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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설교집(Ⅱ)

지영근 목사 著

목 차

(★ : 절기설교)

1995년도  52주 설교


제1과 믿음의 새 출발 (고후 13:4~5)★ 바로가기

제2과 주 예수를 믿으라 (행 16:26~34) 바로가기

제3과 내 집에 와서 유하라 (행 16:11~15) 바로가기

제4과 하나님의 일을 하자 (요 6:28~36) 바로가기

제5과 달란트에 따른 충성 (마 25:14~23) 바로가기

제6과 믿음의 요소 (롬 10:13~17) 바로가기

제7과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17) 바로가기

제8과 우상 숭배를 피하자 (출 20:1~6) 바로가기

제9과 성도의 본받을 대상 (고전 11:1~6) 바로가기

제10과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16)바로가기

제11과 고난의 유익 (시 119:65~72) 바로가기

제12과 진노하시는 하나님(민 25:1~13) 바로가기

제13과 지혜를 구하자 (약 1:5)바로가기

제14과 성도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 (벧전 2:1~5) 바로가기

제15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요1:29~30)★ 바로가기

제16과 부활후 나타나심 (요 20:1~10)★ 바로가기

제17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사 41:8~10) 바로가기

제18과 좋은 어머니 (잠 31:10~31)★ 바로가기

제19과 사무엘의 성장 (삼상 2:17~21)★ 바로가기

제20과 형제를 사랑하라 (벧전 3:8~12) 바로가기

제21과 좋은 열매를 맺자 (마 3:1~10) 바로가기

제22과 그리 하니하실지라도 (단 3:13~18) 바로가기

제23과 인생에 대한 비유 (벧전 2:11~12) 바로가기

제24과 성령충만의 상태 (눅 4:1~13)★ 바로가기

제25과 회개한 탕자 (눅 15:11~24) 바로가기

제26과 회개하지 않은 탕자 (눅 15:11~24) 바로가기

제27과 3신앙의 진단 (시 23:1~6) 바로가기

제28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호 6:4~6) 바로가기

제29과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사 45:11~13) 바로가기

제30과 내게로 돌아오라 (렘 4:1~4) 바로가기

제31과 미가선지자의 외침 (마 7:5~9) 바로가기

제32과 신의 성품에 참여함 (벧후 1:4~7) 바로가기

제33과 3가지 할 일 (롬 16:17~20) 바로가기

제34과빈들로 가신 예수님 (하 14:12~21) 바로가기

제35과 기도 응답의 섭리 (사 41:17) 바로가기

제36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의무 (히 1:14~2:4) 바로가기

제37과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수 24:14~18) 바로가기

제38과 선행을 실천함에 대하여 (약 2:14~17) 바로가기

제39과 평안을 위하여 힘쓴 아사왕 (대하 14:1~7) 바로가기

제40과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 2:12~21) 바로가기

제41과 우리가 구할 은총 (느 9:20~22) 바로가기

제42과 기도자의 태도 (출 14:11~16) 바로가기

제43과 내 말에 거하면 (요 8:31~36) 바로가기

제44과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는 이유 (시 119:97~106) 바로가기

제45과 성경에 밝아지는 마음 (행 3:1~10) 바로가기

제46과 율법으로 주신 감사 규례 (신 26:1~11)★ 바로가기

제47과 몸에 가진 예수의 흔적 (갈 6:11~18) 바로가기

제48과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유 (창 13:5~9) 바로가기

제49과 할례에 대한 지식 (고전 7:18~19) 바로가기

제50과 선택을 잘 하는 성도가 되자 (수 24:14~18) 바로가기

제51과 예수님 탄생의 의미 (마 2:1~8, 16~18)★ 바로가기

제52과 정병을 쓰시는 하나님 (삿 7:1~8)★ 바로가기

1996년도 52주 설교


제1과 믿는자로 시작함 (요일 3:9~10)★ 바로가기

제2과 처음부터 할 일 (신 27:1~8) 바로가기

제3과 올바른 마음을 갖자 (행 8:18~24) 바로가기

제4과 예수님을 따를 자의 자격 (눅 9:57~61) 바로가기

제5과 성도의 경건한 생활 (약 1:22~27) 바로가기

제6과 주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자 (눅 6:35~38) 바로가기

제7과 요셉의 감옥살이 (창 40:1~8) 바로가기

제8과 현실교회의 위험 (사 5:1~7) 바로가기

제9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눅 9:1~6) 바로가기

제10과 전도에 관한 지식 (롬 10:13~15) 바로가기

제11과 복음사역자에게 명하심 (딤후 4:1~5) 바로가기

제12과 바울사도의 목회방법 (행 20:17~24) 바로가기

제13과 중보자의 고난 (히 5:7~10)★ 바로가기

제14과 바울의 부활 증언 (고전 15:1~19)★ 바로가기

제15과 사역자를 원망한 사람들 (민 16:41~50) 바로가기

제16과 회개와 관련된 지식들 (막 1:15, 행 8:22)바로가기

제17과 기드온을 쓰시는 하나님 (삿 6:11~18) 바로가기

제18과 불효자의 받을 벌 (신 21:18~23)★ 바로가기

제19과 자녀의 신앙 교육 (신 6:5~9)★ 바로가기

제20과 안디옥 교회 (행 13:1~3) 바로가기

제21과 징계 대한 지식 (히 12:8~13, 마 16:19) 바로가기

제22과 성령 충만의 결과 (행 4:8~22)★ 바로가기

제23과 고넬료 가족의 성령 충만 (행 10:44~48) 바로가기

제24과 믿음이 적은자여 (마 17:14~20) 바로가기

제25과 신앙의 파숫군 (겔 33:1~9) 바로가기

제26과 말세의 신앙 진단 (딤후 3:1~5) 바로가기

제27과 성화와 영화 (빌 3:17~21) 바로가기

제28과 여리고성 정복의 의미 (수 6:1~7) 바로가기

제29과 3가지 확신을 가짐 (삿 6:16~18) 바로가기

제30과 신앙생활의 방법 (골 2:6~7) 바로가기

제31과 마귀가 못하는 것 (막 5:1~12) 바로가기

제32과 교회를 섬기는 법 (롬 12:3~9) 바로가기

제33과 생명보다 귀한 것 (행 20:17~24) 바로가기

제34과 욥의 신앙 (욥 23:10~14) 바로가기

제35과 성도에게 주신 권세 (요 16:32~33) 바로가기

제36과 벙어리 귀신 들린자를 고치심 (막 9:14~29) 바로가기

제37과 진리가 무엇이냐 (요 18:33~38) 바로가기

제38과 십일조에 대한 지식 (말 3:7~12) 바로가기

제39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마 6:28~30) 바로가기

제40과 바울사도의 목회적 사명 (행 20:17~24) 바로가기

제41과 말세를 극복하자 (마 24:4~13) 바로가기

제42과 여러가지 교훈 (약 1:14~18) 바로가기

제43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 (시 73:23~28) 바로가기

제44과 한나의 기도 응답 (삼상 1:12~20) 바로가기

제45과 미디안에게서 구원하심 (삿 7:15~23) 바로가기

제46과 하나님께 감사 할 일 (시 103:6~14)★ 바로가기

제47과 신앙생활의 요소 (엡 6:10~13) 바로가기

제48과 큰 구원 (히 2:1~4) 바로가기

제49과 죄에 대한 지식 (롬 6:17~23) 바로가기

제50과 회개에 대한 지식 (벧후 3:8~13) 바로가기

제51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요1:14~18)★ 바로가기

제52과 새로운 피조물 (고후5:14~19)★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93년 11월에 “7분 설교” 제1집을 출판하였고, 이어서 2집을 내놓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는 아니나 들으려 하는 사람, 읽으려 하는 사람,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유감입니다. 성경이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것을 읽으므로 그리스도의 비밀을…알 수 있다”(엡 3:4)하셨으며, 또 “읽으므로 복되다”고도 하셨으니(계 1:3) 많은 성도들이 바쁜 생활 중에 모여서 듣고 깨닫는 분량보다 읽어서 터득하는 분량이 더 많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설교집은 제가 새벽 기도회에서 증언한 말씀을 2년분 구역 설교용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편집한 것입니다. 1집은 93년, 94년, 2집은 95년, 96년 절기에 맞추었으나 고난절, 부활절 설교만 조정하여 쓰신다면 아무 때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많이 보급되지 못할지라도 본인은 본인의 증언 자료가 출판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참고해 주시든지, 또는 새벽 기도회 설교준비로 휴식에 지장을 받는 후배 교역자님들이 순간적으로 새벽 기도회 자료의 가닥을 잡는 용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본문 해석 설교를 하면서 2페이지 분량으로 개론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대지를 구분하여 교훈을 첨부한 것입니다. 끝으로 본인의 영적 식견의 발전과 강해집과 일반 설교집 등 계속 출판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또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용도로 이미 출판된 “기독교 신앙백과”와, 또 교회의 실제적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교회헌법연구”에 대하여서도 아울러 소개를 드립니다.




1994. 5. .


저자 지 영 근

 


1995년도


제1과 믿음의 새 출발 (고후 13:4~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새 출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런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는 신년부터 신앙생활을 확실하게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확실하고 미온적인 상태에서 믿음생활을 시작하고, 또 어떤 이는 과감하게 우상을 물리치고 성수주일과 십일조를 드리면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확실하게 믿고, 철저하게 시작하는 것이 복 받을 신앙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말씀 4절은 “그리스도께서 약한 자처럼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성도들도 자신의 정욕을 죽이고, 이 세상을 대하여 약한 자처럼 살아야 할 것” 을 교훈하셨고, 다음 5절에서는 “자신을 시험하여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가 왕노릇 하시는지를 확증하여 만일 그리스도가 자신 속에서 왕노릇 하시지 않으면, 자신이 믿음 밖에 있는 줄로 알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속에서 예수님이 왕노릇 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롬 7:9에서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셨고, 고전 15:31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자기를 죽였다”고 한 말씀이나,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좇으라”(마 16:24)하신 말씀은 자기의 현실적 욕심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현실적 욕심을 죽인 사람은 자기 뜻, 자기 목표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현실적 승리나 목적을 위하여 대립하지 않으며 오직 겸손과 양보와 봉사와 희생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면에 연약하신 분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바로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죽고 주님이 사시는 것을 확실히 하셔야 하겠습니다.

2. 이렇게 하려면 자신을 돌아보고 시험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마 26:41에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셨는데 성도가 자신을 돌아보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육신이 약하여 연약에 끌려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되겠는데 새벽에 못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의 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사도께서는 주의 만찬을 대할 때에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하셨고(고전 11:28), 또 “형제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하셨으며(갈 6:1), 지금 읽으신 5절에서는 “항상 자신이 죽어있고,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가를 확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지금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없는 자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하는 힘이 있으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만일 그것이 없고 자기 정욕에 따라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 믿는 입장을 확실하게 세워서 믿음의 새 출발을 하셔야만 발전이 있고 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저희들은 황금같은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새해가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희미하게 불확실하게 시작하면 역시 결과도 불확실하고 발전과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믿음의 확실함을 점검하시고 새 출발을 잘 하시기 위해서

1) 내가 죽어 있는가?

2)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가? 다시 말하면, 내가 성경말씀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가? 를 점검하시고,

3) 내가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가?

4) 내가 신령한 은혜를 귀하게 여겨 크게 사모하는가? 하는 것을 살피셔서 꼭 믿음의 새 출발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제2과 주 예수를 믿으라 (행 16:26~3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과 함께 “간수의 온 집이 구원을 받음”에 대하여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26절에 보시면,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된 사실이 기록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 있는 전도자들을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게 하여 구출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옥에 있을 때에 천사를 통하여 구출된 사실이 있었습니다(행 12:7). 그러나 세례요한과 스데반은 그렇게 구원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전도자가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죽도록 버려두시는 것과 환난 중에서도 더 일할 것이 그에게 있어서 특별섭리로 구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내용입니다. 간수는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지진을 만났고, 옥문이 파손 된 것을 보았을 때 어두운 밤이라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법에 간수가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대신 자기가 죽어야 하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사도가 이를 만류하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을 때, 간수는 떨면서 부복하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호소하듯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때에 바울사도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였고 간수는 두 전도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때린 상처를 씻기고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음식 대접을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수의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를 살피면

1)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집이기 때문이요(행 13:48),

2) 전도자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 될 만큼 인정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인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자기들의 생명의 위험만 생각하여 도망을 하였다면 그 간수는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죽게 하는 일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전도자 노릇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수는 그 사실이 자기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이 증언하는 복음을 신뢰하여 받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아는 자의 말이면 무조건 믿어도 손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의 말이어야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은 바른 말이라도, 만일 증언자에게 신뢰성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자는 자기의 생명이나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선행을 나타낼 때에 전도자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강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다른 것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시겠지만,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다른 것을 아울러 믿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이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돈 믿고, 건강 믿고, 보약 믿고, 사람 믿고, 교인 믿고, 목사 믿고, 현실을 믿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해아래 있는 것이 다 헛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전 1:3) 다른 것은 고사하고 한가지 가장 마음 아픈 일은 교회에 나오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람 믿고, 목사를 믿는 것입니다. 롬 3:4에서 하나님만 믿을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 14:6에서 예수님만 “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 17:17에서 성경만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믿으려 하며, 사람의 하는 일을 의식하면서 낙망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믿고 의지할 대상이요, 사람은 가지각색이나 모두가 사랑의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어떤 상황을 나타내든지 성도는 그 세상의 소금이어야 하기 때문에 피하여 은둔해서도 안 되고, 맑은 물을 따라 피하려 해도 안 되며,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대상에게나 사랑과 빛을 나타내고,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요, 사명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는 성도님들이 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과 내 집에 와서 유하라 (행 16:11~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내 집에 와서 유하라”는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1. 먼저 이 말씀의 좌표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의 2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니아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전도하여 열매 맺은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의 1차 전도는 행 13:4~15:35까지 나타나 있고, 2차 전도는 15:36~18:22까지요, 3차 전도는 18:23~21:16까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에 보시면 두줄 친 지역 이름이 7번 나오는데 “드로아”는 아시아 서쪽 “에게해”변에 있는 항구요, “사모드라게”는 “에게해” 중간에 있는 섬이며, “네압볼리”는 마게도니아 북쪽(헬라 영지 북쪽)에 있는 항구로서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간 도착지요, 그 곳의 첫번 성읍이 빌립보로서 이곳은 네압볼리 항구와 가까운 지역에 있는 곳입니다. 그 당시에 그 지역들도 로마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또 “두아디라”성은 루디아의 본적지로 소아시아 지역에 있으며, 루디아는 빌립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3. 바울은 그곳에서 안식일을 맞이하였고,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기도처와 전도 대상을 만나기 위하여 강가에 나가서 (기도하고) 그곳에 앉은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켰지만 바울은 안식교인이 아니었고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른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다만 그날도 기도와 전도를 목적으로 조용한 곳을 찾았을 따름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조용한 기도처를 찾고 전도 대상을 찾아 전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그 당시 강가에 모인 여자들 중에 두아디라성에 사는 자주(포목을 일컬음) 장사 “루디아”가 있었는데 이 여인은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그때까지 십자가의 도리를 알지 못하였고 세례도 받지 않은 때였는데 그 곳에서 바울의 증언을 듣고 깨달은 후에 자기와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과 믿음을 권하는 것은 전도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 두 가지를 다 힘 쓴 것처럼 저희들도 그렇게 전도하고 교육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당시 강가에 앉은 여인들은 잠시나마 조용한 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쁜 사람들에게 전도하려 하지 말고 가급적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5. 바울이 말씀을 증언할 때 루디아는 “들었다”고 하였습니다(14절). 또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듣는 단계는 당사자의 노력에 의한 것이고 마음을 여신 것과 청종(깨달음)하게 하신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일입니다. 저희들에게도 증언하는 일과 듣는 일과 성령님의 열어 주심과 청종케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였어도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율법주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6. 그가 듣고 깨달은 후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즉시 바울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가서 모든 가족에게 증거케 하고, 모든 가족이 다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빌립보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봉사 전도입니까? 초대교회는 대부분이 핍박 가운데 가정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마가의 집에서(행 1:13~15, 2:1), 로마교회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롬 16:4~5), 골로새교회가 빌레몬의 집에서(몬 2), 라오데기아교회가 눔바의 집에서(골 4:15) 시작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바울사도의 전도와 루디아의 말씀 청종과 변화 된 것과 즉시 전도 봉사의 역군이 되어서 크게 영광 돌린 사실을 교훈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4과 하나님의 일을 하자 (요 6:28~3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라는 제목과 함께 본문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저희)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즉, 예수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선한 일들의 내용을 질문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에 관한 것을 대답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인 자기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한 일이란 뜻으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1) 질문자들은 선한 일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2) 구원은 하나님이 구세주로 인을 쳐서(27절) 보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3)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일을 자기의 일로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값이면 좋은 일, 하나님의 일을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1) 일에는 세상 일도 있고, 하나님의 일도 있습니다. 썩어질 육신을 위하여 하는 일은 세상 일이고, 자기의 일이며, 영생을 위하여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27절).

2) 하나님은 세상의 일도 부지런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살후 3:10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고, 수고하고 애를 써서 자기의 양식을 먹고,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말라”(8, 10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하셨으니까, 예수 믿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앞세우면서 자기의 일도 적당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1에서도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또 “모든 것을 적당히 하라”(고전 14:40)는 말씀도 있으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열심을 품어 섬기고(롬 12:11) 자기의 일과 세상 일에 대하여는 적당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질문자들은 또 묻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으려면 어떤 표적을 보고 누구를 믿어야 하느냐고 하면서 구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따를 때, 그가 하늘에서 ‘만나’라는 떡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믿은 것처럼 우리도 표적을 보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질문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내린 떡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임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그 떡은 모세가 내려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이며, 그 하나님은 만나의 실체인 참 떡, 즉 생명의 떡을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자들은 또 요청하기를 “주여 그런 생명의 떡이 있으면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고 요청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로 와서 나를 믿는 자는 주리지도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 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신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는 줄 알고 믿고 따라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36절을 보시면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적의 최고는 예수님의 부활이고, 계시의 최고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라” 하셨는데도 믿지 않는 자들은 다른 것을 믿고 따라온다 할지라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요 4:21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 말을 믿으라” 했을 때도 그 여인은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이 사람을 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적보다 성경의 권위가 더 높다는 것을 아셔서 표적보다 성경에 더 가까워지며, 또 성경이 없을 때는 예수님의 말씀이면 되고, 예수님이 안 계실 때는 성경의 지도아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을 하는 것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5과 달란트에 따른 충성 (마 25:14~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달란트에 따른 충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을 “달란트 비유 교훈”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합리적 생활을 착실하게 잘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혹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취미롭고 보람 있게 힘쓰지 못하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이 말씀을 잘 깨달으셔서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1.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자기의 달란트(돈의 단위로 6,000명의 하루 품삯이라고 함)를 종들의 재능에 따라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주었는데 5달란트(2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를 잘하여 갑절을 남겼고, 2달란트 받은 자도 역시 갑절을 남기므로 주인이 와서 회계할 때에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상급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종은 성도를 비유하며, 달란트란 특별한 은혜, 즉 그 사람의 재량에 따라 적당하게 주신 모든 축복을 의미합니다. 또 그것을 받은 후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는 것은 성실하게 노력하였음을 뜻하고 갑절을 남긴 것은 받은 은혜에 족할 만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호칭과 함께 작은 일에 충성 한 것을 칭찬하시고 더 많은 달란트를 주실 것과 주인의 즐거움인 천국의 복락을 상급과 함께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달란트로 이익을 남긴 것을 “작은 충성” 이라고 하신 것은 받은 달란트 밑천 없이 돈을 번 것이 아니고, 재량 따라 주신 달란트를 근거로 하여 돈을 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발전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근거로 받은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눅 19:에서 말씀한 “므나 비유”는 10므나를 1므나씩 10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시므로 성도가 골고루 받은 보편적 은혜를 의미하지만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각인의 천부재능을 따라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도 각인이 종류와 분량상으로 차별 있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므나 비유는 모든 성도의 공통적 사명이라 할 수 있고 달란트 비유는 각인의 분량에 따른 특수한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2.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1) 하나님은 각인에게 그의 천부적 재능에 따라 차별 있게 달란트(은사와 축복)를 주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성도 된 것과 한나라 백성이 된 것과 똑같은 자연 혜택 아래 있는 것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과 한남교회 교인이란 점 등은 다 같이 받은 1므나 같은 보편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지식, 건강, 재물, 생활환경, 직책, 기술 등에는 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달란트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다른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와 같으신 하나님이 여러 종류의 그릇을 용도에 따라 만드시듯이 성도 각인에게 주시는 은사와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적 달란트인지, 육체적 달란트인지, 혹은 전도의 달란트인지, 기도의 달란트인지를 잘 살펴서, 자기의 소질, 자기의 취향, 자기의 형편에 맞는 일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일을 하고, 서투른 왼손을 오른손처럼 쓰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형세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달란트인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자기 분수에 맞는 자기의 달란트에 성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종이 바로 가서 장사한 것처럼 쉬지 않고 성실하게 한 것이 교훈의 근거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익을 남긴 것은 영광의 분량을 뜻하나 하나님은 영광분량(목적 성취)보다도 성실한 수고 분량대로 상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20:12, 계 22:12). 그 이유는 어려운 여건에서 힘든 일을 할 때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수고 만큼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6과 믿음의 요소 (롬 10: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요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과연 “믿음이 무엇으로 인하여 발생하는가?”하는 것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13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주의 이름”은 믿음의 대상이고, “부른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또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지 않으면 부름이 성립될 수 없고, 전파와 증언(즉 믿음의 대상을 알려주는 것)이 없이는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좋은 소식, 복음)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고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16절 말씀에서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도 다 믿지 않았는데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 33:1에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하시므로 후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17절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전달받음)에서 발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종합적인 내용으로 믿음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요소는 크게 나누어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적 요소와 인간이 노력으로 얻는 상대적 요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발생 요소로서는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생명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요 3:3에서 “거듭나는 은혜가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믿음의 발생 요소는 중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부르실 때 일방적으로 주시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2) 믿음의 대상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롬 3:4).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셔야만 믿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여 보여 주시므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 주셨고, 또 성경을 계시해 주시므로서 하나님의 속성과 구원의 방도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생명과 믿음의 대상,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발생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성장 요소로서 전도와 탐구와 체험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성장 요소란 인간이 노력하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전파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자기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고 다음에는 선지자나 사도들이 전파하였고, 또 그 다음에는 전도자들이 전파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하셨으니까 믿을 것을 알려주는 전파가 중요한 것입니다.

2) 탐구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너는 배우고 확신 하여라”(마 7:7, 딤후 3:15)하셨고, 행 8:31에 보시면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빌립의 지도를 받고 깨달은 후에 세례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배우기 전에도 예배하러 왔었습니다. 그러나 배워서 깨달은 것이 그의 믿음의 폭을 넓힌 것입니다.

3) 체험입니다. 말씀을 배워서 믿으면 충분하지만 또 들어서 믿으면 충분하지만 그것으로 의심해소를 못할 때는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으로 듣고 못 믿다가 직접 보고 만져서 믿은 것이 그 실례인 것입니다(요 20:19). 기도 응답의 확신도 체험하면 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의 요소는 발생 요소와 성장 요소가 있습니다. 전자는 중생과 계시로 하나님이 주시고, 후자는 전도와 교육과 체험으로 믿는 자의 노력에서 얻는 것입니다. 이 노력의 복이 클수록 믿음이 커진다는 사실을 아셔서 감사하며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과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17) 목록으로


1. 본문 15절을 보시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란 현실적 생애를 뜻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허탄한 영광(하나님의 영광에 위배되고 궁극적 유익이 없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2. 이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1)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그런 생활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공부하는 자식은 대견하게 여겨도 놀기를 좋아하고 방탕한 자식은 귀하게 여겨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현실에 접하여 살고 있고, 또 하나님은 현실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이상 더 사랑하거나 영광을 가리울 만큼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배가 물위에 떠 있지만 물에 등을 대고 있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 향락에 치중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고, 마귀가 인간의 정욕을 좇아 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6절). 사람에게는 스스로 억제해야 할 3가지 정욕이 있는데 그것이 곧 육신의 정욕(혈기, 식욕, 성욕 등), 안목의 정욕(세상을 보면서 즐길려는 것), 이생의 자랑(명예적 소욕)인 것입니다.

3) 17절에서 세상과 정욕은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 영원히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죄되는 것이나 덕이 안되는 것이나 영원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지기의 정욕과 현세욕을 멀리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적당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현실 위주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하는 것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2. 얼마 전에 불교 조계종의 유명한 성철스님(1912~1993.11.4, 경남 산청출생, 이영주)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불교신자, 사회 인사들 115,000명의 조문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학식이 많고 불도를 깊이 닦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속세를 떠나 고행을 많이 하여 현세욕에서 멀리 떠난 것이 더 유명해진 것입니다. 그분이 19세에 결혼하여 딸을 낳고, 23세에 중이 되었는데 중이 된 후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하러 절에 왔을 때에 그 인정을 끊기 위하여 돌을 던져 되돌아 가게 하였고, 장성한 딸도 중이 되어 아버지를 만나려 했으나 “필요없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을 “불필”이라 짓고 만나지 않다가 37년만에 다른 사람의 중계로 잠시 만났으며, 사회에 소금 역할을 해야 할 것을 알리기 위하여 소금을 먹지 않으면서 8년을 눕지 않았고 10년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종단에 싸움이 있고 또 최고의 지도자 역인 종정의 직에 추대를 받았어도 역시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자기를 만나려면 부처 앞에 3,000배를 하고 와야 만나준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씨가 현직 대통령 때에 만나려 했으나 역시 3,000배에 걸려 만나지 못했고, 어떤 고관은 500배까지 하다가 지쳐서 만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에서도 소금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생명 없는 이방종교인도 그렇게 하는데 기독교인은 더욱 각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불교의 철학은 자연 만물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며, 인간이 때묻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서 스스로 명상하여 어떤 깨달음을 갖는 것이 그들의 종교 철학입니다. 불교의 철학이 현실을 경계하는 것과 자비를 내세우는 것 외에는 진리성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현실적 향락을 좋아하거나 기복신앙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과 우상 숭배를 피하자 (출 20: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우상 숭배를 피하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10계명 중의 두 계명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잡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유형한 것들을 만들어 숭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부처를 섬기는 불교인들이나 또는 잡신을 섬기는 미신 숭배자들을 우상 숭배자로 인정하고 그것을 증오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세계에도 상당한 우상 숭배가 잠재해 있거나 노출되는 경향을 보게 되는데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1. 자기 우상입니다. 성도가 되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모셔야 되는데 여전히 자기를 못 버리는 상태에서 자기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이탈하는 것입니다. 삼상 15:23에서 “완고한 것은 우상 숭배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완고란 자기중심을 고수하기 위해서 회개하지 않는 태도이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거나(롬 7:9, 고전 15:31, 갈 5:24) 하나님의 법에 굴복함이 없으면 그는 결국 자기 우상 숭배에 걸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현실 우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기복신앙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인간적 욕심입니다. 사는 목적을 현실에 두거나 현실 소욕이 강하여 믿음 생활을 옳게 하지 못하는 인간적 욕심입니다. 세상일에 바쁘기 때문에 주일을 못 지키고, 현실적 영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골 3:5에서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세상일에 탐심을 갖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세상일이라면 재물, 지식, 명예, 육신, 장수, 안일, 출세 등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많이 지적 하셨습니다. 요일 2:16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하셨고, 계 18:11~19에 보시면 역시 세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열거하셨는데 금은 보석, 진주, 각종 비단, 그릇, 향품, 포도주등 음식, 소와 양과 말과 수레, 치부, 사람들의 영혼을 낚는 일까지 다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우상주의자들은 먹는 것, 구경하는 것, 이성정욕에 빠지는 것, 유흥오락, 또 치부와 명예 등을 삶의 목적으로 알지 않습니까? 만일에 이런 취향이 성도에게도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닌 현실 우상 숭배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요 17:14). 이 세상은 나그네처럼(벧전 2:11) 지나가야 하는 만큼 적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편인가? 아니면 세상 편인가? 를 판단하여 현실우상숭배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우상을 외형적 교회를 숭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 건물이 크고 좋다하여 그것을 자랑거리로 알거나, 의지하려는 태도, 또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에 어떤 권능이 있는 줄로 알거나, 예배의식이 장엄하다하여 권위를 느끼거나, 자기변화보다 유형적 교회가 더 커지기를 사모하는 등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바로 교회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예배당 큰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예배당은 그 사람 개인이 지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혼자 지었다 하여도 자랑 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또 유형 교회 안에는 당연히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마 13:36). 어떤 이는 자기교회 목사님을 몹시 은혜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순수한 존경심이나 전도 유치를 목적 한 것이면 괜찮지만 역시 교회 우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라면 좋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 흠 없는 목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가 몹시 교만한 것을 보고 실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커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지도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을 것은 성경뿐이요, 존경의 대상은 예수님뿐이며, 사모할 것은 신령한 은혜요, 자랑할 것은 십자가뿐이고,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우상, 현실우상, 교회우상주의에서 탈피하고 성경과 십자가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유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과 성도의 본 받을 대상 (고전 11: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본 받을 대상”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의 1절과 2절 말씀이 바로 “예수님과 바울을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1. 성도가 본 받아야 할 모범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대상은 두말 할 여지도 없이 예수님과 사도들입니다. 본문에서 “나”라는 사람은 바울사도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하시므로 모범자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신앙의 모범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엡 2:20절에도 보시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믿음(신앙고백)과 본분(생활)에 대하여 표준을 제시한 말씀입니다. “바울을 본 받으라”는 말씀은 고전 4:16에도 있고,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본을 비롯해서(요 13:15) 그의 형상(롬 8:29), 그의 성품(빌 2:5)까지 본 받으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살전 1:6).

2.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 받으라”는 뜻은 신앙생활의 원리와 방법에 대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표현법이나 행동하는 모습까지 닮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독특한 모양을 주신 것처럼, 독특한 개성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받은 개성을 우선적으로 살려서 적당하게 활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한 채 어떤 존경하는 성직자의 언어표현이나 행동습관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보기 싫고 외식과 작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주여 주여 세번을 큰 소리로 외치고 기도하자”고 합니다. 이런 기도의 습관을 누가 시작했는지 상당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바르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방법을 쓰다보니 그렇게 된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도는 악을 써야만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개성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태와 모방을 피하고 개성을 보존하면서 표준을 사랑하고 표준을 모방하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저희들은 반성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하면 현실교회 성도들이 모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분별없이 모방하려고 피곤해진 것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주로 예배당 시설이나, 예배당 성물이나, 교회 운영방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좋은 예배당, 값비싼 성구, 다른 교회하는 대로 따라가는 일, 안 해도 될 것을 하는 일, 꼭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일, 사회의 문화주의를 따라가는 일등일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배당 사치보다는 구제가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강단에 십자가 세운 것이 좋아 보인다 하여 그것을 모방한 예도 있고, 또 강단에 강대상을 두개 놓는 것을 모방한 교회도 있습니다. 성도는 무엇이나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영광 될 것인가?, 신앙에 꼭 필요한 것인가?, 안 해도 지장이 없을 것인가?, 예수님 돈으로 해야 할 것인가? 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제직을 초청하여 자기생일을 차려먹고, 회계집사에게 돈을 타갔다는 일로 문의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종의 생일축하 비용을 주셔야 하는가? 할 때, 이런 것은 교인들의 자치금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2절에서는 “바울의 교훈을 기억하고 가르친 유전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유전이란 구전으로 증거 된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21:25). 다른 유전이나 잘못된 행위는 본 받으면 안됩니다(마 6:8, 23:3). 특히 이 세대와(롬 12:2) 개인의 사욕(벧전 1:14)을 본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것을 본 받고 본이 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6절은 설명 생략함).

 

제10과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1~16) 목록으로


1.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베다니 동리에(요 11:18)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11절) 그 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19절).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실이 있었고(2절), 또 예수님을 대접한 사실도 있어서(눅 10:38) 예수님과 그 가정은 퍽 가까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요단강변에 계실 때(요 10:40)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3, 6절). 이것은 그의 병이 위독하여 그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급히 아뢰고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병이 죽을 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하시고(4절), 그곳에서 2일을 더 유하신 후 다시 유대쪽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는 위험이 있어서 제자들이 가기를 꺼려했지만 예수님은 “낮에 다니면 빛을 보므로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낮에 다닌다”는 뜻은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하시고 4일 만에 베다니에 오셨으므로(39절) 유대 지경을 다녀오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 하심은 그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성도의 죽음을 “잠든 자”라 하셨으니 이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살전 4:13).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 부활의 주님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을 때에 그곳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다 하시고(15절) 병든 소식을 들으신지 6일 만에 나사로의 집에 오신즉 두 누이들은 크게 슬퍼하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21, 32절)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구하였고(22절), “장차의 부활을 믿는다”(24절)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 이것을 믿는냐?” 하시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 돌을 굴려내시고 죽은지 4일이 지나서 냄새가 나는 시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도 있었고(마 9:25), 자신도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되심과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요 11:은 나사로 부활장입니다. 저희들은 부활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2. 그런데 이 말씀에서 특별히 교훈을 받고저 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와 목표하는 사건이 이미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빛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 이틀 전에 아시고도 죽은 후 4일 만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시간과 사건의 성취가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4일을 연착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장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셔야만 무슨 일이 되고 안 계시면 실패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셨어야 좋았을 장소에 여러 날 계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빈틈없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시는 분이 아닌 것을 알면 성도는 언제나 낙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오셔서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계획이 실패하면 끝나는 줄 알고 또 죽으면 아주 끝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오셨어도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 이 사실은 모든 성도가 죽어도 부활과 영생의 은혜는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빌 1:21에서 바울사도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계 14:13).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옥에 있는 것을 아시고도 그대로 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순교했습니다. 요한을 죽도록 하신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마 11:13).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의 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사 9:6). 그 안에서 통치되는 모든 일은 안 된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결되고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11과 고난의 유익 (시 119:65~7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의 유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 67절을 보시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셨고, 또 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시므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

다.

1. 고난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1) 슬픔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는 슬픈 사연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마음과 육체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또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4) 죽음이 올 수도 있습니다. 가난, 실패, 이별, 질병 등 고난의 종류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다른 원인에 의하여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실수나 과오에 대한 징벌로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유익할까요?

1) 고난은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눅 15:에서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 가난의 고난과 외로움의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의 위치와 초라한 형편을 깨달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 집에 있을 때의 행복함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아버지 집의 생활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난 때문에 이것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고난은 자기를 살펴 겸손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고난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사도의 겸손 유지를 위하여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 고난이 패망의 앞잡이인 교만을 막는 것이라면 성도들은 겸손 유지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고난은 자기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갖게 합니다. 본분 67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신 말씀이 바로 고난 때문에 반성하고 회개했다는 말씀입니다. 탕자도 고난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4)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 50:15에서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고통 중에서 부르짖었다”(출 3:7)하셨고, 약 5:13에서도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은 성도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항상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고난을 당해서라도 기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고난은 현실애착을 멀리하게 합니다. 성도가 본향을 사모하지 않고 너무 현실에 애착을 두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성경은 현실을 적당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나그네”(벧전 2:11)란 뜻에도 있고, 또 “세상 것을 적당하게 누리며”(고전 7:29~30),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는 말씀에 잘 나타내 주셨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534장)라는 내용이 있는 것처럼 “현실적 고난은 현실을 멀리하고 내세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애착을 갖고 신령한 복을 등한시 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내세 지향적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 고난은 하나님이 성도를 연단하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계 3:18), “욥을 단련하신 하나님”(욥 23:10), “예레미야를 단련하신 하나님”(렘 12:5), “이스라엘을 독수리 새끼처럼 연단 시키시는 하나님”(신 32:11)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많이 겪고 훈련을 쌓은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의연하고 굳센 생활을 할 것입니다. 또 연단을 받은 믿음과 그렇지 못한 믿음은 값을 따져도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고난은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계 20:14). 저희들은 고난을 유익으로 삼을 줄 아는 믿음을 꼭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제12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민 25:1~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말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열이 모압지경에 가까이 이르자 모압왕 발락이 발람이란 술사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니까 발람을 중심으로 한 모압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우상 숭배의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한 것입니다. 그들이 유혹한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다 보이는 높은 곳에서 그들의 신 “바알브올”에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제사 방법에는 우상의 제물과 절하는 것이 있고, 또 여인들이 옷을 벗고 춤추며 남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는 호기심을 갖는 자들에게 큰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멀리서 이 사실을 관망하다가 점점 가까이 와서 구경하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춤추는 여인들이 내려와서 함께 동화될 것을 권유하자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그 여인들에게 끌려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춤추며 음행을 하므로 이방인처럼 바알브올에게 부속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은 염병으로 진노하셨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범죄 당사자들은 물론 범죄자의 직속 두령들을 목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떤 자는 미디안 족의 여인을 데리고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론의 손자 제사장 비느하스가 크게 분노하여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가서 음행하는 두 남녀를 찔러 죽인즉,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가 자기를 대신하여 자기의 질투심으로 노를 풀었은즉 염병을 그치게 하고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평화의 언약, 즉 영원한 제사장의 언약을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죽은자가 24,000명이었고, “영원한 제사장의 언약”이란 메시야의 영원한 중보사역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가질 것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1. 마귀와 마귀의 백성들은 성도를 해하기 위하여 항상 백방으로 유혹하고 있음을 아셔야 하며,

2. 성도는 유혹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경하러 갔다가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말하기를 적게 자고, 말을 많이 하지 말며, 많이 다니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말도 성경에 있는 말씀이지만 죄의 유혹을 피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잠 6:10, 전 5:2, 마 12:19).

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을 손상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거룩한 백성들이 이방인처럼 살거나 이방인의 우상 숭배에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육체적 동화요, 우상 숭배는 신앙적 동화이므로 이런 태도를 극히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범죄할 때 그 범죄의 경중에 따라서 진노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이번 사건은 크게 진노를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염병을 내리셨습니다.

5.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시게 하는 방법은 속히 범죄를 멈추게 하고, 모든 책임자들을 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자들의 두령들을 공중에 목매어 달아야 진노를 그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두령들과 색출된 범죄자들을 모두 처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또 한건의 현장범이 발견되자 비느하스 제사장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처단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푸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노를 멈추시게 하는 방법은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 범죄자들을 징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징계가 미약했다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염병의 피해가 더 컸다는 것을 예측하여야 할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비느하스는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심(의분)을 가지고 범죄자를 강하게 응징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시원하게 해 드린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 후손이 제사장직으로 복 받을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저희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두려워하면서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3과 지혜를 구하자 (약 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으십시오.) 이 시간에는 “지혜를 구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혜를 구하려고 할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 지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지혜는 “사리를 잘 밝혀 처리하는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식이 학문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지혜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요, 또 지식이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는 것이라면 지혜는 선천적 총명으로 스스로 연구하여 터득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도가 왜 이 지혜를 구하여야 할까요?

1)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미련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엡 5:15).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들 앞에서도 지혜롭지 못하면 영광을 가리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솔로몬 왕은 억울한 재판을 하지 않기 위하여 1천 번재를 드린 후 지혜를 구하여 받은 사실이 있고(왕상 3:4~13), 예수님도 어렸을 때부터 지혜가 자랐다(눅 2:52)고 하셨습니다.

2) 지혜와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욥 12:13)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지혜 힘입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지혜를 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본문 말씀대로 기도로 구하는 것이고

2) 또 한가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에(시 111:10)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이 또한 지혜 얻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지혜를 구할 때 꾸짖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꾸짖지 않는다”는 말씀은 성도가 지혜를 구하거나 혹 지혜로워지기를 위하여 욕심을 낸다 하더라도 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장 적절한 생활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간구를 원하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상관없는 생활을 할 뻔한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베푸심에 있어서도 지식(학문적)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다면 역시 못 배운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도를 베푸실 때 지식이나 학문에 의한 방법을 쓰시지 않고 무조건 믿어 순종하는 지혜의 방법을 쓰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도리는 학문으로 연구하여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여 받는 지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4. 저희들이 어떤 생활에서 지혜를 적용하여야 할 것입니까?

1) 진리를 연구하는데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이나, 자기 인생의 연약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하등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육동물들이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나 특히 양이 목자를 의지하는 것은 약자가 강자를 의지하는 지혜를 나타낸 것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성경 말씀에 대하여 퍽 유식하게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백부장이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을 때 그의 말씀(명령)만 발하여도 실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군인 상하계급의 명령계통의 질서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역시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 말씀을 깨닫는데 이용하시고,

2)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이용하셔야 하겠습니다. 지혜롭게 살면 굉장히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도 지혜를 쓰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뱀이나 쥐같은 하등동물들도 지혜를 써서 먹이를 구하는 것을 봅니다. 지혜는 생활에 도움과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3) 지혜를 이용하되 이웃과 화목하는 생활에 이용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면 서로 갈등을 만듭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많이 구하여 신앙과 생활과 화평에 뜻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4과 성도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 (벧전 2:1~5) 목록으로


저희들은 지금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시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버리라”(1절), 사모하라, 자라라(2절), 맛보라(3절),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오라(4절), 신령한 집으로 세우라,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5절)는 말씀들이 있어서 제목을 “성도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1. 버릴 것은 모든 악독, 모든 궤휼,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성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죄악입니다. 성도는 성도답고 성자다운 품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궤휼이란 간사한 말로 남을 헐뜯는 행위임).

2. 사모할 것인데 순전함과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갓난 아이같이 순전해야 합니다. 갓난 아기는 욕심과 악의가 없으며, 또 상대방에 대항하거나 의심하는 것도 없습니다.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젖은 갓난 아이가 먹어야 할 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젖이라고 하셨습니다. 갓난 아이같은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3.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확보는 거듭남으로 단번에 이룰 수 있지만 전체구원의 은혜는 단계적으로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거듭남),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단계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선 성도는 현재 거룩의 단계에 있는 것이고, 아직도 확신이 약한 성도는 신앙의 단계에 있는 것이며, 이미 세상을 떠난 성도는 거룩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라게 하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에 이르도록 신앙 인격이 성장해감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인격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성경에 최대한 부합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신앙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느냐에 따라서 그 성장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또 자란다는 뜻은 무엇을 하기 전에 자신의 변화된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그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며(요 13:1), 또 항상 함께하여 주시고(마 28:20) 영원토록 중보해 주십니다(히 8:20~25). 또 성도가 연약해질 때에 오래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사랑도 있습니다(벧후 3:9). 이런 사랑을 맛보라는 뜻은 조금만 깨달아도 믿음 성장과 변화 생활을 이룩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5.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을 산 돌로 비유하신 이유는

① 예수님이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이고,

② 예수님이 믿음의 기초이시기 때문이며(마 16:18), 불변하시기 때문이고, 피난처요 구원자이기 때문이며(시 18:2, 19:14)

③ 또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 22:44).

2) 예수님께로 나오라는 뜻은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뜻도 있지만, 다음절에서 신령한 집이란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로 나오라는 뜻이 됩니다. 믿는 자는 당연히 주님의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6. 신령한 집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집은 천국과 교회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건설하시지만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 건설합니다. 지상의 신령한 집인 교회는 말씀에 기초하고 거룩한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건축 재료가 되며 성경에 입각한 생활이 바로 집을 짓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우리가 드릴 신령한 계시는 믿음과 순종과 헌신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또 성도가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성도를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7가지 과제들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거룩한 변화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역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5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요 1:29~30) 목록으로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으로 사람들 앞에 출현하셨을 때 이미 예수님이 오실 것을 증언하였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뜻과 어린 양을 보는 문제에 대하여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뜻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 1:18을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2) 하나님이 보내신 자란 뜻이 있습니다.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고, 요 17:8에서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란 뜻이 있습니다. 어린 양은 구약 시대의 제물을 뜻하고, 구약 시대의 제물은 곧 예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창 22:14에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하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하다가 하나님이 중지하게 하시고, 숲에 걸린 양을 보내 주셔서 그것으로 제사를 드린 일이 있었는데 그 모리아 산도 예루살렘에 해당하고 (대하 3:1) 그 양은 예수님이 희생의 제물이 되실 것을 예표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4) 또 제물로 드려지는 양은 1년된 어린 양을 사용했습니다(민 6:18, 출 12:5). 이 어린 양은 묵은 양과 달라서 제물의 가치(늙은 양과 고기는 가치가 없음)를 귀하게 선택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도 처녀, 총각, 또는 젊은이를 더 귀하게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33세의 젊은 미혼자 입장에서 돌아가신 것은 제물의 가치를 더 높여 주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는 뜻은

1) 세상 사람들의 죄책을 대신 짊어 지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재물의 부채를 갚아주고, 짓밟힌 인권을 되찾아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 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심판을 면하고 멸망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 53:5에서 “그가 찔리고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라” 하셨고, 레 16:8의 “아사셀”양이 있는데 그 “아사셀”이란 “내어 놓는다”는 뜻으로 대속죄제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취하여 하나는 속죄제로 드리고 하나는 광야로 보내는 것인데, 이 “보

내는 것”(내어 놓는 것)이 죄책을 청산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죄를 청산하시는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들의 죄만 짊어지신 것입니다(요 17:9). 따라서 “세상 죄”란 선택 받은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저희들은 그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성경으로만 바라 보시되(요 5:39)

1) 가까이, 또 자세히 바라보셔야 하고,

2) 그 생애와 그 십자가와 그의 부활도 아울러 바라보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본 받아야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희생임을 믿으셔야 하며, 또 그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영생을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을 바라보면서 죄사함의 은혜를 감사하시고 십자가 중심의 신앙 생활을 반드시 실천 할 수 있도록 결심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6과 부활 후 나타나심 (요 20:1~10) 목록으로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 보이신 사실”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요 20:에는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으로 추정함)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시체가 없어진 것은 믿었으나 성경이 말씀한 부활은 믿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이 있고(8~9절),그 다음에 기록된 말씀을 계속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울고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고, 또 그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시면서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지만 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로 착각하였다가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실 때 다시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자기를 만지지 말라”하셨으니 이 뜻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여 자신을 열납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적 열납이 우선이므로 하나님을 뵙기까지는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듯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내용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최초에 나타나신 사실입니다(막 18:9). 이때는 주일 새벽 미명 무렵이었고(20:1) 장소는 무덤 근방이었으며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였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도 같이 갔었으나 그들이 천사를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도망하였을 때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막 16:8~10).

2. 마리아와 같이 간 여인들이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서 그 말을 전하려고 달음질할 때 두 번째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여자들이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고, 갈릴리로 가실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8:5~10). 여기에 나타나심은 무덤에서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가는 중에 세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3. 그 여인들이 제자들 모인 곳에 와서 그 말을 하였을 때 믿지 않은 제자들도 있었으나 베드로와 요한(다른 제자; 요 20:3)은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눅 24:34, 고전 15: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세 번째로 꼽는 것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날 저녁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난 사실이 이미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4. 부활하신 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로바와 또 한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저녁 식탁에까지 앉으시고 부활신앙 없는 것을 책망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눅 24:13~31, 막 16:12). 그래서 그들은 그날 저녁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고했으니 이것이 네 번째로 나타나신 것이요,

5. 도마가 없는 10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막 16:14, 눅 24:39, 요 20:26). 이날은 주일 첫날 저녁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을 때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에게, 그리고 그 아침에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그 두 제자가 그날 저녁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고한 후,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 것과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보내실 것과 성령을 받을 것과 서로 죄를 용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 8일후에 도마가 있을 때 11제자에게 또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살과 뼈가 있다” 하시고 부활을 확인케 하신다음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은 채 말씀으로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요 20:26~29).

7.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도마, 나다나엘 외 두 사람이 있을 때, 그곳에 나타나셔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시고 아침식사를 하게 하신 후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신 일이 있었으니 이것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는 세 번째가 되는 것입니다(요 21:1~14).

8. 갈릴리 산에서 11제자에게(마 28:16)

9. 또 500여 형제에게(고전 15:6)

10.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마 10:3, 막 15:40, 고전 15:7)에게

11. 승천하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눅 24:50, 행 1:9) 보이셨고,

12. 바울사도에게는 승천하신 다음에 나타나셨습니다(행 9:5, 고전 15:8).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12번 나타나신 과정을 공부하였습니다.

 

제17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사 41:8~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 드리고, 다음에 특별한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릴 때에, 특별하지 않은 사랑도 있는가? 에 대하여 아울러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

1) 하나님은 성도를 가리켜서 종이라, 택한 자라, 벗이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8절)고 하셨습니다. 이 4가지는 대단히 귀한 신분이 되게 하신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대통령의 비서), 택함을 받은 자, 하나님의 친구, 복주시기로 약속한 아브라함의 자손 등은 모두가 존귀한 신분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푸심으로 주신 것입니다.

2) 불러 주시고, 붙들어 주시며, 싫어 버리지 않으시고, 굳세게 하시고, 함께 하여 주시며, 택한 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땅끝 먼 곳(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불러 주시고, 능력 있고 의로운 오른손(힘 있는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며, 싫어 버리지 않으시고, 굳세게 하여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며, 네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하셨으니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고, 또 성도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깨닫는 성도는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특별한 사랑을 살피기 전에 특별하지 않은 사랑도 있는가? 하실 것입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안 믿는 사람이나 모든 생명체에게 다 같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 5:45에 보시면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의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보편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보편적인 은혜(특별하지 않은 사랑)를 실례로 들어보면,

1) 우선 자연 만물을 들 수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2) 또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들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같은 이목구비, 오장육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3) 지식을 들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학자 되고 출세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반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무엇인가? 이것은 성도에게만 국한하여 특별하게 주시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하고 똑같이 받는 건강, 지식, 물질의 사랑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수한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1) 조건 없이 사랑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주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유력한 조건을 보시고 선택을 하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유력한 조건이 없기 때문에 선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선택을 해 주셨으니까(롬 9:11) 선택 받은 사랑을 꼭 아셔야 할 것이요,

2)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던 원수요,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여 죄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특별한 사랑이 된 것입니다.

3)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주신다는 것이 보통 사랑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보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4) 우리를 양자 삼아주신 사랑입니다. 아무나 호적에 올리려 하지 않겠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아들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5) 범죄할 때 인내하며 오래 참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벧후 3:9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6) 싫어 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요 13:1).

7)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함께 계셔주시는 사랑입니다(마 28:20).

이상 7가지의 특별한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저희들도 그 하나님을 특별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18과 좋은 어머니 (잠 31:10~31) 목록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좋은 어머니”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곧 심장과 같다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일, 남편에 대한 일, 자녀들에 대한 일, 친척에 대한 일까지 가정 주부가 잘 처리한다면 그 가정은 크게 화목하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말씀은 현숙한 여인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그 값이 귀하며 은금보화로도 비교할 수 없고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자에게 허락하실 것인데 현숙한 여인은 ① 믿음직하고 ② 산업을 일으키며 ③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④ 길쌈과 부업을 하여 가산을 돕고 ⑤ 밤낮없이 노력하며 ⑥ 가족에게 깨끗한 의복을 입히며 ⑦ 자기를 단장하며 ⑧ 남편을 존경받게 만들고 ⑨ 지혜로운 말을 하며 ⑩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으니 복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 어버이 주일의 시작이 본래 어머니 주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1908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잘하고 죽은 “자비스”란 어머니의 추도 예배 때에 그 자녀들이 오실 손님들에게 카네이션 꽃을 꽂아드려 어머니의 교육적 공로를 기억하게 한 것이 어머니 주일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머님들의 좋은 활동을 힘쓰시게 하기 위하여 “좋은 어머니”들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입니다(출 2:8~10, 6:20). 요게벳은 아들 모세를 바로왕에게 뺏겼으나 그를 젖 먹이는 기간에 양육 하였는데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과 또 자기의 동족과 고난 받는 것을 애굽의 영화보다 귀하게 여길만큼 사상교육이 잘 되어 있었으니(히 11:24~25), 이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교육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2)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한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낳고, 그 아이를 젖뗀 후 하나님께 드린 서원대로 사무엘을 성막 봉사하는 제사장의 심부름꾼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어렵게 얻은 아들을 포기한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그렇게 포기하였기 때문에 사무엘이 훌륭한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어떻게 양육했다는 말씀은 없지만 그는 처녀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았을 때 상당기간 또는 평생토록 사생자를 낳은 어머니라는 오해를 받았을 것이지만 믿음으로 이것을 극복하였고 또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까지 목격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인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디모데의 어머니 “유나게”는 그의 친정 어머니 “로이스”로부터 받은 믿음을 그대로 “디모데”에게 전승시켜주므로 훌륭한 사역자를 배출시킨 것입니다. 자녀에게 신앙을 전승시키는 부모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딤후 1:5).

5) 그 다음에 일반 역사적으로 유명한 어머니는

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라고 합니다. 그는 기도로서 방탕한 어거스틴을 돌이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회개하도록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②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도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는 19자녀를 낳아 양육하면서 자식들이 무엇을 질문할 때 한번도 불성실한 대답을 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③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가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는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같이 기도했으며 성경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링컨이 9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④ “에디슨”의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에디슨이 학교에서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 문제아로 퇴학 당한 것을 성실하게 지도하여 훌륭하게 양육하였기 때문에 그가 발명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결심 하시자는 것이 이 시간 말씀의 요지였습니다.

 

제19과 사무엘의 성장 (삼상 2:17~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무엘 선지자의 어릴 적 성장에 관한 말씀을 교훈 받겠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로 정하여 가정 중심의 교훈을 강조합니다. 가정 중심이라면 ① 부부간의 사랑이고 ② 자녀들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③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자녀들 교육에 대한 문제 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자녀들을 부모의 목표대로 키우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무엘이 어릴 때 어떻게 교육을 받고 잘 성장하여 훌륭한 선지자가 되었는지”를 살피고 저희들도 각 가정의 자녀와 그들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려는 것이 이 시간 말씀의 취지입니다. 성경에는 어릴적부터 훌륭하게 자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구약에서는 요셉과 모세를 들 수 있고, 구약 중간 시대에 와서 사무엘과 다윗을 들 수 있으며, 예수님 시대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들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삼손도 구별되게 키우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방여자에 빠져서 자기 목숨을 잃고 부끄러운 생애를 마쳤습니다.

1. 사무엘 선지자는 에브라임 지파의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로 한나의 태를 막으셨고(삼상 1:6),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은 큰 불행과 수치로 여겨졌으며(1:7, 10), 한나는 이를 인하여 실로의 성전에 나가서 서원하며 기도하였습니다(1:9~11). 한나의 서원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를 성별되게 키워서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도록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엘리제사장의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생각하셔서 아들을 낳게 하시니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은 것입니다(1:19, 20).

2.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바가 있으므로 아이를 젖 떼기까지 자기 집에서 양육하다가 젖을 뗀 후 매년 제를 드릴 때(출 23:14) 아이를 성소에 데리고 가서 엘리제사장을 수종 드는 자로 섬기며 성전에서 자라게 한 것입니다(1:24~28). 이 사실에서 저희들은 3가지를 교훈 받게 됩니다.

1) 한나가 기도로 받은 아들이요,

2) 한나가 서원을 이행한 점이며,

3) 사무엘이 성소의 제사장 곁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는 전부 부모가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서 각별하게 기울인 정성이었으니 곧 자녀를 위한 기도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서원) 이행이며, 자녀로 하여금 성소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만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녀를 양육하시는 부모님들이 그런 생활과 지도를 잘 하신다면 분명히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저희들은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3. 사무엘 자신이 어릴적부터 잘못된 일들에 오염되지 않고, 잘 자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라 하여 죄와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2:12). 성소 안에서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하여 제물을 갈취하는 등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사무엘은 그런 유혹을 잘 이겼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자라는 어린이는 어떤 유혹이 와도 이것을 잘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이렇게 순결하게 자라난 사무엘은 그가 성장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셨고 그를 선지자로 쓰셔서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단자였으므로 때 묻은 사람을 하나님이 고쳐서 쓰셨지만 사무엘이나 세례요한같은 사람은 본래부터 순결한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여야 순결하게 양육 될 것인가? 를 기대하면서 이 말씀을 살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 보시면 부모의 역할, 제사장의 역할, 당사자의 역할이 나타나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봉사, 제사장의 축복과 지도, 그리고 사무엘 자신의 때 묻지 않고 자라는 성장을 꼭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형제를 사랑하라 (벧전 3:8~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베드로사도께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 자신의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었고(마 26:33), 진실성과 담력도 약했으며(마 26:69,70), 혈기도 죽이지를 못했었습니다(마 26:51). 그러나 다시 재기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큰 용기를 갖고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요 21:15~19). 베드로는 예수님의 인격에서 큰 감화를 받고 자신도 변화되어 형제사랑에 관한 말씀을 기록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형제를 사랑하려면

1) 다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누구의 마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같이 하여야 할까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이 하라”고 빌 2:2~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동등 된 대접을 받으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인간을 섬기셨습니다. 이 한 가지 마음을 표준으로 하여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2) 체휼하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체휼이란 예수님이 인간고를 직접 경험하신 것처럼(히 4:15) 형제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어려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지 않으면 불쌍히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고난 당하는 자의 입장이 바로 자기의 입장인양 생각할 때 긍휼한 마음(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3) 겸손하여야만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사랑의 모범 중에 발을 씻기신 일이 있었지요. 그것이 바로 겸손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일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마음, 체휼, 긍휼, 겸손으로 사랑을 실천하시되 본문 8절 말씀은 그 대상이 악하지 않은 자를 상대로 한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란 말씀이 곧 성도를 상대한 말씀입니다.

4) 그러나 9절 말씀은 악인을 상대로 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어떤 악인에 대하여도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받아야 할 복은 그가 선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5) 그리고 성도가 이 같은 형제 사랑을 시행해야 되는 이유는

① 그것이 성도로 부르신 목적이고,

② 또 하늘의 상급(유업)을 받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7절). 여기에서 사랑 실천이 성도의 임무요, 사랑의 값이 천국에서 가장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베드로사도는 이 사랑의 실천과 관련이 있는 구약의 말씀 시 34:12~16을 인용하여 강조하셨습니다.

1)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날 보기를 원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는 다 그런 사람들이 되셔야 하는데, 여기의 “생명을 사랑한다” 함은 구원 영생을 뜻하고 “좋은날”이란 내세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좋은 날이란 천국의 유업밖에 없습니다. 즉 구원 생명과 하늘의 상급으로 좋은 날을 기대하려면

2)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는데

①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이나 궤휼의 말을 그치는 것이고,

②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이며,

③ 화평을 구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궤휼의 말이란 간사한 말로 형제를 해하는 언사인데, 성도는 말에 덕을 세우고, 선과 화평을 따르는 자가 되라고 시편 기자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시 34:14).

3)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기 위하여 기울여 주시나, (이것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임) 하나님의 낯은 “악행자를(벌하시기 위하여) 감찰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이런 실천을 하려면 상당히 신앙이 있고, 도덕성에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사랑의 실천과 형제 사랑에 대한 사명이 있는 것과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1과 좋은 열매를 맺자 (마 3: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좋은 열매를 맺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세례요한이 출현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회개하라”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10절 말씀을 보시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확고하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좋아하십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농사 잘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도 자기의 영광에 두셨고, 구원 사업의 목적도 마찬가지 입니다.

1) 하나님이 권장하신 열매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시면

①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본문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히는 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돌이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매일 매일 반성하고 돌이키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②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갈 5:22, 23의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셨습니다. 이 9가지 중 희락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온유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필요한 덕이요, 사랑과 화평과 절제는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생활의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로서의 바른 성품과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③ 전도의 열매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롬 16:5에 보시면, “에배네도”가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의 아시아 전도에서 처음 얻은 결신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전도하여 새 신자를 얻는 것을 좋은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④ 찬미의 열매가 있습니다. 히 13:15에 보시면 찬미의 제사를 입술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열매들이 있겠습니다만 우선 이 4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열매를 잘 맺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농작물과 관계있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이기 때문에 농사 기술에서 이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토양이 좋아야 하고, 그 토양이 농작물의 성질과 맞아야 합니다. 농작물을 위한 토양은 신앙에 견줄 때 성도의 성품에 해당합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덤불 속에서는 농작물이 자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옥토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3:3~9). 렘 4:3,4에 보시면 “묵은 땅을 갈고 마음의 가죽을 벗기라”고 하셨습니다. 묵은 땅을 옥토로 만드는 작업이 저희들 마음가짐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 온유, 겸손, 인내, 지혜의 마음인 것입니다.

2)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좋은 씨는 진리의 말씀이요, 바른 교훈과 사상입니다. 성경에 입각한 성경 중심의 생활을 잘 하기 위하여 바른 말씀 터득에 노력하셔야 함은 마치 농부가 좋은 종자를 구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중심의 열매이어야만 좋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3) 좋은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 좋은 관리는 인간적 노력과 하나님의 관리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적 관리로서는 근면한 농부처럼 잘 가꾸고 병충해 등을 예방하고 외세의 침입을 막고(아 2:15) 잘 지켜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관리는 은혜의 축복을 받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 33:14에서 “태양은 열매를 맺게 하고 태음(달)은 자라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땅과 물과 공기와 씨도 하나님이 주셨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하며 신앙적으로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4) 열매를 가장 잘 맺는 합리적 방법은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15:4).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연합된 생활을 하여야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이 4가지 문제를 충실하게 이행하시므로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제22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니엘서 3장의 말씀을 드리고, 본문 16절에 나타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되었을 때 소년의 몸으로 바벨론에 끌려가서 지혜와 총명 있는 자로 인정을 받아 왕실에서 근무하는 대신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지조가 굳은 사람으로 유명하였는데, 또 그 당시에 같은 처지의 동료 3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였습니다. 단 3:은 이 3사람의 신앙적 승리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벨론 나라에서 느브갓네살 왕을 신으로 숭상하기 위하여 두라평지에 90자 가량의 높이로 왕의 금 신상을 세워놓고 나팔과 피리 등 여러 가지 악기 소리를 낼 때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느브갓네살 외 통치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 신상을 향하여 절하도록 반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절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넣어 죽이는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단 3:6).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으므로 나팔소리가 들렸지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에 유대인으로서 바벨론 대신이 된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이 사실을 참소하여 왕에게 고한 것입니다(12절). 그들은 왕에게 고하기를 그 세 사람이 왕을 높이지도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근심하면서 그 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1차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즉 다음에 또 그렇게 할 때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질 것인즉 그 풀무 가운데서 건져낼 신이 어디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1. 이때에 세 사람의 대답이 퍽 신앙적이었습니다.

1)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므로 일축하여 거절한 것이요,

2) 만일 풀무에 넣으면 우리 하나님이 건져 내시고 또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이라 하였고,

3)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을 줄 아시라고 한 것입니다.

2. 이상의 대답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을 일깨워 줍니까?

1) 불신앙적인 일에 대하여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일축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왕의 권면이었고 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사랑하고 동정하여 한번 실수를 용서해 주고 다음에 잘 하도록 하여 살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절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사정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을 믿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였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로 믿은 것이고, 또 하나님은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셔서라도 구원해 주실 줄로 믿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3) 그러나 마지막 대답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적으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역시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주권과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일에 성도의 뜻을 다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정해 드리는 신앙이므로 귀한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기적의 구원이 아니면 자기들은 불에 타서 죽을 것이 뻔한 일이지만 그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순교를 각오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순교를 각오한 신앙을 나타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③ 이적을 믿는 신앙보다 이적이 안 나타나더라도 신앙을 지킨다는 믿음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적을 추구하는 신앙보다 이적이 안 나타날 것을 예상하여 순교를 각오하는 신앙이 더 중요한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핍박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자세, 기적을 믿는 신앙, 기적이 없어도 순교적 각오로 믿음을 지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특별섭리보다 일반은총을 우선 하십시오.

 

제23과 인생에 대한 비유 (벧전 2:1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인생에 대한 비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인생을 가리켜서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하였습니다. 벧전 1:17에서도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하시므로 나그네 인생임을 두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1. 그래서 우선 인생은 나그네 또는 행인 같은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나그네와 행인은 고달픈 인생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 47:9에서 야곱은 자기의 “나그네 인생을 험악하게 살았다” 하였고 시 90:10에서는 “우리의 년수가 70,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였습니다.

2) 나그네는 지나가는 세계라는 뜻이요(고전 7:31), 따라서 미련을 두어서는 안되며,

3) 영구적으로 살아야 할 본향을 사모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1:13~16).

4) 이렇게 나그네 인생을 강조한 베드로는 “나그네 생활을 두려움으로” 지내고(벧전 1:17), 또 본문에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 하며, 성도를 비방하는 이방인들 앞에서 선행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나그네 인생은 ① 세상에 애착이나 미련을 두지 말고, ② 본향을 사모하면서 ③ 영혼을 위하여 육체와 현실의 정욕을 제어하고 ④ 선행을 나타내면서 두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그림자(욥 8:9), 석양(시 109:23), 베틀채의 북(욥 7:6)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빨리 간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그늘이 움직이듯, 또 석양이 빨리 가듯, 베틀채의 북이 빨리 가듯 인생은 빠르다고 하셨습니다. 시 90:4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천년도 한 경점같고 또 신속히 가며 날아간다(10절)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가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부지런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겠지요. 이런 사실을 늦게 깨닫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50대 사람이 30대에 인생을 바로 깨달았다면 20년을 더 값있게 생활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빠른 인생을 부지런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안개와 같고(약 4:14), 풀과 같고 꽃과 같고(벧전 1:24), 또는 꿈꾸는 것같다(사 29: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쉽게 끝날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안개는 아침에 해가 뜨면 소리없이 없어집니다. 풀은 1년 초요, 꽃은 잠깐 피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자가 꿈에 잘 먹었을지라도 깨고 나면 흔적이 없듯이 인생은 어느 때고 낙엽 떨어지듯이 끝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시 90:3, 5에서 “하나님이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라 하시고 홍수처럼 쓸어 가시기 때문에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잘 살고 오래 산다하여도 70이요, 80이라고 하셨습니다. 1900년에 평양에서 출생한 가수 윤심덕이란 여인은 미인 가수로 인기가 상승하는 중에 일본에 가서 레코드에 노래 취입을 하고 오다가 현해탄에 몸을 던져 25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일본에 가서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의 가사는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것인데 “황막한 빈들에 달리는 인생아 너 가는 곳이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이다 행복을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은 슬픔뿐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비관만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없었습니다. 또 93년 10월 10일에 위도 앞바다에서 292명이 죽었습니다. 한 직장, 한 마을에서 매일 같이 살던 9가정의 남자들이 그 배를 탔다가 7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오히려 산 사람이 죽은 가족 앞에 떳떳하지 못하여 나가지를 못한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생이 꽃처럼,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개 같은 인생은 언제나 자기의 영원한 길을 준비하고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나그네, 그림자, 안개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인지를 아셔서 신령하고 근면하게 또 항상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24과 성령 충만의 상태 (눅 4:1~13) 목록으로


1.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사실의 기록이 마 4:과 눅 4: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는 “성령에 이끌리셨다” 하였고, 누가는 “성령에 충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충만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마귀의 유혹(물질 명예의 유혹, 말씀 의심의 유혹,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의 영광을 누림에 대한 유혹)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40일 기도를 끝내시고 마귀의 대표적 유혹을 다 이기신 것입니다.

2. 행 1:8과 엡 5:18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을 권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지 못하면 이 세상을 신앙적으로 이겨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 충만의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나타난 사건들과 대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람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부는 결과에서 바람의 역사를 측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3:8).

3. 우선 구약에서 성령 충만의 결과를 살펴보면

1) 출 31:4에서 “브살엘”과 “오홀리압”이 성전의 기구를 만들 때 지혜롭게 만들고 또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듦으로서 계시대로 시행한 사실입니다.

2) 또 신 34:9에서는 “여호수아”가 성령 충만을 힘입었을 때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성령 충만은 진리에 대한 순종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4. 다음은 신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눅 1:15에서 “세례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힘입었을 때 그는 태어나서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하며 순결하게 양육되었고,

2) 눅 1:39~45에서 요한의 부모(사가랴와 엘리사벳)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한 사실이 있으니 이 예언은 오늘로 말할 때 설교와 같은 것입니다(딤전 4:14).

3) 그 다음의 순서가 예수님이 성령 충만으로 40일 금식기도와 함께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4) 오순절 당시의 성령 충만의 사건입니다.

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생겼습니다(행 2:37~41).

② 방언이 실현되어 언어의 장벽을 넘고 세계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행 2:4,12).

③ 그리고 그들은 술 취한 자 같았다고 하였습니다(행 2:13). 이것은 자기의 주관에 사로 잡힌 것이 아니고 진리의 감동에 사로 잡혔다는 뜻입니다.

④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복음을 담대히 전한 것은 베드로나(행 4:8) 다른 사도들이나(행 4:31) 스데반이나(행 6:5, 7:1, 51) 바울사도도 마찬가지 였습다(행 13:9). 이것은 언어와 핍박의 장벽을 넘으면서 전도의 성공을 거둔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⑤ 모임의 역사가 잘 되었습니다. 행 2:42에 보시면 “날마다 마음(예수님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다”하였고(44절),

⑥ “성경공부와 친교와 성찬예식과 기도에 힘썼다”고 하셨으며(행 2:46),

⑦ 물질의 욕심이 떠나면서 유무상통과(행 2:44, 3:32), 재산 헌납이 있었고(행 4:34),

⑧ 핍절함이 없었다고 하였으며(행 4:31~34),

⑨ 기쁨과 찬미가 있고(행 2:46, 13:52), 신령한 노래로 화답한다고 하셨습니다(엡 5:18, 19).

⑩ 또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공적인 전도와 함께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도 많이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행 2:43).

⑪ 스데반의 성령 충만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행 7:59).

⑫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9가지 열매와 함께(갈 5:22, 23) 소망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 15:13). 이렇게 성령 충만의 상태는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5. 결론적으로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1) 성령 충만의 상태를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지 마시고 성경에 나타난 사실과 부합되는 형편을 보아서 판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의 상태는 진리의 감동과 회개와 모임과 친교와 기쁨, 전도, 기도, 찬송, 교육, 헌금, 선교 등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요,

3)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은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물리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면서 사는 성도가 바로 성령 충만의 최종 결과에 도달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5과 회개한 탕자 (눅 15:11~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탕자의 비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눅 15:에서 “잃은 양을 찾는 비유”,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탕자가 돌아오는 비유”로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은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 시간에는 회개한 탕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다음 시간에는 회개하지 않는 탕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하고 두 아들은 성도를 비유한다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회개한 탕자는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1. 회개한 탕자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1) 그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의 분깃을 요청한 것입니다. 아들이 자기의 몫으로 정해진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한 것이 정당한 것 같으나 사실은 아버지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재산을 주지 않을 수도 있거니와 주려고 할 때에도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주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것을 빨리 받으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간청이므로 그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으려고 주었지만, 그것을 미리 받은 아들은 그것 때문에 아버지를 멀리하게 되었고 또 방탕하게 된 것입니다. 재물을 미리 갖는 것이 꼭 복인 줄로만 알면 안 됩니다.

2) 그는 그 재물을 인하여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입니다. 자식이 세상을 좋아하여 부모를 떠나 있는 것처럼 성도가 현실을 좋아하여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 타락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재물이 있음을 기회로 방탕한 것입니다. 성도가 일을 하지 아니하고 헛된 일에 몸을 담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4) 그는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땀 흘려서 모아준 재산을 키워 나가지 못하고 없앤 것은 불효일 뿐 아니라 방탕으로 재산을 탕진한 것은 역시 큰 잘못입니다.

2. 그 방탕자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에게 쉽게 고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1) 그가 사는 세계에 흉년이 들어서 모든 이들과 함께 궁핍함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웃의 도움을 받을 입장이 못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자립하던 생활에서 자기의 것이 다 떨어지자 다른 사람에게 붙어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3) 그는 붙어사는 집의 돼지 떼를 치는 신세로 하락하였고,

4) 그래도 배가 고픈 중에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얻어먹고자 했으나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아주 비참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이지만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방탕 하는 자를 그렇게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3. 그가 어떻게 회개하였습니까? 그는 자기의 신세가 자기의 아버지 집의 품꾼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대조해 보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일로 재미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극심한 고난에 처하는 일이 바로 그를 회개 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방탕자는 고난을 당할 때에 자기의 잘못과 잘못된 입장을 깨달은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 노릇하는 것이 방탕으로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또 아버지 집에 가서 아들 노릇을 할만한 자격도 없다는 것을 느끼는 체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대신 품꾼이 될 결심을 갖고 돌아온 것입니다.

4.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평소부터 그를 기다리다가 측은히 여겨 기쁘게 맞이하였고, 큰 선물을 주고 잔치를 베풀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잃은 자를 찾았다”고 하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오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녀 된 특권을 구하기 전에 자기를 낮추어 품꾼의 한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품꾼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특권은 외면하고 충성만 하려는 성도가 되어질 때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고 거기에 따른 상급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제26과 회개하지 않은 탕자 (눅 15:25~32) 목록으로


먼저 시간에는 회개한 탕자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만 이 시간에는 회개하지 않은 맏아들 탕자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맏아들은 왜 탕자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할 때 그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는 맏아들로서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를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① 맏아들은 그 집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계승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아버지의 것이 자동적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수고의 댓가를 준 것이 없다 하면서 불평을 하고, 또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2) 형제뿐인 중에서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죽은 자가 살고 잃은 자를 찾은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형은 여전히 동생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동생에게 후한 대우를 하는 것을 불평하였으니 이것이 곧 미움과 시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3) 28절에서 그는 “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을 때에 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사람이나 자주 노하면 화평을 깨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이 용사보다 낫다고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노를 발하지 않으신 것을 유의하셔서 노를 자제하는 연단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그는 잔치에 합세하지 않았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집안 잔치를 위함이 아니고 동리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맏아들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큰 패역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그 아버지의 한 일에 불공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동리 잔치요 아버지가 원해서 하시는 것이니까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으로만 일관하여 화합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5) 아버지의 설득에도(돌이켰다는 말씀이 없음을 보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은 죽음에서 찾고 잃음에서 찾은 것과 같아서 이렇게 한다고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완악은 참으로 골칫거리의 아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들 때문에 적지 않은 고충을 당할 것이 예상되는 것입니다.

2. 우리들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본문의 맏아들과 같은 타락성이 없는지를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1)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관철 시키려는 욕심이나 고집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 하실 때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시고, 또 내 뜻대로 안 된 것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인줄로 믿고 복종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형제사랑의 첫 번째 계단이 이웃을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가 잘 되고 이웃이 잘 되는 것을 크게 축하하고 자신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장 큰 것을 받게 되면 세상 것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세상 것에 대하여나 또는 다른 사람의 일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질 만큼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서도 탐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노하지 않는 성격을 연마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다” 하였고 모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1:29, 민 12:3). 또 마 5:5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에게는 대적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4) 어느 단체에서나 문제의 인물처럼 남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둘째 아들은 회개를 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졌고, 그 아들은 품꾼 같은 위치에 있을 작정을 하였으므로 부담이 없어졌으나 맏아들은 불평하고 이해하지 않고 화목하지 않으며 합력하지 않는 아들로 남아 있는 상태이니 그 아버지의 근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웃에 부담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27과 신앙의 진단 (시 2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진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건강의 문제가 있을 때 진단을 받는 것처럼 신앙도 문제가 있을 때 받아야 하는데 주로 신앙의 문제는 믿음생활이 침체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둔하고 경건생활(믿음에 관한 생활)과 교회의 생활에 취미가 없어지며, 기쁨은 물론 감사와 희망과 의욕과 힘이 없어지는 영적 무능력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교회 안에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동차도 고장이 나면 그 원인을 점검하는 순서가 있듯이 신앙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우선 위의 본문 말씀은 신앙 생활을 정상적으로 잘 하는 사람의 형편을 고백한 내용이므로 대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성도는

1)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심으로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며(1절),

2) 영적 양식(푸른초장)과 영적 휴식(쉴만한 물가)을 즐기면서 살게 되고(2절),

3) 그 영혼은 활기차고 소성된 상태에서 의의 길(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되며(3절),

4) 사망의 음침한 시련의 길을 걷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아무 문제가 없으며(4절),

5) 마귀, 원수 앞에서 항상 승리의 자세를 취하게 되고(5절)

6)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6절).

지금 저희들이 이런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지 못하다면 크고 작은 영적 질병에 걸려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이 원인이 어디서 말미암았을까요?

2. 어떤 성도가 자신의 신앙적 연약을 염려하며 알기를 원하고 처방을 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 자신의 거듭난 여부를 점검하십시오. 거듭난 여부에 대한 말씀 요 3:3, 벧후 1:10, 고후 13:5절을 읽어보시고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진리됨을 믿고 자신이 성경말씀에 속박을 당한다고 생각되면(벧전 1:23) 거듭난 것이고, 그것이 확실치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므로 구태여 신앙의 진단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연습이나 외식이 아닌 거듭난 상태에서만(엡 2:1)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이 거듭났음을 확신하는 상태에서 연약해진 이유

① 신앙생활을 나태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교회생활과 자신의 경건생활을 의미합니다. 기계도 쓰고 나면 닦고 기름쳐야 좋아지고, 연장도 그렇고 사람의 몸도 먹고 일하고 휴식하고 잘 관리하여야 하듯이 영적신앙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자전거 타는 것으로 비유하셨고 또 한란계로도 비유하셨습니다. 자전거는 달려야 쓰러지지 않으며, 한란계는 더워야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연약해진 성도는 분명히 신앙생활을 나태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② 죄를 짓고 가책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자를 멀리하시고(사 1:5) 회개치 않는 자에게 칼을 가시며(시 7:12) 징계하시는 기간에는 권고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사 6:9, 10). 병은 고치지 않으면 커지고, 낫지 않으면 괴롭듯이 영적질병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속히 회개하시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셔야 합니다(수 1:7).

③ 인간 정욕을 앞세워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마 5:3), 자기를 죽임(롬 7:9, 고전 15:31),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갈 5:24, 25)이 있어야 합니다. 젖은 장작은 불이 붙지 않으며 인간정욕은 성취되지 않으므로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하나님의 뜻을 따르십시오(마 11:29).

④ 성경의 맛(성경공부나 설교의 맛)을 모르면 그 신앙은 자랄 수 없고, 활기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 119:97~106, 행 17:11의 말씀을 참고하시고 성경과 자신과의 관계가 개선될 때에라야만 믿음의 심령은 소성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는 육신이 힘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꼭 말씀의 입맛을 내십시오.

이상의 내용을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또는 침체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하여 새로운 힘을 내시고 합당한 처방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28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호 6:4~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720년경에서 670년경 사이에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지 약 1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백성들의 신앙변절을 음난한 여인으로 비유하여 책망한 것이 특징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사랑이 없고, 외식이 심하며,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먼저 본문을 살피시고 다음에 사랑에 관한 것과 하나님 아는 지식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본문 4절에 보시면 “에브라임아…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하셨습니다.

1)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고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인데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호칭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 33:7과 17을 보시면 이 두 지파가 강성한 부족으로 번성하고 대적과 열방을 정복할 것을 예언하셨고 또 예루살렘을 중심한 지역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지파를 선민의 대표로 호칭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 하니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느냐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나 범죄할 때는 공의롭게 징계하셔야 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을 상대로 호소하신 것입니다.

2.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한마디로 표현하여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의 사랑행위가 형식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아침 구름이 비를 내릴듯 하다가 가버리고 이슬이 내리지만 쉬 없어지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행위가 그렇게 미약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의 사랑은 더욱 진실하여야 하겠습니다.

3. 5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셔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저희를 치고,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이 빛과 같으심은 공의롭고 확실하다는 뜻이요,

2) “선지자로 치시고 입의 말로 저희를 죽이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선포하게 하시고, 그 말씀 내용대로 징계가 실현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술의 증거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많을 것입니다. 믿음도 원하시고, 충성도 원하시며, 회개도 원하시고, 성령충만도 원하시며, 교회의 부흥도 원하시고, 성도의 평강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는 두 가지 원치 않는 것과 두 가지 원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원치 않으시는 것은 제사와 번제라고 하셨습니다. 이 제사와 번제는 하나님이 필요하여 율법으로 명하신 것이지만 백성들은 그 제사와 번제의 목적을 벗어나서 형식에 치우치고 참 제사와 번제와는 관련이 없이 행하였습니다. 제사는 신앙과 정성이 따라야 하며, 번제는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의식만 중요하게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송아지나 양의 고기를 좋아하시는 것처럼 오해를 하였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형식적 행위를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2) 그리고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사랑은 계명의 완성이요, 어떤 능력보다 귀한 것입니다(고전 13:1~3). 만일 저희들이 다른 것을 얻기 위하여 사랑을 포기한다면 크게 반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하셨으므로 하나님과 사랑을 동등시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아는 방법은 믿음으로 알고, 배움으로 알고, 경험으로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경을 믿고, 자연계시와 성경으로 알고(요 6:69, 5:3, 딤후 3:15, 롬 1:20), 경험으로 알되(요 14:11~12) 기도의 응답이나 계명 순종을 통한 축복이나 자기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마 5:8) 등으로 하나님을 알고 가까이 교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29과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사 45:1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는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일에 될 일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민족적 수난을 당하게 되지만 때가되면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민족적 수난이란 바벨론에게 멸망될 것을 뜻하며(사 3:1~12) 여기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본문이 예언하신 것처럼 바사왕 고레스를 일으켜서 유대민족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예루살렘 성곽과 성전을 재건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고, 따라서 그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은

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2) 택한 백성의 하나님, 택한 백성 즉 성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거룩(순결)을 본 받고(벧전 1:16) 성도인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 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란 사실을 알 때에 저희들은 그의 피조물로서 더욱 그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1절에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란 말씀이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 즉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불신자와 구별됩니다. 성도는 선택을 받은 자로서 거듭나고 죄사함 받고(엡 2:1)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재창조(중생케 하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장래의 일을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장래 일을 미리 아시고 계획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장래 일을 물으라”하심은 하나님만 장래 일을 아신다는 뜻이요, 또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 묻고 장래 일을 계시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그 원하는 선지자를 통해서 장래 일을 계시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5. 하나님은 장래 일들에 대하여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개인의 장래문제, 자녀들의 장래문제,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장래문제까지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실 수 있습니다. 창 28:15에서 보시면 “하나님이 야곱의 장래를 지키시고 인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의 미래에 대한 문제가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각별히 부탁하는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은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1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의로 그를 일으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뜻으로 파사왕 고레스를 내세웠다는 뜻이요,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한다” 하심은 그의 하는 일을 형통하도록 지도하신다는 것이며,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하고 사로잡힌 자들을 갚음 없이 놓는다”는 말씀은 바벨론에 억류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값없이 해방시켜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가서 성전과 성곽을 재건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주전 478년경에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약 150년 전에 예언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의 미래를 주관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말씀 드릴 것은 11절의 “내 손으로 한 일”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선민적 통치를 의미합니다. 선민적 통치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하시는 일이 많은데 ① 창조하시는 일, ② 섭리하시는 일, ③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구원 사업도 계속하십니다. 또 섭리에는 만물의 보존과 통치가 있으므로 저희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 깨닫고 더 많이 의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0과 내게로 돌아오라 (렘 4: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제목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북방 이스라엘국이 앗수르에 멸망되고, 남방 유대국이 외세의 위협을 받아 국운이 어려울 때에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올라와야 할 것을 교훈하였습니다.

1. 1절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하신 말씀에서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증언으로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아셔야 하며 누가 증언하던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네가 돌아오거든”하신 말씀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돌아오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자가 의지적으로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거듭나고 구원받는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이루어 주시지만, 회개하는 것은 거듭난 성도가 자기의 의지로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성도의 자유의지를 기대하신 말씀입니다.

3.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사는 것이 돌아오는 방법입니다.

4.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성도는 가증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가증한 것일까요?

1) 우상 숭배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2)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하거나 의지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속으로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얼마나 가증합니까? 성도는 이런 일에 진실성을 보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5. 회개하는 자는 요동치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요동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신앙이 요동치 않는 모범을 욥이 보여주었습니다. 욥은 죄로 인한 연고가 아닌 상태에서 물질, 종들, 자녀들이 단계적으로 없어졌고, 자기 몸에 큰 질병이 생기고, 기도응답이 안되는 장기적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② 감사와 찬송을 했으며, ③ 현실적으로 체념하고, 천국에 가서 그 정황을 변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 1:21, 2:10, 13:15). 회개하는 자는 바로 요동치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 2절 말씀에 나타난바와 같이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살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결심하고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진실이란 외식과 위선이 없음을 뜻하고,

2) 공평이란 최대한 명분 있게 바르게 행함을 뜻하며,

3) 정의란 불법을 행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를 멀리하면서 덕을 세우며 사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결과를 나타내 주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열방이 스스로 복을 빌어주므로 자랑 할 일들이 생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일들을 물리쳐 주시고 주위의 모든 세계가 해롭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을 빌어주고 이롭게 하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개인이나 국가에게도 이같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나라도 전쟁의 위협이 더욱 고조된 때가 있었고, 또 한때는 세계적으로 3차대전이란 위협 속에 공포의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소련과 화해가 성립되고, 중동문제가 해결 되면서 공포의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바로 열방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자기와 이웃을 살리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시되 묵은 땅같은 패괴한 마음을 옥토로 만들고, 가죽처럼 두꺼워진 마음을 할례하듯이 벗겨서 예민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부조리한 생활이 있으면 또 한번 반성하고 바르게 생활 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1과 미가 선지자의 외침 (미 7:5~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열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 때에 사역한 선지자이기 때문에 주전 700년 경부터 660년 경에 사역을 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 시대에 북방 이스라엘국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였고(주전 675년) 미가 선지자가 유다와 사마리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을 보면(1:1) 북방 이스라엘국이 멸망되기 전부터 예언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는 죄악이 크게 관영된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미가 선지자는 이웃을 믿지 말라고 하였습니다(5절). 이웃은 친구, 아내, 가족 등인데 “사람의 원수가 자기의 집안 식구라”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악해지면 진실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고, 특히 전쟁이 일어나면 가족간에도 사상이 달라지면서 서로 물고 뜯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하시면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10:36). 따라서 “이웃을 믿지 말라”는 것은 불신풍조와 전쟁과 핍박의 상황이 있을 것을 예고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롬 3:4).

2. “이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5절). 이웃이나 인간은 다 신용하거나 의지할 존재가 못됩니다. 성도가 자칫하면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면서도 인간과 현실을 의지하는 경향을 갖기가 쉽습니다. 현실적으로 살아감에 어려움이 없고, 인간의 과학문명이 찬란해 보일 때 물질이나 지식이나 권세 등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더 찾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히 1:3). 우리의 생명도 함께 붙드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조금이라도 현실을 의지하는 자세로 기울어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적게 받겠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아셔서(사 3:1) 극히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앙망하라고 하셨습니다. 7절 말씀에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하였고, 또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만 의지의 대상이요, 소망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을 앙망하여야 하며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같은 시대의 사람 이사야 선지자도 성도가 피곤을 느낄 때에 더욱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하셨습니다(사 40:31).

4. “재기의 소망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8절 말씀에서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재기의 소망을 갖고 7전 8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성도들이 혹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신원하시기까지는 진노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9절). 그러나 이럴 때에 더욱 재기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은 성도의 회개를 받으시는 분이시고(사 1:18),

2) 진노의 때가 끝나면 다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9절 하반의 말씀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3)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환난에 처한 성도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현실적인 회복에만 그친다는 말씀이 아니고 메시야를 통한 영원한 구원이 있음도 예언하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당시의 범죄하는 백성들이 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또 머지않아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지만 때가되면 회복 될 것이고 이 회복이 큰 위로를 줄지라도 궁극적인 구원은 메시야를 통한 영원한 구원의 은총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인생과 현실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앙망하면서 고난 중에서라도 재기의 소망과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신의 성품에 참여함 (벧후 1: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8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8가지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먼저 본문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절에서 설명하신바와 같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영생 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인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란 명예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1) 정욕을 인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라는 것이고,

2) 또 하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의 신분에 따라 생활이 다르듯이 성도는 성도란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곧 세상 사람들처럼 현실에 집착하여 살지 않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며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을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롬12:2에서는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이라”하셨고 약1:27에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성취하는데 필요한 8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1)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희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고, 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신의 성품에도 참여할 수 없고, 세속을 멀리하며 살 수도 없으며 또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확신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2)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 덕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므로 칭찬을 받으며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덕의 반대 현상입니다. 이웃에 유익을 주고 칭찬을 받으며 화목하는 것이 덕인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3)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은 성경 지식을 비롯하여 모든 지식을 의미합니다. 신의 성품을 아는 것이나, 구원의 도리를 아는 것이 다 지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지식이 없이는 믿음도 성립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도 없기 때문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4) 절제입니다. 절제란 분수에 알맞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 자리, 설 자리, 앉을 자리를 분별하고 할말, 못할 말을 분별하고 쓸 것, 안 쓸 것을 분별하여 분수에 알맞게 사는 것이 절제입니다. 없으면서 있는 체 하거나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은 절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이런 일에 확실하게 하여야 합니다.

5) 인내입니다. 매사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인내는 성도의 미덕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해서 손해 보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유익해집니다. 인내한 다음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꼭 인내를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 경건입니다. 이 경건이란 믿음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에서 훨씬 발전하여 성령이 충만하고 빛을 비추는 사명적 신앙을 의미합니다.

7) 형제우애이니 이것은 관계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8) 마지막에 사랑이란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8가지 생활의 미덕이 있을 때 그 성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8가지를 크게 요약하면 믿음과 지식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실천하여 성도다운 생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3가지 할 일 (롬 16:17~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3가지 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은 바울사도께서 로마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살펴야 할 것과 떠나야 할 것(17절) 그리고 선한데 지혜로워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9절).

1. 교훈을 거스리는 일, 분쟁을 일으키는 일, 거치게 하는 일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때로는 성경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의 지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성도는 이 모든 교훈을 거스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이 거스리면 그 신앙이 의심스럽게 되고 교회 안에서 거스리면 성도의 화합을 해치게 되므로 덕이 되지 않습니다.

2)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분쟁의 불씨는 불평과 욕심, 말의 실수나 혈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가 이웃과 불화하면 하나님과도 불화한 것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거치게 한다는 뜻은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막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신앙과 축복의 발전을 막는 것은 자신의 완고함과 나태함에 있고, 타인의 축복과 발전을 막는 것은 자신이 이웃에게 덕을 세우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이웃에게 어떤 피해를 줄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이나 교회에 대하여서도 거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0:31).

2. “저희에게서 떠나는 일”입니다. 여기에 “떠나라”는 말씀은 잘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동참할 수 없고, 또 악한 자와 악을 행하는 일에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고후 6:15, 16, 시 1:1). 신앙과 사상이 다르거나(고후 7:17) 이단적 요소가 있을 때도 한두번 경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로서 타인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노력하였는데도 효력이 없을 때는 악한 자들에게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장난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전화번호를 바꾸기도 합니다. 성도가 악을 피하기 위하여는 어떤 수단이라도 써서 악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이상의 3가지를 주의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자요, 따라서 자기의 배만 섬기는 이기주의자이며, 순진한 사람들을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미혹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18절). 그래서 성도는 자기나 자기의 이웃에 이런 이기주의자가 없는지를 살펴서 경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선한데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악에는 미련하고 선에는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선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만 선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지혜로워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편지를 받은 로마인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뛰어나므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순종이 복음 사역자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19절). 복음 사역자의 기쁨은 곧 하나님의 기쁨도 되셨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3가지를 잘 시행하는 성도에게 어떤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1)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그 성도의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고,

2) 주 예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선한데 지혜로우면 평강의 하나님이 평강도 주시고 사탄도 물리쳐 주시며, 또 은혜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죄와 부덕을 경계하시고 이기주의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선한 일에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셔서 주시는 축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34과 빈들로 가신 예수님 (마 14:12~21) 목록으로


1. 지금 읽으신 말씀 12절과 13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죽음소식을 들으시고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곳을 떠나사 빈들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순교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1) 순교자체가 큰 축복이기 때문이며,

2) 모든 인생의 갈 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과 분복과 갈 길이 어떤 다른 사람과 같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독립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 각 사람의 사는 방법과 갈 길도 다르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2. 13절에서 예수님은 빈들로 가셨고 또 15절에서 그들이 있는 곳은 빈들이었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동편 벳세다 지역입니다(눅 9:10). 예수님이 왜 빈들로 가셨을까요? 그 빈들에서 모여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빈들은 광야와 같아서 집도 없고 먹을 것은 물론 물도 없으며, 오히려 들과 모래, 바람,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습도 초라하셨고(사 53:2, 3), 아무것도 가지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아무것도 없이 빈들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가신 이유는

1) 없는 곳에서 있게 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2)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인품(겉모양)이나, 그 분이 가지신 현실적인 것들을 보고 따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시며 진리이신 것만 믿고 따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성도들은 초라하거나 빈들에 서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집에 계신 예수님, 또는 많은 재물을 갖고 주시는 예수님, 능력을 과시하면서 약자 편에 서지 않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병 고치는 맛에 따르는 사람들, 떡을 먹고 배부른 맛에 따른 사람들(요 6:26)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저희들은 예수님이 떡과 재물과 병 고침과 좋은 아파트를 주시지 않아도 빈들에 서신 주님이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따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강하고 유족한 편에서 사시지 않았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14절).

3.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의 신앙적 생활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1)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른 무리는 큰 무리였고(14절), 그 수는 여자와 아이를 제한 5,000명이었기 때문에 약 15,000명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빈들에 계신 것을 알고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라하고, 가지신 것이 없으며, 빈들 또한 볼 것이 없는 곳이지만 예수님 자신은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도 예수님의 신분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가르치시는 진리,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분만 믿고 따라야 합니다.

3) 그들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번의 명령을 발하셨습니다. ① “갈 것 없다”는 금지의 명령이요, ②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심이요, ③ “50명씩 줄지어 앉히라”(눅 9:14)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 많은 군중들이 빈들에서 먹을 것이 없고 날이 저물자 무리들을 동리로 들여보내서 먹을 것을 각자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의가 있었을 때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런 방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명령을 사람의 생각으로 점검을 한다면 반드시 이유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동리에 들어가지 않고 무슨 방도로 하시려고 합니까? 먹을 것을 거두어 보아도 얼마 안 될 것입니다. 또 50명씩 줄지어 앉혀서 어찌 하실 것입니까?”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나 함구하고 순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은 이런데서 나타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빈들에 계신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이 이유 없이 순종할 때 기적을 베푸셨음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35과 기도 응답의 섭리 (사 41: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 응답의 섭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에 보시면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할 자가 가련한 형편에 있고 또 빈핍한 형편에 있으며 나가서는 물이 없었고 그 형편이 가중되어 혀가 마를 지경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하시되 기도자가 상당한 고난을 맛보고 노력을 다 하고 더 이상 노력할 아무런 여력이 없을 때에 응답하시고 나서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노력을 안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거저 나타나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1. 성경에는 최후에 응당하시고 역사하신 예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든 기적들은 거의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① 막강한 권세자 바로를 꺽기 위한 재앙들,

② 홍해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바다를 갈라주신 일,

③ 광야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주시고 의복과 신을 보호해 주신 일,

④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양식으로 선지자를 대접하고 능력을 힘입은 사실(왕상 17:14),

⑤ 나만 장군의 문둥병을 일곱 번 순종할 때에 고쳐주신 일(왕하 5:14),

⑥ 예수님이 7병2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따르는 무리들이 3일을 굶고 기진하게 되었들 때에 역사하신 일들입니다.

2. 왜 이렇게 기도 응답을 최후로 늦추실까요? 그 이유는

1) 하나님은 고난을 주실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징계로 주시는 경우와 연단의 섭리로 주시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상당한 고난을 견디고 인내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성도가 오래 참고 기도하므로서 기도의 좋은 연단을 받게 하십니다. 연약한 성도는 평안할 때에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이 노력을 다하고 더 할 수 없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실 차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징계 성취의 섭리, 기도의 연단, 인간의 노력을 앞세우시는 관계로 마지막에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3. 어떤 가정의 성도가 병 낫기를 사모하는데 그 병자의 치료 방법은 활동하는 것이 최고의 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틀을 사다 놓고 운동하면서 물리치료에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운동과 물리치료가 힘도 들고 아픔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조금씩 참으면서 노력하면 상당한 차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환난 중에 기도하는 성도는 노력을 다하면서 구하고 더 이상 노력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출 14:13~25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당도했을 때에 애굽 군대는 계속 추격해왔습니다. 이때에 홍해가 막히고 전진할 수 없게 되자 백성들은 아우성치며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 경우는 인간이 어떻게 힘쓰기 어려운 경우인 것입니다. 이때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외치기를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구원하시는 일을 보자”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노력을 다하고 더 이상 힘쓸 수 없을 때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고 또 하나님이 일 하실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짖으며 기도한즉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하여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들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 든 손을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하신 것은 “최후까지 노력하고 전진하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①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② 7번 이상 노력하기까지 낙심치 않고 힘써야 합니다. ③ 고난을 참으면서 힘쓰고 ④ 기도하며 기다리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제36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의무 (히 1:14~2: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4가지 은혜와 3가지 성도의 의무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의무”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1) 섬겨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이웃 또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마 20:28)하셨고,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 중에 누가 크냐?”하신 말씀에서도 “섬기는 자가 크다”(눅 22:2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발을 씻기시는 모범으로 친히 섬김에 대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또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보내신 천사들을 통해서 성도를 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하시므로 하나님은 그 천사들을 파송하셔서 성도를 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사실을 꼭 믿으시고 감사하시며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시켜 보호, 인도, 봉사해 주시는 은혜를 더욱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공변된 보응(판단)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공변된 보응”이란 모든 사람들의 선악에 대하여 공평하게 판단하시고 보응해 주시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의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권위가 엄하여 그것을 기억한 자들도 응분의 벌을 받았거든 하물며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주시는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끝내 실현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선이 유지되고 선을 행하며 고난을 당하는 성도가 용기를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큰 구원의 은혜입니다. 3절에 보시면 “이같이 큰 구원”이라 하시고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사도들)들이 확증하였고, 또 하나님도 여러 가지 능력과 기사와 은사들로서(성령의 나눠주신 것) 함께 증거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죄사함 받고 영생 얻는 것이 큰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큰 구원에 비례하여 작은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현실적으로 주시는 보호, 인도, 병 고침,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의 나눠 주시는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님의 나눠 주신 것으로서”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영적 은사와 모든 재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에 대한 말씀은 고전 12:4~11, 28~31을 참고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섬기는 은혜, 공변된 보응의 은혜, 구원의 모든 은혜, 성령님이 특별히 나눠 주시는 은사들이 있음을 아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복되게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시행해야 될 의무로서

1) “들은 것을 간절히 삼가 보존”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이 그 뜻입니다. “모든 들은 것”이란 복음의 말씀이고, “간절히 삼간다”는 뜻은 주의하여 지킴이고, “흘러 떠내려갈까 조심하라”는 것은 닻을 든든히 준 배처럼 요동치 않게 붙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진리를 어떤 유혹 가운데서도 견고히 믿을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그 구원을 등한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고 그 복음 신앙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3)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하신 말씀에서 저희들도 은사를 받은 대로 증언하는 사명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4가지 은혜를 꼭 기억하시고, 3가지 사명 즉 ① 간절히 삼가 간직하는 일, ② 복음 신앙에 힘쓰는 일, ③ 증거 하는 일을 잘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37과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수 24: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세상 떠날 무렵에 자기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유언을 하였고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여호수아 앞에서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1. 여호수아는 세상 떠날 무렵에 백성들에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어른들은 다 세상 떠날 무렵에 자녀들에게 좋은 유언을 준비하였다가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유언 중에 가장 좋은 유언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정의롭게 살며, 형제간에 우애하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은

1)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은 애굽에 있을 때 이방신을 섬긴 일이 있었고, 또 요단강을 건너기전 광야에 있을 때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지만(4절) 그 후손들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한 것입니다.

2) 너희들 스스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여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고 여호수아 자신과 그의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백성들에게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보여 주면서 백성들에게 유훈을 남겼습니다.

2.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이 우리와 열조를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기 때문이며,

2) 그들의 목전에서 큰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3) 그 백성들이 행한 모든 길에서 보호, 인도하셨기 때문이며,

4) 그들의 대적인 “아모리” 사람들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유는 ① 구원하신 하나님, ②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 ③ 보호, 인도하신 하나님, ④ 대적을 물리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 하나님만을 경외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의 능력과 보호와 인도를 의지하면서 깨어 생활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말씀에서 신앙 생활의 방법 몇 가지를 교훈 받을 수 있으니

1) 신앙이란 큰 결단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단하기 전에 먼저 판단을 잘 하셔야 하겠지요.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혹은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지를 판단하여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가족들과 함께 이미 결단하였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결단 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도 따라서 결단을 하였습니다. 좋은 결단과 결심이 바른 생활을 나타낸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바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롬 10:5~10에서도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유를 4가지로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에는 고백이 필요한 중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물론 때로는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고백을 확고하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것도 약속이며, 또 “독생자로 구원 하시겠다”는 것도 역시 약속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하나님 뜻대로 복종 하겠다“는 것도 약속이며, 이 약속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되 ② 큰 결단을 갖고 ③ 바른 지식의 고백을 하며 ④ 하나님 뜻에 복종 할 것을 약속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실천하는 만큼 복을 주실 것입니다.

 

제38과 선행을 실천함에 대하여 (약 2:1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선행을 실천함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야고보라는 제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이 6명이 나오는데 그중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한 말씀이라면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믿음은 성실한 행동을 나타내는 믿음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력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14절에서 “믿음이 있다 하며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이익도 없고,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 15,16절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는 자에게 쓸 것을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평안해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것도 역시 무익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3) 따라서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으니 저희들은 산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 오른쪽에 약 1:27을 보시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른 경건은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생활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이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저희들 스스로가 양심에 가책 받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해소하면서 기도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양심에 가책 받는 일은 바로 세계적으로 굶주려 죽는 사람들을 외면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에서 방영된 소말리아의 기아현상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그들과의 거리가 먼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이웃구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그들을 외면하는 일에 대한 가책이 씻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계명에 있습니다(마 22:39). 또 마 25:35~36에 보시면 “주린 자, 목 마른 자, 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울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진정한 이웃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현실로 볼 때에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곧 죽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눅 10:29에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잇가”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도가 도와야 할 우리의 이웃은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령이 죽어가는 선교대상, 장애인들, 고아원, 양로원, 그 외에도 성도들 중에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먼 나라들의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돕지 않으면서 우리의 선행과 기도를 정당화 시키려니까 아쉬움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제 활동 중에 한 부분을 더 보충하여 적은 금액이나마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손길을 뻗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연구하여야 하겠습니다.

4. 굶주려 죽는 사람은 아프리카보다 아시아 지역에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1분에 24명이 굶어 죽는다 하니 이 통계는 하루에 34,560명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구제를 하여야 할까요?

1) 우선은 교회로 짐 지우지 말고(딤전 5:16),

2) 자신이 절약하는 입장에서 할애하여,

3) 가장 어려운 대상을 우선 돕되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먼 곳으로 나가며 찾아야 하고,

4) 특히 믿는 자에게 우선하라고 하셨습니다(갈 6:10).

5) 되도록이면 우리의 구제비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도를 겸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하며,

6) 신용 있게 잘 전달되는 통로를 이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상고한 이유는 저희들의 경건이 인정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모면하면서 성도의 책임을 다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9과 평안을 위하여 힘쓰는 아사왕 (대하 1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평안을 위하여 힘쓰는 아사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사왕은 유다국의 6대 왕입니다. 솔로몬 왕의 증손자이고 주전 912년부터 871년까지 41년 동안 왕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보시면 “아비야 왕이 죽은 다음 그 아들 아사가 왕이 되어 그 시대에 그 땅이 10년간을 평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사왕이 왕이 된 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갈라진지 20년 뒤였습니다. 그 20년 동안은 나라가 편안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라가 갈라진 다음 계속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과 싸움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갈라서 북방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20년 통치하는 동안 계속 남방 유다국과 싸움을 겨루어 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이 신앙적 정치를 잘하여 그 땅이 10년간 평안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사왕이 평안을 위하여 힘쓸 때 항상 전쟁만 일삼던 여로보암 왕이 죽은 것입니다(왕상 15:6, 7, 9, 25). 평안을 위하여 힘쓴지 1년 만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평안을 주시는 방법으로 그 대적자를 없애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평안을 주시는 방법으로는 전쟁에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사왕때도 구스사람 세라가 침략을 해왔는데 그때에도 하나님이 대적을 패하게 하시고, 또 두렵게 하셔서(왕하 14:12, 14)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면 아사왕이 평안을 위하여 힘쓴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한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내가 선하게 하였을 때는 대적자가 생길 수 없습니다. 또 정의롭게 행한 일에 대하여 역시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금방 대적자가 생기고, 또 정의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역시 10년 후에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과 정의가 평안을 이룩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2. 우상의 제단을 훼파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하나님의 선민들이 이방인 풍속에 동화되어 우상 숭배를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 받은 기본 죄악이었습니다(삿 3:5~8). 오늘날 성도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예배당 안에 성화도 붙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강단에 십자가 세우는 것도 법으로 금지 시켰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형상에 절하는 것만 우상 숭배인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탐심은 우상 숭배라”하신 말씀이 있고(골 3:5), 또 “완고한 것(고집이 세고 회개하지 않는 태도)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 15:23)하셨습니다. 또 우상 숭배란 “그 대상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경배해야 할 성도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거나, 또 어떤 사람과 권세를 의지한다면 역시 그것들은 그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가 우상 숭배로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1) 우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2) 무엇에든 탐심을 갖지 말아야 하며(특히 물욕과 명예욕과 향락 등),

3) 완고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기도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하였습니다. 또 11절에도 보시면 구스인의 침략이 있었을 때 아사왕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법인 만큼 평안을 위하여 뺄 수 없는 사실입니다.

4. 4절에서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니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이 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또 7절 끝에도 보시면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선과 정의, 우상 제거, 기도 힘씀, 명령 준수 이 4가지가 바로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을 힘입는 방법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40과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 2:12~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자기의 가족을 한 집에 모으고 창문에 붉은 줄을 드리운 사실”에 대하여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군사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성읍인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정탐을 그 성안으로 파송하였습니다. 두 정탐꾼 정세를 살피고 돌아올 무렵에 여리고 왕에게 그 보고가 들어가서 여리고 왕이 군사를 보내어 정탐꾼을 잡아오라 하였고, 여기에 쫓기던 정탐꾼은 여리고 성벽위에 사는 기생 라합의 집으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방 여인인 기생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을 하고, 또 그 하나님이 자기들의 땅을 그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믿고, 그 정탐꾼을 잘 숨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추격해 온 군인들이 그 정탐꾼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 후에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선대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장차 너희 군사가 여리고 성을 멸망시킬 때 우리를 살려주겠다는 표를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니까 그때에 두 정탐꾼이 “네가 이 사실을 누설치 않고 우리를 이 성에서 달아 내릴 이 붉은 줄을 너의 집 창문에 달아 내리고, 모든 가족을 집안에 모은다면 우리가 쳐들어올 때에 이 붉은 줄이 있는 집은 멸망에서 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이 그 말을 듣고 자기집 창에 붉은 줄을 내렸다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두 정탐꾼이 돌아가서 여호수아에게 그 보고를 했을 때에 여호수아는 그 정탐한 군대들에게 명하여 여리고성 멸망 시에 그 가족을 구원해 주도록 명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기생 라합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고 이때에 구원 받은 라합이 메시야가 탄생하는 계열을 잇는 축복을 받았으니 이 라합의 아들이 베레스이고, 그의 고손자가 바로 다윗인 것입니다.

2. 이 사실에서 저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1)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것일지라도 그 백성들의 침략과 전술로 점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천국의 복을 은혜로 주셨을 지라도 성도가 노력하고 힘쓰는 것만큼 천국의 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11:12) 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힘을 많이 써서 천국의 복을 더 많이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2) 기생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라합은 정식으로 믿음의 권면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관련된 하나님의 능력 등을 소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3) 라합은 택한 백성으로서의 태도를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그가 정탐꾼을 숨긴 사실이 발각되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하나님 편을 도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행위도 이렇게 확실하여야 합니다.

4) 가장 중요한 것이 붉은 줄을 달아 내리는 순종입니다. 라합의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군사에게 달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에 두 정탐꾼은 “붉은 줄을 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라합은 그대로 복종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독생자의 피를 믿으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고, 그 구원의 방도를 복종하여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붉은 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적으로 예시하여 주신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5) 라합은 하나님의 사자인 정탐을 영접하고, 선대하였으며,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실천하고, 구원을 기다리다가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복음을 믿고 실천하며 기다리다가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41과 우리가 구할 은총 (느 9:20~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우리가 구할 은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느헤미야 시대에 백성들이 수문 광장에 모여 신앙의 단합대회를 하면서 기도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후시대의 사람으로 주전 400년경에 2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에스라와 함께 신앙과 예루살렘 복구에 힘쓴 사람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은 초막절 절기를 맞이하여 수문 광장에서 성회를 열고 금식하며 회개, 자복 기도를 하는 중에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배우시고 또 우리가 현재 구하여야 할 은혜는 무엇인가를 아셔서 기도의 제목을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20절에 보시면 “주의 선한 신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구약 시대에도 역사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 성령님이 역사하신 내용은 1) 저희를 가르치셨고, 2) 만나로 끊어지지 않게 먹이셨으며 3) 물을 주사 목마르지 않게 하셨고 4) 40년 동안 들에서 기르셨고 5) 핍절함이 없게 하셨으며, 6) 옷이 해지지 않았고, 7)밭이 부릍지 않았으며 8) 그들의 대적인 헤스본과 바산을 정복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이렇게 다양한 역사를 하셨습니다.

3. 우리는 이 8가지 은혜 중에 4가지는 시급히 간구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풍족하게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는데 요즈음 만나를 먹으려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나는 임기응변책으로 주신 단조로운 식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몇 배 풍성한 양식을 먹고 있음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물을 주신 은혜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물을 많이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인 것 같습니다. 중동의 나라들은 호텔 목욕탕에 하수구가 없습니다. 그만큼 물을 아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물을 얼마나 흔하게 씁니까?

3) 옷이 해지지 않아서 40년을 한 벌로 살았습니다. 요즈음 해지지 않는 의복을 40년 입으라고 하면 누가 입겠습니까? 기적의 의복이라도 안 입으려 할 것입니다. 또한 요즈음 의복은 너무 질겨서 해지지 않습니다. 또 옷을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4) 발이 부릍지 않은 것입니다. 요즈음은 발이 부릍도록 걷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통수단을 좋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발이 부릍지 않는 은혜를 주신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족한 것입니다.

4. 그러면 우리가 구하여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1) 20절에서 “저희를 가르치며”하신 말씀처럼 가르침을 받는 은혜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요14:26). 저희들은 지금도 성령님의 역사로 진리와 모든 것에 대하여 가르침 받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2) 21절에서 “40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기르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들도 좋은 환경에서 주님의 교양으로 건강하게 양육해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3) 21절에서 “핍절함이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만나와 물과 메추라기와 의복과 신을 주시고, 발을 부릍지 않게 하셔서 죽지 않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 정도로 만족하며 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짐승 취급하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환경의 생활을 핍절함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족한 줄로 알며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빌 4:11).

4) 그리고 대적을 정복하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대적을 믿음과 사랑으로 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4가지 은혜를 꼭 성취하셔야 하겠습니다.

 

제42과 기도자의 태도 (출 14:11~16) 목록으로


1.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홍해바다 앞 “비하히롯”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군병들의 추격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특별병거 600승과 마병과 군대가 많았기 때문에(14:7, 9) 능히 대항하여 싸울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앞에는 홍해가 막혀서 전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 한 것이 신앙인의 자세는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분명히 기도하는 호소였습니다. 모세도 같이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15절).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고 답답할 때 부르짖는 기도가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한 자처럼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한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한 다음에 즉시 모세를 원망하는 어조로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본래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 인을 섬기는 것이 나으니 버려두라고 하지 않았느냐?”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원망이 마땅한가? 할 때 1) 기도자의 자세로서 마땅치 않고, 2) 모세를 원망함이 곧 하나님을 원망함이며(출 16:8), 3) 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실수가 없었습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당연한 것이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언대로 응함이었고(창 15:13~15), ② 노예에서 해방되고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여야 하며(창 15:18~21), ③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에서 해방을 시키셨고, ④ 또 하나님의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따라 진행(출 13:21)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추호도 원망할 일이 없는데 그 백성들은 그렇게 원망을 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 사역자를 원망하는 죄가 얼마나 큽니까?

1) 그들이 광야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은 다음 에돔 땅을 통과하려 하다가 에돔족이 길을 열어주지 않으므로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많은 백성을 죽이신 일이 있고(민 21:4~6)

2) 또 고라당의 반역 사건은 하나님이 땅을 가르시고, 직접 불을 내려 죽이신 사실이 민 16: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최초의 원망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문책하지 아니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해결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이 급박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1)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이어 원망하는 간청이 응답될 리가 없습니다. 기도자는 반드시 감사로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가 기도하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바라지 않고 오히려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하는 예가 있을 것인데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원망을 들으면서 부르짖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14절에서 “너는 어찌하여 부르짖고만 있느냐 백성들을 명하여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원망을 들으면서 기도한 태도도 귀하지만 모세는 그 전에도 백성들을 권면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애굽 사람을 다시는 영영히 보지 못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홍해 가르는 역사를 나타내기 전에도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① 기도자에게 원망은 금물이란 점과 ② 어려운 일 앞에서도 침착하게 기도하여야 할 것과 ③ 기도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그들의 원망으로 인하여 응답에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제43과 내 말에 거하면 (요 8:31~36)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나의 제자(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과 참 제자 되는 일과 진리를 알아서 자유 얻음에 관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31절과 32절에 있고, 또 그다음 33~36절에서는 종 된 자와 자유 누리는 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과 자유 누리는 생활”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은 1) 성경을 진리로 믿고, 2) 성경을 깨달으며, 3)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과 깨닫는 것과 실천하는 것 3가지를 구비하는 생활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산다는 뜻을 다르게 설명하면 곧 “예수님과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눅 15:1~7에서도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일이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 이렇게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1)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 제자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확실한 제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눅 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욕대로 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것입니다.

3)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죄의 짐, 고난의 짐, 사랑의 짐 등을 지고 있습니다. 짐을 졌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며 항상 죄에 끌리는 부자유(롬 7:25), 마귀의 유혹에 패배하는 부자유(벧후 2:19)로서 불의에 얽매이게 되고(행 8:23) 죄악의 쾌락을 좋아하게 되고(롬 6:6) 결국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롬 8:2)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롬 8:21)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진리를 알면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속죄와 고난에서의 구원과 사망에서의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후 3:16에서는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한 감동을 받을 때 영적으로 누리는 자유로서 해방된 마음을 갖게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계 1:5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죄에서 해방되게 하신다”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진리 되신 예수님으로 또는 그의 십자가의 공로로 또는 구원을 적용 시키시는 성령님의 감화로 받는 은혜와 자유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종 된 자와 자유 누리는 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기들이 언제 종노릇한 일이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노릇한 것과 또 바벨론에서 70년간 한 것과 계속 강대국의 속국으로 있음을 상기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부자나 권세자 밑에서 종노릇을 안 한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면 마귀와 죄에 대하여 패배한 것인 즉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된 줄을 알아야 하고, 종은 주인의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천국에 영원히 거하시고 예수님과 연합된 자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잘하셔야 하겠습니다. ② 그리고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③ 또 진리를 앎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고난에서,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될지언정 죄의 종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44과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는 이유 (시 119:97~10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와의 관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법, 주의 계명, 주의 증거, 주의 법도, 주의 말씀”이라 하셨고, 성도는 그 말씀을 “사랑하며, 종일 묵상하고, 항상 함께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마음에 꿀처럼 받고, 생활의 등불로 받으며, 말씀을 지키기로 굳게 맹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예찬하고, 성경에 대한 성도의 애착과 활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성경을 어떻게 살피며 또 왜 배워야 하는가? 를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1. 성경을 살피는 태도로

1) 97절에서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욥 23:12). 저희들도 그렇게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2) 98절에서 “종일 묵상하고 함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상고하고 그 말씀에 매달려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교제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3) 또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그 규례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102절). 이것은 성경을 가르침 받는 자세로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며 믿을 것과 행할 것을 교훈해 주십니다. 따라서 꼭 가르침 받는 자세로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4) 주의 말씀을 “꿀같이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103절에서 “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보다 더 달게 여기는 심정이 있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말씀의 가닥을 잡아야 합니다. 할머니가 갓난 손자를 달랠 때에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얼마동안 빨다가 웁니다. 아무것도 먹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젖이 나올 때는 그 맛을 알고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성도들도 꼭 말씀의 가닥을 잡고 그 단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는 자는 “그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맹세하고 작정한다”고 하였습니다(106절).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 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꼭 지킬 결심을 가지고 말씀 배우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을 살피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계신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나타나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나타나 주신 계시는 기록된 말씀(요 1:1, 행 20:32)뿐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가까이 함이 곧 하나님을 교제함인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하신 말씀, 또 렘 15:16에서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다”는 말씀이 바로 성경을 “영적으로 먹는다”고 표현하신 말씀들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마음의 양식을 삼아야만 신앙을 유지, 성장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킬 때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 1:4). 그러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를 아는 복, 하나님의 뜻을 아는 복,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아는 복, 또 명철하여지는 복 등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통해서 주의 법을 깨달을 때에는 원수보다 지혜로워지고, 스승보다 나아지며, 노인보다 승하여져서 악한 길로 가지 않게 되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며, 의로운 규례를 따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성경을 살피는 태도와 목적이 더욱 진지하여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5과 율법으로 주신 감사 규례 (신 26:1~11) 목록으로


이번 주간은 추수 감사 주간이어서 “율법으로 주신 감사 규례”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과 함께 주신 감사의 규례입니다.

1. 본문 말씀을 살펴 보시면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토지 소산을 거둔 후에

2) 맏물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의 택하신 곳인 성전으로 가져와서

3) 제사장에게 전달하고

4) 제사장은 그 감사예물을 하나님의 단 앞에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5) 그리고 감사의 내용을 아뢰야 하는데 ① 유리하던 조상들을 애굽에 거하게 하신 일과 ② 많이 번성하게 하신 은혜와 ③ 애굽의 학대에서 건져 주신 은혜와 ④ 큰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신 은혜와 ⑤ 40년 여정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은혜와 ⑥ 거기서 농사하여 맏물을 거둔 것을 감사하고 경배하며 ⑦ 레위인과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6) 따라서 이 말씀의 취지를 요약하면 ① 우선 받은 은혜를 깨닫고 ② 그 은혜의 소득으로 감사하되 ③ 정성껏 좋은 것으로 하고 ④ 성전과 제사장을 통해서 드리고 ⑤ 감사의 내용을 아뢰며 ⑥ 경배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내용을 말한 것을 다시 음미해 보면 현실의 복과 영적 은혜와 인도해 주신 은혜를 열거한 것입니다.

1) 현실의 복이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조상들과 자기 백성들을 정당한 주인의 나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노예는 인권도 없고, 땅도 없고, 자유도 없는 죽은 백성이나 다름없는 형편인데 그것도 400년간을 그렇게 지냈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 시켜서 가나안 땅의 영토를 주셨고 또 주위의 대적들까지 다 정복하게 하셔서 자유민이 되게 하셨고 자유롭게 자기 땅에 농사를 지어 소득을 거두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현실의 큰 복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그때보다 훨씬 윤택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생각하여 감사를 더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영적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갈대아우르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후손을 번성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선택과 번성의 복은 현실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천국 백성을 삼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눅 19:9에 보시면 구원 받은 백성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을 애굽의 노예 400년에서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애굽이 불신앙 세계를 뜻하고 가나안 땅이 천국을 뜻하며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이 신앙 결단의 순간이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현실을 떠나는 순간으로 비유할 때 더욱 영적 축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애굽과 바벨론은 불신앙 세계를 비유하고(계 17:5),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천국으로, 또 광야 생활을 교회 생활로 비유하신 것입니다(히 12:22, 행 7:38).

3. 인도의 은혜입니다. 본문 8, 9절에 보시면 애굽에서의 인도, 광야에서의 인도, 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생활할 때에 인도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현실의 복과 신령한 복과 보호,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특별히 깨닫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성경에 밝아지는 마음 (행 3: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밝아지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엡 1:17에 보시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간구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성경을 깨닫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 소원은 기도와 연구를 항상 힘쓰므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연구의 방법은

1. 우선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성경개론을 반드시 읽으시고 이 본문의 역사적 내용을 파악하므로 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시작 때 또는 오순절 성령 강림직후에 나타난 사건으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돌아가다가 문전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여 그를 걷게 하니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2. 이 말씀은 두 사도의 형편과 앉은뱅이의 형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내용을 공통성 있는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으면 체계 있는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두 사도의 형편과 앉은뱅이의 형편으로 나누어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베드로와 요한사도는

① 제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하고 성전에 가서 기도한 것입니다.

② 두 사람은 더불어 주목함에서 뜻을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③ 그들에게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중에 돈이나 재물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런 것을 의존하거나 욕심내지도 않았습니다.

④ 그들이 소유한 것은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님을 모신 믿음과 그를 아는 지식과 그의 인격을 닮음과 그의 진리와 능력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으며,

⑤ 그 예수님을 앉은뱅이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⑥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희들은 이 사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앉은뱅이에 관한 사실입니다.

①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불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밝히시지 않았고 우리는 혹 “그의 죄 값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죄 값이 아닌 경우와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요 9:3, 눅 13:4, 요 11:4, 고후 12:9).

② 그는 자신의 결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③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성전 문전에 앉게 하고 구걸하게 하였습니다.

④ 성전문전에서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물질을 구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그런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⑤ 그러나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바라다가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일어서고 뛰게 되었습니다.

⑥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찬미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두 사도와 앉은뱅이의 입장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받는 교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들의 모범과 앉은뱅이의 변화입니다.

3.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읽으셨을 때 어떤 내용들을 상고하셔야 할 것입니까?

1) 우선은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이요, 2) 9시라는 시간 개념이 우리와 같지 않음을 아셔서 적당하게 짐작하여야 할 것이며, 3) 베드로와 요한의 합력활동, 노인과 젊은 사역자의 협력이라고도 이해합니다. 4) 그들의 규칙적 기도, 5) 기도의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점, 6) 성전에 올라갔다는 뜻은 예루살렘이 언덕 높은 곳이기 때문이며, 7) 앉은뱅이의 불행한 상태, 걷지 못하고, 가난하며, 소외되고, 타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구걸하는 입장이며, 모든 불행을 다 가진 상태이고, 영적 불구로 해석하여 교훈 받기도 합니다. 영적 불구란 정신은 맑으나 실천을 못하는 신체불구를 뜻합니다. 8) 우리를 보라는 뜻은 소망을 갖고 주목하라는 것이며 9)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이란 곧 그의 능력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10) 오른손을 일으킴은 상대방을 돕고 힘을 전달해 주는 표현이고, 11)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은 자가 서서 걷고 뛰며 성전으로 들어가서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는 모습에서

결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구구절절을 구상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제47과 몸에 가진 예수의 흔적 (갈 6:11~18) 목록으로


이 시간에 저희들은 갈라디아서의 결론 부분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갈라디아”는 지역의 이름이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사도의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소아시아 서쪽, 지금 터키 영지의 중앙부에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 2차, 3차 선교 여행 때에 그 지역에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특징은 그 지역 성도들의 율법주의 사상을 책망하시고 지도하시는데 있습니다. “율법주의”란 복음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이 세계각처에 퍼져 살면서 “복음을 배척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잘못된 전통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지역의 선전에 넘어가 복음을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이고, 율법을 행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1. 본문 말씀을 설명드리면

1) 11절에서 “내 손으로…큰 글자를 쓴 것을 보라”하신 것은 대필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시고 말미에 바울사도 자신의 필적으로 확인하는 글씨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사도의 글이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2) 12절에서는 십자가를 믿는 복음적 신앙 때문에 율법이 명한 할례(창 17:9~14, 출 12:48)를 받지 않으니까 이로 인한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였습니다. 이때에 믿음이 약한 신자는 “복음을 믿으면서 할례를 받으므로 핍박을 면하려 한다”하셨습니다.

3) 13절에서는 율법을 지키려 하지 않으면서 할례 받은 것만 내세우려 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4) 바울사도는 14절에서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하셨고, 성도가 십자가 중심으로 나갈 때에 세상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십자가의 신앙이 자기와 세상을 등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5) 15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변화된 인격임을 강조하셨고, 그런 자에게 평강과 긍휼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16, 18절).

6) 결론적으로 17절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2.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하신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바울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인하여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사실과(행 14:19), 매 맞고 감옥에 들어간 사실과(행16:22~24), 풍랑으로 고생한 사실이 기록 되어있지만(행 27:18~20) 고후6:4~5과 11:21~33을 보시면 더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복음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셨고(행 20:23, 24)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하셨으며(빌 3:10, 고후 4:10, 롬 8:17, 고후 1: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골1:14)고 하신 것입니다.

2) 이렇게 고난을 많이 당했으니까 더 이상 고난을 받지 않도록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괴롭힌 것은 그들의 율법주의적인 잘못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성도가 이단을 따르거나 신앙이 삐뚤어지면 그것은 자신도 불행할 뿐 아니라 복음사역자를 크게 괴롭히는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기 육체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흔적이란 예수님을 위하여 몸에 받은 상처가 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손과 발과 옆구리에 흔적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무슨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순종한 흔적, 봉사한 흔적, 아니면 감사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요, 또 믿음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며, 복음전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흔적이 꼭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런 것을 사모하는 성도가 된다면 그 믿음은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제48과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유 (창 13:5~9) 목록으로


본문 말씀 9절의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하신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는 신앙적 특징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특징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믿음의 조상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롬 4:11,12). 아브라함의 신앙적 특징은

1)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믿은 것입니다. 그 나이 75세 때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창 12:4, 7) 그는 자녀 생산이 어려운 100세까지 믿고 기다리는 중에 받았고(히 11:11), 또 “자손을 번성시켜 주신다”는 약속이 있은 후(창 12:2)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번제로 죽인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라도 약속을 지키실 줄로 믿었으며(히 11:17~19), 가나안 땅을 주시고자 한 약속이 400년 후에 있을 것이지만 역시 그것을 믿었고(창 15:13~16), 또 메시야의 언약은 2,000년 후에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창 22:18, 히 11:9,10).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상상과 시간을 초월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제단을 쌓는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에 왔을 때(창 13:18), 또 벧엘과 아이사이에 왔을 때(창 12:8), 또 애굽에 다녀 왔을 때(창 13:4), 헤브론에 살 때(창 13:18),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 때(창 15:9),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등 여러 차례 제단을 쌓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의 예배 드리고 헌신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3) 순종의 특징입니다. 히11:8에 보시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으며, 하갈과 서자를 내보낸 일이나(창 21:14)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일은 큰 순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창 22:10). 한마디로 표현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봉사와 헌신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웃에 대한 봉사도 잘 하였고 이로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도 있었습니다(히 13:2). 그의 조카 롯을 자기보다 이롭게 해 주기위하여 거처의 선택권을 먼저 갖게 한 것은 이웃 사랑의 모범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아브라함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자기의 권속들과 조카 롯의 권속들 간에 다툼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8절) 분가를 제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제의할 때 선택권을 조카에게 양보한 것이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권만 주장한다면 평화가 조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93년 9월 10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습니다. 뉴스에서 1,000년의 갈등이 해소됐다고 하였지요. 그 1,000년이란 유구한 세월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시기를 소급하여 계산한다면 솔로몬 왕 때 남북이 갈라진 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평화주의를 일찍 본 받았다면 그렇게 오래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양보하고 평화를 만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9절). 따라서 평화를 위하여 양보하는 정신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신앙적 특징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생활의 자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8:32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란 죄와 환난과 죽음과 생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해 주시며, 자기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대로 살면 되니까 어떤 환경에 처하든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교훈이 바로 이런 자유를 저희들도 가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할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꼭 소유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9과 할례에 대한 지식 (고전 7:18~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할례에 대한 공부를 잠깐 하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할례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 할례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설교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를 이해시키는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헬라나라 남쪽 이방지역이지만 그곳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도 있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1)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하신 말씀은 유대주의적 신자로서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후에 복음을 믿게 된 자를 의미하고,

2) 그에게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는 뜻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처럼 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할례를 받은 의미를 잘 살려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인침을 받은 자처럼 변화된 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3)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하신 말씀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몰랐고 할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게 된 성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그런 사람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은 유대주의식 신앙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5) 그리고 19절에서는 할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할례에 대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1) 양피(생식기의 표피)를 베어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약식 포경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처음 실시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때부터였습니다(창 17:9~14). 그 당시의 할례 도구는 돌칼을 사용했습니다(출 4:25, 수 5:3). 그런고로 고통과 피를 동반한 약식 수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남자가 다 받았으나 율법으로 주실 때는 난지 8일만에 시행하게 하였습니다(창 17:12, 레 12:3, 출 4:24~26). 그리고 꼭 아브라함의 자손만 받게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선민과 함께 동거하며 생활하는 모든 남자(외국인)들도 함께 받게 하시므로 이방인으로서 믿음에 귀도하는 사람을 제외하지 않은 것입니다(여자는 남자에 예속함).

2) 왜 이 할례를 받게 하셨는가? 할 때

① 아브라함의 자손, 또는 선민이란 표시를 하기 위함이요,

② 이방인들도 선민과 동거할 때 같은 입장에 있음을 표시함이고,

③ 메시야 또는 구원의 언약을 받은 백성임을 표시함이며,

④ 이로서 선민의 긍지를 갖고 더욱 경건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요,

⑤ 영적으로 주신 은혜를 외부적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시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경건하게 살면서 영적으로 받은 은혜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3) 여기에 따라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눅 2:21, 요 7:23). 그런데 유대인들은 점점 할례의 의미보다 의식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으로 흘러갔습니다. 마음의 할례(롬 2:29) 즉 신앙적 인격의 변화와 생활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롬 2:25), 표면적 육신의 할례(롬 2:28)만 자랑하면서 그 할례 받은 표시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처럼 자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면서 결성한 단체가 바로 할례당입니다(엡 2:11, 딛 1:10). 그래서 바울사도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갈 6:15)고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할례당들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니까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갈 2:3, 6:12), 할례를 받은 복음적 신자들이 할례 받지 않은 복음적 신자들과의 교제를 감추려한 사실도 있었습니다(갈 2:12). 여기에서 의식은 외식을 낳고, 외식은 거짓을 자행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왜 신약시대에 와서 이 할례제도가 없어졌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선 할례가 위선의 근거가 되었고, 2) 언약의 성취(십자가의 은혜)로 증표가 필요 없이 되었고, 3) 의문의 법인 제사의식과 함께 폐지되었고(골 2:4), 4) 그 대신 피로 속죄함 받음을 표시하는 약식 세례예식으로 대치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마 3:16, 28:19).

 

제50과 선택을 잘하는 성도가 되자 (수 24:14~18) 목록으로


여호수아는 그의 말년에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선택을 바르게 할 것에 대하여” 권면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의 백성들이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과,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섬기던 이방신들과 하나님을 대조하여 보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기의 집도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확실하게 나타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요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큰 이적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또 아모리인을 쫓아내신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하였으니 일단 그들의 선택은 여호수아의 선택과 함께 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1. 성도의 생활의 성공은 바로 선택을 잘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선택을 잘 할 것을 권유하였고 엘리야 선지자도 그렇게 강조하였습니다. 왕상 18:21에 보시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살 때에도 먼저 물건의 질을 보고 다음에는 값을 물어서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사는 것처럼 성도의 모든 생활이 다 그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교리에 맞는가?, 다음에는 모든 이에게 덕을 세우는 일인가?, 또는 영적 유익에 손해되는 일은 아닌가?, 또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인가? 등을 살펴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선택에 성공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아들을 죽일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하나님의 명령순종을 선택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를 시험하시는 줄 알았고, 그 시험에 통과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창 22:12, 히 11:17).

2) 모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애굽왕자의 자리에 있을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쾌히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였고(히 11:24~25),

3) 바울사도는 3차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위하여 라면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시므로 자신의 생명보다 전도의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겨 선택을 한 것입니다(행 20:23~24).

3. 선택에 성공하지 못한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가다라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돼지떼 2,000마리를 죽게 하셨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시내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떠나시기를 간구했다”(마 8:33, 34)하시므로, 그 지역 사람들은 물질의 손해를 염려하는 일과 능력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선택하였으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으며,

2) 또 어떤 청년은 명예도 있고 재산도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 앞에 와서 영생의 진리를 물었다가 예수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시니 그 물질을 포기하는 일에 미련이 있어서 선뜻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마 19:21, 22).

3)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과 유대인들이 시기로 넘겨준 사실을 알고 또 자기 부인이 의인을 도우라는 부탁을 받고서도(마 27:18, 19, 23,24)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양심과 공의를 굽히고 의인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딤후 4:10을 보시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마는 사명선상에서 바울을 돕다가 바울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고향으로 후퇴했다고 합니다. 옳은 일과 그른 일, 좋은 일과 더 좋은 일이 항상 우리 앞에 있은즉 여기에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매일매일 생활에 승리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1과 예수님 탄생의 의미 (마 2:1~8, 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탄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탄의 의미”란 뜻은 “예수님이 왜 탄생하셔야만 하는가?”하는 뜻입니다.

1. 예수님이 탄생하셔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1)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호 4:6, 6:6)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실 때만 알게 되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요 1:18에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입니다(요 14:9).

2) 구속사업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대속물로 쓰시지 않고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영원하시고 흠 없는 예수님의 희생이어야만 속죄와 칭의를 허락하실 수 있었습니다(히 9:14). 요 3:16에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3) 메시야 탄생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중보자를 통한 구원 사역이 있을 것을 많이 말씀하셨고 또 예표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① 창 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하신 말씀이나 ② 창 3:21에서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신 사실이나 ③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창 22:18) 큰 민족으로 창대할 것이며(창 12:2)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26:4, 5)는 말씀이나 ④ 야곱이 유다지파를 축복한 내용에서도 승리자가 출현할 것을 말씀하셨고(창 49:8~12) ⑤ 욥도 구속자가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을 예언하였으며(욥 19:25) ⑥ 다윗을 메시야의 모형자로 세우셨을 뿐 아니라(시 22:1)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언하셨고(대상 17:26, 마 1:1) ⑦ 주전 700년경의 선지자 이사야는 동정녀 탄생과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지실 것과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을(사 7:14, 9:6) ⑧ 미가선지자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을(미 5:2) ⑨ 말라기 선지자는 언약의 사자로(말 3:1~3) 의로운 태양으로(말 4:2) 오실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예언이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요 13:14에서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생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과 선생님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마 10:25에서는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다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사는 생활에 대하여 예수님의 생애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을 지키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마굿간에 태어나신 것부터 깊이 생각하시고 약자의 편에 또 억울한 백성의 편에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깊이 통찰하셔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본 받도록 노력 하셔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헤롯왕 때에 탄생하셨는데 그 헤롯왕은 로마기원 749년 3월 12일에 죽었고 예수님은 그보다 2개월 18일 먼저 탄생하셨다 하여 성탄을 12월 25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이 2살 이하의 남아를 전부 죽인 것을 보면 예수님은 헤롯이 죽은 때보다 약 2년 먼저 탄생하신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52과 정병을 쓰시는 하나님 (삿 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명년부터 더 좋은 정병이 되시기 위하여 “정병을 쓰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사시대에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압하여 7년 동안 괴롭게 하였는데 이때에 하나님이 밀타작하는 기드온을 들어 쓰셨고, 300명의 정병으로 미디안 적군을 쳐부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국운동 역사이지만 성도가 영적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귀의 역사를 이기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정병 되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은 드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기드온을 쓰셨습니다. 이 기드온은

1)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다”하였으니 이는 가문이 작다는 뜻이요(6:15),

2) 그는 밀과 포도를 재배하던 농사꾼이며(6:11),

3) 그는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라 하므로(6:15) 퍽 겸손한 자였음을 알 수 있고,

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으며(6:17), 또 확신하는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평범한 농사꾼이요, 겸손한 특징 외에 다른 것이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6:12).

2.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을 붙이지 아니하리라”하시므로 많은 수의 사람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2절에서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 하였다 할까 함이라”하시므로 인간의 자긍을 없애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력성이나 똑똑한 것을 내세워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거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때 역사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민들이 농사기술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어도 사실은 하나님이 씨와 자연의 복을 주시는 일로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인간의 유력성이나 간판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정병을 쓰시는 분입니다.

1) 기드온을 따른 군사가 32,000명이었지만 그중의 약1/80인 300명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적은 수로도 얼마든지 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2) 정병을 뽑을 때 ① 두려워 떠는 자를 보냈습니다. 군사가 고난과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신 무장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고 가족생계가 염려스러운 사람들은 돌아가라”는 취지와 같은 것인데 여기에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만 남았습니다. ②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만명도 많다 하시고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게 한 후 개처럼 먹은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신 자와 손으로 움켜 먹은 자를 구별하여 손으로 움켜 먹은 자 300명만 선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개처럼 먹은 자는 대적이 오는 것을 살펴야 하는 파수꾼의 태도에 맞지 않는 것이고 무릎을 꿇고 먹는 것도 역시 엉거주춤한 태도로서 출동의 신속함에 지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움켜 먹은 자는 눈으로 감시하는 것과 발로 출동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경계의 태세가 준비된 자세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병은 죽음과 생계를 초월할 뿐 아니라 전략적 지혜와 민첩성도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저희들도 정병대열에 서야 할 것입니다.

1) 신앙지식이 풍부하고 2) 거룩이 풍부하며 3) 사명에 앞장 설 수 있고 4) 연단과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만 정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복종하는 성도,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하는 성도, 교회를 자기 가정처럼 생각하는 성도, 핍박과 고난을 낙으로 알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 교회가 상당한 물질을 필요로 할 때 자기 소유를 흔쾌히 헌납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때 정병 교인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피셔서 금년에 정병 생활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하시고 신년부터는 정병 같은 신자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996년도


제1과 믿는 자로 시작함 (요일 3:9~10) 목록으로


오늘은 신년 첫번 구역예배이기 때문에 “믿는 자로 시작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희미하게 시작하여 불확실하게 하면 안 됩니다. 확실하게 시작하여 확실하게 생활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난자”란 뜻은 거듭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낳아주심” 또는 “거듭남”으로부터 성도란 신분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 생활이 시작되고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짐승 생활이 시작되는 것처럼 저희가 성도로 태어난 만큼 성도의 생활이 확실하게 시작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성도의 확실한 생활은 무엇입니까?

1)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인 말씀과 성령님이 마음 속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감화하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2)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가 되고 성도가 된 상태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경계하느냐, 안하느냐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느냐, 안하느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됨과 마귀의 자녀됨을 분별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요일 4:9~16, 20~21에서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심과 사랑하는 일만 하려는 결심을 가지시고 새 출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경 다른 곳에 나타난 말씀에서 믿는 자로서의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데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눅 18:13에서 기도하는 세리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기도하여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처음에는 자기가 의로운 줄 알았다가 나중에 큰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법을 몰랐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를 때에 죄가 살아났다”(롬 7:9)하면서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하시고(딤전 1:15) 항상 자기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전체의 죄를 용서하여 심판을 받지 않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이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할 의무를 이행치 못하는 연약은 하나님의 노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노를 풀어드리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항상 겸손과 회개를 힘쓰는 것이 성도의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롬 7:9에서 바울사도가 “나는 죽었도다”하셨고 또 고전 15:31에서는 “날마다 죽노라”하셨으며, 또 갈 5:23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하셨고,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눅 9:23)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살고 자기의 성격이나 자기의 주관과 자기 목적이 살아 있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를 죽여 예수님께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임을 아시고 시작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3) 계명을 지키므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 14:23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또 요일 5: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는 성도의 사명이므로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신앙의 새 출발에 필수적이며,

4) 마지막으로는 충성을 결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행 16:15에 보시면 “루디아”가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와서 유하라”하였는데 이 말씀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자마자 즉시 자기의 집을 선교의 근거지로 복음 사역자의 숙식처로 내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믿자마자 충성한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이렇게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서 확실한 새 출발을 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과 처음부터 할 일 (신 2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처음부터 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노정 중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 광야 40년 노정 중 아론이 죽은 다음(신 10:6),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어떻게 행할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들은 이 말씀대로 실천을 하였습니다. 그 실천 기록은 수 8:30~3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두 곳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무엇을 하였는가? 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계명비를 세우고, 다음에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하여 실천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앞서서 더 먼저 한 일이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널 때 요단강 바닥에 있는 큰 돌 12개를 매 지파당 1개씩 가져다가 길갈이란 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수 4:1~24).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다는 사실을 후세대인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좋은 일을 많이 한 기념을 남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성을 점령한 다음에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또 율법의 계명비를 세워,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후 즐거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1. 제단과 계명비를 세우게 하신 장소는 에발산이었습니다. 이 에발산은 세겜땅에 있는 산으로 갈릴리와 사해바다 중간지역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 중간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에발산 남쪽에는 그리심산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상징하여 교훈을 하셨습니다(신 27:10~15, 11:29). 이때에 북쪽에 있는 에발산에 제단과 계명비를 세웠고(수 8:30, 32), 그 산을 저주의 산으로 상징하였으며(신 27:13), 그 남쪽에 있는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으로 상징(신 27:12)하였습니다. 그후에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제단을 쌓은 일이 있는데(요 4:20), 그들이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심산을 숭상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상징적으로 하여, 축복과 저주를 교훈하신 것은 축복과 저주가 서로 먼 거리에 있지 않음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심산 앞에서 복 받을 일을 하였더라도 그 다음산인 에발산 앞에서 잘못하면 역시 축복이 저주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제단을 쌓게 하실 때에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듬은 돌로 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 성전도 다듬은 돌로 쌓았기 때문입니다(왕상 6:7). 그런고로 이때에 다듬지 않은 돌로 쌓게 하신 것은 가나안땅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편의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또 자연석이란 의미에서 인간적 방법을 배제한 순수한 하나님의 계시에만 의존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그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니 번제는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믿게 함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감사를 예표하는 제사이므로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든든히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여야 한다(7절)고 하였습니다.

4. 또 그 당시에 석회공법에 의하여 돌비에 회를 바르고 거기에 계명을 기록한 후 읽어주고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행사는 선민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신앙생활을 잘 시도하되 말씀중심, 제사중심(믿음과 예배), 사랑중심(하나님과의 화목과 기쁨)의 생활을 잘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이 처음부터 할 일도 바로 말씀중심, 예배중심, 사랑중심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제3과 바른 마음을 갖자 (행 8:18~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른 마음을 갖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 드리면, “사마리아”에 마술쟁이 “시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빌립”집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8:9~13). 그리고 그 당시에 사마리아 도성에 “빌립”집사의 전도로 믿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를 그곳에 파송하여 복음 사역을 돕게 하였습니다(행 8:4~8, 14).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에 가서 살펴보니, 그곳의 성도들은 빌립을 통하여 세례는 받았지만 한 사람도 성령님이 내리신 일을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16절 말씀의 “성령 내리신 일이 없다”는 뜻은 오순절 당시 즉 행 2:4에 나타난 역사와 같은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믿기를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으면 다 성령님이 내주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성령의 역사를 힘 입어야 된다”는 것은 바로 오순절적인 특별한 은사를 체험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가르쳐서 “성령이 내리신다”(16절), “성령을 받는다”(15, 17절)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리셨다”는 표현을 하였다 해서 다른 성령님이 밖으로부터 주입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이미 내주 하신 성령님이 특별하게 역사하신 줄로 믿는 것이 바른 이해의 방법인 것입니다.

2. 이에 두 사도가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사도들의 안수기도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에게 주셨던 특수한 이적에 의함이었고,

2) 성령받음의 특징은 행2:4에 나타난 오순절 때의 형편과 같았을 것이며,

3) 그같은 성령받는 특징이 방언과 하나님을 높이는 일등으로 현저하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3. 이것을 목격한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줄터이니 그런 권능을 자기도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으니,

1) 그는 본래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자요(행 8:9), 그것으로 돈을 번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런 청탁을 하였을 것입니다.

2) 이로 인하여 그는 사도들로부터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21절), 또 “악하다”(22절),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자라”(23절)는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악하고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것은

① 돈을 주고 성령을 받으려고 청탁한 점과,

② 그것을 자기의 사업으로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사려는 것도 나쁘지만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하려는 것도 나쁜 것인즉, 딤전 6:5에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4. 사도들은 또 시몬에게 이런 책망 외에도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관계가 없다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함받도록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은 깨닫고 “자기에게 말한 것이 그대로 임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자가 그 잘못된 마음을 회개하지 않을 때 “은혜의 도에 관계가 없고, 물질과 함께 망하게 된다”고 한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비밀은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는 것이고(딤전 3:9), 마음에 심긴 도리도 온유한 심령으로 받아야 하며(약 1:21), 또 옥토에 심겨진 씨라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저희들도 잘못된 마음을 일체 버리고 바른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1) 잘못된 마음은 의심, 염려, 낙심, 교만, 미움, 원수맺음, 불평, 원망, 조급, 더러운 생각 등이요,

2) 좋은 마음은 온유, 겸손, 신뢰, 인내, 소망, 감사하는 마음이요, 또 죄를 회개하는 마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포용하는 마음 등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 교훈 받으려는 것은 바른 마음, 좋은 마음을 가지시므로 은혜생활의 발전을 이룩하시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지면 참으로 큰 불행을 자초한다는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4과 예수님을 따를 자의 자격 (눅 9:57~6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따를 자의 자격”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3종류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 했으나 각각 합당치 않은 문제가 있어서 취소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합당치 않았으며 그 합당치 않은 취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 것인가를 살피셔야 하는데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일선에서 복음 사역에 수종드는 교역자들에게 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역자들은 사명적 차원에서 교훈을 받아야 하고 일반 성도들은 은혜를 사모하거나 봉사적인 관점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어떤 사람이 “어디를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했을 때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시고 쾌히 허락 하지 않으셨습니다.

1) 이 사람이 “어디를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다”는 의미는 자기의 직업을 예수님 따르는 직업으로 바꾸겠다는 뜻이요, 복음사명을 가진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① 예수님은 안식처가 없기 때문에 고생을 각오해야 된다 ② 예수님은 재물이 없기 때문에 재물의 획득을 기대하면 안 된다 ③ 예수님은 인간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목적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따라서 이 사람의 사명이 거부된 이유는 그의 “예수님을 따르려는 목적이 현실성에 있음”을 미리 아시고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다”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과 현실성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신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자신과 현실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복음 일선에 나서는 사역자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하시니 그는 대답하기를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거절하시고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대답에서 “부친 장례식보다 천국복음 전파가 더 시급하다”하시고 허락을 한 것입니다.

2) 부친 장사는 죽은 자들(즉 믿지 않는 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복음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야 할 수 있고(롬 10:15), 또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회란 만남의 기회, 증언의 기회를 의미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보고 “부친 장례를 치르고 와라”하셨다면 그 사이에 다른 사역자가 등용될 수도 있고 예수님이 그 사람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하는 시간적 소모도 있으며 또 그가 즉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전파의 기회를 놓칠 우려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이 말씀은 복음전파의 시급성을 느끼지 못하고 부친장사나 가정에 관한 일로 사명이 갈려야 하는 사람은 일선 사역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3. 또 한 사람이 와서 “가족 작별을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부친 장사 지내는 것만큼 하루해가 걸릴 일이 아니고 잠시 다녀오면 되는 것이므로 쉽게 허락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1) 그러나 예수님은 역시 부정적 대답이었습니다.

2) 가족을 만나 잠시 작별하는 것이 순간적인 일이지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이에 보습이 딴 곳으로 가는 것은 쟁기를 잡아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3) 따라서 이 말씀은 파숫군의 사명처럼 영적 사역의 집착과 몰두가 필요하기 때문에 순간적인 한눈을 팔기 어렵다는 뜻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 말씀하신 교훈은 예수님이 가족이나 도덕을 무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요 사명자는 ① 자신을 현실에서 못 박는 일과 ② 복음 전파의 시급성과 ③ 몰두가 필요함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제5과 성도의 경건한 생활 (약 1:22~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경건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경건에 관한 교훈이 대부분입니다. 경건이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1. 22절에 보시면 “너희는 도를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 만일 도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마치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기만하고 단장하지 않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2. 복음적 신앙을 가진 자는 역시 “율법을 시행하는 자” 라고 2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복음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는 성도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요 8:32).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듣고 잊어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깨닫고 실천하게 하시기 위함이므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 성도들은 더욱더 말씀 실천을 잘하여 현실을 복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3. 26~27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자기 혀를 재갈 먹일 수 있는 자이니 이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자를 뜻하고,

2)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자이니 이는 솔직하고 진실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의 실수를 줄이고 마음가짐과 표현이 진실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요,

3)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아야 한다”고 하시므로 사랑이 실천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4)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이란 신령한 은혜에 반대 되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선호하여 신령한 은혜보다 현실적인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서 3가지 제목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② 복음적 신앙을 가진 자는 더욱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며,

③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은 말의 덕을 세움과 진실과 사랑과 세속에 물들지 않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는 것은 거울과 신앙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잊어버리고 단장하지 않는 자같다”하신 말씀에서 “거울”과 관계되는 말씀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 고전 13:12에서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하셨는데 옛날에는 거울이 맑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보는 천국계시가 그 세계에서 보는 것만큼 밝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본문에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본다”하셨고

3) 고전 10:6과 유7절에는 “소돔의 멸망이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 보는 것처럼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거울을 본다”는 뜻은 “자기를 본다”, 또는 “역사를 대략 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큰 교훈과 귀감이 됩니다. 또 거울은 자기의 몸을 단장해야 하는 신부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말씀의 거울을 살펴서 선민의 잘못한 역사를 교훈삼아 바른 생활을 힘써야 하며 또 자신을 살펴서 잘못된 부분을 항상 고쳐야 할 것입니다. 만일 거울을 통하여 자기의 흠을 발견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자요, 복음적 신앙의 성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한 생활을 힘쓰는 성도는 ① 말을 주의하여 실수를 하지 않도록 힘쓰는 자요, ②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양심과 표현을 진실하게 하는 자요, ③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 실천의 모범을 보이는 자요, ④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요, ⑤ 하나님의 말씀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고 또 지나간 역사를 참고하면서 잘못을 시정하고 항상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6과 주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자 (눅 6:35~3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원수에게도 사랑을 주고 물질을 주며(35절) 이해와 용서를 주고(37절; 비판, 정죄하지 말라) 또 모든 것을 줄때 후히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줄 때, 그 이상을 더 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받을 것을 알기만 한다면 주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1. 먼저 주기를 힘써야 할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만물을 주셨고 생명과 호흡도 주셨습니다(행 17:25).

2) 또 성도에게는 만물보다 귀한 독생자까지 주셔서(롬 8:32) 죄사함과 영생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3) 그리고 또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마 6:32)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히 4:16).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약 1:17) 특별히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마 23:37).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의 근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거져 주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마 10:8), 또 행 20:35에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확실하게 믿는다면 무엇이나 받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3. 주고자하는 성도는 우선 소극적 견지에서 타인의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줄 수는 있어도 바라지는 않는 자세를 굳게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접은 할지라도 받을 체는 하지 말고, 도와줄 수는 있어도 도움 받을 체는 하지 않으며 누구를 대접하려 할 때는 가급적 대접을 되돌려 받지 못할 대상에게 대접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눅 14:12~14).

4.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인지를 잘 알아서 유익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1) 우선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5절에서 원수도 사랑하고 선대함은 모든 이를 사랑함인 것입니다. 주는 것 중에 사랑을 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 실수한 자를 비판하지 않는 사랑, 또 범죄자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랑, 무조건 후히 주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기도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준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장 크게 주는 방법이 바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딤전 2:1~2에 보시면 모든 이와 임금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하셨고, 바울사도도 기도받기를 원하셨으며(엡 6:19) 또 항상 기도해 주시는 일을 힘쓰셨던 것입니다(살전 1:2).

3)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류의 모범자이시며 구세주이시니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언행심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보여야 하고, 또 지상의 교회도 역시 예수님을 나타내 줄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나 교회가 예수님을 바로 보여주지 않고 다른 예수를 보인다든지 예수님이 아닌 마귀를 또는 어떤 인간을 보인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4) 성도는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 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는 대상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인 경우에는 그 사람을 구원하는 방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5) 또 주어야 할 것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구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의 대상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어 고생하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의 편에 계시기 위하여 물질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굶어죽는 인류에 대하여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더 필요한 것을 후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주는 복도 더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7과 요셉의 감옥살이 (창 40: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셉의 감옥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요셉은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유혹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창 39:9에 보시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이가”하고 유혹을 주는 대상과 함께 있지도 않았고(10절), 나중에는 벗겨진 옷을 버린 채 도망을 하면서(13절) 유혹을 피하였지만 결국은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힌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이 사실에서 요셉이 유혹을 이겼다는 승리감이 대단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귀의 시험을 믿음과 용기로 이긴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어렵게 유혹을 이기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만족을 느끼면서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요셉이 감옥생활의 고난을 당하지만 죄없이 당하는 고난이므로 퍽 다행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벧전 2:19~20에 보시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있어서 들어간 것과 죄없이 들어간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죄없이 들어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희생적 교훈과 감화를 주는 교훈이 크기 때문입니다.

2. 요셉은 감옥에서도 봉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1) 요셉의 감옥생활이란 자기 인생의 가장 어려운 생활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생활 환경에서도 자신의 의무와 봉사적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여전히 자기 할 일에 몰두한 자세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눅 22:27).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섬기러 오셨다(마 20:28) 하셨고, 친히 봉사적인 종처럼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요셉도 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자랄 때도 요셉은 심부름을 잘하는 효자였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성실하게 봉사하였으며, 감옥에 들어가서도 그 환경이 가장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역시 봉사적인 자기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죄수 살피는 직임을 맡겼다가(창 39:22) 나중에는 또 범죄하고 들어온 두 장관의 수종을 들게 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던지 자기 할 일이 있다는 사실과 봉사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아셔서 꼭 그렇게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카터대통령은 빈민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사업에 가담하여 친히 목수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도는 어떤 지위에서 물러나 환경이 나빠졌다 할지

라도 자기의 할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요셉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두 장관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은 유심히 보고 그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요셉이 유심히 보고 묻지 않았으면 행운의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요셉의 사랑과 관심이 두 장관의 고민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앞날에 있을 일을 예언해주므로 유익을 전달한 것입니다. 서로 무관심하게 여기는 풍속이나 타인의 근심을 외면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관심을 쓰면 동물과 자연도 보답을 하지 않습니까?

4. 요셉은 꿈을 해석한 사람입니다. 이 꿈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계시는 곧 성경입니다. 성경은 감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안 좋은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접근하고 교제하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모든 성도가 할 수 있는 특권이요, 하나님을 교제하는 영적 축복을 누리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요셉이 유혹에 승리하고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자기의 봉사적 사명을 잃지 않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뜨거운 관심, 또 성경해석의 명수가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그의 모든 일이 다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하게 되어 나중에 큰 성공을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제8과 현실교회의 위험 (사 5: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현실교회의 위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사명자들이 참고해야 할 말씀이지만 평신도들도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갖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선민의 단체(교회를 비유함)를 포도원으로 비유하셨고 하나님이 좋은 포도를 맺게 하시려고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베푸셨지만 인간들의 죄악으로 들포도를 맺었다고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의 들포도란 하나님의 목적에 빗나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선민들이 바른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반대로 은혜를 받고도 신앙의 바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과 비교하여 현실교회도 하나님의 목적에 빗나갈 위험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현실교회가 성직자의 직업 대상이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고생을 각오하고 목사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직을 생활 대책의 수단으로 알고 모종의 직업을 잡듯이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나태한 생활과 사치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성직자의 직업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교회가 사람을 모으는 목적에서 교회의 운영비 조달을 위하여 전도를 하게되는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사도나 브리스길라 내외는 자신들이 선교비용을 벌어 쓰면서 선교한 사실은 있을지언정(빌 4:12, 살전 2:9) 교회유지를 문제시한 사실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물질로 운영되는 문제를 가급적 탈피한 상태에서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헌금한 것을 큰 신앙으로 착각하고 교회의 유지비용을 헌금한 것으로 특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인의 모임이 교회 운영에 목적이 있음이 아니고, 신앙생활에 목적이 있음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가라지의 온상이 될 위험을 방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 13:30에서 지상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있게 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씨만 뿌리셨는데(마 13:37) 사람들이 자는 틈에 마귀가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마 13:25). “사람이 잤다”는 것은 교회의 책임자들의 파숫군 사명의 나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앙적 지도를 나태하게 할 때에 가라지는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가 상당량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용납하시지만, 그것을 최대한 방지하여야 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라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들이 위험한 가라지 대상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 말씀의 권위에 자기를 복종 시키지 못한다면 진짜 신자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4. 교회가 유흥장이나 사교장이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단체 안에는 계층별로 친목단체가 있습니다. 이 친목 단체중에 특히 청소년 단체는 자주자주 예배당을 친교나 대화의 장으로 밤늦게까지 사용하는 예가 있어서 예배당을 사교의 장처럼 쓰는 인식을 주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명실공히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 하고 예배당도 꼭 그런 목적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나치거나 문란한 일이 있으면 역시 유흥장이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5. 교회가 바른 지도를 못할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이 쓴 약을 먹고 떨어질까 우려하여 바른 말, 바른 교훈을 삼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도하여 듣지 않는 교인은 진실한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경은 최고의 약입니다. 성경처방을 무시하거나 성경처방을 바로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들포도를 맺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현실교회가 많은 위험을 안고 있음을 아셔서 항상 바른 지도와 바른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9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눅 9: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12제자에게 능력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셔서 일하게 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격의 말씀이 마 10장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은 먼저 12제자를 불러 모으셨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신 다음,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시면서 전도자가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또 두벌옷의 탐심도 가지지 말며, 모든 대상들과 화목을 유지하면서 각 촌으로 두루 다니며 전파할 것을 분부하셨고, 제자들은 그렇게 시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12제자나 또는 일선에 선 복음 사역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라면 평신도는 이 말씀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아시고 이 말씀이 바로 내게 주신 말씀인 줄로 믿고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1)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지식을, 예수님의 성품을, 예수님의 사상과 생활을 그대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교제하면서 배웠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요 5:39). 성도가 성경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온유와 겸손을 닮고, 다음에는 봉사와 인내와 희생을 닮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대처하셨는지에 대하여서도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잘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닮지 않는 것은 그 스승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스승을 배신하지 않고 스승이 가신 길로 어렵던지, 평탄하던지, 스승과 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꼭 예수님을 배우고 닮고 따라서 예수님의 확실한 제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능력을 받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이 곧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권세와 전파할 내용인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6절). 지금의 전도자들도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귀신과 질병을 명령으로 처리하는 권세를 받는가? 할 때에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사도들에게 주신 권능의 목적이 병자를 위함도 있지만 예수님이 구세주되심을 증명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고(마 11:3~5, 히 2:4), ② 현재는 의술의 방법을 개발시켜 주시므로 상당한 방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병고침의 은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술로도 고치는 것이며 병마다 다 고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유의 권능을 필수적이라고 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병 고침의 은혜는 기도에 의하여 섭리적으로 응답하신즉, 믿고 의지하셔야 합니다(약 5:13~14). 그러나 현시대의 제자된 자들이 꼭 받아야 할 능력은 말씀의 은사, 기도의 은사, 권위(勸慰)의 은사를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우선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반드시 성경적 원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야 하므로 기도에 힘쓸 수 있어야 하며, 불쌍한 자, 슬픔을 당한 자, 낙심하는 자들에게 격려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권면의 은사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전도의 실천입니다. 제자되고 능력을 받았으면 전도를 실천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도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전도의 대상을 찾아가서 말로 증언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그런데 그 상대방이 얼마나 잘 수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도”는 증거하는 것일 뿐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로서 전도 대상이나 믿음 약한 자들에게 좋은 것을 보이지 않으면 낙망을 주게 되기 때문에 전도자의 생활모범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전파의 순서는 먼저 착한 행실을 보이고(마 5:16) 다음에 복음을 전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능력을 받고 전도하는 사역자가 되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10과 전도에 관한 지식 (롬 10:1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에 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세례요한이 전도의 선구자였으며(마 3:1~2, 11~12) 예수님도 전도하셨고(막 1:15), 또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마 10:1~8),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을 지상명령으로 분부하셨고(마 28:19, 행 1:8), 그 일이 끝날 때 재림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24:14). 본문 말씀에서도 “전도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요, 그들의 발걸음은 아름다운 것이며, 전파자가 없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으며, 보내심을 받아야 전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전도는 현실교회가 가장 주력하는 개인적, 교회적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전도란 무엇입니까? 전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복음”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세주되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1) 전도의 대상은 땅 끝의 모든 백성들입니다. 지상의 모든 인류가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사실을 소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행 1:8)하셨고, 또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선민이 어느 특정 지역이나, 시대나, 인종에 국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전도의 대상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찾기 위하여 보편적 인류를 상대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선민이 아니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거듭난 은혜와 함께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행 13:48). 하나님의 선민은 그 수가 확정되어 있으며 늘거나 줄지 않고 예수님이 확실하게 구원하여 끝까지 중보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요 17:9). 따라서 전도는 선민 또는 거듭난 자에게 복음을 제시하여 스스로 믿고 따라오게 하는 것일 뿐 전도사역이 상대방을 믿게 하거나 구원 받을 선민의 수를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 자만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은 택한 자에 한하여 거듭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엡 1:4, 2:1, 요 3:3, 롬 8:30).

3) 전도의 대상은 지각자에 한하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하신 말씀은 듣고 깨달을 자에게 전도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 살던지 지각이 있는 자는 전도를 통해서 구원적 은혜를 소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받을 수 없는 무지각 자도 있으니 이들은 어린 아이나, 또 지각 불능자들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내용을 증언할 때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요 결코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지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해 못할 부분이 더 많아져서 믿음의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도는 믿음을 촉구하는 것일 뿐 이해와 설득을 목적하지는 않습니다. 전도 이론상 변증학적으로 다소간 설명은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식적 이론으로 믿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듭난 생명에 의하여 믿음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박약한 사람들에게도 신뢰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하셨고, 또 라합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므로(수 6:22~23) 무지각자의 구원은 선민의 측근에 있으며 선민 생활에 동화된 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성도의 전도를 통하여 선민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전도를 잘하면 자기의 섬기는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동참한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사명을 게을리 하면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전도는 열심히 하여야 하되 전도가 믿게하는 수단이거나 예정된 구원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지남철(자석)을 흙에 대면 까만 쇳가루가 따라 붙는 것처럼 많이 활동하면 그만한 소득이 있는 것입니다.

 

제11과 복음 사역자에게 명하심 (딤후 4: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젊은 사역자요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엄히 명하신다”고 강조하셨고, 3절과 4절에서는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 즉 교인들이 몹시 완악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2~5절에서는 복음 사역자가 시행해야 될 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1. 바울사도의 엄한 명령에 대하여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 왜 이렇게 엄하게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사명이 너무 중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바울사도께서는 이 명령을 엄하게 하실 때 ① 하나님 앞에서와 ②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서와 ③ 또 예수님이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과 ④ 성도에게 주실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시고 명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명자의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15:58).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없고 영생과 상급이 없다면 연약한 인간이 수고하고 희생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과 영원한 천국은 사명자들의 수고와 희생에 충분한 보상을 하시는 것입니다.

2.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들이 어떻게 완악해 진다고 하셨습니까? 3절, 4절을 보시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설명드리면

1) 바른 교훈을 싫어합니다. 바른 교훈은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 아닌 다른 말, 세상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 등 성경 아닌 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증언자들이 성경보다 인간의 학문을 더 많이 증거 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2)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자기 듣기 좋은 설교만 하는 스승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골고루 받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4:4). 때로는 책망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듣는데 부담스러운 말을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긴 설교, 부담감을 주는 말씀, 특히 책망, 지적 등은 더욱 멀리하려는 추세입니다. 이런 것은 다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3)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세상 이야기, 현실에 관한 복, 부자 되고, 병 고치며, 출세하는 이야기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을 구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할 성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이런 상황에서 복음 사역자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허탄한 이야기가 아닌 성경만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 증언의 효력이 잘 있든지 없든지 증언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말씀이요

3) 범사에 오래 참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 가치관이 잘못된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이 깨닫는 때가 오기까지 참고 계속 가르치라는 것이요

4)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순한 말로 가르쳐서 잘 안 될 때에 조금 더 강도 있게 책망하면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5) 복음 사역자 자신도 자신의 연약을 살펴 근신하고, 하나님의 일로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맡은 직무들을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의 말씀으로 ① 성도는 순결하고 건전하며 신령한 성도가 되어야 하고 ② 복음 사역자는 바른 성도를 양육하기 위하여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증언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12과 바울사도의 목회 방법 (행 20:17~2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3차 전도사역을 마치시고, 헬라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노정에 밀레도 항구를 거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사도는 오순절 절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야 좋을 입장이어서(행 20:16) 여행의 일정을 단축하는 바람에 에베소에 들리지 못하고 에베소 남쪽 60Km쯤 위치한 밀레도 항구에 이르러 잠시 머무시는 중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그곳으로 오게 하여 부탁하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의 노정은 지도를 보시고 참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에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온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신약시대 교회의 장로들로서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서 섬기는 감독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장로와 신약시대의 장로의 뜻이 다른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구약시대의 장로와 신약시대의 장로의 차이는 교회헌법연구 65문 참고). 행 18:19에 보시면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 가신 일이 있었고, 19:1에 보시면 3차 전도 여행 때 또 에베소에 가신 일이 있는데, 행 20:31에 보시면 그곳에 3년간 머물러 목회하신 사실을 말씀하셨으므로 에베소 교회는 바울사도의 목회사역을 많이 힘입은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자신의 방문과 만남이 마지막일 것을 예측하여(행 20:22~24) 마지막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이 당부하시는 말씀 속에 바울사도의 목회사역 방법을 엿볼 수 있으니

1. 성실과 진실로 행하셨습니다. 성실로 행하셨음은 1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일하셨다”고 하시므로 목회 사역지를 떠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 목회에만 충실하셨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도 경우에 따라서 복음적 이중사역이나 사생활을 통한 이중사역을 하기가 쉽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진실하게 하셨다”는 뜻은 18절 끝에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라”하시므로 모든 성도가 바울의 생활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사생활에 대하여 의심할여지가 없을 정도로 진실하셨던 것입니다.

2. 모든 겸손과 눈물로 하셨으니 목회자가 모든 겸손을 차리셨다 함은 성직자란 권위주의나 특권의식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평신도와 꼭 같은 겸손의 모범자가 되시므로 교인으로 하여금 그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 복종하는 성도를 만드시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겸손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감정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눈물로 시작하여 믿음 약한 성도를 권면 할 때나 핍박을 참으며 견디는 일에 이르기까지 눈물 흘릴 일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3.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을 참으면서 주님을 섬겼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복음 사역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 핍박을 견디면서 여전히 주님의 일에 봉사를 한 것입니다.

4. “유익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유익한 것이란 바른 교훈과 책망일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의 가장 어려운 것이 모순을 지적하는 담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으니 이 말씀은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의 복음을 고루 전파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성령님의 지시가 있지만 주님이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는 생명을 버리는 것도 각오한다”고 하시며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여기의 “심령에 매임”이란 자신의 사명적 의지를 나타낸 말씀이고 환난이 있다는 성령님의 지시는 환난을 피하라는 의미가 아니며, 따라서 바울은 핍박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음을 나타내 주신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의 참신한 방법을 시도하고, 성도는 목회자의 사정을 잘 알아서 기도로 협력하며 복종하는 성도가 되셔야 한다는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13과 중보자의 고난 (히 5:7~10) 목록으로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이기 때문에 “중보자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중보자 되신 예수님이 속죄 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 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 7절의 “육체에 계실 때”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여 죄 많은 인간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큰 고난이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을 겸하시고,

2) 사람 사는 죄 많은 세계에 오셔서,

3) 종의 형체로 낮아지셨은즉 비하의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구원사업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아들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중보자가 되실 수 없고, 또 고난을 받으셔야만 속죄의 제사를 이루실 수 있으니, 이는 죄를 짊어지시는 형벌이 고난과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도 순종을 배우셔야 하는가? 에 대하여 예수님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보충하신 것처럼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는 뜻은 예수님이 인간의 입장으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성정으로 고난에 당면할 때 노력없이 저절로 순종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억제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을 받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순종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7절 말씀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기를 비우며 사셨기 때문에 자기의 현실적 욕구를 위하여 기도하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 것은 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기 위한 기도였고(마 26:3) ②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에 대한 중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요 1:29, 17:9).

3. 하나님을 경외하시므로(순종과 함께) 온전하게 되신 것은 예수님이 온전하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유혹을 물리쳐 온전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순종으로 고난도 감당하시고 희생하시므로 하나님의 인정과 응답 받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인정과 응답”이란 하나님이 예수님을 중보자로 인정하시고 중보자적인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자적인 고난은 ①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인간 세계에 오신 비하의 고난과 ② 유혹을 받으시면서 온전함을 지키신 생애의 고난과 ③ 십자가의 고난을 순종으로 감당하신 속죄의 고난을 들 수 있는 것입니다.

4. 이런 고난을 감당하시고 들으심을 얻으셨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하게 여기시는 중보자의 자격을 받으신 것입니다. 9절에 보시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즉 예수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에게 한하여)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의 주가 되셨으니 바로 멜기세덱(영적 대제사장의 모형자; 창 14:20)의 실체가 되셔서 영원한 중보자의 자격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고난 주간에는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비하되심과 거룩을 지키심과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음을 기억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4과 바울의 부활 증언 (고전 15:1~19) 목록으로


부활주일을 지난 주간이기 때문에 “바울사도의 부활 증언”이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의 뜻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 1~2절에서는 1) 예수님의 부활 사실은 복음이며 2) 전도자는 이 사실을 알도록 전파할 사명이 있고 3) 받은 자는 그대로 믿고 그 가운데 서야 하며(부활 신앙을 가질 것) 4) 이 사실을 헛되이 믿지 않을 때(진실한 사실로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2. 3~8절에서 바울사도는 이 복음을 자신도 받고 확인하였으며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 바울사도가 받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요,

2) 이것을 확인한 근거는 성경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3) 그리고 부활하신 것도 역시 성경대로 된 것을 확인하였는데(3~4절)

4) 이 확인은 자기를 포함한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내 주신 사실로도 증명해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게바(베드로)와 500여 형제에게도 보이셨고, 야고보에게와, 모든 사도들에게도, 또 맨 나중에 바울에게도(5~8절) 보이셨으니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자들이 그 당시에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사실을 강조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과 육체적 부활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서 주장하거나 불신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보시면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같이 믿었느니라” 하시므로 바울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대로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3. 12~19절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만 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혹 (모든 사람의) 부활이 없다는 자도 있으나(12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13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죽은 자의 부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2)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도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요(15절), 예수님도 다시 사시지 않았을 것이라(16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능력이 하나님 또는 자신의 능력임을 나타내신 말씀이고 또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일관성 있는 논리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3) 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여러 가지 모순이 야기된다고 하셨습니다.

① 전파한 복음이 헛되어 지고(14절),

② 그 복음을 아는 믿음이 헛되어지며(14절),

③ 부활과 복음을 증언한 자들이 거짓증인이 되고 (15절),

④ 믿음이 헛된즉 여전히 죄 청산이 안 되며(17절),

⑤ 이미 죽은 자들도 소망이 없게 되고(18절),

⑥ 영생도 없게 되니,

⑦ 복음 전파와 영생에 소망을 두고 따른 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19절).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고,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며 부활을 소망하는 자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 8절~10절에서는 별도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보여 주시므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과 동시에 믿음과 변화와 사명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바울사도의 겸손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자신을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셨고(8절), 2)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하셨으며(9절), 3) 자신이 과거에 교회 핍박한 것을 생각하면 사도라 칭함 받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하셨고, 4) 자신이 변화된 것(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10절), 5) 자신이 많이 수고한 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의 성직자적인 최고의 겸손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갖고 더욱 겸손한 생활을 잘 하셔야 되겠습니다.

 

제15과 사역자를 원망한 사람들 (민 16:41~5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를 원망하고 때린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민 16장 전체에는 백성들 중 일부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고 원망하며 핍박하고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사실이 두 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민 16:1~40에서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 4사람이 이스라엘의 유명한 족장 250명과 단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다가 결국은 주동자들의 가족들과 거기에 속한 자들이 땅이 갈라져 죽었고(31~32절), 남은 250명의 족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소멸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또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서는 고라당과 함께 반역한 무리들이 죽임을 당한 이튿날에 온 회중이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의 내용은 모세와 아론이 많은 백성들을 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반역한 죄로 죽임을 당한 것은 죽은 자들 자신의 죄로 인함이고 또 심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죽임 당한 250명 족장들의 가족들이나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죽지 않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그들을 상당한 말로 권면했었으나(4~11절) 듣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차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자들은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42절). 이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순식간에 멸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모세와 아론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엎드렸다 하였으니(45절) 이는 원망하는 백성들만 따로 있어 먼저와 같이 땅이 갈라지는 심판을 면케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아론이 원망하는 백성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땅이 갈라져 죽게 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만일 땅이 갈라지면 원망하는 자들과 원망 받는 사역자들이 같이 죽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 방법을 쓰시지 않고 염병을 내리신 것입니다. 염병은 죽을 자에게만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애굽인의 초태생만 죽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죽지 않게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출 12:27, 29). 염병이 일어난 사실을 알았을 때 모세는 급히 아론을 시켜 제단불로 향을 피워 그것으로 회중을 속죄하므로 염병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으니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아론의 분향 제사가 있었을 때 염병이 그쳤다(47, 48절)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때에 죽은 자가 14,700명으로 처음 반역 하였을 때보다 50배가량 더 많은 수가 죽게 된 것입니다.

3. 처음 반역한 자들은 당을 지었고 모세와 아론만 하나님의 종이냐는 식으로 시기하였으며 그들만 세워 지도자되라는 법이 있느냐하여 명예욕과 투기심을 가지고 반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실하게 그들을 권면했습니다. 첫째는 레위지파의 성막 봉사를 왜 작게 여기느냐(9절), 제사장직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이라(10, 11절)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들도 제사장처럼 분항하도록 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를 알게 하기 위하여 250인으로 하여금 분향을 해보게 한 것입니다(17~18절). 그러나 일부는 그 말도 듣지 않았고(12절), 고라와 250인은 모세를 대적하는 뜻으로 향로를 갖고 왔다가(19절) 결국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4. 이상의 말씀들에서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시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므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에 대하여는 절대적인 존경과 복종을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생각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것으로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역자는 끝까지 가르치고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나중에는 원망하는 백성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게 하기 위하여 엎드렸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최후에 염병의 방법으로 원망하는 자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며 모든 사역자를 사랑하고 감사하므로 충성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16과 회개와 관련된 지식들 (막 1:15, 행 8:22) 목록으로


성도가 애통하며 회개해야 할 것을 강조하지만 회개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진 성도가 얼마나 될까요?

1.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를 뉘우쳐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깨달음은 지식적 역할이고, 죄를 미워함은 감정적 역할이며 이를 멀리함은 의지적 역할입니다. 지, 정, 의의 작용으로 원만한 회개가 이루어지지만 회개의 최종목표는 죄를 떠나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죄에 대한 탄식을 잘하고 죄의식을 강하게 가져도 죄를 떠나지 않으면 참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매일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요 13:10).

2. 회개는 죄를 청산하는 것인데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죄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신 말씀이 있고, 이와 뜻을 같이 한 말씀으로 “생명 얻는 회개”(행 11:18),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 또 “죄사함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 1:4, 눅 24:47)란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다 불신앙이나 복음신앙 밖에서 복음으로 들어올 때 불신앙을 청산하는 회개를 뜻한 것이요(행 2:38),

2) 행 8:22에서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하신 말씀의 회개란 뜻과 또 거역함에서 돌이키게 하는 회개(딤후 2:25),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하실 때 사용하신 회개의 뜻은 복음적 신앙 안에서 잘못한 일들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 것이므로 이 말씀들에서 회개는 두 종류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또 요 13:10에 보시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나니라”하신 말씀이 있지요. 이 말씀의 목욕이란 뜻과 발씻음이란 뜻이 다 회개의 결과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불신앙에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목욕한 것처럼 씻어 주시는 것이니 이것은 의의 은총(심판을 면하는)을 의미하는 것이고(롬 8:29), 발을 씻음은 믿음 생활 안에서의 연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가 매일 회개할 때 발을 씻는 것 같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불신앙을 회개한 것은 믿음에 근거하여 나타난 것으로 의의 은총과 생명 얻는 구원을 받게 되고 성도의 연약 중에서의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므로 징계와 불화에서 벗어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성도가 자기의 죄를 다 회개할 수 있는가? 할 때 자신의 죄를 다 깨닫지 못하므로 구체적인 회개를 완전하게 못합니다. 그러나 성화를 완성하는 단계에서는 죄를 떠나므로 완전한 회개의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7:1).

4. 회개로서 얻어지는 복이 무엇인가? 에 대하여

1) 불신앙에서의 회개는 의의 은총과 구원을 얻게 되고,

2) 믿음 안에서의 연약을 회개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어드리며 자신의 연약과 더러움을 거룩하게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딤후 2:25).

5. 회개는 구원의 과정일 뿐 공로가 되지는 않음을 아셔야 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의지로 회개를 충분히 못한 자라도 구원하실 수 있으니(눅 23:43, 마 18:4) 결국 세상을 떠날 때는 죄를 멀리하게 되기 때문이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죄를 사함 받게 하시되 불신앙 때의 모든 죄까지 사하여 주시고 또 회개하지 못한 죄까지라도 의의 은총을 힘 입혀서 전체를 담당하여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회개란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절차로 지옥갈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로 노여움을 사는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을 회개하여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6. 어떤 이단자들은 한번 죄사함 받았으면 죄가 없어졌으니까 깨끗하므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칭의(심판을 면제 받음) 및 구원과 관계가 있고 회개는 불신앙에서 회개했을 때 구원 받을 믿음을 갖는 결과가 되며, 신앙 안에서의 연약과 실수는 성도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 죄는 지옥 갈 죄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죄이므로 회개를 힘써 발을 씻듯이 돌이켜 바른 생활에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과정일 뿐 공로는 아니며 영광과 자신의 성화와 축복에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제17과 기드온을 쓰시는 하나님 (삿 6:11~18) 목록으로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여러 차례 이방인의 침략에 방림하여 고생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솔왕 야빈의 통치를 20년 받다가 하나님이 드보라 사사를 일으켜 백성을 구원해 주시므로 40년간 태평하였는데, 또 미디안의 손에 붙여서 7년간 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삿 6:1). 이때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찾아오셔서 기드온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기드온과 300명 정병의 역할을 앞세워 미디안의 압제에서 나라를 구출하게 하신 것입니다(이 말씀 16절과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확신”, “미디안을 한사람 치듯 승리하게 하시는 확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되는 확신”에 대하여 29과에서 따로 말씀을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본토인들을 이기고 물리치는 것은 성도의 영적 전쟁의 승리를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드온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7년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양식을 갈취당하고 고생이 심하여 기드온은 밀타작을 숨기려고 포도나무 밑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 찾아오셨을까요? 징계의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삿 6:1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징계의 때가 끝나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때가 되매 예수님도 인간 세상에 오시게 하신 것입니다. 항상 곤경에 처했을 때 가까이 찾아오시는 주님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마 14:25).

2. 구원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지배에서 구원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인생들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기드온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확신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서 정병을 모집하여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기드온을 쓰신 하나님은

1) 아주 겸손한 기드온을 쓰셨습니다. 15절에서 기드온은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나의 집은 므낫세 중 극히 약하고 내 아비 집에서도 제일 작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기드온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겸손한 자를 쓰신 것입니다.

2) 큰 용사라는 호칭을 주셨습니다(12절). 기드온이 본래 용사였는가? 에 대하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큰 용사여 하시고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하셨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지금도 용사같은 신앙을 갖지 않으면 마귀와 세상을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나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군병들로 비유하신 것입니다(딤후 2:4, 5, 엡 6:11).

3) 저희들도 기드온처럼 신앙과 사명의 용사가 되어 죄와 불의를 대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용사되는 데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3차례나 하나님의 이적을 시험하였습니다(6:1, 37, 39).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시험하는 것은 참으로 좋지 않은 것이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기드온의 믿음을 키워 주시기 위하여 승인하셨고(18절), 기드온의 소원대로 응답하여 확신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용사된 자의 무기이어야 하며,

②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줄 알 때에는 복종하기가 쉬울 것입니다(17절). 그래서 기드온은 300명의 정병과 횃불과 질그릇을 깨는 순종으로 승리를 한 것입니다(7:19~23). 자신을 깨고 진리를 증언하여 빛을 발할 때에만 신앙의 승리는 이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18과 불효자의 받을 벌 (신 21:18~23)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효도를 장려하는 의미에서 “불효자의 받을 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부모를 학대하는 불효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서 그가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거나 부모의 징책을 듣지 않으면 성읍 장로들에게 고발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발을 받은 불효자가 “완악, 패역, 불순종, 방탕, 술에 잠긴 자라하면 성읍 장로들의 재판에 따라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므로 완악을 제하고 모든 사람들로 두려워 하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임 당한 시체를 나무에 달되 밤새도록 매달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니까 당일에 장사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시체를 밤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생각하셔야 할 것은

1) 예수님도 나무에 달리셨기 때문에 죄 없이 저주를 받으신 바가 되셨고(갈 3:13), 이 율법에 따라서 당일에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마 27:57~59).

2) 지금도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시체를 오랫동안 두면서 장사 지내는 것을 잘 하는 것으로, 금방 내가는 것은 서운하게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저주 받아 죽은 사람은 그 시체도 대접을 못 받아야 된다는 뜻으로 당일에 장사를 지내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시간의 교훈의 목적은 불효자를 엄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있습니다. 신 27:16에도 보시면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백성들은 아멘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불효자는 인간 대우를 못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상은 이스라엘 선민 국가의 제도였습니다. 그 반면에 효자는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요셉이 출세한 이면에는 효도의 공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효도한 아들 요셉에게 더 많은 축복을 했습니다(창 49:22). 그리고 율법에서도 “부모를 공경한 자는 땅에서도 잘 되고 장수한다”고 하셨습니다(출 20:12, 엡 6:3).

3. 그러면 저희들이 어떤 방법으로 효도해야 할까요?

1)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큰 보람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① 부모와 노인이 계셔야 효도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노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② 나무의 아름다움도 뿌리와 줄기와 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가정에도 노인과 젊은이와 어린이가 있어야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젊은이가 노인을 섬기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효도와 정서교육에도 크게 유익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④ 히 7:7에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시는 노인을 모신 것은 더욱 복된 것입니다.

⑤ 옛말에 나무가 가만히 서 있고 싶어도 바람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도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아쉽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老而親不待)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노인 모신 것을 행복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2) 부모님을 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섬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① 궁금증을 풀어드리도록 자주 보고를 드리고, ② 부모님의 의도에 따라 복종을 잘 하시고, ③ 부모님에게 필요한 것들을 자주 여쭈어 공급하시되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를 드리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효자인가? 불효자인가? 를 스스로 반성하시고 확인 하시는 시간되시기를 바라며 새로운 효도를 결심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9과 자녀와 신앙교육 (신 6:5~9) 목록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이 시간에는 “자녀와 신앙교육”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생각만큼 시행을 못하는 실정인 것이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

1. 성경에서 자식은 은혜로 주셨고(창 33:5), 상급으로 주셨으며, 또 기업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시 127:3). 자식을 은혜로 주셨음은 복되게 하시려는 선물이란 뜻이요, 상급이란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게 하심이요, 기업이란 하나님이 주신 복을 후대에 계승시키고 또 부모가 늙었을 때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식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교육을 잘못 받으면 복으로 주신 선물이 아주 불행을 주는 대상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되게 하신 목적을 잘 성취하려면 부모의 양육과 교육책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의 뜻을 살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녀교육의 사명을 율법으로 주셨습니다.

1) 먼저 부모 된 사람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인으로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녀 신앙교육을 교회가 시켰다 할지라도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할 때는 좋은 효과를 가져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부모가 말씀(즉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성경과 신앙의 선생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선생은 자기가 가르칠 재료를 익숙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도 성경지식과 신앙생활에 관한 지식을 익숙하게 배워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통적 직업이나 기술을 그 자녀에게 전수 시켜주는 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7절 말씀에서 “앉았을 때나 행할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에도 말씀을 강론하라”하신 것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자녀를 대학 보내기 위하여 가르칠 때 부지런히 공부시키는 것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4) 자녀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항상 눈에 보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저기 써서 붙여놓고 들어가며 나가며 보게 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학생은 화장실에도 영어 단어를 써 붙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은 부모가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그 부모가 신앙의 지식을 풍부하게 갖고 부지런히 가르치며 또 스스로 배우도록 만들라는 것인데 지금 이렇게 시행하는 가정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안 믿거나 바쁘거나 또는 성경을 모르거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교육을 교회로 미루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어차피 교육의 사명이 있으니까 주교사를 양성하고 주일학교 제도를 만들어서 가르치지만, 만일 가정이 교회에 의존하고 혹 교회의 교육이 제도상 무책임한 교육으로 부실하게 될 때는 결국 신앙교육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녀에 대한 현실 기독교 교육은 교회가 담당하고 있지만 성경은 부모와 가정에 그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주교사 자격만큼의 성경 지식이 없다면 그 신앙도 구멍 뚫린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시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 10:10). 그런 면에서 신앙교육은 교역자, 부모, 자녀로 이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제20과 안디옥 교회 (행 13:1~3) 목록으로


지금 저희들은 짧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내용을 제목별로 구분한다면 ① 안디옥이란 지역, ② 안디옥 교회에 대하여, ③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뜻, ④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에 대하여, ⑤ 주를 섬겨 금식함, ⑥ 성령님의 지시하는 말씀을 받음, ⑦ 바나바와 사울을 임직하여 선교사로 보냄에 관한 말씀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지점에 있는 현쟁 시리아의 도성입니다.그리고 주전 323년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 부하 셀리쿠스가 그곳을 왕도로 정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면서 자기 아버지 안디오쿠스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행 13:14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도 있으니까 혼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안디옥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도를 제외한 다른 성도들이 모든 땅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 있으므로(행 8:1) 그때에 그곳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3. 그 교회는 대단히 속히 성장하여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이 있었으니 이는 말씀 사역이 풍성함을 나타낸 사실입니다. 선지자란 그 당시까지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계시를 받아 증언하는 직임이었고, 또 교사는 선지자를 통하여 받아진 말씀이나 성경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직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흥왕했을 때 교회의 부흥도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행 19:20).

4. 선지자와 교사로 소개된 사람은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인데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위 5사람 중에 바나바와 사울은 사도에 속하므로(행 14:14) 선지자라고 보아도 되며 다른 이들은 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5사람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바나바는 레위족 구부로 사람

이요, 권위자라 하셨고(행 4:36, 37), “니게르”라는 시므온은(“니게르”란 말은 라틴어로 검다는 뜻이므로) 타 지역에서 온 흑인이며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아프리카 서쪽 먼 곳에서 온 사람이고,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왕족과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젖동생이란 뜻은 헤롯왕이 어릴 때 같이 자란 아이라는 뜻이 보편적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 길리기아 다소 출생입니다(행 21:39). 그렇다면 이 다섯 사람은 인간적으로 공통점이 먼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으로 하나 된 단체라고 볼 수 있고, 여기에서 저희들은 교회의 일치와 조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처의 사람, 각 계층의 사람, 각 직분의 사람들이라도 오직 주 안에서 일치하고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사역에 몰두하게 된 것입니다.

5. 그들이 마음을 합하여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주를 섬긴다”는 뜻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힘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합심하여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선교봉사를 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응답이 없었겠습니까?

6. 그래서 성령님은 그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임직하여 파송하라는 계시의 말씀을 주셨고,

7. 다른 성도들은 그 지시에 따라서 금식기도로 준비하고 안수로 임직하여 1차 선교를 출발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① 안디옥 교회는 핍박 중에도 성장한 교회란 점이요, ② 그 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 등 말씀 사역자들이 많은 점이며, ③ 여러 지역, 여러 계층의 성도들이 서로 화합을 잘한 교회요, ④ 봉사와 기도를 힘쓴 교회며, ⑤ 성령님의 지시 즉 성경대로 복종한 교회요, ⑥ 최초의 외국 선교를 시도한 뜻있는 교회임을 알 때 우리도 그런 교회로 이룩되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1과 징계에 대한 지식 (히 12:8~13, 마 16:19) 목록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3대 의무가 말씀사역과 성례와 함께 권징의 의무가 있고 징계는 회개를 촉구하여 성화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는 사랑의 채찍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계나 또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내는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불복하고 도망하는 사례까지 있으니 얼마나 패괴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의 징계와 교회를 통한 징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 부모가 채찍을 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에게 노여움으로 징계하시기도 하시고 또 교회의 기관(당회)을 통해서도 벌을 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마 16:19에서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하신 것은 지상의 교회가 범죄자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신령한 복을 막을 수도, 열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렇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2. 권징의 목적은 무조건 책망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잘못을 깨우쳐 지도하고 바르게 하여 범죄의 확대를 막고, 거룩을 이루게 함이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노여움을 푸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큰 경각심을 줄 수도 있습니다.

3. 징계는 하나님이 직접도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도 하십니다. 교회가 징계시행을 게을리 할 때 하나님의 직접적 징계가 더 두려운 것을 아셔야 하며, 또 교회의 징계를 사람의 징계로 아시면 안 되고 징계자는 자신들도 죄인인 만큼 더욱 조심하여 공의롭고 사랑스럽게 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징계를 받는 성도도 그것이 자기를 위함인 줄로 믿고 감사로 받아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일찍 노여움을 푸시고 은혜를 속히 베푸시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7:10에 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저희로 회개와 벌을 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4. 타락한 교회에서의 권징의 실태는 권징자가 공의와 사랑으로 하지 않고 미움과 배격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권징을 받는 사람도 어떻게 하든지 변명하여 빠지려 하거나 서로 물고 먹으려는 식으로 대응하여 피차 송사하고 때로는 도망하여 회피하고 서로 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권징은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람이 권징을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직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교회가 하는 징계는 어떻게 합니까?

1) 우선 심각한 범죄로 당사자와 이웃에까지 큰 부덕이 나타났을 때 2) 피해자 또는 다른 사람의 고발이 있어야 하고, 3) 그 고발은 2인 이상의 증인이 입증해야 합니다. 4) 이것을 받은 치리기관은 두 차례 이상 권면하여 돌이키기를 힘써야 하고 이미 저질러진 일은 재판을 해야 합니다. 5) 조사하고 증거를 확보한 후 또 피고에게 변호의 기회를 준 다음 유죄, 무죄를 확정합니다. 6) 유죄일 경우 시벌에는 직분정지, 직분박탈, 은혜박탈, 또는 제명출교로 천국의 길을 막는 일까지 할 수 있으며 이 시벌은 어디까지나 영적은혜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신령한 은혜의 통제 당함을 크게 애석하게 여겨 속히 회개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6. 징계를 복으로 알고 겸손하게 받으며 회개하는 자세로 복종하려는 성도가 얼마나 있을까요? 만일 이것을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대행하는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채 도망하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진실한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징계는 결코 자기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 하셨은즉 아무쪼록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징계를 믿고 순순히 복종하므로 신앙의 진실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제22과 성령충만의 결과 (행 4:8~2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충만의 결과”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로 시작해서 21절까지 그 충만의 결과가 말씀되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돌아가실 무렵에는 연약한 상태에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재기하였고, 또 오순절 당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다음부터(행 2:4)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에 의지하여 그 변화의 상태 몇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본문 이전에 나타난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면 1)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고(행 2:4), 2) 술취한 사람들처럼 성령님의 능력에 취한 상태였으며(행 2:13), 3) 베드로가 성령충만에 관한 것과 예수님에 관한 것을 증언하였고(행 2:16, 36), 4)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자가 3천이나 더하였으며(행 2:38, 41), 5) 사랑과 모임과 찬송이 충만한 중에 성도가 증가하였고, 6)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으며, 7) 그 고침을 받은 자가 사도들을 따르며 증거를 하였고(행 3:7~8, 4:14), 8) 핍박중의 전도로 5천명이나 믿게 되었으며(행 4:1~4) 이런 전도의 역사와 병 고침의 능력때문에 관원, 장로들, 서기관들, 제사장들과 그 문중들이 모여서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권능의 출처를 대라”하면서 핍박을 감행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행 4:5~7).

2. 이런 상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8, 19절)이 어떻게 하였으며,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기탄없이 전도하였습니다(13절). “기탄없이 했다”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주저함도 없이 담대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우선 입이 열려져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들에게는 성경의 상당한 지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①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라”하였고,

② 그 예수님이 바로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라”하였고(시 118:22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구세주 되게 하셨다는 뜻),

③ 또 “천하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이름을 다른 이에게 주신 일이 없다” 하였으며,

④ 더 나아가서는 핍박자들의 위협과 만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여전히 증언을 한 것입니다(18, 20절). 즉 말씀에 입각한 전도, 담력 있는 전도, 핍박중의 전도를 기탄없이 감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의 결과는 곧 전도였습니다.

2) 핍박자들의 세력이 꺾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도자들의 담력과 지혜로운 태도에 따라서 나타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여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① 14절에서 “그들은 힐난할 말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병 고침의 기적을 의심해 보려 하였지만 병 나은 사람이 그곳에서 직접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 16절에서 “자기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말씀과 표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어떻게 뒤집어서 거짓선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자들이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그들도 사실 증언에 동참한 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③ 그들은 결국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위협만 하고 놓아주었습니다(21절). 처음에는 만류하고 단속해 보려고 하였지만(17절) 증언하는 사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한즉 결국은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놓아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담대한 전도하역에 따라 핍박자들을 패배하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습니다(21절). 저희들도 성령충만의 은혜를 힘입어 이런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사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제23과 고넬료 가족의 성령충만 (행 10:44~4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넬료 가족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경위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충만의 당위성을 말씀드리면(당위성이란, 마땅히 그래야 할 이유)

1) 성령충만은 오순절 당시인 초대교회에 있었던 일이요(행 1:~2:),

2) 바울사도께서도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셨고(엡 5:18),

3) 중세 기독교 역사에서 개혁자들이 성령충만에 붙잡혀 개혁운동과 진리운동을 펼쳤으며,

4)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성령충만의 은혜가 나타나서 한국 기독교 초기에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고,

5) 기독교 신앙이 혼탁한 이 시대에도 바른 신앙과 교회정화 운동을 펼치면서 전도하려면 반드시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고넬료 가족이 어떤 경위와 방법으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까?

1) 그 가족들은 경건한 생활을 힘썼습니다. 행 10:1~4에 보시면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구제와 기도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약 1:27에서 참된 경건은 “사랑과 구제와 세속을 피함에 있다” 고 하셨는데 고넬료 집안의 경건 생활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2)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9시에 시간을 정하고 기도한 것이나(3절) 베드로를 청한 후에 일가와 친구들까지 모이게 하고 기다린 것은(10:21~24) 은혜를 사모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07:9).

3) 고넬료는 말씀 지시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천사의 지시에 따라 베드로를 청한 후에 가족과 이웃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힘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5~6절). 모세, 기드온, 나만, 베드로도 다 순종으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4) 고넬료는 겸손하였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의 높은 지위로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을 하였으니(행 10:25) 이것은 복음사역자 앞에서 특별히 겸손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5).

5) 고넬료와 모든 식구들은 베드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한 교리지식이었으니 34절~35절에서 “성부하나님의 교리”를, 36절~37절에서 “성자예수님의 교리”를, 38절은 “성령님에 관한 교리”를 증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증언하였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진리를 증언하는 자라(39절) 하면서 믿는 자의 받을 죄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복을 증거하였을 때(44절)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45절).

3. 그 당시에 성령을 받은 상태가 어떠하였습니까?

1)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 즉 이방인들까지 다 함께 받았고,

2) 44절에서는 “성령님이 내려오셨다”하셨으며, 45절에서는 “부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내려오심”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고, “부어주심”은 성령의 은혜를 물로 상징하여(요 7:39) 풍성하게 주심을 뜻하신 것입니다.

3) 또 그들은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려서 방언을 하였으니 이 방언의 의미는 외국어를 선교적 차원에서 듣도록 하신 것이며(행 2:4) 따라서 복음전파에 사로 잡혔음을 의미하고,

4) 하나님을 높였으니 이는 인간을 낮춘 증거이며,

5) 합리적 신앙생활을 위하여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충만은 경건함과 사모함과 겸손함과 말씀들음을 통하여 받게 된 사실을 깨달으셔서 저희들도 그대로 모범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24과 믿음이 적은자여 (마 17:14~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이 적은자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서를 읽으시면서 예수님이 여러 차례 “믿음이 적은자여”하시고, 책망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하셨는지 그 형편을 따라 살펴보려는 것이 이 시간 증언의 목적입니다. 본문 말씀의 자세한 뜻은 본인이 집필한 강해서를 읽으십시오. 본문의 요지는 간질병으로 심하게 고생하는 아들을 제자들이 고쳐주지 못한 것 때문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17절) 하셨고, 또 “믿음이 적은 연고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기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20절)고 하셨습니다.

1. 그러면 이 본문 말씀의 “믿음이 적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래 귀신을 쫓는 능력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마 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쫓지 못하였으니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고 즉 기도를 통해서 고치지 않고 명령으로만 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막 9:29에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라도 기도를 통해서 고쳐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귀신 쫓는 방법은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방법뿐입니다.

2) 그러면 또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겨자씨는 생명이 있는 작은 씨를 뜻합니다. 이 작은 씨가 싹이 나려면 물을 주어야 하고 큰 나무가 되려면 잘 가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모신 생명 있는 신앙도 기도로 싹을 내고 실천으로 가꿀 때 거기에서 무한정의 생산성을 내다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겨자씨가 작은 씨라도 자라서 큰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도 깃들이는데 산을 뭉개어 바다를 메우는 일을 왜 못하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신앙 중심으로 할 때는 아무리 큰 일도 성취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신 교훈입니다.

2. 또 다른 책망으로 “믿음이 적다”하신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 8:26(눅 8:25, 막 4:40)에 보시면 풍랑을 무서워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풍랑과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으나, 창조자요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무서워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시고 의지한 성도는 환난이나, 핍박, 고난이나, 죽음에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염려나 두려움이 있다면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임을 아셔서 더욱 기도하시고 연합의 상태를 성취하여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마 14:31에서 베드로가 물위로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빠져갔을 때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으니 이때의 책망은 의심한것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않게 하셨으며, 만나와 반석의 물을 먹이셨으므로 눈동자같이 지키셨다(신 32:10)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의심하면 믿음이 적은 것이지요.

3) 먹을 것으로 인한 염려 때문에 “믿음이 적다”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마 16:8에 보시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떡을 예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의논하느냐? 5병2어, 7병2어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적의 양식에 의존하여 먹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기적의 양식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염려한 것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기도 없이 행하는 일, ② 무서워하는 일, ③ 의심하는 일, ④ 염려하는 일이 바로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구멍 뚫린 믿음을 가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들의 믿음에도 구멍 뚫린 부분이 없는지를 꼭 점검하셔야 하겠습니다.

 

제25과 신앙의 파숫군 (겔 33: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파숫군이란 제목아래 복음적 파숫군의 사명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신앙의 파숫군이 어떠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신앙의 파숫군이 누구일까요? 물론 목사나 교역자들이 신앙의 파숫군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사명을 가진 모든 성도들도 신앙의 파숫군 사명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교역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라면 일반 성도들은 읽을 필요가 없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1. 신앙의 파숫군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하신 말씀이 바로 파숫군 사명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파숫군 사역자들은 말씀의 검, 즉 성경지식을 가져야 함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는 필수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마 4:4, 엡 6:17).

2. 파숫군은 고하고, 경고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2절 말씀에서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하셨고, 3절 말씀에서도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명, 가르칠 사명, 그리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 경고하고 깨우치는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경고하는 사명은 자기백성 즉 성도들에게 이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일반적 파숫군은 나팔로 경고합니다. 옛날에 통신 시설이 발전되지 못했을 때 나팔은 귀중한 신호전달의 수단이었습니다. 나팔소리에 따라 기상나팔, 식사나팔, 집합나팔, 출전나팔, 취침나팔 등이 있는 것처럼 파숫군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하고, 또 적군의 침략이 있을 때(이 경우는 이단침투나 범죄에 유혹될 때를 의미함) 더욱 분명하게 깨우치고 권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 칼을 임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쟁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는 뜻이며, 또 하나님이 전쟁을 주실 때는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음이고,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경우에 파숫군은 더욱 경고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만일 전쟁이 임했을 때 파숫군이 경고를 하였는데도 백성들이 경고를 듣고 경비를 하지 않으므로 그 성읍이 멸망을 당했다면 그들이 죽임당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을 뿐 파숫군에게는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4, 5절). 즉 파숫군은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경고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알지도 못한 채 경비를 못하여 멸망되었다면 죽은 자들이(그는, 6절) 자기 죄악 중에서 용서 받을 수도 있으려니와(제한바 됨) 경고하지 않은 죄책은 파숫군이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파숫군은 경고의 책임이 있고 백성들은 회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들을 나태히 할 때 서로 죽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벧후 3:9).

5. 오늘의 파숫군들은 무엇을 외쳐야 할까요? 지금 시대의 멸망의 징조가 무엇들일까요? 로마가 망한 원인은 향락(쑈)과 사치증가와 빈부격차와 성의 문란과 예술의 기형화와 국민이 나라를 멀리한 때문이라는 글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상당 분량이 세속화 되었고 개인의 신앙은 안일주의, 기복주의, 현실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대부분이며 사랑은 구호만 외치고 실제적으로는 짐지려하지 않으며 물량적 발전만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도 사회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파숫군은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 18:8)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현실교회와 성도의 신앙이 세속화되고 있는 위험을 경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6과 말세의 신앙진단 (딤후 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세의 신앙진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눅 18:8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고, 지금 읽으신 말씀에서는 말세에 불신앙적인 일들 때문에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신앙적인 일들을 19가지로 열거하셨는데 참으로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부모를 거역함, 감사하지 않음, 거룩하려 하지 않음,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려하지 않고(보복으로 결말 지울셈), 참소하며, 절제하지 않고, 사납게 행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충성된 종(하수인)을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고, 자고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이런 일들은 예민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으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발달하면 지식으로 범죄하고 과학이 발달하면 과학으로 범죄하며 컴퓨터로 범죄를 예방하려고 하면 컴퓨터로 범죄를 조작하기 때문에 역시 지능이 발달해도 죄는 더해만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들에게 잘못된 요소는 없는지요. “쭉정이, 회칠한 무덤, 살았으나 죽은 자”란 말씀이 다 잘못된 신앙을 비유한 말씀들입니다. 잘못된 요소들을 몇 가지 발췌해보면

1. 지나친 안일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만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저절로 귀에 들어와야 하고, 지루하지 않아야 하며, 부담을 안 가지려 하고, 대접을 받으면 더 좋게 생각하는 식의 신앙생활이니 언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성을 하겠습니까?

2. 친교주의입니다. 이것은 친한 사람과 교제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떨어지고, 서로 모여서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데 취미를 붙여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청년 남녀가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그 모임이 잘 되겠는가를 시험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3. 사업주의입니다. 예수 믿고, 진리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업을 잘 애용해 주기를 바라거나 그런 목적으로 다니다가 그런 사업적 관계가 끊어지면 그 이후로는 교회에 발걸음을 끊는 경우를 자주 보는 것입니다.

4. 기분주의입니다. 신앙생활을 기분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기분따라 사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이요, 말씀대로 믿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다고 열심내고 나쁘다고 안 믿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이는 찬송이나 기도도 기분 따라 하는 줄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뜨겁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기분에 맞는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반드시 조합하여 건전하고 덕되게 하셔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기복주의입니다. 현실복, 물질복, 건강복, 병고침, 자녀형통, 사업형통, 소원성취 등을 목표로 걸고 그 성취 목적에 따라 믿는 식의 태도입니다. 목사의 축복기도가 부족하면 크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역시 문제 있는 신앙입니다.

6. 명예주의입니다.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라고 또 어떤 명예직에 오르기를 바라며 칭찬과 상 받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신경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7. 따라서 저희들은 이상 6가지 잘못된 경향을 멀리하시고, 오직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에만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성경에 이끌리며 경건과 사명에 이끌릴지언정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믿음 중심의 좋은 신앙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27과 성화와 영화 (빌 3:17~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화와 영화”(마지막 변화)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17~19절은 성화에 관한 말씀이고, 20~21절은 영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화란 구원 받는 과정 중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성취하는 목표로 최대의 순결, 또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음을 뜻하는 것이고, 영화란 이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과정인 중생, 소명,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영화 중 마지막에 받는 것 두 가지를 본문에 근거하여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성화에 대하여

1) 바울사도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바울사도를 본받아야 할 이유는 그분이 예수님을 본받았고(고전 11:1), 또 사도의 유전을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살후 3:6).

2) 우리로 본을 삼는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절)하셨으니 전자는 자신의 성화를 위한 말씀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을 성화시키기 위한 말씀으로 본을 받은 대로 본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3) 성화 그 자체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보고 닮지만 우리는 사도들의 모본과 성경을 보고 닮는 것이며, 또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셨습니다(딤전 4:5). 성도가 거듭났어도 부패성이 잔재하고 있기 때문에(롬 7:23) 항상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신의 부패성을 이기면서 살아야 합니다(롬 6:14, 요일 5:4, 엡 4:6). 그러는 중에 점차 신앙과 능력이 자라고(벧후 3:18, 고후 3:18), 나중에는 깨끗하고 거룩하여지다가 육체의 장막을 벗으면 당연히 거룩이 완성되지만(욥 19:26) 그 이전이라도 성령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고후 7:1).

4) 바울사도께서는 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①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고,

②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뜻은 신앙적으로 십자가의 속죄의미를 불신하거나 도덕적으로 십자가에 담긴 겸손과 복종과 고난과 희생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성화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③ 그들의 종말은 멸망일수 밖에 없고,

④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하나님처럼 섬기려하니 이것이 바로 현실적 이기주의이며,

⑤ 또 저희들은 부끄러운 일을 영광으로 알고,

⑥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 하시므로 성화에 역행되는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화되기를 힘써야 할 성도는 십자가 정신에 역행되는 일을 극히 삼가셔야 하며 말씀과 기도와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항상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영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먼저 성도는 영화를 사모해야 합니다. 20절 말씀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씀이 영화되어 천국에 있을 것을 사모한 말씀입니다.

2) 또 영화를 사모하는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됩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씀(20절)은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영화(부활과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살전 4:16, 17).

3) 또 영화되는 복은 만물을 복종시키시는 능력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고 하셨습니다(롬 11:36, 고전 15:28, 히 2:8).

4) 성도의 육체는 고통과 공간의 제제와 죽고 썩어짐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에 흙에 속할 만큼 낮은 것이지만 주님이 영화되게 하시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광의 몸의 형체처럼 변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성도는 내세를 사모하는 만큼 성화와 영화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이 어떤 과정으로 구원하시는가를 아셔야 하며 또 성화와 영화의 의미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① 성화되기 위하여 십자가 원수로 행하는 일을 극히 삼가고 사도들의 생활을 본받으며 말씀과 기도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② 또 영화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도 사모하고 예수님의 영화로운 부활체처럼 우리도 변화될 것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제28과 여리고성 정복의 의미 (수 6: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여리고성 정복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의 첫 성읍인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 성은 굳게 닫혀 있어서 정복하기 어려웠으나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복종하므로 그 성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져서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의미가 무엇인가? 할 때

1. 이 여리고성을 정복함은 약 500년에 자기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뜻을 실현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창 16:12~21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땅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2. 이 땅의 정복은 겉으로 볼 때는 현실생활의 정착인 것이 사실이지만 영적으로는 내세의 복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의 노예생활을 불신앙의 생활로, 광야의 생활을 교회생활, 또는 신앙생활로, 가나안 입국을 영원한 천국으로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홍해의 물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구원의 의미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3:21, 히 8:5, 고전 10:1~6).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가나안족 섬멸을 인간내심의 죄악을 없애는 일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 백성을 죽이거나 쫓아내게 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시고 거룩한 백성을 그 땅에 살게 하시기 위함이나 또 한편으로는 성도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정욕(옛사람)을 죽이게 하시는 상징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롬 7:9, 갈 5:24). 따라서 가나안 정복은 영적성화(죄에 대한 승리)와 천국실현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음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하는 믿음이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은 엄위하시지만 사람의 생각으로는 합리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창이나 칼이나 말이나 병거 등 전략적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밤에 등불을 켜고 잡아야할 고기를 낮에 잡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눅 5:4).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구원의 복을 인간의 지혜나 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2) 그래서 그 백성들은 군인들을 앞세우고 법궤 멘 제사장들을 그 다음에 세우되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예비하게 하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매일 한 바퀴씩 6일을 돌고, 7일째 되는 날은 7바퀴를 돈 다음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일제히 함성을 지르게 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함성과 함께 성벽이 기적으로 무너져서 견고한 성을 파하고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따라서 이 사실은 구원의 복과 영적 전쟁을 치르는 방법을 예표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1) 우선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을 예표로 보여주셨고,

2) 인간의 합리적 타산 없이 무조건 복종하여 은혜 받을 것을 교훈하셨으며,

3) 군인, 나팔수, 제사장, 언약궤 멘 제사장, 백성들 순서로 진행하는 질서를 보여주셨고,

4) 합심 단결하여 7일동안 꾸준히 노력하고 인내하는 노력을 보여주셨으며,

5) 결국은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으로 성취되게 하시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는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순종과 인내와 노력을 보시기 위하여 인간의 지혜와 상이한 명령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여리고성 정복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성취와 함께 구원과 자기성화를 위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29과 3가지 확신을 가짐 (삿 6: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3가지 확신을 가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기드온은 3가지 확신을 갖고 행하므로 전쟁에서 대적을 이기고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승리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함이 필요하고 다음에는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하셨으니 이는 대적과의 싸움에 대하여 승리를 확신케 하시는 말씀이며, 또 그 다음에는 17절에서 “나와 말씀하시는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하였으니 이 뜻은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가를 확인하므로서 믿겠다는 뜻입니다.

1. 저희들은 성경이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노력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제물을 갖고 오도록 기다려 주셨고, 또 그 제물을 불로 응답하셨습니다(삿 6:18, 21). 지금 우리들은 계시를 주시는 시대에 살지 않고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완성적으로 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받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히 1:1). 그런고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영감으로 기록한 성경을 무조건 확신하셔야 합니다.

1) 성경이 진리 되는 증거는 성경자체에 있으니 이 뜻은 성경이 진리 되는 것을 증명할만한 더 참된 표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2) 성령에 충만한 선지자와 사도들이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의심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엡 2:20).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깨끗하게 만들어준 음식을 깨끗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역사적인 보존(참이 아닌 것은 오래 보존되지 않음),

4) 감화를 주는 능력(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다 선해짐)을 보아도 충분히 믿을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확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와 “함께 하신다”하셨고(마 28:20),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23).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과감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믿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셨으니까 함께 계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2) 기도응답의 체험을 통해서 믿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제물을 불로 응답하신 것과 양털에 이슬이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을 응답받는 체험으로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는 광야생활중 기적체험을 하므로 믿었고,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역시 기도응답으로 믿었습니다(창 24:12~27). 저희들도 기도응답이 가깝게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자신의 일을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3. 승리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나는 마귀를 이길 것이다”, “나는 세상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전쟁하는 사람이 질바에는 전쟁할 필요가 없고, 차라리 협상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눅 14:31~32).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네가 미디안 사람을 한 사람 치듯 하리라” 하신 것처럼 승리자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을 이길 능력을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하셨고, 바울사도는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라”하셨으며(엡 6:10~13), 베드로사도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벧전 5:8, 9). 승리의 무기는 말씀이요 승리의 기술은 기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의 확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확신, 나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고 있으므로 꼭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 마귀와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30과 신앙생활의 방법 (골 2:6~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주로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은 자는 ① 그 안에서 행하고, ② 그 안에 뿌리를 박아 세움을 입어야 하며, ③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④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신앙생활의 방법 첫째는 예수님을 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 13:13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주”란 뜻은 “왕”이란 뜻, “주인”이란 뜻이요, 성도는 그의 백성, 또는 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신하가 왕을 섬기고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절대적 복종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받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뜻과 명령에 복종함을 뜻하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뜻은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표준계시를 성경으로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수 1:7), 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극히 성경적이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고루 살피고 성경 아닌 것을 내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말씀에(그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뿌리를 박으라”는 뜻은 성경에만 기초하되 깊은 지식으로 확신하라는 뜻이요,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뿌리 든든한 나무가 곧게 선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정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아직도 신앙 환경이 잡히지 않았거나 개인적 신앙생활이 습관, 규모화 되지 못한 분들이 계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속히 말씀지식에 굳게 서고, 신앙생활의 정착과 습관을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과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교회생활에 취미를 붙이는 일도 그런 생활에 속하는 것이요, 특히 새벽기도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4.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하셨습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실천하여 믿음을 굳게 다지는 것이 성도가 매일 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또는 교훈을) 등한시 하는 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주례자의 말을 통해서 혼인한 부부의 85%가 주례사의 내용이나 설교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요즈음 나온 통계를 보면 예배당에 와서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즉시 잊어버리는 사람이 86%라고 합니다. 이만큼 설교청취와 기억에 주의하지 않는 실정이니 “말세에 믿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교문이나 강해문은 내용을 간직하는 것이므로 큰 은혜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읽을 체를 하지 않으므로 말씀을 외면하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그런 성도가 교회에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거나 불평을 한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회개하고, 배움에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부족하거나 말씀이 자기의 심령에 연결되지 않는 성도는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감사를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불평이나 원망이 있는 사람은 감사할 입장이 못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할 수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하며 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족한 줄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을 원망의 생활로 광야의 생활을 은혜의 생활로 가나안 땅의 생활을 감사의 생활로 비유한 이도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가장 감사를 많이 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 5가지 신앙생활의 방법을 꼭 유의하셔서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1과 마귀가 못하는 것 (막 5: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귀가 못하는 것”이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제목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미 출판된 책에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란 제목도 있으니까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과 못하시는 것, 마귀가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을 알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말도 잘하고 연구도 잘 하며 발명도 잘 합니다. 죄는 더 잘 짓습니다. 그러나 뒤에 될 일을 모르며, 생명과 모든 것을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씨를 뿌리고 가꿀 수도 있지만 자라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전도는 할 수 있으나 역시 믿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을 거듭나게 하셨을 때 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곧 전도인데 이는 마치 시냇물에 발을 치고 등불을 켠 다음 불빛을 보고 내려오는 게를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의 의미를 살피면 예수님이 흉악한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살피려고 하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마귀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1) 마귀는 무덤에 거했으니 무덤은 더러운 곳, 죄악 세계를 뜻합니다. 마치 파리가 더러운 곳에만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마귀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욥 1:6에 보시면 사단도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하셨습니다.

3) 고랑을 채우고 사람이 제어하기 어려울 만큼 비상한 힘이 있었으며,

4) 또 소리를 지르며 다녔으니 소리 지르는 것은 조용함만 못한 것입니다. 성도는 조용하게 살고 조용하게 봉사해야 합니다.

5)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자해행위를 하였으니 자해는 곧 죄악입니다.

6) 예수님께 달려와 절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성전에 나와 엎드리는 행위와 같은 것이요,

7) 부르짖고 간구도 하였으니(12절) 이것은 일종의 기도의 모습이며,

8)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참된 지식도 갖고 있었고,

9) 많은 군대 마귀로서 많은 수와 조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렇게 따지고 볼 때 마귀는 못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마귀에게 성경지식이 있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막 5:7, 행 19:15, 민 23:7~10을 보십시오.

2) 마귀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약 2:19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믿음은 부분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마귀도 기도, 찬송을 하는가? 할 때 기도한 사실도 있으나(5:6) 하나님께 찬송한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외식적 찬송과 세속의 노래는 잘 할 수 있습니다.

4) 마귀도 잘 가르치는가? 유혹도 잘하고 가르침도 잘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4:1).

5) 마귀에게 사랑이 있는가? 물론 있습니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가 바로 그것이고(마 7:15),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고 하였습니다. 이단자들의 사랑표현은 더욱 놀랍습니다.

6) 마귀에게 기적과 능력이 있는가?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자요(엡 2:2), 사람 앞에 불을 명하여 떨어지게도 한다 하였고(계 13:13), 출애굽 당시 10가지 재앙도 모방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3. 그러면 무엇을 못합니까?

1) 창조를 못합니다(시 36:9, 요 14:6).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2) 생명과 사망을 주관 못합니다(신 30:15, 욥 2:6).

3) 고난을 주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못합니다(욥 1:12, 삼하 16:10).

4) 마귀는 진실을 지키지 못합니다. 거짓의 아비요, 거짓을 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요 8:44).

5) 마귀는 정의를 옹호하거나 따르지 못하니, 의의 원수라 하셨고(행 13:10),

6) 마귀는 복음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마귀가 만일 복음을 수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마 13:19, 고후 4:4, 살후 2:9, 딤전 4:1).

저희들은 마귀가 못하는 것을 우리의 무기로 삼아 마귀를 힘껏 대적해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교회를 섬기는 법 (롬 12:3~9)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눌 수 있고, 3대지의 교훈을 종합하여 “교회를 섬기는 법”이라고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대지는 3절 말씀으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섬기는 것”이고, 2대지는 4~5절 말씀으로 “지체의식을 갖고 섬기는 것”이며, 3대지는 각자가 받은 은사활용을 잘하라는 말씀입니다.

1. 믿음 분량을 따라 섬김(3절).

1)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과 사명의 분량을 갖고 있습니다. ① 바울사도가 각 사람을 권면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한다 하셨고 ② 믿음 분량대로 생각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요 누구나 자기분수를 지키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에도 분량이 있는가? 하시겠지만 믿음에는 분량도 있고, 종류도 있습니다. 믿음의 종류란 구원 받는 믿음(행 14:9)과 충성하는 믿음(롬 1:17)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핵심적 진리(예수님 아는 지식)를 아는 것으로 구원 받음에 필요하고 후자는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충성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림과 상급을 받음에 필요한 것인데 여기에 각자가 받은 분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믿음 분량대로 교회를 섬기면 되고, 특히 다른 사람이 그의 믿음 분량대로 섬기는 일에 대하여 간섭하여서는 안 되며, 성도 각인의 믿음 분량이 다른 만큼 봉사의 방식과 분량도 다르다는 것을 아셔서 누구나 양심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2. 몸의 지체의식을 갖고 섬김(4~5절).

이 지체역할에 대한 말씀은 고전 12:12~27에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나 그 지체들이 다 몸에 연결되어 있고 각 지체의 역할이 다르며, 모든 지체는 다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않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만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른팔이 힘이 없으면 왼팔이 오른팔의 역할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코 해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몸과 지체의식이란 몸을 예수님과 교회로 비유하고 지체를 각성도와 성도가 받은 은사들로 비유하여 은사를 받은 모든 성도가 예수님과 그 교회를 위하여 노력하시되 1) 예수님과 연합을 잘 하고, 교회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짐이 필요하며, 2) 자기의 직분과 사명의 위치를 잘 지키면서 3) 상부상조를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의 직분이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한 몸 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주님께 연합된 지체처럼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은사활용을 잘해야 함(6~9절).

성도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은사는 은혜로 주셨습니다. 은사란 신앙적 소질을 뜻하고 은혜는 거져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은사에는 종류가 있으며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방법, 자기소질대로 봉사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자기방법과 자기소질이 없을 때 다른 이의 것을 모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사의 종류 중에 예언, 봉사, 가르침, 권위는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 하셨고, 예언은 계시적 증언을 뜻하며, 가르침은 성경교훈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자기분수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자신도 실천을 못하면서 다른 이를 권면하면 오히려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성실하게 구제하고 부지런히 다스리며 즐거움으로 긍휼을 베풀고 진실과 선을 견지하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언), 봉사, 교육, 구제, 다스림, 긍휼, 사랑 등을 받은 은사의 분량에 따라 시행할 때 지혜롭게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교회를 섬길 때 ① 믿음 분량을 따라 ② 지체의식을 가지고 ③ 은사활용을 지혜롭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제33과 생명보다 귀한 것 (행 20:17~2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3차 전도를 마치고 헬라의 빌립보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시는 중에 소아시아 해변, 에베소 남쪽, 밀레도(섬 아닌 항구)에 도착하여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한 다음 그들에게 증언한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선교 과정 중 에베소에서 전도하시고 3년간 목회하신 일이 있었습니다(행 20:31). 바울사도가 그곳에서 목회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에 대하여는 본문에 일부를 말씀하셨지만 35절까지 다 읽어 보시면 참으로 감명 깊은 사실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울사도의 목회 방법 일부를 살펴보시면 1) 시종 성도를 떠나지 않으셨고(18절), 2) 모든 겸손과, 3) 눈물로 하셨으며, 4) 유대인의 간계로 당한 시험을 참으셨고(19절), 5) 주님을 섬겼으며(예배와 순종과 사랑), 6)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공중이나 개인에게 거리낌이 없이 전하셨고(20절), 7) 유대인(선민), 헬라인(이방인을 대표한 말씀)에게 차별 없이 구원의 도리(회개와 믿음)를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8) 그리고 마지막에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았다”는 뜻은 영의 매임을 받았다는 뜻으로 사명적인 마음에 이끌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과정과 목표성취를 위하여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오셔야만 하였습니다(16절).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이 예측되고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핍박 속에서도 보호와 전도의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섭리를 믿고 떠나려 할 때에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시므로 전도의 사명실천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

1) 생명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입니다. 본문 24절에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시므로 전도의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생명을 버리심으로 구원사업을 이루셨음같이 순교자의 복도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영적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적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이요(마 26:39), ② 바울사도께서는 롬 14:7~8 말씀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죽는 자도 없다”하시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죽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셨고 ③ 약 4:15에서도 “주의 뜻이면 살기도하고 이것 저것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3) 의를 성취하는 것이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 “의”는 도덕적 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는 속죄의 은혜로 의를 주시는 것이지만,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고, 불의에 반대되는 도덕적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예가 있으니 그것이 곧 세례요한의 죽음입니다. 세례요한은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죽은 이유는 왕의 비행을 지적한 것 때문이었으니(마 14:3~11) 이렇게 도덕적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도 귀한 일이며 열사가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4) 생명보다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요 15:13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하셨고, 시 63:3에서도 “인자는 생명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 즉 복음사명, 하나님의 뜻, 정의,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목숨 버릴 각오가 생기도록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욥의 신앙 (욥 23:10~1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욥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별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 지식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지식에 근거한 그의 신앙적 처신입니다.

1.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 지식

1) 성도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길을 인도하실 때 일정한 뜻을 갖고 행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방법으로 이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 하였고, 12절에서 “그는 뜻이 일정하여 누구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하셨으니 성도는 여기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의지하여야 신앙적 처신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성도를 고난으로 단련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16절).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신 32:11~12, 롬 5:3, 벧전 1:7등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연단시키실 때 고난으로 연단을 시키십니다(렘 12:5). 그래서 욥도 자신이 고난 받는 것을 연단으로 생각하였고, 자신이 연단을 받으면 정금같이 더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을 희망하였으며,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10절)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일정한 뜻을 갖고 성도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고난으로 연단주시는 하나님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이런 하나님을 깨달은 욥이 어떤 생활을 나타냈는가? 할 때

1) 우선 그는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의 길을 의탁하였습니다. 고난은 연단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주시는 것일 뿐 결코 어두움으로 자신을 끊거나 흑암으로 얼굴을 가리어 소망 없이 하시지는 않을 것을 굳게 믿고 소망 중에 의지한 것입니다(16, 17절). 결국 욥은 그 믿음대로 성취되었습니다.

2) 욥은 고난으로 연단을 받는 동안 바른 생활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시험을 당할 때 믿음 처신을 더 잘 하여야 합니다. 11절에서 욥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그의 입술의 명령도 어기지 않았다”(12절)고 하였습니다.

3) 욥은 하나님의 말씀 사모하기를 일정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끌리는 신앙입니다. 성도가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물질이나 육신의 양식이나 명예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 성경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앞에서 떨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뜻을 정하시고, 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였으니(15절)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알면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항상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경험에 근거한 원칙을 생활에 적용하였습니다. 14절에 보시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니 그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하신 말씀은 욥이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자주 경험하였다는 뜻이며,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 섭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시라 “그의 일정한 뜻을 변하시지 않는다” 하므로 오직 성도의 복종만 촉구한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욥은 고난 중에서도 희망과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16절,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고 두렵게 하시지만 그것이 사랑에 근거한 연단 목적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주 망하게 하시지 않을 것을 믿고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욥의 신앙 지식과 고난 중에 처신한 신앙적 생활을 잘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성도에게 주신 권세 (요 16:32~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성도에게 주신 권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에서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모습이요, 또 하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1) 예수님의 모습으로는 ① 미래를 아시는 예수님 ② 혼자 계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 ③ 평안을 성도에게 주시는 예수님 ④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2) 제자들의 모습으로는 ① 제곳으로 흩어지려는 제자들 ② 예수님을 혼자 계시게 하는 제자들 ③ 환난을 당하게 되는 제자들 ④ 세상을 이겨야 하는 제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고, 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따라서 평안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의 성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하셨으니(요 14:27)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난이나 아픔에서 떠나므로 누리는 것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믿음으로 누리는 것으로서 환난을 기꺼이 견디며 고난 중에서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평안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롬 5:3, 4). 그리고 또 제자들의 모습에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은 결코 예수님에게서 멀어져서는 안 되며, 신앙과 정의의 입장을 떠나서도 안 되고, 환난을 각오하되(행 14:22) 믿음으로 환난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시간의 제목에 따라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권세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롬 8:14).

① 하나님이 이 권세를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② 또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기 때문에 기도로 은혜를 간청하게 된 것이요(요 16:24), 성도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주여 주여”하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할 때는 자신을 종의 신분으로 생각하여 호칭하는 것이고, “아버지여”할 때는 자신을 아들신분으로 생각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종은 그 주인에게 복종과 섬김을 성실하게 하는 사명이 있을 뿐이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사랑과 은혜와 책임과 친교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성도가 봉사 아닌 간청을 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여 무엇을 하리이가?”(행 22:10),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5:18, 19) 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또 아들 된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유산(영원한 복)을 계승 받게 되는 것입니다(요 6:57, 40, 눅 15:12).

2) 세상을 이기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뜻은 마귀의 유혹을 이긴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고(마 4:1~11, 눅 4:1~13), 본문에서도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세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요 16:13) 좌우에 날선 검 같은 말씀과(히 4:12) 기도의 무기로 주신 것입니다(막 9:29). 계 2:7에서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11절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심을, 17절에서는 감추었던 만나를, 26절에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각각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의 권세를 힘입어 세상과 마귀의 유혹을 이기되 먼저 자신의 정욕을 이기고(갈 5:24), 다음에 죄를 이기며(히 12:4), 또 고난을 견디는 자가 되어야(마 10:22, 고전 13:7)할 것입니다.

3) 성도에게는 봉사의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로 봉사와 영광 돌리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전도하는 사명(마 28:19, 20),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는 사명(벧전 4:10), 죽도록 충성하는 사명(계 2:10),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명(살전 5: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에 동참하는 특권(계 3:26)을 성도에게 주신만큼 성도는 이 특권을 감사하면서 작은 일에서 부터 모든 특권을 누리시고, 또 성실하게 봉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6과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막 9:14~2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우선 크게 나타나는 제목이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이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 마 17:14~20에도 같은 사건이 기록되었는데 그곳에서는 간질이 겸한 증상을 말씀하셨고, “기도 외에는 이런류가 나갈 수 없다” 는 말씀이 생략되었는데 본문에서는 더 자세히 기록하셨습니다.

1. 본문의 개요를 말씀드리면

1)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다른 제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큰 무리가 모여서 귀신병 들린 아이를 고쳐 주지 못한 일로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큰 무리들은 고치는 광경을 구경하려 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고쳐주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귀신 쫓는 능력을 받고도(막 6:7) 시행을 못하였기 때문에 변론의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2) 그 귀신병자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만나자 아들의 귀신병 증상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사실을 말하고 예수님이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22절)고 했다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하고 책망하시니 그 아버지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23~24절).

3) 예수님이 이어서 귀신을 명하여 쫓아내시니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죽은 것같이 되다가 다시 회복되어 완전하게 되었고,

4)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이유를 종용히 물은즉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류가 나갈 수 없다”하시므로 오직 기도의 방법으로만 가능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못 고친 이유는 기도 없이 명령으로만 하려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에서 무엇을 살필 수 있는가? 할 때

1) 예수님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접촉, 교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만 보아도 제자들, 큰 무리, 서기관들, 귀신 들린 자, 그의 아버지가 있었고, 변화산에서는 앞서간 모세와 엘리야도 만나셨으며, 그 외에도 이방인, 불륜한 여자, 공회원, 세리, 소자, 각색병자에 이르기까지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차별 없이 모든 이를 교제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거절하신 예가 없고, 꼭 영접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대로 그렇게 하셔야 하겠지요. 또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니까 무슨 일이나 해결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할 수 있어야 하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은즉 그대로 믿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한 다음에 하나님이 능력과 섭리를 나타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41:17). 지금 우리는 어려운 사람이나 오려는 사람을 “내게로 데려오라”하지 않고, 또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지 않으므로 많은 소자들을 외면한 사실을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믿음 없는 세대를 탄식하신 것입니다(19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만큼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능력을 받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데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귀신 쫓는 능력을 받고도 귀신을 못 쫓은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려고 했어야 할 것인데 기도 없이 자신들의 힘과 명령만 과시하려 하다가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은사, 사랑은사, 물질은사, 지혜의 은사 등을 받았는데 이것을 바르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같은 책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받은 은사를 활용 하지 않으면 더 큰 은사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마 25:29).

결론적으로 모든 이를 교제하는 친교, 누구나 데려오라 할 수 있는 아량, 받은 은사를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제37과 진리가 무엇이냐 (요 18:33~3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진리가 무엇이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다가 예수님이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 하시니까 빌라도가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리를 묻는 빌라도에게 대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안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진리에 속한 자라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은 “거듭난 자라야 진리를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36년 사이에 로마황제가 임명한 유대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앞에 가셔서 재판을 받으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였으나(요 18:24, 31) 사형권이 없기 때문에 총독의 승인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으나(요 19:4) 유대인들의 반기를 두려워하여(요 19:12) 결국 사형하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요 19:16). 이런 재판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하셨고(37절),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36절)하셨으며 또 진리에 속한 자에게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란 사실과(딤전 6:15) 예수님의 나라가 천국이란 사실을 깊이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진리가 무엇입니까?

1) 국어사전에는 참된 이치, 타당한 지식, 사리에 맞는 도리와 성질이라 하였고, 헬라말로 “알레레이아( )”는 참, 진실성, 믿음성, 실재성, 정의성, 사실과 행위의 진실성이라고 하였습니다.

2) 성경에서 “진리”라는 “알레레이아”를 ① 참되다는 뜻과(롬 3:7, 9:1, 15:8, 고후 7:14, 12:5, 엡 4:25, 5:9 등) ② 진리로(요 8:38, 엡 4:21, 딤후 2:15) 번역 하였습니다.

3) 성경이 진리를 설명하실 때 ① 예수님이 유일한 진리라 하셨고(요 8:32), ②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이 진리라 하셨으며(요 17:17), ③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 하셨고(요 16:13), ④ 구원의 도리를 의미하였습니다(요 18:37). 따라서 일반적인 진리의 해석은 진실과 바른 원리를 뜻할 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성경, 구원의 도리를 의미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진리”는 어떤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가? 할 때

1) 유일성을 갖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어야 합니다. 진리가 여럿일 수 없습니다. 요 14:6에서 “내가 곧 진리요”하신 말씀은 원문상으로 “내가 곧 그 진리요”란 뜻으로 유일성을 나타내셨습니다.

2) 진리는 생명과 인격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격을 가짐으로 만물 중에 귀하다면 진리가 인격 없는 생명이거나 생명없는 원리만으로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생명과(요 14:6) 인격(요 1:14)이 있어야 합니다.

3) 진리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모순이 있거나 순결하지 못한 것은 진리일 수 없을 것이요,

4) 무한한 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인간의 숭배의 대상이므로 그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5) 진리는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불행한 문제를 진리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요,

6) 진리는 영원히 존재하여야 합니다. 진리가 피조물처럼 있다가 없어진다면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4. 이상과 같은 취지에서 우리는 진리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1) 예수님이 자신을 진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2)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진리 되시는 모든 요소가 다 구비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 거룩한 인격, 무죄, 순결, 무한한 지혜와 능력,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의 주가 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진리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주셨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제38과 십일조에 대한 지식 (말 3:7~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십일조에 대한 바른 지식”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십일조 헌금을 잘 시행하는 성도가 계신데 그것이 좋은 신앙이고, 오래 믿으면서도 잘 시행 못하시는 분들은 역시 연약에 얽매인 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바른 지식을 갖고 충분히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십일조 헌금은 소득의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가름하는 표준은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주신 육신과 지혜와 시간과 재물로 벌어드린 것을 의미하며, 어떤 사업을 할 때에 운영비를 투자한 것이나 빚을 얻어 투자한 것이면 그 비용을 소득에서 공제한 것이 순수입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육신적 노력, 시간소모, 지혜의 값, 기본재물이 근거가 된 것은 소득에서 공제하면 안 됩니다.

2. 이 십일조의 역사는 아브라함 때에 나타났습니다. 창 4:20, 히 7:2~4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십일조를 당시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음이 기록되었고, 창 28:22, 35:1~14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십일조를 서원하고 시행한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출애굽 때에 와서 율법으로 규정 하였습니다(신 14:22~27, 레 27:30~33). 그 당시에는 소득이 단순하여 농산물과 짐승들로 드리게 되었고 또 농비나 가축 사육료도 별도로 공제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에서 우양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10번째로 드리되 바꾸지 못하며 반드시 성전에 갖다 드려야 했고, 성전이 멀어서 어려울 때는 팔아서 돈을 갖고 가서 그 돈 값대로 사서 드리되 소산물을 그렇게 하려면 1/5을 가산하여 드리라고 하였습니다(레 27:28~31). 십일조를 내기 위하여서도 성전 가까이 삶이 유익하였을 것입니다.

3. 이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됐는가에 대하여 민 18:21~32에 보시면 레위지파의 생활비로 쓰게 하였고, 또 레위지파는 받은 십일조에서 또 십일조를 떼어 거제를 삼고, 대제사장에게 드려 제사장의 보수를 주게 하였으니 제사장을 포함하는 레위지파는 생활적 기업을 받지 않고 성전의 일만 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또 3년에 한번씩 더하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 26:12~15에 보시면 3년마다 십일조를 한번 더하여 그것으로 레위인과 객과 과부, 고아를 돕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5.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계명을 잘 실천 하였는가? 할 때에 성경에는 잘 실천하였다는 말씀이 없고 잘 실천 못하여 하나님이 벌 하셨은즉 잘하라고 계몽 한 사실이 있습니다(느 10:35, 13:5, 12).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도 잘 시행될 것을 언급하였으니(렘 33:13, 겔 20:37) 이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잘 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약 말기인 말라기 선지자는 또 책망을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십일조를 안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함이요, 그 계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라 하였고, 잘 시행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요, 더 많은 소득을 힘입을 것인즉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 400년간의 암흑기가 지난 다음 예수님 시대에 이른 것입니다.

6.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시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외항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고, 그것을 자기들의 의로 여겼습니다(마 23:23, 눅 11:42). 그러나 십일조 헌금등 인간의 선행정도로 의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평가하시기를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데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헌금의 율법적 최저수준임을 아셔야 합니다.

7. 결론적으로 십일조는 의문의 율법에 속하여 폐지되었습니다(롬 10:4). 그러나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사명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것이므로 율법적 봉사를 능가할 만큼 의무적으로 봉헌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5:20). 사도들의 헌금 정신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먼저 자신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고후 8:5, 행 4:32~35).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믿음으로 계명을 순종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란 신앙으로 필요에 따라 십일조 이상을 드리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9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마 6:28~3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시고 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하나님이 기르심같이 성도들도 보살펴 주시니 염려하지 말고 근면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사모하라”하신 교훈 중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1.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의복이 귀하고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의복을 염려할 때가 아닙니다. 사치와 유행의 풍조에서 벗어난다면 더욱 잘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하심은 백합화가 작은 꽃이라도 자연미와 향기가 있으나 솔로몬의 사치한 의복은 그런 것이 없음에 대하여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하루살이 같은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하시고 그런 것을 염려하는 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런데 이 시간에 주목하려고 하는 말씀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라”는 말씀대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물을 생각하려면 그 사물을 알아야 하니까요.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은 곧 “백합화를 보고 알라”는 말씀도 포함된 것입니다.

1) 여러분들이 “백합화”하면 향기 많은 우리나라의 흰 꽃을 연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유대땅의 백합화는 작은 풀로서 튜울립 꽃과 비슷한 빨간 꽃과 흰 꽃으로 된 풀꽃입니다. 따라서 이 백합화는 아주 작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워질 수도 있는 미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작은 풀도 아름다운 꽃이 피고,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풀이 작고 그 생애가 짧아도 풀 한포기로서의 꽃과 향기로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생을 풀로 비유하신 것처럼(벧전 1:24) 저희 자신들을 이 풀로 비유한다면 우리도 각자에게 주신 사명으로서의 꽃과 향기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이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백합화가 자람에 대한 원인은 간단합니다. 특히 이 백합화는 화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손 한번 댄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합화는 살아있고, 꽃피고 향기를 날렸으니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하나님이 키우시거든 하물며 성도를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집에 있는 백합화를 보라하신 것이 아니고, 들에 있는 것을 보라 하셨으니 들에 있는 백합화는 아무리 아름다운 모양을 가졌어도 사람의 발걸음이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감상이나 칭찬을 받을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만 사명을 다하고 사람의 칭찬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연약한 대상을 살펴주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마 26:2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 1:29, 39), 눈을 들어 밭을 보라(요 4:35)고도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잘 살피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바울사도의 목회적 사명 (행 20:17~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사도의 목회적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3차 전도여행을 끝내시기 위하여 마게도냐 지역에서 소아시아 지역의 항구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중에 소아시아 에게해에 인접한 항구 “밀레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북쪽 150리쯤 떨어진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게 한 다음 그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주신 내용입니다. 그때에 바울사도께서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야 할 일들이 있어서 에베소 항구를 들리시지 못한 채 밀레도로 오시게 되었고(행 20:16), 그곳에서 머무신 동안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은 마지막 작별로 마지막 부탁을 하신 것이며, 바울사도 자신이 3년간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떻게 행한 것을 기억하여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행20:31). 이 말씀에서 바울사도의 목회적 사명이 나타난 것을 살필 때 사명자들이 받아야 할 교훈도 많지만 일반 성도들에게도 큰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목회적 사명

1. “항상 성도들 가운데서 행하신 것”입니다. 18절에 보시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하시므로 바울사도의 목회는 시종 양떼를 떠나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모든 생활을 밝히 알 수 있도록 행하신 것입니다. 복음사역자가 항상 성도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고 목회에만 충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1) 바울사도는 목회하실 때 사도라는 직분의 권위를 드러내시지 않고 모든 겸손을 차리셨으며

2) 또 눈물로 하였으니 이는 환난 당하는 성도를 보실 때마다 긍휼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며 또 간절한 기도와 권면을 눈물로 하신 것이었고,

3) 유대인(핍박자들)의 간계를 당할 때마다 참으시면서

4) 봉사에 열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3. 유익한 것들을 빠짐없이 가르치시는 일에 성실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0절에 보시면 “유익한 것을 무엇이나 공중 앞에서와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가르치셨다”하셨고, 유대인이나 이방인(헬라인)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21절). ①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불신앙에서 돌아옴을 뜻하고 ②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구원을 위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사도는 목양적 교훈에 충실하셨던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발걸음에 대하여 소감을 말씀하셨으니

1) 오순절 전에 도착하셔야 할 사유가 있었으며(16절),

2) 심령에 매임을 받아 가시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의 매임이란 스스로 결심하는 사명의 결단을 뜻할 것입니다.

3)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만날른지 알지 못하신다 하셨으니(22절)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나타내 주시지 않았으나, 두로와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하여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은 예고해 주셨습니다(23절, 21:4, 21).

4)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을 아시고도 핍박을 감수하며 끝까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21:17). 그 결과로 바울사도는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까지 호송되고 로마에 가서 또 복음을 전하시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목회적 사명이란 제목 아래 배울 수 있는 교훈은 ① 그의 겸손과 ② 눈물과 ③ 성실함과 ④ 가르치심과 ⑤ 봉사와 ⑥ 전도와 ⑦ 핍박을 사명의 발판으로 이용하면서 ⑧ 생명을 걸고 끝까지 분투하신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41과 말세를 극복하자 (마 24:4~13) 목록으로


1. 마 24장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신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에도 말세의 징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① 거짓 선지자들로 미혹하는 것이고(4, 5, 11절), ②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는 것이며(6, 10절), ③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 것이고(7절), ④ 불법이 성한 것이고(12절), ⑤ 사랑이 식는 것이며(12절), ⑥ 이 세상을 사랑하고(약 5:3, 딤후 3:1~5, 요일 2:15), ⑦ 믿음이 희귀해진다(눅 18:8)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이런 일에 당면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요즈음 기독교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 큰 교회가 많다. 한국 교회가 6.25동란 이후에 급성장했다. 교인수도 많고 신학교도 많으니까 여하튼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눅 18:8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시므로 사실상 참된 신앙이 많지 않을 것을 예언하셨으니까 저희들도 현실 기독교를 볼 때에 그 말씀에 맞추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한국에 기독교가 살아있다면 고아원, 양로원, 장애자 수용소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가정이 부모를 공경하고, 고아를 사랑하며, 예수님 정신에 따라 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사랑하여 한 가정에서 한 사람씩만 데려다가 자기 가족을 만들어도 불우한 사람들이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아닌가?”(딤후 3:5)하는 자책을 느끼게 됩니다.

3. 이런 취지에서 저희들이 말세를 극복하려면 우선 말세의 증상부터 알고 거기에 따라 대처해야 하는데 본문 말씀 13, 14절에서 그 대처하는 방법이 2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견디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극복이 되는 이유는 복음전파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됬을 때 끝이 오기 때문에, 끝이 오게 하는 방법으로 전도를 열심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때는 하나님이 작정하셨을지라도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말세의 징조들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 한 가지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1)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대하여 참으로 말씀 중심에서 이탈하지 마시고, 바른 신학, 바른 해석, 건전한 생활, 건전한 교파, 바르게 가르치는 사역자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난리와 난리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항상 있는 것이니까 주님의 재림이 더 가까워진 줄 아시고 두려워하지 마셔야 하며 특히 주의 할 것은 난리가 났을 때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주는 일”(10절)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런 일을 극히 삼가 해야 할 것입니다.

3)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는 양식이 남아서 버리고, 어느 곳에서는 굶어 죽는다하니 이것을 균형있게 맞추는 것이 극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진에 대한 대책은 아직도 인간의 힘으로는 속수무책이므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4) 불법이 성한 것입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는 될 수 있는 한 법을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영광을 가리우게 되고, 사람 앞에도 덕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는 법을 잘 지킨다는 소문이 나도록 솔선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사랑이 식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성도 주위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투기, 욕심, 교만이 없고, 겸손과 이해와 봉사와 양보와 온유와 기쁨만 있는 세계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운동선수처럼 달음질해야 할 것입니다.

6) 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돌이켜 멀리하며 나그네처럼 생각하시고 내세의 본향을 더욱 사모하셔야 하며,

7) 이런 모든 일들로서 믿음이 식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말세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제42과 여러가지 교훈 (약 1: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야고보”란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이 6명이 나오는데 그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사도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가 있고(마 10:2),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마 13:55, 갈 1:19). 이 두 사람을 야고보의 저자 후보로 세우고 연구하던 중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더 유력한 저자로 인정합니다. 그 이 는 이 사람이 초대교회 후시대까지 일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갈 2:9, 행 21:18). 이 야고보는 믿음에 일치하는 행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1. 성도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이란 현실적인 헛된 정욕(갈 5:16, 24)을 의미하고,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죄의 유혹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현실적인 자기의 욕심에서 떠난다면 죄지을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욕심과 죄는 항상 같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아셔서 욕심 버리는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하셨습니다.

1) “욕심이 잉태한다”는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요,

2) “죄를 낳는다”는 것은 욕심이 범죄행위로 나타남이며,

3) “죄가 장성한다”함은 범죄가 능숙해지고 발전함이요,

4) “사망을 낳는다”하심은 죄로 인한 심판이 멸망이란 뜻입니다(롬 6:23). 이 말씀은 죄의 성질과 시작과 결과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속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참된 것이 없고 매사에 바른 지식이 아니면 결국은 속는 것입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사는 줄 알거나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거나 물질이 생명을 더하는 줄로 알거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못 믿는 사람들은 다 속고 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세상을 속지 않고 살기 위하여 바른 지식을 터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만물의 축복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와 함께 만물까지 주셨고(롬 8:32), 고전 4:7에 보시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죄를 빼고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17절 말씀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 때 저희들은 감사와 겸손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또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속성(어떤 하나님이신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빛이라 하셨고(요 1:1), 하나님도 빛이라 하셨습니다(요일 1:5). 따라서 빛들이란 진리의 역사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고, 아버지란 만물을 주신 하나님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예수님)은 진리 자신이란 뜻입니다.

2)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존재와 뜻에 변함이 없으시므로(벧전 1:25, 욥 23:14) 영존하시고, 또한 사랑과 능력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3)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① 형상이 없다는 뜻이요, ② 따라서 영으로 존재하시며, ③ 말씀으로 내용과 능력을 나타내시고, ④ 흠과 티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순결하시고 거룩하신 속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6. 성도 삼으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 중에서 택한 백성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믿는 것이 성도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뜻을 따라 성도를 삼으신 이유는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하셨는데 이것은 충실한 열매로서 영광 받으실만한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 받으실 목적으로 저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짧은 본문에서 6가지 대지를 설명드렸습니다. 아무쪼록 욕심에 끌려 범죄하지 마시고 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3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 (시 73:23~28) 목록으로


본문 23절에 보시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다”하셨고, 또 28절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면 1) 하나님이 오른손을 붙들어 주시고, 2) 주의 교훈으로 인도해 주시며, 3)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망하는 일을 피하는 방법이요, 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의지함이 되고, 영원한 분깃(기업)이 되기 때문에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하나님 외에 사모 할 자가 없다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긴 것입니다.

2. 요즈음 성도들 중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복이라 하면 건강, 지식, 재물, 명예 등 현실의 복을 마음에 떠올리게 되지만 이것들은 다 90년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복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질 허탄한 것들을 복으로 사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모하라고 하시는 신령한 복과 영원한 복을 추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 “죄 안 짓고 말씀을 묵상하는 복”(시 1:1~2), 그리고 이 시간에 말씀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들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동행하는 것으로 표현하신 예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2~24)하셨고, 또 하나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행한 사람들은 전부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대로 데려가셨다 하셨고, 노아는 인류 창조 후 천년쯤의 사람인데 그 당시는 사람들이 평균 800세 이상을 살 때였으니 1000년 동안 퍼진 인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홍수로 다 멸망 받았지만 노아의 8식구만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일까요?

1) 불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없겠지요. 하나님을 불신 하는 자들과는 동행이 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은 믿으나 하나님의 말씀 뜻대로 복종하지 않을 때 동행이 가능할까요? 역시 동행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쪽으로 가라 하셨는데 우리가 서쪽으로 간다면 당연히 동행이 성취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행동이 다를 때 동행이 안 되는 것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뜻이 안 맞아도 동행을 못한다고 암 3:3에서 말씀하신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이 잘 되려면

① 믿음과 순종으로 동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자녀 삼으신다”(요 1:12)하셨고, 또 계명을 순종하는 자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33).

② 말씀과 기도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주심이요(요 1:1),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의사표시로서 대화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③ 하나님 뜻대로 충성할 때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가주셨고(창 46:4),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복종할 때도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사 6:16).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4과 한나의 기도응답 (삼상 1:12~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한나의 기도응답”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한나가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의 말기로 주전 1100년경에 해당합니다. “에브라임”지파의 “엘가나”라는 사람이 두 아내를 거느렸는데, 하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요, 또 하나는 자식을 낳은 “브닌나”였습니다. 이때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된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6).

1. 우선 이 사실에서 두가지 의문을 풀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1) 경건한 성도가 어째서 두 아내를 거느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일부일처제를 가르치셨지만(창 2:24), 그 계시의 말씀이 엄하게 전승되지 못하였고 또 남자가 귀하고 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인지라 그 계명이 엄하게 시행되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왜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한나에게 갑절의 제물을 주고 그를 사랑하되(5절) “열 아들보다 낫다”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자식을 낳은 브닌나보다 훨씬 더 사랑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에(출 33:19) 남편의 사랑을 받는 한나와 그렇지 못한 브닌나 사이를 공평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소원하는 간청이 특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국 그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2. 한나의 기도와 응답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 한나는 격동과 슬픔이 많은 중에서 기도하였습니다. 6절에 보시면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 번민케 하였으니 그는 남편의 사랑을 적게 받는데 대한 투기심과 자식을 낳은 유세로 한나를 괴롭히므로(6절) 한나가 슬픔을 당하였는데(15절) 하나님은 고난중에서 기도하는 자의 입장을 더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출 3:7).

2) 그의 기도가 간절하였습니다. 10절 말씀에서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하였고, 11절에서는 “서원하며 기도”했으며, 12절에서는 “오래 기도”하였고, 13절에서는 “속으로 기도”하였으며, 15절에서는 “심정을 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 드린 예물도 다른 이보다 갑절을 드렸습니다(5절). 이때에 한나의 소원은 아들 낳기를 원함이었고, 한나의 서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을 하나님께 다시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낳았다”는 명분만 자신이 취하고 아들은 하나님의 쓰심을 위하여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63:1, 눅 22:44).

3) 한나의 기도는 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엘리제사장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확인하고 “하나님이 허락 하시기를 원한다”(17절)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상당한 효력을 주었을 것입니다.

4) 기도로 부탁한 한나가 믿음으로 자기 집에 돌아가서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18절) 하였으니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한나의 신앙 지식입니다. 한나가 응답을 받고 기도한 내용을 2:1~7까지 살펴보시면 한나에게 귀한 신앙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기도할 때 감사와 기쁨과 성도의 권위(뿔)를 지녔고 원수를 향하여 호통치는 담력을 가졌는데(2:1), 하나님의 절대자이심과 행동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임의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증언 한 것을 보면 그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5가지 요소가 기도응답의 조건이 된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제45과 미디안에게서 구원하심 (삿 7:15~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미디안에게서 구원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이었고, 미디안족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백성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하나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다(삿 6:1)고 하셨습니다. 미디안족은 가나안 땅의 본토족으로 하나님이 선민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남겨 놓으신 족속이었습니다(수 23:7~13, 삿 2:3).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은 징계의 의미와 신령적 은혜를 통제하시는 의미가 있고(사 69~10), 전쟁으로 이기게 하여 그들의 손에서 풀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징계를 거두시고 다시 권고하시되 영적으로 권고하시고 또 현실적으로 복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일반적 전쟁의 승리는 물론 영적 전쟁의 승리도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절차로 자기백성을 구원하셨습니까?

1.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삿 6:7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악을 회개하는 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손에 붙이신 사실을 깨우치신 후(10절) 다시 건져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9절).

3.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민족의 지도자로서 기드온을 택하셨습니다(삿 6:11~24). 하나님은 기드온이 가장 쓸만한 인물이어서 그를 선택하셨고, 기드온은 과연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하나님이신지를 확신하기 위하여 불로 제물을 응답하신 일과(삿 6:21),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는 일과(6:38), 양털에만 이슬이 안내린 증거로서(6:40) 확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또 이런 사실이 있기 전에 기드온은 조상들이 섬기던 바알신을 밤중에 다 훼파하였기 때문에 “여룹바알”(바알과 쟁론함)이란 별명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하실 때 꼭 지도자를 앞세우시는 것입니다.

4. 정병을 모집하였습니다. 이 정병은 본래 모집했던 32,000명의 의병 중에 300명만 뽑은 것입니다(7:2~8). 전쟁이 두려운 자(3절), 전쟁의 기술이 없는 자(5~6절)를 다 돌려보내고 용기 있고, 지혜 있는 군인 300명만 쓰신 것입니다. 300명은 32,000명의 1/80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정병을 1당 100으로 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다 정병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친히 세우신 지도자와 소수의 정병으로 이루시는 분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 정병에게 작전오명하셨습니다. 정병을 3대로 나누고 2경초, 보초가 교대하는 시간에 혼란스럽게 기습하되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밝히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치게 한 것입니다. 성도가 마귀와 적의 유혹을 이기는데도 지혜로운 작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회를 이용하는 작전, 적의 취약점을 찌르는 작전이었습니다.

6. 이때에 하나님은 3가지 무기를 주셨습니다.

1) 항아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항아리가 깨지므로 그 속에 감추인 횃불이 밝혀졌습니다. 항아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고전 15:31).

2) 횃불이니 성도의 무언적 빛된 생활입니다(마 5:14).

3) 나팔이니 이는 복음의 증거입니다.

4)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과 기드온을 위하는 일이 일치하였습니다(18절). 이때에 하나님은 적이 자멸하도록 만드셨습니다(14, 22절). 신앙의 대적을 정복하는 절차도 이와 같음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하나님께 감사 할 일 (시 103:6~14) 목록으로


추수감사 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 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다윗의 감사의 시로 앞부분에도 감사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은 간단히 살피고 본문에서 감사의 내용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 앞부분에서는(1~5절)

1) 감사의 내용으로 ① 죄사함, ② 병 고침, ③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심, ④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심, ⑤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심, ⑥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2) 감사의 방법으로 ① 내 속에 있는 것들 즉 지혜와 재능을 총동원한 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② 또 그 은택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본문에서 감사 할 일은

1) 6절 말씀에서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독재정치 하에서 인권의 존중을 못 받거나 의사표시를 마음대로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신앙생활에 핍박을 받는 것도 이만 저만한 손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일을 자기의 의로운 일로 여기시고 그 행사를 알려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출 18:24~26에 기록된 재판법은 모세를 통해서 알려주신 것인데, 혹 사람의 재판이 시행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7:11). 만일 하나님이 심판을 안 하시니 너희끼리 해결해라 하신다면 사람들은 매일 싸우고 다투고 송사하러 다니기에 다른 일은 거의 못할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고 지려는(패배)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송사꺼리를 담당하심에 대하여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후하신 성품에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후하신 성품이란 부족한 성도에게 은혜롭게 대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이런 성품의 너그러우심이 없었다면 부족한 성도가 항상 경책만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노하심 아래서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은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또 노하기를 더디 하심은 온유하심이고 은혜로우심은 덕보이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후하시기 때문에 연약하고 실수 많은 저희들을 용납해 주시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3)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많기를 하늘이 높음같이 많으시기 때문에 자기를 경외하는 성도의 잘못에 대하여 그 죄악을 따라 갚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간과하시거나 벌을 가볍게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또 벌을 내리시기 전에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면서 오래 참아주신다(벧후 3:9)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속히 회개하면 징계를 거의 안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4)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이 자기를 경외하는 성도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건설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식이 고생하면서 살 것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 또 불구자 자식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진토에서 취하셨은 즉 연약한 체질임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① 심판하시는 하나님, ② 후한 성품의 하나님, ③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 ④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47과 신앙생활의 요소 (엡 6:10~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생활의 요소”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하는데도 무기가 필요하고 집을 짓는데도 연장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거기에도 꼭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게 하는 조건과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들이 있음같이 하나님은 충성의 요소로 각종 은사를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고전 12:7~11).

1. 본문 말씀에서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1) 본문 10절에 보시면 “종말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① 종말로란 말씀은 종말이 될수록 마귀의 역사가 강해지기 때문에 신앙 무장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요,

② 주 안에서란 믿음 안에서란 뜻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성경)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을 것이므로 마귀에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③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는 뜻은 성령의 충만으로(엡 5:18)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을 대적하는 힘을 가지라(12절)는 뜻입니다.

2) 성도의 대적은 혈과 육을(인격) 상대로 하는 인간이 아니고, 악의 영들(정사, 권세)인 마귀들과 마귀의 뜻대로 세상을 주관하는 영들이라고 하셨습니다(엡 2:2). 따라서 인간은 사랑하되 죄는 미워하고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본문 13절~18절에 보시면 마귀를 대적하는 장비와 무기로서 전신갑주, 진리의 말씀, 의와 평안, 믿음과 구원,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열거하였습니다.(그러나 이 시간에는 13절~18절을 본문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설명은 생략하고,)

2. 우선 저희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요소가 있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이같은 요소도 필요하겠지요.

1) 진실한 마음입니다. 딤후 3:9에 보시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하셨고, 또 딤후 1:5에서는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외식이나 억지로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마음이 첫째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2) 지식의 요소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이며, 하나님 아는 지식은 성경을 터득하므로 성취되기 때문에 지식의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면 폭넓은 큰 믿음이 될 것이고, 하나님을 적게 알면 적은 믿음이 될 것입니다.

3) 겸손입니다. 성도가 겸손하면 잘 넘어지지 않으나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 그리고 벧전 5:5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시험을 피하고, 은혜를 받기 위하여 겸손해야만 할 것입니다.

4)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불순종이고, 불순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하셨고,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은 이적이나(눅 5:7)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요 2:9)도 순종하기 어려운 것을 순종했을 때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무조건 순종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5) 사랑의 실천이요,

6)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헌신하는 것이며,

7) 항상 기도와 감사와 기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살전 5:16~18).

이 7가지 요소를 신앙 생활의 필수 조건으로 확보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8과 큰 구원 (히 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큰 구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우리”란 구원 받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구원은 “큰 구원”이고,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성도는 피할 수 없는 징책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큰 구원을 받고 등한히 여기지는 않습니까?

1. 본문 1절에서는 “모든 들은 것을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간절히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모든 들은 것”이란 “복음의 도리”를 의미합니다. 이 복음의 도리는 율법으로 예언한 십자가의 도리를 확실히 깨닫는 것을 뜻하고,

2)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간절히 삼가야 함은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간직하고, 경성하여 믿음 지키는 생활을 잘 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소멸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고후 6:1, 살전 5:19).

2. 큰 구원이란

1) 죄인되고 원수된 자요, 영원히 죽을 자를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여 선택하신 것이요,

2)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하신 것이며,

3) 또 영생 구원의 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큰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이 이 큰 구원을 주신 과정에도 큰 은혜가 나타났으니

1) 거듭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엡 2:1). 영적생명 하나를 더 주셨습니다. 따라서 큰 구원은 영적생명을 주신데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요 3:3).

2) 믿음을 주셨습니다. 히 12:2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주”라 하셨고, 벧전 1:7에서 “이 믿음은 금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음 없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3) “의”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 의의 은총이란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의 죄책을 예수님이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신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사 53:45, 롬 8:30, 요 5:25).

4) 양자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요 1:12, 갈 3:26). 양자는 성도의 존귀보다 더 귀한 것이며 예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 된 관계에서 차별 없이 나누어 받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거룩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부패성을 씻어 정결케 하는 은혜요, 예수님의 순결하신 인격을 닮으므로 변화됨을 뜻하는 것입니다(고후 7:1, 딤전 4:5). 따라서 저희들은 매일매일 깨끗해져가는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6) 부활과 영생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나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안식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은 아닙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 예수님의 부활체처럼 영화시켜서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7)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의 심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물론 불신앙과 악에 대한 심판을 받지만(계 20:13~14) 성도들도 현생에서의 잘잘못과(회개는 했지만) 옳고 그른 것을 판단 받아야 하며, 또 일한대로 갚음을 받을 때에 모든 의문이 풀리고 속이 후련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완성은 최종적 상급으로 완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차로 큰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4.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을 1) 예수님과 2) 사도들이 증거 하셨고, 3) 또 성령님이 기사와 이적으로 증거 하셨으며, 4) 각자에게 주신 은사로 믿게 하셨습니다.

5. 그런데도 등한히 여기는 것은 마치 좋은 선물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자와 같아서 은혜를 헛되이 돌리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9과 죄에 대한 지식 (롬 6:17~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죄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한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죄에 대한 지식과 또 죄에서 해방된 은혜를 잘 아셔야만 신앙생활의 보람도 느끼고, 전도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죄에 대한 지식으로

1) 죄란 무엇인가? 를 아셔야 하겠습니다.

①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② 죄라는 원문은 “하말리아”(ἁμαρτία)로서 “과녘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의 목표에 미달하거나 지나쳐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이상 믿으려 하거나 명령 이상 행하려고 하지만 표준을 벗어나는 것은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이 죄가 언제부터 인간에게 들어왔습니까? 이것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므로(창 3:6) 수치됨과 완악함이 생겨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금지된 과실을 먹자 벗은 수치를 발견하였고(창 3:7), 하나님의 음성과 낯을 피하였으니(창 3:8) 범죄가 부패성의 시작으로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된 것입니다(롬 5:12).

3) 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본래 “거역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셨으니 우선 그 말씀에 따라

① 영적 죽음과(엡 2:1),

② 육체적 죽음이 임하였고(창 3:19),

③ 수고와(창 3:16) 땀을 흘리며 살게 되었으며(창 3:17),

④ 유혹자인 뱀과 인간이 사는 자연계도 퇴락시키셨다고 하였습니다(창 3:18).

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죄의 값(심판)을 영원한 사망으로 청하신 후(롬 6:23) 공의로운 뜻대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시고, 그 때를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롬 2:5, 행 17:31). 죄의 결과 중에 영적 죽임이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한 생명의 요소(즉 믿음의 근거)가 소멸되었음을 뜻하며 인류시조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후손된 인류가 전부 불행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한 입장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롬 5:12).

4) 아담이 범죄할 때 마귀의 조정을 받은 뱀의 유혹에 의하였고(계 20:2), 그의 유혹에 속아 자신의 의지로 범죄한 것처럼 지금도 마귀는 모든 세상을 무대로 성도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만들려고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창 3:1~3). 심지어는 예수님과 베드로까지 시험을 하였으니(마 4:1, 눅 22:31) 얼마나 악날합니까?

5) 성경은 이 죄에 대한 비유를 무거운 짐(마 11:28), 갚지 못하는 부채(눅 7:41), 또는 육신의 질병(마 9:13)등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에 결국은 심판의 불행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셨습니까?

1) 하나님께서는 멸망 받을 인생들의 한 부분을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2)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대신 담당하게 하신 후,

3) 거듭나는 은혜와 믿음을 주셔서 대속하셨으며,

4) 거룩한 은혜를 힘 입혀 주셨고,

5)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6) 영생하는 권속이 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마귀의 종,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 의의 종이 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9절).

3. 특별히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신 것은 1)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사실과(15절) 2)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실과 3) 의의 종인즉 육신의 연약을 이기고 거룩을 성취해야 할 것과(19절) 4) 하나님의 종노릇을 성실하게 행하므로 영광의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22절).

 

제50과 회개에 대한 지식 (벧후 3:8~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회개에 대한 지식”을 배우시도록 하겠습니다. 회개에 대한 문제도 깊이 연구하면 그 지식이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베드로사도가 증언한 말씀으로 말세가 임박하였은즉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1절 말씀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란 말씀이 있고, 이 거룩한 행실을 지키기 위하여 “회개를 힘쓰라”(9절)고 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회개에 대한 지식”으로 정한 것입니다.

1) 본문 8절에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하시므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또 시간의 장단과 상관없이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더디고 지루한 것을 느끼시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일 뿐, 막연히 시일을 늦추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 또 아무나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과

②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촉구하심인 것입니다. 또 “아무나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왜 선민만 구원하시는가?”에 대하여는 하나님도 소원을 가지시나 그 소원을 다 이루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주님의 날은 도적같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고 없이 오시므로 크게 당황하지 않게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신 것이요,

5) 그때에 하늘과 땅은 큰 변화를 일으키며 뜨거운 불이 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6) 따라서 이 사실을 깨닫는 성도는 ①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지키면서 ②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2. 회개에 대한 지식을 몇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회개는 마음과 행실의 잘못을 뉘우쳐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분하게 여겨 통회를 하였으면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하고, 돌이킴이 없을 때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는 것이요,

2) 이 회개는 하나님이 이루게 하여 주시는데(딤후 2:25) 말씀으로 깨우치시고(롬 3:20) 성령님이 교통하셔서(고후 13:13) 이루어주시는데 여기에 힘입어 성도들도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마 11:12).

3) 회개를 왜 해야 하는가? 할 때에 ① “의의 거하는바”란 말씀처럼 천국에는 부정한 자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고, ②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함이며(행 2:38), ③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함이고(요 9:31, 행 8:22), ④ 하나님이 징계를 멈추시고 노여움을 푸시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히 12:6).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개가 자신의 부패성을 씻어 거룩하게 하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빨아야 깨끗해지는 것처럼 이 빠는 것이 곧 회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4) 회개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이것은 죄사함의 회개요(막 1:4, 눅 24:47), 생명 얻는 회개이며(행 11:18), 또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 7:10)입니다. 그러나 이 뜻은 회개가 속죄 받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고(속죄 받는 십자가의 믿음임), 구원받는 과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끗한 천국에 씻고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성도의 연약한 생활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행 8:22, 히 6:1).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어 징계를 면하고 거룩해지기 위함인 것입니다. 자칫하면 회개가 구원받는 공로인줄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의로움을 힘입어 심판을 면하는 것이고 회개는 깨끗케 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심판을 면하고 깨끗한 자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51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요 1: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이란 제목으로 성탄의 의미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일”(14절)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요 1:1). “말씀으로 계셨다”함은 예수님이 형상이 없이 내용(신적 말씀)으로만 계셨음을 뜻합니다.

2) 이런 말씀의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사람과 같이 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말씀의 하나님, 즉 독생자가 사람의 몸을 힘입어 오실 때 가지신 이름이며,

4)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은 꼭 같은 인간과 인간 생활로 33년 동안을 세상에서 죄 많은 인간들과 함께 사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은 그렇게 오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14절).

1)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렇게 오신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고,

2) 진리가 충만한 것은 하나님께만 보유되는 진리(참, 말씀)가 사람(예수)을 통해서 직접 나타내셨기 때문이며,

3) 은혜가 충만함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설명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힘입어 이 세상에 거하신데는 여러 가지 희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의 죽으심만 고난과 희생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① 하나님이 인간의 속성을 겸했다는 사실은 절대자가 상대자 역을 겸하시므로서 희생하심이요, ②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영으로만 존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힘입으시므로 육신적 고난을 감당하셔야 하는 희생이요(육신적 고난은 피곤, 아픔, 시장함, 죽음 등이 있음), ③ 동정녀에게서 나셔야만 하므로 사생아의 취급을 받으셔야 하는 희생이며, ④ 죄 많은 세계에 오시므로 희생하셨고, ⑤ 또 비천함과 고통을 받은 백성에게 우선적으로 가까이 하셨으며, ⑥ 가난한 환경에 섬기는 입장으로 오신 것이며, ⑦ 자신의 생활로 인간 생활의 참된 표준을 보이시고 십자가로 고난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셨으니 이 엄청난 희생적 은혜를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은 다 낮아지기를 싫어하고 구차스러운 일도 싫어하며 죄인들이나 환난 당하는 자들을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는데 예수님은 인간이 멀리하려는 모든 것을 다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충만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요한은 은혜의 충만성에 대하여 다시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소개한 요한보다 앞서시고 먼저 계셨던 분이요(15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16절)고 감탄하였습니다. 또 인간을 속박하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셨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이 주신 것이요(17절), 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이라(18절)하시므로 인간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을 큰 은혜로 여겼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탄절을 지키는 저희들이 무엇을 깨닫고 시행해야 할 것입니까?

1)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어 죄인들을 구원하신 사랑을 깨닫고 저희들도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을 사랑하며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이요,

2) 예수님의 겸손과 고난과 봉사와 희생을 생각하여 저희들도 그런 생활을 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육체를 입으시며, 죄악 세계에 오시고, 종의 형체로 오셔서 봉사하시고, 생명까지 희생하시기 위하여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저희들도 그런 생활을 본 받으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2과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4~19) 목록으로


본문 17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명년부터는 새로 탄생한 것처럼 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말씀에는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재창조 받은 피조물이란 뜻입니다. 만물과 인생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로 다시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엡 2:1, 요 3:3). 다시 말하면 영적 생명을 재창조하여 중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고장 난 것을 수리하여 고친 정도가 아닌 새 기계, 새 부속을 갈아 넣는 것과 같이 새로운 변화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이 되므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1) 거듭난 영적 생명을 가지므로 믿음이 발생하게 되었고,

2) 믿음이 발생한 즉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게 되었으며,

3) 성경 말씀을 받게 되었고,

4)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며,

5) 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동거동행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된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된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 된 만큼 생활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감화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14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느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고난으로 생명까지 주신 사랑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은 생활의 목적이 달라져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을 몰랐을 때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후부터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처럼 나는 주님을 위하여 살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이 그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롬 14:8에서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사람을 육체대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보니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볼 때 현실적인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대로만 본다면 아무런 흠모할 것이 없습니다(사 53:2). 유대인,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가난한 자일 뿐이지요. 그러나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 때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이 인간의 값은 그 외모나 현실적인 가치보다도 그의 인격과 하나님을 소유한 신앙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함은 물론 모든 이와도 화목해야 하는 직책까지 주신 것을 아셔야 합니다.

① 하나님이 죄인들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의 죄를 자신이 담당하시고(독생자의 십자가로) 화목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과 화목 된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 화목을 잘 유지하여야 합니다. 욥 22:21에도 보시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뿐입니다.

② 모든 이웃과 화목해야 하는 직책도 주셨다고 하셨으니까 그것도 이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화목하실 때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자신이 담당하셨으며 또 화목하는 말씀, 즉 사랑에 관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죄를 담당하시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화목하는 직책을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년도부터는 더욱 새로운 피조물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