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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Ⅲ)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 : 절기설교)

1997년도 52주 설교


제1과 하루의 충실한 생활 (히 3:12~14)바로가기

제2과 실족하지 않는 복 (마 11:1~6)바로가기

제3과 무슨 은혜를 구할까 (왕상 3:4~13)바로가기

제4과 전파자의 사명 (겔 2:1~7)바로가기

제5과 택한자를 구원하심 (롬 9:10~13)바로가기

제6과 성령에 이끌리는 생활 (마4:1~4, 11)바로가기

제7과 사랑의 발전 (마 22:37~40)바로가기

제8과 환난에 대처하는 신앙 (롬 5:1~4)바로가기

제9과 성도의 충실한 생활 (행 2:46~47)바로가기

제10과 은혜와 노력 (롬 4:4~8, 마 11:12)바로가기

제11과 잘못된 기도 (눅 18:9~14)바로가기

제12과 예수님의 결심과 꾸짖으심 (눅 9:51~56)바로가기

제13과 예수님이 재판 받으신 과정 (마 26:57~68)바로가기

제14과 부활과 관계되는 은혜 (히 2:14~18)바로가기

제15과 좋은 은혜를 주심 (약 1:16~18)바로가기

제16과 경기하는 신앙 (고전 9:24~27, 딤후 2:5)바로가기

제17과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36~46)바로가기

제18과 자녀 양육에 힘쓰자 (삼상 2:18, 막 10:13~16)바로가기

제19과 예수님의 가족 (마 12:46~50)바로가기

제20과 성령님의 내주하심 (고전 3:16~17, 6:19~20)바로가기

제21과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27~31)바로가기

제22과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 (삼상 7:1~14)바로가기

제23과 바울사도의 빈 기도 (엡 3:14~19)바로가기

제24과 성도의 생활의 덕 (빌 4:8~14)바로가기

제25과 소경을 보게 하심 (요 9:35~41)바로가기

제26과 변화를 받자 (롬 12:1~2)바로가기

제27과 3가지 살필 일 (살전 3:17~20)바로가기

제28과 사랑의 방도 (고전 13:4~7)바로가기

제29과 거듭난 자의 생활 (골 2:1~4)바로가기

제30과 하나님의 사자의 외침 (삿 2:1~5)바로가기

제31과 대적을 당하지 못함 (수 2:6~15)바로가기

제32과 요긴한 사람들 (눅 12:32~34)바로가기

제33과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눅 12:13~21)바로가기

제34과 기도 자세에 대한 반성 (마 6:5~8)바로가기

제35과 왕될때의 사울 (삼상 9:1~10)바로가기

제36과 죄많은 여인의 봉사 (눅 7:36~50)바로가기

제37과 말씀에 떠는 자를 권고하심 (사 66:1~4)바로가기

제38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 (행 10:1~8)바로가기

제39과 지혜로운 생활 (엡 5:15~20)바로가기

제40과 성경의 의미 (삼상 3:15~21)바로가기

제41과 가나안 정복의 사연 (삿 1:1~3, 16~21)바로가기

제42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마 18:21~35)바로가기

제43과 예수님과 동행함 (눅 2:41~50)바로가기

제44과 엘리의 죄와 심판 (삼상 2:27~36)바로가기

제45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음 (롬 8:29~30)바로가기

제46과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 (살전 5:18)바로가기

제47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엡 6:23~24)바로가기

제48과 장막 터를 넓히라 (사 54:1~3)바로가기

제49과 제사장의 축복과 응답 (삼상 2:18~21)바로가기

제50과 인생이 곤고한 이유 (롬 7:19~25)바로가기

제51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심 (갈 4:4~5)바로가기

제52과 연말의 기도 (시 90:12~15)바로가기

1998년도 52주 설교


제1과 인정 받는 신앙 (창 22:12~14)바로가기

제2과 축복에 대한 말씀 (창 27:1~4)바로가기

제3과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 (요 10:1~6)바로가기

제4과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바로가기

제5과 분명한 전도 (행 13:46~48)바로가기

제6과 빈약한 자를 돕는 복(시 41:1~13)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을 섬기는 법 (눅 10:38~42)바로가기

제8과 웃사를 충돌하심 (대상 13:5~14)바로가기

제9과 참포도나무와 가지비유 (요 15:1~8)바로가기

제10과 형제가 범죄함을 볼때 (갈 6:1~5)바로가기

제11과 기독교 신앙생활 (계 3:20~22)바로가기

제12과 승리하는 생활 (히 10:1~2)바로가기

제13과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고후 11:1~9)바로가기

제14과 자랑을 삼가야 함 (고전 10:12~18)바로가기

제15과 예수님의 침묵 (마 27:11~14)바로가기

제16과 승리자 예수님 (고전 15:55~58)바로가기

제17과 단지파의 역사 (계 7:1~8)바로가기

제18과 예수님처럼 자라자 (눅 2:51~52)바로가기

제19과 유아교육의 필요성 (잠 22:6)바로가기

제20과 십자가상의 효도 (요 19:25~27)바로가기

제21과 성령의 세례와 충만 (행 1:5, 엡 5:18)바로가기

제22과 교회의 사명자 (딤전 3:14~16)바로가기

제23과 자신을 깨끗게 하자 (요일 3:1~3)바로가기

제24과 육과 영을 깨끗게함 (고후 6:14~7:1)바로가기

제25과 어떤 신자가 될까 (마 11:28~30)바로가기

제26과 지혜로운 생활 (롬 12:3~8)바로가기

제27과 순종으로 복받음 (신 28:1~6)바로가기

제28과 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마 19:23~26)바로가기

제29과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바로가기

제30과 죄사함과 축복 (사 1:18~20)바로가기

제31과 몇가지 의문 (요 19:23~27)바로가기

제32과 4가지 큰 사건 (행 8:1~7)바로가기

제33과 이긴 시험, 진 시험 (갈 4:12~20) 바로가기

제34과 시험에 대한 지식 (약 1:12~15)바로가기

제35과 마지막 예루살렘행 (마 20:29~34)바로가기

제36과 기도의 장애물 (약 1:5~11)바로가기

제37과 피하고 경계할 것들 (딛 3:9~11)바로가기

제38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 (요 5:36~39)바로가기

제39과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바로가기

제40과 3가지를 확인하라 (벧전 1:10~11)바로가기

제41과 3가지 속박 당할 것 (살후 1:6~10)바로가기

제42과 성령님의 성화사역 (고전 6:9~11)바로가기

제43과 교회생활의 의미 (마 13:24~30)바로가기

제44과 자기를 깨끗케 함 (요일 3:3~9) 바로가기

제45과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 136:1~26)바로가기

제46과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2~15)바로가기

제47과 아무 것도 아님 (요 15:5~8)바로가기

제48과 자원하는 심령 (시 51:10~12)바로가기

제49과 집을 짓는 자 (마 7:24~27)바로가기

제50과 상급 받은 청지기 (마 25:14~21, 29)바로가기

제51과 예수님을 맞이한 시므온 (눅 2:22~35)바로가기

제52과 인생의 날을 계속함 (시 90:12~17)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이번에 “7분 설교집” 2집과 3집을 출판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집은 필자가 새벽기도회에서 증언한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못하는 성도가 9할정도 되는데, 목회자의 설교를 고루 취득할 수 있기를 바래서 출판하였습니다. 이책의 특징은 자랑할 것이 못되나 ① 본문 설교인 점, ② 2페이지로 요약하여 복사 활용하게 한 점, ③ 97년도, 98년도, 부활절 절기에 맞추어 구역예배 공과로도 활용할 수 있게 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후배 교역자님들이 새벽기도회 설교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격려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시간 없고, 피곤할때 한번씩 활용된다면 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강해설교와 본문설교를 하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이 취미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일 것입니다. 또한가지 은사는 성경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평신도들이 쉽게 이해할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그 내용을 정리해 보려는 의욕에 항상 사로 잡히는 것입니다. 제가 3집을 집필한 것은 2~3개월 기간에 대심방, 부흥회등 바쁜 일정을 감당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정리했습니다. 문제는 필자가 휴식을 해야 좋을 여가에도 말씀에 끌려서 지루함과 피곤함을 모르고 항상 설교정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매주일 설교와 마태복음 강해와 히브리서 강해와 요절공부등을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생명과 건강 주시는 한 계속 할 것입니다. 현재 신앙상식과 성경개론을 합본한 “기독교 신앙상식”을 출판준비중에 있고, 성령론에 대한 설교와 창세기, 마태복음 강해가 탈고 되었으며 이어서 사도행전 강해를 쓰려고 합니다. 오직 평신도가 읽기 좋은 책을 만들려는 간절한 심정뿐입니다. 하나님이 더욱 여가를 주신다면 목회소감과 교회헌법을 새롭게 정리한 초안과 주일 공예배 설교집도 출간할 계획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이 책을 구입하시고 보급에 힘써 주시므로 출판비 조달에만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1994. 7. .


저자 지 영 근

 

 

1997년도


제1과 하루의 충실한 생활 (히 3:1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하루의 충실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제목의 근거는 본문 13절 말씀에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 보시면 3가지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불신앙의 악심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삼가라는 것이요,

2)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을 피하라는 것이요,

3) 시작할때부터 확실하게 시작하고, 그 확신을 끝까지 잡으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3가지 경계가 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살다보면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믿음이 떨어지는 요소를 발견할때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성도가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할때에 자기 혼자 은혜를 많이 받은 것처럼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교역자 대접도 잘 하면서 몇개월 지나다가 그 사이에 확신을 갖지 못한채 한주일, 두주일 교회 출석을 못하면서 그대로 취미를 잃은 사람처럼 떨어지는 경우를 볼때가 있고, 또 어떤이는 자기의 고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으므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고 떨어지는 경우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이런 유혹에 빠져서 “믿음의 손해를 당하지 말라”는 말씀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생활을 조심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므로서 처음에 확신 갖고 믿음생활 시작한 것을 끝까지 견지하는 성도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시간의 제목은 “하루의 생활을 충실하게 사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인생 전체의 승리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잘 이어가는데 잇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루를 잘 사는 것일까요?

1) 우선은 강퍅하여질만한 죄의 유혹을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만가지 불행의 원인입니다. 주로 어떤 유혹을 피하여야 할 것입니까?

① 욕심을 피해야 합니다. 남보다 내가 현실적으로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십니다. 이런 욕심이 생기면 양보를 못하게 되고 따라서 사랑실천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약1:15)하셨고, “모든 유혹이 자기의 욕심에서 비롯된다”(약1:14)고 하셨으니, 반드시 성도는 이 욕심에서 해방되어야만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마5:3)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물욕, 명예욕, 현실욕에서 반드시 해방된 하루의 생활을 하시기 바라며,

② 혈기를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분한 일, 억울한 일등을 만나도 대단히 침착하게 처신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속히 낙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잘 성내지도 않는 것입니다(사26:3). 혈기나 신경질 내는 일을 잘 피하고 통제할 수 있을때 실수도 적어지고 마음도 편하고, 건강에도 유익한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③ 나태하지 않는 것입니다. 황금같은 시간, 황금같은 인생을 유익하게 보내기 위하여 세월을 아껴야 하기 때문입니다(엡5:16).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놀지 않으며, 일을 해도 값있는 일을 하려고 선택할 것입니다. 근면하지 않으면 근면하지 않은 만큼 손해보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④ 말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급하게 말하다가 실수해 놓으면 그날 저녁에 잠을 못자며 후회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하루생활을 욕심, 혈기, 나태, 말실수에 말려들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있고, 유익한 일은 경건한 생활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루의 생활을 기도로 시작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말씀에 순종하는 일, 신령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진력하는 일등입니다. 이 생활을 열심있고, 뜨겁게 하지 않으면 믿음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하루의 생활을 복되게 보내시므로 후회없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과 실족하지 않는 복 (마 11: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실족하지 않는 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실족”이란 말씀이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데키”, “카살”(시 56:13, 121:3, 잠 4:12)등으로 표시되고, 신약에서는 “프로스콥토( ; 요 11:9)”, “프타이오( ;롬 11:11)”, “스캔달리조( ;마 5:29, 11:6)”로 표기 됬는데, 이 뜻은 “넘어진다, 죄에 빠진다, 저버린다, 또는 걸리게한다, 위반한다, 실수한다”등으로 번역하는 말입니다. 가장 많이 쓰여진 말이 “스캔달리조”란 것인데 영어에도 “scandal”이란 말이 있어서 불명예나 추문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스캔달리조”는 영어의 “offence”란 말로 번역하여 “위반, 실수, 가벼운 범죄”를 나타냈습니다. 영문번역으로 “offence”에 “가벼운 죄”란 뜻이 있다 하여 실족을 작은 죄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마 13:57과 26:31에 보시면 “스캔달리조”를 “배척한다, 버린다”는 말로도 번역을 하였습니다. 결국 실족의 뜻은 여러가지가 있으니

1) 자기가 예수님을 멀리하는 것, 버리는 것, 배반하는 것, 즉 신앙적으로 낙망하는 것이 실족이고,

2) “자기의 오른손이 자기를 실족케 한다”(마 5:29)하셨으니까 스스로 범죄에 빠지는 것이 실족이고,

3) “소자를 실족시키면 죄가 크다”(마 18:6), “형제로 실족케 하면 안된다”(고전8:13)하셨으므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낙망하거나 내가 남을 범죄하게 만드는 것도 실족인데 이런 실족은 죄와 벌이 더 크다고 성경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18:7, 눅 17:1).

2. 그래서 저희들은 실족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발이 실족하면 육신이 상처를 입게되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영혼이 실족하면 믿음이 파손되고, 생활적인 측면에서 실족을 하면 죄를 짓게되고, 더 나가서는 나의 실족이 다른 사람의 실족으로 전염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절대로 실족하지 않으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실족을 방지 하기 위해서 실족하는 종류에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1) 실족이란 의미를 육신이 미끄러지는 것으로 생각할때 조심과 방비가 부족하면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겨울에 빙판진 언덕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미끄러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심하고, 자동차도 체인을 걸어서 운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하면 여간하여 실족하지 않습니다.

2) 실족은 자신의 낙망(마음이 미끄러져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임)인데, 많은 성도가 낙망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망은 분명히 실족이고, 죄인 것입니다. 히 3:12에서도 “하나님께서 떨어질까 조심하라”하셨고, 시 42:5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느냐?”, 예수님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된다”(눅 18:1)고 하셨습니다.

3) 영적 실족에 대한 것은 예수님께 대하여 멀어지면서 낙망과 불안과 염려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가 고침을 받고, 심지어는 죽은자도 살아나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셨는데,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치시는 메시야가 오셨으나, 다 고쳐 주실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혹 고침받지 못하는 사람은 전파된 복음을 받고, 어떤 역경과 악조건에서라도 실족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자신이 범죄하는 실족인데, 성경은 범죄방지를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마 26:41)하셨고, 또 한가지는 “범죄의 여건을 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5:29~30;오른눈이 실족케 하면…, 오른손이 실족케 하면…).

5) 다른 사람을 실족 시키는 것이 더 화받을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차가 사고를 내도 자기차가 깨지는 것은 걱정이 덜 되지만 남의 차를 손해 보이면 괴로움이 더한 것처럼, 소자 한사람을 실족시켜도 그 벌이 중하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두려운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들때문에 이웃이 실족하는 것이 없을까요? 잘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기가 고기를 먹는 것이 믿음 약한자의 양심을 괴롭게 해 준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전 8:13)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어떤 어려움에서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아야 하며(시 121:3, 사 40:31, 요 11:9, 벧후 1:10) 특히 남을 실족 시키지 않는 일에도 사명을 다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과 무슨 은혜를 구할까 (왕상 3:4~13) 목록으로


“무슨 은혜를 구할까?”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옛날에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1000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그를 기꺼이 여기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솔로몬은 자신을 왕위에 앉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자신은 작은 아이라 부족한 점(출입할 줄 모르고 백성중에 거함;7~8절)이 많사오니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을때 그가 자기를 위하여 현실적 영광을 구하지 않고, 지헤를 구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이 지혜와 아울러 부와 영광도 전무후무할 만큼 크게 주셨다는 말씀을 살펴보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데 무슨 은혜를 구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시겠습니까?

1. 깨닫는 은혜를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한다”고 하셨고(호 4:14), 또 하나님은 “마음을 여셔서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눅 24:45). 또 막 15:10에서는 “듣고 깨달으라”하셨고, 마 24:15에서는 “읽고 깨달으라”하셨으며(엡 3:4), 또 딤후 3:14에서는 “배워서 확신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깨닫기를 힘쓰되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셔야 하겠고(호 6:3 ,6),

2) 자신의 허물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욥 6:24),

3)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행 8:32~36),

4)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시 40:8, 엡 5:1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바로 자기의 믿음을 키우는 것이고, 자신의 죄와 연약을 깨닫고 회개해야만 은혜의 관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죄, 하나님을 멀리한 죄, 하나님을 무시한 죄,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 죄, 자기를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묵할한 죄등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주여 이 부족한 것을 많이 깨닫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2.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행 2:37~41에 보시면 회개가 은혜 받는 관건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못박은 무리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을때에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하였고, 베드로는 또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하셨더니, 과연 그날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곧 성령받는 방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당시에 은혜를 받은자들은 예수님을 못박은 자들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찌할꼬”해야 할 것입니까? 감사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며,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아직도 자신의 옛 정욕을 못박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인만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점점 가까이 나가는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순종 잘하는 은혜를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순종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듣는 것은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 15:22, 2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순종하는 방법이 없는가? 할때, 믿음이 있으면 순종은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뿌리가 좋으면 나무와 열매도 좋다고 하셨습니다(마 7:16~18). 또 믿음과 행위는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약 2:17,18). 따라서 믿음이 순종의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롬 1:5에도 보시면 “믿어 순종케 한다”하셨고, 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막 9:23)하신 것도 역시 실천을 가능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로 드리는 아들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실 줄로 믿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히 11:19).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구해야 할 은혜가 수없이 많지만 ① 우선 깨닫는 은혜가 제일 중요하고, ② 그 다음이 회개하는 은혜이며(새 생활의 결심), ③ 믿음따라 순종하는 은혜를 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래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과 전파자의 사명 (겔 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파자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1~2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나타나 주신 경위”를 설명하셨고, 3~7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패역한 백성, 배반하는 자, 열조가 범죄한 자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퍅한 자들에게, 또 안들을 가능성이 많은 자들에게 핍박을 무릅쓰고라도 증언해야 될 이유를 “그들에게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증언하라는 말씀은 강퍅한 자들에게 주시는 재앙의 말씀들인 것입니다(2:10).

2. 왜 하나님께서 안들을 것을 아시면서 증언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1) 선지자가 있어서 일깨워 준 사실이 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5절).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징계하실때 권고 없이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래 참으시면서 일깨워 주시고, 경고하신 다음에 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심때문입니다(애 3:22, 벧후 3:9). 이렇게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증언자로 하여금 핍박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할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6절).

2)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피조물과 죄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실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 40:27에 보시면 “내 사정은 하나님께 숨겨졌고, 내 원통한 것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퍽 자상하신 분입니다. 자신들이 왜 징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 뜻을 알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렇게 되면 재앙을 받으면서라도 그것이 자기들의 죄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혹 한사람이라도 듣고 돌이킬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 10명을 인하여 소돔성을 멸하하실 수 없듯이 단 한사람이라도 회개할 자가 있다고 할때 증언을 안하게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여 믿는자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믿고 따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믿을 자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4:2에 보시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때 듣고 따라오는 자가 없어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야 할 이유는 택한자라도 때가 되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의 범사를 때를 따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전 3:1) 그 때와 맞지 않으면 믿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에 구원하실 자를 거듭나게 하셔야만 거듭난 생명이 복음을 받게끔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가 언제 주어질지 모르니까 항상 복음의 그물을 쳐놓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4)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할 이유는 믿음 그 자체가 설득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이론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독생자가 계시다, 그분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구원 받을 백성들의 죄책을 지신 것이다, 그분은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 우리가 그의 말씀만 믿으면 우리도 죄사함 받고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에 과학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전파만 하고, 믿고 안믿는 것은 하나님 처분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요 3:16이나, 고전 1:18이나, 눅 2:34에 보시면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고 안믿는 것이 구원과 멸망을, 흥함과 패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하라”하신 것은 듣는자가 들으려고 할때 깨달을 수 있는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들려지게 하고 깨달아지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닫게 하는 책임을 전폭 증언자에게만 지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증언자가 못 알아듣게 증언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듣는자가 들으려하고 들을때 깨달을 수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파자는 항상 전파할 사명이 있고, 들을자는 들으려고 해야 깨닫게 되며 안들어도 전파해야 할 이유는 ① 긍휼의 권면을 하는 의미, ② 하나님을 원망치 않게 하는 의미, ③ 혹 돌이킬자에게 기회를 주는 의미, ④ 믿음은 설득으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 ⑤ 듣는자의 책임이 더 크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5과 택한자를 구원하심 (롬 9:10~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원의 지식”을 살피시고, 택한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는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구원에 관계되는 몇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사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닐진대 사람의 협력이 부족해도 그것이 구원목표에 지장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3:9). 그래서 하나님을 “구원의 주”라고 하셨습니다(시 18:46, 히 2:10).

2)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세우신 계획에 의하여 구원을 하시는데(엡1:34, 3:11), 구원대상, 구원대책, 구원의 과정을 정하신 것입니다. ① 구원대상은 택한 백성이고, ② 구원의 대책은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③ 구원의 과정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중생,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단계로 시행하시며, 이것을 시행할때 성령님은 성경을 은혜의 방편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적은수를 택하시고, 다수를 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적은수를 택하셨다는 말씀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아서 찾는이가 적다”하셨고(마 7:14), “다수를 기뻐하지 않는다”하셨고(고전 10:5), 노아시대에 인류를 8명만 남기고 다 없애셨으며(벧전 3:20), 소돔 고모라도 성도를 다 불사르셨으며, 출애굽한 사람들도 두사람만 남기고 다 죽이셨습니다. 이것은 멸망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원만 하시고 멸망에는 뜻이 없으신 것으로 오해 하시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 알기를 원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딤전 2:4). 그리고 또 “땅끝의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사 45:22)로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와 강퍅을 좋아시지 않는다는 뜻일뿐, 만인을 다 구원하신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악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는데 택자만 구원하시는가?에 대하여 신학자도 대답을 못했지만 이것은 마치 썩은 사과가 아깝지만 버려야 마땅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집에도 쓰레기를 버릴때에 집안이 정리되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도 버릴자와 구원 하실자를 분명하게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구원대상을 선택하실때 자기의 뜻대로 하시고 또 구원대상의 선악의 행위를 참작하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하실때 그들이 태어나지도 않고,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구원의 장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6) 그리고 이렇게 택하신 백성은 하나님이 놓치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요 17:9~12에 보시면 “예수님이 맡으신자는 다 구원하시고 보전하신다”하셨고, 마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궁극적으로 훼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요 17:12,24, 계 20:1~3).

7) 또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실때 택한 백성은 거듭나게 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여(요 3:3, 엡 2:1) 끝까지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요일 3:9, 고후 1:22, 4:30). 그런데 지각이 없는자에게는 전도가 상관 없지만, 지각이 있는자에게는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서 진리를 듣고 믿게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전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롬 10:17). 따라서 모든 지각 있는자를 상대로 “전도하라”하셨고(행 1:8), 그 전도를 받은 사람이 택함 받은자이고, 거듭난자이면 믿고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선택자에만 한하는 것이요, 선택자가 아닌 대상은 하나님이 강퍅함에 버려두셨다가(롬 9:18) 심판을 계획하신대로(행 17:31) 영벌에 처하는 재미를 하나님이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사명은 오직 전도할 뿐이요, 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뿐이지 안믿는자가 있는 것을 성도의 죄처럼 여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건을 꼭 사야 할 사람은 장사꾼이 비싸게 불러도 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불신자들에게 아부하거나, 빌붙는 식으로 사정하는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결론인 것입니다. 비택자는 멸망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6과 성령이 이끌리는 생활 (마 4:1~4, 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려에 이끌리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은 다른 것에 이끌리지 않고 꼭 성령에 이끌려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본문 1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와같은 사건을 누가는 기록하기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였습니다(눅 4:1). 따라서 성령에 이끌리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술을 먹는 사람이 술을 적게 먹으면 술에 이끌리지 않다가 많이 먹고 취하면 술에 이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에 취하여 이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쉬운 예로서 술, 담배, 아편, 노름에 이끌리는 사람들이요, 그외에도 현실적 향락에 이끌리고, 재물, 명예, 지식, 건강, 장수에 이끌리는 사람, 또는 범죄에만 가담하여 이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돈벌이와 자녀교육과 출세에 이끌리다가 그것이 성공되면 다시 명예, 권세에 이끌리고, 권세를 축재용으로 활용하다가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은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하는 무엇에 이끌린다고 생각합니까?

2. 분문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에 이끌리신 예수님은 광야고 가셨고, 그곳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으며, 그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기록된 말씀으로 이기신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마귀는 예수님 곁을 떠나고 천사의 수종을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으니, 성령이 이끌리신 예수님은 4가지 결과를 드러내셨습니다.

1)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드물고, 죄가 없고, 살기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도시는 사람이 많고, 죄가 많고, 생존경쟁이 심한 곳입니다. 광야로 가는 사람은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극적으로 살고, 자기 인생을 깨끗하게 살기 위하여 죄악의 오염을 벗어나려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현실경재에 앞장서지 말고, 신앙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는 생활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놋이 소돔성을 택했을때 아브라함이 헤브론 산과 광야를 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면 기도를 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기도도 보통기도가 아닌 40일 금식 특별기도였습니다. 기도에 이끌림이 곧 성령에 이끌림입니다.

3)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나 기록된 말씀으로 대처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나 성도가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는 뜻은 연약하여 유혹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연단을 위함에 시험에 있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기록된 말씀(성경)으로 대처하셨고, 결국은 이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이끌리는 성도는 성경말씀을 앞세워 유혹을 이기는 성도입니다.

4) 마귀는 성령에게 이끌리는 사람의 곁에 있지 못하여 떠나버리고, 대신 천사의 수종을 받게 되셨습니다. 성도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에 이끌리면 마귀는 자동적으로 발붙일 곳을 잃고 떠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대신 성령에 이끌리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됨을 잊지 마시고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에 이끌리시기만 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는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외에도 성령에 이끌리는 생활을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요 14:17) 성경말씀에 이끌림도 성령에 이끌림이요,

2)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행 16:7) 예수님의 인격에 감화되어 회개하며 그 인격을 닮음에 이끌리는 것이요,

3) 또 성령님은 9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기 때문에(갈 5:22, 23) 사랑에 이끌리고 희락과 화평에 끌리고 인내와 자비와 양선에 끌리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끌리는 것이 성령에 이끌림이요,

4) 또 소극적 표현으로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갈 5:16) 헛된 영광을 구하여 격동하거나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갈 5:26).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꼭 성령에 이끌리는 성도가 되어 자신을 죽이며 세욕에 탐심을 갖지 말고, 시험에 승리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7과 사랑의 발전 (마 22:37~4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랑의 발전”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말씀하셨는데, 그 강령은 곧 사랑이라하시고,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요, 사랑의 방법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란 성경전체의 중심교훈이란 뜻이고,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혼신과 모든 것을 기울여 사랑실천에 최대한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행도의 표준이고, 진실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며, 성도가 마땅히 해야할 사명이요, 큰 칭찬과 상급을 받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발전”이란 제목으로 연구하는 중에 사랑하기 쉬운 대상으로부터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에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기 쉬운 대상이 어떤 대상일까요?

1. 자기 자신은 사랑하기 쉬운 대상입니다. 자기 사랑은 하지말라 하여도 본능적으로 잘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이기주의로 나가면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사랑을 죄로 규정하셨고(딤후 3:1),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요15:13). 따라서 사랑의 발전은 자기를 부인하는데서부터(마 16:24)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쉽습니다. 이 사랑은 부부사랑, 자식사랑, 부모사랑, 형제사랑의 순서가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신이니까 서로 사랑해야 하고, 자식은 혈육이니까 그렇고, 부모형제도 혈육을 받고 나누었으니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고(불효), 형제가 형제를 미워하면서 다투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때 자기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사랑실천의 발전이 요원하다는 느낌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의 발전을 가져오려면 가족 사랑에 관한 것은 이미 실천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제가 어떤 결혼식을 주례할때 부부사랑, 가족사랑을 권장하는 말을 하면서 사랑의 목표는 원수사랑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부부사랑이나 가족사랑은 쉽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부자가 소송하고, 형제가 등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순서와 똑같다”고 하시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함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요(시 119:97), ② 성경말씀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요 14:23), ③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요, ④ 예수님의 피로 구속한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요, ⑤ 예수님이 보내어 일하게 하시는 사역자들을 사랑함이요(마 10:40), 소자를 사랑함도 주님을 사랑함이라(마 18:5, 6)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꼭 실천하셔야 할 것은 이웃교회나 이웃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섬기는 교회와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교회안에 자기교회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것은 사랑실천에 위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믿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되 손해를 보이는 이웃이나, 감정상 또는 여러가지 갈등으로 대립하는 이웃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원수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마 5:44). 성도에게는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원수시하는 대상이겠지요. 그러나 혹 이웃이나 형제(성도간)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강퍅한 성도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될때 사랑능력이 부족한 것을 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같은 죄인 원수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은 곧 만물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이 곧 그 뜻입니다. 맹수도 사랑하면 순해진다고 합니다. 모든 동물과 자연계까지도 인간의 사랑을 받을때는 보답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저희들의 사랑 발전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살피셔서 반드시 사랑실천의 승리자기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과 환난에 대처하는 신앙 (롬 5: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환난에 대처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는 여러가지 종류의 환난(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럴때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건 환난을 자청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환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 45:7에 보시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환난을 당하는 성도는

1. 하나님이 어떤 연유로 환난을 주셨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가지 이유로 환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1) 연단을 위함입니다. 본문에서도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주신다”하셨고, 바울사도에게도 연단을 육체의 가시로 허락하셨습니다(고후 12:7).

2) 징계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 12:7에 보시면 하나님은 성도를 아들과 같이 대하여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질병, 흉년, 전쟁, 나라의 멸망등으로 징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3) 성도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은 것이나 나사로가 죽음을 당한 일이나 예수님이 친히 못박히신 일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악도 적당하게 쓰시는 것처럼(잠 16:4) 고난을 주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2. 고난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고난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흑암과 광명을 바꾸기도 하시고(사 5:20, 42:10), 평안도 창조하시며(사 45:7), 어려움에서 형통하게도 하시고(창 39:2~3), 환난으로 유익(인내, 연단, 소망)을 주어 즐겁게도 하시고(본문), 기가 막힐 수렁에서 끌어올리셔서 반석위로 걸어가게도 하시며(시 40:1~2), 소망이 항상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3:13). 그런고로 성도는 환난 중에서도 능히 위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환난을 견디며(고전 13:7)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롬 8:35).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은혜를 힘입게하여 대처하게 하시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환난 당한 성도의 형편을 잘 아시는 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밀하게 감찰하셔서(시 139:1~4) 성도의 모든 어려운 형편을 익히 아시는 것입니다(계 2:2~3). 따라서 하나님이 어려운 사정을 모르시지 않으시므로 위로를 받으실 수 있고,

2) 하나님은 능히 위로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고후1:6에 보시면 “모든 위로로서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말씀만으로 위로하셔도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될 것입니다(고후 1:4).

3)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능히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0:3). 이것은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공중에 떨군다음 새끼가 땅에 떨어질 즈음이 되면 속히 내려가서 그 새끼를 등에 업어 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신 32:11).

4) 환난에서 건져 주시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출 15:26에서는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라”하셨고, 시 50:15에서는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분이라”하셨고, 마 11:28에서는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시므로 쉬게 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어려움을 당한때도 있었지만 지금 평안한 것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전화위복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일이나(창 39:23) 바울이 피고로 로마에 호송됨이 전도의 유익을 준것처럼(빌 1:12, 13) 하나님은 고난으로 더 유익한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롬 8:18).

결론적으로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상의 5가지 방법으로 은혜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그 방법에 따라 대처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9과 성도의 충실한 생활 (행 2:46~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충실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의 충실한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으로는 본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말씀한 내용이 초대교회적이고, 신앙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충실한 생활의무는 신앙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위에 바로 서고, 신앙을 토대로 하여 육신적이고 사회적인 책임도 잘 감당하셔야 합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에 보시면 “날마다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 마음을 같이 하는 일, ② 모이기를 힘쓰는 일, ③ 모여서 떡을 떼는 일(이것은 성찬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기쁨과 순전함으로 음식을 나누는 일, ⑤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잘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면 그것이 좋은 전도의 방법이 되어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전도의 방법이 좋고, 새신자를 잘 수용할 수 있는 입장이 될때에 하나님이 그런 교인들과 교회에 새신자를 보내주신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반성할 점은 아직도 우리는 초신자를 영접하여 잘 화합하고 지도할 수 있는 성숙도가 부족한 형편임을 자각하여 더욱 포용성과 사랑의 친교의 힘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교회,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는 부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단합하여 성찬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친교하는 분위기를 곧 사랑의 분위기가 되는 것이요, 기쁨과 찬미가 있을때 그 세계는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세계가 이렇게 조성되어 다른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면 전도가 잘 될 것이요, 주님께서도 그런 세계, 그런 교회로 구원 받는 백성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2. 성도의 충실한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경을 상고하는 생활입니다. 성경이 믿음의 근거 아닙니까? 성경을 모르면 믿음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한가지를 믿어도 성경에 근거하여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중에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가 바로 그런 내용 아닙니까? 그것을 범신론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에 근거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뵈뢰아 성도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행 17:11).

2)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쉬지말고 해야 하는(살전 5:17) 영혼의 호흡입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고, 연약한 일에 대하여 도움받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도이면 반드시 기도의 맛을 알고 시행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긍지와 응답 받는 체험과 기대 속에서 만족함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랑실천은 계명실천의 정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쉬운 방법부터 시작하여 어려운 것까지를 시행하고 사랑하기 쉬운 대상부터 어려운 대상으로까지 사랑할 수 있는 실천자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성도가 사랑노력에 관심이 없고, 사랑의 불실천에 회개하는 반성이 없으면 성도로서 문제가 있다 할 것입니다. 사랑은 인내로부터 시작하여 온유, 양보, 겸손, 예절, 정의가 있어야 하며, 거기에 반드시 진리와의 결속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3:4~7). 진리 없는 도덕적 사랑은 구원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사랑실천이 바로 행동의 목표란 것을 알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근면한 것입니다. 성도가 시간을 허비하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 위배되고(엡 5:16), 시간을 허비하는 공백에서 잠념, 퇴폐, 범죄유혹은 물론 물질적 소비나 건강에도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창 3:19). 반드시 자기의 당면한 환경에서 받은 소질(달란트)에 따라 맡은 일에 충실, 근면하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마귀는 성경, 기도, 사랑, 근면 이 4가지 실천에 반대하는 혹을 하겠지만 반드시 그 유혹을 이겨야만 성도의 충실한 생활에 성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10과 은혜와 노력 (롬 4:4~8, 마 1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와 노력”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은혜란 뜻은 거저 주는 선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도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엡 2:5)은 구원을 인간의 노력에 의하지 않고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마 11:12에 보시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하시므로 노력을 하되 전쟁하듯이 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고, 또 다른 곳에서도 “회개하라(막 1:15,행 2:38), 선을 행하라(엡 2:10),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요 17:3),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노력에 관한 말씀을 하셨으니 은혜로 구원 받는 것과 노력을 통하여 얻어지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이해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을 설명드리겠습니다.

1) 먼저 4절 말씀에서 일한자에게 품값을 주는 것은 그의 일값을 주는 것일뿐 결코 거저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하고 품삯을 받은자는 그것을 빚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 그런데 5절 말씀에서는 경건치 않은자(즉 죄인이) 경건해질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즉 죄만 짓고 있었는데) 그를 의롭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간주하여 경건하게 행한 공로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이 아닌 그의 믿음(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을 의로운 선행처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7, 8절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의로워질 일에 대하여 이미 구약에서 다윗이 예언하신 바를 인용하신 것입니다(시 32:1, 2). 즉 선행이 없이 “믿음으로 모든 불법과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고 가리움을 받으며 인정치 않음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죄사함 받는 문제가 이렇게 당사자의 노력에 의한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 받는 선행으로(즉 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 6:29에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하셨고, 이와같은 뜻으로 계 14:13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하시고 이 상태가 세례요한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1) 여기의 침노란 뜻은 구원 받는 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확장 사업이 노골화되고, 광대하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의 때부터는 ① 메시야가 오시고, ② 구속사업이 진행되고, ③ 성령님이 상주하여 역사하시고, ④ 복음이 땅끝만방까지 전파되는 운동을 가리켜서 “침노당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또 이 말씀은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비유했을때(계 21:1, 10)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침노하여 뺏은 것을 염두에 두시고 표현하신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도 가나안 입국은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신 것이고 침노란 신앙생활에 따른 성도의 노력이라고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결론적으로 은혜로 된 것과 노력으로 받는 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거저 받는 은혜는 ① 인간을 포함한 구세주와 만물 창조의 은혜입니다(롬 8:32). ② 인간이 죄인임을 아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롬 11:5). ③ 거듭나게 하신 것과(엡 2:1), ④ 부르신 것과(갈 1:15), ⑤ 믿음을 의로 여겨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과(롬 3:24), ⑥ 구원을 받게 하신 것(행 15:11, 엡 2:5, 8)이 모두 은혜인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성도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믿음을 부요케 하는 일과(딤후 3:14)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이것은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축복과 상급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계명을 잘 지키고 충성을 많이 한 성도는 구원 이외에 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이요, 따라서 은혜는 구원의 결과를, 노력은 상급과 축복의 결과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11과 잘못된 기도 (눅 18:9~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저희들의 기도하는 자세와 표현등에 대하여 반성하고 더 좋은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하여 “잘못된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두 신분의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에 바리새인의 기도는 따로 서서 기도하였고, 그 기도의 내용이 자기보다 못한 세리들의 생활과 비교하여 그들을 멸시하고 자기를 의로운자로 자처할뿐 아니라, 자기의 의를 내세워 은혜를 촉구하는 기도를 하였고, 세리는 성전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모퉁이 한 구석) 감히 높은 곳(하나님 보좌) 하늘을 우러러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요. 나는 죄인입니다”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세리의 기도를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더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려는 자를 낮아지게 하시고, 자기를 낮추려는 자를 높아지게 하시는 분임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본래 되지도 못하고 된척한 사람들이고, 세리는 죄인의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기도도 꼭 자기를 입장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지탄하는 세리들처럼 토색하지 않았고, 불의, 간음도 하지 않았고, 또 세리의 신분과도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면서 금식기도와 십일조 내는 것을 내세웠으나 세리는 떳떳한 것이 없는지라 성전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서 가슴을 치며 자복만 한 것입니다.

1. 그러면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이 모든이의 기도를 들으시는데 먼저 바리새인 신분과 세리의 신분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때 기도내용에 앞서서 우리의 신분과 입장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목사가 기도하는구나, 집사가 기도하는구나, 초신자가 기도하는구나를 아시며,

2) 기도의 자세를 유심히 보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고, 세리는 멀리서서 눈을 들어 하늘쪽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치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자세도 하나님은 꼭 보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가 거만하면 안좋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을 일일이 들으시는데 바리새인이 자기를 세리에 비교한 내용, 세리같지 않은 형편을 감사한 내용, 또 자신이 세리들보다 낫게, 금식기도와 헌금한 자랑, 세리가 “나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기소서”한 내용을 그대로 다 듣고 주밀하게 분석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분석의 결과에서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높이며 세리를 멸시하는 기도를 했다”하셨고(9절), 세리는 “어차피 죄인이니까 죄인이라고 실토한만큼 긍휼을 바라는 겸손한 기도를 하였다”고 분석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저희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잘못된 기도를 면할 수 있을까요?

1) 겸손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내용이나 자세에 겸손 아닌 것이 포함되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 또 자기 잘한 것을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같지 않은 것을 불평하는 것, 자기의 욕구불만이나 소신에 입각한 호소를 하는 것등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기도에서 이런 것들을 방지하려면 ① 우선 자기에 관한 기도를 많이 하시고, ②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모든자 또는 실제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고, ③ 자신보다 못한이에게 자기를 비교하지 마시고, 자신을 예수님에게 비교하여 “나는 어찌할꼬”하는 심정으로 기울어져야 할 것입니다.

2) 감사의 기도가 많아야 합니다. 특히 대표기도에서 감사의 기도가 빈약하면 그 기도자가 불평 많이 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3) 자기의 부족과 죄를 자복하는 기도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대중 앞에서 자신이 회개하는 기도를 하면 다른이에게 큰 감화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목표한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저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12과 예수님의 결심과 꾸짖으심 (눅 9:51~56) 목록으로


이 본문말씀에는 51절에서 “예수님의 결심하신 내용”이 있고, 52~55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마리아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요, 56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심에 대하여

1) 이때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때였습니다. 이 마지막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기사가 5차례쯤 기재되었는데 이때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올라가신다는 뜻입니다.

2) “승천할 기약이 차간다”하신 말씀도 그뜻이지만 승천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십자가는 큰 고난인고로 굳게 결심하시고 가셔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결심, 고난, 십자가, 승천, 영광의 순서를 생각하시면서 우리도 신앙과정에서의 고난을 기도와 결심과 용기로 감당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사마리아 촌락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본래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예루살렘) 사람들과의 사이는 조상적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의 백성들을 신앙적, 혈통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이질감은 그들이 여로보암 종교(왕상 12:25~33)에 귀속되었기 때문이고, 혈통적이란 북방의 침략을 받으므로 혼혈아들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에 차별하시지 않고 그곳에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요 4:4).

2) 이번에도 마지막으로 그 지역을 통과하시면서 한 촌에 들어가서 유하시기 위하여 예비하라고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는데(52절)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알고,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루살렘행이 배척의 이유가 된 것은 정통종교인이라는 점과 유대인이란 사실을 노출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3. 제자들은 왜 꾸짖음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1)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즉시 분을 터뜨리고 포악한 마음을 갖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한 말은 하나님께 부탁하여 “날벼락을 쳤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으니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포악과 보복심으로 격동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온유함과 인내심이 강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쉽게 격동하고 조급함을 갖는 것은 죄인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딤후 3:4).

2) 그들은 예수님을 잘 소개하는 일과, 예수님이 그곳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설령 1차부탁에 거절을 당했다 하더라도 더 겸손한 어조로 사정하고 설득하면서 생명의 주 예수님을 소개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자세한 소개를 받았다면 제자들은 영접을 못받아도 예수님은 영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도자의 성품과 대인관계의 처세가 대단히 부드럽고 인내로워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격동된 심정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분함과 혈기와 응징을 가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니 이런 것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원망하시거나 책망하시지 않고 영접하지 않음에 대하여도 아무런 불평이나 반항이 없이 그대로 물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대항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양보를 나타내셨고, 무슨 일이나 억지로 하시지 않았으며, 대항적 태도를 나타내신 일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밖에 있는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책망하시고 또 함께 가셨습니다. 55절 각주에 보시면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 구하러 왔노라”하시므로 제자들의 심판적 요구를 일축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어렵고 좋은 일을 위하여는 결심하셔야 하겠고 또 전도하기 위하여는 온유, 겸손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인내로써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3과 예수님이 재판 받으신 과정 (마 26:57~68) 목록으로


이 시간은 “예수님이 재판 받으신 과정”에 대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후 가룟유다의 지목을 받아 대제사장의 종들과 군사들에게(요 18:12) 붙잡힘을 당하신후(마 26:45~56) 가장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뜰로 끌려가셔서 재판을 받으신 사실을 읽으신 것입니다. 4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3차례의 재판 과정을 거쳐 돌아가시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처음으로 대제사장의 집뜰로 끌려가신 것이 목요일 새벽전이었습니다(마 27:1). 처음에는 원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다가 안나스가 다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요 18:12~13, 24). 그때 제사장의 집뜰에는 대제사장들(가야바의 장인 안나스까지)과 서기관들과 온 공회원까지 모여서 거짓증인들을 내세우며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마 26:57~58, 눅 22:66).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마 26:63~65)고 시인하신 것때문에 그들은 “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도를 하였습니다(66절).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렸으니, 이것은 종교인들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67~68절). 이 첫번째 재판 과정은 종교인들과 공회원이 합한 것으로 예수님이 공회에 넘겨질 것을 미리 예언하신대로(마 10:17) 성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총독 “빌라도”에게로 보냈으니 이는 사형 집행하는 권세가 종교인(유대인들)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다시 총독의 재판을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요 18:31). 이때에 빌라도는 재판을 하다가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란 것을 알고, 그때 마침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예루살렘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할권 문제로 그에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눅 23:6~7). 그러나 헤롯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자기의 관할권을 포기한듯이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냈습니다(눅 23:11).

3.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인수 받아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① 빌라도 자신과 헤롯왕도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고(눅 23:13~16), ② 유대인들의 분노를 진압하기 위하여 적당히 때리는 정도로만 하려고 했으며(눅 23:16), ③ 그도 이 송사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나타난 일로 알았고(마 27:18), ④ 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을때 그의 아내가 “옳은 사람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는 부탁까지 받았기 때문입니다. 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같은 명절에 죄수 하나를 특사로 내보내는 경우로 예수님을 방면하려고도 시도해 보았지만(마 27:15~17) 유대인 송사자들은 “다른 죄수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마 27:21~23)하니 빌라도가 더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오히려 민란이 일어날 위험이 보이므로,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것입니다(마 27:24). 따라서 예수님의 재판 과정은 네번을 거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 앞에서였고, 두번째는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의 재판을 임시로 거친 것이었고, 마지막에는 다시 빌라도 법정에서 끝을 낸 것입니다. 이때에 사회법관인 빌라도나 헤롯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고(눅 23:16), 또 예수님을 정죄하는데 많은 가책을 느끼며 손을 씻기까지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거짓증언과 정치적 반란공세때문에 결국은 사형에 넘기게 한 것입니다(하룻밤을 옥에서 보내시고 금요일 오전에 집행됨).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예수님은 무죄하실지라도 악한자들의 소행에 의하여 돌아가시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② 부패한 유대인의 종교가 의인 예수님을 죽일만큼 사악하여진 것을 알 수 있으며, ③ 하나님은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구원사역의 방법으로 쓰셨음을 알게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14과 부활과 관계되는 은혜 (히 2:14~18) 목록으로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부활과 관계되는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면 여러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과 함께 혈육에 속한 육체를 가지셨다”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자녀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하셨는데, 이는 성도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육체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와같은 모양의 육체를 가지심으로 “동일하게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처럼 육체를 가지신 이유는 사망으로 말미암아(육체가 죄로 인하여 죽게되므로) 사망의 세력 잡은(육체의 죽음으로 성도를 위협하는) 마귀를 눌러 없애기 위함(무익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래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제한된 일만 하게 되어 있고(욥 1:12), 생명과 죽음에 관한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는 것입니다(신 30:15, 마 10:28~29). 따라서 마귀는 핍박의 몸뚱이를 들고 죽일듯이 위협은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행 17:25).

3) 15절에서 “예수님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죽음의 위협아래 종노릇하는 모든자들을 그 죽음에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예수님이 친히 몸을 갖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천사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고, 다만 아브라함의 자손인 성도들이 붙들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16~17절).

4)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형제와 같이 되신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약점을 체험하시고, 인간의 약점을 채워주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자비하고 충성스런 대제사장(중보자)이 되셔서 ①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고, ② 인간이 시험받는 형편을 아시고, ③ 그 시험에서 건져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생활과 죽음을 친히 맛보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17~18절). 이상의 말씀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고를 맛보셔야만 했던 당위성”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본 제목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부활과 성도에게 관계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곧 성도의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열매라(고전 15:20)하신 것은 바로 다음 열매가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① 육체죽음에서의 부활이고, ② 마귀의 핍박에서의 승리이고, ③ 의인의 승리이고, ④ 부활이 있으므로 영생이 있는 것인데 이 4가지 부활의 유익이 그대로 성도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신앙은 곧 영생과 천국을 믿고, 승리를 믿으며,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많은 성도들이 승리와 영생의 소망을 갖고 즐거워 하는데 한가지 감추어진 은혜를 못느끼는 경우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육신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5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죽음의 시범을 보이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3) 마 10:28에 보시면 “몸은 죽여도(핍박, 순교)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마귀의 위협따위는 두려워 하지 말라”하셨고, 빌 1:21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하셨고, 롬 14:8에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하셨고, 계 14:13에서는 “자금 이후 주안에서 죽는자가 복이 있으며”, 요 8:32에서 “진리는(어떤 형편에서나) 자유를 주고”, 요 14:3에서 “예수님은 성도의 죽음의 안내자가 되신다”하셨으니, 성도가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4) 부활을 믿는 성도가 죽음을 언잖게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생명, 자기목적, 자기뜻으로 살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반드시 주님의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절을 보내면서 반드시 한가지 더 받으셔야 할 은혜는 바로 순교적 신앙을 가시시고 “육체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꼭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제15과 좋은 은혜를 주심 (약 1: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좋은 은혜를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하시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하시고, 또 빛들의 아버지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1. 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비싼 물건을 잘못사서 속는 것이 아니고, 각양 좋은 은사가 무엇인지 또 그 은혜와 은사들을 누가 주시는지에 대하여 속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예수 믿는 의미를 잘 모른다면 이것은 크게 속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속담중에 “절에 가서 젖국 찾는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에 와서 엉뚱한 것을 소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각양 좋은 은사가 무엇이며, 그것을 누가 주시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들과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양좋은 은사는 현실에 속한 모든것, 즉 자연만물, 생명, 지혜, 건강들이요, 온전한 선물은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는 믿음, 속죄, 영생등 신령한 은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두가지를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위로부터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높으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주권과 은혜로 거저 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아버지)이 어떤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본문에서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라 하시므로 빛이 충만하시고, 어두움이 없이 정의로우신 분이며, 그 본질과 사랑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고, 또 형상과 외형도 없으신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이 3가지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1) 빛가운데 거하는 자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빛은 순결과 정의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정의로운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악한자가 돈을 가지면 그 돈으로 방탕에 쓸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자가 돈을 가지면 그 돈을 자선에 쓸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누구에게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의로운자에게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엡 6:24에 보시면 “주 예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생활과 충성에 변함 없는자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기도생활, 말씀생활, 사명생활, 환난중에 믿음 지키는 생활까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꼭 든든한 신앙, 큰 신앙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대양을 항해하는 큰 배처럼 바다에 우뚝 솟은 바위섬처럼 변함 없는 믿음을 가질때 하나님은 그런 성도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형상과 모양이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지요. 외모는 없으나 내용은 있는 분이며, 외모는 내용처럼 중요시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흠모할 입장이 못되는 외모를 가지셨던 것입니다(사 53:2). 요즈음 사람들은 겉치레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절차와 서드리가 더 장황한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실을 충실히 하는자에게 각양 좋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러면 결론적으로 각양 좋은 은혜와 은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사모해야 합니까? ① 믿음을 사모하시고, ② 신령한 복을 귀히 여기며, ③ 신앙적 경건생활에 가치관을 두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는 생활을 각양 좋은 은사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제16과 경기하는 신앙 (고전 9:24~27, 딤후 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경기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옛날에 고린도 지역에는(특히 헬라) 운동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운동경기로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히 12:1~2에서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처럼만 한다고 하면 크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운동경기의 목표는 대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바로 마귀와 마귀의 역사를 꺾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통힘으로나 적당한 힘으로는 꺾을 수 없습니다.

2. 그래서 대적을 이기려면 그만한 지헤와 힘과 용기와 훈련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히 12:1~2에서는 “무거운 죄짐을 벗어 버리고 인내로 노력하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경주(다름질)해야 한다”고 하셨고,

2) 고전 9:25에서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절제해야 하고, 썩지 않은 것을 얻으려해야 하고, 향방을 확실하게 정해야 하고,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굴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3) 딤후 2:5에서는 “법대로 해야만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요약하면 경기자는 훈련을 잘 받고, 법대로 경기하며, 인내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그 방법인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성도의 신앙과 관련을 하여 운동을 할때 어떤 주의와 교훈이 필요합니까?(어떤 체육대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함에 있어서

1) 시간의 법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엡 5:16). 운동만큼 시간을 중요시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법을 잘 지키는 성도는 ① 항상 근면해야 하며, ②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하며, ③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며, ④ 타인의 시간을 귀히 여겨주므로 시간을 잘 지켜야 하며, 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기약없이 자기의 인생과 생명(시간)이 끝날때 언제든지 자기의 일생이 잘 정리될 수 있도록 정리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사랑의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본래 운동의 시작은 친교를 위한 것이었고, 지금도 올림픽의 목적이 세계인들의 친교에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교요, 성도의 교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효도가 주님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듯이(엡 6:1) 운동도 사랑안에서 시행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건강의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는 운동의 목적이 건강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육체는 자신이 잘 관리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사와 운동과 휴식을 적당한 규칙으로 시행해 나갈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의 법중에는 낙천적인 마음과 기도생활도 있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ㅇ비니다.

4) 운동이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과 방법을 떠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함께 운동을 하거나 경주를 할때 믿음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규칙 안에서 잘하면 하는 사람도 즐겁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신앙에 비유하고 대적자를 마귀로 비유하여 영적경주를 할때는 당연히 죄와 마귀를 이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자체를 이기고 지는 문제는 신앙이나 하나님 영광과 관련이 없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꼭 한국이 이기고 다른 나라가 져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경기하는 방법에서 신앙생활하는 방법을 잘 터득하여 신앙생활에 승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17과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36~4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하루 앞두시고 그 고난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런때에 제자들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구속사업을 성취하시는 특수한 고난이었고, 제자들은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야 하는 과제 앞에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감당하셔야 할 어려운 일을 앞에 놓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교회나 개인생활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 더욱 깨어 기도하시므로 시험을 물리치거나 아겨야만 할 것입니다(본문의 내용해석은 강해서를 참고하십시요).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나 개인생활에 어려움이 있을때는 좋은 일이 있어도 마귀가 역사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겨회가 부흥회를 준비한다든지, 무슨 임직식을 갖는다든지 예배당 건축을 위한 공사나 헌금같은 큰 일을 할때 마귀는 이 좋은 일들을 훼방하기 위하여 예상치 않은 일들로 유혹을 하는가 하면, 질병이나 경제난이나 송사문제등으로 어려움을 겪을때도 역시 성도의 약해지는 틈을 타서 마귀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것을 물리치는 방법이 바로 기도를 열심히 더하므로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배를 탄 선객들이 풍랑을 이기는 방법은 배안의 낮은 곳에 가만히 있어야 함같이 시험의 우수사려가 많을 때도 자신의 육정을 죽이고, 기도로 경성하며 최대한 이웃을 사랑하는 위치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문 41절을 보시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마음과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육신이 약하다”는 뜻은 “마음으로는 잘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롬 7:21). 그래서 믿는 성도가 주일을 지키고 기도를 하면서도 혈기와 포악을 중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두개의 바퀴중에 한쪽은 잘 굴러가고, 한쪽은 잘 안 굴러가면 그 수레가 곧은 길을 갈수 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처음에는 원하는 마음에 이끌려 땅을 팔아 헌금하기로 약속했으나, 그 땅을 팔아 값을 쥔 다음에 시험에 들어서 땅값 일부를 감추고 사도를 속였다가 죽음을 당한 사실이 있었지 않습니까(행 5:1~11)?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도를 게을리 하면 마귀의 농간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기도하는 성도를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실까요?

1) 다가오는 시험을 비켜가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① 출 15:26에 보시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 “애굽의 모든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게 하신다” 하셨고, 또 마 24:20에서는 (말세에 환난이 임하였을지라도)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해당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은 절기나 시간에 관한 문제까지도 감안하여 통치하심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험을 갖고 오는 마귀를 다른 볼일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시험으로 어려움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 24:22에서 “화난의 날을 감하여”(이것은 재림의 단축이 아니고 환난의 단축을 의미함) 성도가 믿음을 갖고 잘 견디게 하신다하셨고, 또 고전 10:13에서는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떨군다음 떨어지기 전에 업어 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신 32:11). 그러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때 꼭 기도를 힘쓰셔서 시험을 견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은 기도를 잘 하시고,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1차, 2차, 3차에 걸친 기도부탁에도 피곤함 때문에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그 자리에 없던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베드로는 혈기로 말고의 귀를 치고, 3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거의 다 주님을 멀찌기 따르지 않았습니까?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괴로운 일이나 큰 일이 있을때 꼭 깨어 기도하시므로 시험을 잘 통과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8과 자녀양육에 힘쓰자 (삼상 2:18, 막 10:13~6) 목록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양육에 힘쓰자”라는 제목으로 몇가지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자녀들을 주셨는지를 아셔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시 127:3에 보시면 “기업으로 주시고 상급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기업이란 뜻은 부모가 늙었을때 자식이 부모를 부양케 하신다는 뜻이고 상급이란 즐거움의 대상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또 시 127:5에서도 “자녀가 많은자는 성문에서 원수와 만날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으므로 복되다”고 하시므로 인생 삶의 큰 힘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 자녀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누리게 하심입니다(시 100:5). 그래서 사람마다 자녀갖기를 원하고 자녀에게 기대를 걸고 교육에 힘을 쓰지 않습니까?

2. 저희들이 아셔야 할 것은 예수님이 어린이를 좋아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막 10:13~16에 보시면 에수님이 유대지경에서 전도하실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시고 축복해 달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귀찮고 번잡스러운 일로 여겨서 쫓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분히 여기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자의 것이라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리아이처럼 받으라(이 말씀은 어린이를 천국처럼 받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함) 천국생활을 어린아이 받들듯하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다하시고 안수 축복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교훈을 받을 것이 많습니다.

1) 예수님은 어린이를 좋아하시고 복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른들은 오래 살면서 어린이들보다 죄를 더 졌기때문에 순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복받는 분량도 아이들만 못할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린이에게 주시는 복을 어른들이 나누어 받는다고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가 왜 이런자의 것일까요? 이 말씀은 어린아이들이 다 천국갈자란 뜻이 아니고,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본질적 요소가 천국백성의 본질적 요소와 같은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들면 진실성, 착한성품, 신뢰성, 순결성, 겸손등이 천국백성의 자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차례 “어린아이 같이되라”(마 18:3)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꼭 어린아이 같아져야 하겠습니다. 어른이 나타나면 여러가지로 긴장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어른이 어떤 악한 일을 할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살먹은 아이가 나타났다 할때에 무서워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와같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처럼 천국을 받들어야만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① 이 말씀에는 천국이나 어린아이를 다 받을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자식은 부탁하지 않아도 잘 받듭니다. 우리는 그만큼 천국생활도 받들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살피는 것처럼 꼭 신앙생활, 교회생활도 잘 살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천국을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못들어간다 하신 뜻이 무었입니까? 이 말씀은 천국진리를 수용할때 어린아이처럼 진실하고, 신뢰성있으며, 순결되도록(실천을 의미함)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이를 진실한 대상으로 보시고 신앙이 진실과 연결되어야만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결국 자녀양육을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1) 사무엘의 경우는 ① 어릴적부터 성전에 데려다가 성전에서 살게 했습니다. ② 제사장의 일을 돕게 했습니다. ③ 기도하게 하였고, ④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⑤ 또 부모의 각별한 기도와 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최초의 유명한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교회를 나가게 하고, 늘 기도하시고, 성경을 가르치셔야 할 것입니다.

2) 막 10:13~16의 경우에서는 ① 복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처럼 자녀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② 그리고 영혼과 천국과 하나님을 받드는 것처럼 자녀들을 교육적 차원에서 받들고 어린아이의 본성을 어른이 본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9과 예수님의 가족 (마 12:46~5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가족”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경에서 전도하실때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을 고하니까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하시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나의 가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가족관념을 한집에서 사는 혈연적 식구들에게 국한하시지 않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모든 사람을 가족의 공동체로 생각하셨고, 또 사랑의 실천도 그렇게 나타내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어느정도 혈연적 가족주의를 떠나서 교회가족을 자기가족처럼 생각한다든지 또는 예수님처럼 세계의 모든 성도를 자기가족처럼 생각하는 관념을 가진다면 가족적 이기주의를 억제하고 사랑대상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이기주의가 사랑실천의 장애가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족(하나님의 권속;엡 2:19)은 어떤 단체입니까?

1.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단체입니다(50절).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있고, 성경에는 성도가 실천할 계명이 있으며, 예수님의 생활은 그 모범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은 각자에게 표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거듭난 상태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단체입니다. 한집에 살아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고, 서로 떨어져 살아도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남을 받고(요일 3:9, 5:1), 그 믿음이 진실하여 영원한 천국까지 함께 가고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낳음을 받은자이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권속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3:10에서 “무릇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세계는 사랑이 실천되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만일 성도의 세계에 사람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자가 시험에 들었거나 아니면 외식하는 신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일 3:1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사람으로 사랑하셨는고?”하셨고, 또 요일 4:11에서는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셨으며, 또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제일 큰 사랑이라”(요 15: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모범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가 그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받았으며, 또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아 시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무조건적이요, ② 희생적이요, ③ 무한불변한 것입니다. 원수된 죄인, 또 사랑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진자들을 사랑하셨으니까 무조건적 사랑이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까 희생적이며, 또 그 사랑이 무한불변하여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2) 여기에 반하여 인간은 다분히 조건적이고, 타산적이며, 유한적이어서 희생적 사랑과 불변의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완벽한 사랑으로 끝내줄만한 힘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세계이어야만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닮은자를 생산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예수님 닮은자가 출생하고 그렇게 교육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사랑의 폭을 넓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성질과 실천 모범을 배우셨으며, 또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단체, 참 믿음 세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을 닮는 세계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성령님의 내주하심 (고전 3:16~17, 6:19~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내주”란 뜻은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 계시다는 뜻이고, 넓은 의미로는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듯입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성령님의 명칭에 대하여 ① 하나님의 영(사 61:1, 마 10:20), ② 예수님의 영(행 16:7, 롬 8:9, 갈 4:6, 벧전 1:11), ③ 진리의 영(요 14:17, 15:26), ④ 계시의 영(엡 1:17), ⑤ 지혜와 모략의 영(사 11:2, 엡 1:17;각주), ⑥ 능력의 영(욥 33:4, 행 1:8)이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확인하셔야 할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2. 이 성령님이 언제부터 인간들과 관계를 가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래 육에 속한 사람이나 이단자에게는 “성령이 없다”(고전 2:14, 유 19)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불신자나 이단자에게 성령님이 관계하시면 그들이 불신자나 이단자에 머물지 않고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1) 성령님이 사람에게 관계를 맺으시는 것은 성령님의 뜻에 의하여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없는자가 성령님의 내주를 원하여 되는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성령님이 계신것도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성령님이 사람에게 처음 내주하시는 것은 선택받은 백성을 거듭나게 하실때 처음으로 내주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 3:3과 엡 2:1에서 “거듭남의 은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이렇게 거듭나게 하실때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어떤 상태로 내주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령님이 어떤 상태로 내주하시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진리의 영, 지혜의 영, 능력의 영이라고 아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인격적인 영으로, 성경말씀으로(성경말씀이란 성경을 믿는 믿음과 지식을 뜻함), 또 말씀을 복종할 능력으로 내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성경의 지식과 지혜와 말씀실천의 능력이 나타나면 바로 성령님이 내주사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 성령님은 성도의 어느 부분에 내주하시는가?에 대하여 성경은 마음에 계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영이시니까 사람의 영적 실체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음에 계시다는 말씀과 몸에 계시다는 말씀과 전체적으로 함께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엡 3:17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하셨고, 또 약 1:21에서는 “마음에 심긴도”라고 하셨습니다.

2) 그리고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성도의 몸이 성령님의 전이라고 하셔습니다. 여기에 “성령님이 몸안에 계시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역시 몸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항상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창 28:15, 31:5, 46:4, 마 28:20등에서 말씀하셔습니다.

5.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방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할때

1) 타락으로 인하여 죽었던 영적생명을 다시 살려주시는 것이라 하셨고(요 3:3, 엡 2:1),

2) 하나님의 진리, 즉 성경말씀의 씨앗을 성도의 마음에 심어주시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 15:7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안에 거하는 것이라”하셨고, 약 1:21에서는 “도의 말씀이 마음에 심는 것이라”하셨고, 또 벧전 1:23에서는 “성도의 거듭난 것은 썩지 않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새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르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요일 3:9).

6. 그러면 이렇게 내주하신 성령님이 성도의 신앙나태로 다시 떠나실 수 있는가? 할때에 떠나시지 않는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백성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마 28:20에서 “예수님은 항상 성도와 함께 하신다”하셨고, 롬 8:9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고전 12:3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주를 주시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주하여 계신 성령님을 성도의 나태나 불순종으로 근심시키지 마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시키지 않아야만(엡 4:30, 살전 5:19) 더욱 큰 은혜에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제21과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27~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라”(31절)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7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낙망의 표현”이 나타나 있고, 28~30절에서는 “하나님 아는 지식의 필요”를 말씀하셨고, 31절에서는 “영적피곤의 해결책으로 하나님을 앙망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성도가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지 못하면 스스로 낙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상대로 불평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께까지 불평을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사정을 몰라주시고, 자기의 원통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기도를 왜면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가까이 하시고(시 107:9, 잠 8:17),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며(약 5:16),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요 9:31) 하셨으니, 기도응답이 안되게 하는 원인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이 더디거나 심령이 고갈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불평하며 실족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실족하고 불평하는 성도는 우선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호 4:6). 가룟유다도 그런 사람의 일종입니다. 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이

1)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고, 피곤하거나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무한하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만 알면 연약을 느끼는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와사증으로 고생하던 사람에게 누가 그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을 고치는 의사는 어느 시골에 사는 80난 노인이었습니다. 거기에 찾아가서 침을 맞는데, 한쪽으로 돌아간 입이 그 반대쪽으로 더 나가게 할 수도 있다고 하니, 그 기술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후 다른 사람이 또 찾아가려고 하니까 그 노인이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명철과 전능이 한이 없을뿐아니라,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한 문제를 항상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은 다 연약하고 실족해질 수 있습니다. 소년이건 장정이건 연약하지 않을 장사가 없습니다.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자빠질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정도에 차이가 있을뿐 다 연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앙망하기만 하면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마치 건전지를 충전하는 것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앙망하여 능력을 힘입으면 그 힘이 대단하여지는데 마치 독수리가 힘있게 창공을 날아 올라가는 것같을 것이요, 걸어가도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거나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신앙생활에 피곤을 느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할때 ①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 ② 하나님을 멀리하며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하는 사람, ③ 자기성격, 자기표준, 자기소원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 ④ 낙망, 불평, 원망을 잘하면서 교역자에게 기대를 걸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가 교회안에 상당수가 있어서 교역자에게 정신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3) 영혼의 피곤을 처방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피곤하면 질병, 과로, 영양부족 3가지를 놓고 진단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질병을 고치고, 과로를 피함과 동시에 적당하게 활동하고, 영양보충을 잘하면 육신건강이 회복되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을 앙망하는 방법은 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② 말씀따라 순종하며, ③ 영혼의 양식을 취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앙망한다”는 뜻은 “바라본다,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나 보이는 세계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하여 하나님 품안으로, 또 하나님 뜻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회개요, 매일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 이끌리기 위하여 말씀연구와 기도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 일만 잘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셔서 신앙생활을 피곤치 않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육신생활은 옛날에 나무때던 생활에서 기름때는 생활로 편리해졌고, 건강도 좋아져서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에 비례하여 영적생활도 크게 발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우리의 뒤떨어진 신앙생활과 피곤하여진 생활을 일으키기 위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앙망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2과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 (삼상 7:1~14) 목록으로


삼상4:, 5:, 6:에 보시면 블레셋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큰 곤경에 처한 기록이 있고, 본문 14절끝에 보시면 “전쟁에서의 회복과 평화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란 제목을 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할때 “법궤”를 앞세워 하였지만, 여전히 도움을 받지 못하고 패배한 것은(삼상 4:3~11)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하지 못하였고, 형식만 앞세워 복을 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과 그 신에게 벌을 내리시므로(삼상 5:1~9) 빼앗은 법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겼다가 그래도 재앙(독종으로 인한 죽음)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인 “벳세메스”로 보냈고, “벳세메스” 사람들이 함부로 그것을 들여다 보다가 또 많은 사람들이 죽게되어(6:19),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그것을 옮겨가도록 통지를 하였습니다.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 지경으로 옮겨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제사장으로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하였는데 그때에 그곳에서 20년을 머무르며 온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1~2절). 여기에서 “법궤를 안치하고 구별된 제사장이 그것을 지켰다”는 것은 신앙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생활도 정착이 있듯이 신앙생활도 말씀의 뿌리를 든든히 주고, 건전한 교파, 건전한 교회에 정착하여 그 생활이 정리될때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신앙과 생활의 터닦는 작업을 잘 하여 모든 평안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3~4절). 사무엘 선지자가 그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거든 ① 먼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가나안족의 여신, 바알은 남신)을 제하고, ②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③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하시니, 그대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인정 받는 신앙은 먼저 이방신과 이방인의 종교습관등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성도들 중에는 아직도 이방적 종교전통에 얽매여 이방종교의 관습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크게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3. 회개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5~6절). 그들은 사무엘의 지시에 따라 “미스바 광장에 모여서 물로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며 금식하고 자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생명처럼 귀한 것입니다(삼하 23:15). 그들이 물을 예물로 드린 것은 광야에서 물주신 은혜를 생각함이었고, 그 예물을 드리기 전에 피의제사(번제;16절)도 드렸을 것입니다. 합당한 제물(십자가의 중보)과 예물과 회개와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하나님은 이 제사와 기도를 받으시고 평화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사무엘 선지자의 지도를 잘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세운 사역자의 지도를 순종할때 그것이 곧 자기를 순종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그 백성들이 사무엘의 지도에 순종하였고, 6절에서 “그가 다스렸다”하셨으며, 다음 8:7에서 “사무엘의 지도를 떠나 왕을 구함은 곧 하나님을 버림이라”(출 16:8)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교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를 무시하고 자기들 주관대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사역자에게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의 지도를 받는 것이 복받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당시의 백성들도 늙은 사무엘의 지도를 받을때만 평화가 있었습니다.

5. 선지자의 기도에 힘입어 평화를 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기도한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또 침략을 했는데(17절), 이것이 곧 은혜로운 일이 있을때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백성들은 사무엘의 쉼없이 부르짖는 기도를 의뢰하였고(8절), 사무엘의 기도응답으로 우뢰를 발하여 블레셋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는 날동안 블레셋을 막아 주셨다”(13절)고 하셨습니다. 이 5가지 이 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화를 누렸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도 그와같은 방법으로 개인과 가정과 나라에 평화가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3과 바울사도의 빈 기도 (엡 3:14~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사도의 빈 기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1. 본문 14~15절은 기도에 대한 서론이고, 그 이하의 말씀은 기도의 내용인데 그 내용은 5가지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사도의 소원하는 기도내용을 참고하시고, 저희들도 그런 은혜에 이르기를 위하여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먼저 서론에 보시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능력이 절대적이어서 천국과 현실을 아울러 지배하시는 분이므로 기도응답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그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한 태도로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16절에서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께 돌릴 영광이 풍성하기를 위함이었고, 그 영광의 성취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요,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 영광이요,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이요, 기도응답의 성취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5가지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속사람이란 거듭난 심령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건강에 반대되는 영혼의 건강을 위한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려면 당연히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잘 섭취하여야 하겠지요. 밥 잘먹고, 일 잘하면 건강해 지듯이 성경말씀 위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살면 그 영혼이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기도는 사도요한께서도 하셨습니다(요삼 2절).

2)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마음에(믿음으로) 모셨다가 또 나가시게 한 모양입니다. 이 상태는 바로 성도가 주님 뜻대로 살다가 또 변하여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항상 살아계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왕노릇을 하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들 속에서 떠나시지 않고 왕노릇하시면 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사랑의 터전이 형성되는 신앙세계가 되게 해 달라고 비신 것입니다. 17절 중에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성도간에 불화가 있거나 교회안에 불평스런 일이 있는 교회는 이런 터전이 잘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거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사랑이 무르익고 흔들리지 않는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빈 것이요,

4)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넘치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적으로 깨닫되 모든 성도가 다 깨닫기를 빈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질상으로 분석한다면 ①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사랑하신 것은 넓은 사랑이요, ② 오래 참으시고 거듭 용서하시며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은 긴 사랑이요, ③ 독생자를 희생시키셔서 죄인들에게 자녀되는 권세까지 주신 것은 높은 사랑이요, ④ 인간고를 체휼하시고 영원히 중보해 주시는 사랑은 깊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성질과 분량을 잘 깨닫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하셨고,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충만하여 넘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이 5가지 제목을 기도의 과제로 삼으셔서 심령의 건강, 예수님의 내주, 사랑의 터전, 지식으로 깨닫는 그리스도의 사람, 모든 은혜의 충만등을 성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4과 성도의 생활의 덕 (빌 4:8~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보시면 “성도의 생활의 덕”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좋은 일을 할때도 7가지 원칙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나쁜 일을 할 수 없으며, 어리석은 말이나(엡 5:4), 악한 것은 생각지도 말라(고전 13:5)고 하셨으나, 선한 일은 사명으로 알고 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엡 2:10). 8절에 보시면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또는 “무슨 덕이 있든지(덕은 다른이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임)”, “무슨 기림이 있듣지(기림이란 자랑할만한 좋은 일을 의미함)” 이 7가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차를 운전하여 가다보면 시골의 외로운 길거리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을 봅니다. 이때 그 사람을 태워주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을 태워주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에게 덕을 베푸는 것인데 그것에 버스 영업자에게 손해를 주게 되고, 또 사고가 났을때는 보상해 주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을 듣고, 선한 일도 잘 살펴서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7가지 원칙이 무엇입니까?

1) 참되며 외식성이 없고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삶의 철학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의 약점이 노출되도 당연하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진실을 나타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경건해야 합니다. 이 경건이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취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장소나 어느 기회에 안 계실 수 있는 때가 없는만큼 밤이나 낮이나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바른자세를 흐트러 뜨리지 마셔야 합니다.

3)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법에 저촉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회법이나 교회법에 위반이 없게 행하여야 함을 뜻하고,

4) 정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심과 인륜의 법, 신앙의 법에 저촉되지 않아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좋은 일을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할만 하며”하셨으니, 이것은 매사에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여 책망해도 사람은 사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던 의인이던 사랑이 결핍해질때는 부작용이 나는 법이요, 악한 죄인이라도 사랑을 따라 행했을때는 손해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손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6) “칭찬할만 하며” 하셨습니다. 의롭게 한 일도 악인은 칭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도록 노력하여 성도로서 예수님의 명예를 더욱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7) 9절 말씀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스므로 사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생활을 할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곧 평안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와 바울을 본받지 봇하는 것이 혹 평안치 못한 원인이 될수도 있음을 생각하여 어려움 있을 때는 더욱 반성하고 회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10~14절에서는 복음사역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과 자족을 배우고 비천과 풍부에 처할줄 아는 비결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1)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해 주고, 협조하는 것은 바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요(14절), 또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빌 4:14,18). 본래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특별하게 섬겼습니다(빌 4:10, 15). 그러다가 바울의 옥중고역으로 중간에 소식이 끊어졌다가 다시 알게되어 로마감옥에까지 가서 봉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사역자를 돕는 것은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인즉 이것을 아는 성도는 항상 복음사역자의 편에 서서 기도와 봉사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2) 자족을 배우는 것입니다. 지옥 갈 죄인들이 받은 은혜는 한이 없고, 불충한 저희들이 받은 복도 분에 넘치는 줄을 아셔서 자족하며 감사하라고 하셨고,

3) 비천에 처할줄도 아는 것인데 주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죄인취급 받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여 항상 비천함과 겸손함을 자기의 생활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요,

4) 풍부와 가난에도 임의로 대처하는 비결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믿다가 부자될 수도 있고, 또 가난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해지신 분입니다(고후 8:9). 하나님은 이런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제25과 소경을 보게 하심 (요 9:35~4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소경을 보게 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1. 본문 앞부분에 보시면 나면서 소경되어 걸인노릇을 하는 사람을 예수님이 침뱉은 진흙을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여 보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인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고치신 것을 죄로 여겨 “죄인이 어떻게 능력을 행하겠느냐? 그는 하나님께로서 온자가 아니다”(요 9:16)라는등 변론을 하다가 그 부모에게 물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부모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내 아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고 말하지 못하고, “장성한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니까 또 눈뜬자에게 찾아와서 “누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눈뜬자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고,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며 경건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자를 들으시는데(시 34:15, 16) 창세이후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님뿐이니,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고야 어찌 그런 일을 하시겠느냐? 하니까 그들은 마땅치 않게 여겨 쫓아냈다고 했습니다(39절). 그후에 예수님이 그 눈뜬자를 만나서 “네가 인자(하나님의 아들)를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인자”란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한 말씀입니다. 그 눈뜬자가 “주여 그가 누구신지 내가 믿겠나이다”했을때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니라”하시니까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을 했으니 이것이 바로 두번째 심령의 눈을 뜨고 거듭난 상태를 나타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눈뜬 과정을 물었을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묻습니까?”하니까 그들이 욕을 하면서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7~28절)고 하면서 예수님을 거절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눈을 뜨지 못한 것이고, 소경은 눈을 두번 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바리새인들처럼 본다고 하는 자들(안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신다”하시므로 그들에게 영적 신령한 은혜가 닫혀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떠나서 “본다 하고 안다 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무지와 완고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저희들이 신령한 눈을 떴는지, 또는 신령한 눈이 얼마나 밝은지를 점검하셔야 하겠습니다.

1)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see)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2) 사람이 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니, 육체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지각의 눈으로 학문을 배우며, 영혼의 눈으로 신령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또 육체의 눈으로도 크고 작은 것을 보는 것처럼 심령의 눈도 여러가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눈으로 무엇을 보고 알아야 할 것입니까?

① 하나님의 존재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요 14:9, 벧전 1:8).

②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전 4:6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주셨다”하셨고, 엡 1:17에서는 “계시의 정신으로 마음의 눈을 밝히셨다”고 하셨습니다.

③ 자신의 부정(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부정을 못보면서 무엇을 안다고 하니까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 51:3에서 다윗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항상 내 죄가 내 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하셨고(딤전 1:15) 예수님은 “자기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마 7:4)고 하셨습니다.

④ 신령한 복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엡1:3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있다”하셨고, 또 18절에서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⑤ 불쌍한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전도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나(마 23:37), 전도의 대상을 추수할 알곡으로 보신 것(요 4:35)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령한 눈이 얼마나 밝아져 있습니까? 신령한 것을 밝히 보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6과 변화를 받자 (롬 12:1~2) 목록으로


1. 본문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다른 사람을 권면할때 자비한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면의 내용은

1)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영적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양으로 제물을 드렸지만 그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하셨고, 그대신 신약의 성도는 거룩한 몸(깨끗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산제사(자신을 헌신함)를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과 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몸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2)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풍속을 좇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2:2). 성도는 마땅히 세상풍속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만 따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로운 생활에 들어가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이 시간의 주제이며,

4)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발견할때는 언제나 신앙과 양심과 사랑의 바탕에서 성경을 근거로 찾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칫하면 양심과 사랑을 떠나 성경의 부분적 말씀에만 근거하여 주장하기 쉽고 또 때로는 성경을 떠난 상태에서 관행을 따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몸으로의 산제사(헌신), 세상풍속을 멀리함,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얼마나 변화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요, 마귀의 종이요, 죄에 머문자요, 심판을 받을 자요, 영원히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세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요, 죄사함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자녀된 자요, 영생할 자이니 그 신분의 가치로 볼때 비교될 수 없는 차이를 이루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차이가 이론과 지식으로만 주장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마음과 생활의 큰 변화가 일어나야만 할 것입니다.

1) 마음의 변화란 ① 가치관의 변화로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또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생활에 큰 가치관을 정립하고, ②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2) 생활의 변화란 ①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대의 풍속을 떠나서 ② 사도의 전통을 따르고, ③ 세상정욕을 멀리하며, ④ 오직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사명에 힘써 진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변화로운 생활이 밝은 빛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성령의 9가지 열매가 확실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산가는 기차를 탔으면 부산에 도착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만큼 그 믿음의 표시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깨달았을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 5:8)하므로 겸손과 회개의 자세를 아울러 나타냈고, 주께서 따르라 하실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눅 5:11) 이것이 곧 믿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또 바울사도는 롬 7:9에서 “진리(계명)를 몰랐을때는 자기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었다”고 하시면서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하시고 항상 자기 부정에 노력하셨습니다. 행 2:41에 보시면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하셨고, 바울은 개종되자마자 “주여 무엇을 하리잇가”(행 22:10)하고, 사명에 몸을 던졌으며 “루디아”는 세례를 받자마자 “나를 주 믿는자로 알거던 내 집에 와서 유하라”(행 16:15)하여 즉시 자기집을 선교의 근거지로 사용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전부 믿음과 함께 신앙의 인격과 생활과 사명에 큰 변화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생명있는 씨이면 싹이 나듯이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성장하고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음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7과 3가지 살필 일 (살전 3:17~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3가지 살필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시면 3가지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1.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몸은 떠나 있으나 마음은 떠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얼굴보기를 열정적으로 원하였다(17절) 하셨으니,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과의 사랑의 유대관계가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첫째로 살필 일은 우리는 교역자와 성도들간의 사랑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는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역자간에 서로 보고 싶고, 기도해 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 열정적으로 일어날때 말씀으로 주는 감화도 크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살펴보면 적은 수의 성도가 교역자를 열정적으로 사모하는 식구가 있는데, 꼭 거기에 비례해서 적은 수의 성도가 교역자를 비난하거나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성도들은 미온적이기는 하나 부정적 의사표시에도 미온적이기 때문에 유익도 손해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의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가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2. 바울사도가 한두번 데살로니가에 가기를 원하였으나 사단이 그 길을 막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행 17:에 보시면 바울사도의 데살로니가 전도기사가 나옵니다. 그때에 경건한 헬라의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 떼를 지어 바울을 핍박하여 뵈로아로 쫓은 일이 있었습니다(5, 10절). 이런 이유등으로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사모하는 식구들 사이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기회만 있으면 다시 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사탄이 막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막았을까요? 바울이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다니며(행 17:13) 핍박과 음모를 꾸며서 포기하도록 훼방을 놀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의 역사는 전도의 길을 막는 것뿐아니라, 성도의 사랑의 친교의 길을 막는 것도 역시 사탄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전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에 사탄이 막는 것을 감지하셨습니다. 우리도 전도와 사랑실천의 길을 막는 일에 사탄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마다 성도간의 불화가 많습니다. 왜 이런 불화가 일어나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이때에 사탄은 그 원인을 제공하는 일에 역사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성도는 그런 유혹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신령한 눈을 뜨고, 보이지 않는 마귀가 영적세계, 또는 정신적 세계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잘 살펴 그런 유혹을 힘있게 박차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사역자들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은 예수님 강림하실때 주 앞에 설 수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곧 복음 사역자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미술가의 좋은 작품이 그림으로 나타나고, 그 그림이 당선되면 그 영광이 미술가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바울사도는 자기의 전도와 목회의 결실로 얻어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했기 때문입니다. 살전 1:3을 보시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는 “복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하튼 그들은 바울사도가 보셨을때 칭찬스럽고 자랑스러운 교인들이었음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3번째로 살필 것은 “우리교회 성도들도 그만큼 자랑스러운 성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성도들이 많다고 느껴질때 그 교회는 부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7교회를 목회하던중 3교회는 성도간의 불화나 목회상 어려움이 없는 교회였고, 4교회는 문제를 갖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아무쪼록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간의 사랑의 유대를 돈독하게 하고 있는가?, 전도의 길, 사랑의 길을 막는 사탄의 역사를 감지하는가?, 복음사역자의 상급이 될 만한 교회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가?를 살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8과 사랑의 방도 (고전 13: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랑의 방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너무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잘 알려진 만큼 사랑이 실천되는가? 할때 그렇지 못한 실정인 것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씀과 생활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연구하면서 사랑의 방도와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사랑의 방도를 15가지로 표현하셨는데, 소극적인 표현(~~하지 말라)으로 8가지, 적극적 표현(~~하라)으로 7가지 입니다. 그리고 15가지중 8가지가 사람을 상대한 직접적인 방법이고, 7가지는 사건과 관련한 간접적인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인내, 온유하고, 투기, 자랑, 교만, 무례함과, 이지적 추구와, 성내지 않음”은 모두 사람을 상대한 것이고, “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경계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견디는 것”은 사건과 관련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은 “믿은 안에서 사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엡 6:1). 여기에서 개인상대방을 사랑하는 일과, 그 개인(상대방)이 저지르고 있는 불의한 일과 결부된 상태에0서 직접 사랑을 실천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사람을 직접 대할때,

① 오래 참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대화나 친교를 하는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나타나고 그것을 금방 속단하거나 지적하여 대응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더 알기까지 살피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 무슨 동기가 있는가? 본성이 저런가?”를 잘 살피고 기다려서 맨 나중에 적절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유익한 것입니다.

② 온유로 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온유로 대하다가도 나중에 문제가 쌓이면 성을 내는 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마지막 태도에서 성내지 말아야 할것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대화자세는 처음이나 끝이나 온유불변하여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③ 투기가 없어야 합니다. 투기란 것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 될때 그것을 부당하게 여기거나 불평하는 태도인데, 성경에는 “나중된 자가 먼저 잘 되는 경우도 있다”하셨으니까, 의당하게 생각하고 성원하는 자세를 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④ 자기자랑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견제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삼가야 하고,

⑤ 교만이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된 척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합을 깨치는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며,

⑥ 무례한 태도, 즉 예절이나 규모나 질서를 지키지 않는 태도가 자주 나타날때는 대인관계의 융화를 깨치게 되며,

⑦ 자기유익을 구하는 이기주의, 욕심도 사랑실천에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을 대하연지 이상의 7가지 사랑의 방도를 잘 지키면 화목이 충만하며, 누구와도 친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2) 사랑해야 할 대상과 사건이 결부되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사랑해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칭찬할 수 없고, 협력할 수도 없는 경우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상대할때 신앙과 정의와 신뢰와 인내가 동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정의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은 신앙이며, “모든 것을 믿으며”하신 것은 상대방은 신뢰하고 소망스럽게 여겨주는 것이요, “참고 견디는 것”은 인내하는 것인데, 이런 요소를 가지고 문제있는 사람을 지혜롭게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의 악한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든지 진리와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믿어주며, 참아주고, 견뎌주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의 방도는 신앙과 정의 안에서 인내와 온유등 8가지 태도를 취하는 것이고, 사랑의 목표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나 원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세로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제29과 거듭난자의 생활 (골 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거듭난자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거듭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바로 거듭난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씀은 요3:3에서 주신 말씀인데, 짧은 말로 “중생”(딛 3:5),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요일 3:9)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나셨을까요?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던 “니고데모”는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였다가 미련한자란 책망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영적생명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자 속에 주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엡 2:1). 다시 말하면 영적생명이 없는자에게 그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인데, 이 사실은 복음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 싹이 나듯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요, 또 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교리”가 들어있는 것이어서 이 복음을 받을때 믿음으로 자기를 예수님과 연합을 시키고 예수님의 죽음심에 자신의 옛사람을 포함시키고 또 예수님의 부활에 자신의 변화된 인격을 포함시켜서 명실공히 변화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본문 앞장인 골 2:12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너희가 세례받음과 함께 너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었고, 또 죽은자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씨와 성령님이 내주하심은 거듭남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고, 자신의 옛정욕을 죽이고 부활의 주님으로 바꿈을 맞는 것은 거듭난자의 실제적 상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자는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고, 부활하신 주님의 상태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2. 거듭난 성도가 어떤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1) 본문에 보시면 1절에서 “위엣 것을 찾으라”하셨고, 2절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라”하셨고, 4절 끝에서는 “영광중에 나타날 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찾고, 생각하고,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위엣 것이 무엇입니까? 위엣 것은 두가지를 말씀하셨는데 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고, ② 예수님이 재림하실때 영광중에 나타나는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는 항상 예수님을 찾고 생각해야 하며, 또 자신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여, 예수님이 영광중에 나타나실때 자신도 칭찬과 상을 받을자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경기한 선수가 경쟁자를 이기지 못하면 감히 상급의 자리를 넘겨다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승리를 쟁취했다면 시상대에 올라가서 상 받을 것을 소망하는 것처럼 그듭난 성도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또 하늘에서 상급받을 것을 사모하여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땅엣 것만 생각하고, 자기의 생명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있는줄 알아서 자율적으로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니까 땅엣 것을 소망하지 않게되며, 또 자신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자기의 새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결코 자기의 생명과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성도는 자신의 옛사람이 죽은 것과(골 2:20, 롬 6:2)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다시 산 것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빌 1:21). ② 땅엣 것을 생각하거나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갈5:19~21에 보시면 육체에 속한 저속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과 그가 심판하시는 날에 내가 칭찬과 상 받을 수 있는 일들만을 생각하고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30과 하나님의 사자의 외침 (삿 2: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사자의 외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광야 40년 생활을 인도한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후 각 지파별로 기업을 나눠주고, 본토족을 점령하는 전쟁을 하다가 다 점령하지 못한태 세상을 떠났습니다(삿 1:1).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도 여러 지파들이 자기 지파의 땅을 확장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지만 전쟁하는 사이에 믿음도 떨어지고 용기도 떨어져서 여호수아 생존당시의 신앙을 다 저버린 상태에 있었는데, 이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된 것입니다. 신앙이 침체된 백성은 꼭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외친 말씀을 살펴보면,

1. “내가 너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야곱의 12아들들의 후손들로서 430년동안이나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유를 누리를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조상때에 애굽에서 해방된 은혜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영적으로 비유하면 우리가 마귀의 속박에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복의 전체입니다. 저희들은 이 믿음 갖게 된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인도하여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을 계속 인도하신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대적의 침략에서 보호하셨고, 홍해를 가르신 이적과 만나, 메추라기, 반적의 물을 먹이시는 이적과 의복과 신이 닳지 않으며, 발이 부릇지 않는 이적으로 40년간을 광야에서 인도해 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오늘의 성도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인도자란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 48:17에 보시면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 하나님의 인도를 감사하면서 자기의 길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시 37:5).

3.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조에게 맹세한 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하고, 이 땅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실 것을 약속한 땅이었습니다(창 13:15). 하나님은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약600년만에 주신 것입니다. 600년이란 계산은 40년간 광야생활을 하였고, 430년간 애굽에 노예로 체재하였으며,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때부터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120세에 애굽으로 갈때까지 약150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영적으로 비유할때 성도에게 내세천국을 약속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계 21:2). 우리는 이 약속을 믿음으로 소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자는 그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①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을 어겼고, ②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제단을 헐라고 하셨는데 역시 실천하지 못했으며, ③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이방적 생활을 하여서는 안되고, 오직 말씀대로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가 “대적의 백성들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대적을 물리쳐 주시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하나님이 버려두신다하시니, 그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을때 심히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평안하게 살고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 말씀을 청종하는 것뿐임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31과 대적을 당하지 못함 (수 2:6~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대적을 당하지 못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은 가나안족들이었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더 많이 차지하려면 그곳 본토족을 쳐부셔야만 했는데, 그들이 자기들보다 강성하여 그들을 당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시고, 그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기 때문이며,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괴로움을 심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이 말씀을 다시 요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은 가나안 족이요, 그들을 쳐부셔야만 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려 괴롭게 하시니 강해질 수 없고, 대적의 손에 붙여서 노략을 당하게 하시기 때문에 대적을 당하지 못한채 괴로움만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백성들이 열조의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좇아 섬겼기 때문입니다(12절).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1. 우리들에게도 대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엡 6:12)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죄를 짓게 되고, 영적 괴로움에 빠지게 되며, 하나님이 멀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대적과 싸워 이기려면 바른 신앙을 갖고(바른 성경지식), 기도로 경성하며, 하나님과 의 사이에 한치도 멀어짐이 없이 생활하고, 늘 말씀에 붙잡히는 생활을 잘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13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버린 연고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권고하지 않으셨고,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약해져서 대적의 침략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또 11절 이하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하셨고, 그 악이 바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신 곧 이방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저희들은 우리의 신앙이 삐뚤게 나가지 않나?를 항상 조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섬기는 가?” 할때 하나님이 절대자시요, 나의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이시기 때문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는 자기형편이 어떻게 어려워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되고, 또 하나님만을 제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물론 자기의 빈천이나 질병이나 심지어는 죽음까지라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현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도 많이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마 6:24).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신을 섬긴 일이겠습니까?

2) 지금 저희들이 교회에 나가고 예배를 드린다 하여 하나님만 잘 섬기는 줄로 아시면 안됩니다. 순금같은 신앙인지, 아니면 불순물이 섞인 신앙인지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순금같은 신앙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만 하는 신앙이고, 불순물이 섞인 신앙은 하나님도 찾으면서 자기도 내세우고, 자기욕망도 내세우고, 물질, 명예, 건강, 장수, 현실의 복을 다 함께 추구하는 신앙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물도 키우시고 이방인도 키우십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나님 뜻대로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4. 본문 7절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사는 날동안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하였고, 10절에서는 “그후에 일어난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하셨으니, “지도자의 영향이 크다”는 것과 신앙전통을 후세대에 계승시켜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도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금같은 신앙의 성도가 많아야만 하나님이 대적을 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대적들도 우리가 좋은 신앙을 가질때 하나님이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제32과 요긴한 사람들 (눅 12:32~34) 목록으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목적에서 볼때는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를 원하고, 자기는 많은 사람들 중에 속한 한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되지만, 성경을 다른 방면으로 고찰해 보시면 “좁은 길, 협착한 길”로 가라는 말씀도 있고(마 7:13~14),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적은 무리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안심 시켜주심)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시므로 칭찬과 위안과 영생을 아울러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이 말씀의 적은 무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1) 눅 12:1에 보시면 무리 수만명이 따른 것을 보아서 수만명 중에 기드온의 300명처럼 선발된 사람들이요,

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 문제나, 내일 일을 열려하지 않고 열심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들임이 바로 앞부분의 말씀(27~31절)으로 알 수 있으며,

3) 33절에서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하고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 즉 천국의 상급을 예비하는 자들이며,

4)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는 사람들(34절, 마 6:24)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주는 복(요일 1:15~16)을 누리면서 또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중에 적은 무리들은 물질에 의존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청빈하게 살면서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현세욕에 사로잡힘이 없이 공중의 새처럼 하나님의 특별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 적은 무리에 속하였을 것입니다.

욥도 이런 생활을 장려하여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면 하나님이 그에게 은금이 되어 주실 것이라”(욥 22:24~25, 마 6:32~33)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소수의 신앙인들을 위하여 기뻐하셨듯이 성경에도 적은 수의 사람들이 요긴한 역할을 한 사실이 많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살펴보시면 “나도 다수에 속하는 무의미한 사람되지 말고, 소수에 속하는 요긴한 사람이 되어 보았으면”하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1) 우선 노아의 가족 8식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인류초기에 1000년 가까이 살면서 노아 600세까지 약1000년 세월이 흘렀으니, 그당시 인구가 퍽 많았겠지만 하나님은 8명만 살리시고 다 멸절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 8명이 요긴한 인류시조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겨우 8명뿐이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3:20).

2) 하나님은 많은 인류중에 아브라함 한사람만 선택하여 선민의 조상을 삼으셨고(창 12:1~2), 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실때는 “모세” 한사람만 특별하게 쓰셨습니다(민 12:2, 3, 8). 하나님은 이렇게 한사람을 드셔서 요긴하게 쓰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3) 또 창 18:32에 보시면 “의인 10사람을 인하여서라도 그 성(소돔)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하셨으니, 한나라의 흥망이 의인 10사람에게 달렸음도 알 수 있고,

4) 여호수아나 사무엘이나 엘리야나 엘리사가 나라의 간성이 된 것을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① 삿 7:2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산 동안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겼다”하셨고,

② 삼상 7:13에서는 사무엘 선지자가 계시므로 “블레셋을 막고, 뺏긴 성읍을 다시 찾았으며, 그 땅에 평화가 있었다”하셨고,

③ 왕하 2:12(왕상 20:13, 22)에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하였고,

④ 왕하 13:14(6:18)에서는 엘리사가 아람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물리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 한사람이 나라의 국방을 좌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5) 구약 요나서에 보시면 “요나” 한사람이 앗수르 도성 “니누웨”에 가서 회개하도록 일깨워주므로 그 도성이 용서를 받고 멸망을 면한 일이나, 신약시대의 행8:39에서 “에디오피아 내시” 한사람이 세례를 받고 아프리카 지역을 복음화 시키는 효시역할을 하였고, 또 예수님 당시만해도 복음의 주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때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린 사람은 세례요한 한사람뿐이었으며(요 1:31), 예수님의 복음이 12제자와 7집사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이방지역에 전도되었고, 특히 소아시아 헬라, 로마의 전도는 바울을 중심한 몇몇 사람의 전도로 이루어진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로 갈때 그는 죄수 신분이었지만 전도자로 간 것이었고, 풍랑을 만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하나님이 바울을 살리시기 위하여 같이 탄 276명의 생명도 함께 살리셨고(행 27:24), 에스더, 므르드개는 동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한 사람들입니다(에 4:16). 저희들은 어떤 입장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요긴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3과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눅 12:13~21) 목록으로


어떤 부모가 자식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장자가 부모의 재산을 점유하고, 동생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니까, 동생이 그 유업을 나누어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데 그 형이 너그럽지 못한 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

1.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부탁한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1) 예수님을 잘못 알았다는 뜻이요,

2) 예수님은 재판장이나 유산을 나누어 주는 자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에도 재판이나 물질관리는 사회에서 다 하고 있으며,

3)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① 하나님을 계시히시고, ② 선민을 구원하시며, ③ 선민된 자의 삶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아셔야 합니다.

2.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무리에게 하셨지만 유산을 나누어 받기를 청원한 자의 소원을 거절하시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형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 받으려는 것도 탐심에 속한다는 뜻이므로 성도는 일체 부모나 형제의 것이라도 겨져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하셨으므로 물질, 명예등 현세욕에 대한 탐심을 다 없애야 할 것입니다.

3. “사람의 생명이 물질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의존하되 물질이 자기의 건강과 장수를 확보해 주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건강과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물질이 주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본문 22절 이하에서 까마귀와 백합화, 또 하루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24, 27, 28절)을 키우시는 것을 생각하여 인간의 의식주 문제가 꼭 물질탐심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공중에 나는 새처럼 살 수 있다면 퍽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4.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이 협소할 것을 염려하여 곡간을 늘리고 자기의 소유를 그곳에 쌓고 자기의 영혼에게 스스로 말하기를 “재물이 많으니(여러해 쓸 물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리라”하였는데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아갈때에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말씀의 취지가 무엇입니까?

1)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말씀이요,

2) 물질이 많아도 물질은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요,

3)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고,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치 못한 자도 소출이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었으니, 재물을 갖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을 사랑한 덕으로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뿐아니라, 가난한 것이 다 믿음없는 탓도 아니란 것을 알게 하심이요(눅 16:19~23),

4) 또 인간이 생애의 상당 부분을 자기 뜻대로 성취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심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소출이 풍성해진 것이나, 곡간을 확장한 것이나, 그 곡간에 여러해 쓸 물건을 비축한 것은 다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자기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권은 양보하시지 않았습니다.

5) 17~19절에 보시면 “내가(자기주관) 내 곡간, 내 모든 곡식, 내 영혼에게”한 말은 모두가 자기중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결코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즉시(오늘밤) 취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6)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는 재물을 쌓아두나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는 이와같다”하셨으니, 여기의 “이와같다”는 뜻이 “어리석기만 하다”는 뜻인지, “영혼을 불러가시므로 재물을 누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인지에 대하여는 각자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② 부모나 형제의 재산에도 탐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③ 물질이 생명을 단축하기는 쉬워도 연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④ 인간계획의 상당 부분을 하나님이 허용하시지만, 생명에 관한 것은 하나님만이 취급하시며, ⑤ 나, 내것, 내 계획, 내 인생하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말것과, ⑥ 자기만 위하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처럼 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34과 기도자세에 대한 반성 (마 6:5~8)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기도자의 자세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저희들 나름대로 반성하고 시정해야 좋겠다는 과제가 생깁니다.

1. 예수님은 기도자가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1)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외식적인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만 들으시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혹 자기의 기도를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저희)은 자기의 기도하는 것을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사거리 길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자임을 사람 앞에 자랑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기도자가 기도 많이 하는 공로자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할때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인간 중심의 기도로 통제를 받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기도를 잘 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2) 외식하는 기도는 마음에 간직된 믿음이나 간절함의 정성이나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기도하는 모양)에만 치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하나님께 진실을 고하므로 외식을 방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외식적 기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골방기도는 사람이 안보는 곳에서 하는 기도이니까, 자연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양심적 기도를 잘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기도의 내용도 응답하실뿐 아니라, 기도를 힘쓴 노력에 대하여서도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합동으로 기도하는 것은 합심협력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있는 성도가 합심기도에 자주 빠지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있는대로 합심기도를 잘 하시면서 자유기도, 개인기도, 골방기도를 쉬지 않고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차를 타고 여행하는 시간도 기도에 선용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란 기독신자 아닌 사람들이 이방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인격적인 신이 아닌 우상을 상대로 기도하기 때문에 말을 되는대로 중복되게 나타내고, 또 말을 많이 하여야 듣는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 규모의 하나님,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이나 뜻의 표현도 인격자답게 나타내셔야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마치 자녀를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기도의 목적에 따라 취지만 부탁드려도 얼마든지 들어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기도에 관한 몇가지 주의사항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① 합심기도에서도 자신의 열성적 기도를 적당하게 나타내시고, 특히 개인기도, 골방기도를 힘써야 할 것이요, ② 하나님만 상대하여 진실하고 간절하게 하시고, ③ 기도의 내용을 되도록이면 이론적이고, 합리적 내용이 되도록 연구, 노력하여야 하며, ④ 시간이 많을 때는 세밀한 내용으로 아뢸수 있지만 바쁜 시간에 기도하실 때는 취지만 아뢰어도 들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⑤ 한가지 더 부언할 것은 과격하게 인도하는 합심기도회때 지나치게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고역을 치를때(출 3:7), 애굽군의 추격이 있을때(출 14:10), 또는 대적의 침략으로 살생이 심할때(삿 2:18, 3:15, 6:7)등에서 그런 기도를 한듯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일로 그렇게 부르짖을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죄악이 중하고 탄식하는 의미로 간절하게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도 규모있고, 덕스럽게 하는 방법을 따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래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35과 왕될때의 사울 (삼상 9:1~10) 목록으로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주전 1050년경부터 40년간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높아지기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는 지혜가 없습니다. 높이고, 낮추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삼상 2:7),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벧전 5:5).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울이 왕될때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는 유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도나 직분자들도 물론 유력하다는 소문이 나고 그런 인정을 받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유력한 성도, 유력한 제직, 유력한 사역자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사울은 근본이 뚜렷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아비엘의 아들, 스롤의 손자, 베고랏의 증손, 아비아의 현손, 벤야민 지파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족보를 나타내신 것이지만, 왕의 자격자를 논함에 있어 신분이 뚜렷하고, 그가 자라난 교육적 바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선망의 대상이 되려면 좋은 바탕, 좋은 교회, 좋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저희들은 신앙의 전통을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사울은 자기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명하는 암나귀를 찾기 위하여 사환을 데리고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땅등 동서남북을 헤매며 다닌 것을 보면(3, 4절) 자기생활에 충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의 일에 가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남의 말을 많이 하고 남을 잘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그만큼 등한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사울은 효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암나귀를 찾아 여러날을 헤매다가 그는 문득 부친이 암나귀는 고하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염려할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5절). 다시 말하면 부모를 걱정시키는 자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또 이웃을 근심시키는 성도가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때문에 부모나 이웃이 걱정을 하게 된다면, 이런 일을 크게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왕될 당시에 효도는 물론 이웃에 근심을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습니다.

5.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할 줄 알고, 사모하며, 또 섬길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귀를 못 찾은채 부친이 염려할 것을 걱정하던차,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자고 제의했습니다. 이때 사울은 사환의 제안일망정 무시하지 않고 따랐으며 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예물이 없이 어찌 갈 수 있느냐? 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는 예절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에게 문의하고 지도를 받는 사람이 될지언정 성경의 지도를 무시하고 자기 정욕대로 시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6. 겸손하였습니다. 삼상 9:20~21에 보시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라고 하였을때 “자신은 지극히 작은자”라고 겸손의 표현을 하였으며, 또 10:20~22에서는 직접 제비를 뽑아 왕을 세우려 할때도 그 자리를 피하여 “행구하시에 숨었다”고 하였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사람을 찾아내어 왕으로 높여주신 것입니다.

7. 사울은 왕이 되자 성령의 충만을 힘입고, 전쟁에 승리를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암몬족의 침략이 있었고(11:1), 백성들의 통곡이 있었는데, 성령이 그에게 충만해지면서 하나님의 두려움이 백성들에게 임하여(11:6, 7) 전쟁에 승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백성의 두려워함과 단결과 승리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8. 또 그당시 사울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자기의 왕됨을 반대한 무리들에 대하여 불평하지도 않았고, 보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10:27, 11:12~13).

결론적으로 사울의 왕될 당시 8가지 조건을 모든 성도들이 항상 보유할때 하나님이 그 성도도 높여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36과 죄 많은 여인의 봉사 (눅 7:36~5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 많은 여인의 봉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는 “그 동리의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셨으나, 그 동리에서 죄인의 취급을 받는 여자라면 보통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또 본문 43절에 보시면 “많은 빚(50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자가 주인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것이라”하셨는데 이 말씀도 그 여인에게 비유적으로 해당되게 하신 말씀이고, 또 47절에서도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하셨으니까 죄인인 한 여자를 죄 많은 여자로 표현한데는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무슨 죄를 많이 졌을까? 하는 것인데, 흔히 여인의 범죄라면 음행을 예측하는 경우가 있지만(요 8:3) 죄명을 밝히시지 않았으므로 그것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1.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초기에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이고(눅 7:1),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제자들과 함께(40절;시몬) 식탁에 앉으셨을때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1) 그때 그 동리에 사는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이 계신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당시 유대사회에는 남녀의 격차(마 14:21), 바리새인과 평민의 격차, 또 평민과 죄인의 격차가 심하여 그런 격차를 가진 중에서 자리를 함께 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시 1:1). 그러나 그 여인은 모든 장벽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 집에 뛰어들었으니 큰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하거나 예수님께 봉사하려는 사람은 여러가지 난관을 무릅쓰고라도 주님께 가까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죄인의 장벽, 여인의 장벽, 바리새인의 장벽, 그리고 불청객의 장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예수님 뒤에 와서 눈물과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거기에 입을 맞추고 준비해 온 향유를 부었으니, 여기에 담겨진 의미를 분석해 보면 ① 뒤로 온 것은 겸손이요, ② 눈물은 회개와 함께 마음의 정성이요, ③ 머리털은 몸의 헌신이요, ④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필요한 일에 봉사함이요, 특히 겸손한 봉사요, ⑤ 그 발에 입을 맞춘 것은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의 사랑이란 남녀간의 애정적 사랑이 아니고, 죄인이 구세주를 사랑하는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봉사를 잘 하시려면 이렇게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가까이 나간다는 뜻은 믿음을 키운다는 뜻과 그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 기도의 영교를 많이 가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정성, 회개의 눈물, 몸으로의 헌신, 아낌없는 물질봉사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그 여인이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죄사함 받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본문의 결론에서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47절에 보시면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셨고, 또 50절에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 있는줄 알았으나 믿음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도덕적 사랑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믿음이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여인은 예수님의 구세주되심을 평소부터 알고 사모해 오다가 기회를 만나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마 9:12)는 예수님의 목적에 맞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이 여인은 예수님께 봉사하러 왔다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봉사를 많이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복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② 그리고 이 여인이 봉사와 헌신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겸손이나 인내나 봉사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겸손과 인내와 봉사와 때로는 희생까지도 나타내는 것입니다. ③ 사랑에는 물질봉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도, 눈물도, 감람유도, 입맞춤도 없는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고(44~46절), 오히려 예수님을 거짓선지자로 인정하려고 하였습니다(39절). 그러나 이 여인의 봉사는 물심육을 포함한 봉사로 큰 칭찬과 은혜를 받았으니 저희들도 잘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말씀에 떠는자를 권고하심 (사 66:1~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 신앙생활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형식적이 아니려면 자기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앞에 떠는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자기의 길을 걷지 아니하려면 신앙생활 시작부터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가난한 마음(빈 마음)을 갖고 이기적인 현세의 정욕을 떠나서 주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르려고 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떤다는 것은 성경말씀으로 자신의 죄를 지적하셨을때 두려운 마음으로 급히 회개하고 돌이킬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고, 자기의 욕심을 버리며, 최대한 성경에 일치되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권고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권고”란 뜻은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그러면 그당시의 백성들이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성전권위에 의존하고 제사의식과 제물에 의존하였기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웅장한 성전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또 그 성전을 자기들의 조상이 지어준 자기들의 복된 소유물처럼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은혜를 주셔서 짓게된 하나님의 것이요, 또 하나님이 거주하실 장소가 없어서 사람이 그것을 지어 드리게 된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라 사람처럼 일정한 처소에 계신 것이 아니고, 하늘을 보좌로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며 우주에 충만하도록 좌정하시는 분인데, 어찌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하실 처소를 지어드릴 수 있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을 자신의 공로로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2) 제사와 예물과 분향 드리는 의식이 복이 되는 줄로 안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각종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를 크게 3가지로 나누면 속죄제와 감사예물과 분향(기도)이었습니다. 속죄제를 위한 제물은 번제(불태워드림)를 드리는 것으로 재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드렸고, 감사의 예물도 역시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으며, 분향은 사람의 정성과 소원을 받으시게 하는 기도와 같은 것인데 이 제물들이 다 신앙과 정성을 동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른 정신과 생활을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물의 형식과 분량만 있다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악한자들의 형식적 제사는 하나님이 가장 역겹게 여기시는 살인죄나 부정한 제사나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그들이 어떤 자세로 제사를 드렸어야 합니까?

1) 가난한 마음을 갖고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 5:3의 심령의 가난을 뜻하고, 심령의 가난이란 바로 자기를 부정하는 마음이요, 어린아이같은 순진한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가난한 마음을 갖지 못한채 자기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욕심과 고집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2)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며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도 연약한 죄인이라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늘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은 자신이라 하여 죄를 전혀 안 짓게 되는 것이 아닌만큼 늘 겸손과 통회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요,

3)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여겨 떠는 자를 하나님이 권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지 않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3. 그러면 이렇게 듣지 않고, 완고하며, 떨지 않고, 자기의 길만 걸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을 택하는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할때 유혹에 내버려두시고(4절) 권고하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내버려두어 벌받게 하신다는 말씀을 살후 2:11~12과 롬 1:24~28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권고와 징계를 받는자는 복이 있지만 버림을 당하는 것은 저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자기중심과 자기 의를 버리고 겸손과 통회와 두려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38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 (행 10: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부흥회를 앞두고) 하나님이 어떤 성도에게 은혜를 더 많이 주실 것인가?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은혜 주신 사례들을 살피면서 은혜 받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1. 저희들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찬송하며 손뼉치며 주여, 주여하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마 7:7)고 하셨으니까 당연히 열심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뼉치는 찬송은 시 47:1에 근거하여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 될지언정 박수치는 것이 은혜 받는 방법인줄로 아셔서는 안되며, “주여 주여”하는 기도 속에도 반드시 주님의 뜻을 앞세우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7:22). 출 33:19에 보시면 “하나님은 은혜 받을만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힘입을만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꼭 은혜를 받을만한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성경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은헤를 받았습니까?

1) 엘리사는 선배스승인 엘리야를 열심히 따르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엘리야가 승천하게 될 무렵에 엘리사를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미리 알고, 갑절의 영감을 받기 전에는 엘리야를 떠나지 않을 것으로 결심하고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따라가서 결국 에리야의 승천을 목격하고(왕하 2:1~14)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열심히 따르고 구하여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2) 오순절 당시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이미 성령보내실 것을 약속 하셨지만 그당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①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② 한자리에 모여서, ③ 마음을 같이하여, ④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받았습니다(행 1:4~5, 12~14, 2:1~4). 따라서 오순절의 성령충만은 합심기도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행 8:26~39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①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었고, ②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었고, ③ 또 성경을 깨달으려고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사마리아에서 일하는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셔서 그에게 성경을 가르쳐 깨닫게 하는 은혜를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 개인의 경건을 눈여겨 보시고, 그가 은혜를 받아야 할만한 자인고로 은혜의 길을 여셔서 깨달음과 세례와 구원을 전달해 주신 것입니다.

4) 그러면 이 시간 본문의 주인공인 “고넬료”는 어떻게 은혜를 받았습니까? 고넬료는 평소의 신앙생활이 경건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백부장의 지위를 가진 이방인이었지만 ① 온 집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고, ②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고, ③ 항상 기도생활을 힘썼는데,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것을 작정하시고, 천사를 보내어 그 뜻을 저하시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오게 하여 말씀을 전달하게 하셨을때에 고넬료는 은혜를 사모하여 이웃을 청하고, 베드로의 증언하는 마릈ㅁ을 열심히 듣는 중에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은 고넬료의 가족이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안하고 강팍하기만 했으나 바울이 변화받고 은혜 받은 것처럼 하나님편에서 강권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킨 사례도 있는 것입니다(행 9:1~9). 저희들도 이런 여러가지 형편중 하나를 통해서 꼭 은혜 받는 기회가 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여야 은혜를 받겠습니까? 하면서 성경에 은혜 받은 사례를 따라 열심히 노력하며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9과 지혜로운 생활 (엡 5:15~2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 15절을 보시면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하셨으므로 일단 제목을 “지혜로운 생활”이라고 정한다음에 그 다음절을 살펴보시면 지혜로운 자의 생활이 소개된 것을 알 수 있으니 세월을 아끼는 것이요,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요,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21절은 성령충만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지혜로운 생활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시간과 생명은 꼭 같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가 없으면 자기의 일생을 그만큼 후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일까요?

1) 근면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허용하는 한 되도록이면 휴식하고 노는 시간을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2) 가장 보람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여러가지 책임과 재능이 있습니다. 그중에 내가 어느 것을 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겠는가를 생각하여 같은 시간에 비중있는 일을 시행하므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3)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가급적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오나 실수는 그만큼 전진을 더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때가 악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좋은 시간을 바르게 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4)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세월도 아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일을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항상 어느때 끝날지 모르는 자기인생의 종말을 예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생활은) 주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성경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저희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주님의 뜻인줄 알고, 또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기뻐하시는 일인줄로 착각하고 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롬 10:2에 보시면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니 이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생활속에는 인간의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예가 있다는 것을 유의하여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몇가지 발췌해 본다면 ①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롬 11:36, 고전 10:31), ② 성도가 거룩하여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롬 8:29), ③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마 6:33), ④ 매사를 하나님 주권대로 시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욥 23:13), ⑤ 택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죄인들은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1) 성령에 충만하려면 술취하거나 방탕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과 방탕이란 경건에 반대되는 말로서 이 세상의 세속을 좋아하는 근성입니다. 성도가 세속에 가까우면 성령충만의 은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성령에 충만하려면 ① 회개하는 생활을 힘쓰고, ②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행 2:38). ③ 말씀, 기도, 순종, 사명생활, 그리고 겸손을 유지할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본문에 보시면 ① 기쁨의 찬송이 나오고, ②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가 나오고, ③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에 복종하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기쁨, 감사, 겸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④ 또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맺게 될 것이요(갈 5:22, 23), ⑤ 말씀과 기도에 끌리고, 성수주일과 예배에 끌리고, 충성에 끌리고, 사랑에 끌리고, 양심에 끌릴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생활을 하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0과 성경의 의미 (삼상 3:15~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의 의미” 10가지를 증언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사상이요, 인격이요, 능력입니다. 형상이 없는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내용만 있으신 분입니다. 그 존재와 내용을 사람에게 부분적으로 계시해 주신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도가 성경의 의미를 바로 이해 못하거나 성경과의 관계를 바르게 수립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헛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의미를 아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의 의미는

1. 하나님 자신의 임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으로 존재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시는 방법이란 뜻입니다. 본문 21절에서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니”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하나님 말씀)을 대할때 반드시 하나님을 대함인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임재가 있었다”는 증거나 상징이 아니고, 그 실상이란 사실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1:1, 창 28:15~17).

2. 영혼의 양식입니다. 마음의 양식이란 뜻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떡이요, 영혼의 양식은 말씀입니다(마 4:4).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양식을 갈망하였으며, 말씀을 먹고 마음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렘 15:16). 성도는 이 말씀을 꿀보다 더 달게 여기며 매일 묵상해야 합니다(시 119:97, 103).

3. 믿음의 근거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진리의 말씀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도 성경을 통해서 믿고, 성경이 있기 때문에 알고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참)라 하셨고, 따라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7:8, 17).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궁극적으로 믿을 것이 없습니다.

4. 구원의 지침입니다. 구원받는 방도를 알려 주심이란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하셨고, 또 “성경이 구원 받는 지혜를 알게 하신다”(딤후 3:15)고 하셨습니다. 현재는 아무도 2000년전에 골고다의 십자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아는 것은 성경에 근거함 때문입니다.

5. 삶의 지표입니다. 인간이 잘 사는 방도를 알린 말씀입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시 73:24), 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삶의 지표란 뜻입니다(요 14:6). 성경대로 살면 잘 사는 것이고, 복 받는 것이며, 부흥하는 나라가 됩니다.

6. 하나님의 지혜와 일하시는 능력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도 하셨고(창 1: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신다”(본문 19절, 사 55:11)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뜻대로 이루시는 능력을 믿으셔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약속하신 모든 것도 그대로 이루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히 4:12).

7. 마귀를 대적하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귀는 성도를 죄짓게 하는 유혹으로 접근합니다. 이것을 쫓는 최고의 무기가 말씀입니다. 마귀는 기록된 말씀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예수님도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를 대항하여 이기셨습니다(마 4:4).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고, 또 성경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신 것도 그 뜻입니다(엡 6:17). 하나님께 의지하여 대적을 좇는 것이 기도라면 자기의 무기로 적을 쫓는 것은 말씀신앙입니다. 말씀신앙을 든든히 가진자에게는 마귀가 범접을 못합니다.

8. 축복의 방편입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며(계 1:3) 그것을 매일 묵상할때(시 1:2) 복을 받고, 또 말씀을 듣지 않거나 지키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잠 28:9, 신 28:1~2).

9. 성경은 증거의 재료입니다. “증거하지 않으면 벌받는다”고 하셨고(17절), 예수님도 요한사도도 다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요 16:14, 계 1:2, 마 4:4).

10. 성경은 최고의 처방약입니다. 성경으로 안되는 것은 더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요 5:8, 11:43). 성도는 반드시 성경과 자신과의 관계를 든든히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깊이 심겨진 나무처럼 말입니다.

 

제41과 가나안 정복의 사역 (삿 1:1~3, 16~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나안 정복의 사역”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선민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복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하여 쉽게 차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의 족속들을 쳐서 몰아내야 하는 과제를 그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11:12)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지라도 인간의 노력이 제외되지 않으며 구원 받는 은혜도 전체가 은혜이지만 지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믿음 갖는 절차를 통해서 주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땅도 그들이 노력하여 얻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 이스라엘 지파들이 자기들에게 분할된 땅을 점령할때 여러가지 사연이 있은 것을 참고하여 우리들의 영적생활에 유익을 도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유다지파의 솔선모범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대사를 시행함에 있어서 어느 지파가 먼저 싸움에 임할 것이냐?를 논의하다가 “유다지파가 먼저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2절)에는 아무도 이유를 붙여서는 안됩니다. 왜 유다지파를 앞장세웠을까요? 그 지파는 인구가 가장 많았고(민 1:27), 왕(메시야)을 주실 지파이므로(창 49:10) 그만한 일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솔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시므온지파의 협령이 있었습니다. 유다지파는 넓고 험한 지역을 배정 받았으므로(수 15:1~12) 시므온지파와 합력을 시도하였을때 시므온지파는 쾌히 승락하고, 합세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3, 17절). 유다지파는 주동하고, 시므온지파는 협력한 것입니다. 또 시므온지파의 땅을 점령할때는 시므온지파가 주동하고 유다지파가 협력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신앙에 관한 일은 반드시 우열을 가리지 않고 협력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3. 간접적 협력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겐”사람 모세의 처가족이 유다지파에 예속하여 유다지파가 점령한 아랏남방의 지역에 함께 거한 것입니다(16절). 작은 이방인족이지만 믿음으로 합세해 준 것입니다. 그들이 유다지파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전쟁에 같이 나간 것만큼 힘이 되지는 못했지만 점령한 땅을 같이 살면서 지켰다는 점이 큰 유익을 준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들도 성도가 함께 있고, 예배나 기도회에 참여한다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앞장서서 솔선은 못해도, 또는 동등한 대열에서 협력을 못해도 동참하고, 작은 힘으로 협력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19절에 보시면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거민들을 쫓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음미할때 성도의 내심 골짜기에 들어있는 완악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완악성이 정복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겸손을 정복하고, 인내를 정복하고, 사랑을 정복하고, 진리를 정복하며, 후한 봉사생활을 반드시 정복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믿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육정을 못박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철병거를 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20절에 보시면 “무리가 모세의 명대로 갈렙에게 헤브론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른 자라고 칭찬하여 모세때부터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민 14:24, 수 14:9).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면 그만큼 은혜를 받을때 쉽게 성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 5가지 가나안 땅 정복의 사연은 바로 오늘을 사는 저희들에게 신앙생활의 방도를 일깨워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42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마 18:21~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형제가 형제에게 지은 죄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잘 아시는 바와같이 형제의 죄를 7번뿐아니라 70번씩 7번이나 용서해야 된다하심이 무한정 용서하는 뜻이요, 또 비유말씀에서 “많은 죄를 용서 받은자가 자기에게 지은 형제의 적은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자신이 용서 받은 죄도 다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때 자신의 희생과 십자가로 무조건 용서하셨으니 성도는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모범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4:11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셨고, 또 성도는 예수님의 생활의 본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요 13:15).

2. 형제의 죄를 용서하므로 자신의 죄도 용서받고 기도응답도 받기 위함입니다. 주기도문 내용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나(마 6:11),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을 갖고 하나님께 나가라”(마 5:23)는 말씀이나, 부부간에도 불화가 있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벧전 3:7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자신의 죄사함 받는 문제와 기도응답을 위하여 반드시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자신도 항상 범죄의 위험을 지니고 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2에서는 “섰다고 자만하지 말고 넘어질까 조심하라”하셨고, 갈 6:1에서는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돌보아주고, 자신도 그런 시험에 빠질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범죄를 책망하거나 지탄하려고 할때 자신도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는자라는 입장에서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원수갚는 것이 사람에게 없고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수도 사랑하고 원수갚음에 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마 5:38~44, 신 32:35). 어떤 사람은 억울함을 당했을때 욕하고 때리고 상대방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지만 현실적인 법률로도 뺨을 맞았다 하여 임의로 뺨한대를 때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처럼 심판이나 징벌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한자가 그것을 스스로 만회하기 위하여 싸우고 대립을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요.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의롭게 갚아 주신다하심에 대하여 성도는 큰 감사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억울함을 참으면 상당기간 후에는 그 상대방이 크게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것을 자주 경험하면 꼭 그렇게 기대하고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자신의 손해를 다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해자와 잘 합의하여 손해를 만회하고자 할때도 언제나 용서와 사랑과 봉사의 입장에서 협의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의 용서받은 많은 죄가 하나님께 다시 갚아야 할 문제로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본문 비유의 내용 아닙니까? 많은 빚을 탕감 받았는데 형제의 적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므로 주인이 노하여 탕감받은 것까지 다시 내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의미를 구원 받은 칭의문제와 관련하시면 안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죄사함) 받은 은혜는 변함이 없으나 성도가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음은 사랑실천에 미흡함을 뜻하고, 하나님이 어떤 범죄한 성도를 긍휼히 여겨 징계를 유예하셨는데 그가 다른이의 죄를 용서 안할때 그 유예된 징계를 함께 더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런 5가지 이유로 형제의 죄를 꼭 용서하고, 그에 대한 친교와 사랑과 봉사의 태도가 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43과 예수님과 동행함 (눅 2:41~5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동행함”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성도님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참신한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서 그 상태로 만족하거나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복주실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신앙생활을 살피면 어디에 약점이 있는지를 대략 짐작하게 됩니다. 어떤 성도는 모자라는 점이 많은 것같은데도 그 자신은 넉넉한 줄로 착각하는 것을 볼때 퍽 민망함을 느낄때가 있습니다(갈 6:3).

1. 본문의 내용을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12살때 그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고향 나사렛으로 가시는중 예수님이 동행중에 계신줄로 착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에 친척이나 동행인들중에 함께 오시는 줄로 알고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자 예수님을 찾으러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서 결국 3일만에 성전에 들어간즉 예수님이 그곳에서 선생들과 성경문답하시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때에 부모가 많이 찾았다고 하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줄을 알지 못하셨느냐?”고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2.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1) 예수님이 가까이 안 계시나 가까이 계신줄로 착각하는 성도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하려면 우선 계명을 잘 지켜야 하고(요 14:33), 성경과 기도를 힘쓰며 경건한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생활에 크게 붙잡힌 것도 없으면서 의당히 복을 받아야 할 것처럼 과신하는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8:17에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은 멀리 계신데 가까이 계신줄로 착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그 부모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지 않은 잘못때문에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만 했고, 3일이나 헛걸음을 해야 하는 손해를 보았습니다. 저희들도 무슨 일이나 처음부터 주의하고 바로하면 손해가 없고 발전이 있지만 시작을 잘못하거나 주의하지 않으므로 실수를 할때는 상당한 손해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수도 연결을 잘못해서 물이 새는 것을 모르고 화장실과 거실을 두번이나 판 일이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거리감 관계는 생각할 줄 모르고, “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가?”하는 식으로만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에서 은혜를 받으므로 피해를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성경말씀문답 하시는 에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구약식 성전 사용에서 탈피하여 말씀교육장과 기도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마 21:13, 본문46절). 신약시대에는 어느 곳에서나 말씀과 기도를 시행할 수 있지만 전문적인 기관으로 주신 것이 교회와 예배당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방도는 교회중심생활이요, 또 교회중심생활 속에서도 성경을 연구하는 세계입니다. 귀하가 예수님을 가까이 실감하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세상을 가까이 하던 생활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교회를 가까이 하십시요. 그리고 교회생활을 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배우셔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직접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를 알려 주실때 역시 성경을 깨닫게 하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의당히 성전에 계셔야 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49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계속 성전에 계신다는 뜻이 아니고, 성도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저희들 생활에 적용시밑다면 발견하신 예수님을 멀리하지 말고, 항상 가까이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생활을 성실하게 갖추어 예수님을 든든히 모시고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4과 엘리의 죄와 심판 (삼상 2:27~3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엘리의 죄와 심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엘리”라는 사람은 사사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으로 시무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엘리가 대제사장이란 말씀은 없지만 실로의 성소를 관리하는 대표제사장으로 나타나고, 또 그에게 사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삼상 1:9, 2:13). 또 그당시에 “사무엘”이 어린나이로 성소에서 일을 하였으므로(삼상 2:18, 26, 3:3) 그 제사장을 도왔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엘리는 나이가 늙어 98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눈이 어둡고 비둔한 상태에 있었는데(삼상 4:15, 18) 결국은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여 전쟁에 패하고 법궤를 빼앗기고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삼상 4:18).

2. 엘리 제사장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1) 그것은 자기의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역시 제사장인데) 타락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욕을 돌렸는데도 그것을 엄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2) 그 두아들은 불량자라(2:12) 대제사장의 아들이란 명분으로 제사를 훼방하고(2:15), 제물을 갈취하고(2:14, 16), 또 제물 드리러 온 여인들과 음행(2:22)하는 죄까지 범했는데도 엄벌에 처하지 않은 것입니다.

3)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로는 타일렀지만(2:23~25) 아들들은 듣지 않았고, 엘리가 듣지 않는 아들들을 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보다 그들을 더 중히 여긴 처사였고 하나님을 멸시한 큰 죄악이 되었던 것입니다(2:29, 3:13, 2:17).

3. 이리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엘리에게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이 본문의 내용인데 이 말씀이 상당한 설명을 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1) 본문에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이 은혜를 기억지 않는 것을 책망하셔습니다. ① 애굽의 바로의 집에 있을때 노예생활에서 그 조상들을 해방시킨 은혜를 왜 모르느냐 하셨고(27절), ② 이스라엘 12지파중에 레위지파를 선택하셨고, 또 아론의 후손에게 제사장직을 주어 예복 에봇을 입고 제단에서 분향하게 하고, 화제로 드린 제물을 먹게 하는 특별한 은혜를 왜 모르느냐?(28절)하셨고, ③ 하나님의 성소(처소)에서 제물과 예물을 짓밟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겨 그들을 벌하여 그 죄를 금지시키지 않고(3:13) 갈취한 고기를 먹여 살지도록 용납한 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29절).

2) 그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30절부터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① “아론의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시겠다”하신(출 27:21, 29:9) 언약을 파하실 것이니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도 경멸하시기 때문이요(30절),

② “네 팔과 조상의 집 팔을 끊어 제 집에 노인이 없게 할 것이라”(31절)하시므로 팔같은 아들이 죽고, 조상의 집같은 제사장 족속들이 귾어지도록 그의 후손들이 늙기전에 죽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32절).

③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든 복을 베풀겠지만 엘리의 집 처소에서는 환난을 보게 될 것이요(32절),

④ 또 “내 단에서 끊어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33절)이란 한명만이 남을 것을 예고하셨으니, 이는 “비느하스”에게서 “이가봇”이란 아들이 하나 남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4:20~21). 아울러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을 것도 예고하셨으니 이들은 법궤를 따라 나갔다가(4:4)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하여 죽은 것입니다.

⑤ 35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할 충실한 제사장을 세운다”하심은 사무엘이나 사독이나 예수님같은 분을 일으킬 것을 예고한 것이고(7:9, 8:17, 히 3:1), “견고한 집을 세워 영구히 행한다”하심은 구원사역의 방도를 든든하게 이루실 것을,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자(왕) 앞에서 영구히 행한다함은 충성된 사역자가 그 성직을 오래 보존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⑥ 36절에서 “네 집에 남은 사람”이란 엘리의 후손 이가봇을 뜻하는데 그는 구걸하듯이 제사장직을 어렵게 수행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문제있는 제사장을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죽이시고 쇠약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45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음 (롬 8:29~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중에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그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를 만들어) “맏아들이 되게 하신다”, 또 부르시고 의롭다 하셔서 “영화롭게 하신다”하시고, 이 사실은 미리 아신자들(예견)에게 미리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뜻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1)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대상을 구원하시고 미리 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분이요,

2) 하나님은 구원 받는자들로 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② 그들을 아들 삼으셔서 예수님을 맏아들 되게 하시고, 영화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3) 이런 복을 주시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부르시고(롬 10:14), 또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고전 1:18) 의롭다는 은총을 조셔서 구원과정의 최종목표인 영화(요 17:5, 부활과 영락을 뜻함)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이 시간에는 이 말씀중에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인간의 최고 관심사와 최고 존경의 대상은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자 되심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여질때 “저래서는 안되는데”하는 마음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란 사실을 또한번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보여주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고 합니다. 그런 말이 있을까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보이는 하나님(예수님)으로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요 1:18에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3) 성도는 반드시 독생자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사업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형상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형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 형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형상이 없는 분이시고(약 1:17), 예수님도 33년동안 볼 모양없는 형체를 임시로 가지셨기 때문입니다(사 53:2). 따라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만드실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뜻은(창 1:26), 하나님의 고유속성이요, 인격이신 의와 선과 거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상을 받은 시조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훼손시켰습니다. 그래서 구원사업의 시작을 성령으로 새생명 주시는 중생(인격변화)으로부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어떻게 닮아야 할 것입니까? 먼저 성품을 닮고, 다음에는 지식을 닮고, 다음에는 생활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의 성품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온유, 겸손의 성품(마 11:29), 사랑의 성품(요 13:1, 요일 4:16), 공의의 성품(살후 1:5, 7), 그리고 성령님의 열매에서 나타나는 성품도 있습니다. 또 벧후 1:4에 보시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 나쁜 성품을 없애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꿔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너희중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빌 2:5)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지식을 배워서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성경의 지식입니다.

3)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하셨고, 또 “내가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하여 본을 보이셨다”고도 하셨습니다(요 13:15). 말과 행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3가지를 잘 본받는 것이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가장 관심있게 먼저 시작해야 될 것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 닮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 (살전 5:18) 목록으로


성경 여러곳에 보시면 “범사에 감사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우선 본문에서 “범사에 감사하라”하셨고, 엡 5:20에서도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하셨으며, 욥 1:21에서 “주신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라”는 말씀이나, 롬 5:3에서 바울사도가 “환난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하시므로, 범사중에는 환난도 포함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추수감사절기를 맞이해서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범사에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거져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1)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느 사람이나 생명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이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겠다”고 하면 생명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또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니, 이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반드시 생명의 은혜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만물을 주신 은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의식주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혜택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주시고, 흙을 주셨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으니,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을 하나님이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을 큰 은혜로 알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3) 건강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보시면 건강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저희들이 건강한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줄 아시면 안됩니다. “내가 보약 먹고 운동하고 관리를 잘하니까 건강하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21:5,7). “하나님은 환난을 면케하시며 질병의 하나도 임하지 않게 하신다”(출 15:2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의 은혜를 꼭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구원의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중 제일 큰 은혜입니다. 선택하시고, 복음으로 불러 믿음 주시고, 독생자의 십자가로 죄사함 주시고, 의롭다 하여 심판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양자를 삼으시고, 예수님의 거룩을 닮게 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는 이 세상의 유한한 것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은혜입니다. 시 116:1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도움을 구하는 열쇠이기 때문에 큰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외에도 은혜가 많겠지만 이 5가지는 꼭 아시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은) 하나님은 고난이나 실패를 통해서 좋은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믿고, 고난을 소망의 소재로 알아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① 내 뜻대로 안된 것은 “주님 뜻대로 되기 위함이요”, ②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연단의 은혜를 힘입어 더 좋은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요(롬 5:3, 욥 23:10), ③ 내가 징계로 고난을 당하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때문이요(히 12:8), ④ 이유없이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함이요(욥 2:6), ⑤ 내가 죽으면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빌 1:21), ⑥ 실패와 패배도 하나님은 유익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마 21:42).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7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엡 6:23~24) 목록으로


바울사도께서는 에베소서 말미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이 축복의 말씀대로 이 시간에 말씀을 받는 여러분들에게도 은헤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설명을 간단히 드리고 예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 몇가지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에서

1) 바울사도는 사도직의 권위로 축복하였습니다. 사도직의 권위란 예수님을 대리하여 복을 전달하심을 뜻합니다.

2) 복은 하나님과 주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시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십니다. 중보자의 십자가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복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3)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과 은혜를 축복하셨습니다. 평안은 영육간의 평안이요, 믿음을 겸한 사랑은 영적구원을 포함하는 사랑이요, 은혜는 거져 주시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4) 이 복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형제들(23절) 특히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성도가 되셔서 평강과 믿음과 사랑의 퐁성한 은혜를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 첫째는 하나님의 계명(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요 14:23에서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하나님께서도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명을 잘 지키고 주님의 뜻과 모범대로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최고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여러 곳에서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말씀이나(마 22: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치 않다”는 말씀이나(마 10:37), 또 요 21:15, 16, 17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3번이나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하신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소명을 받았을때 배와 부친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였습니다(마 4:22, 눅 5:11). 따라서 베드로는 고향과 직업과 물질과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인데, 중간에 몇차례 실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을 사랑할 것에 대한 다짐을 다시 하였습니다. 그 다짐이 바로 “이 모든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곁에는 사명의 동역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명의 동역자들보다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 두번째는 사명을 이행할때 자기원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뜻과 인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요 21:18말씀인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띠우고 네 팔을 벌리리니 너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입니다. 사명생활을 자기의 소원과 취미대로 할 수 있다면 퍽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주님 뜻에 복종하는 것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입장을 포기할 줄 하는 것이 귀한 일인 것입니다.

3) 세번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자에게 주님은 직분을 주시고 은혜도 주시며 기도응답의 은혜도 더 잘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사명을 주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요 21:16)고 하시므로 목자의 직을 주셨고, ② 또 은혜를 주심은 본문에서 “은혜가 있을 것이라”하셨고, ③ 기도응답의 은혜는 욥 22:27에서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린자가 하나님께 얼굴을 들어 기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계명을 잘 지키고, 주님을 가장 사랑하며, 충성을 변치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8과 장막터를 넓히라 (사 54: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나타난대로 “장막터를 넓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마음과 사랑의 대상도 넓혀야 할 것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이 무엇을 교훈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백성이 줄고, 삶의 터전이 좁아진 상태이지만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 때가 되면 그 백성을 권고하여 황폐한 곳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하시고, 좌우로 번성하여 퍼지며 장막터를 넓힐 수 있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이 바벨론 포로 70년만에 해방될 것을 예언하신 것인가?할때 3절 말씀의 “황폐한 성읍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그 예언에 해당하는 말씀이 됩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 70년 후에 고국에 귀환한 백성들이 예루살렘성을 중건한 사실이 있었습니다(에스라, 느헤미야). 그러나 그 이외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영적선민이 크게 번성하고 확장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1절말씀의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던 자들이 노래를 한다”는 말씀은 전쟁의 피해로 남자가 죽으므로 자녀생산을 못하여 슬픔을 당할때가 있었지만(그것을 해소할 날도 있은즉) 노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70년 후에 포로된 남편이 돌아온다 하여도 이미 늙어서 자녀생산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녀생산이란 육신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민을 부르시는 영적자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많을 것이라”하심은 육신의 자손이 아닌 영적자손이 번성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해방은 맞은 백성들이 고국에 귀환했을때도 정착을 인하여 장막터를 넓힐 수 있었지만 더 나가서 이 말씀은 신양시대의 교회가 확장되므로 장막을 넓게 쳐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 “줄을 길게 하고 말둑을 견고히 박으며 취장을 아끼지 말고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이 열방을 얻는다”는 뜻이 바로 신양시대의 선민의 터전이 넓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글자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산업의 터전도 넓혀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대상 4:10).

2. 넓혀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을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 6:11~12에서 바울사도는 전도자의 넓은 마음을 소개하시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좁아진 마음을 책망하시고, “너희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사업의 넓은 터전을 구하기 전에 마음믕 바다같이 넓혀야 하겠습니다. 넓은 마음은 바로 이해하는 마음이요, 용서하는 마음이요, 포용하는 마음이요, 누구나를 물론하고, 사랑으로 친교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성도는 안나간다는 사람, 자기 이웃에 싫은 사람이 있어서 구역을 못 옮기는 사람, 사람을 선별하여 교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형편입니다. 귀하의 마음은 얼마나 넓습니까?

3. 사랑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행 1:8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신 것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먼데 사람까지 사랑의 폭을 넓히라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의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7)고 하셔습니다. 그리고 또 억지로 5리를 가게 할때 10리를 동행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셨습니다. 혹 우리의 친교대상이나 사랑의 폭이 제한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3가지 넓히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① 마음을 넓히고, ② 사랑의 대상을 넓힐때, ③ 하나님은 영적대상의 열매가 삶의 터전도 넓혀 주실 것입니다.

 

제49과 제사장의 축복과 응답 (삼상 2:18~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제사장의 축복과 응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삼상 1장, 2장에 보시면 아들을 낳지 못하여 멸시와 슬픔을 당한 한나가 서원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 사무엘을 젖떼어 성전으로 데려다가 엘리 제사장을 섬기는 사환으로 일하도록 헌신한 사실, 또 여기에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위하여 두번 축복한 사실이 있는데 그 축복과 함께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서 한나가 아들을 낳았고, 또 사무엘을 헌신한 다음에 3남 2녀를 더 낳는 복을 받았다는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1. 이 사실은 한나의 기도부터 시작이 됩니다. 한나는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에브라임 사람(삼상 1:1) 엘가나의 아내인데, 남편이 두 아내를 거느리는 중 다른 아내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느나, 한나는 생산을 못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자식 낳은 여인이 한나를 격동, 번민케 하니까 여기에서 심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나가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 동기는 “브닌나”로 인한 격동과 번민때문이었습니다. 삼상 1:10에 보시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하고 통곡하고 서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근심꺼리나 충격이나 격동이 생겨질때는 한나처럼 그것을 기도의 동기로 삼아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셔야 할 것이고, 간절한 기도가 바로 통곡과 서원이 된 것입니다.

2. 한나의 기도에 제사장의 축복이 동반했습니다.

1) 엘리 제사장은 그당시에 퍽 늙은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22). 그가 처음에는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술취한자로 오해했었지만 나중에 그것이 아니고, 기도의 간절한 표현임을 알았을때에 “하나님이 너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고 축복을 하였는데 이 한나의 기도와 제사장의 축복이 합력되어 응답을 받고, 사무엘이란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의 기도와 성직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제사장의 축복을 또 받고, 3남 2녀를 낳게 되는 복을 받았으니 그 말씀이 이 본문에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을 하였기 때문에(삼상 1:11) 한나는 그대로 시행을 하여 아이의 젖을 떼자마자 제사장에게 바치니까 제사장이 그에게 에봇을 입혀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고(에봇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섬길때 입는 예복임), 사무엘의 부모는 1년에 한번씩(매년제) 제사를 드리러 갈때 아이의 겉옷을 지어 입히게 되었는데, 엘리 제사장이 한나부부의 이 봉사적인 태도를 볼때 축복할 마음을 또 갖게 된 것입니다. 먼저는 간절한 기도에서 축복할 마음을 가졌으나, 이번에는 귀한 아들을 젖떼자마자 하나님께 바치는 과감한 헌신과 서원을 이행한 진실성과 또 매년 제사를 드리는 정성과 올때마다 아이에게 옷을 해 주는 봉사에 감동을 받아서 축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로 받은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으니 얼마나 보고 싶고 연민을 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이 네게 후사를 주사 네가 하나님께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 이 축복으로 한나는 3남 2녀를 더 낳았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잘 자라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여기에서 한가지 더 아셔야 할 것은 그당시에 축복한 엘리 제사장은 두가지 결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1) 너무 늙어서 똑똑할 수 없었다는 것이요,

2) 두 아들들(홉니와 비느하스)이 불량하여 제물을 갈취해 먹고, 제사 드리러 온 여인과 음행까지 하는데, 이것을 과감하게 단속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말로는 훈계를 하였지만(삼상 2:23~25) 엄하게 벌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되었고, 하나님과 그 제물에 대하여 범죄하는 자식을 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얼마 후에 그는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삼상 4:13~14). 여기에서 저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제사장(성직자)에게 개인적 결함이 있어도 하나님이 쓰시는 중에 있을 때는 그 결함과 상관없이 축복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나의 슬픔과 기도, 그의 서원과 봉사, 그리고 성직자의 축복이 응답의 관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50과 인생이 곤고한 이유 (롬 7:19~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생이 곤고한 이유”를 말씀드리고, 그 곤고함에서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인가?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죄로 인한 곤고를 느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곤고한 정도가 대단히 커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시므로서(24절) 죄로 인한 곤고가 큰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1) 그렇다면 바울사도가 고민하는 죄의 상태란 어떤것인가?를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① 죄가운데 거하던 사람이 일단 거듭나고 믿음 갖기를 시작하면 이는 속죄함과 의롭다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롬 8:30, 10:10, 요 5:24).

② 그러나 그 “의롭다하심”은 법정에서 선포하는 무죄와 같은 것일뿐, 무죄선고 받은 자라도 양심상 또는 행위상 죄가 전혀 없지 않은 것처럼 죄사함 받은 성도도 역시 깨끗지 못한 상태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며 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③ 이것은 마치 저희들이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만 역시 죄의 유혹을 받으며 마귀에게 끌릴때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마음속에 거듭난 신앙의 심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거듭난 마음으로는 성경대로 살고 선하게 행해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와 현실과 악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자기 속에 두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한 인격은 말씀과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려 하고, 또 한 인격은 죄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죄에 끌려가는 것은 “자기가 아닌 죄라”고 하셨지만 “자기가 아니란 것”은 자기의 양심이 아니란 뜻일뿐, 책임없는 남을 뜻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또 바울사도는 거듭난 심령을 속사람 또는 아믕의 법이라 하였고, 유혹받는 심령을 지체속에 있는 다른법, 즉 자기 육체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법이라고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의 법을 따를지언정 죄의 법을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두가지 법이 싸우다가 원치 않는 죄의 법으로 끌려가는 것을 생각할때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까? 그것은 구원의 은총이 죄 안짓는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의의 은총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성도가 연약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다가 또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심판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왜 곤고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이 죄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이요, ② 또 내가 연약하여 마귀의 종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크게 영광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연약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또 범죄하고 넘어지면 성령님이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연약에 끌리는 자신을 곤고한 인생으로 여긴 것이고, 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곤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 왜 곤고하냐 할때에 철학적으로 답변한 글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1) 영만 가진 천사도 아니고, 육만 가진 짐승도 아닌, 영과 육을 아울러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라 하였고,

2) 행동하는 존재로서 행동을 잘못하기 때문이며,

3) 욕구를 가진 존재로서 필요이상의 욕구를 갖기 때문이며,

4)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는 인생인데, 그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성자처럼 살거나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구별하여 처신을 바로 하거나, 욕심을 억제하고, 봉사적인 존재가 되며, 이웃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유지해 나간다면 곤고대신 평안과 기쁨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죄의 유혹을 최대한 거절하면서 우리의 구원이 자신의 의로 말미암지 않음을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1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심 (갈 4:4~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절과 관계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는 율법주의 이단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사도가 증언한 복음적 신앙을 불심케 하였습니다. 복음적 신앙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이고, 율법주의 이단은 예수님을 배격하고, 율법의 행위와 제사의식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때가되매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으며,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하시므로 예수님의 탄생의 계획과 방법과 목적에 관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때가 되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때가 되매”란 뜻은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과 그 시기를 미리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천하의 범사도 때를 두고 경영하십니다(전 3:1). 성경에서는 이 “때”라는 말이 퍽 복잡합니다. 구약에서는 역사의 한 시절을 나타내는 때가 있고(쟈만;슥 5:3, 단 3:8), 시간이나 세대를 말하는 때가 있고(용;삼상 23:20, 단 2:44), 또 특정한 시기를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에스;창 24:11, 29:7). 신약에서도 “헤메라( ;마 2:1)”, “호라( ;마 10:19), ”카이로스( ;마 8:29), “크로노스( ;본문, 계 6:10)”가 있어서 역시 독특한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때가 되매”한 것은 “크로노스”로서 “막연하게 돌아오는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과 관심 속에 특별하게 작정된 역사의 한 시점”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계획을 “만세전에 하셨다”하였고(엡 1:3), 창 3:15이나 사 7:14, 11:1~2, 욥 19:25~27등에서 벌써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계획을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란 창 3:15에서 예언한 “여인의 후손”이란 말씀과 관련이 있고, 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처녀에게서 나실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사 7:14). 본문에는 장소에 관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미 5:2에서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까지 예언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여자에게서”란 의미보다 처녀란 의미가 더 큰 것을 아셔야 하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신신학자들은 “알마”를 여인으로만 번역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예언대로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시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다 타락한 피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정모형을 받지 않은채, 마리아의 몸만을 빌어서 나시게 된 것입니다.

3. 율법아래 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킬 사명을 갖고 나셨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행위계약에서 낙방하였고(선악과 계율을 어김), 타락한 인생은 누구도 율법의 완전 실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율법의 완전 실천자가 아니면 구원자도 될 수 없습니다. 히 4:5에 보시면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다”고 하시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셨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이상의 절차에 따라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에서는 두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입니다. ① 이스라엘 선민들이 본래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받은 의식적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식적 율법의 성취자가 되시므로(십자가로 성취) 그런 의식적 율법을 지킬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이요, ②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율법을 다 못지킨 죄로 심판 받을 입장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함이니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란 양자의 명분과 권세(요 1:12)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탄절을 지키는 저희들이 예수님이 오신 방법과 목적을 잘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2과 연말의 기도 (시 90:12~1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모세가 인생의 허무함을 논하면서 허무하지 않고 뜻있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 실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연말의 기도”란 제목으로 이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년 365일이 벌써 다가고, 또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해의 생활을 반성하고 새해를 뜻있게 보내려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모세가 기도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 날(각자의 날)을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우리의 날”이란 무슨 뜻일까요? 각자의 살아온 날은 계수하기 쉽습니다. 1년은 365이고, 60년은 21900일 입니다. 아니면 저희들이 아침에 일어나고, 낮에 일하고, 저녁에 눕고, 하루 식사 3끼를 하고, 계절따라 의복 갈아 입는 생활을 계수하라는 것일까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렸느냐? 하는 것을 계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알아야 다음 생활의 방도가 계획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어느 기점을 보낼때 꼭 필요한 것인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하신 것입니다. 지혜의 마음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잘 경외하는 마음이요, 가장 소중한 은혜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약 1:5). 동물의 지혜나 미물의 지헤를 보셨지요. 또 인간이 갖는 지혜도 무한하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 지혜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시므로(잠 1:7) 지식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에 예속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지혜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에 유력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관련한 은사로서 지혜 이상 더 요긴한 것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하여 더욱 지혜를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셨던 모양입니다. 돈 많은 부모님이 아들집에 계시지 않고 딸집에 가서 계시면 불리하다는 느낌을 가지실 것입니다. 성도는 재산의 욕심을 내서는 안되지만, 돈 많은 부모가 출가한 딸과 인정이 두터우면 아무래도 딸에게 더 후하게 줄 것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이 멀리 계시면 유익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 계시게 하셔야 합니다. 시 74:23, 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면 복이요, 오른팔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가 대단히 친밀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거리낌을 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늘 순종하며, 하나님 제일주의의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곁에 두면 든든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자들의 기쁜 생활입니다. 성도는 그 방법을 바꾸어 물질을 떠나서 하나님을 모시므로 든든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마 6:24).

4. “긍휼히 여기소서”한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위험중에 살고 있으며, 또 항상 실수를 예견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긍휼(불쌍히 여겨 돌보심)이 없다면 늘 책망이나 받고 징계나 받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려움에서 헤어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과하심, 용서하심, 돌아보심의 은혜가 절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우리를 만족케하사 우리 평생에 기쁘고 즐겁게 하소서”한 것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려면

1) 우선 영육이 편안해야 합니다. 이 평강을 예수님이 주십니다(요 14:27).

2)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야 만족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만큼 갖거나 그 이상을 가져야만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같은 것을 다 가지면 특별한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꼭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가져야만 하는데, 이것은 광대무한하신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주시는 특벽한 은혜(영적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 은혜를 받으시므로 만족을 누리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5가지 기도가 우리의 연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998년도


제1과 인정 받는 신앙 (창 22:1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정 받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어떤이가 인생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인정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좋아하지만,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에 대하여 인정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본래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이 대단하였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주실 약속을 믿고 말씀따라 고향을 떠난 일이 있었고(창 1:1~4), ② 이웃(조카 놋)과의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삶의 거처를 양보한 일이 있었으며(창 13:8~9), ③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사실(창 14:20)등, ④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창 15:6).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한번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히 11:17), 이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가?”를 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창 32:2)고 명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순종하기 어려운 여건이 있었으니, 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처럼 번성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② 독자 죽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며, ③ 일찌기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이 자신의 순종과 헌신을 시험하시는 것인줄 알았기 때문에(히 11:17)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 순종의 뜻은 그대로 순종하려고 결심하고 칼을 댄 것입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실 줄로 믿고 행하였다”(히 11:9)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순종입니까?

4)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취소하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알겠다”고 하신 후, 수양을 대신 번제감으로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을 인정 받은 것입니다.

2. 우리들은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까요?

1)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① 신앙고백이란 기본적인 교리를 뜻하고, 특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신앙고백이 바르지 못하면 그 신앙에 대하여 인정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성경을 바로 믿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이 어찌 인정 받을 신앙이 되겠습니까? ③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로부터 예수님 아는 지식에 대한 신앙고백을 받으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마 16:13~17) 이렇게 성경을 바로 알고, 핵심적 신앙지식을 가져야만 그 신앙에 대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행위가 동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확실하게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를 확인하려면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 하셨고(약 2:17), 또 믿음과 행함은 곧 “나무와 열매와 같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7:16). 다라서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을 인정하실때 반드시 성경에 따른 행위를 보시는 것이고, 심판하실때도 반드시 그 행위를 근거로 하시는 것입니다(마 25:31~46, 계 14:13, 22:12).

3) 성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거듭났을때 성령님과 그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어질때 자신의 옛사람은 죽은 것과 같고(롬 7:9), 성령님과 말씀을 영접하므로 주님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요15:7에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 하셨고, 살전 2:13에서도 “말씀이 믿는자 속에서 역사하신다”하셨으며, 고후 13:5에서는 “예수님이 성도 안에 계시지 않으면 버리운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3가지 측면에서 신앙을 점검하여 인정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인정만 잘 받으시면 하나님이 “모든 면에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시 1:3, 마 6:33, 약 1:12).

 

제2과 축복에 대한 말씀 (창 27: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축복에 대한 말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삭이 맏아들에게 축복하기를 소원한 내용입니다.

1.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창 1:22에서 “아담에게 복을 주신다”하셨고, 창 2:3에서는 “안식일을 복된 날(또는 복 주시는 날)”이라 하셨고, 창 12:2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으며”, 창 12:3에서는 “복 주시고자 하는자를 축복할때 그 축복하는 자까지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니까 당연히 원하시는 자에게 복을 주실 수 있으며, 따라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운동경기하는 주최측에서 상을 예비하고 경기를 벌였을때 그 상을 받도록 힘써야함과 같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사람이 빌어서(축복해서) 받게 하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실(창 14:19), 이삭과(본문) 야곱과 요셉이 각각 그 아들들에게 축복한 사실과(히 11:20,21, 창 48:20), 모세가 백성들에게 축복한 사실(민 6:22~26),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축복한 사실(수 14:13), 또 제사장이 축복하고(삼상 2:20), 왕이 축복하고(대상 16:2), 또 백성이 왕을 위하여 축복했으며(왕상 8:66), 선지자가 축복하였고(왕하 4:16), 신약에 와서 시므온과 예수님과 사도들도 축복을 하였고(눅 2:34, 막 4:7, 고후 13: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누구에게든지 전도하러 들어가서 그 집에 복을 빌어라 그 집이 합당하게 대하면 그 빈복을 받을 것이고, 거절하면 복 빈자에게 돌려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12, 13). 이 말씀들을 참고해 보면 성도는 누구를 물론하고 하나님께 복을 빌 수도 있고, 타인을 위하여 빌어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벧전 2:9에 보시면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서 복을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대상은 욕하는 자에게 욕대신 축복하고(벧전 3:9), 핍박자에게 축복하고(출 12:14), 저주하고 후욕하는 자에게도 축복하라(눅 6:28, 고전 4:12)고 하시므로 그 축복의 대상에 제한이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3. 저희들은 가급적 축복이란 말은 성도가 비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란 것을 아셔서 “하나님 축복하소서”하는 용어를 “하나님 복을 주십시요”하는 용어로 바꾸는 노력을 하시고 그대신 성도가 축복하는 기도를 보통 할 수 있는 것으로 아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누가 비는 축복이 효력이 많을 것인가?에 대하여 아주 경건한 성도가 비는 것이 가장 클 것이고, 그 다음이 복음사역자가 비는 복이 클 것으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사역자라도 경건성이 부족하면 그 기도는 경건한 평신도의 기도보다 더 유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가 많이 경건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실 것입니다(약 5:14, 마 10:12). 또 성도가 축복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부탁하는 것이고, 목사가 축도를 하는 것은(고후 13:13) 복의 근원자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전달하는 의식으로 시행하는 것임을 구별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축복한다”는 말씀이 “율로게오( )”란 용어인데, 이 용어는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마 26:26)할때나 사람이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한다”(눅 6:28)고 할때나, 또 음식을 드시기 위하여 “축사하시고”(요 6:11, 고전 11:24)할때도 같이 사용된 용어인 만큼 축복이나 축사의 뜻이 같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축복하셨다”(막 8:7)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편에서 사용하신 용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남을 위하여 또는 가족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핍박자를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인색하게 하지 마시고, 또 자신이 더 경건하여 축복의 큰 효험자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과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 (요 10:1~6)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여 교훈해 주셨습니다. 이와같은 비유 말씀은 시 23편과 겔 34:16, 마 18:12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들도 이 말씀은 자주 보고 듣고 하여 잘 아는 말씀이지만 자주 살필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갖기 때문에 한번더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저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저희가 알지 못하더라”고 하셨으니 그 당시에 예수님의 교훈을 직접 받은 무리들이 오늘 저희들 만큼도 유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저희들이 그당시 사람들보다 더 유식하려면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설명 드려야 할 대목은 5가지로서 목자와 양과 문과 문지기와 절도와 강도로 표현된 거짓목자인 것입니다.

1. 목자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11절, 14절에 보시면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하고 완전한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1)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하셨고, 또 1절에서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으니 이 “문”이란 뜻에 대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① 본문 8절, 9절에서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의 뜻은 정당한 길, 또는 구원의 길(요 14:6)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당하게 오셨고, 정당하게 사셨으며, 인생의 삶과 구원에 대하여 정당한 길을 열어주시고, 또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삶이나 구원의 방법도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하신 것처럼(요 14:6) 예수님의 뜻(또는 성경)대로 사는 것만이 바른 삶이요, 구원의 방도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선한 부자가 아닌 절도나 강도는 “그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다”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과 성경에 위반되거나 또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외식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정당한 방법으로 믿고 행동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고 하였으니(3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도의 형편을 안팎으로 잘 아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모르면 지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복음 사역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대행하는 사람들인데 역시 교인들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은 흔히 먹고 살아가는 생활형편에 대하여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사실상, 목사가 교인의 형편을 알아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정도”인 것입니다. 성경지식, 인내성, 연단성, 순종, 겸손, 봉사성등을 잘 알아야 하는데 성경시험을 쳐보지 않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 목회의 헛점인 것입니다.

3) 3절에서 “자기 양을 내어 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유 방목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위험이 있을때 잘못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기회따라 통제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생활은 자유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자발적 의지로만 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봉사에 억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4) 목자는 앞서가며 음성을 발하여 인도한다고 하셨습니다(3, 4절). 앞서간다는 뜻은 모범을 보임이고, 음성을 발하며 인도하는 것은 교훈입니다. 목자의 이 중대한 사명을 현시대의 목사(목자와 같은 원문 “포이멘”임)가 수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현실 목사님들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닮지 못했을지라도 선한 목자상을 사모하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양에 관한 것입니다.

1) 양은 분명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와야 하며,

2) 다른 음성은 알지도 못하니까 벌써 유혹인줄 알고 도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4, 5절). 이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짐승도 독초는 먹지 않습니다. 또 양의 우리는 교회로, 문지기는 감독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은 자신이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듣고 잘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래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4과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합리적 전도 방법”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 분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1) 전도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제자들인데 마 28:19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요 13:13).

2) 전도 받을 대상은 온 천하의 모든 족속이요(행 1:8, 마 24:14),

3) 전파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죄에서 구원 받는 방도로서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불행한 상태, 하나님의 구원 섭리, 영생을 소개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4) 복음을 받는 방도는 믿고 세례는 받는 것이요,

5) 믿음의 효력은 구원을 받는 것이요, 믿지 않음의 결과는 정죄와 심판과 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전도의 사명을 주신 이유는

1)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뜻을 가지시고, 유기된 자는 마땅히 버릴 것이나, 선택된 자는 받드시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실때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고, 그 영적생명으로 복음을 영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이때에 거듭남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요 3:3), 복음의 제시는 성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롬 10:14, 15). 물론 지각이 없는 자는 전도와 상관 없이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막 10:14). 이렇게 하나님은 지각있는 선택자를 복음으로 불러서 구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저희들이 어떻게 전도하여야 할 것입니까?

1) 우선 소극적 견지에서 비택자나 거듭나지 않은자는 믿음에 들어올 수 없으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적극적인 견지에서 택한 백성은 다 구원을 받게 되며(요 17:9), 거듭난 자는 다 복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선택한 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상대로 전도하게 된 것이며, 전도자에게 누가 선민인지를 알게 하시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전도의 방법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궁극적 목적을 삼는 것입니다. 복음을 소개하기 위한 예비적 절차로 사랑과 선행의 빛된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행과 빛된 생활이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십자가일뿐 사랑과 선행은 복음이 아니요, 아무도 구원을 받게 할 수 없습니다.

5) 그렇다면 왜 전도자가 복음소개에 앞서 사랑과 선행을 나타내야만 하는가?할때 성도와 전도자와 복음을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어서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대화의 기회로 접근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선행은 복음이 아닌 것처럼 믿음을 가진자는 사랑과 선행이 없는 세계에서도 믿음의 근본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4. 현실교회는 성도들에게 전도사명을 무분별하게 강조하여 성경적 진의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실로

1) 사랑과 봉사가 믿게 하는 방법인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불신자에게 사랑실천만 잘 하면 믿음이 생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불신자의 관심을 끄는 능력일뿐 믿음생산은 오로지 거듭남의 은혜로서만 생긴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전도자의 전도미숙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만 잘 하면 모든 이웃과 인류가 다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도가 소수의 택한 백성에 한하여서만 유효해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한가지는 성도가 불신자의 심령을 불쌍히 여겨서 기도로 은혜를 구하고 예수 믿도록 애걸하여 믿게하려는 방식이 꼭 필요한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을 전도로 믿게 하실때 전도자의 뜨거운 사랑이나 봉사나 간청에 의하여서만 믿어지게 하시는가?할때 인간의 어떤 설득이나 권면보다도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이 절대적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화나 설득보다 더 큰 능력이 복음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믿으셔야 합니다(고전 1:18). 따라서 복음을 소개했는데도 안 믿으면 그 이상의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수하는 약을 소개해도 돈 없으면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랑과 복음을 제공해도 거듭나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거듭난 자이면 확실한 신앙과 생활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4:20, 행 9:18, 16:15).

 

제5과 분명한 전도 (행 13:46~4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분명한 전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전도와 관련된 말씀들 중에 미처 증언을 못한 말씀들이 있어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 사도가 수리아 안디옥교회로부터 처음 선교사로 파송이 되어 소아시아쪽으로 1차 선교를 나가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서 전도한 내용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두 선교사는 ① 담대하게 증언하였고, ② 먼저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자로 자처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된 것과, ③ 이런 일 있을 것이 사 42:6에 이미 예언된 것을 말하니까, ④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면서 찬송을 하였는데, ⑤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보시면 14절~41절까지 전도의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의 내용이 분명하였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저희들에게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분명한 전도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절차에 “전도하는 일”이 있고, 이때에 하나님은 전도자의 역할을 쓰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도자의 역할이 없으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를 구원 못하시는가? 할때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완악한 사울이 회개할때 전도받고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전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구원전달의 절대 관건은 아니고, 전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법에 해당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전도자를 쓰시는 이유는 성령님이나 천사들이 할수도 있지만 성도에게 사명적 일감을 주셔서 충성하고, 은혜 받게 하시고, 상급 받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단 12:3) 주신 것일뿐, 일꾼의 도움을 필요 불가피하여 쓰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만인이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 즉 예복 입은 자만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신부를 바꿔치기 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만일 사람이 예수님의 신부감을 바꿔치기 했다면 하나님이 용납하실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마 22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어 왔더라도 예복 입은 사람만 그 잔치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잔치집 마당에까지 왔을지라도 예복이 없는자(거듭남의 확신이 없는자)는 큰 책망과 징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되고 구원 받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택한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요, 하나님의 만인적 초청이 있어서(마 22:8~10) 마당에까지 온 사람이 많을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만인이 다 구원되어지기를 지향하고 노력하는 만인구원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4. 기독교계에 두 조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 복음주의”라 하여, 십자가를 통한 영적구원과 천국건설을 도외시하고 기독교가 사회, 정치를 바르게 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고, 또 “복음적 사회주의”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기독교가 영적구원과 천국건설을 하나님 뜻대로 앞세우면서 성도의 신분으로 사회에 빛과 소금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잉후자에 속한 복음적 사회주의가 정당한 것임을 믿고 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성도가 빛을 발하면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는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하셨고, 죄악이 더 관영됨은 물론(마 24:12), 성도에 대한 핍박도 심하여 “말세의 날들을 감하신다”(마 24:22)고 하셨기 때문에 드문드문 성자가 나타나서 빛을 발해도 강물에 돌던지는 격의 미약한 상태를 면하기 어렵고, 여전히 죄악이 더해 갈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계 20:3).

결론적으로 현실교회와 성도의 전도사명은 핵심전도내용(행 13:26, 구원의 말씀, 십자가의 도)을 모든 인류에게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가 단합하고, 세계를 구획화하여 책임분담을 시켜서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은 일이 있다”는 개인적 확인이 되도록 분명한 전도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초대교회는 수가 적어 못한 것임).

 

제6과 빈약한 자를 돕는 복 (시 41: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 시편의 주제에 따라서 “빈약한 자를 돕는자의 받을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 시편 표제에 보시면 “다윗의 시”라 하셨고, 또 “영장으로 한 노래”라 하셨는데, 이 “영장”이란 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1.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런 시를 읊었을까?에 대하여

1) 9절에 보시면 “나의 신뢰하던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다”고 하였으니, 이 말씀의 “내 떡을 먹었다”는 것은 왕실에서 왕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는 뜻이요, 또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씀은 반역자가 왕을 밀치려고 자기를 더 높이는 태도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다윗이 왕으로 있으면서 압살롬의 반역을 받던 시절에 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역자 압살롬은 자기의 아들이요, 또 압살롬편이 되어 반역을 도운 “이히도벨”은 다윗왕의 모사였습니다(삼상 15:12, 31).

2) 또 이 당시에 다윗이 병들어 있는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8절에 보시면 다윗의 반역자들이 다윗이 병든 틈을 타서 “악담을 하고 수군거리고 죽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다윗의 원수들이 악담하기를 “다윗이 언제 죽어 그 이름이 멸망할고”하고, 또 6절, 7절에서는 다윗을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 광포하고, 수군거리고, 해로움을 꾀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의 지위를 넘겨다 보며 발꿈치를 드는자가 무슨 음모는 안하겠습니까? 따라서 이 시는 다윗이 왕의 시절 병든시기, 반역을 받는 시기를 배경한 것입니다.

2. 다윗이 왕으로 있으면서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는가?할때 이것은 다윗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때문이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다윗이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내 영혼을 고치소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활을 기록한 삼하 11:을 보시면 다윗왕이 충신 “우리아”를 전쟁에 보내어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자 삼하12:에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하여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삼하 13:에서는 다윗의 자녀들중 암논과 다말 사이에 음행사건이 생기고, 이것을 압살롬이 보복하여 암논을 죽이므로 형제간의 살인이 벌어진후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에 피신하였다가 예루살렘에 온지 2년이 되도록(삼하 14:28) 부왕이 자기를 부르지 않으니까 거기에 감정이 상하여 반역을 꾀한 것입니다(삼상 15:). 압살롬의 반역이 겨우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된 모든 일이 전부 “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것이라”고 다윗 자신이 고백을 하며 회개했던 것입니다(삼하 16:10). 따라서 다윗이 당한 빈약과 곤고는 바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형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3. 빈약한 자를 돕는자가 어떤 복을 받는가? 할때에

1) 빈약한 자는 어려움 중에 있는자, 특히 인간의 연약으로 고통중에 있는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징계, 질병, 사업실패, 집안의 우환등 여러가지로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때에 본 시편은 그런자의 편이 되어, 권고하고, 도와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약자를 돕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빈약한 자를 도우면 ① 그 자신이 재앙의 날에 건짐을 받게 되고, ②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살수 있게 되며, ③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④ 그리고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고(3절), 또 자기를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말아 주시고(2절), 긍휼을 베푸사 자신을 일으켜서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11절) 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윗이 왕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반역자를 다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⑤ 그리고 자신을 완전한 중에 붙들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12절). 저희들은 빈약한 자, 소자를 돕고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7과 예수님을 섬기는 법 (눅 10:38~4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섬기는 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너무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알려진 만큼 덜 알려진 말씀도 있고, 실천이 부진한 형편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중 2차로 예루살렘에 상경하셨을때 예루살렘 동쪽 5리쯤 거리에 마르다와 마리아 형제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집이기도 합니다(요 11:1~44). 예수님과 제자들(저희가)이 그 촌으로 들어가셨을때,

1. 마르다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입니다(38절). 예수님은 물론 그의 제자들까지라도 사랑과 봉사의 심정으로 영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법인 것입니다. 어떤 집은 복음사역자가 자기 집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갑게 영접하는 것이 주님 섬기는 방법이라고 믿으십시요.

2.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39절). 성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태도요, 또 성도가 복음사역자의 설교를 잘 듣는 것도 바로 그 사역자를 영접하고 섬기는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때 잘 듣는 것이 음식을 접대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대접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복음사역자가 음식을 대접 받는 것보다 그 성도의 신앙을 위하여 교훈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말씀 듣는 마리아를 음식 준비하는 일에 협조하도록 부탁을 하였다가(40절) 오히려 거절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육신의 양식을 먹는 일보다 영혼의 양식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4:4).

3. 예수님은 많은 음식을 차려서 대접 받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몇가지 또는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그의 겸손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크고 번잡한 대접을 받아야 할 자신이라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중한 직임을 행하는 것은 사실이요, 또 복음사역자를 잘 대접하므로 접대자가 복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역자 자신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일뿐 대접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절약하는 차원에서입니다. 음식의 메뉴를 단순하게 하면 ① 시간의 절약과, ② 물질의 절약과, ③ 염려, 근심을 더는 일과, ④ 대접 받는 자로 하여금 부담을 적게 갖도록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3)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하여 자제하는 의미도 없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향락주의자가 아니요, 오히려 가난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도 필요이상의 음식종류에서 해방되어, 단순하고 요긴하게 식사하는 방법을 만들어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4. 받은 달란트에 전문성을 띠우는 것도 역시 주님을 섬기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10가지 재주 가진자가 저녁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도 옳게 못하는 10가지 재주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전문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가지 잘 하는 것을 더욱 전문화 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지을때 한 기술자가 다 짓지 않고, 여러분야의 전문가가 맡은 분야에 따라 집을 완성하지 않습니까? 이와같이 성도의 사명이나 복음사역자의 사명도 자신의 달란트에 따라 전문화하여 그것만 잘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다 잘 하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꼭 받은 은사 소질을 전문성 있게 잘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좋은 편을 택하여 행사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뺏기지 않으리라”고 하신 것처럼 좋은 일, 능률 있는 일, 영광스러운 일을 선택하여 그것에만 몰두할때 더 큰 발전과 능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5가지를 잘 실천하여 예수님을 바르게 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음식접대 중에 메뉴를 줄이는 일이라도 과감하게 시행해 보시지요.

 

제8과 웃사를 충돌하심 (대상 13:5~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웃사를 충돌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다윗왕이 법궤를 운반할때 성경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법궤를 붙잡은 제사장의 아들 웃사가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삼상6장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 저희들이 이 말씀을 폭 넓게 이해하려면 법궤의 의미와 그 운반법에 대한 것을 먼저 살피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법궤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성막을 제작하게 하실때 지성소에 안치할 법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1) 이 법궤의 재료는 조각목이었고, 강대상만한 크기의 궤짝이며, 겉은 금으로 입히고, 속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돌비 2개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은 것이었습니다(출 25:10,11, 16:33,34, 26:33, 민 17:10).

2) 이 궤의 명칭은 여러가지여서 법궤(레 16:2), 언약궤(민 10:33), 하나님의 궤(삼상 3:3), 능력의 궤(대하 6:41), 증거궤(출 30:6)등으로 불리워졌습니다.

3) 그리고 이 법궤를 하나님 보좌의 상징인 지성소에 두었다가(출 26:33) 운반할때는 고리에 채를 꿰어서 반드시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자손에게 지성물과 법궤를 운반하는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민 4:1~16). 고핫의 자손들이 법궤를 운반 할때는 먼저 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이 간 막는 장과 해달의 가죽으로 궤를 덮고 채를 꿰어 놓으면 그 다음에 고핫의 자손들이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민 4:5, 15),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민 4:18, 19). 따라서 법궤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엄격하고 주밀하게 취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또 아셔야 할 것은 법궤의 보존 역사와 의미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의 지도에 따라 법궤를 만들어 40년 동안 광야의 성소에 보관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사시대를 지날때는 “실로의 성소”에 있었는데(삼상 1:9) 사무엘 선지자 초기에(삼상 4:1) 법궤를 앞세워 전쟁을 하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뺏긴 일이 있었고(삼상 4:3~11),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고장 “아스돗”의 다곤 신당에 두었다가 큰 화를 당하게 되자 7개월만에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서 이스라엘 진영인 “벳세메스”로 보냈습니다(삼상 6:1, 7~9). 그런데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가 온 것을 기뻐하며 임의 들여다 보다가 또 70명이나 죽었습니다(삼상 6:13, 19). 그래서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 아비나답의 집에 20년을 있게 하였습니다(삼상 7:1~2). 그후에 사울이 왕이 되었으나 사울은 법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대상 13:3). 그러다가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때(대상 10:1~6) 나라를 평정시키고 다윗성(여부스, 예루살렘)을 건립한 후(대상 11:5) 그곳에 성소를 짓고(삼상 6:12~15, 대상 15:1) 법궤를 운반하다가 웃사와 충돌한 사건이 일어나서 오벳에돔의 집에 또 석달을 머물게 하였다가 다시 운반 해오게 된 것입니다(대상 15:1~25, 삼하 6:12~15).

2) 법궤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민 14:43~44, 수 7:6). 그래서 법궤가 있는 것을 지성소라 하였고(출 26:33, 대하 8:11), 또 그곳에서 계시를 주셨으니(수 7:6~9) 이는 보이는 하나님처럼 인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을 하나님의 법대로 옮기지 않았다가 화를 당한 일과 관련하여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은 본래 하나님의 법대로 메어오려고 했었는데(13:5) 천부장, 백부장, 장수들과 의논하여 시행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13:1). 따라서 성경에 있는 것이면 그대로 시행하고, 사람과 의논하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2) 소수레에 실은 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시행했던 방법인데 하나님은 이방인의 법이나 풍속을 받아 들이는 것을 싫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결혼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3) 인간의 지식과 과학을 이용한 것인데 하나님은 과학적인 이용도 자기 뜻에 위반되는 것은 좋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4) 편안하고 빠르게 인도하자는 것인데, 하나님은 능률보다 자기 뜻에 복종하는 성도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는 이방인 풍속이나 지식이나 능률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9과 참포도나무와 가지비유 (요 15: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참포도나무와 가지비유”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에서 나타내 주시는 중요한 교훈 몇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교는 너무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참포도나무의 반대는 들포도입니다(사 5:2). 참포도나무란 뜻은 참된 분이란 뜻입니다. 요 14:6의 “내가 곧 진리요”하신 뜻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도 참성도, 참신자, 참교회, 참목사, 참집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짜 꿀, 진짜 참기름이란 말이 있습니다. 진짜 꿀은 설탕물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진짜 참기름도 다른 종류의 기름이 섞이지 않아야 하듯이, 참성도는 성경에 이탈하는 부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명예욕, 현세욕, 자기교만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주님만 닮아가는 성도가 진짜 성도인 것입니다.

2.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물 창조의 목적이나 성도되게 하신 목적이 하나님 영광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못 맺으면 그 나무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생명, 건강, 지혜)와 은사(기도, 말씀, 봉사, 성직들)에 따라서 주어진 환경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으로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3절의 “이미 깨끗하였으니”하신 말씀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① 선택구별하시고, ② 거듭나게 하셔서, ③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요 13:10), ④ 모든 죄에 대한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⑤ 한가지 주의 하셔야 할 것은 자신이 현재도 깨끗한 줄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죄의 은혜와 과거의 죄에 대하여 용서는 받았지만 우리의 인격에서 죄의 성질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남아 있는 죄의 성질을 계속 없애기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노력해야 합니다(요 17:17). ⑥ 또 “깨끗하여졌다”는 뜻은 주님의 권속이 되어 주님과 동거연합할 수 있는 대상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4. 연합을 강조하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포도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연합이란 주님을 내 속에 모시는 것이요,

2) 그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함이요,

3) 그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성도가 자기 속에 예수님을 모시려면 우선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기의 주관이나 목표나 교만이나 고집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연합의 뜻은 내 육체와 주님의 정신을 결합 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성도의 몸을 “성령님의 전”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고전 5:19). 내 속에 주님이 사시게 하는 연합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5. 기도의 응답입니다. 7절에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① 주님과 연합을 잘함이 그만큼 하나님과 가깝다는 뜻이요, ② 주 안에서 살고, 주와 연합된 자는 무엇이나 주님 뜻대로 구하는 자요, ③ 하나님은 그런 소원을 잘 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6.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절 말씀에서 과실을 잘 맺는 가지는 더 잘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게 하시고, 6절에서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는 밖에 버리워 말라지며, 불에 던져 사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잘 하는 자에게는 더 잘 되게 하시고, 죄되게 하는 자에게는 엄히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 말씀에서 “성도가 주님과 연합을 잘하여 영광의 열매를 맺는 참신자가 되어야 할 것”을 교훈 받은 것입니다.

 

제10과 형제가 범죄함을 볼때 (갈 6: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는 형제의 범죄한 일이 들어났을때 성도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의 형제란 자기와 가까운 믿음의 형제를 뜻합니다. 불신자가 범죄하는 것이나 믿는 신자라도 자신과 친교관계가먼 사람이 범죄했을때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관심을 적게 나타내지만 자기와 친한 사람, 또 자가와 한 교회에 있는 이웃이 범죄했을때는 그 일에 대하여 다양한 처신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혹 숨겨주려는 사람, 위로해 주는 사람, 책망하는 사람, 듣지 않는 곳에서 비난하는 사람등 여러가지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형제의 범죄가 크고, 크게 문제되는듯이 문책해야한다 하면서 자신은 그런 유혹을 안받는 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성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입니까?

1. 신령한 성도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자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신령한 자”란 믿음이 강하고 지혜로운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관주성경은 설명했습니다(롬 15:1, 고전 10:15). 따라서 믿음이 있고, 지혜로운 성도이면 당연히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되,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도록 온유한 심령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범죄자를 지도하는데는 특별한 배려와 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도 그런 유혹을 받고 범죄할 위험이 없는가?에 대하여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다른이의 눈에 티는 잘 보면서 자기눈의 들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완전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또 자신은 범죄유혹 당할 우려가 없는줄 알아서 다른이의 잘못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충분한 위험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바울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가 함께 거하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하고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죄악이 거하고 이웃형제가 범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범죄로 나 자신을 깨우쳐 주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곡식 밭의 가라자가 뽑힐때는 곡식을 해롭게 한다”(마 13:29) 하시므로 가라자가 있으므로 곡식에게 유익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성도가 자기 곁에 있는 성도의 약점을 볼때 자신의 약점을 살피고 발견케 하시기 위함인줄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의하여 악도 사용하시는 분입니다(잠 16:4). 예를들면 욥의 연단을 위하여 사탄을 이용하셨고(욥 1:12, 23:10), 예수님의 속죄사업에도 가룟유다나 핍박자들을 쓰셨으며, 바울사도를 로마로 보내어 이방인에게 선교하게 하실때도 악한자들의 고소가 있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성도는 이웃의 범죄자를 볼때 반드시 자신을 살피면서 자신의 성화를 위해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된줄로 착각하면 크게 위험할 것을 지적해 주셨습니다(3절).

3.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뜻은 형제의 범죄에 대한 책임등 여러가지 무거운 짐들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나누어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이란 남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시는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져 주셨고, 죄짐을 함께 지는 것이 큰 사랑이라면 우리도 형제의 죄를 너그럽게 여겨주고, 또 용서하기를 쉽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마 6:12).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곁에 범죄하는 형제가 있을때 그를 무조건 증오할 것이 아니라 ① 나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보여 주는 것이고, ② 나는 그런 범죄의 위험이 없는가? ③ 나는 그에게 얼만큼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인가?를 꼭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1과 기독교의 신앙생활 (계 3:20~22) 목록으로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구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대한 것을 다양하게 구상하면 내용이 한이 없습니다. 우선 생각나는대로 몇가지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은 무엇을 나타내주셨습니까?

1)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하신 말씀에서 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과(요 14:9), ② 찾아 오시고 두드리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고,

2) 인간이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는 말씀에서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문을 열어 진리를 영접하는 사실을 말씀하셨고,

3) 마음문을 열고 진리되신 예수님을 영접할때에 주님이 그에게로 들어가시는 사실, 즉 인간과 예수님이 연합하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고,

4) “그는 나로 나는 그로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에서 주님과 연합된 동기생활을 말씀하신 것이요,

5) 21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님의 영원한 보좌에 합석하는 특권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이기는 자”라는 뜻은 신앙생활을 현실생활 속에서 성공적으로 잘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찾아오신 구세주를 영접하고, 연합하여, 복종하는 생활을 잘 하면 주님도 함께 살아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복을 함께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신 기독교 생활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즐거워하며, 주님 뜻대로 살면서 주님의 것으로 영원히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1) 기독교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인줄 알거나 아니면 세상과 나와의 관계인줄로 착각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의식하기 전에 인간문제와 세상살이 문제를 앞세우거나 그것들 때문에 진정한 신앙의 문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볼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를들면 신앙생활을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고, 무슨 인간적 취미와 재미로운 것이 있는가를 살피는 사람, 무슨 도덕적 수양의 가치 있는 교훈이 있는가를 엿보는 사람, 또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물질의 덕이나 병고침이 있는가를 엿보는 사람, 또 외로운 사람은 목사나 교인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며, 관심을 가져 주는가?하여 거기에만 마음을 쓰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는 무관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잘못된 일이요, 기독교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들이 혹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 부스러기 은혜일수는 있을 것입니다.

2) 따라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① 우선 찾아오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요 5:39). 성경을 배우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성경과 자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② 발견한 예수님(진리=성경)을 영접할때 자신은 그 앞에서 죽은자나(롬 7:9) 아니면 종이 되고(요 13:16), 예수님을 자기 인격의 머리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우신 주님 앞에 죄인된 자신이 굴복을 하고(눅 5:8), 자신을 포기한 대신 주님을 바꾸어 모시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뜻대로 살게 되면 가치관이 달라짐은 물론, 생활의 목표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신과 자신의 목적과 현실적 영달에 두었던 가치관이 예수님을 주로 모신 후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을 최고의 가치로 깨닫게 되고, 목적 또한 현실에서 신령한 것과 내세의 소망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와 가치관의 교체가 없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④ 기독교 신앙생활의 방법은 오로지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취미나 목적은 이차적인 문제요, 우선 성경대로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생활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생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인격이 예수님 인격으로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동된 후에 성경에 복종하는 생활이어야만 기독교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12과 승리하는 생활 (히 10:1~2)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크게 두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서 “믿음생활을 운동경기처럼 하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2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가지 교훈을 주신 목적은 저희들의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승리하는 생활”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승리하는 방법으로

1. 믿음생활을 운동경기처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하셨는데 이들은 운동경기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이요, 응원하고 감시하는 관중들입니다.

1) 성도는 경기자로서 관중을 의식해야 합니다. 물론 양식도 의식해야 하고, 감찰하시는 하나님도 의식해야 하지만 꼭 우리의 이웃도 의식하여 바른 행동만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경기자는 얽매이기 쉬운 것과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거리낄 것이 없도록 회개하고 최대한 결백한 생활을 하여야 하며, 또 신앙생활에 장애로운 요소들도 제거하고, 생활과 환경이 적합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인내로서 경주하는 것입니다. 운동에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신앙생활이나 사명생활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4) 고전 9:24~25에 보시면 “운동에서는 이기는 자만 상을 얻는다”하셨고, 딤후 2:5에서는 “법대로 경기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규칙을 잘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신앙생활은 믿음을 가지고 마귀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란 믿음을 주시는 분, 믿음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마귀와 싸우기에 부족하면 믿음의 주께 더 큰 믿음을 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막 9:24). 믿음의 주를 바라보시고 값진 믿음을 가지셔야 하며,

2)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전케 하신다”는 뜻은 죄로 인한 모든 불행에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며,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사함과 성화와 영생으로 성취됩니다. 이것들은 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사시는 분입니다. 즉 내세에서의 영광만 소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은 자기의 나라가 아니요,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광만을 사모하시면서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신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세상에 집착함이 많고, 내세의 소망이 약하다면 승리하게 어려울 것입니다.

4) 십자가를 참으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십자가에서 벗어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상태에서 자원하여 지신 것입니다(마 26:53, 요 10:18). ② 죄없이 당하신 것이요, ③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요, ④ 아주 희생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속에는 영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영적 의미란 죄의 대속을 뜻하고, 도덕적 의미란 성도의 생활모범이 십자가에 담긴 뜻처럼 순종, 겸손, 인내, 대신담당, 희생등의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때문에 부끄러울 일이 없는 분이지만 죄인의 취급을 받으심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있으면서도 회개하는 것과 책망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6) 그리고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므로서 고난과 사랑의 생애를 거친 주님의 미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바라보실때 저희들의 신앙생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믿음생활을 운동경기처럼 생각하시고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13과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고후 11: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는 제목과 함께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고린도교회에 2차로 보내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1.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는 사정을 하셨습니다.

1) 이 사정의 뜻은 바울사도 개인의 입장을 동정해 달라는 뜻이 아니고,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말씀을 전파할 수 있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사례비를 받고 일하시지 않았으며(11:7), 마게도냐교회네서 그의 생활비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9절). 따라서 이 사정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 바울사도에게 어리석은 점이 있었다면 말이 유창하지 못함일 것이나 바울사도에게는 그의 부족이 없는 분이었습니다(6절).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음이란 오해로 받는 비난때문이었고(8절), 다른이의 모함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겸손의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거짓자들의 유혹을 쉽게 받아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4절) 자신의 신뢰를 더 호소하시게 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사역자를 분별 못하고, 거짓교사를 따르므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4)오늘의 성도들도 복음사역자에게 어리석은 면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용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사역자의 실수나 고의로 인한 잘못에 대하여는 상회의 지도자들이 그것을 교정, 지도하고 책망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은사가 부족한 면에 대해서는 모든 사역자가 다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고전 12:11) 그것을 탓하여서는 안됩니다. 성도가 소자나 원수도 사랑해야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자를 존중히 여기며 잘 순복하는 성도의 세계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교회도 부흥형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의 소속한 교회의 목사가 자기중심에 맞기를 바라거나 또는 다른 부흥강사처럼 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지만, 은사가 한가지로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또 목사 개인의 독특한 주관이 있기 때문에 결국 성도는 목자의 교훈과 생활로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여러양의 입장을 따를 수 없고, 오직 양들이 목자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요 10:2~6).

5) 요즈음 현실교회에 잘못된 인식이 많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 장로, 또는 교인인줄 아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는 헌금을 할때 하나님(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스리는 책임이나 하나님의 재정을 사용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대행하여 일하는 담임목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교인이 예배당 건물의 지분권이 있다거나 교회재정을 쓸 권리가 있다면 그의 헌금은 헌금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원리를 이해하여 복음사역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교회헌법이 정한 당회나 제직회의 직무는 어디까지나 목회자의 일을 받들게 하기 위함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스위스교회처럼 좋은 목사도 없고, 그른 목사도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의 풍토가 아쉽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성경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2. 열심있는 하나님처럼 바울사도도 열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시간을 아끼고 그 아끼는 시간에 값비싼 일을 많이 한다면 그는 인생을 늘려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떤이는 10분을 아무것도 아닌듯이 헛되이 보내지만 열심히 사는 자는 그 10분에 중요한 일들을 다 처리하는 것입니다.

3. “주님께 정결한 처녀로 중매한다”하셨으니 성도는 우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정결한 처녀처럼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하며, 신부는 신랑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또 신랑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예수님께 필요한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4과 자랑을 삼가야 함 (고후 10:12~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랑을 삼가야 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에서 최초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분은 바울사도였습니다(행 18:1~8). 그리고 바울은 또 다른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중에 고린도교회 안에는 파쟁도 생겼고(고전 3:4), 바울을 불신하는 풍조도 생겼는데(고전 4:13) 이런 일은 거짓된 사역자들이 접근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공력을 자랑하며, 바른 신앙생활을 크게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자신의 정당한 입장을 말씀하시고, 자랑을 삼가게 하신 것입니다.

1. 12절에 보시면 “바울의 일행을(우리가)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견주어 비교하면 안된다”고하셨습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은 거짓사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 거짓사역자들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비교의 대상은 예수님이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최대한으로 경건한 성도에게 자기를 비교하고 그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생각과 표준으로 자기를 평가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화자찬격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동리에서는 퍽 유력한 어부였을 것입니다. 그가 혹 고기 잘 잡는 기술을 자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으로 고기를 잡았을때 예수님의 신분과 자기를 비교해 보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고 한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신 후 “자신은 자랑할 것이 없는 줄로 아는 것”이 바른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3. 13절에서 바울 일행은 “분량이상 자랑하지 않는다”, “분량의 한계를 따라한다”하셨는데 이 말씀은 거짓된 자들의 과장 선전을 지적하시면서 자신들은 그렇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분량의 한계”란 복음전파의 관할 지역에 대하여 한계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거짓자는 남이 한 일도 자기가 한양 공로를 내세우고 또 책임의 한계를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지만 바울의 일행은 그렇지 않은 상태로 고린도교회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14절).

4. 15~16절의 말씀은 “남의 수고를 자기 수고인양 자랑하여서는 안되고 다만 성도의 믿음이 더하여짐에 따라 선교의 사명을 갖고 그 지경을 초월하여 다른지역으로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5. 결론적으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고, 자기를 칭찬하지 말며, 오직 주님의 칭찬을 받는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7~18절).

1) 주 안에서의 자랑이란 주님만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주님 안에서 사는자요, 또 주님이 성도 안에 계시므로 연합의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있는 상태에서 서로 비교할때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고, 주님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자랑과 세속적인 것을 자랑하라고 유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현실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2)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기가 유력하여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인간의 모범자이신 예수님과 비교할때 너무도 초라하여 자랑할 수 없으며, 설령 자신이 무슨 큰 공로를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가 한 것이 아닌 주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10).

3) 옳다고 인정을 받는자는 주님이 칭찬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단 사람의 칭찬은 확실한 표준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와 겉은 알지만 과거와 미래, 그리고 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칭찬이란 바로 성경에 부합되는 생활에 따르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자신의 자랑을 삼가고 주님만 자랑해야 하며, 경건한 성도의 칭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성경적 생활에 따른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5과 예수님의 침묵 (마 17:11~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침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판을 받으시는 과정에서 대제사장이나 총독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은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재판과정에서의 한마디 한마디 대답은 “정죄를 받느냐 안받느냐?”하는 중대한 문제가 결정되는 일이므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우선 대답하시지 않은 상황을 살펴보면

1) 마 26:62과 막 14:6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대제사장들과 공회원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해치고자 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증인 두사람이 와서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된 말인 것이 예수님은 요 2:20에서 “자신이 성전을 헌다”하시지 않고, “너희가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한지 말하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은 “잠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그들은 거짓증인을 둘이상 세웠고, 그들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예수님 한분의 변명이나 해명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대제사장이 “네가 그리스도냐?”하고 물었을때 마 26:64에서 “네가 말하였느니라…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하셨고, 그 다음 재판때에 총독이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셨을때도 “네 말이 옳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본문). 이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송사를 해명하는 일에는 대답하지 않으셨으나, 자신의 신분, 즉 “그리스도, 왕”이란 사실을 증언하는 대답은 확실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1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대답도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재판과 빌라도는 “저들의 고소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였는데도(12~14절) 역시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기이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막 15:4, 눅 22:67). 이때에 대답하시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실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눅 22:67)하셨고,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하였을때는 역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눅 22:70, 23:3). 따라서 신분에 대한 대답은 하시고, 변명에 대한 대답은 하시지 않은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2. 왜 이렇게 대답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1) 구약성경 사 53:7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하여 예언하시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신 일에 대하여 변명이나 불평이나 고통의 소리르 내지 않으시고 돌아가실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침묵은 거짓송사자들의 말을 “아니라”고 변명한다 하여도 그들이 계획적으로 더 많은 증언자를 세우기 때문에 변명하셔도 결과는 꼭 같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성격이 택한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자신이 담당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결백성을 나타낼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다른이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4) 만왕의 왕되신 주님이 거짓된 송사자들과 시비 싸움을 벌이신다면 그것은 왕적 권위에 손상이 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예수님의 이 침묵을 예수님의 3대 직분과 비교하여 ① 선지자적 침묵(예언을 이루신 것), ② 제사장적 침묵(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 ③ 왕적 침묵(권위를 보존하신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결론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억울한 일이라도 자신이 담당하고, 침묵할줄 아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바로 이것을 배우는데 목적을 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제16과 승리자 예수님 (고전 15:55~58) 목록으로


이 시간에도 “승리자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승리자라는 말씀이 성경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57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그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도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승리를 하셨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승리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승리하신 일에 대하여 요 16:33에 보시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환난을 당하시면서도 죄와 싸워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릴때부터 환난을 당하셨습니다(마 2:13). 또 공생애 초기에도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마 4:1~11). 그리고 사명생활과 함께 계속되는 핍박도 이기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에서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는 분이라”고 하시므로 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① 마 4:에서 보면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셨고, ② 요 16:33에서는 “담대함”으로 이기셨고, ③ 히 12:2~3에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참으심”으로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본문 말씀 57절에 보시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다”하셨으니, 저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환난과 세상에 대하여 승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유혹과 핍박을 이기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파한 것은 바로 그런 승리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절을 맞는 저희들에게도 그런 승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에서 승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창조자이시고, 생명의 근원자이시며, 구원자이시고, 또 영원한 승리자이신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은 우주 역사중의 최고의 이적이요, 최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죽음을 맛보시고(히 2:9) 다시 살아나신 것은 만물창조보다도 훨씬 특이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하셨는데 이 말씀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거나 패하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이 율법이란 말씀은(56절) 죄가 율법으로 성립되고 죄의 결과가 사망인데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이겼으니 결국은 율법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어떻게 정죄를 하건 상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이김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52절과 54절에도 보시면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하셨고, 또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죽음은 일시적인 취침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 15:51, 살전 4:13).

3. 그 다음의 승리는 또 어떤 승리입니까? 이것은 마귀를 영원히 가두는 승리인 것입니다. 이 마귀에 대한 영원한 심판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승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동안 필요에 의하여 마귀의 활동을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통제하시기도 하셨습니다(욥 2:6). 어떤때는 천녀까지도 가두셨습니다(계 20:2). 그러나 계 20:10에 보시면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하시므로 마귀에 대한 최후 승리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3가지 승리를 하신 분이고, 또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도록 하신만큼 저희들은 이 승리를 믿고 믿음과 사명에 흔들림 없이 현실을 이겨 나가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7과 단지파의 역사 (계 7: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은 말씀인데 4천사는 땅의 환난을 멈추게 하는 책임을 맡았고, 또 한천사는 해 돋는데로부터 올라와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 하여(이스라엘 각 지파의 종들에게 인을 쳤는데) 그 인친자의 수가 144,000명이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거론한중 단지파가 빠지고 남은 지파의 인 맞은자가 각각 12,000명씩이었습니다.

1. 그러면 여기의 인 맞은자가 어떤 사람인가? 할때 12지파에 예속된 하나님의 종들이었고, 그들은 요한이 당시에 믿음과 사명을 잘 지키고, 천국에 갈자들이었습니다.

2. 여기의 144,000명은 12,000명씩 12지파의 수를 곱한 것이니까 특별한 해석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이 숫자는 사도요한이 계시를 보는 그 시점에 있었던 수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파가 빠졌으니 과연 그 지파중에는 인 맞은 하나님의 종들이 없었는가? 할때 합계의 수까지 명시하여 발표하신 것을 보면 없다고 보는 것이 확실할 것이며, 만일에 여기의 숫자가 상징적인 수라면 그만큼 수를 자세하게 나타내어 합산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3. 여기에서 하나님은 각 지파에서 꼭 같은 수로 하나님의 종들을 배출하셨다는 사실을 살필때 숫자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순번을 말씀하실때 유다지파를 앞세워 르우벤, 갓, 아셀지파로 나열한 것에 무슨 뜻이 있는가? 하는 점과, 요셉지파를 나타낼때 요셉의 두아들 지파로 나뉘었으면 큰아들 므낫세지파와 둘째아들 에브라임지파라고 해야하는데 “므낫세지파와 요셉지파”라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연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이 시간에는 왜 단지파만 빠졌을까를 연구하기 위하여 단지파의 역사를 살펴본 것입니다. 단은 야곱이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낳은 다섯째아들입니다(창 30:6). 그 지파가 400년 후에 애굽에서 나올때 장정의 수가 602,700명이었다니까(출 1:4, 민 1:39) 광야생활 말기에 인구가 더 늘어서 604,400명이 되었습니다(민 26:42). 그리고 그 시기에 족장은 “아히에셀”과 “북기”였습니다(민 1:12, 34:22).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때 여호수아가 그들의 분깃을 정해준 땅은 사해바다 서쪽 지중해변경을 제비 뽑아서 나누어 주었습니다(수 19:40~48). 그런데 그들은 불레셋족(아모리족)을 대적하지 못하여 자기들 분깃을 뺏지 못하고 산지로 쫓겨났습니다(삿 1:34). 그들이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전쟁을 기피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삿 5:17).그때에 삼손이 태어나서 20년간 종족을 보호했지만 삼손은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한 잘못과 하나님의 능력의 비밀을 이방여인에게 누설한 것때문에 결국 자기도 죽고 자기 종족을 불행에 빠뜨렸습니다(삿 13:5~16:). 그래서 그들은 다른 정착지로 이주하기 위하여 용사 5인을 갈릴리바다 북쪽 “라이스”지경으로 탐색을 보냈는데(삿 18:1~2), 그들이 그곳에 가서 미가의 신당을 발견하고, 그 신당을 자기 지파로 뺏어왔으며(삿 18:14~26), 또 6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라이스 거민을 쳐부수고, 그곳에 “단”이란 성읍을 건설하고, 미가의 집에서 뺏아온 불법제단과 신상을 자기들의 종교시설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왕정시대에 와서 아사렐이란 장관도 나왔고(대상 27:22), 다윗왕때는 28,600명의 군사도 배출했으며(대상 12:35), 장식품을 만드는 기술자도 나왔는데(대하 2:14) 바벨론 침략때는 이 지파가 복쪽에 있기 때문에 먼저 피해를 받았고(렘 8:16), 바벨론에서 해방될때는 예루살렘에 성문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겔 48:32). 그런데 중요한 예언은 암 8:14에서 “단의 제단에 의존하는 자는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시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6. 따라서 결론적으로 어떤이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새끼라”(신 33:22)는 모세의 예언한 말씀을 이단으로 해석하여 그 지파가 빠진 이유라고 하지만 역사를 추적해 볼때 단지파는 전쟁에 게을러 자기분깃을 못찾고, 이주한 족속이며,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평안한 백성을 쳤고(삿 18:27, 신 33:22), 불법제단(이단)마저 착취로 설립하여 그것을 숭상한 것이 큰 이유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18과 예수님처럼 자라자 (눅 2:51~52) 목록으로


5월 첫주일은 어린이를 위한 교훈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예수님처럼 자라자”는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 유년기(12세쯤)에 자라시는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1) 51절에서는 “예수님이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부친 요셉의 목수일을 도우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목수라는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친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받드시는 것”이 귀한 것이요, 이 사실을 그 모친 마리아가 마음에 간직할 만큼 소중하게 여긴 것은 주님의 효도가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2) 52절에서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나셨고, 또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면서 자라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보통 사람과 같으면서 은혜롭게 자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예수님처럼 은혜롭게 자라기 위하여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셨습니다. 지혜는 배워서 얻는 지식이 아니고, 스스로의 총명이 더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깨달음입니다. 오늘의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때 이런 지혜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② 키가 자라셨습니다. 여기의 “키”란 건강과 아울러 정상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건강을 지키시는 것과 키가 자라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출 15:26, 마 6:27).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잘 키워 주실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인데 성도가 믿음을 가지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순종만 잘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④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려면 진실하고 겸손하며 봉사적인 인물로 자라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현재 자라나는 자녀들의 마음가짐이나 생활을 볼때 어른들의 생각대로 양육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들면 예절이 부족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어른들이 땀흘려 번 돈이란 관념도 없고, 아끼는 것도 없으며, 이기심과 의존심만 가득하고, 게으르며, 늘 욕구불만과 향락적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녀들도 혹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가정에서는 자녀교육을 위한 특별한 각성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정의 교육실천의 예로,

1)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함께 앉아서 이마를 맞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간단한 가정예배로 진행하는 것도 좋습니다. 앞으로 자녀에 대한 주일학교 교육은 반드시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지고 지도하는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성경 가르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짐이 꼭 있어야 하고,

2) 부모가 자라나는 자녀들이 얼마나 성경을 절대권위로 믿으며 실천하려는 의지가 보이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굴복할줄 아는 자녀만 만든다면 무조건 교육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부모가 매사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① 언어에 본을 보이고, ② 근면에 본을 보이고, ③ 절약과 인내와 절제에 본을 보이고, ④ 사랑과 봉사에 본을 보이고, ⑤ 교회를 섬기는 생활에 본을 보이면 아무래도 자녀들은 거기에 감화와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4) 부조리한 TV프로그램이나 정서를 해치는 것들, 또는 나쁜 친구들과 회동하는 것들을 극히 삼가게 하는 대신에 가끔 부모들과 함께 건전한 교제의 기회를 가지므로 가족적인 친밀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5) 자녀들로 교회생활에 적당하게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5가지만 잘 실천되면 그 자녀는 절대로 탈선되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세대차이에 물들어 가는 자녀들을 시대에 적응하도록 교육하는데는 많은 지혜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합당하게 보실만한 후세대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의 어린이 교육은 자기에 관한 일을 반드시 자기가 책임지게 하는 교육과 공동생활을 질서있게 하는 교육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어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19과 유아교육의 필요성 (잠 22:6)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이 시간에는 자녀교육과 관련있는 말씀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① “마땅히 행할 길”이란 말씀이 있고, ② 이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 있고, ③ “그리하면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세마디의 말씀에 따라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아이에게 가리켜야 할 “마땅히 행할 길”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은 부모가 먼저 본을 보이면서 성경 가르치는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요,

2) 정의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요,

3)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요,

4) 항상 근면하고, 배우기를 힘쓰는 자녀가 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릴때에 교육을 시키는 것은 마치 나무가 커지기 전에 그 나무를 휘어잡아 바로 자라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커지면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기 어려운 것이 마치 자녀들이 커지면 세속에 물들어 있는 상태에서 바로잡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어릴때에 성격과 목표와 생활습관이 이루어져야만 장성한 다음에도 세속의 물결을 피하면서 믿음생활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자녀들이 어릴때 신앙교육을 강하게 시키지 못한 탓으로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믿지 않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세속으로 물드는 것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때에 확실하게 교육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년기에 믿음의 확신을 갖고, 그 확신의 힘으로 청소년기의 탈선케 하는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하고, 유년기의 교육이 그렇게 되도록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재의 가정교육이나 교회교육이 그것을 잘 성취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눅1:15에 보시면 세례요한이 “복중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은혜는 기도로 성취할 수 있고, 유아교육이 태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내세우시면서 “천국이 이런자의 것이라”하시고,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8:6, 막 10:15).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어린아이의 순결을 보존시키는 교육을 하라는 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어릴때에 교육을 잘 받으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어릴때의 교육은 사상과 목표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어릴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강조하여 교훈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유념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사람은 늙을수록 어릴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추억으로 남기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시면서 자녀가 어릴때에 부모가 책임지고 교육하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고, 가르쳐야 할 것은 예절과 바른 말을 하는 것이요, 성수주일과 예배에 임하는 태도요, 정의롭게 사는 생활이요, 겸손과 봉사를 일삼게 하는 일이요, 무엇이나 배우기를 힘쓰게 하고,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자녀교육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주장을 참고한다면 ① 부모가 자녀들의 자부심을 꺾지 말고 야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자녀의 무능을 비난하지 말라 하였고, ② 자녀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치라 하였고, ③ 친구를 바로 사귀고, 물건 간수하는 방법을 가르치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여하튼 자녀교육은 현실문화세계 안에서 바로 가르치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자녀를 위한 기도를 쉬지 마시고, 오직 신앙과정의 세계에만 있도록 지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십자가 상의 효도 (요 19:25~27) 목록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효도에 관한 교훈으로서 “십자가 상의 효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때는 돌아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때문에 기독교는 부모를 저버리는 불효의 종교라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취급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길흉사의 의식이 많이 변화됬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조상적부터 시행해 오던 제례의식을 잘 계승하지도 못할 뿐아니라, 제례의식의 뜻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열심이 식어진 탓일 것입니다. 또 기독교에서는 죽은자의 영혼이 산자의 제사를 받을 수 없다는 교훈으로 많이 계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우선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란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 인륜계명의 첫계명으로 주셨기 때문이고(출 20:12),

2)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조건적으로 주셨기 때문이고(엡 6:1~3),

3) 불효자를 중벌로 다스리되(출 21:17, 신 21:18~21)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를 처단하는 벌과 동일하게 처벌하도록 하셨기 때문이요(레 24:15, 16),

4) 복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이 지극히 효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에게 효도한 사실이라든지, 솔로몬왕이 그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효도(왕상 2:19)는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효도를 하셨는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효도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탐색해 보면 귀한 효도가 포함된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눅 2:51을 보시면 “예수님이 나사렛에 가셔서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받들어 드렸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수님의 부친 요셉의 기사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분은 단명했을 것으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장자로서 모친과 동생들을 부양하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2) 이렇게 살아오신 예수님의 효도는 십자가 상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난의 정황에서도 그 어머니 마리아의 생계를 염려하여 젊은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네 어머니처럼 봉양하라)하시므로 모친의 생애를 부탁하셨으니 우리는 이같은 예수님의 효도를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의 효도는 변함이 없는 효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릴때나, 어른때나 꾸준히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도 역시 어릴때나, 총리가 됬을때나 변함없이 효도를 하였습니다.

② 예수님의 효도는 환경을 초월하는 효도였습니다. 요즈음 사정이 있어서 효도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방이 부족해서, 장남이 아니어서, 시골에 계셔서등등의 이유를 들어 효도를 경솔히 하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자신에게 고난이 있을때는 더더욱 부모를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마지막 순간까지도 효도의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큰 효도가 아닐 수 없고,

③ 자신의 힘이 모자랄때 다른 제자(친구)의 도움을 청하여서까지 효도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효도는 “내가 사는 동안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난 다음이라도 부모님들에게 효도할 수 있는 다른 대책을 세워 놓아야만 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다른이의 어머니 모시는 것을 자기의 어머니 모시듯 하였을 것입니다. 그후에 사도요한은 12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고,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까지 기록하는 큰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효도의 종교를 신봉하면서 또 예수님의 효도의 모범을 알면서도 효도를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하셨고(잠 16:13), 욥은 노인을 지혜자로 예찬했으며(욥 12:12), 룻은 징계받은 노오미를 시어머니로 모셨기 때문에(룻 1:13, 21)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모님을 오래 모시고 효도를 잘 하여 복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21과 성령의 세례와 충만 (행 1:5, 엡 5: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세례와 충만”이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령론에 대하여 많이 듣고 공부하셨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이 “성령의 세례가 무엇이냐?”, “성령의 충만이 무엇이냐?”, 또 “성령의 세례가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고 묻는다면 대답 못할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성령 충만을 기대하는 성도들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이고, 특히 신령한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들은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들도 이런 지식에 의견이 같지 않아서 자주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만, 저희들은 성경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에 나타난대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대로 증언만 하면 될 것입니다.

1.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 우리는 세례의 뜻을 잘 압니다. “쏟아 부었다”는 뜻입니다. 적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쏟아 붓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의 뜻은 성령님이 크게, 강하게, 폭넓게 역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행 1:5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즉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요한이 물로 세례준 것은 요단강에서 물을 부으면서 세례준 것을 의미합니다(지금은 그것이 더 약식이 되었음).

2) 그리고 몇날이 못되어 성령세례가 나타난 것은 바로 행 2:1~4에서 증언하신대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님의 큰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예수님이 약속대로 주신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면(마 3:11, 막 1:8, 행 1:5) 예수님도 성령세례를 받으셨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받으신 사실은 마 3:16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하신 말씀이나, 눅 2:18과 요 1:16에서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주신 사건은 오순절 당시에 폭넓게 강하게 역사하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행 2:17, 11:16). 그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는 거듭날때 역사하시는 단순한 역사보다 좀더 충만하고 광대하게(때로는 단체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충만에 대하여 성경에는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다양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예를들면 요 1:14에서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이 있었다”하셨으니, 예수님이 받으신 성령충만은 완전한 은혜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행 2:4에서의 충만은 “모인 무리들이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여 여러모로 변화되는 상태”를 말씀하셨고, 행 6:3에서는 “집사되는 자격”으로 설명하셨으며, 행 6:8에서는 “증언자의 은사”를, 행 7:55에서는 “순교자의 자세”를, 행 13:9에서는 “핍박중에 전도하는 형편”을, 행 13:52에서는 “전도와 함께 기쁨을 누리는 형편”을, 또 눅 1:15에서는 “세례요한이 태중에서도 성령충만을 입었다”하셨고, 눅 1:67에서는 “사가랴가 성령충만으로 예언을 했다”하셨으니, 이 말씀을 볼때 어느것 한가지만 잘해도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성령충만은 한가지 잘한다고 충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이가 기도를 잘하여 “성령충만하다”고 하였는데, 그가 “성경을 거의 모른다”고 할때에 기도만 잘하는 은사로 성령충만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충만이 한부분을 지적했다 할지라도 다른 부분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란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스데반이 설교만 잘하는 성령충만이 아니라, 순교도 잘하는 충만이요, 바울의 충만도 선교만 잘하는 충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은 충만도 포함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11:1). 따라서 성령충만은 한두가지 은사에 표준할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닮아가는 그리스도의 형상화(롬 8:29)에 그 표준을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이 닮은자가 곧 성령충만한 성도인 것입니다.

3. 성령의 세례가 오순절때 나타난 것같은 사건이면 이것이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 하는 것은 그후에 나타난 사례를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대로 성취된 것만 기록하셨고, 반복적으로 주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어떤 은혜의 역사를 오순절때와 같다고 보는 이는 반복적이라 하고, 본질상 같지 않다는 이는 단회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아직은 오순절때의 역사와 꼭같이 역사하신다고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데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2과 교회의 사명자 (딤전 3:14~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의 사명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5절에 보시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알게 하려 한다”하시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성격과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교회의 성격을 말씀하심에서,

1) 하나님의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셨으니 ①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신 말씀에서 가족관념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② 하나님의 교회란 인간의 교회가 아님과 동시에 하나님께 소유된 교회란 뜻이요, ③ “진리의 기둥과 터”란 교회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으로 교회가 진리(성경)의 보존과 해석과 전파와 시행의 사명이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16절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하시고, 경건의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이 경건의 비밀은 곧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① 경건이란 말은 “유세바이아스( )”로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명사이며, 또 예수님을 “비밀”이라 하심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구약의 예언 속에 감취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② 그런데 도성인신하여 탄생하셨고,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셨으니, 이는 성령의 역사로 부활하시므로 부활전에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임을 입증하신 것이며, 이런 사실을 천사들에게도 알리셨고, 만국에도 전파하셨으며(행 2:5~11), 영광중에 승천하셨으니(행 1:9) 놀라운 경건의 비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사명자는 어떤 자격과 목표를 가지고 일해야 할 것입니까?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하나님 집(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자의 자격과 봉사의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교회를 섬기는 자의 자격은 상당한 은혜를 받은자이어야 합니다. 교회란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자의 신앙과 생활의 본으로 다른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 즉 교역자나 지도자는 ① 바른 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신학이란 칼빈주의 노선을 의미하는 것이고, ② 교파와 교회가 지향하는 사상적 목표에 합력해야 하며, ③ 표준적인 신앙생활에 모범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표준적 신앙생활이란 것은 성수주일이나 십일조나 예배의식등에 대한 표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어떤 목표로 교회생활을 하며, 또 봉사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거룩함을 목표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교회생활의 목적을 자신의 거룩에 두지 않고, 봉사와 사명에만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것은 진리의 사역으로 성도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함이므로(요 17:17) 교회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②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을 관철 시키려고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것인만큼(요 4:34) 성경을 위반하거나 인간주의를 내세우지 말고, 말씀의 의도대로 섬겨야 할 것이며,

③ 허탄한 것에 뜻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자가 어떤 명예나 보수나 칭찬등을 타산하여 거기에 얽매인다고 하면 봉사나 충성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음은 물론 하나님을 상대한 충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 24:4에서 “하나님의 성안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활의 터전이 아닌 성도들은 더욱 교회를 통한 명예적 이득을 멀리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사명자는 그 신앙적 자세와 봉사적 자세가 특별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23과 자신을 깨끗게 하자 (요일 3: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신을 깨끗게 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라”하셨고, 2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하셨으며, 3절에서는 구원완성의 소망을 가진 성도가 자신을 깨끗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함에 대하여,

1)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인생들에게 만물을 주셨고, 성도들에게 독생자를 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되는 명분까지 주셨으니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되고, 천국시민 된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데 이는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선택의 은혜, 속죄의 은혜, 거룩의 은혜도 크지만 이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자녀되고 천국의 백성된 신분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1) 2절에 보시면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하셨는데 ①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안된다는 뜻이 아니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② 다만 지금은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또 깨끗함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깨끗하지 못함이란 속죄의 미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순결의 미완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완전히 순결치 못한 저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2) “장차 어떻게 될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함은 인생인고로 장래 일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꼭 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①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과,

②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가 예수님같아 질 것을 아는 것과,

③ 또 예수님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 우선 성도의 몸이 부활하고 변화되어 예수님의 부활체처럼 영화로워질 것이고, ㉡ 영광과 지위도 예수님과 꼭 같은 일에 동참할 것이고, ㉢ 모든 생활의 즐거움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자와 양자의 행복에 대하여 차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계신 그대로 본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지만 그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바라볼 것입니다. 천국과 하나님을 보는 즐거움은 대단할 것입니다.

3. 따라서 이 소망을 가진자는 예수님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게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셔서 저희들의 상태를 그대로 천국으로 옮겨 가신다면 깨끗한 천국이 건설될 수 있을까요? 천국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자들만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들을 보고 자기를 깨끗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집갈 신부가 자기를 깨끗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혼인 날짜에 앞서 목욕 안하는 신부가 없는 것처럼 주의 재림과 내세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반드시 자신을 깨끗게 하여야 하는데 그 방식은 ① 말씀으로 표준을 깨닫고(요 17:17), ② 기도로 은혜를 구하며(딤전 4:5), ③ 자신의 의지적인 바른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수24:15,18).

결론적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는 자신의 거룩완성에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24과 육과 영을 깨끗게 함 (고후 6:14~7: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육과 영을 깨끗게 함”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순결치 못한 생활을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1. 이 말씀 앞부분에서는 거룩지 못한자와의 교제를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7:1에서는 성도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룸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거룩하지 않은 자는 불신자와 사탄에 속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 “믿지 않는자”를 말씀하셨고, 15절에서는 “벨리알(하나님을 대적하는 악귀의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들과 조화, 상관, 일치될 수 없음은 예수님과 귀신, 또는 성전과 우상의 제단이 조화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여 순결함을 지킬때에 그런자를 영접하시고(18절),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두루 함께 행하시며, 저희의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레 26:12과 출 29:45을 인용한 것임).

3) 7:1에서 이런 약속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성도가 자신의 육과 영을 깨끗이 하여 거룩함을 온전히 이룸에 대하여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육과 영을 깨끗게 한다”함은 자신의 모든 인격을 다 깨끗게 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은 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영혼은 죄를 계획하거나, 재배하거나, 마귀의 유혹에 따라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를 힘쓰면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딤전 4:5, 고전 4:6).

2)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그노스틱”파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종교, 이방종교, 희랍의 철학을 혼용한 학파인데, 영지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육체는 사악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져도 상관이 없고, 따라서 썩으면 그만이며, 영혼은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죄를 져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므로 육과 영의 순결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성도는 육과 영을 깨끗게 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할때 ① 사탄의 유혹은 말씀으로 대적해야 하며(마 4:4~11), ② 신령한 복을 추구하므로 현실의 욕심에서 떠나야 하며(마 6:33, 약 1:14,15), ③ 자기를 죽이면서 말씀 안에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중국 양나라때에 고행이란 과부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왕에게 들어가자 왕이 그를 후궁으로 청했을때, 고행은 그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자기의 코를 베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를 칭찬하여 “고행”이란 이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귀히 여길 것이로되 죄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얼만큼 노력해야 할 것인가?를 비유한 교훈입니다. 또 이런 차원에서 마 18:8, 9(손과 발을 찍어서라도 범죄를 피하라는 말씀)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따라서 육은 범죄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고, 악을 모양이라도 버리고(살전 5:22), 영이 죄를 계획하거나 지배하지 않을때 완전한 거룩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육신을 가진 금생에서도 가능할 것인가? 할때 본문 말씀은 살아있는 성도에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 것이니까(유혹의 요소인 현실과 육체가 물러갈때에 완성되는 것은 당연하시만) 성령충만의 은혜 속에서 금생에도 가능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25과 어떤 신자가 될까 (마 11:28~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어떤 신자가 될까”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너무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하셨고, 예수님도 이들을 다 초청하셨으며, 자신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게 하셨고, 예수님 자신을 배우라 하셨으며, 쉬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신자의 종류를 분별하면서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교훈받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다 오라하셨으니, 여기의 “다”란 뜻은 전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초청대상을 전부 모으시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을 초청하신 이유는 3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게 하심이고, 다음에는 예수님을 배우게 하심이요, 또 한가지는 진정한 휴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현실교회에 출석한 성도들도 멍에를 메는 자, 예수님을 배우는 자, 또는 믿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휴식을 누리는 자로 나누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교회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려하지도 않고, 또 그리스도를 배워 닮으려 하지도 않고, 주님을 모신 상태에서 진정한 자유와 휴식을 맛보지 못하는 성도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 자신들이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할까?를 구상하다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는 자, 예수님을 닮는 자, 진정한 자유와 휴식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1) 멍에를 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란 자기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태도요, 겸손이란 누구 앞에서나 자기를 낮추어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성도들도 온유와 겸손으로 믿음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뜻은 예수님의 지식에서부터 성품과 말씀하시는 것과 생활하시는 것,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 대처하시는 모든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활모습을 직접 보면서 배웠지만 저희들은 오직 사도들의 모범이나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배우고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믿어도 예수님 닮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쪼록 자신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을 옷 입듯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쉼을 얻는 신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을 벗고, 가벼운 생활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8:32에도 보시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휴식이, 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고 항상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채 염려하고 근심하는 경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주관, 자기애착을 앞세우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잘못때문입니다. 시 37:5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하는 것보다 주님의 인도에 부탁하고 맡기는 것이 더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죄와 고통과 사망과 미래에 관한 모든 일들도 다 주님께 맡기시므로 자신은 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멍에 메는 자, 배우는 자, 꼭 휴식을 취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26과 지혜로운 생활 (롬 12:3~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지혜로운 생활”이란 제목으로 바울사도의 권면하신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신 편지의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대부분의 말씀이 “죄에서 구원받는 내용”이지만 12장~15장까지는 성도의 도덕율을 말씀하셨고, 특히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개인생활과 교회생활의 지혜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 3절에 보시면 “내게 주신 은혜”란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그 은혜에 의존하여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헤를 기억하셔야 하겠고(시 103:2),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시행하게 되는 것을 알고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사도의 권면과 교훈이 각사람에게 증언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너희중 각사람에게 말한다”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각사람에게…나누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그리고 권면의 말씀이 각사람에게 전달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행되는 교회의 교육방법이 너무 자유롭게 시행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각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고, 몇몇 사람에게만 알려지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진리를 배우고, 또 모든 성도가 배운 것을 확인하고, 단체적인 교훈은 교리나 성경강해를 배우게 하고, 지적사항은 그 해당자 각사람에게만 권면할 수 있는 체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단체적인 지적과 책망은 비해당자가 은혜롭게 소화시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분수에 알맞게 행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3절에 보시면 “믿음의 분수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셨고, 6절에서도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에도 분량이 있는가?”하시겠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고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어 구원 받는 믿음의 분량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지식의 분량이나, 성령충만의 분량이나, 봉사헌신의 분량은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다릅니다. 따라서 이 분량에 따라 진실하고, 적당하게 할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또 자신이 받은 믿음과 은사분량, 다른 사람이 받은 믿음과 은사분량에도 차이가 있음을 아셔서, 지나친 기대나 욕심이나 허영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분수에 알맞게 생각하고 시행하여 모든 이에게 진실성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4. 지체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적인 교회생활을 잘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지체의식이란 공동체를 몸으로 비유하셨고, 개인을 그 몸에 연결된 지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가 있고, 각 지체의 기능이 다르며, 모든 지체가 자기의 사명을 다하면서 몸을 위하는 것처럼 성도 개개인도 자기가 받은 은사를 지체처럼 활용하여 상부상조하고 교회의 공동체를 사랑스럽게 유지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지체의 사명이 각각 있는 것처럼 성도 각사람에게도 주어진 은사가 있으니, 그것을 성실하고 즐겁게 활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몸의 지체인 손과 발, 그리고 이목구비, 머리의 역할이 다른 것처럼 은사도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다스리는 일, 구제하는 일등이 있는데 이것을 다 성실하고 즐겁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사도가 권면하신 지혜로운 생활은 ① 은혜를 아는 일이요, ② 각사람이 깨닫는 일이요, ③ 분수에 맞게 행하는 것이요, ④ 지체의식으로 살고, ⑤ 은사에 따라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제27과 순종으로 복받음 (신 28: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순종으로 복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선민일 경우에는 세계 1등 국민이 되게 하시고, 개인일 경우에는 5가지 복을 주시는데 ① 성읍이나 들에서나 장소에 구애없이 복을 주시고, ② 자손에게 복을 주시고, ③ 물질 소득에 복을 주시고, ④ 물질 활용에 복을 주시고, ⑤ 들어가나 나가나 무슨 일을 하던지 복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5절 말씀의 광주리나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소득한 물질을 광주리에 담던지 또 떡반죽을 하여 먹든지 건강과 생활에 유익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의 요점은 순종과 복입니다.

1. 이 말씀을 살피면서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 못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1)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때문입니다. 고집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비오는 날 두 부부가 도배를 하다가 종이를 자르는데 남편은 칼로 잘라야 한다, 부인은 가위로 잘라야 한다는 의견대립으로 말다툼을 하다가 남편이 폭력을 가하게 되자 부인이 비오는 밖으로 도망을 했는데, 남편이 부인의 고집 부리는 것이 너무 미워서 개울물로 떠 밀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개울물에 떠내려가면서 “가위가 좋다”는 뜻으로 두 손가락을 내밀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고집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고 하신 것입니다.

2) 성경말씀을 최고의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며,

3) 삶의 목표를 자기뜻이나, 자기 욕심에 두고 하나님의 뜻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순종 잘하여 복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순종을 잘하여 복받은 사례를 성경에 나타난 역사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의 7대손 “에녹”입니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대로 승천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순종하고 따랐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300년 동안을 말입니다(창 5:24).

2) 아담의 10대손 “노아”입니다(창 6:3,9).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셨고,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창 7:5). 비올때를 기다리며 120년이 되도록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인류멸절시에 노아의 8식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을 들 수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떠날때 갈바를 알지 못한채 순종하였고(창 11:31~32, 히 11:8),

② 첩과 첩의 아들을 쫓아낼때도 그러하였으며(창 21:12, 14),

③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았습니다(창 22:12~19). 구약의 인물중에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의 순종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또 모세와 여호수아를 들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대적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을 이기려니까 순종을 잘 하여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할때 순종한 일,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아 기록하고, 명령대로 성막을 제조한 일도 큰 순종이었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채 하나님이 데려가신다고 했을때도 역시 순종을 한 것입니다(출 12:28, 14:1, 39:42, 민 27:12~17). 여호수아도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침략할때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수 1:7~9).

5) 나만은 이방인일지라도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으므로 병을 고쳤고(왕하 5:24),

6) 가나혼인 잔치에서 포도주 기적이 일어난 사실이나(요2:6~9), 베드로가 물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도(눅 5:5~6) 역시 순종으로 말미암았습니다.

3. 끝으로 순종에 대한 성경말씀을 몇절 소개하겠습니다. 시119:4에 “근실히 지킨다”는 말씀이 있고, 44절에서는 “끝없이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시 119:56에서는 “내 소유는 이것이나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하였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순종을 배워(히 5: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빌 2:7), 고후 13:8에서 바울사도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고후 13:8),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없으며(고전 5:6),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고 하셨습니다.

 

제28과 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마 19:23~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26절을 근거로 “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어떤 부자청년이 영생하는 문제를 예수님에게 질문했을때 그 부자가 계명을 지킨 것으로는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부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면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롬 8:30). 하나님은 그 선택자가 부자이거나 가난한 것을 내다보지 않으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엡 1:3, 롬 9:11).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은 선택이나 거듭나는데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거듭난 부자가 신앙으로 입문할때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또 재물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과정상 어려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미련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있으나 부자는 그 재물이 상당한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것을 쉽게 실천했습니다(눅 19:8).

2.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다”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약대의 바늘귀로 들어감보다 어렵다”고 하신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은 구원 받는 일이 어려움을 깨닫고 “그러면 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사실상 구원 받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1) 사람이 못하는 것을 열거한다면 ① 사람은 다 거짓되고 참되지 못하다(롬 3:4)하셨고, ②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하셨으며, ③ 사람은 자기변화와 자기구원을 못한다(렘 13: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느니라)하셨고, ④ 생명을 포함하여 창조하는 일을 못하며, ⑤ 따라서 우주의 통치와, ⑥ 부활과, ⑦ 영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적 노력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악에만 익숙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렘 13:23).

2) 하나님은 무엇에 능하십니까? ①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으시고, ②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깨끗게 하실 능력이 있으며, ③ 죽은자를 살리실 수 있고(롬 4:17, 6:5), ④ 우주를 자기 뜻대로 통치하실 수 있으며, ⑤ 영생천국으로도 인도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구원받는 과정상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마 3:9) 어떤 사람이든지 쉽게 구원하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보시면 ① 하나님은 참된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을 나타내실 수 없으며(롬 3:4, 히 6:18), ② 자신의 신분이나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하여 부인하지 못하시며(딤후 2:13), ③ 죄를 짓지 못하시며(마 4:3~10), ④ 변하지 못하시며(약 1:17), ⑤ 심판을 불공평하게 못하시며, ⑥ 영원히 패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⑦ 예수님의 구속 없이는 죄를 용서하지 못하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는 일은 인간의 노력이나 기술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복을 믿음으로 받는 일이기 때문에 신앙이 중요하진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식을 내세우는 자는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느냐?를 중요시 하지만 신앙을 내세우는 성도는 그것을 따지기 전에 인간이 왜 생겨났느냐?하는 목적을 깨달아서 그 목적 성취를 위하여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배운바를 기억에 남기시고, 사람으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9과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내의 교훈을 받기 위하여 “이것까지 참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고 내려오실때에 제자의 위치를 떠난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의 종들을 대동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지목해 주고, 예수님을 넘겨주려 했을때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오른편 귀를 칼로 치니까(요 18:10) 예수님이 “이것까지 참으라”하시고, 그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1. 우선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유다의 소행을 살필수가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자였고,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진행하고 있을때(눅 22:3,4) 예수님은 그에게 두차례나 권면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한번은 만찬석상에서였고(눅 22:21, 22), 또한번은 본문에서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말씀도 유의하지 않고 ① 예수님을 해롭게 하는 자들의 앞에 섰습니다. 제자가 타락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자들의 앞에 서고, ② 가장 사랑하는 입맞춤의 표시로 예수님을 지목하여 넘겨주는 신호를 나타냈으니, ③ 이는 사랑의 표로 외식을 삼고,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학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제자들과 베드로의 소행이 극히 무법한 폭력적이었습니다.

1) 이때에 제자들(좌우가, 49절)은 폭력적인 기세로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하였고, 결국 베드로는 허락도 없이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쳐서 떨구었으니, 여기에서 제자들의 폭력성과 무질서한 혼란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폭력과 혼란이 있고, 검과 몽치로 진리를 대항하는 때는 어두움의 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54절).

2)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칼부림을 한 것은 특수 폭행일 뿐아니라, 살인미수 죄가 되는 것인데 그는 예수님을 보호할 목적으로 시행했지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하시고, 그 귀를 다시 붙여 주시므로 변상회복 시켜 주신 것입니다.

3. 저희들은 “이것까지 참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1)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그동안도 많이 참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아야 할 것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4, 7).

2) 성도는 인내의 성질과 가치를 아셔야 합니다. 혹 인내를 쓴 것으로만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내를 성령의 열매(갈 5:22)로 하셨고, 또 사랑의 방법(고전 13:4, 7)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내하라”는 뜻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3) “이것까지”란 죄없는 예수님을 학대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무고하게 핍박을 받는 일과도 같고, 또 억울함을 참아야 하는 일과도 같은 것입니다. 억울함을 최대한 참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이고, 또 하나님은 신원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억울함을 참은 성도에게 보상하시며(시 90:15), 또 악한 상대자에게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시 23:5). 억울함을 당하고도 여유있게 넘어갈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큰 복이 될 것입니다.

4) 인내에는 육체적 인내와 정신적 인내가 있습니다. 육체적 인내는 몸의 아픔을 잘 견대는 것이요, 정신적 인내는 말을 참는 것입니다. 자랑의 말, 지적의 말, 원망의 말, 따지는 말, 아는체 하는 말등입니다. 그러나 이것까지 잘 참는다면 성도로서 큰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까지 참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0과 죄사함과 축복 (사 1:18~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사함과 축복”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12년부터 653년 사이에 사역한 선지자입니다(사 1:1). 그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기에 마땅할만큼(사 39장 이전) 패역한 상태에 있었습니다(사 1:).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백성들이 회개해야 할 것과 순종하므로 복 받아야 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18절은 회개하고 죄사함 받을 것을 말씀하셨고, 19~20절은 순종하므로 복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죄사함 받음에 대하여 18절 말씀에는,

1)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변론한다는 것은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온 성도는 변론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뜻이 바로 구원 받는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렇게 될때에 하나님은 “주홍같은 죄를 눈같이, 진홍같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신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죄를 용서하시고, 또 깨끗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진홍같이 더럽고, 색깔있는 죄가 희어졌다는 것은 지은 죄가 없어졌다는 뜻이므로 속죄와 순결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하신 말씀이 죄사함의 방법이 된 것처럼 성경에는 죄사함 받는 믿음을 간접적으로 또는 함축성 있게 말씀하신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① 눅 7:47에서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므로 저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씀을 하셨고, ② 요 17:3에서 “영생은 하나님의 보내신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하셨고, ③ “회개하므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행 11:18), “회개하므로 죄사함과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말씀(행 2:38),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한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일이라고 하신 말씀(눅 19:8), “죄를 자백함이 죄사함과 깨끗함을 받는다”는 말씀(요일 1:9~10)들이 다 “주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다”는 말씀(행 16:31)과 같은 뜻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4) 이와같이 죄사함에 대한 표현도 다른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① 깨끗이 씻어 주신다(사 1:18, 히 9:13, 22), ② 멀리 던지신다(사 38:17, 시 103:12), ③ 새옷을 입히신다(창 3:21, 계 3:18, 19:8), ④ 빚문서를 도말하신다(사 43:25)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속을 통하여 이와같이 죄를 없애주시되, 죄의 결과인 심판에서 속죄로 회복시켜 주시고, 또 죄의 상태인 더러움에서도 깨끗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주홍같고 진홍같은 죄를 처리해 주신다”는 것은 어떤 죄이든지 죄의 성질과 분량이 어떠하든지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 12:32에서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사함받지 못한다”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함받지 못하는 죄”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고, 죄있는 자가 성령을 거스려 믿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사함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는 아무리 적어도 지옥의 판결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롬 6:23, 마 12:36), 아무리 큰 죄라도 그 죄가 커서 속죄 못받을 죄는 없는 것입니다(사 55:7, 롬 8:1).

2.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순종함이 복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1)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즐겁게 순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게 되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2) 그리하여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지언정 거역하므로 칼에 삼키우는(나라의 멸망)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하나님이 어떤 죄를 어떻게 사하시는지에 대한 것과, ② 순종으로 현실의 복 받는 방법을 교훈받으셨습니다.

 

제31과 몇가지 의문 (요 19:23~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몇가지 의문”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이 의문이란 뜻은 “더 알기를 원한다”는 뜻을뿐 말씀을 의심하는 부정적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심하면 안됩니다. 분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무렵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의문되는 것으로,

1. 군병들이 예수님의 의복을 왜 나누어 가졌을까?하는 점입니다. 먼저는 그의 옷을 네깃으로 나눠 가졌고, 다음에는 예수님의 옷이 호지 않고, 통으로 짠것인지라 제비를 뽑아 한사람이 취하였습니다. 과연 그 옷자락이 용도에 필요한 것인가? 할때, 이는 한낱 드라빔과 같은 뜻으로 취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형수의 유품을 보관하는 것은 좋은 행운을 맞게 한다는 통념때문이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어머니”란 호칭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요 2:4에서도 “여자여”하셨고, 본문 26절에서도 그리하셨으며, 마 12:48에서도 “누가 내 모친이냐”하시면서 찾아온 마리아를 개인적 모친으로 대하시지 않고, 모든 성도를 포괄한 가족관념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혈통을 받지 않은점을 생각할때 부정적 요인이 없지 않음을 들수는 있으나, 양모에게도 어머니란 호칭을 써야할 입장인 만큼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공적인 인물이시고, 또 모든 성도를 다 가족으로 인정하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하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모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실 무렵에 그 동생들은 예수님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믿지 않는 동생들보다 제자중 오래 살고, 신령한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하심이 더 합당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중 야고보는 부활후에 믿음을 갖고 충성한 기록이 있습니다(갈 2:9, 행 15:13).

4. 예수님은 왜 가정을 갖지 않았을까요? 만일 가정을 가지셨다면 마땅히 부모님을 그 가정에서 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정을 안가지신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구약의 어린양의 희생이 예수님을 상징한 것처럼 인생의 황금기에 세상의 낙을 포기하시고, 가장 값진 인생과 생애를 희생의 제물로 드리시기 위함이요,

2)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26)하신 말씀처럼 자신이 일찍 세상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정욕을 못박으신 것이요(갈 5:24),

3) 안좋은 미래의 결과를 남기지 않으신 것이니, 만일 예수님의 육신적 자손이 번성하였다면 영적성도와 육신의 자녀들 사이게 큰 갈등을 빚고, 또 많은 예수님 후손들이 우상의 대상이 되고, 교주가 되는등 큰 혼난이 야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상상일뿐, 실제로 예수님은 부정모혈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자녀를 생상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4) 또 예수님은 현실복에 대하여는 미래로 계승되는 자손의 복까지도 못박으신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이기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3가지 고자설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① 모태에서 된 고자, ② 생후에 만든 고자, ③ 천국을 위하여 은사로(스스로 자제함)된 고자라 하셨은즉 모태에서 된 고자는 남성이라 할 수 없으므로 세번째에 해당하는 은사를 가지셨을 것으로 보아야 하며,

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배꼽이 있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배꼽은 모혈을 받기 위한 방편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으나, 만일 일반 사람과 같지 않았다면 어릴때부터 신비한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연구할수록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에 성경연구의 과제를 일깨우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2과 4가지 큰 사건 (행 8: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4가지 큰 사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주의자들(율법주의 이단자)로부터 핍박을 받아 일부는 잔멸을 당하고, 일부는 흩어져서 전도를 했을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전도의 효력이 크게 나타났다는 말씀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큰 사건 4가지가 있어서 본문과 함께 “4가지 큰 사건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1절과 2절에 보시면 변화되지 못한 사울의 태도와 변화된 경건한 성도의 태도의 차이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핍박자들로부터 경건한 집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을때 변화되지 못한 사울은 그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마땅한 죽음으로 여겼으니, 그 심령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었으며, 또 강퍅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분별력도 없고, 사랑과 인정도 없었습니다.

2) 그러나 반대로 경건한 성도들은 “그를 장사 지내고, 그의 죽음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못한자는 분별력과 사랑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핍박으로 인하여 전도사역이 일어난 점입니다. 사울을 포함한 유대주의자들이 예루살렘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서 남녀성도를 잡아 옥에 넘기는 핍박을 가한 것입니다(3절).

1) 이때에 사도들은 순교를 각오한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다른 성도들은 전부 외방땅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이 외방땅이란 유대땅과 사마리아땅, 그리고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행 11:19)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하던 중, 빌립집사는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였는데, 이때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나가고 많은 반신불수 병자가 나음을 얻으며, 빌립의 전도를 받고, 일심으로 따르더라”하셨으니(5~7절), 전도의 역사가 핍박중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핍박중에도 믿음이 성장하는 것처럼 복음전파와 능력도 핍박과 상관없이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이나, 그렇지 못하였을지라도 나가서 전도한 것이 다 귀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일제시재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갔던 성도들이 해방되어 나온 후에 자신의 공로로 내세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책 받을 일은 당연히 스스로 회개하게 하고 서로의 수고와 공로를 치하했다면 해방 후에 재건파나 고려파가 분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이 나만 못하다 하여 무조건 문책하기 보다는 그들 나름대로 수고한 일들에 대하여 격려하고, 칭찬하는 미덕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4가지 큰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큰 핍박(1절), 큰 울음(2절), 큰 소리(7절), 큰 기쁨(8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기독교에 큰 핍박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복음을 전파되고, 신앙의 힘은 용솟음쳤습니다. 마치 풍랑따라 돛을 달면 배가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복음은 핍박중에서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 큰 울음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이 스데반의 죽음을 인하여 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원하여 주시는 분이시고(계 18:20),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며(계 7:17), 크게 운자의 기도를 들으시고(계 5:4), 진리를 밝혀 주셨으며, 또 “슬픔은 마음을 좋게한다”(전 7:3)고 하셨고,

3) 귀신 들린자에게서 사탄이 나가며, 큰 소리를 지른 것인데 이것은 사탄이 나갈때 발광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고,

4) 마지막으로는 사마리아 도성에 은혜가 충만하여 큰 기쁨이 있은 것입니다. 이렇게 핍박을 이기고 전도하는 일, 통곡하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일, 사탄이 쫓겨나는 일, 큰 기쁨을 맛보는 일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33과 이긴 시험, 진 시험 (갈 4:12~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이긴 시험과 진 시험”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란 지역은 소아시아 서북부, 터키나라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인데, 남갈라디아와 북갈라디아가 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1차(행 14:~), 2차(행 16:6~10), 3차(행 18:23) 전도시에 그곳을 다녀가신 사실이 있으므로 바울사도의 전도를 받아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후에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하여 바울의 복음과 친교를 거절하려는 시도를 나타냈었기 때문에 바울사도가 이 소식을 듣고,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보낸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

1) 바울이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실때 그 지역의 생활수준과 풍속과 고난에 동참하셨고,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았으며, 또 바울을 인한 시험꺼리가 그의 육체에 있었지만 그들이 이것을 업신여기거나 탓하지 않고, 오히려 천사와 예수님처럼 영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성도를 시험하는 것이 바울의 육체였다는 점은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바울을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다는 말씀과(15절), 편지말미에 큰 글자를 쓰셨다는 점(갈 6:11;눈이 나쁘면 글씨가 큼)으로 보아 시력과 안질에 문제가 있었거나,

② 전염성 말라리아를 자주 앓으셨거나(이것은 유행성 질환임),

③ 말이 졸하고(고후 11:6), 몸집과 키가 작으며, 피부가 검은 편이고, 등이 굽고, 다리가 않으로 굽었다(유세비오 역사)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육체의 가시”를 가지셨다고 하셨으니, 이 3가지중 어느것에 해당하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그런 약점등로서 사람의 거부대상이 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 초기에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증언한 복음을 기쁨으로 받으면서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약점을 개의치 않고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하고, 또 눈이라고 빼어드렸으면 하는 성도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사역자나 이웃의 육체의 약점을 이긴 시험입니다. 성도가 신앙을 위하여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은 자기가족이 아니고, 복음사역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사역자에게 육체의 약점이 있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이기고 사랑하셔야 하겠지요. 이것은 가족중에 육체의 불구자가 있을때 사랑으로 용납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시험을 이기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외국의 어떤 성도는 고아원에 와서 양자를 데려가면서 가장 못생기고 불구된 아이를 데려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이 진 시험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유혹자들의 말에 넘어간 것입니다. 유혹자들은 유대주의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과 같은 사람들로서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고,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갈라디아교회의 순수한 복음적 신자들을 꼬여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다”는 등으로 이간을 붙여 바울의 복음을 쉽게 저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고,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뜻으로 열심내는 것이 아니고, 꾀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7, 18절). 성도가 무지하면 이런 유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19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셔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유혹에 넘어갈 만큼 그리스도의 형상을 부족하게 닮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교육상 해산하는 수고를 하셔야 하고, 책망하는 음성을 나타내셔야 하며, 신앙순결에 대한 의심성을 버릴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19, 20절).

결론적으로 그들은 바울의 육체의 약점을 사랑하는데는 이겼으나, 거짓자의 유혹을 받는데는 졌습니다.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4과 시험에 대한 지식 (약 1:12~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는 성도가 시험을 받을때에 대처해야 할 지식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험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시험이란 뜻은 고난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고난은 연단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쁘게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롬 5:3, 4). 성도가 고난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죄를 지으므로 당하는 고난이 있을 경우일 것입니다(벧전 2:20). 따라서 시험이란 고난때문에 죄를 범하려 하거나, 또는 어떤 유혹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이란 용어가 여러가지로 사용됩니다.

1) 마귀가 성도를 죄에 빠지게 하고, 불행의 길로 넘어뜨리기 위하여 유혹을 하는 것도 시험이라고 하셨으니, 예를들면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고, 욕심에 끌려 불순종한 것과 같은 것이요,

2) 하나님이 성도를 시험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험은 마귀가 넘어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눅 4:13), 마치 학교 선생님이 학생의 실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테스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은 성도의 신앙의 배양을 위해서는 테스트를 하시지만, 마귀처럼 죽게하기 위하여 시험하시지는 않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창 22:1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력을 시험하여 “이삭을 드려라”하셨고, 아브라맣은 그런 시험을 받을때 순종을 잘 하였으며(히 11:17), 욥 7:18에서 “하나님은 (그같은 뜻으로) 분초마다 시험을 하신다”하셨고, 성도의 마음을 시험하시며(시 17:3), 광야에서 모든 태도도 시험하셨고(히 3:8),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여셔서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0:13).

3) 그런데 반대로 마귀와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4:7).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어서 아무에게도 시험을 받으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많은 이적을 체험하면서도 하나님을 10번이나 시험하였고(민 14:22, 고전 10:9), 예수님께도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는등 시험을 하였으며(막8:11, 눅11:16), 사도시대에도 주의 영을 시험하고(행 5:9),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큰 벌을 받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행 15:10).

3. 본문 말씀에서,

1) “시험은 참아야 복이 있다”하셨으니 이 시험은 고난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어떤 시험을 당하던지 “옳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성도가 시험의 경지에서 신앙적으로 바르게 처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때 건설적으로 대처할줄 아는 성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상급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곧 내세의 상급입니다.

3) 하나님은 마귀처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또 시험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니까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정당한 입장에서 받는 고난)을 괴롭게 여겨서도 안될 것입니다.

4) 다만 인간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5) 욕심은 잉태하는 마음 속에서 자라고, 욕심이 죄를 짓게 하며, 죄는 점점 자라는 성질이 있고, 이 죄를 처치하지 못하면 결국 사망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어떤 지혜를 써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3, 26:41). 기도는 하나님이 시험을 면케하시거나, 이기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② 시험의 올무가 되는 욕심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연성 물질을 없앨때 화재의 위험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섰다하면 넘어질 수 있다 하셨으니까(고전 10:12) 항상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사랑만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아닌 것을 실천하면 금방 시험에 듭니다. ⑤ 유혹자에 대한 강한 도전을 해야 합니다(벧전 5:9). ⑥ 시험의 성질이 약할때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시험에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5과 마지막 예루살렘행 (마 20:29~3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들이 몇가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1.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높고 험한 길을 올라가시는데 큰 무리가 좇은 것은 퍽 좋은 일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요16:32에 보시면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 벌써 왔다”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렵게 믿으려 하거나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면 끝까지 따를자들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하여서는 안되겠지요. 현재 헤아리는 많은 수의 교인들이 그렇게 될자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수가 기돌교의 진가를 대변하지 못할 것입니다.

2. 두 소경의 끈질긴 간청입니다. 소경은 눈이 어둡지만 정보는 빠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30절) 하고, 눈뜨게 해 줄것을 간청하였는데, 따르는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더욱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관심을 끈 것입니다. 두 소경은 간절한 소원을 하였고, 또 책망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간청하였고, 모처럼 예수님을 만나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회를 선용하고, 기도를 힘쓰며, 인내로 노력한 것이 그들의 좋은 태도였습니다.

3. 이 사실에서 두 소경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무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소경은 불쌍한 사람들이요, 소외된 소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결코 무시하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불구자나 과부, 고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불쌍한 소자에 대한 긍휼을 외면한 것은 예수님의 의도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4.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소경이 은혜를 구할때는 의당 눈뜨기를 원하는 것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실 것인데 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이것을 그 간청하는 소경들의 소원이 “더 고상한 믿음에 관한 것”, “신령한 은혜에 관한 것”,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것”들을 소원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일 눈뜨기를 원하지 않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다면(마 6:33) 주님은 더 기뻐하시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을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소원하라”하셨고, 솔로몬 왕은 현실정욕에 관한 것을 구하지 않고 바른 정치를 위하여 지혜를 구했지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시고, 그의 소원과 필요한 것까지 주셨습니다(왕상 3:5~13). 또 수넴여인은 엘리사 선지자가 “왕이나 군대장관에게 청탁을 하라”했으나, “청탁건이 없다”고 하니까 엘리사 선지자는 그 집에 필요한 아들을 낳게 한 사실이 있었고(왕하 4:13~16), 또 마 20:1~16에 보시면 포도원에 늦게 와서 일한 품꾼에게 먼저 와서 일한 사람보다 품값을 더 주신 사례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일은 적게 했으나 품삯을 더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의 분량보다 값진 믿음의 분량값을 더 계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출 33:19에서 “하나님은 은혜 주실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한 것보다 얼마나 귀한 믿음을 가졌느냐?를 보신다는 것을 아셔서 더 고상하고, 신앙적인 것을 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꼭 신앙적이고 신령한 것, 또 값진 것을 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6과 기도의 장애물 (약 1:5~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의 장애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6~8절에서 기도의 장애물은 “의심과 두마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이 설교의 본문이 된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는 여러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1)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많을수록 좋고, 하나님께서는 지헤 구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후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왕상 3:11~13).

2)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때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믿음이란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잘 알면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의심 그 자체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잘 모름은 성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잘 알면 꼭 들어주실 만한 것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파도치는 바닷물이 육지를 덮을 것같으나, 결국은 넘치지 못하는 것처럼 응답의 효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없고, 두마음(하나님외에 다른 것도 의지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3) 인생은 풀의 꽃과 같아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풀의 꽃이란 잠시 피었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침에 피었던 꽃이 낮의 햇살에 뜨거워지면 스러지다가 떨어져 버리는 것이, 마치 연약한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이 붙드시다가 놓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9절에서 “낮은 형제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난하고 비천한 성도이지만 구속함을 받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되고, 천국시민된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은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것입니다. 또 10절에서 “부한 형제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는 것은 과거에 재물을 의지하던 자가 재물의 무상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연약한 피조물임을 생각하여 겸손해 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에서는 지혜를 구하고, 믿음으로 구하고, 인생을 자랑하지 말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설교의 제목에 따라 기도의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1)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그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 못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한다고 할때에 기도의 효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실줄로 믿고 기도해야 되는데(막 11:23~24),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그것은 기도자의 바른 자세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갖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화목이 부족한 것입니다. ① 약 4:3~4에서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말씀이 있으니, 신령한 성도가 세상의 애착이 심하면 하나님과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② 죄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욥 22:23).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사 1:15, 시 66:18)고 하셨습니다. 또 죄가 있다는 뜻은 곔병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요, 그것은 기도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요일3:21). ③ 인간의 교만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므로 하나님과 거리감의 원인이 되고, 기도응답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욥 35:12~13, 약 4:6).

3) 형제와 이웃간의 불화입니다. ① 하나님께 나가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라는 말씀이 마 5:29~30에 있고, ② 또 부부가 불화하면 기도가 막힌다는 말씀이 벧전 3:7에 있고, ③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부르짖음도 들을 자가 없다고 잠 21:13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잠 28:9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몇가지 기도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7과 피하고 경계할 것들 (딛 3:9~11) 목록으로


디도서는 바울사도께서 목회자인 디도에게 목회에 대한 교훈의 서신으로 보내신 말씀입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이 말씀에서 교역자나 성도가 “피하고 경계할 것들”을 말씀하셨는데 ①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고, ② 족보 이야기를 피하고, ③ 분쟁을 피하고, ④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고, 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권면한 후에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의 교훈의 중점은 이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은 가까이 관심을 써도 헛되고, 무익한 정도로 끝나는 것이 있으나, 이단을 가까이 하는 것은 부패와 정죄를 자초하는 일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유 11). 따라서 성도는 유익없고, 위험한 일을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1.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셔야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변론이란 변론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갈래 길중 하나를 선택할때는 선택하여 가야하니까 변론하지만 막연히 변론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시간 낭비의 손해만 보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도 불필요한 변론이 있을 수 있음을 아셔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족보 이야기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 족보 이야기는 성경에 나타난 족보 연구가 아니고, 유대인이 자신의 정통성 있는 혈통을 내세우기 위한 족보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 사람들이 오늘에 와서 양반후손이라고 거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민제도는 오순절 이후에 백지화되었고, 구약시대에도 메시야 언약외에는 선민을 관심 밖으로 돌리신 것이므로 혈통을 내세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3. 분쟁을 피하는 것입니다. 분쟁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아니라, 화해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인내하면서 슬기롭게 분쟁을 피하는 것입니다.

4.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 것일 잘 지키는 것이다”, 또는 “누구는 율법을 잘 못지킨다”, “내가 더 잘 지켰다”는 식으로 율법의 정통성과 시행성을 가지고 대립하여 다투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행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율법의식이 복음으로 대치되었고, 율법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 사실이 더 잘 알려졌으며, 또 율법의 목적은 사랑에 있으므로 어떤 세부규정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은 유익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누구를 정죄하거나, 사랑에 위배되는 다툼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하고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1) 그런데 교역자는 어느 정도 이단을 분별할 수 있지만, 믿음지식이 약한 평신도는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교역자의 지도를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독교를 내세우고 같은 성경과 찬송을 갖고, 교회에 출입하는 단체중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이단으로 낙인 찍힌 단체가 있고, ② 이단에 기울어져 가는 단체가 있고, ③ 신앙생활을 불건전하게 하는 단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3가지 종류를 다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셩경적으로 믿고 건전하게 생활하는 단체나 교인들과만 교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이단의 특징을 염두에 두셨다가 그런 것이 나타날때는 항상 주의하셔야 합니다. 얼마 전에 00교에서는 “교주가 예수님이다”, “죽지 않는다”하고 돈을 사기로 편취하고,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였고, 어떤 정신병 고치는 요양소도 기독교 종교를 내세워 사람을 짐승 취급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과 관련하여 이단의 특징을 살핀다면 ① 우선 성경을 인간의 욕구에 이용합니다. ② 그리고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우상화 하는 일이 많습니다. ③ 또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비밀이 많고, ④ 성경을 개인의 사상대로 해석하므로 전통적인 조류를 무시합니다. ⑤ 그리고 처음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자기들 뜻에 따르지 않을 때는 폭려이나 보복이 따를 수 있고, ⑥ 음행성과 현실성, 물질욕, 명예욕등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단이 아니라도 이상과 같은 석연치 않은 일이 있을 때는 무조건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제38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 (요 5:36~3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말씀해 주십니다. ① 세례요한의 증거이고, ② 예수님 자신의 능력의 역사이고, ③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증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 증거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하시므로 요한의 증거가 있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제일 먼저 메시야로 증언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 5:35)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말씀은 마 3:11, 막 1:7, 요 1:29~30등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 자신의 능력과 이적의 역사로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적을 나타내심이 자신을 메시야로 증거하시기 위함이란 뜻입니다(히 2:4). 본문 36절에서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증거하는 것이라”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이 나타내신 이적이 바로 자신을 증거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이적의 목적은 기도응답이나 자비를 베풀기에 앞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친히 말씀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37절에 보시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다”고 하셨으니 이 증거가 곧 구약성경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 당시에 신약성경을 갖지 못하였고, 구약성경만 가졌으며, 그 성경(구약)이 곧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39절). 구약도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거든 하물며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와 신약성경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저희들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역할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성경으로 영생주심을 아셔야 합니다. 왜그러냐 하면 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을 믿음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음은 역시 하나님의 보내신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니라(38절)하셨고, ② 성경에서만 구원의 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섭리의 일부를 나타내 주시지만 구원계시는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계시는 오직 성경으로만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성경에서만 구원의 방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은 믿음과 상고의 대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얻는 줄 생각하고”하신 말씀은 “성경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알아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 6:69에서도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줄 믿고 알았다”하신 것처럼 신앙이 앞서고 다음에 지식적 연구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먼저 믿고 다음에 배워서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4). 믿는 것은 결심으로 되지만 상고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가르쳐야 할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3)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란 뜻은 성경과 예수님과의 일체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요 1:1),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구약성경에서 감취어진 예수님을 발견해야 했습니다(시 22:1, 사 53:1~11).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복음서나 신약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욱 명확하게 소개를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읽을때마다 예수님을 발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 못하시거나 예수님을 닮지 않는다면 신앙과 성경관이 잘못된 것임을 아셔서 꼭 성경의 눈을 뜨시기를 바랍니다.

 

제39과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지혜로운 건축자”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건축에 비유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을 지어 보신 분들은 건축의 상식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지혜로운 건축자 되는 근거와 방법과 결과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지혜로운 건축자 되는 근거는,

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은혜, 지혜의 은혜, 또 갖가지 은사와 복인데, 이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것 하나라도 내것이라는 생각이나 내 공력으로 갖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2) “터를 닦아두매”하셨습니다. 이 터는 기독교의 기초를 의미하며, 이 기초와 모범은 예수님이라 하셨고(11절), 이 예수님을 계시의 말씀과 생활모범으로 전달해 주신 분들이 바로 선지자와 사도들입니다. 엡2:19에서 “너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자라”하셨고, 또 본문 11절에서는 “이 닦아둔 터 외에 다른 터를 닦아줄 자가 없다”하시므로 사도들이 나타내 주신 성경모범외에 다른 모범이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 지혜로운 건축의 방법은,

1) 그리스도와 성경의 터 위에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축가가 설계도대로 건축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차가 철로따라 가듯이 성도는 성경따라가고, 탈선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터 위에 집을 세우되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세우라 하셨고(10절),

3) 금은 보석, 나무, 풀, 짚들로 재료를 쓰되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써야 한다 하심은 아주 좋은 재료를 쓰라는 뜻이요, 이것이 바로 값진 언행(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날림공사로 지적 받는 사례가 많고, 운동경기도 규칙에 위반되면 탈락하듯이 건축도 재료를 잘못쓰면 안됩니다. 꼭 정품을 사용하라는 것은 목적을 위한 방법도 합당하게만 하라는 것입니다.

3. 신앙생활(건축)의 결과로서 하나님은 검사를 하실때 불로 검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인 건축에도 존공검사란 것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일반적 생활과 사명생활에 대하여 검사를 하실 것이니, 이 검사란 곧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건축검사는 불을 태워 보시므로 타지 않는 재료로 집 지은 여부를 검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타 없어집니다. 영원히 계신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벧전 1:25). 말씀은 불에도 타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된 것만 타지 않고 남는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성경적이 아닌 것들로 치장하고 나타내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불 앞에 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나 현실교회안에 타 없어질 것이 있다면 그런 요소를 하나하나 금, 은 보석으로 교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룩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므로 꼭 신령한 것과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것(세속적인 것)을 구별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건축하는데는 꼭 순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초요, 문틀을 헤우고, 벽돌을 쌓고, 바르고, 칠하고, 도배하는 것입니다. 벽돌을 쌓을때 전기선이나 하수도관을 미리 넣어야 합니다. 이렇게 순서가 중요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① 자신을 포기하고, ② 예수님을 주인되게 하며, ③ 세욕을 억제하고, ④ 신앙의 기초지식을 갖고, ⑤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고, ⑥ 그다음에 사명에 관한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신앙생활을 잘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0과 3가지를 확인하라 (벧후 1:10~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가 3가지를 확인할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차를 갖고 나가려면 우선 면허증과 예비금을 갖고 나서야 합니다. 또 자동차를 손댈때는 타이어에 이상이 없는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신앙생활을 시작함에 있어서도 3가지 점검확인을 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①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과, ② 신앙의 대상을 바로 아는 것과, ③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지배자가 되어 계신지를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 택하심을 굳게함에 대하여 본문 10절에서 보시면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대상을 만세전에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엡 1:4). 그리고 때가 되면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롬 8:30). 또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자를 하나도 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십니다(사 41:9, 요 17:9, 11).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믿음 갖게 되었고, 나는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 믿음이 바로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진자는 “언제든지 실족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낳은 자식은 그 부모의 자식임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택하심을 믿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을 배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대상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확인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하셨고, 이 예수님을 바로 아는가?를 확인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 16:15~16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였을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뜻으로 바울사도께서도 롬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며, 또 예수님 아는 지식을 입으로 시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겉으로 볼때는 신앙지식이 있는것 같아도 막상 “대답하고 시인하라”하면 확신이 부족하여 표현을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다른 것은 대답을 못하여도 “예수님이 누구시며, 성경이 무엇이며,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만큼은 확실히 시인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시험을 쳐도 자신이 있는 분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실 수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죽고 자기 속에 주님이 왕노릇을 하시는 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롬 7:9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하셨고, 고후 13:5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내가 예수님(성경)의 지배를 받는가?를 확인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왕노릇하고 내 속에서 주님이 왕노릇하시지 않으면 “버리운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절대순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도가 시험에 들때 순간적으로 거역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거역이 상습적일수는 없으며, 항상 회개하는 자세로 자기 속에서 주님을 왕노릇하시게 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요일 3:9, 10).

결론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① 자신은 선택함을 받은 자라는 확신과, ②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라는 확신, ③ 또 내가 죽고 내 속에 주님이 사신다는 확신을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41과 3가지 속박 당할 것 (살후 1:6~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3가지 속박 당할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귀에게 속박 당하는 것이고, 술에 취하면 알콜에 속박 당하는 것이며, 담배를 끊지 못하면 역시 담배에 속박 당하는 것인데, 성도는 그런 것에 속박되면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박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성령님과 말씀에 속박되어 끌려가는 자가 되셔야 하겠지요.

1.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하시므로 믿음자체가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이어야 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의 증거”란 바울사도의 증거인 성경이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를 핍박하여 환난을 주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주님을 인하여)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천사들과 강림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며, 성도들로 부터는 영광만 얻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인데, 성도는 이 말씀이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능동적 믿음이 아니고, 수동적 믿음으로 발생합니다. 즉 거듭난 생명이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지혜나 설득이나 사랑이나 문화적 수준을 나타내거나 상관이 명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요, 오직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시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까지는 믿을 수 있지만(롬 1:19~20)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나 십자가로 구속사업을 이루신 것이나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은 이론과 학문과 변론으로 믿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속박을 꼭 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는 성경을 절대 의심하지 않으며 항상 그대로 믿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노력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ㅏ.

2. 말씀에 끌리는 속박입니다. 행 18:5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친구나 TV에 끌리기 전에 성경에 끌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끌린다”는 뜻은 우선 ① 성경말씀을 하나님 말씀 권위로 믿고 두려워 하는 것이요, ② 성경말씀을 꿀처럼 여겨 탐구에 진력하는 것이요, ③ 성경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요, ④ 성경말씀을 증언하기에 급급하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고 쓰고 배우고 전파하며 지키기를 노력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말씀에 속박 당한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게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라고 하였습니다. 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바에는 꼭 성경에 끌리는 체험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에 이끌려 속박 당하는 것입니다. 롬 8:35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하셨고, 또 고전 5:14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하시므로 바울사도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과 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강한 충동으로 살아가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은 자들입니다. 저희들이 사랑에 속박 당하여 사랑만 실천하고, 사랑 아닌 것을 저버린다면 예수님을 가장 신속하게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① 성경말씀을 믿어지는 믿음으로, ② 말씀과 계명에 속박되어 끌려가며 복종하는 신앙으로, ③ 또 사랑에만 이끌리는 생활로 저희들의 삶을 영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2과 성령님의 성화사역 (고전 6:9~11) 목록으로


성도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여러가지 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과 그중에 하나인 성화에 대하여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도 “성령님의 성화사역”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때 ① 미리 선택하시고, ② 선택한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③ 때가 되면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고(이때 거듭난 자만 믿고 따르게 됩니다), ④ 그의 믿음을 근거로 죄사함(의롭다함)을 주시고, 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를 양자로 삼으시고, ⑥ 양자된 자를 거룩하게 만드셨다가 ⑦ 나중에는 부활까지 주셔서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은 죄를 문책하시거나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요, “거룩하게 하신다”는 뜻은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의 인격자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하면 두가지 문제에 걸립니다. 하나는 벌 받아야 하는 문제이고, 또하나는 더러워진 것을 깨끗게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전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면 되고, 후자는 신앙적 교육으로 거룩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성령님은 신앙교육을 통해서 천국갈 성도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님이 거룩하게 만드시는 사역을 말씀하신 성경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본문 말씀에서 “주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하셨고, 살후 2:13에서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1) 주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은 예수님의 중보사역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고,

2)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성경이 소개하는대로 믿어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3)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씻음, 즉 깨끗게 하시고, 거룩, 즉 깨끗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권속으로 분별해 주심이고, 의롭다 하심은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도록 하시는 일에 두루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왜 성화가 필요한가? 할때,

1) 천국에는 부정한 자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고,

2)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고(벧전 1:16), 또 자기 백성의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요 17:17).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도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하셨고, 음난, 간음, 탐색, 남색하는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도적질하고,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고, 후욕하고, 토색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더러운 옷 입은채로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사스러운 잔치나 혼인이 있을 때는 깨끗한 차림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목욕하고, 이발하고, 화장하고, 좋은 옷을 입고 가야 하는 것처럼 천국가는 성도들도 역기 그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어떤 순서로 어떻게 성화되어야 할까요?

1) 우선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벧후 1:4). 신의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 2:5). 예수님의 마음은 진실, 온유, 겸손, 사랑, 공의, 착한 마음등입니다. 자신의 강퍅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야만 바른 생활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고(벧전 1:2), 바울사도처럼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빌 3:8). 세상과 세상 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치고 예수님을 가까이 닮은 사람이 없습니다(요일 2:15). 이렇게 세속을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것입니다(딤전 4:5). 성도가 말씀 연구와 기도에 취하면 자연적으로 그 인격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 성화는 세상을 떠날때에 완성되지만(마 5:8, 욥 19:26), 현세에서 사는 동안 빨리 성화될수록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7:1에 보시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43과 교회생활의 의미 (마 13:24~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생활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게 되고, 신앙생활의 자유를 누리는 국가체제에서라면 반드시 교회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세계에서는 공식적인 교회가 있을 수 없으므로 성경만 가지고 혼자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지요. 그런 뜻에서 교회라는 기관이 구원 받는 일을 위한 절대적 요소는 아닌 것입니다(그러나, 천주교에서는 교회를 구원 전달의 보급소로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계에서 교회생활을 하는 성도가 교회의 성격, 또는 교회의 생활방법이나 목적등을 바로 알지 못하여 때로는 낙망하고, 어떤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어서 교회가 칭찬의 대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볼때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교회와 관련된 지식을 바로 갖는다면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1. 교회란 무엇인가? 할때,

1)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적인 생활을 힘쓰는 단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체를 만들어 교회생활을 하게 하신 이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서 교회를 세우셨다”고 하셨으니(행 20:28), 이 뜻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은 성도가 모인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를 자신의 지체로 비유하시고, 자신은 그 주인이 되시며, 머리가 되신다(엡 1:23, 5:22~32, 딤전 3:15)고 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과 의 연합체임을 아셔서 귀하게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교회는 어디까지나 지상에 있는 것이고, 지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단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이 세게에는 마귀의 역사는 물론 불순한 요소들이 얼마든지 넘나들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내세의 천국과 다른점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형편을 뒷받침해 주신 것입니다. 한 농장에 곡식이 자라면서 분명히 가라지도 허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라자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지라도 그 농장에 허용되는 것은 하나님이 현실교회 안에 불의의 세력을 필요에 의하여 간과하신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물로 고기잡는 비유(마 13:47~48)나, 12제자중 가룟유다가 용납된 사실로도(요 17:12) 나타내 주셨습니다.

4) 따라서 현실교회에는 충실한 알곡같은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알곡을 못맺는 쭉정이 같은 성도, 또는 어린아이 같이 성장 못한 성도, 그리고 곡식 종류가 아닌 가라지 같은 외식자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경은 믿음 약한 자(어런이 같은 성도)를 안위하고, 붙들어 주라(살전 5:14)고 하셨는데, 문제는 가라지를 용납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5) 성경은 가라지가 있음으로 곡식에게 손해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29절). 소극적 견지에서 유익이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① 우선 불법자들 중에 연약한 자와 외식자(비택자)를 가려내기 어렵고, ②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성도의 악을 지적하시고, 교육,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용납하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주위에 있는 교인의 잘못을 볼때, 그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 잡는다면 성화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갈 6:1). 또 죄 짓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서 교회의 성격을 말씀하실때,

1) 광야교회라 하시므로(행 7:38) 가나안 복지(천국)로 인도하는 세계와 연단의 세계임을 말씀하셨고,

2) 시 23편에서 교회를 목장으로 비유하여 목회자와 성도, 즉 목자와 양이 상부상조하는 기관으로 말씀하셨고,

3) 마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 교훈에서 신랑과 신부가 만나고,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로 말씀하셨고,

4) 마 20장의 “포도원” 비유에서 일하는 세계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의 교회생활은 반드시 성도가 예수님을 교제하고, 목사와 성도간에 상부상조가 있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 배움과 연단을 받는 일에 성실하셔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의 부덕한 행위가 나로 하여금 불평하라는 뜻이 아니고,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며, 그것을 기회로 더 좋은 연단 연습에 이르셔야 할 것이요, 또 한가지는 지상교회가 천국의 모형인 만큼 천국에 있는 것만(사랑) 지상에서 행하여지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4과 자기를 깨끗케 함 (요일 3:3~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기를 깨끗케 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증언하는 목적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① 죄에 대한 상식을 갖자는 것이요, ② 또 하나는 죄에 대하여 민감한 태도로서 경계하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에 대한 것을 무관심하게 대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 3절에 보시면 “이 소망을 갖는 자마다 주님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하셨으니, 여기의 “이 소망”이란 장차 부활한 후에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주님과 같이 영광 누릴 것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을 가진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성결함 같이 자신도 성결하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결”이란 죄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9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께로 난 자”란 거듭난 자를(요 3:3, 엡 2:1) 의미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믿는 자”란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확실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결백하게 죄와 상관없이 산다는 뜻이 아니고, 항상 죄를 엄하게 경계하면서 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무관심하면 상습적으로 죄를 짓고도 가책 없는 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성령이 그 마음 속에 거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요, 이 영향을 받는 자신의 인격도 거기에 끌려 범죄하지 못할만큼 삼가는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거듭난 자는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죄를 경계하면서 자기를 깨끗게 하는 성도는 우선 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를 경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지식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죄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거역하므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2) 이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였던 인생, 깨끗하였던 인생이 더러워졌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이 속죄를 통한 칭의이고, 더러워진 것에서 깨끗해지는 것이 말씀과 성령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3) 죄는 헬라말로 “하말티아(ὰμαρτία)”라고 하는데, 이 뜻은 “과녁에 빗나감”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못미치거나, 지나치거나 하여 빗나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두려워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을 잘 하여야 합니다.

4) 한문으로 “罪”자는 “四(넉 사)”자와 “非(아닐 비)”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풍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4사람이 아니라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죄다, ② 죄라는 글자가 벌레 모양으로 생겼으니, 죄는 벌레, 병균처럼 무서운 것이다, ③ 죄는 4가지 아닌 것을 의미하는데 곧 신앙적이 아닌 것(不信), 의롭지 않은 것(不義), 합법이 아닌 것(不法), 실천하지 않는 것(不行)이라고 해석한 경우도 있습니다.

5) 또 죄를 크게 나누면 정신적 죄와 육체적 죄, 즉 생각하는 죄와 행동하는 죄로 나눌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적 죄와 인간에 대한 윤리, 도덕의 죄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짓는 죄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해당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성도 여러분, 지금 저희들은 속죄의 은혜는 받았지만 성결을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 3절 말씀처럼 주님의 깨끗하심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깨끗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진리의 말씀따라 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로 저희를 거룩케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8:15~17).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결백하게 사는 노력을 하려면 ① 우선 자신을 죽이고, ② 자율적 생활을 떠나야 하며, ③ 현세적은 욕심을 최대한 멀리해야 하며, ④ 오직 말씀따라 사는 생활에만 진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현세적인 욕심이란 모든 유한한 것에 욕심을 갖는 것인데, 성도는 그 반대로 반드시 무한한 것(내세와 신령한 것)으로 욕심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 136:1~2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26절에서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마쳤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이름입니다. 이방인들이 여러 종류의 잡신들을 섬기기 때문에 여러 잡신들의 명칭에서 선민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하여 “여호와”란 이름을 불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부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여호와”라는 이름대신 하나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존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란 말씀이 나와도 그 이름은 마음에만 간직하고 표현은 “하나님”으로 나타냅니다. 이 시간 말씀의 제목도 “하나님께 감사하라”(26절)는 말씀을 택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주제로 하였습니다. 매절에 감사가 나오고 26번을 강조하였으며, 1~3절에서는 하나님의 신분의 뛰어나심을 감사하였고, 4~9절까지는 자연을 창조, 통치하심에 대한 감사를 하였고, 10~24절까지는 이스라엘 선민을 해방시켜 인도하신 일에 대한 것이고, 25~26절에서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 주심에 대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이것 외에도 감사할 일이 더 있겠습니다만, 범사에 감사해야 할 성도(살전 5:18)는 늘 감사할 일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신분을 감사함에서 ① 선하고 인자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② 모든 신, 모든 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③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분이 위대할수록 성도가 받는 유익이 큽니다. 우리는 우리의 섬기는 하나님이 절대자 되심에 대하여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고전 1:31에서 “자랑은 주 안에서만 할 것이라”하셨습니다. 주님이 위대하신 분이므로 자랑할만 하고, 좋은 사위를 얻은 부모가 딸을 주고, 재산을 주어도 사위 맞이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자연계를 창조하여 통치하시는 섭리는 큰 기사중의 기사입니다(기사중에 가장 큰 기사는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자연과 만물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자연자체로 주시는 은혜, 공기, 햇빛, 땅과 물, 불과 금속, 또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발전케 하신 은혜로 인간이 살기좋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주적 기사를 행하시되, 지혜로 하늘을 펴시고, 땅을 물 위에 펴셨으며, 해로 낮을 , 달과 별로 밤을 주관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시121:6에 보시면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않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낮의 해가 상치 않게 하심은 구름이나 바람으로 뜨거운 햇살을 막아 일사병을 방지케 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않게 하신다”함은 본래 달이 해롭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달이 밤을 비취게 하심으로 어두움으로 당하는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심이고, 또 달과 지구와의 인력으로 지구의 자전이 조정되며, 따라서 바다의 물이 육지로 넘치지 못하게 하여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계를 통한 은혜가 없으면 인생은 보존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연계의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선민의 생활을 보호, 인도하신 것으로 나타났지만 영적으로 음미하면 구원의 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① 애굽의 장자를 치심은 마귀를 어거하심이요, ② 선민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심은 육적, 생활적 자유와 함께 영적, 신앙적 자유 주심을 뜻하며, ③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심은 성도의 모든 생활을 지도하심이요, ④ 홍해를 가르심이나 대적을 물리치심은 난관이나 시험을 이기게 하심이요, ⑤ 광야로 통과케 하심은 연단이요, ⑥ 땅을 기업으로 주심은 안식처, 즉 영생의 천국을 허락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또 비천한데서 하나님의 보호받는 존귀한 백성이 되어 기념하게 하고(23절),

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25절). 작은 미물들이 먹을 것을 취하는 것을 보면 신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감사 할 일들을 연구하여 감사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연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구속의 은혜와 식물 주시는 은혜등을 항상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2~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항상 선을 좇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람이 항상 하는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호흡이 멎으면 살 수 없겠지요. 이와같이 성도의 신앙생활에도 항상 하여야 할 것이 몇가지 있는데, “항상 선을 좇고, 항상 기뻐하고, 항상(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0~17),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라(행 17:11 말씀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시면 선을 좇는 방법으로 4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신앙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치하해 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들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나 선을 행하는 성도는 절대로 신앙의 지도자들과 싸우거나 대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분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저의 신앙적 역사를 보면서)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혹 작은 불만으로 지도자에 대한 불신을 가졌으면 그것을 잘 해결하고 존경하는 자신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도자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면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히 13:17). 또 모든 이의 수고를 알아주는 것은 성도의 미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너희끼리 화목하라”하신 말씀따라 성도가 서로 원만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크게 둘로 나누면 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정립이고, ② 자신과 이웃과의 원만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정립을 위해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하고(요 14:23),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본문 말씀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고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데, 곁에 있는 성도의 과오에 대하여 못참을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또 이웃 형제에게 악을 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개인을 상대하거나(피차 대하든지) 단체를 상대하거나(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절대로 악으로 악을 갚으려 하지 않아야만 화목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모(角)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격이 과격하지 않고 둥글둥글하며, 원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화목이 없고, 겸손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 세계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생활은 개인적 생활이나, 교회같은 단체적 생활에 꼭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 규모란 뜻을 더 자세히 설명드리면 예절이 있고, 분수를 지키며, 규칙을 잘 지키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예절에 아둔하거나 분수에 알맞은 체신을 잘 못하거나 규모를 지키지 못하여 자신이 설 자리와 서지 말아야 할 자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질서를 흐리게 만들고, 혼난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배우고, 조심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전 14:33)고 하셨습니다.

4. 약한 자를 안위하고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약하다”는 뜻은 이해의 폭이 넓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낙망도 쉽게하고, 슬픔도 쉽게 느끼며, 분노도 쉽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한자는 여간 어려운 일도 잘 참아 넘기는 것입니다. 또 “힘이 약한 자”란 뜻은 성취력이 약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면 성취력도 강해집니다. 그러나 성취력이 약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에 앞서가는 성도는 그런 사람들을 잘 붙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일에 항상 선을 좇는 성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며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제47과 아무것도 아님 (요 15:5~8) 목록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무엇 무엇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보게 되어 “만일 우리들의 세계에 무엇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태양이 없다면 어찌 될까요? 어둠속을 잠시 헤메다가 추워서 얼어 죽을 것입니다. 만일 공기가 없다면 3분도 살지 못할 것이요, 물이 없다면 더러운 냄새가 가득 할 것이요, 돈이 없다면 큰 고생을 해야 하겠지요. 만일 이웃이 없고, 나혼자 산다면 쓸쓸하기는 하겠지만 세상의 욕심은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성도를 가지로 비유하시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으니, 따라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요, 결국 불사름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 속에 거해야만 기도가 응답되고(7절), 영광의 과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8절). 이 말씀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연합의 상태를 “말씀 간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안계시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1) 자연계시나 말씀계시는 가능하겠지만, 인격 그대로를 나타내신 하나님은 알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구원자는 예수님 뿐이시므로 모든 인류는 구원의 성취를 힘입지 못할 것입니다.

2)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인간이 그 목적 성취를 못할 것인즉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든든히 모시지 않으면 이는 가지가 나무에 붙지 않은 것같고, 또 말씀이 심령에 없는 것같아서 기도응답이 불가능함은 물론 아무것도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만일 예수님은 계시나, 예수님의 피 흘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없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십자가 없는 구속은 있을 수가 없기때문에 인생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히 9:22에 보시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꼭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시는 것만을 속죄제가 되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1) 예수님이 제물의 가치로 볼때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요,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시기에 가장 유력하시기 때문이요,

3) 예수님만 무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꼭 피를 흘리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그것은 피가 생명이기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제사드림을 뜻하고, ② 독생자의 피를 보시는 하나님은 뜨거운 사랑과 정열을 느껴 범죄자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어떤 일을 적극성 있게 성취하려 할때는 혈서를 쓰는등 피를 보이는 실례가 있지요? 이것은 그것을 보는 자의 마음을 충동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는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상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뜨거움을 느끼고,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고전 15:13~19에 보시면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의 전파도 헛것이며,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도 망하고, 영생도 없으며, 예수님 따른 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또 만일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히 11:6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큰 믿음, 좋은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좋은 믿음은 성경지식과 실천과 연단과 충성력을 가진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5. 고전 13:1~3에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없는 세계는 절대로 살 소망이 없는 세계일 것입니다.

6. 또 믿는 자에게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 하시므로(약 2:26) 신앙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7. 거룩함이 없으면 주님을 볼 수 없다고 하셨으니(히 12:14) 이것은 “마음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뜻과 같은 것이요(마5:8),

8. 마지막으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히 12:8). 저희들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의 제목을 삼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8과 자원하는 심령 (시 51:10~12) 목록으로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의 시”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얽힌 사연이 많지만 본문에 나타난 말씀 ①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는 간청, ②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는 간청, ③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는 소원, ④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는 간청, ⑤ 마지막으로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붙들어 달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자원하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더 많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이 철저한 회개를 성취하고 새출발하기 위하여,

1) “정한 마음(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죄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그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달라는 뜻입니다. 시계에 약이 다하면 다른 약을 갈아 끼우듯이, 하나님은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하였는데 이것은 진실한 회개, 진실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거짓스러운 요소를 제하여 달라는 기도요,

3) “주 앞에서 쫓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하였는데, 이 뜻은 항상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소원하는 기도요,

4)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하므로 받은 은총을 크게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이 경색되면 구원의 은혜도 큰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감정까지도 덤덤해 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즐거워하고, 은혜와 감사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자기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을 믿는 것도 믿으려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살후 1:10). “믿어진다”는 것은 억지가 아니요,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에 가서 “문화인의 생활과 지혜를 보여주고, 각종 봉사와 사랑을 나타내 주어도 미개인들은 여전히 리빙스톤이 믿는 예수를 믿지 않더라”하였고, 추장 한사람이 믿은 다음에 그 부하족들을 “때려서 믿게하자”고 했을때 리빙스톤은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역시 신앙이란 명령한다고 굴복하여 믿거나, 때린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믿는 것 만큼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회개하는 것도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윗이 회개의 시를 읊으면서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구했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스스로의 마음에서 울어난 것이 아니고, 누구의 강요에 의하였다던지, 아니면 벌이 무서워서 표면상으로만 나타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진정한 회개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그 자신의 심령과 인격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하며, 이 경우에 진정한 회개의 결과는 그 다음에 복종함과 겸손한 생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헌신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후 9:5, 7에 보시면 “연보는 준비하여야 하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내지 말며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때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이끌어 그 십자가를 지게 한 사실에 대하여 그 억지의 봉사가 안한 것보다 유익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는 봉사를 값있게 평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의미로 신앙적인 모든 일도 자원함이 결여된 것은 모두 값진 행동이 못되는 것입니다. 명령에 복종하여 믿거나, 억지로 교회에 출석하거나, 기분, 체면, 수양, 병고침, 기복주의등의 목적으로 믿는 것도 역시 자원이 결핍된 것이며, 감사와 봉사도 자원하므로 시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생활도 자유가 있고 부담이 없으며, 자원함의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49과 집을 짓는 자 (마 7:24~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집을 짓는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반석 위에 집 짓는 자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눅 14:28에서는 “망대 짓는 비유”를 말씀하셨고, 고전 3:10~13에서도 “주님이 닦아 놓으신 터에 불타지 않는 재료로 집을 지어야 장차 불로 심판할때 그 공력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운동경기로 비유하신 말씀도 있고(히 12:1, 딤후 2:5), 농사 짓는 비유, 씨 뿌리는 비유(마 13:18)로도 말씀하셨고, 전쟁하는 것으로도 비유하셨습니다(엡 6:13).

1.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집 짓는 일로 비유하셨는데,

1) 저희들이 무슨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십니까? ① 사 54:2에 보시면 “네 장막 터를 넓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사람이 몸담아 사는 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딤전 3:15에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시므로 지상의 교회를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요 14:3에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은 내세천국의 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집을 다 성도가 짓는 것인가? 할때 하나님이 집을 짓는 주인이시고(시 127:1), 성도는 맡겨진 일에 한하여 집을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육신의 장막을 짓는다 할때 하나님이 집을 세우도록 재물과 기회를 주시면 사람은 좋은 기술자와 재료를 구입하여,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또 성도가 교회의 집을 짓는다면 하나님은 여러가지로 은혜를 주시고, 성도는 전도와 봉사와 사랑과 기도와 진리를 충만케 하여 좋은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 천국집을 짓는다고 할때 이 집은 예수님이 예비하시지만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상급을 받고 더 큰 영광을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은 성도가 지상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분량으로 그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지혜로운 건축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1)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집 짓는데는 우선 기초를 든든히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 기초를 든든히 하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지 않거나 시행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많이 깨닫고 많이 행하는 것이 집을 잘 짓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2) 성경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과 성경이 신앙의 터라고 말씀하신데가 있습니다. 엡 2:20에서 “너희는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하신 말씀이 바로 성경에 기초해야 된다는 말씀이고, 또 고전 3:9~11에 보시면 “성도는 하나님의 집이라”(교회의 요원이므로)하시고, 바울사도가 “그 집의 터를 닦았다”하셨고, 또 다른이는 “터를 닦지 못하니 조심하여 집만 세울 따름이라”하시고, 또 “그 터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집터는 신앙의 기초요,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과 말씀을 전달한 이가 바로 사도요, 선지자란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나 선지자가 아닌 일반 성도는 스스로 터를 닦지 못하며 오직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성경말씀에만 기초하여 믿고, 복종하는 생활로 집을 지어나가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집을 잘 짓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①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반석같은 기초입니다. 이 기초는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성경입니다. 성경에만 기초하여 생활하는 신앙이 집 잘 짓는 신앙입니다. ② 좋은 재료를 써야 합니다. 고전 3:12~13에 보시면 두 종류의 재료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불타는 재료이고, 하나는 불에 안타는 재료입니다. 불타는 재료는 이 세상이 불탈때 없어지는 것이고, 불에 안타는 재료는 영원히 남는 것이므로 이는 천국에서 누릴 상급이 있도록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③ 설계도(주님의 뜻)대로 지어야만 준공검사에 합격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드린 생활입니다. 결국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만이 집을 잘 짓는 최대의 비결인 것입니다.

 

제50과 상급 받은 청지기 (마 25:14~21, 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상급 받는 청지기”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강해문을 통하여 이미 증거된 말씀이지만 연말을 맞이한 저희들이 충성문제를 반성하는 의미로 이 말씀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상급 받을 청지기는 자기가 받은 달란트 파악을 잘 해야 합니다. 달란트란 하나님이 우리들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밑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별로 없는 줄 알고, 자신은 밑천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을 할 수 없는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받은 은혜의 달란트를 점검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감사를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성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우선 성도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자세히 분석하면 선택의 은혜, 거듭나게 하신 은혜, 믿음 주신 은혜, 죄사함과 칭의를 주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주신 은혜, 예수님을 닮게 하신 은혜, 영생천국의 은혜, 말씀과 성령 주신 은혜등이요,

2)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나누어 주신 은혜는 자연계의 은혜를 비롯하여 지혜, 지식, 직분, 능력, 건강, 물질, 명예, 가정, 자녀들, 사업등에 골고루 나누어 주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5달란트를 받은 종이 5달란트의 가치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저희들도 여러 부분에서 받은 은혜의 밑천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긴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이 임의로 쓰고 평안하게 살라고 주신 것도 아니요, 또 “돈을 축내면 안되니까 보관만 잘 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요, “그 돈을 잘 활용하여 더 많은 이득을 남기라”는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구원의 은총과 믿음과 각종 은사와 여러가지 복을 주시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기 해 드릴 사명을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다(엡 1:6)하셨고, 만물창조와 통치와 심판의 목적도 하나님 영광에 있으며(롬 11:36), 따라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10:3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받은 것이나, 무엇을 하는 것이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달란트 받은 악한 종은 달란트 받은 목적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3. 그 달란트를 이용하여 영광 돌릴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식으로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건강으로 어떻게 충성할까?, 물질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여유있는 시간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칠까?, 나의 음악 잘 하는 것으로, 나의 글씨 잘 쓰는 것으로, 나의 계산 잘 하는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 일에 충성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 시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비뇨기과 의사를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데리고 갔더니 치료를 해 주고는 “나의 받은 달란트는 비뇨기과 기술뿐이기 때문에 내가 목사님을 다른 방법으로는 돕지 못하나, 내게 있는 것뿐인 비뇨기과 기술을 필요로 할때는 도와드리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오래간만에 시골의 어떤 친척집에 갔더니 무엇을 주어 보내고 싶어서 찹쌀, 깨, 마늘, 심지어는 된장까지 꾸려 주어서 받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고후 8:11, 12). 있는 달란트로만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을 안 받았다 하여 적은 것도 안해야 되는 줄로 아시면 안되고, 하나님은 적은 것에 충성하는 것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꼭 아시기 바랍니다(21절).

4. 바로 가서 장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갔다”는 뜻은 쉴 사이없이 근면했다는 뜻이고, “장사를 했다”는 뜻은 달란트를 자기 특성에 맡도록 활용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꼭 “장사를 하여서만 이익을 남기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달란트를 받은 종의 형편으로는 장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달란트 받은 종이 집 짓는 기술이 있었다면 집을 지어 팔아서(집장사) 이익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달란트는 물질만 받은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근면하지 않으면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시간도 일종의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상급 받은 청지기는 ① 달란트 파악을 잘 하였고, ② 달란트 맡은 목적을 잘 알았고, ③ 시간 낭비없이 자신의 소질대로 장사하였기 때문에 이익을 남기고, 주인의 칭찬과 상급을 받았음을 아셔서 신년도 부터는 그렇게 충성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1과 예수님을 맞이한 시므온 (눅 2:22~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절과 관련있는 말씀을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맞이한 시므온”이란 제목으로 증언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어리셨을때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1) 이 사람의 직분은 나타내지 않았으나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성령님이 그의 위에 계셨고, 또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다가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갔을때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절기를 지키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저희들은 시므온처럼 신앙있는 자격자로 예수님을 맞이 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과 관련을 맺어오신 분이기 때문에 신앙 없는 자의 성탄 축하는 참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가 퍽 타락한 세대였지만 하나님은 시므온같은 성도를 그때까지 남겨 주셨고, 어린나이로 자라나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게 하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3) 시므온은 당시에 의로운 사람(의롭게 사는 사람)이요, 또 경건한 신앙의 덕을 지닌 사람이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함은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뜻이요, 또 성령의 충만한 감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성탄절을 지키면서 우리의 신앙이 크게 발전하는 체험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시므온이 살아 있을때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가시게 되어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게 된 것입니다.

1) 경건한 성도 시므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게 된 것은(27절) 하나님이 예수님을 마나도록 인도하신 축복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때에 예수님은 몇살쯤 되셨으며, 무슨 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까요? 눅 2:21에 보시면 “난지 8일”이란 말씀이 있고, 또 42절에서는 12세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데리고 온 아기”라 하셨으므로 애굽의 피난 중에서 돌아온 직후일 것입니다(마 2:15, 23, 눅 2:39). 헤롯왕은 37년간을 재위하다가 주후 2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나이 3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율법의 전례대로(27절) 가셨다”하셨으니, 이는 할례일이나(21절), 결례식(22절, 레 12:1~8)을 위하여 간 것이 아니고, 매년 지키는 절기를 위하여 가셨으리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 본 것과 그가 죽기전에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여야 하나님을 볼 수 있듯이 경건하고 성령충만한 성도이어야만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탄을 맞이한 저희들도 꼭 시므온같은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하겠습니다.

1) 시므온은 성전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자주 나갔을 것입니다.

2) 시므온은 성경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지식이 없었다면 메시야를 기다리지 못할 것입니다.

3) 그는 늘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4) 하나님은 또 이렇게 사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5) 또 하나님은 그가 죽기 전에 은혜 받는 기회를 주셨으니, 그 은혜가 곧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4. 그래서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났을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성령의 감동으로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잘 알아보았습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가까이 모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찬송을 하며 감사하였습니다. 28절에서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니다(소원 성취했다는 뜻) 내 눈으로 주의 구원(구원자)을 보았사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찬송과 감사를 드렸고,

4)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구원이요, 이방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흥망을 가름하는 표적이요, 마음을 찌르듯 하고 생각을 드러낼 분이라”고 하였고,

5) 마지막으로는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제사장일 것이라고도 합니다. 저희들도 시므온처럼 주님을 맞이하는 성탄을 지내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인생의 날을 계속함 (시 90:1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생의 날을 계속함”에 대한 말씀과 몇가지 소원기도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벌써 1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인생의 날을 계수해 보고 또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줄 알아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 인생의 날을 계수함에 대하여 본문 12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가 날을 잘 계수하면 “지혜의 마음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 따라서 인생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아셔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날을 계수하는 것은 ① 얼마나 살았느냐에 대한 날수를 계수하는 것입니다. 50년 또는 70년, 정확하게 45년 35일…누구나 생일을 알면 다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연수는 다르지만 평균 나이를 따지면 약 70세쯤 살 것입니다. ② 이것이 긴 것인가, 짧은 것인가? 할때 성경은 짧은 세월이라고 하셨고, 그 짧은 세월을 표현할때 “한 경점이라”(4절), “잠깐 자는 것같다”(5절), “아침에 돋는 풀같고, 잠깐 피는 꽃과 같다”(5,6절), 또 “일식간에 자나간다”(9절), “날아간다”(10절)고 하셨습니다. ③ 그러면 또 어떻게 지나가느냐? 할때 주님의 분노중에 지나가고(9절), 곤고와 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15절). ④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인생도 자신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붙드시는 힘으로 산 것입니다. 본문 90:1을 보시면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고, 또 3절에서는 “주께서 티끌로 돌아가라”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셨습니다.

2) 그렇다면 이렇게 인생을 계수해 본 것이 무슨 깨우침을 주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깨우침으로는 ① 내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인생이란 점과, ②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생을 살지 못하였으면 대단히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③ 허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13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7순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는 자식이나 이웃을 위해서 큰 일을 못했어도 예수님만 잘 믿고 섬겼으면 보람된 인생을 사신 것이라는 말씀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요6:29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마음은 인생을 보람있게 사는 방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2.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하여 어떤 은혜를 소원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1) 13절에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이 복이요, 보람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 73: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2) 14절에서 인자와 긍휼로 평생토록 만족과 기쁨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으로서만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15절에서 “우리를 곤고케 하시고 화를 당하게 하신 날수대로 기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곤고한 시절이 있었다 해도 억울 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핍박 당한 성도의 곤고한 날수대로 기쁨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의 행사를 주님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나타내시고 견고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17절).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5) 주님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 주시라는 것입니다(16절).

결론적으로 인생은 하나님이 없으면 허무해집니다. 또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충만히 받아야만 보람이 있다는 것을 이 성경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