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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Ⅷ)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1.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 있는 말씀 9


제1과 때와 기한에 대하여 (행 1:6~8) 9 바로가기

제2과 하나님의 세 가지 사역 (빌 2:13) 11 바로가기

제3과 능치 못할 일이 없음 (막 9:23) 13 바로가기

제4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눅 18:27) 15 바로가기

제5과 양식 주시는 이적 (마 14:13~21, 왕상 17:4~6) 17 바로가기

제6과 이적에 대한 신앙 (마 12:38~39) 19 바로가기

제7과 세 가지 간구와 응답 (막 5:1~20) 21 바로가기

제8과 돌들이 소리 지름(1) (눅 19:40) 23 바로가기

제9과 돌들이 소리 지름(2) (눅 19:40) 25 바로가기


2. 믿음 생활의 지혜에 대한 말씀 27


제10과 신앙생활의 전환점 (눅 5:1~11) 27 바로가기

제11과 신앙생활의 7대 법칙 (잠 16:9) 29 바로가기

제12과 한 번만 하는 설교 (벧후 1:10~11) 31 바로가기

제13과 적은 수의 중요성 (렘 5:1, 행 27:22~26) 33 바로가기

제14과 가까운데 하나님 (렘 23:23~24) 35 바로가기

제15과 네 믿음이 너를 (마 9:22) 37 바로가기

제16과 기쁨의 소재 (눅 10:17~24) 39 바로가기

제17과 착각과 잘못된 지식 (눅 12:13~21) 41 바로가기

제18과 어리석은 자 (눅 12:13~21) 43 바로가기

제19과 무리에게 이르심 (눅 12:54~59) 45 바로가기

제20과 두 아들의 문제 (눅 15:11~32) 47 바로가기

제21과 한 가지 부족 (눅 18:18~27) 49 바로가기

제22과 어떻게 변화할까? (롬 12:2) 51 바로가기

제23과 세 종류의 누룩 (마 16:6~12, 막 8:15) 53 바로가기

제24과 주의할 일 (막 13:33, 벧전 5:8) 55 바로가기

제25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28) 57 바로가기

제26과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 (요 4:46~54) 59 바로가기

제27과 둘 다 보존됨 (마 9:16~17) 61 바로가기

제28과 예수님의 만족과 유감 (엡 4:30) 63 바로가기

제29과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27~32) 65 바로가기

제30과 베데스다 못의 다른 시각 (요 5:1~10) 67 바로가기


3. 성경(예수님) 중심에 대한 말씀 69


제31과 읽어서 은혜 받음 (엡 3:3~4) 69 바로가기

제32과 설교자와 듣는 자 (벧전 3:15, 행 16:14) 71 바로가기

제33과 성경은 나에게 (딤후 3:15~17) 73 바로가기

제34과 성경을 어찌할까요? (시 119:43~56, 97~106) 75 바로가기

제35과 성경을 사랑합시다 (요 5:38~39) 77 바로가기

제36과 성경과 예수님 (요 5:36~39) 79 바로가기

제37과 무슨 교훈을 받을까요? (눅 9:12~17) 81 바로가기

제38과 감동과 변화를 주신 말씀들 (계 1:2~3) 83 바로가기

제39과 변화 계시의 의미 (눅 9:28~36) 85 바로가기

제40과 예수님을 잊어버림 (눅 2:41~51) 87 바로가기

제41과 숨기시고 나타내심 (눅 10:21~24) 89 바로가기

제42과 권세 있는 가르침 (막 1:21~22, 27) 91 바로가기

제43과 가버나움에서의 교훈들 (막 9:33~50) 93 바로가기

제44과 신앙과 이성 (요 6:69, 엡 4:13, 요일 5:20) 95 바로가기


4. 기도에 대한 말씀 97


제45과 기도와 결과 (막 1:35~39) 97 바로가기

제46과 그의 뜻대로 구함 (요일 5:14~15) 99 바로가기


5. 예배에 대한 말씀 101


제47과 예배에 대한 묵상 (요 4:23) 101 바로가기

제48과 예배 모범에 대하여 (요 4:21~24) 103 바로가기

제49과 공예배의 질서 (고전 14:26~33, 40) 105 바로가기

 

6. 믿음 성장과 천국 실현 107


제50과 성장의 은혜 (막 4:26~29) 107 바로가기

제51과 불의 역사를 소원하심 (눅 12:49~53) 109 바로가기

제52과 천국 건설에 대한 예언 (겔 36:24~38) 111 바로가기

제53과 악인의 회개 (겔 18:21~24) 113 바로가기

제54과 생명강수의 은혜 (겔 47:1~12) 115 바로가기

제55과 천국의 성장과 완성 (눅 13:18~19) 117 바로가기

제56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과정 (막 4:26~29) 119 바로가기

7. 사명과 봉사에 대한 설교 121


제57과 바른 목표 (마 11:7~19) 121 바로가기

제58과 개혁자적 소감 (살전 5:2) 123 바로가기

제59과 예수님의 제자의 의미 (마 28:19~20) 125 바로가기

제60과 구제하는 법 (마 6:3~4, 눅 14:12~14) 127 바로가기

제61과 은혜와 사명 (눅 14:15~35) 129 바로가기

제62과 예수님과 세례 요한 (마 11:7~10, 12:15~21) 131 바로가기

제63과 네 손을 내밀라 (막 3:1~6) 133 바로가기

제64과 예수님의 인사 정책 (막 3:13~19) 135 바로가기

제65과 청탁 (마 10:35~45) 137 바로가기

제66과 주밀하게 살피심 (막 12:38~44) 139 바로가기

제67과 포도원 사수 (왕상 21:1~10) 141 바로가기

제68과 무화과나무 (막 11:12~14, 20~23) 143 바로가기

제69과 한 여인의 봉사와 평가 (막 14:3~9) 145 바로가기

제70과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막 2:1~12) 147 바로가기

제71과 헌금 지식 (막 12:41~44) 149 바로가기

제72과 목회자의 리더십 (고전 15:31) 151 바로가기

제73과 요한의 사명적 자세 (요 3:29~30) 153 바로가기


8. 전도에 대한 말씀 155


제74과 복음을 믿으라 (막 1:14~15) 155 바로가기

제75과 거듭남의 지식 (요 3:3~8) 157 바로가기

제76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요 3:16, 엡 3:18~19) 159 바로가기

제77과 그 이름을 믿는 자 (요 1:12~13) 161 바로가기

제78과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 (요 4:3~18, 25~30) 163 바로가기

제79과 기독교의 구원 (요 3:16, 행 16:31) 165 바로가기

제80과 보고 듣고 고하라 (겔 40:1~16) 167 바로가기


9. 절기에 대한 말씀 169


제81과 성탄 축하 (요 1:9~14) 169 바로가기

제82과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막 11:1~2) 171 바로가기

제83과 고난과 속죄 (히 2:9~10) 173 바로가기

제84과 부활의 당위성과 증거 (행 4:16~21, 요 5:21) 175 바로가기

제85과 부활 신앙과 변화 (요 21:15~18) 177 바로가기

제86과 부활의 은혜와 사명 (요 20:19~23) 179 바로가기

제87과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07:1~9) 181 바로가기

제88과 영적 가을의 교훈 (요 4:35~38) 183 바로가기


10. 말세에 대비함 185


제89과 일어나 머리를 들라 (눅 21:20~28) 185 바로가기

제90과 예비하고 있으라(1) (마 24:42~44) 187 바로가기

제91과 예비하고 있으라(2) (눅 12:35~40) 189 바로가기

제92과 예비하고 있으라(3) (눅 12:35~40) 191 바로가기


11. 연단, 시련 극복의 말씀 193


제93과 환난 중의 기도 (시 143:1~12) 193 바로가기

제94과 풍랑과 대책 (막 4:35~41) 195 바로가기

제95과 환난과 극복 (행 12:1~19) 197 바로가기


12. 다니엘서 강론 199


제96과 다니엘의 신앙 절개 (단 1:1~16) 199 바로가기

제97과 세 사람의 신앙 (단 3:17~18) 201 바로가기

제98과 바벨론의 멸망 (단 5:1~9, 25~30) 203 바로가기

제99과 말세에 필요한 말씀 (단 12:1~4) 205 바로가기


13. 입성, 은사, 피에 대한 말씀 207


제100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207 바로가기

제101과 은혜와 은사에 대한 이해 (롬 12:3~8, 고전 7:7) 209 바로가기

제102과 식물(食物)과 피 (창 9:3~6, 딤전 4:3~4) 211 바로가기

제103과 살과 피를 먹는 의미 (요 6:49~58) 213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7분설교 8집을 끝내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문은 필자가 누가복음 강론을 쓰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간간히 모은 것입니다.

과목을 105과목으로 편집한 것은 1집으로 5집까지 구역예배공과로 편집하였던 것처럼 계속하려 하였으나 절기설교를 배열하지 못한 관계로 공과의 의미는 없게 되었고, 52주 2년분을 뜻할 뿐입니다.

나중에 기록한 것일수록 더 좋은 교훈이 나온다는 느낌을 받고 감사하였습니다. 이 설교집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기록한 필자가 무엇을 묵상하였는가를 헤아리면서 읽으실 때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정독과 헤아림과 반성이 동반되지 않으면 은혜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강론과 9집을 집필하오니 많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2003. 7. 19.


저자 지 영 근

 


Ⅰ.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 있는 말씀


제1과 때와 기한에 대하여 (행 1:6~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때와 기한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때”는 특별한 시점을 뜻하고, 기한은 연장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별할 시점은 기회로 이해할 수 있고, 연장되는 시간은 기간이란 뜻인데, “이것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는 때, 날 때, 성취할 때, 죽을 때”가 하나님께 달린 일이고, 또 “얼마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는 기간”도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전 3:1에 보시면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하셨는데,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셨으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섭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때”는 기회이고 “기한”은 기간인데, 여기에 대하여 원문 상의 표현을 놓고 분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때”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가 일곱 단어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헤메라(마 2:1), 카이로스(마 8:29), 크로노스(마 2:7), 호라(마 10:19), 유카리오스(히 4:16), 토테(마 13:26), 에피(살전 1:2)입니다. 이 중에 “크로노스”는 기회를 뜻하고, “카이로스”는 기간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근거는 본문 번역에 따른 것이지만, 꼭 그렇게 구별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 “때”로 번역한 “크로노스”가 계 2:21에서는 “기회”로 번역되었고, “기한”으로 번역된 “카이로스”는 갈 6:10, 히 11:15, 행 25:16에서 기회로 번역되었으니(롬 13:11, 살전 5:1은 시기로), 일정한 구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회를 주시는 것과 시간을 정하여 통치하시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배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기회(때)와 기한을 어떤 일들에 정하여 쓰시는 지를 배워서 성도들의 생활에 도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먼저 때(기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갈 4:4에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를 정하시고, 그 때에 탄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뺏긴 지 400년쯤 되는 해였습니다.

2) 마 11:12~13에서 “요한의 때”란 말씀이 있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 또 롬 10:4에서도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하셨으니까 요한과 예수님이 공생애로 나타나신 때를 율법이 끝나는 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끝났다는 뜻은 율법의 의식과 교훈이 전부 예수님 안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3) 십자가의 때를 정하시고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요 2:4과 7:6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하셨고, 요 8:20에서는 “잡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시므로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을 반드시 그해 유월절 첫날에 돌아가시도록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4) 부활도 돌아가신지 3일만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마 16:21, 17:22, 20:19Z), 요나의 표적으로도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마 12:39~40).

5) “이방인의 때”란 말씀이 눅 21:24에 있습니다. “이방인의 때”가 언제입니까?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기도 때를 정하고 역사를 섭리하신 것이요,

6) “은혜의 때”란 말씀이 있습니다. 사 49:8에 보시면 “은혜의 때에…응답하시고 구원의 날에…돕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후 6:2에서 인용하시므로 “지금이 곧 은혜 받을 때”라 하셨으니, 이사야는 그 은혜의 때를 800년 전에 예언하였고, 그때는 곧 복음시대 이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7:6).

7) “성령을 보내시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눅 12:49에서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성령을 속히 보내시지 못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신 후,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셔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시면서 답답함을 느끼신 것입니다.

8) 추수 때(마 13:30), 곧 형벌의 날(렘 46:21, 50:27)을 정하신 것입니다. 행 17:31에 보시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 추수 때에 태울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 그 다음 기한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1) 모든 생명체의 수명을 정하셨습니다. 사람도 그렇고(행 17:26), 참새도 그렇습니다(마 10:29).

2)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400년간 객이 될 것과(창 15:13),

3) 출애굽한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 머물러야 할 것과(신 2:7),

4) 선민이 범죄하였을 때 40년간 블레셋에 붙인 사실과(삿 13:1),

5) 바벨론 포로 기간을 70년으로 하신 것을(단 9:2) 성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을 아는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과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유쾌하게 되는 날을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행 3:19, 히 9:10, 행 3:21).

 

제2과 하나님의 세 가지 사역 (빌 2:13) 목록으로


본문에 나타난 말씀에서 “하나님의 세 가지 사역”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시므로 “성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신 말씀에서 “영광 받으실 뜻을 갖고 계신 것”을 나타내셨으며, “너희로 소원을 두고 이루나니라” 하시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세 가지 사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셨고, 또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 “애굽으로 같이 간다” 하셨으며(창 28:15, 46:4), “거처를 같이 하시고 생활도 같이 하신다”(요 14:23, 계 3:20), “싫어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신다”(사 41:9~10 하셨고, 예수님도 승천하실 때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마 28:20)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함께 하실까요? “말씀과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고, 말씀과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엡 3:17, 약 1:21).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요 14:17) 진리이신 예수님과 또 진리이신 성경을 떠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으로 접하고 성경에 이끌리는 감동으로 느끼며 섭리적 보호와 인도를 받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뜻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뜻만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동반하여 감동과 지혜와 실천력도 나타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성경을 상고하실 때 죽은 자의 역사 이야기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전능자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그 앞에서 큰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란 말씀에서 우선 절대자의 주권을 음미할 수 있고, 또 절대자의 자기 영광 목적을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주권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나타내신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나타내주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살림을 사람의 가정 살림으로 비교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기뻐하는 뜻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선 가족의 건강입니다. 그 다음은 생활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자녀들의 발전하는 생활을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지만 성도들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요 17:17). 그 대표적인 말씀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셨고 부르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롬 8:29) 즉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1) 온전한 믿음을 확립해야 합니다(히 10:22). 바른 성경관과 성경의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항상 깊이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필요합니다(빌 1:27). 본래부터 믿음이란 실천을 동반하여야 하니까요. 예수님의 생활을 최대한 본받는 것입니다.

3) 신앙생활의 발전을 계속 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 사역을 하시면서도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하셨고(빌 3:11), 늘 성장하고 발전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고전 14:2, 히 5:14). 성도가 자기의 가족을 위하여 바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택한 백성들의 믿음과 순결로 예수님을 닮게 하시므로 천국 백성 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3. “너희로 소원을 두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갖게 하시고, 그것을 소원하게 하시며, 또 기도하게 하시고 노력하게 하셔서 이루시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소원을 두고 이루신다”는 말씀은 성도의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계라면 기공사의 작동만으로 기계 활동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지혜를 가진 인격자이기 때문에 인격의 특권으로 활동하게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니까 우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그대로 받아 나의 기뻐하는 뜻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기뻐하시는 뜻의 최후 목표는 자신이 예수님을 많이 닮으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목표에 대한 뜨거운 소원을 갖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소원하여 이루게 하신다” 하셨으니까요.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믿음도 더 주시고, 사랑도 더 주시며, 정의감도 더 주시고, 헌신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그 취지에 따라 노력하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목적으로 노력하다보면 세상적 특권이나 향락에서 멀어지고 점차 고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성도의 모든 일을 맡아주십니다. 독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호하실 것이고, 사람이 돕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서라도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마 6:33, 민 20:16, 왕상 19:5).

 

제3과 능치 못할 일이 없음 (막 9:23) 목록으로


아들의 귀신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한 아버지가 “예수님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겨 도와주십시오” 한즉 (예수님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셨는데 이렇게 표현한 말씀은 본문에만 있습니다. 능력을 힘입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에 대한 말씀으로 (여러 차례)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이고(마 19:29), 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도 하셨으며(마 9:22),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넣을 수 있고(눅 17:5~6), 산도 바다에 던질 수 있으며(마 21:21~22), 믿음 있고 의심치 않으면 무화과나무도 말리고(마 21:22),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니(마 21:22)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 말씀만 잘 응용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고, 속된 말로 도깨비 방망이를 갖는 것이 아닌가? 하여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뽕나무가 뽑히고 산이 들려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하시니까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였을 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마 19:26)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가능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성도가 어떻게 응용할 수 있습니까? 잘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믿음, 믿습니다”의 뜻을 잘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자기 생각, 자기 욕망대로 소원한다고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이 믿음을 세 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동차가 길 아래로 굴렀을 때 어떻게 해야 그 차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아주 쉬운 문제입니다. 우선 능력 있는 차를 불러와야지요. 다음에 끊어지지 않을만한 줄로 연결을 해야 하고, 또 그 다음에는 운전사가 그 차를 끌어내주기 위한 소원을 갖고 운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큰 차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다음에 줄 역할은 “겨자씨만한 믿음”인데,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 그것을 겨자씨처럼 작게 표현하셨는가? 하면 어른처럼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무시할 수 없는 명분만 있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갓난아기라도 그 아버지의 핏줄이란 명분만 있으면 아버지가 의무를 느끼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정받는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운전사가 운전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소원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의 소원을 맞추어 갖는 과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빌 2:13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도에게 주셔서 성도가 그 소원을 갖고 기도와 노력으로 성취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소원과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성경에서 찾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것은 성도들도 삼가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하려는 문서 사역이 후시대에 꼭 빛을 볼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을 욕심껏 소원할 때는 저절로 의심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뜻은 진실하니까 의심이 갈 수 없고,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이 여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배만 깨지고 사람은 다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여러분, 안심하시오.(이것이 이룬 것처럼 믿는 태도임) 나는 내게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소원을 가지면 의심 안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합되는 것이면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인즉 의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뽕나무가 마르고 산이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못할 것 같은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새만금은 바다가 육지 되는 것이고, 골프장은 산이 평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일인들 안 되겠습니까? 노예 신세인 요셉이 그 나라 총리될 수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되게 하셨고, 또 목동이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안 될 일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뜻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이 갖고 싶은 소원이 무엇입니까? “믿습니다. 오래살고 싶습니다” 해보세요. 행 17:26에서 “안 된다. 수다 떨지 말아라. 이미 작정하셨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믿습니다. 10억만 주십시오” 해보십시오. “안 된다 부자는 천국가지 어렵다”(마 19:23)고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4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눅 18:27) 목록으로


“사람은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우선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많은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다고 하면서 과학의 힘을 과시하지만 안 죽게 하는 일을 못하고, 타락에서 헤어 나오는 일도 못하며, 잠깐 뒤에 될 일도 모르는 등, 무식하고 무능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얇은 종이처럼 연약한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죄 짓는 일을 빼고는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사 9:6). 창조하셨고, 보존 통치하시며, 모든 생명체를 키우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하실 수 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사람이 상상 못할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뜻이지요. 그 일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죄인은 의를 행할 수 없는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니까 가장 어렵고 비상한 방법을 쓰시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희생으로 대속하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저희들은 한 사람 인도하는 일을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고, 또 제사드릴 양이 성전에 몰려오는 것처럼 사람의 떼로 채워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3:9, 겔 36:37~38). 바벨론 포로 때 흩어진 선민의 힘으로 해방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들어 해방시키셨고, 또 성전 재건할 힘이 없었지만 역시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슥 4:6). 하나님은 매사를 간섭 안 하시는 일이 없고, 심지어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리신다”(마 10:30)는 뜻은 그만큼 주밀하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것도 좋지만, 그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의 생활에 역사되도록 이끄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눅 18:42에도 보시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힘이 없어서 눈을 밝게 하지 못했는데, 그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그에게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롬 4:17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되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으로 무엇을 해결하였습니까?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할 입장에서 하나님이 “대신 양을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셔서 문제가 쉽게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바꾸시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어야 하고 이삭은 죽어야 할 것이나, 아브라함이 이미 부활의 믿음 가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사를 중단시킨 것입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자신에게 역사되지 않아서 큰 고생을 하였는데 예수님을 만날 무렵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서 그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믿음을 아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기 위하여 지중해를 건널 때 풍랑으로 거의 살 소망이 없었는데 밤에 예수님이 자기 곁에 오셔서 “너를 가이사 황제 앞에 세울 것이다. 또 너와 같이 행선하는 사람들도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울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었다”고 하였습니다(행 27:23~26). 결국 배는 깨졌지만 사람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고, 바울은 가이사 황제 앞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구원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드렸고, 또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생활이나 우리의 환경에 역사해 주실 수 있도록 이끄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4.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그 능력에 의존할 수 있겠습니까?

1) 많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하감하시고(시 138:6),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약 4:6~10),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가 되고(잠 15:33), 은혜를 힘입은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처럼(창 18:27),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감당 못할 것으로(창 32:10), 모세는 입이 둔한 자로(출 3:11, 4:10),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의 소리로(마 3:14) 생각하면서 자기는 낮추고 긍휼만 구했던 것입니다.

2) 부탁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부탁해라(사 45:11), 구하라(마 7:7, 눅 11:13), 맡기라(시 37:5, 벧전 5:7)고 하셨습니다. 저는 30 가까운 두 딸이 있습니다. “어느 총각을 붙잡고 너 내 사위 되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지요. 참으로 막막한 일입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 부탁하면 하나님이 잘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3) 기다려야 합니다. 시 37:5에 보시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할 것이라” 하셨고, 애 3:25에서도 “기다리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릴 때 조급하면 안 됩니다. 성취되는 때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잘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고, 기도하며, 맡기고, 기다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과 양식 주시는 이적 (마 14:13~21, 왕상 17:4~6) 목록으로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적으로 양식 주신 사실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순서대로 소개하면 광야에서 만나, 메추라기, 반석의 물을 주셨고(출 16:13~14, 17:6), 엘리야 때에 사렙다 과부에게 가루와 기름을 주셨으며(왕상 17:8~16), 엘리야 자신에게는 천사를 통하여 구운 떡과 물을 먹게 하신 일이 있었고(왕상 19:5~8), 또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조석으로 먹이셨지요(왕상 17:4~6). 그리고 엘리사 때에 어떤 선지 생도의 집에 기름을 주셔서 빚을 갚고 생활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왕하 4:1~6). 신약에 와서는 포도주 이적과(요 2:1~11), 5병2어, 7병2어로 기적을 두 번을 행사하셨습니다. 5병2어, 7병2어란 떡 병(餠)자, 고기 어(魚)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양식의 이적을 행하실 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 5,000명이상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신 일이고, 또 한 번은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신 후 4,000명(여자와 아이 외)이상이 먹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 중 5병2어의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었으나(막 6:35~44, 눅 9:12~17, 요 6:9~13), 7병2어의 사건은 마 15:32~39과 막 8:5~9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4복음에 기록된 것을 대조하면 요한의 기록이 가장 특징이 있고, 공관복음은 약간의 표현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마태는 “빈 들에 계신즉 여러 고을에서 무리들이 모였다” 하였고, 마가는 “한적한 곳에 쉬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왔다”(32~33절) 하였으며, 누가는 “벳세다 고을에 많은 사람이 모이니 예수님이 영접하시고 병을 고쳐주셨다”(11~12절), 요한은 “디베랴 건너편 산에 올라가셨는데 유월절이 가까워지는 때라 많은 사람들이 표적도 볼 겸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마태, 마가는 예수님이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을 기록하였고,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이 식사 염려(점심인 듯)를 하니까 예수님이 갖고 있는 음식을 받아가지고 축사하여 먹게 하셨는데, 요한은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느냐?”고 시험적으로 물으신즉 빌립이 “200 데나리온 어치를 사와도 모자랄 것인즉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대답하였을 때, 안드레가 한 아이의 준비한 “5병2어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몇 명씩 잔디 위에 앉혔다”(18절), 마가는 “푸른 잔디 위에 100 또는 50씩 앉혔다”(39~40절), 누가는 “50씩 떼 지어 앉게 했다”(14절), 요한은 “사람들이 앉으니라”고 하였으며, 공관복음에는 물고기를 “익두스”라 하였는데, 요한은 “옵사리아”라고 표현한 점이 다른 것입니다. “옵사리아”는 아주 작은 물고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요한의 기록에 한 가지 더 부언할 것은 13절에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적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모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굶겨 보내면 기진할 것이기 때문에 7병2어로 4,000명이상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것입니다(막 8:1~9).

1. 중요한 것은 하나님(예수님)이 왜 이런 이적을 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이적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여러 차례 형편에서 공통되는 것은 양식을 구하거나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입장에서만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조자의 책임입니다. 마 6:25~26을 보시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런 약속에 대한 입증으로도 나타내신 줄 압니다.

2. 어떤 방법으로 시행하셨는가? 할 때 남아있는 기름과 밀가루, 또는 떡과 물고기를 근거로 하여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것은 성도가 죽기 전까지는 적은 것이라도 있는 밑천으로 힘쓰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발전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단돈 만원이라도 있으면 적다거나 없다 하지 마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힘을 쓰시라는 것입니다.(만원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한다면 계란을 세 판씩 갖고 다니면서 팔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방법은 이적에 순종이 안 따른 예가 거의 없습니다. 엘리야가 시냇가에 숨어있을 때를 제하고는 다 순종하였습니다. 가루 이적이나, 기름 이적이나, 포도주 이적이나, 떡과 물고기 이적 등에서 다 순종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체와 가정과 개인을 상대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이적을 오늘날도 주신다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기독교인들이 굶어죽게 된 사람도 드물고, 그 사람 곁에 도와줄 수 있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럴 형편이 못 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안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이적을 나타내신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증거하는 목적이 큰 것입니다. 또 그때 이후 이런 이적이 안 나타난 것은 일반은총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6과 이적에 대한 신앙 (마 12:38~3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적에 대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대로 이적에 대하여 배우시고, 이적을 추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좀 강하게 표현하여) 원칙이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병나면 병원으로 갑니다. 그리고 의술로 병 고침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의술 같은 일반은총을 무시하고, 또 하나님의 통치 섭리도 무시하면서 병원이나 약을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부활할 자가 죽었으니 기다리자는 식으로, 신앙을 기적에 의존하여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극단이나 치우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보통으로 가는 것이 정상 위치일 것입니다.

1. 이적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하겠지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5:3에서 “하나님은 통상섭리로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시나 때로는 그의 기쁘심에 따라 통상섭리를 초월하여 하시는 일을 자유로 하신다” 하였으니, 이 뜻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이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능하시고 주권이 있으신 하나님이시니까(사 9:6, 창 49:24)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통상섭리는 일반은총 또는 자연법칙을 의미하고, 그것을 초월하였다는 것은 특별섭리요 기적을 나타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핫지”란 조직신학자는 말하기를 “이적은 하나님이 외면세계에서 통상섭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나타내시는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여 이적은 인간의 과학적 절차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2. 이런 능력을 하나님이 얼마나 나타내 주셨을까?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신 만물창조, 있는 것을 영구 보존하시는 유지, 지구의 자전을 쉬게 하거나 물을 거슬러 올리거나 풍랑을 임의로 조정하시는 일, 병을 고치시고 생사를 임의로 하시는 일, 먹을 양식을 늘리거나 훼손을 막는 일 등, 자연계와 물질계와 생명에 관한 일 등, 또 미래를 예언하시는 일 등, 광범위한 이적을 행하신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건수로는 구약에 64건, 신약에서 58건이며, 이적으로 은혜가 되게도 하셨고, 반대로 벌도 내리셨으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직접 나타내시기도 하셨고, 천사나 사역자를 통하여 나타내기도 하셨는데, 신약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37회이고, 종류로는 병 고침, 사귀 쫓으심, 죽은 자를 살리심, 고기 잡는 일, 양식 먹이신 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 그리고 자신의 부활과 승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타낸 이적은 병 고침 세 번, 물위로 걸은 일 한 번, 죽은 자 살린 일 한 번, 벌 받아 죽게 한 일 한 번이었고, 바울의 이적은 소경되게 한 일 한 번, 병 고침 세 번, 사귀 쫓은 일 한 번, 유두고 살린 일로 각각 여섯 번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제자들이 귀신 쫓는 일을 행하였다 하였고(눅 10:17), 또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막 16:17). 그런데 어떤 자들은 이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다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마 12:39) 하시므로 이적의 표현을 상당하게 거절하신 것입니다(눅 11:16). 지금도 이적으로 진리를 시험하려는 자가 있다면 더욱 거절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의 초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큰 이적을 행하였으나, 이 두 사람의 말기에는 이분들이 다 순교하였고(이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 바울 사도의 말년에도 “에바브라디도”와(빌 2:25~27) “드로비모”가 병든 것을 고쳐주지 못한 것을 보아(딤후 4:20) 이적의 실현이 중지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사와 표적의 용어는 같은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마 12:38, 24:24, 막 13:22).

3. 신약 시대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적을 나타내신 큰 목적은 예수님의 메시야 증언과 기독교의 기초 수립이요(히 2:4), 약간의 긍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으로 계시가 완성되고, 일반은총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이적의 필요성은 거의 감소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어떤 이가 이적을 시험적으로 사모한다면 결코 나타내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적을 자기의 안일한 생활에 쓰려고 하여도 안 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수고하고 땀 흘려 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3:17, 시 37:3, 시 128:1, 요 5:17, 살후 3:10).

4. 오늘날에 와서는 이적의 종류 중 병 고침에 대한 것만 추구하는 성도들이 있는 줄 압니다. 다른 이적은 거의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병 고침이나 귀신 쫓는 일은 지금도 나타내주셔야 좋을 줄 압니다. 그래서 고전 12:9에 “병 고침의 은사가 있다” 하셨고, 약 5:15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신다” 하셨으므로 일반은총도 의존하면서 병 고침과 건강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심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전등불이 들어온즉 등잔불이 없어지는 것처럼 과학의 발달로(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임) 삶의 방도가 좋아짐에 따라 기적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기적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되 기적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섭리로 역사하시는 것인즉, 그 확률이 꼭 자기에게 나타난다는 생각을 멀리하시고 노력하는 대로 거두는 일반은총을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은총도 기적처럼 주시는 은혜가 많습니다(히 4:16). 복권을 사려하지 마시고, 수고의 대가를 바라시라는 것입니다(고전 13:10, 일반은총이 온전한 것임).

 

제7과 세 가지 간구와 응답 (막 5:1~2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마 8:28~29과 눅 8:26~39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두 강해문에서 자세한 설명을 드렸고, 본문에서는 제목대로 “세 가지 간구와 주님의 응답”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본문 10절과 12절에 “간구”란 용어가 나왔고, 또 17절과 18절에도 “간구”란 말씀이 있습니다. 앞에 두 번은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간구한 것이고, 두 번째 간구는 가다랴의 거민들이 예수님께 간구한 것이며, 세 번째 간구는 귀신병 고친 자가 예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각각 간구한 사람의 간구 취지와 예수님의 응답이 어떠하셨는지에 대하여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첫째 간구는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의 정신으로) 예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하였는데, 하나는 거라사(가다라; 마 8:28)에서 자신을 멀리 보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자기들(단체 귀신)을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무질서한 힘은 대단하였습니다. 무덤 사이에 거하고, 이미 고랑을 깨뜨렸으므로 다시 쇠사슬로 맬 수도 없게 되었으며, 밤낮 산이나 무덤을 가까이 하고, 돌로 자기의 몸을 상하였으니, 귀신이 사람을 붙잡고 귀신의 본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이 그 귀신의 신분을 물으신즉 “그 이름이 군대요 수가 많다” 하였은즉 귀신의 세계에도 조직이 있고(마 10:25), 무리가 있으며, 신분상 이름은 물론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귀신을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8절). 사람도 공간이 있고, 집이 있어야 평안한 것처럼 귀신도 적당한 삶의 터가 있어야 하고, 또 거처할 집도 있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입니다. 사람이 귀신의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나타난 상태로 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나오라”는 명을 받은 귀신이, 그 지역이 자기 살기에 적당하므로, 멀리 쫓지 마시도록 간구하였으나, 마침 그 지역에 큰 돼지 떼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해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는 욥 1:7~12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명령도 하셨은즉(12절) 사탄은 간청을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원한 의도를 사람은 모르나 예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허락하셔야 할까요, 마셔야 할까요? 또 예수님이 허락하셨을 때 돼지 떼 2,000 마리가 물로 들어가 죽을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 허락에 연계된 결과는 우선 병자가 나은 것과 돼지 떼 2,000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 귀신은 돼지만 놀라게 하여 죽게 하고, 다시 어디로 도망을 하였겠지요. 귀신이 돼지와 함께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예수님이 이 일을 행하신 목적은 귀신의 간구를 응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병자를 살리고, 가다라 사람들의 재산을 없애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것처럼 누구의 재산도 쌓게도 하시고 없애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뜻이 있겠지요(삼하 2:7).

2. 거라사 거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나와 본즉 돼지 떼는 없어졌고, 귀신들린 자는 고침 받은 상태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시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간구하였을까요? 다른 재산에 또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였을 것이고, 귀신병을 고친 자에 대한 애착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귀신들렸던 자의 불행을 생각하면서 고침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면 예수님께 감사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물질을 사랑하고, 생명의 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입장에서 물질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주를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 간청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영접하지 않고 떠나라” 하는데 쳐들어갈 이유도 없고, 억지로 사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허락하시고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복음은 선물입니다. 기쁨과 감사로 받을 때 주는 것이지 떠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3. 병 고침 받은 자의 간구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려는 뜻으로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도 그의 사명의 정신을 받아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절하시고 “너의 동리에 가서 예수님이 너를 불쌍히 여겨 큰 일 행하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셨으니,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효력이 나타날 것을 예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리의 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아시는 분이고, 생각이 높으신 분입니다(사 55:9). 전도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전도의 효력보다 예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더 귀한 일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행 8:5~8).

 

제8과 돌들이 소리 지름(1) (눅 19:40) 목록으로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뜻은 하나님의 증거 사역의 방편으로써 인간이 진리를 증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인격의 사물을 통해서라도 증거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증거는 사람에게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고, 고고학적 유물이나 발생하는 일들로도 증거됨을 뜻합니다.

1. 성경에는 그런 뜻의 말씀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한다”(합 2:1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하신 일을 나타내며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고 언어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시 19:1) 하셨으며, “천지로 증거를 삼으시고(신 31:28, 롬 1:20) 나귀의 입이나 닭의 울음으로도 뜻을 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민 22:28, 마 26:75).

2. 무인격의 증거는 고고학적 유품들로 증거됩니다.

1) 고고학이란 옛날의 생활 문화나 유품을 통하여 일정한 원리를 정립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필자가 무덤을 정리하면서 32대, 33대 직계 조부의 유골을 그 표석과 함께 확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확실한 증명은 무덤 속에서 나온 표석이 한 것입니다. 이런 사례가 성경에도 적용됩니다. 고고학은 1798년부터 연구, 발굴하기 시작하였는데, 1901년에 프랑스의 “모르간”이 이란의 남단 “수사”(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수도, 창 10:22)에서 “하므라비”(바벨론 최초의 왕으로 주전 1728~1686년 재위) 법전(왕의 통치 법률, 민법 270조문 중 245조문만 상형문자로 나타남)을 발견한 때부터 활성화되었다고 합니다. “하므라비” 법전은 아브라함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데, 그 법전에는 “가장이 죽으면 어머니보다 장자의 권한이 크고, 여동생의 혼인 주권을 그의 오빠가 주관하고, 혼인하는 여동생의 몸값도 그의 오빠가 받는다고 합니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때 반드시 돈을 주고 사와야 하며 건강상 비만한 여인은 몸값이 많으며, 결혼 후 여인이 병들면 그 몸값을 받은 오라비가 치료비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법전은 아브라함 시대보다 200년쯤 뒤의 것이므로 아브라함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2) 1925~1931년에 티그리스강 동편 호리족(창 36:22)이 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누지”에서 발견된 토판을 보면(주전 2,000년경의 것) 양자는 친족이나 종과 자유자 중 할 수 있고, 재산은 주인이 죽었을 때 상속되며, 후에 친자가 나타나면 양자 계약이 말소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종을 상속자로 삼았다가 이삭이 상속자 되는 일이 있었을 것이요(창 24:2), 또 아브라함이 서자 이스마엘을 낳았다가 14년 후에 적자를 낳은즉 서자가 쫓겨난 것도 그런 법의 적용입니다(창 17:21, 25). 또 본처가 생산을 못할 때 여종에게서 후사를 얻었다면 그 여종을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사라가 하갈을 쫓으려 하니까 아브라함이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창 21:12). 또 유언의 권위가 있어서 취소하지 못하는 법이 있었고, 장자의 명분을 팔고 사는 법도 있었으며, 드라빔은 여러 동물 모양의 종류가 있는데, 그것을 수호신으로 보관하였고, 그것을 소유한 자가 상속자임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라헬이 아버지로부터 재산상 손해난 것을 만회하려고 그것을 도적한 듯 합니다.

3) 6,000년 전의 지층에서 아담과 하와와 과일나무가 새겨진 도장이 나왔고, 현재 이락의 영지에 노아 방주의 잔해가 있으며, 또 요한이 조개껍질로 물을 담아 앉은 사람의 머리에 붓는 조각품이 발견되었고, 모세 때의 율법이 석판, 토판, 목판, 우피지, 양피지, 파피루스, 목면포 등에도 기록된 것이 출토되어 성경의 역사를 증명한다고 합니다.

4) 그 중에 중요한 것은 성경사본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파피루스가 76개가 발견되었고, 양피지 사본으로 대문자형이 250개, 소문자형이 2,600개와 lectionary라고 하는 교독문 단행본이 1,600개 등을 합하면 4,526개의 단편 사본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집합되어 성경이 형성된 것이고 성경의 정경성과 전통성을 외증으로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5) 성경 사본의 이름은 발견 장소나 발견 순서 또는 재료 형태 등으로 사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해 주변에서 발견된 것을 사해 사본, 시내산에서 발견된 것을 시내산 사본,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을 “파피로스” 1, 2,…로 p76까지 있으며, 같은 사본이 여러 개 나왔을 때는 발견순서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이 사본에 대한 정경성에 대하여 <기독교신앙백과> 226p를 참조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본을 발견 또는 구입, 보존하는 일과 사본으로 인하여 성경 해석의 논쟁을 해소하는 일 등에 대하여 A(ָָא)사본과 p52사본과 사해사본을 예로 들어 다음 과목에서 옮겨드립니다.

 

제9과 돌들이 소리 지름(2) (눅 19:40) 목록으로


1. א(A) 사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1884년에 독일의 청년 신학자 Tishendorf가 성경 사본을 찾기 위하여 성지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하루는 시내산 입구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에 가서 며칠을 쉬는데, 그곳의 사찰이 양피지에 기록된 고서 쓰레기를 난로에 태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후, 그것을 달라고 하여 일부를 살핀즉 성경의 역대상, 느헤미야, 에스더, 예레미야의 글이 있어서 도합 43장을 출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853년에 또 그곳에 가서 사본이 있는 여부를 물은즉 그 사원에서 사본의 가치를 알았는지 없다고 하면서 외면하더란 것입니다. 이때에 “티센도르프”가 너무 관심을 보이면 오히려 은닉할 위험이 있어서 귀국하였다가 1859년에 또 간즉 역시 먼저 있던 사찰이 냉대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집사에게 인사를 하고 과거에 가져갔던 사본의 책을 보이면서 다른 사본에 대하여 구경만 할 것을 청한즉 벽장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신약 27권이 전부 있고, 헬라어로 된 구약 98% 내용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 외에도 AD 400년에 기록된 바나바 서신(헬라어 사본)과 간증서적인 허마의 목자란 책도 발견한 것입니다. 이때 “티센돌프”는 일기장에 기록하기를 “그것을 팔라 하면 값이 뛸 것 같아서 빌릴 수 없느냐 하였더니 크게 거절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카이로 시로 돌아와 그 수도원의 지부장을 잘 사귀어 수도원 본부에 있는 사본을 지부로 빌려오는데 성공하였고, 하루에 여덟 장씩 빌려다가 문인들을 시켜서 2개월 동안 필사에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원본을 취득하지 못하여 고심하던 차 그 수도원의 원장의 임기가 끝났는데, 그 원장을 임명하는 권세가 러시아 황제인 “쟐”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 사본이 무신론자 러시아 황제의 손에 들어간다면 오히려 취득하기가 쉬울 것 같아서 지부장을 통하여 카타리나 수도원장에게 건의하기를 “노서아 황제에게 선물을 하라” 한즉 은금이 없다 하였을 때, “그 사본을 선물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여 그것을 선물한즉 처음에는 그 물건의 가치를 모르다가 나중에 알고 원장직을 재임명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874년에 “티센돌프”는 죽고 1933년에 노서아에서 공산당 혁명자금이 필요하였을 때 영국 정부가 스타린과 레닌을 교섭하여 그 당시의 돈 50만 불에 구입할 때, 영국 정부에서 25만 불, 미국 교회의 헌금 25만 불로 사게 되었고, 현재 영국 런던의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2. p52 사본입니다. p는 papylus입니다. 이것은 1920년에 애굽에서 발견된 것인데 14동안 일반문서와 함께 두었다가 1934년에 52번째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5,000개의 사본 중 가장 작았고(엽서 반만 함) 모서리가 찢어졌으며 겨우 성경 다섯 절을 확인하였는데, 그 내용은 요 18:31, 32, 33, 37, 38절 뿐이요, 글씨체는 2세기 초 사도 후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헌이 무슨 영향을 주었는가? 하면 1860년에 사망한 독일의 신학자(튜빙겐 대학 교수)인 F. C. Baur가 요한복음을 160년 이후의 기록으로, 요한이 아닌 그의 제자가 썼다고 주장하여 보수학계와 대립이 있었는데 p52가 1934년에 발견되고 그 문체가 150년 이전의 것이 나타나므로 결국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임이 입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사해 사본입니다. 이것은 1947년 2월경에 아랍의 한 목동이 사해 바다 근방에서 양을 찾기 위하여 무심코 굴속으로 던진 돌이 단지 깨지는 소리를 내어 들어가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고물로 팔렸고, 처음 발견한 두루마리에는 이사야, 하박국, 창세기, 다니엘 일부, 권징 조례, 감사송, 빛의 아들과 어두움의 아들과의 전쟁 이야기 내용이 있었으며, 1951년에는 2호굴에서 레위기가 나왔고, 3호굴에서는 이사야 주석과 구리 두루마리가 나왔으며, 1952년에는 4호굴에서 에스더를 제외한 구약 전부가, 1955년에도 여러 동굴에서 각종 물건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방망이와 못으로 글씨를 구리판에 쪼아 새긴 것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 문헌은 2세기 당시에 핍박을 견딘 Qumran 단체의 것으로 추정하며, 이 책의 연결된 이사야서의 문장으로 보아 39장 이전과 40장 이후의 저자가 다르다는 신신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그 박물관이 있는데 집모양이 항아리처럼 지어졌고, 오래된 것 같은 사본이 진열되어 있지만 그것은 모조품이라고 합니다. 그 진품은 1급 비밀로 어디에 보관하였는지 세계인들이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돌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므로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생활의 지혜에 대한 말씀


제10과 신앙생활의 전환점 (눅 5:1~1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시몬(베드로; 예수님 앞에서 신앙 고백할 때 예수님이 ‘반석’이란 뜻으로 지어주신 것, 마 16:18,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임; 요 1:42)의 신앙의 전환점을 이룬 말씀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신앙을 키워나갈 때 평생 몇 번 또는 그 이상 자주 자주 믿음을 한 단계씩 올리는 전환점을 체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다가 유치원에 가면서 배움의 전환점을 갖고, 그 다음에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갈 때도 그렇고, 군에 입대할 때, 직장을 갖거나 결혼했을 때 생활의 전환점을 갖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믿음생활을 하시면서 깨닫는 일이나 실천하는 일에 전환점을 많이 체험할 때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1. 베드로의 신앙의 전환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유대인이니까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행 10:14). 그리고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 소개를 받았지만 훌륭한 선생님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요 1:42, 눅 5:5). 예수님을 사람이나 선생님으로 안다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요.

1) 그런데 본문에서 고기 잡는 이적을 체험하는 바람에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예수님은 시몬을 알고 계셨습니다. 누구에게 소개를 받아서 아시는 줄 알았겠지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 하셨을 때 예수님의 신성적 신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을 나타내주시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고, 그 순간에 율법주의적 신앙을 예수 믿는 신앙으로 변화시키고, 겸손하게 회개하고, 엎드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순간입니다.

2) 그 후에 베드로는 자신이 물 위를 걷는 체험과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과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이적을 보면서 믿음을 성숙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길에는 고난이나 죽음이 없는 줄 알고 큰소리치기도 하였습니다(마 26:33). 그러나 예수님이 악당들에게 붙잡히시고 핍박과 위험이 눈앞에 있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하였는데 닭 우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는 회개의 전환점을 또 한 번 체험한 것입니다(마 26:75).

3) 베드로가 체험한 세 번째 전환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조반을 잡수신 후에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잘못을 되살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야 하지 않으시고 “시몬아”라고 하셨으니 그가 베드로답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듯 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면서 자신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지배하시는 주님의 것이란 뜻을 나타내면서 또 한 번 순교를 다짐하는 전환점을 가졌던 것입니다.

2. 성경의 인물 중에도 변화의 전환점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아가 자기 가족만 남았을 때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났을 때 그러하였을 것이며, 특히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때(창 22:12) 큰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천사의 계시를 받았을 때와(창 28:11~22)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 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었을 때(창 32:25) 생의 전환점을 체험하였고, 요셉은 구덩이로, 노예로, 감옥으로 들어갈 때 등 수없이 체험하였습니다. 신약에서 좋은 전환점을 체험한 사람은 삭개오와 바울 사도를 들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주목하는데 예수님이 그 앞에 오시더니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재산 절반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런 전환점이 성도님들에게 자주 자주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울의 이름을 갖고 있을 때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습니까?(행 9:1~18)

3.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만큼 자리 잡기까지는 여러 차례 변화의 순간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런 체험을 매일 매일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신앙의 전환점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21세 때 은혜 받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회심하는 체험을 하였고, 군 생활 3년 동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였으며, 처음 목사 되었을 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5:19) 하신 말씀에 부딪쳐 변화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또 책을 만들다가 목회 인생이 바뀌었고, 기성교회 시무를 중단한 후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체험을 하므로 그런 일들이 다 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성경 요절 하나에서 변화되는 사람도 있고(어거스틴, 롬 13:11~14), 좋은 신앙서적을 읽고 그것을 변화의 전환점으로 삼는 성도들도 있는 것입니다.

 

제11과 신앙생활의 7대 법칙 (잠 16: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생활의 7대 법칙”을 말씀드립니다. 중대하고도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오랫동안 연구 경험한 최종 결론입니다.

1. 부르심과 택하심과 거듭난 은혜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벧후 1:10~11에서 “이것을 확신할 때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거듭나게 하셨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믿음의 확신인데 신앙생활을 실제적으로 또는 진실하게 시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기의 헌법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본래 “믿음의 주”(히 12:2)도 예수님이지만 우리가 대면할 수 있는 예수님은 성경입니다(요 5:39). 성경이 믿음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 하셨고(시 119:105), “주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라” 하셨으며(마 4:4), 또 “주의 말씀은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하셨고(히 4:11),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후 13:8) 하셨으니 성경이 자기의 헌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경을 자기의 헌법 또는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셨을 때) 분명히 시행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마 16:14, 고전 15:31). 자기를 무시해버리는 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강한 어조로 “자기를 죽이고 못 박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면 자기의 목적을 포기하게 됩니다. 목적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취미도 버리게 됩니다. 성남노회는 노회 마치기 전에 운동회를 하고 마칩니다. 나는 육체 움직이는 운동을 꼭 해야 할 몸이기 때문에 운동회에는 꼭 가는데 배구, 족구, 축구 등 선수 같은 사람만 출전시키고 60 넘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체육에 대하여 완전히 무시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은 고사하고 취미까지 포기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즉 성경을 연구하는 기회가 생겼고, 건강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목적과 취미를 버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또 목적과 취미를 버리면 주님은 그 이상의 목적과 취미를 누리게 하시고, 또 자기의 인생을 더 보람 있게 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마 16:14). 자기 십자가는 자기의 현실적 삶을 뜻합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았다 하여 세상 밖에서 사는 것이 아닌 만큼 먹는 일, 쓰는 일, 자기 가족을 살피는 일, 사회적•국가적 일원으로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직업도 가져야 하고, 부지런하여야 하며(롬 12:11), 세월을 아끼고(엡 5:16),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창 3:19). 사람은 땅 위에서 살게 되어있고, 사회적 존재인 만큼 거기에 따른 사명이 다 있습니다. 성직을 가졌다 해도 가정적, 사회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일에 충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말씀과 기도와 은사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시 119:105에서 “말씀의 맛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먹게 되고 또 먹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씀에 붙잡혀 사셨습니다(행 18:5). 기도의 맛도 모르면 항상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눅 18:1, 살전 5:17). 은혜의 맛도 있고(시 34:8), 하늘의 은사의 맛도 있으며(히 6:4), 하나님의 인자의 맛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벧전 2:3). 이 맛을 알면 성경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교보다 성경 연구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성도 중에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대부분일 것이고 성경을 연구하고 배우러 나오는 성도는 희귀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 수준이 낮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인기만 높이고 교인의 신앙은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성경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성도가 기도의 맛을 알면 기도생활이 24시간 평준화됩니다. 그것이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6. 교회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목적은 단체의 힘으로 성경을 해석하여(신학) 보존, 교육하고 교회를 사랑의 도장으로 알아서 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명예나 직분이 필요하여 교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찬송, 기도, 예배는 혼자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 공부가 곧 자기에 대한 설교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의 목적은 진리 해석, 진리 보존, 진리 전파, 성도의 친교 단체란 것을 아시고(세상의 빛은 성도 개인이 하는 것임) 꼭 두 가지에 힘쓰시되 ① 모르는 성경 배우는 곳, ② 사랑만 실천하는 곳으로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받는 취미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불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 인도하셨지요. 또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고,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 같이 가셨습니다(창 28:15, 46:4). 하나님은 성도를 항상 인도하시는 분이시고(사 58:11),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시 23:3), 또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데(사 48:17) 출입과 발걸음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시 121:8, 잠 16:9). 그러니까 성도는 출입하고 길을 갈 때도 꼭 하나님을 의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고 모든 것은 맡겼으니까(시 37:5) 마치 바람 따라 밀려가는 노아의 배와 같은 것입니다. 노아의 배는 방향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으로 다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체험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매일 매일 자기의 책임만 다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2과 한 번만 하는 설교 (벧후 1:10~11) 목록으로


설교자가 믿는 대상을 향하여 잠깐, 한 번만 하는 설교의 기회가 있으면 무엇을 말하여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인생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고전 10:3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히 11:6) 말하고, 그 “믿음”이란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일로써 지식과 실천과 사명생활에 따라 그 정도를 확대 또는 축소할 수 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믿음 성숙의 목적을 기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것인가? 할 때

1. 거듭남의 확신을 갖고 시작하셔야 합니다. 거듭남의 확신은 성경을 진리로 믿는 데서 나타나고, 그것이 곧 택자 되고 하나님의 백성 됨을 굳게 하는 신앙입니다(벧후 1:10~11). 이 믿음이 없으면 외식자가 됩니다. 그리고 거듭나야 믿어지고(고후 1:10), 믿어져야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믿음과 생활의 헌법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믿으시겠지만 취미, 감정, 전통, 모방, 사무 등에 이끌려 유일한 표준인 성경이 가리워지는 일을 경계하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다, 없다, 잘했다, 잘 못한다” 등의 평가의 표준은 오직 성경뿐이란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3. 자기 부정을 철저히 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하여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빈 그릇이라야 무엇을 담을 수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라”(마 16:4) 하셨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갈 5:24), 바울 사도가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부정이란 뜻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는 것이며, 또 세상과 세속을 멀리하는 것입니다(요일 2:15, 약 1:27). 성도가 세속을 좋아하지 않으려면 진리의 말씀에 끌리고, 신령한 은혜의 가치를 깨달을 때라야만 가능합니다(빌 3:8).

4. 성도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마 16:4). 자기 십자가는 성도의 사회적 책임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가족, 이웃, 국가에 대한 책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가 하는 도덕적 책임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만 잘하면 상당 부분 교회가 그 부분을 감당해 줍니다. 그러나 평신도는 그렇지 않으니까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믿음생활을 잘 하되,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30).

5. 말씀과 기도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꿀 같고(시 119:105),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문제(눅 18:1, 살전 5:17)는 맛을 모르면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종일 주야로 묵상하나이다”(시 1:2, 119:97),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요 1:1, 행 20:32), 말씀 묵상이 곧 주님과의 동행입니다(창 5:22, 눅 10:39, 42). 말씀의 맛을 알면 세상 정욕을 억제할 힘이 생깁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빌 4:7). 성경은 믿을 것과 행할 것뿐입니다. 믿을 것은 교리이고, 행할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공부는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고, 설교는 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성경을 공부하는 자세에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또 기도의 맛도 알아야 합니다. 필자는 30년 목회한 후 교회를 사임하고 고독한 분위기에서 저와 제 아내와 두 사람이 기도할 때 기도의 진지한 맛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기도의 간절함이 한 단계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응답으로 신기함을 느낄 때, 말씀과 기도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체험을 할 것입니다.

6. 교회생활을 잘 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고, 사랑 실천을 연습하는 도장입니다. 예배는 혼자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귀하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경 공부나 사랑 실천 아닌 것으로 갈등하거나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허무한 것인 줄 아십시오. 그러나 현실 교회에는 명예적이고 물질적이며 사무적이고 전통적인 것들 때문에 갈등하는 것도 많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생활을 두 가지 축으로 좁히십시오. 성경과 사랑만 힘쓰는 것입니다.

7.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엡 5:16). 근면하게 사는 것이지요. 놀고 오락 하는 맛에 살지 않고 일하는 맛에 살되, 그것도 생산성 있는 일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생산적 삶을 산다면 그 인생은 헛될 것입니다.

8. 자기의 염려와 길과 행사를 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또 부정을 피하고 하나님께 부탁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세계에서 방법을 일으켜 주십니다. 엘리야가 까마귀의 주는 고기를 먹은 것처럼(왕상 17:4, 시 37:5, 벧전 5:7, 잠 16:3)…, 노아의 방주를 꼭 기억하십시오. 자기가 세운 목적에만 연연하여 하나님으로 따라오시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뜻에 따를 각오를 하시면 하나님은 더 유익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9.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요 8:32). 이 자유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면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명예 없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명예를 못 얻으셔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큰 영광에 오르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비천이나 부요에 처할 수도 있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셨습니다(빌 2:21, 4:11).

 

제13과 적은 수의 중요성 (렘 5:1, 행 27:22~26) 목록으로


성경에는 의인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러 차례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나 교역자님들 중에서 성도의 수가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다른 교회에는 많은 교인들이 찾아가는데 내가 시무하는 교회에는 왜 성도의 수가 늘지 않을까?” 하고 실망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교회가 전도를 훼방하는 요소가 없는 지를 살펴서 개인이나 교회로서 전도의 기능을 살리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할 때 교회는 전도 만능으로 다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 유동의 영향도 있고, 택한 백성의 수가 한계에 이르는 영향도 있으며, 또 지도자의 달란트 은사가 전도 아닌 것에 치중할 때는 양적 부흥을 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에서 항상 희망을 갖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전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인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비중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역자님이 많은 성도를 모으고 싶은 의욕을 나타냈을 때 제가 말하기를 “교역자가 많은 성도를 모으는 것은 전도 은사 활동에 관한 일이고, 그보다 먼저 하여야 할 사명은 자신이 홀로 믿음생활을 잘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믿음생활을 잘하는 표준은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많이 닮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요 6:28~29에 보시면 제자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였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직분상의 사역보다 자신의 믿음생활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개인적 신앙생활을 더 중요시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의인 한 사람을 중심으로 다수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성 안에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도성의 죄를 사하리라” 하셨고, 요나 한 사람의 역할로 니느웨 성민을 살리셨으며, 또 바울 사도 한 사람을 인하여 그 배에 탄 승객 276명을 함께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와 꼭 같은 원리로써 다수가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들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런 참사를 허용하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엘리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엘리사가 외치기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하였고(왕하 2:12), 또 엘리사가 죽었을 때 요아스 왕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전쟁의 승리를 주셨고, 나라를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의인의 비중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소돔의 작은 도성에서 의인 열 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1,400년이 지난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루살렘 큰 도성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의인의 비중이 더 커진 것입니다. 지금은 예레미야 시대에서 2,400년을 지내온 시대인데, 예수님이 얼마의 의인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으니까, 이 뜻은 크게 바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이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성실하게 사는 성도(보통 의인) 몇 사람만 있어도 다행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의로운 생활을 꼭 세례 요한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세대에 주님이 보시는 의인의 표준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의 잉태를 알게 되었을 때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하였으니 의심쩍은 일에 대하여 지혜롭게 행동한 의인이고, 고넬료는 가장의 신분으로 덕을 세웠을 때 역시 “의인”이라고 평하였습니다(마 1:19, 행 10:22). 저는 지금 신약 시대의 의인이란 수준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벧전 3:12에서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하셨고, 또 약 5:16에서는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 하셨으니까 그런 정도의 의인이 몇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편안하게 붙들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인은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수를 따르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반드시 고독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양심껏 살려고 애를 써야 하며, 이렇게 행할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다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0:5, 눅 12:32). 그리고 “좁은 문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3:24). 그러니까 혼자 또는 적은 수가 믿음생활 잘 하는 것을 보람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드리는 골방 기도(마 6:6), 두 사람 이상의 기도(마 18:19)를 권장하셨고,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 하시면서 세 사람의 단결을 권장하셨으며, 열 두 제자로 기독교의 기초를 잡으셨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큰 일을 하였으며,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을 아프리카 대륙의 전도자로, 바울 한 사람을 구라파의 전도자로, 브리스길라 부부를 고린도의 전도자로 보내시는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은 다수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적은 수의 대열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이 되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4과 가까운데 하나님 (렘 23:23~24) 목록으로


하나님이 선민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고 또 먼데 하나님도 된다. 누가 자기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마나는 천지에 충만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소부재 함을 알리시면서 특히 가까운데 하나님, 먼데 하나님,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의미 있게 부각시키신 내용입니다.

1. 여러분,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얼마큼 가까이 계실까요?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마 23:21, 시 73:17, 합 2:20). 구약 시대에는 성전이 신앙생활의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크게 강조하였습니다(대하 6:19~21).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행 17: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을 부인하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얽매어 계신 분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에 계신 것을 크게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에 계시고(롬 1:28, 엡 3:17), 마음으로 믿고(롬 7:23, 10:10), 말씀이 마음에 심기며(약 1:21), 심령에 함께 계신다(딤후 4:22)고 하셨습니다. 또 가까이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동행해주신다(창 5:22, 6:9), 함께 하여 떠나지 않으신다(창 28:15~17, 마 28:20), 거처를 같이 하신다(요 14:23, 계 3:20)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는 마땅히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실족치 않게 하시기 위하여 졸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 성도를 지켜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 출입을 영원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셔야 하며(시 121:5~8),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행 17:25),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빌 4:7)”을 쉬임없이 의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가까운데 하나님으로 의식하는데 하나님이 가까운데 계신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먼 곳으로 유명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까운데 계신 자기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먼 곳으로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은혜도 가까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성경 말씀이 바로 자신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하고, 또 역대의 선배들처럼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창 18:3), 다윗이나(시 22:1), 솔로몬이나(대하 6:19), 예수님과 바울 사도도(마 27:46, 행 27:23)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하나님을 모신 성도가 타인의 하나님께 의지하거나 부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하나님,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2. 먼데 하나님도 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연고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먼 곳이나 어느 곳에도 계시고, 어느 곳에서나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기도가 거리를 초월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유익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날(2003.2.18)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계속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구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또 안전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새벽 날개를 쳐서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시 139:10) 하셨고,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시 121:8) 하신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하시고, 또 먼데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거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역사의 충만성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큰 것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작은 것도 세심하게 감찰하십니다. 따라서 왕이나 단체나 우주적인 것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개인과 그 개인의 세심한 일까지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관계하신 말씀이 대부분입니다.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 등, 다 개인적으로 간섭하시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이 광대하시고 인격이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이루시기 위하여 요나를 쓰셨고, 요나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지중해의 바람과 풍랑과 제비 뽑히는 일과 큰 물고기와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지배하셨고, 인간의 폐부를 감찰하시며(렘 17:10),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마 10:30)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충만성에 의지하여 큰 것과 작은 것, 모든 것을 부탁함에 주저하지 마실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적만 구하지 마시고, 방법도 구하시고, 절차도 부탁하시며, 작은 일까지 세심하게 부탁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목표가 내세의 상급이라면 자신의 생활의 한 걸음을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과 함께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제15과 네 믿음이 너를 (마 9:22) 목록으로


성경에 보시면 여러 곳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본문, 막 5:34) 또는 “네 믿음대로 되라”(마 (:29), “네 소원대로 되라”(마 15:28)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혈루증 든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의 칭찬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사실이 기록되었고, 또 소경이 눈을 뜬 사실도 같은 경우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마 9:29, 막 10:52, 눅 18:42). 그러면 이 사건의 구원의 의미가 병 고침으로 끝난 것인가?.할 때, 못 고칠 병을 예수님의 초능력으로 고쳤은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혼도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는 질병과 관계없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으니까, 이 경우는 영적 구원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행 14:9에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고쳐주실 때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는가? 할 때 아람 나라의 나만 장군 같은 사람은 문둥병을 고치고자 하는 의욕만 있었을 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의 말을 순종한 것 때문에 병을 고쳤고, 병을 고치고난 다음에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을 공경하겠노라” 하고 그 나라의 흙을 갖고 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실 예로 네 사람에게 메여 예수님께 오게 된 중풍병자는 자신의 믿음이 아닌 네 사람의 정성 때문에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중풍병을 고쳐주셨다” 하셨고(막 2:5), 열 문둥이 중 아홉 사람도 병을 고치려는 소원만 있었을 뿐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감사할 믿음은 없었던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감사의 믿음을 가진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17:19)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네 믿음이 너를 어떻게 하였다, 혹은 네 믿음(소원)대로 되라” 하신 이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우선 믿음의 칭찬받은 신분은 혈루증 못 고친 여인, 소경, 감사할 줄 아는 문둥병자, 또 한 사람은 병은 없으나 고독을 느낀 듯한 여인 마리아인데, 이 사람들이 다 천민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외에 백부장 신분도 한 사람 있습니다(마 8:13). 이들은 다 자기 믿음으로 자기의 병을 고쳤고,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눅 7:50, 17:19, 행 15:28), 또 자기 믿음으로 다른 이의 병을 고쳐준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막 2:5, 마 8:13).

2. 이 믿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혈루증 든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소경들은 고함을 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하였고, 마리아는 눈물과 향유로 헌신하므로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컸다”고 하였습니다(눅 7:47). 그러니까 여기의 “네 믿음”이란 것은 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② 예수님의 관심을 끄는 행동이며, ③ 또 사랑하고, ④ 의지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능력자로 믿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관심을 끌만큼 소리도 지르고, 간청도 하며, 사랑의 표시를 나타낸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던, 병을 고치던, 또는 나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을 덕 되게 하려면, 나 자신이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관심을 끌며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know how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을 끄는 믿음의 지혜는 명예나 지식으로 갖는 것이 아니고, 불행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지혜란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란 믿음의 요소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믿음”이 또 중요한 것입니다. 혈루증 든 여인, 소경 거지, 문둥병자, 백부장 등이 그 믿음을 갖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유익하게 활용한 것처럼 저희들도 무슨 어려움이 생기면 반드시 내가 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관심을 끌어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왕을 만나야 하는데 왕이 부르지 않아서 만날 수 없었을 때 3일간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자기 모습을 왕 앞에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는 최후수단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상 셋이 있는데 ① 의사이고, ② 정비사이며, ③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이 곁에 없으면 많이 불편하지요. 성도는 하나님만 모시고 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시 22:1~2, 마 27:46, 신 12:18)으로 모시지 못하고, 목사의 하나님, 전도사의 하나님으로 모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가 심방을 하려면 설교 준비 덮어놓고, 여전도사와 심방대원을 동반하고, 자동차 기름 없애고, 운전기사 수고시켜서 가야 하니,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입니까? 마치 죽쑤어놓고 숟가락 없이 못 먹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믿으면서도, 내 하나님이 없고 믿음의 자립을 못하여, 불구자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란 의미를 잘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제16과 기쁨의 소재 (눅 10:17~24) 목록으로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빌 4:4, 살전 5:16). 또 “하나님을 기뻐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힘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4, 느 8:10). 성도는 반드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기쁨을 외부로 나타내지 못한다 하여도 마음으로는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기쁨의 소재”란 제목으로 말씀드릴 것인데, 이 뜻은 성도가 무엇으로 기뻐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에는 세 가지 기쁨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1) 전도의 기쁨입니다. 17절에 보시면 “70인이 기뻐 돌아왔다”고 한 것입니다. 전도에 맛을 들이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저는 청년 때 전도를 기쁜 마음으로 해보려고 하다가 군에 입대하므로 기회를 놓친 일이 있었는데 모든 성도님들이 하고 싶은 전도를 하고, 전도하면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일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하였으니 전도하는 중에 귀신이 나가고 믿는 자가 생기며 그들로부터 환영과 대접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이런 은사와 기쁨을 달라고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이니, 이것은 구원 받은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의 기쁨은 대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한 대상만 구원을 받는 것인데 거기에 자신이 선택된 만큼 그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 고난이 없다면 세상이나 천국의 차이가 크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천국을 생각한다면 구원 받은 기쁨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평안과 기쁨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을 얼마나 누리십니까?

3)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면 감사가 넘쳐서라도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을 만족하게 여기시면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지식으로 구원 받게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받게 하신 일이며, 또 지식 없는 비천한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인데, 예수님은 이러한 뜻을 만족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주기도문”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심지어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선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기쁨, ① 전도하는 기쁨, ② 구원 받은 기쁨, ③ 하나님의 뜻을 만족하는 성령으로의 기쁨입니다. 꼭 맛보셔야 할 것입니다.

2. 그 이외에 다른 기쁨을 몇 가지 더 말씀드리면,

1) 하나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기쁨입니다. 성경에 “항상 함께 하신다(마 28:20), 동행 하신다(창 46:4),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 14:23), 함께 잡수다(계 3:20)”는 말씀이 있고, 또 예수님을 모시고 기뻐한 사례도 많습니다(마 9:9~10, 눅 10:38, 19:8, 요 12:3). 성도가 주님과 동행함은 큰 기쁨입니다(시 73:23~25).

2) 말씀을 받는 기쁨입니다. 마 4:4, 잠 25:25, 시 119:105, 렘 15:16을 꼭 참고 하십시오. 하루 밥 세 끼의 맛을 모르면 사는 맛이 없는 것처럼 성도가 말씀의 맛을 모르면 신앙생활은 역시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말씀의 맛을 알고 성경을 접할 때 기쁨을 맛보실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듣는 귀가 열려야 하고, 보는 눈이 밝아져야 하며, 연구하는 취미가 생겨야 하고, 성경과 자신의 생활을 대조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활에 큰 만족과 기쁨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어린아이들에게는 진리를 나타내신다” 하셨고, 23절에서는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하셨으니 무엇보다도 신령한 눈과 귀가 열리기를 기도하시고, 또 자신을 어린아이 세계로 집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서는 어른처럼 행동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셔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자기의 일에 만족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의 “자기의 일”은 하나님이 자기만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주신 은사이고,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점점 바빠지고, 각자 자기의 할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남의 도움을 받아야 만족할 수 있다면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 자식이 꼭 그 자리를 지켜준다는 보장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기쁨을 스스로 찾고, 스스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봄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공원 산책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때 혼자 산책하면 기쁨이 적을 것 같아서 아내보고 “같이 나가자” 한즉 같이 나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책을 해도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기뻐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 나와 함께 동행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기쁨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은 주님 떠난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에게만 주신 독특한 은사 활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가장 부끄러운 일은 자기 일에 만족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부러워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주신 은사가 있고, 또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으니까(고전 7:7, 12:11) 자기의 일을 은사로 믿고, 그 일을 함으로 기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 못 된 것을 부러워하거나, 가난한 자가 부자 못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여자는 여자로서의 할 일을 하고, 가난한 자는 그 환경에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함으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7과 착각과 잘못된 지식 (눅 12:13~21) 목록으로


1. 본문에 보시면 “사람의 착각과 잘못된 지식”이 드러납니다. 착각은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하는 것이고, 잘못된 지식은 오랜 세월 갖고 있는 잘못된 고정 관념입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지만, 일시적 착각도 큰 피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의성의 어떤 할머니는 농약병을 식유(콩기름)로 알고, 그것으로 빈대떡을 부쳐서 이웃 할머니와 같이 먹고 죽은 일이 있었지요. 착각도 그런 손해를 봅니다. 옛날 120년쯤 전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해변에 금이 많다 하여 많은 육지의 주민들이 금을 얻으러 그곳으로 가는데, 넓은 사막을 걸어가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니까 거의 다 온 줄 알고 계속 가다가 끝이 안 나타나자 중도에서 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푸른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닌 신기루의 현상인데, 그것을 바다로 착각하여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인도 해안에는 드문드문 말뚝이 서 있는데, 그것은 독사가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일어서 있는 것을 모르고 가까이 갔다가 뱀에게 물려 죽는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항상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지나가는, 주의 깊은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착각으로 한 번 손해를 보면 두 번 다시 속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지식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아는 것, “선악 간에 심판이 없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아는 지식, “세상에 사람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다”고 아는 지식, “자기를 자찬하여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판단, “인간 이외의 통치자는 없다”고 믿는 지식…,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된 지식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그 지식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담배를 아무리 해로운 것이라 하여도 끊지 않을 것이고, 70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복권도 자기라 하여 제외되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은 덕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착각하거나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리석다”고 하신 한 사람도 착각과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착각한 것은 예수님을 물건 나누는 재판장쯤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착각하였다가 나중에 깨닫고 머리를 숙인 사실이 있었지요. 이렇게 착각은 깨달으면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지식은, 700만분의 1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첨 소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어리석다” 하신 사람의 잘못된 지식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다 인간의 것 또는 자기의 것인 줄로만 아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며, 내가 소득을 얻으며, 내가 곡간을 넓히고, 거기에 내 곡식을 쌓고, 내가 평안을 누리면서, 내 마음대로 오래 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와 같은 지식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당일 밤 안으로 데려가실 수도 있고, 자기 죽으면 쌓은 재물도 누리지 못하며, 또 많은 재물이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써 그 반대의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퍽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런저런 착각이나 잘못된 지식들이 믿음 세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먼저 할 것, 나중 할 것을 분별 못하거나(마 6:33, 요삼 2:) 큰 것과 더 큰 것을 분별 못하는 일이나(고전 14:31) 두려워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잘 모르는 경우인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평안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요, 물질이 주는 것 아닙니다(요 14:27). 생명도 그렇습니다(요 14:6). 그러나 성도들 중에도 돈이 생명을 늘려주고, 큰 병원이라야 며칠 더 살게 하는 줄 아는 성도가 많은 것입니다. 옛날에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우리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고, 그 신앙의 형태가 가난하고 가련하며 눈멀고 헐벗은 것 같다” 하셨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계 3:17)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에 찌든 상태인데도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계 2:9) 하셨으니, 성도는 반드시 이런 것을 바로 헤아릴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자기가 적당히 써야 하고, 이웃과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오래 누리게 하십니다(딤전 6:17).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려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그 자신도 못 누리게 하신다고, 비유를 베풀어 교훈하셨습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에 대하여서도 많이 착각을 합니다. “의사 되라, 해결사 되라, 축복해라, 웃겨라, 울려라, 박사 되라 등등….” 아무쪼록 지나친 착각을 하시지 말고, 바른 지식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배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8과 어리석은 자 (눅 12:13~21)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본문에 나타난 한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평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형이 부모로부터 받은 유업을 자신에게도 나누어주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예수님은 재판관이거나 누구의 물건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시고,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신 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소출이 많으므로 창고를 늘려 저축한 후 그것으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신 후 즐거워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게 보시고 그날 밤에 그의 영혼을 찾아가실 때 그의 어리석음의 결과가 드러날 것”을 말씀하신 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않으면 그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부자의 어리석음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리석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 그 한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구세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시 49:12에 보시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다” 하셨고, 또 20절에서는 “존귀한 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일단 어리석은 자로 보아야 하고, 또 장구한 영생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면 그의 생활이 아무리 존귀해 보여도 멸망하는 짐승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2. 둘째로 또 어리석은 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오신 분입니다. 눅 5:32에 보시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유업 나누는 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변호사에게 판사가 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분에게 “재산 나누어 갖는 일을 해 달라” 하였으니 공과 사를 구별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갈 자리, 안 갈 자리, 앉을 자리, 설 자리, 할 말, 못할 말을 구별 못하면 어리석은 자라 할 것입니다.

3. 탐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탐심은 욕심과 정욕에 해당하고, 또 우상숭배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골 3:5). 또 “욕심은 죄를 낳으니(약 1:15) 정욕을 못 박으라(갈 5:24)” 하신 것도 탐심이 더러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가 탐심인가? 할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일용할 양식, 오늘날에는 최소한의 생활비) 이상 더 많이 가지려는 것입니다(딤전 6:8). 따라서 그 사람은 탐심으로 목적을 이루어보려고 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탐심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떡 세 덩이를 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접대하려하니 빌리라 한 것을 응답하실 일이라” 한 것은 그 청원에 탐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탐심에 의하여 지나친 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재물이 있으므로 생명이 연장되는 줄로 잘못 안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깨우쳐 말씀하실 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신 것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수명을 늘리는 줄로 아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물질이 사람의 수명을 줄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줄이는 지 아십니까? 우선 잘 먹어서 주립니다. 다음에는 활동을 안 하게 만들어서 몸을 약하게 합니다. 셋째는 물질 경영상 신경을 많이 쓰게 하여 건강에 손해 보게 합니다. 혹 돈이 없어서 병원 신세를 못 질 때 일찍 죽는 줄로 알지만 돈이 있어서 병원에 가도 이미 잘 먹고 운동 안한 몸(당뇨병, 고혈압)이 가기 때문에 일시 병을 고쳐도 오래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에 잘 먹는 것은 장수에 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5. 예수님의 비유 교훈 속에 나타난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이 없고, 가지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기억 못한다면 크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본문 17~19절을 보시면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식”, “내 곡간”, “내 영혼”, “내가…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리라”하므로 "나와 나의 계획과 나의 것“만 있고,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그것이 피조물로서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의 인생과 생명과 물질이 다 자기의 것인 줄로만 착각을 한 것입니다.

6. 자기에게만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청도의 어떤 장로가 예배당 대지를 헌납하고, 예배당까지 지었지만 등기를 안 돌려주고 죽는 바람에, 타락한 그 아들이 그 땅값을 기어코 받았다는 사례가 있듯이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부요하지 않은 행동인 것입니다.

7. 죽음에 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영혼을 오늘밤에 데려가신다” 해도 자기의 죽을 준비와 할 일을 정리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을 붙드실 때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붙드시고, 데려가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9과 무리에게 이르심 (눅 12:54~59) 목록으로


본문 54절은 보시면 “무리에게 이르시되” 하시고, 그 다음 절을 보시면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에게 이르신 다섯 가지 중

1. “외식하는 자”란 것입니다(56절). 외식에 대하여 가장 많은 책망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외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 저희들에게는 외식에 대하여 지적받을 일이 없겠습니까? 외식은 속보다 겉을 더 많이 꾸미는 것입니다. 겉을 꾸미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꾸며진 겉으로 꾸며지지 않은 속을 함께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겉을 100만원어치 꾸며놓고, 속은 10만원밖에 안 됩니다 하였다면 균형은 깨졌지만 큰 죄가 될 것은 없는데, 겉을 잘 꾸며놓고 속을 공개 안 하거나 속도 꾸민 듯이 나타내니까 진실에 위반도 되고 타인을 속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식이란 진실치 않은 것이고, 질보다 나타나는 양을 크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선전과 포장은 좋은데 알맹이가 아주 적은 상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에 속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어찌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시대란 문화와 사상의 흐름을 뜻할 것입니다. 메시야 이전의 시대와 메시야 이후의 시대는 분명히 다릅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계시하는데 있으면 그리스도가 나타난 때부터는 구약의 목적이 성취된 만큼 신앙생활의 형태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 중에는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기분별을 잘하는 사람들이 왜 시대 분변을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구 소련과 미국이 대립하던 시대에서, 구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에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 증면된 후부터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요. 정치적으로 달라지다 보니 기독교의 교파 간 냉전도 많이 달라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고, 죄악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신앙세계가 혼탁한 시대에 살고 있고, 율법의 표준이 그리스도와 사도들로 또는 성경으로 변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에 알맞은 신앙생활을 하라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3.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되는 점은 세 가지입니다.

1)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순결을 지키려면 바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하십니까? 판단이란 심판이 아니고 바른 선택입니다.

2) 판단의 표준을 성경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알고, 잘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또 중요한 것은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 잘 하는 지혜자를 그림자처럼 모시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순간순간 당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너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신 교훈인 줄 압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시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신학에 관계되는 중요한 부분은 전문가들이 하여야 하지만 대부분 생활에 관한 것은 성도가 스스로 판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너를 고소할 자와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한편에서 의무 이행을 못하였을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법관에게 넘어가기 전에 (길에서) 미리 화해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뜻입니다(롬 12:18). 상대방이 잘못하고도 화해에 응해오지 않을 때는 잘못 안 한 쪽에서 용서하고 기도해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면 되지만(마 5:43~44) 자신이 약속을 어겼거나, 의무 이행을 못함으로 불화상태를 만든 것은 과감하게 나서서 사과하고 의무 이행을 한 후 화해함으로 모든 사람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부간의 불화는 “기도가 막힌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벧전 3:7).

5.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으면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니, 호리라도 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호리 : 로마의 낮은 동전, 마 5:26, 유대 동전 두 렙돈에 해당함). 이것은 법관이 범죄자를 재판할 때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함에 있어서 아주 적은 분량의 책임이라도 있다면 무죄가 될 수 없는 입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해서 무죄가 되려면 재판 결과 전에 깨끗한 화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법을 잘 지킨다 하여도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지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갈 3:11)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그것(죄지은 부분)을 채워주셨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십자가로 구원받게 된 사실을 말씀하신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이르신 말씀은 ① 외식하는 자 되지 말라, ② 시대를 분변하여 거기에 맞도록 살라, ③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④ 모든 이와 화평하라, ⑤ 율법은 호리라도 남김 없도록 지키되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20과 두 아들의 문제 (눅 15:11~32) 목록으로


본문에 나타난 대로 “두 아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저희들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1. 둘째 아들의 문제부터 살피면

1)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멀리 떠나지 않을 때 효도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의 교훈을 잔소리로 여겼거나 부모의 감시 아래서 사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겨 부모 떠나기를 원한 것인데, 이것은 부모를 섭섭하게 하는 잘못입니다. 가급적 한 집에서 살거나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부모 앞에 자주 보여야 합니다.

2) 부모의 재산을 청구한 것입니다. 부모의 재산은 자녀들에게 줄 수도 있지만, 부모 생전에는 부모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달라고 하였으니 염치없는 요청입니다. 부모의 재산이 많아도 자식은 그것을 넘겨다보지 말고 자기의 일만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3) 자율주의를 좋아한 것입니다.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받는 것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것 같아도 사람은 타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분방하면 범죄 유혹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필요한 것처럼 사람도 늘 자기를 통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4) 허랑 방탕입니다(13절). 허랑 방탕이란 생산성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생활을 쏟는 것으로 극히 주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만 하여야 허랑 방탕이 아니고 헛되게 사는 것도 허랑 방탕임을 알아서 생산성 있게 활동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재산을 허비한 것입니다. 성도가 재물을 필요적중하게 사용한 것이면 죄가 아니겠지만 생산성 없는 일이나 범죄 용도로 재물을 썼다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사 55:2). 재물 사용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상 다섯 가지의 잘못으로 불행하고 비참해졌으나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의 비참한 형편과 아버지 집에 있을 때의 형편을 비교해보았고, 자기의 형편이 자기 아버지 집의 품꾼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판단한 후, 아버지 집의 품꾼 신분만큼이라도 회복하기를 소원하여 결심하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을 되찾고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 상태는 곧 회개를 뜻합니다.

2. 맏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깃을 받아간 동생이 빈손으로 돌아왔은즉 아버지의 남은 재산이 그 동생에게 주어질 것을 싫어한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맏아들이 아버지 집에서 수고한 만큼 칭찬이나 대가를 받지 못하였음을 불평한 사실로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이 사실은 형제애의 부족과 용서에 대한 믿음 부족으로도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 우애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롬 12:10, 마 19:19). 그러나 그는 이웃은커녕 동생도 사랑하지 못하였고, 또 동생의 죄를 용서하는 데도 믿음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해야 할 이유는 인간은 다 같은 죄인이므로 누구를 정죄할 권세가 없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함을 전제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6:12, 18:23~33).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는 믿음은 곧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믿음과 연계되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3)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습니다. 무지도 죄입니다(눅 23:34).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 사랑하지만 아들은 그 뜻을 따르지 못하였고,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들은 형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못 느꼈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한 것을 기뻐하고 용서하였지만 맏아들은 그만한 아량과 믿음이 없었으니, 이것이 다 불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들이 한 집에서 30년을 살아도 아버지의 뜻을 자녀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은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맏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공로를 내세웠으니, 이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존하는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고 공로를 주장한다면 합당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듯 부모 앞에서도 겸손할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맏아들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으나 염소새끼 하나라도 받아 누린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버지의 공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먹고 살았으며, 부모가 준 몸으로 부모의 일터에서 살았다는 그 자체가 부모의 은혜인데도, 그 이상 무엇을 대가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평하였습니다.

6)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중에 “내 것이 다 네 것이어늘” 하신 말씀에서 아버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큰아들에게 주려고 마음을 정한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이 자식의 효도보다 크다는 것을 자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 마지막으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권함을 받지 않고 불평만 하였으니, 결국 불화의 씨를 남긴 것입니다. 회개할 과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와 한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으면서도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역한 아들이 되어, 그 아버지를 불편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도가 교회에서 충성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교역자를 괴롭게 하는 형의 성도를 비유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1과 한 가지 부족 (눅 18:18~27)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유력한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이 있다” 하시고,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있음)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신 말씀에서, 이 한 가지 부족이란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적하신 한 가지 부족은 분명히 “소유를 팔아 구제하고…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 입니다. “소유를 팔아 이웃을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레 19:18) 하신 율법을 성의 있게 지키라는 뜻이요,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있다” 하셨으니, 하늘의 상급은 완벽한 행위에 대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갈 3:11) 행실의 성의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면 마땅히 하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라” 하신 것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28절) 사명 일선에 설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사명 일선에 서지 않을 자에게 “소유를 다 처분하라” 하신다면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 일선에 서는 자는 주님께서 각별히 그의 생활을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마 10: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제하고 사명자로 따라라” 하신 것은 한 가지 부족이 아닙니다. 말씀대로라면 두 가지 부족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청년(관원)과 관계되는 일로 한 가지 부족이 되게 하려면, 그 다음에 말씀한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씀을 참고하셔야 합니다. 부자가 재산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고, 일반 성도들도 재물을 하나님 다음으로 돌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과연 그 청년은(마 19:20) 재물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저는 이 청년의 성의로 보아서 사명자는 못 됐지만 복음은 믿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젊은 나이에 관원도 되었고, 영생의 열망도 강했으며, 예수님에 대한 예절(절하고 선생님이라 함)도 있은 것을 보면, 자신의 율법 실천이 불가능함을 알고 복음 뜻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떤 중직자의 부인이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데 주일 못 지키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이는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 중히 여기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주 타락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흔들리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영생보다 재물을 중히 여기면 영생문에 들어오기가 어렵고, 믿는 사람이 신령한 복보다 재물을 중히 여기면 타락의 문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참고하시면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말씀한 한 가지 부족의 의미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한 가지 부족이란 바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나니라” 하신 마 6:24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선 가족이 좋고, 재물도 좋으며, 남이 알아주는 명예도 좋을 것이요, 그 외에도 취미로운 것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진리)을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 하나를 선택하라 할 때는 눈 딱 감고 예수님만 붙드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그런 것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축복을 걷어차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 49:20에 보시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셨습니다. 존귀는 무엇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귀는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되어도 하나님을 모르면…그 다음 일은 여러분들이 상상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믿음이라는 것” 한 가지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또 어떤 사람은 교회도 나가고, 교인 노릇도 하며, 심지어는 능력의 은사를 받았다 하면서 자기 선전을 잘 하는데, 토론을 해보면 성경을 성경적으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통신앙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이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마 7:21~23)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바로 “바른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물건은 돈을 적게 주고 가짜를 사면 경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에는 가짜가 없지요. 예수님은 거짓을 알지도 못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6:18, 딛 1:2, 고후 5:21). 또 여러분이 한 가지 모르시는 것이 있을까 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요 13:16입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아는 데서 그치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무엇을 하라는 뜻입니까?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줄 알고 상전에게 복종하며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행하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마다 한 가지 부족이 무엇인지를 점검하시고 시정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2과 어떻게 변화할까? (롬 12:2) 목록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물로 포도주 되게 하신 사건을 근거로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라고 교훈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누룩이 밀가루를 발효시키듯 도덕성과 신령성에 변화를 가져와야 되고, 그 변화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롬 8:29).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을 때 도덕성 변화와 신령성 변화에 대하여 어느 것이 먼저 나타날까? 하시겠지만, 제가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이 두 가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도덕성이란 인간에 대한 사랑의 차원에서의 변화이고, 신령성은 하나님을 가까이 함에 대한 변화인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를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열매가 전부 도덕적 요소라는 데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중에 충성만 신앙과 관련이 있고, 다른 것은 다 도덕적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행위가 서로 결탁하는 것”으로도 이해하실 것입니다(약 2:17). 그런 의미에서 변화는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은혜를 받음에 따라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변화의 은혜는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 온유 겸손한 사람으로 성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높은 존재를 몰랐다가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고(마 11:29, 눅 5:8), 사울이 살기등등한 태도로 행동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음부터는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 하고 엎드리게 된 것처럼 일단 하나님을 알게 된 성도는 자신을 낮추고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던 평안북도의 깡패 김익두도 예수를 믿은 후부터는 깡패의 기질이 순한 양으로 변한 것입니다.

2. 진실해지는 변화가 생깁니다. 말을 허트러지게 했던 것도 다듬어 하게 되고, 자기에게서 사실 아닌 것이 나타날까 하여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 자체가 참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늘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연합된 예수님의 명예를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 위반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의 신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로 인정된다면 그는 믿는 자라고도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3. 늘 양심적이고 성경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복이 되도록 살아야 하니까, 바른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게 되고, 잘잘못을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기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였지만 믿은 다음부터는 성경이 헌법이고, 또 이웃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을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러다가 잘못하는 일이 있었을 때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잘못을 시인하고, 부족을 인정하며 회개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자기의 부족을 모르거나, 잘못에 부끄러움을 느껴서 감추려는 마음이 생길 때는 아직도 은혜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심이 생기고 비양심이 나쁘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성령님의 권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무가 태양빛을 향하듯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것입니다.

5.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안 믿는 자는 7일을 다 뛰지만 믿는 자는 6일을 뛰고 하루를 믿음에 바쳐야 하니까 더 바빠지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놀고자 하는 틈을 엿본다면, 그것은 시험에 드는 일로 여겨야 합니다. 항상 바쁘게 살아야 시험에 들지 않고, 또 세속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때’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누룩이 밖에서 발효되지 않는 것처럼 신앙 인격의 변화도 세속에 끌리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속에 안 끌리려면 자기 일에 바빠야 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것을 은혜와 취미로 아는 것입니다.

6. 말씀과 기도에 서서히 끌려갑니다. 처음에는 성경의 맛을 모르고 기도의 맛도 모르다가, 점차 성경을 자세히 살피고 기도를 조금씩 간절하게 연습하면서 말씀의 맛도 알고, 기도의 맛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말씀과 기도의 맛을 모르면 도구 없이 맨손으로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과 꼭 같은 것입니다.

7. 봉사적이고 사랑 실천의 자세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심도 있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며, 사랑이 제일인 것”(행 20:35, 고전 134:13)을 알게 되면서 봉사하려는 노력과 사랑 실천에 대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을 발전적으로 이행한 사람은 자유하는 마음을 갖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자유를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요 8:32). 자유란 것은 염려 없고 두려움도 없으며 항상 낙관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소망만 갖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의 평안함처럼 모든 환경에 대하여 평안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하는 믿음으로 모든 환경을 소망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 변화가 꼭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제23과 세 종류의 누룩 (마 16:6~12, 막 8: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 종류의 누룩”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성경에 “누룩”을 좋은 의미로 비유한 말씀도 있습니다(마 13:33). 그러나 나쁜 의미로 비유한 말씀이 더 많습니다. 율법주의를 비유하기도 하셨고(고전 5:6, 갈 5:9), 이방 종교를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고전 5:7). 본문에서는 “바리새인과(눅 12:1, 외식)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셨고, 막 8:15에서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므로 바래새인, 사두개인, 헤롯, 세 종류의 나쁜 행태를 경계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까, 그때 마침 떡을 준비하지 않았던 때이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주는 떡 속에 누룩과 함께 불순물이 들어있음을 경계하신 말씀으로 오해하고, 자신들이 점심(떡)을 지참하지 않은 것을 염려할 때, 예수님은 “너희가 5병2어, 7병2어를 체험하고도 떡을 인하여 염려하느냐? 내가 말하는 누룩은 떡 속의 누룩이 아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잘못된 교훈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가리우는 잘못된 교훈과 그 교훈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일들을 경계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요즈음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세 단체의 이름이 없지만 역사를 지내오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교회와 성도 세계에 엄청나게 퍼져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당은 율법주의 보수파이면서 유대의 독립을 꾀하는 민족주의자들이고, 사두개파는 같은 율법주의자들이면서도 부활과 천사와 내세를 믿지 않을 만큼 현실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며, 헤롯당은 헤롯 왕을 비호하는 집권당으로 선민적 종교 단체에 들어와서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와 종교에 대한 생활을 따로 할 것을 말씀하셨지만(막 12:17) 종교의 세계는 그렇게 성숙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이 크게 강조하신 것은 외식입니다(눅 12:1). 마 23:1~31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많이 지적하셨습니다. 성도가 속보다 겉을 화려하게 과장하면 외식이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보다 부족한 것이 많음을 안다면 회개해야 할 책임이 있고, 회개해야 할 책임을 느낄 때 가책을 받아야 하며, 가책으로 근심하는 성도는 사치나 외식에 이끌릴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단순하고 조용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 속에는 시설, 절차, 행정 등, 너무 과장된 것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 앞에 나타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은 대폭 축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속과 겉을 균형 있게 만들 때, 또는 검소한 자세로 돌아갈 때 상당 부분 외식주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 할 수 있는 부정적 요소는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교만이고(마 23:7), 욕심이며(마 23:7, 눅 16:14), 안일주의(마 23:4)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수없이 책망하셨습니다.

2. 사두개인의 누룩입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당파처럼 유대인의 한 종파인데, “사두개”란 용어가 “사독”이란 제사장(삼하 8:17, 15:24)의 이름을 따서 만든 당파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당파에는 제사장과 지도급 인사가 많은데, 이들은 바리새 보수파와 달라서 부활, 천사, 영혼, 영생을 믿지 않았으므로(막 12:18, 마 22:23, 행 23:8) 바리새파와 알력이 있었지만, 계속 복음을 핍박, 배척하였고(행 4:1~3, 5:17~18, 23:6) 예수님을 죽일 때에도 합세하였던 것입니다(마 26:47). 따라서 사두개파의 누룩은 복음을 대적하는 것과 신령성을 부정하는 현실주의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안에서 신령성을 부정하여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거나, 부활과 천국을 그대로 믿지 않고 선을 지향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신 신학, 현대주의 신학이란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역자의 지도를 받으셔서 그 같은 이단적 사설에 유혹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헤롯의 누룩입니다. 헤롯은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뵈뢰아, 요단강 남부를 통치한 만큼 세력이 있었는데,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자요, 예수님이 여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4:8~12, 눅 13:32). 정치적 세력을 등에 업고 선민의 민족성을 뺏기 위하여 종교 세계를 무대로 작당하는 단체인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정치가에게 아부하거나 청탁을 한다면 그만큼 기독교 정신은 정치로 인하여 희석될 것입니다. 1930년경부터 1980년쯤까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다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미국, 러시아가 화목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이 빛을 잃었지만, 그 이전에는 기독교회 안에도 이질적인 정치운동이 들어와서 큰 혼란을 가져온 일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정치사상에 기독교가 이용되고 더 나가서는 종교가 정치의 어용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런 누룩을 교회가 경계할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자유로운 것입니다(딤후 2:9). 정치와 분간해야 하고(마 22:21), 오직 신령성 있는 믿음을 유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것은 종교적 성격 밖에서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4과 주의할 일 (막 13:33, 벧전 5:8) 목록으로


“주의하라”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의 징상을 말씀하신 내용인데, 그 결말에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즉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 하셨고, 베드로 사도도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니 저를 대적하기 위하여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하라, 깨어라, 조심하라” 하는 말씀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막 13:9, 엡 5:15~17, 골 2:8, 시 39:1, 딛 3:8, 고전 8:9, 10:12, 고후 12:20, 히 3:12 등). 무엇을 주의하셔야 합니까?

1. 어떻게 믿느냐?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서울 가는 사람이 추풍령 휴게소에서 쉬었다가 급히 타면서 비슷한 차이니까 “짐작이 맞겠지” 하고 탔는데 다른 차를 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큰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요즈음도 은행을 믿기 어렵고, 회사는 더욱 그러하니 물질 거래를 함부로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예배당이 있고 찬송, 성경이 같다 하여 무조건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딤후 3:14), 사도적 전통을 지키는지(고전 14:37), 목자와 양이 서로 통하는 지를(요 10:3) 주의하여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양치는 목장에 가서 선교사와 목자가 서로 의복을 바꿔 입고 양을 통솔하니까 늙은 양은 자기의 목자가 선교사의 옷 입은 것을 알고 “참 목자를 따르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믿은 성도이면 이단이나 불건전한 사리를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초신자는 반드시 교역자의 지도를 받으셔서 함부로 다른 사람의 설교 듣는 일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은혜가 있다” 하여 가는 집회에 자유로 가지마시고 꼭 교역자의 지도를 받으시라는 것입니다(마 16:6, 막 8:15, 딤전 6:3, 20, 딛 3:10).

2. 믿음이 떨어지거나 식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환난이 심하고 마귀의 역사가 많을수록 믿음 생활은 위험해 집니다. 핍박만 위험이 아닙니다. 세속의 물결이 폭풍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인데(약 1:27) 요즈음 세속의 바람이 얼마나 강합니까? 아파트 바람, 관광 바람, 외국유학 바람, 음란 바람, 먹자주의 등, 세속의 바람을 피하여야 믿음이 보존될 것입니다. 세상 철학이 믿음을 헐뜯고(골 2:8) 향락주의가 성령을 소멸하지 않습니까?(살전 5:9) 이런 때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 떨어질까 염려하라”(히 3:12)고 하였습니다. 자전거는 가다가 정지하면 쓰러지고, 한란계는 차지면 내려가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열심 떨어지면 믿음생활의 감정이 둔해지고 점차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한두 번 빠지면 주일을 범하게 되고, 주일을 한두 번 범하면 주일을 지킬 수 없이 되며, 결국 세속이나 물질로 신앙을 바꾸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려면” 말씀과 기도와 예배는 물론 성도와의 친교와 성수주일의 끈을 단단히 잡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해치려고 휴식 없이 유혹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3. 사랑의 목표에서 떠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자(마 22:39) 행위의 목표입니다. 성도가 사랑 떠난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곧 믿음 떠난 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요일 4:16에 보시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하셨고, 요 14:23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리니(예수님의 말씀은 계명이고 계명의 강령은 사랑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예수님과 성령님)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랑 실천하는 연구를 많이 하시고, 기도하면서, 연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방법은

1) 형제,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손해 입힌 사람에 대하여 이를 갈거나 악담하지 말고, 그의 완악이 변화되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대화의 폭을 넓히고 화해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화해, 그 자체가 삶의 정상 위치인 것입니다.

2) 자신이 누구에게도 불법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 24:12에서 “불법이 성하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다”고 하셨습니다. 거짓이나 약속 불이행이 있으면 신뢰가 떨어지고, 신뢰가 떨어지면 친교가 깨지면서 대립 양상으로 번질 것입니다. 그 책임이 불법자에게 있으니까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마음과 언어와 행실에 항상 주의하셔야 합니다. 먼저 온유, 겸손한 성품을 지니고, 온유, 겸손에 입각하여 대화하고, 오직 덕을 세우는 행동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엡 5:15에 보시면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믿음, 믿음 보존, 사랑 실천에 주의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25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28) 목록으로


이 말씀은 제목 자체로써 큰 교훈을 주시는 줄 압니다. 성도들이면 누구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같은 제목의 설교문이 일반설교 1집 305p.에 기재되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합당한 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사명에 대한 생활을 합리적으로 이행할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복음을 강조한 합당한 생활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선 율법에서 해방된 생활을 하심이 중요한 줄 압니다. 복음은 율법을 성취한 은혜입니다. 예언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속죄 사역으로도 그러하며, 도덕적인 사람의 계명도 예수님의 모범에 빛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율법을 잠재운 것인 만큼 율법의 의식적 제도와 명령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마 11:13, 롬 10:4). 요즈음도 율법주의적 의식에 얽매여 격식과 절차를 과장하는 경우를 봅니다만 그런 외식성으로 율법주의적 냄새를 풍기지 않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2. 복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 17:5에서 변화산의 계시를 보여주실 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이 예수님 중심 생활을 명하신 것입니다. 혹이라도 어떤 성도가 인간 중심이나 전통이나 문화에 이끌려, 그것을 신앙생활의 표준처럼 강조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중심에서 떠난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마 11:27). 또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살피면 문자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섭섭해 하시는 뜻(눅 17:17, 마 26:40), 만족해하시는 뜻(마 8;10), 괴로워하시는 심정(마 26:37~38)을 읽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 중심 생활을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것이 복음의 합당한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①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신 분이요(마 11:27), ② 욕심이 없으시고(마 20:28), ③ 자기를 둘레시지 않는 분인즉(마 12:19) 겸손을 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④ 은혜를 예수님으로부터만 받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시고(요 1:14) 사람은 누구나 은혜를 받아야 하며 피곤한 존재들입니다. 현실 교회 성도들에게 잘못된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은혜 있는 사역자, 은혜 있는 목사”로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부족한 것이 많은데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줍니까? 또 주위에 은혜 없는 사람(은혜가 부족한 목사 또는 모범이 못되는 인간)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보는 줄 알고 사람을 배척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예수님)이 주시고(약 1:17) 어느 인간도 주위에서 훼방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다 사랑의 대상일 뿐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어떻게 주십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잘 배우고 말씀대로 시행할 때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 하신 말씀이 바로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믿고 시행하는 만큼 주신다”는 뜻입니다.

4.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깨끗하게 시행하기는 어렵지만 고의적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일 3:9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죄를 안 짓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당 월세를 정한 때에 주지 않고 수개월씩 밀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죄를 범하면서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곧 덕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산업 경영에 부조함이 있다“고 그것의 시정을 정부에 요청하는 시위가 있는데, 그것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고속도로를 점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업에 손해를 주면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은 잘못인즉 먼저 그 피해를 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5. 자기 변화에 힘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일 뿐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이차적입니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할 것과 다른 이와 화해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마 5:25, 6:12). 그런 면에서 다른 이의 잘못은 이차적으로 돌리고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빼는(마 7:5)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변화의 목표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롬 8:29). 성도가 예수님의 형상과 생활을 많이 닮을 때 그의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이런 목적을 관철하려면 경건의 연습을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딤전 4:7). 성수주일, 예배드리는 일, 설교 듣는데 집중하고, 기도할 때 졸지 않으며, 명예의식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물질 거래에 분명하고, 술․담배 유혹 등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말을 신중하게 하고, 시간을 잘 지키며, 교회 봉사나 개인적 자선에도 힘을 쓰고, 교역자를 성경 가르쳐주는 사역자로 존경하여 사랑하고, 성도 전체와 화합을 유지하는 교회의 생활이 곧 경건의 연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벧후 3:18).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잘 하시게 하기 위하여 여섯 가지 대목을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26과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 (요 4:46~54) 목록으로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기의 왕은 대 헤롯의 넷째 처의 소생으로 “헤롯 안디바”라고 하는데,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와 뵈뢰아를 통치하였고, 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의 신하가 은혜 받은 사실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 신하는 가버나움에 살았고, 자기 아들의 병이 위급하자 “가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부탁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은혜를 받은 경위를 보면

1.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70리 길입니다. 교회가 곁에 있어도 안 나가는 것에 비하면 큰 결단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요? 아들의 생명을 살려보려는 의욕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모든 인간의 형편은 누구의 질병보다도 자신의 구원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재산과 명예가 있어도 영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은 것처럼 예수님께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자요,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 생명의 주이신 것을 믿고 의지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나올 때 큰 기대를 걸고 나와야 합니다. 12년간 혈루증 든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처럼 기도를 할 때도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시 42:2에서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하였고, 또 107:9에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만족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더욱 큰 기대를 갖고 영광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환난을 복 받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이 성경에서 나온 줄 압니다. “화로 복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90:15, 91:15, 고후 4:17, 12:7~9, 롬 5:3, 사 26:16). 만일 왕의 신하가 아들의 병이 아니라면 70리 길을 와서 예수님을 뵈었을까요? 그러니까 환난을 은혜 받을 기회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환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요나의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욘 2:2) 성도가 당하는 환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거나, 연단을 주시거나, 아니면 기도 응답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란 것을 아시고 환난이나 연고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마 7:7).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내 아들을 살려 주세요. 죽기 전에 내려 오셔서 해결해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하라” 하셨고, 또 기도를 통해서 주신다고도 하셨습니다(겔 36:37, 빌 2:13). 그러니까 기도는 소원 성취에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도 필요하며, 기도가 자기 뜻대로 응답이 안 되도 하나님은 그 이상의 값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처에게서 낳은 아들이 죽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나, 그것이 응답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여디디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삼하 12:15~25) 하나님과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5. 기도 다음에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 중에는 배우고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고, 구하는 것만 제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탁을 받으셨을 때 “무조건 고쳐준다” 하시지 않고 중간에 한 말씀을 하셨지요. 48절에서 “너희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표적을 보고 믿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 응답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때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기 전에 와 주십시오” 하므로 또 한 번 믿음 약한 형편을 드러냈지요.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도 고치실 수 있고, 죽은 다음에도 살리실 수 있는데(요 11:25~26) 그만한 믿음이 없었은즉 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즉…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고 다짐을 받으신 후에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6. 예수님이 말씀으로 은혜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적이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말씀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말씀을 믿으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깨우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믿어야 하겠지요? 산 것만 믿을 것이 아니라 말씀이 능력 전달의 역할이란 것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07:20을 읽으시고 확인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은즉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그대로 믿고 집으로 오다가 마중 온 하인들을 만나서 어제 7시에 아이가 깨어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은혜 주셨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이가 깨어난 시간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간이 같은 것을 확인하였으니 말씀이 곧 능력인 것도 확인한 셈입니다. 필자가 쓴 『핵심설교』 중에 “놀라운 충격”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베푸신 시기가 내가 은혜를 필요로 한 시간보다 앞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식성을 먼저 아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이상의 일곱 가지 경위가 있었음을 명심하시고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27과 둘 다 보존됨 (마 9:16~17) 목록으로


본문 끝에 보시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을 때 둘 다 보존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생베 조각과 새 술은 좋은 것의 비유이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결함 있는 상태를 비유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합류하였을 때 금방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얼마간 손해 없이 지나가지만 낡은 옷이 찢어지고, 헌 가죽부대가 찢어질 때는 손해를 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결함에 접촉하지 말고 건실하게 잘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교훈을 하시게 된 동기는 율법주의자들이 구약식 종교제도를 개혁할 줄 모르고 복음시대에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에 복음을 깨달은 자는 복음적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복음적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모범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이해하면서 구약적 제도에 얽매어 있다면 전통 보전도 안 될 것이고, 또 복음적인 신앙생활도 옳게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니까 둘 다 보존이 안 된다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이 잘 보존되려면 역시 낡은 가죽부대 같은 것을 멀리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이나 주위의 생활을 관찰할 때 알게 모르게 믿음생활의 유익을 해치는 일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고전 10:31). 어떤 이는 “구원받는 데 있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은 생활로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받지요(고전 12:3, 롬 10:13). 따라서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고(엡 5:10), 또 기쁘게 해드리려면 자신의 믿음이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니까 믿음 성숙에 방해되는 일을 멀리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믿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장소를 가급적 피하고, 하나님과 골방에 있기를 좋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육의 양식이 믿음을 키웁니까? 아니면 영혼의 양식이 믿음을 키웁니까? 당연히 말씀이라고 하실 것입니다(마 4:4). 밥맛을 잃고 식사를 못하면 건강치 못한 사람인 것처럼 설교에 맛을 들이고, 성경공부에 취미를 가지며, 성경에 끌리는 성도가 되셔야만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에 들어가지 못한 성도가 적지 않은 것 같아서 실망이 크지 않습니까? 이렇게 믿음생활을 하나님 상대로 하고, 성경 상대로 하며, 개인적으로 실천을 도모할 때 성숙이 되고, 여기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연단입니다. 하나님은 “연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히 5:14). 또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신다”(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 돌파할 때 더 큰 믿음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독을 은혜로, 말씀 연구를 은혜로, 혼자 실천하는 용기와 연단을 은혜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개인 신앙 보존과 성숙을 위하여 말씀드린 것이고,

2. 교회생활과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취라”(마 5:14, 세상의 빛이라) 하셨지요. 은둔생활 하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사람 세계로 나가야 하고, 사회적․교회적 구성 요원이 되어 자기 책임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교회생활을 덕 되게 보존하시고, 사회에도 빛을 발하여 성도로서의 명분이 보존되도록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3에 보시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생활을 바로 하고 복 받는 생활을 하시려면 교회생활의 목적을 잘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교역자와 성도를 상대하는 세계입니다. 교역자로부터는 성경을 배우시고, 성경과 자기와의 관계를 긴밀히 함으로 하나님이 자신과 가까이 계신 것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역자와는 성도와 함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시고 사랑 아닌 상태로 대하지 말며, 또 말씀으로 권면 받는 것 이상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오셨을 때 자신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나 성도의 도움을 바랄 수 있겠지만, 속히 마음을 돌려서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님을 아시고(시 146:3) 바라는 마음을 취소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도움을 줄 대상이 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요 5:7에 보시면 38년 된 병자가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접근하여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가 다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만 여기시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은혜를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마 6:33). 은혜는 기분 만족이나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충족하지 못하는 원인은 허탄한 데 뜻을 두기 때문일 뿐(시 24:3~4) 결코 교역자나 성도의 탓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의 목적은 정치 행정이나, 인기나, 이기주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교육과 사랑과 겸손과 봉사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개인적 신앙생활과 건전한 교회생활을 확립 보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28과 예수님의 만족과 유감 (엡 4:30) 목록으로


이 시간에 말씀드릴 제목은 “예수님(하나님, 성령님)의 만족과 유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경우에 만족하셨으며, 또 어떤 경우에 섭섭해 하시고, 유감을 표하셨으며, 또 어떤 경우에 근심하시고 노하셨으며 애통해 하셨는가?에 대하여 묵상하시고, 저희들은 주님에게 기쁨과 만족을 드릴지언정 근심이나 유감이나 슬픔을 갖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만족하신 일과 유감을 나타내신 일들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성도가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다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희로애락을 다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근심하십니다(창 6:6). 또 “성령님이 탄식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롬 8:26). 근심하고 탄식하면 사기가 떨어지고 그것이 지나치면 역사가 줄어듭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되면 그 성도에게 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구속의 날까지 그 성도를 인쳐주신 분입니다. “인침”이란 보증을 뜻합니다. 성령님이 보증인처럼 구원을 보장하시고 믿음을 붙들어 주시는데, 그분을 근심시키면 역사가 약해짐에 따라 보장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1. 성경에 예수님이 기뻐하신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큰 기쁨과 만족을 드린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만족하셨고(마 8:10),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만족하셨으며(마 15:28), 향유를 몸에 부은 여인을 만족하셨고(마 26:13), 삭개오의 회개를 만족히 여기셨습니다(19:9). 그리고 어린이를 즐거워하셨고(막 10:15),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눅 10:21).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기뻐하신 것처럼(마 17:5), 성도가 세상의 것으로는 큰 만족이 못됩니다. 오직 무한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진미를 맛볼 때에만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요 14:14) 하셨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 말씀은 “성령 충만할 때 누리는 만족”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 체험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 말씀을 살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 때 무한한(위축되지 않는)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풍요로운 시대에 먹고 싶은 것이 없다면 이해를 잘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배부르고 비만한 상태에 있으니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신령한 복은 결코 위축되지 않습니다. 계속 만족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근심하시고 안타까워하신 사실들은 성도가 극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1) 미지근한 것입니다(계 3:15). 신앙생활을 주식(먹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간식거리로 아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불신자 같기도 하겠지요. 예수님은 그것이 역겨워서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미지근하면 쉬게 되지요. 반드시 믿음의 정위치를 확보하고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도가 부족할 때입니다. 마 26:40에서 (이 어려운 때에)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하셨습니다. 요즈음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성도가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3) 성경을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부활을 못 믿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를 만나신 예수님이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라고 하셨습니다(눅 24:25). 성경에 둔하고 부활을 모르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 18:16)고 하셨지요.

4) 믿음 부족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또 넉넉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터인데(히 11:6) 그것이 부족하여 충성도 미흡하고 역사도 못하니까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으리요”(마 17:17)라고 하셨지요. 모자라는 믿음, 더디 믿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아쉬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5) 회개 부족입니다. 회개 부족은 곧 완악이지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백성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눅 19:41~42). 막 3:5에 보시면 “저희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나 인간의 완악이 계속되면 “노와 분으로 하신다”(롬 2:8)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초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실 때 몹시 괴로워하십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 보시고 탄식하셨고(막 7:34), 배고픈 자들 보시고 불쌍히 여겨 거저 보낼 수 없다 하셨으며(막 8:1~3),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같이 우셨고(요 11:35), 예루살렘의 멸망당할 일과(눅 19:41) 자기의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도 크게 민망해 하셨습니다(마 37~38).

7) 악인이 벌 받아야 할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으셨고(겔 18:23), 성령 충만의 은혜가 미흡함을 인하여 아쉬워하시면서 “이 불이 땅에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 12:49).

8) 눅 1·7:17~18에서는 감사 부족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미지근함, 기도 부족, 깨달음 부족, 믿음 부족, 회개 부족, 인류의 불행 문제, 악인의 멸망 문제, 감사 부족 등으로 예수님은 늘 유감을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29과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27~32) 목록으로


32절 끝에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굳게 한다”는 뜻은 형제를 지도하라는 뜻입니다. 남을 지도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 지도하는 자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생활을 먼저 한 사람이나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 후배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모범을 보이고 신뢰를 얻고 존경을 받아서 지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믿는 성도가 모범이 되지 못하면 연약한 성도를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의 부덕으로 그 이웃을 실족하게 하였다면 큰 낭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를 굳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타난 말씀에서 살피면,

1. 상대방을 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지도자이십니다. 그런데 섬김을 받으려 하시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 20:28). 그리고 “섬기는 자가 앉아서 먹는 자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섬기는 위치에 있지 않으면서 누구를 권면한다고 하면 듣는 자가 당장 무시할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길래 나의 일에 간섭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의 말은 섬김을 받는 자가 무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형제의 믿음을 굳게 할 자”는 그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앞에서 훈련을 받은 자이어야 합니다. 28절에 보시면 “너희는(제자들)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함께 한 자들이므로…나라를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연단을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훈련받은 자, 연단 받은 자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기 경성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앞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32절을 보시면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제자 된 자가 믿음이 흔들리거나 떨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남을 굳게 할 자는 자신의 믿음부터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지도하려든다면 “너나 잘하고 네 앞이나 꾸려라” 하면서 듣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것처럼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4. 돌이킬 줄 아는 자입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계명을 다 지키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여야 합니다. 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말처럼 실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는 수요일 저녁 기도회 있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누운 일이 있었고, 또 지난 화요일에는 그날이 수요일인줄 알고 강단에 나가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황당한 일입니까? 죄와 실수도 그렇게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개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회개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의 회개하는 것을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섬길 줄 아는 자, 연단 받은 자, 자기 경성을 하는 자, 돌이킬 줄 아는 자가 그 형제를(그 형제의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본문 31절을 보시면 “마귀가 베드로를 밀 까불 듯 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측근이고, 수제자입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거침없이 범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뜻은 물욕을 버린 것이고, 가족의 인정을 버렸으며, 고향과 직업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험에 들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자기 완성을 이루지 못하여 여러 번 지적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떨구지 못하였고(마 26:31), 자만을 떨구지 못했으며, 혈기를 누르지 못하였고, 폭력성도 누르지 못했으며, 복음적 신앙에 떳떳하지도 못했습니다(갈 2:11~14). 그러나 그는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믿음을 굳게 한 다음에 쓰임 받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요 21:15~118).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어떤 직위에 있던지, 은혜를 많이 받은 자라 할지라도, 마귀는 그 수준에 맞는 시험을 한다는 것을 아셔서 늘 경계를 방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 주인이 도적을 맞지 않기 위해서 저녁에 문단속을 잘 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난즉 도적을 맞았고, 대문은 열려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도적이 대낮에 문 열렸을 때 들어와서 숨어 있다가 도적질을 한 것입니다. 마귀가 어느 시기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먼저 자기를 굳게 하는데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30과 베데스다 못의 다른 시각 (요 5:1~10) 목록으로


요 5:1~8에 대한 강해문은 강론서 11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으로 해설하였는데, 이 시간 설교는 그 장면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각으로 보면 그곳에 연못과 행각과 병자가 많은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인데,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시각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요 4:31에서 제자들이 시장하신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드리니까 “나의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 하셔서 누가 잡수실 것을 먼저 드렸는가? 하였는데 “그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하셨고, 또 35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양식을 수확하려면 넉 달을 기다려야 한다” 하였을 때, 예수님은 “아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셨으니 이렇게 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유와 상징이 많습니다. 뱀을 보면 사탄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저희들이 베데스다 못의 정황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셔야 하겠는지요?

1. 배데스다 행각이 양문 곁에 있는데, 그 행각에는 불행한 자들이 많고, 양문은 “거룩한 문”이라 하여(느 3:1) 제사장들만 출입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교회 앞에 거지나 고아들이 많은데 목사와 교인들이 못 본 척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고아 수출 제1국이 되도록 거룩한 백성들이 못 본 척하고 있는 상태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큰 예배당, 십자가 불빛, 오고가는 교회 자동차, 수천 명의 모임과 주위의 어려운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광경입니다.

2. 각색병자들이 있는데, 특히 지적된 병자는 소경, 절뚝발이(저는 자라 함이 좋음), 혈기마른 자(영양실조), 그리고 38년 된 걷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소경은 아주 못 보는 사람이요, 저는 자는 다리의 균형이 없는 사람이며, 혈기마른 자는 못 먹어서 병든 자요, 38년 된 병자는 말은 하지만 일어서서 걷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네 사람의 병자를 보는 시각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소경은 안과 대상이요, 저는 자는 외과 대상이며, 혈기마른 자는 내과 대상이고, 걷지 못하는 자는 물리치료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면, 그것도 현명한 시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영적 시각을 가진 성도는 그 상태를 전부 병든 인간, 즉 문제 있는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소경은 아주 못 보니까 불신자 같고, 저는 자는 들락날락하는 교인 같으며, 혈기마른 자는 힘없고 맥 빠진 신자 같고, 38년 된 병자는 크게 회개해야 할 죄인, 또는 말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문제 있는 교인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반성한다면 우리 주위에 아주 눈감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1%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전도할 사명을 느껴야 할 것이요, 두 번째는 나 자신이 흔들리는 신자는 아닌지, 균형 없이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는 부조리한 신앙인은 아닌가?를 반성하셔야 할 것이며, 셋째는 혈기마른 영양실조 된 교인을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맛을 느껴야 말씀 공급을 받는 것인데, 대부분의 성도가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면 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형편이니, 성경 실조, 믿음 실조가 안 될 수 없겠지요. “내가 주의 말씀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종일 묵상하나이다. 말씀을 연구한즉 꿀보다 더 답니다” 할 수 있는 분은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손드는 분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다 혈기마른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사모하는 성도가 희귀할 것입니다. 넷째는 38년 병든 자입니다. 성도가 38년 교회에 나갔다면 그 교회 원조 교인입니다. 그동안 입은 불구가 아니니까 말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지 못하고 걷지 못하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를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3. 이 사람은 38년 동안 고생을 하면서 자신의 병든 이유가 죄 값이란 것을 몰랐다가 예수님이 고쳐주실 때에 알았습니다. 그가 병고침을 받았을 때는 누가 고쳐주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피하셨으니까요).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그 은혜에 깊이 관여하신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가서 알게 된 것처럼 저희들도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제가 수년 전에 부산에서 수요일 기도회를 인도했을 때, 한 집사님은 떡을, 한 집사님은 생선찌개를 가져와서 잘 먹고, 4일 후 부활주일 새벽기도를 인도하면서 요 21:13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주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그 강단에 선 상태에서 “내가 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여 떡과 생선을 주신 것을 몰랐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충격을 받고 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고난이 있을 때는 우선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환자는 다행하게도 찾아오신 예수님이 저를 사해주심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은혜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민망한 미신 행위가 우리 주위에서 없어지도록 많은 계몽을 하셔야 할 것이요, 또 아무도 자기를 붙들어 줄 자가 없을 때 주님이 그의 해결자가 되어주셨다는 사실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예수님) 중심에 대한 말씀


제31과 읽어서 은혜 받음 (엡 3:3~4) 목록으로


1. 필자는 평소에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만 의존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 지성인이 많지 않을 때, 또 성경책을 다 가질 수 없는 형편일 때는 귀를 갖고 예배당에 와서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서 성경책, 기독교 서적, 성경 교사, TV, 라디오, 인터넷 등, 기독교 자료가 폭주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고졸 이상의 지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밥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의 설교만 들어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는 1950년 식의 방법을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2. 목사의 설교만 의존하는 생활이 습관이 되고 전통이 되다 보니 나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는 눈이 흐려진 것이고, 목사는 성경의 뜻을 밝힘보다 웅변적 기교로 인기전술을 써서 사람을 모으려 하다 보니 잘하는 사람은 큰 교회를 시무하나 못하는 사람은 은혜 없는 목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표현력 좋은 사람이 반드시 은혜 있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에 졸하다”고 하셨습니다(고후 11:6). 성도님들이 아시다시피 은혜의 주는 예수님이시고(요 1:16~17)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시 107:20, 요 6:68, 8:32, 17:17, 사 55:11). 여기에 따라 인간은 진리를 증언할 뿐(능력이 진리에 포함될 뿐), 은혜가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골에서는 명절 때 떡을 하면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그 떡의 주인이 은혜를 베풀 뿐 전달자는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그런데 전달자를 은혜 있는 분으로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진리 전달자가 권능을 받고 전달하였다 할지라도 그 권능은 전달하는 권능일 뿐(설교의 지혜) 은혜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파자도 겸손하여야 하고, 듣는 성도들은 오직 성경의 본질적 내용에서만 은혜를 받으려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교자의 인기와 관계없이 은혜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가 성경을 가르친다 하여도 말씀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의 뜻을 나타내셨고, 또 그 말씀은 문자와 책으로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인류 초기에는 말만 있었고, 문자는 없었습니다. 문자가 없을 때는 말씀을 주셔서 듣게만 하시다가 문자가 있을 때 “기록으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라 하신 때는 출애굽 때부터였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돌에 새기라”고 하신 것입니다(출 17:14, 24:4, 34:27). 종이가 없던 시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요. 성경에는 흙판이나 목판에 말씀을 새긴 기록이 없지만, 그런 시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다윗 왕 시대에 두루마리 성경이 있은 것을 보아(시 40:7) 양피지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시기는 예측할 수 없지만 Bible이란 말을 쓸 때부터 “파피루스” 종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피루스는 갈대 껍질로 만든 종이를 뜻하고, “파피루스”가 비브로스(헬라 말로 성경)로, 비브로스가 영어의 Bible로 음역된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확실한 글로 주셨습니다. 초기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또 기록된 책이 다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여서 한 사람이 읽고, 여러 사람이 들으므로 깨달았던 것입니다(계 1:3). 참으로 하나님은 고마우신 분입니다. 자기의 뜻을 성도들에게 밝히 알리시기 위하여 말씀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고, 그 기록된 말씀을 보존하게 하셨으며(히 1:3), 또 어려운 말씀은 계시의 정신으로 해석하게 하셔서(엡 1:17, 신 29:4) 자기의 뜻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유식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때는 과학 문화가 덜 발달된 4,000넌 전이었고, 믿음의 조상된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이 목자에 불과했으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도 어부들이 주축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어렵게 여기거나 목사만 연구하여 설교하는 책으로 여긴다면 큰 잘못입니다.

5. 한동안 천주교에서 지도자들만 성경을 갖게 하고 평신도들은 주문 외는 책만 주고, 연구권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와서 루터 개혁자가 원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바람에 성경이 보편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성경이 특정인의 독점에서 모든 성도의 손으로 옮겨 읽혀졌을 때, 종교를 정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직접 읽고 연구하십시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부분을 목사님께 질문하여 깨우침 받으십시오.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 잘 하시려고 애쓰는 노고에 얽매이지 말게 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시고 그 뜻만 나타내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강해 문서로 성경을 가르침 받고, 예배 강단에서는 잘못 시행하는 것이나 교정, 책망하시도록 하십시오. 성직자와 성도가 다 그런 방법으로 나가셔야만 그것이 바르게 되는 방법입니다. 교회의 강단은 성직자의 인기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만 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설교자와 듣는 자 (벧전 3:15, 행 16:14) 목록으로


제가 이 시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설교자와 듣는 자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설교를 듣는 취미를 못 느끼면, 그 예배가 헛되어지고 자신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에 설교자는 더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선 성경에서 설교자에 대한 말씀과 들음에 대한 말씀을 두 절씩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설교자에 대한 말씀으로 벧전 3:15에 보시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하신 말씀이 있고, 눅 24:27에 보시면 예수님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앞 절은 준비에 관한 말씀이고, 뒷 절은 성경 전체를, 또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신 점이요, 다음에 듣는 자에 대한 말씀은 행 16:14에서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 하셨고, 눅 10:39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보는 책도 많이 나왔지만, 예배 중의 설교는 들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1. 설교자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증거하려고 하는 성경의 본문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해석, 그 내용이 성경으로 기록된 목적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2)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확실하게 떠올려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많아도 설교하는 부분은 적을 수 있겠지요. 가르칠 내용이 확실하여야 합니다.

3) 듣는 성도들이 지루하거나 피로하지 않을 만큼의 분량을 이해하도록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항상 기도로 준비하고 증언하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부탁하여야 합니다. 이상 네 가지를 잘한 사람이 설교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증거의 내용이 확실하지 않거나, 논리가 명확하지 않거나, 듣기에 피곤하도록 하면 설교를 잘못하는 것입니다.

2. 설교를 듣는 성도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설교 그 자체를 자기의 마음에 담는 복으로 믿고, 사모하셔야 합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와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말씀이 있고(애 3:25), 또 “사모하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107:9).

2) 예배의 경성을 위하여 미리 휴식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피로가 심하면 운전을 하면서도 조는데, 예배시간에 어찌 졸음이 안 온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미리 휴식을 취하고 경성을 하셔야 합니다.

3) 설교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 설교자가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발표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탐지하기 위하여 설교자가 구상하는 것처럼 또는 설교자의 말을 받아 적는 심정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깨물지 않고 삼키면 소화가 안 되듯이 설교도 이해를 못하면 자기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깨달음으로 심령에 접촉이 안 되면 하나님과의 접촉도 안 되는 것입니다.

4)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 하시고, 어린이를 내세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말씀을 순수하게 받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꼭 어린아이에게 설교하듯 합니다. 수준이 낮다는 뜻인데 만일 그 자리에 까다로운 신자가 있다면 금방 설교를 책잡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성도들은 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기 때문에 아무도 목사의 설교를 저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서 교회는 평안하게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어린아이 심정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5) 넓은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시대에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한다”고(사 28:9~10) 설교를 비판하였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하신다’고 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혹 같은 말이 중복 되도 “실천이 부족하니까 당연히 강조하셔야지, 새로 나온 교인이 처음 들으니까 또 하실 수밖에 없지” 하는 심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말씀 들은 것을 감사하고, 깨달은 것을 축복으로 알아서 열심히 실천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찬송하고 박수치는 맛에 예배드리고, 또 어떤 이는 기도하는 맛에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보다도 말씀 듣는 맛에 예배드리는 성도가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이유는 찬송과 기도는 혼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1:3에 보시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지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는데 초대 교회 당시의 설교는 성경을 한 사람이 읽고 여러 사람들이 들은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책이 많아졌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주므로 듣던 것이 설교로 발전한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3과 성경은 나에게 (딤후 3:15~17) 목록으로


“성경은 나에게 무엇이 되시나?” 하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믿음이 큰 복을 받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성경은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되시는 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신 분이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 마 28:20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신다” 한 것은 곧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따라 계신 것이 아니고, 그의 말씀 곧 성경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총을 갖고 있으면 든든함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완전하겠지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이 곧 하나님의 임재가 되는 것입니다(행 20:32).

2. 성경은 나에게 믿음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실지라도 하나님의 내용이 있어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내용을 성경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고, 진리는 참이란 뜻입니다. 또 성경은 일점일획도 고칠 것이 없고, 또 없어질 수 없는 확실한 말씀이라 하셨고(마 5:18), 시 19:7~10에 보시면 “성경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순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성경을 비판 없이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렘 12:1, 요 20:29).

3. 성경은 나에게 사모함과 묵상과 배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어찌 그리 사모하는지요.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은 배움의 대상이고(딤후 3:14), 연구의 대상이며(라 7:10, 벧전 1:10), “자세히 살펴야 하는 말씀”(눅 1:3)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계 1:3에서는 “이 말씀을 읽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연구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요즈음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예술이나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나는 성경 연구가 취미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성경은 나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지요? 여기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고,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란 뜻입니다. 믿음이란 “성경이 마음에 심겨지는 것”을 뜻합니다(약 1:21). 나무를 심었으면 영양 공급을 하여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건강을 지키고 믿음을 성장시킴에 대한 영양 공급이 곧 성경 양식인 것입니다.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도 있고(눅 1:37), 또 말씀으로 창조하신 증거도 있지 않습니까?(창 1:2)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경 말씀의 능력을 실감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두고도 운전 기술이 없어서 못쓰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말씀 능력에 압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압박하시기 때문에 항상 성경에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힘이 얼마나 큽니까? 카드 빚을 지면서 세상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경건한 것을 힘쓰는 성도는 지금도 큰 힘에 붙잡힌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삼성의 재벌주가 가난한 사람에게 찾아와서 “너는 나의 양자니까 돈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아라” 하였다면 걱정하지 않고 힘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염려를 내게 맡겨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벧전 8:7) 하셨다면 더욱 자신감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성경으로 나타내주시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말씀은 나에게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6. 성경은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요. 만일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으면, 거역하는 자가 되고 믿음 밖에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여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마 21~23).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디서 찾는가? 그것을 답변해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상이고 명령입니다. 어떻게 알아야 할 것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행동 원리를 터득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가 그것을 연구하여 깨우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성경은 나에게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이란 은혜 전달의 수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은혜와 복을 주실 때 성경 말씀으로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확신, 구원, 위로, 병 고치는 은혜 등, 모든 축복을 말씀으로 주십니다. 도시 생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전달은 모든 것이 말씀 역할로 되는 것입니다. 만물도 말씀으로 지으셨고, 구원의 복도 성경으로 알게 된 것처럼 모든 은혜를 말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제34과 성경을 어찌할까요? (시 119:43~56, 97~10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을 어찌할까요?”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누가 좋은 선물을 보내왔다고 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우선 누가 무엇을 보냈느냐? 하실 것입니다. 또 왜 보냈으며, 어떻게 쓰라고 보냈느냐?를 알아보셔야 할 것이고, 혹 부당한 대가를 원하는 선물이면 받지 마셔야 할 것이나 그런 뜻이 없고 은혜로 보낸 것이면 감사히 받고, 선물의 성격에 따라 유익하게 쓰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고, 또 성경에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하면서 이 성경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 의로운 교육과 구원의 도리를 제공하므로 성경은 곧 하나님과 같은(만물보다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받은 저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감사하셔야 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만물보다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롬 8:32, 행 2:38). 만물 주신 것을 의식하면서 성경은 만물보다 귀한 선물임을 믿고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성경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2. 성경 말씀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본문 97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래서 종일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사랑하여야 하고, 하나님과 구원의 도리를 알려주는 말씀이며, 또 바르게 사는 원칙과 풍부한 지혜를 노인이나 스승보다 더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합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몹시 즐거워하고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3. 성경에 붙잡혀야 합니다. 행 18:5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뜻을 어떻게 이해하셔야 할까요? 가정에 붙잡힌 사람은 볼 일 끝나면 집으로 옵니다. 아내에게 붙잡힌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합니다. 술에 중독 된 사람은 새벽부터 먹습니다. 예술에 끌리는 사람도 번거로운 도시를 떠납니다. 이런 것이 다 붙잡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붙잡히면 성경 읽던 것을 마쳐야 식사를 하게 되고, 항상 성경 연구에 마음을 뺏기게 되는 것입니다.

4. 성경의 뜻을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성경을 부적처럼 생각하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성경은 마음에 담아야 할 양식입니다. 우선 믿어야 하고(요 6:69),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셔야 합니다. 계 1:3에서는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하셨고, 시 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다” 하셨으며,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전도의 열매를 얻었다”(행 17:11) 하셨고, 벧전 1:10에서는 “선지자들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다” 하셨으며, 바울 사도도 “배워 확신하여야 한다”(딤후 3:14)고 하셨습니다.

5. 성경을 열심히 배우려면 성경의 맛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이 마음속에서 달음질 하도록 숙달하셔야 합니다(살후 3:1). 성경에는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는 말씀이 있고(히 6:4, 시 34:8), 또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었다”는 말씀과 “꿀보다 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렘 15:16, 시 119:103). 이 말씀들은 다 성경의 맛을 알아야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아는 성도는 여러 가지 유익이 있으니, 우선 설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성경 본문에 의존하니까요. 또 설교의 내용이 본문을 빗나가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본문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교훈도 중요하지만 연구 자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흥미 없는 부분을 연구해도 여전히 재미있고 진지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6.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는 그 말씀 앞에 항상 떨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때는 하나님이 벌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신다”(사 66:2)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공무원이나 공적 책임을 맡은 분들은 다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자신이 벌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에 이번만큼 큰 관심을 나타낸 때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합법이냐? 불법이냐? 이라크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이 합법이냐? 불법이냐?고 한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들을 볼 때 우리나라에 성자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합법과 불법을 따질 때 자기의 도덕성에서부터 따져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나라의 불법을 따지기 전에 자신과 자국민의 생활의 합법성을 따진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직 성경 말씀 앞에서 떨 줄 알아야 합니다.

7. 마지막으로 성경은 지키라고 주신 것인즉 항상 잘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계 1:3). 걸러먹기 식으로 말씀을 지키거나 이기주의로 지키려 하지 마시고 무조건 순종하는 식으로 지키시되 지키기 쉬운 말씀부터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받은 성도는 감사하고 믿으며 사랑하고 사모하며 붙잡히고 연구하며 맛을 알고 두려워하며 지키려고 애쓰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성경을 사랑합시다 (요 5:38~39) 목록으로


성경은 저희들이 책으로, 글로 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66권입니다.

1. 저희들이 성경을 사랑하셔야 할 이유는 참으로 많습니다.

1) 우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

2)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벧후 1:11).

3)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요 17:17), 성령님도 진리의 영이시며(요 16:13), 예수님도 진리이시기 때문에(요 14:6),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이고(요 16:13),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4) 행 20:32과 살전 2:13에서는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함께 하신다” 하셨고,

5) 히 4:14에서는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하신다” 하셨으며,

6) 계 1:3에서는 “성경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성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7) 지금 읽으신 38절에서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말씀을 모시는 것이 같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거하시지 않으면 곧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것이라” 하셨고,

8) 39절에서는 “성경으로 영생을 얻고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며 성경은 상고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9) 또 성경 말씀은 계속 더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으로 끝내셨는데(계 22:18), 구원 받는 일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 생활하는 일에 넉넉하게 주셨다(요 21:15)고 하셨습니다.

10) 성경으로 바울 사도가 깨달은 것을 성도들도 알 수 있고(엡 3:3),

11)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의 뜻이 같으며(엡 5:18, 골 3:16),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1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함이 되는 것이요(요 5:23),

13) 성경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는 만큼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가까이 교제하시기 위해서는 성경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4) 요 17:3에 보시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셨고, 딤후 3:15에서 성경은 구원의 지혜를 주며, 또 배우고 살펴 연구하고 지각을 이용하여 깨닫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3;14~15, 벧전 1:10, 히 5:14).

1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거저 주어야 하고(마 10:8), 심령이 갈할 때에 더 사모하게 되며(사 55:!, 마 5:3),

16) 성도는 이 말씀을 영혼의 양식, 또는 별미나 심령의 약으로 활용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것은 만물과 성경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유일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모든 은혜를 말씀으로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 말씀 활용에 대한 방법을 능숙하게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하나님(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 대상은 하나님뿐이시고, 하나님을 계시한 방편은 만물과 성경뿐입니다.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처럼(롬 1:20)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속성과 섭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영생 얻는 법도 알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하셨으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아는데 성경을 활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행동 지침으로 활용하셔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라”는 말씀이 있고(시 119:105), 또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고후 13:8). 따라서 성경은 성도의 육법전서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는 사람은 성경을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은 영혼의 양식으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 4:4에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 하셨고, 신령한 젖이란 말씀이 있으며(벧전 2:2), “신령한 식물”(고전 10:3)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끼니를 거르면 시장기를 느끼는 것처럼 성도가 성경을 멀리 하면 하나님을 멀리한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장할 때 먹으면 든든한 것처럼 공허감이 오고, 하나님이 멀어진 감정을 느낄 때 성경을 사랑하고 상고하면 다시 든든해지고 안심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양식인 것입니다. 평범하게 말씀을 읽을 때는 보통 양식이 되고, 특별하게 연구할 때는 별미가 됩니다. 성경을 별미로 느낄 수만 있다면 세상을 멀리 하여도 아쉽지 않게 될 것입니다(시 109:105에서 말씀이 꿀 같다 하셨음).

4) 성경은 약입니다. 죄병 고치는 약, 육체의 병을 고치는 약도 됩니다(시 107:20과 요 5:8~9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살리고 치료도 하시지만 위로도 하십니다(슥 1:13).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케 한다”(시 19:7)고 하셨습니다. 꼭 만병통치의 약으로 활용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마귀와 싸워 이기는 도구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 바로 마귀와 대항하는 무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을 때 “말씀으로 대항하신즉 마귀가 떠났다”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마 4:3~11). 성경 잘 아는 사람을 마귀는 시험하지 못합니다. “내가 주의 법(말씀)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하신 말씀의 의미를 실감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6과 성경과 예수님 (요 5:36~39)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이고, 이 성경은 “상고함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사모하고, 보고 싶어 하며,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성경으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던 시대 같으면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에 가볼 수도 있고, 삭개오처럼 뽕나무에라도 올라가 보겠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15세기 문예부흥이 일어날 당시에 독일의 조각가요 미술가인 ‘단네케트’(1758~1841)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하여 나체와 흉상만 그리다가 마지막으로 가장 선하신 예수님을 그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4년 동안 선한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아이들 보고 “누구 형상 같으냐?”고 물었더니 예수님 같다 하지 않고 자기 같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2년간 교정을 한 후 물으니까 아이들 말이 “예수님 같다” 하여 현재 유행하는 예수님의 사진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프랑스에서 이 사람을 청하여 자기 나라 국신인 “비너스 동상을 조각해 달라” 하였을 때 “예수님을 조각한 거룩한 손으로 우상을 만들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양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을 잘못 아는 방법입니다. 아마 이 방법이 정당하다면 “예수님이 자기 모습을 그리라” 하여 성경처럼 남겨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겉모습이나 생활 유품이나 무덤까지라도 남기신 것이 없고, 오직 성경만 남겨주셨기 때문에 성경이 예수님을 발견하는 유일 방편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알려고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는 말씀이 있어서 예수님의 모습이 꼭 아담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아담의 모습을 모르는 이상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삼상 16:17에서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으니까, 혹 외모가 자기 표준에 맞지 않아도 그런 일로 마음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외모 때문에 마음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더 불행한 사람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에 대하여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은 외모가 아니고 그의 신분과 생활하신 일과 이루신 과업입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잘 아셔서 믿을 것을 믿고, 알 것을 아시며, 본받을 것을 본받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앎에 있어서

1) 예수님은 유대인의 한 남자로, 시골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실 때에도 여건이 좋지 않아서 마구간 말구유에 출생하셨지요. 유대인은 약소민족이었습니다. 남자로 나신 것은 아담의 표상이고, 인류를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요, 가난한 시골집, 또 어려운 여건(말구유)에 출생하신 것은 오늘날 유족한 사람들보다 각박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신성을 보유하신 상태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또 사회적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어릴 때 모습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 앞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우셨다” 하였고(눅 2:52), 또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순종으로 받드시면서 성장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과 지혜입니다. 마 11:29에서 성품은 온유, 겸손하였고, 또 거짓말을 하시지 못할 정도로 정직하셨으며(히 6:18), 지혜는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막 1:22). 성품 중에는 참는 성품이 가장 돋보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 사마리아인들의 배척, 가다랴 사람들의 배척, 바리새인•유대인들의 배척, 가룟 유다의 배신,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때 조롱받은 일 등…,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억울함을 다 견디셨으니, 그 인내가 대단하셨던 것입니다.

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자랄 때의 모습과 십자가 지실 때의 모습을 예언하였지요. 예수님의 모습을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이나 풍채나 흠모할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사치와 허영을 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잠잠한 어린양처럼 희생양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사 53:2, 7).

5) 예수님의 생활의 장면을 보면 피곤할 때와 시장할 때가 있었으며(요 4:6, 마 21:18), 바쁘게 사셨고(막 3:20), 들레지 않으시고 다투지도 않으셨으며, 상한 갈대 같은 자를 긍휼히 여기셨고(마 12:18~19), 변명하지 않으셨으며, 자기를 죽이는 빌라도 앞에서도 선한 말씀을 하셨고(마 27:14, 딤전 6:13), “다 이루었다” 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요 19:30).

6)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셨고(요 10:27), 스승이셨으며(요 13:15), 한 가족이라 하셨고(마 12:50), 의원이라고 하셨습니다(마 9:12).

2.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자기의 사명을 “다 이루었다” 하셨고, 구속의 공로와 말씀을 남기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꼭 성경에서만 발견하셔야 합니다.

 

제37과 무슨 교훈을 받을까요? (눅 9:12~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이 시장한 상태에 있음을 아시고 5병2어(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근거로 축사하신 후 기적의 양식을 만들어 여자와 아이를 제한 수로 5,00명을 배부르게 먹이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의 여자와 아이의 수를 제했다 하여 그들이 먹는 데까지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5,000명 훨씬 넘는 수를 먹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기적의 떡을 먹은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내용과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의 제목을 “무슨 교훈을 받을까요?”라 정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무슨 교훈을 받을까요?

1.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10절에서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윗사람에게 보고를 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도하셨으니까 마땅히 결과 보고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도자는 그 보고를 확인하고, 또 지시를 할 것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 기업 운영의 방침을 말하는데 지시, 보고, 점검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그런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2. 휴식입니다. 막 6:31을 보시면 수고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휴식시키기 위하여 벳세다로 가신 것입니다. 휴식은 건강 유지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정신을 많이 쓰거나 육체가 힘들 때 꼭 적당한 휴식을 하십시오.

3. 11절에서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님이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역자는 자기를 믿고 따라오는 교인을 영접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교역자를 믿고 따를 생각이 없으면 믿을 교역자를 찾아야 하고, 교역자는 자기 부족을 모르면서 떠나는 교인을 밉다고 해도 안 됩니다. 따르는 교인과 영접한 지도자의 처신을 보여주심으로 신뢰와 화목을 교훈하셨습니다.

4. 먹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먼저 걱정했습니다. 있는 곳은 빈 들(12절), 무리는 5,000명이 넘는데 다 시장기를 느낀 것입니다. 교인 단체가 먹어야 할 일이 있으면 교인이 먼저 걱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갖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 대안은 동리에 들어가 음식을 사자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돈을 써야 하거나 먹을 일이 생기면 먼저 대안을 갖고 교역자와 의논하세요. 이때에 예수님은 이적으로 먹일 것을 결심하시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이면 따라야 합니다(교역자의 지시도 따라야 좋습니다). 지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있는 음식을 갖고 오라”는 것이고, 다음에는 100명, 50명씩 앉히라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 만드실 때와 비슷한 순종입니다. 이 순종이 있자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시고 축사를 하셨습니다. 축사란 “율로게오”(εϋλογέω)로 축복의 기도란 뜻입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 5병2어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무리 앞에 놓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순종하였습니다. 그때에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① 제자들이 먼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② 순종했습니다. ③ 적은 것으로 축복 받았습니다(여기에서 적게 받은 것 감사할 것). 관심, 순종, 축복이 이적의 결과를 낳았고,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100명, 50명씩 앉아서 질서 있게 먹었습니다.

5. 그래서 성도들은 배고픈 일이 있어도 잘 인내하면서 질서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6.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왜 거두었을까요? 요 6:12에 보시면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음식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다음을 대비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낭비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라면 국물 버리는 것 보통입니다. 무엇이나 먹다 남은 것은 버립니다. 왜 버리느냐? 하면 그것이 저축에 무슨 큰 도움이 되느냐? 할 것이고, 또 버리는 양이 생산에 비할 때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영향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이십니다. 이적으로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또 이적을 주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시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적을 자주 안 주실 것이기 때문에 “남은 것을 활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옛말에 “티끌 모아 태산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티끌이 작다고 버리는데 태산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란 말도 있지요? 한걸음이 작다고 버리는데 천리를 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재물의 복을 안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낭비를 줄이시고, 적당하게 살면서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이 바로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고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8과 감동과 변화를 주신 말씀들 (계 1: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제가 성경의 어떤 말씀들에서 감동을 받고 변화의 생활을 노력하였는가?”에 대하여 간증하려고 합니다. 성도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으면 말씀의 일점일획 또는 한 글자에서도 큰 감동과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관을 배움에 있어서 저는 박윤선 목사님의 교훈을 많이 받았고, 따라서 “박윤선 목사님의 성경관”을 요약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하신 말씀 앞에 굴복을 당한 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하심을 깨달았고(고후 5:14), 그 사랑에 이끌려(롬 8:35) 큰 사명자가 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방탕 중에 있을 때 순간적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낮에와 같이 단정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하신 말씀에 뜨끔함을 느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의 교훈 중 잊어버려지지 않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성경의 어느 요절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많이 차지하거나 믿음과 생활의 힘을 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들을 다 소개하려면 수없이 많겠지요. 저는 그것을 연구하는 의미에서 5,236개의 요절을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몇 개의 요절만 소개하여 그 말씀들이 나의 생각과 생활을 많이 바꾸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신 말씀에서 성경이 영혼의 양식되어야 함과 “모든 말씀”에 중점을 두었고, 또 계 1:2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하신 “다 증거함”이란 말씀 때문에 기록하고 증거하는 사명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2. 행 18:5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였다” 하셨는데, 저도 말씀에 끌리고 붙잡힌 것은 같은데 증거 대신 연구와 기록에 몰두하면서 일반 목회를 중단하게까지 되었습니다.

3. 빌 2:16에 보시면 “말씀을 밝힌다”는 구절이 있고, 눅 24:2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는 말씀이 있어서, 저도 성경을 자세히 강론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4. 행 4:20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고, 또 행 5:20에서는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신 말씀과 “다 전하니라”(계 1:2) 하신 말씀이 나의 친교적 목회를 집필하는 목회로 바꾸어 놓았고,

5. 30代 목회 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마 8:20, 눅 9:58)을 설교한 다음부터 목사가 집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껴 지금까지 그것을 실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6. 행 20:35에 보시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하신 말씀에 의거, 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복 받는 방법이나 줄만한 형편이 못된즉 받을 체를 하지 않는 것부터 시행하기로 노력하는 중 딸 결혼식과 어머니 장례식에 청첩이나 소문을 내지 않고 대사를 치렀으며,

7.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말씀에 의거 “성도는 생산을 많이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자신도 다산하려고 애를 썼으나 6남매에 그쳤습니다(7회 출산함). 자녀를 적게 가진 경우와 많이 가진 경우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8. 고전 15:8~9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란 말씀 때문에 네 번째 임지를 옮기는 때부터 임지 부탁을 하지 않음에 대하여 많은 인내를 하였으며,

9. 빌 2:3의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는 말씀에 따라 정치적으로 앞장서는 일을 자제하였고, 또 매사에 이기주의적 자세도 많이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10. 요 6:12에 보시면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신 말씀 때문에 음식을 버리지 않거나 폐품을 재활용하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11.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다”(시 119:103)는 말씀이나,

12. 바울 사도가 행 27:24에서 “내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신 말씀을 상당히 체험하였습니다(마 6:8, 32).

13. 롬 14:17의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셨고, 또 “식물은 우리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고전 8:8),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2) 하신 말씀에 따라 먹자주의에서 벗어났으며,

14.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에 따라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체험하였고,

15.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하심에 따라 성경을 살피는 일, 곧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잠 8:17~21, 시 127:3, 눅 22:51, 신 30:14, 욥 8:5~7, 시 107:20, 고전 13:13, 계 22:10~11, 시편 23편 등을 좋아합니다.

 

제39과 변화 계시의 의미 (눅 9:28~36) 목록으로


“변화 계시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한 사건에 대하여 마태와 마가도 기록을 하였으니, 비중 있는 교훈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17:1~9, 막 9:2~10). 이 계시를 주신 시기는 전도 말기에 해당하고 “높은 산”이란 장소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나사렛 동쪽 약 8km 지점에 있는 다볼산 정상에 이 사실을 기념하는 탑이 있다고 합니다(56m 높이). 그리고 전도 말기란 “승천 기약이 차 간다”(51절) 말씀도 있고, 누가복음 13장부터 마지막 날 사건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연구의 대상은 되지만 교훈상의 큰 의미는 없다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있는 것은 작은 내용이라도 중요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에(마 17:1)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28절). 이 말씀에는 “세 사람만 데리고 높은 산에 기도하러 가신 것”이 교훈의 요지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으로 주시는 공통 은혜도 있지만, 특별한 은혜에 대하여 다 꼭 같이 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출 33:19,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 점도 있지만, 그들이 은혜를 받아야 할 만큼 주님을 가까이 따른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한 계시를 그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높은 산에 올라가신 것은 조용한 기도처도 되고, 또 세속을 떠난 비밀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그런 처소를 이용한 것이며,

3) 그곳에 기도하러 가신 것은 신령한 은혜를 주실 때 기도생활을 전제로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들도 신령한 은혜를 받으려면 기도를 힘쓰는 일과 세속을 멀리하는 일과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용모가 빛난 형체로 변화되었고, 문득 두 사람이 그곳에 나타났는데, 그가 모세와 엘리야였으며, 그 세 분이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29~31절). 이 대목에서는 “세 사람, 변화, 말씀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세 사람은 그 당시의, 현재의 사람 예수님과 약 850년 전의 사람 엘리야와 약 1,500년 전의 사람 모세가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과 엘리야는 산 사람이 변화된 상태이고, 모세는 죽은 자가 부활한 상태이며, 만난 장소는 한 장소인즉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 때 천국의 형태를 한 부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의 기록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9:27)고 하셨으므로, 그 약속의 성취로 보여주신 것이며, 또 “천국은 이런 곳이다. 1,500년 전의 사람이나, 850년 전의 사람도 한 자리에 모이고 대화하며 친교하는 곳이다.” 죽은 자는 부활하고, 산 자는 이렇게 변화되어 신령한 몸이 되고, 다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계시해 주심으로 천국의 신비감을 더욱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마 그곳에 가면 아담도 볼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는데 누구인들 못 보겠습니까?

2) 그리고 변화의 형태는 산 자의 변화나 죽은 자의 부활이 다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가 서로 다른 입장(모세는 죽었고, 엘리야는 그렇지 않음)에서 왔지만, 그 자리에 나타난 상태와 떠난 상태(30, 34절)가 같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으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만큼 중요하고 하늘의 중직자들도 다 유념하는 바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이때에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다” 하면서 “초막을 짓자” 하였지만 천국이 초막을 짓고 사는 곳도 아니며, 또 예수님과 제자들은 땅에서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땅 위에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그 자리에 선 것이라면 예수님이 그대로 “천국으로 가라”고 하셨을는지 모르나 땅에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만큼 자기의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 구경만 하고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천국을 확신하는 만큼 거기에 따른 전도와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마태, 마가의 기록에는 없지만 누가는 그 당시에 세 제자가 “졸다가 잠이 깨어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졸음이 오는 것은 은혜 받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이 주무시고 정신 차린 상태로 기도하시고 설교 들으시기 바랍니다. 33절에 보면 베드로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헛소리”(자기도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름)를 하였습니다. 성도가 정신적으로 명쾌하지 않으면 계시를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꼭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하늘의 음성이 들리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중보자요,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이신 만큼 예수님 중심의 생활 속에는 구약과 신약이 다 포함됨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예수님만 보여져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예수님을 잊어버림 (눅 2:41~51)목록으로


“예수님을 잊어버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부모가 12세 된 예수님을 모시고 유월절 행사 차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중 예수님을 잊어버리므로 찾고, 성전으로 되돌아오고, 3일을 헛수고한 다음에 비로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평범한 실수 같지만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많은 것을 일깨워주시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피면,

1. 예수님이 신앙의 중심인물인데, 성도들이 종교 행사를 하면서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을 멀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월절은 구약시대의 종교 행사이고, 특히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행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그 행사를 하면서 핵심 인물인 예수님을 잊은 것입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예배드리는 것도 역시 종교 행사입니다. 그런데 진정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형편을 가리켜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마 15:8) 하셨고, 또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마 21:19). 그러니까 종교시설과 의식에 반드시 예수님이 중심에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모들이 종교 행사를 다 마치고 갈 때에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제사를 마친 것은 마치 신약의 성도가 주일 예배를 마친 것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으니, 이것은 마치 하나님 모신 생활을 교회에서만 하고 교회 밖에서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살아야 하겠지요(시 73:23~27). 교회에서는 교역자, 성도들이 같이 있으니까 들러리처럼 덕을 볼 수 있지만, 교회에서 나가면 자기 혼자이니까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방심하지 않습니까? 또 교회 밖의 세상은 마귀의 역사가 더 심하니까 더 경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행사 끝났다”, “주일 예배 드렸다” 하고 세상에 취하여 예수님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동행중에 따라오시려니” 하고 짐작한 것이 예수님을 잊게 된 동기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짐작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짐작 정도로 알면 안 되고, 기도도 짐작으로 하면 안 됩니다. 확실한 깨달음과 확실한 목표를 향하여 확실하게 전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짐작”은 사람의 생각이고, 일종의 관행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이 뒤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도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항상 자기 앞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앞에 모시고, 자신이 뒤따라가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부모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라오시게 하고, 또 짐작으로 “오시려니” 하고 믿은 것입니다. 짐작은 확신의 반대이고, 무확신은 곧 방심입니다. 신 끈을 조이지 않으면 허술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틈이 생기면 유혹을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 하룻길을 지난 후에야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으면 세속에 끌리고, 유혹을 받으며, 경건 생활이 게을러집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부모가 생각한 대로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앞에 모시지 않은 것이 확실하니까 출발지로 찾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결국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때는 어디로 가야하며, 또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오늘날 예수님을 찾는 방법은 장소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계시면 잊어버릴 까닭이 없지 않겠나 하시겠지만, 마음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멀리 떠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 9:15에 보시면 “신랑을 뺏겼을 때는 금식하여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방법이 회개와 기도란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멀어졌는지를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틈을 주지 않는 방법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며,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 토론이 중단된 것은 곧 신앙의 잠을 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곁에 모셨습니까? 그렇다면 세상 풍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마 8:24). 또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신다면 세속의 물결에 빠지지도 않을 것입니다(마 14:30).

 

제41과 숨기시고 나타내심 (눅 10:21~24) 목록으로


1. 본문에 보시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것을(진리, 예수님, 신령한 복)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한다” 하셨고, 또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이렇게 되었다”는 뜻은 지혜 있는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신 일이란 뜻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이 왜 그렇게 하신 것을 감사하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내세우는 교만한 자들을 꺾으시고,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은혜주시는 것을 예수님도 기쁘게 여기시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감사하신 이유는 세상에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미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라”고 한다면 지식 없는 사람들이 진리를 수용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지식 없는 자도 어린아이처럼 된다면 믿음으로 복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니까 예수님께서도 비천한 자의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그 뜻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2.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뜻은 세상 지식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다 복음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인가? 할 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유대인 사회에 알맞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부요하고 지식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살면서 그들의 지식으로 메시야를 배척하다 못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비천한 사람들은 대부분 지방에 살면서 복음을 받되 비판력이 없으니까 어린아이 심정으로 무조건 믿고 따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식인들 대부분이 복음을 배척하고, 비천한 백성들 중에서 복음을 받는 결과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적 추세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말씀은 “부자는 버려지고 비천한 자만 선택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볼 때 부자는 지식으로 받으려하다가 비판으로 끝나고, 비천한 자들은 지식이 없은즉 겸손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받게 되니까, 그것이 감사할 일이란 것입니다.

3. 22절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다” 하셨는데, 여기에 “주셨다는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중보자권을 주셨고(히 5:5~6), 심판권을 주셨으며(요 5:27), 또 영광도 주셨지요(계 4:8~11). 그러나 본문에서 주신 것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란 계시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생활로 나타내셨고, 또 성경으로 나타내셨으며, 또 거듭난 심령으로 믿음의 눈을 주시는 것까지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히 12:2, 벧전 1:3, 계 1:1). 따라서 예수님은 계시를 나타내시는 전권과 거듭나게 하심으로 믿음의 눈을 주시는 전권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4. 성경에 보시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말씀이 있고(마 11:15), 또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귀와 눈”은 세상의 사물을 듣고 보는 것이 아니고, 진리 또는 신령한 은혜를 믿고 깨닫는 감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셔야만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이나 성인으로만 알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주시며, 구세주로 알아야 하지요. 또 성경을 성인의 글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과 거기에 따른 실제적 생활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 있고(요 3:3),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하나님이 주신다” 하셨으며(마 16:17),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를 주라 할 수 없다” 하셨고(고전 12:3), “저희의 눈을 밝히시고(왕하 6:17, 눅 24:31), 진리를 청종하게 하셔서(행 16:14), 믿음을 갖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5. 또 반대로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어둡게 하여 진리를 받지 못하게” 하시는 경우와(사 6:10) 전도를 받지 않도록 “가리우시는 경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고후 4:3).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만 구원받도록 믿음 주시는 것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도자들은 전도의 방법이 구원 문제를 좌우하는 것처럼 과장된 선전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동리에서 복음을 배척하면 발에 먼지를 떨고 나올 것과 다른 동리로 갈 것과 또 땅끝까지 갈 것을 명하셨으니,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한 번 이상 전도하는 것으로 족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전도를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계시와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이 믿음의 열쇠를 주실 때에 예수님을 바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믿음과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전도의 방법이 구원의 문을 여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셔야 하며, 오직 선택받은 백성들이 복음을 받게 하기 위하여 전 인류를 상대로 전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2과 권세 있는 가르침 (막 1:21~22, 27) 목록으로


1.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에 뭇사람이 놀랬으니 권세 있는 자 같고 서기관들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다. 또한 귀신도 명하니 순종하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교훈에 큰 권위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설교)이 왜 권위가 있었을까요? 1) 교훈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요, 2) 교훈하시는 분이 교훈과 부합된 생활을 하시기 때문이며, 3) 그만한 근거로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고(행 16;14), 4) 또 듣는 사람들이 새롭게 듣는 이유도 있으며, 5) 거기에 이적(귀신 쫓는 일 등)까지 겸하니까 그 교훈에 권위가 안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서기관들의 교훈은 자신들도 지키지 않는 율법을 늘 낭독하는 식으로 가르쳤을 것이니 듣는 자들이 감명 있게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100% 증거의 효력을 얻으셨는가? 할 때 “진리는 헛되이 증거되지 않는다”(사 55:11) 하셨으니까 들을 사람이 듣고 들은 만큼의 효력이 있었을 것입니다(마 8:1). 이 뜻은 권세 있는 설교를 들었다 하여 들은 자가 다 굴복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복음의 대적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에도 끝까지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대적하기까지 하였고, 또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따르던 자들 중에서도 많이 흩어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눅 12:1, 32).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진리는 받을 자가 받고 설교자의 인기와는 무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인기는 듣는 자들에게 일시적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인기 그 자체가 은혜 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2.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도 유명한 설교자 몇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 스데반, 베드로, 바울 사도 등입니다.

1) 눅 3:7~14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는 정의와 책망에 강열함을 느낄 수 있고,

2) 행 6:8~53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의 역사를 복음에 결부시키는 성경 중심의 논리적 설교이며,

3) 베드로의 설교는 회개에 초점을 맞춤으로 많이 돌아오게 하는 역사를 이루었고(행 2:14, 37, 3:12), 군중을 지도하는 부흥사로 나타났으며(행 4:4),

4) 바울 사도는 지식과 체험을 겸비한 사역자로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논리적 설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행 26:1~29). 이렇게 잘 하는 설교에도 믿을 자가 믿고, 배척할 자는 여전히 배척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우선 제자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라” 하셨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으며(마 28:20), 가르침의 지혜와 직분을 주셨고(고전 12:8, 28; 엡 4:11),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시면서 친히 가르침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행 8:31, 눅 24:27). 성경이 편지로 전달된 것은 곧 문서운동을 뜻합니다. 이 문서 전달에는 증언자의 인격과 웅변적 호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글을 모르거나 읽지 않은 사람이 귀로 듣는 것과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진리를 문서로 받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하고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자신이 읽어서 확신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판사가 법정에서 말로 판결한 것보다 며칠 후에 도착하는 판결문을 받아보는 것이 더 유익하고 확실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진리를 자급하지 못하고 오직 강단에서 증언하는 것을 귀로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는 것은 원시적 양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진리를 문서로 접하여 많은 지식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 문서를 받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훌륭한 사역자의 입으로 전달될 수도 있고, 또 훌륭하지 못한 사람의 입으로도 전달될 수 있으며(마 5:19), 때로는 어린아이(연소한 사역자)가 전할 수도 있으며(딤전 4:12), 그것도 없이 글씨만으로도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글씨로 전달된 말씀이나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나 다 같은 권위로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듣는 자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도 하시고, 받지 못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아셔서 반드시 깨닫는 은혜를 받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암 8:11에 보시면 “증언자를 희귀하게 하신다” 하였고, 사 6:9에서는 “깨닫지 못하도록 심령을 어둡게 하신다”고 하셨으며, 반대로 사 29:18에서는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으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라” 하셨으니 어둡고 캄캄한 세계에서라도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면(행 16:14)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잠 8:17, 마 7:7). 이 뜻은 사모하는 자에게 깨달음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총 결론은 증언자의 사역에만 매달려 은혜 받지 마시고, 성경이나 성경적 글로 직접 은혜를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뜻입니다.

 

제43과 가버나움에서의 교훈들 (막 9:33~50) 목록으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 고향입니다(마 9:1, 4:13).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도 부르셨고(마 4:13, 18~22, 9:9), 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며(마 8:5, 14, 9:1), 교훈도 많이 하셨습니다(본문, 요 6:55~59). 그러나 그 고을은 “소돔이나 두로, 시돈보다 완악하였다” 하셨고(마 11:23), 결국 그 동리는 발전하지 못한 곳으로 폐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어떤 교훈들을 하셨는가 하면,

1.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33~35절). 그 당시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는데, 그 쟁론의 표준을 어디에 두었을까?가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알아주시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연조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할 수 있겠지요. “잘 가르치는 자가 있어도 시행이 부족하면 적다” 하셨고(마 5:19), “모범이 없으면 흠이 되기 때문에 많이 선생 되려 하지 말라”(약 3:1~2)고 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가 지도력이 있어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한다 하여도 그것이 큰 자 되는 사유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벧전 5:3). 예수님께서는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회 있는 대로 섬김 받는 일을 피하고, 섬기는 자의 위치에 서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36~37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살펴주어서 자라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린아이처럼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하나”란 작은 일로 여긴 말씀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방도를 찾으며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어린아이를 품어 고아원을 없애는 때가 올 때 십자가의 빛이 날 것입니다.

3.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할 때 단체가 다르다 하여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단체가 다르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시기하거나, 악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능한 일을 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금하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금한다”는 것은 교권주의를 의미합니다. 이단적 행위가 아니면 비판하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하는 일이면 칭찬하고, 성원해주며, 자신도 본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4. “하나님은 작은 일도 상 주신다”고 하셨습니다(41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 주는 것도 상을 잃지 않는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감찰과 상급이 그만큼 세심하다는 뜻이고, 또 성도가 작은 선행을 무시하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높은 사람에게는 대접을 하려 하여도 소자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안 하려고 하는 잘못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갚음을 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4:12~14).

5.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함이 크게 벌 받는 죄”임을 강조하셨습니다(42절). 예수님을 믿는 소자가 어떤 사람일까요? 나사로를 기억하시면 될 것입니다(눅 16:20). 믿는 성도 중에 나사로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성도가 그를 불쌍히 여기며, 오히려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볼 때 소자일 뿐입니다. 그를 귀히 여겨 살펴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실족시켰다면 하나님은 그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진다”는 뜻은 가혹한 벌을 받아 마땅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6. “죄를 멀리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43~47절). 본문에서 “손과 발과 눈으로 범죄함”을 말씀하셨고, 그 범죄 도구가 된 손과 발과 눈을 하나씩 없애서라도 범죄를 안 함이 유익하며, 지옥에 가지 않음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죄를 범하고 싶어도 연장이 없어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면 잘된 일일 것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하셨습니다. 명예욕을 없애기 위하여 좌석을 만들지 말고, 방탕을 없애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죄지을만한 유혹거리를 가까운 주변에서 없애야 합니다. “공중과 물위와 땅속은 위험 확률이 높은 만큼 가급적 피함이 좋다”는 말을 농담처럼 한 일이 있는데, 죄의 위험은 반드시 피하셔야 합니다.

7. 지옥은 죽지 않고 뜨거운 곳이며(48~49절) 사람마다 불로(뜨거움) “소금 치듯 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사우나탕에 들어가면 안 뜨거운 곳이 없습니다. “소금 치듯 한다”는 뜻은 고통을 안 느낄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로 뜨겁게 하니까요. 산 미꾸라지에 소금을 쳐 보십시오. 그것이 불로 고통을 주는 지옥의 형극일 것입니다.

8.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지 말 것과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을 지키라”는 뜻이요,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함은 소금이 고루 퍼지는 것처럼 이웃과 사랑으로 화목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교훈하신 여덟 가지 교훈을 꼭 기억하시고 반드시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도록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제44과 신앙과 이성 (요 6:69, 엡 4:13, 요일 5:20) 목록으로


요 6:69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요, 엡 4:13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므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충만케 한다”(동시적) 하셨으며, 요일 5:20은 “예수님이 지각을 주셔서 참된 자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믿어서 알고, 알아서 믿고, 주 안에서 성장하며 살게 된다”는 것인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과 이성”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믿는다(신앙)는 것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무조건 믿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확인하고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 중에 확인을 못하고 믿는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대속하셨다는 사실,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 등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성경의 진리성 같은 것도 무조건 믿지만, 변증학적으로 보든지, 역사적 증거를 보아 믿을만한 근거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분과 구속의 도리와 심판과 내세는 증명 없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성경을 연구한다든지 역사적,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아는 것을 지식 또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2. 여기에서 성경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될 때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증명 없는 것을 믿습니까? 보고 믿거나, 알고 믿는 것은 가능하지만 무조건 믿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셨고, 이성(지각)을 주셔서 알게 하신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믿게 하셨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였을 때 “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셨고(마 16:17), 요 3:3에서는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신다” 하셨으며, 또 “성령의 역사로만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있다” 하셨고(고전 12:3), 예수님이 곧 “믿음의 주”라 하시므로(히 12:2), 예수님이 성령의 역사로 믿음을 주셔야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지각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요일 5:20이 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이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시고 참된 자를 아는 자를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지각은 이성의 작용으로써 생각하고, 배우며, 연구하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 세계를 어떤 박물관으로 비유하였을 때 들어오는 것은 신앙 역할에 해당하고, 들어와서 살피는 것은 이성 역할에 해당하며, 좋은 것을 깨닫는 것은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라”는 뜻은 믿음으로 들어와서 이성으로 배워 확신할 때 온전한 믿음의 사람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만일 이 두 가지가 하나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우선 믿음 역할만 있고 이성 역할이 없다면 어린아이 믿음으로 여겨야 하고, 박물관에 입관만 한 후 아무 것도 감상하지 않는 사람과 같겠지요. 또 이성 작용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경우는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박물관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형편 같을 것입니다. 앞에서 박물관을 천국 세계로 비유하였으니까 신앙이 없고 이성만 있는 사람은 불신앙의 지성인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아는 대상이 아니고,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된 상태(병용)에서 알 수 있으며,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될 때 온전한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 주님 안에서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떠난 성경 지식은 주님과 인격적으로 알거나 친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보시면 “알고 믿는다”는 말씀도 있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1) “알고 믿는다”는 말씀은 “성경을 상고하여 예수님을 안다”(요 5:39),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안다”(엡 3:3), “듣고 믿었다”, “듣고 깨달으라”(행 18:8, 막 7:14), “배우고 확신하라”(딤후 3:14), “듣지 않고 어찌 믿겠느냐?”(롬 10:14) 하신 말씀이고,

2) “믿고 안다”는 말씀은 요 6:69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안다”(히 11:3)는 말씀 등입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 선행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느냐?”, “믿어야 아느냐?” 할 때 B. B. 워필드는 “이성 작용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납득시킨 다음에 믿음을 요구할 수 있다” 하였으나 아브람 카이퍼는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을 붙잡은 것 자체가 믿음이므로 존재를 믿는 믿음이 앞서고, 그 존재를 연구하는 이성은 거기에 종속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성주의자들은 “모르고 어떻게 믿으며 불합리한 것을 어떻게 믿느냐?” 하였을 때, 신앙을 앞세우는 학자들은 “모르니까 믿어야 하고 알기 위하여 믿는 것이라” 하였고, 라틴 교부(3C) 테들리안도 “배리 인고로 믿을 만하고 불가능한 고로 확실하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론은 “믿음으로 시작하고(요 3:3) 믿음의 연구로 확신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두 가지 역할이 하나 될 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4. 기도에 대한 말씀


제45과 기도와 결과 (막 1:35~3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읽고 “기도와 결과”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36~39절에서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왔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전도를 하셨으며, 셋째는 귀신들을 내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나 교역자가 기도를 힘쓰고 이만한 효력을 본다면 다 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손해날 일을 없지요. 오히려 크게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새벽 밝기 전에 일어나시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는 말씀도 있고(눅 22:3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밖으로 나가더라”(막 11:19) 하신 말씀을 볼 때 감람산을 기도처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래 머무시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 기도의 기간으로 보시는 것이 좋을 것이요, 새벽기도를 연속하신 뜻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눅 18:1, 살전 5:17). 그러니까 새벽기도의 제도적 행사나 습관적 기도가 항상 기도하는 생활 속에 자유롭게 포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새벽기도회를 하여야만 하는가? 하면 새벽이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밤낮 없이 사는 세계가 되거나, 24시간 기도로 경성하는 성도에게는 새벽이란 시간적 개념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는 것보다도 기도의 맛을 알아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 아래 기도를 달게 접근하는 태도라 할 것입니다. 저는 기성 교회 목회를 30년쯤 하고 난 다음 교회를 사임하고 고독한 입장이 되었을 때 기도의 맛을 알았고,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개인이 은혜를 받고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시면 어떤 모양으로 기도하시든지 많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으려는 무리들이 모여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단체를 만들 수 없겠지요. 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기도하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간 것처럼 오늘의 교역자님들이나 성도들도 기도를 힘쓸 때 따라올 사람들이 있는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대구 남일교회를 시무할 때 처음으로 금요철야기도회를 시행하였는데 퍽 힘이 들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계속 찬송, 대표기도, 성경 요절 소개로 여덟 시간을 쉬지 않고 강행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2개월 만에 교인이 증가하는 체험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방법이 사람 모으는 절대적 방법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크게 유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을 왜 상대적으로 보느냐 하면 너무 힘들고 피곤하여 계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순번으로 실행하여야 함).

3. 예수님은 자기를 만나러 온 자들과 전도를 하셨습니다. 전도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하는 것이 훨씬 유효합니다. 가까운 마을로 시작하여 먼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따라다니면 주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눅 7:47). 그러나 오늘의 전도는 꼭 예수님의 신분과 십자가의 도리를 알려야 하는데,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불빛만 비취고, 구속의 도리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어서 반드시 전도 문서를 등기 편지로 돌리는 방법이 적절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히 12:2). 그러니까 자신의 말 수단이나 어떤 물질 공세에 의존하지 마시고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면서 전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기도의 맛을 알고, 전도의 사명을 느끼는 성도를 배출할 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4.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정신병자에게 붙은 것만 귀신이 아닙니다. 멀쩡한 사람에게도 귀신이 붙어 다닙니다. 카드 빚을 몇 천 만원씩 지는 자, 또 그것을 안 갚아준다고 부모를 죽이는 자가 제 정신이겠습니까? 귀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귀신의 역사가 떨어져 나갈 때 성령님이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이고, 모든 생각과 생활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였다”고 가상해 보세요. 그것이 귀신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신자들은 귀신을 섬겨서 복을 받으려 하지만, 성도는 귀신을 때려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사람 모이고, 전도하면 나를 넘보는 귀신과, 교회를 넘보는 모든 귀신들이 발을 못 붙이고 도망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46과 그의 뜻대로 구함 (요일 5:14~15) 목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그런즉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아느니라” 하셨으니 꼭 구할 것, 꼭 이루어질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나타난 모범에서 살피면,

1. 죄사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면 490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22). 탕자의 회개나 세리의 기도, 강도의 구원(눅 15:17~24, 18:13, 23:40~43)도 그 실 예입니다. 별 탈 없이 한 주간을 산 것 같아도 곰곰이 반성하면 나태한 생활, 사랑과 봉사가 미흡한 일, 기도 쉬는 죄(삼상 12:23) 등 회개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시키러 오신 분이고(눅 1:17, 5:32)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받아주십니다(시 51:17, 왕상 8:57). 회개는 반드시 응답되는 기도입니다.

2. 평안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가서 “평안을 빌라” 하셨고, 자신도 평안을 축복하셨으며, 특히 부활하신 후에 평안을 선포하셨지요(마 10:12, 요 14:27, 20:21). 평안이 성취되려면

1) 우선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매일 기도로 깨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시험(죄의 유혹을 받거나 넘어가는 일)에 들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마 26:41). 욥 22:21~23에 보시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하고”, “장막에서 불의를 버려야 흥한다”고 하셨으며, 요한 사도는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한다”(요삼 2절)고 하셨습니다.

2) 환난에서 벗어나야 평안이 오니까 무슨 일이나 환난스러운 일이 있으면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에서 건지시고, 또 환난을 극복하게 하시며(고후 1:6), 피할 길도 주시고(고전 10:13), 또 그 환난으로 연단도 주십니다(고후 12:7). 여러분들에게 환난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환난이라 하면 전쟁, 기근, 자연재해, 질병, 부채, 송사, 사고재해 등일 것입니다. 이런 환난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기도할 수 있은즉 해결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멀어진다면 절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금식을 하면서라도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9:15).

3.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을 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짐 중에는 죄의 짐도 있고, 생활고의 짐도 있겠지만, 죄의 짐은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에서 해결하셨으니까 생활의 짐이 무거울 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사 40:29에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직장에 나가고, 노동하며, 피곤을 느끼는 분,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다 피곤하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마 11:28에서 “다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쉼을 얻을 것이고 가벼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욕심과 정욕을 빼버린 후(시 37:5, 갈 5:24)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면 어느 정도 피곤하여도 보람을 느끼고, 따라서 정신적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일도 사명으로 하면 가벼워집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생활을 눈동자처럼 감찰하시는 만큼 과한 짐은 반드시 덜어주실 것입니다.

4. 진로 문제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의 혼사 문제를 부탁하였고(창 24:12), 이삭이 아내의 잉태를 기도하였으며(창 25:21), 야곱이 “자기의 길을 인도하시고 평안히 귀가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고(창 28:20~22), 시편 기자는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사 45:11에서도 “장래 일과 자녀들(하나님의 아들들)의 일을 하나님께 부탁하라” 하셨으며, “하나님은 쉴만한 물가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 하셨으니(시 23:2~3) 자신의 길을 꼭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5.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여 넘치게 응답 받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왕상 3:11). 약 1:5에서는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믿음과 생활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은혜입니다.

6. 예수님은 베드로 개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일이 있었고(눅 22:32), 바울 사도는 엡 1:17에서 “계시의 정신과 마음눈을 밝히심과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 등을 알게 해 달라” 하셨고, 또 엡 3:16~19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것과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는 것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을 구하셨으니, 이것이 다 믿음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게 해 달라”는 것도 믿음을 위한 기도입니다.

7.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합 3:2에서 선민의 부흥을 기도한 일이 있고, 슥 4:6에서는 “선민의 부흥이…하나님의 신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120명이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한 것도 역시 부흥을 위한 것입니다(행 1:14~15). 그 기도가 얼마나 크게 응답되었습니까?

8. 마지막으로는 정치가들을 위해서도 꼭 기도하셔야 합니다(딤전 2:1~2). 사회의 안정은 정치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또 엡 6:19을 보시면 “말씀 전하는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복음 사역자와 정치가를 위하여 동시에 기도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5. 예배에 대한 말씀


제47과 예배에 대한 묵상 (요 4:23) 목록으로


이 시대의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일을 크게 강조하고, 또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을 은혜 받고, 영광 돌리는 일로 압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예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갖고 계신지, 또 내가 아는 지식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피는 의미에서 “예배에 대한 묵상”이란 제목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선 중요한 것은 “예배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또는 “예배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 할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배는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진행하는 것이라” 하였을 때 믿음 없는 자가 돈을 받고 예배에 참석하였다면, 그 순서 진행만으로는 예배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요소가 포함되어야 하겠지요. 어떤 성도는 예배를 목사가 인도해야만 되는 줄로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가족끼리도 드릴 수 있고, 구역장도 인도하지요. 또 평신도가 혼자서도 드릴 수 있습니다(벧전 2:9). 제가 성도님들에게 바라는 것은 예배를 성직자의 독점거리로 믿거나 양보하지 마시고, 스스로 드리는 예배에 만족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곧 이때라” 하셨지요. 그 ‘이때’가 어느 때를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오신 때로부터 신약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예배는 신약시대부터 드려야 하니까 구약시대에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사 드리는 일로 대신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중보자를 대리하는 제사장이 있고, 십자가의 희생을 모형하는 제물이 있었으며, 골고다 산을 모형하는 제단이 있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주면 제물을 갖고 간 성도는 제단이 있는 뜰에서 기도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물은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제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섬기는 방법”인데,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중보자의 역할을 힘입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사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중보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 제사장의 중보로 제사를 받으셨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공로를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여 중보 역할을 하시는 때부터는 인간 중보자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 개인이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하나님께 직접 나가고, 직접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제사의 의미는 “십자가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 제사 의식이 없어진 것은 모형적 계시가 십자가로 성취되었고, 제사장 직분도 예수님이 직접 하시기 때문에 없어졌고, 남은 것은 “십자가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광 돌리는 헌신” 뿐이며, 이 세 가지가 신령한 예배의 골격이 된 것입니다. ① 십자가의 믿음, ② 하나님에 대한 사랑, ③ 영광 돌리는 헌신입니다.

3. 그러면 결론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1) 십자가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또는 예수님의 중보를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예배에 참석을 하여 찬양, 기도를 잘 하였을지라도, 만일 십자가의 믿음을 갖지 않았다면 참석에 불과할 뿐 예배는 아닌 것입니다.

2) 성도가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와 즐거움이 없다면, 그것도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 없이 드리는 제사는 외식입니다. 마 15:7~8에서 “외식하는 자들아…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입술로 존경함은 찬송이나 구호를 뜻함) 마음은 내게서 멀다” 하셨지요. “마음이 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겁지 않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예배 의식은 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나갈 때 평소 생활에서 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느 8:10), 좋은 제물을 드리고, 회개를 힘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십자가의 믿음 안에서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복종을 잘하면 그것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예배의 요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골라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눅 10:42, 2:46). 또 믿음과 회개와 찬송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배 순서에 찬송, 기도, 자복, 설교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도 좋아하시고(눅 17:17), 말씀 토론(문답; 눅 2:46)도 좋아하시며, 이웃 사랑도 좋아하십니다(마 22:39).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예배의 한 분야로써 구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구제 헌금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고, 선교 헌금은 자신이 전도할 사명을 직접 못하기 때문에 대신 돕는 것이며, 예배당 헌금은 자기가 좋은 집에서 예배드리고 싶어서 돈을 내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좋은 예배당을 지어 달라고 하신 일도 없고, 또 하나님도 좋은 예배당에 앉아 예배드려야 받는다고 하신 일도 없습니다). 오직 신령한 예배는 물질적 조건을 떠나서 믿음의 조건과 사랑의 조건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을 포괄한 행사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48과 예배 모범에 대하여 (요 4:21~24) 목록으로


장로교회 헌법에 “예배 모범”의 규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의식적인 질서에만 중점을 두어 설명하였습니다. 예배를 위하여 규범을 만든 것은 예배를 대단히 중요시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일주일에 10회 이상 예배 의식을 갖지만, 혼자 드리는 예배도 예배인즉 예배의 생활을 늘 달고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역자는 예배를 더욱 강조합니다.

1.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예배란 용어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요?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약적 예배의 개념은 몰랐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예배로 알았을 것입니다. 최초의 제사로는 아벨의 제사와 노아의 제사가 있었고(창 4:4, 8:20), 다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제사가 있었으며(창 12:8, 13:18, 22:9, 26:24~25, 28:16), 그 다음에 율법적인 제사로 이어집니다. 율법에는 여러 종류의 제사와 절기 제사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의 기본 틀을 잡아주셨지만 단일 성전만 사용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벨론 침략으로 성전이 훼파되고 레위족이 분산되니까 제사 드리는 일이 어려워졌고, 신앙도 명맥만 유지하였지요. 그러다가 70년 만에 또 해방이 된즉 어느 정도 복구하기는 하였으나 그 시기가 짧았고, 또 헬라의 핍박으로 약 400년간 잠재워졌다가, 예수님 당시의 성전을 주전 40년경부터 헤롯이 지으면서 예수님 시대까지 제사 행위를 이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와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 때 성도들이 신령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의식으로 예배드린 것을 의미하고, 또 한 가지 의미가 있다면 “희생의 제물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중보를 상징하는 것으로 믿는 것”인데,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를 예배로 간주할 때 “인간 제사장의 중보로 상징적 제물을 갖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약적 예배를 신약적 예배와 대조하면 신약적 예배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직접 대하는 영적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2. 신약의 성도가 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에 대한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1) 우선 “예배”란 용어 “프로스쿠네오”(요 4:20~23)는 봉사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영어로는 worship이라고 하는데 이 worship은 worth(가치)와 ship(신분)의 합성어로 “가치 있는 신분”이란 뜻이어서 “하나님을 존귀한 신분으로 높이는 것”을 예배로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예배”는 국어사전을 볼 때 “숭배하는 신을 경배하는 행위와 의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용어들이 예배의 의미를 약간은 깨우쳐주지만, 기독교의 예배를 다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신약시대의 예배가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축복의 산이라 하는 그리심산이나 시내산이나 감람산도 아닌 어느 곳에서나 예배드릴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특정한 건물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예배 그 자체가 의식보다 일반 생활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아는 것을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22절).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신분을 알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배자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많이 알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뜻이 그것뿐입니까? 반드시 친교적 앎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예수님을 알았지요. 그러나 친교적 앎은 아니었습니다. 친교적 앎이란 예수님도 그를 알아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친교적 앎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과의 연합을 확신할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지요. “신령”이 무슨 뜻입니까? “프뉴마티”, “영”이란 뜻입니다. “영으로 예배드려라” 하셨으니까 결국은 “거듭난 심령, 새로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롬 12:1에 보시면 “몸으로도 산 제사를 드리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갖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변화 받는 영적 예배가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그 뜻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이란 뜻은 “알레테이아”, 진실, 참, 진리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거짓과 의식의 반대입니다.

3. 이만한 상식을 이해하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1) “신령”은 영이고, 마음이며, 믿음이고, 깨달음이며, 변화된 마음입니다.

2) “진정”은 진리이고, 진리는 말씀이며, 말씀은 성경 중심이고, 또 진실함과 참됨과 정성이 될 것입니다. 또 롬 12:1에서 몸으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하니까 순결한 생활이 필요하고, 순결한 생활은 세속을 멀리하는 데서 보존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교회의 예배 의식은 의식 자체로써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접근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로 받는 응답의 표현”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제49과 공예배의 질서 (고전 14:26~33, 40) 목록으로


교회 헌법 중 예배 모범은 공예배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공예배의 질서”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예배는 개인도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적 개념은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진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응답하는 영적 예절”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믿음과 하나님 아는 지식과 회개와 감사와 순종과 충성과 사모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개인적 요소 외에 다수가 융합하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고전 14:40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살후 3:6).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하겠습니까?(요삼 4:8) 마땅히 사랑을 실천하셔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공예배 때에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설교)도 있으며, 계시도 있고(그 당시는 성경 계시 완성 이전이므로), 방언도 있으며(섭리에 따라 방언이 나타났음), 통역도 있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을 돌린다”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덕을 세운다” 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예배드리는 행위가 합당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손해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덕을 못 세우는 것은 사랑에 위배되고, 사랑이 위배되면 믿음도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보다 공동체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연단을 받을 때 이웃에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연단의 도장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신 줄 압니다. 그러면 공동체 질서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1. 말하는 사람이 “순서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27절에 “차서를 따라” 하라고 하셨지요? 말로 표현하는 은사는 방언과 예언뿐입니다. 방언을 할 때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성도에게 덕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8절). 그러나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교훈이어서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나타났을 때는(30절) 같은 성령님이 주시는 영감이니까, 성령님이 한 장소에서 두 사람이 말하도록 계시를 주실 리가 없지요. 그래서 새 계시를 주실 때는 먼저 말하던 사람에게는 영감을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씩 순서대로 예언이나 방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예배는 두 사람 이상이 말하고 떠드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성 기도가 이 말씀으로 제재됨이 좋을 것입니다. 주위 사람에게 방해가 전혀 없다면 모르되, 시끄러운 관계로 정신적 안정이 안 되거나, 옆 사람의 기도 내용에 훼방을 받는다면 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2. 공예배에서 말하는 사람을 2~3명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배 시간이 길면 안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행 20:78을 보시면 바울이 “드로아”에서 방증까지 강론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는 마지막 작별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히 길게 하신 것인데, 역시 편안하게 못 넘기고,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지는 불상사를 초래한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시면 방언도 두세 사람, 예언도 두세 사람(29절)만 하라고 하신 것은 시간을 길지 않게 조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예배는 40분 이상 1시간 10분 내에 끝내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때에 말씀 증언하는 사람은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일과 질서를 잡는 일에 유익한 것입니다.

3. 공예배에 덕을 세우는 방법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2~3분전에 도착하는 분도 있습니다. 시간 지키는 것이 서투른 사람은 20~30분전에 오시면 됩니다. 예배의 앞부분을 잘라먹는다는 것은 아주 큰 실례이고, 또 뒷부분을 잘라먹고 축도 전에 나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인즉 주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도 단체 생활에 시간을 어기면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준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행사를 하셔야 합니다. 물론 사람도 기쁨을 맛보지요. 이 행사의 균형이 인간 잔치 쪽에 비중을 두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부분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에 관한 부분은 적고 기복에 관한 부분이 많거나, 찬송을 영광 위주로 부르지 않고 경연대회 식으로 하였다면, 이것은 영광보다 인간 중심이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대회보다 믿음을 좋아하시고, 물질보다 회개하는 심령을 좋아하시며, 제물보다 순종을 좋아하시는 것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집중과 열심입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피곤하지 않도록 건강을 충분히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은 “미지근한 것을 토해내시고, 마음과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계 3:15, 마 22:37). 롬 12:11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씀과 시 33:3의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씀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예배는 개인의 예배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량이 더 많은 것입니다.

 

6. 믿음 성장과 천국 실현


제50과 성장의 은혜 (막 4:26~29)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영적 구원 사업을 곡식 자라는 비유로 교훈을 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음 성자의 요소와 단계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27절에 보시면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그 다음에는 충실한 곡식이 되어 주인으로 하여금 거두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장의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성경에는 믿음 성장을 촉구하시는 말씀이 많습니다. 고전 3:2에서 어린아이처럼 젖만 먹는 신앙을 책망하셨고, 히 5:14에서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라” 하셨으며, 그 외에도 “예수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분이라”(골 1:10, 2:19)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는 잘 자랍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가 금방 대학생 되고, 성인이 됩니다. 제가 한 번은 총회에 갔는데, 장성룡 장로란 분이 총대로 와서 인사를 하기로 알아본즉 제가 30세에 목사 된 후 처음으로 결혼 주례를 받은 신랑이 장로 되고, 총대가 되어 만난 것입니다. 그때 그분이 많이 성장한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직분을 오래 갖고 있었으면서도 너무 성장을 못한 채 육신 냄새만 풍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10년을 믿어도 미지근한 사람이 있고(계 3:15), 20년을 믿어도 낮예배만 나오는 사람이 있고, 미국에는 30년을 믿어도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에만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난쟁이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장을 실감하십니까? 자고 깨는 사이에 오이 자라듯, 자신의 신앙이 성숙한 것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믿음 성장이 없는 자는 젖만 먹는 어린아이 같다 하시고, “욕심, 시기, 분쟁을 버리지 못하는 자며(고전 3:3), 말과 생각도 둔하고(고전 13:11),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넘어가며(엡 4:14), 지각도 둔하여 늘 젖만 먹는다(쉬운 교훈, 칭찬 받는 것)”고 하셨습니다(히 5:13, 고전 14:20). 발전하셔야 하겠지요?

2. 믿음 성장의 요소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씨앗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밭도 그렇고요. 거기에 비 오고, 햇빛 비치고, 바람이 불되 적당하게 주셔야 하니,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결실기(가을)도 그렇고요(행 14:17).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다음에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인데, 성장은 은혜로도 주시지만 사람의 노력에 따라 더 주시는 것입니다. 구해야 주시고, 찾아야 만나주시며, 두드려야 열어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실한 농부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농사 기술을 터득하여 잘 가꿀 때 많은 소득이 있는 것처럼

3)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방법은 우선 마음의 옥토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의 옥토란 온유, 겸손,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실한 마음을 갖고, 선택 받은 것과 부르심 받은 것과 거듭난 사실을 확신한 다음(벧후 1:10~11),

4) 말씀과 기도에 이끌려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능력이며, 기도는 하나님과 나를 얽어매는 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라 하셨고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살전 5:17, 시 116:1). 성도가 기도를 계속하면 하나님은 들으셔야 하고, 성도가 성경을 묵상하면 하나님은 깨우치셔야 하기 때문에, 그 성도를 떠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5) 그런 중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큰 감동과 변화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말씀과 기도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과 기도의 맛을 알고 이끌리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 성장의 절차입니다. 씨앗은 반드시 순서대로 자랍니다. 싹, 줄기, 이삭, 결실의 순서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단계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 단계적 은혜를 구원 성취를 설명할 때는 중생,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의 단계로 구원이 성취되지만, 생활의 단계로 볼 때는 믿음의 확신, 교회 출석, 성경 공부, 회개 기도, 봉사 직분, 감사, 사랑 실천, 헌신 충성의 순서로 성숙해 가면서 많은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가르칠 수 없고, 체험이 없으면 적응하기 어려우며, 사랑 실천이 미흡하면 솔선 자격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믿음 성장의 단계는 성경 지식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과 화목할 때 성숙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성장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런 고상한 목표를 바라보시면서 성장하실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51과 불의 역사를 소원하심 (눅 12:49~53) 목록으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 하신 말씀은 분명 예수님이 “불같은 역사”를 소원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불같은 역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을 던지는 소원을 이루시기 전에 받으실 세례가 있어서 그때까지 기다리시는 일이 답답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고, 땅에 붙어야 할 불은 그 다음에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이므로, 이 불은 성령 강림의 충만한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이후에 있을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초급하게 갈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불의 역사를 소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성도의 주변에 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으로 보아, 분쟁에 이기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선민들끼리 하나님을 공경할 때는 다 믿으니까 핍박과 분쟁이 없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들 중에서 택한 백성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반드시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갈리게 되고, 그 사이에서 핍박과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의미에서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핍박함에 있어서 가장 큰 대적은 권세자의 핍박과 가족의 핍박입니다. 부모, 자식, 형제간에도 갈리고 갈등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령 충만의 불같은 은사가 없으면 어려운 핍박을 이길 수 없겠지요. 그 불이 속히 붙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던지실 불은 오순절 성령의 불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을 소원하신 뜻과 같은 것이고, 불의 역사, 즉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는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불의 다양한 역사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이 몇 가지로 역사 됩니까? ① 밝히는 역사, ② 뜨겁게 하는 역사, ③ 태우는 역사, ④ 능력(큰 폭발력)의 역사입니다. 이 불의 역사를 성경에 근거하여 살피심으로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밝히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성령을 받고, 진리의 빛을 주위에 비추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곱 등장불로 비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지요(마 5:14). 또 시 119:115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많고 답답한 세상에 성도가 의로운 빛을 발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생활을 만인 앞에 비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뜨겁게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미지근하에 할 때 토하여 내치신다”고 하셨습니다(계 3:15~16). 이것은 열심의 불을 뜻합니다. 롬 12:11에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전도의 사명을 느끼면서 “중심이 불붙는 듯하다” 하였고(렘 20:9),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으며(눅 24:32),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금식하면서 회개할 때 “그 중심이 뜨거워진다”고 하셨습니다(욜 2:18). 이 말씀은 사랑의 심정이 뜨거워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딤후 1:6에서는 “하나님의 은사가 불일 듯 한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성령님의 뜨겁게 하는 역사는 열심으로도 나타나고, 말씀의 깨달음에서도 나타나며, 봉사와 전도와 은사 활동으로도 나타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태우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제단에 피어있는 불을 거룩한 불이라고 하셨지요(민 40:9). 그리고 이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았을 때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사 6:7). 이 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단 불은 곧 희생물을 태우고 죄를 없애는 정화의 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은 회개는 할지언정 죄는 지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이 한번 지나가면 소독을 안 해도 될 만큼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불이 성도의 심령에 붙어서, 회개를 이루고, 죄사함 받으며, 자기를 정화시키는 일(거룩; 벧전 1:16)을 원하신 것입니다.

4. 능력의 역사입니다. 불은 힘의 원동력이고, 힘의 상징입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되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나니라”(슥 4:6) 하셨고, 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행 1:8)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능력이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바라신 시급한 뜻은 핍박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도 믿음 나름입니다. 불로 연단을 받은 믿음이어야만(벧전 1:7, 계 3:18)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7:20). 성도가 불같은 능력을 받고 하셔야 할 일은 이웃을 비치는 일로 시작하여, 핍박을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며, 또 성경을 깨달아 땅끝까지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고 이 같은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함으로 예수님의 소원을 시원스럽게 이루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천국 건설에 대한 예언 (겔 36:24~38) 목록으로


본문의 예언은 “천국 건설에 대한 예언”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천국의 개념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를 뜻하지만, 천국이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끝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예언은 선민적 구원을 실제적 은혜와 모형적 계시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실제적 은혜란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 회복의 은혜(예루살렘 귀환과 재건)를 주시는 것이고, 모형적 계시란 뜻은 실제적 은혜를 계시 방편으로 하여 신약시대에 있을 구원의 역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이 말씀을 살피면서 “이는 선민들이 바벨론 속박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을 다시 중건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또는 “신약시대에 있을 성령님의 역사와 교회운동”으로 이해하시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예언에 근거한 교회의 운동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에스겔 선지자는 겔 1:1에 근거할 때 “그의 나이 30세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끌려간 지 5년 된 해에(주전 553년)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야긴이 끌려간 지 5년 된 것은, 전왕을 끌어가고 후왕을 세웠으니까, 시드기야 5년과 같고, 나라는 시드기야 11년에 망하였으므로 나라가 망하기 6년 전이며, 바벨론의 학대가 심한 때였음을 알 수 있고(왕하 25:8~17), 그때에 에스겔이 갈대아 땅에 있었다는 것은 1차 포로 시에 끌려갔음이 확실한 것입니다[왕하 24:10~14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8년에 여호야긴 왕 이외에 수천 명을 잡아간 기사가 나옵니다. 그때는 시드기야로 왕을 교체한 만큼 시드기야 1년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포로는 왕하 25:1~7에서 시드기야 왕 9년(느부갓네살 17년)에 나라가 없어지면서 시드기야까지 포로로 잡아갔고, 그 다음 2년 후인 느부갓네살 19년에 왕궁을 불사르고 남은 사람들을 또 잡아갔습니다; 왕하 25:8~12]. 그 당시의 유다와 예루살렘은 폐허의 광장으로 변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2. 에스겔이 받은 계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 24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흩어진 선민)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방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70년 후에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자 해방령을 내려 성취한 사실이고, 1차, 2차, 3차로 귀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라 1:~2:, 7:~8:, 느 1:~2:). 또 이 예언의 궁극적 성취로는 오순절 때에 이방의 백성들까지 믿음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586년 만에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 100년 후에 될 일을 믿으라고 한다면 “나 죽은 다음의 일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고 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사는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면 한 됩니다. 아브라함은 2,000년 후에 자기의 씨로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을 믿었고(창 15:1~6), 모세는 1,500년 후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히 11:24~26)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약속이 지금도 성취되고 있음을 믿고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맑은 물로 뿌려 정결케 하고(구약의 결례식으로 표현한 속죄임; 출 12:22, 시 51:7)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섬김에서도 벗어나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것은 죄사함을 주시고 죄를 멀리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3) “새 영을 주시므로 새 마음을 갖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또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성도의 속에 계시게 하여(요 14:17)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시는 일(요 3:3, 엡 2:1)부터 시작하여 성도와 함께 하시고 모든 변화와 능력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구약의 흩어진 백성들이 회개하고 새 출발하는 각오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 재건과 함께 정화 운동을 일으킨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이고, 또 신약시대에 와서 오순절 이후에도 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상숭배자가 회개하고, 이방인이 믿으며, 로마의 간수가 회개하고, 점쟁이가 돌이키며, 하루에 300명씩 돌아오고, 사울 같은 완악한 자가 변화되어 사도의 사역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또 성경을 주셨고, 오늘까지 성도와 교회를 붙들어 인도하시므로 천국 운동을 계속 이루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4)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에 거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므로, 여기의 “너희”란 선택받은 백성, 즉 합당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나 비택자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택한 백성(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성도)만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5) 29~30에서는 “물질의 부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물질적 생활(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보장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 6:25).

3. 이상과 같은 은혜를 주신 근거는 “열국에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회복하시기 위함”(36:22)이요, 결코 백성들의 회개의 공로가 아닌즉 이스라엘 족속은 자기들의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탄식하여야 한다”(32절) 하셨고, 또 이런 예언과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 은혜를 성취함에 있어서 “성도는 기도로 구하여야 할 것이라”(37절) 하시므로, 약속된 은혜일지라도 반드시 기도와 간구로 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셨고(엡 5:18), 또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며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 분별하여 따르라”(롬 12:2)고 교훈하셨습니다.

 

제53과 악인의 회개 (겔 18:21~24) 목록으로


본문에는 “악인의 회개와 의인의 타락에 대한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악인과 의인이 그 신분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면 그 신분과 결과도 반대의 입장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의인의 성격과 죄사함의 근거와 변화의 결실에 대하여 교훈 받아야 할 줄로 압니다.

1. 악인의 돌이킴에 관한 것입니다.

1) 여기의 악인이란 진리를 멀리 떠난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즉 의를 행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의롭게 살려는 의욕도 없는 사람입니다.

2) 그런데 이 사람이 큰 변화를 일으켜서 죄를 멀리하고 법과 의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인의 길로 돌이키는 것은 흑을 백으로 만드는 작업과 같아서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한 마음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시 51:10, 겔 36:24~31, 롬 2:4, 마 3:9),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고, 악인은 그 은혜를 받을 때 회개와 정의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마 11:12).

3) 그리하여 “악인이 돌이키면 정녕 살고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범죄에서 돌이키고 불신앙에서 돌이켰은즉 당연히 구원을 받고 멸망에서 영생과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죽지 않고 정녕 살게 되는 이유는 “그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도 기억됨이 없게 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도”란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조상의 죄까지)를 의미하고 그것들이 “기억되지 않음”은 깨끗이 용서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도말했다, 등 뒤에 던졌다”(사 44:22, 38:17), 히 9:12에서는 “영원한 속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시고(마 9:6), 그 권세를 자신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나타내시며(히 5:1~10), 그 속죄의 성격은 영원한 구원적 속죄가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오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받는다”는 일반적 구원의 도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행 16:31).

5) 그런데 22절 끝에서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산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노력하고 율법을 지키는 의”이지만 그 의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한 의”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의의 한 행동, 롬 5:18)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만일 이 “의”를 사람의 노력으로 해석한다면 구원의 근원적 의가 아닌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법과 의를 행하는 표준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은 의롭지 않지만(롬 3:10), 욥이나 요셉이나 고넬료를 의롭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지금까지의 말씀은 근본적 구원과 관계되는 돌이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이 교훈을 변화 받지 못한 생활에서 변화 받는 생활로 돌이키는 교훈을 받으셔야 할 줄로 압니다. 예를 들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생활”에서 차든지 더웁든지 하는 적극성 있는 생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실 것입니다(계 3:15~16, 대하 16:9). 좋은 생활을 결심하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에는 굳은 의지를 나타냈거나, 결심하고 시작한 사람이 큰 축복을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룻이 시모에게 효도할 결심을 굳게 한 것이나(룻 1:18), 다니엘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결심하고 은혜를 받은 일이나(단 9:3, 23), 예수님이 사마리아 전도를 결심하시고 한 일이나(눅 9:51),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한 것(행 21:13)이 다 성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개인이 무엇을 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간을 아끼고, 물질을 아끼며, 건강을 살피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생활을 하십시오. 성수주일을 구별되게 잘 지키시고. 예배 시간을 엄수하시며, 예배 시간만큼은 졸지 마시고, 설교와 대표 기도에 경성하시며, 성경 읽기와 개인 기도에도 힘쓰시고, 모든 이웃에게 사랑과 덕을 베풀며, 온유․겸손하며, 진실하고 양보하며, 명예욕 같은 것을 외면하고, 뜻을 허탄한 데 두지 마시며, 항상 낮은 데 처하고(롬 12:16), 헌금․봉사에도 힘쓰고, 전도인의 모범이 된다면 축복에도 큰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결심하고 의를 행하는 것처럼, 결심하고 분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인의 타락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의 “의인”이란 궁극적 구원을 받은 의인이 아니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던 의인을 말합니다. 궁극적 구원을 받은 의인은 잠시 낙심하고 연약해지다가 돌이킬 뿐, 죄를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책임 중보를 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7:9~11, 17). 따라서 “의인이 범죄하고 가증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의인 같은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도는 죄를 범해도 잠시 연약에 기인할 뿐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한다는 것”은 완전한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타락으로 인하여 의에서 떠났은즉 죽을 뿐만 아니라, 그가 타락 전에 시행한 의로운 노력도 기억하시지 않으므로 상급에 참고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동메달도 못 따면 다음 상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의가 없는 자는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였더라도 구원이나 내세의 상급이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일깨워주시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제54과 생명강수의 은혜 (겔 47:1~12) 목록으로


1.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가 망하기 6년 전(2차 바벨론 포로)에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으로, 포로 5면 만에 갈대아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주시는 계시 받기를 시작하였고, 본문의 계시는 1차 계시 후 20년 후에 2차로 받은 계시입니다(1:1, 40:1). “그발강”은 갈대아의 티그리스강 하류(바그다드 근방) 지역입니다. 이 장소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에 이끌려 계시를 받았는데,

2. 그가 받은 계시를 살피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중 성전 동편의 문지방 밑에서 샘물이 흘러나와 마당에 있는 제단 남편으로 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계시자가 에스겔을 밖으로 인도하여 나가본즉 그 물이 동편 바깥문 우편에서 스며 나와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계시를 보여주는 사람이 손에 자를 갖고, 물줄기를 따라 1천척을 잰 다음에 “건너보라” 하여 건너가본즉 발목에 오를 정도였는데, 또 1천척을 재고 “건너보라” 하여 건넌즉 그때는 물 깊이가 무릎에 올랐고, 또 1천척을 재고 건넌즉 허리에 올랐으며, 다음에 또 1천척을 재고 건넌즉 창일하여 헤엄칠 물로 불어난 것입니다. 그때에 계시를 전달한 자(천사일 듯)가 강물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은 곳에 이르러 하는 말이 “이 물은 아라바(아라비아 황폐한 땅)를 지나 바다로 흐르는데, 이 물이 바다 물을 소성시키고, 또 이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번성하고 고기도 심히 많아지며 모든 것이 살고 어부도 생겨서 엔게디(사해 서안 중앙부에 있는 샘, 옛 이름 하다손다발; 창 14:7 ,수 18:62, 대하 20:2)에서부터 에네글라임(사해 서안 북쪽 마을, 현재 아인엘퍼슈카)까지 각 종류의 큰 고기가 많게 될 것이라. 그러나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할 것이요,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에는 실과나무가 끊임없이 자라고 새 실과를 맺을 것인데 이는 이 강물이 성소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그 실과는 먹을 만 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상과 같은 꿈을 꾸었다면, 기분이 좋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고, 여러분들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전달해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3. 그러면 이 계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1) 이 계시의 배경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샘물과 요단강 하류와 사해바다를 대상으로 하고, 이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장차 부흥의 은혜를 주실 것을 예고하신 계시가 틀림없습니다.

2) 샘물은 은혜와 성령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그 샘물이 성전 문지방 밑에서 솟은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물은 흐를수록 많아졌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중에 더 풍성해질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또 이 물이 닿는 곳에 소성이 있었으니 아라바의 사막에 오아시스가 될 수 있고, 그 물에 고기가 놀며 어장이 생김은 물론, 강변에도 나무가 무성하여 먹을 만한 실과가 생산되고 심지어는 그 나뭇잎까지 약초가 된다 하셨으니, 이 사실은 영적 육적으로 큰 발전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이 예언은 역사적인 견지에서 두 가지를 예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부흥이고, 또 하나는 메시야의 복음과 오순절 때 나타난 성령님의 역사와 교회의 발전상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예언을 한 후 55년 후에 바벨론이 망하고 해방령이 내려서 예루살렘 귀향이 있었고, 성전 재건과 정화 운동이 나타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또 400년 동안 아라바 사막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매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님을 보내셔서, 영적 신앙의 역사를 이루어 지금까지, 교회가 부흥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성령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강수를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땅히 소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승화되는 것입니다. 강물이 소성하여 큰 물고기가 살고 어장이 되며, 강가에 과수원이 재배되고, 심지어는 나뭇잎이 약초까지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모든 생활이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꼭 이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곳은 목동들이 천수를 저수하기 위하여 둑을 쌓은 분지이기 때문에 생수가 들어오는 길을 막은 것이니, 이것은 성도가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은혜 받는 노력을 하지 않으므로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의 희망이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강수 같은 성령님의 은혜를 받고(사 55:1, 암 8:11, 요 4:14, 7:37) 크게 믿음이 성장하여 헤엄치는 기쁨을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발목신앙(교회 출석)에서 무릎신앙(기도)으로, 무릎신앙에서 허리신앙(힘쓰는 봉사)으로, 허리신앙에서 헤엄치는 신앙으로 성숙하셔야 할 것입니다. 헤엄치는 신앙은 현실적 장애물을 충분히 극복하는 만능적 신앙, 즉 정상에 오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55과 천국의 성장과 완성 (눅 13:18~19)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하시고,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깃드는 것”으로, 또 하나는 “누룩이 가루에 들어가서 전부 부풀게 하는 것”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인데, 이 세계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도 자신의 마음에 형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가 거듭나고(요 3:3), 성령님과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성도 자신의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마 5:3) 하셨고, 또 “예수님이 성도의 마음에 계시다”(엡 3:17)고 하신 만큼 천국은 성도 개인의 마음속에서부터 형성되는데 은혜를 받음에 따라 그 세계가 커지는 것이요,

2) 교회의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고, 또 “피로 값 주고 사신 단체”라고 하셨습니다(골 1:24, 행 20:28).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눅 17:20~21)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이 천국도 적은 데서 시작하여 성숙되고 확장됩니다.

3) 내세의 천국입니다. 이 내세의 천국은 세상이 끝나고 마귀가 결박되며 구원 받을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았을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2. 그 천국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1) 우선 개인의 천국은 겨자씨 같은 거듭나는 은혜를 받고, 말씀의 단비를 받아서, 자기의 믿음을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말씀 실천을 잘 한 후에, 사악한 현실에서 마귀와 싸워 이기는 연단을 많이 받음으로 자기의 믿음을 키울 때 성령 충만에 이르고 천국이 확장되는 것이요,

2) 교회는 믿음 있는 성도의 단체인 만큼 모든 성도가 주님의 뜻에 맞는 믿음과 생활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 단체의 믿음 세계입니다. 모든 성도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적 사명을 다하며, 사랑을 나타낼 때, 그 교회는 성장한 것입니다.

3) 그리고 내세 천국은 하나님이 세상을 끝내시고 구원 작업을 완성하시는 때에 이루어집니다. 앞서 간 성도의 영혼이 미완성된 천국(구원자 다 모이지 않은 곳)에서 그 완성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3. 겨자씨 비유는 외적 성장을, 누룩 비유는 내적 심령의 변화를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외적 성장은 눈에 보이는 행동을 의미하고, 내적 심령의 변화는 마음의 깨달음과 새 생활의 의지를 뜻합니다. 누룩이 가루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그릇 속에서 소리 없이 가루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성도가 말씀과 기도로 자기의 인격을 변화시켜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다면, 그것이 곧 누룩이 가루를 발효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겉으로 성장을 보이는 것인 만큼 외부로 나타내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데는 시간도 필요하고, 관리자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성숙되어야 이웃에 덕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큰 교회가 되어야 복음 전파나 사랑 실천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누룩 비유에서 “마음의 천국”을 이루어야 할 것과 겨자씨 비유에서 신앙생활의 외부적 활동이 성숙해야 할 것을 교훈 받게 된 것입니다.

1) 신앙의 성숙은 성경과 기도에 끌리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필자도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 성경을 열심히 읽고, 새벽기도를 힘쓰다가 참회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성도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공예배나 단체 활동에 취미를 느껴 교회생활을 할지라도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은혜를 받을 때는 반드시 성경에 끌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세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말씀(계명)에 대한 복종을 힘써야 합니다. 순종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계명에 대한 순종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고, 무서워 더 올라가기 어렵지만 위만 바라보고 올라간다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실천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성도가 사랑을 실천하려면 이기주의를 떠나서 이웃에게 덕을 세우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사랑 실천의 의지가 아주 없으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요일 3:10). 따라서 사랑 실천을 많이 하지는 못할지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진 자처럼 탄식하며, 회개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복음 사역을 위하여 충성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이를 많이 남긴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고”(눅 19:26), 또 포도원 비유에서 “과실을 많이 맺는 가지를 더 많이 맺게 하시려고 이를 깨끗케 하신다”(요 15:2) 하신 것은 충성자에게 은혜를 더 주신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믿음 자라지 않은 성도가 누가 있습니까?

4)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연단의 기회 주신 줄로 믿고, 믿음으로 이기며 인내할 때 그의 믿음이 크게 성숙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많은 변화와 큰 성장이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56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과정 (막 4:26~29) 목록으로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과정”을 씨 뿌리는 농사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 같고, 진주 장사를 하는 것 같으며,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 것 같고, 포도원에 일꾼을 들여보냄 같다”(마 13:44~48, 20:1) 하셨을 때 그 천국의 의미를 해석하여야 하는 것처럼 본문의 “하나님 나라”란 뜻도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려면 성도 개인이 은혜를 받는 데서 시작하여 택한 백성 전체의 구원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란 뜻은 개인적으로는 “은혜를 받는 과정”이고, 이 과정이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전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성도 개인적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부분과 전체적 구원 완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과정을 곡식 자라는 농사에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시기 위하여 씨 뿌리고, 자라고, 열매 맺는 절차와 믿고, 은혜 받으며, 성장하고, 영광 돌리는 신앙 성숙을 비교하고,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부분과 은혜를 받으며 노력하는 부분을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또 한 가지는 구원하시는 일 전부를 주님이 하시는 것과 사람 모르게 하시는 것과 시일을 두고 하신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은 씨와 땅과 기상 조건(추수 때, 결실기; 행 14:17), 자라게 하시고 또 열매를 익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히 2:10) 예수님이 거의 다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것과 낫을 대는 것은 “사람이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받고(씨 뿌림), 받은 것으로 영광 돌리는 것(낫을 대어 수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는 데는 공로가 없어도 은혜를 받고 영광 돌리는 일에는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중에서 하나님은 자라고 열매를 맺으며 곡식이 있는 과정을 소리 없이(자고 깨는 중에), 시일을 두시고 단계적으로 성숙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초신자가 소리치며 은혜를 받지 않는 것 같아도 10년쯤 지나면 직분자가 될 만큼 성숙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대로 믿음이 자라고, 교회는 교회대로 성장을, 교회 단체의 믿음도 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사상적으로, 사명적으로 성장하면서 거룩함을 이루어 천국 창고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6, 골 1:10, 2:19, 벧후 3:18; 자라게 하심의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이 사역을 행하실 때 시간을 소요하시고, 인간이 모르는 중에 역사하시며, 순서대로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시간을 소요하신다는 것은 개인이나 단체(교회)에 은혜를 베푸실 때가 있고(전 3:1), 세상의 종말이라고 하는 예측할 수 없는 세월을 쓰시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때를 기다리면서 은혜를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소리 없이 역사하십니다. 나무가 자랄 때 소리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랍니다. 성도가 거듭나는 역사를 잘 모르고, 자기가 변화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는 세련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3) 단계적으로 성숙시키십니다. 아무리 급해도 싹부터 난 다음에 줄기와 이삭이 자라서 여물어야 되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도 거듭나고, 회개하며, 성경 배우고, 봉사하며, 사랑을 숙달하고, 고상한 신앙으로 성숙, 연단이 되었을 때 영광을 많이 돌리게 되는 것이고, 그런 성도의 수가 목표에 도달할 때 천국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개인의 신앙은 어느 수준에 왔으며, 천국 완성의 목표는 어디쯤 왔을 것 같습니까? 개인의 신앙 수준은 성도마다 다른데 자신의 판단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싹 나는 수준입니까? 이삭이 팬 수준입니까? 아니면 잘 여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법이 자기 생활 속에 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런데 이 목적을 위하여 이렇게 생활하니 만족하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체적 천국 완성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끝이 온다”(마 24:14)고 하셨으니까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을 받지 않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하나님의 섭리로 가리운 대상이 아니면(고후 4:3), 그곳에 복음이 전달될 때까지는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으셔야 할 교훈은

1)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요,

2) 인간은 믿고 순종하며(사랑, 전도 실천) 누리는 것뿐임을 아셔야 하고,

3) 최종 결과는 천국의 완성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4)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실 때 세월을 두고, 소리 없이,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과

5) 거기에 따라 성도들도 단계적 성장을 이루어 정상에 오르는 믿음의 성숙을 이룩하셔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사명과 봉사에 대한 설교


제57과 바른 목표 (마 11:7~19) 목록으로


필자는 “신앙생활의 본질 문제, 즉 근본 목적”에 대하여 많이 증언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도 “바른 목표”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자주 드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 생활의 바른 목적을 떠나서 허탄한 데 뜻을 두며, 허탄한 것들을 경계할 줄 모르고 거기에 자기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야 하며(마 16:24), 정과 욕을 못 박고(갈 5:24), 세상을 사랑하지 말며(요이 2:15), 또 뜻을 허탄한 데 두지 말고(시 24:4) 따라야 할 것”을 교훈하셨는데도 지나칠 정도로 세속에 치우쳐 사는 것을 볼 때 “바른 목표”에 대한 강조가 무리하지 않습니다. 성도님은 무엇을 목표로 달음질 하십니까? 혹 세속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예수 믿는 목적을 말할 때 “천국가기 위하여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현세적 향락도 누리고, 죽은 다음에 천국을 내다보는 것은 아닌지요? 현세의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신령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현실적 축복이 바로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으로 오해할 위험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건강하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줄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진정한 목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닮는 데 있습니다(롬 8:29).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14절) 세상에 출현한 목적이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주의 길을 예비할 때(마 3:1, 3:11) 사치한 생활을 떠나서 자기 목표에만 충실하였습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가 아니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에 나간 자들이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보았어야 하는데, 그 목표는 고사하고 세례 요한도 본받을 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떠나서 예수님을 나타냈지만, 구경꾼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이 세대의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을 닮지 않고 세속을 닮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인기 작전에 몰두하는 사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사진을 광고에 실으면서 “그 모양새가 중요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웃는 사진이 사람의 관심을 끄는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장을 찍어 선택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진으로 사람을 끌거나, 진리 아닌 것으로 사람을 끄는 것은 결국 현실적 목적에 이용할 뿐일 것입니다. 사진을 보고 이끌려 온 자가 있다면 그는 진리에 이끌린 자가 아닌 만큼, 변화의 기회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요즈음 기독교신문을 보면 사회적 사업을 위한 한 번의 집회를 인하여 큰 광고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직과 인물을 광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않는 분입니다(마 12:19). 조직이나 인물 광고를 할 바에는 차라리 설교 한 편을 광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20~30명 모인 단체에서 여러 해 여전도회 회장을 하던 이가 회장 투표 떨어지자 교회를 떠난 일이 있고, 자기를 사람들 앞에 안 세워주어서 혈기를 내는 장로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갈등하고, 직분 경쟁하며, 교역자를 배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분명히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혹 교회 안에 파벌이 생기거나 인간 갈등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목표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면 며느리의 부족이 나타날 때마다 자기 딸도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고 너그럽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간에 그런 마음만 있다면 갈등은 해소될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 직분 경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직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성도의 목적도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겸손하여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면”(빌 2:3) 직분쯤이야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겸손해져서 은혜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벧전 5:5). 또 교역자를 배척하거나 예배당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예배당 없이 골방에서 드리는 예배가 은혜로움을 체험하지 못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 단체를 의지하거나, 건물과 재물을 의지하거나, 또 성직자의 위로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못하면 단체와 건물과 성직자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 성직자는 반드시 자기의 뜻만 따라주어야 위안을 받으니, 그것도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고, 성경을 깨달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목사님께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 아닌 이상 교역자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배척하는 것은 역시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37~40). 그러면 구원도 받고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제58과 개혁자적 소감 (살전 5:2) 목록으로


저는 27세부터 전도사 일을 시작하였고, 29세에 목사가 되었으며, 현재 66세이므로 40년 가까이 목회 사역을 하였습니다. 아홉 교회를 순회 목회하였고, 노회장도 두 번, 총회도 여러 차례 다녔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기독교계의 안팎을 많이 안다는 뜻입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유감스러운 일도 많이 당하고 보았습니다. 그 중에 나의 됨됨이에 대한 것도 많이 두드려 보았습니다. 20대에는 멋도 모르고 일하였고, 30대에는 잘난 줄 알고 일하였으며, 40대에는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고, 50대에는 설교와 대인관계가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멋모르고 일하였을 때는 하나님이 쓰신 막대기 같았고, 잘난 척하고 일했을 때는 교인들이 속은 셈이며,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부터는 인간성과 교회 안에 마귀가 들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57세 때에 기성 교회 목회를 중단하고, 말씀 연구와 문서 보급 일선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교인이 적고 조용한 환경에서 생활해보니 마귀의 유혹 세계에서 많이 멀어진 것을 느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자신에게 직접 접하는 수도 있고, 교회․노회․총회 같은 단체를 통하여서도 당할 수 있으며, 다른 이웃들로부터도 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믿음으로 이겨야 하고, 마귀의 유혹을 이기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저 자신이 마귀를 대적할 힘이 얼마나 있는가? 하고 자신의 성장도를 측정해본즉, 지금도 많이 약하지만 그래도 연륜 따라 점점 나아졌다고 확신합니다. 요즈음 20년 전의 설교문을 다시 정리하는데 성경을 설명하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지식과 경험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목회를 새롭게 시작한다면 그 동안 깨달은 부조리한 일들, 또는 성경적이 아닌 것들을 다 배제하고 순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할 것 같은데, 몸이 늙어있으니 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에 알맞은 문서 사역이 가장 적절한 듯합니다. 그 동안 신앙세계의 부조리한 일들을 많이 알다 보니 개혁적 사명감이 생깁니다. 초대교회 때 보여준 표준을 다시 주장하고, 그 모범을 보여주고 싶은데, 유명세를 타지 않으면 진도가 없고, 또 기성 단체를 변화시키는 일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과 교회의 개혁 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선 성도가 신앙 독립을 잘 못합니다. 성경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말씀을 지키고, 시험을 이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세속에 물들어 있습니다. 부흥의 방법은 말씀 사역이어야 하고(마 4:4, 행 10:44), 부흥의 목적은 예수님 닮은 성도를 생산하는 것인데, 현실 교회는 부흥의 목적을 물량주의에 두고 있고, 부흥의 방법을 사업적으로 상품 선전하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고, 이웃은 사랑의 대상만 되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 인간적 갈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분들은 교회의 부패가 무엇인지, 인간적 갈등이 무엇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마 4:1~11에 보시면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사실이 기록되었고,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시고 이기신 시험거리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가 물욕입니다(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 불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이지요. 다음에는 명예욕입니다(높은 데서 떨어져도 상하지 않으므로 인기를 얻으라는 것). 세 번째는 세상의 향락욕입니다(마귀에게 절하고 천하를 얻어 누리는 것).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처하셨지요. 그래서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호위한 것입니다. 현재 성도들과 교역자들의 생활을 살펴보십시오. 물욕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가? 명예욕을 외면하는 성도나 지도자가 있는가? 세상의 사치와 향락을 통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자선도 사업적으로 하고, 목회도 생활비를 받아야 하며, 직분자들은 직분 명예주의가 있고, 교역자는 교세를 인기 발판으로 삼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하여야 개혁을 할 수 있을까요? ① 우선 자신부터 자기를 못 박고, 바른 신앙으로 변화 받아야 할 것입니다. ②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기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에만 두셔야 합니다. ③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항상 기도하셔야 합니다(마 26:41). ④ 또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습기가 있으면 곰팡이가 끼듯이 유혹거리가 있으면 시험에 듭니다. 반드시 명예나 특권에는 대가를 치르도록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 외에는 좋은 것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제도화하는 데는 개혁 교회의 헌법을 이상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큰 교단이 여기에 따라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작은 개혁 단체가 새롭게 탄생하여 싹을 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개혁적 소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물량주의와 인본주의를 떠난 하나님 중심의 신앙 개혁을 위하여 교회의 헌법 초안을 구상해보려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개혁은 꼭 있어야 합니다.

 

제59과 예수님의 제자의 의미 (마 28:19~20) 목록으로


“예수님의 제자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너희”는 11사도를 의미하지만 예수님은 그들도 제자로 칭하셨고(마 28:16), 예수님 당시에 허다한 제자들이 있었으며(눅 6:17), 그 허다한 제자들 중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신 것입니다(눅 6:13). 그러니까 제자들은 사도들을 포함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총칭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 땅 끝, 모든 족속(막 16:15, 행 1:8)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으라” 하신 만큼 예수님의 제자 되는 자격은 인종, 성별의 분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데는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에 복음을 받을 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고, 그 다음에 제자들을 가르쳐서 예수님의 분부를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복음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제자 된 표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세례를 받은 분이면 다 자격을 받은 것입니다.

3. 저와 여러분들도 세례를 받았으니까 다 예수님의 제자이지요. 그렇다면 그 다음의 단계로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이 분부하신 말씀들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자”라는 의미 그 자체를 좀 더 이해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의 제자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성경관이 바르고, 주경신학을 가장 잘 하시며, 성경 주석을 쓰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도 박목사님의 제자로서 박목사님의 성경관을 그대로 믿고 펼쳤으며, 또 저 나름대로 강해문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자는 스승의 지식을 배우고, 스승을 닮으며, 스승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란 칭호를 받음에 있어서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본받아 생활하며, 또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뜻을 계승할 때 제자로서의 의미를 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명을 느끼십니까? 제자 된 저희들은 꼭 그 사명을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성경에는 예수님이 제자의 사명에 대하여 특별한 교훈을 주신 내용이 있습니다.

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때…내 제자가 되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요 15:7~8). 이것은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그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 진정한 제자가 되고, 또 은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까(요 1:1) 말씀을 모시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인격으로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제자 됨을 인정하시고 “그의 기도를 듣고 은혜를 베풀어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간직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일 뿐, 이웃은 알기 어렵지요. 그러나 나타나는 일은 하나님의 계명이 사랑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 13:34~35에 보시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로써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므로 성도 간에 사랑할 줄 아는 자라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을 절대적 섬김의 대상으로 믿고 섬기는 자라야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지만 “하나를 선택하라” 할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눅 14:26~27을 보시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대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할 때는 가장 중요한 예수님과 가족 중에 예수님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100점으로 사랑한다면 가정은 90점쯤 사랑하고, 하나를 택하라 할 때는 가족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자기를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려두어 자존심을 내세울 때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31). 가장 죽이기 어려운 것이 자기의 취미와 가족에 대한 인정과 현세욕일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 되는 일에도 적극성을 띠는 방법이 있고, 그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같은 제자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더 많이 도달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이고(엡 4:13~15), 그 노력하고 실천하는 정도에 따라서 칭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뜻을 한가지 더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도덕적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역자(교회에서 생활비를 책임짐)와 교인(자급하며 충성함)의 다른 점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친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잘 실천하면서 가르친 자는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마 5:19).

 

제60과 구제하는 법 (마 6:3~4, 눅 14:12~14)목록으로


필자가 이 글을 기록하는 이유는 자신의 구제 실천이 미흡함을 탓하고, 부끄럽지 않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고 싶은 염원에서입니다. 늘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직도 자신을 가난한 자로 던지지 못하고 개인적, 가정적, 경제적 합리성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끔 기독교자선단체에 부정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음이 아프고, 또 성직자가 자선사업을 하면서 “덕을 세우지 못 한다”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직자는 진리 밝히는 사업에 앞장섬이 당연하고, 물질적 자선사업은 일반 성도가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에 입각한 구령 사업을 위하여 성직이 필요한 것이고, 물질적 구제는 정부 단체와 같은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헌신적 구제를 잘하여 칭찬받는 사례도 많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를 앞세운 어떤 큰 자선단체가 부정이 있어서 그 책임자가 물러난 일이 있는데, 국법을 어기고 등기한 사실, 친인척을 끌어들인 사실, 사치한 생활 시설을 건설한 사실, 보조를 받기 위하여 홍보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고위층을 설득한 사실 등은 불신자의 하는 방법보다 더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남의 도움을 받아 사는 사람의 생활 시설이 사치스러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은 우선 생활부터 최대한 검소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적자 없는 생활 속에서 소비를 향상시켜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셨지요. 좋은 일도 잘 못하면 영광을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웃 사랑, 이웃 구제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셨는지 살펴보시지요.

1) 우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0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구제를 할 때 은밀하게 함이 좋고, 또 자기의 선행을 공로로 기억되지 않도록 잊으라는 뜻입니다.

2) 눅 14:12~14에서 이웃에게 잔치를 베풀어도 “갚음 받지 못할, 없는 대상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명분으로도 갚음을 받지 않기 위하여 힘쓰라는 뜻입니다(행 20:35). 그러나 성도의 자선 사업이 이 표준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우선 선전을 하여야 보조비를 받게 되고, 보조비로 운영을 하여야 하니까 세상에 알리게 되는데, 이것은 순수한 자선이 아닌 자선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자선 사업도 성직자 아닌 성도가 하면 좋고, 성도가 자선 사업을 직업적으로 할 수 있되, 자기의 직업 성격으로 받는 적당한 보수 외에 더 챙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직자가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만으로 족하게 여기는 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선 사업을 하면서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악한 행위이고, 지나친 치부를 하여도 역시 영광이 안 되며, 자선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웃을 돕고 자선하시는 차원에서 우선 필요 이상 갖지 않으셨습니다. 고후 8:9에 보시면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셨다” 하셨으니 이것은 구제의 첫 번 방식입니다. 어떤 이득을 위하여 줄서지 않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주택 구입도 너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남을 도우실 때(배고픈 자에게 양식 주심) 남의 자선을 받아 전달하신 일이 없고, 스스로 이적을 베푸셔서 먹이셨습니다. 전달은 큰 수고가 아닙니다. 어떤 식당을 경영하는 젊은 부부가 넓은 주택도 없이 살면서 22명의 고아를 양육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방법이 “진정한 구제요 자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약 1:27에서 “하나님 앞에 참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믿음의 의미를 차리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으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인즉

1) 우선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하겠지요.

2) 그 다음에는 개인, 가족, 단체별로 합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적으로 합심이 안 될 때는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3) 정도에 따라 시간과 물질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정 수입이 일정하고 수입의 얼마를 할애할 수 있는 생활적 여건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에 그의 생활수준은 검소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여건이 못 되어 시행하지 못하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좋은 목표를 계획하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4) 자선의 방법인데, 시간과 몸으로 헌신하는 방법과 물질로 돕는 방법이 있고, 또 생활을 돕거나 교육을 돕거나 병을 치료해주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도 자기의 환경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요.

5) 구제의 대상인데, 고아, 과부, 갇힌 자, 환난 당한 자를 우선으로 말씀하셨지만(마 25:36~45) 요즈음은 장애인, 노숙자, 장기복역 출감자, 외국인 노동자, 무의탁노인들 등일 것입니다. 이런 이웃을 적당히 선택하시되,

6) 멀리 나는 새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는 중에 자기 곁에 다가오는 대상을 선택함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요,

7) 기독교인은 가급적 선한 사업을 독자적 또는 가정적으로 시행함이 가장 합리적입니다(딤전 5:16). 한국의 기독교인 한 가정에서 1인씩 1건만 책임진다면 우리나라의 자선기관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십자가의 불빛이 이런 방법으로 나타날 때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위상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제61과 은혜와 사명 (눅 14:15~35) 목록으로


“은혜와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5~24절까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은혜의 말씀”이 있고, 26~27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되는 은혜의 말씀”이 있으며, 28~33절에서는 “싸워 승리하라”는 사명의 말씀이 있고, 34~35절에는 “소금의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두 가지 은혜와 두 가지 사명”에 대하여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복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체적으로 설명할 때 구원 받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이고, “그 나라에서 떡을 먹는다”는 뜻은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신령한 복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안 계시면 하늘나라가 성립 안 되고, 어느 곳이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면 떡 먹는 곳, 또는 은혜를 받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면 그 마음이 천국이고, 교회적으로 예수님을 모셨으면 그곳도 천국이며, 내세의 천국은 완성된 천국이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이면 그것이 곧 떡을 먹는 것입니다. 요 1: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이라” 하셨고, 마 4:4과 고전 10:3에서 말씀은 양식, 또는 “만나”라고 하셨으며, 요 6:3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은혜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천국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 먹는 복입니다. 세속의 일들을 적당히 접어두시고라도 이 신령한 떡을 많이 잡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이 떡을 못 먹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 세속의 일로 못 나오는 사람, 말씀 듣는 데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경성하십시오.

2. 예수님의 제자 되는 은혜입니다. 제자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마 28:19에서 “제자 삼아 세례 주라” 하셨으니까 세례를 받은 성도는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을 전문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교회에서 받는 직분도 귀한 것처럼 예수님을 전문적으로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사람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의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도 그렇다”(26절) 하셨으니까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 앞을 잘 닦을 줄 알면서, 인정이나 세속에 치우치지 않고, 헌신성이 강할 때 자기의 제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시작할 때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이나 피를 팔아, 먹으며 시작한 사람, 또는 재산을 헌납하고 시작한 사람은 다 성공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예수님은 그런 헌신자를 크게 쓰시고, 또 나중에 더 많은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점차로 큰 것을 더 주시니까(마 25:23) 주님이 쓰시는 대상이 되시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싸워 승리하는 사명을 꼭 감당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망대를 짓는 일에 “비용 예산이 중요하다”(28절) 하신 것은 목적을 차질 없이 완수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목적은 마귀와 싸워 이기므로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성도가 이런 생활에 준비를 잘못하면 목적 성취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망대 짓는 예산을 잘하는 것처럼 마귀와 싸우는데도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임금이 대적과 싸우려면 적을 알아야 하고, 또 “적이 2만이면 자기의 군사 1만으로 싸울만한지도 헤아려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전쟁에 지는 것은 협상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마귀와의 전쟁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정체를 잘 파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두루 다닙니다(욥 1:7). 사람의 마음에도 들어옵니다(눅 22:3, 31, 행 5:3, 롬 7:24). 들어와서 진을 치기도 합니다(마 12:45). 형제간에도 이간을 시키고(마 10:21),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역사합니다(마 10:23, 24:9). 때로는 맹폭하기도 하고(벧전 5:8), 천사 같기도 하며(고후 11:14), 능력도 나타내고(계 11:5, 13:13), 까불고 흔들며(눅 23:31), 몰래 역사하고(마 13:39), 엿보며 틈을 찾고(엡 4:27), 도적처럼 행동하며(요 10:10), 여우같이 논다(눅 13:32)고 하셨습니다. 이런 마귀가 성도의 마음과 주위에 맴돌고 있으니, 이는 오직 말씀과(엡 6:17) 기도와(벧전 5:8, 마 26:41, 막 9:29) 순종(히 2:4)으로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4. 소금의 사명입니다. 소금은 짠 맛이 있어야 그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성도는 진실함과 거룩함이 있어야 성도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엡 5:9) 하셨고,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를 대할 때 “특별히…하나님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냈다”(고후 1:12)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진실과 거룩이 없으면 그것은 곧 소금이 짠맛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떡 먹는 은혜와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쓰시는 제자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라고, 여기에 따라 승리의 사명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62과 예수님과 세례 요한 (마 11:7~10, 12:15~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성격과 생활의 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원한 표준이시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칭찬하신 사람이기 때문에(마 11:11), 두 분의 생활의 일면을 살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인 줄 압니다.

1. 우선 예수님의 생활 태도를 살필 때,

1) 마 11:28~30을 상고하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거기에 보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생활고와 질병과 전쟁과 무질서로 시달리며 수고하는 인생들이 많은 줄 압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난 많은 인간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안식 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지요.

① 예수님이 온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온유는 성품을 낮추는 것이고,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최대한 낮은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② “나의 멍에”, 즉 예수님이 메어주시는 멍에(계명)를 메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지요.

③ 그 노력이 힘들 때 “예수님의 모범을 보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일, 억울한 일, 피곤한 일, 고난스러운 일을 다 겪으신 분이니까, 그때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고 배워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④ 그러면, 우선 마음이 쉼을 얻고, 마음이 쉼을 얻으면(여유 있고 안정된 마음) 짐도 가벼워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억지로 하면 힘들고 능률이 안 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도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려 할 때, 남이 볼 때 어려운 일도 자기에게는 오락이 되는 것입니다.

2) 19절에서 “다투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함과 핍박을 많이 당하셨지만 다투신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음모를 아시면서도 대결하지 않으시고 피하여 다니시다가, 때가 되매 자기를 맡기고 돌아가셨습니다(눅 4:28~29, 9:53~56, 요 18:7~8). 노무현 대통령이 다투지 않기 위하여 대화정치, 평화정책을 펴는 것은 다툼을 피하는 좋은 사례라 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이해관계가 중요해도 다투지 않습니다.

3) 들레지 아니하십니다. 자기를 명예적으로 나타내려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시면 “많은 병자들을 다 고쳐주시고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이 기도로 병을 고친다고 가상해 보세요. 명예적으로 선전하고, 감사 헌금을 받으며, 큰 교주처럼 군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길에서 (자기 선전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 앞에 이름 내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크게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은 약한 자에 대하여 끝까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도 약한 자들의 세계에서 함께 사셨고, 그들을 위로하시는 편에 서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강자를 의지하거나 강한 자의 생활 문화를 부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처럼 연약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셔야 할 것입니다.

5)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입니다. 이 말씀이 상한 갈대와 같은 의미도 있겠지만, 상한 갈대는 생활의 연약이고, 꺼져가는 심지는 생명의 연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이 말씀에 안락사를 용납하시지 않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세상 끝날까지, 즉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시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성격과 생활입니다.

1) 본문 7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마 3:1~4에서 광야의 생활을 자세하게 말씀하셨지요. 약대 털옷과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으니, 문화와 사치를 멀리한 것이고, 인간들의 경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속히 조용한 곳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과 동거, 동행함으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2)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굳은 의지와 결단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천 명, 만 명이 좋아해도 진리 아니면 안 따라가는 그런 지조 있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죽어도 안 따라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가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으면 다 충신이 되고 영웅이 되는 이유는 진리와 정의가 생명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상에 진리의 적이 있을 때는 생명의 희생을 당하여도 진리를 세워야 함이 원칙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3)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치를 떠나 실리주의로 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예수님의 목적에서 멀어져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말로만 예수님을 증언하였고,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여주었으니,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사역자들이 진리(성경)를 밝히는 사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가까이 본받자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3과 네 손을 내밀라 (막 3:1~6)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이미 와있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먹은 일로 인하여 안식일 논쟁이 있었던 후였습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이 그곳에 와있는 것은 바리새인들(본문은 사람들, 마 12:2)이 예수님을 송사할 근거를 잡기 위하여 있게 한 사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면 안식일을 거역한 자로 송사하려고 한 것이지요(민 15:32~36). 여기에서 저희들은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잘못된 것을 알게 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막 2:27~28) 오로지 휴식을 위하여 있는 줄로만 오해를 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근본 원리를 무시하고 엉뚱한 것을 중히 여기는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 예를 들면 사랑보다 전통을 중히 여기거나,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아셨고(막 2:8), 그래서 그 환자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식일에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 중, 또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양이 구덩이 빠졌을 때도 구해내야 하거든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귀하지 않으냐?”고 하였지요. 그때에 질문을 받은 자들은 “잠잠하였다”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날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2:12).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주장이 옳다면 왜 대답을 못하겠습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한 지식을 가졌고, 남을 정죄하려 하였으며, 그 행위가 떳떳치 못함을 알고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을 보시고 “근심하여 노하셨다”(5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편 손 마른 자의 “손을 내밀라” 하여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원들과 합세하여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론한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에서 저희들은 여러 가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성경으로 주신 뜻을 깨닫는데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완악입니다. 그들은 계명의 목적과 안식일의 취지 등 바로 깨닫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무지의 죄이지요. 또 자신들을 살피는 데는 뜻이 없고, 누구의 죄를 책잡아 송사하려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또 자기들의 하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침 받고도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으니 얼마나 나쁩니까? 사랑의 반대의 극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요소가 0.1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교육관입니다. 예수님이 무지하고 완악한 자들을 어떻게 교육시키셨는가? 하면, 예를 들어 설명하시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양을 살리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중 어느 것이 중하며, 또 중요한 것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하여 예를 드시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선악을 판단하는 교육을 그렇게 시켜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도전적 실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옳은 일은 반대자나 위협자가 있어도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이득도 없이 핍박을 견디시면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대자와 음모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강행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도 옳은 것이면 강행하시는 의지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환자의 순종입니다. 순종에 능력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요단강이 갈라질 때도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물로 들어갔지요. 포도주 이적을 나타내실 때에도 몇 차례의 순종 절차가 있었고, 또 구약에서 기름이 넘쳐 빚을 갚은 일이나(왕하 4:1~6) 나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을 들어간 일 등, 모두가 순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에게도 “한 가운데 일어서라”, “네 손을 내밀라” 하여 순종과 함께 고쳐주셨는데, 한 가운데 일어서는 것은 다리가 성하니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내미는 것”은 믿음의 순종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이란 뜻은 손가락이 아니고, 팔에 힘이 없어서, 그 손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깨관절부터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손을 내밀라” 하셨고, 그 환자는 내밀었으며, “내밀매 회복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은 것”이고(막 11:23), “바라는 것의 실상이 된 것”입니다(히 11:1). 성도의 모험적 순종과 믿음의 순종을 강하게 요구하시는 대목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완악을 경계하시고, 예수님의 교육관과 도전적 실천과 순종과 기적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64과 예수님의 인사 정책 (막 3:13~19) 목록으로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신 내용이 본문과 마 10:1~4과 눅 6:12~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다”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열두 사람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 초기에 제자 임명을 하셨고, 갈릴리 지역의 팔복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에(12~13, 17절), 날이 밝자 임명하셨습니다.

1. 12제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몬”(총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바다를 중심한 어부인데,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베드로(아람어로는 게바; 반석의 뜻, 요 1:42)로 하나 더 만들어 주셨습니다(마 16:18).

2)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우뢰의 아들”(보아너게)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이것은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이 두 형제가 “하늘의 불을 내리게 하여 멸하라”는 요청을 한데서 저를 꾸짖은 뜻으로 주신 이름이요(눅 9:54),

4)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있고,

5) 빌립.

6) 바돌로매,

7) 레위라고도 하고(눅 5:27~29) 마태라고도 하는 세리 하던 사람이 있고,

8) 도마인데, 이 사람은 마 10:3, 요 21:2에서는 “디두모”라 하였고,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됨)인데, 모친은 마리아이고(마 10:3) 형제는 “요세”라 하였으며(I막 15:40),

10) 다른 야고보의 아들 “다대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을 “유다”라고도 하며(눅 6:15, 11),

11) 셀롯(열심당원)이라 하는 시몬인데, 마 10:4, 막 3:18에서는 가나안인 “시몬”이라 하였고,

12) 가룟인 “유다”였습니다. 이 이름들을 혼돈 없이 호칭하면, 베드로(게바, 시몬), 야고보(보아너게), 요한(보아너게), 안드레(베드로의 형제), 빌립, 바돌로매, 마태(레위), 도마(디두모),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소 야고보라 함), 다대오(유다), 시몬(셀롯), 가룟 유다입니다.

2. 예수님이 이들을 원하신 자로 선택하여 가장 존귀한 직분인 사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예수님이 무슨 표준과 인사 정책으로 이들을 세우셨는가?를 살피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회의 인사 정책에도 어떤 기준이 있는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가 사회 인사 정책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과 덕과 지식을 참고하여 민주주의 방식으로 직분을 세우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12제자를 원하는 대로 세우셨는지를 중요하게 여겨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기도하신 후에 임명하셨습니다. 눅 6:12에 보시면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직분을 맡기실 때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고 맡기신 것입니다.

2) 처음부터 함께 한 자들 중에서 뽑으셨습니다. 연조 있고 경험 많은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눅 22:28~29에 보시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함께 한 자들인즉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 하셨으니까, 복음의 초기에도 꼭 그 원칙을 따르신 것입니다.

3) 열두 제자 전부를 갈릴리 지방에서 선출하셨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복음의 시작을 갈릴리 지역에서 출발하신 점도 있지만, 지방 사람들이 더 순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말에 서울깍쟁이와 시골뜨기란 말이 있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부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시작과 함께 시작하는 장소에서 처음부터 자기를 따른 사람을 택하시니 자연스럽게 된 일일 수도 있겠지요.

4) 직업은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베드로가 확실한 어부이고(눅 5:1~10, 요 21:3), 야고보 요한이 그 동업자이며(눅 5:10),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어부일 듯 짐작은 되나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태만 세리라 하였고(눅 5:27~29), 그 외에 8명은 직업의 명시가 없음을 볼 때 직업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따른 경력만 보시고 뽑으신 것입니다.

5) 가룟 유다의 탈선을 아시고 뽑으신 줄 압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왜 유다를 제자로 뽑으셨을까?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요 13:18에 보시면 시 41:9을 인용하여 “내 상에서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 하시므로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예수님을 못 박는데 한 몫 할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유다를 세우신 것입니다. 유다를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적당히 쓰신 것입니다(잠 16:4).

6) 예수님이 대범하시기 때문에 실력의 유무를 따지시지 않고 쓰신 것입니다. 잘못하면 가르치셔서 쓰시면 되니까요. 12제자 중 잘못 쓰인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격을 보고 사역자를 뽑는다면 어려울 것입니다. 제자 중에 수제자라는 베드로가 가장 많이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붙들어주시고, 일하면서 배우고 회개하며, 연단을 받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65과 청탁 (마 10:35~4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서 “청탁”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마 20:20~28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 20:20에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절을 하고, 청탁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본문 35절에서는 야고보, 요한이 직접 청원 하였습니다.

1. 그러니까 청원자는 야고보, 요한과 그의 어머니가 뜻을 모아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계에 부탁이 없을 수 없으나, 부탁은 반드시 가벼운 일을 부탁함이 좋고, 그 부탁의 내용만큼은 명분이 뚜렷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온 친구에게 대접할 식사거리가 없어서 양식을 꾸러 간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1:8). 그의 강청은 타당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세계(내세)에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구한 것은 지나친 청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드리면,

1) 우선 두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 할 정도로 서열 2, 3위에 있었고, 또 어디를 가시거나 이적을 행하실 때도 함께 하여 주심으로 베드로와 함께 3인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마 17:1, 막 5:37, 1:29~31, 14:32~35). 그런데 더 큰 것을 구하였으니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고,

2) 3인자 중 앞 서열에 있는 베드로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두 형제만 잘 되기를 바랐으며,

3) 내세의 상급을 명예적으로 구한 점도 거리끼고,

4) 또 상당한 고난을 감수하고라도 그 자리에 앉게 되기를 청하였으니 예수님은 이런 청탁을 받으셨을 때 퍽 민망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큰 공을 세우고도 “나의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눅 17:10). 상급은 마음속으로 사모할지언정 달라고 부탁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부탁도 가급적 삼가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 “너희의 구하는 바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1) 작은 상급은 작은 일로 받지만, 큰 상급(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큰 공로가 있어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공로 중에 제일 큰 공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하신즉 “할 수 있다”고 각오를 나타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큰 고난을 받았을 때 상급이 큰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2) 상급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미리 정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뜻에 따라 예비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높여주셔서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빌 2:9)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도 그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벌의 주이십니다(계 22:12). “야고보, 요한이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고난에 대한 각오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순교하였으니(행 12:2) 그만한 충성의 증표를 보였다 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집권자와 천국의 일꾼들의 다른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명예를 구할 때 세상의 집권자들처럼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려 특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립니다. 그러나 천국의 일꾼은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하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므로 특권 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고, 그대로 시행하여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 세계나 일반 사회에 청탁하는 일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권세자에게 친근하다는 것을 이유로 무엇을 부탁하고 뇌물을 주는 사례는 더욱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존귀의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1) 우선 겸손한 자에게 주십니다.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출 때 주께서 높여주신다”(약 4:10) 하셨고, 사울 왕도 겸손하였을 때 왕이 되었습니다(삼상 9:5, 21, 10:22). 바울 사도는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시고 날마다 자기를 죽였을 때(고전 15:9, 31) 사도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롬 12:6, 빌 2:3).

2) 성경에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쓰신 종들을 보면 그만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은 독실한 자로 음행의 어려운 시험을 이겼고(창 42:11, 39:7~13), 모세는 그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으며(민 12:3), 다윗은 믿음과 용맹이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고(행 13:22), 다니엘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요(단 1:8), “모르드개”는 민족을 사랑한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에 4:16~17),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가 겸손하게 충성만 하고 다른 뜻을 갖지 않으면 때가 되매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삼상 2:7).

 

제66과 주밀하게 살피심 (막 12:38~44) 목록으로


성경을 살피는 중에 예수님은 “주밀하게 살피시는 분”임을 깨달으면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조심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긴 옷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회당이나 잔칫집에서 상좌에 앉는 것,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부자가 많이 넣은 것, 과부가 두 렙돈 넣은 것, 과부의 구차한 생활,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인 것,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자의 헌금의 비중까지 주밀하게 살피시고 계산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였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삼상 2:3에서 예수님은 “행동을 달아보신다(저울질하심)” 하셨는데, 시 139:2에서는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하셨으니 겉이나 속이 다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그래서 행동을 주의하기 전에 마음가짐부터 잘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부끄러운 마음이나 나쁜 마음을 갖고도 예사로 지나가는 수가 있을 수 있으나 그때마다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나쁜 생각을 다 아셨고(눅 6:8, 11:17), 물속에 고기가 있는 것과 그 고기의 입에 돈이 있는 것까지 아시는 분입니다(마 17:27). 그리고 성도의 마음을 눈동자처럼 지켜보십니다(시 17:8). 따라서 마음의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십니다. 서기관들이 특수 계급인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렇게 한 줄 압니다. 특수 계급이면 특수 계급 노릇을 하여야 하겠지요. 교인의 집이란 교패를 붙여놓고 얻으러 온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내면 영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기관이 긴 옷 입고 다니는 것을 예수님이 합당하게 보셨을까요?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옷값을 못하는 자로 보셨을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화 받을 자라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3:1~14).

3.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보십니다. 성전 사무를 보는 서기관이 시장에 나간 것은 목사가 사우나탕에 자주 가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자주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그런 데서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먼저 하나, 받기만 하는가?”를 예수님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윗사람은 당연히 인사를 받아야 하지만 서로 겸손 차리지 않는 것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4. 회당이나 잔치석상에서 상좌에 앉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자기가 어른인 척 하는가? 아니면 겸손을 차리는가?를 보시는데 “상석에 앉는 자를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신 것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종이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고전 5:19, 요 13:5, 빌 2:8)을 생각하면서 겸손 차리는 것을 일삼아야 할 것입니다.

5. 과부의 가산 삼키는 것을 주밀하게 보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덕 되게 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비싼 이자를 받거나 배려하지 않는 행위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사랑의 척도를 저울질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사람을 대할 때 그 상대자가 이롭게 하는 자이든지 피해를 주는 자이든지를 막론하고 “내가 사랑으로 대하는가? 미움으로 대하는가?”를 판단하면서 사랑을 성립시켜 나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기도하든지 들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도 들으시고, 세리의 기도도 들으시며, 강도의 기도도 들으시고, 심지어는 마귀의 말도 들으십니다(눅 18:9~14, 23:42, 막 5:12). 하물며 성도의 기도이겠습니까? 외식으로 하는가? 아니면 진실하게 하는가? 길게 하는 기도인가? 짧게 하는 기도인가?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 안 하는 기도, 욕심내는 기도, 다른 이의 험담을 하는 기도, 정중하게 말하지 않고 염불 외우듯 하는 기도, 같은 말 또 하는 기도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내용도 연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 여러 가지에서 지적이 되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으니 두려운 일입니다.

7. 연보하는 것도 지켜보십니다. 눅 21:1에서는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돈 넣은 것을 보신다” 하셨고, 본문에서는 “연보 궤에 대하여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관심 있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헌금하는 태도, 또 가난한 사람이 헌금하는 태도를 보시고, 부자가 많이 넣은 것,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그 두 렙돈은 헬라 동전인데, 로마 동전으로 환산하면 한 고드란트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두심), 그 두 렙돈이 구차한 생활 중에서 드리는 것, 또는 자기 소유 전부요 생활비 전부라는 것까지 살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한 치의 생각과 행동을 피하거나 감추지 못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살피시는 것은 정성된 성도에게 복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 하셨으니 믿음으로 하고, 사랑으로 성실하게 하며, 겸손하게만 하면 칭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축복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67과 포도원 사수 (왕상 21:1~10)목록으로


“포도원 사수”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북왕국 7대왕 아합이 자기의 궁궐 가까운 곳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서 채소밭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상당한 값에 팔든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좋은 포도원으로 바꾸든지 하자고 요청을 하였는데, 나봇은 “조상의 유업이므로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 하고 딱 거절한 것입니다. 그 일로 왕이 답답한 마음을 갖고 식사를 안 할 때 왕비 “이세벨”(두로 왕 엣바알의 딸, 왕상 16:31)이 그 사실을 알고 왕의 어인을 찍은 편지를 그 지역 장로들과 귀인들에게 주어서 비류들로 하여금 “나봇이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케 하고 그를 죽이라 하여,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취하러 갈 때,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나봇이 피 흘린 장소에서 아합이 피 흘리게 될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아셔야 할 것과 시행하여야 할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나봇의 포도원의 의미입니다.

1) 이 포도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또 그의 조상은 여호수아 당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입니다. 이것을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생활의 기업”이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2)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생각할 때는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선민을 의미합니다. 시 80:8에 보시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고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고 하셨지요.

② 신약의 교회를 비유합니다. 사 5:1~2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이 신약의 교회를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③ 믿음과 은혜를 뜻합니다. 이것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요 2:9), 포도주로 보혈을 상징하는 뜻(마 26:28), 그리고 “포도나무 가지가 그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요 15:4)는 말씀은 예수님과의 연합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는 신령한 은혜를 총체적으로 상징하기도 하고, 또

④ 사명을 뜻하기도 합니다(삿 9:13).

2. 왕은 왜 이것을 요구하였으며, 나봇은 왕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왕은 그 포도원이 왕궁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그 땅을 왕궁 소유에 붙여서 “나물 밭을 삼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일종의 사치나 욕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조상의 유업으로써 그 땅을 지키는 나봇에 비할 때, 왕의 청원은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값을 많이 주고 또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나봇은 거절한 것입니다.

2) 나봇이 왕의 청탁을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이 금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레 25:23~28에 보시면 “유업을 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여 유업을 팔았더라도 후에 형편이 나이지면 다시 사들이고, 그것이 안 될 때는 희년에 찾는다“고 하였습니다(신 25:5~6 참고). 하나님이 주신 생활의 기업도 그 후손들이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거든 하물며 신령한 기업이겠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봇이 그 기업을 사수하기 위하여 노력한 신앙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고전 4:6에서도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 없으며”, 고후 13:8에서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뜻을 따르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협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높은 왕이, 또 권세 있는 왕이 청원을 하였으니 어찌합니까? 딱 거절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입니다. 이세벨의 간계로 죽었지만 역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왕의 요청에 타협하지 않은 것입니다.

3) 따라서 나봇이 포도원을 사수하다가 죽은 것은 순교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길 줄 알고,

2)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타협 없이 지키며,

3) 나아가서는 순교의 각오로써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된 만큼, 성도와 성도가 사랑으로 교제하고, 덕을 세우는데 노력하셔야 하며, 또 포도원을 예수님의 교회로 비유하신만큼 내가 섬기는 교회와 다른 이가 섬기는 교회를 함께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를 성경의 기초 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단체가 되도록 지켜야 합니다. 혹 여러분들이 조상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이 있다면 조상님에게 효도하는 차원에서 그 유업을 보존 계승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서 후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봇은 포도원이 하나님의 주신 기업이고, 그것을 보존하라는 계명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순교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생명을 걸고 사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①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히 3:14) 하셨지요, ②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하셨으며, ③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9) 하셨고, ④ 달란트 은혜를 확장하라(마 25:16) 하셨으니까 믿음과 은혜와 사명을 사수하셔야 할 것입니다. 왕명이나, 어떤 현세적 영달이 유혹하면서 바꾸자 하여도 결코 타협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히 12:16).

 

제68과 무화과나무 (막 11:12~14, 20~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무화과나무”란 제목으로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사연들을 살피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창 1:11). 또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말리기도 하셨습니다. 창조하실 때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창조하셨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말리기도 하신 것입니다. 여름철에 모기가 사람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이 왜 백해무익한 모기를 만드셨을까?”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만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모기가 졸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혹 모기가 다른 천적에게 먹이가 수도 있고, 뚜렷한 것은 모기가 전염병을 옮겨서 벌 받을 백성들에게 쓰이기도 하니, 하나님이 쓰시는 용도는 다양한 줄로 압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석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실수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렇다면 무화과는 왜 만드셨으며, 또 왜 말리셨을까요? 또 왜 “나 자신은 태어나서 살고 있을까요?” 인류 초기에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다가 그것이 의복으로써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창 3:7). 실수는 했지만 깨달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죽옷을 입었을 때는 가죽이 옷으로는 더 완전하고 무화과나무의 용도는 다른데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만물의 용도가 적합성을 찾아 적응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삿 9:12에 보시면 나무마다 목적이 있는데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는 목적이고, 포도나무는 술을 만들며, 무화과나무는 단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그늘로 사용한 예가 있고(요 1:48), 이사야 선지자는 이적을 나타낼 때 약용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무화과 진액을 바르기도 하였으며, 또 예수님은 유대인을 교훈하실 때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된 것을 아는 것처럼 인자가 말한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면 때가 된 줄 알아야 할 것이라” 하시므로 비유 교훈의 실물을 삼기도 하신 것입니다. 이만하면 모든 것의 필요성과 용도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 둘째 날(월) 아침에 시장한 상태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가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열매를 얻으려고 가까이 가셨으나 열매가 없자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즉 “곧 말랐다”고 하였습니다(마 21:18~22을 참고). 그런데 마가는 “그 시기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13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을 푸셔야 할 것입니다.

1) 왜 예수님은 그것을 모르셨을까? 하시겠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도 아셨고(눅 6:8, 11:17), 고기 입에 돈 있는 것도 아셨는데(마 17:27), 왜 모르셨을까? 하시겠지만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임의로 주관하셨으나 인성으로 행하실 때는 이적을 나타내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실 때만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신성은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2) 왜 무화과의 때가 아닌 것을 아시면서 그 나무를 저주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미워하여 벌로써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보시면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하였을 때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런 일 뿐 아니라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 하셨고, 또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에 있어서 불가능이 없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열매가 있어서 잡수신 후에도 말리셨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상상에 맡길 일이지만, 열매가 없었을 때 예수님은 서운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4. 무화과나무는 좋은 특징을 가진 나무입니다. 꽃과 열매가 먼저 나오고 잎은 나중에 나옵니다. 단맛을 가진 즉석과일입니다.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또 가뭄을 잘 견딥니다. 이렇게 좋은 나무가 창조자의 필요에 응하지 못한 것은 나무의 실수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이나 한낱 과수도 그렇거든 성도이겠습니까? 특별히 은혜를 받은 성도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저희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사명에 대하여 기회를 엿보고, 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충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 새끼가 기회를 얻어 좋은 일을 하였으니, 그 나귀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비할 때 큰 영광이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이틀전날 문둥이 시몬은 예수님을 대접하였고, 또 그 기회에 향유 300데나리온 어치를 붓고 봉사한 여인이 있었으며, 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끌려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을 하므로 예수님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희들도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인즉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용도에 적당하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자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9과 한 여인의 봉사와 평가 (막 14:3~9)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유월절 이틀전날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수요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문둥이 시몬의 초청을 받고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향유 이름)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는데,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왜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300데나리온(300명의 하루 품값 ; 마 20:2) 이상을 받고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좋을 뻔하였다” 하면서 그 여자를 책망한즉 예수님께서는 “그가 좋은 일을 하였는데 왜 괴롭게 하느냐?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은즉 너희가 도울 수 있지만, 나는 함께 있지 않을 것이라. 그가 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니라. 따라서 온 천하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할 것이라” 하시고 극찬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의 기록이 마 26:6~13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신 분들은 이와 비슷한 기록을 또 읽으셨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눅 7:36~50과 요 12:1~8에도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다 각각 다른 사건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전도하실 당시에(눅 7:1, 11)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죄인인 한 여인이 시행한 것이고, 요한이 기록한 것은 유월절 6일 전에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드린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이 갈릴리에서 있었을 때는 바리새인 시몬이 “왜 예수님은 죄인 여자를 알아보시지 못하는가?” 하는 말만 하고,구제에 관한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을 때는 가룟 유다가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좋겠다 하였으니 저는 그 돈을 취급하면서 도적질할 마음을 갖고 그런 제의를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건에서는 가룟 유다와 같은 제의를 바리새인들이 하면서 “이는 허비하는 일인즉 300데나리온 이상을 받아 구제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 세 가지 사건을 혼돈할 수 있으니까 주의를 요합니다.

1.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문둥이 시몬”이란 뜻은 “문둥병을 앓고 있는 시몬”이란 뜻이니, 그의 문둥병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눅 8:2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거론할 때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그냥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마 28:26, 막 16:1, 눅 24:10, 요 19:25). 그러니까 문둥이 시몬이 고침을 받은 문둥이인지 안 고침 받은 문둥이인지는 성도들이 상상하셔야 할 것입니다. 행 12:1~19을 보시면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가두었을 때 교인들은 기도를 하였는데 하나님이 베드로만 구출하셨고, 죽은 야고보는 살려주시지 않았으며(유두고는 살림, 행 20:9~12), 또 그때 여러 파수꾼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도 각색병자가 있었지만 38년 된 자 한 사람만 고쳤으니까 병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문둥이 시몬이 병고침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을 청하였겠지요).

2.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의 제언이 없었지만 두 번째 사건에서는 가룟 유다가 나서서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이 좋다”고 하였는데, 또 1차 사건 때는 바리새인들이 “왜 허비하느냐? 300데나리온 이상을 받고 팔아 구제하면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이고, 또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유다를 왜 예수님이 제자로 두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외식을 모르셨을까? 또 마 26:24에서 “유다의 잘못을 지적하신 후 인자를 파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니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다” 함은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실 것입니다. 답변으로 예수님은 유다의 외식과 도적인 것과 예수님 팔 것을 다 아셨지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지목하므로 작정된 때에 십자가를 지신 것인즉 잠 16:4에 따라 “악을 적당하게 쓰신 것”이고, 또 구약 슥 12:12~13에서 “예수님이 은 30에 팔릴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마 27:6~10, 예레미야의 예언이라 한 것은 개론상 연구해야 함). 그리고 “나지 않음이 좋을 뻔 했다”는 것은 창조의 실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 인생의 불행을 객관적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여인의 선행과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1) 그 여인은 예수님께 봉사하고 싶으나 기회가 없는 것을 알고, 하고 싶은 일을 한꺼번에 한 것입니다.

2) 돌아가신 시체에 바를 것을 살아계실 때 하였으니까 더 잘한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이 기회를 선용하고, 실리적인 봉사를 하고, 비싼 봉사를 한 일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시고, 천하의 어느 곳이나 복음이 전파될 때 꼭 그 여인의 선행을 말해야 할 것이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지 않을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허비한다” 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 봉사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뜻으로 탐심 있는 자들이 구제를 거론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봉사의 기회와 살아계실 때 충성하는 일과 예수님이 미구에 돌아가실 것을 알고 선용한 특징이 있습니다.

 

제70과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막 2:1~12) 목록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 아래, 이 말씀에서 연구하고 교훈 받아야 할 점들이 무엇인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면(마 9:1~8)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고, 예수님은 도를 전하시는데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보이기를 원하였으나 사람들로 인하여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병자의 누운 침상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줄을 매어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린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즉 그 자리에서 서기관들(바리새인)이 앉아 있다가 “저 사람이 누구관대 죄를 사하는고.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자는 없는데” 하고 그 일을 참담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서기관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아시고 “어찌하여 그 문제를 의논(이의를 붙인 뜻)하느냐? 죄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상을 갖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쉬우냐?(예수님은 쉬운 말을 택하셨다는 뜻) 또 인자가 땅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하신즉 그가 일어나서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간즉 본 자들이 다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처음 보는 일이라”고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1. 이 말씀의 첫째로 중요한 것은 “저희의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믿음 속에 신앙 고백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사랑하였고,

2) 그에게 봉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3)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고침 받게 하기를 소원하였고,

4)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사람이 많았지만 기발한 방책과 용기를 갖고 최후의 수단을 마다하지 않고 감행한 것입니다. 이런 정도이면 누가 보아도 감탄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탄하게 한 것이 저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감탄하시도록 한 표현에는 사랑과 봉사에 끈질긴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병을 고쳐주신 방법으로써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욥처럼 죄 없이 병드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와 관련한 병을 앓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 5:15에서도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아 병 낫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지요. 사람은 어떤 병자가 확실한 죄값으로 앓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혹시”라는 용어를 써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니까 죄사함으로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3. 서기관들이 의문을 갖고 마음에 의논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해 줄 주권자가 없는 줄 알았으니까 깜짝 놀라고 참람하게 여긴 것이지요. 이때에 예수님은 “죄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보다 쉽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그 두 용어 중에 “죄사람 받았다”는 말씀이 쉽다는 뜻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쉽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사함의 뜻에 병고침이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죄사함을 말씀한 것이요, 죄사함이 없으면 병 고칠 방도가 없은즉 죄를 그대로 둔 채 병만 고치시려면 많은 문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죄사함의 용어가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용어보다 많이 짧습니다. 한글로 따지면 열 자와 열 석자로 죄사함 쪽이 간단하고, 헬라 원문으로 따지면 네 단어와 여덟 단어로 갑절이나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을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죄를 사하는 권세에 대하여 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권세인즉 예수님이 시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라도 십자가를 지실 것을 전제로 구원의 주(히 2:10)가 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을 영접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예수님께 사랑과 봉사만 잘 해도 “너의 사랑함이 네 믿음이다”(눅 7:44~40) 하셨고, 삭개오는 회개만 하였는데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셨으며(눅 19:9), 본문의 “저희의 믿음”도 신앙 고백이 없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열쇠는 분명히 신앙 고백의 열쇠이지만, 어린아이나 예수님이 직접 구원하시는 대상은 주님이 자신의 문을 스스로 여셔서 인도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문은 예수님 한 분임, 요 10:9).

5. 그 능력의 역사가 신속하고도 완전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방법대로 은사를 재연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적은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적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을 포함하여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던 시대에 역사하셨고(히 2:4), 그 후 시대에는 그같이 역사하시지 않고(딤후 4:20), 보통의 은사와(고전 12:9, 약 5:15), 일반은총으로 고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제71과 헌금 지식 (막 12:41~44) 목록으로


“헌금 지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시니까요(대상 19:11, 엡 4:6).

2. 하나님 곧 예수님께서 만물과 생명과 육체와 지혜와 활동력을 주셨으니까 죄 외에는 다 하나님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헌금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 헌금 제도는 십일조와 헌물입니다(말 3:8).

1) 십일조는 아브라함 때에도 시행되었지만(창 14:20) 법으로 명하신 일이 없다가 출애굽 때에 와서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매년 소산(소득)의 십분지 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민 14:22~29).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열두 지파 중 성전 봉사의 일을 맡긴 레위 지파의 기업으로 주셨고, 제사장들은 다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또 분간하여 하나님께 거제로 드려서 그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라”고 하셨습니다(민 18:21~32). 그러니까 레위 지파의 기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신 26:12~13을 보시면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드리는 날에 고아, 과부, 객을 구제하라” 하셨는데, 이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 번 더 낸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제도 유지를 위하여 이런 헌금제도가 있었고,

2) 예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제사 드리는 제물 이외로 감사나 봉사의 목적으로 드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에 종교제도가 해이해지고, 흉년이 들어 가난한즉 십일조 헌금을 잘 못하게 되자, 말라기 선지자가 크게 책망하고,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지 않는 자는 도적이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말 3:8~12).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성전유지 헌금(레위 지파 기업)과 구제에 대한 일을 제도화하여 시행하였던 것입니다(신 23:25, 레 19:9, 23:22).

4.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헌금제도를 주셨습니까?

1) 우선 구약의 헌금 제도가 신약 시대에 와서 어떻게 계승된 것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율법으로 주신 것이고, 성전제도 유지와 거기에 따른 레위 지파의 기업으로 거둔 것인데, 신약시대에는 성전제도 대신 교회가 세워졌고, 레위 지파 대신 교회의 사역자로 범위가 축소되었습니다. 또 율법은 요한의 때와 그리스도로 마침이 되었으니(마 11:13, 롬 10:4), 그 효력이 상실된 것이 사실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헌금 관련 기사가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마 23:23에서 “이것(의, 인,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셨고, 또 한 번은 본문의 연보궤에 앉으셔서 감찰하시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끝났다 하시고 왜 버리지 말라” 하셨을까요? 약간의 난제이기는 하지만 십자가 이전까지는 율법이 복음으로 돌아오는 전환기이고, 과도기이기 때문에 헌금의 성격을 강조하시는 의미로 그렇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시대에 와서 율법적 십일조를 계승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연보궤에 드린 헌금은 구제헌금과 예물에 속하는 헌금이었습니다.

3) 사도시대에 있었던 헌금 상황입니다. 사도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를 강조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이 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교 목적(이것은 교회 운영비, 교역자 생활비, 선교비 등에 쓰이는 것)으로 드린 헌금인데, 그 양상이 초 십일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행 2:44~45)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으며(행 4:32), 바나바는 밭을 팔아 내놓았고(행 4:37), 그리고 흉년든 백성들에게 구제한 사실이 있었으니(고전 16:1~2), 이것이 곧 선교헌금과 구제헌금인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하셨으니까 감사의 표시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시대에 십일조를 장려한 바는 없으나 선교를 위한 헌금이 십일조를 능가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구제를 할 때도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제하였다” 하므로(고후 8:5) 헌신과 헌물이 구약시대보다 더 충실하였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 계명은 효력을 잃고 헌금은 더 하게 된 것인데, 헌금에 성의가 적으니까 최소한 십일조까지라도 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강조해 온 것이 오늘의 헌금제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헌금제도는 교회 유지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으로 합리화된 것이고, 예배당이나 교회 비품 등은 교인이 필요하여 장만하기도 하고, 그것을 교회 유지용에 포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헌금은 믿음의 열매입니다(행 2:44).

5. 예수님은 헌금을 받으시는 분으로, 많고 적은 것을 평가하셨고(막 12:44),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마 6:21) 하셨으며, 가난을 나쁘다 하지 않으셨고(마 19:23), 없는 것을 내라 하시지 않으며(고후 8:12), 준비하여 즐겨내는 것을 좋아하시고(고후 9:5, 7), 후한 연보가 영광되고 많은 감사가 다른 은혜를 넘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8, 12~13). 성도 여러분, 감사와 헌금(교회 유지비, 선교)과 구제에 인색하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지켜보십니다. 헌금은 “씨를 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6).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둔다 함이 옳다” 하셨으니 헌금 성의에 축복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72과 목회자의 리더십 (고전 15:31) 목록으로


목회자가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려면 “일곱 가지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고 목회의 성공자이신 금광교회 선병문 목사임이 교역자 수양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여기에 공감이 되어 이 글을 남깁니다. 잘 알기는 하지만, 시행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노력하십시오.

1. 목회자가 교인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돌아가신 이천석 목사님은 300 가정의 전화번호를 다 외운다고 하였습니다). 명석한 머리로 목회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의 표현이므로 상대방도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입니다(시 91:14에서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였습니다).

2. 자기감정 조절입니다. 예를 들면 쉽게 노하거나 성질을 부리지 않고, 아니꼽고 괴로워도 침착한 자세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하는 일이라도 혈기를 부리면 우선 상대방과의 화목이 끊어지고, 다음에는 성질이 무섭거나 못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어 사람이 가까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착한 성품은 상대방에게 안심하는 마음을 줄 수 있어서 가까워지게 됩니다.

3.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것처럼 못되게 행동하였거나 유익 없이 행한 교인에게라도 관용을 베풀어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상대방이 변화를 받아 더 잘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쉽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님의 감화를 힘입어 큰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상당한 세월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여유 있게 기다리며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내, 그 자체는 실수나 후회를 예방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존경보다 사랑을 받는 목회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도 받아야 하지만, 그것은 더 피곤한 일입니다. 잘하는 일만 계속하여야 존경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면 약간의 부족이나 실수가 나타나도 상대방의 이해와 협조로 친교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필자는 어떤 교회의 권사가 7계를 범한 담임 교역자에게 얼마나 상황이 급박하였으면 그런 실수를 하였겠느냐 하면서 여전히 교역자의 편이 되어있는 상태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사랑을 받는 가족적 입장이 된다면 상당히 행복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가 실수를 한다면 일시에 존경이 무너져서 다시는 용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6. 유머 감각을 들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지도자가 경색되고 긴장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많습니다. 회의 중에도 그렇고, 설교 중에도 그렇습니다(어떤 중이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다가 중학생 아이에게 때를 밀어달라고 부탁한즉 그 학생의 말이 “당신이 누군데 나를 보고 때를 밀라는 것이요?” 한즉 “왜 나를 모르나? 나 중이다” 한 즉 “나는 중 삼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잠 깨우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 우스운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 말재간 등, 다양한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는 말이 없고, 침통하게 앉았다가 헤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모임에 재미가 없으면 모임 그 자체에도 재미를 못 느낄 수 있으니까 유머적 대화나 친교적 수완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7. 진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에게 진실이 떠나면 따르는 사람들이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회에는 의로운 거짓말이 있다고도 하지만, 믿음 안에서의 거짓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히 6:18). 가나안 땅에 정탐을 다녀온 열두 명 중 열명은 그 지역의 장사인 아낙 자손을 보고 크게 위축되어 악평을 하였을 때(민 13:25~33)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은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밥이라”(민 4:1~10) 하였으니 열명 정탐의 보고는 그들의 불신앙에서의 악평이지만, 그곳에 강한 거민이 있는 것과 땅이 비옥한 것은 사실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할 것을 역설하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던 것입니다(민 14:10).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진실한 자의 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상 일곱 가지를 다시 정리하면 ① 이름을 알라, ② 감정을 조절하여 혈기내지 말라, ③ 웬만하면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라, ④ 오래 참고 기다리며 실수하지 말라, ⑤ 존경받는 자도 되어야 하지만 존경보다는 사랑을 받는 자가 되라, ⑥ 유머 감각을 갖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라, ⑦ 항상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는 다 도덕성입니다. 여기에 제가 더 부언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신령성입니다. 목회자의 신령성은 목회자 자신이 세속을 많이 피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를 위하여 말씀과 기도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도 능숙하게 잘 가르쳐야 하고, 특히 생활상의 문제를 상담해온 교인에게 성경적 처방을 능숙하게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목회자 자신도 그 모범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73과 요한의 사명적 자세 (요 3:29~30) 목록으로


1. 요한의 사명적 자세 첫째는 주제 파악을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명자로 선택 받았는가?를 확실하게 파악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인생을 즐겁게 누리기 위하여 온 자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위한 보조 사명 때문에 온 자란 것을 확실하게 다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사명을 끝내자 일찍 떠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격도 부정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1:23) 예수님만 나타내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지도하는 거이 자기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요한을 보고 “네가 선지자냐? 엘리야냐? 그리스도냐?”고 한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명성이 커진다면 아무래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적어지겠지요. 그래서 요한은 “나는 선지자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아니다”(요 1:24~25), “나는 그리스도에 비한다면 그의 사환(신들메)의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마 3:11)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사명(주제)은 예수님을 알리고 높이는 것이며, 자기 명성 얻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 것입니다.

2. 현실적 영달을 전적으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포기하였는가? 하면 되는대로 사는 생활로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활의 근거를 든든하게 잡으려면 퍽 힘들 것입니다. 요한이 30세부터 사명을 시작하여 예수님을 소개한 다음에 순교하였으니까 그가 만일 “생활 기반을 잡고 사명에 나가겠다”고 하였다면 사명의 기회는 멀리 사라졌을 것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양식을 삼은 것이 바로 되는 대로 사는 생활이고, 현세 영달을 포기한 생활입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떠돌이처럼 살면 아무도 안 따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사는 요한을 따른 제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마 9:14, 14:5). 사명자가 현세 영달에 뜻을 갖는다면 예수님을 바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고, 많은 사람을 빗나가는 길로 유혹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3. 요한은 자기 사람 만드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나의 제자 되어 나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면하여 자기의 제자들도 예수님께로 다 붙인 사람입니다(요 1:35~39).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예수님의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는 부족하고 실수가 많으며 표준 인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한 동기가 “믿음의 사람이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께 필요한 것이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히 11:6)라는 결론을 맺으면서 그것이 곧 세례 요한의 사명 정신인 줄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사람 만들어 자기 단체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사람 되고, 예수님 중심 되어,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4. 목사가 혹 “당신은 꼭 내가 섬기는 교회에 나오시오” 했을 때, 그 교인이 “저 목사님은 내가 필요한가 보다”라고 오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사람이 필요하니까 믿음의 사람을 키우기 위하여 오라는 것이지, 목사가 무슨 덕 볼 일이 있습니까? 교인을 모아서 생활비를 더 받고, 큰 교회를 시무하여 명예를 얻으려 한다면 그 성도가 그 목사에게 필요하겠지만, 세례 요한처럼 명예와 현세욕을 등진 상태에서는 추호도 성도가 목회자에게 필요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양은 예수님의 양인즉 목회자가 자기의 양인 줄로 오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은혜를 예수님이 주시지요.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닌 만큼 주님의 양이 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 3:29에 보시면 “신부를 취하는 이는 신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주님께 연합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역자를 사랑하셔야 하고, 또 그 지도에 잘 협력하셔야 하지만 예수님 모범에 맞지 않는 것까지 맹종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현실에 많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기교회 이기주의를 안 내세우는 교역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양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5. 요한의 사명적 자세는 의에 담대하되, 의의 경중을 비교하지 않고 순서대로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로서 예수님 증거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에 비할 때 왕이 첩얻는 것을 책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 생각대로라면 “헤롯 왕을 책망하고 죽으려 할 것이 아니라 더 살면서 예수님 복음을 전함이 더 좋다”는 타산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런 타산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그의 사명 정신은 가장 큰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였던 것입니다(요 3:30, 마 11:11).

 

8. 전도에 대한 말씀


제74과 복음을 믿으라 (막 1:14~15) 목록으로


전도의 성구로 가장 적절한 말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이고, 또 하나는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최초 전도 일성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1. “때가 찼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때를 정하고 일하신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전 3:1). 이 말씀의 “때가 찼다”는 뜻은 복음을 전하는 때,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성취되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시대는 예수님 때보다 2,000년이 지났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구속사업이 이루어진지 2,000년이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의 시작이 복음의 종말로 바뀌었으니까 때가 찬 것을 조급하게 실감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도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내세의 천국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이고, 세상에 있는 믿음의 심령, 또는 믿음의 세계, 순결한 교회는 내세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7:21). 성도가 지상에서 예수님을 모시면(지금은 말씀과 성령님을 모시고 삶), 그때부터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눅 11:20에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는 세계를 뜻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현재의 생활에서부터 죄와 싸워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심으로 천국을 맛보며 사는 가족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쉬운 뜻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는 불신앙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로 나눌 수 있고, 또 마음의 죄와 실행의 죄로도 나눌 수 있으며, 직접 죄(자범죄)와 간접 죄(조상 또는 이웃의 죄)로도 나눌 수 있겠지만, 일단 자신이 죄를 깨달아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후회하고 슬퍼하며 증오하더라도 돌이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오직 돌이켜야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는 반드시 신앙적 죄(하나님을 멀리한 죄)와 도덕적 죄(사람 앞에 지은 죄)를 하나로 묶어가지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적 회개가 없을 때는 십자가의 은혜가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함을 받을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받도록 회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란 용어는 “나캄”(욥 4:26, 슬퍼함)과 “숩”(시 7:12, 돌아옴)이라 하고, 신약에서는 “메타노이아”(막 1:15)라고 하는데, 이것은 “메타”라는 변화의 뜻과 “누스”라는 마음의 뜻이 합성된 것으로, 곧 “마음의 변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 21:30에서는 “뉘우친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용어는 “엑소몰로게오”입니다(마 3:6, 행 19:18). 이 뜻은 “자복한다, 인정하고 승인한다”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원스럽게 과오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시원스러운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몹시 마음을 뒤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못하는 완악이 깔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는 좀더 회개할 힘을 받아야 하겠지요(딤후 2:25, 롬 2:4). 회개는 지식적으로 깨닫고, 감정적으로 뉘우친 후,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지정의(知情意)의 역할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4.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을 떠날 수 없습니다. 연약하여 죄를 져도 믿음 안에서 짓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 밖에서 죄를 짓다가 복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즉시 모든 죄를 사함 받고(요 13:10),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요 1:13). 또 즉시 죄사함 받는 사례를 아실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셨고(눅 19:9), 예수님과 함께 죽은 강도도 예수님을 부르자마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눅 23:43). 승리하는 대통령만 따르면 자기도 승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만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안에 성경이 있고, 그 안에 십자가가 있으며, 그 안에 내세와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지만, 이 믿음과 회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믿어지고(요 3:3), 믿어져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은즉 모든 성도님들이 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시급히, 또 열심히 이행하셔야 하겠습니다.

 

제75과 거듭남의 지식 (요 3:3~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셨고, 또 “물과 성령으로 출생여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거듭난다”는 뜻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함”과 같은 뜻이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뜻은 방대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난 다음 천국에 가는 것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시간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박물관을 하나님 나라로 비유했을 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박물관에 들어간 것이 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다 구경하려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도 천국의 주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고(믿음으로 모시는 뜻), 그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믿은 후, 성경대로 살려고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고, 또 예수님과 생활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이며, 나아가서는 마귀가 활동하지 못하는(욥 1:6, 계 20:10) 내세의 천국도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또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본다”는 뜻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으며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 있고, “들어간다”는 뜻은 구원 받은 은혜를 전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문제는 거듭남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1) 거듭남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살펴야 합니다. 겔 36:26에서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신다” 하였고, “거듭남”이란 “아노덴”의 뜻이 “위에서 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일 3:9, 5:1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는 “새 생명을 받는 것”(롬 6:4), 새 마음을 주시는 것(롬 7:6),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고전 5:170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 하셨고(엡 2:15, 4:24), 그 외에도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사는 것”이요(엡 2:1), “마음의 할례이며(골 2:11) 영적 부활이라” 하였고(골 3:1, 6:4~6, 엡 2:5), 베드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며(벧전 1:4) 썩지 않는 말씀의 씨로 되는 것”(벧전 1:23)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이상의 용어들을 참고할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선 영적 생명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림 받는 것이고, 그 영적 부활의 상태가 마음의 변화로 오며, 또 변화되는 마음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말씀의 씨로 된다” 함은 마음에 “성경이 믿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살후 1:10). 거듭나는 것은 “영적 생명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면 그 생명이 언제 지음 받았고, 언제 죽었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영적 생명으로 지음 받은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실 때 품부되었고(창 1:26, 2:7), 죽은 것은 아담이 타락하였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창 2:17)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영적 죽음이고, 육체의 죽음과 심판은 다음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창 3:8).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오늘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다 전도자나 교회를 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듭났다, 위에서 났다, 하나님이 죽은 영을 다시 부활시켜 주신 것”이 곧 거듭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은혜를 감지할 수 있는가? 할 때 감지하기는 어려우나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이 언제, 어느 순간에 오셔서 영적 생명을 살려주시는 지를 감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자기의 출생한 경험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음을 볼 대 분명히 어머니의 몸에서 분만된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바람이 불면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로도 느끼고, 피부로도 느끼며, 사물의 움직임으로도 느낍니다. 바람은 하나님만 주관하십니다(창 8:1, 민 11:31, 출 10:13, 욘 4:8, 마 8:26). 그와 같이 거듭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결과로 어떤 변화가 옵니까? ① 완악하고 완고한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겔 36:26). 옥토가 아니면 씨앗의 결실을 못 맺으니까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되겠지요. ②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부하려 하지 않습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회심하게 됩니다. ④ 그 다음에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의 반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증표는 자신이 성경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믿고 그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는가? 아닌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13:5과 벧후 1:10의 말씀을 읽으시고 거듭남의 확신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6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요 3:16, 엡 3:18~19) 목록으로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충격을 받고, 늘 감동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성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달을 줄 안다면 효도를 더하게 되고 부모와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 중에 독생자 주신 사랑을 크게 감탄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다”(요 3:16, 요일 4:11), 또 “어떻게 사랑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는지 아느냐?”(요일 3:1)고 하였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의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 5:1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끊지 못할 것이라”(롬 8:35) 하셨으니, 이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생활을 하여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물질적 발전으로만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물을 주셨기 때문에 그 안에서 먹고 살며 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문명사회가 1,000년이라면 문명 아닌 사회는 수천 년 또는 그 이상을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인간의 지식 발달이 부족하였을 때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다 키우셨고, 지혜를 주셔서 이만큼 살게 하신 것인즉 성도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뜨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1. 우선 가장 큰 사랑이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으니, 이 독생자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자 바로 그분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신 이유는 성탄 설교에서 다 말씀드렸지요. 성도는 예수님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사랑은 만물과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창 1:28에 보시면 “생육하고…만물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롬 8:32에서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이…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도시에 몰려있는 많은 사람이 생필품을 먹고 쓰며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닙니까?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공간이 많습니다. 유기농법 같은 지식으로 인간이 먹고 사는 줄 아시지 마시고, 하나님이 만물을 거저 주신 큰 사랑 때문에 인류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해주신 사랑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선택자를 모르시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 그 사람을 아셨습니다. 다만 그의 선이나 덕을 보신 것이 아니고, 죄인임을 아시면서 선택을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큰 것입니다. 똑똑한 아이를 양자 삼는 것보다 장애인을 양자 삼는 부모의 사랑이 더 큰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타락을 아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롬 9:11, 욥 7:7, 신 7:7). 선택하신 다음에는 믿음(하나님 아는 지식) 주시고, 죄를 씻어주시며(심판을 안 하심), 양자를 삼아주시고, 예수님을 닮게 하시며, 부활의 은혜와 영생을 주셨으니,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4. 함께 해주시는 사랑입니다(마 28:20, 요 14:23, 계 3:20). 목사가 심방을 갔다가 길게 이야기 하지 않고 일어서면 몹시 서운해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자기 집에 오래 머물러주기를 바라지만 인간 사역자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과 성경으로 늘 함께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랑을 실감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가만히 주무십니까? 그렇지 않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공급해주십니다. 시 121편과 139편과 23편을 읽어보십시오. 또 마 6:8, 32과 히 4:16을 읽어보십시오. 보호, 인도, 공급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평범하고 작은 생활 속에 하나님의 보호와 감시와 인도가 있으심을 실감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6. 그 외에도 하나님의 싫어 버리시지 않는 사랑(사 41:9),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요 13:1)에 대하여서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며칠 후에 돌아가실 것을 아시면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49:15~16, 렘 31:3).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음과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셨고,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는 자가 은혜를 더 받는다는 뜻입니다. 넓은 사랑(비택자도 사랑하여 일반은총을 주심), 긴 사랑(성도를 영원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높은 사랑(독생자를 주어 심판을 면하고 영생 주시는 것), 깊은 사랑(성도의 깊고 은밀한 부분까지 감찰하시고, 환난에서 건지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일)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7과 그 이름을 믿는 자 (요 1:12~13) 목록으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절차는)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혈통, 육정이 아니라”는 뜻은 혈통을 받아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또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사람이 원하여, 사람이 그렇게 되는 방법을 만들어서 특권을 갖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은 같은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이해하셔야 할 핵심은 ① 그 이름을 믿는 뜻과, ②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는 뜻과, ③ 자녀 되는 권세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그 이름을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름을 많이 갖고 계십니다. 기억나시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목자, 다윗의 자손(마 3:3, 계 17:14, 요 10:11, 마 9:27) 등이고, 직책으로 호칭할 때는 감독, 사도, 선지자, 대제사장(벧전 2:25, 히 3:1, 4:14, 눅 13:33) 등이 있으며, 신분의 의미를 내포한 이름은 길, 진리, 말씀, 인자, 부활, 기묘, 산돌, 문, 새벽별, 포도나무, 알파와 오메가 등 수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 호칭 등, 성경에 기록된 것이 114종이 됩니다(성경보감 참조). 그렇다면 이 114종의 이름을 다 믿어야 하는가? 할 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름을 다 아는 것은 믿은 다음 배워야 하는 것이고, 처음 믿을 때는 예수님의 신분에 관계있는 대표적인 이름만 믿으면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가” 하셨으니까(마 1:21), 예수님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요, 또 “그리스도”란 이름은 “기름 부음 받은 자”(시 2:2, 삼상 2:10)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해주시는 뜻입니다(요 20:31). 기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만 붓는 것인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뜻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 세 가지 사명을 다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정도로 고백하고, 그 이름의 의미만 알면 “그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믿음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으로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출생을 받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갖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신이 사업을 계획하고 그것을 시행하는 것처럼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어느 때, 어느 기회에 복음을 믿게 되면서, 그 특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심마니가 산을 뒤질 때는 산삼을 기대하고 찾지만, 농부가 농장에서 일하다가 산삼을 얻었다면 의외의 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위에도 불신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이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말미암음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후 때가 되면 거듭나게 하셔서 믿을 마음이 생기게 하시는데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은 성령으로 다시 출생시키는 뜻을 갖는 것입니다. 엔진이 노후하면 언덕 오를 때 잘 못 갑니다. 그러나 보링을 하면 잘 가는 것처럼 “거듭난다”는 뜻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엡 2:1). 그것을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 3:9).

3.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성도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종(군신)관계(요 13:14), 사제관계(요 13:14), 형제 가족관계(마 12:50), 친구관계(요 15:15)가 있지요. 그러나 “자녀가 된다”는 뜻은 양자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8:29). 양자는 필요해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자가 될 때는 아버지의 호적에 친아들처럼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 대우 받고,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는 재산과 모든 것을 다 인수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자녀의 권세”를 잘 이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연합의 불변성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아들은 아버지와 나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확고한 결속입니다.

2) 가장 임의로운 관계란 점입니다. 무슨 부탁을 할 때 그렇습니다. 잘못한 것은 회개하여야 하지만 은혜를 구할 때 미안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것이 적으면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니까 얼마든지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받은 것이 적어도 괜찮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15:31).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받은 것만 자기의 것이 아니고 안 받은 것도 자기의 것인즉 탓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 이름을 믿고 예수님을 잘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8과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 (요 4:3~18, 25~30) 목록으로


예수님은 전도의 명령자이시고, 모범자이십니다. 요 1:39~50에도 예수님의 개인전도 모범이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있는 본문에도 개인전도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전도에 대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여행하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여행하실 때, 그곳에 가시는 목적이 있었지요. 유월절 기념행사 때문에(45절)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에만 전념하신 것이 아니라 예배 또는 일반생활을 하시면서 전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전도가 안 되니까 “땅끝까지 가서 전도하라”(행 1:8) 하신 대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전도자는 사람을 만나러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2. 자존심의 장벽을 넘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멸시하고 미워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 멸시하는 대상을 사랑하셨고, 또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을 딛는 것이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전도를 목적하는 데는 그것을 초월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의사는 전염병 환자라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전도자는 모든 비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교제하기 위하여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마 16:24).

3.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전도하셨습니다. 휴식시간이라도 전도의 기회가 닿으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휴식이란 시간이 한가하다는 뜻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6시에 물 길러 나온 것은 정오에 나온 뜻입니다. 팔레스틴의 정오 시간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잘 안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만은 나왔고,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 여인이 남편을 상습적으로 바꾸는 바람에 동리 사람들이 외면하였기 때문에 일부러 사람 없는 시간에 나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복음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인도하신 줄 압니다. 전도자와 피전도자가 함께 만나야 성사가 있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대화는 적어도 2,30분의 시간이 지났을 것인데,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두 분이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쁜 사람 붙들고는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4. 전도자에게 자연미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계책으로 사람을 호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 약을 선전의 묘수로 사게 하는 것처럼 사기 치는 일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자연스럽게 만나셨고, 또 행인이 물을 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우며, 우물에서 물을 먹으며 대화하는 것이 쫓아가서 사람을 붙들고 대화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음식 사러 갔다 와서 그 광경을 보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신뢰하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27절). 요즈음은 “이벤트”다, “이슈”다 하여 떠들썩하는 방법으로 소위 전도대회를 하지만 예수님은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전도하셨던 것입니다.

5. 상대방의 신앙의 지식을 타진하면서 대화의 질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하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잡수시면서(물 잡수신 기록은 없으나 물을 드셨을 것임) 물과 관계된 이야기를 하셨고, 하나님의 복음적 은혜와 구원을 생수에 비유하여 말씀하시니까 그 여인이 이해를 못하면서도 그 대화에 끌려온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점점 대화의 질을 높이셨습니다.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구했을 것이라” 하시면서 메시야 접근을 이해시키셨고, 나중에는 그 여인이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까지 아셨습니다. 또 예배에 대한 상식이 있는 것도 아셨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신앙적 소지를 파악하면서 거기에 따라 대화를 하셨고, 메시야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6. 비유적인 말씀과 깜짝 놀라게 할 말씀도 하셨습니다. 비유는 깨닫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 여인의 사생활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만 전도자들도 미래 예견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깜짝 놀라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까? 이 말은 근거 없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타난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였다면 어리석은 부자는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7. 전도는 지체하면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한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심방을 미루면 권면의 기회 놓치는 경우를 수없이 체험하였고, 피곤하여도 뛰면 능률이 있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휴식시간에 휴식을 안 하시고 전도하신 것이나, 물 길러 나온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야를 소개하기 위하여 동네로 들어간 것이 그 실예입니다. 여행하시는 예수님이 물 긷는 일을 다 하고,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전도가 시급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는 우리에게 일곱 가지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79과 기독교의 구원 (요 3:16, 행 16:31) 목록으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갖고, 또 그 지식(구원의 도리)을 모든 이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행 16:31에서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셨고, 요 3:16에서는 구원의 주체와 구원의 동기와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적용과 구원의 내용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요 3:16을 복음의 요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멸망하지 않고 영생 얻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값으로 멸망하게끔(멸망은 사망과 지옥임, 롬 6:23, 계 20:15) 되어있는 것인데, 그것을 면하고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용어로는 위기에서 건져주는 것을 구원이라 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죄사함 받음으로 정죄를 면하고, 정죄를 면함으로 심판을 받지 않고, 심판을 받지 않음으로 영원한 멸망, 즉 지옥을 면한 후 그 반대의 세계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하나님이 자기의 뜻과 주권으로 행사하시고, 거기에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협력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엡 1:3~4에 보시면 “성부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일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동기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생과 세상을 사랑하심에 근거한 것인데, 이는 멸망 받을 인생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실 때 계획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선택한 백성만 구원하시기로 한 것입니다(엡 1:4, 요 17:9). 그러니까 인류가 다 구원받지 않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또 적은 수만 구원을 받는 것도 기정사실입니다(눅 13:23~24, 12:32).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살후 1:6~7) 악인을 벌하는 것이 공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공의에 따라 악인을 벌한다면 구원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속물(대신 벌 받을 자)을 생각하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대표자로 세상에 보내어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대속의 제물은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영원한 생명이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어야 하고, 또 그 대속의 죄짐을 자원함으로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으셔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의 독생자만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대속자가 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하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수단으로서는 성령님께서 구원받을 대상에게 거듭나는 은혜와 믿음을 갖게 하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여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의 은혜는 계획도 하나님이 하시고, 선택도 하나님이 하시며, 대속의 공로도 예수님이 시행하시고, 믿음의 역사도 성령님께서 이루게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자는 아무 노력이나 공로 없이 모든 것을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로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시겠지요. 두 살 난 갓난아기가 아파트 20채를 소유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 아이를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거저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영적으로 낳으셨기 때문에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요즈음 구원에 대한 의미를 우리와 같지 않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파는 부활과 내세는 없고 땅에서 잘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믿음을 중요시하지 않고 물질적 구제를 구원하는 일로 보는 사람도 있으며, 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단자는 자신이 구세주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찬송하라는 사람도 있고, 범종교단체와 신앙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잘못된 일이고 위험한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범종교단체에 갈 수 있으나 사회적 문제로 가는 것일 뿐 신앙적 문제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고후 6:15).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하셨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갈 1:8). 요즈음 잘 알지 못하는 교인들은 병이 낫는다든지, 천사를 보았다든지, 죽은 자가 살았다는 등의 이슈거리로 말하면 무조건 관심을 갖고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런 식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절차대로 믿고, 구원 받으셔야 합니다. 절차대로 믿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알고(호 6:3), 다음에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마 6:16, 요 8:32, 14:7, 엡 4:13), 그 다음에는 성경을 알고(요 17:17, 딤후 3:15~17), 성경대로 시행하는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체험이 구원인 줄 아시거나, 구원의 의미와 절차도 모르신다면 황당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와 방도를 아시고, 또 가르치실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0과 보고 듣고 고하라 (겔 40:1~16) 목록으로


평신도님 입장에서 본문을 읽었다고 가상하시면,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무슨 교훈을 주시기 위함인지 감이 잡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기본 지식을 이해하시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고도 뜻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평신도가 이해하기 쉽도록 몇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1. 우선 40:1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 말씀을 바벨론 포로 25년 만에(예루살렘 함락 14년, 주전 533년)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유다 민족이 흩어지고 나라와 성전 제도가 다 없어져서 고난과 절망만 있던 시대였습니다.

2.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게시는(2절) 하나님의 성전의 모형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계시 속에서 성전 모형을 측량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셨으니, 이는 에스겔로 하여금 밝히 기억하고 증언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에 대한 기록은 40장~42장과 46:19~24에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시면서 성전의 모형을 상상해 보셔도 잘 떠오르지 않지만, 전문가가 연구하여 만든 도면(박윤선 박사 주석 끝에 첨부되어 있음)을 보시면 상당 부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척수를 환산해보면 터의 전체 넓이가 6,944평인데(43:20) 정4각형, 두꺼운 담으로 되어있고, 동남북에 문이 있으며, 그 안에 지어진 성소는 22평 정도이고(41:1~4), 담 안쪽 4방에 34개의 방이 있고, 또 성소 앞 동쪽에는 제단이 있으며, 제단에 통하는 현관문도 동남북에 있고, 서편에는 큰 방이 있으며, 주위 전부는 뜰로 되어 있습니다. 꼭 모형도를 보시고 짐작하기기 바랍니다.

3. 중요한 것은 이 성전의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며, 에스겔에게 왜 이것을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성전의 의미에 대하여

① 요 2:21에서 예수님이 “성전 된 자기의 육체”란 말씀을 하시므로 성전을 예수님 자신의 계시인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② 그리고 성전의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로(합 2:20, 겔 48:35), 성소는 예물을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③ 제사장과 제단이 있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사역 및 중보사역을 모형적으로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일반 성도는 뜰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하게 되어있고, 모든 구조가 다 제사장의 사역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속죄 및 중보사역을 나타낸 계시이면서, 또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보이게 한 것입니다.

2) 왜 에스겔에게 이것을 보여주셨는가? 하면 40: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보고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선민들에게 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보여주신 의미를 잘 깨달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은 성도가 에스겔 선지자는 아닐지라도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을 받았을진대 그 성도 자신도 보고 듣고 생각한 후에 그 내용을 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저는 이 말씀을 살피면서 에스겔이 본 성전 구조가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과 같은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분명히 하나님의 간섭으로 지어진 만큼(왕상 6:11~12, 8:10~11, 대상 22:10, 16)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인데 솔로몬의 성전은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이므로 이것을 평으로 계산하면 약 100평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성소의 넓이로 볼 때 차이가 있지요. 그러면 모세의 장막 성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할 때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장막 성전을 짓게 하실 때 엄격하게 명하셨고, 또 “명대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출 36:1, 39:1, 6, 8, 21, 26, 29, 31, 43). 출 36:8~19에 나타난 내용에서 성막을 두르는 앙장을 열 폭짜리 28규빗과 덮개 앙장을 11폭짜리 30규빗으로 쓴 것을 보면, 그 규격이 에스겔이 본 성소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일치한 게시를 주신 것인가를 확인해보려 한 것인데, 공통성이 있지만 성소의 넓이가 같지 않았음을 알았고,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복구 시에 재건할 성전을 보인 것인가? 할 때 그 모형대로 재건했다는 말씀은 없지만, 56년 후에 재건할 성전을 보여주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증언하여야 합니까? 구약시대에는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속죄제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과 그 속죄에 제물이 장차 오실 메시야인 사실을 보고, 듣고, 증언한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성경 계시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의 사건으로 속죄하신 방법을 알고,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사실을 알고, 또 듣고, 배우고, 생각하여 열심히 예수님을 전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딤전 3:15에서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은 머리, 교회는 지체, 엡 5:23). 성전의 담 두께가 한 장대라고 하였으니(40:5), 이렇게 담이 두꺼운 뜻은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든든히 보호하시는 뜻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와 교회는 든든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열심히 보고, 듣고, 생각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반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절기에 대한 말씀


제81과 성탄 축하 (요 1:9~14) 목록으로


요즈음은 성탄을 축하하는 절기이고, 또 저희들은 성탄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다 잘 아실 줄 압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고, 그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모범을 보이시고, 하나님을 나타내주시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분도 대단하시고 목적도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성탄을 축하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생일을 축하해드리는 것은 효도에 속하는 일이고, 효도는 자식이나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기쁘게 만족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탄 축하도 사람 중심의 행사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이 무엇인가?”(엡 5:10)를 연구하여 힘써야 하는 것처럼 성탄 축하 절기에는 더욱 그런 일을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성탄 축하를 드리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한다면, 오히려 크게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이 이런 것을 기뻐하시겠는가? 안 하시겠는가?”를 잘 판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세속을 멀리 하라”고 하셨습니다(롬 12:2, 약 1:27). 그런데 성탄절 때는 세속적 행사가 더 많은 것 같고, 세속적인 방법들이 크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구의 이성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성탄절은 기독교인들의 축제요, 정부의 할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 공휴일을 정부가 주관하면 안 되고 교회가 주관하여야 한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탕하는 행사로 기독교의 절기를 즐기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정부가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한 것은 예수님 탄생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고 세계적 추세에 따라간 것인즉 성탄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주님 당사자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드리겠습니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 여사(1812~1889)가 길을 가는데, 브라우닝의 시를 감상하는 모임 광고를 보고 그 장소에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몇 사람의 연사가 나와서 그의 시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데 원 저자가 상상도 못한 엉뚱한 말들을 하고 있어서 너무 민망하여 마지막 시간에 언권을 얻어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핀잔을 받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효도가 부모의 뜻에 맞게 행하는 것처럼 시도 저자의 뜻에 맞게 감상하여야 하며, 성탄 축하도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탄 축하의 요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신분을 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관계, 신성과 인성을 겸한 신분, 또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잘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므로 그 지식 터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장례식 조위금을 딴 집에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 조문을 하면서도 누가 죽은 조문인지도 분별을 못한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예수님의 신분을 잘 모르면서 축하하였다면, 예수님이 “너는 나를 아는 일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전기세, 난방비 소모하면서 친목회 하라고 오셨겠습니까? 그것은 마구간에 탄생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겠지요. 25일 날 친목회 할 수 있습니다. 노는 날이니까 모일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친목회가 성탄 축하의 한 몫을 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에 대하여 늘 말씀드렸지만 요약하여 다시 말씀드리면 구속사업을 위하여 오셨고, 또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셋째는 인간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적에 응하여 하나님을 잘 알고, 또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으면서 성탄 축하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분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외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직분이 있습니다. 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도 하셨습니다(행 17:25). 왕은 복종과 충성의 대상입니다. 선지자는 증거와 교육을 일삼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하는 직임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복종하고 충성하십니까? 또 얼마나 진리를 열심히 배우십니까? 이 “배운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이런 것을 좋은 절기에 한 번 더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란 뜻은 “구원하신다”는 뜻이고(마 1:21), “임마누엘”은 “함께 하신다”는 뜻이며(마 1:23), “그리스도”는 “기름, 성령, 은혜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러 오셨고(요 10:10), 또 백성과 이웃을 섬기러 오셨습니다(마 20:28). 아무쪼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한층 더 깊이 살피는 마음을 가지시고, 예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려 만족을 드리는 성탄 축하가 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2과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막 11:1~2) 목록으로


고난주간을 뜻있게 보내는 의미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에 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주일에 입성하셨고, 금요일 아침에 돌아가셨으며,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역사적 일정이 명확한 것은 그 사실을 더욱 실감 있게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 같으나, 잘 살피면 나타나 있습니다. 눅 1:3에서 누가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썼다” 하였으므로 누가복음의 기록을 역사 순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은 주일입니다(요 12:1). 또 “이틀이 지나면 무교절이라” 한 날은 수요일이요(마 26:2, 막 14:1), 그 외에도 “안식일”(눅 23:54, 요 19:31), “이튿날”(막 11:12), “예비일 다음 날”(토요일, 마 27:62)이란 표현이 날자 계산에 충분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1. 마지막 주일 전날은 예루살렘 동쪽 여리고 쪽에서 오셨고, 그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능욕과 채찍 맞으심과 돌아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막 10:32~34). 그리고 주일날(5회째)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이 지방에서 도시로 이어진 것입니다(마 4:15~16). 이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빌려오라” 하여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이 뜻은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과 이렇게 될 것을 예언한 슥 9:9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여리고 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은 계속 언덕이기 때문에 많이 피곤하셨겠지만 예수님은 편리한 교통수단도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귀 주인은 흔쾌히 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실 때 제자들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요 12:13) 폈으니, 이는 환영하는 의식이요, 아이들은 “호산나”(아람어, 구원하소서)를 외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다가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11:11). 베다니에는 나사로의 집이 있지만, 그의 집에서 하시지 않고 감람산으로 가신 줄 압니다. 그 이유는 그 이튿날 나오실 때 시장하게 나오셨고(12절), “매양 저물매 습관적으로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막 11:19, 눅 22:39).

2. 월요일에 나오시다가 시장하여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으셨으나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지라 나무를 저주하셨는데,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3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열매 없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순간적으로 신성을 작동하시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인성으로만 감당하신 것입니다. 또 그 시기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면, 저주하시지 마셔야 할 것 아닌가? 하시겠지만 일단 그 무화과나무는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사실인즉 저주받은 것이 마땅하며, 또 이 사실은 열매 없는 선민이 벌 받을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하신 뜻도 있다 할 것입니다. 그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두 번째 하신 것입니다(요 2:13~17).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물질 중심, 돈벌이 중심으로 이용한 것을 크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믿음생활을 사업의 중심체로 이용하는 잘못이 있음을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이나 성구를 신성시하여 선전하고 교회 단체를 보험이나 상업 대상으로 삼는 일을 삼가야 할 줄 압니다. 교회는 영적 신앙생활의 도장이 되고, 성도간의 친교만 힘쓰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크게 돕는 도덕적 사업은 교회의 지도 체제를 떠나서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3. 화요일에도 성전에 나오셔서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시고, 평가하셨습니다. 이때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렙돈은 헬라 동전의 명칭이라고 합니다(고드란트는 로마 동전의 명칭이고). 이 렙돈의 가치는 참새 1/4 값이라고 합니다. 참새 두 마리 값이 1 앗사리온(마 10:29)인데, 렙돈은 앗시리온의 1/8인즉, 그렇게 계산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그 과부의 적은 헌금을 부자의 헌금에 비하여 크게 평가하신 것은 그의 가진 것 전부(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4. 수요일에 하신 일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는 “수요일 행사의 기록이 없다”고도 합니다만 잘못된 견해요, 필자도 수요일 행사를 뚜렷하게 지적하지 못했으나, 이 글을 쓸 무렵에 깨달았습니다. 막 14:1에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하셨으니, 그날이 곧 수요일임을 알 수 있지요.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가셨고, 마리아의 향유 부은 일이 있었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요 14:1~15), 성만찬을 베푸신 일(막 14:22~27),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이 이날에 해당합니다.

5. 목요일에 있었던 일은 새벽에 대제사장에게로 잡혀가신 일(마 27:1), 그 새벽으로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을 받았고, 당일 오전에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을 거쳐 정오(요 19:14, 유월절 예비일 6시)에 종결되었고, 다음날(금요일) 집행하기 위하여 가두었다가,

6.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제 3시에 못 박았으므로(막 15:25, 오전 9시) 그 이전에 십자가의 운반과 골고다 행차가 있었으며, 6시로 9시까지 어두움이 지속되다가 9시(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그날 해지기 전에 장사지냈습니다.

7.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고,

8.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제83과 고난과 속죄 (히 2:9~10) 목록으로


고난주간을 기억하면서 “고난과 속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이 고난주간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음미하는데 있습니다.

1. 인간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며, 예수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저희들이 아는 대로 인간은 죄 값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는 아담의 타락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아담의 후손 된 모든 인류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신적 고난, 육체적 고난으로 나눌 수 있고, 고난의 최후 종점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계 20:14), 즉 지옥의 형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 할 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당연히 고난을 안 받으셔야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책을 담당하고, 구원의 중보자를 삼으시려니까 예수님이 죄책 담당과 중보자의 자격 취득을 인하여 고난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리시는 고난을 세 가지 용도로 쓰십니다. 우리 생각에 고난이란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만일 고난이 없다면 연단도 없고, 속죄도 없으며, 징벌과 상급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의 소중함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고난을 주어 연단의 방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시 119:67에 보시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이제는(고난을 당하므로) 주의 말씀을 지킨다” 하였고, 또 71절에서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하였으며, 바울 사도는 고후 12:9에서 육체의 가시라는 고난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도 알았고, 고난으로 겸손해지는 것과 겸손한 자에게 능력을 머물게 해주시는 것들을 깨닫고 고난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있어서도 고난이 큰 효력을 준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2) 징계와 심판의 수단으로 쓰십니다. 다윗은 죄값으로 아들이 죽는 고난을 당했고, 노아 때와 소돔, 고모라에는 인류의 죄값으로 쓸어버림 받는 고난을 당했지요. 그리고 흉년, 전쟁, 질병, 죽음도 역시 징계의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인류가 영원 지옥불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역시 고난을 심판의 수단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3) 상급의 근거로 쓰십니다. 성도가 의를 위하여 고난당함이 없다면 무슨 상급을 받겠습니까? “의를 위한다”는 것은 예수님 뜻대로 살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 5:10에 보시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예수님을 인하여 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며 모든 악한 말까지 당하게 되었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셨고, 마 19:29에서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은즉 그의 생활이 고난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여러 배를 받고 영생도 상속한다”고 하셨습니다. “상속”이란 후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조상이 믿음으로 고난을 받았으면 그 상급이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괴롭게 하시는 것이 본심은 아니시나(애 3:33) 연단과 심판과 상급을 주시는 일에 꼭 이용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왜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선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생활하는 고난과 핍박 받으신 고난과 사명을 이행하시는 고난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고난과 상관이 없었을 것이나 인간으로 오셔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이 지은 죄값을 인간이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 죄인은 죄값을 치를 수 없는 고로 의인이어야 하며, 고난 그 자체가 심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자요 중보자이십니다. 구약시대에 대속의 모형은 제물이고, 중보자의 모형은 대제사장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한 몸으로 다 감당하신 것입니다.

4. 본문을 잘 이해하시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못함을 입었다”는 뜻은 천사가 맛보지 않는 죽음의 체험을 인간은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고,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이란 뜻은 죄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속죄의 제물 되시고, 또 인간고를 맛보시는 의미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활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는 뜻은 인간 체험을 골고루 하셔야 구원의 주도 되시고, 중보자가 되실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란 창조자를 뜻하고, “창조자 하나님이 많은 아들(구원의 백성)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구원 사역)에 저희 구원주(예수님)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 하심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원의 주와 중보자로 삼으실 때 고난을 속죄의 수단과 중보자의 자격을 얻게 하시는 일에 합당한 수단으로 쓰셨다는 뜻입니다.

 

제84과 부활의 당위성과 증거 (행 4:16~21, 요 5:21) 목록으로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당위성과 증거”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읽으신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증거한 말씀이고, 요 5:21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 부활의 당위성이란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할 이유입니다.

1)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계신 분입니다. 생명의 주이시고,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니까(요 1:1) 당연히 살아나셔야 하고,

2) 구약에서 메시야의 부활이 있을 것과(시 16:10, 사 26:19)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니까(마 20:19, 막 9:9, 14:28, 요 2:19~22) 말씀대로 시행되어야 하며,

3) 예수님이 핍박을 받으신 것은 의인과 악인의 대결인데 악이 이기면 안 되지요. 시 1:6에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 하셨으니, 당연히 정의가 이겨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을 못하시고 패배자가 되셨다면 누가 정의를 위하여 싸우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정의가 승리하는 표상입니다.

4) 구속 사업을 완성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속 사업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대한 열납과(레 1:3, 고전 15:24) 영원한 중보 사역을 계속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딤전 2:5, 히 8:6).

5) 선악에 대한 심판을 하셔야 하고,

6) 구원받은 백성들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증거는 많습니다. 성도님들이 누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말을 들었다면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1) 먼저 역사적으로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말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19), 엘리사가 수넴에서 죽은 아이를 살린 일(왕하 4:32), 시체가 엘리사의 해골에 던져졌을 때 살아난 일(왕하 13:20),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도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고(막 5:4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요 7:15), 또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요 11:13).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도 각각 한 번씩 살리셨습니다(행 9:36~42, 행 20:9~10). 그리고 상징적 능력으로 나타난 것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을 의미합니다(민 17:8). 이 같은 부활의 사실이 인류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성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간 세상에 계시면서 14여 차례 개인과 단체 앞에 나타나셨고, 대화하시고, 만지게 하셨으며, 같이 음식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이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불쾌하고 두려워서 제자들을 불러 경계하고,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역사적 사실을 어찌 부인하겠느냐?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를 한 것입니다. 거짓에 생명을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거짓을 말하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때 사실을 말하고(또는 감추고) 죽는 이는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증거한 것은 “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증거한 것입니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불신앙의 심령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부활과 천국은 신령한 복에 해당하는 것이고, 신령한 복은 거듭난 자에 한하여 알려지는 것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역사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고 “부활을 믿지 마시요. 그것 허황된 선전입니다. ‘사람이 아주 죽고 끝난다’ 하면 사회가 어지럽고 선한 자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꾸며낸 말입니다”라고 하였을 때 그것을 믿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성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고전 12:3) 그래서 예수님과 성경과 십자가와 부활과 심판과 천국, 영생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살후 1:10에 보시면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믿어지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역사로 증명한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가 2,000년이 다 되어 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참 증거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 밝혀져도 여러 번 반복하였을 것이고, 기독교는 교주의 죽음과 거짓 때문에 벌써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지금까지 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중간에 부활신앙 때문에 얼마나 많이 순교하였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를 뒤집을 수 없는 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자신의 관계를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고(마 28:20), 또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도 영생을 주셔서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요 11:26). 따라서 육체의 죽음도 허물을 벗는 것일 뿐, 우리의 영혼은 항상 살아있는 것입니다.

 

제85과 부활 신앙과 변화 (요 21:15~18) 목록으로


오늘은 “부활절 주일”입니다. 주후 325년 5월 20일부터 8일간, ‘니케야’라고 하는 터키의 이스닉시에서 318명의 주교들이 모여 춘분 후 망월(만월) 첫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임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하였고, 그 주교들 중에는 핍박에 의하여 불구된 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개신교가 따로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신교와 구교가 함께 지키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 깊은 절기라고 합니다. 춘분은 항상 3월 31일입니다. 그러나 보름달 되는 날자는 년년이 변화되기 때문에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서 부활절이 유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자는 사람들이 정한 것이고, 또 부활절을 만든 것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절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활주일도 “부활을 믿는 성도의 믿음과 생활”에 대하여 교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잘 아셔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예수님의 부활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시 49:9).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요 2:20, 마 16:21, 17:22, 20:19).

2) 그래서 예수님은 예언대로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3)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계시면서(행 1:3) 열 네 차례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고, 말씀하셨으며, 또 그 몸을 확인하게 하셨고, 음식을 함께 잡수셨으며, 장애물에 상관없이 출입하셨고, 이적도 행하셨으며, 그 몸 그대로 공중으로 떠서 승천하셨으니, 그 부활의 몸은 신비한 몸이고 또 고난이나 죽음을 당할 수 없는 영화로운 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활체에 대하여 설명하시기를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마 22:30).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한다면 부활절을 지키는 성도는 그 타당성을 순순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타당성은

1) 예언대로 이루어져야 하니까 그렇고,

2) 생명의 주가 무덤에 계시면 안 되기 때문이며,

3) 마귀들에게 핍박을 받고 돌아가셨은즉 승리자 된 것을 보여주셔야 하니까 그러하고,

4) 영생이 있어야 영생 천국을 믿을 것이기 때문이며,

5) 성도에게도 그런 부활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뜻과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령님을 보내시고 영원토록 중보 사역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고전 15:20, 살전 4:16~17).


3. 그러면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의 변화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부활에 비중을 두는 것은 성도들도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 하여(변화됨, 살전 4:17)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들에게 주님과 같은 부활이나 승리나 영생이 없다면 인생이 허무하고 불쌍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 영생을 주셨은즉 성도는 승리의 무기를 가진 것이고, 그것을 가진 만큼 그 생활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글을 쓸 때 350억의 복권을 탄 강원도의 경찰관이 다음날 사표를 내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밑천을 가지면 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부활과 영생은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의 자본입니다.

1) 베드로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다가 일시 배신하고 통곡한 후 옛 직업으로 돌아갔었지요. 그러나 그가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났을 때 재기하고 순교자가 되지 않았습니까?(본문)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2) 바울은 어떠하였습니까?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핍박자였는데, 아주 겸손한 사명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5:8~11).

3)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우선 부활을 믿는 성도는 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주신 영생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② 악에 굴하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승리의 증표인즉 의에 담대하여, 죽기까지 싸우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③ 하나님 중심, 영생 목표로 사셔야 할 것입니다. 또 죽어도 사는데 왜 산 자가 활기를 잃겠습니까? 그러니까 부활을 믿고 힘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에 보면 신학교에 부정이 있다고 고발을 한 모양인데, 고발자만 나쁘다고 지탄합니다.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바르게 만드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불의가 정의 되고, 약자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4) 어떤 쪽지에서 생활의 미담을 기록한 것을 보고, 이것이 부활을 믿는 성도의 생활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최고의 행복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고, ◉ 최고의 비참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며, ◉ 가장 외롭고 불쌍한 것은 할 일 없는 것이고, ◉ 가장 못난 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며, ◉ 가장 존귀한 것은 타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고, ◉ 최고로 슬픈 일은 거짓말하는 것이며, ◉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고, ◉ 가장 어리석은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며, ◉ 최고의 멋은 자기의 일을 당당하게 하면서 만족을 누릴 줄 아는 것이고, ◉ 최고의 비통은 의무를 알고도 이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변화에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제86과 부활의 은혜와 사명 (요 20:19~23) 목록으로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은혜와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안식 후 첫날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으나 예수님이 들어오셨고 가운데 서서 여섯 가지 선포를 하셨는데 세 가지는 축복의 말씀이고, 또 세 가지는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부활의 은혜와 사명”으로 정한 것입니다.

1. 은혜의 말씀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두 번을 강조하셨습니다(20~21절). 이 뜻은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영적 평안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평안을 주실까요? 요 14:27에 보시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반드시 건강, 물질, 명예, 자유를 있어야만 누릴 수 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하셨으니까, 건강, 물질, 명예, 자유를 주셔서 평강을 누리게 하실 수도 있고, 그것들이 없어도 성령으로 마음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성도는 어떤 여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무렵에 장애인 남녀가 결혼을 하면서 크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저런 것이 주님을 모신 생활 속에서의 평안이고 행복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믿음으로 평안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2) 확신의 은혜입니다. 확신은 믿음의 충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우고 경험하여 확신하라”(딤후 3:14, 요 10:37~38)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확신하십니까? 성경 지식에 확신이 있습니까? 이번 부활주일을 계기로 큰 확신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확신이 없었습니다. 구약이 예언하였고, 예수님이 여러 차례 예언하셨으나, 믿지 않았고, 나중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시니까 믿었는데,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져보지 못했다 하여 여전히 의심하였으니 의심도 끈질긴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의심 가진 도마에게 확신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27절). 믿음의 확신,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은 큰 축복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100%가 될 수 없겠지요? 부활절에 큰 확신 있기를 바랍니다.

3)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부활의 확신도 못 가졌을 것이고, 따라서 기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부활을 믿음으로 기쁨을 갖게 되었으니, 이 기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 것 같습니까? 법원에서 승소한 기쁨, 병 고친 기쁨, 합격한 기쁨 정도가 아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기쁨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쁨이며, 지옥에서 천국 가는 기쁨일 것입니다. 대단한 기쁨이요, 최고의 기쁨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가 이 기쁨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활의 찬송을 기쁨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2. 사명을 주신 말씀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도들에게 세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은혜도 크고 사명도 중요합니다.

1)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21절에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끝부분에서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고, 막 16:15에서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며, 눅 24:48에서도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가장 강조하신 부분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반드시 전 인류에게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오순절 때 강림하신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요 16:7) 그 성령님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숨을 내쉰” 의미는 성령님이 곧 주님의 영이심(고후 3:17)을 암시하신 듯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이 거듭날 때 내주하신 성령님과 어떻게 다른가? 하시겠지요. 같은 성령님이신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세상에 계시지 않음을 인하여 “세상에 상주하시도록 보내셨다”는 뜻이고, 또 한 가지는 “충만한 은혜로 역사함을 힘입으라”는 뜻입니다(엡 5:18). 따라서 부활을 믿는 성도는 “성령 충만을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주기도문에도 있고,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적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으므로 “탕감 받은 빚을 다시 갚으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마 18:23).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사함 받는 믿음에 포함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심판권에 대하여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에게 죄지은 대상에게 보복할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그의 죄를 벌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이 부활 신앙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 가지 은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시고, 반드시 전도와 성령 충만과 용서를 실천하시기 위하여 결심하고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7과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07:1~9) 목록으로


(맥추,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을 살피는 뜻으로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1절) 하셨고, 2절에서는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하시므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충성된 시어머니에게 말로 감사 표시를 안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일을 손자 키우는 일로부터 빨래하는 일가지 상당히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어머니의 수고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고 치하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곁에서 사람이 “말로라도 감사드려라” 하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푼 상대방에게 말로 감사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즉 “하나님이 이런 은혜 주신 것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며느리의 일을 도와준 시어머니가 무슨 대가를 바랍니까? 바란다면 며느리가 감사히 여겨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물질 같은 것은 바라시지 않습니다. 돈은 가난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마음과 “감사하게 느끼는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은혜를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꼭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감사하였습니까?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거나 인자하시지 않다면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하신 성품 때문에(애 3:33, 요 3:16) 죄인이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죄를 많이 짓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싫어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사 41:9, 요 13:1).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장애인이라도 계속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영원한 것”은 연약한 우리에게 큰 행복과 소망을 주십니다. 따라서 늘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을 감사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는 선민이 애굽이나 블레셋 족의 학대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로 모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은 신앙의 자유를 뜻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인 교회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친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다 주일을 기다리시는 줄 압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이 성도의 모임과 교회 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4~6절을 보시면 어려운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기도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할 때 정착지 없이 방황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노숙자와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땅 사고, 집 짓고, 농사지으면서 정착을 하였다고 가상해 보세요. 은혜가 크겠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살게 하시므로 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이 없어진 것입니다. 요즈음도 물 없이 고생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은혜는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고통 중에서 기도하고 해결된 것을 체험하셨습니까? 혹 체험을 못하셨다면 앞으로는 민감하게 체험하시고, 현재 생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도 응답의 결과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바른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인도받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거할 성을 얻은 것을 큰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는 정착지, 사는 주택도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이사하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습니다. 생활도 인도하시고, 또 그보다 더 중한 사건(취직하는 일, 진학하는 일, 혼사 맺는 일, 사업하는 일, 연고자를 만나는 일 등)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매일 매일의 일을 하나님께 부탁하십시오. 하나님은 미래를 알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너의 길을 정오의 빛같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3~6, 139:10, 121:8).

5.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찬송하라”(8절)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이한 일들을 체험하십니까? 재앙이 나에게 미치지 않은 것도 기이한 것입니다. 시 91:7과 눅 13:·1~5을 읽으시고, 그 뜻을 이해하십시오.

6.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모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감사가 넘치고, 희망이 넘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8과 영적 가을의 교훈 (요 4:35~3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 사업의 열매를 전도자들이 거두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법이 주밀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일어선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말의 주밀한 표현은 그만큼 생각과 생활이 분명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연구할 때 주밀하고, 생활도 분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드릴 제목은 “영적 가을의 교훈”입니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 하는 것은 육신적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고,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하심은 영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전부 전도의 대상으로 느끼신 것은 영적 가을로 느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항상 영적 가을을 살아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을” 하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영적(성경)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1. 가을은 아담이 타락한 시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담이 가을에 타락한 증거는 그 당시에 일기가 서늘하였고(창 3:8), 각종 나무의 실과가 있었던 것과(창 3:1) 가죽옷을 입을 만큼 그 일기가 덥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가을에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 있는 사람들이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않는다”(잠 20:4) 하셨고, 아 2:7에도 보면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가 기울어지니 베테루 산에서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놀자” 하므로 연인과 즐기는 때임을 말씀하셨는데(아 4:6) 즐기는 것도 좋지만 실속 차리는 일이 더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는 가을의 계절을 복 받는 계절로 선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1)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 계절이라고 합니다. 글 읽기 좋은 계절이란 뜻이지요. 이런 때에 성도는 성경을 많이 읽으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복 받는 방법을 헌금으로 알고 있습니다. 십일조 내면 부자 될 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득이 적은 사람은 어찌합니까? 성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계 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익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으니까요. 또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 공부에 해당합니다. 교회적으로 성경 공부의 붐이 일어나면 자신도 은혜를 받게 되고 교회도 부흥됩니다. 살후 3:1에 보시면 “주의 말씀이 성도 중에서 달음질하여야 한다” 하셨고, 또 바울과 바나바가 성경을 가르친즉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자격을 얻었다” 하셨으며(행 11:25~26), 뵈뢰아 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연구한즉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귀부인과 남자들도 믿음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으며(행 17:11~12), 또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한즉 (교회가) 세력 있게 되더라”(행 19:20)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을은 성경 공부로 시작하여 은혜 받는 계절이고, 또 교회를 부흥되게 하는 계절로 꼭 선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가을은 열매를 맺는 계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먹는 열매를 생각할 것입니다. 먹는 열매는 넉 달을 기다려야 하지만, 신령한 열매는 항상 있다고 하셨지요. 그 신령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 인내와 자비와 양선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이런 아홉 가지 열매를 항상 연구하고 연습하여 잘 맺으셔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또 빠진 열매가 있으니, 그것이 전도의 열매입니다. 전도의 열매는 “이미 익어있다”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시지요. 세상에 홀려 사는 사람들을 보시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야 하겠는가? 안 받아도 되겠는가를…. 성경에는 여러 가지 열매가 기록되었습니다. 회개의 열매(마 3:8),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롬 6:22), 빛의 열매(엡 5:9), 의의 열매(빌 1:11), 선한 열매(골 1:10), 그 중에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 4:46)가 곧 전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결실 있고, 소득 있고, 실속이 많은 절기가 되시되, 특별히 신령한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3. 가을은 저축하는 절기입니다. 무엇을 저축합니까? 겨울에 먹을 양식을 저축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비유할 때 미래를 대비하는 신앙적 준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하여야 합니까? 성경에서 미래는(이 세상에 한하여) 몹시 어둡다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고, 재난이 많으며, 하늘의 별도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훈련된 믿음을 준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겨울나기 위하여 양식과 나무를 준비하는 것처럼…. 그리고 또 한 가지 저축하셔야 할 것은 내세의 상급을 받기 위한 선행의 저축입니다. 세상에는 환난이 있고, 성도의 마지막 갈 곳은 천국뿐이며, 천국에 갈 바에는 칭찬받는 대상으로 가야할 것인즉 상급 받을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을은 인생의 황혼기로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가을은 감사의 절기도 됩니다(레 23:9~32). 조상들의 한가위가 그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때와 시기를 의미 없이 보내시지 마시고, 매일 매일 알찬 생활을 하시자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10. 말세에 대비함


제89과 일어나 머리를 들라 (눅 21:20~28) 목록으로


맨 끝 절에서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지금이 과연 머리를 들 때이기 때문에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택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두 가지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말세의 징상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4절까지는 예루살렘 멸망 때에 있을 징조들을 말씀하셨고, 25절부터는 “말세의 징조”를 예언하신 것인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내용은 예루살렘 멸망이고 저 내용은 말세에 대한 예언이라”고 명시를 하시지 않아서 연구에 혼란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시작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였는데 끝은 말세의 재림으로 결론을 지으셨으니까, 그 분간을 24절, 25절 사이로 나누게 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된 데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뜻은 예루살렘 멸망의 참화가 말세 참화의 전초적 역사로(계시 목적) 기록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에도 큰 환난이 있을 것인데 예루살렘 멸망이 그 모형이다” 하는 뜻으로 예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과 경위와 그 결과를 말세에 있을 환난의 모형으로 삼아 주목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20~24절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41년 후에 될 일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0절에서 (로마) 군대에게 에워싸일 것을 예언하셨고, 그날은 형벌의 날이며(22절, 메시야와 성도를 핍박한 죄값), “아이밴 자, 젖먹이는 자의 화가 더 크고, 큰 환난과 지진도 있으며, 이방인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밟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2~24절).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피하여 살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신 것이지요(합 3:2). 이 산이란 의미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시 18:2) 실제적으로 해석을 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그 당시에 로마의 군인들이 산이나 굴까지 다 뒤지지 못하였고, 집에 있는 사람들만 큰 화를 당하였으며, 요단강 건너 ‘펠라’라는 골짜기로 도망한 사람들이 생명을 보존하였고, 수만 명이 사로잡혀 갔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죽이고 성도를 핍박한 죄를 하나님이 벌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킨 사람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메시야를 학대한 죄값이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짓밟힌다”는 말씀은 영적으로는 예수님 재림 때까지를 뜻하고, 일반적으로 볼 때는 선민적 특권의식이 없어질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말세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도 자연계는 예사롭지 않은 변화가 있습니다. 25절의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다”는 뜻을 권세자의 몰락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자연계의 변화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바닷물은 달의 모양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일월성신에 변화가 생기면 인력에도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바닷물이 일정한 수위를 지킬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혼란 중에 곤고를 겪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큰 무서움과 기절할 일이 생기고 하늘의 권능들(그 당시 권세자들로 비유됨)이 흔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세의 징조에 대한 내용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더 자세히 말씀하신 줄 압니다. 이단, 전쟁, 지진 등이 난무한다고 하셨지요. 그때가 언제쯤일까를 헤아리지 마시고 바로 이때, 오늘 밤일수도 있다고 믿으셔서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그때인데 일어나 머리를 드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가족에 대한 애착, 세상에서 놀던 재미, 모든 좋은 것을 다 없는 것처럼 여시기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면서, 예수님을 만날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2) “일어나 머리를 드는 뜻”은 세상에 빠져 잠자는 자처럼(세상이 그대로 오래 있을 것으로 아는 자처럼) 하지 마시고, 항상 예수님을 기다리는 준비 자세를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손님이 자기 집에 오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확실한 시간을 모른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몇 시에 꼭 갑니다” 하고 약속을 지키면 기다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귀한 손님이 “어느 날 간다” 하고 시간 약속이 없다면, 하루 종일 다른 일을 피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취할 태도인 것입니다.

3) 머리를 들고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태의 잠에서 경성하고, 준비한 후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일어나 머리를 드는 태도요, 재림주를 맞이하는 성도의 취할 태도인 것입니다.

 

제90과 예비하고 있으라(1) (마 24:42~44) 목록으로


본문 44절에 보시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게 하신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의 종말을 뜻하고 아울러 이 세상에서 사는 끝 날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붙드시는 동안 인생이 살고 있지만, 죽음이란 밤의 도적처럼 어느 때에 임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상상조차 안하고 사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저의 아버님이 52세에 별세하셨는데 제 나이 52세 때부터 아버지의 별세 나이와 내 나이를 대조하면서, 죽음에 대한 것을 많이 상상하였습니다. 남자의 평균 나이가 77세라고 하지만, 그것은 건강 체질의 사람에게 해당할 것이요, 저처럼 피로를 많이 느끼고, 혈압이 있는 사람은 늘 생명 다하는 날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에는 급하게 독촉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형제 불화를 급히 사화해라”(마 5:25) 하셨고, “때가 가깝다”(계 1:3) 하셨으며,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가 기름을 사러갈 시간이 없다”(마 25:9~10) 하셨고, 또 “지붕에 올라간 자가 집으로 내려올 시간이 없다”(마 24:17~19),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너의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하셨고, “때가 악한즉 세월을 아끼면 예비하라”(엡 5:16)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떻게 예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구상해 보았습니다. 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일이지만, 여러분들도 다 자기의 입장에서 예비할 과제와 방법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1. 저의 시급한 문제는 신앙생활의 원위치로 자신을 돌리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잘하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의 원위치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위치에 가까울 뿐, 성경과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의 생활로 다소간 구제를 한다 하여도 “나보다 네가 더 잘 되라” 할 정도가 되려면 아직도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발견하시고, 자신과 대조를 해보십시오. 비슷하면 좋지만 예수님과 거리감이 있을 때는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원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물이 아무리 맑다 하여도 현미경으로 보면 깨끗지 않은 것처럼 보편적 신앙생활에서 좀더 정밀해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줄 압니다. 교만, 혈기, 욕심, 완악, 세속주의, 나태 같은 것이 아직도 덜 빠진 상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사람이나 전통을 모범하는 일에서 떠나서 성경을 직접 연구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성경에 부합되고, 또 가장 가까워지도록 인격과 생활을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받는 때를 기다리는 성도는 어릴 때 순결하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을 상당 부분 정화시킨 상태에서 부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개혁의 과제와 방도를 메시지로 남겨놓은 일입니다. 제가 이 시대에 유명한 사람 같으면 나서서 지도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만큼 글로 남겨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평신도는 평신도 나름대로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교역자는 교역자의 입장에서 “이런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혁하여야 한다”는 과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화 또는 개혁의 과제들을 어떻게 방도를 세워 지도하여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의 정치는 북한의 핵문제, 남한의 노조, 교조 등의 단합 등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여기에도 개혁의 방법이 연구되어야 하겠지요. 또 성년 나이를 19세 이하로 넓혀서 투표권을 주는 문제로 토론하는 것을 압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공무원, 군인, 학자, 자선, 세금 등으로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만 특권 행사를 하게하고 나라의 덕만 보고 사는 사람은 특권 행사를 안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무 이행을 안 하고 특권만 누리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한동안 만연한 총회장부정선거 때문에 제비뽑기 식으로 규칙을 개정하여 상당 부분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투표할 수 있는 두 사람(총회장 후보)의 위치에 오르는 것 때문에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적당한 자격 기준을 세워놓고 다단계 추첨하는 식으로 한다면 선거운동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의 과제와 방도를 연구하여 글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개인에 대한 준비로써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현재 하고 있는 달란트 사역(글 쓰고 문서운동 하는 것)을 목표에 도달하도록 힘쓰는 일이요,

2) 가정에 관한 일로써 자녀들의 결혼과 생활정착 문제, 조상님들의 유적(묘역) 보존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요,

3) 분수에 알맞은 좋은 일(이웃돕기 같은 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빌 2:13) 하셨은즉 하나님께서 건설적으로 예비하고자 하는 일에 반드시 은혜를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와 여러 성도님들이 다같이 예비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시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91과 예비하고 있으라(2) (눅 12:35~4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비하고 있으라”는 제목 아래 “무엇을 어떻게 예비할까?”에 대하여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인생이 언제 끝날지를 모르는 성도가 되도록이면 참신하게 준비하고, 자기의 사명을 다한 후에 만족하고 여유 있게 부름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구상을 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집을 나간 주인이 언제 귀가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종이 2중, 3중으로 시설된 먼 밖의 대문에 나가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문열어주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고 또 도적처럼 나타날 것에 대비하는 종이 되어야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0절에서 “예비하라. 인자도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라” 하심으로 자기의 부름의 때나 예수님의 재림 때를 위하여 “예비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37절에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하셨는데, 그것이 곧 40절에 말씀한 “예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있는 것은 바로 졸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이고, 예비하는 일을 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깜짝 놀랄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37절에 “주인이 왔을 때 종이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니,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을 앉으라 한 후 수종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눅 17:7과 정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주인이 앉아서 먹으라 하고 수종들 자가 있겠느냐?”고 하셨지요. 그런데 본문에서는 잘 깨어 있는 종이면 “주인이 오히려 종처럼 섬겨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충성된 종에게 그만큼 가까이 해주시고, 또 종의 수고를 많이 덜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순종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면 상당히 가볍게 해주신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마 11:30). 아무쪼록 잘 깨어있고, 잘 예비하여 주님이 대신 져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한즉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예비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고전 13:13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사랑을 갖고 있습니까? 또 현재 상태에서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분명히 이 세 가지를 많이 준비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1. 믿음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것이 믿음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좋은지 나쁜지, 또는 가까운지 먼지를 확인하여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의 끈으로 예수님과 자신을 묶어놓지 않고(이것을 ‘연합’이라 함) 허술하게 하여서, 예수님을 멀리 떨어져 계시게 한다면, 똑딱하고 운명할 때 위로 받을 수 없겠지요. 욥 22:21에 보시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성도의 돈을 빌려 쓰고 정한 기일에 갚지 않는다면 화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자신과 깨끗하게 살아야 화목해지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이나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산 채로 불러가셨다”(창 5:22) 하셨으니,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거리낌이 없도록 철저히 예비하시라는 것입니다.

2. 사랑에 대한 예비입니다.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면,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여야 합니다. 혹 이웃에게 손해를 보였을 때 화목하겠습니까? 그래서 대인관계의 화목을 사랑의 차원에서 늘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가족과 사회와 국가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가족을 살피지 못한다든지, 이웃에 덕을 세우지 않는다든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역시 그 이웃들과 화목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랑의 예비가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족을 이해하고 편드는 만큼 사회도 그렇게 살펴야 하고, 나가서는 나라도 자기의 집안일처럼 생각하여 섬기고 충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는 말씀을 오늘 기억하면서 사랑 예비를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소망과 관련된 예비입니다. 소망은 현세에서도 가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세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천국에서 상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전표를 많이 모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인천에서 노동을 한 일이 있었는데, 하루 일을 하면 전표 한 장씩 주더군요. 월말에 그것을 회사에 갖고 간즉 돈을 주었습니다. 천국에 가서 그렇게 바꿀 전표를 많이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살아있을 때 되도록이면 적게 누리고(눅 16:25), 구제와 선교에 봉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절약해야 저축할 수 있는 것처럼 적게 누리고 많이 봉사하셔야 하는데, 구제는 육신 사랑이고, 선교는 영혼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이 두가지만 상급 받을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 부름 받을지 모르니까 차근차근 예비하셔야 하는데, 믿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준비, 사랑으로 모든 이웃과 화목하는 준비, 영육 간에 봉사 헌신으로 내세의 상 받을 준비를 잘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2과 예비하고 있으라(3) (눅 12:35~40) 목록으로


본문 40절에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예비하는 일”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무엇을 예비할 것인가? 할 때 재림주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재림주 예수님은 꼭 오시고, 또 그날이 임박해오고 있지만, 언제 나타나실 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재림주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비하는 일이 큰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신부로서 자기 단장을 잘 하고, 믿음 있는 신부, 교양 있는 신부, 또는 좋은 선물을 준비하여 신랑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본문에 보시면 대부분 “경성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 켜고 서 있으라”, “졸지 않고 문전에서 있다가 아무 때라도 주인이 오시면 문을 열어드릴 수 있게 하라”, “종이 깨어있는 것을 주인이 보셔야 그 종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잠을 안 자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니까요. 본문에 보시면 “깨어있으라”,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 하셨는데, 또 한 단계 올려서 “도적 지키는 자처럼 하여라” 하시더니, 40절에서는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비하는 것은 깨어있는 것보다 한 수준 높은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깨어있는 것은 평상시의 신앙생활을 꾸준히 잘하는 것이고, “예비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선물꺼리를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어떻게 예비하여야 할까요? 우선 마귀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있는 자세”가 마귀와 싸우기 위한 무장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대문을 열기 위한 준비이지만, 이것이 영적 경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적 경성은 마귀를 대항하는 자세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마귀를 도적으로 비유하셨지요. 요 10:10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은 빈집이나 깊이 잠자는 집에만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 집의 문단속하는 것처럼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마귀를 “독사”(마 3:7), 이리(마 10:16), 우는 사자(벧전 5:8), 또는 개로 비유하였습니다(빌 3:2, 계 22:15). 이런 마귀를 따돌리거나 이기기 위하여 항상 경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0절에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후메이스 기네스데 에토이모이(ὑμεις γίνέδθε ἔτιμοι)인데 ‘예비’라는 ‘에토이모이’가 완료복수동사이기 때문에 “예비 완료된 상태로 있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4. 그러면 성도의 실제적 생활에서 예비하는 일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공백 있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자동차가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도로에 구덩이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구석에 혹 있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어느 부분에 공백이 생기면, 그 틈을 보는 마귀가 믿음을 허물어뜨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느낌을 가졌을 때는 벌써 마귀의 역사가 상당히 진행됐다는 뜻이기 때문에 회복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마 9:14~15).

2)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점을 감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대형사고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들 중에 생각지 않은 때에 죽음이 올 것을 예비하는 방법으로 유언서라도 적어놓고 다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도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온다”는 뜻은 “하나님이 언제 성도의 영혼을 부르실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모르듯이 자기의 세상 떠나는 때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 유언을 남겨놓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렇게 하고난 다음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꾸준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비하는 일”은 깨어있어야 하는데 ①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항상 유지하는 일이 깨어있는 일이고, ② 자신이 세상을 떠날 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며, ③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르게 충성하는 일을 계속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언제든지 계속하다가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면 그 시간이 “끝내라”는 때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예비하는 일에 집착하다 보면, 그 생활도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다급해지기 전에 기도도 미리미리 하게 되고, 먼 훗날에 필요한 것도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믿음과 생활이 여유로워지고, 여유가 있다는 뜻은 곧 그만큼 자유롭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11. 연단, 시련 극복의 말씀


제93과 환난 중의 기도 (시 143:1~12)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다윗의 시”라는 주제가 있고, 다윗이 당면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내용(3~4절)과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와 도움을 청하게 되는 근거를 기록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환난을 당한 성도에게 큰 교훈을 주십니다.

1. 다윗이 어떤 환난을 당하였습니까? 3절을 보시면 “원수가 자기의 영혼을 군박하여, 자기의 생명이 땅에 엎어진 자 같고, 죽은 지 오랜 자처럼 흑암한 곳에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를 풀어 쫓고 찾으니까 은밀한 굴속에 들어가서 숨어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시체가 땅속에 오래 있는 것처럼, 산 사람이 죽은 지 오랜 자처럼 어두운 땅속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상하고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다”(4절) 하였고, 또 영혼이 피곤하고…아주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렵다“(죽을 것 같다는 뜻; 7절)고 하였습니다. 원수로부터 생명이 쫓기는 군박함과 어두운 굴속에서 오래 견디는 괴로움이 상당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이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하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나의 환난은 이런 형편이오니, 2~3절)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주의 진실과 의”란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의로우시니 죄 없이 쫓기는 자신을 공평하게 해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하였으니 다윗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즉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또 6~7절에서는 “내가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받기를 사모하는 표현)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한다”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이 마치 가문 땅이 비를 기다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속히 응답하시고…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시며(7절)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시며, 내가 내 영혼을 주님께 받듦 되기를 의뢰한다”(8절)고 하였습니다. 또 9절에서는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사온즉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주시고…,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해 주십시오”(9~10절) 하였고, 또 10~12절에서는 “나를 공평한 땅으로 인도해 주십시오(인권 침해 받는 중에서) 나를 살리시고 나를 환난에서 끌어내시며 내 원수를 끊어주시고 내 영혼을 괴롭히는 자를 멸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은즉(롬 12:9) 하나님이 갚아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간구의 내용은 살려주시고 공평한 땅(정의로운 세계)에서 살 수 있기를 구한 것인데, 마치 마른 땅이 비를 사모하듯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3. 이 기도의 내용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곧 간구의 근거입니다. 다윗이 무슨 근거로 은혜를 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1) 구속적 은혜에 근거하였습니다. 2절에서 “주의 목전에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 한 것은 인생으로써는 구원받을 근거가 없은즉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에 근거하여 도움을 주셔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과거에 은혜주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는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였고, 블레셋을 격파하였지요. 그때에 은혜주신 은혜를 또 시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사를 묵상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도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3) 주님은 인자하시니 고난당하는 자를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8절의 “주의 인자한 말씀”이라 하였고, 10절에서 “주의 신이 선하다” 하였으며, 12절에도 “주의 인자하심”이란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그 인자와 긍휼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요,

4) 10절에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뜻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시면 내가(성도가) 나의 소상한 일들과 비밀스러운 일들을 어찌 고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못할 말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주 소상하게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5) 11절에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악인에게 쫓기는 자가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고,

6) 마지막으로는 12절에서 “나는 주의 종인즉 원수를 멸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주인의 종을 해하는 자는 곧 주인을 해하는 자이므로 건져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 내용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줄 압니다. 또 다윗이 은혜를 구한 근거 여섯 가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94과 풍랑과 대책 (막 4:35~41) 목록으로


“풍랑과 대책”이란 제목으로 성경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실이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본문의 내용이고, 또 한 번은 마 14:22~33에서 “예수님이 물 위로 오시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간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마 8:23~27과 눅 8:22~25에도 기록된 전도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경은 “읽고 연구하고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이니까(엡 3:4, 계 1:3, 스 7:10, 벧전 1:10, 눅 24:45, 마 24:15) 말씀 주신 목적대로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성경을 살피는 차원에서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나타난 내용과 대조하셔야 합니다. 같은 사건을 세 사람이 느낀 대로 기록한 것이니까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유기적 영감). 그리고 성령님께서 세 사람에게 기록하도록 하신 데도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살펴보면 마가는 “그날”이라 하였는데, 마태는 때를 생략하였고, 누가는 “저물 때”만 기록하였으며, 또 마가와 누가는 “저편으로 가자” 하였는데, 마태는 배에 탄 것만 기록을 하였고, 마가는 “큰 광풍”, 마태는 “큰 놀”, 누가는 “광풍”이라고만 하였고, 마가는 배를 탄 사실만 나타내고, 바다, 호수는 표현을 안 했는데, 마태는 “바다”라 하였고, 누가는 “호수”라고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동서가 45리, 남북이 60리 쯤 된다고 합니다. 마가와 마태는 “예수님이 주무셨다” 하였는데, 누가는 “행선할 때부터 잠드셨다”고 하였으며, “고물”이라는 장소(배 뒤임, 앞은 ‘이물’이라 함)는 마가만 표현하였고, 예수님을 깨울 때 마가는 “선생님”이라 하였고, 마태, 누가는 “주여 주여” 했다고 하였으니 관점이 다른 것이며, 자연을 꾸짖으실 때도 마가는 바람을, 마태는 바람과 바다를, 누가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다 하였고, 마가는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다” 하였는데, 마태, 누가는 “꾸짖으신 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다른 내용은 비슷합니다. 제가 왜 이것을 살폈을까요?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목적에서 입니다.

2. 다음으로는 본문의 내용을 비디오 보듯이 살피셔야 합니다. 35절의 “그날”은 앞부분을 살펴서 가버나움 바닷가에서 “씨 뿌리는 교훈”을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그날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물매 집으로 가셔서 쉬지 않으시고 “저 편으로 가자” 하시니까 배를 타신 상태로 제자들이 모셨고, 다른 배들도 함께 갔습니다(36절). 그러면 출발지는 어디이고, 저편은 어디입니까? 출발지는 예수님의 제2 고향인 가버나움이고(마 4:13, 9:1, 막 2:1, 3:20), 저편은 4시 방향인 거라사 쪽입니다(막 5:1). 가다가 큰 광풍이 일어나고 물결이 배에 부딪쳐 가득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37절). 이때 제자들은 위험을 느끼는데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주무실 것을 배에서 주무시고 그만큼 시간을 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주이시고, 자연의 지배자이시니까 주무실 수 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까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호소를 한즉(38절)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시고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까 아주 잔잔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왜 무서워하느냐? 어찌 이렇게도 믿음이 없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만큼 가르치고 그만큼 이적을 행하였으면 자연의 지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전능자시라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습니다. 만유의 주 예수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풍랑을 두려워할 정도인즉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날 광풍이 불었을까요? 창 8:1에서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신다” 하셨고, 출 15:10에도 그런 말씀이 있으며, 또 “하나님은 바람 날개로 다니신다”는 말씀이 시 18:10에 있고, 요나 때도 바람을 잠재우신 일이 있었습니다(욘 1:4). 따라서 예수님이 자연의 지배자이신 것과 제자들의 믿음 약한 것을 깨우치시려고 그런 일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결과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피신 줄 압니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사실과 말씀에서 유익한 교훈을 받으셔야 합니다.

1) 예수님은 식사하실 겨를도 없었고(막 3:20), 여행과 취침을 동시에 하실 만큼 바쁘게 사신 분임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바빠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자연의 지배자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제자들의 결함에서 교훈 받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무지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거나 멀리 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보완할 과제입니다.

3) 저희들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풍랑 같은 일들을 기도와 말씀에 깨어있음으로써 주님의 능력과 섭리로 잘 해결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만족을 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95과 환난과 극복 (행 12:1~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을 살피는 것이 목적인데, 교훈의 내용을 종합하여 “환난과 극복”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헤롯 왕이 기독교를 핍박하여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넣었으니, 환난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이 교인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로 극복이 되고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주시는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헤롯은 예수님 탄생 당시의 헤롯의 손자인데(예수님 사역하실 때에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은 그의 아들임) 그가 유대인의 민심을 사기 위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또 베드로를 가둔 다음 유월절이 지나면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죽이려고 계획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환난”이란 믿음의 핍박을 비롯하여 사람의 힘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믿음에 대한 핍박이 없어서 다행입니다만 이 사건과 말씀을 환난 차원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베드로는 갇혔고 “교회(마가의 집을 근거로 모인 교인들, 12절)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고 하였습니다(5절). 사람은 갇혀 있고, 빼낼 힘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한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사람들 앞에서 죽이기 위하여) 끌어내려는 전날 밤에 천사를 통하여 구출해주신 것입니다. 천사가 오고, 광채가 나며, 옆구리를 쳐서 깨우고, 쇠사슬이 풀리고, 문이 열리며, 파수꾼이 어찌하지 못하는 중에 베드로가 옷을 입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환난에서 구출해주신 은혜를 의미하고, 또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하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관직에 있던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쉽게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환난의 종류도 여러 가지인 것처럼 기도의 응답으로 해결해 주시는 방법도 많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이 어려운 속박을 당하고 있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도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서 병원이나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할 때 기도하며 해결의 때를 기다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이가 경제적 문제로 부채를 지고 있거나 자기의 책임을 못 다한 일 때문에 부자유한 경우에도 기도로 해결할 수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니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구출을 받을 때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참인 줄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였다가 11절에서 “정신이 든 다음에야 참인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런 상태가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보거나(요 20:15), 주의 보내신 사자를 환상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엄청난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신을 차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참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은 잘 형통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사사건건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할 무렵에 나를 밖에서 집까지 태워주는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이 차를 하나님이 예비해주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인도하시는 뜻을 순간순간 깨달으십시오.

4. 기도한 교인들이 환난 날에 간절히 기도한 것은 좋았는데, 그 기도가 응답된 일에 대하여는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그 기도는 할 때만 간절하였고 기다릴 때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을 때 어린 여자를 내보낸 것도 성의가 없는 일이지만, 그가 대문을 열지 못한 채 들어와서 “베드로가 왔다” 하였을 때 “네가 미쳤다. 네가 베드로의 천사를 본 모양이다” 하고 응수하였으니, 그들이 간절히 기도한 것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그때, 그 어린 딸도 베드로가 갇힌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찾아왔으니까 분명히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문을 안 열어주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의 베드로를 “그의 천사라” 한 것은 베드로가 평안히 순교하기를 기도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타났을 때 그의 천사가 온 것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이 천사되어 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상적 전통이 떠돌아서 헤롯 왕도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천사로 여기지 않았습니까?(마 14:12) 신앙생활의 착각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간섭과 은혜를 꿈에 느끼는 것처럼 아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할 때의 간절함이 기다리는 중에도 유지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생각할 것은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구출될 때 파수꾼들이 죽었고,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베들레헴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들이 다 죽었으며, 가다라의 귀신병자가 나음을 받을 때 돼지 떼 2,000마리도 없어졌는데, 이런 것은 하나님이 특정 사건을 다른 문제들과 연계하여 통치하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2. 다니엘서 강론


제96과 다니엘의 신앙 절개 (단 1:1~16) 목록으로


1.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을 생각할 때는 우선 그가 믿음생활을 저해하는 환경에서 슬기롭게 “믿음을 지킨 승리자”란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신앙 절개”란 제목 아래 오늘의 성도들이 신앙의 핍박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구상해 보려고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슬기롭게 피하는 법도 있을 것이요, 피해도 안 될 때는 떳떳하게 생명을 포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핍박받는 성질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족 중의 한 사람인데(1:3~7) 유다 21대 왕 여호야김 3년(주전 565년, 멸망 15년 전)에 바벨론 왕이 다른 귀족 소년들과 함께 최초로 바렐론에 끌려갔는데, 왕이 유대인의 뛰어난 지식도 이용하고 또 고국에 대한 민족성 같은 것을 없애는 차원에서 이름도 벨드사살로 바꾸고 3년 동안 훈련을 시켜 왕실의 사무를 맡겼습니다. 이방 나라가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았고, 또 마음으로 섬기는 신앙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성전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나타냈지만, 성전이 없는 적국 땅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은즉 개인적 경건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교회 중심으로 합니다. 그런데 어떤 권세자가 주일을 못 지키게 하거나, 기독교인의 집회를 못 하도록 막는다면 구약의 성전이 훼파되어 없어진 것처럼 교회라는 기관도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교회는 있으나 선교활동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북도 교회가 몇 곳 있다는 것을 근년에 확인하였지만, 한동안 교회가 존재하지 못한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하여 신앙생활을 못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또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될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이방 나라에 와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실에서 왕명에 의하여 대접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인데(5절) 그 음식의 진미가 문제였습니다. 첫째는 그 진미를 바벨론의 신 “말둑”에게 제사한 다음에 가져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또 한 가지는 유대 민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하여 진미 섭취에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신앙의 직접적인 핍박에 비하면 소극적인 문제이고 도 경미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적으로 민감하였기 때문에 그런 문제까지도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2. 그래서 어찌하였습니까?

1) 뜻을 정했습니다. 안 먹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자기의 신앙 양심을 더럽게 하는 것이므로 먹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9절).

2) 그 방도로 환관장에게 “자기들에게는 진미를 주지 말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관장이 강하게 거절하지 않고 왕명으로 진미를 베풀지만 만일 진미를 안 먹으므로 얼굴이 초췌(영양실조 현상)해지면 자신에게 위험이 오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3) 그렇다고 뜻을 세운 사람이 물러서겠습니까? 얼굴이 초췌해지는 것 때문에 어렵다면 열흘 동안만 시험해 주십시오. 진미를 안 먹은 열흘 후에 초췌함이 없으면 되지 않소? 하여 허락을 받고 시행한즉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 윤택해지니까 “다니엘은 고기를 안 먹어야 윤택해집니다”하고 상부에 보고하여 감독자가 그러면 “진미와 포도주는 제하고 채식만 주라” 하여 거리끼는 시험거리를 해결한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의문되는 것은 채식만으로도 건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중들이 건강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으로 부담을 덜고 마음이 평안할 때 속을 상하면서 잘 먹는 것보다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면 더 큰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기쁨과 만족과 희망의 생활을 하면 비싼 음식을 안 먹어도 건강할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신 28:5, 롬 14:17).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저희들이 신앙의 핍박을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피할 방법이 없을 때는 죽을 각오를 하셔야 하는데, 단 3:17~18에서 그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롭게 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도 때가 안 되었을 때 피하셨고(요 7:8), 바울 사도도 피하면서 선교하셨습니다(행 9:25, 17:10). 교회나 성직자가 없다고 가상할 때, 성경을 간직하고 혼자 신앙생활하면 됩니다. 교회가 없을 때는 교회적 사명을 개인 것으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교회가 짐 지우는 부분에 대하여는 상당 부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세계에서 교회가 손해를 안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핍박자가 교회를 없애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핍박자가 “마음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인다” 하였을 때, 피할 길이 없으면 반드시 “죽어도 하나님 경외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다” 하고 생명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안 믿는다 하고 비밀리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제97과 세 사람의 신앙 (단 3:17~18) 목록으로


1.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은 하나냐(여호와는 자비하심), 미사엘(누가 하나님 될 수 있으리요), 아사랴(그를 여호와가 도우심)인데, 이들은 다니엘과 함께 최초로 포로로 끌려와서 왕궁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 유대인들의 이름을 다 고쳐서 하나냐는 사드락(당신의 명령), 미사엘은 메삭(누구나 아구와 같다)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니고의 종), 다니엘은 벨드사살(저의 생명을 지킴)고 고쳐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제 시대에 개명한 취지와 같았을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바벨론식 이름을 기뻐하였거나, 자기들끼리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상고하는 세 친구의 신앙은 다니엘을 제한 세 친구를 뜻합니다. 그들이 왕궁에서 일할 때에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90척 높이)을 두라 평지에 세워놓고 왕이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그 낙성식에 참집하게 하였고, 사회자의 명에 따라 각종 악기 소리가 나면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종 방언하는 민족들까지 전부 금신상에 절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낙성식 때 뿐 아니라 국민의례처럼 자주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인 관원 중에서 유대인 관원 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가 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로 왕에게 참소하였으니, 그 내용은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왕을 반역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넣는다”는 법령을 제정 공포한 후에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세 사람을 고발한 것입니다. 고발을 받은 왕은 분노하였지만, “이제라도 절하면 좋으나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질 것이니 어떤 신이 너희를 건지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절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극단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2. 이런 환경에서 세 친구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우선 타협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왕이 권면하는 말이고, 또 생사가 달린 일이지만 믿고 안 믿는 문제는 타협할 성질도 아니고, 생명을 걸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16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아주 강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2)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극렬히 타는 불에서도 건지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을 능력의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의지의 대상을 섬김에 있어서 후회가 있을 수 없지요.

3) 그런데 여기의 세 친구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뜻대로 행동하신다면 절대 주권자가 아닌 만큼 -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기의 뜻대로 하시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롬 11:36, 엡 1:5, 계 4:11).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아무리 신앙적인 일을 행하고 위기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주권으로 살리실 수도 있고 죽이실 수도 있으니까(삼상 2:6), 그 주권을 인정하고 -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성도일수록 자신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 사람을 불에서 구원해주시지 않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세 친구는 그것까지 내다보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을 지라도(죽는다는 뜻)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18절). 이것은 순교적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세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그리고 순교적 신앙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신앙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믿는 신앙입니다. 일반은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기적으로 창조하셨지요? 기적은 특별은총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면 그것은 특별은총입니다. 그런데 창조된 만물이 지금까지 보존된 데는 일반은총으로 적용하신 점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씨앗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나 병원에서 병 고치는 것을 이적으로 여기지 않지요? 그것이 곧 일반은총인 것입니다. 풀무 불에서 건짐 받는 것은 특별은총이고, 그대로 타죽는 것은 자연법칙이며, 일반적 통치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은총을 무시하고 표적만 찾는 자들을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2:39). 노력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복권 당첨되는 확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세계를 대부분 일반은총으로 다스리시고, 일반은총으로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일반은총의 진가를 결코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먹은 “만나”가 기적의 은총이라면, 가나안 땅에서 먹은 농산물은 일반은총에 해당하니 어느 것이 더 좋은 은혜입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귀한 신앙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1) 타협하지 않는 신앙

2)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믿는 신앙

3) 특별섭리를 믿는 신앙(롬 4:17)

4) 일반 은총에 맡기는 신앙입니다.

 

제98과 바벨론의 멸망 (단 5:1~9, 25~30) 목록으로


다니엘서 5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고 또 실제로 멸망당한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벨론 멸망의 역사와 그 의미를 아시는 것이 중요하여 “바벨론의 멸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1. “바벨론”이란 말은 노아 당시에 바벨탑을 쌓은 데서 기인된 말이고, “바벨론”은 “언어를 혼잡케 한다”는 뜻이며, 인간적 단결로 하나님을 대항한 행위인 것입니다(창 11:1~8).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벨론 제국이 계속 적그리스도와 현실주의의 모형으로 나타나고(계 16:10), 또 선민을 핍박한 나라로 실재한 것을 우선 아셔야 합니다. 바벨론 나라의 최초 창건은 주전 1,750년경에 함무라비 왕이 유프라데강 유역을 영토로 하여 창건한 후, 이족들(헷 족속, 앗수르, 엘람)의 침략으로 수난을 겪다가, 주전 1124년경에 느부갓네살 1세가 재건하였으나, 주전 698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망하였다가, 다시 주전 625년에 나보플라살 왕이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하였고, 605년에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가 43년 집권한 후 에월므로닥과 두 왕을 거쳐서 주전 539년 벨사살 왕 때 메데 파사군에게 패하여 망하게 된 것입니다.

2. 바벨론이 메데 파사군의 기습으로 망하던 날 밤에 왕이 귀인 일천명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부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해온 은, 금, 기명으로 술을 마시며, 자기들의 우상신(말둑)을 찬양하였는데, 느닷없이 왕궁 맞은편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 쓰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 일로 왕은 큰 두려움이 생겼고, 많은 박사들을 불러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게 하였으나, 그런 자가 없던 차 태후가 다니엘을 추천하여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게 한 것입니다. 왕은 그것을 해석하는 자에게 “셋째 치리자를 삼는다”고 하였습니다(16절, 첫째는 태후이고, 다음은 벨사살 왕이며, 셋째는 그 다음을 뜻함).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때에 왕의 꿈을 해석하여 인정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단 4:4~27), 또 왕 앞에 나가서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양보한 후에, 그 글자의 내용과 의미를 말한 것입니다.

1) 그런 글씨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와 권세를 받고, 교만하여 벌 받은 사실(들짐승처럼 살게 되었음, 21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된 벨사살 왕까지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찬양하므로, 인간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탓이라(22~23절)고 한 후에,

2) 그 벽에 쓴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 바르신”인데 “메네 메네”는 “끝난다”는 뜻으로 나라의 종말이 올 것을 강조하신 것이고, “데겔”은 부족하다는 뜻으로 “왕의 행동이 하나님의 평가하시는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뜻이며, “우 바르신”은(우는 접속사 and의 뜻) 베레스(나눈다)의 복수 동사로 “나뉜다”는 뜻이므로 결국 “나라는 끝나고 끝난다, 하나님의 저울에 부족함이 되었고, 메데와 파사국으로 나누어진다는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나타난 글자는 히브리어로 “미나 미나 세겔 바르신”인데 다니엘이 이 말을 아람어로 번역하여 “메네 메네 우 바르신”으로 읽었다는 주석을 보았습니다. 그 일이 있자 다니엘은 존귀를 받았지만(29절), 그날 밤으로 메데, 파사군의 침략을 받아 왕이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은 끝나게 된 것입니다.

3. 이상의 말씀에서 오늘의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이방 왕도 주관하시고(5:18) 이방 왕에게도 계시를 주시며(단 4:4~5) 이방 왕도 겸손하기를 바라셨고(20절), 또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으며(23절), 이방인 왕과 그 민족에게도 현세에서 벌을 내리신 분임을 알 수 있고, 또 그런 일들과 관련하여 다니엘을 높이시는 섭리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방인의 생활도 저울질하시거든 하물며 성도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고 하셨고(시 139:1~4), 또 “행동을 달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2:3). 매일 매일 성도의 생활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린다는 것을 생각하여 한 시도 불신앙적이거나 비생산적인 생활에 머물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바벨론 멸망이 성도에게 교훈하는 큰 의미는 ① 하나님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된다는 점입니다. 사 13:1~22을 읽어보십시오. 그 예언은 바벨론 멸망 약 200년 전의 말씀이지만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② 선민을 괴롭힌 원수를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몽둥이처럼 쓰시기도 하셨지만, 그들도 지나치게 악을 행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성도를 괴롭힌 적국을 심판하신 것이며, 또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한 것입니다. ③ 바벨론은 하나님을 등진 현실주의의 표상으로써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사 14:13~14).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말씀이 많은 중에 바벨론을 사탄의 상징으로(계 17:1~8), 또 현실주의, 물질주의의 상징으로(계 18:1~21)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역사적 멸망은 말세 심판의 예표로 계시하신 사건이요, 현실주의, 물질주의의 멸망과 성도와 교회에 승리가 있을 것을 아울러 주신 계시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바벨론이란 상징적 의미를 배격하고, 현실주의를 떠나 하나님 중심 생활을 더 잘하셔야 할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99과 말세에 필요한 말씀 (단 12:1~4) 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고 “말세에 필요한 말씀”이라고 정한 이유는 4절에서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글을 봉함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말세에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오늘날 응하고 있은즉 이 시대의 성도들이 더욱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꼭 말세에만 응할 말씀이 아니고 11:21~45에서 예언한, 또 하나의 적그리스도의 모형자인 헬라의 8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BC 175~163)가 선민을 핍박하므로 당하는 어려움과 말세의 환난을 연계하여 예언하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모형자인 바벨론의 시대가 주전 447년경에 벨사살 17년으로 끝나고, 메데 파사국의 집권이 주전 331년(다리오 3세 4년)부터 안티오쿠스 7세까지(주전 65년) 256년간 지속되다가 로마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제가 이 역사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본문 1절의 “그때”란 의미가 적그리스도가 득세하는 시기로써 1차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통치 시기로 하나님이 이 예언을 한 때(다리오 1세 원년, 11:1, 주전 521년)로부터 346년 후에 있었던 일임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다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말세에도 그와 같은 성격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아울러 예언하시고,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1. “그때에 네 민족(선민 또는 성도)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가엘”은 천사의 이름인데, 군장 중 하나, 대군 또는 천사장(단 10:13, 21, 12:1, 유 9, 계 12:7)으로 호칭된 것으로 보아 힘으로 사탄을 대적하는 군장입니다. 하나님이 큰 환난이 있을 때마다 성도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지요.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고전 10:13)…. 따라서 성도들은 환난이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또 “개국 이래 없던 환난이 있을 것이나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적그리스도가 핍박하는 시기에 현실적 구원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고, 영적 구원의 확고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책은 선택된 백성의 이름을 기록한 생명록입니다(계 3:5, 13:8, 20:15). 택한 백성은 환난 때도 믿음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두 가지 부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5:29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다”고 하셨지요. 본문 2절에서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 얻을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다”고 하신 것은 부활 후에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행 24:15). 바벨론에게 핍박 받아 죽은 성도나, 헬라의 안티오쿠스 4세에게 핍박 받아 죽은 성도나, 또 로마시대에 죽은 성도라도 다 말세에는 생명의 부활을 힘입고 믿음 지킨 자의 행위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계 22:13). 그러나 “수욕을 받고 무궁한 부끄러움을 당할 자”는 중보자의 은혜를 힘입지 못한 불신자들입니다.

4.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궁창의 빛은 태양과 별들입니다.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킨 자는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높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고 환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야광은 어두울수록 빛이 납니다. 별빛도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환난이 있을 때는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내다보고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요(롬 5:3). 성도 여러분, 환난이나 핍박에 대처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자신들을 반성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가 핍박하고 죽인다 하여도 그에게 선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선한 말씀을 하신 것처럼(딤전 6:13)…. 혹이라도 자기와 뜻이 안 맞는 경미한 일들 때문에 마음을 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만큼 환난에 적응력이 약하다는 것을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도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친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한 “궁창의 빛처럼 빛나는 대상”은 환난을 이긴 자이고, 또 여기에서 말씀한 상 받을 자는 의로운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옳게 인도하려면 먼저 자신의 옳은 행위가 넘쳐야 합니다. 이 성도는 바로 전도자이고, 교육자이며, 사랑과 실천의 본을 보이는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세에 필요한 말씀은 “말세에 있을 핍박이나 환난을 하나님 곧 미가엘 천사의 능력을 힘입어 슬기롭게 이기고 자신도 옳게 살면서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일에 힘쓰라”는 교훈입니다.

 

13. 입성, 은사, 피에 대한 말씀


제100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목록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제목으로 성경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애에서 예루살렘 도성에 몇 번이나 가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세 번 가셨다고도 하고, 혹 어떤 이는 다섯 번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 그 문제로 성경을 살피신 일이 있습니까? 또 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에 몇 차례를 올라가셨는지 그 회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행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성의가 중요한 것이지요. 여러분,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여(창 5:22, 6:9) 큰 복 받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에녹은 산 채로 승천하였고, 최장수 아들 므두셀라(969세, 조부 야렛은 962세, 에녹은 365세)를 두었으며, 노아는 홍수 심판을 면하였으니,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도 동행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말씀 사랑과 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연구나 예루살렘 입성 연구도 그런 취지에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예수님의 입성은 눅 2:22에서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셨습니다. 할례 할 8일이란 레 12:3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여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계시다가 20리 상간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할례 한 후 적당한 시기에 애굽으로 피난을 가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사(마 2:7~18)를 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찾으므로(13~14절) 요셉과 마리아가 대단히 급히 움직인 것 같으나 그 당시는 정보가 빠르지 못한 시대이므로 상당 기간 여유 있게 애굽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그 지경 안에 있는 2세 미만의 남자를 죽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마 2:16).

2. 두 번째는 예수님 12세 때에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눅 2:42~47). 그때에 예수님은 성전에 3일간 머물러 계시면서 선생들과 성경 문답을 하셨고, 그 부모는 예수님이 나사렛 동리 사람들과 예루살렘을 떠나신 줄 알고 미리 출발하였다가 다시 성전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등불처럼 항상 앞에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시 119:105).

3. 세 번째는 공생애 시작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마 4:5에 보시면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고 하였으니, 이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호려서 끌고 다닌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4:1) 시험을 받으시는 과정에 예루살렘 성전 답사와 그 건물의 웅장함을 보시는 차원에서 성전 꼭대기까지 올라가신 것이고, 마귀는 그때에 예수님의 마음에 명예적 영웅심을 불어넣으려 한 것입니다(6절).

4. 눅 13:22에서 “전도 여행 차” 예루살렘에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하신 후 계속 교훈의 내용만 나오다가 눅 17:11에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셨고, 그때에 문둥병을 고치신 일이 있었으니, 이 사실을 먼저 전도 여행 차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가 돌아오신 후 다시 가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사실이 누가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마지막 가시는 길이 되겠지만 다른 복음서에 또 가신 일이 있는 만큼, 그때의 여정이 마지막인지 중간인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전도 여행 차 가신 것과 절기 행사 때문에 가신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5. 다섯 번째는 유월절 명절 때 가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 2:13과 4:45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가셔서 “니고데모”와 거듭 나는 대화를 하셨고, 1차로 성전 청결을 하셨지요. 그리고 요 4:3과 45절에서 갈릴리로 오신 기사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절기 차 상경하신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6. 여섯 번째는 유대인 명절에 가신 것입니다. 요 5:1에서 “유대인 명절(유월절일 듯)에 가셔서 “베데스다” 연못에도 가셨고, 그곳에서 38년 된 병자도 고치셨지요. 그리고 6:1에 갈릴리 기사가 나오니까 다시 지방으로 오신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요 7:14에 보시면 “그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셨다” 하였고, 그 명절 끝에 감람산에도 가셨습니다(요 7:37, 8:1).

7. 일곱 번째는 수전절(성전 수리를 기념하는 절기)에 가셨습니다. 이 사실은 요 10:22~23에 기록되었으므로 요한이 기록한 그 이전의 기록과 다른 행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 10:40에서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습니다.

8. 여덟 번째가 마지막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 기록은 마 21:1~11, 막 11:1~10, 눅 19:28~41, 요 11:1, 12:1~15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때에 2차 성전 청결이 있었고, 예루살렘에 한 주간 이상 거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제101과 은혜와 은사에 대한 이해 (롬 12:3~8, 고전 7:7) 목록으로


어떤 성도와 잠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성도가 “기도에 끌리는 은혜를 받았고, 또 자신이 전도를 하면 전도가 잘 되어 여전도회 회장도 하고, 교회를 섬겼는데 목사님에게는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소식이 들어가서 목사님과 갈등이 생겨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도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를 받았다 하거나 무슨 체험을 하였다거나 혹은 기도의 힘을 받아 병을 고친다” 하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어지럽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목사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 성도(권사 또는 장로)를 관찰하게 되는데, 혹 성경과 모순 된 방법을 선전하지는 않는가?,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는가?(무질서에 해당함), 더 나가서는 자신이 받은 은사만 최고로 알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은 기도도 적게 하고 영적 은혜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여기거나, 선전을 하여 목회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은혜와 은사에 대한 이해”란 제목으로 말씀드릴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잘 배우면 모든 부조리한 문제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선 성도가 은혜를 받는 과정이 여러 가지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은혜란 원 뜻은 선물이지만, 성도가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끌려 가까이 나가거나, 말씀을 깨닫고 나가거나, 회개의 체험을 하고 나가거나…. 여하튼 “믿음으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평범하게 전도를 받고, 믿을 마음이 생겨서 교회에 나가고,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제도에 따라 말없이 평범하게 믿는 성도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중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열심을 내고 노력을 하여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였던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체험을 하였거나 안 하였거나, 믿고 구원 받는 일과 얼마나 이웃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평범한 방법(동생의 전도)으로 예수님을 알고 따르다가 고기 잡는 이적과 오순절 성령 충만을 체험하였고, 빌립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보시는 능력에 감동하여 믿게 되었으며, 에디오피아 내시나 고넬료의 가족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음의 충격으로 은혜를 받았고, 바울은 예수님을 증오하였으나 성령님의 일방적 역사에 의하여 변화되었으며, 루디아는 바울의 전도를 들었을 때 성령님의 청종하게 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는 이슬비처럼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경우도 있고, 뇌성벽력과 함께 소낙비처럼 접근하는 경우가 있음을 아시고, 은혜 받은 자신이 “그 은혜에 의지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잘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사”는 사명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주시는 재간인데, 이것이 받는 자의 소원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구 서문교회의 어떤 장로님이 “수천 명을 전도하였다”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는 사람이 다 그대로 전도한다면 부흥 안 될 교회가 없겠지만, 그런 은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롬 12:6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다” 하셨고, 또 고전 7:7에서도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말씀의 사도가 되면 좋지만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하셨고, 또 “이 은사는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고 하셨습니다. 은사의 종류는 직분(목사, 장로, 집사, 주교사 등)도 있고, 사역의 재능(설교, 기도, 전도, 정치, 구제, 방언, 병 고침 등)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음을 갖게 된 경위와 체험을 기억하면서 특히 받은 은사에 대한 것을 잘 점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은사에 대한 이해와 활용에 대한 것입니다.

1)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은사는 여러 가지인데, 이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에게 덕을 세움에 유기적으로 관련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몸과 지체로 비유하셨습니다. 다 필요하고, 다 중요한데 각각 일하는 몫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직분이 많지만 다 일하는 몫이 다르니까 누가 누구를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부덕한 일이 나타나도 깨닫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잘 이해하고 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활용에 대한 것인데 “분수에 알맞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장하거나 부추기지도 말고, 적당하게 받은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롬 12:3에 보시면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고, 고전 7:20에서도 “주께서 나눠주신 대로…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하셨으며, 벧전 4:10에서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은혜와 은사는 받는 과정과 종류가 다르지만,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주신 것이란 점과,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협력할 때 좋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음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02과 식물(食物)과 피 (창 9:3~6, 딤전 4:3~4) 목록으로


“식물과 피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살피는 동기는 성도들 중에 “피를 막 먹어도 됩니까?” 하고 질문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우상의 제물이나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어도 됩니까?”(고전 10:19, 행 21:25) 한 질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최초 인류에게 식물성만 먹게 하셨다가(창 1:29, 명을 거역하고 고기를 먹었는지는 알지 못함) 홍수에서 건짐 받은 노아 시대부터 동물성 식물도 먹게 하셨습니다. 노아 당시에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있었지만, 새와 곤충에 대하여는 정하고 부정한 것을 거론하시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에 넣을 때 정한 것, 부정한 것을 7:2의 비율로 넣었는데(창 7:2, 8), 창 9:3~6에서 “무릇 산 동물은 너희 식물이 된다. 채소처럼 다 너희에게 준다” 하시므로 정, 부정의 가림이 없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피가 곧 생명(육체의 생명)이란 것은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신 12:23~25, 창 9:5, 레 17:11~14). 그리고 창 9:5에서 “피를 먹지 말라” 하신 이유로 “피로 준 생명을 다시 찾을 것인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같다” 하셨으니, 이 뜻은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구별하는 뜻과 죄 값이든(인생) 아니든(짐승) 한 번 죽게 하시는 뜻(히 9:27)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주의 것인즉 구별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하신 줄 압니다. 또 6절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죽인 것인즉) 사람이 그의 피를 흘려 보복할 것이라” 하시므로, 인간이 고등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인 것과 생명과 피를 함께 소중히 여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런데 출애굽 때에 와서 “기름과 함께 피를 먹지 말 것”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레 3:17, 19:26). 요즘도 지방 제거 수단으로 고기에서 기름을 뜯어내지요. 하나님이 피만 금하신 것이 아니라 기름도 함께 금하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피를 먹지 말라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생명의 주(행 3:15)가 하나님이신 것을 구별하는 뜻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피(제물의 피)가 제물로서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고, 장차 예수님의 생명(보혈)을 하나님이 속죄의 제물로 받으셔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득의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인즉 그것을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모든 것의 피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의미와 “예수님의 보혈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구별하여 식물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더 푸셔야 할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말씀한 정한 것과 부정한 고기에 관한 것입니다. “새김질하고 쪽 발 있는 것과 비늘이 있는 것은 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하다” 하여 먹지 않게 한 것입니다. 왜 이런 구별을 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와 불법을 가리는 판단의 습관을 주시기 위한 연단이고, 또 한 가지는 위생상 더럽거나 생명이 모질거나 하여 주의를 요하는 것들을 구별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구별하면서, 지킬 것과 금할 계명도 구별한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은 다 율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효력이 끝나는 때에는 당연히 무효하겠지요(롬 10:4, 마 11:12).

3. 신약 시대에는 “피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셔야 할까요? 의학적인 면에서 피가 생명임은 사실이고, 또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도 사실입니다. 행 3:15의 “생명의 주”란 단지 육체의 생명만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주란 뜻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주신 모든 계명의 효력은 피에 관한 것이나, 식물 등에 관한 것, 그리고 의식에 관한 것까지 다 폐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골 2:16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 월삭, 안식일 등에 대하여도 폄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의 상징이라고 하였지요. 하나님이 인간의 죄값으로 그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는 성도가 그것을 구별하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보혈(영원한 생명)을 드린 후에는 상징적 의미가 다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별된 취급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의 대가로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행 20:28; 피로 사신 교회).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피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15:20, 21:25에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말씀은 율법을 모르던 이방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으로 돌아올 때 급변하지 못하는 상태를 단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지막에 기록하신 딤전 4:3~4을 보십시오.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요…모든 것이 선하매…버릴 것이 없다” 하셨고, 예수님도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하셨으며(막 7:19), 또 바울 사도는 “식물은 배를 위함이라”(고전 6:13) 하시므로 먹는 것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습니다(성찬은 제외함). 우상의 제물을 믿음으로 해결하나(고전 8:4~6) 믿음이 부족할 때는 양심을 인하여 제재를 받는 것처럼(고전 8:7, 13) 피를 먹는 문제(수혈도 같음)도 진리를 깨닫는 믿음으로 해방되며, 이것이 부족한 사람은 양심을 인하여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 21:25).

 

제103과 살과 피를 먹는 의미 (요 6:49~58) 목록으로


5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르시되…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하셨고, 55~57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권위에 집착되어 있으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또 믿음이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아는 것은 모세 율법의 권위와 그것을 지키는 것뿐이요, 영이 살고, 메시야를 영접하며, 메시야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부활, 영생하는 일에 대하여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였습니다. 구약 성경이 메시야를 약속하셨지만, 그 메시야가 예수님으로 나타날 것을 상상하지 못하였고, 또 희생의 제물을 자주 드리면서도 그 희생물이 중보자 메시야의 희생을 예표한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하였으며, 또 약속된 메시야가 오셔서 자신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일에 대하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무지는 진리 앞에 장벽을 만듭니다. 그들은 또 하나님이 선택하여 이끌어주셔야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실과(요 6:44) “구약을 깨닫는 기본 지식이 있을 때 주님 앞으로 올 수 있다”는 사실에도 무지로 일관되어 있었으니(요 6:45) 예수님이 그 장벽을 뚫고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메시야를 믿고 영접하는 뜻이 무엇임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과 믿음을 설명하실 때 어떤 비유를 드셨습니까? 의원의 비유(마 9:12)와 목자의 비유를 드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10:2, 11). 병자는 의원이 아니면 살릴 수 없고, 양은 목자의 보호가 아니면 맹수의 위험에서 역시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원이나 목자는 죽음(심판)을 면하고 생명(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내는데 적절하였던 것입니다.

1) 그런 취지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실 때 예수님 자신을 생수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고, 사람이 사는 데 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은즉 생명이신 예수님을 물(계속 나오는 생수)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들이 출애굽 할 때 모세가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서 백성들을 먹이고 살린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 예수님이 생수 되심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마 21:42~44, 고전 10:4). 물이 모든 생물을 살리는 것처럼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41, 48절). 생명의 떡이 예수님 자신임을 알리시기 위하여 “산 떡”(살아있는 떡)이라고까지 하셨지요(51절). 그 당시에 많은 백성들은 양식에 주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먹는 것”은 이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표적을 보는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하셨으니(요 6:26), 양식 또한 물처럼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6:33, 48)고 하신 것입니다. 또 생수에 대한 말씀이 반석의 물에 근거한 것처럼 떡에 대한 말씀도 구약의 “만나”에 근거할 수 있습니다(출 16:4~15). “만나”가 육신의 양식(썩는 양식)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 당시에 그 양식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나”는 예수님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계 2:17).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셨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였습니다. 모세는 조상들에게 40년이나 만나를 먹게 하였는데, 겨우 포도주 이적 한 번과 5병2어 이적 한 번(7병2어는 그 다음에 시행하였음) 행한 사람을 모세보다 귀하게 볼 수 있겠는가? 하여, 수근거리고 다투기까지 하였으니(6:41~43, 52),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데 그만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오셨다” 한즉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42절) 하고 믿지 않았고, 제자가 되었던 자들도 떨어져나간 것을 보면(66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하는 설명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더 가깝게 비유하셨습니다. 피와 살은 예수님 자신을 뜻합니다. 피는 살 속에 있고, 피 없는 살은 썩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와 살”은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하나로 여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뜻은 생수나 떡을 먹음과 같은 것이요, 이 내용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자신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7절에서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한다” 하셨으니,.믿음(먹는 뜻)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이요,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시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시고 연합하는 일은 하나님과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요 3:3, 6:44, 65). 성령임의 역사로 믿는 자는 이 진리를 부인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6:6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