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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Ⅳ)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 : 절기설교)

1999년도 51주 설교


제1과 빛가운데 사는 생활 (요 3:19~21)★ 바로가기

제2과 버리시는 것과 안 버리시는 것 (렘 12:7~13) 바로가기

제3과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 17:1~5) 바로가기

제4과 생명의 떡 예수님 (요 6:47~59) 바로가기

제5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 43:14~21) 바로가기

제6과 질그릇에 가진 보배 (고후 4:7~10) 바로가기

제7과 복음 사역자와 성도 (고전 3:6~9) 바로가기

제8과 순종하는 복 (왕하 5:10~14) 바로가기

제9과 인을 치시는 하나님 (고후 1:21~22) 바로가기

제10과 신앙 생활의 목적과 절차 (전 12:13~14) 바로가기

제11과 하나님의 일 (요 6:28~31) 바로가기

제12과 완전한 자 되는 능력 (골 1:28~29) 바로가기

제13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 (눅 23:44~54)★ 바로가기

제14과 예수님 부활의 타당성 (마 28:1~10)★ 바로가기

제15과 책망과 대책 (삿 10:10~18) 바로가기

제16과 교회의 사명 (행 2:37~42) 바로가기

제17과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 (마 6:6~8) 바로가기

제18과 여호수아의 신앙 (수 24:14~18) 바로가기

제19과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 (신 6:4~9)★ 바로가기

제20과 모범적 가정 (행 10:1~8)★ 바로가기

제21과 성령의 소욕 (갈 5:13~26)★ 바로가기

제22과 루디아가 변화를 받음 (행 16:11~15) 바로가기

제23과 예수님의 가난하심(눅 2:6~7, 12) 바로가기

제24과 하나님의 사역과 축복 (히 13:20~21) 바로가기

제25과 저주받을 일을 삼가자 (신 11:26~30) 바로가기

제26과 덕을 세우는 교회 생활 (엡 4:29~32) 바로가기

제27과 3가지 권면 (히 10:23~24) 바로가기

제28과 전도의 의미 (롬 10:13~17) 바로가기

제29과 스데반의 믿음 (행 6:1~15, 7:51~60) 바로가기

제30과 공의를 일삼으며 (시 15:1~5) 바로가기

제31과다윗의 긍휼과 기도 응답 (삼하 21:7~14) 바로가기

제32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시 29:10~11) 바로가기

제33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히 13:15~16) 바로가기

제34과 평안의 비결 (요 14:27~28) 바로가기

제35과 하나님이 성취되게 하심 (시 127:1~5) 바로가기

제36과 왕과 백성들 (대상 11:1~9) 바로가기

제37과 좋은 시험 나쁜 시험 (고전 10:10~13) 바로가기

제38과 공정한 저울 (신 25:13~16) 바로가기

제39과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 (약 4:13~17) 바로가기

제40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방법 (삿 3:1~11) 바로가기

제41과 다윗이 왕되기 까지 (삼하 5:1~5) 바로가기

제42과 다윗의 활노래 (삼하 1:17~27) 바로가기

제43과 다윗의 역경과 유익 (삼상 30:1~6) 바로가기

제44과 사울왕을 버리심 (삼상 15:17~31) 바로가기

제45과 사울의 망령된 행위 (삼상 13:5~15) 바로가기

제46과 감사하는 신앙 (엡 5:18~21)★ 바로가기

제47과 성경과 관계된 신앙 (딤후 3:14~17) 바로가기

제48과 하나님의 탁월하심 (사 40:12~17) 바로가기

제49과 생사를 주관하심 (삼상 2:6) 바로가기

제50과 천사들의 증언과 찬송 (눅 2:8~14)★ 바로가기

제51과 한 해의 결산 (마 24:44~51)★ 바로가기


2000년도 52주 설교


제1과 성도의 목표와 성취 (롬 8:29~30)★ 바로가기

제2과 의에 대한 지식 (롬 3:9~12) 바로가기

제3과 문둥병 고치고 영광 돌림 (눅 17:11~19) 바로가기

제4과 믿음 있는 자의 생활 (마 6:26~33) 바로가기

제5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8:8~11) 바로가기

제6과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함 (눅 22:31~34, 고전 15:58) 바로가기

제7과 숨어 계신 하나님 (사 45:15) 바로가기

제8과 하박국의 믿음을 본받자 (합 3:16~19) 바로가기

제9과 문제가 많은 사람 (눅 18:18~23) 바로가기

제10과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 (고전 9:18~27) 바로가기

제11과 성경 연구의 필수 요건 (마 5:8, 요 3:3) 바로가기

제12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요 9:1~12) 바로가기

제13과 하나님의 광대하심 (시 96:1~10) 바로가기

제14과 경건의 연습 (딤전 4:1~8)★ 바로가기

제15과 성도가 받은 은혜 (요 1:12~16) 바로가기

제16과 성찬 전에 하신 일 (마 26:17~29) 바로가기

제17과 부활체의 신비 (고전 15:35~44)★ 바로가기

제18과 찬양에 대한 말씀 (시 113:1~9) 바로가기

제19과 욥의 자녀 교육 (욥 1:1~5)★ 바로가기

제20과 행복한 가정 (잠 31:10~31)★ 바로가기

제21과 인간의 의무와 타락상 (롬 1:21~25) 바로가기

제22과 마음이 뜨거워짐 (눅 24:32) 바로가기

제23과 북방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경고 (호 7:8~16) 바로가기

제24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4~21)★ 바로가기

제25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 (신 28:1~14) 바로가기

제26과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 130:1~8) 바로가기

제27과 아브라함에 대하여 (히 11:8~19) 바로가기

제28과 수넴 여인이 받은 복 (왕하 8:1~16) 바로가기

제29과 4가지 교훈 (사 55:6~11) 바로가기

제30과 지혜로운 생활 (딤전 6:3~10) 바로가기

제31과 네 문둥이의 역할 (왕하 7:1~8) 바로가기

제32과 유다 여호람 왕에 대하여 (왕하 8:16~24) 바로가기

제33과 요셉이 형들을 만남 (창 42:18~25) 바로가기

제34과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심 (요 2:23~25) 바로가기

제35과 모든 은혜의 하나님 (벧전 5:10~14) 바로가기

제36과 죄악이 많은 세대 (호 4:1~5) 바로가기

제37과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죄 (호 4:6~10) 바로가기

제38과 기도하는 법 (요 17:1~11) 바로가기

제39과 하지 말 것과 버릴 것 (골 3:5~11) 바로가기

제40과 따로 있으라 (고후 6:14~18) 바로가기

제41과 기억해 주시는 인물들 (창 19:29) 바로가기

제42과 예수님과 성전 (마 21:12~17) 바로가기

제43과 아하스 왕의 만행 (왕하 16:1~9) 바로가기

제44과 성도의 마지막 소망 (롬 8:18~25) 바로가기

제45과 바울 사도의 생활 목표 (빌 3:10~17) 바로가기

제46과 세 가지 은혜 (갈 2:9~10)★ 바로가기

제47과 엘리사의 죽음 (왕하 13:14~21) 바로가기

제48과 어리석은 백성들 (민 14:1~10) 바로가기

제49과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심 (수 24:1~13) 바로가기

제50과 가장 큰 복 (시 33:23, 26) 바로가기

제51과 여선지자 안나 (눅 2:36~38)★ 바로가기

제52과 부족을 보충하자 (계 2:6~7)★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평신도 중심의 7분 설교 집을 출판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필자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는 새벽 기도회 설교 내용을 다른 설교 내용과 함께 모두 문서로 보존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후시대에 어느 교역자나 평신도라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서였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듯이 절기 설교를 편편히 넣어서 구역 공과용으로도 사용되었으면 좋을 것으로 알아서 그렇게 편집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설교 집은 1999년과 2000년의 부활절 절기에 맞추었습니다. 이미 출판된 1집~3집도 (1994년~1998년) 역시 같은 용도로 편집하였습니다. 한번 복사하여 나누어 드리고 읽으면 더욱 편리합니다.

앞으로 계속 출판될 책들의 집필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읽어서 은혜 받는 시대가 올 줄로 믿습니다.




1995. 6. 15.


저자 지 영 근

 

1999년도


제1과 빛 가운데 사는 생활 (요 3:19~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빛가운데 사는 생활” 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 5:14에서 말씀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도 역시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을 권장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전체의 의미가 “빛가운데서 살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1. 우선 빛이란 어떤 성질이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면

1) 빛은 밝은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고, 빛이 있으면 밝은 것입니다. “밝다” 는 뜻은 사실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진실에 해당하고, 또 어두움이 밝아졌음은 더러움이 깨끗해진 것이므로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이 밝은 것” 이란 뜻에서 진실과 순결을 의미하고

2) 빛은 곧게 나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빛은 장애물이 없는 한 곧게 나가기 때문에 이 “곧다”는 성질은 바로 “의” 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행하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나가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3) 빛은 더웁게 하는 것입니다. 불은 태울 수 있지만, 빛은 더웁게 합니다. 생명은 더운 것입니다. 빙산에서 생물이 자랄 수 없고 오직 따뜻해야만 싹을 낼 수 있고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없는 세계는 죽음이 오고 사랑이 있는 세계는 번성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빛은 생명과 사랑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빛을 발한다” 하면 진실하고 순결한 생활, 의로운 생활, 사랑의 온정을 나타내는 생활을 잘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한가지 더 살필 것은 빛이 저절로 생기지 않고 반드시 가연성 물질이 탈 때에만 불꽃과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가연성 물질이 타지 않으면 불도 일으킬 수 없고 불이 있어야만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의 가연성 물질이 탄다” 는 뜻은 성도의 희생적 봉사요, “불” 그 자체는 희생을 근거로 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름이 타야 빛이 나듯이 사랑의 불꽃이 있어야만 빛이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 “빛이 세상에 있으되” 하신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분” 이란 뜻입니다. 이 빛은 물리적인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빛의 성질을 영적으로 나타내시는 주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할 수 있는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바 와 같이

1) 예수님은 진실하시고 순결하신 분이기 때문이고

2) 예수님이 홀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3) 예수님이 사랑과 생명의 근원 자이시기 때문이고

4) 예수님도 인간들에게 사랑을 베푸실 때 자기를 희생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빛의 역할을 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빛의 근원 자로 나타내시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또 사랑과 근원의 은혜를 베푸시되 자기를 희생하여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고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어떻게 하여야 빛가운데 살 수 있을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짓다가 빛을 비취면 얼굴을 가리우고 도망하는 사람과 텔레비전 카메라에 자기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자기들의 죄가 드러날까 봐서 빛으로 오지 않는 정죄 받을 자요, 후자는 자신의 어두움을 밝히고 빛과 함께 밝게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 즉,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을 등지고 어두움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불신자요, 죄 짓기를 좋아하는 자요, 빛을 등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빛가운데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① 빛의 근원 자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자요, ② 예수님의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어두운 부분들을 구석구석 비취는 자요, ③ 자기의 부정한 부분들을 씻고 청산하기 위하여 자기의 연약과 실수와 범죄가 드러나는 것을 다행으로 알면서 부끄럽지만 참고 회개하는 자요, ④ 빛으로 밝히 드러난 세계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은밀하고 가리운 세계에 있으면 범죄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된 세계에서 살면 많은 범죄와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빛가운데 사는 생활 4가지를 꼭 실행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과 버리시는 것과 안 버리시는 것 (렘 12:7~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과 버리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1.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버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본문 7절에 보시면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 던져, 내 마음에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산업과 그 사랑하는 것을 버리시되 그 버리시는 방법은 전쟁하는 대적,즉 바벨론 나라가 와서 모두 없애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내 집” 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산업” 이란 이스라엘 선민 국을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퍽 사랑하시던 것이요, 10절에서 “낙토(즐거운 땅)”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훼파하면 성전 제도와 제사장 직분이 함께 없어지는 것이고, 산업을 버리면 선민의 왕과 백성들이 함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좋아하시던 것들을 왜 버리실 까요? 아무리 아이가 귀해도 그 아이가 죽었으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산업인 이스라엘 민족이, 산업의 구실, 즉 영광 돌리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때는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8~9절에서 “버리시는 이유” 를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산업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림 중의 사자처럼 사나워졌고, 또 움키면 놓지 않는 무늬 있는 매들처럼 떼를 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삼킬 듯이 으르렁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착하고 의롭게 충성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되 마치 맹폭한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같고, 무늬 있는 매들이 에워싸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극한 완악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 그래서 하나님은 들짐승 같은 바벨론을 들어서 포도원같은 낙토(이스라엘 영토)를 짓밟게 하시고, 훼파하게 하시고, 그 땅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요, 칼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게 하시고, 평안치 못하게 하시고, 밀을 심어도 거두지 못하는 황폐한 땅을 만들어 분노를 발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출애굽 할 당시에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으나, 오늘날에는 그 땅이 너무도 쓸모없는 황무지가 많은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그 땅을 버리신 증거가 확실한 것입니다.

4) 그 외에도 하나님은 버리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시면, 노아 홍수 당시에 노아의 여덟 식구외에 다 버리셨고, 소돔과 고무라 성에서, 놋의 가족 외에 다 버리셨고, 애굽군인들을 홍해에 버리셨고, 가나안 족속들을 버리셨고, 또 광야에서 구원 못 받고 죽은 자들을 버리셨고(고전 10:5), 사울 왕을 버리셨으며(삼상 15:23, 16:1, 고전 9:27), 이스라엘 나라도 왕을 세운지 504년만에 망하게 하셨고, 신약에서는 제자였던 가롯유다를 버리셨습니다. 장차 만물도 없애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1:1).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영광에 위반되는 것이면 나라와 성전과 제사 제도와 왕과 백성들과 그들이 사는 땅까지도 다 버리신 것입니다.

5)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각성하셔야 할 것은 성도가 처음 사랑을 버렸을 때 “교회의 촛대를 옮기신다”하셨고(계 2:5), 성도의 신앙이 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친다(계 3:15~1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버린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버림당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 중요한 것은 “버리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택한 백성은 싫어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41:9에서 “내가 땅끝에서 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여 선택하신 백성은 어떤 부족이 나타나더라도 다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적 책임이 그것이라고 요17:11~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관한 것과(사 42:8, 나 8:11), 택한 백성만은 버리시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들을 버리시지 않는 은혜를 감사하시면서 저희들도 그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셔야 할 것입니다(엡 6:24).

 

제3과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 17: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세마디로 기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눅 23:34)” 하신 것이요, ②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하신 것이고, ③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상의 기도는 “순간적인 호소”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십자가를 지시던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26:39~42에서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문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지금 읽으신 요한 복음 17장 전체에서는 그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 기도 내용의 첫 부분만 읽으셨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을 상당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의미를 살피는 가운데

1. 기도 자가 첫째로 유의할 것은 “나도 마지막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할 때에 그 기도 내용이 대단히 진지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유언을 남기듯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라면 퍽 진지할 것입니다. 성도가 꼭 그런 자세로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대단히 간절하고 아름다운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때가 다 된 것을 알고(1절) 기도를 하셨으니까 그 기도 내용도 최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기도의 환경과 자세가 어떠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밤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자마자 대제사장이 보낸 군졸들에게 잡히셨으므로 마지막까지 기도하신 셈이요, 밤과 낮으로 특정한 기도 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산에서 기도하신 것도 조용한 곳이 그 곳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르치시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님이 주인이셨지만(마 12:4, 6), 사용하실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관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때와 장소는 편리한 대로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과 떨어진 장소에 가셔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기도는 함께 합력 하여 할 수도 있지만,하나님과의 단독회견이 더 의미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골방 기도와 은밀한 처소의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6).

3)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몸의 자세를 나타내신 내용인데,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태도일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주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왕상 8:30)”하신 말씀은 하나님 계신 보좌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이 하늘이란 의미는 눈에 보이는 대기권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높은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는 중에(왕하 4:34, 20:2, 단 6:10) 한 가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시 139:9~10) 또 곁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창 28:15).

4)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호칭하실 때 아버지란 용어를 빼신 일이 없습니다(1, 2, 4절).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 왕과 백성, 상전과 종, 때로는 친구간의 관계(사 41:8)를 가질 수 있으나, 기도할 때만큼은 아들의 위치에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의 구할 특권과 아버지의 주실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중요한 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에서

1)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신 것이 기도의 주제였습니다(마 26:39, 42). 이 사실은 마태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2) 본문의 기도는 ① 하나님의 뜻인 구원 사업을 이루어 ② 영광을 먼저 하나님께 돌린 후에(2~4절) ③ 자신에게도 영광을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4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은 사명을 위하여 순종하시는 것과 중보기도 하시는 일이며(17:9), 영광에 관한 것은 사명으로 뜻을 이루어 드린 후에 자신도 영광되어지기를 간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의 결론은 저희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영광 돌리기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4과 생명의 떡 예수님 (요 6:47~5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생명의 떡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생명의 떡”이란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떡(33절)”, “생명의 떡(35,48절)”,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51,58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떡(살과 피;53절)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50~51절). 여기에서 이 “떡”이란 말씀과 “먹는다”는 말씀은 비유와 상징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떡”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먹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깨닫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물로서 어린양을 사용한 것이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이나, 무교병을 먹은 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상징한 것처럼(출 12:7~8) 생명 주시는 예수님을 떡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왜 자기를 떡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을까요?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요6:1~13에 보시면 5병2어의 기적 사건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5병2어의 사건은 배고픈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서 5000명쯤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나 남게 하신 사실입니다. 배고픈 무리들이 기적의 떡을 먹었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진 것입니다(26절). 심지어는 표적을 보는 것보다도 떡 먹는 것을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떡은 기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육신의 양식일 뿐 영적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생명의 양식보다 육체의 양식인 떡을 더 선호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옛날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만나 사건을 마음에 떠올린 것입니다(31절). “만나”도 역시 기적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만나는 모세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백성들은 모세가 주는 줄 알았고 예수님 시대에도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32절). 만나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5병2어는 예수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예수님을 모세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세처럼 알아서도 안되고, 또 썩는 양식,육체의 양식에만 마음을 두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영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을 주신 것과 관련하여 자신이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떡”이란 뜻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인 침을 받고 오신(27~29절, 33절) 구세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먹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떡은 입으로 먹되 예수님은 마음으로 먹습니다.

2) 떡은 깨물어 삼키되 예수님은 믿고 배워서 깨닫는 것입니다.

3) 떡은 위장으로 소화시키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행함으로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4) 떡은 하루 세번쯤 먹지만 예수님은 항상 모시고 항상 배우며 항상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떡은 배고플 때 잘 먹을 수 있지만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린 상태에서 잘 먹을 수 있습니다(마 5:1,6).

6) 예수님을 먹는 방법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곧 먹는 것입니다. 35절, 36절에서 “내게로 오는 자”라 하셨고, 29절, 40절, 47절에서는 “믿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② 53절~55절에서는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고기처럼) 먹겠습니까? 역시 비유적인 말씀이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찬 예식을 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서(마 4:4) 측면적으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썩어질 양식보다 영생하는 믿음의 양식 곧 예수님을 얼마나 사모하느냐? 하는 것이요, 또 한가지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되 진리가 아닌 불순물이 첨가된 다른 것을 섭취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공해로 오염된 식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제5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 43:14~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나라의 웃시야(아사랴),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이 통치하던 시대에(주전 750~680년경) 예언을 하였는데 그 예언의 취지는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과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은혜를 베푸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66장 중에 39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내용이고, 40장 이후에는 구원의 은총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총을 예고하신 말씀 중에 한 부분을 저희들이 읽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전 60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흩어진 다음 70년이 지난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다시 해방되고 민족이 복귀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새일을 행하시지 않으면 그런 은혜를 나타내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민족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본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① 너희의 구속 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 하셨고(14절) ②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왕이라 하셨고(15절) 또 ③ 새일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19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배우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하여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① 하나님이 바벨론에 메데 파사 군대를 보내어 갈대아(바벨론의 족속 이름) 사람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14절). 이것은 바벨론을 멸망시킬 때 메데 파사 군대를 일으켜 전쟁하게 하실 것을 지시하신다는 뜻입니다. ② 하나님이 바벨론을 쳐 부실 전쟁을 일으키실 때 바다와 물 가운데 길을 내시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바벨론을 꺼져가는 등불처럼 소멸시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17절).

3) 하나님이 이 같은 놀라운 일을 나타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결과가 오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 옛적 일을 생각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굉장히 좋게 해주시므로 과거의 불행을 잊어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던 성도가 천국에 가면 모든 고생하던 일들을 잊어버릴 것입니다(계 21:1, 4). ②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셔서 갈증에 허덕이던 짐승들과 택한 백성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시고 ③ 또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광야와 사막에서 물을 먹게 하신다”는 말씀과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신다”는 뜻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국민적 회복(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먼 훗날에 주실 메시야적 구원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은혜를 해갈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영적 은혜의 해갈은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오순절때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이방인의 구원 사역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저희들은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할 때 모세를 통해서 그 민족을 강팍한 바로의 손에서 구출해 주실 줄을 누가 알았으며 또 홍해 앞에서 갈 길을 잃었을 때 그 홍해가 갈라져서 무사히 건너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은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국운이 약해져서 바벨론에 망하여 민족이 흩어지고 또 유식한 사람들이 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는데 어떻게 회복을 바라겠습니까? 또 70년이란 한 세대가 지나간 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메데 파사의 왕 고레스와 군사를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1945년에 해방될 때에도 일본이 항복하고 카이로 회담을 통해서 독립을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롬 4:17). 그리고 오늘 저희들에게도 새로운 일, 놀라운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일들을 많이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6과 질그릇에 가진 보배 (고후 4:7~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질그릇에 가진 보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7절에서 바울 사도를 중심한 전도자 일행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1. 보배는 무엇이며 질그릇은 무엇일까요? 보배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뜻하고 질그릇은 전도자 자신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성경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보화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 13:44~45의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가 바로 예수님과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때 보화나 진주를 발견한 사람들은 “발견한 후에 숨겨두고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보화를 발견하셨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 3:7~8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을 때 평소에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힘쓰던 것을 다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화가 그만큼 좋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예수님만 모시면 제일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2) 질그릇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자들은 성도요 인간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 이하로 비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신 말씀이 있고(약 4:14) “벌레 같은 사람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욥 25:6)”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질그릇은 쉽게 깨지고 값도 싸고 천한 그릇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귀하지만 그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나 전도자는 아주 연약한 그릇이요, 천한 그릇이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조심하며 보화를 전달할 것 뿐이지 자기를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심환을 처음 먹을 때 전체를 다 먹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얀 초밀로 알맹이를 싼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하얀 초밀을 깨뜨리니까 그 속에서 청심환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전도자들은 그 껍질에 해당한다는 것을 아셔서 자기를 천히 여기고 자기를 깨뜨려야만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보화가 나타나는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는 전도자이셨습니다. 그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실 때 질그릇 신세로 오셨습니다.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모양도 풍채도 아름다운 것도 없으면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으셨으며(사 53:2~4) 곤욕을 당하여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았다(사 53:7)”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전도자들이 인간적으로 겸손하고 낮아져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이 그런 방법으로 전도를 하다 보니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트림을 당하고 매를 맞기까지 하였지만(8~9절, 고후 11:25) 하나님의 은혜로 망하지 아니하셨고(고후 6:8~10) 또 고후 1:8에서는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기까지 하셨다”하시므로 전도자의 질그릇 같음을 충분히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가장 중요한 것은 왜 그 중요한 보화를 질그릇에 담아 주셨나하는 것입니다.

1) 성도와 전도자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가 은혜를 많이 받고 교만해질까봐 육체의 가시를 주시면서 그를 “자고하지 않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고후 12:7).

2)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전도자들(우리에게;7절)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고후 12:9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사역자를 능력있는 그릇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또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시기 위하여 전도자들을 질그릇으로 연약하게 만드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질그릇 같은 성도(전도자)가 자기를 낮추어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것은 씨앗이 흙에 묻혔을 때 싹이 나는 것처럼 성도가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갈 때(즉 자기를 깨칠 때) 보화의 빛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질그릇 같을지라도 보화만 갖고 있다는 소문만 나면 보화를 선전 안해도 찾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실 기독교는 복음을 선전해도 잘 안오지만 진짜 보화를 소유한 믿음을 나타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마 5:16). 이스라엘의 가장 큰 보화는 성경사본입니다. 그 모조품을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은 전파하되 구걸하는 자세는 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7과 복음 사역자와 성도 (고전 3:6~9)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복음 사역자인 바울 사도와 아볼로의 사명에 관한 말씀이 있고 또 성도를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하셨으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하여 “복음 사역자와 성도”란 제목을 정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순서대로 살펴보면

1. 복음 사역자에 대하여(6~8절)

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는 씨 뿌리는 전도자 역할을 하셨고 아볼로는 교육자, 목회자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역자를 쓰실 때 각 사람에게 달란트와(마 25:14~21) 은사를 주시는 분입니다(고전 12:4~11, 27~30). 여기에서 바울은 전도자의 은사를 받았고 아볼로는 목회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 골조 공사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병돌을 쌓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바르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칠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은 집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각각 받은 은사와 직무에 따라 일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자라는 것이고 생명력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씨를 잘 뿌리고 가꾸는 일을 잘 하였어도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요 싹나고 자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면 열매 맺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나 사역자는 열심히 자기의 일을 할 뿐이요 자라는 것과 열매에 대한 기대는 오직 하나남께만 의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열매 맺게 하는 줄로 알았던 착각을 버리셔야 하겠습니다.

3) 따라서 “심는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심는이나 물주는 이는 인간 사역자를 의미하는데 인간 사역자가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훌륭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①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달란트를 가지고 일한 것이고 ② 자라고 열매 맺는 생명력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③ 따라서 영광의 열매를 맺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이 일을 잘 해도 영광 받을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심는이와 물주는 이는 일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나 교육자나 목회자가 하나님이 보실때에 그 가치면에서 꼭 같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볼때는 목회자보다 부흥사가 훌륭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같은 것입니다. 유치원 선생도 있고 국민하교 선생도 있는데 이 계층의 교사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을 한다면 고등부를 맡아 하든지 유년부를 맡아 하든지 우열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직업을 생각할 때도 예수님은 봉사자로 오신분이기 때문에 고상한 직업이나 비천한 직업을 구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편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5)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에는 개인별 상급만 있을 뿐 단체상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 자기의 일한대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열매를 맺는대로 주신다”고 하셨다면 옥토가 아닌 밭에서 고생하며 일하고 소득을 적게 거둔 농부는 크게 불행할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역자의 상급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일에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현실 교회중에는 교역자의 전도실적에 따라 생활비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양적 부흥이 없다고 생활비를 깍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자에 대하여 사람이 과오를 범하는 큰 잘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대로 상을 주시는 분인즉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성실 근면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자(고후 6:1)”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펵 행복한 일입니다.

2. 성도에 대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밭(즉 토양)이요 하나님의 집(즉 가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고 시행할 때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성도는 토양입니다. 토양이 좋지 않으면 농사는 성공 못하는 것입니다. 이 토양은 성도의 마음 밭이요(약 1:21) 기본 자세인데 좋은 토양이 되려면 ① 돌을 제해야 하고 ② 물을 흡수하는 부드러움이 있어야 하고 ③ 질소, 인산, 가리를 고루 보유한 양분이 있어야 하며

2) 하나님의 집은 교회가 가정의 분위기를 가져야 함을 뜻하는데 ① 사랑이 넘쳐야 하고 ② 유무 상통이 있어야 하며 ③ 위 아래없이 서로 봉사하는 자세를 취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좋은 토양, 좋은 집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과 순종하는 복 (왕하 5:10~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순종할 줄 아는 것이 크게 복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얼만큼이나 순종할 힘이 있는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 나타난 나만 장군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나만 장군이 선지자의 말을 순종하게 된 것은 자신을 꺾었다는 뜻인데 그는 문둥병 때문에 그만한 순종을 할 수 있었고 일곱 번까지 순종을 하여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 7번 순종하여 문제를 해결한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리고 성을 점령한 것이 아닙니까?(수 6:12~15,20) 이스라엘 군중이 항오를 이루어 여리고성을 매일 한바퀴씩 7일을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되풀이하라(마 18:22)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순종하는 힘과 또 연속 순종하는 힘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순종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능력자요,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무조건 무엇을 한다 하기 전에 순종부터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 듣는 것이 좋은 제물보다 나으며 거역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5:22~23). “순종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므로 성도는 이를 즐거워하여야 한다(시 40:8)”하셨고 또 “계명을 순종할 때 주님을 사랑함이 되고 주님이 거처를 함께 하여 주신다(요 14:23)”고 하셨습니다. 모녀가 단란하게 사는 집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바닷가에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조개 껍데기를 구해 드리기 위하여 바다에 나가서 그것을 구하여 선물한 것입니다. 이때 그 어머니는 “내가 조개 껍데기를 좋아하지만 네가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3. 순종을 잘하면 많은 은혜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순종 잘하여 은혜 받은 사실을 살펴보면 참 많습니다.

1) 노아가 순종하여 배를 짓고 120년만에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2)아브라함이 고향 떠나는 순종, 첩을 내쫓는 순종,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을 하였는데 이것은 재물과 인정과 생명을 초월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되는 선택과 칭호를 얻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출 14:5) 요단강 흐름이 멈춘 것도(수 3:13) 순종에서였고 신약 성경에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은 일이나(눅 5:5) 가나 혼인 집에서 포도주 기적이 나타난것이나(요 2:5) 5병2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도(막 6:39) 역시 순종에서 였습니다. 무디선생님이 큰 부흥을 일으켰을 때 5명의 목사가 찾아가서 은혜 받은 비결, 큰 축복 받은 비결, 큰 권능, 큰 기적을 체험한 비결, 큰 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을 각각 한가지씩 질문했을 때 무디선생은 그 모두가 절대 순종이라고 대답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은 은혜 받고 능력 받으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비결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자기 부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16:24). 나만 장군도 그것을 못하다가 신하의 간청을 듣고 하였습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는 이유나 목적을 물을 필요가 없고 어떤 의문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순종 모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몇 가지 이유를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순종한 것입니다. 사람의 명령은 책임과 입장에 따라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사역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할 것이면 역시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말씀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롬 1:5에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의 힘을 줍니다.

3) 그리고 현실 욕을 억제하지 못할 때 순종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부정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현실 욕구를 멀리해야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순종할 이유와 순종한 사례와 순종의 유익과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순종으로 성공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9과 인(印)을 치시는 하나님 (고후 1:21~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을 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의 인 치시는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견고케 하시는 분이라(21절) 하셨고,

2) 견고하게 하시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셨다”하셨으니 이 기름 부으심이란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요

3)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속에 계시면서 “인 치는 보증”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인 치심”이란 하나님의 확실한 증명이란 뜻이요, 성도 자신은 확신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 치시는 일을 이해하기 위하여 참고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도장을 찍거나 싸인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물건을 팔고 살 때, 영수증을 써 줄 때, 무슨 각서를 쓸 때 도장을 찍습니다. 도장을 찍는 이유는 자기의 하는 일을 확실히 하여 표증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보존하고 중간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을 치시는 것도 변질성 많은 인간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도무지 변동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다짐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엡 1:13에 보시면 “그(예수님) 안에서 진리의 말씀(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침을 받았다”하셨고, 엡 4:30에서는 “너희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침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어떤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빨간 색으로 도장을 찍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 즉 구원을 확실케 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하여금 성도의 심령에 내주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인 침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왕이 명령(조서)과 결정을 내릴 때(왕상 21:8, 더 3:12, 8:8, 단 6:17) ②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이 어떤 일의 결심이나 단결을 과시할 때(더 10:1, 느 9:38) 인을 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다 권위와 확실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③ 세례 의식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 됨을 인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물론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여 구원받은 백성임을 사람들 앞에서 인치는 것입니다(마 3:16).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성도란 자격증을 받았으니까 역시 사람들로부터 성도다운 인정을 받도록 생활해야 할 의무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식이나 의식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사 1:12,13). 그러나 세례식과 성찬식만큼은 의식을 명하셨으니 이는 세례의 의미와 성찬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④ 또 한가지 인 침의 방법은 성도들이 복음 사역 자의 진실함을 증명해 주는 인 침입니다. 이 인 침은 평신도가 복음사역자를 위하여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고전 9:2에 보시면 “나의 사도 된 것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르고 영광의 열매를 맺은 그것이 바로 바울사도의 사역자적 진실을 증명하는 인 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었으면 그 열매가 농부의 실력을 입증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⑤ 요 3:33에 보시면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을 쳤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그의 증거를 받는 이”란 믿는 성도를 의미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을 쳤다”는 뜻은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믿기로 결심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 침이란 보증의 의미가 있고 결심의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이 인 쳐주시는 방법이 있고 성도가 또는 사람이 인을 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인 침이란 계약에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고 성도의 인 침은 결심과 확신과 책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인 치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심령을 떠나지 않게 함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인 침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참되심을 믿음에 변하지 않으며 성도로서의 책임을 확실하게 이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10과 신앙생활의 목적과 절차 (전 12:13~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생활의 목적과 절차”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면 서도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제목이 바로 “신앙생활의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절차란 믿음 생활을 순서적으로 잘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믿음 생활의 순서를 밟지 않으면 믿음 생활을 전부 헛되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을 사람이 영광 받자고 하는 것으로 역행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대목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앙생활의 목적을 깨달음에 대하여

1) 우리의 섬기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피조물된 인간이 본분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 공경하는 것을 본분으로 알듯이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 공경하는 것을 본분으로 알고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유익이 있다”하여 섬기고 “없다”하여 안 섬기는 것이 아니요 꼭 본분으로 알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섬긴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물 창조와 선민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롬 11:36)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스스로 목적을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창조자에게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인간을 앞세우려는 사람은 자기 목적에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피조물보다 창조자의 뜻을 앞세워야 하니까 하나님 뜻에 따라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인간은 타락하였고 연약하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여러 가지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구원과 다른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반듯이 구원은 선민에게만 주시고(행 13:48) 축복의 은혜는 주실만한자에게 주시니까(출 33:19) 따라서 은혜를 받을 만하게 신앙생활을 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목적을 ① 인간의 본분에 ② 하나님의 영광에 ③ 자신들의 구원과 축복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절차가 어떠해야 하는가? 할 때

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요 1:11과 계 3:20에 보시면 예수님 영접에 관한 말씀이 있고 또 마 16:16에서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접”이란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은 거듭 난자에 한하여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3:3).

2) 예수님과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의 옛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죄악의 요소가 착상되어 나오는 것은 자신의 옛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옛사람을 없애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된다”는 말씀이 요 13:13~16과 롬 6:6과 골 3:9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왕노릇하시게 하는 생활”입니다.

3) 예수님(곧 하나님)을 왕노릇 하시게 하기 위하여 그의 뜻을 깨달아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을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하여 성경을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웠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①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잠 23:26에서 “마음을 달라”하셨고, 마 22:37에서 “마음과 뜻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② 순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삼상 15:22).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③ 좋은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히 11:6, 10:22). 온전한 믿음은 사랑과 덕을 세우고 지식, 실천, 연단, 봉사등 모든 면에 적응할 수 있는 값진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으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요, 또 신앙생활의 목적은 오직 이를 본분으로 행하는 것과 하나님 영광과 자신이 복받는일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제11과 하나님의 일 (요 6:28~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하였더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즉 자신)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들은 “일”이란 그 자체를 어떤 행동 표현이나 사건 처리로 알고 질문을 한 모양인데 예수님은 그 반대의 대답으로 “믿는 일”에 대한 것을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은 인간이 한다는 일이 너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무슨 큰일을 한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하여 크게 덕을 보실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롬 11:35). 성도에게 일을 명하셨다면 “전도하라”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하면 상급을 주시기 때문에 봉사가 될 수 없고 또 사랑과 봉사도 받은 대로 실천하는 본분이고 복을 더 받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더 후히 주신다(눅 6:3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일”이란 개념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일은 곧 예수님을 믿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을 믿는 일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이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고 ②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③ 또 모든 일을 예수님의 중보로 성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요 14:13)”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는 말씀이나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 9:22, 16:28, 막 5:34)”는 말씀도 역시 믿음 따라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④ 또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좋은 믿음이나 큰 믿음 갖는 것을 퍽 좋아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말씀 능력을 믿는 믿음을 보셨을 때(마 8:10) 가나안 여인의 소원하는 큰 믿음을 보셨을 때(마 15:28) 그리고 제자들이 신앙 고백하는 믿음을 들으셨을 때(마 16:16) 기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잘 믿는 일을 가장 으뜸 되는 일로 여기셔서 잘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를 믿는 일”이 무엇이냐? 하실 것입니다. 행동에 반대되는 고백하는 지식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고 하셨으니 까요(약 2:22, 26).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잘못된 지식을 가져도 안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의 제자들의 반영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니까 나를 믿으라”하셨을 때 대답하는 말이 “우리로 보고 믿게 할 표적이 무엇입니까?”하면서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만나를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은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표적을 보여 주어야 믿지 않겠느냐? 는 뜻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내린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이다. 그때에 그 만나가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이었던 것처럼 내가 바로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인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할 때 예수 믿는 일은

1)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고,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고,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임을 알고,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아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는 길은 성경뿐입니다(요 5:39). 신앙고백은 핵심적인 교리만 아는 것이지만 믿음 그 자체가 하나님 지식을 근거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를 많이 아는 것이 믿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믿음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 생활이 일치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갖고 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에 풍성한 하나님 지식을 갖고 또 실천을 동반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깊은 관계와 신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12과 완전한 자 되는 능력 (골 1:28~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완전한 자 되는 능력”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1) “우리가”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우리가”란 골로새서를 발송한 바울사도와 디모데(골 1:1)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여러 교회를 지도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2) 이분들이 “예수님(그를)을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하시므로 복음 사역 자들의 수고는 전파와 권면과 지혜를 동원한 가르침이요 이 가르침의 목적은 “각 사람을 완전한 성도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각 사람”이란 말씀이 세번이나 강조되고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음미하시면서 “저희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입었는가?”하는 것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은혜를 많이 받으신 분이지만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자로 세움 받기 위하여 자신에게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완전 한자 (하나님이 보내실 때 인정하실 만한 자)되는 노력을 하면서 복음 사역 자들의 권면과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유명한 목사님의 책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란 분으로 현실 교회 성도들이 실감 있게 알아야 할 내용들을 많이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2. 그분이 쓴 책은 여러 권이었는데, 당신은 진정 신자입니까?라는 책에서 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실제적으로 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관념적이란 그렇게 듣고 느끼기만 할뿐 신앙의 모범 자들처럼 살아보려고 실제적인 생활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아르헨티나”에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 ② 젖만 먹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어린이처럼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을 다치고 와서 울면서 위로 받고 치료받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믿음 약한 성도가 항상 그런 식으로 교역자를 의존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가 많으며 그 의존 생활이 마땅한 자신의 입장 인양 생각하니 언제 십자가의 군병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십자가의 군병으로 비유했을 때 군인은 더워도 군복을 벗을 줄 모르며 높은 산이나 강도 신속하게 통과하고 사치할 틈이 없으며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용기 있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 입장에서 십자가의 군병으로 성장해야 되는데 그런 교인이 얼마나 되는가? 라고 한 것입니다. ③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계신 동안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의 집사람에게 세례를 준 것을 기억하시며 그들 이외에 아무에게도 세례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신다고 하셨으니(고전 1:14, 16)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문제화된 교인들이 자신에게서 세례받은자들이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신 말씀이며 바울사도는 고린도에 1년 6개월 계신 일도 있었고(행 18:1~11) 또 3차 전도 여행 때도 가신 일이 있었지만(행 19:21, 20:1~3) 그 기간 내에 세례 받은 자가 희귀함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신자, 완전을 기하려는 자에게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세례 교인이면 당연히 완전을 기하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성도는 결혼한 신부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부가 친정을 포기하고 호적을 파 가지고 시집을 가는 것처럼 그렇게 육정과 현실을 못박고 결혼하듯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며 신랑에게 집이 있으면 그 집이 신부의 집도되고 또 차가 있으면 그 차도 신부의 차가 되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하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고 ⑤ 또 기도를 잘하라는 의미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 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된다”는 책도 보았습니다.

3.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완전할 수 있을까요?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넣듯이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데 교리나 지식이나 성경 연구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모든 이에게 순종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하며(책명)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생활에 받아들이는 일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아무쪼록 더 잘 믿기 위하여 개혁적인 변화의 생활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13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 (눅 23:44~54) 목록으로


이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이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된 말씀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날”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다 잘 아시는 사실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시고 토요일에는 그 시신이 무덤에 계셨고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날짜로는 3일만에 부활하셨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하루 반만에 부활하신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에 운명하셨고 주일 새벽 3시경에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시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세계 각국이 자정(밤 12시)으로 정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풍속은 해지는 시간까지가 그 날이요 해진 다음부터 다음날로 계산하였습니다. 출 12:18과 민 9:3~5에 그렇게 나타났고 본문54절에서도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하신 것이 바로 예비일인 토요일을 해진 다음부터 계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첫날 첫시간은 해가 진 때부터이기 때문에 그 저녁 시간에 유월절 의식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2.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4복음서에 예수님의 행적이 다 기록되었는데 4복음 전체를 대조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역사적 시간 순위로 살피는 것은 퍽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연구 대조하여 정리한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눅 1:3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차례대로 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을 기둥으로 세우고 다른 복음서의 말씀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예수님의 마지막 날의 행적을 살피는 일도 역시 누가복음을 참작한 것입니다.

3. 목요일 해가 진 다음에 예수님은 성만찬을 가지셨습니다(22:14~18). 성만찬 준비는 해지기전에 하셨을 것입니다(22:7~13).성만찬에 이어 겸손에 관한 교훈과(22:24~30)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요 13:4~20) 가롯유다가 합석한 자리에서 물러나고(22:21~23)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고(22:19~20)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할 것에 대한 예고와 각종 교훈을 하셨습니다(22:31~38, 요 14:1~17). 여기까지는 최후 만찬의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요

4. 그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22:39~46). 해 진 후에 성만찬과 교훈을 끝내시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가셨으니까 밤 10시쯤 도착하셨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세 차례의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요 1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기도를 끝내셨을 때에 가롯유다를 앞세운 대제사장의 종들(이는 성전의 무장한 군과들임;눅 22:50~52)이 와서 예수님을 붙잡아 종교 재판소로 끌고 간 것입니다(22:47~53).

5. 그래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도 동참) 앞에서 심문을 받고 또 공회로 넘겨졌습니다(22:63~65). 그 때에 예수님은 조롱을 받으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22:54~62).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22:66~71, 막 14:64).

6. 그 다음에 다시 빌라도 총독 관저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사형집행의 허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요 18:31). 이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종교인들의 시기로 피소당한 줄로 알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23:1~5, 막 15:1~8). 그 당시에 빌라도는 유다 총독으로 관청은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소란을 막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자주 거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갈릴리(예수님의 고향)와 뵈뢰아 등을 다스리는 헤롯왕(대헤롯의 아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재판관이 되게하여 함께 하였고(23:6~12) 빌라도가 석방시키려고 노력을 두번이나 하였지만(23:13~25, 요 19:4~16) 결국은 백성들의 충동적 요구 때문에 사형에 넘겨 준 것입니다(23:13~25). 이 과정이 새벽부터 아침까지 진행된 것입니다.

7. 그 시로 예수님은 골고다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그때가 성경에는 3시요(막 15:25) 여섯 시간을 달려 계시다가 제 9시(눅 23:44)에 운명하신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날이 예비일인 고로 안식일 되기 전에 시체를 없애기 위하여 그 날 해지기 전에 장사를 한 것입니다(눅 23:50~54). 예수님의 고난의 하루를 기억하시고 성경 공부에 열중하심은 물론 십자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고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4과 예수님 부활의 타당성 (마 28:1~10) 목록으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 부활의 타당성”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만 하는가? 하는 제목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최초에 천사가 증언한 말씀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이(생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하였고, “그의 누우셨던(빈 무덤)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할까요?

1.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행 3:15, 요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이니까 당연히 자기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언대로 응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는 성경이 예언하셨고(시 49:9) 예수님 자신도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마 17:23, 20:19).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는다면 성경도 거짓으로 드러나고 예수님도 거짓말하신 분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의 확증을 위하여 부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낙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3년이나 따르고 고생한 제자들이 어디 가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시자 “갈릴리에 가서 모든 제자들을 만나시겠다(7절)” 고 하신 것입니다. 평소에 소망의 말씀 주신 것을 그대로 입증하여 다시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 마귀와 악한 자들에 대한 승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귀와 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마귀와 인간에게 공포를 주는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죽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지만 마귀의 지도를 받는 악인들을 죽임을 도구로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악한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끝나셨다면 결국 마귀와 악인들에게 패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악인에 대한 승리자가 되시기 위하여는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고전 15:56, 57).

5.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하셨으니까 당연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눅 24:26에 보시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생각하여도 “하나님 뜻대로 고난 받은 자는 영광도 받아야 한다”는 뜻이요, 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살아나심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6. 십자가의 제사를 드리신 후에 하늘 보좌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열납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이것은 마치 제단에서 흘린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서 뿌리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레 16:17). 고전 15:24에 보시면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하신 말씀이 바로 제사드린자의 열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구원받은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 14:2에 보시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가셔서 성도가 앉을 좌석을 준비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속죄 사업을 완성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있을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은 천국 건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8. 성령님을 보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15:26, 16:7에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서 보내실 성령님”이라 하셨고, 또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께로 가셔야만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을 보내시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9. 성도에게 부활을 주실 첫 열매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며(고전 15:20)

10.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한 중보자요, 통치자가 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행 7:55, 히 12:2, 벧전 3:22). 예수님 부활의 타당성 10가지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15과 책망과 대책 (삿 10:10~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책망과 대책”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잘못을 책망하셨으며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중 사사 시대에 있었던 일로 사사 기드온시대 이후 돌라와야일이 죽은 후에 백성들이 또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므로 불레셋과 암몬의 침략을 받아 18년을 학대받으므로 괴로울 때 비로소 바알신 섬긴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0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알신 섬긴 것을 회개하며 부르짖어 회개하였다”하셨고 그 다음 11절~13절은 책망의 말씀이요, 14절~16절 말씀은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대책에 대한 말씀이 기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책망하신 말씀은

1)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생활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내가 애굽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자손과 불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않았느냐?”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왜 너희가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생각지 않느냐?는 책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을 잊어서는 안되며 또 사사 시대에 하나님이 여러 차례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잊고 살면 책망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2) 기도 응답의 은혜 잊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항상 응답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기도를 통하여 받은 은혜는 알게 모르게 퍽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기도 응답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 12절을 보시면 “너희가 압제를 당할 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어째서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꼭 기도 응답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하기를 마지않아야 할 것입니다.

3) 다른 신 섬긴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13절에서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이 다시는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른 신은 바알과 아스다롯과 아람, 시돈, 모압, 암몬, 불레셋의 우상 신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재물의 신, 자기 우상 신, 명예의 신, 건강의 신, 세상 향락의 신등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직장이나 자식 출세나 지식이나 주택을 우상처럼 섬기는 예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면 반드시 그런 생각에서 멀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 섬기는 것을 책망하셨는데

2. 그러면 이런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1)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의 힘으로는 일이 성취될 수 없음을 먼저 확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14절의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환난 때에 구원하나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2) 15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게 하거나 인간 방법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3) 15절 하반에서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기도는 해결 만능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부족한 기도는 응답이 더딜지라도 응답이 더딘 기도를 통하여 회개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도는 하나님보다 더 대단한 것은 없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안 알아준다 하여도 시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5절). 이렇게 곤고한 중에서라도 다른 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뜻에 맡기며 간절한 기도와 우상을 버리는 회개와 봉사가 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베푸셔야 할 일을 인하여 근심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징계하시던 뜻을 돌이키시려니까 마음이 아프신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책망 받고 회개하는 것을 귀한 일로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6과 교회의 사명 (행 2:37~4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시면 교회의 사명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이고 ② 서로 교제함이요 ③ 떡을 떼는 성찬이고 ④ 기도에 전혀 힘쓴 사실입니다. 여기에 ⑤ 예배의 사명 ⑥ 선교의 사명 ⑦ 봉사의 사명을 첨부하여 7가지 사명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교회의 사명은 예배에 있습니다. 요 4:23에서 “하나님은 심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영적 제사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의식 절차보다 신앙적인 마음을 드리는 영적 교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배를 정성껏 드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의 사명입니다. 행 1:14에서도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하셨고, 또 마 18:19에서는 “합심 기도가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마 26:41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하셨고, 예수님도 기도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마 4:2,11). 교회에는 기도하는 성도가 많아야 시험이 적고 하나님의 일이 순순히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 한사람이 반드시 기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각오로 임할 때 교회가 기도하는 사명을 이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례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식과 성찬 예식이 바로 성례입니다. 세례를 받아야 교인이 생기고 교인이 생겨야 교회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 예식은 말씀의 교훈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영적으로 생활적으로 풍성하게 힘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로 신앙고백을 확고히 하여 인을 치고 성찬 예식으로 십자가 중심 생활에 가까이 나가므로 영적 은혜를 더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나 기도는 개인도 시행할 수 있지만 성례만큼은 교회와 성직자가 있음으로써 시행할 수 있습니다.

4. 전도의 사명입니다. 마 28:19에서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셨고, 행 1:8에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하셨으며 지금 읽으신 본문의 앞부분 말씀이 바로 전도한 말씀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언하였고, 33절에서는 부활을 증언하셨으며, 35절에서 승천을 증언하였고, 33절에서는 성령 강림을, 36절에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였고, 38절에서 회개와 세례와 죄사함과 성령의 은혜를 증언하였습니다. 또 40절에도 보시면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다는 말씀이 곧 전도의 사명을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고 돌아온 제자의 수가 3000이나 더하였습니다.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였고 성령님의 역사가 강한 때이니 만큼 그만한 전도의 결실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먼 곳까지 전도에 충실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사랑과 친교의 사명입니다. 42절에서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며”하셨고, 46절에서는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하셨으니 여기에 “떡을 뗀 것”은 성찬으로 “음식을 먹은 것”은 친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욕심과 투기와 교만을 버리고 순수한 봉사자로서 원수도 사랑하는 폭 넓은 자세를 취하는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6. 봉사의 사명입니다. 44절에 보시면 봉사란 용어가 필요 없을 만큼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것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으니 교회는 곧 남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현실 교회는 자기가 쓰는 것이 너무 많고 남에게 인색한 것이 문제입니다.

7. 가장 중요한 것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성경과 신앙의 교육입니다. 교회의 큰 사명이 진리를 보존하고, 해석하고, 밝혀, 자세히 가르치고(빌 2:16, 눅 24:27) 다 증언하고, 또 모든 말씀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행 5:20, 계 1:2, 마 4:4). 따라서 증언자의 사명도 막중하고 배우는 성도들도 성경 전부를 일점 일획까지 다 살피도록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1:10~12).

8. 진리 보존의 사명입니다. 이는 성경의 원뜻을 가감없이 보존함을 뜻합니다(계22:18~19). 요즈음 번역의 문제로 논란이 많습니다. 따라서 원문과 번역을 최대한 보존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8가지 사명을 말씀드렸고 그 중에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 사명이 중한 것을 강조해 드렸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명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명에 이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제17과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 (미 6:6~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미가서의 요절이자 구약 성경의 요절이라고 합니다(Knud Son).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기독교의 본질 표현이요, 성도의 기본적 생활 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1)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① 죄인을 그냥 용서하시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이고 ② 십자가 대속의 방법을 쓰신 것이(시 53:4) 하나님의 최고 사랑의 표현이고(요 3:16) ③ 또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이 최후의 겸손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2:5~8). 또 공의, 사랑, 겸손은 하나님의 기본 속성(본질적 성품)에 속하는 것입니다(욥 34:12, 요일 4:7, 마 11:29).

2)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최고로 높입니다(롬 11:36). 그리고 계명의 으뜸으로 사랑을 강조합니다(마 22:36~40). 또 자시 부정하는 겸손을 강조합니다.

2. 본문 말씀에서 배울 것은

1) 미가 선지자는 주전 700년경의 선지자로 이사야 선지자와 비슷한 시대에 예언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당시의 사회에 문제점이 있었음을 지적하였으니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에 오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오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 필요한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백성들 중에는 의식적인 제사나 값있는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이 무조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년된 번제물(아담한 제물), 강수 같은 기름(값진 제물), 심지어는 영혼의 죄를 위하여 맏아들을 값으로 쳐서 헌납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의 제사보다 실제적인 생활의 제사를 더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식보다 정신에 있고 물질보다 생활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사 1:13,16, 호 6:6, 암 5:24).

2) 따라서 이런 상태를 치료하는 방법은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성실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① 공의는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지 않고 같은 입장에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상대하며 의인과 악인에 대하여 정당하게 상대하고 대중을 대표하는 입장에서도 명분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공의롭게 행하려면 상당한 지혜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공의란, 자기 생각에 옳은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법칙을 잘 지키면서 대중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시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공의 시행에 성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사랑의 실천입니다. 성경에는 “인자를 사랑함이라”하셨는데 이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人子”가 아니고 어질 인(仁)자와 사랑 자(慈)자이기 때문에 어질고 사랑스러운 심덕과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 계명의 강령이니까 당연히 신앙 의식에 앞서서 정의와 사랑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공의는 잘못을 책망하는 것이고 사랑은 잘못을 덮어 주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잘못을 덮어 주는 것이 불행을 가중시킬 수도 있고,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책망을 안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와 사랑은 성질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공의 실현을 요구할 수 있고, 공의 실현을 위한 채찍이 사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과 공의가 아울러 시행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공의가 사랑보다 당연히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사 1:17, 미 6:8) 공의보다 사랑을 앞세운 말씀도 있으니까(호 12:6, 암 5:15) 거기에도 선후를 따질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에 사랑과 공의가 아울러 성취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복종에서 동행은 하나님과의 연속되는 영적 친교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공의와 사랑이 넘치고 겸손과 자기 반성이 넘치며 늘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갖는 생활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18과 여호수아의 신앙 (수 24:14~18) 목록으로


이 시간은 “여호수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살핀 다음에 여호수아의 신앙생활의 특징 몇 가지를 살피시므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가 110세로 세상을 떠날 무렵에 그 백성들에게 유언 격으로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 보시면 “신앙생활을 확실하게 선택하여 확실하게 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아 놓고 몇 가지 훈시를 하였습니다.

1)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14절)” 고 한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나 부모가 자식을 돌볼 때 성실과 진정으로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섬길 때도 진실과 정성을 쏟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애굽의 신이나 아모리인의 신등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는 것 같아도 상당 부분 인간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며 권세, 명예등 현실적인 것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자기의 건강이나 기술을 의지할 때도 있고 또 믿음이 약한 사람은 미신 풍조를 없애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저희들은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는 생활을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15절에서는 “확실한 선택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신이 좋은지 하나님이 좋은지 확실하게 선택하여 하나님이 안 좋다고 생각되면 다른 편을 택하여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택을 바로 하는 것과 비선민과 선민을 확실하게 구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세계에서도 신앙의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을 나타내는 생활로 변화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자신과 그의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

4) 그랬더니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선택한 이유는 ① 자기들의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였고 ② 큰 이적을 행하여 보호 인도하셨으며 ③ 가나안 땅을 주시고 아모리 사람을 쫓아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무엇을 해 주셨기 때문에 섬긴다”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인 신앙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현실 복으로 무엇 무엇을 해 주시지 않아도 창조자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여호수아는 어떤 신앙의 사람입니까? 여호수아는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 지파에서 “눈의 아들”로 태어나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였고 모세의 수종자역할을 하다가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 정착하게 하는 사명을 다하고 110세에 죽었습니다(민 13:8, 27:18~23, 수 24:29).

1) 여호수아는 모세를 성실하게 받든 수종자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계명을 받으러 올라갈 때 아론과 백성들은 산아래 있게 하였고 여호수아만 데리고 갔다가 여호수아를 중간에 머물게 하고 모세 혼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한 후에 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으나 여호수아는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40일을 금식하며) 모세와 보조를 맞춘 것입니다(출 24:13~18, 32:17). 그 입장을 깊이 살피면 큰 충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순종 일관된 생활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입니다(민 14:26~32).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순종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나안 땅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용기와 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12정탐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왔을 때도 다른 사람은 부정적 보고를 했지만 여호수아는 용기 있고 담력 있는 보고로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민 13:~14:). 신앙에는 믿음과 담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나 아간을 처치하고 아이성을 점령할 때도 용기를 발한 것입니다(수 3:11~17, 5:10~15, 6:20~27).

4) 그 외에도 일찍 일어나는 근면과(수 6:17) 치우치지 않는 지조 있는 신앙도 있었습니다(수 1:7~8). 여호수아의 좋은 신앙들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제19과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 (신 6:4~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7절의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자녀 교육 문제를 교훈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말씀은 분명히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하셨는데 현재 우리는 자녀 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교육의 과제는 세상 학문 교육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 교육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 교육, 성경 교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저희들은 이 교육을 교회에 의탁하고 있고 교회는 주일학교 교사님들에게 의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잘된 일인가 할 때 성경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100년전에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때에 어른 중에는 무식한 사람이 많고 또 바쁘니까 성경을 잘 배우지 못했고 아이들은 잘 배웠습니다. 여기에 “아이들이 잘 배웠다”는 뜻은 어른보다 배울 기회를 더 가졌다는 뜻입니다. 여하튼 어른과 아이가 배움의 시작을 같이 하였는데 왜 그 다음에 부모가 그 자녀를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면 주일학교가 교육을 맡았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로는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은 줄로 여기고 그 책임을 교회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0년이나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가 내려온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현재 이 교육이 만족한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1)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라는 것이 성경적이고

2) 만족하지 못한 사례도 많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면 교회가 주일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많은 경비를 소모하고 주교사님들의 노력이 크지만 교사 한 분이 10명 50명을 가르치는 것이 1명이나 2명을 가르치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주일학교 운영상에 문제는 참으로 크고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재정 문제, 주교사 자격 문제, 인사 문제, 행정 문제, 시간문제, 장소문제등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주교 교육의 효과를 받아 신앙이 성장한 예도 허다 할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100년을 끌어왔으니까요. 그런데 그 중에는 겉으로 흘러간 학생들도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주일학교에 안 나가 본 사람이 어디 있느냐”할 정도인 것입니다. 누구라고 지적은 안합니다만, 어릴 적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13년을 교회에 다닌 청년이 자신의 신앙을 확고하게 세우지 못한 사례가 많은 것입니다. 그것은 주일학교가 단체 교육으로 지나가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주 갈리고 가족들은 자녀의 신앙을 교회에 맡겼으므로 등한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우리 나라에 전달해 준 미국, 캐나다, 그리고 장로교 신학의 원산지인 스위스까지 기독교계가 냉냉하여 예배당을 파는 지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기독교 전성기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예배당을 지었을 것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열심이 떨어진 것입니다. 세속의 물결, 과학적 현실의 물결에 휩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나라에 닥치지 않는 다고 보장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비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교회가 담당하는 성경 교육은 점점 어려워 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저는 앞으로 이런 문제들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1) 성경대로 부모가 성경을 배우시고 그것도 부모 자신이 마음에 새기도록 많이 배우시고 확신한 다음에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옛날에는 어른들 중 무식한 분들이 많아서 불가피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부모님들이 다 고등학교 이상을 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역자가 교안을 준비해 드리면 더 편리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나오는 어린이는 반드시 그 이웃 친구의 집에 합류시키면 될 것입니다.

3) 부모가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먼저 배우고 그 깨달은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면 훨씬 능률적이고 또 성경 적이 될 것입니다. 이번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 있는 부모님들은 반드시 자녀에 대한 성경 교육과 도덕적인 교육을 책임지는 시대가 오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0과 모범적 가정 (행 10:1~8)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모범적 가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행복한 가정”은 고넬료의 가정일 것입니다. 성경에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욥의 가정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가장 복된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1. 이 고넬료의 가정은

1)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2) 구제하는 일을 잘하였고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살았으며

4) 기도를 힘쓰는 집이었습니다.

5) 백성을 많이 구제할 때는 경제적 생활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제와 기도를 받으시고 베드로 사도를 보내셔서 성령 충만의 은혜를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2. 저희들의 가정도 좋은 가정이 되기 위하여 힘쓰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1) 우선 온 집이 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합심 신앙을 위하여 힘쓰셔야 합니다. 부모나 자녀가 믿음 생활을 안하여 괴로울 때 믿는 가족이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은 “내가 전도할 자신이 있는가, 내가 빛된 생활의 자신이 있는가, 왜 저 식구가 내 말에 감화를 받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여 먼저 자신의 신앙 무장과 빛된 생활에 자신을 갖고 전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상당한 감화를 주는데도 돌아오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라 하여 다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2) 가족 중에 욕심 있는 사람이 없어야 그 집이 평안합니다. “내가 다른 이웃을 위하여는 특권을 포기 못하여도 가족을 위해서는 내가 우선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을 모든 식구가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른의 결단에 의하여 모든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또 하나님의 은총이 사랑을 실천하는 자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3) 가족 중에 게으른 식구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가족들에게 놀지 않는 습관을 가르쳐서 부지런히 일하고 또 남을 돕는 일에 열심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4) 가정에 어려운 유고가 없어야 합니다. 누가 방탕을 한다든지 사고를 저지른다든지 질병으로 고생을 한다고 할 때에 사람이 잘못하는 일에 대하여는 과감하게 시정하도록 지도하고 또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이요, 질병 등으로 장기간 고생하는 경우에는 온 가족이 그 어려움을 자신들이 져야 할 십자가로 알아서 불평 없이 감당하고 기도하며 그 병든 자에게 항상 위로와 소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과제요, 사람은 그 유고를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로 믿고 해결을 주시는 때까지 인내하며 잘 감당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고난은 결코 불행한 것만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창 41:37~44, 욥 23:10, 시 119:71, 롬 5:3). 모든 성도의 가정이 다 평안하고 복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하시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결론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모범적 가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모세의 가족들입니다. 출애굽 무렵에 바로 왕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어려운 실정에서 살았습니다. 노역은 노역대로 하면서 아들이 낳아지면 죽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경건한 가족으로 아므람과 요게벳(출 6:18~20)이 있었고 거기에 딸 미리암과 아론, 모세 형제가 있었습니다.

1) 모세가 출생했을 때 직접 죽이지 못하여 역청을 바른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운 것은 그 부모의 신앙 행위였습니다. 악한 왕명을 어긴 신앙 행위였고 그 떠내려가는 모세를 하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2) 이때 하나님은 바로의 딸 공주를 그 곳에 보내어 모세를 건지게 하셨는데 공주가 유모를 구할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 광경을 살피다가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천거한 것은 가족의 사랑의 결과요

3) 모세가 어머니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은 다음에 왕궁에 들어가 애굽의 학술을 배웠으니 여기에는 부모의 신앙적 교육이 앞섰던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지도자가 되고 아론은 대제사장이 됐으며 미리암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교육이 있는 모범적 가정이므로 소개를 한 것입니다.

 

제21과 성령의 소욕 (갈 5:13~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 본문 말씀을 근거로 “성령의 소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이 본문 말씀에는 저희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 많습니다.

1) 13~15절에서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또 율법의 강령에 따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할 것이니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고 16~18절의 말씀을 보시면 ① 성령을 좇으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 ②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요 또 율법 아래도 있지 않을 것이라 ③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스리며 대적이 되므로 “그 한쪽은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고

3) 19~20절까지는 육체의 소욕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는데 전부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죄악을 열거하셨고 현실 정욕에 빠지는 내용이며 그런 자들은 “천국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4) 22~26절에서는 ① 성령의 9가지 열매와 ② 예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과 ③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되 헛된 영광을 위하여 격동하거나 투기하지 말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성령의 소욕”은 어떤 것일까요(17절)? 저희들이 육체의 소욕을 떠나서 성령의 소욕에 사로잡힌다면 어떤 욕망을 갖게 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1) 육체의 욕심이나 헛된 영광은 단연코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거부(대적)할 것이며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며 헛된 영광을 위하여 격동 투기하지 않을 것이라(갈 5:24~26)”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나 세상에 관한 것이 다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죄를 멀리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죄를 짖게 하지만(19~22절) 성령의 소욕은 마귀를 대적하고 또 성령님이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에(요 16:8) 능히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엡 6:17). 그래서 죄와 불의를 멀리 삼가게 되는 것이요

3) 진리의 말씀에 끌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고(요 14:16) 진리를 증거하시며(요 15:26) 성경을 가르치시고(요 14:26)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6:13). 성령님과 진리의 사역은 서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갖는 성도는 곧 성경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욕구는 물론 하나님을 찾는 욕구, 하나님을 사랑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시 63:1에 보시면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갈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육체와 현실욕을 떠나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6:33).

5) 예수님의 도덕성(인격성)을 닮고자 하는 의욕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예수님의 인격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성령의 9가지 열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열매를 분석해 보면 전부 도덕성의 열매들이고 지식의 열매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며 예수님의 도덕성을 닮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사랑이 없고 기쁨이 없고 화평함이 없고 인내가 없고 자비와 양선이 없고 충성과 온유가 없고 또 분수와 균형을 지키는 절제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정상적이 못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욕구는 이런 도덕성을 갖추게 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수록 더 참신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6) 전도의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행 1:8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전도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소욕은 진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도열이 함께 타오르게 되는 것이요

7) 마지막으로 성령의 소욕은 자유 누리는 욕망입니다. 이 자유는 개인의 자유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 8:32에 근거한 진리 안에서의 자유, 즉 어떤 상황에서라도 소망을 갖는 자유(고후 4:8~9, 갈 5:13)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꼭 이와 같은 성령의 소욕이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22과 루디아가 변화를 받음 (행 16:11~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루디아가 변화를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루디아”란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두아디라”에서 자주 장사를 하던 여인입니다. 14절에 보시면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고 하셨습니다. ① “두아디라”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중 한 교회의 이름으로 소아시아의 한 지역 이름입니다. ② 루디아는 자기 고향인 두아디라에서 자주 장사를 하는 여인인데 이 “자주”란 포목을 의미하고 때로는 물감 종류를 말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③ 그런데 이 여인은 “하나님을 이미 공경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다시 변화된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공경한 것이 유대교 종교의 하나님을 공경했거나 아니면 그가 세례를 받기 전인 것을 보아서 소아시아 지경에 전파된 복음을 피상적으로 듣고 관념적인 신자처럼 확신 없이 하나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④ 그 후에 루디아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인 빌립보로 이사를 가서 역시 자주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⑤ 그리고 “루디아”가 은혜를 받던 날, 그는 빌립보 지역의 한 강가에서 여인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루디아는 모인 여인들에게 자주 상품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이 루디아에게 복음이 어떻게 전파됐는가? 할 때

1) 복음 전파는 하나님이 복음 사역자를 보내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롬 10:14에 보시면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어찌 전파하리요”하셨고, 또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하셨고, 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하셨기 때문에 루디아의 귀에 복음이 들려지기까지는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과 전도자의 수고가 따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빌립보지역의 “루디아”에게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기 위하여 ① 일찍이 바울사도를 이방 전도자로 택하셨고(행 9:15) ② 그를 이방 지역에 파송하셨으며(행 13:1~3) ③ 바울은 2차 전도여행때에 빌립보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실 때 소아시아 “드로아”항구에서 배를 타시고 “사모드라게”라는 에게해의 섬을 거쳐서 “마게도냐” 북쪽 항구인 “네압볼리”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네압볼리”항구는 작은 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30리쯤 들어간 마게도냐의 첫성 빌립보에 유하시게 된 것입니다. ④ 바울사도는 안식일에도 기도하고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강가에 나갔다가 모인 여자들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⑤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이 말씀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셨습니다. “말씀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셨다”는 점에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성실하게 듣지 않을 때는 성령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행 10:44). 그래서 “루디아”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했지만 그 때에 말씀을 들으면서 심령이 열려 바른 깨달음과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사도의 마게도냐 전도에서 처음 얻은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 곳에서부터 사역자를 파송하여 만나게 하신 것을 보면 참 놀랍고 신기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그런 식으로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까(행 8:30)?

3. 그렇다면 처음 믿게 된 또 처음 은혜를 받게 된 “루디아”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1) 그는 열린 심령을 가지고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2) 그가 들으려고 애쓸 때 성령님으로부터 심령의 열림을 받았습니다.

3)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그는 또 바울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 자기집 식구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4) 온 식구가 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인생관을 바꾼 것입니다. 인간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현세욕중심에서 내세욕중심으로 변한 것입니다.

5) 그리고 즉시 전도의 사명을 깨닫고 바울 일행을(우리에게;15절)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있게 하므로 선교를 돕고 자기 집을 예배 처소로 삼아 빌립보교회의 시초를 삼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 은혜받은 신앙은 이렇게 확실하고 신속하게 변화를 일으키고 충성과 선교에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저희들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23과 예수님의 가난하심 (눅 2:6~7, 12) 목록으로


이 시간에 “예수님의 가난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시면 예수님의 가난한 생활의 부분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① 성경 어디에서 예수님의 가난한 생활이 나타났으며 또 얼마나 가난하게 사셨는가?하는 점을 살펴보신 다음 ② 예수님이 왜 가난한 집에 오셔서 일생을 가난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는가? 하는 점 등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가난하셨다는 증거

1) 그 집이 가난하여 예수님 탄생시에 베들레헴에서 사관(여관)을 정하지 못하고 어떤 집 마굿간에서 출생하여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눕게 하셨으니 “이것이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표적”이란 말은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한 말로서 특별한 사항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구유에서 나시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실 자리가 없을 만큼 가난하셨다”는 뜻입니다.

2) 나신 지 8일만에 결레식 날이 되어 그 부모들이 모세의 법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결레식(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할 때 눅 2:24에 보시면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하셨으니 본래 넉넉하면 1년된 어린양과 함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레 12:6). 그러나 힘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는 비둘기만 드려도 된다(레 12:8)고 하셨습니다. 그 부모가 비둘기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을 보면 역시 그 집이 가난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요

3)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유하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여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21:17~18). 예수님은 12제자를 파송하실때도 두벌 옷이나 주머니나 양식, 은금(돈)을 갖지 않게 하셨으니(마 10:9~10, 눅 9:3) 이것은 가난한 생활을 하시면서 가난한자들의 입장에 서시고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예수님자신도 양식의 예비없이 사셨고 따라서 시장한 고난을 맛보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9:58). 이것은 주택을 소유하여 일정한 곳에 사시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아무리 추워도 수도관이 얼지 않습니다. 따라서 찬바람을 피해야 하는 특수한 겨울 난방 장치가 필요 없습니다. 천막과 두꺼운 담요를 가지면 겨울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집을 가진 사람은 부자에 속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으셨음은 집없는 가난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사후 대책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사후 대책이란 자신의 장례비와 모친 마리아의 부양 대책입니다. 중국 사람은 반드시 장례비를 예비하고 산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부양 대책을 세우지만 예수님은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마 6:34). 그래서 돌아가신 후 무덤 제공과 장례는 요셉이 제공하여 부자의 무덤을 쓰시게 되었습니다(마 27:59~60).

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두벌 옷을 갖지 않으신 중에 속옷은 호지 않은 옷을 입으셨으니(요 19:23) 이것은 모양 있게 가공한 옷이 아니란 뜻이요, 옷의 용도와 주무실 때 덮는 소용을 함께 쓰신 듯도 합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부요와 사치를 떠나신 분이었습니다.

2. 저희들이 이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가난을 자랑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1) 빈천한 자 편에 서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신 것이 아니고 빈천한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함께 고생을 나누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만유의 주로써 모든 것을 누리실 수 있으나 그것을 포기하셨으니(고후 8:9) 물질을 갖고 누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박애 정신이요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 우리 성도는 가난으로 실족하면 안되고 가난을 은혜의 부족으로 느껴서도 안되며 오히려 신령한 은혜를 더 받아야 한다는 소망을 가지시고 예수님과 생활의 보조를 맞추어 용감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4과 하나님의 사역과 축복 (히 13:20~21) 목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축복”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보시면 목사가 성찬 예식을 한 다음에 이 말씀으로 축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역 4가지와 축복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1)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과 모든 성도들의 최고 목회자가 바로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모든 종들을 거느리시는(계 2:1) 목자장이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목자는 자기 교회의 목사 혼자인 것으로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 목회자가 훌륭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는 다 예수님이 부리는 부교역자와 같은 것이요, 예수님이 모든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친히 주관하심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목자장이요 큰 목자이신 예수님께 의지하여 목회하고 모든 성도의 문제들도 역시 예수님께 의탁하여 처리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훌륭하다 하여 예수님이 베푸실 은혜를 자기가 줄 수 없는 것이고 어느 목회자가 부족하다 하여 예수님이 자기의 양을 손해보도록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중계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반드시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란 것을 확신하시고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주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피를 왜 “영원한 언약의 피”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①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시기 때문이고 ② 예수님의 피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며 ③ 그 피의 공로가 영원토록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사이에서 피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이 수치스러운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창 3:21). 즉 메시야의 구속을 언약하신 것인데 이 언약은 약 4000년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실현되었고, 또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속받은 성도의 구원의 은혜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영원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의 피를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 생명력은 예수님이나 성령님에게는 없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끌어 내셨다”는 뜻은 구원의 계획이 그렇게 실현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애 3:33에 보시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고난은 필요에 의하여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은 본래부터 모든 인생, 특히 성도들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까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평강이 주어짐을 믿고 의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사역자인 신분으로 축복한 것인 만큼 효력이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마 10:12).

1) 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성도 되기를 축복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온전하고 합당하게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라는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성도가 되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 앞의 즐거운 것”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뜻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셨으니”에서의 “우리”란 성도를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리게 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3)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기를 축복하였습니다. “아멘”은 꼭 그렇게 되기를 다짐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축복은 현실적, 인간적 요소가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귀한 복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성도들에게도 성취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5과 저주받을 일을 삼가자 (신 11:26~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저주받을 일을 삼가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서

1)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인생들 앞에 내 놓으시고 이를 선택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신 30:19에도 보시면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복 주시려는 대상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복종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27절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듣는다”는 말씀은 곧 “복종한다”는 뜻입니다(신 28:1).

3) 하나님은 복 받을 자에게 복을 주셨다가 합당치 않으면 다시 화를 주실 수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신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리심 산은 세겜 남쪽에 있고 에발 산은 세겜 북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짧은 기간 내에 축복과 저주를 바꾸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2. 복과 화, 축복과 저주에 대한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복”이란 잘되는 것, 행복해지는 것이고, “화”란 안되는 것이고, 불행한 것이며,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이고, “저주”란 화를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복이 무엇이며 화가 무엇인지를 잘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가 복이 무엇인가?를 판별할 때는

1)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복이고

2)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복이며

3)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현실적 인 것들에 대하여는 복이 되는지 안되는지 잘 알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잘 먹는 것이 복인 것 같지만 잘먹고 너무 살찌면 화가 되고 부자 되는 것이 복이지만 그로 인하여 믿음이 떨어지면 화가 되고 육체의 병고가 화인것 같지만 그로 인하여 신앙이 살면 오히려 복이 되고 환난이 화인것 같지만 그로 인하여 연단을 받으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현실 복에 대하여 어느 것에 치우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는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본문 제목대로 저주받을 일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저주”란 말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저주를 멀리하기 위하여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1)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예수님 아니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행 4:12). 갈 1:8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단자들이나 거짓 증언자들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2)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저주를 받습니다(갈 3:10). 율법은 정죄하는 법이고 심판하는 법이며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못 지키니까(갈 3:11)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주의 종착역은 지옥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본문 28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신을 좇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불순종하거나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저주받을 일이요

4)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우상을 섬기면 저주를 받습니다(신 27:15). 조각물도 우상이지만 사람이 만든 물질, 명예 같은 것도 절대로 우상이 되지 않도록 배척하셔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 앞에 약속한 언약을 배반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서원한 예물을 드리지 않고 흠있는 것을 드린다든지(말 1:14) 하여 약속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런 류에 속하는 것입니다(행 5:3).

6)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 할 때 저주를 받습니다(말 3:9). 아간과 가롯유다가 그 실례인 것입니다(수 7:1,24, 요 12:6). 저희들은 하나님의 물질에 대하여 구별을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삼상 3:13).

7)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지 않고 오히려 이적행위를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삿 5:23에서 “메로스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적의 장수의 도망하는 길을 베풀어 준 죄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8) 不孝子가 저주를 받고(창 9:25)

9) 부모를 속인 자가 저주를 받고(창 27:17)

10) 부모를 경홀히 여긴 자가 저주를 받고(신 27:16)

11) 교만한 자가 저주를 받고(시 119:21)

12)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6:22). 아무쪼록 저희들은 복받을 일만 하고 저주받을 일은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26과 덕을 세우는 교회 생활 (엡 4:29~32) 목록으로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의 제목은 “덕을 세우는 교회 생활”입니다. 성경에는 “덕을 세우라”는 말씀이 많고 “덕을 세운다”는 것은 대인관계에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다시 설명 드리면 다른 사람을 손해 보이지 말고 유익하게만 상대해 주는 것을 “덕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4:19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하셨고, 고전 14:4에서는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신 다음에 교회에 덕 세우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29절에 보시면 “말로 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①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 ②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만 하여라. ③ 듣는 자가 은혜를 느낄 만한 말만 하라. 하시므로 말로 덕세울것을 교훈 하셨고,

2) 30절에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구속의 날까지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여 구원받을 확신을 갖도록 인쳐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으려면 성령님이 감동해 주시는 뜻대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경을 일깨워 주시고 성경대로 시행할 것을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거나 거역하면 그 일시적인 거역에 한하여 성령님은 근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시켜서 성도에게 유익이 있을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31절에서 모든 악한 일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일이란 남을 해코자 하는 악독한 계획, 노함과 분냄, 떠드는 것, 훼방 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짧은 순간이라도 이런 악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마지막 32절에서는 “사랑을 베푸는 노력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내용이 인자, 긍휼(불쌍히 여김), 용서인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에서는 말을 잘하여 덕을 세우는 일, 성령님의 감화에 복종하는 일, 모든 악한 것을 떠나는 일,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말씀하셨으니까 잘 유의하여 실현하셔야 할 것이요,

2.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뜻은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을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유익 대신 불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낙망을 주고 다른 사람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부담을 주는 것이 바로 불이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1) 교회에 덕을 세우는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주일을 안 지키면 벌써 교역자와 이웃이 근심하게 됩니다. 목사는 새벽 기도회에 안 나가면 교인들이 “아파서 못 나오시나”하고 염려하실까봐 어렵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주일을 못 지키면 신앙상, 연고상, 염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 모임에 참석을 하셔야 합니다. 예배 모임, 봉사 모임, 각 기관의 행사 모임 같은 것입니다. 억지로 전도 회원 되라 하여 억지로 모이게 하지 말고, 자원하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쁘고 피곤한 중 지나친 모임과 책임을 강요하여 오히려 낙망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제직회 회원이면 회원 노릇을 잘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3) 겸손한 처신을 잘 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타인을 존중하라(빌 2:3)”고 하셨고, 또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앞에서라도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타인을 존중하는 표시를 확실하게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4) 화평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화평하려면 두 사람이 서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10사람, 100사람이 화평하려면 역시 많은 사람들이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서로 화평하기 위해서는 ① 이해와 겸손과 온유와 용서와 봉사심이 있어야 합니다. ② 또 잘잘못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③ 온유와 겸손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감동을 받고 분이 풀리지 않을 바에는 말을 안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5) 상당한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단체요, 사랑의 단체요, 봉사의 단체입니다. 먼저 믿는 성도가 봉사도 잘 안하고 헌금도 잘 안하면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은혜일 뿐이지만 사람 세계에서는 다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형편대로 봉사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덕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에 덕 세우는 방법 5가지를 꼭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제27과 3가지 권면 (히 10:23~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3가지 권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3절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는 권면이요, 24절은 “서로 돌아 보라”는 말씀이요, 25절에서는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서로 돌아 보라”는 말씀에 중점을 두기 위하여 이 본문을 읽으셨습니다.

1.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대상은 예수님이시고 성경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아니하시고(약 1:17) 말씀도 영원한 것입니다(벧전 1:25). 본문에서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다”는 것은 “아름답고 진실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약속에 대하여 추호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내세와 상급과 심판으로 반드시 최종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과 불공평한 일을 당하여도 내세와 상급과 심판이 있기까지 확고하게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할 가장 큰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고난을 참으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것이 바로 성도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흔들림 없이 믿어야 할 가장 큰 근거가 된 것입니다.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서로 할일”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요 14:34에 보시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셨고,

2) 요 13:14에서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하시므로 서로 봉사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이 “서로 봉사하는 일”에 대한 말씀은 고전 12:28의 “서로 돕는 것”이란 은사의 말씀에서도 강조를 하셨습니다.

3) 그리고 또 갈 5:13에서는 “서로 종노릇하라”하셨고, 롬 12:10에서는 “서로…존경하기를 먼저 하라”하셨으니 역시 종으로 낮아지기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성도의 신분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일 4:8,16,20). “서로 사랑한다”고 할 때에 사랑의 방법은 첫째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고, 다음이 그에게 필요한 것을 보조해 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은 용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악인들의 죄 용서를 구하셨는데(눅 23:34)스데반도 죽을 때 역시 용서를 구하고 죽었습니다(행 7:60). 이렇게 이해하고 도와주고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로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도 돕는 일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서로 돕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일이 목회자를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잘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떻게 목회자를 도울 것인가?할 때 합심해 주는 일과 기도해 주는 봉사가 큰 봉사이고 물질로 돕는 것도 큰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목회자 봉사에 대한 것을 모르는 것이 있어서 이 기회에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목사의 주 임무를 돕는 것입니다. 목사의 주 임무는 기도와 말씀 전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돕는가?할 때 목사가 기도 할 때 같이 기도회에 동참하고 목사가 준비하여 가르치는 교훈에 적극 동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기도회에 합력 하지 못하고 가르치는 교훈에 방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회에 참석하고 열심히 성경 배우는 것”이 목회자를 돕는 일이란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자궁의 혹을 수술하기 위하여 병원에 가면서 “목사님이 오시는 것이 수고스러우니 자기가 와서 기도를 받겠다”하여 시간을 정했습니다. 나는 그 성도가 그 시간에 올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충실하게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기도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예수님도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3.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어떻게 모였습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하셨습니다(행 2:46). 성령 충만했던 시기에는 그랬습니다. 그 후 교회 시대에는 “매 주일 첫날에 모임”을 가졌습니다(고전 16:1). 그런데 왜 매일 새벽 기도회와 수요일 집회를 하는가?하면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여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과 예수님이 새벽기도 모범을 보이셨음과(마 26:41, 막 1:35) 또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행 17:40). 성도가 스스로 성경 공부 잘하고 매일 경성하는 기도 생활을 잘한다면 주일 한번 회집만 하여도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을 스스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수적인 모임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쪼록 견고한 믿음, 서로 돌아보는 일, 모임에 힘쓰는 일을 잘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8과 전도의 의미 (롬 10: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전도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1. 전도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또 승천하시기 직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하셨고, 또 행 1:8에서도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또 본문 15절에서도 “보내심을 받았으면 전파하지 않을 수 없다”하시므로 예수님의 유언적인 지상 명령에 순종함이 되는 것입니다.

2. 전도는 성령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좋은 은사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또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지만(롬 11:35) 전도 사역에 성도를 동참케 하신 것은 성직에 동참시키는 은혜의 직분이며 하나님은 이로 인하여 성도를 복되게 하시고 더욱 큰 상급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단 12: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덕을 보시려고 전도직을 주신 것이 아니요 전도자로 복받게 하시기 위한 은혜의 직분이란 뜻입니다.

3.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한 분야에 속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전도의 대상은 땅 위에 있는 지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요,

2) 그들이 세례를 받기까지만 그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지각이 없는 사람에 대한 구원은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겠지만(마 3:9) 지각이 있는 대상, 즉 듣고 믿고 이해하고 세례를 받을 자에게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막 16:16, 롬 10:14). 또 제자가 되고 세례를 받기까지는 전도 영역에 속하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교육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신 갖고, 제자 되고 세례 받기까지 전도할 책임은 막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도의 전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백성을 인도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롬 10:14~15).

4. 하나님의 선민을 찾아내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구원의 대상을 선택해 놓으셨고(엡 1:5) 특정한 시기에 그들에게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요 3:3). 따라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가(행 13:48) 거듭나는 은혜를 받았을 때만 복음을 영접하게 되기 때문에 전도는 바로 그런 선민을 찾는 방법이고 따라서 거듭난 자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전도는 믿게 하고 구원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에는 수단이 있을 수 없고 수단으로 될 수도 없으며 다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뿐이며 성령의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받은 자는 무조건 믿고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신의 자력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믿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살전 1:10). 불꽃이 없을 때는 아무리 땔감을 던져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꽃이 있으면 땔감을 던졌을 때 타오르는 것처럼 거듭난 생명은 불꽃과 같고 복음은 땔감과 같은 것입니다.

5. 전도는 말세의 기한 섭리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세의 때를 설명하실 때 마 24:14에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온다”고 하셨기 때문에 일단 말세와 재림은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복음을 소개받는 일이 끝나는 시기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손이 못 미쳐서 복음을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요, 일단 말세 전에 지상의 인류는 다 복음 소개를 받은 후가 될 것임을 성경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전도의 의미 5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① 전도는 구원하는 방법이 아니고 구원 받을 자를 알아내는 방법이로구나 하는 것이요, ② 전도의 목표는 사실상 하나님의 선민이며 거듭난 백성이로구나 하는 것이요, ③ 전도와 교육의 영역이 다르니 전도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르쳐서 세례를 받기까지 증언하는 것이고 교육은 제자 되고 세례 받은 자에게 방대한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도에 대하여 오해하기를 “마치 땅에 떨어진 낙엽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것”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전도만 잘하면 전 국민이 다 예수 믿게 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단체가 다 선민이 못된다는 원칙은 없지만 전도가 구원의 방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거듭 난자를 점검하여 모으는 방법일 뿐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하기 위하여 사랑과 봉사를 본 보일 수 있으나 그것도 역시 전도의 방편일 뿐이요 사랑과 봉사가 믿게 하고 구원하는 방편은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9과 스데반의 신앙 (행 6:1~15, 7:51~6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스데반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행 6장과 7장은 거의가 스데반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6:1~6은 스데반과 함께 초대 일곱 집사를 세운 기사요, 그 다음에는 스데반을 모함하는 기록이고, 7:1~50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기록됐으며 지금 읽으신 본문 7장 마지막 부분에는 스데반의 순교 기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행 6장과 7장에는 스데반의 신앙과 사역과 순교가 나타나 있습니다.

1. 스데반의 믿음을 생각하기 전에 몇 가지 살펴야 할 것은

1) 성경에 스데반을 “집사”로 명칭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격자 여섯 사람을 뽑아서 공궤(봉사, 구제;행 6:2~3)를 전담시키기 위하여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보냈다(6절)”했으니 그 업무 성격으로 볼 때 집사가 분명한 것입니다.

2) 스데반이 집사의 직임을 받았다 하여 다른 은사적 사명을 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받은 공궤의 직임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세운 교회적 직임이니까 그 직임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은 사도들의 직임이었을지라도 자신에게 그런 은사가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스데반도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또 행 8:38에 보시면 빌립도 같은 집사로서(행 6:5) 전도는 물론 세례 주는 일까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그들은 사도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서 그렇게 시행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3) 우리는 공적으로 속박되는 직임(윗사람의 지도 감독 아래서 시행하는 직임)과 받은 은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명을 구별하여 시행하심이 좋고 스데반이 집사이지만 다른 일도 잘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직분마다 주 임무가 있고 보조 임무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기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주 임무요, 장로는 다스리는 것이 주 임무요, 집사는 봉사하는 것이 주 임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주 임무를 교회의 질서에 따라 우선 잘 감당하고 다른 사명은 받은 은사에 따라 개인적으로 덕을 세우는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경에는 직분의 승격이란 것이 없습니다. 현실 교회는 잘못 인식되어져서 서리 집사, 장립집사, 장로 등을 대할 때 우열의 성격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에는 신앙의 급수에 따라 직분을 발전시킨 사례가 없고 자격이나 은사의 소질에 따라 한번 직임을 주면 그것으로 종신하였습니다.

5) 따라서 교회에서 주는 직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없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와 장로를 높은 직임으로 아는데 이는 목사, 장로가 섬기는 본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직분은 다 하나님의 종된 직임이요, 또 성경은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고 하셨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 어린이 교사나 장년 교사나 역시 똑같은 존귀한 직임이요, 우열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2. 스데반은 어떤 특징의 좋은 믿음을 가졌습니까?

1)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6:3,5,10). 성령 충만에 대한 의미는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6:3). 지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대처하는 특수한 재능입니다.

3)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6:5).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를 든든히 한 상태입니다.

4) 집사로 안수 받은 사람입니다(행 6:6). 교회에서 공적으로 세움 받은 직분을 가진 분이란 뜻입니다.

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습니다(행 6:8). 이것은 초대 교회 사역자들이 기독교의 모범과 기초를 닦는 동안 여러 직분자들(사도, 선지자, 집사, 전도인 또는 직분 없는 아나니아 같은 분들)에게 특별하게 주셨던 은사들입니다.

6) 그는 천사 같은 얼굴을 가졌으니(행 6:15) 이는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표현을 가진 것입니다. 기독교적 은혜가 너무 충만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행 6:11~14) 천사 같은 모양을 잃지 않았습니다.

7) 그는 대 설교가였습니다. 행 7:이 거의 다 그의 설교인 즉 성경 지식과 증언의 능력이 대단하였습니다.

8) 그는 서슴지 않고 완고한 자들을 책망하였습니다(행 7:51~53). 목회사역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책망입니다. 스데반은 핍박자들을 책망한 것 때문에 결국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9)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고 힘을 얻었으며

10) 순교에 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할 뿐 아니라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순교보다 더 귀한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귀한 신앙을 조금이라도 본받아야 하겠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30과 공의를 일삼으며 (시 15:1~5) 목록으로


지난 시간에 의에 대한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상고하려고 하는 것은 “공의를 일삼으며”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공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공의를 시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해 보려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은 “주의 장막에 거하고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자의 자격”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합당하게 여겨 자기 곁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는 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행하며 진실을 말하고 공의를 일삼으며 이웃에게 참소, 행악, 훼방하지 않고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하나님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서원을 지키고 변리로 대금치 않고(가난한 자 착취 목적으로) 뇌물을 받고 무리한 자를 해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시면 여기에 나타난 대로 행하는 사람이 바로 공의롭게 사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자는 진실하고 악이 없고, 궤사(뇌물)가 없고 의를 의라 악을 악이라고 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는 자를 의미할 것이요, 그런 자는 하나님이 영영 요동치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 성경에는 “공의”를 강조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와 공도를 행케 하려고 그를 택하셨다”하셨고(창 18:9),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대하지 않음이 공의요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므로 공의로우시다(창 18:25)” 또 “공의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시 106:3)”하셨으며, 잠 1:3에서는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하신다”하셨고, 미 6:8에서는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 중요하다”하셨고, 골 4:1에서는 “상전들도 하인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중에서 “공의를 일삼으라”는 말씀이 가장 뜻이 강한 것 같아서 본문을 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은 이 시간부터라도 더 공의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공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공의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1) 이 공의는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시행하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심판의 척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척도(표준)를 가지시고 만유를 심판하실 것이요, 또 현실도 그렇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의를 사람이 시행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도 선악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따라서 인간이 공의를 시행하는 방법은 ① 선악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사 5:20에 보면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 하거나 흑암을 광명으로 광명을 흑암으로 삼거나 단 것을 쓰다 하고 쓴 것을 달다 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선악 분별을 못하면 공의를 시행할 수 없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② 선악에 대하여 바르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여러 자식을 양육할 때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바르게 대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호 유기적 관계에서 유익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자녀에게 과잉 칭찬하는 것이나 잘못하는 자녀에게 과잉 책망하기가 어렵고 또 형제간의 갈등의 원인을 만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선악인의 유기적 관계에서 건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공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여러 사람의 뜻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뜻을 모으면 어떤 개인의 양심과 전혀 반대되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 선거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 양심으로 꼭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좋다”고 했지만 투표 결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공의가 나타났을 때 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죽었는데 조문을 해야 하는가? 안해야 하는가?도 개인적 의견과 국민적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 15:4에서 성도는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망령된 자는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인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김일성 사망에 조의를 보냈으나 국민적 여론에 부딪힌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의는 개인적 의견이나 태도가 아닌 공적 결의의 공평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의에 대한 말씀을 다시 간추려 보겠습니다. “공의는 선악의 제재를 바르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심판의 척도라는 것이요, 인간도 선악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공의의 제재를 받기도 하고 시행도 해야 되는 것이요, 인간이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① 우선 선악 판별을 잘 해야 하고 ② 선을 선이라 악을 악이라 해야 되고 ③ 선인과 악인을 각각 적당하게 대하여야 하고 ④ 또 선인과 악인 사이의 건설적인 관계를 생각해야 하고 ⑤정의를 목표로 하여 개인적 의도와 공적 의도가 다를 때 공적 의도의 성질을 공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공의를 시행도 하고 공의에 굴복하는 태도도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31과 다윗의 긍휼과 기도 응답 (삼하 21:7~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긍휼과 기도 응답”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다윗왕의 말년에 3년 기근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즉 “이는 사울왕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죄 값이라(삼하 21:·1)”고 하셨습니다. 기브온 사람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한 족속인데(수 9:18) 사울 왕이 제사장들을 죽이면서 제사장들의 종노릇하는 기브온 족도 함께 죽인 것입니다(삼상 22:19). 다윗왕은 억울하게 죽은 기브온 족의 한을 풀어 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기를 소원하여 기브온 족에게 속죄할 방법을 물었더니(삼하 21:3) 그들은 “모해한 사람(사울)의 일곱 자손만 주어서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게 해 달라(삼하 21:5, 6)”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두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곱 명의 처형자를 선별하는 내용이요(7~9절), 또 한 대목은 처형한 다음에 긍휼을 베푸는 내용입니다(10~14절).

1. 다윗이 사울의 자손 일곱을 찾는 중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낳은 “므비보셋”이 있었으나 그는 일찍이 다윗의 소년 시절에 그 아비 요나단과 친하면서 “요나단을 해하지 않고 인자를 베풀겠다”는 맹약을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삼상 20:8,42,23:18) 다윗은 그것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죽는데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자손을 찾다 보니까 사울 왕과 그의 첩 리스바에게서 낳은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이는 요나단의 아들이 아닌 사울의 아들임)을 뽑고 그 다음에는 사울의 딸 메랍이 그 남편 “바실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40년 전에 사울 왕이 범죄한 죄 값을 40년 후에 그의 두 아들과 그의 다섯 외증손이 치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의 화를 당했을 때 “이는 40년 전의 너의 아버지의 죄값이라”고 하였다든지 또는 “너의 외증조 할아버지의 죄값이라”고 하였다면 이 사실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징벌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① 죄는 무서운 것이다 ②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위반하는 죄가 크다(시 15:4) ③ 하나님은 40년 후에 또는 상당 기간 후에 그 후손들에게 갚으신다 ④ 그 후손들은 아들(손자)일 수도 있고 나가서는 외손자일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⑤ 또 약 40년 전에 선왕(사울)이 하나님 앞에 맹세를 위반하고 사람을 죽인 죄 값이 40년 후에 백성들에게 미치는 3년 흉년으로 주어졌다는 사실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2. 그 일곱을 처형한 후에 그 시체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6절) 두 아들의 죽음을 당한 사울의 첩 “리스바”가 시체 옆 반석 위에 굵은 베 자리를 펴고 하늘에서 비가 와서 그 시체를 적시기까지 지켰다는 것입니다. 굵은 베 자리를 편 것은 슬픔을 표함이고, 그것을 지킨 이유는 낮에 솔개가 와서 시체 뜯는 것과 밤에 짐승이 와서 시체를 해하는 것을 막으려 함이요, 이것을 “비오기까지 한다”는 것은 가뭄이 3년 기근을 들게 한 것이므로 그들이 처단되어 하나님이 노여움을 푸시면 곧 비가 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이 다윗왕께 보고되자 다윗왕은 이것을 측은히 여겨 또 긍휼히 여긴 것입니다. 다윗은 인자한 왕이었습니다. 굵은 베를 깔고 앉은 여인의 슬픔, 나무에 달려 죽은 아들 둘의 시체를 지키는 여인의 심정, 그렇게 해서라도 비가 와서 기근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하여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와 처형된 일곱 시체를 그 조상 “기스”의 묘역에 장사 지내 준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거리에 매달렸던 것을 겨우 길보아 산에 묻었던 것이었습니다(12,13절). 매달린 시체를 장사지내지 못하고 솔개와 짐승을 쫓는 여인을 보고 긍휼히 여겨 장사 지내 준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 되어 14절 끝에 보시면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일곱 아들을 죽음에 내어 준 것은 공의를 시행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공의를 시행하면서도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 시행은 3년 기근을 면하는 계기가 되었고 긍휼을 베푼 것은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응답하시는 계기가 된 것을 깨닫기 위하여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32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시 29:10~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 시편 29편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사역”을 노래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① 홍수 때에 좌정하신 하나님 ② 영영토록 좌정하신 하나님 ③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④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4가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홍수 때에 좌정하셨습니다. 홍수란 노아 때의 홍수를 뜻하고 “좌정하셨다”함은 가까이 오셔서 심판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때를 정하여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인류 창조 1000년쯤에 노아 시대에 이르러 홍수 심판을 하였고, 2000년쯤에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 고무라를 심판하셨고, 또 1400년쯤 지난 후에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바벨론에 멸망당하게 하셨고, 창조 후 4000년 경인 주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습니다. 장차 세상 끝날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종합적이고 완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2) 심판때 좌정하신 하나님은 의인을 붙드시고 자기의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노아 홍수 때는 의인 노아의 가족을 소돔 고무라 때는 의인 놋의 가족을 선민의 바벨론 심판 때는 메시야 언약의 성취를 위한 그루터기를 남기셨고(사 6:13),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는 여전히 로마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예수님이 친히 재림하셔서 공중에서 성도를 영접하실 것입니다(살전 4:17).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영영히 왕으로 좌정하신 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좌정”이란 가까이 임제하심을 뜻하는데 이는 의인을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는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왕이시고 성도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왕입니다. 왕을 잘못 만난 백성은 불행합니다. 마귀나 불신자는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영영토록 받으므로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행복한 이유는

1) 하나님이 의로운 통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사 32:1).

2) 하나님은 보호 인도하시는 통치가 탁월하시기 때문입니다. 사 48:17에 보시면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영원한 심판자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눈으로 보시고 아주 공의롭게 심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의를 행한 성도가 어떤 어려움이나 손해를 보았다 하여도 절대로 억울할 이유가 없고, 공의로운 값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애굽 군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다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히 11:29에 보시면 “애굽 군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수장 당하였는데” 그 “시험했다”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겠느냐? 우린들 왜 못 건너겠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건너가는 것과 우리가 건너가는 것을 분별하시겠느냐? 그렇게 못할 것이다”하고 건너 가다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푸실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는 분이요 심판 받을 자를 모르고 분별없이 은혜 주시는 분이 아니심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출 33:29). 이렇게 사랑과 능력과 공의가 충만하신 하나님이 영영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힘은 악인이 심판 받는 것을 보는 의인이 “용기를 갖는 힘”이라고 어떤 주석에서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악인의 완전한 심판이 마지막에 있지만 현세에서도 자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의인은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

1) 믿음의 힘

2) 진리 탐구의 힘

3) 진리 순종의 힘

4) 충성의 힘

5) 고난 중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는 힘을 계속 힘입어야 할 것입니다. 사 40:27~31에 보시면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자에게도 힘을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4.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평안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1) 우선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과 동거하므로 든든한 마음을 갖는 평안입니다.

2) 육체의 평안입니다. 질병을 없애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나라를 평안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전쟁이나 사고나 자연 재해를 막아 주시므로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더욱 영광을 돌리시며 그의 뜻에 복종하여 은혜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33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히 13:15~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과(창 1:31) 성도를 구속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엡 1:3~6). 당연히 창조자가 영광을 받으시고 기쁨을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도는 먼저 하나님을 기쁨의 대상으로 알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시 37:4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하였고, 느 8:10에서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하셨으며, 또 하박국 선지자도 “비록 재물이 없고 가난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과 바울 사도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강조하였습니다. 요 3:29에 보시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느니라”하시므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이 자기의 기쁨을 갖는 방법이라”하였고, 바울 사도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드릴 기쁨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9)”하셨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또 사람이 자기 기쁨만 차리면 이웃에게 나누어 줄 기쁨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릴 기쁨도 그렇다(롬 1:1~3)”하셨고, 항상 “어찌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고전 9:22)”하고 연구해야 하며 “땅에 거하든지 세상을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후 5:10)”하시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사는 것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세상을 떠나는 것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1) 신령한 예배인 것입니다. 이 신령한 예배는 성도라야만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요 5:33)”고 하셨고, 벧전 2:5에서는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라”하셨으며, 히 13:15에서는 “찬미의 제사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므로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정성껏 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좋은 믿음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히 11:6에 보시면 “믿음으로라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질적으로 우수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 1:17에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하셨지요. 이 말씀도 구원받는 기본적 신앙에서 성장한 신앙, 연단 받은 신앙, 큰 일을 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숙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억만 있어도 부자이지만 100억을 가졌을 때 더 부자인 것처럼 믿음의 분량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8:10, 15:28).

3) 하나님은 몸으로 헌신하는 산 제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롬 12:1에 보시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몸의 거룩한 산 제사”란 순결한 생활 속에서의 육신적 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한 성도가 되었더라면 그것은 믿음 생활에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일 1:4과 요삼 1:3에서 사도요한도 성도의 성도다운 생활(즉 계명 지키는 생활)이상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4) 성도의 회개를 극치의 즐거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100마리 양 중 잃은 양 하나를 찾고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하였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와 탕자가 돌아왔을 때 표현한 기쁨의 표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눅 15:3~24). 이렇게 하나님은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5) 복음을 전파하며 이웃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살전 2:4에서 “복음 전하는 직책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하셨고, 히 13:16에서 “오직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① 하나님 자신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으며 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5가지를 꼭 기억하시고 ③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4과 평안의 비결 (요 14:27~2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두려움도 갖지 말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1. 예수님은 평안을 맛보시면서 사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빈천한 환경에서 사셨고 공생에 때에는 핍박과 위험도 당하셨지만 마음으로는 근심이나 두려움도 없이 사신 것이 사실입니다. 풍랑 중에서도 주무셨고(마 8:24) 핍박이나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셨으며(요 18:8)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충성에만 몰두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험악한 생애이지만 평안한 마음을 갖고 사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평안을 끼쳐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평안을 주신다”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21)”하시므로 평안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죽음에서도 승리하신 분이니까 인간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는데 특별히 성도에게 주시는 평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 보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하셨으니까 먼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성도에게 주시는 평안의 차이를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1)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떤 경우에 “평안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① 우선 건강하고 ② 재물 있고 ③ 현실적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평안하다고 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은 ① 건강이 없고 재물이 없고 자기의 욕구 충족이 안되도 마음의 평안과 만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② 성도에게 만족이 있다면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구원받은 은혜로 감사하고 자기의 욕구란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순종으로만 만족하고 ③ 심지어는 죽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영생을 소망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불신자의 경우와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육신적이고 현실적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신앙적이고 하나님 중심에서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성도가 예수님의 주시는 평안을 어떤 방법으로 누려야 할 것입니까?

1)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에 최고의 영광을 두어야 합니다. 즉 “어떤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행복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보람있는 일을 위해서는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영광을 생각하면 고생을 고생으로 여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내가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는 만족감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가장 큰 은혜란 선택의 은혜, 구속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 영생 얻게 된 은혜등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곧 세상 것은 작게 보고 신령한 복을 크게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3)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같이 보살펴 주신다는 믿음 안에서 모든 염려를 걷어 치워야 합니다. 가난하여 주린 일도 없으면서 가난을 염려하고 집이 없어 한데서 잠잔 일도 없으면서 주택을 염려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왔으면서 죽을 병 걸릴 것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되지 마시고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 27:1~3에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진을 치고…전쟁이 일어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며…안연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는 신앙으로 누리는 평안입니다.

4) 현세 욕을 외면하고 십자가 중심으로 나갈 때 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현세적 욕심을 갖고 인간 경쟁의 대열에 서면 자동적으로 이웃들과 갈등하게 되어 불안을 초래하지만 그 세계를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면 죄의 유혹도 피하게 되고 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육체나 현실적 만족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신 상태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신령한 은혜로 만족하는 평안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하나님이 성취되게 하심 (시 127:1~5) 목록으로


본문 초두에 보시면 “하나님이 집을 세워 주셔야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또 하나님이 성을 지켜 주셔야만 파수하는 자의 경성 함이 헛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나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되게 하셔야만 형통하고 성취된다는 것이니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인정과 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노력을 해야만 원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 전체에 보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5가지를 말씀하셨는데 ① 집을 세워 주시는 은혜 ② 성을 지켜 주시는 은혜 ③ 수고의 결과를 값지게 해 주시는 은혜 ④ 평안의 잠을 주시는 은혜 ⑤ 자식의 후대를 번성케 하시는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 그러면 저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복을 받을까요? 여기에서 저희들은 몇 가지 복받는 배경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신 28:2~6에 보시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또 자녀와 토지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광주리, 떡 반죽 그릇, 그리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하셨고,

2) 시 1:1~3에 보시면 “성도가 죄의 유혹을 피하고 정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무릇 그 행사를 형통하게 하신다”하셨고,

3) 시 91:4에 보시면 “저가 하나님을 사랑한 즉 하나님이 저를 건져 주시고, 높여 주시고,응답하신다”고 하였고,

4) 마 6:33에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모든 은혜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복을 받을 만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자기 소원대로 복 주시기를 바라다가 낙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은 성도 스스로가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께 부유한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성취되게 하시는 5가지 복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집을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가정을 번성하게 하시고 교회를 흥왕하게 하시며 나라를 발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이 잘되려면 식구도 늘고, 신앙인 지식인도 나오고, 산업도 발전해야 할 것이요, 교회가 흥왕하려면 신앙의 단체가 잘 결성되어야 할 것이요, 나라도 선진국 대열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잘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듯이 신앙과 교회의 발전이 없다면 인간의 삶의 의미와 하나님 영광에도 아무런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2) 성을 지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성이란 나라의 울타리를 의미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은 성뿐만 아니라 믿음, 영혼, 육체 건강, 생명, 지혜, 명예, 물질, 사업, 사회, 국가등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 121:에 보시면 “하나님은 출입을 지키시며 환난을 면케하시고 또 영혼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91:12에서는 “그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고, 신 32:10에 보시면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하셨으니 이런 은총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수고를 값지고 보람있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으시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간과 수고를 효과 있게 쓰지 못하여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길어다 붓는 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아보시면 모든 수고가 값지고 보람있는 결과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4) 평강을 주십니다. 2절 말씀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뜻이 바로 정신과 육체에 평안 주심을 의미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평안해야만 단잠을 주무실 수 있습니다. 단잠을 잔다는 것은 휴식도 되지만 새 힘을 축적하는 것으로 미래에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근심 염려를 멀리 버리시고 믿음 약해지는 일이 아니고는 염려 거리로 삼지 않는 담대한 신앙으로 마음의 평안을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자녀와 후세에 주시는 복입니다. 현재 발전이 없는 것 같아도 후세의 소망은 얼마든지 있고 자식을 기업과 상급 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 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여 주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36과 왕과 백성들 (대상 11: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왕과 백성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울 왕이 블레셋족과의 전쟁에서 죽자, 백성들이 본래부터 추앙해 오던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여 섬기고 복종함으로 시온성 즉 예루살렘을 뺏어 건설하고 나라를 융성케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몇 가지 기도의 제목을 생각해 봅니다. ① 하나님이 사울 왕을 제거하시고 다윗을 쓰심에 대한 섭리요 ② 백성들이 왕을 골육처럼 섬기고 성원하는 일이요 ③ 다윗이 여부스족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을 건설함이며 ④ 요압이 예루살렘 점령에 솔선하여 장관이 됨이요 ⑤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했을 때 나라가 강성해졌다는 사실들과 관련하여 우리도 그와 같은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 삼상 16:1~5, 13을 보시면 사울 왕이 타락했을 당시에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될자를 지명하신 사실이 있었고 그 일이 있은 때부터 다윗은 성령에 크게 감동되어 백성들 앞에 유력해지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반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온 집안이 다 죽음을 당하였습니다(대상 10:6). 이렇게 하나님이 믿음 떠난 사울을 버리시면 그는 버림이 되고 믿음 있는 다윗을 세우시면 그는 명성이 높아져서 하나님이 섭리하신 대로 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브론에 모여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니 그 백성들은 다윗을 향하여 “우리는 왕의 골육이라”하면서 사울왕 때에도 백성을 돌본 이가(거느려 출입하게 함) 다윗장군이었고, 또 하나님께서도 다윗장군이 왕될 것을 예언하신 만큼(삼상 16:13)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세웠으니(3절) 이 언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왕노릇할 것을 서약한 것입니다.

3. 다윗은 왕이 되자 시온산성(예루살렘)을 뺏어 다윗성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시온산성은 현재의 예루살렘이요, 높은 곳의 요새지로서 그 곳에 여부스 토인족들이 살고 있으면서 “아무도 그 지역을 점령하지 못한다(5절)”하면서 크게 방비하였지만 그 족속들이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된 땅이기 때문에 점령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성을 먼저 점령하는 자에게 장관을 주겠다”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그 곳을 먼저 탈환하였으므로 그에게 두목의 지위(군대 장관)를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신앙적 영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예루살렘은 신앙과 교회와 천국의 상징이요, 여부스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앙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이 천국 건설의 모형이듯이 다윗의 예루살렘 건설도 역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에 사는 여부스족을 섬멸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신앙 인격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불신앙의 요소, 자기 중심의 요소, 현실주의의 요소 등을 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두루 성을 쌓고 중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아 그 지역을 보호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신앙 확보, 신앙의 파수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신앙의 파수를 잘하려면 우선 교회가 든든히 서야 하고 성도 개개인이 말씀 지식을 가져야 하며 연단 받은 신앙으로 예수님 중심 생활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4. 다윗과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히 하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고(9절) 백성들이 왕을 섬기되 골육 지친처럼 섬기니 그 나라가 점점 융성해 졌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깨달을 것은 ① 하나님이 쓰시는 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②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의 일을 해야 할 것과 ③ 왕과 백성이 한 골육처럼 일체가 되어야 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신령한 예루살렘 건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또 국가의 융성을 위해서도 기도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7과 좋은 시험 나쁜 시험 (고전 10:10~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좋은 시험 나쁜 시험”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성경을 보시면 좋은 시험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1) 좋은 시험의 사례를 보면 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1) 하신 것이나 ② 하나님의 허락으로 욥이 시험을 받은 일과(욥 1:12) ③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서 시험을 주신 것이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시험한 것과 같았다(신 32:11)”고 하신 것 ④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마 4:1).

2) 이 시험은 누가 하는가?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 대한 시험을 하나님이 하셨고 예수님을 시험받게 하신 것은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본문 13절에서도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을 허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성도를 상대로 이런 시험을 하시는 이유로 ① 욥의 경우는 하나님의 섭리적 경우이고 ②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의 믿음(순종) 분량을 알아보시기 위함이며(창 22:12) ③ 이스라엘의 경우는 연단에 목적이 있었고 ④ 예수님의 경우는 공생애 시작부터 인간이 받기 쉬운 시험들을 모범적으로 이기는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목적이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 제일 많은 것이 연단을 위한 것입니다. 약 1:2,3에 보시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앎이라”하셨고, 또 벧전 1:7에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금보다 더 귀하여…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시험을 크게 기뻐하면서(벧전 1:6) 소망적으로 대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여기의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어떤 상태로 주어지느냐?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예수님이 아무런 실수나 부족이 없는 상태에서 어려움을 당한 것처럼 자기의 욕심이나 과오가 아닌 상태에서 또는 충성하는 상태에서 당면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하고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이 나를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주시는 시험이라고 생각하여 은혜롭게 대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나쁜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나쁜 시험은 넘어뜨리는 시험이고 죄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험을 하시지 않는다”고 약 1: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시험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1)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요 10:10에서 “도적(마귀)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짓게 하는 유혹은 마귀로부터 비롯되는데

2) 마귀에게 사로잡힌 악인들을 통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1:10에 보시면 “악한 자가 너를 꾀일지라도 좇지 말라”고 하셨고, 잠 16:29에서는 “강폭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두방법으로 시험하는데 하나는 성도의 마음에 직접 찾아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악한 사람을 통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직접 찾아오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 속에 허탄한 것들에 대한 욕심이나 불의한 마음을 갖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시험을 꼭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약 1:14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허탄한 것에 욕심이 생긴다”하면 벌써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시험을 감당하고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1) 좋은 시험을 이기는 은혜로 ①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고(마 6:32) ②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며(히 4:16) ③ 피할 길도 주시고(고전 10:13) 환난의 날을 감소시키기도 하시고(마 24:22) 아예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고(고전 10:13) 위기 직전에 구출해 주시는 방법으로(신 32:11) 연단의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악한 시험은 마귀를 대적할 전신갑주를 주셨습니다(엡 6:13). 그 전신갑주가 바로 진리의 말씀(성령의 검), 의의 흉배요, 믿음의 방패요,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는 것임을 아셔서 반듯이 시험을 하나님 뜻대로 통과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8과 공정한 저울 (신 25:13~16) 목록으로


1.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되”를 사용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즉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며 또 같지 않은 되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라 오직 10분 공정한 추를 두고 10분 공정한 되를(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할 것이나 무릇 정당치 않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증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심판 때가 올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되게 속여서 뺏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물건을 팔 때는 작은 저울추를 쓰고, 살 때는 큰 저울추로 사고, 줄 때는 적은 되로 주고, 받을 때는 큰 되로 받는 식의 속임수가 옛날에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율법으로 금지시키셨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도 저을 질을 하신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구상하게 된 것입니다.

2. 저의 집에는 3개의 저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옛날부터 있는 골동품 저울이고, 또 하나는 식당용으로 음식이나 고기를 다는 저울이고, 또 하나는 아주 큰 것으로 수년 전에 LPG가스를 정량을 안 주기 때문에 달아보고 사야 한다 해서 사 놓은 저울인데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각각 용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은 저울은 고기를 사 왔을때 달아보면 장사꾼이 후하고 인색한 것을 알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덩어리 더 줬다”고 했는데 결국은 더 주지도 않고 인심 쓴 척하면서 거짓말한 것까지도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고, 큰 저울은 식구들이 몸무게를 다는데 사용이 되며 살이 찌는 지 내리는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저울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달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저울질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1) 잠 24:12에서 “마음을 저울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마음, 악한 마음을 각각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2) 엡 4:13에서 “예수님 닮은 믿음의 분량”을 알아보신다고 하셨고,

3) 마 25:14에서는 “재능의 분량”도 알아보시고

4) 삼상 2:3에서는 “행동을 달아보신다”하셨고,

5) 창 18:21에서는 소돔의 죄악의 분량을, 단 5:27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죄의 분량을 달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6) 계 22:12에서는 충성의 분량(일한 대로)대로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이란 성도가 워낙 의롭게 살다 보니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기를 소원하였는데(욥 31:6)” 오늘 하나님이 저희들의 모든 것을 달아보신다면 만족한 분량이 나타나겠는지요. 두려운 마음이 앞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도 욥처럼 정직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저울은 무게만 다는 것인가? 저울을 보면서 저희들이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구상해 보았습니다.

1) 저울은 확실한 정량을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저울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면 무엇이나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것도 확실하게, 믿고 안 믿고도 확실하게 삶으로 진실을 표방하는 것이 저울 같은 생활이요

2)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분량이 모자라지 않기 위하여 저울질하는 것이니까요. 모든 것을 후하게 주는 세상이라면 아무도 저울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착한 마음과 지혜와 말씀 지식과 예수님 닮은 인격과 충성에 대하여 항상 성실하므로 하나님 표준에 모자람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공평성 있는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과 레 19:36에도 “공평한 저울”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공평하다”는 뜻은 “고루 분배한다”는 뜻도 있고, 균형 잡힌 생활을 생각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옛날 저울은 물건과 추의 균형이 잡혀서 막대기가 수평을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인체와 생활도 균형이 잡혀야 하듯이 신앙생활도 역시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어떤 운전 경력이 많은 사람이 “거꾸로 다니는 한국의 운전 문화”란 책을 썼는데 왜 거꾸로 다니는 운전 문화인가?하면 자동차 산업만큼 운전 교양 문화가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거꾸로 간다”는 표현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현실 기독교 신앙이 성경 말씀에 비할 때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저울을 신앙생활에 적용시켜서 모든 것을 달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확실한 지, 모자람이 없는 지, 공평하고 균형이 잡혔는 지도 저울질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9과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 (약 4: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업 형통”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신 28:6에서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시 1:3에서는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 욥 22:28에서는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라”, 마 6:33에서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수 1:7에서는 “무릇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업에 관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자”고 한 것입니다. 돈 벌러 가는 장소, 돈 벌려는 기간, 돈 벌이 하는 방법까지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형편이나 취미에 따라 사업을 하는 것은 죄 되는 일이 없는 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지 합당치 않게 죄 되는 방법과 목적으로 시작하면 그것은 잘 되도 복된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합당한 방법과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면 잘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님은 사업하는 자가 꼭 알고 시행해야 할 것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사람이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 아는 지식이지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내일 일을 모르니까 자기의 영적 구원 신앙을 하루 단위로 결산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업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신앙을 꼭 하루 단위로 결산하며 살아야 할 것이요

2) 내일 일을 모르니까 가급적이면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그 날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면을 뜻하는 것이고, 사업은 근면해야만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생명이 안개 같은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를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건강, 자기 생명, 자기 기술, 자기가 갖고 있는 허탄한 것들(세상의 특권)을 믿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생명의 주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9). 인간은 허탄한 것을 자랑하면서 자기 내세우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3. 주의 뜻을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 “우리가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할 것이라”하신 말씀은 목적과 계획부터 하나님 뜻에 따라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장사하여 돈 벌이 하려는 사람이 자기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은 이차적입니다. 돈 벌어 먹고살고, 돈 벌어 집사고, 돈 벌어 자녀 교육시키고, 돈 벌어 자동차 사는데 목적을 두기 쉽고 또 돈 버는 방법도 수단 방법을 임의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면 그 성도의 믿음이 좋아져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하나님은 성도의 순종과 거룩(하나님 닮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1) 그래서 사업을 하는 목적도 예수 더 잘 믿기 위하여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더 영광 돌리기 위하여 한다는 목적이 좋아야 하고

2) 예수를 더 잘 믿기 위한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니까 예수 잘 믿는 방법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되며

3) 하나님이 사업에 복을 주셔서 소득이 많아질 때 본래의 목적대로 그 소득을 하나님을 부요하게 섬기는 일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목적과 방법과 결과가 하나님 뜻에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하는 일들이 자기의 뜻에 맞을 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할 것이라”고 해야 하겠거늘, 인간이 허탄한 것이나 자랑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져 버릴 때는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의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성도는 ① 신앙생활을 하루 단위로 시행하고 ② 매일매일 근면하며 ③ 자기와 인간적인 것과 허탄한 것들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④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⑤ 그 뜻을 앞세워 복종하고 따르는 일을 잘 햐셔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방법 (삿 3: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고 사사들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에 있었던 사건과 첫번 사사 옷니엘의 사역이 기록된 말씀인데 이 말씀을 3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1~5절 말씀으로 하나님이 가나안 족을 남겨 두신 이유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여호수아 후세대 백성들을 가르치고 시험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전쟁을 잘하여 가나안족 전부를 물리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상당 족속이 남게 된 것인데 하나님은 그 족속들을 남겨 후시대 사람들을 시험하시고(1, 4절), 전쟁을 가르치시려고(2절)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4절). 이것은 성도의 주변에 악이 존재하여도 그들을 시험의 대상, 교육의 대상, 연단의 대상으로 알고 훈련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2. 6~7절에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들을 남겨 두시고 그들을 정복하라고 명하신 후(삿 1:1) 그렇게 하나 안 하나를 시험하셨는데 그들은 결국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악은

1) 선민이 이방인 사이에 거하여(5절) 그들과의 생활을 혼돈한 것이요,

2) 통혼을 하므로 피를 섞은 것이요,

3) 그들의 신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4)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요,

5)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 5가지 악을 저희들은 경계하셔야 합니다. 우상과 물질을 숭배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경과 난경에서 기적으로 구출하시고 기적으로 보호 인도하셨는데도 그 백성들은 그 은혜를 모르고 아주 작은 일에도 불평, 원망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때도 그렇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작은 어려움으로 은혜를 잊은 자처럼 행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욱이 생활과 피를 섞고 이방신을 섬겨 신앙을 파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여 메소포다미아왕 구산리다사임의 손에 붙여 8년을 고생하게 하신 것 아닙니까? 이상의 두 대지에서 저희들은 악을 유익하게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잠 16:4) 백성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어떻게 권고해 주시는가?에 대한 말씀이 9~1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들도 어려움을 당할 때가 혹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당하는 어려움들 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방법을 보면

1) 기도 응답으로 권고하십니다. 그 말씀 9절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으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2) 구원자를 일으키시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셉을 일으키시고 모세를 일으키시고 사사를 보내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왕을 세우시고 메시야를 보내시듯이 구원자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어릴 때 친구가 장가를 잘 가서 형통했다는 말을 들었고 어떤 고아는 양부모를 잘 만나서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이건 사회, 국가이건 지도자와 구원자와 협력자를 통하여 권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충만을 주셔서 지혜롭게 하여 권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신이 옷니엘에게 임하여 옷니엘이 전쟁의 용기를 갖고 잘 싸우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믿음, 지혜, 용기, 평안이 다 생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4) 대적을 그 손에 붙여 전쟁을 이기게 하여 권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승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자신이 잘 싸워서 이기는 경우도 있고, 상대방이 못 싸워 내가 이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옷니엘은 성령이 충만하였고 상대방을 붙이시니 이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5) 40년 간 태평 세대를 주어 자기 백성을 권고하셨고 또 지도자 옷니엘은 태평 시대에 죽으므로 복된 죽음의 은혜까지 받은 것입니다. 악을 이용하시는 하나님, 악을 인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1과 다윗이 왕되기 까지 (삼하 5:1~5) 목록으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로 소년 다윗을 선정하여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 때는 사울 왕이 탈선행위를 저지른 다음이었고 사울이 왕노릇을 하던 중 하나님도 그를 버려 왕의 자리에서 물러가게 만드신다고 하신 것입니다(삼상 15:19,23,16:1). 여기에서 다윗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이 되었으며 또 사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왕에서 물러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시는가를 이들의 역사적 생활 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이 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울 왕이 탈선하므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탈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하시고 하나님도 그를 버리셨습니다.

2. 하나님이 다윗을 세상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① 사무엘 선지자로 기름을 붓도록 찾아내게 하시고(삼상 16:12~13) ② 소년 다윗이 용맹을 떨쳐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이므로 세상 앞에 나타내시고(17:49) ③ 사울 왕이 군장을 삼고(18:5) ④ 백성들이 “만만을 죽인 자”로 칭송하게 만드신 것입니다(18:7).

3. 하나님이 다윗에게 연단의 과정을 주십니다. 이 연단에 잘 통과되면 은혜를 받게 되고 또 그 연단이 장차 왕이 된 후에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연단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울의 시기를 받고 명예와 생명에 큰 위협을 당합니다. 군장이 천부장으로 격하되고(18:14), 사울 왕이 두차례나 미친 체하면서 단검으로 다윗을 죽이려 하였고(18:11, 19:9), 사위를 삼는 조건으로 블레셋군의 양피를 베어 오게 하여 죽음의 기회를 주었지만 1차에서는 성공을 하고도 사양하였고(18:17), 2차에는 양피 200으로 “미갈”을 아내로 받아 사위가 되었지만(18:25) 또 침상에까지 군인들을 보내어 죽이려 한 것을 “미갈”이 도망하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19:12). 이때 다윗은 “라마나욧”에 있는 선지자 동산에 은신하였다가(19:18~20) 월삭이 되었을 때에도 왕의 분노가 풀리지 않으므로 왕의 아들 요나단이 화살 쏘는 신호로 다윗을 도망하게 하여(20:22) “높”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도움(음식, 골리앗의 칼)을 받고 떠나다가 블레셋의 침략을 받은 “그일라”를 구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십”이란 곳으로 갔다가 거의 붙잡힐 즈음에 블레셋이 침략하여 사울이 돌아간 사실이 있었습니다(23:13). 그리고 난 다음부터는 다윗이 위험한 형편을 모면하여 엥게디 굴에서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일이 있었고(24:11) 나발의 가족을 무참히 죽일뻔 하다가 아비가일을 만나므로 범죄를 피했으며(25:34) 하길라 산에서는 잠자는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면서도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을 미워하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26:17). 그 후 자기 군사들과 함께 가드에 망명했다가 블레셋 군에게 발각되어 오래 있지 못하고(27:2, 28:1, 29:4, 11) 가족들이 사는 시글락으로 오니 마침 아말렉족이 시글락을 탈취해 간 후인지라 좇아가 그것을 다 뺏어 왔습니다(30:7~20). 그 후에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좇기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겼고 사울은 의인을 괴롭히고 전쟁에 패배하여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버린 자의 결국과 하나님의 쓰시는 자의 보호됨과 인도 받음이 어떠한가를 잘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4. 정권 교체의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지파로부터 헤브론에서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자기의 부족이고 자기가 그 부족을 보호했으니까 당연히 왕으로 추대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군장“아브넬”도 사울의 아들“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삼하 2:4,8). 이스보셋은 11지파를 통활하는 왕이지만 별 힘이 없었습니다. 2년 후에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통간한 연고로 이스보셋의 책망을 받고 안 좋은 사이가 되자 백성을 다윗에게 붙여 줄 결심을 갖고 다윗을 만나 협의한 일이 있었는데(삼하 3:1,6:8,14,20) 다윗의 군장 요압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간첩으로 몰아 좇아가서 죽였습니다(삼하 3:27). 아브넬이 죽자 “이스보셋” 밑에 있는 두 장군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여 그 머리를 갖고 다윗에게 와서 칭찬을 들으려 하였다가 왕을 죽인 죄로 그들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삼하 4:2,8). 무죄한 피를 흘려 공로를 인정받고 명예를 얻으려 했다가 오히려 죽은 것입니다. 아브넬도 그렇게 하려다가 죽은 것이고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도 자기보다 더 큰 공로자가 생기는 것을 시기한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실권자가 다 없어지니까 결국은 전 국민이 다 다윗에게 다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을 삼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상고한 이유는 이 역사 속에 다윗을 인도하시고 사울을 제거하시는 선악의 통치 섭리가 들어 있는 것을 깨닫기 위함인 것입니다. 저희들은 꼭 다윗같은 생활의 길을 가야만 할 것입니다.

 

제42과 다윗의 활노래 (삼하 1:17~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활노래”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는 “활노래”라 하지 않고 “활”이란 제목만 붙였습니다. 이 “활”은 쏘는 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활노래의 주제는 다윗이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주제를 “활”이라 한 것은 사울과 요나단이 활을 잘 쏘는 용사였고, 또 요나단이 다윗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활을 쏘아 신호를 하므로 다윗을 도망하게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삼상 20:20~21) 다윗이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노래의 제목을 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씀은 이 시의 내용이 야살의 책에 이미 기록된 것을 사무엘 선지자가 옮겼다는 뜻이 아니고, “야살”이란 “의로운 자”란 뜻으로 그 당시에 의로운 자들이

이 노래를 책에 기록하여 함께 노래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이 활노래를 통하여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평생을 괴롭게 한 사울 왕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 했지만 그를 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삼상 26:17, 삼하 1:14).

2) 여기에서 저희들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니 다윗은 사울이 없어지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을 해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못한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밉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해하지 못한 것처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다윗은 사실상 사울의 죽음을 원치 않았고 사울이 망한 것을 크게 애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했지만 그를 원수시 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사울이 일국의 왕인 만큼 그가 잘되고 백성도 잘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4) 이 사실은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요, 또 주께서 원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의 모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장애물을 뛰어넘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있어야만 사랑의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증거는

1) 사울의 죽음의 소식을 전한 아말렉 소년이 죽어 가는 사울을 아주 죽도록 해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피 울며 금식을 하였고 사울을 아주 죽게 한 죄로 그 소년을 죽인 사실이 있었습니다(삼하 1:1~16). 이 때 그 소년은 자기가 사울 죽인 것을 다윗에게 알리고 그의 면류관과 손 목걸이를 바치면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지만 결국은 그 반대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심중을 오해하는 것은 큰 손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2) 활노래의 내용을 보아서 알 수 있고

3)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칭찬과 축복을 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2:4~7). 전쟁에 패배한 자의 시체를 그 전쟁 중에 장사 지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3. 활노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 19절에서 “왕의 죽음은 곧 그 백성들의 영광의 죽음이라”고 하면서 애도하였고,

2) 20절에서는 이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가드에도 아스글론에도 전파하지 말라 그 곳에 사는 블레셋 족속 즉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3) 21절에서는 사울 왕의 생명이 죽어지도록 그 시신을 용납한 길보아산을 저주하였으니 이것은 사울의 죽음을 강도 높게 애도하는 시적 표현이요.

4) 22~23절에서 요나단과 사울의 용맹과 사랑을 칭찬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피와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않았다”함은 요나단이 전쟁에 임할 때 사자보다 빨랐으며 용맹스럽게 싸워 전과 올린 것을 칭찬한 것이고, 또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러웠더니 죽음도 한자리에서 같이하였다”고 한 것이요,

5) 24절에서는 “사울왕 통치 시절에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었고 또 화려하게 해 준 것을 칭찬하면서 슬피 울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활노래”에 담긴 뜻은 ①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사랑한 것과 ② 또 그가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 한 원수 같은 대적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신적 사랑을 힘입어 진실한 사랑을 나타냈음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시 109:4).

 

제43과 다윗의 역경과 유익 (삼상 30: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역경과 유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8째 아들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14대 손이요, 이스라엘 나라 두 번째 왕이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신앙과 무예와 수금을 잘하는 재질이 있었고 소년 때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것 때문에 유명하여졌습니다(삼상 17:34, 35). 다윗이 전쟁의 공을 세웠고 또 외적의 침략 위험이 항상 있기 때문에 사울 왕이 다윗을 군장으로 세웠지만(삼상 18:5) 그의 인기가 자기보다 높아지는데 시기가 나서 두차례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으나 창이 빗나가므로 죽이지 못하였고(삼상 18:11, 19:10) 또 전쟁에 보내어 죽이려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를 가져오면 사위를 삼는다고 유인을 했으나 블레셋인 200을 죽여 오면서도 죽지 않으므로 결국 사위를 삼게 되었는데(삼상 18:27) 사위가 된 후에도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고 하여 도망을 다니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의 보호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삼상 21:1~7, 22:18) 그것이 고발되어 제사장족 85명이 죽게 된 사실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있을 때 사울이 그를 추격하여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블레셋의 침략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윗을 더이상 추격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고(삼상 23:27) “엥게디”에 피신 했을 때는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으나(삼상 24:4, 26:7)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이므로 그를 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일시적으로 뉘우치면서도 여전히 다윗 해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나라 “가드”로 망명을 한 일이 있었는데 군사 600명을 데리고 가다 보니까 가드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신임을 하지 않으므로 몰래 이방족을 침략하여 전리품을 거두어 갖고 가서 동족 “이스라엘을 쳤다”고 거짓말을 하여 신임을 얻기도 했습니다(삼상 27:8~12). 그런데 “블레셋”이 같은 이방족 “가드”나라와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치자고 했을 때 가드왕은 자기 나라에서 망명 중에 있는 다윗의 군사를 이용하여 그 전쟁에 협력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때에 또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다윗이 망명 중에 있으면서 “동족을 쳤다”고 한 일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전쟁에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다윗은 동족을 해 한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전쟁에 합세하려고 따라가는데(29:2~5) 블레셋 군사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다윗이 반역할 우려가 있으니 같이 나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드왕 아기스왕은 “그렇지 않다”고 보증을 하다가 “다윗은 기회만 있으면 사울과 화해를 하려고 할텐데 그가 우리의 머리를 베어 가지 않으면 무엇으로 화합을 하겠느냐?”하면서 출전 반대를 해주는 바람에 다윗은 그 전쟁 합세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드에서 계속 의심을 받아 더 있지 못하고 자기의 거주지인 시글락으로 왔는데 와서 보니 자기 동리가 아말렉의 침략을 받아 초토화되고 자기의 두 아내와 많은 사람들이 잡혀간 정황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 그들을 추격하여 포로를 다시 뺏어 오고 전리품도 많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의 역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시편의 상당 부분이 다윗이 역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시간의 설교 제목대로 다윗이 역경 중에서 얻은 유익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1) 선으로 악을 이기므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높여 쓰시는데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자는 어떤 역경에서라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가드에서 망명하다가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게 됐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발견하여 출전을 반대하므로 전화위복이 되었고

3) 또 가드에서 떠나라 하여 “시글락”으로 쫓겨온 것이 전쟁에 피해 받은 자기 가족과 동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4) 그리고 군급할때 은혜를 받았습니다(6절). 결론적으로 이런 사실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백성이면 역경 중에서도 연단을 주시고 유익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44과 사울 왕을 버리심 (삼상 15:17~31) 목록으로


“사울 왕을 버리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사사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여 왕을 세우셨습니다(삼상 10:1).

1) 그 당시 사울 왕은 대단히 겸손하였고(17절, 삼상 9:21, 10:22)

2) 매사에 모범적이었으며(삼상 9:5, 7)

3)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자 새마음을 갖고 성령의 감동함과 예언하는 은사까지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삼상 10:1, 9~11).

2.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왕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왕에서 제외되도록 버리셨다(삼상 15:11, 23, 26, 16:1)”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후회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전말을 모르셔서 실수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뜻을 돌이키셨다”는 뜻이요, “버리셨다”는 뜻은 “왕을 위한 특별 간섭에서 제외시켜 붙들어 주시던 손을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때는 사울 왕이 40세에 왕이 된 후(13:1) 약 25년 왕노릇을 한 후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소년 시절(15세쯤)에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이 40년 왕노릇하고 죽은 후) 30세에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삼하 5:4). 따라서 사울 왕이 65세 이상 되었을 때였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왜 후회하실 일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자에게 직임과 복을 주시고 그가 그 은혜를 잘 유지하도록 자유를 주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자유 주시는 기회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잘 선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은 그의 한 두번 실수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고 교훈 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벧전 3:20).

3. 하나님이 왜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까? 본문 19절에 보시면

1)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임을 아셔야 합니다.

2) 탈취에 급급하였으니 이것은 물질을 챙기는 욕심이지만 그 외에도 자신의 현실적 영달을 꾀하는 일에 급급하였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안해도 충분히 영달을 누릴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상 탈취에 급급한 것은 잘못입니다(공직자들 중에서 진급에 급급하고 재물을 챙기는 일에 급급한 상황이 자주 보도에 나타납니다.인천 북구청의 세금 횡령 사건도 그런 종류일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일에 급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급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자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것은 성도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의도를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4) 사무엘 선지자가 이 사실을 지적했을 때 사울은 자기가 시행한 것(아말렉을 치고 아각을 끌어온 것)만 주장하고 좋은 양과 소를 끌어온 것은 백성들의 요청으로(21, 24절)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란 핑계를 한 것입니다(21절).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진멸하라(15:3, 18)”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를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4. 사울이 이런 죄를 범한 것은 무지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1) 무지란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을 몰랐고 종교적 제사 제도가 하나님의 말씀 존중만 못하다는 것을 몰랐고, 또 하나님이 백성들보다 중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2) 또 그가 교만한 것은 자신이 왕노릇하면서 점점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교만이 바로 범죄의 올무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사울의 경망 됨을 상당 기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니까 결국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23, 26절).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뜻은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거나 분명하게 지키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하셨으니 여기에서 성도가 “말씀을 멀리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요,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면 곧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 사실을 알고 회개하면서 선지자의 옷자락이 찢어지기까지 붙잡고 용서를 구했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29절).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더 보람있는 삶을 이루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사울의 망령된 행위 (삼상 13:5~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울의 망령된 행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하나님이 사사들을 통하여 그 백성을 직접 통치하셨습니다. 사사들의 통치를 받은 시기가 약 300년이었고, 사사는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를 포함하여(삼상 4:18, 행 13:20) 1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구한 것입니다. 그들이 왕을 구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 이유는 ① 열방의 제도를 따름이기 때문이고(삼상 8:5) ②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절함이 하나님을 버림이기 때문이요(삼상 8:7) ③ 왕의 제도가 백성들의 생활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삼상 8:10~18). 그래도 백성들이 권면을 듣지 않으니까(삼상 8:19)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하여 왕 될 자를 지목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여 왕을 세우고 왕의 제도와 할 일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삼상 10:25).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 제도를 승낙하신 이유는 ① 백성의 소원이니까 들어주시는 의미와 ② 어려운 일을 겪어 보라는 연단과 ③ 왕이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삼상 12:14)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 사울도 처음에 왕될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고, 성령 충만의 은혜도 있었습니다(삼상 10:1, 11:6).그런데 사울이 왕된지 2년에 블레셋 군의 침략이 있었는데 블레셋 군은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이요, 백성이 모래같이 많고 사울 왕의 군사는 2천 뿐인데 이 군사를 그의 아들 요나단과 1000명 씩 나누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삼상 13:1~4). 군사의 열세로 몰린 사울이 퍽 답답한 입장에 있으면서 7일에 한번씩 순회오는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려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그도 오지 않고 또 전쟁의 패배를 두려워하는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그 군급한 지경에 하나님의 도움 청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선지자나 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는 제사(번제와 화목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드린 것입니다. 이 제사가 끝나자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니 망령된 일을 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은 마음에 맞는 다른 사람을 지목하여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다”고 하였으니 여기에 “삼으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다윗을 의중에 두시고 벌써 뜻을 세워 놓으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1. 위급한 지경에서 명을 어긴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적군의 침략이 있고 선지자는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지는 군급한 지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지자의 직임을 월권하였지만 그것을 망령된 죄라 하셨으니 우리는 역경 중에서라도 죄짓지 않아야 할 것이요

2. 왕의 직임과 선지자의 직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반직을 가진 왕이 선지자의 성직을 월권한 것은 큰 죄가 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 12:23에 보시면 선지자는 기도와 교훈을 전무하게 되어 있고 특히 제사는 왕이 드릴 수 없는 것임을 아셔서 자기 책임 이상의 성직을 탐하거나 월권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왕의 명령 위반 죄를 징계하시되 “그 왕위가 길지 않을 것이라”하시고 그 시에 벌써 다른 왕을 의중에 두셨으니 이때는 사울이 왕된지 2년때였습니다(삼상 13:14). 그런데 하나님이 사울왕을 물리치는 계획을 38년 후에 시행하신 것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속히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그대로 무마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또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 사울을 죽음으로 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4. 사울이 생각한 위기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위기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남은 군사가 600명뿐이었고 창과 칼도 두사람만 갖고 있는 상태였으나(삼상 14:1, 15, 20) 요나단은 몇몇 군사만으로 전쟁에 승리를 거둔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14:1, 15, 20). 그 당시에 적군이 서로 죽이는 혼란을 야기하여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역경에서 죄짓지 말며 ② 성직을 탐하거나 월권하지 말며 ③ 역경이 아닐 수 있는 것을 깨달아 믿음으로 이기고 ④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만 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제46과 감사하는 신앙 (엡 5:18~21) 목록으로


추수 감사 절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감사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고,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을 때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게 되고 또 감사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제목의 요절은 21절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1. 본문에서 주신 감사의 교훈은 “항상 범사에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1) 그래서 저희들은 언제나 감사하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은혜, 생명의 은혜, 신령한 은혜, 건강과 생활의 은혜등 입니다.

2)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으니까 성도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반드시 환난이나 어려운 일, 잘 안되는 일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고난으로 연단을 주시고(롬 5:3) 연단을 주시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나 모세가 바로 그런 은혜를 받은 인물입니다.

3) 하나님 아버지를 감사의 대상으로 모시고,

4)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을 중보로 하여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야 하는 것은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저희들이 감사하는 신앙을 갖기 위하여

1) 감사절의 유래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 23:16에서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수장절”이 추수 감사절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맥추의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하고 77절이라고도 하며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레 23:34). 보리가 첫곡식이고 그때가 유월절 이후 7주간쯤 지난 때이며 또 그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초막을 짖고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요 7:2). 그러나 이런 성경에 근거한 감사 절기는 선민국이 없어지므로 끝났고 저희들은 선교 초기에 미국 성도들이 지키는 추수 감사절을 도입하여 적당한 시기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미국 성도들의 추수 감사절은 청교도 역사에서 시작되었고 청교도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16세기 중엽에 영국의 천주교회가 교황의 권세를 항거하여 1차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충분한 개혁에 이르지 못하자 개혁 운동을 힘쓰는 성도들을 정부에서 핍박하였습니다. 1553년부터 메리여왕이 개혁하는 성도 227명을 화형에 처하고 신교 목사 3000명에게 핍박을 가하여 800명이 망명을 하였고 그 때에 “로빈슨”목사와 약 100명의 성도가 “스쿨비”라는 촌에 모여서 12년간 노동하며 돈을 모아서 1620년에 60톤짜리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구입하고 신앙 중심의 성도 102명을 태워 63일간 항해하여 북미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착전 30일 동안 탐험대를 먼저 상륙시켜서 지역 탐지를 한 후 그 해 12월 25일에 상륙하여 날씨가 추웠지만 먼저 예배당을 지은 다음 자기들의 주택을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봄이 되어 씨를 뿌리고 가을에 농사를 거두어 감사절을 지킨 것이 감사절의 시초가 된 것이고, 이것이 전국에 확산되어 1864년에 링컨 대통령이 11월 4차 주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런 근거와 전통이 우리 나라에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은혜(시 116:12), 범사에 대한 은혜(살전 5:18) 다시 말하면 일반적인 은혜, 신령한 은혜, 고난의 은혜까지 복으로 여길 수 있는 신앙을 꼭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은혜는 자연 만물과 건강과 지혜와 물질과 평화 같은 것이고 신령한 은혜는 믿음과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과 말씀과 성령, 영생, 내세의 소망과 상급 같은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은혜는 연단과 환난을 뜻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통해서 반드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3. 감사의 방법은 생활과 헌신과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생활은 경건하게 살고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요(미 6:8, 엡 4:1)

2) 헌신은 나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고후 8:;5).

3) 그 다음에 예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입니다(신 16:16). 아무쪼록 이번 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절의 유래를 잘 아시고 은혜를 넓게 깊이 아시고 바른 생활과 헌신과 예물로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7과 성경과 관계된 신앙 (딤후 3:14~1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성경과 관계된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으로 좋은 요절이 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관에 대한 말씀을 증언할 때 자주 본문을 요절로 인용합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을 구분하면 ① 성경의 범위를 말씀하셨고 ② 성경의 출처를 말씀하셨으며 ③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④ 언제부터 성경을 가까이해야 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으로 얻는 유익이 무엇이냐?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을 주신 용도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 5가지 제목에 따라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성경의 범위는 모든 성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성경이란 신구약 66권을 뜻합니다. 현재 성경을 균형 있게 증언하고 균형 있게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 4:4에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신 말씀에 유의하셔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고루 살필 뿐만 아니라 1점 1획, 한 글자, 한 문구에까지 영감된 말씀을 터득하도록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출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벧후 1:21)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신비한 역사이기 때문에 더 실감 있게 확인하기 어려우나 저희들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틀림없이 인간에게 넘겨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권세 있는 사람의 말이 힘이 있는 것처럼 항상 살아 계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 인간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배움의 자세를 갖고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움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갖고 배우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지 않거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상태에서는 배워도 마음이 열려질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15절의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성경을 진리로 믿는 믿음”을 갖고 성경을 배우려 하셔야 하고 또 한가지 주의할 것은 “아무에게나 배우면 된다” “아무 사람의 설교나 들으면 된다”는 생각을 떠나서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며”하심같이 반드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에게 배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대상을 찾는데는 정통적 신학의 계통을 밟은 목사나 교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고도 확신 있는 큰 신앙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배움에 끌리고 연구에 주력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언제부터 배울 것인가에 대하여는 “어려서부터 배우라”하셨습니다. 구약의 선민들에게는 자녀 성경 교육을 몹시 강조하셨습니다(신 6:7). 부모는 항상 어린 자녀들에게 하나님 두려워하는 생활의 감화와 늘 성경을 살피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고 주교사의 노력과 함께 성경의 내용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성경에 이끌릴 때 신앙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5. 성경으로 얻는 유익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경 말씀을 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요 1:1, 5:39). 인간이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받아야 할 은혜

1) 믿음의 확신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고 믿으면 믿음이 약합니다. 그러나 잘 알면 알수록 더 믿음이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2) 구원받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 얻는 방법을 성경에서 터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행 8:30~39).

3) 가장 좋은 첨단의 교육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교훈은 물론 책망할 때도 성경에 근거하여 책망하고 잘못된 것도 성경에 근거하여 바로 잡으므로(바르게 함과) 모든 의로운 교육을 시키는데 최고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 과학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뜻을 목표하는 인간 교육에 최고 지침서라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방법이 역시 성경을 따름에 있고

5)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만 힘있게 접근하면 마귀도 좇을 수 있고 선한 일도 힘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성경과 관계되는 신앙 몇 가지를 본문에 근거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제48과 하나님의 탁월하심 (사 40:12~1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표현한 내용입니다. 탁월 이란 뜻은 뛰어나시다는 말이요, 하나님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을 절대성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본문의 제목을 “하나님의 절대하심을 나타낸 말씀”이라고 해도 되고 또 “전능, 광대, 무한하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어떻게 표현하셨는가?할 때에

1) 하나님의 창조하신 우주와 세계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너무 많고 하늘이 너무 광활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중 우주에 비하여 아주 작은 산 하나도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사람이 어떻게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며 뼘으로 하늘을 재며 땅의 티끌(흙)을 되에 담아 보며 작은 산을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란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자연을 연구하여 다스리고 이용하는 것은 좋으나 눈에 보이는 바닷물이나 땅덩어리도 헤아리지 못하는 존재이니까 인간의 연구(자연 과학등)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 공경이나 잘하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이 일찍이 하나님을 교훈한 일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물론 없지요.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교훈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하셔도 믿어야 하고 “콩을 보이시면서 팥이라”하셔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여호와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가르쳤으며 하나님이 어느 인간과 의논하신 일이 있으며 그를 교훈하고 지식과 공평의 도와 통달의 도를 가르쳤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설령 하나님이 미련하시다 하여도 그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기 때문에(고전 1:25) 그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고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하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한다(롬 11:23)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교훈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거나 똑똑한 체 하거나 무엇을 안다고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된다”하면 되는 줄 믿으면 그만이지 무슨 이유를 붙이느냐?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달에 1000만원 정도 고정 수입이 있으면 만족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주로도 만족할 수 없는 더 크신 분인 것입니다. 거인은 보통 사람의 5배를 먹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몇 배나 받으셔야 만족할까요?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광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다 드려도 채워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열방의 세계가 인간이 볼 때는 한없이 큰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통안에 들어 있는 한 방울의 물 같을 뿐이고 저울에 다는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먼지 같이 작고 레바논의 짐승과 나무를 다 모아도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실 때는 만물도 없는 것같고 빈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돈 많은 사람에게는 10만원 짜리 수표가 종이장으로 취급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드리려 하지만 그것은 다 헛된 일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물질을 원하시지도 않고 필요로 하시지도 않으며 사람이 물질로 하나님의 어느 부분을 채워 드릴 수도 없은 즉 성도의 할 일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따름인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여 섬기려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광대, 무한, 탁월하신 분인 것입니다.

2.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아는 것이 본문 연구의 핵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50년 경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이 주전 600년 경에 있을 나라의 멸망(바벨론 포로)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서가 66장까지인데 39장 이전은 열방의 심판을 예고하였고, 그 예고 중에서 이스라엘의 멸망도 예고한 것입니다(사 2:~5:). 그러나 40장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권고와 구원을 예언하시면서 하나님은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구원도 하실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탁월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믿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49과 생사를 주관하심 (삼상 2:6) 목록으로


좀 더 살았으면 좋을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아쉬움을 가질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더 살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으나 알고 보면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삶과 죽음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도다” 또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이고 살리는 것”은 생사 문제를 뜻함이고 음부를 거론하신 것은 구원 문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때로는 음부란 용어가 어두운 세계, 죄악과 환난의 세계를 뜻하기도 함;창 42:38). 또 마 10:28,29에 보시면 “몸과 영혼을 친히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하셨고, “참새 하나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행 17:25,26에서도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분이며…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는 분이라”고 하시므로 오직 모든 것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린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거든 하물며 성도의 생명이겠습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데도 이유가 있다”고 눅 13: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 자신도 무슨 일을 다할 때까지는 살게 해 주셨으면…”하는 마음을 가져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살고 덜 사는 것이나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이나 세상에 있는 것과 천국에 있을 것에 대하여 어느 것이 유익한 것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려서 쓰실 자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살려서 쓰시는 사람 또는 하나님이 버려두어 죽게 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요셉을 살려주셨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기로 의논할 때(창 37:20) 하나님은 르우벤을 반대자로 세우셨고(창 37:21)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을 때 하나님은 미디안 상고들을 그 곁으로 보내신 분입니다(창 37:28). 요셉은 여러 번 위험을 당했으나 하나님이 특별 섭리로 그를 보호하셔서 이스라엘 부족의 가장을 삼아 쓰신 것입니다.

2. 모세도 태어났을 때 꼭 죽을 형편에 있었지만(출 1:22) 그 부모가 믿음으로 아이를 석달동안 키워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웠으니 그 생명이 풍전등화 같았습니다(출 2:6~7). 그런데 바로 왕의 딸이 그 근처로 목욕하러 나오고 석달된 모세가 울음을 터트려 구원을 받게 하시는 섭리를 볼 때 하나님이 쓰실 자는 어떤 역경에서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두번 창으로 찌르려 했고(삼상 18:11, 19:9) 블레셋 군인의 양피 100개를 베어오라 하였고(삼상 18:25~27) 또 부하들을 보내어 몇 차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생명을 보호하여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삼으신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당시에 엘리 제사장의 집안은 몰락되도록 하셨고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돌에 죽게 하셨으며 사울 왕과 왕자 요나단도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아히멜렉”이란 제사장 부족 85명이 다윗을 선대하였다는 이유로 사울의 칼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삼상 22:14~18). 이것은 85명의 순교자를 내시면서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셨음에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신약에 와서 살펴보면 세례요한이나 스데반등 많은 종들이 순교 당하도록 버려두셨고 예수님은 12영 더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려 돌아가셨으며 베드로에게는 순교를 예고하시고(요 21:19) 사도요한에게는 그렇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 중요한 인물은 바울 사도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선교사명중에 이단자들의 위험, 풍랑의 위험, 질병, 전염병의 위험, 강도의 위험 등이 너무 많아서 항상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울을 지켜 주셨는데 마지막 로마로 가실 때도 풍랑을 만났으나 하나님이 바울을 살리시기 위하여 “함께 탄 276명의 생명까지 바울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행 27:24, 37). 그런데 이 모든 구조의 방법이 자연 섭리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죽을 자나 살릴 자를 다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의하여 주관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서 오직 생사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0과 천사들의 증언과 찬송 (눅 2:8~14) 목록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였으므로 성탄에 관한 말씀인 “천사들의 증언과 찬송”이란 제목으로 증언하겠습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로마 가이사 황제의 호적령을 받고 정혼자 마리아와 함께 자기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 갔다가 유숙처가 없어서 어떤 집 마굿간을 사용하였는데 마침 마리아의 해산 기간이 되어 그 마굿간에서 예수님(아들)을 낳아 구유에 누이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사실을 계시해 주셔서 잉태의 시기를 알았지만(눅 1:30~38) 해산의 날짜와 시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하신 일이 있었고(미 5:2) 그 예언에 맞추어 그 시기에 호적령이 있음과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이 탄생하시자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증언한 대상은 천사들이었습니다.

1) 본문 8~12절이 천사의 증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천사의 증언이 있었습니다(마 28:2~7). 하나님은 허다한 천사들을 통해서 자기의 메시지를 증언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성도들에게 명하셨는데 그 후 빌립 집사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천사의 지도로 선교 행선지를 지도한 일이 있었습니다(행 8:26, 16:6~10). 이것은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전도하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을 구원받은 성도에게 부탁하신 것은 성도에게 특권과 상급을 주시기 위함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증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증언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천사가 어떻게 증언하였습니까? ① 밖에서 양떼를 지키며 야숙하는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하였으니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먼저 증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4:14~16, 11:5).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비천하고 소외된 식구들에게 먼저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② 9절에는 “주의 사자” 10절에는 “천사”라 하셨는데 “주의 사자”는 “주께서 보낸 자”란 뜻이고 “천사”는 “영물의 고유 명칭”입니다. 이들이 나타났을 때 주의 영광(빛)이 두루 비쳤습니다. ③ 그리고 증언한 내용은 “무서워 말라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다윗의 출생지도 베들레헴임;삼상 16: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증언의 핵심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따라서 최초의 전도는 천사들이 한 것입니다. 그 복음은 온 백성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며(행 1:8) 이 복음을 들은 목자들은 강보에 쌓여 뉘인 아기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표적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메시야의 탄생을 눈으로 보고 확신할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성경으로 보고 확신해야 합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을 확인하고 천사의 증언을 말하였습니다(17~18절). 이상의 말씀에서 성탄절을 지키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사실을 증언할 사명을 갖는 것입니다.

2. 제일 먼저 찬송한 대상은 천군과 천사들이었습니다.

1) 천군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피조된 영물로서 하늘의 군대, 또는 하나님의 사신의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2)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확인하고 있을 때 홀연히 천군 천사들이 나타나서 찬송을 하였고 그 가사의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시는 시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이요, 또 땅에 있는 인간들은 그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할 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평화는 ① 죄악의 심판에서 해방되는 평화 ②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고 고난을 쉽게 견디는 평화 ③ 그리스도인답게 사랑을 실천하므로 누리는 평화 ④ 영원한 천국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①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도 증언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 ② 예수님의 탄생 그 자체가 복음 성취의 시작이요, 이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것이며 ③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과 찬송의 사명을 주셨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51과 한 해의 결산 (마 24:44~5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한 해의 결산”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매일 또는 며칠에 한번씩 결산을 할 줄로 압니다.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밑졌다면 얼마를 왜 밑졌는지를 알아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고 특히 성도는 십일조를 잘 드리기 위하여 결산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옛날 의성에서 어떤 장로님이 과수원을 하셨는데 사과 열매를 따기까지 25번 약을 쳐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약 값, 비료값 외에 인건비까지 다 제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금년 한해를 혹 밑지는 인생으로 살아오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슨 이익과 발전이 있었는지 신앙적 유익은 무엇이었는지를 결산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하셨고 주인으로부터 집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가 복이 있는 종(즉 충성된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주부가 그 가족들에게 식사 때마다 좋은 음식을 제공한다면 그 주부의 역할은 충성 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복음 사역자들도 영혼의 양식을 잘 제공할 수 있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협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여러 가지 일들(그 모든 소유)을 더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47절). 마 25:23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주인이 더디 오리라”하면서 주인을 의식하지 않고 헛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저희들의 한 해의 결산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내가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였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노력을 많이 하셨으면 분명히 믿음 성장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을 적게 하셨던지 아니면 늘 하는 방법대로 기계적으로 습관된 일만 하셨다면 신앙의 열매도 그 정도에서 그쳤을 것입니다.

2) 내가 성경 배우기를 얼마나 노력하였는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신앙 성장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위로 받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말씀의 지식이 넉넉했다면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지식은 곧 믿음 성장의 양식이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신앙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 혹 성경 공부를 게을리 하셨다면 명년부터는 가장 효력 있는 방법을 택하여 꼭 공부하실 것을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경 지식의 분량이 바로 여러분들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3)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떤 면에 잘 못 지키는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잘 못 지키는 부분이 바로 구멍난 부분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잘 못 지킵니까? 주일 성수를 못합니까? 십일조 봉사가 부족합니까? 아니면 사랑이 부족하였습니까? 타이어에 바람을 많이 넣었어도 어떤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다 빠지지 않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작은 틈을 막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시험이 오고 그것으로 인하여 축복에 지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 지키는 일을 잘 결산하시고

4) 충성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크게 충성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마 25:23). 작은 일이라 하여 요긴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열쇠 하나 있고 없는 것이 재산을 보호하는 관건이 되는 것처럼 작은 일이 얼마든지 큰 것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간의 기도, 구역의 모임, 위로되는 말 한마디 등이 큰 일을 이루어 내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을 잘하는 자에게 더 큰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한 해동안 얼마나 충성하셨는지 결산하신 대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3. 이상의 말씀들은 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본 일들입니다. 개인 신앙 생활 외에 가정을 위한 결산, 교회를 위한 결산, 이웃과 사회를 위한 결산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고 신년도부터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상대한 좋은 투자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000년도


제1과 성도의 목표와 성취 (롬 8:29~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목표와 성취”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 29절은 성도의 목표를 말씀하셨고 30절은 “구원의 절차”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절차는 미리 계획하시고 미리 선택한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믿음을 주심과 함께)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성화,영화 시켜서 거룩한 아들을 삼으시면 독생자인 예수님이 많은 동생들을 영입함과 동시에 맏아들이 되시고 성도는 그 지차 아들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면 성도의 목표가 무엇인가? 성도의 목표는 맏아들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이며 이런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 본문 29절에서 하나님이 성도로 구원하신 목적은 맏아들인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형제는 닮게 되어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닮아야 한 혈통의 자손임을 증명할 수 있음같이 하나님의 양자인 성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인 예수님을 닮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목적으로 구원하신다고 본문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런데 또 빌 3:14에 보시면 “성도가 푯대로 향하여 좇아가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므로 성도의 목표가 하늘 상급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예수님은 닮고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면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많이 예비하게 될 것입니다.

3) 이렇게 되면 최종 목표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만물 창조와 인생의 통치의 목적이 하나님 영광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롬 11:36). 창조의 목적, 인생의 목적, 성도의 목적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냐?할 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닮게 하시기 위함이며 예수님을 닮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여 하늘의 상급을 받으므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엡 1:5, 6).

2. 예수님 닮는 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1)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예수님 닮는 성화보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전도)을 더 중요하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꼭 아셔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① 예수님을 닮는 것은 본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힘쓰시고 전도는 사명에 속한 것이므로 그 다음에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가정 일을 잘 살핀 다음에 교회의 일을 섬겨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전도를 성도가 힘쓰시되 성도가 구원하는 일을 직접 하는 줄로 아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계 7:20에 보시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그 선택된 자를 때에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도는 믿음의 재료인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 주는 사명만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 사명만 잘하면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또 교회는 믿는 성도의 신앙을 육성시키기 위한 교육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는 제한되어 있고 믿음 분량은 자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전도를 사명으로 하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닮는 본분부터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1)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다고 가상하면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사진이 있어야 하겠지요. 성경이 곧 예수님을 아는 방법이기 때문에 성경을 앎으로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요 5:39).

2) 성경을 알되 밝히 알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빌 2:16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하셨고, 눅 24:27에서는 “자세히 풀어 설명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밝히 알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딤후 3:14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하시므로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4)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가? 행 8:31에 보시면 “지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고, 또 딤후 3:14에서는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며…”.하시므로 선생을 바로 만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만물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성도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과 하늘의 상을 예비하는 것인데 이것을 잘 성취하려면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잘 배우고 확신하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2과 의에 대한 지식 (롬 3:9~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의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 드리면

1) 9절 말씀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하셨으니 여기의 “유대인, 헬라인”은 선민과 이방인등 모든 인류를 지칭한 말씀이요, 그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란 뜻입니다. 이 뜻을 바꾸어 설명하면 “모든 인간은 의가 없기 때문에 죄인 상태 그대로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뜻으로 의가 없는 결과를 말씀하신 것이요,

2) “의인이 없다”하시고 의인이 없는 이유는 ① 깨닫는 자가 없고 ②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③ 정도(바른 길)로 가는 자도 없고 ④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 하시므로 이 4가지가 없는 것이 바로 의가 없는 것인데 사람에게 의가 있으면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을 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여러 가지 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스스로 할 힘이 없는 것이 바로 “의”가 없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면 죄인이란 결과가 오고 죄인이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런 처지에 있다고 본문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면 “의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돌아가서

1) 우선 의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와 상관없이 순결을 지키고 있는 상태”,“순결을 지키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은 상태”인데 사람이 이 정도 되려면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 그대로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다 타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의가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2) “의”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 자신의 본질적인 의입니다(롬 3: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속성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 홀로 의롭고 거룩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의”란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하나님 본질적 의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의롭다는 뜻이지만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특별한 의로서 인간에게 힘입혀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 1:17에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하셨고, 롬 3:22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의”란 말씀이 나타났고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의”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특별하게 만드신 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죄인을 의인되게 하기 위하여 만드신 특별한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후 3:9). 죄인들이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 의를 복종하지 않았다(롬 10:3)”고 하셨습니다. ③ 또 무슨 의가 있는가?할 때 빌 3:6에 근거한 “율법의 의”란 것이 있습니다. 이 의는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최대한 복종하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의요(창 6:9, 7:1)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잘 지키는 의이며(출 15:26) 또 모든 성도들도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 받지만(갈 2:16) 하나님의 계명 순종을 본분으로 알고 순종을 잘 할 때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더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노아는 의인이라(창 6:9)” “의로운 백성이라(창 20:4)” “나의 의가 표징이라(창 30:33)” “항상 의를 행하라(시 106:3)” 또 신약의 사람 “요셉이나 고넬료도 의인이라(마 1:19, 행 10:22)”하신 말씀들이 있지요. 이것은 다 성도가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지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금생과 내세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키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롬 2:13) 다 못 지키는 것이 확실하고(갈 3:11) 따라서 구원의 복은 하나님의 의로 힘입혀 주시는 것입니다(롬 3:20, 갈 2:16).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 ① “의의 뜻과 종류”에 대하여 말씀드렸고 ② 인간이 타락으로 의를 상실한 다음 스스로 회복할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으며 ③ 의의 종류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또 성도가 성도의 본분과 상급을 위하여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율법의 의(빌3:6)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3과 문둥병을 고치고 영광 돌림 (눅 17:11~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문둥병을 고치고 영광을 돌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감사절 설교로 사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10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문둥병을 고침 받고 그 중에 1사람이 감사하므로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1 .이 말씀을 상고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우선 역사적 줄거리를 살피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갈릴리도와 사마리아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리셨습니다. 그 때 문둥병자 10명이 떼를 지어 다니다가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외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한 것입니다. 이 말은 “불쌍히 여기셔서 문둥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다가 문둥병이 나은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 때 9명은 그대로 가고 사마리아 사람 1인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더니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10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9사람은 어데로 가고 이방인인 너 혼자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왔느냐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포를 해 주신 것입니다.

2) 이 말씀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피면 ① 예수님은 갈릴리 방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하여 지나가실 때 갈릴리도와 사마리아도의 경계로 가시다가 사마리아 촌에 들리신 것입니다. ② 문둥병자 10명이 멀리서 소리를 지른 것은 일종의 기도라 할 수 있고, 문둥병자는 성한 사람 곁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기 때문에(레 13:44~46) 멀리서 소리를 지른 것이요,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호칭했으니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병고침의 은혜는 믿음과 관계없이 예수님이 주시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이라도 의원을 통하여 병고침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 죄사함의 복은 참된 신앙이 아니면 받을 수 없습니다. ③ 그들은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청했으니 이것은 기도자의 꼭 필요한 요청입니다. ④ 이 때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하신 것은 이미 고쳐 주었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으라는 뜻이었습니다(레 13:2~14, 32).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병을 고침 받은 연고로 건강 진단 받으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⑤ 이 순종과 함께 그들은 가다가 자기들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사례를 한 것입니다. ⑥ 예수님은 감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시고 감사의 표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 하셨고 ⑦ 또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셨으니 여기의 “네 믿음”이란 “예수님이 고쳐 주신 줄로 아는 믿음”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믿음과 구원은 주님이 주신 영적 은혜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문둥병과 관련한 신앙적 교훈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문둥병은 사람이 못 고치는 병이요 오직 예수님께 나와서만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그 병에 대한 진단을 제사장이 하게 한 것입니다(레 13:2~14, 32). 이와 같이 죄도 예수님께 나오셔야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또 문둥병을 고치지 않으면 그 병으로 죽게 되듯이 죄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 받고 또 문둥병이 전염되는 것처럼 죄책도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죄를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문둥병자는 3가지 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① 자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 기도한 것이요, ② 예수님의 명령이 있었을 때 그대로 순종한 것이요, ③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순종, 감사 이 3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의 은혜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9명의 문둥병자들은 육체의 병만 고치고 영광도 안 돌린 채 가 버리므로 예수님을 섭섭하게 해 드렸습니다.


제4과 믿음 있는 자의 생활 (마 6:26~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 있는 자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믿음 있는 자의 생활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는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임을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 중에 사람 만한 존재가 없고 사람이 창조하지 못하니까 결국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달아야 하는데

1) 공중의 새를 볼 때 그 새들이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지만 잘 번성하고 있음은 하나님이 키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2) 사람이 자기들의 키나 생명을 임의로 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역시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는데 여기의 “키”라는 말은 헬리키안으로 작을 키를 의미하는데 성경 각주에 보시면 “목숨”이란 뜻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체를 자라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3:6). 이렇게 신비한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3)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이 그 꽃을 아름답게 피게 하시고 또 향기를 품게 하시는 놀라운 솜씨를 발견하셔야 하고,

4) 이런 일들이 다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비하면 미물들에게 속한 일이지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까지도 하나님은 키우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던지운다”는 뜻은 들풀이 잠깐 자라다가 베임 당하는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궁에 던지운다”는 것은 대단한 용도에 쓰여지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 목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관장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많이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 있는 자의 생활은) 믿음 없는 자의 생각이나 생활을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보시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므로 믿음 적은 자처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이 미물 돌보시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

2) 성도들이 다른 미물들에 비할 때 하나님의 최고 관심 대상이란 사실을 잘 모르고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는 사람

3) 이방인처럼 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잠 20:13). 성실한 자에게 의식주 문제를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출애굽했을때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이방인들은 무엇을 구합니까? 그들은 현실적인 것 외에는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식 낳기를 구하고 재물과 명예를 구하고 출세와 장수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은 믿는 성도라 하여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 은총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에게 보편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을 앞세워 구하거나 그것만 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구하고 신령한 말씀을 구하여야 하겠지요. 하나님과 말씀을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생활을 구하는 것입니다.

3. 믿음 있는 자의 생활을 결론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성실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 지식, 물질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하고 큰 믿음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실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한 것, 성경 지식에 관한 것, 신령한 것, 충성에 관한 것 등입니다.

2)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요 곧 천국 생활인데 이런 천국 생활은 오직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의”란 것은 속죄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서 의를 만들어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 가진 자에게 다 주시지만 성도의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도 역시 “십자가의 의”를 근거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를 구하는 자는 성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은 이 모든 것(필요한 것)을 신령한 것 외에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고 ② 믿음이 적은 행위를 경계하시고 ③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5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8~11)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서 제목을 잡는다면 “엄책의 효력, 회개하는 자의 마음, 또는 주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생활을 듣고 고린도전서(4:18~5:2)를 통해서 엄책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크게 엄책을 하시고 너무 심하게 책망하신 것 같아서 후회하고 근심하셨다고 하였습니다(8절). 그러나 바울사도가 이렇게 엄책하신 것은 엄책을 받고 돌이키는 것이 복음 사역자를 통한 징계를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징계로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보다 오히려 아무런 해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9절)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책망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하였고 또 근심이 회개를 이루시므로써 그들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11절 끝). 그래서 바울사도는 큰 다행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엄책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니까 “엄책의 효력”이란 제목을 정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이 후회할 것 없는 회개를 이루었으므로 “회개하는 자의 마음”이나 “주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룬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구원에 이르는 회개”란 “회개가 구원을 준다”는 뜻이 아니고 “회개의 관문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회개는 구원의 방도가 아니고 구원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방도는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 근심이 사망을 이룬다”는 뜻은 믿음을 저버린 현실적 근심은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지옥의 사망에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것입니까? 저희들은 이 사실이 곧 회개하는 자의 마음인 것을 아셔서 아울러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회개자의 마음

1.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이란 자신의 과오를 깨달아 뉘우치고 회개하여 바르게 잘해 보려는 건설적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2. 변명함입니다. 이 변명이란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변명이 아니고 죄인으로 지탄받는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협력하여 사랑을 베풀기 위한 목적으로 변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죄인이 변호사를 받을 수 있음 같이 성도의 세계에도 반듯이 변명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3. 분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분함은 실수와 죄를 범한 탄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의 실수가 가장 많고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 실수를 범하고 혼자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격한 행위지만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 죄지은 것을 분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4.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범죄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하실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두려우심을 맛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성도를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오래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벧후 3:9). 상당 기간 기다려도 회개하지 않을 때는 심판하시기 위하여 “화살을 시위에 먹이시고 칼을 갈며 예비하신다”고 하셨으니(시 7:11~12)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래서 늘 떨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셔야 합니다(시 2:11).

5.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모함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도 되지만 특히 바울사도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바울사도를 배반한 일이 있었습니다(고전 1:12). 그러다가 다시 깨닫고 바울을 더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 사역자를 신뢰하고 사모할 때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6. 열심함입니다. 믿음 생활의 열심은 곧 하나님과 복음 사역자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롬 12:11에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7. 벌하는 마음입니다. 회개자는 실제로 징계 받은 것을 반항하지 않습니다. 범죄자가 징계를 반항한다면 그것은 회개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상의 7가지 마음이 회개자의 마음인 것을 꼭 명심하셔서 좋은 근심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6과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함 (눅 22:31~34, 고전 15:5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무엇이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가?하면 믿음과 생활과 사명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 보시면 사탄이 베드로의 믿음을 밀까 부르듯 흔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이킨 후에는 “형제의 믿음을 굳게 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과 함께 옥이나 죽음에도 따라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3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사탄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신앙도 밀까 부르듯 가볍게 흔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많고 직분이 있다 하여 사탄이 흔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믿음 생활 잘 하는 분들도 항상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탄의 정체를 아시고 베드로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우리의 힘으로 믿음이 유지되는 줄로 아셔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과 성령님이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인 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늘 기도하고 또 성령님께 기도 부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롬 8:26).

3) 베드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떠나지 않을 것을 준비하였다고 하였지만 그 준비는 예수님이 보실 때 든든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 날 닭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자신을 믿거나 의지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기도는 베드로가 흔들리고 난 다음에 응답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이로 인하여 베드로가 자신의 연약한 실상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시 타락하도록 버려 두셨다가 다시 돌이키게 하신 것입니다.

5) 베드로는 왜 연약하게 흔들렸을까요? ① 자기의 연약을 모르고 과신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것과 자신을 과신하는 것은 큰 실수요, 과오인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을 과신할 때 하나님은 그를 붙들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② 각오가 든든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옥이나 죽는 데까지 가기를 준비하였다(23절)”고 하였지만 이 준비는 겉으로 표현한 말일뿐 굳게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든든한 각오는 실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천하지 못한 준비였기 때문에 각오가 모자란 것입니다. ③ 기도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실을 아시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눅 22:40)” 하셨을 때도 모든 제자들이 피곤에 못 이겨 기도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과 사명이 함께 흔들렸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하셨는데 이 말씀도 역시 믿음과 생활과 사명이 흔들리지 말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이웃 식구들 세계에도 믿음과 생활과 사명이 흔들리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1)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는 ① 초신자가 믿음의 뿌리를 말씀 속에 내리지 못했을 때 낙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 성도가 기분이나 환경에 끌리지 말고 말씀에 끌리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외식 적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 결국은 흔들립니다. 그 사람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외식인지 진실인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지만 지적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보다 보면 역시 낙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식구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3:14).

2) 생활이 흔들리는 경우는 ① 습관이 덜 됐거나 ② 신앙의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성수 주일과 봉사 생활에 제재를 받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이 습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명 생활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① 이것은 충성하던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정욕을 따르려 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② 때로는 사명자가 고난을 예측하지 못하면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을 미리 알려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16:1~2). 아무쪼록 저희들은 믿음과 생활과 사명에 흔들림 없기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과 숨어 계신 하나님 (사 45:15) 목록으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스스로 숨어 계시다”는 말씀에 대하여 살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1) 이 말씀은 성도에게 또는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가 하나님을 깨닫고 의식하며 응답 받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 대하여 무조건 자신을 숨기시는가?할 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① 하나님은 만물 계시와 말씀 계시,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롬 1:20, 요 1:1, 14:9). 만물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통치를 계시하신 것이고 말씀과 독생자의 계시는 구원 계시와 함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②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 주신 하나님은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하시는데 비택자는 만물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정도에 이를 뿐이나 택한 백성은 거듭난 심령으로 자연 계시와 성경 계시를 접하여 하나님을 깨닫도록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통하여 또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게 되는데 이것이 멀어지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숨어 계신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시고 잘 알려지시고 응답하셔야 할 하나님이 왜 스스로 숨어 계셔야 하는가? 여기에 상당한 이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

1)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대의 백성들이 외식하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시기 싫어서 숨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사 29:13)”하셨고 절기 때에 “성전의 마당만 밟으러 오는 것이…오히려 짐이 된다(사 1:14)”고 하셨습니다. 즉 외식자에 대하여 자기를 숨기시고 그의 기도를 거절하시기 위하여 숨기시는 것입니다(사 1:15).

2)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가 거의 없으니까 나타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시대에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시 14:1~3)”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주실 때가 있고 그때를 기다려서 주시기 때문에 그 전에는 자신을 숨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 4:16에서는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신다”하셨고 잠 30:18에서는 “그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징계를 받는 백성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 6:10에 보시면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눈이 감기게 하라…그들이 깨닫고 고침을 받을까 염려한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징계를 받는 자가 징계를 받는 동안에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30:19). 하나님은 욥에게도(징계 받음이 아니지만) 상당 기간 숨기셨고(욥 23: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바벨론 통치 시절과 말라기 이후 중간사 시대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4) 감찰하시는 방법으로 숨어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39:1~4에 보시면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심리에 감독자가 보는 데서는 잘하려고 하고 감독자가 없을 때는 꾀를 부리는 경우가 있지요. 이때에 진실한 태도는 감시자가 안 보일 때 나타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신 상태에서 인간을 감찰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는 계시를 주신 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시려는 뜻이 계셨습니다(행 17:27)”. 이렇게 더듬어 찾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3.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그 하나님을 잘 발견할 수 있을까요? 여기의 발견이란 의미는 하나님을 잘 깨닫고 의식하며 친교하고 응답 받음을 뜻합니다. 그 방법

1)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하나님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2)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마 7:7).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시되었습니다(요 5:39). 그래서 그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1:10). 이것은 마치 갓난 아기에게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면 빠는 책임이 아이에게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에게는 숨어 계신 하나님이 아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라고(사 58:9) 또 성도는 진리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 발견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과 하박국의 믿음을 본받자 (합 3:16~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박국의 믿음을 본받자”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하박국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로서 주전 650년 경에 선지자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유다의 멸망과(합 1:5~11) 바벨론의 멸망(합 2:9~20)에 대한 경고를 받고 두려워하면서도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두려움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하박국의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두려운 소식을 듣고 떠는 내용입니다(16절). 그 두려운 소식이란 전쟁의 소식입니다. 한번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가 망하는 전쟁이고 또 한번은 파사의 침략으로 바벨론이 망하는 전쟁입니다. 그 사이에서 백성들이 큰 수난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에 썩는 것이 들어오고(뼈에 사무치는 아픔과 두려움을 뜻함) 자기 몸까지 처소에서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2) 전쟁으로 인한 흉년과 가난을 예상하는 내용입니다(17절).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우리의 양이,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착취를 당하고 사람이 죽을 것이기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이 때에 하박국은 전쟁의 두려움과 가난을 믿음으로 극복할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 극복의 방법이 ① 여호와 곧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고 ② 힘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힘입어 정상에 오른 사슴처럼 다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하나님;능력의 하나님은 항상 성도의 소망이시고 변함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환난 중에서라도 기쁨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환난 중에서라도 힘을 주셔서 믿음을 지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시 50:15, 고전 10:13).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마치 사슴이 높은 산을 쉽게 올라가서 정상을 다니는 것처럼 믿음의 힘을 받은 성도들도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더욱 두텁게 할 것을 결심하는 내용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환난을 당할수록 믿음을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축복이 없고 고독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므로 영적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박국의 신앙이 전쟁의 두려움이나 가난에 구애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박국의 신앙을 생각하시면서 우리들과 현실 세계의 성도들의 신앙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1) 저희들은 먼저 자신의 신앙이 정금같은 믿음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정금은 연단과 순결과 값을 동시에 지닌 것입니다. 연단과 순결과 값이 없으면 정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이 우선 힘쓰셔야 할 것은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① 인격은 예수님을 닮고 ② 최대한 거리낌없이 행하여 순결을 지키고 ③ 사명에 충실하면서 ④ 신령한 은혜의 복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현실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분석하면 예수를 믿되 “기복 주의(현실의 복을 누리려는 것)에 끌리는 사람, 사람 앞에 자기를 나타내려는 명예 주의에 끌리는 사람, 성도들 간의 사랑과 친교에 끌리는 사람, 앞장서서 무엇을 하는 충성에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소원 성취가 더디거나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나 사랑이 식거나 직분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신앙도 식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정품 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끌리고 변함없이 말씀에 끌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끌리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끌리는 것이고 말씀에 끌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과 같아서 그 만큼 기도의 응답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분주한 것보다 말씀에 끌려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퍽 유익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하박국이 전쟁이나 흉년에도 신앙에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기뻐한 것처럼 저희들도 값없는 신앙(현실의 복을 추구하는)에 머물지 마시고 정상을 뛰어가는 사슴처럼 신령한 은혜를 더욱 추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9과 문제가 많은 사람 (눅 18:18~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우리들 세계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나 실제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인물은 청년이요(마 19:22), 관원이며, 부자인데(18, 23절) 별문제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유력해 보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① 청년 나이에 관원이었고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 그의 신앙에는 3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곧 율법을 잘 아는 것과 율법을 많이 지킨 것과 영생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문제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점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지적하시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 관원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①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선한 선생님으로(18절) 안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알아야 할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안 것입니다. 구원받는 신앙은 반드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야 합니다(마 16:16). ② 인간 중에는 선한 자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롬 3:10~12) 있는 줄로 알았으며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선한 사람에 해당하는 줄로 안 것입니다. 인간은 다 타락하여 선한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선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타락과 상관없이 오셨기 때문에 선하신 것인데 이 청년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면서 선한 줄로 알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잘못된 것이요, 또 자기처럼 율법을 열심히 잘 지켜서 선의 목표에 이른 선배로 착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③ 자신이 계명을 다 지킨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21절에 보시면 “이것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다 지켰다”하였으니 여기의 “다 지켰다”는 표준을 자신의 어두워진 양심에 비추어 판단한 모양입니다. 본문에는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 증거,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만 기록하셨지만 마 19:19에 보시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말씀까지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의 계명까지 포함하면 십계명중 인륜에 대한 계명을 다 거론한 셈이 되는데 여기에 대하여 다 지키지 못하였으면서도 다 지킨 줄로 착각하고 과신한 것입니다.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갔다가 돈이 모자라면 다시 와서 그 모자라는 돈을 보충하여 갖고 가야 하는 것처럼 의롭지 못하면서 의로운 줄로 착각한 것은 그것으로 뜻을 성취할 수 없는 모자라는 수준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인간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줄로 알았으니 이 사실로 보아서 그는 구원의 도리를 바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는 바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믿는데 있지 않습니까?

3. 이런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시면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이 있다”하시고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으니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여기에서 “한 가지 부족”이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필요로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또 물질은 향락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시 향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2)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주(히 12:2)이시기 때문에 그가 결심하고 복종할 때 믿음을 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한 재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였으므로 근심하고 시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는 자신이 반듯이 물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임을 입증하는 생활을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청년은 소명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22절의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바로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소명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 4:20).

4) 결국 그 청년은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명하게 가리지 못하였고 복종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생명의 주님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물질과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 청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자신의 길을 주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헌신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0과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 (고전 9:18~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3절에 보시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하시므로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시는데 그 모든 것의 내용이 23절 앞부분과 뒷부분에 말씀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복음에 참여하는 뜻과 복음에 참여하는 방법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복음에 참여하는 뜻은

1) 나 자신이 복음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복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복음의 내용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복음과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이고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므로 족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 참여하는 뜻은 자신이 구원받는 것인 만큼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요

2) 빛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주이신 예수님의 명예를 선양할 뿐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의 진실한 증명으로서 빛된 생활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빛된 생활을 나타냄이 복음에 참여함이요

3)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으면서 복음에 참여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이 부탁하신(고후 5:19, 살전 2:4) 유일한 복음 참여의 사명인 것입니다. 상급을 예비하시고 특별하게 부탁하신 것은 오직 전도뿐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에 참여하는 뜻을 3가지로 이해하신 다음

2. 본문에서 말씀한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에서 여러 가지를 살필 수가 있는데

1) 복음을 값없이 전하셨습니다(18절). 전도자의 직임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전달하는 직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천래의 사명이기 때문에 아무런 보수없이 전파한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이 가족 생활비를 받는 것은 교회에 몸을 담았기 때문이요, 전파의 값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값없이 전파하는 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권익을 다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즉 전도자가 자기 하고싶은대로만 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안하면 문화나 풍속 면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자유인이지만 종된자들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종처럼 살아 본 일도 있고 율법주의자들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율법주의적 생활에 동참해 본 일도 있고 약한 자들의 연약한 생활에 함께 동참해 본 일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짖는 세계에 합력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 세계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자유와 권익을 포기하고 희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화권에서 사는 전도자가 천민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처럼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24~27절에서는 운동 경기에서 이기는 방법을 말씀하시고 성도가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운동 경기나 달음질하는 목적은 이기고 상을 받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 생활도 승리 적이어야 하며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에 참여하는 일에 상을 예비하시고 그것을 받아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을 받기 위하여 승리로운 생활을 힘쓰는 것은 사사로운 이기주의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대적자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형체는 보이지 않으나 마귀의 역사는 죄와 불법으로 우리 앞에 잘 나타납니다. 성도는 이것을 배격하는 싸움이나 경주를 잘 하셔야 하는데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① 승리와 상급을 목표하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이기 때문에…이기기를 다투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 유혹에 패배하면 불행은 그 뒤를 따를 것이나 승리하면 즉시 행복이 뒤따를 것입니다. ② 향방 있게 달음질해야 합니다(26절). 이것은 법대로 경기하라(딤후 2:5)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③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고 절제의 목적은 탈선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탈선하여 버림받는 위험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생활을 잘하실 수 있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11과 성경 연구의 필수 요건 (마 5:8, 요 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 연구의 필수 요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며 깨닫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1. 거듭난 심령이어야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이 아니면 아무리 “성경을 진리라”고 외쳐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거듭난 심령이 아니면 하늘나라나 신령한 세계나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 성경을 진리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거듭난 백성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 는 성경을 진리로 믿기 때문입니다. 요 9:4에도 보시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거듭난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2.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하여야 하나님을 본다”하셨고, 또 마 11:25에서는 “복음의 계시를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들은 다 깨끗한 심령이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고 내용만 있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또 깨끗하고 순결한 믿음의 양심에 자신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죄악을 품은 부정한 심령에는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한 심령, 순결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지 않은 성도라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믿음만 갖고 순종, 봉사를 잘하면 많은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너무 없으면 성경을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벧후 3:18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하시므로 신앙이 지식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깨닫는데 필요한 지식은 학자가 아닌 성도들이면 국문을 이해하는 지식, 역사를 이해하는 지식, 교회의 지식, 영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영적이란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과 멀어지는 것을 마음에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죄를 범했을 때 큰 불행을 느끼고 회개했을 때 평안을 느끼며 성경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을 때 감사와 든든한 마음을 갖는 체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성경을 연구하려면 아주 방대한 지식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탐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 없이는 성경이 저절로 깨달아 지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노력을 할 때에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눅 2:46에 보시면 예수님도 성전에서 성경 문답을 하셨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마 7:7)”고 하신 말씀이나 구약 성경 잠 8:17에서 “간절히 찾는 자가(하나님을)만날 것이라”는 말씀과 또 신 6:1~9에서는 “앉든지 서든지 누웠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손목과 미간에 붙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만큼 성경에 집중하고 몰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야로 묵상하고(시 1:3) 날마다 상고하며(행 17:11)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야 한다(벧전 1:10)는 말씀도 있습니다. 무엇이나 목적을 달성하려면 집중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성경 연구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통하여 적당히 듣고 넘어가는 정도로 성경을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아 자기의 양식으로 먹지 않으면(마 4:4) 믿음의 힘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에 몰두하면 약간 비정상인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말씀 연구에 끌리고 거기에 집중하려 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므로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행복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5.실천 체험하는 것이 성경을 깨닫는 필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인내를 잘하고 만족을 맛보거나 사랑 실천을 잘하고 좋은 결과를 얻거나 십일조를 잘하고 형통함을 체험하는 등 선한 일들을 용기 있게 실천하고 뒤따라오는 기쁨과 형통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체험을 성경을 더 신뢰하고 지키는 능력을 얻는데 크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연구의 필수 요건은 ① 거듭남 ② 순결함 ③ 지식 ④ 몰두 노력 ⑤ 실천 체험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12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요 9:1~12) 목록으로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을 여러 각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표면에 드러난 내용 몇 가지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실수로 인하여 불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원인을 여쭈었고 또 소경 자신이나 그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부모나 그 자신의 죄가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소경된 원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 때문인 만큼 성도가 하나님의 일로 불행을 당했다면 그것을 큰 복으로 여기며 감사해야 할 것이요

2) 소경을 보는 두 가지 견해가 나타났으니 ① 불행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는 정죄 심리를 나타낸 제자들과 ②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생각하시면서 불행 당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려고 한 예수님의 태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예수님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 소경을 눈뜨게 하시기 전에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증언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을 뜨는 것보다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나타내신 일이요

2) 그 증언의 내용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라”하심은 빛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요, “밤이 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하심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인간으로서의 세상일이 끝나므로 더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계신 동안 빛된 생활을 많이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증언의 핵심은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과 세상에 계신 동안 빛된 생활을 많이 하여야 할 것을 먼저 증언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먼저 증언해야 할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1)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에 두 가지 방법을 쓰셨으니 ① 침 뱉은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신 것이요 ②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2) 이 두 가지 방법이 눈뜨는 과정의 필수 요건인가?할 때 침 뱉은 흙이 눈뜨는 약이 될 수 없으며 실로암 물에 씻는 것도 역시 그 물이 눈을 보게하는 약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이런 방법을 쓰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밝히 보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흙을 바르는 것은 눈을 보게 하는 일에 지장을 줄 듯한 일이고 또 소경이 실로암 물에 찾아가는 것도 퍽 불편한 일이므로 순종에 걸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거추장스러운 방법을 쓰셨을까요? 이 뜻은 아무래도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행하여 눈뜨기를 사모하는 자로 하여금 주님을 신뢰하고 무조건 순종하며 또 인내로 순종하는 결단과 노력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넣은 일이나(수 3:15~16)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진 사실이나(눅 5:5) 죽은 나사로의 무덤돌을 굴린 사실이나(요 11:41) 맹물을 부어 연회장에게 갖다 준 하인처럼(요 2:8) 순종을 보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믿음과 순종을 앞세워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4. 소경이 눈을 뜬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고 보게 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하는 논란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밝은 눈을 가진 그 걸인이 바로 소경이었던 그 사람이냐, 아니냐?하는 논란이 생겼을 때 눈뜬 사람은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이요, 예수라는 분이 “눈에 흙을 바르고 실로암 물에 씻으라 하여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뜬 소경이 “내가 그로라‘하고 자기를 밝힌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자신을 숨기지 않은 진실이요

2) 예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을 때는 그것을 숨겨서 자신의 입장에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으나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시지 않는 분임을 아셔야 하며(딤후 2:13) 또 어떤 방법으로라도 진실을 밝혀 능력의 예수님을 나타내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교훈에서 믿음의 양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13과 하나님의 광대하심 (시 96: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절에 보시면 “여호와는 광대하시어 극진히 찬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뜻이 무엇이냐?를 아셔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에는 3가지 대목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말씀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하는 점과 성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하는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1) 4절의 광대하신 하나님, 6절의 “존귀와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으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2)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2절에서 “구원의 하나님”, 5절에서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10절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만민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이라”하셨고

3)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는 1절에서 “새 노래로 송축하는 것”이요, 2절에서 “그 구원과 기이한 행적을 날마다 선파하는 일이요”, 7절에서 “영광과 권능을 하나님께 돌리고 극진히 찬양하고(4, 6절) 예물을 드리고 거룩한 것(깨끗한 것)으로 경배하고 그 앞에서 떨며 경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2.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하는 것을 표현하는 일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하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속성”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아셔야 그 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대상으로부터 지음을 받으셨는가?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존성을 출 3:1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전지 전능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사랑스러우시나 공의로우시고 지혜도 무한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지 하시다(욥 11:6)”는 뜻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뜻이요 “영원하시다(롬 16:26)”는 뜻은 존재, 즉 생명이 무한하시다는 뜻이요 “거룩하시다(사 5:16)”는 뜻은 흠 없이 순결하시다는 뜻이요 “사랑스러우시다(요일 4:8)”는 뜻은 피조물들에게 극진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요 “공의롭다(신 32:4)”는 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하여 적절하게 조치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지혜롭다(단 9:22)”는 것은 오묘한 방책이 가장 뛰어나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광대하시다”는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광대하심”에 대한 뜻을 설명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뜻은 하나님이 우주와 그 모든 세계를 다 포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신 분이므로 만물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초월하여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기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실 만큼 하나님의 간섭 범위가 넓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란 뜻은 넓고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넓고 크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하나님의 편재 또는 무소 부재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광대하심이 서로 다른 뜻도 있지만 하나님이 넓게 존재하시기 때문에 편재하신 만큼 공통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꼭 같은 시간에 모든 사람 개개인과 일대일로 상대해 주실 수 있는 영의 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데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나 세계의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같은 시간에 기도를 하여도 모든 사람 개개인과 다 일대일로 상대해 주실 수 있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광대하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고(벧후 3:8) 하나님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심은 “내가 새벽 날개를 펴고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다(시 139:9)”는 말씀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모든 성도들에게 적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대로 유식자는 유식한 형편대로 지식이 부족한 자는 부족한 대로 교역자는 교역자대로 학자는 학자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성경을 연구할 때 모든 사람들의 형편에 알맞도록 감동하시고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특별한 성도에게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요 모든 성도에게 그 형편대로 역사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14과 경건의 연습 (딤전 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하신 말씀을 제목으로 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 보시면 먼저 경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 1절에 보시면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혹케 하는 영이나 귀신”은 같은 뜻이요 그들의 “가르침”이란 성경을 떠난 이단적 교훈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그런 미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믿음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불에 거슬린 것처럼 검게 된 것을 뜻함)이기 때문에 외식하고 거짓말을 하며(2절) “혼인을 금하라”는 금욕주의를 주장하고 먹고 마시는 식물을 가리는 등(골 2:16) 잘못된 교훈들을 펼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어떤 이들이 우상의 제물을 가리거나 율법이 금하는 식물(레 11:1~23)을 가리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식물은 다 하나님이 내신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자들이 믿음과 감사로 받을 때 버릴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3~5절)”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식물을 분별한 것은 십자가의 보혈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피를 먹지 못하게 하셨고 또 고기를 삼가게 한 동물들은 대부분이 맹폭하고 더럽고 간교한 동물들로 구별되기 때문에 육체적 위생은 물론 정신적 순결을 표방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십자가로 보혈을 나타내 주셨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모형적으로 정결케 하는 예법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히 8:13). 그러나 이런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적 종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 생활이 옳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이런 진리를 잘 설명하여 형제를 깨우치면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바른 교훈으로 양육을 받게 될 것이라(6절)”하시므로 율법주의적 신앙을 깨우쳐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4) 그러면 또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의 “거룩”은 죄사함 받고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속죄와 순결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따라서 복음적 성도는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은 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로 여겨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 진리로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하신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경건에 이른다”는 뜻은 “하나님을 가까이한다”,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여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경건한 생활의 반대는 “육체의 생활, 즉 현실적 생활인데 이 현실적 육체의 생활에도 연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현실 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과 숙달된 것이 바로 연습을 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체력을 단련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컴퓨터를 잘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래처의 전화번호를 다 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 생활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뿐이니 그 이유는 100년 못 가서 다 죽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연습은 금생에서도 신앙적으로 복을 받고 내생에서도 상급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영원한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하고 많이 연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결론적으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주로 어떤 것일까요? 성수 주일, 매일 새벽에 일어 나는 연습, 기도하는 습관, 교회에 나와서 엎드리는 습관,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살피는 연습,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또 실천하는 연습, 찬송, 기도, 설교 연습, 더 나아가서는 헌금하는 연습, 겸손해 보는 연습, 무조건 참아 보는 연습, 무조건 순종해 보는 연습, 선행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해 보는 연습(갈 6:9, 계 2:10), 예수님의 성품을 모방하는 연습 등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연습을 많이 하면 기적 같은 마술을 할 수 있는것처럼 성도가 경건의 연습을 많이 하면 성령님이 기적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제15과 성도가 받은 은혜 (요 1:12~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가 받은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혜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이것을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받은 은혜”란 일반인들과 같이 받은 은혜가 아니고 성도만 받은 은혜임을 아셔야 합니다. 생명이나 사회적 은혜나 자연 혜택으로 받는 은혜는 신자나 불신자나 다 같지만 성도가 받은 특수한 은혜는 불신자들은 받지 못하는 것이므로 더욱 귀한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12절 말씀은 예수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다”하므로 큰 은혜를 말씀하셨고 13절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으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거듭난 은혜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14절에서는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의 육신을 힘입어 세상에 오시므로 성도와 함께 계신 것을 말씀하셨고 그 예수님은 “영광의 주시요 아버지의 독생자요 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세례요한은 증언하기를 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이었고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은혜를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가 넘쳤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2.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1) 창조자 하나님(아버지)을 알게 된 은혜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부모를 잃고 버려진 고아의 형편을 생각해 보시고 그 고아가 온갖 고생과 천대를 받으며 소망 없이 살던 중에 훌륭하고 유명한 부모를 찾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귀한 일이며 또 행복하겠습니까?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자를 모르는 것은 마치 고아의 신세와 같은 것이며 여기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바로 고아가 부모를 찾은 것보다 무한정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죄인은 벌을 받으며 형통하지 못합니다. 죄인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형무소에 갇힌 사람은 돈을 많이 쓰고라도 속히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참으로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를 구속의 제물로 희생당하게 하시고 택한 백성 바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영원한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구원 계획을 하셨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성도가 이 은혜에 감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요 5:24).

3) 하나님의 자녀 되는 양자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의 “하나님의 자녀”란 명분 만으로만 그렇게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인정하시고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조카된 자가 아들 없는 삼촌의 양자 되기를 원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그 양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함이고 이 재산은 호적상으로 양자가 됐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양자 되는 것도 하나님이 아들로 취급하여 은혜를 베푸실 뿐 아니라 천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그 아들들에게 상속하여 같이 누리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자 됨은 존귀한 명분으로 보나 실제적인 은혜로 볼 때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세상의 복은 여기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는 “예수님(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하셨고 창 28:15과 마 28:20과 계 3:20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은 큰 행복이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성령님과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여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5)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시는 것은 영생, 천국이요, 하늘의 상급입니다. 이상의 5가지는 불신자들이 받지 못하는 것이요 오직 성도만 받는 것임을 아셔서 크게 감사하시고 누가 묻더라도 “나는 예수 믿고 이런 은혜를 받았다”고 담대히 자랑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16과 성찬 전에 하신 일 (마 26:17~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찬 전에 하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성례식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세례식이요, 또 하나는 성찬식이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찬식에 관한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14:17~25), 누가복음(22:14~20)에만 있고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1. 공관 복음에 나타난 성찬 예식 기사 중에 차이가 발견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1) 마태, 마가는 떡을 먼저 잡수시고 다음에 포도주를 잡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잔을 먼저 잡수시고 다음에 떡을 잡수신 것으로 나타난 점이요(눅 22:17~19)

2) 마태, 마가는 떡을 잡수실 때 축복하시고 잔을 드실 때 사례하였으나 누가복음에서는 두번 다 사례하신 것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3) 이 사실을 종합할 때 ① 성찬식은 음식을 잡수시던 과정에서 있어진 일이란 점과 ② 떡과 포도주를 먹는데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없다는 사실과 ③ 축사나 사례가 복합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관 복음을 종합적으로 살필 때 예수님이 성찬 전에 하신 일에는 공통점이 있으므로(성찬을 앞둔) 저희들이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찬 전에 하신 일

1) 성찬을 위하여 미리 준비케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미리 사람을 동리에 보내셔서 다락방과 음식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찬식은 식사를 겸하였기 때문에 식사와 함께 준비함이 필요하였는데 여기에 장소도 필요하였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처럼 예배당이나 교회 경상비로서 음식 값을 갖고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소와 음식이 필요하므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장소와 떡은 준비 안 해도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준비, 경건의 준비, 충성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열두 제자들과 앉으신 중에 외식자 유다를 선별하여 지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운 제자중 가룟유다가 문제의 인물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제의 인물임을 나타내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때 하나님께 고하신 사실로 나타났을 뿐이고(요 17:12)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신 것은 성찬 예식에 앞서서 였습니다. 눅 22:21~23에서는 “예수님이 성찬식을 명하신 다음에 가룟유다를 지적하신 것”으로 나타났지만 마태, 마가의 기록이나 요 13:21~30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다가 지적 받고 그 밤으로 자리를 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은 식사와 연계된 상황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시간적 순서를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가룟유다는 외식자요 또 예수님을 배신할 자이기 때문에 영적 구원의 복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하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자나 외식자나 배신자는 성찬을 받는 자리에 나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사례와 축복을 한 것입니다. 사례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요, 축복은 성찬을 대하는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 성도가 식사를 할 때에 감사와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생각할 때 구원 영생의 무궁한 은혜를 전달받는 예식인즉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성도에 대한 축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마 26:26, 막 14:22)”하였고 또 잔(포도주)은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 막 14:24 눅 22:19~20)”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에서는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습니다. 성찬을 받는 성도들이 성찬의 의미를 모르고 대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바울사도께서도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하시는 것은 죄가 된다(고전 11:27)”하셨습니다. 또 성찬을 불합당하게 대하는 일 때문에 “약한 자, 병든 자, 죽는 자도 있을 수 있다(고전 11:30)”고 하셨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신 성찬을 의미 있게 받기 위하여는 ① 경건의 준비 ② 회개하는 태도의 준비 ③ 성찬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준비 ④ 감사와 축복을 장려하는 일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찬 예식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생명을 고난으로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에 대하여 실감 있게 깨닫고 기념, 전파하게 하신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제17과 부활체의 신비 (고전 15:35~44) 목록으로


기독교는 영생의 종교이므로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또 부활절 때나 성도의 장례식 때에 부활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을 한다는 것이냐?”하고 질문을 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부활의 진리와 예수님 부활체의 신비함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성경에 부활 기적의 사건은 구약에 3번 신약에 4번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르밧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22;엘리야)과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하 4:35;엘리사)과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해골에 던져 살게된 일(왕하 13:20~21)이 있었고 신약에서는 나인성과부의 아들(눅 7:15;예수님), 나사로(요 11:44;예수님)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 예루살렘에까지 들어가 보인 일(마 27:52;하나님) 또 유두고가 살아난 일(행 20:12;바울)이 있었습니다. 이 부활은 현실적인 부활로 다시 죽음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산채로 변화되어 승천한 사람은 에녹(창 5:24, 히 11:5)과 엘리야(왕하 2:11)였습니다. 여기에서 에녹과 엘리야의 부활체는 예수님처럼 승천할 수 있는 영화의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승천”이란 뜻은 그 몸의 형체가 어느 정도 공중으로 솟은 것을 의미함이요 천국이 현상 세계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희들이 믿는 천국은 어디까지나 영계의 위치 있는 천국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저희들이 부활체의 신비를 알려면 예수님의 부활체의 모습으로밖에는 살필 데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승천하실 몸으로 부활하여 상당 기간(40일) 땅 위에 계신 분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체는 영광스러운 몸이기 때문에 현실적 육체의 몸과 달라서 자연스럽게 식별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가 동산지기로 착각하였고(요 20:15)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영적으로 밝아진 눈으로만 알아보았으며(눅 24:31)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보고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였으니(마 28:17) 이것은 부활체가 육체의 모습과 조금 다른 영화로움을 뜻하며 불신앙의 눈에는 발견되지 않는 신비한 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체는 현실적 몸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보인 것과 말씀한 것과 만질 수 있었음과(요 20:27) 음식을 잡수신 것(요 21:13)을 보아서 알 수 있으며

3)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붙들려고 하니까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곧 올라가노라(요 20:17)”하시고 그 다음에 도마에게 자기 몸을 만지게 하셨으니(요 20:19) 예수님은 그 사이에 하나님 보좌에 다녀오셨다는 뜻이요, 엠마오 제자들에게 알려지셨다가 흔연히 보이지 않았고(눅 24:31) 문이 닫힌 다락방에 문을 열지 않은 채 통과하셨으며(요 20:19)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 가신 것도 도보로 가시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행 1:9) 그 부활체가 공간의 제재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몸임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4) 천국과 지상을 상통하는 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행 7:55;기적에 의한 일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지상의 바울사도에게도 나타나 주셨고(행 9:5, 고전 9:1) 또 “곁에 계셨다(딤후 4:17)”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몸은 천국과 지상을 왕래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이시기 때문에(고전 15:20) 주님의 부활체와 성도의 부활체가 같은데 마 22:30에서 부활체는 천사처럼 성(性)을 초월한다고 하셨습니다.

6) 본문 42절 이하에서 현실의 몸, 즉 육의 몸은 썩을 것, 욕된 것(고난, 죽음이 있으므로), 약한 것이라 하시고 부활체는 영광스럽고 강하고(다시 죽지 않음) 신령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상 세계에 여러 육체가 있고 천체의 영광이 다르듯이 신령한 몸의 세계와 영광도 다르다 하셨고 또 “육의 몸이 있은 즉 그것이 씨가 되어(35절) 신령한 몸이 있게 된다(44절)”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죽음을 맛본 다음에야 부활의 영광을 힘입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부활의 몸과 영광을 사모하며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8과 찬양에 대한 말씀 (시 113:1~9)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의미를 잘 살피면 대단히 조직이 잘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찬양함에 대한 내용이 육하원칙, 즉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의 의미로 순서 있게 잘 기록한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상고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고 마친 것이나 “찬양”이란 용어를 4회나 강조한 것이 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느 8:10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하셨고, 시 37:4에서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인가?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웃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위가 바로 찬송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할렐루야”란 뜻도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뜻이라고 각주에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대로 찬양에 관한 말씀을 상고하면

1. 찬송할 사람은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다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종이란 신분이 낮은 계급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눅 22:27). 그런 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은 더욱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섬기는 것이 불행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은 큰 행복임을 아셔서 더욱 잘 섬기고 즐거워하며 찬송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어느 때에 찬송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으니 여호와의 종들이 찬송을 드려야 할 시기는 2절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성도 역시 영원히 천국에 있을 것이므로 끝없는 영광을 돌려야 함이요, 또 하나님은 사람처럼 바쁘시거나 주무셔야 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느 때 찬송을 드려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어떤 경우에 찬송을 잘하는가 하면 예배 의식을 진행할 때 또는 자기의 마음이 기쁠 때 찬송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자기의 기분에 따라 찬송하지 말고 어느 때든지 혹 괴로울 때라도 찬송할 사명을 갖고 사명으로 찬송을 한다면 하나님은 더욱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한 것이 바로 그런 실례라 할 것입니다(행 16:25).

3. 어디서 찬송할 것인가?할 때 “해 돋는데서 부터 해 지는데 까지”라 하시므로 영광 돌릴 장소를 광활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만방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들로 찬송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만 찬송이 울려나와도 안 될 것이요, 북한이나 어느 세계에서든지 찬송이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가 귀한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웃집 교회에서 들리는 찬송 소리도 귀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다른 교회 부흥되는 것을 시기한다면 그것은 바른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4.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를 4~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고

2) 그 영광이 하늘 위에 높으시며

3)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으니 절대자시요

4)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어 천지를 살피시니 이는 높은 보좌에 계시지만 비천한 세계를 살펴 주신다는 뜻입니다.

5)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가난한 자를 존귀케 하심)

6)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비천한 생활을 의미함)에서 드셔서 방백(관원, 존귀한 자)들과 함께 세우시고

7) 잉태하지 못하여 쫓겨나게 된 여인에게 자녀를 생산케 하여 집에 거하게 하시며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하나님을 실감하면서 항상 즐거움의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19과 욥의 자녀 교육 (욥 1: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욥의 자녀 교육”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욥은 140세를 살았습니다(욥 42:16). 그래서 욥은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짐작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고(창 25:7), 이삭도 180세를 살았으며(창 35:28)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2)를 살았기 때문에 그 나이와 비슷한 시대를 추정하게 된 것입니다. 욥이 동방의 “우스”땅에 살았는데 이 곳은 아라비아 북쪽 지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또 욥은 큰 부자였습니다. 욥의 아들들이 생일이 되면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세 누이들도 참석케 하였는데 잔치를 끝낸 다음에는 욥이 그 자녀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려 성결케 하였으니 이는 그 아들들이 마음으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미리 속죄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의 범죄 방지를 위하여 크게 노력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욥의 신앙과 욥의 자녀 교육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욥은 가족적으로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욥은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욥 1:8에서는 “그런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꼭 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역자의 인정과 칭찬만 받아도 상당한 수준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기를 기록한 것은 욥의 신앙적 인격과 인내의 모범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인정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욥의 자녀 교육이 어떠하였습니까?

1) 욥은 화목하는 자녀가 되도록 힘을 썼습니다. 10남매 자녀들이 각각 자기의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한 것은 가족 화목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가족간에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가정이 잘 시행하는 줄 압니다. 가족간에 한사람이라도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질감이 생길 때는 화목이 약해지는 수가 있습니다. 항상 가족간에 사랑과 우애가 넘치도록 힘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자녀들이 죄를 경계하는 생활을 하도록 교훈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잔치를 끝낸 다음에 매 자녀들의 속죄를 위한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린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잔치와 더불어 무슨 죄지을 위험이 있는가?하시겠지만 사람이 음식을 먹고 마음을 흥겹게 가지면 자동적으로 현실 정욕에 도취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전 7:2,4에서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고 우매자의 마음이 연락하는 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적으로 각성하는 자들은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고(고전 7:30), 웃음도 애통으로 바꾸라(약 4:9)”고 하셨습니다. 욥이 형제 화목을 위하여 잔치를 허락했을지라도 잔치하고 즐거워하는 동안에 그 자녀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까워지거나 연락을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번제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교육 방식은 ① 먼저 자신이 경건하게 산 것이고 ② 자녀들을 화목하게 살도록 지도한 것이고 ③ 죄짓는 것을 경계시키기 위하여 철저하게 단속한 것입니다. 얼마큼 철저하였습니까? 자녀들의 죄를 확인도 하기 전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번제를 드렸으니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죄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마음으로 범죄한 것까지 큰 죄로 인정을 하였으니 죄에 대한 철저한 경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회피하고 마음속의 죄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므로 죄가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욥은 염려되는 것도 죄 지은 것으로, 마음속의 허탄한 생각도 큰 죄로 여긴 것입니다. 저희들도 욥의 신앙과 교육적 모범을 본 받으셔서 먼저 부모님들이 모범을 보이시고 화목하는 교육과 죄를 경계하는 교육을 철저하게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행복한 가정 (잠 31:10~31)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단체는 가정입니다. 가정보다 더 행복한 곳을 찾으려면 천국에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가정이 더 행복해지고 하나님께 영광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1. 본문에서 가정을 행복하게 이끈 주인공은 그 집의 안방마님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을 가리켜서 “현숙한 여인이라” 또 “진주보다 더 값진 여인” 또 “덕행 있는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가정으로 시집을 와서 그 가정을 신분상으로 물질적으로 인덕까지 후하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큰 칭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여인이 행한 것을 간추려 보면

1) 30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첫째 조건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2) 진실한 여인이요, 남편에게 선만 행하고 악은 행치 않는 여자(11~12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은 그 아내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가끔 악을 행한다면 남편은 그를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가정주부의 책임이라면 ① 식구들에게 때마다 식물을 주는 것이요(15절) ② 가족의 의복을 겨울 되기 전에 준비해 놓는 일이요(21절) ③ 매일매일 여종에게 일을 시키는 일이요(15절) ④ 자기 몸단장을 아무리 바빠도 잘한 것입니다(23절). 이런 책임을 성실하게 잘하였을 뿐 아니라

4) 산업을 일으키기 위하여 놀지 않고 일하며 밭을 사들이고 또 장사까지 한 것입니다. 가정의 재산 증식을 위하여 힘쓴 일을 살피면 식구들의 근면을 위하여 밝기 전에 식사를 해 주고(15절) 종들에게 일을 맡기고 포도를 심고 길삼을 하여 팔아서(18~19절) 재산 증식을 이룩한 것입니다.

5)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20절)

6) 입을 열어 지혜와 인애의 법을 베푼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 한 사람의 역할로 말미암아 남편은 그 동리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고(23, 28절) 자녀들은 그 어머니를 크게 존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30절).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저희들의 가정이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생활적으로 더욱 행복해지기 위하여, 모든 가족들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현실 가정의 부조리한 문제 몇 가지를 지적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시정되어야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가족들의 예배드리는 모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① 합심을 못하기 때문이요 ② 온 가족이 일정한 시간에 모임을 갖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잘 극복하고 하루에 한차례 또는 일주간에 몇 차례라도 가족 예배를 시행하셔야 할 것이요

2)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중간층의 부모가 그들의 노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또 그들의 자녀들과도 대화를 많이 하고 또 자녀들끼리의 모임과 대화도 많아야 할 것이요

3) 가족들 간에 물욕을 피하여 누가 물질을 더 갖거나 덜 갖거나 하는 문제로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누구를 혼인시킬 때 가져온 혼수감이나 선물량이 적었다 하여 섭섭한 말을 하는 정도라면 대단한 불행을 맛보아야 할 것을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온 가족이 물질 소유 문제로 욕심을 내지 않는 집안이라면 그 집은 큰 기쁨과 행복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도 될 것입니다.

4) 인권을 골고루 존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들어온 며느리에 대한 인권을 그의 친정 식구들과 연계하여 과소 평가하거나 아니면 갖고 온 것이 적다 하여 경솔하게 보는 태도는 참으로 미개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로는 그런 것을 과감하게 탈피하지 못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는 그런 것을 과감하게 탈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지나친 예절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 공경을 적게 하라는 뜻이 아니고 부모된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지나친 예절과 자유를 통제하여 친교적 거리감이 생기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책임 외에는 상당한 생활의 자유를 부여하라는 뜻입니다. 며느리를 딸처럼 사위를 아들처럼 여기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시행하실 때 그 가정은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넘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21과 인간의 의무와 타락상 (롬 1:21~25) 목록으로


인간이 퍽 악하다는 사실은 본래부터 아는 일이지만 잔인한 수법의 범죄 행각이 보도될 때마다 왜 인간이 저런 범죄를 해야만 하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인간의 완악성을 성경에 비추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범죄를 저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연구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인간의 의무와 타락상을 설명하신 말씀으로 범죄와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을 일깨워 주시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말씀하셨는데

1)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하신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① 신앙적으로 ② 지식적으로 ③ 친교적으로 잘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21절에서 “감사치도 아니하고”하셨으니 이 말씀은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역시 21절에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①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②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고 ③ 그의 진리를 신뢰하며 복종하는 생활입니다. 주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인간의 타락상이 어떠하였습니까?

1)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2)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3)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4) 생각을 바르게 하지 않습니다(그 생각이 허망하여)

5) 점점 우둔하고 미련하여졌습니다.

6) 썩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 버리고 썩어져 없어질 사람이나 금수, 버러지 형상을 택합니다. 이것은 곧 창조자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7) 자신의 육체까지도 음행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피조물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정신적 음행이고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것(24절)”은 육체적 음행입니다. 이런 죄악들은 하나님 보실 때 참으로 악한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인생이 왜 이런 범죄를 해야만 합니까?

1) 조상의 범죄로 전가된 타락의 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부패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은 십자가 공로로 해결해 주시고 이 부패성은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여 지나니라(엡 5:26, 딤전 4:5)”하셨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는 날(갈 5:17;죽음)까지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중요한 것은 본문 24절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자를 타락의 형편에 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자식은 부모가 고생을 하면서라도 공부를 시키지만 공부 안하고 방탕하는 자식이면 부모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뺏도록 하시듯이(마 11:12) 거룩하여지는 은혜도 노력하는 자에게 더하시고 타락을 본업처럼 하려는 자는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3)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제멋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은 줄 압니다. 허망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이 정상인 줄 압니다. 이것이 곧 미련한 마음이 더 어두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썩어질 우상과 피조물과 물질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착각하여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로 알고 범죄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다(시 49:12)”하셨는데 인생이 타락하면 꼭 그와 같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 국토 안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기가 어려워진 것처럼 인간의 정신 문제와 도덕성에 대한 오염도 대단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어떻게 하는 것이 범죄를 예방하는 좋은 방도가 될 것입니까?

1)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려야 합니다.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라(25절)”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는 인생의 목적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2) 가치관을 바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돈잘쓰고 향락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가치관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많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는 오직 신앙과 정의와 충성에 가치관을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소질에 따른 업무에 충실하므로 범죄의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현실의 타락상이 인간의 의무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시면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끝까지 잘 시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2과 마음이 뜨거워 짐 (눅 24:32) 목록으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저희들도 말씀을 접근할 때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1. 본문에서 “마음이 뜨거웠다”는 뜻은 깨닫는 감동과 충격과 뜨끔함을 느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충격과 뜨끔함을 느끼면 회개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는 마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2:37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였으니 이것은 회개를 나타낸 것입니다. 다윗왕이 음행을 하고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을 때도(삼하 12:9) 역시 회개하는 태도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행 18:5에서 바울사도는 말씀에 붙잡혀 살았고 루디아는 말씀을 청종한 후에 충성하는 태도를 표명하였습니다(행 16:15).

2. 이 말씀이 왜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할까요? 그 이유는

1)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요 1:1)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동반하여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행 20:32).

2)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을 쪼개는 운동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서 찔림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사람이 많은 곳이나 높은 곳에서 높은 사람이 증언을 해야 말씀에 권위가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길에서 증언하셨고 바울사도는 강가에서 하셨습니다. 또 본문에서 증언된 말씀은 두 사람에게 증언한 것입니다. 그래도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2)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증언하시고 많이 증거 해야 뜨거워지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만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과 다름이 없으며 또 일점일획에 까지 영감이 들어 있으므로 한마디, 한 글자에서도 여전히 감동을 받고 말씀의 권위를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성경을 접할 때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씀을 전했거나 부정한 선지자의 입으로 증언됐거나 또는 나귀의 입을 빌어 증언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성경을 볼 때 은혜로움을 못 느끼고 훌륭한 사람이 증언하면 은혜를 받는다 하고 또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증언하면 은혜를 못 느끼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청취하는 성도는 증언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증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에 뜨거워져 있습니까? 불신자들의 세계를 보면 우선 스포츠에 뜨거워져 있고 연예인들에게 뜨거워져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나 관광, 향락에 뜨거워져 있습니다. 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벌이에 뜨거워져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명예 획득에 뜨거워져 있습니다. 또 조금 고상한 사람들은 자녀 교육이나 혈육 인정과 사랑에 뜨거워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 사랑에 뜨거워지고 말씀에 뜨거워지며 사명에 뜨거워져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 중에 가장 값있는 은혜는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리는 은혜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포츠나 코메디쇼를 보다가도 그것이 심심해서 말씀 살피는 경지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와 비밀이 무궁하기 때문에 짧은 말씀에서도 무한한 교훈이 창출되고 여러 번 상고하여도 새로운 교훈과 감동을 주시는 것이 특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하는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새롭고 고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에 뜨거워지는 성도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로 여기게 되고 성경이면 최고요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는 줄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의 은혜를 꼭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23과 북방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경고 (호 7:8~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북방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경고”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50년경의 선지자로 남방 유다국에는 13대 웃시아 왕이 다스리던 때이고 북방 이스라엘에는 여러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인데 그 당시 북방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한 신앙과 율법을 떠난 상태에서 자율적 종교를 펴 나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엄중하게 따르지 않는 자율 종교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었고 또 “에브라임”을 북방 나라의 대명사로 쓴 것은 북방 나라를 분열 창시한 여러보암왕이 에브라임지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왕상 11:26).

1. 그러면 그 나라 백성들의 어떤 죄악을 지적하셨습니까?

1) 열방에 혼잡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과 구별됨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란 구별됨을 뜻합니다. 세속에서 멀어지고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2)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 하셨으니 한쪽은 과열하여 타고 한쪽은 냉냉하여 설익은 상태로서 도무지 신앙생활의 규모와 질서와 균형이 잡히지 않는 몹쓸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말씀과 기도, 지와 정과 의, 교리와 도덕, 말과 생활 등이 일치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형편입니다. 나라가 이방인에게 삼키워도 백발노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정욕의 지배를 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고 나이 많은 백발노인도 역시 우둔하여 깨닫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4)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믿고 교만하였을까요? 남방 유다보다 인구, 영토가 많은 것을 믿었거나 이웃의 강대국을 믿고 교만하였겠지요. 11절에 보시면 “애굽과 앗수르로 간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강대국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어떤 뾰족한 수가 있어도 교만하면 안 됩니다. 특히 교만한 표정이 말이나 얼굴에 나타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어려운 일(모든 일;10절)을 당하여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앙 떠난 상태에서 인간적으로만 해결하려는 수단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6) 하나님은 그들을 보실 때 “어리석은 비둘기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는 속수 무책하여 죽음을 당하는 방비 없는 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사람이 보호하지 않으면 죽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백성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징계하시되 그물을 쳐서 새를 잡듯이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12절).

7)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릇 가는 백성이었고 또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을 거스리는 백성이었으며(13~14절)

8) 평소에 부르짖지 않다가도 병들면 침상에서 슬피 부르짓는 자들이었으며(14절)

9) 곡식과 포도주 같은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기복 주의자들이요(14절)

10) 하나님이 연단(연습)시켜 강건해진 몸으로 악을 꾀하며

11) 속이는 활처럼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12) 권세 가진 방백들은 제 마음대로 거짓말하며 입으로 범죄하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16절의 “속이는 활”이란 활 쏘는 자가 고의로 과녁을 맞추지 않고 빗나가게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정통으로 성실하게 하지 않고 외식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런 범죄에 대한 결과로서 하나님은 그들을 “패망하게 하신다(13절)”고 하셨습니다. 강대국을 의지해도 소용없게 하시고 그물로 새 잡듯이 하시며(12절) 칼에 엎드러지게 하시고 적국들(애굽땅)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 나라는 남방 유다보다도 약 120년전에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바른 생활을 힘쓰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24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4~21) 목록으로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 주일이었습니다. 성령강림 주일은 부활주일후 일곱 번째 돌아오는 주일로서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렀을 때 약속하신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행 1:5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40일간 땅위에 계시다가 승천하실 무렵에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하셨는데 그 때로부터 10일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님에 대한 지식을 더 잘 갖추시려면 제가 평신도를 상대로 설교한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읽으시면 많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하신 말씀과 함께 성령 충만한 자의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본문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성령 충만을 받으셔야 할 이유에 대하여

1) 주님이 약속하시고 “받으라”고 명령하셨으니까 받아야 할 것이요

2)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은사를 받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니까요.

3) 사탄의 역사가 극심한 이 시대에 모든 유혹을 이기기 위함이요.

4) 어려움 많은 세상을 이기기 위함이며(요16;33)

5) 권능을 힘입어 전도의 사명을 잘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다섯가지의 사명을 힘있게 수행하려면 성령 충만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1) 회개를 열심히 하고 죄에 접근하지 않기 위하여 힘을 쓰셔야 혹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해 준 일이 있으면 찾아가서 사과하시고 용서를 구하셔야 하고 마음속으로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스스로 금식하면서라도 회개하여 마음의 잘못된 생각을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쯤 되면 벌써 자신이 은혜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행 2:38에서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열심히 성경을 읽고 배우는데 치중하셔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나(행 8:27~30), 고넬료 가족이 성령 받은 것은 바로 말씀을 들은 때문이었습니다(행 10:45). 성도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성경을 배우다 보면 자신이 점점 성경으로 이끌려 가는 체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피곤과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더 배워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끌려가고 그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눅 11:13을 보시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겔 36:24~37). 오순절 당시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역시 기도에 전혀 힘썼다고 하셨습니다.

4) 자신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에 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자신이 현실적인 축복을 받아 현실적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지 마시고 그런 것은 오히려 외면하시고 오직 신령한 은혜를 더 추구하고 사명 생활에 더 힘쓸 것을 목표로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푯대를 두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충만한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3. 성령 충만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본문 말씀이 설명하셨습니다.

1) 범죄가 두렵기 때문에 어떻게 행할 것을 항상 주의하게 됩니다.

2) 무엇이나 성경에 따라 지혜롭게 행동하게 됩니다.

3) 항상 세월을 아끼게 되고

4) 방탕하지 않게 되며

5) 기쁨과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고

6) 사랑의 실천은 물론 항상 감사하게 되며

7) 그리스도를 경외하여 늘 그 뜻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성령 충만의 필요성과 또 충만의 방법 네 가지와 충만의 결과 일곱 가지를 꼭 유의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25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 (신 28:1~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 1~2절에는 “복 받는 방법”을 말씀하셨고, 3~14절까지는 “복 주시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분인가?할 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복과 화를 다 주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 11:26~28에 보시면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백성들 앞에 두시고 복 받을 일을 하면 복을, 복 받지 못할 일을 하면 저주를 내리시는데 그 백성들이 복 받을 땅(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했을지라도 합당치 않은 일을 했을 때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세겜을 중심에 두고 서쪽과 동쪽에 있는 산이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형편에 따라 교차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 28장 전체를 보시면 복에 관한 내용은 14절까지만 기록하셨고 저주에 관한 내용은 68절까지 기록하시므로 복의 내용보다 저주의 내용이 4배나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범죄한 백성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복을 주십니까? 본문 1,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면(말씀을 순종하면;2절)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요 그 명령(계명)을 순종함은 곧 실천하는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은 성경을 통해서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순종하는 것(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완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것을 교훈하실때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시므로 항상 신앙의 정도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어떤 복을 주시는가?

1) 우선 3~6절에서 10가지를 열거하셨습니다(성읍에서, 들에서, 소생, 소산, 짐승의 새끼, 우양의 새끼,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 들어와도, 나가도). 그러나 이 10가지 복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성읍이나 들에서란 “무엇을 하든지(직업 종류에 상관없이) 복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읍에서 하는 일과 들에서 하는 일이 다르겠지만 복되게 하신다는 것이요 ② 소생이 복 받는 것은 자녀가 잘 됨이요 ③ 소산이나 짐승, 우양의 새끼는 산업을 통한 재물의 복을 의미함이요 ④ 광주리나 떡반죽 그릇은 양식이 떠나지 않고 건강을 복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빈 광주리는 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광주리에 소산물이 담기면 양식 걱정을 안 한다는 뜻이요 떡반죽 그릇도 복을 받으면 식물을 먹는 대로 건강에 도움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이 된다는 것은 장소에 구애 없이 복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믿는 성도는 어디를 가야 복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7~14절까지는 무슨 복을 말씀하셨는가?할 때 ① 7절에서는 “대적을 쳐서 이기게”하시고 ② 8절에서는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시고 ③ 9~10절에서는 “세계 만민이 우러러보는 성민”이 되게 하시고 ④ 11절에서는 “육축과 소산”에 복을 주시고 ⑤ 12절에서는 때를 따라 비를 주시며 “꾸어 주는 백성”이 되게 하시고 ⑥ 13절에서는 “머리가 되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열거된 것은 전부 현실의 복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는 여기에 앞서 신령한 복을 사모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면 모든 것을 더 하신다는 말씀”에 근거하여(마 6:33) 말씀을 듣고 순종을 잘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먼저 신령한 복을 주시고 그 다음에 현실의 복도 약속대로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제26과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 130: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한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마구 부르지 않는 것처럼 존귀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특히 시편에서 “여호와”란 이름을 많이 나타낸 것은 잡다한 이방신들과 구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님”으로 대신하여 사용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을 바라라(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이 전체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는다”고 한 것처럼 성도가 살다 보면 깊은데서 나오지 못하고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깊은 구덩이”하면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진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자신의 힘으로 나올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의 장사꾼을 그 옆으로 지나가게 하셨고 또 요셉의 넷째형인 유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요셉을 그 장사꾼들에게 팔도록 하였습니다. 창 45:5에 보시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를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파셨다”하셨으니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깊은데 빠진 성도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자주 깊은 데로 빠질 수 있습니다. 어려운 질병, 전쟁, 불의의 사고, 궤휼에 말리는 일, 억울한 일, 핍박, 경제적 난경등으로 고난 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바랄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를 증언하겠습니다.

1. 기도로서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우려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시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기다리며”하셨는데 이 “기다림”은 말씀과 기도의 응답 기다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깊은데 빠지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최후의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시 50:15에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자기의 죄를 떠올리며 회개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씀이 3, 4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혹 죄 때문에 깊은데 빠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죄는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 주는 것이니까 그런고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는 일단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사유의 은총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며 회개하는 일입니다. 죄는 진노를 가져오므로 사유의 은총을 힘입고 주 앞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외면하고는 하나님을 바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 6절에서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욱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기도만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못되는 줄로 여기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고 가까이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보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또 성경보다는 회개를 철저히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바라야 하는 이유는 우선 자신들이 힘이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께는 풍성한 구속이 있기 때문입니다(9절). 연약한 저희들이 반드시 하나님을 바라되 ① 기도로 바라고 ② 철저한 회개로 바라며 ③ 말씀을 사모하므로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제27과 아브라함에 대하여 (히 11:8~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역사적 기사는 창 11:26~25:10까지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땅 우르에서 아담의 20대손, 노아의 10대손 그리고 데라의 세 아들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아브람(큰 아버지)이었는데 그의 나이 99세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창 17:5)”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86세에 서자 이스마엘을 낳고(첩;하갈) 100세에 적자 이삭을 낳은 후(처;사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힘입다가 17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창 25:7~10).

2.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아는 사실을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생활 특징을 잘 나타내 주셨습니다.

1) 8절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을 잘하였다”하셨고

2) 9절에서는 “그 아들들과 함께 인생을 나그네로 알며(13절)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여 장막(임시 주택)에서 살았다”하셨고

3) 11절에서는 “그의 아내 사라가 단산한 중이었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하시므로 단산한 중에 잉태의 힘을 받은 것은 “사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 13~16절에서는 “아브라함 내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여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약속만 받고 이루지는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므로 하나님이 저희의 하나님 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하셨으며

5) 또 17절에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에 이를 순종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생명의 주이신지라 부활로 되돌려 주실 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씀드려 보면

1) 하나님의 말씀(즉 약속)을 철저히 믿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창 13:14~16)”는 약속이나,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신다(창 13:16)”,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창 17:5)”,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하신 말씀을 다 그대로 믿었고 심지어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요구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되살려 주시므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믿었으니 이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의심치 않고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고 하셨습니다.

2) 순종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창 12:4에 보시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하셨고 본향을 떠나는 순종(창 12:1~4),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순종(창 22:8~14),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순종(창 22:9~12)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고향을 떠나는 순종은 물질과 현실적 기업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에서의 순종이고 첩과 장자를 내쫓은 것은 인정을 초월하는 순종이며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곧 자기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은 순교적 순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만한 순종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 되어 주셨고(17절)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선민의 조상;창 17:4,16)로 여기셨으며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실 정도로 지켜 주신 것입니다(창 12:3). 눅 19:9에 보시면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을 때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하셨고 또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을 때도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눅 16:23)”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아브라함을 천국의 귀한 인물로 대우하신 내용입니다.

3) 그는 또 손님 대접과 조카를 잘 살게 한 사실과 전 재민을 구원해 준 일들로 봉사한 일도 있었습니다(창 13:9, 14:14~16, 18:4).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도 좋고 축복도 많이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아비 “데라”가 우상 숭배를 할 때 선택하셨으니(수 24:2)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반드시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본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8과 수넴여인이 받은 복 (왕하 8: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수넴여인이 받은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수넴”이란 곳은 나사렛과 나인성 밑에 있는 촌입니다. 왕하 4:8~37에서 “수넴여인에 관한 내용”이 먼저 나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수넴여인은 “귀한 여인”이란 호칭을 받았고 남편의 허락을 받아 엘리사 선지자를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엘리사 선지자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아는 것도 귀한 일이었지만(왕하 4:9) 자기집 담위에 작은 방을 짖고 침상과 의자와 책상과 촛대를 진설하고 거기에 엘리사 선지자를 편안히 유숙하도록 봉사를 한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그 여인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신세 갚을 생각이 나서 “왕이나 군대 장관에게 부탁한 일이 있느냐?”하였더니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즉 백성들과 함께 불편 없이 살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고 부탁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넴여인은 봉사는 뛰어나지만 명예욕과 현세욕이 전혀 없는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그 집 형편을 살핀 후에 하는 말이 “이 집에는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넴여인은 왕이나 군대 장관에게 부탁할 것이 없을 만큼 현세욕이 없었는가?하면 그 시대에 아들이 없었어도 그것을 부족으로 느끼지 않았으니 그 신앙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즉시 “네가 돐이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축복하였고 그 축복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왕하 4:17). 그런데 그 아들이 어린아이로 얼마큼 자라다가 별안간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그만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머니 수넴여인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내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하였습니까? 한즉, 엘리사가 “하나님이 그 사실을 내게 숨기셨느니라”하고 급히 달려가서 그 아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다시 살렸습니다(왕하 4:32~37). 그 일이 있고 또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집에 또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7년동안 기근을 명하셨으니 너는 살 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고 하여 수넴여인이 권속들과 함께 블레셋 땅으로 가서 7년을 살다가 고향에 와 보니 다른 사람이 자기의 전토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집과 전토를 찾기 위하여 사마리아에 있는 관청(왕국)에 갔더니 마침 그때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임금(여호람)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게하시는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여인이 그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그 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하시가 그 여인을 알아보면서 “바로 내가 말한 사람이 저 여인이고 저 아이입니다”하니까 왕이 그 여인의 호소를 듣고 집과 전토와 그 동안의 소출까지 다 돌려주도록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수넴여인이 받은 은혜들은 전부 어떤 것입니까?

1. 믿음에 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은혜

2)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알아보는 은혜

3) 선지자를 극진히 대접하는 은혜

4) 명예욕도 없고 아들이 없어도 자족하며 사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대단히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현실에 관한 은혜입니다.

1) 여유 있게 사는 재물의 은혜입니다.

2) 아들을 받은 은혜입니다.

3)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림 받은 은혜였습니다.

4) 7년 흉년을 미리 예고 받고 피난을 잘하게 된 은혜입니다.

5) 왕의 배려로 잃어버린 재산을 잘 찾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3. 섭리 적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섭리적 은혜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은혜를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나타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 그 여인의 집 앞으로 엘리사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대접할 기회를 얻은 것이요

2) 그 남편이 순순히 허락하여 봉사를 잘한 것입니다. 남편이 반대하면 어렵겠지요.

3)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엘리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올 수 있은 것이요

4) 왕에게 말할 때 마침 그 여인이 그 곳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더 잘되었습니다(왕하 4:13).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이렇게 좋은 은혜 받기를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9과 4가지 교훈 (사 55:6~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4가지 교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는 4가지 교훈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고 또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6절)”는 말씀이요 ② “악인은 악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와서 긍휼과 용서를 받으라(7절)”는 말씀이요 ③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르되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이요(8~9절) ④ 비나 눈이 오면 그 물이 땅을 헛되이 적시지 않고 그것이 씨로 싹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여 파종자에게 종자와 곡식을 주어 먹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명하신 일에 형통하도록 역사 하신다(10~11절)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경에 이런 네 가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한 대목씩 간단하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와 가까이 계실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성도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를 선택하여 가까이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다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을 찾고 가까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39장 이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시는 중에 이스라엘의 멸망(바벨론에 멸망;2~5장)도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 40장 이후에서는 위로에 관한 것을 예언하시면서 영적 구원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만한 한때에 찾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권고의 시기가 왔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신약 시대를 의미하고 이스라엘 국가적으로는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이후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간은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그런 때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선지자와 말씀도 희귀하였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은혜를 주실 만한 때임을 잊지 마시고 은혜 받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고후 6:2).

2. 악인이 하나님을 찾을 때는 그 악한 길을 버리고 또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서 긍휼과 용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더 생각할 여지가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니까요(눅 15:18~24).

3.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른 중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유한하며 부패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상한 생각을 하여도 하나님의 높은 생각에 미칠 수 없습니다. 혹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할 때도 역시 하나님에게 깊은 뜻이 있으신 줄 믿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렘 12:1). 따라서 지나칠 정도로 인간의 생각이나 소원을 절대적인 것처럼 내세워도 안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역사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빗물이 땅을 적시면 씨를 키우고 그 씨가 열매를 주어 양식을 주는 결과에 이름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영원히 살아 계신 말씀이어서 내가 깨닫지 못하였다 하여 다른 사람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주시는 효력을 나타내지 않아도 적당한 때가 되면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원시 복음인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창 3:15)”는 말씀은 약 4000년 후에 결실을(메시야 탄생) 맺었고 그 이전에는 그늘에 감추인듯 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 왕하 4장을 보시면 수넬여인의 대접을 받은 “엘리사”가 신세를 갚기 위하여 수넴여인에게 “왕이나 군대 장관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하라”하였더니 그 여인은 자기 백성들 중에 거하기 때문에 부족이 없고 부탁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무색해졌습니다. 선지자가 그 여인의 심정을 너무 모른 것 같고 오히려 말을 잘못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도 영감의 말씀입니다. 얼마 후에 왕하 8:1~6에서 그 여인은 자신의 재산을 찾기 위하여 왕에게 찾아간 일이 있었고 왕은 엘리사의 사역을 듣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 말씀 역시 헛된 말씀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 교훈을 꼭 참고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① 만날 만한 때에 찾음(징계를 푸신때) ② 회개하고 돌아옴(사모하고 노력함) ③ 하나님의 생각이 높으심 ④ 말씀이 헛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30과 지혜로운 생활 (딤전 6:3~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지혜로운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젊은 복음 사역자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여러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만 세 가지로 대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성경 말씀에 착념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3~5절)에 대한 것이고 ② 지족하는 마음을 가질 때 어떤 유익이 있는가?(6~8절)에 대한 것이며 ③ 부하려고 할 때에 어떤 결과가 오느냐?(9~10절)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본문을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말씀에 착념하지 않을 때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하셨고 또 “말씀이 성도를 든든히 보호하시고…기업을 주신다(행 20:32)”고 하셨습니다. 또 시 107:20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시고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마귀의 장난감 되기에 퍽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성도가 성경 아닌 다른 교훈(세상 지식이나 이단 비판 등)을 좋아하고 바른 말 즉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착념하지 않으면 교만해지게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형편이 되며 변론과 언쟁이나 좋아하게 되고 투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도 깨끗한 양심에서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경건을(현실적)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다툼까지 일어나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를 요약하면 진리는 잊어버리고 마음이 부패해져서 싸움만 일삼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패해지면 별별 악한 마음이 다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죄악과 정욕을 멀리하고 마귀의 유혹을 피하는 방법으로 말씀에 착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꼭 기도와 성경 공부를 힘쓰셔서 말씀에 착념하는 체험을 하시고 또 말씀에 착념할때 하나님이 얼마큼 붙들어 주시는 지에 대하여도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딤전 4:5).

2.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6~8절). 지족이란 말은 “자족”이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1) 성도가 자족한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①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 가지고 가지도 못하기 때문이요(7절) ② 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며 ③ 그런 중에도 하나님이 가장 큰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④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고도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은혜도 염려 없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6:31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 또는 “일용할 양식(마 6:11)” 또 “부하게도 마시고 가난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것으로 먹이시옵소서(잠 30:8)”하게 하신 것은 성도가 현세욕에 집착하지 말고 적당하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적당한 것 이상을 구하면 신령한 은혜를 받음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마 19:24)”는 말씀이 뒷받침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신령한 은혜를 더 받는다는 뜻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생활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경건이 이익이 되는 것을 믿음 생활의 더 큰 효력을 힘입어 신령한 은혜를 더 많이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부하려고 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9~10절)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를 심는 것과 같아서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미혹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마귀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험과 올무를 놓게 되며 이런 올무에 걸리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되고 또 그와 관련된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부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는 지식과 명예에 관계없이 또 권세에 관계없이 유혹을 받아서 부끄러운 생애로 마감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거룩해지며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 위해서 ① 항상 자족하는 마음과 ② 큰 재물의 욕심을 떨구도록 힘쓰는 일과 ③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1과 네 문둥이의 역할 (왕하 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네 문둥이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주전 850년경 유다왕은 여호사밧이요 이스라엘 왕은 여호람으로 그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고(왕하 3:1) 엘리사 선지자가 사역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1. 그 당시에 아람 나라의 침략이 자주 있었습니다. 처음 침략이 있었을 때는 하나님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적군의 작전계획을 미리 알려 주셨기 때문에 쉽게 방어할 수 있었고(왕하 6:8~13) 그 다음에는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도단”에 와서 진을 쳤다가 불말과 불병거의 보호를 받는 엘리사가 아람 군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 도성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되돌려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6:13~22). 상당 기간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다가(왕하 6:23) 또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는 바람에 사마리아 성에 양식 유통이 끊어져서 큰 기근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가가 비싸 지다가 나중에는 이집 저집 아이를 삶아 먹으면서 “어제 내 아이를 삶아 먹었는데 오늘은 왜 네 아이를 먹으려 하지 않느냐”고 싸우는 판이 되었으니 그 기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왕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재앙이니 왕인들 어찌하겠느냐(왕하 6:33)” 하면서 탄식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2. 이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내일 이맘때에 곡식 값이 푹 내릴 것이라(7:1)”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을 호위하는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여호와께서 하늘의 창을 내신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니까 엘리사가 말하기를 “너는 네 눈으로 보려니와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기 때문입니다(롬 4:17).

2) 선지자로 증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장관에게 “너는 보기만 하고 먹지는 못하리라(2절)”하였으니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은혜는 믿음이 없으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는 자는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는 말씀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과연 믿음 없이 의심한 장관은 양식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당시에 성문을 지키다가 사람들에게 깔려 죽으므로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17절).

3. 그 때에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네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문둥병자는 도성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성문밖에 있었는데 그들도 기근에 처하여 곧 죽을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심을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인즉 차라리 아람군 진영으로 가서 강복을 하자 그들이 살려주면 며칠 더 살고 그들이 죽이면 여기서 굶어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 강복을 하자”하여 아람 진영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람 진영에 말과 나귀와 모든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아람 군들이 도망을 하고 없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그들을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람 진영에 들어가 쉽게 양식과 의복 등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1) 불행이 지혜를 낳았고

2) 기근이 결단을 내리게 하였으며

3)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형편이 아람 진영에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을 잘 이용하면 배가 더 빨리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어떤 환난이나 죽음의 위기를 선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문둥이 네 사람만 생명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7:9) 사마리아 도성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도성의 백성들은 그 성문 어귀에 있는 네 사람의 문둥이 역할이 아니었더라면 많은 백성들이 기근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네 문둥이는 자신들의 생애가 불행하였지만 그 불행한 생활을 근거로 하여 많은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의심하면 받지 못합니다. ② 문둥이의 생애도 백성을 구원하는 역할에 이용이 되었고 ③ 가난과 기근과 죽음에 직면한 불행이 좋은 결단과 용기를 일으켰음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32과 유다 여호람왕에 대하여 (왕하 8:16~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유다 여호람왕에 대하여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유다국의 “여호람”왕은 유다 나라 8대 임금으로서 주전 854~846년까지 8년간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때에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는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된지 5년째 되는 해였습니다(8:16). 그런데 왕하 3:1에서는 아합의 아들 요람을 “여호람”으로 기록하였고 왕하 8:16에서는 “여호람”을 “요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람”이나 “요람”은 발음상의 차이로 아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도(9대) 여호람이고 유다왕(8대)도 여호람이어서 혼돈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을 “요람”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 여호람왕이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1)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였다(18절)”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이란 비정통 신앙으로 하나님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요람 왕의 아버지 아합의 악한 행위를 뒤쫓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합왕은 이방 여인(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삼아 이방 우상을 섬기고 선지자 엘리야를 핍박하는 등 여러 가지로 악행을 한 사람입니다(왕상 19:1~2, 21:13). 그런데 유다와 “여호람”이 아합의 집처럼 행하였다는 것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또 여호람 왕이 아합의 사위가 되어서 북방 이스라엘 왕 “요람”과 처남 매부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갈등이나 전쟁의 위험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책적 결혼을 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거룩한 백성들과 혼인하고 죄를 짖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왕 여호람이 아합왕의 사위가 된 것은 퍽 불행한 일이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악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성도의 혼인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사업의 합작이나 다른 단체의 구성은 화합이 안 될 때 자유롭게 헤어질 수 있지만 혼인만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며(마 19:6) 음행한 연고 없이는 헤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마 5:32). 또 경건한 자손의 배출을 위하여 “이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도 주셨습니다(말 2:15). 그러니까 혼인을 하되 특히 한나라의 왕인 만큼 더욱 신중하게 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3. 이런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여호람왕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1) 그가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이 그의 조상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생각하여 멸망시킬 것을 참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 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삼하 7:12~13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왕상 11:36). 다윗은 여호람의 6대조 할아버지입니다(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여호람”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6대조 할아버지인 다윗의 은혜를 힘입어 멸망을 면한 것입니다. 후손에게 복을 전달하고 조상의 덕을 보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람의 국력을 약하게 하시려고 에돔을 배반하게 하셨습니다. 나라의 멸망보다는 국력의 쇠약으로 적당하게 응징하신 것입니다. 본래 에돔국은 다윗왕 때에 유다의 속국이었고, 여호사밧 왕때도 동맹국으로 지냈습니다(왕하 3:9). 그런데 여호람 왕때에 유다를 배반한 것입니다. 여호람은 배반한 에돔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전쟁을 했으나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고 그 시기에 “립나”도 배반하여 국력이 약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은 방법으로 여호람을 징책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여호람은 크게 회개하여야 할 것이나 성경에는 그런 기사가 없고

3) 결국 여호람은 8년을 치리하고 그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났으니(8:17, 24) 왕위 8년만에 40세에 죽은 것은 회개치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시 91:15~16).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여호람왕의 잘못을 거울삼아서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깊이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3과 요셉이 형들을 만남 (창 42:18~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셉이 형들을 만남”이란 제목 아래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아들이었고 열두째 아들 벤야민과 함께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라헬”이 동생 벤야민을 낳고 세상을 떠나니까 아버지 야곱이 요셉과 벤야민을 불쌍히 여겨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창 37:3에서는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깊이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던 차 요셉이 양치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왔을 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구덩이에 넣었고 또 다시 요셉을 꺼내서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시위 대장집의 노예가 되어 11년을 수고했고 또 여주인의 음모로 감옥 생활을 2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로 바로 왕의 꿈해석을 잘하여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요셉의 지혜로운 정책으로 애굽에는 양식이 있었고 가나안 땅에는 흉년이 들어 기근이 있자 야곱의 열 아들들이(열두째 아들 벤야민을 제외한)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왔다가 요셉에게 발견이 된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열 형들은 17세에 헤어져서 30세가 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요셉은 그 형들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대화를 하는 중에

1.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18절)”고 하였습니다. 경외란 뜻은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출 1:19에서 애굽의 산파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는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바로 왕이 이스라엘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하였을 때(자신의 생명을 걸고 남자 아이를 살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시 34:7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애굽의 산파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둘러 진을 치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서 너희의 진실함이 되게 하라(20절)”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으로부터 정탐이란 의심을 받게 되자 자신들의 가정 형편을 말하고 독실한 자들이라고 하니까 요셉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독실한 자이면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그 독실함을 증명하라”고 한 것입니다. 독실하다는 뜻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20절). 성도는 항상 진실하여야 하고 그 진실함을 모든 생활로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21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의 형들이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는 요셉의 명령을 받았을 때 요셉을 학대하여 애굽으로 판 죄를 뉘우친 것입니다. 역사의 쳇바퀴는 13년만에 반대 현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일 수 있었던 환경에서 요셉이 형들을 죽일 수 있는 환경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회개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다”, “그가 애걸할 때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우리에게 괴로움이 임한 것이라”, 또 “르우벤”이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이제 그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라고 한 것이 전부 반성과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곧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요셉에게는 인도주의가 있었습니다. 형들의 변화된 사정을 살피는 반면에 굶어 죽게 된 가족들을 살려야 하므로 시므온(둘째형)을 인질로 남게 하고 곡식을 주어 보냈으며 형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안 보이는 곳에서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굶게 된 사람을 무조건 먹이고 연민의 정을 억제 못하는 것이 인도주의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나 국제간에도 인도주의가 성행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5. 곡식을 갖고 가다가 객점에서 짐승의 먹이를 풀어 먹이다가 자루 안에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두 번째 곡식을 사러갈 때 벤야민을 데리고 그 돈을 다시 갖고 온 것입니다. 이것은 정직한 양심의 표현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경외하는 자, 독실한 자, 반성하고 회개하는 행위, 인도주의, 정직한 양심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34과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심 (요 2:23~2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네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① 유월절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셨던 것이고 ②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믿은 것이며 ③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않으신 것이고 ④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중점적으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서입니다. 순서대로 간략하게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이 유월절때에 예루살렘에 계신 사실에 대하여

1)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결례식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셨고(눅 2:22) 또 12세 때에 부모와 함께 유월절 절기에 따라가신 일이 있었으며(눅 2:41) 그 다음에는 공생애에 들어서서 ① 본문에 나타난 사실이 첫번째요 ② 또 요 5:1에서 유대인 명절에 가셨다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이 있으셨고 ③ 요 7:2~3에서 갈릴리 지경에 계시다가 초막절때에 올라가신 일이 있었고 ④ 요 12:13에서 마지막 행으로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방에서도 이적을 많이 나타내셨는데(요 2:1~11)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하셨으니까 예루살렘에 오tu서도 이적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요 21:25). 사람마다 예수를 믿는 경위가 여러가지 입니다. 이적을 보고 믿는 자도 있고 떡을 얻어먹는 맛에 따르는 자들도 있으며(요 6:26) 또 부모의 권면이나 스스로의 감동이나 우환을 통해서나 이웃의 강한 전도 등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위로 믿었든지 믿기만 하면 됩니다(빌1:15-18).

3.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1) 여기의 “저희”란 이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유대인들인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맡겨 의탁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2) 왜 그리하셨을까요? 그를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외식이었는지 아니면 진실로 따랐다 할지라도 장차는 그들이 예수님을 해롭게 하는 자들로 변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요 5:16,18,7:1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참 믿음을 갖고도 베드로처럼 일시적으로 또 가룟유다처럼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곧 회개합니다. 그리고 외식자들은 언제든지 자기들 사욕에 충족되지 않으면 배반할것입니다.

3) 여기에서 교훈 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신임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반성해보려는것임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손해를 주신다 하여도 예수님의 이름이나 그 교회나 복음의 명예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주님을 끝까지 위하는 입장에 서려면 세례요한 처럼“주님은 흥하시고 나는 쇠하여야 할것이라(요3;30)”는 믿음에 서야 할것입니다.

4. 주님은 모든이의 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여 아시는 주님 앞에 저희들은 항상 밝고 깨끗하며 확고한 마음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를 믿으소서 주여 나의 깨끗한 마음을 보시옵소서 주여 주님의 몸을 제가 지키리이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모든 은혜의 하나님 (벧전 5:10~14) 목록으로


본문 10절에 보시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것으로(여러 가지 종류로)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종류가 10~11절 말씀에도 있고 12~14절에도 있습니다.

1. 10~11절에 나타난 은혜의 종류는

1) “너희를 부르사”하셨으므로 부르심의 은혜가 있고

2)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한 말씀에서 성도를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가 있고

3) “잠간 고난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하신 말씀에서 고난 중에서도 온전케 하시는 은혜가 있고

4)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견고케 하시는 은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를 부르시고 믿음을 견고케 하셔서 온전하게 하신 후에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라고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2. 12~14절 사이에는 말씀의 은혜, 고난의 은혜, 선택의 은혜, 성도 교제의 은혜, 축복의 은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말씀의 은혜는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로마에서) 기록하여 “실루아노”란 신실한 형제를 통해서 아시아 전역의 교회들과(벧전 1:1) 또 바벨론에 있는 교회에까지(13절) 전달하여 많은 이방인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만 전달된다면 여러 사람이 다 받기 어렵지만 본문 12절 말씀처럼 간단히 써서 전달하므로 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저희들도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곧 하나님을 대면하는 은혜이므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고난의 은혜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증거한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이것”이란 성도의 고난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 당하는 성도, 핍박받는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쓰신 말씀인 것입니다. 벧전 4:16에도 보시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하셨으니 그 이유는 심판때에 공정한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4:17~19). 또 본문 10절에서도 “잠간 고난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고난의 기간이 깗으면서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으로 복받는 말씀은 “욥”이나 시편 기자 또는 바울도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하였고 시편 기자는 119:71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 5:3에서 “환난은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으로 주시는 은혜에 대한 신앙을 굳게 하여야 할 것이요

3) 택함 받은 은혜입니다(13절). ①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요 15:16) ② 우리의 의를 보시고 택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택하셨고(롬 9:11,11:5) ③ 바벨론 같은 죄악 세계에서 택하셨고(13절) ④ 적은 수효를 택하실 때 우리를 뽑아 주신 것이기 때문에(마 7:14) 그 은혜가 큰 것이요

4) 성도의 교제로 은혜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문안하고(로마를 뜻한다고다 함) 또 베드로가 마가를 “아들이라”하셨고(선배가 후배를 아들로 생각함;딤전 1:2, 몬 1:10) 또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는 말씀은 성도의 친교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세계는 반드시 사랑이 충만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세계에 사랑의 뜨거움이 없고 오히려 의심이나 미움이나 불평과 대적이 있다면 이는 교회의 바른 요소가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축복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이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신 것입니다. 서로 축복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어떤 점포에 가면 “이곳에 오는 모든 이에게 평강을”이란 액자를 붙인 것이 있습니다. 이 내용이 바로 본문 14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은혜 아닌 것이 없을 만큼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감사하며 또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6과 죄악이 많은 세대 (호 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악이 많은 세대”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76년경부터 북 이스라엘 13대 왕인 여러보암 2세가(41년간) 왕으로 있을 당시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악을 음난한 여인의 범죄로 비유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권면한 선지자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폭한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이 강폭한 죄악은 그 시대에만 있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우리 시대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 바로 “듣지 않는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호 5:1에도 보시면 “제사장들아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들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하셨고 호 8:12에는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는도다”하셨고 호 9:17에서도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백성들의 듣지 않고 깨닫지 않으며 돌이키지 않는 죄때문이었습니다(호 6:1).

2. 여러 가지 죄악을 한꺼번에 지적하셨는데 그것을 분류하면

1) 진실이 없다는 것이고

2)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이고

3) 사랑이 없는 것이고

4) 간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는 세계, 누구를 신용할 수 없고 믿을 것이 없는 세계, 요즈음처럼 공해 없는 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신용이 고갈된 세계를 지적하셨으며 또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은 율법의 선생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한 것은 더욱 당연할 것이요 또 사랑이 없는 죄에 대하여는 저주, 사위(거짓된 일), 살인, 투절(도적질), 강포, 피에 피를 뒤대임(연속적으로 폭행이 저질러지는 것)으로 말씀하였고 거기에 간음까지 첨부되어 죄악이 관영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전세방을 얻으려고 할 때 “착하고 이해성 있는 집주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 사는 이웃에 착한 사람이 귀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그 다음에 지적하신 죄악은 백성들이 강퍅하여 제사장이든 백성이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4절 말씀에서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 말며 책망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투고 책망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잘못을 지적하면 다투려 하고 책망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4. 또 한가지 지적한 죄는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중보자 예수님을 모형 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 제사에 중간 역할을 하므로서 하나님께 열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은 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과 다투는 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성직자를 멸시하고 성직자와 대립하고 싸우는 것을 예사로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강퍅하여 회개하지 않는 죄와 성직자와 다투는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5.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 죄악 많은 세대에 대하여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1) 그 백성들과 쟁변하신다고 하셨습니다(1절). 이 쟁변이란 꾸짖음으로 상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자연계의 재앙으로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3절). 땅이 황무해지므로 거기 거하는 들짐승이 쇠잔해 지고 바다의 고기도 없어져서 땅이 슬퍼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슬퍼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때문에 땅이 황폐되어 탄식하는 자연계의 소리를 들으라는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3) 5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 낮에 거치겠고(걸려 넘어진다는 뜻)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타락한 선지자)는 밤에 거치겠고 네 어미를 멸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어미의 뜻은 죄악 생산의 근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엄하게 응징하실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최선책은 회개뿐인 것입니다.

 

제37과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죄 (호 4:6~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00년경 북방 이스라엘의 여러보암 2세가 나라를 다스릴 때부터 장기간 사역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제사장들의 부패 상황을 지적하면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복음 사역자들이 다함께 경고 받는 말씀입니다.

1. 백성들의 죄가 무엇인가?할 때

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시므로 “지식 없는 죄”를 지적하셨고 그로 인하여 망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지식”이란 말씀은 “하따아트”로서 “그 지식” 곧 하나님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것인즉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 “지식 없는 것도 죄인가?”하시겠지만 눅 23:34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용서를 받아야 할 죄란 뜻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죄야 어떻겠습니까? 성경은 그 죄를 “핑계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롬 1:20).

2)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여 마음 판에 새기지 않으면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식사를 자주 안하며 계속 배고픈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율법을 사모하고 말씀 배우기를 힘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장식품으로 들고 다니는 교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기독교 서점에 가니까 기독교 서적이 잘 안 팔리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도무지 책을 안 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3) 이렇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거나 버리면 복이 되지 않는데 ① 하나님은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라”하셨고 ② “저희가 번성할수록 범죄하니 저희의 영화를 변화하여 욕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약 94년쯤 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망하는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2. 제사장들의 죄악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1)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으면서 그 마음을 하나님 경외하는데 두지 않고 저희의 죄악에 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의 성질에 따라서 제물을 먹게끔 되어 있습니다(레 10:17). 이것은 성직을 행하므로 받는 보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의 죄악에 둔다”는 뜻은 범죄 건수가 많으면 제사 드릴 일이 많아지므로 소득이 더 오른다는데 마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염불에는 뜻이 없고 젯밥에만 뜻이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명에는 등한히 하면서 보수에만 마음을 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하시므로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을 할 수 없게 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성직자를 무시하거나 월권하거나 같은 존재로 알든지 아니면 성직자가 자신의 사명적 입장에서 떠나 평신도와 같은 입장을 취했을 때 매일반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권으로 주신 제사장 나라가 되는 명분(출 19:6)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특권이 나라의 멸망으로 없어지고 초대 교회 당시부터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이런 자들에게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① “소행대로 벌하시고 소위대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결코 거저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②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첩을 얻어 행음을 하여도 자손의 수효가 더하지 못할 것이라”하셨으니 이것은 발전할 수 없도록 통제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희들은 백성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에 대하여 경고를 받으셨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이 말씀은 평신도와 성직자의 죄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며 배우지 않는 평신도나 성직의 존엄성보다 보수를 챙기는 일에 급급한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38과 기도하는 법 (요 17:1~11) 목록으로


믿음 생활의 초보자나 기도에 미숙한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법”을 몇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요 이 내용이 17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저희들은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기도에 관한 것을 잘 배우지만 아직도 기도의 상식이 부족한 분들이 계신 줄 압니다.

1. 기도의 전제 조건이 있다면

1) 기도하는 자가 성도이어야 하고

2) 반듯이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상달되는 줄 믿으셔야 하며(요 14:6, 16:23)

3) 기도를 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확실한 신뢰감을 가지셔야 할 것과

4)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함을 들 수 있습니다.

5) 또 하나님은 “중언 부언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그런 것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들 중에는 기도의 자세가(몸 자세 뿐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자세) 표준적이 못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표준이란 것은 정중하고 침착한 자세요 예절바른 언어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할 때는 표현의 자세가 과격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황이 급박할 때 금식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급박한 상황은 “신랑을 뺏기는 일” 즉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신앙의 침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5). 성도의 큰 환난은 오직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셔야 하며 그 이외의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익해질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롬 8:28). 어떤 성도들이 지나치게 과격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에서 방성 대곡과 같은 부르짖는 기도는 “하갈”이 사막에서 죽게 되었을 때(창 21:16~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학대로 고난을 당할 때(출 3:7),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의 피해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삿 3:9) “부르짖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형편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의에 벗어나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3. 기도하실 때 몇 가지 상식을 갖추셔야 할 것은

1) 하나님을 인격자로 상대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사람처럼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작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면 들으시고 생각하시고 기억하시며 판단하시고 느끼시며 관찰하시는 분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여 자신의 태도를 흐트러트리는 경향이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아버지(하나님)에게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종이 상전을 대면하고 신하가 임금을 대면하는 것 같은 입장도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아버지여”하신 모범에 따라 기도의 상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상태에서 기도하시라는 것입니다. 시집에서 돌아온 딸이 친정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기도했을 때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긴장하는 것도 좋지만 긴장이 논리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차분하게 앞뒤를 생각하면서 기도하시면 자유롭게 되고 또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아무런 부담이 없게 될 것입니다.

3) 기도의 내용 속에 감사와 회개의 내용을 반듯이 구상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할 것은 빌 4:6에서 교훈 하셨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기도와 간구를 감사하므로 아뢰라”)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은 눅 18:13~14에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말씀하심에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때에 세리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하는 자세였다고 하셨습니다. 4)인간의 욕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떡을 달라는 아들에게 돌을 줄 부모가 없고 생선을 달라는 자에게 뱀을 줄 자가 없다(마 7:9~11)”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지혜롭게 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왕상 3:11~12). 아무쪼록 부담 없이 기도하시고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잘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화되지 못한 분들 중에서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는 것을 못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39과 하지 말 것과 버릴 것 (골 3:5~11) 목록으로


저희들은 지금 바울 사도께서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동쪽 근방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말씀의 대의를 살피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절)”,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8절)”,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하시므로 성도의 옛사람 부분, 즉 거듭나기 전의 악한 상태 그리고 이것을 5절에서는 “땅에 있는 지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지체”란 말씀을 꼭 육체적으로만 생각지 마시고 “나라는 인간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 사도께서 롬 7:23에서 자신의 부패성의 부분을 지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도가 하지 말 것과 버릴 것”이란 제목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본문에서 버려야 할 것은 거듭나지 못했을 때 갖고 있었던 옛사람 부분인데(땅에 있는 지체) 그것이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개인의 사욕이 아니고 속임수 있는 욕심이란 뜻), 악한 정욕과 탐심과(5절)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이며(8절) 또 서로 거짓말하는 것과(9절) 헬라인, 유대인, 종, 자유자를 분별하는 인간 차별(11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이 말씀 중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저희들에게 이런 부정한 요소가 남아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저희들의 믿음 생활의 과제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으나 하나는 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요 또 한가지 이유는 6절 말씀에서 ”이런 것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날 때에 그 인간의 성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씨뿌려진 것과 같고 또 지식도 과거에 하나님을 모르던 지식에서 아는 지식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사람의 모습이 점점 성장하여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가 인간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가 만유의 통치자시요 만유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인 선민이나 할례를 받고 할례를 주장하는 할례당이나 할례의 효력을 무효로 돌리는 무할례당이나 미개한 야인이나 피부 검은 구스인이나 종 된 자나 자유자를 물론하고 그들이 다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다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 차별을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이 부족하거나 신앙이 적다 보면 자존심과 우월감을 갖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새 사람된 성도가 옛사람에 속한 모든 불의를 멀리 벗어버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성경을 살펴보시면 또 “하지 말 것과 버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하지 말아야 할 것은 ① 다른 신을 자기 앞에 두어 섬기는 일 ② 다른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 ③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 ④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이웃의 것을 탐하는 일 ⑤ 게으른 일(롬 12:11) ⑥ 술 취하는 일(롬 13:13) ⑦ 성내는 일(고전 13:5)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요

2) 버려야 할 것은 ① 이방신(드라빔 같은 것;창 35:2) ② 오빌의 금(물질 우상 주의;욥 22:25)을 버리라 하셨고 ③ 본문에서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버리라”하셨고 ④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성경 지식의 빈약성;히 6:1) ⑤ 어린 아이의 일(신앙의 미숙;고전 13:11)을 버리라 하셨고 ⑥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딤후 2:23)하셨고 ⑦ 헛된 말과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딤후 2:16, 딤전 4:7)하셨고 ⑧ 숨은 부끄러움의 일(고후 4:2)과 ⑨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전부 죄되는 것을 버리라는 것인데 또 죄 안되는 것도 버리면 좋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⑩ 자기를 부정하여 자신을 버리고(마 16:24)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것이요(고전 15:31) ①ꊓ 세상에서 유익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이요(빌 3:8) ①ꊔ 베드로와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마 19:27, 막 10:28)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 것과 버릴 것을 잘 처리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0과 따로 있으라 (고후 6: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17절에 근거하여 “따로 있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상 숭배 자들과 동화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1.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보존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상 숭배자들이나 귀신을 섬기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여 생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못한다”는 뜻은 사회적 생활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본문 14절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의와 불법이 조화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어두움은 죄악을 뜻함)이 사귈 수 없기 때문에” 불신자나 이방 종교인들과 사회적으로 사귀되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죄되는 일까지 합류하여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귀신의 이름)이 조화될 수 없고 믿는 자와 불신자가 상관할 수 없으며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본문 16절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하시므로 “성도를 성전이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령님이 성도에게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6:19). 이렇게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계시면 하나님이 그 성도를 자기의 소유(저희 하나님)와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가 부정을 멀리하여 따로 있게 되면 “하나님이 영접해 주시고 또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18절)”고 하셨습니다. 여하튼 성도는 부정을 피하여 따로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더 큰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요즈음 기독교계는 통합 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한동안 잘못된 교리와 신앙 사상을 배격하고 구별 짖는 운동을 열심히 한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소련, 중공과 외교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 사상의 대립도 많이 허술해 졌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계가 교파만 많이 만들지 말고 통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도 있습니다. 감리교에서 여자 목사를 세운 것이 거의 50년전 일이지만 금년에 장로교 통합 측에서도 여자 목사 세울 것을 결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보수 교단에서는 여자가 목사 되어야 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설명이 필요함,본인생각은 복음적 관계보다 남녀간 통치문제에 있어서 헌법적 조정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 통합이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기독교 안에서도 사상이나 교리의 차이로 통합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대로만 믿겠다”하면 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신앙 활동을 같이할 수 없으니까 당연히 따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이런 형편에서 따로 있어야 하는 성도의 신앙에는 몇 가지 조건과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1) 독자적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따로 있다”는 뜻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확립된 신앙을 가지고 따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바로 믿는 신앙이 있어야만 하며(요 3:3, 마 6:17)

2) 생활의 자립도 있어야 합니다. “따로 있다”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앙 생활을 스스로 확립해 나가지 못하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만일 성도들의 주변이 순결하지 못하다면 스스로 순결한 세계를 찾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믿음과 생활의 자립 외에 또 충성의 자립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모든이의 것이 아닌 것처럼 충성도 모든이의 것이 아닙니다(살후 3:2)”. 충성은 믿는 자의 것이고 또 순결한 성도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1620년에 영국 기독교의 개혁을 힘쓰다가 핍박을 받고 미국 대륙으로 옮긴 것이 청교도였습니다. 그들은 미국 대륙에서 좋은 신앙의 씨를 심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말씀에서 “따로 있으라”는 뜻은 “고립 되거나 분리하라”는 뜻이 아니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할 때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세계에서 교리와 생활이 같으면 지식이나 도덕성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도 합동하고 단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혹 교권 주의 때문에 합동을 못하는 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순결을 위하여 따로 있을 때는 신앙과 생활의 자립은 물론 충성에 대한 책임도 감당하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41과 기억해 주시는 인물들 (창 19: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억해 주시는 인물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선악을 다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감찰하시고 치부하시며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셨다가 나중에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시 139:3, 계 22:12).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어떤 인물들에 대하여는 특별히 기억하시고 교훈의 대상으로 나타내 주신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창 19:29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그의 조카 놋을 그가 사는 소돔성을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기억해 주실 만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갖고 있습니다.

1) 선민의 조상으로 먼저 선택된 사람이고

2)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뛰어난 사람이고

3) 그 중에도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억에서 지워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2. 욥의 선행을 기억하셨습니다. 욥 1:8에 보시면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욥”을 특별히 유의해 보시고 기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욥의 사람됨이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정의로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려 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세상에 없을 만큼 하나님께 기억이 된 것입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도 청렴결백하면 세상이 알아주는 것처럼 선하고 깨끗한 생활이 특별하면 역시 하나님께서 잘 기억해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다윗을 생각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왕상 11:34에 보시면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그 아들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분리될 것을 그 손자 시대로 넘어가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뽑은 이스라엘 두 번째 왕입니다(삼상 16:12).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킨 것을 기억하셨습니다. 그후 그의 아들 솔로몬이 타락하여 이방 우상을 섬겼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생각 하사 징계를 늦추어 시행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삼상 11:29~32). 이것은 다윗의 아들 때에 주신 말씀인데 왕하 8:19에 보시면 다윗의 6대손인 여호람왕 때에도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시기를 즐거워하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이 계명 지킨 것을 크게 기억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방 종교를 뿌리뽑고 신앙 제도를 정착시킨 왕입니다.

4.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신 인물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1) 세례요한입니다. 마11:11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한은 참으로 특수한 인물입니다. 예수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으로 그의 인격과 사명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큰 자”로 기억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2) 가버나움에 사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마 8:10에 보시면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하인을 보냈다가 예수님이 “직접 오신다”고 하니까 “말씀만 하옵소서”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을 나타냈을 때에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하시고 그의 특별한 신앙(말씀 능력, 공간 초월 역사)을 칭찬하신 것이요

3) 마 15:28에서 “가나안 여인의 간청하는 큰 믿음”을 칭찬하셨고

4) 또 막 12:42에서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칭찬을 하셨고

5) 마 26:7에서 “향유 한 옥합을 부은 여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5. 사도행전에서는 “고넬료의 경건 생활과 구제가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 하시고 그 가족에게 은혜를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살펴본 것뿐이요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생활을 살피시고 기억할 만한 일이 있으시면 더욱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은혜를 받은 것도 역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행 8:26~39).

 

제42과 예수님과 성전 (마 21:1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성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자주 듣고 배우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공생애란 30세부터 33세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위하여 일하신 기간을 의미함)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성전은 주전 977년경 솔로몬 왕이 지은 것을 바벨론이 침략하여 훼파하였는데 바벨론에서 해방된 후에 “스룹바벨성전”이란 명칭으로 작은 규모나마 재건되었고 주전 20년부터 46년간 헤롯왕이 계속 수축한 것입니다(요 2:20). 그리고 그 성전은 구약적인 율법 전통에 따라 예수님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2. 예수님이 성전에 몇 차례나 오셨는가에 대하여 어릴 때 두차례 가신 일이 있었고(눅 2:23~24,41) 공생애 때에도 수전절에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10:23). 그리고 본문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성전을 마지막으로 찾으신 때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 성전을 왜 찾아오셨을까요?

1) 그 성전이 예수님 자신을 계시하는 모형이었기 때문이요(요 2:19)

2) 또 예수님은 그 곳에서 구약 율법적인 제사를 드리러 오신 것이 아니고 말씀 전파와 기도의 장소로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에 들어오셔서 제사를 드리신 일이 없었고 오직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눅 2:46)”하시고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4.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시자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신 것입니다. 성전을 성전 용도에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물건을 매매하는 장터와 같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매매자들은 먼데서 오는 성도들이 쉽게 제물을 마련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양과 비둘기를 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 목적을 위한 매매도 참작하시지 않고 그대로 철수시킨 것은 오늘의 성도들이 봉사나 구제를 목적으로 한다 하여도 성전만큼은 구별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2) 성전을 “강도의 굴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에 모여서 형제간의 교제에 죄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강도의 굴혈이란 미움의 극단적 표현입니다. 형제간의 미움, 시기, 원망, 다툼, 불화, 의심, 투기, 욕심, 불평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 곳에 나온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영혼과 육체의 치료 장소가 되어야 하고 또 이런 일들을 통하여 크게 위로 받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육체의 치료 장소”란 병원처럼 사용하여야 된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로서 영혼과 육신의 치료와 안위를 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4) 어린이들의 찬송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은 순결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온전케 하신다(시 8:2)”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권장하신 성전 사용의 방법은 말씀 교육, 기도 장소, 찬송하는 곳, 기도를 통하여 치료하는 곳이요 결코 사랑에 반대되는 일을 하거나 매매하는 장소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성전에 대한 바른 지식을 더 가지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구약 시대의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심과 동시에 없어졌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 성전의 목적이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제사를 예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은 것은 건물뿐이고 그 건물이 복음 신앙 목적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 찬송, 성도의 교제를 갖는 건물로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따라서 오늘 저희들이 사용하는 성전은 구약적 의미의 성전이 아니고 복음적 신앙생활을 위한 예배당, 교육관, 친교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처소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주일은 주님의 날이요 주님을 위한 구별된 날인만큼 성도의 단체에서 세속적인 일을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요

3) 예배당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될 수 있으나 그 건물을 헌납한 봉사가 대단히 큰 것도 아니며 또 하나님이 건물을 소유하시겠다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 때에 어느 장소 누구의 소유이든지 복음적 신앙 활동만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것이나 예배당이 되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3과 아하스 왕의 만행 (왕하 16: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하스 왕의 만행”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하스”왕에 대한 기사는 본문 16장 전체와 대하 28장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아하스 왕이 이방 종교를 끌어들인 일에 대하여는 왕하 16:10~20에 자세하게 기록이 되었고 그 이외의 만행에 대하여는 대하 28장의 내용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1. 아하스 왕은 유다 15대 왕입니다. 주전 703년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 “베가”왕이 17년을 다스리던 때에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이 세상을 떠나므로 그의 나이 20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다스렸습니다. 아하스 왕은 요담의 아들이고 웃시아 왕(아사랴)의 손자요 다윗왕으로부터는 13대 손이 됩니다.

2. 그런데 아하스왕은 그 아버지 요담이나 조상 다윗처럼 바른 왕이 되지못하였습니다(16:2). 본문 2절에서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않았다”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성도의 후손이 좋은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기를 원하시는데 아하스는 그렇지 못하였고 또 자식에 대한 미래 문제는 그 부모가 보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하스 왕이 다윗처럼 잘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가?할 때

1)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게 행하였고(2절)

2)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였습니다(3절). “이스라엘 열왕의 길”이란 예루살렘 성전 제도를 떠나서 자유 종교, 우상 종교를 선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과거 가나안 땅에 입국할 때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신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시 도입하여 ①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② 산당과 푸른 나무 앞에서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특히 베니게족 중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풀어 드린다는 목적으로 귀한 아들을 불태워 제사 드린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3. 이런 왕의 만행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받아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는 크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씀이 없지만 대하 28장에 보시면 아람왕이 다메섹으로 잡아간 포로도 많았고 또 “그 아내와 자녀 20만명과 재물을 사마리아로도 노략해 갔다(5~11절)”하였고 또 그 때에 에돔과 블레셋도 침입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하스 왕과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죄악의 댓가였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네 나라의 침략을 받았어도 멸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보호였습니다(왕하 13:23). 그리고 그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가 있어서 예언하기를 “아람과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말라(사 7:3~9, 8:5~8)”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과 백성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잘 물리쳐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 28:7에 보시면 하나님이 “복받는 백성들에게는 대적을 패하게 하여 한 길로 왔으나 열 길로 도망하게 하신다”하셨고 말씀대로 아람 군대로 군대 소리를 듣게 하여 흩으신 일(왕하 7:6)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셋에게 원조를 청한 것입니다. 원조를 청할 때 성전과 왕궁의 보화를 많이 보내면서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입니다”하면서 청탁을 하니까 앗수르 왕이 아람의 도성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왕을 죽여주므로 그 난리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왕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이방 나라를 숭배하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4. 그런데 끝으로 또 큰 만행을 저지른 것은 앗수르 왕에게 감사 표시를 하기 위하여 “다메섹”엘 갔다가 원수 나라인 아람인들이 섬기는 우상 제단의 모형을 갖고와서 제사장 “우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 옆에 이방 제단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제단과 물두멍과 바다(넓은 물통)와 낭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죄까지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제도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된 것인데(대상 28:11~19) 그것을 임의로 뜯어고친 것이나 이방 제단을 세운 것이나 “우리야”제사장이 그것을 순순히 복종한 것은 참으로 큰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하스 왕은 16년을 통치하고 36세에 죽었습니다. 이런 잘못하는 사실들을 볼 때에 저희들은 더욱 각성하여 종교 혼합 주의를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4과 성도의 마지막 소망 (롬 8:18~25)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강조된 내용은 “성도의 마지막 소망인 천국에 대한 것”이고 내용을 구분하면 ①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되지 않는다(18절)는 말씀과 ② 모든 피조물이 다 예수님의 재림과 영과의 세계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말씀과(19~23절) ③ 성도의 최후 소망은 오직 보이지 않는 내세뿐이란 말씀(24~25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도의 마지막 소망인 천국을 어떻게 표현하셨는가?할 때 18절에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과의 세계라”하셨고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세계라”하셨고 25절에서는 “인내로서 기다려야 할 보이지 않는 소망의 세계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최후 소망이요 종착지가 천국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성도가 왜 그 세계를 사모해야 되는가에 대하여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1) 현재의 고난을 장차의 영광으로 후하게 보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천국의 영광에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서 천국에 가야 이 괴로움의 댓가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란 것입니다.

2)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때문이라(19절)”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피조물이란 성도를 제외한 만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무슨 인격이 있기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가? 하시겠지만 여기에는 비유적,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과 인간 중심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였으므로 만물도 타락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좋은 조건이 상당하게 상실된 것입니다. 창 3:17~18에 보시면 “땅이 저주를 받아…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전 1:8에서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렘 14:6에 보시면 인간이 범죄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가뭄의 재앙을 내리셨을 때 “들 나귀가 자산 위에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만물의 피곤함과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22절). 이런 취지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임하기를 기다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니고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20절;롬 1:24) 따라서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기를 바란다(21절)고 하셨으니 이 말씀 역시 피조물들의 탄식을 영적으로 느끼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택한 백성만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회복하여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시는데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행 3:21, 계 21:1).

3)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도들(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의미하고 속으로 탄식하는 것은 범죄와의 싸움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며, 양자될 것이란 뜻은 성도가 죄사함 받았을 때 명분상의 양자가 된 것이지만 실제적 양자의 영광은 몸의 구속 즉 부활로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영화(부활)될 것”을 기다린다고 한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을 설욕하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바라는 탄식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열망에 의하여 저희들도 같은 대열에 서서 천국의 소망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24~25절에서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하셨고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천국만을 바라보며 참음으로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취소하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의 마지막 소망은 내세의 천국과 그 곳에서 받을 상급에 있음을 또 한번 확실하게 다짐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바울 사도의 생활 목표 (빌 3:10~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세 가지 생활 목표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예수님의 생애의 과정을 체험해 보는 일이요(10~12절) ②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기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요(13~14절) ③ 주어진 여건에서 충실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15~16절).

1. 예수님의 생애를 체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1) 10절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기 위하여 자신도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체험한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일에 이르려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그리스도처럼 죽으면 될 것으로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완성은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 붙잡혀진 구원의 결과를 잡을때까지 좇아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의 완성은 성화(예수님을 닮는 것)와 영화(부활)로써 성취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 잡힌 것처럼 주님이 성취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하려고 힘쓰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어 보고 예수님처럼 부활해 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활 목표도 이와 같아져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기 위하여 올바르게 진력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부름의 상”을 예비하셨습니다. 여기의 “부름”이란 성도로 부르신 뜻도 있지만 사명자로 부르신 뜻이 더 강합니다. 그 이유는 10절에서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셨다”하셨는데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사명자일 경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부름의 상에 대하여 딤후 4:7~8에서도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자신에게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름의 상”이란 “부르신 목적을 위한 상”이란 뜻이요 신앙 생활과 사명 생활을 잘한 성도에게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 상을 받으려면 목표를 세우고 달음질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이렇게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받으려면 목표만 상급에 둘 것이 아니라 생활의 목적도 바르게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① 인생의 목적을 아셔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영화롭게 해 드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이 목적을 분명하게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죄사함 받고 영생 얻음에 있다”할 것입니다. 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철저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③ 교회 생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교회에 출석하는 목적은 사람을 알고 사귀면서 미워하거나 투기하고 헐뜯고 경쟁하기 위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배드리고 말씀 배우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사랑의 친교를 갖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목적만 시행하시고 잘못된 일은 일체 멀리하며 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④ 성경 배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살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잘 수행하셔야만 바울 사도처럼 부름의 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어진 여건에서 충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자들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서 자기 사명을 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자가 “다른 일을 해 보았으면”하고 생각하였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나타내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섭리와 인도가 없을 때는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즉 “자기의 일에 충실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세 가지 생활 목표를 말씀하셨는데 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으려 한 것이고 ② 하늘의 상급을 위하여 진력하신 것이고 ③ 주어진 여건에서 변함없이 충성을 하신 것입니다.

 

제46과 세 가지 은혜 (갈 2:9~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 가지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이 감사절과는 큰 관계가 없지만 본문 9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한 말씀이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알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유대 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아서 바울 사도와 그가 증언한 복음을 불신하였습니다(갈 1:6). 이것은 복음의 말씀과 율법주의 사상이 대립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일들로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전도자 된 것이 다른 사도들이 사명을 가진 것과 성질이 같지 않다는 뜻으로 불신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하신 말씀은 “바울이 어떻게 은혜 받은 사실을 알았으므로”하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님과 같이 따르던 제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개종하여 사명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바울 사도의 은혜 받은 경위를 들어보니까 다 합당하고 복음의 메세지가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같다”는 뜻으로 교제의 악수를 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전도자로 인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받은 은혜는 그가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주의 이단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개종하여 복음 신앙인이 된 것과 또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몹시 핍박하면서 복음을 대적하였는데도 하나님이 사도의 직분까지 주시면서 전도자가 되게 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구원의 은혜와 사명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빌 3:5, 행 9:1~18, 딤전 1:12~14). 그 당시에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다 설명하였습니다. 감사절을 맞이한 저희들은 무슨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2. 그래서 이 시간에 저희들이 받은 은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 116:12에 보시면 “모든 은혜”란 말씀이 있고 살전 5:18에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은혜는 받은 것, 잘되게 해 주신 것등이고 범사는 좋은 일과 괴로운 일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과 고난의 은총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1) 일반 은총은 인류(불신자)가 받은 모든 은총입니다. ① 자연의 은혜 ② 생명의 은혜 ③ 육체와 건강의 은혜 ④ 지혜와 지식의 은혜 ⑤ 의식주의 은혜 ⑥ 평화(국가적) 자유의 은혜 ⑦ 물질적 은혜 등입니다(롬 8:32;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심). 시 104:10에 보시면 “하나님이 샘을 솟게 하셔서 산 사이로 흐르게 하사 들의 짐승들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도 해갈하며…또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셨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기름과…양식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 특별 은총입니다. 이 특별 은총은 성도만 받는 신령한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믿음의 은혜, 하나님 아는 지식, 독생자를 받은 은혜, 죄사함의 은혜, 영원한 심판을 면하고 상급을 받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영생, 천국,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은혜, 말씀과 성령의 은혜 등입니다. 성도는 이 신령한 은혜가 유한한 현실적 은혜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큰 은혜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꼭 그렇게 믿고 그것을 감사하며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반드시 고난으로도 유익을 주시기 때문에 “고난도 은혜라”고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환난 중에도 소망을 주시니 즐거워하라(롬 5:3)”, 옥중에 계신 바울 사도가 “감사하므로 기도하라(빌 4:6, 골 1:4)”고 하신 것이나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갖고 감사한 일이나(고후 12:9) “고난으로 유익하였다(시 119:71)”하신 시편 기자의 말씀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모세도 고난 중에서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감사해야 할 성도는 반듯이 일반 은총, 특별 은총, 고난 은총 세 가지를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7과 엘리사의 죽음 (왕하 13:14~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엘리사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 문병하여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니까 엘리사가 왕에게 활을 쏘게 하였고 또 화살로 땅을 치게 한 후 활을 쏜 뜻은 “아람군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뜻이요 화살로 땅을 세번친 것은 아람을 세번치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엘리사”가 죽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당시의 장례법은 시체를 그대로 묘실에 안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어떤 사람들이 시체를 가지고 장례를 치르려 할 때 모압 적군이 침략해 오니까 다급하여 장례를 옳게 치르지 못하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는데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다시 살아남)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이 말씀에서 무슨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1) 엘리사도 죽을 병이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떠날 때 죽을 병이 드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지만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린 선지자가(왕하 4:34) 자신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이니까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① 그러나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란 점과 ② 하나님이 기적을 필요에 따라 나타내 주시지만 또 안 나타내 주시는 경우도 있다는 점과 ③ 많은 능력의 사역자들이 기적을 연속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며 또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 기적을 힘입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 성도나 인류의 기본적 생활임을 알 수 있고 ④ 엘리사는 죽을 병이 들었을 때 자신이 더 살기를 소원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는 신앙을 가졌으며 ⑤ 따라서 내세를 사모한 열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요아스 왕이 엘리사를 병문하여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하고 또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한 사실에서 교훈을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요아스”는 이스라엘 나라 12대 왕입니다(그런데 유다 나라의 11대 왕도 요아스란 사실을 아셔서 혼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① 왕은 엘리사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이는 선도자로 훌륭한 면이 있지만, 최고의 권세자인 왕이 선지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의지하였다는 점에서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성도들이나 정치가들이 복음 사역자를 존경해야 할 것을 교훈 하시는 것이고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도 존경의 대상이 되도록 자신들을 충분히 정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② 엘리사를 “마병과 병거”라고 한 것은 “엘리사”같은 의로운 선지자 때문에 하나님이 나라를 보호해 주시는 섭리도 있고(창 18:32) 또 엘리사의 사역으로 적군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왕하 6:12, 18).

3)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아람을 치는 상징으로 활을 쏘게 하였고 또 몇 번 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화살로 땅을 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여 깨우치는 방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①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든 상태에서도 나라의 우환을 없애 주는 역할을 한 것과 ② 왕이 화살로 땅을 치는 회수에 따라 아람을 치게 한 것인데 이것은 성도의 결심, 의지, 용기, 소원, 노력에 따라 하나님이 은혜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의지와 용기와 노력이 많을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엘리사의 뼈에 닿은 시체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모압의 침략이 있었을 때 나타난 것이므로 하나님이 엘리사의 시체를 통해서 모압을 경고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려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적을 행한 사람들이 많지만 결국은 그들도 이적이 정지된 상태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세도 엘리사도 예수님도 베드로와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오늘의 성도들이 일반 은총에 의한 기본 생활을 잘할 것을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제48과 어리석은 백성들 (민 14: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란 제목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행위 몇 가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의 출처와 내용을 살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쳤을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셨습니다.

1) 가나안 땅은 그들의 500년전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그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고(창 15:14)

2) 또 그들이 출애굽을 하게 된 것도 그 땅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출 3:8).

3)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대로 12지파 중에서 각 1인씩 탐지인을 뽑아(민 13:2) 40일 동안 탐지를 마치고 백성들과 함께 회보를 받게 되었을 때에(민 13:25~26) 두 가지 회보 의견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4)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성읍이 견고하고 크며 아낙 자손과 여러 족속이 살고 있다는 정보는 일치하는데(민 13:27~29) 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시기 때문에 능히 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자(13:30, 14:6~9)”고 하는데 ② 다른 탐지인들은 오히려 그 땅을 악평하면서 상대방은 대장부 같고 그들에 비할 때 자신들은 메뚜기 같은 존재라 삼킴을 당할 것이므로 쟁취의 가능성이 없다(민 13:31~33)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2.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 시간에 그 말씀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 백성들은 “부르짖으며 곡하며 원망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기도 중에 소망을 갖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어려워진 이유를 연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부르짖고 곡한 것은 기도가 아니요 농성, 탄식이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출 16:8).

2)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그 곳까지 이르는 중에 하나님은 바로에 대한 열가지 재앙과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가 있었으며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인들을 물로 덮으셨으며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그리고 해지지 않는 옷과 달치 않는 신을 신고 있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희들은 생명과 호흡과 건강과 평화와 자연 혜택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의 은혜를 힘입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처자를 칼에 망하게 하려고 인도하셨다(3절)”고 의심을 하였으니 이 얼마나 불신앙적입니까?

3) 지나온 일을 후회하면서 장관을 세워 되돌아가자고 충동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살아 온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복종하여 오던 것을 “과거에 살던 애굽으로 되돌아가자”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시행하는 거역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그런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주장한 것이요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를 후회하여 거역하는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지도자를 정면적으로 핍박하고 도전한 것입니다. ① 본문 5절에 보시면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회중 앞에 엎드렸다”고 하였으니 백성들이 지도자들 앞에서 얼마나 위세를 떨치고 지도자를 위협했으면 모세와 아론이 그들 앞에 엎드렸겠습니까? ② 10절에서 “온 회중이 그들(지도자;모세와 아론)을 돌로 치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를 얼마나 증오했으면 돌로 치려 하였겠습니까? 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다(10절)”고 하셨습니다. 이 영광이란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을 현저히 나타내 주신 것으로(민 14:14, 왕상 8:10~11) 위험 당한 사역자들을 보호하시는 은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백성들처럼 어리석게 행하여서는 안 될 것과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과 순종과 용기와 소망이 넘치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증언한 것입니다.

 

제49과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심 (수 24: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완전히 다 점령한 것은 아님;수 17:12)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 여호수아는 늙어 세상을 떠날 무렵이 되었습니다(수 23:1~2).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성막 앞(하나님 앞에 보임;24:1)에 모이게 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지막 훈시를 하였습니다. 그 훈시의 내용이 본문 23장과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훈시를 마치고 11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수 24:29).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전체의 내용입니다.

1. 그러면 무엇을 하나님이 하셨습니까?

1)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 때 선택하여(24:2) 그를 이끌어 내셨고 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3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죄인된 상태에서 선택하여 불신앙에서 이끌어 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2) 선민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케 하시려고 이삭을 주셨고 또 에서와 야곱을 주셨으며 “에서”에게는 세일산을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3~4절). 이 말씀은 선민의 번성과 기업의 터전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3) 출애굽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5~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지도자로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고 애굽왕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백성들을 해방시키셨고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셨고 추격하는 애굽군들을 홍해에 장사지내시면서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4) 광야 여행 중에 요단강 저편의 아모리 족속을 멸절시키셨고(8절) 모압왕의 저주를 축복으로 돌리셨으며 또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을 선민의 손에 붙이셨다(9~10절)”고 하셨습니다.

5) 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쫓아내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왕벌을 보내셔서 왕벌에 쫓겨 도망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쟁에 승리한 것이 그들의 칼이나 활로 이긴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6) 하나님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성읍을 차지하게 하셨고 또 “심지 않은 과실도 먹게 하셨다”고 하시므로 가나안 땅과 성읍과 농산물을 거져 차지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때부터 그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까지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2.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이방 땅에서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할 때

1) 우선 이 사실은 현실적인 생존 관계를 전부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모든 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존 경쟁의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신 것이 바로 현실적 축복입니다.

2) 그러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견지에서 선민의 역사 과정은 선민의 영적 구원의 과정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계 11:8에서 “애굽은 소돔같고 골고다 같은 곳이라” 하여 죄악 세계를 뜻하셨고 광야에서 성소와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은 중보자의 사역을 뜻하며(히 8:24~25)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안식처 곧 천국을 상징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이나 죄인들이 믿음을 갖고 천국에 가는 일을 전부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행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50과 가장 큰 복 (시 73:23, 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장 큰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큰 복과 작은 복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1. 고전 12:31에 보시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시고 고전 13:1~7에서 “사랑이 제일 좋은 길이요 더 큰 은사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사랑을 천사의 말이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능력 나타내는 믿음보다 더 귀한 것인 줄 알고 사랑 제일 주의로 행하는 성도가 많지 않은 것은 퍽 안 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장 큰 복이 무엇인가?할 때 큰 복에 대한 지식도 잘 깨닫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읽으신 시 73:28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하셨고 또 23절에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믿음만 가지고 내게로 오라”하신다면 미련 없이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마지막 부르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말씀과 기도에 끌리며 오로지 사명 생활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잘못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복을 무엇으로 알고 있습니까?

1) 재물을 큰 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모으는데 목적을 두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중에는 의식주를 위하여 목적을 두는 사람도 있지만 재물을 모으고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의 힘으로 행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는 더 많아진 것입니다. 장관이나 재벌가도 재물을 더 모으기 위하여 죄를 범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하셨고

2) 잠 22:1에서는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고 은금보다 은총을 택하라”하시므로 명예와 은총(하나님이 직접 돌보시는 은혜)이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은 다음에 명예를 추구하는 줄 압니다.

3) 그런데 그 명예가 지식이 없이 잘 유지될 수 있는가?할 때 그렇지 못합니다. 분명히 지식과 실력은 명예보다 나은 것이요 지식과 실력만 있으면 명예는 저절로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사람들의 교육열이 대단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지식이 참 좋은 것은 누구도 부인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건강하지 못하다면 어떠할까요? 건강이 지식보다 귀한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건강에 해로우면 공부를 중단하지 않습니까? “여호사밧”왕은(건강치 못한 것 때문에) 왕노릇도 못하고 아들에게 미리 물려준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8:16).

5) 이렇게 건강이 중요하다면 왜 건강을 바랍니까? 건강한 몸으로 보람된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귀하게 여겨야 하겠지요. 롬 14:8에 보시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런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건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원하는 이유 중에는 오래 살기 위해서 입니다. 무병장수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보다 더 좋은 것은 장수이지요.

6) 장수하고 싶은 분들은 예수를 믿고 영생을 하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까 재물보다 명예가 명예보다 지식이 지식보다 건강이 건강보다 장수가, 장수보다 영생이 귀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영생이 가장 귀한 만큼 영생을 힘입는 신령한 복이 현실의 모든 유한한 복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예수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예수만 믿으면 다 꼭 같은 천국에 가는가 할 때 천국은 한 곳이지만 누리는 영광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인이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보다도 더 귀한 것은 천국에서 누릴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을 사모하는 성도는 바로 천국에서 누릴 상급을 많이 예비하셔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51과 여선지자 안나 (눅 2:36~38) 목록으로


예수님 탄생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에 대하여 주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8일이 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결례식을 하셨읍니다(눅 2:21~24). 결례식이란 것은 레위기 12장에 근거하여 남자가 출생하면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산모는 33일이 되어 그 몸이 깨끗해졌을 때(여자를 낳았으면 66일 만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규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목적은 산모의 산혈이 깨끗케 되기 위하여 시행하라는 규례였습니다. 이것을 시행하는 날짜는 산모가 안 오고 다른 사람이 올 경우에는 산모의 결례 기간과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12:4).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아주 나이 많은 “시므온”이란 사람과(눅 2:26)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시므온의 직책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가 성전에 계셨고 또 예수님 가족에 대하여 예언하고 축복한 것을 보면(눅 2:34) 그 당시에 은퇴한 제사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 때 함께 계셨던 여선지자 “안나”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성령님께서 “누가(누가복음 저자)”로 하여금 “안나” 여선지에 대하여 자세히 감찰하신 것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소행도 감찰하시겠지만 늙은 선지자 “안나”에 대하여서도 자세하게 감찰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도 자세하게 감찰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안나”는 어떤 선지자입니까?

1. 그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째 아들이요 레아의 몸종 “실바”의 소생입니다. 창 49:20과 신 33:24에서 큰 축복을 받았는데 그 축복대로 애굽에서 나올 때에 장정 41,500명이 나와서 40년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53,400명이 들어갔으니(민 1:41,26:47) 다자한 복을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바누엘”인데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시선”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중에서 생활한 자임을 짐작케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실 때 그 조상의 근거까지 보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늙은 여자를 선지자로 쓰신 것입니다. 이 “안나”의 선지자 역할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38절에 보시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감사한 뜻은 하나님이 메시야 보내 주신 사실을 감사한 것이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보게 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했다”한 것은 곧 “예수님을 구속자, 구세주로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3. 매우 늙은 여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늙었는가 하면 출가한 후 남편과 7년을 살고 과부된지 84년이니까 91세에 결혼한 나이를 합한 나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100세를 넘긴 할머니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노인에게도 영감을 주셨고 하나님의 일에 쓰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늙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는 생각은 갖지마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로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1) 봉사자가 성전을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릇이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성전 봉사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음이 좋으며

2) 주야 근무를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밤과 낮이 따로 있지는 않았고 잠자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도 구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4시간 기도하고 특별히 피곤하면 잠시 잠자는 식으로 봉사를 한줄 압니다. 이는 시간에 구애 없이 헌신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에는 시간을 쓸 필요가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3) 금식과 기도로 섬긴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봉사인 이유는 정신적, 육체적, 시간적 요소가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성탄절을 기하여 “안나”와 같은 좋은 봉사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부족을 보충하자 (계 2:6~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부족을 보충하자”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많이 증언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진단하시고 장,단점을 말씀하신 중에 “그들의 수고와 인내, 악한자를 용납치 않은 사실, 거짓 사역자를 드러낸 일, 또 핍박을 견디고 게으로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나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은 책망 받을 일이므로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보충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므로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촉대(교회를 의미함)를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현실 교회 성도들에게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앙생활에 집중(몰두)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라(마 22:37)”고 하셨습니다. 지금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신앙생활을 부업이나 취미로 알고 적당하게 하려는 성도님들은 꼭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 믿는 성도는 바쁘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별로 바쁘지 않게 사는 것이 모자라는 문제입니다. 왜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불신자보다 하나님 경외하는 일 한가지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먹고 살아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 생활보다 더 중요한 일 한가지를 더하니 어찌 바쁘지 않겠습니까? 틈나는 대로 돈벌고 틈나는 대로 성경 공부하고 틈나는 대로 기도, 전도, 봉사해야 하니까 놀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덜 바쁘면 문제가 있고 또 세상일에만 바빠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셔서 보충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엡 5:16).

3. 알아야 할 것을 많이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지식도 교회 생활 상식도 대인 관계에 대한 처세도 세상 돌아가는 일의 지식도 많이 아셔야 하는데 그 중에도 성경을 상당하게 아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에게 문제가 있어서 말씀으로 처방을 하려고 하는데 성경을 찾는데도 익숙하지 못하니 그 처방이 잘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컴퓨터를 사 놓고도 사용할 줄을 몰라서 내버려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일반 지식, 교리 지식, 교회 생활 지식은 어느 정도 아셔야 하는데 그것이 모자라는 성도가 많을 것입니다.

4. 자기 중심을 없애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질 때 자신은 죽고(롬7:9, 골 2:12) 주님이 대신 사신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매사에 자기 중심을 못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을 못 버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죽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시게 하는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15:31).

5. 현세욕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고(갈 5:17) 이 세상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미움받는 일임”을 아셔서(요일 2:15) 세상 욕구를 적당한 선에서 통제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적당한 선이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입장(딤전 6:8)”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현세욕이 강하면 성령 충만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고전 7:29~31, 갈 5:16).

6. 교회 생활의 활성화를 위하여 잘 모여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모임에 능숙해져야 할 것입니다(히 10:25). 주일 공예배 한번 나오는 것 가지고 신앙생활을 다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 교육상으로 부족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 중심으로 잘 모이는 것은 마귀를 위협하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신앙력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사랑의 힘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은혜의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마 5:46). 하나님은 죄인들 즉 원수된 자들을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본받으라(요일 4:11)고 하셨으나 저희들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미약합니까? 당연히 사랑의 힘이 보충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이요

8. 봉사열(헌금)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봉사하는 성도님도 많지만 더 많은 성도가 구경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과 취약점들이 잘 보완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