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7분설교 13집

7분 설교집(13)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1. 전도자료에 대한 말씀 9


제1과 너는 행복자로다(1) (신 33:29) 9 바로가기

제2과 너는 행복자로다(2) (요 15:16) 11 바로가기

제3과 초신자의 길잡이(1) (잠 14:12, 16:25) 13 바로가기

제4과 초신자의 길잡이(2) (욥 8:5~7) 15 바로가기

제5과 초신자의 길잡이(3) (요일 2:17) 17 바로가기


2. 기도에 대한 말씀 19


제6과 기도를 가르치심 (눅 11:1~4) 19 바로가기

제7과 기도의 상식 (요 17:1~26) 21 바로가기


3. 하나님에 대한 지식 23


제8과 돌로 비유하신 예수님 (마 16:18~19) 23 바로가기

제9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 (전 3:11~15) 25 바로가기

제10과 힘이 되신 하나님 (시 18:1, 27:1) 27 바로가기


4. 성경 공부와 교육에 대한 말씀 29


제11과 필요한 양식 (마 4:4) 29 바로가기

제12과 말씀 씨앗과 열매 (눅 8:11~15) 31 바로가기

제13과 신앙지식 문답 (벧후 1:5) 33 바로가기

제14과 진리에 대한 묵상(1) (딤전 2:4) 35 바로가기

제15과 진리에 대한 묵상(2) (전 1:1~2, 12:13~14) 37 바로가기

제16과 설교에 대하여 (눅 24:25~26) 39 바로가기

제17과 죄를 찾는 방법(1) (잠 28:13, 고후 7:10) 41 바로가기

제18과 죄를 찾는 방법(2) (출 20:1~17) 43 바로가기

제19과 발람과 선민 (벧후 2:15~17) 45 바로가기

제20과 발람 사건에 대한 문답 (민 22:1~6) 47 바로가기

제21과 세 가지를 묵상함 (딤전 2:4) 49 바로가기

제22과 디모데와 교훈 (행 16:1~5) 51 바로가기

제23과 문서 사역의 유익 (왕하 22:8~13, 엡 3:3~4) 53 바로가기


5. 목표에 대한 말씀 55


제24과 목표를 세우자 (빌 3:13~14) 55 바로가기

제25과 목적에 적응함 (눅 13:6~9) 57 바로가기

제26과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59 바로가기

제27과 최상의 목표 (시 40:8) 61 바로가기

제28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엡 5:10~11) 63 바로가기

제29과 성공적 믿음 사업 (마 13:44~48) 65 바로가기

제30과 자립 목표 (창 49:22, 요이 3) 67 바로가기

제31과 영원한 소원 (빌 1:20, 2:13) 69 바로가기

제32과 개인적 신앙을 권장함 (시 22:9~11) 71 바로가기

제33과 부모의 세 가지 책임 (시 127:3~5) 73 바로가기


6. 은혜에 대한 말씀 75


제34과 은혜를 발견합시다 (행 17:24~27, 잠 1:20:22) 75 바로가기

제35과 은혜주실 때 할 일 (슥 8:14~17) 77 바로가기

제36과 은혜 주시는 단계 (막 4:26~29) 79 바로가기

제37과 기업을 받은 갈렙 (수 14:6~15) 81 바로가기

제38과 권고 받을 대상 (시 66:2) 83 바로가기

제39과 부요케 하려 하심 (고후 8:7~9) 85 바로가기

제40과 7병2어의 은혜 (막 8:1~10) 87 바로가기

제41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시 62:1~2, 5~6) 89 바로가기

제42과 전화위복 (창 50:18~21) 91 바로가기

제43과 감사하는 신앙 (골 2:6~7) 93 바로가기


7. 믿음에 대한 말씀 95


제44과 내 말을 믿으라 (요 4:21~22) 95 바로가기

제45과 믿음대로 되라(1) (마 9:27~31) 97 바로가기

제46과 믿음대로 되라(2) (요 4:46~54, 롬 12:3) 99 바로가기

제47과 가난과 신앙 (잠 30:7~9) 101 바로가기

제48과 온전한 믿음 (히 10:22, 벧후 1:5~7) 103 바로가기

제49과 백부장의 신앙 (눅 7:2~10) 105 바로가기

제50과 믿음으로 확보할 것 (롬 5:1~4) 107 바로가기

제51과 믿음은 은밀한 것 (마 6:1~6) 109 바로가기

제52과 충격받을 질문 (요 3:29~30) 111 바로가기

제53과 믿음의 적 (눅 22:31~34) 113 바로가기

8. 생활에 대한 말씀 115


제54과 선택이 중요함 (신 30:19~20, 수 24:14~15) 115 바로가기

제55과 나의 양식 (요 4:31~34) 117 바로가기

제56과 최대의 관심사(1) (요 15:5~10) 119 바로가기

제57과 최대의 관심사(2) (마 22:37~40) 121 바로가기

제58과 후회하지 않을 일 (민 23:19) 123 바로가기

제59과 가장 귀한 일 (요 6:29~30) 125 바로가기

제60과 신앙생활의 비유 (마 13:44~48) 127 바로가기

제61과 신령한 자의 생활 (골 1:9~12) 129 바로가기

제62과 자기 십자가의 길 (마 16:23~25) 131 바로가기

제63과 개인적 신앙생활 (살전 5:16~18) 133 바로가기

제64과 마귀와의 싸움 (벧전 5:5~9) 135 바로가기

제65과 성수주일과 십일조 (마 17:5, 히 1:1~3) 137 바로가기

제66과 마음의 양약 (잠 3:8, 17:22) 139 바로가기

9. 신앙 성숙에 대한 말씀 141


제67과 자기를 부인함 (마 16:23~25) 141 바로가기

제68과 물질과 신앙 (마 6:24) 143 바로가기

제69과 자유를 확립하자 (요 4:13~19) 145 바로가기

제70과 신앙의 훈련 과제 (딤전 4:5~7, 15) 147 바로가기

제71과 반성과 노력 (빌 1:27~28) 149 바로가기

제72과 칭찬에 대한 말씀 (고전 4:1~5) 151 바로가기

제73과 은밀한 신앙생활 (마 6:1~6) 153 바로가기

제74과 온전하고자 할진대 (마 19:16~22) 155 바로가기

제75과 내실을 기하자 (마 23:23~28) 157 바로가기

제76과 초월하는 신앙(1) (사 40:28~31) 159 바로가기

제77과 초월하는 신앙(2) (행 3:6) 161 바로가기

제78과 초월하는 신앙(3) (창 28:15) 163 바로가기

제79과 초월하는 신앙(4) (요일 2:15~17) 165 바로가기

제80과 초월하는 신앙(5) (마 22:21) 167 바로가기

제81과 초월하는 신앙(6) (벧후 3:8~9) 169 바로가기


10. 교회에 대한 말씀 171


제82과 교회론 요약 (마 16:18~19) 171 바로가기

제83과 교회의 역사와 특징 (행 7:36~38) 173 바로가기

제84과 교회의 성격 (딤전 3:15) 175 바로가기

제85과 반석위에 세운 집 (마 7:24~25, 16:18) 177 바로가기

제86과 덕을 세우는 교인 (고전 14:12) 179 바로가기

제87과 교회의 사명과 생활 (살전 1:2~8) 181 바로가기

제88과 장로에 대한 지식 (행 14:23~15:2) 185 바로가기

제89과 성도의 책임과 교회 (딤전 3:15) 187 바로가기

제90과 민감한 일들 (고전 11:17~22, 27:34) 189 바로가기

제91과 미워하는 죄와 벌 (마 5:21~26) 191 바로가기

제92과 교회의 암초 (유 1:9~13) 193 바로가기

제93과 애찬의 암초 (유 1:11~13) 195 바로가기


11. 성도의 본문에 대한 말씀 197


제94과 어떤 사람이 될까? (벧후 3:10~13) 197 바로가기

제95과 빛과 사랑 (마 5:14~16) 199 바로가기

제96과 긍지와 자부심 (딤후 4:3~8) 201 바로가기

제97과 존귀를 지키는 법 (시 16:3, 49:20) 203 바로가기


12.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205


제98과 사탄아 물러가라 (마 16:20~24) 205 바로가기

제99과 고난을 위한 인생 (욥 5:6~7) 207 바로가기

제100과 늘 깨어 예비하자 (마 24:35~44) 209 바로가기


13. 개혁에 대한 말씀 211


제101과 예배의 분위기 (요 4:20~24) 211 바로가기

제102과 교회의 부정적 요소 (갈 1:10) 213 바로가기

제103과 전통에서의 자유 (마 5:5~11) 215 바로가기

제104과 개혁의 마지막 목표 (창 13:8~9) 217 바로가기


14. 사명, 정치, 가정에 대한 말씀 219


제105과 사명적 소원의 변화 (빌 2:1~13) 219 바로가기

제106과 어찌하여 놀고 섰느뇨 (마 20:1~9) 221 바로가기

제107과 시원한 정치를 갈망함 (시 14:34) 223 바로가기

제108과 부부행복을 위한 권면 (엡 5:22~23, 28) 225 바로가기


15. 질병과 죽음에 대한 말씀 227


제109과 처음 믿는 환자에게 (막 5:25~34) 227 바로가기

제110과 초신자의 병상에서 (요 8:32, 시 42:5) 229 바로가기

제111과 임종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요일 2:15, 유 20) 231 바로가기

제112과 사경에 있는 성도에게 (요 14:1~4) 232 바로가기

제113과 마지막 큰 일 (마 22:37~40) 235 바로가기

제114과 산 자가 유심할 일 (전 7:1~2) 237 바로가기

제115과 장례에 관련 있는 말씀들 (시 9:20) 239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7분 설교 13집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제가 이 기록을 마칠 무렵에 “통합4복음서”를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집은 제가 12집을 기록한 다음 2005년 7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증거하고 묵상한 내용을 제목별로 대략 분류하여 수록한 것입니다. 설교를 많이 구상하고 기록하다 보니 기록에는 숙달되었지만 다른 재료들을 참고하지 못한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남기는 목적이 필자의 증거 자료를 남기는데 있습니다. 다른 성도님들이라도 혹 읽으시고 은혜를 받으신다면 더욱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현재 저의 집필 계획은 금년 12월로 전체를 편집하여 2007년도 안에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합니다. 그때에 많이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수록한 다음에 기록하는 것은 전체 내용에 통합시키지 못하고 별책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쫓기는 상태가 아닌 형편에서 하나님이 건강과 여가를 주시는 대로 구약 강론(쓰지 못한 것)을 쓰고, 또 설교문은 14집으로 이어질 것이며 개혁 교회 헌법 초안을 구상해 볼 생각입니다. 많이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6. 11. 29.


저자 지 영 근

1. 전도 자료에 대한 말씀

제1과 너는 행복자로다(1) (신 33:29) 목록으로


하나님께서 선민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광야 생활 말기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나그네 생활이고 사막에서의 장막 생활이며 춥고 뜨거우며 만나만 먹고 살아야 하고, 적의 위험도 있었으며 의식주가 족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 40년 전의 세대가 거의 광야에서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볼 때 그 생활을 행복한 생활로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정착지와 풍요함이 없는 생활을 누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너는 행복자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이 행복자로 인정하신 이유를 살피면

1) 우선 “하나님의 구원을 너같이 받은 백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400년이나 된 노예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고 바로왕에게 열 가지 재앙을 이적으로 베푸셔서 구원(해방)의 은혜를 주셨으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택하여 특별 취급하신 것을 행복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너를 돕는 방패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방패는 대적의 무기를 막아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출애굽 했을 때 애굽군이 추격을 하였고, 또 아말렉이 침략을 하였으며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서 생존하기 어려운 일 등 난관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방패가 되셔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고 사는 백성은 행복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너의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이 네게 복종하므로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는다” 하셨으니 이는 대적을 꺾는 승리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하나님이 선민을 특별 취급하여 구원하신 것과 역경에서 보호해주신 것과 대적을 쳐서 승리하게 하셨으니 선민이 그것으로 행복자인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저희들은 행복자입니까? 아닙니까? 행복자 되는 표준을 하나님이 알려주셨으니까 성도들이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모든 국민은 행복추구권이 있다”고 되어 있어서 백성이 타인의 행복을 해치면 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 행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욕구 불만(스트레스)에 걸려서 유명한 의원을 다 동원해도 병명을 잡지 못했는데 어떤 의사가 진단을 하더니 “이것은 신체상의 특별한 병이 아니기 때문에 병명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약은 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셔야 나을 것이라”하여 전국을 다니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으려니까 쉽지 않았는데 한 번은 어떤 거지가 노래를 하면서 즐거워하기로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즐거워하느냐?”하니까 자기는 굴에서 잠자고 깡통 들고 나와서 얻어먹으면 되니까 부족이 없고 행복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지를 말에 태워 임금님 앞으로 데려와서 행복한 사연을 듣고 “상급을 후히 줄 터이니 속옷을 벗어놓고 가라”하니까 그는 겉옷만 있고 속옷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임금이 “속옷 없는 거지도 행복을 느끼는데 임금된 내가 욕구 불만에 걸린 것은 도리가 아니라”하여 뉘우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행복의 조건이 물질이나 현실 조건에 있지 않고 각자의 마음 가짐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믿음 안에서 행복을 찾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3. 성도의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그러트리는 일은 전부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자가 된 것은 우선 선택을 받은 때문이고, 다음에 특별 취급을 받은 때문이며 그 특별 취급에 따라서 자유도 얻었고, 승리도 얻었으며 구원도 받게 된 것입니다. 그쯤 되었으면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한 세대가 사막 여행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였어도 행복자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하지 않았고, 기업의 터전이 없었으며 한 세대가 죽고 없어졌는데도 하나님이 선택하여 특별 취급해 주시는 일과 가나안땅(미래의 소망과 구원의 복)을 주시게 되어 있는 일로써 행복함을 느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제가 행복 느끼는 비결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삶의 목표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마땅히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인정을 안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는 행복한 것입니다.

2) 삶의 목표를 시행할 때 정당한 방법으로 하고 순리에(물결 따라, 바람 따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크게 힘들지 않습니다.

3) 단순하게 살고 홀로 서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뷔페 60종 축소할 것). 야곱, 요셉, 모세, 다윗이 다 홀로 선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지요. 장애인을 살피는 어떤 목사님이 전세 보증금 1000만원을 빌리려고 돈 많은 두 성도에게 부탁을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더라는 말을 듣고 “기도만 하고 하나님이 은혜 주실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탁이 지나치면 순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행복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면서 자기의 하는 일을 취미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미국의 심리학자 “셀리그만”이란 분이 오셔서 “행복을 부르는 법”이란 강의를 한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제2과 너는 행복자로다(2) (요 15:16) 목록으로


지난 주일에 신집사님의 딸과 아들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아버님이 믿음으로 천국가시고 장례식 때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믿음 생활을 결심한 줄 압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는 초신자가 불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기회에 초신자에게 관계된 설교를 하지 않으면 처음 나온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경우가 될까 하여 제가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라”고 하셨는데 이 행복의 종합적인 의미는 그들이 창조자요, 구원자이며 통치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필요한 은혜를 받고 행복자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도 큰 행복자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1. 오늘 교회에 나오신 분이 행복한 이유는 절대자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도 고아된 자가 부모를 찾는 TV가 방영됩니다. 부모를 모르고 헤어졌으니까 찾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음으로 찾는 것입니다(히 11:6). 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교회에 나오셨으니까 벌써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2. 살후 3:2을 보시면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 하셨고, 엡 1:4에서는 선택한 자에게만 주시는데 그 수가 적다고 하셨습니다(눅 13:24).그런데 “그 선택이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결코 “내가 믿고 내가 선택하여 하나님을 모시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많은 인류 중에 적은 수를 선택하실 때 나를 뽑아주셨기 때문에(요 15:16) 내가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을 아셔서 행복한 자임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간을 성도되게 하실 때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는데(요 3:3) 이 거듭나는 은혜를 중생 또는 영적 재창조라고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아는 마음(영)이 죽어(엡 2:1) 없어졌는데 그것을 다시 재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유명한 박사가 절에 가서 부처에게 절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박사라도 하나님 보는 마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 대신 부처를 존경의 대상으로 알기 때문에 거기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제 방에 발 마사지 기구가 있는데 이것이 길에 버려진 것을 제가 갖고 와서 보니 모터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저는 고쳐 쓰는 성격이 있어서 그것을 AS에 연락하여 22,000원을 주고 모터를 갈아서 새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를 믿게 된 성도는 하나님이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4. 성도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따라서 믿어야 할 것이 생기는데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과 성령님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인 것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밝히 나타내신 말씀이 성경입니다. 요즈음 신문을 보시면 모르는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경제 용어, 법률 용어, 예술 용어, 시사 용어 등 모르는 단어가 많습니다. 그 단어의 뜻을 모르면 내용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용어 사전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요긴합니까? 성경이 바로 성도의 신앙 생활을 지도하는 사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성경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육법전서인데 이것을 받은 성도가 성경을 활용할 줄 모르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5. 그래서 초신자는 교회에 나와서 성경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곧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신 33:29을 읽고 설교를 하는 것을 보니까 성경은 그렇게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이로구나”하는 것을 꼭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목적을 거기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가 교회에 나오면서 “왜 교회에 나와야 하는지 또는 주일은 왜 지켜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사도들의 본을 따르기 위함이요, 교회 생활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성도의 단체를 모아서 교회를 결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마 16:18, 행 20:28).

6. 그러면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시겠지요. 예배 중에 성경과 찬송과 기도를 열심히 배우시고, 다음에는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 사랑 실천하는 법을 배워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넘겨다보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예배와 사랑 실천입니다. 예배 중에 성경을 배우면 믿음이 자라고 사랑 실천이 발동되면 복도 받습니다. 모든 은혜와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7.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성숙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복을 주신다”하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 것처럼 느껴져야 어른다운 신앙에 오르는 것이고, 또 거기에서 큰 행복과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되 형식이나 문전에서 돌다가 끝내는 사람처럼 되지 마시고 더 열심을 내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받도록 잘 믿어서 성공하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과 초신자의 길잡이(1) (잠 14:12, 16:25) 목록으로


1. 믿음 생활의 성립과 시작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이 발생한 것이고, 이 믿음은 스스로 항거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을 마음이 생겨서 믿었고, 믿고 싶어서 믿는 진실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셨다”하여 노력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심고 싹 나게 하시며 자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실지라도 믿음이 자랄 때는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 믿음은 진실해야 하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은 일인만큼 믿음으로 성공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2. 초신자가 믿음의 성공을 노력함에 있어서 환경 선택을 잘 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토질과 농작물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환경은 다 사람들이고, 신앙의 영향을 받는 이웃인데 그 이웃이 교역자도 될 수 있고, 친한 성도도 될 수 있으며 또 교회가 주는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보기에 바르나(또는 좋아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잠언에만 두 번 기록되었습니다. 신 13:1~3을 보시면 “선지자가 이적을 행하면서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이 말대로 이루어져도 청종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이적을 행해도 정통성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이 뜻은 신약 시대에 와서 기록된 성경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나타내는 이웃은 초신자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웃들은 다 예수님의 구호를 외쳐서 사람을 다른 길로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 못하는 초신자가 어떤 길잡이로 인도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3. 그래서 그 길잡이에 대한 말씀을 몇 가지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짜가 판 치는 시대에 진짜를 사러 갔다면 “메이커를 보고 비싸게 사면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가짜 메이커를 붙여 비싸게 불렀다면 또 속겠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짜를 갖고 가서 대조 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진짜가 성경이고 예수님과 사도의 모범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도의 현세욕을 부추켜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에 비중을 두고 얼렁뚱땅 사람을 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말하는 상술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신자는 성경을 깊이 몰라도 신령한 복이냐? 세속이냐?하는 것과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냐?하는 것과 하나님 영광 중심이냐? 사람 영광 중심이냐?하는 것과 민주적이냐? 독재적이냐?하는 것 정도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쉽게 이해되는 것도 많습니다. 물건을 살 때 전시품과 판매품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교훈과 실천의 분별력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바른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부터 아셔야 합니다.

2) 하나님과 성경이 하나이고 세계에 산재한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의 자녀란 것을 아셔서 지역적, 단체적 이기주의에 속지 마셔야 하고,

3) 신앙 생활의 기본은 성경을 깨닫고 조용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사람을 어지럽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흥미롭게 하는데도 유혹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목적은 성경을 깨닫게 하고 실천을 지도하는데 있으니까 성경을 깨닫게 하는 목적에 위배되는 가식은 필요치 않은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은혜와 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아야 하니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해치는 일은 순간적으로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어야 하는데”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오직 하나님만 나의 절대자시오 다른 것은 다 상대적이란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들 중에는 교회가 사랑의 기관이니까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탈피하여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으로 받고 나는 나의 모든 이웃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생활 자세로 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요즈음 교회가 이상한 수단을 많이 쓰는데 그것이 주로 문화적 수단이고 세속을 본받는 수단입니다. 왜 이런 수단을 쓰는가?하면 사람의 관심을 끌어 숫자를 늘리기 위함인데 “은혜의 방편은 오직 성경뿐이란 것”을 안다면 상당한 수단을 외면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은혜를 받으러 밖으로 찾아다니지 마시고 집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시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교역자의 지도를 받고 깨달으시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자신이 가까워지지 않으면 하나님과도 가까워지지 않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어떤 친구가 이단 교파에 끌려갔다면 그의 믿음은 바르지 못한 것이고 처음부터 길잡이를 잘못 만난 것이며 그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다 구렁에 빠지는 격이지요(마 15:14). 그래서 초신자의 길잡이가 중요한 것인데 이단을 연구하고 비판하기 전에 성경을 연구함이 중요하고, 성도가 진리만 옳게 이해한다면 아무리 이단의 유혹이 있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단은 타종교나 불신자와 같은 부류인즉 거기에 동요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7)초신자는 교회 선택과 신앙 지도자 선택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물량주의나 인기주의 또는 말씀 아닌 것으로 은혜의 방편을 삼는 교회를 주의하시고, 오직 사랑과 성경 교육을 앞세우는 교회, 이기주의가 없고 인간 권위주의가 없는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초신자의 길잡이 되기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제4과 초신자의 길잡이(2) (욥 8:5~7) 목록으로


신앙은 창조자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잘 믿어서 복 받는 기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잘 믿기를 노력하는데 그 노력을 잘 못하면 축복을 많이 못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20년 이상 교회에 다니다가 나중에 깨닫고 새 출발하는 이도 있은즉 믿음의 출발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 믿기를 시작하셨으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고 모든 은혜와 능력의 원천이시며 구원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또 성도의 아버지이시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커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취미로 교회에 다닌다는 이도 있고, 또 좋은 것 배우러 다닌다는 식으로 부수적 소득을 보는 것처럼 느끼는 이가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지요. 하나님은 성도의 행복을 크게 좌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 투자로 아셔야 합니다.

2. 믿음의 시작을 하나님 아는데서 부터 해야 합니다. 영으로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만 알게 되는데 그 계시가 곧 자연 계시, 성경 계시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하셨고, 이렇게 통치하시며 또 이런 능력자이심을 아는 것처럼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주일 지키고 교회에 나가면 되는 줄로 아는 생각보다 먼저 할 일이 성경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시되 “하나님이 성경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뜻”을 알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만물의 역사, 인류 초기의 역사, 타락과 은혜의 역사, 선택한 백성의 역사, 구원자를 보내신다는 언약의 역사, 구원자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셨다는 내용, 그리고 사도들과 교회의 역사 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동서남북 지리를 대략 아는 것처럼 성경의 내용을 개론적으로나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눈을 뜨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어렵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도 큰 공백이 생겨서 늘 수박 겉핥기식의 생활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읽기를 시작하시되 뜻을 모르면 반드시 교역자에게 물어서 알도록 하는 생활을 시작하시고 매일 매일 그 연구에 끌리고 거기에 취미를 갖고 “내가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였은즉 이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 하에서 기대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를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표자가 하는 것만 기도가 아니요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예수님의 이름과 중보를 힘입어서 하나님과 대화를 갖는 것이 기도인즉 두 사람 이상이 합력하여 기도하면 더 좋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늘 마음으로 또는 혼자서 기도를 하셔야 하는데 하루 단위 또는 몇 일 단위 또는 평생 목적을 위해서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선 하루하루를 평안히 살아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 감사하신 후에 하루의 과제를 상세히 아뢴 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부탁드리고, 특별히 죄의 유혹을 받는 일이나 유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실 것을 부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 연구와 기도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시고 기도하는 일을 호흡하듯 할 때 그것이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자기의 신앙생활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 중국이나 중동에 가도 믿음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4. 교회에 잘 축석하여 믿음 생활의 연마를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워주신 성도들의 단체입니다. 성도들이 합력하여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세워주셨습니다. 예배는 혼자 드릴 수도 있는 것을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까 합동으로 드리는 것이고, 교회에는 성경을 잘 아는 전문 교사가 계시니까 설교를 들어 배우는 것이며 “성도가 사랑으로 친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여기신다(시 133:1)” 하셨으므로 친교하고 또 모든 사람을 친교할 때 사랑의 연단을 기하는 것이며 혼자 할 수 없는 교육, 전도, 봉사를 여럿이 힘을 모아서 하는 곳이 교회인즉 그 생활에 잘 적응하므로 신앙 성장의 획기적 도움을 받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교회를 잘못 만나거나 적응을 옳게 못하면 더 잘 못 될 수도 있으니까 크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초신자가 개인 생활, 교회 생활(사회 생활도 교회 생활에 입각하여 신앙적으로 적응해야 함)을 잘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점검하셔야 합니다. 시 121:5~8을 보시면 “지키시는 하나님, 환난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영혼과 출입을 영원히 지키신다” 하셨고, 시 139:1~3에서는 “앉고 일어서는 것,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관찰하시며 전후를 두루시고 인도하신다(10절)” 하셨고, 마 6:8에서는 “네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하셨으며 또 히 4:16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얼마나 가깝게 와 닿는지를 점검하시되 깨달음과 마음가짐의 변화와 영적, 물적 공급이 필요에 따라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식물도 키우십니다. 불신자에게도 공급하시고 죄인들에게도 일반 은총을 주십니다. 하물며 성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그 아버지에게 은혜를 구하는데 특별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자에게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약속하셨은즉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실 때 믿음의 더 큰 보람을 느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5과 초신자의 길잡이(3) (요일 2:17) 목록으로


초신자의 길잡이 세 번째 드리는 말씀으로 “믿음 생활의 합리적 정의”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대부분 교회 생활에 열심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회 생활은 성수 주일, 예배 참석, 헌금, 봉사, 전도 등인데 이런 열심은 목회자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여기에는 외식이 용납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 정의로 보기 어렵습니다. 노숙자에게 2000원씩 돈을 주어 예배에 참석시키는 사례도 있고, 헌금, 봉사는 타종교인들도 할 수 있는 것이며 또 한국의 초대 교회 당시에 황국주 목사는 부흥 강사로 유명하였지만 나중에 타락하여 2층집에 기생을 두고 술장사를 하였는데 그 동료 목사님들이 권면차 찾아가서 “부흥사까지 한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한즉 “그것은 한 번 해본일일 뿐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믿음 생활을 정의할 때 절기나 주일을 지키고 성직이나 봉사로서는 외식이 있을수도 있기 때문에 외식이 틈탈 수 없도록 표현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표현하여야 믿음 생활을 합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1. 우선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생활하기를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믿음 생활의 유일한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유일 지침으로 말할 때 “노력한다”는 용어를 쓴 것은 성도가 성경대로 다 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갈 3:11). 율법을 다 못 지키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성경대로 믿고 진실하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 생활의 표준이 되는 것은 대전제입니다.

2.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긴다(시 40:8)” 하였고,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선지자 노릇을 하며 이적을 행하였을 때 “모른다(마 7:21)” 하셨으며 그런고로 바울 사도는 “주의 뜻을 이해하라(엡 5:17)” 하셨고, 사도 요한도 본문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주님이 원하실 일인가?”하는 것을 판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알고 친교하시는 것입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하셨고, 또 시 91:14에서는 “저가 내 이름을 안즉 건지고 높이시며 응답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며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좋은 자와 더 많이 친하십니다. 이것은 대통령과 친한 사람이 장관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믿음 생활의 합리적 정의는)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롬 8:29)”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목적이 “예수님을 닮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는 것은 신앙생활에 깊이 들어간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성도로 예수님을 닮게 하여 양자를 삼으셨고, 아들의 형제를 삼으셨으니(요 1:12, 히 2:11)양자와 아들의 형제는 다같은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는 노력이 곧 신앙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5.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동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불신자나 죄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은혜로 삽니까? 불신자나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보다 아주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은혜는 갓난아기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는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함께 하시며 감찰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주시고 기도를 응답하시며 죄사함과 구원의 복과 영생과 상급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할 때 신앙생활의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되고 성도가 하나님을 좀더 민감하게 경외하면 하나님도 민감하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이 르우벤과 유다를 감동하시고 미디안의 장사꾼을 그 옆으로 보내셨으며 또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 흉년 기간을 재서 바로왕에게 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섭리가 성도 개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은혜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생활입니다. 욕심을 갖거나 이웃보다 더 누리려는 것은 기독교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것을 아셔야 하고(고후 8:9),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은즉 주라” 하셨으며(행 20:35) “주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신다는 말씀(눅 6:38)”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전도는 영적 은혜를 나누려는 것이고, 구제는 물적 은혜를 나누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병행할 때 사랑을 실천함이 되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사랑 실천이 곧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믿음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되 전도를 못하면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고, 또 사랑을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낀 때문인즉 이런 것을 보충하여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고(요 14:23), “구원도 받는다” 하셨으며(눅 7:47) 계명의 강령은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40).

8.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성도는 교회 생활을 원만하게 적응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이 뜻은 지상의 교회가 많이 세속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오염 없이 순결하게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 여덟 가지의 정의를 꼭 기억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2. 기도에 대한 말씀

제6과 기도를 가르치심 (눅 11:1~4) 목록으로


“기도를 가르치심”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1. 우선 본문을 살피시면

1)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다”고 하셨습니다.

2) “세례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가르친 기도문은 성경에 없습니다.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눅 5:33에서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한다” 하셨으니까 금식 기도를 가르쳤을 것 같고, 또 요 3:30에서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한 것을 보면 오직 주님의 영과 위한 일만 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은 일체 구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쇠하기를 바라는 상태에서는 자기 위한 간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금식은 왜 하였을까? 죄 많은 세대에서 자기의 정욕을 못 박고 죄를 이기기 위하여 금식하였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사명, 오직 희생”이 세례요한의 생애의 목표였을 것입니다.

3) 제자들이 기도의 가르침을 구했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으며 바울 사도도 기도의 내용에 대하여 가르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딤전 2:1~2을 보시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고 왕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고, 살후 3:1에서는 “복음 사역자의 말씀 달음질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4)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내용인데 이 내용이 마태의 기록(6:9~13)보다 간단합니다. 왜 이 내용이 다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을 때 한번만 가르치셨다면 누가는 그 내용을 더 요약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여러 차례 가르치셨다면 내용을 기계로 찍듯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의미 중심으로 신축성 있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누가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이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차이를 말씀드리면 마태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한 것을 누가는 “아버지여”라 하였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한 것과 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한 것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한 것이 누가의 기록에는 없는 것입니다. 저의 동창 목사님 한 분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완벽한 기도문인즉 모든 기도를 그 틀에 맞추어 기도를 해야 한다”하면서 그렇게 쓴 기도문을 책으로 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도문을 즉흥적으로 요약하신 기도문으로 이해를 합니다. 뜻만 하나님과 통하면 얼마든지 요약할 수도 있고, 또 나누어 기도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 보고 너희들도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라”하신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1) 우선은 성경의 모범대로 가르치셔야 하겠지요.

2) 그러나 기도를 가르치는 자가 자기의 기도 생활 체험에 근거하여 가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기도를 해보니까 이런 방법이 가장 좋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 1:35을 보시면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하셨습니다. 그 모범에 따라 새벽 기도회가 생긴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의 환경이 사람마다 달라서 새벽에 가장 피곤한 사람도 있습니다. 피곤 중의 기도는 간절한 맛을 못 가지니까 안 피곤하고 조용할 때 기도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제가 해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장 안 피곤할 때에 기도하십시오.

3) 기도를 가르칠 때 또 유의하실 것은 기도의 갈망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어느 틈, 어느 시간에 기도를 할까?” “지금 우리 앞에 위험한 세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기도를 먼저 못했으니 불안하다”는 느낌 하에서 기도의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도로가 위험한데 아이를 길에 내보냈거나 미숙한 운전 솜씨로 차를 몰고 나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내보내기 전에 기도한 것과 그 기도할 기회를 못 가져서 조급한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기도의 갈망과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하실 때나 가르치실 때 반드시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라는 것입니다.

4) 제가 기도를 해보니까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든든하더란 것입니다. 둘이 하니까 더 경성하게 되고 무슨 기도를 하고 안 한 것에 대하여 증인이 있기 때문에 좋습니다. 마 18:19에서 “두 세 사람의 기도를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꼭 기도의 동반자를 구하십시오.

5) 기도의 내용인데 우선 감사가 앞서야 하겠지요. 빌 4:6에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자칫하면 감사할 내용에서 감사꺼리를 다 묻는 수가 있습니다. 큰 은혜에서 감사꺼리를 못 느끼고 또 작은 은혜에서 감사꺼리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공기를 주신 것은 큰 은혜지요. 햇빛보다 더 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숨쉴 때마다 그 공기를 사용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꺼리를 많이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구할 것인가?에 대하여 ① 모든 이의 평안을 구하셔야 합니다(마 10:13, 그 집에 평안을 빌라, 딤전 1:2,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있으면 평안하지 않아도 유익하지만 믿음이 약할 때는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의 나라(예수님 모시고 복종함)와 그의 의(죄사함 또는 바른 생활)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③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왕상 3:11). 이 지혜 속에는 믿음과 공의가 포함됩니다. “믿음 주시고 바로 사는 능력을 주십시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왕이 “부나 수나 원수 갚는 것”을 구하지 않았을 때 합당하게 여기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 현세욕이나 이기주의적인 것은 극히 삼가시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약 1:27, 요일 2:15).

제7과 기도의 상식 (요 17:1~26) 목록으로


제가 어떤 장례식에 갔다가 화장터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어떤 성도(신명희 권사)와 신앙적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성도와 신앙적 대화를 길게 나누면서 그 성도가 “신앙적 대화의 상대가 된다는 것”과 (어떤 성도는 신앙 상담에 끌려들지 않거나 대화가 막혀 길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 또 “그 성도의 신앙이 상당히 성숙한 상태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성도는 “저를 만나서 대화하므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좋은 대화 나눈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고 광장에서 소리지른다”(잠 1:20)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은혜를 받게 하시고 또 그렇게 하시려고 “성도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삼하 22:37, 시 37:23, 121:8). 제가 그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대화한 “기도의 상식”을 몇 가지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 말씀이 “자신은 지금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데 기도를 길게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고, 또 한 가지는 “남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긴 기도를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고, 또 “남을 위하는 기도를 꼭 먼저 해야만 그 기도가 온전한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확실한 지식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긴 기도는 자세하게 자초지종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인데 성도가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과정에서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나 자초지종으로 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오늘 아침 7시~7시 15분 사이에 기도를 하였는데 “제가 자동차로 8시까지 분당 차병원에 잘 도착해야 하는 일과 발인 예배를 인도할 때 합당한 말씀으로 증언하고 또 화장터에 와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한 후 마지막(하관) 예배를 드리고 무사히 집에 와서 또 말씀에 집착하고 하루 생활을 의미있게 마치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자동차를 한자쯤 후진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때가 있고, 또 언제는 동역자들이 모인 장소에 가서 안 했으면 좋을 말을 하고나서 후회한 일도 있으니 시험이란 큰 사건에서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 또는 세미한 과정에서 걸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자세한 기도를 안 할 수 없고 또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할 때도 큰 아들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면 둘째, 셋째를 위한 기도나 교인을 위한 기도도 그 문제 있는 것을 따라서 자세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기도를 자세하게 아뢰다 보면 거기에 끌리게 되고 길어지게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 “간절해지고 길어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하라”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그 취지가 사랑에 입각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내가 사랑을 힘입으려면 먼저 베풀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가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먼저 기도하고 나중에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한된 시간에 기도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길게 하고 자기와 가족을 위하여 기도할 시간을 뺏길 때는 서운하고 아쉬운 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그 시간 안배와 내용 안배를 적당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할 때 주의를 주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피곤하면서 시간과 격식에 얽매이는 것보다 피곤하지 않을 때 10분, 20분, 길면 3~40분까지 시간을 갖고 기도하시라는 것입니다. 피곤하거나 지루함을 느낄 때는 기도가 옳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은 가장 적절한 시간을 기도에 활용하시라는 것이요, 둘째는 죄와 관련이 있는 사건에 대하여는 무엇을 이루게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지 마실 것이요, 셋째는 내가 잘 되기 위하여 욕심껏 구한 것이 성취될 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게 되는 것은 절대로 간청하시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간구하여도 인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성격은 욕심에 입각한 것이고 타인을 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은 울고 우리 나라 사람은 웃게 해 달란다든지(축구경기) 저 사람은 울고 나는 웃게 해 달라는 식(입시 경쟁)의 기도를 간청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복은 섭리에 맡겨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 권사님이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인데 옳은 말씀이라”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으로서 상당히 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기도문의 내용을 대충 분석해 보니까 1~5절은 예수님의 사명 수행(십자가 구속, 중보)에 관한 내용이고, 또 예수님이 맡으신 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실 때 성도가 악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신 것과(15절)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처럼 살게 해 주시기를 구한 것과(16절) 거룩해지기를 위한 것과(19절)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믿게 해 달라는 것과(21절) 하나님과의 연합된 관계에서 온전함을 이루게 해 달라(23절)는 취지로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기도의 요점은 주님의 사명과 성도의 믿음과 성화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상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8과 돌로 비유하신 예수님 (마 16:18~19) 목록으로


성경에는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신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나의 영원한 반석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삼하 22:2, 시 26:4). 하나님을 반석으로 표현한 말씀이 많은데 고전 10:4에서 “물을 낸 반석을 가리켜서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 반석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1. 반석은 굳어 요동치 않고(렘 5:3) 요동치 않으니 불변하며 오래 가는 것입니다(욥 19:24). 그래서 예수님을 반석으로 비유하신 것은 영원 불변의 뜻이 있습니다.

2. 든든한 의지의 대상이란 뜻도 있습니다. “나의 영원한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반석, 나의 산성”이란 뜻이 든든한 의지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시 18:2, 31:3, 94:22). 그래서 성도는 반석 같으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의지할 줄 아셔야 합니다.

3. 반석을 쳐서 물을 내고 반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출 17:6, 민 20:11, 삿 6:20~21). 요 7:39에서 “생수의 강은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라” 하셨고, 또 눅 12:49에서 “성령님을 불”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곧 성령님을 보내시고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과 은혜에 따라서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4. 단 2:34에서 “뜨인 돌이 철과 흙으로 된 신상의 발을 쳐서 부셔뜨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바벨론과 헬라의 뒤를 이어 세력을 잡은 로마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심판주로 묘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이신 것과 하나님이 예수님께 심판권을 주셨다”는 말씀은 역시 신약에도 기록된 것입니다(요 5:27, 계 20:4). 마 21:44에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으며 또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다”는 말씀(롬 9:32~33, 벧전 2:8)과 사 8:14에서 “거치도돌, 걸리는 반석이 되어 예루살렘 거민에게 함정과 올무가 되실 것이라”하신 말씀이 다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친다”는 뜻은 “걸려 넘어진다”는 뜻인데 이 심판의 말씀이 가장 먼저 예루살렘에 응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고, 안 믿는 자에게는 심판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1:18) 십자가는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주인공인즉 역시 심판주가 되십니다.

5. “모퉁이돌”로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이지요(마 21:42, 시 118:22~23). 이 말씀은 유대인이 버린 예수님을 하나님이 구세주되게 하신 것을 의미하지요. 여기의 모퉁이돌은 양쪽 벽돌을 함께 붙잡는 역할을 하는 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예수님이 십자가의 구속으로 중매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돌로 비유한 예수님을 다섯 가지로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불변의 대상, 두 번째는 의지의 대상, 셋째는 성령의 근원, 넷째는 심판주 되심, 다섯째는 모퉁이 돌로 비유한 중보자 예수님입니다.

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기초석입니다. “반석 위에 집 짓는다”는 말씀과(마 7:24)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고쳐 주셨는데 이 베드로(아람어로는 게바)의 뜻이 반석입니다. 이 반석은 베드로가 반석 같아서 주신 이름이 아니고, “반석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면 흔들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교회를 비하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 기초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 기초에 든든히 서면 마귀가 범접을 못합니다. 이단은 예수님 지식이 모자라거나 흔들리는 사람들에게만 범접합니다. 예수님과 말씀 지식에 굳게 선 성도에게는 이단이 범접하지 못합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뜻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 위에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본대로의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증거할 특권을 주셨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그런 열쇠는 저희들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푸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도들과 신약의 교회에 주신 권징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권징하였을 때 예수님도 그 뜻에 따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그 진리는 성경으로 나타내주신 만큼 교회가 성경 기초 위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또 예수님 기초 위에 서야 하고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예수님 기초 아닌 것에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전 3:10). 누구를 위한 교회입니까? 누구를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까?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인본주의나 세속주의가 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명예와 이권과 세속이 난무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9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 (전 3:11~15) 목록으로


호 6:3에 보시면 “하나님을 힘써 알라” 하셨고, 호 4:6에서는 “내 백성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몰라서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도가 하나님을 몰라서 바로 살지 못한다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잘 알고 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알면 상당한 변화와 축복에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설교가 곧 하나님을 알리는 일이지요. 하나님 아는 지식과 성경을 아는 지식은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끝 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하셨고, 롬 11:33에서는 “그 지혜와 지식이 깊고 부요하여 그의 판단과 길을 (사람이) 측량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성도가 꼭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중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 몇 가지”만이라도 아시는 것이 중요하여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몇 가지는 꼭 아셔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하셨지요. 만물 창조는 다 믿을 것입니다. 자연계를 창조 안 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생명과 영혼을 창조하십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이나 성도를 만드실 때 “이미 만들어 놓으신 생명과 영혼을 넣어준다”고도 하지만 “그때 그때 만들어주신다”고 믿는 견해가 더 많습니다. 롬 4:17을 보시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기적의 섭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같은 획기적 은혜, 전격적 은혜, 깜짝 놀랄 일, 느닷없이 생기는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야곱의 아들일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셉을 총리로 만나는 것 같은 것이 창조적 은혜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굉장히 큰 일을 하십니다. 사 45:12을 보시면 “하나님이 친수로 하늘을 펴시고 그 만상을 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큰 것은 자연입니다. 태양은 작은 별 중 하나이고 달은 가까운데 있는 티끌 중 하나입니다. 바람이 있고 물이 있으며 우주가 운행을 하는 중에 인간이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태풍이 일어나고 전쟁과 기근이 있으며 우리 주위에 큰 일들이 많지요.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다 하십니다. 창조에 대조되는 용어가 섭리(통치)이고, 섭리에 뒤따라야 할 용어가 심판입니다. 그래서 창조, 섭리, 심판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인데 그 섭리 속에서 큰 일을 하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3. 작은 일도 하십니다. 슥 4:10에 보시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하셨습니다. 작은 것을 멸시 못합니다. 바이러스와 세균을 멸시 못하고 암세포를 멸시 못합니다. 하나님은 “벌레를 명하여 박넝쿨을 씹게 하셨으니” 그것은 작은 일이지요(욘 4:9). 그러나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여 박넝쿨을 시들게 하신 것”(욘 4:8)은 큰 일에 속할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털을 헤아리시고 그것을 검고 희게 하시는 일(마 10:30, 5:36)은 작은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큰 일에도 하나님의 간섭을 느낄 줄 알고 적은 일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간섭을 느낄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벌레가 박넝쿨을 씹은즉 그 넝쿨이 시들고 그것이 시든즉 그늘이 없어지며 그늘이 없을 때 요나가 짜증을 내고 그 짜증이 하나님께 상달되며 거기에 따라 하나님의 조치가 내려집니다.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잘 때 성경을 읽거나 도적을 막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생활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삼상 2:6). 그러니까 죽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맡기셔야 합니다.

5. 따라서 하나님은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삼상 2:7).

6. 또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십니다(삼상 2:7). 성경에 소출을 얻고 창고를 지어 자기만 부요케 하려는 자에게 “오늘밤 네 영혼을 찾으면 그 이룬 재산이 뉘것이 되겠느냐?(눅 12:20~21)” 하셨고, 또 사 45:3에서는 “흑암 중에 숨은 보화를 발견케 하여 그 곳간에 쌓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문제, 높아지고 낮아지는 문제, 갖고 안 갖는 문제가 다 하나님께 달린 것을 아시고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7.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지요. 예수님의 형제를 삼고 하나님의 양자를 삼아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보다도 중요하고 큰 일 중 큰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중요합니다.

8. 마지막으로 또 중요하게 하시는 일은 인류와 성도를 감찰하시는 일입니다. 특별히 성도를 감찰하십니다. 시 139:1~8을 보시면 마음으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감찰 안하시는 것이 없고 또 “바다 끝으로 갈지라도 하나님의 감찰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양심적 행동을 감찰하셨고(창 20:6),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헌금하는 상태를 감찰하셨으며(막 12:41) 열 문둥이가 고침을 받았는데 한 사람만 와서 감사하는 일을 감찰하셨고(눅 17:17), 특히 칭찬스러운 믿음을 감찰하신 것입니다(마 8:10, 15:28). 또 하나님은 자기가 주신 달란트를 다 기억하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것을 땅에 묻고 노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게으른 것도 감찰 하셨습니다(마 25:14~30). 많이 알면 더 좋겠지만 감찰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일만이라도 잘 아시면 좋은 변화의 생활과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제10과 힘이 되신 하나님 (시 18:1, 27:1) 목록으로


1. 사람이 살다보면 힘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데 이룰 수 없거나 더 강해져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이런 형편대로 살라고 하시는구나”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 체념하는 수도 있고,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할 경우에는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은혜를 힘입어서 일어서고 재기하며 형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홀로 능력자이시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붙드심과 통치로 유지해 나간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 힘의 한계를 느끼고 그대로 꿇어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힘을 구하여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현실을 살아감에 있어서 무슨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나는 그 힘을 여기에 쓰겠습니다”하실 수 있는데 꼭 필요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셔야 할 것입니다. 그 필요한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 이 시간에 드릴 중요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활이 힘든 성도들은 우선 받아야 할 힘도 있을 것입니다.

1) 물질 문제 해결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또 흑암 중의 보화도 발견케 하시며(사 45:3) 농장의 소득도 주시고(신 28:4), 이적으로 양식도 주시고 만나도 주셨으니까 물질 문제의 힘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2) 건강 유지의 힘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을 고쳐 주셨고, 또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까 주님께로부터 힘이 와야만 건강이 유지될 것입니다.

3) 명예, 권세, 출세 같은 것은 과분한 것이고 억울한 수렁에서 헤어나야 할 때가 있겠지요. 이 때에 예수님은 최종적 재판자요, 심판자이시니까 그 억울한 일들이 살아서 해결되면 더 좋고 죽은 후에는 확실히 밝혀 주시고 또 보상해 주실 것이니까 그런 관계에서 성도는 힘을 얻고 견디며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힘들게 사는 성도님들은 “건강하여 생활비 벌어쓰고 억울한 일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라지 않겠다”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에도 힘을 주십니다.

3. 이 시간에는 두 절의 성경을 읽었는데 하나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하신 말씀이고, 또 하나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였는데 이 말씀은 다 다윗의 고백이고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이잡듯 추격해오는 사울의 군사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한 기도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이나 억울한 것은 여유를 느낄 수 있지만 생명의 위협은 끝을 보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힘들고 조급한 것입니다. 칼이 자기 생명을 노리거나 질병이 노리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나 위험이 노리거나 생명이 위험 당하는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때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고 승리를 하였습니다.

4. 어떻게 의지하였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시 40:2을 보시면 “다윗이 기가막힐 수렁에서 건짐 받고 반석 위에서 견고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하였을까요?(사 40:28~31)

1)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거리낌 없이) 행하였습니다(시 26:1).

2) 기도하였습니다(시 40:1).

3) 하나님만 바랐습니다(시 62:1). 시 146:3에 보시면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하셨으니까 그뜻도 하나님만 의지하였다는 뜻이지요.

4)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시 26:1에 보시면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40:1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순결, 기도, 하나님만 의지함, 요동치 않음, 기다림” 이 다섯 가지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망한 요건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시 27:1)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5. 어떤 방법으로 주실까요? 깨달음, 회개, 치료, 의욕, 용기, 소망, 이웃의 도움, 대적을 물리치심, 때로는 이적으로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 곁에서 조언하거나 돕는 일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작은 천사를 보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석봉이 글씨를 쓸 때 그 어머니가 “네 글씨는 내가 어두운데서 썬 떡만큼도 일정하지 못하다”한 말을 새겨듣고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고, 루터는 종교 개혁에 힘들어 낙망할 처지에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하나님이 돌아가셨다”하면서 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야 종교 개혁에 낙심을 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루터가 죽을 각오를 하므로 개혁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성도에게 힘을 주실 때 이런 방법으로도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부모와 마주 앉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마주 앉지 않는 자입니다. 부모와 하나님과 다 마주 앉아야 일이 형통합니다.

6.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믿음 지키는 일(핍박, 환경 극복),

2) 성경 연구와 기도(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임),

3) 순결 지키는 일(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4) 사랑 실천하는 일,

5) 세상을 이기는데 써야 하는 것입니다(요 16:33). 서론에서 물질 문제, 병고 문제, 억울한 문제를 말씀드렸는데 여기에 시험에 들지 않는 일을 포함하여 정직하고 힘 있게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4. 성경공부와 교육에 대한 말씀

제11과 필요한 양식 (마 4:4) 목록으로


“필요한 양식”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1. 우선 본문의 뜻을 살피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는데 이 떡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육체의 양식을 의미하지요. 육체의 양식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식사를 잘 하십니까? 건강하고 소화 잘 되면 잘 잡수시겠지만 주의 하실 것도 많지요. 주위에는 건강을 해치는 음식도 많고 또 적당히 먹는다는 것이 퍽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계몽 되어서 뷔페식당에 가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식성에 맞는 것만 조금씩 갖다 먹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식성과 체질에 필요한 것만 먹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영혼의 양식도 그렇게 수요 공급을 잘 해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도 지혜롭게 수요 공급하듯이 영혼의 양식도 그리하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은 성경 66권에 있는 모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66권을 공부하는 식으로 말씀 공급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의 전체적 강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의 전체적 강론이 성도가 공급 받아야 할 필요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2. 그런데 현실 교회는 강론이 아닌 설교를 위주합니다. 왜 이렇게 설교를 위주하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고,

2) 설교자가 말씀 강론보다 설교 인기에 편중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자기의 주관적 표현이 많으니까 말하기 쉽지만 강론은 하나님의 말씀 뜻만 연구하여 가감없이 표현해야 하니까 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3) 교인들이 성경 연구보다 설교 듣는 것을 더 재미있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성경 강론을 강조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된 면도 있습니다. 사실은 설교 듣는 취미에서 성경 공부 취미로 한 단계 올라서야 하는데 그 걸음마를 아직 연습도 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주석을 읽고 연구하는 성도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교인은 귀만 갖고 교회에 오면 된다”, “교인은 입만 갖고 와서 주는대로 잘 먹고 가면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말씀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성도가 대부분이니까 말씀의 깊은 맛을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은 연구하면서 은혜를 받고 설교자는 가르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인데 듣기만 하는 성도는 그 세계를 모르니까 스스로 성경에 끌려가기가 어렵고 설교를 듣는 귀만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은혜 있는 분이다”하고 또 웅변력이나 만담력이 없이 딱딱하게 말씀만 가르치려고 하면 “저는 지식만 있고 영력이 없다”하면서 혼자 판단을 다 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더 있고 덜 있는 사역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다 비슷한 죄인들입니다. 완전하신 분은 예수님뿐이고, 은혜는 예수님만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누가 은혜 더 있고 덜 있다” 하였습니까? 다 분복대로 쓰임 받는 것뿐이지요.

3. 성도님들이 아셔야 할 것은 강론과 설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강론은 성령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파악하려고 1점 1획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 파악을 잘 하였으면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옮기지 못합니다. 겸손하라 하셨는데 교만하고 순종하라 하셨는데 거역하며 사랑하라 하셨는데 미워하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는데 힘쓰시지 않으니까 왜 그렇게 잘못하느냐?하면서 지적하고 깨우치며 책망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들어야 하는 수준은 말씀을 알아서 실천하는 수준 밑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잘못한 것을 스스로 성경으로 깨닫고 회개하면 끝나는 일인데 회개하지 않고 덕을 훼손하니까 설교의 몽둥이로 때리고 권징의 칼을 빼들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여기에서 성경으로 깨닫는 자는 성경 강론의 효력을 보는 사람이고, 설교와 권징으로 효력을 보는 사람은 그만큼 완악하고 은혜와의 간격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강론을 선호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맞는 음식을 선택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꼭 자기 수준과 책임 사명에 맞는 말씀을 우선적으로 공급받고 그 다음에 성경 공부의 폭을 넓혀 가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TV를 보면 나의 취미나 생활 성격과 맞지 않는 것이 80%쯤 됩니다. 스포츠, 오락, 노래자랑이 크게 상관없고, 드라마나 연예인 사는 이야기 역시 별로 상관없으며 질병이나 무슨 지식 보급이나 뉴스 같은 것만 선호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에 있어서도 요소(꼭 아셔야 할 것)가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성경의 출처나 교리의 부분은 우선적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씀이나 목적(사명) 의식에 부합되는 말씀도 아셔야 하며 점차 폭을 넓혀 가셔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자세로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사랑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설교를 예배의 순서로만 아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말씀드리는데 성경을

1) 하나님의 말씀으로,

2) 성령님이 1점 1획까지 영감하신 말씀으로,

3) 예수님의 인격이 동반하는 말씀으로,

4) 믿음의 근거로,

5) 영혼의 양식으로 받으셔야 하고,

6) 또 모르니까 탄식하며 배우셔야 하고(계 5:4),

7) 또 자녀들과 이웃에게 가르쳐야 하니까 필수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지시고 말씀을 가까이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2과 말씀 씨앗과 열매 (눅 8:11~15) 목록으로


본문 11절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믿어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와서 말씀을 그 마음에서 뺏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씨가 바위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시험을 받을 때 뿌리 정착을 못하였으므로 배반하는 자라 하셨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은 자이지만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한 결실을 못하는 자이며 말씀의 씨가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하여 결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 말씀은 마 13:18~23, 막 4:3~20에도 기록되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설명하신 것이 특징이고, 또 15절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깨달음) 지키되 인내로 결실한다”하시므로 말씀을 받는 성도가 은혜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마음(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깨닫고 지키되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말씀 지키는 과정을 꾸준히 보존할 때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간직하고 꾸준히 노력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 막 4:26~29을 보시면 말씀을 받은 네 종류를 거론하신 것이 아니고, 말씀을 잘 받은 자가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단계적으로 성숙이 있은 다음에 추수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시간을 두고) 싹이 나고 이삭이 패며 알곡이 된 다음 그 알곡이 익어야 낫을 댄다” 하시므로 시간이 지나고 성장이 있은 다음 연단을 거쳐서 소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처럼 받아서 마음에 심으시되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그 말씀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사랑을 받고 실천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한 동기는 글에서 한 내용을 읽으므로 비롯되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자궁에 혹이 생겨서 자궁을 다 드러내려 하다가 아이 하나라도 낳아보려는 소망대문에 혹을 일부만 제하고 수술을 했는데 그 후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는 동안 다른 집 아이를 안으려 하면 “아기를 안 낳아본 사람은 아기를 안는 것도 서툴다” 하는둥 몹시 기분 나쁜 일을 몇 차례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갖는 것이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한 번은 설교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어도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셨다는 설교를 들었을 때 “경수가 끊어져도 하나님이 생산할 수 있게 하신다면 나는 더욱 생산할 확률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겨서 기도를 더 하였고, 그때에 또 깨달아진 것은 브닌나가 한나에게 불을 질러서 한나가 기도하게 된 것처럼 주위의 아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에게 부끄러움을 준 것이 자기로 하여금 아이 같기를 힘쓰게 한 동기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고,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4.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기고(약 1:11), 뿌리가 내리며(마음에 심김은 깨닫는 것이고, 뿌리가 내리는 것은 자기 것으로 확신하는 것임) 그 말씀에 기대를 걸고 노력하는 과정을 이해하시라고 드린 예화인 것입니다. 막 11:23을 보시면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하셨고, 또 요 4:50에서는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죽게 되어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가 “아이가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 주소서”한즉 예수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하신즉 그 사람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 종들이 마중 나와서 만났는데 “아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열이 떨어진 시간을 재본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였고, 또 자신이 믿고 돌아오는 때였음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성경 말씀을 예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잘 안 믿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왕의 신하는 예수님 말씀대로 믿고 돌아선 것이 사실이고, 또 아기를 갖지 못한 여인도 “하나님은 경수가 떨어진 늙은 사라에게도 아기를 주셨는데 내게 주시는 일은 더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하고 믿었을 때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은 것이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5. 요 15:7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내 뜻과 예수님 뜻이 통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 안에 있음을 뜻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성도에게 거하는 것은 성도가 성경 말씀을 순수한 믿음으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나타내시려고 능력을 쓰시는 중에 한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해 주십시오”(마 8:2) 하였지요. 이것은 자기의 소원이 문둥병 고치는 것이지만 주님의 소원과 맞아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소원을 먼저 여쭈어 본 것입니다. 이것도 작은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 소원보다 주님의 소원을 먼저 여쭌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나도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내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 뜻”이기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결실하는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시 107:20을 보시면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받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13과 신앙지식 문답 (벧후 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갖도록 더욱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지식을 강조한 말씀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라”(엡 4:13)는 말씀이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엘 3:18)는 말씀이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는 말씀, 또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는 말씀, 또는 “가르치고 증인되라”(마 28:20, 행 1:8)는 말씀들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사람 앞에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까 그 분량을 측정하기 어렵지만 입으로 시인하고 증언하며 가르치는 것은 시험의 답안지와 같아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 지식이 확실한 지식이 되기를 바라서 신앙지식 문답이란 제목으로 몇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여러분들은 오늘 예배에 임하기 위하여 주일을 지킨 중에 계신 것입니다. 종일 경건하게 버티면 잘 지킨 것이고, 예배 시간 이외의 시간을 불경건하게 지내면 잘못 지킨 것이 될 것입니다. 우선 주일을 지키므로 이 자리에 오셨으니까 “주일 지키는 이유와 목적”을 아셔야 하겠지요. 안식일의 계명은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주일의 근거는 다른데 있는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이것을 계명으로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지켜야 합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함이고,

2) 예수님이 주일날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축복하셨고, 또 사도 요한에게도 계시를 주셨습니다(요 20:19~20, 계 1:9~10). 그러니까 주일에 저희들도 은혜 받기를 사모하셔야 하겠지요.

3) 사도들이 매주일 첫날에 모임을 가졌습니다(고전 16:2). 여기에서 성도가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는 성경도 아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고전 11:1과 엡 2:20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는 것인데

2.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한다면 이것이 초보적 지식이니까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최대한 세속을 멀리하고 경건(하나님을 가까이 모심)과 사랑에 가깝도록 행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경건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3.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니까 예배에 대하여 문답을 해보셔야 하겠지요.

1) 예배가 무엇입니까? 주보의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의식적 예배라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부모 생일이나 명절에 자식들이 부모에게 절하는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필요한 행사입니다.

2) 그렇다면 의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전부입니까? 하였을 때 그렇지 않다고 하실 것입니다. “생활 전체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뜻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과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예배를 왜 드립니까?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영광 받으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성도들에게 복을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성도 때문에 즐거움이 없으시면 복을 주시려고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도 드리고 복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4)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영광을 많이 돌릴 것인가?할 때 생활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또 의식적으로 예배드릴 때는 거리끼는 일이 없도록 회개한 후에 성실한 자세로 의식 순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문답은 성수 주일과 예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4. (제목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왜 주일을 지키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여기에 대답을 잘 하시는 분은 신앙의 참 지식인입니다.

1) 보편적인 대답으로서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하셔도 맞지만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지식에 속한 대답으로는

2) “주님의 교회를 유지하려고 그럽니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주기적 모임이나 예배가 없으면 주님의 몸된 유형 교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여 예배, 친교, 헌금, 봉사, 교육 같은 것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더 중요한 대답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려고 그럽니다”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앙의 지도자이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홀로 유지해 갑니다. 물론 결함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도 사람 모인 교회에 가야 신앙을 유지하겠는데” 할 정도는 아닙니다. 사람 모인 곳에 갔다가 오히려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도자가 못 되는 성도는 영적 은혜를 주일마다 재충전하기 위하여 교회에 가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속에 끌리고 번민에 시달리면서 말씀, 기도를 게을리 하고 한 주간을 살아보세요. 곁에 모신 주님이 멀리 떨어진 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무뎌지고 영적 신앙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혹 교역자나 성도가 열심이 있어서 한 주간 동안 말씀과 기도로 사셨다 하여도 교회는 나오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유지하셔야 하니까요. 영적 은혜의 재충전이 성도 자신을 위한 축복의 목적입니다. 풀 깎던 낫이나 김매던 호미를 베이러 오는 것과 같고, 몸 약한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는 것처럼 영적 신앙을 주일에 승화시켜서 멀리 계신 예수님을 더 가까이 모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4과 진리에 대한 묵상(1) (딤전 2:4) 목록으로


1. “진리에 대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요 8:32을 요절로 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드렸지만(핵심설교 74~77과, 7분 설교 9집 34,35과) 그래도 부족하여 또 묵상을 합니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저 역시 답답한 것입니다. 모파상이란 프랑스의 소설가(1850~1894년)가 쓴 “진주목걸이”란 소설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가난한 부인이 동창회 소집 통지서를 받고 자기를 잘 보이기 위하여 어렵게 의복을 장만하였는데 거기에 목걸이가 없으면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연구하다가 큰 부자 친구에게 가서 목걸이를 빌리는데 그 부자 친구는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가짜 목걸이를 빌려 주면서 “아주 비싼 진주 목걸이”라 하고 빌려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잘 차려 입고 동창회에 가서 밤새껏 놀다가 그 목걸이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빌려준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그와 같은 진주 목걸이를 사기 위하여 평생을 고생하고 노력하여 병들고 죽게 된 상태에서 겨우 그와 같은 진짜 목걸이를 구입하여 죽기 전에 빚을 갚으려고 늙고 병든 모습으로 그 목걸이를 들고 친구를 찾아간즉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면서 그때 준 목걸이가 가짜이기 때문에 자기는 받을 체를 안 했고, 안 가져 왔어도 될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평생을 가짜 목걸이에 얽매여 불행하게 산 것을 탄식하고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참된 것을 모른다면 우리도 그 여인과 다르지 않겠지요.

2.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구원 받는 일과 진리 아는 문제는 같은 뜻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진리”란 말씀에 1자를 썼고, 그 밑 각주를 보시면 “참(진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라고 하는 “알레데이아”는 “참 또는 참된 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 14:6을 보시면 “예수님이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이 진리인데 왜 예수님을 진리라고 했나” 하시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참이시오, 진짜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했을 때 인격적으로 설명하면 예수님이시고, 사물로 설명하면 진짜(거짓 아닌 것)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도 거짓말만 안 하면 진리가 될 수 있는가? 하시겠지요. 여기에 대하여 롬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데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고 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참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사정이 있어서 목걸이를 빌리러 갔을 때 “이 목걸이가 진짜 같은 가짜이니까 갖고 가서 목적에 응해라” 했으면 그 여인은 평생 죽을 고생을 안 했겠지요. 그런데 왜 속였을까요? 목걸이를 빌리려는 친구가 동창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고 목걸이를 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부자 친구는 가짜란 말을 할 수 없었고, 또 비싼 진짜를 함부로 빌려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나 없으면서 자존심 부리는 것도 문제요, 없는 친구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가짜를 진짜처럼 빌려 준 여인도 문제인 것처럼 인간 세계는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로서 거짓이 난무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진리와 참을 알아야 하는데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알고 거기에 일생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시 49:20에서 “존귀한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 하셨는데 여기의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엇을 뜻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참과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에게는 진리를 알아야 하는 과제가 생겼고, 또 진리의 반대가 “거짓이고 허탄한 것”인데 거기에 정신없이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반성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사람을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는(요 19:10) 존귀한데 처한 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재판한다고 앉았을 때 예수님이 “나는 진리를 증거 하러 온 사람인데 무릇 진리에 속한 자라야 내 소리를 듣는다” 하시니까 빌라도가 말하기를 “진리가 무엇이냐?”(요 1 9:37~38)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그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진리 되신 예수님, 곧 참된 자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아무나 알아보는 것이 아니요, 오직 “진리에 속한 자”라야만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 3:3, 마 16:17, 고전 12:3). 그것이 곧 “거듭난 백성,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입니다. 진리는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절대로 아무에게나 알려지지 않습니다. 주로 인간의 철학을 내세우는 사람이나(마 11:25) 부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마 19:23),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게 받아드릴 때 알려지기 쉬운 것입니다(마 11:25).

4. 결론적으로 진리 자체는 “예수님과 참된 것”인데 이것을 아는데는 그만한 절차가 있고, 또 제한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1) 제한이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지식으로는 알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게 하신 은총을 받은 자만 알 수 있으니까 그 수가 제한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2) 진리를 아는 절차란 우선 거듭난 은혜를 받아서 성령님이 마음 속에 내주하셔야 합니다. 작은 것을 보려면 현미경을 통해야 하듯이 진리를 알려면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는 예수 믿고 성경을 믿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힘입은 다음에 자신이 진리 아닌 것에 가려져 있는 것부터 탈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과 많은 성도들이 진리 아닌 것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허탄한 늪에서 빠져나와야 진리가 감추어진 보화의 밭으로 달려갈 것이 아닙니까? 다음 시간에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5과 진리에 대한 묵상(2) (전 1:1~2, 12:13~14) 목록으로


진리는 “예수님이시고 참된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다 그렇게 아시는 줄 압니다. 진리가 예수님이시고 참이란 것을 안다는 것은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처럼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그 성도는 진리를 아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보화의 발견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발견하고 안 다음에는 진리를 따르거나 소유해야 되겠지요. 만일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지 않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 진리가 자기 소유되기 어렵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믿음과 행위가 합치될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진리를 소유함에 있어서 절차가 있고, 분량이 있습니다. 절차란 것은 거듭난 심령으로 깨닫고 고백한 후 자기를 비우고(또는 못 박고), 진리를 붙잡는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는 보화를 발견한 자가 가만히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일시에 실천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특별한 사명자에 한하여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진리를 소유하는 분량은 성도마다 다릅니다. 자기를 많이 비우고 자기 것을 많이 팔아서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성도도 있고, 그것을 잘못해서 소액의 적금 통장을 가진 사람처럼 진리를 목마를 만큼 겨우 모시고 사는 성도들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진리를 많이 소유하고 싶겠지요.

2. 그래서 진리를 많이 깨닫고 많이 소유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 방법 첫째가 자기를 비우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빈 그릇을 준비하셔야 은혜를 담을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마 5:3),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자(마 16:24), 또는 날마다 죽는 자(고전 15:31),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갈 5:24)”란 말씀이 바로 자기를 비우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진리를 소유함에 있어서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면 아무리 기도를 할지라도 예수님이 자기의 상전이 되어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꼭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하고,

2) 진리가 아닌 것은 다 허탄한 것인 줄 아셔야 하는데 이것이 쉽게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일시에 깨닫고 변화되었지만 그렇지 못하여 몹시 더디게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를 고백하고 주여 주여 하면서도 자기 부정이나 세상 정욕을 적당하게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줄 압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일용할 양식을 주목적으로 한 최소한의 생계 대책입니다. 거기에는 물질과 건강과 지식과 사회적 조건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것 이상을 추구하려 하거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것을 진리보다 더 중요시 한다면 그것이 바로 헛되고 허탄한 것을 따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자기 분수(생계의 필요조건, 딤전 6:8) 이상 현세욕(명예, 권세, 재물 등)에 이끌린다면 그것은 허탄한 것을 따르는 일이 되어 그만큼 진리 보화를 잃고 있음을 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보화가 아닙니다. 보화는 나 개인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3. 이 시간에 진리를 묵상하면서 본문을 읽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시작은 솔로몬의 글이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강조했지요. 무엇이 헛되다는 것입니까? 전도서 12장 전부가 다 사람이 해 아래(세상)서 생활하는 우여 곡절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를 깊이 살펴보면 오늘날 개인이나 사회가 어떤 우여곡절 속에서 살고 죽는 이야기가 거의 다 나옵니다. 이것은 솔로몬왕이 다 경험하고 끝내본 것입니다. 그리고 늙어서 더 누리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되니까 “다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는 인생이 유한하고 죄악 중에 살기 때문에 결국 “헛되다”는 고백을 안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헛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할 때 그 결론이 12:13에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사람의 본분으로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만 헛되지 않을 뿐 세속적인 것들은 다 지나가는 일로서 “헛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신다” 하셨지요. 이 뜻은 성도가 혼자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은밀한 중에서 혼자 하는 일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홀로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든 타인이 어찌 하든 나는 이 세상을 허탄하게 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믿음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솔로몬이 “하나님 경외하는 일만 허탄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일은 헛되다”할 때 그것을 처음부터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려보고 죽게 되니까 육체적 일은 별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저도 40년 목회를 해 봤는데 잘 먹고 못 먹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 먹었어도 몸이 늙지 않습니까? 그러면 헛되지 않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 갈 것과 하나님을 경외한 일만 남고 처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다 누려보고 “헛되다”는 말씀을 한 이유는 “우리도 누려보고 경험으로 알라”는 뜻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배가 말한 것을 경험 전에 그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소유하려면 세속이 헛된 것임을 아셔서 세속을 적당히 따돌릴 줄 아셔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마 6:24) 진리와 헛된 것은 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요일 2:15).




제16과 설교에 대하여 (눅 24:25~26) 목록으로


누가 저를 보고 “설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설교란(정의)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여기에 설교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몇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1) 깨닫도록 가르쳐야 하고,

2) 감동되도록 가르쳐야 하며

3) 믿게 하여야 하고,

4) 인상에 남도록 마음 판에 새기게 하여야 하며(신 6:6)

5) 지키도록 가르쳐야 하고,

6) 자세히 풀어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을 더디 믿는 자”라고 책망하셨으니까 설교자는 성도로 하여금 더디 믿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 관한 구약의 모든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하셨으니 이것이 설교의 명령이고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목적 성취를 위하여 성경을 가르쳐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성취를 위하여 설교하려면 많은 노력과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면 성경의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대의는 “하나님을 알리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리며 인류의 타락과 구속 사역의 전개 과정을 알리고 성도의 신앙생활과 그 결과에 대하여 알리는 말씀이라” 한다면 성경의 대의를 거의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성경을 한꺼번에 다 가르치지 못하니까 짧게 분할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일정한 부분만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정 문장을 본문으로 읽었을 때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1) 앞 문장과의 연결 또는 역사적 줄거리를 말해야 하고,

2) 용어의 설명과 문맥상의 뜻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을 “총제목 또는 대지, 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 대지, 소지를 말할 때 설명과 교훈이 따라야 하고,

4) 나가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맥을 설명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전쟁하는 말씀을 읽었더라도 다윗은 메시야의 모형자요, 메시야 탄생의 약속을 받은 계열이란 사실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구원 사역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4. 앞에서 말씀드린 여섯 가지 목적 성취를 위하여 내용의 대지, 소지를 발표하려니까 연구를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설교학이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 내용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에 속하지만 설교는 발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신학보다도 물리적 연구가 필요하겠지요.

1) 우선 상대를 보고 설교하는 것이니까 듣는 자의 환경에 맞추어 적절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시급하고,

2) 언사의 지혜를 써서 잘 알아듣게 하는 것과

3) 시간 조절도 적당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물리적 여건 때문에 더 권위가 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물리적 바람을 타니까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4)설교를 듣는 청중 중에는 물리적 바람을 많이 타는 사람도 있고 적게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문서로 알리면 최고입니다(제가 하는 방식처럼). 그러나 물리적 영향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증거자의 경력, 학력도 필요하고, 웅변력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학위를 가진 목사님들이 큰 교회를 이루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자의 환경, 증거자의 자격, 언사, 시간 조절 등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영적 요소는 없어도 되는가?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도 준비가 따라야 그 설교가 힘 있게 역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대부분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하는 분들이 은혜를 더 많이 끼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설교를 가르친 목사님들은 설교자가 “말씀 묵상을 잘 하여 조리 있게 기록한 후 충분한 기도로 그 말씀을 뜨겁게 비벼서 증거 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설교의 영적 권위는 설교자의 인격과 생활이 뒷받침이 될 때 더욱 감동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거절로 옥에 갇혔다가 순교 직전에 나온 목사님들이 설교 준비를 많이 못하였어도 강단에 섰을 때 많은 감동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것(막 1:21~22)”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권위가 있지요(설교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말씀만 믿으면 다 은혜 받는 데는 지장이 없음). 또 기도에 따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설교자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덕분으로 설교가 잘 되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얼마큼 기도했는지 모르니까요. 또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의 인격과 생활을 따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고, 또 듣는 사람이 그 인격을 알기 때문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들음으로써 은혜를 더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씀 듣는 성도가 설교자의 신분과 사생활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면에서 설교를 듣는 경우이니까 이 경우에는 오직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므로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훌륭하면 참 좋은데 그런 사람이 쉽지 않으니까 성도님들은 오직 성경의 권위를 믿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17과 죄를 찾는 방법(1) (잠 28:13, 고후 7:10) 목록으로


“죄를 찾아 회개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성경에 “회개하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뜻과 회개를 받는 은혜도 아셔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자기의 죄를 아셔야 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모르면 “나는 무조건 죄인입니다”하고 고백을 했어도 죄를 모르니까 여전히 그 죄에 그대로 머물게 되므로 회개의 의미를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표준 목표에 위반되는 것이고, 회개는 바르게 교정하는 것인데 회개로 받는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되고, 구원 절차와 자기 성화의 한 단계로 올라서는 것이며 또 죄사함과(행 2:38) 생명(영생, 행 1 1:18)과 성령의 은혜까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행 2:38). 또 “회개를 옳게 못하여 징계를 받고 있거나 징계의 위험이 있다”고 느끼는 성도에게는 회개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회개를 하려면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뉘우치는 감정이 커야 하는데 이 마음을 스스로 갖기 어렵고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행 11:18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다” 하셨고, 딤후 2:25에서는 “징계를 순종으로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신다” 하셨으며 슥 12:10에서는 “하나님이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때 큰 애통이 있게 된다”(눅 5:32), 또 “회개케 하여 죄사함을 주시려고 예수님을.....높이사 구주를 삼으셨다”(행 15:31),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회개할 것 없는 99인을 인한 기쁨보다 더하다”(눅 15:7, 10), “회개하면 70×7이라도 용서하신다”(마 18:21)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행 17:30, 계 2:5). 성도가 회개의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찾아야지요.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려면 감사꺼리를 찾듯이 죄도 찾아야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취지가 “죄를 찾는 방법”입니다. 죄를 잘 몰랐을 때는 의인인척 하였더라도 죄를 발견하면 죄인의 자세로 낮아져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무슨 죄를 못다 회개한 죄인인가?하시는 분들은 죄 찾는 방법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1. 죄를 찾으려고 하실 때 첫째는 양심에 근거하여 찾으셔야 합니다(롬 2:15). 양심에 근거하여 찾는 죄는 평소에 크게 거리끼는 것만 찾게 되고, 구체적인 것을 다 알아낼 수 없습니다. 주로 형제와 싸운 것, 말실수 한 것, 거짓말 한 것, 누구에게 손해 준 것들이 생각나겠지요. 나라의 세금을 깎으려 했거나 국법을 범한 것 같은 것은 발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으로 죄를 찾을 때는 죄의 성질을 분리해서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의 죄와 언어의 좌와 행동의 죄로 분리한다든지 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죄와 불순종, 불충성으로도 분류하고 또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충성으로 분류해서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자기의 부족이나 성실치 않았던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삐뚤어진 마음도 죄로 여기시고 못 배워서 무지한 것도 죄로 여기시니까 그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법 모르고 죄를 지어도 벌금이 나옵니다. 자동차 보험을 8일 늦게 냈는데 15,000원의 벌금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8일을 끈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찾기 위하여 양심을 가지고 이리 저리 헤매야 합니다.

2. 사람의 지적을 받는 것입니다. 김OO 교육부 총리가 교수 시절에 연구 논문 실적 보고를 하면서 “한 내용을 두 제목으로(두 건으로) 보고했다, 그 대가로 연구비를 두 번 타 먹었다” 하였는데 당사자와 청와대는 “관행이다, 약간의 실수인데 사과했으니까 괜찮다”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도 죄이니까 교육 수장 자격 없다”하고 화살을 쏩니다. 다윗의 죄는 나단이 지적했고, 욥은 “자기를 고발한 소송장을 면류관처럼 받들겠다”(욥 31:35)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우쳐 주는 것을 큰 은혜로 여겼습니다. 성도들 중에 “네가 내 잘못과 내 부족을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지적해 줄 수는 있지만 은밀한 죄까지 다 알려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에 비추어 보는 것과 사람이 지적하는 것은 다 미흡합니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완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잘 한 것도 기록되었고, 못한 것도 기록되었으며 가장 완전한 표준도 있습니다. 잘 한 것은 본받지 않았을 때 죄가 되고, 못한 것은 본받았을 때 죄가 되며 가장 완전한 표준은 예수님이시니까 예수님처럼 못하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행위로서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회개하므로 용서 받고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죄를 찾는다면 어디를 보아야 할까요? 우선 십계명을 보는 것이 빠릅니다. 십계명을 보시면서 자신의 생활에 죄 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필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죄의 종목 기록한 것을 살필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롬 11:28~32에 20종목이 있고, 딤후 3:1~5에도 20종목이 있으며 또 다른 곳에 의의 종목(성령의 9가지 열매, 갈 5:22~23)도 있습니다. 쭉 살펴보면서 자기 입장과 대조를 하면 거기서도 많은 죄가 발견 될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미워함),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의 도모, 불효, 우매, 배약, 부정, 무자비...등이라” 하셨고, 또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훼방, 교만, 불효, 거역, 감사, 거룩지 않음, 무정함과 원통함을 풀지 않음, 참소, 무절제, 사나움, 배반함, 조급함, 자고함, 쾌락 사랑, 경건의 모양만 내고 능력은 없는 것,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죄까지 지적을 하셨으니까 거기에 대조하여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8과 죄를 찾는 방법(2) (출 20:1~17) 목록으로


죄 찾는 방법을 앞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이 시간에는 십계명에 근거하여 죄를 찾고 반성하는 기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마음과 행동이 바르지 못한 것은 자기의 불순결에서 찾는 것이고, 또 마음과 언어와 행동으로 나누어 찾아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지요. 목적에서 죄를 찾는다면 하나님 경외하는 목적, 하나님께 충성하는 목적, 사람을 사랑하는 목적, 자기의 책임 생활 목적에서 불성실함이 나타날 때는 죄가 발견되는데 이것을 순서적으로 찾는 방식이 십계명에 비추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살피겠지만 이 시간에는 죄를 찾기 위해서 살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1. 첫째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하셨으니 “하나님만 모시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다른 신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귀요, 잡신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물입니다. 누가 마귀 모신 사람 있습니까? 아담이 모시고 받들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오니까 문 열어 영접하였고, 달콤한 말을 들었으며 그대로 복종한 것이 곧 다른 신을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찾아온 마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응하여 쫓았지요. 마 4:11을 보시면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집집마다 마귀가 우글거리는데 특히 TV속에 많이 거주하니까 TV 속에 있는 마귀는 쫓고 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접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는 것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물질이요, 자신이지요. 자기의 자존심이고 명예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신이 되면 안됩니다.

2.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섬기지 말아야 하니까 한 마디로 피조물이나 물질계, 현실을 숭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육체 숭상, 물질 숭상, 유물주의 범신론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경배할지언정 금송아지나 우상을 만들어놓고 절하면 안 되겠지요. 물질 의존, 숭상도 다 비슷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존귀를 말로 훼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호칭할 때도 반드시 경어를 tM셔야 하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같으니까 여당 당수가 대통령의 뜻과 다른 말을 해도 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말을 하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과 심판은 죽어봐야 알지” 했다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렘 12:1)고 하였습니다. 이 세 계명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분 깎는 일을 하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4. 안식일 계명인데 여기에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식일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거기에 버금가는 주일 제도가 생겼고, “육일 동안 힘써 일하라” 하셨으니까 영적 신앙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단위의 생활을 충실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일 동안 삶의 실적이 없으면 죄가 되고, 또 성수주일의 경건한 실적이 없어도 죄가 되니까 여기서도 반성하시고 죄를 찾으셔야 할 것이요,

5. 효도 계명입니다. 효도에 자신이 없으면 불효의 죄가 많겠지요. 마음에는 원하지만 시간 없고 경제 없는 사람은 말로라도 효도하고 기도로라도 효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식사 잘 하고 활동하는 부모를 싫어하거나 멀리하거나 세상 떠나기를 바라는 자녀들은 없는지요. 자신이 부모에게 한만큼 자식들에게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계 22:12).

6.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인데 살인의 시작은 미움이고, 형제를 욕하는 죄가 지옥불에 들어갈 일이며(마 5:22) 또 소자를 실족시키는 죄가 자신이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데 빠져야 될만한 큰 죄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8:6).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할 사명”을 주셨지요. 이런 말씀과 관련할 때 살인까지는 안 했지만 살인에 접근하는 죄를 많이 짓지 않았겠는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움, 원심, 보복이 사라지기 전에는 살인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꼭 경험해 보십시오. 은혜 받으면 미워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미워하는 악심도 나타나지 않음을 체험할 것입니다.

7. 간음인데 이 계명도 살인처럼 예비적 간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죄악”(마 5:27)입니다. 이런 죄악이 늙은 사람에게는 없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요즈음 성도 바깥 세상에서는 간음죄를 폐지하려는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있는 간음죄를 인간이 폐지하려는 것은 참으로 놀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8. 도적질인데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은 다 도적질입니다. 장사꾼이 거짓말로 돈 버는 것, 불법적 직업으로 돈 버는 것, 노력이나 공력보다 더 받으려고 하는 것, 세금을 깎아 먹는 것 등 물질 죄악이 퍽 많을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재물이 부족하면 부끄러움 없이 생활을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 성도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지 않는 한 도움 받는 일을 정당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행 20:35). 그러나 구제 요청을 안 했는데도 누가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로 알고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성도가 물질 생활만 깨끗해도 크게 덕을 세울 것입니다.

9. 거짓 증거입니다. 사실을 잘못 표현하는 것이지요. 고의로 누구를 해하거나 자신이 덕을 보려고 거짓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양심이 아니면 거짓, 위장의 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10.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인데 “나도 저 사람처럼 가졌으면 하는 욕심”이 없어져야 합니다. 고후 8:9을 보시면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이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하신 말씀을 실천한다면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하여 죄를 찾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제19과 발람과 선민 (벧후 2:15~17) 목록으로


발람의 기사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 사이에 기록되었고, 또 다른 곳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발람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 브돌인데(민 22:5, 신 23:4) 모압왕이 발람을 부를 때는 “아람에서 데려왔다”(민 23:7)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은 출애굽 한 하나님의 선민과 거리가 먼 관계였고, 그 당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도는 출애굽 한 선민들에게만 있었으니까 발람의 신앙적 근거가 선민의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발람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이방인들 중에서 숭상 받는 복술자요(민 22:7, 발락의 장로들이 복술 예물을 갖고 가서 초청하였음), 사술을 행하는 자였던 것입니다(민 24:1, 사술로 몇 차례 예언하였음). 그리고 이스라엘 선민들은 광야 40년을 거의 끝내고 모압 변경에 이르렀을 때에 발람의 이방적 제사에 유혹을 받고 거기에 동참한 죄 때문에 큰 벌을 받은 것이고, 그 이전에는 발람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고 저희들이 민수기 22장 이하의 발람의 기사를 읽을 때 상당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 혼란이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그를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술가요, 이방 선지자를 하나님이 왜 쓰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변경에 이르렀을 때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청해 와서 종교적 술법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신의 힘으로 기세를 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아주 큰 선물을 갖고 가서 초청한즉 1차에는 거절을 했다가 2차 선물에 수락을 하였은즉(22:13, 20) 여기에 돈을 받고 응한 것은 종교 사업주의자란 누명을 벗을 길이 없는 것이고, 발람이 초청에 응해 올 때 처음에는 하나님이 못 가게 하셨으나 2차 초청 때 또 물어본즉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민 24:1을 보시면(이 때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세 번째 제단을 쌓았을 때임) “전과 같이 사술을 행하지 않고”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제가 민수기 강론을 쓸 때) 3차 제단을 쌓기 이전까지는 발람의 예언이 전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사술이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물론 사술도 썼겠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예언의 역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께서 저주하는 말을 못하게 하시고 축복을 하게 하셨으며 심지어는 나귀의 입을 열어 책망까지 하셨으니까 그와 같은 맥락에서 “가라”는 명령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는 성령님이 이방의 잡신 섬기는 자요, 거짓 선지자, 복술(사술)자, 종교사업자 또 왕이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어용 선지자를 상관하시는가?하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왜 첫 번째 못 가게 하신 하나님이 두 번째는 허락 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전자의 대답은 하나님이 “거짓 선지자나 사탄과도 대화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욥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사탄을 오게 하여 명령을 하신 일도 있고,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도 계시를 주신 일이 있으며(단 4:5)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와도 대화를 하셨고(마 8:31~32), 비택자인 가룟유다와도 관계를 맺으신 일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사탄과의 대화나 관계를 가지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후자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사례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청했을 때 “그것이 좋지 않다”고 거절하셨다가 재차 청원한즉 들어주신 사례와(삼상 8:4~9) 또 신약에서는 가다라의 귀신 들린 자가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들어주신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 발람의 요청이 하나님 뜻에 맞지 않지만 “다른 섭리적 근거에 의하여 허락하신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다른 섭리적 근거”란 하나님이 저주를 못하도록 막으시면 되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한 가지는 선민을 시험하여 벌하시기 위한 섭리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선민이 이방인 종교 행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는가를 시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선민이 이방인 종교 행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는가를 시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신 13:1~3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말대로 이루어져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를 시험해 보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이 따릅니다. 그것은 “마귀나 잡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데 발람 따위가 저주를 했더라도 하나님이 저주 안 받게 하시면 될 것 아닌가? 꼭 저주하는 입까지 막으셔야만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악한 자가 저주해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이니까요. 그런데 왜 저주하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하신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위배되는 것은 모양이라도 나타내지 않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효력이 없다고 “모양은 내라” 할 수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선민의 실수입니다. 선민은 발람의 얼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의 유혹(올무)에 빠진 것입니다. 발람은 발락왕에게 예물 값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선민을 진노 받도록 만드는 술책으로 선민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당에서 고기 냄새를 풍기고 옷 벗은 여인들로 춤추게 하면서 선민을 유혹했을 때 정욕에 찬 젊은이들이 가까이 가서 구경하다가 그 제사에 동참하고 제물을 먹은 후 여인들과 음행하는 죄를 범하여 그들의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선민은 발람의 신분을 본래 몰랐지만 잘못된 이방 종교 행사에 접근했다가 유혹되어 범죄하고 24,000명이나 죽는 진노를 받았으니 이런 유혹을 극히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20과 발람 사건에 대한 문답 (민 22:1~6) 목록으로


1. 발람 사건의 기사가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역사적 기사는 민 22:1~25:9에 있고, 평가적 또는 교훈적 기사는 여러 곳에 있으니 신 23:4~5(발람은 메소포타미아 브돌에 사는 브올의 아들인데 그가 뇌물을 받고 선민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선민을 사랑하사 그의 저주하려는 것을 막고 복이 되게 하셨다. 수 24:9~10), 수 13:22(여호수아가 시혼의 나라 헤스본을 점령할 때 발람도 칼로 죽였다), 느 13:2, 미 6:5(발람의 저주와 꾀임을 추억하라), 벧후 2:15(불의의 삯과 연락을 기뻐하면서 음심이 가득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는 자라), 유 11에서는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 하셨고, 계 12:14에서도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고(우상 숭배, 종교 사업, 술법 등),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러 성귀의 뜻을 종합하면 발람은 이방적 사이비, 종교 사업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발람과 발락과 선민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1) 발람은 메소포타미다 브돌 사람으로 이방인이요, 술사였고,

2) 발락은 모압왕이었으며

3) 선민이 이적으로 아말렉을 무찌른 사실을 두렵게 여겨 선민의 마지막 출애굽 과정인 모압 변경에 왔을 때 발람을 초청하여 그의 술법(마법)으로 선민을 저주하여 그들의 기세를 꺾으므로 자기 영토의 안전을 꾀한 자입니다.

3. 이방 종교인의 술법적 저주가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은 마귀의 역사라도 하나님이 막아 주시기 때문에 안전하게 믿지만(발람 사건에서도 그런 취지가 나타남) 이방인들은 잡신 섬기는 자들을 두렵게 여기고 그들의 축복이나 저주가 효력을 준다고 믿는 것이 토속 종교의 관행입니다. 지금도 무속 종교에서는 그런 일을 하는 줄 압니다.

4. 발락의 사신들이 발람을 청했을 때 발람이 여호와께 문의한즉 “가지 말고 저주도 하지 말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방 술사가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는 발람의 행동이 선민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상대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마귀와도 상대를 하시니까요(욥 1:6~9, 단 4:5, 마 8:31~32).

5. 그런데 발람이 왜 가려고 하였으며 두 번째 가려고 했을 때는 왜 허락하셨을까요? 발람이 1차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랐거나 뇌물의 분량을 많게 받기 위하여 거절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교 사업자나 복술자들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그래서 그가 바란대로 2차 초청을 받았을 때는 더 많은 예물과 존귀를 갖고 왔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신의 지도를 받는 자인척 하면서 계시를 기다렸을 때 “하나님이 가되 이르는 말씀만 하라”고 하였다 하면서 따라나선 것입니다. 여기에서 1차 금지하신 하나님이 왜 2차에 가라고 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몇 가지로 구상할 수 있습니다. 민 24:1에 보시면 3차 저주를 시도하려 할 때 “발람이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뜻은 “1차, 2차 저주 때에 사술을 썼다”는 뜻이므로 하나님이 “가라”하시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명을 받은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이 나귀로 그의 길을 막고 또 나귀로 말하게 하셨으며 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를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22:21~35)

6. 발람이 나귀의 말과 하나님의 사자를 접했을 때 “돌아가겠다” 하였는데 하나님이 “함께 가서 이르는 말만 하라”(22:34~35) 하셨으니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것도 발람의 거짓말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발람은 저주할 때 저주를 못해도 따라가는 것 까지는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당한 보화를 받았으니까 노력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 만일 이 때에 발람이 거짓 사술을 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가라”하신 것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뜻을 변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시지만(욥 23:13) 목적이 아닌 절차에서는 구하는 자의 소원에 따라 주실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할 때도 그러하였고(삼상 8:4~9), 또 귀신의 청도 들으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8:31~32). 그러나 그의 저주만큼은 축복으로 변하게 하신 것입니다.

8. 저주를 못하고 축복을 하게 하셨으면 결국 피해와 징벌이 선민에게 없어야 하는데 왜 24,000명이 죽고 또 음행에 가담한 자들까지 죽었습니까?(민 25:1~18) 그것은 유혹 받은 선민들의 죄값으로 징벌을 받은 것입니다. 계 2:14에 보시면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게 하였다” 하였으니 그 올무가 바로 우상 숭배와 음행에 말려들게 한 것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자신이 입으로 저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그 저주대신 선민을 범죄에 끌어들여 벌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방 종교인(특히 잡신자들)은 모든 신을 대등하게 여기는 것이 특징이고, 그 중에 자기와 가장 가까운 신을 더 섬깁니다. 그런 맥락에서 발람은 하나님의 뜻도 공부하였을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계명을 범하면 벌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 방법을 쓰도록 발락에게 권한 것입니다. 그래서 2차, 3차 선민이 잘 보이는 장소로 가서 우상의 제물과 연락과 여인의 몸으로 선민을 유혹한 것입니다. TV에서 외도하는 남자는 42%, 여자는 19%라 하는데 시작은 음식을 같이 먹고 연락을 하다가 더 큰 죄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먹고 놀기 좋아하는 성도는 유혹에 가깝다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1과 세 가지를 묵상함 (딤전 2:4) 목록으로


세 가지를 묵상하였습니다. 하나는 “강론과 설교에 대한 것”이고, 다음에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이해함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는 것”은 인류를 다 천국 시민으로 만드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런 소원은 있으셨지만 소원대로 다 하시지는 않고 택한 자만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소원이 있다 하여 다 이루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원과 성취를 구별하여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한 선민을 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 하셨으나 백성들의 타락으로 이루시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인데 만일 다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면 타락의 자유를 억제하시고 믿음을 붙잡게 하셔야 하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상당 부분 허용하셨고, 그 허용하신 만큼 자신의 주권을 양보하시면서 공의를 실현하신즉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에 하나님의 주권 의지를 양보 또는 허용하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선민을 직접 통치하시기를 원하였으나 백성들이 강하게 원하니까 백성의 원대로 자기의 의지를 굽혀 주시는 것과 같은 것”(삼상 8:6~9)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를 안다”는 뜻을 넓게 해석하면 저희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으로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본문 묵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제가 한 가지 묵상한 것은 강론과 설교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설교란 말은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는 것 또는 바른 것을 깨우치는 것으로 통하고, 설교학에서는 “성경에 근거한 내용을 듣는 자로 하여금 감동받도록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론은 성경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뜻만 자세히 풀어 설명하면 강론의 목적을 다하는 것입니다. 감동은 강론을 들은 자가 스스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감동되게끔 말을 잘 해야 하니까 상당한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설교를 잘 해서 성공한 분도 있지만 설교를 못해서 교회를 키우지 못한 분도 많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들이 강론을 듣고 강론 속에서 감동도 받고 회개도 하며 실천도 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증언자로 하여금 설교 노하우에 신경 쓰지 않도록 설교는 강론도 해야 하지만(눅 24:27) 지적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력이 있지만 부작용도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라, 경건을 실천해라, 봉사를 어떻게 해라”하고 방법과 함께 강조하는 것이 설교입니다(눅 24:25~26). 성경 강론을 신앙 양식의 주원료로 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는 한 계딴 부족한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며칠 전 어린이 주일 쯤에 기독교 TV에서 어떤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하면서 “자족과 감사 생활을 가르치고 효도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는데 제가 끝날 무렵에 잠깐 듣고 저 나름대로 또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잠 22:6을 보시면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땅히 가르칠 것이 무엇입니까?

1) 절대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가르쳐야 하겠지요.

2)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하며 유한 것을 가르쳐야 하겠지요.

3) 인간이 연약하여 자기 힘으로 목적 성취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요,

4)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 또 정직한 자, 또 힘써 노력하는 자를 복 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5) 성경이 믿음과 생활의 원칙임을 가르치고 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요,

6) 항상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고,

7)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는 법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8) 물론 효도를 잘 해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것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이 때 가르치면 무조건 듣습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가르쳐도 효력이 적습니다. 방탕과 완악이 막을 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 교훈 받은 것 기억하십니까? 저는 어릴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교훈을 많이 받았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멍석에서 흩어진 나락을 주으시면서 “너 땅 열 길을 파보아라 쌀 한 톨 돈 10원이 나오는가?” 하셨고, 또 저의 외할머니는 저의 집이 가난한 것을 탓하시면서 “일 안하고 술만 먹으니 가난하지 않겠느냐 너는 10원이라도 돈을 틀어쥐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늙었어도 그 말씀이 마음에 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잘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3. 호 6:6에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 하셨으니까 하나님을 아시려고 힘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도 있고, 인내도 있으시며 예고도 하시고 기회도 주시며 보복도 하시고, 진노도 하시며 쓸어 없애기도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입니다. 또 “양보도 하시고(삼상 8:6~9), 정상도 살피시며(창 20:4~6) 감찰하시고(시 139:1~4), 자기 백성을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시되 본심은 아니시라(애 3:33)”고 하셨습니다. 또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신다”(잠 8:2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인격적 속성이 많습니다. 그 하나님을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2과 디모데와 교훈 (행 16:1~5) 목록으로


“디모데와 교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디모데를 마음에 떠올리신다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우선 성경 디모데전후서를 생각하시겠지요.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사도 후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엊그제 시찰 회원들이 야유회에 나가서 잠깐 예배를 드리는 중에 이 본문을 들으면서 들은 말씀과 내가 구상한 말씀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1. 우선 디모데에 대하여 살피면 그 이름의 뜻이 “디모데오스”로서 “하나님을 높인다” 또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주후 50년경에 1차 전도를 더베와 룻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갈라디아 중남부, 터키 영지)으로 갔을 때 만난 청년인데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지만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는 유대인 여성인데 그 외조모의 신앙이 특별하여 그의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계승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을 때는 디모데가 이미 복음 신앙을 가진 때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을 보아 하나님은 경외하되 율법주의자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의 복음 선교 이외의 길을 통해서 복음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란의 어떤 곳에 도마 기념 성전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도마의 선교 역사가 성경에 나타난바가 없지만 이란에 그의 선교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의 할머니도 초대 교회 오순절 이후의 역사를 예루살렘이나 또는 다른 사역자를 접하여 복음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본문에 보시면

1)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었다” 하셨으니 제자는 스승을 잘 닮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시대에는 예수님 신앙과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닮아야 할 것입니다.

2) 형제들은 “룻스드라, 이고니온, 더베의 형제들”입니다. 더베에서 룻스드라는 북으로 60㎞쯤이고, 룻스드라에서 이고니온은 또 북으로 50㎞쯤인데 “그 지역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향을 중심으로 200리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칭찬 받는 사람이고, 바울과 신앙이 같은 청년이기 때문에

3) 바울이 “함께 선교 사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시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은 대상이 있습니까? 필요한 사람, 유익을 얻을 사람, 오해나 충돌이 없을 사람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도 쓰시고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쓰고 싶은 사람이었고, 동역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또 디모데도 그렇게 바랐기 때문에 그 분들의 협동 사역이 잘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4) 작은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초기 문헌에 의하면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초대 감독을 하다가 도미시안 황제(81~96년)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큰 고통도 감수를 한 것이지요. 작은 고통이란 청년 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이방인 전도도 하겠지만 “이방인들을 껄끄럽게 보는 유대인들에게 동화된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는 것이 좋다” 하였을 때 디모데는 그런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요, 칭찬 받는 자이며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고, 고통을 감수하는 자라는 뜻이 이 말씀의 교훈이고,

3. 디모데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동행하였고(행 17:1~15, 18:5, 고후 1:19, 살전 3:1~2) 또 3차 때도 함께 사역한 기록이 있습니다(행 19:22, 20:4, 고전 4:17, 16:10, 고후 1:1) 문제는 바울과의 관계가 대단히 두터웠다는 뜻으로 “동역자, 함께 수고하는 자”(롬 16:21)라는 말씀이 있고, “아들, 형제, 믿음의 신실한 아들”이란 말씀도 있으며(고전 4:17, 고후 1:1, 딤후 1:2) 또 끝까지 필요했던 사람이고(딤후 4:9), 히 13:23에서는 감옥살이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 사도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모데를 특별히 사랑하고 지도하여 사도 시대 이후의 지도자로 기초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디모데가 훌륭한 것과 복음 사역에 힘쓴 것을 말씀드렸는데

4. 디모데로 말미암아 교훈 받으셔야 할 중요한 내용은 디모데가 사도 이후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울의 제자는 디모데 외에도 많았습니다. 마가, 누가, 디도, 에바브라, 브리스길라 부부, 뵈뵈 등. 그런데 문제는 성경으로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가 사도 시대와 사도 후 시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이 말씀의 주이시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모범을 따르면 됩니다. 그때는 다락방 하나로 만족하였고, 어떤 장소에서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이 넓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하였고, 또 교회 지도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사도 행전과 편지서에 기록된 것인데 이 사도의 직임이 주후 100년으로 끝납니다. 사도의 특징은 성경을 기록한 것과 성경을 진리로 믿게 할 만한 이적을 나타낸 것인데 그 사역이 끝나니까 사도 시대도 지나간 것인데 사도 시대 이후에(오늘의 시대) 교회와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과 사도 아닌 초대 사역자 디모데에게 그 모범을 인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나 교회 직분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도 그 모범이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가 다 받은 것이고, 디모데가 사도로부터 받은 지도권이 무엇입니까? 그 지도권을 장로회라는 단체에서 안수로 받았는데(딤전 4:14) 그 직무를 보면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며 기도하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하고 또 신실한 자에게 일을 맡기고(직분), 감독하고 다스리며 책망하는 것까지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는 기록된 말씀으로 직임을 받은 사도 후시대의 교회 지도자로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23과 문서 사역의 유익 (왕하 22:8~13, 엡 3:3~4, 골 4:16) 목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앞으로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은혜 받는 것보다 문서로 된 말씀을 읽어서 은혜 받는 생활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00여 년 전에는 성경도 귀했고, 한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모임이나 예배 때 듣는 것 외에는 진리를 받을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점차 설교집이나 책이 나왔지만 아직도 글을 읽어서 은혜 받으려는 성도가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무엇보다도 바빠졌습니다. 그리고 경쟁은 더 심해졌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안 바쁜 사람도 계시지만 바쁘지 않은 것은 일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하려면 바빠야 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셔야만 경쟁 대열에 따라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도 일종의 헌신일 수 있겠지만 한 시간에 성경 한 장 읽는 것과 열 장 읽는 것의 차이가 없지 않은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런 능률의 노하우를 차려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 시간 예배를 드릴 때 말씀 증거 하는 시간이 30분이라면 그 30분에 증거한 재료를 문서로 읽을 때는 10분 안에 다 터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후배 목사님들과의 모임에서 설교문을 7~8편 증언하는데 40분쯤 걸립니다. 매 편의 설교문이 예배 시간에 30분쯤 설교해야 하는 내용이지만 취지를 일깨우면서 읽어나가면 은혜는 은혜대로 받고 30분을 끌면서 설교할 것을 5분 내에 다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 번 예배를 드리면서 들을 설교를 1시간 내에 다 보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의식주의, 전통주의에 얽매여서 설교로 예배의 의미를 살리려고 애를 썼고, 그러다보니 발표력이 좋으면 사람을 더 모으기도 했지만 반면에 발표력이 부족한 교회는 손해도 본 것이 사실이지요. 언제까지 설교 위주의 교회를 섬길 것입니까? 설교 잘 하는 목사님의 말 재주가 인기를 끄는 시대도 지나가야 합니다. 오직 말씀의 의미만 나타내는 설교의 시대가 와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하면 감동을 더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감동은 초보신자에게 해당되겠지요. 연단 받은 성도들은 “그 말씀이 주시는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장 시간 성도의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 취지는 “사랑하라, 계명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듣는 귀도 높이고 증거의 단수도 높여서 “문서에 있으니 알아서 하시요”하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지금 성경 문서를 읽고 은혜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기록하여 읽게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로 써서 전달한 것을 익히 아실 줄 압니다. 방금 읽은 본문은 요시야왕이 율법을 읽으므로 옷을 찢을 만큼 감동을 받고 회개하였으며 또 느 8:8~9에도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였을 때 다 감동을 받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서는 말보다 확실한 것입니다. 또 전달할 수도 있고,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서로 보존된 말씀이 성경이고, 편지로 전달하여 돌려가면서 읽으라(골 4:16)한 것이 역시 신약의 편지서이며 바울사도는 엡 3:3~4절에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을 대강 기록하였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을 읽으라”는 뜻과 같은 것인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문서로 만든 설교문을 읽으시므로 예배 때에 듣고 감동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을 짧은 시간에 터득하는 습관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자가(저처럼) 설교문을 만들어 놓았으면 강단에서의 설교는 취지만 간단히 증언하고 “어떤 문서를 읽어서 은혜를 받으시요”하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문서의 증언은 두 번, 세 번도 살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보도록 권할 수도 있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수급할 수 있고, 또 영구히 보존할 수 있으니 일거다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특수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40년 가까이 목회하면서 설교한 것, 가르친 것, 연구한 것, 믿음 또는 성경과 관련하여 묵상한 것들을 거의 빠짐없이 문서로 남긴 것입니다. 만일 제가 이런 문서를 남기지 않고 강단에서 외치기만 하였다면 누가 나의 증언을 듣고 오래 기억해 주겠습니까? 바람 지나간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기록하는 은사를 주셔서 거의 100% 글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남겨 놓은 글을 읽어서 은혜 받으려 하지 않고 꼭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만 들으려고 한다면 그동안 설교 때문에 고생한 많은 목사님들을 더 괴롭게 하는 결과가 올 것이고, 또 듣는 설교로만 영의 양식을 삼으려 하신다면 훨씬 빈약한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하시는 목사님들은 좋은 설교를 준비해 놓고 교인들이 귀만 갖고 와서 들어주기를 바라시겠지요. 그러나 귀로 열 마디를 듣는다면 눈으로는 100마디를 본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혹 성도님들 중에는 “읽는 것이 서툴다” 하시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100년 전도 아니고 50년 전도 아닙니다. 핸드폰으로 TV를 보고 여성이 대통령 나오려고 하는데 옛날 방식에서 발전 안 하시면 되겠습니까? 제 아내도 70이 다 되어 갑니다만 신문을 잘 봅니다. 신문 보는 식견으로 영의 양식을 수급하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예배 순서를 보시면 찬송, 교독문, 사도신경, 주기도문은 늘 하는 것이고 다 아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찬양과 기도와 설교뿐이지요. 그래서 예배 순서를 진행시킬 때도 늘 하는 것은 초신자들을 위하여 가끔 한번씩 하고 새로운 것만 진행시켜서 예배 시간을 단축시킬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찬송, 기도는 다 집에서 하고 교회에서는 혼자 못하는 것만 할 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배는 격식보다 의미와 느낌에 있으니까요.

5. 목표에 대한 말씀

제24과 목표를 세우자 (빌 3:13~14) 목록으로


저는 젊었을 때에 목회를 하면서 상황 따라 생활한 일이 많고 특별한 목표와 계획을 갖지 않고 살았습니다. 늘 설교 준비와 심방에 바빴고, 피로를 느끼다 보니 무슨 목표나 계획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피로를 느낄 때 무슨 목표를 세운다면 일을 적당히 하고 휴식하는 시간표부터 짰어야 할 것이지만 고용 당한 하나님의 종이 되다보니 내 주관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자유로운 환경을 갖고 늙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세상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겠다”하는 인식이 들어서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일을 하니까 참 보람도 있고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 성도님들 중에 생활 목표와 시간표 없이 살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꼭 좋은 목표를 세워놓고 부지런히 생활하는 습관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주시고 이루게 하신다(빌 2:13)”는 말씀을 하신 일도 있는데 본문에서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성취의 뜻) 푯대를 향했다”고 하셨습니다. 앞에 목적하는 말뚝을 세워놓고 그리로 향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바울 사도의 목표는 “예수님 안에서(예수님 뜻대로 살면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천국에서 상 받을 일)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노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목표를 다시 설명 드리면 “예수님 뜻대로 사는 것과 천국에서 칭찬 받을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뒤에 것을 잊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에 잘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새 당원이 된 일, 율법주의 이단자이었던 일, 또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자시의 개종과 변화로 이미 용서 받은 것이니까 그것으로 전진에 지장되도록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오직 앞에 있는 일 즉 미래 지향적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와 우리의 삶의 목표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은 적극적 사명자이고 우리는 보통 사명자이며 또 바울은 단신이었고 우리는 가족을 동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에 목표를 두셔야 할까요?

1.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목표를 두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목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마 7:21)” 하셨고, 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셨으니까 항상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그 뜻을 따르는 목표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계획하시거나 행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일까?”하는 것을 판단한 다음에 행하셔야 하겠지요.

2. 하나님(또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목표를 세우셔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12세된 예수님과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예수님이 일행 중에 따라 오시겠거니”하고 오다가 예수님이 안 계시니까 다시 성전으로 가서 만났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눅 2:44)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지도 않았으면서 자기와 가까이 계신 줄로 착각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6․25때 어린 아이를 등에 없고 허둥지둥 피난 오고 비행기 폭격을 피하는 중 한참 오다 보니까 업은 아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가정 주부가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TV보는데 정신을 쏟으면 다 타버리는 것처럼 성도가 세상에 팔리면 예수님을 떨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신을 차리시고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도록 목표를 세우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말씀 묵상과 기도의 끈을 항상 마음에 걸고 다니셔야 할 것입니다.

3. 다음 세 번째 목표는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지는 목표입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고(요 19:17), 성도들에게도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란 도덕적 책임(가족적 또는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짐승도 자기의 새끼를 키우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자기의 생활을 믿음 안에서 자립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지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을 지키시면서 좀 힘들더라도 노력하고 축복받아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목표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늦게 받는 축복과 상급에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욥은 장년기에 재앙을 받았지만 그때에 처신을 잘 하였기 때문에 노년에 큰 복을 받았고(욥 42:12), 바울 사도도 “하늘에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마 6:19)하신 말씀도 그 뜻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여기에 목표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충성하시되 축복을 조급하게 기다리지 마시고 또 누리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많이 누리지만 나는 이것도 과하다”하면서 사는 것이 축복과 상급을 멀리 바라보는 목표인 것입니다.

5. 마지막 목표는 하루의 시간표를 반드시 만드는 것입니다. 새벽에는 무엇을 하고, 오전에는 무엇을 하며 먼저 할 일, 나중 할 일을 분별하여 하루의 목표를 세워 놓고 그대로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늘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바쁘게 사셔야 시간도 잘 가고 잡념도 없어집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를 하시든지 읽을거리를 읽으시던지 휴식을 취해서라도 바쁘게 사는 일정표에 목표를 두시라는 것입니다. 목표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25과 목적에 적응함 (눅 13:6~9) 목록으로


“목적에 적응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이 제목을 다른 말로 바꾸면 “존재와 상태의 목적을 알고 행하자”는 뜻입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것이 있고 많은 상황이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존재가 자신이고, 또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상황이며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 외에 만물도 있고 하나님도 계시며 이웃과 사회, 국가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와 상태의 목적을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한 농부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맡긴 것입니다. 주인이 무화과를 심은 목적은 때가 되었을 때 열매를 거두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열매를 거두러 간즉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주인은 3년에 세 번이나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열매가 없으니까 찍어버리려 하였는데 종이 “거름을 잘 주고 힘써 볼 것인즉 1년만 더 기다려 달라 하면서 그때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심긴 목적은 열매를 위한 것이고, 주인이 열매를 바라되 상당한 기회를 주었으며 그래도 목적 달성이 안 될 때는 찍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도 존재와 목적에 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찍힌다는 것은 꼭 죽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도 찍히는 것입니다.

1.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목적을 아십니까? 인간은 지분권을 갖고 자기가 목적을 세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는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농부가 무화과를 심을 때 열매를 바란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위하여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 형상대로 짓고 기뻐하신 뜻을 이해하셔야 합니다(창 1:27). 여러분이 자식이나 손자를 보았다고 가상해 보세요. 그 어린 아이가 부모나 조상을 닮으므로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존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8:29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자기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 영광에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목적에 따라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기 위하여 항상 경성하며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기주의 목적 때문에 의연히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행동들도 많이 자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첫째는 목적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믿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가 아닌 상황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목적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을 알아서 열매를 맺어야 하겠지요.

1) “구원 받을 목적으로 예수 믿는다”해도 맞는 대답이지만 “구원 받아지기 위하여 ALE는다”는 말이 더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는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받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내가 왜 예수를 믿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어져서 믿지요. 왜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을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한 것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성경으로 연구하셔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타났고,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모범이 나타났으며 또 신약 다른 곳에서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모범이 나타나 있으니까 날마다 그것을 묵상하여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기초 지식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간 모범을 보이신 것이 족하지만 그 예수님이 이 지구상에 또 한 번 오셔서 사신다면 어떻게 사실까? 하는 것도 묵상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놀러 다니실까? 기와집에서 사실까? 무슨 오락을 좋아하실까? 만일 예수님이 또 한 번 오신다면 목적을 갖고 오실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사시겠지요. 따라서 저희들이 믿음생활을 하는 이 상황의 목적은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함”이란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저희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 하여 교회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어디에 두셔야 합니까?

1) 공예배를 드리는데 두셔야 하겠지요. 예배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고 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교회라는 신령한 단체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가깝게 인도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정성을 기울이셔야 하고,

2) 교회의 사명이 예수님의 모범을 보이는데 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가 교회 생활을 하시되 열심히 예수님을 배우시고 또 사랑 실천을 배우셔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사랑 실천의 방법을 많이 배우면 자신이 이웃 사랑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성도들은 사회인의 한 사람이니까 자신이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있는 목적을 열심히 성취하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예수님을 배웠고, 정의를 배웠으며 사랑 실천을 배웠으니까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 성격을 밝히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빛이요 소금의 사명입니다. 지금 저는 성도 개인의 존재적 목적과 교인된 목적과 사회인 된 목적을 말씀드렸습니다. 반드시 그 목적에 부응하셔야 합니다. 제가 30대 목회를 할 때 어떤 분이 교회를 처음 출석하여 인사를 하는 중에 “목사님의 생활이 퍽 어려우시겠다”하면서 교회 재정 유통이 빈약함을 염려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인식은 “목사는 설교하고 교인은 그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교회라”고 안 것입니다. 물론 고마운 염려이지만 교회는 예수님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6과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목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1. 예수님이 큰 소원을 갖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원이 성취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는 뜻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딱 한 가지만 성취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소원을 가지시면 좋을 것입니다. 단 한 가지로 모든 것을 만족 할 수 있는 소원이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건강일까요? 권세일까요? 이 세상의 것을 갖는다면 그런 것 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자기의 소원을 다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권세가 있어도 그것으로 자기의 죄와 심판은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 한 가지로 만족할 수 있는 소원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는다면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목적과 행복과 미래를 다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소원이 “불을 땅에 던지는 것”이라 하셨는데 이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사역의 임무를 끝내고 구원의 남은 사역을 성령님에게 인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역이 구원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창조 사역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누구를 희생시키시지 않았지만 구원 사역을 하실 때는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으니 귀한 사역이 아닐 수 없는데 하나님은 이 사역을 3단계로 나누어 시행하신 것입니다. 첫 단계는 준비 기간인데 이 기간이 구약 시대입니다. 이 기간에는 성부 하나님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 생존 시대인데 이 때에 예수님이 구원 사역의 근거를 성취하시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취하신 것은 십자가로서 속죄 사역을 이루신 것이고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서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요, 그리고 마지막 3단계는 택한 백성이 구원을 받도록 이끄시는 사역인데 이 사역이 오순절 이후 성령님께 인계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 사업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님 보내시는 것을 “불을 던지는 것”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뜻에서 그와 같은 상징적 용어를 쓰셨다고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 사역이 강하고 뜨겁게 역사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3. 이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려고 구상한 것은 이 본문 해석이 아닌데 말씀을 드린 것이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본문대로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성령님에게 인계된 후 강하고 뜨겁게 역사되기를 바라셨지요. 그러면 “나는 무엇을 원해야 좋을까요?” 이 자리에 많지 않은 성도를 맞이하면서 설교자(목회자)로서 무엇을 바라야 마땅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1) 여러분들이 한 주간을 충실하게 살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생산성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생산성 있게 사셨으니까 저희들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느 순간도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 없을 만큼 잘 사시다가 이 자리에 오시는 것을 바라는 것이고,

2) 주일날 교회에 나오시는 것을 많이 사모하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에게 만족을 주신다”(시 107:9)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하나님 모시고 사는 것을 가정 생활로 비유한다면 주일에 교회에 나오시는 것은 외식, 특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을 많이 돌리고 축복을 많이 받아야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나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설교를 잘 들으셔야 하겠지요. 그런데 요즈음 같은 설교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설교 듣는 방법을 한 단계 높여서 성경을 연구하는 자세로 들으셔야 합니다. 신학생이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때 성경 연구하는 방법을 배워가지고 그것을 설교로 나타내는 것처럼 성도들도 주관적 연구를 하면서 들으면 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설교를 한다면 이렇게 연구하여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설교의 특권을 목사에게만 맡기면 교인들의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4) 성도들의 수준이 교역자처럼 전문화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성경 해석과 교리와 사상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판단력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량주의,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가 기업체로 변신해 가는 상태에서 순수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수준의 성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소원은 성도의 신앙 자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 개개인의 하나님이시고 또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가 성도들 각자에게 성경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자기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만족하고 친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고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특식처가 되어야 하고 일반적 생활을 가정에서 영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7과 최상의 목표 (시 40:8) 목록으로


여러분 최상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생활비, 교육비, 의료비, 주택비를 벌어 쓰는 목표도 중요하고, 또 건강 지키기 위한 목표도 있고, 범위를 더 넓힌다면 이상적 가정이나 이상에 맞는 교회를 이룩한다든지 사회 정화를 위하여 목표하는 일을 가지실 수도 있겠지요. 저에게도 목표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10년이라도 더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나의 목표와 소원이 다 허공을 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텃밭에서 호박도 심고 장작을 패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내가 쓰던 책이나 물품들을 정리해 보고 싶고, 자녀들이 다 가정을 갖고 안정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으며 초대 교회 같은 모범적 교회를 섬기고 싶고, 또 취미 중 하나는 고장난 물건을 고치는 취미가 있어요. 지금도 고장난 선풍기를 고치고 싶은데 이 “최상의 목표”란 말씀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최상의 목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묵상을 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순간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눅 24:31)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한 목표를 다 가지시겠지만 최상의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1. 좋은 믿음 갖는 목표입니다. 좋고 나쁜 믿음이 따로 있는가? 하시겠지만 십자가를 믿고 구원 받은 믿음은 같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성도마다 큰 차이를 이룬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나 둘째가 다 아들인데 큰 아들은 농사짓고 둘째 아들은 대통령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히 11:6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좋아 하신즉)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눅 12:49) 하셨지요. 이 불이 성령의 불이고 믿음을 승화시키는 불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불을 일으키는 방법은 성경 공부와 기도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혼자 할 수 있지요. 성경 공부도 혼자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시면 반드시 성경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갖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깨달으므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믿음의 효력입니다. 교회에서 열 시간을 보냈다고 가상할 때 성경 공부 한 시간이면 다른 일로 아홉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키우는 요소는 말씀 뿐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보통 시계를 만원이면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억에 가까운 시계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값진 믿음이 최상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2. 이상적 교회가 최상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행 20:28)”, 하셨고, 또 “주님의 몸이라(골 1:24)” 하셨기 때문에 중요한데 교회도 최상의 믿음처럼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엡 5:27을 보시면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려면 최대한 초대 교회를 닮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하면서 핍박 중에 전도하였고(행 2:44~45, 8:1), 안디옥 교회는 가르침과 선교를 하였으며(행 11:26, 13:1~5)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상고하는데 주력하였고(행 17:1),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차렸고(살전 1:3), 서머나 교회는 사단의회(이단)를 물리쳤습니다. 이런 일들이 초대 교회의 모범입니다. 그런 중에 사랑 없는 에베소 교회(계 2:4)나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계 3:5)와 말썽 많고 복잡한 고린도 교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에 말썽이 많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말씀으로 은혜 받는 기관입니다. 말씀만 가르치면 됩니다. 교육 자료를 문서로만 전달해 주고 사랑만 실천하라 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배란 것은 주보에 나타난 순서를 진행해야만 예배가 되는 줄 아시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그 순서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순서는 전체 생활의 일부이고, 공예배 의식으로 만든 것뿐입니다. 성도가 어떤 장소에 모이든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 돌리고 어떤 환경에서든 성경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배당 지어 달라”하신 일이 없고, 자신도 갖지 않으셨으며 “큰 단체, 교회만 좋다”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나 성도들은 예배당 터 사고 건물 짓고 많이 모이며 돈 많이 나오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당 건물과 사람의 수와 돈 많은 것이 자기의 믿음을 키우는 요소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바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것들이 다 인간적 명예주의에 얽매인 것이 아닌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주의, 이기주의가 없고 세속주의도 없으며 물량주의도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다가 자기 생애를 마치는 목표입니다. 시 40:8을 보시면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하신 말씀이 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앞에 놓고 “주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하셨으니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예수님 따를 때부터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 하셨고, 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갈 5:24) 하셨으며 이런 이유들로써 성도는 항상 주 뜻대로 사는 일을 최상의 목표로 삼기 위하여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엡 5:17). 이 시간에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목은 최상의 목표요, 그 목표는 ① 믿음의 목표, ② 좋은 교회의 목표, ③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목표인 것입니다.

제28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엡 5:10~11) 목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이 본문에 근거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함”이란 제목의 설교가 두 편이나 있습니다(일반 설교 166과, 7분 7집 77과). 중복되는 내용도 있겠지만 또 묵상을 하였습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을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하셨는데 이 “시험하라”는 용어를 다른 번역에서는 “가려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행사들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과 기뻐하지 않으실 일을 분별, 판단하여 가려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갈 1:10을 보시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의 생활 속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일들이 많고 그 쪽으로 힘을 쓰다보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대하여는 소홀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에 든다면 굉장히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거기에 큰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광경을 예수님도 기뻐하실까요? “한국이 16강에 들어야 예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으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저들이 헛된 일에 힘쓰는구나”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옷을 잘 입었으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요? “사람은 겉을 보거니와 나는 중심을 보기 때문에 별 흥미를 못 느낀다”(삼상 16:7)고 하실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너무 화려한 것이 많은데 이럴 때도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만 보시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겉치레의 모든 행사는 대부분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사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이런 일이 또는 내가 행하는 일이 주님의 기뻐해주실 일인가?하는 것을 시험하고 판단하여 가려내는 지식이 있어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또 한 번 오신다면 어떻게 사실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을 성경에서 찾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시험하되 열매 없는 어두움에 참예하지 않도록 책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열매가 없다는 것은 생산성이 없다는 뜻이고, 어두움의 일이란 죄가 되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을 의미함)을 떠나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헛되게도 살지 말고 거리끼게도 살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고 생산성 있는 일에 진력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 큰 사람이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논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부모가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자기 일에 충실하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2) 히 11:6에서 믿음이 있어야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끝가지 하나님만 믿고 또 보이지 않는 것과(히 11:1)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롬 4:18, 8:24~25).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약속을 지키실 줄로 믿는 바람에(히 11:19)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그 후손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말씀의 능력을 믿었을 때 기뻐하시고 칭찬하셨고(마 8:10), 가나안 여인이 끝까지 의지하고 매달렸을 때 “네 믿음이 크다” 하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셨으며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막 9:23)

3)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해야 기뻐하십니다. 혹 하나님의 이기주의 같지만 인간이 지분권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즉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만 섬기라” 하셨고(출 20:3), 또 하나님만 섬기되 “무엇 무엇 다 하여 섬기라”(마 22:37) 하셨기 때문에 정신이 다른 데로 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부모, 자식(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마 10:37) 하셨으니까 하나님만 사랑해야 기뻐하신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가족이나 현세욕을 사랑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런 환경을 다 떠나서 살았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하였던 것입니다(요 3:29).

4)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시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삼상 15:22). 하나님은 성도가 즐겁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기계는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복사기도 100매 찍어라 하면 찍습니다. 왜 또 하라고 합니까? 하는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에게 이적을 베푸십니다. 노아의 순종, 아브라함의 순종, 여호수아의 순종, 나만의 순종, 가나 혼인집에서의 순종, 나사로 무덤 앞에서의 순종이 다 이적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뜻에 안 맞아도 무조건 순종하고 기다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5)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호 6:6). 그것이 곧 성경 연구이지요. 성경 연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하신 것처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눅 10:42). 그래서 성경에 끌릴 만큼 말씀을 기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6) 복음 사역자를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 말씀은 빌 4:14~19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혼자 산 분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섬김이 있었는데 그것은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역자가 넉넉하게 살아도 섬기셔야 합니다.

7) 마지막으로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잔치를 한 것이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마 18:22, 눅 15:22~2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제29과 성공적 믿음 사업 (마 13:44~48)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에는 세 가지 사업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광부이고, 또 하나는 진주 장사요, 또 하나는 어부 입니다. 이 세 사람이 다 사업가로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이 마치 그 사업자의 하는 일과 같다” 하셨으니 여기의 천국이란 용어를 내세적인 개념보다도 “믿음생활의 세계”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의거하여 “성공적 믿음 사업”이란 제목을 취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요절을 근거로 하여 “신앙생활은 일종의 사업과 같다”(신앙생활의 비유)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사업으로 비유하면 혹 돈 버는 사업, 복 받는 사업을 생각하면서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사업은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을 크게 취득하는 사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돈 버는 사업을 믿음 키우는 사업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물질 사업을 많이 하는 줄 압니다. 성직자도 사례비 많이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으니까요. 성직자가 교회를 돈 버는 사업처로 만들면 안 되겠지요. 교회 역시 돈을 많이 유통시켜서 물질 사업을 앞세우거나 확장시키려고 한다면 그것도 믿음 사업만은 못한 것입니다. 믿음 사업이란 자기의 믿음의 분량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현세욕과는 상관 없이 주님 앞에 칭찬 받을 수 있는 믿음을 크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업가처럼 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믿음으로 성공하셔야 합니다. 믿음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시려면

1. 목적을 믿음에만 두셔야 합니다. 속담에도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금 캐는 사람은 금을 취득하는 데만 뜻을 두고 값진 진주를 구하는 사람도 역시 극상품에만 뜻을 두고, 고기를 잡는 사람도 오직 고기 잡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처럼 성도들도 믿음만을 위해서 진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극상품 믿음에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오가피를 재배하는 사람이 그 생산품을 재료 정선에 따라 8등급으로 나눈다 하더군요. 이와 같이 같은 믿음이라도 믿음의 분량을 따라(롬 12:3) 등급이 있습니다. 극상품 믿음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보화(믿음의 소재)를 발견하는데 주력하셔야 합니다. 어느 곳에 금이 있고 어느 누구에게 진주가 있으며 어느 장소에 고기 떼가 많은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가짜 은혜를 발견하고 잘못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짜 은혜 받는 소재가 따로 있습니다. 그 진짜가 성경이고 예수님입니다. 자칫하면 성경의 뜻과 예수님 아닌 것을 사람의 잘못된 선전에 유혹되어 성경의 뜻과 다른 것 또는 세속이 섞인 믿음의 제도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신앙의 훈련 과제”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래 믿은 성도라도 신앙의 든든한 기초에 서지 못한 것을 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과의 관계, 기도의 숙달, 자기를 부정하는 일, 현세욕을 못 박는 일, 규모를 지키거나 선악을 분변하는 일을 잘 할 줄 모르데 이것들은 다 은혜를 바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혹 이런 성도가 계시면 꼭 진짜 은혜를 발견하셔야 합니다. 어떤 지식인이 주교사 봉사를 오래 하였는데 제가 쓴 기독교신앙백과를 보고 두 내외가 저를 찾아와서 절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그 책을 보고 “신앙생활을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믿음의 본질(알맹이)을 바로 발견한 것입니다. 진주나 보화는 숨어 있는 것입니다. 기복에 치우치거나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거나(딤전 6:5) 사회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로 나가는 것은 값진 신앙이 아니란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진짜 신앙은 가진 것 없고 혼자 믿어도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3. 발견 하였으면 취득을 하셔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이 속에 보화 있다”하면 안 되겠지요. 보화를 발견한 후 자기만 알고 만족하는 것은 그 보화를 자기가 먼저 취득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남을 주어도 먼저 자기가 취한 후에 주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보화이신 예수님을 막 던져주지만 자신이 먼저 진리에 부합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자기 부정을 하면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이것이 자기 부정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렇게 하였을 때 그 땅을 살 수 있었고, 진주를 발견한 사람도 자기 밑천을 다 드려 그것을 샀으며 고기를 잡는 사람도 먼 바다에 나갈 때 완벽한 준비와 장비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업에 성공을 합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지식으로 성공하려고 애쓰는 것을 봅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학교 공부한 후에 세 군데 학원을 거쳐 집에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스포츠로 성공하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청년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다 힘든 일이고 밑천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 사업만큼은 돈 없는 사람도 할 수 있고, 성공의 확률이 확실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청년이 모래 운동장에서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여 월드컵에서 1등해 봤자 22명만 성공하니 얼마나 요원합니까? 그러나 믿음 사업은 하나님이 모든 성실한 자에게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꼭 예수 믿는 일을 으뜸 사업으로 여기시고 바르게 성취하시기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0과 자립 목표 (창 49:22, 요이 3) 목록으로


여러분 목표에 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에는 “위엣 것을 찾으라(골 3:1)” 또는 부름의 상을 향하여 “좇아가라(빌 3:1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신앙 목표, 천국 목표, 상급 목표를 의미하지만 저는 이것을 포함하여 반드시 세 가지 자립 목표를 세우고 달음질 하실 것을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목표와 본문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겠지만 본문 말씀이 목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읽으신 본문은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축복한 말씀인데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든든히 섰다는 뜻),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든든히 선 나무가 마르지 않는 샘 곁에 있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는 것을 뜻함),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그 나무가 유실수이든 그늘을 주든 담 밖에 있는 외인들에게까지 덕을 입히는 것을 의미)”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크게 출세는 못해도 든든히 서서 꾸준히 버티고 이웃에 덕을 줄 수 있는 위치에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에서 그런 축복을 받는 목표를 두었으면 하는 것이고, 다음에 읽으신 성경은 사도 요한이 축복한 말씀인데 “영혼(믿음)이 잘 되고 범사(생활 경제)가 잘 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믿음, 생활, 건강 세 가지의 자립”을 축복한 것입니다. 저의 주위에는 거의가 경제에 신경을 쓰는 분들이고, 건강 때문에 염려하는 분들도 계시고, 신앙의 자립성으로 볼 때는 교역자가 아니면 거의 모자란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하고 40년 목회를 하고 성경을 여러 권 떨구고 책을 70권 이상 쓰고 겨우 신앙의 지도자 문턱에 섰다면 그런 경력 없는 일반 성도가 신앙 자립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 자립이 어려운 것 같아도 눈을 뜨고 힘써 노력하면(고시 준비생처럼) 2~3년 내에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젊은 목사의 설교가 늙은 목사의 설교와 비슷한 것을 보면 “저 분들이 총명하여 일찍 깨달았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엡 3:3을 보시면 “바울이 깨달은 것을 대강 기록하였은즉 너희가 이것을 읽으면 내가 깨달은...비밀을 너희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외람되지만 어떤 평신도가 제가 쓴 글을 다 읽고 터득한다면 그는 저와 비슷한 신앙에 금방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신앙의 자립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고(죽기 전까지의 노력할 목표임), 진리의 분별력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깨닫는 지식입니다. 자립 목표의 첫째가 신앙 자립(성도 각자가 못회자처럼 되라는 뜻)이고, 그 다음이 건강 목표이지요. 우리는 게을러서 또는 피곤하고 시간 없어서 건강 체질로 키우는 일을 조기에 상실했지만 젊은 분들은 반드시 이 목표의 중요성을 아셔서 운동하고 활동하며 적당히 섭생하여 항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세워 힘쓸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목표가 경제적 자립인데 요셉은 축복을 받고 별안간 출세하는 바람에 75명의 가족(행 7:14)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부자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지만 자기 가족이 먹고 쓰고 약간 남아서 이웃을 도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려면 무성한 나무처럼 든든히 서고 그 나무가 샘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함이 지속되어 담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표에 미달된 저희들은 그 목표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달음질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빚지고 고생한 가족이 엘리사로 말미암아 해결된 일도 있었고(왕하 4:1~7), 포도주가 모자라서 난처해졌을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된 일이 있었습니다(요 2:1~11). 그래서 신앙 자립하고 건강하며 생활이 윤택하게 돌아간다면 그것이 곧 정상에 서는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 자가 늘 골짜기에서만 헤매고 항상 모라자서 고민하는 생활을 언제까지 하시렵니까? 또 그런 생활을 대물림해야 하니 이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그래서 빨리 안 되면 2대, 3대를 하더라도 세 가지 자립 목표만큼은 깨달아서 가족별로 또는 개인별로 노력하실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TV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여러 식구가 죽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립 목표가 설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어떤 교회에서는 “대학 입시를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광고낸 것을 보았는데 분명히 “자기 교회 고 3생만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대학 합격하여 무엇 하려고 하는가? 쉽게 돈 벌려고 하겠지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은 그런 대학과 관련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돈을 쉽게 벌기 위하여 대학 가는 것이라면 차라리 지름길을 택하여 복권 당첨 기도회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람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를 다 영접하시고 그 짐을 가볍게 하시며 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 주실까요? 우선 욕심을 버리고 70년대 생활로 돌아가십시오. 많이 쉬어질 것입니다. 남 사는 방법을 따르려니까 힘들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게 주시는 섭리(고후 8:15)”가 있습니다. 그 섭리에 따라 적당하게 사시되 반드시 신앙 자립 목표, 건강(평안) 목표, 적당한 경제 생활 목표를 성취하실 것을 축복하여 마지 않는 것입니다.







제31과 영원한 소원 (빌 1:20, 2:13) 목록으로


제가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은 “영원한 소원”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세상도 변하고 소원도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소원을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적을 위한 기도를 응답 받으셨다면 성취되었으니까 다시 소원할 필요가 없겠지요. 또 만일 하나님이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사 6:8) 때를 따라 은혜를 주셨다면(히 4:16)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데 있어서 더 소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책을 써야 할 정도로 체험이 많습니다. 저에게 칼 가는 기구가 있는데 건전지 6개로도 쓰지만 9볼트 아답터가 있으면 전기로도 씁니다. 그래서 9볼트 아답터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을 길에서 얻었습니다. 12볼트짜리는 많이 버리지만 9볼트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길에 버렸기 때문에 제가 얻은 것인데 저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습니다(그 이외에 비상한 이적으로 주시는 것도 있음, 지우개 이적). 하나님이 이렇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면 필요한 것이라도 소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건강을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90세쯤 되어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우며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반가운 사람도 없으며 좋은 것을 모른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건강이나 장수를 위하여 계속 소원하겠습니까? 그때 되면 정당하였던 소원도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유한한 육체와 현실은 다 변하니까요. 그래서 변하지 않을 영원한 소원을 아셔서 기도의 제목을 삼았으면 하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입니다. 욥 23:13을 보시면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2:13에서 “하나님은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하셨고, 1:20에서는 바울사도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말씀하셨습니다(이 내용은 다른 설교에도 있음). 그래서 저희들도 일정한 소원 즉 변하지 않는 소원을 갖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을 소원이 무엇일까요?

1. 주님의 뜻대로 사는 소원입니다. 이때도 주님 뜻대로 저때도 주님 뜻대로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주님 뜻대로 입니다. 성도가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 7:21을 보시면 “주여 주여 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였어도 주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불법자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자기 부정이요, 자기의 뜻과 정욕을 못 박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고 하셨을 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사람 생각이고 베드로의 뜻인데 예수님은 자기 뜻이 아닌 것을 사탄의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깊이 연구하셔서 사람의 욕망이나 뜻을 무조건 따르지 마시고 평생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만 따르려는 소원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행 21:14을 보시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소원입니다.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창 5:24, 6:9), 시 73:23을 보시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주님과 동행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아셔야 하고, 다음에 주님과 화목하여야 하며 그 다음에는 친교가 두터워야 합니다(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다른 제자들보다 친하였던 것처럼). 또 그 다음에는 목적지가 같고 발걸음이 맞아야 하며 대화(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일곱 가지 조건에 의하여 동행이 가능한즉 늘 그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영원한 소원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동행하고 세상을 떠나면 영원히 주님과 동행하니까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주님과 얼마큼 동행을 잘 하느냐에 따라서 형통하는 은혜도 따릅니다. 요셉처럼(창 39:2, 23). 그래서 영원히 주와 동행하는 소원을 가지셔야 하고,

3. 하나님을 의지하여 은혜를 받는 소원입니다. 요즈음처럼 의지하는 일이 시급한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급하게 살다보니까 신호등 막히는 것 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군요. 스트레스는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평안한 마음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조류 독감. 소리도 없이 수만 마리가 다 죽습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수없이 위험을 겪으면서 보호를 받고 말씀하시기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란다(고후 1: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일이 쉴 사이가 없고 천국에 가서도 믿음이 계속 되는 한 하나님 품 안에서 살아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의지하는 소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4. 마지막 변할 수 없는 소원은 하나님 영광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는데(고전 10:31)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세세토록 있어야 하니까(롬 11:36) 하나님께 돌릴 영광 소원이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토록 주님의 뜻대로 사는 소원, 영원토록 주님과 동행하는 소원 또 영원토록 하나님을 의지하여 은혜받는 소원, 그리고 영원토록 영광 돌리는 소원을 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개인적 신앙을 권장함 (시 22:9~11) 목록으로


1. 문득 생각나기를 “개인적 신앙생활을 권장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단체적 신앙생활이 곧 교회의 생활인데 교회의 생활도 꼭 필요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성경을 배워야 하고 성도간의 친교를 가져야 하며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을 합력하여 이행하셔야 하니까 필요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그 생활이 습관이 되면 독립적 신앙이 해이해지기 쉽습니다. 무엇이나 단체에만 의존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자기는 껍데기 신세가 될 것입니다. 또 단체나 이웃이나 교역자를 의지하였는데 그 단체가 없거나 잘못 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마치 공중에서 납치당한 비행기처럼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시되 반드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유지를 순간이나마 놓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모친의 젖을 먹을 때부터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인적 관계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모태부터 젖 먹을 때부터 의지하게 하셨고 또 자신은 주께 맡긴바 되었으며 주 아니면 도울 자가 없다”하므로 다윗 주위에 아무도 의지의 대상이 없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떤 면에서 가까이 해주신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길에서 종이 한 장을 주울 때 “하나님이 이 종이를 주신다, 반드시 이 종이에 기록할 말씀도 주실 것이다”하고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냉장고에 “반찬이 세 가지쯤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덟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갖다 놓은 반찬은 새우젓뿐인데 다른 것은 저절로 생겼고, 간식까지 저절로 들어오는데 저는 그것을 “하나님이 저를 개인적으로 생각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알뜰하게 먹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먹을 것을 그렇게 권고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들도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느끼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개인적 신앙생활을 권장하는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신앙 고백을 자신이 해야 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마 8:13) 하셨고, “자기의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되어야” 하며(엡 4:13) 남의 입으로 들어간 음식이 자기 배를 불릴 수 없는 것처럼 구원 받는 일도 자기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지식(신앙 고백)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 없습니다. 롬 10:10을 보시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셨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자기 생각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발표하는 것인데 이 발표는 자신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인이 입으로 시인할만큼 독립적이어야 하고,

2) 생활 실천이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실천과 연결되는데 믿음 분량에 따라서 실천 분량과 사명 분량이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자기 믿음 분량대로 독자적 실천을 안 할 수 없겠지요. 신앙생활이 단체에만 의존한다면 단체의 뜻대로 가겠지만 단체의 뜻이 성경과 맞지 않을 때는 혼자라도 시행해야 하니까요. 여기에서 계명 실천의 분량과 사명 실천의 분량이 차이가 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큰 일을 하고도 31세쯤에 순교하였고, 베드로, 바울은 오랫동안 사명 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일을 잘한 후 순교하지 않았고,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도 다 사명에 임하는 자세가 여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달란트와 분야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이 가지각색이므로 개인적 생활이 필요한 것이고,

3) 세상 떠날 때 단체를 모아놓고 싹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각자의 수명에 따라 데려가시는즉 자기 떠날 준비를 자기 혼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갈 동반차를 맞추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 영접할 준비를 개인적으로 하셔야 하니까 그러하고,

4) 상급이 개인적입니다. 계 22:12을 보시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종이 한 장을 맞들었어도 힘과 정성이 더한 자와 덜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단체 봉사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단체상은 없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공력대로 받으니까 개인적 신앙생활 확립이 중요한 것입니다.

5) 신앙이 개인적이면 누리는 축복도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 단체에서 외국 여행을 많이 합니다. 저는 서너 차례 돈 적게 들이고 갈 수 있는 것도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다니면서 시간 없애고 구경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만일 단체를 위주로 한다면 싫어도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활하니까 내가 좋고 내가 만족한 것만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이고 실속있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 든든히 서실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공교회 시무를 끝내면 개인적으로 사명 생활에 임할 생각입니다. 결코 능률이 저하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제33과 부모의 세 가지 책임 (시 127:3~5) 목록으로


제가 자녀를 양육하고 나이는 많아지며 6남매 자녀 중 특별하게 성공한 자가 없다보니 자동적으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느라고 한 것도 있지만 취약점도 있는데 이 취약점의 발견이 소 잃은 다음에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외양간 고칠 시기도 지났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시 이행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있는 젊은 식구들을 교훈하는 의미에서 “부모의 세 가지 책임”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 책임이 무엇인가? 하면 ① 신앙교육의 책임이고, ② 도덕적 생활을 지도하는 책임이며 ③ 경제 자립을 위한 인식을 주는 책임입니다.

1. 자녀가 신앙만 바로 가지면 다른 것은 염려 안 해도 되지만 신앙의 연단이 덜 될 것을 예상하고 그 다음 것에 대한 책임도 유의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신앙에 관한 일이지요. 그것만 잘 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하시므로 신앙이 앞서면 육체적, 현실적 문제도 신앙 안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자라나는 자녀들을 살피면 대부분 신앙 공백, 도덕성 공백, 경제생활의 공백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한 자녀들은 열악한 환경을 밑거름삼아 홀로 서고 홀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의 언덕에 의존하여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는 만큼 부모의 책임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 지도를 잘 하려면 자기 신앙생활을 먼저 확립하고 자녀를 어릴 때부터 공백 없이 자기의 신앙생활 범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부모가 틀 잡힌 신앙생활을 하셔야 되니까 성경 지식이나 생활 습관이 수준급에 올라야 합니다. 만일 부모가 자기 신앙에 대하여 누구에게 의존하는 정도라면 자녀들까지 의존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중에 자녀들은 세속의 유혹에 빠져 있고, 신앙 수련을 위한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모저모로 힘들지요. 그래서 부모 된 분들은 반드시 자신의 신앙 자립과 사명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자녀들에게 자기 신앙생활과 같은 생활을 전수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매운탕 장사가 “그 음식을 많이 팔게 된 노하우는 국물 만드는 비법에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알려줄 것이라” 하더군요. 부모 되신 분들은 자신의 신앙 노하우를 미리부터 물려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쁘고 연약하여 이것을 옳게 시행 못한 것이 끝내 후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잃은 분들은 한 세대는 건너뛸 수밖에 없고 그 다음 세대에 잘 하도록 당부하십시오.

2. 도덕적 생활의 책임을 일깨워주는 것인데 이것은 효도와 형제 우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부양과 효도 책임”, 그리고 형제 우애의 책임을 꼭 강조하셔야 합니다. 형제들끼리는 서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 부양의 책임은 늦어도 70세부터는 자녀들이 적당히 분담하여야 합니다. 어떤 아들이 “부모를 멀리 한다”는 말을 들었고, 또 그 아들이 “여동생의 돈을 떼어 먹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것이 도덕과 형제 우애의 결함입니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뉴스 때마다 “늘어나는 노인을 위하여 국가적 대책이 시급하다”하면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부모는 “자식 덕을 볼 체 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팽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효도의 계명을 깨는 것이고, 따라서 인륜의 법도를 파하는 것이 된즉 누가 자식을 낳으려 하겠으며 어느 자식이 부모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나라에서도 부모 부양을 자식에게 책임지워야 늙은 부모가 대접을 받을 것 아닙니까?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하신 뜻을 자식 된 자들이나 사회가 인식하도록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시 127:3). 그리고 자식이 있어 생활이 아주 어렵지 않으면 노인에 대한 국가의 보조는 없애야 합니다. 자녀의 책임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형제우애는 그 폭이 모든 성도에 한하므로 넓습니다. 그런데 혈육의 형제와도 화목과 우애를 못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 교육의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3. 경제 자립에 대한 인식 교육입니다. 부모가 가난하여 고생하는 것을 못 느낀 자녀들이 많습니다. 90년대 들어와서 더욱 그렇지요. 여기에서 자녀들이 사치와 낭비만 알고 소득과 절약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경제 자립이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하고, 그 경제 자립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며 되도록이면 젊었을 때에 밑천을 잡아야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면 덜 피곤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6남매의 자녀를 다 키워놓았을 때 “이들이 가족적으로 단결해 준다면 한달에 1000만원 이상의 소득이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퍽 여유 있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이 교육 부족으로 잘 안 된 것입니다. 부모 중심으로 단결해주지 않고 다 자유 행동만 취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립한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과 그 대책을 깨우치는 것이 크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세 가지 공백을 메우기 위한 책임을 말씀드렸습니다.

6. 은혜에 대한 말씀

제34과 은혜를 발견 합시다 (행 17:24~27, 잠 1:20~22) 목록으로


제목은 “은혜를 발견 합시다”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수없이 나타나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지 않으면 은혜를 계속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발견 하려면 신령한 눈을 떠야 합니다. 은혜는 각자가 느끼는 것입니다. 우선 제가 느낀 은혜를 말씀드릴 것인즉 참고하시고 여러분들도 받은 은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금년 여름에 몹시 더웠지요. 더위가 지나가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선선한 바람을 주신 것입니다. 살만하시죠. 하나님이 자연을 통하여 주신 은혜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금년 장마와 태풍에서도 저와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2. 제가 더워서 고생할 때 “장례일이 생기면 큰 고생할 것 같다”하면서 솔직한 말씀으로 “그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는 안 했지만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다 피하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3. 지난 8월(2006년) 29일 오후 7시 40분에 황정훈군의 부친이 별세하셨는데 제가 손목을 붙잡고 기도할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민감하게 응답하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과거에 한남 교회 유묘현 권사님이 별세하실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입관 예배를 드리면서 “네 가지 이적을 체험하였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선선할 때 돌아가신 일, 예수 믿고 돌아가신 일, 기도할 때 돌아가신 일, 그 시신이 부드러운 것”이었습니다. 또 교인이 없었어도 아무 지장 없이 장례를 잘 치렀습니다. 크게 감사할 일이지요.

4. 전도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전도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시신을 모신 앞에서는 누구나 숙연한 자세로 설교를 잘 듣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믿음 없는 사람이 설교를 듣고 믿음이 생기고 또 좋은 믿음을 갖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요, 설교자의 보람이며 성도의 보람인 것입니다. 대접을 안 받고 생기는 것이 없어도 큰 보람인 것입니다.

5. 제가 성남 사는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화장터에서 성남 사는 사람은 화장비 5만원, 15년 납골당 비가 10만원인데 타 지역 사람은 이 두 가지에 80만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남 사는 것을 감사하였고, “쉽게 움직일 일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요,

6. 이번에 저의 사돈 장례식에 참관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서울 대학 병원 장례실 구조, 제도, 비용, 주차장 문제, 거기서 화장터로 가는 길, 화장터에서 신청하는 절차, 유골 나오는 절차, 식당 문제 등 장례에 필요한 상식을 거의 다 배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7. 하나님이 저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은혜입니다. 제가 건강하면 이런 은혜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척추, 위장, 시력, 치아, 발의 통증까지 문제가 많다보니 잘 견뎌 나가는 것이 큰 은혜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8. 여기에 따라 하루 하루 살아갈 때 “사고 났다는 소식 듣지 않고 사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저나 성도의 가정에 혹 연고가 있어도 한 가지, 한 가지 절차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김삼님 권사님의 자궁경부암 연고도 크게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9. 하나님이 저에게 사소한 용품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필, 종이, 운동 기구, 식료품 같은 것인데 이것을 길에서 얻어 오기도 하고 누가 주기도 합니다. “참으로 적당한 은혜라”는 것을 느낍니다.

10. 저의 하는 일이 글 쓰는 일인데 바쁜 작업은 다 끝났고, 이제는 선택 작업만 남았는데 요즈음은 역사 순위에 따른 “통합 4복음”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재미도 있고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일이 없으면 활동(운동)할 기회가 없겠지만 적당하게 움직여야 할 일거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약간씩 활동을 하니까 그것이 좋은 운동이 되는 줄 압니다. 시 121:8을 보시면 “하나님이 성도의 출입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일거리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적당하게 주셔야 하겠지요.

11. 요즈음 제가 기도원 생활처럼 식사를 자급합니다. 누가 보면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글씨 쓰면서 생각하고 발에 지압도 하고 뉴스도 듣고 음식도 만듭니다. 그리고 입맛대로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생활할 수 있는 지유와 공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사치는 일체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자유스러움을 느낍니다.

12. 제가 어제는 길에서 또 은혜를 집어 왔습니다. 그것은 좋은 거울 밑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는 성구가 기록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13. 성경에서 또 은혜를 발견하셔야지요. 본문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어디나 계신 하나님,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하나님, 인류의 연대와 거주를 정하시는 하나님, 멀리 계시지 않은 하나님, 자기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고 감사 하시면 더 많은 은혜를 주실 줄로 믿어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5과 은혜주실 때 할 일 (슥 8:14~17) 목록으로


“은혜주실 때 할 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선지자로(주전 520년경) 학개 선지자와 비슷한 시대에 선민들이 성전 재건과 신앙 회복을 힘쓸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중심이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고, 또 예배당 건물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지만 구약 시대에는 성전 제도가 계시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성전 재건이나 제사 행위가 신앙의 필수 요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에 스가랴 선지자는 두 가지를 외쳤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14~15절), 또 하나는 “은혜를 주실 때 성도가 할 일”을 깨우친 것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살피면

1) 하나님은 선민들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노를 격발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며 뉘우치시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의 나라와 성전 제도를 망하게 하시고 70년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통치 36년을 겪을 때 얼마나 피해가 많았습니까? 그런데 선민들은 그 갑절을 당한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워하셔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범죄와 징계를 적당히 조절하여 때리시고 그 기간이 차면 뉘우치시는 것입니다(긍휼의 표현).

3) 뉘우치신 다음에는 은혜를 베푸시기로 뜻하시고 매를 거두신 후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내가 은혜 베풀기로 뜻하였은즉 저는 두려워말고 이렇게 행할지라”고 하셨습니다. 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며 때가 되면 뉘우치시고 뉘우치신 다음에는 은혜 베풀기로 작정하시면서 “이제는 너희가 이렇게 행하라”고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신약의 성도들은 징계 받는 기간에 있지 않고 은혜를 주시는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고후 6:2) “은혜주실 때에 할 일”이 바로 저희들이 할 일인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거짓이나 외식에 흔들리지 말고 “진실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진실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은 중국산입니다”하고 싸게 팔아야 할 것을 “국산이라”하고 섞어 파니까 아예 국산은 살 수 없는 줄로 알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을 예사로 하는 이가 있습니다. 일단 진실에 문제가 있으면 그의 모든 생활이 다 불신에 감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안 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오해하게 하고 말을 잘못 표현해서 또 진실을 왜곡하게 하는 경우가 성도들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신분의 안 좋은 것을 숨겨서 덕을 보려 한다면 그것도 거짓에 해당하는 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진실 보유가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이요,

2) 화평한 재판을 베푸는 것입니다. 성도간에도 잘잘못의 시비를 가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고 누가 불법을 행하였느냐?”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원고와 피고가 갈등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양심상 죄를 깨달으면 “내가 잘못했다”하면 되는 것이고, 잘못했는지 잘 했는지에 대하여 서로 대립될 때는 “재판을 성실하게 해서 결론을 짓자”하면 될 것입니다. 원고와 피고가 함께 법정에 나가서 자기 할 말을 하고도 나와서는 두 사람이 같이 식사를 하고 “내 잘못으로 드러날 때는 내가 회개하고 사과할 것인즉 형제 우애에 대하여 금이 가면 안 된다”고 서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공인의 대표로 결백을 주장하는 어떤 동역자를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그 고발당한 분도 성직자이기 때문에 “재판하여 혐의가 없으면 당신이 사과해야 할 것이라”하고 좋게 지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도의 세계에서의 고발은 죄를 밝히는데 있는 것 일뿐 누구를 손해 보이려는 뜻이 아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그런 재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거나 고발하면 큰 싸움으로 비화됩니다. 성경은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하라”고 하셨지만 그 실천이 어렵습니다. 법정에 나가보면 원고 피고가 서로 폭력 직전에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변호사는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그런 분위기에서 재판을 하고 잘못이 나타나면 서슴지 않고 회개하면서 그것 때문에 화목을 깨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계명의 실천을 의미합니다(레 19:18).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한다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니까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를 다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부모 사랑하고 자식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 경우는 사랑을 강조 안 해도 실천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와 이웃과 원수는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 실천이 힘든 과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이 언덕을 넘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 3:1, 10).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 받은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원수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진실과 화평과 사랑이 실행되어야 할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제36과 은혜주시는 단계 (막 4:26~29) 목록으로


“은혜주시는 단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노력 없이 쉽게 은혜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하고 대부분 성도들에게 은혜주실 때는 연단과 과정을 통해서 점차로 주시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출 33:19을 보시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세월을 보내면서 점차 은혜를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왕하 4:3~4을 보시면 선지자의 생도집이 빚을 지고 어려움 당하였을 때 기름의 이적을 베풀어 문제를 해결한 일이 있었지요. 이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너는 나가서 그릇을 빌려오되 조금 빌려오지 말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였고, 그 빌려온 그릇만큼 기름을 주셨으니 이것은 준비한대로 은혜 주시는 섭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은데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며 그 다음이 곡식이라” 하셨지요. 그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농부의 노력은 계속되며 하나님도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며(결실기를 주어) 여물게 하셔서 낫을 대어 거두게 된다” 하셨으니 이것이 다 상당한 노력과 과정을 통하여 은혜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모시고 은혜 받는 세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고 현실을 뜻하며 이 은혜 받는 과정을 농사 일로 비유하셨습니다. 씨 뿌리고 가꾸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고 시간을 끌면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씨도 여물어야 하고 여문 곡식이라도 거두어야 하며 거두어 쌓아 놓은 곡식을 먹어 힘을 낼 수 있을 때 그 열매의 보람을 느끼는 것인즉 하나님의 은혜가 끝까지 함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태풍이 늦게 와서 모든 과일을 다 떨구는 것을 보면 은혜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실 때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고 깨는 사이에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구치소에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면회 한 번 안 가고 내버려두다가 주위 사람들의 독촉을 받고 진정서를 보내고 보증 보험 등 노력을 하였더니 구정 전날 “보석을 하니까 절차를 밟으라”는 연락이 와서 바쁘게 서둘러 수속을 끝내고 그 날 밤 10시 넘어서 출감을 하였습니다. “나는 나올 줄 몰랐는데 이름을 불러서 깜짝 놀랐다”하기로 “너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서 일하고 애쓴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매일 자고 깨는 사이에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싹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며 병충해를 막으시고 여물게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런 은혜속에서 이만큼 보호 받고 누리는 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가 은혜를 받는데도 단계가 있으니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며 그 다음에 충실한 곡식인 것처럼 성도들도 그런 단계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화해하는 단계입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원수지간이었습니다(롬 5:10). 그런데 하나님이 원수된 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회개하게 하셔서 화해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의 마음을 푸시고 화해를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이 상태를 끝까지 붙잡고 나가면 다른 은혜는 몰라도 천국 가는 구원은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죽을 때 받는 것이니까 그 사이에는 다른 은혜를 받아야 하겠지요.

2)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를 대한민국 국민인줄로만 아는 것과 친한 사이로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이 친교의 단계가 있으니 이것은 기도하고 싶고 성경 배우고 싶으며 주일을 기다리게 되고 성도의 교제에 기쁨을 느끼는 그런 생활입니다. 말씀, 기도에 맛을 못 느끼면 하나님과 친한 것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인정 받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시니 자기 마음에 합하여 그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행 13:22)”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태도를 취하셔야 합니다. 믿음이든 겸손이든 복종이든 마음의 덕이든 충성과 헌신을 보여서 하나님을 깜짝 놀라시게 해야 합니다. 백부장이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 하였을 때 “오시지 마옵시고 말씀만 하옵소서”(마 8:8) 하였을 때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도 역시 칭찬하실 일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매사에 “이 사건을 하나님이 지켜보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인정을 하셨을 때 기도 응답도 쉽고 권고 받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권고의 반대는 진노입니다. 따라서 권고하실 때는 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는 진노의 기간이 끝났거나(사 45:1~4) 만족한 회개를 하거나(눅 15:17~24) 선한 증거를 드러냈을 때(벧전 2:12) 나타내주십니다. 사 66:2을 보시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권고하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땅을 권고하시면 “그 땅이 물을 내어 심히 윤택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시 65:9). 성도가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환난에서 건지시고(죄, 원수, 핍박, 환난, 죽음 등. 신 34:17, 33:!9, 39:8), 보호하시며(신 32:10) 인도하시고(사 48:17),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히 4:16). 또 다윗처럼 들어 쓰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제37과 기업을 받은 갈렙 (수 14:6~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설교가 “갈렙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일반 설교집 131과에 있는 것을 알지만 어떤 젊은 목사님이 개척 교회를 시도하면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을 듣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갈렙은 출애굽한 사람으로 가나안땅에 들어올 때까지 여호수아와 함께 생존한 사람이고, 유다 지파의 족장이며 또 출애굽 직후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그 땅이 들어갈 만한 좋은 땅이라”고 긍정적이고 적극성 있는 보고를 한 사람입니다. 출애굽한지 4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가나안땅을 밟은 사람은 자신과 여호수아뿐이었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자신은 족장의 한 사람으로 남았지만 여호수아를 크게 존경하고 받들었습니다. 이제 유다 지파를 대표한 족장으로서 자기 지파를 위하여 기업을 받게 되었는데 갈렙이 여호수아를 일깨워 청원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 평지를 제비 뽑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1. 그런데 갈렙은 무엇을 생각하였는가?하면 45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약속이란 모세가 12 정탐의 보고를 들을 때(두 사람만 하나님의 뜻에 맞는 보고를 하였음) 모세가 말하기를(여기의 모세의 말은 하나님의 약속임. 신 11:24, 수 1:3)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된다”고 한 것인데 그 당시에 갈렙이 그 헤브론 지역(팔레스틴 남방 산지이고, 험한 곳이며 또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사는 곳인즉 넓기는 하지만 점령하거나 살기에 힘든 땅임)을 밟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대로 성취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것을 제의하게 된 것입니다. 갈렙이 보통 사람 같으면 45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잘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 땅이 산지, 사막이요, 험한 지역이니까 그 땅을 차지하려고 마음먹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제비를 뽑아 더 좋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현실적 문제를 타산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생각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뜻이 성취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성도의 중요한 신앙입니다. 자기의 생활 문제, 축복 문제를 타산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길에서 어떤 물건을 주워왔는데 제 아내는 그 물건의 용도를 생각하면서 “필요 없다” 하였지만 저는 그 용도보다 먼저 생각한 것이 “하나님이 길에서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은혜를 길에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길에서 무슨 은혜를 주실 것인가?하고 유심히 찾기도 합니다. 잠 1:20을 보시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고 광야에서 소리지른다”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곧 은혜입니다. 갈렙이 광야에서 밟은 땅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희들도 생활의 타산보다 말씀과 뜻과 약속을 믿는 신앙을 꼭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2. 가나안 땅의 기업의 은혜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은 먹고 사는 생활 터전이지요.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영적 축복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시행되는 과정이요, 또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계시의 터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땅에서 열두 지파가 생존했고, 그 생존 속에 메시야의 뿌리가 있었으며 또 그 땅에서 선민을 통치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영적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보이는 것만 보시지 마시고 그것 이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볼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기업의 의미는 현실의 복보다도 영적 축복의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갈렙의 축복과 용기입니다. 갈렙이 축복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과 건강이었고, 그의 용기는 85세라도 전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전쟁도 칼과 창만 휘두르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여 마귀와 싸우는 전쟁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런 용기를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와 싸워 이길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랑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인정받는 위치에 설 것인가?하는 일을 위하여 전쟁하듯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 동안은 어떤 정치가가 “범죄와의 전쟁을 한다” 하였는데 아직도 학교 안에 있는 깡패도 소탕을 못하지 않습니까? 갈렙은 85세라도 전쟁할 수 있는 의욕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쓸 무렵에 안현필 선생님의 건강 비결(삼위일체 장수법)을 읽고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포기하고 현미를 먹으며 체질을 바꾸면 70부터도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을수록 일을 더하려고 합니다.

4. 그 외에도 갈렙은 기업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성실한 보고를 하였다”(7절) 하셨고, 또 “온전히 좇았다(8절)”는 말씀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여호수아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이 간청은 기도와 같은 것이지요. 성실한 생활과 온전히 좇은 상태에서 간청을 한 것입니다. “성실한 보고”는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고, 다음에 성실한 노력이며 또 한 가지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것”은 계속 순종만 한 것을 의미합니다. 45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켜 달라”한즉 여호수아는 거절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여 축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38과 권고 받을 대상 (사 66:2) 목록으로


제목은 “권고 받을 대상”입니다. 성경에 권고란 말씀이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권면한다는 권고(勸告, 잠 12:15)가 있고, 또 하나는 “도움을 준다”는 뜻의 권고(眷顧)가 있는데 본문의 권고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뜻합니다.

1.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1) 하나님에 대하여 갈망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 42:2에 보시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이 기다려지지 않거나 말씀이 사모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임재(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계심, 마 28:20)와 주시는 은혜를 가까이 느끼지 못하는 사람, 큰 것을 받으면 혹 은혜로 느낄까요? 자연계의 은혜가 크지만 못 느끼는 성도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게 나타나는 은혜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못 느끼는 성도는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의 방법이 서툰 사람입니다. 초신자나 연단이 부족한 성도이지요. 말씀 지식이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하며 현세욕이 강하면 믿음 생활이 자리 잡히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과 현세욕을 겸하여 섬기게 되니까 왔다 갔다 하겠지요. 그래서 신앙의 일변도로 가지 못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4) 연약을 느끼는 성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엇에 연약이 있을 것 같습니까? 우선은 건강의 연약입니다. 병고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 고통을 호소하고 죽음을 겁내는 분들, 그 다음에는 경제적 연약이겠지요. 검소하게 사는데도 늘 피곤하고 쉴 시간 없이 고달픈 것입니다. 경제가 연약하면 효도하기도 어렵고 가정을 유지하기도 어렵겠지요. 이런 분들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또 연약 중의 하나는 무지의 연약입니다. 세상이 항상 위험하고 변화가 소용돌이치며 속이는 일이 늘 눈앞에 있는 세상에서 지식이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이것이 권고의 대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그리고 그 이외에 특별한 어려움이나 사명에 처한 경우가 있겠지요. 만일 여러분들이 이상의 다섯 가지(갈망 없음, 임재와 은혜 의식 없음, 신앙생활의 틀의 부족, 모든 연약, 기타 특수 사항)중 하나라도 해당사항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권고 은총에 의하여 해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권고는 한계가 있은즉 기대하지 마십시오.

2.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자를 권고하시려고 합니까? 그 대표적 성구로서 본문을 들 수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하나님이 권고하신다” 하셨으니까 그 원칙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자를 권고하십니다. 마 5:3에서는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지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뜻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하여 자기를 비운 것(자기 부인)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비워야 할 이유는 피조물이고 죄인이며 종 같고 티끌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겸손도 자기를 비우는 일에 해당합니다. 자기의 연약을 느끼고 은혜를 갈망하는 것도 마음을 비운 자의 태도일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자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 가난의 의미를 잘 이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심령에 통회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의 대접을 받은 사례가 있고(눅 15:11~32), 또 비유 교훈의 말씀에서 “세리가 가슴을 치며 통회하였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눅 18:13~14)”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요청을 받지 않으시는(요 9:31) 대신에 회개하는 자의 지도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들으신다(마 18:22)” 하셨으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시려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의 장벽을 회개로 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이 거리꼈는데 이것을 이렇게 회개하였은즉 나를 권고해 주십시오”하신다면 하나님은 즉시 방책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떠는 사람은 성경을 펼칠 때부터 긴장해야 합니다. 대법원 법정에 가보세요. 법관의 말에 얼마나 긴장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성도는 “떨면서 즐거워한다(시 2:10)”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며 눈물을 흘렸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시면서 15년을 더 살게 하셨고(왕하 20:1~7), 히스기야왕의 증손자 요시야왕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었는데(옷을 찢고 통곡함, 왕하 22:8~20) 하나님이 그 시대에 나라가 망함을 받지 않고 그 후손의 시대로 연기된 사실이 있었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떠는 자를 권고해 주십니다.

4) 그 외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권고하시는데 다윗이 그 예입니다(행 13:22). 다윗이 하나님의 뜻과 같은 생각을 가졌을 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 하셨고,

5) 또 한 가지 권고해주시는 대상은 “성실한 자”입니다. 욥 8:5~7을 보시면 “부지런히 기도하고 청결하며 정직하면 정녕 돌아보셔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으로 권고 받는 방법 다섯 가지를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권고하신 사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아가 홍수에서 특별히 살아남는 권고를 받았고,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으나 그 후손이 모래처럼 번성하는 권고를 받았으며 야곱과 요셉도 어려운 환경에서 권고를 받아 형통하였고, 다윗도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흉년을 피하게 되는 권고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시대에 누가 권고 받은 것까지 기억하시고 말씀하셨지요. 눅 4:26~27을 보시면 “엘리야 선지자 때에 권고 받은 자는 시돈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흉년에 양식으로)뿐이었고, 엘리사 때에도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권고 받는 자가 많지 않은 중에 바로 여러분들이 권고 받는 대상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9과 부요케 하려 하심 (고후 8:7~9) 목록으로


2006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에 대한 설교를 구상하던 차 본문에 근거하여 “부요케 하려 하심”이란 제목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부요케 하시려고 “만유의 주”이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는데 과연 저희들이 예수님의 부요케 하시는 은혜를 받고 부요함을 느끼는가?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절에 부요함(은혜가 넘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감사절을 지키는 것이나 감사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족하라”는 말씀도 있고(빌 4:11),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는 말씀도 있으며(고후 9:8) 또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즉 부족함이 없다(시 23:1)”는 말씀도 있습니다. 아직도 가질 것을 못 갖고 누릴 것을 못 누려서 부족함을 느끼신다면 감사절 지킬 입장이 안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감사절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은혜를 깨닫게 하는데 있어서 요긴한 교훈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두 번째 보낸 서신입니다. 첫 번째로 고린도 전서를 보내실 때는 그 교회의 형편이 많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본문을 보내실 때는 고린도 전서의 효력으로 많이 좋아지고 평정된 때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기록하신 요지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의 기근을 돕기 위하여 성심껏 구제 헌금을 하라”는 권면을 하시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기도 갈망)과 우리(교역자들)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하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 은혜(구제하는 것을 은혜로 표현)에도 풍성할찌라” 하셨고, 8절에서는 “내가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헌금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 오직 다른 이들(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구제에 열심낸 것, 고후 9:2)의 간절함을 너희도 갖고 사랑의 진실을 증명코저 함이라”고 하셨습니다(구제는 사랑의 증명임).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9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하셨는데 과연 오늘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아시는지에 대하여 묻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별한 은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부요하신 자로서” 하셨는데 얼마큼 부요하신지 다 아시지요.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런 분이 “너희(성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가난해지셨는지 아십니까? 말구유에 뉘임 받고 짐승 취급을 받으실 만큼 가난하셨고, 또 낮아지신 것이요. 들의 여우나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을 만큼 필요한 것을 갖지 않으심으로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취하면 얼마나 취하시겠는가? 하시겠지요. 만유를 다 취하실 수 있습니다. 만유가 주님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다 포기하시고 가난하게 되신 것은 “너희로 하여금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성도가 부요함을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를 부요케 하시려고 만유의 주로서 가난한 생애를 사셨은즉 성도가 그 은혜를 힘입어 마땅히 부요함을 아셔야 한다”는 것이 이 시간에 드리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물질만 가난하신 것이 아니라 신분도 종의 입장으로 오셨기 때문에(마 20:28) 다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유의 주님이 가난해지신 것에 우리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롬 10:12을 보시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성도에게 부요하시면 성도는 그 부요를 느껴야 하겠지요. 만일 못 느끼신다면 믿음이 없거나 욕심에 가리웠거나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에 은혜를 족하게 못 느끼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받은 은혜가 많다는 것(딤전 1:14)을 깨우쳐 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들이나 저나 조상들의 죄 값은 우리에게 복 주실 여건이 못 됩니다. 저의 아버님도 성경책을 몇 차례 던지셨습니다. 불신앙이 죄이니까요(왕하 9:18, 마 23:30). 그 다음에 지혜가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있습니다. 지혜 부족이나 연약은 의를 옳게 시행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살아야 복을 받겠지만 연약하니까 복 받을 일을 힘 있게 못 하므로 은혜 받을 여건이 부족하고(잠 10:1), 거기에 덧붙혀서 게으른 것이 또 있습니다. “게으르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어온다”고 하셨습니다(잠 10:8). 여러분은 여기에 해당 안 됩니까? 만일 해당된다면 은혜와 복이 말라붙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풍성하게 임한 줄을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상님들 죄만 거론하였습니다만 자신들의 죄는 없겠습니까? 죄대로 벌을 받으면 다 사망입니다(롬 6:23). 그런데도 살아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 마지막으로 은혜의 부요를 깨닫는 방법은 예수님의 생애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얼마큼 가난한 것, 설명 드렸음, 생명도 가난하여 33세 사셨음)을 자신의 형편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큰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제40과 7병2어의 은혜 (막 8:1~10) 목록으로


우선 본문을 읽으신 성도님들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도 기록되었다는 것을 떠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마 15:32~38에도 기록되었지만 거기에는 예수님이 무리들을 상대로 “특별한 인정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없고 먹은 사람의 수가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라”하신 것이고, 또 비슷한 사건의 기사는 5병 2어의 기적 사건으로 이 사건보다 먼저 시행하신 것인데 그것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된 것입니다(마 14:19, 막 6:41, 눅 9:16, 요 6:10). 그래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음식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는데 대하여 두 번째의 말씀을 접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접할 때 저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과 또 하나님이 엘리야를 까마귀로 먹게 하신 것이나(왕상 17:1~6) 엘리사가 기름으로 빚을 갚아주고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인 사건(왕하 4:1~7, 42~44),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 만드신 일(요 2:11)까지 생각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없는 것을 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일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롬 4:17을 보시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4000년 전의 사람 아브라함도 그렇게 믿었고, 2000년 전의 사람 바울사도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이 본문을 읽고 믿으셔야 할 것이 많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창조자가 맞구나”하는 것과 또 “예수님은 양식을 만들어 주실 수도 있구나”하는 것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하지 말라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하신 말씀(마 6:25~26)을 생각하면 “아무리 경제적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이 먹을 것은 주시겠지”하는 안도감을 갖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라서 마가가 기록한 본문에는 특별한 내용이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읽으시면서 그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장소는 갈릴리 호수 주변인데(7:31) 마 15:33에서는 “광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떡을 먹은 사람이 “여자, 아이 외에 4000명”이니까 상당히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불쌍한 자식이 있고 덜 불쌍한 자식이 있습니다. 성도가 부모 앞에서는 불쌍하지 않은 입장에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불쌍히 여김을 받도록 낮아져야 하고, 또 그런 형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은혜를 받으려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이 왜 불쌍히 여김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3일을 굶으면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이라”하신 것을 보면 이미 굶은지가 오랬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기 집을 떠나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멀리 광야로 왔는데 처음에는 잠깐 살펴보고 귀가하려 하였겠지요. 그런데 또 끌리고 또 끌려 3일까지 굶고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첫째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따랐겠지요. 또 그 다음에는 병 고치려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요 6:6을 보시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따른 자들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은혜가 다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3일씩이나 굶으면서 광야에서 고생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 그들이 3일을 굶은 것과 그 중에는 먼데서 온 사람이 있는 것과 허기진 상태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자가 있을 것까지 아시고 처방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셨는데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하여 일곱 개의 떡을 거두어 그것을 축사하시므로 떼어 주게 하셨고, 또 그 다음에 작은 생선도 같은 방식으로 시행하여 큰 무리를 다 먹게 하신 것입니다. 떡 일곱 개를 거둔 것은 곧 작은 것으로 봉사한 뜻이고, 예수님이 축사하신 것은 복을 주신 것이며 또 그것을 나누어 준 것은 봉사의 손길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이 먹고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저희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응용하셔야 합니까? 우선 예수님을 창조자, 능력자, 해결자로 믿는데 응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희들은 3일을 굶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을 받드는지를 살피셔야 하겠지요. 저희들이 풍족하기 때문에 3일 굶을 환경이 안 될 때는 이 말씀을 가지고 굶어 죽는 백성들에게 가서 가르칠 사명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3일 굶은 사람들 앞에 가면 꼭 이런 이적을 베푸실까요? 이와 꼭 같은 이적을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겠지만 이와 같은 이적이 아니라도 차선책의 은혜는 반드시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 차선책의 이적은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그와 꼭 같은 이적을 안 나타내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7병 2어 같은 작은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날 때는 얼마든지 굶는 자에게 양식을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차선책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가난한 중에서 적은 것으로 봉사하였는데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도록 복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이 합당할 줄 압니다(요 6:3~15, 5병 2어의 이적, 7분 설교 12집 3).

제41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시 62:1~2, 5~6) 목록으로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고, 또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평안의 복을 받은 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 인도, 섭리를 잘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섭리를 절실하게 느끼는데 어떤 때는 분초를 다투어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제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려고 할 때 한 10분쯤 집안 정리를 끝내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가족이나 많은 연고자들이 그 시간에 활동하고 있을 것을 생각할 때 기도의 기회를 늦출 수 없는 충격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일은 절실한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이고, 시험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며 또 환난을 당하면서 힘의 한계를 느끼는 중에 환난을 이기고 일어서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데 성경에는 절규하며 하나님을 의지한 사례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욥이 환난을 당하면서 말하기를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에 괴로운대로 말하리라” 하였고(욥 10:1), 또 “내가 오늘도 혹독하게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찾을꼬 그리하면 그 앞에 나가서 호소하고 변백할 것이라”(욥 23:1~2) 하였고, 다윗도 생명과 전쟁과 정치의 위험을 당하면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내가 하나님께 피하였거늘 내 영혼더러 새처럼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하심은 어찜이니이까(시 11: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고 있습니다(시 12: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시 13:1)”하는 절규의 기도를 하였고, 예수님도 자신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마 27:46)하고 기도하셨으며 바울 사도도 고후 1:10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으니....이후에라도 또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이 무엇이냐”하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사 40:31을 보시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다” 하셨는데 하나님을 앙망하는 뜻을 설명드릴 필요가 있지요. 개역 성경이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설명에 시간을 써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앙망이라는 용어(차쟈)를 turn(돌이키다)으로 번역하였습니다. “turn”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앙망”은 “쳐다본다, 바란다, 의지한다”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인간의 힘의 한계를 느끼는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종합적으로 설명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려 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한 신뢰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 신뢰 관계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모시는 믿음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자기의 아버지로 모시고 신뢰하였을 때 모리아산의 제단에서 결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신즉 자기의 생명을 맡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믿음입니다.

2. 순결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이 반성하였습니까? 환난을 당해도 찬송해야 하고(욥 1:21),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실지라도 의뢰하여야 하며(욥 13:15) 또 욥 31:16~23을 보시면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의 어깨 뼈가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다”하였고, 또 “내가 처녀를 주목하지 않으려고 내 눈과 언약을 맺지 않았느냐”(욥 31:1) 하면서 자기 반성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시 26:1에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며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요 9:31) 의인이 버림 당하거나 걸식하는 것을 버려두시지 않기 때문에(시 37:25) 일단 정의로운 입장에서 요동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흔들림 없이 정의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나의 영혼이 하나님만 바람이여.....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또 5절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9). 시 146:3에서는 “인생이나 방백도 의지하지 말라” 하셨는데 사람이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만 바라게 되는 경우가 있고, 인생이나 권력이나 기술이나 돈을 의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절차에 불과한 것으로 알 뿐 그것들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술을 하러 들어가면서도 “나를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의사는 하나님이 쓰시는 방편이다”라는 식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하는 힘이 최대한 하나님께로만 기울어지도록 하셔야 하고,

4. 기도로 구하는 일이 필요하겠지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실 계획을 갖고 계시면서도 구할 때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6:8에서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하시고도 7:7에서는 “구해야 주신다”(겔 36:3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 앞에 와서 구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값이면 기도 많이 하는 자를 주실 것입니다.

5. 사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무슨 일을 하겠습니다”하는 사명적 조건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제42과 전화위복 (창 50:18~21) 목록으로


“전화위복”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화를 필요한 일에 쓰시기도 하시고, 또 필요에 의하여 화를 복으로 또는 복을 화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어떤 화(불행)에 처하여도 정신을 차리고 믿음만 지키면 화가 복으로 변하는 것을 쉽게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불행이나 고난스러운 일을 당하여도 결코 흔들리지 마시고 소망 중에 믿음만 지키면 머지 않아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믿으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우선 성경에 그런 말씀이 많은 것부터 증언을 하겠습니다. 신 30:19을 보시면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둔다” 하셨고, 쉬운 예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군이 병거로 추격을 했을 때는 형통하지 않는 것 같았고, 선민은 고난을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면서 선민은 애굽군의 추격에 의하여 홍해를 속히 건넜고, 당당하게 따라오던 애굽군은 수장을 당하므로 일시에 화복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놀러 갈 때는 좋았지만 사고를 당했을 때 불행이 왔고, 미국의 어떤 선교사는 선교행으로 떠날 배를 놓쳐서 왜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하였는데 나중에 소식을 들은즉 그 배가 풍랑을 만나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행복이 불행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불행과 고난이 행복과 유익으로 바뀌는 은혜를 꼭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고난으로 단련을 받으면 정금 같은 신앙인이 된다”(욥 23:10) 하였고, 잠 16:4에 보시면 “하나님도 악한 날에 악인을 적당하게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받을 때 “이 저주는 하나님이 시켜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인즉 가만히 받자 이 저주 까닭에 하나님이 나에게 선으로 갚으실 것이라(삼하 16:12)”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신약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곡식 밭에 있는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하신 것은 그것을 뽑는 것이 곡식에 해될 수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마 13:24~30). 만일 우리 주위에 전염병 같은 것이 없다면 청결에 게으른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결한 것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롬 8:26에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셨고, 바울 사도는 고후 12:9에서 “자기 몸에 붙은 육체의 가시가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감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그의 50견일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는데 그 가시가 무슨 유익을 줍니까? 교만을 막는 유익, 괴로움 속에서도 감사를 배우게 하는 유익,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중에 머물러 계시게 하는 유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이런 은혜를 추적하여 깨닫는 믿음이 있어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는 것(고전 13:13)”이니까 혹 있을 수 있는 고난과 불행이 소망을 뺏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에 나타난 “전화위복 사건”을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1) 아담의 타락은 불행이지만 그것이 구속의 은혜와 천국 영생으로 복이 되었으니 다행인 것이고,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고향을 떠날 때 피난민처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땅을 받았고, 선민과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으며

3) 야곱도 아버지 집에서 나그네 신세로 변했지만 그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연단과 열 두 지파의 복을 받은 것이며

4) 요셉이 어머니를 여의고 형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므로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또 노예 생활과 억울한 감옥살이까지 한 것이 결국은 성공의 길이 되고 선민 생존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요셉은 자기를 애굽에 보낸 형들의 죄를 용서한즉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하시므로 요셉이 형들의 죄를 용서하고 또 자기 가족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고아된 사람이 외국으로 양자되어 가서 성공한 사례도 많지 않습니까?

5) 모세가 강물에 띄워진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었고, 또 선민의 지도자가 된 것이요,

6) 욥도 상상하기 어려운 화를 당하였지만 믿음을 지킨 탓으로 갑절의 복과 인내의 모범자가 된 것이며

7)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받은 것은 고난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울의 족속을 선대하였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하여 사울을 선대하였고, 또 사울왕족 시므아가 다윗을 저주하였을 때도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여겨 감수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합당하게 보신 요소가 된 것입니다. 그런 공로가 축적되어서 다윗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고난이 유익을 준 것이고, 전화위복된 것입니다.

8) 세례요한은 일찍 순교하였지만 사명자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9) 바울사도의 생애는 고난이 많았으나 그 고난이 상급의 기대를 갖게 하였으며 마지막에 송사를 받고 로마에까지 간 것이 전도 여행과 전도 기회가 된 것이고,

10)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고난이요, 희생이지만 그의 죽으심이 영광은 물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속죄 사역이 된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은혜를 꼭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제43과 감사하는 신앙 (골 2:6~7) 목록으로


2006년도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영토 없이 살다가 해방되고 40년 만에 토지를 주셔서 첫 열매(초실절, 출 34:22) 거둔 것을 감사로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 23:16). 저희들이 이런 절기를 기회 삼아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감사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하는 신앙인의 표준을 아십니까? 성도가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1) 영적 은혜(구원의 복)의 무한한 가치를 아셔야 합니다. 만일 영적 은혜를 모른다면 세상의 복만 알겠지요. 그런데 세상의 복은 항상 흔들리고 또 한계가 있으니까 충분한 감사의 소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은혜(죄사함, 심판을 면하는 것, 영생하는 것,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2)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하며

3)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감사하는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범자가 곧 바울사도입니다. 바울사도가 “항상 감사하라”(엡 5:20, 살전 5:18, 몬 1:4) 하셨고, 또 감사를 강조하신 말씀이 옥중서신에 많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옥중의 마지막 서신인데 거기에도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딤후 1:3)고 하셨고, 성도들에게도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라”고 골 3:15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감사 신앙의 표현입니다. 성도가 감사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할 때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1) 항상 마음으로 감사를 느껴야 하겠지요. 그것이 곧 마음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골 3:16을 보시면 “마음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방도로 감사를 하든지 마음의 진정한 감사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혹 “감사절기이니까 제도에 의하여 감사한다”고 하면 그 감사는 헌금 걷는 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2) 말로 감사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감사의 뜻을 아뢰는 것이지요. 빌 4:6에 보시면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아뢰며”하신 것이 말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열명의 문둥이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로 감사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7:15).

3) 예물(헌금)을 드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제물과 예물을 드리는 규례가 있고(레 1:2, 출 35:22),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쳐주신 후에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증거하라(눅 5:14, 레 14:1~32)”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4) 찬양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 찬양을 하였고(눅 1:46), 시 107:1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할 때 그 내용이 찬양의 시로 읊어진 것을 아실 거시오, 계 7:12을 보시면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 하시므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이 서로 나눌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5) 순종과 헌신입니다. 만일 감사한다 하면서 불순종하고 헌신을 안 한다면 그것은 감사를 부정하거나 외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되어서 감사의 뜻을 상실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기도로 헌물과 찬양과 순종, 헌신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저희들에게 감사하는 신앙이 있는가?를 반성하시고, 또 감사의 신앙이 부족하다면 왜 부족한가를 연구하여 감사하는 신앙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가 만일 영적 은혜의 가치를 모른다면 감사꺼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영적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 충만과 같은 것입니다. 나사로가 이 세상에서 거지로 살았더라도 죽은 후에는 아브라함 곁에 가서 영광을 받은즉 지옥 간 부자가 부러워한 것이 영적 축복의 결과요, 영적 축복은 그만큼 현실과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감사 신앙을 위하여 믿음의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2) 현세욕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사막에서 살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전쟁하면서 보리 농사를 지었으니 그것이 풍족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초실절을 지킨 것은 그것도 없을 때를 생각하여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롬 12:16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날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롬 12:16을 보시고 옛날의 어려운 생활을 보아야 하는데 성경을 무시하고 또 예수님 생활이나 세례요한의 생활을 무시하고 판교아파트만 생각하니까 감사의 소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신앙을 키우는 성도는 세상의 복을 분복대로 살면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상이 다르고 조상의 업이 다르고 신앙이 다르며 노력이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꼭같이 누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표준을 따르려 하지 마시고 내게 주신 분복대로 살면서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렇게 되려면 항상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겸손한 삶이란 것이 바로 자족하는 것이고, 은혜를 과분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핍박자였던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였고, 자비량으로 선교를 하면서도(행 20:33) 감사하셨는데 빌 4:6을 보시면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을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신앙은 ① 영적 신앙이 성숙하고, ② 현세욕의 만족감을 가져야 하며 ③ 겸손한 삶을 살아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너희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세움을 입어(감사하는 신앙을 확립하여)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7. 믿음에 대한 말씀

제44과 내 말을 믿으라 (요 4:21~22) 목록으로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의 제목은 “내 말을 믿으라”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1. 그러면 이 말씀을 역사적으로 볼 때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인데 오늘 저희들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일 상관이 없다면 저희들은 이 말씀을 읽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기록하여 주실 때 후세인들을 위하여 주셨고, 또 모든 성경을 택하신 모든 백성을 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중보 기도하신 것도 모든 택한 백성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요 17:9). 또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다른 것은 성령님의 말씀이라도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요 10:30, 13:49, 딤후 3:16) 다 한 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 말을 믿으라”하신 것은 “성경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많이 믿고 많이 받으셔야지요. 성경에 믿음과 복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네 믿음대로 되라(마 8: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믿고 구하셔야 할까요? 믿을 것은 성경이라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몇 가지 특별한 말씀을 믿고 은혜를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특별한 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하신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든든할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창 28:15, 46:4, 마 28:20 말씀을 믿으세요. 하나님이 함께 계셔주시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마귀가 시험의 보따리를 들고 가까이 오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지 않거나 방심한다면 그 믿음대로 되어야 하니까 하나님도 그 성도와 가까이 계셔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는 신세가 되겠지요.

2.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말씀을 꼭 믿으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의 보호 은총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길에서 보호하신다,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출 23:20, 신 32:10) 하셨고, 특히 시 121편은 “철저하게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믿으셔야 보호를 받습니다. 주무시지 않고 지키시며 자연 재해로 상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영혼과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만큼 보호를 받으실 것입니다.

3. 공급하시는 은혜를 믿으세요. 마 6:8을 보시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셨고, 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셨으며 또 히 4:16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고, “이른 비와 늦은 비도 때를 따라 주신다”(렘 5:24)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소용되는 것은 주로 필기도구와 먹는 것뿐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적당한 때에 주시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과일이나 반찬이나 약 종류까지 적당한 때에 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주실 줄 믿고 기다려 보십시오. 놀랍게 체험하실 것입니다. 만일 쌀이 떨어졌는데 쌀을 살 입장이 못 되면 믿고 구하고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믿는 자를 절대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마 6:25(무엇을 먹을까....염려 말라)절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배고플 때 만나를 주셨고, 목마를 때 물을 주셨으며 고기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을 믿으셔야지요.

4.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사 47:17을 보시면 “나는 너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 방주를 인도하셨고,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셨으며 야곱의 가는 길도 인도하셨고, 복음사역자의 길도 인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앞길을 서둘러 행사하지 마시고 기도로 부탁하면서 순리대로 형통케 하시는 (바람과 물결을 타는) 인도를 받도록 살필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과 자녀들의 길도 꼭 하나님의 인도를 받도록 믿고 부탁하십시오(사 45:11). “장래 일을 내게 묻고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5.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참 많습니다. 사랑하신다는 약속(요 3:16), 용서하신다는 약속(마 18:21), 구원하신다는 약속(행 16:31), 천국으로 안내하신다는 약속(요 14:3),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약속(살후 1:5, 창 18:25, 계 16:5) 등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은혜를 안 믿으면 복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성이 기근으로 주렸을 때 “양식 주실 것”을 믿지 않은 장군에게 “너는 보기만 하고 먹지는 못하리라” 하셨는데(왕하 7:19) 그가 양식 거둘 때 인파에 눌려 죽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힘있게 믿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제45과 믿음대로 되라(1) (마 9:27~31) 목록으로


1. 본문을 보시면 두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요”하니까 예수님이 그 두 소경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하셨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하시니까 “그 눈이 밝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은 것은 “메시야, 선지자로 믿은 신앙”이고, 그 분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줄로 믿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긍휼을 믿은 것”입니다. 의지의 대상이 능력만 있고 긍휼이 없으면 안 고쳐 줄 것이고, 긍휼은 있으나 능력이 없으면 못 고쳐 줍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다 믿어야 하는데

2. 과연 그런 믿음의 대상이 이 세상에 있는가?할 때 하나님(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롬 3:4, 오직 하나님만 참되심). 그 소경은 좋은 기회를 만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처럼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지 않은 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은혜를 구할 것인가?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대책으로 예수님은 성령님(성령님=하나님)을 보내주셨고(요 16:7),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요 16:13) 성경 말씀을 감동하여 베풀어주신 것입니다(딤후 3:16).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의 인격과 접촉을 안 하셔도 그의 말씀인 성경으로 하나님을 접하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말단 공무원이 결정된 나라의 법대로 공무를 집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 동반하시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1:1, 16:13). 요 21:25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 하셨으니 “이는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로 성경 밖으로 나가서 무엇을 묻거나 모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단번에 주신 것과 가감하지 못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유 3, 계 22:18~19). 이것이 바로 믿는 성도의 성경관입니다(물론 성경이 형성되고 전래된 과정에 대하여 의문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적 능력으로 주신 산물로 일단 믿으시고 나중에 얼마든지 배우실 수 있음).

3.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심에 있어서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엡 3:19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으로 알아야 하니까 성경의 넓이란 “넓게 이해하고 적용하라”는 뜻이고, 성경의 길이란 “영원한 말씀으로 믿으라”는 뜻이며 성경의 높이란 “하나님의 권위로 높이 받들라”는 뜻이고, 또 성경의 깊이란 1점 1획까지 세심하게 영감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넓이는 범위를 나타낸 말씀으로 너와 나를 가릴 것 없이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만일 “구약은 구약 시대 사람에게 준 것이고, 신약은 예수님이나 사도 시대의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한다면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겠지요. 또 “이 말씀은 저 사람에게는 적용되지만 나는 해당 안 된다”한다면 또 문제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누구나 제외 없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어찌 내게 해당되느냐?”하지 마시고, “나도 죄인인즉 회개를 힘쓸 따름이라”는 자세로 받아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롬 12:3을 보시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연구의 과제를 주시는데 믿음은 거저 받는 것이냐?할 때 거듭나야 믿어지니까 거저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또 “무엇이나 다 저절로 믿어지느냐?”할 때 증명할 수 없는 것(십자가 대속, 천국, 심판 같은 것)은 저절로 믿어져야 하고, 노력하여 믿음의 분량과 폭을 넓히는 것도 있으니 예를 들면 성경 지식이나 신앙 경험으로 믿음 분량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안 될만한 믿음은 다 거저 주십니다. 그러나 축복을 더 받고 덜 받는 믿음은 성도의 노력에 좌우되는 바가 큰 것입니다.

5. 그러면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소경이 예수님을 사랑의 메시야로 알았기 때문에 “눈뜨게 해 주실 줄 믿는다” 하였는데 그 믿음이 예수님의 뜻과 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의중을 옳게 맞춘 것이지요. 어떤 귀신병자는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게 해주시오”하니까 안 들어 주신 예도 있었습니다(막 5:18~19). 그러니까 “믿음대로 된다”는 뜻은 주님과 뜻이 통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뜻을 표한 것(말씀으로 나타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하였을 때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하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겠다 하신즉 저가 믿고 가더니(순종) 그 시에 아들이 살았다”(요 4:46~51)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실지 안 주실지를 모르고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성경으로 주님의 뜻이 나타난 것은 무조건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도 인색한 성도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네 죄 때문에 몸이 약한 것이다”(고전 11:30)하면 “아멘하고 회개합니다”하면 되는데 꼭 자기를 욥에게 비유하여 말씀대로 받지 않는 것은 완악에 속한 것이고 믿음 분량이 적은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믿음대로 되라(2) (요 4:46~54, 롬 12:3) 목록으로


하나님이 주실지 안 주실지 모르면서 믿고 구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 전쟁을 할 때에 “태양아 머무르라”한즉 그 기도가 하나님과 통하여 태양이 머물렀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수 10:12) 저는 이것을 복권이 당첨되는 것 같은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고, 또 성령님께서 그런 기도를 하도록 감동하셨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기도 많이 하는 여성도가 죽어가는 암환자를 앞에 두고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를 수없이 외쳐도 안 들어 주신 사례를 보았습니다. 이때에 그 “믿습니다”는 하나님과 코드가 맞지 않는 기도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그런 식의 모험적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고, 이미 말씀 떨어진 것,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른 “믿음 분량”을 설명 드리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 분량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파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믿음대로 된 사실에 대하여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 인물이 있는데 그 중 900세 이상을 산 사람이 7명입니다. 장수 순위를 보면 8대 므두셀라가 969세이고, 6대 야렛이 962세, 10대 노아가 세 번째로 950세를 살았고, 그 다음이 아담, 셋, 게난, 에노스 순입니다. 만일 노아가 장수를 원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면 하나님이 선뜻 응답하실까요? 이런 경우에 “믿습니다”하는 기도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뜻이지요. “물 심판에서 구원 받으려면 방주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장수의 복을 약속한 것이므로 믿고 복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덕에 배를 지으려니까 난관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 기간이 120년이나 끌었으니 비난도 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롬 1:5, 믿어 순조에 되나니). 믿음의 분량이 상당했기 때문이지요. 950년 살면서 120년 기다린 것은 긴 세월이 아닐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주는 “오래 살라”고 주신 명령이지만 “독자 이삭을 죽이라”는 것은 축복을 다 깨는 명령인즉 지키기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켰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믿음 분량이 컸기 때문입니다. 믿음 분량이 크면 자기 입장을 생각 안 하고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니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놋의 가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놋의 가족을 구원해 주시려고 “소돔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두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으니 이것은 불신앙적 사례이지요. 그리고 남은 식구들이 신속하게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으니 믿음의 분량이 아주 부족한 형편입니다. 이 부족한 형편을 천사들이 도와서 이끌어 냈는데도 빨리 도망하지 못하고 놋의 처는 뒤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창 19:12~29) 이것도 믿음 분량이 적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을 잘 하는 것은 믿음 분량이 많은 것이고, 불신앙하거나 불신앙에 이끌려 세속에 미련을 두면서 순종을 잘 못하는 사람은 믿음 분량이 적은 것입니다.

4) 엘리사 시대에 선지생도의 미망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난에 쪼들려 두 아들을 종으로 뺏길 위기에 처했을 때(왕하 4:1~7) 엘리사의 자문을 구하였고, 엘리사는 “빈그릇을 많이 빌려다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어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하였는데 그대로 순종하여 잘 형통하다가 준비한 그릇이 다 하니까 기름도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고 순종하면 형통하되 준비한 만큼만 주신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든지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2. 믿음이 모자라는 형편을 살피겠습니다.

1) 나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어 나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고 머뭇거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군대 장관으로 영접 받지 못한 자존심이 가로 막았지요. 이런 자존심이 자기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고, 그런 교만이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게 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고, 또 성도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한다” 하셨을 때 베드로가 이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때문이라”(마 16:21~24) 하셨고, 또 그것을 “사탄의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자주 자기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덮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똑똑한 체하면 그렇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하게 또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게 행동하면서 순종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47과 가난과 신앙 (잠 30:7~9) 목록으로


“가난과 신앙”에 대하여 묵상해 보았습니다.

1. 가난이 무엇입니까? 어떤 목사님이 자기는 부잣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하면서 재물의 복을 받아 부자 되는 성도가 되라 하였는데 성경은 어디에도 “부자 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미국 속담에 “가난은 적게 가진 것이 아니라 더 가지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난은 재물의 분량으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꼭 써야 할 것이 모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의문이 생기지요. 꼭 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양식이 모자라서 주림을 당하거나 의복이 모자라서 추위를 타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 하셨고,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마 6:11) 하셨으며 예수님도 집을 가지신 일이 없으신 것으로 보아 “생명과 육체 기동을 위한 필요 조건이 모자라는 것이 가난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먹고 사는 것은 있는데 집 살 돈과 자녀 교육 시킬 돈이 없으니 어찌하느냐?” 했을 때 그것도 생활 구조 형편상 가난은 되지만 그것을 조건으로 도움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건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여 자녀 교육을 못 시키니 동정해 주시오” 했다면 가난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이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행 20:35)의 의미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성경은 가난의 표준을 “도적질해야 먹을 형편인 양식 핍절”이라고 정의한 후에 그렇게까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욕 돌리지 않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성도는 “아굴”이란 사람인데(잠 30:1)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했습니다. 하나는 허탄한 것과 거짓을 멀리 하게 되기를 구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필요한 양식이 모자라서 도적질을 하려 한다면 큰일인즉 그렇게 되지 않기를 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확실한 것은 필요 이상의 부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하였듯이 부자 되지 않아야 할 이유도 말씀하였는데 그것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하고 하나님을 멀리 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것 있고 평안한데 무엇이 답답하여 주여 주여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가난하거나 연약한 여건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지 안 하면 안 될 입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으로 바람직한 환경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가난과 연약을 하나님 가까이 모시는 환경으로 아셔서 감사하시고 그 가난과 연약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길로 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자로 살고 하나님을 멀리 할 것이냐?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것이냐?”하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나는 가난해도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 것이다”하고 모든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처럼 나서야 할 것입니다(마 19:27~30).

3. 지금 성도들에게 상당 부분 중요한 것이 “가난과 신앙”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물질에 대하여 자유로운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돈 벌어야 하고 절약해야 하며 때로는 눈치 보일 만큼 인색해야 하니 그것이 생활에 큰 부담 아닙니까? “실사구시”란 말은 형편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라는 뜻인데 가난과 신앙을 적당히 대처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보편적 추세입니다. 가난한 성도가 많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교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이 가난하셨고(고후 8:8),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을(마 11:5) 기억하시면서 긍정적 사고를 하십시오.

2) 하박국 선지자가 아무 것도 없는 가난 중에도 의연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한 것을 생각하십시오. 현재 이 사회는 실세 차리는 사람이 유명하지만 성도는 그 반대로 행하여 떳떳한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간장물에 국수를 말아서 단무지 두세 쪽으로 점심을 먹고 아침, 저녁은 (치아 관계로) 죽 반 그릇만 먹습니다. 그런데도 체중도 줄지 않고 몸도 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다니엘처럼 붙드시는 것이 아닌가?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만 먹고도 40년이나 살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적의 은혜에 붙잡히기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더위를 즐기라”고 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어차피 가난하니까 가난한 생활을 감사히 여기며 즐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천국 가기 어려운 부자나 일만 악의 뿌리 되는 돈을 부러워하지 마셔야 합니다(마 19:23, 딤전 6:10). 만일 부자나 돈 많은 것을 부러워하신다면 결국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는데서 헤어나지 못함이 될 것입니다(마 6:24).

4) 자기의 환경을 살피십시오. 병중에 있거나 장애로 인하여 활동할 수 없으면 그는 하나님이 특별 섭리로 은혜를 베푸실 것이요, 혹 게으르거나 땀 흘리는 일에 인색하면 그는 일하여야 할 것이고(창 3:19), 또 사치나 낭비도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고전 11:31에서 “우리가 우리를 살피면 판단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재산이 많으면 판단을 받거든 하물며 성도이겠습니까? 모든 부자들과 고위층 사람들이 재산 형성의 조사를 받지요. 그런데 돈을 좋은 일에 안 쓴 것에 대하여는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 “어떻게 소득한 것과 왜 좋은 일에 쓰지 않았느냐?”하는 것까지 판단을 받게 됩니다(눅 10:29~37). 그래서 이런 판단을 받지 않으려면 부자도 가난도 아닌 그 중간이 적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저자는 꼭 필요한 양식만 구한 줄 압니다.

제48과 온전한 믿음 (히 10:22, 벧후 1:5~7) 목록으로


본문의 “마음의 뿌림을 받은 것”은 성령님의 최초의 역사(말씀과 거듭남)를 뜻하고, “양심의 악을 깨달음”은 회개이며 “몸을 맑은 물로 씻음”은 죄사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변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참마음은 외식 없는 진실함을 뜻하는데 “온전한 믿음”을 설명하려면 연구를 더 하셔야 합니다. 무엇이 온전한 믿음일 것 같습니까? 제가 여기에 대한 설교를 핵심 설교 13과, 7분 설교 6집 37과, 10집 51과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또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초신자는 성경 지식과 믿음 생활의 경험과 연단이 부족한즉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고, 학벌이나 명예나 성경 지식이 있어도 실천이 부족하면 역시 온전한 믿음이 아닐 것이며 일반적 성경 지식과 교리와 신앙적 사상 파악이 부족해도 문제가 있으며 교회 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홀로 서지 못하거나 핍박을 견디기 어려워도 역시 온전한 믿음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온전한 믿음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다 원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전한 믿음에 대한 것을 연구하다가 벧후 1:5~7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성도의 여덟 가지 신앙적 요소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여덟 가지만 잘 구비하면 온전한 믿음으로 칭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 요소를 단계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1. 믿음이란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을 대상이 하나님 뿐이시니까요. 이 믿음에는 하나님 아는 지식, 하나님의 뜻 순종, 하나님과의 친교, 또 그 친교를 위한 순결, 하나님의 뜻 성취를 위한 사명, 그리고 감사와 찬양까지 다양한 요소가 따릅니다. 믿음이 말은 간단해도 요소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텁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면 다른 이의 기도도 안 들으실 것이라”할 만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믿음에 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면 다 끝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힘쓴 다음에 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이웃)을 상대하여 원만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과 싸워도 안 되고 이웃을 미워해도 안 되며 외면해도 안 되고 시기해도 안 되며 이웃과의 관계가 화평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혹 “이웃에게 원망 들을 일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5:23~24). 성도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립시킬 수 없기 때문에 덕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3. “덕에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원시인들은 지식을 크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귀의 유혹도 현실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없으면 많은 사람의 생활과 신앙의 문제까지 단순하지 않은 형편이 되어져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시인들에게는 성경을 주시지도 않았지만 문명인들에게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나 생활에 상당한 지식을 활용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신앙의 지도자들에게 지식이 더욱 필요해지게 된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이단에 속고 세상살이도 힘들게 되니까요.

4. “지식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절제가 무엇입니까?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이고, 설명을 드리면 자기 분수를 지키며 자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에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다, 방언을 하며 떠들썩하다가도 사회자가 똑똑 신호하면 뚝 그치지 않느냐? 만일 성령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다고 절제 없이 계속한다면 되겠느냐?”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차는 쓸 수 없는 것처럼 지식 있는 성도도 자기만 아는체하면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만은 신앙과 인격을 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이 알면 그만큼 절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절제는 자기 통제 또는 자기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고, 인내는 오래 참는 것인데 오래 참는 인내가 없으면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도가 덕을 세우려고 하면 말을 참아야 하고 욕심을 억제해야 하며 양보를 하고도 좋은 말을 못 들을 때가 있고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될 때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인내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절제 또는 희생을 하려니까 인내가 필요한 것이요,

6.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은 무엇이며 왜 인내에 경건이 필요합니까? 경건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이 인내와 경건의 인물입니다(욥 1:21, 2:10). 성도가 인내하기 힘들 때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죽기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내를 계속하기 어렵겠지요. 예수님의 승리는 인내하고 돌아가신 다음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인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경건만 생각하다 보면 이웃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부모 공경할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면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줄 압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다보면 이웃을 외면하게 되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기로 형제 우애와 친교를 말씀하신 것이고,

8.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형제우애를 하되 도덕적 제도나 체면 유지에 머물 것이 아니라 마음에 뜨거운 애정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원만하게 사랑하고 친교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49과 백부장의 신앙 (눅 7:2~10)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마 8:5~13에도 기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이 더 상세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도 보시면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 여러분 백부장이 어떤 신분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인데 유대인들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로마로부터 파송 받은 군인 장교입니다. 그리고 백부장, 천부장 제도는 구약 성경에 있는 제도인데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면 백부장, 천명의 군사를 거느리면 천부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이 백부장 이름을 가진 것 보면 그의 군인들이 유대인을 잘 통솔하기 위하여 그 지역 사람의 문화를 존중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백 명의 군사가 적은 것 같아도 그 지역에서는 그만한 세력자가 없으니까 그 지위나 권세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집 종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던 중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 집 종의 병을 고쳐주고 싶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청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백부장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낮은 신분의 종을 사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극화 현상이 없어지려면 높고 귀한 사람이 천하고 약한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겠지요. 우리에게 큰 모범을 보이는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백부장이 종을 그렇게 사랑하였으면 자신이 가서 예수님을 만나 부탁을 할 것이지 왜 유대인 장로들을 보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이 백부장은 자신과 예수님이 왜 진작 가까운 사이가 못 되었을까?하고 후회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하려니까 친면이 없고 알지 못하는 사이이며 또 자신은 이방 나라 사람으로 그 지역의 치안을 위하여 파송된 만큼 자신이 직접 가서 사정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고 자신은 이방 군인 중대장에 불과하니 어찌 예수님 앞에 서겠는가?하는 겸손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4. 이때에 유대인 장로들은 그 지역의 원로들입니다. 그리고 이 장로들은 예수님과 한 동족입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찾아뵙는데 자기보다는 임의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이 이들에게 “명령으로 가라” 했을까요? 성경을 보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고 장로들이 마땅한 일로 알고 기쁘게 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백부장이 그 지역에서 인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시면 장로들이 예수님께 가서 말하기를 “이 백부장이 로마 사람이고 군인 신분이지만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회당가지 지어준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그의 청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 것입니다.

5. 여기에서 저희들은 그 백부장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됨이 무엇입니까?

1) 종을 사랑하고 타국 민족을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백부장보다 2000년이나 뒤떨어진 시기에서 겨우 “혼혈족의 호칭을 바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2000년 전부터 천민(종)과 타민족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2) 이웃 봉사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회당을 지어주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3) 그는 예의범절을 아는 사람이고 또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의범절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이방인 군인으로서 유대인 높은 분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예수님께 덕을 베푼 일이 없으면서 청탁을 한다는 것도 미안한 일이란 것을 계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서지 못한 것이니 이 얼마나 예절 있고 겸손한 사람입니까? 백부장은 어깨에 힘 줄 만한 사람이지만 높고 권세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겸손하였으니 저희들은 평민인 만큼 더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그런데 백부장이 장로들을 보내면서 “종의 병을 고쳐 주십사”하라고 했을 뿐 “모셔오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장로들의 설명을 들으시고는 너무 기특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마 8:7)하시고 그의 집 쪽으로 발길을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신다”는 소식이 먼저 백부장에게 들어왔는데 이 백부장이 생각한즉 큰일났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서 얼굴 뵙기도 황송하여(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 못할 자라 하였음, 마 3:11) 다른 사람을 보낸 것인데 “자기 집에 오신다”니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자기 벗들을 보내서 자기의 뜻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뜻은 “예수님이 전능하신즉 말씀만 하셔도 능력 전달이 되는 줄 아는데 이렇게 수고까지 하시면 어찌합니까?”한 것입니다. 자기도 윗사람이 명령하면 복종하고 또 자기도 부하에게 명령하면 복종하니까 예수님도 말씀만 나타내시면 종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백부장은 진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며 또 말씀이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이 크게 감탄하시고 “이만한 믿음을 처음 본다” 하셨는데 보낸 사람들이 집에 가니까 종의 병이 이미 나아진 것입니다. 마 8:13절에서는 “네 미음대로 되라” 하셨지만 본문에서는 칭찬만 하셨는데도 병이 나은 것입니다. 좋은 믿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뜻의 초월성을 믿는 신앙입니다.

제50과 믿음으로 확보할 것 (롬 5:1~4)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믿음으로 확보할 것 몇 가지”를 소개하셨는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죄사함과 영생),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 또 믿음으로(여러 가지) 은혜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 그 외에도 환난이 연단과 소망을 주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받는 은혜가 많은 중 꼭 받아야 할 것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짠맛 잃은 소금처럼 헛된 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1. 믿음으로 확보해야 될 것 첫째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이단에 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믿는 것도 쉬운 일 아닙니다. 좁은 문,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같은 것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단순하면서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과 영생과 심판과 성경이 진리인 것 정도까지만 믿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진실해야 한다”는 문제는 신앙 고백과 생활 목표가 일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계명을 성실히 지키되 다 못 지켜도 그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열심이 신앙 고백과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구원 받을 일을 확보하신 줄로 압니다.

2. 하나님을 사랑(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계명의 강령이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는 것”이란 뜻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예배 의식보다도 계명 순종에 있고(요 14:23) 이웃 사랑은 나의 혈기와 욕심을 빼버리고 남을 먼저 배려할 때 실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맺어야 할 열매가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다 주시고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롬 8:32, 마 20:28). 요일 4:11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하셨으니까 성도가 모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쪽으로 마음과 생활을 나타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원수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는 수준에는 도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직도 그 열매가 마음에서 싹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믿음 주신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고, 축복의 길도 막는 결국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자신감 없는 믿음 생활은 극히 초보에 해당한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책임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마 16:24). 믿음이란 것은 무엇 무엇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나는 하나님을 믿어 드리겠습니다”하는 식으로 흥정해서 바꾸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만물과 의식주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불신자들이 잘 먹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란 것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불신자들이 자기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처럼 자기의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을 지면서 축복을 더 받아서 자기의 십자가가 가벼워지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예수를 믿었으면 자립 생활에 들어가도록 노력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행 20:35에서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은즉 성도가 주면서 사는 위치에 있도록 확보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사례 받는 것이나 구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이 섬기는 차원에서 주어서 받는 것은 도움 받는 것이 아님). 예수를 믿되 얻어먹으려고 믿는 것은 아니니까 모든 성도는 믿음 안에서 자립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4.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의 무기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에서 패배하는 것은 만 가지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경쟁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마귀와의 경쟁에서는 마귀를 짓밟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무기를 다 갖고 계십니까? 그 무기는 바로 말씀과 기도와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후 2:14, 고전 15:57) 하셨고, 요일 5:4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5. 이 “이긴다”는 말씀에는 죄 뿐 아니라 고난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고난 문제 해결의 열쇠도 꼭 갖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문제 해결의 열쇠가 성경 여러 곳에 있지요. 욥기에도 있고, 시 50:15, 119:67, 요 16:33, 롬 5:3, 벧전 1:6~7, 5:10, 계 7:17, 21:4 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고난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행 14:22, 딤후 3:12) 고난 극복의 방도를 알고 계셔야 하며

6. 마지막으로는 세상 떠나는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갖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쓰시다가 끝을 보게 하시니까 주님의 뜻에 의지하여 살고 주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말씀은 롬 14:7~9과 빌 1:21에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반드시 구원, 사랑, 자기 십자가, 죄에 대한 승리, 고난에 대한 적응, 죽음에 대한 신앙의 열매는 꼭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51과 믿음은 은밀한 것 (마 6:1~6) 목록으로


제목은 “믿음은 은밀한 것”입니다. 이 제목을 따라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가 분수에 넘칠 만큼 자랑하거나 믿음을 과장하여 나타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여러 곳에 보시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거나 큰 이적을 행하시고도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막 7:36, 마 9:30)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려고 “들레시지 않는다”(마 12:19)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병 고친 은사 경력만 있어도 나타내려하고 속보다 겉을 더 화려하게 보이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겸손한 믿음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믿음은 은밀한 것”임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왜 은밀한 것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린다면

1)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겨지기 때문입니다(약 1:21).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심겨지면 그 믿음 분량이 큰 것이고, 적게 심어지면 적은 것인데 이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밀하다는 것입니다. 큰 집에서 사는 것이 믿음이라면 금방 알아보겠지만 마음에 심겨진 도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믿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처럼 거듭난 심령도 영이기 때문에 안 보이며 이 안 보이는 하나님과 안 보이는 영과의 관계가 믿음인즉 은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보실 때 겉이나 행동보다 마음을 먼저 보시는 것입니다(히 4:12, 잠 16:2).

3) 셋째로 믿음이 은밀한 이유는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서 행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람 앞에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구제도 나팔 불면서 하지 말라 기도도 큰 거리 어귀에서 보이게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해라” 하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가 갚아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본문 1절에서 “은밀하게 하지 않은 것은 상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천국에 가면 유명한 자선 사업가들이 다 상을 적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문나고 사람의 칭찬 받은 것으로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모르는 것, 하나님만 아시는 선행을 행한 사람이 가장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4) 믿음이 은밀한 것은 성도의 겸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나타내시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요 21:25을 보시면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되도록이면 자기를 안 타나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능한 것보다 부족이 많을 터인즉 무엇을 나타낼 것이 있겠습니까?

2. 그러면 전도는 어떻게 하며 인간 관계를 어떻게 맺으라는 것입니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두 가지 속담을 기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싸고 싼 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향은 포장을 많이 하고 감추어도 그 냄새가 난다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덤불 속이라도 유실수가 있으면 길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보화만 잘 간직하면 아무리 자신을 은밀하게 감추어도 알려지게 마련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감추인 자를 뽑아 쓰시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행구 사이에 숨었을 때(삼상 10:22) 뽑아 쓰셨고, 다윗이 여덟째 아들로 제외되었을 때도 뽑아 쓰셨습니다(삼상 16:11). 종교 개혁 시대에도 로마 유학을 해야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와서 지금도 외국 유학을 해야만 쓰임 받게 되고, 학력을 크게 여겨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학위를 따려고 가짜 박사까지 넘겨다보는 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땅과 레바논땅 밖으로 나가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2000년이 지나도록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그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겸손하고 은밀하였다”하여 세상이 모르게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복음이 지나칠 정도로 개방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마치 신용 없는 물건을 선전으로 팔아먹는 격입니다. 진짜 물건은 크게 소문내지 않아도 필요한 사람이 은밀하게 찾아와서 깊이 감추어 놓은 것을 사가는 것처럼 성도의 믿음이란 감추인 보화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이면 하나님이 알려지도록 하셔서 필요한 자가 공급받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딤후 2:9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핍박에 위축받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있었어도 복음은 봇물처럼 흘러나갔고, 스데반이 순교를 하였는데 하나님은 스데반 죽일 때 협력한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선교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감추어지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으로서 자기 앞만 꾸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문나지 않은 고넬료를 지켜보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특별 섭리를 나타내셨고, 에디오피아 내시도 역시 이방인으로서 나타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의 숨겨진 경건을 보시고 특별 섭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유명한 성직자에게 배우려고 하지만 믿음은 2000년 전의 사람 예수님이나 사도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실리적일 것입니다. 4000년 전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배워도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배운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밀한 것입니다.

제52과 충격 받을 질문 (요 3:29~30) 목록으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주신 모범이고 명령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항상 성경 말씀과 자신의 입장을 저울질해야 할 줄로 압니다. 어떤 말씀은 “잘 지킨다”할 수 있겠고, 또 어떤 말씀은 “아예 연약하여 못 따라 갈 것으로 단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인데 또 어떤 말씀은 감취어 있어서 느낌조차 못 갖고 넘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저희들이 스스로 반성하며 충격을 받고저 하는 의미로 성경에 있는 몇 가지 말씀을 질문해 보겠습니다.

1.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기뻐하였는데 과연 당신도 그러합니까? 신부를 취하는 이는 신랑이고 세례요한은 그 들러리인데 “자기는 신랑이 신부를 취하면서 즐거워하는 음성을 듣는 것으로 기뻐한다” 하였으니 이는 오직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자기의 기쁨의 소재란 뜻입니다. 대단한 헌신이요, 충성이 아닐 수 없지요.

2.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례요한은 주님을 위한 희생만 있고, 자신을 위한 이기주의는 일체 없었음을 나타내주신 말씀입니다. 기복주의가 0.1%도 발견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3. 귀하는 온유합니까? 온유한 성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모세도 지면에서 뛰어날 만큼 온유하였고(민 12:3), 예수님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고 하셨습니다. 온유는 노할 줄 모르고 신경질 내거나 혈기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로만 상대하고(필요하면 법으로 대할지언정) 노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귀하도 마음이 온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4. 귀하는 겸손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출생 때부터 겸손하게 크셨습니다. 그 부모가 예수님을 외양간의 구유에 뉘었으니까요. 이것은 짐승 취급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먹던 음식, 쓰던 물건을 안 쓰는 이도 있습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인데 그런 사람은 초상집에도 가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누구도 와서 손대지 말라”고 해야 하겠지요. 겸손은 예수님이 섬기는 자의 위치에 계시듯(마 20:28) 자신이 종의 취급을 받도록 낮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지려고 노력하십니까? 또 겸손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보십니까?

5.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를 믿으십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를 것이라”(마 16:24) 하셨지요. 욥은 자신을 티끌과 구더기에 비유하였습니다(욥 10:9, 30:19, 7:6). 그리고 “티끌은 바람에 날릴 뿐이라(욥 2:12)”고 하였으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주권 없는 티끌처럼 취급하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질문은 “예수님이 당신의 왕이 되셨습니까?” 하는 것이지요. 또 “주여”란 말을 예사로 부르지는 않습니까?하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6.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십니까?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고, 두 강도는 자기 십자가를 진 줄 압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의 죄책을 자신의 담당으로 여기는 마음이고, 또 도덕적인 책임을 뜻합니다. 한편 강도가 회개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다(눅 23:41)” 하였지요. 그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인간은 항상 벌 받아 죽을 죄인인줄 알면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세를 갖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7.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마 6:24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긴다”고 하셨지요. 한 주인은 예수님이고 또 한 주인은 현세욕입니다. 이 뜻과 같은 질문은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갈 5:24)”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8.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즉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려 하십니까?(롬 14:8)”

9.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아십니까?(딤전 6:8)”

10.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물욕과 명예욕과 현세적 특권을 버리고 말씀을 따르신 것처럼 그렇게 해보실 용기가 있습니까?(마 4:1~11)

11. “생육하고 번성하라”하신 말씀대로 순종할 용기가 있습니까?(창 1:28)

12. 아브라함처럼 그 이웃에게 생활 근거지의 특권을 양보할 수 있습니까?(창 13:9)

13. “현실과 내세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하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골 3: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다”고 하셨음, 빌 1:23)

14.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하셨는데(롬 8:29) 귀하는 과연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또 예수님의 인격을 얼마큼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15. 귀하가 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가상할 때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눅 17:10)하고 미련 없이 물러날 생각이 있습니까?

16.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는데 그 말씀을 읽고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17.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하셨는데 귀하도 그렇게 하셨습니까?

1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행 20:35)

19. “하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하셨는데 귀하도 그 말씀 따라 희생에 앞장 설 용기가 있습니까?

20. 주님이 귀하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한 줄 믿습니다(빌 1:21)”하고 흔쾌히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질문은 이런 것들 외에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충격을 주는 줄 압니다. 반성할 문제가 많다는 뜻이지요.




제53과 믿음의 적 (눅 22:31~34) 목록으로


“믿음의 적” 또는 “믿음을 훼손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믿음을 설명한다면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경 말씀도 사랑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복종을 잘 하면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훼방하거나 대적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세력의 정체를 잘 아셔서 그것들을 물리치고 이기면서 믿음 보존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믿음의 적”이라 하면 근원적으로 마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거짓말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요 8:44). 참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요 8:26, 14:6). 그런데 마귀는 “자기 말이 참이라” 하니까 진리의 대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마귀가 눈에 보이면 멀리 피하면 되겠지만 마귀도 영물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역사합니다. 산에 갔을 때 짐승 잡는 덫을 발견하셨다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위반하는 짓을 하려고 일을 꾸몄구나” 하시겠지요. 그리고 그 덫을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치우시겠습니까? 만일 그것을 그대로 둔다면 짐승이 피해를 보고 불법자가 승리할 것인즉 그렇게 되면 안 되니까 치우셔야 하겠지요. 성도가 믿음의 적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을 대적하는 것과 방법이 그와 같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2. 그러면 믿음을 해하는 마귀의 역사가 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아 3:15을 보시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는 말씀처럼 저희들도 믿음을 해하는 여우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1) 믿음을 해하는 첫째 여우가 의심입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의심을 적게 받는 사람이면 행복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의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심하면 안 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 위로 오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물 위로 갔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마 14:28~31). 무엇을 의심한 것입니까? “물 위로 오라 하신 예수님이 빠지게 하시면 어쩌나?”하고 예수님의 일방적 취소를 의심한 것입니다. 사람은 나무에 오르라 하고 그 나무를 흔들 수 있겠지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꾀일 때도 “참으로 하나니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냐?”하면서 말씀에 의심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성경 의심이 곧 믿음의 적입니다.

2) 의심이 지나쳐서 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이라” 하셨고,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16:21~23, 26:31~35)하셨는데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 버려도 나는 안 버릴 것입니다”한 것은 예수님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도들에게 많이 나타나지요. 아예 지킬 체를 안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어떤 말씀을 무시하고 못 본 척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산아제한, 아내의 복종, 옳고 그름의 판단 등).

3) 무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66권으로 자기를 계시하셨는데 성경을 전체적으로 연구할 지식이 부족하여 많이 알지 못한다면 그만큼 믿음의 분량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호 4:6을 보시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 하셨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힘써 알라”(호 6:3)고 하셨습니다. 지식 없는 것이 망할 죄인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알지 못하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 무지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시고 열심히 배우는 일에 주력하십시오. 법을 몰라서 못 지킨 것인데도 “이유 없다”하고 벌금 통지서 나오는 것을 경험하셨지요.

4) 나태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느니라” 하셨고(마 11:12),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마 7:7) 하셨으며 또 “전심으로 향하는 자에게 능력 주신다”(왕하 16:9)는 말씀을 아시면서도 나태를 일깨울 줄 모르면 역시 믿음의 발전을 막는 것입니다. 기도할 기회를 놓쳐 보세요. 기회가 잘 안 옵니다. 기도를 깊이 하려고 하면 뒤에서 “간단히 해”하고 당기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마귀는 성도의 나태를 권장하는 방법으로 믿음에 장애를 놓는 것입니다.

5) 완악입니다. 완악은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거역하고도 시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로 향하는 문을 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 향하는 문은 몇 계단이 있는데 겸손, 온유, 진실, 신뢰, 그리고 자기 부정, 회개, 복종심과 충성심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완악은 처음 단계에서 막히는 것입니다.

6) 세상 일에 너무 바쁜 것입니다. 세상 일에도 절제를 하면서 영적 은혜를 위하여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마주 앉는 것을 귀한 일로 여길 줄 아셔야 하며

7) 안일무사가 신앙의 적인 줄 아셔야 합니다. 저희들이 안일무사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데 고난이 믿음을 해칠까 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안일무사가 믿음을 나태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도 주시고 가시도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욥 23:10, 고후 12:7~8).

8. 생활에 대한 말씀

제54과 선택이 중요함 (신 30:19~20, 수 24:14~15) 목록으로


“선택이 중요함”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고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선택을 잘못하여 불행해진 일이 많을 것인데 그것조차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 성경에 “선택 잘 하라”는 말씀을 세 곳만 말씀드리면

1) 신 30:19~20에서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증거를 삼노니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부종하라(하나님 뜻을 따르라)”하신 말씀이 있고,

2) 수 24:14~15에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면 너희 열조가 강 저편(아브라함 고향)에서 섬기는 신이든지 또는 가나안땅의 신이든지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 하였고,

3) 왕상 18:21에서 엘리야가 외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아야 할 것이라” 하므로 바른 선택을 촉구한 것입니다. 선택을 잘 한 사람은 다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인생을 만족하게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선택 잘못한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선택이 잘 된 것 같으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구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삼상 8:4~22). 이때에 하나님이 “선민들에게는 군왕 제도가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거나 선지자의 지도를 받으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떼를 쓰듯 왕을 구하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선택대로 허락하셨는데 결국은 좋지 못한 상태에서 507년을 끌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을 구할 때 선택을 잘못한 것입니다.

2) 히스기야왕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선한 왕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가 병든 일이나 앗수르의 침략으로 수난을 받은 것은 조상 또는 백성들의 죄값일 만큼 선하였습니다. 그런데 왕하 20:1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선한 왕을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사람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면 하나님이 유익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롬 8:28에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모르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눈물을 보이고 더 살고 싶은 은혜를 구하니까 하나님이 그의 뜻을 따라 15년을 더 살도록 붙드시고 앗수르를 물리치는 은혜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게 된 것은 사실인데 3년 후에 므낫세를 낳았고, 므낫세가 다음 왕이 되어 55년 동안 악한 왕으로 나라와 백성을 멍들게 하였으니 그 일로 본다면 히스기야가 그때 죽는 것이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겠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모르니까 선택을 잘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예하고 아멘하면서 순종하겠습니다”하는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3)요시야왕도 좋은 왕이었습니다. 성전 수리를 하고 율법을 읽으면서 회개하고 우상 타파와 정화 사역을 많이 하였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복을 주시면서 왕하 22:19저에서 “네가 겸비하고 회개한즉 내가 너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이 곳에 내리는 재앙을 네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시야왕의 시대에 재난을 안 주셔서 평안히 죽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를 치려고 유대땅을 딛고 유프라데쪽으로 간다”하였으면 길을 허락하고 나가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이 재앙을 안 주시겠다” 하셨으니까 믿고 가만히 있었으면 애굽의 몽둥이로 앗수르를 때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므깃도에 나가서 싸우다가 전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히 열조에게로 가게 하신다”는 약속대로는 되지 않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간 것만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선택하여 소원을 응답받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한 것이 아니면 불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1) 성도가 하루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서 매사에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고,

2)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 중에 지도자들이 선택을 잘못하였거나 안 했으면 좋을 일들을 선택하므로 현실 교회가 성경과 예수님 모범에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처음에 복음을 받고 순종하며 기도, 말씀에 진력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만 점차 교인이 많아지면서 복음 증거자들이 듣는 자들의 무지를 바탕으로 인기주의 또는 권위주의로 빠져간 것이나 증거자의 권위가 설교에 있음을 알게 되면서 설교 위주의 목회를 하다보니 여기에서 교역자의 우열이 생기게 되었고, 성경 강론을 멀리 하면서 재미있는 설교만 들으려는 잘못된 의식을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또 교역자 고용(청빙) 제도는 인기주의와 물량주의와 직업 의식을 갖게 하였고, 권징 제도는 거의 무용지물에 있다 할 것이니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만 못할 만큼 치리회를 무용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밀하게 살피면 현실 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잘못된 선택이 많은 것을 유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매사의 선택을 지혜롭게 하셔야 합니다.

제55과 나의 양식 (요 4:31~34) 목록으로


1. 본문 34절을 보시면 “나의 양식은”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이었으며 저희들의 양식은 무엇이어야 하나”하는 것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록하려고 할 때 몹시 피곤하였습니다. 그때 TV에서 “피플 세상 속으로”란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어떤 청년이 영재 학교를 수석으로 나와서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 쓴 책 한 권을 정독하고 자기 생활의 용기와 변화를 일으켜서 그 책을 쓴 저자를 찾아가서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 것입니다. 그 청년은 공부 잘 한 후에 “한국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그때 저는 “내가 피곤해도 이 말씀을 기록해야 하겠다”는 용기를 갖고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환경을 건설적으로 타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사마리아 동리를 지나시다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를 하신즉 그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로 믿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성 안에 들어가서 전도를 한즉 “사람들이 예수께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은즉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하고 진리를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제자들은 음식을 준비해놓고 “랍비여 잡수소서”하고 예수님께 권하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시고, “사람들은 넉 달 있어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 하지만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저의 마음을 상당히 뜨겁게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밭은 세상을 뜻하고 “희어져 있다”는 뜻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보려고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 진리를 깨달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성 안에 들어간 것은 그가 물을 갖고 가서 점심을 먹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육신의 양식을 뒤로 미루고 영적 양식을 먼저 공급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입니다.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보려고 나오는데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을 차려놓고 먹으려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양식은 아주 먹지 않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성도가 육신의 양식에 집착하여 영혼의 양식을 소홀히 하거나 전도를 게을리 하거나 전도의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영혼의 양식은 갈망하지 않고 현실적인 행복이나 육신의 양식을 더 추구한다면 깊이 반성하시고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신 것이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하고, 여기의 일용할 양식이 결코 육신의 양식만을 뜻하지 않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제가 (어제)수요일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역대상 15장을 일부 읽고 다윗이 법궤를 옮길 때 동원된 사람들의 이름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만일 큰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를 했다면 설교를 들으려고 한 성도들이 불평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큰 교회 설교나 작은 교회 설교나 다를 수가 없고, 또 한 사람이 받아야 하는 말씀이나 1000명의 사람이 받는 말씀도 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설교를 안 하고 다윗이 법궤 옮길 때에 동원된 사람의 이름만 읽었을까요? 그것이 설교자의 실수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도자가 설교학적인 설교를 했다면 만족할 성도들이 있겠지만 지금 한국 교회는 120년 동안 설교학적인 설교를 듣고 있는데 거기에 TV 설교까지 첨가되어서 폭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교의 의미는 책망에 있고, 계명을 지키도록 사랑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요, 귀가 따갑도록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듣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는 중에 “일점일획까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여 영혼의 양식을 삼아야 한다”는 인식은 거의 없어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계 1:3에서는 “성경을 읽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고, 시 119:97에서는 “주의 법도를 사랑하여 종일 묵상한다” 하였으며 행 17:11에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의 뜻이 이렇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면(강론을 의미함)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도 필요하지만(눅 24:25~26) 설교보다 강론이 더 중요하고(눅 24:27) 설교보다 강론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강론책으로 공부하시고, 교회에서는 문의와 답변을 하고 설교로 책망만 하는 시대로 발전하고 변화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육신의 양식이나 잘 먹는 문제는 2차적 문제로 돌리시고 자신이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을 스스로 펼치고 스스로 공급받아 만족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으셔야 할 영혼의 양식이 여러분 손 안에 있어야지요. 목사의 머릿속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양식은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시면서 제자들이 준비한 식사를 뒤로 미루신 주님을 생각하시면서 저희들도 식사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뜻부터 시행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56과 최대의 관심사(1) (요 15:5~10) 목록으로


성경에 보시면 “마음을 다하고.....전심을 기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주신다”하셨고(대하 17:9), 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7~39)”고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또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노력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거저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이 은혜는 거저 받는 속죄의 은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속죄의 은혜는 믿음으로 거저 받지만 은사와 축복은 관심 따라 노력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읽은 본문 말씀은 관심의 목표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하여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성도의 관심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연합적 관계가 어떠하냐?”에 두시되 거기에 전심을 기울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동안 월드컵에 관심가지신 줄 압니다. 또 북쪽 미사일에도 관심 두셨을 것이고, 또 매일 살아가는 생활에도 관심을 두셨을 것인데 하나님은 성도가 살아감에 있어서 무엇은 100% 필요하고, 무엇은 50% 필요하며 무엇은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관심을 갖고 노력할 때도 반드시 그 비중과 시간을 안배하여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구별할 줄 알고 많이 할 것과 적게 할 것을 조정하는 지혜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은 곧 하나님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비중 있고 중요하지만 가정도 중요한 만큼 교회 생활과 가정 생활을 안배해야 하는 것처럼 영적 생활과 육신 생활도 안배하되 허탄한 일은 멀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24:4에 보시면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그 거룩한 곳에 설 자는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허탄한데 뜻(관심)을 두셨다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안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허탄한 것인지도 잘 분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스포츠나 오락이 있고, 직업 생활에 관계된 일이 있으며 또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기도가 있다고 할 때 무엇이 허탄한 것인지 또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그 중에서 최대의 관심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물처럼 이리로 쏠리면 저쪽이 허술해지고 저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면 이쪽이 허술해지니까 가장 고상한 목적에 최대의 관심을 쏟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성숙된 단계에 있으면 대부분 무엇이 신령하고 무엇이 속된 것이며 또 무엇이 허탄한 것인지를 아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초가 잡히지 못한 분들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며 또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는가?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그런 상식을 깨우쳐 드리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출석한다고 할 때 만일 믿음이 초보적이라고 한다면 무엇에 관심을 둘 것 같습니까? 우선 예배당 건물이 어떠하냐에 관심을 갖겠지요. 그 다음에는 사람이 얼마나 모였느냐?에 관심을 갖고 수를 의식하겠지요. 세 번째는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하는데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것은 외모를 보고는 모르는 것이고, 그 사람의 학벌이나 간판을 보고도 모르는 것이며 설교 한 시간을 듣고는 더욱 모르는 것입니다. 목사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것은 그의 믿음과 지식과 생활이 표준(예수님)에 가깝다고 검증됐을 때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니까 속히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를 관심 두겠지요. 그리고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드린 것은 실속 있는 일이지만 그 이외에 관심 가졌던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데 아무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은 반드시 가져야 할 최대의 관심사이고, 그 관심사가 바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느냐? 아니냐?하는 것 아닙니까?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교회에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아무개가 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아무개 집이 꼭 구역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아무개 성도가 속히 퇴원해야 하는데, 예배당이 속히 완공되어야 하는데.....” 다 좋은 관심입니다. 요즈음에 또 “한반도 회복 기도 운동”이란 행사가 있고, 통일을 위한 기도는 늘 있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좋고 교회를 잘 되게 하는 일도 좋으며 더 나가서 나라와 정치를 위한 관심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서 또는 그보다 더 크게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은

1. 내가 하나님의 인정받고 있는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7분 설교 13집. 인정을 받음, 시 1:6). 사람이 다 완전할 수는 없지만 거리끼는 일이 심하면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모르고 훌륭하다 해도 그 자신은 인정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정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건전하고 무게가 있을 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2.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민감할 만큼 가까운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개개인을 하나님과 가깝도록 지도하기 위하여 교회 활동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결속시키는 매개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말씀과의 관계가 최대의 관심사란 뜻입니다.

제57과 최대의 관심사(2) (마 22:37~40) 목록으로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성도는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자기 정신으로 살지만 믿는 성도는 예수님의 정신(성경 말씀)으로 살기 때문에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믿는 성도가 안 믿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허탄한데 까지 관심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에 전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마 7:21~23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주여 주여 하며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한다”한 사람들이 다 불법자로 몰려 “내게서 떠나가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고 귀신을 쫓으며 권능을 행한다 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신 것이니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예사롭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봉사도 앞뒤 관계를 재보고 해야 합니다. 직업적 선한 봉사가 있는데 그것은 보조를 받아서 돌려주는 것입니다. 자기 것으로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 것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시골길에서 걷는 사람을 태워주고 싶어도 그것이 버스 업자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어서 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선행도 까다로운 것처럼 신앙적으로 행하는 일에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성도가 되시되(시 40:8) 항상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엡 5:!7)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아도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으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계명의 강령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인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면 되는 것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랑할 마음과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웃 사랑을 단계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 나가야 합니다.

1) 우선 미운 자를 사랑하고 마음으로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이 이웃 사랑을 안 받아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립을 하셔야 합니다. 하루벌어 하루를 살며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다른 이의 사랑이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위치에 서서 자립을 긍지로 여겨야 합니다. 어떤 이는 도움을 받아서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성도로서 빚만 지는 일일뿐 보람된 일이 아닙니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아도 도움을 안 받는 자립이 중요합니다.

3)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아 할 이유는 가난하게 살아도 자립을 했으니까 도움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또 주는 것은 복이라도 도움 받는 것은 빚이 되기 때문입니다. 행 20:35을 보시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하신 만큼 이 말씀을 기억하신다면 다른 이로부터 도움 받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4) 자기의 능력이 성장하는 정도에 따라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인데 이것은 속도가 느려도 보통 은혜로 할 수 있는 것이고,

5) 그보다 속도가 빠른 이웃 사랑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처럼 자기 생활비 전부를 이웃 사랑에 쓰는 것인데 그것은 놀라운 사랑이고, 5병2어의 기적을 초래할 근거가 되겠지요. 이렇게 약한 입장에서 단계적으로 사랑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셔야 하고,

3.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 6:33에서 이 방법은 “모든 것을 더하시는 은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천국 생활이고, “그 의”는 바르게 사는 생활 입니다. 구하지 않고 받은 의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받은 죄사함이지요. 그리고 구해서 받는 의는 계명을 지키는 노력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야 죄를 안 짓게 됩니다. 시 1:1~3을 보시면 “죄 안 짓는 자라야....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과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는 것”은 같은 복인데 이 복이 그 나라와 그 의(죄를 멀리 하는 것)를 구하므로 받으니까 꼭 그 일에 관심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어떻게 하여야 죄를 멀리 할 것인가?”하는 것도 역시 큰 관심을 쓰셔야 합니다.

4. 하나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금슬이 아주 좋은 사람을 가리켜서 잉꼬부부라고 합니다. 저는 잉꼬부부로서는 자격이 없습니다. 부부가 매일 몇 번씩 “사랑해 사랑해” 한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에 정신적으로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부부 사랑을 적당히 하면서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시면 다른 이의 기도도 소용없다”할 정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에 최대의 관심을 두시라는 것입니다. 네 가지 관심사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제58과 후회하지 않을 일 (민 23:19) 목록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약 3:2에서 “사람이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 하셨는데 온전한 사람은 없으니까(롬 3:10) 실수를 줄여서 후회를 안 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울을 왕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삼상 15:11). 그래서 이 “후회”로 번역한 “나캄”이란 동사를 “유감”으로 번역함이 적당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후회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저희들도 후회를 안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후회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무엇을 잘못하면 후회하게 되며 또 “후회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후회하게 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제때 배우지 못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반드시 미리부터 전문성을 살려서 그 전문성과 관련있는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금방 성인되고 금방 40대 됩니다. 제가 26세에 신학교 갔을 때 친구 최전도사님은 34세였는데 그 분은 자주 “나이가 많아서 공부하기 힘들다”는 말을 했습니다. 일찍 결혼하고 전도사 일을 하다보니 신학을 늦게 가서 후회를 한 것입니다.

2) 젊어서 시간을 낭비하면 금방 후회하게 됩니다. 부지런하게 산 사람의 뒷줄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규, 비정규직이 그래서 생긴 것인데 격차가 너무 심하니까 후회를 하는 것 아닙니까? 젊어서 시간을 생산성 있게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삶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에 힘들고 힘드니까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교만하면 후회하게 되고 조급하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고전 10:12에서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셨고, 딤후 3:4에서는 “조급한 것도 죄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말이나 조급한 것은 금방 후회꺼리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게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4) 자기 할 책임을 못하게 되면 역시 후회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셨고, 바울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하셨는데 사람이 성인이 되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면 자기의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사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무엇이 후회하지 않을 일인가?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을 일도 연구해 보셔야 합니다.

1) 진실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진실은 역사적으로도 다 드러나고 또 하나님은 진실에 근거를 갖고 공의롭게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현재 “진실이 숨겨져서 덕을 봤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진실을 숨겨서 덕을 보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사기꾼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조상과 신분과 생활에 대하여 부인하신 일이 없습니다(딤후 2:13).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나타냈을 때는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토하고 돌팔매를 맞아도 그것은 후회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2) 의롭게 행한 것도 후회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다가 성공이 더딘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바르게 행한 것이 잘 한 것이고, 인정받는 것이니까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 1:6에서 “오직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 하셨고, 시 37:25에서는 “의인과 그 자손이 버림당한 것을 본 일이 없다” 하셨으니 역시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순간적으로 핍박을 받아도 그것이 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3) 이웃을 사랑하였으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미운 자가 없어야 하고, 죄인이나 원수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눅 6:38에서도 “형제를 용서하였거나 형제에게 후히 베푼 것은 하나님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에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4) 보물을 하늘에 쌓은 것도 후회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요즈음 재활용품을 모아서 2억씩 장학금을 낸 분이 두 분이나 보도되었지요. 그 분들은 잘 먹고 잘 쓴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러나 후회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 6:19~20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손실이 없고 마음까지 천국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적 사명이나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재물을 쓴 것은 결코 후회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5)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 기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것은 성경 연구와 증거를 뜻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어떤 선비는 글만 좋아하다가 가난해졌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후회할 일입니다. 그 배우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도에 사로잡히는 것은 주님과의 동행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미흡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꼭 잡아주셔서 동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 회개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후회할 일이 아닙니다. 고후 7:10에서 “후회할 것 없는 회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회개에 인색한 성도들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세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무지하고 실수가 많았습니다”하고 인정하는 일을 즐겁게 여기셔야 할 것이요,

7) 자기의 맡은 일을 다 감당하였을 때는 설령 고난을 많이 당하였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제59과 가장 귀한 일 (요 6:29~30) 목록으로


“가장 귀한 일”로 시간을 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일을 접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자기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된 일, 또는 생산성 없는 일에 쓰는 사람들을 볼 때 퍽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고, 또 한 가지는 요즈음 한창 떠드는 사행성 오락(바다이야기) 업자가 전국에 13,500처란 말을 듣고 놀란 것입니다. “사행성”이란 속여서 돈 빼먹는 오락이란 뜻입니다. 도적놈이지요. 그 13,500처 가운데 기독교인이 없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눅 24:34)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차피 지옥 갈 사람들이니까 세상에서라도 낙을 누려보려고 애를 쓰는 줄 압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입고 누리며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여 시간을 보냈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일이 무엇인가?”를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일은 직업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직업을 종류별로 나누어 생각해 보십시오. 노동 직업과 비노동(사무직) 직업이 있는데 다 좋은 것입니다. 정신적 직업으로 몸이 약해진 사람은 노동하는 직업을 부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과 적게 버는 직업이 있지요. 이때에 직업은 돈벌이와 관련이 있으니까 죄만 안 짓는다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좋은 것입니다. 또 직업 중에는 혼자 하는 직업이 있고(농사, 목축, 어업), 상부상조하는 직업이 있습니다(회사원, 상업, 공무원). 혼자 하는 직업은 자유가 있어서 좋고, 상부상조하는 직업은 상부상조하니까 좋은 것입니다.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표준은 나의 하는 일이 이웃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주느냐?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상업은 유통의 유익을 주고 의사는 건강에 유익을 주며 교사는 지식과 교양에 유익을 주고 정치자는 나라의 살림에, 법률가는 송사 문제에 유익을 주겠지요.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목수의 직업을 가지셨다가(막 6:3)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로 바꾸셨습니다. 본문이 그 내용입니다. 따라서 직업의 종류와 가치로 볼 때 가장 귀한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인간적인 직업이 있고, 신앙적인 직업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직업은 세상 살이에 필요한 직업들입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직업들 중에서 타인에게 손해 주는 직업을 성도는 극히 삼가셔야 할 것입니다. 법을 위반하는 직업은 물론 나쁘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손해되게 하는 직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술장사. 담배 장사 같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골에 한 집 있는 술 집 때문에 그 동리의 여러 집이 파탄에 처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그 술집을 원망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여자들에게도 폐암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담배 연기의 간접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하셨으니 그런 직업은 삼가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 선택이 어렵거나 할 일이 없는 성도는 재활용품 수거하는 직업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청소도 되고, 운동도 되며 돈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이라도 직업 때문에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학규 전 도지사가 노동일을 해도 자존심 탓하는 사람이 없고, 카터 대통령이 집 짓는데서 일을 해도 자존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큰 벼슬을 했기 때문인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긍지와 신앙의 보람을 갖는다면 설령 그 직업이 노동이라 할지라도 더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죄 없는 서민만도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의 하는 일(직업)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서 평가를 해 보시지요.

1)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직업이 있습니다. 양식 생산, 의복 생산, 주택 건립 같은 것이지요. 꼭 있어야 할 직업입니다.

2) 또 건강에 유익을 주는 직업이 있습니다. 의사, 스포츠, 웰빙 사업 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귀한 직업입니다.

3) 교육적인 직업입니다(교사, 학교 운영 같은 것). 지식인, 교양인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4) 대통령, 공무원, 군인, 법관 같은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직업입니다. 그것도 귀한 직업입니다. 요즈음 생활하는데는 의사와 법무사와 정비사(차량)가 측근에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5) 그리고 다른 이의 시간을 뺏는 직업, 오락, 관광 같은 것은 별로 생산성이 없는 줄 압니다.

6) 그리고 가장 귀한 직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설교자가 대중 앞에서 설교할 때보다 더 보람있고 중요한 시간은 “그 증거하는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만족을 느끼는 순간”이란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60과 신앙 생활의 비유 (마 13:44~48) 목록으로


예수님은 본래부터 “비유 교훈을 많이 하신다” 하셨고(마 13:3, 막 4:34), 또 성경 여러 곳에서 성도의 신앙생활을 비유로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앙생활의 지혜를 말씀하시는 비유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신앙생활을 믿음 사업으로 비유하셨습니다(성공적 믿음 사업). 본문에 보시면 “보화를 발견하고 그 땅을 사는 비유와 값진 진주를 사서 큰 만족을 갖는 일과 고기를 많이 잡아서 목적을 성취하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 뜻은 신앙생활을 “노다지 캐는 일”로 말씀하신 것인데 다시 말하면 큰 횡재나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복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업의 성공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성공하는 것인가?하면 보화나 진주를 믿음으로 비유하여 “믿음 소득의 사업”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유의하실 것은 믿음으로 받는 축복에 앞서서 믿음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시고 그것을 구하는 사업이 신앙생활인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기복주의가 0.1%도 없었고, “자신은 오히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망해야 할 자라”할 만큼 기복을 멀리 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생활은 믿음의 보화를 크게 확보하는 사업입니다. 사업의 성공을 목표하듯이 믿음 확보에 성공하시도록 크게 다짐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 신앙생활은 농사짓는 일과 같습니다(막 4:1~32). 씨 뿌리는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농사에 중요한 것

1) 종자 선택이지요. 종자가 무엇입니까? 바른 성경관, 바른 신앙 고백, 바른 신앙 사상, 성경의 바른 해석입니다. 종자는 곧 정통 신앙입니다.

2) 토양이 중요하지요. 토양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가 마음에 심기고(약 1:21), 진실하게 믿어야 하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 온유, 순결한 마음을 뜻하지요. 씨가 좋아도 밭이 나쁘면 열매가 충실할 수 없습니다.

3) 농부의 지혜와 근면입니다. 부지런한 농부의 관리가 있어야 소출을 내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렇게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인데 비와 햇빛과 결실기를 하나님이 주시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수확의 때를 기다리면서 노력하셔야 하고,

5) 농사의 마지막 특징은 소출이 씨에 비하여 많은 것입니다. “게자씨가 적은 것이로되 그것이 자라면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가 깃들이는 것”은(막 4:31~32) 많은 수확을 뜻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잘 짓는 정성으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3. 건축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마 7:24)을 기억하실 것이고 망대를 지을 때 예산한다는 말씀(눅 14:28~30), 또 고전 3:10~15에서 “지혜로운 건축자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건축에 중요한 것은

1) 기초이지요(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

2) 불타지 않는 재료입니다(궁극적 구원의 신앙).

3) 완벽한 건립입니다. 예산 부족으로 끝내지 못한다든지 규칙에 위반되어 준공 검사를 못 받는 식의 잘못된 집을 지으면 안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완벽을 기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집은 기초도 중요하지만 위치도 중요합니다.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만큼 좋은 신앙의 집을 지으십시오.

4. 운동 경기로 비유하셨습니다. 이 운동 경기에 대한 말씀은 고전 9:24~27과 히 12:1, 딤후 2:5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운동 경기는 힘과 훈련과 규칙이 잘 적용되었을 때 이길 수 있고, 메달권에 들지 못하면 허무해집니다. 그래서 건강의 힘, 연단, 규칙 엄수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누구에게 무슨 책임을 맡길 때도 실력 위주로 나가야 하고(지역 안배, 선후배 아닌), 규칙을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자기가 지키기로 서약한 교회 헌법을 안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약한 것은 해로워도 지켜야 합니다(시 15:4). 운동 경기의 특징은

1) 체력(믿음 실력)이고,

2) 강한 훈련이며

3) 규칙 준수요, 목적은 상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런 취지로 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전쟁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 전쟁에 대한 말씀은 눅 14:31~32, 딤후 2:4에 있고, 딤전 6:12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셨고, 엡 6:10~17에서는 “전신갑주를 입으라....우리의 상대(씨름)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하시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의 특징은

1) 무기가 좋아야 하고,

2) 적을 알아야 하며

3)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의 유혹을 이기는데 있어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큰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누가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6. 혼인 잔치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는 이적을 나타내 주셨고(요 2:1~11), 열 처녀의 등불 비유(마 25:1~3)에서는 등불 예비와 경성을 강조하셨으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마 2:1~14)에서는 외식자가 쫓겨나는 것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런 중에 혼인 잔치의 큰 뜻은

1) 신랑과 신부의 연합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지요. 잘 연합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2) 기쁨과 친목입니다. 잔칫집은 즐겁습니다. 이쪽 저쪽 집이 다 즐겁지요. 이것이 교회의 화평을 뜻합니다.

3) 음식 잔치 곧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성도나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주는 역할과 사랑을 베푸는 역할만 하셔야 합니다. 이상의 비유 교훈의 특징을 잘 살피셔서 신앙생활에 응용하시기 바랍니다.




제61과 신령한 자의 생활 (골 1:9~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령한 자의 생활”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우선 “신령한 자”부터 생각해 보셔야 하겠지요. 신령이란 뜻은 하나님의 영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라(요 4:24)”하신 말씀에서 이 “영”이란 뜻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 또는 물질적 실체의 반대로서 영, 혼, 정신, 마음, 성령님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들이 다 영적 실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하다”는 뜻은 신령하지 않은 세속이나 인간의 정욕이나 현세적 요소들과 거리가 멀고(롬 12:2, 갈 5:24, 요일 2:15), 하나님의 영(성령)을 풍부하게 모신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푸뉴마(영), 푸스케(혼), 칼디아(마음)란 용어가 다 영적 사람을 표현할 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은즉 육신과 세속에 반대되는 영적 요소를 많이 확보한 성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자는 성령이 충만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5:18). 성도가 성령이 충만하면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1) 우선 예수님의 인격을 많이 닮을 것이고,

2) 성령님이 은사 역할을 하시니까(고전 12:8~11) 믿음과 지혜도 충만할 것이며

3) 또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신령한 은혜와 관계된 말씀이 많습니다. 신령한 예배(요 4:24, 세속이 멀고 영적 축복이 풍성한 행사), 신령한 은사(고전 12:4~11, 28~30, 롬 1:11, 신령한 은사 중에는 예언이 최고임. 고전 14:21), 신령한 일(고전 2:13, 영적 축복과 관계된 일들), 신령한 식물(고전 10:3, 만나), 신령한 반석(고전 10:4, 물을 낸 반석, 예수님 상징), 신령한 몸(고전 15:44, 부활체), 신령한 노래(엡 5:19, 찬송), 신령한 집(벧전 2:5, 교회), 신령한 제사(벧전 2:5, 예배), 신령한 지혜와 총명(골 1:9, 믿음 지식, 성경 지식,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령이란 하나님의 특별(영적) 사역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3.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들이 신령한 자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신령한 자는 육신에 속한 자의 반대요, 또 육에 속한 자의 반대입니다(고전 2:14~3:2). 육에 속한 자는 성령이 없는 자이고, 육신에 속한 자는 성령님의 역사가 미약한 자입니다. 그래서 육신과 세속이 더 가깝지만 신령한 자는 하나님 편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치지 않고 간구한 내용을 보시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달라” 하셨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으며 또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아는 일이 성숙 되기를” 바라셨고, “기쁨으로 견디는 일과 참는 일에도 능력 있기를” 기도하셨으며 또 “빛 가운데서(정의) 기업을 받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 신령한 자의 행할 일입니다.

4.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령한 자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자 또는 예수님을 닮은 자의 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1)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마 16:24). 자기 부정에 대한 말씀을 소개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씀(롬 14:7~8),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갈 5:24),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고전 15:31)”이 있습니다. 성도의 자기 부정은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시는 뜻입니다.

2) 현세욕이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본향을 사모하면서(요일 2:15, 히 11:14) 위엣 것을 바라보고(골 3:1)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히 11:9~10, 벧전 2:11).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이 바로 물욕, 명예욕, 현세욕을 이기신 것입니다.

3) 물질의 욕심을 적당히 멀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가진 자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면서(행 2:44) 자기의 것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2)”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물욕을 적당히 조절해야 된다는 말씀이 많지요.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사실(고후 8:10),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사실(마 6:24),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딤전 6:8), 부와 가난을 피하여 적당한 것을 구하라는 말씀(잠 30:8), 또 낮은데 처하여 살면서(롬 12:16)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마 6:20)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성도는 적게 갖고 검소하게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8, 11, 32).

4) 영적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12세 되신 예수님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눅 2:46~49)” 하면서 성경 토론에 임하신 일을 기억하셔야 하고, 요이 9절을 보시면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 하셨고, 또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와 친교에 전념하였다는 말씀(행 2:46)”,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늘 성경을 상고하였다는 말씀(행 17:11)”을 기억하셔서 진리 탐구에 임하셔야 하는 것이고,

5) 갈 6:1에 보시면 신령한 자는 “죄를 깨달을 때 속히 돌이킨다” 하셨으며

6) 사나 죽으나 주님 뜻대로 살면서(롬 14:7~8) 핍박을 잘 견디다가(마 5:11~12, 행 5:40~41, 히 11:36~39)

7) 아무 때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62과 자기 십자가를 짐 (마 16:23~25) 목록으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연구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고난은 죄값으로 온 것이고, 우리는 죄 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고난이 없으려니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도 고난이 있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았다 하여도 그 날부터 고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고난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른 사람들이 순교의 고난을 겪었으며 또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하셨으니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일단 “고난을 각오하라는 뜻”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2. 십자가는 형틀이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벌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도 “잘못하면 벌도 받고 책망도 받을 각오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요 3:17)”하여 책망이나 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화를 선포하셨고, 교회에 권징권도 주셨으며 가룟유다나 아나니아 삽비라도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죄를 지으면 벌 받을 각오를 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두 강도가 입증하였습니다. 눅 23:32을 보시면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하셨은즉 이 말씀에서 행악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간 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로서의 자기 십자가이고, 두 행악자는 자기의 죄로 벌 받는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한 편 강도가 “마땅하다”고 시인하였듯이 자신이 벌 받아 마땅한 입장임을 시인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딤전 1:15) 하면서 주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3.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자기의 책임을 상당하게 이행해 왔습니다. 그것이 먹고 사는 책임, 가족 양육의 책임, 효도의 책임, 국가에 대한 충성의 책임 등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불신앙 때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을 지키며 봉사를 해야 하는 과제가 하나 첨부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과제이지요. 이때에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믿어드릴 터이니 또는 내가 예수님 제자 노릇 할 터이니 나의 가족이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양식과 집과 교육비를 주십시오” 하였다면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 믿는 값으로 네가 과거에 해오던 책임을 벗겨 줄 수는 없다 그것은 불신자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기 십자가인즉 그것을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또한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장애인 자녀를 둔 성도가 있고, 또 어떤 이는 병든 부모를 장기간 모시고 있는데 “그 장애와 우환을 벗겨 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다” 해보았자 주님은 “그것을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것입니다.

4. 또 특별한 내용 한 가지는 자비량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그 이유는 본문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또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오히려) 찾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전도자로 나선 제자들이 자기의 생활비 뿐 아니라 목숨까지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님이 지켜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쓰실 때 유급을 정하고 쓰신 일이 없으셨고, 제자들도 그것을 구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돈 전대를 준비한 후에 사역에 임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신 일일 수 있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볼 때는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의 제자이지요. 그러니까 성도 전체가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할 사명이 있고, 복음 사역자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바울 사도는 자비량으로 사역하지 않았습니까? 선배들이 교회 사역자를 세울 때 청빙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한 바람에 초기에는 좋은 뜻으로 하였겠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 제도가 직업화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속히 개혁되어서 성직의 직업화되는 경향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교회가 진리 위에 든든히 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생활비 받는 성질을 필요로 하지만 부작용이 없어져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성도나 사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힘들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주님이 가볍게 해 주신다”는 마 11:30의 말씀입니다.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열심히 지면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주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가벼워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전대 준비 없이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는 집이 있게 하셨고, 엘리야 선지자는 사렙다 과부를 만나게 하셔서 흉년을 피하게 하신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례는 근대 교회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60년대에 대전중앙교회를 개척하신 양화석 목사님은 그 교회 초창기에 솥에 물을 붓고 굴뚝에 연기를 피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는데 그 교회가 부흥되었고, 목사님도 잘 살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잘 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63과 개인적 신앙생활 (살전 5:16~18) 목록으로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이 뜻을 “성도의 개인적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성도의 개인적 생활에 꼭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교회 없는 곳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때에는 개인적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아브라함, 야곱, 요셉도 그런 생활을 하였고, 또 오순절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있어서 흩어진 성도들도 역시 개인적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그들이 교회 설립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식물의 뿌리가 직접 양분을 취해야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믿음이 예수님께 직접 연합된 상태에서 은혜를 받아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믿음 생활을 교회에 의존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경우는 의존하는 교회도 없고 의지하는 목사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홀로 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경우는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혼자 믿는 성도가 교회에서 집에 돌아오면 역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셔야 하고 모든 성도들도 그런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그 생활이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셔야 하며 범사에 감사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개인적으로 기쁨과 기도와 감사에 미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개인 생활은

1.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기뻐해야 하느냐? 하시겠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세주이신데 그분이 나의 신랑이 되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신부가 신랑만 잘 만나면 그것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으로 만족하여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께 깊이 빠지면 다른 것(세상 것)은 거들떠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관계는 세상과 멀어지는 것과 비례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취미를 외면할 줄 모르면 주님과의 관계가 기뻐할 만큼 좋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만족을 늘 가지셔야 하는데 마치 좋은 신랑을 만난 신부처럼(마 25:6, 계 21:9), 보화를 발견한 후에 그 밭을 사놓은 사람처럼(마 13:44) 또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하신 것처럼 그런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성도가 세상 정욕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정과 욕을 못 박으라, 갈 5:24) 계속적으로 세상 욕구에 얽매인다면 예수님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7:2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

2. 기도 생활입니다. 성경에는 “쉬지 말고 기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한 자리에 앉아서 떠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친분과 대화 관계를 마음 속에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부가 신랑 모르게 무슨 일을 하지 말고 오직 신랑과 의논하여 뜻을 맞추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의 생활을 계획할 때 반드시 기도로 의논하고 또는 의논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살면서 자기 욕심만 부리고 신랑이 벌어 온 돈을 혼자 쓴다고 가상해 보세요. 그 부부는 잘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부부가 의논이 착착 맞는 가정은 소리 없이 발전할 것입니다. 성도가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그 기도 생활이 상당한 궤도에 올라서야 합니다. 기도를 갈망하는 일에서부터 마음으로 기도하고 자기 반성도 하면서 기도 중에 주님과의 뜻을 맞추어(거리끼는 것은 취소함)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대상 17:25에 보시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다” 하셨는데 이 마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기도할 마음을 주셔서 기도에 갈망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뜻을 따라 간절하게 부탁하고 성취되지 않은 것을 꾸준히 구하여 응답하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때 그 성도는 기도의 궤도에 자리 잡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의 맛을 느끼고 기도할 힘을 얻는다면 무슨 일이나 두려움 없이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기쁨도 하나님과 성도 개인과의 관계이고, 기도도 그러하며 감사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갖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것을 감사합니다”하고 나팔을 안 불어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 가짐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까 누가 “감사하라”하여 감사하지 마시고 모든 은혜를 깨달은 상태에서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받은 은혜를 감사히 여기시고 적은 것에 감사할 줄 아셔야 합니다. 제가 폐품 중에서 요긴한 물건을 얻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할 줄 모르면 큰 것도 그러하다(눅 16:10)”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는 많이 받고 자기는 적게 받았을지라도 그 적은 것을 감사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연단 받는 것을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연단은 대부분 고난으로 주십니다. 저는 자동차 안전을 위하여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 딸이 자동차 추돌을 하여 보험상의 손해를 보았지만 속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사람 다친 사고가 아닌 경미한 것이었기 때문이고, 또 그런 경미한 사고를 경험할 때 운전사의 숙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 일반적인 은혜, 작은 은혜 그리고 고난으로 깨우치시는 은혜를 감사하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원만해지는 것입니다. 기쁨, 기도, 감사, 이 세 가지는 성도의 개인 생활로서 필수 요건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제64과 마귀와의 싸움 (벧전 5:5~9) 목록으로


성도의 신앙생활의 승리는 곧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승리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에 대한 정체를 공부하시려면 성경 낱말 사전의 마귀와 사탄을 찾아보시면 좋고, 저 나름대로 기독교 신앙 백과 끝에 “사단에 대한 지식”(720P)이란 글을 요약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정체를 지나치게 추리하다가 이단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성경에 나타난 것만 알고 끝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고, 따라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에 힘을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1. 본문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하신 만큼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며 7절에서는 “염려를 주께 맡길 때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마귀와 싸워야 하는데 세상적 염려에 붙잡혀 있다면 싸울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세상적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만 발 벗고 마귀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동태를 살펴 적절한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예수님도 시험하였고(마 4:1~11), 베드로도 밀 까부르듯 하였으며(눅 22:31) 성도의 취약한 부분의 틈을 찾고(엡 4:27) 본문에서는 “우는 사자처럼 달려 든다”고 하였습니다. 눅 4:6에 보시면 “천하만국의 권세를 넘겨받았다” 하셨고, 엡 2:2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 하셨으니까 마귀는 세상 어디나 존재하는데 사람의 마음(또는 가룟유다의 마음, 눅 22:3)에 들어가 불신, 욕심, 거짓, 불법, 불의를 작당하는 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행 5:3). 마귀는 영적 실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마귀의 역사를 알려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에서 찾아야 합니다.

2. 마귀와의 싸움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우선 마귀를 알아야 하겠지요. 나쁜 사람이 자기를 숨기는 것처럼 마귀도 자신이 마귀 아닌척 할 것인즉 마귀의 역사를 알려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으로 찾아야 하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셔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시려니까 성경을 열심히 또 깊이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과 맞지 않으면 마귀가 그 장소, 그 사건에 붙어서 거짓으로 성도를 유혹하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그 주된 무기가 말씀의 칼입니다.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라” 하셨고, 엡 6:17을 보시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성령의 검인가?하면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셨고, 또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문자와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동행,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이 몸으로 싸우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대항하신즉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다고 하셨지요. 마귀는 자신이 거짓의 원조(요 8:44)이기 때문에 참된 말씀(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고 진리가 나타날 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무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무기는 성경을 믿고 깨달은 확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3) 경성의 무기인데 이 무기가 곧 기도입니다. 엡 6:18을 보시면 전신갑주를 설명하신 말씀에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하셨고, 본문에서도 “근신하라, 깨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칼이라면 기도는 파숫군의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깨어 있을 때 마귀의 역사가 꿈틀거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들면 도적이 들어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잠이 깨어 있으면 도적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도의 경성이 그런 역할을 하고 또 시험에 들지 않거나 이기는 능력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 순간 기도의 연속이 필요합니다.

4)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가을철에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분이 많은데 모기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 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기가 괴롭히면 “신앙생활의 틈을 막으라”는 하나님의 교훈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이 모기를 주신 이유를 그렇게 깨달았음, 시골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졸지 않도록 쏘는 경우도 있음). 그러면 신앙생활의 틈이 무엇입니까? 말씀, 기도에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며 현세욕을 좋아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적당하게 넘어가려는 것들이요, 분명치 않으면 다 틈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적으로 살아가고 원리대로 살아가는 습관을 키우셔야 할 줄 압니다. 마귀는 마음 속에서 역사하지 앟습니까? 교만에서 역사할 때 겸손으로 마귀를 쫓아야 하고, 욕심에서 역사할 때도 그 욕심이 허탄한 것임을 알아서 쫓아야 하며 특히 무지에서 많이 역사하니까 무지를 하나님 아는 지식으로 메워야 하고 분과 혈기에서 역사하는 것도 알아서 온유와 너그러움으로 틈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요약하면 “예수님(성경적) 아닌 것은 마귀다, 마귀는 영물이요 세상 어디에나 있고 특히 마음 속에서 역사한다, 마귀와 싸우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잘 파악해야 한즉 곧 죄와 싸우는 것이고 이것을 이기려면 말씀의 무기, 기도의 경성, 틈을 주지 않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고, 또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도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인즉 그만큼 마귀의 유혹이 감소될 수 있습니다. 죄에 민감하시고 민감한 만큼 죄를 대적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5과 성수주일과 십일조 (마 17:5, 히 1:1~3) 목록으로


우선 본문의 뜻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나셨는데 구름이 저희 두 사람을 덮고(가리운 뜻)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하나님의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율법시대, 구약시대는 지났은즉 덮어두고 율법의 성취자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뜻만 따르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구약과 율법은 예수님을 나타내시기 위한 서드리 과정으로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또 히 1:1~3 말씀은 “구약 시대에 여러 계시가 있었으나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이 오시므로 그 계시가 완성된 것”을 의미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서 율법 운운하는 것은 공자 앞에서 문장 쓰는 격에 불과하니까 “예수님만 절대 표준으로 따르면 된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율법보다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예수님의 모범을 본 시대) 성도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참고는 하되 율법주의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1. 아직도 성수주일을 구약식 율법의 안식일 제도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안식일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 정도는 좋지만 그 이상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계명을 주신 성격은 천국의 모형이란 점과 휴식과 제사(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성)에 의미가 있었으니까 7일 중에 하루를 지키는 주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예배)과 천국 같은 즐거움과 휴식에 목적을 두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따라서 주일을 지킬 때 경건을 해치는 일(세속 접근), 휴식에 장애되는 일, 친교를 소홀히 하는 일을 삼가도록 노력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부천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당 문전에 놓은 커피 자판기를 없앤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 일부가 주일날 200원씩 넣고 커피 사 먹는 것을 세속적인 일로 여겨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여전도회에서는 그 돈으로 구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어디나 사람 모인 장소에서는 성수주일하는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니까 이해하시고 성도 각자가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사도들의 집회 모범을 본받기 위함인 만큼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면서 최대한 경건하도록 노력하셔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성수주일과 십일조에 대하여 자주 글을 썼지만 또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쓴 책을 다 못 보시더라도 이 책에서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 약 5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십일조를 시행하였습니다(창 14:20). 그때에 십일조를 받은 사람은 멜기세덱이란 살렘왕이고 제사장이었으니 상징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 드린 것이 확실하지만 드린 이유는 알기 어렵고, “왕에게 세금을 바친 뜻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해 봅니다. 500년 후에 그 제도가 율법으로 선포되었지요. 하나님이 선민에게 십일조 제도를 주신 이유는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과 레위 지파의 생활비를 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 제도는 예수님을 계시하는 모형인데 예수님이 오시므로 계시적 모형 제도가 다 끝난 것이요, 따라서 레위 지파의 직무도 없어졌은즉 용도가 끝나므로 율법적 제도까지 폐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님으로 끝났다”는 성경은 마 17:5, 롬 10:4, 마 11:13, 히 8:13 등에 기록되었고, 신약 성경에서 구제비를 모금하면서도 “십일조를 내라”하여 거둔 일은 없습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하지 않으면서 유무상통하고 전토를 팔아 헌납한 일은 있어도(행 2:44~45, 4:32~35) “누가 재산의 십일조를 드렸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 23:23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그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정의, 사랑, 믿음)은 버렸다” 하시므로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 헌납보다 더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이것(의, 인,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 봉사)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하시므로 십일조 생활의 여지를 남기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 소극적 표현은 헌금이나 물질적 봉사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혹 이 말씀을 십일조 권장의 뜻으로 인용한다면 “율법주의로 돌아가자”는 뜻인 만큼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자 그 시기는 율법주의에서 복음주의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과도기에는 율법주의가 시행되었지만 점차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행 15:29에 보시면 “우상의 제물이나 피와 목 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하라”는 말씀이 있고, 골 2:16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 월삭,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말라”하신 말씀이 다 그 과도기에 주신 말씀들입니다. 마치 어둠이 끝나고 아침이 올 때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새벽이 있는 것처럼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봉사적 헌금 차원에서 주신 내용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십일조가 거의 교리처럼 되어 버렸으니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 헌금을 거두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배들이 헌금 수집의 효력을 위하여 그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고,

2) 봉사를 많이 하거나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말씀(말 3:10, 눅 6:38, 고후 9:6)을 강조하며 가난한 성도가 재물의 복을 받도록 권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도가 빚을 지면서도 십일조를 내게 하고 억지로 또는 모험적으로 복을 받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약 시대의 헌금 제도는 필요하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즉 목표가 무한하며 방법은 자원하는 신앙에 근거해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66과 마음의 양약 (잠 3:8, 17:22) 목록으로


성경에 “양약(좋은 약)”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① 즐거운 마음이 양약이고, ② 선한 말이 양약이며 ③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경외(의지)하는 마음이 양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셨다면 먼저 마음의 토양부터 정돈을 하셔야 합니다. 땅을 고르고 흙을 다듬은 다음에 씨를 뿌려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옥토에 뿌린 씨가 30배....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셨고(마 13:23), “예수님이 온유, 겸손하신즉 그 마음을 본받으라(마 11:29, 빌 2:5)”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작용이고 말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주무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시면서 저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잠 17:22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나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암 진단을 받았다고 가상합시다. 이 때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하나는 소망스러운 마음이고, 또 하나는 절망적으로 근심하는 마음입니다. 암 진단을 받았는데 어찌 소망만 갖겠으며 또 근심하는 마음을 안 갖겠습니까? 그러나 절망 중에서도 상당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차피 한 번 가는 것인데 더 살기 싫다 하나님 뜻대로 간다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긴다”하고 든든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요, 또 “요즈음 의술이 발달했으니까 잘 치료하면 되지”하는 마음을 갖고 마음의 평안을(어느 정도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TV나 다른 목사님들 설교에서 들은 것을 옮기고 남기는데 목적을 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암을 갖고 치료하면서 다른 병자를 살피는 의사가 TV에 나와서 암을 이기는 방법을 말하는데 “암을 강도로 여기지 말고 친구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슬픔이나 절망을 평안으로 돌리고 잘 다스리면 결코 더 심해지지 않고 잘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으로 육체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위 “엔돌핀”이 나와야 좋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과부된 젊은 여성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유방암 생기는 확률이 크다고 합니다. 이런 스트레스가 육체적 병의 원인을 주니까 낙관적 마음 갖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슨 병이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탄식하고 절망하면 오히려 병을 더 크게 키운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라도 심리적, 의학적 견지에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요 14:27).

2. 좋은 말이 양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누구에게 저주 비슷한 말을 하셨다면 회개하시고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자식들을 책망할 때 속으로는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부모가 못 가르친 책임도 느끼면서 저주 비슷한 말(고생하여 마땅함)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그 말을 액면대로 듣는다면 부모를 미워하거나 불행을 느끼겠지만 부모의 궁극적 목적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부모는 적게 쓰고 남는 것은 자식을 주려는 정신이니까 자식들이 그것을 이해한다면 매를 맞아도 감사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2006. 11. 26. 오후에 김선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인데 “물 두 컵을 따로 놓고 그 컵에 입을 대고 하나는 악담, 하나는 선담을 퍼부은 후에 그 물을 얼린 후 현미경 관찰을 하면 악담 받은 물은 모양이 엉성하고 선담 받은 물은 그 조직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꼭 같은 화분에 꼭 같은 묘목을 심고 꼭 같이 관리를 하면서 한 나무에는 칭찬과 좋은 말만 하고, 한 나무는 “볼품없다”하면서 부정적인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발육 상태를 보면 칭찬 받은 나무는 잘 크고 저주 받은 나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예로써 목사가 심방을 했을 때 감사를 많이 하는 집에 가면 축복의 말씀도 잘 나오고 기도도 잘 나옵니다. 그러나 목사의 심방을 억지로 받거나 감사가 적은 가정에 가면 준비한 말씀도 맞지 않고 증거할 말씀도 떠오르지 않으며 기도도 막히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원망을 피하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하며 나쁜 말을 삼가고 좋은 말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 12:18을 보시면 “칼로 찌름처럼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다” 하셨고, 또 16:24에서는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뼈에 양약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3. 마음의 즐거움과 선한 말도 육체에 양약이 되거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겠습니까? 잠 3:7을 보시면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케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악을 떠난 순결이라”고 하셨습니다. 잠 3:5~7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라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고 골수를 윤택케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출 15:26, 롬 4:17). 아무쪼록 마음의 즐거움과 언어의 축복과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모든 병과 행사에 양약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제가 이 글을 쓰면서 2006. 11. 28. 오전 글씨 지우는 corretion이란 문방도구가 끊어진 것인데 완전한 것으로 회복된 것을 체험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고쳐주신 이적입니다. 지난 밤에 고쳐주신 줄 믿습니다.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셨습니다.).

9. 신앙 성숙에 대한 말씀

제67과 자기를 부인함 (마 16:23~25)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뜻은

1. 자기의 인격을 예수님 앞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욥은 인생을 “구더기와 티끌이라” 하였고(욥 25:6, 2:12, 창 18:27), 세례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요 1:23)” 하였으니 이 뜻은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인격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사역(전파)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도구처럼 쓰임 받는 것으로 만족할 뿐 인격적 대우를 안 받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와 비슷한 사례가 또 있지요. 수로뵈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쳐달라고 구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막 7:28)” 하시니까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지요. 이 뜻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같다(시 49:12)”고도 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는가를 알아보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줄 압니다. 그때 그 여인이 자기를 부인한 것 때문에 “큰 믿음을 가진 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또 자기를 부인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예수님 앞에서 신하 또는 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신하는 종과 같고 기계와 같습니다. 군인을 사람이라 하지 않고 병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관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존재이지요(마 8:9). 적어도 인격적 또는 인권의 발동을 하려면 의사 발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과 신하는 그런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100% 복종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그 종을 복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잘 섬겼다”하여 앉아서 대접받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없겠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의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9~10)”하고 칭찬이나 사례 받을 체를 하지 않은 채 물러나야 하는 것이 종의 입장인즉 이것들을 종합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뜻은 의사 표시나 특권 없이 복종만 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주님 앞에서 자기가 확보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는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란 재물과 직업과 가족과 동리 사람들까지 버린 것인데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린 것입니다 .자기 생각은 “밝은 후에는 고기가 안 잡힌다”는 것이었는데 그 생각이 틀렸으니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고전 1:25)”는 말씀에 따라 “자기의 모든 소유와 경험과 지혜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갈 5:24)”입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욕구를 갖고 태어납니다. 식욕, 정욕, 향락욕 같은 것이지요. 이런 욕망이 다 육체 때문에 나타나는 것인데 성도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이런 육체의 정욕은 다 마귀의 시험꺼리가 되고(마 4:1~11)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훼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5)”고 경계하셨습니다. 자연적, 선천적 욕구가 죄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귀 유혹의 이용꺼리가 되기 때문에 그런 “현세적 ,육체적 정욕을 못 박으라(포기하고 멀리 하는 뜻)”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 향락욕에 빠지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4. 자기를 부인하는 뜻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고전 15:31). 사람 앞에서 “나 죽소”해야 덕을 볼 때가 있는데 하물며 티끌 같고 구더기 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 되는 것이 무엇이 억울하겠습니까? 죽을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이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생각하여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은 겸손의 극치라 할 것입니다.

5.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도가 예수님 앞에서 왜 이렇게 자신을 부인해야만 합니까? 그 이유

1)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하셨으니 창조자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요,

2) 인간이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며(롬 6:23, 3:10, 죄의 값은 사망, 의인은 없음)

3)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이고(행 17:25, 삼상 2:6, 애 3:38),

4) 인간이 내세울 것이 없을 만큼 연약하기 때문이며

5)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6. 저희들이 이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좀 더 겸손해지기 위하여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성도가 사람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우면 앞길을 망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이겠습니까? 모세가 자기 부인을 못하고 반석을 치는 실수로 사역을 중지당한 사실이 있고(민 27:12~14), 사울왕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다가 그대로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5:23). 자기를 부인하도록 노력합시다.

제68과 물질과 신앙 (마 6:24) 목록으로


마태복음 설교 24과, 25과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현실적 생활과 관련하여 또 말씀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산주의와 유물주의는 같은 것으로 봅니다. 공산주의가 “오직 물질이다” 하였는데도 물질 문제를 풍요롭게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 사실이고, 미국 같은 청교도로 시작한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뿐이다”하면서 유물주의를 따돌렸지만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을 보면 역시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신앙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물질과 관련한 신앙(인식)을 어떻게 갖고 계십니까?

1.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의 것이고(만유의 주, 엡 4:6), 행 17:25을 보시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생명과 영혼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과 함께 그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감사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2. 먹을 것(일용할 양식)과 입을 것은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딤전 6:8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 하셨으니 여기의 주택은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잠잘 자리는 입을 것에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약대털옷을 입은 것은 그것이 어떤 토굴에서 잠잘 때 이불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본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공중의 새나 들풀도 키우신다”는 말씀입니다(마 6:8, 26~28, 32). 하나님은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땀을 흘리라”(창 3:19)하셨고, 또 성도에게는 “수고한대로 먹을 것”과(시 128:2) “게으르면 가난이 올 것”을 경고하셨습니다(잠 6:11). 그러니까 성도는 우선 땀 흘리고 일하여 먹고 살아가는 생활을 해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 장애를 가졌거나 중병으로 일을 못하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로 살아가게 하시는 방법이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것은 성경에서 많은 병자들이나 환난 당한 자를 형통케 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성도가 재물의 복 받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장려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죄 짓고 재물을 모으거나 영광 되지 않게 재물 취급하는 것은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이 인간에게 건강만큼 요긴한 것이다 보니 그것으로 벌도 주시고 축복도 하시는 것입니다. 흉년은 재물의 벌이고 풍년은 재물의 복입니다. 재물의 복을 받는 첫째 방법이 “주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될 때 줄 것을 안겨주신다는 것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나는 사회사업가가 되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이 10억을 주시지 않나?”하시지 말고 그 10억을 벌려면 자기 먹고 사는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돕고 주는 일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회사업가들이 그렇게 하여 성공한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눅 6:37~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섬기기를 좋아한즉 더 잘 살게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4. 하나님께만 받으려하시고 사람에게는 주려고만 하셔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바라거나 기대하지 마십시오. 어느 사람이 그 이웃을 자식처럼 도와주겠습니까?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시 146: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야곱의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고(시 146:5) 오직 그만 바라라(시 42:5)”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도움과 소망은 하나님께만 두시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기대를 걸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물질의 복을 받는 신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주실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흑암 중의 보화를 발견케도 하시고(시 45:3) 무릇 그 행사를 형통하게도 하시며(시 1:3) 소산에도 복을 주시고 광주리에도 복을 주실 수 있을 것이고, 소생이 잘 되어 뜯어가지 않게도 하실 것이고(신 28:4~6), 환난을 면케하여(시 121:7) 낭비를 없애주시기도 하고 또 뜻하지 않은 일로 도움을 받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5. 성경에는 “복 받은 성도가 꾸러가지 않게 하신다(신 28:12)”고 하셨습니다. 복 받은 민족이나 성도는 빌려줄지라도 빌리지는 않아야 하니까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카드로 긁는 것이나 빚지고 사는 것(은행 돈 꾸는 것)을 예사로 행하실 것이 아니라 10원도 지고 사는 것이 없도록 생활을 바꾸시라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을 적당하게 갖고 적당하게 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이 의지의 대상이 되어도 안 되고(잠 30:8~9), 일만악의 뿌리가 되어도 안 되니까(딤전 6:10) 취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자에게 말로만 “잘 먹고 잘 입어라”하면 됩니까? 국민들 중에 생선 같은 비싼 음식 사 먹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TV에서는 매일 좋은 음식 구경만 시키니 이것이 어찌 바른 정치입니까? “부자는 천국 가기 어렵고(마 19:23)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고후 8:9)”을 깨달으신다면 물질의 큰 욕심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물질과 사치로 위신을 높이려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대단히 부끄럽고 졸렬한 사고방식입니다. 물질과 신앙이 바로 정립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잠 30:8).

제69과 자유를 확립하라 (요 4:13~19) 목록으로


저는 어제 전철을 오래 타고 어떤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전철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어떤 외국 목사님의 설교집을 두어 편 읽고 저 나름대로 또 설교를 묵상하였습니다. 목사의 아들이 장가가고 예배당에서 하는 결혼식인데 예배당 앞에 진열된 화환이 22개였습니다. 화한이야 주어서 받은 것이지만 대단한 영광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기도한 목사님은 신부 측 목사님인데 결혼식을 “거룩한 예식”이라고 하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성도에게만 있는 것인데 결혼은 불신자도 하는 것이어서 개신교에서는 결혼을 성례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마당에 꽃으로 장식한 승용차가 있었는데 아는 여전도사님이 좋은 차라고 하면서 결혼 때 받은 선물인 것처럼 소개를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시대에 좋은 차, 나쁜 차의 차별이 있느냐? 별 것 아니다, 나는 좋은 차를 준다 해도 싫어서 안 쓸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사실입니다. 좋은 집도 싫고 좋은 차도 싫으며 사치한 음식은 더욱 싫고 의복도 그렇고 무슨 구경이나 여행도 싫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으냐? 성경을 연구하고 글씨 쓰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제가 성경 연구와 집필을 위하여 얼마큼 집중하는가?하면 목회 사역을 중지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운동이나 등산도 못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주보도 만들지 않으며 넓은 주택으로 이사도 안 갑니다. 이사를 안 가는 이유는 현재 환경이 글 쓰는데 지장 없기 때문에 고의로 변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여행도 설교입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이 전철에서 구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우물물을 먹으면 먹어도 또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그 우물물이 무엇입니까? 세상 정욕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셋집 면하면 집사고 싶고, 또 더 큰 집에 살고 싶고 또 더 좋은 것 하고 싶고 1억을 저축한즉 5억을 만들고 싶고 더 좋은 차, 더 좋은 음식 또 장수하는 것 등 끝이 없으니까 그것이 곧 계속 목마른 뜻입니다. 예수님은 33세를 사셨는데 남이 백수 한다니까 나도 오래 살아야지 하고 늘 목숨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이 현세적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죽을 때 만족하게 못 죽고 아쉽게 죽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 사마리아 여인이 잘 대변해 줍니다. 여자가 세상에서 행복을 바랄 때는 돈보다 남편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다는 남편을 얻었는데 안 좋아서 이혼했지요. 다음 남편을 맞을 때는 주의해서 만났겠지만 두 번째도 안 좋아서 목마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 네 번, 다섯 번까지 바꾸어 보았으나 여전히 목말라서 다섯째도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도 “임시로 살고 있다” 하였는데 예수님이 이 사실을 밝히신 이유는 선지자란 사실을 알리는데도 목적이 있지만 인간이 세상 것으로(남편) 갈증을 면하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처럼 잘 안 된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도 더 살고 싶은 것을 성취 못하기 때문에 갈증을 못 면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묵상을 하면서 “나는 왜 힘들고 피곤하게 사는가?”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피곤하지?”하고 따져보니까 두 가지로 피곤한데 하나는 달란트 사명(말씀 강론 집필) 때문이고, 또 하나는 가족들과의 생활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달란트 사역을 꼭 해야만 하는가?할 때 이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물질적 소득이 없어도 보람을 느끼고 하는 것입니다. 꼭 목표를 끝내도록 생명과 건강을 붙들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고, 기도의 제목입니다. 제가 이 일을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하나님이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부르시는 줄 믿고 가야 하겠지요. 그 다음에 가족들과의 생활을 위해서 피곤한 문제를 생각해 보았는데 제가 아주 중대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도 가족의 일원이고, 교인이며 사회의 일원이지만 나를 위해서는 거의 염려를 안 해도 되는데 대부분의 염려가 가족과 이웃을 위한 염려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나를 위한 염려는 많이 안 해도 되느냐?할 때 그것은 내가 넉넉하여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로 인하여 상당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죄사함 받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의복은 죽을 때까지 입을 것이 있고, 음식은 국수와 죽을 많이 먹으니까 비용이 적게 들며 잠은 아무데서나 자다가 아무 때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하고 갈 것이니까 사는 것도 염려 없고 죽는 것도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연단 받으면서 확보한 믿음이고 자유입니다(젊어서 부흥사 하시고 큰 교회 시무하신 목사님이 심심하여 다니시다가 노숙자 식사 대접하는데 가셔서 점심을 얻어 잡숫는다 하기로 제가 책망을 했습니다). 이웃이 나의 신분을 몰라도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앞을 꾸리고 이웃에게 덕을 세우며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의 말씀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 중에 지목사는 자기 위한 염려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확보하였기 때문에 안 해도 되는데 가족이나 교인이나 이웃 때문에 피곤하시다 하니 우선 가족이나 교인들이 “우리 위한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그런 믿음과 자유가 있습니다”하는 말이 목에 까지 올라와 있을 줄 압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다 진리 안에서 자유만 확보” 하였으면 무슨 염려를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미 불이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그런 반사적 오기로라도 “나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확보했으니까 내 걱정 마십시오”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싶겠지만 실제적으로 자유를 확보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70과 신앙의 훈련 과제 (딤전 4:5~7, 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훈련 과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가 대구에 있을 때 장로요, 의사인 아들을 둔 노인 권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한 일이 있는데 그 분으로부터 수준 높은 신앙을 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꼭 신학을 배운 권사님 같아 보였습니다. 존경이 가더군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오래 교회생활을 한 분인데도 자기 신앙생활의 노선을 옳게 잡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퍽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문제는 성도가 신앙 훈련을 잘 받아서 정상에 오르고 수준급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복을 짓는 사람이 양복을 다 만들었어도 다림질을 안 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군요. 신앙도 완성품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데

1. 우선 본문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하셨으니까 거룩해져야 할(예수님 닮는 것) 성도에게는 말씀, 기도가 중요하고, 또 다음에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교훈주시기를 “네가 예수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실천한) 선한 교훈으로 형제를 깨우쳐야 성도들이 양육을 받을 것이라”하시므로 믿음의 말씀 곧 필요한 것으로 깨우쳐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또 7절에서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또 15절에서는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하시므로 “깨우침과 권면과 경건 연습과 발전을 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시라고 몇 가지 훈련 과제를 알려드리려고 하는데 우선 아셔야 할 것은 교회가 그 과제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교회생활과 교회에서 훈련받은 다음에 실제적 신앙생활이 있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는 신앙의 훈련장이기 때문에 교회의 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로 착각하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고 시험을 쳐서 면허를 따야 과제가 성취되는 것처럼 신앙도 훈련 과정과 실천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슨 훈련이 필요합니까?

1) 말씀 훈련입니다. 성경이 식량 재료라면 요리해서 먹을 줄 아는 기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교회에서 펼치는 장식품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냉장고에 진열된 식품처럼 되어서 자신의 입맛대로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과 자신과 관계 맺는 훈련을 잘 하시려면 성경에 대한 개론도 이해하시고 성경 말씀이 곧 내 마음이 되고 내 생활을 지배하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글자 하나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바꿀 수 있어야 하니까 그 훈련이 작은 일이 아닌 것이요,

2) 기도 훈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정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으나 기도하는 만큼 하나님과 가깝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원 성취가 덜 되었거나 범사에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 욕구 중심으로만 나가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곁에 계시고 자기를 인도하시는데도 자신은 자신의 뜻이 성취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계신 줄로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는 신앙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기도 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정되어야 합니다. 늘 대화하시고 받은 은혜를 민감하게 깨달아서 감사하시며 늘 부족을 아뢰시고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는 훈련이라야 할 것입니다.

3) 현세욕을 멀리하는 훈련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교훈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마 16:24), 날마다 죽으라(고전 15:30),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세속을 멀리 하라(약 1:27),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14),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갈 5:24)” 하셨는데 이것이 잘 실천되지 않는 것입니다. 훈련 과제가 아닐 수 없지요. 세상 정욕과 싸우는 극기 훈련입니다. 이 훈련이 잘 되면 세상 애착이 멀어지겠지요. 세상이 역겨워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4) 규모를 따라 사는 훈련입니다.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에도 많은 규모가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인격자로, 아버지로 모시니까 예절상 규모가 없을 수 없고(부모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해야 함), 교회생활에서는 훈련장이기 때문에 규모가 더 많습니다.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 대인관계로서의 계약 관계, 성도간에 서로 돕는 일, 예배에 대한 규모, 남녀노소, 선후배 관계 등에서의 규모가 있는 것입니다. 강단에 오를 때와 의자에 앉을 때도 규모가 있고, 심방을 가서 좌석할 때도 규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도 어른이 먼저 들고 먼저 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많은 규모를 배우셔야 합니다.

5) 선악 분별에 대한 훈련입니다. “천국은 마치 고기를 잡은 후....못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그릇에 담는다(마 13:48)” 하셨고, 히 5:14에서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악 분변과 취사 선택의 연단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판단력이 없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성경과의 관계 맺는 연단, 기도의 연단, 현세욕을 억제하는 연단, 규모를 따르는 연단, 선악 분별의 연단입니다. 빌 2:21~22에 보시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제71과 반성과 노력 (빌 1:27~28) 목록으로


반성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고, 노력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미흡하다면 크게 결심하고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본문은 두 절이지만 각 절마다 주시는 교훈이 큽니다. 27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고도의 실천을 뜻함) 생활하라” 하셨고, 또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일심으로 서서”하신 것은 사도의 간섭이 없어도 자립적으로 든든히 서라는 뜻이며 그런 상태에서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하셨으니 이 말씀 모두가 높은 수준의 신앙에 든든히 서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살피면 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데 이 시간에는 “복음에 함당한 생활의 표준”은 어디에 있으며 과연 저희들이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묵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성격(표준)을 생각해보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엄밀히 명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 28:1에서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 하셨고, 수 1:7에서는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 하셨으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마 7:21), 예수님의 본을 받아 행하는 것(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이고, 또 고전 11:1을 보시면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합당한 생활의 기준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 또는 말씀 정도에서 치우치지 않는 것(성경대로 사는 것),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 받는 것(엡 2:20)”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면 어느 정도 실천을 하여야 “합당하게 행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활은 믿음과 성품과 언어와 활동을 다 포함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 지식이 없거나 성품이 바르지 못하면 합당한 생활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인즉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우선적인 것은

1) 믿음 지식이 상당하게 있어야 합니다. 엡 4:13을 보시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하셨고, 히 5:14에서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는 우선 상당한 믿음 지식이 있고, 연단을 받은 후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정도가 되셔야 함을 알 수 있고,

2) 성품이 원만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롬 12:2을 보시면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으라” 하셨지요. 그래서 마음 변화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우선 진실하고 겸손하며 온유하셔야 합니다. 진실은 거짓과 외식이 없는 것으로 “거짓말 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하셨습니다(계 21:27). 겸손은 죄사함을 받았지만 괴수 죄인인 것처럼 사는 것이요(딤전 1:15), 온유는 조급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딤후 3:4, 고전 13:5). 성도가 복음의 합당한 생활을 나타내려면 성격부터 변화되어야 하니까 반성하실 필요가 있고,

3) 언어가 순화되고 덕이 있어야 합니다. “언어가 순화된다”는 뜻은 세속적으로 저속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고(농담도 주의해야 함, 엡 5:4),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말의 실수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과 같지 않게 표현하거나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이것도 폭언(언어 폭력)에 해당한즉 복음에 함당한 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믿음 지식과 성품과 언어부터 바르게 나타나도록 준비한 다음에 주님 뜻대로 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대로 또는 성경적으로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의 합당한 생활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1) 우선 자기 생활의 원만성을 위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셔야 하겠지요(살전 5:16~18).

2)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셔야 하겠지요(마 6:33). 그것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받는 방법이니까요.

3)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마 19:24)” 하셨으니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는 성도가 부자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역행하는 일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재물은 적당히 갖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잠 30:8).

4) 원수도 사랑해야 하니까 미운 자도 없고 미워하지도 말아야 하겠지요(마 5:43~44).

5) “예수님도 일하신다”(요 5:17) 하셨으니까 놀지 마셔야 하고,

6)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하셨으니까 산아제한 할 수 없겠지요.

7)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마 6:25) 하셨으니까 의식주 염려를 마셔야 하겠고,

8) “높은데 마음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 하셨으니까 있어도 검소하게 사셔야 하겠지요.

9)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마 19:19) 하셨으니까 좋은 일에 경쟁하거나 줄 서지 마셔야 하겠지요(양보주의).

1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행 20:35) 하셨으니까 받는 것을 바라거나 좋아해서는 안 되겠지요.

11) “하나님 앞에 거짓 없는 경건은 고아나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라”(약 1:27) 하셨으니까 생활의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하겠지요. 교회가 한 두 사람만 도와도 어려운 사람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12) “자기를 부인하고 또 자기를 날마다 죽이면서 살아야 하니까”(마 16:24, 고전 15:31, 갈 5:24) 명분 없이 고집 부리면 안 되겠지요.

13) 예수님처럼 집 없이 살고 “33세만 살면 족하다”할 생각은 없습니까? 천 가지 만 가지 다 부족뿐인즉 결심하고 더 노력하시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고 세리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8:13)하고 회개하며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제72과 칭찬에 대한 말씀 (고전 4:1~5) 목록으로


“칭찬에 대한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저희들이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으면 그것은 상급이고 큰 복입니다.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 먼저 본문을 살피면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를 신용하고 환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이 흠이 있어서 칭찬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모함으로 의심쩍은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신임을 호소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보시면 “나를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 달라(복음을 훼방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모함이 있었음) 그리고 나에게 충성을 요구하라 나는 사람에게 판단 받는 일은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이다 사람의 판단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감추인 것을 드러내실 것이고 마음의 뜻도 나타내실 것인데 그때에 각 사람(의롭게 행한)에게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 칭찬, 하나님 칭찬이 있는데 사람의 칭찬은 빗나갈 수도 있고 그것이 상급을 대신할 수도 있으나(마 6:1~2) 나중에 주실 하나님의 상급만큼 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사람의 산판을 적은 일로 여기셨고, 장차 있을 하나님의 칭찬에만 소망을 두었다는 말씀입니다.

2. 일단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려면 사람의 칭찬을 비켜 가는 것이 좋고, 또 보통 잘한 일로서는 칭찬의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 5:47을 보시면 “너희가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같이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고, 또 마 5:20을 보시면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들도 계명을 힘써 지킨 자들임)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인간의 의가 탁월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지만(십자가의 의로 구원 받음) 율법을 지킬 때는 바리새인보다 더 잘 지켜야 한다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칭찬을 받으려면 그의 선행이 탁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벨상을 받는 사람은 다 세계적으로 탁월한 선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3. 그래서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칭찬스러운 일들과 칭찬받은 일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양의 피로 제사 드린 일이나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일이나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순종하며 기다린 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칭찬 말씀은 없지만) 칭찬할 만한 일이고,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자라”(행 13:22) 하셨으나 합한 내용을 찍어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도 고난을 받으며 자기의 책임을 다 하였은즉 칭찬받을만한데 하나님이 직접 계시로 칭찬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의의 면류관을 계비하신 줄로 믿는다”(딤후 4:7~8)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희들도 칭찬받을 좋은 일들을 만드시자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어떤 일로 칭찬하셨습니까?

1)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창 22:12) 하시고 축복과 함께 칭찬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외아들에 연연하지 않는 순종과 또 욥을 칭찬하신 일(욥 1:8)이 있었고,

2)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 12:3) 하셨으며

3)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인물들을 두루 칭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고 이삭을 드린 순종과 장막 생활을 한 것(8~19절), 사라가 믿음으로 잉태의 힘을 얻은 것(11절), 모세가 애굽의 영화를 버리고 선민과의 고난을 택한 것(24~28절), 그리고 여호수아, 라합과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이 믿음으로 국방에 기여한 사실(29~34절),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이 믿음으로 죽은 아들을 살려 받은 사실(35절, 왕상 17:17~24, 와하 4:35), 그리고 순교자들의 죽음을 칭찬하셨고(35~40절), 솔로몬이 1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했을 때에도 기뻐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왕상 3:11).

4) 신약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직접 받은 사례를 살피면 세례요한을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신 말씀(마 11:11, “가장 위대한 자” 설교 참조), 중풍 변자를 고쳐주실 때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네 사람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신 일(막 11:5),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10)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하시고 크게 칭찬하신 일이 있고, 또 가나안 여인이 자기를 개처럼 비하시키면서 끈질기게 은혜를 구했을 때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사실(마 15:21~28), 죄 많은 여인이 바리새인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발을 씻겨 드렸을 때 예수님이 자기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소홀한 태도와 대조하시면서 “이 여자를 보느냐.....저의 죄가 사하여졌다”(눅 7:44~50)하신 일, 그리고 마지막 주간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의 향유 부음을 받으셨을 때는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 26:6~13, 요 12:1~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적이기는하나 달란트를 받은 대로 갑절의 이를 남긴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은즉 내가 많은 것으로 맡기리라”(마 25:19~23)하신 말씀이 있고,

5)교회적으로 칭찬받은 사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하여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가 칭찬을 받았습니다(살전 1:3, 계 2:8~11, 3:7~13).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일이 중요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73과 은밀한 신앙생활 (마 6:1~6) 목록으로


“은밀한 신앙생활”이라고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성도가 의를 행하여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하지 말고 구제하는 것도 그러하며 또 기도할 때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주일 새벽에 교회의 간판에 전깃불을 켜면서 “불빛 간판을 보고 기도하러 오는 타 교회 성도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은밀 기도의 말씀이 생각나서 불을 끈 사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할 때 사람 보이는 곳에서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단체 기도나 통성 기도는 마음의 안정이 적습니다. 그러나 개인 기도 특히 두 세 사람 또는 적은 수가 합심한 기도를 할 때는 조용한 분위기이므로 마음 정리와 집중이 더 잘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제가 인도하는 기도회는 가족적인 기도를 길게 하기 때문에 타 교회 성도가 동참하면 오히려 지장을 받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저희들끼리 하는 기도회가 더 적절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의 은밀한 신앙생활을 권장하기 위해서입니다.

1. 우선 은밀한 신앙생활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자유를 만끽합니다. 저는 저의 두 아들이 속히 결혼하여 독립하고 자립하여 자유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도가 신앙 능력으로 자립을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기도할 때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길게 하나 짧게 하나 등 통제를 받지만 혼자 하는 기도는 큰 자유를 누린즉 편리하고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골방 기도는 은밀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독립적 자립과 자유를 누리는 유익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2. 은밀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독대,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즉 하나님과 자신만 있는 것입니다. 단체 신앙에 물든 사람은 공예배만 드려야 예배인 줄 알고 사람 많이 모인 곳에 가야만 은혜롭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은혜 받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 아닙니까?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말씀을 방편으로 하십니다. 성도가 은밀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이 자신과만 함께 계셔주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기 때문에 성도 개개인과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단체 상봉하지 마시고 꼭 독대할 것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3. 은밀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나타내지 않는 것인 만큼 하나님 중심(하나님만 아신즉)이고, 겸손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레시지 않는다”(마 12:9) 하셨고, 사람이 못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도 “나타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귀 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시고도 “소문내지 말라”(막 7:36) 하셨고, 또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막 5:43)고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에 관한 것은 나타내셨어도 자기의 선행에 대하여는 자랑하시거나 나타내신 분이 아닙니다. 이 얼마나 귀한 미덕입니까? “천국은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 그것을 전부 부풀리는 누룩과 같다”(마 13:33)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사랑의 방법이 “자랑하지 않으며 겸손이라”(고전 13:4)하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은밀한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 중심이고, 겸손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요,

4. 은밀한 선행이라야만 상급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사람 앞에 보이려고 의를 행한 자는 이미 상을 받았은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 하셨고, 또 구제하는 것도 나팔을 불면서 한 것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은즉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만큼 은밀하게 해야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되도록이면 간판 없이 자기 것으로 은밀한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타난 성행보다 안 나타난 선행에 상급의 비중이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 은밀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권고를 받을만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시 146편에 보시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하시면서 “야곱의 하나님으로만 도움을 삼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성도는 주위에 의지하는 사람이 없는 자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고 권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야곱이 홀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도와주신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여러 번 독대하였습니다. 독대할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지요. 야곱이 집을 떠나 홀로 여행할 때 창 28:15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셨고, 두 번째는 창 31:3에서 “네가 외삼촌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셨으며 세 번째는 창 32:28에서 한판 씨름을 벌인 후에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하셨습니다. 이 뜻은 야곱이 홀로 서고 은밀한 신앙생활을 하였을 때 하나님이 권고하셨다는 뜻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즈음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멍석 펴고 나팔 불며 나타내는 면이 있습니다. 알맹이보다 포장이, 또는 내용보다 서드리가 더 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금광을 발견하였으면 은밀하게 감추어 놓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취하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잘못 나타내면 사탄의 세력을 돕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은밀한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이방 종교의 세력이 더 커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은밀한 신앙생활의 뜻 다섯 가지를 유의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키워나갈 것을 권장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74과 온전하고자 할진대 (마 19:16~22) 목록으로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랑의 승리자 되는 비결”을 알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늘 고민합니다. 말만 앞세우고 실천을 못하니까요. 어떤 때는 사랑을 실천해 보려고 양보하는 때도 있고, 노력도 합니다만 사랑 실천으로 온전해지려면 아직 멀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사랑의 비결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제가 말을 앞세우는 것은 실천하여서가 아니고 말이라도 앞세우면 가책이라도 더 느낄 것이 아닌가?하는 마음에서 증거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몇 가지 성경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씀(고전 13:13) 또 고전 13:4~7에서 사랑하는 방법으로 일곱 가지쯤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되 오래 참고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로 기뻐하고 상대방에게 소망을 가져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성도가 계시면 그 분은 “사랑의 승리자요 온전함을 이룬 분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만물과 생명과 모든 것을 다 주셨으니까요(롬 8:32, 고후 8:9, 마 20:28).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누리신 것이 없습니다. 부를 누리셨습니까? 호의호식을 하셨습니까? 가정을 가지셨습니까? 장수를 하셨습니까? 평안히 돌아가셨습니까?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으시므로 사랑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승리자 되는 비결은 “많이 갖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갖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의식주로서 생존 유지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살고 그런 중에서도 자기와 같거나 더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는 그 대상 앞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양보하지 않을 때는 대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뒷자리에 서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곧 양보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영생 얻는 질문을 하였는데 저희들은 대부분 영생 얻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믿으며 신앙 고백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십자가를 믿으라”하시지 않고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계명은 신앙에 수반하는 것이고, 계명의 강령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신은 계명을 잘 지킨 줄로 자부하고 있지만 사랑 실천의 실격으로 실천이 미흡한 것을 깨우쳐 주시고 아울러 “그의 계명 실천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은즉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한다는 것”을 깨우치시려고 한 것입니다(율법의 목적).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네가 계명을 지켰다” 하지만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고...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것으로 나눠주는 것은 사랑 실천과 하나님 아는 지식이 접할 때 구원도 받고 상급도 예비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정리를 해야 하겠습니다.

1. 사람이 온전하려면 사랑 실천의 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실천의 합격 수준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사랑을 실천했다면 그것으로 칭찬도 받고 은혜로 죄사함과 영생을 받은 후에 하늘의 상급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사랑의 승리자 되는 비결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대폭 양보한 후 뒷자리만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세속적 욕심에 끌린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세속에 물든 자처럼 살지 말라”(약 1:27, 요일 2:15)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망설여지겠지요. 본문에서 질문한 사람도 그렇게 망설여진 것입니다.

3.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면서 거기에 망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나 여러분들이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사랑을 실천한다고 이기주의를 떠나고 다 양보하면 “노숙자 신세가 될텐데 그렇게 되면 어찌하나”하는 염려를 하실 수 있는데 결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적당하게 주시고 또 후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눅 6:38). 베드로나 바울사도가 노숙자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4.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걸림돌이 무엇인가?하면 부양 가족에 대한 의무에 못 미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두 가지로 해결해 주실 것인데 하나는 “너희 쓸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주시는 섭리가 하나 있고(마 6:8), 또 하나는 자녀들이나 부양 대상 되는 사람도 자기 같은 신앙만 가지면 역시 신앙적으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승리자 되도록 노력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75과 내실을 기하자 (마 23:23~28) 목록으로


이 시간의 제목은 “내실을 기하자”는 제하에서 “실속있는 생활”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즈음 교회나 성도들이 내실을 기하는 일보다 겉치레 또는 의식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어서 저는 그것보다 “내실을 기하는 생활”이 더 중요함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외식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외식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입니다. 겉을 보는 사람에게만 좋게 보이려는 목적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겉과 속을 다 보십니다. 다 보시니 어떠하였습니까?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속에는 썩어가는 송장이 있는데 겉은 잔디와 비석으로 좋은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속도 겉처럼 깨끗한 척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외식이기도 하지만 균형성 없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균형성 없는 생활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이 비싼 옷, 비싼 음식, 비싼 자동차를 선호하는 예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든든하고 균형성 있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하고 겸손하며 분수를 지키는 것이 바른 생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금식(눅 18:12), 제사 의식(미 6:6~8) 같은 것에는 철저하면서 의와 인과 신은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 “소경된 인도자라”하시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런 말씀들을 마음에 두시고 저희들도 외식과 의식보다 내실을 기하는 생활에 들어가셔야 할 줄로 압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교회 생활에 의존하는 비중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와 의식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찌하든 겉보다 속을 차리는 생활을 하셔야 할 줄 압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 교회의 의식과 행사보다 자기의 사생활에 더 큰 비중을 두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사생활에서 말씀, 기도나 경성함이나 양심적 생활이 없으면서 성수주일을 하고 절기를 지킨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장 “너는 제도와 의식만 중요시 하느냐 24시간 사생활에 경성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생활에서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5:23).

2.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수주일이나 예배의 경건을 강조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성수주일을 해야 공예배에 참석할 수 있고, 예배 의식의 경건함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것인즉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호 6:6을 보시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 하셨고, 또 요 4:22에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제사나 예배 의식보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도시에 사시는 여러분들이 주머니에 돈 떨어지는 날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콩나물도 못 사고 연탄도 못 산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주일날 교회 앞에 사정해보려고 나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민망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항상 모시고 사는 것이 단체 의식에 얽매여 사는 것보다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보를 보고 “무슨 순서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고 평소의 경건한 생활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예배당도 지어가지면 좋지요. 그러나 그 예배당은 하나님이 꼭 지어 갖기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가 편리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지은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 또는 분위기 좋은 예배를 위하여 지은 것인데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몸을 주님 계신 성전으로 알고 모시는 생활입니다. 고전 6:19에서 “성도의 몸이 성령님의 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 계신 성전을 갖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예배당에 가야만 기도가 되고 예배가 된다”고 했다면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당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를 성전 삼고 또 자신을 예배당처럼 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4. 직분, 헌금, 봉사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것은 “봉사하라”고 드리는 것이고, 봉사를 잘 하시려면 헌금도 잘 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높은 직분을 안 준다는 이유로 봉사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봉사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고 봉사와 구제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분, 봉사에 앞서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사랑입니까? 당연히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직분을 갖고 사랑, 봉사하려 하지 마시고 직분 없이도 사랑, 봉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랑을 실천하시려면 물질도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앞서 모든 이에 대한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소자는 소자이어서 불쌍하고 환자는 환자이어서 불쌍하며 죄인은 죄인이어서 불쌍하고 폭력자는 깨닫지 못한 자이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이 직분에 앞서 사랑 실천의 근거가 되어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의식보다 내실을 기하자”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제76과 초월하는 신앙(1) (사 40:28~31) 목록으로


“초월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초월해야 할 요소들이 많습니다.

1. 초월의 뜻이 무엇일까요? 초월은 훨씬 넘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보통보다 뛰어남, 세상 이욕에서 떠남, 가능한 범위를 넘어섬”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특별 통치를 받는 백성이니까 무슨 일이나 보통보다는 뛰어나고 대단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된 동기는 “나 자신도 연약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자책도 있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호칭하는 예수님의 몸된 교회도 이렇게 연약해서는 안 되는데”하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놀다(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을 만드는 집에서 “부엌칼이 없다든지 칼이 들지 않는다”하면 웃을 일인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들어 못살겠다, 피곤하고 힘들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공을 나는 독수리는 저희들이 보아도 자유를 누리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날개가 없으니까 불편한 것이 많지요. 어디를 좀 가려면 지도를 살펴야 하고 자동차를 정비해야 하며 또 차는 밀리는데 졸음이 와서 교통사고의 위험도 있지요. 그래서 한 번 나들이를 하려면 신경을 많이 씁니다. 독수리처럼 날수만 있다면 모든 장애물을 다 초월하여 형통하게 움직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성경에는 성도가 하나님을 앙망하면 그렇게 지상을 초월하여 “높이 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고아의 생활은 홀로 서야 하니까 힘들지요. 그러나 좋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여유있게 활동하는 것처럼 성도가 의지하는 하나님, 성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세상의 일들을 상당 부분 초월하여 생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활을 할 때에 성숙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초월에 대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3. 우선 의식주 생활에 대하여 초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 6:31~33을 보시면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이방인도 살게 하시는데 성도를 굶기시겠느냐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는 뜻이니까 성도가 성실하게 살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인즉 이 말씀에 따라 초월하는 뜻으로 교훈하고 싶은 것은

1) 지나치게 음식 사치나 의복 격식이나 주택 시설 등에 신경을 많이 쓰지 마시고 적당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주택에 대한 말씀은 없지만 “예수님이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는데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적당한 거처가 있으면 족하지 않은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식생활에 대한 말씀도 나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는 말씀도 있고,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고전 8:8). 잘 먹는다 하여 성령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고 잘 못 먹는다 하여 은혜가 떨어지고 큰 손해 보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음식 사치에서 떠나 간단하고 실리적인 식사를 하시도록 노력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롬 14:17에도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데 있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셨고, 또 더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영접 받으셨을 때 마르다가 음식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없다면 이방인들처럼 먹자주의에 붙잡혀도 괜찮고 한 30가지 놓고 잡수셔도 됩니다. 그런데 “혹 한 가지라도 족하다”하신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여러 종류를 놓고 잡수려 하십니까? 그래서 영양실조 되게 하시라는 뜻이 아니고, 적당한 음식 서너 가지면 좋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내가 주는 식탁에 앉으면 자주 숫자 많다고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런데 점심은 서재에서 제가 해결합니다. 국수 삶아서 간장 국물 붓고 김치하고 먹습니다. 그래도 배가 불러서 걱정입니다. 사람이 음식 사치하고 의복을 깔끔하게 입으려면(의복은 겉치레임,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음, 행 10:34) 상당히 바빠야 합니다. 그 시간에 성경을 묵상하셔야지요.

2) 또 유의하실 것은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2절)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모범이 아니란 뜻이지요. 성도가 이방인의 문화를 따라가는 것을 예수님은 좋아하시지 않습니다(약 1:27).

3)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좋아하십니다. 성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려면 현실을 많이 초월하셔야 합니다. 현실과 세속에 너무 많이 얽매이면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도 적당히 또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곧 현실 초월입니다.

4) 그리고 또 “내일 일도 염려하지 말라” 하셨으니까 미래 염려도 초월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77과 초월하는 신앙(2) (행 3:6) 목록으로


현실교회가 언제까지 물질의 노예가 되고 물질을 앞세워 일할 것인가? 수분이 곰팡이 번식의 원인이듯 물질 타산이나 금전을 앞세우는 일이 진정한 기독교의 의미를 가리운다고 보셔야 합니다. 저의 생각은 교회 단체에서 구제금이나 경상비를 거두어 즉시 쓰는 일 또는 선교를 돕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 물질 사업을 하거나 선물 공세 등으로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 우선 성도는 물욕을 초월해야 신앙이 바로 클 수 있겠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마 6:24)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마 11:5)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렵고(마 19:23~24) 특히 사명자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주님을 따르라(마 19:21)” 하셨으며 또 재물이 시험의 대상으로서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하신 말씀(딤전 6:10)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 세계에서 부자나 재물을 선호하는 일들을 극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많이 번 것을 축복으로 자랑하며 부자를 존경한다면(재물을 흩쳐 구제하는 성도는 제외함)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이웃에 덕을 세우는 일을 권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부자에게는 재물을 흩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재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경계하는 교훈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면 부유층 세계에 가셔서 사시려 하지 않고 빈촌으로 가실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런 뜻에서 성도는 재물 선호하는 일을 적당히 통제, 초월하도록 노력하십시오.

2. 교회는 반드시 물질 문제를 초월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돈으로 시작한 종교도 아니고 예수님께서도 “전대 은금 없이 전도하라”(마 10:9) 하셨으며 본문에 보시면 베드로나 요한도 “은금은 없고 예수님의 이름만 앞세워”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초대 교회의 어디를 보아도 물질을 모아서 교회를 시작하였거나 전도, 선교비를 전담한 사례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다락방을 빌려 쓰시면서도 자기의 건물을 가지실 필요를 나타내시지 않았고,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그 비용을 성실하게 주었다는 말씀도 없으며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옥중 생활을 돕기 위하여 선물을 보낸 사실이 있고(빌 4:15), 바울사도는 선교비가 부족하였을 때 스스로 벌어서 동역자의 생활까지 도와준 사례가 있습니다(행 20:34). 그리고 여러 교회로부터 구제금을 수집하여 전달한 사례가 있습니다(고후 8:1~15). 이것은 초기에 있었던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방법이 재연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명을 가진 성도나 가족이 전도할 지역에 이민을 가서 살면서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나 성도의 가정이 독자적으로 사명을 갖고 외지에 나가 살면서 전도를 한다면 큰 교회가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시행하는 선교 방식은 파송하는 교회가 잘 유지되면서 늘 선교비를 모아 보내주어야 하니 그 일이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새로운 방법도 권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급 생활을 하면서 선교할 수 있는 사명자가 나와야 하고, 그가 전도 지역에 가서 적당한 직업을 갖고 살면서(가족이 생활비를 주는 것은 적절함) 전도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나 그 측근에 있는 동역자들이 다 그렇게 한 줄로 알고 있고, 부부로서 그렇게 한 가족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할 때 복음이 들어왔고, 생활비와 연계하여 사역자를 초빙하는 제도를 시행하다보니 교회는 재정 사역에 얽매이게 되었고, 교역자는 생계수단으로 목회를 안 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연약해졌으며 교회가 재정문제를 만회하려고 노력한 것이 결국 물량주의를 양산하게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정년을 앞두고 뒤를 돌아본즉 “내가 교회에서 생활비에 고용당한 것이 나의 성직을 절름발이로 마치게 한 것이라”는 고백을 안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역자도 물질을 초월하고 교회도 물질을 초월한다면 물량주의는 없어지고 진정한 기독교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비 받아야 선교하러 가시겠다” 또는 “생활비를 받아야 목회하겠다”, “감사 헌금 받아야 안수해 주겠다”하실 분이 아닌데 요즈음 기독교 세계는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물질 거래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은 진정한 헌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떡 얻어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속히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요 6:26). 신령한 은혜를 돈을 주고 사려해도 안 될 것이요(행 8:20), “거저 받았은즉 거저 주라”(마 10:8)는 말씀도 기억하셔야 하고, 또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않도록”(딤전 6:5) 노력할 때 십자가의 밝은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가 재정이 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과 성도의 단체로 성립될 뿐 거기에 물질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단체만 있으면 어디서나 예배드리고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교회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가 가난한 것을 교회의 약한 것에 포함시키면 안 됩니다. 가난한 교역자는 따로 구제할 수 있겠지만 사역자가 구제 받는 것은 합리화 될 수 없지요. 현실 교회가 재정을 초월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정 약한 교회에서 사역자의 생활비 문제, 건물 확보 문제, 세속을 따라 모방하는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물질을 앞세워 그것으로 사람을 유인하지도 말고 십자가의 복음만 그대로 전하는 미련한 전도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전 2:1~5). 또 교회의 물질적 사역이 커도 자랑할 것이 없고 교회의 재정이 적다하여 신앙생활이나 전도에 지장 받을 일이 없은즉 떳떳한 입장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78과 초월하는 신앙(3) (창 28:15) 목록으로


1. 성도가 무엇을 초월하여야 하는가?하면 단체를 초월하여야 합니다. 이 뜻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단체의 역할로만 성립되고 혼자 서기는 어렵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인간 단체(교회) 안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곁에 있고 교인 친구들이 많아도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또 교회 단체에 가도 넉넉한 위안을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가 단체를 초월하여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을 혹 교회를 부정하는 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의 피로 사신 단체(엡 1:23, 행 20:28)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면 되겠습니까? 혹 “교회 안에 부정적 요소들이 있으니 그것을 알아서 경계하시오”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부정적 요소를 시정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100년(우리나라)~2000년의 전통으로 굳어졌고, 또 그 단체와 옹호자들이 많기 때문에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닌)단체를 초월하여 자기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성경 따라 생활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시대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했고, 바벨론 포로 시대에도 했으며 출애굽 때와 아브라함 때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조건은 옛날보다 이 시대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완성된 후에 성경이 가장 활발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50년 전만 해도 성경 구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눈만 들면 강단 위 스크린에도 나타나고 TV 설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시대 다음으로 신앙생활하기 좋은 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아브라함만 할까요? 다윗만 할까요? 야곱이나 요셉만 할까요? 또 왜 신앙생활을 할 때에 단체를 초월하여 홀로 서야 할까요? 그럴 이유가 많습니다.

1) 신앙의 단체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3) 신앙 고백도 독자적으로 해야 하고 천국도 단체와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이요,

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하나님과 단 두 분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성도를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무개를 만나자” 하셨는데 혼자 갈 힘이 없으니까 “목사님, 장로님과 같이 갑시다”하면 되겠습니까?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그리고 너로 하여금 내 뜻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하셨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시는데 왜 단체에 의존하십니까? 내 지갑의 돈을 쓰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돈을 꾸러 가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단체적 신앙생활과 단체를 초월한 개인적 신앙생활은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4) 남을 의지하는 신앙은 미안하고 번거로운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암으로 세상 떠나는 부인의 가족이 “세상 떠날 듯하니 심방 오십시오”하여 10리 가까운 거리를 여러 차례 갔었습니다. 가서 4~5시간 기다려도 안 떠나니까 또 왔다가 또 갔다가를 몇 차례 반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체를 초월한 성도는 스스로 믿음을 확보하였으므로 죽음에 대하여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성환 집사님이 죽음 직전에 “다 알고 있으니까 염려하시지 말라”하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를 주는 신앙입니까? 제가 대구에 있을 때 지방에 계신 목사님이 다녀가신 일이 있는데 신경통이 너무 아파서 대구 변두리에 있는 어떤 기도원 권사님께 안수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의 안수를 받고 병을 고치려 하시니 이것이 덕이 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별과 같으니까(계 2:1) “주여 나 죽겠습니다 하고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홀로 서는 신앙, 또는 단체(이웃)를 초월하는 신앙을 가지셨다면 힘들게 대구까지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연약하기 때문에 일시 도와준다 하여도 하나님의 직접 권고만 못할 것입니다.

5) 단체라는 이웃이 마땅치 않을 때가 있어서 불편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시아버지가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는데 며느리는 그 교회에 나가는 것이 양심에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아버지 목사는 자꾸 나오라고 합니다. 신앙의 단체가 개인 성도에게 그런 갈등을 줍니다. 또 부부가 한 교회에 나가는데 남편은 목사에게 충성만 하려 하고 아내는 목사의 마땅치 않은 일을 보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부가 교회를 나누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대구의 어떤 교회는 거금으로 예배당을 짓고 목사와 대립이 되었는데 목사는 자기의 일터라고 안 나가고 중직자들은 터줏대감들이라 하여 안 나가며 오랜 세월 싸움만 하다가 결국 갈라진 사례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있는데 신앙과 사명과 사명의 방법까지 일치하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사명의 방법에서 틀립니다. 제가 말하기를 “목사 싫어하는 교인이 ⅓쯤 되면 나오는 것이 좋지”하면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교회가 전도의 방법으로 “세속의 방법을 써서 물건 선전하듯 하는 것은 좋지 않고 차라리 밀가루에 접촉된 누룩처럼 조용히 역사하는 것이 좋다”하면 또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또 “목사가 교회의 헌법을 지키기로 서약했으면 그대로 따라야 하지 않느냐?”하면 역시 묵묵부답입니다. 이렇게 이웃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저의 목회하는 방법을 제 아내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양심대로 신앙생활하려면 단체를 초월함이 좋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서도 홀로 서는 신앙이 필요함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79과 초월하는 신앙(4) (요일 2:15~17) 목록으로


성도가 “현실주의”를 초월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잘 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현실은 이 세상이고, 이 세상에서 권세 있는 자는 마귀입니다. 눅 4:6을 보시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모든 권세와 영광은 내게 넘겨 준 것이라 하면서 자기에게 절을 하면 다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적 권세 부린 사람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믿음을 떠나서 폭군 노릇하고 독재자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지요.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활동 영역은 이 세상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세상은 인간이 지나가는 나그네 터전이 되었고, 예수님도 그러하셨기 때문에 요 18:36에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셨지요. 만일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종들이 싸워서 유대인들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과 육신은 임시적 생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먼저 그것을 깨달아야 현실주의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부가 친정을 자기의 영구적 살 집으로 알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도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임시로 살고 있습니다. 내 집을 가지면 죽을 때까지 이사를 안 가겠지만 저는 거처만 있으면 됩니다. 히 11:8~13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깨닫고 말하기를 “자기와 이삭과 야곱은 외국인 같고 나그네 같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와 성이 있기 때문에 장막에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이 세상이 인간의 임시 처소이기 때문에 대충 산다는 뜻입니다. 현실주의를 초월하는 성도들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치 배가 물 위에 있으니까 떠 있지만 물을 안으로 끌어들이면 안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마귀의 무대이니까 마귀가 좋아하거나 주동한 일들에는 동조하지 마시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필요하여 주시는 것만 적당히 누리면서 마귀와 현실과 인본주의에 따라가지 않는 것이 “현실주의 초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초월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씀합니까? 우선 본문을 보시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물질, 명예, 향락)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육체의 정욕과.....세상을 따라 온 것이다(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음) 이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는 성도가 어떻게 현실을 초월하지 않겠습니까? 또 약 4:4에서는 “세상과 벗하려는 자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롬 12:2).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세속의 풍조가 좋아 보이고 불신자들이 사는 방식을 따르려하며 세상 욕심을 다 채우려 한다면 그는 성경을 믿지 않는 자로 단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자기의 생활과 달라도 돌이킬 체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의 정욕을 따라 기독교를 취사 선택하는 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 정욕을 초월하라는 것 외에도 자기 정욕에 맞지 않는 계명을 못 본 체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 초월성이 없으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첫째는 현실에 욕심을 품고 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쉽게 성취 안 될 때는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현실 집착은 영적 은혜를 감소하게 되고 따라서 내세의 상급도 다 포기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마 5:11~12, 6:2, 눅 16:25). 현실주의와 인본주의는 서로 비슷합니다. 현실주의는 인간 본위로 사는 세상 아닙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따지지 않고 일시적으로 자기 마음에 맞으면 되고 사람이 알아주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월드컵 시기입니다. 월드컵에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성도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기도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월드컵에 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분명히 지는 나라가 있어서 이기는 나라가 생기는 것이니까 이기는 영광에서 지는 욕을 빼면 0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원리도 모르고 “하나님 하나님 월드컵”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주의나 인본주의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또 인본주의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세속적 생활입니다. 성도가 이런 생활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의 세상은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끌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갈 1:10)고 하였습니다. 현실주의는 사람에게 기쁨 구하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의 성공자는 요즈음으로는 축구 선수들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들도 나이가 들면 계속하지 못하더군요. 이것이 현실주의의 결함입니다. 따라서 현실주의적 성공을 하나님이 다 인정하시는 일로 착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0과 초월하는 신앙(5) (마 22:21) 목록으로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의 국가에 대한 초월”입니다. 이 초월의 뜻은 교인들이 신앙을 갖고 나라에 대한 충성을 잘 하도록 가르치고 또 나라 정치에 불법성이 있으면 사회인보다 교회가 앞장서서 죄 되는 일을 깨우치므로 덕을 세워야 하지만 교회가 그런 대가로 나라에 무슨 보상을 구하거나 교회가 나라의 무슨 덕을 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정치와 종교를 구별하라는 뜻이지요. “교회와 성도는 이웃에게 빛의 사명이 있다”(마 5:13~14) 하셨은즉 빛도 비추고 소금 역할도 하되 국가로부터 무엇을 바라면 안 됩니다. 국법으로 건전한 종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했으면 되지요. 혹 악한 정치가가 종교적 모임을 불허하였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스스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요즈음 국회에서 통과된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는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립되어 있고 많은 사립학교들이 여기에 반발을 하는 중 무엇이 문제인가?를 구상하다가 다른 사학이나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 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떠나서 간섭 받지 말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립니다. 일반 사학은 학문 교육 목표를 뚜렷하게 천명하고 사회의 인정을 받도록 청렴하게 운영하면 됩니다. 교육을 시행하여 돈을 벌려면 적당히 벌면 되겠고, 그런 일에 대하여 나라의 감독 받는 일을 마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종교적 학교도 운영 문제에 대해서는 꼭 같다 하겠습니다. 그런 중에 기독교 학교의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통성 보존입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지요. 이것은 기독교 교파나 학교 운영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학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정통성 이념 훼손으로 든다면 사학법을 고칠 때 나라에서 파송하는 이사는 재정적 운영에만 관여하고 정통적 종교 이념에 대하여는 관여하지 않게 한다면 될 듯 하고 어느 개인, 어느 단체나 학문 시책 운영을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나라의 감시도 받고 세금도 잘 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대한민국 백성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면 마땅히 소득세나 부가세를 내야 하겠지요. 그런데 국가가 직접 관할하지 않는 종교 행위 중에서 받는 사례가 세금의 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경우에 국가는 세금을 명할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상당한 소득을 교회로부터 받은 것이 사실인즉 성직자의 양심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세금을 부과시키려면 국가가 교회 살림에 들어와서 재정 감시를 하고 근거를 취해야 하니까 정교 분리에도 문제가 있고, 또 헌금한 돈도 정확하게 관리하여 부가세를 공제해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도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봉헌하고 또 세금 혜택을 받는 것도 문제가 있은즉 연구할 일입니다. 따라서 성직자의 소득의 세금을 양심에 맡기고 그 통계를 공개함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가 자기의 신분이나 소득을 숨기려 한다면 그는 성직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시고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흔히 성직자들이 자기 문제를 많이 감춘다는 말을 듣습니다. 너무 감추면 진실에 의심을 받지요. 그래서 솔직해야 합니다. 교회가 물적 재산(예배당)에 대하여 세금을 내는 것은 현재 면제 받는 줄 압니다. 그러나 나라가 어렵다면 교회가 어떤 고아를 돕는 것보다 먼저 나라를 살리는데 솔선하여야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나라의 덕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 따지기 전에 “나라에도 후하게 주고 나라가 구제하라”고 해도 될 것이요, 나라에 주기 싫으면 소득의 근거를 없애면 됩니다. 소득의 근거를 없애는 뜻은 교역자 생활비를 몇 가정이 모아서 적당히 드리고 교회에 헌금한 돈으로 적당히 선교에 쓰라고 하면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니까 교회는 돈과 상관 없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돈 없고 말씀만 있는 곳으로 알면 나라에서도 세금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것인데 세금 내기 싫은 성직자가 있고 좋은 일을 한다고 말만 하면서 세금을 빼달라고 하는 성직자가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교회가 많이 개혁하여 물량주의에서 탈피하도록 하면 진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선교나 성직자 생활비를 사사롭게 시행한다면 신학교는 어떻게 운영하여 성직자를 배출할 것이냐? 하시겠지요. 그것은 교파마다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회에서 교과목과 교수를 배정한 후 그 교수님은 자기의 전문 과목에 대하여 시간과 장소(예배당)를 정하여 강의하고 시험을 쳐서 학점을 주면 됩니다. 그 교수님이 목회를 겸하기 어려워 교수만 한다면(학점을 줄 때 부득이 가격을 정하여 생활비의 보탬이 되게 하든지) 자립한 상태에서 무보수로 하든지 큰 교회에서 교육 목사로 대접하면 될 것입니다. 모든 학점이 이수된 문서를 놓고 필요 조건에 의하여 성직을 주면 될 것입니다. 100년이 되어도 신학교가 자립을 못하여 구걸하고 교회에 짐 지우려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헤롯왕을 여우라고 하셨습니다(눅 13:32). 정권에 아부하시지 않는 뜻이지요. 또 예수님은 핍박 받는 정권 밑에서도 구속 사업을 하셨고, 사도들은 핍박을 받아 흩어지면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핍박 중에 성장해 온 기독교가 정권에 아부하거나 정부의 덕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설득력이 없다 하더라도 말씀드리는 중심은 “교회가 정부의 간섭이나 힘을 초월해야 된다”는 취지를 말씀드린 것으로 여기시지 바랍니다.




제81과 초월하는 신앙(6) (벧후 3:8~9) 목록으로


초월에 대한 것을 묵상하다 보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1.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계 1:8, 21:6, 22:13) 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기다리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고 하루에 천년의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려니까 시간이 촉박하고 때로는 많이 기다려야 하며 또 죽는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성도가 예수님 오실 날을 지루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시고 “하나님은 지루한 것을 모르신다, 천년도 하루처럼 보내시는 분인데 말세가 신속하게 임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시겠지만 두 가지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지루하게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을 경험하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때에 천년을 하루처럼 보내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잠을 주시면(잠 자는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름) 그 지루한 감각이 다 없어집니다. 시 127:3에서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뜻이 무엇인가? 휴식과 평안을 의미하는가?” 하였는데 하나님은 잠을 통해서 기다림을 없애주시고 일할 때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간이 바쁠 때 하루를 천년처럼 쓰시게 하시는 하나님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 3개월 잡은 것이 한달에 끝나는 경우를 체험하고 여호수아가 태양 정지를 요청하여(수 10:12) 아모리족을 치게 하신 일을 기억하였습니다. 형편에 따라 성도의 시간도 천년을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처럼 쓰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단 하나님은 역사를 그 이전으로 돌리시지는 않음).

2.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고 그 만상을 명하셨다”(사 45:12) 하셨고, 또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내 발등상이라”(사 66:1, 마 5:34~35)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 천국과 현세를 한 울타리 안에 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에게 변화의 모습을 보이실 때 모세와 엘리야를 한 장소에서 만나게 하신 것은 시간과 공간을 다 초월한 사건이요, 또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았다가 예수님임을 알고 만지려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하셨는데(요 20:17) 그 다음 그 동산을 떠나기 전에 그 여인들을 만나 주시니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을 보면(마 28:9)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하나님 보좌에 가서 하나님을 뵙고 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의 공간을 초월하여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같은 공간적 초월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시는가?할 때 두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항상 곁에 계신즉 전달이 늦을 수도 없고 임재가 더딜 수도 없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미국 간 성도가 병중에 있으면서 전화로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여 했더니 나았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고, 이것은 마 8:8에 나타난 백부장의 신앙(말씀 능력이 공간을 초월)을 합리화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시간의 초월성과 공간의 초월성을 믿으시고 그것이 저희들에게 은혜로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꼭 가지셔야 할 초월적 신앙 두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생사를 초월하는 신앙이고, 또 한 가지는 축복을 초월하는 신앙입니다.

1) 생사를 초월하는 신앙이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일이란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빌 1:20에서 “살든지 죽든지.....하나님 존귀만......”라 하였고, 또 21절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셨으며 23절에서는 “사명만 아니면 천국 가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사초월은 당연한 것입니다. 고후 5:1에서도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더 좋은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다”고 하셨지요. 이것을 믿는 것이 생사초월입니다. 힌두교도들은 삶이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죽어서 평안히 사는 동물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많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는 “고아가 많다” 하더군요. 성도는 자살하면 안 되지요. 그러나 반드시 “살면 세상 재미 보고 죽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간다”는 생사 초월의 관념을 꼭 가지셔야 합니다(롬 8:24, 보는 것을 부가 바라리요).

2) 축복 관념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기독교인이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 받으라”하고 또 예수님보다 더 잘 살면서도 여전히 끝없는 기복신앙에 얽매이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3년만 살자”하시면 성도들도 아멘 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33세를 사셨어도 “나는 꼭 80은 채워야 합니다”한다면 그 사람은 현세적 축복 초월을 못한 사람입니다. 성도가 축복 초월을 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이 현세 축복을 적게 누리셨기 때문이고, 성도가 현세에서 축복을 많이 누리면 하늘의 상급을 깎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칭찬과 상을 많이 받으면 하늘의 상을 미리 받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구제하고도 나팔 불지 말라”(마 6:24) 하셨고,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는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고 부자는 누린 것이 많아서 그 격차가 크다”(눅 16:25)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현세적 축복 문제는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0. 교회에 대한 말씀

제82과 교회론 요약 (마 16:18~19) 목록으로


신학적으로 교회에 대한 분야를 “교회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학문적으로 배우려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에게는 쉽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르치는 순서가 ① 교회의 정의이고, ② 출처역사요, ③ 본질 설명이고, ④ 종류 구별이며 ⑤ 사명이고, ⑥ 은혜의 방편이며 ⑦ 교회가 받은 권세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이 일곱 가지 제목대로 지식을 갖는다면 좋은 신앙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1.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 “교회”란 용어는 본문에서 처음 나오는 단어인데 “에크레시아”로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속에 처한 백성을 그의 거룩한 세계로 불어내신 단체(엡 2:19에서는 시민, 권속)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묻기를 “교회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으로 나온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가족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느냐?하고 묻는다면 교회의 출처를 대답하셔야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전도하여 제자가 되게 하시고, 또 그의 제자들이 전도하여 성도의 단체를 이루었을 때 이 성도의 단체가 곧 교회인데 이 단체는 세계적으로는 한 단체이나 다 한 곳에 모이지 못하니까 각자 편리한 장소에 부분별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대로 살려고 힘쓰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다가 마지막 성찬을 나눈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셨으나 40일 만에 성령님이 오시고 또 역사하셔서 성도의 단체를 이루게 하셨고, 그 단체가 전도하고 친목하며 사랑과 빛을 발하며 그 교세를 세계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때에 처음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오늘날 세계의 교회로 확장된 것입니다.

3. 교회의 본질(구성 요소)이 무엇이냐?할 때 교회를 정의할 때는 믿는 단체의 상태를 말씀드렸지만 본질을 설명할 때는 구성 요소를 말해야 합니다. 구성 요소

1)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하니까 이 반석은 예수님이시고 성경이며 또 성경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과 말씀, 성령님과의 유기적 연합성이 계속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 구성 요소는 말씀과 성령님(예수님)이 계셔야 하고,

2) 말씀대로 고백하고 따르는 성도가 있어야 하며

3) 그 성도의 생활을 지도하는 사역자가 있어서 질서있게 통솔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 그리고 성도, 그 다음에는 성도를 질서있게 통솔하는 지도자(교회 직분자)를 갖고 있으므로서 교회의 기능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이 교회를 어떻게 구별하느냐?할 때 유형 교회, 무형 교회로 구별하지요. 무형 교회는 영적으로 취급하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진실한 믿음을 뜻하며 하나님만 아시고 내세 천국에 가야 잘 알 수 있는 세계요, 유형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교인의 단체이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형 교회를 구약 교회(선민 단체, 행 7:38)와 신약 교회로 나눌 수도 있으나 구약 교회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니까 우리 앞에 없는 것이고, 우리 앞에 있는 교회는 세계에 흩어진 모든 성도의 단체(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파와 정치와 생활하는 장소는 달라도 다 하나의 교회인데 여기에 외식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무리들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 지상의 유형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거나 무형 교회를 설명할 때는 외식자 부분이 제외되지만 유형 교회를 말할 때는 신앙 고백을 하고 출석하는 대상을 뜻하기 때문에 신앙 고백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상태에서 믿음 생활을 함께 하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이 단체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자기의 교회를 피로 값 주고(속죄 성격, 행 20:28) 세우셨습니까? ① 이것은 성도가 단체를 이루어 친교하고, ② 성경을 보존, 연구, 해설, 교육, 전파하여 ③ 교회를 주님의 뜻에 따라 확장시키고, ④ 더 나가서는 단체의 힘으로 악한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 지키는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개인의 힘보다 단체의 힘이 크고 또 성도의 융화와 친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시 133:1).

6. 그러면 또 주님이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은혜의 방편이 무엇입니까? 그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딤전 3:15, 고전 11:23~25). 모든 은혜의 근원이 말씀에 있고, 또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혜와 능력을 힘입으니 주님 앞에 있는 것이고, 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았으니 가까이 나가는 것이며 또 성찬 예식을 통해서 주님을 모시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다짐할 때 역시 주님과 가까워지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7. 이것 외에 또 교회에 주신 권세(예수님의 권위를 나누어 주신 것)가 있으니 그것이 곧 정치권, 봉사권이며 권징과 축복 기도권입니다. 정치권은 교회가 법을 만들어 다스리는 것인데 그 모범이 민주적으로 하게 되어 있고(행 6:1~6), 봉사권은 직분을 세우는 일이며 권징은 책벌하는 권세이고(마 16:19), 축복은 타인을 위하여 복을 비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딤전 2:1~2, 8). 교회에 오시면 말씀 선포와 성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 교인들이 모여 의논 결정하는 정치가 있으니 이것이 곧 교회나 총회가 작정하는 규정을 의미하는데(행 16:14) 그 기본권이 교인에게 있으며

2) 사역자나 봉사자를 앞세울 때 그 자격과 봉사 업무를 교회(총회)가 세우며

3) 권징권도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면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이고(마 16:19),

4) 타인을 위한 축복권인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이것을 중보권으로 행사하셨지만(요 14:27, 20:21, 고후 13:13) 직분자나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서로 축복 기도하는 것은 좋으나 성직자가 사도처럼 축도하는 것은 과장된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교회의 정의와 시작과 본질과 구별과 사명과 은혜의 방편과 특권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83과 교회의 역사와 특징 (행 7:36~38) 목록으로


성도가 교회의 생활을 잘 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성격과 생활” 등 여러 말씀을 드렸는데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역사와 특징”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교회라는 명칭은 예수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6:18) 하셨는데 이 “세우리라”하신 약속이 성취된 것은 오순절 이후에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가 그 시작으로 성취되었고(행 8:1), 거기에서 구브로, 안디옥 등 소아세아 교회로 번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시발점이 어디냐?할 때 명칭상 또는 구성 요소로서의 교회 시작은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 교회라 할 수 있지만 성격상으로 볼 때 교회는 성도의 단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단체는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본문 말씀에 “광야 교회”란 말씀이 있습니다. 선민의 출애굽 단체가 광야 40년의 생활을 한 단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광야 교회, 구약 교회, 예수님 시대의 교회, 오순절 이후의 교회, 현실 교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렇게 다섯 세대의 내력이 교회의 역사요, 그 역사에 따른 특징을 살피는 중에서 저희들이 현대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조건은 성도가 있고, 하나님의 간섭이 있어야 하며 또 예수님을 대리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1. 광야 교회를 보십시오. 선민이 곧 성도이지요. 하나님의 강한 간섭(율법, 이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 단체를 “광야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단체 생활에 무슨 특징이 있었습니까?

1) 세속(애굽, 불신앙, 우상주의 등)을 박차고 나온 특징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나왔기 때문에 돌아갈 형편도 어렵게 되었지요. 이것이 성도가 세속을 멀리 하는 특징입니다.

2) 인생을 나그네 생활로 만족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 같다”(벧전 2:11)고 하셨습니다. 이 나그네와 행인이란 뜻은 “적당히 지나가는 자처럼 살라”는 뜻입니다. 육체적, 현실적 생활을 완벽하게 정착하려 하지 말고, 자기의 할 일만 충실하면서 지나가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 지도(율법, 불 기둥, 구름 기둥)만 따르는 것입니다. 불 기둥, 구름 기둥이 뜨면 가고 멎으면 서는 식으로 말씀 중심에서만 움직인 것입니다.

4) 특별한 은혜에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의식주가 그러 하였고, 적을 치는 것도 그러하였습니다.

5)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서 불신앙 한 자나 거역한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으니 광야 교회는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을 생각할 수 있고,

2. 구약 교회는

1) 단일 성전 제도가 특징입니다. 이것은 세계의 교회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교파 교회 이름, 교세는 달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단체는 세계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을 꼭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간에 투기하면 안 됩니다.

2) 제사 행위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과 메시야 구속 사업을 나타내는 계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도 중보자 예수님의 모형이고, 제물도 속죄제의 모형이며 그 섬기는 절차는 하나님께 정성 드리는 행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교회에서는 단일 성전, 메시야와 속죄제 계시,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범에 특징이 있었습니다.

3. 예수님 시대의 교회는 어떠 하였는가?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와 교회는 그 지체와 같은 것인즉

1) 가장 중요한 특징이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따르면 되었으니까요.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로 연합을 강조하신 것처럼 주님과의 연합이 특징이고,

2) 예수님의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마 15:10) 하시고 교훈에 집착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3) 그리고 전도에 열중하셨습니다. 막 1:38에 보시면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전도에 열중하셨으며 또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4)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것의 모범을 보이셨으니 그때의 특징은 연합과 가르침과 전도와 모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오순절 당시의 교회입니다. 오순절 당시의 교회의 특징은 이방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타난 역사와 그 이외의 역사(사도행전과 신약에 기록된 교회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교회의 특징은

1) 성령의 강한 역사와

2) 핍박을 과감하게 극복하는 전도와

3) 성도의 유무상통하는 교제,

4) 영적 사역과 물적 사역을 분간한 일(행 6:1~7),

5) 사도와 장로회를 조직하여 교회들을 감독하고(행 16:4~5),

6) 선교와 교육에 주력한 일들입니다. 그 당시의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하면 이적, 두려움. 기탄없는 전도, 순교, 합심 등이 일어났고(행 2:41~47, 4:32~35, 11:1, 5), 선교 사역(13:1~3), 치리회 결성(16:4), 성경 연구 활동(17:11, 베뢰아 교회), 말씀에 붙잡힘과 흥왕(18:5, 19:20), 봉사적 미덕(20:35) 등이 있었습니다.

5.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교회는 다 이 성경에 바탕을 두어 전래되어 온 것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후 100년 경에 신약 성경이 완성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직접 지도하신 것이 특징이고, 현대 교회는 그 분들이 기록한 성경 위에 세워진 것이 특징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하신 뜻은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특징을 지혜롭게 적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4과 교회의 성격 (딤전 3:15) 목록으로


성도가 교회의 성격을 잘 알아야 교회 생활을 합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가 교회의 생활을 잘 하시면 주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그 자신도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몇 가지로 나누면 개인 생활, 가정 생활, 교회 생활, 사회 생활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 교회 생활이 가장 어렵고 그 대신 잘 하면 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 생활은 자기만 경성하면 간섭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가정 생활은 사랑하는 식구들끼리 모여 하는 것이므로 부담이 없으며 사회 생활은 이웃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의 외인들이기 때문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므로 덕만 세우면 칭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은 모든 이를 가족처럼 대하면서 서로 감시자가 된 상태에서 책임을 다 하여야 하고, 또 질서 있고 공의로우며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만 조용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실 수 있기 위하여 교회의 성격 몇 가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란 성격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라 하셨고, 또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고, 또 가정의 성격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상의 천국은 교회란 뜻인즉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주권과 영광을 누리시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집”이란 가족 세계를 의미하는 만큼 여러 사람이 모였어도 다 가족적 분위기로 융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가족이냐?”할 때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는 예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단체란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다”(행 20:28)는 말씀이 있고, 또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라”(골 1:18, 24)고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권위가 예수님과 같다는 뜻입니다. 가치로 볼 때 예수님의 생명의 피 또는 몸과 같고, 권위로 볼 때는 예수님의 진리 사역을 맡은 대리 기관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가 성례와 임직과 권징을 시행하는 것을 보아서도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지체를 치면 머리가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교회가 어려우면 주님이 괴로워하시고 교회가 잘 되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요, 따라서 성도는 교회라는 단체를 인간 단체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여겨 사랑하시고 잘 되게 할지언정 피해되지 않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의 것으로 종속된 성격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님들은 교회의 종속성과 전체성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종속성이란 예수님이 주인이시란 뜻이고, 전체성은 세계에 있는 모든 성도의 단체가 다 한 교회란 뜻입니다. 교회가 잘 되어 갈 때 성도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 하시면 안 되고, 또 받아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주 되신 예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교회 잘 되는데 따른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무례하고도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요, 또 교회의 성격을 전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내 교회란 인식과 함께 개교회적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만 크게 만들려고 온갖 욕심과 수단을 쓰지 않습니까? 어떤 곳에 가니까 어물전이 있는데 형제가 나란히 점포를 갖고 하더군요. 한 집에서 흥정하다가 “옆에 있는 점포의 물건이 더 좋다” 하니까 “거기는 우리 형님 점포이기 때문에 거기서 사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도 이런 인식과 상부상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성도가 지역별, 교파별, 또는 숫자별로 나누어 단체 생활을 하는 것뿐입니다. 교회가 커도 내가 영광 받을 일이 없고 교회가 작아도 내가 은혜와 봉사에 아무 손해됨이 없는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 되는 영광은 주님이 다 받으시고 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믿음 생활만 잘 하여 은혜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4. 교회는 진리 사역의 성격이 있습니다. 학교는 교육을, 경찰서는 치안을 담당하는 것처럼 교회는 진리 활동의 무대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터는 표준을 뜻합니다. 표준은 예수님과 사도들(선지자)과 성경이고, 기둥은 터 위에 세운 집을 뜻한즉 교회가 진리 중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터이시니까(고전 3:11) 예수님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물을 살피시되 “예수님도 저렇게 하셨을까? 과연 저것이 성경의 뜻인가?”하는 것을 중요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말씀은 은혜의 방편이즉 교회가 말씀 사역을 잘 나타내서 시 23편의 말씀처럼 성도들(양)에게 은혜를 받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교회의 성격은 훈련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연단의 도장이지요. 이 사실이 성경 어디에 근거하는가 하면 행 7:38의 “광야 교회”란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 생활은 연단 성격을 띤 교회의 모형입니다. 거기서 불신앙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또 한 가지 교회가 도장이 되는 이유는 “곡식 밭에 가라지가 용납되는 말씀”(마 13:24~30)이 있는데 그 가라지를 뽑지 않게 하신 이유는 곡식이 피해를 받지 않으면서 가라지와 경쟁하여 면역성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문제 있는 성도에 대한 주의가 각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상의 교회의 성격 다섯 가지를 이해하시면 큰 도움이 되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85과 반석 위에 세운 집 (마 7:24~25, 16:18) 목록으로


저는 교회 개혁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했습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도 맥락이 같습니다. 아무리 자주해도 넉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기초에 신앙과 교회를 세워야만 든든한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이 든든히 서 있지 않으냐? 하실지 모르나 예수님 기초에서 변질되어 가고 있고 뿐만 아니라 갈등하는 속사정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 취약점이 있고, 또 어떤 면에 보완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가?할 때

1. 목회자의 자격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제가 자격이 있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40년 이상 목회 경험을 해본즉 바른 목회를 하려면 상당한 지식과 도덕성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연단의 기간도 상당 기간 있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도덕성도 중요하고 성경 실력도 중요하며 정통적 사상과 건전성도 중요하고, 상황 따라 처리하는 지혜도 있어야 성도를 옳게 지도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역자들의 신분을 점검할 때 기본 실력과 경력을 봅니다만 기본 실력이나 경력의 판도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3000원짜리 옷과 30만원짜리 옷이 비슷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평신도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역자의 실력과 경력을 평가함에 있어서 예민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성직자를 양성하는 기관에서 더 많은 계획을 보충하여 승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물욕과 명예욕과 현세적 향락욕과 세속적 경향에 대하여 경계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2. 교역자의 입지 관계가 든든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현실 교회 제도에서 당회원 장로들이 목사의 부도덕성을 은연중 감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정치 5장 4조) 이로 인하여 교역자가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을 의식하여 통제받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목회를 생계 수단으로 할 때는 상당한 부자유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교회 안에서 물권을 많이 가진 사람을 의식하게 되고, 또 그 상대자는 자신이 교회 운영의 주인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역자의 입지는 물질을 초월한 상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저도 일곱 교회 이상을 전임하면서 체험한 일이고, 또 초빙 받을 때마다 앞장서서 초빙한 중직자들에 대하여 그 공로를 신세로 여기게 되니 그에게 바른 말을 다 못하면서 부자유를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정치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경향이 없어야 좋은 것입니다. 성직자는 교회에서 누구에게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나 바울사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니까 자기 십자가 지는 일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어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든든하려면 좋은 교역자가 든든히 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3.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이 중심이란 목표와 같은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교회가 있으며 무엇을 표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 중심, 사도 중심, 성경 중심, 사랑 중심, 실천 중심입니다. 다른 것은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른 것이란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같은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한 것이나 무당을 죽이라”하신 것은(신 7:3, 출 22:18) 이방인의 문화와 풍속을 본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엄숙할지언정 세상의 극장이나 회사 같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재정만 넉넉해지면 성공한 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정이 포장이라면 믿음은 알맹이인데 포장 좋다고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믿음의 알맹이만 좋아하십니다(히 11:6).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예수님이 부자되시겠지만 예수님은 부자를 떠나서 가난하게 되셨으니(고후 8:9) 그 재정이 무슨 큰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교회가 재정을 선호한다면 그것이 회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돈을 멀리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구제하는 일 외에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교회가 도움을 받으려 하거나 사회인에게 청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개인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하고, 성도 중에 장애로 인하여 어려운 분들은 적당하게 돕는 제도가 있어야 하며 성도의 명분을 가진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 받은 성도는 “꾸어줄지라도 꾸이지는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신 28:12). 이것은 가난한 성도를 주눅들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고 성도가 복을 받아 자립을 해야 하며 그런 성도의 규합이 있을 때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세우고 설립 예배를 드렸는데 6개월 후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 이유를 물은즉 경상비 보조를 하던 성도가 부도났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물질에 좌우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5. 마지막으로 교회는 반석 위에 든든히 서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를 잘 해야 합니다(마 5:37). 성도를 가르칠 때 또는 지도자들 앞에서도 바른말을 할수 있을 때 또 사회나 정치가들 앞에서 말할 때에도 성경적이고 양심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름하기 어려울 때는 공평한 입장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석은 곧 예수님 중심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제86과 덕을 세우는 교인 (고전 14:12) 목록으로


“덕을 세우는 교인”이란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덕을 세우는 교인은 목회자가 바라는 교인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하셨는데 성도가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신령한 생활을 힘쓰면 하나님이 먼저 기뻐하시고 이웃 성도들에게도 좋은 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또 본문에 보시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도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덕을 세운다는 뜻인데 그렇게 하면 이웃 교인들이 먼저 기뻐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교인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성숙한 믿음, 어른 같은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린이 같은 초신자가 없을 수 없겠지만 속히 성숙하시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예배에 성실하고 예배 시간을 잘 지키는 성도입니다. 교회에서 한 주간에 공예배를 세 번 드리면 한 번 참석하는 교인, 두 번 참석하는 교인, 세 번 참석하는 교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때에 시간을 잘 지켜야 하고, 적어도 90%의 성도가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정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설교를 세 시간 들었는데 어떤 이는 한 시간 들었다면 그 신앙의 지식을 어떻게 조화시킵니까? 이때에 문서라도 주어서 균등하게 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설교와 성경 공부를 교과서처럼 만들어서 예배에 불참하여 듣지 못했어도(학교 강의식으로) 터득하는 기회를 주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2. 예배에 경성하는 교인입니다. 예배 인도자가 청중을 내려다보았을 때 졸거나 옆 사람과 수군거리는 성도를 보았다면 퍽 민망하겠지요. 졸 때는 말씀을 경청할 수 없은즉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의 결과는 다 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경성이란 경청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 그 자체가 하나님 아는 지식을 뜻하기 때문에 예배에 큰 의미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 지식이 없으면 목사님 설교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설교자가 항상 초보만 가르칠 수도 없지요. 그래서 성도들은 속히 신앙의 기초 지식을 터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성경을 배우려고 하는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다. 목사님 설교 1년, 10년을 들어도 “목사님 내가 성경을 읽다가 이런 의문이 생겼어요”하고 묻는 교인이 거의 없는 것은 참 민망한 일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잘 아셔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 공부에 무관심해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어떤 성도가 “목사님 성경에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행 15:20, 옛날에는 시골에서 개를 목졸라 죽였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가이사라 빌립보에 가셨을까요?”(마 16:13) 하였으니 그렇게라도 물어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순수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교인의 모범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배운 사람도 착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배워야지요. 어떤 교회의 간판을 보면 “베델 교회”가 있는데 이 뜻이 “하나님의 집”으로 창 28:19에 근거한 것이면 “벧엘”이라고 쓰는 것이 바른 뜻입니다. “벧”은 집이고, “엘”은 엘로힘(하나님)의 첫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에 한문 성경을 보고 “애급”이라고 읽었는데 한글 성경에는 “애굽”으로 되어 있지요. 그런데 영어로는 “에집트”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 원문을 찾아보니 “아이굽토스”이고, 또 히브리 원문은 “미스라임”입니다. 그래서 늘 재점검을 해야 합니다. 행 20:17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밀레도에 가신 일이 있어서 “밀레도”가 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섬이 아닌 항구이고, 원 이름은 “밀레토스”입니다. 또 히 13:17을 보시면 “교역자에게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 후에 자세히 보니까 회개가 아니고 회계(돈 갚는 것)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배워도 구멍이 뚫리니까 배우고 또 재점검하시는 교인이 되셔야 합니다.

4. 허탕한데 뜻을 두지 않는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다. 시 24:4에서 “허탄한데 뜻을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무엇이 허탄한 것이냐?하면 지나친 기복 신앙이 허탄한 것이고, 명예욕 같은 것이 허탄한 것이며 사랑에 위배되는 이기주의가 허탄한 것이고, 또 너무 육신적이고, 현세주의적이면 그것도 허탄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의 것을 꿈꾸셔야 신령하고 땅엣 것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속된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인즉 신령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으면 다른 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인즉 우선 평안하고 조용하며 모든 성도가 그를 존경할 것입니다. 만일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퍽 불만스럽고 평안치 않은 세계가 될 것입니다.

5. 건전한 인식을 가지셔야 하는데

1) 목사는 모든 것을 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아시고,

2) “교인은 누구이건 나의 사랑의 대상이다”라고 아시며

3) “나는 축복을 받되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교역자를 들볶지 않게 됩니다. 교역자가 부족하여 교회 부흥이 안 된다는 인식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교인들에 대하여는 “내가 당신에게 사랑의 빚진 자요”하고 자세를 낮출 것입니다. 또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니까 사람을 의존하지 않게 되고 복을 받아야 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좋은 생각입니다.

6. 모든 교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친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가정에서는 행세를 안 합니다. 노인은 부모처럼 아랫사람은 동생처럼 모든 이를 친척처럼 대하는 성도가 되신다면 그 교회는 재미있는 안식처가 되고 교역자는 성경 연구 외에는 바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제87과 교회의 사명과 생활 (살전 1: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의 사명과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개인 생활, 가정 생활, 사회 생활이 있는데 이 네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교회 생활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도가 교회 생활을 잘 하시려면 교회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아셔야 합니다. 교회 지식에는 역사적 지식(출애굽한 광야 교회, 구약 교회, 예수님 시대의 교회, 사도 시대인 초대 교회의 역사), 본질적 지식(교회의 성격을 공부하는 것), 사명적 지식(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 같은 것) 등이 있어야 합니다(83과 참고). 그런데 이 시간에는 그 내용들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실제적 생활 문제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성도의 교회 생활을 말씀드림에 있어서 본문을 읽게 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범이 본문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범은 여러분들이 수차 들으신 줄 압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나타내므로 바울사도가 크게 감사하였다는 내용입니다.

1)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과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의 역사를 뜻하고,

2) 사랑의 수고는 성도와 이웃에 대한 수고로운 사랑 실천을 의미하며

3) 소망의 인내란 교회 생활 중에서 나타나는 각종 부조리한 일들에 대하여 잘 극복하는 생활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가 이 세 가지 사명만 잘 이행하면 그 위상과 성도의 생활이 원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현실 교회가 원만하거나 만족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부족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1) 교회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베드로는 핍박을 받는 중에도 “기탄없이 증거하면서.....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13, 20) 하였고, 행 19:20에서는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고 그로 인하여 믿는 자도 많아졌다”(행 17:11~12) 하셨으니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믿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의 수고는 성도 주위에 핍절한 자가 없도록 돌보는 것입니다. 행 4:34에 보시면 “그 중에 핍절한 자가 없으니 이는 있는 자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에 구제하는 일을 대표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성도로서 많이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이것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균등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고, 없는 자의 핍절함을 해결해주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가난한 성도가 느끼는 핍절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일하는 복음 사역자들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딤전 6: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주리는 자에게 의복은 추위에 떠는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잠잘 곳이 없으면 춥겠고, 또 병들면 배고픈 것보다 더 고생이 되겠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구제를 받고자 할 때 육체 보존(식, 의, 질병) 이상으로 도움 받으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들의 신학교 등록금을 보조해 달라”고 호소해온 일이 있고, 또 어떤 목사님은 “막내딸 결혼비용을 보조해 달라”는 호소문을 보내온 일이 있는데 행 20:35을 보시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시고, 눅 6:38에서 “주는 자에게 흔들어 넘치도록 더 주신다” 하셨으니까 성도의 신분이면 선교 목적이 아닌 육신 생활에 대하여 가능한한 도움을 피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을 위한 봉사와 수고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 생활 중에 나타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니까 소망 중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핍박을 견디는 것이 소망적 인내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핍박은 없지만 내부의 사소한 문제로 강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생활에 재미가 없는데도 떠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원인 분석을 잘 하여 극복하는 방법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4. 성도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만족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그 원인은 목회자에게도 있고 성도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잘 인내하며 취약점을 보완해야 좋습니다. 목사도 신이 아닌 이상 부족이 있고, 교인들은 그 신앙 수준으로 볼 때 유치원생으로부터 대학생까지 있으니 이들이 교회 생활에 적응하는 상태가 다 다른즉 원만하게 포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독재를 하다가 10년 싸우고 갈라진 예가 있고, 또 어떤 교회는 목사가 전자게임과 사우나탕에 가서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 밑에 있기 싫다 하여 나온 예가 있으며 또 어떤 교인은 목사님이 미국 가서 박사가 되어 왔는데 예배당 건축이 미완성된 상태에서 “나는 속히 이 예배당을 완공한 후 박사 가운을 입고 이 앞에서 혼인 주례를 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가 “저런 목사 밑에서 무슨 은혜를 받겠느냐?”하여 교회를 옮겼다는 이도 보았습니다. 반대로 교인들 세계에서도 목사님에 대하여 무조건 복종하고 봉사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또 무엇이 맞지 않거나 욕구 충족이 부족할 때 기쁨과 만족을 잃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괴팍스런 성도는 목사의 관심을 끌려고 애를 쓰는가 하면 옆사람 보다 자신이 앞서야 하는 경쟁 의식(명예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불만을 가진 성도에게 “그렇게 목사가 싫으면 교회를 옮기면 되지 않느냐?”고 물은즉(확실한 답변은 안 하지만) 그 교회를 전통적으로 섬겨온 공로와 명예적 문제 때문에 모교회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명예욕이나 공로 의식을 버리고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만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성도가 교회 생활 중에서 만족을 느껴야 하는 소재는 세 가지입니다.

1) 성도간의 사랑의 친교입니다. 이 사랑의 친교는 많은 약점을 덮고 소망의 인내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하신 것처럼 성도의 세계가 늘 추석 명절같은 분위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운 사람과 싫은 사람이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니까 껄끄러운 대상과도 화해하고 미움을 버린 후 친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미운 대상을 상대할 때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보낸 천사”로 믿고 행하면 좋습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나타난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야곱이 그를 천사로 알지 못했을 때는 씨름 대항을 했지만 알았을 때는 그 앞에 엎드려 축복을 구한 것처럼 성도는 모든 이웃을 하나님이 나의 사랑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천사로 믿으셔서 사랑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신다면 곁에 어떤 사람이 있든지(혹 외식자나 이단자가 있더라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2) 두 번째 만족을 느껴야 하는 은혜는 설교에 대한 기대입니다. 목사가 설교 잘 하여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면 좋지요. 그런데 설교를 잘 하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TV에서 유명한 이의 설교는 다 나오니까요. 그리고 문서를 통한 설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은 설교 탓할 교인이 없을 것이란 것입니다. 그 대신 지루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구의 총회장하신 어떤 목사님은 미국 교회를 다녀오신 후에 40분 하던 설교를 15분으로 줄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7분 설교를 13집째 기록하였습니다. 잘 하는 설교는 길게 해도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요점을 떠난 긴 설교가 교인을 지루하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자주 TV 설교를 보는데 대부분 내가 기록해 놓은 내용이기 때문에 들을 것만 듣고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일 교회 성도들은 목사가 설교 잘 하고 못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로 알기 때문이고, 또 성경을 스스로 공부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말씀 공급 받는 은혜를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쌀 찧는 정미 기계가 있더군요.

3) 교회 조직과 관련된 직분 이행입니다. 교회에서 받는 직분을 명예적으로 이용하면 안 되지요. 그 대신 받은 직분에 따라 봉사하고 일하는 취미는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분을 연합적으로 이행하려니까 서로 뜻이 맞지 않고 질서 없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만족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수리부가 있지요. 방을 하나 만들자 해 놓고 수리부장 신장로(건축업자)가 건축업자 함장로에게 맡겼는데 150만원 들었다는 것입니다. 신장로 생각은 70만원 정도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일 맡은 사람이 정당한 영수증을 제시할 때는 “수고했다”하고 끝을 내야 합니다. 당회나 제직회나 접대부나 봉사부나 의논해서 시행하고 중간에 의논하지 못한 부분이 나타날 때는 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시행한 후 다음 행사 때는 그런 사항까지 잘 챙기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 사명이나 조직 운영에 대하여 긴 말씀 드릴 수 없지만 모든 부조리를 겸손과 인내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아셔서 그 목적에 따라 성도의 사명과 생활을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아셔야 하겠지요. 그 목적

1) 첫째는 진리의 기둥 되고 터 되는 목적입니다. 교회가 이 진리의 목적을 잘 감당하려면 성경 원문 보존을 잘 하고, 번역을 잘 한 후 바른 해석을 하여 가르치고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고 성도는 열심히 배워야 하며 또 만방에 증거 해야 합니다(전도기관은 먼저 배우고 전해야 합니다. 신학 교육도 여기에 속하는 것임).

2) 성도의 화목한 친교입니다. 시 133:1에 보시면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신 것처럼 교회는 혹 가시 같은 사람이 있어도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곡식밭에 있는 가라지를 곡식이 손해되지 않기 위하여 그대로 두라”(마 13:25~30)하신 말씀과 “형제가 화목한 상태에서 제물을 드리라”(마 5:23)하신 말씀을 유의하실 때 일단 교회에 모인 성도는 화목과 사랑을 전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공예배의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문안 인사드리는 것입니다. 성도가 혼자 있어도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처럼 여럿이 모이면 더욱 잘 드려야 하겠지요. 예배는 의식에 속한 것만은 아니지만 (생활도 포함됨) 평소의 성실한 생활과 함께 잘 드려야 하니까 성실하게 드려야 하고,

4) 사랑 실천이 목적이요, 사명입니다.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려니까 전도해야 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루 살펴야 하니까 구제 봉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사명과 생활은 진리 사명, 친교 사명, 공예배 사명, 사랑 실천의 사명이 있는데 성도의 교회 생활로서 또 유의하셔야 할 것은 성경을 배우는 일(신학교처럼)과 사랑 실천에 대하여 연단 받는 일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과 예배드리는 일과 사랑 실천의 연단은 성도가 혼자 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교육과 전도와 구제는 합력하여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잘 융합할 수 있어야 한즉 융화를 잘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연합적으로 하는 일이 융화가 잘 안 될 때는 성도 각자에게 책임을 맡기거나 뜻 맞는 사람들끼리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독자적 개인 생활보다 퍽 힘듭니다. 서로 존중하고 뜻을 맞추며 질서를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생활의 원만한 적응을 할 때는 그만큼 성숙된 신앙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88과 장로에 대한 지식 (행 14:23~15:2) 목록으로


장로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아십니까? 제 설명을 들으시면 많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딤전 5:17을 보시면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와 목사가 대립하고 덕을 못 세우는 장로도 있어서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모든 직분자들이 직분 역할을 잘못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거나 그 직분을 있게 한(공동의회로 세운) 교인들에게 덕을 못 세운다고 할 때는 언제든지 그 부조리를 해소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학원에서 공부한 아이의 학원비를 여러 달 안 주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못 주는 자나 못 받는 자가 다 마음 아플 것입니다. 이것은 제도를 잘못 시행한 때문입니다. 선금만 받고 가리켰으면 될 것을. 이와 같이 교회의 직분도 잘 제도화시켜서 자격 있게 행하면 누릴 수 있고 책임에 못 미치면 그만두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초신자가 교회에 오면 “장로는 예배 때에 대표 기도하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예배드릴 때마다 장로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예배 때는 장로가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장로가 있어야 하는가 보다”하다가 목사님과 심방에 동행한 것을 보고는 심방도 같이 다녀야 하는 직임인 줄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장로는 구약 시대에 애굽과 미디안 나라에도 있었고(창 50:7, 민 22:4), 선민 국가에도 있었는데 고을마다 성읍마다 다 있었습니다. 그들을 “백성의 장로들이라” 하였는데(출 19:7) 그 지역 또는 그 민족의 원로들로서 백성들의 대표자를 의미하고 송사가 있을 때는 재판이나 증인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룻 4:2). 한 동리의 어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의 교회의 장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5:3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최초 교회에서 사도들이 장로와 합력하여 교회의 일을 협력한 것을 뜻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일을 함께 하려면 신앙과 지식과 건덕면에서 상당한 자격자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가 장로 있는 교회의 원조가 되다 보니까 다른 교회들도 장로의 필요를 느껴서 바울이 2차 전도로 세워진 교회들에서도 장로를 세웠다는 말씀이 골 14:23의 내용입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를 하고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였다”하신 것을 보면 신중히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영광되기를 바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러면 장로를 왜 세웠을까요? 사도(가르치는 직)는 적고 교인과 교회가 늘어나니까 감독하고 다스릴 사람이 없으며 또 예수님의 복음을 확장시켜 나감에 있어서 믿음 있는 사람들을 앞장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은 일종의 통솔인데 통솔하는 지도력을 발휘하다 보면 잘못하는 사람을 책망하고 재판해야 할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에 책망이나 재판은 여러 사람이 할수록 공의롭겠지요. 그리고 전도의 효력이나 영광을 목적함에 있어서 장로가 모범적 신앙을 갖고 앞장서 준다면 모본이 되어서 교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단체를 지도자인 목회자와 합력하여 다스리고 감독하며 책망도 하고 재판도 하며 모든 일에 본을 보이고 목회자를 도우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좋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래서 교단이 장로 세우는 법과 자격과 직무 조항들을 만들어서 장로를 세우게 한 것인데 이 일을 시행하다 보면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장로교 헌법에서 목사와 장로의 치리권을 꼭같이 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목사보다 장로수가 많지요. 이때에 목회자의 입장과 교인의 입장에 차이가 생기면 장로는 교인의 대표자이니까 자연히 교인편에 서게 되고 사소한 일이라도 장로들이 단결을 하면 목사가 뜻을 이룰 수 없는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목사가 법을 무시하고 장로를 강압하면 독재 정치가 되고 법대로 시행하면 민주 정치가 되지만 목회자 소신대로 못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가 여러 명이라도 두 세 사람이 친한 경우는 있지만 여러 장로가 다 단결하는 경우는 없는데 반하여 어떤 교회는 장로들끼리 회를 만들어 단결하고 목사의 뜻을 꺾으려드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때에 목사는 진실을 말하고 장로 중 한 사람은 그 진실을 모른다고 발뺌을 하므로 목사와 그 장로가 대립이 되었다면 진실을 아는 다른 장로가 입증을 하여 “목사의 주장이 옳다”고 해 주어야 하는데 장로들끼리의 화목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진실 입증에 나서지 않거나 목사가 치리하는 입장에서 불법을 막으려고 애를 써도 거기에 협력하지 않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 이런 일은 장로가 있음으로 인하여 교회를 더 어렵게 하는 실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도가 조용히 덕을 세우고 명예욕 없이 장로가 된 후 모범을 보이면서 겸손하게 목사와 의논하고 성도들에게 군림하지 않으면서 직무를 감당하면 크게 덕이 되고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직분을 명예로 알거나 직분자들끼리 대결하거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들과 대항하고 또 목사와 화합하지 못하거나 모범을 나타내지 못 하거나 교인들의 신임 투표를 기분 나쁘게 여기거나 덕을 못 세우는 줄 알면서도 물러나려 하지 않는다면 교회나 목회자에게 심각한 누를 끼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직분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많이 연구하여 더 완전한 정치 규정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 모두 성도의 지지와 칭찬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들 앞에 서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부담 없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89과 성도의 책임과 교회 (딤전 3:15) 목록으로


교회는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세우신 단체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행 20:28, 엡 1:23).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만큼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 “영광스럽다”는 뜻은 흠과 티가 없는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5:27). 그러면 현실 교회가 순결한가?할 때 흠과 티를 모르거나 지적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흠을 지적할 때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못하고 두드러진 것만 지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순결하도록 개혁해야 되는 일은 성도와 지도자가 다 순결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는 신앙의 격차가 많기 때문에 고루 순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경우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순결은 교회의 지도층이 순결을 표방하는 길로 안내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둘 다 구렁에 빠지겠지요. 그러니까 지도층만큼은 소경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무관심하니까 문제이지요. 따라서 전적 순결을 도모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도 방침을 순결주의로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 생활 속에 명예욕이란 있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예를 부추기는 일이나 명예를 넘겨다보기 쉬운 제도 같은 것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현실 교회가 개혁하고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100년 전통을 뒤집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넣는 것처럼 뜻 있는 분들이 바르게 시작하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공교회 시무기간이 1년 반 남았는데 그 후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성도의 책임을 다하는 교회”를 구성하고 그것을 제도화 되도록 해보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택한 백성은 적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또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입장에서(눅 12:32, 13:24, 살후 3:2) 교회가 물량주의로 나가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물량주의를 획책하기 위하여 수단 쓰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진실 찾기가 어렵지만 교회는 진실해야 합니다. 신앙은 말씀만 먹고 자라야 하는데 현실 교회가 말씀 아닌 사회적 문화를 먹고사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책임을 어떻게 다하여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까?

1.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되고 백성된 인식을 뚜렷이 갖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뚜렷한 인식이란 것이 성경대로 살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을 본 받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세례 줄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2. 성도가 교회에 올 때 자기 힘으로 오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차로 모시러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예삿일이 아닙니다. “나 교회에 갈 테니까 예수님 차 좀 보내주십시오” 했다면 큰 무례이지요. 그런데도 교회가 인간의 편의와 숫자의 비중을 위하여 차를 돌리지 않습니까?

3. 예배당 사치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예배당 보다 가난한 사람 구제를 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건물을 사람 끄는 방편이나 잘 사는 문화를 선전하는 재료로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치한 건물을 원하시는 것처럼 가르쳐서도 안 되고, 또 성물이나 성의를 은혜의 방편으로 착각하도록 보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장소에서 예배드려도 되는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나왔을 때 다른 사람이 헌금하여 지어 놓은 예배당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의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올 때 자기 힘으로 나오고 자기 먹을 것을 자신이 준비하고 자기가 앉아 예배드릴 처소도 타인을 의존하거나 신세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립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자세를 갖도록 씨를 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에 입각한 것입니다(행 20:35, 마 16:24). 새로 시작하는 교회에서 앉을 자리를 각자가 부담하면 예배당을 짓는 수고나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관인즉 누구를 막론하고 인기, 명예의 유혹을 피하게 하여야 할 것이며

6. 세속적 유행을 교회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예배 의식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교회의 예배 의식은 찬송, 기도, 말씀, 권징, 회개, 헌금, 성례로 족할 것입니다. 이런 의식에서 세속적 경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인간 명예나 물력을 앞세우는 선전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7. 교회가 고용인을 쓸 때 (부득이 하여 쓰지만) 그 고용 조건을 부작용이 안 나타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와 교역자 간에 또는 교회와 다른 용역자 간에 사랑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8. 설교는 많은데 말씀 밝히는 일(눅 24:27, 빌 2:16)이 적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의 성경 지식을 시험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9. 교회를 인간적 , 사회적 이권을 도모하는 기관으로 알거나 이용하지 말아야 하며(딤전 6:5)

10. 세속적 인기나 물력을 앞세워 성경과 십자가의 권위를 가리우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1.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도가 교회에서 할 책임이 무엇인가?할 때 우선 경건에 주력하고 다음에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에 입각한 봉사와 전도를 하고 진실의 책임과 자립의 책임을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11시에 노회에서 재정처리를 한 일에 대하여 감사를 하러 가게 되는데 이런 물질 정책이 되도록이면 축소되고 헌금 하는 성도 자신이 직접 선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시도해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90과 민감한 일들 (고전 11:17~22, 27~34)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성도의 모임이란 행사가 사랑의 교제와 성찬 예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임 행사가 다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런 모임은 분쟁과 편당이 있으니 칭찬할 수 없고 유익하지 않은 모임이며 그런 상태에서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7~20절). 이 모임은 성찬식이 틀림없으나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먼저 준비한 사람들끼리 먹은즉 어떤 이는 취하고 어떤 이는 시장하게 되었으니 이런 일은 빈약한 자를 부끄럽게 한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행위로서 칭찬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성도의 세계에 사랑과 배려가 만족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의 관계가 순조롭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를 살피지 않고 성찬을 받으면 역시 “주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는 죄(거룩을 훼손함, 마 7:6)를 범한다” 하시고, 30~31절에서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은즉 우리가 살피고 판단 받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계 2:20~22을 보시면 “우상 숭배하는 이세벨의 죄를 지적하신 후에 그 죄를 음행죄로 비유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뜻은 병을 주신다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떤 병든 자나 죽은 자가 다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지적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족집게로 뽑듯이 지적할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지적하는 일은 할 수 있고, 또 회개는 아무리 많이 해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7:10). 저는 다른 병자를 지적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반성하기 위하여 묵상한 것입니다. 본문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다” 하셨는데 저도 혈압 문제, 소화 문제, 관절 문제, 담 결리는 일, 시력, 청력 등 약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10kg을 들 수 없으니 이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상고하시는 성도님들도 스스로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살피는 일에 민감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민감하게 통치하십니다. “머리털을 다 헤아리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님은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고(렘 17:10) 생각하는 것과 움직이는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시 139:1~4)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또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를 아주 민감하게 관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기분 나쁜 대화를 하고 나면 집안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도 그렇게 민감하다는 것을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위장병이 민감하다는 것을 체험하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단체에 붙여 넘어가는 것처럼 하려 하십니까? 개인적으로 민감하게 하셔야 합니다. 성찬 예식은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와 성찬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분별 없어도 괜찮고 성찬 때만 회개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예배는 의식만이 아니고 전체의 생활이 다 예배인데 성도는 하나님의 낯이나 보좌를 피하여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무엇에 민감하여야 합니까?

1. 18절에서 “분쟁과 대립에 있지 않은가?”를 살펴서 여기에 가담하지 않아야 하고,

2. 성도의 세계에 편당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서 편당에도 치우치지 말고 공평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흔히 “팔이 들이 굽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편당을 뜻하는 것입니다. 혹 차이를 두어도 명분이 뚜렷하면 됩니다.

3. 싸움이나 편당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사랑)가 없으면 성찬 예식이나 예배가 의미 없는 것인즉 언제나 회개하고 화목하는 마음을 앞세워 예배에 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맞지 않을 때는 진리 문제가 아니면 양보하고 진리 문제이면 갈라서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다 미워하고 원수로 생각한다면 이 지구에서 어찌 살겠습니까? 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시고 사랑하는 마음만 갖는 것이 성도의 도리일 것입니다.

4. 교회 안에서 빈약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칭찬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런 일이 있어서 교회 안에 배부른 사람과 시장한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인즉 그것도 민감하게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막 14:3). 만일 예수님이 문둥이를 멀리 하셨다면 그는 소자로서 실족당함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일에도 민감해야 되고,

5. “유익이 못 되거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라”(17, 34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모였다 헤어질 때는 “좋은 모임이었다”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중요한 요소가 사랑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성 혼자 있는 집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면 그것이 판단 받을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에서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 받을 일이 없도록 민감하게 주의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거나 인권 또는 사랑에 미흡한 행동을 취할 때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있도록 징계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1과 미워하는 죄와 벌 (마 5:21~26) 목록으로


저는 평소에 미워하는 죄나 교만한 죄를 엄격하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믿음 생활의 경험을 쌓으면서 그것을 두렵게 알게 되었고, 또 미워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못한 시절이 있었지만 역시 경험을 쌓으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어 감을 체험한 것입니다. 성도나 성직자에게 “미움의 대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 의견 갈등이나 일시적 인격 모독 등으로 약간 있을 수 있는 일일 뿐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성도에게는 일시 미운자이건 시기의 대상이건 원수이건 누구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하셨으니 어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미운 대상이나 피해 주는 대상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지금 말씀드린 마 5:44(원수 사랑과 기도)과 또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다”(롬 12:9 ,신 32:35)는 말씀에 있다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드러나는 큰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징계)를 맞으면서도 “내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인가?”하고 회개할 것이 없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마음의 완악과 미움과 언어의 교만과 언어의 폭력까지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시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절도나 살인 강도의 죄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취지는 마음의 완고함(회개하지 않는 것)이나 누구를 미워하고 언어로 폭력하는 것도 큰 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21~22절에서 “살인자나 형제에게 노한 자가 꼭같이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자라(무시하는 것)한 자도 지옥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시하는 죄가 욕하는 죄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무시하기 쉽고 자신은 똑똑하여 위안 받기 쉬운데 그것도 퍽 위험한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전 11:17~31을 보시면 고린도 교회의 성찬 예식을 꾸중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꾸중받은 죄는 가난한 형제가 성찬용 식사를 준비해오지 못했는데 준비한 자들이 혼자 먹으므로 준비 못한 가난한 형제들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편에서 성찬을 이행했을 때(사람 무시한 죄를 회개 안함)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30절) 하셨으니 병 중에 있는 성도들의 상당부분이 교만죄, 무시하는 죄, 누구를 미워하는 죄에 기인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율법에는 살인자가 심판을 받는다”(출 20:13, 신 5:17) 하셨지만 예수님은 욕하고 무시하는 자도 심판을 받고 또 마 18:6에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였을 때는(소자를 무시한 죄)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났다” 하셨으니 그 죄가 사형감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미워하는 죄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퍽 유감인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죄와 같은즉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이나 생명의 위험으로 징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시는 분이심, 출 21:24). 그러니까 살인에 가까운 범죄 즉 미워하는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는 죽음 또는 죽음에 가까운 질병으로 징계하실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의식하면서 미리 예방하는 성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마 6:11~12)하신 말씀에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연계된 것을 유의하셔야 하고, 또 막 11:25에서는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시리라” 하셨고, 딛 3:3~4에서는 “우리도 전에는 각색 정욕에 빠져.....피차 종노릇하고 투기하며....서로 미워하였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실 때에 우리의 의와 행위를 보시지 않고 긍휼에 근거하여 새롭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일 2:9~11을 찾아보시고 확인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성도가 죄 짓는 사람이나 자기에게 피해주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자기 성화의 목표로 삼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변화에 발전이 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며 자기의 길이 형통할 것입니다. 이때에 범죄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실예로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어떤 사이입니까? 설명 안 드려도 다 아시지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계속 너그러웠고 사울은 끝내 다윗이 죽기를 바랐는데 결국 다윗은 위경에서도 보호를 받으며 인기가 올라가서 왕이 되었고, 사울은 죽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나서서 사울을 미워하고 대항하였다면 다윗은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의 둘째 딸이 언니의 가정 불화에 대하여 형부를 미워하고 화해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큰 딸 내외가 한 교회에 나오지 못했고 저는 그들이 꼭같은 결함이 있다고 알면서도 완고한 사위가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 후 둘째 딸이 결혼하여 첫 아기를 유산했을 때 저는 그것이 “형부를 미워한 죄 값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우치는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 후에 큰 딸은 이혼하였고, 그 가정이 서로 갈등할 때 셋째 딸도 둘째 딸처럼 형부를 안 보려 했지요. 몇 일 전에 임신 중에 있는 셋째 딸이 태아의 위험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저는 그때도 심방을 가서 “사람 미워한 죄를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속으로는 변명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화해를 안 하려 하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는 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미운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제92과 교회의 암초 (유 1:9~13) 목록으로


유다서를 통하여 “교회의 암초”에 대한 것을 살피려고 합니다.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예수님의 종된 입장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전체의 뜻을 살피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활동하는 문제들”을 열거하여 외식과 이단과 불의를 경계할 것을 교훈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하심과 지키심을 받는 자라” 하였고, 3절에서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하시므로 말씀 중심을 강조하였으며 11절에서 “가인의 길,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을 지적하시면서 이런 일들은 “애찬의 암초요 물 없는 구름이며 거품만 뿜고 물러가는 거친 물결 같은 것으로 피해를 주고 영원한 심판에 들어갈 것들이라”(12~13절)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가인의 길이나 발람의 꾀임이나 고라의 패역에 가담하거나 피해를 당하지 않아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규제를 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이단이다, 저것은 불건전하다”고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활동 주위에는 얼마든지 유혹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점포에 가서 물건을 흥정하다가 안 사고 나오려하면 부담스러운 것처럼 잘못된 일에 접근하다가 나오는 일은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가인의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시면 가인은 세 번째로 출현한 인간이고, 최초에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인데 그 당시에는 자기 가족 몇 사람 밖에 없었지요. 그가 응답하실 수 없는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그 원인이 제물(피의 제사 아닌 것)에만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인즉 요즈음으로 말하면 믿음 없이 외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선택자와 비선택자로 나누실 때 가인이 최초의 비선택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의 대표적인 죄는 신앙의 외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지배하시지 않고 또 예수님이 자기 속에서 왕노릇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모든 신앙 행위를 나타내보입니다. 현실 교회 안에 이런 교인들도 있겠지요. 그 다음에는 가인이 형제 사랑을 안 한데서 시기와 미움과 살인이 저질러 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사람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요일 4:20). 그런데 그가 하나뿐인 동생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시기와 미움은 곧 살인과 같은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 5:22, 18:6). 세 번째로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 하였으니 여기에서 거짓말과 책임 회피와 회개하지 않는 완악을 드러낸 것입니다. 시기, 미움, 살인, 거짓말, 책임 회피, 완악 이것이 바로 불신앙의 산물인즉 그런 싹이 성도들에게 나타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인은 형식적 신앙인입니다. 그가 제물을 드린 것은 복 받기 위하여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죄사함과 특별 은총은 주시지 않았고, 일반 은총에 힘입어 죽지 않고 살도록 용납해 주신 것입니다.

2. 발람의 어그러진 길입니다. 발람의 기사는 민수기 22장~25:9까지 기록되었는데(제가 민수기 강론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음) 선민이 발람에 대하여 잘못한 것은 그의 수단에 놀아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발람은 계속 이방족인 모압족과 관계를 맺고 모압족 앞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셨기 때문에 못한 것뿐인데 마지막 저주하려던 행사에서 싯딤에 있던 선민의 장정들이 저주 행사에 참여한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하므로 범죄하여 24,000명이나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발람은 이방족이 숭상하는 종교 사업자였습니다. 모압왕 발락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이 섬기는 신의 힘으로(다신주의자임) “저주해달라”한즉 많은 사례비를 받고 어용선지자 또는 종교 사업자가 되어 저주 행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선민을 위하여 그의 저주 기도를 초자연적으로 막으셨지만 그는 세 번이나 끈질기게 도전하였는데 거기까지는 이방인의 행사일 뿐이지요. 그러면 선민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의 음행성 있는 제사에 관심을 두고 가까이 나가고 결국은 그 제사에 가담하여 그 곳에 있는 여자들과 음행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안 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람은 종교 사업자이고, 어용 종교인인즉 그것도 알았어야 하고, 더 나가서는 이방 종교 제사 행위에 접근 아함은 물론 여인들이 옷 벗고 춤추는데서 도망하여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 못하고 정욕에 끌려들어가는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어야 합니다.

3. 고라의 패역입니다. 고라는 레위 자손인데 “왜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만 들어 쓰셨겠느냐?”하여 하나님이 사역자 쓰신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고 싶어서 자기들 수단으로 성직자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이끌려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 되라는 법이 있느냐?”(민수기 16장)하고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거스린 것 때문에 땅이 갈라져 죽고 염병에 죽은 사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직자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절차대로 받고 합법하게 시무하는 경우에는 거역하거나 도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직자에게 불합리성이 나타날 때는 상급 기관에 제소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규모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대항하거나 당을 지어 괴롭히는 사례가 있으니 이런 것은 크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가인의 외식, 발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 등에 함부로 가담될까 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3과 애찬의 암초 (유 1:11~13) 목록으로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그 시대의 교회의 암초를 애찬의 암초로 표현하시면서 신랄하게 지적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읽었습니다. “애찬”의 뜻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잔치(성찬)하는 행사입니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부정적 요소들을 가리켜서 “애찬의 암초”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애찬의 암초는 곧 교회의 암초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찬을 나누시는데 그 곳에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한 가룟 다가 앉아 있었으니 그가 곧 애찬의 암초가 아닐 수 없지요. 그때에 예수님은 그의 할 일을 지적하셨고, 유다는 그 곳에서 가시 뽑히듯 일어나 먼저 나갔습니다(요 13:30). 예수님의 애찬에 유다가 암초였듯이 그 후 교회 시대의 암초로서도 가인의 길과 발람의 유혹과 고라의 패역을 지적하셨습니다. 제가 앞의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인은 최초의 비택자인즉 그의 제사 행위는 외식이었음을 알 수 있고, 발람의 유혹은 이방 종교 또는 거짓 선지자, 종교 사업자, 세속 등의 유혹에 해당하고, 고라의 패역은 성직자에게 대항하여 괴로움 주는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 없어야 할 것들이요, 무익하고 해로운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암초,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기주의), 물 없는 구름, 열매 없는 가을 나무, 거품만 뿜는 거친 물결, 유리하는 별들(방향 제시 못함)입니다. 이것들은 마치 가룟유다가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없었으면) 좋을 뻔하였다”(마 26:24)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 교회에서 없었으면 좋을 일들이 많은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애찬의 암초들은 크고 적은 것을 막론하고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외식성(비진리), 세속성, 이기주의인 것입니다.

1. 외식성은 가인에게서 나타난 행위입니다. 가인은 최초의 비택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감동이 없는 사람이면서 제사를 드렸으니 그의 제사 행위가 외식이 아닐 수 없는데 이런 외식(신앙과 필요 없는 것)이 현실 교회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교회에서 옷 잘 입은 사람을 대우하는 것도 마땅치 않게 말씀하셨지요(약 2:2~3). 그런데 왜 성의가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의복을 본 떴다”해도 잘못이고, “천주교의 전통을 본 받았다”해도 잘못이며 “사람을 존귀하게 보이기 위하여 입었다”해도 잘못입니다. 이 성의에 대한 합리적 설명은 옹색하기만 한 것인데 이것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성직자의 권위주의 때문입니다. 의복으로 사람을 거룩하게 나타내려 하는 것은 이웃을 속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권위는 하나님이 주셔야 하고, 사람은 자신을 낮춰야 하며 또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그의 실제적 생활로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치나 물량주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인데 교회는 겉에 있는 것으로 사람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입니다. 명분을 내세워(학위, 표창장 등)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일을 자제하여야 합니다.

2. 발람의 유혹에 이끌린 것이지요. 발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 종교인, 이방 종교 사업자, 뇌물을 받고 그 값을 하려고 애쓴 자, 어용 종교인, 잡신에 접하는 자, 사술, 복술자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교회나 성도의 인식 속에도 상당 부분 깔려 있을 것입니다. 무당에게 내리는 잡신은 춤추고 시끄러울 때 온다고 합니다. 성령님도 그러하실까요?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마음 속으로 조용히 오십니다. 그래서 골방에 앉은 자가 혼자서 통회하게 만드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속의 풍습 따라 시끄러운 쪽으로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사업성이 없습니까? 믿음 사업만 하여야 하는데(예수님 높이는 사업, 십자가 자랑하는 사업, 복음 전달 사업) 물질 사업, 명예 사업 더 나가서는 정치 사업까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인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기복주의가 빠지고 교회의 목표 중에서 이기주의가 빠져야만 기독교가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방 풍속에 따라간 것이 바로 발람의 유혹을 받은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3. 고라가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 되라는 법 있느냐?”하고 도전한 것이지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세우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잘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는 교역자를 괴롭히는 성도가 많습니다.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인데 가장 큰 것이 시원한 꿀물(설교)을 달라는 것입니다. 꿀물은 성경입니다(시 119:103). 성도가 배고픈 입맛을 갖고 오시면 어떤 설교나 꿀물 같을 것입니다. 성도가 꿀물 요리법을 터득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말씀을 접하실지언정 그런 일로 성직자에게 도전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성직자의 잘못 때문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그 잘못을 시정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연구 시도할지언정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고 해보아도 안 되면 그 성직자를 멀리하면 됩니다. 부정을 시정하지 않는 성직자나 단체는 은혜가 떠난 곳이니까 생명 있는 은혜를 추구하셔야 하겠지요. 교회는 교역자와 성도가 싸움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 갈등이란 것이 일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허탄한 것들을 제하여 없애는 교회가 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11. 성도의 본문에 대한 말씀

제94과 어떤 사람이 될까? (벧후 3:10~13) 목록으로


본문 11절을 보시면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본문을 보시면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로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끝이 도적처럼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 드러난 상태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그 중의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티끌도 감출 수 없는 상태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떠나가고 땅이 녹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세상도 무용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천국)을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이니까 마땅히 변화되어야 하고, 또 티끌도 감출 수 없는 상태에서 도적처럼 심판의 때가 오기 때문에 준비에 준비를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까요?

1. 준비 완료한 상태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는 사람이 등록금을 준비해놓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고, 또 중병으로 일어서기 어려운 사람이 장례 절차를 예비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느닷없이 태풍이나 지진이 일어나도 대처할 만큼 준비해놓고 사는 사람처럼 자신이 되는 일과 자신이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명이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에 사람마다 책임이 무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할 일을 하면서 죽는 날까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데려가시기 때문에 많은 분량을 못하는 것은 책임이 없습니다. 꼭 할 일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곧 “자기 되는 것(신앙 인격)과 자기 할 일(사명)”입니다.

2.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1)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말씀하셨고, 12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하셨는데 이것은 다 경건 생활(거룩한 행실 곧 믿음 생활)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위치에 서서 믿음과 순결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 지식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것인데 믿음에는 반드시 생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늘 가는데 실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지요. 실이 없으면 바늘이 무용한 것처럼 믿음은 생활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은 믿음 분량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예수님을 많이 닮도록 노력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2)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될까에 대하여 더 설명을 드린다면(이것이 다 거룩한 행실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진실한 사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실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중요합니다만 사람이 타산을 하다보면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는 척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이 진실 보존에 큰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도 하시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알면 안다 알아도 말 못한다, 무엇 무엇을 하겠다”하는 일에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3) 예절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대학교 선전 신문에서 예절에 대한 글을 보고 이 설교를 준비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전화 걸고 받는 예절, 아는 사람을 만나 호칭하고 악수하며 대화하는 예절, 회의석상이나 식사 자리에 앉는 순서, 위치, 먼저 먹고 나중 먹으며 일어서는 분별 등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악수는 윗사람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악수는 여자가 주도한다고 합니다. 용어도 중요합니다. 경상도 아이들은 어른에게 “진지 잡수셨습니까?”해야 할 것을 “밥 묵었나”하니 참으로 민망한 것입니다. 승용차를 탈 때도 좌석에 예절이 있습니다.

4) 자기의 책임을 의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배우는 책임, 군에 간 사람은 국방의 책임이 있지요. 가정에서 부모, 자녀와 함께 사는 사람은 가사의 책임이 있고, 교회에서도 역시 책임이 있습니다. 가사의 책임이 무거운 것을 아셔야 할 것이고, 교회에 나오셔도 시간 지키는 책임, 자리 채우는 책임, 열심히 듣고 찬송, 기도하는 책임, 교회를 섬기는 책임 등이 있습니다. 반드시 자기 할 일에 대하여 책임 의식을 갖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건설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딤전 4:15을 보시면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리적 발전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시면 비싼 것을 안 사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곧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생산성 있게 사는 사람은 돈 보다도 시간을 더 아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생산성 있는 일에 써야 하니까 생산성 없는 일에는 쓸 수 없습니다. TV에서 오락을 보는 대신에 지식 보충을 해야 합니다. 경제 용어, 법률 용어, 정치 용어, 연예계의 용어 중 너무 모르는 말이 많지 않습니까? “버블현상”이란 말 때문에 제가 사전을 찾아 본 일이 있습니다. 항상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생산성 있게 사는 사람은 술, 담배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담배 못 끊는 사람에게서는 희망을 못 느낍니다. 담배 정도를 못 끊는 사람은 이성의 유혹이나 술이나 도박 같은 것은 더 못 끊을 사람이지요. 생산성 있게 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95과 빛과 사랑 (마 5:14~16) 목록으로


“빛과 사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2006. 11. 25.에 청도 화양읍 교회 100주년 기념과 임직식이 있어서 다녀왔고, 그 교회는 제가 33년 전에 3년간 시무하면서 예배당을 짓고 나온 교회입니다. 100주년 기념식에 “축사를 해 달라”해서 5분간 축사를 했습니다. 축사는 축하할 일을 말하는 것인데 ① 백주년 기념식 하는 교회가 드무니까 그것을 축하한다 하였고, ② 100년 동안 많은 사람이 구원 받고 충성하며 고난을 견뎠은즉 잘 견디고 충성하는 일을 100년간 했으니 축하할 일이며 ③ 전임 목사님도 몇 분 오셨고, 33년 전에 저를 알아보는 분이 10명이 안 되더군요. 그러나 그 주위에서 오신 분들까지 오랜만에 만나니 축하할 일이요, ④ 임직식이 있어서 장로, 집사, 권사를 세우니 이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충성할 기회와 직분을 주시는 것인즉 축하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그리고 마지막 축하 제목이 임직의 뜻대로 충성을 잘 해서 칭찬받게 될 줄로 믿고 축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충성을 잘 하느냐?하는 것이지요. 제가 그것을 간단히 설명할 때 그 교회 이름 글자를 해석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지역이 본래는 옛날 청도읍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이름이 구읍 교회인데 나중에 읍이 청도역 있는 곳으로 옮기니까 화양면 소재지로 남는 바람에 화양읍 교회가 된 것인데 이 화자는 “빛날 화”자이고, 양자는 “볕 양”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하기를 빛날 화자는 빛 되신 예수님을 뜻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교회 성도들이 빛 되신 예수님을 충만하게 모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예수님을 많이 닮아야 한다. 그 다음에 볕 양자는 햇볕정책이란 말이 있듯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뜻하게 비추는 것이 곧 사랑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사랑 실천만 잘 하면 충성하는 것이 되고 좋은 교회 되어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축사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부언한 이야기 한 마디가 있는데 그것은 “저의 외손자 시영이가 돌도 안 된 아이인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안다” 하였고, “이런 것(사랑인 것과 아닌 것)은 강아지도 안다”고 한 것입니다. 저의 집 개가 10년만에 죽었는데 식구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 하셨으니까 사랑을 알아야 하겠지요. 자기의 생각과 말과 나타내는 행동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는데 의외로 그것이 흐려져 있고, 삐뚤어져 있으며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와 성도의 병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57세에 일반 교회의 목회를 중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는 당회 결의에 따라 시행할 의무가 있는데 그 결의의 성격이 사랑 아닌 것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혼자 사는 여전도사를 특별한 과오 없이 연말에 내보내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몇 차례 시행하면서 사랑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어린 아이나 강아지도 자기 미워하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교회가 또는 성도가 교역자를 괴롭히거나 어렵게 해서 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중 교역자 배척해 본 교회가 많겠지요.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시면서 “너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가룟유다가 끼어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대적이 되고 예수님을 미워했다 하여 예수님이 같이 미워하고 대항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에게 떡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가룟유다 같은 자가 있으면 한두 번 권면해보고 안 되면 자신이 그를 멀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이것을 못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올무에 걸린 것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배당에 자기 재산을 투자한 것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목회자를 청빙할 때 서로 조건을 걸어 서약한 때문이며 셋째는 개교회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덫에 매여서 “나는 내 자리 지키고 너는 나가야 한다”하고 싸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닌 것으로 싸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도 눈이 어둡고 노회, 총회도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자기 단체가 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줄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느 개인이라도 진리와 믿음 위에 서고 사랑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워진지 100년이 되었어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세계가 많은 줄 압니다. 교회를 성직자의 명예 전당이나 생활 대책소로 여기는한 그 병폐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사랑인 것과 사랑 아닌 것은 어린이도 알고 강아지도 아는데 왜 20년, 30년 예수 믿은 성도가 그것을 모르느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이 답답하여 고전 13:4~7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이다 사랑은 성내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만 기뻐하며 모든 대상을 믿어주고 소망을 가지며 모든 대상과 함께 견뎌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기주의 또는 다른 사람 사이를 비비로 들어가는 것, 자기만 사람들 앞에 보이게 하고 싶은 것” 때문에 사랑의 실패자가 되고 빛을 내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6과 긍지와 자부심 (딤후 4:3~8) 목록으로


“긍지와 자부심”이란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성도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못 느낀다면 신앙생활을 헛되게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나는 죄사함 받고 구원 받았다”, “나는 심판 안 받고 영생한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문제 없다”는 확신속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신다면 더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줄 압니다. 현실적으로도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30세에 집도 있고 직업도 있어서 생활이 안정 되고 일찍 출세한 편이다”, “나는 자녀들이 다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나는 먹고 사는데는 걱정이 없다”한다면 그런 것도 세상적으로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긍지와 자부심은 보통 성도들이 느끼는 것보다는 좀 특수한 것 그리고 현세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것 중에서 좀더 고상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길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을 살핍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사형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밖에서 복음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제가 로마에 가서 바울 사도가 참형 당한 장소를 보고 왔는데 그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연해 놓았더군요. 한 장소에서 목을 친즉 그 머리가 4~5m 굴러 있는 모습까지 재연해 놓았는데 저는 그 기념 예배당이 다른 건물보다 온도가 1~2도 낮고 춥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3절을 보시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바르지 않은 교훈이 많으니까 이때를 예언하신 듯 합니다. 그리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둔다”는 것은 4절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것 같은 흥미 있는 이야기만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강론에는 흥미가 없고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외국 다녀온 목사가 외국 이야기를 하면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곧 진리가 멀어지는 증거이지요. 그런 중에서 5절을 보시면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상급을 크게 받을 것인데 “고난을 받으라”하면 달게 받을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바울 사도께서는 “자기의 떠날 날이 가까왔다” 하시면서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나의 달려갈 길도 다 달리면서 믿음을 지켰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면류관을 받을 것만 사모한다”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하신 말씀처럼 아주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할 수 있기를 기도하셔야 하겠고, 또 바울사도처럼 고상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특수한 긍지와 자부심을 어떤 것으로 가져야 할 것인가? 그 일이 어느 정도 가능성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들이 “예수님처럼 완전하다, 바울사도처럼 대단하다”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니까 평범한 자부심보다는 좀더 발전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나는 성경을 옳게 이해하고 있다는 지식의 소유”입니다. 자를 대고 선을 긋는 것과 자 없이 그은 선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성경을 옳게 이해한 사람의 생활과 옳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생활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역자는 성경 지식이 너무 불충분한데도 교인들은 아무 감각 없이 따라갑니다. 이것은 마치 뱃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세상 넓은 줄을 모르고 열 달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 수준 이하에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여 이런 말 하는 사람은 굉장히 안다는 뜻이 아니고 어느 정도 주제 파악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차를 몰고 서울에 갔는데 “길 모르면 무조건 남쪽으로 가면 한강이 나오니까 거기서 길을 찾으라” 합니다. 만일 그 지식조차 없다면 방향도 못 잡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교리요 신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구의 설교를 들었을 때 무조건 아멘 하지 않고 “저 말은 잘못 하는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인식할 수 있는 기본 지식 가진 것으로 큰 긍지를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2) “나는 바른 신앙생활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으로 긍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수박 밭에 가서 잘 익은 수박 고르기가 어렵지만 잘 배우셔서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교역자와 함께 가고 있다는데서 긍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태평양을 건너가시려면 더디 가는 배라도 큰 배를 타셔야 안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큰 배가 안전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큰 교회에 나가면서 긍지를 느낀다면 그 교회 목사님도 큰 교회 시무하는데서 긍지를 느끼겠지요. 그러나 “그 단체가 크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큰 교회에 나가시거나 적은 교회 나가시거나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긍지와 보람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단이나 교회가 크고 적은 것을 떠나서 “바로 믿고 바로 가르치는 노선에 있다”는 것으로 긍지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나는 이래봬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 긍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너는 법을 어기고도 형통했고 나는 법을 지키면서 고난을 당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법 지킨 자를 인정하실 것인즉 하나님은 나를 더 가깝게 여기실 것이다”하는 확신 아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만 행복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 할 때 법대로 하지 않으면(법은 성경과 교회 헌법)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딤후 2:5) 하셨는데 성경 법대로 안 된 생활이 많겠지요. 그 중에는 더한 사람, 덜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나는 그래도 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다”는 생활로 긍지를 가지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자기의 맡은 일에 근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97과 존귀를 지키는 법 (시 16:3, 49:20) 목록으로


“존귀를 지키는 법”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존귀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인데 존귀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높여 주는 존귀(정치가, 학자, 운동 선수, 재벌가, 예술인 등)가 있고, 사람이 “존귀하다, 인기 있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귀하게 인정하시는 존귀가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세례요한은 “사람이 그를 존귀히 인정하지 않고 임의로 대하였지만(마 17:12) 하나님은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1:11). 여러분들은 어떤 존귀를 원하십니까? 제가 이설교를 기록한 시간이 61주년 8․15날 11시였습니다. TV에서 8․15 경축식이 있은 다음에 61년 동안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방영하였는데 옛날에 나무 때고 완행 열차 타던 시대에서 고층 아파트, 자가용, 핸드폰 시대를 거쳐 유비쿼터 시대로 가고 있다는 문화의 발전상을 자랑스럽게 소개를 한 것입니다. 이 뜻은 보리밥 먹던 사람이 쌀 밥 먹어야 존귀하고 완행 타던 사람이 KTX 타야 존귀하다는 뜻과 같은 것인데 과연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인생은 돈을 잘 벌고 많이 써야 존귀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성경 두 구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땅에 있는 성도(바로 저희들)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다”하신 말씀이고, 또 한 구절은 “존귀에 처하나(나라의 문화적 발전상) 깨닫지 못하는 자(진리 또는 참된 가치관을 모르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는 말씀입니다. 짐승은 정신 세계의 한계가 있습니다. 주인을 알고 따르는 것 이상 발전을 못합니다. 짐승에게 지혜가 있다면 생육, 번성의 지혜뿐입니다. 그리고 먹다가 죽는 것이 짐승의 일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숭고한 가치관을 모른다면 차라리 부잣집 애완동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길지 모릅니다. 성경의 “멸망하는 짐승”이란 뜻은 먹는 목적으로 살다가 죽는 불행한 인생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는 존귀한 자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령님과 다윗왕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왜 존귀한지 또 존귀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존귀한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1) 하나님이 성도를 만드실 때 비싼 대가를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행 20:28에 “피로 사신 교회”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셨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어떤 미군 병사가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라”하여 “수건으로 감고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의 보혈 같은 존귀가 있고,

2) 하나님의 가족 같은 존귀가 있습니다. 엡 2:19에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가족은 다 귀하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선택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모르고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 받을 기대를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성도에게 영광을 받으시려고 구속 사업을 이행하신 것”입니다(엡 1:3~6). 그러면 하늘에 있는 성도들도 귀할 터인데 왜 땅 위에 있는 성도를 존귀하다고 하셨을까요? 눅 15:7을 보시면 “땅 위에서 한 사람이 회개하였을 때 그 기쁨의 분량은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런 기쁨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죄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죄 많은 세계에서 마귀를 이기고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과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당연히 지상에서 승리하는 성도이겠지요. 그래서 땅에 있는 성도가 더 존귀한 것입니다.

2. 성도는 이 존귀를 지켜야 합니다. 부자가 재물을 지키고 운동 선수가 건강을 지키듯이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존귀를 지키셔야 합니다.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1) 성도의 존귀를 스스로 자긍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값진 존재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권속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내게 달려있다”하는 긍지를 가지시고 또 나는 가난하고 배운 것이 적으며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주시는 존재란 것을 스스로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 임직식에 축사하는 방법을 물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문을 하면서 “목사 되기 전에 성도된 것을 축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란 기본 신분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2) 조심하여 지혜롭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존귀가 어디서 훼손되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말 실수, 믿음 실수, 범죄, 무절제, 사명의 저조 등을 조심하여 존귀 떨어질 행동이면 극히 삼가셔야 합니다.

3) 다양성 있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버리워지고 밟혀져 마땅한 것처럼(마 5:13) 성도의 존귀한 입장도 유지되려면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셔야 되는데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책임, 교회에 대한 봉사의 책임, 사회에 대한 준법의 책임, 가정에 대한 부양의 책임, 세계 인류에 대한 사랑과 기도의 책임 등을 잘 감당할 때 존귀의 명분을 보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제98과 사탄아 물러가라 (마 16:20~24) 목록으로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부활을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1) 십자가와 부활은 구원의 도리이고 하나님이 가장 중대하게 여기시는 뜻입니다. 독생자의 고난과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이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이 중요한 교훈을 하시면 잘 받으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이 교훈을 비로소 하신 이유는 미리부터 말씀하시지 않고 돌아가실 때가 가까울 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의복도 입는 순서가 있듯이 교훈도 순서가 있고, 환경에 따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병들었을 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돌아가려 할 때 임종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때와 환경에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면 부인하였으니 참으로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체가 참이요, 진리란 사실을 깜빡 잊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멘으로 받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을 내세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높으신 구원의 뜻을 받들어)“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였으면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고 모르면 질문을 해야 하는데 “간하여 가로되(못하게 말리는 것)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그런 일이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것이고, 또 스승 앞에서 자기를 내세운 일이 된 것입니다.

3. 이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하셨으니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도록 격려하는 행위가 아니고 낭떠러지로 떠미는 행위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말, 또는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행위,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자기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시고도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요(마 26:39). 그러니까 저희들도 죽음의 환경이 다가온다면 자기의 생각을 앞세워 기도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수명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니까 사람의 기도로 길고 짧게는 못한다(행 17:26) 하나님이 히스기야왕처럼 그렇게 해 주실수도 있지만 꼭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는 신앙을 갖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히스기야가 15년 더 사는 기간에 므낫세를 낳았는데 므낫세가 12세에 왕이 되어 55년 동안 가장 악한 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백성을 괴롭혔음).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 따르라고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4. 이 시간에 강조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사탄아 물러가라”입니다. 분명히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베드로를 쫓은 말씀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있는 사탄의 역사(잘못된 생각과 반항)를 물리친 말씀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여기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을 미워하면 한 사람도 가까이 할 사람이 없고 자기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만 미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사탄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눈에 보인다면 돌로 치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보이지 않고 죄인만 보이니까 사람을 미워하는데 성도는 사탄을 볼 줄 아셔야 합니다. 사탄을 볼 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 보셔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처럼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형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탄을 만드셨을까?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지만 사탄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물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 섭리 안에서 갱겨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탄을 피조물처럼 만드셨다면 죄를 만드신 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드신 것이 아니고 섭리 중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마치 빛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앞에 물체가 나타나니까 그림자가 생긴 것처럼 그렇게 생겨진 것입니다(골 1:16, 하늘의 것들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었다 하심). 혹 “하나님께 범죄하여 쫓겨난 것이 마귀”라고도 하나 벧후 2:4에 그런 규정이 없습니다(눅 10:18). 천사도 마귀 때문에 타락하였을 것이니까 마귀가 생긴 원인을 천사에게 돌려도 안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빛을 부분적으로 비추실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 반사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중요한 것은 마귀를 어떻게 발견하고 쫓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의심케 하는 말을 용납하다가 걸려들었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경우도 꼭 같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의 말을 진리로 대항하여 물리치셨습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온즉 번뇌가 생겼고(삼상 16:14), 세겜 사람들에게 악신이 잡힌즉 군주를 배반했으며(삿 9:23)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즉 예수님을 배반하고 입을 맞추는 외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마음 속에 들어와서 번뇌를 주고 악한 생각을 갖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거나 불신과 불순종을 일삼으니까 거기에서 사탄을 발견하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 의심, 완악, 미움, 혈기 같은 것이 나타날 때 또 나중에 기도하자 하거나 설교 시간에 눈이 감길 때, 또 불법의 유혹이 올 때 반드시 “사탄아 물러가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99과 고난을 위한 인생 (욥 5:6~7) 목록으로


제목은 “고난을 위한 인생”이고, 말씀 내용은 “고난에 대한 대처 연구”입니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은 “풍랑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늘 풍랑을 예측하다가 바람이 불면 돛을 내리고 키로 방향 조작을 하면서 적당히 대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고난이 있으면 “있을 수 있는 일이 왔다”고 생각하시고 적절한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문제에 대한 설교는 자주 해도 넉넉지 않을 것입니다.

1. 본문을 보시면 “재앙은 티끌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재앙과 고난이 원인자에 의하여 온다”는 뜻이고, 그 원인자는 하나님이시며 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 하셨고, 인생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불티가 날음 같으니(불티는 본래 위로 나는 것이니까) 인생은 고난 중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저희들도 고생스러고 짜증스러운 인생이 당연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왜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을까요? 이 글을 쓴 욥의 친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타락한 인생에다가 죄악이 관영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부터 죄는 고난과 죽음을 가져온 것인데 세월이 갈수록 그것이 근절되지 않으니까 고난이 연속되고 있고,

2) 인류가 자신 또는 조상 또는 이웃과의 연대적 책임에 따라 징벌을 당하므로 받는 경우가 있으며

3) 핍박이나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하셨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고 하셨습니다.

4) 또 중요한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의 연단에 의함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벌로도 쓰시고 연단의 도구로도 쓰십니다. 욥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습니다.

5) 그런데 무슨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였을 때 그의 친구들은 “죄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욥은 “그렇지 않다” 하였고,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욥 23:1~7을 보시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만날고.....내가 그 앞에 나가서 호소하고 변백할 것이라” 하였으니 욥은 결백하게 산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혹독하게 당한 재앙이 자기의 죄 값이 아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이 고난 주시는 이유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에는 종류도 있고 이유도 다양한데

3. 성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1) 있을 수 있는 일로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생이 죄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서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불티가 위로 나는 것은 정한 이치인 것처럼 죄악 세상에 사는 인생의 고난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사공이 바람을 맞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핍박이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욥 2:10을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하였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뜻입니다.

2) 좀 심한 고난이라도 예사로 알아야 합니다. 욥은 큰 축복 상태에 있다가 완전히 꺼지는 재앙을 받았습니다. 자녀들과 종들이 다 죽고 재산이 없어지고 건강이 악화되니까 명예까지 없어졌으니 재앙치고는 아주 큰 것인데 욥 1:21에서 말하기를 “내가 빈 몸으로 왔는데 하나님이 그만큼 주셨다가 다시 취하신 것인즉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할 것이라”하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섭섭함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거두신 것이니까 예사롭다는 것이고, 다만 몸의 고통 때문에 탄식을 한 것입니다. 이 지상에는 엄청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배가 잠기고 비행기가 없어지며 섬도 물에 잠겨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산 사람은 그대로 삽니다. 18세된 처녀 장의사가 하루에 시체 15구 이상을 꾸려낸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대단한 일을 예사롭게 아는 것처럼 저희들도 고난을 그렇게 알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3) “어떤 고난이 있어도 신앙의 낙망은 없다”는 원칙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욥이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니까 그 아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아내의 말이 어리석은 것을 탓하면서 “복 받을 때가 있으면 재앙 받을 때도 있은즉 그것이 하나님 욕할 일이 아니라” 하였으니 이것은 보이는 것의 유한성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돌 집을 잘 지었다 하더라도 허물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유한한 인생의 복도 그렇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신앙의 낙망을 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기 때문에 “고난 없으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고난을 징계의 도구로 쓰셨다고 믿을 때는 열심히 죄를 찾아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기계가 고장나면 고쳐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욥기 31장을 보시면 욥이 상세하게 자기를 반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기계를 고치다 안 되면 새로 사야 하는 것처럼 삶의 근본을 다시 시작해야 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징계는 회개로 고치면 되는데 거기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지요.

5) 하나님이 고난을 연단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아셔서 회개도 하면서 연단을 받으셔야 하는데 견디는 연단, 깨닫는 연단, 바로 서는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3:7에서 “사랑은 견디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핍박도 잘 견딜 대 상급이 있습니다(계 2:3, 고후 1 :6, 6:4). 그리고 고난이 있어야 깨닫습니다. 시 119:67에서도 “고난이 깨달음을 준다”고 하셨지요. 민족적인 고난도 발전을 주는 것입니다(일본, 한국). 그리고 옳게 서는 연습은 바로 걸음마 배우는 어린이나 운동 선수와 같은 것입니다. 고난에 흔들림 없이 의연히 대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100과 늘 깨어 예비하자 (마 24:35~44)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1. 우선 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을 본 일도 없고 상상하지도 않지만 “장차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벧후 3:10). 인간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요. 성도들 중에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슬쩍 펼쳐보고 탁 덮은 다음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행 5:10을 보시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하신 “다”자 때문에 저는 목회자 인생을 바꾸었고(눅 17:10에도 “다”자가 있음), 또 요 6:12에 보시면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하신 말씀 때문에 음식찌꺼기를 버리지 못하며 길에 떨어진 못 한 개를 집지 않고 그대로 걷다가 다시 와서 집은 일이 여러 차례 있습니다. 나는 길에서 집어 온 못을 다 쓰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얽매인다는 증거”를 하나님 앞에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권위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말씀을 중요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36절에서 “그 날(예수님 재림)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이고, 세상이 끝나는 때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때인데 “그 때를 인생들은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때를 모를 때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42절에서 “깨어 있으라” 하셨고, 44절에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말세의 때를 모르면 깨어 있고 예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어떻게 깨어 있고 예비해야 합니까? 아들이나 딸의 혼인 날짜를 알면 어떻게 예비해야 하는지 잘 아실 것이고, 대학 입시 날짜를 알면 어떻게 예비하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그와 같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시비될 일 없도록 해결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든든히 붙잡고 계시면 어느 순간에 꽝하고 세상을 떠나도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어디서 객사를 해도 자기의 장례비는 그 몸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곧 부자나라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재림의 때를 모르고 사는 성도는 항상 구원 받을 믿음과 상급 받을 보따리를 준비한 상태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재림 날짜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때도 모르고 자기 죽을 때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는 것도 많습니다. 중복 지나면 20일 만에 말복 되는 것도 알고, 여름 지나면 분명히 선선한 바람 불 것도 아는데 자기에게 환난 닥치는 일과 자기의 죽음의 때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도 교회 이정범 장로님은 만난지 두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질병이 오는 때와 임종이 오는 때를 모른 것이지요. 어느 권사님도 느닷없이 암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학생 네 명은 썰물에 빠져 죽었고, 또 어떤 교회 성도는 인천에서 경남까지 수련회 다녀오다가 차 사고로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런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깨어 예비하셔야지요. 요즈음 저의 연고자 중 두 분이 임종 날짜를 다투고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 나중 가겠다” 다투어 보았자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믿음 준비하여 하나님 앞에 잘 가기를 바랍니다만 왜 하필 복 중에 가시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여름에 양말도 못 신고 벗고 사는데 이 복중에 움직이려니까 큰 고역입니다. 마 24:20을 보시면 “전쟁이 일어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 어렸을 때부터 저의 할머니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에 일주일만 앓고 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는데 그대로 되어 음력 3월 11일에 돌아가셨고, 또 한 가지 응답은 “속 썩이는 아들이 먼저 세상 떠나고 마음 편하게 3년만 더 살다가 가게 해 주십시오” 하셨는데 그것도 그대로 되었습니다). 외아들(저의 아버지) 먼저 가고 2년 10개월만에 돌아가셨습니다.

4. 언제 환난이 올지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성경에 보시면 노아는 홍수 날 것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따라 열심히 배를 준비하였기 때문에 환난을 이길 수 있었으나 믿지 않고 준비 안 한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질병이 겁나면 예방 주사라도 맞아야 하는데 암은 예방 주사가 없고, 교통 사고 예방은 안전 벨트와 감속 밖에 없지만 졸음 운전자가 받는 것은 예방할 길이 없겠지요. 이렇게 예방할 방도가 없은즉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성도가 환난의 때를 모릅니다. “죽는 것은 괜찮은데 아픈 고생은 싫다”는 분도 있고, 가난한 것도 환난입니다. IMF닥칠 것도 모르고 당했지요. 가난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예비하십시오. 가난해지는 방법에서 떠나야 하는데 “탐식과 연락을 좋아하면 가난해진다”(잠 21:17, 23:21), “손을 게을리 놀리거나 좀 더 눕자 좀 더 자자하면 빈궁과 곤핍이 강도처럼 몰려온다”(잠 10:4, 6:10~11)고 하셨으니까 그 방법대로 예비하셔야 하고, 또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예비는 고전 11:30에 근거하여 “너희 중에 연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 자는 자가 적지 않다” 하셨는데 그 이유는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존중하여 받들지 않을 때 있을 수 있다”고 하신 만큼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켜서 예방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죄와 질병, 그리고 효도와 온유는 수명과 연관이 있는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5:5, 엡 6:3, 고전 11:22, 28~30).

13. 개혁에 대한 말씀

제101과 예배의 분위기 (요 4:20~24) 목록으로


구약의 성도들은 신앙(경건)의 의식으로서 제물을 갖고 성전의 제단 앞에 가면 제사장이 받아서 죄를 전가했다는 의식으로 제물에 안수하고(출 28:10~20) 뒤처리를 다 해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제단 뜰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이었고, 그것이 성취된 신약 시대에는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표로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예배라 하면 공예배 의식을 연상하시겠지만 실은 성도의 전체적 생활이 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요소를 신령과 진정, 또는 경건이라고 할 때 성도는 어느 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경건(예배)도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은 예배가 곧 생활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이냐?할 때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드리는 것이므로 공예배이고, 성도의 생활 전체를 화분으로 본다면 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꽃이 피려면 뿌리와 나무와 관리가 좋아야 하는 것처럼 의식적인 예배도 신앙적 생활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축복의 산이라 일컫는(신 11:29, 삿 9:7) 그리심산을 신비한 예배처소로 알았지만(20절) 예수님께서는 “이 산이나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하시므로 예배 처소가 따로 있음을 의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신령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신분과 사역을 높이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정”이란 뜻은 진실입니다. 외식이나 허풍이나 가식이나 작태 같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분위기는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나타내며(말씀 중심) 인간의 가식적 행위는 되도록이면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끄러우면 하나님도 시끄럽게 여기시고 사람이 무질서하게 느끼면 하나님도 그렇게 느끼실 것이며 사람이 신령하지 않다 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레시지 않고 떠들지 않으시며(마 12:18~19) 사거리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라(마 6:5~8)” 하신 것을 보면 질서 있고 조용한 것 그리고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찬송까지 작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되 공교히 연주하라”(시 150:5, 33:3) 하셨으니까 찬송은 곡조대로 힘 있게 부르되 무질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집회에 모르고 갔다가 시작부터 시끄럽고 사람의 작태와 인기주의가 나타나고 심지어는 예배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신비한 듯이 어떤 충격을 주려는 것처럼 고함을 치고 소란스럽게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사람이 웅변이나 박수 소리나 만담, 기담이나 고함 소리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거기에 무슨 영성(성령의 역사가 가미되는 것)이 있는 줄로 착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이크가 없을 때 큰 소리로 외치셨지만 내용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작태는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빌라도를 권면하실 때도 “선한 증거로 나타내셨다”(딤전 6:1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말씀 속에 성령님의 역사가 동반하시기 때문에 증언자가 다른 수단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언자가 왜 그렇게 떠들썩하게 하며 자기의 수단을 나타내려 하는가? 그것은 성경 말씀 자체의 권위를 모르기 때문이고, 또 자기로 말미암아 은혜 받게 하려는 인기주의 때문이며 가식이나 작태, 인간적 수단이 고전 2:1(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안 하신 것)에 위반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증언자는 증언자대로 날뛰고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 성도들은 그런 분위기에 무슨 신비한 은혜가 나타나는 줄 믿고 동화되지만 이런 것이 신령과 진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용하고 질서(순서가 명료함) 있고 온유한 어법으로 말씀만 부각시키고 간절한 기도와 힘 있는 찬송을 주 요소로 진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그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성령 체험을 하려고 기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체험적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때 한 번 있었습니다(행 2:1~4). 그리고 사도 시대에 이적이 나타나다가 사도 말기에는 이적이 있었으면 좋을 형편인데도 안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죽은 자를 살렸는데도 나중에는 병든 제자를 못 고친 것이고(빌 4:26~27, 딤후 4:20), 베드로도 옥에서 나왔으나 나중에는 그런 역사가 없었으니 이것은 히 2:4에 근거하여 성경이 영감되는 시기에 증표로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히 1:1). 그러면 이 시대에 성령님의 역사를 어떻게 체험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마 28:20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 하셨는데 이 뜻은 말씀(성경, 요 1:1)과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과 성령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계십니까? 그것은 “마음에 심긴 도란 말씀이 있으니까(약 1:21) 말씀이 마음 속에 거하시는 것이고(엡 3:17), 또 성령님은 성도와 함께 계시고(요일 4:13)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신다(대하 36:22)”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감동시키실까요? 그것은 요 16:13에서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신데 “그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16~17). 그러니까 성령님이 성경을 보고 들으며 연구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이고 진리에 맞도록 실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경을 깨닫고 실천하려고 하신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그렇게 감동하신 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적 체험은 무조건 “없다”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권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상한 분위기에 현혹당하지 마시고 오직 성경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으심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02과 교회의 부정적 요소 (갈 1:10) 목록으로


“교회의 부정적 요소”란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교회의 부정적 요소”란 “교회에서 나타나지 않아야 좋을 일들”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정화 차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면 설교의 교훈과 축복에 뜻을 두는 줄 압니다. “저런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데”하는 관심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깨닫고 보면 교회나 성도의 생활 속에 예수님답지 않은 일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까지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부정적 요소(없었으면 좋을 일들)들이 어느 부분에서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인기주의에서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는 약대 털옷을 입었고 몸 치장을 하지 않았으며 또 자신은 예수님 앞에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 하면서 “주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되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요 3:30, 막 1:6~8). 이 말씀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기본 자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직자나 직분자들이 사치하거나 자기를 과장 표현하지 않으면서 인기를 얻으려 하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겸손하게 사역을 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자이시지만 인간은 다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교회 앞에서도 시인하고 늘 회개하는 자세를 감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사람을 높이거나 칭찬하는 인기주의가 교회 안에는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 안에는 물질적 사치가 없어야 합니다. 몇 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리모델링 하려면 그 돈으로 미개국에 가서 학교를 지어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돈이 남아서 잘 먹고 잘 쓰는 교회도 있는데 예수님은 “5병2어의 이적을 행하시고도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하셨으니 성도이면 이런 말씀을 기억하여 검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성전을 값진 것으로 받으셨지만 신약 시대의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 하시고 헐게 하셨습니다(요 2:19). 따라서 돈이나 물질로 관심 끄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은 말하기를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의 이름이 있다” 하셨고(행 3:6), 바울사도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며 전도는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다”(고전 2:1~4)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물질 사치나 물질 운동을 앞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제나 받고 현세복을 받으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3. 교회 안에는 세속주의 풍조가 없어야 됩니다. 어떤 이는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교회가 뒤떨어졌다 하면서 세상의 문화를 끌어들여 예배 의식이나 교회 행사를 사회식과 방불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삼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운 것은 교회 안에서 시행하셔도 사회에서 배운 것은 교회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똑똑히 보세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행하는가? 아니면 사회나 불신계나 외국의 풍물을 답습한 것인가? 그런 것이 세속주의인데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롬 12:2, 약 1:27) 성경 교육도 꼭 사회 교육 방식으로 따라가지 않습니까? 신 6:7~9 말씀대로 하셔야 합니다. 세속의 풍조가 역겨운 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자율주의”입니다. 사사시대에 율법이 없은즉 “소견에 옳은대로” 했고(삿 17:6), 여로보암이 자율 종교를 세웠을 때 자기 마음대로 분향도 하고 절기도 만들며 제사장직도 주었습니다(왕상 12:28~33). 그러나 기독교는 계시 종교이고 성경 본위의 종교이니까 무엇이나 성경적 근거가 없으면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 없고 진리를 거스릴 수 없으며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4:6, 고후 13:8). 특히 예배 의식이나 기독교적 행사에서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을 임의로 시행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성경에 없는 규정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자율주의가 자리를 잡고 전통이 되어 성경을 거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유전이 그래서 생긴 것 아닙니까?

5. 율법주의 잔재입니다. 제사장, 제단, 절기, 안식일, 십일조, 성전과 관련된 언어와 생활을 신약 시대에도 종종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구약이 성도에게 주신 계율이요,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 나타났을지라도 예수님의 모범만큼 밝은 계시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의 성취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 율법으로서의 효력이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냈고, 예수님도 “행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창 14:20, 마 23:23). 롬 10:4을 보시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하셨는데 율법의 마침되신 예수님이 “특별히 십일조 율법을 지키라”고 하실 까닭이 없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봉헌의 성격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성도는 남을 위하여 적게 가지려고 해야 되고(고후 8:9), 가진 것도 주님의 것인줄 알면서 율법에 얽매이지는 않되 십일조 이상으로 섬기는 열심에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6.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과장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없으면서 있는체 하거나 기도의 응답이 안 될 것을 된다 하면 안 되겠지요.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거짓, 예수님의 모습을 잘못 나타내는 것 등일 것입니다.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예수님만 높이고 열심히 배우고 사랑으로 친교하면서 조용하고 들레지 않고 복음과 빛을 드러내는 그런 교회를 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기주의, 신비주의 등 부정적 요소가 많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깨닫고 살피셔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103과 전통에서의 자유 (마 15:5~11) 목록으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고(행 18:5) 계명에 얽매여 사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나사못이 길에 떨어져 있으면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멀리 지나쳤다가도 다시 와서 그것을 취하는 것이 저의 습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얽매임이 좋다는 예화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세뇌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 말씀이 신 6:6에 있는데 “너희는 하나님이 명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 다닐 때에 부지런히 강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세뇌(마음에 새겨짐)되면 때와 장소에 분별없이 그것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 교회에 오셔서도 성도들과 만나면 성경 공부한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멀리하고 다른 것에 그 이상의 신경을 쓰시는 성도가 계신 것 같아서 “전통(문화)에서의 자유”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게 된 것입니다. 전통도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들의 유전”이라고 합니다(살후 2:15, 3:6). “주일 잘 지키자, 십일조 이상으로 헌금하자, 절기도 의미 있게 지키자, 예배를 잘 드리자, 단정하게 차려입고 봉사하며 사랑하자, 새벽에 기도하자”하는 것이 다 좋은 전통이고, 주일 11시에 예배드리는 것도 가장 적절한 전통입니다. 그러나 그 전통 시행에 결함이 있거나 더 좋은 방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못 고치지만 사람이 만든 법은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1시 예배를 9시로도 할 수 있고, 또 다른 시간으로도 할 수 있으며 예배의 장소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고, 또 목사의 설교가 의식을 떠나서 문서로도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보의 종목도 열 가지를 다섯 가지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에 물들어서 전통이 법인 줄 아는 성도가 많습니다. 옛날에 시골 교회 성도들이 “낮에도 성찬 예식을 합니까?”하고 물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예수님이 저녁에 성찬 예식한 것과 당회장 목사가 주일 저녁에만 순회와서 성찬 예식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주일 11시 예배도 그렇게 못이 박힌 줄 압니다. 또 예배 장소는 어떻습니까? 저는 골방 기도가 대중 틈에서 왕왕하는 기도보다 훨씬 간절함을 느꼈는데 어떤 성도는 예배당에서 기도를 해야만 좋고 또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려야만 만족을 느끼는 분들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전통에 물든 것인데 가르치는 사람들이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처럼 잘못 인식시킨 탓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무지와 또 좋은 예배당에서 교인을 많이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고 싶은 명예적 충동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 교회를 2년 하다가 2개월 동안 주택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교인 두 가정이 주택에서 드리는 예배에 적응을 못하고 나간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네 집에 있는 교회”란 말씀도 있습니다(골 4:15, 몬 1:2). 이 “네 집에 있는 교회”란 말씀이 마음에 닿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으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 중에서 더럽게 하는 것은 나오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것도 생각과 의식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연세 의대 윤방부 교수의 건강 강의가 있었는데 “과식만 피하고 막 먹으라”고 합니다. 또 “낙관적으로 살고 오래 살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강의는 다 전통과 음식 문화를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무엇을 초월하셔야 합니까?

1. 숫자를 초월하십시오. 두 세 사람이 예배를 드려도 아무 부족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일 뿐 나와 숫자와의 관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장소, 건물을 초월하십시오. 좋은 예배당에 앉았다고 “은혜가 더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뜻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좋은 건물에서 예배드리고 싶으면 자기 돈으로 예배당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남이 지어놓은 예배당에 가서 신세지지 마시고.

3. 헌금(돈, 물질)을 앞세우는 신앙도 초월하셔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내게 은과 금은 없다”(행 3:6)고 하였습니다. 돈이 있으면 구제하고 없으면 그만이지 돈을 앞세우거나 돈으로 신앙의 요건을 충족시키려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4. 사람의 이목이나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경외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극과 극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사람의 이목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바울사도는 갈 1:10에서 “내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생활의 목표부터 잘못된 것인데 그들의 이목을 의식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된 틀(전통, 문화, 제도 등)에서 벗어나시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세뇌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심령에서 폭탄처럼 터져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의 잘잘못을 옳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단체가 있음으로 목적을 다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교회 단체의 덕이 없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 지키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제104과 개혁의 마지막 목표 (창 13:8~9) 목록으로


기독교 역사 100년 중에 교단장 선출을 놓고 가장 치열하게 선거 운동을 한 시기는 90년 하반 또는 2000년 초반쯤으로 예측됩니다. 필자는 타 교단에 대한 형편은 잘 알지 못하나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주교에서 교황을 뽑을 때 선거 운동을 하거나 돈 봉투를 돌린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개신교가 천주교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무슨 여당, 야당이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반드시 대립 양상이 나타나고 그 대립 양상은 실권 다툼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총회나 단체가 대표자 또는 임원을 어떻게 뽑느냐?하는 것보다도 피선거권이 있는 성도나 성직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줄 압니다. 벧전 5:5에 보시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겸손한 자가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울왕도 겸손할 때 쓰셨고, 교만할 때 버리셨습니다(삼상 10:22, 15:22~23, 16:1). 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하신 말씀(마 18:4), 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빌 2:3)들을 마음에 둔다면 “내가 꼭 OO장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뽑아주십시오, 필요하면 돈도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자기를 홍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대표자 되는 일에 형제끼리 경쟁한 일도 있었으니 이런 단체나 이런 지도자들이 모인 세계에서 어떻게 온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방법으로 얻어진 감투라면 오히려 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체는 크고 자격자를 모르기 때문에 추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추천할 때도 인간적 수단과 방법이 따르는 줄 압니다. 어떤 교단은 지역별로 나누어 윤번제로 추천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지역에서도 대표자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압니다. 이것도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디게 하지 않으려면 전체적 피선거인 중에서 유력한 사람이 나와야 할 것인데 그것을 특정 지역에 한정하고 추천하니 어찌 전체 중 유력한 대표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제가 주장하는 마지막 개혁의 목표는 모든 성도나 복음 사역자가 현실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그 본성으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도 감투 쓰는 일에 나서는 자가 없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국적 또는 교단적 대표자를 어떻게 뽑느냐? 하시겠지요. 교단에서 총대들에게 1~2개월의 기간을 주고 개인적으로 알아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국적인 연락망을 통해서 유력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겠지요. 이 경우에 서로 칭찬도 하고 흠을 지적하기도 하겠지만 제 3자의 칭찬과 지적은 다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큰 교회 목사님들이나 신학교 교수님들의 학력, 경력은 쉽게 섭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회원이 특정인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선거 운동을 한다면 그것을 크게 망녕된 일로 지탄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의 교황이 별세하면 홍의주교들이 모여서 투표한다고 합니다. 이 경우에 내부에서 선거 운동을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기명 투표를 열 번쯤 하면 중지가 모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인간의 선거 운동 없이 뽑힌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뽑아 쓰시는 인물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TV에 레슬링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데 반칙을 허용하면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더군요. 그래서 실제 실력자를 모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물이 감투를 쓰는 일도 많다고 봅니다. 또 어떤 선배의 자문을 받는다고 할 때 진실하게 평가하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인즉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겠지요. 따라서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모든 피선거권자의 나타난 현상을 탐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대상을 기도하면서 선출하는 의식과 제도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달음질을 잘 하였을지라도 법대로 경기하지 않은 것은 면류관을 받을 수 없은즉 사람을 뽑는 일에 있어서도 허탄한 체계에 말려들지 않도록 유의하셔야 합니다. 왜 감투를 좋아합니까? 이 좋아하는 이유가 혹 명예적 이득과 물질적 이득을 바라는 것이라면 그 직임 자체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놓은 사람이 돈을 쓰면서 명예를 위하여 하려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사도들은 돈 쓰고 직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부귀와 명성을 건져 먹은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섬긴 모든 사람들이 다 서민적 생활 수준에 머무를 때 그는 현세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 과욕이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하여 성직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실증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셨고, 바울사도는 마지막 생애를 셋집에서 보내셨습니다(마 8:20, 행 28:30).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감투(직분)를 쓰려는 자가 없어야 하고 선거 운동도 없어야 하며 기도하고 투표로 뽑히면 하나님의 인도 섭리로 믿도록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복음적 직분은 군림하거나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즉(벧전 5:23, 눅 22:25~26) 오직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만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큰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성직자가 될 때 개혁의 마지막 과정이 끝날 것입니다(창 13:9).


14. 사명, 정치, 가정에 대한 말씀

제105과 사명적 소원의 변화 (빌 2:13) 목록으로


1. 제가 신학 공부를 할 때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다 지방 교회 전도사들이었기 때문에 토요일 되면 자기의 섬기는 교회로 가고 월요일에 학교로 오곤 하였는데 저는 처음에 그런 임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되면 이 교회 저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는데 어떤 교회에서 설교자의 유고가 생기면 임지 없는 신학생들에게 설교 초청이 오는데 그런 초청에 해당되기를 속으로 소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무엇을 안다고 설교하기를 소원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신자에 불과한 입장이네도 설교할 가닥이 있었고, 소원이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마른 막대기 같은 자를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2. 그 다음의 소원이 임지 교회의 초빙을 받는 것입니다. 전임 전도사이면 더 좋고 아니면 교육 전도사라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임지 초빙이 있어야 식대와 등록금을 보충할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는 도시 집중 시기가 아닌 5․16 직후로 어떤 지하실에서 가마거적을 깔고 5,6명 예배드리는 교회가 혹 있었을 뿐 아무도 개척에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의 이동이 있기만 기다렸고 한 번 이동이 있게 되면 도미노식으로 퍼지기 때문에 소개 또는 초빙의 기회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 초빙 소원이 임지 초빙 소원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3. 전도사 때나 초급 목사 때에 좋은 교회, 좋은 예배당을 만나기 어렵지요. 대부분 한옥식으로 지은 예배당이나 벽을 벽돌 아닌 판자로 덮은 기와집 예배당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초기 목회 때 그런 예배당을 김해, 부산, 상주, 의성, 청도 두 곳까지 여섯 교회를 다니다가 청도 두 곳은 벽돌 예배당을 짓고, 대구 남일 교회로 옮겼으니 그동안 벽돌 예배당 소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길을 가거나 버스를 타고 갈 때 좋은 예배당을 보면 그 좋은 예배당이 기독교의 전부인 듯 그런 예배당 갖기를 소원하였고, 때로는 그런 예배당 짓는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소원이 합당하였는지 하나님이 두 예배당을 짓고 두 교회의 터를 확장시키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4. 도시 벽돌 예배당에서 시무를 해보니 그때부터는 또 소원이 달라졌습니다. 그 달라진 소원이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교인의 수도 늘고 헌금도 더 나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교역자의 책임으로 감당하려니까 퍽 힘들더군요. 헌금의 모범을 보인다고 십일조를 드리고 또 십일조로 다른 헌금을 하였으며 성도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금요 밤기도회를 8시간 강행하였는가 하면 있을 곳 없는 소경을 먹이고 재우면서 주일 예배에 자리를 채우게 하는 열심까지 낸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물량주의 소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교역자가 많겠지요.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에 힘쓰는 것 아닙니까? 되는 교회는 잘 되는데 어떤 교회는 안 되는 경우도 있어서 개척 교회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 2:47, 9:31) 하셨으니 이 소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5. 도시에서 좀 더 큰 교회의 청빙을 받아 옮기는 소원도 있었습니다. 장기 목회에 발전이 더딜 때 그런 마음도 가져본 일이 있었고,

6. 설교 잘 하는 소원입니다. 설교는 할수록 어려워지고 설교에 시간을 투자하면 전도, 심방에 공백이 생기면서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설교는 은밀하게 준비하고 목사는 늘 교인 앞에 나타나야 하며 그러고도 설교는 잘 해야 교인이 줄지 않습니다. 잘 하는 설교의 표준이 있겠지만 대체로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설교는 성경 강론이지만 기독교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성경 강론이나 성경 공부로 설교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기독교가 아직도 거품에 떠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잘 하는 소원은 곧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성경의 본문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7. 정치적 지도자 되는 소원입니다. 이것은 단체의 장되는 소원이 아니고 교회 헌법을 연구하여 법대로 교회를 통치하는 소원입니다. 저는 목사될 때 성경과 교회의 헌법 지킬 것을 하나님 앞에 서약한 것을 잊지 않습니다. 교회가 “행정적으로 무질서해지거나 이웃 교회가 분쟁을 할 때 헌법 적용 잘 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헌법을 잘 알고 법대로 목회해야 한다는 소원을 가진 것입니다. 교회의 헌법은 직분자나 목사가 교회를 손해 보이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고 버티는 것보다는 나와야 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지금 소원은 교회의 현행 헌법을 실용성 있고 부작용 없는 헌법으로 고쳐서 흠 없는 교회를 이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범이 못 되는 직분자는 스스로 직분에서 탈락하는 제도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적 직분은 결코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8. 지금의 소원은 나의 목사된 족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개척하여 평생을 시무한 좋은 교회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대신 내가 40년 이상 목사 생활을 하면서 연구하고 증거한 재료와 신앙 사상을 전부 문자로 남기고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 소원이 좋은 것이어서 하나님이 거의 성취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 글이 역사에 남고 세계적으로 넓게 보급될 때가 있기를 기도하며

9. 또 마지막 소원은 가족들과 이웃들이 다 좋은 신앙과 생활의 자리가 잡힌 것을 보면서 나는 나의 남은 책임과 생활 유품을 자녀들에게 잘 인계하고 “나의 할 일을 다 하였다, 나의 상태는 정당하다”하는 입장에 있다가 평안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 된 것입니다(2006. 7. 4.).




제106과 어찌하여 놀고 섰느뇨 (마 20:1~9) 목록으로


제가 늘 다니는 길에서 젊은 부인과 노인을 포함하여 5~6명이 길가운데 앉아서 노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놀지 말고 가서 일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며 놀기만 하고 하루 세끼씩 먹기만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노는 것이 왜 나쁜 것인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불행한 것이란 사실도 모를 것이니 시 49:20 말씀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노는 사람이 많으면 나라와 후손이 손해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직업(일자리)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왜 취업을 못하느냐? 하니까 “자기의 능력(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이 41%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도들은 늙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일을 하셔야 하고, 병중에 누워계시다 할지라도 정신만 있으면 기도와 말씀 묵상을 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일을 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건강을 버티며 또 “힘써 일하라”(출 20:9)는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혹 “천국은 안식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성도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면 “안식한다”고 하지요. 그 말씀을 “논다”는 뜻으로 아시면 안 됩니다. 죄 값으로 땀 흘리고 고생하는 일을 안 한다는 것이요, 천국은 즐겁게 일하는 곳임을 아셔야 합니다. 혹 자기의 하는 일을 취미로 하면서 만족하신다면 그 분은 바로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기쁘게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천국은 포도원에 일군을 넣어 일시키는 곳과 같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3, 6, 9, 11시까지 사람들에게 일을 시킨 것입니다. 3시는 오전 9시이고, 11시는 오후 5시입니다. 오후 5시에 일당을 주고 일 시킬 사람이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없지만 하나님은 저녁에 왔어도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늦게 온 사람이 혹시 노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은 70세부터라”할지 모르나 야곱은 “130세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창 47: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가서 17년 더 살면서 힘들지 않게 살았겠지요. 사람이 왜 일을 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창 3:17), 지루하지 않고 건강하기 위해서 일해야 하며 계명대로 살려니까(출 20:9)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도 있고(마 16:24),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롬 12:11). 그래서 일을 하셔야 하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일은 남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사와 사명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 25:14~16에 보시면 달란트 비유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에 달란트를 각각 다르게 주셨습니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다르게 주신 것은 바로 은사와 사명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5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자신의 일과 사명을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사명의 성격과 분량을 조정해 주십니다. 예를 들면 모세에게는 출애굽 사명과 율법 선포 사명을 주셨고,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복 사명을 주셨으며 세례요한에게는 예수님을 안내하는 사명을 주셨고, 베드로에게는 교회 세우는 사명을 주셨으며 바울사도에게는 이방 선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다 그 사명을 감당한즉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요 5:43, 8:28) 하셨으며 예수님 자신이 자기 사명에 대하여 다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전도하러 오셨다(막 1:38, 2:17), 죄인을 부르러오셨다(마 9:13), 잃은 양도 찾아 구원하시고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간에 싸움을 붙이러 오셨으며(눅 19:10, 마 9:13, 35) 또 섬기고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고(마 20:28, 막 10:45),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눅 12:49)”하시고는 마지막에는 “다 이루었다”하시고 가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수고한 일도 대단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되었다”(고전 11:1) 하셨으니 이것은 성도의 빛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전 9:16)하신 것은 선교(전도)의 사명이며 또 그가 편지를 써서 여러 교회에 보내시고 디모데에게 “너는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참념하라”(딤전 4:13)하신 것은 교육 사명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나타난 모세, 여호수아, 세례요한, 예수님, 베드로, 바울사도의 사명을 말씀드렸습니다. 저희들은 그릇이 너무 부족한 줄 알지만 작은 사명이라도 주신 것을 깨닫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오후 5시에도 노는 사람들이 있어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였을 때 늦게나마 깨닫고 순종한즉 먼저 온 자와 다름없는 대가를 받은 것은 믿고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건비나 보수에 얽매여 억지로 일한 것이 아니고 늦게 온 자기들을 일하도록 써준 일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일한 대가로 많이 받은 줄 압니다. 절대로 “일거리 없다” 하시거나 “써 주는 자가 없다”하지 마시고 열심히 일을 하세요. 시간을 정하여 놓고 기도하시고 전도도 하시며 성경이라도 필기를 하십시오. 저도 써 주는 사람 없지만 바쁘게 살지 않습니까? 저는 불교 방송에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스님을 대접하는 뜻으로 일거리를 안 드렸더니 “밥 값을 안 했다고 잡수시지 않아서 다시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일에 시간 쓰지 마시고 일거리 없으면 독서라도 하시고 배우는 일을 하십시오.




제107과 시원한 정치를 갈망함 (시 14:34) 목록으로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정치가들이 의와 죄만 바로 알고 시행하면 영화로운 나라가 될 것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험난한 세월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백성의 뜻을 모아 정치하는데는 불만이 없지만 의와 죄를 모르는 백성들이 뜻을 모은다면 죄를 근절하고 의를 시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담배나 도박이 나빠도 과반수가 좋다 하면 시행해야 하고, 과소비가 나빠도 과반수가 좋다 하면 시행하다가 쪽박을 차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민주주의는 백성들의 의견 규합을 뜻하고, 삶의 원리는 죄와 의를 판별하는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요즈음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버블(주택값 상승)현상인데 이것을 막기 위하여 집을 더 많이 공급한다고 합니다.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삶의 수준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적당하게 발 뻗고 잠 잘 자리만 있으면 된다”는 인식을 종교적 교훈이나 철학으로 가르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의 전진 시설에만 급급하고 통제 시설인 브레이크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장수를 좋게 여기다 보니 장수를 위한 부대시설이 많아지지요. 이때에 만일 “나는 적당히 살다가 죽을 것이요, 꼭 장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면 그의 삶의 무거운 짐이 반으로 가벼워질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인간의 욕구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고 생산성 있는 목표와 정치로 변화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나라를 의롭고 생산성(발전성)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제가 “시원한 정치를 갈망함”이란 제목을 정하였는데 이것은 너무 답답한 일이 많기 때문이고, 또 시원한 정치의 역할이 몸에 와서 닿는 것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5․16 당시에 깡패 소탕에 대한 정책에 피부에 닿은 일이 있었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일과 새마을 정책이 몸에 닿도록 느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라의 발전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물질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 임기 전에만 물러났다면 좋은 결과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이 시대의 국민들이 잘 깨달아서 나라를 영화롭게 만드는 일에 다같이 일심협력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정치해야 내 마음(다른 이의 목표는 내가 모름)이 시원할 것인가?

1. 폭력 근절책이 나와야 합니다. 5․16때 군법 회의에서 깡패 소년이 무기징역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한 때 조용해졌지요.깡패와 폭력이 숨을 죽였으니까요. 일벌백계가 이런 효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일이나 여성이 밤길을 걸어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거짓과 사기 근절책입니다. 거짓 증거, 위장 전술, 섞어 파는 일, 문서 위조, 가짜 지폐, 과잉 선전, 사기 등 진실과 위배되는 것을 몽땅 일벌백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자와 가짜 분별에 국민이 신경을 안 쓰도록 해야 합니다. 진짜는 진자로 팔고 섞인 것은 “섞였다”하고 팔고 중국산은 “중국산이다”하고 팔면 장사 못할 이유가 없겠지요. 거짓말을 하면 혀가 잘리는 줄 알도록 정치를 하면 아예 거짓을 꿈꾸지 않을 것입니다.

3. 일하는 국민을 만들어야 합니다. 일만 하면 소득이 적어도 건강에 유익하고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은 사회라는 기업체에 취직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하루 생활의 일지를 써서 검열 받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중노동에 휴식은 필요하지만 의미 없이 노는 것은 가정과 나라를 망치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률적으로 적당하게 노는 날을 주고 나머지는 실적 있는 일을 하게 하며 게을러서 고의로 일을 안 한 자가 있으면 벌을 가하여 일을 하게 하되 밥 먹고 잠자듯 하도록 습관화시켜야 합니다. 놀면 가정과 나라가 망하니까요.

4. 인권 존중입니다. 사람을 짐승 대우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러나 인권을 대우받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자처럼 폭력이 있고 짐승처럼 도덕성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권대우를 하겠습니까? 적어도 양심적이고 도덕성 있는 사람이 인권 대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5. 세금 정책입니다. 많이 가질수록 많이 내게 하고 많이 쓸수록 많이 쓴 값을 내게 하면 양극화도 해소되고 세금도 잘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갖고 많이 쓰는 것이 큰 덕이 되지 않도록 하므로써 물질적 부강이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6. 정치가는 반드시 교황을 뽑는 방식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사탕 발림 같은 유혹적인 공약도 안 할 것이요, 선거 운동의 부조리도 없을 것입니다.

7. 자립성 없는 노인이나 장애인들에 대한 부양 서열을 만들어서 국가는 그 책임을 마지막에 지도록 하여야 하고, 도움 받는 것은 크게 좋은 일이 아닌 줄 알도록(행 20:35) 계몽하여야 하며

8.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비생산적인 것을 다 죄로 규정하여 엄벌하여야 합니다. 담배, 도박은 비생산적인 것이지요. 도박이 비생산적이며 복권도 그럴 것입니다. 시간을 사용하되 그 시간의 값만큼 생산적 가치가 없다면 그것도 비생산적일 것입니다. 나라가 국민의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소비시키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라도 시원스러운 것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제108과 부부행복을 위한 권면 (엡 5:22~23, 28) 목록으로


2006년 5월 31일은 우리나라 지방 통치자를 선거하는 날인데 제가 새벽 6시에 기독교 TV방송을 들은즉 도봉감리교회 김진호 목사님의 “가정 행복 특히 부부 화합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설교를 잘 하셔서 제가 중간부터 끝까지 들었습니다. 부부화합이 잘 안 되는 분들이 계시면 꼭 그 설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www.obmc.org를 통하여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듣고 기억한대로 몇 가지를 여기에 기록합니다. 누구시든지 쉽게 접하여 교훈을 받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1. 부부의 생활을 무엇과 같다고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직종을 가진 분들에게 물어서 답변을 받은 말을 옮겼는데 이 내용은 부부 생활을 오래 안 한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줄 압니다. 요즈음 멋모르고 결혼했다가 울고 후회하고 이혼한 부부들도 있겠지요. 그래서 경험자에게 잘 배워 준비를 잘 하심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1) 작가에게 “부부생활이 무엇과 같으냐?”한즉 부부생활은 “희극과 비극의 시나리오 같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때는 기분이 좋으나 서로 싸울 때는 비극이란 뜻이지요.

2) 그 다음에 어떤 사업가에게 물은즉 “결혼은 투기 사업 같아서 잘 만나 잘 사면 이득이 있으나 잘 못 만나서 못 살게 되면 큰 손해 보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3) 군인에게 물은즉 “30년 전투하는 것 같았다” 하였으니 이 사람은 부부 화합을 위하여 30년간이나 작전 세우고 전쟁하듯 한 모양입니다.

4) 음악가에게 물은즉 “결혼은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화음을 만드는 것 같다” 하였고,

5) 약사에게 물은즉 “쓴 약, 단 약, 자극적인 약을 조제하는 것 같다” 하였으며

6) 기상 통보관에게 물으니까 “맑다가 구름끼다가 천둥번개하는 것 같다” 하였고,

7) 개그맨에게 물은즉 “신나게 웃기다가 혼나는 것 같다” 하였으니 이 일곱 사람 중에 비교적 무난하게 산 사람은 음악가인 것 같습니다. 이 뜻을 잘 이해하신다면 신혼 부부들은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부부가 행복하려면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과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을 서로 잘 알아서 쌍방이 다 노력을 하여야 하는데

1)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 ① 안정감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 생각을 첨부한다면 “사랑의 안정감, 보호의 안정감, 경제의 안정감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남편이 어떻게 하면 아내가 안정감을 못 느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말이 퉁명스럽거나 밖으로 많이 다니거나 생활비 같은 것에 책임을 못 다하면 그럴 것입니다. ② 애정 표현을 원한답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 등이겠지요. ③ 따뜻한 대화를 원하고, ④ 경제적 책임을 든든히 감당해 주기를 원하며(생활 격식 따라 다르겠지만) ⑤ 가정에 대하여 책임감 있게 노력하는 것을 원한다고 합니다. 경제성, 화합성, 책임성을 성실히 감당하셔야 하겠지요.

2)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할 때 ① 남편은 아내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가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많은 아내들이 남편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는 경우가 많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남편을 무시하는 여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편이 생활 대책에 힘이 없고, 하루도 빠짐없이 술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그 부인은 행상으로 1남 4녀를 교육시키면서도 그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가르친 부인이 있으니 바로 대구 남일 교회 고정옥 권사님이십니다. 그 분의 자녀들이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권사님은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마음 쓰시는 것이 성인에 가깝습니다. 제가 대구 남일 교회 14년을 시무할 때 교회와 교역자를 잘 섬기셨는데 제가 남일 교회를 떠난 후 25년째 되는데도 지금까지 저의 생일이나 명절에 저를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저도 저의 가족 다음으로 기억하는 분이 고정옥 권사님 가족이고, 그 뒤를 이어 기억하는 분이 교인들과 함께 또 몇 분 있습니다. 여하튼 술만 잡수시고 살림을 모른 분이라도 남편이기 때문에 존경한 것입니다. 모든 남편들은 자신에게 부족이 있어도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무시하는 아내를 알면서 “사랑합니다”라고 하였다면 그것은 외식일 것입니다. ② 성적 욕구에 불충족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성적 욕구에 불만을 갖게 되면 생리적 리듬이 깨지고 정상적 생활의 능률을 저하시키며 많은 스트레스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거절한다면 그 부부는 깨진 그릇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③ 남편은 아내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비용 없이 야외에 나가는 행사가 자주 있습니다. 구경도 하고 좋은 음식도 먹고 목욕도 하는데 제 아내는 그것을 사양합니다. 늙었기 때문에 젊은 분들과 어울리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될지는 모르나 혼자 가는 남편은 서운한 느낌을 갖습니다. ④ 아내는 남편의 자랑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전문가의 통계로 조사한 것입니다. 아내가 특별하게 잘 하지 않아도 있을 때 있고, 할 때 하기만 하면 자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100%는 아니라도 70%만 하면 자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⑤ 가정에 충실해 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집안 일을 책임지고 잘 하는 아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존여비의 시대는 약 20년 전에 지나갔습니다. 아무쪼록 부부 행복에서 가정 행복으로 발전하시기 바랍니다.




15. 질병과 죽음에 대한 말씀

제109과 처음 믿는 환자에게 (막 5:25~34) 목록으로


1. 평소에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는 전도를 받으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또 하나님을 믿을 필요를 느끼시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겠다”는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배가 고파야 음식이 당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겠다”는 환경에 이를 때가 있는데 이것은 나의 병고가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때를 정하시고 병고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주 만상이 사람의 원인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통치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귀하를 만세전에 택하셨다가 때가 되매 부르신 것인데 그 부르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할 필요를 느끼게 하시기 위하여 질병을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처음 믿을 때는 특수한 동기를 갖습니다. 전통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지만 고난이나 특별한 동기로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 50:15에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셨고, 또 마 11:28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행 17:22을 보시면 “사람마다 종교성이 있다” 하셨는데 이 뜻이 바로 연약한 인생이 전능자를 의지하려 하는 마음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얇은 종이가 벽에 붙으면 뚫릴 수도 없고 찢어질 수도 없는 것처럼 연약한 인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스스로 강할 수 있는가요? 인간은 피조물이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강할 수 없고 자기 뜻대로 무엇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법관이 돈도 권세도 있었지만 자기 생명을 붙들 능력이 없어서 죽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위문을 하니까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는 법인즉 그리 알라”하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법이나 권세가 생명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 행 17:25~26을 보시면 “하나님은 생명의 주로서(행 3:15)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고.......또 생명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꼭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이시고, 또 모든 생명의 주로서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성경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병을 고친 사례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렸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부활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저희들은 하나님의 이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주가 돌고 있고, 많은 생명체들이 인간의 간섭 없이 살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씨 하나가 땅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꼭 같은 농장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곡식은 씨에 따라서 맛이 다르지요. 저는 이런 조화를 다 하나님의 창조로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음을 깨우쳐 드리는 것입니다.

5.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의 능력을 어떤 자에게 주십니까?

1)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십니다(시 107:9). 요 5:5을 보시면 38년간 중풍병으로 고생한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네가 낫고저 하느냐?”하시고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하신 일이 있었고,

2)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구하라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7:7). 마 15:22을 보시면 한 여인이 “자기 딸의 귀신병을 낫게 해 달라”고 구한 일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두 차례나 거절하셨지만 계속 구한즉 오히려 칭찬하시고 고쳐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알고 지나가셔야 할 것은 모든 병자가 다 고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병을 허용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목적과 관련하여 은혜를 베푸실 대상이 있고, 거절하실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출 33:19). 하나님이 거절하셨다가도 간청이 지나치면 주시는 섭리도 있으니 그것이 가나안 여인의 경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병자가 왔지만 다 고쳐주셔서 그 시대에 병자가 없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문내지 말라”(막 5:43) 하셨고, 특별한 사람만 고쳐주신 것입니다. 제가 귀하를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것은 귀하가 특별한 대상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병 고침 받을 자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본문을 보시면 12년 혈루증 든 여인이(사람의 힘으로 못 고친 자임) 예수님이 “능력 있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 병이 고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확신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4) 또 어떤 경우는 중풍병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람들이 그를 들 것에 태워 메고 와서 사람들이 많은 중에 지붕을 뚫고 그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오게 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는 말씀이 있고(막 2:1~5), 또 중요한 것은

5) 사역자들의 기도입니다. 약 5:14에 보시면 “교회의 장로들(지도자)을 청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는 가까이 와서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마 8:5~13). 떨어져서 기도해도 상관없습니다. 꼭 믿기만 하십시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고(시 11:6),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시며(마 16:16)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내 죄를 대속하신 것을 믿으시고(요 1:29) 간절히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6.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은즉 그 결과로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제110과 초신자의 병상에서 (요 8:32, 시 42:5) 목록으로


1. 귀하의 과거의 인생은 어떤 환경에서 살아오셨든지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삶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곧 변화의 삶입니다. 성경에는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고(엡 4:24), 또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12:2). “새 사람을 입는다”는 뜻은 자기라는 인생을 예수님의 종으로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예수님 뜻, 또는 성경적으로 바꾸는 것이요, “변화를 받으라”는 뜻은 롬 12:2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되라” 하셨으니까 믿지 않는 생활 풍속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 없이 산 것이고, 변화된 생활은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것이니까 상당히 달라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한계가 있고, 그 위에 지배자가 계시다는 것을 대단히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본래는 인생이 지각이 있을 때 만물은 누가 지었고 인생의 시작은 누가 하였으며 사람이 왜 고달프게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지를 아셨어야 하는데 무심코 살아오다가 한계를 느끼니까 전능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낙망할 일과 불안한 일을 만난 것임)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을 바란다”는 뜻은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는 뜻이고, 또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써주셔서 “가까이 임하시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2절에도 보시면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하셨고, 또 107편 9절에서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연약하을 깨달으셨을 때 힘껏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유대인 총독에게 “진리에 속하지 않으면 진리를 모른다” 하시니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뜻은 “사람이 진리를 믿어야 안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보이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인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생겼지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도 알아야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를 안다”는 뜻은 예수님을 하나님(또는 하나님의 아들)으로 믿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14:6에 보시면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제가 왜 이렇게 진리를 말씀드립니까? 우주와 만물과 인생이 다 진리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힘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이 다 진리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가 병을 자청하여 만든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그 질병을 지배하였습니까? 신 28:60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게 들어붓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살고 있음을 아셔서 하나님 앞에 바른 태도를 취하시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곧 믿음의 처방입니다.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힘으로 숨 쉬고 있고, 자연도 하나님의 힘으로 보존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이 인생에게 병을 주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때리는 목적으로도 주시고 깨닫게 하는 목적으로도 주십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깨닫지 않습니까? 질병으로 유익하게 하시는 목적도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고 돈 있으면 죄 짓는 일에 능숙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 짓지 못하고 겸손하게 하시려고 병을 주시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이적을 나타내어 하나님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요 11:4을 보시면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 하였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시고 죽도록 내버려두신 다음에 다시 살려주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과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알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병으로 죽게 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섭리”도 있는 것입니다(왕하 13:14). 이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병을 고친다는 병원에 장례처를 마련한 것을 보십시오. 그 장소가 성황을 이루지 않습니까?

4. 그러면 병 중에 있는 성도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앞에 옳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치 신부가 신랑 앞에 설 때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 것처럼 병자가 깨달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 확실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 기도, 말씀, 충성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도록 노력하십시오.

2)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소원대로 안 하실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너무 충성된 종이라 세상에 두시기 아까워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