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7분설교 12집

7분 설교집(12)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1. 전도와 관련 있는 말씀 9


제1과 기독교를 알리는 전도 (행 2:29~36) 9 바로가기

제2과 거저 받고 거저 주라 (마 10:7~10) 11 바로가기

제3과 궁극적 구원의 말씀 (딤후 4:18) 13 바로가기

제4과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함 (살전 2:13) 15 바로가기

제5과 소명을 이해함 (마 22:9~14, 롬 8:30) 17 바로가기


2. 성경, 족보, 하나님, 예수님 19


제6과 성경으로 터득할 것들 (딤후 3:15~17) 19 바로가기

제7과 족보,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창 5:1~32) 21 바로가기

제8과 하나님을 본받으라 (엡 5:1~14) 23 바로가기

제9과 예수님의 신성 증거 (요 1:1~4) 25 바로가기

제10과 말과 일에 능하심 (눅 24:19~20) 27 바로가기


3. 절기와 관련있는 말씀 29


제11과 확실한 새출발 (히 3:14) 29 바로가기

제12과 성찬과 새출발 (눅 22:7~20) 31 바로가기

제13과 부활을 믿게하는 이적들 (마 12:38~40) 33 바로가기

제14과 부활 주일 묵상 성구 (골 2:6~3:4) 35 바로가기

제15과 부부화합의 복 (벧전 3:1~7) 37 바로가기

제16과 자녀 교육의 목표 (잠 22:6) 39 바로가기

제17과 자녀에 대한 책임 (시 127:3~5) 41 바로가기

제18과 아하시야의 불행 (왕하 1:1~4) 43 바로가기

제19과 감사에 대한 말씀들 (고후 4:14~15) 45 바로가기

제20과 성탄절에 묵상함 (눅 1:24~38) 47 바로가기


4. 하나님의 섭리 49


제21과 하나님의 통치 (시 93:1~5) 49 바로가기

제22과 하나님의 통치 역사 (시 103:19) 51 바로가기

제23과 주밀한 섭리 (마 10:29~31) 53 바로가기

제24과 엄연한 사실 (롬 1:18~20) 55 바로가기

제25과 하나님의 보호 섭리 (행 27:20~26) 57 바로가기

제26과 받은 은혜의 공통점 (창 28:15~22) 59 바로가기

제27과 안된 일 같으나 유익함 (삿 3:1~6) 61 바로가기


5.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63


제28과 내게로 오라 (마 11:28~30, 벧전 3:15~16) 63 바로가기

제29과 고난과 신앙 (시 30:1~12) 65 바로가기

제30과 힘이 되신 하나님 (시 18:1) 67 바로가기

제31과 고난으로 받는 축복 (히 12:3~13) 69 바로가기

제32과 요셉이 바로 앞에 섬 (창 41:14~15) 71 바로가기

제33과 요셉을 높이신 의미 (창 41:37~43) 73 바로가기

제34과 하나님의 보호 사례 (시 91:7) 75 바로가기

제35과 5병2어의 이적 (요 6:3~15) 77 바로가기

제36과 불안한 세상 (벧후 3:10~13) 79 바로가기

제37과 새 힘을 얻자 (사 40:27~31) 81 바로가기


6. 도덕적 생활과 관련 있는 말씀 83


제38과 진실을 점검합시다 (마 5:37) 83 바로가기

제39과 외식을 피합시다 (마 23:25~28) 85 바로가기

제40과 성도에게 항상 있을 것 (고전 13:13, 살전 5:16~18) 87 바로가기

제41과 무엇을 가지고 나갈까 (미 6:6~8) 89 바로가기

제42과 거룩과 의와 선의 묵상 (롬 7:12) 91 바로가기

제43과 기독교적 신앙 생활 (시 73:23~28) 93 바로가기

제44과 말 잘 하기를 기도함 (사 50:4) 95 바로가기

제45과 자랑에 대한 말씀 (렘 9:23~24) 97 바로가기

제46과 의인과 악인의 분별 (말 3:13~18) 99 바로가기

제47과 두 종류 (계 22:10~12) 101 바로가기

7. 은혜를 사모함에 대한 말씀 103


제48과 경계로 주신 말씀 (출 17:1~7, 고전 10:5~11) 103 바로가기

제49과 경성하는 기도 생활 (눅 12:35~40) 105 바로가기

제50과 눈물을 흘리심 (요 11:32~35) 107 바로가기

제51과 마음을 넓히자 (고후 6:11~13, 시 119:32) 109 바로가기

제52과 다섯 가지 손의 역할 (출 17:8~16) 111 바로가기

제53과 어찌하여 나갔더냐 (마 11:7~10) 113 바로가기

제54과 존귀의 은혜 (빌 2:5~11) 115 바로가기

제55과 보화에 대한 묵상 (마 13:44) 117 바로가기

제56과 보화의 3단계 (마 13:44, 막 4:26~29) 119 바로가기

제57과 범죄 방지 조건 (삼하 11:1~4) 121 바로가기

제58과 꿈을 꾸고 생각함 (욥 33:13~18) 123 바로가기

8. 신앙 성숙과 자유에 대한 말씀 125


제59과 변화를 받읍시다 (롬 12:2) 125 바로가기

제60과 광야와 신앙 (1) (출 19:1~6, 창 28:10~22) 127 바로가기

제61과 광야와 신앙 (2) (마 4:1~11, 3:1~4) 129 바로가기

제62과 경건의 연습 (딤전 4:7, 행 10:1~6) 131 바로가기

제63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눅 13:23~24) 133 바로가기

제64과 죽은 자, 병든 자, 산 자 (마 11:2~6) 135 바로가기

제65과 요셉의 신앙 (창 37:5~11, 50:15~21) 137 바로가기

제66과 신앙 생활의 즐거움 (히 13:17) 139 바로가기

제67과 신앙의 인맥(人脈) (히 13:7~8) 141 바로가기

제68과 지혜로운 생활 (엡 5:15~21) 143 바로가기

제69과 성도의 자유 (갈 3:23~29) 145 바로가기

제70과 자유를 체험합시다 (요 8:32) 147 바로가기

제71과 자유를 누립시다 (갈 5:1) 149 바로가기


9. 기도와 관련 있는 말씀 151


제72과 성도의 소원 (요삼 1:3~4) 151 바로가기

제73과 기도 응답의 사례들 (시 116:1~2) 153 바로가기

제74과 매일 드리는 기도문 (2006. 3. 8. 새벽) 157 바로가기

제75과 한 가지만을 구함 (시 27:4) 161 바로가기


10. 사명자에 대한 말씀 163


제76과 성공적인 삶 (욥 8:5~7) 163 바로가기

제77과 목회자의 조건 (딤전 6:3~12) 165 바로가기

제78과 목사의 사명 (딤전 6:11~12) 167 바로가기

제79과 부끄럽지 않은 생활 (빌 1:20~21) 169 바로가기

제80과 목사된 분들에게 부탁함 (히 13:7~9) 171 바로가기

제81과 목사 권면 (빌 1:20~21) 173 바로가기

제82과 젊은 목사님들에게 (딤전 4:11~16) 175 바로가기

제83과 다 이루신 뜻 (요 19:28~30) 177 바로가기

제84과 과제를 깨닫자 (눅 18:18~23) 179 바로가기

제85과 인생 보람 (창 47:8~12) 181 바로가기

제86과 성도의 사명 (행 2:43~47) 183 바로가기

제87과 화목하는 직책 (고후 5:16~19) 185 바로가기

제88과 성도의 3대 사명 (행 2:40~47) 187 바로가기


11. 교회 개혁과 관련 있는 말씀 191


제89과 거룩한 교회를 이루자 (엡 5:26~27) 191 바로가기

제90과 교회를 보는 눈 (삼상 2:3, 16:7) 193 바로가기

제91과 진정한 교회 (엡 5:27) 195 바로가기

제92과 원조 초대 교회 (행 2:40~47) 197 바로가기

제93과 안디옥 교회의 특징 (행 11:19~26) 199 바로가기

제94과 목회자의 자유와 권위 (딤전 4:12~13) 201 바로가기

제95과 교회의 표준과 요건 (딤후 2:1~7) 203 바로가기

제96과 교회의 순결 (엡 5:27, 딤전 3:15) 205 바로가기

제97과 생활 예배와 공 예배 (요 4:24) 207 바로가기

제98과 좋은 교회 되는 방법 (딤전 3:14~16) 209 바로가기

제99과 교회 운영의 문제 (행 9:31) 211 바로가기


12. 사회 정치와 관련 있는 말씀 213


제100과 정치인들을 위한 기도 (딤전 2:1~4) 213 바로가기

제101과 통치자가 시행할 것 (잠 14:34) 215 바로가기

제102과 정치하는 지혜 (딤전 2:1~2) 217 바로가기

제103과 천륜을 어기는 정치 (삼상 8:6~7) 219 바로가기

제104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 8:3~11) 221 바로가기


13. 윤리 문제와 이단 223


제105과 생명보다 중한 것 (막 8:35~37) 223 바로가기

제106과 인간 생명 윤리 (레 17:4, 신 12:23) 225 바로가기

제107과 이단에 대한 처방 (딛 3:10~11) 227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2006년 5월 10일은 제가 큰 해방감을 느낀 날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0년 목회하면서 설교에 사용하였던 기본 노트를 다 정리하여 출판물이 되도록 바꾸었으므로 과거에 사용한 설교 원고를 정리 안한 것이 없도록 하는 작업이 완료된 것인데 이것은 열왕기서 강론을 다 정리하므로 끝내게 된 것이요, 또 한 가지는 틈틈이 정리한 7분 설교 12집도 같은 시기에 끝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집은 제가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를 쓰면서 틈틈이 묵상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특별한 목표를 두고 쓴 것은 아닙니다. 1년쯤 모은 재료가 100여 과목 되므로(강론에 따른 설교는 강론집에 첨부되었음) 그 내용의 취지에 따라서 분류한 다음 적당히 편집한 것입니다. 중간 제목과 각 설교문의 제목을 보시고 참고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앞으로 또 100여 과목을 모아서 13집을 만들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대단히 힘들고 피곤한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이 건강을 더하여 주신다면 신약 강론 중 마가복음을 공관복음에 합병하여 설명하고 따로 쓰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마가복음 강론을 쓸 계획이고, 그 다음에 구약에서 쓰지 못한 몇 권의 말씀을 더 쓸 계획입니다. 그 외에도 목회 회고록이나 개혁 교회 헌법 초안 또는 기독교 신앙 생활의 결론에 해당하는 짧은 글도 쓰고 싶은 의욕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고 분주한 세대 속에서 어떻게 하면 신앙 생활을 단순하게 잘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저의 고민이자 마지막 과제입니다. 제가 쓴 글의 특징은 다른 분의 더 좋은 말씀들을 두루 섭렵하지 못한채 성경 본문 중심과 나만의 묵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넓고 깊은 것이 없이 평범하고 초보적인 설명뿐이란 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성도님들도 자기 묵상을 많이 남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말씀에 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05. 6. 30.


저자 지 영 근


1. 전도와 관련 있는 말씀

제1과 기독교를 알리는 전도 (행 2:29~36) 목록으로


“기독교를 알리는 전도”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하였습니다. 전도는 길게 하기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하지만 꼭 알려야 할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알리는 최소한의 내용”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저는 전도의 사명을 가진 자로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도의 내용이 전도 받을 대상에게 충실하게 증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십자가 불빛이 꽃밭을 이루지만 그것은 “교회가 있다”는 표식일 뿐 전도의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좋은 전도지를 만들어서 문전마다 뿌리는데 누가 그것을 갖고 들어가서 꼼꼼히 읽습니까? 거의 읽지 않으니까 사실상 기독교의 내용이 전도 대상의 마음에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닿게 해야 전도가 완성되는 것인데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끝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난 당한 배가 표류하는데 구조선이 찾아가서 줄을 던졌습니다. 조난자가 그 줄을 받고 자기 배에 걸면 구조를 받겠지요. 그런데 “나는 당신의 구조가 싫소”하고 받은 밧줄을 거부했다면 그는 구원 선택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런 일과 관련하여 오늘의 전도 실태는 밧줄을 난파선까지 던지지 못하고 구경만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전도 계획을 세워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알리는 최소한의 전도 메시지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데는 변증학적 논리가 있지만 전도는 토론이 아니니까 그 말을 다 할 수 없겠지요. 일단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였을 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하고 되물어 왔다면 “그 하나님은 창조자요, 만유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자이시고 또 심판자이십니다”라고 알려야 할 것입니다. “만물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또 우주 만상이 어떻게 운영됩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네 가지 사역만큼은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 자신은 만물의 출처와 통치를 모르니깐 허무맹랑한 말로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당신은 타락자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했다면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어올 수도 있겠지요. 이 때에 구원은 죄 지은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 갈 것을 영원한 생명의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시는 일을 계획하셨는데 타락한 죄인을 거저 용서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 없는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대신 벌을 받게 하시고 구원받을 자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 경위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본질상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것은 인간을 대표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분이 죄 없이 돌아가신 것은 죄인들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며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리를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행 4:12, 16:31). 전도자가 여기까지는 일깨워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섭리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했고, 구원의 의미와 천당, 심판과 지옥도 말했으니까 전도로서의 필요한 증거는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이 내용이 전도 대상의 마음에 한 번은 부딪혀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교회에는 왜 나오라고 하느냐?”하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성경이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 절대 진리가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질문이 들어올 때 답할 준비를 갖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교회에는 왜 나오라고 하느냐? 한다면 “예수님이 교회를 신앙 생활 잘 하는 기관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집을 짓고 사는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바람을 막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인 것처럼 신앙 생활도 죄악과 유혹의 역사를 방지하고 하나님을 배워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관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고,

2)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진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거기에 절대 복종하라고 하느냐? 한다면 이것도 대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보시오 하나님은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입니다. 어찌 자기의 뜻을 문자로 기록하시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동반하시는데 그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지배하시기 때문에 특정인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씀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으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고, 이 말씀은 신비하게도 구약이 3500년, 신약이 2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가감없이 보존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의 예언이 역사적으로 틀리거나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의로운 변화가 없다면 이 성경은 벌써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간에 핍박도 많았지만 성경이 보존되는 것을 보아도 신의 말씀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진리로 믿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2과 거저 받고 거저 주라 (마 10:7~10) 목록으로


초대 교회 당시에 복음은 “거저 받고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밑천 들여 복음을 받고 또 대가를 주고 병 고친 사례가 없으며 사례물을 구한 예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나 선교 형편은 어떻습니까? 완전히 산업화 되어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형태를 원점으로 돌리는 노력을 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목사 청빙에 대한 교회 헌법이 교역자의 생활비를 주고 복음의 일을 전담케 하였는데 그 제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가족에 대한 짐을 교회가 진 사례는 없고 개인 전도자에 한하여 특별 섭리로 보장해 주신 사례는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에 취직하면 먹고 살 수 있고, 복음을 상품화 시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잔꾀가 발생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의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거저 받고 거저 주는 식으로 또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딤전 6:5),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만(마 16:24) 교회의 산업화나 복음의 상품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1. 교회에 일이 많고 전문 사역자가 필요하여 일군을 두고 생활비 주는 제도를 없애면 좋지만 그런 제도가 있다 해도 부작용만 없으면 좋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합리한 관계에서 갈등하는 일, 성직을 직업화하여 치부하는 일, 교회를 생활 대책소로 의뢰하는 일만큼은 없어져야 하고, 또 교회 행사나 단체를 상대로 부업이나 직업을 갖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산업화 경향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면 전도, 교육,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하시겠지요. 국내 전도는 성도 개인이 빛과 사랑으로 하면 되고, 국외 선교는 사명 있는 가정이 이민을 가거나 사업차로 외국에 가서 살면서 전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신학교 교육은 교파적으로 학자를 지명해 놓고 그에게 일정한 과목을 배웠을 때 성직자나 강도자의 자격을 주면 될 것입니다. 아무도 복음을 인하여 돈을 벌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혹 신학자가 되고 싶으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공부해야 하고, 먹고 살아가는 물질 생활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사역이나 성직이나 교회 생활이 성도나 사명자에게 허탄한 것들을 제공하는 소재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습기를 제거하면 곰팡이가 발붙이지 못하는 것처럼 교회나 성직이나 영적 신앙 세계에서 반드시 습기 같은 것을 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본문 7절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으니 이 뜻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고, 다음에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능력 전달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나 은사 전달을 할 때는 일단 대가성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장군이 문둥병 고침을 받았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사례물을 구하였다가 큰 책망을 받고 자신에게 문둥병이 옮겨진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왕하 6:26~27).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을 받아 은혜를 전달한 자는 절대로 은혜의 대가를 구하여 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 강사가 사례비를 구하여 “내가 이 돈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구제를 합니다”라고 하였더라도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가 주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라는데 있고 신령한 은혜를 상품화 하는데 있습니다. 잠 17:16을 보시면 “지혜를 사고 팔지 말라” 하셨고, 잠 23:23에서는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 하셨으며 행 8:23에서는 성령을 돈 주고 사려한 자에게 “악독을 행하는 자라” 하시고 저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그러면 전도자의 생활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9~10절을 보시면 “전대나 은금이나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준비하지 않은채 다니면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그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이 전도자가 주머니를 갖고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그날 그날 의식주로 끝날 뿐 더 모을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방법대로 하시다가 부업을 하여 다른 사람의 생활비를 도운 일까지 있었습니다(행 20:34). 초대 교회 당시에 선교사 파송은 단신 사역자들을 파송하였고(예수님 때도 그러 하였음. 눅 5:11, 마 8:21~22), 그들은 선교 사역 중에서 성도들이 돕는 협조를 받았으며(행 16:15, 롬 16:2~4, 빌 4:15~19)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정통성 있는 사역자를 보냈다는데 의미가 있을 뿐 고정적 생활비를 보냈다는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신 사역 범위 안에서 그의 생활을 섭리적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섭리적이란 그때 그때 영접하는 자와 공급하는 자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5. 저는 요즈음 정년이 가까워옵니다만 “무보수로 교회를 시무하시요”하면 건강한 동안은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연령층이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역자가 가족 부양의 책임을 갖고 목회를 해 보세요. 물질과 가족에게 이끌리는 목회를 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작용이 따를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부흥이란 명목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니 들으러 오라”는 문서가 많이 오는데 많게는 35만원까지 전부 강의료를 갖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은혜를 사고 또 팔라는 뜻이 아닐까요? 교회 부흥되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쯤 되면 물질에서 초월해야 되고 또 “공짜로 가르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표현이 지나쳤다면 이해하십시오. 다만 교회나 진리 사역에서 진리를 팔고 사는 듯한 물적 거래가 없어져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3과 궁극적 구원의 말씀 (딤후 4:18) 목록으로


장로 교회의 교리로서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있고, 5대 교리 중 다섯 번째 교리가 “궁극적 구원의 교리”인데 이 뜻은 “궁극적 구원의 보장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하여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믿음 생활에 들어왔으면 모든 역경을 극복하도록 섭리하셔서 반드시 구원받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설령 믿음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자라도(유아 또는 저능아 등) 하나님의 선택 섭리에 해당된 자이면 궁극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제가 쓴 “기독교 신앙 백과” 제157번 “칼빈주의 5대 교리” 제목에서 부분적으로 말씀드린 바가 있으나 여기서는 궁극적 구원의 말씀을 성경에서 직접 확인하는데 의미가 있고, 또 교리 지식을 연구하는 이유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희망을 갖고 흔들리지 않아야 할 용기를 갖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벧후 1:10을 보시면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않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궁극적 구원의 도리를 믿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견고함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성경 요절을 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궁극적 구원을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이는 마치 왕이 왕자 하나 이상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와 영광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으로 말씀드리면 롬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셔서 많은 형제 중(예수님으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 자신이 뜻하시는 일이면 꼭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원 섭리를 나타내시게 된 것입니다. 민 33:19, 롬 11:29에서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신 분”이시며 눅 14:28에서는 “예산, 경영에도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선택받은 인류에게 구원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전능하신고로 반드시 구원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원시 복음인 창 3:15(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함)에 나타났지만 시 51:8에서도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런 약속에 대하여 구원을 안 하시면 하나님은 신실치 못한 분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고(마 8:48), 또 참되신 분입니다(마 17:3). 고전 10:13에서도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신다”고 약속하신 구원을 꼭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에 의하여 그리 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다른 자에게 뺏기시는 분이 아니시고(사 42:8, 12, 48:11) 또 자신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하시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렘 14:21). 만일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구원을 안 하신다면 자신의 뜻에 위반되고 약속에도 위반되며 또 영광에 위반되기 때문에 꼭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성경 말씀을 소개 하겠습니다. 욥 23:13~14절에 보시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시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하셨고, 시 41:12에서는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하셨으며 또 시 138:8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하셨고, 사 41:9에서는 “저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일정하신 뜻을 변하시지 않고 완전한 중에 붙드시며 또 싫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궁극적 구원을 나타내셨고, 신약에서는 요 14:14에서 “내가 주는 물(성령의 역사를 물로 비유하신 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하셨고, 요 5:24과 6:47에서는 “믿는 자는 구원을 얻었다” 하셨으니 이는 구원이 이미 확보된 것을 뜻하는 것이며 요 6:51에서는 구원의 은혜를 “산 떡”이라 하시고, “이것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요 10:28~29에서는 “내가 문이니 들어가며 꼴을 얻고 나오며 꼴을 얻는다” 하셨는데 양이 목장 안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안전하지만 혹 그 문을 나온다 하여도 생명을 유지할 꼴이 있고, 또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것인고로(요 10:17, 눅 15:1~10) 구원에 동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요 13:1에서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셨고, 롬 8:33~39에서는 “의롭다 하신 것을 정죄할 자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도 없으며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로도 믿음을 저해할 수 없으며…아무 피조물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롬 11:29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셨고, 엡 5:1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하셨고, 빌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확신한다” 하셨으며 딤후 4:18에서는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 하셨고, 히 9:14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어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셨으며 히 10:14에서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하셨고, 요일 5:11, 13에서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만한 요절만 알고 계셔도 넉넉하리라고 믿습니다.

제4과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함 (살전 2:13) 목록으로


바울사도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증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성도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받은 것은 정당한 것인데 그럴 경우에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함”으로 정한 것입니다. 사 55:11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하셨고, 따라서 히 4:12에서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 말씀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웠었다”고 하였습니다(눅 24:32).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내가 영향을 많이 받은 말씀”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목이 길어서 “영향을 받은 말씀”으로 줄이려고 한즉 “다른 말씀에는 영향을 못 받았는가?”하실까봐 제목 정하는데 마음을 썼습니다. 모든 말씀이 다 신앙의 양식이고 영향을 주셨지만 특별하게 생활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준 말씀을 몇 가지만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말씀에 속박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제가 청년 시절에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몹시 거친 말로 반항하고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특별 기간이었는데 그런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나서 가까운 기도처에 간즉 아는 전도사님이 사연을 들으시고 눅 22:51 “이것까지 참으라”는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격동이 심한 환경에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참지는 못하지만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2. 마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인데 이 내용은 시 22:1에서 다윗이 절규하며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한 내용인데 제가 은혜를 처음 받을 당시에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많은 눈물을 쏟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계속되면 좋을 터인데 지금은 그런 감정이 거의 없고 그런 줄만 알고 있는 실정입니다. 좀 더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고전 15:8~9에서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만삭되지 못한 자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하신 말씀은 목사된 후 31세 때에 읽고 “겸손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교회 임지를 부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는데 부탁없이 네 교회나 전임을 하였고, 동역자들 사이에 나를 낮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가 이 말씀의 역사를 받는다면 “나를 OO되게 해 주시오”하거나 명예욕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4. 30대 초반에 남일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신 마 8:20을 증거하고 그때부터 교회가 제공하는 사택에서만 살기로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발전하여 주택 소유하기를 피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또 바울 사도가 셋집에 사신 것을 알았고(행 28:30), 또 집 가진 동료자들이 자기 집에서 살면서 목회하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계속 주택 소유를 피해 왔는데 예수님과 바울 사도는 단신이란 차이가 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만일 집을 소유할 형편이 된다면 아내의 명의로 할 생각입니다.

5. 요 3:30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신 세례요한의 정신에 감동을 받고 “언제라도 교회 부흥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고, 교인들이 싫다하기 전에 움직였으며 57세에 일반 목회를 중단하였습니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교역자 이기주의는 이 말씀에 배치되지요. 교역자는 교회를 위한 희생의 역군이 되어야 하고 교회도 교역자 섬기는 책임을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사 41:10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싫어 버리시지 않는다”하신 말씀과 요 13:1의(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하신 말에 큰 감동을 느끼고 있고,

7. 또 “자비와 은혜가 많으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고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시며 영원히 노를 품지 않으신다”(시 103:8~10, tm 9:13, 벧후 3:9)는 말씀에 큰 감동과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8. 막 8:3에서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이 3일간 먹지 못한 것과 그들이 멀리서 온 것과 그대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시고, 7병2어의 기적으로 먹여주신 사실은 예수님의 주밀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9.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하신 말씀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후 13:8)하신 말씀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의지를 항상 일깨워주시는 것이요,

10.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신 말씀과(마 4:4) 행 5:20에서 “생명의 말씀을 다…말하라”하신 “다”字 때문에 강해 설교와 성경 요절 연구집을 쓰게 되었고, 그 책이 기성 교회의 목회를 못한 산물이 되었습니다.

11.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하신 말씀 때문에 제가 음식 남은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눅 19:17을 보시면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해라”하신 말씀이 있는데 저는 이 뜻으로 작은 종이 한 장, 물 한 방울에도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도 작은 것부터 충성하면 많은 것도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은혜를 적중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12. 요즈음에 와서는 용서의 신앙이 조금 발전했습니다. 남의 죄를 용서하고 미운 자에게 축복해야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 요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줌같이”하신 주기도문과(마 6:12) 욥 42:10에서 “욥이 벗들을 위하여 빌매 하나님이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는 말씀이 저에게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총 절수는 31,173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말씀으로 감화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제5과 소명을 이해함 (마 22:9~14, 롬 8:30) 목록으로


“소명을 이해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구원의 서정(절차)을 말씀드림에 있어서 “소명의 뜻과 문제”를 자세히 설명 드린 문서가 없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충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의 절차를 말하라”하면 중생, 소명,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어린이 교육 자료 92과와 핵심 설교 134과(구원의 섭리)와 기독교 신앙 백과 101과(구원 받는 절차)에 수록되었지만 소명에 대한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14절에 대한 마태복음 강론도 살펴보십시오.

1. 소명이란 하나님이 구원의 길에 오르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전도자를 통해서 “예수 믿으시오, 교회에 나오시오, 죄사함 받고 영생 하시오”하는 권면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혹 지각 없는 대상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절차로 이행된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소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본문의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 관계된 내용이 바로 14절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입니다. 마 22:1~14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과정에 관계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데 본래 비유는 100% 다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시려는 취지에 대하여 이해를 돕는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하셨으니 여기의 임금님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을 뜻하며 천국은 구원이고, 잔치는 영적 축복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성도를 신부로 비유하시지 않고 잔치에 초청받아 왕을 알현하는 대상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2:3, 9에 보시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오라”고 청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소명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시행입니다. 3절의 “먼저 청함 받은 사람”은 유대인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들에게 혼인 잔치에 참여할 우선권을 주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적 은혜의 축복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배척, 능욕하고도 부족하여 십자가에 죽였으니 이것은 우선적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에 자리가 많이 남았지요. 왕은 이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우게 하였는데 그들이 “사거리 길에서 만나는대로(선택 여부를 가리지 않고) 청함 받아 온 사라들”로써 곧 이방인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소명을 받을 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같은 방법으로 초청되었지요. 그런데 잔칫집에서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잔치 음식만 겨우 맛보고 예복 없이 쫓겨난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비유한 것이고(히 6:6), 예복을 준비하여 왕을 만난 사람만 구원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롬 11:29).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선택자와 중도 탈락자가 다 포함된 것이고,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는 외소 또는 일반적 소명이라 하여 잔칫집(교회)까지는 왔으나 구원받을 믿음을 갖지 못한채 탈락될 자들이고, 또 하나는 내소 즉 유효적 소명이라 하여 선택 받은 자(구원 대상)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시려면 하나님이 지상 교회에 외식자들을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마치 12제자 속에 가룟유다가 있는 것처럼 또 농장에 곡식만 자라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용납하신 것처럼(마 13:14~30) 여기에서 가라지는 곡식 보호 차원에서 그대로 두신다 하셨고(29절),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부정적으로 기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악인도 쓰심에 적당하게 하셨다”(잠 16:4)는 말씀처럼 섭리적 용도가 있었고, 또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마 13:47~48을 보시면 “천국은 각종 물고기를 그물로 모은 다음 거기에서 쓸 것을 선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으는 소명과 구원 받을 믿음을 갖게 하는 소명이 하나로 된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가 보면 신부를 데리고 오는 안내자와 신랑을 데리고 오는 들러리가 있지요. 그 들러리는 혼인이 성립되었을 때 다 물러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구원의 길로 안내할 때 외식자들을 이용하여 쓰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쓰냐고 하시겠지요. 가룟유다처럼 쓰시고 바리새인들처럼 쓰시는 것이겠지요. 바리새인들이나 유다가 있었기에 예수님이 그들의 배척을 받아 돌아가신 것이니까요. 따라서 내소자가 외소자의 안내로 교회에 올 수도 있겠고, 또 택한 백성이 외식하는 교인의 부족한 면을 보고 더 각성하여 성화에 이르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구원의 의미와 성도의 본분에 적중하지 못하면서 열심내는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허탄한 것에 목적을 두고 열심 내는 것이지요. 그런 열심이 교회 부흥에 유익을 주고 택한 백성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자는 허탄한데 뜻을 두는 자가 아니니까요(시 24:4). 따라서 그들의 열심이나 봉사가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세적 축복의 맛을 보는 정도에서 그치겠지요.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하여 줄기와 잎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즉 내소 받은 성도를 인도하시는 차원에서 외소 받은 자들을 쓰시는 섭리가 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명은 하나님 앞으로 불러오는 것인데 잔치석까지 올 자와 궁극적 구원에 이를 자로 분류된다 할 것입니다.

2. 성경, 족보, 하나님, 예수님

제6과 성경으로 터득할 것들 (딤후 3:15~17) 목록으로


성경과 성도와 관계된 말씀을 많이 드렸고, 또 본문과 관련된 제목의 설교가 많은즉 목록표를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성도가 성경으로 무엇을 터득하셔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즈음 컴퓨터만 잘 하시면 만능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도가 성경만 잘 이해하시고 활용하신다면 정말로 만능적 신앙 생활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본문에서 15절은 성경이 “구원의 지혜를 주신다” 하셨고, 16절은 “모든 성경(66권)이 하나님의 감동(성령의 감동, 벧후 1:21)으로 주신 것인즉 하나님의 말씀이며 (유익한)교훈의 지침이라” 하셨고,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 즉 성도로서의 온전한 인격을 만드는 지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에게 바른 자격과 구원과 필요한 지식을 주시는 교과서라는 뜻입니다.

2.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무엇을 터득하셔야 할까요? 성경을 여러 차례 읽으시고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하신 성도이면 다 저와 같이 말하실 것입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이라고…, 자연계시도 하나님 존재의 증명이지만 성경은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이 있으면 말씀의 주인이 있는 법이니까요(요 1:1). 예수님도 “성경으로 하나님을 안다”(요 5:39) 하셨고, 바울사도도 “성경(사도의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 타당하다”고 하셨습니다(살전 2:13).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되 말씀하시는 인격의 하나님 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증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신분의 구체성을 나타내십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되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시고 창조, 보존, 통치, 구속,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주신 것이요,

3) 인류 통치하시는 방법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인류 통치하시는 방법으로서 택함 받은 선민(성도)을 어떻게 다스려 주시는 것과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서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성취에 대한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구약 시대부터(아담) 십자가의 구속을 계시해 주셨고, 구속의 역사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게 해 주셨으며 동시에 구원의 은혜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인양성의 인물로 보내셔서 신적 역사와 인적 생활을 보여 인간 생활의 모범도 나타내주셨고, 또 예수님만 모범된 것이 아니라 사도, 선지자들과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생활을 통해서 신앙 생활하는 방법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진실하기 때문에 악인의 악행이나 선민의 잘못된 것도 다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행할 것과 금할 것이 있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에서도 선택해야 할 것과 경계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 믿어야 할 것, 행해야 할 것, 금해야 할 것 등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4. 이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은혜의 방편으로서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1)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줄 알지요? 성경 말씀이 바로 믿을 근거입니다.

2) 우리가 십자가로 죄사함 받지요. 이 십자가의 내용이 말씀 전파로 알려집니다. 막 16:16을 보시면 “너희는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 하시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셨는데 이 전파의 내용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3) 능력 전달을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 9:23) 하셨고, 히 4:12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하셨으며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의 의미가 같은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엡 5:18~19, 골 3:16~17). 육체의 병을 고치시는 치유 사역도 “말씀과 함께 능력을 전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107:20을 보시면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방편으로 쓰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능력이 다 말씀으로 전달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터득할 것을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터득하실 것 ;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신분(절대자, 인격자 되신 것), 하나님의 사역(창조와 섭리), 인류의 시작, 구속 계획과 사역, 선민(성도)에 대한 통치 섭리, 예수님의 신분과 생활과 속죄 사역, 내세와 심판에 대한 것, 믿을 것과 행할 것과 금할 것, 내세와 심판, 그리고 성도의 교회 생활 등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시는 것이요,

2) 성경을 은혜의 방편으로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지혜가 말씀으로 전달되고(요 3:16, 행 16:31), 현세 복 받은 방법도 계명으로 주셨으며(신 28:1~6) 병 고치는 능력도 말씀으로 주시고(시 107:20, 히 4:12, 막 9:23), 성도의 자격을 이루는 것과(딤후 3:17) 성령 충만과(행 10:44) 인도하시는 것도 말씀으로 하신다(시 119:105) 하셨으니까 전폭적인 은혜의 방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깨달은 시편 기자는 시 119:97~106에서 “말씀 사랑하는 신앙 고백”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터득할 것을 반드시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과 족보,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창 5:1~32) 목록으로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메시야 계보를 살피되 10대씩 나누어 살피려고 합니다.

1.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10대가 됩니다. 1) 아담(130세에 셋을 낳고 930세 삶) 2) 셋(105세에 에노스 낳고 912세 삶) 3) 에노스(90세에 게난을 낳고 905세 삶) 4) 게난(70세에 마할랄렐을 낳고 910세 삶, 눅 4:37에서 “가이난”이라 하였음) 5) 마할랄렐(65세에 야렛을 낳고 895세 삶) 6) 야렛(162세에 에녹을 낳고 962세 삶) 7) 에녹(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65세 삶) 8) 므두셀라(187세에 라멕을 낳고 969세 삶) 9) 라멕(182세에 노아를 낳고 777세 삶) 10) 노아(500세 후부터 셈, 함, 야벳을 낳고 600세에 홍수를 겪은 후 950세 삶, 창 9:29). 10대. 평균 나이 857.5세가 되고, 아담은 8대손 므두셀라 56세까지 삶.

2. 노아의 아들 셈부터 데라까지 10대가 됩니다. 11) 셈(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음, 창 11:10) 12) 아르박삿(35세에 셀라를 낳음, 창 11:12, 눅 4:35에서는 “살라”라 하였음) 13) 가이난(창 11:12대로하면 “셀라”이지만 눅 4:36에서 “가이난”이라 하였으므로 이는 창세기에서 건너뛴 것임) 14) 셀라(30세에 에벨을 낳음, 창 11:14) 15) 에벨(34세에 벨렉을 낳음, 창 11:16) 16) 벨렉(30세에 르우를 낳음, 창 11:18) 17) 르우(32세에 스룩을 낳음, 창 11:21) 18) 스룩(30세에 나홀을 낳음, 창 11:22) 19) 나홀(29세에 데라를 낳음, 창 11:24) 20) 데라(70세에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음, 창 11:26, 205세 삶, 창 11:32).

3. 아브라함부터 살몬까지 10대가 됩니다. 21) 아브람(99세 때 아브라함으로 개명됨, 창 17:5, 100세에 이삭을 낳고(창 21:5) 175세 삶, 창 25:7) 22) 이삭(40세에 리브가와 혼인, 창 25:20,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음, 창 25:25~26, 180세 삶, 창 35:28) 23) 야곱(처 레아로부터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 창 29:35, 147세 삶, 창 47:28) 24) 유다(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음, 창 38:30, 46:12) 25) 베레스(헤스론을 낳음, 룻 4:18~22, 마 1:3~6) 26) 헤스론(람을 낳음, 룻 4:19, 눅 3:32) 27) 람(아미나답을 낳음, 룻 4:18~22, 마 1:4, 눅 3:33에서는 “아니”로 나타남) 28) 아미나답(나손을 낳음, 마 1:4, 눅 3:32) 29) 나손(나손은 살몬을 낳은, 마 1:4, 눅 3:32) 30) 살몬(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음, 마 1:5, 눅 3:32).

4. 보아스로부터 요람까지 10대입니다. 마 1:5~8에 근거할 때 31) 보아스 32) 오벳 33) 이새 34) 다윗 35) 솔로몬 36) 르호보함 37) 아비야 38) 아사 39) 여호사밧 40) 요람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3:31부터 누가의 기록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연결되지 않고 다른 아들 “나단”에게 연결됩니다(삼하 5:14~16). 나단은 솔로몬의 형이요 같은 어머니 밧세바(밧수아)의 아들입니다. 여기서부터 누가복음의 계보가 달라진 이유는 마태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본래 계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기록하였기 때문이고, 누가는 요셉이 나단 계열 집안으로 양자(계대상) 왔기 때문에 그 계열대로 올라가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선 마 1:1~17의 실제 계보를 살핀 후 누가 복음에 나타난 양자 계열을 또 살펴보겠습니다.

5. 웃시아로부터 스룹바벨까지 10대입니다. 41) 웃시아 42) 요담 43) 아하스 44) 히스기야 45) 므낫세 46) 아몬 47) 요시야 48) 여고냐(이 여고냐의 역사는 복잡합니다. 여고냐는 요시야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 여호야김의 아들이므로 손자에 해당하고 여기에서 계열을 건너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고냐의 별호는 “여호야긴”입니다. 왕하 24:6, 대상 3:16, 요시야 다음 왕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였으나 3개월만에 애굽에 끌려가 폐위되고, 그 형제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고쳐 다음 왕을 세웠으며 그 다음 왕이 그의 아들 여고냐인데 그 이름을 여호야긴으로 고쳐 바벨론으로 데려가고 그의 삼촌 맛다냐를 시드기야로 고쳐 유다의 마지막 왕을 삼았습니다. 이 때에 “여고냐”는 바벨론에서 스알디엘과 브다야 등을 낳았습니다(대상 3:15~19). 49) 스알디엘(직계 아들이 없자 조카인 브다야의 아들 스룹바벨로 계대합니다. 대상 3:19) 50) 스룹바벨(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았다 하였는데 대상 3:19~24에 아비훗의 이름이 없으니 건너뛴 것인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음)

6. 아비훗부터 요셉까지 10대이고 따라서 예수님은 61대가 됩니다. 51) 아비훗 52) 엘리야김 53) 아소르 54) 사독 55) 아킴 56) 엘리웃 57) 엘르아살 58) 맛단 59) 야곱 60) 요셉 61) 예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7. 그렇다면 눅 3:23~38에 나타난 계보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담부터 다윗까지에서 마태복음 족보에는 12대 아르박삿 다음에 “가이난”이 빠진 것을 눅 4:36에서 보충하였으므로 한 세대 차이를 나타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 다윗왕 다음 대부터 마태복음의 족보는 “낳고 낳고” 하였은즉 혈통을 따른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그 계열에도 단손되었을 때는 양자 영입으로 계열을 이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49대 “스알디엘”이 조카 스룹바벨로 계보를 이은 것입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은 자기 후손 아비훗으로 솔로몬의 계열 즉 요셉의 집안을 이었고, 또 “레사”로(눅 3:27) 요셉의 양자된 나단의 계열을 이은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 된 후 야곱의 아들이 헬리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은 34) 다윗 35)나단 36) 맛다다…멘나, 멜레, 엘리아김, 요남, 요셉, 유다, 시므온, 레위, 맛닷, 요림, 엘리에서, 예수, 에르, 엘마담, 고삼, 앗디, 멜기, 네리, 스알디엘, 스룹바벨, 레사, 요아난, 요다, 요섹, 서머인, 맛다디아, 마앗, 낙개, 에슬리, 나훔, 아모스, 맛다디아, 요셉, 안나, 멜기, 레위, 맛닷, 헬리, 요셉, 예수님으로 이어진즉 76대가 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계열에서 15대가 건너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역사적 인물로 오신 것과 성경의 확실함을 이해하는데 도움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과 하나님을 본받으라 (엡 5:1~14) 목록으로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1. 본문 앞에 “그러므로”란 말씀을 읽으셨는데 에베소서에는 “그러므로”란 말씀이 많고, “그러므로…어떻게 행하라”는 말씀이 많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런즉”, “이를 인하여” 또는 “이런 이유로”란 말씀이 10회나 나옵니다. 원문의 디오, 오운, 두루카린(3:1, 이런 목적으로), 투토오운(4:17, 이런 이유로) 등으로 표기된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 번역에서는 1:15, 2:11, 3:13, 4:8의 “그러므로”를 번역에 넣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개역 성경이 훨씬 원문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란 접속사가 나올 때마다 “~~했으니(은혜를 받았으니),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구절을 찾아본즉 엡 2:1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은혜로 살리셨으니 생각해라” 하셨고, 3:1의 “이러므로”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십자가로 화목되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리게 된 것이라” 하셨으며 3:13의 “그러므로”는 “영원전부터 예정하신 뜻대로(11절) 구원하셨은즉 낙심하지 말라” 하셨고, 4:1의 “그러므로”는 “더욱 넘치도록 은혜를 주실 것이므로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하셨으며, 그 외에 4:17, 25, 5:1, 15에도 “그러므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그러므로”는 어디에 연결됩니까? 그 앞 문장을 찾아보시면 4:30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시키실 때까지 보증자가 되어주신즉 “그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도 보시면 “창세전에 선택하셨다”(1:4),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셨다”(1:5),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셨다”(엡 1:13), “만물을 주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엡 1:22),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5), “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2:8)…그러니 “새사람답게 살라”(4:24)고 하셨습니다. 본문 5:1에도 보시면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을 어떻게 말씀해 주셨습니까?

1)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절에서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라” 하셨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사 자신을 버려 향기로운 제물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사랑은 이웃을 위한 희생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 마음을 뜨겁게 하는 두 가지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업체 사장이 그 회사 종업원의 아들을 위하여 신장을 준 사실이고, 또 한 가지는 50대 두 자매가 서해 바다로 조개 잡이를 나갔다가 밀물 들어오는 것을 모르고 조난을 당하였는데 한 사람만 구조할 수 있게 되자 그 언니가 “동생이 살아야 한다”하고 밧줄을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랑이 실제적으로 현실에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 가운데 거하는 생활은 모든 이웃을 위하여 화해하고 화목하며 봉사하고 희생하며 다같이 잘 살도록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과 우리나라 국민이 쉽게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에 진실을 왜곡하고 군국주의를 되찾으려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 조상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국민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과는 사랑의 화합이 잘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거짓과 악이 공존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만 사랑 가운데서 행한다면 큰 빛이 되고 모범이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열 세대라도 단결한다면 좋은 협동 생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과 현세욕만 빼버려도 사랑의 반은 성취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 형제애를 발동한다면 사랑의 큰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3~7절 말씀이 전부 성결에 관한 말씀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죄)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이름도 부르지 말라” 하셨으니 아주 멀리 하라는 뜻이요, 또 “말로 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을 일체 자제하고 도리어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말로 덕을 세우려면 우선 인격의 바탕이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릴 때부터 교육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하겠지요.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성숙된 인격(예수님을 닮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8절을 보시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는 생활이란 뜻이지요. 9절에서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하셨고, 11절에서는 “열매 없는 자처럼 어두움에 있지 말라” 하신 것은 “실행에 옮기라”는 뜻이요, 또 빛의 생활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먼저 “내가 착한 사람인가 아닌가?, 또 내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아닌가?, 또 내가 진실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살피셔서 반드시 빛을 발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 광복 60년을 기념하는 8․15 대통령 경축사에서 역사 바로 잡는 연설을 들었는데 한 마디도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역사 바로 잡으려면 과거 역사를 규명해야 합니다. 그것을 피하려는 사람은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빛은 어두움과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진실과 선과 의를 최대한 실천하는 노력을 하셔야만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제9과 예수님의 신성 증거 (요 1:1~4) 목록으로


예수님은 신인 양성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성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절대적 신성이고, 인성은 사람과 동일한 인성입니다. 제목은 “예수님의 신성 증거”이지만 완전한 인성 증거도 아셔야 하겠지요. 우선 예수님은 여인의 몸에 잉태되셨고, 해산할 날이 차서 출생하셨으며(눅 2:6) 족보를 가지셨고(마 1:1~17, 눅 3:23~38), 어릴 때의 성장 과정이나(눅 2:41~52) 사회인 또는 유대인으로서 결격 사유가 없었으며 일반인처럼 똑같은 시험도 받으셨고(히 4:15), 인격적 감정도 나타내셨으며(기쁨, 슬픔, 민망함 등. 눅 10:21, 19:41, 마 26:37~38, 9:36, 막 14:33~34) 빌 2:7에서는 “사람과 같이 되셨다” 하셨고, 사람처럼 고난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특히 빌 2:7에서 “사람과 같이 되셨다” 하셨고, 히 4:15에서는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시되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인성에 대하여 이만큼 예비 지식을 가지신 후에 신성에 관한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 1:1에서 “말씀은 예수님을 뜻하는데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고, 빌 2:6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라” 하였으며 요 14:9에서는 “나(예수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히 1:3에서도 “예수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곧 하나님이란 뜻”은 씨와 열매가 같은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마 3:17, 요 3:17, 17:1, 막 1:11).

3.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은 순결, 무죄를 뜻합니다. 인간이면 다 죄가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롬 3:4, 10), 예수님은 벧전 2:22에서 “죄를 범하시지 않는다” 하셨고, 히 4:15에서는 “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4. 창조자이십니다. 요 1:3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하셨고, 히 1:2에서는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5. 생명의 근원자이십니다. 요 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하셨고, 요 14:6에서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 하셨으며

6. 영원 불변하신 분이니 요 1:1에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8:58에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도 계셨다” 하셨으며 히 1:11~12에서는 “주는 영존하시고 연대가 다함이 없다” 하셨고, 히 13:8에서는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또 벧전 1:25에서 “주의 말씀도 세세토록 있다” 하셨거든 하물며 말씀의 주이시겠습니까?

7.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마 28:18을 보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하셨고, 엡 1:22에서는 “만물을 그 발아래 복족케 하셨다” 하셨으며 계 1:8에서는 “처음과 나중이시오 전능하신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능력은 그의 이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 병을 고치신 일이 34건, 자연을 지배하신 일 5건, 음식을 만드신 일 3건, 부활케 하신 일 3건, 도합 45회의 이적 기사가 있습니다.

8.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요 16:13에 보시면 “장래 일을 알리실 것이라” 하셨고, 또 그런 일을 나타내셨습니다(마 17:27, 21:1~3 고기 입에 돈 있는 것과 나귀 새끼 임자가 어떻게 말할 것까지 아심).

9. 무소부재하십니다. 요 1:1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신 분이라” 하셨고, 마 18:20에서는 “승천하시면서도 성도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 하셨으며 엡 1:23에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공동 번역은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이 이루어집니다) 하시므로 만물 안에 무소부재 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10. 죄 사하는 권세입니다. 마 9:6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눅 7:47에서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하신즉 “저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였으니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예수님) 뿐이십니다.

11. 구원자이십니다. 행 16:31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 하셨고, 행 4:12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 3:8에서 구원은 하나님께 있고, 또 딤후 1:9과 살전 5:9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2. 믿음 대상이 되십니다. 믿음 대상은 참 되셔야 하는데, “하나님만 참 되시다”(롬 3:4), 또 “예수님도 참 되시다”(요 14:6, 진리)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하신 것이고,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행 16:31, 요 3:36, 5:24). 마 11:27의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하신 말씀도 예수님만 믿음 대상이 되신다는 말씀이요, 요 20:31에서 “이것을 기록함은(성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13.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요 14: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응답하시고 예수님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경배와 영광 받으실 대상이시란 뜻입니다. 영광이 주님께 있어야 할 것을 롬 11:36, 벧후 3:18에서도 말씀하셨고, 계 5:12~13에서도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예수님이…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시므로 천상 보좌의 광경도 나타내셨습니다.

14.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 신성의 증거로 부활하셨고, 부활로 승리하심으로 최종 심판자가 되신 것입니다. 요 5:22, 27에서 “성부 하나님은 심판하는 권세를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증거와 사역은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하실 수 없는 일들입니다(성경을 마음에 심는 목적으로 증거함).

제10과 말과 일에 능하심 (눅 24:19~2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두 제자(1인은 글로바)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에 자기 고향으로 가면서 그동안 이루어진 일들(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이야기 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가셨으나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이는 저희의 눈이 가리웠기 때문), 예수님이 “지금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요?”하신즉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전지자이거늘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를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였습니다.

1. 이 말씀에서 주목을 끄는 내용

1) 길을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 생전에 수차례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유의하지 않은채 실망하고 옛생활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믿어야 소망을 갖고 믿는 태도를 취할 것인데 믿지 못하였으니까 부활과 관계없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사건으로(요 2:19), 요나의 이야기로(마 12:39), 또 나사로의 부활로(요 11:44) 또 복음서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여러 차례(마 16:21, 20:18~19)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부정하기까지 하였고(마 12:39), 다른 제자들은 무심히 들어 넘기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의 성도들이 설교를 무심히 들어 넘기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2) “저희들의 눈이 가리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나셨지만 세상 사람은 아닙니다. 천사 같은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령한 존재는 아무나 볼 수 없고, 주님이 눈을 뜨게 하실 때 즉 성령님이 도움을 주실 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식사를 함께 하면서 축사하시고 음식을 떼어 주실 때 눈이 밝아진 것을 보면 역시 주님이 영안을 열어 주셔야 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성경으로 예수님을 봅니다(요 5:39).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는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엡 1:17) 하셨으니 이 계시의 정신이 곧 성령님이 주시는 영적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늘 성경 깨닫는 은사를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 하였고,

4)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것만 말하고 그 십자가의 의미가 속죄 사역이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의 이사야 53장은 그 사실을 밝히 찍어 예언을 하였지만 그 예언이 시종일관 하게 예수님께 응했다는 사실을 즉시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요 1:29, 행 2:39, 마 21:42).

2.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말(언어)과 일(행동)에 능하셨다”는 말씀에 따라 저희들도 말을 잘 하며 또 행동에 능한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은 “말의 실수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하실 만큼 말의 실수 없음이 중요하고 어려운 깃임을 말씀하셨고, 또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온몸을 굴레 씌울 만큼 그 행동을 바르게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감동되는 말로 사람을 속이고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진실하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행동에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약 3:4~6에 보시면 말(혀)을 배의 작은 키와 작은 불과 불의의 세계로 비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의 영향이 큰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말의 실수를 줄이려면 “말을 더디하라”고 하였습니다(약 1:19, 전 5:2). 많이 생각하다가 하니까 더디고 또 조급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또 “말을 적게 하라”고 하셨습니다(전 1:2, 약 3:2).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하는 사람인데 큰아들 결혼식에서 인사말 한 마디 하는 것을 적어 갖고 나갈 정도로 심사 숙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말 잘 하기란 힘든 것입니다. 참된 말만 해야 하고(계 21:8) 선하고 덕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엡 4:29, 5:4). 내가 말하므로 상대방에게 격려를 주지 못한다면 안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마땅히 할 말을 한 것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위대하게 칭찬하셨습니다(마 11:11, 14:4).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선한 말씀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13).

2) 행동입니다. 행동도 “자세히 주의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엡 5:15). 또 의로운 일만 하여야 합니다(딤후 2:5). 되도록이면 법에 걸리는 일을 하지 마셔야 합니다. 행동할 때에도 오해 받을 일을 삼가고 규모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살후 3:6~7) 적당하게 하는 것과(고전 14:40) 절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 5:22). 무엇이나 모자라는 것과 넘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의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면 더 좋지만 최소한 손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도 건설적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행하면 세월이 헛되어집니다(엡 15:16). 그래서 건설적인 일이면 시기를 앞당기고 근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출 20:9, 롬 12:11). 말과 일에 능하여지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3. 절기와 관련 있는 말씀

제11과 확실한 새출발 (히 3:14) 목록으로


2006년 신년을 맞이하면서 “확실한 새출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금년에는 특별히 첫 날이 주일이어서 새출발 의미에 더 큰 각성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연구하던 차 본문을 살피시면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란 말씀이 시작할 때 무엇을 확실히 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말씀이 확실하게 시작한 것을 어떻게 꾸준히 붙들고 나갈것인가?를 연구하게 하며 또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연구하게 하시기 때문에 적절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 것입니다.

1. 그러면 새출발 하시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확실히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 과거 청산을 확실히 하셔야 하고 과거 청산이 어려울 때는 과거의 과제를 새해로 지고 가셔야 하니까 문제 정리라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를 살아오신 줄 압니다. 저도 1년 마지막 주일에 다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디스크 수술하는 일로 인하여 2개월된 손자를 데리고 대구에서 성남으로 와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었고, 딸의 해산일이 늦어지면서 분만이 되지 않아서 제왕절개를 받은 일이 있으며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서 그것을 수습하는 고달픈 일이 있었고, 눈보라로 인하여 시골길이 미끄러워서 운전의 큰 위험을 느낀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연말 주간에 다 해결이 되어서 첫 주일을 가볍게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되지 않았다면 “무엇 무엇은 신년에 해결할 과제다”하고 정리하여 지고 넘어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신년 과제는 과제대로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도 구년에 못 이룬 과제들이 신년으로 넘어온 것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년에도 뚜렷한 목표를 갖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2) 확실한 과제는 먼저 기도하는 일입니다. 제가 “기도가 무엇이냐?”하는 말씀을 드릴 때 “먼저 하는 것이 기도다”라고 정의한 일이 있었지요. 기도를 먼저 하셔야 하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입니다. 항상 기도부터 하시는 일을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을 연구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자세에서 전진하여 스스로 묵상하고 연구하며 모르는 것은 물어서라도 배우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일날 교회에 나오셔서 잠간씩 듣기만 하셔야 합니까? 아니면 집에서 앉든지 서든지 묵상하고 연구하셔야 합니까? 어느 것이 더 잘 하는 것입니까? 저는 “스스로 연구하는 것이 더 잘 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옛날에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 영양실조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주는 것만 먹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원하는대로 먹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신령한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을 원하는대로 공급받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말씀 연구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 3:14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자기 집 샘물을 갖고 계시라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계명대로, 성경적으로 사셔야 복 받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사를 계명의 잣대로 재서 바르게 행하는 일을 확실한 목표로 세우실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이상 네 가지를 실천하였을 때 끝까지 견고히 잡으셔야 하겠지요. 마귀는 끝까지 못 잡도록 훼방을 합니다. 그러니까 방법을 쓰셔야 하는데 그 방법

1) 꾸준히 시행하는 것입니다. 늦어도 황소 걸음이라는 말처럼 토끼처럼 깡충 깡충 뛰다가 쉬는 것이 아니고 거북이처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단거리를 뛰는 것이 아니고 마라톤을 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하십시오.

2) 역경과 시험을 싸움으로 이겨야 합니다. 다윗이 왕 되기 전에 역경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방나라 아기스왕에게 망명을 청하였겠습니까? 수차례의 전쟁, 수차례의 도피, 수차례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그때 그때 보호를 받으며 시험을 이겼습니다. 시험을 이기면 또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결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것이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마 11:6). 꾸준히 행하고 역경 시험을 이기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실족함이 없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면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1) 그것이 곧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고, 동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이 나와 동행해 주셔야 하는 것이고,

2) 성도가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는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 있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곳이 바로 하나님 우편입니다.

3) 영광의 상급을 누리시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주님과 함께 상급 받는 위치에 오를 줄 압니다. 어떤 이는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을 교회의 부흥(숫자와 헌금)으로 잘못 아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 장로 후보쯤 되는 집사가 대중 앞에서 목사님에게 무안을 줄 만큼 불평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의 활동이 부족해서 양적 부흥이 없다는 것인데 그 사람의 은혜의 개념은 물량주의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도 자신이 또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맛보는 것이 은혜인 줄 모르고 교회의 숫자와 헌금 불어나는 것이 은혜인 줄 아니까 인간들끼리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나와서 은혜의 핍절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이 말씀 연구를 생산하지 않고 주는 것만 얻어먹기 때문이란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년 새출발은 확실한 목표, 확실한 방법, 확실한 은혜에 도달하시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2과 성찬과 새출발 (눅 22:7~20) 목록으로


구약 시대에는 율법적 제사 의식과 절기 행사 등 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 모든 의식과 율법적 실천을 다 폐하셨습니다. 히 7:18을 보시면 “전의 계명이 무익함으로 폐하였다” 하셨고, 또 히 10:9에서는 “전엣 것(율법)을 폐하심은 둘째 것(예수님)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말씀을 살피면 마 11:13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은 요한까지라” 하셨고, 롬 10:4에서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참고 안 해도 되고, 율법보다 더 밝은 계시인 예수님만 본받아 행하면 율법의 요구보다 더 좋은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율법은 명령만 하였고, 모범을 보인 일이 없는데 예수님은 하나님도 보여주셨고, 십자가도 실천하셨으며 율법의 강령인 사랑을 실천 모범으로 나타내주셨기 때문에 율법 전체의 주인이 되시고 실천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모든 의식이 없어졌는데 예수님이 두 가지 의식만은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례식과 성찬 예식인데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성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시면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이란 뜻입니다.

1. 성경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고(마 3:6), 친히 세례를 베푸셨으며(요 3:22) 또 “세례를 베풀어 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신약의 교회에서 이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례 의식은 사람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몸에 물을 끼얹으며 깨끗케 씻는 의식을 시행한 것으로 죄 씻음 받는 은혜를 상징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죄사함 받은 은혜를 인상 깊게 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로 듣고 깨닫는 것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더 인상에 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강물에서 목욕을 하나 집에서 세수를 하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으나 씻는 의식에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목욕하는 의식이 물 뿌리는 의식으로 간소화된 것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침례교파에서는 성경적 의식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물통에 몸을 잠갔다가 꺼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하는데 꼭 성경의 의식을 합리적으로 하려면 물통을 사용하지 말고 개울로 나가야 하고, 개울에 갈 바에는 요단강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도 그렇게 안 하면서 약식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세례 의식을 통해서 죄 씻음 받은 은혜를 인상에 남도록 하는데는 거기에 따라가는 부속적 은혜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희생한 사실, 즉 십자가에 돌아가심이 있고, 또 우리가 죄사함 받으므로 성도 되고 교인되며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시민 되는 은혜가 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까지 항상 인상 깊게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성도답게 생활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의식이 성찬식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고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은 유월절 첫날인데(마 26:17) 그날 예수님이 어떤 다락방을 빌려서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시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통상적인 음식은 빵(떡)과 포도주였습니다. 이 음식을 잡수시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각각 축사하시고(마 26:26, 떡 먼저, 눅 22:17~20, 잔, 떡, 잔의 순서로) 떡을 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하셨고, 또 잔을 주시고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하시므로 예수님이 친히 피를 흘려 죄사함의 은혜 주실 것을 언약하신 의미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눅 22:19, 고전 11:24에서는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념 행사가 많은 것처럼 성도는 수시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성찬 예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교회를 시무하면서 신년 첫 주일에 성찬 예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찬 예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신년 새출발을 하신다면 대단히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찬의 의미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 생활을 노력하면서도 퍽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중에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성찬 예식은 감사를 일깨우는 의식이요, 두 번째는 십자가의 은혜와 성격을 생각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죄사함을 주신 것이고, 그 성격은 순종과 고난과 겸손과 희생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성격대로만 산다면 율법을 잘 지킨 것이 되고, 세상에 빛이 밝아질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과의 친교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리에서 성찬을 받았으니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일, 십자가의 목적과 성격을 기억하는 일, 예수님과의 친교와 동행을 실천하시는 일”이 성찬에 담겨 있는 것이고, 또 넷째는 고전 11:28에서 자기를 살피는 회개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과거를 씻고 새출발하는 것입니다.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었으면 조심하셔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인간적 사랑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찬을 함께 먹지 않다가 책망 받은 것은 사랑의 결격 사유 때문이었습니다. 2006년도를 시작한 저희들이 꼭 성찬의 다섯 가지 의미를 실천할 결심을 가지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3과 부활을 믿게 하는 이적들 (마 12:38~40) 목록으로


부활을 못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부활을 믿게 하는 이적들”이란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부활을 안 믿는 분들이 없기 때문에 이 설교는 성경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누가 묻기를 “이번 주일에 계란을 돌리느냐?”하기로 제가 말하기를 “그 행사는 형식에 불과하다 계란에서 병아리 나오는 생물학적 원리로 부활을 믿으라는 비유적 방법인즉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행사에 불과할 뿐인즉 차라리 성경을 더 연구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실제적 할 일이다”하고 제가 두 제목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하나는 엘리사의 이적인데 엘리사의 행한 이적은 종류별로 7종쯤 되고, 사건별로는 21회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이적 또는 부활을 믿게 하는 이적을 살펴 본 것입니다. 부활과 관련 있는 이적을 찾아보니까 구약에서 13회(하나님 2, 모세 2, 엘리야 2, 엘리사 4, 다니엘의 세 친구와 요나가 각 1회) 나타나 있고, 신약에 8회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이 6회, 베드로, 바울이 각각 1회씩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1. 구약의 이적에서 무엇이 부활을 믿게 하는 이적이냐? 하면

1) 창조 이적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조의 이적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이적이 그 속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은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한 것은 인간 창조 절차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죽은 시체를 살리는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이적이 곧 창조 이적이면 부활 이적도 그 창조 이적 속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약의 만나 이적과(출 16:31) 사르밧 과부의 집에 나타난 양식 이적과(왕상 17:19~22) 선지 생도의 집에 나타난 기름 이적(왕하 4:1~7)과 또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이적이 있으니(왕하 4:42~44) 그것이 다 창조 이적에 속하는 것입니다.

3) 에녹의 승천 이적과 엘리야의 승천 이적이 있습니다(창 5:21~24, 왕하 2:22). 이런 이적은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4) 또 창조 이적에 속한 것으로 출 4:2~4에서 모세가 쥐고 있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또 그 뱀이 지팡이로 변한 것이요, 아론의 마른 막대기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살구 열매가 맺었으니(민 17:8) 이것들이 다 창조 이적이 아닐 수 없지요.

5) 죽은 자를 살린 이적으로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왕하 4:32~35), 엘리사의 해골에 다른 시체가 닿은즉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13:20~21). 또 이와 방불한 이적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고 나온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다 불가마에 들어갔는데도 타지 않은 것입니다. 죽을 입장에서 안 죽는 것은 죽은 자가 사는 이적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또는 우리의 부활을 믿게 하는 이적이 구약에 열 세 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2. 신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나인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눅 7:15), 가버나움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마 9:25, 막 5:41, 눅 8:54) 베다니에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요 11:43). 이 사건은 부활 그대로의 사건입니다. 또 예수님 자신의 부활까지 합하면(마 28:9, 행 1:9) 예수님은 네 번의 부활 이적을 나타내신 셈입니다.

2) 예수님이 5병2어와 7병2어의 이적 베푸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마 4:19, 막 6:41, 눅 9:16, 요 6:10, 마 15:38, 막 8:9).

3)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마 17:1~3의 변화산의 광경이지요. 이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키셨고(영체로 변한 것), 이미 변형되어 승천한 엘리야와 죽어서 부활한 모세가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도 부활을 믿게 하는 충분한 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약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각각 한 번씩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렸지요. 행 9:36~42을 보시면 다비다는 봉사를 많이 한 여인인데 “다비다”란 이름은 아람어이고, 사슴 또는 암노루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헬라말로 번역하면 “도르가”가 됩니다. 그래서 “다비다”는 아람어 이름이고, “도르가”는 헬라어 이름인데 그 여인을 살렸고, 바울 사도는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 20:9~10). 부활과 관련된 이적은 다 소개하였습니다.

3.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자 살리는 이적을 세 번이나 나타냈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못 믿고 따라다닐 때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적을 보여 달라고 했지요(마 12:38, 16:4). 예수님이 무어라고 답하셨습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고 하셨지요. 이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함은 나쁜 짓이란 뜻입니다. 우주 안에 창조와 생명력이 가득차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이적을 구한 것입니다. 이적을 추구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이적을 구한즉 요나의 표적만 보여 주시겠다” 하였지요. 요나의 표적이 곧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 계신다는 뜻 아닙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뜻이 또 있습니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것이 없다” 하셨지요. 예수님의 부활로서 이적을 보인 다음에는 이적의 보따리를 싸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이후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비상한 이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 생활을 성경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죽은 자가 살아서 예수를 믿으라 해도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지 않으면 전함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눅 16:31). 그러니까 성경으로만 부활을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성경에 기록된 부활과 관계된 말씀을 다 소개 하였으니까 꼭 부활, 영생, 상급까지 믿으시고 영원히 사는 자처럼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제14과 부활 주일 묵상 성구 (골 2:6~3:4) 목록으로


이 말씀은 오늘 아침에 갑자기 묵상한 말씀입니다. 2:5, 16, 3:1에 “그러므로”가 세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앞에는 근거를 제시하는 말씀이 있겠지요.

1. 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여 뿌리를 박고…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하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노략당하지 말고…그러기 위하여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여러분들의 주입니다. 예수님께 기반을 두고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감사하셔야 합니다.

2)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유전과 초등 학문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어떤 노회에서 고난 주간에는 노회를 안 합니다. 주여주여 하고 기도하라는 뜻이지요. 부활 주일 지나고 노회를 하는데 투표 쪽지를 돌려서 누구누구 투표하라고 선전을 합니다. 그 작난이 몇 십 년 된 전통입니다. 그런 유전을 따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불교 방송을 보면 철학 이야기를, 일반 방송을 보면 건강,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것이 초등 학문입니다. 건강 이야기가 왜 초등 학문이냐 하면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이 내시고 하나님이 데려가시기 때문입니다. 초등 학문이란 뜻은 초보지식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인간의 유전을 박차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며 초등학문을 능가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하늘을 나는 사람처럼 세상을 멀리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13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범죄(인간의 자범죄)와 육체의 무할례(이방인이 율법을 몰라서 할례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선민이 아니었다는 뜻임)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이 그(예수님)와 함께 살리시고(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근거로 거듭나게 하신 뜻),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이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이 선민을 정죄하여 심판으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99을 지켜도 하나 때문에 심판을 하니까요)를 도말하시고 제하셨으며 십자가로 못을 박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정사와 권세(율법의 권위, 능력)를 벗어 버려(율법으로 의인을 죽인 잘못)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나 (부활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16절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이것이 다 율법적 제도임)을 인하여 폄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기 지키는 일은 폄논해야 할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율법의 권위를 밟으셨기 때문에 그렇고, 또 예수님은 진리 자신으로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17절에서 “이것들(절기, 의식, 율법)은 장래일의 그림자(모형으로 보여주신 것)”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장래일의 그림자이면 그 그림자의 실상은 예수님이고, 또 장래일이 천국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면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시니까 율법이나 의식이나 좋은 전통이라도 그것이 다 예수님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본받으면 율법을 100% 이상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절 끝에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 하셨으니까 이 시간에 몸을 다 예수님께 드립시다. 병든 몸도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이니까 내가 쓰는 동안은 관리를 잘 하십시오.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달라 하시는데 안 드리려 하지 마시고 집주인이 집 내달라 하면 내주는 것처럼 몸도 순조롭게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20절을 보시지요.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왜 세상에 사는 것처럼 의문에 순종하느냐 붙잡지도 만지지도 맛보지도 말라”한 것은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사람이 만든 법과 전통은 지켜 봤자 약간 좋은 듯 하나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 22절에서 사람의 명과 가르침(인본주의)을 좇느냐 이것은 어느 정도(자의적 숭배,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절제, 지혜 등) 지혜있게 하지만 육체 좇는 것(현실 정욕)을 억제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 좇는 것, 현실 정욕은 무엇으로 억제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억제되고, 진리 즉 예수님을 바로 알 때에 억제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의식을 행하거나 율법에 복종한다고 억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런 분이로구나”하는 것을 성경으로 깨달을 때 성령님의 역사와 감화로 육체 좇는 일(세속 좋아하는 일)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3:1에서 “그러므로(육체적, 세속적인 일에 쐐기 박는 것이 율법이나 의식에 있지 않음을 알고)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거듭남)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위엣 것을 찾아야 할 근거는 거듭남(믿음 시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거듭난 다음에 믿는 것입니다. “위엣 것”이 무엇입니까? 위엣 것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하셨으니까 2절 말씀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땅엣 것(세속적인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TV에 보면 정치 토론이 많이 나옵니다. 정치 토론의 주제는 대부분 “여당이 잘 하냐 야당이 잘 하냐”하는 것인데 어떤 결과로 낙찰되든지 하늘의 별 따올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건강을 위하여 약품 선전도 많지만 모든 사람은 다 때 되면 죽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 세상의 초등학문이니까 성도는 이런 것을 배우려면 시시해지고 시간이 아까운 것입니다. 성도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으려면 예수님께만 마음이 끌리고 세속적 행사는 점점 시시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저도 은혜를 받기 전에는 세상의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빌 3:8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안 다음부터는 구경도 싫고 좋은 집, 좋은 의복, 좋은 음식, 좋은 자동차, 사람이 알아주는 것까지 다 싫어졌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은 위엣 것(예수님 그리고 하늘의 상급, 빌 3:14)을 사모하는 기회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15과 부부화합의 복 (벧전 3:1~7) 목록으로


“부부화합의 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부부 생활의 의미와 부부화합을 통한 가정의 복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1. 부부 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다고 하셨습니다(창 2:18~23). 이 과정에서 생각해보셔야 할 것 몇 가지가 있지요. ① 창조 과정에서 여자 육체의 요소를 아담의 갈비뼈로 하신 것입니다. 남자는 흙을 요소로 하셨는데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요소로 하신 것에 무슨 뜻이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맞이할 때 창 2:23을 보시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며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한다” 하였으니 다른 뜻은 별도로 하고라도 여자(아내)가 남자에게 연계된 뜻과 어느 정도 종속의 뜻이 없지 않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금 더 보충하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다”한 것과(창 2:18) 타락한 후에는 창 3:16에서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육체 근거의 종속적 의미와 다스림 받는 종속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② 창 2:23의 “이끌어오셨다”는 뜻과 마 19:6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하신 뜻은 정당한 혼인에 대하여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하신 원칙도 중요함을 성도는 인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합법적 혼인에 대하여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원칙을 믿는 부부라야 성도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부부의 필연성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특별 은사가 있거나 고자된 자는 제외할 수 있지만(마 19:12, 고전 7:8)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으므로(창 2:18) 혼인은 정상적인 인륜법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혼인을 시도하신 목적은 인류 역사의 전개와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결합된 부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창 2:25). 25절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는 뜻도 역시 부부가 한 몸임을 입증하신 말씀입니다(마 19:6). 사람은 둘, 정신도 둘, 몸은 남자, 여자이지만 하나처럼(합력을 뜻함) 협력하여 행하는 것이 부부란 뜻입니다. 일도 하나처럼 합력하여야 하지만 몸도 서로 분방하지 말 것과 남녀 공히 자기 몸을 서로 맡길 것까지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부간에는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고전 7:1~9). 지금까지의 말씀은 육체적 결합에 관계된 말씀이었습니다.

3. 도덕성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부부화합의 복을 이룰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시 128:2에 보시면 “내실에 있는 아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내의 내조 생활을 의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남자의 노동력이 크니까 여자는 집에서 육체 건강에 알맞도록 덜 힘든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문화가 바뀜에 따라 불변할 원칙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2) 엡 5:22~25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 되심과 같은즉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아내들은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라” 하셨고,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하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마 19:19) 하셨는데 “아내 사랑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엡 5:28). 골 3:17에서도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하셨고, 18절에서는 “남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뚜fut합니다. 아내는 절대 복종이고 남편은 자기 몸(생명)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다 물에 빠졌는데 구조선에는 한 사람만 타야 합니다. 이때에 오래 산 부모가 자식을 더 살게 하기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여야 하겠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그 형편이 되면 어찌해야 합니까?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까 명령을 받은 그 남편이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 앞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아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불순종 못합니다. 부부화합의 복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은 극단적 처방을 내려 주셨는데 한편은 복종이고, 한편은 복종하는 아내를 생명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복종하는 아내로 조건이 붙는 것은 교훈하실 때마다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권의 차이가 아닙니다. 오직 행복의 비결일 뿐이지요. 고전 11:11에서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 하시므로 남녀가 대등한 존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 마지막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주라 칭하며 복종했다”는 실예를 들어 말씀하셨고, 여인의 단장은 화장품이나 옷이나 패물로 할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단장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아내를 연약한 그릇처럼 보살피며 또 영원한 동반자로 여겨 사랑하므로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부부는 말씀 헌법을 잘 지킬 때 화합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복종 외에 행복 찾는 법은 없고, 남편 역시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때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16과 자녀 교육의 목표 (잠 22:6) 목록으로


“자녀 교육의 목표”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 6:4~9에 근거하여서도 자녀 교육에 대한 말씀을 드린 줄 압니다. 자녀 교육을 시키는데 사회적 장애물이 많습니다. 우선 사회적 교육이 시간을 뺏고, TV, 오락, 스포츠, 퇴폐풍조 등의 바람이 세서 안정된 교육의 여건 조성이 힘든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로 붙들어 주시는 바가 없으면 믿음 중심의 자녀 양육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환경이 각박하여도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게 잘 자라는 자녀도 있지요. 그런 경우는 큰 축복입니다. 자녀 교육을 성경으로 이끄는 지름길은 매일 부모와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말씀으로 지도하며 기도하는 일을 자녀가 자립할 때까지 지속하는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시간을 쓰지 마시고 성경의 요점을 일깨워주는 것과 마음이 뜨겁도록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늙도록 마땅히 행할 길에서 떠나지 않을 줄로 믿는 것입니다. 특별한 환경 변화의 사정으로 기도회의 줄을 끊긴다면 그 시로 나태해지는 시험에 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셔야 할까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은 우선 모범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1. 도덕적 목표입니다. 도덕성은 불신자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딤전 3:9에 보시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갖는다”는 말씀이 있고, 또 벧전 3:21에서도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하셨는데 여기의 양심은 도덕성에 속하기 때문에 신앙보다 도덕적 목표가 앞서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덕성의 중요한 것은 성품과 예절입니다. 성품이 좋지 않고 예절을 배우지 못하면 신앙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 그래서 성품 교육을 시키시되 착한 마음,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 정직한 마음을 갖는 자녀가 되도록 지도하셔야 하고,

2)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은 예절입니다. 인사성, 언어 순화, 효도, 형제 우애를 잘 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성품으로는 착함, 온유, 겸손, 진실함이고, 예절로는 인사성, 말의 지혜, 효도, 형제 우애인데 이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도덕적 교육입니다.

2. 신앙의 사람을 만드셔야 되겠지요. 선택 받고 거듭나는 것은 교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믿음이 바로 잡히고 성장하는데는 교육의 힘이 큽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는 것이 목사님이나 주교사가 가르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 믿으시고 노력하십시오. 이때 교육의 과제는 교회의 지도를 받으시면 좋습니다. 문제는 점검과 지속입니다. 무엇을 점검하셔야 하는가? 하면

1) 자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시 2:11)

2) 하나님을 섬기려는 뜻(성경을 복종하려는 의도)이 있는지

3) 성경을 진리로 믿고 성경적 교훈의 원리를 인정하는지

4) 예배에 무조건 복종하는지

5) 기도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였는지를 점검, 확인하시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직도 신앙의 뿌리를 주지 않은 상태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고후 13:5에 보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자녀)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자신과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이상의 다섯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그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변하지 말고 지속하게 하십시오.

3. 사회적 인격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 뜻은 가족 밖에서의 대인 관계의 원만함을 뜻하고 나가서는 교회와 국가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회적인 인격으로 교육시키시려면

1) 우선 국법을 잘 지키도록 지도하셔야 합니다. 나라의 법을 피해 가려 할 것이 아니라 나라에 덕이 되도록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어른들도 그렇게 시행하셔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족친 어른의 아들이 판사였습니다. 어려운 사건을 부탁하는 차원에서 그 판사의 부친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법관을 배출시킨 가문에 추호라도 의심 살 일을 하면 안 된다 하면서 대쪽같은 성품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고 “법관의 가문은 저러하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정신을 자녀들에게도 교육시켜야 할 것입니다.

2) 근면성 교육입니다. 자존심을 세워 직업을 고르려 하시지 마시고 무슨 일이나 열심히 땀 흘리는 일을 자랑으로 격려하셔서 일하는 자녀를 만드셔야 합니다. 경제가 휘청하면 여러 가지 불행이 밀려오는 것을 각성시키셔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꼭 실천하도록 교육하십시오.

3) 융화적 노력입니다. 이 융화적 노력은 성경에서 “사랑 실천”으로도 말씀하셨고(마 22:39), “화평케 하는 자(화평을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도 주셨으며(마 5:9) 또 고후 5:8에서는 “성도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일반적 교훈으로는 “처세를 잘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인 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때 성공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4) 봉사성 있는 인격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것을 안 쓰려 하고 남의 덕 보는 일만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넉넉해지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야 하고(마 7:12) 성도가 남에게 줄줄 알아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눅 6:38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진리를 믿고 실천하도록 교육하셔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곧은 팔 가진 사람만 있다”는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자녀 교육의 목표로서 도덕성, 신앙성, 사회성에 과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17과 자녀에 대한 책임 (시 127:3~5)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자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성도는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 목적을 아셔야 합니다.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상급”이란 말씀입니다. 나라의 어린이는 미래의 소망이고 꽃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은 성도의 “자녀에 대한 바른 인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자녀를 주실 때 상급이 되고, 기업이 되게 하시려고 주셨다면 마땅히 하나님 자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과 쓰심의 목적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인류 중에 이스라엘 12지파를 선택하신 것도 기업과 영광 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셔서 특별 통치를 하셨지요. 그러나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때 버리시고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급과 기업으로 주신 자녀들도 성도가 하나님 목적에 부응하여 행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짐이 되거나 화근의 씨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자식이 친구와 함께 강도로 변하여 부모 집을 습격하고 부모를 죽인 사례도 있으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 된 분들은 우선 자녀에 대한 인식을 잘 하시고 그 다음에 책임 이행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녀를 인식함에 있어서

1) 상급이 된다는 뜻은 즐거움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아기를 처음 가진 식구들이 그 아이를 즐거워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좋은 선물이고 상급이로구나”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2) 기업이란 부모가 늙었을 때 부양할 자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30세쯤에 자식을 낳고 잘 양육하여 60세쯤에 자식의 부양을 받는다면 퍽 이상적이고, 이때에 자식의 부양을 받는 60대 부모는 건강한 동안 뜻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자식은 축복의 계승자입니다. 출 20:6에서 “상급은 천대에 이른다” 하셨고, 시 100:5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른다” 하셨으니까 그 축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자식의 자식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자녀들이 살기 어려운 것을 나라가 알고 “나라가 노인을 부양한다” 하지만 차라리 나라는 젊은이를 후원하고, 부모는 자식들의 책임으로 지도하는 시책을 펴야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4) 여기에 어린이를 자녀의 의미로 받는다면 어린이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대상이란 점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는 순결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막 10:13~16). 그래서 성도들은 어린이를 천국 백성의 모형자로 아시고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자식 농사란 말이 있지요. 어떤 농부는 충실한 열매를 소득하는데 어떤 농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농사의 노하우에 대한 차이인 것처럼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책임을 말씀드린다면

1)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솔로몬은 지혜로웠는데도 말년에는 타락을 했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자기 아버지처럼 지혜롭지 못했으며 히스기야는 선한 왕인데도 나쁜 아들 므낫세를 낳았고, 므낫세는 나쁜 왕인데도 요시야라는 선한 손자를 두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가 그만큼 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힘쓰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30세부터 목회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 위한 기도를 예사로 알고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자녀가 없음을 60대에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 아들, 딸이 가정을 가진 때부터 잉태를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다 잉태를 하였다 하기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손자, 외손자를 키우는데 잉태했을 때부터 지금가지 하루도 기도 뺀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자식 키울 때에 비하면 큰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아이 부모가 반드시 계승하여 자식이 신앙으로 자립할 때까지 힘써야 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또 “요셉이 성공하는 것처럼” 반드시 복을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2) 양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 양육의 방법이 건강과 교육입니다. 자녀를 건강하게 키울 책임이 부모에게 있고, 또 자신이 스스로 배우려 할 때 까지는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비용 지급과 모범입니다. 물질 딸리고 모범 딸리면 이것은 연장 없이 일 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먹이고 입히며 생활의 본을 보이시되 진실한 생활, 정의로운 생활, 근면하고 근검하며 저축하고 또 사랑하고 봉사하며 죄와 타협하지 않는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중요한 일이지요.

3) 감시, 지도를 잘 하셔야 합니다. 감시 할 것이 많겠지요. 건강 감시, 지혜 성장의 감시, 믿음 감시(믿음에는 아이들이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가?, 성경을 배우려 하는가?, 기도의 필요를 느끼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는가?, 교회와의 관계를 깊이 갖는가? 하는 것들임), 친구 사귀는 감시, 시간과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감시를 하시고, 중학에서 고등으로, 고등에서 대학으로, 대학에서 군대로, 군대에서 사회로 이동하고 또 혼인 대상을 만나 정착할 때까지 그 이동 경로를 반드시 감시하여 지도하셔야 합니다.

4) 그리고 이 감시 지도를 효율적으로 시행하는 방법이 바로 가정 예배와 기도회를 갖는 것입니다. 같이 앉아서 “이렇게 살자”하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효력과 감화 이상 더 큰 덕은 없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부모가 이런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출세한 집안을 빼고는 대부분의 부모가 그런 능력과 자격이 부족했습니다. 부모가 물질에 딸리고 신앙과 기도와 시간에 딸리며 지식에 딸리기 때문에 계속 끌려가면서 바른 지도를 못하고 사회적 제도에만 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반드시 부모가 정상에 서서 반드시 물질과 시간과 모범의 여유를 갖고 자녀를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18과 아하시야의 불행 (왕하 1:1~4) 목록으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이스라엘 8대왕으로 22세에 왕이 되어 2년을 다스리다가 죽은(왕상 22:51) 악한 왕이었습니다(대하 20:35). 그에게 몇 가지 불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① 모압이 배반하여 국권이 약해진 점이고, ② 다락의 난간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은 것이며 ③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신만 알게 되어 우상신에게 자기의 생사 문제를 물으러 간 것이고, ④ 그 물으러 간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⑤ 죽은 후에는 또 아들이 없어서 형제가 다음 왕을 계승하였으니(왕하 1:17) 퍽 안됐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조상들이나 그의 아버지 아합왕이 살아있을 때 자기 아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저는 그것까지 생각을 해 보면서 아하시야가 불행해진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1. 조상을 잘못 만났습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는 아합이고, 할아버지는 오므리인데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오므리가 시므리를 죽이고 왕된 일이나(대상 8:36, 9:42) 아합이 이세벨과 합작하여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을 괴롭힌 일들을 생각하면 그 후손이 어찌 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악한 부모의 후손이 잘 될 수 없다는 것은 “3, 4대를 벌주신다”는 출 20:5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면 자식이 불행해집니다. 요즈음 제 아들이 손자를 낳아 놓고 몹시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애비가잘 해야 자식이 복 받을텐데”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부모가 아들을 유학까지 보냈었는데 그 아들이 장가가게 되면서 주택을 염려했는데 처녀 아버지가 “집 걱정 말라”하고 25평짜리 전세 아파트를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아들은 부모를 잘 만나서 유학까지 한 덕분에 덕을 본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2. 아하시야는 부모가 악한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그가 23세에 죽은 것은 하나님을 깜깜하게 모른 탓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합이 하나님을 몰랐고, 그의 어미 이세벨이 바알신만 아니까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삼상 2:6) 그 하나님을 모르니까 죽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찾아가서 묻지 못하고 바알세붑(파리의 피해를 어거하는 신)에게 가서 물으려 했으니 이 얼마나 민망스러운 일입니까? 아하시야가 하나님께 여쭈러가지 못한 이유를 따진다면 그 책임이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고(신 6:5), 그 다음에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신 6:7). 가르친 다음에는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확인해야 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두려워하는지, 성경공부를 좋아하는지, 기도를 필요로 하는지, 죄를 두려워하는지” 이런 것들을 확인하셔야만 부모로써 자식에 대한 신앙 계승 사명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가 자기 신앙 능력이 약하면 교육과 전승 능력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그 할아버지대부터 하나님에 대한 핍박은 있었어도 관심이나 지식이 없었으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불행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없고 신앙 교육도 없었으며 신앙 계승도 없고, 신앙 연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해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민이 그렇고 왕이 그렇다 보니 하나님이 역겹게 보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 보호하시지 않고 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거나 출입을 지키시면(시 121:3~8)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난간에서 떨어질 때는 중상을 입히시기 위하여 떨어지도록 버려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으니까 환난이 방패막 없이 들어온 것입니다.

2) 아하시야가 역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나” 하시고 지켜보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하면 독불장군처럼 살다가 죽을 지경이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에 대부분이 하나님을 검불이라도 잡는 뜻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검불처럼 적게 생각하고, 1/100이라도 도움 얻으려고 의지하는데 그래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검불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반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시 18:1~2) 하면서 하나님을 절대 능력자로 믿고 의지하여야 하는데 어떤 병자는 마지못하여 조금 의지하는 표시를 내기도 하고, 또 자신이나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어렵다는 핑계로 기도를 더 안하고 누가 해주기만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연단 부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은 바알신이나 아세라 목상이나 바알세붑 같은 것뿐인데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는 대부분 죽었으니까 남아 있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보낸 것입니다. 선민이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선민은 선민답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방 선지자 수백명을 죽이고 그 땅에 비를 내린지도 얼마 안 되었을 터인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는 줄 알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갔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해도 크게 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선후배가 모여서 사진을 찍어도 앞자리 설 사람과 뒷자리 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은 뒷자리에 보이지도 않게 하고 파리신을 앞 자리에 세우니 하나님이 아하시야를 버리시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여섯 번째 아사왕도 그랬습니다(대하 16:12). 아하시야가 불행해진 것은 그 부모가 하나님을 꽉 붙잡도록 하지 않은 탓임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9과 감사에 대한 말씀들 (고후 4:14~15) 목록으로


2005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에 대한 말씀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설교자가 되셨더라면 감사의 말씀을 구상 하셨을텐데 아쉽기는 합니다만 성경에 “항상 또는 범사에 감사하라”(엡 1:16, 살전 5:13) 하셨으니까 마음에 항상 감사가 떠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미래 한국” 11월 14일자 신문에서 북한 사회의 부정적 요소 여섯 가지 중 하나가 북한은 “감사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회”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급을 받아서 자기만 먹고 쓰면 되니까 누구에게 베풀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으니 감사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서 제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또 하나님을 모르니 무엇을 감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감사는 하나님께 드릴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고 주고 받을 것까지 없으니 감사란 용어조차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회란 말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 구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세계이고, 또 주고받는 흐름이 있는 세계이니까 감사하게 되고, 또 감사를 권장하니 복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시 100:4에 보시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성전의 외문) 들어가며 또 116:17에서는 감사제를 드리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성전으로 제사 드리러 나가는 것인데 반드시 감사제(예물을 뜻함)를 드리고 하나님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생활로 설명 드린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또 감사를 앞세워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빌 4:6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의…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할 때 “감사를 앞세워 구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할 때는 필요해서 구하는 것이겠지요. 또 필요할 때는 그만한 공백을 느꼈기 때문에 구하는 것인데 무슨 감사를 전제하라는 것인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없어서 구하고 불만족스러워서 구하는 것인데 무엇을 감사하라는 것일까요? 여기에 두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라”는 것이고(영적 은혜 또 지금까지 살아온 은혜), 다음에는 “없어서 구하지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거나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 더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 부족한 사람들이 대부분 못 사는 줄 압니다.

3.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감사꺼리가 없거나 적은 줄로 아는 이가 많습니다. 동창회에 가니까 어떤 목사님이 재산을 많이 갖게 된 것과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감동을 받고 믿음 생활 잘 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기에 비교한즉 “나는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그렇다면 감사할 일이 적어지겠지요. 성도 여러분 감사의 초점을 자기에게 두면 안 됩니다. 자기는 부족한 인생입니다. 재산 많은 것을 자랑했지만 그것이 무슨 자랑꺼리입니까? 그래서 감사의 근거를 헤아릴 때 자신에 관한 것은 이차적으로 돌리고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136편에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로 시작하여 25회 감사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전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마 11:25을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실 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을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신 것입니다. 지혜있고 슬기 있는 사람에게 나타내시면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조건 감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하신 일도 많습니다. 그 중에는 불행한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청력이 좋지 않았는데 진단을 한즉 “늦은감은 있으나 빨리 수술하면 조금 나아질 것이라”하여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연구에 몰두하다가 안 가니까 의사가 집에까지 왔더란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귀가 어두워서 세상 소리를 안 들으니까 편하고 못 듣는 것이 연구에 지장이 없다”하고 귀 먹은 상태에서 발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발명가가 된 후에 하나님이 자기의 귀를 안고친 것을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4. 지금 읽으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1) 은혜의 목표를 재산 모으고 자녀 잘 되는데 두지 않고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일에 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도 살리셔서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로 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최종적 은혜에 목표를 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던지(많이 가졌든 적게 누렸든) 다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일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느낀 것이요,

2)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의미가 두 가지로 나누입니다. 개역 성경대로 하면 “감사로 말미암아 축복을 넘치게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뜻이 되고, 또 다른 번역을 참고하면 “더 많은 사람이 은총을 받고 감사심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감사심이 넘치면 감사 예물과 충성도 잘 하겠지요. 그러면 축복도 더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 하나있고, 또 한 가지는 “축복이란 대가를 떠나서 은혜 많이 받고 감사 신앙 갖는 성도가 많아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감사에 대하여 더 많은 묵상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제20과 성탄절에 묵상함 (눅 1:24~38) 목록으로


2005년 성탄절에 새로운 말씀을 묵상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기사를 살펴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만 기록하였고, 아브라함 이전의 계열 중에 12, 13대 사이에서 “가이난”이 생략되었습니다(눅 4:36). 그래서 그 생략된 대수를 포함하면 예수님까지 61대이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 계열로 내려왔으며 예수님의 할아버지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계열은 “낳고 낳고”가 아닌 “그 이상은 누구라”고만 하였는데 솔로몬의 형 “나단” 계열로 내려오다가 포로 이후 시대에 솔로몬의 혈통 “스알디엘”을 계대(양자)한 일이 있고, 예수님까지 76대이며 예수님의 할아버지는 “헬리”로 되어 있으니까 일단 이 문제를 조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조화는 이렇습니다. 마태는 혈통적 하향식으로 기록하면서 약간 건너뛰었고, 누가는 하나 건너뛴 것이 발견되었고(대상 3:17~19), 혈통이 아닌 족보상의 상향식입니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가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 헬리 가문으로 양자(계대)를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그 양자 계열을 하나 더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족보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요셉과 결혼하고 동거하여 여럿의 동생들(남녀)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막 6:3). 또 한 가지 대조되는 성탄 기사는 마태복음에서는 “왕이 탄생하였다”하고 동방의 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한 사실을 기록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목자들을 일깨워 “베들레헴에 구주가 나셨다”하여 찬양으로 영광을 돌렸으니 한쪽은 귀족적이고, 한쪽은 서민적 축하를 하므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신 것과 구세주이신 것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면에 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본질적 신분”을 내적으로 갖고 계시면서 사회적, 육신적으로 결함 없는 인간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육체로 오시려니까 성령님의 잉태 기적이 나타난 것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지상 출현이 작은 일이 아니다 보니까 별의 움직임과 천사의 활동이 나타난 것인데 문제는 예수님의 신성이 언제, 왜 발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오셔서 가끔씩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신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이적으로 신성을 나타내신 후 돌아가신 다음에 신성으로 부활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세상을 살아가실 때나 십자가를 지실 때는 일체 신성을 나타내시지 않고 꼭 같은 인간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는 인성을 버리셨을까? 할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체 그 자체가 인간적 요소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중보 사역자로서 못 박힌 흔적을 가지시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육체로 탄생하신 장소와 환경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땅에 오셔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때문이고, 또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사 11:1). 그런데 그 유대땅이란 환경이 로마의 속국이고, 탄생은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자라신 곳은 시골 나사렛이요, 집안은 몹시 가난한 목수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탄생하실 때는 방에서도 출생을 못하시고 마구간에서 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시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단 한번 세상에 보내시는 것인데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인생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 8:9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탄절 되면 많은 교회들과 성직자들이 “마구간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그 분은 만물의 소유자이시고 만물을 누리실 수 있는 분인데 인류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정신과 생활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 살려면 사치는 물론 과소비를 떠나서 검소하게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배당 치장도 수수하게 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구유의 예수님을 보라”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성도가 부응을 해야 합니다. 늘 말씀드린 일이지만

1) 하나님을 알리러 오셨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나님을 아시도록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히 1:1을 보시면 “옛적에는 여러 모양의 계시로 알리시다가 모든날 마지막에는 예수님으로 알리셨다” 하셨고, 예수님이 33년을 알리신 후에는 또 성령님이 성경으로 알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은 하나님을 알리신 날입니다.

2) 모범적 인간과 인간의 생활을 알리시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모범적으로 자라셨고,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호화롭게 사시지도 않았고, 오래 사시지도 않았으며 누구와 싸우신 일도 없고 주먹을 쥐시고 밀고 당기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예수님은 혁명가가 아니신데 예수님을 중심한 혁명(기독교 부흥)은 돌아가신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선과 의를 뿌려놓으면 그 다음시대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은 영원하신 중보자 사역을 위해서 오셨는데 그 사역이 십자가와 부활로 한 단계 성취되었지만 택한 백성을 다 구원하시기 까지는 아직도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중보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성도가 가까이 모시지 못한다면 성탄절을 지키는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꼭 가까이 모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섭리

제21과 하나님의 통치 (시 93:1~5) 목록으로


1.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다” 하셨는데 이 통치의 의미는 하나님이 만유를 다스리시되 특히 자연계의 위엄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만유의 창조도 대단하지만 특히 뇌성벽력이나 폭풍으로 인한 바다의 물결 소리는 어디에도 비할데 없는 능력을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큰 것만 다스리시는 것은 아니지요. 생명에 관한 것과 인간에 관한 것과 성도에 관한 것 등 극히 작은 일까지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나 자연계 통치나 전쟁 같은 것은 큰 통치라 할 수 있고, 공중의 새를 날게 하시고 들풀을 키우시며(마 6:26, 30) 사람의 머리털을 헤아리시고(마 10:30), 그것을 검고 희게 하시며(마 5:36) 식물과 사람의 키를 자라게 하시는 일(고전 3:7, 마 6:27), 더 나가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일(삼상 10:9, 시 139:2, 삼하 17:14, 빌 4:7) 같은 것은 더욱 세심한 통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통치란 뜻을 좁게 표현하면 “다스림”을 뜻할 수 있지만 넓게 표현하면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섭리는 하나님의 계획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창조, 경영(통치), 심판이 다 섭리에 포함 될 수 있고, 통치는 총괄적으로 하시되 자연계 통치, 생명계 통치, 영계의 통치로 나눌 수 있으며 생명계 통치는 식물계, 동물계(미생물 포함), 인간계로 나누어 통치하실 것이고, 인간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를 특별 통치로, 비선택자를 일반적 통치로 나타내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 49:15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지켜보신다” 하셨고, 신 32:10에서는 “호위, 보호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하셨고, 사 49:15에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아이를 잊겠느냐”하시므로 하나님의 특별 통치가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젖먹는 아이를 혹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하셨고, 시 27:10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셨으니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통치는 부모의 보호, 인도보다도 더 완전하고 우월하다는 것을 믿으시고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통치가 우월한 이유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왜 우월할까요?

1) 우선 사랑의 통치를 하십니다. 사랑의 통치라면 매를 맞아도 유익하겠지요. 사 48:17을 보시면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통치의 목적이 사랑과 유익에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이시고, 시작과 끝을 다 아시기 때문에 유익하도록 통치하실 수 있고,

3) 또 전능하시니까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사랑하여 유익하도록 통치하시고 싶으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통치에 한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신즉”(롬 14:17) 하나님의 원대로 뜻대로 통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영계를 통치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성도가 영계의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마귀를 물리치는 일인데 이런 것은 사람의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을 수 없고(막 9:29), 오히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지혜롭게 붙드시고 다스려 주십시오”하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심한 통치, 우월한 통치, 그리고 마음까지 다스려 주시는 통치의 은혜를 힘입으셔야 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섭리와 관련하여 저희들이 꼭 믿고 행하셔야 할 것이 있으니

1) 결과 지향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목적 성취를 위하여 과정을 만드시니까요. 요셉이 총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었습니까? 그때 그 과정의 목적이 “흉년에 선민을 먹여 살리시기 위한 섭리”라고 하셨습니다(창 45:7). 따라서 모세나 다윗이나 요나의 앞길에도 그런 섭리가 있었으니까 성도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를 믿으며 좋은 결과를 기다리셔야 할 것입니다.

2) 불미스런 일도 거저 넘기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5:16을 보시면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육체대로”란 옛사람을 뜻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의 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 121:8, 잠 16:9).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을 때 다윗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어 저주하게 하신 자라”(삼하 16:11)한 것은 사람의 움직임과 만남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나 사건을 육체대로 또는 우연으로 알지 말고 주의하시자는 것입니다.

3) 나의 길을 섭리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부탁하는 기도의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보다 말씀 받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말씀을 받았다 하여 말씀이 기도되거나 기도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닌즉 항상 기도의 몫은 성실하게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소원과 과제는 성취될 때까지 매일 기도하십시오(눅 18:1~5). 그리고 성취되었으면 중지하십시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루의 생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니까 하루의 과제를 자초지종 부탁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이나 겨울에 해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는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헌신 예배 설교차 가다가 모란에서 에어쇼 때문에 길이 막혀 혼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자초지종 기도를 하는 편이지만 그날따라 그런 어려움을 겪고 크게 반성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내 몸에 닿은 체험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2과 하나님의 통치 역사 (시 103:19) 목록으로


“하나님의 통치 역사”를 묵상해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근원적 통치 섭리를 믿으셔야 합니다. 우선 인간의 힘이 못 미치거나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다 창조자 하나님의 통치로 믿으셔야 하고, 또 사람의 활동으로 결과를 맺은 일이라도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다 섭리하셔서(그렇게 되게 하셔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을 믿게 되면 우선 인간의 힘을 초월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과 변화되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로 아셔야 하고, 또 하나님은 사람의 노력을 통해서 결과를 맺게 하시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아셔서 성실하게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신다” 하셨고, 열방의 통치자가 되시며(시 105:20)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고(시 45:6, 97:2) 그 통치가 대대에 이르는데(시 145:13) 하나님이 이렇게 통치하실 때 큰 권위를 입으시고(시 93:1) 세계가 굳게 서며(시 96:10) 땅이 즐거워하게 된다(시 97:1)고 하셨습니다. 대상 16:30~31을 보시면 “온 땅이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떨어야 한다” 하셨고, 시 139:7~8에서는 “인간이 어디로 가든지 주의 신을 떠나 피할 수 없다” 하셨으니까 누구나 꼼짝 못한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하나님이 만물 창조하신 것을 다 아시죠.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많습니까? 얼굴을 긁어서 현미경으로 보니까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요. 여하튼 우리 사람은 미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영적 형상, 의, 선, 거룩)을 닮은 인간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자유 의지로 타락을 하였지요. 이 타락은 인간이 자유권을 행사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내버려 두시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지요(간과, 롬 3:25). 불순종하고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이 벌하시고 없애실 수도 있는데 최초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히셨고(창 3:21),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요(롬 5:14), 하와는 “산 자의 어미”라 하셨으니까요(창 3:20). 구원은 하나님께 있고, 예수님이 구원의 주이시니까(시 3:8, 히 2:10) 타락자에게 구원을 주신 것인데 구원의 방도와 절차에 따라 주셨다고 아셔야 합니다.

2. 이 일을 포함하여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와 구원 안 하실 자를 구별하셨습니다. 엡 1:4에 보시면 이것을 만세전에 선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으니까 아벨만 구원을 받았고, 아벨 대신 주신 셋의 계열에서 구원 받을 자가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 대상을 우선적으로 기록하셨는데 그것이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대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3대이며 다윗부터 예수님까지 43대인데 여기에는 건너뛴 계열도 있겠지만 예수님 오신 때까지 예수님이 선택자의 계열로 오셨고, 그 이후에도 계속 택자와 비택자는 나누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선택을 자기 주권으로 하신다(롬 9:21, 엡 1:5) 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시면서 택한 대상의 수가 비택자보다 적고 또 적은 수의 무리를 구원하신다(눅 12:32)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사업주의로 나갈 때는 숫자를 선호할지라도 택한 백성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숫자주의를 선전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10:5).

3. 그 다음에 아담 이후 아브라함까지 약 2000년 동안은 택자, 비택자가 나타나다가 아브라함 때에 와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셨는데(창 12:1~3, 롬 4:11) 그때도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이삭과 야곱 계열로만 선택을 하셨고, 야곱의 후손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번성했을 때 선민족이라는 단체와 국가의 형성을 만들어 통치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나타나는 현상은 선민족(국가)은 선민족이고, 선민족 중에 영적 구원을 받을 자와 못 받을 자는 또 구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한 백성이라 하여 다 모세처럼 천국 가는 것은 아니고, 그들 중에도 불신으로 죽은 자들이 많지요. 그런 중에서 그들이 영적 구원은 못 받지만 선민이란 단체에 있으면서 선민적 통치는 함께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영적 구원 대상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특별 취급을 받고 선민은 선민 생활을 잘 할 때 국가적 또는 단체적으로 축복을 받는 것인데 선민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못 지키는 바람에 출애굽 때부터 시드기야왕까지 약 950년 동안 존속하다가 선민 국가란 형태는 아주 없어진 것입니다. 그 없어진 때가 주전 600년경인데 그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은 마치 아담부터 아브라함 때까지 영적 계열이 계승된 것처럼 계승되다가 예수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4.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이시고 구원자이시지요. 그래서 예수님 이후 세상 끝날까지 택함 받은 성도는 성도대로 하나님의 취급을 받고 교회는 믿는 성도의 단체로서 특별한 은혜와 통치를 받지만 신약 시대의 교회가 국가는 아니니까 이스라엘 선민 국가 같은 통치를 받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티칸이나 국교를 가진 나라는 옛날 이스라엘의 왕조시대처럼 통치하실까에 대하여 이것은 계시가 완성된 이후에 어느 민족이 자발적으로 국교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출애굽 시대나 이스라엘 나라와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열방의 모든 나라도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나라와 백성은 일반 은총으로 다스리시고 성도 개인이나 성도의 단체(교회) 또는 성도가 많은 나라는 특별 은총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운 성도를 중심으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잠 14:34에서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나라나 의의 비중이 크면 복 받고 악의 비중이 크면 욕될 것이요, 성경에는 의로운 성도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복 받은 사례가 있은즉(왕하 2:12, 13:14, 행 27:24)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이 하나님의 복된 통치를 받기 위하여는 정의로운 생활을 힘쓸 것 뿐이라는 사실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제23과 주밀한 섭리 (마 10:29~31) 목록으로


사람 사는 생활이 점점 위험해지고 어려움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임신하면 아이를 낳겠거니”하고 예사로 지나갔는데 요즈음은 “잘못된 아이를 낳으면 어찌하나”하는 염려를 할 때가 있고, 또 질병의 위험 같은 것을 의사나 보험사에서 너무 부추기니까 늘 질병의 위험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중에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건강 문제나 생활 문제 등을 몹시 자세하게 아룁니다. 과거에는 제목적으로 기도하고, 대충 기도하였는데 요즈음은 몹시 자세하게 아뢰고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는 중에서 하나님도 주밀하게 인생을 간섭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밀하게 다스리신즉 성도들도 주밀하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이 그 대표적 성구인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문제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 12:6에서는 “참새 다섯이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한 마리도 잊어버린바 되지 않는다” 하셨으니 참새는 미물이라도 “그 숫자 문제, 잡히고 죽는 문제, 가격 문제, 팔리는 문제까지 간섭하신다” 하셨으니 사람은 어떠하겠으며 또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어떠하겠습니까? 성도에 대하여 얼마큼 간섭하신다는 대표적 말씀이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신다는 것”이고, 또 “희고 검게 하는 것도 주관하신다”(마 5:36)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영혼이 아닌 육체 부분이고, 육체 부분 중에서도 가장 덜 중요한 부분인데 “하나님은 그것까지 간섭을 하신다” 하셨으니 다른 것은 얼마나 간섭을 더 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주밀하게 섭리하시는 것을 깨달아 감사하시고 부탁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창조의 과정이 주밀합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만물을 먼저 마련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에게 또는 모든 생물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하셨으며(마 6:8, 32) 히 4:16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털 가진 짐승이 여름 되면 털갈이를 하고, 겨울을 지내기 어려운 동물이 겨울에 동면을 하는 것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인간만 못한 동물들이 다 인간의 간섭 없이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지으셨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생명이 결성되는 것처럼 신비한 것이 없을 것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복 중에서 조성하신다”(시 90:2, 139:13, 사 44:2) 하셨고, 만물을 붙드시며(시 71:6, 히 1:3) 체질을 아시고(시 103:14) 또 “자라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 3:6~7). 사람은 자기의 키를 “한 자도 더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6:27). 그러니까 머리털 하나 검고 희게 되는 것까지 하나님의 간섭 없는 부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관심을 쓰시면 성도들도 작은 일 하나 하나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의존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교훈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에 계셔서(엡 3:17) 마음을 다스리시지 않으시면 마귀가 그 자리를 점령하여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버려지게” 됩니다(롬 1:24). 그러면 바로나 헤롯처럼 강퍅해지게 됩니다. 사울왕에게는 번민이 생겼지요. 그리고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사 6:100.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에 역사하시면 지혜롭게 되고(약 1:5), 부드러워지며(겔 36:26) 깨달음이 오고(눅 24:31, 행 16:14, 신 29:4), 바른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잠 16:33). 빌 4:7을 보시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간섭이고 은혜인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복, 화에 대한 섭리입니다. 신 11:26을 보시면 “하나님이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둔다” 하셨고, 복 되게 하시고 저주 되게 하시는 방법으로서는 삼상 2:6~8에서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며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켜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꼭 화 되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복 되는 것을 나중에 말씀하셨으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죽이고 살리는 문제에 대하여 “버린 자에 대한 섭리”(삼상 15:22~27), “하나님의 보호 섭리”(삼상 19:23~24),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 하십시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이 보호를 받을 때 라합이 그들을 지붕으로 올려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수 2:6),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두 사람이 우물 속에 숨었는데 한 여인이 그 우물 위에 볶은 곡식을 널어서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삼하 17:19~20). 반대로 사울은 그의 파수병들이 잠을 자서 노출을 시킵니다(삼상 26:12). 또 하나님이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실 때 파수병 있는 문을 둘이나 통과해도 드러나지 않게 하셨습니다(행 12:10). 그리고 다윗의 인기는 만만으로, 사울의 인기는 천천으로(삼상 18:7) 만드시는데 그것이 곧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환경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섭리입니다. 배우자의 복을 받으려면 쉽게 만나게 하셔야 하고(창 24:12), 재물에 복을 받으려면 흑암 중의 보화를 발견케 하셔야 합니다(사 45:3). 하나님은 그런 것도 섭리하십니다.

4. 하나님의 보호 섭리인데 다윗의 경우로 이미 말씀드렸지만 애굽군이 선민을 추격할 때도 애굽군 앞에는 흑암과 교통 사고(병거 바퀴가 벗겨짐)가 일어났고, 선민 앞에는 빛과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선민을 위하여 갈라진 홍해의 길은 애굽군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그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적의 추격을 피할 때 “그 발걸음을 암사슴 발 같게 하셨고”(시 18:33), 또 “그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신다”(시 91:12)고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적을 대항하여 싸울 때에 “어깨에 힘을 주어 활을 당기게 하시고 구원의 방패를 주신다”(시 18:33~35)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묵상하시면 여러분들의 기도에 더 자세한 사연을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외에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더 자세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범죄의 분량을 달아보십니다(창 18:21, 단 5:27). 범죄의 질을 살피십니다. 고의적이고 악의적인가? 우발적인가?(창 20:6)를 다 참고하셔서 공평하고 세밀하게 심판하시니(히 1:8, 삼하 21:1~9) 얼마나 주밀하신가? 하는 것입니다.

제24과 엄연한 사실 (롬 1:18~20) 목록으로


사람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면 크게 잘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을 창조하지 않은 것이나 자신이 자기로 말미암아 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엄연한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본문 2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하신 것은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엄연한 사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부터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히 11:6). 성도들은 다 하나님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에 따라갈 것이 있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해 놓고 주일에만 의식하면 안 되겠지요.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셔야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중에 세속이 끼어들면 크게 훼방을 받습니다. 따라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데는 반드시 그를 의식하는 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요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으로 믿는 성도는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만이 아니셨고 보이는 사람도 겸하여 오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이는 것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찾는 방법으로 주신 말씀이 있는데 요 4:23을 보시면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신령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하셨고, 고전 2:13을 보시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이 신령이란 뜻이 무엇이냐? 할 때 세속의 반대인 영적 세계를 의미하니까 육체와 현실을 멀리하면서 영적 세계로 깊이 들어갈 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세계, 성령의 감동 받는 세계, 청결한 양심 세계(마 5:8, 딤후 1:3), 그리고 영감의 말씀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신령한 세계에 계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고(신 4:39),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시 139:9~10). 따라서 저희들은 어디서나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또 어디서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이 특별한 곳에만 계신 줄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갖지 마셔야 하고,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 말씀과 순결이 있으면 그곳이 곧 하나님을 만날 곳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서 무엇을 여쭈어 보거나 교훈을 받아야 할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성경으로 대답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번에 모든 것을 다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유 3, 요 21:25, 계 22:18~19) 더 새로운 것이 없고 어느 곳이든지 말씀이 바로 나타나는 곳이라야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성경이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 전부라는 사실을 확인하신다면(또 그것은 엄연한 사실임) 반드시 거기에 적응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적응하는 생활이란 어느 곳이나 성경이 있고, 기도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일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인격 있는 자의 본질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와 지식을 갖고 계시고, 희로애락을 하셨으며 의와 지와 정을 갖고 나타내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란 좋은 것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죄 짓는 사람을 누가 인격자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인격자로 믿을 때도 그 생각이 사람과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바른 것이면 “하나님도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민망하고 노하실 때가 있고, 사람이 속시원할 때가 있으면 하나님도 그러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격의 하나님을 믿을 때 인격적으로 대화도 하고 섬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십니다. 엄연한 사실이지요.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길데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사 40:25, 46:5). 그러니까 절대 능력자를 모신 성도는 능력의 하나님을 모신 것으로 만족하시고, 그 하나님께 부탁하여 안 된 것이면 다른 방도가 없는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 능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저희들 주위에는 귀신의 작당도 많고 또 성령님의 역사와 무관한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신의 작당이 내 믿음을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단을 두려워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린아이처럼 면역성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속히 믿음의 성숙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단이 발에 걸릴 만큼 많아도 아무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조차 나타난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경건치 않은 자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히 11:6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하심으로 심판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성도의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깨끗하게 사는 생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5과 하나님의 보호 섭리 (행 27:20~26) 목록으로


저는 이 본문으로 중환자를 위로, 격려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는 암말기에 처하여 오래 살 것 같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이 말씀 23절을 보시면 “나의 속한바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나)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이시고 생사를 주관하시니 주의 것은 확실한 만큼 날마다 하나님을 인식하셔야 하고, 또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든지 환경상의 변화가 올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주가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집사님의 삶과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십니까”한즉 그렇다고 명쾌하게 대답하시더군요. 또 23절에서 “그 하나님이 내 곁에 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 항상 집사님 곁에 계신 것을 아시고 의지하며 기도하시라”한즉 또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풍랑 중에 처한 바울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탄 276명까지 바울에게 붙여주시고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주관하시는데 바울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276명의 생명까지도 함께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 이 사실로 볼 때 바울은 276명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은 몇 백명의 죽을 생명도 필요하게 쓰시는 자와 함께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신즉 반드시 “그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지막 교훈은 25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였고, 메리데섬에 내려서 무사히 로마로 갔으며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이사 황제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한 줄 압니다(행 28:11~15, 도착, 딤후 4:17, 증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곁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성경으로 주신 모든 말씀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시라고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내가 좋은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을 또 묵상해야 되겠다”하고 묵상을 했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성도로써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셨다고 합시다.

1. 누가 묻기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면 이 말은 전체의 핵심 또는 제목을 말하라는 것이지요. 이때에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한 성도는 “하나님이 복음 사역자 바울을 위험 중에서 또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보호,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일행의 위기 상황도 있고, 잘못을 지적한 말씀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방법도 나타나 있고, 바울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있으며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 섭리에 대한 말씀도 있고, 바울의 격려와 신앙 고백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 일을 말씀한 내용도 있으나 핵심은 “자기의 사역자를 보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2. 언제 보호하셨느냐? 하면 유라굴로라는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깨지고 여러 날 굶고 살 여망이 없어졌을 때(20절) 보호하셨으니까 살게 될 것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게 된 것을 그 위기 직전에 살려주신 것입니다. 풍랑을 일찍 그치게 하시든지 아니면 배라도 덜 깨졌을 때 살려주실 수도 있는데 왜 죽게 됐을 때 살리셨을까요? 하나님은 응답을 늦게 하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사 41:17을 보시면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할 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 혀가 마를 때…응답하신다” 하셨으니 이는 고난을 주신 후에 “이제는 죽게 됐다” 하였을 때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여 살 수 있는데 살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까? “꼭 죽었다” 했을 때 살아야 하나님의 능력인 줄 믿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단 섭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출발 전에 “풍랑이 있을 듯하니 과동하자”고 하니까 서원들이 “괜찮다” 하였고, 인솔자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더 믿고 떠났으니 그들이 크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내 말 듣고 떠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지 않았느냐”고 한 마디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그들에게만 한 것으로 알지 마십시오.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위반하고 불행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으면 좋을 뻔 하였다”고 후회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3. 왜 보호하셨습니까? 바울만 보호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탄 276명까지 보호하셨습니다. 바울을 보호하신 목적은 전도자로서 가이사 앞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고(24절), 또 276명을 살려주신 것도 전도자 되게 하시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4. 어떤 방법으로 살려주셨습니까? 곁에 함께 계셨고, “두려워말고 안심하라” 하셨으며 죽지 않고 한 섬에 오르게 될 것이요, 또 바람을 멈추시고 바람의 길을 멜레데섬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욘 4:8), 바람을 명하시며 꾸짖으셨다고 하셨습니다(눅 8:25, 막 4:39).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능력은 무한하시고 한 사람 보호를 위하여 276명의 생명을 함께 붙여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25절에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도가 성경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성경은 설교의 재료가 아니고 성도 개개인의 영혼의 양식이요, 믿고 자기 생활에 그대로 응용하셔야 할 과제란 것을 아셔서 말씀대로 믿고 시행하며 말씀대로 되는 체험을 꼭 하셔야 할 것입니다(삼상강론 중 설교 15과에 같은 제목이 있음).

제26과 받은 은혜의 공통점 (창 28:15~22)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야곱과 나의 받은 은혜의 공통점”이란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1. 무엇이 공통점이냐? 하면

1) 야곱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란 공통점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인즉 아담의 22대손이고, 연대로는 주전 1900년경의 사람인데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야곱이 섬긴 하나님이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같으신 분이고, 또 야곱에게 은혜를 주신 것처럼 나에게도 은혜를 주신 것이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데 대하여 행복감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2) 선택해주신 은혜가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나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같은 은혜란 것입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면 3900년쯤이라는 시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3)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 것이 오늘날 나와 함께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하셨고, 마 28:20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지요? 야곱이 받은 은혜도 그러하였습니다.

4) 하나님이 야곱을 지키시고 보호 인도하신 것이 같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이끌어…돌아오게 할지라”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은혜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안 받는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다 보호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출발한 지역은 브엘세바로 추정되고(창 26:23) 거기서 목적지인 하란(아브라함의 제 2고향, 창 11:31)까지는 1100㎞(300리 가까이 됨)가 넘는 곳인데 그 여행 중에 하나님이 보호하셨고, 또 찾아가는 외삼촌 집에도 잘 가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도 보호 인도하셔서 이 시간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야곱과 다를 바 없는 은혜를 받는 것이지요.

5) 공급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시면” 하였는데(20~21절) 하나님이 그대로 인도 공급하신 것처럼 우리도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야곱보다 더 좋게 공급해 주시지 않습니까? 야곱은 그 시대에 양고기 이상 잘 먹은 것이 없었을 것이지만 오늘 저희들은 그때보다 훨씬 좋은 것들을 공급받고 있으니 야곱보다 더 나은 은혜를 받는 것이고,

6) 야곱이나 저희들에게 꼭 같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신다” 하셨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하신 뜻은 신앙 계승과 메시야 계통을 잇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신앙 계승을 하고 있고, 메시야 계통 이음 대신 메시야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성도 각자에게 주신 뜻을 그 목적에 위반없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도 목적있는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7) 야곱은 많이 깨닫고 하나님께 제사와 경배를 드렸습니다. 야곱의 제사와 경배는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받은 은혜를 나도 빠짐없이 받고 있구나”할 때 큰 보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2. 이때 야곱은 좋은 결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안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나 혼자 섬기는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도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은혜를 받고 좋은 결심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역경을 헤치고 일어선 자의 모형입니다. 저희들도 인생 역정에서 성공하셔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한 일을 비롯하여 제사 드린 일과 서원한 일 등으로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저희들도 부족한 점들에 대하여 많은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과 자신과의 관계를 좁혀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주신 말씀으로 믿으시고 또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도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만나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셔서 성경에 나타난 인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구상하고 응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모세가 이적을 행한 것이나 엘리야가 이적을 행한 것이나 또는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접한 것 같은 것은 오늘 우리가 체험하기 어려운 상황들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사도들이 체험한 이적도 역시 같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비상한 이적을 체험한 것은 계시 전개 과정이나 시대적 배경에 따라 특수한 면이 있기 때문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그런 일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이가 “죽은 자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추구하는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 은혜로 인한 통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성경에 인물의 역사로 가장 생생하게 많이 기록된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역사입니다. 이들은 다 이적을 체험한 일이 없으면서(계시적 이적 외에)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까? 다윗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인물들을 우리들의 생활 범주에 함께 모시고 같은 입장으로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또는 3500년 전에 주신 성경 말씀이 변함없이 보존되고 또 변함없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은 한 하나님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통치를 하신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야곱과 같은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신앙의 긍지를 더욱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제27과 안 된 일 같으나 유익함 (삿 3:1~6) 목록으로


성경을 보시면 “안 된 일 같으나 유익한 일”이 많습니다. 안 됐다는 것은 죄가 연장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의미하고, “유익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거나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 주는 일을 뜻합니다. 씨앗 한 알이 썩을 때는 안 됐지만 거기서 생명의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원리와 같은 일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아셔서 “안 된 일이 있다” 하여 결코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로써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셨은즉 죽어도 소망이 있는 성도에게 무슨 일인들 소망이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그런 사실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에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이 만 가지 불행의 원인이 됐지만 롬 1:24을 보시면 “하나님이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신다”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도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인데 그 일로 인하여 성도들은 지상 낙원보다 더 좋은 천국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고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안 된 일 같았는데 총리가 되므로 잘 되고 보니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미리 보내신 것이라”(창 45:7)하신 말씀을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그 계획은 13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또 모세가 강물에 버려져야 하는 신세도 따분한 일이지만 그가 강물에서 공주에게 발견되었고, 바로궁에서 자라게 된 일이 80년 후에 선민을 해방시키는 인도자가 되었으니 역시 안 된 일 같으나 유익해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류 멸망의 역사가 세 번 나오고 선민에 대한 징계도 크게 볼 때 두 번 나옵니다. 노아 홍수, 소돔 멸망, 가나안족 멸망이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신 것이고, 선민이 바벨론에게 망한 것과 주후 70년에 로마에게 망한 것은 선민에 대한 징계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진노의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셔도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볼 때 하나님이 더 큰 방법으로 나타내시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취지로 가나안족을 멸하실 때(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일찍 멸절 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출 23:29~30을 보시면 “그들을 천천히 쫓아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선민이 가나안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가나안족이 천천히 쫓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데 “천천히 없애신다” 하셨으니 왜 그리 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쫓겨난 자리에 들짐승들이 번성하면 선민에게 괴로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고, 또 삿 3:1~4에서도 역시 천천히 쫓아내시는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후시대 선민들이 가나안족을 어떻게 경계하는가를 시험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전쟁 가르치는 대상을 삼기 위하여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곁에 악인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선민을 시험하시고 연단 주실 대상으로 설명하셨으니 이 얼마나 오묘한 일입니까?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 57:1을 보시면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줄로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뜻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 미리 데려가시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은 히스기야왕의 증손자로 31년 왕노릇하면서 선한 왕으로 이름을 나타냈습니다(왕하 22:~23:25에서 그런 왕이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고 하셨음). 그런데 그때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으니 이는 그의 조부 “므낫세왕의 죄로 인한 격노라” 하셨고(왕하 23:26), 요시야왕이 그 전쟁에 나갔다가 애굽 군대와 충돌하여 전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왕이 죽기 전에 말씀하시기를(왕하 22:20)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도록 평안히 열조에게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하시므로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 일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화액전에 데려가시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빌 1:20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하신 말씀은 화를 피하는 의미와 천국의 안식을 누리는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선민을 징계하실 때 하나님은 앗수르나 애굽이나 바벨론을 몽둥이로 쓰셨습니다(사 30:32). 그런 의미에서 악인들을 연단의 도구로 쓰시는가? 하면 심판의 도구로도 쓰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잠 16:4에서 “하나님은 온갖 것을 그 쓰심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마귀의 창조자가 아니시고 또 죄를 기뻐하시지도 않지만 적당하게 쓰시기도 하시고 결국은 심판도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하 22:22을 보시면 하나님이 거짓말 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에게 보내어 거짓 예언을 하게 하셔서 아람과의 전쟁을 유도하시고 그 전쟁에서 아하시야왕과 여호사밧왕을 패하게 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왕하 21:29~22:23). 그것이 악을 쓰시는 섭리인데 이런 경우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서도 나타납니다. 제사장들의 완악, 로마 권세의 타락, 가룟유다의 위선 등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고,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셔서(마 24:42, 시 118:22~23) 자기의 구속 사업을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악이 함께 있거나(롬 7:21~8:2) 이웃에 있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들이 자신 또는 주위에 나타날지라도 성도는 그 상태를 무조건 부정적, 비관적으로 여기지 마시고 그 다음에 나타날 일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의 축복 섭리를 믿고 기대를 갖는 믿음을 꼭 가지셔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롬 8:28).

5. 고난 극복에 대한 말씀

제28과 내게로 오라 (마 11:28~30, 벧전 3:15~16) 목록으로


“내게로 오라”는 제목으로 전도 설교를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읽은 본문이나 지금 드리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드렸고, 또 다른 설교집에도 여러 과목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또 드리는 이유는 어떤 분이 이 설교집(7분설교 12집)만 읽는다고 가상할 때 전도설교를 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1. 마 11:28~30을 보시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이 있고, “주님께로 오라”는 말씀이 있으며 “내게 배우라”는 말씀과 “쉼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의미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입니다. 고난을 모르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계 3:17).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려면 영적 공허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죄로 인한 고민과 사후 심판의 두려움”입니다. 그런 짐을 진 사람은 현실적 걱정이 없어도 하나님 앞으로 나올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수고와 고달픔이 있고, 현실적 위험에 떨고 있으며(보험이 잘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임) 또 나가서는 영적 죄에 대한 고민도 겸하여 가질 수 있는데 이것들이 다 수고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오라” 하신 것은 곧 믿음 세계 또는 교회 생활로의 초청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초청장은 전체 인류를 상대로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3) 예수님 앞에 나와서 배우는 것입니다. 배울 때 반드시 예수님과 성경을 믿음으로(진리로 믿음) 배워야 합니다.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하나님 뜻대로 사는 방법”을 배워 실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쉼을 얻는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소득이고 받는 은혜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며 만족하고 소망도 있고 자유, 영생이 있어야 쉼을 얻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때에 육체가 평안하면 더 좋지만 육체나 현실적 여건이 안 좋아도 은혜를 받으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것과의 차이”라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요 14:27). 일반 사람들은 죽는 것을 최후 불행으로 압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하셨으니까 믿음 세계와 불신앙세계의 가치관이 이렇게 차이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믿는 성도님들이 믿음 생활을 잘 배우셔서 쉼을 얻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벧전 3:15~16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왕으로 모시라는 뜻) 거룩하게 하며(순결을 지키라는 뜻)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배우려고 하는 초신자들에게 소망을 성취하고 또 쉼을 얻는 방법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 생활에 대한 지도입니다.

1) “시작을 확실하게 하라”고 지도해야 합니다. 히 3:14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확실하게 하셔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성경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을 통하여 믿고 성경이 진리인 것은 거듭난 은혜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은혜를 확인하는 방법은 말씀(성경 66권)이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살후 1:10). 반드시 믿어지는 확신으로 시작하시고,

2) 말씀을 열심히 배워 터득하셔야 합니다. 기도로 깨닫는 지혜를 구하시고 선생님에게 배우시며 묵상도 많이 하시고 말씀 뜻대로 성취되는 체험도 많이 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구원의 도리는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구원 받는 과정과 영생과 천국과 심판은 어떻게 하시는가?, 교회 생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성경을 66권이나 주셨는가?, 사랑의 실천 방법은 무엇이며 고난은 어떻게 극복하며 먹고 살아가는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모든 사항에 대하여 많이 배우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 “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맛을 모르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성경에 맛을 들이면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수월해집니다. 설교에 집중할 줄 알면 예배 시간이 긴 줄 모르게 됩니다.

3) 하나님과 친분 관계를 맺을 줄 아셔야 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내게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관계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니까 성령님의 은혜로,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경계하고 기도에 끌리는 것으로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임재하셨으니까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과 일치되도록 노력하는 것이요,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인격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경적으로, 인격적으로 두터워져야 합니다. 사람이 인격자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는 사람과 친해지듯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친교 방법은 진실과 사랑에 있고, 영적 친교는 기도와 말씀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4) 그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쉼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는 것이지요.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요, 또 영광 받으실 기업이니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녀라도 방탕하는 자식은 부모와 거리가 멉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해도 자식은 부모 가까이 따르지 않으니까요. 효도하는 자식처럼 하나님을 섬기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효도와 사랑실천을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면 하나님이 보호, 공급, 인도하실 때 기쁨, 감사, 소망을 맛보게 될 것이요, 기도 응답하시는 체험을 하심으로서 구원과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제29과 고난과 신앙 (시 30:1~12) 목록으로


“고난과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도 살피고 제가 겪은 일을 간증하려고 합니다.

1. 성도가 고난을 당하면 우선 자신을 살피고 거리끼는 일이 있으면 회개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또 자신의 고난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분이시고(히 12:8),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 자는 자가 생길 수 있으며(고전 11:28~30) 저를 침상에 던지기도 하신다(계 2:22)” 하셨기 때문이고, 또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을 하였습니까? 결국 욥의 고난이 끝났을 때에 깨달은 것은 인간이 다 죄인이란 것과 욥이 인내의 모범적 인물이 된 것과 갑절의 축복과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섭리와 욥기의 계시문이 나타났으니 이렇게 욥이 고난당한 배후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욥에게만 해당하는 하나님의 통치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개별적으로 살피시며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지금 읽으신 본문이 “고난과 신앙”이란 제목과 관련이 있는가? 할 때 관련이 있습니다(이 본문으로 시편 설교 44과에 “주님을 높이자”는 설교가 있음). 1~4절은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와 찬송을 하자”는 내용인데 다윗이 하나님을 높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대적에게서 끌어내주시고 무덤으로 갈 직전에서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신앙이 관련된 것이고, 또 5~6절을 보시면 “노염(징계)은 잠깐이고 은총은 평생 주시는데 저녁에 울음이 기숙하여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잠깐 징계하시고 은총은 길게 주십니다. 이럴 때에 성도는 징계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6~7절을 보시면 다윗 자신이 은총을 힘입어 형통할 때 “요동치 않는다”하면서 “주의 은혜로 내 산(예루살렘 왕국)이 굳게 세워졌다” 하였다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매(징계, 권고하지 않으심) 내가 근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산이 견고했을 때는 왕권이 든든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근심이 생긴 것은 다윗이 음행죄와 살인죄를 짓고(삼하 11:1~17), 그 다음에 범죄로 말미암아 근심된 일로서 아들이 죽었으며(삼하 12:18) 자녀들의 불륜이 일어나고(삼하 13:14), 또 압살롬의 반역이 있으므로(삼하 15:1~18) 큰 고난이 닥쳐온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습니까? 회개로 풀었지요. 나단의 경고가 있을 때 확실하게 시인하고 회개하였으며(삼하 12:13) 또 혼자서도 많은 회개를 하였습니다(시 6:6). 본문 8절에서도 “내가 주께 부르짖고 간구하였다” 하였는데 그 다음 10~11절에서 “하나님은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셨으며 자기를 돕는 자가 되사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기 때문에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찬송하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윗의 고난과 신앙이 관련 있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고난이 있으면 신앙과 관련을 맺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저는 10여년 전부터 50견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도 견딜만 하니까 지금까지 살았는데 괴로울 때는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때마다 반성하고 회개한다면 신앙의 자존심 갖는 교만이 큰 죄라고 여겨질 뿐 다른 가책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후 12:7에 나타난 “바울의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나의 어깨 통증과 같은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는 곧 50견인데 하나님이 나를 자고하지 않고 약한 중에 능력을 힘입으며 또 허술하게 살지만 은혜가 족한 것을 알게 하시려고 내게 주신 육체의 가시로 믿고 경성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견비통은 아플 때는 꼭 가시로 찌르는 것 같고 제가 오가피약을 6개월을 먹고 차도를 본 일이 있는데 나을 때는 꼭 가시를 조금씩 빼는 것처럼 낫는 것을 경험했습니다(두 달 반 후에 또 재발하였음). 제가 약 15일 전에 체증으로 4일간 고생하고 10일 이상 식욕 회복을 못한채 고생을 했습니다. 피로와 과식과 손발 찬 증세가 겸하니까 체증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죄와 관련지어 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고 두 주간쯤 지내오다가 지난 주일 낮예배 때에 교독문 40번(사 58:4~9, 금식에 따른 선행)을 읽다가 죄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교독문 사 58:7을 보시면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셨는데 이 말씀은 얻으러 오는 사람을 안 보려고 피한 것을 의미하는데 제가 두 주간 전에 대구 고속터미널에서 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이 없었기 때문에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슬쩍 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동전 없는 것을 후회하면서 가책을 느꼈으나 체증으로 고생하면서 그 생각을 못했다가 교독문에서 걸린 것입니다. 그때에 저는 여행할 때 반드시 동전을 예비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어떤 이는 영업적으로 구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까지 가책 받을 필요는 없겠지요. 문제는 내가 거리끼는 일을 한다고 자책할 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욥”이 자기를 반성한 사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욥 31:9~40을 보시면 욥이 말하기를 “내가 언제 가난한 자를 멸시했으며 주리고 헐벗은 자를 외면했던가”하는 반성문이 나오는데 21절을 보시면 “내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자기 세력을 믿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곧 어개와 팔뼈가 아프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닿더라는 것입니다. 욥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고아를 무시했다면 50견을 앓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난과 신앙은 이런 상태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제30과 힘이 되신 하나님 (시 18:1) 목록으로


시편 설교집에서 이 본문으로 드린 설교가 있는 줄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은 묵상하는 시기에 따라서 새로운 교훈을 받는 줄 압니다.

1. 우선 하나님은 힘의 원천이십니다. 본문에서 “힘이 되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시 43:2, 46:1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으며 창 17:1, 수 22:22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은즉 하나님은 전능하신 힘의 원천이십니다. “그 힘으로 산을 세웠다(창조)”고도 하셨습니다(시 65:6).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이 어떤 상태 또는 어떤 방법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1) 자연계에서 나타납니다. 우주의 창조도 하나님의 힘에 의한 것이거니와 우주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힘이 얼마나 큽니까? 시 18:9~16을 보시면 자연계에 나타난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땅이 진동하고 연기가 오르며 바람 날개로 높이 뜨시고 흑암, 물, 구름, 번개 등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자연의 힘이 위대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힘이 생명에 나타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굳은 땅에 싹이 나고 불탄 동산에도 여전히 풀이 나며 땅이나 바다에서 생명 번식이 얼마나 힘 있게 진행됩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 또는 부활이라”(요 14:6, 11:25)하신 것처럼 모든 생명에 하나님의 힘이 전달되는 것을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힘이 나타납니다. 사건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대상 16:31, 시 93:1, 계 19:6). 시 18:3, 29을 보시면 하나님의 힘이 전쟁에 나타나서 승리 주시는 내용과 보호, 인도(2, 19절)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류의 모든 삶과 사건, 그리고 구속 사역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 또 중요한 것은 영적, 정신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영적으로 나타나나 하시겠지만 우선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거듭남은 영적 사역), 지혜 주시는 능력, 이 지혜의 힘이 이 시대에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귀신(마귀)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줄 압니다. 귀신, 마귀를 누가 상대하며 정복할 것입니까? 오직 주님의 힘 뿐이지요. 막 9:29에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하신 것은 “하나님만 귀신의 영역을 지배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힘은 자연과 생명과 모든 통치와 영계에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 힘이 나의 힘으로 와 닿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능력이 없어요. 그리고 그 능력은 하나님의 고유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그 능력이 자신 또는 인간들에게 화로 임하지 않고 복으로만 임하도록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노아때 물심판으로, 소돔 때는 불심판으로 나타내셨고, 또 지진으로 고라당이 죽은 것을 기억하신다면(민 16:31) 요즈음도 물과 불과 지진으로 재앙을 받는 사례가 있으니 이런 일은 오로지 자연의 지배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만 의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생명의 힘은 하나님이 생태계를 보존하시는 것과(히 1:3) 잉태케 하시는 것과(룻 4:13, 삼상 2:21) 생명의 능력 되심과(시 27:1) 생사를 주관하시는데서(삼상 2:6)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과 호흡을 주관하시고(행 17:25~26) 또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시니까요(행 3:15). 그러니까 저희들은 더 살고 덜 사는 문제를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든든히 부탁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 힘을 주시는 문제입니다. 믿음 사건, 생활 사건, 환란 등 얼마나 우수 사려가 많습니까? 시 18편 말씀은 다윗이 원수들에게 쫓기는 상태에서(극한 위험, 4절)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힘을 체험하고 그 능력을 찬양한 내용입니다. 사 40:29을 보시면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도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 지혜와 총명과 용기로 주십니다. 슥 4:6을 보시면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신으로 되게 한다” 하셨고, 사 11:2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3. 이 신으로 역사하시는 힘을 어떻게 받으며 또 무엇에 적용하셔야 할까요?

1) 행 1:8을 보시면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능이 깨달음과 의욕과 용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전도의 힘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사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셔서 사사가 되어 전쟁을 이기게 하셨고(삿 3:10), 전쟁에 나갈 때 따르는 자가 있게 하셨으며(삿 6:34) 적을 무찌르는 용기와 힘을 주셨고(사 11:29, 14:6, 15:14), 또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즉 “말씀이 혀에 있어 증언하시게 한다”(삼하 23:2)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하나님의 힘을 힘입는 것은 성령 충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오직 성령 충만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2) 어떻게 하셔야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실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많은 증언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제가 쓴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에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사모하고 구하시며 성경 연구와 기도에 몰두하시고 회개와 순결과 순종과 사명에 힘쓰시면 분명히 받으실 수 있습니다. 마음에 큰 확신과 용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지혜와 힘을 어디에 쓰실 것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셔야 하겠지요. 여러분들이 돈돈 했는데 1000억쯤 생겼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막 쓰면 안 되겠지요. 성령님이 주신 힘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영광 목적에만 쓰셔야 합니다. 무엇이 영광 목적입니까? ① 하나님을 믿는 일이요(요 6:29, 고전 12:3), ② 성경 말씀을 터득하는 일이며(행 16:14, 잠 1:20), ③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이고(롬 1:5, 계 1:3, 신 30:14), ④ 전도하는 일에 쓰셔야 하고(행 1:8), 또 그런 일에 붙잡히셔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일에 힘을 주셔서 항상 용기와 만족과 감사와 역사와 희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계명 실천력만 있으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제31과 고난으로 받는 축복 (히 12:3~13) 목록으로


“고난으로 받는 축복”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의 생활 속에 많은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을 성공과 축복의 계기로 삼자는 것이 제가 드리는 말씀의 취지입니다. 옛날 속담에 “전화위복, 고진감래, 새옹지마, 개천에서 용이 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다 고난을 이기고 성공한 사례를 표현한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화를 사람 앞에 두신다(신 30:15), 복을 선포하는 그리심산과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산은 가까운 거리(세겜성 동서로 가까이 있는 산)에 있다(신 11:29)” 하셨는데 대부분의 화는 고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연단과 징계입니다. 특별한 범죄와 관계없이 고난을 당한 사람이 욥과 예수님과 바울 사도이고, 그 이외의 순교자들도 그런 입장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때에 성도가 고난을 잘 감당하면 큰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난이 죄값으로 또는 징계로 주어지지만 성도가 순종으로 징계를 잘 감당하면 역시 큰 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고난이 있을 때 원인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을 잘 견뎌서 더 큰 축복이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성도가 되시자”는 것입니다. 징계로 온 고난이나 연단으로 주신 고난이나 모든 고난을 이긴 자에게는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많지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신 것과(롬 8:28) “환난은 연단과 인내를 주고 연단은 소망을 준다”(롬 5:3)는 말씀이나 “도가니는 은을 연단하고 풀무는 금을 연단한다”는 말씀(잠 17:3)이 다 고난으로 유익한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 어떤 고난이나 소원대로 안 되는 문제가 있어도 결코 낙심하거나 희망을 버리지 마시고 오히려 “무슨 축복을 주시려고 그러시나” 하고 기다리면서 믿고 지혜롭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실례를 보면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으며(창 47:9, 35:9~15) 욥도 고난을 받았으나 갑절의 복을 받았고(욥 42:10), 또 고난의 사표가 되었으며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인하여 음행과 살인 등 여러 종류의 죄를 범하였지만 회개하고 징계의 고난을 받은 다음에 지혜로운 아들 솔로몬을 받았고(삼하 12:15~25) 또 성전을 짓고자 하는 소원을 거두신 대신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안 좋은 일 다음에 주신 좋은 축복입니다. 나만은 문둥병을 앓다가 병도 고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왕하 5:17), 예수님은 핍박을 받아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사 그 고난을 대속의 공로로 받으셨으며 바울사도도 선교상 핍박을 받아 로마까지 가셨지만 하나님은 그 방법으로 바울을 이방의 선교사로 쓰셨던 것입니다. 시 119:71에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 열매를 얻은 사례는 성경 외에도 많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요한 번연은 개혁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간 덕분에 천로역정이란 성경 다음으로 읽혀진 신앙 서적을 집필하였으며(1678년 출판) 독일의 죠지 후레드릭 헨델(1685~1759)은 오른쪽 반신불수요, 빚더미에 앉은 상태에서 오직 십자가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메시야곡(할렐루야)을 작곡하여 지금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구의 어떤 장로님은 평생을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 관절염에 대한 글을 써서 많은 유익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저도 아버지의 방탕(술로 짝하여 세상살이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증오하여 지금도 그 반발심으로 버텨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악과 불행과 고난이라 하여 결코 자신을 화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설명 드리고 예화로써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오래(벧후 3:9) 참으신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고난도 잘 참고 또 잘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4절에서는 “성도가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면 아직도 여유가 있음을 알라”는 것이요, 5~7절은 “하나님이 징계를 주시는 것은 버린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인즉 고난의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8~9절에서는 “육체의 아버지가 징계를 해도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이겠느냐”, 또 10~11절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신즉 그것이 처음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아도 나중에 그것으로 연달했을 때(징계를 옳게 감당한 뜻)에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으니까 12~13절에서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힘을 내서) 고침을 받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어떤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자신의 과제와 십자가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왓토는(1684~1721) 37세에 죽은 유명한 화가인데 그가 “소망”이란 그림을 그려서 인류에게 공헌했다고 합니다. 그 소망이란 그림은 지구 위에 한 소녀가 줄 떨어진 하프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무슨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소녀는 하프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 하프줄이 다 끊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생명 다하기까지 십자가만 붙잡고 세상을 멀리 보라는 의미로 저는 해석을 하였습니다. 반드시 “주어진 고난을 참으면서 전화위복의 소망을 삼으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2과 요셉이 바로 앞에 섬 (창 41:14~15) 목록으로


가나안 땅에서 야곱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이 어떻게 애굽왕 바로에게 신임을 얻어 총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그 일이 성취되어 선민의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일이 성취된 역사적 시간은 약 200년입니다. 200년의 역사를 한 눈으로 보시면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고 의지하시자는 뜻에서입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이유와 과정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요셉의 증조부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할아버지도 태어나기 전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가나안 땅으로 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에 “네 자손이 이방땅에 가서 400년간 객이 되어 이방인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창 15:13). 이 예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애굽으로 가야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니까 그 일이 성취되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으며 야곱이 요셉을 포함한 11 아들을 낳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이 성장할 때 또 한 번의 계시가 있었는데 그 계시는 요셉의 꿈으로 나타났고, 그 꿈 내용은 “요셉의 11형제가 요셉 앞에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요셉을 비웃고 더욱 미워했으나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창 37:7, 11).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요셉이 이 꿈을 꾸었을 때는 그의 생모 라헬이 죽어서(창 35:19) 요셉이 불쌍한 신세가 되자 그 아버지가 요셉을 더 생각해 준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창 37:3~4). 요셉이 나이도 어리고 미움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양치는 들에 형들과 내보내지 않다가 설마 요셉을 해롭게 하겠느냐? 하고 심부름을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심부름 보내지 않으면 요셉이 애굽 갈 기회가 안 생기겠지요. 그때에 형들은 요셉을 보자 미움이 발동하여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 같다”고 핑계하면 아버지는 속을 것이고 그 놈의 꿈은 맞지 않을 것 아니냐? 하고 의논을 했는데 맏형 르우벤이 구덩이에 던져지면 나중에 데려갈 요령을 하고 죽이지는 말자 하여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지기만 하였는데 점심을 먹으면서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을 보았을 때 넷째형 유다에게 아이디어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애굽 가는 장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멀리 보내면 “안 죽였으니까 괜찮고 안 보게 되니까 시원하며 돈까지 받으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행을 하니까 요셉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셉을 애굽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1차적 섭리입니다. 이것은 라헬의 죽음과 아버지의 사랑과 형들의 미움과 심부름과 죽일 계획과 살릴 방도와 장사꾼 지나간 것과 팔아버리는 일까지의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애굽에 가서 바로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갔고, 거기서 노예 생활 11년째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음행 유혹을 하지만 그것을 뿌리친즉 반대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 감옥이 한 두 군데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요셉이 높은 사람들 들어가는 감옥으로 들어가려면 보디발의 집에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을 노예로 쓰는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창 39:5). 요셉이 들어온 후에 복을 받으니까 요셉을 계속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인을 겁탈한 죄인이 되니까 높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가까운 감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니까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꿈을 꾸어 해석을 해주었으며 꿈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만 살아 나갔는데 요셉을 위하여 구명 운동할 것을 부탁받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2년 후에 바로왕이 꿈을 꾸고 번민을 할 때 요셉을 천거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 술 맡은 관원이 나가자마자 요셉을 석방시켰다면 요셉은 멀리 다른 곳으로 갔을 것이니까 그때에 바로가 꿈을 꾸어도 요셉을 불러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2차적 섭리는 보디발 집에 복 주신 일로부터 시작하여 음행 유혹, 감옥행, 두 관원의 꿈 해석, 술 맡은 관원의 망각 등 숱한 사연의 역사가 전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에 간지 13년 되고 감옥생활 2년 되었을 때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가 되었고, 총리된 후 7년 풍년과 2년 흉년이 지났을 때(흉년 5년이 더 남음, 창 45:11) 가나안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일에서도 간섭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간이 200년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그런 하나님을 의식하시지 않습니까? 시 139:1~4에서 “나를 감찰하시고 안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생각을 통촉하시고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내 말과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는 하나님”을 왜 의식하시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눈길이 막혀서 많은 차들이 운행을 못하였고, 저도 광주 갈 것을 못 갔습니다. 오늘 같은 날 우리 집에 대사가 있으면 어찌할 뻔 했나? 하고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마 24:20을 보시면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이나 겨울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도하라”는 말씀은 적당한 때와 기회를 하나님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이길 때 “하나님이 자기의 발을 암사슴 발같게 하셨고 어깨에 힘을 주사 놋활을 당기게 하셨으며 자기의 발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셨다”(시 18:33~34)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품위 있는 200세겔이나 되는 머리칼(삼하 14:26)이 나무 뿌리에 걸려 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질 때 죽이자, 살리자, 팔자 할 때도 하나님이 섭리하셨고, 애굽의 관원이 요셉을 살펴주겠다 해놓고 2년 동안 망각한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있었으니 저희들은 그런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요셉을 높이신 의미 (창 41:37~43) 목록으로


요셉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요셉은 흠없이 크면서 연단을 많이 받고 30세에 크게 된 사람입니다. 요셉이 성공한 비결을 살피면 그의 노력과 연단에 따른 바도 있지만 그보다 앞선 하나님의 섭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요셉이 성공하게 된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 자신이 받은 연단에 중점을 두어 하나님이 요셉을 높이신 의미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언을 하셨는가 하면

1) “네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라”(창 15:13)고 아브라함(요셉의 증조부)에게 예언하셨고,

2)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셨는데 “열 한단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이었는데(창 37:5~8) 이 꿈이 요셉의 형들에게 발표됨으로 하나님의 예언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 예언이 응하려면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해야 하겠지요.

2. 하나님이 선민을 먹여 살리도록 대책을 세워주신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의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창 26:3~4). 그러니까 그 민족이 굶어 죽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인데 그 방법으로 요셉이 성공하여 애굽의 양식으로 선민을 먹일 것을 작정하시고 이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5:5을 보시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서 자기들의 잘못을 말하며 용서를 구할 때 “당신들은 나를 이 곳에 판 것을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물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양식을 예비하시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의미로 본다면 애굽인들도 이방인이지만 요셉을 통하여 그들의 흉년 문제도 해결해주시는 긍휼이 있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니까요(엡 4:6, 롬 3:29).

3. 요셉을 높이신 의미는 요셉을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나타내주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나 멜기세덱이나 다윗이 메시야의 모형자로 등장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삭은 제물로서의 모형자이고, 멜기세덱은 제사장 곧 중보자로서의 모형자이며 다윗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모형인데 요셉은 어떤 모형자이냐 하면 선한 목자로서의 모형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집안을 다 먹여 약육하였으니까요. 그리고 요셉의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와 공통되는 점으로 메시야의 모형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성경보감에서) 요셉은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자의 공통점(창 37:3, 마 3:17), 요셉은 어린 목자요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공통점(창 37:2, 요 10:11), 요셉은 세겜으로 보냈고 예수님은 세상으로 보내신 공통점(창 37:13, 눅 2:13), 요셉은 형들을 찾아갔고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간 점(창 37:16, 눅 19:10),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고 예수님은 세상의 미움을 받은 점(창 37:5, 요 15:25), 요셉도 유다가 팔자 하였고 예수님도 유다가 판 점(창 37:26, 눅 22:3), 요셉과 예수님이 다 죄없이 붙들려 고난당한 점, 요셉은 감옥에서 2년 만에 나오고 예수님은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한 점, 요셉은 총리되고 예수님은 영광에 들어가신 것 등으로 예수님의 모형적 인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섭리적 목적에 의하여 요셉을 성공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4.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노력없이 하나님이 거저 높이시는 예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요셉도 많은 연단을 받고 성공한 것입니다.

1) 요셉은 고독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죽으니 고독하였고, 열명의 형들이 따돌리니 고독하였으며 타국에 가서 홀로 사니 고독하였지요. 그러나 성도는 고독할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고 고독해져야 “주여 주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고독할 때 하나님을 깨달았지요(창 28:11, 17).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홀로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위험도 겪었습니다. 구덩이에 밀쳐질 때, 노예로 팔려갈 때, 억울하게 감옥 갈 때 그러하였겠지요.

3) 비천한 노예 생활을 하므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 생활은 알고 보면 봉사의 연단입니다. 요셉은 노예로도 주인을 섬겼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봉사의 일을 전담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에게 봉사를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반드시 대접 받는 사람이 대접한 자를 사랑할 것입니다. 제가 대구 남일교회 떠난 지가 20년 가까이 되는데 그때 여전도회 회장하신 고정옥 권사님은 지금까지 저의 생일과 명절에 선물을 주십니다. 1년에 꼭 세 번은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대접 받은 부담 때문에 365일 기도를 빼는 날이 없습니다. 봉사는 주는 것이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접하는 자가 대접 받는 자보다 더 받는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마 7:12, 눅 6:38). 따라서 봉사 연단은 성공의 씨뿌림이 되는 것입니다.

4) 인내도 많이 하였습니다. 억울한 일 참는 것이 적은 일입니까? 그것도 감옥에 들어가서 2년을 견뎠고, 노예 생활로도 11년을 견뎠습니다.

5) 또 노예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권이나 자기 중심이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의 욕심이나 기와집 가질 욕심도 가질 수 없는 입장이지요. 오늘날 성도들이 노예처럼 자기를 부정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6) 요셉은 물질적 정욕만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이성적 욕구도 못 박으므로 시험을 이기는 극기의 인물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인물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누구를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요셉을 높이신 데는 하나님의 섭리도 있고 요셉의 연단도 컸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34과 하나님의 보호 사례 (시 91:7) 목록으로


약 35년 전에 부흥사로 사역하신 박용묵 목사님의 설교를 메모한 문건이 나타나서 그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하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 하시겠지요. 박용묵 목사님의 아드님들도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만(박재천 목사, 박상은 의사) 그 목사님의 형님도 박영묵 목사님이신데 하체를 쓰지 못하시는 불구의 몸으로 청도 송금교회를 시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들 박재택 집사(전도사, 그 후의 성직은 모름)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모습만 보았고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몰랐는데 그 분의 삼촌이신 박용묵 목사님의 부흥 설교를 듣고 알게 된 것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서 한창 전라도와 경상도를 쓸어내릴 무렵에 박재택 집사가 경북 영천군 청통면 우천리(은해사, 절이 있는 곳)에서 전도사로 우천교회를 시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그 곳에 가까이 쳐 내려오자 가족들과 교인들을 남쪽으로 피난을 시키고 자기는 40일 금식 기도를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20일쯤 지났을 때 삼촌되신 박용묵 목사님이 그 곳에 피난차 가셔서 “기도를 중지하라”고 하셨는데도 듣지 않고 계속 하였는데 그 무렵에 인민군들이 후퇴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위 다른 곳은 다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많은 피해를 주었으나 그 곳 청통면 우천리 부근만 혹처럼 남겨놓고 들어오지 못한 결과를 나타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박 전도사의 기도와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을 깨달았고 박 목사님 자신도 그 곳에서 그의 기도 응답에 힘입어 피난의 어려움 없이 보호를 받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박용묵 목사님이 전국으로 다니시는 부흥사이시니까 전남의 영암 지역의 어떤 교회에 가셔서 부흥회를 하셨는데 그 지역의 원로급 목사이신 지한홍 목사님이 자기 강사실에 찾아오셔서 “박 복사님이 박재택 전도사의 삼촌이 맞습니까?”하여 그렇다고 하신즉 “참 훌륭한 조카 전도사를 두셨습니다”하고 우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박 전도사가 영암 지역에 있는 금정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를 핍박하는 어떤 아이가 예배당에 자주 돌을 던져서 큰 피해를 주었는데 동리 사람들이 “그 아이는 독종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박 전도사는 그 아이를 위하여 15일을 금식 기도 한 일이 있는데 기도 후에 그 일도 없어졌고 교회에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금정교회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노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임시 노회때 보조 청원을 하였는데 “임시 노회때는 보조를 결정할 수 없으니 정기 노회로 미루자”고 하는 것을 지한홍 목사님이 당회장을 하셨기 때문에 “박재택 전도사가 이 청원서를 내면서 30일 금식 기도에 들어간 청원이다” 하시니까 아무도 반대를 못하고 보조 결정을 해 주므로 그 예배당을 짓고 나왔다고 하시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6․25가 나서 영암군에서 92명의 순교자가 났고, 예배당도 거의 불탔는데 박 전도사가 지은 금정교회는 인민군들이 도망을 하면서 몇 차례 불을 질렀는데도 타지 않아서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 전도사는 영암에서 금정교회를 짓고, 영천의 우천교회로 가서 시무하면서 6․25를 만나 기도를 한 것인데 그 기도의 효력이 영암의 금정교회에 까지 미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에 관계된 박재택 전도사나 박용묵 목사님과 지한홍 목사님을 가까이 뵌 일이 있습니다. 지한홍 목사님은 제가 군생활을 하면서 광주 신학교를 다닐 때 전남노회에서 사역을 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일제 때에도 신사 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르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를 만났을 때는 영암군 군서면 신흥교회를 시무하셨는데 그때 전시 사태가 급박하게 되자 영암읍교회 조규춘 장로님이 오셔서 부산으로 가는 배편을 준비해놓고 떠나시자고 했는데도 교회를 떠날 수 없다 하며 지키시다가 내무서원에게 끌려가셔서 3개월간 광주 형무소 생활을 하시면서 고초를 당하셨는데 그때에 때리는 사람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다”하면서 때렸는데 그때 지 목사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매를 맞는다”고 생각하시면서 견뎠고, 나중에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실신한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영암 지방에서는 엄청난 살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산군이 물러가고 광주 형무소 문이 열려서 무사히 나오셨는데 신기하게도 신흥교회는 모두 무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박용묵 목사님이 영암에서 지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사례를 들으시고 집회를 하실 때마다 이 사실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주의 종이 주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순교적 사명감으로 감당하더니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우천교회와 신흥교회를 지켜주셨다”고 증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을 알고 보면 성경에 대한 확신이 더 확고해집니다. “의인 10인을 인하여 소돔을 보존해주신다”는 말씀(창 18:32)이나 엘리야, 엘리사가 나라의 간성이 된 사실이나(왕하 2:2, 13:14) 또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마 10:39, 눅 17:33)는 말씀이 사실대로 성취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35과 5병 2어의 이적 (요 6:3~15) 목록으로


5병 2어나 7병 2어의 기적의 말씀은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줄 압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기독교 TV에서 이 본문에 근거한 수원 어떤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제가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중간에 들었는데 “성도는 어디서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제목이었고,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000명 더 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사명을 느낀 것처럼 모든 이웃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사명을 느껴야 하고, 또 그들이 큰 돈을 모아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도시락 즉 적은 것을 나누므로 시작하여 축복을 받지 않았느냐? 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선가들이 가진 것 없이 그렇게 하여 성공한 것을 저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뜨끔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재물의 여유가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요. 또 제가 생각 안 해 본 말씀인데 14~15절을 보시면 놀라운 이적으로 배부른 사람들이 어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에 오신다는 선지자라”하면서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뿌리치시고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몰라야 한다는 뜻이지요(마 6:3). 요즈음 자선 사업으로 자기를 알린 후 무엇에 출마하거나 어떤 공로를 세우고 명예를 높이려는 사람들에게 역시 뜨끔함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듣고 나도 이 부분에서 성경을 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경 연구는 큰 축복입니다.

1. 이 본문의 핵심은 양식 이적입니다. 성경에 양식 이적이 열 두 번 나옵니다. 먹을 것을 운반해 주신 이적으로 만나(출 16:13~14), 반석의 물(출 17:6), 까마귀의 떡과 고기(왕상 17:1~7), 천사가 가져온 떡과 물(왕상 19:5~6), 또 베드로가 고기 잡은 일(눅 5:6, 요 21:11)이 두 번 있고, 그 다음에는 기존물을 변화시킨 것으로 포도주 이적이요(요 2:9), 그 다음에 중요한 이적이 거미줄 빼는대로 나오는 것처럼 기존 물질이 부풀어 난 것인데 이것이 구약의 사르밧 과부집과 선지생도의 집 기름 이적과(왕상 17:8~16, 왕하 4:1~7) 또 떡 20개로 100명을 먹인 이적이 있고(왕하 4:42~44), 신약에서 5병 2어, 7병 2어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5병 2어 사건이 4복음에 다 기록 되었습니다(마 14:13~21, 막 6:34~46, 눅 9:10~17). 그렇다면 네 사람의 저자가 한 가지사건을 말하였을 때 각자의 특징이 있겠지요. 그 특징 중에 요한의 기록에 나타난 것이 더 특징이 있어서 이것을 본문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분위기를 조성할 때 마태는 “세례요한의 죽음 소식을 듣고 빈들로 가자” 하였고, 마가는 “요한의 죽음 소식과 함께 예수님이 휴식을 명하셨다” 하였으며 누가는 “열 두 제자의 전도 소식과 함께 요한의 죽음 소식도 들었다” 하였고, 요한은 “유월절이 가까워오는 때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빈들로 가자 하시고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 하였는데 누가만 그 장소가 “벳세다”라고 하였습니다(이 대조되는 내용은 그만하고). 요한복음의 특징에는 빌립과 안드레의 이름이 나오고, “빌립을 시험하셨다”는 말씀(5절)과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하신 말씀과(13절)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임금 삼으려는 것을 피하셨다”는 말씀이(15절)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3. 여기에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1) 예수님은 분명히 창조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때나 자연계를 창조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2) 다만 인간의 힘으로 양식 공급이 안 되고 그대로 두면 기진하여 쓰러질 우려가 있을 때(마 8:3) 이적으로 양식을 주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이적을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이런 이적을 체험하려면 양식 없는 장소에 갇혀서 3일쯤 굶은 후에 이적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꼭 이적을 베푸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쯤 되면 하나님이 무슨 역사를 하실 듯 하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 큰 무리에게 어떻게 떡을 구하여 먹였으면 좋겠느냐” 하셨으니 이것은 사명을 일깨워주시면서 사람의 방도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이때에 먹을 걱정을 먼저 한 것은 열 두 제자였는데(마 14:15, 눅 9:12) 예수님이 빌립을 지목하여 물으신 것이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아도(떡을 거출해도) 200데나리온 어치는 부족할 터인데” 막 6:37에서는 “그만한 분량은 동리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4) 인간의 힘으로 안 될 때 예수님이 능력을 나타내셨으니 그것이 곧 어린 아이가 선뜻 내놓은 적은 양식을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신데서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① 제자 중 모두가 사명을 느꼈고, ② 적은 봉사가 있었으며 ③ 감사와 축사가 있었고, ④ 그 다음에 나눔이 있을 때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난한 돈으로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금방 유명해지기도 할 것이고,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눅 6:38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고 흔들어 넘치게 하실 것이라”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그 당시의 사건은 주님의 이적이지만 그런 이적이 없는 시대에도 물질의 축복 받는 방법이 그렇다는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부족하지만 감사하고 적은 것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5)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시므로 재활용에 힘쓸 것을 말씀하셨고,

6) 무리들이 “임금을 삼겠다” 하여도 사양하시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영광을 받자고 자선 사업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36과 불안한 세상 (벧후 3:10~13) 목록으로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와 과학이 발달하니까 점차 좋아지리라고 희망을 가지십니까? 아니면 병든 세상이고 치료 불가능하며 망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세상이라고 아십니까? 성경대로 대답하셔야 하겠지요.

1. 본문 10절에서 “주의 날(재림, 심판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때는 우주가 다 파괴되고 모든 일(숨겨진 일)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괴될 세상인데 “이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건강하게 활동하셨는데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느닷없이 위암 말기로 판정을 받고 두 달 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죽을 것은 알지만 언제 죽을지를 모르는 것이 마치 도적이 드는 것처럼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것을 알지만 준비가 부실하여 불안한 것입니다. 죽는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처럼 이 세상의 끝도 죄로 인한 병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만삭되면 해산해야 하듯이 죄가 차면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에 끝이 있는 것입니다.

2. 병들고 불안한 세상을 한 번 진단해 볼까요? 막 13:28을 보시면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알지 않느냐 너희들도 이런 일(무화과나무 연한 것=죄를 의미함)을 보면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병든 세상을 진단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1) 우선 진실을 찾기가 어렵고,

2) 대인 관계가 점점 경색되어 갑니다. 친척도 멀어지지 않습니까?

3) 정치는 싸움만 하고,

4) 자연계의 오염 때문에 조개에도 독이 들어 있고, 감자 튀김에도 암의 요소인 아크랑 아마이드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5) 주변국을 보십시오. 이북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 다 믿기 어려운 나라들 아닙니까?

6) 그런데다가 테러위험, 전염병, 교통위험, 자연재해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설교를 쓰는 시간에도 일본 어느 곳에 4.5도의 지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선 살기는 사는데 도무지 예측 불허의 세상이란 것이 사실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기 때문에 주식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도 감지하실 것입니다.

7) 이런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 세계를 깊이 들여다 보신다면 또 실망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성직자일수록 예수님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교회가 순결합니까? 기독교 비판은 그만하고 다만 믿고 바랄 것이 못되는 세상이라고만 아시면 됩니다.

3.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하시겠지요. 그 대답이 본문에 있습니다. 우선 본문대로 말씀드리면

1)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뇨” 하시고, “거룩한 행실로 경건한 생활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경 연구 잘 하고, 예수님 모습 잘 알며, 예수님을 닮으므로 경건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적처럼 오셔도 순결을 지키는 성도는 각별히 대해 주실 것입니다(벧후 2:7). 소돔의 멸망 때 놋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 재림 전에 세상을 떠나도 각별하게 인도하십니다(요 14:1~3).

2) 12절에서 “그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 보따리를 꾸려놓고 천국 갈 때를 기다리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과 대화를 해보면 죽을 준비한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건강해도 그 날을 사모해야 하거든 하물며 몸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 같은데 어찌 죽을 준비를 안 하겠습니까? 일간 강화도에 가서 유골함을 묻어 놓고 오려고 합니다. 또 죽기 전에 무엇 무엇은 꼭 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다 이루었으니까 이제는 데려가셔도 됩니다.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경건으로 깨어 있는 것이고, 둘째는 그 날을 사모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 할 일을 다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3) 1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의만 있고 죄 없는 곳을 뜻함)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없는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속상하지 않습니까? 문 열고 나가면 층계에 담배 꽁초와 담배 연기가 있습니다. 왜 남의 집 문 앞에 와서 악한 냄새를 풍깁니까? 죄를 쉬운 것부터 고쳐야 하는데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되니까 여론조사 전화가 많이 옵니다. 경제를 일으킬 사람이 도지사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기로 “나는 경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70년대처럼 살아도 괜찮다”하니까 무엇이 중요하냐? 하더군요. 그래서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세상이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천당이나 가야 깨끗하지 세상에서 무슨 깨끗함을 바라겠나”하고 세상을 미워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본문 설명입니다. 본문 아닌 것으로 두 가지만 더 보충하면

4) 분변을 잘 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눅 12:56을 보시면 “시대를 분변하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병든 세상을 진단하라는 뜻입니다. 죄악이 얼마나 관영되고 있는지 암 말기이면 두 달 이상 안 가는 것처럼 세상에 죄가 많을수록 말세도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분변은 딤후 2:15에서 “진리를 옳게 분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기주의, 현실주의로 배우지 마시고 예수님 모습 그대로 배워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시대를 분변함이 필요하고요.

5) 진리(하나님의 말씀)만 든든히 붙잡는 것입니다. 속지 않은 것은 진리 뿐이고(요 14:6),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뿐이기 때문입니다(마 5:18, 벧전 1:24).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다섯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제37과 새 힘을 얻자 (사 40:27~31) 목록으로


(7분 설교 3집 전 21과 “하나님을 앙망하라” 참고) 이 본문을 읽고 우선 제목을 “새 힘을 얻자”고 정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나 설교를 구상할 때 단순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고 좀 더 상세히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더 잘 하는 일입니다. 상세히 연구하는 방법으로 본문을 살피신다면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야곱이란 이스라엘 선민에게 주신 말씀이고, 이사야 선지자는 다 16대 히스기야왕 때(왕하 19:·~20:) 사역을 한만큼 그 시대의 형편에 적응하도록 주신 말씀이니까 그 시대의 형편도 알아보시고, 또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도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의 백성들은 원통한 사정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잘 안 돌보아 주신다”고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원통한 사정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왜 그 일에 외면하셨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다인들의 원통한 것은 앗수르의 압박이고 침략이었습니다. 앗수르가 히스기야 6년에 북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을 하니까 히스기야가 복종을 하고 성전 기둥의 금조각까지 벗겨서 조공을 바쳤으니(왕하 18:9~16)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문을 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왜 이렇게 내버려 두셨고, “주여주여” 했어도 응답을 안 했을까요? 그것은 열왕과 열조와 민족이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죄가 분량을 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 28:15, 36~37과 왕하 17:19~26에도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의는 개인에게 갚으시고 또 민족의 죄는 민족에게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견디는 백성들이 얼마나 피곤하였겠습니까? 그 피곤의 형편을 “소년도 넘어지고 장정도 자빠지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피조물은 자연의 재앙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그 징계는 피하도록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하도록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맞을 만큼 맞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며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고, 또 명철도 한이 없으신 분인데 “그 능력과 힘을 피곤하고 무능한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피곤을 느끼는 성도님들은 꼭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받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새 힘인데 성도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주신다” 하였고, 받기만 하면 하늘을 날 만큼 힘이 솟고 “달려도 피곤치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또 연구할 과제가 생깁니다. 우선 나는 무엇에 피곤을 느끼며 그 원인이 무엇인가? 를 아셔야 할 것이고, 또 모든 인생이 느끼는 피곤과 환난은 무엇인지도 살피셔야 할 것이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방법”이고, 또 알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의 성격”입니다.

1. 성도에게 무엇이 피곤하냐 하면 “먹고 살기 위하여 돈 버는 것이 피곤하고 건강 지키는 일이 피곤하다”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돈 있고, 건강한 분들은 현세의 낙을 누리려니까 피곤하겠지만 현세의 낙이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어렵게 사는 성도들을 마음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어렵게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로 모시고 현세적 과욕을 버린다면 큰 짐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70억짜리 집에서 사는 것과 7천만원짜리 집에서 사는 것이 1/100로 차이가 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절대 가치를 모르면 상대 가치를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환난까지 겹쳐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앙망해야 새 힘을 얻고 고달픈 신세를 만회하며 창공을 나는 자처럼 활발해질 것이라” 하셨으니까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을 앙망함”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일까요? 앙망이란 믿고 쳐다보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입만 벌리고 “주여 주여”할 수는 없겠지요.

1) 앙망은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목적과 방법이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겠지요.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만 보일 것이니” 빚을 다 갚은 것만큼이나 후련할 것입니다.

2) 하나님 뜻에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없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바람 따라 가는 배처럼 말입니다.

3) 자기의 받은 은사(곧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실 때는 새 힘을 주셔야 하겠지요.

3. 그러니까 어떻게 새 힘을 주시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새 힘은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고 맡길 때 옵니다. 자기의 문제를 능력자에게 부탁하고 맡겼으니까 그만큼 가벼울 것이 사실 아니겠습니까?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쁨으로 시행하면 그만큼 힘이 오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때는 힘 빠지는 것을 체험하겠지요.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때 직접 주시는 새 힘은 이적을 의미하고 간접적으로 주시는 새 힘은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자가 나타날 때는 꼭 하나님이 보내주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높이 난다”는 뜻은 장애물을 초월하고 높이 계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새 힘은 성령님이 주시는데 성령님은 지혜의 신이시기 때문에(사 11:2) 먼저 지혜를 주셔서 많이 깨닫게 하시고 다음에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불과(마 3:11, 불세례) 물과(요 3:5, 7:38~39, 생수), 바람(행 2:2)의 역사로 비유하셨는데 이 세 가지 중에는 바람의 역사가 더 큰 줄로 압니다. 물은 불을 끄고 바람은 물을 흩으니까요.

6. 도덕적 생활과 관련 있는 말씀

제38과 진실을 점검합시다 (마 5:37) 목록으로


“진실을 점검합시다”란 제목으로 “진실”이란 단어를 놓고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누가 저희들을 보고 “당신은 거짓된 사람이요”한다면 크게 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간간히 “진실 아닌 것을 감행한 적이 있다”고 반성하기도 할 것입니다.

1. 진실이 왜 중요할까요?

1) 진실은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죽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 모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핍박자들이 “너 예수 믿으면 죽인다” 했을 때 예수님을 속으로만 믿고 말로 “안 믿겠다”하면 죽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은 진실과 믿음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이지요.

2) 진실이 아니면 믿음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겠다 안 믿겠다”를 여러번 번복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결국은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처럼 믿음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거짓으로 믿는 자의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을 것인즉 거짓 믿음은 효력있는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이 세상에 거짓이 판을 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한우고기 사면 젖소고기 주고, 기름을 짜도 섞인 기름을 준다고 하며 언젠가는 큰 수박을 흥정해 놓고 왔는데 배달은 그보다 작은 것이 왔으니 이렇게 암흑한 세상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진실이 중요한 것을 우선 세 가지만 말씀드리고,

2. 진실의 본질을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진실의 본질은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표현할 때, “진리(요 14:6), 참된 자(요일 5:20), 참되신 하나님(살전 1:9), 참 빛(요 1:9),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투명하시다는 뜻. 약 1:17)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며(고후 5:21) 하실 수도 없는 분이라 하셨고(히 6:18), 또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분이라(딤후 2:13)”고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하나님, 롬 3:4)은 진실하시고 투명하시며 그 말씀이 진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 중에 인간은 다 거짓되도(롬 3:4) 변화를 받은 백성인 만큼 최대한의 진실을 지키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진실을 나타내는 힘이 강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또는 정욕적으로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1) 체면이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약점을 감추거나 거기에 따른 거짓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과거가 추하다 하여 숨기는 일, 남이 인정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 하여 숨기는 일, 혹 늙은 것을 나타내면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젊게 위장한다든지 심지어는 나이 먹은 것을 꺼리는 성직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족보상의 문제까지도 다 드러내신 분이고, 바울은 과거의 약점과 자신의 약한 것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이단 좇은 것, 사람 죽인 것, 말에 졸한 것, 육체의 가시 있는 것, 심지어는 핍박을 피하여 광주리를 타고 도망한 일까지 말씀하셨으니까요. 왜 이렇게 자기의 약점을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고후 12:6에서 바울을 평가하는 눈이 지나칠까 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중매인으로부터 신부감 소개를 받았는데 신앙과 학벌이 좋고, 기술도 있고, 가문도 좋다고 장점을 많이 말했는데 숨겨진 약점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면 잘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왜 장점, 약점을 다 알리지 않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장점과 약점도 알리는 것이 바른 행위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면에서 진실하셔야 합니다.

2) 위기 의식 때문에 거짓말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거짓말이고, 기생 라합의 거짓말입니다. 이럴 경우에 살기 위하여 거짓말 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시겠지요.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취소하겠습니다” 하셨다면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거짓말 죄를 지을 수 없으니까 돌아가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위기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시든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진실을 사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약하여 일시적으로 진실을 굽혔다면 하나님이 긍휼로 용서하실 수도 있겠지요.

3) 계략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이 계략적인 거짓말을 사회적으로 또는 교육학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나 선생님이 자녀들 교육을 시킬 때 약점은 덮어 놓고 책망하지 말고 장점만 잡아서 칭찬하고 희망을 심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책망은 안 받고 칭찬만 받는 바람에 신이 나서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지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라”하시므로 옳고 그른 것 중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악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부가 예쁜데 귀가 멀었다면 두 가지 다 말해야지요. 인물만 좋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거짓이 성도의 세계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줄 압니다. 특별히 부부간에 그렇다고 봅니다. 요즈음 부부 중에 자존심 갖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자존심은 교만이고 하나님 앞에 악입니다. 신부가 그렇다고 가상합시다. 남편이 그 자존심을 지적하면 화합과 협조가 안 되니까 무조건 좋은 것만 칭찬하고 살았다면 그 남편은 평안을 위해서 공평과 진실을 덮은 것입니다. 평안보다 공평과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북한은 인권이 떨어진 나라이지요. 유엔 총회에서 그 인권을 지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권을 했습니다. 남북 관계 유지를 위하여 바른 말을 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실을 타협한 것입니다. 반드시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고 할 때 진실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제39과 외식을 피합시다 (마 23:25~28) 목록으로


마 23장을 보시면 “외식하는 자들에게 화있을진저”하신 말씀이 일곱 번 나옵니다. 외식은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 외식(또는 의식)에 빠져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그 죄값으로 주후 70년에 큰 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외식을 피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1.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모양새이지요. 사람이나 사물이나 속이 있고, 겉이 있으며 목적이 있고, 절차가 있습니다. 속과 목적을 열매라 한다면 곁과 절차는 나무 또는 잎과 같은 것인데 겉이 속보다 크고, 절차가 목적보다 장황스러우며 열매보다 잎이 무성하면 외식이 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물의 내용보다 선물의 포장이 더 잘 되어 있다면 실속 차리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속과 겉이 같거나 겉이 속만 못하면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용보다 나타나는 것이 더 크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속을 저울질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이 곧 실속이요,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의 소재는 경제논리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성도들은 모이면 믿음논리에 비중을 두셔야 하겠지요. 외식이 많은 믿음 생활과 외식을 피하는 믿음 생활을 견준다면 단연코 실속 차린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성도들 중에는 외식을 일삼는 사람들도 없지 않으니 저는 그런 것을 일깨워드리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왜 외식을 피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왜 외식하는 자들을 정죄하셨을까요? 그 이유

1) 속과 겉이 다르면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선전하는 물건과 배달 받는 물건이 같지 않거나 선전하는 보험과 혜택받는 경우가 같지 않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거짓된 죄악입니다. 외식의 뜻이 바로 실속보다 형태가 큰 것을 말하니까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격이지요.

2) 외식에 들어가는 밑천을 실속에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새벽 기도회 때에 저는 “본 교회 교인들과 연고자들을 위해서 자세히 기도해야 하겠다”고 계획을 하였는데 외지 교인이 한 분 오신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30분 이상의 기도 시간을 끌 수 없어서 새벽 기도 인도를 20분에 끝냈습니다. 외처 교인에게 개인 기도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랬지요. 그런데 그 분은 예배 끝나자 즉시 갔습니다. 우리끼리의 기도 시간만 손해를 본 셈이었습니다. 저는 그 외처 성도가 잠시 앉았다 갈 바에는 차라리 “자기 집 골방에서 기도를 하였더라면 좋을 뻔 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왔다 갔다 하는 의식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물할 때도 포장 비용을 내용에 포함시키세요.

3) 외식자들이 예수님의 미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예수님이 역겹게 보시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외식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1) 예배당 우상주의에서 나타납니다. 예배당을 공예배의 처소나 교육 장소로 아시면 족합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구약 성전시하거나 예배당이 화려하면 은혜가 더 되는 줄로 착각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왕상 8장을 보시면 솔로몬이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배당을 그 성전으로 착각하고 숭배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천주교 예전헌장 7장에 보시면 “성전에서 쓰는 미술품과 조각품 제구들은 사람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정성되게 이끄는데 공헌하는 만큼 숭배하고 보존하며 더욱 창작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품이 은혜의 방편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뿐이라”고 하는 개신교 신앙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2) 성의에서 외식이 나타납니다. 성의는 목사도 입고 신부도 입으며 이단 교주들도 입는데 요즈음 추기경 한 분이 더 임명되면서 천주교 지도자들의 성의가 더 나타납니다. 그들이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두렵고 또 민망하여 못 볼 지경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옷을 입으신 일 있습니까? 지금 갖다 드리면 입으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높으시니까 입으십시오”해도 안 입으실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의 편에 있노라”(막 10:45) 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인들은 성직자가 그렇게 옷 입은 것이 은혜를 준다고 믿을 것입니다.

3) 명예적 외식입니다. 직분의 성격도 모르고 직분 받기를 좋아하고 학위의 성격도 모르고 증(증명서)만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실력은 실력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절대로 직분 명예나 간판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한국이 기독교 선진국이 되려면 교인들이 똑똑해지는 때가 와야 합니다. 교인들이 잘못된 것을 먼저 알고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때가 와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박사가 되려면 외국의 유명한 학교에 가서 7년 이상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7년은커녕 3년도 아니고 1년도 아니며 앉아서 박사 되었다고 감사 예배를 드리는데 대부분의 성도가 “우리 목사님 박사 됐다 나는 그런 목사님의 양이라”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명예적 외식입니다.

4) 돈 사업 외식입니다. 왜 돈 사업이 외식입니까? 신앙 비중이 돈 사업보다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1년 예산 20억입니다. 선교비, 구제비로 다 씁니다”했을 때 “그러면 그 돈 사업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였을 때, “믿음이 아니면 헌금이 어떻게 나옵니까?” 하겠지요. 그러나 헌금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말씀과 기도)보다 앞세울 수도 있고, 또 신앙의 의미도 모르면서 헌금하면 복 받으니까 팍팍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보다 믿음(영적 관계)을 좋아하십니다.

5) 마지막으로 외식은 예배 행사에 세속적 조미료를 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적인 작태 같은 것이지요. 예배는 곧 바른 생활에 접목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성도에게 항상 있을 것 (고전 13:13, 살전 5:16~18) 목록으로


성겨에 보시면 “항상 쉬지 말고…일깨여”(마 26:41)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 성구가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그 외에도 “항상 주야로 OO을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렇게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을 간직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육체적 기본 생활은 최소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인데 사람이 육체 생명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는 “숨쉬는 것과 먹는 것과 잠 자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다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성도의 신앙이 살고, 신앙의 기본 위치를 지키는데도 몇 가지 있을 것이 꼭 있어야 합니다.

1. 우선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소망은 낙심하지 않으면서 미래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이요,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다 천국까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도 천국까지 지속되어야 하고, 더 좋아진다는 기대감도 영원히 있어야 하는 것은 성취가 끝나거나 미래의 기대감이 없으면 좋은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역시 그렇습니다. 천국은 사랑이 넘치고 지속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한시도 그치지 않은채 영원히 간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진실과 온유와 겸손이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믿음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거짓이나 외식과 상종을 안 하니까 진실이 있어야만 하고 온유와 겸손은 은혜의 말씀을 받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라야 열매를 맺기 때문에(마 13:23) 그렇습니다. 약 1:21을 보시면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겸손해야 은혜를 받으니까 그런 것입니다(벧전 5:5). 따라서 진실과 온유와 겸손은 성도의 마음의 기본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마 11:29). 진실, 온유, 겸손이 없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되시고 온유, 겸손하신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요,

3. 성도에게 기쁨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살전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셨지요. 성도가 항상 기쁨을 지니고 살려면 그만한 깨달음과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큰 기쁨의 소재 아닙니까? 어떤이가 중요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몇 시간 후에 있었던 장소로 찾으러간즉 아무도 손대지 않은채 그 지갑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크게 만족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또 부모를 잃은 고아가 수십년 고생을 하다가 부모를 찾았다면 그것도 기쁨의 소재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기쁨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을 알면 알수록 믿음 지식이 더 커집니다. 죄사함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된 뜻을 알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알고 천국을 알고 공의로운 심판을 알아보십시오. 기쁨 떠날 날이 없을 것이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소망을 가진고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잊으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항상 있을 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1:2)하신 말씀과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항상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43)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과 기도는 주님과의 동행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까? 저는 없는 줄 압니다. 잠잘 때야 무슨 일이 있겠나? 하실지 모르나 잠 자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은 줄 압니다. 언젠가는 마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서 무서워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시도 하나님 의지하는 일을 떠날 날이 없은즉 주님을 모시는 일, 즉 말씀과 기도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고, 또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도 많이 있고(엡 5:20, 살후 1:3, 2:13, 몬 1:4), 특히 기도로 소원할 때 “감사로 아뢰라”(빌 4:6, 대상 4:10) 하셨지요. 범사에 감사하시려면 우선 짜증을 해소하는 법부터 아셔야 합니다. 전화위복을 믿으면 환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지요. 저 아는 최집사 남편이 차 사고를 당했는데 “죽지 않아 감사하고 자기 실수 아니어서 감사하며 노후 차량이 파괴되어 감사하고 많이 깨달아서 감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좁은 도로에서 차를 비켜줄 때 내가 양보하니까 감사하다고 끄떡하며 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감사는 기도 응답의 관건도 되거니와 나와 너를 다 기분 좋게 하는 방법도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41과 무엇을 가지고 나갈까 (마 6:6~8) 목록으로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까”하는 제목입니다. “사람이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나이 많은 사람은 가는 순서가 빠를 것입니다. 제가 70세가 아직 안 됐지만 한국의 남자 평균 수명이 73세란 말을 들으면 “많이 살아야 몇 년이겠구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몇 일 전에 어떤 목사님이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주셨는데 거기에 찍힌 제가 제 모습이 아니고 아주 늙은 다른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에 내가 어디 섰느냐”고 아내에게 물은즉 “이 사람이 당신 아니냐” 하면서 “왜 젊은 목사님들 모임에 가서 남의 사진을 망치느냐 당신 한 사람의 늙은 모습 때문에 이 사진이 보기 흉하다”는 것입니다. 농담조의 말이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늙었나”하는 생각과 함께 살 날이 촉박한 것이 사실인데 아직도 남은 일과 할 일이 많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슨 보따리, 무엇을 가지고 가야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모습이 없는 성령님과 성경 말씀을 모시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갈 때는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 앞으로 가는데 친정 어머니가 시집 간 딸을 반기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반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예수님 나는 이렇게 살다 왔습니다”하고 보따리를 풀어 보여드려야 하는데 정말로 주님이 “잘 했구나 좋구나”하실 것들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을 보시지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가서 경배할까 1년된 송아지(물질, 제물)를 갖고 나갈까 했으나 송아지는커녕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 뜻은 성도가 세상에서 재물 많이 갖고 산 것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물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갖고 누리기 위하여 긁어모은 것은 상 받을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 맏아들…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였는데 자기 자식은 자기에게 귀한 것이지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이 내 자식 보시고 기뻐하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의 열매”는 생명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신즉 크게 반기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곧 공의를 구하여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보따리 내용이 나왔습니다. 잘 챙기셔야 합니다. 첫째는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암 5:24에서는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 하셨는데 이 공의와 정의는 바로 순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인자를 사랑함”은 곧 사랑 실천을 의미하고 셋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은 헌신적 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보따리 내용은 순종, 사랑, 헌신 뿐인 것입니다. 혹이라도 “예수님 저는 목회하면서 전도를 잘 하여 많은 교인을 만들었고 교인이 많다보니 큰 교회가 되었으며 그래서 대접 잘 받고 살다가 왔습니다” 했다면 예수님이 무슨 대답을 하실까요? “네가 수고한 것은 내가 다 안다 그러나 네가 전도할 때 내가 도왔고 등록 교인이 생길 때 내가 거듭나게 하여 인도했으며 교회가 부흥될 때도 성령님이 다 하신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중에 너는 대접도 많이 받았은즉 너의 상급은 이것 뿐이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공로는 크게 내세울 것이 못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늙은 이야기를 말씀드렸지만 젊은 분이라 하여 준비 기간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즉 부지런히 노력하여

2. 내세 상급의 무게를 줄 수 있는 순종과 사랑과 헌신에 힘쓰실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1) 무조건 순종을 잘 하십시다. 고후 13:8을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셨고, 또 고전 4:6에서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갈 수 없으며, 고전 7:19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데는 아무 조건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 위임식 때 어떤 목사님이 교인 권면을 하시는데 제가 감동을 받았기로 말씀을 드립니다. “새벽 세시쯤에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만났으면 좋겠다’ 하시면 ‘예 알았습니다. 곧 갑니다’ 하면 되지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하고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쯤 순종해야 순종이 쌓이지요. 시 119:56에서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입니다”하신 말씀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순종의 보따리가 무게를 줄 것입니다.

2) 사랑의 보따리입니다. 마 25:32~46에 보시면 양과 염소를 분별하셨는데 염소 편에 섰는 사람들이 “언제 주님이 오셔서 목마르다, 춥다, 외롭다 하셨습니까?” 하였고, “소자를 안 돌본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사랑 실천과 상급을 연계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가지신 분은 많이 베푸십시오. 그런데 게을러서 못 갖고 없어서 못 베푼 것은 자랑꺼리가 못 되고, 남을 더 갖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을 자초하셨다면 그 분은 가진 것으로 베푼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나타낸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 8:9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자보다 더 숭고한 사랑임을 알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헌신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함께 있기 위하여 소자들 쪽으로만 다니다 보니 자기 집이 좋아도 있을 시간이 없고, 좋은 음식이 있어도 먹고 누릴 시간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 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고, 세상 정욕에도 얽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세욕을 누리지 못하고 주님만 가까이 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순종과 사랑과 헌신을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42과 거룩과 의와 선의 묵상 (롬 7:12) 목록으로


“거룩과 의와 선”을 묵상해 봅니다. 성경에 거룩과 의와 선이 한 절 속에 기록된 말씀이 본문입니다. 제가 이 세 가지 의미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하여 오래 묵상하였고, 성구도 많이 찾아 보았으며, 일반 국어 사전의 설명도 찾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원론적인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1. 거룩과 의와 선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 그 근원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의롭고 선하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근원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1) 성경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요 17:11, 레 11:45). 그런데 “하나님만 거룩하시다”는 말씀은 없으나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사람으로는 의인이 없음. 롬 3:10)에 거룩하다” 하셨고, 또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레 20:8, 히 2:11, 요일 2:20) 하셨으니까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이차적일 뿐 거룩의 근원과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요,

2) “의”라는 것에 대하여서도 “의인은 없고(롬 3:10) 하나님은 의롭다(사 42:21, 시 89:14, 119:142)” 하셨으니까 역시 의의 근원자이시고,

3) 또 선을 생각해 보면 막 10:18에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셨으니까 이 세 가지 덕목의 근원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덕목을 그의 말씀만으로는 다 알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 예수님으로 다 보여 주셨기 때문에(요 14:9) 예수님이 곧 거룩과 의와 선의 근원자이시고 또 모범자이신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과 의와 선을 인간들에게 힘입혀 주시는가? 할 때 하나님은 그 속성을 인간에게 주시고 또 인간이 그것을 본받아 행하도록 권장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달이 자기의 빛은 없으나 태양빛을 받아서 비취는 것과 같고, 또 사람이 샘물의 근원을 만들 수 없으나 그 맑은 물을 활용할 수 있는 것처럼 거룩과 의와 선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최대한 본받도록 은혜와 방법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나니라”(레 11:45, 딤전 4:5) 하셨고, 마 5:10에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한다” 하셨으며 미 6:8에서도 “오직 공의를 행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셨고, 또 롬 7:12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이니까, 시행하여 성도들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함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거룩과 의와 선이 무엇인가? 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1) 이 세 가지는 다 하나님의 근원적 속성인데 그것이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로 나타났고 또 성도들에게도 권장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고,

2) 거룩과 의와 선에 대하여 국어 사전에 보면 “거룩은 성스럽고 위대한 것”이라 하였고, “의는 옳은 행위”라 하였으며 “선은 착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막연한 것이지요. 성스럽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며 또 무엇이 옳은 행위이며 무엇이 착하고 훌륭한 것이냐? 할 때 그 표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원자이신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 설명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거룩과 의와 선의 의미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거룩은 예수님처럼 죄와 상관없이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인간들이 그렇게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즉 성경대로 살고 또 기도를 통하여 성경 실천의 힘을 구하므로 죄와 상관없는 예수님처럼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변화된 새사람이겠지요. 만일 사람이 완전히 거룩해진다면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히 2:11) 하셨고, 또 “아들의 형상을 본 받으라(롬 8:29)” 하셨으니까 유혹 많은 세상에서 최대한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이요, ② 의에 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엇이 의냐”하면 의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신앙 계명과 사랑 계명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잘 지키면 의롭게 사는 것인데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의를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의의 반대인 “죄를 졌다”는 뜻이 되고, 모든 사람이 의에 완전하지 못하니까 죄인이 된 것이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니까 죄인을 심판하실 계획을 하신 분인데 그 중에 구원할 자를 십자가의 의를 힘입혀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의는 선행에 해당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공로로 심판을 면제해 주시는 것을 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저는 선과 의가 같은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이면 선은 무엇이냐? 하시겠지요. 선이란 표준도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선이니까 의와 같은 것입니다. 편리하게 이해하시기 위하여 “의와 선이 같고 칭의는 구속의 은혜로 면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거룩”은 죄와 상관이 없으면 성립이 되지만 의와 선은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데서 성립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란 뜻은 죄와 의와의 관계에서 심판하고 또 여러 사람과 나 사이에서 행동하는 원리를 찾는 것입니다. 죄와 의와의 관계에서 심판을 하시니까 죄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상을 받게 되는 것이고, 또 여러 사람 관계에서 행동 원리를 찾으니까 개인의 환경에서 혼자 사는 생활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과 의와 선에 대하여 좀 더 발전된 지식이 있으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3과 기독교적 신앙 생활 (시 73:23~28) 목록으로


“기독교적 신앙 생활을 어떻게 설명드려야 좋을까”를 연구하는 것이 저의 본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많은 설교를 하기도 하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또 묵상을 하면서 “이렇게 설명드리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에서는 기독교적 신앙 생활을 몇 가지로 말씀해 주신 줄 압니다.

1) 23절을 보시면 “항상 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복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지요(창 5:24, 6:9). 그런데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으려면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좋을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겠지요.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싫어서 도저히 함께 살기 싫어서 “절간을 옮길 수 없으니 중이 떠나야지”하고 남편 자식 두고 집을 나간 사람을 보았는데 성도가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으려면 같이 있어도 싫지 않고 지루하지 않을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25~28절에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라는 것”입니다. 반석은 든든한 의지의 대상을 의미합니다. 혼자 있으면 허전하고 무섭지만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든든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요(28절)”, 또 25절을 보시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으리요 땅에서도 주 외에는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할 정도로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만 즐거운 것입니다. 든든하고 즐겁고 또 28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였으니 든든하고 즐거우며 복이 되는 줄 아니까 항상 하나님과 같이 동거, 동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디를 다니다가라도 자기 집에 와서 눕는 것이 제일 편안한 것처럼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하였고(23절), 또 “나의 피난처이십니다”(28절) 하였으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생활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보호, 인도 받기 위하여 기도 하셨습니까? 기도를 잘 하시고 하루를 사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다니 하나님이 나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시는가” 하시겠지만 지금 교회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신 것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누가 왕이 되었다면 잘 된 것이고 잘 인도 받은 것이지요. 사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잊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 하여 이리 저리 다니는데 찾지 못하자 같이 간 하인이 그 동리에 사는 선지자를 찾아가서 물어보시자 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네가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이라”고 선포를 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런 절차로 벼락 감투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게 된 때부터 하나님은 사울을 왕 세우기 위하여 인도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천국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습니다(24절). 천국 가는 티켓을 받는 것이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는 기독교적 신앙 생활을 “하나님과 함께 함,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음, 천국갈 준비함”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제가 본문을 떠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1) 기독교적 신앙 생활은 믿을 대상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을 대상은 하나님 뿐이시고 성경 뿐입니다. 웰빙을 믿어보려 하거나 생명보험, 의료보험을 믿어보려 하거나 촌에서 갖고 온 참깨를 믿어보려고 하지만 다 불안한 것이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만 믿는 것이 기독교적 신앙 생활입니다.

2)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천명이 곁에서 음식을 먹었다 하여 자신의 배가 부릅니까? 자기의 양식을 자기가 먹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다른 이와의 관계는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 가시면 무슨 수가 생기는 줄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큰 교회에 계신 하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올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 생깁니다. 절대로 신앙을 단체나 이웃이나 어떤 행사에 의존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이 바른 생활입니다.

3) 말씀에 끌리는 취미로 사는 것입니다. 시 119:87~106을 보시면 눅 10:42을 보시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 듣는 편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 생활 중에 말씀으로 깨닫고 기쁨 느끼는 것이 없으면 들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드시 성경을 연구하는 취미에 끌리셔야만 좋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닮아 사는 것입니다. 롬 8:29을 보시면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이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생활이 예수님의 생활과 거리가 멀다면 그것은 성경과도 거리가 먼 것이요,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포도원 경영자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사 5:1~2). 기독교 신앙 생활은 “예수님을 닮는 것”인데 잘못 닮았으면 헛수고 아니겠습니까?

5) 하나님과 성도의 무리와 함께 친교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의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을 대상을 믿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맺으며 말씀 취미로 살고 예수님을 닮으며 성도와 친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적 신앙 생활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제44과 말 잘 하기를 기도함 (사 50:4) 목록으로


저는 말을 많이 했고 많이 기록하였지만 말이 가장 어렵고 실수가 많으며 바른 말이나 바른 기록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몇 일 전에 국어 순화 연구를 하시는 이수열 국문학자의 글(동아일보)을 보고 더욱 느꼈고, 또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많습니다. “공연을 갖는다”하면 안 되고, “공연을 한다” 해야 하고, “가결시켰다”하면 안 되고, “가결했다” 해야 하며 “전통이 뒤집어졌다”는 “뒤집혔다”로, “3번이 되겠습니다”는 “3번입니다”로, “…적이 있었다”는 “때가 있었다”로 해야 된다고 합니다. 여하튼 한글의 법과 표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말을 잘못하여 불이익을 당한 사람도 있고, 또 말을 잘 하여 덕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잘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 질문한 청년인데(마 19:16~22) 그 청년은 잘못된 지식을 세 가지 말했는데 그것은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것(사람 중에는 선한 자가 없음),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한 것(율법으로 영생 얻는 줄 착각),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다 못 지켰음)”, 이 세 마디는 그가 옳게 배웠더라면 발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마 20:20~22에서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인데 예수님의 이모라고도 함. 막 15:40, 요 19:25)가 예수님께 자기의 두 아들을 높은 지위에 앉게 해 달라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장관되게 해 달라는 뜻인데 명예욕이 들여다보이는 말을 한 것이지요. 70년대에 어떤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 부흥회를 하시러 갔는데 그 곳에 초신자가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그 집은 나이 80 가까이 된 노인이 아들을 늦게 낳은 집인데 그 노인과 인사를 하고 건강을 칭찬하는 뜻으로 “백수(白壽)하시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노인이 그 말을 욕으로 듣고 “저런 사람을 왜 내 집에 데리고 왔느냐”하여 식사 대접을 취소하고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200살 살고 싶은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 나이를 떳떳하게 나타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백수하시오”하거나 나이를 묻는 것은 안 하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말을 잘 하여 복 받은 사례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감동시킨 일이 있어서 그가 다윗의 아내가 된 일이 있고(삼상 25:23~31, 42), 솔로몬이 기도를 잘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더 많은 복을 받은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왕상 3:5~13) 이런 사실을 보면서 “말을 잘 하는 것도 은혜인즉 기도해야 하겠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말에 대하여 주의를 주신 것만 몇 구절 살피겠습니다.

1.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선지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여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줄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나의 귀를 깨우쳐 주셔서 학자처럼 잘 알아듣게 하옵소서” 하였으니 이는 말로 위로하는 것과 잘 듣는 것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 잘 하시도록 기도하시자는 것입니다.

2.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벧전 3:15을 보시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병든 분, 가난한 분 등 고난당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을 만나서 대화할 때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말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하셨으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환자 위문 기도를 잘 하는 분이 계십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소망을 주는 격려나 축복 기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3. 전 5:2~3을 보시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오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니까 실수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관청에 서류를 넣었을 때 기록을 잘못하였거나 법규에 맞지 않으면 반료되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소원을 들어주실 리가 없지요. 그래서 “내가 이런 부탁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실까?”하는 것을 늘 성경에 비추어 보시고 합당할 때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적당하게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잠 30:8, 고전 14:40).

4. 야고보의 말씀입니다. 약 3:1~6에 보시면 “선생된 자가 말을 실수하면 큰 심판을 받으니 많이 선생 되려고 하지 말라 사람마다 말의 실수를 하는데 말의 실수가 없다면 온전한 사람일 것이라 말은 배의 키와 같고 작은 불과 같아서 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남의 집 아이에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못 느끼고 책망만 받을 때인지라 “부모가 자기를 미워하는 이유가 그것이었구나”하고 큰 고민을 하였는데 결국 담임 선생님이 그 아이와 상담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모습이 닮은 것을 이야기 하면서 오해를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담도 주의 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5. 마 5:37을 보시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사실대로 말하라는 교훈인데 역시 환경따라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죽었을 때 두 번이나 신하들이 그 말을 나타내지 못한 일이 있고(삼하 12:18, 18:32), 요즈음도 어떤 노모는 자식 죽은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말에 대하여 조심은 하지만 심각할 정도로는 느낀 일이 없었는데 글을 쓰면서 국문학적 표현을 하려니까 너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이래 저래 힘든 것이로구나”하고 말 잘하는 지혜를 기도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45과 자랑에 대한 말씀 (렘 9:23~24) 목록으로


얼마 전에 원로급 목사님 가족들과 모여서 대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분은 “재산을 많이 갖게 되었다는 내용과 또 자녀들이 잘 되었다”는 말씀을 자랑처럼 하셨는데 나는 거기에 비할 때 이것도 저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서 말을 못하고 그 대신 “자랑도 가려가면서 해야 할 것이라”는 반성과 교훈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반성하면서 “나는 무슨 자랑을 잘 하나”를 생각한즉 저는 솔직하게 건강이나 생활의 약점을 자랑처럼 나타내는 경향이 있고, 또 중요한 자랑은 내가 목회 2선에 나와 있기 때문에 혹이라도 누가 나를 헛되게 사는 인생처럼 오해할까 두려워서(오해해도 괜찮고 사람의 인정을 안 받아도 괜찮은 것인데)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또 바쁘게 살고 있다, 증거의 내용을 문자로 쓰고 있다”는 말을 자랑처럼 하고 있음을 반성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꼭 자랑할 필요가 없는데 여기에 한 가닥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당신들도 나처럼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사모하시오”하는 권장의 뜻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자랑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1. 성경에 보면 허탄한 자랑을 크게 경계하셨습니다. 벧후 2:18을 보시면 “저희가 허탄한 자랑을 토하여…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고 하셨습니다. 허탄한 것을 자랑에서 빼려면 허탄한 것을 아셔야 하겠지요. 롬 8:24에 보시면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하시므로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들이 허탄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또 고후 4:18을 보시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시므로 잠깐 있는 것, 있다가 없어지는 유한한 것이 허탄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세적, 물질적, 육체적인 모든 것이 허탄한 것입니다. 현세적인 것이 영원한 것에 비할 때 허탄하고 또 허탄한데 이끌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임을 안 성도들은 그것을 자랑꺼리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멀리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시 119:37) “내가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않는다” 하였고, 따라서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다” 하였으며(시 24:4) 욥은(욥 31: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여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그렇다면 공평한 저울에 달려 하나님이 나의 정직을 아시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허탄한 것들은 세상적으로 온 것이고(요일 2:16), 자랑거리가 못될 뿐 아니라(벧후 2:18) “그런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약 4:16, 롬 1:30).

2.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으니 자랑할 수 없고(롬 3:27), 또 육체가 아무리 미인이고 준수해도 늙으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의 동창 목사님 중에 총회장 한 분이 7명인데 늙으니까 걸음도 잘 못 걷습니다. 거기에 명예와 재물을 붙인들 얼마나 더 가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도 다 허탄한 것입니다. 고전 15:10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다른 사도들 보다 일을 더 많이 하셨지만 그것을 자신이 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라” 하셨고, 복음 전파도 부득불 할 일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셨으니(고전 9:16)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왜 복음 전파가 부득불 하셔야 할 일이며 자랑할 수 없는가? 하시겠지요. 그 이유는 바울이 복음의 빚진 자로서(롬 1:14) 빚 갚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20, 25에 보시면 “인간의 지혜가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만 못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전도 잘 하고 목회 성공한 분들이 자랑하는 경우가 혹 있지만 그것도 주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뜻입니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자랑하라”고 하셨습니까?

1) 빌 3:13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100번, 1000번을 자랑해도 괜찮은 일이며

2) 갈 6:14에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하셨으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과 대속의 은혜를 많이 자랑하셔야 하며

3) 사 45:25에 보시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자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의롭다 함을 받은 은혜는 인간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받았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4) 고후 11:30을 보시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약한 것은 그의 잘못 산 과거, 그가 고생하는 육체의 가시, 핍박이 두려워서 성벽을 타고 도망한 일(고후 11:32~33), 실수한 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랑을 하실 때 자신의 인격이나 신분은 깎여도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만 자랑한다면 크게 회개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5) 바울사도가 또 부득불 자랑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신비한 체험담이었습니다. 고후 12:1에 보시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신비주의자들의 날뛰는 교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훈이나 오해를 풀기 위하여 자랑할 때는 부득불 한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인간적인 모든 일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는 줄로 아심이 좋고 오직 자랑의 대상은 예수님, 십자가,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셔야 할 것입니다(대상 16:10, 시 20:7, 사 41:16). 본문으로도 깨달으십시오.

제46과 의인과 악인의 분별 (말 3:13~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이 많습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때에(심판하시는 때) 너희가 돌아와서(박윤선 목사님 주석에 원문은 또 한 번이라 함)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의인과 악인의 분별”로 정했습니다.

1. 우선 이 말씀에서 교훈받으셔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13절과 17절을 보시면 “여호와가 이르노라” 하셨고, 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이 가라사대, 또는 성령님이 말씀하시되(행 21:11)”하신 말씀이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호 4:1, 미 1:2)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선지자가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하면 “대단히 두렵고 숙연한 자세로 듣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느 8:5~9). 하나님의 말씀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말씀이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처럼 그 말씀으로 모든 이론과 분쟁을 끝내는 것이고, 교훈으로 말하면 마지막 교훈이고, 처방으로 말하면 극약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분쟁이나 이론도 성경으로 끝내야 하고, 어떤 잘못을 처방함에 있어서 성경(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방하였는데 듣지 않으면 그는 희망이 없는 자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말씀을 존중하고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시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13절에서 “완악한 말”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말은 마음과 인격의 표현입니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까?”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완악한 말을 해 놓고도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한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말로 표현해야만 완악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속에 품은 것도 완악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완악한 말입니까? 순하게 표현해도 뜻이 완악하면 완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완악한 말

1) “하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 14:1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완악하고 참람된 것입니다. 롬 1:19~20을 보시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만물에 보여 알게 되기 때문에 저희가 핑계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조상이 없다”하는 것처럼 원인자를 부인하니 이 얼마나 완악한 것입니까?

2)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안 섬긴다, 만군의 여호와 앞이라 하면서 그 명령을 지키고(그 명령을 지키기 때문에 고생하며) 슬프게 행한들 무슨 유익이 있느냐,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해도(계신가 안 계신가, 벌하시나 안 하시나) 화 받지 않더라”고 말하는 것 이 완악한 말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말입니다. “잘 해도 잘 되지 않고 막 살아도 벌 받지 않더라”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말 첫째는 “하나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의의 심판이 없다”는 것이요,

3) 그러니까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내실 때 목적을 가지셨으며, 그 목적대로 섭리를 하시는데 그 섭리를 무시하고 “내 뜻대로 산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적으로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악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추호라도 “하나님 없다, 공의 없다, 섭리 없다”는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그때에(악인들이 완악한 말과 행동을 취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어떤 태도를 취한다고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시면 “피차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저들의 말을 들으셨다, 듣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 때까지 간직하실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라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은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와 섭리를 무시하는데 성도는 “그렇지 않다, 너희들의 주장과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치부하셨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를 위하여 때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의인의 고난이 상당히 따를 것입니다.

4. 그런데 1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또 임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최종적 판결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나의 정한 날이 있다” 하셨으니 이 날은 하나님의 심판 날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주시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기 때문에 사람은 모릅니다. 내일일 수도 있고, 세상 끝날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로(성도, 의인, 공의를 믿고 선을 행한 자)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기뻐하는 것 같이 내가 그들을 아낄 것이요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또 한 번)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을 어떻게 벌하신다”는 말씀은 나타내시지 않았지만 성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특별한 소유를 삼고, 특별하게 아끼시며 그때에 옳고 그른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답답한 것은 악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완악한 말을 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느냐” 하였으니 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나 때가 되면 “아차 내 주장이 틀렸고 주여 주여 하던 자들의 말이 맞는 것이었구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급은 고사하고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 소유로 삼으시고 특별히 아끼신다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항상 의식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항상 기대하시며 그의 섭리에 복종하는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의 특별 소유, 또 특별히 아낌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7과 두 종류 (계 22:10~12) 목록으로


제가 열왕기상 19장을 살피는 중에 깨달은 것은 “아합왕의 처 이세벨이 회개하거나 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상 종교의 제사장 450인(거기에 아세라 제사장 400인도 합세하였을 것임)과 하나님의 종 엘리야 한 사람 간에 “누가 참신이냐”에 대한 대결이 있었는데 제물을 불로 응답한 신은 하나님뿐이었고, 다른 신은 다 헛것이요, 목석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지요. 이세벨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돌이킴이 마땅하고 또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죽이려 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도 돌이키지 않았고, 원수처럼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기적을 체험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해지지 않는 옷과 신을 신고 아침, 저녁으로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원망만 퍼부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도 그런 면에서는 반성할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빈 손으로 양말 한 짝 신지 않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것 아닌 것으로 지금가지 먹고 입고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기적으로 믿었다”하여 누가 이단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성도와 인류가 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만 돌려야 하고 “은혜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추호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는다 하면서 감사를 못 느낀다면 종류에 문제가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눅 16:31에 보시면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기록한 말씀을 듣고 믿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서 보인다 해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죽은 후에 자기는 지옥에 있고 자기 집 주변에서 거지 노릇하던 나사로가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살아가서 다섯 형제에 말하여 믿게 하겠다” 하였을 때, “모세가 말씀한 성경으로 안 믿는 자는 죽었다 산 자의 말도 믿지 않을 자라” 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과 이세벨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만난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기적의 사실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실이 있고, 스바 여왕은 예루살렘에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그 왕궁과 성전의 찬란한 모습을 보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요, 또 신약에서는 바울 사도를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은 율법주의 종교인으로써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신 계시 체험을 하고 즉석에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누구는 기적 체험을 하고도 믿음이 안 생기고 누구는 생기는가? 할 때 믿음은 택한 백성에 한하여 하나님이 거듭나는 은혜를 주실 때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히 12:2)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은 “믿습니까 믿습니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믿어집니까 믿어집니까”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요 3:3을 보시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 “거듭난다”는 뜻은 성령님께서 믿을 마음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 10:9을 보시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하셨는데 마 16:17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하였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 하셨고, 바울사도도 고전 12:3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결론이 나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구원받는다는 결론이지요. 엡 5:4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셨고, 롬 9:13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셨으며 벧후 1:10에서는 “택함 받은 사실을 굳게 믿어야…실족치 않는다” 하셨고, “택한 자의 수는 적다”는 의미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결론은 전도는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을 자를 모으는 것입니다. 안 믿을 자는 절대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자는 따라옵니다. 따라서 전도는 설득이 아닌 모으는 것입니다. 지남철을 대면 철분 있는 것만 붙는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면 믿는 자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결론은 성도들이 큰 짐을 벗었습니다. 전도해도 열매 없어서 걱정했고, 예배당에 자리가 비어서 걱정했는데 이제부터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내가 빛 된 생활을 못하거나 전도를 못하면 걱정을 하고 기도를 하십시오. 전도의 목표를 넓게 잡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결론적으로 주셨습니다. 창 1:24~25을 보시면 “짐승, 육축, 기는 것”을 종류 별로 만드신 것처럼 사람과 짐승도 종류 별로 만드셨고,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하신 것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인류가 다 믿기를 바라는 사람 되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생전에는 1000년을 더 살아도 원숭이가 사람 되는 것은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변화 안 될 자는 안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자, 더러운 자(불신자, 이단자)는 그대로 두고 의롭고 거룩한 자(신자,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자)는 자기의 의와 거룩에만 힘쓰라”하신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은혜를 사모함에 대한 말씀

제48과 경계로 주신 말씀 (출 17:1~7, 고전 10:5~11) 목록으로


“경계로 주신 말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을 읽으셔서 아시는 바와 같이 출 17:1~7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을 할 때 “르비딤”(신광야의 한 지점)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말씀이고, 고전 10:5~11의 말씀은 구약의 선민의 역사를 성경으로 기록하신 이유가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 숭배하고 간음하다가 죽은 것을 거울삼고(발람 사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당한 일, 원망하다가 죽은 일 등이 말세를 당한 성도들에게 경계로 주신 것인 만큼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살피시면서 경계할 점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1절을 보시면 “선민들이 노정대로 행하여 신광야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노정대로 행한 것”은 불기둥, 구름 기둥을 따라 행한 것인즉 하나님의 인도대로 간 것이고, 또 하나님의 인도가 멈추었기 때문에 장막을 친 것인즉 잘못 됨이 없었습니다.

2. 그런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착 시킨 장소에 마실 물이 없으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지요. 이때는 선민들이 열 가지 재앙과 홍해 갈라진 것과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한 것과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는 만나까지 먹은 후였으니(출 16:4)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고 성숙함을 보여야 하겠지요. 이때에 하나님이 물 없는 곳에 장막을 치게 하신 것은 그 물 문제에 대하여 성숙한 신앙을 나타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의 “물이 없다”는 의미를 확대하여 생각한다면 물질 문제, 건강 문제, 영적 고갈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물질이나 건강의 문제가 없는데도 신앙적으로 마음을 편케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은혜의 개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신앙 생활의 자유를 누리고 성경 공부를 잘 하면서 사랑만 실천하면 되는데 자기 욕심이나 허탄한 것에 사로잡혀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 책임을 교역자에게 돌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 문제나 생활 문제로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지혜롭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선민들은 “모세와 다투면서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모세와의 다툼이 돌 던질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4절).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왔는데 왜 모세와 다투며 하나님을 시험하고(2절), 또 원망하겠습니까?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주는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80년을 신학을 했다면 모를까 이방 나라 왕궁 생활하고 광야에서 목자 생활한 사람이 무슨 은혜를 베풉니까? 하나님이 은혜 전달하는 도구로 쓰시는 것뿐입니다. 청와대로 말하면 대변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잘못 없는 모세(복음사역자)를 원망하는 것도 잘못이고, 모세를 의지하여 “물을 먹게 하라”는 것도 잘못이며 모세와 다투며 싸우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면 모세 같은 사람 없어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또 한 가지 잘못한 것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기 때문에 전부 시험의 대상입니다(롬 3:4). 견본을 보고 물건을 샀는데 집에 온 물건은 견본 같지 않은 것이 옵니다. 얼마나 거짓된 것입니까? 전셋집을 임대하면서 아버지가 전세를 놓았는데 아들이 또 놓고 도망했습니다. 방 한 칸에 두 부부가 들어와서 오랜 기간 같이 사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권리증 이름과 주민등록과 당사자를 확인하고 계약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중도금 받고 집 열쇠를 안 주고 도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단단히 시험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일향 미쁘신 분이니까(딤후 2:13) 시험하면 안 됩니다. 제가 누구의 계약서를 써주면서 “주민등록증을 보자”하니까 펄펄 뛰며 성질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당사자로 안 믿어주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달라”했더니 주민등록 잊어버린 증명을 보이더군요. 거기에는 사진이 없기 때문에 누구의 직인이 찍혔어도 당사자 확인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사람은 믿기 어렵고 하나님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하였고, 7절에서 그 시험의 뜻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할 때 전세 계약하고 홍해 건널 때 중도금 받고는 물 없는 르비딤에 와서는 그 하나님이 사기치고 도망하여 우리 중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망령된 일입니까? “좋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고 안 좋을 때는 안 계시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유혹하여 목말라 죽게 한다” 하였으니 이 악을 무엇으로 변명하겠습니까? 저희들은 그런 잘못을 범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모세가 그 사실대로 하나님께 기도한즉 방법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선민들이 완악을 드러내기 전에 모세와 의논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한 때문에 완악만 드러나고 하나님의 노여움만 산 것 아닙니까? 이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지팡이를 갖고 백성 앞을 지나가서(돌로 치려는 백성 앞을 지나가게 하신 것은 모세의 희생적 태도를 요구하신 것임) 백성들과 함께 있는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산 반석 위에 서면 내가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장로들 목전에서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들로 마시게 하라” 하여 그대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해결자는 하나님이시고 해결 방법은 기도란 뜻입니다. 르비딤과 호렙산과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신앙 삐뚤어진 자들을 다 없애십니다. 고전 10:5에서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무조건 모이는 숫자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적은 수라도 진짜만 좋아하십니다. 반석을 치는 것은 예수님을 일깨우는 기도입니다. 그 땅 이름을 “맛사”라 “므리바”라 하였으니 “맛사”는 원망의 뜻이고, “므리바”는 다툼이란 뜻입니다.

제49과 경성하는 기도 생활 (눅 12:35~40) 목록으로


“경성하는 기도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40대 목회를 할 때 금요밤 철야 기도회를 8시간씩 한 일이 있었고, 50대 목회 때는 밤 기도회만 두 시간 정도씩 한 일이 있었는데 한 주간에 한 번 하는 것이라도 퍽 피곤합니다. 교인들도 피곤하겠지요. 기도를 많이 하시면 하신 만큼의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도록 깨우쳐주신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시간을 많이 할애하도록 주신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8시부터 30분쯤 아내와 함께 방에 앉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니까 하루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바쁜 일이 없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나니까 바쁠 일 하나도 없다”고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기회를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매일 느꼈기 때문입니다. 목사 내외가 무엇에 그리 쫓기는가? 하시겠지요. 제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설교 한 편 기록할 때가 많고 여러 가지를 정리하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저 하는 일에 몰두하면 아내는 식사, 빨래, 청소 같은 일에 손을 댑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할 때 제가(글 쓰는데 정신을 쓰기 때문에) 피곤하면 대표 기도하기가 힘듭니다. 또 전화를 받아야 하고 되도록이면 하루 일과 전에 기도부터 해야 하니까 그렇게 기회 붙잡기가 쉽지 않은데 다행하게도 일찍 기도 행사를 끝내면 그만큼 일처리를 많이 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기도의 필요성과 시급함을 느끼시고 기회를 잘 붙드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1. “종이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밤늦게 돌아오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2경, 3경을 놓치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은 성도의 신앙적 경성이고, 사명적 경성이며 더 나가서는 기도의 경성입니다. 2경, 3경은 가장 깊은 밤을 뜻하고 잠을 자야 하는 피곤한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종이 경성했을 때 “주인이 와서 기꺼이 여기고 종을 앉힌 후 오히려 수종들어 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기도로 경성한 성도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효력을 크게 믿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집 지키는 종이 도적 오는 시간을 알면 그 시간에만 경성해도 되지만 그것을 모르니까 밤낮을 고사하고 경성해야 하는 것이 마치 “시험에 들지 않기를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성경에 밤낮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 88:1에 보시면 “내가 주야로 주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 앞에 달하게 하소서” 하였고, 눅 18:1~8에서는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하여 한 과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에게 자주 찾아가서 하소연을 한즉 재판관이 자기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역시 항상 기도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기도로 시간 투자한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항상 기도하라” 하셨으니까 그만한 대가를 충분히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도 형통하게 해 주시니까요. 시 40:1~2을 보십시오. 다윗이 “기가막힐 수렁과 웅덩이에 빠졌을 때 기도하고 기다린즉 하나님이 건져주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 88:1에서도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씀이 있고, 딤전 5:5에도 보시면 “참 과부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더운 절기에 에어컨을 잠깐 끄면 금방 더운 열이 엄습하는 것처럼 성도가 기도와 말씀 정신을 잠시라도 중단하면 금방 나태와 세속과 위험의 바람이 자기를 감싼다는 것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주야 항상 기도”란 정신적 경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24:42, 살전 5:17).

3. 기회에 따라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 50:15을 보십시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하셨지요. 애 2:18~19을 보시면 “내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눈물) 밤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 지어다” 하셨는데 이때는 유다의 멸망시기였습니다. 시 62:8에서는 “시시로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은 눅 6:12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고, 또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뜨거운 기도를 드리셨으며(마 26:36~46)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도 집행관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문제와 강도의 구원 문제와 어머니의 부양 문제와 자신의 영혼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셨으니 고난을 불사하시고 죽음 직전까지 기도로 깨어계셨던 것입니다(눅 23:34, 39~43, 요 19:27, 눅 23:46). 성도가 세상 떠나는 그 시간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가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고, 귀한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 받기 전에(변화 있는 과도기) “전혀 기도에 힘썼다” 하였고(행 1:14), 또 핍박이 심하며 베드로가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었다” 하셨으며(행 12:5) 또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있으면서(그 발이 착고에 채인 상태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 16:25). 그때마다 하나님의 역사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문제 있을 때 드린 기도가 많지요. 야곱이 에서와 화해를 시도하려 할 때도 얍복강가에서 기도하였고(창 32:26, 천사와의 씨름), 다니엘의 기도나(단 6:10) 에스더, 모르드개의 기도(에 4:16)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눅 12:8~9에 보시면 양식이 없는데 밤에 손님이 온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경제적으로 부딪히는 성도의 생활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밤중을 개의치 않고 친구에게 찾아간 것은 바로 사소한 일이지만 기도의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재판관에게 사정하는 가난한 과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눅 18:1~7).

결론적으로 경성하는 기도 생활은 정신적으로 24시간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 있을 때 수시로 부탁하는 것이고, 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는 대부분 은혜를 구하게 되는데 나 잘 되기 위하여 이웃에 손해 줄 일은 결코 구하지 마시고 오직 나도 잘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되며 이웃에도 덕 되는 것을 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제50과 눈물을 흘리심 (요 11:32~35) 목록으로


TV에 “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방영을 보면 젊은 부인이 남편과 시모의 학대로 어린 자녀들을 두고 쫓겨난 후에 그 아이들이 큰 고생을 하면서 고아처럼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 그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 눈물이 안 날수 없습니다. 슬픈 연극을 보아도 눈물이 나는데 실제적 슬픈 사연을 보면서 왜 눈물이 안 나겠습니까? 그럴 때는 엉엉 울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울 사도께서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하셨고(롬 12:15), 약 4:9에서도 “애통하며 울 지어다” 하셨으니까 울 일 생기고 감정이 동하면 엉엉 울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데, 이것을 참으려 하고 우는 사람 취급 안 받으려고 슬쩍 슬쩍 곁에 사람(아내) 모르게 눈물을 닦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성하기를 “내가 왜 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가? 내 아내 앞에서 무슨 체면 세우려는가? 강인하고 쌀쌀한 사람으로 위엄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하면서 반성한즉 결국 울지 않은 척 한 것이 외식이고, 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 미련한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눈물을 자주 흘리는 것은 안 흘리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고 인간성을 순화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셔서 눈물 흘리기를 인색하지 마실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울 일이 있을 때 안 울면 롬 12:15과 약 4:9을 위반하는 것이고, 성격 못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쉽고, 따라서 동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성경을 몇 곳 찾아보았습니다. 전 7:3~4을 보시면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근심하면 마음이 좋게 된즉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웃음보다 슬픔이 낫다는 뜻인데 요즈음 웰빙 바람과는 반대됩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나와서 건강해지는데 울면 나쁘지 않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마음에 병들 정도로 우는 것이 아니고 스트레스 또는 마음에 엉킨 것을 풀어내는 목적으로 우는 것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만큼 흘리면 마음에 안정이 옵니다. 세속적 기쁨은 경건을 멀리 쫓지만 눈물과 슬픔은 경건한 자세를 취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마 5:4, 눅 6:21). 또 성경에 어떤 분이 많이 울었는가? 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일 많이 운 사람이 야곱과 요셉과 예수님이시고 그 다음이 다윗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운 사람이 있지만 성경에 나타난 횟수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가족을 만났을 때 반가워서 울었고(창 29:11), 형 에서를 만나 화해할 때도 울었으며(창 33:4) 또 아들 요셉을 잃었을 때 “내 아들이 정녕 짐승에 찢겼다” 하고 애통하였습니다(창 37:34~36). 그 다음에 요셉도 애굽에서 형들을 만났을 때 골방에 들어가 울었고(창 42:24, 30), 또 자신을 나타냈을 때에도 울었으며(창 45:14) 야곱을 만났을 때도 울었고(창 46:29), 야곱이 세상 떠날 때도 울었습니다(창 50:1). 요셉이 야곱보다 한 번 더 울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윗과 예수님도 각각 세 번 울었습니다. 다윗은 우정 어린 요나단과 헤어질 때(삼상 20:41), 아말렉 적군들이 시글락을 침략하여 여인들을 끌어갔을 때 “울 기력이 없어지기까지 울었다” 하였고(삼상 30:4), 또 시 6:6을 보시면 “회개의 눈물로 밤마다 침상과 요를 적셨다”고 하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우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셨고(눈물을 흘리심),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37년 후에 그 도성이 참상 당할 것을 상상하시면서 우셨으며(눅 19:41) 다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눈물과 땀을 흘리시고 우셨다”고 하셨습니다(마 26:37~38, 요 12:27, 히 5:7). 예레미야 선지자도 망하는 나라를 생각하면서 밤새도록 울었고, “눈물을 강처럼 흘리라”고 권면하였으며(애 1:2, 2:18)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가 회개하면서 심히 통곡하였고(마 26:75), 바울사도는 밀레도에서 성도들과 이별하면서 우셨지요(행 20:37). 우는 것도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에서는 축복을 뺏겼을 때 소리 높여 울었고(창 27:38), 한나는 아들 못 낳아서 울었으며(삼상 1:7) 이스라엘 백성들도 환경이 어려울 때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하였습니다(삼상 2:4, 11:4).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자의 큰 무리가 울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눅 23:27~28). 그런데 저희들이 울지 못하거나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눈물을 많이 흘리시고 우는 사람이 되셔야지요. 나사로 죽었을 때 예수님도 같이 우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울지 않는 심령이 어찌 경건하다 하겠습니까? 다윗은 “회개의 눈물로 침상이 젖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을 때 너무 우니까 고향 교회의 한연성 장로님이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정신이 돌까봐 염려했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면서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고 눈물을 강처럼 흘리라” 하셨으니 이제부터 저희들은 눈물날 때 은혜인 줄 아시고 손수건 준비하여 부끄러움 없이 울기를 작정하십시다. 제가 포도를 1근(400g)에 2000원씩 샀는데 어떤 상인이 네 근에 5000원씩이라 하여 샀는데 달아본즉 세근 반이었습니다. 속은 것보다 속이는 사람 많은 것이 분하더군요. 나라에 거짓말 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잘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 나라에 진실 찾기가 산삼 찾기보다 어려운 것 아닌지요. 성도들은 그런 것을 볼 때도 울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51과 마음을 넓히자 (고후 6:11~13, 시 119:32) 목록으로


“마음을 넓히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넓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 때문에 손해 본 일이 많았을 것이고, 경험을 하면서 마음이 넓어지고 있는 것도 체험하실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머리 깎는 것을 싫어했고, 머리 파마하는 것도 싫어했으며 코 큰 사람도 싫어했고, 짧은 치마도 싫어하였으며 심지어는 여자가 글 배우는 것도 싫어하였지요. 참으로 좁은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문화 생활권 뿐 아니라 정치와 종교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일단 넓은 마음이 좋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좁아서 죄 짓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11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넓다”하는 것은 전도자 편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고, 또 오해를 풀고 포용할 의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2절의 “너희가 우리 안에 좁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은 이해 못하는 원인이 바울사도측에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실 아닌 것을 오해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너희 심정에서(스스로) 좁은 마음을 가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전도자의 입장을 바로 이해 못한 것이 그들의 좁은 마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녀를 대하듯 마음을 넓혔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3절)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넓히면 이해와 화해와 협력이 잘 될 것입니다.

2. 성경에 본즉 마음의 종류도 많고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잠 21:2, 24:12). 성경에 보시면 정한 마음, 새 마음이 있고(시 51:10, 약 4:8, 겔 36:26), 빈 마음도 있으며(마 5:3) 좋은 의미로 강하고 견고한 마음이 있고(시 27:14, 112:8, 사 26:3), 나쁜 의미로 굳은 마음도 있습니다(겔 36:26). 회개하는 마음으로 상한 마음이 있고(시 51:17, 욜 2:13),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도 있는데(겔 36:226, 고전 4:21) 오늘 읽으신 본문에서는 좁은 마음도 있고 넓은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3. 무엇이 넓은 마음입니까?

1) 넓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같이 생각하는 마음이고, 나와 너와 모든 이웃을 다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시궁창에 오물을 버렸을 때 이것이 하수도와 개울과 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까지 넓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의 헌금하는 것을 보시면서 그의 생활비 전부를 내는 것까지 헤아리신 분이고(막 12:42), 또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이 멀리서 온 것과 3일간 먹지 못한 것과 그대로 더 있으면 기진할 것까지 살피신 마음이 곧 넓은 마음 아니겠습니까?(막 8:1~3)

2)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포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고전 4:19~21, 고후 2:10~11). 그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여 수습하겠다”고 하시고, “이해한다, 배려하고 포용하며 용서하고 자식처럼 타이르고 끝내겠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용과 용서는 넓은 마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과(마 5:45) 예수님이 회개하는 자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말씀(마 18:22)이 다 넓은 마음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3) 넓은 마음은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명자가 교회 인근에 교회를 세웠다고 할 때 교회가 이기주의나 사업주의에 목적을 두지 않는 한 반가워하고 축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얹잖게 생각하는 성도와 교역자가 있다면 넓은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또 나중에 교회를 세운 사람도 불가피한 이유가 없으면 역시 남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눅 6:37에서 예수님이 “남을 배려하고 주라”하신 말씀이나 행 20:35에서도 바울도 그 사실을 다짐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넓은 마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놋에게 삶의 터전을 먼저 양보한 것처럼(창 13:9)

4) 소망하고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넓지 못하면 먼 훗날을 소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안목을 넓혀 훗날 또는 내세에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마음이야 말로 넓은 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궁극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라도 만회하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타락에서 구원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환경에서라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는 것”(롬 12:12)입니다. 소망을 갖고 참는 마음이 넓은 마음입니다.

5) 부드럽게 안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 36:26) 하셨고, 시 37:11에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린다” 하셨는데 사람의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을 때 자기 마음을 안정되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종교적 영향으로 마음에 안정을 가진 환자는 회복이 빠르다”는 임상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남이 육체의 양약이 된다”(잠 3:7~8) 하였고, “즐거운 마음과 지혜로운 말(혀)도 그렇다” 하셨는데(잠 16:24, 17:22, 12:8) 이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순화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닮는 첫 번째 과제로서 넓은 마음 갖기를 기도하시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의 일만 생각지 마시고 과거의 역사를 살피면서 또 멀리 넓게 내다보시고 사랑의 폭을 넓히면서 많이 배려하고 소망을 가지며 자기 마음의 안정을 지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2과 다섯 가지 손의 역할 (출 17:8~16) 목록으로


사람의 지체 중에 손이 하는 역할이 많습니다. 본문을 읽는 중에 “다섯 가지 손의 신앙적 역할”이 나타나 있어서 저희들이 그런 은사 역할을 잘 하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이방족 아말렉의 침략을 받아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호렙산 반석 위에 서서(17:6) 두 손을 든즉 이스라엘이 이긴 것입니다. 이 말씀에 “두 손을 다 들었다”는 말씀은 없지만 모세의 피곤한 손을 받쳐주기 위해서 아론과 훌이 “이 편 저 편에서 붙들어 올렸다”(12절)고 하셨으니까 두 손을 다 든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손은 아론과 훌의 손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의 손이 들려 있을 때만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렸을 때는 아말렉이 이기는 것을 보았는데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들고 계속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그들 손으로 돌대를 쌓아 모세로 하여금 앉게 한 후 양쪽에서 그들의 손으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다(13절)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전쟁이 계속 승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 중에 다른 세 가지 손의 역할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손의 신령한 역할”을 살펴보기로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양손을 든 모세의 손입니다. 이 손을 들었을 때 홍해도 갈라졌고, 전쟁에 이기는 능력도 나타났으니 이 손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이 통하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통하는 손은 우리의 신앙 생활 중에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은혜인즉 기도 응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경건 생활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니까요(대하 16:9). 우리들 생활 속에 어려운 문제가 많은데 기도한 후에 잘 풀렸다면 그것이 곧 지팡이를 든 손이란 것입니다. 그 손을 들어 홍해도 가르고 전쟁도 이겼듯이 성도가 경건과 기도의 힘으로 능력을 힘입으면 곧 그 손을 가진 것입니다. 능력의 손입니다.

2. 도와주고 은혜 받는 손입니다. 아론과 훌은 두 가지를 알고 한 가지를 실천했는데 두 가지 안 것은 “모세의 손이 능력의 손이란 것과 손 드는 일이 피곤하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일 하나를 실천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이기면 덕을 같이 봅니다. 이것은 성도가 성직자나 이웃을 봉사하고 은혜를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직자는 말씀 준비와 기도에 피곤합니다.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라”고 집사를 세우지 않았습니까?(행 6:4) 그러니까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하고 성도는 목사의 말씀과 기도로 덕을 보니까 잘 도와야 하겠지요. 이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성도는 은혜를 못 받습니다. 목사가 증언하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또 기도의 도움 받는 일이 크다고 믿으시면서 교역자를 돕는 손길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양쪽에 돌대를 쌓아서 모세의 손을 얹게 한 아론과 훌의 손입니다. 이웃을 섬긴 손도 되는데 본래 이웃을 섬기는 것은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자신이 복을 받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고후 9:6, 눅 6:38) 따라서 이 손은 남을 돕고 복 받는 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꼭 주고 받는 손이 있기를 바랍니다.

3. 13절에서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하셨는데 여기에 칼 잡은 손, 전쟁하는 손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글자로는 숨겨졌지만 실제로는 나타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대적이 아말렉이라면 우리의 대적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시면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으니 이 아말렉은 선민의 적이자 하나님의 적이요, 바로 우리의 적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성도와 진리를 훼방하는 적이지요. 여호수아는 칼 잡은 손으로 그들을 쳤지요. 성경에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셨고, 또 “좌우에 날선 검 같다”고도 하셨습니다(히 4:12). 따라서 여호수아의 칼 잡은 손은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손인데 칼이 말씀을 뜻하니까 성경을 잡은 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성경을 갖고 계신데 깨달은 말씀이 날선 검 같아야 합니다. 살후 3:1에서는 “말씀이 달음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마귀와 싸우는 손, 성경을 잡는 손입니다.

4. 14절을 보시면 “이것(하나님의 말씀, 선민의 역사)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하신 말씀에서 말씀을 기록하는 손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외워 들리는 것”은 모세가 그 당시에 받은 말씀(아말렉과 대대로 싸움)을 알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기록하는 손을 갖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갖고 있는데 한 번 쓰고 없애는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이 아니고(대대로 남겨) 기념할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록하는 손은 곧 증거의 손입니다. 모세의 글, 선지자의 글, 바울사도의 글이 다 성경이 되었고 대대에 기념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손은 참으로 큰 축복의 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글을 남기는 것은 그런 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15절에서 “모세가 단을 쌓고…그리고 하나님이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맹세하신 사실”을 증언하였는데 여기에서 돌로 제단을 쌓은 손이 나타난 것입니다. 제단을 쌓으면 거기에 희생의 제물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겠지요. 희생의 제물은 예수님이 다 드렸으니까(히 7:27, 9:14) 더 드릴 수 없고, 예물에 해당하는 헌신이 곧 제단 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헌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소자를 섬기는 봉사(마 25:45), 그것이 곧 이 시대에 제단을 쌓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의 손, 성직자를 돕는 손, 마귀와 직접 싸우는 손, 말씀 기록과 증언의 손, 그리고 소자를 도우며 봉사하는 손이 우리들에게도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53과 어찌하여 나갔더냐 (마 11:7~10) 목록으로


본문 9절을 보시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고 여쭌다면 “나는 무엇을 보러 나왔습니다, 나는 무슨 일로 나왔습니다”하고 옳은 대답을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증언하였고,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헤롯왕을 책망한 일로 옥에 갇혔고,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하셨는데 감옥에 있는 요한이 예수님의 신분을 알기 위하여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오게 한즉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야로 증언하시고(5~6절),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하신 것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메시야에 대한 전파 사역을 한 것과(마 3:1~3)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본래는 세례요한을 따랐는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언하는 바람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요 1:35~37, 3:30). 이때에 예수님은 요한이 감옥에 있는 것을 아시고 요한에 대하여 칭찬의 말씀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요한의 좋은 점이 아니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하신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회에 나오신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세례요한을 보러 나갔던 것입니다. 광야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있다”하여 그것을 보러 나간 것은 아니었고, 또 그들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 하였다면 마땅히 왕궁으로 갔어야 할 것이지만 선지자를 보려 하였기 때문에 광야에 나갔으니 잘 한 것이고, 그 선지자는 세례요한인데 “그는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것은 본문 강론이나 설교문을 통하여 다 말씀드렸습니다(핵심 설교 102과, 마태복음 설교 52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를 보러 나갔다가 그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된 것입니다.

1. 여러분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예수님을 뵈려고 나오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아무리 훌륭해도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를 대단히 칭찬하셨어도 그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시면 목사님을 비롯하여 훌륭한 성도가 많지만 사람을 보러 나오신 것이 아닌 이상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갖지 마시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으며 가까이 하시도록 마음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른으로부터 어린 아이까지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 대역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야 할 곳에서 결코 예수님 아닌 모습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무엇을 보려고 나오셨을까요? 사람의 계획이나 사람의 뜻을 보시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그의 말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으로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 주어야 하고, 성도는 성경을 배우는 것 속에서 예수님의 뜻을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인본주의로 풀어서 예수님의 뜻 아닌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이 60년대처럼 인분을 주고 배추를 키워서 김치를 만들었으니까 아무래도 기생충 위험이 있는 것처럼 성경을 인본주의로 해석하면 사람의 사상과 전통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사신 예수님이 2000년의 역사가 흘렀다 하여 다른 분, 다른 생활로 변화되셨을까요? 저는 똑같은 그때의 예수님이 그대로 계시다고 믿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그 인격과 생활이 달라진다면 적어도 100년에 한 번씩은 새로운 성경이 나와야 하겠지요. 인간은 100년 전의 생활 문화에서 100년 후의 문화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과거에 나무 때고 살다가 지금은 가스를 사용하며 삽니다. 이렇게 생활 방도는 변했지만 예수님의 인격과 그 인격에 입각한 생활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하고, 성도는 그 뜻을 배우려고 이 자리에 나오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본주의를 배워야 할 곳에서 인본주의를 보려 하시거나 사랑의 원리와 모범을 배우셔야 할 곳에서 사랑에 위배되는 이기주의나 신령에 위배되는 세속주의를 하나님의 뜻인 줄로 잘못 알고 배우실까 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이 나오신 이 교회에서 교회의 사명이 바로 실현되고 있는지를 바라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크게 나누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진리 사명이고, 또 하나는 계명 실천 즉 사랑의 사명이며 셋째는 순결의 사명입니다.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지도자와 성도는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진리의 사명에는 성경의 보존과 성경의 바른 해석과 성경의 교육과 전파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사명입니다.

2) 사랑의 사명은 곧 계명 실천이지요. 성도의 화목과 친교로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3) 순결 사명은 죄나 불순한 것들을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조치하는 것인데 이 사역이 곧 권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순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바로 나타날 수 없지요. 그래서 진리와 사랑과 순결은 교회의 필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인간이나 세속을 보려 하지 마시고 반드시 예수님과 사랑과 순결을 보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4과 존귀와 은혜 (빌 2:5~11) 목록으로


존귀의 은혜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존귀의 은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존귀가 무엇입니까? “높임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높임을 받는 것과 존귀해 지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정받는 존귀가 진짜 존귀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존귀해지는 경위를 살피면 방법상 종류가 많음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존귀해지게 되었으며 누가 인정하는 존귀라야 참 존귀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존귀는 노력해서 얻은 것이 노력 없이 얻는 것보다 더 크고 사람이 인정하는 존귀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귀가 더 귀하다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떤 사람이 “인간이 존귀하다”고 인정받는 다섯 가지 상태를 꼽은 일이 있는데 아들로 태어났을 때(옛날) 존귀를 받고, 신랑 신부가 되었을 때 존귀를 받으며 또 무슨 목적을 성취하여 출세했을 때이고, 넷째는 회갑 잔치라고 하였는데 요즈음은 칠순, 구순으로 늘어났습니다. 장수한 것을 기념하여 자녀들이 잔치를 해줄 때 존귀를 느끼게 되고 마지막 존귀는 덜 살고 아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존귀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다섯 가지 중에 출생과 죽음은 노력 안 하고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혼인이나 출세로 인한 존귀보다는 못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존귀의 가치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귀의 가치와 사람이 인정하는 존귀의 가치에도 차이가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리 표준은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기도로 존귀의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까? 일본의 수상은 “욘사마(배우)가 자기보다 인기가 더 있다” 하였고, 미국에서도 마이클잭슨(가수)이 인기 높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귀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존귀한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같다”(시 49:12) 하셨고, 예수님은 헤롯왕을 여우라고 하셨으며(눅 13:32) 엘리사 선지자는 아람의 군대 장관을 서민 취급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왕하 5:1, 10). 그래서 저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인정하는 존귀는 이차적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존귀를 힘입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주는 존귀가 잘못된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가짜 박사가 무슨 존귀입니까? 그래도 한때는 가짜 박사를 축하한 성도들이 있었지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가장 큰 자라고 존귀를 주셨는데(마 11:11) 오늘날 세례요한처럼 사는 성도가 있다면 그를 존귀한 자로 볼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존귀의 표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2. 이 존귀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노력을 했어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실 때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존귀의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을 찾아보면 “하나님은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 하셨고, 거름 더미에서 드셔서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삼상 2:6~8) “존귀와 위엄이 하나님께 있고”(대상 16:26),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기도 하신다”(겔 21:26)고 하셨습니다. 시 8:5에서는 “하나님이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 하셨고, 시 23:5에서는 “원수 앞에서 상(床)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존귀를 주실 만하면 비천을 가리지 않고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존귀해진 자를 살피면 요셉과 모세를 들 수 있고, 사무엘과 다윗을 들 수 있으며 사울왕은 높였다가 떨어지게 하셨고, “성도는 존귀한 자라”(시 16:3)고 하셨습니다. 다 하나님이 존귀케 하신 사람들입니다.

3.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누구를 높이셨는지 몇 분만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한나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을 못 낳아서 둘째 부인에게 수모를 당하고 비천해졌는데 기도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므로 존귀해진 여인입니다. 기도는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미국의 어떤 어린이가 예배 시간에 헌금이 없어서 헌금 시간이 되면 눈 감고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돈이 없어서 헌금은 못하나 제가 커서 하나님께 몸 바쳐 일하고 섬기겠습니다.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했는데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한 달치 헌금을 미리 주고 “매주일 나누어 내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이가 몇 번 그렇게 하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유를 물은즉 동전 보관하는 것이 귀찮고 무엇을 사먹고 싶은 유혹이 와서 한꺼번에 헌금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이가 바로 1884년 부활절 때 최초로 한국에 온 선교사 언더우드란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존귀를 받은 것이지요.

2) 요셉은 환경에 따라 충성하므로 존귀해진 사람입니다. 시 101:6에 보시면 “하나님의 눈이 충성된 자를 높여 자기 앞에 서게 하신다” 하셨는데 요셉처럼 환경 따라 충성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3)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란 말씀이 있는데(잠 15:33) 사울이 처음 왕 될 때 두려워서 행구 사이에 숨었었고, 왕 된 후에 “멸시를 받았어도 잠잠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삼상 10:22, 27).

4) 다윗은 연단 받은 연고로 하나님이 높이셨고,

5) 예수님은 죽기까지 충성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이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만유주, 심판자)을 주사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존귀의 성격, 존귀를 주시는 분, 존귀의 은혜를 받게 된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제55과 보화에 대한 묵상 (마 13:44) 목록으로


어떤 목사님의 설교문에서 보화에 대한 말씀을 읽고 저도 보화에 대하여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설교문의 요지는 “보화는 천국이고 예수님이다, 보화를 소유하려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참 좋은 말씀이지만 그것이 성도의 생활 속에 잘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천국은 저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현세 천국도 있으니까 이 세상을 천국처럼 또는 낙관적으로 사는 방법을 아셔야 하고, 또 보화가 예수님이면 그 예수님이 나에게 형님쯤 되어 주시든지 보호자나 안내자쯤만 되어주셔도 큰 복이겠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화를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라”한 것은 보화를 얻기 위하여 투자, 희생을 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어려운 일인가? 하면 천국, 예수님을 사모하자니 더 급한 것이 있고, 투자 노력을 하자니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실 분은 아니십니다. 무식한 사람에게는 비유를 들어 깨닫게 하시는 분이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실 만큼 약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니까 분명히 연약한 자에게 보화를 터득하는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막연한 것 같으나 잘 깨달으면 쉬운 것입니다. 만일 신앙이 학문이라면 신앙으로 복 받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보화를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1:25). 그러니까 보화를 소유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식견으로 가능함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같다” 하시므로 천국이 보화인데 이것이 타인의 밭에 감취어 있기 때문에 찾는 노력이 필요함을 말씀하셨고, 일단 찾은 후에는 “숨겨두고 기뻐한다”하므로 자신만 알고 만족하면서 보호하다가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셨으니 자기 소유(현세의 복)로 그 밭(예수님)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화 획득의 단계와 신앙의 단계가 함께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보화냐? 하고 찾는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천국이 보화라고는 하는데 어느 구석, 어떤 부분, 어떤 상태가 예수님이고 천국인지 감이 잘 잡힙니다. “아 이것이 천국이고 예수님이구나”하고 감이 잡히는 것이 곧 보화의 발견입니다. “이것이 진리로구나”하고 깨달아져야 할 것입니다.

2. 다음 단계는 보화를 발견해놓고(진리를 깨닫고) 그 보화를 자신이 갖게 될 것을 희망하면서 기뻐하고 만족하는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보화는 자기 주머니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그것을 왜 기뻐하느냐 하면 자신만 알고 있으니까 소문만 내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이 되지 않았더라도 남이 모르고 있고 자기 소유될 가능성만 있으면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내세 천국, 내세 상급이 그런 것 아닙니까? 이 보화에 대하여 첫째는 발견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대부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왕이시고 천국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멀리 계셔도 그 분은 나의 구세주요 중보자이시니까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은 나의 보화이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멀리 계시게 하고 자기 집으로는 모시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보화(예수님, 천국)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하셨으니,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사는 뜻이 무엇입니까? 설명 안 드려도 짐작하시겠지요. 보화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누구든지 자기 것을 다 팔아오는 자가 있으면 준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를 걷어차지 못하여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고, 어떤 부자 청년은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를 돕고 나를 좇으라” 하였는데 그것이 어려워서 근심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난한 과부는 저녁 먹을 양식도 없는데 있는 돈을 털어 헌금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돈은 그의 재산 전부라” 하시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나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몸만 쏙 빠져 나왔으니까 모든 것을 버린 셈이지요. 그리고 그 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목숨 바칠 각오를 하였으니 그것이 곧 자기 소유를 다 판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 보화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은 지식이나 철학적으로 따져서 복 받을 능력자는 아닙니다. 어린 아이 편에서 은혜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아주 큰 부자요, 유명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다섯 살이면 그는 자기 아버지의 명예나 재산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루 하루 먹고 즐겁게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누가 그에게 전도하기를 “너의 구세주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고 예수님이다” 했을 때 그것을 믿고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바로 보화를 산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앞세우시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하신 뜻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내 입장, 남의 입장을 생각해서 인간적인 보화를 손꼽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이 보화로구나, 꾸러가지 않을 만큼의 생활 기반은 있어야 되” 또 무엇을 하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니까 “시간이 보배야” 하다가 또 큰 보배는 “하루 하루를 평안하게 사는 거야”하고 그런 것들을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건강, 생활비, 시간, 평안 등은 다 이 세상에 속한 자기 소유에 해당하는 것인즉 그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으로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 소유를 팔아 밭을 사는 것인 줄로 믿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이 단계에만 들어간다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도 잘 되게 해 주실 것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가 더욱 많게 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보화는 현세적 소유를 버리거나 멀리할 때 소유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56과 보화의 3단계 (마 13:44, 막 4:26~29) 목록으로


제가 “보화에 대한 묵상”이란 제목으로 한 편의 설교를 썼습니다만 못 드린 말씀이 있기 때문에 몇 말씀 더 드리기 위하여 “보화의 3단계”란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1. 우선 성도들은 보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이면 다 보화를 알고 계신 것인데 그것을 설명할 만한 지식이 필요하겠지요. 여기에서 말씀하는 보화는 최고의 보화 또는 모든 보화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보화를 알지 못합니다. 보화 되시는 분이 알려주셔야 하니까요. 성경 말씀에서

1) 보화는 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내세 천국이 목적이지만 지상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도 천국이란 것을 아셔서 천국의 이생, 저생의 보화성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천국이 보화이면 천국의 주인 또는 천국을 주시는 분은 더욱 보화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절대 보화가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의 세계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 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보화이신 예수님을 인간이 모시려면 진리의 말씀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예수님을 소개한 성경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붙잡고 모시는 수단이기 때문에 진리와 믿음이 또한 보화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또 중요한 보화가 있으니 그것은 믿음의 역할입니다. 보화를 간직만 하고 있으면 죄사함 받고 천국은 갈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성경 믿고 십자가 믿는다는데 누가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도의 세상 살이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믿음의 역할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막 9:23, 마 8:13)하신 말씀이 바로 믿음의 역할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고의 값진 보화는 천국이고, 천국을 주시는 예수님이며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진리와 믿음이고, 또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렇게 보화를 알았으면 그 보화를 찾아나서야 하는데 그것이 신앙 생활의 1단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욥 28:1을 보시면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화 있는 곳을 찾는 단계가 바로 초신자의 신앙 생활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되다 하더라”는 원리를 믿고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바로 보화를 찾는 것이지요. 금광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내가 어찌하면 은혜를 받을꼬, 어찌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꼬 또 어찌하면 성경을 잘 이해할꼬”하면서 부지런히 연구, 기도하며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라”고 하신 줄 압니다. 그 방법으로서 성경 연구와 기도와 바른 생활, 세 가지만 힘써 보십시오. 분명히 “성경은 연구할수록 재미 있고 예수님은 배울수록 보화로운 분이시다”하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이 부분에 졸업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직 재학 중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발견한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3. 그 보화를 깨닫고 기뻐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 보화를 깨닫기만 해도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성도가 천국도 가기 전에 “나는 택한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죄사함 받고 천국 갈 것이다” 하면서 성취되지 않은 것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 성취되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성도의 형편으로는 보화가 매장된 밭이 다른 사람 소유의 땅으로 되어 있는데 그 땅 주인은 자기 밭 밑에 보화가 매장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문 내지 말고 돌아가서 그 밭을 살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기독교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입니다. 땅 속에 보화가 있어도 주인이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만 아는 은혜의 생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화는 먼 밭에 묻어 놓고도 기뻐하며 긍지를 갖고 보화를 소유한다는 소망에서 만족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씀이 있듯이(히 11:1) 예수님을 멀리 모시고 살면서도 은혜를 누립니다. 이 은혜는 실제 소유한 것이 아니면서 마음으로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활용은 못하고 자기 마음으로만 위안을 받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 단계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도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 지켰고 십일조 드렸으며 목사님 축복 받았고, 교인들이 다 나를 사랑하니까 만족하다”고 느끼면서 예수님은 저 산 넘어 계시게 하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보화이기는 하지만

4.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하는데 그것이 곧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보화의 밭을 사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자가 “소유를 팔아 밭을 산다”는 뜻은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천국이 저의 것이 되는 것처럼 자기의 현세적 특권을 포기함에 따라서 예수님을 더 가까이 또 더 풍성하게 모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도와주고 싶어도 돈이 자기 주머니에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면 마치 마음으로 느끼는 소망만 있을 뿐 필요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빈 마음이 아니면 들어오시지 않고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겨도 가까이 오시지 않으며 이 세상의 것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려고 해도 오시지 않으니 가장 큰 보화이신 예수님을 모시려면 자기부터 부정하고 물질도 숭상하지 않으며 또 현세욕을 다 포기하므로 보화의 값을 치러야만 주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뜻이 마 5:3(심령 가난), 마 6:24(두 주인 못 섬김), 마 16:24(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요일 2:15(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보화를 이해하시고 보화의 단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7과 범죄 방지 조건 (삼하 11:1~4) 목록으로


곰팡이는 습기만 없으면 반대로 건조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성도는 가장 큰 불행을 초래하는 범죄를 방지할 책임이 항상 있습니다. 제가 운전을 20년 이상 하면서 여러 차례 접촉 사고 또는 사고의 위험을 겪은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어떤 경우에 사고가 나는가”를 알게 되어 좋은 경험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범죄 상황을 보면 범죄 조건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중국에 가서 술집에 들어가면 “아편을 먹을 가능성이 많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보도를 아는 사람은 중국에 가서 술집에 안 가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위험이 있는 나라에 가지 않도록 노력하시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선지생도가 학교를 짓기 위하여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를 물에 빠뜨린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왕하 6:5).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끼 자루를 점검하지 않은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물가의 나무를 찍은 때문이지요. 이런 원리 하에서 “범죄 방지 조건”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지금 읽으신 본문은 다윗의 경우를 참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범죄 방지 조건

1. 여가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계속 시간에 쫓기는 일이 있어서 중요한 일도 거들떠보기 어려워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쫓겨야 합니까? 말씀과 기도에 쫓기고 자기 십자가 지는 일(도덕적 책임)에 쫓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가한 사람 만날 시간이 없어져야 합니다. 죄는 불순한 인간들로부터 묻어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노인 목사님이 나를 찾아오고 싶어 하는데 내가 만나 드릴 시간이 없고, 그 분은 퍽 심심하여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럴 때에 성도는 자기의 바쁜 과제에 끌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오후에 낮잠을 자고 한가히 지붕 위에서 걷다가 유혹을 받았지요. 하와도 사탄(뱀)을 만나 이야기 할 시간을 준 것이 범죄 기회가 된 것임을 유의하십시오(창 2:1).

2. 은혜를 잊어버리면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은 옛날의 어려운 시절을 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부모님 시대에 고생하신 것과 아버님이 병 중에 계실 때 계란이 귀하여 잡수시지 못한 것을 늘 기억합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나의 식욕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나단이 다윗을 책망할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삼하 12:7~8) “왕을 세우고 보호하셨으며 사울왕의 것을 다 주셨다”고 하셨지요. 그런데도 다윗은 욕심을 더 부렸습니다. 이 욕심이 바로 은혜를 모르는데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부모님이 돈과 쌀을 꾸러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고, 그것을 가장 증오하였습니다. 지금도 그것을 증오합니다. 성도는 가급적이면 은행 대출 같은 것도 하지 마십시오. 축복 받은 자는 “남에게 꾸어 주어도 자신은 꾸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신 15:6, 28:12). 어려울 때에 비하여 현재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욕심과 범죄 유혹에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을 때입니다. 삼하 12:9~10에서 “하나님과 그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거나 그 말씀을 의식하지 않는 자는 곧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면 참으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권고의 기회를 한 번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망이 있었던 것이지요. 부모를 의식하지 않는 자식이라면 그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부모를 의식함이 없을 때 죄를 돌이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4. 자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여색을 일삼은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바울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 하셨고, 또 “자족하기를 배우라”고도 하셨지요(빌 4:11). 사람이 자족을 모르면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낮잠을 자고 산책을 하며 신하의 아내를 불러들이는 일이 분수에 맞는 것입니까? 그런 생활이 곧 죄를 이끄는 것입니다. 없어도 없는 체 하려 하지 않는 것, 돈이 없어도 있는 자처럼 쓰고 빚을 지거나 지식이 없고 배운 것이 없으면서도 세상 물정을 아는 자처럼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은 줄 압니다. 그런 것이 다 분수없는 일로서 죄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5.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셨고, 또 “성령의 소욕을 힘입어 육체의 욕심을 멀리 하라”(갈 5:13~17)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은 인내의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악을 시행하지 않기 위하여 참는 노력과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자족, 분수, 육체의 정욕, 인내를 반드시 이룰 줄 아셔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마지막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범죄를 최대한 방지하려면 사람이 바쁘게 삶으로 허튼 일, 어설픈 일, 죄 되는 일을 할 시간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여야 하며 또 하나님과 성경과 부모를 두려워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사는 사람은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것이니까 가치로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썩은 음식과 같으니까요. 또 자족하고 정욕에 얽매이지 않으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마 26:41). 사울은 “하나님이 버린 자이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삼상 16:1) 하셨지만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뜻은 “기도 응답하시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은 기도 없이 일방적으로 쇠하고 망했지요.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고 기도 열심히 하였으므로 보호 받고 원수가 죽으며 나라가 통일 되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이 다 자연 섭리 즉 일반 은총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58과 꿈을 꾸고 생각함 (욥 33:13~18) 목록으로


여러분 꿈 많이 꾸시지요. 제가 기독교 신앙 백과 218페이지에서 “성도가 꿈을 믿어야 합니까”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표준 계시(실천을 요구하거나 예언의 뜻으로 받는 것)로서의 의미는 성경 완성 이후에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젊어서도 꿈을 꾸지만 나이가 70 가까워지면서 더 많이 꾸고 도무지 생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꿈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이런 꿈을 왜 꾸는 것인가? 를 고민스럽게 구상해 보았지만 시원스러운 대답이 없어서 평생을 고민해 왔는데 요즈음에 와서 몇 가지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대가 되시지요?

1. 우선 이 꿈을 누가 주시는가? 할 때 잠 자는 자는 꿈을 만들 수 없으니까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하셨고(빌 4:7), 본문에서도 “꿈이나 이상으로 인치듯 교훈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자신이 꿈 꾼 것을 자신은 기억을 못하고 곧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누가 무슨 꿈을 꾼 것과 무슨 꿈을 꾸게 하셨다는 것을 아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만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보이지 않는 영계와 정신의 세계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인즉(시 139:2) 사람이 꿈 꾼 것을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2. 꿈을 어떤 종류로 꾸게 하시는가? 할 때 하나는 계시의 목적이 있었고, 또 하나는 일반적 교훈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꿈을 찾아보았습니다. 순서대로 보면 아브라함 때에 아비멜렉의 꿈이 있었고(창 20:3~7), 그 다음 야곱의 꿈(창 28:12, 31:10), 라반의 꿈(창 31:24), 요셉의 꿈(창 37:5~9), 애굽 장관들의 꿈(창 40:5~19), 바로의 꿈(창 41:1~7), 미디안 병사의 꿈(삿 7:13~15), 느브갓네살왕의 꿈(단 2:1, 4:5), 신약에 와서는 요셉이 현몽 받은 것(마 1:20~21), 동방 박사들의 꿈(마 2:11~12), 그리고 빌라도 처의 꿈(마 27:19)이 있었는데 이런 꿈들은 다 계시적 목적(중대한 결정도 하고 성경에 기록되는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꿈들이 이 시대에도 주실 수 있는가? 할 때 “성경 계시의 완성으로 끝났다”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유 3절에서 그런 계시는 “단번에 주셨다” 하셨고, 히 1:1에서는 “예수님 이상 더 밝은 계시가 없다” 하셨으며 따라서 “표준 계시는 가감을 못한다”고 계 22:23~24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는 일반적인 꿈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일반적인 꿈을 주시는 목적과 가치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이 시간 주제인데 우선 일반적인 꿈에 대한 성경도 찾아보셔야 하겠지요. 민 12:6을 보시면 “하나님이 선지자와 꿈으로도 말씀을 하신다” 하셨는데 이 꿈은 성경계시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와의 대화로 끝낸 것이니까요. 그리고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꿈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꿈을 꾸었을 때 “인 치듯(마음에 뜨끔하고 잡히는 것) 느끼고 교훈이 되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꿈을 꾸었을 때 반드시 건설적 목적으로 교훈과 유익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전 5:3에 보시면 “일이 많으면 꿈이 많다” 하셨고, 또 5:7에서는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을 수도 있다”고 하셨으니 이 뜻은 인간이 꿈을 꾸고 허영이나 번민에 사로 잡혀 자신을 해롭게 만드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 20:8을 보시면 꿈처럼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도 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꿈을 이용하여 “몽사를 얻었다” 하면서 사람을 유혹하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렘 23:25~28, 유 8). 결론적으로 이런 꿈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건전한 유익(인 치듯 교훈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두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깐 꿈꾸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아무 실감이 없으시겠지만 너무 생생하게 꾸는 꿈이 많은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의 본문까지 기억될 때가 있으니까요. 때로는 내가 생시에 그리워한 일도 없고 사모하거나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까지도 경험을 하니까 낮에는 생시에 살고 잠잘 때는 꿈세계에서 사니까 두 인생을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잘 때 “좋은 경험을 또 주십시오”할 때도 있고, 이쪽 저쪽으로 두 인생을 사니까 현생이 짧아도 아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꿈에 여기저기서 살았으니까요.

2) 세상 떠난 사람을 만나고 먼데 있는 사람을 만나는데는 안성맞춤이란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때는 그 분들을 재미없게 만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돌아가신 분과 포용을 하면서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퍽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돌아가신 분을 만날 길이 없는데 꿈에는 볼 수 있고, 또 먼데 사람과 친교할 수 있으니 그 점이 퍽 좋았고,

3) 꿈은 공포스럽게 꾸는 꿈과 즐겁게 꾸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까? 공포스러운 꿈을 꾸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겠나”하는 염려도 됩니다. 무시하려고 해도 잘 안 되지요. 이때는 기도로 마음을 달래고 기도로 모든 것을 부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일이 있었으면 찬송하고 감사해야 하니까 꿈이란 것이 바로 나에게 “기도하라”는 신호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드릴 때 “하나님 이런 저런 꿈도 꾸었습니다, 참 기분 좋았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도 있었고 불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꿈 많이 꾸어 기분도 내시고 기도로 더 많이 일깨우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8. 신앙 성숙과 자유에 대한 말씀

제59과 변화를 받읍시다 (롬 12:2) 목록으로


제목은 “변화를 받읍시다”인데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하게 된 동기는 저 자신이 인생 말기에 와서 성직 생활과 관련하여 많이 변화된 것을 느끼고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적당한 본문을 읽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합당한 교훈만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셨으면 거저 지나가지 마시고 반드시 닭다리 뼈를 깨물어서 그 속의 영양분을 빨아 잡수시듯 내용의 의미를 집고 넘어가시든지 아니면 반성을 하시든지 그렇게 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1. 본문을 보시면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세속에 관한 것이고 인본주의를 의미하지요. 이 세대의 반대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이해하신 후에는 내가 이 세대를 본받고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는 것이 없는가? 를 반성하시고 또 현실 교회도 그런 것이 있는지를 살피셔서 경계할 것이 있으면 경계하셔야 하겠지요.

2)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인데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을 것인즉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지식과 가치관이 깨달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그것이 좋은 줄 알았는데 다시 깨닫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옳은즉 이것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거기에 따른 생활 변화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나쁜 것은 바르게 하고 모자라는 것은 채우는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변화되어야 할 과제는 믿음의 성숙입니다. 말씀과 사랑으로 발전하셔야 하겠지요.

2. 저는 스스로 변회된 것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30대, 50대 보다 60대에 와서 많이 변화되었는데

1) 성경 지식과 함께 선에 대한 표준을 더 알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많이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잘 하고 잘못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자문을 안 받고 스스로 결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말씀에 끌리는 변화입니다. TV앞에 앉으면 세상 것을 다 볼 수 있지만 뉴스도 두 번 듣는 것이 싫증날 정도로 다 무의미하고 헛 시간 보내는 것 같아서 다시 말씀 앞에 앉게 되니 감사한 일이고,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는 것이요,

3) TV에서 좋은 것을 못 느끼는 만큼 세상 재미를 느낄 것도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 사치가 싫은 것입니다. 관광도 싫고, 명예도 싫으며 좋은 집, 좋은 차도 싫고 검소하게 살고 싶은 의욕만 있으니 이런 것은 과거에도 꿈꾼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싫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 생활의 장황스러운 의식이 싫어지고 간소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긴 기도하고 옷술을 넓히며 문안 받으려 했고, 모범이 못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23:3). 대구의 큰 교회 목사님이 설교 잘 하시는 분인데 미국 다녀오신 후에 설교가 15분으로 단축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교는 웅변적 감화보다 내용 자체의 전달을 중요히 여긴 줄 아는 것입니다. 또 예배는 의식보다 생활이 중요합니다. 주보에 나타난 순서가 많아야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의식은 빠르고 간소할수록 좋고 성경 교육은 실속있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5) 저는 물량주의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숫자와 헌금에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모릅니다. 입술이 부르트고 머리가 빠질 정도로 숫자와 헌금에 연연했는데 이제는 숫자와 헌금이 없어도 나와 교인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6) 제가 지금도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지만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인즉 “사랑을 해치는 법은 무시해도 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거룩을 해하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될 때 “교단 헌법을 지킨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교단 헌법이 “물러나라”할 때(정년) 까지는 교리에 문제가 없는한 잘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시 15:4에 근거하여).

7) 과거에 교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고 경계에 앞장섰었는데 이제는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보수 사상을 중요시하되 신앙이 일치하는 교파끼리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도 합니다. 여기에는 짧게 배우고 목사된 사람과 오래 배우고 목사된 사람의 차이가 있는데 목회 일선에서 보면 오래 배운 사람도 고전하는 이가 있고, 쉽게 목사된 사람도 잘 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을 엄격하게 따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변화가 생긴 것이요,

8) 마지막으로 또 변화된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부족을 따지기 싫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검사 타입이란 말도 들었고, 노회에서 책망조 발언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 8:7)는 말씀에도 가책을 받고, 또 롬 2:21을 보시면 “가르치는 네가 자신은 왜 안 가르치느냐 도적질 말라 하고 너는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고 너는 간음하느냐”하신 말씀은 “실천이 부족하면 입 다물라”는 뜻이고, “모범만 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무리 지적하고 책망해도 변화는커녕 더 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중에 계 22:11을 보시면 “불의하고 더러운 자들을 그대로 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기성교회 시무할 때 당회원 장로들이 “누구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니 목사님이 그것을 책망,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책망, 권고하면 그 교인과 싸우든지 떨어지든지 할 것이고, 목사가 권면을 안 한다면 엉성한 목회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너는 죄가 없어서 돌로 치느냐”할 때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남의 잘못과 부족을 많이 간과한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만 더 불행해지겠지요.

제60과 광야와 신앙 (1) (출 19:1~6, 창 28:10~22) 목록으로


“광야와 신앙”이란 제목으로 묵상하였습니다. 성경에 광야를 일컬은 이름이 15회 나오고, 많은 신앙인들이 그 광야를 거쳤습니다. 광야는 저희들이 생각할 때 물이 없고 사람이 없으며 모래와 바람만 있는 황량한 곳이고 때로는 뱀, 전갈, 들짐승, 도적떼, 뜨거운 햇살까지 사람을 괴롭게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광야를 통과하지 않음일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를 안 갈 수 없는 사례가 있고 오히려 그 광야의 여정이 신앙에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음을 보고 “광야와 신앙”이란 제목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우선 야곱이 광야에서 은혜를 받게 된 사실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잘 살다가 형과 불화를 일으켜 집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외삼촌 집으로 피난하기 위하여 유다 광야를 북쪽으로 통과하여 밧단아람(유프라데강변)까지 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가게 된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출발지로서 헤브론 서남쪽 40㎞쯤에 있고, 거기서 혼자 출발하여 날이 저물고 인가가 없으니 돌베개를 베고 잔 곳이 바로 남쪽 유다 광야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지리상으로 그 지경을 짐작한다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곳 즉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행 8:26)”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 광야가 야곱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1) 우선 야곱이 발을 디딘 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곳입니다. 돌로 베개를 할 형편이었으니까요. 그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광야는 자기를 비운 것이고, 하나님은 자기를 비운 자를 가까이 대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자기를 비우는 기회가 있을 때 은혜를 받게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야곱은 그때에 하나님이 자기 곁에 함께 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믿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으면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허점이고,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야곱은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고 큰 변화를 갖습니다.

3) 그 변화란 것이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서원한 것이지요. “스스로 제사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독립적 관계를 갖는 것이고, 은혜를 구한 내용은 보호, 인도, 공급, 귀향의 은혜이지요. 그리고 그 은혜만 주신다면 “하나님을 잘 경외할 것이라”고 서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신앙이 확실한 단계에 들어서는 변화입니다. 어른 밑에서 따라다니며 소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대하는 신앙으로 발전한 것이니 광야는 그에게 큰 은혜 조건이 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선민과 광야에 대한 것입니다. 선민은 믿음의 단체인데 그 단체를 행 7:38에서 “광야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교회와 대조하면 제도가 다를 뿐 본질과 목적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단체를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선민 단체의 수가 200만을 헤아리는데 그들을 40년간이나 광야를 돌게 하시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신광야, 수르광야, 시내광야, 바란과야 등 네 개의 사막을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뜻이 계시겠지요.

1) 하나님이 다 책임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여행 중이고 그 곳은 사막이기 때문에 무슨 직업이나 일감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며 길도 없으니까 인도하셔야 하고 또 맹수, 바람, 뜨거운 햇빛의 위험도 있을 수 있으니까 보호를 하셔야 할 입장인데 하나님은 그 책임을 지시려고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보호, 공급, 인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우리가 광야 같은 곳에 살아도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만유의 주이시니까 보호, 공금, 인도의 은혜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한달도 아니고 40년 동안을 그렇게 하셨으니 역사적으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2) 성도는 광야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① 율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가르치게 하셨으니까요. 이것은 현실 교회가 성경 교육 사명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 교육을 열심히 하는 줄 압니다만 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사모하면서 말씀 배우는 취미를 하나님 가까이 모신 생활로 만족하시고 주야 묵상하는 입장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믿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광야로 인도하실 때 모세를 부르실 때부터 바로왕을 꺾고 홍해를 건너며 또 사막에서 만나와 물을 주실 때 얼마나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그러니까 계속 주시는 은혜를 믿고 복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이란 것이 제사 드리고 서로 사랑하며 아침마다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 먹고, 불기둥, 구름기둥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잘 드리고 서로 사랑하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셋째로 중요한 것은 목적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 의식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성경을 묵상할 때 찬송가 가사(221장)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내가에 길이 살겠네”하는 찬송입니다. 여기의 가나안 복지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선민의 광야 생활은 현실을 비유하겠지요. 성도의 현실 생활이 바로 믿고 복종하며 하나님 영광과 천국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④ 마지막 할 일은 가나안 땅 들어갈 때까지 연단 받고 인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니까 애굽의 세속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장막집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광야의 신앙이란 것입니다.

제61과 광야와 신앙 (2) (마 4:1~11, 3:1~4) 목록으로


“광야와 신앙”이란 제목입니다. 광야는 위험이 많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인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40년이나 살게 하셨고, 또 본문을 보시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도 광야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성도의 신앙 생활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구태여 성경의 절수를 대지 않아도 광야가 어떤 곳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89년도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고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가면서 사막 구경을 처음 하였는데 “황당하다”는 감정 밖에는 표현할 것이 없었습니다. 겔 6:14을 보시면 “광야는 처량하고 황무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물 없고 그늘 없으며 뜨거운 햇살과 모래 바람이 무섭고 그런 중에서 뱀이나 맹수떼나 도적떼도 나타난다고 합니다(신 8:15, 사 13:31, 렘 3:2). 그러나 그 곳에서도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 있으시길래 세례요한이 거기서 살았고, 또 성령님이 예수님을 그 곳으로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1. 세례요한과 광야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마 11:11에서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할 것을 외쳤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살다보니 광야의 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또 기후적용을 위해서 약대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왜 광야에서 살았을까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첫째 이유는 세례요한이 광야에 출현하여 외칠 것을 사 40:3에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언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인데 이로써 선지자가 그만큼 성경과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한 점을 배울 수 있고,

2) 요한이 부자를 많이 쳤습니다. 눅 3:7~14에 보시면 “독사의 자식들아”하면서 책망을 하였고, “옷 두 벌 있는 자가 왜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지 않느냐” 하였으며 또 군병들과 세리와 강포자들에게도 책망을 하니까 그들이 좋게 받았겠습니까? 그들은 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핍박을 하고 요한을 때려서 외곽지로 쫓아냈겠지요.

3) 그렇다 하여 신앙인이 주눅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을 멀리 하라”(요일 2:15)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도성을 포기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례요한과 광야는 선지자의 사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과 광야에 대한 것을 요약하면 예언을 이루는 사명과 핍박을 받은 때문이란 점과 세속을 멀리 하는 생활이란 점에서 광야를 선택한 것이니까 그 신앙이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놋처럼 도성을 택하면 세속에 물드는 일 때문에 고달파질 수 있지만 세속을 멀리 하면 경건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과 광야입니다.

1) 본문 1절을 보시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가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 궁금할 수 있으시겠지만 어렵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보통 성도가 금식 기도 같은 연단을 받기 위하여 기도원에 가는 것처럼 감동하실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도 그런 감동 하에 유대 광야로 가신 줄 압니다.

2)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기 위하여 가셨다” 하셨으니까 처음부터 연단 목적을 갖고 가신 것입니다. 광야는 인간에게 연단을 주기에 적절한 곳입니다. 연단을 어떻게 주느냐 하면 고난을 받게 하고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중에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연단이 필요하셨을까? 하시겠지만 우리와 같은 육체와 인간의 성정을 갖고 오셨으니까(히 4:15)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3) 금식으로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먹을 것이 있는 집에서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먹을 것이 없는 환경에 처하여 굶주리게 되었을 때 금식을 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란 점입니다.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으니까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금식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금식입니다. 떼를 쓰면서 긍휼을 구할 때 금식을 했습니다(욜 2:15~18).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금식하는 것도 역시 회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금식은 사명과 관계가 있는데 이것이 곧 모세의 금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을 통치하려니까 40일 금식을 세 차례나 하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금식은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목적 때문에 금식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음식이 없으시니까 자연적으로 금식을 하시게 된 뜻이 하나 있고, 용서를 비는 목적으로 금식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니까요. 결국 예수님의 금식은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현세의 정욕을 이기는 모범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금식하시고 시장기를 느끼시니까 얼마나 잡수시고 싶었겠습니까? 마귀는 “그때가 기회다”하여 예수님 마음 속에 유혹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3일 굶어 도적질 안 할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는데 40일이나 굶었으니까 “도적질해 먹어도 괜찮아,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버는 사람도 많은데, 명예를 위한 이적도 행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 영화를 누려봐”하는 유혹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말씀에 흔들리시지 않은 것이 예수님의 모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을 주리시고도 물욕과 명예욕과 세상 향락욕에 흔들리시지 않고 이기시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신 것인데 이런 신앙의 모범이 광야에서 있으셨은즉 광야와 신앙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62과 경건의 연습 (딤전 4:7, 행 10:1~6) 목록으로


7분 설교 4집 후편에 “경건의 연습”이란 설교가 있는데 또 같은 제목으로 몇 말씀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립니다. 딤전 4:5을 보시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씀이 있고, 4:15에서는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운동 경기가 연습 없이 안 되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배우고 연습하며 진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경건의 뜻을 아셔야 되겠지요. 경건이란 εύσέβεια(유세베이아)는 기독교 신앙적 용어로 해석할 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태도,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맺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원만한 관계를 맺도록 조건을 구비하려면 신앙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순결이 중요하고, 복종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 지식, 순결, 복종, 친교 다섯 가지를 대표로 꼽는다면 신앙과 지식은 성경으로 깨닫는 것이고, 순결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하셨으니까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며 복종은 사랑 실천이고, 친교는 늘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의 연습이 중요하겠지요.

2. 그런데 7절 앞에 보시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을 연습하려는 사람이면 우선 버릴 것부터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망령된 문화가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이나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인간의 지위를 높이는 일들이지요. 이런 것들에는 침을 뱉고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또 “허탄한 신화”라 하셨는데 이것은 온전치 못한 학설이나 주장 같은 것입니다. 인류에게 큰 행복을 줄 것처럼 선전하는 것들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것이 철학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과학, 경제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스포츠나 오락이라고도 합니다만 그것들이 어떻게 인류에게 큰 행복을 주겠습니까? 그래서 허탄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이나 수단이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면 다 허탄한 것인즉 그런 것들에게서도 마음을 돌릴 줄 아셔야 합니다. 인류에게 참된 평안과 행복과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지요. 그래서 경건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가 바람 따라 날고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여 사는 것처럼 성도는 경건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가장 복받는 길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런 경건 연습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하면

1) 말씀(성경)과 관계를 맺는 연습입니다. 성경은 읽고 듣고 지켜야 하며(계 1:3) 연구하셔야 하고(TM 7:10, 시 111:2, 벧전 1:10), 또 주야 묵상(시 1:2)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터득하셔야 하는가 하면 역사적 이해(국문학적 이해, 용어 이해)와 인명, 지명 이해와 교훈에 대한 것(도덕적, 영적)과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연구에 재미를 붙이는 연습도 하셔야 합니다.

2) 기도 연습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니까 기도도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에서 감동을 받은 대목이 있었는데 기도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엎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이러시면 됩니까? 나를 알아주셔야지요”하는 태도가 아닌 “자기 부정이요, 영혼의 호흡이며 선한 싸움의 무기이고, 만능의 열쇠이며 하나님의 관심을 이끄는 도구이고, 영혼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친교입니다. 이것을 숙달된 운전기사처럼 되기 위하여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은 좁은 공간도 잘 이용하는 것처럼 기도가 숙달되면 장소, 환경이 아무리 불편해도 지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3) 예배 연습도 중요합니다. 성수 주일, 예배 엄수, 시간 엄수부터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마음을 예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설교를 건설적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하며 대표 기도에 공감을 표해야 하고 찬송은 독창하듯 불러야 할 것이며 헌금도 적게 내는 것부터 더 많이 드리는 것으로 연습하시고, 예배 시간이 좀 지루할 때는 반드시 기다리는 연습을 하여 인내를 키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초신자가 예배 시간에 땀을 흘리며 고역스러워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이것은 목적과 자세와 연단이 다 어긋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4) 경건 연습 중 또 중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자신을 없는 자로, 또 부족한 자로, 또 죄인으로 알 때는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다 은혜가 되고 과분한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 갖는 연단을 하셔야 됩니다. “일본과의 야구에서 30년 만에 이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긴 팀이 가장 강한 팀하고 대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긴 것이 더 불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그때에 졌다면 진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생활 속에도 불리해 보이는 것이 더 복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골 2:7에서는 “감사를 넘치게 하라” 하셨고, 고후 4:15에서 “너희의 감사로 은혜가 더하여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감사 잘 하는 방법을 아시고 불리한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는 연단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또 강조하고 싶은 경건의 연단은 사랑 실천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베푸는 사랑이 적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관심하고 베푼 것이 없으니까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도 없어진 것입니다. 구제는 일종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심은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6). 만일 여러분들과 사이가 안 좋게 헤어졌거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지목하여 기도를 많이 해 보십시오. 상대방은 자신이 기도 받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 그 기도를 받는 사람이 변화된 상태로 관계가 회복되거나 아니면 자기의 마음이 넓어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체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껄끄러운 대상에게도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을 하셔야 사랑 연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63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눅 13:23~24) 목록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 누가 두 곳에 기록되었는데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1. 마태복음부터 살피면 “좁은 문은 협착(힘들게 통과하는 문)하고 반대로 크고 넓은 문도 있는데 좁은 문은 생명의 길로서 찾는 이가 적고 넓은 문은 멸망의 길인데도 넓으니까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좁은 문은 구원받는 자의 수가 적음을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 받는 자의 수가 적다”는 말씀은 마 22:14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청함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하셨고, 고전 10:5에서는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적은지에 대해서는 비례를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노아 홍수가 그 계시를 주신 것이라면 1000년 역사에 8명이고, 소돔고모라가 그 계시라면 소돔의 인구 중의 세 사람, 또 출애굽 인구가 그 계시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포함하여 광야에서 믿음으로 죽은 자만 구원을 받은 것인데 이것을 세계인구로 비례한다면 천의 하나 만의 하나가 아니고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 가보면 기독교인이 많은 것 같아도 다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사업주의로 나가면서 좁은 문을 넓게 선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적을 행하셔서 많은 사람(무리 수만명)이 몰려 왔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좁은 문으로 가신다” 하니까 적은 무리로 변하지 않았습니까?(눅 12:1, 32) 십자가 막판에는 베드로까지 떨어졌으니까 그 수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때에 예수님은 “적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좁은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또 주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길임을 분명히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즉 도마처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하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바로 좁은 문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는 좁은 길일 수 없는 것입니다.

2. 누가복음의 좁은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한즉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으니까 여기서도 적다는 뜻을 말씀하셨는데 또 말씀하시기를 “그 문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분당의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고 신청한 사람은 많지만 800:1이 되다 보니까 다 안 되는 것과 같겠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좁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부자는 강도나 사기꾼에 비하면 죄인도 아닌데(돈만 제일이다 하고 산 사람임)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가는 것보다 쉽다”(마 19:24) 하셨으니 이것이 곧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마 6:2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요. “구하여도 못 들어갈 자가 많다”는 뜻은 잘못 구하는 자, 잘못 믿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마태복음의 좁은 문은 선택자가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누가복음의 좁은 문은 구하여도 안 되는 사람 즉 잘못 믿는 사람이 많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7:21~23을 보시면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능력도 행했으나 하나님 뜻대로 못하고 불법을 행하여 떠나가라” 하셨으니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좁은 문 통과 자는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디에 있거나 어디를 가나 문은 두 개이니까 이때에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일을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쓴다는 것은 판단을 잘 하셔서 안일주의, 이기주의, 현세주의를 피하고 십자가 중심의 길에 접근만 하면 내 힘으로 못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밀어 넣으셔서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약대와 바늘귀 말씀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19:26).

3.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 가지로 좁은 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좁은 문은

1) 특별히 선택받는 성도만 들어가는 문이란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수가 사람 뜻대로 늘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 많이 하면 자기 교회는 채울 수 있어도 택한 자의 수를 늘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택한 백성의 수는 멸망자보다 적은데 그들만 통과하는 문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의 길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들어가는 문이고,

4) 좁은 문은 협착하기 때문에 안일주의로는 통과하기 어려우니까 예수님도 “힘쓰라” 하셨고,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11:12)고 하신 것입니다. 왜 힘써야 하는가? 하면 마귀가 넓은 길로 당기는 유혹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좁은 길은 자신이 하나님만 의지하여 가는 길입니다. 좁은 길은 인간을 의지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들도 같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 따로 따로 떨어져서 각자가 예수님만 모시고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예수님 경우도 제자들이 다 흩어졌고, 바울사도도 순교 직전에 인간적 고독을 느끼셨습니다. 자기 곁에 사람이 없고 오직 주님과만 동행하는 길입니다. 지금은 사람이 많지만 천국 들어갈 때는 주님과 자기만 가는 좁은 문이란 뜻입니다.

6)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도성에서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의인 한 사람을 찾아보라”(렘 5:1) 하였고, 예수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으며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 하셨기 때문에 말세에 믿음을 지키고 경건하게 살려면 고독이나 핍박을 감수하면서 좁은 문으로 가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64과 죽은 자, 병든 자, 산 자 (마 11:2~6) 목록으로


제가 왕하 1~3장 강론을 쓰면서 병자를 고치고 성한 사람(사자)을 만드는 역사를 증언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죽은 자, 병든 자, 산자”로 정했는데 이 제목의 뜻은 고전 2:14~3:3의 강론 중 설교 5과에 나타난 “세 종류의 사람”이란 말씀과 같은 것인데 거기에 대한 예증을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 설교를 또 드리게 된 것입니다. 왕하 1장을 보시면 아하시야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으니 그것은 육신의 병이고, 그가 바알세붑 선지자에게 물으러 간 것은 영적 신앙의 큰 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왕상 2장에서는 엘리야가 승천을 하고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렸으니 이는 부활 승천의 능력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 다음에 여리고의 물을 고친 것은 세상과 사회를 건전하게 고치는 교훈이고, 4장에서는 빚 갚는 일, 음식의 독 제거하는 일,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이는 이적이 나오는데 이것은 가정, 사회의 경제 문제와 불안(부정 식품) 문제를 해결하는 말씀이요, 5장에서는 나만이 문둥병 고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만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문둥병은 육신의 병인데 엘리사를 찾아와서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는 살아야 하고, 병든 자는 고쳐야 하는데 여기의 죽었다는 의미와 병들었다는 의미를 개인 또는 가정, 더 나가서는 교회와 사회로 진단해 볼 수 있고, 또 살리고 고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전 2:14의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고, 고전 3:1의 “육신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병든 자이며 고전 2:15의 “신령한 자”는 영적으로 건강한 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씀으로도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엡 2:1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란 말씀이 영적으로 죽은 것(불신자)익, 사 1:6을 보시면 “상하고 터지고 맞은 흔적뿐”이란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영적으로 병든 것(병든 신앙)을 뜻하며 영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자는 고전 2:16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어찌 되었든 그리스도의 마음만 가지면 바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자신과 주위를 살피셔야 합니다. 누가 영적으로 죽은 자요, 병든 자이며 산 자인가? 누가 정신적으로 병든 자인가? 누가 육신적으로 병든 자인가?(이것은 잘 나타남) 또 어느 가정, 어느 교회, 어느 사회가 죽어 있는지 또는 병이 들었는지 아니면 건전하게 살고 있는지도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1. 여러분 영적으로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불교 방송을 들으면 도덕, 윤리, 철학, 마음의 신비에 대해서 깊은 강의를 하지만 창조자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살립니까? 사람은 못 살리지요. 생명의 주 하나님만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약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입니다. 벧전 1:23을 보시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은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접하는 자가 믿음으로 받으면 사는 것이고, 안 받으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그대로 두시기로 작정하신 자에 대하여는 살릴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죽음은 어찌 하느냐? 하시겠지요. 육체의 죽음은 영적으로 산 자나 죽은 자에게 일반적(외형상으로 볼 때)으로 임하지만 심판 때에 가서 “선한 일(믿음)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불신)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고 하셨습니다.

2. 영적으로 병든 자가 있습니다. 고전 3:1에 보시면 “육신에 속한 자요 어린 아이 같은 자”라 하셨고, 롬 7:25에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덜 먹으면 몸에 좋은 줄 알면서도 과식하는 것처럼) 기도로 힘을 받으라”(마 26:41)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연약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정신이 건강치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마음에 모시면 다 치료가 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옳게 교육을 받지 못하여 늘 삐뚤어지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오직 신앙(성경)과 교육으로만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떠나고 교육 떠났으면 희망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개인적으로 사시되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일에 있어서도 불신자는 일반 은총에만 의지하나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까지 의지한즉 건강의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죽은 가정을 살린 사례가 있지요. 그것이 나오미의 가정입니다. 늙은 시모와 젊은 며느리(그것도 이방 여인)만 남았으니 죽은 가정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살리시니까 룻이 집안 남자와 결혼하여 계대하고 다윗의 조부 오벳을 낳았으니 확실히 살린 것이고, 또 선지자의 생도집도 빚에 쪼들려 무너지는 집인데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어떻게 살리셨는가? 하는 것은 강론문을 읽으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병 때문에 영혼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살려 주셨고, 나만은 영혼과 육체가 다 죽은 자인데 하나님이 다 고치고 살려주셨습니다.

5. 교회도 예수님을 표방하지 않는 교회는 다 죽은 교회이겠지요. 그 중에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을 이긴 교회이고, 안디옥교회는 선교하고 활동하는 교회이며 데살로니가교회는 기쁨과 감사로 누리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진리 아닌 것을 고치고 뽑아내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회도 고치십니다. 그것이 곧 여리고의 물을 고치신 것 아닙니까? 믿기 어려운 세상을 진실하고 믿을만한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제65과 요셉의 신앙 (창 37:5~11, 50:15~21) 목록으로


요셉은 복 받고 형통하여 성공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도록 밀어 주셨고, 복을 주셨지만 요셉도 좋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들도 요셉처럼 성공의 삶이 있기를 바라면서 요셉의 신앙의 좋은 점을 살피려고 합니다.

1. 요셉은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의 꿈은 계시의 꿈이니까 우리가 이런 꿈을 꾸시려면 성경을 잘 아시면 됩니다. 성경이 완성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또 꿈은 포부 즉 내다보는 소망을 뜻하지요. 그래서 저희들도 요셉처럼 큰 포부를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내가 형들이나 부모들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포부를 갖고 그때를 기다리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건전한 포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좋은 꿈을 반드시 가지셔야 합니다. 야구를 이기고 골프를 이기며 축구를 이기는 꿈에 부풀지 마시고 건전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또 나의 삶을 가장 보람있게 장식할 수 있는 꿈을 꼭 가지십시오.

2.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하고 그 계획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에 대하여 두 번 말했습니다. 하나는 창 45:5에서 “형들은 나를 팔았다고 근심,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낸 것입니다” 하였고, 또 50:20을 보시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처럼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섭리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의 역할만 봅니다. 그래서 매사마다 “내가 했고 누가 했다”하지만 섭리를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계획에 의하여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섭리고, 실패, 성공도 섭리며 죽는 것도 섭리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평안과 위로도 되고 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섭리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뜻이고 불신자가 말하는 운명은 원인자가 없이 저절로 된 것을 말합니다.

3. 요셉은 맡은 일, 자기 일, 자기 달란트에만 근면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요셉이 총리가 되고 싶었다면 총리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정치가가 되어서 선거 운동 같은 일에 뛰어들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자기 앞에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요셉의 앞에 있는 일은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으며 노예가 된 다음에는 도망칠 생각없이 노예로 충성하는 것이었고, 감옥에 들어가서는 감옥에서 봉사, 충성하는 것이 자기 앞의 일이고, 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도들도 지나친 욕심에 얽매여 하늘의 별 따는 식, 일확천금 같은데 마음 두지 마시고 성실하게 자기 앞 일만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는 요셉도 본받아야 하고, 또 하루의 일은 내가 아는 것을 하는 것이지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시험을 이기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시험은 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항상 죄 되는 것과 죄 안 되는 것을 구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죄 되는 일이 걸려들 때는 단호하게 걷어차야 합니다. 요셉이 시무하러 주인집에 들어간즉 그 집 여주인이 음행하자고 유혹을 했습니다. 이때 요셉은 그 집의 모든 일 중에 그것만 금지된 사항이란 것을 알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창 39:7~13을 보시면 요셉이 시험을 이긴 경위가 자세히 나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집안에 사람 없고, 매일 졸라댔으니 넘어갈 법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붙잡는 옷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니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입니까? 그래서 성도가 이런 유혹을 이기려면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다 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증거물을 안 남기고 도망했어야 감옥에 안 갔을 것이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증거가 있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가야 바로왕을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지요. 여하튼 은혜를 받으려면 죄를 이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5.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 생활 11년, 감옥 생활 2년을 기다렸습니다. 노예 생활, 감옥 생활은 사람 생각으로는 희망이 없는 생활이지만 그것이 세월을 보내고 때를 기다리는데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기다리면서 인내를 키우는 것이 유익한 것인 줄 믿고 연단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롬 5:4에서 고백한대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주는데(그 다음에) 연단이 소망을 준다” 하셨으니까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와 기다림의 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무 불평 없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소망을 갖고 때를 기다렸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 사랑 실천의 신앙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믿음이 헛되고(약 2:14), 행위의 근본은 사랑이지요(마 22:37~40).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먹이고 입히며 도와주는 것이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 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라도 죽이려 했고 자기를 노예로 팔아먹었는데 그 죄를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받지 못할까 하여 아버지의 유언까지 내세우면서(창 50:16~17) 용서를 구했지요. 이때 요셉은 울었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심판, 보복권이 하나님께 있음)하면서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고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먹여 살리겠다” 하였으니(50:18~21)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7. 마지막으로 요셉은 두 가지 유언을 하고 110세에 죽었는데 첫 유언은 “하나님이 권고하셔서 너희를 조상의 땅으로 가게 하실 것이라”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내 해골을 그 곳으로 갖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본향을 사모한 것인데 여기에는 현실적 본향과 내세의 소망이 다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본향을 사모하였으면 “유골을 갖고 가라”고 하였겠습니까? 요셉의 일곱 가지 좋은 신앙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제66과 신앙 생활의 즐거움 (히 13:17) 목록으로


“신앙 생활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혹 억지로 하시거나 힘들게 하시지는 않습니까? 어떤 분은 교회 생활에서 충격을 받아서 큰 시험에 드는 경우를 보았는데 그렇게 하면 신앙 생활의 보람이 없겠지요. 본문 말씀은 복음 사역자의 즐거운 생활을 권장한 말씀이고 복음 사역자가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이 복종을 잘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복종은 그들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복음 사역자들도 성도들이 복종을 잘 할 수 있도록 지도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혹이라도 성도님들 중에 신앙 생활의 자유를 누리시지 못할까 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이 자리에서 억지로 예배를 드린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땀이 날 만큼 힘들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가? 하시겠지요. 설교자를 존경하지 않으면서 그 설교를 듣게 되거나 부모의 강요로 억지로 나와 앉으면 억지 예배가 되고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즐겁게 하시려면

1. 우선 교회 선택을 잘 하셔야 합니다. 부조리 없는 교회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설교자와의 뜻은 맞아야 합니다. 설교자와의 뜻이 안 맞는 상태에서의 한 교회 생활은 서로의 고역이고, 불신과 미움의 죄를 짓기 쉬우니까 그런 환경을 개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역자와 뜻이 맞아도 텃세부리는 교인이 있거나 법대로 운영되지 않아서 거리낌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잘 극복해보고 안 되면 역시 새로운 방법으로 개 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신앙 생활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원함으로 즐겁게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거듭나면 믿어져서 믿는 것처럼 예배나 기도나 전도, 봉사도 하고 싶은 충동에서 즐거움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 51:12에 보시면 억지로 하는 일이 거리끼기 때문에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고, 그 이외의 구제나 감독 사역도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벧전 5:2, 고후 8:3, 17). 교역자도 하고 싶은 취미와 은사대로 하여야 하고 성도들도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억지로 모방한다면 모방도 안 되려니와 자기 것도 뺏긴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규모와 목표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바람과 물결 따라 흐르는 것처럼 생활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게으른 생활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자기를 맡기고 사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예배, 예배 시간은 지켜야 하지만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정하면 피곤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12시에, 또 어떤 이는 하루에 네 번 기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시간을 지키려면 피곤하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신 줄 압니다. 자동차에 앉아서나 공원을 산택하면서도 정신만 집중하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배당에서만 기도가 되는 줄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면 될 것을 예배당에까지 왔다 가려니까 수고는 물론 시간 낭비가 많겠지요. 이 바쁜 세상에 휴식 시간이 부족하고 전화 받을 겨를도 없는 때에 가능한한 규모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 하실 것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4. 달음질 하되 꼭 1등 하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마귀하고 둘이 뛸 때는 1등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9:24). 그러나 사람하고 경쟁할 때는 앞서려 하지 마시고 양보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삶의 터전도 양보하지 않았습니까? 남하는 것만큼 하고 남 사는 것만큼 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축복의 분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복 받는 사람과 대대로 복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일치되겠습니까? 차라리 양보하고 사랑하는 것이 더 잘 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열에서 1등 하려 하지 마시고 분복대로 세상 욕심 없이 살아야 신앙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5. 교회에서 지우는 무거운 짐에 말려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30명쯤 나오는 교회에서 에어컨 놓아야 한다, 음향 시설 해야 된다, 강대상을 바꿔야 한다, 전세 예배당을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성도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도 안 되고, 그런 짐을 질 때 적당히 지시라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까를로스” 목사가 쓴 책에 풍자적 표현이 있는데 초신자가 어렵게 교회에 출석했는데 점차로 강조하는 것이 “주일을 지켜라, 예배에 빠지지 말라, 주일 오후 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도 나오라, 구역 예배와 새벽 기도회도 나오라, 기관에 가입하고 십일조와 회비를 내라, 찬양대를 하고 주일 학교를 해라, 성경 공부를 하고 구역장을 하라, 전도 운동에 나오라” 하였으니 정상적인 것 같지만 이 짐을 어떻게 다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생활 유지에 바쁜 사람은 힘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면 신앙 생활의 즐거움을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20분 성경 공부하고 40분 예배 드려서 1시간에 두 가지 목적을 다 성취합니다. 그것도 교인들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피곤치 않아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신앙의 자립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교회와 교역자에게 의존했는데 교역자가 외국에 가서 1년쯤 있게 되었다면 어찌 될까요? 크게 당황할 것입니다. 의존 대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말씀 연구와 기도에 자립하시고, 생활도 자립하면 무슨 문제가 있어도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즐겁고 자유로운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자립을 확보한 정상에 오른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 여섯 가지를 잘 시행하시므로 신앙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67과 신앙의 인맥(人脈) (히 13:7~8) 목록으로


한국 초대 교회 당시에 사역하신 선배님들의 역사적 자료를 정리하면서 “신앙의 인맥”이란 제목 아래 한국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것을 살피려고 합니다. 저희들이 좋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좋은 선배님들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요즈음 이천 한나원에 시설된 기독교 역사 박물관에서 신앙위인 120명을 선발하여 그분들의 사적을 전시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120명이 다 유명한 분들이겠지만 우리의 신앙의 맥과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닐 줄 압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들이 어느 선진과 맥을 통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우선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초대 역사부터 살핀다면

1) 1832년에 화란의 선교사 구츨라프 목사님이 오셔서 40일쯤 머물다 가신 일이 있었고,

2) 1864~1866년에는 영국의 토마스 목사님이 선교차 황해도에 오셔서 잠깐 선교하시고 대동강으로 입국하려 하시다가 순교하셨으며

3) 1884년 1월 20일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오셔서 고종 황제의 승인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였고,

4) 우리나라 최초 선교사 입국일인 1885. 4. 5.에 미국의 장로교 목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 아펜셀라가 같은 시간에 입국하여 정식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5) 1년 후인 1886년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송천(소래)교회가 처음 세워졌고(한국교회 역사 연구 학자이신 이찬영 목사님은 그 교회 당회록을 직접 확인하셨는데 그 설립 일자가 1983년 5월 16일이라고 함. 역사 예화931. 그렇다면 송천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영향으로 세워졌다고 보아야 함),

6) 1890년에는 미국의 북장로교 마포삼열 목사님이 입국하셨으며

7) 1901년에 장로교회 당회가 조직되었고,

8) 1907년에 최초 신학 졸업생과 장로 교회 독 노회가 생겼으며

9) 1910년에 한일 합방이 있었고,

10) 1912년에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당시에 선교사 44명, 목사 52명, 장로가 125명이었다고 합니다.

2. 초대 선교사 두 분의 신앙을 소개하면

1)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1859~1916)님은 미국에서 뉴욕 대학을 마치고 화란의 개혁파 신학을 공부한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그 분이 총회장 되었을 때 하신 설교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이란 제하에서 속죄하시는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예수님의 죄에 대한 승리와 우주적 왕권을 말씀하면서 성도가 고난에 동참할 것을 역설하였고, 정교 분리를 강조하되 사회적 복음주의가 아닌 복음적 사회주의를 말하므로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칼빈주의, 보수주의로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마포삼열(1864~1939) 목사님의 신학 교육입니다. 이 분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을 공부할 때 핫지나 워필드, 아브람 카이퍼 같은 칼빈주의 신학을 배운 분이라 평양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365명의 목사를 양성하면서 “십자가의 도” 외에는 증거하지 않기로 한 바울사도의 신앙처럼 보수적 신학을 가르쳤는데 1939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중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는 신신학과 좌경 신학이 물들어 있었고(나중에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로 갈라짐), 한국에도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를 중심으로 자유 신학이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포삼열 목사님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유전과 초등 학문을 좇는 무리들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는 경고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 선교사들은 철저한 복음적 신앙을 심어준 것입니다.

3. 그 후에 초대 한국 교회의 신앙의 맥을 이어준 목사님들로는 길선주(1869~1935), 김익두(1874~1950), 주기철(1897~1944) 목사님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1) 길선주 목사님은 초대 부흥사로 회개와 위로를 많이 증언했다고 합니다. 성경 중심의 사경회가 곧 부흥의 방법이었고, 나라 뺏긴 것이 서러워 천국 소망을 많이 외쳤으며 1932년 당시에 교인 30만명이라고 하였는데 그 분의 마지막 설교에서 “양보다 질을 강조하셨고, 교회가 세속화 되어감을 경계” 하셨다고 합니다.

2)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깡패에서 변화된 분으로 “십자가 보혈, 예수님의 부활, 회개, 민족의 악습 비판, 모범 생활과 헌금을 강조” 하셨다고 하며

3) 주기철 목사님은 기독교 사학가인 김인서 목사님이 평하시기를 “잘 믿고 잘 살았으며 잘 싸웠고 잘 죽은 분이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사람 앞에 청백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허다한 간증자들이 보는 바라” 하였고, 그가 남긴 설교 제목에 “일사각오”란 제목이 있는데 “주님 따라 일사각오, 남을 위해 일사각오, 부활 위해 일사각오하자” 하였으며 또 “하나님 앞에서”란 제목에서는 “경건과 정직과 태연함으로 완전 하라”하면서 순교의 염원으로 불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해방 1년 전(1900~1944)에 감옥에서 돌아가셨는데 병 보석으로 잠깐 나와서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설교하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제목이 “나의 다섯 가지 기도”인데 그 대목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가족이 교회의 짐 되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과 사명의 원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신학 사상이나 세속화 문제에 대하여 조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60년대, 70년대만 해도 퍽 어지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용한 것은 모두가 먹고 사는데 바쁘고 자기 교회의 물량주의 확보 때문에 불건전한 신학이나 세속화 같은 것을 거들떠서 대항할 시간과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론은 좋은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자는 것입니다.

제68과 지혜로운 생활 (엡 5:15~21) 목록으로


“지혜로운 생활”이란 제목의 설교가 에베소서 강론 중 보충 설교 7과(15~18절)와 7분 설교 3집 전 39과(15~20절)에 두 편 있는 것을 알면서 오늘 또 새로운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내용이 많겠지만 새로운 정리에 속한 부분도 있을 듯 하여 다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 되지 말라” 하셨고, 15절에서는 “지혜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적부터 지혜롭게 자라셨다”고 하셨지요(눅 2:52).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혜롭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특히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청소년 때부터 지혜롭게 철이 들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어떤 자녀는 대단히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어른 못지않게 지혜로운 생활을 나타내는 것을 볼 때 대견해 보이고, 어떤 집 자녀는 30, 40세가 되었으면서도 부모와 뜻을 맞출 수 없을 만큼 지혜없이 행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지혜로워질 것인즉 기도로 많이 구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신 34:9, 왕상 3:11, 약 1:5). 본문에 나타난대로 지혜로운 생활을 찾아보면

1. 자세히 주의하는 것입니다. 실수 없고 확실하게 행하기 위함입니다. 사람 사는 일에 수월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세히 주의하지 않으면 전부 실수투성이가 됩니다. 한일 청구권 문서를 놓고 한국은 “징용자나 위안부 보상은 별도로 청구할 수 있다” 하고 일본은 “다 포함됐다”고 하니 이것은 그 문건을 작성할 때 자세히 주의하지 않은 탓입니다. 언제나 계약할 때는 후유증 처방을 최대한 고려하여야 합니다. 자세히 주의 하고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2.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도 여러 차례 드렸지요.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1) 실수가 없어야 시간적 손해가 없고,

2) 휴식을 축소하고 근면해야 하며

3) 엄부를 고상한 쪽(비중있는 일)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4) 부스러기 시간도 이용할 줄 알아야 하고,

5)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더 연구해 보십시오. 세월을 아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면 그는 성숙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 소모되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그는 미숙인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3.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계명 금지 조항),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 있으며(이것은 믿음 분량에 따라 양심에 가책 없도록 하는 일) 또 한 가지는 반드시 시행하여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인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계명 중심, 사랑 중심, 그리스도의 모범 중심을 잘 따라야 할 것이고,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성경 전문가의 자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과 진실을 다 만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방탕을 떠나는 것입니다. 술을 먹는 것도 방탕에 해당하면 떠나야 합니다. 술이 자신의 발전적 생활을 해할 때는 방탕에 속합니다. 어떤 집에서 포도주 한 잔을 대접상 제공하였다고 할 때 예의상으로 한 잔 마시는 것은 방탕이 아닙니다. 그러나 취하는 기분을 맛보려고 먹었다면 방탕입니다. 그런 일들을 포함하여 실속을 해치는 모든 일은 다 방탕입니다. 방탕은 미련한 자의 소행입니다.

5.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말씀에 이끌려 사는 생활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신지라(요 14:17) 진리의 말씀 즉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 성경(벧후 1:21)을 떠나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붙잡히고, 성경에 이끌려 살며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따라 사는 생활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이적을 나타내도 말씀에 따름이 없으면 그것은 성령 역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는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 37:4).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은 기도로 소원하는 것만큼 가치를 나타내는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7. 범사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범사에 항상 감사하려면 감사 안 할 일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경에서 감사할 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은 역경에서 감사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시 9:1, 9, 12~13). 어떤 성실한 집사가 작은 회사의 사장이었는데 경영이 부실해지자 인건비와 부채를 깨끗이 정리하고 회사의 문을 닫았는데 그 다음 몇 일 후에 그 회사의 종업원들이 그 집사 출석하는 교회에 나와서 “사장님의 진실하고 늠름한 태도를 보고 감동되어 믿음 생활 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담임 목사님이 “그 사장 집사의 회사가 망한 이유를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망해도 감사하면 열매와 복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8. 피차 복종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피차 복종하는 것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만큼(빌 2:8) 성도가 겸손하여져서 서로 복종하고 섬기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생활 여덟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69과 성도의 자유 (갈 3:23~29) 목록으로


1. “성도의 자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의 자유란 성경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의 자유와 같고 자유의 진정한 뜻은 성경과의 일치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또는 성경 안에서 믿음 생활을 하면서 자유를 못 누리는가? 할 때 핍박 없는 세계니까 상당하게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깊이 들어가서 주밀하게 살피면 못 누리는 점도 상당하게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만큼 말씀을 드려도 “누가 내 신앙 생활을 속박한다고 부자유가 있다고 하는가?”하실 만큼 부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재물이라도 의지해야 할 것인데 만일 아침 양식이 없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부자유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인데 신앙이 모자라서(무지와 미숙) 예수님과의 동행이 멀어졌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신앙 회복을 자기 혼자 해결하기 어렵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과의 동행을 회복하기 까지는 상당 기간 불안과 부자유를 느끼면서 회개하므로 회복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 지식의 부족은 곧 신앙의 부자유를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부자유를 못 느끼는데”라고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은 자유로워도 종의 아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갈 4:22~24) 신앙 신분도 수준에 달하지 못하면 알게 모르게 속박을 당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23절의 뜻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율법에 매인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계시될 믿음의 때”에 오신 가장 밝은 계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4~25절은 “율법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는 말씀이고, 26~27절은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이며, 28~29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옷만 입으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요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유업도 받으므로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인종이나 민족성 차별이나 남녀의 지위 문제를 따졌다면 그는 따지는 것만큼 부자유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인종이나 주종이나 남녀의 차별을 두어 따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시면 우리가 무엇에 속박되어 살며 무엇에 자유로워져야 하는가를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래서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할 일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율법주의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직도 성도들이 율법주의에 얽매여 사는 것이 있고, 또 교회가 본의 아니게 율법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안식일 제도로 성수 주일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고, 십일조 제도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며 제사장 제도에서 성의와 관유 제도(천주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절기 의식 같은 것도 율법에 얽매이는 바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갈 4:10을 보시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니 나의 수고가 헛될까 두렵다”고 하신 것은 율법주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부분들이 성도의 생활과 신앙 용어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밝히 비취시는데도 옛날의 등불 밑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찾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 28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하나라”고 하셨는데도 상당 부분 여자가 남자의 권위에 눌리고 있다면 이 부분은 여자의 자유를 속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쌓이고 쌓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의 제도가 지나치게 성도의 자유를 속박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 과외 공부 시키는 것처럼 속박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척 교회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돈 뜯어내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은 언제나 감동 받은 성도가 자원하여 드리는 것일 뿐 교회가 뜯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교회가 지나치게 물량주의를 앞세우기 때문에 성도가 피곤해진다면 그것이 곧 자유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거리낌입니다. 성도가 죄를 지어도 거리끼고 책임을 못 다 해도 거리끼지요. 성도 뿐 아니라 누구든지 거리끼면 부자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짐도 벗고 책임도 감당하여 자유를 누리셔야 하고,

4) 고난과 죽음을 초월하지 못할 때 부자유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성도들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환난을 유익의 방편으로 삼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하셨고(롬 5:3), “육체의 가시도 도리어 기뻐하였다” 하셨으며(고후 12:9) 만일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다면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에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다”(빌 1:21~23) 하셨으니 이것이 곧 환난과 죽음을 초월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웠겠습니까? 성도가 이 자유를 누리시도록 반드시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5) 주님을 멀리한 부자유입니다.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에 있으면 안심되고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머니 품을 떠났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부자유가 밀려올 것입니다. 가난하고 보호자 없는 것은 자유가 아니니까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도의 본분을 다 하면서 필요한 것을 공급 받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 침체에 빠져서 주님과의 동행이 없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불행이고 부자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한다면 아무 것도 근심하거나 책임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곁에서 보셨고, 아무 지적도 안 하셨으니까 그것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전통)에서의 자유(갈 2:20), 교회 제도(지나친 속박)에서의 자유, 거리낌에서의 자유, 고난과 죽음에서의 자유, 주님과 동행함에서의 자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제70과 자유를 체험합시다 (요 8:32) 목록으로


저는 자유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요 8:32, 갈 5:1, 3:23~29, 딤전 4:12~13 등의 설교문 참조). 이제 마지막으로 “자유 체험을 하셨습니까? 꼭 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성경에는 자유를 권장한 말씀이 많은데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한 자유는 “율법이나 사람이 만든 유전 같은 규모와 의식에서 자유로우라”는 말씀이고, 예수님이 말씀한 본문의 자유는 어떤 핍박이나 고난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로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아닌 것은 무엇이냐”고 하시겠지요. 자유가 아닌 것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활이 불안하고 여러 가지 역경을 억지로 극복하면서 욕구 불만과 함께 보람된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유로운 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소망으로 고난을 극복하면서 마귀의 유혹에 승리하고 보람된 자기 생활에 정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에 이런 사례가 있는가? 할 때 두 분의 자유로운 생활을 추천할 수 있는데 한 사람은 구약 시대의 다윗으로 시 23편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고, 또 한 사람은 신약의 바울사도로서 고후 6:1~10 말씀을 근거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신앙 고백을 살피면 “자신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상태에서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양식과 휴식을 주시며 보호하셨고, 영혼의 소성과 함께 의의 길로 인도하셨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극한 위험에서도 건져주시고 안위하셨다, 그리고 또 핍박자 앞에서도 승리를 주셨는데 이런 은혜가 평생 따를 것이므로 나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 하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함께 함, 공급, 보호, 인도, 승리의 은혜를 받고 자유 느끼는 고백을 한 것이요, 그 다음에 바울사도는 핍박 중에 전도하면서 파란곡절을 다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 견디는데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 속에서 잘 견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칭찬과 욕이 교체되고, 좋은 이름, 나쁜 이름(명예의 영욕)이 오고가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 속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자신은 유명하고(하나님이 알아주심),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지 않을 것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속으로는 기쁘고, 가난한 자 같고 없는 자 같으나 부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라” 하셨으니 바울사도야 말로 고난 역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람과 자유를 만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순탄치 않습니다. 고난과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고 고난의 생애를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하셨고(행 14:22), 또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저 하면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고 하셨으니까 성도가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하든지 평강을 힘입어야만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3. 제가 체험한 자유를 말씀드리면

1) 말씀과 기도에 끌림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즉 하나님이 놀랄 만큼 가까이 해주셨는데 그 증거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마 6:32, 히 4:16). 성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다면 상당 부분 염려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겠지요. 염려를 더는 것이 곧 자유 체험입니다. 제가 말씀과 기도에 끌렸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씀에 끌린 은혜는 제가 받은 특별한 은혜이지만 기도에 끌리는 은혜는 모든 성도님들이 체험하셔야 하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고독에 처하고 연약에 처하니까 저절로 기도가 갈망되고 간절해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독과 연약은 기도의 후원자가 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고난 극복의 신앙을 배우는 것인데 이것은 바울 사도에게서 배우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가난도 체험했고, 가난에서의 자족과 자립을 체험한 분이며(빌 4:11, 롬 12:16, 행 20:34) 몸의 가시(질병, 고통)를 기쁨과 연단으로 극복하셨고(고후 12:9), 자신이 당하는 환난은 소망을 이룬다고 생각하셔서 즐거워하였으며(롬 5:3)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님 앞에 간다”는 소망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빌 1:24) 한 마디로 고난과 죽음을 초월하므로 자유를 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방법을 모방하고 모색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번에 체증을 앓고 많이 허약해졌지만 그 덕분에 10년 동안 이루지 못한 체중 감소를 5㎏이나 성취하였습니다. 어찌하든지 닥쳐오는 고난을 반성과 회개와 희망으로 극복하는 것이 바울사도의 자유 체험입니다.

3) 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책임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 책임을 기쁨과 보람으로 수행하셔야 합니다. 제가 스스로 보람을 갖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메시지를 문자로 바꾸는 작업인데 저는 이 작업이 목회보다 귀하다고 생각하여 57세에 전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람을 느낍니다. 보람을 느끼는 것이 곧 자유 체험입니다. 헛된 인생을 산다 할 때 자유가 있겠습니까? 집에서 자녀를 양육하시는 분들도 보람을 가지십시오. 모세와 사무엘이 쓰임 받은 것은 어릴 때 그 어머니의 양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업에 귀천 없이 충실하므로 보람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세상 떠나는 날까지 과제와 일감을 가지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시는 분이 계시다면 고생이 많은 것처럼 할 일 없고 심심하며 시간이 안 가는 것은 큰 부자유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늙도록 업무에 끌려 살아야 합니다. 그 업무란 소비적 향락 업무가 아니고, 생산적 업무를 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바쁩니다. 강해문 몇 권만 더 쓰면 되겠는데 시간과 건강이 촉박하기 때문에 심심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때를 따라 공급을 받으며 고난과 죽음을 믿음과 소망으로 극복하고 보람 있는 일에 몰두하면서 바쁘게 사니까 상당한 자유를 맛보게 된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71과 자유를 누립시다 (갈 5:1) 목록으로


여러분 자유를 누리십니까? 많이 힘들고 쫓기며 부자유를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 자유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셔서 못 누리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이 유익도 없는 불필요한 속박을 당하게 해서 부자유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생명, 또 자신이 살고 죽는 문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보따리에 꾸려서 예수님의 자동차에 실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굉장한 휴식을 느낄 것입니다. 제가 자유에 대한 설교를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제목 색인, 요절 색인 참조).가만히 묵상하는 중에 또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몇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1. 자유의 은혜를 생각할 때 부자유가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염려와 고통, 그리고 부족과 절망이 있으면 그것이 부자유에 해당할 것이고, 그와 반대로 평안이 있고, 넉넉함과 보람과 소망이 있으면 그것이 곧 자유 확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많습니다. 그런 중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믿으니까 근심이 되겠지요. 또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과 지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고 죄사함 받음과 동시에 영생을 확보하였다면 그것으로 받는 행복과 자유는 대단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애에 아쉬움을 느끼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산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는 늘 불안하고 불안한즉 자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생애를 주님의 것으로 맡기고 죽음이란 것을 천국 가는 관문으로 믿는다면 그 두 가지 속박(생애의 아쉬움, 죽음 공포)에서 다 해방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속박이란 근심, 고통, 불만족, 심판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고, 반대로 자유는 평안과 보람과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안과 보람과 영생 소망이 없거나 부족한 분들은 다 자유를 갈망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 “예수님이 자유 주신다”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오면 쉼을 주신다”는 말씀도 있고(마 11:30), “진리를 알면 자유케 한다”는 말씀도 있으며(요 8:32) 지금 읽으신 본문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율법의 종 되지 말고 다시는 종노릇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유대인들이 억세게 율법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심하게도 하였고, 또 율법의 잣대로 늘 재보고 판단을 하였으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법이란 것은 규격에 꼭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분명한 것을 뜻합니다. 만일 안식일을 시간적 개념으로, 십일조를 계산적 개념으로 지킨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내는 사람, 받는 사람이 다 고달플 것입니다. 더 받으면 죄가 되나요?

3. 그러면 구약 시대에는 왜 그렇게 지키기 어렵고 까다로운 법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죄를 어느 정도 방지하는 목적과 예수님을 나타내는 목적과 율법은 다 못 지키니 손을 들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잘 지키려고 애써 보아도 다 못 지켰으면 못 지킨 것이기 때문에 정죄를 받고 구원을 못 얻게 됐으니 어찌할꼬”하고 구원의 주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율법주의자들은 “그래도 율법을 지켰으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말씀이 인생은 다 율법의 실격자라는 뜻인데 단 한 분 예수님만 율법의 실천자가 되셔서 율법이 예수님을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려 하였고, 예수님은 정죄 받으실 죄가 없으시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이기고 챔피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속한 성도들도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고, 예수님을 상전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마 11:13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요한까지”란 말씀이 있지요. 왜 세례요한까지일까요? 이것은 선지자와 세례요한의 사명이 율법의 완성자(마 5:17)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인데 예수님이 율법의 승리자로 나타나셨으니까 예수님이 모든 계시의 정점이 되신 것입니다(히 1:1).

4. 그렇다면 율법을 무시해도 되는가? 하시겠지요. 율법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약의 성도들이 그것을 지켜 복을 받은 자도 있은즉 존경하고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100% 못 지켜도 죄사함과 구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으니까 지장이 없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뜻과 일치한 것이니까 잘 지키는 만큼 상급과 축복은 변함없이 받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성도님들이 율법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첨부해 드릴 것은 마 15:9을 보시면 “외식자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곧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사람이 만들어 지키므로 전통이 되고 문화와 습관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필요한 규례들은 없애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동의회법이나 재판법, 예배 모범 같은 것을 읽고 지키려면 힘든 것이 많고, 그것을 위반한 것이 성경을 위반한 것보다 더 힘들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 법은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든 것인데 사랑과 겸손만 앞세우면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뒤로 가고 옥신 각신 하는 것을 수습하려니까 법제정만 점점 까다롭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 발전이나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데는 아무 도움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사랑이 실천되는 법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법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성도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자유는 욕구 충족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도 받았으며 영생 소망까지 있으니까 궁극적 자유는 확보한 셈이지요. 감사하실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의 인생 문제를 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염려에서 해방되는 연습을 힘쓰십시오. 그리고 맡은 일에 충성하셔야 보람을 느낍니다. 또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면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유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9. 기도와 관련 있는 말씀

제72과 성도의 소원 (요삼 1:3~4) 목록으로


1. 성도가 어떤 소원을 가져야 좋을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소원 몇 가지를 찾아본 것 중 하나가 본문입니다.

1) 사도 요한은 사도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나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의 소원은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는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더 즐거움이 없다” 하였으니까 최고의 소원이었겠지요.

2) 그 다음에 바울사도의 소원을 찾아본즉 빌 1:20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살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며(전(前)은 능력의 사역자로 쓰임을 받을 때이고 이제는 감옥에서 참수 당할 날을 기다릴 때임) 살든지 죽든지 내 몸(보이는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이라 하시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의 소원과 환경에 변함없는 믿음의 소원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소원을 가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또 베드로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벧후 3:11~12, 14을 보시면 “(말세가 임할 때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하시므로, 성도가 주 재림시에 “예수님을 영접할 자세 갖추는 일”을 최후 권면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목적이 바로 그의 가장 큰 소원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4) 다음엔 천사의 소원도 있습니다. 벧전 1:12을 보시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일 뿐 아니라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신 종이라”고 하셨습니다(히 1:14). 종이 소원을 가질 필요가 없겠지만 하나님이 진리 증거의 사역을 사람들에게만 맡기실 때 천사들도 거기에 관심이 있어서 “진리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천사들도 진리 터득의 소원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5) 그러면 예수님의 소원도 찾아보셔야지요. 눅 12:49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므로 성령 강림의 사역과 성령 충만을 원하신 것입니다. 또 벧후 3:9에 보시면 또 한 가지 소원이 기록되었는데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생각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시므로 예수님의 소원은 성령 충만과 전도(최후 부탁)와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 달성과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달성이 첫째 소원이 되는 이유는 독생자를 희생시켜서까지 구원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알기를 원하신 말씀은 호 6: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셨고, 딤전 2:4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성도가 진리 아는 것이고, 천사의 소원도 그러하였으며 예수님의 소원은 성령 충만과 전도와 회개, 그리고 모든 사람(택함 받은 자)이 구원받는 것(요 17:9)입니다. 이상의 소원이 다 우리의 소원이 되고 또 기도의 제목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무슨 소원을 가지셔야 할까요? 우리 나름대로 건설적이고 신앙적인 소원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릴 소원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인생의 목적이니까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자”(고전 10:31) 하셨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소원은 꼭 가지셔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무슨 소원을 가지셔야 할까요? 개인적 신앙 생활이 원만해지는 소원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것이 쉬운 일 같아도 하나님이 순조롭게 나가는 환경을 주실 때 잘 할 수 있지만 유고가 생기면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개인의 신앙 생활이 잘 나가기를 소원하셔야 합니다. 바른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의 가정이 잘 되어가는 소원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런 소원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기도하실 때는 결코 빼지 않으실 줄 압니다. 가정이 잘 된다 하여 현실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을 만한 신앙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현실의 복은 주시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4)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가 아주 좋은 교회되기를 소원하셔야 합니다. 요즈음 좋은 교회 표준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예배당 좋고, 강대상 좋고, 목사 학벌 좋고, 숫자, 헌금 많고, 돈 잘 쓰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여기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준입니다. 좋은 교회는 “예수님 닮은 성도의 수가 늘어나는 교회”이고, 또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세속화된 교회나 진리 사명에서 잘못 가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니까 잘 판단하시고 좋은 교회 되는 소원을 가지십시오.

5) 보람된 사람의 소원을 가지십시오. 무엇이 보람된 삶일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처럼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그릇의 은사 분량대로 충실하게 쓰임 받는 것이 보람된 삶인 것입니다. 고기는 그물 가진 어부가 잡겠지요, 자신은 그 고기로 요리하는 기술이 있다면 그것을 잘 하므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성도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서 자기 일에 충실하므로 보람된 삶을 이루는 그런 소원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6) 또 좋은 교회되기를 원하는 소원 속에 교역자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소원도 가지셔야 합니다. 교역자는 곧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생각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도의 사명”이란 설교를 갖고 있는데 그 사명만 시행하면 이상의 다섯 가지 소원도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앞서 성도의 소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73과 기도 응답의 사례들 (시 116: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 응답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도의 상식을 많이 갖추셔서 기도의 많은 응답을 받으시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다윗의 시”로 추정합니다만 시편의 종합적 내용이 거의 기도 응답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사람의 기도와 응답 사례를 보시면 기도의 취지나 응답하신 방법을 알게 되므로 많은 기도의 지식을 더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피겠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성을 심판하시려고 살피신다는 사실을 알고 “심판은 공의롭게 하셔야 하는데 그 성에 의인이 10명이라도 있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니까 의인 10명만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놋을 봐 주십시오”하는 간청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 고모라는 멸망 받았는데 창 19:29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놋을 빼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이 없었으나 그를 생각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놋은 아주 악한 사람인데 아브라함 때문에 멸망을 면한 것인가? 할 때 그렇지는 않습니다. 벧후 2:8을 보시면 “의로운 놋”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운 놋이니까 구원을 받아야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간청인 “공의로 심판해주십시오”한 것을 생각하셔서 공의롭게 하시다보니 의로운 놋의 가족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기도는 “누구를 봐주십시오”한 기도가 아니고, “공의를 실현시켜 주십시오”한 기도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늙은 종, 2절)을 시켜서 고향인 메소포타미아(하란)에 가서 “자부감을 구해오라”고 하였을 때 그 종은 창 24:12에서 “주인이 자부될 자를 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에 기도를 구체적으로 하였습니다. “물 길러 나온 처녀에게 먹을 물을 구하였을 때 그가 약대에게도 물을 먹이겠습니다”하면 주께서 응답하시고 은혜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그대로 되어 적임자를 만났고, 그 다음에 부모와 당사자의 허락도 잘 받아낸 일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또 그의 간구의 내용은 “필요한 사람을 잘 만나게 해 달라”는 간청인데 하나님이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늙은 종의 기도 효력도 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번성의 복과 메시야 보내실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의 코드가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가 중요한 것이지요. 주인의 자부를 구함에 있어서 늙은 종의 이기주의 타산은 하나도 없은즉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기도는 주인을 위한 기도요, 넓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3. 야곱의 기도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시면 야곱이 평소에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몰랐다가 고독을 맛보았을 때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때 기도하기를 “나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옷을 주시며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사도 드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하고 서원을 했는데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원을 이행하였지요. 그러면 이 기도가 야곱이 구한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네게 허락한 뜻을 다 이루시겠다”고 하셨을 때 야곱은 “그대로 해 주십시오”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기도한 것이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인 만큼 그대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한나의 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시면 한나가 아들을 못 낳아서 당하는 수모 때문에 기도를 했는데 그 당시에 한나가 성태치 못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5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한나의 태를 닫으셨을까요? 이는 기도로 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도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겔 36:37).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세상에 보내실 섭리가 있었고, 한나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실만한 이유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섭리와 억울한 사정의 응답이 필연적인데 또 한나는 이기주의로 기도하지 않고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되바치겠다” 하니까 그의 헌신적 간청이 응답을 하실 만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섭리적인 것은 기도자가 잘 모를 수 있지만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과 헌신적인 기도는 응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5. 야베스의 기도가 있습니다. 대상 4:9~10을 보시면 야베스가 기도로 간청하기를 “주께서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삶의 터)을 넓히시고…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야베스가 그런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는가? 할 때 9절을 보시면 “그가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존귀한 자이면 기도 응답의 여지가 많은 것이지요. 존귀한 자의 지경이 넓어지고 존귀한 자가 평안하면 사랑 실천이나 하나님 영광에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은혜를 구할 때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존귀의 티켓을 먼저 따셔야 할 것입니다.

6. 에스라의 기도입니다. 라 7:1~6, 8:21~23을 보시면 에스라는 아론의 16대손이고(스 7:5) 유다국이 망할 때 제사장 스라야의 아들인데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자란 사람입니다. 바벨론의 이방 종교 풍토 속에서도 율법을 잘 배워 학사의 자격을 따고 믿음을 지키는 중에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왕 고레스 시대가 되자 유대인들이 해방을 받고 귀향령이 내려져서 예루살렘에 오게 된 사람입니다.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성전 건축의 재물을 받고 1800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 거리가 4개월 여행 노정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이 여행이 평탄하기 위하여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 기도를 하면서 평탄한 여행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왕이 “재물을 갖고 먼 길을 가는데 호위병이 필요하지 않느냐?” 했을 때 “하나님이 보호, 인도하실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했기 때문에 불안감이 있어도 기도에 의존해야지 “하나님이 보호하실 겁니다” 해 놓고 “호위병을 주십시오”할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호위병을 거절하고 기도만 믿고 갔는데 하나님이 무사히 보호, 인도를 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도는 “실제적으로 믿어야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어찌하나 하여 다른 방책을 쓴다면 기도의 효력은 멀리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안나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이 안나는 예수님 탄생 당시에 과부된지 84년된 할머니였습니다. 100세가 훨씬 넘었을 할머니인데 그가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100세 넘은 할머니가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였겠지요.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결례를 하기 위하여 성전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본 사람은 예수님 부모나 세례요한의 부모 정도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므온이란 제사장과 안나 할머니가 알아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영안이 열리고 진리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물며…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하신 뜻과 같은 것입니다.

7. 한 과부의 억울한 송사에 대한 기도입니다. 성도는 억울한 일이나 사리가 바로 판단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눅 18:2~8을 보시면 호소자는 약한 과부이고 재판자는 사람을 무시하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즉 약자가 억울함을 해소하기가 퍽 힘든 입장이지만 낙망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매일 재판장을 흔드니까 결국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을 끄는 재판을 후원한 사실이 있었는데 거의 다 승소했습니다. 꾸준한 기도에는 엉킨 실도 풀리고 마른 땅에 샘도 솟을 수 있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으면 끝까지 기도를 하시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요,

8.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 부탁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셨고,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셨으니까요. 십자가의 쓴 잔이 지나가기를(거절은 아님) 구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 달라”(마 26:39) 하셨고, 또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대상을 남김없이 다 구원하시는 것이라”(요 17:9) 하시고, 그들의 믿음이 보존되기를 구하신 일이 있었는데(요 17:11) 세상 끝날 전에 다 이루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1) 그 중에 한 가지가 베드로를 위하신 기도로 “그가 아주 타락하지 않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눅 22:29~32을 보시면 베드로에게 사탄이 범접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교만의 사탄, 자존심 사탄, 죽음과 핍박을 두려워하는 유혹의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아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셨는데 이 기도가 처음부터 응답되지 않고 베드로가 거짓말하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때까지 사탄에게 버려졌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효험이 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기도가 타락 안 되도록 응답되지 않았을까? 성경을 보시면 그 대답이 쉽게 나옵니다. 눅 22:32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 하시니까 33절에서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데도 가기로 준비했다”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34절에서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 하셨으니까 세 번 부인하도록 버려두시고 그 다음에 아주 타락하지 않도록 붙드신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기도하셨다” 하셨을 때 겸손하였더라면 그 뒤의 상황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믿음 보존 받기를 기도하고 기도해 주는 일이 필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기도 부탁으로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눅 21:36을 보시면 “말세에 임할 모든 일(환난)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하신 것은 “환난 예방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시 50:15에는 “환난을 당한 후에도 기도하라” 하셨지만 본문은 “그 예방으로 기도하라” 하셨으니까 유의하실 일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 24:20에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믿음의 결격 사유가 생기지 않고 타이밍이 안 맞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는데 눈길이 막히면 타이밍이 안 맞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라는 것이요,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말씀하신 것이 마 26:41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에서 기도할 제목을 찾으시기를 바라고 응답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4과 매일 드리는 기도문 (2006. 3. 8. 새벽) 목록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어제와 지난 밤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하루의 생활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저께는 성유의 이사 하는 문제가 있었고, 어제는 사라의 이혼 문제에 대한 재판 날이었는데 사위가 재판 연기를 청원하여 4월 11일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한 만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사람 사는 세계가 여러모로 각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위험이 많은데 하나님이 이모저모로 보호, 인도해 주셔서 별 연고 없이 지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제가 기도 드리는 근거는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저는 “골방 기도 하라”는 말씀, “두 세 사람이 합심 기도하라”는 말씀, 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말씀, 그리고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함께 “무엇을 줄고”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솔로몬왕은 성전도 지어 드렸고 일천 번제도 드렸지만 저는 살아온 생애가 초라합니다. 제가 살아온 생애를 뒤돌아볼 때 부끄러운 일들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노년기에라도 바른 위치, 바른 생활에 임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솔로몬은 지혜 한 가지를 구하고 여러 가지를 받았는데 저는 여러 가지를 구합니다.

1. 하나님 저에게는 세 가지 목적과 책임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네 자녀는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지만 둘째, 셋째 아들은 아직 준비도 약하고 배우자도 없으며 가정을 이루어주지 못했습니다. 우선 그들이 믿음 준비와 경제적 자립을 잘 하고 하나님이 믿음 있는 합당한 배우자를 정해 주셔서 속히 독립 가정과 자립 생활에 들어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손자와 외손자와 막내딸 임신 중에 있는 태아에게 은혜를 주사 특별히 강건케 육성시켜 주시옵소서.

2. 두 번째는 저의 달란트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인도해 주셔서 제가 지금 하는 목회는 이차적 사역이고, 일차 사역이 기독교 신앙 문서 만드는 것 아닙니까? 지금 열왕기상 15장 강론을 쓰고 있는데 탁월한 영적 지혜를 주셔야 하겠습니다. 금년 여름 다 가기 전에 열왕기하까지 마치면 과거에 쓴 원고는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 후에 쓰다가 중지한 인물 공부와 회고록 등을 마무리 하여 홈페이지, CD 제작, 출판물 만드는 일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은혜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협력하는 분들도 몇 분 있습니다. 잘 협력하게 하셔서 “과연 12년이나 더 할 수 있는 일반 목회를 중단하고 글을 쓴다하더니 좋은 결과를 나타냈다”는 칭찬과 보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문헌들이 앞으로 좋은 기회를 만나서 널리 반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다음에는 저의 목회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적당한 새교회에서 목회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목회 2선에 있는 고로 열심히 전도 못하는 것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새교회 성도들에게 은혜와 은사를 많이 주셔서 교회 발전에 충성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현재 서울에서 나오는 두 세대, 성남에 사는 네 세대, 거기에는 중환자 한 사람, 그리고 신체 불편한 분도 한 분 있습니다. 아울러 보살펴주시고, 또 저와 자녀들 6세대가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 가족들을 합하면 37명입니다. 그 중에는 믿음 없는 자도 있고, 믿음이 있는 듯 하나 형식에 얽매어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세속에 붙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꼭 믿음 주시고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오며 성도의 가정마다 식구마다 다 각각 은혜를 받아야 할 과제가 있지 않습니까? 믿음, 건강, 경제 문제, 깨달음 또는 자립 생활이나 혼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꼭 필요한 은혜를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교회의 자금 관리와 전세 예배당을 관리하는 일에 대하여서도 은혜를 주시고 성도들의 전세 주택이나 물질 거래 등에 대하여서도 진실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제가 2년 후에는 정년제에 의하여 공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때에 교회의 후임자 문제와 저의 거취 문제가 합리적으로 성취되게 해 주시옵소서. 교회는 교회대로 발전의 길로 나가게 해 주셔야 하고 저는 저대로 하나님이 건강과 생명을 더 주시는한 주름 잡힌 것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단기나마 목회해 보고 싶은 충동이 있으며 여기에 따라 개혁교회 헌법 초안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욕이 있사오니 이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4. 그리고 저의 소원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은 안정된 주택, 정리된 살림, 가문의 역사를 인계하는 일 또 앞에서 부탁드린 대로 맡은 사명을 다 이행하고, 여유 있게 “하나님이 이제는 부르셔도 나 할 일 다 했으니 갈수 있다”는 입장이 되게 해 주시고, 욥의 생애가 노년에 더 좋았던 것처럼 늙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끼치는 일이 없고 세상 떠날 때 힘들게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은혜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5. 하나님이 저의 가족들의 경제적 생활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공급해 주시고 살펴주신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아시는바와 같이 저희 노후 생활은 교회에 짐 지우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하신 만큼 자녀들이 잘 되어 부모를 부양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현재까지 저에게 주신 재물과 금전 관리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이 적절한 보살핌과 관리를 해 주셔서 적기에 쓸 수 있고, 목적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형통하게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박OO 사모님이나 그 교회 권진희 목사님의 목회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정OO 장로님의 하는 일 위에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6. 제가 맡은 일을 평안히 수행하려면 오늘 하루의 생활도 무사히 지내야 하고 또 가족들과 교인들은 물론 주위의 연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다 평안하고 발전하는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연고자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저도 평안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제가 맡은 일을 진행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저의 가족들과 교인들의 오늘 하루 생활을 지켜 인도해주시고 또 제가 생각하는 전국에 흩어진 연고자들에게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저는 전국적인 인물이 아니며 정치적, 사회적 인물도 아닙니다. 세계적 선교가 중요하지만 제가 그렇게 폭넓은 기도를 많이 드릴 입장이 됩니까? 정치적 문제나 나라의 경제 문제, 외교 문제, 그리고 전국 교회 문제, 세계 선교 문제, 신학 교육 문제들도 하나님께 부탁드리지만 자세히는 아뢰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연고자들을 평안하게 살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일은 바로 제 앞에 있는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제 아내의 건강 문제를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혈압 문제, 관절계통, 소화기관, 신경성, 시력, 청력에 이르기까지 건강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대구에 있는 큰 아들 가족, 안산에 있는 둘째 아들, 광주와 복정동과 미금에 사는 세 딸들과 모든 사돈의 가족들, 집에 있는 막내 아들까지 오늘 하루의 생활을 무사히 지내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OO 목사님의 성직의 진로를 비롯하여 네 가족의 생활과 윤 권사님의 가족들과 김 장로님의 가족 다섯 식구와 특히 요셉에게 지혜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또 김 집사님 부녀의 생활과 문 집사님 집 세 가족과 신 집사님댁 네 가족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함성환 집사님이 어려운 병 중에 있는데 이것을 믿음으로 이기기 위하여 싸우고 있사오니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요셉의 할머니에게 건강과 믿음을 주시고, 그 집에 어려운 문제가 없게 해 주시옵소서. 청년들이 정신을 차려 깨우치게 해 주시고, 가정을 이루지 못한 아들, 딸들을 권고해 주시며 믿음 떠난 자들이 없도록 각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7.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수도권과 전국에 흩어져 사는 연고자들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선 저와 아내의 혈육 형제, 자매들과 집안 식구들, 외가의 식구들, 이종 사촌들, 모든 친척들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전흥덕 성도를 위하여서도 부탁을 드립니다. 저희들의 기도와 관심이 헛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사랑하고 염려해주며 자주 친교하고 도와주는 이웃들과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사랑만 받고 갚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십시오. 저는 제가 기도하는 대상들이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오는 것을 많이 체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해주시는 줄 압니다. 성경 연구회에 모이는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이 저를 만나러 오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일 때마다 은혜를 주시고 그 목사님들의 가족과 목회 하는 일들 위에 큰 은혜를 더 하여 주시옵소서. 포항의 6촌 여동생, 경주의 외 6촌, 그리고 부산 동삼로 교회와 연고된 식구들, 여수의 조카딸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대구에 많은 연고자들이 있습니다. 저의 처가의 가족들과 아들의 처가의 가족들 그리고 전임지인 남일 교회의 많은 성도들, 희락원의 가족들, 태평교회의 장로님들, 그리고 많은 동역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천국 간 손순금 권사의 자녀들, 구미, 김천의 연고자들, 광주의 동창 목사님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김제의 조병남 목사님과 오산 제일교회 박순대 목사님의 가족들과 목회 하는 일 위에 은혜를 베푸시며 당진의 김호룡 목사님, 수원의 오우용 목사님과 그 가족들, 그리고 오순세 장로님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고정옥 권사님과 그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되 특별히 홍신애 딸에게 잉태하고 생산하는 복을 주시옵소서. 수도권에도 많은 연고자들이 계십니다. 전임지 한남교회와 관련된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황동노회 산하 여러 동역자들과 교회들, 강남 시찰회의 모든 교회와 동역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제가 소속되어 있는 성남 노회의 교회들과 모든 동역자들 특히 중원시찰에 가까이 있는 모든 식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8.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서 크게 위험한 것이 자동차 운전과 교통의 위험인 줄 압니다. 저의 가족들과 교인들, 그리고 모든 연고자들이 안 전 운행을 할 수 있도록 보호, 인도해 주시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결코 시험에 드는 일이 없게 하시며 하루의 생활을 보람 있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도록 보호, 인도해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 하루 종일토록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제도 퇴촌에 볼 일을 보면서 7분 설교 두 편을 정리하였습니다. 오늘은 열왕기상 15장을 기록하게 됩니다. 건강과 지혜로 집중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오전 11시에 성경 연구차 목사님 몇 분이 오시게 됩니다. 그때에 은혜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저와 가까이 교제하는 사명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녁 기도회 시간에도 은혜를 주시옵소서. 일일이 구하지 못한 말씀이 많은 줄 압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저의 부족한 기도를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을 의탁할 때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75과 한 가지만을 구함 (시 27:4) 목록으로


“오직 한 가지만 구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1. 이 세상에도 한 가지로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생활의 원리가 많습니다. 한 가지를 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를 아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아주 포기해도 괜찮지만) 한 가지를 구하여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만 있으면 여러 가지를 해결할 수 있고, 또 돈이 없어도 건강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도 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권세가 있는 사람은 권세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도 “두 마리 토끼 잡으려 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팔방미인이 되려면 힘들겠지요. 신앙 생활도 한 가지로 해결하는 문제를 연구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제가 한 가지로서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문제를 신앙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게 된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기도 제목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40분쯤을 기도해도 하나님께 부탁해야 좋을 것을 자초지종 다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가족들과 교인들의 문제는 어느 정도 상세하게 구할 수 있는데 친척이나 연고자나 전국 교회 문제나 사회 국가 문제는 구할 시간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다 회전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칠 때마다 “누구 누구 위한 기도도 못했고 무엇 무엇을 위한 기도도 못했구나”하고 마치면서 “주여 모든 것을 주님께 부탁 합니다”하고 그치는 실정인데 꼭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그렇게 많이 염려하면서 긴 기도로만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성경에는 “모든 염려(과제)를 주께 맡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 5:7, 시 37:5). 그렇다면 “하나님 알아서 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부탁드립니다”하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기도는 하나님께 문안만 드리면 되는 식으로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일곱 시간을 앉아서 기도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하신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막 1:35, 눅 6:12, 18:7). 성도가 항상 기도하고 밤낮 부르짖으려면 기도의 보따리를 다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구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100가지, 1000가지를 다 구해야 잘 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마음에 갈등을 가져보았다는 것입니다.

3. 성경에 한 가지로 여러 가지를 다 받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잘 아신다면 길게 기도로 구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1억의 현금을 전달하려면 100장 뭉치 100개를 헤아려야 하는데 수표 한 장이면 끝납니다. 이것이 곧 한 가지 구하여 100가지 성취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시면 “내가 한 가지를 구하리니 곧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해주십시오”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다윗의 기도인데 다윗이 왕 되기 전에는 생명 보호가 시급했고, 왕된 후에는 세상 것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구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사모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것이 자기 생명보다 귀한 일이고, 왕이 되어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귀한 일이란 뜻입니다. 한 가지를 구하는 신앙은 긴 기도를 피하는 편의주의가 아니고, 가장 귀한 일 한 가지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신앙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긴 기도를 하게 되고, 또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하여 긴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중에서 긴 기도를 피하려면 생명과 현실을 포기하면 되겠지요. 그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바꿀 수 있을 때 한 가지만 구해도 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본문도 그 뜻입니다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마 6:33)하신 것과 시 1:1~3에서 “복 있는 사람(죄를 피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면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는 말씀과 또 한 말씀은 요삼 2절에서 “영혼이 잘 되면 범사도 잘 되고 건강할 수 있다”는 말씀이요, 또 이 말씀을 종합한 말씀이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막 9:23). 이 말씀들은 다 한 가지 신앙에 집중하여 100가지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을 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서 종합을 하면 하나님 즐거워하는 일을 생명이나 왕권보다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시 27:4, 다윗의 환경), 그 나라와 그 의를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며 또 죄를 멀리하고 말씀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영혼이 잘 되는 믿음 제일주의로 나가는 신앙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여 모든 것을 다 받은 것도 참고하시고(왕 2:16), 또 어떤 청년이 한 가지 부족(재산 포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례도 있는 것을 감안하여(막 10:21) 꼭 한 가지 일에 몰두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극히 사모하셔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절차

1) 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고, 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은즉(마 6:24) 세속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약 1:27).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는 정신에서 떠나(딤전 6:5)

2)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3)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자신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그에게 있어야 할 다른 것도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노력을 안 하는데 어떻게 주실까?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를 위하여 인간계나 자연계나 천사들을 동원하셔서라도 필요한 은혜를 베푸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한 가지 내용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뿐일 것입니다.

10. 사명자에 대한 말씀

제76과 성공적인 삶 (욥 8:5~7) 목록으로


본문 7절에서 “시작은 미약하나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시므로 나중이 심히 창대해졌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부터 목적 성취를 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인생 마지막까지 성실을 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지 미흡한지를 평가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공을 거절할 사람은 없을 것이나 혹 자신이 어떤 목표를 성취함에 있어서 환경이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성공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 과오를 범하기 쉬운데 이때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오시면 반드시 성공적 삶을 깨우쳐 주시고,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시며(롬 4:17) 또 사막에 물과 길을 내시는 분이심을 믿고(사 43:19)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도가 교역자를 찾아와서 “나는 성공적 삶을 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니 가르쳐주십시오” 했을 때 성도들은 여기에 답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벧전 3:15에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 성공적인 삶의 뜻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되는 것을 성공적인 삶으로 목표를 세웠다 하여 자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인 줄 아시면 안 됩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였거나 사람이 알아주는 일을 성취하였다 하여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인생을 내신 목적에 따라 충실하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인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목적, 또 어떤 이에게는 저런 목적이 있으신 것이니까 그 목적을 자신이 받은 은사와 환경에 따라 파악하신 다음에 그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시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환경이 열리는 일을 살피면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청년 때에 교회에는 열심히 나갔지만 목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전혀 없었는데 취직할 길은 없고 신학의 길은 열렸기 때문에 그 길로 갔고 “목사가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신 뜻이라” 믿고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큰 교회의 목회는 할 수 없게 되고, 신앙적 문서는 쓰고 싶자 조용한 환경을 주셨기 때문에 “문서 말씀 전달이 나의 성공적 삶이라” 믿고 몰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개별적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가 자신의 능력과 환경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 해야 할 사명(자기 십자가, 신앙적, 도덕적, 사회적)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성공적인 삶에 대하여 모범을 말씀드린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신앙인의 일반적 모범이면서 약속의 자녀 계승을 완수한 분들이고, 요셉은 흉년에 선민족을 먹여 살린 사람이며,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구속 사업을 이루신 분이며, 바울은 이방전도의 목적을 성취한 만큼 이 분들은 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중에 단 두 분, 예수님과 바울 사도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요 19:30, 딤후 4:7~8). 하나님이 각 사람마다 쓰시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일찍 세상 떠나도록 버려두셨고, 베드로와 바울은 역경에서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고유적 사명을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3. 어떻게 하여야 성공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 하는 일과 목적과 방법이 의로워야 합니다. 6절에서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신다” 하셨으니까요. 정당한 일(죄 안 되는 일)을 하십시오. 또 목적을 개인적 욕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에 두십시오.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버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을 시행할 때도 떳떳하게만 하십시오. 의롭지 않은 일은 하나님이 동하시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5절에 보시면 “전능하신 이에게 부지런히 구하고 빌라” 하셨습니다. 일도 의롭고 목적도 의로우며 방법도 의로우니 얼마나 기도하기 좋습니까? 가책 없는 기도라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기도도 부지런하셔야 합니다. 이때에 주의하셔야 할 것은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니까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을 의지하는 것을 병행시키면 기도의 효력 보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A라는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하러 가서 B와 C에게도 부탁한 말을 했다면 “그 쪽의 결과를 먼저 기다려 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 쪽은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시 146:3). 미 7:5~6을 보시면 “이웃이나 친구나 품에 누운 여인이나 가족도 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대상은 의지하지 않아도 도와줍니다. 따라서 도울 자 못 되는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섭리를 기다리십시오.

3) 자기의 일에 성실히 몰두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가 그러 하였고, 요셉의 생애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자기 일에 성실하면 첫째 시험에 들 겨를이 없고, 다음에 정신, 육체가 건강해지며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내다보게 되는 것입니다(대하 16:9). 야곱은 속히 부자 된 사람이 아닙니다. 20년 동안 타향살이 하면서 눈 붙일 겨를 없이 수고한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고한 대가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시 128:2).

4) 마지막으로 형통하고 성공하는 방법은 “이웃에게 주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고(마 7:12), 남에게 베풀 줄 아는 것이 곧 자신이 받는 방법임을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6:38, 고후 9:6). 성공적인 삶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77과 목회자의 조건 (딤전 6:3~12) 목록으로


제목을 “목회자의 조건”(목회자의 갖출 일)으로 정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니의 사람”(11절)이라 하였고, 일반적 이해로는 성직자입니다. 본문에서는 복음사역 일선에선 “디모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람(전도자, 목회자)이라고 하셨는데 이 직분은 예수님과 복음과 교회의 명예를 걸고 오직 그 일에만 몰두하는 사역자를 의미합니다(본문에 디모데가 목사라는 지명이 없음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저의 40년 목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많이 반성합니다.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장로교회 헌법은 목회자와 교회 간에 계약을 체결하고 목회를 하게 하는 것인데 쌍방의 책임이 부실해지면 계약 실천의 위험이 오고, 그것을 수습하는데 부작용이 많습니다. 저는 큰 부작용 없이 40년을 잘 지냈지만 그렇다고 하여 교회나 성도에게 유익만 주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계약 관의계 목회가 없어지고 교인이 스스로 따르고 스스로 떨어지도록 되어져야 순수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나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내가 새로운 성직을 시도한다면 어떤 입장에서 해야 될 것인가”를 구상하다가 이 설교를 기록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목회자의 부정적 사유와 긍정적 사유를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교훈입니다.

1. 우선 부정적 사유를 살펴보시지요.

1) 다른 교훈(이단성 교훈)을 하면 안됩니다(말씀을 분변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 딤후 2:15).

2) 기본 양심으로써 교만, 변론, 언쟁, 투기, 분쟁, 훼방, 악심 같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4절).

3) 마음의 부패와 진리 상실에 이르지 말아야 하는데(5절) 이것은 상황이 악해질 때 변질되기 쉬운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4) 경건(영적 신앙 생활과 관계된 일)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 신문에 성구, 강대상 과고가 나오는데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마 21:3)고 기록을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에 이용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나귀 새끼 쓰신다”한 것을 자기가 만든 강대상을 쓰셔야 하는 것처럼 선전을 한 것입니다. 또 “기도해 주고 감사 헌금 하라는 것, 성직 생활로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 등이 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인데 그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평신도의 기복주의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세계에서 “다툼이 일어 난다”고 하셨습니다(5절).

5) 부자 되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9절). 만일 성직자가 부자 되려고 한다면 시험, 올무,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고,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6)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란 만악의 뿌리여서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고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인데 왜 돈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이상 여섯 가지를 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시작하려면 반드시 이런 것들을 피하는 조건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2. 긍정적 사유가 꼭 있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있을 것은 있어야 하니까요.

1) 바른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말 즉 말씀과 경건 교육에 착념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을 하려면 신학적 지식, 성경적 지식, 도덕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확보하려니까 경건에 착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박사는 못 되어도 성경 선생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연구하면서 목회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우면 둘 다 구덩이에 빠져도 건질 자가 없는 것입니다.

2)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것입니다(7절). 요즈음으로 말하면 돈과 사치에 관심 없이 사는 것입니다. 여기의 부양 가족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을 때는 따로 살아야 하고, 부양 의무가 성직자에게 있을 때는 그 십자가 지는 해결책(생활비)이 별도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의 계약 조건에 포함되면 목사가 교인의 고용인 되기에 족한 것입니다. 지도자 위치에서 “말씀 뜻이 이렇다”해야 할 사람이 돈이 필요하여 교인의 종이 된다면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는 의식주 이상 필요 요소가 없어야 좋다는 것입니다.

3) 생활의 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11절의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서 흠 잡힐 만한 일이 없도록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요,

4)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성직을 싸움으로 설명하신 것은 그만큼 악의 세력과 불법이 많아서 그것과 싸워야 하는데 그 싸우는 방법은 “선한 증거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한 증거는 성경적 설교입니다. 12절에서 성직자는 “이것을 위하여 부름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뜻은 “천국 상급을 목표하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성경 가르칠 능력을 갖고 도덕성에 문제가 없으며 예수님을 닮는데 주력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성경 말씀만 의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하지 않아야 할 것이 떠오르는데 그것이 다 허탄한 것들입니다(시 24:4). 인간에게 진리는 전하되 그 인간의 신분은(고위층이든 부자이든) 의식할 필요가 없고, 사치 생활은 죄악된 것인즉(롬 12:16, 고후 8:9) 역시 그러하며 교인이 더 오고 덜 오는 것이나 헌금이 많고 적은 것도 관심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교회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섬기는 교회에 안 나오면 그 사람의 양심대로 다른 교회에 갈 것이고, 헌금은 아무리 많이 나와도 나는 검소하게 살 것이니까 크게 필요하지도 않을 것인즉 관심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할 일은 진리를 바로 가르쳐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것”만(롬 8:29, 갈 4:19) 중요한즉 반드시 그 일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78과 목사의 사명 (딤전 6:11~12) 목록으로


목사의 사명을 어떻게 증거할 지를 연구해 봅니다. 성경으로 보여주신 참 목사는 “선한 목자”라 하신 예수님이시고(요 10:11), 그 다음에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와(마 16:18~19) 바울사도를 들 수 있으며(딤전 1:12, 고전 11:1) 최후에 나타난 모범자는 바울의 자도를 받은 “디모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시면서 그가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우선 본문대로 목사의 사명을 살핀다면

1) 그 앞에 있는 말씀을 따라 피할 것이 있는데 다른 교훈을 피할 것(3절), 다툼을 피할 것(4절),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을 피할 것(5절), 부자 되는 일을 피할 것(6, 9절)과 돈 사랑하는 일을 피하라(10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이상(최소한의 생활비) 자신을 위한 돈의 필요성이 없도록 자신의 입장(환경)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따르고 싸우며 취할 것이 있는데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는 따르고, 선한 싸움은 싸우며 영생은 취해야 하는데 네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요약하면 “모범적 신분을 지키는 일과 죄를 상대로 싸우는 일과 선한 증거로 나타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과 관련하여

2. 목사의 사명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1) 예수님을 몸으로 나타내는 사명입니다. 여기의 몸이란 뜻은 빌 1:20에 근거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하신 말씀에 따라 입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생활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롬 8:19). 예수님의 모습과 생활을 근사하게라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서 다큐멘터리 배우처럼 보여줄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사 53:2에서 “예수님은 고운 모양과 풍채가 없고…아름다운 것이 없다” 하셨은즉 이는 사치가 없이 나약한 모습이요, 곤욕을 당할 때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사 53:7), 강포와 궤사가 없었다(사 53:9) 하셨으며 온유, 겸손(마 11:29), 다투지 않고 들레시지 않는 모습(마 12:19), 자신이 거룩하다 하신 모습(요 17:17),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습(빌 2:8), 나귀 타시고 들어오시는 모습(마 21:5), 어린 아이를 높이신 모습(마 18:3),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보라 하신 모습(마 25:45), 마귀와 세상을 이기신 모습(마 4:11, 요 16:33) 등을 보시면서 그런 예수님을 자신의 몸(생활)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자란 별명을 들을만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사명입니다. 딤전 4:13을 보시면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사의 두 번째 사명이 진리 증언의 사명입니다. 성경을 두루 섭렵하여야 하고, 성경을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하며 교리에도 민감하고 특히 해석이 건전하여야 하며 잘 가르치는 소질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읽기나 묵상을 게을리하면 영적 감각이 둔해지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면 설교 내용이 샘물처럼 분출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배하라”(벧전 3:15)고 하셨습니다. 목사에게 설교가 축적되지 않으면 즉 말씀 준비에 쫓기는 생활은 몹시 피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노력하고 준비하여 증거하시되 “다 증거하는 것과(행 5:20)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수 8:32, 삼상 10:25, 계 21:5). 우리는 지금 3500년 전과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구약과 신약)을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또 일점 일획까지 중요한 말씀을 다 증언하지 않는다면 증언자의 사명을 다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실한 증언과 가르침의 사명이 중요하고 그렇게 하려니까 말씀과의 밀접한 관계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셨는데(엡 6:18) 예리한 칼로 능숙한 검술을 나타내는 사명을 땅 끝까지 나타내시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교회를 섬기는 사명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명은 예수님과 성령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 하셨을 때 이미 세워졌고(마 16:18), 또 오순절 때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실 때 활성화 된 것입니다(행 2:1~4, 2:43~47). 그리고 바울사도 시대에 “이미 터를 닦았은즉 집만 지으라”(고전 3:10)고 하신 뜻은 교회의 설립과 생산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목사는 성도의 믿음을 가꾸어 순결하게 되도록 교육하는 것이 곧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세계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따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확장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구상의 하나의 교회를 교파별 또는 지교회별로 나누어서 모든 목사들에게 성도 양육의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마치 목자가 양에게 좋은 꼴을 먹여 좋은 양을 생산하는 것처럼 성도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 닮도록 양육하여 교회 단체를 천국 모습에 가깝도록 섬겨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5. 교회가 천국을 닮으려면 먼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성도의 거룩(예수님 닮게 하는 것)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신다”(갈 4:19) 하셨으니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믿음을 보기 어려운 말세에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눅 18:8) 목사에게 가장 바쁜 것은 설교 준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꼭 목사만 인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로 하여금 스스로 예배를 드리도록 연습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예배 때에 가르칠 말씀을 충분하게 공급하여야 합니다. 예배의 의미는 의식이 아닌 생활이기 때문에 성도 자신이 스스로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명으로서 크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명,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 그리고 교회가 천국 모습이 되도록 섬기는 사명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제79과 부끄럽지 않은 생활 (빌 1:20~21) 목록으로


(제가 장립 받는 목사에게 권면하는 순서를 맡고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바울사도처럼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셔야 하겠고, 바울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제도(이제의 환경은 전과 다름) 온전히 담대하게 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매일반으로 또는 죽음을 삶보다 더 유익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넷째는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삶의 목적으로서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고, “살든지 죽든지”한 말씀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하신 말씀은 목적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생사를 초월한다는 뜻과 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행하다가 “죽음을 당해도 유익하다는 확신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한 것”인데 이 뜻은 성도나 복음사역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다가 환경이 어렵게 되더라도 믿음의 담력을 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형통하고 복음사역자가 잘 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교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의기양양하고 담대할 수 있는데 바울사도처럼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셔서 사형 집행을 받을 입장에 처하였다 해도 “온전히 담대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나 복음사역자도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라도 기쁨과 담대함과 소망을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적 특권에서 멀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확실하면 이는 보화의 땅을 사 놓은 자 같아서 조금도 위축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강조 드리려고 하는 것은 바울 사도처럼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 부끄러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헌금을 적게 해도 부끄럽고 명절에 어른을 찾아뵙지 않아도 부끄럽습니다. 제가 목사 되기 전에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일과 목사된 후에 부탁조로 드린 선물이 되돌아왔을 때의 느낀 부끄러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후회 막급하더군요. 목사 생활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 일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목사 생활을 하기 싫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새로 목사 되시는 분들은 그런 부끄러움을 만들지 마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성직자가 당하기 쉬운 부끄러움.

1) 직무와 관련하여 실력이 부족하면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2) 준비 부실한 설교를 하고 나면 강단에서 내려올 때부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3) 자신은 실천이 부족하면서 성도들에게 강권할 때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요,

4) 어떤 때는 설교의 표현이 본질과 또는 목적과 다르다고 장로로부터 지적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 초반에 그런 경험을 당해본 일이 있습니다(어감 표현의 실수).

5) 공예배시에 장로님으로 하여금 대표 기도 하시게 하고 조는 경우도 있습니다(저는 그런 경험 있으나 위기는 면했음).

6) 교회 정치를 합법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했을 때 지적을 당하면 부끄러움보다 목회 생명에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고,

7) 자기를 신뢰해주지 않는 성도들을 대항하여 맞서는 부끄러움이 있고,

8) 물질과 대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부끄러움도 있으며

9) 또 큰 부끄러움은 열매가 속히 나타나지 않을 때 자신의 연약을 느끼면서 감수해야 하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후배 목사님들이 이런 부끄러움을 많이 해소하도록 노력하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2. 기술이 있어도 연장 없이는 일할 수 없는 것처럼 목사란 성직이 있어도 은사적 노하우가 없으면 안됩니다.

1) 그 노하우 첫째가 말씀의 은사인데 성경 실력, 성경에 붙잡히는 생활, 성경을 읽으면 순식간에 설교가 떠오르는 은사 같은 것입니다. 또 기록하는 은사도 좋습니다. 오래 남으니까요.

2) 기도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평신도들도 하는 것인데 성직자가 무슨 기도 노하우가 필요하냐 하시겠지만 제 경험으로 볼 때 저는 기도에 대하여 늦게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하는 필요성을 느끼는 문제, 기도를 소상하게 드릴 수 있는 환경 조성, 기도를 한 후에 든든함을 느낌은 물론 하루의 모든 일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 그리고 응답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 등입니다.

3) 고전 14:1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고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라”는 말슴도 있으니까 일반 생활이나 목회 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시행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목적과 방법만 취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요,

4) 목회 하는 목적을 허탄한데 두지 마시고(시 24:4), 오직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데만(롬 8:29) 두어야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3.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자녀가 생기고 손자가 생기면서 “너는 늙고 많이 살았으니 부름 받을 준비해라” 하실 때 하나님께 갖고 가실 보따리가 있어야 되는데 그 보따리에 자신이 한 일들을 담고 꾸려야 하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담을 만한 것이 없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목회에 성공 못한 분들이 그런 경우가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 보따리에 꼭 큰 것을 담아야만 기뻐하실 분은 아닙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시 119:56)이라든지 (해놓은 일은 없으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본문)는 것이라든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과 은사를 열심히 활용하였다면” 그것도 보따리에 꾸릴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불순종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은사에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였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크게 칭찬하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80과 목사된 분들에게 부탁함 (히 13:7~9) 목록으로


몇 일 전에 노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님들에게 권면 순서를 맡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보충문을 기록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선배들을 주의해보고…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점을 본받으라”는 뜻이지요. 또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즉” 최고의 표준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배의 모범도 주님 표준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표준에 안 맞는 것이 다른 교훈인데, 본문에서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하셨으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고,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할 것이요 식물로 할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식물은 정결한 식물을 먹어도(레 11:2, 골 2:16)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롬 14:17). 따라서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한다”함은 말씀과 성령님의 은혜로 바른 마음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사직과 관련하여 후배 목사님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1. 일찍부터 겸손하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성도의 기본 자세이고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겸손해야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6). 단체장 후보로 두 사람이 뽑혔다면 그 두 분은 유명한 분이고, 은혜가 있는 분이겠지요. 그런데 그 두 분은 비슷한 친구가 아니고 연령이나 연조로 볼 때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후배된 목사에게 겸손과 양보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겸손을 바라십니다. 그러나 명예욕에 끌리면 겸손, 양보 그런 것이 다 없어집니다. 제비 뽑는 대결로 나섰지만 하나님은 선배를 뽑아주셨습니다. 만일 후배가 겸손과 양보의 미덕을 보였다면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나 성직자의 겸손의 현 주소가 어디인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30대, 40대 목사 때에 똑똑해 보이려고 하다가 벼룩 만큼만 뛰고 더 못 뛴 사람입니다. 일찍 개달았더라면 하늘에서 독수리가 내려와서 집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시지 않았겠는가? 하고 반성을 해봅니다. 목사 될 때는 다 겸손한데 커지면 그렇지 않을까 하여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2. 사명 인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이 사명 인식이란 십자가 구속의 공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대가가 없어도 해야 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 하며 더 나가서는 고난과 핍박과 어떤 손해가 와도 복음사역 이상 더 귀한 일은 없는 줄로 알고 헌신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가성이나 명예성 때문에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확신하시고(사례나 대가를 받을 만한 입장에서는 받아도 가하지만) 안 받아도 충성하셔야만 하는 것이 성직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자신이 받은 은사와 달란트 파악을 하셔서 그 은사 소질대로 사역을 하십시오. 내 것을 갖고 하는 것은 자유롭고 재미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은사를 모방하려면 어색하고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 소질을 잘 활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 강사의 소질을 본따려 한다든지 큰 교회 목사님의 틀에 자신을 끼우는 것은 어색한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이 고유적으로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노력하실 것을 부탁드리고,

4.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이 “나는 내 생애에 1000번 부흥회를 했습니다”했다면 그것은 그 분의 가치관입니다. 어떤 목사님 말씀에 “목사의 명예로운 때가 세 번 있으니 첫째는 목사 될 때요, 두 번째는 위임할 때며 세 번째는 원로 목사로 은퇴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목회의 성공을 뜻하면서 그 분의 가치관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더 많은 분들이 그 대열에 서지 못할지라도 목사로서의 자기 가치관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가 받은 은사를 파악하여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은사에 충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두 가지만 했습니다. 하나는 불법자들에 대한 책망이었고, 또 하나는 켜서 비취는 등불처럼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왕을 책망한 값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한 일은 단순하였지만 그 일이 그의 가치관이었고, 그는 그것 때문에 가장 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마 11:11). 큰 그릇만 그릇이 아닙니다. 반드시 자기가 받은 은사에 알맞은 가치관을 가지십시오.

5. 성직의 목표를 본질에 두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왜 목사로 세우셨을까? 숫자 늘리고 예배당 지은 후 사회 사업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예수님 닮은 모습을 보이고,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본질과 목적을 반드시 표적으로 삼아 나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6. 바쁘게 사셔야 합니다. 운전 중에 전화 받는 사람이 많지요. 그렇게 바빠도 먹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목사의 영적 관리도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 일로 바쁘지 않습니다. 그래도 화장실에 가서 긴 시간을 못 보냅니다. 세수도 간단히 하고 칫솔질 하면서 다른 볼일을 같이 볼 때가 많습니다. 조용한 기도의 기회 갖기도 어렵고 강론문을 비롯하여 마음에 떠오르는 내용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 때문에 운동할 시간이 없습니다. 창세기 읽으면 계시록이 멀어지고 설교문이 남아돌아가야 하니까 눈코 뜰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시간 관념이 투철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바쁜 분으로 대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규칙적 휴식이 필요하지만 어영부영하는 시간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7. 마지막 권면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제가 30년 동안 평탄한 목회를 하고 교회에 의존해서 살았는데 교회 없이 나온즉 홀로 있게 된 것입니다. 전임지 교회 성도가 많아도 후임 교역자 온 후에 전화할 입장이 못 되고, 그렇다 하여 친구 목사님들이 나의 후견자 되어 줄 수도 없지요. 이런 경우라도 목사는 주님과 함께 든든히 자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사는 역경도 믿음 안에서 극복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이하 생략함).

제81과 목사 권면 (빌 1:20~21) 목록으로

(2005. 10. 11. 성남노회)

목사 되기까지 많은 공부, 많은 노력, 많은 시험을 거쳤는데 이제는 목사가 되었으니까 큰 목적을 성취했다는 느낌과 만족을 가지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에 시험칠 일만 없어도 후련한 감을 느낄 것입니다. 크게 치하, 축하를 드립니다. 그런데 저의 선배 권봉태 목사님은 이 자리에 서시면 우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려고 목사가 되었느냐?”고 하십니다. 물론 격려의 말씀도 하시지요. 제가 알기로는 “내가 너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신 것이 아닌가? 짐작을 합니다. 목사는 분명히 명예로운 직임이고, 대접도 받을만 하지만 어려운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무엇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하시겠지요.

1) 은혜 없는 목사 노릇 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 속담에 욕과 저주를 할 때는 “은혜 없는 목사 3년만 해라”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보통 말하기를 10년쯤 목회를 해야 “목회가 어렵구나, 설교는 할수록 어렵구나”를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3) 오죽하면 바울사도는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셨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닮게 하려면 해산하는 수고만큼 노력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제가 어려운 것 몇 가지를 발췌해 본즉

1) 우선 자기 부정이 어렵고,

2) 자기 십자가(도덕적 책임)지는 일이 힘들며

3)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4)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5) 환경 변화에도 여전히 담대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과거는 유두고를 살리는 기적이 나타났고, 선교의 재미를 보실 때였으나 바울의 이제는 감옥에서 참수형의 때를 기다리는 초조한 시기였으니 환경의 변화가 극과 극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담대하셨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나타내게 하는 것이고…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으니까요. 성직자는 좋을 때나 고통이 있을 때나 여전히 주님 안에서 담대해야 하는데 그런 처신도 쉬운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6) 그리고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대인 관계상 껄끄러운 대상)도 사랑해야 합니다. 껄끄러운 대상을 사랑해 봤자 원수 사랑의 1/10밖에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실천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3. 직무상의 어려운 점은

1) 설교가 어렵고,

2) 공의 실천(공의를 일심아야 하는데, 시 15:2) 하기가 쉽지 않으며

3) 성경을 걸러 먹기 식으로 실천하기는 쉬우나 정밀하게(현실적으로 손해 되는 부분까지) 지키는 일이 어려우며

4) 가족 부양에 관한 일은 자기 십자가에 해당하는데(비축된 재산이 없으면) 역시 어려운 것이요,

5)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는 것이 다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발 벗고 전문적으로 나서야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4.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소망을 말씀드리면

1)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행하시는 것이고,

2) 환경 변화에 관계없이 담대함을 변하지 않는 것이며

3) 목적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나타내는 일이고,

4) 살든지 죽든지 노력하되 죽어도 유익하다고 믿고 뛰는 것입니다. 좋은 모범이지요. 여러분의 목사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학교 입학 할 때는 목사 되기 위하여, 목사될 때는 목회하기 위하여, 목회할 때는 어떤 목적으로 하여야 합니까? 목회의 포부와 목표가 많겠지요. 그러나 목회의 진정한 목표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는데 있다”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바울사도는 부끄러움 없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1) 목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부끄럽게 됩니다.

2) 준비 없는 설교는 강단 내려갈 때부터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3) 성경 질문에 대답을 못하게 되어도 그렇고,

4) 실천 없는 강요는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5) 도덕성이나 교리에 위배되는 설교,

6) 용어나 표현이 저속하고 작태를 수단으로 쓰는 행위가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7) 특히 헌법적 실수는 목회의 바탕을 흔드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성공하는 목사님 되시기 위하여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린다면

1) 말씀의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시면 설교 내용이 즉시 떠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에 끌려 있어야 합니다(행 18:5, 신 30:14). 말씀은 최후 극단의 약이요, 처방입니다. 말씀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 제일 주의로 목회를 하십시오.

2) 기도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노력은 기도에 비할 때 10%정도의 효력을 믿으시고, 나머지 90%를 기도에 의존하십시오.

3) 사랑 실천에 승리자가 되시고 사랑이 아닌 것은 시행하지 마십시오.

4) 시간은 항상 넉넉하지 않은즉 근면하셔야 하고,

5) 지금도 서약을 하셨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이나 사람 앞에서의 약속은 해로울지라도 지키십시오.

6) 받은 은사의 노하우를 잘 살려 맡은 대로 성실히 일 하시되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자유를 누리셔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자유를 못 누리거나 상급과 무관한 일에 고난을 당한다면 크게 허무할 것입니다. 반드시 승리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제82과 젊은 목사님들에게 (딤전 4:11~16) 목록으로


나는 젊었을 때에 성실한 목회를 해보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늦게 깨달은 바가 많았고, 잘 해 보려고 하니 정년이 거의 다 되었을 뿐 아니라 늙어가는 몸이므로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젊은 목사님들이 일찍 깨닫고 잘 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큰 그릇으로 쓰시리라고 믿으면서 몇 말씀 드립니다.

1. 우선 겸손하게 시작하십시오. 바울이 유력한 사도이지만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또 자신이 한 것은 자기가 아니요 주님이 하신 것이라”(고전 15:8~10) 하셨고, “예수님이 자신을 들레지 않으신 것”(마 12:19)을 기억하세요. 성직자가 겸손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의 겸손 모범을 보여야 하고(마 11:29), 또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이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기 때문(벧전 5:6)입니다. 젊어서 목사되면 약간의 자존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자존심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시고, 반드시 목사되기 전보다 더 겸손하여 인격적 변화가 있음을 나타내십시오.

2. 온유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온유하신 분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배척을 받으셨을 때에도 온유를 지키셨고(눅 9:53~56), 바리새인들과 다투지 않으셨으며(마 12:19) 가룟유다에게도 혈기를 부리시지 않았고(마 26:23~25, 50, 눅 22:21), 빌라도에게도 “선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딤전 6:13). 목사는 열 번 참다가도 한 번 혈기를 부리면 인격상의 많은 손해를 보게 되고, 또 혈기 부린 대상과 화해하려면 반드시 사과해야 합니다. 모세의 온유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으나(민 12:3) 그가 한 번 실수로 온유를 상실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을 때(민 27:14, 18) 직임의 끝을 맺고 여호수아에게 인계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경우에서라도 혈기를 삼가고 온유를 시켜야 합니다.

3.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고(요 14:6), 빛이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란 뜻(약 1:17, 요 1:4)은 다 진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진실은 사실대로 표현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외식과 허영이 앞서면 사실이 왜곡될 수 있고, 약속을 위반해도 진실에 위반됩니다. 요즈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목사님들이 많다고 합니다. 진실은 목사와 목회의 생명입니다.

4. 이기주의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곧 욕심입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 하셨고,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성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성도나 성직자가 이기주의에 얽매일 수 있겠습니까? 마치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선택권을 먼저 갖게 한 것처럼(창 13:9) 양보심을 발휘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라는 기관은 성직자의 욕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고, 목사는 일하는 종일 뿐이니까요. 교회에 대한 욕심도 피해야 하거든 하물며 세속에 대한 욕심이겠습니까?

5. 그래서 또 멀리 해야 할 것이 세속욕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갈 5:24),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세속에 물들지 말라(약 1:27),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 6:8), 세상을 나그네처럼 알라(벧전 2:11)” 하셨으면 세상의 의욕과 취미를 적당한 선에서 끊고 사치나 향락이나 세속 모방을 멀리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생활은 신령한 면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니까 세속을 멀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이것들을 피하고” 하셨는데 지금 피할 것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교만, 혈기, 외식, 거짓, 이기주의, 세속”입니다.

6. 그 다음에 취할 것은 성실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일을 맡기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좋은 어장, 좋은 장비를 주셨으면 그에게는 많이 가져오라 하실 것이고, 어려운 일감에 적은 장비를 주셨으면 그것에 알맞은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직임과 달란트에 성실하였으면 그것으로 자기의 사명을 다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눅 12:48을 보시면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열매나 다른 사람이 거두는 열매에 착안하지 마시고 나 맡은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의 성실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실을 다하는 사람은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실히 노력하면 반드시 발전이 있다는 뜻입니다.

7. 제가 젊은 목사님들에게 특별히 깨우쳐 드리고 싶은 것은

1) “남이 하는 대로 하면 잘 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마시고 모방에 앞서 자신의 노하우(고유적 은사)를 개발하여 거기에 알맞게 일하실 것을 권해 드리고 싶고,

2) 하나님의 사역을 함에 있어서 무엇이 장애를 주는 것인지를 살펴 속히 정도에 서는 발판을 구축하라고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부자유한 요소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부자유한 요소를 자기의 십자가로 믿고 고역스러운 목회 일생을 보낸 분들이 많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미리 해결하고 장애물 없는 대로에 서서 목회를 한다면 큰 자유를 맛보고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목사의 자유를 막고 목회에 장애를 주는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① 자기의 생활 역사에 불법성이 개입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가짜 학력, 부정 선거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삶의 진실성”으로 장애물을 없애야 하고, ② 목회 전문 실력의 부족인즉 이것을 잘 보완하는 노력을 하셔야 하며, ③ 자기 십자가가 무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눅 9:60) 하셨는데 가족, 측근, 사회적, 도의적 책임 등 너무 많은 자기 십자가를 지면 주님을 따르는데 더 힘들고 또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관련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가볍게 져야 함이고, ④ 실천 모범에 자신이 없으면 교훈도 힘을 잃는 것이요, ⑤ 기도와 말씀의 준비가 아울러 미약하면 그것이 또한 자신감을 잃게 하여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잘 유의하시고 보완하셔서 성공적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83과 다 이루신 뜻 (요 19:28~30) 목록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을 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뜻일까요? 전체적으로 표현하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하셨다”는 뜻이지요. 놀라운 인생 모범의 고백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말이 “테텔레스타이”인데 이 뜻은 “단번에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다, 완성하여 끝내다, 지불이 완료됐다”의 뜻이라고 합니다. 다 이루신 뜻

1. 인간으로 오신 목적의 완료를 의미하는데,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관계의 사역을 떠나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오신 인간의 도덕적 사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적, 사회적 사명을 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목적 중 하나는 유대인의 한 사람이란 책임을 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나타내신 것으로 보나 가정에 대한 사명과 사회에 대한 사명에 있어서 자신의 하실 몫을 다 하신 것입니다. 사회인의 한 분으로서 나라를 독립시키는데까지 역할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모범자, 교육자로서 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120년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하였을 때(창 47:9) 자기 가족에 대한 사명을 다했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로서 120세까지 노력하였으면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2. 영적 사명으로 설명하여야 하겠지요. 그 영적 사명의 중요한 것이 구원 받을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값은 심판이고 사망인데 그것을 대신 지시므로 속죄의 은혜를 받도록 공로를 세우신 것입니다. 사 53:5~6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각자 제 길로 간 자이거늘 하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죄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고난과 죽음을 맛보신 것이 바로 우리가 당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받아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고 심판을 면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뜻을 히 9:14~15절에서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려 하신다” 하였고, 또 히 10:10에서는 “예수님이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심판을 면하고 천국 백성이 되는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그것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속죄하는 구세주를 내가 찬양하리라”(35장) 하였고, “예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193장)하는 가사는 성도가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것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3. 인간의 사회적 목적 성취가 첫째이고, 둘째는 속죄 사역이며 셋째는 율법에서 해방을 주신 자유인 것입니다. 찬송가 35장 1절 가사에서 “내게 자유 주시려고 주가 고난 당했네” 하셨고, 또 갈 5:1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지요. 또 이것을 비유로 강조하시기를 갈 4:31에서 “너희는 계집종 하갈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하는 여인 사라의 자녀임을 인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계속 정죄하고 심판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능력만 있으면 율법이 걸어 잡을 수 없을 것인데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갈 3:10~11) 끝까지 코 꿰인 상태에서 종처럼 율법에 얽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택한 백성을 율법에서 자유케 하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신 죄 없는 분으로서 율법 집행자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율법에서 자유로워지신 것이고, 예수님께 속한 모든 백성들까지 율법에서의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에서 “신령하고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다” 하신 것은(롬 7:12, 14)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그 목적이 선하다는 뜻이요,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마 5:17)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의 모범이 율법보다 더 낫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율법보다 신약의 복음은 더 밝은 계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고”(시 102:20),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시며”(롬 8:2), “바로의 손, 곧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시고(신 7:8, 13:5)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4:5)고 하신 것입니다(눅 1:68, 렘 31:11, 호 13:14, 미 4:10, 롬 6:18, 22). 그리하여 율법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예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계 1:5).

4. 마귀의 기를 꺾는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히 2:14을 보시면 “예수님이 혈육에 속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은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고(사망 세력을 꺾으신 뜻)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 하는 자를 해방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마귀의 기세를 꺾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싸우다가 한 놈이 밀리면 포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귀의 기세를 꺾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 예수님께 속한 성도들도 함께 승리를 한 것이지요(요일 3:8).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것은 인생 모범, 속죄, 율법에서의 해방 또 마귀와의 상대에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것은 성도의 부활과 영생 천국과 심판의 결국을 보게 하신 일이 된 것입니다. 저희들이 다 이루셔야 할 책임은 인간의 도덕적 사명과 영적 사역을 위한 전도의 사명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84과 과제를 깨닫자 (눅 18:18~23) 목록으로


저의 집에 글씨 액자가 하나 있는데 내용을 보면 “아침에는 희망찬 계획을 낮에는 성실한 노력을 밤에는 반성과 묵상을”이라고 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글귀가 싫었는지 길에 버린 것을 저는 그 글귀가 너무 좋아서 문전에 걸어놓았습니다. “아침에는 희망찬 계획을” 하였는데 혹시 하루의 과제를 모르거나 자기의 인생의 삶의 과제를 모른다면 되는대로 사는 떠돌이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 중에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과제에 대한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일 잘 지키시고, 예배도 잘 드리시고 성경을 배우면서 이만큼 신앙 생활의 틀이 잡힌 것은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위험과 취약점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어떤 교회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기의 신앙적 과제를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거나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서 “과제를 깨닫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과제를 깨닫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실 것입니다. 관련이 있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온 청년에게 과제를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저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와 같은 취지로 자기의 신앙 생활의 과제를 아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의 강론을 썼고, 7분 설교 8집 21과에서 “한 가지 부족”이란 설교를 썼는데 “과제를 깨닫자”는 문제는 나타내지 않은 것 같아서 또 이 설교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은 마 19:16~22과 막 10:17~22에도 있는데 약간씩 표현이 다릅니다. “어떤 청년 한 사람, 어떤 관원이라” 하였고, 마태는 “선생님” 하였는데 마가, 누가는 “선한 선생님”하고 호칭했다가 예수님이 “선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셔서 그 청년(마 19:20)이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면서 “선하다” 하였다가 지적을 받았습니다. 마가는 “꿇어앉아서 말하였다” 하였고, 마가와 누가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 얻습니까” 하였는데 마태는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 얻습니까” 하니까 선한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십계명 중 후반부 계명을 제목적으로 설명하시면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시니까, 그 청년의 말이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처삼촌 벌초하듯 지킨 모양이지요. 그러니까 “네가 온전하고저 할진대”(마태 기록), 마가, 누가는 “한 가지 부족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까 그가 부자인고로 근심과 슬픈 기색을 띠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청년, 부자, 관원(출세)이고,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을 줄 알고 많이 지켰는데 사랑의 계명에서 실격된 것을 안 것이고,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으로 알았으며 영생의 갈망이 있었는데 “너쯤 되면 영생할 것이라”고 인정받을 줄 알고 확인하러 왔다가 혹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하셨는데 과연 “계명을 지키면 구원 받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계명을 지키되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이지(재산 팔아 나눠주는 것 정도) 완전하게는 못 지킵니다(갈 3:11).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도록 1차로 시행을 시키시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신 후에 복음으로 구원 받아야 할 것을 알리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1. 예수님이 그 부자(관원) 청년에게 주신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너는 인간이 선한 줄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2) 너는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고 있으니 그것도 잘못이다.

3) 너는 계명을 잘 지킨 줄 알고 있으나 그것도 잘못이다.

4) 너는 계명을 지켜 구원 받는 줄 알지만 그것도 잘못된 지식이다.

5) 너는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켰다 하지만 너무 미흡하다.

6) 부자도 좋고 관원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실천의 결단을 못 내리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사람이 온전해지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한 가지 부족”이라고 강조하셨는데 누구나 한 가지 부족을 실천하여 온전해진다면 다른 것은 다 실천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부정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만 있다면 주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하늘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세례요한이고, 베드로와 바울사도 같은 분입니다.

2.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과제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창 3:9)하신 것처럼 “아무개야 너의 과제를 아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자(관원) 청년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셨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하신 것처럼 저희들에게 주신 과제도 많습니다.

1) 마 15:10에서 “듣고 깨달으라” 하셨고, 딤후 3:14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으니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 첫 과제입니다.

2) 계 3:19에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바른 지식을 가지면 “자기의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될 것인즉(계 3:17~18) 회개할 과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3)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도록 생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된 것처럼(행 13:22).

4) 하나님이 과연 내 곁에 계신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과제입니다(행 27:23, 딤후 4:17).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는 말씀과 기도에 끌리고 생각이 하나님을 묵상하는데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상의 네 가지 과제를 이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5과 인생 보람 (창 47:8~12) 목록으로


“인생 보람”이란 제목으로 묵상하겠습니다.

1. 제 방에는 성경 구절 액자도 여러 개 있지만 다른 글귀 액자도 하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침에는 희망찬 계획을, 낮에는 성실한 노력을, 밤에는 반성과 묵상을”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제가 이 글귀를 보면서 제 생활을 반성해 본즉 “어지간히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3월 15일 아침 6시인데 TV에서는 “가자 지구에서 KBS 용태용기자가 팔레스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2시 30분에 일어나서 세 편의 설교문을 기록하는 중입니다. 피로가 오면 1시간쯤 자고 아침 식사 후 기도 시간을 갖고 가족들과 연고자들의 평안을 기도한 후 오늘도 왕하 19장의 강론을 쓰고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3월 21일은 노회의 목사, 장로님들의 야유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좋은 점도 있고, 대접도 받지만 그 일이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한 분량까지 강론문이나 신앙 자료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계획하고 목표하는 일들이 잘 성취되었을 때 “내 인생도 보람이 있다”고 느끼려고 합니다.

2. 인생 보람과 관련하여 야곱이 고백한 말씀 한 구절을 읽었는데 이 내용은 야곱이 130세 되었을 때에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한 말이지요.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요, 그 다음에 “바로에게 축복을 하였고, 바로가 좋은 땅과 기업을 주어서 공궤하였다” 하므로 야곱이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믿음의 조상이고, 신앙 생활에 표준 인물격이요, 성경에 야곱의 생애만큼 길게 기록된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생활과 우리의 생활을 대조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130년이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했으니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지요. 옛날도 오늘처럼 수고하며 먹고 사는 일은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러자 에서와의 갈등이 생겼고, 집을 떠나 나그네 신세가 되었으며 외삼촌 밑에서 고용인이 되었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을 하였다”(창 31:40)고 하였습니다. 재산이 조금씩 증식되기는 하였지만 네 부인을 거느리고 열 두 아들, 딸 하나 키우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흉년이 든즉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올 정도였으니까 그 삶의 고달픔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와서 17년 평안히 산 때도 있었습니다. 애굽에 와서는 요셉이 공궤하고 왕실에서 도우니까 염려 없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었습니다. 130년을 고달프게 살고 17년은 평안히 산 후 천국 간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야곱의 17년은 그 인생의 11%입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78세로 본다면 78세의 11%는 7년이 되는데 늙어서 그만큼 평안하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야곱이 130년을 험하게만 살고 전혀 낙이 없었는가? 할 때 부분적으로 또는 순간적으로 누리는 낙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보람을 느꼈고, 일은 취미로 하였을 것이며 자기 재산이 늘어나는 기쁨도 맛보았고, 거기에다 네 여인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식들이 커지니까 노동의 뒷자리로 물러났겠지요. 이것이 야곱의 현세적 보람입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보람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서 보람을 느끼신 일은 열 두 지파 선민을 확보하시는 일인데 그 열 두 지파가 다 야곱이 생산한 아들이었으니 거기에 보람이 있었고, 또 한 가지는 메시야의 맥이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혈통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이요, 셋째는 야곱의 신앙과 생애가 후세인들에게 모범과 교훈을 주는 계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고난도 당했고, 자기 보람도 느꼈으며 또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결국 험악하게 살았지만 보람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4. 그래서 저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보람이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야곱처럼 우선 먹고 살아가는 노력을 잘 해야 합니다. 야곱이 눈 붙일 겨를 없이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꼭 남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도록 자립하셔야 합니다. 소득이 힘들면 소비를 줄여서라도 적당히 살면 될 것이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한 두 가지라도 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사명에 관한 것을 뜻합니다. 기도, 전도를 잘 하시든지 봉사, 구제를 잘 하시든지 먹고 사는 일 외에 신앙, 봉사에 대하여 특별히 상 받을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벌어서 자기 가족들과 산 것은 자기 십자가 진 일일 뿐 상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상 받을 일은 헌신과 봉사 즉 이웃을 위한 사랑이지요. 그런 면에서 할 일을 하셔야 하고

3) 순결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국무 총리가 3․1절에 골프 친 것 때문에 물러났고, 또 누가 성추행한 것 때문에 고전하듯이 성도는 순결을 못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천해지고 버려지니까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바쁘게 살았으니까 세상 구경도 많이 못하셨는데 주무실 때 꿈을 구하세요. 저는 65세 이후에 꿈을 많이 꾸면서 비행기 탈 때도 있고, 바다 위를 날 때도 있으며 설교하고 기도할 때가 더 많습니다. 꿈은 꼭 자신이 느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으로 두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욕심을 갖고 잠잘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보람 있는 인생 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86과 성도의 사명 (행 2:43~47) 목록으로


“성도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또는 헌신 예배 때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또 들으셔야 할 이유는 헌신 예배를 없애지 않고 계속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헌신을 잘 하신다면 헌신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의 사명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실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 사명이고, 또 하나는 교회적 사명입니다. 이 두 가지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은혜와 복도 더 많이 받으시며 주님의 교회를 더욱 천국답게 만드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개인적 사명입니다. 성도가 교회 단체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사는 시간이 훨씬 많은즉 개인적 사명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개인적 사명을 잘 하셔야 교회적 사명도 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신분은 참으로 존귀하고 중요합니다. 천국 시민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또 성도의 개인적 사명은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서 형태 있는 교회가 없어져도 신앙은 개인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니까 개인적 사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여러분들이 거룩해질 사명이 있습니다. 인격이 깨끗하고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님의 인품을 닮는 것이지요. 요 17:17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고, 롬 8:29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목적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해지는 방법을 아셔야 하겠지요. 그 방법은 말씀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딤전 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붙잡혀서 거룩해질 사명이 있고,

2)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시 107:9) 가까이 따르며(시 73:23, 28) 기도로 교제하고(눅 18:1) 늘 함께 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마 28:20, 창 5:24).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깝고 두터우면 됩니다. 약 4:8을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몰랐다가 꿈꾸고서 알았지요(창 28:16). 성도님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마음과 몸으로 느끼는 것처럼 체험을 하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도 주셨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그렇게 믿고 사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더 가깝게 살펴주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모시고 교제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이웃에 대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시고(마 5:13~14),

4) 자기 십자가 지는 사명(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셔야 하며(마 16:24),

5) 전도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혼자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 1:45). 그러고 보니 성도의 개인적 사명은 다섯 가지입니다. 거룩, 교제, 빛과 소금, 자기 십자가, 전도입니다.

2. 교회적 사명은 무엇일까요? 교회 생활 오래 하셨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한 번 더 다짐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1)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예배는 생활이 중요하고 개인적으로도 드릴 수 있지만 복음 사역자로부터 말씀 듣는 비중이 크고 또 단체적 경배와 경건은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의 표현을 가장 합리적으로 실천하는 행사인 만큼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또 예배를 통해서 받는 은혜가 가장 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충실한다면 먼저 목사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목사님 목회에도 큰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예배드릴 사명이 있구요.

2) 성경 배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만 듣고 성경을 다 배우시는 줄 아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근거이고, 영혼의 양식입니다. 마 4:4에서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고, 행 5:20에서는 “다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배우시되 모조리 배우는 틀을 만드시고 읽어가면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면 교역자에게 물으세요. 설교자에게 가장 큰 대접은 “좋은 말씀 주셔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고 배우려는 성도에게 큰 지혜를 주십니다(약 1:5).

3) 사랑과 화목입니다. 교회 안의 이웃이 다 나와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과 방법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과 사랑하고 화목하며 협력하는 도장이 곧 교회입니다. 삿 3:2을 보시면 가나안족을 남겨두신 이유가 “선민의 후손들을 시험하시고 전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의 연단을 위하여 악을 쓰신다는 뜻인데 교회 안에도 융화를 해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성도가 화목하는 직책과 사명을 갖고(고후 5:18, 마 5:9) 지혜롭게 사랑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도장이요, 천국의 모형인즉 사랑할 것만 생각하시고 받을 것은 생각지 마십시오. “내가 오늘 교인을 만나면 사랑만 실천하고 온다”는 각오로 행하신다면 참으로 좋은 환경이 될 것입니다.

4) 봉사의 협력 사명인데 이것은 개인이 빛과 소금 사명을 감당할 때도 필요하지만 교회는 혼자 하기 어려운 것을 십시일반으로 하는 기관이니까 단체적 사업에 협력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순응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이지만 억지로 하거나 힘들게 끌려 가지는 마십시오. 분수에 알맞게 하는 것을 모든 회원들이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봉사의 자유와 양심을 누리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협력 사업을 하시면서 속상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5) 교역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눅 8:3에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하실 때 요안나, 수산나 등 다른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교역자는 항상 바쁘고, 잠이 부족하며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주로 설교 준비, 성경 연구, 기도에 쫓깁니다. 교역자를 돕는 방식은 대접 뿐 아니라 방법이 많습니다. 예배 참석 잘 하시고, 시간 잘 지키시며 화목하고 협력만 하셔도 좋고, 특히 존경하고 기도해 드리는 것이 중요하며 “가르침을 잘 듣고 깨달았다”고 하실 때 그것이 큰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의 약발을 못 받으면 성숙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개인적, 교회적 사명을 잘 하시기 위하여 다섯 가지씩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87과 화목하는 직책 (고후 5:16~19) 목록으로


본문 18절에 보시면 “화목케 하는 직책”이란 말씀이 있고, 19절에는 “화목케 하는 말씀을 (주사)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화목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직책은 전문업과 책임을 뜻하며 “화목하는 말씀”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직책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된 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가 아니라도 “사랑의 직책과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본문 말씀을 살피시기 전에 요한 1서를 읽어보시면 요한 1서는 화목케 하는 말씀 즉 사랑의 계명을 일괄적으로 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일 1:7~11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지 않는다 그 계명은(사랑의 율법인즉) 옛부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새 계명을 쓰는 것은 저(예수님)와 너희(성도)에게 참된 것인즉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이 뜻은 예수님이 형제 사랑의 모범을 실천하셨다는 뜻임)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님을 모시고)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는(그대로) 어두움에 있는 자이다 어두움에 있는 자는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형제를 미워함)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의 확립이 없으면 그는 빛(그리스도) 가운데 있지 않은 자요, 눈 없는 자와 같아서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제가 요한 1서 강론을 쓸 때는 이런 깨달음이 없었음). 그 외에도 요일 3:10에서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무릇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들이라” 하시므로 믿음과 성도와 사랑이 일치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계속해서 3:16을 보시면 “그가(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셨고, 17절에서는 “형제가 궁핍한데 재물을 갖고도 도와주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그(주) 안에 거하는 것이겠느냐” 하셨으며 18절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셨으니 성도가 사랑을 실천하는 세계는 우선 미움이 없고, 재물이 있는 자 사이에 궁핍한 자가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사랑 실천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의 강조는 화목하는 직책에 관한 말씀으로 성도의 세계(교회) 안에 갈등하고 대립하며 썰렁한 상대 또는 역겨운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에게 “직책을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한 교회에서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은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 안에 사랑 아닌 갈등과 미움이 많음을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두 친형제 장로끼리도 서로 갈등, 비난, 반목 질시하니까요. 예를 들면 뜻이 같지 않다 하여 서먹해지고 다투기도 하며 자기의 주장을 반대했다 하여 미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만히 있고 협조를 안 해도 미워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 특권을 행사하겠다고 형제, 목사, 장로끼리도 대립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다른 세계에 왜 불화가 없겠습니까? 여하튼 미움과 불화가 있는 세계는 바른 신앙의 세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은 성도가 화목케 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알고 행해야 할 수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제가 고린도후서 강론을 쓸 때 이 내용을 깨달은 것이 기억나지 않음).

1) 16절에서 “아무도(미운 자, 껄끄러운 대상) 육체대로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육체대로 알지 말라”는 뜻은 “그 미움의 대상이 하나님의 뜻(섭리)없이 나타난 줄로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삿 3:1~2을 보시면 “가나안족(나쁜 사람들, 없어야 할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남아있게 하신 것은 성도를 시험하시고 전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움의 대상을 사랑으로 연단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잘 풀어야 할 시험 문제를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모든 이를 다 사랑하면 그는 사랑의 승리자인 것입니다.

2)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변화되었지만 삶의 방식도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존심으로 살던 자가 자기를 부정했고(마 16:24), 육체적, 현세적으로 살던 자가 정과 욕심을 못 박았으며(갈 5:24) 세속을 따라 살던 자가 세속을 멀리 하고(롬 12:2, 약 1:27, 요일 2:15), 자율주의를 떠나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변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3) 18절에서는 “악한 자가 자기 곁에 있는 것이나(잠 16:4)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 이웃과 화목하도록 직책을 주신 것도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라”는 뜻이요,

4) 19절에서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짊어지셨으며 이로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대부분 미움의 대상은 그가 미운 짓을 하거나(죄) 자신이 욕심에 끌려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화목을 위하여 그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인즉 성도가 그것을 본받아서 화목하는 직책을 이행하여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성도의 세계에 미운 대상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혹 미운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저 불순한 상대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가를 연구하고 기도하며 연단받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사자”로 생각하셔야 하고, 또 예수님이 나와 화목하시기 위하여 내 죄를 짊어지시고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부덕한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부덕을 내가 떠안는 심정으로 그를 상대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세례가 곧 주님 모신 천국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88과 성도의 3대 사명 (행 2:40~47) 목록으로


“성도의 3대 사명”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좋은 소원을 가지십시오. 일단 소원이 있어야 성취를 기대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빌 2:13에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원을 갖는 것이 좋을까? 를 연구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선진들의 소원을 찾아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는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소원을 가졌고(요 3:30), 사도요한은 “성도가 진리대로 산다는 소식을 듣는 것 이상 큰 기쁨이 없다” 하셨으며(요삼 3절) 바울사도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언제 어떤 경우에서나 담대함을 변하지 않으면서 자기 속에서 주님이 존귀하게 나타나시기를 바란다” 하셨고(빌 2:20), 베드로는 “말세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므로 준비하다가 주님 맞이하게 되기를 소원”하셨으며(벧후 3:11~12), 예수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므로 성령 충만을 원하셨고(눅 12:49), 하나님은 “모든 사람(택한 자)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호 6:6, 딤전 2:4). 진리 아는 것은 곧 하나님 아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생각해 보면 “누가 나의 증언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보다 더 반가운 것은 없고, 나의 소원이 있다면 “나의 생각과 증언을 문자로 남겨 놓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소원을 가지셔야 좋을까요?

1)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니까요(고전 10:31).

2) 신앙 생활을 순탄하게 하는 소원을 가지십시오. 믿음 생활 순탄한 것이 복 받는 지름길이니까요.

3) 가정이 평안하고 잘 되는 소원을 가지셔야 하고,

4) 교회가 잘 되는 소원도 가지셔야 합니다(헌신 예배 드리는 목적도 거기에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떤 교회처럼 되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히 초대 교회처럼 되어져야 하겠지요. 초교 원조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바로 다음에 나타난 교회가 원조 교회입니다. 바로 지금 읽으신 본문입니다. 이 교회를 살피면 9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전도 잘 되는 특징인데(40~41절) 요즈음 전도가 잘 안 되도 낙심하지 마셔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2000년 전 복음 초기에 처음 그물을 던진 때였으니까 잘 된 것이지요. 그 후 2000년 동안 계속 던졌으니 자원이 적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전도의 은사적 결함에도 문제가 있지만 지금은 희귀한 택한 백성을 영입하는 시대란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명령이니까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②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셨는데 이것이 성경 공부입니다(42절). 반드시 성경의 맛을 알고 끌려야 합니다. ③ 사랑과 친교입니다. 42절의 “교제하고 떡을 뗐다”는 말씀이 그 뜻이니까요. 초대 교회 안에는 사랑과 친교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④ 전혀 기도에 힘썼구요. 전혀 기도에 힘쓰는 것이나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비슷한 뜻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노하우 없이 하기 어렵습니다. 기도에 끌려야 하고 또 기도의 맛을 알아야 하니까요. ⑤ 사람마다 두려워한 것인데(43절)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한 것입니다. 성도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거나 말씀, 기도에 갈망함이 없으면 반드시 그 신앙 생활을 다시 점검 하십시오. ⑥ 사도들로부터 표적이 나타난 것인데 요즈음 그런 이적이 없다고 서운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사도가 있어서 사도들이 이적을 나타냈지만 지금은 사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때에 사도가 이적을 나타낸 큰 이유는 히 2:4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구세주이시고 성경이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표적의 결과로 성경이 완성되었은즉 성경 제일주의로 사는 생활이 이적 체험보다 훨씬 귀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적으로 진리 증명을 하였으니까 진리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⑦ 44절에 물질 통용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을 택하신 분입니다(고후 8:9). 은혜 받은 성도가 세속의 욕심이 없어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게 되면 물질을 제 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희들은 그런 세계를 동경하셔야 할 것입니다. ⑧ 46절에서 날마다 모여 찬미하고 음식 먹고 성경을 배웠으니 교회보다 더 재미있고 진지한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모였고, ⑨ 47절에서 “이웃의 칭송을 받으니 수가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실상이 거의 소개된 줄 압니다. 성도의 몸담은 교회가 꼭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5) 교역자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소원을 가지십시오. 히 13:17을 보시면 “교역자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일하게 하라” 하셨고, “그래야 성도에게도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격려하시고 기도해 드리고 즐거움을 갖게 하십시오. 그 일을 성취할 수 있기 위하여 소원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6) 자기 인생을 보람되게 마치기 위한 소원을 가지셔야 합니다. “할 만큼 했다” 또는 “보람 있는 일을 했다”하고 주님 앞에 가TU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상 여섯 가지 소원이 꼭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개인적 사명입니다. 신앙 생활은 개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움직이는 시간이 대부분 아닙니까? 삼손의 어머니와 그의 아버지 마노아가 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불꽃 중에 올라가는 것을 부인만 보고 마노아는 못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을 때도 사울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동행인들은 우뢰 소리로만 들었으니 이렇게 신앙 생활과 은혜가 개인적으로 차별있게 임하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1) 죄 안 짓는 순결 사명입니다(요 17:17, 딤전 4:5). 죄 안 짓고 예수님 닮도록(롬 8:29)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져야 하는 것이요,

2)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명입니다(약 4:8). 친한 사람에게 100만원을 꾸려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 아는 사람에게 10만원을 꾸려 해 보세요. 거기서 가깝고 먼 것이 나타나겠지요. 하나님과 친한 증거는 말씀과 기도에 끌리고 기도 응답이 잘 되며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는 공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평소에 물 먹고 싶을 때 음료수 주는 이가 있었고, 과일이 먹고 싶을 때 과일 가져다주는 이가 있어서 그것을 아내에게 자랑하면 아내는 비웃으면서 “우연의 일치된 것을 가지고 다른데 가서 자랑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 하면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 그런 일이 너무 신통하게 나타나니까 부인을 못하고 “당신이 필요한 것이면 주실 것이니 기다리라”고 까지 하더군요. 한 번은 부산에서 밤에 저녁 식사를 할 때 동치미 국물이 먹고 싶었는데 그 생각이 들자 동치미 국물을 갖고 방문한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큰 충격을 받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보내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 나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이 미리 알고 보내신 것인가? 를 측정한즉 하나님이 내가 필요할 것을 아시고 미리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면 크게 행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며 친교할 사명이 여러분 개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3) 사회적 사명으로 빛과 소금 역할을 하셔야 하고(마 5:13~14),

4) 자기 십자가 지는 사명이 있는데(마 16:24) 이 자기 십자가는 불신자들이 감당하는 도덕적, 사회적 사명입니다. 성도들도 예외 없이 그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을 섬기면 또 주님은 그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요.

5) 전도의 사명입니다(마 28:20, 행 1:8). 전도를 개인이 하셔야 자유롭고 좋습니다. 개인의 사명 다섯 가지를 꼭 이행하십시오.

3. 교회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엡 1:23), 피로 값 주고 사신 단체라 하셨으니(행 20:28) 참으로 중요한 기관인데 이 기관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성경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성도의 단체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 잘 되는 소원을 가지셨고, 또 원조 교회의 모범도 살피셨으니까 교회의 사명을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

1) 공예배에 성실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공예배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경건의 첨단입니다. 정신 차려 예배를 드리시고 예배가 지루한 줄 모를 만큼 집중하셔야 합니다(이때에 인도자는 예배를 지루하지 않게 인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2) 교회에서의 성경 공부에 주력하시되 재미를 맛보셔야 합니다. 교회의 교육 방침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성경을 살피면서 의문점을 풀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많은 질문을 드려서 지도자가 그 답변을 연구하기 위하여 바깥 출입을 못할 만큼 만드십시오. 그리고 베뢰아교회가 성경 공부로 발전한 모범(행 17:11)을 기대하십시오.

3) 사랑과 화평의 사명입니다. 초대 교회가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뗐다는 것은 사랑과 화평의 분위기를 말씀하신 것이고, 고후 5:18에서 “성도에게는 화목하는 직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 아닌 자가 없어야 하고, 문제가 있는 성도는 방정식을 푸는 노력으로 사랑하여 해결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과 계명 실천의 도장(道場)으로 아셔야 합니다.

4) 봉사, 협력의 사명입니다(고전 12:28, 서로 돕고). 개인의 사명 중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하려면 개인적으로 봉사를 해야 하지요. 그러나 교회의 봉사, 협력은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연합적으로 하는 것이니까 반드시 명분 있고 부담은 적게 하여 자유롭게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연합 사업에 융화가 안 되면 안 하는 것이 나을 만큼 부작용이 따르니까 지혜롭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교역자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섬기십시오. 성경에는 가족 있는 교역자를 교회가 어떻게 섬겼다는 모범이 신약 성경에는 없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구약 시대의 레위 지파 섬긴 것을 적용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권위로 집행된 것이니까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율법 시대가 아니므로 은혜와 사명의 신앙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넉넉하게 드려도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목사님이 필요한 것은 도덕적 생활의 지도나 예배 인도자 때문이 아니고 성경 교육과 신앙적 지도 때문이란 것을 아셔서 신앙적 지도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셔야 합니다. 신앙적 지도는 설교를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나침판 역할을 하는 것인즉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독일 교회의 특성은 성직자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를 잘 섬기면 그만한 복을 자신이 받습니다(빌 4:17). 5․16정권 시절에 가장 국방장관을 오래 역임했던 김성은씨의 어머니가 김상권 전도사(증경총회장)를 섬긴 예화(다른 설교집에 기록됨)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상의 세 가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11. 교회 개혁과 관련 있는 말씀

제89과 거룩한 교회를 이루자 (엡 5:26~27) 목록으로


이 본문을 요절로 하여 “찬된 교회”, “교회의 세 가지 순결”(핵심 설교 87, 88과), “교회 생활의 병폐”(7분 7집 6과), “영광스러운 교회”(7분 9집 65과)란 제목으로 수록하였지만(7분 11집, 12집에도 교회 개혁과 관련 있는 제목이 있음) 이 시간에 드리는 말씀은 현실 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직접 지적하고 시작부터 잘못된 요소가 잠입하지 못하는 교회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가 이만큼 뿌리를 내렸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하시겠지만 시작부터 새로운 틀 안에서 교회 생활을 한다면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1. 금기(禁忌) 사항을 생각해보십시오. ① 물질의 힘을 앞세워 운영하는 교회를 만들지 마셔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행 3:6)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재정적 단체 아니라도 또는 가난하여도 얼마든지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합 3:17~19). ② 기복주의로 신앙을 이끌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떡을 얻어 먹는 맛으로 따르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요 6:26). 구원이나 영적 축복은 기복이 아닙니다. 기복은 현실적 이득을 의미합니다. 딤전 6:5에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라” 하셨으니까요. ③ “돈 갖고 와서 은혜 받으라”하면 안 됩니다. 거저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마 10:8), “진리를 사고 팔지 말라”(잠 23:23) 하셨으니까요. 병 고침의 기도를 하고 사례물을 구하거나(사 1:23) 전도, 교육, 부흥 방식의 노하우를 전하면서 숙식비 명목으로 돈을 구하는 사업주의로 이끌리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거저 준다 하다가 나중에는 감사해야 한다 하고 그 다음에는 돈을 갖고 와서 은혜를 받으라”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행 8:21과 왕하 5:25을 보십시오. ④ 교회는 사회나 국가의 덕을 보면 안 됩니다. 빛이 되지 않으니까요(마 5:13). 교회가 정부 앞에 가서 사정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비공식적 이득을 구하지 말아야 하며 세금은 모범적으로 내야 합니다(마 17:24~25, 롬 13:7). 국가로부터 교회가 보호를 받지 못할 때도 진리는 매이지 않으므로(딤후 2:9) 보존되어 왔습니다. ⑤ 불신앙 세계나 이단자들을 원수처럼 대항하여 싸우지 말고 진리의 뜨거운 열로 정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원수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마 5:44), 비선택자와 마귀의 역사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며(눅 4:6) 만인 구원설이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엡 1:4, 살후 3:2, 행 13:48, 마 7:13). 숫자를 위주로 하는 교회는 분명히 사업주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⑥ 교회 이기주의는 사랑 정신에 위배된즉 마땅치 않고(마 22:39), 부당한 인사 횡포도 그러하며(마 18:6) ⑦ 교회 안에 거품(숫자, 돈, 사업, 사회적 지위, 물건 자랑 등)이 있으면 이는 진실에 위반될 수 있고, 또 보이는 것을 자랑하는 뜻이 되므로 마땅치 않고(롬 8:24, 요일 2:15), ⑧ 신비주의(진리 가감)와 이적을 과장되히 선전함도 바른 것이 아니며(히 2:4, 계 22:18~19) ⑨ 교회 내부 생활에서의 사치나 과소비도 그러 하고(요 6:12, 롬 12:16), ⑩ 성수 주일이나 십일조를 율법주의 식으로 과장되게 강요함도 옳지 않으며(마 11:13, 롬 10:4) ⑪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여서도 안 되고(마 11:28, 23:4), ⑫ 사치하거나 장황스러운 의식이 의식주의로 흐를까 염려되며(딤후 3:5) ⑬ 교인들이 스스로 사용하는 예배당이나 성구 비용을 제공한 것은 헌금이라 할 수 없고(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닌 만큼), ⑭ 교회 안에서는 누구라도 명예적 인기를 누리면 안 되며(마 3:12, 고전 15:8~10, 엡 3:8) ⑮ 헌금은 예수님의 것인즉 예수님께 요청할 만 하거나 예수님이 쓰실 만한 일에만 쓸 것이요, 성도 자신이 대접 받는 일에는 지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무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5). 자치 회비를 거두어 마음대로 쓰면 편할 것입니다. ⑯ 교회(노회, 총회)가 물질 거래처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마 21:13). 최소한의 상납금으로 족하고 개인적 생활의 영리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도 꼭 필요한 것은 교회 밖에서 성도를 상대로 하여 시행하고 가급적 안 해야 합니다. 은급비나 납골당 사업도 교회 밖에서 해야 합니다. 특히 성직자를 상대한 은급 제도는 마 6:25, 32, 눅 17:7~10, 딤전 5:16, 시 127:3에 위반될 수 있습니다(무자녀 성직자는 제외). 따라서 모든 사명자는 법적으로 원만한 계약을 체결한 상태에서 시무하는 것을 제하고는 교회를 생계 수단처로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합니다(마 16:24). ⑰ 성도가 교회 안에서 양심적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하고(행 23:1),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요 8:32). 성도가 교회 안에서 양심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 교회 지도자의 지도 방침이 성경적이 못될 때 치리회를 통하여 처리할 수도 있어야 하고, 만족이 없을 때는 교회를 옮길 수도 있어야 하며, 봉사나 사명 생활에 강요 당하지 않고 부탁을 받았을 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교회 생활 중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교인이 꼭 알아야 할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리 없이 능률있게 신앙 생활에 도움 되는 지식과 성경 해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 모범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3) 교회가 성도의 단체인 만큼 단체적 예배 행사가 필요하되 예배의 요소가 의식적인 것만이 아니고 생활이 수반되어야 하므로 장황스럽게 의식만 치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4) 성도의 가족적 친교가 항상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인 회중 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5) 전도와 봉사 사명을 이행하되 개인적으로 혼자 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두 사람 이상 또는 두 교회 이상 또는 노회나 교단적으로 합심 협력하여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가급적이면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도함이 좋을 것입니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성도가 순결을 지키고(요 17:17), 진리 지식에 몰두하며 사랑과 친교에 만전을 기하고 성도 각자가 힘써 스스로 선한 일(기도, 전도, 봉사)을 할 수 있으면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90과 교회를 보는 눈 (삼상 2:3, 16:7) 목록으로


교회에 대한 지식을 쌓는 의미에서 “교회를 보는 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눈”이란 뜻은 바른 교회를 선택 또는 세우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1. 어떤 성도가 이사를 간 후에 교회를 선택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흔히 예배당 크기를 보고 찾아가는 경향이 많은 줄 압니다. 그만한 교회의 목사님 설교가 저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영접을 받으니까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성도는 교파를 따지고 설교를 3~4회 점검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분이 교회를 보는 눈은 앞에 분 보다 조금 발전했다 할 것입니다. 교회의 성질을 잘 모르니까 교파를 찾는 것이 당연하고, 또 지루한 설교에 피로를 느꼈으니까 깔끔하고 박력 있는 충실한 설교에 마음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 단계 발전한 성도는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행정의 민주성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신앙의 잣대가 거의 표준화된 성도입니다. 정체성(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함)이 뚜렷한 교파라도 그 성직자가 정체성과 관계없이 탈선하는 경우가 있고, 또 행정이 장로회 헌법이라도 그대로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데 이런 것을 따질 만한 잣대를 가진 사람이면 그는 교역자의 식견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보는 세 가지 눈을 말씀드렸는데 처음에는 예배당과 물량을 보는 눈이었고, 다음에는 교파와 설교를 보는 눈이며 그 다음에는 신학과 행정의 정체성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보는 바른 눈이 어떤 것일까요?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삼상 2:3에서 “하나님은 행동(나타나는 행위)을 달아보시고” 또 삼상 16:7에서는 “중심(사상)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심이 바로 서고 중심에 근거한 행동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중심은 정신적이고 지식적입니다. 그리고 행동은 나타나는 활동인즉 여기에서 물적 근거(예배당, 재정, 사람의 수 같은 것)는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심은 신앙이고, 행동은 사랑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 자기 행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고, 이 개인적인 신앙과 행동이 합쳐서 교회라는 연합체의 본질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성도가 교회를 보는 눈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셔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찾아보려고 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동방의 박사들이 말구유에서 예수님을 본 일이 있고, 예수님의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성전으로 되돌아가서 성전에서 문답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으며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또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본 것처럼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나타내보이고 가르치는 곳인 만큼 반드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눈을 갖고 예수님을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라 예수님 모습 아닌 부분들도 나타나니까 분명히 선별하여 예수님만 보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신 예수님과 대조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배우는 눈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 “눈을 여셨다”는 말씀이 있는데(왕하 6:17, 눅 24:31, 엡 1:18, 계 3:18) 이 눈이 곧 성경을 배워서 깨닫는 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성경을 배우는 눈을 갖지 않으면 큰 소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성경을 배우는 취미가 어느 정도인지 또 말씀을 터득하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셔서 성경 터득하는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취미로 접근하고 예민하게 감동받는 사람이 있고, 덤덤하게 흥미 없이 대하는 사람이 있으니 반드시 성경을 터득하는 눈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눈을 가지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보는 눈, 다음에는 성경 배우는 눈, 그 다음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눈인데 이것들이 비슷한 내용 같으나 약간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 보는 눈은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발견하는 것이고, 성경을 보는 눈은 성경의 내용을 터득하는 것이며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교리와 행동원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높아지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아닌 것과 성경이 아닌 것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공의와 사랑을 보셔야 합니다. 공의를 보려는 눈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사랑을 살피는 눈도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여러 사람 관계에서 시행하는 일인데 시 15:2에서는 “공의를 일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법이 살아 있어야 하고, 공의가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도 공의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하며 아울러 사랑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는 눈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법질서를 어겼다면 그것은 말씀 뜻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몇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몇 사람을 억울하게 했다면 이것도 공의와 사랑이 실천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니까 이런 것을 관찰하는 눈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교회의 목적을 관찰하는 눈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진리의 보존과 해석과 전파요, 성도의 친교와 사랑이며 천국을 모형하는 순결이 있어야 하니까 그 목적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눈이 있어야 하고,

6) 세계의 교회를 하나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교회, 나의 측근만 교회가 아니라 세계적 교회와 성도가 다 하나라는 개념 속에서 전체성 있게 보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도 독도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대한민국 백성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큰 교회에 나가는 성도가 다수 교인을 인하여 우월감을 갖는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작은 교회 성도가 우월감을 못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91과 진정한 교회 (엡 5:27) 목록으로


현실 교회가 많이 개혁되고 변화될 뿐 아니라 앞으로 세워지는 교회들이 “진정한 교회”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정한 교회”란 제목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에 보시면 “자기(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는 말씀이 있고, 그 영광스러운 교회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나 교역자가 진정한 교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려면 그 교회의 티나 주름 잡힌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티와 주름이란 것이 작은 흠 같으면서도 교회의 본질과 관계되는 중요한 요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을 보실 수 있는 눈이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형태를 많이 봅니다. 교인수, 헌금액, 사회 사업, 선교의 규모, 예배당의 크기 같은 것이겠지요. 무조건 그 형태만 있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일까요? 반드시 그 세계에 티나 주름 같은 흠이 없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티와 흠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목적이 잘못된 것으로도 나타나고, 연약으로도 나타나며 신학이나 교리 부재, 또는 성도의 무지나 도덕성 결여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교회의 교육이 잘못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흠과 티를 발견하시려면 많은 신앙 경력과 성경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7노회, 7당회, 9교회를 40년 전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 강론도 구약의 몇 권 부분을 빼고는 다 썼습니다. 한 교회에서 14년 이상 시무를 못했고, 58세에 기성 교회 시무를 사임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전격적으로 사임한 이유는 목사의 목회하는 위치가 “교인들이 추구하는 교회 이상”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목사는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이 말씀한대로 예수님을 밝히면 교인들은 그 예수님을 닮아 따라오므로 변화되어가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교인이 바라는 목표에 목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로 요청하기도 하지만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만 닮아 살면 될 성도가 목회자로 하여금 자기 욕구에 맞추어 목회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생활비를 주어서 고용을 했다”는 입장에 처한 것입니다. 목사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하나님의 사역자이지 생활비 받는 값으로 교인들의 가려운 부분만 긁어주러 다니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생활비를 받는 것 때문에 교인의 권위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겸손할 수 있지만 목사의 성직이 제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은 목사라는 성직을 욕 돌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성직이 늙기까지 계속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교회를 사임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교회를 보는 눈이고, 이런 티와 주름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형제가 서로 장로 되겠다고 운동을 한 사례가 있고, 어떤 교회 청년은 자기가 꼭 회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년회를 와해시킨 사실이 있으며 어떤 이는 장로 되기 위하여 3년이나 새벽 기도를 안 빠진 예가 있고, 어떤 장로는 자기에게 헌신 예배 사회를 안 맡겨 준다고 목사를 비난한 일이 있으며, 어떤 교회는 20년 되도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구제와 선교, 예배당 건축에만 몰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데 건물이 없어서 교회를 못 세운다” 했다면 교회는 돈 없으면 설립될 수 없겠지요. 과거에는 터를 산 교회만 노회가 인가를 했습니다. 지금은 전셋집도 인가해 주는 줄 압니다. 어떤 이가 집이 없어서 “뒷동산 나무 밑에서 예배드리겠다” 했다면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마땅히 교회는 모임의 단체이므로 건물이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신의 명예나 인기에 덕을 보았다면 크게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면서 자신이 영광을 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지요. 본문에 보시면“…없이 거룩하고” 하였습니다. 거룩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에서의 구별이고(세속성이 없어야 함), 두 번째는 순결(범죄성이 없음)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 세속성이 없습니까? 찬송가의 곡조가 청소년 노래로 따라가지요.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사경회를 하였는데 이제는 유원지 호텔이나 외국으로 나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연예인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한들 성직자만 하겠습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모이는 수보다 연예인이 온다 하여 더 모이는 것이 바로 세속성이겠지요. 결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정한 교회를 예수님 중심, 성경 중심에서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그 무엇에도 구애 받음이 없이 사셨습니다. 바리새 이단과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없어서 못 하는 교회”가 되면 안 되고, 오직 성경만 있으면 교회가 탄생할 수 있는 형편이 될 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할 사명만 순수하게 시행할 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크게 나눌 때 세 가지인데, 하나님께 할 일, 성도에게 할 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할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예배인데 이 예배 속에 찬송, 기도, 성경 공부, 감사, 회개, 간구, 축복 등이 포함되고, 성도에게 할 일은 사랑과 친교와 협동이요, 안 믿는 사람에게 할 일은 전도와 선행이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목회 사명자가 교회를 섬기게 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입지에 서야 하고, 성도들도 교회의 티와 주름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에 이르도록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2과 원조 초대 교회 (행 2:40~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원조 초대 교회”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강물도 근원이 있고, 음식 전통도 근원이 있듯이 초대 교회도 원조가 있습니다. 지나다 보면 “초대 교회”란 교회 간판을 봅니다만 그 간판의 뜻은 초대 교회를 사모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런 초대 교회를 실현할 수 있을까? 에 대하여 많은 문화적 제약과 생존 경쟁 때문에 부정적 요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초월하거나 또는 명예욕, 물욕, 향락욕이 필요 없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충분히 그런 형태를 나타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초대 교회를 이루기 어려운 이유는 정통 신앙이 있어도 사회적, 물질적 제약을 받기 때문인데 그것을 떨쳐 버리거나 그 영향을 안 받는 성도들이 모이면 충분히 모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광야교회란 뜻이 있었지만(행 7:38) 그 시대는 성령 강림과 계시 완성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로서의 구비 조건이 미흡한 것이었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시점부터 초대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이 원조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최초에 강림하셨을 때 가장 강하게 역사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형편은 성령 충만한 상태였고, 따라서 교회 형편도 모범이 된 것입니다. 그 형편이 어떠 하였습니까?

1. 전도하고 전도의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0절을 보시면 “여러 말로 확증하며 구원을 받으라”고 전도하였고, 그 전도의 결과로 3000명이나 떼를 지어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현실 교회의 전도는 “여러 말로 확증하며 전도하는 식”과 또는 “십자가의 도리를 개인에게 전하지 못하는 형편의 취약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불빛만 보이는 식의 형식적 전도가 개인에게 십자가의 도리를 알라는 구체적 전도로 변화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였을 때 “전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떼로 몰려오는 역사는 잘 안 일어날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나타난 때는 바다에 그물을 처음 던진 것과 같고, 지금은 택한 백성의 수가 한정된 상태에서 너무 여러 차례 그물을 던지다 보니 잘 안 잡히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이해하시고 한 두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이것은 성경 교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니까요.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고 또 성경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성경 연구에 취미를 갖고 성경에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합니다”(시 119:103)한 말씀은 먹어 본 자의 고백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족할 뿐 스스로 연구하고 모르는 것을 발췌하여 묻고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다가 성령을 받았고(행 10:44), 베뢰아교회 성도들은 성경 공부의 열심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일까지 있었으니까요(행 17:11~13). 술, 담배 즐기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씀에 끌리셔야 할 것입니다.

3. 42절에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도 성경에 이끌리는 것처럼 맛을 아셔야 합니다. 공예배 때에 드리는 기도는 골방 기도만큼 간절함을 못 느낍니다. 또 평상시의 기도가 고난이나 고독이 있을 때의 기도보다 간절성이 적습니다. 그래서 고독이나 고난 중에 골방 기도를 힘쓰시면 기도가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또 하나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부탁하는 것이며 셋째는 소원에 관한 것입니다. 흠 잡히지 않을 만한 소원을 하시되 이루어질 때까지 하십시오.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이 사람의 노력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4. “사람마다 두려워하고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로 인하여 나타내 주셨는데 지금은 사도가 없으니까 그런 이적이 잠재된 것입니다. 그 대신 나타난 것이 성경 계시의 완성이고, 사도의 이적은 성경의 진리성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주신 이적이었습니다(히 2:4). 그러니까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적을 구하기 전에 성경에 복종하는 능력을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에 복종할 줄 아는 성도가 곧 초대 교회를 본받는 것입니다.

5. 46절에서 “모여서 예배드리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모여 찬송, 기도하고 성경을 배웠으니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한 탓이겠지요.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성경을 배우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6. 사랑의 친교입니다. 모든 소유를 하나로 뭉쳐서 합동 관리한 줄 압니다. 자기 재산이란 소유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떡을 뗐다” 하셨는데 이것은 성도의 친교 모임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성찬 예식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성도가 친교할 때 무슨 욕심이나 이해 관계가 있겠습니까? 서로 “나는 배고파도 참을 것이니 너 많이 먹으라” 하였을 것이니 그 세계에 사랑이 얼마나 충만하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집사, 장로 같은 직분은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여섯 가지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전도, 성경 교육, 기도, 말씀 권위에 굴복, 회집과 예배, 물질과 타산을 초월한 사랑의 친교가 있는 곳이 바로 원조 초대 교회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93과 안디옥 교회의 특징 (행 11:19~26) 목록으로


이 본문을 근거로 한 설교가 사명(전도) 설교집에 수록되었으나 자주 묵상하는 중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하게 되었고, 요즈음 큰 교회를 제외하고 개척 교회를 시작하시는 목사님들이 교회가 포화 상태에 이른 입장에서 기발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개척 교회를 성장시키기 어려운 상황을 많이 목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척 교회를 시도하는 사역자님들에게 조언을 하고 싶은 뜻도 있고, 저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70 정년 후에 작은 교회를 섬겨 보았으면 하는 의욕에 차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큰 교회로 끌려갑니다. 작은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의 고갈로 어려움 당하는 기간이 너무 깁니다. 또 교회가 시작부터 재정 문제와 싸우는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과거의 전통은 교역자가 가난을 극복하면서 또 교회 생활과 함께 어려운 생활을 유지해 가면서 목회를 하니까 이중 부담을 안고 재정 중심의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오늘날 같은 물량주의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물량주의는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앞세워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증거를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겠다” 하셨고(엡 1:4, 요 17:9), 주여 주여 하는 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를 원하신 것”(마 7:21)을 잘 아실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나타난대로 “참 그리스도인”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으로 일컬음 받는 것”이었습니다.

1. 안디옥교회는 최초에 이방인이 전도한 교회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처음에는 유대인 성도가 스데반이 순교 당할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하여 베니게(갈멜산 북쪽), 구부로(지중해 동북쪽의 큰 섬), 안디옥(시리아 북쪽의 도성)에 가서 유대인들에게만 전도를 하였으나 이방인들도 전도를 받았습니다. 20절을 보시면 “그 중에 구부로와 구레네의 몇 사람이 안디옥으로 와서 헬라인에게 전도를 한 것”입니다. 구부로는 키프로스라는 섬나라로 이방 지역이고, 구레네도 애굽의 북쪽 항구인즉 역시 이방 땅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전도를 받고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을 상대로 전도를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니까 율법주의 장벽 때문에 잘 안 되었겠지요. 요즈음 기성 교회에 나가던 교인들을 붙잡고 “나와 함께 개척하자”하면 잘 안 옵니다. 그 이유는 “개척 교회는 적은 교인이 목사 생활비 주어야 하고 예배당 지어야 하며 사람간의 친교가 적고 예배의 규모가 웅장하지 않아서 은혜가 적다”고 핑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기성 교인보다 불신자 전도가 낫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이면 신앙 생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물질 사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적 친교나 예배의 악세사리도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예배의 악세사리로 아는 사람들이 예배 순서를 다양하게 변형시키는 것을 봅니다만 하나님이 그런 것을 보신다고 생각합니까? 마치 자동차의 디자인을 변형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며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겉 모양 좋은 차를 사시겠습니까? 튼튼한 차를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겉보다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양새보다 질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가 되려면 믿음 중심을 바로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외식이나 물량주의에서는 벗어나는 교회 또 벗어나는 신앙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특징은 “주의 손이 도와주셔서 수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생명체이기 때문에(요 3:3) 사람이 만들거나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믿게 하셔야 신자들이 증가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누구에게 맡긴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실력 있고 든든한 집에 맡기시겠지요. 하나님도 자기의 자녀를 덕 되게 할만한 교회로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교인들에게 짐을 지우기 전에(짐은 스스로 지어야 함) 자유와 은혜를 끼치는 교회의 풍토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만한 교회가 되도록 힘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복 받을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인스 워드가 복 받은 이유는 그가 어머니(부모)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먼 곳의 좋은 대학에 가지 않고 가까운 대학에 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효도가 성공을 주실 만한 축복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엡 6:1~3). 모든 생활은 물론 교회의 질적 환경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십시오.

3. 감독이 철저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한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나바는 사도입니다(행 14:14). 사도는 교역자이기 전에 감독자이거든요. 엡 2:20을 보시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의 감독을 받았다는 것은 교리와 사상 또는 신앙의 기초 질서가 바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허탄한 것을 추구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신앙이 아니겠지요. 또 진리를 삐뚤게 이해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이단이겠지요. 따라서 표준과 정통은 하나인 것입니다. 금메달이 하나인 것처럼 가장 건전한 것도 하나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교육의 특징이 있는 교회입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울이 율법에 능통하면서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과 신앙의 교사로서 적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을 바로 가지려면 교육을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셔야 하고 교회의 사명도 아셔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신앙 생활을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하는 것도 배우셔야 하겠지요. 마귀의 역사는 세상 지식과 함께 발전하니까 성도의 지식도 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세금 문제, 양심 병역 문제, 종교사학법 개정 문제도 신앙과 관련한 지식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교육이 중요하고,

5. 자격 취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 만하여 준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교회가 성도의 자격 또는 직분자의 자격을 줄 때 상당하게 갖춘 자에게 주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특징을 교회 개척의 목표로 세우신다면 꼭 성공할 것입니다.

제94과 목회자의 자유와 권위 (딤전 4:12~13) 목록으로


“목회자의 자유와 권위”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많이 경험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고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성도에게 신앙적 자유가 있어야 하는 만큼(성도의 자유란 설교 참고. 갈 3:23~29) 목회자도 자유롭고 또 권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목회자의 자유를 말씀드리고 다음에 권위로워지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목회자의 자유에 대하여 우선 목회자는 신앙 생활의 선생님이니까 스스로의 신앙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 8:32을 보시면 “진리를 알 때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셨고, 갈 5:1에서는 “그리스도가 자유를 주시며”, 딤후 2:9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하셨으니까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자기 신앙으로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몇 가지 더 자유 누릴 요소를 찾는다면

1) 거리낌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거리낌이란 자기 양심의 가책도 받으면서 외부로부터 지적받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연합회 책임자가 학력을 속였다고 문제된 일이 있었고,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문제로 지적을 받습니다. “누구는 거짓말을 한다, 누구는 치부를 한다, 누구는 교리가 불건전하다, 누구는 독재를 한다”는 등등으로 지적 받는 일들이 많은데 이런 지탄 속에 빠지면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래서 최대한 거리끼는 일을 해소시켜야 할 것이요,

2) 자기 십자가가 너무 무거우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가족이나 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무겁게 지고 목회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홉 식구를 부양하면서 목회를 했으니 생활비와 목회가 결탁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래도 돈이란 관념을 멀리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개혁 교회는 반드시 목회자가 생활비 문제를 교회에 짐 지우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역자의 생활 대책소로 전락시켜도 안 되고, 교역자도 그런 것 때문에 부자유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홀가분하게 진리만 증거할 수 있어야 자유롭고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타의 개입이 없어야 합니다. 장로가 많은 교회에서 목사의 정치적 자유는 거의 없는 것이 장로교회의 정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장로 목회 하였지 내 마음대로 목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누구의 간섭없이 받은 은사대로 목회하고, 사명도 스스로의 의욕과 자원으로 하고 자기 신앙 양심대로 할 수 있어야 자유로운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목사인데 목사가 교회의 의자 하나를 마음대로 못 옮길 때가 있습니다. 잔소리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에 자유 대신 많은 스트레스를 받겠지요. 그래서 목사도 목회상의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원칙적으로 따지면 그 자유를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지식으로 받아서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거리끼는 것이 없고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능력이 있으며 또 타인의 통제 없이 스스로의 양심과 은사대로 실천할 수 있을 때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런 목회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2. 목회자의 권위 문제입니다. 딤후 6:11을 보시면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셨고, 본문 12절에서는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하셨는데 목회자가 권위 없이 무시를 당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본문의 “연소함”이란 막연하게 나이 적은 것을 무시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이가 적어도 유력한 입장이면 무시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에 젊은 목사가 들어오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8세 어린이가 대학생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지요. 누가 그 어린이를 어리다고 무시하겠습니까? 목사의 권위도 유력하면 올라서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력해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지요. 본문에 보시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라” 하셨고, 또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가 이상의 말씀만 잘 실천하면 당연히 권위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에 모범이 되고 사명에 몰두하니 시험에 들 여가도 없고, 흠 잡힐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큰 그릇으로 쓰시겠지요. 제가 목회 생활을 하면서 목회자의 권위를 생각해 본즉

1) 우선 목회 역량이 넉넉해야 하겠다고 느낀 것입니다. 만일 말씀이 딸리고 경험이 딸리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방도가 부족하다고 하면 권위를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경력이 적은 젊은 사역자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역량을 축적한 상태에서 목회에 임할 때 권위를 세울 수 있고(이 권위는 명예욕이 아닌 사명 능력임),

2) 실천의 모범이 있어야 합니다. 천여명 모이는 교회가 도시에서 촌으로 이사를 갔는데 교인이 한 명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목사님이 가족도 없이 혼자 있으면서 검소하게 살며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목사님 말에 이의를 붙이는 이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활 실천의 모범이 되면 권위가 있게 된다는 사실이요,

3) 하나님이 붙드시고 쓰시는 은혜가 현저히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목회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실 때 그를 강물에서 건질 때부터 80년 동안 키워서 쓰셨고, 여호수아를 쓰실 때도 40년 동안 연단시켜서 쓰셨습니다. 이 뜻은 목회자가 성령님의 지도에 붙잡힌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역사할 수 있을 때만 권위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령님이 나를 붙들고 쓰신다”는 확신과 함께 사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자유는 거리낌 없고,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지며, 독자적 의지로 행할 수 있어야 하고, 권위는 역량이 풍부하고 실천에 모범적이며 성령님의 붙드심이 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95과 교회의 표준과 요건 (딤후 2:1~7) 목록으로


교회의 정화와 개혁의 차원에서 “교회의 표준과 요건”이란 제목으로 구상해 보았습니다. 교회의 표준은 물량주의나 전통에 두지 말고 오직 성경에만 근거하여야 하고, 교회의 요건은 참신한 교사(복음사역자를 뜻함)와 그 교사에 대한 철저한 감독 대책과 교육과 전도와 사랑 실천이란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교회의 역사는 2000년이고, 우리나라의 교회 역사는 120년쯤인데 표준은 성경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의 교회 생활이 과연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같으며 성경에서 교훈하는 목적을 잘 이루어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피고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지도자들이 해야 하겠지요. 만일 지도자들이 전통에만 의존하여 맹종한다면 혹 잘못된 일이 100년, 1000년을 가도 고치지 못하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1. 바른 교회의 표준은 성경에 있고, 초대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물량주의나 전통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1)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믿으며 깨달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성경에 있고, 그것을 요약한 것이 교리인데 이것을 옳게 터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영감으로 말씀을 주셔서(살전 2:13) 바른 진리를 나타내셨고, 혹이라도 누가 진리 아닌 다른 말을 하지 않나 하여 사도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으며(행 11:22, 13:46) 수시로 교리의 일치를 점검하였고(갈 2:1~9), 또 논쟁이 있을 때는 사도회에서 토론한 후 지도하였습니다(행 15:28~29).

2) 정치에 관한 사항인데 이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회에서 작정한 규례를 만들어 지도한 것입니다(행 16:4). 이 작정한 규례가 구체적으로 전달된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닌 행정에 관한 것이니까 신축성 있게 만들어쓰되 신앙적 원리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지금 읽으신 말씀에서 교회의 요건에 대한 상당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도는 기독교의 기초 작업(표준을 세움. 엡 2:20)을 한 사람들인데 교회와 관련된 직책을 수행한 분이 바울사도이고, 바울이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1) “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목사)요 교사인즉 평신도 같아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한 것입니다. 죽음이나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하면 좋겠지요. 요즈음도 교역자는 강해야 할 것입니다.

2) “들은 바(복음 신앙, 성경 지식)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 하셨으니 옳은 사역자를 후계자로 세워 계승시키라는 뜻입니다. 신앙과 사명이 바른 사람에게 계승시키는 문제가 교회의 큰 요건입니다.

3) “좋은 군사처럼 충성하라”는 말씀인데 군사는 “고난을 각오해야 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헌신적 사명) 또 법대로 경기하는 사람처럼 법을 지켜야 한다” 하셨고,

4) 농부가 수고하고 곡식을 받는 것처럼 수고한 만큼 대우 받는 것은 괜찮다(직업적 사명의 경우) 하셨으며

5)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총명을 주실 것이라”하므로 배워가면서 숙달될 것까지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표준은 성경이고, 모범은 초대 교회인데 만일 저희들이 교회를 새로 시작한다고 가상할 때 필요한 것(즉 교회의 요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기성 교회에 들어가서 그 교회를 정화시킬 수 있겠는가?”할 때 “가능성이 없다. 그 이유는 30~50년의 시간이 없고 전통이 뿌리 박힌 것을 변하려 하다가 쫓겨날 것이니까 안 될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 또는 기성 교회와 상관없이 나 혼자 성경만 보고 새로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우선 물량주의를 탈피한즉 좋고, 내가 (신학을 배운자인즉) 직접 성경을 연구하면서 거기에 맞추어 나가니까 좋을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것

1) 성경과 신앙 생활을 바로 깨달은 교사(목사, 가르치는 사람)가 있어야 합니다. 한 30년쯤 바로 배우고 연단 받은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히 성경과 신앙 원리를 나타내 줄 것입니다.

2) 가르치는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 안 한다는 보장이 없은즉 감독기관을 두어야 하는데 현재의 체제처럼 노회나 총회로는 미흡합니다. 그 이유는 치리회가 문제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속히 식견을 갖추어 상회와 함께 감독해야만 좋을 것입니다. 배우는 자와 감독자가 서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요,

3) 직무 성격에 따라 직분을 주는데(가르치는 자는 교사, 다스리는 자는 장로, 구제, 봉사하는 자는 집사, 전도, 기도하는 자는 권사 등) 반드시 자격과 책임에 따라 주고 자격과 책임이 이행되지 않을 때는 자동적으로 면직되는 제도를 만들어서 교회의 직분이 명예꺼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책임 이행을 못 했으면서 직분 명예만 누렸다면 그것은 부끄럽게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4) 복음 사역자가 사례(생활비)를 받고 교회 일을 할 때(성경적으로 허락된 직업적 목회) 양편의 유감이 없도록 지혜롭게 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 교회의 목사 청빙법인데 부작용이 없도록 잘 계약해야 하고 또 교회측과 목회자가 잘 실천해야 합니다.

5) 잘못하는 사람을 책망하는 법이 있지요(마 16:9, 고전 4:21, 딛 1:13). 그런데 이 법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은 완악한 자가 반항하는 이유도 있지만 증거를 수집하여 법대로 재판하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어떤 완악한 성도는 권징을 은혜로 받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벌을 청할 수 있는 풍토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런 교회와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왜 그런 교회가 없을까요? 역시 교회의 요건이 잘못 되어 있고, 기능이 흐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부작용을 수술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96과 교회의 순결 (엡 5:27, 딤전 3:15) 목록으로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목사의 직분을 갖고 있는 동안 순결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의 순결한 교회란 교인들이 전부 순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 교회의 방침과 목표가 순결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의 순결은 일시에 성취되지 않습니다. 점차로 좋아지고 점차로 예수님을 닮고 점차로 거룩해집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외식자)가 곡식(성도) 사이에 같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때가 되면 가려지겠지요(마 13:24~30).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가 나가는 방향이 외식이나 거룩하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것은 마치 배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태우고 가지만 배의 가는 방향은 일정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엡 5:27을 보시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 뜻이 교인 전부가 거룩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천국을 비유한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 없고 티 없는 것을 그 교회의 지도 방침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샀는데 어느 부분에 약간 흠이 있다면 그대로 두겠습니까? 이와같이 주님의 몸 된 교회도 흠이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결한 교회의 의미를 모른채 사람 중심의 교회를 만들려고 결사 강행하는 교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딤전 3:15에 보시면 “이 집(교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씀을 듣다 보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그래서는 안되는데”하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1. 우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이웃에게 덕과 복은 주어도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집회소를 주택 가까이 지어 놓고 큰 소리를 질러서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꼭 큰 소리가 필요하면 장소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이웃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여 예배당을 지을 때는 이웃의 동의서 받는 일까지 생겼으니 이것은 교회가 이미 이웃들에게 인심을 잃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람 잠 못 자게 하면서 찬송하고 소리 지르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2.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을 의지하면 안 되겠지요. 세속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입니다. 물질, 지식, 인기, 사람의 수단 그런 것들이지요. 물질을 의존하기 위하여 나라의 세금을 안 내려 하거나 스포츠, 연예인을 의지하여 부흥에 덕을 보려하거나 인간적인 물질 거래 방법(계 모임, 보험, 납골당)까지 다 교회로 들여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업체처럼 만들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의 것이나 정부에 의지하며 신앙의 약한 면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3. 교회는 물질 때문에 걱정하는 단체가 되면 안 됩니다. 행 3:6에서 베드로 요한은 “은과 금이 없었다” 하였고, 초대 교회 당시에는 흉년 든 곳에 구제금을 거두어 전달한 사례 외에는 교회 재정 문제를 거론한 말씀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돈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돈을 빌리러 가거나 예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 집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란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권위와 진리의 권위를 세워 일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진리를 앞세워 일하지 않고 돈을 앞세워 일하려니까 돈 걱정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지요. 돈 걱정 하는 일이 전도자의 생활비라면 그 전도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마 16:24)을 다시 음미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돈 걱정을 해야 한다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회에 나와서 이중 짐을 져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쉼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4. 교회에는 외식과 사치가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외식과 사치와 낭비를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나타내시고도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외식은 곧 겉치장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오면 예수님과 진리만 보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물이나 성의를 보고 권위적 느낌을 가지면 안 됩니다(요 6:12). 그래서 겉치장, 외식, 사치, 낭비 같은 것이 나타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 낭비가 있다면 그것도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 위반될 것입니다(엡 5:16). 교회 단체가 친목이 불가피 할 때 1년에 한 번쯤 야외에 나갈 수 있겠지만 기관별로 다 다니면 결국 낭비를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대로 지도하는 기관임을 나타내려니까 절제하고 단속을 하는 것입니다.

5. 교회 안에는 인간적 명예 주의가 없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존경하면 되는데(롬 12:10) 어떤 이는 목사라고 영광 받고 누구는 교회적 공로가 있다고 영광 받고 누구는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광 중심으로 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성직자나 성도가 있어도 적당히 존경하면 됩니다. 결코 인기주의나 인간 우상주의로 나가면 안 됩니다.

6. 교회는 사랑의 기관이고 세계의 교회가 하나란 점을 감안하여 결코 자기 교회 이기주의가 있으면 안 됩니다. 설령 이기주의를 버리다가 교회가 안 될지라도 이기주의 욕심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 팽배, 명예욕 팽배, 세속주의 팽배가 가득찬 현실을 지적하셔야 할 것입니다.

7.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셨으니까 교회에는 하나님만 살아계셔야 하고, 진리로만 근간(기둥과 터)을 이루어야 하며 사랑만 나타내는 그런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97과 생활 예배와 공예배 (요 4:24) 목록으로


“생활 예배와 공예배”란 제목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1. 우선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영”이란 뜻은 인격적 존재로 현상계를 초월하여 무소부재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성도와 늘 함께 계신 것입니다(마 28:20, 딤후 4:22, 엡 3:17).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믿으시면 우선 하나님을 찾으러 다른 곳으로 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예배하는 자”라 하셨으니까 예배의 뜻을 아셔야 하는데 많은 성도님들이 “예배”라면 공예배, 구역 예배, 가정 예배, 무슨 의식 예배를 떠올리게 되고, 또 의식적 순서 진행을 생각하실 것인데 그것은 예배의 목적이나 의미가 아니고 의식 순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중에 신령과 진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을 예배의 요소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예배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신령과 진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먼저 신령의 뜻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 영에 접촉되는 것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령과 반대되는 것은 “세속적이고 정욕적이며 현세적인 것들”입니다(요일 2:15~16, 약 1:26~27). 그러니까 그런 요소들을 최대한 제외시키고 어디까지나 영적 은혜(믿음, 말씀, 성령 충만, 신앙적 요소)에 입각하여 예배 또는 생활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2) “진정”이란 뜻은 하나님을 느끼는 믿음(마음가짐)의 진실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眞은 진실을 뜻하고, 情은 마음의 느낌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예배에 그런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1) 성도의 거룩을 기뻐하십니다(요 17:17). 이 거룩의 의미는 정결하여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롬 8:29). 정결 또는 거룩해지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로 됩니다(딤전 4:6). 그래서 예배 의식 속에 말씀과 기도가 필수적 순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또 회개, 권징도 거룩을 위해서 필요한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찬송을 기뻐하십니다. 계 5:12에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때 찬송을 부르는 것인데 이 찬송을 되도록이면 새노래로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시 33:3).

3) 하나님은 자기 뜻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삼상 15:22). 이 순종이 곧 계명 실천이지요. 십계명 중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계명이고, 다음 계명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 계명인데 이것이 잘 지켜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예배 행사에 믿음과 사랑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사명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를 들면 구원을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써 전도하는 일 같은 것입니다. 선교, 봉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선교와 사랑 목적에 따른 헌금을 하는 것이며

5) 성도의 친교를 기뻐하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하셨기 때문에 예배 행사 중에 성도의 친교가 있는 것이고,

6) 하나님은 성도 개인과의 대화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며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살전 5:17, 마 6:6)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상의 여러 가지 요소를 개인이 시행하면 개인 예배가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시행하면 공예배가 되며 모든 성도가 개인적으로 생활에 접목시키면 생활 예배가 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주제를 “생활 예배와 공예배”로 정한 것입니다.

5.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공예배와 생활 예배를 다 중요하게 여기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는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 줄 압니다. 또 어떤 분들은 혼자 드리는 예배나 생활 예배에 대하여는 느낌조차 없는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제가 몇 일 전에 강원도 횡성의 더덕 농장에 다녀왔습니다. 농장에서 더덕 엑기스를 한 잔 주어서 먹고 왔는데 그 엑기스는 더덕을 3일간 끓여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농도가 좋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는 집에서 먹기 위하여 4㎏쯤을 사왔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공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특별한 엑기스를 먹는 것과 같고, 개인적 또는 개인 생활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사 온 더덕으로 반찬을 해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공예배는 전문가가 준비하기 때문에 영적 신앙적 농도가 크고, 개인 예배는 공예배만 못하지만 개인 생활의 시간적 비중이 크기 때문에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표현한다면 공예배는 특식과 같고, 개인적 생활 예배는 일상 생활에 먹는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6.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셔야 할 것은

1)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란 점입니다. 단체가 있어서 내 신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 개인을 상대로 믿음을 주셨고, 또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시기 때문에 개인적 생활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개인적 생활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신다면 개인의 생활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요소를 시행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 찬송, 기도도 있고, 회개와 순종도 있으며 사랑과 사명 실천을 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공예배란 단체적 경건을 뜻합니다. 개인이 해 오던 일을 교회에 와서 단체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경건과 단체적 경건의 차이는 단체적 경건을 행사할 때 전문가의 지도를 받는 것 외에는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전문가의 지도란 바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공예배의 비중이 그만큼 큰 것인데 그 대신 개인적 생활 예배는 독자적 행사로 드리는 것이니까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98과 좋은 교회 되는 방법 (딤전 3:14~16) 목록으로


1. 제가 부산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어떤 교역자 모임에 갔다가 부산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송도교회에 시무하신 김마태 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좋은 교회 되는 말씀을 하셨다”는 생각을 하였고, 오늘 “좋은 교회 되는 방법”을 말씀드리면서 그 말씀부터 소개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김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열 사람이 한 사람의 뜻은 맞출 수 있어도 한 사람이 열 사람의 뜻은 못 맞춥니다. 목사 한 분을 모셔 놓고 기백명의 교인들이 다 자기 뜻만 맞추라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은 예수님만 따르시오 하고 장로님은 목사님의 뜻만 따르고 교인들은 장로님의 뜻만 따르면 모두가 예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화목하게 일치시키는 좋은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들은 때는 40년 전쯤입니다. 그때도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계몽을 한 줄 압니다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문제가 더 좋아졌을까요? 나빠졌을까요? 제 견해로는 세속화도 더 많아졌고, 교파와 교회가 많아지면서 부정적 요소들도 더 많아졌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목회 경험을 갖기 전에는 교역자님들이 다 성자 같은 줄 알았는데 제가 경험해 보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데는 초보에 불과하고 목사가 예수님을 안 닮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가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수님 따르고 장로가 목사 따르며 교인이 장로를 따르면” 참 좋겠는데 문제는 목사가 예수님을 본받아 따르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목표는 예수님 아닌 곳으로 가겠지요. 그래서 목사를 문책하고 바로 잡는 기관이 노회인데 노회가 그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노회 안에 고양이 목에 방울 달러 갈 목사, 장로가 없고, 혹 있다고 하여도 고양이가 가만히 있지 않고 으르렁거리기 때문에 방울을 달수가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대책을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그 대책이 바로 교인 스스로가 성경으로 예수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목사님이면 그 교회에 나가고 아니면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노회나 총회도 방울 달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이미 돌아가신 주 권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분당의 어떤 교회에 나갔다가 나왔는데 나온 이유가 무언가 하면 “그 교회 목사님이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예배당 완공이 덜 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박사된 것을 광고하는 주일에 자기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은 속히 예배당을 완공한 후 박사 가운을 입고 이 예배당에서 결혼 주례를 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 정신이 틀렸다 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인이 판단 안 하면 깨우쳐주고 바로 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제가 오래 전에 교회를 풍자한 만화를 본 일이 있었는데 그 만화는 일본의 어떤 신학자가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 그림은 목사가 리어카를 타고 앉아서 채찍을 들고 있는데 그 리어카를 끄는 사람들은 교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권위주의를 가지고 “순종해라, 섬겨라, 목사 해롭게 하면 벌 받는다”하면서 교회를 독재로 다스리고 교인들을 들볶는 형의 교회를 풍자한 것이고, 두 번째 그림은 교인들이 리어카를 타고 앉아서 채찍을 들고 있는데 그 리어카를 목사 혼자서 힘들게 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짐작하시겠지만 “우리가 헌금해서 월급 주니까 목사는 교인의 비위를 맞추고 교회를 부흥시켜서 돈 많이 나오게 하라”는 목사 고용형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교인이 왕입니다. 목사는 하인이 되어 있고요. 목사가 교인 말을 듣지 않거나 교인과 코드가 맞지 않으면 나가야 하는데 나가면 무엇으로 가족을 먹여 살립니까? 난감한 일이지요. 그래서 “나 죽소”하고 “예수님은 그렇지 않은데요”라는 말도 못하고 살아가는 교회를 뜻한 것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그 리어카에 예수님이 타고 계신데 목사가 앞에서 끌고 교인들은 뒤에서 미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니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목사가 영광 받는 곳도 아니고 교인이 영광 받는 곳도 아니며 또 목사가 교인을 힘들게 하는 곳도 아니고 교인이 목사를 고용하는 곳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고, 목사나 교인들은 다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충성하는 일꾼들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좋은 교회 되게 하시려면

1) 인간 중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인간 우상주의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것을 어디서 찾느냐? 하시겠지요. 당연히 성경에서 찾고 예수님을 표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기대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다 내가 사랑하고 도와줄 대상일 뿐 절대 의지의 대상은 아닌 줄로 아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셔서 어떤 이에게 사랑을 기대하였다가 기대한 대로 안 되면 크게 낙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사람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멀리 하십니다. 시 146:3에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야곱의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러 나오는 곳이지요. 사람을 믿거나 의지하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좋은 교회 되게 하시려면 자립 신앙으로 서야 하고, 판단도 잘 하셔야 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99과 교회 운영의 문제 (행 9: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 운영의 문제”란 제목으로 묵상을 하겠습니다. 이 제목의 문제는 교회가 재정 문제를 안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초대 교회 형편을 말씀하신 것인데 “유다,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지방 교회를 포함한 것)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하였다” 하시므로 초대 교회로서의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씀하셨고, 또 행 16:4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지도자들. 요즈음으로 말하면 총회)이 작정한 규례(교회 헌법)를 주어서 지키게 한즉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하므로 역시 문제가 없는 교회의 모범을 나타낸 것입니다. 9:31에서 “그러므로”한 것은 사울 같은 핍박자가 개종하므로 교회가 극단적 핍박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외에도 진리와 사랑의 역사가 컸을 것입니다. 교회 운영의 문제점을 생각함에 있어서 미자립 교회와 자립 교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고, 문제없는 경우와 있는 경우를 살필 수 있습니다.

1. 우선 교회라는 형태를 이루기 전에 전도 사역을 살피면 눅 8:3에서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전도하러 다니실 때 동행하는 여인들이 자기들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는 말씀이 있고, 마 10:9~10에서 예수님이 전도자들을 파송할 때 “너희가 전대를 갖지 말고 빈손으로 나가라 그리고 어느 촌에서나 합당한 자를 만나면 그 집에 유하라” 하시므로 전도자의 숙식 문제를 섭리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시사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적으로 사용하는 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동리에 들어가 사 온 일은 없지만(마 14:15) 제자들이 무리와 함께 공금으로 사 먹는 문제를 막으려 하시지는 않았습니다(막 6:37, 요 6:5~7). 그리고 나라에 세금을 바칠 때 공금에서 내게 하시지 않고 특별히 마련하여 고기 입에서 나온 돈으로 내라고 하셨습니다(마 7:24~27). 그 다음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성전 문전에 구걸자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내게 은과 금은 없다”하고 능력을 나타내어 일어서게 하였지요(행 3:6). 이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이 없다”는 것은 돈을 앞세워 포교에 힘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49:6~7에서 “재물로는 속죄와 구원을 못한다”고 선언을 하셨으니까요. 그러면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을 때 비용을 전담하였는가? 하면 기도하고 파송만 하였고, 비용 전담에 관한 것은 말씀이 없었으며 바울은 자비량으로 전도하셨을 뿐 아니라 천막 직업으로 동행인들의 쓸 것까지 공급하면서 사역을 하였습니다(고전 9:7, 행 20:34). 그러다 보니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의 배려를 받기도 하셨고(행 16:15), 로마 옥에 계실 때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선물을 받기도 하셨는데(빌 4:16) 문제는 교회가 물질의 짐 때문에 어려움 당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처럼 자립 교회가 탄생하였을 때 복음사역자에게 교회가 생활비 주는 제도를 인정하신 것입니다(고전 9:9~14). 자립 교회에서 생활비를 부담하였으니까 재정적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 교회는 재정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한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미자립 교회의 운영상 어려움과 그 교역자의 궁핍함 때문에 호소해 오는 편지를 접하면서 한국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명예가 말이 아니고 교역자의 명예도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미자립 교회에 운영상 문제없을 경우와 문제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자립 교회의 복음사역자가 신학을 다 배운 후에 자기 생계 문제를 자비량으로 해결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면 아무 문제가 없고, 또 집회소 문제는 교회 성장에 따라 늘려 가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문제가 있는 교회는 교역자가 생활 대책을 교회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교인 하나가 나와도 헌금을 추구하고 여러 교회에 보조를 청원하므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교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짐 지우려 하지 말고 형편대로 대접을 받으면서 교회를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자립형 교회가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3. 자립형 교회의 운영 문제입니다. 여기의 “자립”은 교역자(그 교회에서 시무하는 사역자들)들의 생활비를 줄 만큼 재정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정이 많으면 많은대로 쓰겠지만 교역자 생활비를 줄 정도는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 교역자가 신뢰를 받고 교회에 기쁨이 있으면 문제없는 자립 교회인즉 반드시 교역자나 교인들은 이런 환경을 확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도 은혜로운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자립 교회는 대부분 헌법에 의하여 계약 조건으로 교역자를 청빙하지요. 그 청빙 조건은 하나님 앞에 서약한 헌법에 준한 것이기 때문에 청빙하는 교인들이나 청빙 받는 사역자가 다 자기 사명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목사는 성실한 목회를 약속하고 교인들은 성실한 협조를 서약하는데 교역자는 도덕성과 영적 사역이 중요하고, 성도는 교역자의 생활 대책과 교역자의 지도에 순응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쌍방이 이 약속을 잘 지키면 은혜로운 교회가 되고 다 행복하며 영광이 되지요. 그러나 어느 쪽이건 책임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 부조리 해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불법성의 문제, 사랑의 문제, 영적 은혜의 핍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합니까? 이것이 징계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현 교회의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계약 기간을 길게 끌지 말고 1~2년씩 정하여 신임 투표에 응하게 하므로 교인들과 교역자의 자유를 다 확보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과 성직을 연계하는 상태에서 해방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12. 사회 정치와 관련 있는 말씀

제100과 정치인들을 위한 기도 (딤전 2:1~4) 목록으로


본문 2절을 보시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고, 3절에서 “이는 우리가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나라와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이 나라가 이런 형편이니 어떻게 정치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워낙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면서 정치를 하려니까 어려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닐 줄 압니다. 제가 보고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이라면

1. 죄를 억제하는 노력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TV나 라디오 홍보물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무엇은 죄이다”라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계몽해야 하고, 죄 지은 자를 공의롭게 벌하여 반드시 죄의 보상을 받게 하므로 어린아이까지라도 죄 지으면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어떤 죄는 큰 죄라도 곧 풀려 나올 것이라”는 인식이 국민의 생각에서 사라지게 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법률적, 도덕적 죄악을 예사로 알고, 폭력적 언사 등 이웃을 불쾌하게 하는 일들이 많은 줄 아는데 근절되게 하여야 합니다.

2. 인생관 철학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현재 인생관 철학은 “돈이 제일이라”는 유물주의, 배금 사상으로 치닫고 있고, 있는 자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족한 줄을 모르지 않습니까? 정부가 반드시 인생관 교육을 시켜서 인생의 가치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TV에 보면 잘 먹는 장면과 건강 강의가 많은 것 같고, 가치 있는 인생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거의 없는 줄 압니다. 혹 있지만 항상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일 것입니다. 사람 사는 가치관을 숭고한 목표에 두지 않고 대부분 사람 표준에 두고 무조건 따르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잘 사는 표준, 즉 인생 철학을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국민노소를 물론하고 성실하게 일하므로 시간을 절약해 쓰도록 계몽하여야 합니다. 건설적이 못 되는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게 하면 안 됩니다. 저도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지만 TV로 인하여 간간히 뺏기는 시간이 많습니다. 자기 일보다 유익하면 TV라도 보아야 하지만 개인, 국가적으로 생산성이 없는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시간까지 뺏으려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주 5일 근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더 많이 하여 소득을 얻게 해야 합니다. 돈 있는 사람은 그 기회에 휴식 아닌 소비만 할 것이니 역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이나 젊은이를 막론하고 “쉬지 않고 일해야 산다”는 집념이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4. 물질 절약 정책입니다. 어느 집이나 물건을 오래 써야 경제가 된다고 봅니다. 나무로 된 가구는 100년을 써도 헐지 않습니다. 물론 유통으로 인한 상호 유익도 필요하지만 나라 살림과 가정 살림이 무엇이 다릅니까? 어느 자치 단체에서 비용이 남았다고 그 예산을 없애기 위하여 공원길을 좋게 하였다면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운 것만큼 효력이 있겠습니까? 저축을 잘 하고 과소비를 안 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시행함으로서 물질과 소비를 막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재벌의 아들이 “청바지를 입고 왔다”는 보도를 들었고, “재벌가가 사치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 넓은 주택을 갖고 누리는 것이 칭찬받지 못할 과소비로 지탄 받는 사회가 되어야 나라의 앞날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5. 앞으로 토지 공개념 정책을 효율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용하는 토지는 사용하는 성질에 따라 세금을 내게 하고, 개인의 소유지라도 사용 안 하는 것은 국가가 매입하고, 국민이 사용하려고 할 때는 매도하고 허가하는 방법을 써서 용도 없는 땅을 국민이 소유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하겠지요.

6. 도심에는 녹지가 귀하지만 지방으로 나가면 산도 많고 경작 안 하는 전답도 많은 줄 압니다. 그리고 도시에 살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인즉 그들로 노는 땅을 개발하게 하는 영농정책을 써서 외국 식품 수입을 감소시킴이 어떨까요?

7. 많은 재벌의 자녀들이 영어 연수차 외국에 갑니다. 많은 여행비를 외국에 뿌리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 외국 연수촌이 한 군데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전국에 몇 곳쯤 설치하면 좋지 않을까요?

8. 나는 세금 제도가 단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부동산을 가졌으면 그 재산세와 그것으로 인한 취득세를 내면 됩니다. 왜 의료보험까지 올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대한 모든 세금은 도로세, 매연 피해 등을 포함하여 기름값에 포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국민세, 지방자치 또는 시민세, 재산세, 취득세, 부가가치세, 거기에 고가 물품 소비세 정도를 포함하면 좋을 것입니다.

9. 옛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을 바닷물처럼 퍼오지 않는 상태에서 “경제만 살리라”하니 말이 됩니까?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가난한 사람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의 게으름과 과소비, 정치의 실수 등으로 빚을 진 나라에 “가난한 자 없게 하라”하지 말고, 점차 생산성 있게 노력하여 차근 차근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10. 마지막으로 단체적 이기주의를 뿌리 뽑는 정치를 연구하셔야 하고, 모든 부조리는 입헌 국가에서 법률적으로 해결하도록 틀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목청 높이는 데모는 국가 발전, 특히 경제 정책에 유익이 없다고 봅니다. 이런 일들이 잘 되도록 기도 합시다.

제101과 통치자가 시행할 것 (잠 14:34) 목록으로


통치자는 나라의 대표자이고, 나라를 영화롭게 만들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대통령이나 정치가들이 어떻게 나라 다스리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나라가 되려면 근본부터 변화를 일으켜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신앙인의 식견으로 볼 때 너무 답답한 일이 많아서 우선 몇 가지만이라도 글로 남겨보는 것입니다. 현재 국민을 대하는 매체는 교육 계통과 매스컴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좋은 교육이나 좋은 방침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정치적, 통치적 의견은 이렇습니다.

1. 국민들에게 죄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집중적으로 교육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V를 오락이나 먹고 즐기는 일에 쓰지 말고 늘 법 지키는 것과 죄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가르쳐서 국민들로 하여금 바르게 사는 법을 세뇌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위 본문에서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앞에서 일하는 정치가들이 죄와 부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정치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사람이 “국법이나 도덕법이나 양심의 법이나 사랑의 법을 어기면 죄가 되고 죄는 나라와 자신을 욕되게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일깨우는 정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지도자의 도덕성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 배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국민 앞에 나서는 대표자는 그래도 인물 중에 인물일 것입니다. 우선 겸손이 보이고, 교양이 있어야 하겠지요. 정치가에게서 겸손과 사랑은 없고 공약과 정권만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습니까? 10억짜리 집에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집 없는 백성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융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가로서 성자를 바랄 수는 없지만 겸손과 상호 존중과 협력과 진실 정도는 나타나야 한다고 봅니다. 의견 차이로 국회가 떠들썩해도 상호 이해와 토론과 협력을 통해서 무난히 항해할 수 있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백을 메우는 교육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3. 나라 살림을 가정 살림처럼 알뜰하게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가정 살림과 나라 살림은 일맥 상통한다고 믿습니다. 가정에서는 절약을 하는데 나라가 과소비를 부추긴다면 모순이 되겠지요. 한동안 명절 때 “사고 파는 유통이 있어야 된다”고 선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내수를 많이 하면 장사하는 사람과 기업은 잘 되겠지만 가정이 저축을 못 하고 빚을 지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저는 먼저 가정이 탄탄해져야 사회와 국가도 든든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이 과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면서 저축하여 집도 사고 세금도 많이 내도록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가끔 나라에 빚이 있고 국민당 빚이 3~4백 만원에 이른다는 말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의 빚을 지게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빚 얻어 쓰는 것이 무슨 능수입니까? 자녀들 보고 “돈 없으면 빚 얻어 쓰라”고 가르칠 부모가 있을까요? 외국 관광이나 음식 선전이나 지나친 상품 광고 또는 물건을 오래 쓰지 않고 버리는 습관 등은 경제에 위배되는 것인즉 열심히 계몽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인간의 생활 철학이 근면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의 생활 철학을 논한다면 마땅히 종교인이나 철학자가 담당해야 하지만 “노는 것이 나쁘다”는 말을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환경과 삶의 목적이 다르지만 온 국민이 가정과 나라가 잘 되기 위하여 “놀지 말고 일하자”는 계몽을 한다면 노는 사람은 병신 취급 받는 문화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놀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죄 라는 것을 철학 또는 종교학적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왜 인간을 비싼 밥 먹고 놀게 하겠습니까? 당장 놀면 건강에 해롭고 비만과 질병이 따르며 그 다음에는 병원 신세 지다가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생애와 사회가 생산성 있기 위하여는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생활 철학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5. 직업의 귀천을 평준화 시켜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기술자나 지식인을 노동자와 같이 대우하라는 뜻이 아니고, 비천한 국민이 힘든 직업에 종사할지라도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인생을 평준화 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나 사무직이 노동이나 농사에 비할 때 취미상으로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하여 직업의 귀천을 보편화 시켜서 어떤 직업으로 돈을 벌었든지 사람 사는 목적만 다 하였다면 “그 사람이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계몽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전문직에 쏠려서 생활의 질서와 균형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6. 진실과 공의는 빛을 발하게 하여야 합니다. 고구려 때 역사도 발굴하는 판에 왜 근대사를 숨기겠습니까? 진실 밝히는 일이라면 인권이 어찌됐던지 밝혀야 하고 고의적(죄인줄 알고 범한 것) 범죄자는 사면 없이 죄값을 치르게 하여야만 공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정치적 범죄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한 이상 정치가들의 불법이나 한탕주의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7.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삶이란 것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만 다하면 무난한 국민이겠지요. 그 정도로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일본인들의 도덕성 교육이 뛰어난 줄 알고 있지만 기성 세대의 실세들은 군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망발을 되살리고 있으니 이율배반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국민성은 우선 도덕성에 기반을 두고 이웃 사랑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야 하며 적어도 “자신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감을 갖고 시행하므로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가 공약을 남발하고 실천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요, 국민들이 뚜렷한 명분 없이 “못 살겠다” 하면서 어수선하게 하는 것도 법치 국가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하여 해결하면 될 것을 왜 소란스럽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102과 정치하는 지혜 (딤전 2:1~2) 목록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마다 정치하기 어렵다는 생각과 함께 정치하는 지혜를 구상해 보게 됩니다. 성경에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정치가를 뽑으니까 백성들 전부가 정치를 함께 하는 것인데 인류 생활의 안정과 고요함이 오려면 끝이 없고 아무래도 “세상은 종말일 올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소요는 물질적 소득 부족에서 옵니다. 인건비가 적다, 정치가들이 개인의 재산상 손해를 준다 또는 권세자들이 인권을 유린했다, 교육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한다는 불평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들은 책임질 것만 말하고, 책임을 못 질 거짓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농사짓는 방법도 지나치게 지도하다가 농민이 손해를 보면 또 보상을 요구하니까 우선 조용함을 유지하려면 지나친 간섭을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이 “이런 정치를 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면 그 공약에도 찬반이 있을 수 있은즉 공약을 안 함이 좋을 것입니다. 공약 없이 정치가를 뽑으려면 그 사람의 인덕과 실력과 경력을 시험 쳐서 뽑으면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지도력은 가장 큰 실력자에게 있다고 봅니다. “인심만 얻으면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하니까 돈이나 예술이나 스포츠 같은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인기를 얻으려는 추세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다같이 잘 살지 못하는데 있지요. 여기에서 잘 사는 표준을 대부분 재물에 둡니다. 알고 보면 재물 가진 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인류를 위하여 공헌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이고, 더 나가서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잘 산 것이 되겠지요. 민주주의가 좋은 것 같으나 반대하는 소수가 다수 의견을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편안치 않은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소수가 강렬하게 반대하는 시책은 융화점을 찾든지 안 되면 그냥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불평과 대립의 씨앗을 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1. 우선 정치적 목표가 국민의 도덕성 앙양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교육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기술과 경제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성은 이해, 양보, 화합, 인내, 사랑, 봉사, 준법 등에 유익을 주는 덕목입니다. 도덕성이 앙양되고 보편화되면 상당 부분 덜 시끄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다 공평하게 살 수 없는 것은 각인의 역량과 노력과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격차를 인정하되 여유 있는 자의 과소비를 줄여서 극빈자의 어려운 부분을 보충해 주는 정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정책을 강하게 쓰면 춥고 배고프며 병들어서 범죄 하게 되는 부작용을 상당 부분 방지할 것입니다.

2.양심 본위의 정치인데 이것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종교는 자신이 유익을 얻되 이웃에 피해 주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만큼 종교로 인한 피해 방지책을 법률로 정하고, 종교 자유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 대신 종교가 국가의 신세를 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요즈음 사학법 통제로 논란이 많은데 정부가 그것을 통제하여 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립 학교에 등록금이 비싸거나 부정이 있으면 그것만 단속하면 되겠지요. 그리고 종교적 사학은 종교적 이념만 그 단체에서 가르치면 좋고 종교 단체가 학교를 사업적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 기독교 이념을 일반 교육과 함께 시도한다면 기독교인 아닌 사람에게까지 종교 행사를 필수 과목으로 넣으면 안 됩니다. 억지로 종교 행사에 참여시켜서 불평을 야기 시키는 것은 하나님도 원치 않으십니다. 기독교는 범 종교와 달라서 택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니까요.

3. 경제와 근면을 하나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 뜻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그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하는 시책입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 노는 것은 죄에 해당한즉 돈이 있는 사람이라도 노는 자유를 주면 안 되고 나라의 발전과 공익에 유익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을 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피우는 대로 해로운 것처럼 노는 것은 노는 대로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통제를 하는 것입니다. 항공 조종사가 3일을 파업한즉 정부 조정권을 발동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노는 것은 나라를 후퇴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의 헌법에 행복의 자유조항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의 발전이나 국민 전체에 불행을 초래하는 모든 잘못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고, 놀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취미에 따라 공익성 있는 일을 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국민 건강에 대한 국가의 시책입니다. 국가가 백성들의 모든 병을 다 치료해 줄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감기 들면 병원에 가도 돈이 적게 든다 하고, 중병을 진단하려면 그것은 보험이 안 된다 하니 여기에 조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일보다 더 심각합니다. 누구의 어떤 병을 치료할 것이며 그만한 의료 시설을 언제 확보합니까? 복잡하겠지만 질병의 급수와 공익성에 기여하는 여부로 순서를 만들어서 더 살아야 할 사람부터 치료 순위에 도움을 받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국민의 이해가 따라야 합니다. 무조건 인권만 주장하면 안 됩니다. 사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과 못 주는 사람 중 한 사람만 치료할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기여하는 사람을 살려야 하겠지요(개인의 인권을 무시하려는 뜻이 아니라 공익성을 강조하는 뜻).

5. 마지막으로 중요한 목표는 교육과 국방일 것입니다. 교육은 세계적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함이고, 국방은 내란이나 외침을 방비해야 한즉 국민된 사람이면 누구나 교육세와 국방세를 내고 의무 감당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앞 일이 복잡합니다. 사람 사는 세계에 죄악성이 사랑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점점 고달픈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끝이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이 세상은 나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신 상태에서 위로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다가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을 가져야 할 것 뿐이라 할 것입니다.

제103과 천륜을 어기는 정치 (삼상 8:6~7) 목록으로


제목은 “천륜을 어기는 정치” 또는 “천륜(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생활 문화”라고도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바른 생활을 하려면 우선 교육을 잘 받아야 하고 또 정치적 힘으로 잘 다스려야 하며 모든 인생은 순리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2~30년 내에 생활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요. 핵가족 제도, 바쁜 생활, 많이 먹고 활동은 적게 하는 것, 아이는 유아원에서 키우고 노인은 나라가 부양하며 부부는 맞벌이를 해야 하고, 남자, 여자는 권리와 책임이 똑같다고 하는 것 등 많이 변했지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천륜을 어김에 있어서 정치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천륜을 모르니까 인본주의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읽은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사사 시대 357년 합하면 약 400년인데 400년 동안 왕이 없이 살았습니다(정부가 없었다는 뜻). 그때에는 선지자와 족장들과 재판관들만 있었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의병장(사사)이 일어나서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했지요. 그런데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 하니까 하나님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다스림을 받자는 것인즉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원하니까 왕을 세워 주시면서 “왕을 세우면 무엇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지요. 왕궁을 다 먹여야 하고, “이래라 저래라”하면 복종해야 하니까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 사는 방법이나 정치에 있어서 천륜을 어기지 않으면 좋겠는데 천륜을 모르니까 그것을 어기는 바람에 더 살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저는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륜을 어기는 정치와 삶이 무엇이냐 하시겠지요.

1. 남녀 동등권입니다. 성경에 “여자가 남자만 못하게 지었다”는 말씀이 없고,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고전 11:11) 하셨으니까 인권은 동등합니다. 그런데 직무도 같습니까? 요즈음에 와서 여자들이 “직무도 같다”하면서 설거지도 같이 해야 한다 하고 미국에서는 95세 할머니가 군대에 가겠다는 식으로 남녀 구별 없이 일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표를 의식하여 그 일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강인한 체질과 부드러운 체질, 1년 임신해야 하고 2년 보육해야 하는 여자가 남자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남자 여자 필히 그 신체와 성격에 맞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천륜이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붙여주실 때 분명히 “돕는 배필”(창 2:18)이라 하셨고,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거의 깨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깨지면 깨진 문화가 정착되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가정 정서에서 사회 정서로 변해 갑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간의 인정도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적되면 짐승 사회처럼 변한다고 보셔도 틀림 없을 것입니다.

2. 남녀 구별을 허는 문제입니다. 여자, 남자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좋으나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가 남장을 해 보십시오. 그것은 율법이 금하는 것입니다(신 22:5).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일 다 하고 싶고, 남자가 여자 일 다 하고 싶어 하다가 결국은 동성애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동성애법을 통과시킨 나라도 많은 줄 압니다. 남자가 가정 주부 노릇을 하면서 보람있다고 하는 사회가 되었지요. 그것은 여성의 직장을 동등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 직무와 체질상 천륜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3. 효도의 계명을 깨는 것입니다. 아이를 어머니가 안 키우고(직장 가야 하니까) 보육원에 맡겨 사회적으로 키우는 것처럼 노인들도 자식이 맡을 필요 없이(맡기 힘든 사회임) 나라가 부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비용은 그 자녀, 그 국민들이 내지만 운영은 나라가 하니까 자녀들은 부모 부양에서 멀어져도 된다는 식입니다. 왜 이렇게 만듭니까? 천륜을 모르는 정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 부양의 책임을 젊을 때부터 가져야 하는데 “나라에서 연금 준다니까 나는 나 먹을 것만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하도록 사회 문화가 변질 되는 것입니다.

4. 벌 주는 일입니다. 성경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신 19:21)는 말씀이 있고, “너 죄 지으면 천벌 받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를 벌하여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지은 사람이 버젓이 활동 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저명한 인사나 재벌가들이 징역 사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죄는 통제할 힘이 없고 따라서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5. 성경에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 쉬라”고 하셨지요(출 20:9). 그런데 5일만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닷새는 힘써 일합니까? 아닙니다. 노는 것을 최고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시간을 뺏어서 전부 오락과 식도락으로 끌고 갑니다. 만일 나에게 권세를 준다면 나는 당장 TV에 뉴스와 교육적인 것만 방영하게 할 것입니다. TV 보시면 거기서 먹을 것 나옵니까? 안 나오겠지요. 먹을 것은 농산물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농산물은 노동과 기술로 나오지요. 농사가 천하지대본이 되는 이유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농산물을 먹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인구가 굶어 죽는 이유는 농산물 수급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바로 우리들) 농사 아닌 방법으로 돈을 잘 벌어서 양식을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인구 중 농사짓는 사람이 적어졌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세계인의 식량이 다 부족하겠지요. 그때 화성에 가서 쌀을 사오겠습니까? 땅을 파서 건져내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일 그 자체가 필수품 생산이어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국민을 오락으로 내몰면서 어떻게 빈곤이 해결되기를 바랍니까? 요즈음 정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공익 요원을 간병인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간병은 70 넘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청년들은 공부할 길을 열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6. 고전 14:1을 보시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 하셨고, 고전 13:13에서는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나라 교과서에 사랑과목이 있습니까? 없지요. 사랑의 “사”자도 없지요. 그러니까 개인 욕심을 통제할 길이 없고 집단 이기주의를 교화 시킬 길이 없지 않습니까? 이기주의를 박애주의로 바꾸는 것이 바로 사랑 교육일 것입니다.

제104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 8:3~11) 목록으로


2005. 8. 30에 진보적 학술 단체와 친일 인명 사전 편찬 위원들 약 20인이 회합을 하여 친일파에 해당한 사람 3090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명단에는 일제 시대에 관원들, 군인들(장교급), 전쟁 자금 대 준 사람들이 포함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인사들도 많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정치적 인사를 든다면 민주당 당수를 지낸 유진오씨를 비롯하여 교육자 김활란, 박흥식, 박정희, 백낙준, 민복기, 김정렬 등이 있고, 기독교 인사로도 48명이나 있는데 정춘수, 양주삼(감리교 감독), 정인과, 송창근, 홍택기, 채필근, 박마리아 등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해방 후에 유명한 목사로 일한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친일파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에 반대 역할을 한 사람들로 명단 발표와 함께 그 명예를 크게 실추시킨 결과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잘한 일이며 공정한 일인가에 대하여 시원한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왜 시원치 않은가? 하면 첫째는 60년 이전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참작하였겠지만 개인적 깊은 생활은 다 알 수 없었을 것이란 점과 둘째는 아무리 기준을 잘 설정한다 해도 무엇 이상은 친일파이나 그 이하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며 셋째는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 정죄하듯 한 사람들이 (물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겠지만) 그 환경에서 친일을 반대하는 애국자적 활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정죄는 죄 없는 자가 하여야 한다”고 성경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법을 어긴 자가 받는 것이고, 이것을 판단할 자는 법을 지킨 자이어야 합당함을 성경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한 여인은 율법 출 20:14을 위반하였고, 그 범죄에 대한 형법 신 22:24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까지 끌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것은 예수님이 “율법대로 시행하라”하실지 안 하실지를 물어서 만일 “율법대로 시행하지 말라” 하신다면 예수님을 종교 재판에 고발하려고 한 것인데 예수님은 적당한 글씨를 써 보이신 후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송사의 빌미를 잡지 못하고 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합당한가? 할 때 예수님은 안식일과 성전의 주이시고(눅 6:5, 마 12:6), 율법의 해설자이신 만큼(마 5:27~28) 그 당시의 지도자들보다 율법으로 더 완전한 분이시므로(마 5:17) 잘못이 있을 수 없고, 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하신 것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사 9:6) 세상에 오신 목적이 정죄나 심판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에(요 3:17) 정죄를 안 하시고 주의만 주시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오늘날도 실정법에 위반된 것이 아니면 주의만 주고 덮어두는 식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정법이란 것은 정부가 국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 나라의 법을 어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는 옛날의 실정법이 폐하여진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것을 문제시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에 종교적 형법이 그러 하였습니다. 주전 600년경에 국권이 상실되어 예수님 시대 이후까지 이르렀고 예수님 시대에도 국권이 로마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에 종교 재판과 실정법도 별개의 것이었으며 종교 재판을 따로 해도 사형 집행권이 없었으니까 율법 실천이 불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데 까지 가능하였던 것은 로마 당국이 유대인의 민심 호전을 위하여 유대인 단체의 청원을 들어주는가 하면 예수님의 문제를 정치적 실정법(종교와 관계없는 소요죄 같은 것)으로 걸어서 무고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취지는 종교 재판 제도가 힘을 잃었기 때문에 율법을 거역하였다 하여도 정죄 재판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과 연계하여 친일파 문제를 대조한다면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는 실정법이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누가 무슨 법을 위반하였다고 할 수 없는 만큼 정죄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왜 애국자가 안 되었느냐? 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교 안 했느냐? 하는 문제도 개인 양심에 달린 것일 뿐 “국권을 상실했을 때는 국민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법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이상 애국 순교를 했어도 개인의 양심으로 한 것이고, 살아남기 위하여 적국자에게 봉사를 하였어도 개인 양심으로 한 것인데 이것을 수십 년 역사가 지난 다음에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친일파다”하여 명예를 손상케 한 것은 많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한국인 판사가 한국인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요, 또 유감스럽게도 죽지 못하여 교편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순교적 개연성도 없는 사람들이 “누구는 친일파다”라고 하는 것은 죄 있는 자가 돌로 치는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논개 기생은 일본군 대장에게 술 따라주고 같이 죽었으니 술 따라 줄 때는 친일이고, 죽을 때는 애국이 된 셈이지요.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본군에 있을 때는 친일인데 해방 후에는 애국을 했다고 공인하는 줄 알고 있고, 6․25는 동족이 나라를 찬탈한 것이어서 반항해야 애국인데 그때에 반항 안한 사람들이 다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5․16은 동족이 정권을 찬탈했어도 그 정치에 협력한 사람들이 아무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라 잃고 실정법 없는 상태에서 총칼로 위협하는데 반항하고 순교할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은밀한 중에서 된 일과 양심 문제는 밝힐 수 없는 중 덮어 놓고 나타난 역사만 가지고 정죄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6․25때 장로 아들이 내무서원들과 합작하여 많은 우익(당시는 반동) 인사를 죽음으로 끌고 가다가 아는 목사님의 아들을 살려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악과 선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정죄하기란 더욱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역사의 근거만 상세히 남기고 판단은 인류의 양심에 맡겼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입니다.

13. 윤리 문제와 이단

제105과 생명보다 중한 것 (막 8:35~37) 목록으로


1. 제가 말씀을 묵상하다가 “생명보다 중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마 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온 천하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목숨은 그보다 더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이 있어서 온 천하를 만나고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 만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한 줄 압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상식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라들이 다 목숨 보존을 위해서 또는 오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은 없습니까? 마땅히 있고, 또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옛날의 여인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장도를 품고 다녔으니 그 여인은 정조와 순결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고, 두 여인 형제가 조개를 잡으러 나갔다가 밀물을 피하지 못하여 죽게 되었는데 한 사람에게만 구조의 밧줄이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언니가 “나는 죽어도 동생 너는 살아야 한다”하고 자기 몸을 물속으로 감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목숨보다 동생의 목숨을 더 중요히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 목숨보다 자식의 목숨이 더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요. 이렇게 생각해볼 때 우리 주위에는 자기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개 주검”이란 말이 있지요. 가장 보람 없는 죽음을 개 주검이라고 하는 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보다 중한 것을 알아보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 잃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소중히 아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단서가 생략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이 제 것인 줄 알고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무시하면서 살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죽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눅 12:16~21에 보시면 어떤 부자가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내 영혼아 내가 재물이 있은즉 오래 살며 누리자”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네가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므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찾는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35절의 해석입니다. 또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하신 것은 예수님과 믿음과 전도 사명으로 죽게 되면 목숨보다 더 귀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보호해 주실 수도 있고, 생명보다 더 귀한 구원과 상급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6절에서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다” 하시고, 37절에서 “무엇과 자기 목숨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셨으니까 이 질문에 성도가 대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미 나온 말씀에서 “목숨은 세상보다 귀한즉 세상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하셔야 하고, 또 “예수님과 믿음과 복음 전파는 목숨보다 귀한 것인즉 그것과는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목숨보다 귀한 것을 생각해 보시지요.

1) 예수 믿는 일이 목숨보다 중하지요. 35절에서 “예수님과 복음(믿음과 전도)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도 된다” 하셨으니까요. 바울사도가 일사각오로 주님을 믿었고, 일사각오로 전도한 말씀이 롬 14:7~8, 행 20:24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음, 복음은 목숨보다 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진실이 목숨보다 귀한 줄 아셔야 합니다. 이 진실이 투명하지 않으면 믿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진실이 같은 뜻입니다. 거짓으로 자기를 꾸민다면 믿음도 거짓으로 꾸밀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진실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계 19:20에 보시면 “거짓 선지자가 지옥에 간다” 하셨고, 또 21:8에서는 “거짓말 하는 자도 지옥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은 우발적 거짓말을 했더라도 속히 회개를 합니다. 따라서 진실은 믿음을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귀한 줄 아시고 진실을 지키고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정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정의는 바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위하여 소중한 독자 생명을 내놓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바로 정의(하나님의 뜻)가 생명보다 소중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약 4:15에 보시면 “너희가…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이것 저것을 할 것이라”고 하였지요. 이 말씀도 주의 뜻이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죄 안 짓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4) 자유가 생명보다 귀합니다. 죄에 속박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것을 보면 죄에서의 해방(곧 자유)이 생명보다 귀한 것을 알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인권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갈 5:1에서 “주님은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가 생명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5) 이웃 사랑이 생명보다 소중합니다. 친구와 나라도 이웃입니다. 요 15:13에 보시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큰 사랑이라” 하셨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하셨으니(요 10:10) 이런 말씀들이 다 이웃 사랑의 소중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도(요일 3:16) 역시 이웃 사랑이 한 개인의 생명보다 소중함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을 때 저희들은 “믿음과 진실과 정의와 자유와 사랑을 위해서라면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106과 인간 생명 윤리 (레 17:4, 신 12:23) 목록으로


1. 요즈음 생명 공학이 발달하는 중 인간 생명의 윤리관 때문에 기대감도 있지만 우려감이 앞서기도 하고 여기에 대한 확실한 신앙적 정립이 없기 때문에 착잡한 심정도 있습니다. 요즈음 황우석 박사의 연구 과정에서 난자 채취 문제가 대두되고 여론이 확충되자 기독교 학자들의 의견도 지상에 많이 나와서 읽어 봅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윤리학자이신데 동아일보에 게재한 글에서 “살아 있는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일이 난자보다 중요한즉 중요한 일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었고, 총신대 이상원 교수는 총신대보의 글에서 “수정의 순간부터 독립된 생명인데 이 논리는 사도신경적 전제라” 하였는데 수정 이전의 난자도 생명 가치에 포함시켜서 “그 난자를 줄기세포의 성격으로 채취함은 곧 그 생명을 죽이는 배아 살해라 하여 의학이 난자 채취를 금해야 하고 차라리 성인의 체세포에서 연구함이 가하다” 하였고, 또 제가 잘 아는 정평수 목사님의 글도 기독 신문에서 숙고하였는데 정 목사님의 글에서 제시한 성경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 지었다”(렘 1:5)는 말씀에서 생명은 복중 배아 당시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점과 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다”(시 139:13) 하셨는데 이 말씀도 역시 생명 착상 당시부터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에 포함됨을 의미한다 하였고, “기성인의 생명 연장을 위하여 배아 생명을 죽임은 살인이라”는 입장을 밝힌 줄 압니다. 이 사상은 총신대 이상원 교수님의 뜻과 같다 할 것입니다. 또 같은 기독 신문(1559호)에서 “생명 존중은 땅의 회복에서 나와야 하는데 곧 퇴비가 열쇠라”는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유기농법에 의하지 않은 모든 식품과 무제한의 수입 식품들이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지적한 것이고, 건강 장수의 비결을 “자연 보존에서 찾자”는 의미입니다. 다 좋은 내용으로 발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 여기에서 제가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것은 생명의 요소와 생명 자체와 성숙한 생명의 차이에 대한 것과 피와 정액과 난자의 차이는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생명 되는 피”(창 9:4, 신 12:23)란 말씀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 17:11),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레 17:4) 하셨는데 이 의미는 피를 가진 모든 생물에 한하되 육체적 생명을 뜻하는 줄 압니다. 육체적 생명은 영적 생명(엡 2:1)은 물론 정신적 요소를 배제한 육체만의 생명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중에서 인간 생명을 성숙시키실 때 정신적 요소가 어느 시점에 주입되는지에 대하여는 알기 어려우나 문제는 존엄성을 인정해야 하는 인간은 어느 시점부터란 것이 명확해져야 할 것입니다.

1) 인간의 존엄성을 사회적 또는 인권적 차원에서 인정받아야 할 시점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 수정되는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장소가 꼭 여인의 복 중에서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요, 어떤 시설에서 되든지 상관없으며 그 수정체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윤리적 문제는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그런 의미에서 영혼과 육신이 조합되었을 때 존엄성 가진 인간이 되지만 이 두 요소가 복 중에서 결합되는 시점을 포착하기 어렵지만 수정되었을 때부터 존엄성 있는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정자와 난자의 가치 문제입니다. 정자는 생산량도 많고 밖으로 배출시키기도 쉬우며 부지기수로 버려지는 실정이고 난자는 희귀하게 발생되고 외부로 빼내는 절차가 어려운즉 이런 생리적 또는 의학적 가치로 볼 때는 정자보다 귀한 것이 사실이나 생명 요소의 가치로 볼 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왜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 생산에 차이를 두셨는지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자와 난자가 독립적 생명체임은 사실이나 그 한쪽만으로는 인간 생명이 될 가능성이 없은즉 수정된 생명체와 동등시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 생명의 일방적 요소일 뿐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난자를 인간 생명과 동등시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보수적 학자들의 견해는 “난자도 인간 생명처럼 존중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정자는 천시합니까? 난자, 정자가 다 잠재적 존엄성이 있을 뿐 수정된 인체 생명과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피는 곧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신 12:23). 레 17:11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하셨은즉 피를 정신이 배제된 육체의 생명과 동일시 하신 것입니다. 모든 육체가 피의 순환으로 생명이 보존된즉 피를 주는 것도 육체 생명의 일부를 주는 것인데 정자, 난자도 피의 일종이 아닙니까? 정자는 남자의 피의 핵이고, 난자는 여자의 피의 핵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요 15:1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 같은 인생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가장 성숙한 생명을 희생하여 주셨은즉 이렇게 성숙된 생명이라도 사랑 목적을 위하여라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주니의 뜻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나 순직자가 상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자기의 난자나 정자를 자의로 제공했을 때 그것을 살인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수정 착상 이전의 생명의 일방적 요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상으로 따진다면 성숙한 생명을 희생하는 것보다 작고 또 자기 아이를 낳아서 누구를 주는 것보다도 적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난자나 정자 그 개체는 인간 생명의 요소로서의 인간의 생명 가치를 능가할 수 없다는 취지로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만큼 기록해 본 것입니다.

제107과 이단에 대한 처방 (딛 3:10~11) 목록으로


“이단에 대한 처방”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처방”이란 말은 약방문 용어인데 병과 관련하여 한의사쯤 되어야 처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단에 대한 처방을 하려면 건강도 알고 질병도 알듯이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중요한 것은 이단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단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1) 한 문자로 설명하면 끝이 다른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다르고 말과 실천이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설명은 모순도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다른 경우는 이단 아닌 경우에도 있으니까요.

2) 고상한 설명으로 이단의 원문은 “하이레시스”인데 다른 교훈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다른 교훈이란 성경의 원뜻과 같지 않다는 뜻이니까 설득력도 있지만 구원 받는데는 문제가 없으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까지 이단에 포함시킬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성경 해석이나 설교를 원리가 아닌 부분에서 잘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합리적으로 이단을 설명한다면 “성경의 기본 원리를 왜곡하는 것이 이단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중요한 것이 기본 원리에 대한 것이겠지요. 이 기본 원리에 대한 것도 선을 긋기가 어렵지만 “구원 문제와 관계있는 중요한 것까지는 기본 원리에 속한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며 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는 것, ② 성경을 가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여기에서 성경을 어떻게 주셨느냐 하는 것은 덜 중요함), ③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는 것, ④ 그 하나님이 절대자요, 유일신이며 창조자요, 섭리자이냐 아니냐? 하는 것, 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 ⑥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속 사업이냐 아니냐? 하는 것, ⑦ 믿음으로 구원 받느냐 행위로 받느냐? 하는 것, ⑧ 천국과 심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⑨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 ⑩ 성령님과 교회와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원리는 믿으나 그 세부 설명에 있어서 성경대로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다 이단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어떤 단체에는 이단 신앙과 정통 신앙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다 싸잡아서 이단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 성찬론, 직분의 권위와 성격, 성경관, 성물과 의식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단은 “구원 받는 신앙 원리에 속한 왜곡과 그 원리를 잘못 실천하는 행위”라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처방을 하시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2.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한두 번 훈계한다는 뜻은 이단자에게 대화나 글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장은 그런데 그 주장은 성경의 이런 근거에 의하여 맞지 않는다”하는 뜻만 한두 번 알리거나 발표하면 되는 것입니다.

2) “멀리 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조용히 신앙적으로 상관하지 말고 또 다투지도 말며 내버려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단자들 소용돌이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들이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요, 율법주의자들 아닙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이단인 이유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하였으니까 확실한 이단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걸어오는 말에 성경적으로 답변하셨을 뿐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외식에 대한 죄는 많이 책망하셨습니다(마 12:19, 23장).

3. 저는 지금도 이단과 다투지 말고 또 원수처럼 미워하지도 말며 멀리 하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멀리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멀리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교제로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단의 사람들이 많은 줄 압니다. 이단의 근본은 불신앙과 철학과 성경을 왜곡하는데서 오는 것인데 누구는 더 이단이고 누구는 덜 이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인정하는 나쁜 이단은 교인을 살살 뽑아가는 이단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은 구원파에서 뽑아갔고, 통일교 쪽에서 뽑아갔는데 교회에서 뽑혀 나가는 수는 아주 희소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의 신앙의 뿌리가 얕은 사람, 다시 말하면 자기 신앙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들이 뽑혀 가는 것입니다. 흔히 뽑혀 나가는 사람을 보면 교리를 몰라서 뽑혀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의 민감성을 부추기는 바람에 뽑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 교회에서 강조해야 할 부분이 성도 개인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교제하도록 만드는데 주력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단이 교인을 빼가는 것은 기성교회에서 교인을 든든한 신앙으로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뺏긴 것이니까 뺏어간 이단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족제비가 닭을 물어 갔는데 족제비 탓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단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체통을 지킨다면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것부터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나 성경을 내세우면서 이단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하나님 없다, 모른다”하면서 불신앙 하는 사람들 중에 더 하고 덜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불신자나 이단은 다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바로 믿게 된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감사하면서 이단 앞에 내가 든든하고 떳떳하도록 신앙 생활을 하시자”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간다는 사람들을 어찌 다 내 힘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