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7분설교 9집

7분 설교집(Ⅸ)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1. 성경을 사랑함 9


제1과 성경을 살피는 자세 (행 17:11~12) 9 바로가기

제2과 두 가지 계시 관찰 (롬 1:18~20, 요 5:39) 11 바로가기

제3과 성경의 개론적 지식 (딤후 3:16~17) 13 바로가기

제4과 말씀으로 부흥됨 (행 28:23~31) 15 바로가기

제5과 본문에 나타난 교훈들 (요 6:41~51) 17 바로가기


2. 하나님과의 관계 19


제6과 세 가지 축복 (요삼 2) 19 바로가기

제7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 (요 4:21~24) 21 바로가기

제8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 4:8) 23 바로가기

제9과 막힌 담을 헐자 (엡 2:11~19) 25 바로가기

제10과 하나 되는 뜻 (엡 4:1~6) 27 바로가기

제11과 예수님을 사랑함 (요 14:21~23) 29 바로가기

제12과 하나님 사랑의 증표 (요 21:15~17) 31 바로가기

제13과 목양의 비유 (요 10:1~16) 33 바로가기

제14과 예수님과 나 (요 13:16) 35 바로가기

제15과 홀로 사는 은혜 (시 73:23~25) 37 바로가기


3. 예수님과 믿음 39


제16과 신앙의 기초 (엡 2:20) 39 바로가기

제17과 믿음을 붙드심 (눅 22:31~32) 41 바로가기

제18과 주 예수님 (요 13:12~17) 43 바로가기

제19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45 바로가기

제20과 예수님 따르는 목적 (요 6:26~29) 47 바로가기

제21과 믿음의 터 (엡 3:14~19) 49 바로가기

제22과 믿음으로 믿음에 (롬 1:17) 51 바로가기

제23과 믿음의 효력 (히 10:37~38) 53 바로가기

제24과 믿는 의미와 보람 (행 16:31) 55 바로가기

제25과 믿음 성장 (히 5:13~14) 57 바로가기

제26과 믿음의 방편 (요 14:11) 59 바로가기


4. 구원의 섭리 61


제27과 구원에 대한 지식 (롬 1:18~20) 61 바로가기

제28과 때가 차기 전과 후 (갈 3:23~4:7) 63 바로가기

제29과 큰 구원과 은혜 (히 2:3~4) 65 바로가기


5. 은혜를 받은 결과 69


제30과 눈과 귀를 밝히자 (잠 20:12, 엡 1:17~19) 69 바로가기

제31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시 23:1~6) 71 바로가기

제32과 믿음으로 받는 은혜 (막 9:23~24) 73 바로가기

제33과 삼 단계 은혜 (엡 2:5~7) 75 바로가기

제34과 진리와 자유 (요 8:32) 77 바로가기

제35과 자유 얻는 법 (요 8:32) 79 바로가기

제36과 속박과 자유의 종류 (고전 7:20~24) 81 바로가기

제37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요 14:27) 83 바로가기

제38과 부스러기의 은혜 (마 15:25~28) 85 바로가기

제39과 신령한 복의 장애 (마 19:27~30) 87 바로가기


6. 생활의 덕 89


제40과 성도의 지킬 법 (롬 7:19~25) 89 바로가기

제41과 무엇이 중요합니까? (시 49:20, 렘 9:23~24) 91 바로가기

제42과 성도의 개인 생활 (빌 4:4~9) 93 바로가기

제43과 성도의 교회생활 (롬 12:10~21, 빌 2:1~9) 95 바로가기

제44과 본이 되는 문제 (벧전 5:1~4) 97 바로가기

제45과 주려는 마음 (눅 6:37~38) 99 바로가기

제46과 발 씻겨주심에 대한 교훈 (요 13:1~11) 101 바로가기

제47과 겸손은 좋은 것이다 (잠 15:33) 103 바로가기

제48과 길이 참으라 (약 5:7~11) 105 바로가기

제49과 예수님의 환경 대응 (요 21:25) 107 바로가기

제50과 화목한 생활 (고후 5:17~19) 109 바로가기

제51과 원망 (민 11:1~3) 111 바로가기

 

 

 

 

 

 

 

7. 변화와 개혁 113


제52과 사람의 가치 (시 49:20) 113 바로가기

제53과 내가 믿는 기독교 (딤후 2:8~9) 115 바로가기

제54과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 (창 28:15) 117 바로가기

제55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자 (엡 3:18~19) 119 바로가기

제56과 예수님을 닮자 (롬 8:29) 121 바로가기

제57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7) 123 바로가기

제58과 잠재적 우상주의 (롬 1:21~25) 125 바로가기

제59과 진리 중심으로 가자 (요 16:13) 127 바로가기


8. 교회의 생활 129


제60과 신약 교회의 역사 (딤전 3:15~16) 129 바로가기

제61과 교회에 대한 비유 (딤전 3:15~16) 133 바로가기

제62과 적은 무리의 할 일 (눅 12:32) 135 바로가기

제63과 두 가지 문제 (마 9:14~15) 137 바로가기

제64과 타인의 범죄와 처신 (갈 6:1~5) 139 바로가기

제65과 영광스러운 교회 (엡 5:25~27) 141 바로가기

제66과 현실 교회 진단 (계 3:17~19) 143 바로가기


9. 고난 극복과 승리 147


제67과 예수님이 이기신 세상 (요 16:31~33) 147 바로가기

제68과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애 3:19~26) 149 바로가기

제69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시 2:11) 151 바로가기

제70과 거룻줄을 끊음 (행 27:25, 30~32) 153 바로가기

제71과 다니엘의 좋은 점 (단 1:8~9, 6:3~10) 155 바로가기

제72과 부끄럽지 않은 삶 (빌 1:20~21) 157 바로가기

제73과 기다림의 복 (애 3:24~26) 159 바로가기

제74과 죽는 것도 유익함 (빌 1:21) 161 바로가기


10. 성도의 사명 163


제75과 구원받은 자의 사명 (엡 5:15~21) 163 바로가기

제76과 성도의 사명 (요 15:16~27) 167 바로가기

제77과 바울의 기대와 소망 (빌 1:20~21) 169 바로가기

제78과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10~11) 171 바로가기

제79과 빚을 갚는 생활 (롬 1:14~15) 173 바로가기

제80과 후대에 전하라 (시 78:1~8) 175 바로가기

제81과 미룰 수 없는 때 (요 7:6) 177 바로가기

제82과 중요한 일들을 생각함 (마 22:37~40) 179 바로가기


11. 성직에 대한 사명 181


제83과 사도 후시대의 성직 (딤전 3:15) 181 바로가기

제84과 성직을 전달함 (딤후 2:1~4) 183 바로가기

제85과 어떻게 목회할까? (딤전 4:11~16) 185 바로가기

제86과 목사 권면 (딤전 3:1~7, 4:11~16) 187 바로가기

제87과 집사, 교인 권면 (딤후 1:16~18) 189 바로가기

제88과 사명자에 대한 묵상 (고전 15:10) 191 바로가기

제89과 교회를 개척하려면 (호 10:12) 193 바로가기

제90과 목회자의 길 (마 16:21~28) 198 바로가기

제91과 원위치, 푯대 (빌 3:10~14, 갈 4:19) 200 바로가기


12. 절기 설교 202


제92과 성경과 십자가 (고전 1:18) 202 바로가기

제93과 예수님의 부활 (요 11:25~27) 204 바로가기

제94과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 (요 21:1~14) 206 바로가기

제95과 성찬과 새 출발 (마 26:17~30, 고전 11:17~29) 208 바로가기

제96과 감사에 대한 묵상 (시 56:9~11, 116:12~14) 210 바로가기

제97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212 바로가기

제98과 성탄절의 할 일 (마 2:1~12) 214 바로가기

제99과 성탄절 문화 (마 2:1~12) 216 바로가기


13. 간증 및 기타 218


제110과 나의 생활 습관 (고전 10:31) 218 바로가기

제101과 말씀에 붙잡힌 증언(간증) (행 18:5) 220 바로가기

제102과 나의 어제 일기 (히 13:7) 222 바로가기

제103과 말씀의 달음질을 위한 기도 (살후 3:1~3) 225 바로가기

제104과 복에 대한 지식 (시 16:2) 227 바로가기

제105과 신령한 복의 의미 (엡 1:3~6) 229 바로가기

제106과 국가에 대한 성경의 역사 (행 17:24~26) 231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하나님의 은혜로 7분 설교 9집을 편집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는 신약성경 강론을 마지막으로 집필하면서, 예배 설교를 위하여 수시로 묵상한 것을 설교문으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나중에 정리하는 설교일수록 은혜로운 것이 더 많다고 필자는 느꼈습니다.

105과목은 52주 52과목을 2년분으로 맞춘 것입니다. 한 주간에 두 과목씩 읽으신다면 1년 묵상용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10집을 만들기 위하여는 과거에 사용한 원고들을 참고하여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문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좋은 양식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계속 설교문 요약과 <교회헌법 이해>란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2004. 4. 15.


저자 지 영 근

 

1. 성경을 사랑함

제1과 성경을 살피는 자세 (행 17:11~12) 목록으로


성경을 살피는 성도가 어떤 믿음과 어떤 자세로 살펴야 하는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젖 빠는 방법을 배워 갖고 나오는 줄 압니다. 성도가 거듭나면 성경을 진리로 믿게 됩니다. 그 믿음과 터득함과 적용에 대하여 잘 아셔야 합니다.

1. 어떤 믿음으로 성경을 대하셔야 하는가? 하면

1) 우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고전 4:6에 보시면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 절차를 거쳐서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문자로 기록해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같은 뜻으로 살전 2:13에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시면서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됐다는 뜻”이고, 성경으로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교회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뿐임, 계 22:18~19)은 운동력이 있고(히 4:12),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요 1:1) 하시므로, 문자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내용상으로 보는듯한 신비성을 갖고 성경을 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의 순수성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시고(히 1:3), 그 존재가 영원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말씀을 지켜주신다는 것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 번역이나 전래상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순금을 99%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씀의 진실성과 능력에는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말씀을 이용하여 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우선 창조하셨고(창 1:1), 거듭나게 하시며(약 1:8, 벧전 1:23), 깨끗케(거룩) 하시고(요 17:17), 영혼을 소성시키시며(시 19:7), 믿음의 근거가 되게 하셨고(요 20:31), 또 영혼의 양식으로 주셨으며(마 4:4), 교육의 지침은 물론 구원의 법으로도 주셨습니다(딤후 3:16~17, 롬 10:8~10).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하여 영원까지 이른다고 하셨습니다(행 20:32, 히 4:12, 시 19:9). 당연히 가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계 22:18~19).

2. 살피는 자세입니다

1) 우선 사모하셔야 하겠지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마 7:7).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고,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시 130:6, 벧전 2:2). 렘 15:16에 보시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었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배고픈 거지가 밥을 얻어먹을 때 요긴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연상케 하신 것이고, 시 119:103에서는 “주의 말씀이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설교 준비하시는 사역자들 중에 성경 연구가 꿀보다 단 체험을 한다면, 필자처럼 목회를 못하고 나오게 됩니다. 목회도 중요하지만, 목회는 사람을 대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말씀에 몰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말씀 살피는 모범을 더 살피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다가 빌립에게 깨우침 받은 사실이 있고(행 8:30~31), 또 고넬료의 가족들이 베드로를 모시고 설교를 들음으로 은혜를 받은 사실이 있으며(행 10장),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런가 하여(믿는다는 뜻)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부흥된 동기가 성경 공부에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력한 교사의 입장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고, 1년 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주었다”(행 11:24~26) 하였으니, 성도가 알만큼 알고, 배울 만큼 배워야 성도로서의 자격이 있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벧전 1:10~12에 보시면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는 말씀이 있고, 또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구원 받은 성도만큼 존귀하지 않습니다(히 1:14). 따라서 진리의 말씀은 존귀한 성도들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자기 집 식구 외에는 열쇠를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성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복음 전하는 특권까지 주셨지요(행 1:8, 벧전 1:12).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메시지의 전권을 주시지 않고, 특별하게 알릴 것만 심부름시키는 것처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좀 더 알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자기의 말씀을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삼게 하시기 위하여 거듭나는 은혜와 지각을 주셨고(히 5;14), 또 인간 교사를 주셨습니다(엡 4:11). 그리고 “너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딤후 3:14). 또 반드시 “바울 사도의 후계자에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딤후 3:14). 정통적 교사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배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벧후 3:16).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말씀의 맛을 아십니까? 바울 사도처럼 말씀에 붙잡혀 계십니까?(행 18:5) 아무쪼록 성경에 맛을 들여서, 성경을 연구하실 때 반드시 직설적 교훈(표면에 나타난 것)과 이면적 교훈(숨겨진 말씀)을 터득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빌 2:27, 딤후 4:20, 눅 13:1~5, 의미 상고).

 

제2과 두 가지 계시 관찰 (롬 1:18~20, 요 5:39) 목록으로


인간은 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만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계와 현상계를 포괄하므로 피조 세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고, 우주와 영계를 초월하여 계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래서 영으로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계신 만큼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시는 계시의 방편으로 자연 계시와 성경 계시를 주셨고, 또 예수님으로 나타내셨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터득하여 알만한 지식과 영적 식견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20절).

1. 만물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본문 20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자연을 관찰할 것을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달과 별들을 내가 보니…하면서 하나님의 권고를 깨달았다”(시 8:3) 하였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1) 하였으며, 또 “개미를 보라”(잠 6:6),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마 6:26, 28), “눈을 들어 밭을 보라”(요 4:35), “땅에 있는 동안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밤과 낮이 쉬지 않는다”(창 8:22)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지각을 주셨습니다(히 5;14, 출 28:3). 따라서 그 지혜로 자연 계시를 보고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만물) 계시에 나타내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1) 우선 인과법칙에 의하여 만물이란 결과가 있으니까, 그 결과의 원인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2) 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과,

3) 그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4) 만물을 보면서 만물이 영원한즉 하나님은 더 영원하시고,

5) 만물이 오묘한즉 하나님은 더 지혜로우시며,

6) 만물의 질서가 있은즉 하나님은 더 규모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7) 그 중에서도 으뜸가게 지혜로운 사람을 보는데, 사람의 지혜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시 8:3에 보시면 달과 별을 보고 말하기를 “주께서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십니까?” 하였으니 달과 별로 무엇을 권고하셨을까요? 우선 달과 별은 밤을 밝게 해주고, 나침반 역할을 해주며, 달과 별의 인력이 바닷물을 붙들어주지 않습니까?(시 104:9)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만일 바닷물이 넘치면 어찌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조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름 햇살이 30°에서 40° 이상으로 오른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낮의 해가 사람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8) 여기에서 깨달을 것은 하나님의 보호적 사랑입니다. 미생물들이나 물고기들이 알을 까서 생명체를 배출하는 것을 보면 더욱 놀랍지요. 따라서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게 하시는 것이 아주 많은 만큼 인류는 자연 계시로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며, 또 하나님을 본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두 번째로는 말씀 계시로 또 자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 말씀 계시를 주셨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타락을 하였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말씀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져 있는 자들은 자연 계시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은 자요, 어둠에 처한 자”라고 하셨습니다(시 14:1, 롬 1:21).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 해도 “그것은 기독교인이 그렇게 믿는 것일뿐, 일반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성인의 말이라고만 하지요. 그런데 또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태어나셔서 33세에 돌아가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면, 그것을 어찌 또 믿겠습니까? 또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대속 사업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은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 받으신 것이다” 하였을 때, 만물을 보고도 창조를 안 믿는 자가 그런 신령한 일들을 믿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믿는 것은 영적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성경 주신 것을 믿게 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니까, 그 말씀에 기록된 구원의 도리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신 것과 그 구원의 사역이 십자가란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난 은혜(요 3:3, 엡 2:1), 계시의 정신(엡 1:17~18), 보는 눈과 듣는 귀(잠 20:12)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시 145:15).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구체적 성품을 알려주시기 때문에, 자연 계시에 비할 때 훨씬 밝은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계시를 다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과 성경의 개론적 지식 (딤후 3:16~17) 목록으로


성도가 전도를 하다 보면 성경의 본질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만나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는 자들이 고등한 이론으로 성경의 흠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의 합리적 증명을 하였다면, 믿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인바 타락한 피조물이 판단할 자격이 없으며, 설령 합리적 증거를 말하였다 하여도 거듭나는 은혜를 받지 않으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은 성도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또는 그의 말씀, 성경)을 알아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아보게 된 것이고(요 6:69), 믿은 다음에 연구한 만큼 더 큰 확신을 갖게 되는 순서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것은 지식에 근거하여 믿는다는 것이 무조건 믿는다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성경의 출처나 정경성에 대하여 질문할 때 전도자가 아주 모르면 안 좋습니다. 요 10:25에서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되 예수님의 양(즉 택함 받은 자)이 아닐 때는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1. 우선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말씀(언어)으로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것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딤 3:16, 벧후 1:21). 여기에 대하여 구약성경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네(선지자) 입에 둔다”(레 1:9, 신 18:18) 하셨고, 그때마다 “주께서 이르시되”(사 51:16, 59:21) 하셨으며, 이때에 다른 말이 섞이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내가 이르는 말만 하라”(민 22:3, 23:5), “가감하면 큰 벌을 받는다”(신 18:20, 겔 13:3, 계 22:18~19)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영감에 의하여 사람(선지자)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2. 역사적 보존성입니다. 모세 당시부터 문자로 기록될 때(기록하라, 출 24:4) 문화 수준에 따라 돌판, 토판, 양피지, 파피루스, 종이 등으로 발전,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때에 역사적 보존성이 의심스러울 수 있으나, 우리는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하고(히 1:3), 또 예수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하신 말씀과(요 10:35)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신 말씀과(벧전 1:25)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시지 않은 것은 곧 말씀의 정경성을 입증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마 11:27, 요 12:49, 요 10:34). 결과적으로 구약성경이 예수님 시대까지 무흠하게 보존되었다는 뜻이고, 신약은 주후 100년경부터 기록 보존된 것인즉 보존상의 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3. 성경이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하나의 원본(저자가 직접 기록한 것)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닙니다. 인쇄술의 미흡으로 여러 가지 단편 문헌으로 흩어져 보존되었고, 그렇게 보존된 것을 사본(사람이 옮겨 기록한 것)하였는데, 이 사본의 대표적 종류는 알레프(א)사본, 알렉산더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베자 사본(D) 등이 있습니다(이 사본 발굴에 관한 이야기를 7분설교 8집에 수록하였음). 이렇게 흩어진 사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다가, 주후 397년 칼타고 종교대회에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선택하여 묶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많은 문헌들 중 전통성이 없는 것은 배제되었을 것인데, 어떤 것을 전통성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하였는가? 할 때 확실한 전통에 의한 것, 비판과 불신의 여지가 없는 것, 영적 감화의 위력을 주는 것, 많이 응용된 것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692년에 구교에서는 14권의 책을 더 첨부하여 성경에 포함시켰는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4. 번역의 역사를 살피면, 본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된 것인데, 주전 3세기경에 애굽의 톨레미 왕이 이스라엘 각 지파 중 6명씩, 72인의 학자들을 뽑아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70인역(Septuagint)이라 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이 이것을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1910년에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드가 한글로 번역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중, 1967년에 신약 새번역과 1977년에 천주교와 진보적 기독교 합작으로 가경을 포함한 성경이 출판되었으며, 또 현대인성경도 읽기 쉽도록 번역한 것이나 있으나, 문제는 원문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후 4세기 때에 천주교 주관으로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윌겟(Vulgate)이라 하고, 구교에서는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합동번역이 나오기까지 사용하였습니다.

5. 성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만큼 성경 말씀의 진리성과 정확 무오함을 증명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진리임은 내증(성경 자체가 증명함)으로 되지만,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외증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으로 감동 받고 변화된 일과 복 받은 사실, 성경의 앞뒤가 논리적으로도 부합하는 사실, 장구한 역사를 거쳐 비판을 받은 사실, 조지 워싱턴이 성경으로 정치한 사실, 뉴턴이 성경을 극찬한 사실, 나폴레옹도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실로 살아있고 성경을 불신하는 자들에게 대항할 힘과 이론이 성경 자체에 있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기독교신앙백과> 190, 191과 참조).

 

제4과 말씀으로 부흥됨 (행 28:23~31) 목록으로


사도행전을 살피면 부흥된 경위가 네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곧 기도 부흥, 친교 부흥, 정치 부흥, 말씀 부흥인데, 기록된 분량으로 보면 기도, 친교, 정치 부흥은 1회씩 기록되어 있고, 말씀 부흥 기사는 10여 회 기록되어 있어서 “말씀으로 부흥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행 1:14에서 “믿는 자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는데”, 행 2:2에서 오순절 성령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것이 기도에 의한 부흥이고, 행 2:44~47에 보시면 “믿는 사람이 함께 있어 물질을 통용하고 음식을 먹으며…하나님을 찬미하였을 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적 부흥이며, 행 16:4에서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지키게 하니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치적 부흥입니다. 그러나 말씀 증거와 설교, 교육 등으로 믿음을 일으키고 교회가 부흥된 사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씀으로 부흥된 사례를 보면

1)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자 행 2:14부터 베드로의 설교가 있은 후 2:41에서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하셨고,

2) 행 3:12~26까지 베드로가 설교를 한즉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핍박하고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믿는 자가 약 5천이나 되었다” 하셨으며,

3) 행 8:32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는 병거에서도 성경을 읽었고, 성령님은 빌립을 시켜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성경을 깨달은 내시는 확신을 갖고 세례를 받은 후 아프리카 전도인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연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4) 행 9:28~31에 보시면 사울이 개종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였는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시면 “담대한 증언과 핍박 중의 변론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교회의 평안과 부흥이 있은 것입니다.

5) 행 10장의 고넬료 집 부흥을 잘 아실 것입니다. 고넬료가 평소에 경건한 생활을 잘한즉 하나님이 그 가정에 베드로를 청하게 하셨고, 그 가정이 베드로를 모신 후 말씀을 크게 사모하였으며,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셨다”(44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셨고, 말씀 사역에 따라 말씀 듣는 자에게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 행 13:14~15에 보시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르쳤고, 48절을 보시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 주시기를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시므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도 말씀 사역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을 알 수 있고,

7) 행 14:3~4에서도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말씀을 담대히 말한즉” 따르는 자가 생겼으며,

8) 행 16:11~15에서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였는데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증언을 청종하게 하셨고, 그 집이 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자기의 집을 선교의 근거지로 사용케 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때 강단이 아닌 강가에 앉아서 증언하였습니다. 말씀 증언에는 장소와 격식이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9) 또 중요한 사건은 베뢰아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신사적으로 믿음생활을 하는데(신사적은 건전한 방법, 예절 갖춘 모습)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많고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았으니(행 17:11~12) 하나님은 성경 상고하는 교회에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10) 행 18:5~8에 보시면 “바울이 말씀에 붙잡힌 사실이 있고, 밝히 증거한 일이 있는데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집과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으며,

11) 에베소에서는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한즉 세력을 얻고 마술사가 책을 불태우는 등 놀라운 역사가 있었고”(행 19:17~20),

12) 행 20:6~12에서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새도록 설교하였는데,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나므로 적지 않은 위로를 준 일이 있었으며,

13)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바울이 로마의 셋집에 계시면서 찾아오는 무리들에게 강론하고 증거 전파하였는데(23절) “믿는 자가 있었고 또 금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24, 31절). 말씀에는 하나님이 능력이 나타나서 마귀가 떨고 도망하기 때문입니다(마 4:10~11, 히 4:1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셨고, 또 “복음 사역자가 말씀을 담대히 알리도록 기도해 달라”(엡 6:19)고 하신 것입니다. 교인들을 말씀 중심의 신앙인으로 만들려면 말씀만 달음질하게 하셔야 합니다(살후 3:2). 기도하는 교인, 친교하는 교인, 정치 잘하는 교인보다 말씀 중심의 교인을 만들고, 전도 부흥을 잘 이루시려면 교역자와 성도가 일체되어 말씀 사랑과 연구와 증거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과 본문에 나타난 교훈들 (요 6:41~51) 목록으로


(요한복음 강론, 설교보충 5과에도 수록됨)

1. 본문 41~42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알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란 의미를 모르고 믿지 않은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아는 지식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또 그의 부모까지 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오셨다”는 의미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일반적 지식은 있으나 신앙적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 지식은 아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수군거리기만 한 것입니다. 지식은 일반적 지식이고,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되는 것”(엡 4:13)은 믿음의 지식(믿음으로 아는 것, 히 11:3, 요 6:69)을 의미합니다. 일반적 지식이 오히려 믿음의 장애가 된 것입니다(요 9:41).

2. 수군수군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43절). 롬 1:29과 고후 12:20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은 죄라”고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이 수군수군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면 말을 그칠 때가 있지요. 그때 반드시 누구를 폄론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거나, 아니면 범죄 모의를 하였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하던 말을 공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말의 실수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일에 크게 주의하여 가급적이면 모든 사람이 다 듣고, 다 보아도 괜찮은 말만 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44절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요 15:16) 부르시고 거듭난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을 아시고(요 3:3, 마 16:17, 고전 12:3) 전도에 앞서 반드시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시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하여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4. 44절에서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는 말씀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궁극적 구원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자가 천국을 본다”는 말씀이나(요 3:3), “믿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47절),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나(요 17:6~12),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과(요 1:12), “영생을 얻었다”(요 5:24)는 말씀이 다 궁극적 구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5. 구약을 이해할 때 메시야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45절에 보시면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은 구약을 인용(사 54;13)한 말씀으로, 구약이 메시야를 예언하신 만큼 “그 내용을 배운 사람은 주님께로 온다”(45절)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구약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듭난 심령이라도 예비지식이 있으면 믿음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조명한 말씀은 구약성경뿐이니까, 그것을 앎으로써 예수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눅 24:25~27).

6. 하나님을 계시할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46절에서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소개할 분이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요,

7. 48절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말씀은 요 4:10의 생수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생수나 떡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있으면 삽니다. 여기의 “산다”는 뜻은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영생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의미에 대하여 56~57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고 자신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처럼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을 요 14:11에서도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두 인격이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롬 13:14, 14:7~8; 엡 4:1, 3).

8. 떡이란 의미를 더 밝혀서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생수에서 떡으로, 떡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용어는 다 구약성경에서 예표하신 것을 알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호렙 산의 생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출 17:6).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율법인 모세의 지팡이를 맞고 물이 나온 것은 곧 예수님의 희생적 구속 사업을 예표함이고, 만나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며(계 2:17), 더 나가서 “자신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는 뜻은 구약 제사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양이 희생될 때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필자는 성찬예식을 할 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이고, 떡은 그리스도의 살을 찢기신 고난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깨달은 것은 “피와 살”은 하나로써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살에 피가 없으면 그 살이 썩고, 또 살 한 점을 떼려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주님의 살과 피는 주님 자신의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의미인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제6과 세 가지 축복 (요삼 2) 목록으로

 

뜻있는 예배를 맞이하여 “세 가지 축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세 가지 축복은 영혼이 잘되는 것과 범사가 잘되는 것과 강건한 것인데, 먼저 이 복의 의미를 잘 아셔야 합니다.

1) 영혼이 잘되는 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가까이 모시면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처럼 만사형통 할 수 있습니다. 만족, 기쁨, 소망도 누릴 수 있고, 필요한 것을 공급 받을 수도 있으며, 어려운 문제도 이기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천국도 하나님의 것인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범사가 잘되는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이웃과 좋게 사는 것입니다. “범사”라 하면 사업을 먼저 생각하실 터인데, 사업은 물질과 관련이 있고, 사회적으로 신뢰와 교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사업을 하든지 이웃의 협조가 있어야 하니까, 거기에는 신뢰가 따라야 하고, 결국은 재물과 명예의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3) 강건의 복인데, 이것은 자신의 정신과 몸의 건강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른 정신과 건강한 몸을 갖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창조자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건전한 정신이 아니지요. 또 효도나 가정의 책임을 모르는 사람도 역시 건전한 사람이 아니요, 담배꽁초나 오물을 길에 버리면서 잘못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건전한 정신이 아닌즉, 이 사회에는 잘잘못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다 정신 건강의 결함자들입니다. 따라서 육체 건강 문제는 정신 건강에 비할 때 희소하지만, 그래도 건강하여야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 가지 축복을 깊이 생각해보면, 영혼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범사가 잘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이며, 영육의 강건은 바로 자신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축복을 어떻게 받는가? 할 때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서 대구에 오려면 버스, 기차, 비행기 편이 있고, 기차도 세 가지 종류가 있지요.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시간에 맞추어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복 받는 방법도 그런 것입니다.

1)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 직접 부탁하고, 직접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간에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잘 안될 때가 많고, 잘 되도 신세를 갚아야 하니까 불편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갚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베푸신 줄 알고 믿음으로 감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 하신 말씀이 바로 직접 구하고, 체험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2년째 식생활을 혼자 해결하는데, 채소만 먹다 보면 두 달에 한번쯤 고등어찌개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한 지 24시간도 안돼서 고등어매운탕을 갖고 오는 분이 있습니다. 생각이 없을 때에는 안 가져옵니다.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다른 사람을 감동하여 보내주시는 것입니다(시 103:14, 히 4:16, 렘 32:17, 학 2:7). 그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면 사람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때,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연약하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대상도 못 되고, 오히려 사랑 받기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은혜는 하나님께 구하고,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을 베풀 대상으로만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사람은 다 사랑의 대상일 뿐이고, 은혜와 복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받는 믿음을 키우셔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뜻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씀 수요 잘하는 것, 성령 충만한 것, 교회생활에서 만족 느끼는 것, 기도로 깨어 있으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등일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게 되는 데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섭리적으로 받는 것도 있고(요 15:16), 자신의 성실한 노력으로도 받을 수 있으며(대하 17:9, 욥 8:5~7, 마 7:7), 또 성직자나 이웃의 기도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섭리적으로 받는 축복이 가장 크고, 노력으로 받는 복이 그 다음이며, 이웃의 기도로 받는 것은 가장 적은 것입니다. 남 잘되라는 축복을 많이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축복한 것처럼, 저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과 해당 교회와 기관이 다 잘되기를 축복합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 다음의 일은 다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의 잘됨과 강건이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의 샘물을 퍼 쓰려면 경쟁, 싸움, 혼란만 있고, 넉넉한 물도 못 쓰겠지요. 거기에서 갈등과 불화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샘물 대신 바닷물을 퍼 쓴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웃끼리 갈등할 이유도 없고, 풍성한 물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축복은 무한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고, 이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의 대상으로 수용할 때, 진리 안에서 큰 자유와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더 행복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7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 (요 4:21~24) 목록으로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되, 멀리 계신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나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이 은밀한 곳까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 중에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곧 찾아 나선 것이고, 어떤 성도는 은밀한 골방에 앉아서 말씀과 기도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코드가 안 맞으면 아무리 힘써도 성취되지 않으나, 코드만 잘 맞으면 뜨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대상만 되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자를 찾으십니까?

1. 자기 백성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배신하였거나 멀리 하는 백성이라도 자기의 백성이고 자기의 구속자이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 44:21~22을 읽어 보십시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택한 백성, 믿음의 확신 가진 자 하나님의 자녀 된 자를 간절히 찾으시는 말씀입니다.

2. “의인을 찾으신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렘 5:1에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 하시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인을 찾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 깊은 곳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여기의 “의인”이란 죄 없는 의인이 아니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며 진리를 사모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믿음 생활을 하므로 의로운 생활을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확대하여 예수님의 생활에 비한다면 마치 햇빛으로 실내를 비춘 것과 같아서 많은 결함이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깨닫고 예수님 생활을 닮아가려고 힘쓰는 자를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말씀 앞에 떠는 자를 찾아오셔서 권고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벌벌 떱니까? “성경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는 마음을 가지십니까? 요즈음 말씀 앞에 떨지 않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시 2:1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고 하셨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몰랐다가 고기 잡는 이적을 체험한 후에 깨닫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는데, 그 태도가 바로 예수님을 두렵게 여긴 것입니다. 두 사람의 군인이 서로 싸울 때 목사가 생명을 걸고 찾아가서 롬 2:10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니까, 싸우던 군인이 그 말씀에 굴복하여 싸움을 중지하고 화해를 하였다는 말이 있고, 제 친구 목사님은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 말을 안 하다가 해질 무렵에 친구가 그 아내를 보고 성경 엡 4:26에 “분을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셨는데 지금 해가 지고 있으니 화해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니까 그 부인도 그 말씀에 굴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떠는 자를 권고하십니다. 설교 시간에 졸지 마십시오(목사도 간단히 설교할 것).

4.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잠 2:1~5에 보시면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고, 나의 계명을…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은을 구하고…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처럼 찾으면…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쉽게 알아지고 쉽게 만나지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고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처럼 노력하고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잠 8:17에 보시면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고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난다” 하셨고, 대하 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암 5:4에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5.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소개할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외식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의식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으며, 절차나 순서에 있지 않고 생활에 있으며, 육체나 물질이나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있으며, 현실적 실리에 있지 않고 내세적 소망에 있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뜻을 설명 드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무엇 무엇은 아니란 것”을 말씀 드렸으니까 깨달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순결, 오직 순종과 헌신, 오직 천국 소망에만 뜻을 두어 현실적 허탄한 것을 얼마나 멀리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8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 4:8) 목록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셨으니,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이 자기 곁에 계셔주신다면 거기서 더 큰 복이 없을 것입니다. 시 73:23에도 보시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하셨으니, 성도가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주님이 오른손을 붙들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 73:27에서는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음녀처럼 말할 것이라” 하셨고, 마 9:15에서 “신랑을 뺏길 날이 올 때는 금식하여야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이 다 하나님을 멀리 함에 대한 불행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녹이나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큰 복을 받았고(창 5:24, 6:9),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도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하루를 함께 거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요 1:39).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하십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시 73:28).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드릴 터인데, 혹이라도 그런 방법을 쓰시지 않았다면 그 동안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줄 안 것이 착각일 수도 있고, 허풍일수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또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하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계 3:15에 보시면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지요. 이 말씀이 곧 가까이 동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가까이 모실 수 없습니다.

2.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과 내 뜻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내가 그의 계명을 거역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두 인격이 화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암 3:3에서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주님께로 가는 통로를 여는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주님을 떨어지시게 하고 혼자 있는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려면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말씀으로 성도의 마음에 계십니다(엡 3:17). 그런데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그 더러운 처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할 때 복이 있고 저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5:8), 예수님을 모시기 가장 좋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어 겸손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욕을 버릴 때 주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려면, 그 환경이 인간들로 북적대는 것보다는 홀로 있고 고독해지는 것이 좋으며, 더 나가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거나 멀리하는 것이 좋고, 또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고난을 기회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요즈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조용하게 누워서 묵상합니다. “하나님, 이 방에는 하나님과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이 장소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장소도 아니고 세상을 사랑하는 장소도 아닙니다. 제가 힘닿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곳입니다. 나는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마음의 기도를 드립니다. 만일 세상 일로 분주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용한 것만 하겠는가? 또 하나님과 일대 일로 대면해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면 그 일을 도와주겠습니까? 그런 뜻에서 홀로 있거나 고독한 것이 좋으며, 또 고난이 있을 때는 자기의 연약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속이 답답할 때 기도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힘들지만 그때마다 결심하시고 기도하는 자세로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려움에서 헤어나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차량 피해를 받고 마음이 무거웠으나 기도한 후에 해결된 체험을 하였음).

5. 예배에 이끌리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방법입니다. 예배 의식의 중요한 순서는 찬송, 기도, 설교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찬송하면 주님이 가까이 오셔서 들으십니다. 기도도 들으십니다. 또 성도가 성경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 면전에서 듣는 것과 같은 것인즉, 역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본문) “손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청렴결백을 뜻하고, “두 마음을 품지않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것(재물, 명예, 현세욕 등)을 겸하여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독과 고난과 연약을 하나님 가까이 모시는 기회로 삼고, 믿음과 계명과 청결함과 예배와 두 마을 품지 않는 일에 주력하신다면, 그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자가 될 것이고, 주님은 반드시 그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제9과 막힌 담을 헐자 (엡 2:11~19) 목록으로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것을 TV로 보셨지요. 우리도 휴전선의 담이 헐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대인관계, 또 하나님 관계에서 많은 담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담을 허셨습니다. 우리도 여러 종류의 담을 헐어야 하겠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담을 헐고 하나 되라”는 교훈을 강조하셨습니다. 11~13절에 보시면 “이방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선민과의 사이에 있던 막힌 담을 헐고 한 권속이 된다”는 말씀이 있고, 또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씀이 있으며, 14~15절에서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하셨고, 16절에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여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다” 하셨으며, 17~18절에서는 “먼 데 사람들과 가까운 데 사람들에게 평안의 복음을 전하므로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감을 얻게 하셨다” 하셨고, 19절에서는 “모두가 (믿음 안에서) 동일한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과 죄인, 이방인과 선민, 먼 데 사람들과 가까운 데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1.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담을 허셔야 하는데, 첫째로 성도간의 담을 허셔야 합니다. 성경에 “형제”란 말씀은 혈육의 형제가 아니고,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5:22). 롬 12:10에 보시면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마 5:22) 하시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러 나가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하나님께 나가라(마 5:23)고 하셨습니다. 또 “형제의 죄를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그의 죄를 용서 안 하신다”고 하셨지요(마 6:12, 18:23~35). 성도가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허셔야 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용서를 받고 담을 헐려면 “먼저 형제 화목을 하고 하나님께 나가라”는 순서 때문에 형제 화목을 먼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 간에 의견 차이나 상호 거래상의 부조리 때문에 불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미워하거나 말을 안 하고 지내거나 보복을 하려는 마음 같은 것이 일체 없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부족하고 의무 감당을 못하여 유감스럽다는 정도로 생각하면서,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거나 친교를 안 하는 것은 불화이고 보복입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보복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용납하시지 않을 것인즉 성도는 마땅히 형제간의 담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입니다. 처음에는 불신앙의 담을 높이 쌓고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었지만(롬 5:10) 예수님이 십자가의 중보로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저희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된 것인데, 간간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불화의 담을 쌓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엡 4:30). 많은 성도들이 천국 가기 위하여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뜻대로 옳게 삽니까? 그 옳게 살지 못하는 담을 허셔야 하는 것입니다. 욥 23:25~26에 보시면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릴 때 하나님께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하나님과 재물(현실)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마 6:24)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자신과 현세욕으로 하나님 앞에 담을 쌓지 마시고, 그것을 낮추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낮추는 법은 요일 2:15~17에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3. 형제 화목의 차원에서 동질성 있는 교파와 하나 되거나 한 권속처럼 지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교파의 갈등도 많이 완화됐지만 아직도 교파의 이기주의 같은 것이 남아있는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없어져야 하겠지요.

4. 다른 종교나 불신자와의 화목입니다. 이 땅에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종교들이 기독교와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공통성 없는 것이 무종교인입니다. 무종교인이나 같지 않은 종교나 다 같은 범주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 진리의 종교이니까요. 그런데 진리의 종교를 못 믿는 사람들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하고 안 믿거나 다른 것을 믿는 사람은 그대로 버려두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밝혔는데도 안 믿으니까요. 계 22:11에서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하지 말고, 나 할 도리만 잘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 일은 진리를 밝히는 것뿐이고, 불신자나 이단자를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단자라도 미워하는 장벽이 있다면 헐어야 할 것이고,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인종, 계급 간의 차별의 담도 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소국가의 백성으로 오셨고, 천민으로 인정받던 사마리아 여인을 상종하셨으며(요 4:4, 7~9),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고(마 9:12), 여러 인종이 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포용하셨습니다(사 45:22, 딤전 2:4). 그리고 앞집과 뒷집 사이에 막힌 무관심의 담도 허셔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믿든 안 믿든 사랑으로 화목할 수 있도록, 담 허는 일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10과 하나 되는 뜻 (엡 4:1~6) 목록으로


본문의 핵심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1. 우선 성령님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셨는가? 하는 것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래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또 선민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즉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였으며, 또 선민과 이방인은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 동리에 많은 사람이 살아도 남남처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떻게 일으키셨는가? 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택한 백성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영적으로 새사람을 만드셨다는 뜻입니다(엡 4:24). 꼭 같은 차가 생산됐다면, 그 차의 성능이나 가격이 꼭 같은 것처럼, 새로 지음 받은 자는 성과 이름이 다르지만 신령한 면에서 볼 때 하나된 것입니다. 또 성도의 자격으로 볼 때도 하나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소망으로 부름 받았고, 같은 믿음을 가져 같은 뜻으로 세례를 받았으니까, 성도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서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또 성도끼리도 성령님이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잘 유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성도들이 함께, 화목하고 질서 있게 사는 분위기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잘 살던 집이 풍비박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모습을 변하시지 않았는데도 가장이 첩을 얻었다고 가상해 봅시다. 그러면 부부의 금슬이 깨지고, 부모와 자녀간의 친교도 깨지며, 예수님과도 멀어질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노선도 잘못된 일이 개입되면, 그와 같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순수한 신앙과 질서 있는 생활만 보존한다면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어느 한 사람이 엉뚱한 잘못을 범하고, 판단력 없는 사람들이 그 잘못에 동조한다면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노선은 하나 됨을 상실할 것입니다.

1) 우선 개인이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성도의 단체(단체는 교회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유지하는 파가 있는데, 어느 한 파가 다른 길에 유혹을 받았다면, 성도의 하나된 것은 깨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편이 있고, 안 닮은 편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편은 정통이라 할 수 있고,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닮지 않은 편은 이단이 되는 것인데, 정통과 이단은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 되어 서로 합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에게서 따로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6:14~18). 그러면 이 경우에 하나된 것을 해친 쪽이 어느 쪽입니까? 그 쪽은 바로 예수님(성경)과 일치하지 않은 쪽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나 교역자는 정신을 차려서 말씀 중심에 붙잡혀 있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많은 편이 정통 같고, 적은 편이 이단 같지만, 그것은 바른 잣대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정통의 길이 좁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통과 이단은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입니다.

3. 하나 됨을 깨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으로 딴 길로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는 같지만 도덕적으로 격차를 이루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중에 이적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배척을 하여야 하겠지요. 이것은 이단을 격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 애국자라 하면서 “자기가 정치를 해야만 잘한다”고 하는 개인이나 정당은 인격적으로 미숙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런 것은 마치 예수는 믿되 적게 닮은 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까지 하나 되는 대열에서 떼어버린다면 예수님을 많이 닮은 성도는 몇 사람 고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보시면 그런 대상을 향하여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둔하라는 뜻이 아니고 포용하여 정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 되는 뜻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면, 1) 예수님과 자신이 힘 있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생활하며, 예수님 뜻에 전적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하나 되고 영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2) 성도끼리 하나 되는 것인데, 같은 신앙을 가졌으면 예수님 닮은 생활이 미흡해도 이해하고 포용하여 잘 가르치고 사랑으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고전 1:12). 3) 그러나 어떤 교파나 그 교파에 속한 성도의 신앙의 질이 정통과 같지 않으면 그들과는 신앙적으로 하나 될 수 없은즉 도덕적 친교 이상으로 하나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4) 그러나 도덕적 생활은 미흡해도 신앙고백이 같으면, 그 대상과 신앙적 합동 행사를 하고, 도덕적 정화에 힘을 쓰면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된 것을 깨친 자는 바로 이단자들과 불법자들에게 있음을 인지하시고, 성도는 성도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제11과 예수님을 사랑함 (요 14:21~23) 목록으로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 잘 아십니까? 예수님을 왜 사랑하셔야 하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찬송가가 생각납니다. 411장을 보시면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성도들에게 “왜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까?” 하면 좋은 대답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구세주이시니까”,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라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니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숨겨진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22절에서 가룟 유다 아닌 유다(다대오, 셀롯)가 “왜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안 나타내려 하십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내 말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라” 하심으로써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만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할 이유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고 택한 자들만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3:48, 살후 3:2).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즉 천국의 시민들로부터만 사랑을 받고, 영광 받기를 원하실 뿐, 타락하고 하나님 부인하는 자들로부터 영광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발을 씻겼지요(요 14:9). 예수님을 사랑한 표현으로는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1) 예수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고(요 14:9),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같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24).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겨오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면서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요 8:16, 19) 하시니까 크게 혼돈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성경으로 삼위일체의 진리를 믿는 만큼 예수님만 섬기면 하나님 섬김과 같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은 예수님의 뜻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이비 종파에서 사람을 암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종교는 교리도 건전하여야 하지만, 그 종말이 사랑으로 끝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은 제사의식의 계명의 아니고(빌 2:8; 갈 5:6, 13), 사랑 실천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22:37~40, 갈 5:6).

3) 예수님의 말씀,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대상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살아있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행 20:33, 요 1:1).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하였고, 또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다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시 1:2, 계 1:3).

4) 교회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피로 값 주고 사셨으며,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행 20:28, 골 1:24)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은 교회 사랑하는 목표와 방법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옳게 배우고, 화목 단결하여 사랑 실천을 잘하는 세계가 되도록 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사역자 사랑입니다. 롬 10:15에 보시면 “보내심을 받지 않고 어찌 전파하겠느냐?” 하셨지요. 이 말씀은 말씀 전파자를 주님이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마 10:40에서 “예수님이 보내신 자(너희)를 영접함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복음 사역자를 예수님처럼 섬기면, 그것이 또한 주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6) 소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 25:45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7) 예수님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닮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마 7:21, 요 13:15). 경건 그 자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약 1:27).

3.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복을 받습니까?

1) 하나님 사랑을 겸하여 받습니다. 예수님만 사랑하였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다 받는 것입니다.

2) 거처를 함께 해주십니다. 자신과 가정을 함께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한 집에 계시니까요.

3) 자기를 나타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도 잘 깨닫게 하시고, 기도하면 “알았다” 하시고 응답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물론 내세의 상급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할 이유와 방법과 결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제12과 하나님 사랑의 증표 (요 21:15~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 사랑의 증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또 베드로에게 아주 귀한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사랑의 증표를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라신 사랑의 증표는 베드로와 함께 있는 동료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강한 증표를 나타낸 사례를 살펴본 후,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겠는지를 교훈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사랑의 증표를 제시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을 때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고 하셨습니다(창 22:12). 아브라함은 그런 증표를 드리고, 천하 만민이 그의 씨로 복을 받는 메시야 약속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22:16~18).

2. 욥의 증표입니다. 욥은 부와 자녀들과 종들과 명예와 건강을 다 잃고, 가난과 질병과 비천함과 고독에 쌓여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할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은 보통 사람들의 고난과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한 상태에서의 고난이 아니고 순결한 상태에서의 고난입니다. 그러면서도 “적신으로 왔은즉 적신으로 감이 마땅하고, 주신 자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취하신 것도 마땅하며,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을 받는 것도 마땅하다”(요 1:21~22, 2:10)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송을 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큰 증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박국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직전의 선지자로 나라가 전쟁 위험에 흉흉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위험이 파도처럼 임할 것과 환난이 목전에 달하여 뼈가 썩는 것 같았고, 몸이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또 한 가지 고난은 가난이었습니다. 전쟁을 목전에 두고 가난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 3:16~18)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믿음이 곧 하나님께 대한 불변한 사랑인 것입니다.

4.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는 자라 하면서 오직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으로 자기 인생을 헌신하였고, “영광은 예수님이 받으셔야 하며,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요 3:28~30) 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다 예수님께 인도하고, 인생의 미련 없이 30세쯤에 순교를 당하였으니,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증표를 나타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를 최고로 칭찬하셨습니다(마 11:11).

5.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입니다(눅 5:11). 마 19:27~30을 보시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였을 때, 예수님이 “열 두 보좌에 않는 특권과 영생의 상속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태만히 하여 탈선하였다가 주님이 다시 붙들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주님이 붙들어주셔야 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한 가지 사랑의 증표를 더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료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늙어가면서 은퇴 목사처럼 사니까 동역자 친구들과의 교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독이란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가족들도 접근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친구이고, 성경만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려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한다” 하셨으니까 가족이나 친구도 멀리하고 주님의 뜻만 따라야 하는 것이 “이 사람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함”이 되는 것이고, 베드로는 그 증표를 제시함으로 순교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6.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긴 두 여인입니다. 한 여인은 갈릴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고(눅 7:36~38, 47), 또 한 여인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요 12:1~3, 14:13; 마 26:6~13). 이 여인들이 자기의 물질과 정성을 예수님께 아낌없이 드렸을 때 “사랑함이 많다”고 하셨습니다(눅 7:47).

7. 바울 사도가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롬 14:7~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세속적인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긴 것을 들 수 있는 것입니다(빌 3:8). 이들은 다 특별한 방법으로 사랑의 증표를 제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 사랑의 증표를 무엇으로 드려야 할까요? 우선 잘한 사람들이 한 것을 조금이라도 본받으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생활의 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경과 기도와 사랑 실천에 힘쓰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증표가 있을 때 주님이 더 가까이 와주실 것입니다.

 

제13과 목양의 비유 (요 10:1~16)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양의 우리가 있고 문이 있으며, 또 양이 있고 목자가 있으며, 꼴이 있고, 먼저 온 자가 있으며, 삯군이 있고 늑탈하는 이리가 있으며, 삯군은 절도, 강도라 하셨고,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인데, 무엇을 비유하신 것인가? 할 때 “성도의 교회 생활” 또는 복음 사역자의 “목양 생활”을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1. 그래서 저희들은 1절의 “양의 우리”를 교회로 생각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이 키우는 양은 반드시 목장 안에서 생활하여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생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의 피로 값 주고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행 20:28). 그리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니 많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엡 1:23, 5:28). 교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첫째로 이리떼 같은 마귀의 유혹에서 믿음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 신앙적 교육을 받아야 하며, 다음에는 성도간의 교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가 성립되려면 울타리가 필수적입니다. 목장에 울타리가 있는 이유는 양으로 하여금 아무 곳이나 가지 못하게 함이고, 또 맹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일종의 규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규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리와 정치입니다. 교리는 바른 신앙이고, 정치는 바른 생활입니다. 교리와 정치가 교회의 울타리 역할을 함으로써 성도의 신앙을 잘못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2. 양의 우리에 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은 바른 통로입니다. 목자이건 양이건 이 문으로만 출입하여야 합니다. 고후 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 중심 또는 성경 중심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9절에 보시면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도로 가는 문, 바로 사는 길, 또는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길도 되는 것입니다(요 14:6). 3절에 보시면 “문지기”가 있는데 문지기는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그 목자에게 딸린 양만 출입을 허용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지기는 복음 사역자의 생활을 지도하시는 성령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 아닌 것에는 동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요 14:17) 꼭 진리대로, 문으로, 정도로 갈 때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12절에 삯군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이 삯군은 이리나 절도, 강도보다는 낫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이기주의 용도로 이용하는 무리들입니다. 평신도들이 기복주의를 목적으로 교회 생활을 한다면 떡 얻어먹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평신도들보다 헌신을 더 많이 해야 할 사명자들이 품삯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품삯이 적거나 못 받을 때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사역자가 삯군이 되지 않으려면 환영을 받아 부임을 하든지 아니면 명예나 봉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든지, 시작할 때부터 목적을 바로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삯군은 결코 양을 위하여 희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12절에서 “삯군은 양도 자기 양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이기주의 목적으로만 한다는 뜻입니다.

4. 절도, 강도가 있다고 하셨는데(8절), 이것은 이리에 해당하는 자들입니다(12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8절).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들이요, 또 구원 받지 못할 이단(율법주의)을 전파하여 영혼을 죽이는 자들이니까 마귀, 이리 정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삯군이 있을 수 있고, 교회 밖에는 절도, 강도가 있으므로, 양들은 참 목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안전지대에 든든히 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확인되지 않은 집회소에 함부로 가면 안 됩니다. 평신도는 독초와 음모를 분별하거나 항거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역자의 지도를 잘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상품 선전하는 곳에 잘못 가면 후회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은 것처럼, 은혜를 전달한다 하면서 유익 없이 보내는 집회가 많은 것을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목자와 목자를 따르는 양이 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참 목자, 흠 없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양의 이름을 알아서 불러내며 앞장서서 모범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여 본을 보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중에 사명을 가진 목자(포이멘, 목사)들은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지만, 그 정신과 생활을 본받으려고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노력은 적게 하고 존경만 받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만 따르며 목자 아닌 자의 유혹은 엄히 경계한다고 하였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분별한다는 뜻은 성도가 바른 성경관을 갖고, 성경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세속주의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벌써 목자의 음성을 잊어버린 것이라 할 것입니다. “목양의 비유”에서 많은 교훈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4과 예수님과 나 (요 13:16) 목록으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시는가?”에 대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성도님들에게 예수님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지요? 예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이길래 가장 귀한 존재이신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제목으로 구상을 할 때, 찬송가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그 다음 절에는 “친구 되시고, 기쁨 되시며, 소망이 되신다” 하였고, “바른 길 가게 하시며 영생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93장).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과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과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 됨과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과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만국인의 구주시며 심판하실 주님 되어 우리의 기쁨과 생명과 평화와 영광이 되신다”(94장)는 내용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내용이 이 가사에 다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분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잘 아신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나의 주이십니다. 요 13:13에서는 “너희의 주”라 하셨고, 계 17:4에서는 “만 주의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유주이시고, 또 하나는 통치주란 뜻입니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것(생명, 육신, 생애, 건강, 지혜)이 다 주님의 것이고, 또 주님 원하시는 뜻대로 나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계19:6에서는 “만왕의 왕”이라고도 하셨는데, 왕은 소유자이고 통치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것이라. 그리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요 14:6에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이라” 하였고, 빌 1:21에서는 “내 속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라” 하시므로, 자신의 주가 예수님이심을 확실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어떻습니까? 정○헌 씨가 주인 노릇 하자니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성도가 능력 있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종노릇을(또는 백성 노릇을) 잘하는 것이 큰 행복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나에게 구원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자란 예수님이 중보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을 면케 하신 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시고, 천국의 백성을 삼아주시는 일입니다(히 4:14).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라” 하였는데(마 16:16), 그 고백이 바로 나의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세주 역할을 아무에게나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겨주신 자에 한하여서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 17:9).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한 것처럼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의지할 때만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나에게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0:11). 이 목자라는 원문 “포이멘”을 영어 성경에는 “쉐퍼드(sheperd)”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양의 목자를 생각하면, 시 23편의 말씀처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밤에는 목장에서 양을 지킵니다. 좋은 꼴로 먹이고, 휴식시키고, 또 지킵니다. 만일 이리가 넘실거리면 생명을 걸고 이리를 쫓음으로 양을 보호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목자를 “쉐퍼드”라고 한 것은 개가 주인을 지키기 위하여 주인을 따라다니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예수님이 성도에 대하여 충견처럼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목자가 되어주시면 성도는 좋은 보호자를 모신 것인즉 크게 든든함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시 23:1, 요 8:32). 목자는 양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마 28:20).

4. 예수님은 선생님 또는 모범자라고 하셨습니다(요 13:13). “친히 인생의 본을 보이셨고, 그 형상(인격과 생활)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 13:15, 롬 8:29).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만 본받았습니다(고전 11:1). 만일 성도가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세속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좋은 포도를 심고 들 포도를 맺는 격이 될 것입니다(사 5:1~2). 성도들 중에 이와 비슷하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으로부터 받는데 열매는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면 열심히 배우고 닮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그 외에는 “나는 너희와 함께 사는 가족이다”(막 3:35, 계 3:20), “형제로 여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히 2:11). 예수님이 본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하나님이 많은 양자를 만드시는 바람에(롬 9:4) 예수님이 여러 이복형제를 둔 줄로 압니다(마 13:55).

6. 또 친구라 하셨고(마 11:19, 요 11:11,15:15),

7. 신랑도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25:1~13, 고후 11:2).

8. 또 예수님은 인류의 심판자도 되시지만, 성도에게는 상주시는 심판만 하십니다(요 5:24, 계 22:12).

이상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또 어떻게 교제하며, 어떻게 영광을 돌리고, 또 어떤 은혜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5과 홀로 사는 은혜 (시 73:23~25) 목록으로


“홀로 사는 은혜”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저는 본래 대가족이 한 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런 계획도 가져보았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두 아들은 떨어져 살고, 두 딸은 결혼하니까 남은 가족은 막내아들, 딸과 아내와 저뿐입니다. 집에 있는 아들과 딸도 집에서 식사 한 끼를 안 할 때도 많기 때문에 제 아내도 혼자 사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11개월째 가까운 곳에 있는 예배당 서재실에서 혼자 따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생활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가족들과의 식생활(된 밥과 무른 밥의 차이)이 틀리고, TV를 시청하는 취미가 틀리며, 또 잠시 집에 머문 시간에도 글씨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저의 가정주택에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가족 전체가 저에게 애정을 갖고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냉담한 분위기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떨어져 혼자 사는 일이 자연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21세 때 2개월 정도 산에서 기도생활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처음 은혜를 받을 때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생활의 기쁨을 체험하였고, 늘 그 생활을 동경해 왔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배고픈 시절이었으므로, 밥 한 그릇과 김치와 새우젓 반찬이 꿀같이 맛있던 시절이라, 그 시절의 생활을 재현 해보고 싶었는데, 일단 혼자 살고 보니 식생활의 자유, TV보는 자유, 또 글 쓰는 자유까지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불편은 없는가? 할 때 불편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편이 있다면 식생활에서 느껴야 하는데, 김치와 양념은 아내가 공급해주고, 빨래도 해주기 때문에 상당히 편리하고 슈퍼마켙이 1층에 있으니 유리한 편이나, 나는 식생활을 단순하게 하는 주의이므로 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가지, 또는 한 가지만이라고 족하다 하셨는데(눅 10:42)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어떤 분은 우유만 먹고도 건강하다는 TV 방영이 나오고 있구만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생활을 단순하게 개선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 맛에 산다” 하니까, 그것이 어렵겠지요. 문제는 식도락을 피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만 먹으면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운동을 하면서 현미밥과 콩나물국을 끓이고, TV를 보거나 또는 말씀 묵상을 하면서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 먹은 후 피곤하지 않으면 글을 쓰고, 피곤하면 잠자고, 또 일어나서 산책하고 들어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활에 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된 입장에서 자동차 관리, 금전 관계, 다른 사람의 일 등, 괴롭게 감당하는 일도 있지만, 그것도 사명으로 알고 합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자유를 만끽하는 유익이 있지요. 그렇다고 하여 저는 현세욕을 누리는 자유를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자유를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식생활은 단순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쪽에 자유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혼자 살게 된 이유는 나 같은 취미와 사상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 잠을 잘 때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곳에는 하나님과 저만 있습니다. 내가 가족들과 같이 있으면 사람을 상대하는 시간이 많고, 그 대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은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은즉 주님과만 동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합니다. 대통령이 많은 사람을 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면, 그 대접을 받은 사람이 멀리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연설을 듣고 오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을 오라고 하여 독대를 하고, 그 시간을 오래 끈다면, 그는 특별한 인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하나님 만남과 동행도 홀로 하는 것이 제일 값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1대1의 관계”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 세계도 상부상조가 잘 될 때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들을 가까이 하거나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에 지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들을 멀리 하셔야 하는데(시 146:3~4, 요일 2:15), 그런 것을 억지로 멀리하려면 힘들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과의 동행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시고, 세속에 관한 일들은 취미롭거나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붙들어 주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빌 4:7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홀로 사는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홀로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이행하는 일에 뚜렷해야 합니다. 홀로 사는 목적이 자신의 자유와 세욕을 누리는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신령한 은혜와 생산적 목적을 갖고, 또 현세욕을 통제하는 입장을 취할 때 뜻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오른손을 붙드시는 체험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제는 누가 자동차를 접촉 사고 내고 도주하였습니다. 거의 찾아낼 가망이 없었지만 찾아내어 수리를 하였는데, 본래 고장이 있는 부분을 다시 수리하게 된 것이니, 그것도 주님이 내 오른손을 붙들어주신 덕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3. 예수님과 믿음


제16과 신앙의 기초 (엡 2: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기초”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바르지 않으면 옳은 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처음 믿는 분들이나 기초에 대하여 옳게 이해 못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이 말씀을 드립니다. 기초란 터, 기반, 표준, 모범, 바른 사상, 바른 목적, 바른 깨달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모퉁이 돌이 되셨다”(마 22:42) 하셨고, 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교회의 기초라고도 하셨습니다(마 16:18). 바울 사도께서도 이 기초에 대한 말씀을 고전 3:11과 본문에서 하셨습니다. 원 기초는 예수님이시고, 그 다음 기초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모범이며, 그 다음에 영감 된 성경으로 기초를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님들이 표준(기초)을 잘 잡아야 탄탄한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기초는 성경입니다. 예수님, 선지자, 사도들이 기초이고 모범이지만, 그분들의 모범이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만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나의 하는 일과 남이 하는 일을 성경의 잣대에 놓고 재보는 일을 서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해석이 다양합니다. 여기에서 옳은 해석, 그릇 해석을 적당한 방법으로 가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100년, 1000년 모르고 지나온 것이라도 성경에 위배된 것이면 잘못인 줄로 알고 시정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1948년에 시작된 줄 압니다. 금년까지 56년째인데 “돈 쓰는 선거가 잘못이다. 기업체에 이해관계를 말하고 선거비를 염출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돈 준 자는 가볍게 하고 전달하고 받은 자만 처벌하며 선거 기간에는 수사를 중단한다” 하니, 그것도 법 집행의 공의를 다 어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 경제가 70년대로 후퇴해도 법은 법대로 집행하여 공의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같은 무지와 오해가 많은데, 원 표준은 성경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양심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거듭난 심령을 뜻하고,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 외식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생활도 자기의 하고자 하는 소원과 기쁨과 희망을 갖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양심 아닌 외식으로 믿는 척 한다면 사람은 그것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을 아셔서 진실하게, 또 정성스럽게 믿음생활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기초는 신앙생활을 자신이 직접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기도나 예배를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는 줄로 알지 마시고, 자신이 직접 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하루 세끼 음식을 먹는데, 1주간에 21회 먹습니다. 그 중에 교회에서 세끼쯤 먹습니다(예배). 교회에 안 나온 시간 18회는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합니다. 남이 먹는 음식을 구경한다고 자기 배가 부른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자신의 연약을 보충해주는 기관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4. 신앙생활에 색깔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나라는 하나인데 정치에 색깔이 있고, 코드가 맞고 안 맞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성경과 모범은 하나라도 받은 은사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앙 사상 또는 주의라고 합니다. 목적은 같은데 방법이 틀리는 경우지요. 부산 가는 것이 목적이면 자동차, 기차, 비행기, 배로 갈 수 있겠지요. 이 네 가지 중 선택의 표준은 안전성, 경제성, 시간 조절을 대조하여 가장 합리적 수단을 채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합리적 선택이 가장 건전한 신앙생활의 방법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신앙생활의 목적이 뚜렷하여야 합니다.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영생이고, 또 하나는 사랑 실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성경 지식이 상통하고, 사랑은 계명 실천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실 때 성경을 가르치는 설교냐, 사랑을 실천하라는 설교냐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설교의 많은 내용이 얼마큼 성경 밖으로 나가있는가도 탐지하면서 들을 줄 아셔야 합니다.

6. 신앙에 분량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색깔 따라 분량이 있을 수 있겠지요. 성경을 많이 알고 많이 실천하는 사람은 분량이 많은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믿음 분량이 적다하여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상급과 영광에 차이가 있지요. 그런 것도 감안하여 이해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할 것을 포용하며, 자기의 맡은 일을 잘하면서 적응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속을 사랑하거나 허탄한 데 뜻을 두면 하나님의 사랑이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요일 2:15).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신령한 복을 추구하면서, 그 다음에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마음을 쓰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령한 일에 등한하고, 세상의 일이나 정치에 앞장서는 것을 “사회복음주의”라고 하는데, 그것을 돌이켜서 “복음적 사회주의”로 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터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제17과 믿음을 붙드심 (눅 22:31~3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을 붙드심”, 믿음생활을 붙들어주시는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성”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중에 “믿음을 붙들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가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핍박 때문에 힘들어 한 사례가 있고(히 11:33~38), 사도들이 무거운 짐을 지운 일은 없었지요(행 15:28). 그러나 요즈음은 지도자들이 교인을 바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는 줄 압니다. 이럴 때는 적당히 조절도 하고, 또 “무거운 짐 진 자를 오라” 하신 예수님 앞에서 합당한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11:28). 여하튼 사악한 세대에서 “믿음을 붙들어나간다”는 일이 쉽지 않지만, 성령님께서 그것도 책임을 져주신즉 기대하시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기도이고, 은혜를 받은 상태는 회개와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성령 충만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배우고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1. 말씀에 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됩니다. 행 8:26~39에 보시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다녀가면서 병거에서 성경을 읽다가 빌립 집사를 만나 은혜를 받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내시의 정성도 대단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예루살렘으로 다녀갔고, 병거에서 성경을 읽었으니까요. 그때 성령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일하는 빌립을 유다 광야로 보내셔서 그 내시를 만나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비슷한 예가 행 10장에 고넬료 집에도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평소에 경건하게 산 사람인데 하나님이 “베드로를 청하라” 하셨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는 “고넬료 집으로 가라” 하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세계에서 듣고 배우는 것도 성령님의 그런 역사에 의함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접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 대화를 하면서도 같이 가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모른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동행하신 것을 못 느끼는 것처럼…. 그런데 “저희 눈이 밝아져서” 알아보았습니다(눅 24:31). 그때 예수님이 밝혀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 9:22에 보시면 “하나님은 총명을 주시고”, 엡 1:17에 보시면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분”이며, 행 16:14에 보시면 “바울이 증거하는 말씀을 청종하게 하셨고”, 요 14:26에서는 “들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요 16;13에서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것도 주님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행 18:5에 보시면 “말씀에 붙잡히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힌즉 생명을 걸고 전도하러 다닌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14권을 쓰신 것도 말씀에 붙잡혀 쓰신 것입니다. 저도 말씀에 붙잡혀 이 설교문과 로마서 강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바람 쏘이러 나갈 시간이 아까울 만큼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말씀에 붙잡혀 밥을 태우거나 뉴스 시간을 놓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말씀에 붙잡힌 것이 주님과의 동행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하여 진리와 관계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기도로도 도와주십니다. 베드로가 타락할 위기에 있을 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질 번하다가 붙은 것입니다. 세 번 부인했지만 살기 위해서 부인한 것일 뿐 아주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이렇게 큽니다. 또 성령님께서는 기도할 마음도 주시고(삼하 7:27, 대상 17:25), 또 “연약한 기도를 도우시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롬 8:26). 말씀과 기도 접촉이 은혜를 유지하는 것인데, 성령님은 이 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 기도가 게을러지면 “기도하게 해 주십쇼” 하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내가 너로 기도하게 하지 않느냐?” 하실 것입니다. “네가 기도하게 해 주십쇼 하는 소원이 바로 내가 준 것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4. 또 중요한 것은 때가 되면 성령 충만도 주시는 것입니다. 겔 36:26에 보시면 “내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내 율례를 행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나” 하고, 염려하실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켜주시는 줄로 믿으시고 부탁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생애 말년에 로마 감옥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시기를,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탁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지키실 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붙들어주시는 주님이 곁에 계신 것을 확신하시고, 든든히 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 11:23에 보시면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하셨고, 13:43에서는 “은혜 가운데 있으라” 하셨으며, 행 14:22에서는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제18과 주 예수님 (요 13:12~17) 목록으로


“주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호칭할 때 “주 예수님” 또는 “주여”라고 합니다. 이 “주”란 뜻은 “왕”이란 뜻입니다. 임금은 나라와 백성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행 4:24, 계 6:10)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주를 본받으라”, 그리고 “종이 상전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행하여야 복이 있다” 하셨으니 저희들은 복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무엇의 주이신지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주여, 주여” 하던 생각과 생활 방식이 많이 달라져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생명의 주”란 말씀이 있습니다(행 3:14~15, 17:25; 요 14:6). 나와 여러분들의 생명의 주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죽으면 자기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행 17:25에 보시면 “기한을 정하고 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롬 14:8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이 말씀을 의미 있게 받으셔야 합니다.

2. 나의 주(요 13:13~14), 우리 주(고전 9:1)란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주”란 말씀을 하신 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독점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셔도 예수님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광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시 104:1). 하나님(예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독점하지 못한 분들은 이 말씀으로 꼭 깨달으셔서 자기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는 분이 되지 마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우리 주님이십니다.

3. “만유의 주”란 말씀이 있습니다(대상 29:11, 요 10:29).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요 1:1~2) 천지의 주재로서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입니다(행 17:24~25, 롬 8:32). 우주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선 땅과 하늘과 공기와 햇빛이 주님의 것이고, 모든 자연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연의 혜택을 입으면서 주님의 것인 줄을 몰라도, 성도는 그것을 알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4. “의의 왕”이란 말씀이 있습니다(히 7:2; 벧후 1:1; 롬 4:5, 8:30). 예수님이 의의 왕이란 뜻은 의의 근원이시고 의의 표준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생활을 하시려면 예수님 표준대로(선생이라고 하셨음) 사셔야 합니다. 의의 왕은 죄인을 의롭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즉 죄사함을 받는 의도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약 1:17). 또 예수님이 의의 왕이시기 때문에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행 17:31).

5. “평강의 왕”이란 말씀이 있습니다(사 9:6). 요 14:27, 20:21에 보시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누리는 평안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시고,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10:10).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평안이 크게 중요한 줄 압니다. 평강의 왕에게 부탁하셔야 합니다.

6. “믿음의 주”란 말씀이 있습니다(히 12:2). 모든 성도가 갖고 있는 믿음이 다 주님이 주신 것이고,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기도하기를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주가 예수님입니다.

7.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의 주”라고도 하셨습니다(행 4:12, 히 2:10). 예수님이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받게 해주시는 것인즉 믿음의 주, 구원의 주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8. “말씀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말씀으로 계셨고(요 1:1),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습니다(마 11:27). 하나님이 혼자 예수님 모르게 말씀하시는 일이 없습니다(요 12:48~49). 그래서 “계시의 주”도 되시는 것입니다(행 13:49, 15:35, 19:10; 살후 3:1).

9. 딤전 1:12을 보시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주”란 말씀이 있고, 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으니(사 9:6), 이 말씀은 “능력의 주”란 뜻입니다. 어떤 능력을 구하시든지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아셔야 하고,

10. “지혜의 주”도 되십니다. 사 9:6에 보시면 예수님을 “기묘자라 모사라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를 보존하실 분이라” 하셨고, 잠 1:7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하셨으니까, 예수님만큼 지혜로운 분은 없습니다.

11. “소망의 주”란 말씀이 있으니(딤전 1:1; 엡 4:4; 롬 8:24, 15:13) 주님으로부터 소망의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이요,

12. “영광의 주”란 말씀이 있으니(딤전 1:1; 엡 4:4; 롬 8:24, 15:13)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려야 할 것이며,

13. 예수님은 사랑의 승리자이시므로(요일 4:7~10, 19) “사랑의 주”도 되실 수 있고,

14. 자유를 주시는 분인즉(요 8:32, 갈 5:1) “자유의 주”가 되실 수 있으며,

15. 또 중요한 것은 “교회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자기의 피로 값을 주고 세우셨다”(행 16:18) 하셨고, 교회를 자신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골 1:24). 따라서 교회라는 단체의 신앙과 화목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만물, 생명, 평안, 믿음, 지혜, 능력, 말씀과 의, 소망과 천국과(요 14:2~4; 계 3:21, 4:2; 사 6:1) 사랑과(요일 4:7~10, 4:9) 자유가 필요하시면 꼭 주 되신 예수님께 의지하여 성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9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의 뜻과 우리 생활과의 관계를 살피셔야 할 줄로 압니다. 우선 이 말씀은 절대유일성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이유는 “레 호도스 헤 알레테이아 헤 조헤(ὴ όδὸs. ὴ. άλήθεια. ὴ ζωή)”라는 표현에 정관사 용법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 길 중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뿐인 바로 그 길이란 뜻입니다. 원문에는 “곧”이란 말이 없지만 우리 성경에 있는 것은 그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러면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살피고, 우리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하겠는지를 교훈 받겠습니다.

1. ‘길’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길’이란 ‘호도스’는 영어의 way로 번역되었고, way는 방법, 습관, 도로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길로 말씀하신 데는 의롭게 사는 방법으로서의 길과 하나님을 아는 방법으로서의 길과 죄사함 받고 천국 가는 구원의 방도로서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 길은 예수님뿐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마 17:5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지요. 이 뜻은 율법을 참고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본받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 되어 본을 보였으니 그 본을 따르라”(요 13:15)고 하셨습니다. 사람 사는 방법이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최고 유일의 방법임을 믿고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성인, 군자, 열사가 있어도 예수님의 순결하고 봉사적이며 희생적인 삶을 따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접견하려면 비서실장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요 12:20~22에 보시면 헬라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을 뵙고자 하였을 때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성취된 것처럼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요 1:18에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 되고(요 14:9), 또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6:13, 17:8).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의미도 그렇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중보적 의미로도 그러한 것입니다.

3)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길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죄사함 받고 의로워져야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거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 죄 값은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큰 값입니다. 영원한 생명, 순결한 인격, 하나님의 독생자가 순종과 고난과 죽음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대속자도 될 수 없고, 중보자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구원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시 23:3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셨는데, 이 길이 좁은 길을 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 또는 십자가를 믿은 믿음의 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하튼 천하에 많은 종교가 있어도 예수님이 중보하시지 않는 길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행 4:12, 갈 1:8). 기독교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사이비한 기독교를 신봉한다 하여, 역시 증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은 제한되어 있고, 선택되어 있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불신자이든, 일반 종교인이든,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든 같은 범주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택한 백성은 예수님이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만큼(요 17:9~12) 참 성도는 믿음의 정도 지키는 일을 크게 중요시하셔야 합니다. 참을 드러내는 그 자체가 이단을 비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만 진리이십니다. ‘진리’란 뜻은 단순합니다.

1) 거짓이 아닌 ‘참’이란 뜻입니다. 롬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누가 금을 샀는데 오랜 후에 그 색이 변하였으면, 그것은 진짜 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진리 되려면 순결하고(진실을 뜻함) 영원(불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 146:6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다”고 하셨습니다.

2) 또 한 가지 진리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도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용어가 음식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믿는다”는 용어는 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참”은 예수님(하나님)과 그의 말씀(성경)뿐임을 아셔야 하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하여 속지 않을 대상은 예수님뿐이심을 아십시오. 분명히 믿었던 가족이나 자녀들도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숨 쉬는 것, 자라는 것,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생명은 곧 힘입니다. 우주도 움직이고, 식물도 자라며, 모든 생물이 숨을 쉽니다. “생명” 하면 영적 생명도 있습니다. 거듭난 생명입니다(요 3:3, 엡 2:1). 이 모든 생명의 주(곧 근원자)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요 1:2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셨고, 또 “생명과 호흡을 주관하시며…그를 힘입어 기동한다”고 하셨습니다(행 17:25~27). 만물을 생동하게 하시는 예수님,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 뜻대로만 살기를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마 10:29, 사 55:10, 골 2:19, 고전 3:6, 욘 3:7).

 

제20과 예수님 따르는 목적 (요 6:26~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22~25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벳세다에서 예수님이 5,000명 이상에게 기적의 양식을 먹인 것을 체험하였는데, 그 이튿날 예수님이 그 지역에 안 계신 것입니다(그 전날 밤에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으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계셨음). 그래서 가버나움으로 뒤따라 와서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25절)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하시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그들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따라온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표적을 보고 따른 일은 없었는가? 할 때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요 4:48).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했다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도 하셨지요(마 12:38~39). 그런데 본문의 경우는 표적보다도 떡을 먹고 배불러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본즉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표적보다는 배부른 것이 더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 따르는 목적, 즉 예수 믿는 목적(교회에 나오시는 목적)이 잘못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이벤트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고, 떡은 육체 양식, 썩을 양식, 사업주의를 의미하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교인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나와서 잘하는 설교, 유명한 사람, 잘하는 찬양 등으로 기쁨을 맛보았다면, 그것이 표적이 아니라도 이벤트 사건으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표적을 보러 따라다닌 사람들은 볼거리를 보고 기쁨을 느끼자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목적은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영광 가로 채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실제적 노력을 하셔야지, 구경하는 쪽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배가 고파서 떡을 얻어먹으려고 나왔는데 그것을 잘못이라고 하면 되느냐?” 하시겠지만, 이것은 절에 가서 젓국 찾는 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쌀 배급소가 아니고, 말씀 배급소입니다. 쌀 배급소는 하나님이 일반 은총에 의하여 사회사업체를 따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육체의 양식 문제는 일반적으로 해결하고, 예수님께 와서는 “영생하는 양식”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식 주시는 이적은 두 번 이상 하신 일이 없으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전업이 아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교회가 구제를 전업처럼 하면 안 되는데, 오히려 물질 사업을 앞세우고 믿음을 뒤 세운 상태로 나가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1,000만원을 길바닥에 뿌리고 하나님의 일을 잘한 것처럼 나타냈지만,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과 금이 없었고 예수님만 계셨다”(행 3:6)는 사실과 비교하면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슴으로 비유할 때 믿음은 뿔에 해당하고, 물질 구제는 고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뿔도 필요하고, 고기도 필요하지만 예수님은 뿔(믿음, 히 11:6)만 원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당시에 떡 얻어먹으려고 온 사람들을 보시고, 3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떡과 사업주의로 기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기적이나 이벤트를 보았다 하여,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여쭙기를 “하나님의 하시는 일(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복수, 엘가)을 할 것입니까?” 하였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님)를 믿는 일(단수, 엘곤)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믿는 자)는 “믿는 일, 즉 자기의 신앙을 증진시키는 일”에만 열중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도 개인 개인의 믿음 증진에 힘써야 할 것이요, 목회도 그런 방법으로 하셔야 할 것이며, 교인들도 깨달아서 자신이 믿음 중심에서 일하는지 아니면 사회봉사에 얼마나 비중을 두는지를 교회 생활 안에서 판단하여 믿음 성숙을 소홀히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그 믿음의 성숙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시겠지요. 그것은 숫자나 헌금이나 이벤트 사건이 아니고, “성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연구와 순종의 맛을 모르거나 기도와 응답의 맛을 모르면 믿음 성숙이 요원할 것이고, 또 자기 부정을 못하거나 세속에 거리감을 두지 않으면 말씀과 기도와 믿음 성숙에 이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오직 “믿음 성숙과 예수님을 닮음”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엡 4:13, 롬 8:29).

 

제21과 믿음의 터 (엡 3:14~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6절에 “속사람을…강건하게 한다”는 말씀과, 17절에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말씀과, 또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말씀이 곧 “믿음의 터”를 나타내신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터”에 대한 묵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의 터는 자기의 마음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신다” 하셨고, 약 1:21에서도 “마음에 심긴 도”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씨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옥토에 부려질 때 결실을 잘하는 것처럼 믿음도 그 마음 밭에 따라서 성장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려면 씨가 옥토에 뿌려졌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마음도 착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마음의 터를 이룰 때 좋은 신앙을 육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 3:9에 보시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지라”는 말씀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의 터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행 16:31)이나,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셔서 더불어 잡수시고(계 13:20) 계명을 지키는 자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 14:23)는 말씀이 곧 가정에 주님을 모신 뜻입니다. 가정이 합심하지 않으면 믿음생활에 큰 불편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녀의 순결을 위하여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교훈도 하셨습니다(말 2:15, 고전 7:39). 신앙생활을 가정 중심으로 안 하거나 못한다면 큰 손해를 봅니다. 반드시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할 때 자신과 자녀 교육상 큰 유익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가정이 믿음생활의 두 번째 터가 되는 것입니다.

3. 교회입니다. 교회는 믿음생활을 교육하고 연단시키는 터입니다. “이 집(교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 하셨고(딤전 3:15),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딤후 2:19) 하셨으며, “사도들이 닦은 터 외에 다른 터를 닦을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고전 3:11, 히 6:2). 또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지요(마 16;18). 따라서 교회의 터는 예수님이고, 믿음 생활의 현주소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연단을 받으며, 성도와 합동하여 영광을 돌리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생활을 건전하고 지혜롭게 잘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옳게 배우고 사랑 실천을 잘하면서 여러 가지 부조리한 일에 유혹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교회를 주신 목적이 믿음의 보호를 받고, 육성을 받으며, 천국의 모형처럼 즐거움을 갖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행 2:44~47).

4. 지금까지는 믿음의 터로써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말씀 드렸는데 이제는 장소적 개념을 떠나서 환경적 개념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믿음 생활은 어떤 세계에서 하여야 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도덕적 심성입니다. 앞에서 믿음의 터는 마음이라고 설명드릴 때 옥토에 뿌린 씨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지요? 그 옥토가 어떤 마음을 뜻할까요? 착한 양심, 순결한 마음,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한 말씀을 더 보충한다면, 엡 5:9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곧 성도의 마음 바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이런 마음의 자세가 믿음의 터가 될 때에 그 믿음도 바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2) 말씀 세계에서 살아야 믿음 생활이 잘됩니다. 성도 스스로도 성경을 연구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가까이 사귀거나 모임이 있을 때 성경을 말하고 성경을 토론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이고(마 4:4),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말씀 연구를 자기 생활의 환경으로 삼아야 함을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가까이 하는 세계를 자신의 생활의 터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세계가 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혀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골 2:7). 이것은 사랑 실천의 자세가 확고한 것을 뜻합니다. 사랑의 힘이 약하면 사랑하기 어려울 때 흔들릴 것이나 사랑의 뿌리가 깊으면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실천도 연습과 연단을 거쳐 성숙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연단의 세계입니다. 벧전 1:7을 보시면 “믿음의 시련”이란 말씀이 있고,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연단 받은 믿음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고난을 선용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과 고난을 생활의 터로 삼아 대등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하며(욥 2:10),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상의 모든 환경을 신앙의 터로 굳히는 일입니다. 17절에 “터가 굳어져서”란 말씀이 있습니다. 한 나무가 한 자리에 오래 정착할 때 고목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좋은 터에 좋은 신앙을 심고 오래도록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과 영광을 돌릴 때 믿음의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22과 믿음으로 믿음에 (롬 1:17) 목록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하셨은즉 앞에 말씀한 믿음과 뒤에 말씀한 믿음의 차이가 있음이 사실인즉 여기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믿음으로 믿음에”는 ἐκ πίστεως είς πίστιν(엑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으로써 원문학자의 말에 의하면 앞에 있는 “피스테오스”는 속격단수로써 그 믿음이 믿음의 주(히 12:2)이신 예수님께 전적 예속되었음을 뜻하고, 다음에 있는 믿음 “피스틴”은 대격단수이므로 상대성(상대자의 노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대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인간의 노력을 가함으로 성숙한 믿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자는 거듭난 상태로서의 시작하는 믿음이고, 후자는 더 성숙한 믿음으로 영광의 열매를 맺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2. 이 사실을 더 밝히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와 가지로 또는 싹과 줄기로, 줄기와 열매로 비유할 수 있고, 사람으로 말하면 곧 출생한 아이와 자라나는 아이로 비유할 수 있으며, 사건으로 말하면 시작과 진행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상태, 그것이 바로 시작하는 믿음이고, 실천하는 단계는 그 다음 믿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씨앗에 물이 가해지면 싹이 나지요. 이와 같이 거듭난 심령에 진리가 가입되면 믿음의 싹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싹은 햇빛과 공기와 영양을 받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창조자를 기쁘게 하는 것처럼 믿음도 싹으로부터 시작하여 말씀, 기도, 실천, 연단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하며 영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시작하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거듭난 심령은 진리의 말씀을 믿고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믿음은 신앙고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막 16:16). 거듭난 심령은 믿음과 행동의 능력이 있습니다. 롬 1:5에서 “믿어 순종케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순종력도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성숙된 믿음이 무슨 효력을 주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사람으로 출생한 것과 그 집안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으로 효력을 줄 수 있지요. 이것은 처음 믿음이 시작하는 믿음, 거듭난 심령,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확보하는 효력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린아이가 자라서 좋은 인격자가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이는 그 부모나 가정이나 사회에 주는 유익과 영광이 큰 것처럼 믿음도 성숙하면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히 11:6), 사명을 이행할 수 있으며, 또 성숙된 믿음과 충성의 대가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하는 믿음은 구원을, 성숙한 믿음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 여기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시작하는 믿음에서 받는 은혜는 죄사함(행 2:38, 13:39, 10:43), 의롭다 함(갈 3:16, 롬 3:25), 양자의 권세(요 1:12, 요일 3:1), 계명 실천의 의지와 힘(롬 1:5, 갈 5:6, 딤전 1:5, 몬 5)을 주는 것이고, 뒤에 있는 믿음은 성도의 노력과 함께 성경 지식 즉 믿음의 폭을 넓히고 실천과 헌신의 사명을 가지며 말씀과 기도와 사랑에 붙잡히는 생활을 통하여 예수님을 많이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6. 성도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셨습니다(요 3:3). 이 뜻은 인간의 노력 없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후 1:11에 보시면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믿음은 억지로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성령님의 일방적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말씀하신 믿음은 성경 연구, 기도 노력, 실천 노력, 사랑과 헌신 등, 인간의 노력이 있음으로 성숙되는데 여기에도 성령님의 역사가 있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총에 붙잡혀 노력하므로 성숙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고전 12:9에 보시면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신다” 하였는데, 이 믿음은 성숙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거듭남을 주신 것도 그 성령님이 주신 것이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도 그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앞에서 말씀한 원문적 해석에 부합됩니다. “피스테오스”는 속격단수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믿음이고, “피스틴”은 대격단수로 인간의 노력과 함께 성숙하는 믿음이란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 앞에 있는 믿음을 불완전한 믿음이라고 하였다는 글을 보았으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본질적으로 완전한 믿음입니다. 다만 연단과 성숙이 안 됐을 뿐이지요. “겨자씨가 적은 것이로되 자라면 공중의 새가 깃든다” 하신 것처럼 겨자씨만한 믿음(마 13:31, 17:20)이 앞에 있는 믿음이고, 큰 나무로 자란 믿음이 그 다음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23과 믿음의 효력 (히 10:37~38) 목록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의인”이란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정의를 주장한다 하여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믿음 없이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적인 불신자이지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십자가의 믿음) 죄사함 받은 의인이 있습니다. 신앙 고백을 바로 할 줄 아는 성도입니다. 자기의 공로 없이, 노력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 받은 의인이지요(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의인이 있습니다. 이런 의인이 값진 의인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고, 믿음으로 사랑 실천을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는 믿음이란 것과 믿음으로 받는 효력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믿음은 진실한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진실한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니까,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 참되시고(롬 3:4) 예수님과 성령님만 진리이시니까(요 14:6, 17)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말씀 성경 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호 6:3에서 “힘써 하나님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믿음 밖에서 지식으로만 아는 경우가 있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 19:15에 보시면 악귀 들린 자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고 하였지요. 이것은 믿음 밖에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 1:12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믿음이 아니면,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소리쳐도 주님은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성경을 통하여(요 5:39)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보존자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자연과 생물을 다 통치하십니다. 그 중에 성도를 특별히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 역사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분이며, 예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성령님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만 가지 은혜의 주로서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며, 성도가 계명 실천하기를 바라시고, 항상 감찰하시며, 책망도 하시고, 상급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는 모든 인류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도 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성도와 어떤 관계에 계십니까? 성도의 권속과 하나님, 성도의 왕, 성도의 아버지, 성도의 목자, 때로는 성도의 친구도 되어주시는 것입니다(출 15:2, 3:7, 요 1:12, 시 23:1, 요 15:15, 엡 2:19). 또 예수님은 형님이 되시는 것입니다(롬 8:29, 히 2:11). 그만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크고 대단한 관계입니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맡기면 잘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5, 잠 16:3, 벧전 5:7). 광주에 작은 집을 세놓은 것이 있는데 추위에 수도가 터졌습니다. 3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약 15일간 고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설비 기술자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일체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위안이 되고 편안하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와 특히 자녀들에 관한 일까지(사 45:11) 하나님께 맡기면 참으로 평안할 것입니다. 맡길 때는 어린아이에게 맡긴 것처럼 아쉽게 여기지 마시고 유력한 분에게 맡긴 것처럼 하셔야 하고, 또 ;무관심을 보태서라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성도들도 영원히 사는 존재이니까 현세의 조급성을 떠나서 영원히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히 11:1), 소망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며(고전 13:13), 시 146:5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여 맡기며, 순종하고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4. 두 번째 큰 대지로 믿음으로 받는 효력이 무엇일까요?

1) 죄사함입니다. 행 2:38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죄사함 받으면 자동적으로 “의롭다”는 인정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 8:30).

2)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과 양자 되는 특권을 받습니다(요 1:12, 롬 8:29). 하나님이 그 성도를 아들 취급해주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3) 믿음이 순종력을 줍니다. 롬 1:5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고 하셨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계명 순종할 힘이 없어서 고민하시는 줄 압니다. 그 순종의 힘을 사람(교역자)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믿음의 분량을 키울 때 순종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면 능치 못한다” 하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막 9:23). 믿음으로 계명 순종을 잘하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실 것이구요.

4)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요 3;16). 믿음이 곧 천국 열쇠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받는 소득은 죄사함(의)과 양자의 특권과 순종력과(해결) 천국 입장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겨자씨에서 싹이 나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쪼록 좋은 믿음으로 성숙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제24과 믿는 의미와 보람 (행 16:31) 목록으로


“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의 보람으로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 시간에는 “믿는 의미와 보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가 믿는 의미를 바로 알고 믿는 보람을 많이 느낀다면 천하를 얻는 즐거움보다 더 보람될 것입니다.

1. 믿는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하셨습니다(전 12:13).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은 피조물들로부터 경외를 받으시기 위하여 자기를 나타내주셨는데, 그 나타내신 계시가 바로 자연 계시이고, 또 성경 계시이며,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계시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도 가장 밝게 계시하신 것이 예수님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요 14:9). 따라서 성도는 이상의 세 가지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과 영적으로 통하고 교제하며 느끼는 앎이 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나를 알아주시되, 얼마큼 친하고, 얼마큼 가까운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잘 믿고 못 믿는 의미를 가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분관계를 강조하다 보면 기독교적 의식은 이차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 지키고 예배드리며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의미를 찾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마음에 깊이 모시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모하며 친교하는 것을 믿음의 방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알기 쉽게 요약하면 교회 중심 생활과 개인 중심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중심 생활을 하면서 개인 중심 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교회 중심 생활은 한낱 의식에 불과해질 것이요, 또 개인 중심만 중요시 여기고 교회 생활을 소극적으로 대한다면 주님의 교회를 소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을 다 중요시 하되 자신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 신앙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가깝게 모시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믿는 자의 마음에 계실지라도 역사해주시는 범위 안에서 성도가 그 효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 또 말씀을 영감으로 나타내셨으며,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17, 딤후 3:16, 요 16:13). 그러니까 성도가 성경을 떠나서는 믿는 의미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믿고 잘 배우며,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복종, 시행할 때에 믿는 의미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5) 믿는 의미의 한 방도로써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본받는 것입니다. 롬 8:29을 보시면 “미리 아신 자들로…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하셨고, 이로서 “많은 형제 중에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되어있습니다. 또 형제가 서로 닮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고, 부모의 영광도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는 데서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 믿음생활은 헛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생활의 의미는 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간의 본분을 다하는 것, ② 하나님을 알되 친교적으로 아는 것, ③ 하나님을 개인적 관계에서 가깝게 모시는 것, ④ 성경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⑤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는 것, 이런 생활을 교회를 통하여 터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의 보람입니다.

1) 우선 믿음의 보람은 영적 구원에서 받는 것입니다. 영적 구원이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 천국은 모든 성도가 일반적으로 받는 것이고, 또 내세에 들어가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소망만 가질 뿐 현세에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2) 예수 믿는 보람을 현세에서 누리려면 두 가지 방도에서 누려야 하는데, 하나는 예수님과 자신이 친교함으로 느끼는 보람이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이웃에 사랑을 실천함으로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느끼는 보람입니다. 누구나 사랑 실천을 많이 하면 좋은 이웃을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가까이 하는 것은 차원이 더 높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친교함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과의 친교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가까이 하면 오히려 훼방을 받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끌려본 체험이 있으셨습니까? 물론 기도에도 끌려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할 텐데…” 하면서 기도의 과제를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자세로 이끌리는 체험이 있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맛과 응답의 맛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 119:103에서 “주의 말씀의 맛이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합니다” 한 고백도 체험하셔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곧 주님과의 영적 친교인데, 여기에 빠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무가치해지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런 성도를 각별히 관심 써주시는 것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73:23). 이렇게 믿음생활의 보람은 구원의 은혜와 사랑의 세계에서 느끼는 보람과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에서 느끼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25과 믿음 성장 (히 5:13~14) 목록으로


여러분, 믿음 성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문에 보시면 “어린아이는 젖만 먹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나 장성한 사람은 단단한 식물을 먹으니 지각을 사용하여…선악을 분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 미숙자와 믿음 성장자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성도님들이 자기 믿음의 성장하는 상태를 체험하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을 알고, 먹으면 배부른 것을 알지요. 100만원과 1억원을 대조할 때 어느 것이 많은 돈이며, 1억이 100만원의 몇 배인지도 아실 것입니다. 여름철 비 오는 날 오이 밭을 들여다보면 오이 자라는 상태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신기함을 느낄 때가 있지요. 믿음 성장도 바로 그런 체험을 하시면서 보람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1. 믿음 성장의 느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 성장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장애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목적을 향하여 가려면 먼저 장애물을 제거하는 길을 닦은 후 자기 건강을 챙기고 달음질을 하여야 하는 것처럼 믿음 성장의 느낌을 받는데도 절차가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1) 성경을 사랑하는데 끌리는 체험입니다. 2) 기도의 맛을 알게 되는 체험입니다. 3) 말씀의 맛과 기도의 맛을 알면서 하나님이 자기 곁에 계신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4) 자기 삶의 목적을 알고, 5) 정욕적인 불만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풀려야 합니다. 6) 그리고 만사를 하나님께 의존하고 낙관하면서, 7) 소망을 미래로 당기는 것입니다. 그런 징후가 나타나는 것을 매일매일 체험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 성장의 방법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 성장의 방법은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여기저기로 다니는 분들도 있고, 또 자신이 노력을 안 하면서 누가 안수하면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방법입니다. 성경에 아이가 어른 되는 것으로 믿음 성장을 비유하신 것은 그 성숙이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성경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시행하셔야 합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고 진실하게 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고 조심하는 데가 있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신앙생활의 중심을 못 잡고 신앙 쪽과 불신앙 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확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믿어야 안다”(요 6:69), “믿어야 순종한다”는 말씀이 있고(롬 1:5), 또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도 있으며(마 9:29), 또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다”(행 27:25)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만큼 진실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믿음, 또 성경에 굴복하는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2) 겸손하셔야 합니다. 인간이 겸손하여야 할 이유는 피조물이고, 죄인이기 때문이지만, 또 믿음 성장을 위하여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약 4:26, 벧전 5:5, 시 147:6).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을 때(마 5:3), 그 심령의 가난도 자기를 비운 겸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빈 그릇이어야 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겸손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회개가 중요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장애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마치 막힌 하수도를 뚫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행 3:38에서 “회개해야 성령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리낌을 해소하지 않으면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그렇게 되면 믿음 성장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은혜 받는다”는 예화로 무디 선생님의 설교를 소개하면 어떤 점원이 물건을 팔아서 1,500불을 횡령하였는데, 그것을 회개하기 위하여 주인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1,500불 중 550불을 쓰고 950불이 남았은즉 쓴 것을 갚고 점원을 사퇴하겠다 한즉, 주인이 “회개하였은즉 더 신임할 것이니 일을 잘하라” 하여 더 성실한 점원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 힘써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땀 흘리며 수고하는 자에게 열매를 주신다”(시 126:5)는 말씀이 있고, 또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대하 16:9). 노력 없이 믿음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챔피언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노력을 통하여 주십니다. 노력 없이 받는 은혜는 보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노력하셔야 할까요? ① 기도를 노력하셔야 합니다. 기도 그 자체가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까요(시 107:9). ② 성경 깨닫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이 알려 하지 마시고, 글자 하나 하나, 한 줄 두 줄부터 공부하여, 공부에 맛을 들여야 합니다. 성경 공부에 맛을 못 들인 상태에서 믿음 성장은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믿음의 근거요 영혼의 양식입니다(마 4:4). ③ 순종인데, 순종은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은 사랑 실천입니다. 믿음과 행위가 일치할 때만 성장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④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쇠가 되려면 많이 두드림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수난을 견디면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고, ⑤ 자신이 사명자(전도자, 설교자, 봉사자)가 된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힘쓰실 때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감에 있어서 발전이 있으며 실감이 나고 큰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26과 믿음의 방편 (요 14:11) 목록으로


“믿음의 방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제목의 뜻은 “믿음을 발생시키는 요소”란 뜻입니다. “믿음”이란 참(진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참 아닌 것”, 즉 변하고 거짓되며 없어질 것을 잘 믿습니다. 그리고 “참을 믿으라” 하면 잘 안 믿습니다. 참이란 존재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나타나셔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일체이시다”, 본문대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 하셨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데 안 믿으니까 예수님이 2차 선택으로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믿으라” 하셨으니까, 이 말씀에서 믿음의 1차 방편은 말씀이고, 2차 방편은 이적과 사역입니다. 이런 말씀을 상고하면서 “믿음의 방편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잘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발생시키는 요소(방편)는 성령님의 역사로 성취되는 절대적 방편이 있고, 사람의 노력으로 자극을 주는 상대적 방편이 있습니다.

1. 절대적 방편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1)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요 3:3, 엡 2:1). 이 은혜는 성령님이 택한 백성에 한하여서만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노력을 하여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믿음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이 직접 감동을 주셔서 믿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그 지식을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라” 하셨고(마 16:17),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고전 12:3),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베드로가 믿음을 갖게 된 경위나(눅 5:4~8), 바울이 변화된 경위를 보면(행 9:1~18)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가 있으셨고, 루디아가 바울의 전도를 받을 때 “주님이 마음을 열어 말씀을 청종케 하셨다” 하시므로 성령님의 역사가 있으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 성령님의 절대적 방편은 전도 사역입니다. 롬 10:13~15에 보시면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하셨고, 또 “전파함이 없으면 어찌 들으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 하셨으므로 믿을 대상을 알리는 전도가 믿음의 방편인데, 그 전도를 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행 1:8). 그러니까 믿음의 절대 방편으로써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감동 받게 하는 역사, 전도로 알리게 되는 근원적 섭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큰 역사에 굴복 당하는 상태를 못 느끼고, 스스로의 믿음이나 적은 감동에 끌려서 믿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2차적 방법, 또는 상대적 방법에 의하여서도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저와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교회에 나가도록 인도하신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환경 극복과 진로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면서 그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인도와 어려운 환경이 상대적 믿음 방편이 된 것이지요. 군대생활을 하면서 광주신학교에서 만난 정농업 상사(당시 계급)는 전방에서의 군 생활 중 그 지역 민간 교회에서 찬송하는 소리가 좋게 들려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2차적인 방편으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어가는 병자에게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고 “예수를 믿자” 하였을 때 안 믿을 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의 감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음의 2차 방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믿은 것과(눅 8:2, 막 16:9), 문둥이 시몬이 예수를 믿은 것과(마 26:6), 나면서 소경 된 자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요 9:33)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고 믿은 것도 되지만 사랑 실천에 감동을 받고 믿은 것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2차적 방편이 사랑과 선행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 결과에 많은 효력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식과 경험의 영향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큰 원인은 구약 성경을 예수님과 접속시키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일깨워줌으로 믿게 된 사람이 사마리아의 물 길러 나온 여인이었고(요 4:7~26), 또 한 사람은 에디오피아 내시였습니다(행 8:32~36). 그들은 구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예수님으로 성취된 것을 몰랐다가 배워서 깨닫고, 또 경험함으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요 14:29에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셨는데도 듣는 자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예수님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일이 이룰 때에 믿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지식(딤후 3:14), 경험(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이 믿음의 큰 방편이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내 믿음 성숙의 방편을 성경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시면서(물론 기도도 힘쓰셔야 함),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실 때도 절대적 방편이 있고, 또 상대적 방편이 있다는 것을 아셔서 2차적 믿음 방편을 많이 제공하는 역할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4. 구원의 섭리


제27과 구원에 대한 지식 (롬 1:18~20) 목록으로


구원에 대한 인식에는 여러 종류와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정통적 교회 안에서 조용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큰 행복이고 평안입니다만 성경의 뜻을 바로 펼치기 위하여 잘못된 주장들과 싸우는 사람들은 힘들고 피곤한 것입니다. 하인이 주인의 뜻을 알고 바로 행하는 것이 충성인 것처럼 저희들도 옳지 못한 사상들을 주인의 뜻대로 깨우쳐주기 위하여 구원에 대한 인식을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주장이나 학설이 나오면, 그 주장의 핵심에 따라 ‘○○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인식하는 방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자연주의, 초자연주의가 있고, 초자연주의 안에 율법주의, 제사제주의, 복음주의, 보편주의, 특수주의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초자연주의 중 복음주의와 특수주의를 믿고, 다른 것은 다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들이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논쟁을 하였는데, 문제는 잘못된 주의에 현혹되는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1. 구원을 인식함에 있어서 자연주의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살기 좋은 세계가 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17세기에 영국의 톨란드와 틴달, 그리고 독일의 렛싱, 불란서의 룻소 등이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명하다는 철학자들이 주장한 만큼 많은 공감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 밖의 일은 믿지 않습니다. 영혼이나 천국이나 십자가 대속이나 성령님의 역사는 다 이성 밖의 일이므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창조자이신 만큼 타락도 책임을 지셔야 하는데, 그 책임지시는 방법이 자연 만상이 자연의 법칙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도 자기들의 이성으로 잘 판단하여 선을 행하면 좋은 세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도라는 것입니다(롬 1:19). 그리고 타락과 구원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합니다. 또 영혼과 내세를 믿지 않는 것 보면 사두개파와 신신학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있던 다음 시대에 칸트(1724~1804)가 ‘순수이성비판’을 제창하여 “이성은 현상계에 일만 알게 될 뿐 형이상학적 소재(영적 지식)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함으로, 초자연적 세계의 가능성을 주장함으로 자연주의를 대항하였다고 합니다.

2. 초자연주의란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방도로만 구원하신다는 주장입니다. 구원은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것이며, 또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인데,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하여 하신다는 주장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 타락, 구원의 섭리를 믿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또 여러 가지 주의가 발생한 것입니다.

1) 율법주의란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율법만 잘 지키면 의로워지고 그 의로워짐이 곧 구원이고 영생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만 엄격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인데, 성경은 율법이 정죄만 할 뿐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0, 5:12; 갈 2:16, 3:10~11).

2) 제사제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대신 성경의 제사법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의 제사의식은 엄격합니다. 그리고 신부를 사제(제사를 맡는 직)라고 합니다. 문제는 구원 받을 자가 천주교의 미사(예배 의식)를 통해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적 제사에 참여함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당은 구원의 배급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어떤 환자가 성당 밖에서 죽게 되면 교회의 회원이 가서 ‘종유’이라는 의식을 베풀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사제주의입니다.

3) 그러나 복음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회 역할이 중요하지만 구원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정에 의하여 교회가 없는 무인도에 가서 홀로 산다 할지라도 성경적 신앙과 구원의 도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벧전 2:9, 4:5; 롬 14:12). 복음주의는 십자가로 구원 받고, 성경 66권을 믿는 주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실 때 어떻게 구원하시느냐?에 따라 또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로 나뉘게 됩니다.

4) 보편주의란 룻터파, Remonstrant(항론파), 웨슬레파에서 신봉하는데, 룻터파는 구원을 받을 때 “은혜를 거절하지 않으면 된다” 하고, 항론파는 “적극 노력, 협력해야 한다” 하며, 웨슬리안파는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정진해야 받는다”고 합니다. 보편주의란 의미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5) 특수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만 구원하신즉 그 택한 자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반드시 구원을 받도록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특수 구원은 칼빈주의 5대 교리(<기독교신앙백과>, p.436)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또 특수주의 안에도 타락전예정설(엡 1:4)과 타락후예정설로 나누어지나, 1618년 독일의 돌트회의에서 타락전예정설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제28과 때가 차기 전과 후 (갈 3:23~4: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을 이해하실 성도님들이 얼마나 계신지요. 성경은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이므로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인들이었고, 일찍이 유대 종교를 모른 상태에서 오순절 이후에 바울 사도 등의 전도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 받는 도리이지요. 그런데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은 거짓이고, 자기들의 방법대로 1,500년 동안 내려온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림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초보적 성도들이 대폭 율법주의에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율법주의는 잘못된 교리이고, 따라서 이단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 생애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의 신앙생활을 설명함으로 이전의 신앙생활과 이후의 신앙생활의 달라진 점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첫째로 깨달으실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중보자로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역사적 시점에 한 번 오시게 되어 있고, 그 약속을 구약성경에서 일관되게 예언하신 것입니다. 구세주도 한 분이시고(요 14:6, 갈 1:7~8), 구원의 방법도 한 가지 뿐이란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요 10:9, 행 4:12).

2. 그렇다면 두 번째로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1세기 초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단 번에 이루신 것인데(유 3), 그 사건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의 사람들이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처럼 십자가 이전의 구약의 성도들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희생을 믿음으로 차별 없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는 것으로 구원을 비유한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후불로 사는 것이고, 신약의 성도들은 선불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해가 잘되실 것입니다.

3. 그런데 구약의 성도들은 십자가 사건 이전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장차 메시야를 보내어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희생되실 것인즉 그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으라”는 뜻으로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로 계시하셨고, 또 그것을 시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메시야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된 것인데, 시대가 지나고 전쟁이 일어나며 종교적 전통이 와해되면서 제사 제도에 대한 의미는 전달, 교육이 못되고 의식만 전달되고 율법만 강조되니까 유대인들의 신앙이 메시야 사상에서 율법주의 사상으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구원은 메시야 신앙으로 받는 것인데, 율법주의(율법의 지켜서 구원 받는다는 뜻)로 돌아갔으니, 헛되게 믿음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것이 복음주의를 대적하여 큰 핍박까지 하게 된 만큼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4.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왜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약의 말씀이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데,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① 죄를 방지하고(갈 3:19), ② 의의 말씀(롬 9:31)이므로 예수님을 계시하신 것이고, ③ 백성들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할 때 정죄 받을 입장을 깨닫고 구세주를 대망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이 세 가지를 다 모르고 독선에만 빠진 것입니다.

5. “때가 오기 전에 몽학선생 아래 있었다”는 뜻은 “율법 아래 있었다”는 뜻과 같은 것인데, 율법은 내용만 제시했을 뿐 실천 모범이 없기 때문에 초보적 선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선생님은 말씀과 모범을 갖춘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역사 세계에 한 번 오시는 것이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초보적 선생님만 모신 격이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 상태를 적자가 장성하지 못하여 후견이나 청지기 아래 있는 것으로 비유하셨고, 적자가 장성한 것을 예수님의 초림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 아래 있음이 마치 몽학선생이나 청지기 아래 있는 것 같았으나(예수님이 안 오셨으니까 어쩔 수 없이 율법만 지키게 되었다는 뜻), 모든 유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또 그 예수님은 주인이시니까 청지기나 몽학선생같은 교훈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4:4~6을 보시면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되 율법 아래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롬 13:10, 마 22:37~40), 율법에 속한 자들을 속량하셨으며, 또 아들의 영(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종이 될지언정 율법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야를 믿되 율법을 실천할 수밖에 없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예수님께 표준하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강령은 사랑이고,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 모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의 종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사도시대 초기까지는 율법시대에서 복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란 점을 아셔야 하고(마 23:23; 행 11:7~9, 15:29), 과도기가 지난 사도후시대부터는 개혁이 성취된 상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갈 1:11~14, 골 2:16, 고전 12:1, 롬 10:4, 행 21:21~26).

 

제29과 큰 구원과 은혜 (히 2:3~4) 목록으로


“큰 구원과 은혜”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문에서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하시므로 구원의 은혜가 큰 것과 구원의 목적에 옳게 응하지 않으면 그 대가를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구원의 은혜를 폭 넓게 이해하고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 받으려고 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죄사함과 관련된 모든 은혜”입니다. 또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으니까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은혜”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또 아무나 십자가를 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중보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므로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받는 모든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 은혜도 주시는데, 그 은혜를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각별히 더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와 일반적 은혜는 대단히 크고, 넓고, 높고, 깊다는 것을 성도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알 때, 거기에 합당한 사명과 생활을 이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길흉사를 알려오면 부조금 분량을 정할 때 친척을 제외하고라도 20만원 할 집이 있고, 10만원 할 데가 있으며, 적으면 5만원, 3만원 하는데, 그 분량이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따라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사명도 비례되기 때문에 “큰 구원과 사명”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우선 구원의 은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이 은혜를 만세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엡 1:4,.눅 14:28).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project를 하신 것입니다.

2) 계획을 하실 때 인류 타락을 아셨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실 때 적당한 수(전체에 비할 때 극소수)만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왜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할 따름인 것입니다(발 2:13). 그 수가 적다는 것은 노아 홍수 때에 8명, 소돔 고모라 때에 3명, 출애굽 대에 역시 극소수(고전 10:5)임을 감안할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적은 수가 되는 것입니다(마 7:14).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셨고(살후 3:2),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되고(행 13:48), 또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행 14:9, 살후 1:10).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예수란 분이 여러분의 죄값을 담당하셨으니, 그분을 구세주로 믿으시오” 했을 때, 안 믿겠다는 것이 정상이고, “믿겠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믿어져서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3) 그렇게 적은 수를 미리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선택을 하실 때 두 가지 방도를 쓰셨는데,

①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과 의논하여 선택하신 것이고(엡 1:4),

② 또 한 가지는 선택 받은 대상의 죄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롬 8:11). 예수님과 의논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대속 사역(십자가)을 하셔야 하기 때문이고, 또 죄성을 따지지 않은 것은 큰 죄나 적은 죄나 예수님의 공로로 다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히 9:13~14).

③ 놀라운 것은 그 절차에 우리가 당첨이 된 것입니다. 복권 당첨되면 ‘쉬쉬’ 하는 것처럼 당첨된 성도들도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 15:16에 보시면 “예수님이 택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 받은 것을 믿는 것이 큰 축복이고(벧후 1:10), 보화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13:44).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이 보화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 안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나타난다면 그만인 것입니다(롬 14:7~8, 빌 1:20).

4) 이렇게 선택하신 다음에 만물을 창조하셨고,

5) 인류에게 만물(일반계시)과 말씀(성경, 특별계시)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셨는데, 여기의 독생자 예수님의 계시가 모든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요 5:39, 히 1:1). 자연은 만물 계시인데, 그것으로는 구원의 도리와 하나님을 다 모릅니다. 그리고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으로 구원 계시와 계율은 주셨지만 성취와 모범은 안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구원 언약의 성취를 주셨고, 또 예수님으로 계명 지킨 모범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시 주신 것을 큰 은혜로 아셔야 합니다.

6)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계시를 주셨다 할지라도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이 계시를 믿거나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력 없는 자에게 빛이 소용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거듭나는 은혜입니다(엡 2:1, 요 3:3). 거듭난 심령이 계시를 접할 때 믿음이 발생하여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믿음의 주(히 12:2)이신 예수님이 주신 것이고, 믿어져야 구원을 받는 것인즉 예수님이 구원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히 2:10, 시 3:8).

7) 그러면 은혜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 아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대통령을 알려면 선거 때 돈을 주어야 함). 하나님은 믿음으로 압니다. 성경도 믿음으로 압니다(요 6:69, 5:39). 하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같은 것입니다.

② 하나님을 안즉 예수님과 십자가도 알았으므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지요(사 53:5, 요 1:29). 죄는 만 가지 불행의 원인이고,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인데, 죄사함을 받았으니까 심판 받을 이유가 없고, 지옥 갈 위험도 없는 것입니다(요 3:16). 요즈음 줄줄이 끌려들어가는 사람들이 다 죄사함을 받는다면 행복하겠지요? 죄사함의 은혜가 죄인들로서는 아주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칭의도 아울러 받는 것입니다(롬 8:30).

③ 그런데 또 그 다음에 받는 아주 큰 은혜가 하나님의 양자 되는 은혜입니다(요 1:12, 롬 8:29).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으셨은즉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이 되는 것입니다. 히 2:11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형제이며 권속입니다(마 12:49~50). 재벌가의 양자가 되면 수천억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 되고 예수님의 형제 된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④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하십니다(딤전 4:5, 요 17:17). 이 거룩이란 순결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치가 변해가듯이 성도의 인격과 생활도 예수님을 닮는 목표로 변해야 하겠지요.

⑤ 안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안식으로 인도 받는 것이 저에게는 두 번째 과제입니다. 먼저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고 다음에 평안히 가는 것입니다. 요 14:1~3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셨으니까 잘 인도해 주시겠지요.

⑥ 그 다음에 주시는 은혜가 부활이고, 영생 천국입니다(살전 4:16~17). 바울은 “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고난 같은 것을 맛보기를 사모한다”(빌 3:11~12)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예수님 같은 고난을 안 겪어도 다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만유가 복종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11).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고난을 사모한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곧 천국의 입문을 뜻합니다. 천국은 안식과 신망애가 영원한 곳입니다(고전 13:13). 이 얼마나 놀라운 큰 구원입니까?

⑦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면 또 한 가지 속 시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잘잘못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고,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악인만 받는 것이고, 상급은 성도가 받는데, 상급의 표준은 행한 대로, 일한 대로(계 2:23, 18:6, 22:13)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5:19에 보시면 “가르치는 자가 모범 실천을 잘하면 크다 일컬음을 받고, 말로만 가르치고 실천을 적게 하면 적다 일컬음을 받는다” 하시므로 성도나 지도자나 다 그의 믿음생활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여기까지가 구원에 속한 은혜인데, 그 구원과 관련한 현세적 축복도 대단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내세의 소망보다 현세적 은혜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아무래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은혜가 불신자들보다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정도가 아니고 특별한 것입니다. 그 특별한 은혜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은혜입니다(창 28:15, 46:4; 마 28:20). 어떤 장애인 부부가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다” 하는 말에 감동 받은 일이 있습니다.

2)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시 139:1~4, 계 2:1~4).

3) 거처를 함께 하시고 더불어 생활해 주십니다(요 14:23, 계 3:20)

4) 인도해 주십니다(창 28:15, 신 32:12). 그래서 “너희 길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시 37:4, 사 45:11). 여러분, 여러분의 길을 맡기십니까?(불기둥, 구름기둥,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 셋집 얻는 일도 섭리하심)

5) 보호하십니다(신 32:10~11, 시 121:1~8). 여러분, 요즈음처럼 사고 위험 많은 세대에 생존한 것이 다 하나님의 보호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신 32:10, 마 23:37).(간증 : 물에서, 수레에서, 총알에서, 좌익에서)

6)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시 40:1~2, 50:15).

7) 필수품 공급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마 6:6, 32; 히 4:16; 음식, 가구, 의복, 신발, 용돈, 심지어는 약까지…,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꼭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주시는 것을 체험하니까 “안 주시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는 믿음이 가더군요. 주시는 것만 받고 누려도 넉넉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정도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을 말씀 드렸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런 은총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반은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구원의 은총 주신 목적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롬 8:2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작정하시고 시행하신 것은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여…예수님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독생자만 계신 것이 서운하셔서 독생자를 닮은 양자를 많이 두어 예수님을 성도의 형님 되게 하실 목적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사명적 결론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는 것입니다. 인격으로 닮고 생활로 닮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개인 개인이 “예수님을 닮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드리는 것입니다.

 

5. 은혜를 받은 결과


제30과 눈과 귀를 밝히자 (잠 20:12, 엡 1:17~19) 목록으로


마음눈이 열리기를 바라는 뜻에서 “눈과 귀를 밝히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기의 “눈과 귀”란 신령한 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의미하는데, 이 깨달음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세상의 것을 잘 터득하는 깨달음이고, 또 한 가지는 신령한 것을 잘 깨닫는 것입니다. 일괄적으로 둔한 사람을 멀기 나쁘다고도 합니다. 머리(생각하는 총명)가 좋은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세상 물정도 밝습니다. 그러나 정신활동을 안 하거나 총명이 부족한 사람은 깨달음이 둔합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보면 퍽 부럽습니다. 그 사람이 총명한 것은 선천적 은혜도 있고, 노력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총명이 있어도 하나님, 예수님, 창조, 십자가, 천국, 하나님의 심판, 성경 등에 대하여는 관심도 흥미도 못 느끼는 경우가 있지요. 이것이 바로 신령한 귀와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귀와 눈을 주시면, 또 그것을 밝혀주시면 현실적 모든 사물은 흥미를 못 느끼고, 오히려 신령한 복에 대한 것만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TV에서 경제를 말하고, 정치를 말하며, 역사와 문화를 말할지라도 그것들이 다 현실에 속한 이야기일 뿐,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나 영원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흥미가 없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임할 때 가치관의 큰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저속한 예를 든다면, 누가 홈런 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마음을 쏟는다든지, 또 특정 가수의 팬이 되어 만족을 느낀다는 경우를 생각할 때, 신령한 눈이 없어 하나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과 신령한 눈을 가짐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모든 성도님들이 신령한 눈을 밝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되시기를 바람에서 입니다.

1. 저희들에게도 하나님이 세상 보는 눈을 주셨지만 세상을 밝히 보는 것을 바라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흥미를 갖고 끌려가면 성경에 위반되기 때문입니다(롬 12:2, 요일 2:15). 그래도 세상 물정이 밝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겠지만 속이는 세상에서 안 속고 살려면 고달프기만 할 뿐, 안 속지도 못할 것이고, 정화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불법이 성할 것과 믿음 찾기가 어려울 것인즉(마 24:12, 눅 18:8) “자신의 신앙이나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계 22:11). 따라서 죄와 불신앙과 이단을 너무 심각하게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의 입장만 밝히고 자신이나 든든히 서서 바른 길을 가면 됩니다. 이 말의 뜻은 맞대항하여 이기면 좋지만, 효력도 못 내면서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통일교를 대항하여 무슨 덕을 보았으며, 불교를 대항하여 무슨 큰 교화의 소득을 얻었습니까? 구원은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가 믿는 것입니다(행 13:48). 나는 내 주위에 불신자나 이단자가 있다 하여 자신의 신앙에 피해본 것이 없습니다. 진리와 신앙은 매일 수 없는 것이고(딤후 2:9), 자기의 신앙만 든든히 서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이단을 경고하기 전에 정통적 신앙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 이단은 지적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는 취지는 사회의 부조리를 대항으로 이기려 하지 마시고, 차라리 속고 살면서 참된 것(진리, 하나님,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는 진짜를 팝니다” 해도 믿기 어려운 세상인즉, 세상 믿을 것을 포기하시고, 신령한 것만 믿고 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신령한 눈을 주신 분입니다. 엡 2:1에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하신 말씀과 요 3:3의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신 말씀이 바로 신령한 눈과 귀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는 눈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눈이 다릅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무나 볼 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성도의 눈에만 보였고, 성도에게만 나타나 주셨습니다(요 20:14~16, 눅 24:30). 루디아가 바울 사도의 전도를 들을 때 “주께서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다”(행 16:14) 하셨고, 왕하 6:14~20에 보시면 “엘리사가 그 사환의 눈을 연즉 이스라엘의 군대를 에워싼 불말과 불병거가 보였다” 하였으며, 또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도 하시고 밝게도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의 영안을 어둡게도 하시고(사 6:9), 밝게도 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눅 24:45).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였고, 바울 사도도 “지혜와 계시의 정신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신령한 눈과 귀를 주시면 먼저 마음의 생각이 밝아짐과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간절히 듣게 되며, 끌리게 되고, 연구하는 재미를 느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없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73:23).

 

제31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시 23:1~6) 목록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여 목자로서 그 양에게 은혜를 주시는 말씀이 본문에서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여 은혜주시는 말씀이 요 10:1~16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양의 목자로(2절), 양의 문으로(7, 9절) 비유하시고, 양을 알되 각각 이름을 지어 아시고, 앞장서서 그 이름을 불러내시며,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또 도적이나 이리떼에게 상하지 않도록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양의 특징은 “다른 목자의 음성은 듣지 않으며, 꼭 자기 목자의 음성만 듣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목자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구약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즉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는데, 목자 되신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를 쓴 다윗의 간증이란 점에서 저희들도 그와 같은 간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목자가 주시는 은혜는,

1. 2절을 보시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양이 먹고 쉬면서 소화시키는 장소인즉, 이 말씀은 성도의 육신적 생활의 수요 공급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 은혜는 3절에서 말씀하셨으니까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 구하는 것”을 기도하게 하신 것을 보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신 말씀도 불신자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그런 책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이 더 좋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생필품을 공급하시는 은혜란 것을 꼭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먹고 사니까 특별 은혜가 아니다” 하지 마시고 생필품에 대하여 특별히 또 필요한 대로,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라는 것입니다(제가 이 글을 쓰는 중 조○○ 목사님과 점심을 먹기로 약속되어 기다립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특정 음식을 먹게 하시기 위하여 이런 기회를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2. 3절을 보시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뜻이 “믿음에 관한 영적 은혜”라고 이해합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곧 믿음을 일깨우는 것이고, “의의 길”이 죄사함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잠들거나 꺼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소생시키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곧 영혼의 침체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하도록 인도하시는 방법은 기도하게 하시고, 성경의 맛을 알게 하시며,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와 말씀에 끌리고, 가책을 많이 느끼며, 하나님께 대하여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성령님이 성도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의 길”이란 죄사함 받는 십자가의 신앙으로 이해하셔도 좋고, 또 계명을 지키는 의로운 행실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바른 길로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결벽증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이 닮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3. 지켜주시는 은혜입니다. 시 121편에서도 “지켜주시는 은혜”를 말씀하셨지요.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면서 지키시고, 또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강도 만나기 좋은 곳)에 다닐지라도 해를 받지 않도록 주께서 함께 하신다” 하셨고(능력자와 동행하면 안전함),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 함은 지팡이로 양을 보호 인도하시고, 막대기로 맹수를 때려서 쫓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호도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위험의 요소를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도망할 때 압살롬이 두 가지 모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택하면 다윗이 죽게 되고, 후새의 모략을 선택하면 다윗이 삽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후새의 모략을 선택하게 하셔서 다윗을 보호하신 것입니다(삼하 15:34, 17:14). 이렇게 보이지 않는 보호와 인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알고 믿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승리의 은혜입니다. 5절 말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여기의 상은 식탁임)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며…잔이 넘친다” 하심은 원수를 패배케 하심으로 승리의 기쁨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을 찾는 원수가 있었지만, 저희들에게는 원수가 아닌 괴로움 주는 사건이 대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난제들도 해결해 주십니다. 시 40:2에 보시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난제 해결의 체험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시 50:15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 은혜를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2과 믿음으로 받는 은혜 (막 9:23~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성경에는 “믿으면 ○○을 받는다, ○○을 성취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어려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결된다,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실 예를 히브리서 11장을 보시면 믿음 안에서 해결된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믿음으로 받는 은혜” 몇 가지를 소개함으로 성도와 성경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유익을 가지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을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일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만 믿어도 다 믿는 결과가 됩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이고,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도 안다”고 하셨습니다(요 14:7, 9).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진리이시며, 성령님도 진리이시니까(요 14:17) 삼위의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인격인즉(행 20:32) 믿어야 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기록하라” 하여 성경으로 주셨습니다(출 24:4; 계 1:2~3, 19, 2:1).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은 그가 계시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뜻이고, 계시의 말씀을 성경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되 성경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글을 모르는 사람이나 어린이는 지식과 관계없이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행 16:31, 마 3:9).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과 말씀과 진리와 성경이 하나란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또 한 가지 하나 되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공통입니다. 엡 4:13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라”는 말씀도 있고, 또 믿어 받는 것과 알아서 받는 것이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지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알아도 구원을 받습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믿고 알아서 받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1.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요 3:16), “내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하시는 것이라”(요 14:10) 하시므로 말씀과 예수님과 하나님을 하나로 말씀하셨고, 또 구원을 받는 의미 속에는 거듭남과 믿음과 속죄와 양자와 거룩과 영화와 천국 영생과 상급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어 구원 받는 줄 아셔야 합니다.

2. 말씀을 믿는 데서 순종과 실천이 따릅니다. 롬 1:5, 16:26에서 “믿어 순종케 하시고, 믿어 순종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정욕에 끌리면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말씀을 믿을 때 그 믿음 분량에 따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실천과 함께 그 강도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또 중요한 것은 말씀을 진리로 믿을 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 6:69에 보시면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알았다”는 뜻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다는 뜻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곧 하나님)로 알 때 하나님도 그를 알아주셔서 쌍방 간의 앎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아는 분량이 곧 하나님을 아는 분량입니다.

4. 말씀을 믿고 알면 거룩의 은혜를 받습니다. 시 119:9에서 “말씀을 따라 삼가한다”는 내용이 있고, 요 17:17과 딤전 4:5에서 “말씀 또는 진리로 거룩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면, 그 말씀이 그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어긋난 것을 회개하게 하고, 말씀을 지키게 하시므로 거룩(순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 15:3).

5. 말씀을 믿어 성령을 받습니다. “믿는 자의 받을 성령” 이란 말씀이 있고(요 7:39), 성도들이 말씀을 듣다가 성령 받은 사례가 있으며(행 10:44), 말씀 풍성과 성령 충만을 하나로 표현하시기도 하였습니다(엡 5:17~19, 골 3:16~17). 따라서 성경을 잘 모르면서 성령이 충만하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성령님은 말씀, 진리를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요 14:17).

6. 말씀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길이고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또는 그의 말씀을 앎으로 갈 길을 인도 받는다는 뜻이고, 시 119:105에서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라” 하신 말씀도 역시 앞길을 비추어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아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게 되고,

7. 마지막으로는 뜻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마 9:23)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셨을 때,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믿고 갔는데, 그 시에 그 하인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마 8:13, 요 4:50~52). 따라서 말씀을 믿고 알면 많은 문제 해결의 방도를 힘입어 성취할 수 있음을 아셔서 응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믿음을 굳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3과 3 단계 은혜 (엡 2:5~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다” 하셨고, 그 다음에는 “함께 일으키셨다” 하셨으며, 셋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하시므로 살리고, 일으키고, 앉히실 때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내용을 꼭 첨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가 살리시고, 일으키시며, 앉히시되 꼭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빠짐없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3단계 은혜는 거듭남과 일어섬과 앉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신 은혜입니다. 이 살려주신 은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살리셨기 때문에 거듭남의 은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는 신령한 대상, 신령하신 하나님, 신령한 말씀, 신령한 세계를 접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육체로 말하면 시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시고, 구원의 때가 되었을 때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는 것은 구원 역사의 시작이고, 이 시작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셔서 살아난 만큼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점에 같이 거듭났다는 뜻이 아니고, 거듭나는 생명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그 능력에 기인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생명은 신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도 현실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이기 때문에 신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거듭나는 은혜도 주님의 부활 성격과 부활 능력에 기인하여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벧전 1:3에 보시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벧전 1:23에 보시면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하셨는데, 부활로 거듭난 것은 능력의 근거이고, 말씀으로 거듭난 것은 방편을 뜻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남의 능력은 부활이고, 거듭나게 하신 방법은 말씀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려면 모태에서의 과정과 출산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거듭남의 은혜도 그런 과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2. 6절에서 “함께 일으키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활동도 하고 자기의 일을 하여야 하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도 성도의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선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담은 말씀(성경)을 주신 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또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활동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무슨 활동을 하게 하십니까? 아기가 자라는 것처럼 믿음도 자라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려면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복종하고, 행동에 옮기는 노력을 하셔야 하겠지요. 그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면서(살전 1:3) 빛을 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노력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즉 벌떡 일어나서 활동하는 자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해진다”(마 13:12)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함께 일으키신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열심은 소용이 없고(롬 10:2),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행사에 일으키는 역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일으키신다”는 뜻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하시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승리를 뜻하므로 생활에 능력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3.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뜻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분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앉아서 대접 받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는 자…오라” 하시고 “쉼을 얻는다” 하셨지요? 이 뜻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자녀에 걸맞은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앉아서 누리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으키신 것”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이라면 “앉히신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는 왜 아파트 한 채도 이루지 못하였느냐?”고 합니다. 나의 적절한 대답은 “멀리 나는 새는 잡을 수 없다. 따라다녀도 소용없다. 가까이 오는 새라야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을 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해 주실 때 붙잡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앉히신 것”은 내세의 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잘되게 하시는 은혜를 의미한다는 점도 꼭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4과 진리와 자유 (요 8:32) 목록으로


“진리를 알면 자유를 준다” 하셨기 때문에 일단 제목을 “진리와 자유”로 정해놓고 묵상을 하겠습니다. (이 제목의 설교가 많기 때문에 중복 안 되는 내용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우선 진리를 알고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요 18:38에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나는 진리를 증거하러 왔으니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 하신즉, 빌라도가 말하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하였지요. 한 나라의 총독이라도 진리에 속하지 않으면 진리를 모르니, 진리가 주는 자유는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뜻은 “알레테이아”로써 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참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요 3:33, 롬 3:4). 하나님이 참되신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도 참됩니다. 즉 거짓이 없고 옳은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과 성령님이 참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16:13). 이 “참”이란 것이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져도 안 되고, 영원히 있어야 하며, 또 마귀에게 눌려 속박 당하거나 지옥으로 끌려가는 영혼을 해방시킬 수 없으면 안 되니까 능력이 무한하여야 하며, 참 그 자체를 증명하려면 심판도 공정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이 다 진리이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거룩하고 전능하며 영원하고 유일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 그 예수님께서 “진리(자신)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알지니”라는 “그노세데”가 2인칭 복수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진리를 알 수는 없습니다. 거듭난 자라야만 영혼의 눈을 갖기 때문에(요 3:3) 진리를 알게 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거듭난 자가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어찌 될까요? 이것은 마치 성숙되지 못한 영아와 그 어머니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형태만 알 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모자관계는 유지됩니다. 이와 같이 믿기는 하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정도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정도가 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분량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2:3).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진리를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유 누리는 분량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릇이 커야 은혜를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친해지고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1) 우선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는 거듭난 확신을 갖고,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벧후 1:10에 보시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이 있고, 요 6:69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알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열쇠가 아니면 예수님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룩하신 분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도 꼭 같은 방법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요 17:17).

2) 그 다음에는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니까(요 5:39)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신분과 뜻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생전의 추억만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데는 그의 말씀이 심오하고 무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안 계셔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과 친교로써 아셔야 합니다. 기도로 속삭이고, 말씀으로 뜻을 알고, 실천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가까이 계신지를 늘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마음도 그리로 끌릴 것이고, 기도의 응답도 잘 될 것인즉 그것을 늘 확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모 묘소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셨지요? 그것은 허공에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혼이 와서 듣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들으시는 것입니다. 또 말씀도 성경으로 주시고요. 그것이 곧 친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회개, 사명, 순종 같은 것)을 하시면 하나님이 그 곁에서 떠나시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8:29) 그런 기회에 예수님과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는 은혜를 받고 자유를 누리셔야 하는데,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 즉 성도가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누리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철학자들(헤겔, 스피노자, 칸트)은 “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본성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 하면서 마치 동물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자유 서식하는 것으로 비 하였다고 합니다. 또 프랑스의 인권선언문 4조에서는 “남을 해하지 않는 것이 자유라” 하였고, 링컨은 “타인의 자유를 거부하는 자는 자신도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하였으며, 룻터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룻터의 자유 정의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에는 만족과 보람과 감사가 따라야 하는데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람을 삼는다면 충분히 행복하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이나 요셉이나 하박국이나 세례 요한, 예수님, 바울 사도까지 다 어렵게 살았지만 감사하고 기뻐하며 소망을 갖고 살았으니(고후 4:7~10, 롬 5:3) 그런 자유를 느끼면서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자유 얻는 법 (요 8:32) 목록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은 성도에게 “자유 얻는 법”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 차례 증언하였고(<핵심설교집>에 “진리를 알지니” 3편), 자유 얻음에 대하여 상당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강론을 쓰면서 평신도님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 14:6). 그리고 “진리를 안다”는 뜻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과 친교적으로 알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부자유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이런 말씀을 강 건너 불처럼 보고 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유가 무엇이며, 예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이며, 또 자유의 뜻이 무엇임을 이해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만사해결의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용법을 반드시 탐구하여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1. 먼저 부자유한 의미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부자유의 뜻을 욕구불만, 염려, 스트레스, 고통, 억울함, 죽음의 공포로 이해하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이런 환경이나 정신 상태에 접할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부터 억압을 받는다면 욕구불만, 스트레스, 고통이 따를 것이고, 가난, 멸시, 질병에 얽매어도 염려와 공포가 따를 것이며,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입장과 함께 정신적, 육체적으로 당하는 모든 고통이 다 부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부모를 잘 만난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의 평안함과 화평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혹 사람이 아니라도 주인을 잘 만난 애완동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애완동물이 주인을 기쁘게 하면서 그 동물의 입장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보다 훨씬 평안하고 자유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유 아닌 것과 자유로운 것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시고, 이 자유를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진리 되신 예수님인데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를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스스로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신의 부족과 불행을 느끼는 만큼 타인에게 덕을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자가 누구를 도울 수 없는 것과 같겠지요. 성경은 육체적 생활에 따른 부자유 외에도 죄로 인한 양심의 부자유(심판의 두려움)와 율법에 속박된 부자유(갈 3:10, 신 27:26) 등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자유를 어떻게 얻습니까? 분명코 자신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전능자가 주셔야만 됩니다. 평안은 곧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평안을 주신다” 하셨고(요 14:27), 성령님은 하나님이신데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하셨으며(고후 3:17), 또 진리는 예수님인데 “진리를 알면 진리가 자유케 한다”(본문)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의지하며 따를 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만큼 자신은 죽은 것이고(롬 6:6) 예수님이 자신 속에 사시니까(빌 1:21) 무엇이나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의식주 문제를 생각하셨습니까? 안 하셨지요(마 6:25, 31). 명예를 얻으려고 애를 쓰셨습니까? 역시 그런 것도 멀리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으니까요(히 12:2). 장수하시려고 애를 쓰셨습니까? 아니지요. 때가 되면 돌아가시려고 기다리셨으니까요(요 7:6). 그러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요 4:34에서 “나의 양식은(먹고 사는 중요한 목적)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만 따르면서 살면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이런 예수님을 알면 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엄청난 세상의 욕심에서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욕심에서 방향을 돌리면 자유를 50%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먹고, 부자 되며, 명예롭고, 장수하는데 관심이 없게 되어보세요. 생존경쟁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3) 생활 목표와 만족의 근거를 확보하셔야 합니다.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열심히 배워서 하나님의 뜻만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인간이나 현실 문화에 표준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좋아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만 따져서 행하는 것입니다. 피조물 자체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목적은 오직 창조자, 인생을 보내신 분에게만 있으니까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도록 목표를 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만족과 감사와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만족을 두셨고, 그 뜻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 “다 이루었다” 하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은 부활하신 다음부터만 받으셨습니다. 요 8:29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혼자 두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문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자신의 문제는 형통해도 괜찮고, 형통 안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니까요. 성도가 이런 생활 속에서 자유를 누릴 때, 그것이 곧 진리 되신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례 요한처럼, 바울 사도처럼 사는 것이 곧 자유를 얻고 누리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제36과 속박과 자유의 종류 (고전 7:20~24) 목록으로


요 8:32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고 자유를 얻으라” 하시니까 무리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종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자유케 되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유의 뜻을 모른 것입니다. 그들은 발에 쇠사슬을 맨 노예만 자유가 필요한 줄로 안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퍽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도 죄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릴 제목은 “속박과 자유의 종류”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면서 못 누리는 자유를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1. 율법의 속박과 율법에서의 자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율법 지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 27:26에서 “율법을 시행 안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 안 받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는데, 노력을 하면 사회는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겠지만, 율법을 100% 지킬 수 없는 것이니까(갈 3:11) 항상 저주 받을 걱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속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하나님이 아들이니까 나만 믿으면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내가 오기 이전까지만 주신 것이다”(롬 10:4) 따라서 “너희는 율법에서 벗어났고(롬 7:6) 다시는 율법이 너희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롬 8:1)” 하셨으니, 이것을 깨달은 자는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2. 권세자의 속박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권세자는 국가도 될 수 있고, 상전도 될 수 있겠지요. 여기서 해방되려면 나라의 독립을 하든지, 아니면 종 된 자가 값을 주고 풀려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국민 되고, 종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순종하거나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받는다면 넉넉히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바벨론 포로에 넘기셨고, 요셉을 애굽인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그 상태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면 종이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니까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섬기러 오셨다”(막 10:45) 하셨으니까 그 뜻대로 상전을 섬기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그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자유할 수 있거든 자유하고,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여 부름 받은 상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평생 하인 노릇만 하여도 주님의 뜻으로 한 것이니까 자유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3. 생활고의 속박과 자유입니다. 돈벌이 때문에 주일을 못 기키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이 곧 생활고 속박입니다. 그런데 먹고 살아가는 걱정이 없어졌다면 자유를 얻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성도가 자유 얻는 방법은 공중의 새나 들풀도 키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땀)하는 자에게 주신다”(창 3:19)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일은 돈벌이가 아니라도 봉사의 일만 해도 됨) 신앙을 앞세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3). 자기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시는 복”을 체험하면 모든 생활고나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내가 근면하고 믿음생활을 앞세우면 하나님이 기막힐 정도로 그때, 그때 주시는 체험을 하시므로 자유를 누리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가 재물 쌓은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 하시고, 천국 가기 어렵도록 재물 주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딤전 6:8).

4. 질병과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질병은 두 가지 원인으로 옵니다. 하나는 잘못의 대가이고, 또 하나는 부르심의 방법입니다. 잘못의 대가는 회개하고 연단 받으면 병 고치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몸이 약하면서도 교만하고 반성 안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겸손해지고 순종할 때까지 병을 간직하게 하실 것입니다.(고후 13:7~9). 그러나 데려가시기 위하여 주시는 병은 천국 갈 준비의 신호이니까 미리 알려주시는 것을 고맙게 여기시고 사무정리, 살림 인계, 상급 준비 등을 잘 하셔야 합니다. 가장 유명한 세례 요한은 30세, 예수님은 33세를 사셨으니까, 장수 욕심을 버리시고 천국 갈 소망이 앞당겨지기를 바라면서 자유를 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죄의 속박과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 마귀의 자식”인데(요 8:34, 44), 이것은 곧 지옥으로 끌려가는 속박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게 되니, 그것이 가장 큰 자유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하는 찬송이 바로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6. 자기 정욕에 속박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짐승 같은 자유입니다. 되는 대로, 맘대로 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유는 “날마다 자기를 죽임으로”(고전 15:31) 억제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생활로 변화시켜야 하며,

7. 마지막으로는 “유행과 문화에 속박되는 것인데, 이것도 세속을 멀리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 전환하여, 그 속박을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속박의 종류가 많지만, 이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요 14:2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곧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런즉 “마음에 근심이나 두려움을 갖지 말라” 하시므로 평안의 약속과 평안의 소재와 평안의 성격과 평안의 결과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려움이 많은 시대에 생수 같은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도들에게 그림의 떡처럼 되지 않기 위하여,

1. 우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함에 대하여 부활하신 후에는 두 번이나 선포하셨고(요 20:19~21, 눅 24:36),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신 말씀”(마 11:28)에서 잘 나타납니다. 약 1:17에서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 하셨으니,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이 평안 주시는 약속을 믿고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2. 평안의 소재가 “주님의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누리신 평안이란 뜻이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이 제공하실 평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사시면서 인간적 평안을 누리신 분으로 아셔야 합니다. 모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풍랑 위에서도 주무신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고 가난과 멸시와 배신과 음모를 당하셨지만, 불안을 표현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민망함과 슬픔과(마 26:37) 놀라신 사실이 있으셨지만(막 14:33), 그것은 성도가 당할 고난이 아니며 주님이 성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약소국의 백성으로, 가난 비천을 겸한 백성으로, 음모, 배신, 억울함으로 돌아가신 분인즉, 가장 한 많은 인생으로 33세를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평안을 누리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속 사업은 죄의 심판을 벗겨주실 방도로, 또 택한 백성들에게 사망과 고통을 이기고 평안을 갖게 하실 능력자로 군림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평안을 그의 원하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의 성격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불안과 해결책을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불안과 고통은 성도가 당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가난과 비천의 고통, 억울함의 고통, 정욕대로 살지 못하는 욕구불만, 권세자로부터 받는 속박 등등일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중 정욕대로 살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제하고는 예수님이 다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정욕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마음의 가난이고, 자기 부정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이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도 병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가난, 억울함, 비천함, 부자유 등등으로 고난 당하는 백성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부분일 뿐이고, 극히 현실적 해결에 속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의 생활 모범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일은 없을 것인즉, 그 이외의 다른 고난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할 것은 없겠지요. 예수님은 어려운 환경에서 “나의 평안”이라 하실 만큼 평안을 누리신 것을 아셔서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받는 평안입니다.

① 질병이 문제입니까? 죄사함 받고 병 고침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9:1~2, 약 5:13~16). 질병이 안 고쳐질 때는 연단을 받으시면서 감심으로 견디는 것입니다(고후 12:8~9). 수고도 감심과 자원으로 할 때는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② 질병이 죽음의 방편으로 올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히 9:27, 계 14;13, 행 17:26, 요 14:1~3, 살전 4:13~18에서 읽고 묵상하시면 죽음을 소망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 1:21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으로 느끼시지 마시고,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응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가난, 비천, 욕구불만에서 평안을 취하는 것인데, 예수님처럼 물질에 소망이나 기쁨을 두지 마시고, 매일매일의 생활로 만족하시며(마 6:11, 8, 31~32),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자의 자세를 취하고(마 20:28), 욕구불만은 자기 부정으로 해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갈 5:24).

4) 마지막으로 평안을 해치는 것이 억울함입니다. 이 경우에 이 세상에서의 공의의 실현은 기대하지 마시고(어느 정도는 해결됨) 마지막 때에 공의롭게, 또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주님께 맡길 때(전 12:14) 큰 위로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빌 4:7).

 

제38과 부스러기의 은혜 (마 15:25~28) 목록으로


가나안 여자가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을 때, 예수님이 두 차례나 거절을 하셨는데도, 그 여자가 물러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하신즉, 그 여인의 말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였으니, 이 뜻은 “예수님이 부스러기 은혜만 주셔도 내 딸의 병이 낫겠다”는 뜻이요, 그 여인의 물러서지 않는 간청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스러기 은혜만 받아도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제가 설교문을 요약하면서 부스러기를 모아 정리할 필요를 느껴서 정리한 것을 소개드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또 “이같이 사랑하셨다”고 하셨지요(요 3:16, 요일 4:11).

1)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마 9:12, 딤전 1:15).

2) 원수를 사랑하셨고(마 5:44, 롬 5:10),

3)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으며(사 41:9, 요 13:1),

4)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요 3:16, 엡 2;13~16).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높이와 넓이와 길이로 설명하시고(엡 2:19),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롬 8:35).

2. 신비주의란 계시의 연속성을 믿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신 계시를 왜 오늘날에는 안 주신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기도할 때마다, 다 계시를 받는다면 성경은 무익해지고, 기독교는 개인주의로 중심을 잃을 것입니다. 아직도 계시의 연속성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다음 성경을 읽고 이해하십시오. 예수님이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입니다(히 1:1; 요 21:25; 엡 2:20, 3:3~5; 고전 4:6, 3:10~11; 딤후 3:16~17; 유 3; 계 22:18~19). 따라서 완성하여 주신 계시 이상 더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고후 13:8, 수 1:7). 누가 기도해준다 하면서, 앞길을 점치듯 하는 사람이 있으면 믿지 마십시오. 성경은 귀하의 길을 지금도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불란서의 “아담가이온”이란 여자가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신비가였는데, 1688~1693년까지 그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20년간 성경을 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계시로 받기 때문에 간편하다” 하였는데, 1690년에 병이 들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업을 완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코 이 병으로 죽지 않는다” 하였으나 결국 그 병으로 죽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Pariat 이라는 제자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시를 받는다는 주장은 허망한 것입니다.

3. 요 16:32~33에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또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고독과 고난과 세상을 떠나시는 일을 당하시고도 담대히 승리를 외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도 고독과 고난과 세욕(죽음을 아쉬워하는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1) 3년 동안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떠나버린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의지하시고 사셨더라면 큰 낭패를 보실 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소에 사람을 의지하고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독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 고독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옛말에 “매도 혼자 맞으면 더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에 하나님이 예수님 혼자 고통당하시도록 하시지 않고, 양편의 두 강도와 함께 당하시도록 섭리하신 뜻이 있으신 줄 압니다. 제가 30년 목회를 하다가 중도에 사임하였을 때 교인 없는 고독을 느껴보았는데, 그때에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즉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도 체험하였습니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꼭 은혜 받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환난을 이겨야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고 기도하시며, 또 부활과 영광을 소망하시면서, 그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고난은 예수님에 비할 때 아무 것도 아니지요. 한동안 핍박도 있었고, 전쟁의 고난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고후 3:12). 전쟁의 피난처는 하나님이라 하셨고(시 46:1), 질병과 가난도 연단 차원에서 극복하셔야 합니다(고후 12:9; 빌 4:11; 왕상 19:4, 13). 옛날 조상들이 “기축년에 솔잎이 남지 않았다” 하였고, 6·25 때 피난 나오다가 아버지, 형이 죽고 어머니와 6남매가 껌팔이 하고, 술찌끼, 쌀겨를 먹고 살면서, 그 돈에서도 십일조를 내고 굶으면서 교회에 나간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쌀 서 말을 받아 기반을 잡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난 극복에 담대하시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세상살이의 욕심을 빼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지요(갈 5:24). 이것이 바로 세상 정욕을 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찬송가 395장)

 

제39과 신령한 복의 장애 (마 19:27~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령한 복의 장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신령한 복은 예수님이고, 성령 충만이며, 하늘의 상급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 자, 성령으로 말씀 실천을 잘하는 자, 또 하늘의 상급을 많이 예비하는 자가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인데, 그것을 해치는 요소가 무엇들인가? 하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본문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본문에 “열 두 보좌에 앉는 것과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는 것”은 큰 신령한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재물(전토)과 가족을 버린 자들이 받은 것입니다. 재물을 버렸다 하여 굶어죽거나, 가족을 버렸다 하여 인륜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가족들로부터 받은 영광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한쪽으로는 신령한 은혜를 거절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의 장애가 무엇입니까?

1. 자기 자신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마 16:24)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은혜를 막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비워야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마음의 가난입니다(마 5:2). 나의 신분, 나의 생각, 나의 목적, 나의 취미…, 그런 것을 못 버리면 신령한 복이 멀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예수님이 자기 부인을 안 하는 자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만 사시도록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롬 7:9, 빌 1:21).

2. 두 번째 장애는 “안일”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을 안 하려는 자은 죽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안일주의, 땀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생활의 공급이 일하는데 있고(창 3:190), 하나님과 예수님은 만물의 주이신 데도 일을 하셨습니다(요 5:17). 하나님이 놀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복 중에 큰 복인 신령한 복을 주시겠습니까? 우선 일을 잘하여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자기 십자가 짐, 마 16:24) 신령한 복을 구하여야 하니까, 안일주의는 은혜를 받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수고를 취미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물욕이 큰 문제입니다. 성경에 물욕을 부정적으로 말씀한 내용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물욕을 떨치고 사신 것을 비롯하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부자는 천국 가기 어렵다”(마 19:23), “가난도 말고, 부도 말고, 적당한 것을 구하라”(잠 30: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 “돈은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아라”(눅 16:24), “어리석은 부자가 그날 밤에 죽으면 그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예수님은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이기시지 않았느냐?”(마 4:4), 또 그 반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부와 재물은 부정적으로, 가난을 긍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옳게 시행한다면 이 땅에 부자 성직자는 없어져야 하고, 또 “재물 많은 자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도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4. 세속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셨고, 구약에서는 “이방인들과 격리하여 살고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라 6:21, 느 9:2, 신 7:3) 하셨으며, 요일 2:15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깨달았을 때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 현실적인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하셨지요(빌 3:8). 여전도회 회원들과 버스를 타고 야외 소풍을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갈 때는 찬송만 부르고 갑니다. 그런데 올 때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세속적인 노래로 스트레스를 풀자는 것입니다. 저는 세속의 노래를 못 불러서 스트레스 쌓이는 것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고, “건전한 노래를 부르라” 하였는데, 유행가를 너무 잘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는 주여 주여 하고, 집에서는 세속에 묻혀 살았구나”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세속의 반대가 경건입니다. 세속에 끌리는 장애를 반드시 막아야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 뜻에 따르는 천하의 영광을 거절하셨습니다(마 4:8~9).

5. 명예욕입니다. 명예욕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인데, 바울 사도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갈 1:10). 명예욕은 겸손에 반대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데(벧전 5:5), 명예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겠습니까? 혹 주신다 하여도 많이는 안 주실 것입니다. 신령한 복은 영원히 누리는 것이고, 세속의 복은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인데, 성경은 일시적으로 누리는 모든 것을 “허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시 24:3~4, 119:37). 아무쪼록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되지 마시고, 신령한 복의 대로를 닦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6. 생활의 덕


제40과 성도의 지킬 법 (롬 7:19~25) 목록으로

 


사람이 목적지로 걸어갈 때 닦아놓은 길로 가는 것과 길이 없는 곳을 그대로 헤치며 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직선을 그을 때 자를 대고 긋는 것과 그대로 긋는 것의 차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의 잣대는 곧 법을 뜻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의 법(22절), 마음의 법(23절), 다른 법(23절), 죄의 법(25절)이란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양심, 속사람, 22절)은 지킬 법이고, 다른 법과 죄의 법은 단호히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지킬 법”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인데(요 1:17),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하셨습니다(롬 7:12).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으며(마 5:17) 또 일 점 일획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강령은 십계명으로 요약되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의식과 절기에 대한 율법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성하셨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여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 사랑에 관한 계율은 예수님이 생활 모범으로 나타내심으로 더욱 완전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계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전케 하셨고, 사랑의 계명은 그 모범을 실천하심으로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잘 지킴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이 되어 하나님이 가까이 와주시고 또 “거처를 함께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3). 따라서 율법의 사랑의 법은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 국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 국법은 나라가 잘되기 위한 법이고, 하나님이 일반 은총에 의하여(롬 13:1) 왕이나 백성들로 만들게 하신 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실수로 믿음과 사랑에 위배되는 계명이 아니면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로마의 국법을 거역하신 일이 없으셨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마 22:21) 하시면서 나라의 세금도 의당히 내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가정과 나라와 교회를 꼭 같이 사랑하셔야 하고, 따라서 가정의 의무, 나라의 의무, 교회의 의무를 잘 시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가정은 행복의 근원처이고, 나라는 악의 방패박이며,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 또는 교회에 대하여 충실한 의무와 충성을 잘 못하면서 특권만 행사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의존만 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나라 법을 모범적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의 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신령한 단체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개인과 통하여야 하지만 통치적 생활로는 가정이나 사회 같은 단체이기 때문에, 이 단체 운영을 위하여 교회법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선한 일을 합력하여 질서 있게 잘하기 위하여 예배드리는 법, 재정을 취급하고 봉사하는 법, 직분을 세우는 법 등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회원이 되면 교회의 헌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국법이나 교회법은 만들어 지키다가 더 좋은 방책이 나오면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의 법은 사람이 고치지 못합니다. “주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마 5:18, 벧전 1:25).

4. 그런데 성도가 지식이 부족하든지 교육 대책이 부족하여 법을 잘 모를 수도 있고, 또 법이 없을 수도 있을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할 때, 이때는 양심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양심을 본성으로 주셨습니다(고전 11:14, 롬 2:15). 그것이 곧 마음의 법인데, 이것으로 자기를 살피고(잠 20:27), 자기를 판단하며(요 8:9), 진실을 말하고(고후 1:12),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행 23:1).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면 이 양심이 흐려지기도 하고, 또 회개하면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양심을 잘 간직하고 잘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린 약속(서원)도 “잘 지키라” 하셨는데(시 15:4, 사 19:21, 잠 5:5), 사람의 통제 없이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곧 양심입니다. 양심적 생활이 잘 될 때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신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표준들을 얼마나 지키려고 하느냐? 하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후 13:8) 하셨고, 오직 “말씀을 지킬 따름”이며(고전 7:19), 또 시 119:56에 보시면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말씀을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들은 다 계명 지킬 강한 의지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계명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고(요 4:34, 6:38~39)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셨으며, 죽음으로 끝내시기까지 죄를 짓지 않은 분입니다(히 4:15). 율법과 함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범이 성도의 지킬 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완전하게 모범을 보이셨으면서도 성도들에게는 완전을 요구하시지는 않았습니다(갈 3:11, 2;16). 최대한의 성의를 권장하신 것이지요(요 14:23).

 

제41과 무엇이 중요합니까? (시 49:20, 렘 9:23~24) 목록으로


여러분,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은 무엇이 중요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건강, 재물, 학문, 출세, 정치 등,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겠지요. 만일 여러분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인생으로 태어난 만큼 중요한 대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1. 창조자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부모를 모르고 한 평생을 산다면, 그 사람은 인륜으로써 가장 중요한 일을 접어놓고 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의 “깨닫지 못 한다”는 뜻은 진리 곧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고, “존귀한 데 처한다”는 뜻은 비용을 많이 쓰고 산다는 뜻입니다. 한 달에 10만 원쯤 쓰고 살면, 사람들이 존귀하게 여겨주지 않습니다. 한 달에 천만 원쯤 쓰면서 살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존귀하게 살아도 진리이신 하나님을 모르면 짐승처럼 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지식을 자랑할지 모르나,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렘 9:23~24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자는 그 지혜를, 용사는 그 용맹을,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믿음과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다(요 6:69, 5:39). 믿음에 입각한 성경 지식이라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글 배우듯 아는 것이 아니고, 친교적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 10:14에 보시면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 하셨는데, 그 말씀이 친교적으로 앎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또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면, 그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효자는 부모를 존경합니다. 존경하면 가까이 모셔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하는데, 가까이 모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초청하든지 아니면 그 집에 가서 살아야 가까이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를 힘쓰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 중에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생활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 되는 이유는 예배 순서에 말씀과 기도, 찬송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예수님(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경제부총리가 매미호 태풍 때 제주도에 있었다고 질책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대통령과 같이 있었으면 더 큰 태풍이 있어도 추궁 들을 일이 없겠지요. 이와 같이 성도가 예수님만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무슨 좋은 일을 안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잘잘못을 지적하실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함께 친교하고 계셨으니까 그의 태도에 대하여 지적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최고 행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고전 10:31을 보시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셨고, 엡 5:10에서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며느리나 사위를 본 부모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손자나 외손자가 그렇게 귀엽고 보고 싶고 기쁘더라” 하면서 “당신도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 심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도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손자손녀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순종과 사랑을 제일 기뻐하십니다(삼상 15:23).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시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만 열심히 하시면 하나님은 최고로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에는 회개도 있고, 순결도 있으며, 사명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자기의 사명이고 복된 생활이며, 내세의 상급을 쌓는 것인즉 크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이 기도도 많이 응답하실 것이고, 범사에 형통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만 되어보세요. 정신없이 형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153마리입니다(요 21:11). 153마리라니요?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을 헤아려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153마리 중에는 작은 고기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와 작은 은혜를 막론하고 잘 깨달아서 마음으로 감사하는 일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일이 크게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2과 성도의 개인 생활 (빌 4:4~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개인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개인 생활이라면 혼자 하는 생활과 가족생활을 포함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교회생활과 사회생활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모시고 혼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단체상이란 없고 개인상만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 갈 때도 개별적으로 혼자 갑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셔도 7일 중 2일 이상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떠난 개인 생활과 가정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학교를 교회로 비유하였을 때, 초등학교에라도 가려면 자기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개인적 자립 신앙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요셉 등은 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지나칠 만큼 교역자를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교역자가 떠나 있을 때에도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빌 1:27) 하시므로 성도의 자립적 신앙생활을 권장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믿음생활하기 수월한 점이 있지만, 교회와 교역자를 늘 모시고 다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1. 그래서 개인 신앙 첫째는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개인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성도가 성경을 연구하여 신앙고백을 해도 좋지만, 그만한 연구 기간이 없을 때는 교사에게 배워서 신앙고백을 잘 하셔야 합니다.

2. 그 다음에는 성경을 연구하여 시행하되 독자적 의지로 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며, 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사명이 다르니까 거기에 따라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다른 사람의 생활을 모방하려 하지 말고) 시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길과 사도 요한의 길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요 21:22).

3. 항상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동거, 동행을 잊지 마셔야 하고, 항상 하나님을 두렵게 의식하여야 하며, 주님의 마음과 뜻(성경)을 따라 시행하고, 가족적으로도 믿음이 일심협력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과 연단 때문에 가정적 믿음 행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가족들이 모이면 길게 기도하는 일을 힘써야 하고, 거기에 자녀들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도의 개인생활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독자적 신앙고백과 성경으로 예수님을 깨닫는 일과 개성에 맞는 의지적 생활과 가정의 기도생활을 중요시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4. 마지막으로 본문을 살피면, 본문의 말씀이 바로 성도의 개인생활을 지도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4절에 보시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깨달으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2) 누구의 문제든지 “관용하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5절). 이 관용과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베푸는 방법입니다(마 6:12).

3) 감사생활을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감사가 앞서야 하고(6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까?(살전 5:18) 사람이 낮은 데 처하고 족한 줄을 알면(롬 12:16, 빌 4:11) 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족한 줄을 모르면 탐심이 앞서고, 탐심은 우상숭배와 함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골 3:5, 약 1:15). 최인열 목사님이 저에게 한문 친필 족자를 보내왔는데, 내용은 “知足可樂 務貧則憂(지족가락 무빈칙우)”입니다. “사람이 족한 줄 알면 즐거우나 탐욕을 가질 때는 근심스러운 법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족을 배우셨다”고 본문 4: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경험) 신앙생활에 큰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기도를 힘쓸 때 “지각에 뛰어나신 평강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7절).

5) “무엇에든지 참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외식을 빼고 진실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6) 또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태도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7) “무엇에든지 정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정결은 양심을 뜻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였습니다. 위법이 아니라도 양심에 거리끼면 정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8)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하시므로 사랑의 목적으로(고전 14:1) 시행하고,

9) 또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도 “칭찬할만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8절). “무슨 덕이나(베푸는 것) 기림(보람된 일)을 행할 때도 이상의 내용들을 참작하라”고 하셨습니다.

10) 또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통적 신앙을 바로 배우고 지키라는 뜻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배우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들의 교훈과 모본이 아니고는 바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인간들을 표준하지 말고 바울에게 배울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개인생활의 독립과 확립을 위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동거 동행은 개인적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제43과 성도의 교회생활 (롬 12:10~21, 빌 2:1~9) 목록으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개인생활과 단체생활로 구별됩니다. 개인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고, 또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즐거움의 비중이 크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범주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체생활을 잘해야 하는데, 신앙적 단체생활이 교회 생활이고, 신앙적 빛을 발해야 하는 세계가 사회적 이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도의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두 곳의 말씀이 성도의 교회생활에 적합한 교훈을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1. 우선 교회의 성격과 목적을 알고, 생활의 방도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1) 교회라는 진정한 성격은 순수한 성도의 단체를 뜻하지만, 지상의 유형 교회는 다 순수한 것이 아니고 가라지도 잠재되어 있는 상태의 단체를 의미하는데(마 13:29), 예수님은 모든 교회의 창시자이시고, 피 공로로 세우셨으며(행 20:28),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를 지체라 하셨으며(엡 1:22~23), 또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딤전 3:15). 따라서 성도가 주님의 교회(기관, 성도의 단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불충성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는 성도의 생활과 주님의 목적에 필요하여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무엇에 필요하며, 왜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예배당 건물 자랑하고, 사회사업 하며, 교역자 봉급 주라고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진리 사역과 사랑의 연단, 두 가지에 있는 것입니다. 딤전 3:15의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이 진리 사역의 사명을 주신 말씀이고, 또 한 구절은 “사랑이 율법의 강령”이란 말씀과(마 22:40)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신 요일 4:7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진리 사역은 믿음을 위한 것이고, 사랑은 행실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교회를 주신 목적은 진리 사역을 통해서 믿음과 사랑을 겸한 성도의 신앙을 육성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진리의 수호와 교육과 전파와 사랑 육성에 있는 것”입니다. 교파가 있고, 신학교가 있으며, 직분이 있고, 봉사가 있는 것은 다 진리 사역과 사랑 육성에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크게 강조하는 것이 성도가 교회에 나오시면 두 가지 할 일뿐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을 배우시고, 또 하나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시겠지만, 예배는 개인예배, 가정예배, 구역예배도 있습니다.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꼭 부탁드리는 것은 “성도가 교회에 나가는 목적은 성경 공부와 사랑 실천에 있으니(사랑하려니까 직분을 주는 것임) 다른 생각은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서 개인적, 명예적 욕심 부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2. 결론적으로 본문에 나타난 내용이 성도의 교회생활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기로, 이를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롬 12:10~21에서 “형제를(성도를 형제라고 하셨음)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나이, 지식, 경력에 관계없이 겸손하기 위하여 동생을 자처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임), 그리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며 열심을 품고 주님(교회)을 섬기라. 환난이 있으면 참고, 항상 기도를 힘쓰며, 성도를 구제하고, 손님 대접을 잘하고, 핍박하는 자가 있으면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하셨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며(고락을 같이 함) 자존심 세우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도 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이에게 선을 도모하며, 모든 이와 더불어 평화하고,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2) 빌 2:1~9에서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성도의 이웃에는 여러 종류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어서 권면 대상, 사랑의 대상, 위로의 대상, 성령 교제의 대상(계시에 대한 토론), 긍휼 대상, 자비의 대상이 있는데, 성도가 이런 분들을 위하여 봉사할 때에도 “같은 목적, 같은 방법으로 할 수 있도록 뜻을 합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단체 사역을 하면서 뜻을 합하지 못할 바에는 안 하거나 개별적으로 하는 것이 불화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나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것은 금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명예적으로나 이기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을 공평하게 돌아보며 교역자(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생활에서 교역자의 신임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교역자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역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 ① ‘소신껏 일해 보십시오’ 하고 순종하는 것이요, ② 설교에 은혜를 받고, 성경 공부에 취미를 갖는 것입니다. ③ 좋은 것으로 섬기는 봉사입니다. 5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겸손하면서 복종할 때 하나님은 크게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교회생활은 성경 공부와 사랑 실천에 있다는 것만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리고 사회적 생활은 어디서나 선도적 역할로 빛을 발하셔야 할 것입니다(교회 나가는 사람이라 좀 다르군 할 정도로…).

 

제44과 본이 되는 문제 (벧전 5:1~4) 목록으로


지도자(목사, 장로)가 본이 되지 않거나 먼저 믿는 성도가 본이 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있을 역사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있고(요 13:14~15, 롬 8:29, 고전 11:1), 또 본받고 변화된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서(롬 14:19, 15:2; 고전 14:12)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16). 지금 읽으신 본문은 베드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이고, 장로와 사도의 직책을 가진 사람(감독)이며, 예수님의 고난을 눈으로 본 증인이고, 나타날 영광(구원과 상급)에 참여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이기 때문에 후배 성도들을 권면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양 무리를 치되” 하신 것을 보면 교역자에게 주신 말씀이고, 또 5절에서 “젊은 자들아 장로들에게 복종하라” 하신 것을 보면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 같으니까 모든 성도가 함께 받을 교훈이라고 생각됩니다.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일을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 그리고 “더러운 利(부당한 이권)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평신도)에게 주장하는 자세(권위주의)를 취하지 말며 오직 양 무리에게 본이 되라”, 그래야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오래 누리는 상급)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저희들은 자신의 본이 되는 생활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어두운 밤에는 달빛만 있어도 상당히 좋습니다. 달이 암체이지만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처럼 저희들도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밝게 또는 희미하게라도 빛을 발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많이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멀찍이 대하지 마시고, 꼭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또 어떻게 사셨는가?, 사도들이 어떻게 본을 보였는가?를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 13:14~15에서는 예수님이 “선생이신즉 본받으라” 하셨고, 바울 사도는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았은즉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온유, 겸손을 본받고(마 11:29), 모세나 베드로의 겸손을 본받으며(민 12:3, 빌 2:7), 마음에 큰 변화를 받고(시 51:10, 겔 36:26), 예수님이 섬기러 오신 일에 대하여서도 본을 받고(마 20:26~28, 빌 2:7), 무반항주의로 행하신 일도 본받으며(눅 1:29, 9:51~56; 마 26:24, 50, 27:14), 믿음과(히 13:7), 섬김(발 씻기심)과 사랑과(요 13:1), 희생에 대하여서도(한 알의 밀) 본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모범을 모르면 시행할 수 없으니까 열심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안다고 실천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실천이 됩니다. 선행하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선행의 모범을 몰라서 여쭈니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지요. 저희들도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결단이 부족하여 못하는 것이 많은 줄 압니다. 이 실천력이란 것이 믿음의 성숙에서 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령 충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 충만이 단시일에 되지 않습니다. 경건의 연습과 연단과 노력을 통하여 점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을 받으려면 자기 부정, 근면 성실, 물욕을 떨구고 세속을 멀리 하며 허탄한 것을 경계할 때 하나님이 그의 그릇 준비를 보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믿음 성숙을 위하여 힘쓰시는 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에 본을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1) 모임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는 모임의 단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히 10:15). 저는 모임의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열 번을 모여도 모임의 준비를 갖고 있습니다. 모임이 힘들기 때문에 많이 통제합니다. 성도는 모임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임에 은혜 주신 말씀이 많습니다(마 18:19; 행 1:15, 10:24, 11:26, 13:44).

2) 말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초신자에게 “옷맵시를 고치라” 했다가 돌아선 일이 있었고, 저도 후배 교역자에게 “잘하라”고 했다가 두 번이나 싫은 소리를 들었으며, 장모가 사위에게 “식사 많이 하라” 했다가 “당신 딸 굶기지 않았고” 하였으니, 말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3) 선행과 봉사에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기본 성도들이 사랑으로 베풀지 않으면 나온 교인도 떨어집니다. 궂은일에 앞장서야 하겠지요. 외경에 있는 말인데, 누가 길 가에 죽은 개를 버렸습니다. 냄새 나고, 파리 모이고, 얼마나 불쾌합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누가 이것을 버렸느냐?”고 따질 때 예수님이 그 광경을 보시고, “죽은 개라도 이빨은 희구나” 하시고, 치우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의 본이 아니겠습니까?

4) 그 외에도 성경 연구에 본이 되시고(행 17:11),

5) 기도를 힘쓰는 일과(눅 18:1, 마 26:41),

6) 순종하는 일과(롬 1:5, 16:26; 히 5:8, 딛 2:11),

7) 선악을 분변하는 일과(시 72:1, 119:7),

8) 효도와 윗사람 섬기는 일과(엡 6:1, 딤전 5:17),

9) 겸손 차리는 일과(요 13:16, 창 18:27, 욥 25:6),

10) 부지런함(롬 12:11)에 이르기까지 본이 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여 자기에게 전심을 기울일 때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제45과 주려는 마음 (눅 6:37~38) 목록으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배려하는 생활만 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자기 것으로 남긴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신즉 입은 의복까지 뺏기셨습니다. 그리고 또 교훈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교훈하셨습니까? “비판,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래야 자신도 비판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다” 하시므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 받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또 한 가지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훈의 요점은 “주어야 넘치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줄 압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가진 것이 넉넉지 않기 때문입니다. 넉넉하면 없는 자에게 주겠는데…, 자신의 앞을 꾸려나갈 만한 힘이 없은즉 주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입장이지만, 이 연약에서 헤어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2004년 1월 1일 새벽 2시에 기록하면서 새해를 맞는 하나의 과제로 삼으려고 합니다. 드리는 말씀의 제목을 정할 때 “줍시다. 주고 받읍시다” 하지 않고, “주려는 마음을 갖고 삽시다” 한 것은 내 양심의 형편에 맞게 정한 것입니다. “나는 주지 못하면서 주라”는 설교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주려면 우선 자신이 가진 것을 없애야 하고, 또 자신은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실천은 가족이 함께 사는 한, 일치하는 신앙이 없으면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나 베드로나 바울 사도처럼 가족을 초월하고 혼자 있을 때 가능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환경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려는 마음을 갖고, 또 그 생활을 목표로 할 수는 있기 때문에 “마음을 갖자”는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성직을 수행한 모범이 없습니다. 거의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단신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례들입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와 교역자와의 관계에서 장단점을 배출하였습니다. 장점은 교회가 교역자를 원만하게 섬기고 교역자가 교회를 섬겨 성공한 사례이고, 단점은 교회가 교역자를 원만하게 섬기지 못하고 교역자가 생활을 교회에 의존함으로 원만한 목회를 하지 못한 사례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역자가 단신이거나 생활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조건의 장애를 넘어서 진리의 뜻만 나타내고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믿음 중심의 사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나의 남은 여생 중에 홀로 독립하는 생애가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그때까지 “주려는 마음과 계획”을 갖고 살려고 합니다. 4남매 자녀들만 가족을 이루고 독립하면 그런 때가 올 것이고, 그때부터는 네 것, 내 것 없이 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큼 후히 되어 주시는지 체험해보려고 합니다. 행 20:35에서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얼마나 기억합니까? 저는 이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주지 못한즉 받을 체나 말아야지” 합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맞이할 때는 갖고 오는 것을 일체 바라지 않습니다(당사자들은 어찌할지 모름). 하나님은 주려는 마음을 가질 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도의 아들을 중매하려 한즉 “교사노릇 하는 자부라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직이 일반직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으로 “주기 위하여 사람을 구하지 않고 받기 위하여 구하니 복이 안될 텐데…”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주어야 받는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고후 9:6에 보시면 구제비 염출을 하시면서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 하셨고, 8~9절에서는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고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며, 또 빌 4:15에서도 “주고 받은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받으려는 욕심을 없애고, 주려는 마음을 갖고, 주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줄 수 있는 밑천을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연말 TV를 보면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소개될 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또 “주어야 받으니까 받기 위하여 주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에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비우는 것이 필요하고, 사치나 현실적 영달에서 멀어지는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후 8:9에 보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자신의 희생으로 남을 잘되게 하신 예수님의 생활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도는 먼저 겸손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가난한 이웃들의 위치에서 고락을 함께 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체험하고 싶어도 우리가 처한 환경(신앙생활 수준)이 맞지 않아서 은혜의 경지에 접근조차 못하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아시스의 기적을 만나려면 사막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려는 마음을 갖고, 받는 은혜의 문턱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발 씻겨주심에 대한 교훈 (요 13:1~11) 목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겸손과 봉사의 본을 보이신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성경도 여러 차례 읽으셨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나 제가 그 말씀과 그 사건을 깨달으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어떻게 생각하셔야 할까요?

1.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데, 나는 누구의 발을 씻겨준 사실이 있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발 씻겨준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언제인지 TV화면에서 평생 남편의 발을 씻겨준다는 여인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발 씻겨주는 것 이상의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뻣뻣한 자세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이런 봉사의 본을 보이실 때에 좋은 환경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고난당할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신 하루 전이었고, 또 몇 시간 후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신 상태에서 좋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나쁜 사람 같으면 “내가 내일 죽은 것인데 누구의 발을 씻겨주겠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과 고난에 구애 없이 돌아가시는 시간까지 자기의 할 일을 하신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1절에도 보시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자기의 환경을 탓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발 씻김의 모범이 맛만 뵈는 정도가 아니고 아주 적극성 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인이 되어 하신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그 식사를 다 끝내지 않은 것),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며,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물까지 닦아주셨으니, 이는 완벽한 하인의 자세이고 빈틈없는 봉사이며 겸손의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잠시 하신 일일지라도 연습 삼아 보이기 위한 것처럼 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종처럼 시행하신 것입니다. 겸손과 봉사에 외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의 겸손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것이고, 우리는 겸손해 보았자 죄인의 자세에 머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낮아진 겸손이지만, 우리의 겸손은 제자리 지키는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겸손을 차려도 공을 세우는 겸손이 못 됩니다. 죄인이니까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발 씻겨주심은 하나님이 사람의 발을,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발을, 의인이 악인의 발을,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왕이 백성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것을 아셔서 우리가 허리를 굽히고 봉사하는데 큰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이 겸손과 봉사를 하실 때, 그 대상에게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발을 씻겨줄 것이니 줄 서라” 하신다면 베드로가 맨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발을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하고 사양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순서 절차 없이 몸 닿는 대로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설마 자기 발까지 씻기시랴” 하였는데, 자기 순서까지 오자 “주여 내 발도 씻기시렵니까?”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겸손하였고, 가룟 유다나 빌라도에게도 겸손하셨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 26:24, 딤전 6:13).

6.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실 때에 겸손과 봉사와 육체의 정결만 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 씻음 받는 은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양하였을 때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상관이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내가 십자가의 피로 네 죄를 사하지 않으면 너와 나는 물론 너와 천국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죄사함의 두 가지 원리를 교훈 하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전체적으로 죄사함 받고, 심판을 면한 후 구원을 받게 되는 죄 씻음이고, 또 한 가지는 일시적 범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죄 씻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 앞부분을 목욕으로, 뒷부분을 발 씻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희들은 구원 받는 믿음을 확고히 하셔야 하고, 매일 매일 회개하는 일을 발 씻듯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발은 몸 중에 더러운 부분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 발을 씻겨주신 것은 성도의 악한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실 것을 약속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마 18:21).

7.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기 위하여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죄사함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목욕을 시켜주십니다. 정죄 받지 않고 구원 받도록, 그러나 성도가 일상생활에서 짓는 죄를 징계 차원에서 용서 받으려면 회개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발 씻는 일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인데(마 6:12, 18:33),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이상과 같은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발 씻김의 본을 보이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제47과 겸손은 좋은 것이다 (잠 15:33)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겸손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큰 미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20대에 공부하는 총명이 열리지 않아서 교수님들의 강의를 실감 있게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30대, 40대, 50대를 살면서 조금씩 깨달아지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한 번은 모란시장에 갔더니 뱀탕 선전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먹으면 효력이 있겠는지, 업겠는지를 몰라서 시험 삼아 먹어본 일이 있는데, 역시 지혜롭지 못하여 돈만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된 유익을 모르고 비생산적인 일에 투자하지 않습니까? 비용을 들여서 금강산에 가보고 오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 바닷가를 다녀온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라”는 말씀을 설명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백 가지 유익한 일을 하여도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함만 못하고,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잘할 때, 그것이 지혜롭게 하는 훈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약삭빠르게 살고, 안 속고, 지혜롭게 살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뒤따라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이 뜻은 겸손이 존귀를 준다는 뜻입니다. “존귀의 앞잡이”란 존귀가 겸손에 끌려간다는 뜻입니다. 기차를 타는 사람이 좋은 객차, 좋은 좌석을 택합니다. 그러나 객차는 혼자 움직이지 못합니다. 반드시 기관차가 끌어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존귀를 좋아합니다. 존귀해 보려고 화장하고, 좋은 차 사며, 비싼 음식 먹고, 가짜 학위를 받으며, 주택도 넓히고, 사람들 앞에 나서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 자체로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도 꼭 같이 속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삼상 16:7). 따라서 겸손으로 얻어진 존귀가 아닌 것은 참 존귀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는데 자기 자랑, 자기 선전만 하고, 남을 멸시하는 험담하고, 돈으로 인심을 사서 당선이 되었다면, 그것은 좋은 명예가 아니지요. 그러나 겸손을 차리고 부족하다고 하였는데도 대중이 앞장을 서게 하였다면, 그것이 참 존귀인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존귀를 힘입게도 만들고, 겸손이 참 존귀를 증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벧전 5:5~6에 보시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나니 때가 되면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꼭 이 방법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물건을 잘 보관하면 그것이 골동품 되는 줄을 모르고, 구한말 때 쓰던 물건들을 다 버린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강화 반다지도 누구 주었습니다. 그런 것을 후회한다면 이제라도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겸손이 좋은 이유는 넘어지거나 쏟트릴 염려가 없습니다. 고전 10:12에 보시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고 못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조심하여야 하지요. 섰다가 넘어져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낮추어 기어간다면 넘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를 쏟트리지 않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은혜를 보존케 하시려고,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그를 겸손하게 만드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그 육체의 가시를 원망거리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자기를 능력의 손에 붙잡히게 하시는 은혜인 줄 알고 크게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어디서나 잘난 척하면 금방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 차리고 조용히 있다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평안의 앞잡이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겸손이 좋은 이유는 자신이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바울도 겸손의 모범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는 데 있다”(롬 8:29)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셨습니다(마 11:29). 섬기는 자로 오셨고(마 20:28), 발 씻김의 본을 보이셨으며(요 13:14~15), 들레지 않으셨고(마 12:9),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5~8).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도 부족하다 하였고(마 3:11),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8~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겸손이고, 인간의 겸손은 죄인이 자기 자리 지키는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4. 겸손이 좋은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신다”(시 138:6)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시며(사 66:2),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시 10:17), 또 미 6:8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한다” 하시므로 어떤 제물이나 분향하는 의식보다도 겸손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순종을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은 순종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또 고난은 겸손의 앞잡이도 됩니다(신 8:3, 고후 12:7). 아무쪼록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 차리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거짓 겸손은 좋지 않다” 하셨고(골 2:18), “겸손을 옷 입듯 하라”(골 3:12) 하셨으니, 한 번 더 자신들을 살피셔서 겸손과 사랑을 일삼아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8과 길이 참으라 (약 5:7~11) 목록으로


어떤 후배 목사님이 이 본문의 7절 말씀 중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른 비 같은 축복과 늦은 비 같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농부가 기다리는 “이른 비”는 씨 뿌릴 때 주시는 비를 의미하고, “늦은 비”는 열매가 맺으려 할 때 주시는 비를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는 분”이시고, 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시 104:3, 신 28:12).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셔서 때를 따라 유익하도록 주시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다면 그만한 은혜는 쉽게 주실 것입니다. 본문 전체의 핵심적 교훈은 “길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길이 참으라”고 하셨지요. 본문을 통해서 인내와 관련된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1. “참는다”는 것은 견디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견디고 기다려야 할 일이 대부분임을 알게 됩니다. 견디기 어려우면, 형통하면 되는데, 그 형통이 쉽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견디면서 일을 하겠지요. 그 사람은 일을 멈출 기회만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을 취미로 아는 사람은 견디는 것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내를 취미로 삼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도 덜고, 시간도 잘 가며, 쉽게 결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갈 5:22에서 “인내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인내할수록 성령 충만의 분량을 늘리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꼭 인내를 취미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무엇을 인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헤어날 수 없는 모든 고통을 기도와 함께 견디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억울함을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인내의 내용이 바로 원망거리(9절)인데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망하고 재판하여 어느 정도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런 것을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요즈음 사회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높은 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법대로 하면 되는데, 그것을 정치거리가 되도록 보도하는 것이 문제이고, 어떤 사람이 정부 시책에 불만이 있으면 정부청사 앞에 가서 항의하든지 행정소송을 하면 되는데, 왜 도로를 막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가? 하는 것이요, 규격에 안 맞아서 준공검사 안 해주는 것을 불평하면서 검사 맡은 다음에 지적하지 않는 것과 형평이 안 맞는다는 말을 변호사가 하는 것을 보면 속이 탑니다. 불법을 안 한 자가 법을 말해야 하는데, 불법을 하면서 무슨 형평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이런 일들로 정계를 원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읽고 많이 참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억울한 일, 원망할 일, 항의할 일, 재판할 일들이 너무 많은 중, 그것들을 많이 참아야 하겠습니다.

3.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7절에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세상 끝날인데, 너무 지루할 것 같으니까, 8절에서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를 모르지만 성도가 죽고 나면 시간을 초월할 줄 압니다. 잠자는 사람이 시간 지루함을 모르는 것처럼 성도가 죽기까지 참고나면 그때는 주님의 심판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을 것이니까요(벧후 3:8).

4. 어떻게 참아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그 방법까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8절). 마음을 굳게 먹으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으니까 인내를 쉽게 취소하지 않겠지요.

2) 결국에 희망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인내의 끝이 좋아질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좋아지는가 하면 우선 8절에서 “자기가 원망함으로 받을 심판”을 면하게 되고, 다음에는 인내의 표본자인 욥의 결말이 좋아진 것처럼 “자신도 좋아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내의 열매로서는 좋은 것만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를 잘하려면 마음을 굳게 하고, 결과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3) 인내하는 자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모범자로 농부들과 선지자들과 욥을 실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농부가 씨 뿌릴 때부터 땅에서 나는 열매를 거두기까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항상 기다리지 않느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기에 오지 않는다 하여 농사를 뒤엎고 중단하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 너희도 그와 같이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라. 그리고 앞서간 선지자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인내, 순교한 것을 기억하여야 하며(마 5:12, 23:34; 행 7:52, 히 11:32~38), 그 중에도 인내의 사표로 욥을 알지 않으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인내의 뜻과 인내의 과제와 인내의 기간과 인내의 결말과 인내하는 방법을 교훈 받게 된 것입니다. 반드시 인내를 은혜와 취미로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9과 예수님의 환경 대응 (요 21:2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기록 안 하신 것은 “모범의 분량이 너무 많거나 어렵기 때문에 적당하게 나타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을 닮아 살아야 할 성도는 예수님의 지식과가 성품과 생활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 모범서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살핌에 있어서 전제하셔야 할 것은 “우리와 꼭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시다”는 점입니다(히 4:15). 그리고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히 5:8). 따라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을 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릴 적 역사는 눅 2:41~52에서 세 건이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12세 때 성전에 가셔서 “선생들과 문답”을 하신 것으로 그만큼 율법과 신앙 지식을 가지셨다는 뜻이고, 그 다음에는 “나사렛에서 순종하여 받들었다” 하셨으니, 이것은 부모의 뜻에 순종한 효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혜와 키도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양호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라나실 때 말썽을 피우셨다면 불효의 죄를 지셨겠지만 그런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역사는 30세쯤부터 시작됩니다(눅 3:23).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를 구분하면 전도 사역 준비 기간, 유다에서의 전도 사역, 1차, 2차, 3차 갈릴리 사역, 후기 유다와 베레아 전도 사역,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한 주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방대한 설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양한 인간 대상과 환경에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에 나서시기 전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고(마 3:13~17), 40일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세 가지 큰 시험을 이기셨으며(마 4:1~11, 눅 4:1~13), 처음에 요한(숨겨진 인물),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을 따르게 하셨고(요 1:35~51), 다음에 가나에서 포도주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최초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성전이 청결하지 않은 것을 보시고 청결케 하셨는데(요 2:13~35), 이 성전은 구약식 성전이고, 그 성전이 장터로 이용되는 것을 엄금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 대답에 응하셨고(요 3:1~21), 사마리아에서 인종이나 성차별 없이 여인을 상대하여 전도하셨습니다(요 4:4~42). 여러 종류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속한 일이고, 또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 사도들에게 주신 만큼(마 10:1, 히 2:4) 일반 성도가 본받을 일은 아닙니다. 눅 4:16~30에 보시면 나사렛에서 성실하게 교훈하셨으나 그들이 예수님을 쫓아냈고, 심지어는 낭떠러지에 밀쳐 떨어뜨리려는 음모를 아시고 조용히 피하셨습니다. 금식의 질문을 받으셨을 때 자주 금식하는 것을 반대하셨고, 영적 공허에 빠졌을 때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9:14~17). 그리고 베데스다 못에서 가장 심한 병자만 고쳐주셨습니다(요 5:1~9). 안식일에 시장함을 느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비벼 먹는 것을 승인하셨고(도적은 아님, 레 19:9), 좋은 일을 행하시고도 자기를 나타내시거나 들레지 않으셨으며(마 12:13~21), 산상보훈을 통하여 성도의 생활에 대한 전반적 교훈을 하셨습니다(마 5:1~8:1). 말씀의 능력(공간 초월)을 믿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마 8:5~13, 눅 7:1~10),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 슬픔을 위로, 불쌍히 여기사 그 아들을 살려주셨으며(눅 7:11~17), 세례 요한을 극찬하셨고(마 11:2~19), 바리새인도 청하면 방문하셨으며(눅 7:36~50), 바리새인의 잘못을 엄히 경계하셨고(마 12:22~45, 15:1~20), 신앙적 가족이 혈연적 가족을 초월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2:46~50).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해의 목적과 숨기는 목적이 있다 하셨으며(마 13:10~17), 고향에서 두 번째로 좋은 교훈을 하셨으나 배척당하셨고(마 13:5~58), 12제자를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셨으며(눅 9:1~11),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과(마 9:29) 신령한 은혜를 떡으로 여기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 4:4, 요 6:22~71). 끈질기게 구하는 가나안 여인의 태도를 “큰 믿음”이라 칭찬하셨고, 배고픈 자의 사정을 잘 아셨으며(마 15:32~38, 막 8:1~9), 표적 구하는 것을 책망하셨고(막 8:10~12,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불순한 신앙 사상(바리새인, 사두개인의 누룩)을 경계하셨으며(마 16:5~12),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을 칭찬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하셨고(마 16:13~20), 부활과 내세를 믿게 하는 변화의 광경을 나타내셨으며(마 17:1~13),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께 있으니(요 19:11) 세금을 내라 하셨고(마 22:17~22), 겸손과 용기를 강조하셨으며(마 18:1~35), 형제들이 믿지 않으므로 서로 협력이 못되었고(나중에는 변화되었음, 요 7:2~9, 막 6:3), 사마리아서 배척을 받으시니 그대로 나오셨으며(눅 9:51~56), 초막절을 예언에 따라 지키셨고(사 6:9, 10; 요 7:10~52),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며(요 7:53), 사마리아인 비유로써 진정한 이웃의 사명을 말씀하셨고(눅 10:1~24), 나사로 가정을 방문하셨으며(사랑을 베푼 가정, 눅 10:38~42), 바리새인의 위선, 욕심, 염려, 청지기 교훈, 믿음 분쟁, 시대와 징조 분별에 대한 교훈을 하셨으며(눅 12장),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셨으며(요 10:1~18), 유대인들의 증오를 받으시되 대항하지 않으셨고(요 10:42~44), 헤롯 왕의 증오에 경고하셨으며(눅 13:31~35), 사모하는 삭개오에게 가까이 해주셨고(눅 19:1~10), 명예 구하는 제자를 권면하셨으며(마 20:28), 돌아온 자를 영접하신다 하셨고(마 18:22, 눅 15:1~34), 때가 되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끝까지 할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박한 편에서 사셨고, 혈기로 대항하지 않으셨으며 사회의 법과 질서를 지키셨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이고, 갖지 않으심으로 남을 도우신 것입니다.

 

제50과 화목한 생활 (고후 5:17~19) 목록으로


“화목한 생활을 힘쓰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며…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할 것과 세상과의 화목에도 사명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롬 5:1을 보시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하셨습니다. 또 성도간의 화목을 위한 말씀으로 “형제 화목이 제사 드리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마 5:23~24) 하셨고,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함을 아름답게 보셨으며(시 133:1),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도 하셨습니다(마 5:9). 또 인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것이 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롬 12:18~21, 히 12:14). 이상의 말씀들은 성도의 화목의 대상이 하나님과 성도와 모든 이웃임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1.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셨고,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성도와 화목하기를 원하셨은즉 반드시 화목을 유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교훈과 교훈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욥 22:21~28을 보시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다시 흥할 것이고 하나님께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있으며 응답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해석하면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할 때 평안과 발전이 없음은 물론 기도의 관계도 훼손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화목을 해치는 장애는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이 2004. 3. 1.인데, 이때마다 일본과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그 이유는 과거의 불행하였던 문제들을 시인과 사과로 해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하나님 앞에서의 거리끼는 문제도 확실하게 돌이키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마음가짐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나는 죄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탐심이 죄악이라 하셨고, 음심(淫心)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27~28, 사 57:17). 또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고 저울질하신다”고 하셨으니(잠 16:2, 24:22; 히 4:12; 시 139:2)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 하셨고, “형제와 불화가 있으면 급히 사화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마 5:24) 하시므로 인간과의 화목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연계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교를 항상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약 4:8). 그런 의미에서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동행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이웃과의 화목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가족과 성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세계의 인류와 이해관계로 미움의 대상이 된 이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은 다 사랑합니다. 문제는 성도를 가족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이며 모친이라”(마 12:50)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모든 성도를 자기의 가족처럼 선대할 수 있을까요? 너도 나도 허탄한 목적을 떠나서(시 24:4)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고, 사랑을 최고의 계율로 시행할 때 가능하리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교인들 간에 선을 긋고, 사소한 의견 차이나 사소한 주도권 싸움으로 갈등하는 교회를 여럿 보았습니다. 대부분 신앙생활의 목적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두지 않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는 방법을 성경 탐구에 두지 않을 때 사람을 경계하거나 대결하고 사랑을 해치는 일을 예사로 행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은혜의 전당인 교회에 나오셔서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받으려 하거나, 사랑의 도장인 교회에 나오셔서 사랑에 위반되는 일을 시행하는 경우를 보게 될 때, 이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고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교육상 교역자가 필요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맺으시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인간 경쟁을 피하는 방법이고, 허탄한 현세욕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날개를 단다면, 장애물이 있거나 도로가 없거나 교통수단이 없어도 상관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로지 이기주의를 탈피할 수 있을 때에라야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중에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미움의 대상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인데, 일단 “원수 갚는 것이 주님께 있다”(롬 12:19)하셨으니까 그 말씀을 든든히 믿으시고 부탁하신 후, 미운 자나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고 화목한 마음을 가지면 그 다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원만하게 처리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대상과 화목해야 평안이 온다는 것을 꼭 믿으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1과 원망 (민 11:1~3) 목록으로


성도는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 되면 조상의 탓”이란 말이 속담이 될 정도이면 원망을 잘하는 백성이란 뜻인데, 성도는 원망을 안 하고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부부가 장애아를 생산해놓고 서로 자기 탓이라고 하며 상대방을 위로하는데, 그 부인의 말이 “이 아이는 우리만 키울 수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출생한 것이라” 하고, 그 양육을 사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동포를 원망한 사실”도 있고(레 19:18), 지도자를 원망한 사실도 있는데(출 16:2, 7),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망하는 말을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1절; 출 16:8, 9).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요즈음 100년 만에 3월 폭설이 내려서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과 눈으로 피해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자연계로 주시는 재앙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은 여름 장마와 호우로 피해를 보았지요. 또 금년 처음으로 조류독감이란 것이 생겨서 닭, 오리를 쓸어 묻는가 하면 소, 돼지까지 쓸어 묻는 경우를 볼 때 하나님의 재앙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원망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불로 진 끝을 살라 많은 백성들을 죽게 하셨는데, 그 다음에는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되어 250명이 분향하다가 불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민 16:11~19). 여호와의 불(1절)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제물을 태운 불?(왕상 18:38)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유황불(창 19:24), 뜨거운 일사병이나 더위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여름철에 열대야 현상이 조금만 더 심해진다면 큰 피해를 본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운 분이십니다. 선거를 40일쯤 앞두고 정치 세계가 몹시 복잡할 때 눈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닌지도 반성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야당은 대통령이 잘못해서 잘 안 된다고 합니다. 물론 잘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더 잘할 수 있는 대안과 증거를 내보이고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어떻게 남의 눈의 티를 빼라 할 수 있습니까? 대체로 정치가들은 정권욕만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와 재앙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악한 원망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400년간 민족적 노예에서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으면 40년인들 괴로움을 못 참아서야 되겠습니까? 추격하는 애굽군들이 홍해에서 장사된 일과 기적의 양식과 물과 해지지 않는 의복을 입었고, 밤낮으로 인도를 받으면서 2년간 견디다가(10:11), 애굽에서 잘 먹던 일을 기억하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괴로운 일보다 은혜가 많은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도 기억하시고, 현재의 은혜도 기억하시며, 또 앞으로 주실 은혜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린다면 원망하는 마음은 점차 없어질 것입니다. 약 5:9에 보시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구 때문에 무엇이 안 된다”는 생각도 하지 마셔야 합니다. 잘못하는 사람은 제쳐놓고 자신만 잘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빌 2:14에서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논을 잘하고 뜻을 합해서 하라는 뜻입니다. 마 5:23에서는 “성도가 누구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을 했을 때는 하나님께 복 받기 위한 예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를 먼저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성도는 사랑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누구에든지 원망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귀한 신앙인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믿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13년간 고생을 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창 45:7). 그런 차원에서 출애굽으로 인한 고난도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고(출 13:21),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롬 8:28), 또 고난으로 연단과 깨달음을 주십니다(시 119:71). 그런 사실을 믿고 안 된 듯한 일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원망을 안 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실천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고, 원망을 안 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데 속하는 것인즉 얼마나 귀한 믿음의 실천입니까?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자기의 양자로 삼은 것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원망을 안 하는 사람은 고난을 전화위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주고(인내는 성령의 열매임), 인내가 연단을 주며, 연단 받은 믿음이 소망이 큰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만한 믿음을 갖는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고, 자신도 만족할 것이며, 항상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갖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원망을 할 줄 모르는 성도, 범사에 감사만 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7. 변화와 개혁


제52과 사람의 가치 (시 49:20) 목록으로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말씀드릴 주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존귀를 크게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존귀한 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다” 하심으로 사람이 인정하는 존귀와 알 것을 알아야 하는 문제가 일치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값진 보화인 하나님, 곧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1. 사람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데는 두 가지 저울 또는 잣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잣대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사람의 잣대가 아무리 섬세하여도 오류가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것입니다. 오류가 있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의 판단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자의 판단은 악을 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부패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것 아닙니까? 또 사람의 판단에 한계가 있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과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류투성이입니다. 장기 집권할 때 투표한 사람들이 그 다음 세대에는 그의 동상을 훼손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과거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는 “의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치의 판단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2. 사람은 가치의 판단을 사회적 지위 또는 문화적 영향에 두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것은 외모(건강, 인물), 지식(학벌), 가문, 그리고 재물, 그 다음에 출세 종목과 지위를 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불법과 악이 들어있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문화적 영향에 둔다는 뜻은 사람이 좋아하고 알아주는 경향에 따라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TV에 출연하면 금방 스타가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알려진 그 자체를 가치로 여겨주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학자, 교수, 사회사업가, 헌신 봉사자인데,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을 가지면 다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성도는 인간 표준에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어떤 표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삼상 16:7에 보시면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저울질하시는 표준은 외모가 아니라는 사실과 중심(마음가짐)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탤런트가 이혼율이 많은 이유는 외모를 보고 결혼하였다가 내면이 못된 것 때문에 그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함을 모르고 결혼한 것입니다. 마음에는 겸손하고 착한 마음, 정직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 인내하는 마음, 그리고 건전한 사상이 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를 무게 있게 보시는 것입니다(눅 20:21).

2)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나타나는 생활입니다. 삼상 2:3에 보시면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셨고, 느부갓네살 왕의 행동을 저울에 단즉 미달되었다고 하셨습니다(단 5:27). 그러면 무게가 나가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 진실하고 성실하며 근면한 행동 등일 것입니다. 나무의 좋고 나쁜 것을 열매로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좋은 행동에 무게를 두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초보에 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존귀한 데 처하여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하는 짐승 같은 것입니다. 짐승의 특징은 창조자를 모르고, 땅만(세상만) 보고 사는 것입니다. 호 4:6에 보시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지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였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과 망할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은 없어질 것이고, 죄사함 받지 못한 인생은 망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마 16:26,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신 것은 지옥 갈 생명이 아니고 구원 받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알아야 그 생명이 영원한즉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는 영원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요 1:12),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자이니까(전 12:13)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는다는 그 믿음이 자기 구원에만 그치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커져서 창조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열매로 말하면 덜 익은 열매가 있고, 잘 익은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처녀, 총각이 많지 않으니까 무조건 교회에만 나가면 믿음 있는 것으로 취급하고 결혼도 승인을 합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급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성경을 아느냐? 얼마나 사랑 실천을 하느냐? 하나님과 어느 정도 가까이 지내느냐?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느냐? 얼마나 사명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큰 점수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자라”(마 11:11),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마 8:10) 하셨으며, 또 “네 믿음이 크다”(마 15:28)고도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가치는 사람이 평가하는 가치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중심과 행동과 하나님 아는 믿음과 그 믿음의 성숙함에 큰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제53과 내가 믿는 기독교 (딤후 2:8~9) 목록으로


“내가 믿는 기독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디모데에게 편지 하시기를 “나의 복음(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하는 도리)과 같이…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부활은 영원한 승리의 확증임).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처럼 매이고(전도하다가 갇힌 것을 의미함) 고난을 받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말씀이 매이지 않는다”는 뜻은 전파된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여 변화를 준다는 의미도 있고(사 55:11, 히 4:12), 말씀 그 자체는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요 1:1)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믿는 기독교”는 세 가지 특성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절대 종교, 초월 종교, 모범 종교인 것입니다.

1. 기독교는 절대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창 17:1),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간을 대하시는 분이며(출 6:3), 영존하시고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이신 것입니다(시 89:6, 사 46:5). 여기에서 성도가 느껴야 할 것은 기독교를 신봉함에 대한 절대 긍지인 것입니다. 교황이나 이단 교주는 물론 대통령도 부럽지 않고, 기독교 아닌 어떤 다른 종교가 아무리 사람들의 인기를 끈다 해도 동요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성직자는 이단이 성행할 때 겁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한때 떠들다가 세월이 가면 거품처럼 꺼질 것입니다(행 5:36~39). 이단을 경계하되 대항하지 말고 구경거리로 여겨도 됩니다. 그 이유는 절대 종교는 상대 종교로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겁을 내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런 믿음을 가지려면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과의 강한 밀착이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동요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독교는 현실을 초월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신 것과 부활 승천하신 것이 바로 그런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의 성도들이 초월 종교를 믿으면서도 현실적 사물에 지나칠 만큼 얽매이는 것을 보면 퍽 안타깝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하고 영원한 것보다 현세적인 영달을 더 사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태가 개인은 고사하고 교회적으로도 나타나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1) 예를 들면 성도와 교회가 물질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성도가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양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되고(마 6:11, 25), 가난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예수님의 가난한 생애를 부끄러운 생애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정죄하시지 않았으나 부자와 천국은 거리가 멀다고 하셨습니다(마 19:24). 또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물질이 중요합니까? 믿음과 성령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행 8:!7~21) 믿음과 돈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돈은 사람의 의식주 생활에 필요할 뿐 믿음생활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행 3:6). 왜 교회가 돈을 앞세우며, 돈 때문에 염려를 합니까? 마땅히 돈은 믿음생활과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2) 외식주의를 초월하지 못합니다. 예배당이 있어야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예배는 어느 장소에서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예배당을 요구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드릴 때 특수한 차림새가 있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특수한 옷을 입지 않습니까? 그것이 곧 외식주의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수없이 때리셨어도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거품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3) 명예를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괴수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 하면서, 주님은 흥하셔야 하되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요 3:30, 마 3:11)고 하셨습니다. 만일 성도나 교역자가 직분에 탐심을 갖는다든지 명예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명예의 노예인 것입니다.

4) 향락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향락은 불신자와 마귀의 목적입니다(마 4:8, 계 18:11~13).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알았을 때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현실적 조건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다”(빌 3:7~8)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당연히 세속을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약 1:27, 요일 2:15)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5) 고난도 초월하여야 합니다. 행 14:22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는 고난은 부끄럽지만 그렇지 않은 고난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벧전 2:19~20, 시 119:67). 성도가 경건하게 살려 할수록 핍박을 받아야 하는데(딤후 3:12) 고난을 초월하지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

6) 생사를 초월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게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빌 1:21). 그래서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셨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롬 14:8)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30 초반에 인생을 끝내고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사를 초월하는 종교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교가 모범을 보인 종교입니다. 계명만 베풀고 모범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모든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나는 못 한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꼭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히 4:15). 또 기독교는 바쁘기도 하고 심심하지도 않은 종교입니다(요 5:17, 막 3:20, 살 5:16).

 

제54과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 (창 28:15) 목록으로


혹이라도 성도님들 중에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란 제목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고, 또 가장 초보적 지식입니다. 성도님들 중에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채 헛된 일에 관심을 갖는 듯한 분들을 많이 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 신앙생활의 목적이나 방법이 예배당 짓는데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배당 짓는 것이 중요하면 예수님도 예배당을 지으셨어야 하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성만찬을 위하여 다락방을 잠깐 빌려 쓰셨고, 산이나 들에서 가르치셨으며, 건물을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이나 방법이 건축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즈음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건물을 지어주고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건물은 교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단체 예배나 교육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들의 예배당을 잘 지으려고 평생 노력하고, 또 잘 지었으면 그것으로 크게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건축은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설령 건축헌금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편의를 위하여 한 것뿐일 것입니다.

2. 예배당이나 교회용 비품 장만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구사에서 “주께서 쓰시겠다”(나귀 새끼 타신 일) 하신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강대상과 의자 등을 많이 선전하였는데, 그 성구들은 다 사람이 쓰는 것일 뿐 주께서 쓰시는 것이 아닌데 거짓된 말로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거나 의자에 앉아서 드리거나 다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이 사치의 도를 넘은 지가 오래고, 심지어는 강대상도 아크릴, 유리 같은 것으로 교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좋게 보는 교인들도 많겠지만 나는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택도 안 가지셨고(마 8:20), 의복 사치도 안 하셨으며(요 19:23), 음식도 그러하셨고(눅 10:42), 가장 큰 사치가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각을 현대인의 생각으로 표준을 삼아서, 사람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물질과 현실적인 것은 다 믿음과 먼 것이기 때문에(요일 2:15, 마 4:8~10) 그런 것들을 중요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치나 체통에 정신을 쓰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일에 지장이 되는 것입니다.

3. 의식을 갖추는 일입니다. 옷을 입거나 예절을 갖추는 것도 의식입니다. 즉 적당한 의식이 필요하지만 장황스러운 의식은 좋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음식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하셨고(눅 10:42), “아비의 장사를 치를 때 아들이 꼭 참석해야만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마 8:21~22). 예수님의 생활을 살피면 실리적이고, 생산성 있으며, 의롭게만 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상당 부분 의식이 지나치는 것입니다. 임직식을 거행하려면 서약 받고 발표하면 되는 것인데, 청첩장 띄우고, 잔치하며, 기념품, 기념패, 선물, 가운, 장갑까지 등장을 해야 하고, 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며, 돈을 들이고, 또 사람 앞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폭 간소화하고, 그 시간에 성경을 연구하심이 더 좋을 것입니다.

4.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사람 앞에 인정을 받으려는데 관심을 쏟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인정이란 것이 존경 받는 것으로 끝나면 되는데, 반드시 직분을 갖고 군림해보려는 의욕을 갖는 것입니다. 초신자는 초신자대로 큰 자 되기를 원하고, 오래된 신자는 그 나름대로 큰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 24:3~4에 보시면 “허탄한 데 뜻을 두지 않는 자라야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 때문에 마음 쓰는 이도 많고, 장로 되기 위하여 새벽기도를 나오는 이도 있었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직분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헛된 일에 분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현세욕의 기복주의와 향락입니다. 신령한 복은 마음 속에 없는 것 같고, 현세 복만 추구하고 자랑하는 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나타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돈 있고, 출세하고, 과소비적으로 살아야 하겠지요. 바울 사도는 그런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빌 3:7~8).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입니다. 현세욕을 떨치는 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이 싫어지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줄 것이라.” 보호와 인도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게 할 것이다.” 나를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과 동거 동행이요, 주님이 나를 세상에 두시고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분명히 깨달아서, 그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들을 중요히 여기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존재 목적을 확실히 알고, 그 책임을 다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55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자 (엡 3:18~19) 목록으로


성경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실감한 사실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실 때(마 17:1~10)와 겟세마네 깊은 골짜기에서 기도하실 때에(마 26:37)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함께 하였었고, 또 성만찬 때에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기댈 정도였으며(요 13:23, 21:20), 요한을 호칭할 때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란 표현을 하신 것으로 보아(요 21:7, 20)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실감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셨다”(요일 4:8)고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하셨고(고후 5:13~15),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환난, 곤고, 핍박,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아무 피조물이라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롬 8:35).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낀 것입니다(딤전 1:11).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십니까? 반드시 그 사랑의 지존성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할까요?

1. 자연 만물을 주신 데서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물을 돈 주고 사먹는 사람, 산소를 돈 주고 호흡하는 사람, 땅세를 내는 사람, 햇빛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 동물과 식물과 산과 바다와 자연의 신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연계를 거저 주신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안방에 앉아서 세상 구경을 하실 때 감탄만 하실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연 만물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과 건강 주신 것을 생각하시면서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자연보다 귀한 것이 자기 생명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만물도, 천국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세상에 나오셨습니까? 생명의 주(행 315) 예수님이 생명을 주셨고, 건강도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히 1:3, 사 41:10). 건강이 안 좋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병을 주신 목적이 따로 있으실 것이요, 많은 인류가 생명과 건강을 힘입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생명, 내가 얻은 건강, 내가 누릴 건강이란 생각을 버리시고, 생명과 건강의 은혜를 하나님께 돌리시며 하나님의 보호와 생명 주신 사랑을 크게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자연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3.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정죄 받고 지옥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이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그런 형편을 “짐승 같은 인생이라”(시 49:2) 하셨고, 예수님은 구원에서 제외된 가룟 유다를 가리켜서 “차라리 나지 않았더면 좋을 번하였다”(마 26:24)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다음의 반열에 오르는 큰 영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가 큰 줄 아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때,

1) 하나님을 원수처럼 등진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요,

2)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 적은 수를 택하셨고(눅 13:24, 고전 10:5),

3) 택함 받은 자의 선함을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선택하셨는데(롬 9:11) 그 중에 저희들이 당첨된 것입니다. 무조건 선택하셨지만 대상은 알고 하신 것입니다(사 41:8~9). 그러니까 사랑을 느끼셔야 하고,

4) 한 번 선택해 주셨으면 결코 싫어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사 41:9).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3:1). 길가에 나가면 많은 가구와 폐품이 버려져 있고, 심지어는 애완동물도 버리며,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5) 또 구원 대상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실 때 독생자 예수님의 고난과 생명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해 주셨으니,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누가 자기의 외아들을 희생하여 죄인을 구원하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그렇게 할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하셨습니다. 고아를 데려다가 키워 양자로 삼았는데, 그 아들이 부모를 학대하였다고 재판을 하여 아들을 벌 준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모른 것이지요.

4. 구원적 사랑 외에 또 한 가지는 참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성도가 잘못을 하여도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오래 참아주시는 것입니다”(벧후 3:9). 그리고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십니다”(마 18:21~22).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인간의 사랑 실태와 하나님의 사랑을 곰곰이 비교해 보시면서 하나님의 높고, 넓으며, 깊고, 긴 사랑을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6과 예수님을 닮자 (롬 8:29) 목록으로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과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사역을 시행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인데, 그 영광 받으실 내용은 “독생자 예수님을 닮은 자녀들을 만드셔서 천국 건설을 하시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하신 일이라”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일사 각오로 예수님을 닮는 일에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교회의 일들로 분주한 줄 압니다. 그 중에 가장 분주하고 중요한 과제가 온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으며,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생활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들으시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으로 계시되었는데(요 5:39), 성경을 깊이 살필 힘이 없다 보니까 교회에 나와서 설교와 믿음 선배들의 모범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가르치는 것으로 예수님을 잘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짜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의 잘못 가르치거나 모자라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이 부자 되어야 한다고, 액센트를 높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시면서 부자가 천국 가기란 아주 힘들다”고 하셨습니다(마 19:23). 또 어떤 목사님은 헌금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고 나사렛 예수님만 계시다”고 하였습니다(행 3:6). 또 어떤 교회는 예배당 치장만 합니다. 이웃의 어떤 교회가 큰돈을 들여서 예배당 리모델링을 하고 강대상을 아크릴로 바꾼 후 “하나님, 기뻐하십시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성찬 예식 장소를 빌려 쓰시면서 “좋은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는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기발한 방법을 다 씁니다. 그런데 고전 1:21을 보시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예수님과 증거되는 예수님이 크게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믿는 목사님이나 선배들이 예수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할 때, 그것도 여간 미흡하지 않습니다. 행동 실천이 못 따르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 바울 사도 등이 거의 모범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본받으라”(고전 11:1, 엡 2:20)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사도들의 본을 보입니까? 못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취하시지 않고 가난하게 되신 분”인데(고후 8:9), 요즈음 그런 모범을 보이는 사역자가 어디 있습니까? 자선사업을 하는 분들 중에 혹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려면 성도가 직접 성경을 연구해서 아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란 것입니다. 나는 토종이나 깨끗한 농산물 먹기를 포기했습니다. 비싸게 주고 속는 것보다 싸게 주고 낮은 것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짜로 사야 합니다. 어디서 삽니까? 성경에서 직접 깨닫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속히 성경을 스스로 터득하는 정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아셨으면 먼저 자기를 죽여 없애고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마 5:3)는 말씀이나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마 16:24)는 말씀이나 “자기를 죽이고 따르라”(롬 7:9)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롬 6:6에 보시면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셨고, 갈 6:14에서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은 바로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또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도 역시 예수님을 모시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빈 자리에 예수님의 인격을 모셔야 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빌 2: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느낍니까?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어떻게 느낍니까? 그것은 두 가지로 느껴야 하는데, 하나는 진리의 말씀 따라 느끼고(요 8:32, 14:17), 또 하나는 양심을 따라 느끼는 것입니다(롬 2:!4~15, 행 23:1). 성경에 명시가 없거나 성경을 모를 때는 양심을 따라 행하고, 성경에 명시가 있을 때는 성경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 하신 말씀처럼 성경대로 시행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3. 과감한 시행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누구의 눈치를 보려 하지 마시고 과감하게 모범하는 것입니다. 시행의 능력은 믿음에서 옵니다.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씀이 있고(롬 1:5), 하나님을 기뻐하고(느 8:10, 시 37:4), 앙망하는 데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사 40:29~31). 예수님과 모범이 뚜렷하면 결단성 있게 시행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 겸손한 마음,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 위해 기도하는 마음,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마시고 낮은 데 처하는 생활(롬 12:16), 진실한 생활(히 6:18),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시는 생활(엡 1:5, 요 6:12),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범(빌 2:8), 겸손하시고 근면하신 모범 등(빌 2:3, 롬 12:11, 요 5:17)을 따라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과제에 봉착하면 항상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를 살펴서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주님을 닮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제57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7) 목록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중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거룩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된다는 것과 또 기도로(예수님이 기도하셨으니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성도가 성취함에 있어서 거룩의 의미를 아는 것과 성취의 방도를 아시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1. 거룩이란 성도의 신분이 본질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복으로 말하면 세탁을 잘 한 것과 같고, 그 깨끗한 상태를 보존 또는 완성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마음도 순결해져야 하고, 행실도 범죄할 가능성이 없어져야 하겠지요. 어떤 물체에 습기가 없으면 썩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은 마귀가 행동하는 곳이어서 습기가 있으나, 천국은 마귀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습기가 없는 곳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거듭난 심령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늘 부패 유혹을 받지만 육체를 벗고 천국에 갈 때는 부패성의 유혹을 떠나가는 것이므로 완성된 성화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의와 거룩(성화)은 차이가 있습니다. 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법적 추궁에서 면제 받는 것이고, 거룩은 성도의 신분을 빨래하듯 깨끗케 하여(습기를 없애는 것처럼) 부패와 악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2. 이 거룩이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러우면 안 되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의 신부로서 천국에 갈 때 깨끗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 거룩의 의미를 다른 말씀으로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라”(롬 8:29), “새 마음을 갖고 변화를 받으라”(겔 36:26, 롬 12:2), “온전히 거룩하라”(살전 1:23),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벧후 1:4),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으라”(계 19:8)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 13:10의 “이미 목욕했다”는 말씀도 거듭남과 함께 범죄의 때를 묻히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도 진리로 거룩해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절차를 중생, 소명,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8단계로 표현한다면(물론 그 이전에 계획과 선택이 있었음, 엡 1:4) 거룩은 성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죄사함 받는 의는 칭의에 해당함). 성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 최대한의 순결을 유지하고, 또 순결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였을 때 보람이 있고 칭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일을 하기 전에 자기 순결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거룩해지는 방법대로 노력하셔야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진리로 거룩해진다” 하셨는데, 여기에 앞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을 보면 진리 사용과 기도가 동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딤전 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거룩해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가 성경이고, 다음이 기도입니다.

1) 진리로 거룩해집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고 성경입니다(요 17:17). 항상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안 들여다보는 사람보다 얼굴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성경으로 예수님의 깨끗한 모습을 보시고, 그 모습을 본받는 것이 바로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시 119:9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성경을 깨닫는 대로 성경의 자를 대고 금을 그을 때 곧은 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생활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것”(마 26:41)은 소극적 방법이고, “말씀을 깨닫고 시행할 능력을 구하는 것”은 적극적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마음이 정돈이 되고, 성령님이 감동하사 말씀으로 이끌어주시며, 회개할 마음도 주시고(시 51:17), 또 진리 실천의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시 51:10~12). 따라서 말씀과 기도는 동시에 필요한 것입니다.

3) 더러운 곳에 가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범죄를 충동하는 세계가 있고, 또 직접 범죄는 아니지만 생산성에 손해를 주므로 범죄에 간접적으로 나가게 하는 환경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을 힘쓰는 성도는 항상 갈 자리와 안 갈 자리, 할 일과 안 할 일, 만날 사람과 안 만나야 좋을 사람을 가리어 접근, 거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왕하 6:5에 보시면 선지자 수련생이 강물 곁의 나무를 찍다가 도끼를 빠뜨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안전한 곳의 나무를 찍지 않은 까닭입니다. 성도가 세속을 좋아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유혹 받을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4)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딤전 4:7). 성경 공부 연습(계 1:3; 엡 3:4; 행 17:11, 8:20; 딤후 3:14), 기도 연습, 회개 연습(게으르면 근면을, 교만하면 겸손을, 불화하면 찾아가서 화해하는 연습을 용기 있게 해보셔야 함), 그리고 세속의 잔치에 가급적 멀리하는 연습 등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연습은 습관이 됩니다. 교회 안 나가는 일도 몇 번 계속하면 더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과 생활의 순결 보존이 이 설교의 목적입니다. 아무쪼록 말씀, 기도, 유혹을 피함, 경건의 연습으로 가장 깨끗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58과 잠재적 우상주의 (롬 1:21~2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셨으며, “스스로 지혜가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으니 이는 썩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성경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전통 의식에 따라 우상 숭배하는 일을 탓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성경을 옳게 깨닫지 못하여 잠재적 우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우상 숭배가 나쁜 것을 알면서도 우상주의적 생활에 얽매이는 문제) 그런 것을 씻어내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골 2:20~21에 보시면 “율법주의를 탈피해야 할 성도들이 여전히 율법주의 잠재의식에 얽매어 있음을 아시고 “초등학문에 얽매이거나 의문에 순종하는 일에서 벗어나되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며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것이면 멀리 하고, 모양새나 냄새도 피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성도님들 중에는 잠재적 우상주의에 얽매인 것을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셨습니다(롬 1:5).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분인데 “토정비결을 볼 수도 있지 않느냐? 나는 신년 초에 한 번씩 봅니다”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도의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토정비결에 담지 않은 이상, 그것을 믿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 취미로 본 것이라면 생각에 문제가 있는 교인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제일주의와 정도로 가는 신앙은 확고하여야 합니다. 천주교 교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성물을 숭배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십자가 형상이나 마리아 동상에 경배를 하지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마리아 동상 같은 것을 보고 마리아를 존경하는 뜻으로 배례한다고 할 것입니다. 존경과 숭배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존경을 숭배로 바꾸면 안 됩니다. 십자가도 내용적 의미(속죄 형틀)가 있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형틀 자체가 절 받을 자격품이 아닌 이상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절할 수 있지만 돌아가신 시신 앞에 절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시신이 절 받을 자격품이라면 미이라를 만들어 놓고 계속 참배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시신이나 유골을 인격으로 생각하겠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흙으로 여기게 되어 있기 때문에(창 3:19)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체는 우상도 아니고, 만들어 놓은 형상도 아닙니다. 불교인이나 천주교인이 염주를 굴리는 이유를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그것이 정신 집중을 꾸준히 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겠지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성자의 유골에 입을 맞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의식이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교황이 우리나라의 공항에 내리자 흙에 입을 맞춘 일이 기억납니다. 한국을 사랑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흙 또는 땅이 숭배의 대상인 듯 표현되는 것이 문제라 할 것입니다. 어떤 교인은 교패나 성경책이 액운을 없애는 부적인양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보호해주실지언정 성경책이나 교패를 보시고 재앙을 거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책 구입하기가 좋아진즉, 옛날에 쓰던 헌 성경책이 쓰레기로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기에 민망하지만 벌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대신 성경책을 오래 쓰세요. 그리고 가보로 남기십시오. 그러면 후손들이 조상의 신앙생활을 기억하고 본받으려 할 것입니다. 귀신의 작당이 주위에서 많이 나타납니다만 그것도 성경적으로만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적 이해란 귀신이 곧 마귀이고, 하나님만 통제하실 수 있으며, 기도로만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막 9:29). 또 마귀는 하나님의 허용 범위를 넘어 행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욥 1:12). 어떤 성도는 앞 일이 잘될 것인가? 못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몹시 궁금하게 여겨서, 그것을 꿈이나 어떤 징조로 풀어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 4:14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알아지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복 주시는 은혜만 믿고 최선을 다하면 복과 노력이 합쳐서 잘되고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기만 하고 정당하게 행하지 않으면 잘 안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입니다(욥 8:5~7). 옛날에는 여자나 까마귀나 뱀을 재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고, 거북이나 까치는 그 반대로 여겼지요. 그러나 어느 숫자가 좋고 나쁘다는 식의 의식도 없어져야 합니다. 망령이 누구에게 와서 귀신들린 자가 되게 한다든지, 귀신은 떠들썩해야 오고(굿할 때 그러함), 성령님도 부르짖어야 역사하시는 줄로 아는 착각도 버리셔야 합니다(마 6:6, 18:19; 왕상 19:12).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어디에 쓰던지 상관할 바 없으나 성도는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하며, 외모나 의복이나 언어의 수단이 은혜를 주는 것처럼 믿어서도 안 되고, 은혜는 오직 말씀의 뜻 전달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꿈은 100번을 예견해도 맞지 않는 것을 아실 것인즉 꿈의 신비에 얽매이지 마시고, 가장 중요한 우상 숭배가 탐심이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골 3:5). 하나님보다 더 기대를 갖거나 의지하려 하거나, 세상일에 큰 취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곧 우상주의에 얽매이는 것임을 아셔서 항상 떨쳐버리셔야 합니다.

 

제59과 진리 중심으로 가자 (요 16:13) 목록으로


종교개혁(1517. 10. 31)을 의미 있게 되새기자는 뜻으로 말씀을 구상하다가 “진리 중심으로 가자”는 제목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1. 구약 시대의 선민 종교는 하나님 중심 종교 또는 율법에 의한 종교로 모세 때에 그 기반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방 종교와 대립하게 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에서 멀어졌으며, 메시야의 명맥을 잇는 소수의 무리들만 핍박을 견디면서 믿음을 지키다가 예수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구약 성경을 잘못 이해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을 핍박하였으나,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였고, 성령님이 오셔서 사도들을 붙드시고 성경과 생활 모범을 지도하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확고하게 세워주셨는데, 예수님 시대부터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면서 정통성 있는 성도가 정통성 없는 사이비 단체와 대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실패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자기의 백성을 다 구원하시기까지는 진리 운동을 보존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가 교회사 책을 보니까 교황이 베드로 이후 264대째 내려왔는데, 1대 교황부터 32대 교황까지 다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33대 “실베스델 1세” 교황 때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허하면서 기독교가 숨을 돌리고 발전하게 된 것인데, 중요한 것은 진리 중심으로 발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이 생기면서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바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핍박하다 못해 죽이는 부조리가 계속되다가 1453년부터 로마 교회에서 동방 교회가 분리를 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성직자들이 화형을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구교의 부패상 95개 조항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듦으로 개신교가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은 흘러야 깨끗해지는데 흐르지 못하고 전통에 얽매어있으면 전통이 교리가 되고 습관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000만원 밖에 없는 교회가 한 달에 50만원씩 주면서 전세 예배당을 사용하다가 문을 닫게 되었다 하기로 그 6, 7명이 가정집에서 예배드리면 되겠다 하였더니,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많이 실망했습니다. 예배당처럼 만들어진 장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예배인 줄 아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남과 북은 50년 동안 정치와 문화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하나가 되겠습니까? 손자 대쯤 내려가야 비슷해질 것입니다. 천주교가 부패하였을 때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혁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자유를 얻은 지 740년 만에(1054년) 구교를 반항하여 나온 것이 동방 교회이고, 그 동방 교회의 개혁이 미흡하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463년 후에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도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100년 태동한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1414. 5. 4.에 개혁자 존 위클립이 화형을 당하였고, 또 그 다음 해인 1415. 7. 6.에 “존 훗스”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꼭 100년 후에 룻터가 개혁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2. 우리는 진리 중심에서 떠난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불신자나 이단자나 사이비 종파나 진리 가운데 서지 않았으면 다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우리는 “이것이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 중심에 선다” 하는 것만 잘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천주교를 큰집으로 아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르다고 해야 됩니다. 우리와 다른 것을 몇 가지 지적한다면(책에서 본 것들, 미확인) 성경에 가경 14권 첨부, 교황 오류 없다, 교황이 구원 준다, 교회가 성경 위에 있다, 교회의 말이 법이다, 예전이 구원의 방편이다, 신부는 사죄권 있다, 연옥이 있다, 죽은 자의 영도 살아있는 자의 공력으로 구원한다, 전통도 큰 권위가 있다, 성물이나 화상도 숭배 대상이다, 성자의 뼈에 입을 맞춤이 좋다, 마리아의 조형물은 경배의 대상이다, 성찬은 화체설이다, 인간 제사장(신부)의 중보로 구원 받는다, 예배당 치장이 은혜를 준다, 마리아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 예수님처럼 몽소 승천했다(1950. 11. 1. 신조로 공포)…. 천주교가 정치권으로 개신교를 탄압할 때 개신교도 5,000만 명 넘는 수를 학살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사실이 다 아니거나 정화되었기를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진리 가운데로 가고 있습니까? 개신교도 예수님을 닮으려면 근본적으로 개혁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만 진리 가운데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운데’란 말은 갓 길이나 변두리 길이 아닙니다. 없는 것을 만들지 말고 진리 중심이 무엇인지를 더욱 잘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8. 교회의 생활


제60과 신약 교회의 역사 (딤전 3:15~16) 목록으로


“신약 교회의 역사”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약 교회 전에 구약 교회도 있었습니다. 행 7:38에 보시면 “광야 교회”란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선민의 출애굽한 단체를 의미합니다. 구약 교회는 선민국가로써 하나님이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여 다스리셨기 때문에 신약의 교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 교회는 메시야 사역을 기다리면서 믿음생활을 한 단체이고, 신약 교회를 좀 더 자세히 구별한다면 여러 가지 특징을 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 교회는 선민에 한하여 부분 계시(구약 39권)와 상징 계시(메시야 예언), 그리고 제사적 제도, 인간 중보자인 제사장과 선지자 사역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한 단체이고, 신약 교회는 사도 시대라는 과도기를 100년쯤 거쳐 완성된 계시와 구약의 성취 아래 모형(상징)적 행사를 떠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고, 그것을 전수시키는 단체입니다.

2. 신약 교회의 출현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2사도와 따르는 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약 100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성립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가장 밝은 계시인데, 그 내용이 사도시대에 성령의 강림하심과 특별 계시(성경) 사역으로 나타내 주셨고, 또 사도들이 친히 교회생활의 모범을 보임으로(고전 11:1, 엡 2:20) 신약 교회의 기초가 완성된 것입니다. 신약 계시의 기초란 예수님과 선지자와 사도가 없는 상황에서 오직 남아계신 성령님과 성경 그 자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교회의 모범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성경이고, 완성적 기초 시기는 주후 100년경 신약성경의 완성 때부터인 것입니다.

3. 신약시대의 교회는 많은 수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 오순절에 성령님의 강림하심과 특별한 은혜의 역사로 복음이 예루살렘에 전파되었는데, 복음을 반대하는 율법주의 종교가들의 강한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난 전도자들이 먼저 안디옥에 전파하여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안디옥 교회를 설립하였고, 안디옥 교회가 이방 지역에 선교를 시작한 것이 주후 50년경이었으며,, 복음이 신속히 전파되어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과 로마까지 전파되었습니다.

1) 주후 54~68년은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인데, 네로는 기독교를 핍박하였고, 원인을 모르는 화재에 대하여 이를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씌워 자기의 생일에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하면서 “이 불이 너희가 말하는 하늘의 불이라” 하였고, 또 성만찬에 대하여 비난하기를 “너희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살인귀들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이 시기에 순교 당하였습니다.

2) 이어서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가 305년까지 이어졌고, 주후 80~90년경에는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가 있었는데, 그때에 기독교인들의 재산 몰수, 축출, 살해 등이 있어서 그 시기부터 313년 기독교 국교 승인이 있기까지 약 200년간 카타콤 생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200년간 카타콤에서 낳고, 살고, 죽으므로 핍박을 견딘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용한 암호패가 ‘익두스’(Ἰησοϋς Χριστὸς Θεοϋ 󰐦ιός Σωτηρία)인 것입니다. ‘익두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이라”는 뜻의 앞 글자를 모아 결성한 것(ΙΧθUS)으로 ‘물고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물고기 표식을 갖고 다니면서 정보 교환과 생필품 공급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이것을 색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땅굴(카타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감히 들어가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3) 또 주후 100년경에는 “트라야노” 황제의 박해가 있었는데, 그때에 안디옥의 감독 “익나디오”가 맹수에 먹혀 죽었고, 120~150년 어간에는 “하드리아노” 황제의 박해로 기독교 호교론자들까지 축출하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묘에 여신상을 건립하였으며, 160~180년 사이에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69~166년)과 기독교 명사인 “져스틴 말터”(100~165년)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핍박이 계속되다가 303년에 레오크레틴 황제가 죽으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황제가 된 후 313년에 전격적으로 기독교를 공허하게 된 것입니다. 이 콘스탄틴 황제는 부왕이 죽자 정권을 이양 받을 무렵에 지방 총독들의 반동이 일어나서 내란 수습 차 전쟁을 하였는데,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 십자가 밑에 라틴어로 “너는 십자가 깃발을 들고 승리하라”는 글귀를 보고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10년간 싸워 로마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독교는 핍박에서 해방되고 발전하였는데,

4) 그때로부터 80년 후인 395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어 서로마는 카톨릭 교단이 자리하고, 동로마는 이스탄불에서 희랍정교회가 자리하여 1,400년경까지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자기의 교세 확장을 힘쓰는 중에 모하멧이 나타나서(570년생) 630년에 모하멧교가 창시되었고, 그들이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점유한 상태에서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가 임의롭지 못하자 160대 우르반 교황이 성지 탈환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켜 터키군과 싸운 것이 곧 십자군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1096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년간 8회의 전쟁을 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성지 탈환을 위한 200년 전쟁은 결국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회교의 출현과 십자군 전쟁은 기존 기독교의 양적, 질적 훼손을 가져왔고, 결국은 개혁의 과제를 야기한 것입니다.

5) 그 개혁의 과제가 바로 천주교의 부패입니다. 여기에 대항하여 마르틴 룻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고(1517. 10. 31.) 이 종교개혁에 대한 기록은 <기독교신앙백과> p. 464와 로마서 강론에 요약 수록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단행되자 신구교간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스페인은 로마와 함께 개혁을 반대하여 자기 나라에 있는 개혁자 성도들을 추방하였고, 화란은 개혁을 지지하므로 추방되어 오는 종교적 망명객들을 받아들인즉 감정 대립은 물론 종교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신구교간에 전쟁을 하니, 이 전쟁을 30년 전쟁이라고 합니다(1618~1848). 결국 1648년에 “웨스팔리아” 조약을 맺어 끝을 본 것입니다. 그 조약은 “스페인은 화란의 독립을 승인하고, 독일은 스위스의 독립을 승인한다. 카톨릭파와 룻터파, 칼빈파는 신앙의 자유를 갖되 군주의 신앙과 맞지 않을 때는 재산을 갖고 이민할 수 있다는 등”의 조약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자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6) 그 당시 천주교의 부패성(개혁의 문제)에 대하여 룻터는 95개 조항을 열거하였지만, 크게 문제되는 것은(<기독교신앙백과> p.466, 468) 표준 계시(성경 66권)의 가감(외경을 가하고, 출 20:3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가 없음),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높이고, 평신도의 성경 해석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공덕이 구원의 공효를 준다 하고, 교황의 무류(無謬) 주장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 중에 더욱 충격을 주는 것이 속죄권 판매와 성직 매매였던 것입니다. 죄는 믿음으로 사함 받을 뿐 물질적 티켓으로 받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잘못을 감행하였다 하며, 오로지 금품 수집하여 성당을 짓는 목적으로 분별없이 성직을 매매하였으니 기독교를 신령상의 종교에서 인간적, 제도적 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 기독교도 기독교의 본질 아닌 것이 크게 부각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성도의 참 모습은 곧 교회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자신의 옛사람을 못 박고(롬 6:6, 갈 2:20, 고전 15:31), 허탄한 것(육체적, 현실적 정욕)을 멀리하며(시 24:4), 교회(성도 단체)를 허탄한 목적이나 세속을 위한 일에 이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십자가만 자랑하며, 모든 이를 상대로 사랑만 실천하는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살피면, 천주교 전래 역사와 개신교 전래 역사와 장로교 전래 역사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천주교 전래 역사는 개신교보다 약 100년 앞서며, 1777년에 유학자로서 중국에 왕래하면서 이덕조, 정약용,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5인이 신자가 되었고, 1784년에는 이승훈(신부), 이가환(대신)이 입문하였으며, 1794년에는 중국 신부 주문모가 처음 입한하여 강완숙 여인 댁에서 포교하다가 순교하고, 계속 핍박을 받게 된즉 1801년에 황사영이 교황께 백서(帛書, 핍박 사연을 비단에 쓴 것)를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순교하였고, 이어서 신유박해가 일어나 3,000여명의 순교자를, 1839년 기해박해로 130여명 순교, 1842년에 김대건 신부가 배출됐으나 1846년에 백령도에 가서 최양업을 입국시키려 하다가 발각되어 순교 당하고, 1866년에는 병인박해로 선교사 7명 외 8,000여명이 순교를 당한 상태에서 오늘에 이른 것이며,

2) 개신교 전래는 1832년에 화란의 선교사 구츨라프가 만주에서 한인을 선교하였고, 1865년에는 스코틀랜드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하였으며, 1872년에는 역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주에서 선교하였으며, 1884년에 미국 선교사 “알렌”이 의사로 선교하였고, 1885. 4. 5.에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가 입국하였으며, 1886년에는 미국 여 선교사 “스크랜톤”이 입국하였고, 1890년 에는 중국에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 “네비우스”가 입국하여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시도하여 많은 발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3) 장로교의 전래는 미국 북장로교 출신인 언더우드 입국에 뒤이어 아비손, 마팻, 베어드 박사가 들어와 평양을 중심으로 의료, 교육 사업을 하면서 선교하였고, 1889년에 호주 장로교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 누이가 경남 지역에서 선교하였으며, 1894년에는 아담슨 목사가 교육과 나병 치료에 임하였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테이트 목사 부부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하였으며, 1893년에는 카나다 선교사 등이 내한하였다고 합니다. 장로교 최초 교회는 1883년에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고향인 황해도 송천에 “솔래교회”를 세운 것이고, 최초 독노회는 1907년에(목사 7인도 장립), 최초 총회는 1917년에 목사 52인, 선교사 44인, 장로 125인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은 민족의 수난 뿐 아니라 장로 교회에도 많은 분열과 발전을 가져왔으니, 기독교 장로교파, 고신파, 통합측, 합동측, 개혁측 등 많은 교파를 양산하였고, 오늘의 교회 형태를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더듬는 이유는 많은 수난을 참고하면서 고난과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기 위하여 참신한 교회의 모범을 정립하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제61과 교회에 대한 비유 (딤전 3:15~16) 목록으로


성경에는 직접, 간접으로 교회를 비유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비유로 몸과 집과 부부와 목장으로 비유하신 말씀이 있고, 간접적 비유로는 학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연구하시면서 교회의 성격을 잘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1.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엡 4:12), “피로 사신 교회라”(행 20:28)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자기 몸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우선 일체성을 나타내신 것이고, 몸을 머리가 지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며, 주님 뜻대로 다스려져야 하고, 몸과 몸이 상부상조하는 것처럼(고전 12:12~27) 성도의 세계가 그러하여야 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교회의 연합, 그리고 성도간의 협동을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셨는데, 이 집은 건물로도 비유되고 가정으로도 비유되는 것입니다. 고전 3:11~12에 보시면 “건물을 지을 때 터를 닦아야 한다” 하셨고, 이 터와 기초는 예수님과 사도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6:18, 고전 3:10). 참으로 기초가 중요합니다. 예수님 기초에 처음 쌓는 기초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시작할 때 시작한 멤버들이 좋은 전통을 세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집을 지을 때는 “공력(재료와 기 )있게 지어야 한다” 하셨고(고전 3:12~13), 또 엡 2:20~22에 보시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간다” 하심으로 기초 위에 선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가 서로 연결되어 “주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성전이란 성도의 신앙적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엡 3:17). 따라서 교회적인 신앙생활도 기초가 든든, 확실하여야 하고, 먼저 믿은 교인의 본이 중요하며, 또 상부상조가 중요함을 교훈하신 것이요, 둘째로 집에 대한 비유는 가정입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하셨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셨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란 예수님이 주인 노릇하시는 가정을 뜻하고, “진리의 기둥과 터”란 진리의 사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 대한 사명은 성경의 보존과 해석과 교육과 전파와 실천인 것입니다. 교회는 다분히 가족적이어야 하고, 또 진리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집 짓는 일, 또는 가정으로 비유하신 줄 압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님 반석 위에 섰는지, 교회의 분위기가 가족 세계와 같은 지를 살펴 그런 세계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교회를 부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엡 5:22~3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남편으로 교회를 아내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하시므로 교회가 예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성도 개인은 예수님의 뜻을 다 못 따라도 교회의 단체적 행동은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혹 개교회가 주님의 뜻을 못 따라도 노회나 총회는 반드시 바른 목소리를 내고 표준을 어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교회를 섬긴다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엡 5:27).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주님의 뜻에 따를 때 순교를 각오하고 복종하여야 하며, 이와 같은 원리로써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고, 남편은 그 아내를 귀히 여겨주고 사랑할 때 좋은 가정이 되고 교회도 그런 취지로 섬길 때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4. 교회를 목장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하셨을 때(요 10:11) 양의 우리와 문과 문지기로 말씀하셨고, 목자가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들어가고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는 신앙의 지도자인 만큼 예수님의 모습과 방법을 많이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욕심 있으셨습니까? 없었지요. 예수님이 현실을 사랑하셨습니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요 18:36)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시기 위하여 잠시 다녀가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세상을 나그네로, 천국을 본향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셨는데,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듣고 다른 음성은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교인들이 자기 교회 담임 목사님의 지도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는 줄 압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께 성경을 배우세요. 성경을 배워 은혜를 받으려고 하세요. 이 장소, 저 장소, 이 목사, 저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결국 그 성도는 목장을 떠난 자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한 목장(자기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고 은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시 23:1, 행 20:28, 벧전 5:2~4).

5. 마지막으로 비유되는 말씀은 교회를 학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도 배워야 하고, 시험도 쳐야 하며, 연습도 하고, 신앙을 연마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딤전 4:7). 교회에 와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몸 같고, 집 같으며, 가정 같고, 부부 같으며, 또 목장과 같고, 학교와 같은 줄 아셔서 성실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62과 적은 무리의 할 일 (눅 12:32) 목록으로


(○○교회 권면)

지금 이 교회는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당 형식을 가진 집회소 운영이 어렵고, 두 번째는 꾸준히 일할 수 있는 교역자의 사역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사람의 생각대로 해결하려면 돈만 있으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런 중에 몇 가정 안 되는 소수의 성도일지라도 독립적 교회란 이름 아래서 가족적 신앙생활을 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의욕이 강한 것은 좋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포기한다면 개인적 또는 단체적으로 얼마든지 다른 교회에 입회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교회를 폐지시킨다면 “그 동안 교회를 잘 섬겼으면 좋을 뻔했다”고 혹 뉘우칠 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나태로 교회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하신다면 깊이 반성하셔야 하고, 할 만큼 했는데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이니까 큰 가책이나 서운함을 느끼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목회연구소를 운영하는 분이 말하기를 두 구역회 중 한 구역은 잘되고, 한 구역이 안 되면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인즉 잘되는 구역원을 안 되는 구역으로 떼 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반성할 것은 반성하되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이 섭리란 뜻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를 폐지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 상태에서 되게 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1.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들에게 상당한 봉사적 실력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11명의 제직이 있는데 주일날 점심 차리는 것이 귀찮아서 빵만 먹고 헤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할 때 이 교회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이 상태에서 교회를 붙들고 일으켜 세우려면 먼저 물질적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앞세워 교회를 하려고 하는 전통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고 예수님만 계시다”고 하였습니다(행 3:6). 돈이 없어도 교회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주택에서 예배드리면 됩니다. 보통 주택이 20명 정도 예배드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전셋집으로 늘리되 그 전세자금을 차대, 무이자 투자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배당이라는 집회소를 전도용 간판이나 우상으로 생각하는 습성을 가진 탓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30년간 예배당에서 예배만 인도하다가 교회를 사임하고 집에서 예배드린 일이 있었는데 간절함과 감동이 더 컸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왜 허전함과 고독이 없었을 까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말씀 연구가 있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과의 교제를 좋아하면 그만큼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성도들이 많던 적던 “나는 하나님과만 동행한다”는 자세만 가지면 고독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이 있고(마 6:8), 또 “너희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빌 4:19). 이 말씀대로 무엇이 필요할 때 받는 체험을 해보세요(간증 사례). 큰 만족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3. 교역자 대책을 세워야 하지요. 정상적으로 가족 있는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려면 사택, 교육비, 생활비, 자동차,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한 달에 4~5백만 원 비용이 납니다. 그러니까 기성 교회가 탄생하려면 예배당이 있고도 월 4~5백만 원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뜻인데 적은 교인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설교자, 교육시키는 선생만 있으면 되는데, 요즈음 무임 목사님들이 많으니까 그런 분들을 모시고 형편대로 사례하다가, 중요한 것은 헌신적 사역자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송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그리스도파 교회”인데 문을 닫고 장로교 강도사가 들어가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 강도사는 교인이 하나도 없는데도 바쁩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만 모시고 유지하다가 뜻있는 사역자를 만나면 일어설 기회를 얻을 것을 믿고 꾸준히 기도하시라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이목이나 현실적 관계를 초월하여 오직 “나 자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에만 주력”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돈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도 많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없으면 “멸망하는 짐승 같다”(시 49:20)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히 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도의 최고 목적입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분량이 있습니다(롬 12:3). 100만원 있는 자와 100억 있는 자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예배당, 많은 교인, 재정 넉넉, 또 유명세에 오른 교역자가 있는데 믿음 분량이 적다면 모양새 없고 믿음 분량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시겠지만 이 지상에는 목표에 잘못 가는 교회가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목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과 같습니다. 독생자를 희생시켜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워주신 큰 목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닮게 하여 예수님 비슷한 양자를 많이 두고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롬 8:29). 따라서 나 개인이나 교회의 형태가 예수님 닮은 모습을 나타낼 때에만 목적을 다하는 것인데 그것은 꼭 숫자로만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교회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63과 두 가지 문제 (마 9:1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현실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 두 가지 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제가 말씀드릴 사건과 직접 관계는 없으나,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기도가 중요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을 상고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금식한 이유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야를 영접하려는 준비로써 경건 차원에서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금식 규정이 없지만 나라의 재난이 있을 때(삼하 1:12, 더 4:16) 조상들이 금식한 전통을 따라 특정기간에 금식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하라고 시키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왜 누구는 금식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에게는 금식을 안 시키십니까?” 한즉, 성도를 잔칫집 손님으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여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수 없으므로 금식을 안 해도 되나 신랑을 뺏길 때는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는 슬플 일도 없고, 금식을 안 해도 되지만 예수님이 멀어질 때는 가장 강한 수단을 써서라도 주님을 가까이 모셔야 한다는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만사 OK이지만, 예수님을 멀리 하거나 은혜가 부족할 때는 문제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며칠 전에 어떤 통합측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분은 어렵게 개척 교회를 하는 분입니다. 교회를 잘 섬기던 집사가 “교회에 나오면 기도가 잘 안 나와서 떠난다” 하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이유를 진단해 볼 때 기도는 어떤 장소에 영향을 받아 잘 나오고, 안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집 골방에서 하나, 예배당에서 하나 마음잡게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막히는 확실한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일을 참고 있을 때 깊이 끌리지 못하는 점이 있고, 두 번째는 교회 안에 화합하지 못하는 대상이 있을 때 기도가 막힙니다. 부부도 그렇다고 하셨지요(벧전 3:7). 또 교회에 나와서 기도가 막힐 때 큰 이유는 교역자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을 때요, 그 외에는 기도 내용을 전개시키는 목표와 논리가 부족할 때 기도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원인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도록 자기 회개를 하는 것이지요. 정의 문제, 진실 문제, 나태 문제, 대인관계의 사랑 문제 등에서 자기 점검과 회개가 있으면 기도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모든 성도를 존경하고 사랑의 대상으로 포용하면서 자신을 섬기는 자로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족하여 포용을 못한다면 기도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3) 교역자에 대한 불만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기도도 많이 안 하고 먹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 하거나 “진실치 않다”거나 “신령한 능력이 없다”는 식의 불평입니다. 교역자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기도가 막힌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일 뿐 인간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교역자가 모범이 못 되도 자신은 그 교역자에게 모르는 성경을 배울 수만 있다면 족한 줄 알아야 하고, 화장실 곁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처럼 아무리 주위에 악이 떠돌아도 자기 신앙은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성도의 기도가 안 되는 것이 교역자에 대한 불만이라면 이는 신앙생활의 위치정립이 잘못된 것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기도 과제, 목표의 부실을 보충해야 합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목표가 확실하기 때문에 기도 주저할 일이 없습니다. 만일 자신이 기도 막히는 것이 그 환경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장난이라면 더욱 용기를 내어 이겨야만 계속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서울의 어떤 교회의 회계집사와 대화를 하는 중 그 교회의 많은 제직들이 목사를 배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한즉, 많은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물질에 너무 밝다”고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목사가 생활비를 더 받으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물욕이 심하다”는 뜻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고용인이니까 주는 대로만 받으시오”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교인이 자기 돈으로 생활비를 주면서 하인처럼 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사의 생활이 중류나 서민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잠 30:8). 당회장은 예수님의 재정을 대리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권리행사를 한다면 헌금 성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재정사용권을 당회장에게 맡기고 제직들은 사무적 관계에서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정도 이상 물욕을 갖는다면, 교인들의 신망이 떨어져서 나가는 교인이 생길 것이고, 그 목회는 잘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목사가 교인 수준 이상 재물을 많이 가졌을 때에 해당합니다. 성경에는 가족을 거느린 목회자의 실 예가 없고 거의가 단신 사역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족 생활비와 연계하여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목사가 물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이 경우에 목사도 자제하고, 교인은 교역자에 대한 봉사의 의무를 성실히 하는 선에서 잘 조정되어야 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64과 타인의 범죄와 처신 (갈 6:1~5) 목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본문을 주밀하게 살피신다면, 1절에서 “범죄가 나타난 경우(범죄자, 범죄의 성질과 범죄 경위)”, “신령한 너희”란 뜻, “온유한 심령을 갖는 태도와 이웃의 범죄를 바로 잡아주는 문제”, 그리고 “자신을 살피고 조심하는 일”, 2절에서는 “짐”의 성격과, “그 짐을 서로 지는 문제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문제”를 생각하셔야 하고, 3절에서는 “되지 못하고 된 척한 자신을 반성하는 일과 스스로 속이는 뜻”, 4절에서는 “자기의 일을 살피는 문제”, 또 “스스로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나 자랑할 것은 못되는 문제”,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지는 일”을 살피셔야 하니까, 이상에서 소제목이 13개나 됩니다. 잘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 교훈을 주신 이유는 교회의 단체나 성도의 세계에서 부조리한 상황(질서가 깨지거나 범죄가 드러나는 경우)이 일어났을 때 은혜롭고 명분 있게 수습하고, 사랑의 분위기를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사람이 무슨 범죄를 하고 그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도라도 죄를 안 짓고 살지 못합니다(롬 3:10, 갈 3:11, 약 3:2). 만일 자신의 죄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회개하고 시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 앞에 드러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형편으로 드러나면 성도가 이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이 이웃의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 처신을 말씀하셨다 하여 국법상으로나 교회법으로의 처리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도가 개인적 자격으로 그 이웃의 범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 중에 범죄가 나타나면 누가 범했느냐(어른이냐, 아이냐, 지식인이냐, 무지한 자냐?), 무슨 죄를 졌느냐(교리적 문제냐, 도덕적이냐?), 범죄 경위가 어떠하냐(우발적이냐, 고의냐?)에 따라서 처신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것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는 자는 신령한 성도이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육신에 속한 자에 비할 때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를 뜻합니다(고전 3:1). 성도라도 은혜를 많이 받지 못하면 육신에 속한 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통제를 잘못하기 때문에, 넓은 마음도 갖지 못하고, 따라서 온전한 처신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신령한 자는 형제의 범죄에 대하여 온유한 심령으로 사고합니다. 범죄자의 입장도 생각하고, 자신의 책임 문제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빵 한 개를 위하여 누가 강도짓을 했다면 그를 미워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빵 1개를 주지 못한 것을 자책한다면, 분노보다 책임을 느낄 것입니다. 성도가 범죄자에 대하여 넓은 마음을 가지면 분노는 멀리 가고 자책하는 마음이 생겨서 온유한 심령을 갖게 될 것입니다.

4. 그러한 자를 바로 잡는 문제에 대하여 상당한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범죄 경위에 있어서 실수냐? 고의냐? 상습적이냐? 연약으로 비롯된 것이냐?에 따라 처방이 달라야 하는 것처럼 범죄자를 깨우치고 바로 잡도록 지도하는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범죄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여 “자신도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범죄를 자신의 범죄 예방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5. “짐을 서로 지라” 하셨으니, 이 짐은 혼자 지기 어려운 짐이고, 죄인으로 취급받는 짐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가 죄를 짓고 사람들의 지탄으로 버림이 되었다면, 그 당한 사람은 고독의 무거운 짐을 져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의하여 그 짐을 나누어진다면 그 범죄자는 소생할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고, 용서의 법입니다(마 18:33~35, 22:37~40). 성도는 그 법을 성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6. 대체적으로 자긍하는 사람이 죄인에 대한 배려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되지 못하고 된 척하면 스스로 속임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된 척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범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긍하는 마음(자신의 유력성을 생각함)을 갖고라도 자기를 깊이 살핀다면 남에게 자랑할 만큼 넉넉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긍할지라도 타인에게는 자랑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일을 잘 살피고, 자기의 짐(자기의 책임)을 완전하게 질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여러 종류의 성도들이 있는데, 계명을 잘 지키는 성도도 있고, 잘 못 지키는 성도도 있겠지요. 계명을 잘 지키는 성도가 못 지키는 성도를 미워한다고 가상해 보세요. 화합체가 되겠는가? 또 자신도 결함이 있으면서 자기보다 더 결함 있는 성도를 지탄했다고 가상해 보세요. 그 세계는 대립과 싸움만 일어날 것입니다. 필자의 목회 중에 교회의 사택을 팔면서 5천만 원 상당을 사기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 실무자 장로님을 용납하고 넘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은 위임식을 못하고 교회를 옮겨야 하겠다고 하더군요. 이유인즉 3년 전에 교회 재정을 손해보인 책임자를 엄하게 벌하지 않았다 하여 젊은 층에서 반대를 한대요…. 제 생각은 재정에 대한 실수범죄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 성도를 문책하고 쫓아내어 그리스도의 법과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온유, 이해, 용서, 자기반성”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65과 영광스러운 교회 (엡 5:25~27) 목록으로


본문 25절은 “예수님과 교회를 하나로 여기라” 하셨고(하나란 뜻은 존귀나 연계성으로 볼 때 그렇다는 뜻임), 26절에서는 “교회를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거룩하게 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교인들의 인격과 생활의 정화를 말씀으로 이루라는 뜻입니다. 27절에서는 그렇게 할 때에 교회가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고, 주름이나 흠이 없는 순결한 교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흠 없는 교회를 바라시는 것이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생활이 주님의 뜻에 부합하게 되어 있는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고, 특히 교역자는 자기의 섬기는 교회가 흠이 없기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아담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인데, 그 교회 교역자 내외가 퍽 불안한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있고, 어떤 큰 교회는 담임 목사님이 왕처럼 군림한 상태에서 교인들이 꼼짝 못한다(좋은 의미로는 복종만 한다)는 말이 있으며, 또 어떤 교회는 기관의 임원 된 자가 임원들과의 알력 때문에 하소연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무지와 제도상의 불비로 오는 부작용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다 같이 자유롭고 만족하며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선교 상 어려움을 당하는 일과 핍박으로 고난 받는 일과 사상의 쓴 뿌리 때문에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내부 갈등으로 받는 괴로움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생활 모범, 바울 사도의 선교사적 모범, 그리고 목회 서신에 나타난 내용과 초대 교회의 역사가 목회와 교회생활에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되어야 하며, 부작용을 초래하는 잘못된 제도는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 교역자는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지요. 모범자요 봉사자의 존재입니다(벧전 5:3, 요 10:4). 목사가 예수님을 대리하여 전파, 성례, 축복을 대행한다 할지라도 극히 겸손한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은 자신도 연약에 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2. 교역자가 사용하는 도구는 말씀과 기도와 모범뿐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에게 말씀을 분명하게 가르쳐서 예수님을 바로 나타내줄 사명이 있고, 또 모범을 보이면서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가 “총각 목사도 성경적인가?”라는 말을 하였다 하여 그 노회의 총각 목사가 재판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 잘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총각 목사가 그런 일로 인기관리를 해야 은혜가 됩니까? 이런 것이 다 성직자의 잘못된 권위주의이고, 말씀과 기도와 모범과 사랑만 도구로 쓰지 않고, 교권으로 인기관리를 하는 잘못된 예인 것입니다.

3. 그렇다면 교회생활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교역자가 성경대로 가르치면 순종하여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고, 다음에 한 가지는 봉사 면에 있어서 다수의 뜻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뜻이 맞지 않아서 단체 봉사에 문제가 있으면, 차라리 단체를 없애고 개인적 봉사를 권장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반장을 하려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서로 겸손하고 양보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라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롬 12:10, 16; 빌 2:3; 고전 10:33). 그렇게 하는 사이에 꾀를 부리고 짐을 안지는 자도 있지만 그것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이제는 반드시 교인을 성경과 하나 되도록 맺어줄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교회의 조직이 중요하고 성직자의 설교나 축도의 권위가 중요하다 하여도, 성경 말씀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교회나 목사의 설교를 성경보다 더 의존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생활은 시대 상황에 따른 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고, 자신은 성경과의 친밀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에 정착하도록 지도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5. 많은 교인들이 재정 처리의 문제로 부조리를 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교회는 성물(하나님께 드린 것)과 자치회 활동금을 구분하여, 성물은 교회 대표자인 하나님의 사역자가 예수님의 뜻에 맞는 용도로 사용케 함이 좋고, 기관의 자치 활동금은 건설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치회의 뜻대로 사용케 하면 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투명한 보고이고, 또 하나는 성직자의 생활이 근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가난한 성도의 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사치나 과소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이 곧 교역자의 생활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교역자의 생활이 빈궁하면 그의 십자가는 더욱 무거울 것이나, 점차 나아지면 가벼워질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가 가벼워지면 하나님의 일을 더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양쪽 사명을 적당히 나누어 시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6. 자녀 신앙교육의 책임은 가족이 1차로 맡고, 차선책으로 교회에 의존하여야 합니다.

아무쪼록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고, 세속의 즐거움을 멀리하여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순수한 사랑의 단체가 될 때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66과 현실 교회 진단 (계 3:17~19) 목록으로


진단이란 병을 찾는 것입니다. 건강 체크를 잘하여 예방하거나 고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처럼 사명 있는 많은 성도들이 현실 교회를 진단하여 치료(개혁)에 임하여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증언자가 이 말씀을 드림은 증언자는 그렇지 않다는 뜻도 아니요, 또 모든 교회, 모든 교역자, 모든 성도가 다 그렇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병이 있는 부분에 대하여 있다는 것을 알리고 다 같이 잘해보자는 뜻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초대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문제(병)를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가 없고 넉넉한 줄로 알고 있었으니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현실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현실 교회와 자기 신앙에 문제가 없는 줄로 아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게으르고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좋은 믿음)과 흰옷(순결)과 영적 은혜를 터득하는 신령한 눈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현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은 교역자가 져야 할 것입니다. 통영에서 매미호 태풍으로 조립식 예배당이 파손된 사진을 보내고 구제를 청해왔더군요. 교세는 20명쯤이라고 합니다. 20명이면 30평 주택에서 예배를 드려도 되는데, 그 장벽을 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교역자이고 교회 전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행 20:35)고 하셨는데, 문제 되지 않는 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예배당을 초월하지 못하고, 교권주의를 초월하지 못하며, 물질 선호 사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교회 이기주의를 팽개치지 못하고 있으며, 지나친 교역자 권위주의도 자제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 내에서 직분 선호사상 때문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셨습니까? 겸손하고, 순진하며, 무지한 성도는 교회 내부에 암처럼 잠재한 문제들을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바른 일 하려는 성직자가 잘못하는 성직자를 상대로 하여 감동을 주고 지도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전에는). 누가 바른 말을 하여 상대방의 악을 지적하면 악이 단결하여 개혁자를 희생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독재를 꺾은 것이 국민인 것처럼 교회 정화도 평신도가 하여야 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모든 것을 교역자에게만 의존한다면 교역자에게 문제가 있고, 상회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교회는 어두움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도 교계 안에 그런 요소들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교역자를 진단합니다.

1) 교역자는 물질적 생활과 관련 없이 교회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을 보장함은 당연하지만 혹이라도 교역자가 생계 문제 때문에 교회의 일을 부조리하게 처리하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부당한 목사 배척은 죄입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나가야 할 교역자가 생계 문제로 바른 증언을 못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겠지요.

2) 교역자는 더 유력한 시무자가 나타났다고 할 때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양보함이 원칙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 부흥이 자신 문제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요 3:30).

3) 교역자가 성경 위주로 목회하지 않고 친교, 조직, 인간적 관계로 결속하여 단체를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뜻은 성경으로 깨우치는 면보다 도덕성과 친교, 정치 등으로 붙잡는 면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성경과 신앙에 붙잡혀 있지 않고, 인간적 결속을 떠나지 못하여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축복, 목사님이 살펴주심, …을 의지하여 감사히 생각함은 좋으나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는 중요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4) 교역자의 권위주의입니다. 성경의 선생님 되고 모범자로서의 권위를 떠나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라는 것을 강조하여 교인 앞에 군림하는 태도인데, 예수님이나 바울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역자를 위해하면 벌받는다”는 인식을 주면서(삼상 24:6), 교역자 자신은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대항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자를 미워하여 그에게 심적 고통을 주고 쫓아내는 일도 없지 않으니, 이런 일들은 다 교역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5) 권위주의 뿐 아니라 신령한 은혜에 가까워져 있지 않고, 세속적 향락을 일삼아 누리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사역자는 성경 지식이 빈약할 수밖에 없고, 결국 직업의식에 얽매인 사역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울의 목사 자녀들은 대부분 외국 유학을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 추세라면 문제가 아니지만 “세속적 특권을 먼저 누린다”는 뜻으로 지적사항이 된다면 덕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녀를 두었다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입으신 옷까지 벗김 당하고 돌아가셨으니까요.

6) 교역자가 약자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하겠지만 강자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 앞에서는 할 말을 못하는 데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를 책망하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교역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되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달라” 하셨고(엡 6:19), 또 갈 1:10에서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교역자가 상대방의 죄를 지적함에 있어서 기회와 정도를 조절하여야 하지만 사람과 대립하기 싫어서 불의를 덮어놓고 산다면 사명자로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7) 명예 문제입니다. 사람이 알아주는 명예를 위하여 부탁하고 돈을 쓰며, 명예 유지를 위하여 온갖 수단을 쓰고, 예수님의 교회를 자기 명예의 발판으로 삼거나 형식적 학위로 인기를 돋보이게 하는 등, 역겨워 볼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는가 하면, 그 교회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이번에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하면서 박사 밑에 있는 자신을 행복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알고 만족을 느끼는 것을 본 일도 있습니다. 누가 이런 교인을 만들었을까요? 지도자이지요. 시찰회 어떤 교회가 어제 주일부터 “들어온 헌금을 강단에서 발표하고 기도하는 일을 중지했는데 섭섭해 하는 교인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그런 시작을 안 할 것을 한 것이 문제이어서 고치려니까 힘 드는 것입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준다”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개혁의 때가 언제입니까? 교인들이 성경제일주의로 나가는 때, 교역자가 교권주의, 세속주의를 떠나서 신령한 세계에 머무는 때, 물량주의, 교회 이기주의가 없어지는 때, 교회 안에 사회적 교회적 불법이 없어지는 때라 할 것입니다.

2. 교인을 진단합니다. 제가 어떤 교회 헌신예배 설교자로 갔는데 “20분 설교하라” 하여 간단히 했는데 사례는 많이 받았습니다. 문제는 주일 오후가 퍽 피곤한 시간이어서 이해를 합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성경공부를 한다면 20분까지 길게 설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

1) 성경을 사모하고 배우려 하며, 질문을 하고, 성경 교육 서적을 읽고, 성경을 배우며 깨달을 때 기쁨을 느끼는 성도가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교인이 많지 않은데 그러고도 설교는 짧아야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배우기를 좋아하고, 성경과 기도의 맛을 아는 교인을 찾아보세요. 성경과 긴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행 17:11의 베레아 교회 성도들의 모범을 꼭 닮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지요.

2) 말씀 앞에 떠는 성도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떨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시 2:11),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빌 2:12),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신다고 하셨지요(사 66:2). 법원에 가면 판사가 들어올 때 조용해집니다. 대법원에 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법관은 사람이 만든 법으로 재판하고,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다 복종합니다. 성도가 성경 말씀을 얼마나 존중합니까? 대부분 성경을 진리로 믿고 존중하지만, 성경보다 전통이 앞서고, 성경보다 문화가 앞서고, 성경보다 체면이 앞서며, 성경보다 정욕이 앞서지는 않습니까? “성경이 이렇다 하여도 다른 사람, 다른 교회, 다른 교역자가 다 그렇게 하는데 왜 혼자 고집 부리느냐?”고 항의하지는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무조건 굴복하지 않고 인간 선배나 문화와 유행과 전통에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직행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살전 3:11). 성경대로 실리주의로 행하면 될 것을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하여 많은 절차와 포장으로 거품을 내는 일들을 성도가 앞장서서 삼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 앞에 떠는 성도를 찾아보세요.

3) 세속을 외면하려고 애쓰는 성도를 찾아보십시오. 롬 12:2의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과 요일 2:15의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하셨으니까 성도가 어느 정도는 세상을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을 세상에 두는 것 같아요. 가치관을 하나님 가까이 하는 믿음 성숙과 신령성에 두지 않고, 돈 잘 벌고, 출세하며, 사람이 알아주는 세계로만 달음질하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불신자와 구별된 점이 바로 세상에 덜 치우치는 것입니다. 스포츠, 드라마, 관광 따위를 적당히 대하고, 하나님 가까이 모시는 일을 중요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보다 유행가를 잘 부르고, 노래방에 다니는 교인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경건을 힘쓰는 성도를 찾아보세요. “나부터 경건을 힘쓰지 못하는데 어디서 찾느냐?” 하시겠지요?

4) 잘잘못 특히 신앙적 시비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성도가 누구누구이겠는지를 찾아보십시오. 교리적인 지식도 있고, 기독교 사상의 지식도 있으며, 교회생활의 법도 알고, 성경의 윤곽을 어느 정도 이해하여 교회와 신앙이 바로 가는 지, 잘못 가는 지를 판단할 수 있는 성도(유력한 성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찾아보세요. 히 5:14에서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고 선악을 분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평신도가 교회를 정화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 교회는 정밀 진단을 안 해도 많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지도자들의 교권주의, 명예주의, 향락주의에 빠져있는 것부터 뿌리를 빼고, 빈 마음과 금욕 정신으로 개혁에 앞장 서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

 

9. 고난 극복과 승리


제67과 예수님이 이기신 세상 (요 16:31~33) 목록으로


33절 끝에 보시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고, 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므로, 성도가 환난 많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기이신 세상은 오늘처럼 종교의 자유나 인권이 보장되거나 물질이 풍요한 세상이 아니었고, 대단히 현실보다 어렵되 진리를 죽이는 시대였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정치적 자유가 없는 세상이었고, 구약식 종교의 전통도 대부분 변질되어 핍박을 무릅쓰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어려운 시대이며, 잘못된 종교(유대주의)의 독선이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 따라 착취, 음모, 살인이 마음대로 자행되는 세상이었습니다. 만일 오늘의 백성들이 이런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세상을 이기려고 한다면 독립운동, 인권평등운동, 경제발전운동, 도덕성회복운동, 그리고 종교정화운동까지 많은 일들을 성취해야만 세상을 이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성취는 100년을 두고 시행해도 어려울 것입니다.

2.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예수님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초라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즉 조직과 단체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예수님 홀로 세상을 이기는 일에 보탬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배신과 멀리하는 일만 하였으며, 또 예수님께 이적의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정권을 뒤엎은 일이나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시는 일에 일체 이용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낮은 계급의 위치에서, 물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악인들에게 희생되어 돌아가신 것이었고, 승리하신 결과는 돌아가신 다음에 부활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독립을 시켰습니까? 경제를 일으켰습니까? 바리새인들을 타파하였습니까? 제자들에게 안전 대책을 세워주었습니까? 그런 일에는 아무 것도 손쓴 일이 없으시면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으니, 그 “이기신 의미”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무엇을 하라”고 명하신 뜻을 다 성취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분명히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 19:30). 저희들도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만큼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목적대로 노력하고, 세상을 떠날 때는 “다 이루었다”든지 아니면 70%밖에 못하고 죽는다든지 하여 자기 인생의 결론을 맺고 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4.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목적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 요 14: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생의 모범(죄 안 짓는 것)을 보이는 일, 진리이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명,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를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 중에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때가 이르기까지, 핍박과 음모와 가난과 부자유한 세대 속에서, 율법을 거역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시면서, 살아오신 그 생애가 다 세상을 이기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입장으로 오셨고, 권세 있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섬김과 사랑으로만 세상을 이기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 성도들의 입장에서 진리와 사랑의 무기만 갖고 싸워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죄 안 짓고, 사랑하며, 저항 없이 사시다가 희생양이 되신 것입니다.

5. 그 억울하고 괴로운 입장에서 어떻게 그 방법으로 견디고 이기실 수 있는가? 할 때에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확신이고, 2) 고난을 당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아신 것이며, 3) 승리는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였을 때, 그 다음에 찾아올 순서라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실 때 이상 세 가지의 믿음과 긍지와 소망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생활도 꼭 그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권 없는 식민지 백성이었지만 우리는 독립국가의 백성이니까 국가에 대한 사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직 진리로 또 정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리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도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가 끝 힘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웨인라이트” 장군이 일본군에게 포로 되어 만주수용소에 있었는데, 8.15때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방 명령자로 변하여 “수용소 포로들을 석방하라” 하니까, 패배 당한 일본군이 옥문을 열었다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주 안에서 승리자임을 믿으시고, 담대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제68과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애 3:19~26) 목록으로


사람마다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몹시 괴로운 고난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평안하실 줄 압니다. 극한 고난이 임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환난 중에 나를 부르라…내가 너를 건지리라”(시 50:15) 하신 말씀도 있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도 다 주님께로 오라”는 말씀이 있지요(마 11:28). 저희들은 고난 극복에 대한 믿음 지식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1. 예레미야의 고난과 극복입니다. 우선 예레미야의 고난의 성격부터 아셔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이고 선지자이므로 그 신분이 존귀하였고, 유다 말기에 약 20년(여호야김~시드기야, 주전 568~548년)간 사역하였고, 유다가 망한 후시대에도 사역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난은 백성들의 범죄를 마음 아프게 생각한 것이고(밷후 2:10), 범죄를 책망한즉 달게 받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즉 핍박하였고, 바벨론 침략에 임하여 “하나님의 징계 섭리에 복종하라” 한 것이 반역자로 몰려 더 큰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 고난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을 위한 충성으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레미야는 고난 극복의 방책으로 1)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고난을 알아주시면 되니까요. “내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소서”(19절) 한 것이 곧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2) 진리(하나님)를 묵상한 것입니다. 고난만 생각하면 낙심이 되지만, 하나님을 묵상할 때는 희망이 솟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고, 또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24절).

3) 그러다 보니 소망이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25절). 그래서 기도와 묵상은 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신 것입니다. 사람이나 건강이나 돈은 꾸준한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변동하고 없어지기 때문이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니까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실 때 피조물로서의 목적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은혜주실 때를 기다리겠다고 한 것입니다(25~26절). 기도, 말씀 묵상, 하나님께 대한 소망,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시는 일,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상책임을 깨닫고 시행한 것입니다.

2. 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가정적이고 개인적이었습니다. 가정적 고난은 재물 없어지고, 종과 자녀들이 죽었으며, 부인이 뜻을 같이해주지 않는 것이었고, 개인적 고난은 질병과 명예의 실추였습니다. 이것도 고난의 극치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때에 욥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우선 인내하였습니다(약 5:11). 인내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도는 인내하는 일을 은사 활동으로 아셔야 합니다.

2)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주권적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욥 1:21, 2:10).

3)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욥 1:22, 2:10).

4)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욥 10:2에 보시면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고 무슨 연고로 나와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났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인생의 의로 구원 받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였으며(욥 42:1~6), 그 다음에 더 큰 축복을 받고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나오미입니다. 이 여인은 선민으로서 흉년을 피하여 모압에 가서 살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삶의 기반을 잃는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때 자신이 양식을 따라 이방 지역에 온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것이어서 하나님을 멀리 한 것과 다름없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깨닫고 유다로 돌아오려고 결심한 것은 하나님을 멀리 함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오는 회개와 다름이 없는데, 이때에 둘째 자부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로 왔으니, 그것은 하나님과 효도를 선택한 그의 결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오자마자 환영을 받았고, 이웃과 보아스의 도움을 받다가 나중에는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하여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낳은 아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어 왕통과 메시야 계열에 오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시는 교훈은 믿음이 멀어지면 고난이 올 수 있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4. 다니엘은 신앙적 핍박을 받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믿음의 지조를 지킴으로 이겼고, 하박국은 가난의 어려움을 하나님 즐거워하는 신앙으로 이겼으며, 아삽이란 사람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때문에, 믿음에서 실족할 번 하였는데(이런 것은 신앙의 갈등으로 받는 고난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말씀 배움으로) 깨닫고 힘을 얻었다고 한 것입니다(시 72:2, 17).

결론적으로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심적, 육적으로 종류가 많지만, 이것을 이기는 방법으로써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능자로,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자존심을 꺾고 자기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목표에 두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는 말씀처럼 모든 고난이 죄와 욕심에서 발생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건설적인 목적을 향하여 신앙적으로 노력할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69과 두려움을 느낄 때 (시 2:11) 목록으로


성경에는 성도가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소망을 갖고 생활할 것을 많이 말씀하신 줄 압니다. 훌륭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백성인즉 당연히 마음 놓고 의지하며, 든든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그러한 보호와 인도를 받을 만큼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되 떨면서 즐거워하라” 하셨고, 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으며(빌 2:15), 롬 11:20에서는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두려운 마음을 가져보십니까? 성도가 부족하게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나태와 방종과 자만이 될 수 있은즉, 두려워하면서 방책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 방책이 곧 신앙적 경성입니다. 신앙적 경성을 안 할 때 더욱 두렵습니다. 신앙적 경성은 말씀과 기도에 붙잡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딸이 결혼하는 날도 오전에 설교 한 편을 쓰고, 12시에 결혼식장에 갔습니다. 그 후에 경주 결혼식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승합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다녀온 일이 있었고, 또 그 차에서 전도와 신앙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어도 나는 안 죽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질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그 반대로 “나라고 하여 그런 사고를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 속에 불안을 느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기도하라는 뜻이겠지요. 저는 화장실에 갈 때 꼭 핸드폰을 들고 갑니다. 중요한 전화가 그 순간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눈이 오고 길이 미끄러운 날인데 중요한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별일 없으려니 하고, 5분쯤 휴대폰을 지참하지 않았다가 그 순간에 문제를 당한 것입니다. 세워놓은 자동차에 접촉사고를 당했는데, 아내가 저에게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사고 낸 사람의 휴대폰 번호만 적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때 전화를 받았더라면 “자동차 번호를 기록해 놓으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려움과 피해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휴대폰을 갖고 화장실에 가야 할 만큼 위험하고 바쁜 세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움을 안 느끼고 사시는 분들은 각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두려움을 느껴야 할 이유는 어려운 시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의 교훈이 어느 때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1. 성도가 예수님을 멀리 하였으면 굶고 금식하셔야 합니다. 마 9:15에서 “신랑을 뺏기면 금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밥 굶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영적으로 주님과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금식으로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일임을 느껴야 할 것이고,

2. 잠 6:10~11에서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눕자 하면 빈궁이 강도같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동차 접촉사고로 피해를 본 것도 잠을 더 잔 이유로 당한 것입니다. 일찍 일어났더라면 사고 전화를 방에서 받았을 것입니다. 잠자기를 즐기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을 두려워하시면 잠자고 나태할 때부터 두려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깨어 기도를 못했을 때 시험에 들 확률이 큰즉 두려워하셔야 합니다(마 26:41). 깨어 기도를 안 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가 계실 듯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유소가 있으려니 하고 차에 기름을 넣지 않았다가 혼난 경험이 있습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고 시험에 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4.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도 그런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갈 6:1에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형제가 범죄한 것을 보면 그것이 자신을 경성케 하는 신호인즉 두려워하고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범죄가 드러났을 때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5. 또 이웃에 사고가 났을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을 때…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그같이 망하리라”(눅 13:4) 하셨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6. 또 성경에 어떤 사람이 재물을 쌓아놓고 “오래 살며 누리자” 하였는데, 하나님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거기 해당 안 됩니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7. 또 시 7:12에 보시면 “사람이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칼을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찌르고 수술하는 것입니다. 찌르면 죽는 것이고, 수술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8. 또 약 4:14에 보시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도 마디 마디 마다 두렵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9. 또 히 12:15~16을 보시면 “주위에 은혜 못 받는 자가 있음을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잘못된 사상)가 나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에서’처럼 현세의 복만 추구하고 신령한 복을 외면하는 자가 있음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종합하면 우리는 지금 덜 굳은 얼음판을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일들이 이상의 아홉가지 뿐이겠습니까? 두려움을 느낄 때 속히 방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되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5:19, 계 22:13). 그리고 기도이상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제70과 거룻줄을 끊음 (행 27:25, 30~32) 목록으로


사도행전 27장을 통하여 많은 감동을 받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27장은 바울과 다른 죄수들이 백부장(율리오)과 군사들의 인솔을 받으며 여러 선객들과 함께 지중해와 아드리아(27절)해를 건너 로마로 가는 과정에 풍랑을 만났고, 그 풍랑 중에서 죽지 않고 보호 받은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 우선 바울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으로 죄 없는 죄수의 몸으로 최고재판자인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였고(25:11),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하여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도록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행 28:23~31). 여기에서 저희들은 눈에 보이는 상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도하시고, 또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중요한 목적을 두고 섭리하시는 사실을 꼭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셉이 애굽으로 팔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부족들이 22년 후에 흉년을 피하여야 할 것을 위하여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45:5~6, 17세 애굽, 30세 총리, 7년 풍년, 2년 흉년 때 만남). 하나님의 놀랍고도 세심한 섭리를 깨닫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2. 본 장에는 젊은이들이 알기 어려운 단어들이 있습니다. 지명은 지도를 놓고 공부하시면 됩니다. “유라굴로”란 광풍 이름은 사라호, 매미호, 태풍 이름과 같은 것이고, “스르디스”(17절)란 모래 언덕이요, 연장은 돛이고, 42절의 이물과 고물은 배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3. 풍랑이 일어난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이 “생명과 화물과 배에 타격이 있을 것인즉 미항에서 과동하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이때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선주의 말만큼 믿지않고, 선주의 뜻에 따라 출항한 고로, 그런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보면 큰 연단을 받았으니까, 그런 연유로 하나님이 풍랑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시 83:15; 욥 9:17; 시 104:3, 48:7; 욘 4:8).

4. 풍랑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 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셨으니, 이 뜻은 다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또 바울은 가이사 황제에게 증언자가 되어야 하며, 바울을 인하여 함께 탄 자도 죽지 않게 하신다 하셨는데, “네게 주셨다”는 말씀은 바로 바울을 인하여 다 죽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그렇게 시행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시면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고, 따라서 성경을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체험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30절을 보시면 풍랑으로 14일을 시달리는 중에 사공들이 거루를 타고 도망하려고 한 것입니다. 큰 배에는 사람이 276명이나 탔고, 거기에 밀과 다른 짐이 실려 있으니까(18, 38절), 만일 큰 배가 깨진다면 거루를 탄 것이 유익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큰 배에 있지 않으면 구원 얻지 못한다”(31절) 하니까, 군사들이 서슴지 않고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린 것입니다. 앞에서도 사공들은 바울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고, 반대로 백부장과 군인들은 바울의 말을 믿으려 하였는데, 처음에 바울이 “과동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을 때, 백부장이 듣지 않은 것을 뉘우치고, 군인들이 바울의 뜻을 따라 주저하지 않고 거룻줄을 끊은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풍랑 중에 거루는 생명줄과 같은 것인데…. 거루를 붙잡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단호하게 거룻줄을 끊는 것처럼 성도들도 어느 것이 신앙적이며, 어느 것이 건설적인가를 판단하였으면 거기에 위반되는 것은 아무리 중한 것이라도 끊고 포기하는 용단이 있어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결단과 증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증표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 크게 기뻐하셨던 것입니다(창 22:12, 마 16:17). 거룻줄을 끊어버리는 용단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6. 뱃사람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는 시간까지 배도 버티고, 사람도 버텨야 하니까 무진 노력을 하였습니다. 배를 버티기 위하여 짐을 풀고, 심지어는 곡식까지 버렸으며, 닻줄을 끊고, 킷줄을 늦추며, 돛을 내렸다 닫았다 하면서 항만으로 나갔고, 사람들은 안심을 시킨 다음에 음식을 먹였으니(25, 34절), 하나님의 죽지 않는다는 약속이 노력 없이 성취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버텼습니다. 쉽게 말하면 노력 없이 거저 복 주시는 섭리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지에 가까이 와서 배가 다 깨졌을 때 군인들은 죄수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였지요. 만일 그렇게 되면 바울도 죄수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죽이지 말고 각자 육지로 헤엄치거나 널조각을 붙잡고 나가게 하자 하여 모든 사람을 다 살렸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없었지만 일반 섭리로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란 점을 확실히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71과 다니엘의 좋은 점 (단 1:8~9, 6:3~10) 목록으로


“다니엘”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앙의 지조를 지킨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죽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다니엘의 좋은 점”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유다의 귀족 소년이었을 때(여호야김 3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왕궁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유다가 아주 망하기 20년 전이었습니다(단 1:1~7). 이 시간에 다니엘서 본문을 두 곳 읽었는데, 먼저 읽은 내용(뜻을 정하고 진미와 포도주를 금한 것)은 바벨론 통치 시절에 있었던 내용이고, 다음에 읽은 내용(사자 굴에 들어간 내용)은 메데 파사가 바벨론을 점령한 다음 파사왕 다리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대를 짐작하면 앞의 사건은 청소년 때에 있은 일이고, 뒤의 사건은 70년 이상 이후의 일이니까 100세 전후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살았습니다. 쉬운 말로는 꿈을 갖고 목적과 계획을 세운 것을 뜻합니다. 성도가 이런 꿈을 가질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을 계획하셔야 합니다. 다니엘은 선민의 자유와 독립의 꿈을 가졌습니다. 기도할 때 고국 영토를 바라보고 기도하였으니까요(6:10). 그리고 또 한 가지 꿈은 신앙에 거리끼는 일을 안 하려고 한 것입니다. 왕궁에서 주는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란 점도 있지만, 동족들이 주린다는 것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미를 피한 것입니다. 신앙 양심상의 거리끼는 일을 안 하려는 꿈을 갖고 실현에 옮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믿음 안에서의 무슨 꿈이 있습니까? 저는 말씀 밝히고 선포하는 꿈, 저렴한 비용으로 검소하게 사는 꿈, 목회 말년에 10년만이라도 성경적 목회를 하고 싶은 꿈, 자녀들 잘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꿈이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도 인간적 욕심이 개입되었다면 하나님은 욕심대로 성취되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 다니엘은 파사 시대 다리오왕 때에 세 사람의 총리 중 으뜸으로 뽑혔는데(영의정 같은 직), 6:3에 보시면 “마음이 민첩하고 여러 사람 위에 뛰어났다”고 하셨습니다(어떤 분의 설교에서 마음이 민첩함은 영이 탁월한 뜻이라고 함). 영이 탁월하다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고, 민첩 그대로라면 지혜롭고 근면한 것을 의미하며, 또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전국 치리자가 될 정도이면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시기하는 자들이 고소할 틈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렴결백입니다. 4절을 보시면 “충성 되어 아무 틈, 아무 허물도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 된 자는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습니다. 또 부정함을 나타내지도 않았습니다. 요즈음처럼 이름 있는 정치가들이 부정에 연루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기하는 자들이 흠을 잡지 못할 정도이면 대단히 결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하여 다니엘의 흠을 잡기로 한 것입니다(5절). 그래서 그들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음모는 30일 동안 왕 외에 무엇에게든지 구하거나 숭배하는 행위를 하면 사자 굴에 넣기로 하는 규정을 만들어 왕의 어인을 받은 것입니다. 나라의 백성들이 임금에게만 충성하게 한다는 구실로 그런 건의를 하여 허락을 얻었을 것이고,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뜻으로 늘 기도하는 사실을 알고, 다니엘이 왕명에 복종하여 한 달 동안 기도를 안 하면 고소를 못하겠지만, 한다면 그것을 왕명 불복으로 처단하려고 한 것입니다.

4. 이 일에 대하여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10절에 보시면 “여전히 자기 집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한 것”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 하여 안 섬길 수 없는 것이고, 기도하지 말라 하였다 하여 안 할 수 없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또 권세자가 “한 달간 예수를 믿지 말라” 하였다면 죽지 않기 위하여 그 행위를 중지하겠다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어떤 위협을 가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굽힐 수 없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믿음 행위를 중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5.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자세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과 하나님께 감사한 사실입니다. 다른 방백들로부터 시기를 받고 음모에 말려들어 죽음에 직면하였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늙은 나이인 만큼 더 살기를 체념하고 믿음을 보존하는 것과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여기고, 소년 시절에 바벨론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 비할 때 왕궁에서 존귀한 신분으로만 살아오므로, 복 받은 것을 감사하고 만족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분복도 한계가 있습니다. 유다가 망하기 20년 전에 바벨론에 와서 유다가 망한 후 70년이 지나기까지 존귀한 위치에서 살았은즉 더 이상 벼슬이나 현세욕에 연연할 것이 없이, 동료들의 음모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때일 것으로 믿고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반드시 그런 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다가라도 그것이 끝나는 조짐이 올 때는 섭리에 순종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형편에서 하나님은 또 능력을 베풀어 보호 해 주셨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믿음으로 또 승리하였습니다. 좋은 뜻을 정하고, 흠 없이 생활하여,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위험에 처했을 때 순교의 정신으로 감사하는 좋은 점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72과 부끄럽지 않은 삶 (빌 1:20~21) 목록으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부끄럽지 않게 사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부끄러움을 느껴보셨습니까?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 정도에 따라 큰 충격을 받고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그런데 이 부끄러운 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을 모르고 미안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죄를 짓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양해를 구할 줄을 모르고, 미안하게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른다 하거나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것만큼 큰 부끄러운 일이 없는데, 그런 입장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 단계 더 높여서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짓는 일을 낙으로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죄를 짓고 성공하였다” 하면서 자랑하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습니다(빌 3:19). 안타까운 일입니다. 셋째로는 또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않은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든지, 근검절약하든지, 선천성 장애를 가진 것 같은 것은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놀기를 좋아하거나 자기의 목적과 주관이 없이 살거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데도 자유가 있고 당당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신사회가 되고, 갈등이 있으며, 허망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하여 부끄러움 당한 일들을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무지가 큰 부끄러움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 말을 할 때 외국어나 전문성 용어를 모르면 멍청한 입장이 되지 않습니까? 요즈음처럼 시사용어가 많이 생겨나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170년 전 조상님의 비문을 몰라서 돈을 들여 해득한 일이 있습니다. 후손이 조상님의 비문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성도가 성경을 모르면 그 이상으로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뜨면 배우려고만 하셔야 합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출처와 뜻을 해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무지가 곧 부끄러운 일이고, 예수님도 그것을 죄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

2) 거짓이 드러나면 큰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갈 6:3에 보시면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된 척 했다가 부족이 드러나면 부끄럽겠지요. 진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44년 전의 일인데, 군생활 할 때 선임자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선임자의 업무 권한을 알고 침해한 후에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드러나지 않을 줄 알고) “전혀 없었다”고 부인하였는데 금방 주머니에서 문서를 보이면서 “이것이 네 글씨가 아니냐?” 하였을 때 얼굴이 붉어졌는데, 더 가슴 아픈 말은 “너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안 할 줄 알았는데 하느냐?”고 질책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 세계에서 “언제까지 돈 주겠다” 하고, 실천 안 하는 예가 허다한 줄 압니다. 그것이 다 거짓말인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안된 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3)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부끄럽게 됩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왜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자기의 환경에서 자기가 할 책임을 알고 그것을 이행하여야 합니다. 그 책임을 이행 못할 때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으로 태어났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사는 방법도 잘 터득해서 기회 놓치지 말고 책임을 이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문화와 풍속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돈 벌고 건강 지키며, 가급적 30세 전에 결혼하고 자녀 낳고, 교육시켜서 후손을 잇는 것은 기본적 책임이고, 그것이 사람 사는 방법인데, 이것을 망각하고 저축에 관심 갖는 일보다 쓰는데 열중하고, 미래의 대비도 없이 순간의 기분으로 만족하면서, 가정이나 부모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형 된 자가 고의로 혼인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동생들이 결혼을 하니까 사진을 찍을 때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를 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생에 대한 자기 책임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결혼할 조건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미안하고 민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 앞을 꾸리는 책임을 다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치거나 자기의 할 일을 못하면 결국은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느낄 때가 오는 것입니다.

4) 자립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움 받는 일을 의당히 여기고 도움만 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의 도움으로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빌어먹자니 부끄럽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눅 16:3)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여 생활도 자립하고, 여기에 따라 신앙도 자립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립이란 성경을 배우는 것 이상 교역자를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 는 하나님이 교역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기의 하나님, 자기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3과 기다림의 복 (애 3:24~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다림의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는 연구 제목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기업은 미래를 위하여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대상입니다. 땅을 많이 소유한다든지, 기술을 배워 그것으로 생활 근거를 삼는다든지, 자식을 의지할 때 재물이나 기술, 사업등이 다 그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업들은 세상에 국한할 뿐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신다면 하나님께 만물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영생이 있으니 얼마나 완벽합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되 풍성하고 충만하게 모시는 기업됨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뜻인데, 이 뜻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정하고 기다리며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요, 셋째로 “구원을 바란다”는 뜻은 육체의 생명을 살리시는 뜻도 있고(행 27:44), 영적 구원도 있으며(행 16:31), 더 중요한 것은 공평하게 귀결된다(심판)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1. 그렇다면 왜 기다려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만사를 때를 정하시고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4시 연한(창 1:14), 처음과 나중(계 2:13), 생명의 수한(행 17:26), 추수와 결실기(마 13:30, 행 14:17) 등 생명과 생명 지배에 관한 것이 그렇고,

2) 구원 사역도 그렇습니다. 메시야 약속이나 예수님 초림의 때나 십자가의 때와 성령 강림과 이방인 구원의 때와 재림의 때가 있으며(요 13:1, 12:23; 행 2:1), 또 은혜의 때와 징계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때란 이방인 구원의 시기를 의미하고(눅 21:24),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 하셨으며(히 4:16), 또 “은혜 주실 때”란 말씀을 하셨고(고후 6:2), 징계의 때는 선민의 애굽 생활 400년(창 15:13~14), 광야 생활 40년(민 14:33~34), 바벨론 포로 70년(단 9:2)이 그 실 예가 아닙니까?(호 2:13)

3) 이런 때와 기한을 임의로 변동하실 주권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단 2:21).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머물러 낮 시간을 연장하신 일이나, 히스기야의 생명을 데려가시려고 하셨다가 15년을 늦추신 일이 그 실 예입니다.(수 10:12~13, 왕하 20:6). 말세의 때도 그렇습니다(마 24:22).

2. 기다리는 것을 왜 복으로 아셔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때를 정하시고 일을 하시니까(단 9:19)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고 기다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을에 거둘 열매를 여름에 따게 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인즉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순리대로 사는 것이 순종이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2) 기다리는 것은 인내의 복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열매 중에 오래 참는 것(갈 5:22)이 있으니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인내 그 자체로써 은사 활동이고, 성령님의 은혜를 추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은사이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3) 기다림은 곧 결실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니까, 때가 되면 소득이 있으므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씨앗을 심었을 때 결실기에 가서 거두어야 하는 것과 같고, 은행에 정기예금을 하였을 때 만기에 찾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부족하여 열매를 미리 따거나 정기예금을 미리 해약하면 손해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은혜를 주시니까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오래 기다릴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농작물을 세 종류로 구분하면 몇 달 만에 수확하는 채소가 있고,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곡식과 과일이 있으며, 여러 해 만에 수확하는 인삼이 있습니다. 가격을 보면 금방 수확한 채소가 제일 싸고, 그 다음이 과일곡식이고, 그 다음이 인삼인데, 몇 백 년 된 산삼은 수천만 원 합니다. 이렇게 오래 된 것이 값이 비싼 것은 기다림의 복 때문입니다. 성도가 세상 재미를 보면서 인간적 영광을 누리는 것도 같습니다. 젊어서 누리는 것보다 늙어서 누리는 것이 낫고, 현세에서 누리는 것보다 내세에서 누리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억제하고 또 억제하고, 또 참고 오래 참다가, 자기 당대에 안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할 때, 그 못 누리고 인내하며 기다린 것이 내세의 상급으로 축적되어 나중이 더 창대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쓴 신앙자료가 12,000 페이지쯤 됩니다. 앞으로 더 쓰면 15,000 페이지쯤 되겠지요. 이것이 점차 세상에 나타난다고 해 보세요. 큰 결과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집필)을 선택하지 않고, 목회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집 한 채와 죽을 때까지 생활비를 받겠지만, 집이 없어도 거처는 있을 것이고, 굶어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80년쯤 지나면 내가 목회할 때 있던 교인들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니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러나 글을 써놓은 것은 보존만 잘하면 천년도 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기다림의 복으로 받는 것입니다.

3. 어떻게 하여야 잘 기다릴 수 있을까요?

1) 미래에 소망 두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합니다. 부모가 쓰던 물건을 3, 4대만 보존해 보세요. 좋은 기념가치가 될 것입니다. 돈 안 쓰고 저축하는 맛에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2) 인내를 은사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제74과 죽는 것도 유익함 (빌 1:21) 목록으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성도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하는 것이 성경적 신앙입니다. 요즈음 “알 카에다”란 조직에서 자폭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죽음 자체를 알라 신에 대한 충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며, 또 옛날 사극을 보면 충성 된 신하나 무사들이 왕을 위해서 죽는 것을 두렵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될 때, 불신자들도 뜻있는 목적을 위한 일이면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도 힌두교인들의 생사관입니다. 늙은 부모를 죽음의 대기소에 모시고 와서 죽을 때를 기다리는데, 취재 기자가 그 노인 보고 “두렵지 않으냐?” 하니까 “간지스강 곁에 와서 죽게 된 것이 큰 영광이라”고 하면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인이라도 신념이 강하면 정신적 강한 힘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셨고, 또 전도의 핍박을 받아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도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 20:24) 하시면서 “환난과 위험과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라”(롬 8:35, 39)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내세 지향적인 생활을 한 사람은 바울 사도 외에도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베드로의 경우에서 특별하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내세를 사모하면서 이 세상을 “외국인 또는 나그네라” 하였고(히 11:13~16), 늘 장막 생활만 하였으며(히 11:9), 욥도 “자기의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였고(욥 19:25~26), 베드로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 2:11) 하면서 현실 극기의 생활을 힘썼던 것입니다. 우리나 요즈음 성도들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장수를 좋아하고 죽는 것을 겁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혹 내세를 소망하는 성도들 중에서 죽음을 말할 때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쉽지 않으나 오래 앓다가 죽는 것은 겁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죽음의 문제를 놓고 어떤 생각을 가지셔야 할 것 같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현실은 잠깐이고 내세는 영원한 것이며(고후 4:18), 죽음을 잠드는 것으로 비유하셨고(살전 4:13, 요 11:11), 죽은 후에 부활과 주 영접이 있으며(살전 4:15~17), 영생이 있고(요 3:16, 10:8), 안식과 존귀가 있은즉(사 57:2, 계 14:13) 죄악과 고난이 많은 세상에 사는 것보다 당연히 죽는 쪽이 좋다고 하셔야 할 것이고, 따라서 내세 지향적인 생활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생각을 하여야 내세 지향적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 생명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본문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전세를 살다가 기한이 되어 나가는 것을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죽음은 주께서 자기의 생명을 거두시는 것인 만큼 의당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2. 죽음 이후의 일이 생전의 일보다 더 좋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더 살면 자기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에게 유익하겠지만, 바울 자신은 부름을 받았을 때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유익이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땅에만 좋은 것이 있지 않고, 바다 속에도 좋은 것이 많은 것처럼 천국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좋은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3. 죄악 세상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이는 살기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 벌어서 열흘 먹을 수 있으니까 살기 좋겠지만 성도는 먹고 마시는 데 뜻을 두지 않고(롬 14:17)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뜻을 둡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 가리우는 것은 죄악이고, 성도는 그 죄악을 가장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자기 자녀 왕따 당한 것 때문에 이민 간 사람도 있었지요. 이와 같이 성도가 세상의 죄악을 생각한다면 세상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마 24:14~12에서 “말세에는 죄악이 많고 사랑이 식는다” 하셨고, 또 딤후 3:1~9에서도 “죄악은 많고…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멀리하는 세계는 허무한 것입니다(전 1:2). 그래서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세상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개인 개인 인생이 다 목적을 갖고 살도록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이 실현되면 필요 없고, 용도에 응했으니까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주님을 위한 목적”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제가 이상한 물건을 주워놓고 그 용도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용도도 연구하셔야 하겠지요. 모세는 80년 연단 받고, 40년 쓰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 선구자 역할만 하고 30세에 데려가셨고, 예수님은 30년 일반생활, 3년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런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행 17:25). 그래서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살고, 계획대로 가는 것인 만큼 죽는 것을 자신의 실수처럼 여기거나 자기 뜻을 못 이루는 것처럼 여기지 마시고, 오로지 주님이 받으실 영광과 주님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줄로 믿고 항상 준비하시되, 죽음에 의연한 자세를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가수 길은정씨가 44세쯤 대장암으로 죽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의연하게 기쁨을 나타내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을 것입니다(2004. 11. 12, 오전 KBS TV).

 

10. 성도의 사명


제75과 구원받은 자의 사명 (엡 5:15~21) 목록으로


“큰 구원과 은혜”란 제목으로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성도를 삼으신 목적은 독생자 예수님을 닮은 양자를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롬 8:29). 그러니까 예수님을 닮는 생활에 목표를 두시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앞 설교 29과).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시고,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닮으려면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을 잘 믿는 방법을 소개하면,

1) 확실하게 시작하라(벧후 1:10). 믿음생활은 시험도 아니고 연습도 아님.

2) 성경이 믿음과 생활의 표준임. 전통이나 문화 유행이나 인간이 표준이 아님.

3) 예수님이 자기의 주가 되셔야 함(자기 부정).

4)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믿음생활 할 것(마 16:24). 자기 십자가란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일반적 책임임.

5) 말씀과 기도의 맛을 알아야 함(시 119:105, 116:1).

6) 범사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살전 5:18, 고후 12:9, 빌 4:11, 시 37:5).

7)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요 8:32).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의미를 아는 것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란 점입니다. 우선 소개드린 일곱 가지만 잘 실천하면 믿음생활에 많은 발전을 이루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개인생활 처신을 잘하셔야 합니다. 교회나 교역자님이나 신앙 선배를 매일 동반 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회생활은 1/10 정도도 안 될 것이고, 늘 혼자 생활합니다. 요셉이 우상숭배의 나라에 혼자 가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던 것처럼 성도들도 일단 개인적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든든히 모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심고(약 1:21, 엡 3:17), 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행 20:32).

2) 개인 신앙의 확립으로 신앙고백을 옳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리와 사상의 기초를 잡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교리와 사상이 저절로 잡히지만, 일반 성도는 성경을 많이 알기 어려우니까 먼저 교역자의 지도를 받아서 신앙적 교리와 생활의 기본 틀을 터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3) 그리고 성경을 설교로만 터득하려 하지 마시고 반드시 스스로 연구하여 예수님을 발견할 줄 알고(계 2:1~4), 또 교훈을 깨달을 줄 알며(요 21:1~14, 약속대로 오심, 물고기를 잡게 하심, 자연을 지배하심, 그물을 보존하심, 떡과 생선을 주심, 153마리를 헤아림 등), 실천 의지를 갖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4) 양심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행 23:1) 하신 것처럼 혼자 정의로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자 있을 때도 감찰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이목보다 하나님의 감찰이 더 두렵지요. 그래서 성도는 혼자 있을 때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바르게 처신하는 것이 곧 양심 실천입니다.

5)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항상 일하십니다(요 5:17). 따라서 성도들도 항상 개인적으로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바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방탕, 낭비, 폄론, 게으름, 허영 등의 마귀 역사에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법 일곱 가지와, 개인생활 잘하는 법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꼭 기억하시고 실천하시면 큰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3. 성도의 교회 생활입니다. 혼자 믿음생활 하는 데는 불만이 없어도, 교회 생활에 불만을 갖고 화합 못하는 성도가 있음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생각하기를 “저 성도는 아직도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목적과, 교회 생활의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주신 목적과 생활 방법을 잘 아십니까? 더 잘 아시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교회는 예수 믿는 성도의 단체입니다. 예배당은 건물일 뿐이고요…. 또 지상의 교회는 가라지를 용납하는 농장과 같아서 외식자도 섞여있는 것입니다(마 13:39~40). 다 천사 같은 성도만 있고, 마귀 같은 외식자가 없다면 그 세계가 연단의 장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예수님이 피로 값을 주시고(행 20:28, 구속하여 성도 되게 하신 뜻), 교회를 세워주셨을까요? 혹 잘못 아는 사람들은 예배나 예배당 건축이나 십자가 불빛이나 물질 봉사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100명이 한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100명 각각 혼자 예배를 드린다면 그 비중이 더 클 것입니다. 또 예배당 건물은 좋은 집과 같을 뿐인데, 그것은 주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당을 갖고 싶어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또 물질 봉사는 구제에 속한 육체적 봉사일 뿐,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적믿음 사역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으니,

① 시 133:1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의 연합적 친교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하여 성도들로 양자를 삼으신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 안에서 교제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좋아하실 만하지요. 자녀 많은 집 식구들이 서로 우애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나는 그것을 상상하고 6남매를 두었는데, 자기들끼리 우애함). 그러니까 교회 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사랑과 화목입니다. 사랑과 화목! 곧 계명의 강령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에는 겸손, 양보, 용서, 봉사, 구제, 헌신, 인내, 희생, 존경, 별 것 다 있습니다. 자기 자랑, 투기, 욕심, 이기주의, 교만, 무례, 악의,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부터 내려오는 속담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보고 말하기를 “저 사람은 법 없어서도 살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옥신각신, 반목질시, 상호 폄론, 감정 대립, 훼방, 작당하는 경우가 있다면(그런 교회도 많이 보았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 실천의 도장으로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마지막 목표는 원수 사랑입니다(마 5:44). 원수 사랑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먼저 교회 안에서 쉬운 대상부터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연습입니다(딤전 4:7).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니까 사랑하고,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니까 사랑하며, 교역자는 신앙의 선생님이니까 사랑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과 자기의 형제이니까 사랑하며, 성도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나으니까 사랑하고, 불신자 같은 사람은 원수 사랑할 연습으로 사랑하여야 가히 원수 사랑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이나 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하면 이웃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추호라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성도가 없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② 진리 사역의 기지(터)로 주신 것입니다. 딤전 3:15에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셨습니다. 정치의 터가 국회라면, 진리의 터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뭉쳐,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진리를 사수하고, 진리의 뜻을 밝히며,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성경 가르치는 일과 성경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 하셨지요(딤전 4:13). 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지요(딤후 3:14). 여러분, 예배드리러 나오십니까? 성경을 배우러 나오십니까? 여러분, 사랑하러 나오십니까? 뭐 따지러 나오십니까? 예배는 11시 공예배 아니라도 개인예배, 가정예배, 아침예배, 저녁예배, 신년예배, 구역예배, 심지어는 기념 예배까지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비중을 의식에 두지 마시고, 성경 공부에 두시라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강론으로 공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설교로 공부하는 것인데,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배우는 것이고, 설교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성경 공부의 맛을 알고, 잘 배우면서, 목사님께 질문을 하신다면 목사님은 성경 연구에 몰두하셔야 하고, 모든 성도가 성경 공부에 열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행 19:20, 17:11~13). 따라서 성도의 교회 생활은 성경 공부와 사랑 실천, 두 가지만 염두에 두시고, 다른 것은 후원자 격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성경)이 가장 고상함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습니다(빌 3:7~8). 이와 같이 악을 대항하고, 현세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능력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저는 말씀에 붙잡히는 능력과 가치관 때문에 목회를 중단했습니다. 지금도 골방에 앉아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보람에 취하여 있습니다).

③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교역자를 사랑하고, 교역자로부터 성경을 배우면서, 교역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교역자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고, 꼭 자기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해달란다 던지, 자기만 알아달라는 식으로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주의 발단입니다. 벌써 사랑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교역자에게는 성경 가르치는 일만 기대하세요. 교역자가 예수님 100% 모범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닮지만 미흡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교역자가 가르치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배우고, 기도,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인 권면 순서를 맡고 세 가지를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설교를 잘 듣고, 성경 공부에 열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든지 자세히 듣고, 증거자가 설교하는 목적을 깨달으면 은혜 안 되는 설교가 없습니다. 교역자는 성도가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면 보신탕 대접 받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설교 구상에 더 큰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 화목입니다. 빌 2:1~4에 보시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아(상호 유익)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신 말씀이 바로 성도의 화목을 교역자가 기뻐한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교역자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딤후 1:6에 보시면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유쾌하게 해주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격려하고, 치하하고, 협력하는 뜻을 나타낼 때 교역자가 더 큰 힘을 얻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웠으면 가만히 기다려야 잘 붙습니다. 더 잘 피우기 위하여 이리저리 볶으면 불도 꺼지고, 자신은 추워집니다. 그래서 격려와 협조만이 공생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교역자를 위하세요.

 

제76과 성도의 사명 (요 15:16~27) 목록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성도에게 주신 사명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을 예사로 읽지 마시고, 사명을 찾으면서 읽으신다면 새로운 교훈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1. 16절을 보시면 세 가지 사명을 말씀하셨는데 “과실을 맺고, 과실이 항상 있게 하며,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 다 받게 하라” 하셨으니, “기도 성취를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1) “과실을 맺으라” 하셨는데, 이 과실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과실은 지혜로운 농부처럼 노력을 하여야 맺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열매의 종류가 많습니다. 회개의 열매(마 3:6), 의의 열매(잠 11:30, 히 13:15), 선한 행실의 열매(마 7:17, 빌 4:17),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23, 엡 5:9), 찬송의 열매(히 13:!5), 전도의 열매(롬 1:13) 등이 있습니다.

2) “이 열매들을 항상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사명의 연속성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잠자듯 하거나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여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기도 만능의 생활”을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격식을 갖춘 기도도 잘 하셔야 하지만, 기도생활을 원만히 유지하시려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부끄럽지 않게 유지하는 것과 기도를 마음의 묵상으로(시 19:14) 24시간 유지하는 생활이 필요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서로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17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일이 자기의 믿음 발전에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을 때는 옹졸한 마음이나 편협 된 마음을 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을 오래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점점 마음이 넓어지지요. 그래서 자신의 부족을 더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서 이웃을 사랑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잘 안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는 용서도 할 수 있고, 원수처럼 생각하였던 것이 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적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셨는데(엡 1:4, 요 17:9), 제자 되는 선택은 예수님이 하셨으며(마 28:19)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고, 또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3:1). 성도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하여 모든 이웃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다면 큰 자유를 맛볼 것입니다.

3. 세속을 멀리하는 사명입니다. 19절에서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평안과 낙으로 살기 어렵고, 또 풍요를 누릴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혹 넉넉한 것이 있으면 없는 사람과 나누어야 하고, 항상 일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사실상 세상의 낙을 누리면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잠깐이다. 나는 나그네다” 하면서 멀찍이 보고 멀찍이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 많이 못쓰는 것이나 출세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줄 아시고, 멀리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인 줄 아셔야 합니다(요일 2:15). 세상 재미 끊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취하면 넉넉히 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 금식하는 용기로 세속을 멀리하면 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생활의 맛을 아는 사람이 다른 구경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성도가 세상과 벗 되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말씀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약 4:4).

4. 고난과 핍박을 견딜 사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피하려 하고, 이적을 체험 하여서라도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성경에는 고난을 권장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20절에 보시면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한 것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하리라” 하신 말씀은 종이 주인과 함께 핍박, 고난당하는 것을 의당히 여기고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행 14:22, 롬 5:4, 고전 13:17, 고후 12:7, 골 1:11, 계 2:3 등에 보시면 고난을 견디는 것이 크게 유익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5:11~12, 요 16:33, 벧전 1:7). 고난을 구차하게 생각지 마시고,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시험문제로 알고 잘 풀면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5. 증거의 사명입니다. 26절에서 “성령님이 증거하실 사명”을 말씀하셨고, 27절에서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증거자는 성령님께 잡힌 자입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고, 진리를 증거하시며 가르치시고, 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요 14:26, 15:26, 16:13) 인간 사역자를 세우시고 은사를 주셔서(행 8:26, 10:7, 16:6~10; 고전 12:7~10)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 중에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역이 으뜸입니다(요 14:26). 이상의 말씀에서 성도의 사명 일곱 가지를 성실히 감당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7과 바울의 기대와 소망 (빌 1:20~21) 목록으로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1. 우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렸지만, 오늘의 성도들이 현실 탈피나 현실 초월을 못하여 부끄럽게 생각 안 해도 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할 뿐, 인간을 의식하거나 세상적 경쟁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재물을 가졌습니까? 명예를 가졌습니까? 출세를 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성도들이 그런 것을 대단하게 여기면서 사람이 안 알아주는 것을 고민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노처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40대 여인이 생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줄 압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리고 유행을 따르지 못하거나 의복이 세련되지 않으면 출입도 못하는 예가 있습니다. 성도가 그런 장벽을 넘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기고, 오직 자기의 본분을 다함으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2. 항상 온전히 담대한 것입니다. 이 담대함이란 연약을 초월할 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사는 성도는 근검하게 살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정당하고 떳떳하여야 합니다. 말과 행실에 구김살이 있으면 안 됩니다. 정의에 가책 받거나, 자유와 여유가 없을 때는 담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요 8:32),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공급 받는 은혜도(히 4:16; 마 6:8, 32)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식당에서 음식이 남으면(버린다고 할 때) 꾸려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분을 자동차에 태우니까 “왜 승합차를 타십니까?” 하고 놀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근검 생활하고 실리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또 “나는 인생을 부족하게 산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대가로 남은 여생을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 생활 속에 나의 철학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즉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셨으니 만큼(마 19:20~23) 성도들도 그런 생활을 힘쓰면서 담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명성(존귀)을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예수님에게 욕이 돌아갑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너무 성실하게 하니까 같이 근무하는 군인이 “기독교인으로 너처럼만 하면 네가 믿는 예수에게 욕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다른 군인으로부터 거짓말을 한 일로 지적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너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거짓말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하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전도자가 택시 운전사에게 전도를 한즉 목사 설교를 들으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이 어떤 큰 교회 목사를 승차시켰는데, 뒷자리에 같이 앉은 여전도사에게 “아무개 교인 왜 교회에 안 나왔느냐?” 하니까, 전도사가 대답하기를 “교회가 멀어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 돕겠다고 해요” 하니까, “고런 못된 것이 있나” 하고 민망할 정도의 욕을 하더란 것입니다. 목사가 성도의 취한 태도에 대하여 칭찬을 못할지언정 욕을 하니 그런 목사의 설교를 들어 무엇 하겠느냐? 하였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성도의 언행이 중요한 것입니다.

4. 생사를 초월하여 사명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살든지 죽든지” 하셨고, 21절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생사문제를 초월하셨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생사를 초월하신 것은 오직 복음 전도를 위해서인 것입니다(행 20:24). 성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가장 값진 일을 선택하여, 거기에 생사를 걸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고전 10:31, 갈 4:19). 며칠 전에 저의 원고를 정리하는 목사님과 원고를 주고받는 교환을 저희 딸 결혼식 하는 예식장에서 주고받기로 하자 한즉, “분주하실 터인데 가능하겠느냐?” 하기로 “딸의 결혼식보다 원고를 주고받는 일이 더 중요한즉 그것이 우선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은 지상의 어떤 일들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 생사를 초월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살펴보면 중요하게 여기신 일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 본분 지키는 일이었고(아무 일에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 다음에는 전도하시는 일이었으며(행 20:34), 그 다음에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는 일이었고(갈 4:19), 또 그 다음에는 교회를 잘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27절). 바울 사도는 교회를 잘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일심으로 서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받은 은혜와 은사에 따라서 꼭 할 수 있는 일과 목표를 정하시고, 뜻있는 일에 진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첫째는 이 달란트 사역(말씀 집필을 끝내는 일)입니다. 이 사역이 잘 끝나고 널리 퍼질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78과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10~11) 목록으로


바울이 신앙적 변화를 일으켰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엇을 하리이까” 한즉 “다메섹에 들어가면 네가 할 일을 말할 자가 있다” 하셔서 다메섹에 간즉 “아나니아”란 사람이 계시를 받아 “너는 하나님이 이방에 전도하는 그릇으로 쓰실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무엇을 하리이까?” 하면 하나님이 어떤 계시로 응답하시는가? 할 때, 하나님은 만인이 공통적으로 믿고 생활할 수 있는 원리를 성경으로 다 주셨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계시를 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에 충분한 말씀을 성경으로 주셨다는 사실과(요 21:25, 딤후 3:16, 계 22:18~19) 표준 계시가 끝났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1:1). 그렇다면 모든 성도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성경으로 지도를 받으셔야 하는데, 그 방법을 잘 모르는 성도들이 계실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이 하라는 것만 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은 안 하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항상 어떻게 믿을 것과 어떻게 행할 것을 성경에서 지도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것을 권장하셨고, 죄와 불의는 배격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직업 선택이나 진로 문제 선택에 대하여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누구를 위하여 방언 기도를 한 후에 “당신은 교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는 말을 듣고 “기도의 사이비한 응답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32년 전에 청계산 기도원의 대표자가 청도의 어떤 집사를 위하여 기도한 후(그가 사업차 경산으로 이사를 가려 한다 하니까) “집을 떠나면 죽으니까 가지 말라” 하였는데, 그 집사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자기 뜻대로 이사를 갔고, 그 후 3년이 되도록 죽지 않고 건재하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개별적인 응답으로 진로를 정한다”는 유혹은 30년 전에도 있던 일인데, 아직도 성경관이 바로 정립되지 못한 성도들이 성경을 자기 생활의 지침으로 응용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적 교육이 미흡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진로 문제를 두고 어떻게 처신하셔야 할까요?

1. 우선 혼사 문제는 주 안에서(고전 7:39), 자원함으로(행 23:1, 24:16; 벧전 5:2), 효도의 차원에서(엡 6:1) 시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 직업을 바꾸는 문제입니다. 성도가 직업을 바꾸려 할 때 현재의 직업으로 부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으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즉 살만 하면; 잠 30:8, 딤전 6:8) 그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이상은 욕심으로, 지나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전 7:16에 보시면 “하나님이 나눠주신 대로, 부르신 그대로(사명자)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할 때 문제가 됩니다. 성경에는 가난 해결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와 베푸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십일조로 재물 모으는 것은 율법적임. 따라서 신약시대에 권장할 일은 못됨. 필자도 과거에는 그런 설교를 하였음). “믿음으로 노력하고 의롭게 살면 주신다”는 말씀을 창 3:19, 욥 8:5, 눅 6:38, 마 6:26~34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에 꼭 직업을 바꾸던지 취직을 하셔야 할 경우입니다. 이런 때에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적당한 직업이나 일감을 주십쇼” 하고…. 그리고 인력 구하는 곳에 이력서를 넣거나, 또는 제3자의 예기치 않은 인도로 일감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성도는 그런 절차를 우연으로 느끼지 마시고, 반드시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의 인도로 믿고, 감사하며 성실히 응하시기 바랍니다. 이때에 자기의 취미와 소질, 그리고 신앙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조건을 참작하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직업이 취미와 소질에 부합하면 더 좋으니까 그런 것은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고, 또 신앙에 지장 주는 일은 거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물질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봉사의 사명과 영적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섬기러 오신 분인 것처럼(마 20:26~28) 이웃 봉사에 대한 사명은 항상 열려있지 않습니까?

4. 결론적으로 어떤 장로님이 교역자 되는 문제를 의논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교역자는 봉사하는 일을 하기 전에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 하니까 성경 지식이 상당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가르침에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역자 포화 시대인 만큼 교역자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문제와, 대가(사례나 생활비) 바라는 문제를 포기하고 실천할 수 있는 소원과 자신감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나타나는 은사와 사명의 소질을 점검하면서 결심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빌 2:12에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하셨고, 또 요 10:2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복음 사역자 되는 일에 불법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할 일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되, 자신의 위치에서 과욕을 갖지 않는 것과 믿음 중심, 봉사 중심, 사랑 중심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79과 빚을 갚는 생활 (롬 1:1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빚을 갚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는 빚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있는데, 마땅히 져야 할 빚이 있고, 안지고 살아야 할 빚도 있습니다. 져야 할 빚은 신앙적으로 갚아야 할 빚이고, 안 져야 좋을 빚은 재물의 빚입니다.

1. 먼저 생활이 어려워서 부득이 빚을 지고 사는 성도님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신체에 장애가 있든지, 소득의 일터에 변화가 있든지, 아니면 사고를 당하여 빚을 져야만 하는 성도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속히 생활 기반을 잡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몇 백만 원의 카드 빚 때문에 절도, 강도, 살인, 자살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며, 빚이 저렇게 무서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시 40:2에서 “하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끌어올려주신다” 하셨고, 왕하 4:7에서는 빚으로 인하여 두 아이를 뺏길 위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사례가 있습니다. 혹이라도 게을러서 소득을 적게 하거나, 과소비로 지출을 더하거나, 몸으로 노력하지 않고 빚으로 투자하여 이를 보려고 빚을 진 분들은 빚을 진 책임이 더 많은 만큼 속히 자립하셔야 할 것입니다. “빚을 졌으면 이자를 갚아야 한다” 하셨고(마 25:27), “호리라도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나오지 못한다” 하셨으며(눅 12:59),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지 말며, 자급자족하라”고 교훈 하셨습니다(살후 3:8~10). 요즈음 삶의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싼 이자를 알면서도 예사로 빚을 얻어 쓰는 것을 봅니다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빚보다 나은 것이 이자 없이 빌리는 것이지만, 그것도 예비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눅 6:35에 보시면 “원수를 사랑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말며 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리는 것이 빚을 얻는 것보다는 못하지만(신세를 지는 것이니까) 다시 돌려줄 것이니까 바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라”고만 하셨고, 바라거나 누를 끼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눅 6:34, 38; 고후 11:9; 살전 2:9). 왕하 6:5에 보시면 도끼를 빌려 쓰다가 물에 빠뜨린 일이 있었고, 눅 11:5에 보시면 밤중에 친구 집에 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는 내용이 있지요. 얼마나 민망하고 불편하겠습니까? 며칠 전에 수도가 동파되어 추운 날 이웃집에 가서 물을 구하는데 여간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급적 빌리거나 꾸러 가지 않기 위하여 미리 예비하는 성격입니다. 시멘트벽에 못을 박으려면 못, 망치, 드릴, 시멘트 송곳, 전깃줄, 트랜스, 발판 의자, 청소 도구, 여덟 가지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만 없으면 빌리러 가야 합니다. 남의 신세를 져야 합니다. 어떤 이는 먹고, 직장 가고, 잠자는 것, 세 가지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자기 주택을 관리하고 살림을 한다고 할 때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또 “빌어먹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며”(눅 16:3), “채무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 하셨고(잠 22:7), 따라서 “남의 빚에 보증도 서지 말라”(잠 22:26) 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성도가 신앙적으로 져야 하는 빚입니다.

1) 전도의 빚입니다. 롬 15:27 말씀이 그 뜻입니다. 바울이 믿지 않을 때 전도를 가로막고 핍박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역으로 갚으려니까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도 타인의 전도를 받아 믿었으니까, 자신이 그 빚을 갚는 전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빚입니다. 롬 13:8에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것도 지지 말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받았고,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의 사랑을 받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또 이웃이 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을 지탱하는 것이고, 소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소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십 년을 같이 살면서 소가 일을 해주고, 새끼를 낳아주어 그 집을 일으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겹게 그 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해롭게 하지 않은 것만이라도 큰 은혜로 느끼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시되 빚 갚는 심정으로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요일 4:11).

3) 육신의 빚입니다. 롬 13:8에 보시면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육신”이란 뜻이 바로 “살크(부패성)”이기 때문에 인간 정욕대로 살아온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율대로 살지 않고 자기 정욕, 자기 욕심대로 살면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갈 5:24~26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며(자기 뜻으로 살지 말고) 성령으로 행하여야 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며, 서로 격동하거나 투기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산 것이 육신대로 산 것이고, 육신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빚을 갚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갈 6:17, 25). 물질의 빚은 되도록이면 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를 끼치는 것과 빌리는 것도 없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다만 전도의 빚, 사랑의 빚, 육신의 빚을 갚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신 28:12에서 “복 받은 백성은 꾸어줄지언정 꾸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80과 후대에 전하라 (시 78:1~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교훈을 주시고 비밀한 말을 전하리니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이며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하시고, “이를 자손에게 알게 하라”(5절) 하셨으니 “…저희로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조상들의 잘못된 것을 알아서 패역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시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훈과 비밀을 후시대에 계승시키라”는 명령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교훈을 신 6:6~7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4대에 걸쳐 신앙 계승을 잘한 집안입니다. 육신의 대도 끊기면 서운한 일이지만, 신앙의 대는 꼭 혈육으로 잇는다는 것보다도 후시대에 나타날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의 권속인 만큼 신앙의 대를 바르게 계승시키는 것이 크게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계승시켜야 하는가? 하면

1. 성경 말씀을 보존, 계승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66권만 진리로 믿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외경 11권을 포함하여 77권을 정경으로 믿으니 문제가 있고, 또 유대교는 구약만 믿고 신약을 믿지 않으며, 모슬렘 단체 즉 마호멧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믿되 주후 622년에 마호멧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코란경”도 꼭 같은 신의 계시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신교 성도들은 진리를 가감할 수 없다는 사실과(계 22:18~19) 예수님의 마지막 계시로써(히 1:1, 계 1:1) 표준 계시가 끝났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하며, 이 사실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계시가 일정하지 않다면 큰 혼란이 오고, 모든 사람들이 자율 종교를 창시하게 될 것입니다.

2. 성경의 번역을 옳게 하여 성경을 기록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마 5:18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 하신 말씀에 의거하여 성경의 일점일획을 중요히 여기다 보니 번역상의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세계적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2003년도에 105개국, 129개 언어이며,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도 지금은 여러 종류인 줄로 압니다.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여러 종류가 나왔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개역성경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 개역이 원문에 가장 가까우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족한 번역을 꿈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힘 드는 일이라도 시대 언어에 맞고, 원문의 뜻과 같은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시자는 것입니다. 주석을 많이 달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바른 해석을 후시대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벧후 3:16에 보시면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즈음 이단이나 불건전한 사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개가 예수라는 주장, 단군이 단 지파 후손이라는 주장, 예수님의 재림이 어느 날이라는 주장, 선악과의 범죄는 음행이라는 주장 등…,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해설들이 쏟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에 성도들은 바로 배우고 바로 전달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 남겨놓는 강해문이나 문서들이 후시대에 빛을 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른 번역자가 필요한 만큼 바른 해석 전달도 필요한 것입니다.

4. 생활 전통입니다. 고전 11:1~2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셨고, 또 “사도의 유전도 전하여 준대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의 유전은 성경이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나타나고 있는 성도의 생활이 사도의 생활과 같습니까? 같지 않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우선 시대와 환경에 큰 차이가 있지요.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를 닮으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방법이 아니고, 진리를 알고 믿는 일, 사랑을 실천하는 일,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그 정신을 본받아 행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외식을 피하고, 세속을 사랑하지 않으며, 약한 자의 입장을 살려주고, 핍박에 타협하지 않으며, 이기주의를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것과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과 사람이 알아주는 일에 따라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도의 전통을 키기고 전달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갈 1:10).

5. 교회의 생활 전통 계승입니다. 성지 순례를 해보면 기념 예배당이 많은데 전부 예술성을 나타냈습니다. 예술성은 기술의 표현입니다. 건물은 물질이고, 하나님은 믿음을 좋아하시며, 성도가 예수님 닮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 생활의 전통을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 닮는 일에 목표를 두어야 하겠지요. 대체적으로 교회 생활이 피곤합니다. 헌금, 봉사, 예배, 교육의 분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힘들고 피곤한 행사들이 다 예수님을 닮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힘들고 피곤한데도 지식 있는 믿음과 열매 맺는 사랑 실천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생활 전통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겁고 피곤한 짐을 덜어주고, 효율적인 성경 교육을 시켜서, 스스로 예수님을 닮아 사는 일을 최고의 가치 있는 일로 여기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 원문 계승, 성경 바른 번역 계승, 사도적 생활 전통 계승, 예수님을 닮도록 지도하는 교회 생활 전통을 계승시켜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1과 미룰 수 없는 때 (요 7:6)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뜻은 뒤로 미룰 수 없이 즉시 시행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룰 수 없는 때”가 무엇인가?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때를 정하고 일하신다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다”(전 3:1) 하셨고,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셔야 할 때가 있으며(갈 4:4,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여인의 몸에서 나게 하심), 돌아가실 때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때를 맞추시기 위하여 핍박을 피하신 일도 있었고(요 7:1~8), 예루살렘 상경을 늦추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7:6, 8:20). 그 외에도 영광의 때, 이방인의 때, 징계의 때, 수명의 때 등이 있습니다(요 12:33, 단 9:2, 눅 21:24, 행 17:26). 기도의 응답은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릴 필요 없이 시급하게 시행하여야 할 일들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성도에게 준비되어 있는 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그때가 준비된 것입니까?

1.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급히 할수록 좋은 것일 뿐, 적당한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 5:23에서 “일이 커지기 전에 급히 사화하라” 하셨고, 호 3:13에서는 “범죄의 시일을 따라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호 4:9, 12:2). 그러니까 죄는 질병과 같아서 초기에 발견하고 초기에 치료할수록 유익한 것처럼 죄는 회개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 7:12에서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눅 15:20).

2. 은혜 받는 일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때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아야지…, 내가 아무 때 휴가 내고 부흥회 할 때 은혜를 받아야지…” 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이 곧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지지 않았습니까?(고후 6:2) 은혜는 시간을 정하고 앉아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은혜를 받았고, 모세는 양을 치다가 받았으며,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 은혜를 받았고(왕상 19:19), 사울은 길 가다가 갑자기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행 9:3) 그러니까 은혜를 받는 데는 무슨 때와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은혜를 사모하고, 구할 수 있으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호 10:12에도 보시면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의를 비처럼 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후 6:2의 “지금”이란 신약시대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성사되고 계시가 완성되며 성령님이 상주하시고 이방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현재를 뜻한즉, 차를 탄 상태에서도 기도하시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십시오.

3. 전도 사역을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한다”는 말은 육체의 양식이고, 영혼의 수확은 이미 거둘 때가 되었으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요 4:35). 이 말씀은 전도의 때가 항상 준비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전도의 사명을 가진 자가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 하였을 때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1~62) 하셨고, 또 “부친을 장사 지내고 주님을 따르겠다” 하였을 때도 “죽은 자들로 저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1) 하셨으며, “빨리 시내의 사거리로 가서 어려움 당한 자들을 초청하라”(눅 14:21) 하신 말씀은 다 전도의 시급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적기를 놓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도의 기회는 앞당길수록 좋을 뿐, 특정의 때가 있는 것이 아닌즉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충성의 때도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25:16에 보시면, 주인이 종들에게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기고 “장사하라” 하였을 때 (주인이 속히 올 줄로 알고), 바로 가서 장사한 사람만 이를 남기고, 주인이 왔을 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받은 자가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게으름 피고 방탕한 자들은 다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24:48, 눅 12:45). 개인적으로 예수 잘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교회 생활 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행 20:28, 엡 1:23).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인적으로 사명적인 일(말씀 사역)을 행할 때, 자기의 충성의 시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줄로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 계 2:3, 10에서 “예수님은 사명자의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아신다” 하셨고,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으니까 충성에 몰두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는 것이 큰 행복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에 몰두하려면 사명 사역을 취미로 알고, 거기에 끌려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너희의 때가 준비되어 있다” 하심은 바로 자기의 부름 받은 시기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세상 떠나는 일이 우리 눈앞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부자 되어 향락을 누리려던 어리석은 사람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말씀이 그 사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닐진대 우리의 죽음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을 준비는 시급할 뿐, “천천히 해도 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월도 아껴야 하니까요(엡 5:16). 이상 다섯 가지 미룰 수 없고, 준비되어 있는 때를 확실하게 이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82과 중요한 일들을 생각함 (마 22:37~40) 목록으로


“중요한 일들을 생각함”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중요한 일들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자기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의 책임이나 부모의 책임자가 되기 싫어서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합니다. 겨우 벌어서 혼자 먹고 사는 것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1.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계명의 강령으로 주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중요한가 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시행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랑하는 일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시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일을 말할 때 “사람 노릇을 한다” 또는 “인생의 본분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인생의 본분이란 기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두고(전 12:13), 일반 사람들은 예절(길흉 대사에 관심 갖는 것)에 두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가까운 연고자의 길흉사에 인사를 못하면 “사람 노릇을 못했다”고 합니다. 길흉 대사를 크게 과장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간에는 관심을 갖는 것이 좋은 미덕입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큰아들이나 큰딸이 부모의 위치에서 동생들을 살펴줄 책임이 있고, 동생들은 맏형이나 맏누이를 어른으로 섬겨야 집안의 중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어느 단체나 어른이 있어야 하듯이 가족 단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큰형이 할 도리를 안 하거나 못하면, 주위에서 “그것도 사람 노릇 못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생활의 문화가 가부장 제도에서 개인주의로 변화되어 가고 있고, 여러 가지 전통과 미덕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형제간의 친교와 우애는 변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중에도 부모의 유산을 받아서 부모의 입장을 지켜주는 장자의 도리를 시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장자가 그 일을 감당할 입장이 못될 때는 다른 동생에게라도 그 책임을 넘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친척들이 분산하는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

3. 성도들이 생활함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생각해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자기에 관한 일입니다. 가족이 먹고 살아가는 생활의 자립, 꾸러 다니지 않고 누구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생활의 자립입니다. 그리고 집안 살림을 정갈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자기 집을 어지럽게 하고 정돈을 못하면 “살림을 엉망으로 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2) 이웃에 대한 책임입니다. 이웃은 국가와 사회와 측근(친척, 지우들)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국가에 대한 백성의 의무가 성실하여야 하고, 또 사회에 대한 도의적 책임(성도는 전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에도 봉사적 책임을 앞장서려면 물질생활을 여유 있게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성도가 소득의 1/10을 교회에 드리고, 또 1/10을 이웃을 위해 쓴다면 상당한 책임을 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넉넉한 재산 기반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못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돈을 벌고, 근검절약 하며, 저축해서, 재정 기반을 다져놓고, 여유 있는 고정수입으로 자신의 사명과 이웃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갈 6:2을 보시면 “짐을 서로 지라”고 하셨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위하여 조금씩이라도 짐을 져준다면 사회의 질서와 균형이 잡힐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상당하게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것이 적은 정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셔야 하고, 성경을 연구하셔야 하며, 예배와 친교 등 교회의 사명(이웃이나 교역자를 섬기는 것)을 하셔야 하니까 상당한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 시행하는 일에 정신적 집중을 많이 하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4. 그런데 성도가 초신자이거나 힘이 약하여 이 세 가지 중요한 일들을 다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하셔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빨리 성숙하여 신앙생활의 정상에 서십시오. 올라갈 때 힘이 들지만 올라가 놓으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동서남북을 멀리 볼 수 있는 것이 등산의 기분인 것처럼 신앙생활도 틀만 잡히면 힘들지도 않고 하나님이 크게 도우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힘이 없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자기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일을 다 할 수 없을 때는

1)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터 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은 복을 받는 일이기 때문에 자원을 공급 받는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일보다 신앙에 관한 일이 더 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6:33)

2) 자기 일이 중요한 것 같아도 이웃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웃에 줄 것을 주고, 이웃에 할 일을 해야 하나님이 주실 것을 주시기도 하시지만(눅 6:38), 지탄의 화살을 안 받습니다. 이웃에게 책임을 안 해보세요. 금방 비난의 여론이 떠돕니다. 그래서 이웃에 대한 책임이 앞서야 하는 것이고,

3) 마지막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청소가 덜된 것이나 음식을 초라하게 먹는다 하여 비난할 자도 없지만, 비난을 받아도 그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다 중요하지만 중요한 일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 다음이 이웃에 관한 일이요, 셋째가 자기의 생활에 관한 문제란 점을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11. 성직에 대한 사명


제83과 사도 후시대의 성직 (딤전 3:15) 목록으로


“사도 후시대(즉 오늘의 시대)의 성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하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후시대의 성직이 성경 어느 부분에 근거하여 계승되고 있으며, 또 그 성직의 책임적 성질은 어느 정도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 먼저 성직의 의미를 정의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직분을 받고 교회의 모든 일에 충성하는 직임을 뜻할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대행하여 사역하는 영적 권위의 직분을 뜻할 수 있습니다. 교회 자체는 거룩한 기관이지만 일반적으로 섬기는 직임(행정과 물질 봉사 사역)을 성직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치리 장로와 그 이하의 직분을 성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계가 말하는 성직자는 목사를 뜻하고, 목사가 성직인 이유는 예수님을 대행하여 교회의 대표가 되며, 말씀 전문가가 되고, 또 성례와 축도로 신령한 은혜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로써 성직자가 구별된 존재가 된 것인데, 그것이 성경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를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성직의 유래를 살피면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요,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자입니다. 아브라함도 선지자였고, 모세도 선지자였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 와서 선지자와 제사장 직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계시의 실체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이 속죄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맡으신 것인데,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을 것을 아시고, 성직의 후계자로 사도들을 세우셔서 계시(신약성경)와 행동으로 기독교의 기초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에는 사도들이 특권적 지도에 따라 교회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12 사도를 아실 것이고, 그 다음에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가 되었습니다(바나바, 행 14:14, 26). 그런데 주후 100년경까지 오래 산 사도가 요한이고, 마지막 사도로서 성직을 후계자에게 계승시킨 분이 바울 사도입니다. 여기의 마지막 사도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도 시대까지 계시를 주어 완성하셨고(히 1:1, 엡 3:3~5), “선지자와 사도들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엡 2:20). 그러니까 사도 시대까지는 계시를 받은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도 후시대에는 완성된 계시에 의하여(새로운 터를 닦을 수 없고) 오직 집만 짓는 것처럼 생활하고 지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3:10).

3. 같은 사도직이라도 후계자를 세움에 있어서 사역자와 사역의 원리를 말씀하신 분은 바울 사도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성직의 원조라 하지만 “그의 신앙고백이 천국 가는 열쇠가 되고 교회의 기초가 된다” 하셨을 뿐(마 16:18~19) 후계자 계승에 대한 교훈을 나타낸 일이 없으며, 사도 요한은 바울 사도보다 오래 사셨지만 후계자 계승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오직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다시 쓰신 사실과(요 21:15~17) 성경의 마지막 글에서 기존 계시를 사수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계 22:18~19).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장로회에서 디모데를 안수한 후(딤전 4:!4) 그를 교회의 감독이라 하셨고(딤전 3:1), 그 감독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신약 교회의 지도 방침)을 딤전 3:1~7, 15, 그리고 목회 서신 전반에서 교훈하신 것입니다.

4. 중요한 것은 사도적 성직이 사도 아닌 성직자로 연결되는 고리를 찾는 것입니다. 사도가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계시로 나타내셨으니까 그 계시에 의존하면 되지만, 사도 후시대는 성경만 있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한 말씀으로 사도 후시대의 성직 계승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이 설명해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상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사도들과 장로회(신약의 장로, 행 14:23)에서 안수로 직임을 주었는데, 그 직임의 이름이 감독이고(딤전 3:1), 감독으로서 교인을 지도하는 성격이 목자(목사, 엡 4:11)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없을지라도 그 직임을 수행하라는 말씀은 본문에서 “만일 내가 지체하면(못 올 수도 있다는 유언임)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한다” 하심으로 신약 시대의 성직을 연결해 주셨고, 또 딤후 2:2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하시므로 그 다음 후계자 세우는 방법까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5. 따라서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장로회 구성이고, 또 하나는 목사(감독)의 직무 성격입니다. 장로회 구성은 교인들이 자격을 보고 민주적으로 세우며(행 1:26, 6:5), 또 그 연합체를 구성하면 됩니다. 그것이 현 제도입니다. 다음에 목사의 직무 범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감독은 본을 보이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벧전 5:3, 딤전 4:13), 책망(권징)도 할 수 있습니다(딛 1:9, 2:!5). 세례나 성찬은 성직자에게만 국한할 일이 아닌 것 같고(행 8:38, 고전 11:22), 축도의 성격과 근거에 대하여(마 10:12~13, 고후 13:!3) 과연 목사가 사도적 권위를 계승해도 되는가를 더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영적 권위는 성경에만 국한하고, 성직자는 교인의 모범자 또는 성경 교육의 전문 지도자로만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사도 아닌 자가 사도적 권위나 제사장적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교회헌법 재탐구의 예배모범 부분을 참고 하십시오).

 

제84과 성직을 전달함 (딤후 2:1~4) 목록으로


“성직을 전달함”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목사직의 의미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구약시대의 성직을 살피면 선지자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계시에 의하여 행동한 사람들인데, 어떤 의식에 의하여 임직을 하거나 계승시킨 일이 없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의하여 필요할 때마다 직접 쓰셨습니다. 그 후에 선민제도가 생긴 후 제사장을 세울 대 선지자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여 세웠는데, 이것은 모세가 아론에게 임직을 시킨 것과 같고, 제사장은 세습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왕은 선지자가 세웠지만, 신령한 직이 아니므로 목사직과 큰 관계가 없습니다. 구약시대가 끝날 때 예수님이 계시의 주이시고, 참 제사장으로 오심으로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사역과 제사장의 사역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사역이 계시라면 예수님의 출현이 계시의 절정이고, 구약의 제사장은 참 제사장의 모형인 만큼 예수님이 그 책임을 다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만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마 17:5).

2.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할 때 우선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셨고,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셨으며,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감동하여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보이는 모범은 제자(사도)들의 모범과 성경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우신 의미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하시므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본을 보였고, 성도들로 사도들을 본받게 하신 것이며, 아울러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 시대에 성직자에게 주신 모범과 교훈은 성경에만 남게 된 것입니다.

3. 그러면 선지자와 사도직이 신약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할 때

1)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표준계시를 받는 특수은사는 제외되고, 계시된 것만 밝혀 증언하는 은사를 주신 것이고,

2) 또 성경 계시로 기독교의 기초를 닦아주셨기 때문에 성경이나 기독교를 진리로 입증하는 능력은 주시지 않고, 그 기초 위에 집을 짓는데 필요한 은사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뜻은 성경에 근거한 믿음과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권위나 은사를 세습하려 하지 말고, 오직 계시의 정신을 받아서 성경만 잘 해석하여 믿고, 가르치며, 생활하면 되는 것입니다(고전 3:10~11, 엡 2:20).

4. 그러면 이 성직이 사도로부터 교회 시대로 넘어온 고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할 때 이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주신 교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란 용어는 엡 4:11에서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목자로 번역한 “포이멘”과 같은 말입니다. 목양자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의 목양자 되고 목회자 되는 근거와 교훈은 예수님과 사도를 비롯하여 디모데에게 주신 교훈이 있고, 사도에서 일반 성직자로 넘어오는 고리는 디모데에게 연결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네가 사도 후시대에 성경에 기록된 첫 번 교역자인즉)

1)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교역자 자신이 먼저 강해야 함),

2)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사명의 성질)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뜻은 “자기 되는 것, 즉 성직자의 자질과 실력 갖추는 일” 등을 확보하라는 뜻이요, “충성된 자에게 부탁하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만한 사명과 능력이 어느 정도 구비된 자에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맡긴다”는 말씀을 “부탁한다”는 순화적 용어로 사용한 것은 성직이 명령에 굴하는 것이 아니고 지도는 하되 자발적 순종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을 나타내신 줄 압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말씀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부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직을 유시하라는 뜻이 아니고, 많은 성도들의 공인에 의한, 즉 많은 성도들이 “그 사람쯤이면 성직자 됨이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자로 세우라는 뜻입니다. 계시에 따라 성직을 받는다면 대중의 인심이 필요 없지만 성도들이 세워서 성도들을 지도하게 하는 사역자인 만큼 많은 증인들이 자격의 기준을 세우고 가르치고 다듬어서 세우라는 뜻인 것입니다.

5. 노회는 성도의 단체이고, 아울러 성직자의 단체입니다. 이 단체가 곧 많은 증인들입니다. 목사로 세울만한 자격이 있어서 세운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성직을 넘길 때 장로회(신약 교회의 원로급)에서 교훈하고 안수하여 전달한 말씀이 있습니다. 딤전 4:14에 보시면 “장로회에서 안수할 때 예언으로 교훈하셨다” 하셨고, 딤후 1:6에서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안수하셨다” 하였으며, 딤전 5:22에서 “무자격자에게 함부로 안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안수는 전달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드리는 말씀은 성직의 근거가 예수님과 사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도가 없는 시대에 목사의 권한과 모범은 사도로부터 인계 받은 디모데(목회 서신)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85과 어떻게 목회할까? (딤전 4:11~16) 목록으로


제가 “다니엘의 좋은 점”(71과)이란 설교문을 기록하면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는데, 그 뜻은 고국의 자유 독립과 양심에 거리낌 없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뜻(꿈)을 정하고 목적을 이루어 나감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 자신의 가진 꿈도 말하여야 하겠기로 “나는 말씀을 해설하여 펼치는 꿈과 목회 말년에 단 1년만이라도 바른 목회를 하고 싶은 꿈이라”고 기록을 하였는데, 꿈대로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다음날 “단 1년만”이라는 용어를 단 10년만으로 고쳐서 기록을 하였습니다(왕하 13:18~19).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참 목회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려면”이란 글도 썼습니다. 그 제목에서는 “개척의 방법”을 기록하였지만, 이 시간에는 어떤 성도, 어떤 교회를 만드는 목회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에게서 좋은 교인이 나올 것이고, 좋은 교인들이 모여야 좋은 교회가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인 것입니다.

1.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는 교인을 만드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롬 8:29)이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시고, 현세욕 없고, 사랑만 있으시고, 죄와 불의에서 멀리 떠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면 목회자 자신은 얼마나 닮았으며, 교인 중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 지를 늘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서 예수님 닮은 교인이 적으면 칭찬받을 목회가 아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목회자가 먼저 예수님 닮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교인이 예수님 닮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교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사 66:2).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판결문을 읽고 그 뜻을 모르면 변호사를 안 찾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호 8:12) 말씀 앞에 고민하거나,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교인을 보셨습니까? “말씀은 이런데 왜 나는 저런고?”, “말씀은 이런데 이 뜻이 무엇인고?” 하고 묻는 교인을 만드셔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으로 자기의 신앙생활을 확립하는 교인을 만드셔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주일 지키고, 예배드리고 헌금하면 만족하는 경우가 있고, 조금 더 발전하면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감동 줄 만한 설교를 못하면 금방 마음이 불편해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신앙생활이 목사의 설교에 좌우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목사는 늘 고달픕니다.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여 깨달음과 기쁨을 얻고, 연구 자료가 없어서 깨닫기 어려운 것만 목회자에게 물어서 깨닫는 교인을 만드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강해설교가 근본이어야 하고, 긴 설교의 목적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하신 뜻은 사랑 실천을 그런 방법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 자신이 검소하게 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잠 30:8). 목사가 부잣집에 심방할 필요 없습니다. 그 집은 현실적으로 부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4. 말씀 만능을 믿는 교인을 만드셔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모신 줄 믿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신 후, 또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과 함께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믿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적 지도를 받는 것 외에 목사로부터 도움 받을 일이 없어집니다. “예수님 내 집에 오시지 마옵소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마 8:8) 하는 교인을 만드시라는 것입니다. 과거 가난할 때는 목사가 교인 집에 가서 대접 받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비만 상태에 있습니다. 대접 받는 것이 오히려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은즉 심방 대신 성경 몇 장 몇 절로 은혜 받으시오 하면 충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진단과 처방만 해주면 약은 자신이 알아서 사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 만능의 신앙은 말씀과 자기와의 관계를 스스로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에수님만 믿고 허탄한 데 뜻을 두지 않는 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 설교를 듣고 고민하거나 민감하게 느끼고, 그것으로 교역자를 괴롭히는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허탄한 것 때문입니다. 명예 문제, 직분 관계, 특권 관계, 이기주의 문제 아닙니까? 만일 그 성도가 모든 이웃에 대하여 사랑의 자세를 갖거나, 또 남을 더 낫게 여긴다면(빌 2:3) 문제될 것이 없는데, 허탄한 것에 뜻을 두고 그것을 양보 또는 포기를 못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뜻이 바로 허탄한 것에 취미를 못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신령한 은혜의 가치를 아는 성도를 만들어야 합니다(빌 3:8, 고전 9:11). 다시 말하면 마 13:44의 말씀처럼 보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복 신앙으로 기울어지겠지요. 기복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신령한 복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성경의 원리를 알고, 사랑만 실천하며, 사람으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는 성도를 만드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 중심, 사랑 중심의 교회가 되게 하고, 물질우선주의에서 떠나 물질과 상관없는 교회(돈이 없어도 유지되는 교회)를 만들도록 개혁하여야 합니다. 좋은 교인, 좋은 교회가 되도록 목회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남기는 것입니다.

 

제86과 목사 권면 (딤전 3:1~7, 4:11~16) 목록으로


내 나이나 목사 연조로 볼 때 최원로급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배 목사들을 위하여 몇 마디 권면하고자 합니다. 크게 나누어 두 대지만 말씀드리겠는데, 하나는 끌려서 안 될 것과 또 하나는 반드시 끌려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끌리지 말아야 할 것

1) 명분이 없거나 명분이 약하면 동하지 마십시오. 명분 있는 일을 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명분 없는 일을 하면 시간을 소모하는 결과가 오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디를 가자고 할 때 명분이 충족되면 가고, 그렇지 못하면 안 가는 것이 옳고, TV를 볼 때도 유익이 있으면 보되 실익이 없으면 안 보는 것이 옳으며, 돈을 쓸 때도 명분이 있는 일에만 써야 할 것입니다. 즉 할 것과 말 것을 확실히 분별하여, 명분과 실익이 없으면 끝까지 끌리지 마셔야 합니다.

2) 물욕과 사치한 생활과 명예욕과 이성에 끌리지 마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이 바로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험입니다(마 4:1~11). 또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씀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 16:24, 갈 5:24). 성도가 자기 교회 목사를 비난할 때 “우리 목사님은 물질에 너무 밝다”고 하면서 배척하는 상태를 본 일이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법인즉 반드시 물욕을 떨친 상태에서 사명 수행을 하여야 하며, 또 사치에 끌리지 마셔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가난하셨던 생활과 세례 요한의 광야 생활을 예수님이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눅 1:80, 마 11:11). 또 명예욕을 떨쳐야 할 이유는 그것이 성직을 망치고, 상급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기주의를 잘 아십니다. 야곱이 아내 얻기 위하여 봉사한 일과(호 12:12) 무리들이 떡 얻어먹는 맛에 예수님을 따른 것과(요 6:26) 가룟 유다가 돈궤에 뜻을 두고 따른 것까지(요 12:6) 익히 아시지 않았습니까? 명예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총회장을 하라” 해도 사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총회장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요 3:28~30). 다음은 사치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같이 동거하시는 예수님 보고 “좋은 집에 삽시다. 좋은 음식 먹읍시다. 좋은 자동차, 좋은 의복 입읍시다” 하고 권해보세요. 또 “예배당을 더 좋게 꾸밉시다” 해보세요. “야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자동차, 좋은 예배당, 참 좋구나” 하실까요?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세속(세상 사람들의 풍습)에 물들지 않는 것인즉 없는 자들을 생각하자” 하시고 사양하실 것입니다. 또 이성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덕이 안 되고, 그것 때문에 사명선상에서 무너진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목사가 여자를 넷째 얻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도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에 끌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 허비, 물욕, 명예욕, 사치욕, 이성욕에 끌리지 않으면 우선 정상궤도에는 선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끌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말씀에 끌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맛을 모르면 설교가 안 나오니까요. 말씀에 끌리고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마 4:4, 행 18:5). “주의 말씀이 꿀보다 달다”는 말씀을 실감하여야 합니다(시 119:103). 목사가 말씀에 끌리면 설교 준비가 쉬울 뿐 아니라 반사적으로 세상 욕심이 없어집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끊기 어렵지만 폐암에 걸리면 쉽게 끊는 것처럼 성도들도 세상 정욕을 끊기가 어렵지만 말씀의 맛을 알면 세상의 것들이 다 싫어집니다. 꼭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 기도에 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에 끌릴 때 “성령님이 나를 가까이 붙드시는구나” 하고 느끼셔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면 그만큼 하나님도 멀리 계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사역자가 말씀과 기도에 끌리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입장을 살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에만 끌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은 다 사랑의 대상일 뿐이니까요. 교인도 그렇고, 문제 있는 교인도 그러하며,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 교인은 더욱 그러하고, 다른 이웃과 원수도 그러한 것입니다. 자기를 싫어하던 교인이 큰 사랑을 받을 때, 변화되어 충성하는 체험을 해 보십시오. 그때에 미운 대상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희생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4) 합법에 끌리는 것입니다. 노회에서 규칙을 어기고 “이번만 어기자”는 결의를 하더군요. 안 어겨도 되는데 어기는 것은 또 어길 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시 15:4). 법을 어긴 것은 노회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불법을 예사로 행하는 것은 부패의 일종입니다.

5) 마지막으로 끌려야 할 것은 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나타내서 손해 볼 것 같으면 진실을 감추는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있는 자가 병 없는 척하고 혼인을 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큰 악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늙지 않았다는 취급을 받으려고 생일을 감추는 이도 보았습니다. 진실을 주고 손해를 받아야 합니다. 목사가 반드시 끌려야 할 것은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합법과 진실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87과 집사, 교인 권면 (딤후 1:16~18) 목록으로


제목은 집사, 교인 권면입니다.

1. 집사님이나 교인들이나 우선 예수님 잘 믿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1:6).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생활이 성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봉사에 앞서 근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생활 잘하는 법”을 다 아시겠지요? 혹 모르시면 목사님께 부지런히 배우셔야 합니다. “믿음생활 잘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첫째 본분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믿음생활 잘하는 결과는,

1)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가까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가깝습니까? 혹 이 자리에 돈을 목사님께 맡기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목사님께 와서 통장과 도장을 갖고 가서 돈을 찾는 분이 계십니까? 안 계시겠지요? 하나님은 목사님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신의 하나님이요 자신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직접 통하고, 가까워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닮아 행하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 행하는 분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결과를 갖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깝고,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 행하도록 노력하십시오.

2. “오네시보로”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원컨대 오네시보로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특별히) 그날에(환난 시기) 주의 긍휼을 얻게 해주십시오” 하셨으니, 이 사도의 영감적 기도는 오네시보로의 집에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하셨을까요?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시원하게) 하였고, “바울의 매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주 찾아 만났으며, 잘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을 대해보면 답답한 경우가 많고, 또 교역자의 마음을 유쾌하게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협조적인 말, 긍정적인 말, 격려의 말씀을 드려서 힘을 내게 해드려야 합니다. 부정하고, 반대하며, 불평하는 교인이 되면 목회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의 갇힌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을 이해하고 사명에 협력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으로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교역자를 자주 만나셔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필요하면 항상 저를 부르세요” 하면서, 자주 대접도 하고 몸으로도 봉사를 하십시오.

3.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갈 6:2에 보시면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짐을 같이 져야 합니까? 목사님이 짐 지고 계신 것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지금 목사님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데, 무슨 짐인가 하면,

1) 교인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즉 평안케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염려하는 짐이고,

2) 교인을 예수님 닮게 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짐(바울 사도는 그 수고를 해산하는 고통에 비교하였음, 갈 4:19),

3)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는 짐을 지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첨부한다면,

4)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짐(사회적, 가정적 책임)도 있습니다. 이 짐이 가벼운 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억지로 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명으로 지고, 기쁨으로 지는 것이지만 몸에 살이 붙지 않을 만큼 피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성도님들이 교역자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늘 기도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서로 느끼고 돕는 것이 서로 짐을 지는 것입니다. 교인이 준다든지,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교역자에게 부담을 갖게 하는 것은 결코 돕는 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4. 교역자로 하여금 신바람 나게 해드려야 합니다. 대구의 태평교회가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큰 예배당을 가진 부광교회가 외곽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본 예배당을 태평교회에 싸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입당예배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담임목사님이 크게 만족하며 신바람 난 듯한 모습을 보고 저도 기뻤습니다. 교역자에게 그런 기쁨과 감사와 의욕이 충천할 때, 하나님의 일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부흥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 봉사를 잘하다가 “교회에 나오면 기도가 막힌다” 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도 막힌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서 해결하여야 하겠지요. 자신에게 있는지, 교인이 막은 것인지, 아니면 교역자가 막는 것인지를 살펴서 해결하고 기도의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교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교역자가 신바람 날 수 없습니다. 의욕을 일으켜 주고(약점은 교인이 깨우치지 않아도 잘 아시니까)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세요. 특히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신바람 나셔서 더 잘하실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집사와 평신도가 무엇이 다른가? 하면 직분자나 집사가 선배이면 좋은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 뒤에서 미는 것이지요.

2)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교회 재정을 담임 목사님에게 사용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장이 제직회장권을 겸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예수님께 드린 것이니까 예수님의 재정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대행하는 복음 사역자에게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께 헌금하고 사용권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헌금 했다가 되뺏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어디에 쓸까요? 목회에 도움이 되도록 쓰십시오” 하고 맡기는 제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집사, 좋은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8과 사명자에 대한 묵상 (고전 15:10) 목록으로


(7분설교 9집을 시작하는 설교로 “사명자에 대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사명을 느끼고 직분을 받은 자가 자기의 사명 목표를 만족하게 달성하지 못하였을 때 고민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맡은 일만 충실하게 잘 하였다면 오히려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명자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욕심 부릴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 목회자님들 중에서 큰 시설, 큰 단체를 원하는 경우가 있지만, 거기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이 쓰시는 정도(분량)가 있음을 아셔야 하고, 또 중요한 것은 사명자가 어떻게 사명자가 되었으며,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의 맡은 일만 성실하게 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1.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바울은 이단자 바리새인이었고, 그리스도를 강하게 대적하고 핍박하던 자인데 복음 신앙으로 개종한 후, 사도직을 받았으며, 사명감도 탁월하여 그리스도의 모범자로 변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것이 자기로서는 상상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딤전 1:12~13) 강권적 역사로(행 9:1~18)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믿음을 갖고 사명을 가진 것은 스스로의 계획과 노력으로 된 것입니까? 혹시라도 사명을 받으려 할 때 현실적 직업관으로 취하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나 진정한 사명자로 부름 받은 것을 확신할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도, 지혜도 하나님이 주셨고, 사명의 과정과 직분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2. 자신이 변화된 것과 사명감을 갖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심을 안 다음에는 자신을 사명자로 세우신 목적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선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감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셔야 하겠지요(시 37:5, 마 7:7). 그리고 환경에 적응하는 범위 안에서(마 6:24, 자기 십자가) 또 자기가 할 수 있는 은사에 따라(고전 12:4~11) 일을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함을 뜻하고, 성직은 은사(직분 또는 능력)에 따라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쓰실 때 처음부터 그릇을 분별하시고(딤후 2:20~21), 그 그릇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쓰십니다. 이것은 “사명의 종류와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무엇을 하여라” 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을 마음의 확신으로 직접 깨닫는 경우도 있고, 위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전달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직접 부르셔서 쓰실 때는 “그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알려주신 후, 그 사명을 40년간 감당하였을 때 끝내셨습니다. 바울은 처음 변화를 받았을 때 하나님이 무엇에 쓰시려고 자신을 변화시키셨는지 알지 못하여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질문한 일이 있었지요(행 23:1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에 가면 알려줄 사람이 있다” 하셨는데,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바울의 사명은 “이방에 복음 전하는 선교적 사명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었고(행 9:10~15), 바울은 그 사명을 알았을 때 자신에게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것과 외국어 실력을 이용하여(행 21:37~40, 22:28) 유익한 여건 속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목적을 알았으면, 그 목적에 좋은 열매가 맺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얼마나 부지런하게 노력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열매의 최종 수확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또는 다음 세대에서 거둘 수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고(요 4:37), 바울 사도도 “심는 자와 물주는 자와 자라게 하시는 분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고전 3:6). 그러니까 사명자는 자기의 할 일만 하고, 결과에 대하여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적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최선의 방법 정도는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세속과 사욕을 멀리하고, 말씀 연구, 기도, 교육, 전도에 집중하는 것이고, 장로는 목사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협력하는 것이요, 집사는 물질 봉사, 구제 등에 힘쓰는 것입니다. 장로는 재판을 할 때 공정한 발언을 많이 함이 좋고, 그 이외의 목회상의 문제로는 목사가 용기 있게 일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할지언정 목사로 일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고, 예수님은 믿음의 알맹이를 거두실 뿐, 물질이나 건물이나 무분별한 숫자를 구하시는 분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세를 하나님이 불러 쓰셨습니다. 모세에게 출애굽을 맡기셨고, 그 일을 이루신 후 여호수아에게 넘기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명이었지요. 그 사명을 끝낸 후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베드로, 바울도 하나님이 부르셔서 기독교의 모범을 세우게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명자들도 하나님이 부르셨고, 사명과 은사를 주셨으며, 각자에게 목적 있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교만할 일도 없고, 영광 바랄 일도 없으며, 열매는 믿음의 열매를 주님께 드릴 것뿐이고, 자신은 최소한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 사명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89과 교회를 개척하려면 (호 10:12) 목록으로


본문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을 교회 개척의 의미로 받습니다. 전도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고,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은 마치 묵은 땅을 기경하여 좋은 밭을 이루고 좋은 씨를 심어 좋은 열매(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도)를 배출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필자는 4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7노회, 9교회, 8당회를 전전 시무하였고, 노회와 총회의 일도 가까이 관찰하면서 깨달은 점도 있는 반면에 문제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혁의 차원에서 교회를 개척하려니까 연령이 거의 다되어 스스로 할 수는 없고, 만일 내가 교회를 개척한다면 “이런 방도에 의함이 합당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글을 남깁니다. 한국 초대 교회 때는 성직자가 귀하였고, 성도들이 순진한 만큼 순수한 면이 있었으나, 6․25 전후를 기하여 신학적 혼란이 시작되었고, 그 후 도심지 개발이 심화되면서 순수한 사명적 개척이 있은 반면, 너도 나도 목사가 되어 십자가를 세우면 교인이 온다는 인식하에 질적 성장을 고려함이 없이 무실력한 신학교와 신학생들이 생기면서 진정한 의미의 교회를 세우지 못한 면도 있다고 봅니다. 기성 교회는 개혁이 몇 배 힘들 것입니다. 차라리 개척을 하여 100년 후를 내다보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보시지요. 만일 제가 20년쯤 건강할 수 있다면 시도해 봄직도 할 것입니다.

1. 개척자의 자격 준비입니다. 목사이면 더 좋으나, 전도사라도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필자는 30세 목사 때 제법 똑똑한 줄 알았지만, 사실상 목회자의 자신감을 가진 때는 60세쯤이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개척자들이 스스로 되지 못한중에 된 줄로 착각하고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함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자격 준비,

1) 성경 66권의 핵심을 어느 정도 터득할 것과,

2) 바른 교리를 인식할 것과,

3) 성경 연구의 취미와 그 연구 결과를 설교로 나타낼 수 있는 능숙함이 있을 것과,

4) 전도와 기도의 은사를 확신할 것과,

5) 그리스도의 사명자로서 명예욕과 현실욕 등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포기한 후에 시작할 것과(갈 5:24),

6) 사명자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할 것과,

7) 자기 십자가(물질적, 사회적 생활 대책)를 짐으로 사명 생활에서 들어오는 물질적 소득이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준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2.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은사를 받은 대로 시행하되 물질의 힘이나 지혜의 설득이나 다른 관계로 사람을 끌려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존재와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고 사랑의 친교를 갖는 중에 따라오는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1:12에서 “전도의 미련함”이란 상술적 의미를 배제하고, 진실하게 십자가와 복음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택하는 자가 신령한 구원과 성경 진리만 보고 따라오게 할 것이요, 예배당 모양이나 화려한 성구나, 사랑받을 욕심이나, 인간적 친교 관계에 끌리지 않게 함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믿음을 갖고 시작하는 사람을 수확의 열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바로 그것을 확인하고 주는 것입니다.

3. 이때에 예배당은 자기 집을 사용함이 좋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거실이 있으면 10명까지는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초대교회가 집에서 시작한 의미(골 4:5, 롬 16:5),

2) 자기 집으로 예배 처소를 삼았다는 의미,

3) 예배당 건물의 우상성을 배제하는 의미,

4) 예배당 확보에 부담을 덜고 자유를 주는 의미가 있고,

5) 이사하거나 뜻이 안 맞아 나갈 때는 예배당 지분을 반환받을 수 있으며,

6) 또 예배당 건물을 보고 찾아오는 자가 말씀과 믿음을 생각하고 오게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4. 한 사람의 교인을 만들 때 첫째는 예수님을 닮고, 다음에는 교역자를 많이 닮은 자가 되었을 때 세례를 주고 교인을 삼아야 합니다(고전 11;1, 바울은 예수님을, 교인은 바울을 본받으라 하셨음). 만일 신앙과 사상과 생활이 전도자(교역자)를 비슷하게라도 닮지 않으면 얼마 못가서 충돌이 생기고 분열을 가져오게 될 것을 미리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역자와 뜻을 같이하는 교인들이 몇 명 생겼다고 할 때, 그들은 자신이 믿음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 복 받으려고 하면서, 교역자의 주택을 신세지면서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인이 10명이라면 각자 성의대로 자발적 헌금을 모아 10여명 수용할 수 있는 전셋집을 얻으면 되고, 그때에 헌금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무이자로 투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후 교인이 20명 이상이 되면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공간을 넓히면 됩니다. 왜 이런 방법을 써야 합니까? 그 이유,

1) 헌금에 부담이 없어야 하고,

2) 주님이 예배당을 지어달라는 요구가 없었으며,

3) 예배당은 실제로 사람이 쓰는 것이기 때문이고,

4) 예배당 선전으로 충성을 과시하거나 그것으로 큰 교회 목사, 큰 교회 성도라는 명예적 유세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인이 진리를 믿고 와야지, 예배당을 보고 오면 안 되는 것인즉 집회소는 필요하나 예배당과 성물의 사치로 낭비하거나 그것을 권위 있게, 숭배물처럼 생각하게 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확보한 성도이면 봉사는 못할지언정 다른 사람의 덕을 보려하지 않을 것이고(행 20:35), 자기 앞을 자신이 책임지는 의미에서 자신이 앉을 장소(예배당)와 자신이 먹어야 할 점심 정도는 스스로 책임지면서 교인이 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배당 건축을 평생소원처럼 알면서, 헌금을 모으기에 급급한 교회가 있다면, 다 이런 착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5. 교인이 모이면 신령한 행사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예배와 성경 공부와 기도입니다. 이것 외에 성례식을 빼고는 신령한 행사가 없습니다. 바쁘고 힘 드는 세상이기 때문에 신령한 행사도 약간의 통제는 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의식 자체보다 정신과 생활이 중요한즉 간단하게 드리되, 그때 그 시대에 맞는 주의사항과 경성할 내용을 말하는 정도로 설교하고(헌금은 헌금함에 넣음) 마칩니다. 그 다음에 성경 공부는 교역자가 체계적 실력이 있어야 하므로 단계적 교육 자료를 만들어서 문서와 함께 교수하되 짧은 시간에 많은 분량을 가르쳐야 좋습니다. 신앙 원리와 성경 본문 강해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배는 간단히 끝나는 것이므로 온 가족 아이들까지 함께 와서 예배를 드리고, 어른 성경 공부에서 알아듣지 못할 어린 대상들은 부모가 깨달은 것을 반드시 가족 기도회 때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하고, 교역자는 그 교육 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주일학교를 할 여력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교사되고, 학생 되게 하여 하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린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반드시 부모(교사)가 일대일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는지, 아는지, 혹은 지키려고 애쓰는 양심이 있는지를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학교의 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교회에 짐 지우게 하려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모가 그 자녀를 가르치게 함이 성경적이니까요(신 6:6~9). 이 시대의 교인들은 다 자녀에 대한 주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혹 안 믿는 집 아이가 있으면 가까운 성도 집에 맡겨서 교육하면 됩니다.

6. 헌금과 그 처리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감사와 십일조뿐입니다(여기에서 십일조는 율법 시행의 뜻으로 강조하시면 안 되고, 교회적 활동의 필요한 경상비로써 교인의 의무를 시행케 하는 뜻이어야 합니다). 이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신령한 복에 비할 때 경미한 것이므로, 그것으로 축복 받으려는 기복심을 떨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하나님이 좋은 일에 상당한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시오(계 22:12, 고후 9:6, 막 12:41~43). 기복주의 헌금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금은 누가 장부정리를 하든지 예수님(교회)께 드린 것인즉, 예수님의 주머니에 담긴 돈으로 생각하시고, 교회의 대표자 또는 예수님의 일을 대행(전파와 성례, 축도로)하는 사역자가 사용권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교회 헌법에 제직회가 재정을 취급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사무적 관계일 뿐 사용권을 행사함은 아닙니다. 교인이 헌금하고 교인이 사용권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헌금이 아닐 것입니다. 교역자는 예수님의 돈을 쓸 때 반드시 예수님이 쓰실 만한 자리에 써야 합니다. 이것은 지출의 합당한 명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돈으로 구제하실 수는 있으나 성도의 부조금까지 하시라 할 수는 없을 것이요, 예수님은 복을 베푸실 수는 있으나 명절에 목사의 집에 고기를 사들고 가시라고 하실 수는 없으며, 예수님은 전도, 선교비에 돈을 투자하실 수는 있으나 성도가 예수님의 돈으로 점심을 얻어먹고 예수님 보고 화장실에 휴지를 사놓으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를 위하여 부를 포기하신 예수님(고후 8:9)의 돈으로 비싼 음식을 사먹는 것도 명분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역자의 생활비를 정하는 것과 명확하게 지출 상황을 밝히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중간 생활비를 받음이 합리적이요, 덜 받는 것은 교역자의 헌신적 분량에 따라 정할 것이고, 더 받으면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있지 않다” 할 것입니다. 주님의 돈을 명분 있게 지출하면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고, 개척 전도자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누구의 사업체니, 수퍼마켙이니 하는 민망한 말들이 떠돌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7. 각 기관 활동입니다. 한 가정에 노인층, 장년층, 청년, 유년, 남녀가 다함께 살 때 합리적 교육이 성취됩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그만큼 융화의 폭이 좁아지고, 끼리끼리의 특색과 자유 분망이 일어납니다. 조직으로 부흥시키려는 제도는 말씀과 기도로 부흥시키는 일이 아닌즉 피함이 좋고, 꼭 끼리끼리 단체 결성을 한다면 신앙적 교육은 반드시 교역자의 지도를 받을 것과 선한 사업을 하는 것만 자유롭게 하되, 신령한 복을 해쳐서는 안 될 것을 다짐하여 허락하는 것입니다. 교회 헌법이 어떠하든, 교역자는 노회가 감시하여야 하고, 장로는 성도의 생활을 살피며 재판 심사관으로 족하며, 모든 성도는 봉사적 능력이 있을 때 직분을 줄 수도 있겠지만 직분을 우상시하는 부작용이 있을 때는 평신도로 봉사케 함이 더 영광될 것입니다.

8.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교회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막고 건설적으로 승화시키는데 무슨 유익이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1) 물질 중심의 교회를 진리 중심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멀리하셨고(고후 8:9), 부자나 재물을 위험한 요소로 말씀하셨으며(마 19:23, 딤전 6:10), 베드로,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고 예수님만 계시다”(행 9:3~4) 하므로, 물질 구제를 접고 능력을 나타낸 것을 표방하는 의미에서 교회에 돈이 없어도 좋고, 있어도 주님 뜻대로 사용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예수님)는 물질 가난을 탓하면 안 됩니다. 교역자에게 자립 능력이 있고, 예배당 문제를 각자가 부담하는데 무슨 돈이 필요합니까? 있으면 선교비, 구제비로 쓰면 됩니다.

2) 교역자가 물질 또는 생활비 조달에 교회를 의지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담대히 말할 수 있고, 헌금하는 교인의 고용인 같은 인상을 주는데서 탈피할 수 있으며, 헌금하는 교인의 위세도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오직 교회에서 존경받을 자는 예수님을 많이 닮고, 말없이 표 없이 약한 자를 많이 돕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너도, 나도 권위주의는 없어질 것입니다.

3) 교회 안에 큰 싸움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한국 교회의 큰 병폐이지요. 하나는 나가야 할 교역자가 나가지 않고 법을 어기면서 교인들을 애태우는 일이고, 또 한 가지는 교회 안에 소수와 다수가 편을 갈라 교역자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이 보통 10년 갑니다. 그것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목사가 잘못이 있거나 법적으로 정당한 시무 목사가 아니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안 나가고 못나가는 것은 자기 생활을 교회에 의존한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법도 되려니와 하나님의 교회에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교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자급생활)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또 교인들끼리 화목을 못하거나 교역자와 화목을 못하여 갈등할 바에는 예배당 지분을 받고 나오면 됩니다. 예배당 건물을 가르지 못하여 싸움만 계속 하는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갖고 나온 자리(좌석 대금) 비용을 사용해도 되지만 마음에 드는 교회에 제공하고 등록하면 크게 자유로울 것입니다.

4) 교회 안에 직분 경쟁의 알력은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 생활의 목적은 예수님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은즉 직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단체가 크고, 일하는 폭이 넓을 때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성도가 할 일은 구제뿐인즉 구제비를 많이 거두어줄 만한 사람을 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개인이 하셔야 하고, 선교는 선교비를 거두어주면 선교사가 할 것이요, 성경 교육도 담임자가 유급 사역자를 두어 가르치면 됩니다. 소규모의 예배는 많은 설교 자료를 비치해놓고 자유 선택하여 읽고 스스로 예배드리면 됩니다. 장로가 목사 활동을 제재하도록 하면 목사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폐단이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장로 되는 것을 무슨 벼슬처럼 여겨 받으려고 애쓰는 일이나 경쟁 같은 것은 교회 안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장로를 세우되 재판하는 심판관이나 변호사 역할을 하게하고, 목사의 잘못된 독주를 지적, 건의하는 위치에만 있게 하여 교인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역할로 필요할 줄 압니다. 옛날에는 장로가 부작용을 일으키는 예가 적었는데, 점차 장로님들의 목사의 활동을 격려하고, 협조함에서 통제, 부정으로 선회하는 경향 때문에 이런 조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필자가 “개혁 교회헌법 초안”을 쓸 때 응용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헌법 개정에 제의된다면 비판하는 일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반대 이유가 명예욕을 떠난 상태에서 진정 교회의 유익을 위한 합리적 비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명예욕에서 떠나야 합니다.

5) 교회나 교단이 개혁되려면 감투 쓰는 것을 바라는 성직자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상당한 자격 기준을 정하여 다수 선발해 놓고, 기도하고 제비 뽑는 것이 상책입니다. 제비 뽑혀 되는 것은 당사자의 명예가 아닌 하나님이 쓰신다는 뜻일 뿐입니다. 좀 부족한 지도자가 나오면 유력한 사람이 사랑으로 보완해주면 될 것입니다. 또 감투욕을 없애려면 일당을 주지 말고 식사만 대접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감투를 안 쓰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비 뽑힌 자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대안을 말하도록 만든 것이 전통적으로 부패를 일삼아온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6) 또 큰 부조리는 권징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말로 안 되면 권징해야 합니다. 권징 받은 자는 겸손하게 순종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증거가 불충분하면 권징 안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보다 나은즉 확실하게 하여야 합니다. 교역자나 성도가 권징을 받고 타 교파에 가서 권징을 안 받은 것처럼 등록을 한다면, 그 진실이 왜곡된 거짓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은 단체가 교회라면, 그것은 마귀회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를 가나 자기를 부인하면 안 됩니다. 자기의 진실을 밝힐 줄 아는 성도가 진실한 믿음의 성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교회를 개척한다면 우선 교역자가 말씀과 은사의 준비가 있어야 하되 전도은사와 교육은사가 있어야 하며, 장소는 집에서부터 믿는 자 자신들이 점차 책임을 지고 목적은 예수님과 교역자를 닮게 해야 하며, 스스로 예배드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며, 헌금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전체적으로 친교하며, 어린이 교육은 부모의 책임하에 둘 것과 물질이나 교역자 생활비 등에 얽매임이 없게 하고, 성경 말씀 외에 누구도 권위 세울 자가 없게 하며, 사랑과 질서를 잘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90과 목회자의 길 (마 16:21~28) 목록으로


1. 필자는 “목회자의 길”이란 제목으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어찌 하면 사람에게 아부 또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진리 중심의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반성도 하고 연구도 해보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중직자들에게 바른 말이나 책망을 안 하고, 넘어가 예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것은 갈등을 피하고 편안한 목회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진리의 빛은 가리웠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인 간에 갈등이 있으면 목회자가 떠나는 결과가 오고, 그것은 곧 목회자 가족의 생활에 불행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가족들의 생계와 연계하여 목회를 하다 보니 물질적 재정 확보를 힘써야 되고, 그것을 인하여 사람의 수를 채워야 하며, 또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고민하고 참습니다. 목회자의 권위가 높아서 모든 성도를 포용하거나, 성도 위에 왕처럼 또는 큰 모범자로 군림할 수만 있다면 크게 책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퍽 드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배척 받기 전에 여러 차례 교회를 옮겼기 때문에 억지로 생활비를 받은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역자는 자기의 실수나 법적 절차로 반드시 시무 교회를 떠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명예적 문제, 생계 문제 등으로 떠나지 않음으로 성도의 심령에 상처를 주고, 교회의 발전을 막는 일을 보았을 때 퍽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이 곧 물질과 명예와 목회를 하나로 연계하였기 때문입니다.

2. 나의 목회 생활 40년 중 30년은 가족 생계와 연계하여 힘들게 하였고, 남은 10년은 교회로부터 받는 생활비에 의존함 없이 작은 목회와 집필 사역을 하고 있는데 큰 자유를 느꼈습니다. 다시 과거의 목회 환경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힘든 목회를 안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랬을까? 한다면 아무래도 가족 생계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에는 친구 목사님의 아들이 목사 됐다는 소식을 듣고 퍽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반드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헌신성 있는 목회를 하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못할 바에는 부러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명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각성과 새로운 목회 문화를 구축하여 새롭게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지금은 2004년 초입니다. 정치가들이 기업자의 돈을 안 먹은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물갈이가 시급해졌고, 돈 없이 정치해야 되는 판도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나 성직자도 꼭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의 성직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3. 한국 교회 목회자의 길을 살펴보면, 복음과 함께 서양문명이 들어왔을 때 성령님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났고, 또 외국 문명의 영향도 있고, 교육 부재의 무지도 있어서 목회자가 천사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핍박도 견뎠고, 초대 교회의 기틀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6·25(필자는 그때부터 경험하였음)동란으로 남한 땅에 복음의 물결과 가난이 덮쳤고,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충동이 강해지면서 부흥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목회자들이 교회로부터 받는 적은 생활비로 고생하며 살기 시작하였고, 목회와 생활을 연계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5·16혁명으로 산업 발전의 시대가 왔고, 그 정권이 끝날 무렵부터 도시집중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도시집중 현상은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호기였습니다. 학교가 잘되는 만큼 신학생도 많아졌는데, 그 여파로 한동안 많은 개척 교회와 교회 성장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도심에 발붙일 자리가 없고, 도심에 개척 교회를 세워도 인구가 외곽으로 분산하기 때문에 양적 부흥이 힘 드는 추세에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줄 압니다. 그 이유는 운영비가 없기 때문이고, 시작할 때는 뜻을 갖고 시작하였으나 돈이 없은즉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돈을 의지하여 교회를 운영하려고 한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개혁적인 차원에서 목회자의 길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1) 우선은 사명감을 느껴야 합니다.

2) 영적, 성경적, 노하우를 축적해야 합니다. 신학 공부, 연단 등으로 폭발할 만큼 축적하는 것입니다.

3) 자기의 십자가 지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가족 생계나 사회적 적응력에 관한 자립입니다.

4) 그 다음에 자기의 “정과 욕을 못 박고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고 사람의 일은 생각지 말아야 한다” 하셨고, 24절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하셨으며, 25~26절에서는 구원 받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줄 알고, 27절에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지요(마 19:27). 복음적 헌신성에는 가족도 중요하지 않고, 작별인사도 주요하지 않으며(눅 9:61), 심지어는 부모 장례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눅 9:60). 이 뜻은 헌신의 100%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려 하거나(눅 9:62) 예수님과 재물 또는 예수님과 명예를 함께 추구하는 정신을 떠나서(마 6:24) 현실적 실속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때 바른 목회의 기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진리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깜짝 쇼, 문화적 행사, 신비주의, 인간적 아부 등을 삼가고 오직 진리만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 중심으로만 키워야 하고(요 17:17), 그 말씀은 문서로 전달되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엡 3:3~4, 골 4:16). 열매는 어떻게 맺든지 하나님이 거두실 것입니다.

 

제91과 원위치, 푯대 (빌 3:10~14, 갈 4:19) 목록으로


말씀 드릴 제목은 “원위치, 푯대”입니다. “원위치”란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 또는 자세를 의미하고, “푯대”란 목적지를 표시한 말뚝이니까 원위치와 푯대는 최고의 목적을 뜻합니다. 창 3:9에 보시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지요. 아담은 자기의 위치(옳은 자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불순종하고, 또 하나님을 피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또 핑계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자기의 위치를 못 지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있어야 할 위치에 바로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서 있습니까? 이 시간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원위치가 어디인가? 화살이 가야 할 과녁은 어디며, 우리의 달음질 목표는 어디인가? 그것을 아신 다음 어떤 방법으로 그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를 연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안 된 것이면 세상 떠나기 전에는 이루어야 하겠지요.

1.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에게 간절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저 함”이고, 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함”이며(10, 11절),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 함”이고, 그것은 곧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인데(12, 14절),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즉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하신 것입니다(13~14절). 바울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이 당시에도 고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절) 하시면서, 그 나름대로 최고의 목표에 말뚝을 박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을 하신 것입니다. 그 목표가 바로 바울과 우리가 있어야 할 원위치란 것입니다. 바울의 목표와 우리의 목표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과 부름의 상을 목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우리의 목표는 원위치(꼭 있어야 할 자리)에 서보기라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을 탐험하는 산악인, 남극을 탐험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적지에 가서 사는 것이 아니고 섰다 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도 항상 원위치에 서면 좋지만, 죽기 전에 잠시라도 서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 그 원위치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푯대가 있는데, 그 푯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상태에 있을 때, 그곳이 바로 원위치이고,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목적이야말로 주님이 구원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 구원하신 것은 “자기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하여 양자를 삼으셨다”(롬 8:29) 하셨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것이 믿음의 질적 성장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히 11:6).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고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위치가 원위치인 것입니다. 이 원위치는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닮되 예수님의 신성(이적과 능력)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고, 인성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신분의 지위가 다르고, 죄 없는 상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제하고는 꼭 같은 육체, 꼭 같은 성정을 가지셨고(히 4:15), 꼭 같은 세상에 오서서 인간으로서의 삶과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그 예수님의 인간성과 삶의 방도를 깊이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믿음 지식과 성품과 삶 그 자체요, 또 가장 힘든 환경에서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를 성경이 낱낱이 기록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하고 수용할만한 것만 기록하셨다”고 요 21:2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사신 분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범이 충분하고, 예수님도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요 13:15).

4.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꼭 같이 따라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완전하게 닮거나 모방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노력에 따라 최대한 닮아보라는 것입니다. 형제가 쌍둥이라도 꼭 같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님과 꼭 같기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순결한 분이시고, 인간은 부패성이 남아있으니까 그것부터 다른데 어떻게 꼭 같으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을 주시고도 “다는 못 지킨다”고 하셨습니다(갈 3:10). 그러니까 각자의 믿음 분량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위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환경에서 예수님의 환경처럼 입장을 유도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도덕적 사명) 때문에 어렵다면, 자기 십자가를 해결하는 정도에 따라 시행하셔야 하고, 또 그 기한을 단축하거나 뒤로 미룰수록 성취하기 쉬울 것입니다. “세상 떠나기 전에 예수님 닮은 생활 3년만 해보았으면, 그것이 힘들면 석 달만이라도 해보았으면, 또 그것이 힘들면 단 열흘이라도 예수님처럼 변화된 상태에 있다가 천국에 갔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심이 어떨지요?

 

12. 절기 설교


제92과 성경과 십자가 (고전 1:18) 목록으로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어서 “성경과 십자가”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의 뜻, 고난주간, 그리고 예수님이 수요일 저녁에 성만찬을 잡수시고, 그 저녁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가 그날 밤에 잡히신 것과 목요일 새벽에 종교재판을 받으시고, 목요일 오전에 빌라도의 재판을 끝내신 후(요 19:14~16), 하루 감옥에 계시다가 금요일 오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십자가의 설교를 많이 들었으나 성경이 말씀한 십자가에 대한 교훈은 숨겨진 것 같아서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란 이름은 1,365회쯤 기록이 있고, “십자가”는 복음서에 50회쯤, 다른 곳에 20회쯤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적 용어만 있는데, 그것이 곧 “장대에 구리 뱀을 단 것”이지요(민 21:8). 구약의 예언으로는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면 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갈 3:13),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예언하셨으니까(마 19:20)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1.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상징적 의미로 많이 사용합니다. 예배당이나 교회의 표식, 또는 믿는 가정과 성도의 표식, 또는 예배 공간의 장식품으로 걸어놓는데, 성경에 십자가를 장식물이나 드라빔(부적)처럼 썼다는 말씀은 없으니까 장식과 상징만으로 그치지 않도록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십자가는 가장 가혹하게 사형 집행하는 로마의 형틀입니다. 마 27:23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소서” 한 것이 곧 십자가를 사형 집행의 형틀로 쓰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가 거의 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즈음 그것을 상상하여 제작한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죽은 자도 있다고 합니다.

3. 예수님이 대속의 목적으로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내가 너희의 죄 때문에 죽는다”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임을 밝히 예언하셨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 하셨으며,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셨습니다(눅 23:34). 중요한 것은 대속의 십자가로 믿는 것입니다. 감격하면 더 좋지만, 감격하지 못해도 알면 되는 것입니다. 은행에 예금한 것을 알면 감격하지 않아도 찾아 쓸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알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4. “십자가의 도(구원의 도리)가 구원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멸망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고전 1:18)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멸망할 자들은 십자가의 도리를 어리석은 일로 여겨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을 받지만 성도는 믿으니까 능력을 받는데,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영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힘쓰는 능력 등이 다 그 믿음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하는 능력과 소망의 능력, 마귀 대항하는 능력이 다 그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롬 8:35~37).

5. 골 2:20에서 “의문에 쓴 증서(율법)를…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승리하셨으니…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 하시므로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바로 믿는 성도들은 율법주의나 의식, 전통 등에 얽매이지 마시고, 오직 주 안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6. 고전 1;13에서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라고 하셨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인간 중심, 교역자 중심에 밀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성도들이 예수님과 성경은 멀리 하고, 교역자나 인간 단체를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참으로 십자가 중심이 아닌 것입니다.

7. 또 바울은 고전 1:17에서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가 헛되어지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말의 지혜를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소개하였으나 안 들으면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고, 말의 지혜(수단)는 오히려 십자가를 헛되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8. 고전 2:1~2에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에도 없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9. 엡 2:16과 골 1:20에서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십자를 수직과 수평으로 해석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줄 압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과 다 화평해지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곧 회개와 사랑입니다.

10. 히 12:2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하셨는데, 고통도 함께 참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빌 2:8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겸손과 인내와 복종과 희생을 나타낸 것입니다.

11. 그 다음에 갈 5:11에서 “십자가 의미에 거치는 일을 하지 말라” 하셨고, 빌 3:18에서는 “어떤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즉 경계하라” 하셨으며, 히 6:4~6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여러 가지 은사만 맛보고 타락하므로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십자가의 의미를 영광스럽게 할지언정 욕되게 하지 말라는 교훈이요.

12. 마지막으로 성도가 할 일에 대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롬 6:6, 갈 2:20)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의 십자가 지는 일을 하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도 함께 죽일 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죽이라”(고전 15:31)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이 “신앙적, 도덕적, 사회적 의미에서 마땅히 할 책임을 다하라”는 부탁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제93과 예수님의 부활 (요 11:25~27) 목록으로


오늘이 세계적으로 지키는 부활절인데, 이 날짜와 절기 행사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결정으로 지키는 행사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시기와 행사를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잘 깨닫고, 부활신앙에 합당한 생활을 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1. 성경에는 부활 사건이 여러 차례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가 각각 한 번씩 죽은 자를 살렸고(왕상 17:19~22, 왕하 4:32~35),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세 번(눅 7:15, 마 9:25, 요 11:49), 베드로, 바울 사도가 각 한 번씩(행 19:36~42, 행 20:9~10) 죽은 자를 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린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일반적 부활에 비할 때 특이한 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1) 메시야가 부활할 것을 구약 성경 여러 곳(시 16:10, 시 71:20, 85:6, 118:17)에서 예언하셨고, 예수님도 자기 생전에 자신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습니다(마 16:21, 17:23, 20:19).

2) 다른 사람처럼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살아나신 것이 아니고, 무덤에서 3일 만에 사신 것이 특별한 것이고,

3) 다른 사람처럼 다시 죽을 몸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다시 죽을 수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영화로운 몸으로 산 사람이 변화된 사건은 에녹과 엘리야가 있음).

4) 그리고 40일 동안 계시면서 14회쯤 보이시고, 함께 계시기도 하시다가 그 몸 그대로 승천을 하셨으며,

5) 그 승천하신 증거로써 10일 만에 약속대로(행 1:4)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3. 이 역사적인 사건이 과연 믿을 만한 일인가?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 않고, 성경을 믿는 기도교인들만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론을 전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를 대속의 제물로, 또 예수님의 부활과 천국을 믿느냐? 하면 다 믿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마음의 코드를 조정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을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세계에서 나타난 일이고,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증인이었으며, 그들이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2,000년 이상 보존되어 오면서 기독교가 부흥되었고, 지금도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4.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적을 부인하고 철학만 주장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이 모르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불문에 붙입니다. 예를 들면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고, 누가 통치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안다”(창 1:1, 히 11:2)고 하셨습니다.

5. 이 세상에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창조, 만물 통치, 생명 번성, 그 세 가지만 꼽아도 전능자의 존재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부활의 능력이 믿어지지 않으면 여우나 독수리가 썩은 고기를 먹어도 죽지 않고, 미꾸라지가 더러운 웅덩이에서도 산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이 공중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시겠지만, 공중에 집을 깔아뭉개는 물이 떠돌고 있고, 무거운 땅덩어리가 공중에 떠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신다면, 부활 승천은 이론적으로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15:39~42에 보시면 “육체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영광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땅의 존재가 있듯이 하늘의 존재도 있다”는 뜻입니다.

6. 물고기는 거의 숨 안 쉬고 삽니다. 믿어집니까? 그것이 믿어진다면 부활의 세계도 믿을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정신(영혼)으로 되어 있음을 아십니까? 사실이지요. 그러면 보이는 육체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있듯이 만물도 보이는 세계(땅, 별)와 안 보이는 것(공기)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무형체로 무게만 있는 것이고, 빛은 무형체로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존재하거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왜 부활과 신령한 몸과 영혼과 영생과 천국이 없겠습니까?

7. 성경에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마 22:32)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증거로써 무덤에 있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과의 연합이요,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은 곧 구원의 열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고, 마리아는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인데 “그들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6:6). 육체는 후패하고 보이는 것은 없어져 가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고후 4:16~18). 땅이 물보다 강하지 못하고, 물이 공기보다 강하지 못하며, 공기가 빛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형한 것이 강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성도가 이 부활의 진리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고, 또 살아서 믿을 때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공포, 한 가지에서만 자유로워도 부활의 의미를 누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제94과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 (요 21:1~14)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에서(해변) 7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셨다”(1절)는 뜻은 공간과 형체를 초월하여 운행하시고(눅 24:31), 또 자신을 계시(현현)하실 목적이 있을 때만 원하는 자들에게 보여주신 줄 압니다(요 12:29).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예수님이 디베랴에 나타나신 의미와 고기 잡는 이적을 베푸신 의미와 떡과 생선을 주신 의미와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의미와 물고기 153마리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라도 목적 없는 일은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1. 왜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 행사에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재소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사명의 길로 인도하셨겠지만, 특별히 베드로를 순교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이하에 보시면 사랑의 다짐을 받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그곳에 오셔서 눅 5:1~11과 방불한 고기 잡는 이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기에도 몇 가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지만 능력이 여전하시고, 또 세상에 계실 때 시행하신 이적도 여전히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고, 또 베드로로 하여금 처음 예수님 따랐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재소명을 하시러 오셨으니까요.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데는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 섭리도 있고,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는 섭리도 있으며, 재물을 모으게 하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사 45:3).

3. 떡과 생선을 먹게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여 재물을 주시는 것과 당장 시장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을 구별하여 해결하시는 은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재물이 있어도 배고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 억짜리 집이 있는데 빚을 지고 가난한 생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집이 안 팔리고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집에 가면 음식이 있겠지만 밤새도록 수고하고 집으로 가기까지는 시장함을 느껴야 하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막 8:3을 보시면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하시고, 7병2어로 기적을 베풀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작은 은혜, 세심한 배려를 뜻하는 것입니다. 티끌을 모으면 태산이 되겠지만, 그 티끌 하나하나가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은혜인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작은 은혜, 위급한 것을 해결해주시는 은혜입니다.

4.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의미입니다. 고기가 많이 담겼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보존을 뜻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에 있어서 믿음 보호, 건강 보호, 명예 보호, 재물 보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실 때는 반드시 받는 자의 그릇을 보시고,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심이나 물욕으로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주시지도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마 6:11, 딤전 6:8) 하신 하나님이 목적 없이 재물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재물 주시는 방법(노력, 특별은총), 쌓게 하시는 은혜(잠 8:21), 그리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전 5:19, 딤전 6:17)가 있습니다. 돈을 벌어도 쌓지 못하는 이가 있고, 쌓아놓고도 누리지 못하는 이가 있지요. 하나님은 그런 일들도 적당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굉장히 몸이 허약한데도 잘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은혜인 것입니다.

5. 153마리의 의미입니다. 요즈음 어부들이 그물을 올린 다음 물고기를 헤아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자들은 그것을 헤아렸습니다. 왜 헤아렸을까요? 몇 마리인지를 알기 위하여 헤아렸겠지요. 그러면 그 물고기 숫자를 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짐작을 하시겠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살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식생활은 건강과 직결됩니다. 운동과 수고도 그렇습니다. 정신적 평안도 그렇습니다. 공기나 물, 환경도 그렇겠지요. 그래서 먹고 일하고, 마음 편하고, 환경 좋은 데서 사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교회 환경이 좋은 것은 영적 신앙에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밥맛이 좋으면 은혜인줄 아셔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이 부담이 없으면 그것도 은혜인줄 아시며, 양식 걱정을 안 하면 그것도 은혜인줄 아시고, 속 썩이는 자식이 없으면 그것도 은혜인줄 아셔야 합니다. 요즈음 “감기예방주사를 맞으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예방주사를 55년 전에 맞은 기억이 납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식사할 때 반찬을 탓하지 마시고, 꼭 “자기 입맛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 28:5에 “떡 반죽 그릇이 복이 있다”는 뜻은 거친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마르면 물 잡숫고, 싱거우면 소금 치듯이, 무엇이나 입에서 당기면, 그 당기는 종류를 적당하게 잡숫고, 반드시 음식의 사치를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몇 가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10:42)

 

제95과 성찬과 새 출발 (마 26:17~30, 고전 11:17~29) 목록으로


성찬식과 함께 2004년을 새 출발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복음서에 예수님이 시행하신 성찬식 기사가 있고, 그 다음에 바울 사도가 이것을 시행한 말씀이 고전 11:17~29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성찬식에 대한 견해가 교파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이해하고 가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수없이 설교를 하셨지만 성찬식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그러니까 제자들과의 마지막 모임에서 한 번 시행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셨고, 세상 끝날까지 이 의식을 시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 예식은 구약 율법의 유월절 의식을 신약 시대에 와서 간소화한 의식입니다. 이것은 세례 의식이 구약 시대의 할례 의식을 간소화시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찬식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 의식과 취지상으로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간소화시켰을까요? 그것은 이 의식이 의미하는 십자가의 계시가 실제 행사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여기까지의 내용을 이해 못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의식과 성찬식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유월절 의식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를 통하여 주셨는데, 특정 기간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음으로 장차(1,500년 후에) 메시야가 오셔서 구속 사업을 이루실 것을 믿고, 사모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양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뜻하고, 누룩 없는 떡이나 쓴 나물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00년 동안 그 절기를 지켰는데, 이제는 양으로 예표한 실상이 예수님이시고, 또 그 예수님이 이틀 후에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실 것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표적 계시가 현실화되므로, 그 의미가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 사업이 현실화되므로 밝혀졌기 때문에 예표적 의식을 간소화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의 피를 포도주로,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떡으로, 그리고 문설주에 바르는 일을 먹는 것으로 간소화하여 기념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또 모범자도 예수님이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제자들이 유월절을 예비하였고(기도 준비, 장소, 음식 준비), 그 당시에 모임의 장소가 없어서 아는 사람의 집을 빌려 쓰셨으며, 저물었을 때 식사 기회를 이용하셨고, 열두 제자들만 모였으며, 그 자리에서 먼저 가룟 유다의 배신적 범죄 결심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회개하지 않은 채 떡만 먹고, 그 자리를 떠나 예수님 파는 작당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 불행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 식사 중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몸으로 기념하고 먹으라는 뜻) 하셨고, 또 그 다음에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이 잔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의 피란 구약 시대부터 메시야가 오셔서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을 예언한 언약의 피라는 뜻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내 몸이라” 하셨으니까 “예수님 몸으로 변했다”고 믿지만,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기념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포도주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상징하고, 떡을 예수님의 성체로 상징하는 만큼, 크게 경건을 차려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식을 불신앙이나 완악으로 받을 때는 벌을 면치 못한다고 고전 11:30에서 말씀하셨고, 그 모범으로 가룟 유다는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어떤 자세로 이 성찬을 받아야 합니까?

1. 믿음의 자세로 받아야 합니다. 이 성찬(떡과 포도주)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과 성체를 기념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신 사랑을 느끼고, 또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영원한 가치의 생명의 피를, 그리고 생애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을 매달려 살을 찢기신 고난을 당하신 것을 마음으로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의식을 지키게 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깊이 음미하여 주님을 가까이 따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느낀 자는 자신도 그 사랑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도 알고, 화목하기도 하며, 남을 배려하는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는데…가룟 유다는 배신하였고, 그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성찬 예식을 하시려 하니까, 몇 가지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그 불상사가 무엇이냐 하면 작은 교회의 단체 안에 분쟁이 있고, 편당이 있으며,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에서의 성찬은 도리어 해로운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죽의 몸과 피를 범하는(즉 성체를 경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엄히 경계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성찬식을 계기로 하여 2004년도를 새 출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로,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는 자로, 용서하고 화목하는 자로, 과거의 신앙적 나태를 회개하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고자 하는 결심의 자세로 임할 때에 의미 있는 성찬이 되고, 새 출발이 되리라고 믿어서, 이 의식을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제96과 감사에 대한 묵상 (시 56:9~11, 116:12~14) 목록으로


“감사에 대한 묵상”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여 이기고 생명을 보존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패배는 자기 생명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나라와 백성의 멸망입니다. 또 생명의 위험은 전쟁 뿐 아니라 질병과 사고 등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내가 아뢰는 날에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의 위험에서 기도하였는데 원수가 물러갔은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낫기를 기도하였는데 그 질병으로 죽지 않았으면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겠지요. 제가 어떤 장례식 날, 비가 그치지 않아서 기도하였는데 1시간 후에 그쳤은즉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야 하고, 그렇다면 나도 엘리야의 입장과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0절, 11절을 보시면 다윗이 기도가 응답된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찬송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 말씀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찬송한 것입니다(요 1:1, 시 107:20). 또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면 사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살려주시면 “감사제를 드려 서원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고, 또 실족하지 않게 하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모든 일에 실족하지 않고 이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에서는 이 시를 쓴 성도가 모든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많이 안다는 뜻). 그리고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며 연구를 한 것입니다. 앞의 본문에서 다윗은 서원을 지키고 감사제를 드리는 것으로 시행하였고, 본문 기자는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다가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구원받은 사실을 높이 드러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구원받은 모든 은혜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감사의 방법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백성들에게 나타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서원)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임하는 그 자체는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를 감사하고(시 116:12), 범사를 감사하며(살 5:18), 항상 감사하려면(엡 5:20) 감사를 생활화하지 않고는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시 37:5, 사 48:17, 롬 8:28). 꼭 가깝게, 빨리 인도하셔야만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광야로 멀리 돌게 하신 이유가 대적을 피하는 목적과 연단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그것을 알면 더뎌도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고용원 목사님이 백령도 부흥회를 가시기 위하여 인천서 배를 타는데(그때가 연휴나 명절이었던 모양) 인원이 초과되어 경찰관의 만류를 받다가 바다에 빠지는 봉변을 겪고 그 배를 못 탔는데, 그 배가 가다가 엎어져서 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도 생명을 붙드시는 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청년은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하였는데, 그가 예수를 믿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곳의 식인종들이 이 선교사를 잡아먹으려고 의족에 칼을 댔는데 아픔을 느끼지 않자 “신으로 모셔야 하겠다” 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성도는 어떤 일이나 낙관하고 희망을 갖는 것이 옳고, 또 당장 안 된 일이라도 감사하면 반드시 유익한 일로 성취된다는 것을 믿으시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빌 4:6에서 “감사하면서 간구하라” 하셨고, 골 2:7에서는 “감사가 넘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짐승도 주인의 구유를 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사 1:3). 소나 개나 말이나 코끼리는 주인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지요. 짐승도 은혜 베푼 대상에게 감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어떤 농부의 집에 유식한 친구가 와서 대접을 하였는데, 농부의 집이 기독교 가정이니까 식사를 받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손님으로 온 유식한 친구가 “자네는 아직도 18세기에 살고 있군” 하면서 감사 생활을 뒤떨어진 생활처럼 여기더란 것입니다. 이때에 그 농부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 집에도 자네 같은 식구가 하나 있다네” 하니까 “그 사람이 누군가? 아들인가? 딸인가?” 하고 물을 때 “우리 집 돼지가 먹을 줄만 알고 주인을 모르며 감사할 줄도 모른다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들은 다 감사를 성실하게 하였습니다. 요셉의 감사가 뛰어나고, 욥이나 하박국도 그러하였습니다(창 45:7, 욥 1:21, 2:10, 합 3:17~18). 다윗과 바울 사도가 그러하였습니다. 신앙이 자라려면 여러 차례 전환점을 겪어야 합니다. 인류가 다 물속에 잠기고 노아의 집만 남았을 때 노아는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도 생명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하였고, 요셉은 형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외로운 신세가 되었지만, 그렇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창 45:7). 고후 9:12에 보시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감사가 있는 곳에 넘치는 은혜가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감사하는 인격이 되고, 감사를 생활화하시며, 특히 안 된 일에도 소망을 갖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97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감사하는 자가 됨”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를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는 평강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감사하는 성도, 즉 감사하는 인격이 되는 문제입니다. 노후의 평강을 위하여 젊어서부터 돈을 모으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았고, 어떤 노인은 아들딸들이 다 잘사는데도 80 넘은 고령에 평강이 없어서 탄식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평강의 요소는 “돈과 건강과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있어도 목적 성취와 보람이 없으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평강과 보람을 아울러 성취하려면 대비를 잘하셔야 합니다. 오래 사는 문제의 대비도 하여야 하고, 또 오래 병드는 대비도 하여야 합니다. 저의 집안의 94세 된 할머니가 그의 딸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로 안부를 물은 후 “네가 내 앞에 가지 말아야 하는데…” 하시고, 그 이튿날 조용하게 별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 있는 죽음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죽을 때 반드시 그렇게 죽어야 행복할 것인즉 미리 하나님께 부탁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하나님도 몰랐고 부탁도 안 하셨는데 그렇게 돌아가셨으니까 하나님께 부탁하는 성도는 더 잘되리라고 믿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평강을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요 14:27). 또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한다”고 하셨습니다. 평강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저는 씻는 것이 귀찮아서 목욕이나 청소를 잘 안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원봉사를 낙으로 알고 장애인을 목욕시켜 주기 위하여 일부러 뛰는 사람이 있으니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본문에 보시면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과 연합하였다는 뜻인데(엡 2:16), 성도에게 평강이 없으면 예수님도 괴롭다는 뜻입니다. 한 몸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안하게 살고, 평안하게 예수 믿는 방법을 잘 터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이 평안을 뺏어가는 것인지, 또 무엇이 평안을 주는 것인지를 잘 가려서 선택을 잘하셔야 합니다. 요즈음은 쾌속정이 많지만 옛날에는 작은 똑딱 배가 많았습니다. 그 똑딱 배를 타면 한시도 몸이 편하지 않고 흔들립니다. 그래도 그것이 기계배라고 빨리 가는 맛에 그것을 탑니다. 통탕대며 흔들리는 것이 평안이 아니라면 그 배의 엔진을 떼어버리면 되겠지요. 그러면 목적지에는 빨리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목적지에 가서 할 일과 배 위에서 할 일이 비슷한 가치가 있다면 배 위에 오래 있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이 뜻은 성도가 생활의 목적과 가치를 잘 조정하면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성도가 큰 재물을 얻기 위하여 고생을 하지만 재물의 욕심을 버려도 평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시간의 제목은 “감사하는 인격이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정신적 구조에 있어서 감사가 인색합니다. 감사가 인색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보다 자기 정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것을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은혜를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모자라고 불평하게 되며 감사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기의 소원을 갖는다면 성취 못할 일도 없고, 또 하나님 뜻대로 된 것을 감사할 때 모든 일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지만, 그것도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린이들이 복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나타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마 11:25~26). 아버지의 뜻대로 된 것을 감사한다면 감사 안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 오는 날 장례식에 가서 “비를 그치게 해주십쇼. 10분 내에 그치면 기도 응답으로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10분 안에 비가 안 그치고, 한 시간 후에 그치고, 또 반시간 후에 햇빛이 났습니다. 문제는 10분이란 시간을 내 뜻과 욕심으로 앞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잡으시도록 여유를 드렸다면 기도 응답을 더 크게 실감하고 감사를 더할 번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감사 못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앞서면 뜻대로 성취 안 될 때에 불평, 원망, 욕설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엡 5:4을 보시면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버리고(원망, 짜증 버리고),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원망, 짜증을 돌이켜 감사의 말로 바꾸려면 그만큼 성숙된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벧전 3:9에 보시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하셨는데, 악행하는 자와 욕하는 자에게 복을 빌려면(원수를 사랑하여 기도하려면) 보통 마음으로 되겠습니까? 가치관의 변화가 와야 되고, 심판주 예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여야 하며,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진단하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범사에 감사할 줄 모르거나, 또 역경을 전화위복으로 믿지 않는다면(롬 8:28)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표준하여 나의 생활을 대조하세요. 나라도 없이 핍박과 고역이 많은 어려운 시대에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시다가 33세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보다 우리의 생활이 낫다면 반드시 감사하는 인격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98과 성탄절의 할 일 (마 2:1~12) 목록으로


2003년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2003년의 성탄절이나 그 이전의 성탄절이나 성탄절의 의미와 축하의 뜻은 같습니다. 성탄절을 뜻있게 보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큰 교단의 교회들에게 알리는 글을 보았고, 또 성탄절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글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탄절 문화는 크리스마스 츄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그리고 ‘징글벨 징글벨’ 하는 노래로 12월 연말이 된 것을 알리는 줄 압니다. 또 옛날부터 성탄절이 되면 연극도 하고, 성탄송도 부르며, 밤새도록 오락하고, 선물을 나누며, 떡을 먹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몸은 피곤하고 각성하는 것은 적고, 또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가 성탄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구제는 예수님이 섬기러 오신 것을 모범하는 것입니다(마 20:28).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예수님이 왜 세상에 탄생하셨는지, 예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 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서, 구제하는 것이 성탄절을 잘 보내는 것인 줄로만 안다면 잘못된 축하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러 오신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임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애기 돌잔치나 어른 환갑잔치처럼 축하하면 되는가? 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고, 어린아이나 사람 입장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므로 인간 중심의 축하 방법도 역시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의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탄절 축하를 프로그램 행사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일날을 성경에서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생일 축하를 어느 날짜에 받으시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신 증거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명하시지 않은 것은 시행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 2,000년 전부터 성탄절을 지켜온 것은 성탄 당일에 동방박사들과 천사들과 목자들이 그 나름대로 축하 행사를 하였기 때문에 후시대의 성도들도 “복된 은혜다” 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문제는 성탄 축하의 프로그램이 성탄의 의미를 옳게 알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자 되심과 능력자 되심과 인간 또는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는 하나님을 잘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 5:39을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셨으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호 4:6). 따라서 지혜로운 성도들은 성탄절을 하나님 아는 기회로 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사 45:15, 시 139:1~3).

2. 타락한 인간들에게 참된 인생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로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요 13:15) 하셨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롬 8:29) 하셨으며,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하셨고, “우리(사도와 제자들)와 주를 본받으라”고도 하셨으며(살전 1:6, 엡 5:1), 또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라”고도 하셨습니다(빌 3:10).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성탄 축하의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갑자기 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장례식 날 40세 가까이 된 아들이 아침부터 술이 취하여 주정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는 의미를 상실한 사람이지요. 이와 같이 만일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자세가 없다면 역시 성탄절을 지키는 의미를 상실한다 할 것입니다.

3. 구원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구원 사역을 하시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범도 사람인즉 나타내셔야 하지만 구원 사역의 중보도 인간 편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인간 편에서 하셔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사람 중에, 예수님처럼 의롭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아무도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구원의 주가 되시고, 영생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인간들에게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뜻을 잘 깨달아서, 그 뜻에 부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탄절에 할 일입니다. 따라서 배우고, 본받고, 신령한 복과 믿음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 성탄절에 할 일인 것입니다. 어떤 아나운서가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날인 줄 안다”고 하였을 때 공감한 바가 있었습니다.

 

제99과 성탄절 문화 (마 2:1~12) 목록으로


“성탄절 문화”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2003년 성탄절 무렵에 기독신문을 본즉 총회 교육부에서 성탄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을 한다는 기사가 났고, 그 핵심은 소비와 향락의 문화를 믿음과 경건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문화는 과감하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속히 바꾸지 않으면 습관이 되는 것처럼 생활 방법도 한 가지만 계속하면 습관이 되고, 전통이 되며, 결국 문화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은 빨리 고쳐야 합니다. 기독신문에 교정문이 나왔는데 “누구 장례식에 ‘명복을 빌었다’는 말이 적절치 않으므로 ‘조의를 표했다’로 정정한다”고 하였더군요.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라서 죽은 자를 위하여는 복을 빌지 않으니까 명복이란 용어가 적절치 않지요. 그러면 조의는 적절합니까? 조의는 죽은 이를 슬퍼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복되다 하셨고, 따라서 “슬퍼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 14:13, 살전 4:13). 그러니까 “조의”도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차라리 “소천을 축하합니다” 하여야 성경적이고 신앙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죽어도 슬퍼하는 것이 문화가 되니까 이방 종교인 힌두교만도 못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쁜 문화는 나쁜 영향을 주고 속히 고치지 않으면 중독이 되어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탄절 문화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성탄절 하면 기독교의 경건이 앞서야 하는데 불신자들의 향락이 앞서고, 거기에 성도들도 경건(신앙에 관한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향락으로 빠져드니까요. 우리도 365일 동안 오락을 안 하다가 성탄절이니까 두 시간만 윷놀이를 하자 하였으니 자칫하면 성탄절에 오락을 하여야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인해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성탄절 문화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2월 17일자 기독신문에는 성탄절과 관련된 기사가 많았습니다. 총회장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지를 갖고 참된 평화를 전합시다” 하였고, 총회 교육부에서는 성탄 문화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소비와 향락 문화를 그치고 경건성을 바로 세우자 하면서 “카드와 선물을 보내고, 캐릭터를 들고 캠패인을 해라, 음주, 가무, 퇴폐, 음란 문화를 배격하고 불우 이웃과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성경을 읽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하였고, 신세원 목사님의 글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대한 글을 게재하였는데, 캐럴이란 옥스포드 사전에서 설명하기를 “단순하고 유쾌하며 유행되는 현대적, 종교적 노래”라 하면서, “129년에 로마의 감독이 불렀고, 1224년에 성 프랜시스가 불러서 유행시켰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성탄의 의미를 재인식하자”는 글에서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종말적 재림을 연계하여 영적 구원의 의미와 평화를 누리는 데 있다”고 말하였으며, 또 “룰스”는 말하기를 “사랑과 평화의 건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업적을 계승하는데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증거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성탄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탄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인데, 예수님은 누구시며, 누가 왜 보내셨는지를 알고, 보내신 이의 뜻과 그 목적에 맞도록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인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 본질이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분이며, 또 영원하신 분인데, 인간을 대표하여 죄 값을 치르고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선물로 받은 것이 성탄입니다.

2. 그래서 감사하고 축하를 많이 하는 것은 좋은데, 어떻게 절기를 지키고 축하하여야 잘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 탄생 날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날자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12월 25일은 사람이 비슷하게 정한 날일 뿐입니다. 그리고 탄생한 예수님께 탄생을 축하한 성경의 모범은 세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동방박사들이 별의 징조를 보고 왕이 탄생한 것을 알고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사실이고, 두 번째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 찬양을 한 사실이며, 세 번째는 목자들이 찾아가서 천사의 말한 바를 확인하고 찬송함으로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범이고 교훈입니다.

1)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성경 연구와 복종으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합니다.

2)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경외하는 것이지요.

3) 예물을 드리는 것인데, 예물은 받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구간에 탄생한 예수님의 부모가 가난하였은즉 값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는 물질이 직접 필요하지 않고, 또 물질만 예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도에 맞는 생활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고, 성경과 만물도 받았으며, 죄사함과 영생과 다른 것들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릴 예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 요구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시행하고, 요구하시지 않는 것이나 증오하시는 것은 우리도 멀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기쁨의 소식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에 할 일은 그 절기에만 할 일이 아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실천하여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절기의 문화를 점차 보편화되게 하고, 또 인간 문화 중심을 떠나서 극히 신앙적이고 사명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3. 간증 및 기타


제100과 나의 생활 습관 (고전 10:31) 목록으로


저보다 16년 위인 서○○ 목사님은 82세 된 노인 목사님인데,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 분은 젊었을 때 큰 교회 목회도 하셨고, 부흥회도 수백 회 하셨으며, 아들은 현역 대령이고, 두 사위는 큰 교회 목사인데, 마나님이 안 계셔서 늘 심심하다고 하면서 저를 찾아오십니다. 관찰력과 비판력이 강한 분인데 저의 생활을 소상히 아시면서도 도대체 지 목사의 생활 철학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기성 교회 목회를 중단한 일이라든지, 골방에 앉아서 글만 쓰고 있는 것이라든지, 150m 옆에 집과 부인이 있는데도 예배당 방에서 혼자 식사를 해먹는 것이라든지, 식사를 할 때는 가난한 자의 음식을 맛있게 또 만족하게 먹는 것 등…, 이해 안 되는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인정하든 말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나 목표와 성격을 몇 가지 나타내려고 합니다.

1. 신앙 중심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신앙 중심이란 곧 성경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실천할 때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것까지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아제한을 권장하는데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18)는 말씀 때문에 6남매를 키웠으니 힘들었겠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중요한즉 성도의 생활도 중요하고, 성직의 생활은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데, 성직자의 참된 표본상은 예수님, 세례 요한, 베드로, 바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음은 참된 자를 믿는 것이고,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며(딤후 2:12), 믿음은 진실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신분과 거처를 감추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진실을 감추어 덕을 보는 것보다 사실을 드러내어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3. 창 3:19에서 “땀 흘려 살라” 하셨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점과 육체의 땀을 흘리는 일에 인색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또 “세월을 아끼라”(엡 5:16)는 말씀 때문에 시간 절약과 시간의 효율적 이용에 힘쓰고, 또 요 6:12에서 5병2어의 기적으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신 예수님이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신 말씀에 따라 음식 찌꺼기를 버리지 않는 일이나 시간의 자투리를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기다리는 것과 산책하는 것, 그리고 유익 없이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무슨 일이나 실리를 따져 더 나은 일과 대조하고 명분이 약하면 움직이지 않는 성격과 생활이 굳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4.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목사이면 최고이지 다른 학 박사가 필요 없으며, 또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음이 중요할 뿐 사람이 알아주는 것은 자기의 영광에 해당하고, 왜곡 판단이 많으므로 인기가 중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바울 사도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 하신 것처럼 죽기까지 겸손을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계가 성직자를 너무 권위시 한데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성경 선생님이고, 기독교 생활의 모범자로만 부각시키고, 하나님의 사자라는 권위는 없앴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도 시대까지는 계시 영감을 주셔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셨지만, 사도 같은 성직이 계승되지 않는 만큼 복음의 대리 사역자 정도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권위를 통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5. 실리주의, 시간·물질 절약,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로 생각하다 보니 물질적 선호, 제도 절차 등의 매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예배도 의식보다는 믿음 자체와 생활이 중요한 것처럼 일반 생활도 현실적, 물질적 생활보다는 신령적 권위가 더 큰 것입니다. 이리하여 의식 절차를 간소화하고, 생활의 거품을 없애다 보면 임직식은 선출 절차 끝나면 즉석에서 서약하고 공포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가 있으면 되고, 장례식은 시체가 있어야 하며, 발 벗고 잠잘 수 있으면 집인 줄 알고, 배부를 수 있으면 음식인 줄 알며, 몸을 이동시킬 수 있으면 자동차인 줄 알만큼 사치는 멀리 떠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연식으로 살았고, 예수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2) 하셨는데, 성도들이 식도락에 빠지면 안 되겠지요. 마르다가 봉사에 힘쓰고, 마리아가 예수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을 때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셨지요(눅 10:42). 마르다의 일은 물질 봉사 사업이고, 마리아의 일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여기에서 말씀 사역이 으뜸가게 중요함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진리로만 사역한다는 뜻입니다(행 3:6). 그래서 저도 말씀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6.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20대 초에 잠깐 경험한 기도원 생활을 흉내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 철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되도록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101과 말씀에 붙잡힌 증언(간증) (행 18: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말씀에 붙잡혀 성경을 밝히 증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간증 삼아 기록에 남기려고 합니다. 어느 성도나 성경 말씀에 감동이나 충격을 받고 생활의 변화를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 역시 20대 초반부터 은혜를 깨달으면서, 성경 말씀에 찔림을 받아, 인간적 욕구 통제를 받으며 살아온 것이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작은 키의 각도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 말씀은 성도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 제가 21세 때에 기도생활을 힘쓰다가 부친이 술에 빠져있는 일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께 거역하는 횡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기도와 경건미가 멀리 떠났습니다. 그때에 기도원에 계신 노정길 전도사님이 눅 22:51의 말씀을 보이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기도해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참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2. 30세에 목사가 되어 교회 임지 문제로 동료자들에게 청탁을 하다가,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8~9)는 말씀을 읽고, 그때부터 겸손을 차리는 노력을 하면서 여러 교회로 임지를 옮길 때 네 교회를 전임하기까지 부탁 없이 인도하시는 대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3. 창 1:22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마 6:32의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신 말씀에 붙잡혀서 산아 제한을 풀고 6남매를 키웠습니다. 그래도 하나쯤은 산아 제한을 하였지만, 그 말씀에 붙잡혀 속박을 당한 것이 생활에 큰 변화를 준 것이 사실입니다. “아들딸, 둘만 낳으라” 할 때에 여섯을 낳았으니 보람과 고난의 갈등이 심하지 않았겠습니까?

4. 한번은 강단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한경직 목사님은 은행 통장을 모르고 사신다고 합니다” 하는 설교를 한 후 목사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가책되어, 지금까지 집의 소유권 없이 살아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적지 않은 유혹과 갈등을 느낍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잡고 통제하시니,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들을 때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눅 10:42) 하신 말씀에 끌려서 목회 중심을 성경 연구 중심으로 돌렸습니다. 이것은 저의 생활에 큰 역사의 전환이었습니다. 57세에 400명쯤 되는 교회의 담임을 사퇴하고, 성경 강론과 교육집 등을 쓴다고,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까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에 끌려서 선택을 한 것입니다.

6. 말씀 연구와 집필에 끌릴 때는 늘 보람 있게 생각하는 말씀이 “모든 말씀(성경 전체)으로 살 것이라”(마 4:4), “자세히 살피라”(눅 1:3), “말씀을 밝히라”(빌 2:16), “자세히 설명하라”(눅 24:27), “더 자세히 풀어”(행 18:26), “다 증거하였느니라”(행 5:20, 계 1:2), “어찌 그리 단지요”(시 119:103),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1:2) 하는 말씀이 지금도 나를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7. “세월을 아끼라”(엡 5:16)는 말씀 때문에 시간 절약에 노력하고 있고,

8.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 하신 말씀에 걸려서 폐품 활용이나, 음식 버리는 일을 금하고 사는 것입니다.

9. 또 롬 14:17에 보시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지 않다” 하셨고, 고전 8:8에서 “식물은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안 먹어도 부족이 없고 먹어도 풍족이 없다” 하신 것과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8:22) 하신 말씀에 따라 음식 사치를 멀리 하니까 생활이 많이 편리한 것을 느낍니다.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는데도 시간이 더 절약되는 것입니다.

10. 저와 제 아내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경상도와 경기도의 차이, 성격과 취미의 차이, 더 나가서 신앙의 차이 등,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지만, 늘 마음에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부의 대의를 지킵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간의 갈등을 말씀으로 극복하는데, 그런 중에 유익한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인내도 하고, 또 말씀에 몰두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11.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시대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주는 것이 좋다. 줄 것이 없으면 받을 체나 하지 말자’는 생각에서,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길·흉사에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 외에는 청첩을 하지 않는 일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12. 고전 13:13의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씀은 대단히 늦게 실감하였습니다. 큰 목회를 하여도 사랑 실천이 미흡하면 칭찬 받을 일이 없겠지요. 사랑은 기독교의 상징이 아닙니까? 사랑에 반대되는 일을 교회나 성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에서 사람을 암매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종교의 결과는 미움과 살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성도의 결과는 사랑으로 끝나야 합니다.

13. 요즈음은 제가 어디에 가나 선배 목사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체로 음식 먹을 때는 상좌를 피합니다. 그 이유는 “상좌에 앉지 말라”(눅 14: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4. 그런데 빌 2:3에 보시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신 말씀에 따라 특권을 양보할 생각을 늘 가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바른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역시 큰 갈등을 느낍니다. 성도 여러분, 반드시 말씀에 충격 받고 이끌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102과 나의 어제 일기 (히 13: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하셨고, 또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간증”을 기록하면서 적당한 본문이 없어서 기록한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도자는 예수님과 사도들입니다. 사실상 저 역시도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살 때가 많습니다. 나는 어제(2003.11.11)의 일을 그대로 묻어두기보다는 나의 신앙의 발전을 생각하면서 성도의 믿음도 이렇게 자라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일기장 쓰는 형식으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하루 전에 고향인 강화군 선원면 두운리에 사시는 먼 친족 할아버지이고 나보다 한 살 위인 흥운씨로 부터 “모친이 별세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 장례식에 가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장례 전날쯤 다녀올 수도 있지만, 장례 날 가면 사람을 더 만나게 되므로 참여의 의미가 더 있는 것입니다. 흥운씨는 9대조 할아버지 동생의 계열이기 때문에 촌수로 따지면 18촌인즉 가까운 친족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내가 고향의 선산을 관리함에 있어서 5촌부터 8촌까지 친족이 있지만, 그 분들은 선산 관리에 사명을 느끼지 않았으나, 흥운씨는 자기의 10대조와 11대조의 묘가 함께 있는 연고로 큰 관심과 노력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분을 더 가까운 일가로 알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장례 시기에 가을비가 3, 4일 연속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비가 와도 개는 시간을 이용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가졌지만 갤 가망이 없는 것처럼 비가 계속되었습니다. 약 15년 전쯤 이모님이 별세하여 장례를 치를 때 장마 기간이었고, 장지는 강화 마니산 중턱이었는데, 그 날 소낙비가 하루 종일 멎는 기회도 없이 와서 큰 고역을 치른 기억을 하였습니다. 장례 날 차 안 막히는 시간에 강화에 가기 위하여 성남에서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였는데, 비는 계속 오고 있었고, 6시에 강화 여동생 집에서 1시간 머물다가 7시 30분에 초상집에 가서 흥운씨의 동생들과 매부들, 그리고 그 집 후손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아침을 먹었습니다. 흥운씨가 부고를 보여주면서 나를 “친족 대표에 이름을 넣었다”고 하기로 고향에 사는 5촌, 7촌이 계시지만, 내가 집안의 종손도 되고, 친교가 더 있기 때문에 넣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장지는 가까운 동리 약 400m쯤 되는 선산이고, 하관 시간은 오시(午時)인데, 나는 처음에 오시(午時)를 정오 12시로 착각하였다가 나중에 11시~오후 1시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주들 보고 “비가 개지 않으면 갤 때까지 기다리자. 양식이 없어서 못 기다릴 이유는 없지 않느냐? 비 안 개면 내일 하지”라고 한즉 비가 와도 비닐 우비를 입고 한다고 하더군요. 또 나에게 꼭 입어야 한다 하고 건과 흰 두루마기를 주어서, 그것을 입고 크게 부담스러웠습니다. 그 이유는 날이 좋아도 시골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갈 때 상주들과 사위들과 모든 연고자들로부터 찬조비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건을 쓴 사람으로 부담을 더 느낀 것입니다. 봉투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2만원씩 두 봉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당에 세운 차를 치우게 되어 100m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석에 앉아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11시 15분인데 12시에 하관하려면 속히 비가 개야 할 텐데,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초상집도 근심이 큰데, 옛날 이모님 장례식 때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나가야 하는가? 그 당시에 빗줄기는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옛날에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집에 가셨다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난처한 소식을 들으시고, 이적으로 포도주를 주셨는데, 내가 참석한 이 초상집이 비를 인하여 난처한 형편이니까 내가 한 번 기도로 부탁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지배자이시고, 여호수아 때는 태양도 머물게 하셨으며, 엘리야는 비를 안 오게도 하시고, 오게도 하셨는데(약 5:17~18) 내가 기도하여 비가 멎는다면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내가 과거에 이모님 장례식 날에는 “비를 멈추어 달라”는 기도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 후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셨다고 자부하였고, 기도 응답을 잘하신다고 큰소리친 일도 있었은즉 한 번 해볼까? 예수님이 풍랑과 바람을 꾸짖으신 것처럼 하신다면 금방 비는 멈추고 구름이 밀리면서 햇빛이 날 수도 있을 텐데…하고 기도할 결심을 한 것입니다. 서있는 자동차의 핸들을 붙잡고 앉아서 “하나님, 내가 오늘 떠날 때도 잘 다녀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이 집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잠시라도 비를 멈추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바람과 비를 명하시면 멈추어질 수 있습니다. 꼭 엘리야의 기도만 들으십니까? 저는 기도하면 안 됩니까? 부탁드립니다. 비가 오다가 자주 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11시 20분인데 10분 안에 비가 멎으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 줄로 믿겠습니다. 아멘” 하고 10분을 차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분 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1시 30분에 초상집으로 오니까 기부금을 걸고 우비를 입은 채 상여가 출발을 했습니다. 12시쯤 산에 도착하였고, 그때부터 바람이 불면서 비가 멎기를 시작하였는데, 1시 전에 하관이 끝나면서 비가 멎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한 후 얼마 만에 비가 멎었는가를 계산한즉 약 1시간 만에 완전히 빗방울이 그친 것입니다. 그리고 반시간쯤 후에 햇빛이 났습니다. 햇빛이 났을 때에 상주들보다 5분쯤 미리 내려오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기도할 때는 “10분 안에 멎어주셔야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는 1시간 만에 멎었고, 1시간 반 만에 햇빛이 났으니, 이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비가 오다, 안 오다 한 것으로 여기겠지요. 그러나 기도를 한 성도가 자기 생각대로 꼭 안 맞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이 아닌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부상을 입었거나 병든 사람이 “10분 안에 낫게 해주시면 기도 응답으로 믿겠다”고 하였다면 10분 안에 낫지 않고 한달만에 치료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일단 기도한 다음에 기도의 내용과 관계 있는 일이 성취되었고, 또 자신이 맡은 일도 잘 끝냈으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의 응답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성도가 항상 주님과 동행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주님과 의논하고 부탁하여 처리하는 생활을 습관화 하셔야 한다는 점에서인 것입니다. 그날 2시쯤 되어 그 집을 떠나기 전에 점심을 먹는데, 문상 온 장로님 한 분과 인사를 하였는데, 그 분은 그 집 딸의 시아버지였습니다. 이웃에 아는 사람들을 서로 소개하고 내가 그 장로님에게 내가 쓴 책을 드리고 싶어서 주소를 기록하였고, 이 글을 쓰기 방금 전에 그 책을 우편물로 부치고 왔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상주의 따님의 시아버지 되는 장로님도 은혜를 받고, 그 며느리도 은혜를 받고, 그 믿음의 여파가 초상집까지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홍동백서라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제사를 여러 차례 드리고, 절만하면 잘 되는 줄 아는 전통의식이 나로서는 기다리기도 싫고 하여 그 집을 속히 떠나게 된 것입니다. 2시 10분에 출발하면서 식탁에 있는 떡을 몇 개 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는 도중에 졸음운전을 방지하는 약으로 쓰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대로 나왔습니다. 예측대로 강화대교를 건너면서부터 졸음이 오기 시작하였는데, 김포읍을 지나면서 가장 심하였습니다. 차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비 오는 것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고역이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깜빡 존 다음에 오려고 했지만, 차를 세울만한 자리에서 계속 지나치게 되어 88도로 입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남쪽 외곽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88도로로 들어선 이유는 딸의 혼인예식장 자리와 구조를 답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도 나의 절약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김포읍을 지났을 때 여러 차례 주여, 주여 소리를 지르면서 잠을 쫓으려 하였고, 그 순간에 10분만 잠을 잘 수 있다면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국회 의사당쯤 왔을 때부터(기도 후 약 반시간 후) 정신이 들기 시작하였고, 졸음의 고충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크게 다행히 여겼는데, 그때는 30분 전에 기도한 응답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졸음이 멎는 응답을 기다렸더라면 더 빨리 졸음이 없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간절함은 응답을 기다리는 조급한 심정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석촌호수 4거리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잠실 롯데백화점 앞을 왕래하면서 서쪽에 있는 석촌호수만 보았고, 동쪽에 있는 호수는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지도를 보면서 석촌호수가 길 양쪽으로 있는 것을 알았으나 확인을 못하였는데, 바로 어제 그 확인을 한 것입니다. 성남 쪽에서 가락동시장을 지나면 첫 번 육교가 있는데, 그 육교를 지나 큰 사거리가 석촌역 4거리이고, 거기서 우회전 하면 100m 오른쪽이 잠실 여성문화회관이었습니다. 서울 쪽에서 오면 잠실역 지나서 첫 번 육교를 지나 석촌 4거리가 있기 때문에 석촌역은 두 육교 사이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예식장의 지하 1, 2층 주차장과 입구와 출구를 확인하고 승강기를 타고 5층 피로연과 6층 예식장까지 구경하였으며, 중요한 것은 차를 갖고 온 내빈들이 확인 도장을 받아 가면 무료 주차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5시에 집에 와서 뉴스를 듣고 일찍 쉬었습니다. 혹 누가 이 글을 읽으셨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서 힌트를 받고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밀한 생활, 예비하는 생활, 주님의 보호와 인도와 간섭을 순간적으로라도 놓치지 않으면서 동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3과 말씀의 달음질을 위한 기도 (살후 3:1~3)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하여금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첫째 제목은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잘 보급된 것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달음질 하듯 잘 보급되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무리하고 악한 핍박자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단서를 붙이셨는데, 그 말씀이 곧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구원 받게 되면 족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난초를 업체의 사무실에 보급하는 한 여성 사장의 성공 사례를 TV에서 보고 아래 기도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문을 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기도 내용 ;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평소에도 늘 마음으로 소원하는 바가 있지만(시 37:4) 이 시간에는 기록을 하면서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생활 중에서 말씀 달음질을 위한 노력과 교회와 가정에 평안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 TV에서 어떤 젊은 부인이 난초 배달을 하다가 그 사업의 전망을 내다보고, 남편과 함께 난초 재배를 하였고, 또 난초 배달을 여러 기업체의 사무실로 배달하는 사업을 활성화하여, 그것을 인터넷으로 받고 진행시키는 큰 업체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는 난초업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 연구자요, 보급자입니다. 저도 이것을 컴퓨터 사이버와 인터넷을 통하여 신속하고 폭넓게 보급할 때를 기다리며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난초업자의 성공처럼 저는 말씀 달음질하는 업자의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평신도를 위한 신앙 자료를 집필하는 은사를 주셔서, 저희 목회 후반기에 목회보다 이를 중히 여겨 지금 9년째 일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순간순간 깨닫는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사온즉 더욱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강론집으로 구약 9권과 신약 26권을 끝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리며, 설교집으로는 핵심 설교, 일반 설교, 마태복음 설교, 절기의식 설교, 사명 전도 선교, 성령님에 대한 설교, 인물 설교(미완료), 7분설교 9권까지 완료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리며, 교육 자료로써 기독교신앙백과, 기도백과, 어린이교육, 인물공부(미완료), 신앙문답을 쓰게 하셨고, 교회헌법연구의 출판을 감사하며, 성경 연구 재료로써 요절 연구 5,236절의 해설집을 쓰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 저의 일생의 회고록을 남기는 의미로 2003년까지의 일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현재 로마서 2장 강론을 쓰고 있사오니, 2~3개월 안에 끝내게 하시고, 여기에 곁들여 7분설교 10집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잘 끝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끝난 후 인물 설교와 인물 공부를 마무리,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설교 원고들을 정리하여 속히 끝내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시간적, 건강한 여유가 있으면 성경강론집도 추가하여야 하겠지만, 개혁교회헌법초안과 현행 헌법과 교회의 문제 수습에 대한 방안 같은 것도 보충 설명하는 의미에서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지금도 어지러운 교회의 소식을 들으면서 헌법상 행정 문제 해설에 큰 필요를 느낍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꼭 붙들어 써주시고, 오직 말씀 달음질 사역에 목적을 다하므로 목회 말기를 집필 사역과 보급에 쓰게 된 일에 대하여 큰 보람을 갖게 해주십시오. 이 일은 혼자 다 하지 못합니다. 주위에서 식자를 쳐주는 분, 교정해 주시는 분, 또 컴퓨터 홈페이지를 살펴주시는 분이 있사오니 그분들에게도 은혜를 많이 주십시오. 앞으로 이 방대한 내용들이 다 정리되면, 제목으로 약 5,000제목, 요절로 약 10,000요절, 페이지로 약 12,000쪽이 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저는 이 내용들을 우선 책 종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다음에 색인을 만들되 가나다 순위에 의한 제목별로, 성경 순위에 따른 요절별, 그리고 신앙적 용어별로 나누어 질서 있게 입력한 후, 필요한대로 뽑아내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급할 예정입니다. 제가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한 무상으로 보급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 영혼의 양식이고, 믿음의 양식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성경 글자를 헤아리며 살피기를 좋아하는 성도가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연구하는 것인 줄 압니다. 지금 저는 건강의 위협을 느낍니다. 혈압이 160~180을 오르내립니다. 그 관계로 치아 보수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견디는 데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나의 생명과 나의 하는 일이 하나님께 달렸고, 또 제가 해야 할 목회나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일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저의 모든 일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모든 일에 은혜를 더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하는 일을 돕는 분들과 저와 연고를 맺고 친교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변함없는 은총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구하지 못한 일까지 아버지께 의탁하면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104과 복에 대한 지식 (시 16:2) 목록으로


“복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정치적 사건(대통령 탄핵 사건 같은 것)에 대하여 잘했다, 못 했다로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처럼 이 복에 대한 지식도 믿는 성도들과 안 믿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이라도 복에 대한 지식을 잘못 갖는 수가 있을 줄 압니다. 그래서 깨우치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신문의 기사에서 22세 된 청년이 취직이 안 되어 고민하던 중, 그의 숙모가 무당인데 굿을 하라 하여 어렵게 70만원을 들여 굿을 했는데도 1년까지 취직이 안 되자 굿 값을 내라 하고 폭력 상해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무속인이나 청년은 노력 없이 돈을 들여 굿을 하는 것이 복 받는 방법인 줄로 알았고, 또 그가 생각하는 복은 돈벌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복의 지식을 그렇게 알고 있어도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문화와 지식이 많이 발달한 시대인데도, 아직 그런 지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육의 질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복의 개념은 차이가 큽니다.

1. 복을 누가 줍니까? 연약한 인간이나 피조물이나 생명 없는 것들은 줄 수 없겠지요. 또 귀신이 복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건전치 못한 생각입니다. 복은 창조자, 절대자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시면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2.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복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생깁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현세적으로 잘되는 것만 복으로 알고, 신령한 세계의 복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적 건강, 물질, 지식, 명예, 출세, 장수 등 사람들이 알아주는 표준에 따라 복을 정하는 줄 압니다. 그것이 복이 아닌 것은 아니고, 또 하나님이 안 주신 것도 아니지만, 성도는 복이라는 개념을 사람의 목표에 두어서는 안 되고, 또 현세적인 복은 오래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비중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적으로 복을 누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부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으며, 장수도 못하셨고, 핍박과 음모만 받고 가장 가혹하게 돌아가셨으니, 누가 그 인생을 복되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바라는 복은 창조자의 뜻에 기쁨을 드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영생의 복이 큰 것이지요. 또 명예로 따진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복이 크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실 것입니다. 믿는 성도님들 중에도 신령한 복의 가치를 모르는 분들이 계신 것이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복이라 하셨는지 살펴보시지요. 시 73:28에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셨고, 시 1:1~2에서는 “범죄를 삼가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할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현실의 복은 그 다음인데, 이 복은 성도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도 주신다는 점을 감안할 때 특별한 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복을 받는 방법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 받는 방법을 노력 아닌 요행수를 바라지요. 예를 들면 돈 들여 굿을 한다, 액땜을 한다, 재수없는 것을 피한다, 우상에게 절하고 빌어서 복을 받는 줄로 알지만, 하나님이 성도에게 복 주시는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과 구원은 노력 없이 거저 주시지만, 그 이외의 복은 성도의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주십니다. 예를 들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주시고(시 1:1),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자에게 주시며(시 128:1, 엡 6:24), 열심히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고(마 25:28, 눅 19:25, 딤후 4:8), 기도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대상 4:10, 마 6:33), 성실히 노력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욥 8:5~7). 두 요절만 소개하겠습니다. 욥 8:5~7에 보시면 “하나님은 부지런히 구하고 전능하신 이에게 빌며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형통하게 하시며…네 나중이 심히 창대하리라” 하셨고, 또 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모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뚜렷한 목적이나 자기의 할 사명을 모르고 헛된 일에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복 받을 대상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시 24:3~4).

4.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은 어떤 복을 사모하실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롬 8:24에 보시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하셨고, 또 고후 4:18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복을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복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천국을 사모하며, 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영혼이 말씀에 붙잡히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육신의 볼거리와 육신의 양식보다 항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바라며 힘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05과 신령한 복의 의미 (엡 1:3~6) 목록으로


1. 본문 3절에 “신령한 복”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복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그 다음 절에서 “구원의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구원의 복이 신령한 것인데, 여기의 “하늘에 속하였다”는 뜻은 천국에서 누리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와 관계된 모든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복을 지상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란 특권을 누리는 것 등입니다.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특권과 유익함이 다 신령한 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령하다”는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이 “신령”이란 용어가 “영”이란 말과 원문이 같습니다. “프뉴마”라는 말을 신령(엡 1:3) 또는 영으로(요 4:24) 번역한 만큼 신령이나 영은 같은 뜻으로 아셔야 하고(혹 “로기코스”란 말이 영적 예배, 신령한 것이라고 할 때 쓰여짐, 롬 12:1, 벧전 2:2),

2) 이 용어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만 쓰여진 것이 아니라(요 4:24) 마귀의 영이나(딤전 4:10, 계 16:14) 천사의 영을 말할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히 1:14).

3) 그렇다면 피조물 세계에 신령한 것이 있는가? 할 때 현실은 세속이라 하여 마귀의 무대일 뿐이고, 신령에 반대되는 것이요, 사람의 육체도 부활하기 전에는(고전 15:44) 신령한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도의 거듭난 영은 성령으로 거듭난 만큼(요 3:3) 신령한 것입니다.

4) 따라서 성도들이 신앙 세계에서 말하는 신령이란 뜻은 우선 하나님을 신령한 분으로(영적 존재) 믿는 것이고, 성도의 거듭난 심령(신령한 은사, 롬 1:11; 신령한 너희, 갈 6:1)이 신령한 것입니다.

3. 여기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신령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관계된 모든 것이 다 신령한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누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일반은총은 불신앙세계와 비인격세계를 뜻하고, 특별은총은 예수님을 통하여, 또는 성령님과 말씀의 역사로 나타내시는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신령하다(롬 7:14), 만나는 신령한 음식이다(기적의 양식, 고전 10:3), 교회는 신령한 집이다(벧전 2:5), 예배는 신령한 제사다(벧전 2:5), 거듭난 성도는 신령한 자다(갈 6:1)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4. 그런데 이 “신령하다”는 용어가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을 힘입은 성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고전 2:15),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깨달으며(고전 2:13), 신령한 자는 배려도 잘한다(갈 6:1~2) 하시므로 수준 높은 성도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전 3:1에 보시면 신령한 자를 어른으로, 육신에 속하는 자를 아이로 비유하셨지요. 이렇게 믿음이 성숙한 상태를 신령한 것으로 표현하셨을 때 이와 비슷한 말로 나타난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시 32:6), 경건해야 기도 응답을 받으며(요 9:31), 고넬료와 그 집 종이 경건하였고(행 10:2, 7), 경건과 단정함(딤전 2:2), 경건과 거룩한 행실(벧후 3:11)을 함께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취하는 올바른 자세를 뜻하고, “신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령합니까? 또 얼마나 경건합니까? 이 두 가지는 성도에게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5. 말은 사용하기 나름입니다. 80년도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믿음생활 잘하는 성도를 “경건한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사람 참 경건한 분이야….” 말 실수 안 하고, 말을 적게 하고, 지적 잡힐 일 없이 성실하게 사는 성도나 교역자를 그렇게 일컬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성 운동”이란 말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성 운동이란 믿음을 일으키는 운동이고, 하나님과 성도의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이라도 성도들이 이 영성 운동이란 것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령하시고, 성경이 신령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거듭난 심령이 신령한 것이니까 자신이 성경과 기도와 거리낌 없는 생활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영성 운동이 실현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예수님 닮은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경건하다 하거나 신령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가 받은 믿음 분량 전체로 예수님 닮은 모습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여러 곳에서 통지서가 옵니다. “어느 장소에서 영성 운동도 하고 목회 방법과 교회 부흥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니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10년 전에는 “돈 갖고 오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군데도 거저 오라는 데는 없습니다. 5~20만원을 갖고 가야 영성 운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하셨고, 바울 사도도 거저 주셨습니다(행 20:31~35). 그런데 “비용 갖고 와야 가르쳐준다” 하니, 돈 없는 사람은 가기도 어렵고, 하는 사람은 장삿속으로 한다는 오해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성 운동이라는 방법이 대부분 조직과 수단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회개의 역사를 앞세웠지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마치 기업이 살아 남기 위하여 수단을 쓰는 것처럼 교회 운영 방법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영성 운동이 무엇입니까? 떠들썩 하는 것 아닙니다. 이벤트 행사는 더욱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연구하고, 예수님 닮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신령하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를 헤아려서, 하나님과 자신이 예민할 정도로 가까워지도록, 배우고 생활하며 노력하는 것임을 깨달으시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06과 국가에 대한 성경의 역사 (행 17:24~26) 목록으로


“하나님은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시나”, 우리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이행하여야 하는가?을 알아보기 위하여 “국가에 대한 성경의 역사”를 더듬어보려고 합니다.

1. 국가의 형태가 처음에는 부족사회로 시작하여, 인류가 번성하자 부족간의 갈등이 있으므로 방어력을 키우다 보니 군주 집단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선민제도를 시행하시지 않고, 일반적 통치로 인류를 다스리시다가 노아 때에 패역한 인류를 심판하신 것을 보면, 일반적 통치(선민국가 아닌 것) 하에서도 인류가 패역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셨고, 선민국이 아닌 바벨론이 강해져서 선민국을 응징하게 하신 것과, 또 바벨론을 응징하시기 위하여 메데 파사국을 일으켜 바벨론을 정복하고, 고레스 왕을 세워 선민을 해방하게 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 드리면 모든 국가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선민국가도 다스리신 일이 있으며, 선민국가가 없어진 다음에는 신앙적으로 혼합된 국가가 실현되었는데, 이 모든 국가의 국민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인 아닌 국민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 경우에 국가에 대한 국민의 태도는 두 가지 표준에 의하게 되는데,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선민국을 다스리신 일에 표준을 두어 가능한 한 신앙적으로 생활하고, 비기독교인은 그들 나름대로의 양심에 근거하여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양심을 근거로 하는가 하면 불신자들이 성경을 표준 지침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독교인은 천지의 주재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류와 영토와 주권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통치 섭리에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문 26절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하시므로 인류의 생존과 거주지에 대하여 섭리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롬 13:1에서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세계의 여러 국가에 대한 통치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중교 중심 국가도 있고(바티칸, 모슬렘, 영국성공회, 불교 등) 종교와 무종교의 혼합 국가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종교, 무종교 혼합 민중 속에 정통 기독교인이 섞여 사는 나라인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십니다(계 2:23). 각 사람 중에는 단체적으로 하는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출 9:27) 행위의 척도는 의로우냐, 의롭지 못하냐?로 따지는 것입니다.

2) 불신앙이나 잘못된 종교를 다 의롭지 않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3) 참된 기독교 신앙은 의롭게 여겨주실 것입니다.

4) 끝으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불신자와 악인이 많아도, 진실한 성도 또는 빛 된 교회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지 않습니다. 혹 의인이 악인과 함께 죽어도 의인에게 보상하실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살았고, 놋의 가족이 전멸 중에서 산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사람만 있으면 이 도성을 멸하지 않겠다” 하신 것이나, 엘리사 한 사람을 나라의 병거와 마명으로 쓰신 것(왕하 2;12, 13:14)은 다 성도의 의로움을 보시고, 혼합된 나라를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선민 국가이면 특별섭리로 다스리십니다. 예를 들면, 임금도 하나님의 계시로 세웁니다(삼상 8:6, 10:1). 그러나 혼합 국가에서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의 대상이니까 성도 중심으로(기독교에 큰 비중을 두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비택자에게서 자기를 경외하도록 바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양심을 많이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롬 2:14~15). 그들이 그 양심을 따라 도덕적 선을 행하고, 성도와 교회가 바로 서면, 그 나라는 누가 집권을 하였든지 복 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양쪽이 다 타락하면, 다 징계와 버림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인들이 악하고, 기독교가 자기 위치에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등경 위에서 빛을 발하여 부도덕한 불신자들을 교화하라”고 하실 것입니다(마 5:14). 만일 교회(성도)가 빛을 발할 능력이 없으면, 다 망할 것입니다. 나라가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에 기독당이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염려를 합니다. 한 점도 비난받을 일이 없고, 모범만 되어야 할 텐데, 기독당 안에서 서로 당수 되겠다고 추태를 부리지 않겠나 하는 염려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 부패하여 교회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부패한즉 정치가 그것을 본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핍박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 있는데, 교회가 먼저 반공을 했나, 아니면 공산주의가 먼저 반기독을 했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데올로기 위에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정치하는 방도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인데, 기독교가 공산주의를 대항 또는 피하기만 한 것이 설득 또는 정복할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닌지를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신을 반대하는 무신론, 유물론이라 하더라도 기독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데올로기 대항을 떠나 사랑만 실천한다면 어느 곳에서나 적응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통치에서 적응하시고 반항의 뜻을 보이시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소수의 성도라도 예수님 뜻만 잘 따르면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기독교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