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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Ⅶ)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1. 초신자 필수 지식 9


제1과 종교에 대한 견해 (행 17:22~31) 9 바로가기

제2과 종교에 대한 묵상 (롬 1:20) 11 바로가기

제3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히 3:14) 13 바로가기

제4과 기독교를 신봉하는 목적 (고전 10:31) 15 바로가기

제5과 초신자의 교회생활 (롬 12:1~21) 17 바로가기

제6과 교회생활의 병폐 (엡 5:27, 히 12:15) 19 바로가기


2. 신앙의 본질 문제 21


제7과 신앙인의 현주소 (창 3:7~11) 21 바로가기

제8과 성경의 본질적 의미 (왕상 19:11~13, 행 20:32) 23 바로가기

제9과 영적 축복의 원리 (눅 13:18~30) 25 바로가기

제10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미 6:8) 27 바로가기

제11과 성도의 여섯 가지 미덕 (살전 1:2~7) 29 바로가기

제12과 네 가지 유의할 일 (히 12:14~17) 31 바로가기

제13과 구원을 이루라 (빌 2:12~13) 33 바로가기


3. 하나님에 대한 지식 35


제14과 하나님을 알자 (호 6:3~6) 35 바로가기

제15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마 28:20) 37 바로가기

제16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 (렘 5:1, 겔 34:11~12) 39 바로가기

제17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살후 1:6~9, 요 3:16) 41 바로가기

제18과 무엇을 배울까요 (마 28:20) 43 바로가기

제19과 성경 박사 (행 18:24~26) 45 바로가기


4. 믿음 성숙에 대한 말씀 47


제20과 믿음에 집중하라 (마 22:37~40) 47 바로가기

제21과 영혼을 소성케 함(시 19:7~11) 49 바로가기

제22과 말씀을 얻어먹음 (렘 15:16) 51 바로가기

제23과 양보 못할 것 세 가지 (마 9:14~15) 53 바로가기

제24과 독자적 삶 (요 21:18~22) 55 바로가기

제25과 믿음 생활의 과정과 목표 (엡 4:13~14) 57 바로가기

제26과 은혜와 노력 (마 11:12) 59 바로가기

제27과 은혜 받는 과정 (왕하 7:3~8) 61 바로가기

제28과 믿음의 문답 (히 11:1~3) 63 바로가기

제29과 예수님을 보라 (사 42:1~4) 65 바로가기

제30과 은혜 받은 증거 (시 86:17) 67 바로가기

제31과 의인에 대한 지식 (겔 18:5~9) 69 바로가기

제32과 믿음의 분량 (롬 12:3, 고후 10:13) 71 바로가기

제33과 전진의 원리 (딤전 4:15, 히 10:38) 73 바로가기

제34과 거룩함에 흠이 없음 (살전 3:13) 75 바로가기

제35과 연약한 인생의 대책 (시 39:1~7) 77 바로가기

제36과 불안과 대책 (시 42:5) 79 바로가기

제37과 발람의 사건이 주는 교훈 (민 25:1~9) 81 바로가기

제38과 마귀를 대적하라 (벧전 5:8~9) 83 바로가기


5. 신앙생활 적응에 대한 말씀 85


제39과 섭리 의존 (마 24:20) 85 바로가기

제40과 물 같은 신앙 생활 (사 41:17~20) 87 바로가기

제41과 교회생활, 개인생활 (살전 5:12~22) 89 바로가기

제42과 사랑 실천에 대하여 (요일 4:7~12) 91 바로가기

제43과 적당하고 질서 있게 (고전 14:40) 93 바로가기

제44과 규모 있는 생활 (살후 3:6) 95 바로가기

제45과 개인 신앙생활 확립 (창 28:10~22) 97 바로가기

제46과 이 세대를 본 받지 말 것 (롬 12:1~2) 99 바로가기

제47과 성도의 일반적 생활 (약 4:6~10) 101 바로가기

제48과 세월을 아끼라 (엡 5:16) 103 바로가기

제49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 41:8~10) 105 바로가기

제50과 염려 해결책 (빌 4:6~7, 벧전 5:7) 107 바로가기

제51과 짐을 더는 법 (마 11:28~30) 109 바로가기

 

 

 

6. 복에 관한 말씀 111


제52과 주님과 동거 동행 (창 5:21, 요 14:23) 111 바로가기

제53과 믿음생활의 모범자들 (요 8:39~40) 113 바로가기

제54과 다섯 가지 은혜 (고후 8:1~5) 115 바로가기

제55과 복 있는 사람 (시 33:12~22) 117 바로가기

제56과 아버지의 사랑 (요일 2:15, 눅 15:11~24) 119 바로가기

제57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자 (사 64:1~7, 66:2) 121 바로가기


7. 기도와 교리적 내용 123


제58과 예레미야의 기도와 응답 (렘 12:1~17) 123 바로가기

제59과 가뭄의 기도와 응답 (렘 14:1~22) 125 바로가기

제60과 하박국서의 감동 (합 3:1~9) 127 바로가기

제61과 바울의 기도 (살전 3:10~13) 129 바로가기

제62과 항상 기도하는 문제 (살전 5:17) 131 바로가기

제63과 율법의 시대적 적용 (마 5:17~18, 11:13~14) 133 바로가기

제64과 죄와 율법 (롬 7:1) 135 바로가기

제65과 십일조와 헌금 지식 (말 3:8~12, 막 12:41~44) 137 바로가기

제66과 안식일과 주일 (사 58:13~14) 139 바로가기

제67과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답 (마 12:1~8) 141 바로가기

제68과 구원을 이루는 문제 (빌 2:12) 143 바로가기


8. 전도, 부흥에 관련된 말씀 145


제69과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 10:12) 145 바로가기

제70과 에스라의 회개 운동 (라 10:1~12) 147 바로가기

제71과 교회의 터 (고전 3:10~11) 149 바로가기

제72과 작은 일의 날 (슥 4:10) 151 바로가기

제73과 전도 원리 (요 1:33~37, 4:25~29) 153 바로가기

제74과 전도의 방편 (살전 1:1~10) 155 바로가기

제75과 덕을 세우기 위함 (고후 12:19~21) 157 바로가기

제76과 연보 모금 정책 (고후 9:1~5) 159 바로가기

제77과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엡 5:10) 161 바로가기

제78과 큰 양보 두 가지 (행 20:33~35) 163 바로가기

제79과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4:12~13) 165 바로가기


9. 성경의 부분 강론 167


제80과 에스라서 (라 1:1~4, 7:6~10) 167 바로가기

제81과 에스라의 사역 (라 7:27~28) 169 바로가기

제82과 성곽 준공과 성회 (느 8:1~12) 171 바로가기

제83과 느헤미야의 재건 사역 (느 8;10~18) 173 바로가기

제84과 에스더서의 핵심 (더 4:13~17) 175 바로가기

제85과 이같이 말씀하시되(1) (렘 6:16~19) 177 바로가기

제86과 이같이 말씀하시되(2) (렘 9:23~24) 179 바로가기

제87과 유다의 죄와 멸망 예고 (렘 13:1~27) 181 바로가기

제88과 소행대로 벌주심 (호 12:1~6, 12~14) 183 바로가기

제89과 호세아의 비유 말씀 (호 2:5~7, 12:10) 185 바로가기

제90과 요엘서의 핵심 (욜 2:15~17) 187 바로가기

제91과 정의를 하수같이 (암 5:21~27) 189 바로가기

제92과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암 8:11~13) 191 바로가기

제93과 요나서 학습 (욘 1:1~10) 193 바로가기

제94과 니느웨와 요나 (욘 1:1~3) 195 바로가기

제95과 미가서의 대략 (미 1:1~7) 197 바로가기

제96과 성전 재건의 역사(役事) (학 2:6~9) 199 바로가기

제97과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10) 201 바로가기

제98과 말라기서의 대략 (말 4:1~6) 203 바로가기


10. 절기(신년, 부활, 가정, 감사, 성탄) 설교 205


제99과 새 출발하는 마음 (히 3:14) 205 바로가기

제100과 부활과 교훈 (요 11:25~26) 207 바로가기

제101과 자녀 교육에 대한 반성 (신 6:5~9) 209 바로가기

제102과 효에 대한 교훈 (엡 6:1~3) 211 바로가기

제103과 감사할 근거 (살전 5:18) 213 바로가기

제104과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6~16) 215 바로가기

제105과 성탄의 본질 (갈 4:1~11) 217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수년 전에 7분 설교 6집의 정리를 끝낸 후 7집까지만 정리하기로 결심한 일이 있었는데 2003년 2월 18일에 집필을 끝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날은 저의 결혼 38년째 되는 날입니다.

그 동안 이사야서와 호세아서 등을 아울러 집필하면서 지금도 많은 교정 문건들이 적재된 상황입니다. 앞으로는 교정건과 일반설교문 요약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본서인 7분 설교 7집이 나중에 집필된 것이어서 신앙생활의 원리를 더 낫게 요약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설교자들이나 평신도님들에게 유익이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몇편의 설교는 구약의 짧은 성경들을 요약한 것도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의 실천이 잘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2003. 2. 18.


저자 지 영 근

 

1. 초신자 필수 지식


제1과 종교에 대한 견해 (행 17:22~31) 목록으로


필자가 “종교에 대한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종교의 정황을 잘 알기 때문에 증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본질과 대조해보고 기독교의 정통신앙의 긍지를 갖게 하는데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1. 종교란 인간이 연약한 상태에서 더 큰 능력 있는 대상을 알고 의지하며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연약을 규정함에 있어서 현실적인 연약만 믿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를 갖는 이도 있고, 또 죄에 대한 심판과 영혼의 미래를 위하여 내세관을 갖고 신봉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하며, 도덕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도 그렇고, 영혼 자체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종교가 현실을 그 한계로 하지만, 기독교는 현세와 내세에 대한 문제를 다 의존하는 종교입니다. 종교는 종류가 많고, 그 활동범위와 목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2. 인간이 종교를 갖는 목적은 생활 중에 느끼는 모든 위험과 연약에 대하여 위로, 보호, 인도를 받고, 나아가서는 영생문제까지 해결하려는데 있다할 것입니다.

3. 인류가 신봉하는 모든 종교는 그 출처 또는 신봉하는 대상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절대적 유일신은 하나님뿐입니다(사 45:5, 고전 7:4).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원인사역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아 믿게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도교인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자기의 결심이 의지의 역할로 나타나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선택과 중생과 소명과 믿음주시는 은혜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특성은 창조자 및 절대 신에 대한 신봉이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피동적 믿음이며, 현세와 영원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기에서 절대 신이 아닌 대상을 신봉하는 종교는 다 일반종교에 해당합니다.

4. 절대 신이 아니면 잡신입니다(시 86:8). 어떤 사람이 정신수양(기도 또는 도를 추구함)을 하거나 평범한 생활 중에 어떤 계시를 받고 거기에 근거하여 경전을 만들고 종교를 창시한 경우가 있습니다. 코란경과 같은 잡신에 의한 종교, 또는 특정한 경전은 없지만 순간적으로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무속종교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잡신들과 관련된 종교입니다. 절대 유일신은 창조자요, 섭리자이며, 심판자이시지만 그 이외의 잡신들은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5. 자연신을 믿는 토속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신비와 웅장성에 압도되어 태양신, 산신, 목신, 용왕신 등의 이름을 붙이고, 그 외에도 동물을 숭상하는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자연신 또는 서물 숭배 종교입니다. 과연 자연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을 줄 수 있을까요? 또 참 신이 아닌 잡신들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6. 인간의 사상과 지식의 소산을 숭상하는 종교가 있으니, 여기의 특징은 신을 배제하고 인간의 지식과 합리적 논리를 종교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대상은 인간의 지식, 사상, 최고의 도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곧 철학입니다. 철학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의 지식만 최고의 의존대상으로 여깁니다. 또 사상을 중심한 종교라면 정치적 이념을 들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이라면 군주정치, 공산주의, 민주주의를 들 수 있는데, 군주정치나 공산주의는 역사적 검증에 의하여 퇴색되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현재도 우상 시 되고는 있지만 인간의 지나친 자유 옹호가 타락성을 묵인할 때는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7.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음을 주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석가모니는 어떤 신에 의하여 좋은 인격이 된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과 극기 등으로 선한 인격이 되어 사회를 빛내고자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인즉 그것이 무흠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느 종교이건 영혼의 창조자와 신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내세와 영원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8. 종교에 대한 견해를 종합적으로 말씀드리면, 절대 유일신 종교와 일반종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 또는 사이비 종교가 있다 할 것입니다.

1) 기독교 유일신 종교는 절대 신 하나님에 근거한 종교, 곧 성경에 의한 피동적(섭리) 종교로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으며, 현세와 내세(영혼)를 포괄하는 종교이고

2) 일반종교는 절대 유일신이 아닌 잡신을 숭상하거나 자연신, 또는 서물 숭배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고, 또 인간의 지식이나 사상과 전통을 종교처럼 숭상하는 것입니다. 일반종교를 신봉하는 목적은 대부분 현실적 기복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3) 기독교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는 모두가 성경의 뜻을 곡해하거나 인위적으로 이용하는 잘못된 종교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에 의한 참 종교가 아니면 인생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과 종교에 대한 묵상 (롬 1:20) 목록으로


종교에 대한 견해를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또 이 글을 읽으신다면 초신자님들의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질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자연계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다”는 말씀이므로 인간이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자 되심과 섭리자 되심을 알 수 있고, 또 인간 자신들도 그분의 피조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면(호 14:9) 그것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연 그 자체가 피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자를 모르니까 인격적 영장인이 무인격인 자연을 숭배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1. 종교에 대한 것을 묵상할 때 종교란 정의는 인간이 보다 나은 것을 숭상하는 행위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의 결실이 없더라도 마음에 끌리거나 그것이 없이는 일보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종교성을 가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주, 궁합 같은 것은 종교의 틀은 없지만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는 혼인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2. 종교의 출처를 생각할 때

1) 사람이 만든 종교(유교, 불교, 사상, 철학)가 있고,

2) 사람이 어떤 신의 계시를 받았다 하면서 만든 종교가 있으며(잡신 종교, 무속 또는 사이비 종교),

3) 절대 신의 일방적 사역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있으니 기독교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 계시의 틀을 가감할 수 없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계 22:18~19).

3. 종교의 대상은 여러 대상이 있습니다.

1) 신 중에는 절대 신 하나님이 계시고,

2) 그 다음에 절대 신이 아닌 존재로써 소위 영물이라 할 수 있는 잡신(귀신, 마귀)의 세계가 있으며(마 12:45),

3) 인간을 신격화하는 사례가 있고(단 3:5),

4) 인간이 만든 사상과 교리를 종교 대상으로 숭상하는 경우가 있으니 자신이나 또는 많은 종교인들이 그 대상을 어디에 두는지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런데 또 한 가지 경이로운 것은 자연이나 서물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태양이나 바위나 나무 앞에 절하는 사람(물론 그 속에 신이 있다고 믿지만), 또 코끼리나 소를 신으로 여기는 사람, 그 외에도 뱀이나 쥐나 여러 가지를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이 어디나 다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산신, 용왕 신이 있는가 하면 주당 신(집안에 있는 신), 장독 신(간장, 된장),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있다고 믿어서, 그 곳에 고사를 드리는 일이 있지요. 요즈음은 급사하는 병을 고혈압으로 진단하지만, 옛날에는 그것을 몰랐으니까 혹 화장실에 가서 죽었을 때는 그곳의 귀신이 잡아간 줄 알고 그곳에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절대 신 하나님도 무소부재 하시지만 잡신들도 여기저기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욥 1:7). 그런데 인간의 착각으로 없는 신을 있는 것처럼 믿거나, 무인격한 물건이나 동물을 인간보다 나은 존재로 믿고 숭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요.

4. 인간이 종교를 접근할 때

1) 신적 섭리나 인도에 의하여 접근되는 경우와 자신의 의지적 선택으로 접근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구원 계획과 선택과 작정하신 때에 거듭나는 은혜를 주셔서 이끌려가게 하시는 것이고, 또 무속종교의 교주도 자기의 소원이나 의지가 없이 잡신의 역할로 무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2)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일반 종교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구와 선택 의지로 종교를 신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교, 불교, 기타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 또는 철학을 종교로 신봉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5. 종교의 동기와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의 동기는 대부분 인간의 취약점에서 발단합니다. 특히 자연 조건이 안 좋아져서 피해를 보는 경우에 자연신을 의지하게 되고, 질병이 있어 고치기 어려울 때, 주위에 있다는 잡신들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죄를 범한 인간이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여 심판자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실현될 수 없고,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야만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종교 접근의 동기는 모든 인간이 연약함을 느껴 큰 것을 의지하려는 종교성에서 비롯되었고 그 연약의 범위를 현실과 육체에 둔다면 그것은 현실적 종교이고, 현실 문제와 내세(영생 구원) 문제를 아울러 의지하는 목적을 가진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신에 의존함이 없는 종교는 내세에 희망을 둘 수 없겠지요. 그러나 어떤 종교는 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내세가 있는 듯이 장례 의식을 치르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모순이라 할 것입니다. 저승사자 또는 잡신이 사람의 영혼을 저승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허무한 구상입니다(행 17:26).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여 철학의 학문이 넓어지고 과학이 발달하지만, 사람 사는 세계는 점점 힘들어집니다. 보이는 것은 낡아지는 것인즉 지구도 낡아집니다. 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이 종말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특징은 절대 신에 의한 종교로써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인도로 믿게되며, 현실 문제(육체)와 내세 문제(영혼)를 아울러 해결하는 영원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제3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히 3:14)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종교’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종교 중 기독교만 으뜸 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절대 종교인 이유는 절대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믿게 되며, 또 현실과 내세 문제를 절대자의 은혜로 해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를 처음 접한 초신자가 우선 알아야 할 지식이 무엇일까요?

1.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된 동기와 힘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믿고 싶어서 내 힘으로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하나님이 믿도록 감동하셔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행 13:48, 고전 12:3, 요 17:9). 인간의 자유 의지를 최고의 힘으로 아는 종교인들은 신의 섭리나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 자신의 지혜를 종교 활동의 근본적 힘으로 여기지만, 신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신적 역할로 믿고 종교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미개인에게 문화인이 접근하면 미개인들이 가까이 오지 않지만, 혹 가까이 오는 사람은 “문화인이 자기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을 갖고 옵니다. 이것은 새가 사람의 손바닥에 있는 모이를 먹으러 오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믿은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하여, 때가 되매 성령님의 역사로 믿을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나타난 사실이란 것입니다(살후 1:10, 요 3:3, 고전 12:3). 이것은 지식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인간의 지식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사실은 나중에 성경을 배우시면서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을 운명이라 하는 것처럼 인간이 믿음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2.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 또는 기독교 신앙의 경전으로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절대자 신으로 믿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의 뜻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뜻을 말씀으로 나타내셔서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벧후 1:21)으로 인간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하신 만큼 기독교인은 성경을 믿음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사이비한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왜 성경 66권만 진리가 되느냐? 또 성경 내용이 정확 무오하게 보존된 것을 어떻게 믿느냐? 지금은 왜 말씀을 안 주시느냐? 등등 이유를 붙이고 의문을 갖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존재를 반드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기 전에 믿거나 증명하기 전에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경의 출처와 성경이 진리 되는 이유는 차차 배우게 될 것입니다. 고후 13:8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오직 진리(성경)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의 생활과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기독교의 특성 몇 가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성경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음과 생활의 지침이고, 더 나아가서는 심판의 척도도 됩니다.

2) 교회기관을 통하여 기독교적 사명과 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사명이라면 진리를 보존하고 해석하며 전파하는 사명이 있고, 기독교적 생활에는 예배와 성도의 친교와 사랑 실천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 사람의 힘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단체를 통하여 이루어 나가도록 뜻을 베푸신 것입니다.

3) 겉치레(의식, 제도, 시설)를 중요시하지 않고 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예수님은 초라한 외모로 생활하셨습니다(사 53:2~3). 요즈음 돈이 흔해지면서 성직자의 의복에서부터 예배당 치장에 이르기까지 눈부실 만큼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골방이나 마당에서 예배드려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사랑을 실천한 종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생활목표는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바른 면모를 나타내지 못하는 많은 교회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다같이 반성하면서 기독교의 특성을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과 기독교를 신봉하는 목적 (고전 10:31) 목록으로


초신자가 신앙생활 또는 교회생활을 할 때 자신이 기독교를 신봉하는 목적에 대하여 바른 이해와 바른 목표를 갖지 못하면 교회의 생활문화 또는 전통에 말려들어서 진정한 목적을 배우기 전에 이차적인 목적으로 이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을 믿음생활 하면서도 바른 목적을 고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필자가 이 글을 쓸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술로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다가 마지막 수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병을 고치고자 하였을 때, 그 방법으로 병을 고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요, 그 이외에도 자기의 소원 성취를 목적으로 믿음생활을 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자체가 인간 중심의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계획, 하나님 영광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혹 처음에는 모르고,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시작하였을지라도 속히 깨닫고 그 목적을 하나님 중심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또는 사이비 종교)는 대부분 자기중심이나 현실주의와 기복에 목적을 둡니다.

1. 예수 믿는 목적을 옳게 아는 성도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의 조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보다 더 원천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자신의 피조성을 아는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이 타락한 존재란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긍휼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은 곧 무지무능입니다. 무지무능 때문에 원치 않는 죄를 짓고 불행을 자초하지 않습니까? 무능한 자신이 어떻게 행복해지는 방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복해지는 방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지도 받아야 하고, 오직 그 지도에 순종할 자세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이 기독교 종교를 신봉하게 된 원인과 경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목적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그 집을 지음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도 목적이 있으십니다(시 37:39, 히 2:10). 따라서 피조물은 목적을 창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일반통치와 특별통치로 나누어 다스리십니다. 특별통치에서 제외된 모든 피조물들은 다 일반통치의 대상이고, 특별통치의 대상은 선택받은 성도들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으나”(딤전 2:4), 구원을 계획하실 때는 선택하여 작정하신 자만 구원하셨습니다(행 13:48). 그렇게 하신 데는 하나님으로서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땅 1만평 가진 주인이 100평만 떼어서 집터를 삼고 나머지는 후원으로 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계획 아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역시 믿는 목적이 성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구원 사역을 실행하셨을까요? 기독교를 신봉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예수님뿐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자녀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를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요 1:12, 시 2:7). 따라서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잘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그 자녀로 가족을 삼으셨고 또 백성을 삼으셨습니다(마 12:50, 출 3:10, 엡 2:19). 그러니까 하나님의 권속 되고 백성 된 목적을 다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롬 8:29)고 하셨습니다. 또 형상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 생활도 본받게 하셨습니다(요 14:13~15, 고전 11:1). “형상을 본받는다” 함은 예수님의 인격(정신)을 본받음이고, “생활을 본받음”은 그의 덕행을 본받는 것입니다. 덕행은 남을 이롭게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 욕심에서 떠나셨고, 또 희생의 제물까지 되셨습니다.

4)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3:16에서 “독생자를 주심은 영생을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믿음 또는 예수님을 앎으로(요 3:16, 17:3) 받는 것인데,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이상에서 말씀한 네 가지 목적을 충실히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과 함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영광입니다(창 1:31, 롬 11:36, 본문). 그 영광을 이루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5. 그렇다면 성도 자신의 목적은 없어도 될까요? 자녀 노릇, 백성 노릇, 그리고 예수님 닮은 생활만 잘하면 그것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이고, 거기에 따라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을 것을 아시고 주신다”(마 6:6, 32:3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만한 믿음에 이르지 못할 때는 구할 수도 있습니다(마 7:7). 그런데 하나님은 허탄한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시 24:4). 다만,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전폭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 신봉의 숭고한 목적입니다.

 

제5과 초신자의 교회생활 (롬 12:1~2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내용이 길고 교훈이 많은데 저는 이 말씀을 초신자님들이 교회생활을 하실 때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1절에서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한 생활을 동반한 정성된 예배를 드리라는 뜻이요, 2절에서는 “이 세대(세상 유행과 사람이 만든 전통 같은 것)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 마음과 변화의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며, 3~7절에서는 “과욕 또는 타의에 끌리지 말고 자기의 믿음과 은사의 분량에 따라 적당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라”는 교훈이요, 또 자기 직분에 충실할 것(8절)과 사랑(9~10절), 근면, 본사, 소망, 기쁨, 인내, 기도, 손님 대접, 구제, 핍박자 사랑, 위로, 낮은 데 처하는 것, 원수 사랑, 모든 이와의 화평 등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11~21절). 이렇게 교훈은 많지만 그것을 다 일시에 실천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부터 알고 시행하셔야 하겠지요.

1. 예배드리는 일을 열심히 하십쇼.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가장 가까이 나가는 태도요, 감사와 찬송과 기도(자복)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헌신하여 영광 돌릴 것을 표현하는 의식입니다. 여러 가지 의식 순서가 있지만 그 의식 자체가 예배의 요소를 충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순종하는 생활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열심히 드리면, 영광 돌리는 목적과 복 받는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혼자서는 예배를 못 드리는 자가 되지 마시고 힘닿는 한 공예배에 참석하시되, 스스로도 예배를 드리십시오. 예배는 공예배처럼 순서가 많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 기도하시고, 성경 읽으신 후 설교집을 읽어도 좋은 예배가 됩니다.

2. 교회생활을 근거로 하여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초신자 교육도 있고 전체에게 가르치는 공과도 있습니다. 어느 편으로 배우시든지 순서 있게 배우시고, 원리상의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 성도님들 중에 신앙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늦게 깨달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원리에 입각한 교훈과 생활을 바르게 배우지 못한 까닭이겠지요. 성도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진정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제도에 대한 순종과 부분적 교훈만 강조 받다가 성경 중심의 생활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의 십자가는 불빛일 뿐입니다. 그 십자가를 나타낸 교회는 십자가가 상징적으로 교훈 하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많이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교회적 또는 개인적 이기주의에 치우쳐서는 안되겠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잘못된 전통이나 교훈을 무조건 받지 마시고(혹 그런 교회가 있다는 뜻) 성경의 원리를 그대로 실천하며 가르치는 지를 잘 판단하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리와 성경 해석과 예수님의 생활을 바로 배우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시며, 기독교의 원리를 바르게 설명한 서적이나 방송 등을 통해서 많이 공부하십쇼. 신앙 지식이 곧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3. 성도와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하셨고, 20절에서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의 생활과 계명의 목적이 사랑에 있으므로, 교회를 사랑 실천의 도장으로 생각하여 모든 교인을 다 사랑하고 화목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해 관계와 상반되는 사람이 있다면 화목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성도의 교회생활은 자기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갖고 임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는 덕과 복을 받기 위하여 나가는 곳이 아니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자신은 믿음의 실천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오로지 사랑할 대상으로만 아시고, 자신에 대하여는 허탄한 생각을 갖지 말며(시 24:3~4) 오직 하나님 앞에 잘하여 은혜 받는 일에만 충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좋은 성도가 있으면 칭찬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혹 잘못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미워하지 말며,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믿음으로 또는 건설적으로 교제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실천함으로 자신이 사랑 실천의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4. 교회의 지도층에서 헌금이나 봉사를 권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 때는 헌금과 봉사 권면을 강요나 양심 압박으로 당하지 마시고, 자기 분수에 맞도록 하시면 됩니다. 만일 강요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양심과 믿음 형편에 따라 할 것인즉 이해해 달라”고 하십쇼. 그것이 혹 불 충성으로 오해된다면 직분 서열에 앞설 수 없겠지만, 교회생활의 목적이 직분에 있지 않고 바른 믿음과 실천에 있는 만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6과 교회생활의 병폐 (엡 5:27, 히 12:15) 목록으로


초신자가 교회에 입교하면 교회는 무조건 깨끗하고 신뢰할만한 곳으로 여기고 생활하다가 그렇지 않은 일들이 나타날 때, 낙심하기 쉽고 또 경계를 하지 않다가 같은 쓴 뿌리에 가담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엡 5:27에 보시면 “티와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하셨고, 히 12:15에서는 “쓴 뿌리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현실 교회에서 그런 교훈은 목표일 뿐, 많은 병폐를 없애지 못하는 실정이므로 극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1. 성도가 목사의 설교만 의존하는 경향입니다. 설교로 은혜 받는 비중이 크지만 설교의 기교 때문에 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는 내용은 성경입니다. 설교의 기교는 포장에 불과하지요. 설교자의 기교가 좋던 나쁘던 성경의 의미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설교자의 기교만 따르면 웅변 못하는 목사님들이 어찌 되겠습니까?

2. 교인들의 모범이 부족한 점입니다. 이때에는 낙망하지 마시고 자신이 앞서서 모범자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런데 또 오래 믿은 직분자가 모범이 못되거나 심지어는 존경했던 목사님에게 문제가 생기는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그 문제가 경미한 도덕성에 관한 것이면 많이 이해하고 경계하셔야 합니다(갈 6:1). 넓은 마음과 아량을 베푸는 연단이 필요합니다. 성직자도 인간이며 숭배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3. 성직자를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직자의 축복보다 자신의 믿음으로 복 받는 비중이 더 클 것입니다. 성직자를 지나치게 의존하면, 자신의 믿음 성장과 자립이 더뎌집니다.

4. 교회 안에 이단성과 불건전한 활동이 용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 때는 크게 경계하셔야 합니다. 이단은 신앙원리에 위배되는 주장이고, 불건전한 활동은 덕되지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이거나 비정상적 표현이나 과장된 선전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이상한 행동으로 마음을 이끄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5.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상태에서(갈 5:24)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명예와 칭찬을 좋아하게 되고, 현실적인 기복주의에 빠지며, 이기주의가 팽배되어 사랑의 반대의 길을 가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교회생활에는 권위주의나 명예적 지위를 탐하여 경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6. 어떤 교회가 지나친 오락이나 친교에 비중을 두고, 교회의 재정을 교회 운영경비에 많이 쓰며, 세속의 풍토를 따르기를 좋아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령적 경건성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주의, 현실주의, 기복주의, 이기주의, 신비주의, 먹자주의, 물량주의의 뜻을 아셔서 크게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나 중직자의 시무를 파하기 위하여 교인들이 단결하거나 법적 운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직자나 교인이 잘못할 때, 법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이 있지만 반드시 자신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시무 교역자가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거나 은혜 전달이 약하다 하여 배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정당한 것이라면 유명세 없는 목사들은 다 도태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인은 원수도 사랑하여야 하는데, 애써 기도하고 노력하는 교역자를 배척하였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교역자에게는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은혜 있는 목사는 따로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 인간은 다 연약하고 거짓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롬 3:4). 어떤 교역자가 시무하든지 그 교역자를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셔야만 합니다.

8. 교회 행정에 대하여 처음에는 모르셨지만 나중에 아시게 되면 교회의 성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로교회 헌법은 당회 중심으로 행정을 하게 되므로 목사와 장로가 뜻이 맞지 않으면 어렵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 잘 절충하고 화합하여야 합니다. 그런 중에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중요하고, 행정은 사무적인 일이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만큼 과민하게 접근하지 않음이 좋다고 여기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화해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9.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병폐는 교회의 텃세입니다. 오래 섬긴 교인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되고, 목사는 예수님 대리자이면서도 나그네처럼 되는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께 드린 하나님의 돈을, 교인이 자기의 재정으로 목사 봉급을 주는 줄로 여기거나, 예배당을 교인들이 지었다 하여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사소한 이유 등으로 교역자를 배척하는 풍토는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습임을 아셔야 합니다. 교역자로부터 악한 원수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교회는 곧 병폐 있는 교회로 여기셔서 좋은 교회 되게 하는 대열에 합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본질 문제


제7과 신앙인의 현주소 (창 3:7~11) 목록으로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담의 신앙적 현주소를 물으신 것입니다. 육신의 현주소는 “동산나무 사이”이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정당한 현주소에 있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였고, 적당한 의복을 입지 못했으며, 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고, 하나님은 현주소를 물으셨는데 아담은 자기의 처한 상태를 잘못 답함으로 핀잔을 받았으며, 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였으니, 이것들이 아담에게는 신앙의 주소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지금도 신앙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네가 신앙인으로서 정당한 위치에 있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갓길을 가거나, 불법주차를 하셨거나, 세금 신고를 안 하였거나, 불법건축을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불안하겠지요. 그것은 일반 생활의 현주소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생활에도 마땅히 처해야 할 현주소가 있는 것입니다.

1. 정도로 가야 합니다. 신앙의 정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바른 교리의 지식을 갖는 것이요,

2) 법적, 도덕적, 양심적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합니다.

3) 사랑의 대열에 서야 합니다. 사랑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앞서 가고, 사랑을 적게 하는 사람은 뒤에 따라갈지라도 사랑의 길만큼은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신다”고 하셨습니다(잠 8:20). 신앙과 생활의 정당한 노선이 자기의 현주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입장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다”(시 73:28),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이 오른손을 붙들어 주시고, 예수님을 모시면 생활을 함께 해 주신다”(시 73:23, 계 3:20) 하셨고, 또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그를 가까이 해주신다”(약 4:8)고 하셨습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큰 복을 받았지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최고로 장수한 ‘므두셀라’를 아들로 두었고, 노아는 홍수에서 살아남아 제2의 조상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의 증거와 하나님이 자신을 가까이 해주시는 은혜의 증거를 갖고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말씀, 기도, 순종, 헌신 등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방법이지요. 저는 과거에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이제는 “성경에 매달리는 것이 목회보다 더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보통으로만 믿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해주시는 증거를 대단히 민감하게 느끼고 있습니다(특별설교집, 놀라운 충격 참조).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까이 해주신다는 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아셔야 합니다.

3. 하나님의 품에 의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나를 무시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지 않았습니까? 행 21:14에 보시면 바울의 예루살렘 행선을 놓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내 뜻, 내 소원, 내 목표는 주의 뜻이면 이루어주실 뿐, 그것이 예수님의 뜻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는 자세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갈 5:24, 약 4:15).

4. 신앙의 현주소는 반드시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교회 없고, 성도 없고, 목사님 안 계셔도, 성경만 갖고 혼자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신앙생활은 개인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평화시대에 교회가 있는 것은 축복이지만, 성도가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이 멀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사 3:1). 성도가 골짜기의 백합화 같고, 광야의 수선화 같아도(주위에 돕는 사람이 없다는 뜻) 믿음으로 홀로 서면 하나님이 특별섭리로 더 가까이 해주시고, 더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람들을 피하여 골짜기에 숨었어도 하나님은 까마귀를 명하여 떡과 고기를 날라다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신앙의 도장입니다. 말씀과 사랑의 도장입니다. 교회가 신앙의 도장이 되는 것은 “인간 의존하라는 뜻이 아니고(모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일 뿐, 의존대상은 아님), 홀로 서기를 배우고 연단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나는 혼자 믿어도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의 위치를 현주소로 가져야 합니다. 혼자 활동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5. 세속적 미련을 멀리 하셔야 합니다. 스포츠에 열광하고, 관광 좋아하며, 비싼 음식만 먹으려 하고, 세상 풍조에 익숙한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좋은 자동차, 좋은 집 갖고, 잘 사는 것만 선호하는 성도를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안 사셨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하셨으며, 또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롬 12:16)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 알고”(딤전 6:8) 세상을 검소하게, 또는 적당하게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네 주소가 어디냐?”고 물으셨을 때 저희들은 ① 교리와 도덕과 양심과 사랑의 정도에 터를 잡고, ②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집을 짓고, ③ 하나님의 뜻만 의존하는 가구를 넣고, ④ 믿음에 홀로 설 수 있다는 대문을 달고, ⑤ 세속을 적당하게 경계하는 좁은 길이 있는 장소를 현주소로 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8과 성경의 본질적 의미 (왕상 19:11~13, 행 20:32)목록으로


“성경의 본질적 의미”란 성경 말씀을 무엇으로 믿어야 하는가? 의 뜻입니다. 바른 성경관이 중요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처럼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많음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 오늘도 계시를 주신다, 성경은 구 시대에 주신 것이므로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다, 성경은 믿음으로 받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나 의식이나 단체가 믿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교회는 핍박 시대에 존재할 수 없음), 오직 성경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핍박 시대에 수백 년씩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 보존으로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 제일주의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5:18에서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하신 것은 글자 하나 점 하나에까지 영감적 능력이 나타나서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A라는 사람이 편지를 보냈으면 A의 말로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출 17:4, 24:4, 32:32, 34:27, 삼후 10:25, 벧전 1:23~26, 딤후 3:16, 신 9:10, 호 8:12, 겔 33:7, 5:17, 마 7:6, 14:27, 요 1:45 등).

2.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람과 지진과 불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지만 “세미한 소리로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이외의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습니다(욥 4:12, 22:22, 엡 3:17). 성경이 없을 때는 천사로 나타나신 사실이 있지만 성경이 완성된 시대에 천사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천사는 마지막 심판 때에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3:41).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자신이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성경은 곧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요 1:1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지요. 본문에서 “말씀이 부탁을 받으셨고, 말씀이 든든히 세워주시며 말씀이 거룩하게 하시고(요 17:17) 기업을 주신다” 하셨으니 인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양심과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속성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예수님을 완전한 인격자로 믿으시되 성경을 그렇게 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재판관의 뜻이 판결문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경으로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간다”(마 7:22)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믿고 행하여야 하는데 그 뜻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살필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신학적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 이상을 더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 21:25, 엡 3:5, 히 1:1, 계 22:18~19). 그러니까 성경 이외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할 때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적 설교입니다.

5. 성경은 “참” 그 자체입니다. 롬 3:4에 보시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였고, 또 요 14:7에서 “예수님만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참”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곧 유일한 “참”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분(거짓이 전혀 없는 분)은 하나님(예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참된 말씀입니다. 세상에 가짜가 많은 것을 발견하실 때마다 사람이나 물건을 믿지 마시고 성경만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6. 성경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무엇이 있으라” 하시니까 그대로 되었다고 하셨지요. 이것은 말씀에 능력이 따른 증거입니다. 또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셨고, 시 107:20에서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 말씀에 능력이 동반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더니(요 4:50) “아들이 살았다” 하는 시간에 능력이 전달되어 아이가 살아난 사실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믿는 대로 능력이 나타나서 성취된다”(막 9:33)는 뜻이지요. 따라서 성경은 곧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임을 믿고, 성경을 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령 충만을 강조한다 하여도 말씀이 충만하면 곧 성령의 충만과 같음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엡 5:18~19, 골 3:16).

 

제9과 영적 축복의 원리 (눅 13:18~30)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 여러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전체의 총 제목을 “영적 축복의 원리”라고 정하였습니다.

1. 신령한 축복이 적은데서 시작하여 시일이 지나면 크게 성숙하는 것임을 교훈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생명 있는(진실한) 믿음의 씨앗을 뜻하고, 그것이 비단 적은 모습으로 시작하였을지라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나무 자라듯이 자라고, 또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되고 이웃에 덕을 세울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나무는 심고 물 주어 가꾸면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의 겨자씨의 자람은 믿음의 성장, 또는 교회의 발전, 또는 복음 운동의 미래를 작은 씨에서 큰 나무가 되고, 시일을 따라 성장하며 덕을 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영적 축복은 심령의 변화를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루 서 말은 많은 분량을 뜻합니다. 누룩은 겨자씨처럼 복음의 성격입니다. 씨가 흙에 심겨지면 보이지 않는 속에서 싹이 나는 것처럼 누룩도 가루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속에서 발효를 일으켜 가루의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지면 성령님과 말씀의 역사에 의하여 크게 변화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옛 마음이 변하여 새 마음을 갖는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다음에 생활도 변화됩니다. 여기에서 “누룩”은 말씀과 성령의 비유이고, 가루는 인간의 마음과 인격성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 신령한 축복은 교육으로 성숙됩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시기 위하여 각 성, 각 촌으로 두루 다니셨고, 또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 생활에 있어서 영적 축복을 성숙되게 하는 것은 교육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의미 있게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시행하도록 교육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4. “영적 축복, 즉 구원을 받을 자의 수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마 7:13~14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넓은 문과 좁은 문,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표현하여 구원받는 자의 수가 분명히 적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여호수아와 갈렙, 적은 무리,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심, 선택의 교리 등(벧전 3:20, 민 14:24, 30, 눅 12:32, 엡 1:4, 고전 10:5)이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하거나 교인을 모을 때 “구원받을 자의 수가 적다”는 점을 참고하지 않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보편구원설을 믿지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감추고 증거 하거나 이기주의 목적으로 증거 하면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선택자만 구원하시고, 그 수는 적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가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전도하시되 교인의 수가 적을 수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영적 축복을 주심에 대하여 대상의 한정도 있지만 시기의 한정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24절에 보시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구하면 주신다”는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뜻은 기도 응답의 효력을 말씀하신 것이고, 본문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한다” 하심은 구원하시는 시기가 지나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열 처녀 비유 말씀에서도 “잔칫집에 문이 닫힌다”(마 25:10)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세상 통치를 끝내시는 날이요(벧후 3:10~13), 그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인데 그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약 4:13, 마 24:36~39) 모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 기간이 끝난 때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바른 신앙 갖기를 원하여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6. 신령한 복을 받는 자의 입장은 외식적 행사에 있지 않고 내적 신앙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구원의 때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외식자가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함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마 7:21~23에 보시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행한 자도 불법자로 인정될 때 쫓겨났다” 하신 것처럼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26절, 외식적 접근)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의 관건이 아니며 오직 심령적으로 통하고 구원받을 기회에만 구원받는 일이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신령한 믿음의 성숙은 먼저 시작하여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에 시작하여 먼저 될 수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보편적으로는 시간과 경험을 요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힘쓰는 노력에 따라서 급히 성숙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당사자의 실례가 바울 사도인 것입니다.

이상 일곱 가지 영적 축복의 원리를 상고하였습니다.

 

제10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미 6:8)목록으로


미가 선지자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의 사람이므로 주전 710년에서 650년경에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생활을 하므로 깨우쳐 주신 줄 압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귀중한 생활 수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네 가지 생활 수칙 중

1.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공의를 행하라”고 강조하셨고, 시 15:2에서는 “공의를 일삼으라”고 하셨습니다.

1) 공의는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표준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자신의 본성으로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또는 어떤 대상을 상대하실 때 언제나 공의와 사랑에 어긋남이 없이 행하십니다.

2) 공의란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잘잘못에 대하여 공평하게 처리하시는 뜻을 말합니다. 공의에는 사건을 나타낸 인격이 있고, 또 사건 자체의 성질이 있습니다. 사건 자체의 성질은 선악이고, 그것을 나타낸 자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은 바로 잘잘못에 대한 옳은 판단이고, 또 잘한 자와 못한 자에 대한 바른 처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을 악이라 하거나 악을 선이라” 한다면 공의가 아닐 것이요, 재판을 굽게 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의를 시행하는 방법으로 “오직 너의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난다”(마 5:37)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법과 규모를 지키며 공의롭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2.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질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니까요. 인자를 베풀 대상은 인간입니다. 모든 이웃들 중에 특별히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야 할 대상에게 더욱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십계명으로 주셨고(출 20:2~17), 십계명의 강령은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해설해주셨습니다(마 22:37~40). 그리고 사랑의 중요성과 방법론은 바울 사도께서 고전 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은사 중의 최고의 은사가 사랑이고(고전 14:1), 사랑 실천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거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44, 요 15:13). 예수님은 그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눅 23:34). 사랑은 범죄를 덮어주거나 죄인을 두둔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쌍한 자를 사랑하고, 죄인은 반드시 공의와 함께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을 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서 천한 인간 세계에 오셨고, 인간과 같이 되시되 섬기는 자로 오셨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범을 보이셨고,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5~8). 세례 요한은 “그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 하시고 주님은 흥하시되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마 3:11, 요 3:30)고 하였으며, 바울 사도 또한 “괴수 죄인이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며 사도라 칭함 받기에도 감당 못할 자이고 사도 중에 작은 자라”(딤전 1:15, 고전 15:8~10)고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겸손은 존귀보다 우월하고(잠 15:3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귀히 여기시며(사 66:2) 그런 자를 높이시고(약 4:10) 또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벧전 5:5) 하셨으니 항상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장성하면 부모 떠나기를 좋아하지만 부모는 늙을수록 자녀들이 가까이 살기를 바라고 또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인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큰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창 5:22, 6:9).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 동거를 힘쓰려면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맞추고(암 3:3) 생활의 방향과 보조를 맞추며(빌 3:14, 고전 9:26) 말씀 묵상과 기도를 힘쓰므로 동행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은 ① 공의롭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힘쓰실 것이요, ② 사랑의 실천은 물론 긍휼을 베풀 것과 ③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할 것과 ④ 항상 하나님과의 동행을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1과 성도의 여섯 가지 미덕 (살전 1:2~7)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여섯 가지 미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 중에 전도를 받았고, 또 핍박 중에 믿기를 시작하였으며 믿음 생활의 시작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미덕을 나타내므로 바울 사도의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나타낸 신앙 생활의 미덕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와(3절)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는 것과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본받은 것이며 또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입니다(6~7절). 바울 사도는 이 여섯 가지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요, 또 택함을 받은 결과이며 또 예수님의 복음이 말로만 증거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을 입증한다”고 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자는 신실한 신앙의 열매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미덕 중

1.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변화로운 생활입니다. Meyer란 신학자는 이 뜻을 “믿음의 더 큰 산출”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더 좋아지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하겠지요. 롬 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해석하는 뜻은 우상 숭배하던 이방인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즉 거기에 따른 획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술, 담배 하던 사람이 그것을 끊고, 세상 욕심과 오락을 좋아하던 사람이 그것을 멀리하며, 더 진실하고 신령한 가치를 깨닫는 쪽으로 인격과 가치관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에서 이런 역사가 꾸준히 나타나면 예수님 인격에 더욱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수고입니다. 수고하므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물질로 사랑하는 것은 구제이고, 인력으로 사랑하는 것은 헌신입니다. 요즈음처럼 바쁜 시대에 인력으로 이웃을 돕는다면 역시 큰 사랑의 수고가 될 것입니다. 사랑에 입각한 수고는 재미와 보람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와 외가에 갔다가 며칠 후 집으로 오게 되었는데 갓난아기 여동생이 있었고, 또 생활이 가난하였는지라 곡식 등 음식 보따리가 무거웠습니다. 외가에서 저의 집에 오는 거리는 지름길로 40리 정도였는데 외할머니가 동생을 업고 보따리를 머리에 인 상태로 30리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가시다가 밤늦게 들에서 강도를 만난 사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그만 오시고 돌아가십시오” 하여도 두 번 세 번 더 가자 하여 저의 집이 멀리 보이는 장소까지 오신 것입니다.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정성이 그런 수고를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버나드 뉴만”이란 사람이 불가리아의 한 농가에 거처할 때 그 집의 딸이 드레스에 수놓는 것을 보니 그 분량이 너무 많은지라 “그 많은 분량을 어떻게 끝내려고 계속 하느냐?” 한즉, 그는 “그 옷이 자기의 결혼 때에 입을 것인즉 피곤함이나 지루한 줄을 모른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바로 이런 감정에서 나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3. 소망의 인내입니다. 소망 없으면 인내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인내한 성도들에게 칭찬과 상급을 주신다고 확신한즉 힘있게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참는 인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손해를 감수하는 인내도 역시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근거하여야 참을 수 있습니다.

4.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 성도는 다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말씀 연구에 기쁨과 취미를 못 느끼는 성도들이 계시지요. 성령의 기쁨, 즉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말씀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습관적으로 경성하지 못하는 성도는 큰 결단을 내리셔서 말씀이 마음에 화살처럼 박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 내가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103) 한 고백이 결코 외식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지도자들(우리)과 예수님을 본 받는 자 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믿음의 지도자로써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으로 증거하고 생활로도 증거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본을 보였다”고 하셨으니까요(고전 11:1, 살전 1:5).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은혜를 전달하는 사역자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사역자와 예수님을 함께 사랑하고 사모하셔야 합니다. 교역자를 본 받으면 자동적으로 예수님도 본 받게 될 것입니다.

6.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일반 사회에 본을 보이는 성도가 많아야 밝아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 중에서 처음 믿기를 시작하였으면서도 이상 여섯 가지의 미덕을 나타내는 일에 부족하지 않았고, 오히려 믿는 자의 본이 되므로 바울 사도가 크게 만족하셨고, 감사하셨으며 “전도가 잘 된 것인즉 더 말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12과 네 가지 유의할 일 (히 12:14~1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화평과 거룩함을 좇고,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과 교회 안에 쓴 뿌리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하여 “네 가지 유의할 일”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화평함을 좇는 일입니다. 14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라”(해석상, 마 5:9) 하셨고, 베드로와 바울 사도도 화평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벧전 3:11, 롬 12:8). 화평은 곧 화목 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 개인간의 화평은 물론 단체나 국가간의 화평도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실수나 이해관계로 화평치 못한 대상이 생겼으면 우선 자기 실수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의 피해에 대하여 성심껏 보상한 후 화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웃이 자기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아량 있게 용서하고, 서로 불편한 상대가 되지 않도록 관계개선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한 사람도 미워하거나 경계하는 대상이 없도록 사랑 중심으로 마음을 정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으면 주님을 가까이 하는데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먼저 화해하고 제물을 드리라”(마 5:24)고 하신 것입니다.

2. 거룩함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성경에 거룩을 강조한 말씀이 많습니다(레 11:45, 요 17:17, 딤전 4:5). ‘거룩’이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자신도 순결하여야 하고, 이웃도 같이 순결하여야 합니다. 순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청결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마 5:8). 또 자신이 거룩하여도 이웃이 다함께 순결하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마치 놋이 의로웠어도(벧후 2:7~8) 소돔이 심판을 받는 것과 같고, 선민 세계에 의로운 선지자가 있어도 나라가 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이웃이 다 거룩함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해질까요?

1) 우선은 회개하고 화해, 용서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노여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되지만, 순간적 범죄에 대하여 일시적 징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회개로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깨끗케 하고 재범을 방지할 결심을 갖는 것입니다.

2) 말씀과 기도를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 4:5) 하셨고, 예수님도 성도의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니까요(요 17:17). 말씀은 거룩한 생활의 표준을 아는 것이고, 기도는 실천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므로 이루는 것입니다.

3) 주의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시 119:9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실을 주의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 거룩만 힘쓰는 것도 믿음이 약하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과 이웃들도 함께 거룩하여야 하니까 함께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배우려하지 않으며, 설교시간에 잠자는 성도가 있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다’는 뜻은 징벌 받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 하면 “하나님이 칼을 가지고 화살을 시위에 넣어 당길 준비를 하신다”(시 7:12~13) 하셨으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래서 말씀으로 은혜 못 받는 자나 완악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늘 경성하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는 이유는 바로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4. “쓴 뿌리가 나서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쓴 뿌리의 종류 두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음행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라고 하셨습니다. 에서가 팥죽을 택하고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 곧 현실주의입니다. 교회라는 단체가 자칫하면 색깔이 변하고 목표가 변할 수 있습니다. CMS(정명석)이란 선교단체는 그 교주가 음행을 일삼는다는 TV 추적방송이 나왔고, 많은 교인들이 물량주의, 현실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쓴 뿌리에 예민하여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돈 3,000만원을 옥상에서 뿌렸지요. 구제의 목적은 좋았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은밀히 하라”는 교훈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를 선전한다 하여 부흥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단 사상이나 세속주의, 물량주의, 이기주의, 음행, 성도간의 불화와 부도덕…, 그런 것들이 다 쓴 뿌리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네 가지 교훈을 유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3과 구원을 이루라 (빌 2:12~13)목록으로


이 시간의 제목은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우선 빌립보서가 누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전달한 말씀인지를 알고 공부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는 지역 이름입니다. 마 16:13에 보시면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고 칭찬을 받은 장소로 “가이사랴 빌립보”가 있지만 이 곳은 본문과 해당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분봉 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칭호를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칭한 곳인데 경치가 좋고 갈릴리 호수의 수원인 “바니야스”란 원천이 있는 곳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한 도성으로 마게도냐 왕 빌립이 자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성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후 50년경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2차 전도 여행 때 그 곳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행 16:12~40). 빌립보 교회를 세운 후 약 10년 후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받아 기록하신 후 제자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이 편지를 전달한 것입니다(빌 1:1, 4:18). 빌립보 교회가 자기 교회의 사역자인 에바브로 디도를 문안 위로 차 로마에 보냈기 때문에 그 편을 이용하여 감사와 교훈을 전한 것입니다.

2. 본문에 나타난 말씀만 상고하겠습니다.

1) 바울 사도가 없어도 다시 말하면 상당 기간 교역자가 없어도 “믿음 생활을 잘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고, 교역자는 성경으로 신앙 생활의 방도를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성경과의 관계에서 믿음에 굳게 서고 교역자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 신앙을 유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니까 감독자가 없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복종하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을 이루라”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아직 구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까? 예수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가 구원을 이루는 과정을 잘 아셔야 혼돈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자가 “구원을 받았느냐, 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질문할 때 대답을 못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구원에는 여러 단계가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의 3 단계로 성취됩니다. 예를 들면 중생, 소명,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8 단계로 구원이 완성되는데 믿음으로 받은 과거의 구원은 6 단계 양자까지이고, 말씀과 기도로 현재 받고 있는 것은 성화이며 예수님 재림 시에 받아야 할 완성될 구원은 영화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구원이 확보된 것이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현세에서 받고 있는 것이요, 영화는 부활의 은혜로 장차 받을 것입니다. 이 같은 구원의 은혜를 “복종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잘 이루어가라”고 권면하신 것이요,

3)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13절). 성령으로 내주 하시지요(고전 6:19). 예수님이 내주 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엡 3:17). 또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신다”(살전 2:13)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으로 성경의 뜻에 따라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요 17:17).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가지시는 기쁜 뜻은 바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계획하며 성경의 교훈대로 계획을 세워 소원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는데 있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때 그 성취가 확실하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소원을 갖고 계십니까? 그 소원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까? 초점을 잘 맞추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① 빌립보서의 개론을 간략하게 말씀드렸고, ② 교역자가 없을 때라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신앙을 유지할 것과 ③ 3 단계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복종과 두려움으로 계속 성취할 것과 ④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성경 말씀 중심으로 역사 하시고 소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14과 하나님을 알자 (호 6:3~6) 목록으로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를 아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좋아하시는가 하면 “번제보다 더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번제는 속죄제의 상징이지만, 그 정성으로 볼 때는 신약시대 성도들의 예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형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중요시하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알지니”(요 8:32) 하신 말씀도 있고, 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요 17:3)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갈 4:9). 성도가 하나님을 알려면

1. 우선 하나님의 계시 방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셔야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세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첫째는 만물로, 둘째는 예수님으로, 셋째는 성경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롬 1:20, 요 14:8~9, 5:39). 만물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자연통치의 지혜를 계시하셨고, 예수님으로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격을 계시하셨으며,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뜻(특히 구원의 도리)과 섭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직접 체험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경험은 성경으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만물계시와 성경계시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경계시 같은 것을 또 주시는 줄 알면 안됩니다. 만물 창조를 끝내신 것처럼 성경으로 주신 계시도 끝내신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1:2).

2.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가 타락할 때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주시는 것인데(창 2:17, 엡 2:1), “거듭난다”고도 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도 합니다(요 3:3, 요일 3:9). 이것은 신령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마음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다 거듭 났습니까? 나무가 흔들리면 바람 부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성경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곧 거듭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에게만 주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류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과 거듭난 자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를 다 구원받는 백성 되게 하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것입니다(요 17:9). 따라서 택한 백성만 하나님 알기를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3. 거듭난 심령을 근거로 지혜와 총명을 더 받아서 만물과 성경 살피는 노력을 열심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힘쓰는 자에게 주십니다(마 7:7, 눅 13:24). 또 보화를 찾듯이 전심을 기울일 때 은혜를 주십니다(마 13:44, 대하 16:9, 약 4:8). 노력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1) 우선 마음이 청결하여야 합니다(마 5:8). 회개하기를 힘쓰라는 뜻이지요. 2) 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확신하라”(딤후 3:14)고 하셨으니까요. 3)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계시의 정신을 주시라”(엡 1:17)고 기도하셨고, 약 1:5에서도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행 16:14). 4) 경험하셔야 합니다. 경험에 관한 말씀은 요 1:39과 10:38에 기록되었고, 경험의 방법은 기도 응답과 순종으로 깨닫는 체험입니다. 기도 응답을 체험할 때, 기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요 16:23), 순종하여 은혜를 받을 때, 순종이 복 받는 방법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눅 5:5, 요 2:5~8, 왕하 4:14). 또 성경이 아니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과(빌 2:6, 요 14:6, 8, 14) 진실하심과(롬 3:4, 히 6:18, 시 146:6) 구세주 되심(요 3:16, 15:13)을 알 수 없고, 심판에 대한 말씀도 곡식 타작하는 계시로 보여주셨지만 성경이 더 확실한 것입니다(요 5:27). 따라서 청결함(진실), 배우는 노력, 기도 경험을 하되 열심히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일수록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필자도 오래 믿고, 오래 경험하니까 더 알아진 것이 많은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4.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스스로 계시고 신령한 분이지요(출 3:14, 요 4:24).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절대자이시지요(사 40:25).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시고(창 17:1, 사 40:28), 또 무소부재하시며(시 139:8~9, 렘 23:23), 성도와 항상 함께 계시고(마 28:20, 창 46:4),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삼하 7:22, 대상 16:25). 하나님은 사랑도 많으시고, 공의로움도 있어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요 3:16, 미 6:8). 그래서 인류가 사랑에 근거하여 복을 받기도 하고, 공의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뜻은 우주를 포괄하여 손에 쥐신 분으로 이해하셔야 하고, 또 우주 밖에도 계시고 안에도 계시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 일시에 모든 자에게 1:1로 대하실 수 있는 무한한 인격체로 이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을 반드시 쌍방적(갈 4:9), 친교적으로(요 15:14, 요일 1:3, 6)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가장 보람있는 일은 하나님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얼마나 친합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얼마나 아십니까? 잘 알고 많이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시는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15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마 28:20) 목록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성도들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영광을 많이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성도를 좋아하시고, 성도와 친교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 1:12). 자식이 멀리 있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함께 하시고(마 28:20), 싫어 버리지 않으시며(사 41:9~10), 동거(요 14:23, 계 3:20, 창 28:15) 동행을 원하시고(창 5:24, 6:9, 46:4), 함께 하는 자의 오른손을 붙드신다고 하셨습니다(시 73:23). 수고로운 자, 환난 당한 자, 병든 자도 차별 없이 좋아하십니다(마 11:28, 시 50:15, 막 2:17). 그리고 변론과 계속하는 대화도 좋아하십니다(사 1;18, 살전 5:17). 따라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있게 사는 일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있으며, 친교 하는 일일 것입니다(창 18:17, 요 15:15). 성도가 하나님과 친교 하려면 겸손하고 의로우며 말씀과 기도를 힘써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마 11:29, 잠 8:20, 미 6:8).

2.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서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호 6:3). 제사나 예물과 예배보다도 더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셨고 “듣고 깨달으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5:10, 딤후 3:14).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예수님을 닮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닮도록 본을 보이셨고 사도들도 예수님을 닮는 생활을 하였습니다(요 13:15, 고전 11:1, 벧전 1:16). 구원의 목적도 예수님을 닮게 하는데 있다고 하셨지요(롬 8:29).

3.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제물보다 더 좋아하신다 하셨고, 말씀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셨으며(눅 10:42), 고넬료의 집에서는 말씀 듣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행 10:42). 또 순종할 때 기적을 나타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범자였습니다(히 11:8, 17, 창 22:12). 설교를 의미 있게 듣지 못하는 분들은 많이 각성하셔서 듣는 정성을 기울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회개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눅 15:7, 마 18:21~22, 눅 23:40~43).

5.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마 25:23에 보시면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데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시고 많은 것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크게 충성할 힘이 없어도 작은 일에 충성하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손이 없어서 사람을 쓰시겠습니까? 만물을 혼자 창조하시고 홀로 운영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많이 받고 많이 충성하는 것이나, 적게 받고 적게 충성하는 일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마 25:14~23).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충성하였을 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 26:13) 하실 만큼 기뻐하셨고,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도 여러 배의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9:27~29). 성도가 하나님께 충성할 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말씀이 있고, 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자기를 다 헌신하면 어떻게 살까?” 하시겠지만,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시 100:3)는 사실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이 헌신의 모범자라 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용기 있는 신앙생활을 좋아하십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상태를 책망하셨지요(계 3:15).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 정복의 사명을 주실 때에도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수 1:7~9) 하셨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대장부가 되라”(왕상 2:2) 하였으며, 바울 사도도 “남자다우라”(고전 16:13)고 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셔야 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고전 15:58). 요 16:33에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므로 담대한 생활이 승리와 평안을 얻는 방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숨어서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45:15, 시 139:1~4). 몰래 카메라가 어디나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앉는 것, 일어서는 것, 생각하는 것, 다니는 것, 눕는 것, 말하는 것 등, 감찰 안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감찰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잘하는가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라” 하셨으니까 마음을 다하는지, “열심을 품고 섬기라” 하셨은즉, 열심을 내는지를 감찰하시는데, 그 이유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대하 16:9). 하나님은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제16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 (렘 5:1, 겔 34:1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고 저희들이 곧 찾으시는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 받으려고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 희귀한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대상은 좋은 대상이고, 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찾으시는 것입니다. 만나기도 하시고(잠 8:17), 들어주기도 하시며(마 7:7), 구하여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사 46:4).

1. 하나님이 찾으시는 대상 첫째는 의인입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의인(공의롭게 살려고 애쓰며 진리를 구하는 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찾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이 차고 심판의 불꽃이 튀려고 하는 순간에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자는 의인 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때는 그보다 수가 많아서 “열 사람만 찾아내도 소돔성을 멸하시지 않겠다”(창 18:32)고 하셨지요. 아브라함 때는 인구가 적었고, 예레미야 때는 약 1,400년 후이니까 인구가 더 많았겠지만, 의인이 열에서 하나로 준 것은 그만큼 의인이 희소해졌고, 값이 중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의인을 찾으신 이유는 단체적 심판을 면케 해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들이 의인의 덕으로 멸망을 면하고 사는 줄을 아셔야 할 것이요, 의인이 적다하여 실망하시지 말고, 다 의의 길을 떠났다 하여 자신까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연구해 보셨습니까? 우리처럼 찬송, 기도하고 주보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이 신령한 예배라고 믿으십니까? 예배는 제도나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의 3요소를 말씀드린다면 믿음과 순종과 동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이고,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것이며, 동행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찬송과 기도가 있을 때 신령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기뻐하시고(히 11:6), 그런 자가 적은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시며(눅 18:8), 그런 자를 찾으시고(시 143, 24:3), 또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요 9:31).

3. 세 번째로는 사명자를 찾으십니다. 사 6:8에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고 사명자를 찾으셨습니다. 또 마 9:37과 눅 10:2에서도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일군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사역자를 모시려 하니까 “일군다운 사람이 귀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가 없이 일할 사람이 많지 않고, 또 베드로나 바울 사도처럼 현세적인 일들을 초월하여 헌신하려는 사람도 찾기 어려우며(눅 9:62, 마 10:37),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사명에 임하는 사람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마 1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종이나, 사환이나, 군사처럼 헌신할 수 있는 사명자를 찾으시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면 누구나 귀히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4.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십니다. 겔 34:11에 보시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내가 내 양을 찾되 흩어진 양떼를 찾는 것같이 하신다” 하셨고, 예수님도 그런 자를 구원하시며(요 17:9), 특히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눅 19: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신 백성들을 다 구원하시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민족이나 개인을 찾아 구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민족을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고, 탕자의 비유는 잃은 자 개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뜻입니다(눅 15:3~10). 그런 취지에서 성도들은 전도하고, 낙심한 자를 부지런히 권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을 찾아 단체의 받을 벌을 면케 하시고, 신령하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아 영광을 받으시며, 참된 사명자를 찾아 자기의 사역을 맡기시고, 잃은 자를 찾아 회개시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찾는 대상은 상벌대상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상 받을 자나 벌받을 자는 결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대하 16:9에 보시면 “여호와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하셨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감찰을 피할 수 없고, 또 악인도 그렇습니다. 습 1:12에 보시면 “내가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공의를 무시하는 자를 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감찰하실 때 불꽃같은 눈으로 하시고(계 1:14), 죄를 찾아 벌하시며(욥 10:6, 레 18:25, 수 22:23, 사 10:3), 가인의 죄, 아간의 죄, 소돔의 죄를 다 캐내시고, 잡신까지도 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출 12:12, 삼상 5:3). 이 경우에 성도는 반드시 칭찬 받을 대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17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살후 1:6~9, 요 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하여 교훈 받겠습니다.

1. 성경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하신 내용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신 32:4) 하셨고, “사람을 다스릴 때 공의로 다스려야 한다”(삼하 23:3)고 하셨으며,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도 공의라 하셨고(창 18:25, 레 19:15, 벧전 2:23), 또 “공의는 사람이 행할 바라”(마 3:1) 하셨으며, 사랑보다 공의를 먼저 말씀하신 곳도 여러 곳에 있습니다(미 3:1, 6:8, 슥 9:9). 결국 공의는 사람과 하나님이 다 실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 사람이 시행해야 하는 공의란 어떤 것입니까? 우선 공의의 뜻부터 아셔야 하겠지요. 공의는 공평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롭다(바르게 행한 것)”는 표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의요, 공의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하여 바르게 살았으면 의로운 사람이고,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고 교제하는 생활을 잘하였으면 공의롭게 행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평하게 행하는 것이 공의인즉 인권, 인종, 모든 이웃, 모든 계층을 의롭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이웃을 상대함에 있어서 책임을 지는 이웃(예; 가족 또는 계약 관계의 이웃)이 있고, 그 외에는 보편적 관계로서의 이웃이 있습니다. 이때에 보편적 관계로서의 모든 이웃에 대하여 공평하고 명분 있게 상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렘 4:2, 5:1에 보시면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공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공의는 자신과 대인관계에서 시행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는 가족 같은 특수관계도 있고, 국가적 관계도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인류적 관계도 있습니다. 또 이웃을 상대할 때 책임자의 입장일 수도 있고, 막연한 인류관계도 있겠지요. 이 때에 그 환경과 자신의 능력과 책임에 따라 의롭고 공평하며 명분 있게 행하는 것이 사람이 시행할 공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의 주권자요 표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의요 표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의의 표준을 정하여 인간에게 명하실 수 있은 즉 인간적 공의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입니다(롬 9:13, 21~23).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실현은 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본문 6~7절에서 “악한 자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의로운 자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도 잠정적으로 시행하시지만(시 8:11~16, 73:1~8) 완전한 심판은 세상 끝날에 하십니다(마 13:30).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1) 그 심판권을 다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요 5:27). 그때에는 천사도 심판하십니다(롬 2:16, 벧후 2:4, 유 6).

3)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악을 통제하시는 목적도 있고(롬 13:4), 선민 또는 의인을 보호하시는 목적도 있으며(삼상 24:15, 31:6), 더 나가서는 성도에 대한 위로와(살후 1:7)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엡 2:4~7).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금생과 종말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습니까? 인내하는 자도 없고, 선행하는 자도 없으며, 희생적 봉사는 더욱 없을 것이요, 폭력만 난무할 것이니 인간 세계는 짐승 세계와 같아질 것입니다(고전 15:19, 22).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덕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는 표라”고 하셨습니다(살후 1:4~5).

2. 사랑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의 실천자요 모범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내신 증거는 만물과 독생자를 주신 것이고(롬 8:32), 또 “세상(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요 3:16).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셨는데(요 15:13) 예수님이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구약은 사랑의 계명을 주심으로 사랑을 권장하셨고, 신약에서는 사랑의 본을 십자가로 보여주시고 인간의 사랑을 권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만물을 주신 것이었고, 죄인을 용서하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2) 인간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까? 그 실천의 방법을 고전 13:4~7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사랑이 계명의 으뜸이라” 하셨고(마 22:39~40), 바울 사도는 고전 13:13에서 “사랑이 믿음, 소망보다 제일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믿음이 구원을 주고, 소망이 인내를 이루게 하지만, 사랑은 현세의 덕과 내세의 상급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마 25:44~46). 따라서 설교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인데 설교의 목적과 총 제목은 “사랑 실천하라”는 것뿐이어야 하고, 성경 본문 강론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목적으로 배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또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공의와 사랑에 대하여 상고하였습니다. 선택 교리와 관련하여 불신자가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원죄의 사함을 받지 못한 것과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마 24:14, 롬 5:19, 10:16, 벧전 4:17).

 

제18과 무엇을 배울까요 (마 28:20) 목록으로


마 28:2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께서는 “권하는 것과 가르침에 착념하고, 또 성도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딤전 5:13, 딤후 3:14). 가르치고 배우게 할 것은 성경인데 성경말씀이 시작부터 다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중요한 것 첫째는 거듭나는 도리입니다. 요 3:3에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으니 그 뜻을 처음부터 아셔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뜻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심령을 다시 살려주시는 것인데(엡 2:1)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깨달으려면) 이 영적 새 생명을 받아야 하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먼 곳은 망원경으로, 작은 것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하는 것처럼 신령하신 하나님은 영적 심령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눈이 있으면 빛을 보게 되고, 마음이 있으면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와 같이 영적 생명이 있으면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듭 났는지 거듭나지 못하였는지를 아는 것은 믿을 마음이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의 여부를 살펴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은 눈이 되고 성경과 만물은 하나님을 나타내 주신 계시이니까 성경을 열심히 배워서 하나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방도가 멀어집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믿음생활을 한 친구 장로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중 “제가 말씀 연구를 인하여 목회 일선에서 후퇴하였다” 하니까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성경과의 관계에 비중을 두지 않고, 교회의 단체적 생활에 비중을 두면 그런 생각을 갖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생활 그 자체는 인간적 단체생활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란 점을 인식하실 때 성경말씀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무엇을 알고 배우셔야 합니까? 우선 1) 하나님의 존재를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어디나 계시며, 또 영원히 계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이요, 2) 하나님의 신분을 아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무한한 분이심을 아셔야 하고, 3)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배우셔야 합니다. 호랑이가 있는 산길을 걸어간다고 할 때 호랑이를 의식하겠지요. 성도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모르면 신앙생활을 한 발자국도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류 없는 성경을 주셨는데 인간이 성경의 진리 됨을 믿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기뻐하시는데 인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은 믿음과 사랑과 순종을 좋아하시는데 인간이 그것을 힘쓰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은 과장된 의식과 외식을 좋아하시지 않는데 성도가 그런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 믿음생활은 점수를 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신분과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곧 인생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또 중요한 과제는 자기 삶의 목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사는가? 존재하니까 살겠지요. 그러면 나를 존재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나를 세상에 살도록 하셨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인생 사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롬 11:36)라고 하셨습니다. 인생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성경대로, 또는 하나님 뜻대로, 또 다른 표현은 예수님을 닮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성도로 부르신 목적이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롬 8:29)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항상 “내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는가? 예수님의 생활 모범을 따르려고 힘쓰는가?”를 점검하고 확인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은 성도가 하나님과 동해하는 것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모시고, 지식으로 이해하며, 순종과 대화(말씀, 기도)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동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6. 교회생활을 왜 하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생활은 성경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도장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속에 예배가 있고, 직분 제도가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을 배우게 하고, 사랑의 실천을 연단 받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꼭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9과 성경 박사 (행 18:24~26) 목록으로


성경에 익숙한 성도님들이 되실 것을 바라면서 “성경에 나타난 성경 박사님”들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제가 아는 성경 박사는 첫째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 오경이란 분량이 작지 않은데 모세는 그것을 받아 기록을 하고 다 증거 하였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에게 외워 들려주었습니다. 인쇄술이 없는 시대에 외워 들려주는 일도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출 24:4와 신 31:24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기록하셨다” 하였고, 또 여러 곳에서 “다 증거 하였다” 하셨으며, 출 17:14에서는 “받은 율법을 여호수아에게 외워 들리라” 하셨으니 율법에 통달함이 없고서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2. 웃시야왕 때에 ‘스라야’란 사람이 있었는데(대하 26:5) 이 사람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자”로서 그가 살아서 하나님께 구하는 동안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묵시, 즉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는 자가 있고, 그 뜻대로 시행할 때는 나라도 평안하였습니다.

3. 에스라 학사 겸 제사장을 들 수 있습니다. 라 7:6~10에 보시면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학사”요 그 당시에 아닥사스다 왕이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라 7:12)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데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만큼 말씀에 달음질(살후 3:1)하였기 때문에 퇴폐한 백성들을 정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즉 방백들과 지도층이 이방 혼인을 하였고 부패가 극심하였는데, 에스라가 가서 기도를 하고 말씀으로 백성들을 교훈 하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회개의 역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에스라는 기도에 생명을 맡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호위병 없이 5,000리 길을 4개월(라 7:8~9) 동안 안전 여행한 사람이었으니까요.

4.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주”이시니까 설명할 필요가 없으나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어릴 때부터 성경공부를 하셨습니다. 눅 2:46에 보시면 “성전에서 선생들과 앉으사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 하셨고(눅 24:19), “그의 가르침이 권세 있는 자” 같아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것입니다(마 7:29, 막 1:22, 27). 말씀에 익숙할 때에만 새 맛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 같아야 한다” 하셨으니(마 13:52) 이 말씀도 성경의 척척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5. 베드로의 성경 지식도 대단하였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계실 때에 베드로는 설교한 일이 없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시자 베드로가 제일 먼저 설교를 했지요. 성령 강림의 근거를 성경으로 설명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언한 것인데(행 2:14~36) 그 설교가 끝나자 금방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잘못을 크게 각성하였던 것입니다(행 4:13). 또 베드로는 사도회의에서 논쟁이 있을 때도 청중을 압도할만한 발언을 하여 질서를 잡은 사실이 있고(행 15:6~11), 베드로전서 1:10~12에서는 성경 연구를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6.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 하였고(행 18:24~25),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평신도이지만 아볼로를 능가할 만큼 성경지식이 있었습니다. 행 18:26을 보시면 “그들은 아볼로보다 더 자세히 성경을 풀어 가르쳤다”고 하셨습니다.

7. 마지막으로 성경에 능한 인물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들에게 전하라”(행 5:20)는 사명을 받았다 하셨고, 따라서 “진리 안에서 스승이 되었다”(딤전 2:7)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에게 유익한 것이면 다 증언하는 분이었습니다(행 20:20). 그것은 신약성경의 많은 분량이 바울 사도가 전달한 말씀이란 점으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 증거하고 진리를 밝히는 사명” 때문에 필자도 이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행 5:20, 빌 2:16).

8. 제가 아는 선배님들 중 성경박사 몇 분이 계십니다. 저희들 신학 초창기에 사역하신 오종덕 목사님은 성구사전이라고 이름 지어야 마땅하고, 또 같은 시대의 총신 교수 차남진 목사님은 성경 역사를 꿰뚫으신 분이며, 주경 신학자 박윤선 목사님도 66권의 주석을 남기신 분입니다. 아직 생존하신 박희천 목사님은 신․구약성경을 100회 이상 읽으신 분입니다. 돌아가신 친구 목사님(최문한) 한 분은 요한계시록을 다 외우셨습니다. 대만의 어떤 목사님이 박희천 목사님에게 “자신이 장총통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였고, 또 신․구약을 벌써 네 번째 읽는다”고 자랑하더라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배우려고 하여야 하겠지만 계 5:1에 보시면 “울어야 한다”, “계속 울어야 한다”(ἔκλαίον; 과거미완료 동사)고 하셨습니다.

 

4. 믿음 성숙에 대한 말씀


제20과 믿음에 집중하라 (마 22:37~40) 목록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때이고 직분자를 세우는 시간이기 때문에 교회 충성과 관련된 말씀으로 “믿음에 집중하자”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세계올림픽경기와 같아서 죽을힘을 다 기울이지 않으면 은혜 받기도 어렵고 승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1. 하나님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지 살펴보면, 엿새 동안 일했으면 하루 쉬라고 하셨지요. 또 이틀 양식까지 구하지 말고 하루 양식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부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귀가 하나님께 있고 창고에 쌓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부자는 천국 가기 어렵고, 마음이 가난해져야 천국을 얻을 수 있으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고 “부와 가난을 멀리하고 적당한 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딤전 6:8, 잠 30:8). 이 말씀의 뜻은 세상살이를 소극적으로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에게도 먹을 것을 다 주시고 특히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하시면서 “그 나라와 그의 의(이것은 세상일이 아님)를 구하면, 필요에 따라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하게 벌어서, 적당하게 쓰고, 잘사는 사람들보다 못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2. 그런데 신앙생활만큼은 그렇게 지도하시지 않고 몹시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1등을 하여야 한다”(히 12:1, 고전 9:24~25)고 하셨습니다. 올림픽에서 1등 하는 사람이 보통 힘써서 이기는 사람이 없지요. 사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신앙생활도 전심전력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1) 기도는 “쉬지 말고 항상 하라” 하셨지요(눅 18:1, 살전 5:17). 2) 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하셨지요. “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친다”(계 3:15~16)고도 하셨고, “전심전력하여 전진만 하라”(딤전 4:15, 히 10:38) 하셨으며,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상을 많이 받고(마 19:30), 얽매이기 쉬운 것은 벗어버리고 따라야 하며(히 12:1),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에서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힘쓰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마귀의 역사와 능력이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고 틈을 찾으니까(벧전 5:8, 엡 4:27) 한 치도 휴식을 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마귀와 잘 싸우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까 믿음생활에 미친 사람처럼 적극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생활에 집중하되 어디에 목표를 두고 힘써야 할까요?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가면 무조건 예배에 빠지지 말고 기도생활과 성경공부를 힘쓰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 자라는 기초적인 방법입니다. 그 후에 교회에 정착하면 헌금하는 일, 예배당 건축하는 일, 구제․봉사하는 일, 전도하는 일을 강조하고, 그런 일들을 잘하게 하기 위하여 직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직분이 있어야만 하고, 직분이 없으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직분을 줄까요? 그것은 서로 먼저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직분자들이 모범과 봉사에 앞장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 평신도이면 서로 겸손을 차리는 뜻에서 좋은 일에 나서지 않으니까 직분자에게 책임을 주어서 먼저 모범을 세우고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직분을 명예로 가지면 안됩니다. 좋은 명예가 영광스러운 것이라면 성도는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보면 명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가 성도를 누르고 높아진들 무슨 명예가 되고,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은 “모범 되고 앞장서서 봉사하라”는 뜻일 뿐 다른 뜻은 없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성도와 직분자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과 사람을 힘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의 강령을 말씀하실 때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람 사랑하는 것이 “그와 같다” 하시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랑을 나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일 4:20에서도 “보이는 사람을 사랑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다” 하셨고, 산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약 2:17).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셔야 하는데,

2)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예배, 성경, 기도를 힘쓰시고, 교회, 교역자, 교인, 그리고 이웃의 소자(어려운 사람들)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나, 교역자나, 소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과 사람 사랑을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도록 힘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제21과 영혼을 소성케 함(시 19:7~11)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혼을 소성케 함”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시 138:7에서는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그러면 “영혼이 소성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소성’이란 국어사전에서 “잃었던 정신이 깨어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사람의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입니까? 벧전 4:7에 보시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소성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얼마나 믿음의 정신을 차리고 사셨습니까? 또 이 시간에는 정신을 차리십니까?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은 “운전하면서 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낭떠러지에 서도 두려운 줄을 모르는 것처럼 성도의 영혼이 시들면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동안 말씀의 집중력을 잃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허리 아픈 것과 방 얻으러 다니는 일이 연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눌리거나 취하면 영혼이 침체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라고 하였습니다.

2. 영혼을 어떻게 소성시켜야 합니까?

1) 기도로 소성시켜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하셨고, 또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사랑이 없으면 영혼 소성이 안 됩니다. 어려운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생기가 돌고 용기를 갖는 것처럼, 기도나 사랑은 주는 자나 받는 자의 영혼이 소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보장을 믿습니다. 그리고 약 1년 전부터 이사하는 집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현대APT 전세를 얻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예배당 가까운 집, 교통, 주차, 넓은 집, 좋은 집을 구하려니까 어렵지요. 1억짜리 연립주택도 주차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제 하나님의 은혜로 7,000만원에 이 모든 것을 다 해결했습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졌을 때, 내 영혼도 소성됨을 느꼈습니다.

2) 말씀으로 소성시켜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으로 영혼을 소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시들어 가는 풀에 물을 주면 생기가 도는 것처럼, 영혼은 말씀의 양식으로 소성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것이고,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여 깨닫는 것은 어머니의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은 조미료를 많이 넣은 식품만 좋아하니, 그 신앙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현실주의로 가지요. 제가 기도 응답 받은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을 바라고 항상 기도하는 것이 소성된 영혼의 생활임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집이 전셋집인데 재개발 지역이어서 1년 전부터 순탄하게 집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5,000만원 짜리 전세 살던 것을 1억 2천 짜리 아파트로 바꾸어도 주차문제, 관리비 문제가 부담이 됩니다. 교회와의 거리 조정, 교통문제, 주차문제, 넓이문제, 남향집, 전망, 가격까지 조건이 맞기란 힘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개료도 안 드리고 그런 집을 계약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심령이 소성된 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고 감사하였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묻기를 복권의 숫자가 몇 개냐? 고 물었습니다. 일곱 가지 조건도 맞춰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욕심 안 부리고 꼭 필요한 것을 구할 때 주십니다. 그래서 “복권 같은 것은 응답을 안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 것을 좋아하면 영혼이 소성 받지도 못하려니와 하나님의 사랑도 멀어집니다(요일 2:15). 본문 10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규례를 정금보다 더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재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영혼이 소성함을 받으면 1) 우둔한 자가 지혜롭게 된다 하셨고(7절), 2) 또 8절에서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 하셨으며, 3) 눈도 밝아진다 하셨고, 4) 11절에서는 “말씀으로 경계를 받고 지킬 때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영혼의 소성은 성령 충만한 상태를 뜻하고, 성령 충만은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병자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때 회생이 가능한 것처럼, 성경을 의미 있게 깨닫고 성경연구의 맛을 알며 지킬 때 마음이 소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 앞에 일깨어있는 심령이 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2과 말씀을 얻어먹음 (렘 15:16)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세 가지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는 선지자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말씀이고, 다음에는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다”는 고백이며, 셋째는 “주의 말씀이 자신에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 가지 고백이 다 중요하지만 “말씀을 얻어먹음”에 중점을 두어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자라” 하신 말씀에서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만 나타내는 하나님의 종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떠날 수 없는 일체감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의 사역자들과 성도들도 그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권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주님의 뜻을 앞세워 자신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것입니다.

2.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다”고 한 것입니다. “얻어먹었다”는 뜻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구걸하듯 사모하고, 찾아서 터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은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으니

1) 우선 그 시대에 말씀이 희귀하였음을 뜻합니다. 선민 세계에 말씀이 희귀해질 것을 아모스 선지자가 약 150년 전에 예언하였습니다(암 8:11). 또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증언만 하였고(14:13~14), 의로운 선지자는 핍박을 받으니까(20:8~9)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성경, 교사, 서적, 방송망 등 부지기수로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이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말씀이 곁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2) 예레미야가 말씀을 얻어먹었음은 그 자신이 말씀의 기갈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시장기를 느끼고 목마름을 느끼는 것처럼, 말씀의 사모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재미를 느끼고 성경을 보아야 하며, 설교에 기대를 걸고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은 반드시 그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교훈의 의미를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갈망한다 하여도 깨달음이 미흡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진리를 사모하듯이, 성경의 갈망이 있어야 말씀의 갈증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얻어먹었다”는 뜻은 구걸하듯 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즈음은 라디오만 틀어도 좋은 말씀이 넘치게 임하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오거나, 선지자를 만나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그런 기회가 쉽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나라의 위기는 닥쳐오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임하기를 얼마나 갈망하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받은 계시의 말씀이 희망의 말씀이 아니고 멸망의 예고였기 때문에 증거자에게 더 큰 고난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어떤 말씀이든 갈망함으로 말씀을 받았고

4) 또 그 말씀을 달게 먹은 것입니다. 배고플 때 얻어먹는 적은 음식이 맛있지 않겠습니까? “게 눈 감추듯 한다”는 속담처럼 말씀을 달게 먹은 것입니다. 듣고 깨달은 말씀을 “먹는다”는 용어로 표현한 말씀도 역시 말씀을 효력 있게 깨닫는 자세를 교훈 하신 표현입니다. 배고픈 갓난아기에게 젖꼭지를 가까이 대면 어떻게 합니까? 급하고 맛있게 먹으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까? 얻어먹었다는 뜻이 바로 그런 자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힘이 되는 것처럼, 말씀 터득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라고 고백한 뜻을 이해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먹었다”는 뜻은 말씀이 희귀한 때에 갈망하고 노력하여 달게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교역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 큰 기쁨과 즐거움을 맛봅니다. 어떤 때는 감탄도 하고, 눈물도 흘립니다. 제가 이 설교문을 기록하는 것이 7분 설교 7집 105과목을 마치는 부분입니다. 바로 앞에 기록한 것이 렘 14장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선민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예레미야의 기도를 살피면서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을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렘 14:19~20). 이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감동스럽습니까? 말씀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심령이 열리지 않았거나, 말씀에 접하는 방법이 문제가 있으면 즐거움을 맛볼 수 없고, 말씀의 즐거움을 모르면 믿음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얻어먹은 예레미야의 뜨거운 심정을 이해하시고 본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23과 양보 못할 것 세 가지 (마 9:14~15)목록으로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이라”(요 15:13) 하시고, 몸소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성도가 그런 생활을 목표로 한다면 양보 못할 것이 없겠지요. 교회 섬기는 일에 70 정년제가 생겼지만, 자기보다 교회를 더 잘 섬길 사역자가 있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더디게 하지 않는 차원에서 직분도 양보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자기가 무슨 직분을 맡기 위하여 경쟁하거나 선거 운동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물질과 명예 등, 심지어는 사랑 실천을 인하여 목숨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도무지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1.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을 양보하거나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일이 없지만 신랑을 뺏길 날이 올 때는 금식하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 때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예수님을 멀리하게 되는 일은 금식을 하는 노력을 하여서라도 방지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떠나면 여지없이 마귀의 유혹이 오는데, 이는 시험받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멀어지고 시험에 드는 책임을 누가 해결할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순간도 예수님을 멀리하는 일이라면 양보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모실 때 주님이 오른손을 붙들어 주십니다”(시 73:23). 성도는 주님의 붙드심을 받지 않으면 한시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 떨어지는 시작이고, 마귀를 가까이 부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마 12:44).

2. 정통 신앙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정통 신앙이란 성경을 바로 깨달은 지식이고, 거기에 입각한 생활입니다. 딤후 3:14을 보시면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의 교훈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하나님인 것처럼, 바른길도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뜻이 아닌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는다”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손해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른 것을 배우고 바른 신앙을 갖는데 대하여 양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앙의 단체가 서로 합쳐서 사랑을 실천할지라도 자기의 신조나 그 신조에 근거한 생활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가까운 친척이 있는데, 명절 때 개신교 목사의 집에 왔는데도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피하는 것을 보았고, 미국에서 각 나라에서 모여든 신앙인들이 연합사업을 하다가 성찬 예식을 하게 되었는데 장로교회에서 시행하는 성찬예식에 루터교회 신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념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정통성 있게 이해한 성도들도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의 신념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 믿는 신앙을 어떤 연합사업이나 타협의 조건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통 신학을 생명과 같이 여겨야 할 것은 그 바른 신앙이 자기의 큰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3. 자기의 달란트적 사명을 양보하면 안 됩니다. 마 25:15에 보시면 “그 재능대로 각각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달란트 사명이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고 다른 이의 도움이나 간섭이 없어도 자신이 능히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물론 하나님의 통치 대상에게는 다 주어진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맡은 일”인데 “그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그 충성을 타인에게 양보하거나 게을리 하면 타인에게 덕 될 일도 없고 자기에게만 손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만 해야 할 일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정통 신앙을 지키는 것, 자기만 할 수 있는 달란트적 사명, 이 세 가지를 양보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그러나 영광을 양보하고 재물을 양보하며 특권을 양보하고 자기 아니라도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양보하는 것은 필요에 따라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여러 가지 장점을 당선된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그가 인권운동을 했다는 사실,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희생적 변호사 역할을 한 것, 동서 화합 차원에서 호남의 정당을 택한 것, 선거의 이해관계로 여러 번 손해를 보면서도 정당을 바꾸지 않은 지조, 정몽준 씨와의 공조체제를 이룰 때 양보한 일 등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시적으로는 손해로운 것 같아도 결국은 좋은 결실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고난과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일관성 있게 정도로 가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처럼, 성도들도 항상 신앙의 바른 원칙에 서서, 허탄한 것들이면 다 양보하고, 진정한 가치의 것이면 끝까지 고수하는 좋은 신앙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24과 독자적 삶 (요 21:18~22) 목록으로


“독자적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많은 성도들 중에 자신의 독자적 또는 고유적 주관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목적 주신 뜻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의 풍조에 따라 떠내려가듯 살아가는 분들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반드시 자기의 믿음과 의지에 따라 독자성 있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1. 독자적 삶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 대로 살아라", "남의 정신으로 살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자기 분복에 알맞도록 살아라", 신앙적으로도 독립하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하며, 취미 따라 은사 따라 바쁘게 사는 자가 될지언정 줏대 없이 대세에 휘말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홀로 설 수 없고, 또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믿음 안에서, 또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환경에 따라 독자적 삶을 영위하시라는 것입니다. "나(설교자)처럼 살고, 나처럼 목회하고, 나처럼 방에 앉아서 설교문이나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하나뿐이기 때문이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사는 방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인 만큼 나답게 산다는 뜻입니다.

2. 인간이 다른 사람의 뜻을 따라 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목적을 두시고, 그 목적에 알맞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목적 없이 씨 뿌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너와 나와 이 세상을 목적 없이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히 목적이 있는데, 그것을 아는 방법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자기의 받은 달란트와 환경을 대조하여 연구하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선생 할 수 없고, 지식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선생을 하여야 하며, 또 믿음과 정의감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맞도록 일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름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젊어서는 네가…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시므로 베드로의 미래를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일어날 일까지 경험한 후라, 거절도 못한 채 "이 사람(사도 요한)의 앞길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니까 "내가 (승천하였다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세상에 머물게 한다 한들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를 뿐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각자의 길을 다르게 정하셨은즉 각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자신이 할 일을 알아서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3. 그렇게 하셔야 할 근거로써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고유성 있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피의 DNA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동질성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태어나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환경과 수명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방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영생할 사람은 영원한 계획을 하셔야 하고, 또 오래 못살 사람은 거기에 맞추어 계획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행 17:26에서 "사람의 수명을 정하셨다" 하셨는데, 그 말씀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조로증 환자가 있는데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늙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늙는 것이 방지되면 인간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세포를 생성시키는 연구를 하였는데 세포 중 수명 유전자 요소를 가진 "텔로미어"란 것이 분열하는데 거기에서 분열되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수명 연장을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의 섭리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4.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삶은 서로 길이 다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보고 "나처럼 살아라" 할 수 없고, 또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하여 책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후천적 교육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쁜 환경에서도 성공하고, 어떤 이는 좋은 환경에서도 죄를 짓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늙어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으로 작정하셨고, 사도 요한은 장수할 섭리에 해당하는 것을 말씀하셨으며,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죽음의 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사명적 감동에 이끌려 로마의 전도자가 되고 순교를 하였으니,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이 그 보고를 받으시고도(마 11:1~6) 자신이 메시야인 것만 알리시고, 그를 살릴 뜻은 나타내시지 않으므로, 역시 세례 요한도 작정하신 섭리대로 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순서대로 하십시오. 큰 것과 적은 것을 따지지 마십시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복음에 비할 때 작은 일이지만 그것이 자기의 생애에서 순서대로 감당하여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타산성 없이 순종하고 죽은 것입니다. 사리사욕에 얽매인 사람들은 요한의 죽음을 미련하게 여길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성도의 독자적 삶이 칭찬스럽지 않거나 비난을 받아도 옳다고 생각할 때 과감하게 실천하는 독자적 삶이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5과 믿음 생활의 과정과 목표 (엡 4:13~14)목록으로


“믿음 생활의 과정과 목표”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 또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일”은 믿음 생활의 과정에 관한 말씀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름”은 “믿음 생활의 목표”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려면 5 대목으로 살펴야 합니다. 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뜻이고, ② 아는 것이며 ③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는 뜻이고, ④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뜻, 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충만케 하는 문제들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문제입니다.

1) 여기에서 믿을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믿을 대상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말씀인 성경도 함께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을 대상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뿐입니다.

2) “믿는다”는 뜻은 “신용한다, 의지한다, 바란다”는 세 가지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한다, 경외한다, 복종한다”는 뜻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믿을 대상이면 당연히 경외와 사랑과 복종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이것을 믿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거듭나게 하신 은혜로 주십니다(히 12:2, 요 3:3). 그러나 사람에게 “믿으라”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믿어지는 것을 더 깨달아서 확신하라”는 뜻입니다. 깨닫는 것은 지식과 경험에 의합니다.

2.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믿음은 신앙심에 근거하는 것이고, “앎”은 지식과 경험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앞서고 지식이 그 다음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접근할 때 실상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 의심하면 가까워지지도 않고 알아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생활할 때는 가까워지고 깊은 정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믿고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고 이치에 맞으면 믿겠다”는 것은 인간이 진리의 판단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도 그런 일에 속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성경은 믿음으로 접근하여야만 그 실상을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 6:69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을 믿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의심하면 정죄부터 받게 되고(롬 14:23), 진리는 알 수 없게 됩니다. 철학은 믿음을 빼고 지식만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성인으로까지는 알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믿음에 근거한 상태에서 지식과 생활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는데 지식은 성경으로 아는 것이고, 생활은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말씀은 요 5:39에 있고, 경험(친교)으로 안다는 말씀은 요 10:38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배우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친교 하면 예수님을 알게 되는데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신분을 알게 되고, 친교로는 예수님이 자기를 인정해 주시게 되어 쌍방적 친교의 앎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자기편에서 일방적으로만 아는 것은 신앙을 제외한 지식 만으로의 앎인데 그것은 영적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3.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믿고 아는 것”이 바른 앎이란 뜻이고, 또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라는 뜻(같음)”이며 예수님을 믿고 알 때 두 인격이 서로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인격적으로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었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반쪽 인생이라 하여 온전한 삶이 아닌 것처럼 인생도 창조자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님을 알고 그 분과 연합을 하였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고 기차가 철로 위에 자리 잡은 것처럼 인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었을 때 온전한 사람으로써의 출발점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의 위치가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믿음과 연합의 정신을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최대한 닮도록 생활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으려 하지 않고 세상 사람의 풍속을 닮으려 하거나 세속을 닮으려 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바른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사람의 방도요, 목표이기 때문에 인간주의를 모방하여 살려 하지 말고 성경에서 예수님의 삶을 깨달아서 그것을 모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 생활이 넉넉하고 충만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 생활의 과정과 목표는 ① 믿음과 배움의 지식으로 확신의 폭을 넓혀가고,②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신이 됨으로써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궤도에 올린 다음 ③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는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제26과 은혜와 노력 (마 11:1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와 노력”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은혜”란 전체적으로 거저 받는 것을 뜻하고, “노력”은 인간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 하였을 때(요 3:16, 롬 3:22) 이것은 은혜로 거저 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구원”이란 환난에서 건져주는 일반적 의미가 아니고,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또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 하셨으니 이 말씀에 오해가 없도록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가? 에 대하여 이 말씀의 뜻은 천국 운동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 이전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할 때에 사실상 주전 400년경의 사람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 사역을 다 한 후부터 세례 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침체되었었고, 겨우 종교의 명맥만 이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한이 출현하여 회개를 외치고 메시야를 소개하니까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 하신 뜻이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인가? 할 때에 만일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어긋날 것입니다.

1) 성경에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과(롬 3:22)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요 3:16), 또 “예수님이 믿음의 주”라는 말씀(히 12:2)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믿음과 구원을 주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요 3:3), “성령의 역사로만 주를 주시라 할 수 있다”(고전 12:3) 그래서 “믿어졌다”(살후 1:10),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가 다 예수를 믿었다”(행 13:48) 하신 것이 다 은혜로 택한 백성만 구원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침노한다”는 뜻이 인간의 노력이 아니란 뜻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인간이 노력하여야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 생활을 위한 노력을 분명히 명하신 것입니다. 천국 문은 예수님이시고(요 10:9), “예수님이 아니면 열고 닫을 자가 없다”(계 3:7) 하셨으니까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는 뜻도 그 열쇠의 의미가 “바른 신앙 고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 침노 당한다”는 것은 “사람이 노력으로 문을 연다”는 의미가 아니고, 천국 생활에 관련된 은혜와 복을 노력으로 많이 받으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고, 그 땅은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은 옛 생활, 광야는 현실, 가나안 복지는 천국을 상징하지요. 그 땅에는 믿음의 지조를 지킨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으니까요(민 14:30).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선민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창조자가 아닌 이상 거저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애굽에 사는 동안 이방 민족이 그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침노하여 뺏어 가지라” 하셨으니 땅을 은혜로 주신 것은 구원의 복에 비유되고 침노하여 뺏는 것은 영토 확장을 의미하니까 천국 생활의 복락을 뜻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 고백하고 구원의 티켓을 받는 것은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도와, 헌신을 많이 하여 은혜를 더 받는 식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식구들은 노력으로 천국 생활의 은혜를 더 누리는 것이고, 나가서는 내세의 상급도 더 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력의 대가는 누리는 것과 상급의 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 사람이 노력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공로인가? 할 때에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많고 인간의 노력은 아주 경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과 공기와 빛과 물과 씨와 건강과 지혜를 주셨고, 인간은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약간 활동하므로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활동을 안 해도 식물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노력을 하면 더 맺는 것인데 이것이 축복과 상급에 해당하는 결과를 주는 것일 뿐 구원 그 자체를 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신령한 은혜로 비유하면 믿을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고(요일 3:9, 5:1), 지식과 연구와 체험으로 믿음의 폭을 넓히는 것은 노력으로 얻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엡 4:13, 롬 1:17). “주 예수를 믿으라” 하셨을 때 하나님은 성경으로 믿을 대상을 나타내 주셨고, 또 거듭나는 은혜로 믿을 마음을 주셨으니 믿음의 근원은 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주신 이성의 작용으로 “믿을 대상을 확인하고 영접하라”는 것이 “믿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생명으로 태어났은즉 울고 젖을 빠는 것은 태어난 생명의 책임이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영광 돌리는 일과 축복은 노력으로 이루셔야 하겠습니다.

 

제27과 은혜 받는 과정 (왕하 7:3~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역경에서 은혜를 받고 형통하게 되는 과정”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피면 유다 왕 여호사밧 때에(주전 850년경) 북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통치할 때였습니다(왕하 3:1). 그 당시에 아람 왕 “벤하닷”이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 도성을 에워싸므로(왕하 6:24) 성중의 백성들이 크게 주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아이를 삶아먹어야 하는 입장까지 되었던 것입니다(왕하 6:28). 그때에 여호람왕은 “엘리사 선지자가 바알신을 대적한 연고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다” 하면서 엘리사를 죽이려 하였고, 엘리사는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양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왕하 6:30~7:2). 따라서 그 지역을 배회하는 문둥이 네 사람도 역시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이들이 어차피 굶어 죽을 지경이 되니까 결사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문 앞에 주둔한 아람군 진영으로 항복해 들어간 것입니다. “성 밖에 있어도 어차피 굶어 죽을 것이요, 성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인즉 성 앞에 주둔한 적군에게 항복하면 혹시 살려주고 양식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여 반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갔더니 적군들이 모든 양식과 전리품을 남겨 놓은 채 도망하여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날에 “큰 군대가 몰려오는 소리를 듣고 착각하게” 하셔서 그들이 도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왕하 7:6). 그래서 네 사람의 문둥이는 양식을 얻고 형통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곤경에 처한 백성들에게 은혜주시는 과정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곤경에서라도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항상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3:13, 롬 15:13). 다른 백성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내일 이맘때에 양식을 얻으리라” 하니까 한 장관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늘의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왕하 7:1~2)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 문둥이는 희망 갖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마리아성 안팎에는 양식이 없었고, 있는 곳은 아람 군대의 진영뿐이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듯이 양식을 구하려면 양식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야곱이 흉년들었을 때 애굽으로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양식을 찾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마 7:7). 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롬 4:17).

2.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람 진영이 아니고는 양식 구할 곳이 없으니 그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람 진영으로 항복하고 들어가는데는 항복 그 자체도 부끄러운 일이고, 또 죽을 위험도 있는 것이니까 결단에 큰 용기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전심을 기울이는 자”, “침노하는 자”(대하 16:9, 마 11:12), “결심하는 자”(단 9:3)란 말씀이 있고, 그런 결단이 있을 때에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작이 반”이란 속담처럼 결심과 결단도 결과의 승패를 거는 것입니다. 결단이 부족하여 망설이는 사람은 큰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결단을 내어 이삭을 제물로 드렸고, 나만 장군이 어렵게 용기를 내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가서 병을 고쳤으며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돈 것도 역시 결단 있는 순종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는 과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희생을 각오하여야 하는 점입니다. 문둥병자들은 생명을 반쯤 희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람 진영에 안 들어가도 굶어 죽을 형편이니까 죽이면 죽고 안 죽이면 산다는 50% 희생 정신과 50% 희망으로 항복을 한 것입니다.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는 것처럼(고후 9:6) 희생이 클수록 받는 영광이 큰 것입니다(마 19:29). 성경의 사역자 중에 가장 희생을 크게 한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 하셨고(마 11:11), 그는 말하기를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하였습니다. 희생 중에 가장 큰 것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 사랑이 가장 크고(요 15:13), 생명의 희생이 있을 때 밀알처럼 열매가 많아지며(요 12:24) 또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가 오히려 산다고 하셨습니다(마 10:39, 막 8:35, 눅 17:33). 주 안에서의 희생은 곧 생명이고 상급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고난은 은혜를 받는 동기가 되었고(합 3:2), ② 소망과 결단과 희생은 은혜를 받는 필수적 과정이 되었으니 ③ 성도는 항상 믿음 안에서 긍정적 사고 방식과 용기와 결단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28과 믿음의 문답 (히 11:1~3)목록으로


저희들은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생의 본분도 시행하며 구원도 받고 축복도 받으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연구를 하시며 또 의문은 없으신 지 여쭙고 싶습니다. 믿음이 중요한 만큼 믿음에 대하여 많이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믿음의 문답”이란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1.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믿을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거짓된 대상이나 영원히 믿지 못할 대상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의 체력을 믿었는데 50년 후에 그가 늙은 몸이 되었다면 그 체력은 영원히 믿을 것이 못 되겠지요. 따라서 유한한 피조물은 다 믿을 것이 못 되고, 또 거짓된 자는 더욱 믿을 대상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되고 영원한 대상, 불변하는 대상만 믿을 대상이 되니까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참되시고(롬 3:4), 그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거짓된 대상은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기 때문에 외식하는 믿음은 성립될지언정 참 믿음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믿을 대상이 하나님 뿐이신 데 그 믿을 대상에 대하여 더 설명할 부분이 없는가? 할 때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고, 또 말씀으로 계셨으니까(요 1:1) 성부, 성자, 성령님과 그 분들의 말씀과 그 분들이 합동으로 계시해주신 성경 말씀은 다 믿을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14:6, 17:17, 살전 2:13). 하나님이 참되신 즉 그의 말씀과 성경도 참되므로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일들을 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이란 뜻에는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증거를 보고 믿는 것과 못 보고 믿는 것의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만물이 증거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은 만물에 보여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에 핑계하지 못한다”(롬 1:20)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는 모든 인간들이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인 것은 다 잘 믿습니다. 그런데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십자가는 대속의 방법이며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증명이 안된 것이지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읽으신 말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또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증거”란 말씀이 바로 증명 없는 것을 무조건 믿어서 그대로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아는 신앙에 포함되지만 일단 상태와 결과를 안 보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신용 있는 사람이 “1,000만원에 3부 이자를 주겠다”고 하였다면 그 약속한 말을 믿고 돈을 줄 것입니다. 그를 신용이 있는 사람으로 믿기 때문에 선불 이자를 안 받았지만 믿고 돈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내세가 있고 부활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을 신용하는 자는 그 말씀과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그 말대로 되고 또 자기가 믿은 대로 되겠지요. 그것이 곧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안 보고 믿은 것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용이 있었다 하여도 변동할 여지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믿을 대상이 못되는 것이지요.

4. 여기에서 증명되지 않은 것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님께서(히 12:2) 거듭나는 은혜로(요 3:3) 새 생명을 주실 때 거듭난 심령은 증명 없이 믿으라는 모든 말씀을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지식적으로 알고, 믿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증명 없이 믿어야 하는 모든 신령한 일들은 거듭난 성도라야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곧 구원받는 믿음이요, 신앙 고백을 하는 믿음입니다(행 16:31). 믿음에는 구원에 필요한 믿음도 있고, 기도 응답에 필요한 믿음도 있으며(약 5:15, 마 15:28, 막 11:24), 능력을 힘입음에 대한 믿음도 있고(막 11:20~23, 마 8:13), 큰 확신을 갖고 순종하는 믿음도 있으며(롬 1:4, 14:23), 미래의 될 일을 바라는 믿음(히 11:1)과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갈 5:6)과 거룩한 믿음(유 20)과 또 온전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히 10:22). 모든 성도의 구원받는 믿음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도에 있어서는 은사에 따라 다르게 역사 하는 특징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구원받는 믿음 외에 순종하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온전한 믿음, 거룩한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예수님은 부활을 믿을만한 증거로 사도들에게 주셔서 신앙의 터를 삼으셨습니다. 행 17:31, 엡 2:20).

 

제29과 예수님을 보라 (사 42:1~4)목록으로


1절에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하신 말씀은 곧 예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도 요 1:36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도 히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라”는 뜻은 “예수님의 생활 모습을 잘 살펴 본 받으라”는 뜻입니다. 2002년 월드컵 행사가 어제(5월 31일 저녁)부터 시작되었지요. 세계의 인류들이 월드컵 축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를 봄으로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축구를 잘 하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체력과 문화와 단결력과 노력을 함께 알 수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국위 선양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알고 본 받는 것은 막연한 국위 선양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과 인격 변화와 생활과 축복의 전환점이 됨은 물론 구원과 영생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1.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신약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는 방법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본 받아 나타내셨지만 그 사실도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고전 11:1). 요 5:39과 21:25에서 “성경이 곧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라” 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보거나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신 만큼 그 분을 꼭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다(요 17:3).

2. 우선 본문에서 소개하신 예수님을 살피면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붙드시는 분이고, 하나님께 종처럼 충성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사람의 모양을 입으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라”(빌 2:6~8)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만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종 되신 모습, 즉 겸손, 복종, 희생을 기피하지 않으신 모습을 바라보셔야 할 것입니다.

2)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택하셨다”는 뜻은 중보자, 대속자로 택하셨다는 뜻이고, “기뻐하셨다” 함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목적(대속, 중보자)에 넘치도록 순종을 하셨기 때문이며 “사람”이란 뜻은 완전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성정으로 대속자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본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모습, 인격에 관한 것, 인간으로 세상에 적응하시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신 일에 대하여 바라보실 수 있어야 하며

3) “나의 신을 그에게 주셨다” 하심에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셔야 할 것입니다. 요 1:14과 3:34과 마 3:11, 16에서도 예수님이 성령에 충만하신 분임을 말씀하셨고, 마 4:1에서는 성령님에게 이끌리신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와 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을 넉넉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바로 물욕과 명예욕과 권세 향락욕이었습니다. 이런 시험은 성령의 충만으로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갈 5:16). 하나님은 성령에 충만한 성도를 더욱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4) “이방에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과 통치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선교를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인도 섭리로 하는 것입니다. 또 공의롭게 살려고 힘쓰는 것도 역시 예수님의 뜻과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도 섭리하셨기 때문에 그 구원의 역사를 완성할 때까지 주님이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와 말씀으로 활동하시지요. 저희들은 “공의”란 뜻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공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생활입니다. 의와 악에 대한 바른 처신이기도 합니다. 공의란 “미쉬파트”의 뜻이 “참된 종교의 작용”이라고 해설한 것도 보았습니다. 여하튼 하나님 표준에 입각한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공의를 펼치시는 예수님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을 만큼 겸손한 분이며(외치지 않으시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며 거리에 들리게도 아니 하심) 또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를 보존하실 만큼 긍휼한 분이시고, 또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며 소망이 넘치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지가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악한 세상에서의 생활과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3. 히 12:2에서는 “십자가를 참고 감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셨고, 또 히 4:15에서는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가 없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깊이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그의 인격, 그의 생활, 그의 십자가, 그의 겸손, 그의 복종과 희생, 그의 공의로운 생활 등을 보시고 꼭 본 받는 생활에 들어가셔야 할 줄로 알아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0과 은혜 받은 증거 (시 86:17)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 받은 증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은총의 표징을 나에게 보이시옵소서” 하였는데 이 “은총의 표징”이 곧 은혜 받은 증거인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이며 은혜를 많이 받은 종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많이 닮은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 고백을 하고 구원받는 은혜이고, 또 한 가지는 생활로 영광을 많이 돌린 후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구원(죄사함과 영생)은 공로 없이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믿음도 주님이 주신 것이니까요. 그러나 생활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격 변화와 노력과 헌신적 공로로 본을 보이는 생활에 속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은혜 받은 증거”는 후자에 속한 내용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증표가 성도의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1.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술에 끌리고 여자에 끌리며 도박에 끌리는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말씀과 기도에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앉으면 기도하고 싶고, 또 성경 묵상하고 배우고 싶은 충동입니다. 성도 중에는 기도에 끌리고 말씀이 꿀처럼 사모되는 충동을 체험하지 못한 식구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성도는 신앙 고백으로 구원만 받았을 뿐 생활의 은혜가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은혜 받은 증거는 결벽증이 나타납니다. 결벽증이란 죄를 안 짓기 위하여 예민한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욕심을 갖지 않으며 이웃을 미워하거나 손해를 보여도 안 되고, 말의 실수나 약속의 위반은 더욱 두려운 것이며 더 나가서는 불법을 피하고 의무를 감당하며 거리낌없기를 최대한 힘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무책임하게 하고 실천하지 안으며 죄의 감각이 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결벽 증세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도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세속을 멀리하게 됩니다. 세속이란 신령한 복에 반대되는 것으로 세상에 속한 모든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잘 먹는 것, 잘 입는 것, 돈을 잘 쓰는 것, 놀기를 좋아하는 것, 현세의 복을 부추기고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유족함)이 대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는 것으로 족함을 느끼고 사치나 허영이 부럽지 않으며 사람의 칭찬까지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하셨고, 바울 사도는 “세상에서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다” 하셨으며(빌 3:7) 사도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일 2:15). 스포츠를 떠들썩하게 해도 마음이 끌리지 않고 누가 현실적으로 성공하였다 하여도 부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은혜의 가치가 감추인 보화처럼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4. 기도 응답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을 확신하면 기도에 더 끌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간구한 내용을 항상 기억하시고, 언제 무엇이 응답 성취되었는지를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내용이 응답된 것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이란 바로 기도의 내용을 기억하고 응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자신에게 얼마나 성취되는지를 체험으로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바로 나에게 약속을 주신 분으로 믿어야 하니까 자기 육체의 아버지보다 더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신다”(창 28:15) 하셨으면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약속으로 믿고 잘 지켜주시는지를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하셨으면 과연 자신이 먹고 입었는지를 확인하세요. “네게 있을 것을 아시느니라”(마 6:8, 32) 하셨고, 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면(히 4:16) 그대로 되고 있는 지를 확인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성도는 반드시 이 다섯 가지를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하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끌릴 때는 반드시 성경의 내용을 터득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줄 아셔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는 사람이나 돈 보다 하나님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31과 의인에 대한 지식 (겔 18:5~9)목록으로


필자는 본문 말씀을 읽고 “의인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에 의인을 말씀한 내용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본문만큼 명확하게 설명한 곳은 없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법과 의를 따라 행하고 우상 숭배를 멀리 하며 음행이나 음란을 삼가고 폭력이 없으며 가난한 자를 배려하여 덕을 보이고 손으로 범죄하지 않으며(폭행, 절도, 나태) 진실하게 판단하고 율례와 규례를 성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인이라” 하셨고, “그런 의인은 정녕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산다”는 뜻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십계명만 잘 지키면 의인이라”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고, 진실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도 의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고 하여 이 “의인이란 규정”이 계명에 대한 절대 순종이나 절대 순결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고(갈 3:10~11, 약 3:2),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요 3:16, 롬 3:21~22) 따라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롬 3:10).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은 것은 마귀의 역사가 강한 세대에서(눅 4:6) 인간의 연약을 아시기 때문에(히 4:15, 5:7) 예수님 자신처럼 100%의 율법 실천을 요구하시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자유(스스로 지키라는 뜻)를 주셨습니다(갈 5:1). 만일 “율법을 다 지켜야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 하셨더라면 인간들은 신기루를 따라가는 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의로운 자로 지명하고 칭찬하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1) 노아를 의인이라고 하셨지요(창 6:9). 노아는 순종이 특징이었고, 과음 실수가 있었습니다.

2) 욥처럼 의로운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욥 1:8). 욥이 죄를 안 짓기 위하여 애를 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일이 있었을까 하여 예비적으로 번제를 드린 사실과 이성적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처녀를 주목하지 않은 일 같은 것입니다(욥 1:5, 31:1).

3)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의로운 자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한 일이 있었습니다(마 1:19).

4) 예수님 출생 당시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고,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기다리던 중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찬송과 증언을 하였고(눅 2:25~32),

5) 고넬료를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22). 고넬료는 이방인 군인으로서 기도와 구제에 힘을 쓴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의인은 전체적으로 다 의롭다는 뜻이 아니고, 어느 정도 또는 상당하게 정의로움을 나타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 사람들이 칭찬한 의인이었고, 욥은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의(계명을 지키라,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율법의 속박을 떠나서 “자유롭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의”를 말하는 것이고, 또 완전 결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며(갈 3:11), 진실에 부끄럽지 않도록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보시면 “의인이 산다”는 말씀과 “의인 아닌 자가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곳이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정녕 산다” 하셨고, 만일 그의 아들이 의롭게 행하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10~13절) 하시므로 의롭지 않은 자식이 “부모의 의의 공덕을 힘입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출 20:6에서는 “조상의 의의 값을 수천 대까지 주신다” 하셨으니 서로 상충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뜻은 의인의 후손이 의로운 생활을 힘쓸 때 그 조상의 공덕과 합하여 더 주시는 복이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아비의 죄값을 3, 4대까지 받게 하신다”는 것도 그 후손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할 때 부모의 죄값과 함께 벌을 더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겔 18:1~4에 보시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 하여 아들의 이까지 시다는 말이 어찜이냐…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라 아비나 아들의 영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므로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에 나타난 의도 요셉이나 고넬료처럼 행한 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의는 축복과 상급에만 해당하는 것이며 반대로 “의롭지 않다”는 것은 성도의 신분상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그는 구원도 받을 수 없고, 현실과 내세의 벌을 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의는 “완전한 의”인데 인간은 아담부터 타락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의를 갖춘 자도 없거니와 완전하게 계명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메시야의 의를 힘입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사명을 갖기 때문에 그 사명을 이행하는 의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의 의는 믿음의 증표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계되며 현실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에 큰 관계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믿음의 분량 (롬 12:3, 고후 10:13)목록으로


“믿음의 분량”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결과로 볼 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우선 믿음의 본질이 하나라는 뜻을 설명하겠습니다. 엡 4:5에 보시면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라는 뜻은 본질적 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요소가 하나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수단은 하나란 뜻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한 분이시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이신 신성이 구분되는 것처럼 믿음도 구원받는 믿음과 역사 하는 믿음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범자이시고, 죄 없는 인간으로서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자가 되시고, 또 심판주가 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그 결과를 나타냄에 있어서 구원받게 하는 믿음과 큰 역사를 나타내어 영광 돌리는 믿음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3. 롬 1:17에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시작하는 믿음이 있고, 성숙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1) 그래서 우선 시작하는 믿음을 말씀드리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을 때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뜻하고, 그 믿음으로 의를 힘입어(롬 3:26)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행 14:9에 보시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금방 회개한 강도도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눅 23:43),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순절 당시에서 3,000명, 5,000명이 세례를 받았지요(행 2:41, 4:4). 그들은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예수님의 제자 될 것을 결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바른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 세례를 받았고(행 8:39). 루디아의 집도 그와 같이 세례를 받았으니(행 16:14) 이것이 곧 믿음 중에 시작하는 믿음이요, 거듭난 믿음이며 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량과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성숙한 믿음이 있으니 이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성도마다 같지 않은 것이 마치 사람마다 건강이나 지식이나 재물이 같지 않은 것처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4.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분량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롬 12:3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고, 고후 10:13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역사)한다” 하셨으며 그 외에도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다”(엡 4:7),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데 이르라”는 말씀(엡 4:13), 또는 달란트 분량에 관한 말씀(마 25:15),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신 말씀(마 15:28),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신 말씀(마 8:10), 또 “믿음이 적은 자”(마 17:20)라고 책망하신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5. 그러면 이 많고 적은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1) 말씀 지식이 많고 적음을 뜻합니다.

2) 성령 충만이 넉넉하고 부족함을 뜻하고,

3) 실천 분량이 많고 적음을 뜻하며

4)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음이 많고 적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분량은 성도마다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은사로 되는 경우가 많지만 성도의 노력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최초의 믿음은 거듭남과 동시에 하나님이 믿을 능력을 주셔서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살후 1:10). 그래서 구원은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믿음은 배우고 기도하며 회개하고 연단 받으며 실천하므로 육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 분량이 많으면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히 11:6), 또 능력도 나타내주십니다. 성경에 보시면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고”(마 17:20) 또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역사를 나타낸다”(눅 17:6) 하셨지요. 이 믿음이 곧 분량에 따라 역사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숙하는 믿음이면 비단 분량이 작아도 역사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이 크면 기도의 응답은 물론 능력을 힘입는데 유익하고, 또 충성을 잘 하여 하늘의 상급을 예비할 뿐 아니라 많은 영광을 돌리는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제33과 전진의 원리 (딤전 4:15, 히 10:38)목록으로


“전진의 원리”란 제목으로 구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믿음이 커져야 할 것과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히 11:6), 또 믿음 따라 복 받게 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마 9:29, 막 9:23). 본문에 보시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하셨고, 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인데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인용근거 알 수 없음), “성장하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3:1~3, 히 5:14)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 12:28~29에 보시면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려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받을 때 믿음도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진의 원리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많이 받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가치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유혹을 피하며 자기의 순결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1. 은혜를 많이 받는 일에 대하여 사람이 자기의 입장을 알면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통치 섭리에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권세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라도 몸은 하나일 뿐이고, 90세 이상을 누리기 어려우며 칭찬스러운 생애를 살기도 어렵습니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보호, 인도, 공급에 대한 은혜를 구하고,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주 안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1) 갈망함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 천사의 몸을 붙잡고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창 32:26)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의 효력은 에서와 화해하는데서 나타났고, 또 그의 열 두 아들들이 다 건재하였습니다. 역사에 없던 태풍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과 자연에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막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인재가 아닌 천재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12:28~29, 시 107:9).

2) 은혜 받는 목적을 겸손과 하나님의 영광에 두셔야 합니다. 겸손과 영광은 은혜 받는 방법도 되고, 또 결과도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가 겸손하지 않거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더 겸손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많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문제가 많이 있으면서도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덕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고전 4:18).

3) 은혜 받기를 노력할 때 회개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순결에 지장이 있으면 모든 일이 은혜롭지 않습니다. 운전자가 갓 길로 차를 몰면 불안한 것처럼 거리낌 상태에서의 생활은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거리낌은 마음의 병이고, 마음의 병은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4) 말씀, 기도, 순종, 헌신을 꾸준히 하면 오래지 않아 큰 감동과 변화의 충격으로 큰 은혜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꼭 힘써 보세요. 이 은혜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을 뜻합니다.

2. 하나님 영광을 목표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별하여 영광을 많이 돌리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힘도 생기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집니다. 이때에 가장 영광이 많이 나타나고 자기 은사 소질에 맞는 일을 선택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가 “해야할 몫을 주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다 펼치려 하지 마시고, 전문성 있는 은사에 비중을 두어 시행함이 더 영광이 될 것입니다. 고전 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셨지요. 고전 12:8에서는 “은사의 서열”을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고후 4:18), “겉 사람과 속 사람”(고후 4:16), 현실과 천국(고후 5:1, 전 7:1~4), 육체와 영혼, 믿음과 체험(요 14:11), 일반 은총과 기적, 성직과 평신도…,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더 큰 것을 분별하고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전진을 잘 하려면 순결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코미디언 이○일 씨가 잘 나가다가 끊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관리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담배로 몸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 분은 지혜로운 데가 많았지만 한 구석이 어두웠습니다. 성도들도 심령의 한 구석이 어두워지면 유혹에 빠집니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이 너무 순진하고 신앙적 지식이 없어서 사람의 유혹에 잘 넘어갑니다 예를 들면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많고, 또 교회가 잘못 가르치는 일이 많지만 그것을 모르고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지 않고, 붉은 셔츠를 입고 축구장에 가셔서 과격한 응원을 하셨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아시안 월드컵이란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직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필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4과 거룩함에 흠이 없음 (살전 3: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거룩함에 흠이 없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자신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서 교훈과 기도를 힘쓰셨던 것입니다.

1. “거룩함에 흠이 없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뜻은 조상의 타락으로부터 이어받았거나 범죄의 유혹에 이끌리는 부패성을 가진 성도들이 최대한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하고 죄를 멀리할 수 있는 깨끗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믿음의 새 출발을 할 때 깨끗한 옷을 입고 시작하였다면 세상 떠날 때까지 그 깨끗함을 보존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어릴 때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면 금방 더럽게 한다고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받았고, 누구는 항상 옷을 깨끗하게 오래 입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거룩함에 흠이 없음”은 죄짓는 일을 몹시 삼가는 것을 뜻하며 성결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렇다면 성도가 거룩함에 흠이 없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완전 성결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는 뜻이 털면 먼지도 안 나오도록 입으라는 뜻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부패한 인간은 모태로부터 부패성을 갖고 나오기 때문에(사 51:5) 스스로 완전히 성화 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대로 다 준행할 자가 없다”(갈 3:10~11)고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성도가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뜻은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출입하는 것처럼 흠 없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먼지는 없을 수 없음).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순결하게 탄생하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므로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십니다(벧전 1:19, 고후 5:21, 히 4:15).

3. 성도가 거룩하여지고 흠이 없게 되는 방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 하셨고, 딤전 4:5에서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성경대로 살기를 힘쓰고, 성경대로 믿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에 예민하며 “천하를 다 준다 하여도 진리를 거스릴 수 없다”(고후 13:8)는 신념이 확고하다면 유혹을 이길 수 있고, 모든 범죄를 최대한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 9:14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라 하시므로 말씀, 기도, 성령님의 역사 등으로 거룩을 보존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회개도 꼭 필요합니다. 회개가 거룩하게 되는 소극적 방법이라면 말씀, 기도는 적극적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서 살기를 시작하였을 때 깨끗함으로 시작하였지만 연약하여 범죄 유혹에 빠졌다고 가상한다면 일단 회개를 하고 범행을 중지한 다음에 다시 성경대로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길을 잘못 갔을 때 깨닫고 다시 돌아온 다음 바른 길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그런데 회개하는 과정에 있어서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상대로 범죄한 일에 대하여 그 사람과 화해를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성도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깨닫고 돌이키면 됩니다. 하나님께 손해 드린 것을 인간이 보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할 입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면 죽기 전에 채권자 앞에 사과하고 탕감을 받든지 아니면 화해를 구하고 세상을 떠나야 그 회개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대로 한 범죄는 지상에서 갚을 수 있는 만큼 힘쓰고 화해를 할 때 완전한 회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과오를 회개하고 말씀 따라 살기를 힘쓴다면 거룩함을 잘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고 하셨습니다.

5. 중요한 것은 “죄사함 받았다”는 것과 “거룩함”의 구별이고, 또 재림하신 예수님을 맞이할 때 죄사함 받았으니까 자기의 영적 신분도 완전히 거룩해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죄사함”이란 십자가의 공로에 의하여 천국에 들어가도록(심판을 면함) 의의 티켓을 받는 것을 뜻하고, “거룩함”이란 성도의 신분(인격)이 부패성을 제거한 상태로 얼마나 깨끗하냐? 하는 것인데 이 거룩함은 성도마다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잘 하고, 말씀 실천을 잘 하다가 주님을 맞이한 성도는 큰 기쁨의 대상이 될 것이나 회개를 부족하게 하였다든지(앞에서 부채 갚는 일로 비유 설명하였음) 말씀 실천이 미흡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면 그 상태대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를 옷 입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귀한 어른 앞에 나타날 때 깨끗하게 입은 자와 더럽게 입은 자로 보이는 것 같을 것입니다. 설령 거룩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고 구원받는데는 지장이 없고, 정도에 따라 “크다 혹은 작다”로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마 5:19). 그런 의미에서 성도가 무엇을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도 자신의 인격과 생활이 거룩해지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크다 일컬음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완전 거룩이 없다 하더라도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수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5과 연약한 인생의 대책 (시 39:1~7) 목록으로


"연약한 인생의 대책"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1~6절까지는 "연약한 인생"에 관한 말씀이고, 7절은 "대책"에 대한 말씀인데, 그 대책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 뿐"이란 것입니다. 본문 앞에 잔글씨를 보시면 "다윗의 시"라 되어 있고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표제로 나타난 잔글씨가 히브리 원문에도 있는가? 할 때,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시대에 삽입한 것이 틀림없지요. 히브리 음역으로 '맛소라'란 말은 전통이란 뜻인데, 맛소라 학파란 단체가 주전 300년경(?)부터 있었는데, 그 학파에서 구약의 문서를 모으는 일과 발음을 표기하여 점을 찍은 것과 정경 보존에도 힘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표기사역이 주후 700년경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학파에서 적당한 시기에, 잔글씨로 각주를 붙였을 것으로 사료되는데, 많은 신학자들이 그 내용을 정경처럼 믿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다윗의 시"이고 "영장 여두둔"이란 악보의 곡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시로 읊고 여두둔 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보급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노래 가사로 보급하는 경우가 있으니 좋은 방법입니다.

1.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다윗이 자기의 연약을 고백하고 노래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40년간 왕 노릇을 하였을지라도 왕 되기 전에 사울왕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고, 또 왕 된 후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이나 아들 압살롬의 모반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1) 인간이 연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선한 자를 위협하는 악인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불안한 것처럼, 가만히 있는 자를 괴롭히는 악인들이 있기 때문에 착하게 살려고 하는 자라도 연약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다윗이 악인 때문에 행위를 조심하고 입에 자갈을 물릴 만큼 침묵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도 그것이 화근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말도 발하지 못하니 근심이 더 심해진다"(2절)고 하였습니다.

2) 인간이 연약하고 답답함을 느낄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기도를 안 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악한 자들 앞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하거나 화가 치밀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시고 또 나의 연약함도 알게 해주십쇼" 하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도대체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것은 생명의 쫓김을 당하는 다윗으로서 적합한 기도인 것입니다. 인간은 악인들로부터 늘 생존의 위협을 당하기 때문에 연약함을 느끼는 것이고

3) 또 악인의 위협이 없다 할지라도 짧은 인생에 불과한즉 연약한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므로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하므로 영원자 앞에서 유한자의 날이 없는 것(경점; 시 90:4)처럼 짧은즉 연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위험이 없고 강건해도 80년인즉(시 90:10), 그렇게 짧은 인간이 어찌 약하지 않으냐? 하였고

4) "사람이 든든히 서도 진실로 허사 뿐이라"(5절) 하므로 연약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 허사냐 하면 "그림자처럼 빨리 달리는 인생이 그 빠른 시간에 헛된 일에 분요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6절). 그 "헛된 일"이란 "재물을 모으는 일"이고,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 모르는 것"을 위하여 분요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눅 16:1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선호한다면, 그 인생은 허사를 경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시 2:1). 하나님은 인간(특히 성도)이 물질에 편중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신 것 자체를 보아도 그렇고(고후 8:9),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말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교훈,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씀,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욥 22:24)는 말씀들이 다 검소한 생활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이 물질 중심으로 허탄한 일에 빠지고, 그림자처럼 빨리 가는 인생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며, 늘 악인들 세계에서 조심하고 위협을 당한즉 연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빨리 지나가는 것을 뜻합니다(시 109:23, 나의 가는 것은 석양의 그림자 같다 하심).

2. 이처럼 연약한 인생의 대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7절에 보시면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 연약한 인생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자의 소망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37:40에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라" 하셨고, 시 121:1에서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피조물은 도움 주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만 연약한 인생에 대하여 도움을 주실 수 있고 보호․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태도에서 반드시 돌이키셔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보호받은 것은 군사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였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6~29).

 

제36과 불안과 대책 (시 42:5)목록으로


2003년 1월 3일 늦은 밤 TV에서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의 강의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 불안한 요소들이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불안을 떨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그 강의에 공감은 하지만, 기독교적인 신앙에 근거한 대책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설교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의 대책을 현실적 방법으로 대처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종교가 그런 동기로 생긴 것이 많음) 신앙인이 아닌지 신앙에 근거한 대책을 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안은 오직 기독교적 신앙으로만 해결하여야 합니다.

1. 현실에 불안의 요소가 많은 것을 여러 가지로 증언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핵무기의 위기, 물의 고갈, 교통사고의 위험, 중국대륙의 황사현상, 엘리뇨, 라니뇨, 고층건물의 위험, 속수무책의 질병, 인도로 뛰어드는 자동차, 사기행각, 가짜 물건, 오염식품, 대인관계의 갈등, 가난문제, 결혼을 겁내는 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전자기구의 복잡한 용법 등등,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정신적으로 고민하고 공포증, 노이로제 등에 걸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2. 그래서 불안의 요소를 제거해보려는 자구책을 많이 쓰는데, 대략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면

1) 도피하는 형이 있다고 합니다. 신문, 뉴스 잘 안보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사는 것, 속담에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2) "설마" 하는 생각으로 위험한 생활을 그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정원 초과하였지만 설마 배가 엎어지랴" 하는 식으로 산다는 것이요,

3) 위험을 예견하여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혹 이혼할 수 있으니까 적당히 살면서 나갈 구멍을 열고 사는 것입니다.

4) 주인 의식에서 피하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집수리도 하여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지만 세입자는 그렇지 않고, 가장은 살림 책임이 있지만 다른 식구는 그것이 없는 것처럼, 책임 일선에 서지 않는 방식이요,

5) 고슴도치가 가까이 있으면 서로 찌르고 멀면 심심하니까 적당한 간격으로 사는 것처럼 인간관계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자기 주장을 적당하게 묵살하고 사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 선택하는 것이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거나"라는 음식명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주시오 하면 "아무거나"란 음식을 주고, 왜 이런 것을 줍니까? 하면 "아무거나" 달라고 하지 않았소 한다는 것입니다. 신경 쓸 일 생기는 것이 다 불안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탈피책도 있다는 것입니다.

7) 광란의 세계로 뛰어든다고 합니다. 잊으려는 수단이겠지요.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른다든지,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를 하거나, 번지점프를 하거나, 스포츠 같은 것에 몰두하여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8)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불안에 시달려서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러다가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이시형 박사의 강의는 여기까지 끝내고 진정한 대책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까?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대책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신 말씀에서 성도가 불안한 생각을 갖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입니다. 어떤 친한 사람이 돈을 맡기면 비싼 이자를 주겠다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 때문에 시행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구상하는 시간에 TV에서 사소한 재판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임대자와 세입자간에 이사 가는 날짜 문제와 복비 문제 때문에 법정에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 세입자가 이사 다니는 일은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을 안전하게 이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이사 문제를 앞에 놓고 주택의 넓이 문제, 교통 문제, 주차 문제, 조명․전망 문제 등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탁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나중에 결말은 날짜 문제, 날씨와 복비 문제, 공과금 나누어 내는 것까지, 아무 탈없이 해결된 것을 체험하고 놀랬습니다. 모든 일이 순탄하지 않고 불안한 세상에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맡기고 기도하면서 정도로 행하는 것이 은혜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시 37: 3~5).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부탁하실 때, 큰 것만 부탁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제외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이나 홍수나 큰 사고의 위험도 없기를 기도하셔야 하지만, 앉는 것, 서는 것, 눕는 것, 작은 물건 옮기는 것, 사람 만나 대화하는 것 등 아주 작고 세미한 부분에서도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되 세심하게 의뢰하고 맡긴 후 조심하는 생활 속에서 안전한 보호와 인도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발람의 사건이 주는 교훈 (민 25:1~9)목록으로


민수기 25장, 26장에서는 발람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쳤을 때는(22:1) 아모리 왕 “시흔”과 바산 왕 “옥”을 무찌른 다음이었으므로(민 21:21~35) 모압 왕 발락이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신 2:9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압을 해하지 않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모압 왕은 이를 의심하고 이웃 나라인 미디안의 장로들과 합작하여(22:4) 방위책을 연구하던 중 메소포타미아 “브돌” 사람(22:5, 신 23:4) 술사 발람을 청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게 하는 미신적 방법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1. 여기서 발람의 신분은 먼 이방 땅에 사는 미신적 술사로서 잡신을 접하며 축복과 저주를 점치고 이를 선포하므로 소문난 선지자(거짓)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에 발락왕의 명을 따라 모압의 사신들이 예물을 갖고 발람을 방문하여 취지를 알렸을 때 발람은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은 말씀해주셨으니 과연 하나님이 발람의 사술에 응하실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은 사탄과도 말씀을 하셨고(욥 1:6~9), 악을 이용하기도 하시며(잠 16:4), 때로는 악인으로 진리를 증언하게도 하시는 만큼(요 11:49~53) 발람과의 대화가 가능하였으며 다만 발람의 사술에 끌려(발람은 마지막 한 차례만 사술을 쓰지 않았음, 24:1) 대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는 뜻을 알리시며 발람의 농간에 유혹된 백성들이 진노 받아야 할 사실들을 알리시려고 나타나주신 것입니다.

3. 이 때에 하나님은 발람에게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22:12)고 하셔서 처음에는 가지 아니 하였는데 발락이 2차로 더 높은 귀족들을 보내고 존귀를 약속하면서(22:15~17) 또 청원하였을 때 다시 하나님께 여쭌즉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이르는 말만 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이방의 종교인들이 술사의 저주로 국난을 모면하려는 소치는 흔히 있는 일이고,

2) 하나님이 “가라, 내 말만 하여라” 하심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었지만 뇌물과 존귀에 눈이 어두워 가기를 원하므로 만류하시지 않고, 버려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욕적으로 행하는 자의 행동을 계속 억제하시지 않은 것뿐이므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지시지 않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 뜻을 시행할지언정 인간의 고집을 강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요, 또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하여 다 형통하는 일로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4. 그 당시 발람이 나귀를 타고 떠날 때에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막혀 엎드렸지만 발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나귀를 때리므로 나귀의 입에서 책망의 말이 나온 일도 있었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나귀보다도 어두운 자요, 나귀만도 못한 자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2:21~30).

5. 모압에 도착한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시도해보기 위하여 바알 신당에 올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22:41) 일곱 단에 각 수송아지와 수양을 제물로 드렸으니 이 장소와 제사 방법은 이방식의 방법이었고,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신 7:2~5). 이렇게 거짓 선지자는 예물과 존귀를 좋아하고(22:7, 17), 자기의 저주가 효력이 있는 듯이 선전하려 하며 미신적 방법을 서슴지 않고 이방적 제사에 동화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6. 그는 자기 입에서 저주가 나오기를 원했지만 두려우신 하나님이 저주의 말씀을 주시지 않으므로 3차례나 저주대신 축복만 하였는데 문제는 그 이방 제사법에 음행이 곁들여 있었고, 이것을 미끼로 구경거리를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그 유혹 당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으니 이것이 발락의 꾀임에 빠진 비극이었습니다(25:1~9). 성도는 이런 유혹과 거짓 교훈을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지자의 술책에 속아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입니다. 어떤 분은 이단자들과 과격하게 대립하다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으니, 그 대립하고 경계하는 방법을 합법적으로 시행하시되, 내가 믿는 진리를 더 확실하게 증언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행한다 하면서 성도를 죄의 길로 유혹한 것입니다. 2중, 3중으로 속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38과 마귀를 대적하라 (벧전 5:8~9)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마귀가 눈에 보일까요? 영물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욥기에게도 나타났고, 예수님께도 나타났지만(욥 1:6, 마 4:1) 사람의 눈에는 그 형체를 감출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귀는 형체로 나타나지 않고, 역사로 나타나고 상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는 행위나 거역하는 행위, 의심하는 마음 등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나타난 사탄은 뱀 속에 들어간 말하는 영으로 나타나서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였고, 베드로의 마음속에 들어간 사탄도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영으로 역사 하였습니다(창 3:1, 마 16:23). 따라서 성도들이 마귀를 찾아 대적하는 방법은 자기 또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성경적 상태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역행하는 방법으로 대적하여야 합니다.

1. 의심과 불신의 마음이 생길 때 마귀의 역사인 줄을 아셔야 합니다(롬 14:23, 히 3:12). 마귀의 첫째 수법이 성도나 믿으려는 자의 마음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의심케 하고, 예수님과 십자가를 의심케 하며 성경의 무오설을 의심케 합니다. 배움과 확신이 부족하면 그런 유혹이 옵니다(딤후 3:14). 그래서 이 의심의 마귀(불신의 마귀)를 감지하여 역행할 때 그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게으른 생활에서 찾아야 합니다. 롬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셨고, 본문에서도 “근신하고 깨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과 생활의 침체를 마귀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없고 바쁜 것도 없으며 멍청하여 놀기를 좋아하는 상태는 바로 마귀가 역사 하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에 경성하고 묵상하며 자기의 사명을 느끼고 부지런히 자기의 일로 돌아가야만 마귀를 대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살전 4:11).

3. 마귀가 기도를 훼방할 때 깨달아야 합니다. “누워서 기도하지, 자고 난 다음에 기도하지” 하면서 기도를 뒤로 미루려 하거나 기도하면 간단하게 끝내려는 마음을 갖거나 다른 사람이 대표 기도를 할 때 간절한 마음을 주지 않고 속히 끝나기를 바라거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졸음을 이기지 못한다면(마 26:43) 역시 마귀가 곁에서 역사 하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 그때 꼭 마음을 고치고 간절한 자세를 취하셔야만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4. 설교를 들을 때 듣는 귀를 뺏어 갑니다. 그래서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설교가 끝나기만 기다리게 됩니다. 설교자는 여전히 안타깝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때에 마음을 고쳐서 설교자의 심정과 하나가 되도록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설교자의 마음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자신도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지 못할 때 마귀의 훼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마 11:14).

5. 현세욕과 향락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귀의 역사임을 감지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갈 5:24)고 하셨습니다. 세상 정욕은 현세적 욕심과 함께 세속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롬 12:2, 약 1:27). 잘 먹고 많이 갖고 싶거나 잘 입고 싶고 명예를 좋아하거나 허탄한 것에 뜻을 두고저 할 때는 강하게 거절하고 대적하여야 합니다. 세속에는 세 가지 낭비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 낭비요(엡 5:16), 둘째는 물질 낭비이며(요 6:12), 셋째는 육체 낭비가 됩니다(고전 6:20).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마귀와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는 것입니다(요일 1:15).

6. 인내를 중지하려 할 때 마귀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고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갈 5:22, 고전 13:4, 7). 따라서 그 마음을 거두게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딤후 3:4).

7. 진실을 감추고 적당하게 얼버무리거나 약속 이행이 더뎌진다고 생각할 때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나(고후 1:18) 마귀는 거짓이 자기의 본성이라고 하였습니다(요 8:44).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진실이 왜곡될 때는 마귀가 그렇게 역사 하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 진실을 져버리는 것은 모두 마귀의 역사입니다.

8. 자존심과 교만을 부추길 때 이것이 자기 부정에 반대되므로 마귀의 역사요(마 16:24, 고전 15:31, 갈 5:24),

9. 불평, 원망이 앞서고 감사를 못 느낄 때 이는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잘못이므로(살전 5:18) 마귀의 역사이며,

10. 봉사에 인색하거나 사랑 실천의 의지가 약하다면 이것은 실천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이므로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11. 회개하는 일과 잘못을 시인하는 일을 선뜻 실천할 수 없을 때 마귀가 가로막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마 18:22),

12. 소망의 하나님(롬 15:13)을 망각하고(시 42:5, 고전 13:13) 낙망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마귀의 역사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로 나타나고 있음을 예민하게 감지하여 용감하게 대적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신앙생활 적응에 대한 말씀


제39과 섭리 의존 (마 24:20)목록으로


하나님이 만유를 통치하시는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과 통치와 구속사역과 심판과 천국 경영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행 17:25~26에 보시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고…저희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하시는 분이라" 하셨고, 시 139:1~3에서는 "앉는 것과 서는 것과 생각과 말하는 것과 모든 행위를 감찰, 보호,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의지하지만, 성경적으로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호흡을 주관하시니 숨쉴 때마다 하나님의 간섭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이 앉는 것과 서는 것을 감찰하시니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의지하면서 사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데, 별 감각 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의 환난 당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환난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환난의 시기를 정하시는데, 그 환난의 시기를 단체적으로도 주시지만, 개인 개인에게도 특별하게 적용시키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흔히 행사를 준비하면서 좋은 날씨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런 섭리적 은혜가 대단히 필요한 것이고, 또 기도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지만, 특별히 자기 백성들과 관계되는 일에 자연과 만물을 적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복 받은 백성들에게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 내리신다"(신 11:14) 하셨는데, 만일 수확기에 홍수를 주셨다고 가상해 보십쇼. 그런 의미에서 섭리 의존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생명을 보존하는 과정에 르우벤과 유다가 역할을 하였고, 미디안 장사꾼과 보디발의 집과 보디발의 아내가 역할을 하였으며, 감옥의 간수와 바로 왕이 역할을 하여, 요셉을 출세 시키지 않았습니까? 또 요셉으로부터 꿈 해석을 받고 나간 대신이 2년 동안 요셉의 부탁을 잊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고, 또 요셉이 애굽에 가게 된 것이 "흉년에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였습니다(창 45:7). 또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위기에 처했을 때,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여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친 사실이 있으며(삼상 23:27~28), 또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았을 때 압살롬이 후새의 모략을 듣느냐, 아히도벨의 모략을 듣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려고 압살롬의 마음을 붙드사 후새의 모략을 취하게 하셨지요(삼하 17:14).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이시고(빌 4:8), 어떤 문제를 선택할 때에도 그 마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깨우치실 때 제비 뽑히는 일을 섭리하셨고, 그가 물에 던져지기 전에 미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으며(욘 1:17), 요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벌레를 명하사 박 넝쿨을 씹게 하셨고(욘 4:7), 출애굽 당시에 애굽군의 병거 바퀴를 벗기신 일과 흑암을 주신 일과 홍해에 장사하신 일, 또 선민들에게는 광명과 바다의 대로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일, 뇌성벽력으로 앗수르군을 멸하신 일들이 다 하나님의 통치 섭리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옛날 아브라함 때도 혼인하기가 퍽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를 순적하게 만나게 하셨고(창 24:12), 효녀 룻에게도 보아스 같은 남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룻 4:13~14). 성도 여러분,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의지하고 많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5). 좀 민감하고 세세하게 의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현재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모든 대상을 포괄적으로 통제하시기 때문에, 그 오묘한 섭리를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믿으셔야 합니다.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위험한 것을 알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바울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을 때 제자들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고 하였으니(행 21:14),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에 자기를 맡기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삼하 21:8에 보시면, 사울왕의 딸의 손자들이 그 할머니의 친정 아버지의 죄로 죽었고, 사울왕은 약 400년 전 여호수아의 맹약을 위반한 죄로 그들을 죽게 한 것입니다. 또 호 10:9~10에 보시면, 사사시대에 범죄하였으나 벌하지 않으신 것을 약 700년 후까지 기억하신 말씀이 있으니, 하나님의 통치 섭리는 이렇게 오묘하고 세세한 것입니다. 그런 통치 섭리가 모든 성도의 생활주변에 꼼꼼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은혜로운 인도를 부탁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사 45:11~12, 48:17).

 

제40과 물 같은 신앙 생활 (사 41:17~20)목록으로


이사야서를 묵상하다가 “물 같은 신앙 생활”이란 제목으로 물과 관련된 말씀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물을 크게 복된 은혜로 표현하셨습니다. “물 없는 자를 가련하고 빈핍한 자라” 하셨고, 물이 없을 때 죽음을 당하게 됨과 또 물이 있을 때 죽을 생명이 살게 되고, 물 없는 자산과 광야에 물이 동하여 사막이 농장으로 변하는 것을 큰 은혜와 복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생명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을 소성시킴에 대한 비유적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2. 이 물이 어떤 것이며 어떤 용도에 쓰는 것입니까? 성경적으로 물의 출처와 용도를 살펴보면

1) 물은 하나님이 만물 창조 당시에(요 1:3) 근원적으로 창조하신 물체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기사가 창세기 1장에 기록되었지만 거기에 물과 공기를 창조하신 기사는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근원적 피조물이란 것입니다.

2) 물의 요소를 엄밀하게 분석하면 H2O, 즉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로 결합된 물체입니다. H2O 이외의 요소가 물에 함유되었다면 그것은 물과 이물질을 구분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이 물이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습니까? 우선은 먹는 식용으로 동식물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 외에는 씻고, 농사지으며 강물과 바닷물도 되어 운반책도 되고, 해자도 됩니다. 또 물이 복도 되고, 심판의 재료도 됩니다. 그 외에도 공업용이나 약용 등 용도가 많겠지만 한 마디로 말할 때 물은 생존의 필수 요소입니다.

3. 물의 특징을 살펴보면 물은 3무 요소가 있는데 색이 없고, 맛이나 냄새가 없으며 자기로써의 모양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무게와 부피뿐이고, 모양은 환경(그릇)에 따라 만들어지며 모일 수도 있고, 흩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물은 그 특성에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모양이 없다보니 틈 사이에도 잘 스며들며(시 109:8) 포용성이 많아 모든 다른 물체에 접촉도 합니다.

4. 이 물은 흙과 열보다는 약하나 쇠보다는 강합니다. 쇠는 단단하고 물은 여리지만 쇠가 물을 자를 수 없고, 물이 쇠를 녹슬게 하니까 쇠보다 강한 것입니다. 사람도 딱딱하고 폭력적이라 하여 강한 것이 아니지요. 점점 부드러운 것만 힘을 얻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물도 그래서 강한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죄 씻음의 재료인 보혈로 상징하셨고, 또 성령을 상징하셨습니다(요 2:6, 7:38~39). 본문 말씀의 의미도 신약 시대에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을 가뭄에 물이 동하는 역사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물 같은 역사의 성령 충만을 받고 물 같은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일단 물의 충만은 곧 성령의 충만을 상징합니다(엡 5:18). 우리 나라는 물의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물이 귀하여 먹는 물을 주리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물을 마실 때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물은 깨끗합니다. 물 그 자체는 티가 없고 투명한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투명하고 깨끗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령 충만과 함께 깨끗함을 간직하셔야 하겠습니다.

3) 물은 퍽 부드러운 물체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도들의 성품도 예수님처럼 또는 물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며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물이 아래로만 흐르는 것은 바로 겸손한 생활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시고, 죄악 세상에 오셨으며 또 비천한 신분이 되시고, 고생하신 것은 다 물처럼 낮은 데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된즉 물처럼 높이 오르신 것입니다.

5) 물은 적응을 잘 합니다. 넓으면 넓게 가고 좁으면 좁게 흐르며 틈 밖에 없을 때는 틈새로도 들어가고 막히면 정지하고 그릇의 모양에 따라서 자기의 형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성도의 생활이 그만큼 유연하고 모든 환경에 잘 적응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6) 물의 목적지는 바다입니다(전 1:7). 성도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물은 자기의 목적지로 가는 일에 대하여 한시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영광 목적이나 천국 목적에 방심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7) 고사성어에 “行雲流水(행운류수)”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을 해석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인생 철학이 다 그 글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름처럼 다니고 물처럼 흐르는 생활 속에 인생 철학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물을 축복의 상징으로 말씀하신 뜻을 잘 연구하셔서 성도의 인격이 물처럼 형성되고, 또 물처럼 활동하는 생활 철학을 꼭 시행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법(法)이란 글자의 뜻도 “물 흐름 따라 간다”는 뜻이 아닙니까?

 

제41과 교회생활, 개인생활 (살전 5:12~22)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2~15절은 “성도의 교회의 생활에 관한 말씀”이고, ② 16~22절은 “성도의 개인생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생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꼭 실천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교회생활에서

1) 수고하는 봉사자들과 다스리는 지도자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자기를 희생하며 수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에 참석을 못하면서 식당 일을 보아야 하는 분도 있고(없어야 할 일이지만), 직장의 손해를 보면서 교회의 일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마땅히 수고를 알아주고 격려, 감사,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또 “다스리는 일”을 하는 당회원의 수고도 만만치 않습니다. 늘 의논하고 불평 없이 공평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가 이런 분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지도에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성도끼리 화목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외로움과 싸워야 하지만, 여러 사람이 살 때는 그 생활이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성도가 단체 적응을 잘하면 크게 성숙되었다 할 것입니다. “끝없는 햇살”이란 드라마를 방영한 일이 있는데 내용은 남편의 적은 봉급으로 남편, 자녀들과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는 여인이 있는데, 자기가 무남독녀 외딸이기 때문에 친정어머니를 모시게 되었고, 또 얼마 후에 부잣집 사위 집에서 살던 시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취직 못한 시동생의 용돈까지 주면서 살아가는 형편에서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는 끝없는 햇살 같은 주부의 생활 이야기였습니다. 성도의 교회생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3) 문제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한 이해와 처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이란, 본문에서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교회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약하고 힘이 없는 자가 있으며(여기의 힘은 생활력을 뜻함), 또 악으로만 상대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대상들에게 처신을 잘못하면 금방 교회가 싸움터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혈기와 폭력으로 목사를 내쫓는 경우도 있고, 그런 일들로 교인간에 대립이 되어 몹시 험악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 없는 자는 합당한 권계로, 약한 자는 격려와 후원으로, 악으로 대하는 자는 선으로 대하면서 오래 참을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성도들이 단체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지혜와 인내가 없으면 단체의 화평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마 24:12에 보시면 “불법이 성할 때 사랑이 식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말씀을 지키고 규모를 따르므로 단체생활의 질서와 화평을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의 개인 생활입니다. 17~22절에 보시면, “기쁨, 기도, 감사, 성령, 예언, 선택, 악을 추방함”에 대한 일곱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 성도 개인이 할 일들입니다.

1)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시 133:1), 신앙생활에 힘이 되며(느 8:10), 기쁨 있는 교회가 부흥도 됩니다(행 2:46).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잘못하는 생활일 것입니다.

2)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생활화하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항상 같이 사는 정신을 쉬지 않고 갖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습관 되면 많은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230억을 모교에 장학금으로 헌납한 분이 자기는 사치나 낭비를 할 줄 모르고 아무리 사람 살기가 어렵다 하여도 고생하면서 자란 시절보다는 낫기 때문에 늘 감사하면서 산다는 말을 하더군요. 혹 사치나 허영이나 현세욕에 들떠 있는 성도가 계시다면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치하며, 새 것만 좋아하여 쓸만한 폐품을 물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이 모자라서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요 6:12)

4)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므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말씀, 기도, 순종, 사명에 힘쓰는 것이고,

5) 예언으로 은혜 받는 일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멀리하면 계속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늘 친근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6) 항상 신앙적이고 생산성 있는 것만 선택, 시행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좋은 것만 취하라” 하셨으니까요.

7) 악에 대한 모양까지 버리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급히 서두르지 마시고 항상 정도를 따라가는 노력을 하시므로 성화 실천에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교회적 단체생활 세 가지와 개인적 필수생활 일곱 가지를 상고하셨습니다.

 

제42과 사랑 실천에 대하여 (요일 4:7~12)목록으로


사랑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는 말씀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실천에 만족하십니까? 만족 못하시는 분들이 많겠지요. 이 말씀을 증언하는 본인 자신도 사랑 실천에 만족하지 못하여 고민하면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자주 TV에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손길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이는 물질로 돕고, 어떤 이는 몸으로 봉사하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생활이 가난한 중에서도 희생적으로 돕는 것을 봅니다. 기독교인 아니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성도들이 무슨 생각이 있어야 하고 사랑 실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할 근거와 방도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또 사랑 실천이 힘들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단계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도 많지요. 하나님과 모든 이웃과 동물들과 자연까지 다 사랑의 대상이지만, 우선 중요한 것이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결탁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5:3~6, 22:37~39, 요일 4:20, 약 2:14~17).

1.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표현하면 이웃을 돕고 화목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제한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고 하셨습니다. 죄와 거짓이 마귀에게 속하고 마귀로 말미암는 것처럼(요 8:44)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본성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라, 8절).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사랑 안에서 평화로웠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사랑 실천이 왜 중요할까요?

1) 우선 계명의 으뜸입니다(십계명 참조, 율법 강령, 마 22:37~39).

2) 은사 중에도 으뜸입니다(고전 12:31, 13:13).

3) 믿음의 보증도 됩니다. “사랑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그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셨으니까요(약 2:12).

4) 상급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믿음, 소망보다도 나은 것이라”고 하셨지요(고전 1:1~2).

5)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다른 은사의 실천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하셨습니다(고전 1:1~2).

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로 사랑의 극치를 본 보이셨습니다(요 15:13).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랑을 본받아 행함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요일 4:11).

3. 사랑 실천의 방도에 대하여 연구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사랑 실천을 노력함에 있어서

1) 우선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임을 아셔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물질로 구제하는 것만 사랑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능력 범위 안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겠지요. 사랑은 “모든 이웃에 대하여 덕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말과 물질과 헌신적 봉사로 베풀 수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①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긍휼, 용서, 이해, 미워하지 않는 것 등일 것이요,

② 언어는 위로, 격려, 칭찬, 감사, 축복, 기도, 전도하는 일 등이며,

③ 물질로 하는 것은 구제금을 전달하는 것이고

④ 헌신적 사랑은 자신의 몸으로 시간을 드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입니다. 우선 이런 방법들을 생각하신 다음에

2)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을 점검하셔서 거기에 맞는 사랑을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용서와 기도 같은 것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물질 봉사는 시간이 없어도 할 수 있으며, 말로 나타내는 사랑은 물질과 시간이 없어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수에 알맞은 정도에서 실천하여 점차 사랑의 폭을 넓혀서 점차 부끄럽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 실천 자금을 모금해 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급적 직접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구제, 자선을 자기 치부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것은 칭찬 받을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생각하여 좋은 것을 누리시지 않았고(고후 8:9), 가진 것도 없으셨으며, 남겨놓은 것도 없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입각한 생활과 구원의 은총을 남기셨습니다.

4. 사랑 실천에 핑계를 대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지만, 혹 가족들과 뜻이 맞지 않아서 실천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 이런 경우에는 적당한 선에서 뜻을 맞추시든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셔야 할 것입니다.

5. 요즈음 새 정치의 개혁이 일어나는 이때에, 한국교회 성도들 가정에서(아주 어렵지 않은 가정) 고아나 무의탁 노인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나 후견인이 필요한 갇힌 자 한 사람씩 양육, 부양, 또는 책임을 진다면, 기독교의 큰 혁신으로써 빛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죄가 경제적 궁핍에서 발생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에 사랑 실천의 혁신이 일어나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을 갈망하면 반드시 실천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실천이 가장 값진 은사이며, 값진 상급을 예비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3과 적당하고 질서 있게 (고전 14:40, 엡 4:7)목록으로


성경 말씀에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모든 일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행하여야 합니다. “적당함”은 분수에 알맞고 균형 잡힌 것을 뜻하고, “질서”는 규모 있는 생활을 할 때 유지됩니다. 성도의 개인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있어서, 적당치 못하게 살거나 질서유지를 못하여 크게 혼란을 야기하는 일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고후 10:13, 15, 롬 12:3 참조).

1. 성도의 개인 생활에 있어서

1) 휴식과 노동시간을 적당하게 균형잡지 못하여 가장 중요한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주간의 생활계획을 적당하게 잡지 못하여 주일날 일감을 남겨놓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2) 또 어떤 성도는 수입과 지출을 적당하게 균형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잘 쓰고 교역자 대접도 잘하기 때문에 그만한 여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부채를 지고 살다가 파산 당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으니, 빚을 진 사람이 여유 있는 사람처럼 지출을 한다면 적당치 않은 것입니다.

3) 과식, 과욕, 과소비도 적당하지 않으려니와 과경은 아부가 되고, 과로는 건강을 해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셔야 합니다. 질서를 지키는 일이 자기 생활에도 해당되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갑이 을에게 돈 줄 시간을 약속하였을 때, 을은 병에게 같은 약속을 할 수 있고, 또 병은 정에게 같은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약속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약속자가 약속 실천을 못하면, 을과 병과 정의 생활질서가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하게 하고 약속이행으로 질서를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2. 적당하고 질서 있는 것은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도 중요합니다.

1) 우선 예배 순서를 정할 때, 순서 안배를 적당하게 하고, 대표기도가 길지 않아야 하며, 기도자의 순위도 중요하고, 설교 역시 지루한 감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의 대표기도가 길다고 사회자가 신호를 한다고 합니다.

2) 또 어떤 성도는 자기 집의 일은 엉망을 만들고 교회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불평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 경우에도 자기 집의 일과 교회의 일을 안배하여야 할 것이요,

3) 성도가 개인적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말씀으로 깨닫는 은혜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은혜도 균형 있게 취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성경을 멀리 하거나, 성경만 배우고 기도를 게을리 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것도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지적 신앙과 정적 신앙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3. 교회가 대중(성도)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적당하고 질서 있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1)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기복 신앙을 지나치게 부추기면 안 되겠지요.

2) 또 교역자의 생활비도 합리적으로 지출하는 규모가 있으면 좋을 것이요,

3)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나 감사는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역자인 목사가 그 사용권리를 가짐이 합당하고, 선교나 건축이나 구제 등 특정 목적으로 거두는 헌금은 그 자치회의 결의로 취급과 사용함이 좋다고 봅니다. 만일 어떤 제직이 하나님께 헌금한 후 축복기도까지 받고, 그 헌금에 대한 취급과 사용권리를 이행한다면 헌금의 의미가 상당 부분 훼손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어떤 교회가 예수님의 돈(자치회의 기금 아닌 것)으로 교인의 경조비를 지출하였다면 축복의 근원자인 예수님이 교인에게 부조한 것이 되는데, 이런 일이 합리적일까요? 적당치 않고 또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부조금을 기관헌금에서 하는 것이 좋고, 또 적당한 금액을 조정함은 물론 부조의 대상에 대하여 일정한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경조 지출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별 문제이지만, “누구의 연고는 광고하고, 누구의 연고는 광고하지 않았다”든지, “누구는 그의 연고자까지 관심을 써주고 누구는 그의 직계인에 대하여서도 돌보지 않았다”는 등 불평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5) 심방할 때 동행자를 대동하는 것도 규모가 없으면 불평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순서를 공평하게 정하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6) 어떤 성도가 교회용 기구를 헌납하였는데 약 10년 후에 그 물건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교체하였다 하여 불평하는 일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공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함부로 아무나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용도의 기한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찌 생각하면 답답한 일이지요.

결론적으로 교회의 공적생활에 질서가 최대한 유지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만 또 최대한 시험 거리들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문제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순수한 봉사가 아닌 의도적 또는 타산적 봉사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요, 합리적 명분이 없는 행사도 그럴 것인즉 모든 일에 규모와 질서가 유지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4과 규모 있는 생활 (살후 3:6)목록으로


성경에는 성도가 규모 있게 살아야 할 것을 여러 번 교훈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하셨고, 또 “규모 없이 행하거나 사도들의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규모를 지키라”는 교훈은 고전 14:40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행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에서도 주셨습니다. 적당치 않거나 질서가 없으면 규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언제나 앞세우셨고(마 10:2), 기적의 떡을 먹이실 때도 50명씩 줄지어 않게 하셨습니다.

1. 규모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법질서와 예절입니다. 유행이나 전통은 아닙니다. 예절이 도덕적 규범이라 하여 의식을 지켜야 함보다도, 예절은 윗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며, 또 예절을 지키는 것이 규모라면, 이것은 생활의 규모를 뜻하고 신앙의 규모는 표준 진리 또는 사도의 유전(교훈과 모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잘 지키고 만일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사귀지 말며 형제처럼 권하되 원수처럼 생각하지는 말라(살후 3:14)”고 하셨으니까 이 말씀의 결론은 “바르게 믿고 규모 있게 사는 성도들이 그렇지 않은 성도들과 한 단체로 살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법을 지키려는 사람이 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고, 또 사도들의 유전만 따르자는 성도가 되는대로 인본주의에 따라 살자는 성도들과 한 단체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표준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섞였을 때, 자기의 신앙생활과 영광에 지장이 없으면 상관이 없지만, 단체행사를 할 때 사도의 유전이 아니거나 규모에 맞지 않는 일을 하게 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떠나 따로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단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딛 3:10~11) 근본을 흐리는 비정통인들과도 동화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원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과 하나님 영광에 손해 받지 않을 만큼 처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규모를 잘 지키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정통 교리를 사수하여야 합니다. 정통 교리는 인간이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여 원리를 요약한 신앙 고백입니다. 연구자의 역할에 따라서 칼빈주의도 있고 알미니안주의도 있으며 또 다른 교리들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전통적으로 점검이 잘 된 교리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바로 믿고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고전 10:5, 벧전 3:20). 예수님은 명예, 탐심, 사치, 연락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과 거룩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만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을 바르게 갖는 것이 정통 교리의 사수입니다.

2) 법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규모를 따르는 것입니다. 국법, 교회법, 대인관계의 약속, 그런 것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국법을 어기면 그만한 손해를 받습니다. 교회법은 하나님 앞에서 준법하기로 서약한 것이기 때문에 더 잘 지켜야 하는데, 교회법이 성경의 뜻과 위반되지 않도록 제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대인관계의 계약법을 위반하였다면 생활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겠지요. 그런 면에서 법을 지키는 것은 규모와 질서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치리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 부합되는 법을 만들어 지도하고 모든 성도는 거기에 적극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예절을 지키는 것이 곧 규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계는 반드시 상하의 계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고 특히 소자에 대한 배려가 있으셨을지라도 상하 계급을 인정하시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효도 계명이나 모든 상전과 종에 대한 규례(딛 2:1~10)나 국법 준수에 대한 명령(마 17:25, 딤전 2:2)이 그것입니다. 이런 일들과 관련하여 교회 안에도 선․후배가 있고, 서열이 있으며, 들어가고 나가는데 대한 순서와 좌석에 대한 상․하석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것을 잘 살펴 예절의 규모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4) 근면과 자립이 규모 있는 생활입니다. 본문에서 규모를 말씀하신 동기가 일하지 않고 남에게 누를 끼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셨을까요(살후 3:8~10). 그래서 근면과 자립이 규모 있는 생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규모에 대한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린다면, 교역자는 교인의 종이거나 고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지요. 평신도의 선생님이고. 또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하여 드린 자가 사용 권리를 행사한다면 헌금의 의미가 없고 예배당 헌금도 자신이 사용할 때는 헌금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생활 속에 규모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음을 지적하여 시정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교리와 기독교 사상과 교회의 생활과 예절을 지킴에 있어서 사도의 유전을 지킴으로 규모 있는 생활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개인 신앙생활 확립 (창 28:10~22)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개인 신앙생활 확립”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나 주위에 신앙생활의 지도자가 없어도 스스로 성경에서 터득하고 자기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교회가 없을 수도 있고, 변질될 수도 있으며, 또 자신이 교회를 옮길 수도 있고, 또 신임하던 성직자가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정통 교회 없는 지역에 가서 산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때는 혼자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교회생활에 별 재미를 못 느끼는 성도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 자기를 지도하는 교역자와 신앙적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을 때, 그가 교회생활로는 재미를 못 느껴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도는 우선 적응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고, 노력해도 안 될 때는 적응될만한 교회를 찾아가야 하겠지만, 거리 관계로 마음에 맞는 교회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은 자기의 믿음을 키워서 독자 생존하는 식으로 자기의 개인 신앙생활을 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계를 수리하는 사람이 왔는데 “저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고 보았더니 거기에 해당하는 연장들이 너무도 잘 구비되어 있어서 쉽게 일을 끝내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동차는 땅으로 가고, 배는 바다로만 가는 줄 알았는데, 비행기가 땅과 바다와 공중을 다 다니고, 자동차도 물로도 가고 땅으로도 가는 것을 보고 놀랜 일이 있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였고(욥 1:21), 하박국은 “가난해도 기뻐한다” 하였으며(합 3:19), 바울 사도는 “비천에도 처해보고 자족하기를 배웠으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였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롬 5:3, 빌 4:11~12, 1:21) 하였으니, 그런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은혜의 핍절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가 개인 신앙생활이 확립되면 어떤 환경도 겁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을 읽은 이유는, 본문 말씀에 “야곱이 혼자 있게 된 내용,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를 접한 내용, 야곱이 제사를 드리고 서원한 내용, 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내용이 바로 개인 신앙생활 확립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이요, 칭찬을 많이 받은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고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며, 아브라함이 175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창 25:7, 26:26) 야곱은 15세였습니다. 또 야곱이 여행에 들어선 때는 40세 이전이었습니다(창 26:34).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신앙생활을 배웠지만 장성한 다음에는 믿음생활을 홀로 하였던 것입니다.

3. 개인 신앙생활 확립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요. 우리는 이것을 성경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파악할 경우에, 그것을 깨닫게 하는 지도자(목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의 방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성경 말씀으로 모시고, 성경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성경을 연구함으로 하나님께 끌리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예배를 드릴 때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터득하게 하는 것인데, 이 목적을 스스로도 터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교리 중에 어려운 것은 배워야 하지만 대부분의 계명은 사랑에 관한 것이므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설교자의 기교를 원하고, 설교자가 듣기 좋은 설교를 하면 그것을 영력이라 하면서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영력은 말씀 자체입니다(히 4:12). 그 영력은 증거자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며 누구나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깨달을 때 영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 신앙생활 확립은 우선 성도가 성경 말씀과 자신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독자적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를 누구에게 끌려 다니면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끌리는 심정 때문에 기도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끌리고, 부탁할 일이 많고, 감사해야 하며, 기도를 안 하면 공허를 느끼기 때문에 기도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먹고 입는 생활로 족하게 여기면서 그 이상의 욕심을 떠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성경대로 살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돈 많이 쓰는 사람을 보고 잘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먹을 것(일용할 양식)과 입을 것(헐벗지 않는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딤전 6: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욕심이나 사치를 탐하지 말고 살 때 경건한 믿음을 보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딤전 1:9~10). 성경에는 “반드시 자기의 집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없으니까 그것은 은혜 종목의 필수 요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 필수 요건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독자적 동행입니다.

 

제46과 이 세대를 본 받지 말 것 (롬 12:1~2)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다섯 가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예배란 구약 시대에 드리던 제사 의식에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신약 시대에 성도가 드릴 예배인데 그것을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생활이 곧 영적 예배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의식보다 생활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이 시간에 말씀 드릴 주제요, 셋째는 “마음을 새롭게 가지라”는 것이요, 넷째는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며 다섯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케 여기시는 뜻을 깨달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전체의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적응하도록 변화 되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부터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신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불신자들의 생활 방법을 좋게 여기지 말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고유한 생활 문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생활 문화가 다 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인 일에 반대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성도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약 1:27). 세속이란 것이 죄가 아닌 듯하나 경건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되도록 불신자들과 함께 관광 버스를 타지 말아야 합니다. 갈 때는 조용히 가지만 올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민망하고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버스 안에서 감행합니다. 예를 들면 세속된 노래, 떠드는 것, 춤추고 서로 몸을 비비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조용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행하여야 할 성도에게는 지옥과 같은 환경이라 할 것입니다. 물질주의, 현실주의, 이기주의, 기분에 끌리는 일, 시간 낭비 등이 다 신앙적인 일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유행을 따르려 하거나 다수주의에 따르지 마시고, 성경대로 사시되 주관을 세워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으려면 변화를 받아야 하고, 생활에 변화를 이룩하려면 마음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도 이대로는 안 될 것이 많습니다. 옛날 바울 사도 당시에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의로운 것 같으나 신앙적으로 따지면 의롭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금연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일찍 정신을 차린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100년 전부터 시행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유명하다는 사람들 중에도 담배를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생활 문화에도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교인이 목사의 지도를 따르지 않고, 교인의 요청에 목사가 응하라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깨달아 받지 않고 목청 높이는 설교를 통하여서만 깨닫는 것이나, 교회의 이기주의 행사나 진리 아닌 것으로 마음을 끌려 하는 것 등이 다 고쳐야 할 일들입니다. “돈이 없어서 교회를 유지하지 못한다” 하거나 “건물이 없어 예배를 못 드린다”고 할 때 믿음 생활은 성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은 “내게 은과 금은 없고 예수님만 계시다”(행 3:6)고 하였습니다. “돈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마음을 “배우자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고치고 “예배당이 있어야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마음을 “어느 곳에서나 예배 드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고쳐야 하며 또 “목사가 있어야 예수 믿을 수 있다”는 마음을 목사님이 안계실때는 “성경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고쳐서 변화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쫓겨난다”(마 7:21)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잘 깨닫고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으려면 세상을 멀리 하셔야 합니다. 선민이 애굽을 탈출한 일, 자기의 살 땅에서 이방인들을 내쫓는 일,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한 일, 이방 종교법을 본 받지 않은 일 등을 명심하시고,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물질주의, 현실주의, 쾌락주의, 명예주의, 이기주의, 인간주의 등을 전부 역으로 행하여 신령주의, 내세주의, 하나님 제일주의, 성경 제일주의 등 예수님처럼 사는 생활을 표본하여 사랑과 봉사, 겸손을 일삼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7과 성도의 일반적 생활 (약 4:6~1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일반적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생활은 매일 매일의 생활이고, 또 한 주간마다 주일을 지키면서 반성하셔야 할 일입니다. 한 주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또 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매일 매일을 잘 살면 한 주간도 잘 사시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계속 되면 성도의 복된 생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중요한 생활이고, 또 일반적으로 늘 시행하셔야 하는 생활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회에도 가고 연합회에도 가며 기도원에도 가고 봉사대열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두 가지 일에만 치우치면 안 됩니다. 꼭 할 것을 하고 봉사도 하셔야 합니다. 이 시간에 본문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성도의 일반적 생활에 교훈을 주시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 하셨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며 “순복하므로 마귀를 대적하라” 하셨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되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 하셨으며 또 “슬퍼하는 자와 함께 하며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런 중에서 제가 강조 드리려고 하는 일반적 생활은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하셨으며 또 오늘과 지금은 얼마나 가까이 하고 계십니까? 본문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리라” 하셨지요. 이것을 쉬지 말고 숨쉬듯이 항상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주님이 멀리 떠나시면 금방 시험에 들고 금방 불행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73:22에 보시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요 피난처가 됨이라”(28절)고 하셨습니다.

1) 신앙 생활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시도 빈틈없이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데는 말씀과 기도와 뜻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묵상하시고 기도를 항상 달고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일을 강하게 배격하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길로만 가시니까(잠 8:20) 성도가 정의를 떠나면 주님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반성과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을 반드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눅 2:41~50).

2. 자기의 일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창 3:19에 보시면 “네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와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시고, 또 현실적 즐거움에만 집착하는 것은 사명을 회피하는 일이요, 내세의 칭찬과 상급을 삭감하는 일로 여겨서 크게 주의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자기의 일감을 정하세요. 고정적인 직장이 있으면 직장에 다녀오신 후에 무엇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피곤하면 휴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피곤이 풀어지면 또 일하셔야 합니다. 일 중에 크고 좋은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요 6:29). 그런 의미에서 할 일이 없을 때는 말씀을 살피고 기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을 하나님이 해주시도록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자녀들의 배우자 문제로 기도하였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찾아다니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하였더니 어떤 목사 부인으로부터 중매에 대한 전화가 오더군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임을 깨닫고 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가장 고상하고 최종적인 일은 말씀과 기도인 것입니다(행 6:4).

3.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라” 하셨고,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사랑하여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세요. 우선 가족이 있겠지요. 그 다음에 교역자, 성도, 친척, 그리고 이해 관계 있는 대상일 것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한 단계 올라서서 사랑이 잘 안 가는 식구들이 있으면 반드시 용기를 내어 그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발전하여 원수를 위한 기도도 나올 수 있고, 원수도 미워하지 않게 되며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피해를 안 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덕을 베푸는 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고 주기를 힘쓸 때 더 큰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꼭 기억하시면서 이웃을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눅 6:38, 행 20:35).

 

제48과 세월을 아끼라 (엡 5:16)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월을 아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뜻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시간을 가장 영광스럽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월이란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지혜를 최대한 선용하며 세월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세월을 아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성도의 환경이 밀물처럼 세속으로 이끌려가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기의 시간을 무의미한 일에 뺏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2002년 월드컵 행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과연 성도에게 월드컵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지요. 성도가 월드컵에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를 점검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엡 5:15).

1. 우선 성도가 세월을 아껴야 할 이유를 생각해보시지요.

1) 세월을 아낌이 성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잠을 적게 자고 공부한 사람은 다 성공한 줄 압니다. 그러나 놀기를 좋아하고 세상 재미를 보아가면서 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할 것인즉 세월을 아끼느냐 안 아끼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 실패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인생은 한 번 살 뿐 두 번 이상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라는 이 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소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도 다시 오지 않으며 따라서 기회란 것도 한 번으로 지나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인생을 한 번 더 산다고 한다면 잘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잘 해 본다는 지혜도 인생을 다 살고야 깨달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미리 깨닫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3)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사서 머리와 꼬리와 내장과 가시를 제하면 먹을 것이 적은 것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도 생산성 있게 활용할 것이 얼마 없는 것입니다. 저도 하루 24시간 중 설교와 기도에 사용하는 시간은 얼마 안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뺏기는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아주 비생산적인 유혹도 있습니다.

4)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엿새 동안 네 모든 일을 힘써 행하라” 하신 말씀도 같은 뜻이겠지요. 하나님은 “일하고 쉬라” 하셨습니다. 일하고 쉰 다음 첫 날에 할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일에 하는 일입니다.

“성공, 실패의 문제, 한 번 사는 인생, 때가 악함, 또 하나님의 명령” 이 네 가지가 세월 아낄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2. 세월을 아끼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1) 세월을 아끼시려면 우선 자기의 인생을 보람있게 설계하셔야 합니다. 누구나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달란트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보람있고 비중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직도 할 수 있고, 공무원도 할 수 있다면 그 중에 성직을 택하셔야 하겠지요. 또 성직 안에서 기도도 할 수 있고, 말씀 연구도 할 수 있다면 말씀 편을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목회도 할 수 있고, 신학교 교수도 할 수 있다면 교수 편을 택하여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모든 할 수 있는 행사 중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비중 있는 일을 선택하시라는 것입니다.

2) 근면하고 몰두하셔야 합니다. 건강에 해롭도록 몰두할 필요는 없습니다.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심신 수양을 하면서 몰두하는 것입니다. “부지런 하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달란트를 받은 자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야곱이 눈 붙일 겨를 없이 일하였다”는 말씀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롬 12:11, 마 25:16, 창 31:40).

3) 부스러기 시간을 잘 선용하셔야 합니다. 저는 바깥출입을 할 때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여러 가지 볼일을 모아 가지고 나갑니다. 금융기관, 의료기관, 문방구, 슈퍼, 우체국 등 몇 가지 볼일을 갖고 나갑니다. 자동차를 이용할 때도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일을 보도록 사용하고 5분에 하는 일, 10분에 하는 일들을 선택하여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이 없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상호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시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시간 약속을 지키고 미리 시간 계획을 짜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100명이 합동 행사하는 장소에 한 사람이 10분을 늦으면 990분을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간 계획에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하여 “몇 시간 몇 분까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끝낸다”는 약속 하에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 설정, 근면 몰두, 짧은 시간 선용, 상호 관계 유지를 잘 하시므로 세월을 아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길을 “달음질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딤후 4:7). 그 이유는 핍박으로 인하여 생명의 재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행 20:24, 고후 1:9). 따라서 모든 성도가 자기의 삶의 기회가 초급하다고 생각하여 하루와 한 순간을 죽음 준비하는 자세로 의미 있게 산다면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제49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 41:8~10)목록으로


본문에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성도는 하나님의 종이고 벗이며 택한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붙드시고 부르시며 싫어 버리시지 않고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며 또 “그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 취급을 받는 성도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놀라지 않아야 하며 굳센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나 물질도 다 그렇습니다.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면

1)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피조 된 인격체란 점에서 더욱 관계가 큰 것입니다.

2) 보존자와 보존을 받는 자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보존자도 되시고(히 1:3), 모든 것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9절). 하나님이 만물과 생명체를 보존하지 않으시면 만물의 생존과 질서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생명도 보존을 받는 것입니다(삼상 2:6, 행 17:26).

3) 섭리자와 피섭리자의 관계에 있습니다. 섭리란 말이 어려우면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모든 인류와 만물이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신 30:15).

2.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일반 통치를 받는 것 외에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웃은 어디까지나 이웃이고,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에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특별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 특별한 관계를 말씀드리고, 특별한 관계를 누리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성도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택한 야곱”이란 말씀이 그 뜻입니다. 전부를 취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둘에 하나나 열에 하나가 아니고, 굉장히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에 들어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1,000년쯤 되고, 인류의 평균 수명이 830세쯤 살 때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선택하셨고, 또 인류의 역사가 2,000년쯤 되고, 사람의 수명이 120세쯤 될 때에 아브라함 의 가정을 택하셨으니 그 선택의 비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자가 연약하여져도 “싫어 버리시지 않는다” 하셨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2) 하나님은 선택된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셨으며 믿음을 주셨고, 속죄와 의로움을 주셨으며 영생을 주셨으니 이 구원의 은혜는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인기 있게 살았어도 심판을 받고 지옥 가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불행한 것을 생각할 때 성도에게만 주신 구원의 은혜가 특별한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 되는 관계를 주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자녀의 권세를 주셨다” 하셨으니(요 1:12) 이 또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처신과 특권을 꼭 누리시기 바랍니다.

4) 본문에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벗과 벗 사이가 가족보다 더 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요 15:15).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벗들 간에는 비밀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친한 친구들끼리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르고 가까이 하는 것을 봅니다.

5) 본문에서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친교할 때는 벗이고, 특권을 누릴 때는 자녀이며 순종하고 봉사할 때는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것이 결코 천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비서가 천한 직이 아닌 것과 같지요. 하나님의 종노릇을 잘 하십니까? 반드시 말씀의 종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13:13~16).

6)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스승이라”고 하셨으니까 성도는 그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요 15:14). 제자는 스승을 본받고 배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인성을 본받되 성품과 지식과 말과 행실과 생활을 최대한 본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성도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시 100:3에 보시면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육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도와주시니 놀라지 말고 굳세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연구하셔서 선택에 대한 감사, 구원에 대한 영광, 자녀로서의 기쁨, 벗으로서의 친교, 종으로서의 순종과 봉사, 제자로서의 본받음, 목자와 양으로서의 안전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50과 염려 해결책 (빌 4:6~7, 벧전 5:7)목록으로


사람이 어떤 때는 염려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나 다 큰 자녀라도 염려 없이 살고 잠을 잘 자는데 나는 왜 염려를 안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염려를 안 하고 맑은 미소를 띠는 어린이가 천국 시민이라면 우리는 성도라 자처하면서 얼마나 옹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가정에 돈 쓸 일이 생길때 우선 염려를 하면서 대책을 세우지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나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의연하게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가정에 심방을 간즉 전세보증금 200만원을 올려줄 돈이 없어서 변두리로 이사할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나보다 가난한데도 퍽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생활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 된다면 염려 없이 밝은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1. 대략 어떤 일들로 염려를 하게 됩니까? 체험하여 잘 아실 것입니다.

1) 실수를 하였거나 무슨 일을 경솔하게 처리하였을 때

2) 억울함을 당하였으나 회복되지 않을 때

3) 생산의 균형을 깨치는 소비처가 생길 때

4) 죽음이나 건강의 위협을 당할 때

5) 자기나 자녀들의 생활에 발전이 부진할 때 등등일 것입니다. 염려해 보았자 유익이 없고, 염려를 안 함이 좋은 줄 알면서도 염려를 떨구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2. 염려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낮은데 처해야 합니다(롬 12:16). 자기보다 더 불행한 대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족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이(빌 4:11, 딤전 6:8) 자기보다 더 불행 당한 사람을 보면 어느 정도 위안을 받고 “이만한 형편도 은혜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은 성경 지식으로 갖는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도 염려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양육하는 부모가 자기를 키워주는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① 성도의 아버지이십니다(요 1:12). ②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요 4:16), ③ 자기 백성을 손바닥에 새기신 듯이 감찰하시며(사 49:16), ④ 눈동자처럼 지키시고(신 32:10), ⑤ 그늘이 되어주시며(시 121:5), ⑥암탉이 그 새끼를 보호하듯 하시고(마 23:37) ⑦ 독수리 새끼처럼 연단 하시며(신 32:11), ⑧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주시는 분이며(마 6:8, 32), ⑨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고(히 4:16), ⑩ 인도하시고(창 28:15, 시 139:10), ⑪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며(롬 8:28), ⑫ 또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행 17:31, 벧전 2:23).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유익하도록 인도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염려를 크게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신다”고만 생각하여도 크게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계 2:1~4). 믿음은 곧 하나님을 앎으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3)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열쇠 뭉치를 잃고 몹시 답답하였는데 기도한 후 상상 이외의 장소에서 찾았고, 그 다음에는 증명 수첩을 잃고 기도한 다음 찾았으며 또 다른 연장을 잃고 역시 기도한 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도끼와 잃은 나귀를 찾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6:5, 삼상 9:3).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본문) 하신 것도 기도로 부탁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하루 열 번쯤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루에 한 번쯤 밖에 안 합니다. 그래서 “열 번 아프면 기도도 최소한 열 번은 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괴로워도 기도를 안 하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기도는 곧 하나님의 인도와 힘을 힘입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노력도 하여야 합니다. 노력은 인간적 방법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방법이 없을 때 하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와 화해할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를 하였지요(창 32:11, 22~29). 그는 기도를 하고도 선물 공세를 하였으며(창 32:13~15) 또 선물과 종들과 가족들을 앞세운 다음 자기는 맨 뒤에서 에서를 만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사람의 노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염려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염려를 잊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옆에 있어도 모르면 두렵지 않은 것처럼 모르는 것이 곧 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잊으려 할 때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그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빌 4:7) 염려를 모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무실 때 염려하셨더라도 기도하고 주무신 다음에는 그 염려가 없어지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제51과 짐을 더는 법 (마 11:28~30)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고 또 내 멍에는 쉬우며 내 짐은 가볍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분명히 인생의 고난을 더는 비결이 들어있습니다. 철학은 바른 것을 인간적 두뇌로 연구하는 방법이고,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 속에서 신적 은혜를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니까 반드시 성경으로 그 비결을 배워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지는 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주셔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또 한 가지는 마귀가 사람의 욕심을 발동하여 괴로움을 당하게 하는 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칠 수 없는 장애를 가졌거나 자기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하는 책임, 즉 자기의 십자가 같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나의 멍에). 그러나 자신이 방심하고 실수하였거나 분수에 맞추지 못하는 생활 때문에 당하는 스트레스와 고난은 마귀가 주는 것이고, 자기가 만들어서 당하는 짐인데 이럴 경우에 이런 짐, 저런 짐을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가장 경미한 짐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셨는데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 원인을 살피면 자기 실수나 이해 부족이나 과욕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욕심에 끌려 죄를 짓는 것처럼(약 1:4) 욕심과 교만에 끌려 자기 스트레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1) 실수를 범하여 질책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모욕감을 느끼기 전에 “내가 실수하였다”고 즉시 시인하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세요. 그것이 곧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받는 방법입니다. “실수하였다”는 데는 예수님도 용서하시는데 누가 물고 늘어지겠습니까? 사람 중에 실수 안 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이해 부족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다른 사람의 성격과 취미와 생활 문화를 넓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마음을 넓히라”(고후 6:13)는 말씀이 있습니다. 흔히 가족들 중에서 자기 성격과 맞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아내, 또는 어떤 남편은 상대방에게 100% 끌려가면서 사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주관이 뚜렷할 때는 서로의 자유를 찾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가 그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을 서로 막지 않는 것입니다. 양복에 갓을 쓰고 나가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기 취미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성격대로 살아주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로 느끼는 스트레스가 욕심에 이끌리는 것인데 이런 일이 있을 때 자기의 믿음 약한 것을 탄식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무엇이 욕심에 끌리는가? 하면 자기보다 행복해 보이는 이웃 때문에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의 집이나 자동차나 자녀들 출세나 모든 것이 자기보다 좋아 보이고 나는 왜 이 지경인가? 하면서 스스로 속상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도 하고 서로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믿음으로 처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온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은 것처럼(창 45:5) 자기의 어려운 환경도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자기의 어려운 환경을 주님이 지워주신 짐이요, 십자가라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롬 9:20~21, 마 16:24). 주님이 지워주신 짐으로 알고, 사명적으로 지면 주님이 가볍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예배당을 짓는데 헌금할 돈이 없어서 몸으로 헌금할 작정으로 교회의 건축을 돕다가 미장 기술을 터득하여 그 기술로 먹고 살아갈 방도가 생겨진 일이 있고, 대부분의 자선가들이 고아나 장애인을 돕다가 큰 자선 사업가로 변하는 예가 있으니 이런 일들이 다 짐을 지므로 잘 된 실 예가 아닙니까? ② 예수님의 생활 환경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백성으로 가난한 집에서 사셨고, 또 쫓기면서 사셨으며 억울함을 당하셨고, 33세 짧은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유와 풍요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시장기를 느끼며 무화과 열매를 찾은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③ 성경대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여(롬 12:16) 더 어려운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과 비교하시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입원하여 병원 생활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세요.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④ 그리고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멀리 보는 것입니다(요일 2:5,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면 하늘이 가까워지는 동시에 세상이 멀리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멀리 보고 탐심을 제거할 때 마음도 편해지고 하나님도 가까이 계셔주신다는 것을 꼭 믿고 체험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6. 복에 관한 말씀


제52과 주님과 동거 동행 (창 5:21, 요 14:23)목록으로


성경에는 주님(또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함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과 동거 동행하면 크게 행복할 것입니다. 우선 동거에 관한 말씀을 살피면 마 28:20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고, 또 요 14:23에서는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 하셨으며, 계 3:20에서도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거 동락의 생활 이상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동행에 관한 말씀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죽음 없이 데려가셨다”(히 11:5) 하였고, 창 6:9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홍수의 멸망에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녹의 아들은 최고 장수자 “므두셀라”이고, 에녹은 엘리야처럼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채 승천하는 복을 받았으며, 노아는 의롭게 살면서 인류의 제2시조가 되었으니, 하나님과의 동거 동행 그 자체도 복이려니와 동행으로 받은 축복도 대단히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1. 동행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항상 예수님이 계시게 하여야 하고(엡 23:47), 성도의 가정에도 항상 계시도록 모셔야 하며, 특히 외출을 하거나 어떤 일에 몰두할 때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망각하지 않도록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일상생활에 대한 것도 기억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 한번씩 먹는 약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확인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약을 먹는 것은 잊을 수 있고,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먹이는 것은 잊을 수 있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이나 기도하는 일은 잊어서 안 되는 것이 주님과의 동거 동행의 원칙일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다 예수를 믿는데 주일날 교회 출석만 한다고 가상할 때, 그 집에 예수님이 동거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교회에 가서만 생각하고 집에서나 일상생활을 할 때 외면한다면, 예수님은 그런 외면과 배척을 받으시면서 함께 계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인을 모신 자녀가 하루 종일 늙은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가상해 보세요. 그 노인들은 심심하여 양로원만도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가족이 예수님과 동거한다고 하면서,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면서, TV 오락프로나 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무시하여 내쫓은 일이 될 것입니다.

2. 그래서 예수님과 동거 동행하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암 3:3). 부부의 뜻은 반반씩 따라도 되지만, 예수님의 뜻은 전폭 지지해야 합니다. 부부싸움과 이혼의 원인이 뜻 안 맞는 데서 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주님은 옳고 주님의 말씀은 전리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렘 12:1). 이것을 거스리고 도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2)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의롭고 공평한 길 가운데로만 다니시기 때문”입니다(잠 8:20). 예수님 가시는 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의롭지 않은 길로 가면서 주님이 동행하시는 줄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의롭고 공의로운 길에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3) 주님과의 간격을 좁혀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검소하였는데 우리의 생활이 사치하다면, 동행조건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름을 좋아하시는데 나는 물을 좋아한다면, 역시 어울릴 수 없겠지요. 그래서 먼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의를 행한 다음에도, 주님과의 생활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꼭 같을 수는 없겠지만 비슷하게라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혼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대화 없는 동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동행 그 자체가 동무처럼 친교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잠자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심심하지 않게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행 동거하는 데는 네 가지 필수 요건이 있습니다. ① 주님의 뜻을 따름이요, ② 모든 일을 의롭게 행함이며, ③ 예수님의 생활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요, ④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기도는 나의 말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천군 천사의 보호를 받을 것이요, 또 예수님과 동거하면 주님이 그 가정의 필요한 것도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거 동행을 잘 하시는 것이 바로 믿음생활의 목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53과 믿음생활의 모범자들 (요 8:39~4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생활의 모범자들”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본받으려 하십니까? 여러분들 주위에 은혜 있는 목사님들이나 부흥 강사님들이나 복 많이 받은 장로님들이 계시다 해도 그분들을 본받으려 하지 마시고(나쁜 것까지 본받을 수도 있으니까) 반드시 제가 알려드리는 모범자들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모범자들입니다.

1.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무흠자로써 모범자가 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무흠자일 수 없다는 점에서 거리감은 있으나, 인간 모범자이심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성도들을 찾으셨고(롬 8:29), 거기에 따라서 예수님도 “내가 본을 보였으니 나를 본받으라”(요 13:15) 하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발 씻기는 것만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고, 모든 것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성품을 본받고, 언어를 본받으며, 생활을 본받고, 나아가서는 사랑의 모범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본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분이고, 예수님의 충성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요 15:13, 빌 2:8).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신 분입니다. 문화는 바뀌었지만 정신과 원리와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2.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담의 20대 손이고 주전 4,000년경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모범자가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 또는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시고(롬 4:11), 그의 믿음을 확인하신 후 그를 본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히 11:13~17). 아브라함은 평소에도 순종을 잘 하였습니다. 또 내세를 사모하고 현실을 나그네처럼 살아간 모범도 있습니다(히 11:13~17). 그런 중에서 어려운 시험을 받기도 하셨지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이 진실함을 인정하시고(창 22:12), 그를 신앙의 모범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본문 39절을 보시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아브라함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사는 본받아야 하고, 아브라함이 실천하지 않은 것은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잘 실천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3. 사도들입니다. 이 사도들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로써 예수님이 모범자 되도록 만들어주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침의 특권을 주셨으니까(마 28:19~20) 제자된 성도가 스승을 본받아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고전 3:10~11에 보시면 “사도들이 예수님 터 위에 기초를 닦고 집을 세웠다” 하셨고, 또 “사도들이 세운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확실한 모범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고전 11:1에 보시면 “내가(바울 사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시므로 사도의 모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많습니다. 문화적으로 따라갈 것은 없지만, 2,000년 전에 사도들이 어떻게 믿었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또 어떻게 전도하고 헌신하였는가에 대하여, 그 정신을 본받고, 거기에 가까이 나가는 생활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평신도가 아닌 전문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문 사역자들이 사도들을 더 많이 연구하고 모범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히 11장은 믿음의 선진들이 모범을 말씀한 장입니다. 그리고 히 13:7에서는 “지도자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해 보면서 저희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에서 믿음의 모범자들이 현세의 복을 얼마큼 누리고 죽는가? 하는 것은 참고할 바가 아니요, 다만 그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믿음의 선진은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다 행실의 종말이 신앙적이었고, 현세의 복은 거의 누리지 못한 분들입니다. 성경에서 칭찬 받은 모범자들이 몇 분 있는데, 하나님과 꾸준히 동행한 에녹, 120년 동안 꾸준히 순종한 노아, 오랫동안 온유함을 간직한 모세(민 12:3), 여호수아와 갈렙의 용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행 13:22), 아무런 흠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무엘,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킨 다니엘, 최고의 칭찬을 받은 세례 요한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성도님들이 모범을 함부로 또는 쉽게 주변 인물들 중에서 정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롬 3:11에 보시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셨고, 또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만 참되시다”(롬 3:4) 하셨으니, 사람 중에서 모범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 그러려니” 하시고, 성경에 나타난 모범 인물을 본받으셔야 하고, 또 성경의 모범 인물이라 하여 다 연약이나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 중에서도 또 선별하여 모범적인 것만 본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54과 다섯 가지 은혜 (고후 8:1~5)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마게도냐”는 현재 헬라 영지의 북부에 해당하고, 주후 55년경 이 지역이 로마 통치하에 있을 때, 바울 사도가 2차 선교여행으로 그곳에 가셔서 “네압볼리”, “빌립보”,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뵈뢰아”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예루살렘 지역은 흉년이 들어 빈곤하였고, 고린도를 포함한 헬라 지역은 그보다 나은 실정이기 때문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차 헬라 지역을 다니시면서 구제헌금을 권장하셨는데, 뜻밖에도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기대 이상으로 많은 호응과 협력을 하므로 바울 사도를 크게 만족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아가야 지역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구제헌금을 하도록 권하시면서(고전 16:2), 마게도냐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봉사한 모범을 자랑삼아 소개하신 것입니다. 본래 은혜의 뜻은 한 가지이지만 그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은혜”란 거저 받는 좋은 것입니다. 또 거저 받은 것이 안 좋아 보이고, 고난스러운 것일지라도, 좋은 목적으로 주셔서 좋은 결과를 나타낼 때는 역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는데, 그 고난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역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시 119:71). 그러면 저희들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너희에게 알게 한다” 하시고 증언을 하셨는데,

1. “환난의 많은 시련”이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도 은혜입니다. 시 119:71에 보시면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이 괴로운 것이지만, 이런 괴로움을 믿음 때문에 받고, 또 믿음으로 받을 때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도가 고난으로 많은 연단을 받는다면, 마치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한 사람처럼 강한 사람이 되어,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극복할 것입니다.

2. “넘치는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넘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을 적게 표현할지라도 속으로는 기쁨을 간직하셔야 합니다. 근거 없는 기쁨은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승리와 소득이 있고, 보람과 소망이 있을 때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 이상 더 큰 보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승리하는 생활이고, 발전하는 수단이며, 미래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그 마음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생활을 진실 되게 시작하였으므로 시련을 받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을 만끽하였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은혜”입니다. 좋은 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고, 열심도 하나님의 뜻대로 내야 합니다. 목적이 좋아도, 방법에 합리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됩니다. 그러니까 목적과 방법에서 꼭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하시므로, 구제금 전달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랐음을 명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들은 항상 성경 말씀과 자신의 깨끗한 양심을 기본으로 하여 늘 묵상하고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는 헌신의 은혜”입니다. 5절 말씀에서 구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구제는 물질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은 신약시대 성도들의 마땅한 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헌신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레위 지파에게 성전 사역을 전담케 하고 십일조 헌물로 그들의 생활비를 주었기 때문이며, 또 예수님의 희생적 모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로 받은 만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요일 4:10~11, 계 2:10).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자는 반드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주권 없는 종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5. “성도 섬기는 일을 성실하게 시행하는 은혜”입니다. 4절에 보시면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하였고, 또 “우리에게 간절하게 구하였다” 하였으니, 이 뜻은 복음 사역자들의 전도와 구제를 격려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시행함”으로써 형제 사랑에 대한 실상을 솔선하여 나타낸 것입니다. 믿는 것도 은혜이고, 변화되는 것도 큰 은혜이며, 좋은 일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넘치는 기쁨”,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는 헌신”, “성도 섬기는 일”, 이 다섯 가지 은혜가 저희들에게도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55과 복 있는 사람 (시 33:12~22)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복 있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가 복이 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 선민국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선민국이 없으니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 또는 자기 가정의 하나님, 자기 단체의 하나님으로 모신 백성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모시지 않는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거나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대단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신 자는 우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정욕을 못박으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생활이 정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통일교 목사를 30년 하다가 개종한 후 책을 썼는데 그의 통일교 생활은 틀림없는 “문선명 제일주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성도는 다 하나님의 빼신 백성이지만 평범하게 사는 성도와 특별하게 사는 성도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영광의 눈총을 받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의 축구팀을 구성하려면 감독, 매니저, 코치, 선수 등 4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선수는 20명뿐인데 그들이 다 뛰는 것이 아니고 11명만 뜁니다. 40명 중 11명이지만 11명 중에도 또 눈에 띄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계의 관중이 주목을 하고 영웅시합니다. 그들은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특별하게 빼신 백성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축구는 11명이 하는데 그 중 튀는 한 선수가 공을 잡으면 관중이 다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합니다. 그것이 곧 빼신 백성이 된 증거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조금만 성의를 보이면 빼신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기 위하여 주밀하게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14절, 대하 16:9).

3. 자기의 용맹과 수단을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16절에 보시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는 왕이 없다”고 하셨지요. 군대는 용맹과 지략의 대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사의 힘”도 역시 인간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전쟁도 하나님이 하시고 구원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적 지혜와 수단이 다 잘 되는 방법인 줄로 아시면 안됩니다. “여인천하”라는 역사 드라마가 거의 인간적 수단과 방법으로 권세를 버티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다 죽고 망한 것입니다. 잠깐의 영달을 위하여 수단과 불법을 쓴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수단과 용맹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의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 안에서 성실하게 사는 자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또 기근 시에도 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의 인자하심(은혜 베푸심)을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경외하는 일과 바라는 일”을 같은 뜻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곧.....)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선보다 악이 많고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칭찬보다 긍휼(인자하심)을 더 기대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21절에서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태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느 8:10에 보시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신 자, ② 영광의 기업으로 특별하게 뽑힌 자, ③ 자기의 용맹과 수단을 의지하지 않는 자, ④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임을 꼭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6과 아버지의 사랑 (요일 2:15, 눅 15:11~24)목록으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세속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곧 하나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도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타내주신 말씀이 곧 탕자의 비유 교훈입니다.

1) 아버지의 사랑 첫째는 자기의 기업을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천국의 영광이지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받으실 천국의 영광을 제외됨 없이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다 지식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기업 되는 영광을 그 성도들에게 영구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의 분깃을 달라 하셨고, 아버지는 의당한 듯이 나누어주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아버지가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곁을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인데 아들은 자기의 욕구대로 집을 떠나기를 소원하였지요. 아들이 집을 떠나는데는 한 밑천을 갖고 가는 것과 연관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소원과 같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식이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분깃을 미리(천천히 주려한 것인데)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의 뜻에 꼭 안 맞아도 아들의 소원과 취미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가 응답되었다” 하여 다 하나님의 소원과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산성이 없는 것임을 아시면서도 아들을 기쁘게 해주시려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니까 그런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 같으면 밑지는 장사를 안 할 것입니다.

3)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20절).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아들을 늘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다리는 심정을 자식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식이 아버지 신분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때에 이해를 할 것입니다.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그 성도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아버지의 사랑은 죄짓고 실패하고 돌아오는 아들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하신 것처럼(마 9:12) 하나님은 범죄한 아들이라도 돌아오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교훈에 보시면 아버지가 성공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웃 나라에 흉년 소식을 듣고 다 털어먹었으리라고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갖고 오는 자를 기다리십니다(시 41:17). 20절에 보시면 “측은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 돌아온 탕자의 형은 재산을 탕진하고 온 동생을 아버지처럼 측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형제간의 사랑과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영접하고 입 맞추는 사랑입니다. 만족하게 사랑하고 뜨겁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6)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영접한 후에 최고의 옷으로, 가락지로, 살찐 소로 연회를 베푼 것은 좋은 것을 흠뻑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 7:11).

7) 아버지는 자식의 변화된 모습으로 만족할 뿐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도 성도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을 많이 닮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명예나 재물 같은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허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시 24:4).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찾았으니 즐거워함이 마땅하다” 하므로 변화(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것, 품꾼의 하나처럼 겸손해진 것) 그 자체를 가장 중요시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대략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아낌없이 자기의 기업을 주시고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항상 기다려 주시고 변화된 것 이상 바라지 않으며 실패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기뻐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2. 그러면 어떤 성도가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도가 “주여 주여” 한다고 하여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심에 있어서도 등급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하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유한하고 허탄한 것들)을 많이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사모하실진댄 그만큼 세속에 대한 사랑을 멀리 하시고 하나님만 더욱 사랑하는 자세와 생활을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엡 6:24).

 

제57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자 (사 64:1~7, 66: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빈틈없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권고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깨우치시며 붙드시고 인도해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선지자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아주 큰 은혜와 능력을 발동하셔서 선민을 권고 선대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작은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에 항상 강국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면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고, 또 백성들이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권고가 떠나면 강국이 침략하는 몽둥이를 맞아야만 하였습니다. 북방의 앗수르군이 침략하여 참기 어려운 멸시를 가해왔을 때 하나님이 지진과 뇌성 벽력을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을 죽이시고 나라를 구해주신 일이 있었습니다(사 30:30~32, 34:9~10). 그래서 본문의 기도 내용에서도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산들을 진동시키시고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게 함 같게 하여…주의 대적인 열방으로 떨게 하옵소서”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능력으로 선민의 대적을 쳐 부셔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연고 없이 선민을 치셨을 리가 없고 또 무조건 선민의 대적을 치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선민이 하나님의 권고 받을 만한 입장이 못되는 것을 탄식하면서 권고 받을 만한 입장에 있어야 할 것을 몇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그 첫째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라” 하셨고, 또 사 40:31에서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앙망”이란 그 대상을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축구 선수의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이 공을 찰 때 차마 눈을 뜨고 못 보면서 기도했다고 하니까 아나운서가 하나님께 하셨습니까? 부처님께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곧 부처님을 앙망한 것입니다. 의지하는 대상이 바로 앙망의 대상이요, 인간이 의지하는 행위가 바로 앙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의지하고 다른 강대국을 앙망하는 데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으니 답답한 일입니다.

2.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5절). “기쁘게 의를 행한다”는 것은 바르게 사는 생활을 큰 보람으로 알고 그 일 시행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며 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의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일을 즐거움과 자원함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서 붙잡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자립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자립하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결코 어느 사람이 중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5절에 보시면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길”이란 주님이 가시는 길이니까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1:2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주의 뜻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기억)하는 자”를 하나님이 선대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또 말씀은 얼마나 묵상하고 기억하는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4. 7절에서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일이나 돌이키고 경성하는 일이 결심과 용기 없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분발할 것을 결심하고 시행하는 노력을 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대하 16:9에 보시면 “하나님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스스로 분발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사 60:2에 있는 말씀을 소개하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자기 부족을 아는 것입니다. 교만할 근거가 없는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심령에 통회함”은 항상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 치며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항상 두렵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는 것을 예사로 아는 사람이 있지만 시 7:12에서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그 칼을 가시고 활을 당기신다”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다섯 가지 권고 받는 대상과 방법을 상고하였습니다.

 

7. 기도와 교리적 내용


제58과 예레미야의 기도와 응답 (렘 12:1~17)목록으로


성경을 살피시는 분들은 성경을 한 장 읽으신 후에 그 내용을 구분하실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앞서 본문의 시대적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본문 1:23에서 유다 19대왕 요시야 13년부터 22대 시드기야 11년 말(주전 628~586) 사이에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드기야 11년 말은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한 때이므로, 선민 세대 말기에 주신 말씀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고, 그의 고향 아나돗은 예루살렘 동북쪽에 인접한 곳이요, 책망과 멸망에 관한 예언을 많이 하였고(11:21~23), 그로 인하여 핍박도 많이 받으면서(37:13~16, 38:7~13), 그 예언의 성취를 본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을 구분하면 다섯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은 예레미야의 기도이고, 그 이하는 다 하나님의 응답인데 하나님이 응답하신 내용을 살피면 네 가지 내용입니다. 5~6절은 “연단 주시는 교훈”이고, 8~10절은 “선민의 타락성을 표현한 말씀”이며, 7, 11~13절은 “악인의 나라를 벌하시겠다는 말씀”이고, 14~17절은 “선민을 괴롭힌 나라를 멸하신 후 때가 되면 긍휼을 베푸신다”는 내용입니다. 대지별로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예레미야의 기도에서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다”고 전제하였습니다(1절). 여기의 “쟁변(립)”의 뜻은 예레미야의 신앙이나 논리로 볼 때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대립하는 뜻이 아니고 의문을 풀기위한 문의로 보아야 합니다. 이 쟁변은 하나님 편에서도 하셨습니다(호 12:2, 미 6:1~2). 문제는 선지자가 하나님과 쟁변할 때 “주는 의로우시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사건들이 많이 있어도 사람은 심판자가 아니며, 또 역사의 내력을 모르고 공평치 못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전지성과 역사성을 연계하여 심판하신즉,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성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한 이유”를 질문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형통하는 동안 의인은 연단을 받아야 하며, 때가 되면 벌도 내리시고 은혜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5~6, 7, 11~13, 14~17절). 2절에서 악인의 현실적 축복을 유실수 열매로 비유하셨고,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도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은 일반적 축복입니다(마 5:45). 또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마음은 멀다” 하셨으니 외식적으로 신앙 행사하는 자들을 고발한 내용입니다. 믿음은 진정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의 신분과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아신다” 하였으니(3절) 이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청구하는 이유가 원수를 미워함에 있지 않고(마 5:44), 그들을 멸하시므로(양을 잡아 제물로 삼는 것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신 후 가뭄으로 인한 고난에서 모든 생물들을 구원해달라“는 취지였습니다(4절). 또 ”그 땅 거민은 악하여…그가(악인들) 우리의 결국(의인이 승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므로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악한 자들의 죄는 그 지역에 가뭄의 고통을 주시면서도 악인 자체는 일시적으로 형통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2.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네 가지로 말씀하셨으니

1)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연단을 받아야 하니”(5~6절), 그 이유는 더 큰 고난이 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말과 경주하겠으며 평안한 땅에서 무사한 생활만 한다면 홍수가 났을 때(요단의 창일)는 어찌 하겠느냐? 또 악인의 형통을 성도가 고난으로 여긴다면 가족의 핍박이 있을 때는 어찌 하겠느냐?” 하시므로 더 큰 환난에 대한 훈련이 필요함을 말씀하신 후에

2) 선민의 타락상을 말씀하셨으니(8~10절) 하나님은 자기의 선민을 “내 산업”(7, 8절), “내 포도원”(10절), “내 분깃, 내 낙토”(10절)라 하시면서 그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항하되 마치 “삼림 중의 사자가 먹이를 탐하여 으르렁대는 것 같고, 무늬 있는 매가 먹이를 할퀴는 것 같으며, 목자가 포도원을 훼파하는 것처럼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의 대상인 선민이 증오의 대상으로 변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 들짐승(바벨론을 뜻함)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산업을 망친 자들을 삼키게 하실 것과(9절) 그 산업을 내어 던져(7절) 유다와 선민의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하여 평안을 잃게 하셔서 아무런 생산도 없이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13절).

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산업을 훼파한 악한 이웃(바벨론)을 그 땅에서 멸망당하게 하여 뽑아버리고(14절), 또 때가 되면 “뽑아버린 그 이웃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셔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도를 배우게 하신다”(15~16절) 하시므로 선민을 괴롭게 한 자들이 한때 수난을 당하지만, 훗날에는 그들(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에 동참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은 뽑힐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16절).

 

제59과 가뭄의 기도와 응답 (렘 14:1~22)목록으로


렘 14장을 읽고 “가뭄과 기도와 응답”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6절까지는 “가뭄의 정황”이요, 7~9절은 “선지자의 기도”이고, 10~12절은 “(선지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이며, 13~18절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고발과 하나님의 응답”이고, 19~22절은 “선지자의 마지막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기도 내용이 큰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1. 가뭄에 대한 말씀에서(1~6절) “가뭄으로 인하여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통곡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친다(위에 오르도다) 귀인들이 사환을 시켜 물을 구해 오라 하나 우물에서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고(고개를 들지 못함),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진즉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 머리를 가리우며,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어도 풀이 없어 죽게 되고(내버리고), 들나귀들은 자산(풀 없는 붉은 산) 위에 서서 시랑(늑대 같은 야생동물)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은즉 아득한 눈의 표정을 짓는다” 하였으니 가뭄 세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7~9절) “하나님이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죄 많음이 확실함) 주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가뭄으로) 낙담이 많습니다(선민의 낙담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는다는 뜻).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곤란한 때에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선민을 유숙자 나그네(행인)처럼 대하시나이까? 어찌하여 힘없는 자처럼(범법하는 자) 하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자처럼 하시나이까? 주는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선민이오니 이 백성을 버리지 마옵소서” 하고 호소하므로 정상적 관계처럼 은혜주실 것을 진술한 것입니다.

3. 이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10~12절). “내 백성(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죄를 기억하여 벌할 것인즉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삼상 16:1) 그들이 금식하며 부르짖을 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요 제사를 드려도 받지 않을 것이며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멸하리라” 하시므로 죄로 인한 징벌을 돌이키시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고, 또 기도와 제물도 거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4. 이 뜻을 알게 된 예레미야 선지자가 또 기도합니다(13절). 이 기도는 거짓 선지자들의 횡포를 고발한 것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그들)에게 이르기를 칼이나 기근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오히려)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하나이다” 하였으니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주장만 나타내므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5. 여기에 대하여 응답하시기를(14~18절)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도다. 내가 보내지 않았고 명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들도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이요 장사 지내줄 자도 없을 것이며, 그 아내와 자녀들도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라” 하시고, 하나님도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리니(하나님의 인격적 감정 표현) 이는 내 백성들 위에 큰 파멸이 임하고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성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은 방황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6. 이렇게 하나님이 징계가 불변함을 듣고도 예레미야는 또 기도를 드립니다(19~22절).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예루살렘과 선민)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악을 인정하며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시고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창 22:15~18)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열방의 허탄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그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렘 15:1). 여기에서 기도를 무조건 만능으로 여길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여도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될 때에만 응답됩니다. 예레미야의 간절한 기도와 정신을 본받되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섭리를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60과 하박국서의 감동 (합 3:1~9)목록으로


저는 하박국서를 읽으면서 미묘한 감동을 느꼈기 때문에 “하박국서의 감동”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 미묘한 감정의 근거는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 내용이 너무 정열적이고 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7~8절을 보시면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하신 말씀들에서 기도의 정열과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또 교훈주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씨름하는 자”라고 합니다. 죄와 씨름하기 위하여 그런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신분과 시대를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갈대아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아(1:6~11, 2:4~8) 유다의 멸망 이전의 선지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선민을 상대로 예언하였습니다.

1. 하박국은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1:1~4, 12~17, 2:1, 3장 전체가 기도의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부르짖어도 왜 듣지 아니하십니까?”(1:2) 하였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응답을 하셨습니다(1:5~11, 2:2~20).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2.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를 통하여 선민이 범죄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진정을 하였습니다. 백성이 범죄하면 선지자는 회개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강포하며 간악하고, 패역하고, 겁탈하며, 분쟁이 있고, 율법이 해이하며, 공의가 시행되지 않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상태를 진정한 것입니다(1:3~4). 참으로 나라가 엉망이었고, 질서와 도덕이 폭력에 눌렸습니다. 2:15~19에서도 “폭력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를 하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3. 1:6에서 하나님은 선민의 죄 값으로 갈대아인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갈대아”란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 땅을 갈대아(BC 2300~1370년), 앗수르(BC 1270~606년), 바벨론(BC 606~538년), 파사(BC 538~331년) 나라가 순서대로 통치하였습니다. 하박국 시대에는 앗수르 나라가 있었고, 그 다음에 바벨론이 들어서서 유다를 침략하였지요.

4.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의 침략이 있을 것을 계시 받고 기도하기를 “악인만 벌하시고(1:13) 바벨론에 맡겨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것만큼은 거두어 주십쇼. 어찌 바다의 고기를 씨 말리듯 다 없애시려 하십니까?”(1:12~17)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잔인성을 말씀하시면서(2:5~8)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 계획을 백성들에게 “기록으로 계시하라”고 하셨습니다.

5. 2:2을 보시면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문서로 보일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증언자는 말과 행동과 문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하셔야 할 것입니다. 합 2:20은 하박국서의 요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다”는 뜻은 선민을 상대하신 지상의 보좌가 예루살렘 성전이고 또 기본적 보좌가 천상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 표현의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의 권위를 느껴야 할 것을 나타내신 것이고, “온 천하가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함”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6. 3장 전체는 하박국의 기도 내용인데, 1절의 뜻은 “시기오놋”이란 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읊었다는 것이고, 2절에서 “들었다는 소문”은 선민적 구원의 소망(메시야 예언)입니다. 하박국은 멸망 계시만 받았고 구원 계시는 소문으로 들었으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부흥을 수년 내에 주십쇼”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부흥의 원 뜻은 “차야”란 말로써, 성경에 한 번 표기되었는데, 메시야적 구원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고, “수년”이란 “베케렙 솨님”으로 1년 단위의 뜻이 아니고 복합적(세기) 연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말씀은 “진노 중에서 위로의 은총이 속히 나타나기를 갈망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흥”이란 용어에서 우리들도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물량주의적 부흥이 아니고 “예수님을 닮은 성도의 증가”를 의미한다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이룬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슥 4:6). 3장 중간 부분에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위엄을 말씀하셨고(3:3~15), 그것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의 창자가 흔들릴 정도로 떨렸으나(16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소식이었으므로(8, 18절) “비록 가난할지라도 즐거워하며 힘을 얻고 용감한 생활을 할 것이라”(17~18절)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무화과, 포도, 감람 열매,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므로 힘을 얻고 사슴이 높은 곳을 힘있게 달리는 것처럼 용감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결론을 말씀한 것입니다. 가난은 신앙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믿음과 기도만 있으면 얼마든지 형통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61과 바울의 기도 (살전 3:10~13)목록으로


본문에는 바울 사도의 간구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에서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바울 사도처럼 주야로 심히 간구할 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소원한 간구 내용을 저희들도 간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의 시기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시다가 핍박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여 아덴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면서 간구하신 내용입니다.

1. “성도를 직접 만나서 믿음의 부족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10절)고 하셨습니다. “성도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핍박의 바람이 가라앉아서 평안한 분위기에 방문할 수 있기를 기도하신 것이고, “믿음의 부족을 온전케 함”이란 초신자들에게 방대한 믿음의 지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말씀이 전달되려면 가르칠 교사가 있어야 하고,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며 또 듣는 자들이 총명을 갖고 사모해야 됩니다. 이런 여건이 하나라도 부족하면 말씀이 심령에 심겨지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바빠도 안 되고 듣는 사람이 피곤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 부족에 대하여 일깨워줄 수 있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믿음의 부족을 여러 가지 면으로 점검하여야 합니다. 성경 지식 면에서, 교회 생활 면에서, 자기의 양심 생활 면에서, 또 사명 생활 면에서 반성한다면 많은 부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셔서 성도들의 믿음이 충실해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2. 핍박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1절의 “우리의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하신 내용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이적으로 탈출한 몸이기 때문에 적극적 수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길로 직행을 못 하시고 지름길로 숨어서 아덴까지 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이 멀리 떠났다”고 확인이 된다면 직행하실 수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핍박자의 소행을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짐승이 권세를 받되 42개월만 받았다”는 말씀이 있고, “사탄을 잡아 1천년 결박한다”(계 10:2)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섭리자요 사탄을 조정하시는 하나님께 직행의 여건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 시대에 완악함과 죄악이 통제되고, 전도의 길이 어두운 땅까지 열려지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간에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에는 교역자와 성도간의 사랑, 성도와 성도간의 사랑, 또 더욱 넘치는 사랑,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넓고 큰 사랑이 있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교회의 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교역자는 사랑하는데 문제 있는 성도는 사랑을 못합니다. 또 어떤 성도는 교역자도 사랑을 못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역자가 사랑을 못 받아 교회를 떠난 사례가 있습니다. 그 교인들의 신앙이 크게 잘못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성경을 통하여 직접 은혜 받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교역자보고 “나만 사랑하시고 나만 축복하시고 내 뜻대로만 해 주시오” 하다가 안 되면 교역자도 미워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모든 성도와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피차간 사랑하되 그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4. 13절에서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굳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려면 우선 핍박을 이겨야 하고, 다음에 세상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이기려면 태풍을 견디는 나무처럼 뿌리와 줄기가 다 견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견고하기를 기도하신 것이요,

5. “주 앞에 흠 없이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정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문제는 성도가 예수님을 맞이할 때 깨끗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거룩함을 보전키 위한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의”는 용서받는 은혜이고, “거룩(흠 없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멀리하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거룩함에 흠이 없음” 설교 참조).

 

제62과 항상 기도하는 문제 (살전 5:17)목록으로


1. 성경에는 “항상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눅 18:1에서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하셨고, 롬 12:12에서도 “기도를 항상 힘써야 한다” 하셨으며, 또 잘 아시는 내용으로 살전 5:17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이 말씀을 읽은 성도들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 무엇이며, 또 “할 일 많은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항상 기도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먹고 일하며, 연구하고, 잠자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 정신을 써야만 합니다. 일상생활에 정신을 안 쓸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일상생활에 마음을 쓰고, 남은 여가에 대하여 항상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음식을 먹거나 일정한 육체 활동을 할 때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겠지요. 또 기도하는 일이 소중한 만큼 불필요한 일반활동으로 기도할 기회를 저버려도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정신으로 하는 것인즉 최대한의 정신적 여유를 만들어서 그 여가를 기도하는 일로 채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길을 가거나 버스에 앉은 상태에서도 기도할 수 있으며, 잠을 자기 전에도 기도하다가 잠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활동을 할 때는 체계 있는 기도를 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쪽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할 일이 없고 심심해서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이지만 성도는 항상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곧 기도요, 기도 이상 더 값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아신다면 크게 행복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왜 이런 연속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제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한 달에 한 번씩 출동한다면 기도도 그런 때에만 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마귀는 쉬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에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의 줄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방학도 없고 휴식도 안 하면서, 성도를 죄짓게 하기 위하여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하기 위하여 항상 유혹하는 것입니다. 벧전 5:8에 보시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하셨고, 엡 4:27에서는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마귀는 도적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마 6:19, 24:43). 도적을 방지하기 위하여 항상 집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기도도 마귀의 역사를 대적하기 위하여 항상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 26:40(막 14:37)에 보시면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는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파수하는 기도와 같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기도”는 연약으로 오는 불안과 위험, 사고, 우환 등을 면하게 해 달라는 부탁과 의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섭리자이십니다. 복과 저주를 주관하십니다(신 11:26).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환난을 예언하시면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 하신 말씀을 보면 기도가 환난을 피함에 있어서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루 하루의 생활이 평안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는 기필코 기도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나 행동하기 전에 되도록이면 아침 일찍 기도부터 시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3) 하나님과의 동거 동행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친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 11:11). 또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 14:23)는 말씀도 있고, 또 하나님과 성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입니다(요 1:12). 그 외에도 동행에 관한 말씀(창 5:24, 6:9), 동거에 관한 말씀이 있으니(계 3:20), 여기에 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기도를 항상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고 한 집에서 살거나 동행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기도의 대화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내 곁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엡 1:20, 골 1:19, 29), 또는 믿음 안에서(갈 2:20) 사는 생활입니다. 죄를 방지하기 위한 마귀와의 대적을 위하여, 환난이나 사고 등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부탁의 기도,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동거 동행하는 생활의 대화로써 성도의 기도는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4. 한 가지 더 부언 드리고 싶은 것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기도의 재미를 보는 생활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기도를 망각하거나 기도의 취미를 못 느끼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신앙의 무기를 갖고도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컴퓨터를 갖고도 방법을 몰라서 못쓰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나 말씀의 맛을 모르면 은혜의 진미를 모르는 것과 같아서 크게 불행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연구에 몰두하는 시간을 제하고는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제63과 율법의 시대적 적용 (마 5:17~18, 11:13~1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율법의 시대적 적용”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율법이란 의미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구약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할 수 있고, 좁은 의미로 볼 때는 모세 5경이나 십계명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 제목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율법은 구약 시대에 주신 모든 계율(지킬 내용)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율은 출애굽 때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선민에게 주신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선민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에는 하나님을 알리신 내용,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 성소를 짓고 제사장을 세워 제사를 드리는 법, 그리고 각종 민법과 형법, 재판법과 의료법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여러 가지 목적에 의하여 주셨으니

1) 하나님과 메시야의 구속 사업을 계시하는 목적이 있었고(제사에 관한 법),

2) 신앙과 함께 선민 국가를 통치하는 법이며(일반 국가의 법처럼),

3) 도덕적 윤리를 지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모세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는 그 백성들을 어떻게 통치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위 제목에 “시대적 적용”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3 시대로 나누어 우선 이해를 돕겠습니다. 첫째 시대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입니다. 그 기간은 약 3,500년이고,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요셉 시대를 지나 애굽에서의 400년간 노예 시대까지 해당하므로 이 기간을 족장 시대와 노예 시대라고 할 수 있고, 다음에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로부터(선민 국가가 망하므로) 율법의 시행 대상이 없어진 바벨론 포로 시까지와 또 선지자가 없던(말라기 선지자 이후) 시대로부터 예수님 오신 때까지요, 셋째는 예수님 이후 시대입니다. 아담 이후 율법을 받기 이전 시대는 선민과 비선민의 두 부류가 있었으나 선민 계열의 인구가 국가 형태를 갖지 않고 부족 형태를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그때 그때 필요한 말씀을 개별적으로 주셨고, 또 그렇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 야곱이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행동한 사실이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율법 시대만큼 하나님의 계시가 넉넉하지 않았겠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심을 받은 것을 보면(롬 4:11) 그 신앙이 얼마나 귀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 성경을 포함하여 풍성하게 받았지만 계시가 희귀하던 때의 아브라함만큼 믿음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3. 율법을 주신 시대의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그때부터 선민 단체에게 적용 되었습니다. 출애굽 때부터는 인구의 수도 많았고, 부족 사회를 넘어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지요.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이 300년쯤 나라를 다스리다가 왕정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정 시대가 사울왕으로부터 시드기야왕까지 약 500년간 지속하다가 바벨론에게 망하므로 인하여 국가 형태가 없어졌기 때문에 지킬 대상이 없는 율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형태로서의 집행은 할 수 없게 되었더라도 경건한 믿음을 개인적으로 보존하는 성도는 그 나름대로 지키면서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신앙의 맥을 잇게 된 것입니다(사 6:11~13, 눅 1:5~7).

4.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시대에 율법 적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목적이 있는데 예수님은 문자가 아닌 실제 인격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신 만큼(요 14:9) 그 목적이 넘치도록 성취되었고(즉 율법보다 더 밝은 계시가 예수님이란 뜻),

2) 율법의 제사장이나 제사법은 메시야의 구속 사업을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 일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예표적 계시를 통하여 메시야의 구속을 믿어야 함;요 14:6) 족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구약적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복음적 신앙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또 중대한 것은 계명의 강령이 사랑인데 율법은 내용만 주셨지만 예수님은 실천을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 속에 율법이 다 포함되어 있고, 또 성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구약으로 주신 율법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뜻과 같은 말씀이고(마 11:27), 또 예수님이 하나님을 보였으며 구원 계시와 도덕 계명의 실천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권위의 변함이 없지만 예수님의 모범 속에 포함되는 말씀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말씀과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보다 더 밝은 계시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나 의식적 율법은 폐지되었고(골 2:16), 도덕적 율법은 내용만 주신 것이므로 그 권위에 있어서 실천자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64과 죄와 율법 (롬 7:1)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와 율법”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고, 율법의 시한과 성도의 성화의 종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죄에 대한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죄의 시작은 아담부터이고, 죄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며 죄의 시초 범행은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계율을 어김에서 비롯되었고, 그 죄의 결과는 형벌과 본질상 더러움으로 모든 인간에게 임했습니다. 형벌은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받습니다. 일시적으로 받는 것은 산 동안에 받는 것이고, 영구적으로 받는 것은 사후의 지옥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본질상 더러움이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심사와 욕심에 끌리는 마음이 잠재하는 것인데, 그것을 부패성이라 하며 성화되지 못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롬 6:23)는 뜻은 궁극적 심판의 대상임을 뜻하고, 의(십자가)의 은총을 힘입어 죄사함 받으면 궁극적 심판에서 제외됨과 동시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전가된 원죄(부패성+조상의 죄책)와 자범죄에 얽매여 사망 아래 있는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궁극적 심판에서 제외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 항상 부패성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죄 안 짓고 성화되는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추셔야 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율법의 의미를 이해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1)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계율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다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 119:97~104). 그러나 제한된 의미로 볼 때는 모세 5경이나 십계명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마 12:5). 또 신약 시대에서 볼 때에는 구약 성경을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5:17).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을 의미상으로 설명한다면 구약 성경에 나타난 행동 지침(할 것과 말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이 이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율법 주신 목적을 아셔야 합니다.

1) 범법함을 인하여(죄를 깨닫고 경계하라) 주신 것입니다(갈 3:19). 백성들이 죄를 범하는데도 깨우치거나 처벌할 법이 없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정죄할 수 없으니까요(롬 5:13). 율법을 강조해도 죄를 다 통제하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갈 3:10~11). 그래서 어느 사람이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자가 없는 것이요,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아십니다(갈 3:11).

2) 다만 율법으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놓고(갈 3:22) 심판의 대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3) 이렇게 심판의 대상을 만드신 다음, 율법적으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신 다음에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초보 교육, 정식 교육으로 인도하는 과정)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갈 3:14).

4. 율법이 하나님의 계율이면 이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에만 익숙할 뿐, 그 계율 자체를 지킬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갈 3:10~12). 성도가 성화되려면 하나님의 계율을 따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1) 믿음에서 옵니다. “믿어 순종케 한다”(롬 1:5)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어야 실천력이 생깁니다.

2) 말씀 따라 삼가는 것입니다(시 119:9). 행실을 깨끗케 하려면 “말씀 따라 삼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성도의 의지의 노력입니다.

3)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갈 5:16~18).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말씀 따라 살 때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에 의하여, 깨달음과 감동을 받고 용기 있게 시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5. 율법의 역사가 어느 시점까지 유효한가? 할 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갈 3:19) 또 사람이 산 동안만 유효한 것입니다.롬 7:1).

1)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요, 주인이시기 때문에(마 5:17, 22:36~40, 요 19:30) 주님이 오시고 주님의 말씀만 들으면 율법이 그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음성으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17:5) 따라서 신약 시대의 표준은 율법이 아닌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2) “사람이 살 동안만 유효하다”는 뜻은 율법은 죄와 상관하는 것인데, 사람이 죽으면 범죄와 상관이 없게 되니까, 자연적으로 율법은 부패성의 잔재를 가진 산 사람과만 상관이 있고, 죽은 사람은 부패성이 다 성화되기 때문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부패성을 제거하고 거룩하여질 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다가(딤전 4:5) 죽음과 함께 성화가 끝난다는 증명을 할 때, 롬 7:1 말씀이 그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곧 죽음이 성화의 종점이란 뜻입니다(롬 6:6, 골 2:11).

 

제65과 십일조와 헌금 지식 (말 3:8~12, 막 12:41~44)목록으로


많은 목사님들이 말 3:8~12에 근거한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막 12:41~44의 말씀은 헌금을 받으시는 예수님이 “과부의 적은 헌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비중 상으로 큰 것을 바쳤다”고 칭찬하시므로 헌금이 많고 적음을 비중으로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신약시대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교훈입니다.

1. 헌금의 종류에 대하여 구약시대에는 십일조와 헌물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각종 헌금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드리게 하여(신 14:22) 성전제도 운영에 사용하였고, 예물은 제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 제도가 율법으로 주어졌고, 그 십일조 헌금이 성전봉사를 일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생활비로 쓰게 하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전제도는 없어졌고 예수님은 십일조(마 23:23), 헌금(눅 21:1), 예물(마 5:23)이란 용어를 쓰셨으며, 사도시대에는 연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고전 16:1, 고후 8:2). 예수님이 사용하신 용어로 십일조나 예물은 구약적인 것을 인용하신 것이고, 헌금은 “도라”로써 선물을 뜻합니다. 예물도 역시 “도라”로써 감사 선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사용한 용어는 연보(로게디아)로써 거출한 돈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도를 상대로 연보 즉 구제금을 거출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시대 때에 십일조를 강조하여 돈을 거출한 사례가 없는 것입니다.

2. 이상의 내용들을 근거로 하여 신약시대의 교회가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옳은가? 할 때에, 율법에 근거하여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고, “교회 운영비를 위하여 봉사금을 내되 소득의 십일조 정도를 헌납하게 한다는 것”을 옳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주의적 헌금체제를 그대로 본 따는 것은 율법주의 신앙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부당한 짐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구약시대의 의식적 율법(제사제도, 절기, 십일조 규례)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 하셨고(마 11:13), 또 갈 3:19에서도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주신 것인데…약속하신 자손(곧 그리스도)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하시므로 그 율법의 효력이 정지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약의 제사적 의미와 헌신과 사랑에 대하여 율법을 초월하는 모범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십일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의문을 푸셔야 할 것이 있으니

1)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폐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마 5:18). “율법을 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제도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란 점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한 그의 말씀도 본질적으로 없어질 수 없음을 뜻할 뿐 율법이 예수님의 모범보다 낫다는 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2) 마 23:23에서 예수님이 “이것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 하시므로 이것은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인데 그 두 가지를 다 이행하라 하시므로 십일조를 내도록 권장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의 효력을 요한까지라”고 하신 말씀과 달라진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를 내라”는 뜻은 율법의 정신으로 내라는 뜻이 아니고, “봉사의 정성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 율법주의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운영을 위한 월정 헌금으로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면 성경을 더 잘 이해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4. 롬 8:32을 보시면 “아들을 아끼지 않고…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만물)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셨고, 고후 8:5을 보시면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구제금을) 우리에게 주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율법을 초월하여 헌신과 헌금을 할 수 있도록 근거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와 만물을 인간들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자신을 주셨으며, 또 모범적 성도는 먼저 자신(십일조 헌금보다 더 중한 것)을 주께 드리고, 또 연보(구제금)도 하였으니, 이것이 신약시대의 헌금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이상 생명을 드려도 제한할 필요가 없으며, 십일조는 봉사의 최소액에 불과한 것입니다.

5. 신약시대의 헌금의 용도는 교역자 생활비(고전 9:9), 예배당 구입 및 관리비, 선교비, 구제비 등입니다. 이것은 믿음 육성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용건들인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교회적 사명에 응하도록 성실히 헌금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듯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말 3:10~12, 고후 8:6). 헌금은 믿음과 봉사적 사명과 능력에 따라 자발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므로 지나친 강요가 있어서는 안 되며, 뜻만 보임이 좋고(고후 8:10), 주님의 재물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명분 있게 사용되도록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66과 안식일과 주일 (사 58:13~1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안식일과 주일”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안식일과 주일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주일을 존중히 여기고 거룩하게 지켜서 복을 받으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안식일과 주일을 이해하심에 대하여 많은 성도들이 안식일의 개념과 안식일이 폐지된 사실과 주일을 지키는 이유를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혹 아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꿰어놓은 구슬처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 6일 후에 안식하시는 뜻과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시는 뜻으로 주셨습니다(창 2:3). 그리고 출애굽 때에 계명으로 주실 때에도(출 20:8~11) “그날에 종들까지 안식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고 복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안식일로 안식의 의미를 나타내신 것은 영원한 천국 안식의 모형으로 천국을 계시하신 것이고(히 4:9; 우리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있다. 그곳은 쉬는 곳이고 평안한 곳이라 하심, 마 11:28, 계 7:15~17),

② 거룩한 날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날로써 영광과 축복을 장려하는 날로 구별하신 것입니다.

③ 그래서 선민들이 안식일의 취지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안 되고 백성들도 복이 안 되기 때문에 그 계명 위반자를 죽이는 벌까지 내리시면서 시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민 15:32).

2.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신약시대부터)은 이 안식일을 안 지킵니까? 그 이유를 설명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한 것이 안식일 제도가 의식적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폐지되었느냐? 고 하시겠지요. 이 율법이 폐지된 시기는 세례 요한이 오고,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된 때부터 폐지된 것입니다. 마 11:13에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한까지란 뜻은 요한이 구약 계시의 목표인 예수님을 소개한 것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이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인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누가 편지로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그 사람이 왔으면, 그 소개한 편지는 그 사람만큼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예수님만큼 밝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많이 상고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계명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영원히 지켜야 할 신앙과 도덕적 계명이고, 또 하나는 계시의 목적으로 주신 의식적 계명입니다. 여기의 의식적 계명이란 날과 달을 지키는 절기를 포함한 모든 제사제도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계시의 목적이란 것은 안식일이 천국 계시의 목적인 것처럼 제사 의식은 십자가 희생의 중보사역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고전 13:10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따라서 제사제도는 십자가 사건으로 온전한 것이 왔고,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인데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온전해진 것입니다. 요한은 외치기를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셨고, 하늘에 올라가도 예수님이 안 계시면 천국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과 성령님과 말씀을 모시고 사는 세계가 곧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눅 17:21;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로써 계시의 목적이 성취된 것과 페지 된 시기를 말씀드렸습니다.

3. 성경에는 안식일이 폐지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호 2:11에서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렘 12:7에서 “하나님이 자기 성전과 선민 기업을 버리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하셨습니다. 이는 선민들이 안식일과 제사제도를 신앙인답지 않게 취급하므로(암 8:15, 사 1:11~17) 징벌의 의미로도 폐하시겠다 하셨고, 또 징벌이 아니라도 목적 성취에 의하여 폐하시게 된 것입니다. 히 7:18에서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셨다” 하셨고(히 8:7, 13), 골 2:16에서는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 하셨으니,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을 때 의문자들의 말들이 있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4. 주일은 어떤 근거로 지킵니까?

1) 구원의 주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마 28:1;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심).

2) 성령님이 주일날 강림하셨습니다(행 2:10; 오순절이 주일임).

3) 사도들이 주일날 모여 성만찬을 시행하였고(행 20:7), 또 헌금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고전 16:2).

4)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을 때 주의 날에 받았고, 그날을 “주님의 날”로 호칭을 한 것입니다(계 1:10).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기독교의 기초 사역을 이룩한 사도들이 모범을 세워 시작한 날이므로(엡 2:20) 아무런 이의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안식일만 고수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결론적으로 주의 날은 주님의 날이므로 거룩합니다. 그날에 주님이 많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성도들도 신령한 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던 것처럼 저희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되, 안식일 성수의 방법을 재연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제67과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답 (마 12:1~8)목록으로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답을 통해서 여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 하려고 합니다.

1.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6일 창조 다음날 안식하시고(창 2:3) 인간에게 안식의 필요성(천국)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안식일을 계명으로 주신 때는 언제입니까? 출애굽 때 모세를 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출 20:8~11).

3.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어떠합니까? 세속의 일을 최대한 정지하고 믿음의 일을 힘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의 시간적 일정은 어떠합니까?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입니다(레 23:32, 신 24:15).

5. 안식일은 어떤 대상들에게 주신 계명입니까? 선민들에게, 또는 선민들과 합류한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출 12:48~50).

6. 하나님이 국가적으로 선민을 다스리시다가 끝내신 때가 언제입니까?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한 때부터입니다.

7. 선민 통치가 끝났으면 구원 언약도 폐지됐을까요? 구원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므로 그대로 이행하셨습니다(사 6:13, 11:1).

8. 안식일의 시간적 규정을 세계인들이 잘 지켰을까요? 지역마다 해 뜨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9. 안식일을 범할 때(더럽혔을 때) 어떤 벌을 주셨습니까? 죽이라 하셨고, 그렇게 시행하셨습니다(출 31:11, 민 15:35).

10. 안식일 계명이 율법입니까? 율법이 아닙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갈 2:16).

11. 안식일 계명이 의식적 계명입니까? 신앙적 계명입니까?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의식적 행위에 속한 계명입니다.

12. 안식일을 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까? 호 2:11에서 안식일과 절기를, 단 12:11에서 모든 제사를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13. 왜 폐한다 하셨을까요? 불순종, 불신앙의 원인도 있지만(암 8:15, 사 1:11~17) 온전한 것으로 대치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3:10).

14. 안식일보다 더 온전한 것이 무엇일까요? 안식일의 주 예수님이고, 또 천국의 주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15. 그렇다면 안식일 제도는 언제쯤 폐지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폐지되었습니다(마 11:13).

16.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셨나요? 물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막 6:2), 이는 그날 모인 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에 속박되실 이유가 없고, 그날 모인 기회를 이용하신 것입니다.

17.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18. 안식일 제도가 주일과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까? “거룩한 날, 영광 돌리고 복 받는 날”의 의미가 같습니다.

19. 왜 휴식의 의미는 없습니까? 세속의 일을 중지해야 하지만 영광 돌리는 일로 더 피곤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0. “주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계 1:10에 근거하여 “주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날이니까 거룩한 날입니다.

21. 신약의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들의 모범과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엡 2:20).

22. 사도들이 어떻게 모범 하였습니까? 주일날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고(행 2:10), 주일날 성찬 예식을 가졌으며(행 20:7), 또 주일날 모여 예배 드리고 구제 헌금을 하고, 매주일 첫날에 모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6:2).

23. 주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마 28:1),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며(행 2:10), 또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계시를 받은 날입니다(계 1:10). 예수님이 나타나신 날도 주일입니다(눅 24:29, 마 28:9, 요 20:19).

24. 계명의 뜻과 종류를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면 다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만큼 그분들이 영감을 받아 증거한 말씀들은 다 계명입니다(살전 2:13, 엡 3:3~4). 계명에는 믿을 계명과 지킬 계명이 있으니, 믿을 계명은 깨달아 믿어야 하고, 지킬 계명은 실천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을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는 계명은 지킬 계명입니다.

25. 주일은 어떤 계명입니까? 지킬 계명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도록 지켜야 하니까요. 그리고 주일이 계명 된 것은 사도들이 명하고 본을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6:2).

26. 주일을 잘 지킴에 대한 어떤 규정이 있습니까? 신약에서는 사도들의 모범 외에는 규정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주일에 모여 예배 드리고, 성찬식을 하였으며, 구제헌금을 걷고, 사랑의 친교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건설적으로 본을 보인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본을 보인 것(예; 시장할 때 밀 이삭 비빈 것을 노동으로 규정하는 행위)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데는 세속주의적인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신령한 예배와 봉사 또는 사랑 실천에 힘쓰는 일을 크게 장려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68과 구원을 이루는 문제 (빌 2:12)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이루어 나가는 것인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구원”은 벌받고, 또 영원한 심판 받을 죄인이 심판을 면하고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여기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성취하게 됩니다. 죄를 짓고 복역 중에 있는 자가 특사로 나오면 자기 집까지 가야 하겠지요. 이때에 자기 집이 서울이라면 어디 어디를 거쳐서 가야 하는 것처럼 구원받는 데도 몇 가지 과정이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과정은 은혜로 되는 것도 있지만, 노력으로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시는 부분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노력하는 부분은 심판을 면하거나 천국 가는데 도움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상급에 도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심에 있어서 순서를 말씀드리면,

1. 우선 계획을 하시겠지요(눅 14:28, 엡 1:5). 계획은 하나님이 혼자 하십니다.

2. 구원의 대상을 선택하십니다(엡 1:4). 선택도 하나님이 혼자 하십니다.

3. 거듭나게 하십니다(요 3:3). 이것은 영적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창 2:17, 엡 2:1). 이것도 하나님이 혼자 하십니다.

4.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믿음의 주(히 12:2) 예수님께서 믿을 근거인 성경을 전도로 나타내시고 믿을 자가 마음을 열어 받게 하십니다. 믿음의 요소인 거듭남과 진리는 하나님이 주셨고, 전도와 권면은 사람이 일깨우는 것이며, 믿는 것은 그 당사자가 자기의 마음을 열어 믿는 것이니까, 마치 밥은 어머니가 주고 먹기는 자기가 먹는 것처럼 믿음에 있어서 사람의 심적 노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진리의 지식을 넓힘에 따라서 더 커지니까 역시 사람의 노력이 따르는 것입니다.

5.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것인데 여기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만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역할은 사람이 하여야 합니다. 죄를 통분히 여기는 마음에 성령님의 감화가 따릅니다. 그러나 죄를 근절하고 돌이키는 데는 상당한 결단이 있어야 하므로 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속죄입니다. 속죄는 죄를 원천적으로 용서하여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속죄를 받을 때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장차 심판은 면할지라도 현실을 살아가면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간과하시고 참으시다가 징계하시는 경우도 있고(시 32:1, 히 12:8), 회개하면 용서하여 징계를 멈추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대하 30:18~20). 이 경우에서 심판을 면하는 원천적 속죄가 있고, 또 징계를 면해주시는 용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칭의입니다. 이것은 속죄를 받은 자를 의롭다(심판 받을 죄가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인데(롬 8:33), 이 속죄와 칭의도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8. 그 다음에 양자 되는 은혜가 있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자 또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양자의 특권을 주시는 것인데(요 1:12), 이것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9. 그 다음에 성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패성(죄의 성격)을 제거하는 것인데,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 따릅니다. 열심히 회개하고, 성경대로 실천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죄 없이 사는 생활을 노력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룩해지고(요 17;17),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며(딤전 4:5), 예수님의 깨끗한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롬 8:29). 성도 중에 죄에 민감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요. 성화를 많이 이룰수록 죄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 자기를 깨끗케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벧후 3:14). 자기를 깨끗케 하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하여도 천국은 죄가 없기 때문에 더 범죄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가 성결이라”고 하셨습니다(약 3:17). 이 성화는 성도가 노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자신이 상급 받는 방법입니다.

10. 마지막은 영화입니다. 이것은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입니다(주 재림 시까지 산 자는 변화됨, 마 17:2, 살전 4:17). 영화는 구원의 최종 단계로 죽은 성도의 영혼이 천국(낙원, 눅 23:43)에 가 있고, 시신이 흙에 묻혀 있다가 세상 끝날이 되어 주님이 재림하시면 무덤의 시신들이 다 부활체로 변하여(천국에 있던 영혼과 연합) 공중에서 만난 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먼저 부활이 있고, 다음에 산 자의 변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영도 이와 비슷한 절차로 이루어지되, 먼저 지옥에서 머물다가 맨 마지막에 부활하여 심판을 거친 후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갈 것입니다(계 20:14). 시체의 잔해가 보존되지 않았다 하여 부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구원의 절차가 있고, 신앙, 회개, 성화를 이룸에 노력이 필요한즉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8. 전도, 부흥에 관련된 말씀


제69과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 10:1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호세아 선지자가 주전 750년경에 이스라엘 북왕국 백성들을 상대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종 죄악이 뿌리를 깊이 준 잡초처럼 무성한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차면 징벌할 것을 계획하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죄,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는 죄, 배은망덕하는 죄, 포악하고 패괴한 죄, 교만죄,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큰 죄 등이었습니다. 염증이 차면 터지는 것처럼 그 백성들도 선지자의 경고를 받고 바른 치료를 하지 않으면 망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징벌을 거둘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성도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직전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로 적당한 것입니다. 매 맞기 전에 회개하면 매를 맞고 회개하는 것보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평안이 있었기 때문에(10:11) 백성들이 방심하였으나,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징계하시기 때문에, 고요하다 하여 안전한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3) “묵은 땅을 기경하라” 하셨고

4) 묵은 땅을 기경하면 마침내 하나님이 임하여 “의를 비처럼 내리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묵은 땅을 기경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죄사함(의)의 은혜를 풍족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묵은 땅을 기경함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묵은 땅은 선민의 고착화된 죄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 1:6에서는 선민의 만행 된 죄상을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 된 신체”로 비유하셨는데, 본문에서는 “묵은 땅”으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본래부터 묵은 땅이 아니고 농사 짓던 땅을 버려 두었기 때문에 묵은 땅이 된 것입니다. 옥토를 보존하려면 김매고 거름 주는 작업을 계속하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며, 패괴하고 회개하지 않으니까, 묵은 땅처럼 그 심령과 인격과 생활이 퇴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은 땅은 고질화되고 끈질기게 자리잡은 죄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을 “기경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갈아엎으라는 말씀이지요. 어느 한 부분만 손댈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그 백성들의 죄악이 얼마나 고질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1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시기입니다만 선거 당시에 “한국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선거제도의 문제, 동서갈등의 문제, 부패 문제, 정당대립 문제 등, 정치풍토에 문제가 많았지요.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신선한 풍토를 만들 때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완전한 개혁을 힘쓰므로 묵은 땅을 기경하셔야 하겠습니다.

3. 저희들의 묵은 땅 기경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1) 잘못된 마음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실족하는 마음을 자족하는 마음으로(마 11:6, 빌 4:11), 유감스러운 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고전 10:10, 살전 5:18), 포기하는 마음을 소망하는 마음으로(시 42:5, 고전 13:13),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살전 3:12, 5:14) 바꾸고, 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정신을 가지시고(살전 5:22)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목표를 확실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후 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 하신 바울 사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는 것을 마음의 변화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 옮길 때 개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효력 있게 배우고 실행하는 것이 성도의 교회의 생활입니다. 오늘날 교회생활 속에도 묵은 땅의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인간적 전통에 얽매이는 것, 의식에 얽매이는 것, 물질 운영에 얽매이는 것, 직분과 조직과 경영을 세속화시키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특정인의 명예 발판이나 특정인의 사업 무대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뒤엎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 하도록 개혁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 열심히 예배드리시고, 열심히 기도하시며, 열심히 성경 배우시고, 열심히 친교하시며, 전도 봉사를 하는 것만이 교회생활을 보람있게 하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그 당시의 선민들에게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신 교훈이라면, 오늘의 성도들에게는 잘못된 전통과 현실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 이기주의 등을 탈피하여 완전한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 나갈 것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제70과 에스라의 회개 운동 (라 10:1~1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에스라의 회개 운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회개 운동은 이 세대에 절실한 요구입니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 2세가 왕으로 있을 때, 아론의 16대 손이고 스라야의 아들인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가 있었습니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라 7:6) 하였는데, 이는 바벨론 땅에 살면서 파사 왕의 통치를 받는 시대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는 뜻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환한 때는 바벨론이 메데 파사에 망한 지 약 79년 후였습니다. 고레스왕 때에 1차로 귀환한 백성들이(에수아, 스룹바벨) 20년간 잘해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핍박자들로 인하여 정화운동을 중단한 채 59년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는데, 먼저 온 백성들이 정화운동을 중단한 후 몹시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로를 사기에 충분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파사 왕조 때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인 조상들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은 제사장이요 학사였습니다. 에스라의 회개 운동이 어떤 절차로 일어났습니까?

1. 에스라가 귀환하여 백성들의 범죄 상태를 파악하였습니다. 라 9:1~2에 보시면 그 진상 파악 내용이 나옵니다. 으뜸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이방인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가증한 일(우상숭배 등)을 그대로 행하고, 또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거룩한 자손이 섞이게 하는데, 모범이 되어야 할 방백들과 두령들이 더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죄는 우상 숭배나 이방 혼인 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대표로 많은 범죄와 부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우선 죄목과 죄성을 알아야 하고, 기가 막힐 정도로 분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3절).

2. 에스라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9:5~15까지의 말씀이 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 내용입니다. 에스라의 회개는 자기의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연대적으로 책임을 지고 드리는 회개였습니다. 민족이나 단체의 회개운동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책임을 느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 먼저 죄를 자복하였을 때 많은 백성들이 모여 동참을 하였는데 거기에는 “남녀 어린아이들까지 큰 무리가 모였다”고 하였습니다(1절). 대표자, 지도자의 회개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어려울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큰 무리가 모여 합력하면 힘이 되는 것입니다.

4. 그 때에 백성들 중에서 “스가냐”란 사람이 나와서 “백성들의 힘을 모아 회개의 역사를 이루자”고 단합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졌으나 회개하면 소망이 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사람들의 의논을 따라 이방여인 아내들과 그 소생들을 다 내보내게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고 율법을 시행하자” 하면서 에스라 제사장이 앞장서면 우리도 돕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중들의 단합 현상입니다.

5. 이 일이 있자 에스라는 “여호아난”의 집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한 후(6절) 백성들을 모아놓고 공포를 하였습니다(7절). 공포와 훈시를 받은 대상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1차 귀환한 백성들, 7절)이었고,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3일 내에 예루살렘에 오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선민의 회에서 쫓아낼 것이라”(8절)고 한 것입니다.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적 회개에 자유가 있지만 선민 체제에서는 실권자의 통치로 회개를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앞장서면 백성들은 뒤따르는 법인데, 이때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주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힘에 굴복을 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이방 여인 취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들을 끊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11~12절). 그때에 이방 여인을 취한 자들을 조사한즉 제사장 중에 다섯 사람, 레위 사람 중에 여섯 사람, 찬양하는 사람 중에도 한 사람, 문지기 하는 사람 중에 세 사람, 일반 백성 중에 100명을 헤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6. 이 일이 있을 무렵에 하나님이 큰 비를 내리셔서 온 백성들로 떨게 하였으니, 그때 그 백성들은 그날이 9월 22일인 것을 잊지 않았고(9절), 또 백성들은 큰 비를 만나면서 “우리가 이렇게 회개하오니 이일로 인하여 진노를 떠나게 하소서”(14절) 하므로, 그때의 큰 비를 “하나님의 진노와 회개의 채찍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과 혼인을 한다고 하여 꼭 믿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도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자기의 거룩을 지킬 사명이 있고, 단체적 회개 운동은 지도층에서 솔선한 후 백성들의 호응을 받아야 하며, 또 자연적 재난을 하나님의 진노로 믿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할 것을 아울러 교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71과 교회의 터 (고전 3:10~11)목록으로


제가 새교회란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터󰡓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1. 터에 대한 말씀을 살피면

1) 우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의 신앙고백을 상기시키시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신다” 하신 말씀이 있고(마 17:18),

2) 엡 2:20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하시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생활과 교훈에 기초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3) 같은 뜻으로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터를 닦았는데 다른 이가 집은 세우나 능히 다른 터를 닦을 자는 없다” 하시므로 교회의 터는 오직 사도들과 성경에만 기초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터는 예수님 중심, 사도 선지자 중심, 그리고 성경 중심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현실 교회는 교회라는 신령한 믿음의 터보다 예배당 건물 터를, 또는 예배당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성경을 보고 따라오지 않고 예배당의 위치나 시설과 제도를 보고 따라오는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신앙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느 장소에서 드려도 상관없습니다(요 4:21). 예수님은 자기의 성전 마당에서 가르치신 일이 있었지만, 그 성전이 제사 용도로 목적을 다하자 교권주의자들에게 내어주고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이나, 바다나, 선상 위에서 교훈하셨고 마지막에는 어떤 성도의 다락방에서 성만찬을 베푸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예배당을 교회의 대명사처럼 여기면서 건물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3. 기독교의 터를 닦은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사도들도 장소를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어떤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고(행 1:13, 2:2),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의 집에서(눅 22:12, 행 12:12),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행 16:15),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롬 16:5, 고전 16:19), 골로새 교회가 빌레몬의 집에서(몬 2), 라오디게아 교회가 눔바의 집에서(골 4:15) 시작된 것과 죽은 다비다와 죽은 유두고가 살아난 이적도 역시 다락방에서 나타난 것입니다(행 9:39, 20:8). 그 후에 사도들이 어떤 장소를 성역화 한 사실은 일체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집을 팔아 구제한 사실은 있어도(행 4:36) 누가 어떤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였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큰 집회 장소나 건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신앙의 터로 여기거나, 교회의 대명사(간판)처럼 믿거나, 믿음과 사랑의 증표로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문에서 예배당을 짓고 교회(단체)를 지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외국에서는 큰 건물이 쓸쓸해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4. 제가 새교회를 시작하면서 주택에서 몇 주간 예배드린 일이 있었는데 20명까지는 예배드리기에는 참으로 편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소, 사찰, 관리, 식당, 난방 등이 아무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성도가 자기의 점심 식사만 지참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장소가 큰 예배당이 아니면 안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교회의 터󰡓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적이라는 데 관심이 없고, 사람의 이목에 관심을 두며, 인간 단체와 조직을 좋아하고, 또 인간 단체를 의존하기도 합니다. 혼․상례 등 대사를 치러야 할 사람들은 더더욱 큰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직분의 명예에 비중을 두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전통적 기독교 문화를 교리처럼 알고 선호합니다. 그렇다면 소홀히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앙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또 기독교적 생활은 “자기와 이웃간의 사랑의 결속”이라는 점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나 선지자들은 진리와 사랑 이외에 다른 터를 닦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본”을 터로 닦으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교회의 터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터”는 기초요 표준이란 뜻입니다. 교회의 터는,

1)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표준하여야 합니다.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말이나 전통을 따르려 하시지 말고 오직 성경 말씀만 표준 삼아야 할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인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만드시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롬 8:29). 따라서 저희들은 항상 예수님의 인격을 흠모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사도들의 모범입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과 선교하는 것이 사도들의 모범에 속하고, 또 예배 순서를 찬송, 기도, 말씀, 헌금, 권징, 축도 등으로 시행하는 것도 역시 사도들의 모범에 의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물질로 구제하였지만, 그것으로 전도의 수단을 삼은 일이 없고, 성경에 “교회가 가난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4) 사랑이 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으뜸이고, 믿음의 증표이며, 영광과 상급의 방편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사랑 실천의 분량에 따라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터 네 가지를 꼭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제72과 작은 일의 날 (슥 4:10)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뇨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큰 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습니다. 다 주님의 일이고 소중한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일을 맡겼다 하여 그가 큰 사람이 되고, 작은 일을 맡았다 하여 작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주님의 백성이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혹이라도 어떤 성도가 작은 일을 작게 보거나 희망이 적은 일로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 탄생한 어린아이라 하여 그 일을 작게 여긴다면 큰 실수인 것처럼 우리 주위에도 자기의 일이나 남의 일에 있어서 작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있겠지만 그것을 결코 작게 여기지 마시고 큰 것의 동기, 또는 큰 일의 시작으로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성경에는 “작은 일을 크게 여기라”고 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본문의 “작은 일의 날”이란 뜻은 바벨론의 침략 때 파괴된 성전을 약 150년 후에 재건함에 있어서 그 재건하는 성전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작다 하여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자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당시에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일곱 등불과 두 감람나무의 계시를 주셨는데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이고,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두 사역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성전 재건하는 일을 하나님이 일곱 눈으로 감찰하시고, 두 사역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성전이나 두 사역자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겨자씨 비유”도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작지만 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된다는 뜻이지요(마 13:31).

2. 여러분 혹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별 것 아닌 존재인데”, “저 사람 별 것 아닌 일을 하고 있어” 하고 무시한다면 그 무시당할 대상은 세상에 있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마 16:26) 하셨고,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마 12:19~20) 등 소자에 대한 배려가 크셨던 것입니다(마 25:40). 또 사건을 보실 때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다”(눅 16:10)고 하셨습니다. 혹 성도들이 큰 것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작게 느낀다면 꼭 깨달으셔야 합니다. 인류가 한 조상에서 번성하였고, 노아 때에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번성하였으며 선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한 사람으로 계승되다가 야곱의 아들 시대에 와서 12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열 한 째 아들 요셉을 그 형들이 멸시하였지만 그가 자기의 종족을 먹여 살리는 큰 인물이 되었고, 강물에 떠내려가던 어린 아이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애굽에서 나온 장정 603,550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 40년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니 그 두 사람이란 숫자도 결코 작게 볼일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하나님이 의인 열 사람을 찾으셨고(창 18:32), 예레미야 선지자 때는 예루살렘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으셨으나 없었으며(렘 5:1),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국방 역할을 하였고(왕하 2:12), 사도행전에서는 바울 사도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을 함께 살리신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행 27:37). 사울은 자신이 “벤야민 지파 중 극히 작은 자라”(삼상 9:21) 하였을 때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고, 다윗도 이새의 여덟 째 아들로 소외당한 인물이었지만(삼상 16:10)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군 되게 하셨으며 또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작은 자처럼 살았지만 “가장 큰 자라” 하셨고, 바울도 그 이름의 뜻이 “작은 자”이지만 아주 큰 일을 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눈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천국에서 큰 자라”(마 18:1~4) 하셨으니까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두 세 사람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고(마 18:19), 가룟 유다를 포함한 열 두 제자로 복음 사역을 이루셨으며 어느 나라에나 복음이 처음 들어갔을 때는 다 작은 규모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1985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셀라 의사가 들어와서 개신교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3. 결론적으로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1) 여러분 모두가 자기의 인생과 하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신다면 꼭 그런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키우시고 공주의 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물며 성도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광야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모이는 새 교회의 모임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이 12명뿐이지만 다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처럼 못 되라는 법이 없습니다. 다 중직자요,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 교회의 하는 일들을 작은 일로 여기시지 말자는 것입니다. 표준 교회 만드는 일, 세계적으로 메시지 전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입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놀라운 효과와 놀라운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믿으시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마시고, 오히려 큰 소망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73과 전도 원리 (요 1:33~37, 4:25~29) 목록으로


“전도 원리”란 제목으로 전도에 대한 확실한 지식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전도”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몰랐다가 대화 중에 자기 앞에 서신 분이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알고 동리에 들어가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한즉 그들이 예수님께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2. 전도하셔야 할 이유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두 곳만 소개하면, 막 16:15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셨고, 행 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하셨고, 그 뜻에 따라 “전도자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롬 10:14~15). 예수님이 인간의 전도를 방법의 하나로 쓰시는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가 전도 사역을 잘하면, 그것이 자신의 신앙 연단에도 도움이 되고, 상급을 에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단 12:3).

3. 전도자가 되려면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 할 때에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자격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사도들의 전도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가 전도하거나(행 1:8, 2:14~42), 지식이 있고 생활의 덕을 세우는 자가 전도하면 전파의 방법이 더 윤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열매는 자격 있는 전도자의 역할에 의하여서만 맺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복음을 씨앗으로 비유하였을 때, 그 씨앗이 뿌리는 자의 자격에 의하여 싹 나는 것이 아니고 토양과 물과 햇빛과 공기 등의 여건으로 싹을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전 1:21에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말씀을 하셨고, 또 27절에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셨으며, 2:1에서는 전도를 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역시 큰 자격을 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안드레나 빌립(요 1:40~45),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무슨 자격을 거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고(눅 19:40), 심지어 구약시대에는 나귀의 입을 여사 발람을 책망하신 일도 있었습니다(민 22:28). 전도의 내용을 문서로 전달한다고 할 때, 그 문서 전달자에게 무슨 자격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안 믿는 사람도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단 2:46~47, 마 27:54).

4. 전도의 대상은 모든 시대의 모든 자입니다. 막 16:15과 행 1:8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끝의 모든 자에게 전도할 사명을 주셨은즉, 어느 시대, 어느 인종, 또는 완고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를 막론하여 전파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땅속에 매장된 보화를 캐내기 위하여 그 주위의 모든 땅을 다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자가 비택자이기 때문에 믿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복음을 듣고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정죄한다”고 하셨습니다(롬 10:18, 막 16:16).

5. 전도의 방법은 오직 복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가 되신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한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마 16:16). 많은 교회들이 사람을 이끌기 위하여 사랑과 구제 등의 방법을 쓰지만, 그것은 자선일 뿐 전도가 아니며, 전도가 아닌 것에는 믿음의 불이 붙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복음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리 전달로 족한 것입니다.

6. 전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택자에게 열매를 기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라도 믿음의 때가 있을 것인즉(전 3:1), 하나님의 섭리적 시기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 2:5)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습니다.

7. 마지막으로 복음은 상품이 아니므로 물건 파는 사람처럼 인위적 수단을 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일반기업체처럼 운영하는 사람들은 우선 사람을 모으고, 헌금을 받아내며, 그것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하여 온갖 상술적 방법 같은 것을 다 쓰겠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속들이 모인 단체인 만큼 역시 거룩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의미를 정중하게 설명하고, 믿고 안 믿는 여부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리 12:2, 고전 12:3).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하나님에게 취약성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요 주권자이십니다.

 

제74과 전도의 방편 (살전 1: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의 방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교회마다 전도의 필요를 절감하고 전도인 양성과 전도운동을 펼치는 것을 봅니다. 요즈음은 전도열이 많이 식은 것 같고, 또 열매가 적다고 합니다. 원인을 알아보셔야 하겠지요. 전도의 방법은 먼 데 있지 않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많이 나타나 있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셨으니까(1:3) 속히 크게 부흥되었을 것이고, 또 다른 지역까지 전도의 사명을 이행하였습니다(7절).

1. 우선 전도의 방편을 확보하려면 “믿음 있는 성도” 즉 전도 인력이 있어야 합니다. 씨가 있어도 뿌리는 자가 없으면 생산할 수 없는 것처럼 전도 인력이 필요한데, 하나님은 확신 갖고 자신감 있게 전도하는 자를 쓰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20) 하면서, 핍박과 위협을 무릅쓰고 증언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 있는 전도 인력이 무엇입니까?

1) 복음을 말로만 받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받은 자들입니다(5절). 복음을 받을 때 자기의 생각으로 불확실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큰 감화와 능력으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는 믿음생활이나 전도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물론 의욕을 갖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2) 말씀의 맛을 아는 성도들입니다. 교회마다 말씀의 맛을 아는 성도가 극히 적은 줄 압니다. 6절에 보시면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맛을 알면, 담배 피우고 싶고, 고기 먹고 싶은 것처럼, 말씀 살피기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설교자의 증언 내용보다 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의 맛을 모르면서 성경에 생소한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성경(전도)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자는 말씀이 불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3)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보시면 전도자 일행이 “감사와 기도를 하면서, 성도의 미덕을 쉬지 않고 기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시험을 피하는 예방이고, 마귀 쫓는 무기이며, 또 믿음 생명을 건지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전도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4) 사랑의 수고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전도는 아니지만, 그것이 전도 대상을 측근으로 오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걸인들을 모아 주일마다 1,000원씩 주면서, 예배에 참석하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구제를 힘쓰면 전도의 대상이 옵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 믿을 자는 하나님의 택한 자에 한할 것입니다(4절).

5)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6절에 보시면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우리”는 전도자 일행이요 “주”는 예수님입니다. 전도자나 성도가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주를 본받았다”는 말씀은 전도자들이나 성도들이 다 예수님을 본받는데 일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시고 악으로 선을 이기신 분입니다. 성도가 악한 세상에서 살면서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주님을 본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전도 인력 확보란 의미로 ① 큰 능력과 확신으로 믿는 자, ② 말씀의 맛을 아는 자(성경 지식의 확보를 뜻함), ③ 기도를 힘쓰는 성도, ④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성도, ⑤ 예수님을 닮은 자를 말씀드렸습니다.

2. 이분들이 어떻게 활동하여야 하는가? 할 때

1) 본이 되어야 합니다. 7절에 보시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전국에서 으뜸 되었다는 뜻입니다. 상은 1등만 제일입니다. 4등, 5등은 광고도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도가 잘 되려면 1등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연약과 부족을 보충하고 힘을 더하여 1등 자리에 나가야만 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활동 방법으로써의 두 번째는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란 말씀(3절)과 “부활하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는 말씀(10절)은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참고 잘 견딘다는 뜻입니다.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뿌리는 사명만 있다”는 생각을 갖고 꾸준히 힘쓰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2000년 된 신약성경을 보고 믿는 것처럼, 뿌려진 말씀은 썩지 않으니까 아무 때라도 효력을 드러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여 사람을 모아서 교회를 만들고, 생활비나 영광의 소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삯군이라 할 것입니다.

3)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하여야 합니다. 8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하셨으니, 좋은 소문만 나면 전도의 만점이란 뜻입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전도의 인력 양성하는 노력을 힘쓰시고, 믿음의 역사에 대한 좋은 소문만 나타낼 수 있다면 전도의 사명을 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제75과 덕을 세우기 위함 (고후 12:19~21) 목록으로


본문 19절을 보시면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 모든 것”이란 고후 12장에서 말씀한 내용들입니다. 12장에서 말씀한 내용들을 살피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① 부득불 신비한 체험을 말씀하신 것이고(1~4절), ② 바울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신 것이며(4~10절), ③ 사도의 뛰어난 점을 말씀하셨고(11~12절), ④ 고린도 교회에 물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시면서(13~14절), ⑤ 공금 취급에 철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5~18절).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을 오해하고 불신하는 자들이 바울과 대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신뢰를 회복하여 화합하므로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1. 왜 “셋째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신비한 체험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신비성 없음을 흠잡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의 음모획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준계시(성경) 아닌 신비를 말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지만, 대적자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하여 부득불 자랑한 것입니다. 신비 그 자체는 표준계시 앞에 내세울 것이 못되는 것으로 바울 사도가 개인적으로 체험을 한 것입니다.

2. 약한 것을 왜 자랑하셨을까요? 5절에 보시면 “약한 것들만 자랑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유세비오 역사에 근거하면 하나는 체구가 왜소한 것이고, 두 번째는 육체의 가시(안질 같은 것)를 보유한 것이며, 셋째는 “말이 시원치 않은 것”(고후 10:10, 11:6)이니, 이 세 가지는 교역자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그 약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육체가 왜소하고, 말이 시원치 않으며, 건강치 않으면, 교회에서 청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만큼은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복음 사역자에게 기대할 것은 신령한 은혜이고, 신령한 은혜는 육체적 약점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적 약점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육체적 약점이 자신의 신앙 인격을 키워주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인격은 육체의 가시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게 임한 것을 깨달아 감사한 것이며, 또 겸손하게 되고 “능력이 머문다”는 것은 고난 때문에 기도를 더하게 된즉, 그 기도 덕분에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의 약점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만 바울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바울의 약점을 선전하여 복음의 길을 막고, 교인들의 신임을 훼방하기 때문에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므로 오히려 유익한 것임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3. “사도 자격이 다른 이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랑하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나는 자격이 넘치는 목사입니다”라고 하였다면 어리석은 자랑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라” 하시므로 타의에 의하여, 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억지로 시켰다”(11절)는 뜻은, 그들 중에 바울 사도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로 바른 판단을 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의 자격이 충분함을 비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 자격에 있어서 약점으로 찍힌 것은 “예수님이 직접 세운 사도가 아니고 스스로 자칭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웠지만 역사적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된 증거가 바로 “성도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고후 3:1~3). 본문 12절에서는 사도의 자격을 “인내성과 이적성과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4. 교회에 물질적 부담을 주시지 않은 점인데, 교회 초창기이므로 재정상의 부족도 있었겠지요. 또 바울은 단신 사역을 하셨고 직업성도 있었기(행 18:3, 20:34) 때문에 교회로부터 사례비 등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공평치 않다”(13절)는 이유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교회에서는 받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안 받는 것은 “무슨 궤계가 있다”는 것입니다(16절). 바울이 많은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데, 고린도 교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보수를 사양한 후, 공금을 받아 도망칠 것처럼 헐뜯는 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재물을 모은다”는 말씀과 공금 취급자는 “디도”인데, 그도 성령으로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신임성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18절).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반대자들을 설득시켜서 그들이 바울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거둔다면, 바울이 다음에 가서(세 번째 14절) 그들을 만날 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과 수근수근 함과 거만과 어지러운 일들이 없이 서로 덕을 세우고 화합하는 상태로 만나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교인들 일부 사이에 오해와 불신의 골을 메꾸시기 위하여(즉 덕을 세우기 위하여) 본의 아닌 자랑과 변명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제76과 연보 모금 정책 (고후 9:1~5)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흉년 만난 유다 지역의 성도들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헬라 지역 특히 고린도 교회를 상대로 구제 연보를 많이 거두시기 위하여 노력한 사실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연보 모금 정책”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구제 헌금을 거둘 대 억지로 하거나 부담스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소극적으로 시행하고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본문 말씀을 보시면 바울 사도가 크게 적극성을 띤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구제와 선한 일을 힘써 행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먼저 구제 그 자체는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것은 은사요(엡 4:12), 집사의 주된 사명입니다(행 6:1~3). 예수님도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실 때 “섬기러 오셨다”(막 10:45) 하셨으니, 이 섬김의 사명이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섬김 그 자체는 사랑의 실천이고, 사랑의 실천만 상급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마 25:31~46). 사람이 천사의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처럼, 누가 설교를 잘하여도 사랑 실천이 미흡하면 큰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고전 13:13). 바울 사도는 “모든 이를 섬기되 믿음의 가정에 더욱 힘쓰라”고 하셨습니다(갈 6:10).

2. 성도를 섬기는 일은 "그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2절과 3절에 “너희를 위하여”란 말씀이 있습니다. 남을 돕거나 구제하는 일이 “그 자신을 위함”이 되는 이유는 남을 돕는 것이 곧 자기가 복 받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얼마큼 복을 받는 것인가 하면 “씨를 심어 열매를 거두는 것 같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9:6). 눅 6:38에서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을 섬기면 땅이 소출을 내고, 짐승을 섬기면 짐승이 덕을 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섬기면 예수님이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남을 돕는 사람이 크게 유명해지고 발전하는 것을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3.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유다의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헬라인들의 도움을 요구하신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할 때 기회를 선용하신 줄 압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적극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1년 전부터 준비케 하였다”는 말씀을 자랑삼아 하셨습니다. 그 후에 소식을 들으니까 성도들의 구제 열심이 대단하여 격동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은 부추길 필요가 없겠지만 좋은 일은 자랑하고 격동을 받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2절). 좋은 모범을 많이 선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4. 구제 정성이 부족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4절). 의무 감당이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에 속합니다. 성도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구제를 하지 않으면 사랑의 진실함(고후 8:8)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되어 믿음 자체에도 문제가 있은즉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약 2:17), 또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헌금 의도가 강한 것을 자랑하셨는데, 그 자랑만큼 결과가 없다면 역시 말과 실제가 맞지 않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교인들과 자랑한 지도자가 다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천이 부족한 부끄러움, 사랑에 못 미치는 부끄러움, 헛된 자랑이나 말과 실제가 맞지 않는 부끄러움을 두려워 할 때, 자신의 책임에 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5절에 보시면 구제 연보와 관련된 말씀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1)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하셨고, 3절에 보시면 “이 형제들로 보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헌금 취급하는 종들을 “성실한 사람들로 보냈다”는 뜻입니다. 8:18에서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 하셨으니, 이것은 공금을 엄격하게 취급하는 정직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이기주의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2) “전에 약속한 연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과 생활 형편에 따라서 계획하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받을 때 계획적인 구제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미리 준비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중에 "준비"란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예배나 헌금도 준비하고 구제비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닌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준비는 없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을 경영상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대로 할 것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고후 8:11~12). 하나님은 없어서 못 내는 것을 결코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 준비하면 됩니다.

4)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면은 강요나 충동이 아닙니다. 잘 깨닫고 자원함과 정성으로 하게 하기 위하여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살필 때, 바울 사도께서는 구제 사역과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하여 크게 힘쓰신 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저희들도 성도 섬기는 일을 성심껏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제77과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엡 5:10)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시험한다”는 원문은 “도키마조”(δοκίμάξω)로써 “시험한다, 조사한다, 검사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연구를 요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함”은 영광 돌리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성도의 최고의 사명이요 필수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목적으로 사십니까?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으로 사셔야 하겠지요.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연구해 보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교역자 친목 행사하는 날 마음속에 구상하였다가 집에 와서 기록을 하였습니다.)

1. 믿음이 있어야 하지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히 11:6). 그런데 믿음의 분량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믿음, 큰 믿음, 거룩한 믿음, 보배로운 믿음,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구원 얻을만한 믿음 등, 믿음의 성분이 많지요(히 10:22, 마 15:28, 유 3, 벧후 1:1, 갈 5:6, 행 14:9). 이런 것들 중에서 칭찬 받을 좋은 믿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큰 확신을 갖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능력과 성령으로 큰 확신을 갖는 믿음은(살전 1:5) 깊은 신앙으로, 깊은 샘, 뿌리 깊은 나무처럼, 환난, 태풍이 와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지식 있는 믿음입니다(딤후 3;14). 이것은 신앙의 폭을 말합니다. 깊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도 넓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분량은 또 실천에 있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니까 실천이 믿음 분량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 넓은 지식, 실천하는 믿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기뻐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르지 않습니까?(마 8:10) 값비싼 믿음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깨끗한 신분을 보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국무총리를 맡기려 하니까 깨끗한 신분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깨끗하신 분입니다. 그 깨끗한 것을 성결, 또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더러운 옷으로 비유하였을 때, 깨끗이 빨아 입고 더럽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인물에 속합니다. 세례 요한은 성결 면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 가는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신 줄 압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거룩, 성결, 깨끗한 세마포, 신부 단장, 또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라”는 등의 말씀으로, 성도가 순결하여야 할 것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비유하였을 때 신부가 씻지도 않고, 더러운 옷을 입은 상태에서 악취를 풍긴다면 어느 신랑이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신부가 깨끗하게 단장하였을 때는 기뻐할 것입니다. 회개는 때를 씻는 것과 같은 것인데, 예수님이 회개하는 자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겠다” 하신 것은 그만큼 순결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목적 다음에는 반드시 순결 목적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나 자신의 순결 목적이 귀하다”는 확신을 가지시고 자기를 깨끗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먼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성찬을 받으라”(고전 11:28) 하셨으니, 이는 성결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3. 성도들의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시는 분입니다. 달란트를 맡기셨고, 품꾼을 들어 쓰셨습니다. 달란트로 장사 잘한 사람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상급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만족해하시는 표정을 마음속에 상상해 보십시오. 포도원에 일군을 들여보내실 때, 새벽에, 아침에, 정오에, 해질 무렵에 각각 일을 시키셨는데 해질 때 온 사람에게 하루종일 일한 값을 다 주셨습니다(마 20:1~16). 왜 그랬을까요? 충성의 성질이 만족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여인이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라” 하셨고(마 26:12), 또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한다”(마 19:29) 하셨으니, 이 말씀도 충성자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마땅히 충성으로 기쁨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기쁨, 영광을 돌리려면, 이론과 증거의 여지없이 자신이 받을 영광을 최대한 포기하고 주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영광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기뻐한 사람입니다(요 3:29). 만일 우리가 예수 믿는 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다면 크게 부끄러워하고 또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계 3:10~11). 천국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은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에 던짐으로 영광을 반환하였고, 세례 요한은 스스로 쇠하는 길을 택함으로 영광을 반환하였습니다(요 3:20).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믿음, 순결, 충성, 영광 반환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78과 큰 양보 두 가지 (행 20:33~35)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께서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 하셨으니 성도는 물욕에서 떠나야 함이 옳고, 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공급하였다” 하셨으니, 이는 선교 지원금이 없을 때 선교자금과 생활비를 자급자족하신 일이며, 또 범사에 모범을 보이시고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셨을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눅 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고 양보하는 복”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봉사생활이 미흡하고, 또 큰 것을 양보하지 못하는 욕심이 있어서 어떻게 하든지 이런 문제를 조금씩 만회하고 시정해 보려는 뜻에서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큰 양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삶의 터전을 양보한 사실입니다(창 13:8~9).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키운 사람입니다. 기본 재산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지만, 그를 분가시킬 때 “네가 먼저 좋은 지역을 선택하라” 하였으니, 이런 양보가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요즈음 생존경쟁이 퍽 심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자기의 삶의 터전을 타인에게 양보하는 것은 마치 직장을 내주는 것과 같겠지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시행하였습니다. 어떤 믿음으로 그런 양보를 하였을까요?

1)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얼마든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안과 대책이 없으면 포기하기 어렵지만 얼마든지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떠났지만 하나님이 가나안 땅 주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히 11:8).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체험한 것입니다(히 4:16). 이런 체험은 성도들도 꼭 하셔야 합니다.

3) 조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재산을 아낌없이 물려주는 것처럼 조카도 사랑하는 대상이니 만큼 자기보다 더 발전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기 때문에 큰 것을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양보하고도 부족함 없이 잘 살았으니, 이는 “주는 자에게 더 후히 주시고”(눅 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면(양보)한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의 이기주의와 성직자들의 지나친 교인 욕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자기 교회의 부흥만을 원하여 가까운 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교회를 생활대책의 사업처, 또는 명예를 나타내는 기관처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역자는 교인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경우가 있고, 또 큰 배척을 받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으며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자기의 명예를 나타내려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다 교회단체를 육체의 기회로 이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갈 5:13). 교역자는 교회의 유익과 성도의 심령 또는 믿음 유익을 위하는 일이라면 교인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권하였습니다(마 3:11, 요 1:29).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능력 있는 사역자이기 때문이었고, ② 또 제자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③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예수님을 나타내는데 있었고, 그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많이 데리고 다님으로써 인기를 도모하려고 하였다면 한 사람의 제자도 예수님께 양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복음사역의 일을 인기나 이기주의 목적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하면서(요 3:30), 모든 영광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았지요(마 11:11).

아브라함은 기업의 터전을 양보하였고, 세례 요한은 제자(교인)들을 양보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물질과 명예를 포기하였지만 오히려 물질과 명예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형제가 한 교단에서 총 회장에 출마하여 경쟁한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형제가 한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불쾌감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믿을 때에는 상당한 것들을 양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양보하고, 명예를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믿음의 큰 발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마 6:24), 하나님보다 물질과 자신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고(욥 22:24), 또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9과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4:12~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극찬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상고하겠습니다. 마 11:11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칭찬하실 때 “여인이 낳은 자 중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하시므로 절대적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위대함에 대한 내용을 여러 가지로 살핀 결과 “그의 겸손, 그의 정의로움, 메시야를 직접 소개한 선지자의 역할, 더 나가서는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생활한 점 등”, 위대한 면모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기독교신앙백과 275, 276). 그런데 한 가지 더 상고할 것이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데, 그것이 곧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1. 세례 요한은 30세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먼저 출생하였습니다(눅 1:24~44). 그리고 세상을 떠난 것은 30세쯤 되신(눅 3:23) 예수님의 사역 초기, 즉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명을 끝내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30세쯤에 인생을 마친 것입니다. 30세에 세상을 떠난 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행한 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주님이 칭찬하신 것을 근거한다면 인생이 장수해야만 행복하고 칭찬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란 점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고, 예수님도 때가 되어 33세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볼 때, 인생이 태어난 목적을 다함에 있어서 그 수명의 길고 짧음이 문제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세례 요한이 죽은 이유는 병들거나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순교하신 것입니다. 정의의 종류를 따진다면 진리와 신앙에 관한 정의가 있고(불신앙 책망이나 이단 비판 같은 것), 또 한 가지는 도덕 윤리에 대한 정의가 있다 할 것입니다. 도덕 윤리에 대한 정의라면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세례 요한이 죽게된 정의의 외침은 윤리적 문제, 이웃 사랑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일치하여야 하므로 두 가지 정의가 다 중요하겠지만 믿음을 외면하는 세계에서는 음행이나 취첩을 큰 죄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왕의 신분으로 볼 때는 “동생의 아내를 뺏어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하여도 큰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국의 왕이 백성들 앞에 덕되지 않는 불륜을 범하였으니까 누구라도 그것을 지적하고 올바른 지도를 하여야 하는데, 그 사회에서 그것을 말할 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의에 담대한 요한이 말하고 책망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기 때문에 요한은 그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헤롯”이란 인물은 예수님 탄생 당시에 있었던 대 헤롯의 넷째 부인 “말다스”의 소생인데 예수님의 전도 초기에 갈릴리, 뵈뢰아 지역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그의 본처는 아라비아 왕 아레다의 딸이었는데, 로마에 갔다가 자기의 계수인 헤로디아와 간통을 하고, 그를 아내로 취한 것인데, 누구도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요한이 사명을 느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3. 요한이 왕의 잘못을 책망한 일에 대하여 몇 가지 주저할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1) 왕의 잘못을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이나 큰 보복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2) 왕이 저지르는 일을 백성된 입장에서 어떻게 지적을 하겠느냐? 할 수 있고,

3) 왕이 자기의 아내를 갈아치운 일이 무슨 큰 죄가 되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여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요,

4) 복음의 메시지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작은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5) 나 아니라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구태여 내가 나서서 그 말을 하고 죽는다면 차라리 침묵하고 살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외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교회나 노회의 부조리 등으로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해관계로 따진다면 간섭이나 자문을 하지 않아야 평온하고 피해가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아무런 이해 관계나 후환을 고려함이 없이 주저하지 않고 할 말을 한 것입니다. 타산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지혜 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믿음을 핍박하여 죽이려는 자 앞에서 잠깐 안 믿는 척 하고 산 다음에 큰 전도자가 된다면 더 영광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도가 더 중요하니까 거짓으로 죽음을 면해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4. 결론적으로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시행할 때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 중심의 이해관계로 선택하여 시행하지 않고 ① 하나님이 주신 사명(복음과 정의)을 행하되, ②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에 따라, ③ 또 하나님이 주신 역사적 환경에 따라 순리대로 자기의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사역자로 일을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꼭 그런 자세로 일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명에는 큰 일, 적은 일의 타산이 없어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5. 마 14:12~13에 보시면 세례 요한의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예수님이 보고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그 보고를 받으시고도 아무런 평가를 하시지 않고 그대로 전도에 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하여 한 일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이미 각오하고 시행한 일임을 예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요 3:30).

 

9. 성경의 부분 강론


제80과 에스라서 (라 1:1~4, 7:6~10)목록으로


필자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에 에스라서의 개론이 간략하게 기록되었습니다만, 초신자가 또 한 번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몇 말씀 더 보충합니다. 에스라서를 공부하실 때는 우선 연대와 시대를 아시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에스라의 신앙과 사역”에 대하여 교훈을 받으셔야 합니다.

1. 에스라서의 연대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라 1:1, 주전 537년)부터 아닥사스다왕 20년(주전 445년, 느 1:1) 사이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간은 92년쯤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고 70년 후에 파사국이 바벨론을 정복하자 파사국의 처음 왕인 “고레스”가 유대인에게 해방령을 내렸는데, 그 때가 주전 537년입니다(연대 계산은 연구 재료에 따라 차이가 있음). 그리고 파사 왕조의 역사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① 고레스(538~530), ② 아하수에로(530~522), ③ 스멀디스(522~521, 4:7, 8, 23의 '아닥사스다'는 스멀디스와 동일인임), ④ 다리오(521~486), ⑤ 아하수에로(크셀쿠스, 486~465), ⑥ 아닥사스다(465~423), ⑦ 아하수에로 2세(423), ⑧ 세킨디아노스(423), ⑨ 다리오 2세(423~404), ⑩ 아닥사스다 2세(404~358), ⑪ 아닥사스다 3세(358~338)에서 헬라의 알렉산더에게 망하였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파사국의 왕조 연대를 아셔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2. 1차, 2차, 3차에 걸쳐서 귀환 역사가 있었는데, 1차는 고레스 원년(주전 537년)이었고, 스룹바벨(총독)과 예수아(제사장)와 느헤미야, 스라야, 모르드개 등을 포함하여 42,360명이 나왔습니다. 그때에 700여명의 노비와 짐승들과 성전 재건에 필요한 물질들을 갖고 나와서 간단히 쌓은 제단에 제사를 드리다가 나온지 2년된 때부터 성전 재건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1차에 귀국하였지만 다시 파사로 갔다가 3차 귀환 때에 다시 와서 2차 귀환 때에 온 에스라와 합력하였습니다. 1차에 귀환한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하는데 70년 동안 족보 없이 그 지역에 흩어져 살던 무리들이 성전 재건을 같이 하자 하였을 때, 그들의 신분이 확실하지 않아서 거절하니까 그들이 대적자로 변하여 그 역사를 훼방하고 또 반역할 위험이 있다고 왕에게 진정을 올린즉 결국 다리오 1세 2년에 중단을 명하므로 17년만에 중지되었으나(라 4:23~24) 이렇게 된 것이 모략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허락을 받아 재건을 서두르니 다리오 6년에(23년 후) 필역을 하고 봉헌식을 하였습니다(6:1~15). 그 후 2차 귀환이 아닥사스다왕 7년 1월에 있었으니까(7:7~10, 8:31), 이 때는 주전 458년이고 1차 귀환 때에서 79년이 지난 때였는데, 그때에 에스라(학사 겸 제사장)가 나온 것입니다. 그들도 수가 상당하였고 처음처럼 많은 보물을 갖고 와서 성전 재건에 힘쓴 사람들과 합력을 하였습니다(라 8:1~14). 그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이란 영지 쪽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하는 데는 큰 위험이 따릅니다(직선 거리 약 2,000km). 에스라는 그 이동하는 여행에 대하여 “평탄한 길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지요. 이 기도를 드린 동기는 “왕에게 호위병을 붙여주십사” 하고 부탁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는데(8:21~23) “하나님의 손이 위에 계시므로 잘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7:9, 28). 이것은 에스라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기도의 효력을 믿고 모험 같은 일을 행한 것인데 결국 효력을 본 것입니다. 믿고 시행하면 분명한 응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수 3:15~16). 3차 귀환은 2차 귀환 13년 후인 아닥사스다 20년(445년)에 있었는데, 그 때에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에스라와 합력하여 성곽 재건과 신앙 정화에 힘을 쓰게 된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에스라의 신분과 정화 사역을 살피는 데서 그의 신앙과 사역의 모범을 배우는 것입니다.

1)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손으로 제사장입니다. 그 조상이 유다국 멸망 때 바벨론에 포로 되어 왔고, 바벨론에 포로 된 때로부터 에스라가 모국 땅에 가게 된 기간은 148년 후인즉 바벨론 시대 20년, 파사 시대 78년이 지나갔으니까 에스라는 파사국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그 조상들로부터 신앙생활을 배운 것입니다.

2) 그는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범은 성도들에게 성경에 익숙할 것을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라” 하시므로 왕의 큰 신임과 사랑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의 신용과 사랑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다”고 하였습니다.

4)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그 율례와 규례를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을 결심하므로 연구하는 일과 실천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을 힘쓴 것입니다.

5) 에스라는 정치적 개혁(부정부패 척결, 7:24~26)과 종교적인 개혁(9:1~4)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였는데(9장)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백성들의 동조를 받았고(10:1~4), 특히 높은 자들의 부정과 이방 여인을 취한 죄를 정화시키는 역사를 나타낸 것입니다(9:1~2, 10:4~5, 18~44). 참으로 에스라의 신앙과 사역은 대단한 것으로 저희들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81과 에스라의 사역 (라 7:27~28)목록으로


“에스라의 사역”이란 제목 아래 에스라 7장 이후의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에스라서를 읽어보면 역사적 사건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6장까지의 내용에서는 바벨론에서 1차 귀환한 사람들(주전 539년,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이 황폐된 성전을 어렵게 재건하여 15년(514년) 만에 마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7장~10장까지의 내용은 성전이 필역된 후 56년이 지난 후(458년)에 에스라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2차로 귀환하여 선민들의 깨끗지 못한 부분을 정화하는 사역이 기록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살피면서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주신 은혜와 에스라의 개혁운동을 교훈 받게 되는 것입니다.

1. 7장에서 에스라의 신분 설명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아론의 16대 손이니까 제사장인데 거기에 율법학사라는 직함이 있고, 그 당시의 파사 왕인 아닥사스다 2세의 총애를 받아 “무엇이든지 구하면 허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이고 율법학자이며 왕의 총애를 받으니까 유력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2차로 고국에 간 시기는 아닥사스다 7년(주전 514년)이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이후 92년 된 때이니까 그는 바벨론 시절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포로 2세)이고, 바벨론에 피난 간 부족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종교를 붙들고 나가는 환경에서 율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2. 그 때에 “에스라”는 고국에 가서 예루살렘 성도를 중심으로 신앙을 복구하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그 허락을 받기 위하여 아닥사스다왕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아닥사스다왕이 그 일에 대하여 더 열심 있는 뜻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벨론 시절에는 숨도 못 쉴 만큼 눌려 살았지만 파사 시대에 와서는 왕들이 여호와 신을 하늘의 하나님(7:12)으로 섬기면서 에스라가 청원한 것 이상으로 협조를 해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27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 하셨고, 또 28절에서는 모든 방백(대신들, 7명, 7:14) 앞에서도 은혜를 얻게 하셨으며, 또 “하나님의 손이 나의 위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힘과 수단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벌써부터 일을 되게 하셔서 왕의 마음과 방백들의 마음과 에스라 자신을 움직여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후에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파사 지역은 팔레스틴 땅에서 볼 때 동방 약 3,000km 지역입니다. 거기에서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이 있을 것을 약 2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사 41:2에 보시면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켜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겠느뇨” 하셨고, 또 사 43:5에서는 “네 자손을 동방에서 오게 할 것이라” 하셨는데, 그 예언에 근거하여 선민의 귀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왕이 에스라에게 허락한 은혜는 “귀향하고 싶은 백성들을 마음대로 데리고 가고, 왕의 내탕고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것들을 다 갖고 가고, 또 그 지역의 방백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좋은 재판관을 임명하고 율법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종교를 빛나게 하고, 협력 안 하는 사람은 처벌하라” 하였으니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종교 정화에 목적이 있는 만큼 일반 백성들보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느디님 사람(8:20, 레위인을 돕는 잡역자들) 중심으로 귀향자 단체를 모집하였습니다. 모집한 인원이 14부족, 장정만 1,724명이고, 또 레위인 봉사자인 느디님 사람이 220명 도합 1,944명이니까, 그 장정에 딸린 남녀노소를 포함하면 더 많은 수로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들의 여행의 길을 평탄하게 인도 받기 위하여 출발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기도회를 갖고, 그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께 평안한 여행을 부탁한 것인 만큼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포기하였는데 결국 “하나님의 손이 도우심으로 매복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셨다”고 하였습니다(8:31). 기도로 부탁하였으면 그만큼 믿고 맡기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8;21~23).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드릴 보물 취급을 엄격하게 잘 하여 그대로 인계하였습니다(8;24~34).

4. 그리하여 4개월만에 목적지에 잘 도착한 후(7:9) 정황을 들은즉, 하나님이 크게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도층에서부터 이방 혼인을 예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거룩을 손상하는 일로써 가나안 입국 때부터 엄히 막으신 것이었습니다(9:11, 신 7:1~4). 이때 에스라는 옷을 찢고, 수염을 뜯으며, 금식을 하고,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한즉(9장) 하나님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에스라 편에 서주었고(9:4), 어린 청소년들이 에스라를 도와서(10:1~4)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 여인들을 내보내면 소망이 있지 않겠느냐?” 하여 그대로 강하게 시행을 한 것이니 이는 청소년들이 기성 세대를 도전하여 개혁 운동에 앞장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교육의 사명자이고 정화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에스라가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제82과 성곽 준공과 성회 (느 8:1~12)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총독으로 가서 역경을 극복하고 헐어진 도성을 수리한 다음에 낙성식을 거행한 장면을 기록하신 말씀이므로 제목을 “성곽 준공과 성회”라고 정하였습니다. 느헤미야서의 대략을 말씀드리고 조상들의 성회 장면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을 깨닫고자 합니다.

1.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바벨론에서 태어난 것과 그곳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것과 그 당시 파사 왕인 아닥사스다 2세의 총애를 받은 것은 다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에스라가 제사장이고 율법 학사로서 예루살렘의 종교적 정화의 사명을 갖고 아닥사스다 6년에 먼저 와서 헐어진 성전을 재건하고 퇴폐된 종교적 생활을 정화하는데 힘썼고, 느헤미야는 일반 백성으로 파사 왕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있다가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로 에스라 귀환 14년 후인 아닥사스다 20년에 유다 총독의 직임을 갖고 귀환하여 에스라와 합력하였고 성곽 및 도성 재건과 신앙 정화에 힘쓴 사람입니다. 에스라가 성전을 재건할 때나, 느헤미야가 성곽을 중수할 때, 그곳 지역민들의 강한 반발과 훼방에 부딪혀 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기도와 끈기와 하나님의 은혜로 목적을 성취한 사실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에스라는 성전이 완공된 후에 갔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것은 1차 귀환한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난국을 극복하였고, 그 당시 훼방자는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들”이었으며(라 5:3) 느헤미야 때에 훼방한 자는 “산발낫과 도비야”였습니다(느 2:10). 스룹바벨 때에 성전 재건을 훼방한 것은 하나님과 유대인을 핍박하는 무리들의 소행일 것이고, 느헤미야 때의 훼방자 “산발랏”은 호론(헤브론 근처) 사람이요,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산발랏의 종 되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 잘 되는 것을 핍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산발랏”은 동족일 수도 있는데 왜 훼방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느헤미야가 성곽 중수하는 것을 보고 그 지역에서 160년간 살아온 연고를 내세워 성곽 중수를 같이 하자고 하였는데, 느헤미야와 귀환민들이 이것을 반대하므로 대립이 된 것입니다. 왜 반대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신앙 신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160년쯤 전에 바벨론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때 성전도 헐리고 제사장이나 지도자급 사람들이 다 바벨론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종교 명맥이나 선민 족보를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이 지켰고, 예루살렘을 떠나 타처로 흩어진 사람들은 종교 명맥을 이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유대인이란 증명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으로 일하는 거룩한 도성 건설에 합류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섬김을 받으시거나 이방인의 불신앙적 생활로 영광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이지만 사람 앞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데는 상당한 증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단체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느헤미야가 어려운 사역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성회를 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느헤미야가 하나님과 예루살렘을 사랑하였고, 그 도성이 퇴락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1장).

2) 그런데 아닥사스다왕이 느헤미야의 초췌함을 보고 소원을 물어서 예루살렘 성곽 중건을 위한 모든 면에 승인을 하였습니다(2:1~8).

3) “하나님의 선한 손이 느헤미야를 도우셨고”(2:8), “하나님이 감화하셨으며”(2:12, 7:5), “형통하게 하셨고”(2:20), 또 백성들은 밤낮없이 파수를 서고 노력하므로(4:14~23) 52일만에 필역하였는데(느 6:15) “이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라”(6:15)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고 일을 하므로 백성들이 그 노고를 생각하여 그를 존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아닥사스다 32년 7월 1일에 예루살렘 동편 수문 광장(느 3:26, 8:1)에 일제히 모여서(성곽 준공을 기념하는) 성회를 열었는데, 유대인의 7월은 절기의 달입니다. 월삭(1일)과 대속죄일(10일)과 초막절(15일)이 있기 때문입니다(민 10:10, 레 23:27, 42).

5) 광장에 모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① 우선 “일제히 모였다”(8:1) 하였으니 단결이 잘 된 것을 알 수 있고, ② 학사 에스라가 두루말이 성경을 갖고 나무 강단에 섰으며, ③ 다른 제사장 13명이 좌우에 보좌하였고(말씀을 받드는 의미), ④ 새벽부터 정오까지 낭독하였으며, ⑤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이 기립하였고, ⑥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할 때 아멘으로 화답할 뿐 아니라 다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감회, 감사, 회개, 탄식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6)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날이 주의 성일(안식일)이고 성회인 만큼 슬픔을 거두고 잔칫집처럼 지내면서 “하나님을 기뻐함이 힘이 되는 것인즉 다같이 기뻐하자”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단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세우며, 읽고 듣고 해석하고 깨달으며, 감사하고, 나눠주며,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감동하심과 도우심에 의하여 어려운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요긴하게 쓰임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83과 느헤미야의 재건 사역 (느 8:10~18)목록으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가서 에스라와 합력하여 성곽 공사를 끝낸 시기는 아닥사스다왕 34년이라고 하였습니다(5:14). 그때는 바벨론 포로 이후 약 170년 후였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제도를 완전히 새롭게 건설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1차 귀환한 스룹바벨과 에수아가 성전을 재건하였고(솔로몬 성전보다는 많이 작게 건설함), 두 번째 간 에스라가 율법학사이기 때문에 성경적 지도를 하였으며,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성도의 성곽을 준공하였으니까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느디님 사람도 포함)과 함께 170년 전의 성전봉사제도를 복구하여 재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 남북이 50년 격리된 사이에 많은 차이가 생겨서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처럼 170년만에 없었던 종교를 새로 세우는 격이 된 만큼 어렵게 복구한 것인데 느헤미야 8장 이후의 말씀은 그런 것들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신약식 제도개선과 정화사역의 차원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모든 건축 사역이 끝났을 때 봉헌식(12:27)과 아울러 성회를 열었고 성회는 절기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선민의 초막절은 과거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출애굽의 은혜(특히 광야 여행)를 감사하는 행사였습니다(8:15). 그때에 제사를 드린 근거도 있지만(라 3:1~6) 느헤미야서에서는 율법적 낭독만 강조하였으니(8:18) 의식적인 제사보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회를 열 때에 슬픔을 참고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감사의 눈물이나 회개의 눈물 등이 어찌 없겠습니까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8:10)고 하셨습니다.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은 과거를 정리하는 단계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새 시작의 출발입니다. 반드시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는 단계에 이르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항상 기뻐하려면 변치 않는 하나님을 기뻐하여야 합니다(살전 5:16).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이시고 “기쁨으로 그 앞에 나가라”(시 100:2)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곧 기도 응답의 방법이며, 은혜 받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시 37:4, 사 40:31). 시 37:4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하셨고, 느 8:10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함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3. 170년 동안 율법 없이 살아온 생활을 청산하는 의미로 회개하는 행사를 가졌으니, 9장을 보시면 “그 달(아닥사스다 34년 7월)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방인과 절교하고 낮 4분 1동안 자기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고 율법을 낭독하면서 사유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9:17). 그들은 약 1,000년 전부터 조상들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긍휼을 구하고(9:31), 열조의 죄 때문에 이방인의 통치를 받게된 것을 탄식하고, 그 기도회에 참석한 지도층이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 인을 쳤다”고 하였습니다(9:28~38). 9:38의 “견고한 언약”이란 저주 맹세(10:29) 또는 독립의 은혜를 구하는(9:36) 의미였을 것입니다.

4. 선민의 명단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서에도 귀환자들의 명단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처럼 느헤미야서에도 제사장족, 레위족 등 부족별로 명단 기록을 성실하게 하였으니 이는 선민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선민 단체에 이방인이 섞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결혼한 상대라도 다 쫓아낸 것은 그만큼 성도의 구별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확실한 성도와 믿음이 적게 확보된 성도를 어느 정도 감지하여 외식성을 줄이고 정통적 신앙인을 확보하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 고백과 경건과 사랑 실천의 의지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5. 여러 가지 생활 방침을 저주 맹세로 결단하고 제도를 세웠습니다. “저주 맹세”란 방침대로 시행 못 할 때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10:29). 무슨 방침들을 세웠습니까?

1) 이방인과 혼인을 금하는 것이고(10:30),

2) 안식일이나 성일에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이며(10:31),

3)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고(10:31),

4) 성전 관리비를 스스로 내는 것이며(10:32),

5) 제사용과 제사장이 쓸 것을 공급하되, 소산의 맏물로 드리는 것이고(10:33~36),

6)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고 레위인은 그것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게 하였으며(10:37~39),

7) 예루살렘에 머물 자와 그 이외의 지역에 거할 자를 구별하였고(11:1~2),

8) 레위인들 중에서 감사기도만 하는 자들과 문 지키는 자들을 지정하였으며(11:17~19), 반차를 따라 시행할 찬양대를 맡겼고(12:24, 31), 그들에게 소용되는 것들을 날마다 공급하게 하였습니다(12:44~47).

9) 그 다음에는 잘못한 자들에게 응징을 가하는 말씀이 13장에 기록되었으니, 이는 출애굽 때에 모압과 암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하지 않았음을 인하여 저주한 일을 모범한 것입니다(13:1~3). 그 예로써 “도비야”는 반역자였는데 그가 제사장과 연락되어 성전 뜰의 방에 거한 일과 레위 사람들에게 줄 것을 주지 않은 일과 전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은 일과(13:7, 10, 11) 안식을 거역한 일들과(13:15~22) 이방 혼인한 일(13:23~27)을 크게 책망하므로 신앙생활의 기반을 닦아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살피면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① 정통적 신앙이 중요함을 깨닫게 하고, ② 좋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개선되어야 하며, ③ 잘못된 일들이 드러날 때는 책망하고 스스로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문서에 인을 치게 하므로 건설적인 노력을 시도한 사실을 교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84과 에스더서의 핵심 (더 4:13~17) 목록으로


“에스더서의 핵심”을 몇 가지로 살피겠습니다.

1. 역사적 배경입니다. 에스더서의 사건은 파사왕 5대 “아하수에로”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벨론 통치 시절에 유대인의 종교가 핍박을 받았지만, 파사국 통치를 받을 때는 종교의 자유는 물론 왕실의 협조를 받는 입장이 되어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파사의 1대왕 고레스 때에 1차 귀환이 있었고(538년), 그 후 79년만에(아닥사스다 6년, 458년) 2차 귀환이 있었는데, 에스더서의 역사는 2차 귀환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 밑에 많은 대신들이 있는 중 하만 총리와 모르드개가 있었는데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 등용된 사람입니다. 모르드개는 그의 삼촌의 딸 에스더를 (부모가 없게 되어) 양육하였고, 그가 왕비 간택에 합격되어 왕후가 되었는데, 그의 혈통이 유대인이란 것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왕이 하만을 높여 하만이 권문으로 출입할 때 누구나 꿇어 절하도록 하였는데, 모르드개는 절을 하지 않으니까 다른 신복들이 그 이유를 물은즉 모르드개가 대답하기를 “자기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우월감도 있었겠지만 사람을 우상시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의 신복이 이 사실을 하만에게 알렸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모반할 여지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였을 것이고) 크게 노하면서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다 멸하기로 작정한 후 왕에게 나가서 “한 민족이 왕의 나라에 거하면서 그 법률이 만민과 달라 왕의 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왕에게 무익할 것인즉 진멸하소서” 하니까 아하수에로왕 12년(474년) 1월 13일에 “왕이 소견대로 하라”고 승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13일에 거사일을 정한 후 각도의 관원들에게 알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과 거사일 사이는 11개월인데, 모르드개가 이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세워 노력한 기간은 2개월쯤이었습니다. 같은 해 3월 23일에 모르드개의 뜻이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었으니까요(8:9).

2. 그래서 민족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 민족이 왕명을 지키지 않으니 왕에게 유익이 없을 것인즉 진멸함이 좋겠습니다” 하였을 때 왕이 “좋을 대로 하라”(더 3:11) 하고 반지를 빼주어 조서에 찍게 하고, 비용까지 주어 12월 13일에 일제히 거사하라고 각도에 문서를 띄운 상황이니, 그 시일에 유대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다 진멸당하게 된 것입니다.

3. 위기를 깨달았을 때 대책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지요. 이 대책을 세움에 있어서 왕이 아닌 이상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므로 각자가 자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다음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르드개는 제일 먼저 왕후 에스더를 찾아가 상의하게 되었고, 에스더는 왕을 만나서 그 사실을 부탁하여야 하는데, 왕이 만나기를 청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위법이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민족들과 함께 3일간 금식(기도)을 선포하고 금식 후에 왕에게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왕을 볼 수 있는 뜰에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왕이 반가워 맞이하였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터이니 소원을 말하라” 하므로 자신이 잔치를 준비할 터이니 “하만을 청한 자리에서 오시라” 하니 초청 대상이 된 하만은 더 오만해지면서 왕후가 자기를 선대할 줄로 짐작하고, 자기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모르드개를 때가 되면 나무에 달아 죽이기 위하여 자기 집 뜰에 높은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그날 밤에 왕이 역대일기를 읽다가 역적 모의를 고발한 모르드개에게 존귀를 베풀지 않은 사실을 알고,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하만은 그가 자신인 줄로 착각하고 “왕 같은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중을 돌면서 왕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자라”고 광포하심이 좋다고 하자 “모르드개에게 그렇게 하라” 하여 하만은 수모를 당하고 모르드개는 존귀해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청한 잔치에 임하였을 때, 에스더가 사실을 말하고 “민족의 생명을 달라” 하니까 하만의 오만성을 알고 있던 왕이 승인을 하므로, 모르드개를 죽이려 한 나무에서 자신이 달려죽었고, 왕명은 취소하지 못하는지라 유대인들이 그 날짜에 스스로 생명을 보존하되 “해하려는 자를 도륙하라” 하여 그 날에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고, 그 기념으로 12월 14일(13일~15일)을 부림절이란 명절로 삼게 된 것입니다.

4. 이상의 사실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고, ②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며, ③ 심지어는 좋은 일에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더 4:16). ④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와 섭리를 베푸셔서 해결해 주시는 뜻이 있으니, ⓐ 하나님이 왕에게 왕후를 사랑할 마음을 주시고, ⓑ 모르드개가 존귀해지는 기회를 주시며, ⓒ 왕이 하만에 대하여 증오를 갖게 하시고, ⓓ 유대인을 좋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부족들에게 흉년들 것을 아시고 “미리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다”(창 45:7) 하신 것처럼, 에스더가 왕후 되는 일부터 하나님이 선민을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국가적인 일, 민족적인 일, 그리고 개인과 가족적인 일에 대하여 얼마든지 유익한 섭리를 베푸셔서 보호받고 형통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85과 이같이 말씀하시되(1) (렘 6:16~19)목록으로


성경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히 예레미야 6장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란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9:16, 22). 그래서 “이같이 말씀하신 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같이 말씀하셨다” 함은, 그 뜻을 더 부각시키는 어조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나라 말기에 사역한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멸망 약 100년 전에 예언하였다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미가, 나훔, 스바냐 선지자의 사역에 뒤이어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하였을 때 예언을 한 것입니다.

1. “너희는 길에 서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는 길을 계속하지 말고 멈추어 반성하고, 살피라는 뜻입니다. 인생은 다 자기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인지 아닌 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생활이 바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멈춘 상태에서 자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잠 14:12).

2.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알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얼굴의 티를 보려면 거울을 보아야 하는 것처럼, 자기 생활의 잘못을 보려면 모범자의 생활을 보아야 합니다. 그 모범자는 그들의 신앙적 조상들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대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옛적 길, 곧 선한 길”은 구약 시대의 선민의 조상들이 어떻게 하였는가를 살펴, 자신들의 옳지 못한 길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일, 노아가 순종한 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한 일,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이 어떻게 한 일 등을 살펴서 자신들의 잘못된 길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생활을 대조하여 보고 우리의 잘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선한 모범을 본받기 위하여 돌이키라. 그러면 하나님이 심령의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생활이 바르지 못하면 평안을 못 느낍니다. 하물며 성도이겠습니까? 성도가 믿음의 정도에 서지 못하면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면 “오른손을 붙드신다”고 하셨습니다(시 73:23). 성도가 거리끼는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마음에 평강이 오고, 따라서 육체와 생활도 건강하게 형통하는 것입니다. 요삼 2절에 보시면 “영혼이 잘 될 때 범사와 건강이 성취된다”고 하셨습니다.

4. 17절에서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파수꾼과 나팔은 선지자의 경고를 의미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설교입니다. 선지자의 깨우치는 말을 잘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교역자의 설교를 믿음과 겸손과 갈망함으로 잘 받으면, 신앙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듣지 않고 시행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교역자가 설교를 하면서 “잘 듣나 안 듣나”를 살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선지자에게 경고의 사명을 주신 후에 백성들이 “잘 듣나 안 듣나”를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거역한다”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16절에서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리하지 않겠노라” 하였고, 17절에서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19절에서도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내 법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5.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시간을 끌며 기회를 주셨어도, 계속 듣지 않고 거역을 일삼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8~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 열방들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이 생각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누가 부당한 일을 깨닫지 못할 때,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듣지 않고 깨닫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땅이여, 들으라. 열방아, 들으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와 같은 표현은 이사야 선지자도 하셨지요(사 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니 결국 재앙(나라의 멸망)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 생각하는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늘 깨우쳐 주시지 않습니까? 이때에 마음을 겸손히 하고, 늘 반성하며, 한 가지 한 가지씩 잘못된 것과 부조리한 것을 잘 시정해 나가면, 하나님은 큰 평강을 주시지만,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는 결국 그 잘못된 생각의 소득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86과 이같이 말씀하시되(2) (렘 9:23~24)목록으로


본문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1.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지혜는 인간의 자기 생각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철학, 과학 같은 것입니다. 철학은 지식의 집합이고, 과학은 기술의 집합이지만, 그것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1) 우선 그것이 만능일 수 없고 극히 적은 부분일 뿐이며, 2) 또 지식이 좋은 데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핵무기 개발이나 전쟁에도 쓰여지는가 하면,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항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혜가 많다는 사람들은 더욱 조심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는 지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마 18:2~3). 또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거스릴 수도 있습니다. “참된 지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 1:7).

2.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용사는 싸울 능력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전쟁이 하나님께 달렸고”(삼상 17:47), 용맹으로 전쟁을 이기지 못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삼상 17:50~51, 삿 4:12~16). 또 올림픽에서 챔피언이 된 선수들 중, 자신의 건강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힘 자랑을 할 수 없는 피조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재물 많은 것을 자랑할 수 없을까요? 그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또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사용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고, 또 그것으로 자신을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란 말씀(학 2:8),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사 45:3), 그 재물로 자기만 부요케 하지 말라는 말씀(눅 12:18~21), “재물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씀(딤전 6:10, 마 19:23)을 기억하신다면 부자의 재물이 자랑거리가 못 됨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 대부분이 현실주의에 집착합니다. 현실주의의 대표적 목표는 재물입니다. 아직도 로또 복권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고 하는데, 인간은 거부가 되기 위하여 800만 분지 1로 당첨되는 복권을 줄 서서 사지 않습니까? 그 열심이 대단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하셨고(마 6:24), 따라서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릴 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있다”(욥 22:24~25) 하시므로, 성도가 재물을 의존하거나 자랑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가난이 믿음에 큰 덕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합 3:17~19, 마 11:5, 고후 8:9).

4. 자랑할 것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24절).

1) “명철하여 하나님을 안다”는 뜻은 하나님을 가까이 의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명철이 없는 자입니다. 또 만물이 웅장하고 오묘한 것을 볼때 하나님을 의식하여야 되고, 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느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명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시는 일은 스스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해 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한 일에 대하여서는 자신이 알 수 있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인즉, 그것을 잘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명철입니다. 그 명철이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좋은 체험(간증)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체험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애, 공평, 정직)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무한한 것을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성이 있으시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데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하나님의 초월성은 본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나타내시는 것을 알 때는 성도가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을 자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역을 알되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서 펼치시는 분임을 알고, 그것을 본받아 생활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잘 아시는 것”으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보람이 없습니다. 또 인자를 베푸는 일로 자랑할 수 있으며, 공평을 행하는 것으로 자랑할 수 있어야 하고, 진실을 나타내어 정직하게 사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것이나 대학에 간 것을 자랑하는 것은, 곧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므로 마땅치 않고, 건강이나 힘을 자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므로 역시 자랑할 수 없으며, 재물을 많이 가진 것도 예수님의 모범에 맞지 않으므로, 그런 것을 보람으로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과 공의와 진실을 실천하는 생활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87과 유다의 죄와 멸망 예고 (렘 13:1~27)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유다의 죄와 멸망 예고”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말기까지 사역하였기 때문에 10, 25, 27절에서 유다의 죄를 지적한 말씀 외에는 다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1~11에서는 베띠가 썩는 상징적 계시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셨고, 12~16절에서는 “무지를 깨우치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으며, 17절은 선지자의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이요, 18~19절은 “왕에게 고하라”는 말씀이고, 20~26절은 “멸망당하는 정황”을 설명하셨습니다.

1. 유다의 죄를 살피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말하며 다른 신을 좇아 섬기고 절하는 죄라”(10절) 하셨고, 25절에서는 “하나님을 잊고 거짓을 신뢰한 죄로 망한다” 하셨으며, 27절에서는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음행의 비루함과 가증함으로 화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산 위에서 행한 음행”이란 이방신을 섬기는 행사에 부속된 행위입니다(민 25:1~3).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고 세속에 끌려 무분별한 생활을 하는 것이 큰 죄였습니다.

2. 이상의 범죄에 근거하여 그들이 응득으로 받는 벌이라(25절) 하시고, 멸망에 대한 말씀을 여러 가지로 증거하셨습니다.

1) 베띠가 썩는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셨습니다(1~11절).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있다가 유프라데 물가로 가서 바위틈에 감춘 후 여러 날 후에 썩은 띠를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 땅과 유프라데강과의 거리는 약 1,500리이므로 이 계시는 실제 행동 계시가 아니고 환상적 계시로 예측함이 좋습니다. 문제는 어떤 의미로 이런 계시를 보여 증언하게 하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선지자의 증언(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10절) 실감 있게 듣고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의 “베띠”는 이스라엘 선민을 비유합니다. “그것을 산 것”은 하나님이 속량(마귀 또는 애굽에서)하여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 뜻이고, 또 “그것을 허리에 띰”은 하나님이 선민을 자기에게 밀착시켜 사랑하고 요긴하게 여기신 것을 뜻하며, 띠가 사람의 허리에 있지 않고 유프라데 강변에 묻힌 것은 선민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속으로 나간 것(타락)을 의미하고, 상당 기간 후에 그 베띠가 썩은 것은 유프라데 방향에서 오는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완전히 말할 것을 나타내신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베띠처럼 요긴하게 쓰시고 영광의 기업을 삼으려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11절).

2) 12절에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신 즉 백성들은 그 포도주를 축복의 잔으로 착각하고 의당한 줄로 여겼으니, 그것도 무지의 일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포도주는 잔뜩 취하게 하시는 포도주였습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여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렇게 할 것이라…그들을 아끼지 않고 멸하리라(13~14절) 하시므로 그들을 술 취한 자처럼 버려 두어 동족끼리, 또는 가족끼리 싸우도록 만드실 것이니, 그런 멸망의 흑암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16절).

3) 그러나 그 백성들은 여전히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선지자로 하여금 슬프고 안타까움을 당하게 하셨으니 17절에서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 흘려 통곡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백성의 멸망을 깨닫는 선지자만 홀로 통곡을 한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바벨론의 침략 상황을 예고하였습니다(20~26절).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짐승들)와 양 떼는 어디 있느뇨(그들이 다 잡아갈 것이라는 뜻) 너의 친구 삼았던 자(이는 바벨론 왕이 유다 왕 여호야긴과 조약을 맺고 우방국처럼 지낸 때가 있었음; 대하 36:5~10, 애굽도 그러하였음; 대하 36:3), 즉 바벨론 왕이 수령이 될 때 구로하는 여인처럼 고통하게 될 것이고, 치마가 들리며(수치), 발뒤꿈치도 상하게 될 것(끌려 다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돌이킬 힘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겔 36:26~28). “구스인(노아의 큰손자, 에디오피아 흑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음 같이 악에 익숙한 백성들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인즉(이 말씀은 선민이 스스로 회개하지 못한다는 뜻도 있고, 또 인간의 전적 타락을 설명하기도 함) 결국은 사막의 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처럼 나라와 백성들이 흩어지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24절). 22절을 보시면 환난을 경고 받은 백성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회개할 힘이 없고) 죄악이 크므로 수치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할 기회와 힘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경고만 하시고 회개할 힘을 주시지 않는 것은 결국 심판을 돌이키시지 않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제88과 소행대로 벌주심 (호 12:1~6, 12~14)목록으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북왕국의 죄를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소행대로 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북왕국이 하나님의 징벌로 나라가 망한 것은 호세아 9년, 주전 675년이었고, 호세아 선지자는 여러보암 2세 때로부터 스갈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왕(마지막 전왕) 때까지 약 60년간 사역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소행대로 벌주시는 하나님이 여러 차례 정변을 주셨고, 결국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셨으니, 이는 소행에 따라 벌을 주신 것입니다.

1. 1절에서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한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거짓”은 일반 거짓 행위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상 숭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상이 복을 줄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우상을 섬기니까 결국은 우상으로부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풍을 따라간다”는 뜻은 동풍이 농작물을 해치는 바람이기 때문에, 이것은 포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거짓과 우상에 해당하고, 동풍은 포학과 전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왕국을 대표한 용어입니다. 그 이유는 북왕국의 초대 왕 “여러보암”이 에브라임 지파이기 때문입니다(왕상 12:20, 25). 또 “북왕국이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굽에 기름을 보낸 행위”는 평화를 위한 외교 수단이지만 결국 앗수르의 침략으로 망하고 애굽의 도움은 받지 못하였으니 헛된 보응을 받았고, 전쟁주의자 앗수르와 계약을 맺었으니 전쟁으로 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이 소행대로 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것이 없고, 회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2. 3~4절에서는 그들의 조상 야곱의 모범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은 하나님이 선민으로 태어나게 하신 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청년기와 장년기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청년기 생활을 12절에서 말씀하셨지요.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한 것”은 그 형 에서를 속인 죄에 대하여 자복과 회개를 하지 않고 도망한 것인즉, 마치 사고를 내고 도망한 것처럼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외삼촌의 집에 가서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고 양을 쳤다”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닌 타산적 또는 계략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기복주의에 얽매여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얻은 것은 20년간 고생한 것이고, 또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이니(창 47:9) 그것도 하나님이 야곱의 소행대로 갚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장년기에 와서 변화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외삼촌 집에서 20년간 고생하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형의 세력이 야곱보다 못하지 않았고 형과 화해하여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때에도 야곱은 뇌물작전(선물이지만)과 도피작전을 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창 23장). 그런데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났고 “야곱은 그 천사와 힘을 겨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힘을 겨루었을까요? 처음에는 힘센 천사인줄 모르고, 에서가 보낸 자객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씨름으로 넘어뜨리려 하였는데, 결국 자기의 환도 뼈가 위골되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울며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수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울며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변화의 계기인 것입니다. 야곱이 회개하며 울며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만나주시고…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 35:1~5). 6절에 보시면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① 허탄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② 사랑(인애)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③ 공의(죄 안 짓고 사는 것)를 행하여야 합니다. ④ 그렇게 하고도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가 성도의 복 받는 방법입니다.

3. 하나님이 소행대로 벌주시는 체험을 하신 일이 있습니까? 남을 속이면 자신이 속임을 당하고, 남을 미워하면 자신이 미움을 받으며, 부부가 싸우면 그 자녀가 병이 나고, 십일조를 확실히 드리지 않으면 그 금액만큼 손실이 생기는 것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참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소행대로 벌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실 예를 들었고, 또 그 민족의 소행에 따라 벌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89과 호세아의 비유 말씀 (호 2:5~7, 12:10)목록으로


호세아서 강론 집필을 마치고 이 글을 씁니다. 필자가 호세아서를 선택하여 강론을 한 것은 호세아서에 나타난 비유 말씀들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적절한 비유 말씀을 들어 교훈 하시는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몇 가지를 발췌하여 소개한다면,

1. “음란한 아내”, “음란한 자식”(1:2)입니다. 이는 그 남편이 사랑하기에 가장 역겨운 대상입니다. 아내가 음란하여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았다고 할 때, 누가 그 여인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우상을 섬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꼭 그 입장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이 무궁하시므로 “돌아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사실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읍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연애하는 자”란 말씀입니다(2:7). 음란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할 때, 그가 “양식과 의복 등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 남편을 버리고 갔지만, 하나님이 막으심(2:6)으로 약속대로 실천되지 않았으니 결국은 버림을 당한 셈입니다. 본래 “연애하는 자”란 공식적 부부가 아니지요. 오직 타산과 일시적 재미만 보기 위한 관계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연애를 하면 일시적 재미와 소득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깊이 망치는 수렁이란 것을 아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쉬 없어지는 이슬”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6:4, 13:2). 이 말씀은 우리 속담에 “쟁개비 같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인애(하나님에 대한 사랑)가 그렇다 하셨지만, 우리는 인애뿐 아니라 진실과 근검과 인내 등 모든 면에서 쉬 없어지는 이슬처럼 잠깐만 시행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소망까지 꾸준히 시행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4. “달궈진 화덕”이란 말씀입니다(7:4). 달궈진 화덕은 뜨거운 것이기 때문에 심판의 도구로 말씀하신 것인데, 항상 달궈져 있는 것이 아니고 “빵 만드는 자가 사용하는 화덕”이므로 가루를 발효시키는 동안은 달구지 않다가 구울 때 달구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평안한 것 같으나 발효가 끝나면(심판하실 기한이 차면) 달군다(심판)는 것입니다.

5.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7:8). 전병을 잘 구우면 먹는 사람이 행복하겠지요. 이와 같이 성도가 믿음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한 쪽은 설고, 한 쪽은 타면, 다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명분이 모자라거나, 균형을 파하거나, 냄새만 풍기는 식의 생활을 역겹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6. “기뻐하지 않는 그릇”입니다(8:8). 여러분 집에 버리자니 아깝고 그대로 두자니 장소 차지만 하고 쓰지 않는 물건이 있지요? 누가 요긴하게 쓴다 하면 줄 것인데도, 달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부정하면 꼭 그와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요긴하게 여겨 기뻐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를 뜻합니다.

7.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입니다(8:9). 이 말씀은 북왕국이 앗수르에 아부하는 태도에서 앗수르가 값을 많이 받으면, 즉 조공을 많이 주고 복종하면 연애하는 자처럼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마치 기생을 사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상 섬기는 것이 그러하고, 현실을 의지하는 것도 그러하며,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오는 것만 확실한 실속이 되는 것입니다.

8. “기브아의 시대”입니다(9:9). 이 시대는 사사 시대이므로(삿 19:22) 호세아 시대로부터 약 330년 전입니다. 그 당시에 벤야민 족이 패괴한 짓을 행하고 거의 멸절 당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패괴함이 벤야민 족만 있은 것이 아니고 다른 족속들도 그러한 것을 기억하시고 그들에 대한 죄를 벌하신다” 하셨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9.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죄가 만신창이 된 몸처럼(사 1:5~6) 죄악이 만연된 것을 뜻합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전부 부패하였으니 부분 수리가 불가능하므로 “집을 아주 헐고 다시 지음”이 낫다는 뜻입니다.

10. “길들인 암소”입니다(10:11).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적이어야 합니다.

11. “아침 구름, 쉽게 사라지는 이슬,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란 말씀입니다(13:3). 범죄한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이 누리던 영광이 쉽게 없어질 것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12. “기다리는 표범, 새끼 잃은 곰”입니다(13:8). 기다리는 표범이 먹이를 놓치지 않고, 새끼 잃은 곰은 폭학함이 극에 달합니다. 새끼 잃은 곰이 도로에 있는 고압선 전주에 올라가서 감전되어 죽는 장면을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뜻을 돌이키시지 않을 때 인간이 어떤 자구책을 쓴다 하여도 하나님이 강하게 하실 것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13. “푸른 잣나무 같다” 하셨으니(14:8), 이 말씀은 우상을 마른 막대기로, 성도를 푸른 잣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잣나무는 푸르고 향과 열매가 있으며, 또 목재용도로도 좋습니다. 성도의 생활이 그렇게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14.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입니다(13:13). 북왕국이 머지 않아 큰 고통에 처할 것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면 그 고통은 크고 당할 수밖에 없은즉 미리 회개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습니까?

 

제90과 요엘서의 핵심 (욜 2:15~17)목록으로


“요엘서의 핵심”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요엘서에는 두 가지 증언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하나는 요엘이 사역한 시대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호세아 선지자처럼 죄를 책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부두엘의 아들 요엘이 사역한 시기는 요엘이 재앙을 예언하면서 “북편 군대가 와서 나라를 황폐케 하다가 물러갈 것”(2:1~11, 20)을 언급하므로(북편 군대는 앗수르로 해석함) 앗수르 침략 이전에 예언한 것이 틀림없고, 또 죄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많이 지적하였으므로 “요엘”은 뜨거운 회개를 촉구하는데 중점을 둔 까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엘이 증언한 핵심은 ① 북왕국에 큰 재앙이 임할 것을 경고한 것과, ②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 것과, ③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은총이 가깝게 또는 멀게 나타날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요엘서를 다 읽고 내용을 분류한다면, “재앙 경고”, “회개 촉구”, “구원 예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재앙 예고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에 보시면 “늙은 자들과 모든 거민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녀들과 후 시대에 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엘이 증거한 시대와 재앙의 시기와는 한 두 세대의 간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선지자의 경고는 모든 백성들이 듣고 증거할 사명이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재앙의 예고로써는 “팟종이, 메뚜기 등이 농산물을 다 없앤다”(4절) 하셨는데, 이 말씀이 실제적인 흉년을 예고하신 것인가? 아니면 북편 군대가 들어와서 해충들이 곡식을 없앤 것처럼 모든 양식을 다 뺏어갈 것을 상징한 말씀인가? 할 때, 4절에서 해충을 말씀하신 후, 5절에서는 “포도주에 취한 자들아 슬피 곡하라” 하시고, 6절에서 “사자 같은 강한 이족이 올라와서 포도나무를 멸하고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한다” 하신 것을 보아 앗수르의 침략을 황충이나 메뚜기의 침입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앙의 핵심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양식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없으니 제사장들이 슬퍼하여야 하고, 농부들도 부끄러울 뿐 아니라 기쁨도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1:11~13). 1장 하반에서는 양식 고갈로 들짐승까지 없어질 것을 말씀하셨고, 2:1~11에서는 “앗수르 군대가 크게 용맹을 떨치며 선민 북왕국을 괴롭혀 마치 도적 같고, 땅이 진동함 같으며, 해와 달이 빛을 잃은 것처럼 두렵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재앙 예고가 핵심이었습니다.

2. 뜨겁게 회개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1:8에서는 “처녀가 약혼한 남편이 죽은 것처럼 애곡하고” , 1:13~14에서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땅의 모든 거민을 하나님의 전으로 모아, 금식하며 부르짖으라” 하셨으며, 2:12~17에서도 뜨거운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12~13절을 보시면 “이제라도 금식하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며, 의복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애가 크신 분이기 때문에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평화로운 제사를 드리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대상은 제한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 장로들, 신랑, 신부, 어린이, 젖 먹는 자까지 회개하는 모임에 참석시켜서, 성회를 열고 금식을 하며 울고, “내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인들의 손에 붙이시려 하시나이까?” 하면,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워져서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2:15~18). 성도들 중에 하나님 앞에 거리끼게 산 분들이 계시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을 만큼 회개하는 방법을 배워 시행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는 마음에 큰 가책을 느껴 어떤 부끄러움이라도 감수하고 돌이키는 결단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핵심은 은혜 주심에 대한 예고입니다.

1) 백성들의 회개를 전제로 적군을 쫓아보내시고 다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2:19~20). 그렇게 될 때에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고, 이른 비, 늦은 비도 적당하게 주셔서 모든 손실을 회복시켜 주시므로(2:21~26)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는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그리고 2:28~32의 말씀은 신약시대에 성령 충만의 은혜 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본인이 집필한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과 󰡔사도행전 강해󰡕2:17~18 부분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3) 세 번째로 은혜 주심에 대한 약속은 선민을 부당하게 괴롭힌 이방 족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2의 “여호사밧 골짜기에서…그들을 국문 한다” 하심은, 선민을 학대한 악한 백성들을 벌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이란 “하나님의 심판”이란 뜻이고, 유다국 4대 왕입니다. 그때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치러 왔다가 하나님의 역사로 골짜기에서 크게 패한 일이 있었습니다(대하 20:1~30).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선민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실 것이고, 따라서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있을 악인(애굽, 에돔, 3:19)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성도가 회개하면 재앙을 면할 수 있고, 아무리 악인이 강성할지라도 선민은 약속대로 구원을 받으며, 악인은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제91과 정의를 하수같이 (암 5:21~27)목록으로


아모스서를 5장까지 읽고 “정의를 하수같이” 또는 “공법을 물같이”(24절)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짐 진 자”입니다. 죄 짐을 벗고, 이웃을 위한 봉사적인 짐을 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시 68:19, 마 11:30, 갈 6:2, 5). 아모스는 유다의 웃시아왕 때이고, 또 북왕국으로는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을 한만큼(1:1) 이사야나 호세아 선지자와 같은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아모스”의 신분은 드고아(베들레헴 남쪽 10km 지점 성읍)에서 목축업과 양잠업(7:14)을 하던 농민이었습니다. 아모스서의 특징을 살핀다면 정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사랑을 강조한 만큼, 아모스 선지자는 공의를 강조하였고, 예언의 상대자가 이방인과 선민을 포괄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습니다. 1장을 보시면 “다메섹과 가사와 블레셋과 두로와 에돔과 암몬과 랍바에 대하여 예언하실 때, 그들이 이방인들로서 선민을 해롭게 한 것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죄 서너 가지를 인하여 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방인의 죄를 감찰하시되 그들이 선민을 해롭게 한 일과 그들의 대표적인 죄 서너 가지만을 징벌에 적용시키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다메섹은 길르앗을 압박하였고(3절), 가사는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으며(6절), 두로는 형제의 계약을 이행치 않았고(9절), 에돔은 분을 끝없이 나타냈으며(11절), 암몬은 길르앗 여인의 배를 갈랐다(13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느 민족의 개인이나 단체의 범행을 낱낱이 기억하시고 합당한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2장에서는 모압과 아모리인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1~3, 9)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도 지적하셨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전쟁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3~16). 유다의 죄는 율법을 무시하고 거짓 것에 유혹을 당한 죄이며(4~5절), 이스라엘(북왕국)의 죄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판 죄(불공평한 재판), 음란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한 죄(6~8절), 나실인을 멸시한 죄(11~12절)를 지적하시므로 죄에 대하여 대단히 면밀하게 지적하신 것을 깨달을 수 있고, 3장에서는 “선민들의 무지와 범행을 책망하라”고 하셨습니다. 1절에 보시면 “온 족속을 쳐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모든 족속 중에 선민만 아시고(사랑하셨으나) 그들이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의합하지 않고는 동행할 수 없는 만큼”(3절) 벌할 것이 확실하고(4~6절),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선지자들로 나타냄이 없이는 시행하시지 않음을 말씀하셨으며(7절), 또 10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는 것”과 비정통적 제사에 대하여 벌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0~15). 4장에서는 북왕국 백성들이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1절) 벧엘과 길갈에서 잘못된 제단에 헛된 제사 드리는 일을 인하여 벌을 주시되 자연 재해와 전쟁 주실 것을 예언하셨고(4~11절), “하나님은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의 뜻을 사람에게 보이시며 아침을 어둡게 하시고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분이라”(13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7절), 말씀으로 뜻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소망(아침)과 절망(어둡게)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땅의 높은 데를 밟는다”는 말씀은 권세자를 누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5장에서는 “회개할 것을 간곡히 권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6절), “바다 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또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하라”(8, 14, 16절),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가 중함을 안다”(12절) 하시고 화가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2. 이 시간에 본문으로 선택된 말씀을 살피면

1) “하나님이 절기와 성회와 제사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21~22절). 이것은 신약시대 성도들의 예배 제도와 상통함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셨고, 또 “노래 소리도 그치라” 하셨으니, 이것도 예배에 포함되는 찬송을 의미하는 것인데, 역시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 하셨을까요? 공법이 없고 정의가 없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방인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우상 없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암몬족의 태양신인 몰록을 왕으로 섬기는가 하면(식굿은 몰록의 신당을 의미함), 별을 섬기는 신앙, 즉 “기윤”을 섬긴다는 것입니다(기윤은 별신을 숭배하는 우상임). 이 말씀을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두 가지를 회개하고 예배 드려라. 하나는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법과 정의를 지키는 지를 살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같아도, 현세적 탐심이 우상 숭배이고(골 3:5), 자기 교만, 돈, 권세 등을 의지하는 현세주의가 우상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계명과 국법과 양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데는 영광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추구하는 태도가 우상에 해당하고, 또 정의에 위반되는 일이 많이 있을 것인즉, 반드시 그것을 깨달아 돌이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므로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92과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암 8:11~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모스 6장~9장까지의 대략을 말씀드리고, 지금 읽은 본문을 요절로 하여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6장에서는 “은혜를 모르고 죄의 위험을 모르는 자들에게 나라를 쳐 없애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혜를 모른다” 하심은 선민들에게 비옥한 땅(출 3:8)을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하므로 “너희의 땅을 갈레와 하맛과 블레셋과 비교해 보라”(2절, 하맛은 갈릴리 바다 북쪽 30km, 갈레는 하맛의 북쪽 200km, 블레셋은 현재 가사 지구임)고 하셨습니다. 또 “죄의 위험을 모름”은 흉한 날이 멀다(화가 미치지 않는다) 하면서 죄와 강포를 행하고(3절)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법을 따라야 할 자들이 공법을 쓸개처럼 여기고,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들이 정의를 인진(독한 쑥)처럼 여겨 멀리한다는 것입니다(12~13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궁궐을 쳐 부시고(8절), 백성들이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시고, 결국은 “죽은 시체를 장사지낼 자가 없도록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1:10). 그 다음 7장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나라가 망할 위기에 있을 때 선지자의 기도로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을 황충의 비유와 화염의 비유로 말씀하셨고(1~6절), 둘째는 하나님이 “다림 줄을 잡으시고 땅을 재어 집을 허시는 계시”를 보여주시므로 북왕국의 멸망을 예언하셨으며(7~9절), 셋째는 벧엘에 있는 거짓 선지자 아마샤가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를 남쪽으로 쫓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아모스가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한 것을 역적에 해당하는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자기의 예언을 받지 않는 자들이 창기가 되거나 아니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10~17절). 8장에서는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신 예시로 나라의 장래가 끝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3절). 여름 실과는 속히 상하거나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을 교훈으로 나타내신 것이고, 또 기근이 임하되 양식의 기근과 말씀의 기근이 아울러 임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4~6, 11~13절). 그리고 이런 재앙을 내리실만한 근본적 죄악은 “단과 브엘세바에 세운 이질적 제단과 제사행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4절).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에 의하지 않은 제사나 종교행위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데, 북왕국이 분리될 때 예루살렘의 성전을 상실하게 되자 임의로 단과 벧엘에 세운 제단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결과가 된 것입니다. 9장에서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사실과(1~10절), 메시야 시대에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1~15절). 이상 6장~9장까지 내용을 말씀드렸는데

2. 이 시간에 교훈 받고자 하는 요절은 11~13절에서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 대한 것입니다. 7:10을 보시면 북왕국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를 역적으로 몰아 쫓아내려 하였는데, 구약시대에는 선지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화적 방편이 없으니까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말씀 없는 기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북왕국에서 의로운 선지자가 없으면 말씀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세례 요한의 출현까지 약 400년간 선지자와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말씀이 풍족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집약하여 성경 66권으로 주시고 끝내셨기 때문에(엘 3:5, 히 1:1, 계 22:18~19, 요 21:25), 넉넉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크게 감사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며 즐거워하고 부지런히 가르치며 문설주에 붙이고 가까이 하며 꿀처럼 달게 먹고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 8:12에 보시면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져도 덮여진 그릇에는 물이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하거나 노력하지 않을 때는 여전히 말씀이 기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흔한 것이 설교입니다. 그렇지요. 설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근거하여 깨달았을 때만 말씀의 갈증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를 듣지 않아도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되고, 또 말씀을 사랑하게 될 때 말씀의 기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많은 성도들이 말씀의 기갈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 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먹고 노는 맛에 삽니다. 성도는 말씀을 상고하고 지키는 맛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말씀의 기갈과 함께 눈물의 기갈, 사랑의 기갈, 경건 생활의 기갈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아울러 반성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제93과 요나서 학습 (욘 1:1~10) 목록으로


1. “요나서”는 하나님이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가드헤벨”은 스블론 지파의 기업에 속한 성읍으로 서쪽 가멜산과 동쪽 갈릴리 바다 남쪽의 중간에 처한 곳입니다. 요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자세한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 하는 것인데, 요나서에는 요나가 앗수르를 원수 국으로 여긴 뜻(4:1) 외에는 나타난 것이 없으나, 왕하 14:25에서 시대적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요나로 하신 말씀처럼 여러보암(2세)이 이스라엘 지경을 하맛에서 아라바 바다까지(북쪽과 남쪽의 경계지역임) 회복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요나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앗수르 민족이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여 이스라엘 침략을 포기하므로 그 시대에 이스라엘이 형통한 것으로 추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북왕국의 여러보암왕 때(13대, 788~759)이고, 남왕국으로는 웃시아왕 때에 사역한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들과도 비슷한 시대에 사역을 한 것입니다.

2. 요나서의 대략을 살피면, 1장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를 쳐서 외치라” 하셨으나, 요나가 거역하고 하나님의 낯(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고, 그 배에서 죄인으로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는데, 하나님이 큰 물고기로 그를 삼켜 3일간 보호하신 사실이 기록되었고, 2장에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달라는 뜻으로 기도한 내용과 하나님이 물고기로 하여금 육지에 토하게 하셔서 3일만에 살아난 내용”이 기록되었으며, 3장에서는 하나님이 두 번째 같은 사명을 주셔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룻길을 행하며 “회개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망한다” 하였더니 임금과 백성들이 크게 회개하는 역사를 나타냈고, 따라서 하나님이 재앙의 뜻을 돌이키셨다는 내용이요, 4장에서는 “이스라엘 국을 괴롭히는 앗수르가 회개하므로 망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요나가 불만을 갖고 성을 내며 “살기 싫으니 차라리 생명을 거두어 주시요” 하고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깨우치신 내용은, 요나가 초막에 거하면서 뙤약볕으로 고생할 때 하나님이 박넝쿨 그늘로 햇빛을 가리게 하신 즉, 요나가 그 그늘의 서늘함으로 위로를 받았는데, 또 벌레를 준비하여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신 즉 그늘이 없어지고 햇빛과 함께 뜨거운 동풍이 불자 요나가 뜨거움을 인하여 또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이 “네가 하루 있다가 없어진 박넝쿨도 아끼거든 하물며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앗수르 백성 12만여 명과 그 육축을 하나님이 아끼시지 않겠느냐?”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광범위한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기의 옹졸함을 깨닫고 사랑과 이해의 폭을 넓혔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서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 나라도 일반은총에 근거하여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가 선민을 괴롭힌 것은 선민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몽둥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미워하기 전에 자기들의 죄부터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열 가지입니다. ①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는 하나님, ② 요나의 거역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③ 요나의 거역하는 길에 풍랑을 주시는 하나님, ④ 요나가 제비 뽑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 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바람을 그치게 하신 하나님, ⑥ 요나를 살리기 위하여 물고기로 삼키게 하시고, 또 육지에 토하게 하신 하나님, ⑦ 박넝쿨로 그늘을 주시고, ⑧ 벌레로 그늘을 없애시며, ⑨ 또 뜨거운 동풍을 주셔서 요나를 일깨우시고, ⑩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롬 3:29). 출애굽 때 선민들과 같이 나온 사람들을 선민처럼 취급하셨고(레 19:33, 민 9:14), 기생 라합과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가나안) 여인, 고넬료가 다 이방인이었습니다(마 1:5, 요 4:1~4, 마 15:22, 막 7:26, 행 10:1).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의 택한 자가 있다는 것과 이방인 구원의 시기가 오순절 이후부터이지만, 그 이전에도 전적으로 제외된 것은 아니란 점을 아셔야 합니다.

2) 요나가 연단 받은 역사입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거역자에 대한 징계를 체험 못 하였다가, 체험한 후에야 깨달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신즉 이방인들도 크게 회개하는 것을 깨달았으며, 고난 중(물고기 뱃속에서)에 기도하였고, 풍랑이 자기 탓임을 알았을 때 자기 하나의 희생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희생심이 있어서 “자기를 물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두 번이나 죽기를 간구한 심정은 연약이지만, 하나님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3) 뱃사람들은 풍랑을 만났을 때, 자기들 방법으로 신을 의지하였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중심으로 섭리하셨고, 앗수르의 왕과 백성들이 요나의 외침에 굴복 당한 것은 역시 회개할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눅 5:32, 행 11:18, 딤후 2:25)의 역사에 의함인 것으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요나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방인 뱃사람들이 부르짖는 신에게 굴복되거나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아무리 이단이 많이 설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두려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통신앙을 지키는 것만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94과 니느웨와 요나 (욘 1:1~3)목록으로


“니느웨와 요나”란 제목 아래 몇 가지 보충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1970년대에 장로교통합측 신학교 교수로 재임한 선교사 길기수란 분이 “요나서는 신화”라고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길 선교사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갔지만, 그의 신학사상을 적당한 방법으로 옹호한 분들도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실제 사건으로 믿어야 할 것을 신화로 믿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요나서를 정경으로 믿어야 할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1)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이란 말씀이 역사적 인물로 왕하 14:25에 나타난 점과, 2) 지리적 형편에서 합리성을 이루는 점과, 3) 권위 있는 역사 문헌인 마카비서(주전 2세기경 마카비 왕조에서 기록한 문헌)에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였다 하며, 4)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는 예수님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신 점입니다(마 12:39, 40, 16:4, 눅 1:29~32). 마 12:39을 보시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 하시므로 예수님이 요나의 사건을 표적으로 입증하셨고, 또 “요나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음 같이 인자도 밤낮 3일을 땅속에 있으리라” 하시므로, 요나가 물고기에게 먹혔다가 살아난 사실을 역사적 표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요나서의 정경성과 역사성을 확실히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니느웨”에 관한 것입니다. 니느웨는 예루살렘 동북쪽 약 1,000km 지점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노아의 손자(셈의 4자 중 1)로, 나라를 건설한 후 바벨론에게 예속되었다가 주전 1,400년경에 독립하였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이스라엘 국과 대립하게 된 것은 주전 800년경 므나헴왕 때에 침략하여 조공을 받은 일이 있었고(왕하 15:19~29), 또 주전 734년경에는 아람과 이스라엘(북) 유다를 침략하였을 때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구원을 청하여 앗수르 왕 “티글낫빌레셋”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16:7~9). 이와 같은 일들로써 북왕국과의 사이는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은 요나의 시대보다 약 50년 후의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북왕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앗수르를 항상 원수의 나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3. 요나서를 살피면 네 가지 대상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요나와 이방인 여행객들과 앗수르 백성들입니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주만상을 다 통치하십니다. 선민이 범죄 하였을 때, 앗수르를 몽둥이로 쓰시기도 하였고(왕하 17:19~25), 앗수르를 일시 보호하시기도 하셨으며(요나서), 또 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특별섭리로 다스리시고, 또 일반은총에 따라 이방인들과 자연계와 미생물까지 다스리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감찰과 간섭에서 추호도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요나와 한 배를 탄 선장과 선객들인데, 이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타난 특징은 ① 죄인이 있을 때 신이 재앙을 내리는 줄로 안 것과, ② 죄인을 찾을 때 제비를 뽑으면 신의 도움으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③ 각자가 자기의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라 하므로 모든 신을 대등하게 여긴 점을 알 수 있고, ④ 죄인을 벌하면 신이 진노를 거두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신앙에 바른 지식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신앙과 성도의 신앙에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하여 같은 종교로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3) 앗수르의 백성입니다. 앗수르 백성들은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1:2) 하실 만큼 죄를 많이 졌으나, 요나가 하룻길을 행하며 회개할 것을 외쳤을 때 놀라울 만큼 회개의 역사를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동반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18, 딤후 2:25).

4) 마지막으로 “요나”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① 요나는 평소에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적국(앗수르)을 증오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민족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앗수르를 몽둥이로 쓰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침략자들을 미워하기 전에 먼저 자기 민족을 상대로 회개를 외쳤어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앗수르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또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③ 하나님의 뜻과 명을 거역하면 벌받는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④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체험을 하였으니, 자기를 죽이는 체험, 고난 중에서 기도하는 체험, 또 죽음에서 사는 경험, 복종하고 전도하였을 때 회개의 역사가 있음을 체험하였고, 나아가서는 40일 후에 멸망당하게 하실 것을 돌이키시는 것까지 체험을 한 것입니다. ⑤ 그래도 앗수르가 망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원수 갚는 마음을 풀지 못하였으니, 아마 요나의 가족이 앗수르군에게 멸망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성도이면 그런 완고한 마음도 돌려야 할 것입니다. ⑥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물에 던지라” 한 요나가 앗수르에는 호의를 베풀지 못하여 차라리 “자기를 데려 가시라”고 호소할 정도였지만, 하나님은 박넝쿨 그늘을 귀하게 여긴 요나를 일깨워, 12만 명 더 되는 앗수르의 백성들과 생명체를 사랑하심이 마땅함을 그의 생활 체험을 통하여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제95과 미가서의 대략 (미 1:1~7)목록으로


“미가서의 대략”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가”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 같은 자가 누구냐”란 뜻이라고 합니다. “미가”는 유다 열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모라셋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에 대한 기사가 렘 26:18~19에도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히스기야왕이 미가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가”는 이사야보다 후시대 사람이고, 예레미야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시기는 주전 740년~680년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미가”가 모라셋 사람이란 뜻은 그 지역이 유대 땅 서편 블레셋에 인접한 지역(가드모라셋)이므로, 유대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를 전하였다” 하셨으니(1절), 이 뜻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예언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제목별로 분류한다면, 죄 책망, 멸망 예고, 권면, 메사야적 구원 예고, 선지자의 탄식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장별로 나타난 말씀을 요약한다면, 1장에서 서론(1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2~4절), 북왕국의 우상 숭배 지적(7절)에 대한 말씀이고, 2장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을 압제하는 죄(1~4절), 선지자 핍박에 대한 말씀과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 증언하는 내용(6~11절)입니다. 3장에서는 정치가들의 공의를 멀리 하는 죄(1~4절), 거짓 선지자의 감언이설죄(5~7절), 성직자들이나 치리자들이 뇌물을 먹고 삯을 위하여 일하는 죄(9~11절), 4장에서는 미래에 있을 영적 은혜와 승리의 은총을 예언하셨고, 5장에서는 미래에 있을 영적 은혜의 구체적 실현으로 메시야가 탄생할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예언하셨으며, 6장에서는 잘못을 깨닫고(10~16절) 의롭게 행하는 방도를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권면하셨으며(6~9절), 7장에서는 말세에 부패가 심하지만(1~4절) 신약의 교회가 승리할 것과(8~15, 18~20절) 원수가 패망 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6~17절). 미가서의 내용을 상세하게 살피고 정리하면 좋겠으나 그럴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다만 미가서에서 강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6:6~8과 7:7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1. 미 6:6~8에서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세 가지”를 말씀하셨으니, 곧 “공의를 행하고 인자(사랑)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래서 성도는 공의를 행하고, 또 공의를 일삼아야 합니다(시 15:2). 하나님이 공의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1년 된 송아지나, 천 천만의 수양이나, 맏아들(헌신적 역할)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공의롭게 사는 생활이 물질이나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공의가 무엇입니까? 매사를 옳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사건과의 관계, 단체와의 관계 등등에서 자신의 처신을 명분 있고, 합리성 있게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살기 운동과 같은 것입니다.

2)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인즉, 이것은 사랑 실천을 크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고, 믿음의 증표요,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이고, 또 상급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마 22:40, 야 2:20, 요삼 3:10, 마 25:31~46). 성직자는 삯을 인하여 일하고, 권세자는 뇌물로 재판하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압제하니, 사랑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데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은 물론 교만한 자를 멀리하신다는 뜻입니다. 벧전 5:5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고, 또 자신을 뉘우쳐 회개할 수도 없으며, 은혜를 사모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절대적 요소입니다. 사울이 겸손할 때 왕이 되었으나, 교만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고, 하나님이 사울을 붙으시지 않은즉 인기는 다윗에게로 돌아갔고, 사울은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2. 7:7에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죄악은 만연되어 있고, 하나님은 징계와 멸망을 예고하셨으며, 의로운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아 없어지는 때에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만 우러러볼 따름이란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인간 단체 또는 이웃과 협력하며 살다가, 그 이웃을 떠나게 되어 고립되었다고 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우러러보고 앙망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고, 천지를 진동시켜 역사 하시며, 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롬 15:13, 히 12:26, 시 60:2, 롬 4:17).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쫓겨났을 때, 물 없는 사막에서 방성대곡한즉 “하나님이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눈을 밝혀 샘물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하시매 그가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다”(창 21:14~20)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또 변화가 많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도움이 희박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오직 하나님만을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96과 성전 재건의 역사(役事) (학 2:6~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전 재건의 역사”란 제목 아래 학개서의 의미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1에 보시면, 하나님이 바사국의 다리오왕 2년 6월 1일에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예수아, 라 3:2)에게 증언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파사 왕 고레스 원년에 1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헐어진 성전을 재건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때 함께 온 백성들의 수는 42,360명이었는데(라 2:64, 5:1~2, 6:14)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2년 2월 후에 재건 역사를 시작하였지만(라 3:8) 대적자들의 반대, 고발로 인하여 역사를 그치게 되었는데(라 4:23~24), 학개 선지자가 사역한 시기는 “다리오왕 2년이라” 하셨으므로(라 4:24~5:1, 학 2:1) 그때까지 20년간 끌면서 완공을 보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에게 성전 재건 속행에 대한 말씀을 주셔서 그 내용을 당시 지도자들에게 전하였고,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의 경고를 받음으로 다시 힘을 내어 4년간 공사를 하므로 고레스왕 6년 12월(아달월) 3일에 준공하게 된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은 구약 성전과 신약의 예배당의 의미를 구별하여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예배당을 잘 지으려는 마음에서 구약 성전의 건립을 신약시대의 예배당과 같은 수준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봉헌식까지 같은 의미로 재연하는 경우가 있으나(라 6:16), 구약의 성전과 신약시대의 예배당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 뿐이고, 계시의 식양대로 짓게 하셨으며, 제사 드리는 목적으로 쓰셨고, 또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의 몸을 뜻하는 계시적 방편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21). 그런데 십자가를 계시하는 모형적 제사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필요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은 후에는 구약 성전의 용도가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의 개념(계시와 믿음 방편)으로 사용하던 성전은 없는 것이고, 다만 예배 드릴 장소와 건물만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대중이 예배를 드리려니까 장소, 건물, 시설이 필요하게 된 것일 뿐, “예배당을 지으라” 하셨거나, “헌당식을 하라”고 명하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예배당을 갖고 싶다고 부탁하신 일도 없고, 돌아가시기까지 집도 가지신 일이 없으며, 열 두 제자와 함께 성만찬을 베푸실 장소도 빌려쓰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예배당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용하고 집합소가 되게 하려니까 상당한 시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어느 곳에서나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즉 장소와 건물을 초월하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구약시대에는 성전이 신앙의 필요조건(성전에 가야만 말씀 듣고 제사 드림)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성경을 필요조건(은혜의 방편)으로 주셨기 때문에, 장소와 건물은 부수적 시설로 전락한 것입니다.

2. 구약시대 성도들의 신앙의 구심점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편이 되는 성전을 재건하다가 20년이나 방치한 상태에서 학개 선지자가 무슨 말로 권면하였습니까? 1장에서는 “건축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 하면서, 먼저 주택 건립을 한다면 하나님이 재물의 복을 주시지 않는다. 보아라. 현재 농산물 소득이 현저하게 줄지 않았느냐? 하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하셨고, 2장에서는 “재건하는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만큼 크지 않아도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 만국의 보배와 은금이 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냐? 또 하나님은 천지를 진동시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건축 헌금을 성실히 하여라. 좋은 일을 형식적으로 하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나쁜 일을 형식적으로 하면 그 형식도 죄가 된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헌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증으로써 율법의 거룩해지는 법과 부정해지는 법을 설명하셨으니, “제물 된 고기가 다른 음식에 접촉되면 그 음식이 거룩해질 수 있지만 제물을 씻던 옷자락이 닿았다 하여 거룩해질 수 없다 하시지 않았느냐?” 이와 같이 옷자락 같은 형식적 봉사로는 복 받을 체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요(레 6:27), 그 반대로 시체를 만진 자는 그 손으로 다른 것을 만져도 부정하게 되니까(민 24:22) 잘못하는 것은 그 형식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오묘한 설명입니다. “너희들이 이 말씀을 듣고 성전 재건에 힘쓰면 하나님이 오늘부터라도 복을 주실 것이다. 재물은 물론 열방의 적들까지 물리쳐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당이 하나님을 섬기는 용도로 필요하고, 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봉사, 구제, 전도도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일을 하심에 있어서 소극적이거나 구경꾼처럼 되지 마시고, 적극성 있게 시행하실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교훈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의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 또 하나님은 천지를 진동시켜 복을 주신다”(2:6~7)고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무슨 일이나 선한 일을 중단한 일이 있으면 적극성 있게 다시 힘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계시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시의 주이신 예수님이 오셨은즉 유형한 건물과 의식적 계시가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단체예배나 단체적 행사의 집합소가 필요한 것 뿐(그것을 예배당이라 함), 성전같은 거룩한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을 하나님이 쓰셨다면 신약의 예배당은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제97과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10)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하다가 훼방자들의 음모로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움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을 때, 학개 선지자의 격려도 있었고, 또 스가랴의 예언이 있어서, 짓다가 중단된 성전을 4년만에 필역한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라 4:24, 6:15). 따라서 스가랴서는 그 시대와 내용에 있어서 에스라서와 학개서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때에 스룹바벨은 총독이었고, 예수아는 대제사장으로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학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므로, 성전 재건 역사에 힘을 전달한 것입니다. 자주 말씀 드린 일이 있지만, 신약적 신앙생활은 근거를 성경에 두기 때문에 예배당 같은 집회소 건립에는 큰 의미가 없지만, 구약시대에는 성전제도가 신앙의 전체적 구심점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성경이 개인의 손에 없었고, 또 메시야적 구속 사업도 모형적 제사로 믿음을 갖게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헐어진 성전의 재건을 곧 타락한 신앙과 하나님 멀리 하던 생활을 되살리는 심령부흥과 같았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 재건은 중요한 것인데 어떤 훼방의 역사가 있다 하여 서둘지 않거나 건축헌금을 더디 내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므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이를 책망하였고, 특히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계시를 전달하므로 성전 재건의 역사와 선민적 신앙의 부흥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도우시고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1. 본문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강의 얼음을 녹일 때 약간은 사람이 녹일 수 있지만, 전체가 녹을 때는 하나님이 기온을 높이시거나 봄을 주셔야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 부흥과 교회 부흥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도우시면 사람 앞에 태산 같은 장애도 평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핵 문제가 남북 문제로 태산 같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면 그것도 평지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대 지대를 놓았은즉 하나님의 신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완공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10절을 보시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면 안 된다” 하셨으니, 이 뜻은 본래 성전보다 작게 재건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과, 또 공사자들의 힘이 미약한 것을 탓하여 협조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성전의 재건과 많지 않은 백성들의 수고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일곱 눈으로 감찰하신다” 하셨고,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성전 재건을 위한 “다림줄(큰 자재를 옮기는 줄)을 붙잡는 것을 볼 때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4장 전체의 의미를 말씀드리면, 스가랴가 환상 세계에서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 계시는, 한 등대 위에 일곱 등잔이 있고 그 등잔 밑에 주발이 있는데, 등잔과 주발로 기름을 공급하는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기름이 공급됨에 따라 불이 켜지므로 등잔 밑에 있는 주발에는 기름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기름이 채워지는 것은 좌우에 서 있는 두 개의 감람나무에서 기름을 흘려 금관을 통하여 주발로 공급하는 광경을 보인 것입니다. 스가랴가 그것을 보여주시는 의미를 천사에게 물은즉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되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실 것을 나타내심이라” 하셨고, 또 일곱 등잔의 일곱이란 뜻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하나님의 눈이며, 두 감람나무의 뜻은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기름 발리운 자들을 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일곱 불빛은 하나님의 눈이라”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 비취시고 감찰하시는데 두 사람이 기름 공급을 꾸준히 하여 등잔불이 꺼지지 않게 함은 성령님의 역사로, 두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아 지도적 역할을 잘 하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끝내게 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성전 재건의 실무자는 스룹바벨 총독과 예수아 대제사장인즉(라 3:1~2, 두 감람나무의 뜻), 그 두 사람의 지도를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 종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뿐이므로 그 두 사람을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14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 말씀을 이 시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신앙 부흥의 방도로 받으셔야 합니다. 예배당 건축도 신앙 부흥을 위한 집이기는 하지만, 구약의 성전 같은 본질적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기름 공급은 성령님의 역사를 뜻하고, 두 감람나무는 성령 충만한 지도자를 뜻하는 만큼, 성령 충만한 교역자의 지도를 잘 받아서 그리스도의 빛을 꾸준히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부흥이 성전 재건에 있었다면, 신약시대의 신앙부흥은 성전을 자신의 몸이라 하신(요 2:21)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는데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98과 말라기서의 대략 (말 4:1~6)목록으로


“말라기” 선지자의 사역 시기가 성전 재건 이후, 즉 주전 450년경 이후라는 점에 대하여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의 “말라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말라기서의 대략은 느헤미야와 에스라 때에 상당한 정화운동을 펼쳤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여전히 부패한 상황을 지적하였고, “메시야의 큰 날”이 도래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에 대하여 선택적 주권을 행사하심에 따라 에서의 계열이 스스로 발전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고(2~5절), 또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음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6~14절).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예사 일로 알거나 번폐스럽게 여긴 것은 큰 죄에 해당합니다(13절). 이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예배나 말씀 상고나 기도를 예사 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장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때 저주를 하시되 “ 그 얼굴에 똥칠하는 것처럼 하실 것이라” 하셨고(1~3절), 정도에 서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으며(4~9절), 한 아버지의 자녀 된 선민들로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과(10~13절) 부부생활의 파탄을 일으키는 것을 지적하시고(14~16절), 그런 일들은 “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며, 멸시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7절). 3장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시는 사자(세례 요한)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과(1절), 메시야는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과(2~3절) 심판의 사역도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4~6절). 그리고 십일조 도적질하는 죄(7~12절),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책망하신 후(13~15절), 메시야 시대의 정한 날에 특별한 은혜가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6~18절). 그 특별한 은혜란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아들처럼 아끼시며, 의인과 악인, 또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에 대하여 확실히 분별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장에서는 메시야 시대를 “풀무불 같은 날이라” 하셨으니(1절), 이는 예수님을 심판자로 설명하신 내용이고(3절, 마 3:1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임), 또 예수님을 “의로운 해”로 비유하여 희망 없는 백성들에게 생명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절). 그리고 “너희는 모세의 법을 기억하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메시야 탄생)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세례 요한을 비유로 설명하심)를 너희에게 보내어 타락한 도덕성(부자간의 갈등, 6절)을 회개케 할 것이라.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로 땅을 칠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1.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책망하시고 제사 의식의 정성이 모자라는 것을 책망하셨으니, 여기에 착안하여 신약의 성도가 예배에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성이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며, 경성한 태도로 말씀을 듣고, 늘 자신을 반성하면서 회개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간의 화목에 대한 것입니다. 2:10에 보시면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하시므로 형제의 불화를 책망하셨고, 또 부부간의 불화로 인한 가정의 파탄에 대하여서도 성도가 지켜야 할 윤리를 교훈하셨습니다.

3. 십일조와 헌물(정품이 못 되는 제물, 1:7~8)을 옳게 드리지 않는 것을 도적이라 하시고 크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십일조와 헌물에 대하여는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근거하지만, 신약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마 11:13). 신약시대는 봉사적으로 헌신하는 각자의 양심적 신앙에 근거합니다. 십일조를 못 박듯이 율법에 근거하여 강조하는 사례가 있지만, 율법주의에 얽매이지 않도록 교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의로운 태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태양은 온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또는 “광명한 새벽별(아침별)이라”(계 22:16) 하신 말씀과 부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별이나 빛으로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민 24:17, 요 1:9, 마 2:2, 눅 1:78, 시 84:11, 계 22:6). 빛은 만물 소생의 원천으로 곧 생명을 뜻합니다(요 14:6). 예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출 15:26). 죄병, 육병, 생활의 병을 다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마음에 평안과 소망을 가지며,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생각하여, 마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는 것처럼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한 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난 일이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며, 책망이 없는 세계는 암흑 세계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 말기에 부패 상황을 지적하였고, “돌이키지 않을 때는 저주받을 일이 두렵다”고 하셨습니다(4:6).

 

10. 절기(신년, 부활, 가정, 감사, 성탄) 설교


제99과 새 출발하는 마음 (히 3:14) 목록으로


신년을 새 출발하면서, 한 해를 의미 있게 살기 위하여 “새 출발하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도의 바른 마음가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을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롬 10:10, 약 1:21), 마음가짐이 행복을 좌우하며, 마음가짐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한 마음을 주시고(시 51:10),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며(겔 36:26), 또 마음을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빌 4:7). 본문에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란 말씀이 있지요. 이 말씀이 곧 “시작을 확실하게 하라”는 뜻인데, 마음의 생각과 목표가 확실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활을 견고히 지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2. 그렇다면 새 출발을 함에 있어서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1) 자족하지 못하던 마음을 자족으로 바꾸어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분이시고, 또 후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딤전 6:17, 고후 9:8). 또 “자족을 배우라”는 말씀도 있고(빌 4:11),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므로 족한 줄 알며(딤전 6:8),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실 때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시 23:1). 또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롬 12:16). 그렇다면 모든 성도가 은혜의 핍절을 느끼지 말고, 받은 은혜를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좋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가 없어 부족을 느꼈다면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과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많이 가진 것을 자기 표준으로 알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만족한 마음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2) 반드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도들의 생활을 살피면 보편적으로 감사생활과 감사기도가 적습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은 감사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롬 8:28). 지금까지 축복을 적게 받은 것처럼 생각하였던 것을 후하게 받은 줄로 믿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자세로, 새 출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만족에 의하여야 하고, 기도의 요건이라고도 하셨습니다(빌 4:27).

3) 혹이라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떤 상대방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셨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을 깨끗이 잊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불안이나, 섭섭함이나, 누구에 대한 유감을 품는 마음은 은혜를 받는 일이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를 드릴 때 먼저 “대인관계의 회복을 이룬 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새 출발을 하는데는 화목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3. 어떤 목표를 갖고 새 출발을 하셔야 할까요?

1) 세월 아끼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엡 5:16). 예수님은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사셨고(막 3:20), 바울 사도께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하셨습니다. 다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시겠지요. 세월은 빠르고, 인생은 짧습니다. 아무쪼록 보람있는 일만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특히 텔레비전을 보실 때 유익이 가장 많은 프로그램을 선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괴테(독일, 시인, 작가, 과학자, 1710~1782)란 철학자가 말하기를 “생산성 있는 것만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생산성 있고 진보성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딤전 4:15). 젊은 사람들이 여기에 치중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는 말처럼 부스러기 시간을 잘 활용하여 큰 유익을 도모하는 생활이 되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목표로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이는 예배시간만 동행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새로운 결심과 목표는 24시간 연속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기도를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습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구원이십니다. 산소 통을 입에 물고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이, 그 산소를 생명 줄로 알고 붙잡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모신 생활을 그렇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잠 8:20에서 “하나님은 정도로만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정도로만 가야만 예수님을 든든히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만 가까이 모시고 살면, 안전 문제, 사명 문제, 생애의 보람 문제가 다 우월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마 9:15).

3)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께서 아시오매 주님의 처분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주시는 분”입니다(마 6:8, 32, 히 4:16).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시 37:5). 맡기는 사람은 자기의 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 절약과 예수님과의 동행에서 충실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더 보람있게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바른 마음가짐과 바른 목표 아래서 발전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0과 부활과 교훈 (요 11:25~26)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부활과 교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해마다 봄철 되면 부활절 행사를 크게 합니다.

1. 문제는 그 행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무슨 유익을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우선 부활 주일은 봄철에 지키지만 그 날짜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종교 회의에서 “매년 춘분과 만월이 지난 후 첫 주일로 하자” 하여 그것이 전통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전통은 진리가 아니니까 우리는 그 날짜에 얽매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2) 그런데 부활 주일이 되면 늘 새벽 연합 예배를 보았는데 금년(2002년)부터는 오후 시간에 모인다고 하니까 그 전통도 100년만에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부활절 되면 찬양 대원이나 여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교회에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부활을 알린 천사가 흰옷을 입었다하여 그것을 모방한 것일 뿐 부활의 직접적인 교훈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흰옷을 안 입어도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4) 부활절이 되면 삶은 계란을 나누어주는 관례가 있는데 나누어주려면 생명 있는 산 계란이 더 좋을 것입니다. 산 계란은 부화되어 부활의 이적을 어느 정도 나타낼 수 있지만 삶은 계란은 먹기만 좋을 뿐입니다. 계란을 주므로 부활의 능력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부활을 믿는 성도는 계란을 안 받아도 믿습니다. 또 부활을 안 믿는 성도가 계란을 보고 믿을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짜나 행사나 상징이 부활의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이 부활의 의미를 주는 것인가? 할 때

1)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셨다. ②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셨고, 또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으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요, 진실하신 분이다. ③ 이 세상에서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물질 창조가 아닌 생명 창조인데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신 것은 “최고의 기적을 나타내주신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곧 부활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④ 예수님은 악한 자들과 죄를 대항하여 싸우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패배를 당한 것 같았지만 결국은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다는 뜻은 곧 마귀와 싸워 승리하신 뜻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마귀에 대한 인간 삶의 승리인 것입니다. 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죽을 수 있는 현실의 몸으로 부활하셨다면 악한 자들이 또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통과 사망이 있을 수 없는 몸이요, 그러나 보고 말하고 잡수시고 만질 수 있었으며 다닐 수 있는 몸이고, 공간을 초월하시고 나타나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는 신비한 몸, 즉 하늘의 육체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⑥ 그리고 또 예수님의 부활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중보하시며 심판주 되시기 위한 부활이란 것은 믿는 성도만 그렇게 믿고 아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 자신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일까요?

1)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고(벧전 3:21),

2) 믿음의 능력과 믿을 내용을 주셨습니다(고전 15:2).

3) 그리고 우리들 자신들의 부활과 천국의 영생을 주셨으며(요 3:17)

4) 무정죄 심판과(요 3:18)

5) 영원한 중보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요 16:23~24).

4.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절을 지키는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믿을 것은 부활 교리대로 믿어 구원을 받고

2) 영생을 사모하면서 사시되 영생을 사는 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곧 우리의 구세주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집이 헐리면 더 좋은 집이 지어진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죽음을 희망으로 삼으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요 11:25~26). 따라서 “영생을 살고 있는 생활, 영원한 계획으로 사는 생활” 그 자체가 부활절을 지키는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101과 자녀 교육에 대한 반성 (신 6:5~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녀 교육에 대한 반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으니까요(7절). 이 말씀은 부모가 선생님 노릇을 직접 못하면 대리 선생님이라도 세워서 가르칠 책임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선생님이나 교회 선생님의 책임은 이차적일 뿐 교육의 전체 책임은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2. 부모가 교육자의 입장을 취할 때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 보시면 먼저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잘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6절)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한글 교육이 성경에서 시작된 것처럼 옛날 모세 시대에도 교육의 지침서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쳐야 할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길 만큼(새긴 글자는 지워지지 않음) 깨닫고 실천하여 자기의 것을 만든 다음에 자녀 교육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지식과 생활에 모범이 못 된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3. “굉장히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앉았을 때나 다닐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도 강론하고 또 여기 저기 기록하여 보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7, 8절). 이것은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는 뜻도 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파에 물들어 악의 길로 나갈 우려가 많음을 암시한 뜻도 있는 것입니다. 잠 1:10~19에 보시면 “악한 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를 말씀하셨는데 악의 세파가 파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생명줄(교훈)을 든든히 붙잡지 않으면 결국 속게 되고 넘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속지 않는 일로 알고 넘어갑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다단계 판매책에 넘어갔고 그 주모자가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자녀들이 지혜로운 교훈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속고 사는 줄로 아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4. 언제부터 가르쳐야 좋으냐?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태교란 것과 5세 이전의 교육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지성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기도나 정서적 마음의 바탕을 닦는 목적으로 교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5세 이전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잠재적으로 좋은 마음을 갖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고,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지혜가 있으셨던 것처럼(눅 1:15, 2:52) 그렇게 되도록 기도를 힘쓰시고 또 환경을 만들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담배 연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 영향이 나의 총명을 많이 둔하게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2) 6세 이후부터 지각과 생활에 영향을 주는 교육을 하셔야 하겠지요. 여기에는 반드시 부모의 시간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젊은 부부가 다 직장에 나가고 집에 오면 피곤하니까 아이들을 붙잡고 가르칠 기회가 거의 없겠지요. 유치원이나 학교 교육은 1:1의 교육도 아니고 부모로서의 교육도 아니며 학문과 제도상의 교육일 뿐입니다. 어떤 교수님이 말하기를 “아이는 아이들과 잘 통하니까 어른이 아이 입장이 되어 같이 놀고 생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좋지만 젊은 부모가 돈 벌러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는 돈 벌고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10세 미만의 손자들을 빈틈없이 가르칠 수 있어야 교육이 잘 될 것입니다.

5.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1) 성경을 국어나 수학처럼 가르쳐야 합니다.

2) 그 다음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을 가르치고(성경공부와 기도),

3) 부모 공경하는 일을 가르치고,

4) 근면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5) 이웃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6) 그리고 학문은 학교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6. 그러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이 잘 되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집은 목사 집에서 목사 자녀가 나왔는데 또 어떤 집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으며 또 어떤 자녀는 패륜적인 부모 밑에서도 선하게 성장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이는 고통스런 환경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섭리적 은혜인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닙니까? 이 사회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도망가서 없고, 어린 손녀가 병든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바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세속에 눈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려운 환경이 그에게는 좋은 교육의 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억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7.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바쁜 일정에 끌리고 퇴폐한 취미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의 시간을 할애하여 대화와 교육과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 발전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제102과 효에 대한 교훈 (엡 6:1~3)목록으로


1. 본문에 보시면 효도는 주 안에서 부모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고, 또 축복이 약속된 첫 계명인데 그 축복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 된 자녀들이 이 두 가지 말씀을 잘 실천, 유의하지 않는 줄 압니다.

1) 우선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만 행하려고 합니다. 5월 8일에 앞서 저의 둘째딸이 카네이션 화분을 갖고 왔기로 “부모에게 꽃을 달아주는 것보다 더 실속 있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혹 5월 8일에 부모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을 물어온다면 “나는 음식이나 옷이나 용돈은 싫으니 너 자신의 혼사를 위하여 하루 한 번씩 기도하는 것을 약속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으나 부모의 뜻을 묻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돈 20만원을 모아서 용돈을 쓰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안한 것보다는 낫지만 부모의 뜻을 이해하는데는 0점이었습니다. 부모는 돈 20만원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20만원의 공돈이 생겼다 하여 그것을 써야할 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효도는 자녀의 표준으로 하면 안 되고 부모의 뜻을 따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주 안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어떤 자녀가 돈만 보내고 부모 곁에 오지 않거나 부모의 뜻을 거역하면서 선물을 보냈다면 그것도 바른 효도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자식은 사랑하면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을 외면하면서 인륜적인 것만 실천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경외하면서 효도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효도 조건으로 약속하셨으니 이 뜻은 부모 된 사람과 자녀 된 사람을 다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축복을 이용하지 않는 자녀들이 많은 것은 퍽 유감입니다.

2. 성경에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127:3). 부모가 자녀를 낳고 양육한 만큼 부모가 늙고 자녀가 성장하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고생시키지 않고 양육하였거나 효도의 본을 보였으면 자녀들에게 당당히 “효도하고 섬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자녀들을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하더라도 그 자녀들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자신들이 고난 중에 연단 받고 성장한 것을 다행으로 알면서 부모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효도를 잘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효도를 못한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효도하라”고 명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장 “부모도 효도 안 하고 왜 나만 하라고 하느냐”고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처럼 하지 말아라” 하고 부탁하여야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안된 일입니까? 이 자리에는 부모 된 분, 자녀 된 분, 부모와 자녀를 겸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다 실천 모범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실천 모범이 효도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다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들에게 용돈을 구해도 분수에 알맞게 쓸 것만 구하셔야 하고, 또 자녀들은 자기 생활 가계에 적당한 분량을 부모 부양책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부모는 이웃이나 정부나 교회의 도움을 받으셔야 마땅하지만 자녀가 있는 부모는 반드시 자녀가 기업이 되도록 자녀의 섬김으로 노후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잠 1:10, 2:1, 3:1, 4:1, 5:1, 6:1, 7:1 등에 보시면 솔로몬왕이 “내 아들아…너는 어떻게 해라”고 훈계한 말씀이 있고, 또 잠 31장에서는 르무엘왕의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훈계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라도 부모의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을 더 산 부모나 노인들의 경험은 바로 역사적 교훈입니다. 상식도 많고 경험도 많습니다. “형 만한 동생이 없다”는 말처럼 자식이 어찌 부모만큼 알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뜻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잠 31:10에 보시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찾기 어렵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누가 좋은 남편을 찾아 얻겠느냐”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효도한 룻이 보아스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땅에서 잘 되게 하시는 방법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을 꼭 활용하세요. 그 반대로 행하시지 마시고. 요즈음은 옛날처럼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머리를 잘라 팔아서 고기를 안 사와도 됩니다. 말로만 효도하셔도 됩니다. 부모님 장수와 건강을 위해 기도하시고 “진지 잡수세요, 무슨 반찬을 할까요, 차 한 잔 드릴까요, 나가서 산책하세요” 하면서 입으로만 효도해도 상당하게 부모님을 위안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모를 거부하거나 부모와의 대화를 멀리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혹 그런 분이 있다면 땅에서 잘 되지 않는 것이 그 탓인 줄로 아시고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혹 잘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목사의 축복 기도가 부족한 것이 아니고, 효도가 부족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03과 감사할 근거 (살전 5:18)목록으로


감사에 대한 말씀을 가장 비중 있게 주신 말씀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감사할 것을 명령으로 주신 말씀이고, 감사의 범위는 범사이며 감사할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에 대한 묵상을 해보셨습니까?

1. 감사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시려면 “감사의 뜻”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감사는 은혜 주신 대상과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2) 그 은혜의 대상과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내게 …한 은혜를 주셨다” 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3) 그 은혜주신 대상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 표시는 마음으로 해도 되고, 말로 해도 되며 또 은혜주신 대상이 기뻐하는 것으로 표시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골 2:7에 보시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하셨으니까 감사는 많이 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감사 없는 세상으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물 없는 땅 같을 것이고, 맹수가 들 끊는 세계 같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살 수 없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도덕의 극치입니다. 도덕과 예절이 없는 세계는 폭력과 약육강식만 있을 것이니 짐승도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2. 이 시간의 제목은 성도가 감사할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두셔야 합니다. 감사할 이유를 따지기 전에 “감사하라” 하신 명령이 있으니까 무조건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이유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뒤를 살피거나 망설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과 명령이 있으면 무조건 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으니까 그 범사의 뜻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범사는 모든 것 전부를 가르칩니다. 환난도 감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이가 죽은 집에 가서 “감사하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성도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섭리가 있으실 것을 믿고 속으로는(혼자서)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이니까 무조건 감사하시고

2) 구원받은 은혜를 늘 가장 큰 은혜로 생각하면서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은혜,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은혜,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시민 된 은혜, 영생 천국을 가게된 은혜가 전부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큰 은혜란 것을 잊으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3) 보호, 안전의 은혜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붙드시고 지켜주십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 10:29). 또 안전을 주시려고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신 32:10)고 하셨습니다. 시 121편에서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키시되 영혼과 육신을 지키시고 출입을 지키신다” 하셨으니 하나님의 보호가 성도들 곁을 한시도 떠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그런 믿음을 갖고 살 때 더 잘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마 9:29).

4) 의식주 해결에 대한 은혜를 감사하셔야 합니다. 딤전 6:8에 보시면 복음 사역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는 대접을 많이 받는 고급직 사역자인데도 “의식주 해결로 만족하라” 하신 것을 보면 그 이외로 더 갖고 누리는 것은 고려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 이 말씀이 옛날의 가난하던 시절을 표준 하여 “먹고살기만 하면 큰 은혜로 알라”는 뜻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을 체험한 성도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 것입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농사를 짓고 보리를 수확하였다고 할 때 그 기쁨과 만족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중에 사치를 목표로 삼고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여 답답한 심정을 갖는다면 의식주 문제 해결만으로 감사하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도가 넘치는 은혜를 깨달으면 누리는 생활의 욕구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빌 3:8).

5) 국가와 사회적 은혜입니다. 국가가 신앙의 자유를 통제하고 인권을 밟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회와 정치를 크게 감사하셔야 합니다.

6) 섭리적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섭리적 은혜란 하나님이 성도의 길을 인도하시되 광야 40년을 지나게 하셔도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한 것처럼 고난도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섭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창 45:7, 롬 8:9). 모든 일에 희망을 갖고 감사하는 것이 섭리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상 여섯 가지 감사 근거를 잘 기억하시고 정신부터 감사가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04과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6~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면 사도 요한의 증거와 사도 요한이 증언한 세례 요한의 행적이 나타나 있는데, 14절과 16절을 보면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셨고, 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이 “은혜 위에 은혜”란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충만한 것을 감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복수는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공감한 사실을 나타낸 것입니다.

1.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한 은혜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빛이 어두움에 비췄고 그 빛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땅에 오셨으며, 또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지만 알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과, 그분을 직접 보게 된 것과, 그분을 통하여 은혜 받게 될 것을 충만한 은혜로 알고 감탄한 것입니다.

2.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3년이나 짧은 생애를 살면서, 자기를 위하여 누린 것이 거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만 끝내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사명이고, 또 자기의 증거를 인하여 믿게 하는 사명이라”고 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 사명을 다 하였는가? 할 때, 최초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게된 사람이 그였고,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여(요 1:26~34), 자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였은즉, 그의 사명은 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남은 사명이 더 있다면, 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예수님이 들으셨을 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마 14:12), 그를 위대한 자로 칭찬하신 것을 보면(마 11:11) 세례 요한이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고백한 세례 요한이 현실적으로 받은 은혜가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면 그가 받아 누린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거주지는 도시가 아닌 거친 광야였는데, 약대 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 사람이 무슨 좋은 집을 가졌겠습니까? 집이 있었다면 토굴이었겠지요. 그에게는 가정이 없었고, 명예를 누린 일도 없으며, 예수님의 연세보다도 3년을 덜 살고 세상을 떠나므로 명실공히 현실적 축복으로는 누린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하다”고 감탄을 한 것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령한 은혜를 감사에 앞세우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작은 은혜를 크게 여겨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4. 세례 요한은 현세의 복을 받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생활에 비하면 짐승처럼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꼈으니, 곧 예수님이 빛과 구원자로 오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는 중, 자신들에게 믿음과 영접하는 은혜와, 또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와 사명을 주신 일에 대하여 “은혜 위에 은혜라”는 고백을 하였으니, 이것이 교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자리에 세례 요한처럼 살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감사할 성도가 있겠습니까? 오직 신령한 은혜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그 다음에는 작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 정동진 역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 “장관이더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데, 많은 성도들이 빵 한 개, 쓰다버린 폐품, 길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귀히 여길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며, 특히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루 먹을 것인즉 적은 것이고, 또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니까 “그까짓 것” 해도 되겠습니까? 그 적은 것이 그들의 생존을 붙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굶게 되었을 때,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습니다(왕상 17:6). 그것이 적은 은혜입니까? 그 떡은 우상의 제단에서 물어왔을 것이고, 고기는 맹수가 먹는 것을 물어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여 그 은혜가 적은 것입니까? 만일 그것을 적다고 여기신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작은 은혜를 다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호 2:9). 떡과 물과 기름과 양털과 술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을 우상이 주는 줄로 착각한 자들에게서 다 뺏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길에 떨어진 종이라도 한 쪽이 쓸만하면, 그것을 갖고와서 씁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평생 쓸 종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슥 4:10, 눅 16:10). 이 뜻은 작은 것을 은혜로 여겨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기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105과 성탄의 본질 (갈 4: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질”이란 성탄의 의미를 가장 뜻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1. 본문을 상고하겠습니다.

1) 1~3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임시조치법(완전한 법이 세워질 때까지 쓰는 것)으로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지만, 너무 어리면 그가 장성할 때까지 후견인이 관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후견인과 초등학문으로 율법의 입장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계명인데, 계명의 주인이며 모범자가 오시기 전에 임시로 주신 계명입니다. 모범자 예수님이 오셔서 모범을 보였다면, 계명 대신 “예수님처럼 살아라” 하면 될 것을 모범자가 오시기 전이니까 생활 원칙을 기록으로 주실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을 후견인, 청지기, 또는 초등학문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2) 4~6절에서는 “때가 차매(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는 때가 있음) 하나님이 그 아들을(즉 예수님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인간으로 탄생하신 것)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율법을 지키게 하심)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속량하시고(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이라. 그래서 아들의 영(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모범자요, 하나님의 아들,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성도가 율법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갖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율법이 정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사” 하신 것은 성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강조한 것”은 종처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아들처럼 자유로운 자가 되어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성탄절에 무엇이 생각나느냐?” 하니까, 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 징글벨 노래, 또 조금 발전한 것이 구세군 자선냄비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성탄과 관련된 직접적인 설명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탄의 본질(성탄과 관련된 기본지식)을 알면서 성탄절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중요한 것은 성탄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성탄의 뜻은 바로 때가 되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 날짜를 사람들이 비슷하게 짐작하여 정하였다고 합니다. 변하는 세월이니까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2)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떻게 오셨으며, 왜 오셨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려니까 동정녀 탄생이란 기적으로 출생하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에 두 가지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곧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을 겸하여 탄생하신 것입니다. 인간 된 신분은 인간처럼 출생하여 인간처럼 사시고, 인간으로 적응하신 후, 인간처럼 돌아가신 것입니다. 완전한 모범 인간이었습니다. 또 하나님 신분이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전지함을 나타내셨으며,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 속에 완전한 인간생활과 신적 권위가 다 나타난 것입니다.

3) 이런 분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요(요 14:9),

② 인간의 본을 보이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을 보였고, 또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요 13:15).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기 전에는 율법으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처럼 100마디 율법을 듣고 행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모범을 보고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종과 후견인과 초등학문으로 비유하셨고, 예수님은 아들과 주인과 완전한 지혜로 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날과 달과 제도, 격식을 따지는 것은 낡은 생활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냐, 아니냐를 따져야지요.

③ 죄인을 구원하는 중보자가 되시라고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시려니까 대속적 형벌의 고난은 인성으로 받고, 중보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영원토록 중보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배워서 알고, 믿어서 구원받으며,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가장 미흡한 것이 예수님처럼 잘 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많은 각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성탄절이 되면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에 비할 때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말과 증거로만 포장을 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