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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Ⅵ)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1. 하나님을 인식함에 대한 말씀


제1과 하나님을 알자 (1) (호 6:3)바로가기

제2과 하나님을 알자 (2) (호 5:13~6:3)바로가기

제3과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편 (롬 1:19~20)바로가기

제4과 만물이 보여주는 계시 (롬 1:20)바로가기

제5과 경영하시는 하나님 (잠 16:1~4)바로가기

제6과 쳐서 이르시는 하나님 (암 3:1~8)바로가기

제7과 하나님의 심판 (행 17:30~31)바로가기

제8과 예수님이 아시고 행하신 것 (요 13:1~11)바로가기

제9과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마 8:1~17)바로가기

제10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 (히 3:1)바로가기

제11과 하나님 지식과 기도 (단 2:17~23)바로가기


2. 성경에 관한 말씀


제12과 성경과 신앙 생활 (딤후 3:14~17)바로가기

제13과 말씀을 묵상합시다 (시 1:1~3, 사 66:1~2)바로가기

제14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 (시 1:1~3)바로가기

제15과 말씀을 좇아감 (창 12:1~4)바로가기

제16과 취미로운 성경공부 (신 6:6~9, 시 119:97, 103, 행 17:11)바로가기


3. 은혜 받음에 대한 말씀


제17과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3)바로가기

제18과 은총을 받는 방법 (잠 3:1~8)바로가기

제19과 은혜 받는 방법 (약 4:1~10)바로가기

제20과 보는 눈을 갖자 (계 3:17~18)바로가기

제21과 깨닫지 못하게 하심 (사 6:9~13)바로가기

제22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4:16)바로가기

제23과 장마비의 은혜 (겔 34:26)바로가기

제24과 남은 자에게 은혜를 주심 (렘 31:7~14)바로가기

제25과 하나님만 의지하자 (시 146:1~10)바로가기

제26과 새 것을 사모함 (전 1:2~11)바로가기

제27과 성도의 누릴 권세 (롬 13:1~2)바로가기

제28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 (요 1:12~13)바로가기

제29과 성도의 세 가지 체험 (시 118:1~9)바로가기

제30과 재건한 성전의 봉헌식 (스 6:13~22)바로가기

제31과 나만이 받은 은혜 (왕상 5:15~19)바로가기

제32과 신앙 생활의 맛 (시 119:97~104)바로가기


4. 믿음에 관한 말씀


제33과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19~26)바로가기

제34과 두 가지 믿음 (롬 1:17)바로가기

제35과 믿음의 성장 (벧전 2:1~3)바로가기

제36과 신앙 성장의 요소 (엡 4:13~15)바로가기

제37과 온전한 믿음 (히 10:22)바로가기

제38과 이해할 수 없는 일 (잠 30:21~23)바로가기

제39과 믿음의 책망과 칭찬 (마 17:17, 8:10)바로가기

제40과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자 (약 4:8)바로가기

제41과 욥의 신앙 (욥 2:7~13)바로가기


5. 구원에 관한 말씀

 

제42과 다윗의 신앙 (시 27:1~6)바로가기

제43과 십자가의 도 (고전 1:18)바로가기

제44과 구원 얻은 자가 적음 (눅 13:23~24)바로가기

제45과 강도가 증언한 진리 (눅 23:34~43)바로가기


6. 사명과 부흥에 관한 말씀


제46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 (대상 16:1~6)바로가기

제47과 하나님이 쓰신 사역자 에스라 (스 7:1~10)바로가기

제48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중건 (느 2:1~10)바로가기

제49과 몰각한 목자들 (사 56:9~12)바로가기

제50과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마 28:16~20)바로가기

제51과 부흥된 원인 (겔 36:22~38)바로가기

제52과 천국의 확장 (마 13:31~33)바로가기


7. 연단에 관한 말씀


제53과 고난의 유익 (1) (시 119:71~72)바로가기

제54과 고난의 유익 (2) (시 119:71)바로가기

제55과 징계 후의 은혜 (렘 31:1~6)바로가기

 

 

 

8. 생활에 관한 말씀


제56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28)바로가기

제57과 신앙 생활의 고백 (시 105:1~7)바로가기

제58과 성도가 지향할 목표 (빌 3:13~14)바로가기

제59과 하나님을 기뻐하라 (느 8:10)바로가기

제60과 신자의 생활 (롬 12:1~21)바로가기

제61과 진실되기를 노력함 (빌 1:9~11)바로가기

제62과 확실한 열매를 맺자 (마 7:15~20)바로가기

제63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신 22:11)바로가기

제64과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딤후 3:1~5)바로가기

제65과 화평케 하는 자 (1) (마 5:9)바로가기

제66과 화평케 하는 자 (2) (마 5:9)바로가기

제67과 화평함과 거룩함 (히 12:14)바로가기

제68과 빛의 자녀들 (엡 5:8~9)바로가기

제69과 빛과 소금 (마 5:13~14)바로가기

제70과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 (고전 13:40)바로가기

제71과 운동경기와 신앙 (고전 9:24~26)바로가기

제72과 왕 앞에 설 자 (잠 22:29)바로가기

제73과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17)바로가기

제74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왕하 4:2, 시 119:56)바로가기

제75과 원한과 송사 (눅 18:1~8, 고전 6:1~8)바로가기

제76과 생활 계획의 한계 (마 6:33~34)바로가기


9. 기도에 관한 말씀


제77과 기도에 대한 상식 (마 7:7~8)바로가기

제78과 기도의 필수 요건 (요 16:23~24)바로가기

제79과 기도할 때 유의할 말씀 (요일 5:14)바로가기

제80과 최후의 응답 (사 4:17)바로가기

제81과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바로가기

제82과 아브라함의 기도의 성격 (창 18:22~33)바로가기

제83과 다윗의 기도 (대상 29:10~19)바로가기

제84과 엘리야의 기도 (왕상 18:41~46)바로가기

제85과 뜻을 정한 다니엘 (단 1:8~16) 바로가기

제86과 바울의 기도 특징 (엡 3:14~21)바로가기

제87과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 (갈 6:1~5)바로가기

제88과 기도 응답의 장애 (약 4:1~3)바로가기


10. 사랑에 관한 말씀


제89과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바로가기

제90과 예수님이 보시는 사람 (눅 7:36~50)바로가기

제91과 긍휼히 여길 대상들 (유 1:22~23)바로가기


11. 평안에 관한 말씀


제92과 평강을 누리는 법 (요 20:19, 21, 26)바로가기

제93과 평안히 사는 법 (요 14:27)바로가기

제94과 마음과 육체의 건강 (잠 4:20~23)바로가기

제95과 행복의 비결 세 가지 (신 33:29)바로가기

제96과 휴식을 주시는 하나님 (막 6:30~31)바로가기

제97과 다니엘의 위기 극복 (단 2:17~24)바로가기

제98과 중풍병자를 고치심 (1) (마 9:1~8)바로가기

제99과 중풍병자를 고치심 (2) (마 9:1~8)바로가기

제100과 질병과 예수님 (마 8:14~17)바로가기

제101과 저주와 축복의 계승 (롬 5:12~19)바로가기


12. 기타의 신앙 상식


제102과 몇 가지 바른 지식 (롬 10:2~3)바로가기

제103과 다윗의 마지막 말 (삼하 23:1~7)바로가기

제104과 오십부장의 신앙 (왕하 1:13~16)바로가기

제105과 므낫세왕에 대하여 (왕하 21:1~18)바로가기

제106과 요시아왕의 역사 (왕하 22:14~20)바로가기

제107과 삼화삼복(三禍三福) (대상 13:5~14:2)바로가기

제108과 다윗이 법궤를 옮김 (대상 16:1~6)바로가기

제109과 아사에게 평안을 주심 (대하 14:1~8)바로가기

제110과 아사라의 예언 (대하 15:1~7)바로가기

제111과 보람된 생애를 삽시다 (대하 33:20~25)바로가기

제112과 에브라임의 범죄 (호 8:11~14)바로가기

제113과 나라가 분열된 이유 (왕상 12:12~17)바로가기

제114과 독사의 자식들 (마 3:7)바로가기

제115과 예수님 시대의 형편 (요 5:1~9)바로가기

제116과 시험에 드는 이유 (마 26:41~43)바로가기

제117과 보배와 질그릇 (고후 4:7)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이 책에 수록된 설교는 7분설교집 1집~5집에 수록된 내용처럼 필자가 새벽기도회에 간단히 증언한 내용을 문자화 한 것입니다.

5집까지 편집할 때는 절기에 해당하는 설교를 삽입하여 2년분 공과용으로 편집하였사오나 본 6집은 목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적당히 분류하여 편집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계속 다른 책들을 집필하고 출판하여야 하는 관계로 7분설교는 여기서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집필한 책들이 여러 종류있지만 전체를 출판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필요한 내용을 참고하실 성도님들이 계시면 전화를 주시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전달해 드리는 것을 적극 힘쓰겠습니다.

모든 집필이 끝날 때 출판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설치하여 방대한 보급을 꾀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8. 8. 27.


저자 지 영 근

 

1. 하나님을 인식함에 대한 말씀


제1과 하나님을 알자 (1) (호 6: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알자”는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성경에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1)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노력하십니까? “힘써서 하나님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2)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기독교적 의식을 중요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원하는 것만 구하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면 자신에게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3) 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예수님을 앎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 8:32에서는 “진리를 앎으로 자유를 얻는다”고도 하셨습니다.

2.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할 때

1) 거듭난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3:3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만 알면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고전 12:3).

2)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이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11:7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모든 것을 주셨다”는 뜻은 “계시의 특권을 다 예수님께 주셨다”는 뜻이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다”는 뜻은 “성경계시에 대한 바른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거듭난 자 곧 성경관이 바른 자는 곧 구원의 대상인 선택된 자에 한하여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자, 거듭난 자, 성경관이 올바른 자라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할 때

1)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 5:3에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연 계시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깊은 뜻과 구원의 도리는 성경으로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되 성경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믿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 6:69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인줄 믿고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역사책처럼 알고 연구할 때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요

3)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며 알 수 있습니다. 딤후 3:14에서 “너는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고, 또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벧전 1:10~11). 성경은 열심히 배우고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노력하는 것입니다(마 7:7). 대하 16:9에 보시면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노력할 때 성령님께서 깨닫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 무엇일까? 할 때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다 친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가족들이 찬하고 뜻 맞는 친구들이 친합니다. 친구들 중에도 고락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친한다”는 뜻은 우선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계명을 잘 지키며 성실하게 생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고 성경지식을 많이 가지므로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간의 친밀, 부부간의 친밀함처럼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잘 알면 어떤 은혜를 받습니까?

1) 구원을 받고

2) 보호를 받으며

3) 자유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신앙으로 받지만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셨고(요 17:3) 또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것을 “복이라” 하셨으며(시 73:28) 또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73:28). 그러니까 자신이 신령한 은혜에 이끌려 살고 하나님이 자신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실 만큼 가까워져야 할 것입니다. 오른손을 붙들어 주심이 곧 보호요 인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기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요 8:32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진리를 알 때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진리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아시는 성도들이 되셔서 큰 자유를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제2과 하나님을 알자 (2) (호 5:13~6: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알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3절에 보시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셨고, 호 4:6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을 안다”는 뜻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분관계(아버지와 아들사이처럼)로 아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 사정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친분관계로 안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하나님을 사모하고 연구하며 기도하고 복종해야 할 것이고 지식적으로 알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증언한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50년경의 선지자로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한 것이요,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여야 복을 받을 것인가? 에 대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는 말씀으로

1)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13절에서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에브라임의 병은 북방 이스라엘의 어려움을 뜻하고, 유다의 상처는 남방 유다국의 어려움(고난 또는 죄)을 뜻하는데 그들이 그 상처를 하나님 앞으로 고치러 오지 않고 “에브라임이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낫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환난을 당했을 때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알아서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고침을 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육체의 병이 들면 원인을 규명하듯이 하나님은 성도가 자신의 죄를 깨닫기를 심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항상 나의 연약이 무엇인가? 나의 죄가 무엇인가? 를 알려고 하셔야 하며 또 지체하지 않고 회개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응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4절에 보시면 “에브라임에게 사자 같고 유다에게 젊은 사자 같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환난(전쟁 같은 것)을 당하게 하여 탈취를 당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좀 같고 썩이는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 좀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망치는 것이고 썩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소리 없이 망하도록 응징하시기도 하시고 사자처럼 외부의 침략을 통해서 망하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응징하시는 하나님, 보이게 안 보이게 응징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응징을 하시면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15절에서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할 것이라”하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벧후 3:9에도 있습니다. “주께서는…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고한 자를 때리신 후 그가 회개하는 낯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진정한 회개를 할 때에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살리시며 제 삼일에 일으키신다”는 것은 속히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회개한 자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임재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하지만 하나님이 새벽빛처럼 일정한 모습으로 임하여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일정한 새벽빛”으로 비유하신 것은 변함없는 소망을 주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고, 이른 비(비 ; 게쉠은 겨울비로 파종할 때 필요함)와 늦은 비(말코쉬 ; 봄비, 곡식이 익을 때 필요함)는 농작물 재배를 위하여 적기에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① 자기 백성들이 죄를 깨닫기를 원하시고 ② 회개하지 않을 때 응징하시고 ③ 응징 받는 성도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④ 회개하면 싸매주시고 ⑤ 또 일정한 은혜의 하나님으로 임재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범죄 한 백성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자기의 죄와 상처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무슨 계명을 바로 못 지켰으며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2)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입장에서 회개하고 사모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2절)하신 말씀처럼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73: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을 힘써 알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지식이상 더 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과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편 (롬 1:19~20) 목록으로


위의 말씀 19절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하시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의 요소를 품부해 주신 것을 말씀하셨고, 20절에서는 만물계시 즉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함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편이 두 가지임을 말씀하셨고 이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신성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깊은 뜻과 구원받는 진리를 알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첫째 방편은 사람 속에 들어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1)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타락의 잔재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도덕적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롬 2:14에서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셨고, 15절에서는 “양심”이라고 하셨으며 행 17:22에서는 “종교성”이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2) 따라서 인간에게는 “종교적 본성” 또는 “종교적 양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종교적 본성은 ① 무엇을 숭배해 보려고 하는 마음과 ② 의지하려는 마음과 ③ 선을 지향하는 마음과 ④ 영생의 본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종교적 본성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도덕적 방편이 되는 것이요

2. 만물계시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출처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1) 만물은 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2) 만물은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3) 그렇다면 마땅히 만물의 창조자와 주인과 통치자가 계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4)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만물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곧 하나님이란 뜻이 아니고, 만물이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을 나타내주신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종교적 본성으로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방편 외에 거듭나는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성경계시를 통하여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4과 만물이 보여주는 계시 (롬 1:2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만물이 보여주는 계시”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세 가지입니다. ① 자연계시요 ② 예수님으로 계시하심이요 ③ 성경계시입니다. 본문에 보시면“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 따라서 만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만물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나타내 주십니다. 자존성이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출 3;14). 만물은 다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피조되지 않은 존재는 만물의 원인자이신 스스로 계신 하나님뿐이신 것입니다.

2) 만물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나타내 줍니다. 만물은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절대자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대상이 없습니다(시 89:6).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지혜를 따를 자가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만물은 창조자 하나님만 절대자라는 무언의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3) 만물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만물의 수명이 유한하지만(고후 4:18) 하나님이 없애실 때까지는 영원한 것입니다(벧후 3:10, 계 21:1). 따라서 영원한 만물을(전 1:4)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성, 절대성, 영원성은 다 신성에 속하는 것인데 이것을 만물계시로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만물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의 만물은 자연을 일컫는 것입니다.

1)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땅과 공기와 햇빛과 물과 양식. 이 다섯 가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선물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연의 아름다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예술가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은 너무 아름다운 예술품인데 이것을 다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자연을 질서있게 통치하시므로 인간에게도 질서 의식을 교훈하셨습니다.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화목과 상부상조에도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광대한 지식의 소재입니다. 성도가 자연을 깊이 연구할 때 무한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자연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나 소돔고무라의 유황불에 의한 멸망, 그리고 지진, 가뭄, 태풍 등의 피해가 곧 심판의 도구가 된 증거입니다. 이처럼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 주시는 계시인 동시에 인간에게는 삶의 터전으로 아름다운 경치로 질서와 심오한 교훈을 주시는 것으로 또 심판의 도구가 되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제5과 경영하시는 하나님 (잠 16: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경영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람은 경영하는 일이 많습니다. 목사는 목회가 경영하는 일에 속하고, 사업가는 사업이 경영이요, 누구든지 자기가 맡은 일에 능률이 있기를 바라는 모든 일은 다 경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나 하나님의 허락과 인도가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 자기가 승리할 것으로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만세전에 작정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될 때에 마귀의 역사로 조종을 받는 바리새인들과 가롯유다 등을 이용하여 쓰셨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역사는 인간의 힘과 마귀의 힘을 초월하여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

1.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마음에 경영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고 계획하는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할 때 그 생각과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든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감안하지 않을 때는 그 생각과 계획은 인간 중심으로 흘러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각하고 계획할 자유를 주신 것은 말살되지 않은 양심부분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지으신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이성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계획, 저런 계획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로서 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계획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여야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의 응답”이란 기도의 청탁일 것입니다. 성도가 계획하고 기도했을 때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 나올 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빌 2:13을 보시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이루시나니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성도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그 소원은 하나님의 뜻임) 그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같은 생각을 했을 때는 벌써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나 그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안 된다”(마 10:29)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구하고 응답받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계획을 감찰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앞에 나타내는 행동은 의식을 하고 바른 것을 나타내려 하지만 마음의 약한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가책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행동이 옳은 줄 알지만 하나님은 마음과 행동을 함께 보시기 때문에 깨끗지 않게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보이려면 우선 마음을 청결케 하고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너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시 37:5에도 있습니다. “행사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은 자신이 경영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탁하고 조급하지 않게 기다리면 하나님이 순리대로 길을 열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체험한 성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잘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26세 때 단신으로 전도사 일을 하였습니다. 그 때 신학을 다닐 때인데 1주간에 쌀 석되씩 받아 가지고 기숙사에 가서 먹고 오면 주일은 교회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 다른 교회에서 단신 교역을 할 때 3천원을 받았고 결혼을 했을 때 5천원을 받았으며 지방교회에서 두 식구이므로 쌀 두말을 받았고 어머니를 모신 즉 세말, 자녀의 수에 따라 식량을 받다가 장남이 초등학교 갈 무렵에 도시교회로 인도를 받았고, 14년을 있으면서 여섯 자녀가 다 한 초등학교를 나오고 또 자녀들이 대학 갈 무렵에 성남으로 와서 편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성남에서 9년 만에 전격적으로 시무 사면을 했습니다. 남은 여생을 더 유익하고 복되게 살기 위하여(아홉식구와 함께) 임지없이 사면한 것입니다. 이 때에 방을 얻어 나오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때 그때 유익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도를 맡긴 상태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시 23:6)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은 “인간이 노력을 안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하고 맡기고 노력하면 반드시 적당한 때에 적당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꼭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5. 그리고 또 하나님은 “악도 적당하게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가롯유다의 배신이 예수님 구속사업에 이용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 어려운 사건이 그 배후에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준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영하시는 분이시오, 하나님이 성도의 일을 경영하실 때 그 성도의 행위가 합당하면 어떤 경영이라도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6과 쳐서 이르시는 하나님 (암 3:1~8) 목록으로


아모스 선지자는 주전 830년경 유다왕 웃시아 통치 초기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보다 약 50년 앞서서 일을 하였습니다. 유다나라의 바벨론 포로 이전의 선지자들은 거의가 민족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멸망을 예고하며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싱약시대의 영적운동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본문 2:1에 보시면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그 벌을 돌이키지 않는다” 하셨고, 또 4절과 6절에서도 “유다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그 벌을 돌이키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들이 다 백성들의 죄를 쳐서 책망하시고 또 심판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도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1. 쳐서 이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친다”는 뜻은 “책망하고 벌을 경고하신다”는 뜻입니다. 8절에 보시면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하시므로 하나님이 노여움을 발하실 때 성도는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하며 또 “하나님이 말씀하셨은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하시므로 “아모스”선지자의 “쳐서 이르는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증언을 한 것입니다. 성경이 저희들을 책망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책망임을 아시고 겸손과 회개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셨고, “너희만 알았나니”하신 말씀에서 “선민만을 특별하게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것은 죄악과 우상에서 건지시고 자유와 영토를 주시고 영생주시는 은혜를 의미하고

2) “너희만 알았다”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만 아신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만 아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죄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라”(2절)고 하셨습니다. 4절과 6절이 “서너 가지 죄”란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죄악을 헤아리는 분이시고, 서너 가지 적은 죄악도 결코 없는 듯이 넘어가는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죄악을 헤어려 가면서 회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의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의합”이란 뜻이 같다는 뜻입니다. 뜻이 같아야만 동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만 하나님과 의합하고 동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어그러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동행은 의합에서 시작되고 목적과 방법이 일치할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이유없이 책망하는 분이 아님을 역설하셨습니다. 4절~5절 말씀은 전부 인과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자는 움킨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자에게 뺏기지 않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고, 젊은 사자도 잡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굴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며, 창애(올무)를 설치하였으니까 새가 걸린 것이고, 새가 걸렸기 때문에 창애가 뛴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와 죄악이 있기 때문에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재앙을 보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원인에 의하여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이나 재앙이 일어나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됩니다. 이 나팔은 재앙을 알리는 것인데 “하나님의 시키심이 아니고는 재앙이 성읍에 임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당성 있는 원인에 의하여 재앙을 보내시는 분입니다. 이런 재앙이 임하고 나팔로 신호를 할 때에는 두려워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그의 종 선지자에게 미리 알리시고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행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고하시고, 일깨우시고 오랜 기간 참으셨다가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선지자를 통하여 죄를 일깨워 주시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회개를 촉구하셨을 때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상당기간 참아 주시다가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입니다(벧후 3:9). 여기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권고와 오래 참으심의 사랑을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교훈 일곱 가지를 교훈받았습니다. ① 쳐서 이르시는 하나님 ②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③ 모든 죄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 ④ 의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⑤ 확실한 원인에 의하여 결과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⑥ 오래 참으시고 재앙을 보내시는 하나님 ⑦ 자기의 비밀을 먼저 알리시고 경고하시고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7과 하나님의 심판 (행 17:30~31)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말씀하신 것인데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① 알지 못하던 시대는 언제인가? 하는 점이요 ②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말씀의 “알지 못하던 시대”란 예수님의 부활 이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를 나타낸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31절에서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한 사실을 알지 못한 시대는 그만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하여 왜 허물치 않으셨을까요? 여기의 “허물치 않으셨다”는 뜻은 알지 못하고 범죄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의 손길을 늦추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죄입니다(눅 23:34). 그러나 모르고 범죄하는 것은 알고도 고의로 범죄한 것보다는 훨씬 경한 것입니다. 그런 정상을 참작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경하게 하시거나 늦추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고 증언하게 하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자로서 심판자이신 것과 공의로 천하(만민)를 심판하실 때(끝날)가 있을 것을 알고,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것을 천하에 알리게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습니다. 따라서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갖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노여움이나 징벌이 아닌 칭찬과 상급으로 나타나는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지식을 몇 가지 말씀드린다면

1. “심판”이란 뜻은 상선벌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한 자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말씀을 기록하는 시간에 전두환씨의 구속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씨의 구속은 그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벌을 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은 역사적 섭리를 통하여서도 상선벌악을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심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본문 31절의 “정하신 사람”이란 말씀이 곧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 5:22,27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심판자는 예수님 뿐이요 또 예수님이 심판하실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악에 대한 승리자이기시 때문입니다.

3. 심판의 대상은 마귀와 전 인류입니다. 이 말씀도 본문 31절에서 “천하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는자나 안 믿는자나 다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5:24)고 하신 말씀은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의 심판은 받아야 칭찬과 상을 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성도는 성도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도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그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이며 마귀가 심판 받을 일에 대하여 계 20:1~3, 10에 말씀되어져 있습니다.

4. 심판의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의 척도가 되는 것은 성경대로 잘 산 것과 못 산 것으로 선악이 가려진다는 뜻이요, “공의롭게 하신다”는 것은 상급과 징벌의 분량 기준이 분명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심판도 완전함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 심판의 때는 이 세상이 끝나고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하늘의 보좌에서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말씀하신 것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 13:24~30, 36~40), “달란트 비유”(마 25:14~30),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 등으로 말씀하셨고, 인류 심판의 자세한 과정은 계 20:11~15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6. 성경은 자연 계시적 섭리와 역사 계시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자연 계시적 섭리란 마 3:12 말씀에서 “곡식을 타작한 후 알곡은 창고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는 원리”와 같음을 말씀하셨고, 또 역사적 계시로서는 노아의 심판, 소돔고무라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 등으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7. 또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완전하게 하신다하여 현세적 심판을 전혀 안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멸망된 후 나라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나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망이 있게 하신 일이나(눅 13:4~5) 아간과 아나니아, 삽비라, 가롯유다, 느부갓네살왕, 사울왕 등에게 심판을 가하신 것은 신 불신간에 또는 단체, 국가, 개인 간에도 현실에서 심판하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8. 심판받을 죄악은 불신앙과(요 16:9) 악한 생각과(창 6:25, 마 5:28) 잘못된 말과(마 12:36) 잘못된 행위(고후 5:10, 계 20:12)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불신자의 받을 심판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정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성도된 입장에서 정죄의 심판은 면하지만 칭찬과 상급에 따르는 심판이 어떻게 미칠 것인가? 를 유의하여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에 전력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8과 예수님이 아시고 행하신 것 (요 13:1~11)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무엇 무엇을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일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예수님이 아시고 행하신 것”으로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무엇을 아셨는가? 하면

1)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가(가까이) 이른 것을 아셨습니다(1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언제쯤 어떻게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마 20:1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앞일을 아신 것입니다.

2) 마귀가 가롯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일을 아셨으니 이것은 마귀의 동태와 사람의 심정을 꿰뚫어 아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볼래 악한 영물이지만 자기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여 팔려는 마음가진 것을 아셨을 때 예수님은 퍽 섭섭하였을 것입니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아셨으니 여기의 “모든 것”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한 구속사업과 인간적 생활 모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맡으신 것은 곧 예수님의 사명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명과 구원의 중보역할을 하시는 사명과 성도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사명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명 중에 중보사명은 영원히 계속하시는 것이고 계시사명과 모범사명은 성경으로 이미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과 제자의 배신과 자기의 사명을 알고 계셨습니다.

2. 예수님이 이상의 세 가지를 아시고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 끝까지 사랑하는 일을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웃을 사랑할 바에는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계실 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아셨을 때 사랑하는 일을 끝가지 실천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저희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촉박한 때를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시면서 그 촉박한 시간에 “사랑의 실천을 끝까지 행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중직자의 모임인데도 사랑없이 냉냉할 때를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저는 “내가 얼마나 살 것인데 이런 냉냉한 분위기에 있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여 그 자리를 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도덕의 완성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상급은 사랑으로 받습니다. 사랑의 기회는 성도가 현실에 있는 동안 뿐이란 것을 아셔서 성실하게 실천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겸손한 봉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자기를 팔려고 하는 배신과 또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봉사에 솔선하신 것입니다. ①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친히 종이 되신 것입니다. 막 10:45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만 씻어주시는 모범만 보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종의 자세를 취하는 일까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잡수시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시고 겉옷을 벗으신 후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또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고 그것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두르신 수건으로 물을 닦아 주시는 일까지 완벽하게 시행하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으로 겸손과 봉사의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된 자, 지도자된 자가 종처럼 낮아지고 겸손과 봉사의 본을 보일 때 비로소 기독교는 생동감이 나타날 것이요, 진정한 기독교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만이나 권모술수나 아첨이나 궤계와 청탁 등으로 높아져 보려는 추태가 성직자나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면 안 될 것이요, 항상 종의 위치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아끼지 않는 성도의 세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구속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종의 모범이요, 겸손과 봉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한 가지 신령한 교훈이 있으니 “예수님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제자로서 감당치 못할 일이라는 뜻으로 도덕성에 관한 것만 생각하고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는 일을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 것인즉 잘 씻김을 받지 않으면 서로 상관이 없다”고 하시니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더 갖기 위하여 “손과 머리까지 씻겨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씻어 주시는 의미는 죄사함을 뜻하고, 이미 목욕을 한 것은 거듭나서 믿음을 가질 당시에 모든 죄를 속죄하신 칭의를 뜻하며 발을 씻어야 하는 의미는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으로 회개와 용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죄를 사함 받지만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성화는 그때 그때 회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속히 세상 떠날 것을 아신 예수님이 사명에 관한 것과 사랑과 겸손과 봉사와 교육을 더욱 힘쓰신 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9과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마 8:1~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병을 고쳐주신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한 문둥병자를 고쳐주셨고, 다음에는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그 다음에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신 만큼 병고침의 능력에 대하여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병자를 어떻게 고쳐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문둥병자는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하므로 주님의 소원에 의존하여 병고침 받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주여 원하시면) 기도하되 “주님의 소원이면 고쳐달라” 하였으니 이것은 자기의 뜻보다 예수님의 뜻을 앞세운 것이고 “만일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문둥병 환자로 있어도 괜찮다”는 여유를 보인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인간의 욕심만 앞세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고, 또 자비를 베푸시는 분인 고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여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실에서 나타난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원자가 주님의 뜻을 앞세우며 간구한 기도가 응답된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병고침이 영적 은혜만큼 대단하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요 ② 또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가르치는 사역에 지장을 줄 수도 있으며 ③ 예수님은 자랑삼아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선포는 적극성을 띠되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일은 소극적으로 필요에 따라 사역하셨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여야 됨은 율법에 따라(레 14:2~32) 건강진단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가버나움에 사는 백부장의 간청으로 그의 하인의 중풍병을 떨어진 곳에서 말씀(명령)으로 고침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백부장의 신앙이었습니다. 본문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서(5절)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눅 7:1~10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종을 보내어 자신의 청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탁은 백부장의 부탁이니까 본문에서는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유대인 장로들과 벗(종들)을 보냈다” 하셨고, 그들은 백부장의 선행(회당을 지어줌)을 말함으로 백부장의 칭찬에 중점을 두었으나 본문에서는 병고침의 경위만을 기록하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1)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할만큼 겸손하였으며

2) 그 대신 그 동리의 원로급인 장로들을 보냈고

3)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급히 만류하면서 “말씀만으로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 능력만 나타나면 충분히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 신앙을 하인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확답만 받으면 충분하다고…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르기를 높은 사람이 명령하면 그 부하들이 복종하여 성취하는 것처럼 천지의 주재자이신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의 부리시는 천사들의 역할이나 성령님의 역할로 충분히 오시지 않고도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하시고 “네 믿음대로 되라”하셨을 때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갖지 못한 “나라의 본 자손들(복음을 받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시므로 백부장처럼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는 ① 백부장의 겸손한 신앙 ② 하인을 염려하는 사랑 ③ 예수님께 부탁하는 기도 ④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말씀의 능력과 기도의 응답이 천리만리의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응답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가셨다가 병자의 누운 것을 보시고 아무런 표식없이 환자의 손을 만지시므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특징은 표식없이(명령이나 안수없이) 고쳐주신 점과 병 나은 환자가 즉시 수종들만큼 약한 것이 회복된 것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계속 찾아온 병자들에게 말씀으로 귀신을 쫓으시고 병자들을 다 고치셨으니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사 53:4) “우리의 연약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씀의 성취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와 말씀의 능력이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심을 믿는 신앙과 믿음으로 병고침 받고 긍휼에 의하여 병고침 받는 사례가 있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0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 (히 3:1) 목록으로


저희들은 지금 히 3:1을 읽으셨습니다. 우선 이 말씀이 누가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주신 말씀인가를 아신 다음에 본문내용을 살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하신 분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바울사도의 서신에 나타난 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아서 바울의 기록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신 것인데 “히브리”인이란 아브라함의 혈통과 관련이 있는 유대주의적(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요, 목적은 구약의 제사의식에 나타난 의미를 복음적으로 설명하시면서 교리와 덕행을 아울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은 어떻게 쪼개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① “그러므로”란 뜻을 추적하셔야 하겠지요 ② 성도를 가리켜서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고 ③ 거룩한 형제들이라 하셨으며 ④ 예수님을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설명하셨고 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1. “그러므로”의 뜻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그 앞 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셨다” 하셨고,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오셨다”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비하시고 충성되신 대제사장이신 것과 자신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자기처럼 시험받는 성도들을 잘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잘 알도록 깊이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을 가리켜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아”하신 것은 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성도들을 호칭한 말씀이고, 문제는 저희들이 하늘의 부르심을 입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 정착할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민 갈 사람이 비행기표를 사 놓고 기다리는 것 같고 시집갈 신부가 혼인 날짜를 정해놓고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저희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에 살 때에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고향을 미련없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나안 땅에 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후손들이 400년 후에 차지할 것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는 또 인생의 본향이 지상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을 때 육신의 고향을 사모하지 않고 영혼의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여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 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저희들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또 아무나 다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특별하게 사랑을 받고 선택을 받은 자에 대하여 부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3.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을 받는 저희들과 모든 성도들이 다 거룩한 형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거룩한 자인가? 내가 깨끗한 자인가? 내가 죄가 없다는 뜻인가?”하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의 뜻은 구별과 순결의 뜻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하면 이해가 가지만 “나도 거룩한 자다”하면 자신이 없는데 성경은 거룩한 형제라고 일컬어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글자의 뜻이 “구별된 무리”란 뜻입니다. 세속에서 또는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된 것입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온 후 쓸 것과 못쓸 것을 선별할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쓸 것은 버리지요. 이때에 “그릇에 담긴 것”은 구별된 것입니다. “그릇에 담겼다”하여 그대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주인이 쓰기 위하여 선별한 것이니까 주인의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의 물건이나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붙드시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수리도 임금이 동침하면 금방 상궁이 됩니다. 우리의 거룩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죄사함 받았으니까 심판이 없으며 말씀과 성령으로 사니까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별되고 순결해진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과 “기초, 표준, 모범자”란 뜻이 있습니다(엡 2:20, 고전 11:1).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시니까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사도의 성격을 가지신 만큼 으뜸이 되시며 모든 것의 표준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표준으로 살려하지 않고, 인간들의 문화나 전통이나 욕구를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바른 생활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란 뜻은 중보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여 죄 많은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도를 중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중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5.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계시하신 것은 성경입니다(요 5:39). 그러니까 성경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과의 동행입니다. 축구 선교단, 발레 선교단 이란 것이 있지만 축구나 발레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못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깊이 연구할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생각나게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요 14:26).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절대로 쉽게 보아 넘기지 마시고 가까이 보시며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 정신과 생활속으로 들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1과 하나님 지식과 기도 (단 2:17~23) 목록으로


다니엘이 그의 세 친구와 함께 바벨론 왕궁에 있을 때 느부갓네살 왕이 이상한 꿈을 꾸고, 꿈의 징조를 알지 못하여 번민할 때에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읽으신 것입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꿈을 말하지 못하는 박수와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동원하여 꿈과 해석을 하게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박사들까지 동원하여 꿈을 말하게 하였기 때문에 박사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꿈을 알리지 못하면 다함께 죽임을 당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에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그 꿈의 내용과 의미를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주셨던 은밀한 계시를 다니엘에게 나타내 주시므로 많은 사람을 죽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기도에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다니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1) 은밀한 일을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으로 안 것입니다. 18절에 보시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시기를 원한다” 하였고, 22절에서도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주신 꿈을 다니엘에게도 나타내 주실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주전 500년경에 있은 일이지만 주전 1900년경에 애굽왕 바로가 꾼 꿈을 요셉에게 해석하는 계시를 주시므로 요셉을 높이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저희들은 성경말씀 속에 감추인 계시를 연구함으로 깨달을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오묘하고 비밀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시대적 정권 변화의 계시였지만 성경은 신령하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오, 신령한 천국과 구원의 계시란 점에서 가장 귀중한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2) 지혜와 권능이 있는 하나님으로 안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만물 통치를 보아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알 수 있지만 어두운 심령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지혜와 권능을 인간들에게 또는 다른 피조물들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지혜는 방책을 의미하고 권능은 성취력을 의미합니다. 산을 오르던 소가 돌바닥을 딛고 미끄러졌으면 다시는 그 돌을 디디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소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를 짓고 뉘우친 후에도 또 죄를 지으니 참으로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권능을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항상 지혜를 구하고 말씀지식과 실천력을 구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임의로 변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안 것입니다. 행 1:7에서도 “때와 기한은 하나님 권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때는 기회를 뜻하고, 기한은 시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스스로 제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임의로 변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애굽 생활을 400년으로 잡으셨고, 이렇게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은 때를 변하실 수도 있으니 히스기야 왕을 데려가려 하시다가 15년을 더 살게 하신 일도 있고 사울 왕을 쓰려 하셨다가 중도에 폐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때를 변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때와 기한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도 좋은 때와 좋은 시기를 주시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운데 있는 것은 공개되지 않은 비밀이요, 주로 감추인 죄악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은밀한 세계가 감추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은밀한 약점이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밝히 아시는 것입니다. 어두운데 있는 것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인 미래의 일도 아십니다.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 나오고 그 물고기 입에서 돈이 나올 것도 아셨고(마 17:27) 나귀를 풀어올 때 주인이 왜 가져가느냐?고 묻고 주님이 쓰신다 하면 순순히 줄 것까지 아신 것입니다(마 21:1~3). 저희들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항상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시고 의지하며 사셔야 할 것입니다.

2. 다니엘의 기도에서는

1) 23절에서 열조의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으니 이것은 열조의 신앙과 관련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창 17:7).

2) 18절에서 동무들과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합심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3) 은밀한 일에 대하여 알기를 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와 총명이요, 성경지식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18절).

4)감사와 찬양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23절). 다니엘이 가진 하나님 지식과 기도 생활에 끌려가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2. 성경에 관한 말씀


제12과 성경과 신앙 생활 (딤후 3:14~17) 목록으로


“성경과 신앙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신앙 생활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성경과 신앙 생활은 나눌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성경을 믿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을 믿는 문제와 배우는 문제, 그리고 실천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성경을 소중한 줄 모르는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1. 신앙 생활은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믿을 때는 성경의 말씀이 믿을 만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성경 66권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시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의심하시는 분이 계셔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말씀 중에 한마디라도 참되지 않다고 할 때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불신앙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1) 성경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벧전 1:21) 특정한 선지자를 통하여 전달해 주셨고, 또 틀림없는 기록으로 남겨주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다 참되신 분입니다(요 8:26, 14:6, 롬 3:47). 마귀는 거짓의 근원자요(요 8:44)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실 만큼 빛 가운데 계시고 진실하신 것입니다. ③ 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그 말씀도 역시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히 1:11). 예수님도 부활 승천하여 영원히 계십니다. 죽고 없어지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④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말씀으로 없었던 만물을 있게 하실 만큼 능력이 있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1:37). 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진실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도 역시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33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당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라” 하였을 때 “그런 일이 있었느냐”하고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2000년 전에 당신의 조상이 나의 조상으로부터 돈을 꾸어 썼는데 갚으시오”하면 갚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성경을 믿기란 어려운 것이어서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기적같은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을 믿게 되는 첫째 방법은 거듭나는 은혜를 받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요 3:3) 하셨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마 16:17)고 하셨으며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셨습니다. 또 살후 1:10에서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성경이 진리인 것이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의심없이 믿어진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는 하는데 확신이 적을 때는 두 번째 방법으로 배우고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슬과 양털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한 일이 있었고(삿 6:36~40), 베드로도 물위로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당신이 주님이시면 나를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하여 확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배우고 알면 믿음이 더 생기고 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성취되는 여부를 체험하면 믿음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실천하고 기도하신 후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는지를 기다려 보십시오. 잘 성취되면 믿음이 더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하고 믿는 것보다는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못자국을 만지는 체험으로만 믿겠다”고 하다가 책망을 받았으니까요(요 20:29).

2.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과(요 5:39) 구원을 받는 도리와(딤후 3:15) 복을 받는 방법이 다 성경에 있습니다(수 1:7, 신 28:1~6). 그리고 “성경은 배움으로 확신한다” 하셨으니까 열심히 배우셔야 합니다. 매일 사용하는 말도 안하면 잊어버립니다. 사촌의 이름도 교제를 멀리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약방 주인이 무슨 약이나 처방에 따라 꺼내 올 수 있는 것처럼 성경 지식도 그런 식으로 적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성경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알 것과 실천할 것을 구분하여 알 것은 신앙 고백의 재료가 되게 하고, 실천할 것은 실천에 옮기는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시면서 무엇이 믿을 것이고 무엇이 실천할 것인가를 분별하여 쉬운 것부터 실천하시고 어려운 계명은 반드시 단계적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수준까지 발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믿는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자신의 일이고 세상의 일인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처분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이오니 나의 인생과 내 가족의 인생을 주님이 살아주십시오”하는 믿음으로 맡기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시 37:5~6).

 

제13과 말씀을 묵상합시다 (시 1:1~3, 사 66:1~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을 묵상합시다”란 제목으로 묵상할 말씀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바른 생활하기 운동”이란 이름을 가진 단체에서 현실교회와 성도들의 생활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일깨우는 문서가 우편으로 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읽고 찢어 버릴 수가 없어서 거기에 나타난 요절 몇 구절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성경순위대로 말씀드리면

1. 신 14:28(26:12)에서 “매 3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일조를 내어...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게 하라” 하셨는데 오늘날 교회는 성도의 십일조가 구제비 등으로 사용되지 않고 교회의 사업비 등으로 쓰면서 주의의 가난한 자들을 외면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부분적인 일이지만 교회마다 경상비가 부족하여 구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잘 보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사 1:11~17에 보시면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너희가 그것을 보이러 오면서 내 마당만 밟는도나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여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니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펴고 기도하여도 내가 눈을 가리우고 듣지 않을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악을 떠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고 약자를 변호하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포악을 일삼고 회개하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지 않고 종교의식만을 내세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무수한 제물”은 헌금 봉사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순결(정의)과 사랑의 실천으로 섬기는 것인데 그것들을 외면하면서 예배의식이나 교회제도와 물질봉사를 자기 순결이나 이웃사랑보다 더 앞세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잘못을 지적하신 것이요

3. 사 58:6~10에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주린자에게 식물을 주고…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가난한 자들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에는 교회와 교인이 많습니다. 또 열심있게 찬송하고 기도하며 특별기도회도 많고 금요철야 기도회, 금식 기도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성도의 사명으로 가정마다 고아나 과부를 한 사람씩 모신다면 우리나라는 고아나 과부의 수입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고아 수출 제일 국가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도의 사명을 다한 것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크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암 5:21~24에 보시면 “너희가 절기를 지키고…번제나 소제나 화목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하셨고, 미 6:6~8에서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또 맏아들을 드릴까 하는도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의식이나 봉사활동보다 공의실천과 사랑과 하나님과의 동행(하나님을 말씀으로 모시고 사는 생활)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바르게 살고 항상 겸손하고 항상 주님을 가까이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5. 사 66:1~2에서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고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할 것이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며 심령에 통회하는 것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것인데 신약시대의 교회는 말씀 앞에 떨며 회개하는 것보다 예배당 건축으로 하나님께 영관 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줄로 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성전이나 예배당을 꼭 지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성도의 단체가 너무 많을 때 합동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도들의 편의상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필요하여 사용하는 예배당을 하나님이 필요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당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교회가 순결한 생활보다 예배당 건축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오랫동안 교인들에게 짐을 지우는 잘못과 지나친 예배당 사치들이 부당함(마 24:1,2, 눅 21;5,6)을 지적함에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9,16, 6:19). 아울러

6. 마 23:15에서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하셨고, 또 그 앞의 14절에서는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먼저 믿는 자가 본이 되지 못하여 나중 믿는 자나 믿으려 하는 자를 실족케 하는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믿는 자의 책임이 중요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7.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않는 것이라” 하셨고, 그 앞절에서는 “자기의 혀를 재갈먹이지 않거나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말에 덕을 세우고 진실과 사랑이 있어야 하며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할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현실교회 성도들에게 참으로 많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잘 깨달아서 꼭 시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4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 (시 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그 말씀에 함축된 교훈을 찾고 말씀과 자신의 생활을 대조하면서 성경에 일치되기를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다른 일 다 제쳐놓고 말씀만 묵상해 보셨습니까? 그렇게 잘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설교준비 그 자체가 말씀 묵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설교준비, 성경연구, 설교를 듣는 일 등이 곧 말씀묵상입니다.

2. 말씀묵상은 “복 있는 자의 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복에 대한 말씀을 크게 두 가지고 말씀하시고, 3절에서는 그런 자에게 “형통하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생활 두 가지는 ①죄를 멀리 하는 것과 ②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한다는 것은 복 받는 방법 중에 가장 큰 방법입니다. 죄를 멀리한다는 뜻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현실적 형통뿐만 아니라 기적의 은총가지 힘입을 수 있는 복 받는 방법입니다(신 28:1~6, 요 2:5). 성도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은 죄를 멀리하는 순결한 생활을 의미하고 또 복 받는 최고의 방법인데 여기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도 역시 같은 복을 받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희들이 또 깨달아야 할 것은 “말씀 묵상함”이 복 받는 방법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자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입니다(요 1:1). 그러니까 말씀 묵상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말씀의 애착과 주야 묵상을 해도 큰 보람을 못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묵상을 곧 하나님접근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주야로 묵상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 주야 묵상이란 말씀이 과장된 표현일까요? 주야란 밤낮 24시간을 말씀할까요? 24시간 말씀을 묵상하면 잠은 언제 잘 것입니까? 잠을 자고 정신이 피곤치 않아야 말씀 묵상을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말씀이 과장된 표현인가 아닌가를 살피면서 저의 생활을 대조해 보니까 제가 바로 “졸리면 자고 깨면 말씀을 묵상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말씀이 과장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회를 다 성직자로 구성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세상의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자기의 할 일을 하면서 항상 말씀을 묵상하면 그 생활도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말씀만 묵상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만 묵상하면 지루하고 심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에 환장한 사람, 도박에 환장한 사람, 아편에 중독된 사람은 그 습관을 그칠 줄 모르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은혜의 말씀에 취하게 되면 술 먹는 사람이 매일 아침 해장술을 마셔도 싫지 않은 것처럼 성도들도 성령의 충만을 받고 말씀에 취하면 술이 술을 먹는다는 말처럼 성경 묵상에 계속 이끌리게 되어 성경 말씀대로 주야 묵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말씀을 묵상하여야 할까요? 우선 성경을 읽거나 마음에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하기에 알맞은 분량을 정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줄거리로 나타난 말씀도 있고,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도 있으며 금언처럼 짧게 주신 교훈도 있습니다. 지금 읽으신 시 1:1~3이 금언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선 한 줄을 다 읽으면 분량이 많으니까 “복 있는 자”란 말씀만 읽고 묵상을 해보시지요. “복 있는 자” 어떻게 묵상할까요? 눈덩어리 굴리듯이 이리 저리 굴리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우선 글자수가 몇입니까? 네 글자 짧은 내용입니다. 복 있는 자를 말씀하셨으니까 복 없는 자도 있겠지요.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잘 되게 해 주시는 것이겠지요. 큰복도 있고 적은 복도 있을 것입니다. 큰복은 “영원한 복” 적은 복은 “현실의 복”. 복 받는 방법도 은혜로 받는 것과 노력으로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은혜로 받은 복은 무엇이며 노력으로 받은 복은 무엇인가? 나는 현재 복 받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묵상의 내용이 꼬리를 달 것입니다. 복 받는 것을 감사하고 복 받을 일을 위하여 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연구하실 때는 전체의 내용 교훈의 출처, 교훈의 목적, 역사적 해석, 영적 교훈 등을 육하원칙을 생각하면서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주야 묵상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에게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 형통의 복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이 복을 체험하시려면 먼저 말씀묵상을 잘 하셨어야 하고, 설교라도 잘 듣고 깨달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형통하는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으나 형통하였고, 모세가 강물에 던져졌으나 형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에 홍해가 막혔으나 형통하였습니다. 롬 4:17에서 “하나님은 죽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묵상을 잘 하도록 노력하시고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받으리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5과 말씀을 좇아감 (창 1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을 좇아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경에는 본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말씀을 좇아갔다”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갔고(창 12:4) 바울사도는 말씀에 붙잡혀 전도를 하였으며(행 18:5) 그와 같은 뜻으로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창 5:24, 6:9) 또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사랑하고 종일 묵상하며 그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느낀 성도의 간증이 있고(시 119:97,99,103) 행 8:28에 보시면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약 1200리를 예배차 다녀가는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병거위에서 이사야서를 읽으며 간 사실이나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은(행 17:11) 다 말씀에 붙잡혀 끌려 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억지로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충동에서 다른 일을 제쳐놓고 성경을 배우거나 또 즐거움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말씀을 좇아가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2. 이 말씀 좇아간 사례들을 다시 살펴보면

1) 에녹이나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니까 천사로 나타나셔서 동행하였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항상 동행하였다는 뜻보다 계시의 말씀대로 복종하였다는 뜻이 더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행은 말씀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되 말씀보다 앞서거나 뒤서지 않고 성경과 기도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간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고향인 갈대아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간 것을 의미하는데 고향과 기업의 터전을 버리고 명령따라 복종한 것이요

3) 바울사도가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은 전도의 구령사명에 사무쳐서 말씀의 메시지를 외치게 된 것이며

4) 시 119편을 기록한 성도나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성경 말씀의 맛에 붙잡혀서 읽는 맛에 깨닫는 맛에 또 성경을 가까이 함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으로 믿고(요 1:1) 성경을 사랑하며 즐거움으로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3. 그러면 말씀을 좇아간 의미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최고로 믿고 가장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열심히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4) 말씀 연구에 끌려서 성경 연구쪽으로 자기의 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5) 이것은 곧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붙잡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붙잡힌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시 1:2에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4. 어떻게 하면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따라 살 수 있을까요?

1) 우선 은혜 받기를 사모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2) 노력하는 방법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잘 모르는 것은 배워서 깨달아야 합니다.

3) 회개의 뜨거운 체험을 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죄를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4)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보호 인도하심을 마음으로 의식하며 항상 두렵게 여기고 성경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것입니다.

5) 말씀을 깨닫는 맛에 더 연구하고 말씀을 가까이 사모함이 하나님을 사랑함인 줄로 믿을 때 점점 말씀에 이끌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반드시 감사하며 기록으로 남기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술에 끌리거나 세상 향락에 끌리는 것처럼 성도가 말씀에 이끌리는 신령한 은혜를 맛보셔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은 없다고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제16과 취미로운 성경 공부 (신 6:6~9, 시 119:97,103, 행 17:11) 목록으로


어떻게 하면 성경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이면 반드시 성경에 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시 107:9)고 하셨기 때문에 성도가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도 구하고 찾으며 사모하는 노력이 있을 때 성령님께서 은혜를 받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은혜를 사모하며 성경을 읽을 때 빌립을 보내어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 고넬료가 은혜를 사모할 때도 베드로를 보내어 증거하게 하셨으며 빌립보 강가에서 바울사도가 증거할 때도 성령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증거하는 진리를 청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 성령님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배울 수 있는 동기와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후천적 노력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님이 성경 공부를 하게 하실지라도 사람이 취미로운 방법을 택하면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잘해 보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성경을 취미롭게 또 힘써서 공부해보아야 하겠다”는 큰 결심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결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시행할 능력을 주십니다. 결심하고 기도하였으면 하게되는 이유가 안하면 거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좋은 성경책을 새롭게 구입하여야 합니다. 한문 성경이나 관주 성경이나 아니면 공백이 많은 새성경을 구입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날짜를 쓰고 필요없는 낙서를 함부로 하지 말며 꼭 깨달은 말씀과 요긴한 말씀을 줄치면서 읽기를 시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을 읽거나 배우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 2:13에서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은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촉복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지혜로우며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믿고 큰 희망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7). 그래서 그 말씀대로 성취되는 것이고 또 “주의 법도를 묵상함이 스승보다 명철하게 만들며 주의 법도를 지킴이 노인보다 더 명철하게 됨이라”고 하신 말씀은(시 119:98~99) 성경이 최고의 지혜서란 뜻이며 또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살아 역사하신다”고 하셨으니까(눅 1:37, 히 4:12) 진실과 지혜와 능력을 갖춘 말씀임을 믿고 상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성경을 읽는 것이 복 받는 방법임을 믿고 읽는 것입니다. 계 1:3에 보시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헌금하고 봉사해야 복 주신다”하셨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자기를 만나려면 3000번 부처에게 절을 하고 와야 한다”하여 고 박정희 대통령부하가 만나러 갔다가 절 3000번을 채우지 못하여 만나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할 때 성경은 읽는대로 복을 주시니 얼마나 쉽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복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장 한 장을 더 읽게 되는 것입니다.

6.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란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보람있는 일 아닙니까? 돈벌이 한 것과 세상지식을 배운 것과 사람을 가까이 사귄 것과 권세 주리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은 것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인가? 할 때 말씀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것이 제일 보람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영원히 기억하실 일인 것입니다.

7. 말씀에 취미가 붙도록 방법을 쓰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 문답지를 갖고 공부하는 방법이요(생각하는 공부)

2)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마다 메모를 하는 것이요

3) 어떤이는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4)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내용을 교역자에게 물어서 그것을 또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5)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을 메모해 놓고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는 방법이요

6) 제목에 따라 요절을 이어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했을 때 믿음에 관한 성경 요절을 순서대로 메모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만 메모하면 원고 없는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7)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또 메모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떤 하나님을 발견하였다”하고 그것을 기록에 남겼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호 6:6).

8) 이런 것을 자주 하다 보면 작은 설교문을 쓰게 될 것이고,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고 싶은 충동도 받게 될 것입니다.

9) 그래서 결국은 교역자가 되었으면 하여 신학을 하게되고 목사의 길을 가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성경을 연구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얼마나 고상한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취미있게 배워서 신령한 복을 더욱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3. 은혜 받음에 대한 말씀

제17과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3) 목록으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가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두 사도를 따르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을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이 말씀처럼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1. 항상 반성하며 회개하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반성과 회개가 없이 사는 생활은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실수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성과 회개를 일삼아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습니까? 현실 쪽입니까? 하나님 편입니까?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입니까? 성경과 하나님의 뜻과 신령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의 생활은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성경 연구에 힘쓰며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생의 목적으로 알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계명대로 행하지 않으면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명의 강령은 사랑입니다. 매사에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았으면 육신이 평안하여도 그 상태가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었는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사랑 아닌 것을 시행하고도 은혜 가운데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드시 성경적인 믿음과 사랑에 거리낌이 없어야만 은혜 가운데 있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성도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1) 우선 받은 은혜가 큰 것을 아셔야 하고

2) 고난이나 징계도 유익하게 하시는 은혜로 여겨야 하며

3) 현재 은혜를 많이 받지 못하였어도 미래나 후시대에 더 많이 주실 줄로 믿는 신앙을 가져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판단하셔서 영광스런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저는 기성교회 목회하는 일보다 작은 개척교회를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되리라는 생각에서 작은 목회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6. 예수만 믿어야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아니고 무엇을 믿겠느냐? 하시겠지만 예수님 외에 자기를 믿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명예, 직분, 현실 정욕 등 사람 앞에 자기를 내세우기 위하여 마음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으면서도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현세욕을 적당하게 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결하지도 않고 어린아이 같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예수님만 믿는 성도들이 되실 때 은혜 가운데 있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반성하며 회개하는 생활 ②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 ③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④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일을 하는 생활 ⑥ 예수님만 믿고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생활이 은혜 가운데 있는 생활입니다.

 

제18과 은총을 받는 방법 (잠 3:1~8)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4절을 보시면 “네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피조물이요 죄인된 인생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은총은 직접 주시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귀중히 여김을 받게 하시므로 간접적으로 은총을 베푸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과 6절과 8절에도 은총에 관한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서는 “장수하고 많은 해를 누리며 평강이 더한다”하시므로 평안중에 좋은 것을 누리며 장수하는 복을 말씀하셨고, 6절에서는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하시므로 성도의 “미래의 될 일과 행할 일을 지도해 주신다” 하셨으며 8절에서는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며 네 골수로 윤택케 하리라”하시므로 건강 지켜주시는 문제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종합해 보면

1) 건강과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요

2) 좋은 것을 누리며 장수하게 하신다는 것이요(여기의 장수는 영생을 포함한다고 아셔야 합니다).

3) “네 길을 지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하여 앞을 예측하기 어려울 때 하나님이 적당하게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은총을 살피면 모두가 현실의 복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에 말씀드릴 내용으로 이런 은총을 받는 방법이 모두 신령한 복을 추구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은총주시는 방법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1절에서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하셨고, 3절에서는 “인자와 진리로 네 목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하셨고, 5절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셨고, 6절에서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셨고, 또 7절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2) 이 말씀을 간추려 보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으로 ① 악에서 떠나는 일이요 ②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하되 자기의 명철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인정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이 “모든 일에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유력하시다”는 뜻입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며 복종하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라”하심은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이행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네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한 패를 목에 거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을 떠나고 인간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으로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만가지로 은총을 베풀어 모든 일이 복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신 은총 중에 건강의 복을 강조하셨습니다. 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반적 건강법은 영양을 필요한 만큼 섭취하고 운동을 적당히 하고 마음을 편케 가지면 건강할 수 있습니다. ② 이와 같은 일반적 방법 외에 성도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과 믿음으로 마음을 편케 하는 일과 믿음으로 죄를 멀리하는 일을 잘하여 건강에 더 큰 도움이 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그리고 건강한 몸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삼 2절에서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신 사도요한의 기도를 늘 생각하시면서 믿음과 범사가 일치하는 중에서 건강의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9과 은혜 받는 방법 (약 4:1~10) 목록으로


1. 이 본문 한절 한절을 살피는 가운데 열 가지 “은혜 받는 방법”을 발견하였습니다. 은혜 받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좋은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저희들이 받은 가장 큰 것은 “구원의 복”입니다. 이 구원의 복은 저희들이 다 받았습니다. 요 5:24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 엄청난 은혜(영생의 복)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영광 돌리는 일은 성도가 하여야 합니다.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셋째 딸을 낳고 섭섭한 감정을 갖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섭섭함을 느끼는 마음이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사 48:17). 제가 첫 번째 아들을 낳고 좋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딸을 낳고는 아들 낳을 때 만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30년이 지난 후 저의 61세 생일이 되었는데 딸은 생일비용에 쓰도록 40만원을 주었으나 큰아들에게는 한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들보다 딸이 유익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좋을 것과 나쁠 것을 가리지 마시고 유익하도록 은혜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내용을 써서 벽에 붙이려고 합니다. 구원받고 교회 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입니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며 가까이 하시고 나를 보호 인도해 주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까이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가까이 해 주시는 체험을 수없이 하였기 때문에 책을 써야 하는데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는(98.4.3) 글을 보다가 피로감이 생겨서 두 시간쯤 산책을 하려고 하였는데 부산의 광안리 벚꽃구경을 가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때를 맞추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광안리에 가서 벚꽃도로를 산책한 후 해변을 걷게 되었는데 잔잔하게 파도치는 물결이 훌륭한 사과 한 개를 제 발 앞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그런 것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살펴 주신다고 믿고 마음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혹 그런 일을 우연함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경미한 일까지라도 절대로 우연으로 보아 넘기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시는 일로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며 또 “얼마나 가까이 간섭해 주시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재산을 모으고 지식을 가지며 교회가 부흥되고 사람이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받되 반드시 이런 은혜(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본문 제목으로 돌아가서 은혜 받는 방법

1)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1절에서 “싸움은 욕심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물욕, 명예욕, 현세욕, 자기목적, 자기취미 등이 대표적인 욕심인데 항상 “너 좋으면 먼저 하라 나는 다음 것을 취하겠다”는 자세를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2) 기도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구하지 않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못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구하셔야지요. 무엇을 구하실 때는 반드시 자기 생각을 앞세우지 마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3) 4절에서 세상과 벗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애착갖지 말라고 많이 말씀하셨습니다(롬 12:2, 약 4:4, 요일 2:15). 어떤 사람이 형무소에 장기 복역하면서 “출옥하면 믿음으로 살겠다”고 굳게 약속하고도 나온 후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형무소에 같이 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5절이 그 말씀이고,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시 42:2, 애 3:25, 요 5:3).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병낫기를 사모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지요. 그 때 예수님은 가장 오래된 병자 한 사람만 고쳐주셨습니다.

5) 겸손입니다(6,10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5).

6) 순종입니다(7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계명 순종을 잘하면 마귀는 피한다고 하셨습니다.

7)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8절). 말씀, 기도, 순종, 사명으로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시 73:28). 하나님은 그런 자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시 73:23).

8) 손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9절). 이것은 물질 문제에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줄 것을 주되 확실한 날짜에 주는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 거래가 희미하면 사귀지 마십시오. 반드시 손해를 볼 것입니다.

9)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은 진실한 마음, 하나님만 가장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10) 회개하는 것입니다(11절). “슬퍼하며 울지어다” 하셨습니다. 회개 아닌 울 일도 있겠지만 회개하는 심정,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눈물 흘리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보는 눈을 갖자 (계 3:1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보는 눈을 갖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사도요한을 통하여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면을 지적하시고 그 대책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지적된 내용을 살피면

1) 믿음생활이 미지근한 것이고(미지근 ; 열심없음, 불확실, 무관심, 중간상태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음식으로 비유할 때 부패가능성이 있음을 뜻함)

2) 자기의 부족을 모르면서 만족하는 것이고

3) 신령한 눈이 어두어진 상태라 마땅히 볼 것과 알 것을 모르는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 대한 대책으로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시련을 많이 겪은 연단받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회개한 후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안약으로 눈을 보게하라”하신 것은 신령한 눈을 육신의 눈 치료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희미한 눈을 안약으로 치료한다면 신령하게 보는 눈은 하나님이 성령님의 은총으로 깨닫게 하실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에 보면 인간이 바른 관찰을 하지 못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게 하시므로 볼 수 있게 되는 사실을 말씀하신데가 있습니다. 요 9:41에 보시면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하시므로 바리새인들 중에 잘못보고 잘못 아는 것을 지적하신 일이 있었고, 또 구약에서 하갈의 눈과 발람의 눈을 밝히신 일과(창 21:19, 민 22:31) 또 신약의 눅 24:30~31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두 제자의 눈을 밝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이 주셔야만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신 29:4, 사 6:10, 왕하 6:17).

3. 무엇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까? 여기의 “본다”는 의미를 광범위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도 바로 보아야 하고 심적 세계도 바로 보아야 하고 신령 세계도 바로 보아야 하겠지요.

1) 우선 저희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호 6:3에서 “하나님을 알자” 하셨고, 요 14:9에서는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 하셨는데 또 “예수님으로 성경을 본다”고 요 5:39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는 눈을 가지고 성경 속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을 바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눈 먼 것과 벗은 것과 상처난 것을 모르고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모르면서 아는 자신들로 착각한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빼라”(마 7:3~4)는 말씀도 역시 자신의 입장을 바로 볼 줄 모른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보는 눈이 흐릴 때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요 죄인이라”고 무조건 인정하는 것이 바로 판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바로 보는 눈도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하고(빌 2:3) 또 대인 관계의 진실한 교제를 우하여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멀리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뜻은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계획과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 40:9에 보시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르면 우선 현실세계가 멀어지고 맑은 공기를 마시게 되고 광활한 하늘이 나타나면서 먼 곳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주실 하나님의 은총을 길게 집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의 부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4,5백년 후에 성취될 것을 믿고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평강으로 주실 수도 있고, 또 후 시대의 발전으로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 축복에 대하여 조급하게 기대하지 마시고 멀리 내다보면서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일에만 충실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신령한 축복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축복은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님, 내세 천국, 영혼에 관한 일 등이 다 신령한 대상입니다. 이 신령한 대상 중 가장 존귀한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경에 눈을 뜨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진 성도는 “항상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 하셨고, 또 “너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셨으니까 영적 축복을 주된 목적으로 사모하고 현실의 복이 부수적으로 딸려 붙도록 믿음 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오늘날 그 반대로 행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이 저희들의 신령한 눈을 밝혀 주시도록 기도하시고 밝은 눈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며 이웃을 알고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신령한 복의 기치를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21과 깨닫지 못하게 하심 (사 6:9~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깨닫지 못하게 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 전달의 은혜를 막으신다는 말씀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드리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시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여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하며 치료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징계하는 기간을 정하여 멀리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계시를 받고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하고 여쭈니까 기한이 있는데 그 기한의 때는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고 가옥에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이스라엘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거민이 다 흩어지고 약속의 땅이 황폐하여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의미하는데 결국은 바벨론 통치 70년이 지난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황폐되듯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지면 그 땅은 황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1/10이 오히려 남았을 지라도 이것도 삼키는바 될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북방 이스라엘 영토를 9/10로 표현하시고 남방 유다를 1/10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먼저 망하고 1/10 정도의 남방유다가 남았다 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바벨론에 삼키우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밤나무나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같이 선민국가는 망하였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폐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은 거룩한 씨로 그 땅에 그루터기로 남겨 주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보내주실 메시야(거룩한 씨) 약속을 여전히 시행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감추시는가? 할 때 징계받을 대상(70년 동안 버림받을 대상)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감추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전쟁을 통하여 선민국을 망하게 하시고 성전을 훼파하여 종교제도를 없애시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없애고 흩쳐서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비유를 베풀어 허락된 자에게는 깨닫게 하시고 허락되지 않은 자엑는 감추시는 방법을 쓰시며(눅 8:10) 또 개인의 심령을 둔하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거나(10절) 아예 말씀받을 기회를 못갖게 하시므로 진리를 감추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 55:6에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기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가 깨달아야 할 말씀을 증언할 때 듣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에게 해당하는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또 어떤 이는 듣고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의미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를 감추시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서 말씀에 민감하도록 회개하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의 성도의 귀와 마음을 통제하여 진리를 감추기도 하시고 나타내기도 하신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넓은 마음을 주사 진리 깨닫기를 소원한 기도”가 시 119:32에 나타나 있고, “하나님이 귀를열어 인치듯이 듣게 하셔야 한다”는 말씀이 욥 33:16, 36:10에 있고, “귀 있는 자만 들아라”는 말씀이 마 11:5, 13:9, 계 2:7,11에 나타나 있고, 또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하신 말씀이 마 19:12에 있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행 7:51에 있으며 또 “주께서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셨다”는 말씀이 행 16:14에 있고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이 신 29:4에 있고, “즐겨 받는다”는 말씀(마 11:14), “계시의 정신을 주신다”는 말씀(엡 1:17),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롬 12:4)이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민감하지 못하거나 깨달음이 부족하거나 은혜를 못받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이 나에게 진리를 감추심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면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열심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함과 아울러 진리에 접근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도 자신이 말씀을 사모하지 않거나 열심히 배우려 하지 않거나 기초지식이 너무 부족하면 역시 말씀은 마음에 와 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읽고 쓰는 것보다 알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하실 때 하나님은 기회도 주시고 깨닫는 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3) 말씀을 가까이 하고 깨닫는 것 이상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남교회에서 교인을 따라 다니는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에 끌리는대로 갈 것인가? 하는 두 기로에서 말씀편을 선택하였고, 이삿짐을 꾸리고 정리하는 기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쉬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에 끌리고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2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4:16) 목록으로


본문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은 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무엇인가? ②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가? ③ 성경에 나타난 그 같은 실례가 무엇인가? ④ 우리들은 그런 은혜를 많이 깨닫고 체험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1.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거나 형편에 알맞도록 인도하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은혜가 있음을 믿을 때는 위기가 있을 때도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릴지언정 염려하거나 당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가 막혔을 때 위기를 당하였지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셨고, 이어서 홍해가 갈라지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함께 하시는 은혜(창 28:15, 마 28:20), 인도하시는 은혜(시 139:10), 또 형통하게 하시는 은혜(창 39:2,23)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IMF 문제에 대하여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과소비를 깨닫고 생활 거품을 줄이는 일, 외국의 돈을 빌려 오는 일, 기업체가 개선되는 일 등입니다. 따라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그때 그때 필요한 은혜를 주셔서 어려움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가? 할 때

1) 크게 나누어 특별섭리와 일반섭리로 하십니다. 특별섭리란 자연계의 변동이나 이적을 통하여 베푸시는 것을 의미하고 일반섭리란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이적이 아닌 우연의 일치처럼 나타나지만 역시 배후의 섭리는 특별성을 띠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천사와 사람을 부리시고 쓰십니다. 누구든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하라하면 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8:9).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으로 구원얻을 후사들을 돕기 위하여 보내는 자라”(히 1:14, 마 26:53)하셨고, 사람도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안하던 생각도 하게되고 이것을 선택하려고 계획하였다가 저것을 선택하는 이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감동을 받는 사람은 감동받는 내용에 따라 남을 돕게도 되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되어 때를 따라 돕는 일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노하실 때 다윗왕을 감동하여 인구조사할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삼하 24:1). 그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감동이었고 그것이 진노의 빌미가 되어 벌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서도 감동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은혜 받게 하시는 일을 위하여서도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왕을 추격할 때 아히도벨의 작전을 따르면 다윗이 위험해지고 후새의 작전을 따르면 다윗이 안전해집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다윗을 살리시기 위하여 압살롬이 후새의 모략을 택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삼하 17:5, 14). 이렇게 천사를 부리시고 사람을 쓰시며 자연계까지 통치하여(신 30:19, 31:28) 원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3. 성경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신 사례가 있는가? 할 때 그런 역사적 증거 많습니다.

1) 홍수로 인류가 멸할 것을 아시고 그의 원하시는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산위에 방주를 예비하게 하신 것이나(창 6:14) 아브라함이 첩 하갈을 쫓아냈을 때 물없는 사막에서 방황하게 되었지만 그 때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하신 일이나(창 21:19)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이삭대신 드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마침 양 한 마리가 수풀에 걸려 그 일을 시행케 하신 일이나(창 22:13) 이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배우자를 구하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에 갔을 때 좋은 처녀를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일(창 24:11~12) 야곱이 단신으로 나그네 신세가 되었을 때 브엘세바 광야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으므로 큰 힘을 얻게 하신 일(창 28:15)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 맏형 르우벤의 마음을 감동하사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넣자 하였고, 요셉이 구덩이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미디안의 장사꾼들을 그 곁으로 지나가게 하시고 유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요셉을 장사꾼들에게 팔도록 제의하게 하셨고(창 38:25) 또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집이나 감옥살이 2년 만에 성공하게 된 과정에서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고, 모세가 강물에 떠내려갈 때 바로왕의 딸과 모세의 울음소리가 마주쳐서 알게 되고 또 공주의 마음이 모세를 건져 기르도록 감동된 일, 엘리야가 굶주릴 때 까마귀로 하여금 떡과 고기를 전달하게 하신 일(왕상 17:4) 또 신약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마 8:26) 허기진 자들에게 기적의 양식을 주셨으며(막 8:1~9) 바울이 풍랑을 만나 멜리데섬에 이르렀을 때 독사의 해를 받지 않으므로 그 곳 주민들에게 대접을 받은 일(행 28:1~10등일 것입니다.

4. 문제는 저희들이 이런 은혜를 느끼고 체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이 느끼고 체험하실 것입니다. 혹 이런 은혜를 잘 느끼시지 못하는 분들은 계속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니까(마 6:32) 반드시 체험하시고 든든히 의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23과 장마비의 은혜 (겔 34: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장마비의 은혜”란 제목아래 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땅에(산 4면, 예루살렘 주변) 복으로 비를 내리시되 때를 따라 장마비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① 물의 복이 있고 ②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있으며 ③ 비를 주시되 장마비를 주시는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들과 모든 생명체에 복을 주시고 위하여 물을 주셨습니다. 물이 없으면 아무 생명도 살지 못합니다. 또 이 물이 넉넉하기도 하고 적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입니다(히 4:16). 물이 아주 없으면 생명체가 다 죽고 물이 적으면 큰 고생을 하게 되며 또 물이 너무 많으면 노아 홍수같은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신 11:14에 보시면 “이른 비, 늦은 비”가 있고, 신 28:22에서는 “때를 따라 적당하게 주시는 비”가 있으며 본문에서는 “때를 따라 장마비를 주신다”고 하셨고, 또 다른 곳에서는 “소낙비”(시 72:6)와 “이슬비를 주신다”(창 27:28, 시 133:3)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인류를 잘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실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멜 만큼(민 13:23~27) 비옥한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지역이 가장 황무한 땅이며 비옥한 곳은 극히 일부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비를 내리시지 않으니까 당이 황무하여진 것이고(신 11:14) 또 “비대신 티끌과 모래를 그 곳에 붓는다”고 하셨습니다(신 28:24). 이렇게 물과 비를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도 하시고 화가 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 “때를 따라 비를 주시되 복된 장마비를 주신다”는 것은 오랫동안 축복을 정지하셨다가 하나님이 징계를 푸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징계받을 당시의 피해를 복구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 의미도 있고 영적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라면 이스라엘 민족을 바벨론 포로에 버리셨다가 70년이 지난 후에 다시 해방되게 하시는 것을 뜻하고 영적으로는 신약시대에 복음적 은혜와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모를 내야 할 시기에 한달쯤 비가 오지 않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모든 저수지가 다 말랐습니다. 논에 조를 심을 수도 없을 만큼 가뭄이 있었다면 그 가뭄이 소낙비 정도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반드시 장기간 쏟아 주시는 장마비 같은 은혜가 임해야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혹 오랜기간 영적 은혜의 침체에 빠져 있었다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장마비 같은 큰 은혜를 주셔야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 침체된 상태라면 소낙비 같은 은혜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23:3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하셨는데 이 말씀도 역시 침체된 심령을 시들은 식물로 비유하여 “은혜의 단비를 주셔서 소생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신 32:2에는 “연한 풀 위의 가는비요 채소위에 단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65:10, 미 5:7).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소낙비가 필요한 분도 계실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장마비가 필요한 분도 계실 것이며 매일 매일 소리없이 주시는 새벽 이슬비 같은 은혜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심령의 가뭄이 오래 계속된 분에게는 축복의 장마비 같은 큰 은혜를 또 일시적 침체에 빠졌던 분에게는 일시에 주시는 소낙비 같은 은혜를 매일 매일 영혼의 양식을 필요로 하시는 분들에게는 은혜의 단비나 이슬비 같은 축복이 있어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창 49:22에 보시면 “요셉은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하시므로 샘물로 주시는 은혜가 있고 또 같은 뜻으로 잠 5:15에 보시면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물물을 구원의 생수로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사 12:3, 요 4:6~12). 물이 귀한 사막지대에서 자기의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은 생활이 해결되는 축복이고 또 샘물이란 끊임없이 계속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모든 은혜를 다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말씀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조건이 또한 부족하지 않습니다. 물과 물질은 너무도 풍성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저희들의 사모하는 마음과 열심과 충성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계에 장마비 같은 은혜, 소낙비 같은 은혜를 다 주셨습니다. 지금은 단비와 이슬비를 주시는 시기입니다. 매일 매일 주시는 이슬비로 무럭 무럭 자라는 신앙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하게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마지막으로 이 장마비와 물의 은혜는 성령 충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은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고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재료이며 또 물은 소산물에도 풍작을 주는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은혜로써 성령님을 생수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 4:10,14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생수”라 하셨고, “그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요 7:39에서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킴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영적 생명과 소성함을 주십니다. 또 잠 25:25에 “먼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이는 말씀, 복음임)은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할 때 물의 은혜는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심령이 갈한 성도에게는 장마비 같은 성령의 은혜를 또 하나님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는 때를 따라 주시는 단비 같은 은혜를 믿음 생활이 규칙적으로 자리 잡힌 성도들에게는 아침마다 주시는 이슬비를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에게는 생수같은 은혜를 주실 줄로 믿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24과 남은 자에게 은혜를 주심 (렘 31:7~14)목록으로


7절 하반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에 “남은 자에게 은혜를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앞부분(31:1~6)의 말씀에서 계속되는 내용이고, 말씀의 내용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은혜와 신약시대에 주실 신령한 은혜를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남은 자”란 70년 포로 이후의 백성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서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된 자를 위하여 전파 찬양하며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야곱은 선민의 남은 자를 뜻하고 만국의 머리된 자는 존귀를 약속받은 선민을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또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계획된 일이라도 믿음 갖니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성취시킬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겔 36:37).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1.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1) 8절에 보시면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북편땅은 바벨론이고 땅 끝은 먼 이방땅 세계를 뜻입니다.

2) 어떤 대상을 모으는가? 할 때 “소경과 절뚝발이(불구자)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까지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불구자나 임산부는 여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난리가 나면 도망도 못하고 피해를 받는 대상이지만(마 24:9) 그들까지 올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은 안전한 여건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스 8:21~23)입니다. 또 신약시대에 복음이 비천한 자로부터 전파될 것을 예언하시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사 61:1).

3) 그렇게 되면 흩어진 남은 자들이 울며 돌아 올 것은(9절) 그들이 감격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감격도 그러려니와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는 더욱 큰 감화와 감격의 눈물을 자아내게 할 것을 예언하심이요

4) 하나님이 그 흩으신 백성을 인도하시고 모으셔서 장자차럼 살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9~10절). “넘어지지 않고 바른 길로 행하게 하시고 그들의 아비가 되시고 그들을 장자로 취급하시며 목자가 양을 지킴같이 지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9절 중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라”는 말씀은 갈려 나갔던 북방 이스라엘도 장자처럼 살펴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남방유다, 북방 이스라엘이 나뉘어 갈등하였지만 해방된 후에는 그것이 없어질 것이요, 또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이란 선민과 이방인이란 장벽도 없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 10절 말씀에 “나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라”하신 말씀도 신약시대에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5) 속량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하는 뜻이고 속량이란 풀려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의 해방은 메데파사국이 값을 지불하고(전쟁의 승리), 고레스 왕이 해방령을 내려 풀려 나왔습니다. 마치 모세가 기적을 행하고 백성들을 해방시킨 것과 같은 것이요, 죄인이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마귀에게서 풀려난 것과 같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자유와 구속의 은혜 이상 더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6) 물질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가 모일 것이라”는 말씀은 물질의 복을 의미하고

7) 마지막으로 주시는 큰 은혜는 영적 은혜로써 그 심령을 물댄 동산같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12절 중에 보시면 “그 심령은 물대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을 것이요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 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며 슬픔이 즐거움이 되고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이 있은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의 심령에 흡족하게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하신 말씀이 영적 축복 즉 성령의 충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물댄 동산이나 처녀가 춤을 추고 노인과 청년이 어울리는 것은 무궁한 평화를 뜻하고, 제사장의 심령이 흡족한 것은 믿음의 지도자가 은혜로울 것을 뜻하기 때문에 믿음의 복, 즉 신령한 은혜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하고 믿음의 새 출발을 한 것과 에스라의 종교 정화 운동이 바로 영적 축복의 회복이요 이 사실이 신약시대의 오순절로 이어져서 성령의 큰 역사를 세계 만방에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사모해야 할 은혜는

1)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목자가 양을 지킴같이 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요

2) 우리의 심령이 물댄 동산처럼 신령한 은혜로 채워지기를 사모하실 것이요

3) 징계 받는 자를 풀어 주시고 믿음의 새 출발을 잘하여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기를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남은 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제25과 하나님만 의지하자 (시 146:1~1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만 의지하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힘있는 사람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기술 등이 다 좋은 것입니다. 성도가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자기의 마음을 채우지 않고 세상의 좋은 것들에 마음이 끌리면 세상의 것들을 외면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늘 유한한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가장 존중시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1. 제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크게 강조하는 내용은 저희들에게 세상적으로 의지할 것들이 없어지고 고독을 느끼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기회요, 또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주시는 기회란 것을 아셔서 오히려 기뻐하고 소망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사임하고 나왔을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인간적 소외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무엇을 부탁하거나 협조를 구할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다 바쁘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저는 마음에 확신하기를 “나의 인간적 고독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만드시는 은혜의 섭리라”고 믿으면서 오히려 소망을 갖고 감사한 것입니다. 사람의 열 번 도움보다 하나님이 한 번 은혜 주시는 것이 더 큰 복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말씀에 보시면 “평생을 하나님만 찬양하고 권세자(방백)나 인생을 의지하지 말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만 소망을 두어라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영원토록 진실하신 분이며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며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해방을 주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며 객을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며 악인의 길을 굽게(응징)하시고 영원히 대대로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만 의뢰하여야 할 것을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고후 1:8~10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환난을 당하고 심한 고생을 할 때 살 소망이 끊어져서 그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기반이 다 무너져서 살 소망까지 없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환경을 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들도 이런 믿음을 가지면 어렵고 고독해져도 그것을 믿음의 연단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더 좋은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사 3:1~3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유다)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할 때는 그것들을 다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양식과 물이 있으니 넉넉하다”하거나 자기 나라에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귀인과 모사가 있으니까 든든하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것들을 다 없애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개가 돈을 벌어서 살림을 보태주니까 좋다”하는 생각도 퍽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배후에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고(삼상 17:45)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귀향할 때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놓고 호위병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호위병 없이 여행을 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으며(스 8:22~23) 어떤 여전도사님은 아들 하나를 공부시켜 의지의 대상을 삼으려 하였다가 그 아들의 공부를 다 하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시체를 안고 “너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4. 사람이 가장 의지하기 쉬운 것이 자기의 건강, 자기의 지식, 자기의 기술, 자기의 모아놓은 재산, 자기의 부모, 자기의 자녀, 자기의 사업 등일 것입니다. 어떤 레슬링 선수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질병에 못 이겨 세상을 떠난 것을 잘 아시지요. 또 어떤 대통령은 수천억을 치부하였지만 그렇게 부끄럽고 무상하게 죄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셨지요. 요즈음 의료보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의료보험이 있으니까 부담없이 병원에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집집마다 의료보험이 다 있는데 왜 죽는 사람은 여전히 있는가? 를 생각하시고 먼저 생명과 건강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아사왕이 하나님보다 의원을 의지하다가 병든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대하 16:11~13).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 기억하실 교훈 ① 하나님만 의지하시자는 것입니다. ② “나는 무엇무엇이 있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을 버리시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또 한 번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할 때 그것을 제하여 버리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라며 ④ 인간이 가진 것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 고독을 느끼는 때가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때임을 믿으시고 소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6과 새 것을 사모함 (전 1:2~11) 목록으로


본문 9절에 보시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새 것을 좋아하고 새 것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새 것을 사모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전도서를 쓰신 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평가하였는데

1. 한 마디로 표현하여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모든 것”이란 인생과 자연과 만물로써 현세에 있는 유한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얼마큼 헛된가 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할 만큼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헛되다”는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치관에 대하여 소극적 의미가 강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된 이유

1) 인생이 한 평생 수고하여도 자기의 시대가 지나가면 그 뿐이기 때문에 삶의 기한이 유한하고 거기에 따라서 수고의 대가를 자기가 누리지 못하니 헛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모으려고 큰 고생을 하였는데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살만하니까 세상을 떠났고 그 자손들이 부모의 유산을 탕진한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사실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 죽은 사람의 인생이 헛된 것과 같음을 본문이 말씀한 것입니다.

2) 인생에 비할 때 땅은 영원히 있지만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이리가고 저리가는 것은 늘 같은 모양으로 변함이 없고 강물의 흐름도 항상 흐르지만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상태에서 변함이 없으니 역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보는 그것으로만 만족해야 할 뿐이란 것입니다.

3)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느끼는데 그것들이 몹시 피곤하게 움직여도 역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만물의 피곤”이란 인간이나 동물 세계를 의미할 것입니다. 인생살이도 늘 피곤하지만 먹을 것을 찾는 짐승이나 새를 보면 잡아 먹고 잡혀 죽는 세계에서 얼마나 피곤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TV를 통해서 동물들의 세계를 보시면 더욱 잘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4) 이렇게 피곤하게 만물이 움직인다고 하여 사람의 눈과 귀를 족하게 할 수 있는가?할 때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음으로 새로운 볼거리와 새로운 들을거리를 아무리 개방을 한다 하여도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시 옛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동품이 좋아지기도 하고 머리스타일이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는데도 결국은 비녀 꽂는 시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치마폭이 넓었다 좁았다 길었다 짧았다 하지만 다리 길이의 한계가 있으니까 변화되어 봤자 별볼일이 없는 것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역사 보존을 가치있게 여기지만 한 사람의 역사를 그 후시대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것과 보관하는 것도 후손들이 싫어하는 추세이니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는 새 것이 없기 때문에 현세의 것으로는 새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2. 새 것을 어떻게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까?

1) 새 것을 추구하려면 “새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① 새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있지만 새 것이기 때문에 지루함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볼 때 변함이 없고 항상 보아도 지루함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공품은 세월이 지나면 헐어지고 변하여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② 새것은 과거에 없던 것이나 못 보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따라 누구든지 새로운 것을 나타내면 성공의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하여 새 것을 추구하셔야 합니까? ① 변하지 않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곧 새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방법은 바로 성경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감추인 무궁한 비밀을 항상 연구하고 묵상하여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롭게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새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② 자기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새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엡 14:24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 하셨고, 딛 3:5에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 중 가장 큰 보람은 재산이나 지식이나 명예를 취득하는데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변화되고 있는가? 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변화된 새 모습을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욕심있던 자신이 욕심 없어진 자신으로 교만하던 자신이 겸손한 자신으로 사랑없던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으로 변화된 모습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요 ③ 가장 큰 새 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신(계 21:1~7) 천국을 사모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한한 세계와 현실에서는 새 것이 없으니까 반드시 새 것을 추구할 때는 하나님과 진리에서 또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신앙 인격에서 또 영원한 천국을 추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7과 성도의 누릴 권세 (롬 13: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누릴 권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권세를 탐하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능력을 행하시므로 능히 왕이 되실 수도 있었지만 이방인 권세자처럼 집권하지 않으시고 “크고저 하는 자는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20:25~26)고 하시므로 성도의 누릴 권세가 정치적 집권자의 권세가 아닌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이 권세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1. 눈에 보이는 권세를 헤아려 본다면

1) 정치적 권세를 들 수 있습니다. 정치적 권세로 전임 대통령의 잘못도 얼마든지 응징할 수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무력적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게는 폭력의 승리를 의미하고 크게는 무력으로 정부를 굴복시키는 혁명적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경제적 권세를 들 수 있으니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4) 지식적 권세이니 모르는 자가 아는 자의 지도를 받는 것이며

5) 도덕적 권세로 윗사람을 존경해야 하고 또 존경하는 뜻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보이지 않는 권세의 통치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권세의 통치

1) 자연의 통치요

2) 생명에 대한 통치요

3) 역사섭리에 대한 통치요

4) 선악 심판에 대한 통치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절대자에 대하여 분명히 통치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통치를 누가 하시는가? 그 권세자가 누구인가? 할 때 절대자 하나님이 그 권세자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권세자 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시요,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하셨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거나 못박을 권세가 있다”고 하였을 때 “주께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다”(요 19:10~11)고 하셨습니다.

2) 저희들은 하나님이 절대의 권세자이신 것을 믿습니다. 자연과 생명과 구원과 역사섭리와 심판의 주권자이심을 믿는데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성도가 누릴 권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누리도록 주신 권세인 것입니다. 저희들은 성도가 누릴 권세에 대하여 잘 아시고 좋은 권세인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4. 성도가 누릴 권세

1)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요 1:12에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어떤 것이며 어떤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까? ①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요 ② 심판을 면제받는 특권이요 ③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이요 ④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교권이요 ⑤ 기도로 무엇이나 청원할 수 있는 특청권이요 ⑥ 하나님이 누리실 좋은 영광을 영원토록 상복받는 권세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권세를 저희들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권세는 누리려고 애를 쓰셔야 합니다. 세상권세는 안 누리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이 주신 자녀된 권세만은 누리려고 애를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과 하늘의 영광에 소망을 두시고 말씀과 기도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특권을 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정의자의 권세인 것입니다. 거리끼는 상태에서 살고 있으면 정의자의 권세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속에서 살고 있어도 역시 그렇습니다. “나의 하는 일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여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나 떳떳하고 소망이 있지만 “거리끼는 입장에 처하여 있다”고 생각될 때는 자신의 마음도 괴롭고, 떳떳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겨오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검찰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하나도 의기 양양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이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다 하여도 양심상 혐의가 없을 때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 1:6에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의 길은 망하리라” 하셨고, 시 112:6에서는 “의인은 영영히 요동치 않음이여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죄를 멀리 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환경이 좋지 못하면 죄로 끌려가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 선을 행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역시 환경이 좋지 않으면 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성도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양심상의 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나라의 법률에 저촉되지 않으면 된다”고 하겠지만 성도들은 신앙의 법과 양심의 법을 아울러 지켜야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더 큰 민감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시무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여 가책을 느끼던 것이 교회를 사임한 상태에서는 그 가책을 적게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② 정의자로서의 권세를 반드시 누리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8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 (요 1:12~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1)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세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런 믿음은 사람의 힘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신 은총에 의하여 성취됩니다. 그래서 믿음과 아울러 받는 자녀의 권세도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성도에게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로서 양자의 영을 받아(롬 8:15) 새롭게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13절). 이 사실을 성령으로(요 3:3) 또는 말씀으로(벧전 1:23)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거듭난 것을 중요한 은혜로 알면서 함께 자녀의 특권받은 은혜도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은

1)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이요(롬 8:15)

2) 예수님 다음에 예수님의 동생으로 입적된 것이요

3)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적자와 양자가 받는 특권은 적자 예수님의 신적 본질과 심판주 되심과 중보자 되신 것을 제하고는 모든 영광에 대하여 같은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1) 동거의 특권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자식은 부모와 함께 사는 특권이 있고(눅 15:31) 요일 1:3에서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빛가운데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요일 1:7)고 하셨습니다.

2) 요청의 특권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롬 8:15을 보시면 “너희는…양자의 영을 받으므로 아바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부르짖는다”는 말(크라조 ; )이 “큰소리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요청할 때 힘있게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 7:11에서도 “아비는 자식에서 좋은 것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3) 상속받을 권세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눅 15:31의 “내 것이 다 네 것”이란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고전 6:9, 15:50, 갈 3:29). 이 유업은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시면서 자녀의 명분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친교와 간청과 모든 영광에 대한 기업을 함께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9과 성도의 세 가지 체험 (시 118:1~9)목록으로


이 시를 읊은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세 가지 체험을 하였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였고, 또 한 가지는 고통 중에 기도하여 응답받는 체험을 하였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또 이스라엘이나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 것이요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다 그와 같이 말해야 한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마 19:17).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려면 하나님을 가까이 체험하여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 34:8에 보시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선이란 도덕율의 가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도덕율의 가치가 선이기 때문에 선은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지은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개는 착한 사람이다”했을 때 그는 착한 사람의 선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인자”란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서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아론의 집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선포하여야 하는 것처럼 저희들도 그 인자와 선하심을 깨닫고, 선포하고 본받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고통 중에서 부르짖은 기도응답의 체험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5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이나 압살롬에게 쫓길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그의 방거롬을 인도하여 광활한 곳(도망하기 좋은 넓은 곳)으로 인도해 주신 체험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도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기도응답에 반드시 민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의 가치를 알고 기도를 더 힘쓰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내 편이 되사 나를 도와 주시는 것이 인간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사람앞에 연약한 표현이나 사정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믿음과 정의를 간직하였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영광 목적을 간직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면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요, 하나님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낫고 하나님께 피함이 방백들(권세자)을 신뢰함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인심은 변할 수 있습니다. 좋다고 하던 사람이 싫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권세가진 자를 의지해 보아도 그 권세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길을 유익한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 욥 22:24~26에 보시면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면 전능자가 네게 보배와 은이 되어 주시고 네가 하나님께 얼굴을 들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질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지함이 훨씬 좋다는 뜻입니다. 제가 22세때 군대에 입영하면서 그 당시에 2만원의 여비를 주시는 것을 고의로 물리치고 2천원(치약, 칫솔, 수건 살 돈)만 갖고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기도를 많이 힘쓰던 중이라 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출발하는 기차에서 인솔하는 기관병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돈을 걷을 때 돈이 없어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뇌물 줄 기회를 피한 셈입니다. 수용연대와 배출대에서 뇌물쓰는 일이 더 심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돈이 없으니까 줄 수 없었습니다. 뇌물의 효력으로 후방부대로 배치 받는 신병들을 볼 때 공허감이 생겼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늘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운동장 복판, 뙤약볕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뇌물 효력 이상으로 저를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희들도 이 시편 기자처럼 좋은 것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0과 재건한 성전의 봉헌식 (스 6:13~22)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전 재건을 마치고 봉헌식을 한 후 유월절을 지켰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전 548년(606년이라고도 함)에 바벨론 국에 멸망된 것은 잘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바벨론 통치 70년이 되었을 때 메데파사국이 바벨론을 정복하고 고레스왕 원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 갔던 백성들의 후손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 와서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고레스 원년에 1차로 해방되어 나온 식구들이 20년 기간을 끌면서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식과 유월절을 지킨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첫 번째 고국에 와서 성전 재건에 힘쓴 지도자는 스룹바벨 총독과 에수아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이 있을 때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가 백성들을 많이 권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성전 재건이 필역된 것이 본문 6장까지 기록이 되었고, 7장부터는 느헤미야 총독과 에스라 제사장이 2차로 귀환하여 사역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실피면 1차 귀환한 사람들이 20년간 성전을 재건한 후에 훼방의 역사가 생기면서 59년간 침체 상태에 머문 기간이 있고, 그 후 2차 귀환한 사람들의 25년간 신앙 정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만 계산하여도 100년이 넘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협력한 파사국의 왕은 고레스, 다리오, 아닥스사다 왕이 본문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과 고레스 왕과 다리오 왕과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성전 재건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하셨고, 고레스 원년에 명령이 내리고(스 5:13) 다리오 6년에 준공이 되었기 때문에(스 6:15) 그 기간을 20년으로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역사적 연대 연구 필요함).

1. 이스라엘 민족의 성전 재건은 신앙 부흥의 절대적 요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단일 성전 제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서의 제사가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저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바람에 하나님이 징계로 나라와 성전을 훼파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고의 때가 이르러 나라는 회복되지 못하였지만 신앙의 자유를 갖고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으니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이 성전을 재건할 때 하나님의 명령과 세 왕의 조서와 협력이 있었고, 또 여기에 따라 강 서편의 총독들도 신속하게 준행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왕과 총독과 제사장들과 백성들, 특히 포로자의 후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그리하여 성전 재건을 필역한 후에 모든 계층이 합심하여 봉헌식을 성대하게 하였고, 또 1월 14일이 돌아온 즉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 잡혔던 자들의 후손들이 함께 유월절 양을 잡고 이방인들의 더러운 것(우상주의)을 버리고 7일동안 지키니 그때에 하나님이 저희에게 즐거움을 주셨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감동하여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는데 힘있게 하도록 도움을 주었다(22절)고 한 것입니다.

4. 이상의 사실 속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신앙 부흥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갖고 성전을 재건하고 이방인들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봉헌식과 유월절을 지킨 것은 바로 그들의 정화 운동이고 신앙 부흥인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들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은혜를 받는 신앙 부흥, 곧 성령충만의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노력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고(행방됨) 명령을 하셨고, 왕도 명령을 하였고 총독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합력하여 힘을 쓴 결과로 일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훼방자들로 인하여 상당기간 지연된 적도 있었지만 다시 노력하여 성취를 한 것입니다(스 4:21).

3) 하나님의 은혜가 자손의 대로 계승된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시면 “사로 잡힌 자의 자손들이 즐거이 봉헌을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조상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후손이 성취하여 은혜받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조상 때는 징계를 받았으나 후손의 대에 은혜를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4) 하나님이 즐거움을 주시되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과 스스로 구별하여 이방사람들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한 자들이 함께 즐거워하게 하신 것입니다. 현실교회에 이런 융화의 은혜가 꼭 있어야 합니다. 잘 믿은 사람이나 못 믿은 사람이나 회개하고 잘 하려고 할 때는 즐거움으로 영입하고 융화하며 합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해방 후에 신사참배 문제로 그렇지 못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5) 하나님이 적국의 나라였던 앗수르 왕까지 감화를 주셔서 이스라엘의 성역을 돕게 하시는 은혜가 있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도움을 받게 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신앙부흥,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일치, 대물림의 은혜, 즐거움과 융화의 은혜, 이방인을 감동하시는 은혜가 저희들에게도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증언한 것입니다.

 

제31과 나만이 받은 은혜 (왕상 5:15~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나만이 받은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왕상 5:1~14까지는 “나만이 문둥병을 고침받는 내용”이 기록되었고, 이어서 본문에서는 나만이 참 하나님을 깨닫는 은혜,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 평안의 복을 받는 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나만이 받은 은혜는 네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도 좋은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1. 나만이 첫째로 받은 은혜는 문둥병을 고침받는 은혜였습니다.

1) 나만은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으로 큰 권세를 갖고 있었지만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문둥병 때문에 퍽 불행하였습니다. 그가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던차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계집아이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에서 사역하는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2) 엘리사 선지자가 그의 문둥병을 고치는 방법으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 하였을 때 처음에는 순종할 마음이 없었으나 신하들의 권면으로 겨우 순종을 하자 문둥병이 깨끗이 나은 것입니다. 나만이 순종을 억지로 하였지만 억지로 한 순종의 결과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 순종을 잘하여 병고침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만이 받은 은혜는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하나님이 없는 줄로 안다”(15절)고 한 것은 “유일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에서 발견하였다”는 뜻입니다. 인생이 창조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입니다. 잃었던 혈육의 부모를 만나는 것보다 엄청나게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창조자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채 살아가는 인생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3. 나만은 개종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1) 엘리사 선지자의 안내로 병고침을 받자 먼저 선지자에게 예물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대신 표현하려 한 것이지만 선지자는 강하게 사양했습니다. 나만의 병을 고친 것은 선지자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사례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만이 “온 천하에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는 줄 안다”한 것으로 보아 병고침의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나타냈고, 엘리사 선지자는 그것에 대한 사례를 거절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은사의 대가를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교역자를 섬기는 차원에서 받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갈 6:6).

2) 또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은 나만이 이스라엘의 흙 두바리를 싣고 가서 “이스라엘 땅에 계신 하나님을 자기 나라에서 검기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7절). 여기에서 나만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 위에만 머무는 것으로 착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흙 두바리를 청구한 것입니다. 그는 어디서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려 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정성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는 문제는 이방신에게 드리는 제사방법으로 드리려 한 것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그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몇 가지 확실한 것은 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정달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혜가 거절되지 않았음과 ② 이방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지식이 부족하였을지라도 차차 배우게 될 것이므로 문제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만이 하나님을 섬기려한 변화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특별한 경우에 우상숭배하는 장소에 갔더라도 자기가 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닐 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음을 나타내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만이 왕을 경호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왕을 모시고 그 나라의 신당인 우상의 제단에 들어 가서 왕과 함께 몸을 굽히지만 그것은 왕을 수종드는 사명일 뿐 자신의 숭배가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종을 사유해 달라”고 하였을 때 엘리사 선지자는 그에게 평안을 선포해 준 것입니다. 성도가 관광차 절에 가는 경우가 있고, 또 국가의 대표자가 외국을 방문했을 때 그 나라의 종교나 문화에 따라 주어야 하는 예절이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어떤 종교의식에 참석하였더라고 그 목적이 종교 숭배에 있음이 아닌 예절이나 문화 행사에 동참한 것이면 크게 문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나 미신에 동조함이 아닐 경우에 신앙의 입장에서 긍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보는 사람의 양심을 크게 괴롭게 할 때는 삼가야 좋을 것입니다(고전 8:13).

4. 평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흙을 싣고 가기를 소원하는 나만에게 선지자는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평안의 복을 선포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14:27). 예수님이나 선지자의 축복은 그대로 효력이 있습니다(사 55:11). 따라서 나만은 병고침의 은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은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 평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가 허용된 사실, 진정과 외식을 구분하여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뜻, 이방인이 하나님의 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도에 부족이 있을지라도 지극한 정성에 의할 때 받아 주시는 뜻이 있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무지를 정당한 것으로 아셔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배워서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신앙생활의 맛 (시 119:97~10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 생활의 맛”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신앙 생활의 맛”이란 “무슨 맛에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친구 만나는 맛에 나오는 경우가 있고, 찬양대원이 되어 앞자리에 서는 맛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장로님은 “재정 부장을 안 하려면 장로 할 필요없다”고 하였으니 성도 중에는 신앙 생활의 맛을 엉뚱한 것에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어떤 맛에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맛에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73:28에 보시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셨고, 또 23절에서는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에녹과 노아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맛에 항상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창 5:24, 6:9). 문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 쌓기를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자복하고 성경말씀 듣고 또 감사하는 일이 곧 예배요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는 맛에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의 성도 중에 이것이 없는 성도가 많아서 신앙 생활이 피곤을 느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모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시를 지은 성도는 말씀만 가까이 하면 지혜와 명철이 생겨져서 노인보다 승하여지며 원수보다 지혜로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맛에 끌린 것입니다. 술에 끌리고 도박에 끌리고 여자에 끌려 방탕하듯이 말씀의 맛에 끌리면 늘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81절에 보시면 “내 영혼이…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하셨고, 87절에서는 “저희가 나를 세사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명에 이끌려 좋은 관직을 떠난 분들이 계십니다. 필자는 말씀 연구와 집필에 이끌려 목회를 사임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활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 가까이 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 맛에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죄를 짖지 않는 맛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 1:1에 보시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바로 “죄를 멀리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성도를 죄 짖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박차는 것은 마귀에 대한 승리요 곧 신앙 생활의 승리입니다. 승리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성도는 반드시 죄의 유혹을 박차고 승리감에 도취하는 기쁨을 맛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욕, 명예욕, 권세욕, 거짓, 시기, 원망, 혈기, 미움, 다툼, 폭력 등으로 범죄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기와 뜻이 안 맞는 사람들에 대하여 거부감이나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는데서 취약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를 짖지 않고 불법을 행치 않기 위하여 큰 것을 포기할 때 느끼는 기쁨을 맛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시행하시려면 결심과 새 출발의 시기를 정하고 “지금부터는 바르게만 살아야 하겠다”하고 기도하며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큰 만족과 보람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변화의 생활입니다.

4. 사랑을 실천하는 맛에 살아야 합니다. 죄 짖는 일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 실천의 부족입니다. 저희들은 이 사랑을 도덕적 사랑과 영적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전 11:33에 보시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되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도덕적 사랑이고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열심히 전도하는 것은 영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이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예배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말씀연구의 맛을 느끼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사랑 실천의 맛에 산다면 1등 신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꼭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믿음에 관한 말씀

제33과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19~26) 목록으로


25절에 보시면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바울이 로마호송 중에 일어난 사건에서 주시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이 1차, 2차, 3차 선교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송사를 받고(행 25:2) 가장 높은 심판자인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상소)하여(25:12) 피의자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중에 지중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호소할 특권이 있었고

2) 유대인 송사자들이 죄없는 바울을 무조건 죽이기 위하여 음모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요

3)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 그 당시 가장 높은 로마 황실에 복음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억울하게 송사받는 문제와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기회를 복음 전하는데 이용하시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도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행 27:24).

3. 이런 이유로 백부장과 호송군들에 의하여 로마로 호송될 때 다른 피의자들(죄수)과 함께 가게 되었고, 로마로 가는 상선에 편승하여 지중해를 건너던 중 큰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1) 처음 출발한 곳은 가이사랴 항구였고 거기서 시돈을 거쳐 루기아의 무라항에 이르러 거기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바꾸어 타고 풍랑을 견디며 지중해 중간섬인 그레데 섬의 미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미항에서 계속 출발하느냐 (풍랑을 우려하여) 안 하느냐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선원들은 가는 것이 좋다 하였고, 바울 사도는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니 연기하자(10절)고 하였는데 죄수들을 호송하는 백부장이 바울의 맓다 선원들의 말을 더 믿음으로 행선을 강행하게 된 것입니다. 가는 도중에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풍랑을 만나 소망이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20절). 여기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복음 사역자의 성경적 지도에 순종하여야 복되다는 것입니다. 어부의 경력을 가진 베드로가 고기를 잡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고기를 잡은 것처럼 바울이 배와 풍랑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신령한 지도자적 권위로 뜻을 베풀 때 순종하는 편이 더 복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고 선원들의 말을 신용하였다가 267명의 생명을 위험지경에 몰아 넣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변화를 시도할 때 복음 사역자로부터 성경적 지도를 받는 일에 주저하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풍랑으로 말미암아 배의 기능을 상실하고 배의 짐을 다 풀었는데도 배는 소생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3일을 지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 사도에게 나타나서 “안심하라 두려워말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만 파손될 것이요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267명)을 다 네게 주셨으며 또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같이 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증언하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4. 이 과정에서 저희들은 또 세 가지 중대한 사실을 교훈받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23절).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뜻은 “먼데서 와서 말씀하시고 가신 것”이 아니고 항상 같이 서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인간들이 판단했을 때 함께 계시던 주님의 사자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도 혼자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야곱이 그런 생각을 하였다가 다시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창 28:17). 마 18:10에 보시면 “소자 하나 하나에게 천사들이 배정되어 있고 그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있다”고 하시므로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대단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성도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바울이 풍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사자는 항상 그 곁에서 계셨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 우리 각 사람과도 함께 계심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2) 함께 탄 생명 267명을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들을 다 바울에게 주셨다” 하셨으니(24절) 이 말씀은 바울이 그 배에 탓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다른 생명들도 살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과 같고 의인 열 사람으로 소돔을 살리시려는 것과 같으며 또 왕하 2:12에서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병거와 마병의 역할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의인 한 사람이나 소수를 인하여 많은 악인을 용납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이 많아야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만 있어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서 고독한 의인되는 일에 용기를 다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고백입니다. 25절에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것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대로 되었습니다. 성경이 곧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복음 전파의 기회를 얻으려고 가이사에게 호소한 일 ②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더 믿는 어리석음 ③ 풍랑 중에도 항상 곁에 서신 예수님 ④ 의인에게 악인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⑤ 말씀대로 될 것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큰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두 가지 믿음 (롬 1: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두 가지 믿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해하셔야 할 것은 ① 복음의 뜻과 ② 하나님의 의란 뜻 ③ “믿음으로 믿음에”란 두 가지 종류의 구분 ④ 그리고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복음”이란 복된 소식, 기쁜 소식, 구원의 소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눅 2:10에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하시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기쁨의 소식이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영생의 소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종류가 많지만 복음을 설명하는 구원의 소식은 속죄와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복음입니다.

2.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 이 “의”가 무슨 뜻입니까? 저희들은 의를 생각할 때

1) 옳게 사는 것을 의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멀리하여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살후 1:7). “공의”란 하나님만 완전하게 시행하실 수 있지만 인간들도 하나님의 공의의 뜻을 본받아서 공평하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시 15:2).

3)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이것은 의로워질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힘입혀 주시는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책을 면하여 주시고 의로운 자로 인정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문제입니다. 이 말씀에 분명히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시작하는 믿음이고 그 다음은 결과에 도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믿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겠습니까?

1) 시작하는 믿음에 대하여 이 믿음은 ① 거듭난 자의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 3:3과 엡 2:1에서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듭난 심령의 믿음이 아니면 진실한 신앙이 싹틀 수 없는 것입니다. ②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 16:16에 보시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타나고 있고, 롬 10:10에서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셨는데 이 말씀의 “입으로 시인함”이 곧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성도가 신앙을 고백하여야 세례를 받고 성도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계명 실천과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동반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하셨고(약 2:17) 또 요일 3:10에서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또 거듭난 자는 죄를 경계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하셨습니다(요일 3:9). 따라서 바른 신앙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계명 실천의 의지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계명 실천의 의지를 동반하는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④ 따라서 그 믿음은 끝가지 붙잡는 믿음이고(히 3:14) ⑤ 결국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행 14:9). 시작하는 믿음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거듭난 믿음, 고백하는 믿음, 계명 실천성이 있는 믿음, 끝까지 견인하는 믿음, 결국 구원 받을 믿음입니다.

2) 결과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할 때 ①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믿음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성숙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주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인격이 주님을 많이 닮아야 하며 실천성이 강하여야 하고 또 헌신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② 그렇다면 시작하는 믿음과 결과에 이르는 믿음을 구별할 때 시작하는 믿음은 구원받는 신앙이고 결과에 이르는 믿음은 상급받는 믿음, 즉 충성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 2:15, 히 5:14). 지금 저희들의 믿음이 구원받을 믿음에서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히 10:22에 보시면 “온전한 믿음”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온전한 믿음”은 신앙 고백만하여 구원받는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며 주님을 닮은 자되고 주님께 대한 영광의식이 강하여 헌신을 힘쓰는 연단된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신앙이 성숙하여져야 할 것입니다.

4.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합 2:4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의 의인은 죄사함 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또 “의인이 됐다”는 뜻은 정죄를 받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패성이 제거된 거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생활을 잘 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두 가지 믿음의 성격을 잘 이해하셔서 구원받은 믿음의 확신에서 성숙한 믿음의 경지로 발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5과 믿음의 성장 (벧전 2:1~3) 목록으로


본문의 1절은 “버릴 것”이고, 2절은 “사모할 것”이며 3절은 “맛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 하반에서 그 결과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믿음 성장을 촉구하시면서 그 성장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저희들의 믿음은 항상 자라가야 합니다.

1) “자란다”는 뜻은 작은 믿음의 분량이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씨에서 싹이 났을 때 크게 자라는 경우도 있고 작게 자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크게 자란 나무는 열매를 더 많이 맺어 주인을 더 기쁘게 할 것입니다. 저희들의 믿음도 구원받는 믿음에서 영광을 많이 돌리는 믿음으로 자라야 할 것입니다(롬 1:17, 12:3, 빌 4:13).

2)본문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신다”는 말씀은 성경 지식을 갖추어 확신(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 또 “확신있는 신앙에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성장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생활의 후퇴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히 10:28). 따라서 항상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2. 믿음 성장의 방도가 무엇입니까? 이 방도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본문에 나타난 내용대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개입니다. 본문에서 회개의 내용은 대표적인 죄를 버리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죄는 “모든 악독, 모든 궤휼,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죄가 많을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 성장의 길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악독은 죄를 총괄하는 내용 즉 진리에 위반하는 것이요, 궤휼은 남을 속이거나 부정한 행위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요, 외식은 내용보다 과장하여 남을 속여 명예적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발전하는 것을 헐뜯는 것이요, 비방하는 말은 다른이의 명예를 헐뜯는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죄는 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배반하고 자김나 제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역사해 주십니다(행 2:38). 회개의 방법은 자기를 부정하고 사랑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려면 열심히 회개하는 체험을 거쳐야 합니다. 회개는 지식적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감정적으로 죄를 두렵게 생각하며 의지적으로 범죄 행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떠나서 완전히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죄인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변적인 회개를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순전한 것은 거짓성이 전혀 없음이고, 신령한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뿐이며 곧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 지식을 풍성하게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야 공급 없이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성장도 역시 성경 지식을 근거로 하고 성경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는 만큼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이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또 갓난 아기는 젖 외에는 사모하지 않습니다. 젖을 먹던 아이에게 우유를 주면 그 맛을 분별하여 안 먹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①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입니다. 앉든지 서든지 성경을 펼치려 하고 길에 다닐 때에도 늘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에 붙잡혀 살기를 좋아하는 생활이요 ② 성경 묵상이 아닌 것은 취미를 못 느낄만큼 거부감을 느껴 성경에만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다가도 세상적 이야기는 취미가 없어지고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하느냐에만 흥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러니까 순전한 말씀이냐 인간의 말이냐를 잘 분별하여 세속적인 말에 대하여는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준비에 빠져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 곁에서 스포츠나 드라마를 TV로 보고 있다면 당장 훼방을 받게 되고 가치관의 큰 차이를 느끼면서 자신이 말씀 가까이 하게 된 은혜를 큰 복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신앙 성장의 양식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3)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성장의 첫째 방법은 죄를 멀리하며 정의에 이끌리는 것이고, 둘째는 세속을 멀리하며 말씀에 이끌리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의 맛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래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자인데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받고 사도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원수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대신 죽어 주셨고, 또 존귀한 직분까지 주셨으니 그 T랑의 강한 능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고후 5:14). 그래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칼이라도 능히 끊을 수 없다”(롬 8:35)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체험한 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감화가 없으면 신앙이 성장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기뻐하실 믿음 성장을 위하여 열심히 회개하는 일(정의롭게 사는 일), 신령한 말씀에 붙잡혀 사는 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며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36과 신앙 성장의 요소 (엡 4:13~15) 목록으로


신앙 성장의 요소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본문을 읽었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라”는 말씀과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시는 핵심은 “성도의 신앙이 자라야 하는데 그 자람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닮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서는 ①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고 ②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 ③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신앙 성장을 주제로 한 목표와 방법과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된다”는 뜻은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상통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성경으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런데 “안다”는 뜻이 지식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대 인격으로 친교적인 앎을 뜻하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잘 아는데 하나님과 친하지 않다면 그것은 지식과 믿음이 따로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하나님을 잘 알기도 하고 친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2)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나 아브라함, 욥(창 6:9, 17:1, 욥 1:8)이 그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명을 잘 지키면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또 온전한 상태가 바로 예수님을 많이 닮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어린 아이 같지 않아서 잘못된 유혹의 풍조에 요동치 않는다” 하셨으니 이것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고 온전한 사람이 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성도가 믿음만 충실하면 어떤 유혹이나 거짓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가 지식과 경험이 많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도 어른 같은 신앙을 가져야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온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됨과 동시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만 행하는 것이요 또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5절에서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하시고, 16절에서는 “머리와 몸과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생각과 활동이 머리 중심에서 나오는 것처럼 성도의 장성한 신앙 생활도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성경 중심)으로 시행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신앙 성장의 요소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닮는 것”이며 범사를 사랑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저는 이 제목에 대하여 네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신앙 성장 요소는 성경 지식입니다. 이것은 육신이 먹어야 성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누에는 뽕을 먹어야 하고 성도의 영혼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마 4:4). 인정하십니까? 밥맛 잃은 사람이 건강한 것 보셨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함으로 받고 먹는 맛에 사는 사람처럼 말씀을 깨닫는 맛에 사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재미있게 터득하는 방법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못배운 사람도 마음이 열리면 깨닫는데 왜 고졸이상의 성도가 터득을 못하겠습니까? 성경지식은 곧 신앙 고백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또 신앙 생활의 목표와 방도가 어떠하여야 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2) 사랑실천입니다. 이것은 욱체 건강을 힘쓰는 사람이 몸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이나 도시에서 일정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신경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건강에 활동이 중요한 것처럼 신앙도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사랑 실천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계명의 강령입니다. 또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묵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실천의 목표가 사랑과 공의에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성도의 생활 방도는 사랑 실천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랑아닌 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을 하나 하나 시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자신의 성경 연구 생활, 기도 생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충성의 정도를 측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 한 두 번 또는 주일에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가 계실 것이고 잠든 시간을 빼고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셨는데 그 동행의 의미를 살피면 말씀, 기도, 순종, 헌신에서 떠나지 않는 생활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은 보호, 인도, 기도 응답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많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 이웃에 있는 성도들이 나의 신앙 생활을 이해하고 닮아 오지 않는 것”을 제하고는 많이 응답하셨습니다. 기차 무궁화호는 의자 셋이 나란히 있는데 제 좌석이 창 옆의 자리인데 쿠션이 고장난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장시간 불편할 것을 생각하고 가운데 빈자리로 옮겨 앉았는데 부산에서 수원역까지 오도록 그 자리에 사람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에 “이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자주 체험하여야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고난과 경험으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인격도 교육과 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신앙 성장도 고난 경험과 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욥 23:10). 유대인의 세 가지 교육방침이 있는데 ① 가족들이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옴으로 외부의 위험을 막고 가족 단합을 잘 하는 것이며 ② 조상들의 출애굽을 생각하면서 독서, 독경을 하는 것이요 ③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로부터 모금을 하면서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칙이 그 민족을 단결 발전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잘 성장하려면 ① 말씀 연구 ② 사랑 실천 ③ 하나님과의 유대관계 확립 ④ 그리고 고난과 교육적 연단이 꼭 있어야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온전한 믿음 (히 10:22)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확실하고 유효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뿌림을 받고(말씀으로 거듭남을 뜻함) 양심의 악을 깨닫고(회개를 뜻함)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면(세례를 뜻함)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온전한 믿음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앞서 온전치 못한 믿음을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온전치 못한 신앙

1) 성경지식이 빈약하고 신앙고백을 옳게 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성도는 부지런히 배워서 바른 신앙을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기복주의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도 모르면서 현실의 축복만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병낫고 사업 잘 되고 자녀들 출세하고 소원 성취하러 나오는 경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인간 친교주의로 나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친구교제, 사업유통, 사람과의 교제를 위하여 취미상으로 나오는 성도들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감정과 기분에 도취하는 것이 신앙 생활인 줄로 아는 경우입니다. 찬송과 기도를 마음 뜨겁게 하는 방편으로 삼아서 감정을 크게 자극시켜서 기분이 퍽 좋아야만 그것이 신앙의 바른 방법이요 은혜를 받는 것인 줄로 아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5) 또 어떤 신앙은 믿어지는 것만 믿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 축복하는 말씀은 믿으나 저주하는 말씀은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상과 같은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사상을 멀리 떨쳐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2. 온전한 신앙은

1)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앙 고백을 바로 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교회를 어느 정도 안다는 뜻입니다.

2) 사람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가 아닌 하나님 제일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어떤 감정이나 취미나 소원을 다 떠나서 성경대로 실천하기를 힘쓰는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주일 지키고 예배드리는 의식으로만 알면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성경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앞에 한 알의 밀이 되어도 칭찬과 상급이 있거든(요 12:24) 하물며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죽이는 일이야 오죽 하겠습니까?(고전 15:31)

아무쪼록 저희들의 믿음이 허탄한 것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귀속시키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줄 아는 믿음이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8과 이해할 수 없는 일 (잠 30:21~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잠언을 쓴 아굴이란 사람이 세상에 희귀한 일이 일어나서 사살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음을 알게 하므로 무질서한 세상을 한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이유에 의하여 낮은 자를 높이실 수 있지만(삼상 2:6~8) 본문에서 지적한 희귀하고 놀라운 일은 무질서나 어두움을 틈타서 사욕을 챙긴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이렇게 되면 더 어려운 문제가 야기될 것을 우려하여 나타낸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일도 있지만 본문이 말씀하는 내용은 염려를 나타낸 깜짝놀랠 모순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1. 그러면 그 문제스러운 깜짝 놀랠 일이 무엇입니까?

1) 종의 신분으로 있다가 임금이 된 것입니다. 요셉처럼 순리대로 높아진 것이 아니고 어둡고 무질서한 틈을 타서 종이 임금을 없애고 자신이 임금된 것이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요, 자격없는 자가 왕이 되었으니 그 앞날이 더욱 암담해 질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2)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무식하고 덕이 없는 자가 큰 재물의 소유주가 되었으니 얼마나 교만하고 방탕하겠는가? 를 우려한 말씀이요

3) 거리낌 받는 계집 즉 성격이 포악하거나 부정이 있어서 시집을 못갈 줄 알았는데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명한 것이요

4) 계집종이 주모가 된 것입니다. 주인이 계집종과 눈이 맞으면 오행수로 종이 주인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리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종이 왕되고 미련한 자가 부자가 되고 부정한 여인이 시집가고 여종이 주모되는 것은 다 기회를 역이용하여 이득을 차린 것으로 결국은 후일을 염려한 말씀으로 성도는 합리적 방법과 합리적 위치에서만 자기의 일을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순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저래서는 안되며 저런 모순을 범해서는 안 되는데 모순이 나타나는 일이 성도의 신앙 세계에도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제목을 택한 것입니다.

2. 성도의 생활 속에도 이해 못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1)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의심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인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없는 하나님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범신론적 신을 믿는 결과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으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모든 말씀을 다 진리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거나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과 같은 것이므로 믿는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한시도 하나님을 잊거나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체면을 차리면서 대등한 대상들 앞에서는 투기하고 경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성자의 기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과 양심의 표현이고 거듭난 자가 예수님을 닮는 표식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조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 믿는 성도가 십자가 은혜에 엎드리지 못하고 감히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자기의 인기를 나타내려하고 자기의 뜻만 관철시키려 하는 등 겸손하지 못한 사례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믿음을 갖기 전) 자신이 살았다가라도 진리를 깨닫고 계명이 이를 때에는 자신의 죄는 살아나고 자신의 인격은 죽게 된다”고 롬 7:9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도인 자신을 위하여 희생하신 것이요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것은 신앙인임을 의심케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비우거나 죽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즉 얼마나 만족한 일입니까? 시편에 보시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시 37:4) 하셨고, “나의 소망은 주께 있으며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온다”(시 39:7, 62: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고

5) 예수를 믿으면서 사랑에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사람을 데려다가 도와주시는 못할 망정 어려운 사람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은 사랑을 실천 못해도 교회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을 인색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6) 예수님을 대리하는 복음사역자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르는 태도와

7) 천당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이해 못할 일이 많겠지요. 우선 이상의 일곱 가지만이라도 우리들의 생활에서 모순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9과 믿음의 책망과 칭찬 (마17:17, 8:10)목록으로


“믿음이 좋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히 11:6). 그래서 저희들은 믿음 부족에 대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믿음 육성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믿음 부족을 책망하신 말씀과 반대로 믿음이 있으므로 칭찬하신 사례가 있어서 그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책망하신 사실부터 찾아보겠습니다.

1) 마 17:17을 보시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하시므로 제자들의 잘못을 책망하셨는데 이것은 제자들이 기도없이 간질병을 고치려고 하다가 못고친 사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지만(마 10:1) 이 능력을 기도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막 9:29) 불미스런 현상을 드러낸 것입니다. “불미스럽다”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면 예수님의 이름의 권위가 나타나도록 병고침의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였으니 결국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이 외식적 행동에 이용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없이 행하거나 불확실한 일을 행하거나 예수님의 이름을 헛된 일에 남용하면 믿음 없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2) 마 8:26에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고 책망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 어렵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깨워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연과 만유의 통치자란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만유의 주를 모시고 가면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분을 잘 몰랐기 때문에 풍랑을 두려워 하였으므로 그 믿음 연약한 상태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을 주어집니다(벧후 3:18). 지식을 갖춘 좋은 믿음을 가짐으로(롬 10:1) 예수님을 확실하게 모셔야 할 것입니다.

3) 마 14:31에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풍랑 중에 물 위에 나타나신 예수님께로 걸어가다가 바다에 빠지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의심한 것은 하나님의 연속적 붙드심을 의심한 것입니다. “물 위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면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했을 때 예수님이 “오라”하셔서 그 말씀 능력에 붙잡혀 물 위로 걸었는데 풍랑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런 이적이 계속 될 것인가?”하고 의심하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는 영원한 말씀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능력도 함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심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4) 마 16:8에 보시면 “믿음이 적은 자들이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셨을 때 제자들은 반사적인 생각으로 많은 무리들이 어디서 떡을 구하여 먹을 것인가?를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시가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역사가 있은 다음이기 때문에 떡 먹는 문제로 염려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것이나 식물과 동물을 먹이시는 것과 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신 것은 먹을 것을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근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시범을 생활에 적용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떡을 의미하심이 아니고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경계하라는 말씀인데 그런 의미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5) 눅 24:25에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 연약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의심이 작용하면 더디 믿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더디 믿는 것은 더딘 동안 의심하였다는 뜻입니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이므로 책망을 받아 마땅하겠지요. 이렇게 기도없이 행하는자, 만유의 주를 모시고도 두려워한 자, 하나님의 붙드심을 의심하는 자, 능력을 체험하고도 먹을 것을 인하여 염려하는 자,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더디 믿는 자들이 믿음에 관한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에 관하여 칭찬을 아끼시지 않은 사례도 있습니다.

1) 마 8:10에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하시므로 백부장이 말씀의 능력을 믿음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2) 마 15:28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하시고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때에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치는 문제로 끈질지게 간청하여 결국 예수님의 허락을 받음으로 그의 지구력있는 간청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3) 마 16:17에서 신앙 고백을 바로 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다”고 칭찬하셨고

4) 마 25:21에서는 충성을 잘한 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셨으며

5) 마 26:13에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위하여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다 믿음이 좋은 상태를 나타내므로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책망받을 일은 지양하고 칭찬받을 일은 본받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0과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자 (약 4: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자”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일이 크게 복된 일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시 73: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셨고, 시 63:8에서는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에 하나님도 가까이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요소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좋으냐 덜 좋으냐에 따라서 하나님과 가깝고 먼 사이가 되는 것이요, 성도가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도록 노력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자

1. 회개하는 자를 가까이 해 주십니다. 본문에서도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하시고 “죄인들이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 곧 마음과 실천을 깨끗이 갖는 자를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탕자를 영접하시고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역시 회개하는 삭개오를 크게 기뻐하셨습니다(눅 15:7,24, 18:14, 19:9). 성도는 무엇이나 고치는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집 안에 고쳐야 할 물건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고칠 것은 고쳐 놓아야지요. 이와 같이 생활도 고칠 것은 고쳐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고치는 자에게 가까이 해 주십니다.

2. 겸손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눅 18:14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고, 벧전 5:5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신 분입니다(마 11:29).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슥 9: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사장님 대우를 받기 위하여 비싼 승용차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승용차로 사장의 대우를 받으려고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타시고 입성하신 의미를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겸손할 때 왕 세우셨다가 교만하여졌을 때 버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계시게 하려면 어린아이처럼 겸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진실한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히 6:18에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내가 곧 진리요”(요 14:6)하신 말씀도 역시 진실하시다는 뜻입니다. 또 중요한 말씀은 딤후 2:13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시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관한 문제를 속인다면 “진리가 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결백한 척하였다면 그는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어 “진리가 그 속속에 계시지 않는다”고하셨습니다(요일 1:8). 사람이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데서 잘못된 말이 나오는 수도 있고, 또 말과 주장을 실천 못하는데서 거짓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정탐의 보고가 상이한 것은 고의적인 거짓이 아닙니다. 한편은 믿음과 긍정적으로 보았고, 한편은 불신앙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과 실천이 다른 것은 거짓을 자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짓과 상종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들이 자기의 허물이나 약점을 감추어서 어떤 유익을 보려한다면 그것도 역시 진실치 못함에 해당할 것입니다(욥 8:6, 시 140:13).

4.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가까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연약한 것을 아십니다(시 90:5).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시 84:12, 잠 16:20, 28:25 등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고 또 풍족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것을 의지하는 마음과 손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은이 되신다” 하셨고(욥 22:24~25), 시 146:3에서는 “방백들과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시 49:6에서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그것으로 아무 형제도 구속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여야 할까요?

1) 현실적인 것을 의지하지 마셔야 하고

2) 기도하여야 하며

3)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잠 16:20에서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곧 진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요 1:1). 시 107:9에서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하셨고, 애 3:25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내가 저를 버리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선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사모하고 갈망할 때 하나님이 그 심령에 가까이 와 주시는 것입니다.

6. 충성된 자에게 더 가까이 와 주시는 것입니다. 느 9:7~8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충성됨을 보사 언약을 주셨다” 하셨고, 눅 19:17에서는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여도 가까이 와 주시고 또 열 고을 권세까지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회개와 겸손과 진실과 의지함과 사모함과 충성됨이 곧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님도 그 성도를 가까이 해 주시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41과 욥의 신앙 (욥 2:7~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욥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욥의 신앙”이라면 누구든지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① 고난을 극복한 신앙이고 ② 인내하는 신앙입니다. “욥”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바가 없고 따라서 욥만큼 인내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약 5:11에 보시면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안다”하시므로 욥이 인내의 모범자가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욥의 다른 신앙 볓 가지를 더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은 140년을 살았습니다. 고난과 질병을 당한 사람치고는 퍽 오래 산 나이입니다(욥 42:16). 이 사실은 고난과 질병이 수명을 단축하지 않음을 알게 하셨고, 또 아브라함이 175세(창 28:7), 이삭이 180세(창 35:28), 야곱이 148세(창 47:28), 요셉이 110세를 산 것과 비교하면 욥은 야곱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또 욥기에는 “우스” “스바” “갈대아” “데만” “수아” “나아마”라는 여섯 장소가 나타나 있는데 여기의 욥의 고향인 우스와 두 친구의 고향인 수아와 나아마는 현재까지 연구된 책에서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데만(친구 엘리바스의 거주지)은 사해바다 남쪽과 에일낫의 중간지역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욥을 침략해 온 스바사람은 남쪽 에디오피아를 의미하고 또 갈대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간지역으로 현재 이락의 서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로운 지식을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탄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사탄과 대화를 나누시며 사탄을 지배하신 사실이 기록된 것입니다(욥 1:6~12, 2:1~6). 여기의 하나님이 계신 곳은 천국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받은 백성들이요, 사탄이 그 곳 출입을 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영물입니다(왕상 22:22, 잠 16:4). 마지막 심판 때에는 어느 곳에 있는 사탄이든지 다 심판하여 무저갱으로 보내실 것입니다(계 20:1~3). 그러면 욥의 신앙은 “고난 극복과 인내”외에 또 어떤 신앙이 있었습니까?

1) 조건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조건 없는 신앙을 칭찬하시니까 사탄은 말하기를 욥이 지상에서 은 축복을 받은 까닭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까닭을 없애보라고 하셨습니다. 욥이 지상에서 받은 축복은 가정의 복, 재산의 복, 존귀의 복, 건강의 복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그 까닭을 다 없앴지만 욥은 여전히 순전함을 지킨 것입니다. 이렇게 까닭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욥이 현실적으로 좋은 것은 다 뺏겼습니다. 가정, 재산, 명예, 건강까지 다 뺏기고 남은 것은 고난과 목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받았으면 재앙을 주셔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욥 2:10)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재앙을 주셔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여야 함을 나타낸 신앙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깊게 믿고 넓게 믿고 영원히 길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3)욥은 좋은 신앙의 친구를 가진 사람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성도의 친교적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서로 친교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셨습니다(시 133:1). 친구는 어려울 때 찾아오는 친구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신앙의 친구이어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고난 중의 욥을 찾아와 위로하였고, 같이 슬퍼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해당하는 권면을 바로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낸 것은 사실이요, 그들도 훌륭한 신앙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① 조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② 주권에 순종하는 신앙과 ③ 좋은 친구와 더불어 친교를 갖는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42과 다윗의 신앙 (시 27: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다윗이 사울왕과 압살롬의 추적을 피할 당시에 어려웠던 때를 회상하면서 지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 포로 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지만 근거가 없고 6절 말씀의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린다”는 말씀이 솔로몬 성전 이전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의 신앙 몇 가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과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요(1~3절), 다음에는 하나님 사모하는 일을 제일주의로 여긴 신앙이요(4절), 셋째는 환난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믿는 신앙이요, 넷째는 승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저희들도 이 네 가지 신앙을 가짐으로 믿음의 질을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1. 다윗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 대하여

1)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빛이요 구원이라고 믿었습니다. 빛은 어두움과 절망을 밝혀주는 것이고 구원은 역경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성도의 아버지로서 구원의 은혜를 넉넉히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성도는 작은 일에도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과 비천과 죽음 네 가지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길 때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 다윗은 또 하나님을 생명이요 능력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래서 대적자나 원수된 행악자라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자기의 생명을 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군대가 진을 치고 전쟁이 일어날지라도 오히려 안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안연”이란 두려움과 근심을 모르는 편안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두려움을 멀리 쫓으려면 현세의 정욕을 멀리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든든히 맡기며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가깝다는 신앙적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모하는 일을 제일주의로 여긴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내가 하나님께 구하였던 한 가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한 가지씩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지식이나 효도에 관심쓰는 경우도 있지요.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에 또 어떤 이는 운동에 제일 큰 관심을 쏟습니다. 저는 틈만 있으면 설교문 정리하는 것을 제일주의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한 가지 일이 하나님을 앙망하되 그 전에서 사모할 것을 소원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 다윗이 늘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 나갈 기회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 같으면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대에는 율법도 희귀하였고 성소에 가서 제사장을 통하여 제사를 드려야만 하나님을 섬기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전, 장막)을 사모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다녀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을 사모하여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환난에서의 보호를 믿는 신앙입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어려운 환난과 위기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환난 중에 총알이 비켜가고 붙잡히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경우로 보호받는 사례가 많습니다. 저희들은 아주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작은 일중에서라도 적당하게 인도하시고 어려움을 피하게 하시는 은혜와 섭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5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환난날에 초막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은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셨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그 장막”이란 삼상 21장에 나타난 내용으로 “다윗이 사울왕을 피할 때 성소에서 아히멜렉 제사장의 보호를 받은 것”을 연상한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바위 위에 높이 두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안전한 고지에 인도하여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어떻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에 대하여 체험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승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6절의 “내 머리가 나를 두른 원수 위에 들린다”는 말씀은 원수 앞에서 승리한다는 뜻이요, 승리를 해야만 즐거운 제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승리를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가 죄나 비양심적인 사실을 안고 있으면 승리의 자신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받는 신앙과 사명과 노력이 있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위치에서 승리의 자신감을 가진 것입니다. 시 109:4절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과 기도의 편에 선 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좋은 신앙을 본받아서 항상 의연하고 의지하며 보호를 받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구원에 관한 말씀

제43과 십자가의 도 (고전 1: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십자가의 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많이 강조되고 증거 되었으며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시간에 또 한 번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도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깨닫고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1) “십자가의 도”란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ㅎ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고 사건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신 것이고 여기에 따라서 복음의 전도자들도 꼭 지식인이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26~27).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죄에서 건짐받고 영생 얻는 일이요, 십자가의 도는 바로 그 열쇠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전 2:2)고 하셨습니다.

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이란 뜻은 구원받지 못할 비택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자의 헛소리처럼 이해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 십자가로 당시의 죄를 담당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비택자들은 이 복음을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을 것입니다.

3) 그러나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우선 능력이 없으면 죄로 죽을 자를 살려내지 못합니다. 또 능력이 없으면 마귀와의 대결에서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믿는 신앙이면 죄에서 건짐받을 수도 있고, 또 마귀와의 대결에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죄와 마귀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란 뜻입니다. 이상으로 본문 내용을 설명드렸습니다.

2. 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 십자가의 도리를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의 도는 믿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단 한 가지 방법만을 쓰셨습니다. 따라서 이 방도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도는 믿음으로 받을 때 자신이 구원받는 유일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것은 그것 외에 더 쉬운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므로 하나님의 최고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대속물이 없이는 죄를 거저 사하실 수 없고, 그 대속물은 순결하고 영원한 생명이어야 하며 또 하나님과의 친분관계가 있어야 하고 완전한 순종과 고난과 생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였습니다. 따라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자는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한 가지 방법뿐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요구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만 대속의 방법이요,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입니다.

3) 십자가는 예수님의 도덕적 생활을 모범입니다.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는 로마의 형틀이고, 신령한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이며 도덕적 의미는 네 가지가 있는데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반드시 이 네 가지를 실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덕적 의미 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경륜을 세우시고 단 한 가지 방법인 십자가를 예수님이 감당하실 것을 제의하셨을 때 예수님이 이를 순종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죽음을 아시고 순종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 2:8에 보시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절대 순종이요, 고난과 죽음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② 십자가는 자신의 비하요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고 사람 중에 종되시고 속국 백성이 되셨으며 천인 계급으로 오시고 마굿간에 누시고 목수 일을 하셨으며 악인들이게 멸시를 당하시는 죄인의 입장까지 낮아지셨으니 겸손 중에 최고의 겸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③ 고난의 감수입니다. 이 고난은 뜻있는 고난입니다. 성도가 믿음과 정의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십자가 중심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④ 남을 위한 자기의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의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반드시 순종과 겸손과 고난과 희생의 도덕적 실천을 앞장서서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예수님의 생활 모범입니다. 마 16:24에 보시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자기의 십자가”란 자기의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금 내는 책임과 모친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이행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도 가정과 사회의 일반적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책임을 감당하면서 믿음생활, 사명생활을 잘 하는 것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반드시 십자가 도리에 대하여 믿을 것은 믿고, 알 것은 알며 행할 것은 행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4과 구원 얻는 자가 적음 (눅 13:23~2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원 얻는 자가 적음”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들 중 구원하시는 대상의 수가 극히 적음을 말씀드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숫자주의에 이끌리는 마음을 떠나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더 가깝게 수립하고 적은 수의 선택에 자신이 해당된 것을 크게 감사하며 전체적 구원주의에 입각하여 전도하지 말고 택한 백성을 상대한 전도임을 알아서 양보다 질에 치중할 것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알마니안 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인류 또는 전체민족을 천국 백성되게 하기 위하여 전도의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전체를 구원하시지 않고 극히 적은 수의 백성만을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합당하도록 믿고 선택 교리에 부합되는 전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의 수를 또는 누구를 선택하여 구원하실까? 하는 것이 궁금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구원받을 백성의 수가 극히 적다”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일자, 각 사람의 죽을 날짜, 구원의 대상자의 수와 그 신분들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거기에 적응하는 생활이 성도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을 보시면 “구원 얻을 자의 수가 적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구원 얻을 자의 수가 적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 7:13에서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시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에 비할 때 찾는 이가 적을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기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갔으면 좋겠는데”하면서도 좁은 문을 외면하고 넓은 문 쪽으로 밀려가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 가기 위하여 믿는다”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신앙생활이 확신없는 외식과 실제적 신앙이 못되는 수준에서 서성대는 것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역사는 다 적은 주를 대상으로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구원이 그 실례인 것입니다.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으로 1000년 경의 사람이며 그 당시 인류의 수명이 평균 84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지상에 많은 인구가 퍼졌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여덟명만 구원하셨고, 아브라함은 아담의 20대 손이고 2000년 경의 사람인데 그 당시 소돔 고무라, 아드마, 스보임 네 도성에도 역시 많은 인구가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놋과 그의 두 딸을 합하여 세 사람만 구원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전 1500년 경 출애굽 때를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선민정치가 그 민족을 다 천국 보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민정치를 하신다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구원적 우선권이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에 인구 조사한 수가 장정만 60만이었으므로 여자와 노인, 유아를 합하면 2~3백만 명이라고 추산할 수 있지요. 그런데 광야 40년을 거치는 동안 그 수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하고 다 광야에서 죽었고, 그 죽은 수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출애굽 백성들 중 구원 받은 수는 극히 적다고 보아야 합니다. 고전 10:5에 보시면 “하나님이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은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성경에 보시면 신약시대에 부흥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응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말세에는 믿음이 희귀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세에는 점차 신앙인의 수가 줄게 끔 예언되어 있습니다. 겔 36:25~28,38에 보시면 “말세에 성령 충만의 역사와 구원 받는 수가 정한 절기에 양떼의 몰려옴 같이 흥왕할 것이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신약의 오순절 때에 응하였고, 또 드문드문 교회의 부흥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고, 또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지고 죄악의 역사가 많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10~14, 딤후 3:1~5). 따라서 말세에는 택한 백성 외에는 믿음에 들어오기가 퍽 어려운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경을 진리로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혹 사람의 친절이나 봉사나 IMF 극복을 위함이나 기복주의에 이끌려 나오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요, 오직 성경에 이끌려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나오는 성도라야만 참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사람 수에 의존하지 마셔야 합니다. 사람의 구제나 도움이 있어도 한계가 있고,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것만 못합니다. 사람의 수에 의존하여 희망을 가져보실 생각이 있으시면 그 힘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과 자신과의 믿음 관계를 든든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믿음 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며 가까이 계신가를 느끼시면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내가 고독해지고 또 내가 세상 것(돈, 명예, 인간 배경 등)을 의지하지 않을 때 더 가까이 해 주심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고독해지는 것을 오히려 기회로 아시고 소망가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전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택한 백성들 중에 많은 식구들이 전도한 자의 교회로 몰려 올 것입니다. 전도는 내 교회를 부흥시키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선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편입니다. 혹 전도를 열심히 하셨는데도 열매가 적으면 말세인지라 그 만큼 완악해졌고, 또 구원의 선민들이 거의 구원의 길에 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노력으로 인류를 다 구원하라”고 하셨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평안대신 십자가를 지우시는 분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강도가 증언한 진리 (눅 23:39~43)목록으로


“강도가 증언한 진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두 사람의 강도들이 자기들의 죄로 예수님처럼 십자가 형틀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은 강도를 끔찍한 죄인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죄가 사람들에게 발견된 것이 강도라면 누구에게든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악한 생각과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죄가 많을 것을 예상하여 강도와 우리들과의 범죄간격을 좁혀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두 강도 중에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았으나 한 사람은 회개하므로 큰 차이를 나타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가 회개하지 않은 일반 죄인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음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강도가 외친 말도 진리가 될 수 있는가? 할 때

1) 진리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말하거나 믿지 않는 죄인이 말하거나 심지어는 짐승의 입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민 22:30)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2) 따라서 강도가 증언한 말이라도 진리는 진리로 받아야 하며 존경하지 못할 사람이 증언하거나 혹 어린 아이가 증언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 두렵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강도가 무슨 진리를 증언하였습니까?

1) “회개하지 않는 자는 책망받아야 마땅하다”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회개한 강도가 회개하지 않은 강도를 꾸짖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2) “죄는 지은대로 보응받는다”는 진리를 증언한 것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씀과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므로 당연하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를 지은대로 갚아 주시고 보응하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증언한 것이요

3) 모든 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회개 안한 자도 두려워해야 하지만 회개한 자도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시 2:11).

4) 예수님은 옳지 않음이 없는 분임을 증언하였고

5) 죽기 직전에 회개하여도 충분히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음과

6) 죽기 직전의 기도도 넉넉히 응답될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고난 중의 기도, 죽음 직전의 기도라도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받으시고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귀한 진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6. 사명과 부흥에 관한 말씀

제46과 하나님을 섬기는 법 (대상 16:1~6)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을 살피면 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들어갔다는 말씀 ② 그 법궤를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솔로몬 성전 이전에 만든 임시 성막)에 두었다는 말씀 ③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말씀 ④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는 말씀 ⑤ 무리들에게 매명 떡과 고기와 건포도병(떡)을 주었다는 말씀 ⑥ 여호와의 궤앞에서 섬겼다는 말씀 ⑦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할 때 책임자를 세우고 각종 악기를 사용하였다는 말씀 ⑧ 제사장이 언약궤 앞에서 항상 나팔을 불었다는 여덟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하나의 뜻으로 종합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방법을 잘 배워서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1. “법궤를 멧다”는 것은 법대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본래 그 법궤를 메지 않고 이방인의 방법에 따라 수레로 운반하다가 웃사가 죽고 하나님과 충돌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대상 13:1~14) 그런데 이번에는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출 25:14). 하나님을 섬길 때 말씀대로 합법으로 양심적으로 섬겨야 할 것을 교훈하심이요

2. 법궤를 안치한 것은 신앙 생활의 정착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 확립을 뜻합니다. 법궤가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이사온 후 살림 정리를 안 한 것과 같아서 신앙 생활이 정돈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정돈되지 않고 확립되지 않으면 바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믿음의 대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중보자의 희생을 믿는 신앙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였음을 감사하는 예물이므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4.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축복하였으니 이것은 선지자(다윗도 예언자이므로 선지자임)와 왕 된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특권은 마구 행사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상태에서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 하에서 효력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안하는 자의 축복이 효력을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이 축복한 것이 하나님을 섬김에 해당하는 것처럼 복음 사역자의 축복기도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일종이 되는 것입니다.

5.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은 성도간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윗(왕)과의 친교, 왕과 백성들과의 친교등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133:1에 보시면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친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6.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심령으로 가까이 모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가까운 곳에서 신약 시대로 말하면 교회를 가까이 하며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교회는 아니지만 사명 가진 성도는 예배당(교회) 가까운 곳에 살아야 믿음 생활과 봉사 생활이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개인적 생활 중심으로 거처를 정하는 실정은 퍽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을 하였고, 또 찬양할 때 전문가들과 각종 악기를 동원한 것이요

8. 또 제사장들은 항상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었으니 이 나팔은 경고와 출동신호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반드시 이 나팔소리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역자의 지도에 복종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을 꼭 봉사나 희생으로만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과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무엇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여덟 가지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행한 일, 하나님의 궤를 아무데나 방치하지 않고 정한 좌소에 안치한 일, 하나님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선지자요 왕인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한 일, 하나님 앞에 나온 모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사랑의 친교를 나누게 한 일, 또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7과 하나님이 쓰신 사역자 에스라 (스 7: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쓰신 사역자 에스라”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에스라는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에 바벨론에서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제사장 신분을 가진 유대사람이었습니다. 바사왕 아닥사스다는 메데파사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처음 왕인 고레스와 다리오 다음의 왕이었습니다(스 6:14). 여기의 아닥사스다는 다리오 2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메데파사의 왕조역사를 명확하게 살피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첫째는 확실한 설명의 재료가 없고, 한 사람이 두 이름을 쓰는 경우와 비슷한 시대에 같은 이름이 두 사람 이상 있는 경우와 한 이름(바로왕)을 여러 사람이 계승해서 쓰는 경우가 있어서 왕조역사 연구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또 본문의 주인공인 에스라도 그가 레위지파이고 아론의 16대 손은 확실한데 보통 말하기를 그가 “바벨론에서 출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스라야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피살되었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그러니까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출생했다는 설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혹 그 어머니가 유복자를 데리고 가서 낳았든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끌려 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 제목으로 돌아가서

1. 하나님이 쓰신 사역자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손이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가 제사장 신분이란 뜻이고, 하나님의 성직을 16대를 계승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에스라의 족보를 상세하게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이 16대를 계승시켜 주신 것과 역사성을 확실하게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제사장들도 수난을 겪은 때가 많았습니다. 사울왕이 제사장 85인을 죽인 때가 있었고(삼상 22:18) 여러보암왕 때도 수난을 당하였고(왕상 13:33) 또 바벨론 침략 때도 큰 수난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 신앙과 제사장 직위를 지킨 것은 퍽 지조있는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계승과 직분의 계승을 높이 평가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율법에 익숙한 학사였습니다. “율법에 익숙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한다는 것이요, 성경의 지식이 많아서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율법에 또는 성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잘 가르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지식 많은 것이 신앙의 분량입니다. 믿음의 근거가 성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에스라의 하는 일을 도와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왕에게 구한 것은 다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방나라 임금도 에스라를 신임하였습니다. 에스라가 왕에게 구하는 것은 왕이 다 수락한 것은 왕도 에스라를 신임하고 하나님도 배후에서 에스라의 일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분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두 r지 여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사실대로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보는 사람이 자기의 색안경을 쓰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실을 나타내지 않으면 남이 자기를 바로 알아 줄 수 없을 것이요, 또 자신이 결백하여도 보는 자가 ,결백치 않을 때는 역시 결백치 않은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을 다 받으려면 상당 기간 정의의 빛과 증거를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는 율법 연구를 결심하였고, 또 하나는 율법 준행을 결심하였고, 또 하나는 율례와 규례를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율법 연구 결심, 준행 결심, 가르치는 결심은 참 귀한 것입니다. 제가 한남교회 위임목사직을 다른 임지도 없이 사임한 것은 엄청난 결단이라고 보는 동료자들이 많았습니다.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제가 그 일을 결단낸데는 다른 문제들에도 원인이 있지만 성경강해서를 쓰고 설교문을 글로 반포하려는 결심과 또 자유로운 양심 생활을 했으면 하는 소원과 문서(신앙서적) 보급 선교가 목회보다 낫겠다는 판단으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결심이 저의 결심과 꼭 같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결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는 결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은 연약해도 교회는 강해야 하는데 교회 대표자들이 강하지 못하면 교회도 강하지 못하여 여지없이 사랑 아닌 일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율법 준행의 결심이나 사랑의 결심은 귀한 것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보급해 보려는 것도 역시 좋은 결심입니다. 제가 쓴 신앙 상식이 중국 교포 성도들에게 신앙 교과서처럼 쓰여지는가 하면 그것을 번역 보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퍽 만족하였습니다.

5.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귀향하여 20년 간 있으면서 성전을 재건하였고, 신앙 생활 정화 운동을 벌여 좋은 일을 많이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전통을 갖고 직분을 고수한 자,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자, 하나님과 사람(왕)의 인정을 받은 자, 좋은 결심을 가진 자를 귀하게 쓰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 외에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겸손한 자, 순종하는 자, 화합을 잘 하는 자, 봉사적인 자, 인내를 잘 하는 자, 양보와 희생정신이 있는 자, 사리를 바로 판단하는 자, 기도하는 자, 연단을 많이 받는 자를 쓰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48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중건 (느 2:1~1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중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당시에 유대인 하가랴의 아들로 태어나 에스라처럼 신앙교육과 고등교육을 받고 파사왕 아닥사스다 20년에 왕실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에스라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지만 에스라가 먼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신앙 부흥에 힘썼고, 그 다음 2차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한 사람이 느헤미야힙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선민들의 고향이자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도성 재건은 별개의 것으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사역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느헤미야는 먼저 예루살렘의 황폐된 소식을 들었습니다. 느 1:3에 보시면 형제 중“하나니”가 유대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은 즉 그곳의 남은 자들이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성이 훼파되고 문짝이 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열조의 묘실이 있는 예루살렘이 황폐된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불행이었습니다.

2. 그래서 느헤미야는 슬픈 마음을 갖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열조의 범죄에 대한 자복과(느 1:5)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복주실 것을 약속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은혜를 구하였고(느 1:9) 자기에게 형통하는 길을 주셔서 성전 중건에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느 1:11). 그때 자신은 아닥사스다왕의 신하로 있었기 때문에 그 왕의 배려가 있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좋은 소원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1) 황폐된 소식을 듣고 기도한 때는 기슬르월(3월)이었고 응답이 시작된 달은 니산월(7월)이었기 때문에(1:1, 2:1) 4개월 만에 응답이 된 것입니다.

2) 그 기도의 응답은 왕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 앞에서 은혜를 힘입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황폐를 인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을 때 왕이 그 이유를 물으면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2:4) 예루살렘 중건을 위하여 은혜 힘입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 때 왕이 느헤미야에게 유다 총독을 명하고 군대 장관과 마병을 함께 보내 주고 강서편(유프라테스강이나 요단강일 것임)의 총독들에게 조서를 보내 주어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큰 감동을 받고(11절) 밤중에 혼자서 무너진 성벽들을 점검한 후 백성들에게 “성을 중건하여 민족의 수치를 면하자”(18절) 하였더니 여기에 훼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셔서 백성들이 일제히 동참하여 일을 분담함으로써 어려운 일을 진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느 3:의 말씀에서 사역분담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것

1)성 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좋은 소원을 갖고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려는 것은 좋은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성취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 4개월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소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원 자체가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빌 2:13). 필자는 기성교회의 어려움과 문제가 많아서 늘 고민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목회를 사임하게 하시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의 자유를 갖게 하셨고, 마음껏 말씀 연구에 집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좋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왕이나 사람의 협조를 통하여 성취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소원을 아닥사스다왕을 통하여 성취하게 하셨습니다. 나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칠 때는 자기 집의 하녀를 통하여 일깨워 주셨고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자로 등장할 때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천거가 있었듯이 사람의 도움을 통하여 응답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떤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교제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명분있는 일에는 반드시 훼방이 있고, 협력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산발낫과 도비야는 이것을 비웃고(2:10,19) 업신여겼으며 나중에는 훼방까지 하였습니다(4:7~8). 그런데 훼방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협력과 용기가 따릅니다. 그래서 중건하는 성도들은 파수꾼을 세우고 대적과 싸우면서 역사를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반드시 좋은 소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계획을 가지시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과 위한 일들을 많이 성취하게 하실 것입니다.

 

제49과 몰각한 목자들 (사 56:9~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몰각한 목자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 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바벨론의 침략으로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사 39:5~6). 그 예언은 이사야의 예언 후 약 100년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되는 원인이 그들의 죄값임을 말씀하신 중에(사 1:15~17) 본문에서는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부패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목사가 증거하고 성도들을 듣게 하는데는 민망한 점이 있지만 오늘날도 몰지각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증언자는 자성하고 성도들은 이 시대의 복음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상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본문에서 신앙의 지도자들을 파수꾼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파수꾼은 병사들을 방어하면서 대적이 올 때에 나팔을 불어 경고하고 대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은 훈련된 병사이어야 하고 무장을 해야 하고 깨어 지켜야 하며 이상한 징후가 있을 때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적자의 자세와 사명을 비유한 말씀이기 때문에 성직자가 성직자의 자질과 자격을 갖춘 상태에서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그런데 본문에서 타락한 파수꾼에 대하여 비유적인 말씀을 책망을 하셨습니다. 어떤 비유로 책망을 하셨는가? 하면

1)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수꾼이 바른 관찰을 못하듯이 그 당시 성직자들도 현실을 바로 볼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시대의 죄악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때를 분변하지 못하는 경우 등일 것입니다. 소경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앞을 직시하지 못하는 영적 어두움을 지적하신 것이요

2) “무지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무지하고 일반지식에도 무지하며 경험도 무지한 상태에서 더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진단을 바로 해야 바른 약을 쓸 것 아닙니까? 성직자가 무지하면 신앙 지도를 옳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벙어리 개란 짖지 못하는 개로 성직자가 할 말을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성경 말씀을 다 증언할 수 있어야 하고 핍박중에서도 증언할 수 있어야 하며 교리를 잘못 이해할 때도 깨우쳐야 하며 신비주의, 기복주의, 현실주의도 강하게 배격하는 설교를 해야 하며 성도의 교만, 명예욕, 월권 등 모든 잘못에 대하여 낯을 가리지 말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너무 민망하여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바른 권면을 하고도 사랑을 저해하는 일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할 때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반드시 할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서야만 할 것입니다.

4)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게으르고 안일주의에 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꿈꾸는 자”를 계시의 말씀을 도적하는 자로 해석해 봄직도 합니다. 꿈을 꾸고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고 내세워 인기를 얻으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거나 안일을 좋아하는 자는 향략도 좋아합니다. 놀고 먹고 구경하며 세월보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연구하고 다 증언하려면(계 1:2) 평생을 하여도 못 할 것입니다. 자기 앞에 산적된 사명을 두고도 게으름을 핀다면 몰각한 목자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4) “개들과 같아서 탐욕이 심하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개의 특성은 체면없이 탐심을 나타내는 일일 것입니다. 성직자의 3대 유혹은 물욕, 명예욕, 성욕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문제에 결백할 수만 있다면 거룩한 사역자일 것입니다. 성직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각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5)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길로 돌이킨다”는 뜻은 신본주의가 아닌 자신의 정욕주의를 뜻하고, “어디있는 자이든 자”란 남방유다에 거주하는 선지자나 북방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선지자나 다 같다는 뜻이요, “자기 이만 도모한다”는 뜻은 오직 이기주의에만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생각하여 말씀하실 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직자의 이기주의는 교회가 어찌되든 성도의 신앙이 어찌되든 자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6) 그리고 미래의 길조만 예고한다고 하였습니다(12절). 성경에는 선지자가 복과 저주를 다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신 11:26). 그러나 성도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저주는 감추고 축복만 하는 경향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성직자들의 참 됨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성직자인 저 자신을 위시하여 모든 동역자들이 늘 반성하며 회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페루의 원주민 중 어떤 도인은 아마존강 정글로 걸어가도 밀림 속의 온갓 곤충소리가 멎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곤충이 그 도인의 성품이 착함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도 밀림의 곤충들이 그렇게 알아 줄 것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50과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마 28:16~2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의 어떤 산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1.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1) 모든 족속이란 세계의 인류 전부를 의미합니다. 구원은 택한 백성에게만 주실지라도 복음의 전파 사명은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도의 사명은 인간(성도)에게 주셨고, 사람은 누가 선택받은 자인지를 모르니까 모든 사람에게 전파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복음과 함께 모든 인류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모든 족속에게로 가는 순서는 우선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먼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행 1:8에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순서로 가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전도가 가까운 이웃을 외면하고 먼 곳을 앞질러 간다면 우선 가까운 이웃부터 차근차근 전도해 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족속에게로 갈 때 “빈손 들고 가라”는 뜻으로 아시면 안 될 것입니다. 반드시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시면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셨는데 복음을 소개하지 않고는 세례를 줄 수 없으니까 반드시 복음을 소개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도리를 의미하고 구원의 도리는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더 짧게 요약한다면 “모든 인생은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로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영생하는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 사실을 소개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확실한 전도는 확실한 복음을 알려주고 확인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가까운 대상 중에서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나 불쌍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적 위로를 받지 못하는 만큼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4:15~16, 11:5).

2.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1) 스승에게 배우지 않는 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2) 스승의 지식과 사상을 그대로 전수하여야만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제자는 스승의 뜻에 순종하고 충성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실 때 그런 각오와 결심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례의 뜻은 신앙고백을 확인하여 인을 치는 것입니다. 천국의 신령한 교회는 사람이 확인을 안하여도 하나님이 다 아시지만 지상의 교회는 사람들의 단체이기 때문에 사람의 확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을 점검하고 세례의식으로 표징을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므로 그대로 순종해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4. “내가 저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예수님의 분부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사상과 교회의 생활과 사회 생활 등 여러 가지 교훈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삼는 것은 신앙고백과 충성을 결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전반적인 신앙 생활의 교육을 뜻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지식의 공백은 물론 잘못 알고 있는 문제들도 많은 줄 압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보충과 교정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 먼저 부모들이 배우고 다음에 자기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신 6:7). 세상지식은 부모가 못배운 탓으로 자녀들을 더 잘 교육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자신이 먼저 알고 자녀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현실교회는 말로만 가르치는 재래적인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반드시 문서로 교육하는 초고속 방법을 써야만 할 것입니다.

5.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지킨다”는 뜻은 계명의 실천이요, 변화의 생활입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으면서도 예수님을 닮지 못하거나 마음이 착하지 않거나 말에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사랑실천에 발전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다 지킬 수는 없지만 강한 실천의 의지와 함께 용기있게 시행하면 성령님께서 도와 주시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만큼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의 믿음이 외식이 아닐진대 예수님의 마지막 다섯 가지 명령을 잘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1과 부흥된 원인 (겔 36:22~38)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부흥될 것을 약 550년 전에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부흥의 은혜는 “성령님의 역사로 성결되게 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각별하게 통치하시며 재물의 복도 주시고 건축도 하게 하시며 또 사람의 떼로 넘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결의 역사는 내적 부흥이고 사람이 넘치는 것은 외적 부흥인데 진정한 부흥은 질과 양이 다 충족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형식이 다 일치해야 합니다. 저희들은 항상 부흥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은 우리 자신의 심령에서부터 기도의 역사, 회개의 역사, 전도의 역사, 충성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점차로 다른 사람들까지 성령 충만의 은혜가 넘쳐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살피는 중에 “부흥됐다”는 사실과 함께 그 원인을 찾아보았습니다.

1. 행 2:4에서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은 큰 부흥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받아졌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550년 전에 예언하셨고, 요엘 선지자는 약 850년 전에 예언을 하였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줄 것이라”(욜 2:28~32, 행 2;17)는 예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세 번이나 약속하셨고(요 14:26, 15:26, 16:7) 또 승천하실 직전에도 “몇 날이 못되어 받을 것이라”(행 1:5)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인데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이 그 약속을 믿고 다 모여서(1:13, 2:1) 기도에 힘을 쓰는 중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약속은 하나님 편에서 하신 것이고 사람이 할 것은 “믿고 다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다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이 성령 충만을 받은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성령을 모든 사람이 다 받는 것이 특징이었고, 성령님이 다른 방언으로도 말을 하게 하셨으니 방언 아닌 말이야 얼마나 더 잘하였겠습니까? 전도나 덕담을 아주 잘 하였을 것입니다.

2. 행 2:41에서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하였으니 하루에 3000명씩 돌아온 것은 큰 부흥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살펴보니까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2:4) 소리를 높여(2:14)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2:36). 36절에 보시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하니까 그 말에 3000명이 돌아왔으니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십자가 전도가 그런 효력을 가져 온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다 성령 충만한 은혜를 먼저 힘입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상태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도한 것입니다.

3. 행 2:47에 보시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수가 날마다 더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유를 살펴보니까 42절에서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하므로 성경 교육이 있었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하시므로 성찬 예식과 친교가 있었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하므로 기도의 노력이 있었고, 또 “기사와 표적이 많았다”하셨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하시므로 유무상통(물질을 초월하는 생활)이 있었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모이기를 힘썼으며 친교와 찬송이 있었고 온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성경공부와 기도와 모임과 물질을 초월한 사랑의 친교가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오늘날 크게 기대하지 못하나 그 대신 성경의 권위와 기도 응답의 역사를 많이 강조하여 하나님의 친근한 역사를 증언하여야 할 것이고, 유무상통이란 참으로 차원 높은 신앙 세계에서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4. 행 4:4에 보시면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원인을 살펴보면 핍박 중에 전도가 더 큰 역사를 나타낸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증언과 교육을 힘썼고,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전도하는 것을 싫어하여 전도자들을 가두기까지 하였으나 그런 핍박 중에서도 말씀을 들은 자들중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시대의 전도가 거의 핍박 중에 있었으나 역시 전도의 큰 효력을 얻은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핍박 중의 전도에서 더 큰 열매를 주시는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며 전도한다는 그 자체가 고난과 생사를 초월한 사역이니까 그만한 능력이 더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5. 행 6:1에 보시면 “그 때에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6장 앞에서 찾아보면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하시므로 꾸준한 전도와 교육 사역이 제자의 수를 더 하게 한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6. 행 9:31에 보시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며 수가 날마다 많아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흥의 원인은 교회가 평안하였고, 든든함이 있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광의 분량과 성령님의 위로(사랑의 충만)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7. 행 16:5에서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 하였다”하셨는데 그 이유는 4절에서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로 지키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직자의 성경적 지도와 상회의 성경적 지도를 잘 준수한 것이 그 원인이었고

8. 행 19:20에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하셨는데 여기의 “세력을 얻은 것”은 부흥이고 부흥의 원인은 “주의 말씀이 흥왕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부흥의 방법은 합심, 모임, 합력, 기도, 말씀, 전도, 사랑, 질서, 안정, 핍박감수와 인내, 기쁨의 찬송과 권고의 능력 등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천국의 확장 (마13:31~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천국의 확장”이란 제목아래 본문 말씀이 주시는 교훈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천국의 확장 과정을 설명한 말씀입니다. 천국은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서 커지는 것과 같고 또 천국은 적은 누룩이 많은 가루를 부풀려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천국이란 뜻과 겨자씨가 크게 자라는 문제와 가루가 누룩에 의하여 변화되는 문제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내세의 천국이고 또 하나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지상의 천국은 성도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세계를 의미합니다(마 3:2, 막 1:15). 따라서 마귀에게 끌리거나 타협하는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성도간의 화목과 교제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런 천국이 내세에서는 완성적이지만 지상 세계에서는 미완성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창 5:24, 6:9)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였고, 오늘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에 사로잡혀 사는 생활이 바로 지상천국을 체험하는 세계입니다.

2.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뜻은

1) 우선 천국이 점차 확장되어 완성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천국이 완성되는 것은 일시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점차 자라는 것처럼 상당한 시간을 요하며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 건설의 계획은 창세전부터 하신 것이고(엡 1:14) 실제 성취의 과정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진행되어 택한 백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구원하기까지(그 때는 세상 끝날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세계에 있는 성도가 교회는 다 천국확장의 과정에 있는 단체이며

4) 작은 개척교회가 큰 교회로 성장하는 것도 역시 그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5) 여기에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겨자씨 비유 말씀이 누룩 비유와 비교한다면 천국의 양적 성장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천국의 양적 성장을 말할 때 물질적인 것(교회의 재산이나 시설 같은 것)은 천국의 양적 요소에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생명의 수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수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한정하셨기 때문에(요 17:9, 행 13:48, 살후 3:3, 요일 3:10) 그 수가 차기까지만 구원사역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6) 여기에서 한 생명의 비중은 하나님이 보실 때 꼭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생명의 비중이 같음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음에 말씀 드릴 신앙의 질적 비중은 그렇지 않음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3. 천국확장으로 “누룩이 가루를 부풀린다”는 뜻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1) 이것은 성도 개개인의 질적인 신앙을 변화 성장시킨다는 뜻입니다.

2) 이 변화의 한계는 예수님 인격의 장성한 분량까지 입니다(엡 4:13). 1억 재산을 가진 사람 100명이 모여도 1000억을 가진 사람을 당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 약한 사람 100명이 믿음 좋은 사람(즉 성령에 충만하고 예수님 닮은 사람) 하나의 가치를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상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실 때 “이스라엘을 다 다녀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마 8:10)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런 만족의 표현은 그 한 사람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 분량이 많다는 뜻입니다.

3) 성경에 보시면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신 말씀이 많습니다(롬 1:17, 고전 3;1~3, 히 5;13~14). 사람의 생명은 다 같지만 그 인간 가치에 있어서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있고 미개인과 지성인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질적 신앙도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적은 자”(마 16:8)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천국확장의 일면이 되는 것입니다.

4) 겨자씨가 자라날 때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면 누룩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소리없이 변화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화된 성도가 빛과 소금 역할을 잘 하여 이웃을 교도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누룩과 같은 감화력이나 변화를 주는 힘이 없으면 천국확장을 위한 사명에 이바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적 신앙을 키워 큰 감화력을 보유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28대 윌슨 대통령(1856~1924)이 퇴임한 후 어떤 이발소에를 갔는데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발소 안에서 잡담을 하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그 이발소에를 찾아왔는데 잡담하는 모든 사람들이 별안간 조용해지더란 것입니다. 윌슨 대통령이 너무 이상하여 그 이발소를 나온 후 누구에게 그 이유를 물은 즉 그 분이 바로 무디 목사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이것은 무디 목사의 인격이 대통령의 인격보다 훨씬 훌륭한 것을 입증한 일인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반드시 누룩처럼 역사하는 감화력이 있어야 하며 이로써 자신과 이웃 성도에게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연단에 관한 말씀

제53과 고난의 유익 (1) (시 119:71~72) 목록으로


이 시를 지은 성도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 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주의 입의 법)을 깨닫는 것이 천천금은(많은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1. 이 말씀에서 교훈을 주시는 말씀은

1) 고난을 당하므로 유익하였다는 사실과

2) 고난으로 진리를 깨닫는 일과

3) “진리를 깨닫는 일이 큰 재물을 얻는 것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성도의 고난 당한 이유를 살펴보면 “잘못으로 인한 징계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67절에서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였으므로 범죄한 후 징계를 받고 깨달아 유익하여졌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2.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정신적 고난과 육체적 고난입니다. 억울한 일, 분한 일, 슬픈 일, 기막힌 일, 책임을 지는 일 등이 정신적 고난이고 피곤하고 굶주리며 앞으로 죽는 일이 육체적 고난인데 이런 고난을 왜 받아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대체적으로 죄 때문에 받는 것이지만(창 2:17, 3:16~19, 롬 6:23)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죄와 상관없이 받아야 하는 고난은 욥의 경우나 연단의 경우와 사명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1) 욥은 징계를 받을 만한 죄가 없었는데 하나님과 사탄과의 논쟁에서 시험의 대상이 되어 고난을 받았으니(욥 1:11~12)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요 11:4).

2)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라는 고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계속 머물 수 있도록 겸손한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후 12:7)고 하셨으며

3)사명으로 받는 고난은 예수님을 인하여 받는 핍박이나(마 5:11~12) 선교사역상 받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골 1:24이나 벧전 4:13~14에서 그 말씀을 하셨고, 또 많은 선지자들이 핍박받은 사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 11:25, 히 11:37).

3. 결론적으로 고난의 유익은

1)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고난을 받을 때 욥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되고 또 그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그만한 상급을 받게 되니 유익하며(욥 42:10)

2) 연단으로 받는 고난은 겸손한 은혜와 함께 더 큰 능력을 수용하고 보존할 수 있으므로 유익하고(벧전 4:12)

3) 우선 기도할 수 있는 기회와 충동을 갖게 되니 유익한 것입니다(약 5:13).

4) 사명으로 받는 고난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하셨고

5) 징계로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유익하다 하여 고의로 죄 짖고 벌 받을 일은 아니나(벧전 2:20)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바른 성도되게 하시기 위하여 징계로 고난을 주시는 만큼 잘 깨닫고 복종하면 더 큰 유익이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어떤 고난을 당했을 때 그 이유를 잘 분석하여 유익을 도모하는 기회를 잡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예배당을 짖는데 헌금할 것이 없어서 자기의 몸을 예배당 짖는 인력 봉사의 도구로 내 놓고, 공사일에 수종을 들었는데 그 수고하는 일이 고단스러웠지만 그것이 미장일을 배우는 계기가 되어 그 때부터 미장기술자로 생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도 헌신적 고난이 삶의 방도를 얻게 된 유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54과 고난의 유익 (2) (시 119:7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의 유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성도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 고난이 유익을 주었고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신 이유는 “저희들도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 그 고난 때문에 유익하여진 것을 체험하고 또 고난을 유익의 방편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런 생활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또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면 그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어떤 유익을 주시는 방편으로 믿으시면서 소망을 가지십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욥 5:5~7에 보시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한 말인데 “재앙은 티끌이나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인생의 죄 값으로 받는 것인즉)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난 것은 마치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인생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고난을 위하여 난 자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죄 값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마음에 번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숨은 것입니다(창 3:8). 이것은 정신적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를 주셨고, 남자에게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하시므로(창 3:16~19) 생활에 따른 수고를 주셨으니 땀 흘리는 수고도 고난의 일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하셨는데 이것은 육체의 질병과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고난은 최초부터 죄 값으로 받은 것이란 사실과 정신적 고난, 생활의 고난, 육체의 질병과 죽음의 고난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고난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이 “돈이 많고 권세가 있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해 보아도 요즈음 부정축재에 물린 돈 많은 정치가들이 고난이 없습니까? 정신적 고통이 누구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1) 사람으로 태어나서 고난을 맛보는 것은 첫째가 질병입니다. 이 질병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연습일 것입니다.

2) 생활을 위한 수고입니다. 모든 직장인들이 다 수고롭습니다. 혹 돈이 많아서 놀고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사는 것이니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 따를 것입니다. 전 1:8에 보시면 “만물의 피곤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3) 정신적 고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정신적 고난은 첫째로는 자기 실수에서 오고 다음에는 욕심에서 옵니다. 말이나 행동을 실수하였으면 그 순간부터 마음에 불편이 옵니다. 양심의 가책일 수도 있고, 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욕심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은 자신이 남보다 못한 것을 느꼈다든지 남이 잘 하는 것을 시기한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일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고통에서 멀어 질 수만 있다면 큰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여 고난이 유익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30세 전과 후로 나눈다면 30세 전은 고난의 생애였고, 30세 후는 평안의 생애였는데 그의 고난의 생애가 평안의 생애를 만드는 방법이 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는데 기쁨으로 거두었고”(시 126:5) 해산의 고통이 따른 다음에 생명을 얻었으니 모두가 고난의 대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요셉은 총리되기 전에 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고, 옥살이 하기 전에 억울한 노예생활을 11년이나 하였고, 노예가 되기 전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또 그 전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고난이 심했습니까? 그런데 그 고난의 연장이 요셉을 총리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복받는 성도에게 주셔서 여러모로 유익하여지는 방편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1) 깨달음의 방편으로 쓰십니다. ① 고난을 통하여 인생의 연약을 알게 하시고 ② 실수를 후회하며 돌이키게 하시고 ③ 고난스러우니까 견디다 못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④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영락의 세계를 사모하게 하시고 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게 하시고 ⑥ 진리를 탐구하게 하시므로 각 가지의 깨달음과 연단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12:7).

2) 고난이 수고의 일종일 때는 땀 흘리고 노력한 자에게 그 대가를 주시므로 보람된 소득을 얻게 하시는 것이오

3) 사명있는 성도가 사명을 위한 고난을 당하였을 때는 큰 상급을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마 5:10~12, 고후 11:23).

4) 히 12:8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요 유익한 것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은 고난으로 징계를 하시기 때문에 징계로 받는 고난도 성도를 유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으로 깨닫는 유익과 소득을 얻는 노력과 상급을 쌓는 보람과 징계로 받는 유익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성도가 될 때에 고난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55과 징계 후의 은혜 (렘 31: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징계 후의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려 아프게 한 다음에는 다시 불쌍히 여겨 먹이고 입히고 위로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신 후에 다시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국 말기의 선지자로써 바벨론 포로 전에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였고, 또 하나님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은혜주실 것을 예언하고 나라의 멸망을 함께 경험한 선지자입니다. 본문 말씀은 민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앞절인 2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 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징계하신다는 말씀이요, “말일에 그것을 깨닫는다”는 말씀은 그 징계가 성취되는 날에 즉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때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 포로 70년이란 징계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 어떤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까?

1.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또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예언할 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1절)하므로 자기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말씀이 2절, 7절과 15절에도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풍조 때문에 그런 강조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엄중하게 받으셔야 합니다.

2)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란 남방 유다국 민족이나 북방 이스라엘 민족을 통합하여 한 가족처럼 살펴주시고 또 그 백성들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 기울어졌던 입장에서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이 사실이 바벨론에서 해방된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할 때에 바벨론에서의 해방은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요, 실제의 성취는 신약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어 영적 축복이 만방에 넘치는 것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통한 은혜는 부분적 은혜의 성취이고, 또 실제 성취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를 받은 것은 “칼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은혜를 받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2절).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출애굽 사건을 연상하고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애굽군의 칼에서 벗어난 후 광야에서 은혜를 받은 것처럼 바벨론의 칼에서 벗어나 의지할데 없는 광야같은 생활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안식의 때를 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안식의 때”란 역시 바벨론에서의 자 와 해방을 받는 것을 예표로 한 신약 시대에 주실 영적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이 은혜를 주시는 근거는 하나님이 본래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무궁한 사랑을 약속하신 것 때문입니다(3절). 신 7:8이나 10:15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약속을 변치 않으시고 그대로 시행해 주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그 백성들을 소고치고 장식하고 춤추는 처녀처럼 존귀하게 세워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절). 처녀는 깨끗하고 존귀함을 뜻하는 것이요, 처녀가 장식하고 춤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평화로운 때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존귀와 평화를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5. 포도원을 심어 그 과실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은혜와 함께 평화 정착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를 심으면 처음 3년간은 충성치 못한 것이므로 버리고 4년째는 하나님께 드리고, 5년째의 열매를 먹게 하셨기 때문에(레 19:23~25) 평화 정착이 아니면 포도 수확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으니까 평화를 주시는 것이요, 이 예언은 영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는 파수꾼이 이르기를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께 나가자”고 할 것이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분국됐을 때도 북방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남방 유다까지 바벨론에 망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사왕 고레스 원년에 해방령이 내려지면서 각처로 흩어진 백성들이 예루살렘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예언은 바로 그렇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외친다”는 말씀(6절)이 바로 북 이스라엘에게도 길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러보암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의 대명사가 “에브라임”이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징계 후에 받은 은혜는 ① 말씀을 주신 은혜요 ② 해방과 자유의 은혜요 ③ 신앙 복귀의 은혜요 ④ 평화와 재물과 존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이스라엘 민족을 예표로 하여 신약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이며 또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예언의 부분적 성취로 시작하여 신약시대에 세계의 선민들에게 주실 구원과 성령의 충만을 약속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는 그 예언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 생활에 관한 말씀


제56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는 세 가지 제목의 교훈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씀이고, 다음에는 “믿음의 지도자인 바울사도가 계시나 안 계시나 하나님 중심에 든든히 서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젖은 장작은 풍구질을 하여야만 불이 잘 붙으나 마른 장작은 풍구질을 안 해도 잘 탑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신앙도 성숙한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분변할 줄 알고 교역자가 없어도 믿음과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믿음의 대적자들이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가 담대한 용기로 대적할 때 틈을 찾지 못하고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마 4:1~11, 벧전 5:9).

2.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막 1:1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하시므로 복음의 주, 복음을 나타내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기 때문에 천주교가 되었고, 개신교는 예수님을 중심하기 때문에 예수교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저를 귀히 여기신다”(요 12:26,44~4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려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닮으며 그의 생활을 본받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며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닮지 않거나 예수님처럼 살지 않으면 합당한 생활이 못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 전통 중심으로 살지마시고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사셔야 하겠습니다.

2)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로 성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복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복음적 구원 사역이 있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중심의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네 가지 정신을 발휘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고(질 2:8) 둘째는 죄악 세상에 오셔서 죄인의 취급을 받으시기까지 겸손하여지신 것이며(마 11:29, 사 53:7~9) 셋째는 부끄러움과 죽음의 고통을 참으신 것이고(히 2:11, 12:2) 넷째는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벌을 받으시므로 희생하신 것입니다(사 53:5, 눅 23:34). 따라서 성도들도 이 네 가지(복종, 겸손, 인내, 희생)정신으로 생활을 하여야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마 16:24, 눅 14:27). 현실교회 예배당에 십자가가 너무 많지만 이 네 가지를 실천하는 성도와 교회가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는 생활이 곧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파한 사람들이고 복음적 생활의 기초를 수립한 사람들입니다. 고전 11:1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하셨고, 엡 2:20에서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과 복음의 전파자요 증인들이며 또 복음적 생활의 모범자들인 사도들의 신앙 생활을 기초로 하여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바로 그 뜻입니다. 사도들의 신앙 생활을 본받는 것이 복음적 신앙 생활입니다.

4) 사랑실천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정받는 믿음은 할례나 무할례의 의식에 있음이 아니요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고 하셨습니다(갈 5:6). 따라서 아무리 설교가 좋고 어떤 능력을 행할지라도 사랑 실천이 미흡하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나타내시기까지는 무궁한 사랑의 실천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원수같은 자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죄와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로 희생의 제물로 주셔야 하였고, 예수님의 당하신 그 고난과 죽음을 보시면서 참으셔야만 하셨던 사랑 때문에 복음적 구원 사역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도 그 형제를 사랑하는 목표와 결과에 이르도록 사랑 실천에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고전 13:4~7 말씀을 항상 살피시고 각자의 생활과 대조해 보면서 사랑 실천에 모자람이 없도록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5) 교회 중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세우신 기관”이라고 하셨기 때문에(행 20:28)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 주님의 몸처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신령한 단체, 말씀의 단체, 사랑과 봉사와 진리 파수의 단체로 잘 유지해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교회의 성격과 목적을 잘 이해하여 거기에 부합되도록 잘 유지하여야 할 것이요

6) 이상의 모든 사실이 성경에 근거하여 알려진 것이므로 성경 중심이 곧 그리스도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심이 아닌 것은 인본주의, 전통주의, 현실주의, 물량주의 등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 사도들의 모범 중심, 사랑실천 중심, 교회 생활 중심, 성경중심으로만 믿고 행하여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제57과 신앙 생활의 고백 (시 105:1~7) 목록으로


대상 16:8~22에 보시면 다윗이 번제를 예루살렘에 안치한 후에 악사인 아삽을 시켜서 하나님께 찬송하게 한 내용이 있는데 그 말씀이 본문 1~5절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다윗의 시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1~2절에 감사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과 하나님의 행사를 만민에게 전하는 것과 노래와 찬양이 있고, 그 다음 3~4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과 여호와를 구하되 그 능력과 얼굴을 구하라는 내용이요, 5~7절에서는 “하나님의 이적과 판단을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내용을 종합하여 “신앙 생활의 고백”이라 하였고, 그 고백을 네 가지로 나누어 ① 경건한 예배를 위한 고백 ② 하나님을 자랑하는 생활의 고백 ③ 하나님을 구하는 생활의 고백 ④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는 고백으로 나누어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경건한 예배가 신앙 생활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예배를 안 드리거나 예배를 최고의 경건으로 여기지 않으면 성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환경에서 격동된 입장을 취하다가라도 예배를 드린다 하면 마음과 자세를 고치고 경건한 예배에 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시면 감사함이 있고,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하셨는데 이 말씀은 기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행사와 기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함”은 설교에 해당하기 때문에 감사, 기도, 설교, 찬송을 포함하는 행사가 곧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생활 고백에는 반드시 예배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자랑하는 생활이 곧 성도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이 약할 때는 현실적인 문제를 많이 자랑하다가 믿음이 성숙되면서 점점 하나님을 자랑하는 생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개종하기 전에는 할례받은 것, 아브라함의 자손 된 것, 벤야민 지파된 것, 사울왕의 후손인 것, 율법에 충실한 것,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 대제사장의 공함을 받고 사신 노릇한 것 등을 자랑거리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개종하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의 자랑거리가 변하였습니다(빌 3:5~6).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자신의 연약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고후 11:30, 고전 2:2). 본문에서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 베푸신 일들에 대하여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을 그 생활의 고백으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은혜를 구하는 생활이 고백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피조물이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에게 구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고(요 16:23) “구하면 주신다” 하셨고(마 7:7) “주시기로 작정된 것도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주신다”(겔 36:37)고 하셨습니다. 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히 4:16).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 능력을 구하고 그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뜻”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사모하는 것이고, “그의 능력을 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것이요, “그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의 말씀과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구하는 생활을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생활입니다. 6~7절에서 “그의 이적과 판단을 기억하라” 하셨고,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은 주로 출애굽때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다”고 하셨는데 이 판단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바로왕의 완악을 굽히게 하시기 위하여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리시다가 마지막 열 번째에서는 장자를 치시는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아말렉을 소탕하고 가나안 족을 없애시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판단에 속한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이적과 기사가 우리 곁에 있음은 물론 하나님이 공의를 시행하시는 판단도 항상 성도곁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58과 성도가 지향할 목표 (빌 3:13~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가 지향할 목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드립니다.

1.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 13절 말씀에서 “바울이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은 신앙 성숙과 구원을 다 이루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도 자신을 완전히 성화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롬 7:19~24).

2) 그래서 앞에 있는 한 일을 잡기 위하여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하셨습니다. ① 그러니까 “앞에 있는 오직 한 일”이란 예수님 안에서 부르신 목적대로 믿음 생활과 사명 생활을 잘하여 하나님 앞에 가서 상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행하려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음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지나간 일에 대한 회고나 반성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고 전진을 방해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14절에서 “푯대를 향한다”는 것은 가치관과 목적과 방법을 바르게 정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뒤에서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4) 15절 말씀에 “우리 온전히 이룬 자”란 영적 신앙이 성숙단계이 있는 바울과 그 동료자들을 의미한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13~14절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하늘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좇아가는 생활을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무슨 일에…달리 생각한다”는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 사상이 바울사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혹 그런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것도 나타내시리라”하셨으니 그 당시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므로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실 것이란 뜻이요

5) 16절에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씀은 “깨닫고 있는 지식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더 필요한 지식이나 교훈이 있다면 그때그때 지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2. 신년을 맞이하여 성도가 지향하셔야 할 목표

1) 목적의식을 뚜렷하게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시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보시니 “자기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창 1:31, 롬 11:36). 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아서 배필을 만들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창 2:18). 또 타락한 인생들을 그대로 버려 두시는 것이 좋지 않아서 영광을 받으실 목적으로 구속사업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엡 1:3~6). 그런고로 저희들도 꼭 필요한 목적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① 인생으로 태어난 목적입니다. 나 개인의 목적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하신 목적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전 12:13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본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목적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② 그리고 특정한 백성들로 성도되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게 하심이라”고 엡 1:6에서 말씀하셨고 ③ 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신 말씀이 고전 10:31~33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과 성도된 목적과 무슨 일을 하는 목적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생활 방법을 확실하게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생활 방법의 표준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잠 1:3에서는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하라” 하셨고, 미가선지자는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라”(미 6:8)하셨고,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행하고 선을 이루며 덕을 세우라”(롬 14:23, 전 3:12, 고전 10:33)하셨고, 베드로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정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셨습니다(벧후 1:4~7). 이런 말씀들은 다 저희들에게 생활 방법을 지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과거의 생활 방법에 실수가 있었다 할지라도 오늘부터는 주안에서 의롭게 선하게 덕되게 살도록 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소유의식을 분명하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대상 29:14).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고전 4:7). 바울사도는 롬 14:7에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우리의 생명과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임을 아셔야 하고 우리의 생애가 주님께 달렸음을 아시되 반드시 생각하는 것도 주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생활 취미도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 취미로 돌이키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앞을 향하여 열심히 사시되 삶의 목적과 삶의 방법과 소유의식에 대한 확실한 표준을 갖고 사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59과 하나님을 기뻐하라 (느 8: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성호이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는 것이 죄스럽기 때문에 “여호와”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으로 고쳐 부르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대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여호와여”라고 불렀으니까(시 18:1) 부를 수 있다고 하지만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윤리적 세계에서는 서로의 이해 증진을 위하여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한 것은 이방인들이 숭상하는 잡신들과 구별하기 위함이요 또 “여호와”란 이름 자체가 큰 권위로 부각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기록한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 땅에서 유대인 하가랴의 아들로 태어나 그 곳에서 신앙과 일반교육을 받고 성장하다가 메데파사왕 아닥사스다 20년에(주전 399년) 유다 총독의 직임을 받고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와 함께 2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12년간 신앙 부흥과 아울러 성곽 중수에 힘쓴 사람입니다(느 5:14). 그 해 7월에 초막절 절기를 지킬 때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하고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을 때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 땅에 온 것이 감격스럽고 또 오랜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니 역시 감격스럽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가 율법으로 드러났을 때 회개하는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운 것은 감사와 기쁨과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때에 느헤미야는 “오늘이 거룩한 성일이니까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살진 것으로 먹고 나누어 주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슬픔이나 눈물도 건설적인 의미를 갖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작정된 성일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더 복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하겠습니다.

1.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을 감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와 성도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2)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연구하여 깨닫도록 성경을 주셨고, 성경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엡 3:1~4, 딤후 3:14, 벧전 1:10~11).

3) 하나님을 소망의 대상으로 항상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며 또 성도에 대한 사랑이 불변하시기 때문에 영원한 소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낙망할 수 없겠고,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1:6).

4) 하나님을 기뻐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최고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최고로 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돈입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만족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성도를 아주 귀하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욥 22:24에서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릴 때 하나님이 그에게 보배가 되시며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 얼굴을 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 6:24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섬기지 못한다”하셨으니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당연히 재물의 부요를 외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선택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통장에 저금액이 늘어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할 때마다 회개하고 하나님으로 더욱 만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생명, 나의 소망이 되신 주 밤낮 불러도 늘 아쉬운 것 뿐이라”(82장)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을 만족하고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가 절대자이시고 영원 불변하시며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고

3. 또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받는 은혜는 힘을 주시는데 마음의 용기, 깨닫는 힘, 육체의 건강, 정의 실현의 힘 또 소원 성취의 힘까지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시 37:4). 아무쪼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므로 새 힘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60과 신자의 생활 (롬 12:1~21) 목록으로


먼저 본문 말씀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시면 “몸으로 헌신하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받은 생활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받은 은혜대로 분수에 알맞도록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라, 각자 받은 은사에 따라 즐겁게 사역하라,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며 형제 사랑과 형제 우애와 존경을 먼저하고 열심히 주님을 섬겨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를 힘쓰고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님 대접을 잘하라, 핍박자를 축복하고 슬픈자, 기쁜 자에게 어울리며 낮은데 처하고 교만하지 말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할 수 있는대로 화평하고 원수 갚지 말며 원수에게도 구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 깊이 음미하면서 우리의 생활을 반성하며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어떤 교회의 주보에 실린 내용을 가지고 교훈을 삼으려고 합니다. 바람에 불려 다니는 종이를 집어 살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많이 주셔서 필기하기가 고달픈데 길에 떨어진 주보를 보고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 시간 교훈의 재료로 삼은 것입니다. 길에 떨어진 주보는 96. 12. 24. 새빛 전원교회(양경훈 목사)의 것인데 저는 그것을 간직하였다가 98. 4. 3.에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저는 휴지에 기록된 내용도 신앙 교훈에 합당하면 보고 은혜를 받습니다.

1. 그 주보에 실린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부해야 할 사람 없다, 내가 편들어야 할 당파 없다, 내가 갚아야 할 원수 없다, 내가 유지해야 할 벼슬이 없다”하므로 아부대상, 편들 대상 그리고 원수와 명예욕이 없음을 고백하였고, 그 다음 글에는 “나에게는 섬길 하나님이 계시고 사랑해야 할 나라가 있으며 구원해야 할(전도해야 할) 이웃이 있고, 부양해야 할 부모, 처자가 있다”하므로 하나님, 나라, 이웃, 부모에 대한 네 가지 사명을 일깨웠고, 그 다음 글에는 “나에겐 벗을 영접할 방이 있고, 평생 지켜야 할 신앙이 있으며 항상 애독해야 할 성경이 있고, 내가 소속하고 사랑해야 할 교회가 있다”하므로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가 있음을 감사하면서 벗을 영접할 수 있는 여유있는 주택을 가진 것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글에서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가을과 맑은 하늘을 감탄하면서 우리의 기상은 얼마나 높으며 우리의 꿈은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질문을 하였고, 마지막 단원에서는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로 식사하며 또 감사하면서 천직에 종사하고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좋은 교훈과 글을 보실 때는 다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모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하는 심정을 갖고 늘 성경과 교훈에 집착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저는 이상에서 소개한 글이 다 성경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한 가지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성도는 아부하지 않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욥 32:21~22에 보시면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나를 속히 취하시리라”하였고, 시 12:2에서는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하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하시므로 “아첨”은 하나님을 몹시 역겹게 해 드리는 죄악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성도는 사실대로 살고 분수대로 살며 누구에게도 아첨을 안해야 할 것입니다. “아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진실치 못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에게 누구를 편드는 편당적 행위가 없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편당 행위로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정치계는 편당 정치를 하더라도 성도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여 누구에게도 사랑이 제외되는 표시를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고전 1:11~13).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평한 생활을 하도록 하셔야 할 것이고, 특히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사람의 편을 드는 잘못은 더욱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갈 1:10).

3) 성도에게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원수 같은 대상을 사랑하고 기도해 주어야 하니까요(마 5:44). 성도가 원수를 갚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대신 더 공정하고 엄하게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롬 12:17~19).

4) 명예욕 같은 것은 일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자기 부정해야지요(마 16:24), 날마다 죽어야지요(고전 15:8~9),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지요(갈 5:24), 형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니까(롬 12:10,16) 벼슬 같은 명예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출 20:3~6, 마 22:37) 나라를 사랑하며(딤전 2:2) 이웃을 사랑하고(마 22:38) 부모에게 효도하며 가족에 대한 책임을 행하라는 말씀도 다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엡 6:1, 딤전 5:8). 다만 나라를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도 함께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마 6:33).

6) 신앙과 성경과 교회는 다 갖고 있지요. 성경은 더 좋은 것이 없지만 신앙과 교회는 좋은 신앙, 좋은 교회를 선호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벗을 영접할 방을 준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벗을 자기 방으로 모신다는 것은 준비상 문제도 중요하지만 친교적 관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친구를 모시는 것이 불편하여 여관으로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7) 그리고 항상 소망 중에 즐거워하면서 매일 매일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와 만족으로 잠자리에 드는 좋은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양반은 급해도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들도 차분하게 성도다운 생활을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61과 진실되기를 노력함 (빌 1:9~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진실되기를 노력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은 여생을 더 진실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연구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0절을 보시면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하신 것처럼 진실하게 삶으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하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어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요,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1) 성도의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요

2)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행하는 것이요

3) 진실하게 사는 것이요

4)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중의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요절로 하여 진실에 대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에는 거짓이 팽배되어 있습니다.

1)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것으로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8:44). 그러니까 모든 거짓의 원천은 사탄에게 있는 것이고 누구나 거짓을 자행하였을 때는 사탄의 미혹에 빠진 순간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롬 3:4을 보시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① “사람은 다 거짓되다”는 뜻은 진실치 못한 타락의 근성이 잠재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모든 부패성이 잠재하여 있어서 그것을 씻어내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를 힘쓰는 것인데 그 부패성 중에 거짓성도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② 그러니까 이런 거짓성을 포함한 부패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회개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딤전 4:5).

3. 저희들은 성경에서 진실의 모범자 두 사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 진실의 모범자 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 14:6에서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의 참되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딤후 2:13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지 못한다”하셨고, 히 6:18에서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은 예언의 성취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지만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으신 사실에서 자기를 부인하시지 않으셨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거짓 근성 중에 자기의 약점을 숨겨서 명예에 손해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향을 감추고 나이를 감추고 경력을 감추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비밀을 다 말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숨겨 둘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기를 오해하여 과신할 때는 반드시 그 오해를 풀어주고 자기의 명예에 손해가 있어도 진실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장관의 비서 노릇을 한 사람이 장관 노릇을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다고 할 때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지요. 이와 같이 자신을 과신케 하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자기의 사실을 말하고 진실한 위치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시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조상과 예수님의 생활을 그대로 나타내신 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에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그 며느리를 범하여 베레스를 낳은 일과 또 그의 후손 살몬이 이방여인 기생 라합에서 보아스를 낳고 또 보아스는 이방 여인 훗에서 오벳을 낳은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족보의 맨 처음에 기록하셨고, 또 생활은 말구유에서부터 목수 생활과 가난한 표현을 다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시지 않는 것이요, 과거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또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울도 자기의 조상과 고향과 과거의 잘못된 종교에 빠졌던 것과 예수 믿는 성도를 핍박, 잔해한 것까지 다 말하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빌 3:5~6, 딤전 1:13,15). 바울도 자신의 과거의 약점을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할진대 자신의 연약을 자랑할 것이라”(고후 12:5,9)고 하셨습니다. 자기 연약의 자랑은 진실함도 되고 겸손함도 되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를 힘입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롬 9:1에서 “바울 사도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하므로 자신의 참된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도 진실되기를 더욱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어떻게 하여야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1) 진실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한일 합방을 일본이 강요에 의하여 인을 하고도 일본이 그것을 회피하는 것을 역사가 심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산 동안 거짓을 숨겨도 죽을 때는 말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진실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에게 진실성이 없으면 구원 받는 믿음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문 “파스틱스( )”는 진실이란 뜻이기 때문에 믿음과 진실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3) 진실이 아닌 것으로는 어떤 것도 덕을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약점을 숨겨서 명예로워져 봤자 유익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정 축재한 사람들의 결과를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4) 마지막으로 진실하기 위하여서는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 지킬 능력이 없을 때는 반드시 계약을 변하여서라도 진실을 지켜야 하며 특히 말을 옮길 때 확실치 않게 옮기는 일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여생을 진실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62과 확실한 열매를 맺자 (마 7:15~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확실한 열매를 맺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6절에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에서 확실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로 나무를 알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데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고 하시므로 성도가 성도로서의 확실한 생활을 나타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성도가 어떤 열매는 맺는 것이 확실한 것일까요?

1) 성경을 바로 아는 지식의 열매입니다. 성경을 옳게 이해하지 않으면 믿음이 잘못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생활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씨를 심으면 싹이 나는 것처럼 성경을 알면 순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도덕성을 닮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성경지식의 열매와 순종과 예수님의 인격성(도덕성)의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본문 15절에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도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하시므로 외식적인 열매가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기도도 잘하고 인정도 베풀며 양 같은 표시가 나타나는데 사실은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으니 양의 가죽을 쓴 그 이리는 결국 양을 해하는 것처럼 성도의 바른 신앙을 해치는 잘못된 교훈과 사상이 성도의 세계에 침투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개인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가 물들어 있고, 더 심하면 율법주의, 이단사상까지 침투되는 것을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무와 열매는 반드시 찍어 불에 던져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에서 세 종류의 사역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진리를 앞세워 일을 하되 진리 실천을 잘하면서 가르치는 사역자로 이들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자라 하셨고(마 5:19)

2) 꼭 같은 진리를 증거하되 실천을 잘 못하면서 가르치는 사역자로 이들은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3) 마 7:23에서 “주여 주여하며 기도하고 말씀 증언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 쫓는 능력도 나타냈으나 예수님은 그를 모르는 자요, 불법자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또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의 뜻대로 시행하지 않으므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하신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거짓 사역자에게 주신 경고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 중심의 열매와 사랑의 열매만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중심의 확실한 열매가 아닌 것들 즉 인본주의, 현실주의, 물량주의, 신비주의 등 확실치 않은 열매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5.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성도가 맺어야 할 확실한 열매는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1) 먼저 거듭난 은혜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믿음이 발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요 3:3, 살후 1:10). 어떤 근거와 증거를 놓고 믿으려 하기 전에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면에 이끌려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내주하신 역사로 믿게되는 것입니다.

2) 성경에 확신을 갖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계시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신 말씀은 성경뿐이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서는 믿음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떠난 하나님 숭배를 범신론적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신앙과 본분의 절대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셔야 하며

3) 그동안 자신이 주인이던 것을 바꾸어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이 되시게 하고 자신의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주여 하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요 13:16에서 “주인과 종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시킬 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나무 뿌리로 예술품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나무 뿌리는 산에 버려진 것이었지만 주인을 잘 만날 때 좋은 예술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의 주인이 되시게 할 때(자신이 예수님의 종의 신분을 지킬 때) 큰 변화와 존귀가 주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선생님과 모범자로 모셔서 배우고 닮는 것입니다. 요 13:14에서 “예수님은 선생님이라”하셨고, 마 28:19에서는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제자된다”는 뜻이 바로 스승을 닮는 것입니다. 성품, 지식, 언어, 생활등 모든 면에 예수님을 닮는 생활이 확실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2000년 전의 사람 “예수님처럼 살아 보았으면”하고 소원하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고, 사랑을 실천하시면서 사셨고, 또 사명을 감당하시면서 사셨습니다.

5) 연합의 확신이 있는 열매를 맺으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포도나무 비유와(요 15:1) 접붙임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롬 11:17,24).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면 참감람 열매를 맺는 것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서도 주님과 연합이 되고 인격과 생활도 연합이 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입장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확실함, 성경관의 확실함, 주종관계의 확실함, 제자 됨의 확실함, 연합의 확실함의 열매를 맺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63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신 22:11) 목록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연구하여 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린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성도의 믿음 성장이고 진실한 생활이며 회개하는 것, 거룩해지는 것, 순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지각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생활할 줄 아셔야 합니다. 십계명도 살펴보시면 할 것과 말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그와 같습니다. 반드시 할 것과 말 것을 분별하여 우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병든신앙, 어린 아이 같은 신앙, 오래 믿으면서도 자립을 못하고 깨달음도 없으며 이웃 권할에게 의존하여 따라 다니는 신앙을 싫어하십니다. 고전 3:1~2에 보시면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린 아이 상태에서 크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신 일이 있지요. 시기와 분쟁을 못 버리고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일들로 어린 아이 신앙에 머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속히 자라고 열매 맺도록 노력하십시오.

2. 혼탁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혼탁한 상태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이 혼탁하고 기독교 사상이 혼탁하며 생활에 질서가 없고 이방인들과의 사이에서 선명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또 곁길로 가는 신앙(수 1:7, 잠 8:20), 흔들리는 신앙, 확실하지 않은 신앙(고전 15:58, 히 3:14)등입니다. 본문에 “소와 나귀를 격리하여 밭가는 것”을 금하였지요. 이것은 힘과 성격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쟁기가 일정하게 나갈 수 없는 것을 뜻하고,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는 것”도 역시 섬유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혼합이 있으면 안 됩니다. 성도로서의 확실한 분, 이방인들과의 확실한 구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도로 가는 표준적 신앙과 사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외식을 싫어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실 때 “화있을진져”하시고 여러 차례 책망하셨지요(마 23:13,15).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제물을 갖고 와서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며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보실 때 견디지 못하시겠다(사 1:12~14)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을 버리고 안식일 절기등의 제사 행사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외식인 것입니다.

4. 다른 복음을 싫어하십니다. 다른 복음이란 이단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갈 1:7~8에 보시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하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저주에 해당하는 죄는 이단적 교훈입니다. 이단이 이단되는 것은 성경을 사람의 정욕대로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마 15:14)고 하신 말씀이 곧 거짓 선지자나 그 추종자들이 다 멸망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5. 인간적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기드온의 군사를 32000명에서 300명으로 줄이신 것은 인간의 힘을 나타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요(삿 7:2~7), 인간들이 교만하여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여 흩으셨습니다(창 11:4). 인간은 피조물이고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인간이 하나님을 멸시하며 교만을 부리는 것입니다. 렘 9:23에 보시면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자랑할진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하셨고, 또 렘 15:31~32에서는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곧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 인간의 정욕대로 자유 방종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자기를 부정하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마 16:24, 갈 5:24) “상전에게 복종하라”(요 13:16~17)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마 7:21)하신 말씀들은 다 인간의 개인적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직접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구하여 믿음과 현세의 복을 아울러 성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고 현세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도끼가 찍는 자의 뜻대로 사용되는 것처럼(사 10:15) 인간이 자기의 뜻을 앞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성도들이 현세욕에 붙잡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인생을 나그네처럼 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히 11:13, 벧전 2:11). 세상에서 좋은 집을 짓고 오래 정착하려고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 5:8에 보시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있을진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본향을 사모하지 않고 현세욕에 붙잡혀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롬 12:2, 요일 2:15). 그러니까 현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은 낭비를 싫어하십니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세월을 아끼고 근면하라”하셨지요(엡 5:16, 롬 12:11). 또 물질 낭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기적의 양식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 하셨고, 그릇의 낭비를 피하게 하시려고 가득 채우게 하신(민 7:13,19) 분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깊이 연구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면 성도들도 그것을 하지 않으려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를 엄격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깨달아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64과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딤후 3:1~5)목록으로


본문 1절에 보시면 “네가 이것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란 “말세에 고통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말세”이니까 저희들은 고통을 느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한 고통은 “열아홉 가지 죄로 인한 고통”이라고 하셨습니다. 배고픔은 고통도 아니고 지식의 빈곤도 아니며 질병의 아픔도 아니고 신앙적 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닌 도덕적 퇴폐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죄 열아홉 가지를 살펴보니 열여덟 가지는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것은 “경건의 능력 부인” 한 가지인 것입니다. “죄 때문에 고통한다”고 하셨는데 인간들 중에는 이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못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돔, 고무라성에 죄악이 만연했을 때 고통을 느낀 사람은 놋 뿐이었고 의로운 심령을 가진 자라야만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벧후 2:8에 보시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놋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의로운 심령을 가진 성도는 죄악을 볼 때마다 통곡하는 기도를 할 것이지만 심령이 우둔하거나 화인 맞인 사람들은 마음 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도덕적 요소가 무엇인가? 할 때

1) 자기 자랑(남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2) 돈 사랑(돈이면 제일이고 무엇이나 돈 버는 목적으로 노력하는 것임)

3) 자긍입니다(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4) 교만입니다(다른 사람을 누르고 자기가 꼭 그 앞에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5) 훼방입니다(다른 사람을 헐뜯어 자기발 밑으로 넣으려 하는 것입니다).

6) 부모 거역입니다(요즈음 부모의 소원따라 복종하며 살려는 자녀들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7)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고 백성들이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도 감사하지 않으며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8) 거룩하지 않는 것입니다(거룩은 죄 안 짓는 순결이고 예수님을 닮는 생활인데 죄를 무서워하며 예수님을 닮아 살려는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9) 무정한 것입니다(인간적 사랑을 못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인사도 안하고 서로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으며 형제지간에도 인정이 먼 경우가 많습니다).

10)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은 화해하기를 힘쓰지 않는 인간들의 완악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남북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잘 이해 될 것입니다).

11) 참소하는 것입니다(참소는 서로 이간을 붙여 화목을 해치게 하고, 그 사실로 이권을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절제하지 않는 것입니다(적당하게 조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과속, 과소비, 지나친 게으름, 성질이 급하여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운전 실수를 하면 지나친 욕을 먹게 되는데 그럴 때에 절제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3) 사나운 것입니다(깡패만 사나운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어린 여학생, 심지어 미성년자들도 사납고 무섭습니다).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방탕하고 취미로운 일에는 사람이 몰려도 좋은 일 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선한 일은 옳게 살기 위하여 애쓰는 것인데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15) 배반하여 팝니다(종이 주인을 이롭게 하였어도 종에게 사랑을 쏟지 않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고 자신의 이권만 챙기는 악한 행위입니다).

16) 조급합니다(차분히 기다리며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17) 자고합니다(자긍과 비슷하지만 교만을 포함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대통령 출마하여 지지를 얻으려면 자고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들레지 않으며”(마 12:19)하신 말씀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18) 쾌락 사랑을 하나님보다 더 하는 것입니다(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쾌락만 사랑하지만 하나님 아는 성도는 반드시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야 하는데 이런 행위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오락이나 현실 향락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여야 합니다).

2.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신앙 생활을 위하여 갖추는 형식들입니다. 비유한다면 물건의 포장같고, 육신의 옷 같으며 대학이 실력이 아닌 간판같은 것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끌리고 성경에 끌리며 신령한 복에 끌려서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어떤 성도는 교회라는 단체에 끌리고 조직에 끌리며 예배의식에서 신비감을 느끼고 직분 감당하며 봉사하고 친구를 만나는 생활 또는 주일 지키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한 것이 신앙 생활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신앙 생활은 자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의식은 몸의 옷과 같습니다. 반드시 경건의 모양보다 경건 자체의 생활을 능력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멀리 따로 나와서 바른 생활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고후 6:17).

 

제65과 화평케 하는 자 (1) (마 5:9) 목록으로


성도는 거듭난 백성이요, 거룩한 천국의 시민이며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도 누구와도 다투거나 불화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신앙 사상이 맞지 않는다 하여 시기하고 음모하였지만 예수님은 어느 사람과도 직접 다투시거나 싸우신 일이 없었고, 자기를 배척하는 무리들을 피하면서 사셨고, 가롯유다도 미워하시지 않았으며 자기를 못박는 자들에게도 선한 말씀을 하셨고(딤전 6:13), 결국은 무저항 주의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1.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으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화평케 하는 자”란 화평을 만드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에레노피오이 ; ). 성도는 화평을 만들어 내는 기숙자가 되셔야만 할 것입니다.

2)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화평의 본성이 없으면 그는 성도의 자격에 미달된 것이니까 더 많은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화평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1) 우선 성품의 변화가 적기 때문입니다. 성품 자체는 성령님의 역사로 변화되는데 악한 생각이 물러나고 새로운 가치관이 마음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 겸손이 성품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황해도의 김익두씨가 유명한 깡패였는데 그가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 전도를 하니까 전도를 받는 사람들이 김익두 목사를 몰라보고 핍박을 하였을 때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너를 가만두지 않았을 꺼야 예수가 너를 살린 줄 알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성이 착한 사람처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말을 조심하여 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여 거기에 알맞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연령에 따라 약의 분량을 조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이 상대로 말하는 것과 어른 상대로 말하는 것이 다르듯이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서 적당하게 말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성격과 입장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급적 말을 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경산의 어떤 교회에서 90세 된 노인이 교회에 처음 나오므로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을 가셔서 그 노인의 건강과 나이를 묻고 “건강하셔서 좋습니다. 백수하시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는데 그 노인은 자기에게 “백세까지 살라”는 말을 섭섭하게 듣고 노발대발하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오래 살라”는 말을 욕처럼 듣는 경우도 있지만 그 노인은 65세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손자를 보고 죽으려는 마음 때문에 100세를 더 살아야 하는데 “백수하시라”하니까 분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아는 자신들은 누가 자기에게 어떤 부덕한 말을 하여도 넓게 이해하고 분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말을 즐거움으로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고(시 116:15) 또 복되게 여기시며(계 14:13) 죽음을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14:3). 무슨 이야기나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불화가 어긋나는데서 발생하지 않습니까? 무례한 일, 약속 위반, 불법한 일 등일 것입니다. 마 24:12에 보시면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파출소 마당에 주차장이 있어서 차를 세운 다음 경찰관에게 양해를 구하였더니 그 경찰관의 말이 “차를 제자리에 주차시키기 전에 들어오면서 먼저 양해를 구한 다음 처분에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옳은 말입니다. 무엇이나 순서와 절차를 밟지 않거나 시간 약속, 금전 거래 등 약속을 위반하면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4) 불화에 대한 치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았을 때 즉시 시인하고 양해와 용서를 구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타인의 실수를 보았을 때는 너그럽게 감싸주는 덕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마 18:22) 또 바울사도의 말씀처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바로 잡고 자신들도 그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평한 세계가 곧 성도의 세계인 것입니다. 겸손이 없고 신뢰가 없으며 협력과 이해도 부족하고 양보와 봉사가 없는 세계는 성도의 세계가 아닌 것임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성품의 변화와 말의 지혜와 올바른 행동을 나타내야 하며 어떤 불화의 요인이 발생할 때는 이해와 용서로 화평을 유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 불화의 원인 중 한 가지는 “자신의 이기주의”란 것을 아셔서 모든 성도가 이기주의 없애는 은혜를 받으셔야만 할 것입니다.

 

제66과 화평케 하는 자 (2) (마 5:9) 목록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성실하게 화평을 도모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가 화평을 도모하려면 세 가지 중요한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1) 온유한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이 온유한 성품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마 11:29). 시 37:11에서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자신의 정욕을 억제할 수 있을 때에라야만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말이 유순하여야 합니다. 잠 15:1에서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싸움이 잘못된 말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최대한 삼가고 반드시 격려와 교훈과 소망을 주는 말을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불법을 삼가야 합니다. “불법이 성하면 사랑이 식는다”(마 25:12)고 하셨습니다. 불법으로 인하여 사랑이 식으면 화평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불법이란 모든 잘못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도덕, 거짓, 무책임을 의미합니다.

4)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화평이 깨지는 이유중 하나는 자신의 승리를 위하여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는 믿음을 갖고, 사람들끼리의 시비를 상당부분 하나님의 심판때로 미룬다면 불화의 소지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를 취함이 화평의 최선책이 될 것입니다(고전 13:4~7).

2. 화평의 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선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이 복있는 마음”(마 5:3)이라고 하셨지요. 가난한 마음은 빈 마음이요, 빈속이 편안하듯이 마음도 가난하면 편안한 것입니다. 화평한 마음에서 평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마 12:35). 반드시 믿음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고(마 8:24)

2) 하나님과 화평하셔야 합니다. 욥 22:21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하셨고, 롬 5:1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하셨으며 살후 5:19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성도가 회개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생활을 할 때에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웃과의 화평입니다. 롬 12:18에 보시면 “할 수 있거든…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하셨고, 고전 10:33에서는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누구 한 사람과도 불화한 상태를 갖는다는 것은 평생 후회되는 불행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사상과 성격과 생활이 달라도 화평의 관계만은 성실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67과 화평함과 거룩함 (히 12:14) 목록으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 명상할 수 있는 충분한 과제를 주시는 것입니다.

1. 과연 나 자신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는가? 이것을 반성함에 있어서

1) 모든 사람과 화목한 상태에 있는가? 혹시 누구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려는 대상은 없는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누구와도 거리낌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혹 어떤 사람이 나로 하여금 피해를 당하였다고 원망하거나 유감을 갖는 사람은 없는가?를 생각하여서 원만한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이요

2) 계속 화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겸손함과 봉사성 있는 자세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거룩함을 좇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순결을 뜻하는 말씀이요,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순결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교제하다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좋은 사람에게도 순결하게 대하고 나쁜 사람에게도 순결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게 대하고 만일 나쁜 사람이라고 하여 의심하고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상대한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거룩함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결함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순결함과 사랑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을 좇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인 관계가 원망하고 사랑실천이 선행되어야 주님과의 교통이 원만해진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완전히 격리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낌없이 주님을 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 5:23~24에서 “형제와 화목한 다음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혹 형제와 거리낌의 관계가 있으면 역시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거리낌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웃과의 화평함과 거룩함은 사랑의 원만한 실천을 뜻하는데 깊이 반성하고 연구하여 사랑실천의 승리자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제68과 빛의 자녀들 (엡 5:8~9)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성도는 주안에서의 빛이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1. 성도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란 뜻입니다. 약 1:17에 보시면 “각 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온다” 하셨고, 요일 1:5에서도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은 더 많습니다(요 1:5,7, 3:19~20, 8:12, 12:35). 하나님과 예수님을 “빛이라”하신 것은 하나님을 설명하신 비유라기 보다 하나님 자신의 순결과 진실을 그대로 나타내신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빛에는 어두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 1:17에서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형상이 없다는 뜻보다도 어두운 면과 가리워야 할 불결함이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을 받고 거듭난 백성들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빛을 발하여야 할 백성들입니다. 달이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예수님을 반사하는 책임을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후 2:15에 보시면 “성도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라”하셨고, 또 고후 3:3에서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서 담배 냄새나 술 냄새나 세속을 가까이 하는 냄새가 나면 안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져야 할 것이요, 또 성도의 말과 생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편지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런 으미에서 빛을 발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의 빛된 생활이 성도의 중요한 사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방법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이 세 가지를 강조하려고 본문을 택한 것입니다.

1) 빛의 자녀들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하셨고,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양은 착한 동물입니다. 양은 어떤 상대도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목자의 각별한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딤전 1:5에 보시면 “착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가장 먼저 변화되어야 할 것이 착한 사람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옥토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무엇이 착한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① 분노가 없고 ② 욕심이 없으며 ③ 교만이 없고 ④ 이해와 긍휼과 양보와 화합이 있을 때 착한 사람이란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욕심 부리며 대항하려고 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착해야 합니다.

2) 빛의 자녀들은 의로워야 합니다. 의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의와는 성질이 다른 것으로 성도의 옳은 행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 드린다면 ① 죄 안 짓고 ② 양심 바르게 살며 ③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계명이나 국법을 어기면 의로울 수 없겠지요. 도 양심상 거리껴도 의로울 수 없겠지요. 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것도 의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은 계명을 잘 지키고 나라의 공법도 모범적으로 잘 지키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거리낌없이 행하고 자신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책임을 다할 때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하셔야 하고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더욱 모범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3) 빛의 자녀들은 “진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고(시 146:6) 영원토록 동일하시며(히 13:8)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며(히 6:18) 그늘이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약 1:17). 따라서 하나님은 거짓과 외식을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원수시 하시는 것은 사탄이 거짓의 원조이기 때문입니다(요 8:44). 죄를 졌으면서도 안 진 척하거나 연약을 느끼면서도 강한 척하거나 없으면서 있는 체하거나 있는데도 없는 체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문 “피스티스”는 진실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성도가 진실을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그 믿음도 헛되기 쉬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면서 모른다”고 한 것은 생명을 바칠 수 없는 연약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감행한 거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거짓을 속히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도적한 아간이나 아나니아, 삽비라는 거짓을 끝까지 간직하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잘못을 하고도 속히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거짓 죄를 범했을 때는 속히 회개해야만 그 보응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실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진실하기를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진실의 취약점이 있느냐 하면 ① 사실을 옳게 표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해하도록 표현하는 것이지요 ② 사실을 부분적으로 나타내거나 가감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역시 오해할 위험이 있으므로 바른 전달이 아닙니다. ③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악한 행위입니다. ④ 약속 위반을 예사로 하고 말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성직자에게 6차례 속은 일이 있었습니다. 계속 그의 앞날을 지켜볼 것입니다. 혹 말로한 약속이 시행되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즉시 자기의 말과 약속이 잘못된 것을 시인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잘 나오다가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들은 그늘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인격은 은혜받을 그릇이 못됩니다. 대화를 피하거나 사리를 숨기는 사람들은 진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9과 빛과 소금 (마 5:13~14)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게하는 역할을 하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어두움과 부패는 죄악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이 죄악과 거리가 먼 것처럼 성도들은 항상 정의로운 생활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없애고도 자신에게 손해가 없지만 소금은 다른 물체의 부패를 방지할 때 자기를 희생하여야만 가능하므로 이것은 성도의 희생을 권장하시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와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 여기에 소속한 성도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교회 수나 성도에 비할 때 정의 사회가 잘 구현되지 않는 이유는 사명을 가진 성도나 교회의 역할이 그만큼 미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빛이 정의로운 활동이면 소금은 봉사와 희생을 의미하는데 오늘의 성도들이 얼마나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는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려면

첫째는 성도 자신이 자기의 성화에 힘써야 할 것이요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음을 나타내야 할 것이요

셋째는 성도 개인은 희생적인 일을 잘 못하여도 예수님의 분신인 교회는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자비와 희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교회와 성도들의 예수님 닮지 못한 일들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70과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 (고전 13:4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는 일”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인생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적당하게 하여야 유익한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적당하게 먹어야 합니다. 많이 먹으면 체하고 적게 먹으면 약해집니다. 잠도 적당하게 자야 합니다. 많이 자면 게을러지고 적게 자면 피곤해집니다. 일도 적당하게 하여야 합니다. 너무 많이 하면 피곤하고 너무 안 하면 가난해집니다. 잠 30:8에서는 “재물도 적당하게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면 하나님을 모른다 하기 쉽고 너무 적게 가지면 도적질 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자기가 가진 재물의 적당량을 헤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꼭 써야 할 일을 못쓰게 되지 않을 만큼 갖는 것이 적당한 것입니다. 사치나 허례허식에 돈을 쓰는 것은 안써도 되는 일이고, 의식주와 질병 치료, 교육관계에 쓰는 것은 꼭 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표준으로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버는데는 과격할 만큼 열심있고 신앙 생활은 나태할 만큼 게으른 사람이 있으니 이것도 적당치 않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수입만큼 지출하여야 하는데 돈을 잘 쓰는 습관이 있어서 항상 빚을 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인간 교제에 있어서 성격을 나타낼 때 과격하게 나타낼 수도 있고, 온건하게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과격은 피하면서 자기의 양심과 지조를 지키는 적당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나사를 잠글 때 지나치게 힘을 주면 마모되어 헛돌게 됩니다. 지나치게 힘을 준 것은 과격하였다는 뜻입니다. 벌을 주기 위하여 “적당히 때리라”고 하였는데 지나치게 때려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적당치 못한 것이 큰 화근을 초래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이나 바울사도가 적당하게 행하신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제사장들은 죄인이라고 몰아 세우고 재판장 빌라도는 예수님 보고 변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습니다(마 27:13~14). 그 당시 예수님의 묵비권 행사가 곧 적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다고 다 변명하시면 결국 십자가를 피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행 21:24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에 왔는데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율법을 무시한 자로 오해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염려하는 장로들이 “율법에 의하여 결례행사를 마치고 머리를 깎을 사람에게 성전에 가서 그의 머리 깎는 비용을 대주면 핍박자들이 볼 때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는 자인줄 알았는데 결례식에 참석하고 머리 깎는 비용을 대주는 것을 보니 우리가 오해하였구나”할 것인즉 그 비용을 대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머리 깎는 비용 대주는 구제를 위하여 성전에 간 것일 뿐 결례식을 돕는 뜻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처사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복음사상을 해치지도 않으면서 구제하고 오해를 풀게하는 적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도 적당하게 교회생활도 적당하게 찬송, 기도, 설교도 적당하게 목소리도 적당하게 대접도 적당하게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는 성도님들이 도시기를 바랍니다. 또 높은데 뜻을 두지 마시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롬 12:16) 있는 것을 족한 줄 알고(히 13:5) 평범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질서대로 사셔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질서있게 살게 하기 위하여 법률적, 도덕적 기준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여기에 첨부하여 성경적, 양심적 기준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무적인 질서도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1) 질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까? ① 순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고 뒤서는 순서입니다. ② 합법입니다. 합법이 아니면 질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③ 규모입니다. 갖출 것을 갖추는 것입니다. 또 규모는 앞에서 말씀한 적당한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순서를 차릴 줄 모르거나 법을 지키지 않거나 규모를 차리지 않는다면 그 세계는 싸움터가 되고 사람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교회생활에서도 질서를 잘 지켜서 앞서고 뒤서는 순서를 알고 자기의 위치와 좌석을 알고 사무적인 규모를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 행정을 집행하다 보면 규모와 질서를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크게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대구에 있을 때 어떤 성도가 전세 주택을 살았는데 이사갈 때 집주인이 “화장실 수리를 해 놓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유인 즉 세입자가 들어올 때 화장실에 타일 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많이 떨어졌으니까 수리해 놓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세입자는 “저절로 떨어졌으니까 책임이 없다” 주인은“그 말 못믿는다”하여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런 책임을 누가 진다”는 계약 명시가 있으면 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계약상의 질서요 규모인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의 인사 관계도 그렇게 복잡한 것입니다. “교회 사찰은 중요직이 아니니까 적당한 사람이 와서 일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1년 후에 내보내지”하고 영입을 했습니다. 만족하게 일하지 않습니다. 성품이 포악합니다. “나가라”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나갈 집도 없는데 교회가 이렇게 하는 법이 있느냐”하고 멱살잡이를 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왜 사전에 성품조사, 신원조사, 보증인을 세워 받지 못했나?하는 것을 크게 후회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장로가 나간 후에 그것을 당회록에 정리를 안하였는데 다시 들어와서 목사를 불리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사무적인 절차가 다 질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런 질서유지를 위하여 대책을 세울 때 모든 성도는 그런 일을 이해하고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반드시 적당하게 행하고 질서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71과 운동경기와 신앙 (고전 9:24~26) 목록으로


바울사도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교훈하셨습니다. 헬라인들은 운동경기를 좋아하였고, 고린도지역 사람들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즉 너희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상 얻는 자가 하나”란 말씀은 금메달을 따는 자만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면류관 중에는 썩을 면류관과 썩지 않은 면류관의 두 종류가 있는데 썩을 면류관은 현실적인 것으로 상을 받는 것이고, 썩지 않는 면류관은 신령한 복으로 상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으로 심어 썩을 면류관을 얻을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으로 심어 썩지 않을 영원한 상급을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9:25). 따라서 값진 면류관을 준비하려면 모든 일에 절제하여야 하는데 방향 설정을 잘하고 헛된 것(허공을 치는 것)에 힘을 소모하지 말고 규칙대로 최선을 다하여 버림이 되지 않고 상을 받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규칙을 위반하면 일등을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한 다음에 “운동경기의 특징”을 몇 가지로 살피면서 그 특징이 신앙생활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의 특징

1. 대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대적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대적은 사람도 아니요 죄인도 아니요 오직 마귀일 뿐이고, 마귀의 역사로 나타나는 죄의 유혹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이든지 죄의 유혹에 넘어 가지만 않으면 마귀에게 충분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적인 일에 끌리지 않고 성령의 충만으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뜻만을 따를 때 가능한 것입니다.

2. 운동경기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구경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편에도 구경꾼들과 응원자들이 있고 성도의 편에도 구경꾼들과 응원자들이 있는데 성도들은 자기의 팬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경꾼들이 누구들입니까? 히 12:1에 보시면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바로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경주에 승리하지 못하면 예수님께도 면목이 없고 다른 성도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3. 운동경기의 특징은 규칙을 엄하게 지키는데 있습니다. 딤후 2:5에 보시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하셨으니 이렇게 운동경기가 법이 엄한 것처럼 성도의 신앙생활도 말씀에 엄격하게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은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피의 제사가 없었기 때문이요(요일 3:12, 유 1:11)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 정성되게 행하지 못한 일로 징책을 받은 일이 있고(창 15:9~13)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죽은 사실이나(레 10:1) 벱궤를 고핫 자손이 메지 않고 수레로 옮기다가 화를 당한 사실(삼상 6:7) 등은 모두 하나님의 명한 규칙을 위반하여 벌받은 사례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운동경기에 “규칙을 위반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다 아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생활도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전 4:6, 고후 13:8)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승리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운동경기에 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기의 주최자이십니다. 계 22:12에 보시면 “모가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상을 예비하시고 신앙의 운동경기를 개최하셨으므로 성도는 그 뜻에 순종하여 상 받기를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승패 문제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도가 패배하면 마귀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패배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5. 운동경기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기인 것입니다. 보통으로 뛰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경기의 상대자는 마귀로써 마귀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마귀는 쉬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최선을 다하는데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엡 6:11에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전신 갑주의 중심적 무기가 바로 말씀과 기도인 것입니다. 살후 3:1에 보시면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신앙 생활도 달음질하셔야 하겠습니다. 자전거는 멎으면 쓰러집니다. 믿음의 달음질도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의 특징 다섯 가지를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응원자들을 기쁘게 하여 규칙을 잘 지켜서 승리의 상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제72과 왕 앞에 설 자 (잠 22:29)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이 왕 앞에 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왕 앞에 선다”는 뜻과 “자기 사업에 근실한 것”이 어떤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왕 앞에 선다는 뜻은 칭찬과 존귀와 상급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왕을 예수님으로 비유할 때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 대통령 앞에서 칭찬 받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성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상을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기 일에 근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1) 성도들은 자기의 일을 잘 파악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 자기의 일은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책임입니다. ② 이웃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자기의 책임이라면 우선 자기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들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라”는 말씀은 효도의 교훈을 비롯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모친 마리아의 부양을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일과(요 19:27) 딤전 5:8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책임에 대한 말씀은 “빛과 소금 역할을 하라”는 말씀(마 5:13~16)이 바로 그 교훈인 것입니다. ③ 자기의 일은 하나님이 주신 특수한 은사 즉 달란트에 대한 활용입니다. 일반적 달란트는 일반적 지식이나 기술에 따른 직장 생활을 의미하고(눅 19:12~22) 특수한 달란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령한 은사의 기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25:14~29). 예를 들면 성직자라도 일반적 목회생활 이외에 특수한 은사가 있고 일반 성도들도 신앙생활 외에 특수한 은사가 있습니다. 그 은사를 일반적 은사보다 앞세워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2)이렇게 자기의 일을 안 다음에는 어떤 순서로 활동하며 어떤 일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인가를 연구하여 일반적인 일은 최소한 덕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까지 노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령한 일은 최대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의 일”을 지혜롭게 감당하여 근실하게 산 사람이 왕 앞에 나가 칭찬과 상급을 받을 자임을 아셔서 좋은 상을 얻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3과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용사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말씀은 본문에서부터 23장 끝까지 소개됩니다. 다윗은 나가가 평정되고 국권이 든든해 졌을 때 그동안 자기를 위하고 또 이스라엘 나라를 위하여 싸워 준 용사들에 대하여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뜻으로 용사들에 대한 기록을 하였고 또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선민국가를 든든히 세우는데 노력한 용사들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1. 8절에서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용사답게 신앙생활을 잘 하는 지를 반성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그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생활을 하라”(수 1:6)고 하였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할 때 “대장부답게 하나님을 경외하라”(왕상 2:2~3)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용사답게 신앙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다윗의 용사 중 첫 번째로 꼽힌 사람은 군장의 두목 “요셉 밧세벳”이요 그는 한 때에 800인을 죽인 공로가 있었습니다. 8절에 보시면 “그는 다그몬 사람 요셉 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그몬에 가서 살 때와 에센에서 살 때에 그 이름을 다르게 사용했기 때문이며 그가 죽인 대적은 블레셋 군이었을 것이고(11절) 한 때에 800인을 죽였으니 그 외에도 많은 공적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는 대적 800인 이상을 죽이므로 군장의 두목이 되었고, 첫 번째로 꼽히는 다윗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3.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리아살”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중 한 사람인데 블레셋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오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러간 상태였는데 세 사람 용사들끼리 싸움을 돋우고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대적을 치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이기게 하셔서 다시 물러났던 백성들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르며 대적의 전취물을 노략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어 준 것”은 용사의 사기를 돋군 것이고 “칼이 손에 붙었다”는 것은 힘이 다 빠지기까지 싸운 것을 뜻하며 이렇게 힘이 다 빠지도록 싸웠을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고, 승리의 기수를 잡았을 때 물러난 백성들이 다시 와서 합세한 것입니다. 엘르아살의 전공도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였습니다. 이 사람은 블레셋 군인들이 떼를 지어 녹두 나무 밭에 모였을 때 백성들은 그 앞에서 도망하였지만 이 사람은 그 밭가운데 서서 블레셋 사람을 치니 그 때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녹두 나무 밭 평지에서 도망하는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혼자 나가서 그 앞을 막고 싸웠으니 이것은 용사다운 희생적 싸움이었고 하나님은 이때에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5. 30두목 중 세 사람의 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다윗에게 물을 대접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용사가 곡식을 벨 때에 아들람 굴이 있는 곳으로 다윗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그 때 다윗이 갈증이 심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기를 청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다윗은 산성에 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르바임 골짜기에는 블레셋 군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다윗이 사모하는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친 것입니다. 이 때에 다윗은 그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이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하겠다 이 물은 물이 아니요 세 용사가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가져온 그들의 피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 용사의 생명의 가치가 있는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갈증을 참으며 세 용사가 생명을 걸고 가져온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그 신앙은 참으로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성도들의 마음을 오래 오래 뜨끔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무엇을 교훈 받아야 할 것입니까?

1) 첫째 교훈은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작하는 것으로 심판을 예고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3:12). 다윗이 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앉았을 때 그동안 잘 싸워준 용사들의 공적을 기록한 것은 행한대로 상급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심이요

2) 전쟁에 공을 세운 용사들은 다 특징이 있으니 어떤 용사는 대적을 많이 죽였고, 어떤 사람은 혼자 싸웠고, 어떤 사람은 다른 용사의 격려를 받으며 싸웠으며 어떤 용사는 상관을 위하여 충성하였고, 어떤 용사는 힘이 다 빠지기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방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은사와 직책대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낱낱이 감찰하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고 구원을 주셨을 때는 언제나 죽기까지 노력하고 싸웠을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고 하셨습니다(마 11:12). 신앙생활은 마귀와 죄와 싸우는 전쟁입니다. 용사가 아니면 전쟁할 수 없습니다. 명실공히, 신앙의 용사가 되어서 용사다운 믿음생활을 용기있게 시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4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왕하 4:2, 시 119:56)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 당시에 선지자 생도의 미망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빚에 쪼들려 고난을 당할 때 엘리사 선지자에게 그 어려움을 호소하였더니 선지자가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미망인은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외에는 아무것도 없다”함으로 한 병 기름이 있음을 말하였고, 엘리사 선지자는 그 기름을 근거로 하여 그릇을 빌려다가 골방에 들어가서 그 기름을 따르게 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가난 문제를 해결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례는 예수님 때에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실 때도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마 15:34, 막 8:5) 하셨고, 또 제자들은 “우리에게 이것 밖에 없습니다”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 제공했을 때 예수님이 능력을 나타내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을 때 기름 한 병과 오병이어는 아주 요긴한 근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 3:6에 보시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 뱅이를 고쳐 주실 때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를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을 때 병자가 일어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사는 저희들이 옛날에 살던 사르밧 과부나 선지자 생도의 미망인처럼 기근에 처했는가 할 때 이적이 나타나야 할 만큼 심각한 시대에 살고있지 않으며 또 질병문제 역시 심각한 경우가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문제보다 더 앞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가장 앞세워야 할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 있다고 대답해야 좋겠습니까? 반드시 없을 것은 없어야 좋고 있을 것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그러면 먼저 현실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현시대에는 물질적 향락주의가 많습니다. 여름철이 되니까 자동차가 많이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서울에 교통체증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여유있게 사니까 물질을 사용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 외에도 물질적 향략주의는 너무 팽배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현시대는 문화수준이 고도에 와 있습니다. 지식이나 과학문명을 통한 인간생활이 얼마나 편리해졌습니까? 참으로 문화혜택을 많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3) 교회생활을 들여다 볼 때 시설과 제도가 굉장히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 시설, 조직, 제도 이런 것이 다 외형적인 것들인데 대부분 다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꼭 있어야 할 것이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1) 진리 탐구열이 부족한 것입니다. 100명 성도 중에 10명 쯤은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거의가 진리 탐구열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의 신앙을 퇴보시키고 선악을 판단하는 심령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시 42:1~2에서 고라 자손은 말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곧 성경을 배우며 깨닫고 성경에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2) 선악을 판단하는 감각이 둔해진 것입니다. 히 5:14에 보시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의 선악과 방법의 선악이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목적, 좋은 방법만 선별하여 생활할 수 있는 믿음의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3)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사랑하시다가 결국은 자기를 내어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등장 밑이 어두운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일체감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한 가족이란 개념에서도 떠난 사랑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과감히 회개하고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1, 엡 4:2, 계 2:5).

4) 정신적으로 언어상으로 행위로 볼 때 순결이 부족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네게 있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을 내 놓아라”하셨을 때 만일 저희들이 좋은 믿음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거나 진리 탐구열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선악을 판단하는 예민한 정신을 보여 드리지 못하거나 진정한 사랑, 깨끗한 생활의 순결을 보여 드리지 못한다면 주님은 크게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좋은 것들을 보여 드려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제75과 원한과 송사 (눅 18:1~8, 고전 6:1~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원한을 풀어 주소서”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의 서론은 “항상 기도하라 기도응답은 더딜 수도 있다 그러나 낙망치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고

2)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권위만 세우는 자란 뜻입니다. 이런 재판관은 재판을 할 때 임의로 공의를 굽히고 뇌물이나 많이 받아야 사건을 유익하게 처리해 줄 사람이므로 비천한 자들의 송사에 대하여는 참으로 문턱이 높은 것입니다.

2. 그런데 마침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그에게 사건을 제소했습니다. 그 과부는 자주 재판관을 찾아가서 “속히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재판관은 본래 사람을 무시하는 자이기 때문에 얼마동안 고의로 사건을 처리해 주지 않았습니다. “과부”란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성경에 과부가 존귀한 신분으로 나타나는 기사가 없고, 거의가 비천한 상태로만 나타납니다(애 1:1, 막 12:42, 말 3:5). 따라서 그 과부는 뇌물을 들고 재판관을 찾아 갈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은 지연된 것입니다.

3. 그런 형편에서 그 과부는 재판관이 번거로울 지경에 이르도록 자주 찾아 가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니까 그 불의한 재판관은 책임과 의무를 떠나서 번거롭고 귀찮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처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있음직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신청자의 소원이 번거로우면 들어 주거든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택함받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합당한 소원으로 밤낮 부르짖을 때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신 것입니다.

4.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인자가 올 때에 ”란 이 시대 곧 말세지말을 뜻하고

2) “믿음을 보겠느냐”는 뜻은 탄원하는 사건과 관련할 때 “하나님 뜻에 맞는 바른 청원을 얼마나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에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와 간구를 하지 않으므로 주님이 바라는 믿음 상태에 머물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산까를로스 오르띠스 목사는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천국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반드시 정욕적인 기도를 피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이차적으로 돌리면서 믿음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을 먼저 기도하는 지혜를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5.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내용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응답이 더딜지라도 하나님께서 응답을 미루시는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도를 계속 한다”는 뜻은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신을 포함하여 기도의 의미가 연속되도록 생활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또 억울한 사건이나 공평치 못한 사건이 있을 때 의당히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고 또 법관에게도 의탁할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법관에게 의탁하는 모든 것이 불의한 일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고 “성도는 일반재판을 하면 안된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법은 교회에도 있고(출 18:13,22, 마 16:19) 나라법에도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요 18:31, 롬 13:1~4). 다만 일반법에 송사하는 것을 능사로 하지 말고 스스로 화해를 도모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25).

6. 그런데 이런 송사에 대하여 반대되는 교훈을 말씀하신 곳이 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마 5:39~40)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최고의 선과 최고의 덕행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폭력자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차라리 맞는 것이 잘 하는 것이며 송사하여 재물을 취하려는 자에게 줄만한 것은 다 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웃간에 원망 들을 일이 없도록 생활하고 원수를 미워하는데서 사랑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도 교훈하셨습니다(마 5:25,44).

7. 그렇다면 또 교회나 사회법에 송사하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할 때 ① 교회 안에서의 송사는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을 판단해 주고 범법자를 책망하여 바로 살도록 지도하며 교회의 순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것이고 ② 사회적인 재판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잘잘못을 가리고 질서를 도모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고전 6:1~11에서 성도간의 문제를 믿지 않는 법관 앞에서 재판하는 것을 금지할 사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믿지 않는 재판관을 불의한 자라 하셨고(고전 6:1) 교회에서는 안 믿는 세계를 가볍게(알아주지 않음) 여긴다고 하셨으며(고전 6:4) 그런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6:9).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 만큼 어두운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성경으로 잘잘못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또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 장차 성도들은 예수님의 심판석에 배석하여 천사를 심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다투면서 시비를 가리지 못하여 믿지 않는 법관에게까지 찾아가서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성경을 놓고 스스로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교회는 일반법관에게 찾아가기 전에 시시비비를 시원스럽게 판단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교회가 공의롭지 못한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8. 마지막으로 신앙양심을 떠나서 폭력이나 착취를 일삼는 악한 자들에 대하여는 성도라도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써 국가적 보호를 받아야 할 특권이 있기 때문에 불법한 일에 대하여 국법의 심판을 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롬 13:1~4). 이 경우에 의와 불의를 가리는 일과 회개하는 범죄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일이 다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76과 생활 계획의 한계 (마 6:33~34) 목록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이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1. 우리가 과연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성실하게 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복종하며 사는 생활이고 “그의 의”는 매사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마음과 뜻과 정성이 그일에 집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축복이란 노력이나 투자보다 더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통하는 은혜를 받으니 자기의 노력과 관련없이 출세를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원을 갖고 나가서 천원짜리 물건을 바꾸어 오는 것은 노력의 대가입니다. 그러나 천원을 주고 만원 상당의 물건을 바꾸어 왔다면 그 차액의 대가는 형통한 것이고 하나님이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얼만큼 성실하게 살알더니 하나님이 무슨 일들을 형통하게 더하여 주시더라”는 체험을 할 때 믿음도 더 좋아지고 신앙생활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하신 것이 “내일 일을 계획하거나 준비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내일 일을 염려 안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은 “염려되는 일을 미리 앞당겨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염려와 준비는 뜻이 다릅니다. 내일 먹을 양식이 없을 때 오늘 준비할 수 있어서 미리 양식을 사 놓는 것은 준비입니다. 그런데 준비할 방도가 없습니다. 돈도 없고, 이웃의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날 푹 쉬고 그 다음날 어떻게 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양식을 미리 구하라”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 즉 그날 먹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출 16:21~30) “밤중에 온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어서 친구에게 사정한 즉 줄 수 없노라 할 수 없고 간청함을 인하여 그 소용대로 준다”(눅 11:5~9)는 말씀이 그런 뜻인 것입니다. 호랑이가 배고프면 어슬렁 먹이를 구하러 나가겠지요. 이 때에 사냥감을 만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따라서 노력을 다 하고도 내일 먹을 양식이 없으면 푹 자고 다음 날 주실 은혜를 기다릴지언정 미리 염려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히 4:16에서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고, 롬4:17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힘의 한계가 다 하였으면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염려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출 14:14에 보시면 홍해가 갈라질 때 “여호와께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하셨습니다.

4.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은 “계획이나 준비를 미리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과 준비는 하나님이 내일과 미래를 주실 때 적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120년 후의 일을 예고 하시면서 방주를 짓게 하셨고(창 6:3) 아브라함에게는 400년 훈에 출애굽이 있을 것을 예고 하셨으며(창 16:13~15) 요셉에게는 7년 흉년에 대비할 것을 계획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계획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눅 14:28). 그런데 약 4:13~14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계획”을 어리석은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일의 기약이 하나님께 달린 것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자기만 의지하며 시행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일을 주시고 1년까지 살게 하시며 또 형통한 은혜를 주실 때에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5. 본문에서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한 즉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를 하루 단위로 살게 하시고 또 하루 단위로 은혜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치 안개속을 더듬어 나가는 것처럼 성도가 하루 단위로 그날 그날을 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나도 하루 분씩 주셨습니다. 안식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있을 때는 이틀 분을 주셨고 사람이 욕심을 내어 계명을 어기고 더 갖는 것은 썩어지게 하셨으니(출 16:21~30) 철저한 하루주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만나는 인간이 변통할 수 없는 중에서 있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레 19:13에서는 “품군의 품삯을 당일에 주지 않고 밤을 넘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기도문을 하면서 양식이 있을 때는 “오늘날 우리에게”를 “오늘날 세계의 민족에게”로 고쳐서 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결심할 것은 하루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구합니다”하고 저녁되면 반성하고 감사한 후 푹 쉬고 또 내일을 주시면 그 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약없는 내일은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이 하루 단위로 살아라”하셨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퍽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내일 쓸 것을 오늘 안 주시고 당일에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믿으시고 그렇게 기다리시면서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9. 기도에 관한 말씀


제77과 기도에 대한 상식 (마 7:7~8)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외식하는 자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 앞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말이 많아야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골방기도와 은밀한 기도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상식으로

1. 기도의 뜻을 아셔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의사표시입니다. 이 의사표시는 생각(묵상)으로도 할 수 있고 말로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요,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2. 기도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이시고(마 6:9) 예수님은 기도의 중보자이시며(요 16:23~24) 성령님은 기도를 도우시는 분입니다(롬 8:26). 기도의 대상을 호칭할 때 주님이시여 성령님이시여 하지 마시고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여”로 호칭하는 것이 합당하며 예수님이 기도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3. 기도의 내용은 크게 나누면 고백과 청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형편을 보고하고 자기의 중심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회개하는 내용이 다 고백에 해당되고, 청원은 모든 것을 소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라서 반드시 고백이 앞서고 청원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또 청원 중에는 신령한 은혜를 먼저 구하고 다음에 현실의 복을 구하셔야 하며(마 6:33, 5:11,13) 현실의 복을 구할 때 꼭 필요한 것만 적당하게 구하는 태도를 취하셔야 합니다(잠 30:8). 욕심으로 구하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약 4:3)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여야만 들어주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일 5:14). 따라서 기도자는 무엇을 청원할 때 상당하게 심사숙고하여 “이것은 하나님도 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오면 그것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기도 중에 자기 욕심만 차리려는 기도가 강조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반드시 이기주의를 떠나서 사랑 중심으로 청원할 것을 잊지마셔야 할 것입니다.

4. 기도는 언제 하는 것이 좋은가? 할 때 살전 5:17에 보시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하셨고, 눅 18:1에서는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특정시간에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특정시간에 기도한 사례가 있습니다(막 1:35, 행 3:1). 따라서 특정시간에 기도하고 또 쉬지않고 기도하면 퍽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시간(예를 들면 새벽기도 같은 것)에 기도를 못할 경우에는 항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는 방법은 눕던지 일어나든지 길을 가든지 무엇을 할 때 항상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가짐을 끊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5. 기도하는 장소도 항상 기도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침상이나 식탁이나 골방이나 산이나 길에서나 차 안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 기도를 권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 하셨으니 기도의 합리적 장소는 기도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시설한 교회당(구약시대에는 성전마당)이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6. 성도가 특정 소원을 간청할 때 여러 가지 교훈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1) 우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시 106:1) 기도를 들으시는 분인 것과(시 116:1)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합니다(롬 8:28,32).

2) 간청하는 자의 마음으로 감사와(빌 4:6) 회개와(시 66:18) 충성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에 유익하지 않은 것은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고전 10:31,33).

3) 꼭 주실 줄로 믿는 마음입니다(막 11:24).

4) 마지막으로 낙심치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시 40:1, 애 3:25).

반드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는 열쇠임을 체험하므로 기도에 이끌리는 생활이 있으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78과 기도의 필수 요건 (요 16:23~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의 필수 요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드리면

1)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그 날”이란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묻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모든 의문을 확인하는 곳이요 또 부족함이 없이 성취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묻는다”는 “에로가오( )”는 “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각주). 따라서 천국은 물을 것도 구할 것도 없는 확실하고 완전한 곳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2)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모든 기도가 예수님의 중보를 통하여 응답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사함 받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되는 일과 영생 구원받는 일 뿐만 아니라 기도를 응답하시는 일에도 반드시 중보를 하시는 것입니다.

3)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전이므로 중보사역이 끝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4)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하시므로 성도가 기도로 구하므로 응답을 받고 응답을 받으므로 기쁨이 충만한 체험을 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기도의 필수 요건이 무엇인가?

1) 기도의 대상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마 7:11에 보시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성도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이 다 기도에 의해서만 산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부족하였어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주신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기도자에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 아버지와 아들관계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 6:9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무상으로 거래하는 관계입니다. 또 비밀의 간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크게 미안할 것도 없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다정하고 소상하게 이야기하는 감정으로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법적 특권은 꼭 같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성도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마 7:7에서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 “구한다”는 뜻은 기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주시고 싶은 것도 “그의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겔 36:37, 빌 2:13). ② 찾는다는 뜻은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기도도 노력하여야 하지만 그 일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③ “두드리라”는 뜻은 “최후까지 인내하며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목적지에 와서 집을 찾았으나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노력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원하시지 않는 것을 성도가 기도만 한다고 주시겠습니까? 부모의 심정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기의 현실적인 욕심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먼저 생각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깨닫는 것과 회개하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 중심으로 행하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필수 요건은 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이요 ②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기도하는 것이요 ③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요 ④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79과 기도할 때 유의할 말씀 (요일 5:14) 목록으로


1. “감사하라”는 말씀

1)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2)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하므로 깨어 있으라”(골 4:2)

4)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회개하라”는 말씀

1)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2)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3)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3,15)

3.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

1)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약 1:6)

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3)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4. “용서하라”는 말씀

1)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2)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5.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는 말씀

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2)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

4)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5)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6. “간절하게 구하라”는 말씀

1) 아브라함이 의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도한 사실(창 18:27~33)

2) 야곱이 황도뼈가 부러진 후 울면서 간구한 사실(창 32:26, 호 12:4)

3)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토함같이 부르짖은 사실(시 20:17)

4) 한나의 간절한 기도(삼상 1:13)

5) 하나님의 중심을 뜨겁게 하는 금식 기도(욜 2:18)

6) 손님접대를 인하여 양식을 꾸러간 자의 애걸함(눅 11:8)

7)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부의 번거로운 청탁(눅 18:5)

7. 기도 후에 기다리라는 말씀

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2)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4~25)

3)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8)

 

제80과 최후의 응답 (사 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최후의 응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최후의 응답”이란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나 어려운 하소연을 속히 응답하시지 않고 다 죽게 되었거나 아주 망하여 없어지기 직전에 응답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나 어려움을 감찰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섭리(방법)중 위기 직전에 살려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런 내용들을 살피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 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 혀가 마를 때 그들에게 응답하시고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로 인하여 불행하게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지 않으시고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죽음 직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련한 것은 병들고 외로운 신세를 의미하고 빈핍한 것은 먹을 것을 주리는 상태요, 거기에 물조차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 또 그 갈증이 심하여 혀가 마르는 지경이 된 것은 최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 죽게 되었을 때 응답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2. 이런 사례가 성경 어디에 나타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창 22:11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우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은 후 그 아들을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이삭 죽이는 일을 중지하게 하신 사실이 있고

2) 창 43:14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갔다 와서 벤야민을 데리고 가야만 양식을 또 사 올 수 있다고 하니까 야곱은 벤야민을 아끼는 심정 때문에 안 보내려 하다가 “내가 아들을 잃으면 잃으리로다”하고 벤야민을 보냈습니다. 야곱에게 막내 아들 벤야민은 귀한 존재이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 할 때는 귀한 것을 포기할수록 응담의 은혜가 큰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아우성 쳤을 때 모세는 즉시 나를 죽여…곤고함을 보지 않게 해 달라“하였으니 이 기도는 후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쫓기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한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왕상 19:4).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은혜로 모세에게는 메추라기를 엘리야에게는 천사를 보내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4) 또 모세가 홍해바다를 건널 때와 요단강을 건널 때도 미리 기적을 베푸시지 않고 애굽 군의 추격으로 답답한 경험을 한 후에 홍해를 갈라 주셨고, 요단강도 법궤를 멘 제사장의 발이 강물을 디뎠을 때 흐르던 물이 중단하여 쌓이게 된 것입니다(출 14:12~13, 수 3:13,14).

5) 풍랑이 일어났을 때 “요나”가 자기를 물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 1:12)한 것이나

6)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기도한 것이 응답된 일은(더 4:16) 모두 최후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고 희생을 각오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희생을 각오하는 기도도 역시 최후의 기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최후의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까?

1)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기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당한 기간을 징계상태로 버려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한을 정하고 일을 하시는데(출 9:5, 전 3:1) 징계의 기간도 정하시는 것입니다(창 15:13, 단 9:2). 그러니까 그 기간이 차기까지 기도 응답이 지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깨닫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고난이 계속된다는 뜻인데 고난은 깨달음을 주는 것입니다. 시 119:71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하였습니다. 고난으로 깨닫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난으로 깨닫는 것은 인생의 연약으로부터 자신의 죄와 인생의 허무와 전능자를 의지할 필요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는 분량이 찰 때까지 응답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3)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완악한 사람은 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련해지면 많이 겸손해 지고 어려움에 처할 때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고난을 당하면서 회개한 사람이 다윗왕입니다. 다윗왕은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음행과 살인죄를 범하고 뉘우치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자녀들간의 불륜과 살인, 아들의 반역 등). 그 때에 다윗은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기까지 회개한 것입니다(시 6:6). 완악한 자를 회개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은 고난이상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직접 방법 ; 성령님이 역사하심).

4) 인내하게 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시 40:1에 보시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하였고, 애 3:25에서는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선을 베푸시므로…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징계의 기간을 채우시는 것과 회개와 깨달음과 인내와 기다림을 위하여 갈증으로 그 혀가 마를 때까지 외면하시지만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다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업어 올리는 것처럼 위기 직전에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고 조급함이 없고 고난을 견디면서 꾸준히 기도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81과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에는 애통하고 울어야 할 것을 권장하신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멸망 받을 예루살렘 백성들과 도성을 위하여 우신 일이 있었고(마 23:37) 또 히 5:7에 보시면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애통의 의미와 종류와 결과에 대한 순서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복 받을 만한 애통은 건설적인 눈물과 감정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애통에는 반드시 눈물이 동반하니까 애통과 눈물을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눈물은 마음의 표현인데 혹 건설적이 못되는 눈물과 애통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한 눈물, 탄식의 눈물, 절망의 눈물, 보복심을 갖는 애통같은 것은 복되지 않습니다. 본문의 “애통한다”는 핀데오( )는 악인의 핍박을 받는 의로운 성도의 슬픈 표현이라는 해석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별하는 장면의 슬픈 표현을 오둘모스( )로(고후 7:7) 환난 당하는 애통을 수노케( )로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고후 2:4). 여기에 비할 때 본문의 핀데오란 애통은 정의감과 신앙성을 가진 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건설적인 애통에 대하여 기쁘게 보시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건설적인 애통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1) 회개하는 애통입니다. 다윗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한 애통(시 6:6), 요엘 선지자가 “너희는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며 돌아오라”는 말씀(욜 2:13), 히스기야왕이 병들어 누운 채로 심히 통곡한 회개의 기도(왕하 20:3), 세리의 가슴을 치는 통곡(눅 18:10), 베드로의 회개의 통곡(마 26:75), 바울의 자기 부패성으로 인한 탄식(롬 7:24),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다가 자신은 이중인격자라고 외쳤으며, 마틴루터는 애통하며 회개하다가 졸도까지 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는 반드시 신앙 초기에 회개하는 애통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애통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우신 일이나(요 11:35) 예루살렘 멸망을 인하여 우시고 또 울라(마 23:37, 눅 23:28)하신 일이나 바울이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하신 말씀이나 초상집에서의 눈물(전 7:2~3)이 바로 긍휼의 애통인 것입니다. 성도는 긍휼을 베풀기 위하여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무지한 자, 포악한 자 등을 위하여 울어 줄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링컨은 어릴 때 노예들이 채찍을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애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 노예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불쌍한 이웃과 함께 우는 애통이 긍휼의 애통이며 복있는 애통인 것입니다.

3) 기도의 간절성을 나타내는 애통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울며 간구한 사실이 있었고(호 12:4)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러하였으며(히 5:7) 히스기야왕의 기도나(왕하 20:5)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찌하면 자신의 눈이 눈물 근원이 될까”하였고, “밤새도록 애통하니 그 눈물에 눈이 상하였다”고 하였으며(렘 19:1, 애 1:2, 2:11) 그러고도 계속 “통곡하며 기도할 것이라”(렘 13:17)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있는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응답하실 것입니다(왕하 20:6). 성경에 보면 굻은 베옷을 입고 슬픔을 표하며 기도한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았습니다(왕상 20:31, 시 35:13, 사 15:3, 렘 4:8).

4)사명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시 126:6에 보시면 “울며 씨를 뿌린 자가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것이라”하셨고, 바울사도가 눈물로 목회하셨으며(행 20:19,31, 21:13) 젊은 제가 디모데를 생각한 연민의 눈물도 흘리셨고(딤후 1:3) “해산하는 수고”를 하셨으며(갈 4:19)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바울을 배척하였고(딤후 1:15) 또 사도요한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평론하며 충성된 자들을 괴롭혔다고 하셨습니다(요삼 9). “하나님은 소자 하나만 실족케 하여도 연자맷돌을 달고 죽는 것이 낫다”하셨는데(눅 17:2)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적은 죄이겠습니까? 사명자가 사명생활 중에 흘려야 하는 눈물과 통곡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은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후 1:3~7에도 “위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라는 명사 “파라크레시스”( )는 “격려와 권고”의 뜻이 있고 “위로한다”는 동사는 ( ) “곁으로 부른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요 14:16의 “보혜사”라는 말씀이 “파라크레토스”( )로 “안위하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애통하는 성도에게는

1) 하나님이 그 곁에 가까이 계셔 주시는 것이고

2) 격려하시며 권고해 주시며

3) 안위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드리는 눈물의 기도가 있은 다음에는 그 마음이 후련하고 근심이 멀어지며 신뢰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성도에게 마음에 평안부터 주시고 다음에 위로의 말씀을 주시며 그 다음에 위로될 만한 은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눈물없는 성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제82과 아브라함의 기도의 성격 (창 18:22~33)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 속에 “아브라함의 기도의 성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자에게 좋은 모범을 주십니다.

1. 기도자의 자세가 겸손함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은 27절에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티끌로 표현하는 겸손은 대단한 것입니다. 욥은 인생을 구더기로 바울은 자신을 괴수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욥 25:6, 딤전 1:15).

2. 간절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지 내용을 관철하기 위하여 여섯 번의 질문을 거듭하였으니 그의 간절함과 기도의 끈질긴 태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하면서 50인,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가지 여섯 번의 질문을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질문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자기의 뜻을 내세워 관철시키려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알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질문의 기도를 드리고 그 대답을 성경에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4. 공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고무라의 죄악을 점검하러 가신다”는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창 18:20~21). 이 때 아브라함은 죄악이 심한 도성을 멸하시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혹 그 곳에 의인이 몇 사람 있어도 그들과 함께 멸하실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실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5. 결말을 듣고 기도를 끝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여섯 번 질문에서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결말을 듣고 끝낸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혹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까지 노력하고 인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기도의 성격은 겸손함과 간절함과 인내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과 공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음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83과 다윗의 기도 (대상 29:10~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기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다윗의 기도 내용입니다. 다윗왕이 늙고 세상을 떠날 무렵에 왕위를 솔로몬에게 이양할 것을 결심하고 솔로몬에게 성전 지을 것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앞 부분의 말씀을 보면 다윗왕은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한 중 성정 건축의 일은 크기 때문에 다윗이 먼저 힘을 다하여 건축 재료를 헌납하였고, 많은 백성들도 거기에 호응을 하여 성심껏 드리니 이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윗이 계획한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29:1)하였고, 또 “그 전을 사모하여 사유의 재물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29:3). 여기에서 기도하는 다윗의 자세에는 하나님을 위하고 사모하는 마음과 예물을 많이 드리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10절~11절 보시면 “영원히 송축을 받으실 하나님이라”하였고,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으며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시며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라”고 하므로 하나님이 영화로우셔야 할 내용들을 말하면서 말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몇 가지 고백을 나타냈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서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요, 부귀의 주관자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심이 주께 있다 하였고(12~13절),

2) 감사의 내용으로서 14절을 보시면 “드릴 힘이 없는 백성들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드릴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뜻을 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 건축 재료가 많이 나온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재물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직한 마음으로(17절) 재물을 드릴 수 있도록 힘 주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헌금은 감사와 기쁨과 자원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인생을 나그네와 우거자로 생각한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익하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우리는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을 무상하게 생각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이 세상을 잠시 기약없이 지나가는 존재란 것입니다. 이미 열조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우리도 미구에 지나갈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인생을 세상에 속한 나그네나 우거자로 안다면 그만큼 세상을 적당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내세와 영원한 복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그런 생활을 요구하셨습니다(약 4:13~16). 또 인생을 “머무름이 없는 그림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석양의 그림자를 연상한 것입니다(시 109:23). 석양의 그림자는 해가 저물어짐에 따라 머무름이 없이 속히 덥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날이 빠르고 촉박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인생을 보람있게 살기 위하여 죽기 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3. 간구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1) 18절에서 “이것을 백성들의 심중에 영원히 생각하게 해 달라”하였으니 여기의 “이것”이란 “성전을 짓도록 힘쓴 일”이며 그것을 그 후시대 백성들이 기억하기를 바란 것은 그와 같은 정성으로 하나님을 계속 섬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을 예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시며”란 기도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 때 반드시 마음가짐이 좋아야 할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자의 마음은 ① 감사가 우선이요 ② 자복하는 마음이요 ③ 사모하는 마음이요 ④ 즐거운 마음이요 ⑤ 충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 성전을 지어야 할 솔로몬에게도 “정성된 마음을 주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19절).

3)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또 자신이 예비한 재료로 성전을 건축하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한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의 손으로 성전을 지어야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계명과 법도와 율례는 구별하기 어려움).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기도할 때도 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내용 ② 자신의 정당한 신앙 고백 ③ 감사의 내용 ④ 가장 요긴한 것을 간구하는 내용 ⑤ 특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내용들을 간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4과 엘리야의 기도 (왕상 18:41~46) 목록으로


구약 성경 왕상 17장~19장은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은 한 마디로 장관을 이룹니다. 엘리야는 북방 이스라엘 나라 아합왕 때 사역을 하였는데 아합왕은 북 이스라엘 7대왕이었고 최고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종교를 반역하고 우상의 제단을 쌓은 북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야 같은 큰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악한 왕에 가장 큰 사역을 하는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 퍽 대조적이며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하는 복을(롬 5:20) 주신 증거요, 또 북 이스라엘에게도 선지자를 주신 것은 그들도 약속 받은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 계속 따른 것입니다. 왕하 17장부터 나타난 엘리야의 사역을 보면 17:1에서 “엘리야의 말(기도)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 것이라”하였고,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보내셔서 기적의 양식으로 흉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아들이 죽은 것을 살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오바댜”란 선지자는 아합왕의 왕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100명을 숨겨 먹인 사실이 있었고, 엘리야는 수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오바댜 선지자를 통하여 바알 선지자와 대결할 것을 아합왕에게 제의하였고, 가멜산에서 그대로 사형을 하게되니 하나님의 선지자는 엘리야 뿐이고, 바알 선지자는 450명이요 거기에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합세를 하였습니다. 제물을 드리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알자고 하여 대결했을 때 잡신들은 불로 응답을 받지 못하였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불로 제물을 태웠습니다. 그리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가 기도를 드린 즉 즉시 큰 비가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아합왕의 왕후 이세벨은 이방나라 두로왕 엣바알의 딸로써(왕상 16:31) 우상을 도입한 자이고 우상 선지자들이 죽자 더 악하여져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찾아 다니게 되니 엘리야는 다시 피곤하여져서 브엘세바로 피신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기도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위로하고 먹을 것을 주어 호렙으로 가게한 후 다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다메섹에 있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고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를 대신 할 선지자가 되게 한 후에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입니다(왕하 2:11). 엘리야 선지자는 이만큼 찬란한 능력의 사역을 한 선지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엘리야의 기도와 관련하여 몇 가지 연구를 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엘리야의 기도가 아니면 그 땅에 우로를 내리시지 않을 만큼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왕상 17:1). 약 5:17에 보시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내 말이 없으면 하나님이 비를 주시지 않는다” 한 것은 엘리야가 비오지 않도록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의 범죄와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볼 때 비오기를 구하는 축복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축복 기도가 함부로 남발되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교역자들 중에는 교인을 듣기 좋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 축복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 베풀만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출 33:19) 결국은 그 축복이 공수표로 돌아가는 것이고 공수표로 돌아 갈 것을 알면서 사람을 일시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하여 축복하는 것은 마치 거짓 선지자들이 “화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왕상 22:15). 그러니까 축복자는 반드시 축복받을 여건을 제시한 후에 거기에 일치하는 축복을 함이 합리적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2. 엘리야는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우상의 무리들을 없애고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린 후에 비오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실 일이 있을 때는 그것을 없애거나 해결하기 전에는 기도 응답이 안 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문제를 충분히 해결한 다음에 은혜와 축복을 구하는 것이 순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왕 또는 백성들의 죄와 관련이 있었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징계 섭리에 쓰임이 된 선지자였으며 엘리야는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상태에서 백성에 대한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3년 6개월 만에 죄 문제를 처리한 후에 기도하였으며 응답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장황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사람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따라 다닐 때 도망하였고 피곤하였으며 심지어는 죽기를 간구하기까지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선지자를 위로하셨고 먹여 주셨으며 힘을 내게 하셨고 갈 길을 가게 하셨으며 그가 해야 할 남은 사역을 마치게 하셨고, 후계자를 세운 다음에 죽음을 맛보지 않은채 승천하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쓰시는 사역자를 또 하나님 뜻대로 헌신한 사역자를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기도자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85과 뜻을 정한 다니엘 (단 1:8~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뜻을 정한 다니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다니엘”하면 바벨론 포로 시기의 선지자로써 그의 세 친구가 함께 이방 나라 왕궁의 우상 세계 안에서 살면서 믿음의 지조를 지킨 사람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다니엘은 유대나라 왕족 출신으로(단 1:3) 유다 21대왕 여호야김 3년, 바벨론에게 실권을 뺏길 당시부터(멸망 12년 전) 소년의 나이로 바벨론 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서 바벨론 왕궁에서 먹고 배우고 왕궁 사역에 일하게 된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궁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학문을 배우는 환경은 좋았지만(단 1:4~5) 바벨론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이고, 또 포로(인질)의 신분이며 가족과 떨어졌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우상 숭배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 퍽 거리끼고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런 어려운 형편에서 자기의 믿음을 지키며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사명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1. 그는 “뜻을 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8절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란 말씀이 있습니다. “뜻을 정하였다”는 것은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마음에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의 목적은 신앙을 지키고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었고, 그 방법으로 우선 거리끼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곧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매일 세 번씩 고향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6:10). 하나는 죄를 안 짓고 거리낌을 면하려는 뜻이요 또 하나는 민족을 위하자는 뜻이었으니 좋은 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나오는 음식 중에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던 고기를 먹지 않았더니 음식을 제공하는 환관장이 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고기를 안 먹으므로 그 몸이 초췌해지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세 동료자와 함께 “열흘 동안 시험을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열흘 후에 고기를 먹은 자들과 채식만 한 자신들의 몸을 비교한 즉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자기들의 몸이 더 윤택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면하고 건강의 복을 받았습니다.

2. 이 사실에서 하나님은 좋은 뜻을 정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1) 처음에는 환관장에게 채식만 하겠다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이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 마음을 주셔서 도움을 받게 하셨고

3) 열흘을 시험해 보자는 제의에 환관장이 응하였고

4) 이 때에 하나님이 신앙인들의 건강을 도와 주셔서 고기를 먹은 사람들 보다 더 살 찌고 윤택하게 하시므로

5) 결국은 뜻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활 중에서도 어려운 문제가 따를 때가 많을 것입니다. 하나 하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뜻을 정하고 기도하며 노력하시면 하나님이 한 가지 한 가지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항상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기도를 적게하고 성취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잘 되는 방법입니다. 어떤 성도가 아들의 대학교 등록금 때문에 염려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부탁하고 기도하자고 하였는데 별 방책이 나지 않아서 기간 내에 내지 못하고 휴학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대학교의 담당 교수가 “반액 이상을 장학금으로 해결해 줄 터이니 나오라”하여 해결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기록할 때 한남교회를 사임하고 전셋집에 나와서 새교회를 개척하려고 퍽 고심하던 때였습니다. 문정동에 집회소를 얻는 일이 큰 문제였는데 바로 어제(95. 10. 2) 적당한 장소에 계약을 잘 했습니다. 하나 하나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현저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개척 방법에 대한 뜻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큰 희망과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갑자기 되는 것을 위하여 서두르지 않습니다. 기도의 기간도 필요하려니와 저는 말씀을 정리하는 것 때문에 노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3.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들 다같이 좋은 뜻을 정하고 기도에 힘쓰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 어려운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서 뜻을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란 질병, 양식이 없는 가난,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가 있는 고민같은 것입니다. 크게 심각하지 않은 것을 어려운 문제로 알거나 내세우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요(마 6:32).

2) 정의롭게 살기 위한 소원을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롭게 살고 거룩하여 예수님을 닮는 것이 성도의 으뜸가는 목적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이 예수를 닮으려 하기도 전에 나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으로 알거나 또 자기의 하는 일이 큰 일을 하는 것처럼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생각임은 더 말할 여지가 없으나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사람이 일을 하였다 하여도 미약한 것 뿐입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좋은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항상 소망스런 마음만 갖도록 뜻을 정하십시오. 저는 한남교회를 사임한 후 자동차가 없었습니다. 큰 불편이 있었으나 내게 자동차 없는 기간이 있음으로 “있을 수 있는 화를 면케 해 주시는 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마음까지 들더군요. 아무쪼록 뜻을 정하고 승리한 다니엘처럼 저희들도 좋은 뜻을 정하고 기도하고 노력하여 문제를 해결하시고 시험을 극복하시며 주님 뜻대로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6과 바울의 기도의 특징 (엡 3:14~21)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신 것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의 기도는 엡 1:16~19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의 기도 내용에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것은 기도자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대상에게는 말을 붙이기 어렵지만 아는 대상은 친교의 대상이기 때문에 말하기 좋은 것처럼 하나님을 하는 지식은 예배와 기도에 큰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요 4:21). 그러면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까?

1) 하늘과 땅의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기도의 대상이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성도의 주관자란 뜻이요

2) 모든 은혜에 충만하신 분이며(19절)

3) 영광의 풍성을 위하여 일하시고(16절)

4) 성령으로 역사하게 하시며(16, 20절)

5)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넘치도록 이루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희망스러운 부분을 발견한 것은 20절의 “우리의 온갓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기도보다 생각을 많이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갓 구하는 것도 응답하시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기도가 부족할 때는 생각이라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가 자기의 생각대로 성취된 것이 많을 것입니다.

2. 바울사도의 기도의 태도는 무릎을 꿇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와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말씀이 세 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행 9:40, 20:36, 21:5). 무릎을 꿇는 것은 항복과 복종을 표시하는 것으로(빌 2:10) 기도자의 겸손한 자세이기도 한 것입니다.

3. 바울사도의 기도의 소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기도의 소원은 하나님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인데

1)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무장된 심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무장된 심령은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 것이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 것은 성경 지식을 간직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되기를 바라신 말씀”이 곧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 것이요, 예수님이 그의 마음 속에 계실 때 그 성도가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든든히 모신 성도는 항상 든든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사랑가운데서”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생활을 뜻하고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은 사랑실천에 변동됨이 없이 든든하게 자리 잡은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박힘은 나무의 견고성을 뜻하고 터가 굳어짐은 건축물을 염두에 두신 것으로 성도의 사랑이 든든한 상태를 견고한 나무와 기초가 잘 된 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사랑실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믿음 갖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3)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8절에 보시면 “모든 성도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는 인간고를 체휼하신 중보자의 사랑에서 깨달을 수 있고(히 4:15)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영원성에서 깨달을 수 있으며(요 13:1) 또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는 영광스러운 보좌와 지위에 계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세상의 죄인들에게까지 찾아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극과 극의 연결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은혜로 성도들에게 채워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은혜는 영적으로 현실적으로 주시는 모든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5) 마지막 소원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무궁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란 성도의 교회 생활을 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란 성도 개인의 예수님 중심 생활을 뜻합니다. 성도의 합당한 생활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께 돌려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① 말씀으로 예수님을 풍성하게 모실 것을 ② 사랑실천의 기반이 잡힐 것을 ③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히 깨달을 것을 ④ 모든 은혜를 충만하게 받을 것을 ⑤ 그리고 하나님께 무궁한 영광을 돌릴 것을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87과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 (갈 6: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절엣 보시면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하셨고, 4절에서도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과 다른 성도가 무슨 죄를 범하면 많은 성도가 자신을 살피기 전에 범죄한 다른 성도의 문제만 살피다가 오히려 지나친 비판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또 자신의 부족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께서는 다른 사람의 과오가 드러났을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저희들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구상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는

1. 하나님 “나의 입장을 잘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하여 생존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목적을 잘 이행하고 있습니까? 또 나는 유력한 자입니까? 연약한 자입니까? 나의 하루 하루 책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신의 입장과 목적과 책임을 알고 그 책임에 대한 문제를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마다 달란트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사명과 책임도 다른 것입니다. 저에게는 큰 것 세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목회자의 책임이고 또 하나는 가족 부양의 책임이고, 마지막은 달란트 은사의 책임(문서 집필)입니다. 넷째를 꼽으라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자신의 입장을 살펴서 자신의 입장과 삶의 목적과 책임을 알 때 그 책임과 목적 이행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한다고 다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닌데 주여 주여도 못하고 하나님을 멀리 모시고 산다면 큰 불행일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지를 살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가까운 믿음 관계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랑을 뺏길 때는 금식하여야 한다”(마 8: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가까운 관계를 수립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저희들 자신의 믿음이 주님 보실 때에 칭찬 받을만 하겠는가? 를 살피셔서 “주여 나의 믿음 약한 것을 도와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지식에서 얻어집니다. 성경지식의 빈약함을 느낄 때 자신의 믿음도 빈약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더 좋은 믿음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꼭 해야 할 책임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 자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당하게 잠을 자고 있는가?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가? 두 가지만 살피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잠을 자는 성도는 일하기 위하여 잠자는 경우가 되어야 할 것이고, 다음에는 자신이 하는 일이 꼭 할 일을 하고 있는가? 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예배 드리는 일이 꼭 할 일이지요?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지요. 제가 기차를 타고 부산에 오면서 “내가 꼭 할 일을 하는 것인가?”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책임이 있고 약속이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까 꼭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확인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성도들이 다 자기의 하는 일을 점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반드시 나의 할 책임입니까?” 질문하시고 반성하여 마땅히 할 일 만을 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할 일을 두어 두고 2차적, 3차적 일을 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위배되는 일을 한다면 당장 중단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영광되며 명분있는 일만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내가 반드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을 가장 정당하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목적이 좋을 때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을 쓰고 있는가를 살펴서 “하나님 제가 이 책임을 이행하는데 최선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희들은 예배를 드리는 일이 정당한 책임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 때에 최선의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찬송도 잘 부르고 기도도 잘 하며 말씀 묵상과 청취도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을 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5. 평가와 반성을 위한 기도를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사명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이 사명을 이런 방식으로 이행하였습니다. 성실성과 방법상에 잘못은 없습니까? 있다면 바로 깨닫고 더 잘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자신의 입장과 사명을 파악하는 기도 ②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 믿음 결속을 든든히 하는 기도 ③ 자신이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판단을 구하는 기도 ④ 자신이 하는 일에 방법이 최선책인가를 점검하는 기도 ⑤ 평가와 반성하는 기도를 할 때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기도가 있고 그 기도의 응답이 있다면 자신의 생활은 원만하며 책임을 다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제88과 기도응답의 장애 (약 4:1~3)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기도응답의 장애”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응답의 장애에 대한 말씀이 약 1:6,7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약 1:6,7에서는 “믿음에 반대되는 의심이 있으면 안되고 한 마음 또는 전심에 반대되는 두 마음을 품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본문에서는 네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욕심이 있거나 형제 사랑에 반대되는 일이 있거나 기도를 나태하게 하거나 자기 정욕대로 잘못 구하여도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씩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1. 믿음이 부족하면 기도응답에 장애가 됩니다. 믿음 부족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친교의 부족, 잘 아는 사람과 잘 아는 친구는 수락을 잘 하지만 친교와 신뢰가 두텁지 못한 사람은 청탁수락을 잘 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관계를 가깝고 민감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신앙의 본질이고 기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막연하면 기도응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 1:6의 “믿음으로 구한다”는 뜻은 의심하지 말고 꼭 주실 줄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친교 확신이 부족하면 기도응답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2. 두 마음을 품어 마음에 정함이 없이 기도하여도 응답에 장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청탁하는 사람이 한 사람에게 하지 않고 두 사람에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성경에 보시면 “재물, 방백, 마병, 우상, 친구, 아내, 무기, 포악, 요술자, 귀인, 양식과 물 등을 의지하면 그 의지하는 것까지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시 44:6, 49:6, 62;10 146:3, 사 3:1, 31:1, 합 2:18, 미 7:5). 그리고 시 25:2과 26:1, 고후 1:9에서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두 마음이란 의지의 대상을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을 대등하게 상대하면서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자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죄를 품은 자의 기도는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사 66:18). 특히 야고보서에서 지적한 죄는 욕심의 죄와 인간끼리의 불화의 죄와 세속을 사랑하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모든 싸움이 저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한다”(1~2절)하시므로 아기주의와 욕심 품은 죄를 지적하셨고, 또 “살인, 시기, 다툼이 있을 때 얻지 못한다”(3절) 하셨으며 또 “성도가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간음하는 죄와 같고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4절)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죄가 기도응답과 관련이 있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성도들이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나 주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욕심과 정욕을 앞세우고 보이는 형제나 인간들과 갈등하며(요일 4:20) 세상을 사랑하는 근성을 뽑아 버리지 못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마치 복권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자는 기도하기 전에 욕심을 갖지 않는 것과 형제등 이웃과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는 것과 세상을 멀리 또는 적당히 바라보면서 믿음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4. 구하기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여야 주신다”(마 7:7)고 하셨습니다. “지혜도 구해야 주신다”하셨고(약 1:5) 또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된 은혜도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고 겔 36:3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기도로 끌어 당기시려는 것입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과자를 사놓고 손자가 와서 달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시 50:15에 보시면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환란이 있다고 기도하는 성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열 명에 두 명쯤은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가 기도로 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점쟁이 말을 들으러 가는 교인도 있습니다. 질병이나 어떤 사건의 문제가 있으면 먼저 기도부터 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섭리 안에서 치료의 방도가 생겨지기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그 반대로 행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하 16:12에 보시면 “아사왕이 발에 병이 들었는데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먼저 의사를 의지하였다가 2년만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성도들은 어려운 우환이 있어도 기도할 줄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5.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에 근거한 이기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기의 욕심을 앞세우고 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앞만 생각하는 역시 욕심 빼지 못한 기도입니다. 삼상 1:13에 나타난 한나가 아들 낳기를 원한 것이 사실은 자기의 욕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돌릴 영광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자기에게 아들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는 아들을 낳으므로 저주받은 여인이 아니라는 명분을 갖는데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월드컵 장소를 우리나라에서 하게 해 달라”고 성직자들 단체에서 기도하고 떠들었습니다. 성직자들이 왜 일본을 분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소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섭섭함을 줄 일은 결코 간구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응답을 위하여 기도응답에 장애되는 몇 가지 내용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합당한 조건에서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0. 사랑에 관한 말씀


제89과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8복을 선포하신 중 다섯 번째의 복이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1. 긍휼이란 어려움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어려움 당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시 103:7, 애 3:22) 그 성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은 가난하고 병든자, 범죄하고 소외된 자, 무지하고 비천한 자 등일 것입니다.

2. 저희들은 흔히 “나는 이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큼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동정을 기대하지 않을만큼 든든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 없어도 된다”는 착각을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없는 부족한 죄인들이며 또 항상 실수하고 회개하지 못한 죄가 많을 것임을 생각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징계를 면제받고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백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마 18:22).

3.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었습니다. 소경들과(마 9:27) 문등병자들을 긍휼히 여기셨고(눅 17:13) 빚진자를 불쌍히 여기셨으며(마 18:33) 또 귀신병 들린자(막 5:19) 목자의 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는 성도들(막 6:34) 슬픔 당한 가족들(요 11:33)을 불쌍히 여기신 사실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마 12:20)고 하셨습니다. 우선 저희들에게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4. 저희들이 긍휼을 베풀려면

1) 우선 긍휼한 마음으로 긍휼의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7세기경에 많은 백인들이 노다지 수확을 꿈꾸고 아프리카에 갔다가 미개한 흑인들을 보았는데 한편은 “그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겠다”는 욕심 어린 마음이었고, 영국의 선교사 리빙스톤(1813. 3. 19.~1873. 5. 12. 아프리카 탐험가)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여 그들에게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세워 준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2) 거절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희들은 동정을 구하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을 다 들어 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자기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가깝게 접근한 대상에게 거절하지 않는 용기와 적극성 있게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눅 10:31~32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은 자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은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적극성 있게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적십자 운동의 발단은 크리미아 전쟁때(1853~56) 영국의 간호사인 나이팅게일(1820~1910)이 아군 적군의 국적을 초월한 구인 1만명 가량을 간호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긍휼의 대상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 것을 교훈 받을 목적으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90과 예수님이 보시는 사람 (눅 7:36~50) 목록으로


본문 44절을 보시면 “이 여자를 보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보신 것처럼 저희들은 예수님이 보아주시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요, 또 예수님은 그 여자의 어떤 면을 보셨는지를 살피셔서 저희들도 예수님이 지켜보시는 관심의 대상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죄 많은 사람을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오셨을 때 찾아온 여인은 그 동리의 “죄인인 한 여자”였습니다(37절). 여기에서 예수님이 죄인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신 것은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9:13). 따라서 누구든지 의인인 척 하는 사람은 주님이 돌아보시지 않습니다. 눅 18:9~14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예수님은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를 가까이 따르는 사람을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관심있게 보신 여인은 예수님을 가까이 찾아 온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죄인 취급을 받는 신분임을 알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찾아 온다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떳떳하지 못한 신분을 가지고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예수님 뒷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약 4:8에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에녹이나 노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동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를 붙드신다”(시 63:8)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자를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3. 회개하는 사람을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여자가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용서받기 원하는 자의 회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태도를 “자기를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지만 결과로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47절)하셨으니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곧 회개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마 18:22) 예수님이 인간들의 회개를 얼마나 기대하셨는가? 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봉사)하는 자를 관심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것이나(요 6:9) 가난한 과부가 두렙돈의 적은 헌금을 한 것이나(막 12:41~44)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 까지라도(마 10:42) 확실하게 기억하시고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하여라면 몸도 마음도 물질도 아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냄새를 제거하는 화장품용으로 쓴 것입니다. 그것은 한 두 방울만 떨어뜨려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는 은혜가 커서 감사한 의미가 있고, 둘째는 예수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이나 아깝지 않게 여긴다는 헌신 봉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께 아낌없이 헌신하는 자를 관심있게 지켜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청하여 대접하는 좋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동리의 죄 많은 여인을 죄인시 하며 멸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적당한 조치를 취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번써 그 바리새인의 잘못된 마음가진 것을 아시고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자라”는 비유를 들어 그를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두 가지를 반성하여야 하겠습니다. ①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아닐 바에는 조금 낫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는 것이요 ② 또 한 가지는 “죄인으로 지목받는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외면하는 자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도가 많겠지만 혹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관심있게 보셨고, 자기를 가까이 따르는 자를 가까이 교제하셨으며 회개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여 헌신, 봉사하는 성도를 귀히 여기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인간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그를 귀히 여기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시므로 죄에 대한 용서와(47절) 평안의 복을 아울러 포해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이 보아주시는 관심의 대상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91과 긍휼히 여길 대상들 (유 1:22~23)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하셨고, 또 “불 가운데 있는 자를(불타 죽기 전에) 끌어 내어 구원하라”하셨으니 그도 역시 긍휼히 여기라는 뜻이요, 또 “어떤 자를…긍휼히 여기라”하셨는데 그 어떤 자는 “그 육체로 더럽힌 자라”하셨으니까 육체로 더럽힘이란 고전 5:18에서 “음행이 몸을 더럽히는 죄라”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그런 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음행한 자는 돌로 쳐서 죽였는데 예수님은 그것도 정죄하지 아니 하시고 잘 타일러 보내셨습니다(요 8:11). 요즈음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는 음행죄가 소돔 고무라 성처럼 성행되고 있겠지요. 그러나 아직도 밝은 세계에서는 그런 죄를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의심하는 자는 어떤 죄인이며 불가운데 있는 자는 어떤 자인가? 할 때 이 유다서가 “거짓 스승들을 경계하라”는 취자의 말씀인 것을 감안할 때 믿음이 잘못되어 가는자, 또는 이단자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도적은 물질이나 가져가고 강도는 몸이나 상하지만 거짓 스승들은 영혼과 믿음을 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수 중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마 5:39에 보시면 “원수를 대적하지 말라”하셨고, 43~44절에서는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원수라도 사랑해야 하는데 과연 저희들에게 원수를 사랑할만한 힘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1. 그래서 저희들은 누가 원수냐? 하는 것을 분별하기 전에 악한 원수를 사랑할 마음과 힘이 있는가를 우선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저희들이 악한 자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할까요? 그런 사실을 반성하며 이유를 찾아보셨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 이유

1) 자신을 너무 정당하게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흠이 있고 항상 범죄 가능성을 예측해야 할 만큼 연약한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상당히 너그러워 질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겨 거역하던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냥을 탕감받은 빚쟁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천냥빚 못 갚은 사람을 미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사랑하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이해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판주 되심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주 되심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엄격하게 심판하시도록 가만히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할 자신이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미워하면 하나님의 심판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사랑만 충만해지고 진리에만 끌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미워할 여유가 없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무조건 진리와 의와 사랑과 감사가 넘치고, 마음이 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거나 부족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의 잘못까지 싸매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며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범죄의 도구까지 미워하라는 뜻이니까 죄는 엄하게 미워하고 사람은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긍휼히 여길 대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긍휼히 여길 대상은 다 죄짖는 사람들입니다.

1)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낙심이나 타락이나 불신앙은 다 의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의심하면 믿음과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그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잘 깨우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며 기도 응답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마시고, 또 소망에 대하여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갖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 불가운데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야 합니다. “불가운데 있는 자”란 영혼을 불 태우는 자, 믿음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지옥은 계속 불타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0:10). 의심하는 자가 믿음이 흔들리는 자라면 불가운데 있는자는 타락에 빠진자, 또는 이단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자들도 미워하지 말고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성실하게 깨우쳐 보고 안 되면 멀리 할 것입니다(딛 3:10).

3) 육체로 더럽히는 범죄자도 긍휼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육체로 더럽히는 범죄는 음행, 폭력을 비롯한 도덕적 범죄를 의미합니다. 불가운데 있는자들은 불신앙과 이단의 범죄이고 의심하는 죄는 연약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상당한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를 점검하셔야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길 수 없는 것은 범죄행위 자체요, 범죄자는 연약한 자나 신앙적 범죄자나 도덕적 범죄자를 막론하고 누구에나 긍휼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7).

 

11. 평안에 대한 말씀


제92과 평강을 누리는 법 (요 20:19, 21, 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평강을 누리는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성도에게 평안 또는 평강을 주신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하셨고, 또 부활하신 후에도 “평강이 있을 지어다”란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으며(본문) 사도들도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셨고(롬 1:7, 벧전 5:14, 계 1:5) 개인 뿐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평안하고 든든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행 9:3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평안의 은혜를 베푸셨는데 어떤 성도들은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서 늘 아쉬워하거나 탄식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안하지 못하는 이유와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평안을 누리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이고 정신은 신앙적으로 다스려야 하며 다른 외부적인 조건(건강이나 물질 등)도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아가 부모를 만나면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또 욕심없는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평안을 누리는 법”을 말씀드릴 내용은 다섯 가지 대목입니다. ① 마음의 평안이요 ② 시험을 해결하는 일이며 ③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④ 섭리의 물결을 타야 하며 ⑤ 형통의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마음에 평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평안이 잘 안 생기면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 아기를 유심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갓난 아기는 욕심이나 다른 생각이 없고 어머니 품에 안긴 것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큰 만족을 삼고 다른 욕심은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생각하고 다른 욕심은 다 버리세요.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려면

1) 나는 예수님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 그리고 영생의 복은 반드시 확보하셔야 합니다. 명절에 기차표 못 산 사람처럼 우와 좌왕하게 되면 평안이 없습니다. 영생의 차표는 믿음으로 받아 놓았지요?

3)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 하세요.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니까 어린 아이처럼 내 욕심을 버리고 현세욕도 버리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요”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영생을 확보하고 욕심을 버린 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2. 시험을 잘 해결하여야 합니다. 시험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질병, 실패, 가난, 환란 등입니다. 이런 시험들로 인하여 평안치 못한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험을 해결할 수 있어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어려울 때는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고전 10:13) 우선 시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대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신감을 키워 주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신 32:11).

2) “욕심에 끌려 시험을 자초한다”(약 1:14)하셨으니까 욕심을 버리므로 시험을 이겨야 할 것이요

3)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6:13, 26:41). 시험을 이기는 방법으로 자신감을 갖고 욕심을 버리며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적당하게 또는 건설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물질도 주실 것이고, 질병도 치료해 주시든지 질병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든지…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와 환란의 위험이 항상 감돌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지켜주셨고(창 28:15) 요셉과 모세도 지키셨으며 다니엘의 친구들을 풀무불에서도 지켜주셨고, 바울사도를 풍랑에서 지키셨습니다. 신 33:25에서는 “문빗장을 철과 놋이 되게 하신다”하셨고, 시 121편에서는 “환란을 면케 하시고 자연재해를 막아 주시며 영혼과 출입까지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평안을 누리려면 있는 시험은 이기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사울왕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삼상 15:26, 행 13:22).

4. 섭리의 물결을 타야 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주신 환경과 은사에 따라 분수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배가 커도 파도를 거스리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겨울을 대비하여야 하고 겨울을 물리치려고 하여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환경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받은 은사보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욕심을 내어 분수에 지나치는 일을 감행하거나 모험을 하여 자기 생활의 질서를 파괴하므로 스스로 고난을 자취하는 것입니다. 롬 12:3에 보시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며…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롬 13:16)하셨으니 이것이 곧 섭리에 복종하는 것이고 평안을 유지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 주시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능률이 약하고 고달픕니다. 부채로 더위를 식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나면 얼마나 유익합니까?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그런 은혜로 형통하지 않았습니까?(창 39:2,23) 시 1:1~3에 보시면 “형통의 은혜 받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1) 거룩한 생활(죄를 경계하는 생활)을 힘쓰고

2)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은 성도의 본분이고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의 길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형통이란 노력 이상의 결실을 얻게 하시는 복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평안의 복을 누리려면 ① 마음의 평안을 확보하고 ② 시험을 해결하며 ③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④ 섭리에 복종하는 생활을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93과 평안히 사는 방법 (요 14:27) 목록으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 가지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영생이고(요 10:28) 또 하나는 자유이며(요 8:32) 또 하나는 평안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영생을 받으셨습니까? 받으신 줄 아셔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육의 분리요,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또 “진리를 알면 자유하게 된다”하셨는데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맛보고 계십니까?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 형벌에서 벗어난 자유,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문제없이 살아가는 자유, 하나님의 자녀되고 백성된 위치에서 긍지를 갖는 자유등 활개치며 사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평안히 살수 있는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평안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하셨고, 또 그 평안을 누리는 성격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형편과는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안 믿는 사람들과 비슷한 괴로움이 있어도 그것을 믿음의 특수한 처방으로 물리치거나 평안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안히 사는 방법

1.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평안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을 해치는 일이 없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도 그 말씀이 있고, 또 마 26:41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힘쓰는 성도에게 시험을 제하시거나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셔서(고전 10:13) 평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욕심을 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적 욕심을 가졌을 때 불안을 느끼다가라도 그 욕심을 포기하면 금방 평안을 맛보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려고 할 때”는 근심 걱정이 되다가 그것을 포기하면 근심이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욕심은 시험을 끌어 드리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을 자기 욕심에 끌림이라”(약 1:14~15)고 하셨습니다. 욕심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많이 가지려는 것일까요? 성경지식이나 성령 충만을 많이 받으려는 것도 욕심입니까? 욕심은 죄를 뜻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하지 않고 사람 표준대로 살려는 의욕입니다. 많은 사람 사는 방법대로 또는 자기 고집대로 살려는 것이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을 가지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것처럼 평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3. 현세욕의 표준을 인간 표준에서 예수님 표준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3:15). 사도들도 예수님을 본받고 또 본을 보였습니다(고전 11:1).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받아 사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누리지 않은 것은 안 누려도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그 원칙을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으로 바꾸어서 살려니까 고달프고 평안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하셨고, 또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딤전 6:9)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물욕, 명예욕 때문에 고달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명예와 현세욕을 누리기 위하여 고생할지라도 성도는 그런 것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자기를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도자이십니다(시 139:10). “자기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고, 또 “자기의 길을 맡기고 의지하면 저가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5). 높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사람은 고생이 많지요. 그러나 자기의 취미와 소질대로 사는 사람은 많이 고생하지 않습니다. 늘 기도하고 믿음 생활을 잘 하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면 마치 파도를 타는 사람처럼 잘 살수 있습니다. 성도가 상당한 문제로 자기의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응답되지 않을 때는 “주님 뜻대로 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의 욕구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고생도 많고 성취의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다른 모든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대로 복종하는 생활을 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5. 염려를 염려로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를 끌어 드리지 않으려면 염려를 염려로 알지 말 것과 염려일지라도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식없는 염려, 어떤 이는 자녀들 출세 못하는 염려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염려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을병이 들었다 하여도 염려를 안할 터인데 자식이 없거나 출세를 못하는 것이 무슨 큰 염려가 됩니까? 진짜로 염려하고 금식 기도해야 할 것은 “신랑을 뺏기는 일” 즉 “예수님이 마음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마 9:15). 성도의 근심거리가 있다면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일인 줄로만 아시고 그 의외의 것은 다 염려거리가 못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염려는 염려가 아닌 사명 수행입니다.

6. 그런데 실제로 평안치 못한 문제를 갖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괴로운 문제가 범죄의 결과라면 회개해야 할 것이고, 범죄와 상관없는 고통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과제로 믿고 성실하게 견디고 인내하며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에서 영과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으로 구속의 은총을 주셨고, 해산의 아픔으로 귀한 생명을 주시며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지만 더 좋은 연단을 주신 것처럼 “나의 이 불행스러운 괴로움은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키시고 더 좋은 은혜를 주시려는 과제라”고 믿고 신앙적으로 적응하실 때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을병이 들어서 고통을 견디고 천국에 가는 일도 하나님이 주신 과제로 받을 때 은혜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의 욕심을 버리시고 염려를 염려로 느끼지 말며 고통도 하나님이 주신 과제로 믿고 섭리대로 살면서 적응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94과 마음과 육체의 건강 (잠 4:20~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음과 육체의 건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말할 때는 육체의 건강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건전하게 다스리는 것이 육체의 건강보다 중요하고 마음의 건강이 곧 육체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이 벽에 금이 갔으면 그 집은 든든한 기초에 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건전하지 않으면 역시 마음의 기초가 잘못된 것이며 이를 가르쳐서 병든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병이 있으면 그것은 행동과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1.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건강은 물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약속도 지켜야 하고 공과금 지불 날짜도 지켜야 하고 특히 재산을 지키고 명예를 지키며 건강도 지키고 주일도 지켜야 하는 등 지킬 것들이 많은 중 마음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집은 기초를 다지면 되고 몸은 건강을 돌보면 되는데 마음은 어떻게 지키는 것일까요?

1) 우선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 뜻은 마음을 죄와 관련시키지 말고 순수한 마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마 5:8의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욕심, 미움, 부정한 마음을 갖지 마셔야 합니다.

2) 굳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굳은 마음이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면서 자기 위치를 지키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위치는 낮은 곳입니다. 롬 12:16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라”하셨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되(빌 2:25)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다”(마 11:29)하셨으니까 마음의 위치는 겸손하고 낮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자리보존과 입장보존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자리보존을 잘 못하는 것이고, 더러운 마음을 가지면 입장보존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또 “좋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염려, 두려움, 근심 같은 것은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치우치지 않고 굳은 마음을 견지하려면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고 하셨으니까(히 13:9) 은혜를 받아야 좋은 마음, 건강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든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마음의 건강입니다.

2. 육체의 건강도 잘 살피셔야 합니다. 육체는 영혼과 함께 인간의 구성요소입니다.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이고(약 2:26) 육체없는 영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니까요(눅 16:23) 또 인간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지체요(고전 6:15) 성령님의 전(고전 6:1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란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자기의 것처럼 쓰신다는 것이고, “성령님의 전”이란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에 계시고, 마음은 육체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건강하셨고(눅 2:52) 사도요한은 건강하기를 간구하셨습니다(요삼 2). 따라서 성도들도 몸의 건강을 위하여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육체, 육신, 몸의 건강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육”이란 말씀과 “육신”이란 말씀이 몸(신체)이 아닌 것으로 표현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고전 2:1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육과 영의 온갓 더러운 것에서”(고후 7:1)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들은 다 불신앙적인 강한 부패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육신을 좇는 자”(롬 8:5) “육신의 생각”(롬 8:6)등이 있는데 이 말씀들은 성도의 연약한 부패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 또는 몸”이라고 표기된 말씀만 몸의 건강과 관련이 뚜렷한 것입니다.

3. 건강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곧 잘 먹고 활동하고 적당히 휴식하는 것입니다. 보약도 필요합니다. 사회의 생활 구조가 가난한 사람은 잘 못먹게 되고 바쁜 사람은 휴식을 못하며 너무 평안한 사람은 운동부족으로 건강을 해칩니다. 이런 환경에서 먹고 활동하고 휴식하는 규칙적인 생활구조를 잘 형성하셔야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2) 또 중요한 것은 마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이는 생명도 되고 그 온 육체의 건강도 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근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변하는 세계에 인정을 깊이 쏟으면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딸이 시집을 갈 때 인정을 많이 쏟았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또 세상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변하는 것과 유한한 것들에게 마음을 많이 주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그네 다녀가는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사 26:3에서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염려, 근심,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반드시 감사, 기쁨, 소망을 잃지 않도록 믿음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몸을 죄의 도구로 쓰지 말고(롬 6:13, 고전 6:13)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6:20). 사랑하던 개도 사람을 물면 주인이 죽이듯이 하나님의 쓰시는 몸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죄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의 도구가 안될 때는 질병으로 쳐서 버리시는 것입니다(신 28:17~29,35,59~61, 고전 11:30, 약 5:15, 계 2:22). 따라서 마음과 육체의 건강을 하나님의 뜻안에서 바르게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95과 행복의 비결 세 가지 (신 33:29) 목록으로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은 백성들이 그들 뿐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와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을 이기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구원과 승리를 얻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 10:13에서는 “행복을 위하여 계명을 지키라”하셨고, 롬 4:9에서는 “구원받는 일이 곧 행복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은 행복이 될 수 없고 행복은 영원히 즐거운 것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 행복의 비결 첫째는 가장 귀한 보화를 소유하여야 합니다. 마 13:44의 말씀처럼 “보화를 발견하여 그 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한 성도는 가장 귀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장 귀한 보화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이신 하나님이요, 예수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의 인정받는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한한 현실의 것들이 그리워지지 않을 때 비로서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2. 승리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여기의 “이겼다”는 뜻은 혈기나 현실적 타탄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현실로 이겨야 이긴 줄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가 어떤 대적에 대하여서든지 진리로 이기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이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이기고 하나님의 뜻과 사랑으로 이겼을 때 바로서 칭찬과 상급이 예비되는 것이요, 궁극적인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요 8:32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저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가 무엇입니까? 양심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 성경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자유,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마음대로 충성할 수 있는 자유, 죄에서 해방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는 자유라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의 세 가지 비결은 ① 진리를 가장 많이 소유하는 것이요 ②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이요 ③ 모든 일에 자유를 누리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96과 휴식을 주시는 하나님 (막 6:30~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휴식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휴식이란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하지 않고 항상 노는 사람에게는 휴식의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이 노는 것이고, 무엇이 일하는 것인가?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에게 덕이 되는 생산성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일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 중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 가장 귀하고 사람을 위하여 일을 하되 자기를 위한 일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고전 10:31~33).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하여 생활하라”(창 3:17, 살후 3:12)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정신적, 육신적으로 피곤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정신적 휴식과 육체적 휴식이 아울러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1) 제일 먼저 명하신 것은 출애굽 당시에 안식일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출 20:8~11에서 안식일 계명을 주실 때 ① 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하고 ② 이레되는 날은 모든 백성들이 다 쉬어라 ③ 이는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되는 날 쉬셨으며 ④ 또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육체적인 휴식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과 영원한 안식을 기억하게 하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안식일의 제도는 신약시대에 와서 새로운 주일제도로 바꾸어졌습니다. 왜 계명으로 주신 안식일 제도가 없어졌을까요? 그 이유 ①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은 의문에 속한 계명으로 제사의식이 없어진 것처럼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골 2:14에 보시면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하셨고, 또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평논하지 못하게 하라”(16절)고 하셨습니다. ② 이 안식일은 안식일과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을 모형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신 다음부터는(마 22:8, 약 2:1)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더 밝은 계시가 된 것입니다(마 17:5). ③ 주일은 과연 휴식하는 날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구약 시대의 안식일에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휴식이 될 수 없는 것처럼(레 16:29~31, 민 28:9~10) 신약의 주일에도 신령한 사명을 이행하는 성도에게는 휴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가르치며 배우는 것도 상당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이나 주일이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차원에서는 휴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적인 휴식은 안식일 제도가 폐지된 신약시대에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 주일에 휴식의 의미를 담기 위하여 예배를 간단하게 드리고 휴식을 많이 하도록 한다면 안식일에 휴식하게 하신 뜻을 많이 반영하는 일로써 좁은 결과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성수주일의 의미를 약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육간의 휴식을 잘하여 더 능률있는 생활을 하게하기 위함입니다.

3) 예수님이 휴식을 명하신 것입니다. 막 3:20에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으셨고 배에서 주무셨으며(마 8:24) 제자들도 음식 먹을 겨를이 없었고(막 6:31) 그들의 눈이 피곤한 때가 있었습니다(마 26:43, 막 14:40). 이런 경우에 당연히 쉬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말씀에서 “한적한 곳에서 잠깐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후에도 계명에 따라 안식일날 쉬었습니다(눅 23:56). 여기의 “쉬었다”는 뜻은 “세상 일을 쉬었다”는 뜻입니다. 제사드리는 일과 영적 사역에는 휴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쉬지 않음에 대한 대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휴식을 주신 내용 중에는 또 한 가지 특이한 휴식이 있으니 그것이 곧 마음의 휴식 즉 영적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하셨으니 이 휴식은 현실에서 염려없이 살아가는 신앙적 자유(요 8:32)도 되려니와 또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의미도 있다 할 것입니다(계 14:13).

결론적으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휴식과 관련한 교훈 ① 규칙적으로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나 주일에도 영적 은사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휴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경성하여야 하고 항상 기도하여야 하고 항상 마귀의 역사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 그 대신 피곤하면 잠깐 쉬어서 피곤을 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눅 21:37). ③ 식사할 겨를도 없고 눈이 피곤하도록 수고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막 3:20, 6:31). 쉴틈없이 일하고 건강에 유의하여 휴식하는 생활이 필요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제97과 다니엘의 위기 극복 (단 2:17~24) 목록으로


다니엘은 위기를 잘 극복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1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안 먹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는 일에 위기를 극복한 일이 있었고, 본문에서는 왕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일로 전국의 박사들을 죽이는 왕명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위기에서 구원받은 일이 있고, 또 다니엘서 6장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것”을 바벨론의 대신들이 참소하여 사자굴에 까지 던져졌다가 구원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님의 이적에 의하여 구원된 사실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피하여 채식만 먹고도 그 몸에 건강을 유지한 것이나 왕의 꿈을 해석하도록 은밀한 일을 계시로 나타내 주신 것이나 사자의 입을 봉하여 다니엘을 해하지 않게 하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이적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다니엘에게 위기를 제공한 사람은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의 해석을 알지 못하여 고민 중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꿈의 해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자신의 꾼 꿈 자체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국의 술객들과 박사들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결국은 “모든 박사들을 다 멸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다니엘과 유다에서 온 세 친구들도 박사였기 때문에 모든 박사들과 함께 죽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2. 다니엘이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습니까?

1) 다니엘은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과 왕을 설득하였습니다.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은 완악한 자를 돌이키는 힘이 있습니다.

2) 다니엘은 어떤 어려운 위기에서도 침착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하였고, “기한을 주시면 좋겠다” 하였으니 이 말은 다니엘의 침착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3)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해결의 방법으로 알았고, 함께 죽게 된 유다에서 끌려 온 세 친구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기도와 기도의 협력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응답은 계시로 주어졌고,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의 내용과 해석을 이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도들도 그렇게 응답을 받아야 하는가?할 때 계시의 말슴이 완성된 신약시대에는 이미 계시된 성경 속에서 응답의 내용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의 열쇠는 믿음과 기도와 성경에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극복하므로

1) 자기와 모든 박사들의 생명을 다 살게 하였고

2) 자기는 박사장이 되었으며

3)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19, 23절)

4) 영원 무궁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이 있으신 하나님, 때와 기한을 변하시는 하나님,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 지혜와 총명을 주시며 깊고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극복을 잘 하는 성도가 은혜로운 성도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98과 중풍병자를 고치심 (1) (마 9:1~8) 목록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동리에 이르신 것”은 갈릴리 바다 동쪽에서 북쪽변 가버나움으로 오심을 뜻하고, “가버나움”을 본동리라 하신 것은 그 곳이 예수님의 제 2고향이기 때문입니다(마 4:13, 막 2:1).

1. 이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하였습니다(2절). 중풍병은 오늘날 잘 알려진 병이요, 그가 침상에 누운 것은 전신마비의 중증 환자였는데 막 2:3에 보시면 “네 사람이 메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게 하기 위하여 데리고 온 것입니다. 시 50:15에 보시면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고, 출 15:26에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하셨으며 또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셨으니까 일단 인생살이가 어렵고 피곤한 분들은 하나님 곧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나온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을 갖고 능동적으로 행하였으며 중풍병자는 거기에 따른 것입니다. 병자 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하는 일은 가족들도 하기 힘든 것인데 네 사람이 그 한 사람을 위하여 마음의 사랑과 신앙적 사랑과 육체적, 시간적 봉사를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서로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 사랑을 베푼 네 사람과 중풍병자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1)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네 사람이 병자 한 사람에게 사랑과 구원의 열심을 보인 믿음입니다. 막 2:3에 보시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달아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인도해 오는 정도만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을 받도록 적극성 있게 노력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인도에서만 그치지 말고 은혜에 이끌리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하 16:9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신 다음에 그 중풍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① “소자야 안심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해결의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로 고민할 때 힘있는 사람이 “안심하라 잘 될 것이라”하였다면 그 위안과 안도감은 대단할 것입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분이 “안심하라”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저희들이 문제있는 소자가 되고 “안심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안심하고 염려하지 않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죄사함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죄를 사함받으면 구원의 복(영생 천국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받는데 이 사람은 그것 외에도 죄사함과 함께 중풍병에서도 놓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질병을 허용하실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주시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죄에 대한 징계로 주십니다(고전 11:30, 약 5:15, 계 2:22). 모든 성도가 질병을 앓을 때 죄로 인한 징계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을 때는 우선 자기를 살피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 죄사함의 선포는 중풍병자의 믿음과 회개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주님께서는 협력해 주는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죄 용서의 의미는 질병에서 놓임 받음이 되었고, 분명히 그 죄사함은 구원으로 연결되었을 것입니다(8절).

3. 그 다음에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며 마음의 악한 생각을 지적하시는 분이며 간단하고 의미가 큰 말씀을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1)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십니다. 우리는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항상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요, 또 악한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신속히 가슴치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2) “죄사함 받았느니라”하신 말씀이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하신 말씀보다 쉽다는 뜻은 우선 문맥이 짧고(원문)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신 말씀이요, 또 예수님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으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므로 내용의 의미가 풍부한 것입니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하신 것은 “병을 완전히 고쳐 주셨다”는 뜻이므로 이렇게 짧고 쉬운 말씀을 하신데서 표현의 지혜를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4. 무리가 권세있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니(8절) 저희들도 예수님을 가장 권세있는 분으로 믿으시고 영광을 돌리며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제99과 중풍병자를 고치심 (2) (마 9:1~8) 목록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으로 몇 가지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말씀은 막 2:1~13에 더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본 관점에서 기록한 본문이 무엇을 교훈하려고 하신 것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의 “저희의 믿음”이란

1)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의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막 2:3에 보시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 계신 곳에 왔으나 장소가 복잡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저희”란 병자를 데리고 온 많은 사람들이요

2) 또 “저희의 믿음”이란 ①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줄로 믿고 찾아 온 사람들의 의지하는 믿음과 ② 이웃에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감동되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믿음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에게서 그런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 중풍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2. “소자야 안심하라”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중풍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은혜를 받을 자는 먼저 “안심하는 마음”에서부터 은혜받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크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잘 처리해 주실 줄로 믿으면서 안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벌써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는 말씀으로 은혜 베푸시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3. 질병과 죄가 서로 관련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1)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자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는 일과

2) 중풍병자의 질병이 죄와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그러나 모든 사람의 모든 질병이 다 그의 죄로 인한 징계처럼 아셔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욥 2:7, 고후 12:7).

4.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4절 말씀에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생각은 불신앙의 악한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저희들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 16:2).

5.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하신 것은 가정에 가서 평안히 쉬고 가정에 충실하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교회로도 가게 하시지만 가정을 충실하게 돌볼 것도 명하신 분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6. “온 무리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하였으니 역시 능력을 나타내시고 은혜를 베푸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과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어려운 병을 고쳐주신 은혜와 함께 저희의 믿음, 안심하라는 말씀, 죄와 질병과의 관계,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집으로 가게 하신 예수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 중심으로 시행하신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100과 질병과 예수님 (마 8:14~17) 목록으로


믿음의 성도는 기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만물과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자를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병고침의 기적이나 죽은자를 살리신 이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병을 고치신 사실이 기록된 말씀입니다(실제로 처음 나타내신 이적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었습니다 ; 요 2:11).

1.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때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1)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났다”하였고

2) 그 여인은 그대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3) 그리고 또 많은 구신들린 자들에게 범접된 귀신들을 쫓아냈고

4) 다른 병든 자들도 다 고치시므로

5)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17절, 사 53:4).

여기에서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능력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뜻만 나타내시면 병고침의 역사는 전달되는 것이고 그 능력이 불가항력적(즉시 모든 병을 완치하심)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 고쳐주신 때도 있지만(눅 17:17)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요 5:5~9).

2. 성경에서 인간이 병을 앓게 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모든 고난과 죽음은 죄값으로 온다”고 하셨습니다(롬 6:23).

2) 죄로 인한 징벌로 주시는 경우도 있고(신 28:27~28)

3) 은혜 보존(겸손의 연단)의 목적으로도 주시며(고후 12:9)

4) 특별섭리로 주시고(욥 2:4~6)

5) 육체를 멸하여 영혼을 찾으시려는 목적(죽게함)으로도 주시는 것입니다(왕하 13:14, 고전 5:5, 고후 4:16).

이처럼 목적이 있어서 병을 주심 같이 병을 고쳐 주실 때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전 3:1).

3. 그 후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 10:1). 이 권능을 주신 목적은 세 가지였으니

1)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목적이었고(요 10:37~38, 히 2:4)

2) 긍휼을 베푸심이었으며(마 9:27, 막 9:22)

3) 하나님이 건강케 하여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고쳐서 쓰셨고, 바울도 강건케 하여 쓰셨기 때문입니다(욘 2:10~3:2, 딤후 4:17).

4.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그 능력을 나타낸 사례도 있으나(눅 10:17~20) 실현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막 9:17~19). 제자들이 병고침의 능력을 실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믿음이 없고(막 9:19) 기도가 없었음을 지적하신 것을 보면(막 9:29) 예수님이 주신 능력이라도 받은자의(제자들에게 주셨음)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역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또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열 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믿는자에게 표적이 따를 것이라”하셨고, 그 표적은 “귀신을 쫓는 것과 새 방언을 하는 것과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것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하시는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6:14,17~18). 이 말씀을 “열 한 제자에게 주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순절 이후에 성취되어 베드로와 요한(행 3:6),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7) 그리고 바울이 그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행 19:11~12, 28:3,8).

6. 그러나 바울사도의 말년에는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사례가 있고(딤후 4:20, 빌 2:26~27) 결국 이 능력은 하나님이 특정인에게 주시는 은사로 주시게 된 것입니다(고전 12:9,11). 고전 12:9 말씀에 “병고침의 은사”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우선 의술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신령한 능력으로서의 병고침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할 때 믿음과 기도의 방법을 통하여 병고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7. 병고침에 대한 결론적인 성경 말씀은 약 5:13~16에 나타나 있습니다. 은사는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고전 12:11)이기 때문에 성도가 소원하여 받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따라서 어떤 성도의 기도가 병고침에 효혐으로 나타났을 때 그 성도는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은 복음의 전성기(기초수립 과정)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특별하게 역사하셨으나 복음의 기초가 수립된(성경 계시 완성) 교회시대에는 성도의 기도를 통한 은사의 역할로 병을 고쳐주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병중에 있는 성도는 약 5:13~16에 근거하여 회개하며 간절하게 기도하시고 또 치료의 방법도 아울러 시행하시면 하나님이 여러모로 은혜를 베푸셔서 그 병을 낫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101과 저주와 축복의 계승 (롬 5:12~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계승되는가”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는 죄로 인한 저주와 은혜의 선물인 구원의 복이 어떻게 주어지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죄로 인한 저주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후손에게 미치되 예외없이 사망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셨습니다. ① 12절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뜻은 “죄(부패성)가 모든 인간에게 퍼졌다”는 뜻이요, 이것은 마치 물근원에 독을 풀어 끝까지 흐리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도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하심은 “모든 후손이 조상의 범죄에 대한 연대저기 책임이 있고 또 자신도 범죄하기 때문에 사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13,14절 해석 생략).

2) 15절에서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16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와 죄책은 저주로 계승되었지만 구원의 은사는 한 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지만 죄와 죄책이 계승되는 것처럼 그렇게 축복이 계승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의 결과 의(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미치는 것은 같지만 그 동기와 대상과 방법과 상황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① 동기에 있어서 죄가 사망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이지만 구원의 은사는 사랑에 근거하였고 ② 대상에 대하여 죄의 결과는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지만 구원의 은총은 선택자에 한하여 주신 것이며 ③ 저주의 방법은 진노의 심판이지만 구원의 은사를 주시는 방법은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십자가에 의하였고 ④ 심판과 구원의 상황을 살필 때 심판은 하나님의 범죄라도 용서받지 못할 때에 심판을 받지만 구원은 개개인의 모든 죄에서 지식적으로 짊어지시고 지식적으로 중보하여 사죄의 은총을 힘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죄와 심판은 산위의 돌이 굴러 떨어진 것 같고 사죄와 구원의 은총은 떨어진 돌을 본 위치로 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은 한 개의 죄로도 가능하지만 구원은 모든 죄에서 중보자가 고난과 지식을 가지고 속죄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사 53:11).

3) 17~19절의 말씀에는 아담의 범죄가 인류 심판의 근거가 된 것처럼 예수님의 순종도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근거가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죄로 인한 저주는 전체에게 의로 인한 축복은 택자에게 주셨다는 점과 저주는 공의에 근거하고 구원은 사랑과 십자가에 근거하였으며 심판은 원인에 의하여 하시지만 구원은 범죄의 결과에서 회복하는 것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출 20:5,6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죄는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시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수천대까지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데 성도들도 잘못할 수 있고, 잘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로 인한 심판은 받지 않지만 성도가 회개하지 않을 때는 노여움 푸시기 위하여 또는 엄히 깨우치시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나면 심판을 받지 않으니까 현실에 있을 때 징계를 하시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 것입니다.

1) 3, 4대까지 벌하심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본다면 수천대 복을 베푸심에 비할 때 대단히 제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희들은 3,4대의 징벌을 가혹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에 의한 가벼운 벌로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상 오래 벌하신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폐결핵이나 색맹, 또는 변태적인 성격이 유전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3,4대 지나면 없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퍽 은혜스럽지만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혹 죄로 인한 징계라 할지라도 3,4대에 끝나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수천대에 이른다”하셨으니 이 수천대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영원한 복이라고 보는 것이 좋으며 영원한 복은 구원과 내세의 상급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지파를 통하여 메시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구원의 은총도 우선권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복, 영생의 복, 내세의 상급의 복은 다 신령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천대란 신령한 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현실적인 축복의 장구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도에게 주시는 선행의 복을 수천대로 말씀하신 것은 신령한 상급에 의존하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주와 축복이 계승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한이 있고, 내세적으로만 무한하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12. 기타의 신앙 상식


제102과 몇 가지 바른 지식 (롬 10:2~3) 목록으로


1. “몇 가지 바른 자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지식없는 열심을 지적하였습니다. “잘못된 열심”이란 뜻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자식으로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적하신 말씀은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힘입혀 주시는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히셔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고, “자기의 의”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므로 죄와 심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의를 시행해 보았자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갈 3:11)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힘입혀 주시는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지식이 없으니까 율법의 열심만 있고 십자가의 은혜는 배격하니 그런 열심은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율법 시행은 영광과 축복에 효험이 있을 뿐이고 죄사함과 영생구원은 십자가의 신앙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또 바로 알아야 할 지식은 “구원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지나친 열심들이 구원운동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백성이나 인류가 다 구원 받았으면” 하는 소원을 갖는 것이라든지 또는 구원 못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례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웃들을 볼 때 인정을 쓰지 말라는 것인가? 하시겠지요? 인정을 갖는 것이 구원하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그 당사자가 믿음을 가져야 받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대상에게 거듭나는 은혜로써 주시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반하여 믿음을 갖게 하는데는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 중에 구원의 핵심 교리인 십자가와 부활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구원의 도리를 전달하고 알려주는 책임을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선택자에 한하여 하나님이 하시고 성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리(믿을 근거)를 알리는 책임만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도에게는 씨뿌리는 책임만 있고 싹을 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고전 3:6).

3. 또 아셔야 할 지식은 “하나님이 인류의 적은 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선택 교리에서 확인될 뿐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지만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 눅 13:23~24)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열심히 하시되 아무리 전도를 잘 해도 믿는 자의 수는 안 믿을 자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고 노력하시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전도를 열심히 하여도 열매가 적다고 낙망할 형편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시 3:8) 열매에 대하여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오직 충실하게 전도한 것으로 만족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 4:2에서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전파를 힘쓰라”하신 내용도 역시 구원문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전도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전도를 할 때는 반드시 구원의 도리를 알려야 합니다. 막연하게 “예수 믿읍시다”고만 말하고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지 않았다면 완전한 전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할 때는 반드시 구원의 도리를 알리고 구원의 대상이 적다는 것도 아신 다음 믿음의 열매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4.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나가는 예배당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우리 교회입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예배드리는 집일 뿐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믿는 성도의 단체입니다. 그 단체는 여러 곳에 따로 모여 예배드릴 수도 있고 또 예배당이라는 특별한 집이 아니라도 어디서나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가 예배당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예배당이 교회를 생산한 줄로 착각을 하여 성도들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예배당 건물을 가지려고 거기에 목적을 두고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회는 20년이 넘었으면서도 작은 예배당을 마련 못하여 고심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교회는 예배당이 없다고 전국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배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단체이고 성도들은 예배당 중심으로 모일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 중심으로 모여야 하며 또 예배당을 부흥의 도구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전도의 능력을 부흥의 도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행 3:6).

5. 교회가 돈 때문에 염려하면 그것은 바른 교회가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돈 때문에 염려하라고 하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일 없으면 기도하라”하셨고(마 6:11) 3일을 굶고 따른 성도들에게 기적으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막 8:1~10).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여기라”(롬 12:16, 딤전 6:8)하셨고 예수님은 집도없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마 8:20, 고후 8:9). 그런데 예수님의 교회는 가난 때문에 염려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성전을 바리새인들에게 뺏기시고 산이나 들이나 바닷가 또는 빌려쓰는 다락방에서 아무 지장없이 예배를 드리시지 않았습니까? 억지로 헌금하고 빚을 얻어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물질에서 해방되는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며 가까이 보살펴 주시는가? 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을 우선적으로 확립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03과 다윗의 마지막 말 (삼하 23:1~7) 목록으로


본문 1절에 보시면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다윗의 왕국이 견고해졌을 때 다윗은 장문의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본문 22장에 있고 지금 읽으신 말씀은 그 마지막 부분인 결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섯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말하는 자기 자신을 1절에서 소개하였습니다. 말하는 자는 “다윗”인데 자신은 이새의 아들이요, 높이 올리운 자요,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기를 소개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임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나라와 이웃에서 자기 이상 더 높은 사람이 없으니까 높이 올리운 자요(올리웠다는 뜻이 수동적 표현인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주신 것을 믿기 때문임), 야곱의 하나님(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민의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왕만 된 것이 아니라 선지자도 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기를 소개한 것은(자신이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하지만)만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 올리는 것을 큰 사명으로 알도록 계몽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소개한 다음에

2. 자신이 말을 나타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으니(2절) 그 경위는 “여호와의 신이 자기를 빙자하여 그 혀에 말씀을 주시므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이 말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바위가 이르시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영감성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벧후 1:21에 보시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도 본문에서 자기의 말은 성령의 지도를 받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3. 말씀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1) 영감으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오

2) 이스라엘의 바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바위”라고 하신 것은 바위가 변하지 않고 든든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선민과의 언약이 불변하고 든든한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공평하게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볼 때 어떻게 보면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도 사실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눈으로 보시면서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또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외를 중심으로 성도와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가정을 중심으로 생활의 초점을 맞추듯이 하나님은 선민의 생활과 입장을 중심으로 만유를 통치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선택이 되었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머문 것이나 바로왕을 응징하여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나 가나안 족을 멸하시고 그 곳에 정착하게 하신 모든 것이 다 선민을 중심으로 통치하신 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중심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돋는 해 아침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온 후에 광선을 받고 땅에서 움돋는 새풀처럼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돋는 해 아침빛이나 구름 없는 아침이나 비온 후에 햇빛을 받으며 움돋는 새풀”은 모두 희망적인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주시는 분이란 것입니다. 깨끗한 햇빛, 밝은 아침, 움돋는 새싹을 보는 마음은 상쾌하고 미래의 희망을 내다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것처럼 고난 후에 희망을 주시는 분인데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길 때는 어두운 세월을 보냈지만 이제 자기의 왕권이 견고해진 후로는 밝은 아침을 맞이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4. 다윗이 받은 은혜를 설명하였습니다.

1)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하므로 자기의 왕국을 든든하게 해 주시고 아침 햇빛처럼 희망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한 것이요

2) 하나님이 자신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견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세우신 영원한 언약은 메시야 언약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삼하 7:15~16, 사 55:3, 마 1:1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언약을 굳게 믿고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시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5. 마지막으로는 “사악한 자의 결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버리워질 가시나무 같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사람을 편케해 주지 않습니다. 함부로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나무는 철과 창자루로 족쳐서 불살라야 하는 것처럼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윗왕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고 영감으로 말씀을 주신 하나님, 약속을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 공의로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침햇빛처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사악한 자를 가시나무 불태우듯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104과 오십부장의 신앙 (왕하 1:1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오십부장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1000부장, 100부장, 50부장이란 말씀이 나옵니다(출 18:21). 모세 때에는 그들이 재판관 역할을 겸하였지만 신약시대에는 군장 역할을 하였습니다(요 18:12, 마 8:5). 본문에 나타난 50부장은 50명의 부하를 거느린 군장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의 8대왕 아하시야가(아합왕의 아들 ; BC850년경)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자 블레셋 땅 “에그론”에 있는 블레셋 이방인의 신 “바알세붑”에게 찾아가서 왕의 병이 낫겠는가? 죽겠는가? 를 물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하시야의 왕도가 사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에서 에그론까지는 남방 150리 상간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신에게 물으러 갈 정도로 타락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사자가 에그론 쪽으로 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임하여 “그 사자에게 가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책망하고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대로 증언하였고 왕의 사자는 가던 길을 돌이켜 왕에게 그 사실을 고한 즉 “네게 말한 사람의 모양이 어떻더냐? 하여 몸에 털이 많고 가죽띠를 띤 사람이라”고 하니까 왕이 그는 “엘리야”가 분명하다고 확인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아버지 아합왕 시절부터 왕실에서 미워하여 죽이려 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몸을 드러내지 않고 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왕상 19:1,21). 그 사이에 아합왕은 죽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2년째 왕노릇을 할 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때 왕은 자기에게 불길한 예언을 한 엘리야를 잡아오도록 50부장에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 한 사람을 50부장 군장에게 맡긴 것이나 엘리야가 그를 따라가지 않고 50부장과 그 군졸을 다 죽인 것을 보면 그들이 나쁜 목적으로 엘리야를 잡으러 온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첫 번 50명이 높은 산에 있는 엘리야에게 가까이 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이 내려오라 합니다”했을 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 50인을 사를 것이라” 한즉 곧 불이 내려 그들이 다 타 죽은 것입니다. 엘리야를 잡으러 간 자들이 돌아오지 않자 왕은 또 다른 50명을 보냈는데 그들도 꼭 같은 절차와 방법으로 죽으니 왕은 세 번째 또 다른 50명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앞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여러 가지를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① 아하시야왕이 자기 아버지 아합의 죄를 버리지 못한 점과 ② 자기의 생사문제를 자기들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먼 곳 이방인의 신에게 물으러 갈만큼 타락한 것과 ③ 선지자를 모시러 가지 않고 잡아오기 위하여 50명의 군졸을 보낸 것은 폭력을 내세운 만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조상의 잘못을 재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할지언정 세속적 신앙에 물들면 안됩니다. 그리고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역자 앞에서는 큰소리나 혈기나 다툼같은 폭력적 태도를 일체 취해서는 안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는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엘리야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세 번째로 받고 온 50부장은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은 방법으로 하다가는 자신들도 죽을 것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50부장은

1. 먼저 엘리야 앞에 꿇어 엎드려 간구한 것입니다. 이 때에 다른 군졸들도 같이 엎드리게 하였을 것입니다. 군대의 위세를 일체 나타내지 않고 겸손하게 간청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하는가를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 나만도 엘리사 선지자 앞에서 겸손하게 복종하였을 때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왕하 5:11~14) 저희들은 이 50부장이 선지자 앞에 겸손하게 꿇어 엎드려 간청한 태도를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태도도 그러하였습니다(행 10:33).

2. 그 50부장은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왕명을 받고 엘리야를 모시러 왔는데 먼저 사람들처럼 다 죽으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데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50명의 생명을 귀히 보소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와 부하 50명을 “당신이 종”이라 한 것을 보면 엘리야를 거스려 잡으려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말에 복종할 자세를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하들을 “엘리야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선지자의 권위를 왕권보다 존중히 여긴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너는 저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가라”하셔서 엘리야가 왕 앞에 직접 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왕이 죽을 것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50부장의 신앙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부하의 생명도 살리고 왕명도 복종하여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선지자를 가까이 대할 때 폭력이나 군력을 앞세우기 전에 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 엎드렸고 ② 50명의 부하들을 엘리야의 종들이라 하였고 ③ 자기를 포함한 50명의 생명을 귀히 여겨 달라 함으로써 관료적 권위를 버리고 복종의 자세를 취했을 때 하나님의 권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모든 어려운 일에 겸손과 기도는 해결의 열쇠요, 복음 사역자 앞에서 겸손한 것이 또한 은혜를 받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05과 므낫세왕에 대하여 (왕하 21:1~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므낫세왕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므낫세가 유다나라 왕이 된 것으로부터 어떻게 죄를 짓고 죽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을 읽어 가면서 배울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1. 1절에서 므낫세는 12세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헵사바”라고 하였으니까 아버지도 알아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므낫세의 아버지는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왕은 16대이고 므낫세는 17대 왕입니다. 므낫세가 왕되었을 때에 북방 이스라엘은 망한지 22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주전 675년, 호세아 9년에 망하였고(당시 유다왕은 히스기야 6년이었음), 므낫세는 주전 653년에 부왕 히스기야가 죽으므로 12세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2. 그런데 이 므낫세왕은 12세로부터 67세까지 55년을 왕노릇 하였습니다. 그는 유다왕 23명과 이스라엘왕 19명 중 가장 오래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노릇을 오래 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55년 왕노릇 중에는 죄되는 일만 많이 하였으니 오히려 그의 장기 집권이 복되지 않았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좋아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장기 집권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므낫세 왕처럼 죄를 많이 짓는 왕노릇이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을 과감하게 행동한 장기 집권은 크게 욕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본문에서 중요하게 나타내신 것은 므낫세의 죄악입니다. 왕이 어렸을 때는 간신들의 요청대로 명령을 했겠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백성들을 유혹하였다고 하였습니다(9절). 므낫세는 가장 악한 죄만 골라서 범했습니다.

1)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습니다(2절).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은 신당을 세워 우상(아세라)을 섬기고 자연신 일월성신(진)을 섬기고 또 아들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일과 사술을 위하여 신접한 자나 박수를 찾는 일등인데(3~7절) 여기에 세 가지 더 악한 것이 있습니다. ① 부친 히스기야왕이 헐어버리고 없앤 것을 다시 끌어 들여 세운 것이요 ② 그것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마당에 세운 것이요 ③ 16절에서 이런 악행 외에도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린 것입니다. ④ 그리고 잘한 것은 성경에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성경은 므낫세왕의 악에 대하여 평하시기를 ① 가장 악한 북방 이스라엘 왕인 아합의 소위를 본받았다 하셨고(3절) ② 하나님께서 이미 멸하신 열방보다 더 심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55년을 왕노릇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후하게 참아 주신면도 있으나 결국 그의 왕노릇은 복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여기에서 므낫세의 죄악을 요약해 보면 ① 이방인의 종교를 본받은 것이요 ② 성전의 거룩을 모독한 것이요 ③ 포악하여 무죄한 사람을 죽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거울로 들여다 볼 때 저희들은 이방인들의 종교적 습성을 본받지 마셔야 하고 거룩한 생활을 보존하는데 노력하셔야 하고 또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온유, 겸손을 지켜 포악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당시부터 므낫세 시대까지 지켜보셨다는 말씀이 15절에 있습니다. 출애굽은 주전 1500년 경이고 므낫세 시대는 주전 60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900년 동안 지켜보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생애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수천대까지라도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5. 그리고 선지자를 통하여 멸망을 경고하셨습니다. 10절에 보시면 “그 종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의 선지자라면 이사야를 비롯하여 미가 선지자나 호세아, 아모스가 해당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하기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사마리아를 잰 줄(앗수르에게 정복당하게 하심)과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저울에 달아서(죄악을 저울질 하심) 대적의 손에 붙이신다(12~15절)”고 하셨는데 이 사실은 약 100년만에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천년 전부터 죄를 통찰하셨고, 저울과 줄로 측량하여 멸하시되 100년 후에 멸할 것을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므낫세의 죄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배우셨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는 성도가 되셔야만 하겠습니다(18절의 “웃사”는 26절의 “웃시아”의 준말임).

 

제106과 요시아왕의 역사 (왕하 22:14~20) 목록으로


요시아왕의 역사는 왕하 22:~23:30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아 왕은 유다나라 19대 왕으로 8세에 왕이 되어 31년간 왕노릇하고 젊은 나이 39세에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요시아의 아버지 아몬왕은 2년간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왕은 가장 악한 왕으로 55년간 가장 오랜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본문 2절에 보시면 요시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였으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1. 요시아왕의 치적을 살피면

1) 요시아 18년에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앙의 표상이었습니다. 당연히 성전이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하는데 신앙이 해이해지므로 방치한 상태에 있었다가 요시아왕 때에 와서 성전 보수의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 때에 건축자들은 비용을 회계하지 않을만큼 진실하게 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22:7). 성전의 수리는 심령의 새옷을 갈아 입는 듯한 변화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요시아왕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희귀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하나님의 율법책이 발견되어 그것을 제사장 힐기야로 하여금 읽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요시아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명하여 “하나님께 물으라”고 하였습니다(13절). 여기의 “물으라”는 뜻은 선지자에게 물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오라는 뜻이요, 질문의 내용은 왕이 율법을 듣고 보니 백성들이 율법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이 많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겠는가?에 대하여 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훌다”라는 여선지자에게 가서 물었더니 “하나님이 그 곳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시되 왕이 읽은 율법책의 말씀대로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16절). 이유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때에 훌다 선지자는 사람들을 보낸 요시아왕을 일컬어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15절)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서는 임금도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 요시아왕은 선지자의 경고를 들었을 때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거민에 대하여 빈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하신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을 한 것입니다. 이 회개는 왕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회개한 것입니다.

4) 그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왕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하시므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 주신 내용은 “요시아왕이 죽어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므로 그 땅에 내리는 재앙을 보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시아왕은 39세에 세상을 떠나지만 그것이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지 않는 유익한 죽음이란 것입니다. 그후 13년 후에 애굽왕 “바르느고”가 앗수르를 치기 위하여 가는 것을 요시아왕이 방어하러 나갔다가 죽게된 것입니다(23:29).

5) 또 요시아는 성전수리 외에도 우상의 단을 훼파한 기사가 23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2. 문제는 요시아 같은 선한 왕이 왜 39세에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축복과 질병의 의미를 아울러 나타내 주셨습니다.

1) 축복의 의미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같이 후일에 있을 나라의 멸망르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미리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사 57:1에서도 “의인이나 자비한 자가 죽는 것은 화액전에 취하여 가시는 일”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시아가 8년을 더 살았으면 여호야김 9년에 바벨론의 속국이 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20년을 더 살았으면 완전히 나라가 없어지는 것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액전에 세상을 떠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2) 징벌의 의미는 “요시아왕의 할아버지 므낫세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23:26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하 23:25에 보시면 “요시아처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하나님이 유다를 향하여…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하나님을 격노케 함을 인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시아는 선한 왕이라도 그 조부의 죄값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요시아왕의 좋은점과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선을 행하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107과 삼화삼복(三禍三福) (대상 13:5~14: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삼화삼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세 가지 화와 세 가지 복”이란 뜻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사울왕이 불레셋과 전쟁할 때 뺏긴 법궤를 20년 만에(삼상 7:1)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삼화 6:12) 메어오려 하다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 웃사를 죽게 하셨기 때문에 운반을 중단하고 “오벳에돔”의 집에 석달을 머물게 한 사실과 두로와 “히람”이 다윗의 궁궐건축을 협력한 말씀과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된 사실을 깨달으므로 그 백성들이 나라를 진흥케 하였다는 내용을 읽으신 것입니다. 여기의 “법궤”란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이 법궤는 출애굽 당시 광야 여행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큰 강대상 만한 궤를 조각목으로 만들어 그 속에 십계명 돌비와 만나와 싹난 지팡이를 넣어 보관케 하셨고, 또 하나님이 그 법궤(시은소) 앞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에는 “법궤”를 오늘의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블레셋에 뺏겼고, 블레셋이 돌려 보냈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한 후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구별하여 20년을 지키게 하였다가(삼상 7:1~2) 다윗이 나라를 평정한 후에 다시 운반해 오다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

2. 그러면 “삼화삼복”이란 무엇입니까?

1) 화에 대하여 ① 첫째 화는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화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분명히 메어 오려고 하였는데 그만 7절에서 새 수레에 싣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분명히 메도록 시설과 명령이 되어진 것입니다(출 25:14). 그런데 그것을 알고도 그렇게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약 4:17에 보시면 “선을 행한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대로 안한 것이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② 이방인들의 방법을 모방한 것이 화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운반할 때 “고핫의 자손이 어깨에 메라”하셨고, 또 메는 채까지 꿰여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 보낼 때 사용하였던 방법을 모방하여 시행하다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민 4:15, 삼상 6:10). 성도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이방인의 풍속을 좋게 여겨 따라가고 모방하는 것은 큰 화를 자초함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③ 거룩을 구별하지 않는 화입니다. 10,11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웃사와 충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충돌하여 웃사를 죽게 하셨을까요? 여기의 “웃사”는 아비나답의 아들이고(삼하 6:3) “엘리아살”의 형제인데 삼상 7:1에 보시면 “엘리아살”만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신 이유는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법궤에 손을 댓기 때문입니다. 소가 뛴 것은 수레를 이용한 때문이고, 웃사가 죽은 것은 구별되지 않은 자가 거룩한 일에 관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뜻과 뜻을 일치시키시고 거룩과 거룩을 일치시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이 일치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고 화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복에 대하여 ① ,함께 섬기는 복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오벳에돔의 집 권속이 함께 석달을 법궤를 지켰는데 그 집과 소유가 복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도 함께 섬기고 함께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놋의 식구는 놋과 세 딸은 잘 믿었지만 그의 아내와 세 사위는 도중하차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족과 함께 교회 권속이 함께 합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된 일이요 ② 두로왕은 베니게 지역에 있는 작은 나라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다윗의 궁궐을 지을 때 협력을 잘하고 다윗 왕국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 통치 40년과 솔로몬왕 통치 40년까지 80년을 함께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것은 친교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로 화목하고 친해야 서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③ 본문 14:2에서 “다윗이 왕된 것을 하나님이 세워 주신 것으로 깨달았는데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진흥케 하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깨닫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화, 이방인의 방법을 따르는 화, 거룩을 구별하지 않는 화, 반대로 함께 섬기는 복, 화목하는 복, 깨닫는 복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제108과 다윗이 법궤를 옮김 (대상 16:1~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다윗성;15:29)의 장막으로 옮긴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섬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지정된 장소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은 법궤만 옮긴 것이 아니라 성막(제단)을 정리한 것이요 구약시대의 신앙의 시설을 갖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고, 제사장은 중보자 예수님의 상징이며 제단은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사울왕 때에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법궤를 뺏겼다가 다시 돌려온 법궤를 신앙적으로 운반하지 못하여 불상사가 일어났고, 아비나답의 집과 오벳에돔의 집에 보관하였던 것을(대상 13:3~14) 다윗이 자기의 도성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을 정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를 가면 필요한 세간을 정돈하고 사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하나님과 말씀과 교회간에 정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교회를 가까이 정하고 성경을 옳게 가르치는 사역자와 함께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다윗은 법궤를 안치한 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불태워 드리는 제사로서 속죄제에 해당하고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가 속죄제에 해당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하므로 회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고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속히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는 속죄제가 되는 동시에 성도가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이며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에게 축복을 한 것이요, 백성들을 대표한 자격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구한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무론남녀하고 매 사람에게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개씩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는 법궤를 옮기는 자리에 참여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 그 화목제의 고기와 함께 나누어 먹는 제사의식에 속하는 것으로(레 7:15)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이웃과 화목한 상태를 누리며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느냐?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제물도 기쁘게 받으시고 성도의 회개하는 마음도 받으시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도간의 화목을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33:1에 보시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하셨습니다.

5. 그 다음 4~6절은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사역을 한 것입니다. 왕이 할 일이 있고 레위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지만 왕권으로 협력을 잘 해줄 때에 레위 사람들도 하나님 섬기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다윗이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나팔을 불게 하였던 것입니다.

1) 앞에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다윗은 자기의 사명을 다한 후에 다른 사람 즉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장려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가가 1차 선교여행 중에 중도에서 포기하자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서 훌륭한 사역자를 만들어 나중에는 바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끔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는 일입니다. 어떤 교회는 완전한 사역자만 초빙하려고 합니다. 사역자에게 어떤 결함이 나타나면 용납하거나 좋은 사역자로 육성시키려 하지 않고 무조건 내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건설적이 못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역자나 성도간에 부족을 잘 수용하고 키워주는 역할을 반드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찬송하며 감사하고 비파와 수금을 타고 제금을 치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팔을 불게 한 것입니다. 레위지파로 하여금 찬송과 감사를 전문으로 하게 만든 것입니다. 다윗시대에는 감사전문과 찬송전문이 있었습니다. 비파와 수금과 제금같은 악기도 사용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 지도하게 하기 위하여 아삽을 두목으로 삼고 여러 사람의 부두목을 두었습니다.

3)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항상 나팔을 불게 하였습니다. 나팔은 그 소리에 따라서 기상 나팔, 집합나팔, 진격나팔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부는 나팔은 경성하라는 나팔, 기도하라는 나팔, 또는 자유를 선포하는 희년의 나팔을 불었을 것입니다. 성전은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나팔소리를 들을 때 더욱 경성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잘 섬긴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화목하고 감사와 찬송으로 잘 섬기셔야 할 것입니다.

 

제109과 아사에게 평안을 주심 (대하 14:1~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사에게 평안을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절에 보시면 “그 시대에 그 땅이 10년을 평안하였고” 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사는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왜 평안을 주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아사는 유다나라 여섯 번째 임금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비얌”으로 3년간 왕노릇을 하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17년 왕노릇을 하였는데 르호보암이 왕될 때 북방 이스라엘이 갈라져서 여러보암도 함께 이스라엘 왕이 되니 남방 유다와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고 유다나라에 아사가 왕이 되었을 때 북방 이스라엘에는 여러보암이 20년째 왕노릇을 하던 시기였습니다(여러보암은 22년 재위). 아사는 41년간 왕노릇한 중 39년을 평안하게 지냈습니다(대하 13:1, 16:12~13). 아비얌이 여러보암과 싸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역사도 있지만(대하 13:18~20) 그는 아내를 열넷이나 취하였고, “여러보암은 아비얌 때에 치심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되었지만(대하 13:20) 실제로 죽은 것은 아사왕 때에 죽었습니다(왕상 14:20, 15:1, 9).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보암을 치신 것이 아사왕에게 평안을 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아사왕에게 평안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한 것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양심에 가책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기 마음에서부터 평안을 붙잡지 못합니다. 인자무적이란 말이 있듯이 자기가 선하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자에게 평안을 주시는데 모든 대적자를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2) 정의를 행하는 일 중에 이방우상을 제하고 산당을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 같아도 민심에 관한 것이요, 종교문제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었지만 상당하게 그 일을 수행한 것입니다. 3절 말씀의 “이방제단”은 “이방인의 우상제단”이란 뜻이요, “산당”이란 산에 설치한 우상제단이요, “주상”이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기둥모양의 우상을 뜻하고 “아세라상”이란 역시 가나안 사람들의 여신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절에도 보시면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태양상이란 태양을 신으로 섬기기 위하여 세워놓은 신상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출 20:4).

3)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신앙심을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물질과 명예와 향락에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와 깨끗한 생활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와 신령한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꼭 세상사람들 표준대로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는 생활로 돌이키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아사왕은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였습니다(4절). 그리하였더니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앤 것입니다. 우상을 제거한 다음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왕이 “율법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명령하였으니 얼마나 시행이 잘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사왕이 율법지키는 모범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6절을 보시면 그 때에 “평안을 주셨고 여러해 싸움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5) 본문은 아니지만 15:16~19을 보시면 아사왕에게 평안주신 이유가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그것은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 목상을 세운 것 때문에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서 불사른 일까지 있는 것이요 ② 아사왕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으니 이같은 종교 정화 운동을 과감하게 시행한 후 후회하거나 변하지 않았고 꼭 같은 마음을 한평생 가졌으며 ③ 또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전에 드린 것입니다. 여기에 “구별한 것”이란 하나님의 성물을 하나님의 성전에 보관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물은 꼭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그런 이유등으로 하나님이 그 시대에 평안을 주셔서 35년 동안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14:7, 15:19).

4. 그러나 여러 왕들이 정화 운동을 하면서도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한 것은(15:17, 왕상 12:3, 14:4)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윗과 솔로몬이 사용한 기브온 산당(대상 21:28~30, 왕상 3:4)을 기념으로 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아사왕은 북이스라엘 바아사의 침략을 받았을 때 아람왕을 의지한 일이 있었고(16:1~5) 또 발에 병이 들었으나 의원만 의지하다가 3년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16:9, 12~13). 성실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간이나 물질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큰 평안의 복을 주시는 것을 아사왕이 역사를 통해서 많이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대하 16:9을 꼭 읽으십시오.

 

제110과 아사랴의 예언 (대하 15: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사랴의 예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시면 “아사랴”는 “오뎃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선지자 오뎃의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상의 이름을 따서 후손을 일컫는 관습에 의한 것입니다. 애굽왕 바로가 몇대를 이어도 바로왕이라고 호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아사랴 선지자는 유대나라 여섯 번째 왕 “아사”가 정치를 잘하고 있을 때 그로 하여금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사랴 선지자가 아사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1. 너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 2절에 보시면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아사”는 유다국을 대표한 왕이니까 주신 것이고, “유다와 베냐민”이란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반지파 ; 수 14:23)가 유다국을 형성한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도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이해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하나님과 동한다”는 뜻을 상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함께 합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니까) 하나님의 내용적인 인격 또는 그 본질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용은 그의 말씀으로 나타내 주신만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며 가르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정리하는 기간에 하루에 4~5편을 기록했습니다. 졸리면 자고, 밤낮없이 몰두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나는 하루종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느낌을 갖고 만족한 것입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가족들에게 늘 평안을 주셨습니다.

2.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만난바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만난바 된다”는 뜻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고저 할 때 하나님은 벌써 그의 곁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찾습니까? 만일 성도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가상할 때 어떤 결과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위로나 격려나 깨달음이나 은혜베푸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미 살아있는 성경으로 모든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요, 그 결과는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을 연구하여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의 깨달음이 있으려면 회개한 심령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태도와 연구노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너희가 만일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축소하여 교훈을 받는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그를 멀리하신다”는 뜻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좋은 집에 입주한 성도의 집에 가서 입주 감사예배를 드릴 때 “이 집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소로 사용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지언정 하나님을 심심하게 해 드리거나 주무시게 하지 말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집에서 찬송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들으실 일이 없으니까 심심하실 것이고, 또 성경을 살피지 않으면 가르쳐 주실 일이 없으니까 역시 주무셔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나태를 경계하기 위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짓고도 완고하면 하나님이 성전과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시듯이(렘 12:7~10)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시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시고(참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으며 율법도 없게 될 것이지만 다시 찾을 때는 만난바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3~5절).

4.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시면 요란한 일들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허리띠가 풀어지면 옷이 벗겨지듯이 하나님의 보호가 떠나면 5절 말씀에서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 성읍 저 성읍이 피차 상한바 되고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평안할 때 하나님의 보호가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셔야 하며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도록 늘 묵상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강하게 하고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강하게 하라”는 뜻은 “결심을 굳게 하라”는 뜻이요, 손을 약하지 않게 함은 선행의 용기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 22:12). 하나님이 변하시지 않으시는 것이 확실할진대 저희들의 신앙과 신앙생활의 용기도 변해서는 안 될 것이요, 특히 선행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닌만큼 선행에 약해져도 안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사왕은 아사랴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8절에 보시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가증한 물건들을 제하되 빼앗은 에브라임 땅에서도 제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중수하고, 12절 이하에 보시면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거역하는 자는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한즉 많은 국민들이 기쁨으로 돌아왔고, 또 하나님이 만난바 되시며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의 증언에 깊이 유의하시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111과 보람된 생애를 삽시다 (대하 33:20~25)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보람된 생애를 삽시다”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대하 33:1~20까지는 유다 14대왕 므낫세의 55년 집권의 역사가 기록되었고, 지금 읽은 말씀에는 그의 아들 아몬왕의 2년간 집권기사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몬왕은 좋은 생애를 살지 못한 것이 저희들에게 아쉬움을 주는 것이며 또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민으로 살아도 그 인생이 귀하거든 왕이 된 사람이야 더욱 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각자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계시며 매일 매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 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므낫세왕은 히스기야왕의 아들로써 히스기야왕은 대체로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자기의 성실을 기억해 달라고 하면서 통곡하고 기도하므로 15년을 더 살다가 왕노릇 29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된 것입니다. 므낫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을 집권하였는데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악을 행하여 우상숭배를 장려하니까 그 백성들도 꾀임을 받아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바벨론으로까지 끌려 갔는데 크게 깨닫고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이 그의 왕위를 다시 보존케 하셔서 남은 여생에 우상을 제거하고 왕노릇을 잘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2. 그 다음 그의 아들 아몬이 22세에 왕이 된 것입니다. 과연 아몬왕이 보람된 생애를 보냈는가? 할 때

1) 아몬은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상례이지만 부모의 잘못된 일은 본받지 말고 좋은 점만은 본받아야 하는데 아몬은 그 반대로 부왕의 잘한 것은 본받지 않고 악한 것만 본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몬의 생애는 불행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자라나는 자녀들이 친구를 어떻게 사귀는냐에 따라 그의 앞길이 정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친구를 본받을 때 좋은 생애를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상을 섬겼습니다. 므낫세가 회개하기 전에 만들었던 우상의 단들을 회개하면서 훼파하였는데(15절) 아몬은 그것을 다시 세워서 숭배를 하였으니 이는 효도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역행을 한 죄악입니다. 부모의 좋은 행적을 보존하는 자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므낫세가 스스로 겸비하여 회개한 일은 본받지 않았으니 누구든지 좋은 것을 본받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자기 생애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을 것입니다.

4) “더욱 범죄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비 므낫세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3.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한대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24절에 보시면 “그 신복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2년간 짧은 왕노릇을 하고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가 있는 만큼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잘하면 자신과 후손이 복을 받고 못하면 역시 자신과 후손에게 불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망할 일만 하다가 망하였고, 요셉이나 다윗은 좋은 일만 하다가 흥하였습니다. 저희들도 좋은 생애를 가지려면 좋은 일만 선별하여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신복들이 아몬왕을 반역하여 죽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섭리로 된 일이지만 반역자, 살인자들은 자기들의 죄로 또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심판섭리에 따라 갈지라도 개인의 불법한 죄나 살인은 역시 그 자신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본토족이 진별을 당하는 것은 그들의 죄값으로 내린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역사는 섭리에 순응하지만 죄의 책임은 인간이 져야 함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족은 이스라엘의 손으로, 아몬을 반역한 신하들은 국민의 손으로 심판하게 하신 것입니다.

5. 아몬은 죽었으나 그 아들 요시야는 8세에 왕이 되어 31년을 다스렸습니다. 왜 아버지는 심판하시고 아들은 왕이 되게 하셨을까요? 높이고 낮추는 권한,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으니까 하나님의 주권대로 하신줄로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범죄의 분량에 따라서 공의롭게 하시고 또 축복의 약속에 따라서 지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아몬이 죽고 요시야가 왕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사라고 믿으셔야 합니다(렘 12:1). 그런데 왕상 11:36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등불이 항상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다윗의 후손에 왕통이 이어질 것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 요시야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정리하면 ① 저희들은 자신의 생애를 좋은 생애로 만들기 위하여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②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이나 스승이나 이웃의 좋은 것만 본받고 나쁜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시며 행위대로 갚으시고 또 축복의 약속은 지키시는 분임을 믿으시고 ④ 하루 하루 시간 시간을 살아가실 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 에 대하여 늘 점검하시고 반성하시는 저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12과 에브라임의 범죄 (호 8:11~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에브라임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의 “에브라임”은 북방 이스라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 이름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왕 때 나라가 분국되었는데 분국되어진 나라인 북방 이스라엘을 쪼개어 처음 왕된 사람이 에브라임 지파 후손 여러보암 왕이었습니다(왕상 11:26). 예루살렘을 중심한 다윗의 왕통은 유다지파이고, 북방 이스라엘은 에브라임지파 여러보암이 초대왕이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 에브라임으로 일컬은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50년경에 북방 이스라엘의 죄악과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에브라임의 범죄

1. 죄를 짓기 위하여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계시대로 지은 예루살렘 단일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라가 분국되니까 북방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성전중심에 이끌려 돌아오지 않으니까 나라가 약해질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왕상 12:27). 그래서 “단”과 “벧엘”에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그것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한 신이라”하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마음대로 절기를 정하고 마음대로 자신도 제사장이 되어서 분향을 한 것입니다(왕상 12:28~33). 여러보암은 그런 죄악으로 인하여 큰 재앙을 당하고도 자율종교를 폐하지 않으므로 북방 이스라엘 전체에 이질적인 종교의 뿌리를 박은 것입니다(왕상 13:1~6, 14:9).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이단종교나 자율종교를 세운 것과 같으니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함이 되었다”는 뜻은 종교적 제도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시대의 예배로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대신합니다. 예배자체는 영광 돌리는 일이지만 예배드리는 방법이나 여러 가지 제도상의 불합리로 영광을 가리우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인하여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율법을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저를 위하여 자기의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해 주셨지만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패괴함이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자기를 지은자를 잊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이 뜨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으로도 증언하게 하시지만 자기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시되 만가지로(수없이) 기록해 주셨지만 역시 읽지 않고 배우지 않으니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많은 성도들이 귀와 입만 갖고 교회에 와서 찬송하고 듣기만 하고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주일에 30분 정도 들어서 언제 다 배웁니까? 마땅히 강해서나 설교문을 많이 읽어서 보충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동안 성경을 기록하는 붐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현상이지만 내용을 알려고 하는 눈이 떠져야 하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져야 할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기록을 했으니까 은혜를 주시겠지”하는 얕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뛰고 있습니다. 세상 지식과 생활은 고도로 발전하는데 성도의 성경지식은 재래식 방법과 분량에 그대로 멎어 있으면서 안일주의 신앙생활만을 능수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말씀을 외면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시대의 성도들은 듣고 읽고 공부하는 열심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신학생들도 책을 안 사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3.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응답도 안하시고 벌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13절에 보시면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고기로 제사를 드리지만(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와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을 떠난 자율제사이기 때문에 받지 않으시며

2)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벌하심”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벌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금방 벌하시면 죄를 기억하실 필요가 없지만 상당기간이 지난 후라도 그 죄를 그대로 기억하시고 벌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그 벌의 내용은 “애굽으로 다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지원을 구하러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하 17:3~4에 보시면 호세아왕 때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침략으로 그 나라에 조공을 드리다가 애굽왕 “소”에 의존하여 조공을 중단한 일이 있었으나 다시 침략하여 호세아 9년에 사마리아왕도가 점령되고 그 나라가 여러보암왕때로부터 호세아 9년까지 257년만에 망한 것입니다. 그 때에 남방 다도 앗수르의 표적이었으니까(왕하 17:19~20) 결국 국민들이 애굽으로 다시 피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범죄는 자율종교 설립과 말씀을 저버린 죄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 나라는 247년만에 망하는 벌을 받은 것입니다.

 

제113과 나라가 분열된 이유 (왕상 12:12~17)목록으로


이스라엘 나라는 사울왕 때에 건국되어 네 번째 왕인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나라가 분국되었습니다. 건국된지 120년만에 분국되었고, 12지파 중 유다지파만 예루살렘과 유다지경에 남고 다른 지파는 다 여러보암왕을 중심으로 북방 이스라엘 나라고 분리된 것입니다(왕상 11:13). 분리는 화합의 반대입니다. 이 시간의 제목은 “나라가 분열된 이유”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분열된 이유

1. 솔로몬왕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왕은 말년에 타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많은 처첩을 거느림은 물론 이방신을 따르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두 번이나 권면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왕상 11:1~10).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왕의 충성을 생각하여 솔로몬왕 당대에 분열시키지 않으시고 그 다음 아들의 대에 분열케 하셨으며(왕상 11:12) 한 지파의 명맥을 이어주셨으니(왕상 11:13) 이는 긍휼을 베푸심도 되지만 메시야 계열의 명백을 잇기 위함이었습니다(사 6:13, 11:1). 한 마디로 표현하여 선왕의 죄값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2. 르호보암왕의 편벽된 정치 때문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할 때 노인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소년들의 의견만 수렴한 것입니다(13~14절). 아무래도 노인들의 의견이 더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들의 의견에 일방적으로 따른 것이 실수요, 백성들의 의견을 화합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편벽된 의견수렴이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3. 권위주의 정치를 하려한 것입니다. 무조건 왕명에 복종시키기 위하여 권위를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11절에서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정치하리라”하므로 왕의 권위만으로 백성들을 누르려 한 것입니다. 인심은 권위로 얻을 수 없고 사랑과 덕으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4. 폭력정치를 쓰려한 것입니다. 13절에 보시면 “왕이 포악한 말을 하였다”하였고,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전갈로 정치한다”(11절)는 말이 전부 왕의 폭력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백성들의 인심이 르호보암왕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비합리적인 분리는 사랑과 화합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왕의 죄값을 그의 아들 시대에 갚으셨고, 하나님이 그런 섭리적 징계를 하시니까 르호보암은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노인들의 교도보다 소년들의 교도를 선택하였고, 덕을 세우는 것보다 권위를 세우려 하였으며 백성들의 의견을 고루 참작하지 못한 결과로 나라가 분열 된 것입니다.

 

제114과 독사의 자식들 (마 3: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악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책망한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들로 비유하셨을 때는 그만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사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죄악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경계의 교훈을 삼게 하시는 것입니다.

1. 독사는 타락으로 벌받은 동물입니다. 아담을 유혹할 때 이용당하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창 3:14) 결국 타락의 동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탄을 뱀으로 명칭하기도 하였습니다(계 12:9).

2. 독사는 그 모양이 무섭고 흉합니다. 착한 양심으로 독사를 볼 때 징그럽고 무섭고 흉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않는 상태를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인상을 비유하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3. 무서운 독을 갖고 있으니 이것은 악한 마음과 행동으로 이웃을 해하는 범죄의 무기라 할 것입니다. 이 악의 독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막 16:18).

4. 독사는 손발이 없고 입과 몸만 있습니다. 손발이 없음은 일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입은 먹는 것이며 몸은 먹은 것을 소화시켜야 하므로 결국 놀고 먹는 동물이란 뜻입니다.

5. 독사는 냉피동물입니다. 이것은 냉냉하다는 뜻이요, 인정과 사랑이 없음을 뜻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