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7분 설교집 11집

7분 설교집(11)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1. 하나님에 대한 지식 9


제1과 참 좋으신 하나님⑴ (히 14:15~16) 9 바로가기

제2과 참 좋으신 하나님⑵ (시 103:7~14) 11 바로가기

제3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삼상 15:22~23) 13 바로가기

제4과 하나님을 배우자 (신 4:32~43) 15 바로가기

제5과 하나님 일의 필수요건 (사 48:11) 17 바로가기

제6과 야곱의 하나님 (창 28:10~22, 35:1~5) 19 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 (히 2:1) 21 바로가기

제8과 예수님의 권위 (요 18:4~9) 23 바로가기


2. 성경 연구에 대한 말씀 25


제9과 말씀 묵상 연습 (마 7:7~8) 25 바로가기

제10과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 (딤후 2:5) 27 바로가기

제11과 성경 연구 자세 (눅 2:46~51) 29 바로가기

제12과 말씀을 상고함 (왕상 17:8~16) 31 바로가기

제13과 성경의 응용 (고후 12:7~10) 33 바로가기

제14과 성경의 활용 (딤후 3:15~17) 35 바로가기

제15과 족보를 살핌 (마 1:1~16) 37 바로가기

제16과 계시 방편 (히 1:1~3) 39 바로가기


3. 기도에 대한 말씀 41


제17과 기도에 대한 말씀 (약 5:13~20) 41 바로가기

제18과 기도 묵상 (살전 5:17) 43 바로가기

제19과 기도 잘 하는 법 (눅 11:1~4) 45 바로가기

제20과 혀가 마를 때 응답하심 (사 41:17~20) 47 바로가기

제21과 기도 불응답 (사 1:13~17) 49 바로가기


4. 은혜를 구함에 대한 말씀 51


제22과 형통한 은혜 (대하 26:4~5) 51 바로가기

제23과 여호와이레 (창 22:14, 빌 4:19) 53 바로가기

제24과 복에 대한 연구 (애 3:38~39) 55 바로가기

제25과 봄비 때에 비를 구하라 (슥 10:1~7) 57 바로가기


5. 은혜를 깨달음 59


제26과 내게 주신 은혜를 앎 (갈 2:9) 59 바로가기

제27과 구원의 즐거움 (사 9:1~7) 61 바로가기

제28과 날 때부터 소경됨 (요 9:1~7) 63 바로가기

제29과 소경이 아는 것 (요 9:24~34) 65 바로가기

제30과 성도의 신분과 책임 (엡 2:19~21) 67 바로가기


6. 신앙생활의 지혜(1) 69


제31과 네 자신을 돌아보라 (갈 6:1) 69 바로가기

제32과 가난을 즐기자 (합 3:18~19) 71 바로가기

제33과 마땅히 알아야 할 것 (호 4:6) 73 바로가기

제34과 강한 자가 됩시다 (딤후 2:1~6) 75 바로가기

제35과 주님과 동행함 (눅 2:41~47, 24:3~17) 77 바로가기

제36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요 13:13~15) 79 바로가기

제37과 믿음의 비밀 (히 10:22) 81 바로가기

제38과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음 (히 11:17~19) 83 바로가기

제39과 인간의 7 종류 (요 9:1~23) 88 바로가기

제40과 히스기야왕의 특별한 점 (왕하 18:1~8, 20:1~7) 90 바로가기

제41과 크게 기뻐함 (요 3:29~30) 92 바로가기


7. 신앙생활의 지혜(2) 94


제42과 경홀히 여기지 말 것 (신 32:15) 94 바로가기

제43과 믿음 생활의 상극 (히 12:14~17) 96 바로가기

제44과 소자의 증언 (마 18:10) 98 바로가기

제45과 독수리에게 배울 점 (신 32:11~12) 100 바로가기

제46과 신앙생활 반복 사역 (사 28:9~11) 102 바로가기

제47과 믿음 생활의 7대 요소 (막 9:23, 히 11:6) 104 바로가기

제48과 믿음 생활의 바라는 목표 (고전 3:10~14) 106 바로가기

제49과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신 32:10~14) 108 바로가기

제50과 믿고 두려워 말라 (신 1:29~33) 110 바로가기

 

8. 영적 휴식에 대한 말씀 112


제51과 무거운 짐을 벗자 (마 11:28~30) 112 바로가기

제52과 쉼을 주시는 예수님 (마 11:28~30) 114 바로가기

제53과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9) 116 바로가기

제54과 가장 중요한 일 (창 28:15~22) 118 바로가기

9. 교회 및 교역자와의 관계 122


제55과 새교회의 목표 (마 5:15~16, 엡 5:27) 122 바로가기

제56과 하나님의 교회 (딤전 3:15~16) 124 바로가기

제57과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⑴ (롬 16:1~4) 126 바로가기

제58과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⑵ (고전 14:1) 128 바로가기

제59과 교회의 부흥 (행 9:31) 130 바로가기


10. 사명과 섬김에 대한 설교 132


제60과 사명자에 대한 이해 (고전 12:4~11, 딤후 2:20) 132 바로가기

제61과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더라 (눅 8:1~3) 134 바로가기

제62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벧전 4:7~10) 136 바로가기

제63과 이사야를 불러 쓰심 (사 6:1~13) 138 바로가기

제64과 의인의 간구 (약 5:16~18) 140 바로가기

제65과 어려운 시대의 선지자 (왕상 17:1~16) 142 바로가기

제66과 선한 싸움 (딤후 4:7~8) 144 바로가기

제67과 내 상이 무엇이냐 (고전 9:18~23) 146 바로가기


11. 개혁의 과제들 148


제68과 개혁의 필요성 (마 23:37~39) 148 바로가기

제69과 교회 생활의 부자유 (요 8:32) 150 바로가기

제70과 교인의 자유 (갈 5:1) 152 바로가기

제71과 목회와 가족 (고전 9:5~14) 155 바로가기

제72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함 (딤후 3:1~5) 157 바로가기


12. 잠언 설교 159


제73과 지혜로운 생활 (잠 1:1~6) 159 바로가기

제74과 말씀의 은혜와 마음을 지킴 (잠 4:20~23) 161 바로가기

제75과 성경의 활용 (잠 6:20~23) 163 바로가기

제76과 미물의 지혜 (잠 6:6~11, 30:24~28) 165 바로가기

제77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잠 8:17~21) 167 바로가기

제78과 지혜자에게 있을 것 (잠 21:20) 169 바로가기

제79과 진리의 확실한 말씀 (잠 22:17~21) 171 바로가기

제80과 마음을 주께 드림 (잠 23:25~26) 173 바로가기

제81과 말씀의 비유와 역할 (잠 25:25) 175 바로가기

제82과 현숙한 여인이 되십시오 (잠 31:1~31) 177 바로가기

제83과 덕행 있는 여인 (잠 31:1, 29~31) 179 바로가기


13. 욥기 설교 181


제84과 욥기의 서론 (욥 1:1~5) 181 바로가기

제85과 고난 받게 된 욥 (욥 1:6~22) 183 바로가기

제86과 정상에 서는 법 (욥 8:1~7) 186 바로가기

제87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욥 13:15) 188 바로가기

제88과 고난 중의 욥⑴ (욥 23:1~9) 190 바로가기

제89과 고난 중의 욥⑵ (욥 23:10~17) 192 바로가기

제90과 하나님을 만나야 함 (욥 23:3~5, 8~9) 194 바로가기

제91과 연단의 과제들 (욥 23:10) 196 바로가기

제92과 욥의 반성과 재판 (욥 31:1~40) 198 바로가기

제93과 욥기의 결론 (욥 42:1~17) 200 바로가기


14. 절기 관련 설교 202


제94과 신년 맞이의 의미 (마 9:17) 202 바로가기

제95과 삶의 변화 (신 30:19~20) 204 바로가기

제96과 자기 십자가 (마 16:24) 206 바로가기

제97과 부활이신 예수님 (요 11:25~27) 208 바로가기

제98과 부활과 은혜 (고전 15:12~19) 210 바로가기

제99과 예수님과 나사로 가정 (요 11:1~44) 212 바로가기

제100과 효도, 어찌 할꼬 (엡 6:1~3) 214 바로가기

제101과 성찬 받을 준비 (고전 11:20~34) 216 바로가기

제102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마 1:18~25) 218 바로가기


15. 초신자 관련 전도 설교 220


제103과 선교적 섭리 (행 27:18~26) 202 바로가기

제104과 전도 섭리 (롬 10:13~15) 222 바로가기

제105과 거듭남과 믿음 (요 3:3, 요일 3:9) 224 바로가기

제106과 베드로의 입문 경위 (눅 5:1~11) 226 바로가기

제107과 초신자 지도 방법 (벧전 3:15) 228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하나님의 은혜로 7분 설교 11집을 집필하고 편집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는 2005년 전반기 중에 여호수아 강론을 쓰면서 그때그때 묵상한 말씀과 욥기, 시편, 잠언 설교문을 다시 정리하여 함께 수록한 것입니다. 그 중에 시편 설교의 분량이 많아서 “시편 설교를” 따로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과거에 기록된 문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것이지만 읽으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그대로 편집한 것도 있습니다. 제가 쓴 모든 글을 요절별, 제목별로 다 분류하였기 때문에 필요한대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남은 글의 집필을 위하여 제가 건강하도록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5. 6. 30.


저자 지 영 근

 


1.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1과 참 좋으신 하나님 (1) (히 4:15~16) 목록으로


복음 성가 중에 “참 좋으신 하나님”이란 가사가 있고, 또 어떤 성도가 기도할 때에 “거룩하시며 지존하신 하나님” 하지 않고 “참 좋으신 하나님”이란 용어를 쓰는 것을 듣고 왜 하나님의 신분을 일컬을 때 지존의 용어나 절대적 용어를 쓰지 않고 보편적 용어를 쓰는가? 하고 마땅치 않게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좋다는 말은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그 이유는 좋은 사람, 참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예수님은 똑똑하신 분입니다”라고 설교를 했는데 어떤 장로님이 “똑똑하다”는 말을 미련함보다 낫다는 뜻으로 이해할 때 “예수님의 신분을 격하시키는 용어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란 용어를 잘 안 쓰는데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좋으신 분이다”라는 감동을 받고 이 용어를 쓰게 되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신분을 보편적으로 끌어내리려는 뜻이 아니라 “참 좋으신 분이라”는 느낌 그대로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하나님에게 인격적 감정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법관들이 재판하다가 우는 것 보셨습니까? 아무리 불쌍한 상황에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눈물 없이 유죄 판정을 내립니다. 법관은 공의가 98%라면 인정이나 감정은 0.2%밖에 안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슬픔이나 기쁨이나 감정을 못 느끼는 법관 같은 분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때 좋은 분이 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과 의지와 감정을 동시에 적당하게 발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의 눈물과 기도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고(왕하 20:5), “온 국민과 가족이 안타까움을 호소할 때 그 중심이 뜨거워지신다”(욜 2:15~20)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연약하면 최후에는 눈물밖에 없을 것인데 하나님이 “나는 지존자인즉 그런 눈물, 감정, 인정사정은 모른다” 하셨다면 좋으신 하나님이라 하겠습니까?

2. 하나님은 세심한 분이시기 때문에 좋은 분입니다. 세심하다는 것은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보리를 수확할 때 “모퉁이의 부분은 거두지 말라”고 하셨지요(레 19:9). 부잣집에서 볼 때는 굵은 곡식 거두었으니까 아낌없이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모퉁이 곡식을 버리게 하신 것은 가난한 자들 이삭 줍는데 도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이삭 줍는 것을 하나님은 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계신 것이지요. 요즈음 도시 주변에는 버려진 물건이 많습니다. 버린 자는 넉넉하고 대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다 쓰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버리고 대범한 편에만 계시다면 “이 세상에 건강하고 아쉬운 사정을 안 하는 사람도 많은데 병들고 가난하고 남의 도움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하느냐? 너희들 다 죽어 없어져도 나는 답답할 것 없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꺼져가는 심지 불어 꺼”, “흔들리는 갈대 꺾어 없애”,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런 것까지 살핀다면 하나님으로서 대범하지 못해” 하신다면 연약한 인간이 어디에 발을 붙이겠습니까? “아내는 허리가 아프다 하고, 나는 어깨가 쑤십니다”하고 기도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입니다. “내가 저들을 거저 돌려보내면 얼마 안 가서 기진할 자가 생길 것이야 그러니까 기적의 양식으로 먹여야지” 하시는 분이시고(막 8:1~3), 그 기적의 양식이 남았을 때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말고 활용하라”고 하셨으며(요 6:12)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그의 가진 것 전부이고 그 헌금이 부자의 큰 돈 보다 많다”(막 12:42) 하셨으니 이 얼마나 세심합니까? 제가 이 설교를 드리게 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심하셔서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희 사정 다 아니까 큰 것 몇 가지 제목만 구하고 자초지종 긴 기도 하지 말라” 하신다면 성도는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개인적으로 가까이 오시고 개인적으로 친해 주시며 개별적으로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육체를 갖고 계셔서 “왔다 갔다”하신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미국 성도가 불러서 갔다 며칠 후에 오신다 한꺼번에 수백만 명이 주여 주여 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응답한다” 하신다면 좋으신 하나님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고 어디나 편재하시며 광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샘물 나오듯이 계신 곳이 따로 있다면 모든 성도가 하나님 만나러 다니기에 바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공기처럼 존재하시니까 성도 각자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주신 것도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 손 안에 있지 않습니까?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절대자로서의 주권이 있으시고, 또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시고(대하 2:5, 시 113:5) 친구로 임의롭게 대해주시기도 하시며(요 15:15) 영원한 중보자라고 하셨습니다. 중보자는 인간 편에서 인간을 대변하는 변호사 역할을 하시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든 연약을 체휼(체험:suffer)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사정을 잘 아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 있거나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이 모자라서 다른 곳에 이중으로 부탁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한 부분에까지 전체적으로 적응해 주실 수 있도록 인격과 감정이 있으시고 연약을 익히 아시며 세심한 것까지 살피시는 분이시고 주권자로서 전능하신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중보자로서 대해주시니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2과 참 좋으신 하나님 (2) (시 103:7~14) 목록으로


성경에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줄 아십니까? 아시길래 하나님을 믿으시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어떤 점이 좋습니까?하고 물을 때 대답을 망설이신다면 좋은 줄 모르고 믿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이 제목의 설교가 히 4:15~16에도 있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감탄한 말씀이 많은데 여러분들도 깨닫고 같이 감탄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욥 1:21을 보시면 욥은 10남매 자녀들이 다 집이 무너져 죽었고, 종들과 짐승들은 대적의 습격으로 다 없어졌는데도(억장이 무너지고 실성할 지경인데도) “주신 자도 하나님, 거두어 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나는 망해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였고, 합 3:18에서는 하박국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인데도(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했을 것인데도)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하였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길래 그런 고백을 하였을까요? 시 73:25절을 보시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으리잇가 땅에서도 주 외에는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좋으신 분임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는데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며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하늘처럼 높으시다, 또 죄과를 멀리 옮겨주시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연약한 체질까지 기억해 주시니 얼마나 좋으냐”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실감하며 사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물을 주셨습니다(롬 8:32). 땅 없고 집 없다 하지 마시고 만물을 즐기면서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롬 8:32에 보시면 “독생자도 주신 하나님이 독생자와 함께 만물을 주시지 않겠느뇨” 하셨습니다.

2. 그리고 보니 만물보다 중한 독생자 예수님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고를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주셨습니다. 인간 부모 같으면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 줄 압니다. 성탄절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주신 목적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인간 모범, 속죄 제물, 영원한 중보자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3. 타락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제일 문제되는 불행의 원인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실 때 십자가의 공로로 근원적으로 없애주신 것도 있고, 또 징계를 가볍게 해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 주신 것”입니다(시 103:12). 하나님이 한 번 용서하셨으면 끝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징계도 하시는데 이 징계도 오래 참으시고 경고를 주신 후에 하시고(벧후 3:9), 벌을 주시되 죄보다 가볍게 주시니(라 9:13, 시 78:38, 103:8) 얼마나 긍휼이 큽니까? 또 때리신 후에는 위로해 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고후 1:3~4). 저희들은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4. 죄 용서를 받으니까 하나님이 양자를 삼아 천국의 기업을 주시는 것 아닙니까? 여기의 양자란 용어는 예수님 한 분이 적자이기 때문에 쓰는 용어일 뿐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 대우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모시고 의지할 때 육신의 아버지보다 굉장히 더 많이 사랑하는 아버지로 모시고 기뻐하며 의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에는 하나님의 자녀, 심판 면하는 칭의, 천국 영생이 다 연계됩니다. 이 은혜를 예사로 아시면 안 됩니다.

5. 어디서나 영원히 함께 해 주십니다(창 28:15, 마 28:20). 부모, 처, 자식, 친구 다 좋지만 영원히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외국에 출장가시지 않습니다(렘 23:24). 주무시지도 않습니다(시 121:4). 그리고 항상 저희들 곁에 계시고,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요 14:23). 또 동행하십니다(창 5:22,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하나님을 찾으러 다니지 마십시오.

6. 하나님은 성도와의 대화를 좋아하시고 기도를 개별적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기도는 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길다 하시지 않습니다. “주야로 말씀 묵상하라” 하셨고(시 1: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수천만 명이 한꺼번에 기도하는데 한 분 되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어떻게 다 들으실꼬? 하고 염려해 보셨습니까? 그것을 성경이 답하십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삼하 7:22, 시 104:1), 일시에 개인적으로 다 들으시고 개인적으로 응답하시는데 이것이 광대, 무한, 충만하신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줄 서게 하시거나 시간 예약하실 만큼 제한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7. 또 중요한 것은 성경을 단 번에 주셔서 육법전서처럼 다 알리셨습니다(히 1:1, 유 3, 계 22:18~19). 하나님이 대답을 즉시 안 하시면 답답하겠지요. 욥이 그런 고충을 당했습니다(욥 23:1~9).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뜻을 다 받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8.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요(히 4:16). 겨울에 겨울옷, 여름에 여름옷 주시지 않습니까?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마 6:8,32) 그것도 적당하게 주시며(고전 14:40, 잠 30:8) 또 “유익하게 가르쳐 주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48:17).

9.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물건을 쉽게 버리는 사람은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이 연약한 여러분을 버리시면 어찌합니까?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두고 보시는 분입니다(마 12:20). 약자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고,

10. 70×7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시며(마 18:22)

11. 때 되면 조용히 천국으로 안내하시고(요 14:1~3),

12. 공의롭게 심판해 주시니(계 22:1~12) 참 좋으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3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삼상 15:22~23) 목록으로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우선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또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또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잘 아셔야 합니다. 또 가장 싫어하시는 것도 잘 아셔야 바른 생활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도 생각하tu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마귀의 작당, 죄와 불법, 거짓, 불신앙 그런 것들이겠지요.

1.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창 1:31을 보시면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만물을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만족한 예술품입니다. 그러니까 경작과 개발은 잘 할지라도 훼손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자연 보호, 생태계 보호가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제사 의식(제물)보다 순종이고 물질(수양의 기름)보다 말씀 듣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15:22을 보시면 하나님이 제물을 순종만큼 또 말씀 듣는 것을 수양의 기름만큼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배나 종교 의식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또 물질 봉사보다 말씀 청종 즉 하나님을 가까이 마음속에 모시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일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시 1:1~3). 또 시 11:7에 보시면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곳에는 계시지도 않습니다(잠 8:20).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일을 가만히 두는 것을 좋아하시고(자연), 외식보다 실속 있는 일을 좋아하시며 또 의롭고 명분 있는 일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잠 8:20, 고전 10:31).

2. 기뻐하시는 것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또는 누구를 또는 어떤 사람을 가장 기뻐하실까요?

1)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지요(히 11:6).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셨으니까요. 믿음이란 참으로 다양하고도 묘한 것입니다. 꾀 굵은 사과를 한 자루에 5000원씩 하기로 사 왔는데 속에는 나쁜 사과만 넣고 보이는 곳에만 굵은 것을 넣었으니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속은 허하고 떠들썩하는 믿음도 있고, 보이는 것은 사치하지만 실속 없는 믿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룩한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온전한 믿음, 큰 믿음이란 말씀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또 과일 이야기인데 귤이 좋은 것이라 하여 싼 값으로 샀는데 굵은 것 5,60개 들어 있습니다. 이것도 실속 없는 것이지요. 믿음의 가치도 이렇게 다양합니다. 저는 TV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분들이 진지하게 듣습니다. 잘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 설교자의 설교는 내가 다 알고 다 증거 한 설교입니다. 나는 그 설교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 듣기를 원하는데 수천 명의 청중은 그 설교를 들어야 할 만큼 초등 지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히 5:14에서 “장성한 자의 식물이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젖만 먹겠느냐?고도 하셨지요(고전 3:1). 하나님은 실력 있는 믿음을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믿음은 순결한 것을 뜻하고, 온전한 믿음은 실력을 뜻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은 실천을 잘 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사랑 실천을 잘 하면서 주여 주여 합니까? 많이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제 저녁 TV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회고록을 썼는데 그 마지막 결론이 “사랑 실천을 옳게 못하여 후회스럽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추기경이 혼자 몸으로 살면서 재물 모은 것이 없을 텐데 어떤 면에서 사랑 실천을 못했다고 후회하였을까? 여러분 짐작 가는 데가 있겠지요?(약자를 위하여 몸으로 헌신 못한 것과 가난한 백성 곁에서 함께 살지 못한 것일 듯) 따라서 하나님은 좋은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2)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마 3:17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기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을 꼭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많은 자녀를 두기 위하여 성도를 아들 삼아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 된 관계는 양자라도 적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국의 기업을 다같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려면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롬 8:19). 하나님은 예수님을 많이 닮은 성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하셨고, 또 딤전 2:4에 보시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열망과 성령 충만의 열망이 강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시 51:17에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셨고, 또 미 6:8에서는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런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알아서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작품을 보존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 듣는 것과 순종과 의와 공의와 사랑을 좋아하십니다. 또 하나님께는 구원의 열망과 성령 충만의 열망이 있는 것과 실력 있고, 온전한 믿음을 기뻐하시며 하나님 닮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 닮은 자녀들을 기뻐하십니다. 또 성도의 상한 심령(회개)을 요구하시고 성도가 예수님을 닮은 상태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요한 제목이 바로 5과에 있는 “하나님의 필수 요건”입니다.

 

제4과 하나님을 배우자 (신 4:32~43) 목록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알리는 기록입니다(요 5:39). 본문 36절에도 보시면 “하나님이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다” 하셨는데 이 뜻이 곧 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성경을 살필 때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배우셔야 합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자주 드린 줄 압니다(계 2:1~7). 그러면 본문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자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자연 만물로 나타내셨고, 성경으로 나타내셨으며 성경을 주실 때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주셨다”고 하셨습니다(히 1:1). 본문 36절에서는 “큰 불과 함께 말씀을 듣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연 계시와 성경 계시로 하나님을 나타내주셨는데 또 중요한 것은 32절에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하신 것처럼 큰일을 행하여 자기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일도 큰일이고, 통치하시는 일도 큰일이지요. 인도네시아 앞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강한 해일이 태국, 스리랑카, 인도, 아프리카 해변까지 덮쳐서 수만 명을 죽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큰 일 아닙니까? 본문에서 말씀한 큰일은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내시고 또 다른 민족을 그 땅에서 쫓아내신 후 그 땅을 선민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일도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34, 37~38).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 수 있는데 또 39절을 보시면 “상천하지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이 없는 줄 명심하라” 하셨으니 성경이 나타내신 하나님(여호와)만 참 신이고, 절대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이어야만 절대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2. 역사를 중요시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2절을 보시면 “사람을 창조하신 날로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라”는 뜻이지요. 왜 역사가 중요할까요?

1) 과거에 받은 은혜를 깨달아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고,

2)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깨달아서 더 의지하고 경외하여야 하기 때문이며

3) 역사가 반복되는 만큼 경험적 교훈을 삼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전 1:10에 보시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으니 이미 한 일도 후에 다시 할 것이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은즉 무엇을 가리켜 새 것이라 하랴”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반복되는 여사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역사적 교훈을 참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신 것도 그것을 거울처럼 보고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0:6). 하나님이 선민에게 어떻게 하셨고, 어느 개인에게 어떻게 하신 것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주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조상을 사랑하면 그 후손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7절에서 “네 열조(아브라함)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인 너(이스라엘)를 택하셨다” 하셨고, 40절에서는 “규례와 명령을 지킬 때 너와 네 후손이 한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에서도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지요(출 20:6). 그러니까 축복을 계산하려면 자기 일만 살피지 말고 조상이 한 일과 후손이 받을 것을 꼭 마음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 잘 되기 위하여 부모가 고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 고생하는 일로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하나님이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사랑하셨고,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순종을 잘 하였기 때문에(창 22:12) 그 후손이 복을 받았고, 심지어는 조카까지도 복을 받은 것입니다(창 19:29).

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시는데 34절을 보시면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험도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지만 합격하셨고, 애굽의 바로왕은 낙방하여 계속 강퍅해지는 바람에 이적과 기사로 재앙을 받았습니다. 전쟁으로 선민을 붙들려 하다가 홍해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편 팔로 선민을 보호하셨고, 이방족으로 하여금 큰 두려움을 갖게 하여 선민 앞에 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피조물에게 무슨 일을 하실지 모릅니다. 엊그제 일어나 지진(2004. 12. 25.인 듯)으로 피해 본 사람이 말하기를 10m 이상의 해일이 20분쯤 들어왔다 나갔는데 엄청난 아비규환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이런 피해를 막겠습니까? 오직 엎드려 기도할 수밖에 없겠지요.

5. 하나님은 억울한 자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실수를 하면 실수한 것만큼의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늑대를 쫓기 위하여 던진 돌이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에 똑같이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또 피해자가 감정으로 대항해도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공의롭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도피성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율법에 “살인자는 죽이라”(출 21:12) 하셨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라”(출 21:24) 하셨으니 살인자가 죽게 되어 있지만 고의가 아닌 것은 정상을 참작해 주어야 공의로운 재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자기를 계시하시고 역사를 중요시 하시며 상벌을 연대적, 계대적으로 하시고 여러 가지로 권고의 방법을 쓰시며 공의롭게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본문에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제5과 하나님 일의 필수 요건 (사 48: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 일의 필수 요건”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필수 요건이란 하나님께 꼭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양보하시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면 반드시 이 사실을 아시고 하나님의 필수 요건을 위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필수 요건 첫째는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대로 다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그 계획에 위반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으면 다 제거하고 “하나님의 목표하신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을 양보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셨고, 또 자신이 십자가를 감수하시면서 까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 하셨으며(마 26:39)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겠습니까?(요 4:24) 쉽게 말하여 하나님의 뜻은 아들에게도 양보 안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두손 번쩍 드는 자세를 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행 21:14). 아무리 은혜와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자기의 받으실 영광을 양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양보 안 하시는 영광을 왜 성도나 성직자가 가로채려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내가(하나님) 나를 위하여 또 나를 위하여(두 번을 강조하시고)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욕은 영광의 반대입니다. 영광이 딴 데로 가면 하나님께는 욕이 가는 것임.) 그래서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영광을 가로채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우선 사울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 된 후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전쟁에서 죽었고(삼상 15:23), 느브갓네살왕은 이방인이라도 영광 돌리지 않다가 미쳤으며(단 3:10, 4:17,26)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나만의 문둥병 고친 사례를 받았다가 자신이 문둥병에 걸렸고(왕하 5:2), 헤롯왕(아그립바 1세)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다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행 12:23). 그러니까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되도록이면 칭찬과 인기와 특혜는 적게 받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하여야 영광을 많이 돌리는 것인가?도 연구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행하고 좋은 명성을 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자신은 항상 낮은 위치에 처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양자를 많이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성부, 성자, 성령님뿐입니다. 천사들은 부리는 종인즉 가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국 가족을 늘리시려고 구원 사역을 계획하신 것인데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막 데려다가 가족을 삼으시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예수님을 닮게 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삼고 천국의 가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롬 8:29). 이 작업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도 쉽지 않기 때문에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쓰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거듭나게 하신 것이고, 말씀을 주신 것이며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믿음이 생기고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이(딤전 4:5) 곧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예수님을 꼭 닮아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필수 요건이란 뜻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닮지 않는 백성은 천국에서 가족으로 두고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육체를 떠날 때 성화가 완성되지만(욥 19:26) 본래 천국이란 개념은 내세와 현실의 신앙 세계를 포함해서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막 1:15) 현재 살고 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을 많이 닮아야 하는 일에 하나님은 양보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이루시는 것, 영광을 꼭 받으셔야 하는 것, 자기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필수 요건입니다.

4.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택한 백성을 하나도 남기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3000년에 출생할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3000년까지 끄실 것이요, 또 그 택한 백성이 어떤 미개한 사회, 어두운 골짜기에 있다면 거기까지 복음이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령이 돌처럼 완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녹여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는 다 구원하신다” 하셨고, 다만 “가까이 따르던 가룟유다를 보전하시지 않는 것은 그가 멸망의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7:9~12). 하나님은 한 번 택하셨으면 싫어버리지 않으십니다(사 41:9). 또 자기의 사람이면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3:1). 이런 말씀들은 다 선택자에 대한 궁극적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공의를 양보하시거나 후퇴하지 않으십니다. 공의는 공평한 심판이고, 악을 의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겠지요?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물질은 사람의 필수 요소입니다. 예배와 영광은 받으시나 꼭 좋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골방이나 마당에서 드리는 예배도 받으십니다. 의식, 절차, 사치,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정치도 일반 정치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고 양보하시지 않는 것은 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고, ② 자기의 받으실 영광을 타인에게 주시지 않으려는 것이며 ③ 하나님의 자녀이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고, ④ 자기의 계획으로 선택한 백성이면 말세를 단축 또는 연장하셔서라도 다 구원하시는 것이요(마 24:20), ⑤ 공의의 분별입니다.

 

제6과 야곱의 하나님 (창 28:10~22, 35:1~5) 목록으로


“야곱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28:21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개인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도 개인의 하나님으로 역사해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개인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1. 35:3에 보시면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환난 날에 응답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살아 온 생애 중에 환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것을 찾아 감사하셔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집에 갈 차비와 외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군에서 알게 된 김O호란 친구가 “성탄 등을 팔라”는 연락이 와서 그것을 교회에 다니며 팔아서 부족을 채운 일이 있었습니다. 객지에서 춥고 돈 없으면 환란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쫓김을 당하면서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까지 2000리 쯤의 여행을 할 때 150리쯤 올라온 곳이 “룻스”란 광야인데 거기에서 돌베게를 베고 잠을 잘 때 하나님이 계시로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지킨다,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어준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야곱은 잠이 깨어 그 장소에 돌기둥을 세워 기름을 붓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나를 붙드사 평안히 이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이 장소에서 제사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제사도 받으시고 서원도 받으시는 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형통하였고, 20년(창 31:41) 후에 대가족을 이루어 그 길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환난 중에 나타나주시는 분이시고, 권고하시는 분이며 또 그 권고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 50:15에서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창 28:15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보호 인도 하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서 외삼촌 집을 쉽게 찾은 일부터 일감을 맡고 보수를 받으며 아내를 얻고 자녀를 낳기까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님들도 하나님이 “빈틈없이 함께 하시고 보호 인도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을 지키기를 바라셨고, 또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서원을 들으셨으며 약속을 이행하셨는데 어찌 야곱의 서원을 묵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제단은 약속 이행의 제단이고 또 감사의 제단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그때그때 형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뜻을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4. 야곱은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깨끗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할 것을 깨닫고, 모든 식솔들에게 “이방인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의복을 바꾸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식솔들이 품에 지니고 있던 이방신 상(드라빔)과 귀고리를 내놓아서 그것들을 과감하게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룻스”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 곳을 벧엘(하나님의 집)로 이름을 고쳤다가 20년 후에 돌아올 때는 그 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로 또 고쳐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이 20년 동안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에서 살면서 그 식솔들이 이방 우상과 드라빔을 숭상하는 것까지 제재를 못 하였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려 하였을 때는 그런 이방적 색채를 정화시켰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여기에 따라 그 식솔들이 잘 복종한 것을 보면 야곱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주 제단을 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단을 쌓을 때는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의복까지 바꾸는 정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저희들은 제사 대신 자주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야곱의 정신을 본받아서 은혜를 감사하고 서원을 이행하며 정결을 확보하기 위하여 회개하고 노력하는 일이 있어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가족을 계속 보호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호하셨는가 하면 본문 5절에서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교통사고는 사람의 실수로 추격당하는 것이고, 강도, 절도는 사람의 고의성으로 추격당하는 것이며 자연 재해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재앙인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다스리실 때 낮의 해나 밤의 달이 해하지 않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주위의 악한 사람들을 감동하사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여 성도를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 교훈은 개인적으로 대하시는 하나님,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특히 환난 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고 서원 이행을 촉구하시는 하나님, 정화를 앞세운 야곱의 제사, 그리고 악을 통제하여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 (히 2:1) 목록으로


고난주간인고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되 “그의 고난의 생애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1. 우선 본문에서는 성도와 예수님의 신분을 각각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신분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이고, 또 “거룩한 형제”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란 구원의 대상이란 뜻이고, “거룩한 형제”는 “구별되고 성결하다”는 뜻인즉 존귀한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신분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란 믿음 대상을 나타내 주신 분 또는 계시의 주란 뜻이요, 제사장은 구원의 주 또는 중보자란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계시의 전부(믿는 도리, 가장 밝은 계시, 하나님을 나타내심)요, 제사장 직분이 곧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책임자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죄인을 하나님께 천거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연합되게 하는 사역인데 이것은 대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대가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극치의 고난을 당하시므로 속죄의 대가를 제공하시고, 용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제사장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을까요? 여기에 대하여는 요 1:1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님을 말씀(원문의 로고스)으로 표현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셨으며 창 1:26에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란 말씀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므로 삼위의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신 상태를 표현하신 만큼 그대로 믿으시되 말씀으로 표현된 뜻은 존재, 내용은 있으나 형상이 없는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때가 되시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탄절 설교로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계시하실 목적, 인간 모범을 보이실 목적, 그리고 구원 사역을 이루실 목적으로 오신 것인데 여기의 인간 모범이나 구원 사역을 이루시려면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떤 과정으로 오셨든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4:15).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장 절박한 시대에 가난한 집 아들로 오셔서 고생스러운 인간을 사시고, 모든 시험을 다 이기셨으며 인간적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억울함을 당하신 것이나 죽음을 당하신 것은 인간이 당하는 꼭같은 고난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4. 그렇다고 하여 신성은 없으셨는가? 할 때 신성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는 신성과 인성이 독립적으로 겸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신성을 나타내셨고, 언제 인성을 나타내셨을까? 하시겠지요. 신성은 이적을 나타내실 때 보이신 것인데 그 목적은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구원의 주이신 것을 증명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것과 오병이어 같은 기적은 사람을 그 육체적 위기에서 구출하실 목적도 있으셨지만 궁극적 목적은 자신의 신성과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고난으로 구속 사업을 하심에 있어서 신성적 능력을 개입하시지 않은 채 고난당하신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대표하신 인간으로 고난을 당하셨으되 그 생명과 신분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 또는 영원한 생명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중보자로서 제물 되실 자격은 죄 없는 인간의 인간적 고난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있어야 하며 또 그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순종이 따라야 하므로 예수님이 아니면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과 죽음만 대속의 대가가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심도 있고,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시는 중보 기도도 있으며(눅 23:34) 이런 중보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린 사례도 있는 것입니다(히 5:7).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낮아지신 고난(하나님이 사람 되심, 천국에서 죄악 세계에 오심, 사람이 종의 형상이 되심 등). 생애의 고난, 죄와 싸워 이기시는 고난, 중보자의 영적 고난,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5. 이런 과정을 살피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거저 용서하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살후 1:7). 또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이요,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으로 받으시되 인간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일까지 순종하셨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속 사역의 십자가입니다. 이 구속 사역의 십자가는 골고다의 죽음만이 아니고, 도덕적, 사회적 생활에 관한 것도 포함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구원은 믿음 주, 구원의 주님께서(히 12:2, 2:10) 거저 주시는 것이고, 성도가 져야 할 십자가는 일반인들처럼 육체적, 사회적(가정적) 삶에 있어서 그들처럼 살아가는 짐을 지면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8과 예수님의 권위 (요 18:4~9) 목록으로


미국의 어떤 이발소에 손님이 많아서 시끌벅적 하였는데 그 손님 중에는 그 지방의 도지사도 이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안간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가?하고 두리번거려 보니까 웬 낯선 사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하게 여긴 사람이 그 주인에게 “저 분이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니까 무디 목사님이라고 알려주더란 것입니다. 무디 목사의 권위가 그 지방 장관보다 훨씬 권위가 있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권위도 그렇게 높아지는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권위를 말씀드리고 성도들이 사회에 빛 된 권위를 나타내야 할 것을 교훈 받으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위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무장한 병사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잡아오라 하니까 퍽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을 지목해 주었고, 예수님이면 도망하거나 피할 줄 알았는데 “내로라” 하시니까 깜짝 놀라서 “저희가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권위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생각할 때 신적 권위와 인적 권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적 권위는 인간이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 세계에 나타내주시는 영향이 있는 만큼 알아보심이 좋고, 인적 권위는 반드시 성도가 본받으셔야 하므로 더 많이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신적 권위로서는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분상의 존귀와 권위가 있으시고(마 3:17),

2) 죄 없는 순결한 분으로서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히 4:15). 높은 지위에 있어서 훌륭한 분으로 알았는데 뇌물 먹은 혐의를 받고 구속되는 것을 보셨지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죄가 드러나면 일시에 권위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점도 티도 없으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즉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벧전 1:19, 약 1:17).

3) 영존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사 9:6),

4) 전능하신 하나님, 즉 능력이 무한하셔서 이적을 행하신 사실로 볼 때 권위가 있으며(사 9:6)

5) 또 천국에서는 영원히 왕 노릇하시고, 선악간에 심판주가 되시므로 권위가 있으신 것입니다(히 7:21, 요 5:22, 17:2) 예수님의 신적 권위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것과 구원(죄사함. 막 2:10, 눅 5:24, 욕 17:2)과 보호, 인도의 은총을 주심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인성적 권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 탄생하셨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옳게 사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적 권위

1) 모범적 인격자이십니다. 무디 선생이 지나갈 때 그를 보는 사람들이 자기를 반성한 것은 그의 인격이 존경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인격성이라 하면 마음과 언어와 행실이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온유, 겸손, 진실, 봉사성 같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것이 뛰어나셨기 때문에 자신을 “선생이라”고 칭하셨습니다(요 13:15). 우리나라 속담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지요. 좋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좋은 사람”이란 인정을 받으셔야 합니다.

2) 가르치심의 권위입니다. 막 1:22, 7:29, 눅 4:32에 보시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설교를 하면 조용하게 듣고 또 어떤 이가 설교를 하면 떠들거나 조는 경우가 있지요.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가 있으셨기 때문에 듣는 자들은 잘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가 있는 이유는 지식도 있으셨지만 실천이 동반한 교훈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으셨다고 봅니다. 계명을 가르치거나 사랑을 말할 때 실천하면서 가르쳐야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을 이기신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꼭같은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와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히 4:15). 그런 의미에서 온갖 죄의 유혹과 고난과 고통을 받으시면서 세상 권세에 무폭력으로 도전하시고 돌아가셨지만 요 16:23에서 “세상을 이겼다” 하셨으니 이런 일들이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여기에 비할 때 인간은 어떻습니까? 지식과 간판으로 권위를 세우려 하지요. 그래서 가짜 학위증이 남발하지 않습니까? 또 물질로 권위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큰 집에 거주하고 비싼 차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런 것은 절대로 권위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권위 있는 분은 예수님이지요. 또 예수님이 “권위 있다” 하시고, 예수님이 칭찬을 하셔야 그 사람이 권위 있고, 훌륭한 것인데 예수님이 누구를 칭찬 하셨을까요? 전반적인 인격을 두고 칭찬하실 때 세례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렙 돈 낸 것과 마리아가 향유 바친 것을 칭찬하셨지만(막 12:43~44, 마 26:11~13) 인격을 칭찬하신 대상은 세례요한뿐이었습니다. 요한의 생활을 상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살았고, 의복은 단벌이며 음식은 메뚜기였으니 검소한 정도가 아닌 걸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래도 세례요한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인 다음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요한의 영이 그 속에서 운동한다”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4. 성도들도 권위 있는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며 죄사함 받았고, 영생 할 백성이며 또 세상을 비출 빛의 사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와 성도가 권위를 잃었습니까? 지금 다른 이방 종교에게 권위를 내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이유는 성도들이 참된 권위를 모방하지 않고 세속의 권위(물질 권위, 인간적, 정치적 권귀)에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성도가 권위를 회복하려면 반드시 세속의 권위를 박차고 참 권위의 주 되신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행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2. 성경 연구에 대한 말씀

제9과 말씀 묵상 연습 (마 7:7~8) 목록으로


시 1:2에 보시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님들이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신다고 가상할 때 어떤 방법으로 하시면 좋을까요? 연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강론문에도 있고, 설교문으로도 기록된 줄 압니다(7분 설교 6집 13과, 핵심 설교 4과).

1.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는 뜻을 이해하셔야 하겠지요. 구하는 뜻은 하나님께 기도로 간청함일 것이고, 찾음은 목적 성취를 위한 노력을 의미할 것이며 문을 두드림은 분명히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그가 계신 곳을 찾아 두드림일 것입니다. 성도가 만나서 소망을 얻고 은혜를 받을 대상은 하나님(예수님) 뿐 이신즉 하나님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알아볼까요?

1) 성도의 마음에 계십니다(눅 17:21).

2) 교회에도 계시고(딤전 3:15),

3) 천국에도 계시며(행 7:49, 요 14:2)

4) 상천하지에 무소부재하신 것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수 2:11, 욥 42:2).

5) 또 하나님은 말씀(성경)으로 자기를 계시하셨고, “말씀에 인격이 동반한다”(요 1:1, 행 19:32, 히 4:12) 하셨으니까 말씀을 상고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구하는 기도, 찾는 노력, 하나님 계신 곳에 가까이 나가는 두드림”에 대하여 묵상을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멀리 다니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집에 앉아서 말씀을 연구하시고 모르는 것을 교역자님께 배우는 것이 최상입니다. 누구에게 배우느냐?하는 문제가 중요한즉 잘 분별하십시오.

2.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린다” 하셨으니 이 뜻은 구하는 목적이 성취된다는 뜻이고, 하나님은 두드리는 자에게 만남을 허락하신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무엇이나 자기 마음대로 요청하고 인간 정욕에 얽매인 상태에서 면담을 하고자 하여도 허락하시고 만나주실까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뻔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릇이 토기장이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과 같고(롬 9:21), 도끼나 톱이 사용자에게 쥐어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사 10:15).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성도가 자기 목적대로 구하고 찾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구하고 찾으며 두드렸을 때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 9:31에 보시면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때 들으신다” 하셨고, 또 요일 5:14~15에서도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할 때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 1:10~15을 보시면 “죄악이 가득한 채 성전 마당만 밟으러 오는 자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손을 펼 때 눈을 가리우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듣지도 않으시고 만나주시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을 구하고 찾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할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종목, 또는 구하는 정도가 어떤 것인지를 반드시 아셔야 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죄악이고 마귀의 장단에 춤추는 것입니다. 시 66:18에 보시면 “주께서 죄악을 품으면 듣지 않으실 것이라” 하셨으니까 매사에 죄와 관련이 없는 것만 구하셔야 합니다. 목적은 죄가 아니라도 부정한 방법을 쓰면서 기도하는 것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2) 허탄한 것, 너무 세속적인 것도 안 들으시는 것입니다. 허탄한 것은 예수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이고, 신령한 은혜에 위반되는 것들입니다. 시 24:4에서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옛말에 “제사에는 뜻이 없고 젯밥에만 뜻이 있다”는 말처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 목적은 생각지 않고 자기 욕심 또는 현세욕만 채우려 하는 그런 간구 행위는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세속적이란 것”은 현세적 여건에 대하여 지나치게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전도사님이 심방 가서 식사 한 끼 대접 받으면서 “거부가 되게 해 달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지나친 기도 같다” 한즉 “축복을 많이 하려고 그랬다”고 하더군요.

3) 정욕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정욕적이란 것은 자신의 육체적 또는 현세욕에 이끌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 4:1,3에 보시면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란 말씀이 있고, 또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자부와 둘째 딸이 임신 중인데 제가 아들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욕적인 기도로 받으실 것 같아서입니다. 서로 갖기를 원하는 것은 절대로 “나 주십시오”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갖고 싶어도 참고 주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4)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구하셔야 합니까? 꼭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을 구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봄비 때에 비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슥 10:1). ① 믿음을 위한 기도를 하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이 성도의 믿음 성숙을 기뻐 하시니까요(히 11:6). 말씀, 교회, 교역자, 선교를 위한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② 환난을 호소하십시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셨으니까요(사 50:15). 괴롭고 아프고 힘든 것들이 다 환난입니다(마 11:28). ③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마 10:12에서 “그 집에 들어가면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사회적 안정, 나라의 평안, 가정의 평안,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것, 최소한의 필수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실 때 지금 말씀드린 내용 순서처럼 묵상을 하신다면 은혜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특히 “문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가까운 대화의 통로가 열림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또 그 문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음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0과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 (딤후 2:1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 사도가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진리(말씀)를 옳게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선장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배는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라” 하셨는데 복음 사역자의 가장 부끄러운 것이 진리의 미숙함일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부인으로부터 전도지를 받았는데 그 전도지는 여호와의 증인 파에서 배포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가? 읽어본즉 성경을 많이 증언하였는데 해석의 목표가 딴 데로 간 것입니다. 만일 성경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 그 글을 읽고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여호와의 증인파 또는 이단자의 전도지를 외면합니다. 그러나 잘 모르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토론하다가 잘못된 해석에 바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1. 여호와의 증인파는 “평화로운 신세계를 대망하라”는 뜻으로 현실 천국이 도래할 것만 강조하고 “내세 천국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세 천국에 대한 성경은 증언하지 않고 일시적 또는 부분적, 그리고 상징적으로 말씀한 지상 천국의 말씀을 궁극적 소망의 말씀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세 천국이 왜 없느냐?하면 “지옥 불에 던진다”는 말씀(마 5:22, 눅 18:9, 계 19:20)이 “다 타서 없어지는 뜻이기 때문”에 갈 것(영혼)도 없고 갈 장소도 없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이단 신자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들은 성경을 일방적으로만 증거하고 전체를 종합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요(막 9:48), 뜨거운 고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눅 16:24) 불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또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고후 7:1), 영은 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욥 19:26, 눅 23:43, 마 10:@8) 그들은 “불이 영혼의 존재도 없앤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마 10:28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고 하셨지요. 사람에게 영적 실체가 없으면 인간을 생령이라고 할 수 없지요. 여하튼 영혼의 불멸성과 지옥과 천국을 다 부인하고 지상 천국만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2. 어떤 말씀을 가지고 지상 천국을 주장하는가?하면 벧후 3:13, 사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말이 지구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된 세상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 89:36~37과 104:5에서 “땅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벧후 3:12에 보시면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본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땅이 없어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뜻인데 그런 성경은 감추고 자기들 목적에 해당하는 말씀만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땅이 영원히 있다”는 것은 인생의 짧음을 땅에 비유하여 표현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수없이 갔지만 땅은 계속 있지 않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정통적 성경 해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내세 천국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죽는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23:43) 또 그들은 주장하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땅을 정복하라”(창 1:28)하신 말씀이 지상 천국을 목적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땅 뿐 아니라 우주도 정복해가고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내세가 없다”는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주장을 합니다.

3. 여호와의 증인 전도지를 보면 지상 천국을 말씀하신 듯한 지상 낙원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샘이 솟고 황무지에 꽃이 핀다”(사 35:6,7), “이 나라 저 나라가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다”(사 2:4), “땅이 소산을 내므로 굶주릴 자가 없다”(시 67:6, 72:6), “포도를 재배하여 타인이 먹지 않는다”(사 65:21~22), “수고가 헛되지 않고 사자와 살찐 짐승이 아이에게 이끌린다”(사 65:21~23 11:6~9), “병들었다 하지 않을 것이고 눈물을 씻어 주시며 사망과 애통이 없을 것이다”(사 33:23, 계 21:4) 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여기에 “평화가 온다”는 말씀은 바벨론 포로 70년의 시대와 같은 전쟁과 재난을 70년 후에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또 “눈물, 질병, 죽음이 없다”는 말씀은 내세 천국이 그렇다는 뜻인데 이 말씀들을 전부 지상 낙원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하니 참으로 토론 상대가 되지 않는 주장인 것입니다. 차라리 지상 천국을 말하고 싶으면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것이 약간은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설이란 계 20:1~3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사탄을 천년동안 가둔다”는 말씀인데 사탄을 가두면 죄 없는 천국이 지상에 이루어지겠지요. 그러나 이 천년왕국도 지상의 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영적으로 모시고 사는 자의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천년설(주 재림전 교회 시대에 성도 개인이 누리는 천국)이라고 하지요. 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신 주님의 기도도 거기에 목적을 두신 것인데 이것도 이단자들은 지상 천국에 결부시킵니다. 결국은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내세 천국이 없다는 자들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몹시 혼란하다가 주님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24:3~28과 딤후 3:1~5에서 말세의 징조가 거짓 선지자의 횡포, 사랑의 결핍, 불법 등이 있음은 물론 “인자의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고, 세상이 정화되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으로 계 22:11을 보시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다”. 이런 상황에서 “의를 행하는 성도는 그대로 의를 행한다” 하시므로 세상이 깨끗해지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 낙원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성경을 바로 아는 성도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계신 내세 천국에만 소망을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1과 성경 연구 자세 (눅 2:46~51) 목록으로


2004. 12. 28.(火)은 저에게 퍽 은혜로운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잠시 외출을 하고 저 혼자 있었는데 예정에 없었던 설교가 연달아 세 편이나 생각이 나서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 기록한 시간이 오후 2시인즉 또 다른 말씀이 뒤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성경 연구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고 또 예수님의 모범을 보시고 깨달으셔야 합니다. 본문의 기록은 예수님 열두 살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열두 살 못 된 분 보고 “예수님처럼 본받으시오” 하면 “무리한 일이라”고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더 된 분들은 얼마든지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선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이 성전에 계셨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지켜오는 유월절 행사에 부모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행사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어떤 용도로 성전을 쓰셨는가?에 대하여 살피면 “할례 할 8일이 되었을 때 이름을 예수라” 하였고(눅 2:21),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찼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비둘기로 제사하려 함이라”(눅 2:22~24) 하셨으니까 그 부모가 제사장에게 부탁하여 제사를 드렸다고 보아야 하고, 또 결례란 말씀과 관련하여 할례도 받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12세 때에 성전에 오셨을 때와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오셨을 때는 제사 드린 사실이 없고 말씀만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관계되는 성전의 의미는 기도하는 장소와(마 21:3) 말씀 강론하는 장소와(막 12:35) 자신을 계시한 건물(요 2:19~21)로만 이용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12세 이후에 성전에 가신 뜻이 “성경을 듣고 물으며 강론하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서셔서 성전에 가신 이유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가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예배당에 가는 큰 이유를 성경을 배울 수 있다는데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보다 성경 배우는 일이 더 중요하냐? 하시겠지요. 예배는 순서 의식이 아니고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또 예배가 순서 의식이라 해도 성경 강론이 반 이상의 시간을 차지하지 않습니까? 또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새벽기도와 공예배를 합하여 열 번 드린다고 할 때 “일곱 번은 각자가 집에서 드리되 담임 목사가 전달한 설교문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세 번만 교회에 와서 드리시오” 한다면 저는 찬성할 것입니다. 예배는 어느 곳에서나 드릴 수 있되 성경을 배우는 것은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이고, 성도들이 가정에서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비중이 더 크기 문입니다. 이렇게 성경 연구의 필연성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셔야 하고,

2.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으신 것입니다. 성경 잘 아는 분을 만나야 하고 그 분들과 함께 앉아야 하니 이것이 곧 성경 교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한 것처럼(눅 10:39, 42) 또 고넬료의 가족이 베드로를 모신 것처럼 성경 교사를 가까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교역자를 모심에 있어서 가정의 후견인, 예배의인도자, 또는 축복의 사역자, 성경 교사라는 직임 중에서 성경 교사의 인연을 크게 맺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교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옳게 가는 사역자를 모셔야 할 것입니다.

3. “듣기도 하고”하신 것입니다. 성경 교사의 가르침(설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들을 때는 정신을 차려 들어야 하고, 기본 지식이 있으면 더 좋으며 총명을 구하셔야 하고, 또 피곤치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면 재미있게 듣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행 16:14). 그래서 예수님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15:10) 예수님의 양친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한즉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을 때 50절에서 “그 양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열두 살 된 아들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신 뜻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잘 듣고 가르치는 의미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은 “묻기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도 질문할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하물며 저희들이겠습니까? 연속 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거나 설교를 들을 때 깨닫지 못하는 부분들을 묻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읽으셨다고 할 때 질문할 것이 많아야 합니다. ① 왜 아브라함 이전의 족보는 뺏을까요? ② 왜 아브라함과 다윗만 앞에 넣었을까요? ③ 왜 누가복음에 있는 계보와는 같지 않을까요? ④ 왜 41대를 기록하면서 세 사람의 여인 이름만 넣었을까요? ⑤ 왜 41대를 14대로 나누어 발표하였을까요? ⑥ 14대를 3세대로 곱하면 42대인데 왜 41대가 되었을까요? ⑦ 이 족보에 생략된 부분이 있는가요, 없는가요? ⑧ 왜 예수님의 족보를 맨 앞에 기록하셨을까요? ⑨ 낳았다 하셨으면 다 혈통을 계승한 것일까요? ⑩ 생략이 되었다면 어디서 되었을까요? 하고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교사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더 큰 연구에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51절에서 “순종하여 받드신 일”이고, 또 한 가지는 “그 모친이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둔 것”입니다. 열두 살 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셨습니까? 성경 교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성전에 오셨고, 선생들 중에 앉으셨으며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으며 부모님에게 순종하여 받드셨고, 그 모친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으니 이 말씀대로 저희들도 시행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2과 말씀을 상고함 (왕상 17:8~16) 목록으로


성경에 “말씀을 묵상한다”는 용어가 20회쯤 나오고(시 1:2), “말씀을 살핀다 또는 상고한다”는 말씀이 두 번, 세 번 나옵니다(벧전 1:12, 요 5:3, 9).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도 스스로 마음을 써서 말씀 살피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본문을 읽고 여러 차례 설교를 하였는데도 늘 새로운 맛을 주기 때문에 이 본문을 택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제목을 잡는다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전체의 결론은 “기적으로 양식을 주심”입니다. 또는 “기근을 극복하게 하심”이요, 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에게 은혜를 주심”이며 또 “하나님의 사역자를 붙들어 주심”이요, 또 “과부의 결단과 순종”이며 “선지자를 먼저 섬김”이요, “양식을 주시는 섭리”라고도 할 수 있고, “양식이 다하지 않음”이란 제목을 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외에 “선민의 시련”이란 제목을 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제목을 뽑으시려면 읽으시면서 마음에 짚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상고하셔야 하는가?하면 순서대로 하셔야 하는데

1. 우선 역사적 배경부터 살피셔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북왕국 아합왕 때에 사역을 하였고, 시기적으로는 주전 874년~853년쯤이 되며 아합왕이 이방 여인 두로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 하나님 섬기는 일을 폐하고 바알신을 섬기도록 권장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지자를 거의 다 없앤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으니 한 사람 왕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다같이 벌을 받아야 하는 시기였고, 그 벌로써 비를 주시지 않으므로 가뭄과 흉년과 기근이 3년 반이나 지속되는 시기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왕의 죄와 백성이 받는 벌이 연계된 것과 하나님은 벌을 주시되 자연과 물질계로 벌주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때에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이 쓰셨는데 그가 굶어 죽을 형편에 이르자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너는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다” 하셔서 엘리야는 순종도 해야 하고, 기근도 면해야 하니까 사르밧(두로와 시돈의 중간 지역, 사렙다)으로 갔고, 그 곳에서 자기를 공궤할 과부를 찾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과부가 누구라는 것은 지목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역과 과부란 것만 알려 주셨고, 찾는 책임은 엘리야의 몫이 된 것이지요. 저 같으면 그 동리나 관청에 찾아가서 “이 동리의 과부, 부잣집이 어느 집이요?”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다 기근에 처했으니까 그래도 있는 사람이 공궤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지요. 돈이 많아도 헌금 안 할 수 있고, 없어도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어떤 여인이 동산에서 나무개비를 줍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너무 목이 마른 상태였고, 물이 금보다 귀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조금만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엘리야는 현상 붙은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라는 신분을 안 밝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봉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물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때에 엘리야는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떡도 줄 수 있지 않겠나? 배가 고프니까 염치불구 하고 “떡 한 조각을 첨부해서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엘리야가 자기의 신분은 나타내지 않았어도 선지자의 권위로 명령한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선지자인데 죽을 지경이니 동정하라” 했다면 덕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요(김O대 목사 예증). 선지자가 입이 말라 죽게 되었는데도 사렙다 과부에게 명령한 것을 보면 선지자의 품위를 지키면서 그만한 영감이 왔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을 봉사하는 사람이면 떡도 줄 것이라”고 믿었지요.

4. 그런데 그 여인의 대답이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 남은 것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대한 정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여인이 바로 하나님이 지시한 과부란 사실이요(아들과 먹으니), 또 한 가지는 양식이 떨어지면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 이상 더 큰 무기는 없는 것입니다.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라”(더 5:16) 하였는데 형통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죽기를 각오한 바울도 승리하였습니다(행 21:13). 그때 엘리야는 “네가 두려워말고 그것으로 작은 떡 하나를 먼저 만들어 나를 주고 그 다음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어 먹으라 그러면 비 오는 날(양식 해결 되는 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다 없어지지 않으리라”한즉 과부도 그 말씀을 믿고 시행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 여기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여인, 순종의 여인, 봉사하는 여인, 그리고 가난한 과부에게 기적을 주셨고, 그 기적에 힘입어 엘리야도 보호를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사르밧 과부처럼 금보다 귀한 물 대접을 하고 또 순종하며 자신과 아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자를 섬겨 보세요. 그러나 기적은 아무 때나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나무 개비 주워 다가 마지막으로 빵 쪄 먹고 굶어 죽을 각오를 하는 성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를 잘 섬기고 넉넉해진 성도가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엘리야처럼 먹이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감히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돈 쓸 일이 생기거나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루 이틀 안에 주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새로운 체험을 하였는데 먼저 돈이 생기고 그 다음날 용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쓰임이 있고 돈 생기는 것보다 돈 생긴 다음 쓰임이 나타나는 것이 더 발전한 은혜가 아닐까요? 사르밧 과부는 진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각오한 것”은 12절에서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와 과부를 아울러 살펴주시는 은혜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상고하시라는 것입니다.

 

제13과 성경의 응용 (고후 12:7~10) 목록으로

 

“성경의 응용”이란 제목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인 것처럼 성경을 아는 만큼 그 말씀을 자기 생활에 어떻게 응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구슬이 많아도 꿰는 순서가 있을 것이고, 꿰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취지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응용입니다. 저희들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또 바울의 신앙 고백의 말씀도 읽었습니다. 이 본문으로 많은 설교를 들으셨을 줄 아는데 문제는 말씀 이해와 응용입니다.

1. 우선 바울을 이해해야 합니다.

1) 바울은 자신을 성도의 모범자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모범이실지라도 바울이 예수님을 모범하셨으니까 바울을 본받으면 곧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사도입니다. 이 사도의 직분은 초대 교회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의 목적과 특징이 있습니다. 사도직의 목적은 기독교의 기초를 닦고 기독교 생활의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생활의 모범을 보이는데는 특징이 없으나(그 당시 바울의 생활이나 지금 우리의 생활이 다르지 않다는 뜻)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 일에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초대 교회 때 한 번만 세우고 끝내는 것인데 그 기초를 닦기 위하여 계시적 영감과 특수한 기적을 주신 것입니다(히 2:4). 이 두 가지가 특징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기초 닦는 계시가 없고, 기초를 입증할 만한 이적을 나타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닦아 놓은 기초(성경)에 집만 짓는 것(성경적 생활)이 우리의 사명일 뿐 다른 기초(새로운 계시와 비상한 이적)을 닦아야 하는 줄로 아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고전 3:10).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인간 모범자이실지라도 인성의 모범자이실 뿐 신성의 모범자는 아니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되 인성을 본받고 사도를 본받되 기독교 기초 사역을 제외한 것을 본받도록 응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갖고 계셨습니다. 이 가시는 쉽게 말하여 늘 괴로움을 주는 질병입니다. 혹 안질이라고도 하지만 심해지면 죽을 수 있는 고혈압 같은 병인지도 모릅니다. 병이란 항상 괴로움과 아픔과 생명의 위험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견비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혈압이 항상 높기 때문에 늘 고난과 생명 단축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바울도 그런 고충을 갖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육체가 건강해야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성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은혜로운 사역자들도 병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빌 2:26~27, 딤전 5:23, 딤후 4:20).

3. 바울은 그 괴로움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그에게 필요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괴로운 일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응답이 안 되면 그것이 필요한 고통인 것으로 해석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 초기에 죽은 자도 살렸고, 독사의 해를 받지 않을 정도의 기적도 나타내셨습니다. 만일 그 기적이 그 방법대로 통한다면 한 번의 기도로 자신의 가시를 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역 말기에는 동역자의 질병 때문에 크게 염려한 적도 있었습니다(빌 2:26, 딤후 4:20). 그런 의미에서 어떤 우환이나 고난은 기도로 해결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4. 안 되면 어찌하느냐? 기도 만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에게 고난을 주실 때 뜻이 있으시니까 그 뜻을 이해하고 고난을 선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실 때 겸손하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계시를 많이 받는 바람에 자고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늘 아프니까 교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벧전 5:5) 교만하면 은혜 보존도 못하고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라도 겸손한 것이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응용을 하셔야 합니다.

2) 육체의 가시는 네게 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한 줄 알지니라”고 하셨습니다(9절). 요즈음 받은 은혜가 적은 줄로 아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더 잘 먹으려고 애쓰고 더 좋은 집에서 살려고 힘쓰며 생활비를 비싸게만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나는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참기름은 콩기름으로 대신하고, 과일은 채소로 대신하며 모든 생필품은 버려진 것을 주워다 쓰자는 주의입니다. 약간 과장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진실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은혜가 나의 노력에 비할 때 진실로 크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활의 폭과 비용을 줄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한데 왜 그것을 모르느냐?”하시고 가시를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바울이 약한 자이고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산나무는 기둥으로 쓸 수 없고, 죽은 나무, 마른 나무라야 쓸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뻣뻣하고 교만하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15:31) 저나 여러분들이 인간적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지 않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이런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어떤 자세를 취하였습니까? 다시 말하면 가시를 안 빼주신 일, 기도 응답 안 하신 일을 어떻게 응용하였습니까? 10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라면(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라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핌과 핍박과 곤란 당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강해지는 것입니까? 가시를 안 빼주셔서 고통이 계속 되는데.....고통은 계속 되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겸손으로 은혜를 보존하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셔 주시고 하나님의 일에 자기를 써주신다고 하는 것이 곧 자신이 강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강하여지시기를 바랍니다.

 

제14과 성경의 활용 (딤후 3:15~17) 목록으로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또 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성경의 활용”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심령에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문에 보면 성도들의 믿음 생활 통계가 나왔는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뜨거움을 느끼는 문제는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주일 낮 예배만 드리는 자 66%, 구역 예배, 특별 예배는 3.5%, 성경 읽기 1시간 하는 사람 26%(많은 것), 안 읽는 사람 53%, 기도 30분 이하 하는 사람이 47%, 기도 안 하는 사람이 35%, 성경 공부는 3%(100명의 3명), 모태신자 70%, 스스로 출석한 자 15%, 친구 선배로 통한 자 34%, 전도 경험자 26%, 전도 무경험자 73%, 그래서 신앙생활을 겉도는 사람이 많으니 집중 교육이나 효과적 전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성도 개개인이 성경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성경을 잘 활용해서 신앙생활의 만족과 복을 받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1. 성경이 곧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요 1:1에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신 30:11~14에도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서 모셔 올 일도 아니고 바다 밖에 가서 가져 올 것도 아니라 이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이 있으니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성경책이 없을 때는 “네 손목에 있고 미간에 있다”고도 하셨습니다(신 6:8).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이리 저리 다니지 마시고 자기의 손에 있는 말씀을 펼치고 하나님을 만나시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계명판을 넣은 법궤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듯이 신약 시대에는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성경과 함께 임재해 계신 것입니다.

2. 성경을 의심 없이 믿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편지를 하였으면 그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네 믿음대로 되라, 말씀을 믿고 가더니 아이가 나았다(막 9:23, 마 8:13, 요 4:50), 말씀이 이룰 줄 믿고 의심치 말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막 11:22~23 16:16)” 하셨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믿어 복 받는 책입니다. 성경 말씀을 소중하게 여겨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길에 가면 성경 액자를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골동품으로 수집합니다. 도저히 길에 둔 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은 “읽어서 복 받고 들어서 복 받으며 지켜서 복 받는다”는 말씀이 계 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6% 성도가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통독하는 것이지요. 맹물보다는 낫고 수박을 먹는 느낌쯤 되겠지요. 그래도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들어서 복 받는 것인데 듣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떤 집회에 갔다가 네 시간 앉았는데 혼났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좋은 편을 택했다”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0:43).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도한 것만큼의 은혜가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잘 가르치고 길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성도는 듣는 노하우를 개발하셔서 듣는 부담이 없이 깨닫는 취미를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키는 복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여러 가지로 복 받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에 보시면 “광주리가 복 되고 떡 반죽 그릇이 복 되며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으며 나라의 대적도 물리쳐 주신다” 하셨으니 대단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신 28:4~7). 말씀 지키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중심으로만 나가면 되는 것이니까요(마 22:36~40). 또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신 30:11). 왜 계명 실천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마 11:30에도 보시면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는데 왜 그럴까요? 이것은 성도가 자신을 못 박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성령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장기를 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우면 하겠습니까? 감동을 받고 쉽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4. 묵상해서 복 받는 것이 있습니다. 시 1:2에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 묵상한 경험을 말씀드리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5왕과 싸울 때 “태양이 머물고 달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하라”고 하셨지요. 태양이 머물면 달빛은 필요 없는데 왜 그렇게 기도하였을까요? 또 기브온 땅에서 아얄론은 동쪽일까요, 서쪽일까요? 그런 것을 묵상하시면 재미있습니다. 또 욥이 7남 3녀에 11,000마리 짐승이 있는데 왜 종의 수는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왜 다를까요? 예수님이 음행한 여인을 구하실 때 땅에 글씨를 쓰셨는데 왜 무슨 글씨를 쓰셨을까요? 이런 묵상을 하실 수 있고, 그렇게 묵상하시면 복될 것입니다.

5. 기록하셔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요즈음 성경을 기록하는 성도가 많으신 줄 압니다. 성경에 “기록하라”는 말씀도 많고(출 17:14, 34:27, 요 20:31), 욥도 자기의 사정이 기록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욥 19:23). 기록은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을 겸하는 작업입니다.

6. 전파하여 복을 받습니다. 롬 10:15에 보시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셨고, 또 “말씀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하늘의 별처럼 빛난다”고 하셨습니다(단 12:3).

7. 교육적 지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성경대로만 살려고 힘쓴다면 가장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성경을 깨달을 때 역시 성령님의 감동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용하던 성경책을 오래 보존하면 좋은 기념물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익숙하게 활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5과 족보를 살핌 (마 1:1~16) 목록으로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한다(행 17:11), 배운다(딤후 3:14), 살핀다, 연구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전 1:10). 이 시간에는 신약 최초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본문을 읽은즉 예수님의 족보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초두에 왜 예수님의 족보부터 기록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

1) 신약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소개할 때는 누구의 자손, 아무개라고 소개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고 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적 인물 중에 조상이 없으면 안 되고, 특히 사회적으로 호적에 올리려면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 사회적 인물,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그 족보의 내용을 왜 아브라함부터 기록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창 12:2).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롬 4:11)이란 말씀이 곧 메시야 약속이고 이 사실을 창 17:2~8에서도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약속의 성취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다음에 다윗을 거론하신 것도 그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도 메시야 약속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삼하 7:12~13, 시 110:1, 22:1). 그래서 족보 서론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거론된 것입니다.

3. 이 족보는 3세대로 구분하였고, 1세대를 14대로 헤아렸지만 다윗이 앞뒤로 중복 계산되었기 때문에 41대가 되고 아담부터 데라(아브라함의 부)까지 19대를 합하면 예수님이 아담의 60대손으로 탄생하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60대라는 계보가 순서대로 된 것인가?할 때 상당한 생략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약 4000년인즉 이를 60대로 나누면 평균 67세에 대를 이었다는 뜻이니 생략된 것이 짐작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약 1000년인데 여기에서 14대가 나왔고, 다윗부터 포로 전까지는 약 400년 밖에 안 되는데 거기에도 14대가 나왔으며 포로 후부터 예수님까지는 약 600년인데 역시 14대로 나누었으니까 그 댓수의 평균 기간이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느 부분에 생략이 있는지를 살피려면 상세히 연구하셔야 하는데 우선 한 가지만 예로 든다면 요람의 아들 웃시야라 한데서 4대를 건너뛴 데가 있지요. 우선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서는 76대로 나와 있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마태복음의 족보는 16대가 생략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가복음의 족보와의 차이는 누가복음 강론에 수록됨.).

4. 예수님 족보에 생략이 있어도 되는가? 하시겠지요. 본문 8절에서 “요람이 웃시야(5대손)를 낳았다”한 것은 잘못된 말씀이 아닙니다. 고조부가 낳았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족보를 기록한 목적이 역사적 연대를 나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계승된 것을 증명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요시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또 “낳았다”는 말씀이 꼭 직계 혈통만을 의미하는가?할 때 우선 혈통 계열을 따른 것인데 중간에 아들이 없을 때는 양자로 계승시킨 것도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그 증거로는 12절에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았다” 하였지만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조카입니다(대상 3:17~19, 스알디엘의 동생 브다야의 아들임.). 한국인의 족보도 양자로 계승하지만 역시 조상의 혈통임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손색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5. 그런데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세 여인이 배우자로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은 것이고, 또 하나는 살몬이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은 것이며 또 하나는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은 것입니다(3,5절). 왜 41대나 기록하면서 세 여인만 기록되었는가? 하시겠지요. 그런데 이 세 여인은 다 문제를 안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인데 애굽으로 가기 전에 남편이 죽었으나 시부인 유다가 계대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베레스를 낳은 여인이니(창 36:11~30) 음행으로 치면 죄가 크지만 유다의 자손을 보려는 의욕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유다 계열로 주셨습니다(창 49:10). 그다음 라합은 이방 여인이고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주고 붉은 줄을 달아 내리므로 구원을 받은 여인입니다(수 2:1~21). 따지고 보면 다말과 라합은 생명을 건 모험을 한 여인들입니다. 다말은 자손을 얻기 위하여 걸었고, 라합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그리고 룻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방 여인으로서 효부입니다. 그는 효부이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믿음도 본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여인에게 복을 주셨고, 그들이 낳은 아들들을 메시야 계열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범죄의 장벽과 신분의 장벽이나 이방인의 장벽을 헐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약점, 범죄의 약점이 있었지만 믿음과 효도와 모험의 장점을 보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족보에 기록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아야 할 것은 ① 하나님의 언약의 실천이요, ② 하나님은 그 언약을 섭리적으로 이행하시는 것이며 ③ 또 섭리적으로 뜻을 이행하실 때는 장벽을 초월하신다는 점이고, ④ 인간은 사회적 문화의 적응을 받아야 한다는 점과 ⑤ 세 여인의 모험적 신앙과 행동에 큰 복을 주셨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16과 계시 방편 (히 1:1~3) 목록으로


1. 계시 방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계시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또는 무엇으로 주시느냐?하는 것이고, 방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뜻이나 교훈을 주실 때 무엇을 통하여 또 어떻게 전달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선 본문의 뜻을 말씀드리면 “옛적에는(구약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 여러 모양(이것이 계시의 방편임. 연구 과제)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뜻 전달)하셨는데 모든 날 마지막(최종 시기)에는 아들(예수님)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 본체시며 창조자, 보존자시며 영광의 광채이시고 대속자요, 통치자, 심판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1절의 중요한 뜻은 예수님이 최종 계시, 최고 계시의 본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 이상 더 큰 계시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 이전에 있었던 모든 계시(구약 성경)는 예수님 그늘 속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후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대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워 모범을 보이시고 또 성경을 주셔서 자신을 알리게 하셨으니까 성경이 곧 예수님 반영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보다 더 밝은 계시는 없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

2. 그런데 계시 방편이란 제목에서 몇 가지 연구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구약 시대나 성경을 주실 때 여러 부분, 여러 모양이 어떤 것들이었나 하는 점이고, 다음에는 오늘날은 성경 이외의 계시로서 유효한 계시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 시대에 계시를 주실 때 “아담아, 아브라함아, 모세야”하신 것처럼 직접 음성으로 주신 일이 있고, 꿈으로도 주셨고(창 20:6), 이상(환상, 비몽사몽, 욥 33:15, 행 10:10)과 천사로도 주셨는데(행 10:4) 그 중에서 말씀으로 직접 주실 때는 깨닫기 쉽게 하시기 위하여 비유로도 주셨고(삼하 12:3~4, 시 78:2, 마 13:3), 때로는 연극처럼 시청각 교육하듯이 나타내신 바도 있었습니다(베띠. 렘 13:1). 그 외에 또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이 우림과 두밈으로 무엇을 판결한 것이나(출 28:30) 제비를 뽑게 하여 뜻을 나타내신 일도 있었으니(욘 1:7) 이런 것들이 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인데 지금은 다 최종 계시로 인하여 막을 내린 것입니다.

3. 그러면 또 다른 계시는 없는가?할 때 무인격의 사물을 계시 방편으로도 쓰신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자연 계시가 가장 크고, 때로는 비둘기로 노아에게 물 걷힌 것을 알린 일과(창 8:8) 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을 깨우치신 일과(민 22:28~30) 적당한 시기에 닭 우는 소리로 베드로를 깨우치신 일도 있고(마 26:24, 74), 또 특이한 것은 “너희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하시므로 무인격의 동물이나 심지어는 돌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일에 일조를 하였다는 사실입니다(7분 설교 8집에 “돌들이 소리 지름”이란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4.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 무엇을 하나님의 계시(교훈)로 믿고 참고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적절하고 밝은 것이 성경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 터득하는 방법을 반드시 배우시고 아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 이외에도 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전에 꿈을 꾸면서 잠을 깼습니다. 그 꿈은 전임지 남일교회에 세상 떠난 장로님들과 살아 있는 제직들과 청년들이 무슨 항의를 하는 꿈을 꾸었는데 나는 이 꿈의 의미를 ‘남일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뜻 이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아무리 신비하고 신통해도 그것을 알맹이 계시로 받을 근거가 없으니 껍질격으로 받는 자극으로 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교훈)로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1) 그 첫째가 자연 계시입니다. 자연 계시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다고 롬 1:2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농사지을 대 거름을 잘 하면 소득을 얻습니다. 또 자연을 보호하면 그만한 덕을 봅니다. 그리고 자연 계열의 연구를 통해서 유익해지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다윗이 자연을 보고 노래한 내용을 보십시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 하셨고(시 19:1~6), 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로다”(시 121:1)하므로 자연으로 깨닫는 지식이 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2) 동물도 살피세요. 벳세메스로 가는 암소가 법궤 수레를 메고 치우치지 않으며 가는 것도 배우시고(삼상 6:12), 소와 나귀가 임자를 아는 것도 살피시며(사 1:3) 닭이 새벽을 알리고 개미가 부지런한 것이나(잠 6:6) 뱀이 지혜롭고 비둘기가 순결한 것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마 10:16).

3) 히 13:7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한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하셨으니 신앙 선배들의 행실과 종말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고,

4) 불신자들의 소리입니다. 욘 1:6을 보시면 요나가 풍랑 중 잠자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선장이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하여 요나가 일깨인 사실이 있었으니 오늘날도 가장 따가운 채찍은 불신자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에게 주신 절대적 계시는 성경과 자연 계시뿐이지만 성도가 교훈 받아야 할 또 다른 대상은 선배, 불신자, 동물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3. 기도에 대한 말씀

제17과 기도에 대한 말씀 (약 5:13~20) 목록으로


이 말씀은 병자를 위한 교훈으로 많이 증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훈 받을 내용이 많습니다.

1. 우선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면 저는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는 모든 성도를 지칭한 말씀입니다(약 1:1). 성도가 기도해야 할 것과 “고난을 기도로 해결하라”는 말씀은 많이 하셨습니다. “환난 중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라” 하셨고(시 50:15), 또 성도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들으사 반석 위에 세워주셨다”고도 하셨습니다(시 40:1). 고난은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시 68:19에서 “하나님은 날마다 성도의 짐을 져주시는 분”이라 하셨으니까 고난이 있을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고난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죄 짓는 가책과 힘들고 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형통 안 되는 일이 많은데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알 수 없다” 하기로 “기도하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덧붙여서 자기반성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는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병도 고난의 일종인즉 우선 자신이 기도하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하려 할 때 “교회의 장로(여기서는 교역자, 감독자, 신앙 지도자를 의미함.)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평신도보다 더 믿음 있고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기도 응답이 더디 되는 이유를 상담하고 권면 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도가 병들었을 때 기도를 하였는데도 계속 힘들면 기도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병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에 대하여 장로들의 자문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기도의 장애를 제거해야 할 문제도 있을 수 있으니까 믿음의 지도자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좋아하시고 성도가 “나는 무슨 죄 때문에 벌 받아 마땅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성도는 자기의 죄를 시인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15절의 “믿음의 기도”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장애물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할 때는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간구와 죄를 서로 고하는 것” 세 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도는 “낫게 해 주십시오”하여 낫는 것만 믿음의 기도가 아니고, 병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피면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병이나 고난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 연단을 주시기 위함인지 아니면 죄를 회개케 하시기 위함인지 아니면 죽음을 주시기 위함인지 어떤 영광에 목적이 있으신지를 모르니까 믿음 있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 목적을 살피면서 지혜롭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의인의 간구란 성결한 자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기도는 들으셔도(눅 18:13)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9:31). 그러니까 기도 응답이 더딜 때는 의인의 기도가 되도록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의인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죄를 서로 고하는 것”입니다. 불교 방송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불교도들도 참회를 많이 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기 원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현재의 모든 죄....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기 원합니다” 하는데 누가 죄를 용서하는지에 대하여는 막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기 위하여 죄를 서로 고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회개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하면 체통 깎일까봐 혼자만 알고 주여 주여 한다면 힘 있는 회개가 못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섭리를 헤아리면서 기도하는 것이고, 의인의 간구는 죄를 서로 고하는 것입니다.

4. “엘리야”만 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서 “엘리야가(주전 700년경의 선지자이지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 하신 뜻”은 비를 오게도 하고 안 오게도 하는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때 엘리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저희들도 엄청난 은혜를 구할 수 있고, 또 체험하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기적의 양식을 주신 일이 있지요(왕하 17:6). 저도 기적 같은 양식을 받아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없이 먹었습니다(핵심 설교 중 놀라운 충격 참고). 또 비가 멎기를 기도하여 응답받은 일이 있습니다(7분 9집, 나의 일기 참고). 그렇다하여 하나님이 나를 엘리야나 사도처럼 쓰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엡 2:20). 문제는 큰 제목도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죽은 자가 산일은 유두고 한 사람 뿐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비가 오고 안 오는 문제는 연속된 일이니까 죽은 자를 금방 살리는 기도는 안 해도 그 이외의 기도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본문에 보시면 기도할 과제를 하나 더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미혹 받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미혹 받는 범위는 넓습니다. 이단에 미혹 받는 자도 있고, 세속에 미혹 받는 자도 있으며 신령한 은혜에 거스리는 일로 미혹 받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니까 그것도 기도의 큰 제목이란 뜻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와 질병이 있을 때도 기도해야 하지만 믿음이 연약해지거나 미혹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마귀의 까불림을 당할 때 예수님이 기도해 주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눅 22:31). 그리고 기도할 때는 먼저 자신이 하고 다음에 복음 사역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기도의 제목은 질병에 대한 것, 죄를 서로 고하는 회개, 더 나가서는 큰 것도 구할 수 있고, 또 미혹 받는 대상을 위하여서도 기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제18과 기도묵상 (살전 5:17) 목록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시고 기도에 대한 말씀을 받으셨으니까 “기도 묵상”이란 제목을 걸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우선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반성해 보시면 할 일이 많은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하시겠지요. 잠자는 시간만 빼고 기도를 생활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쉬지 않는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2. 이런 말씀이 다른 곳에 또 있는가?할 때 눅 18:1에 보시면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으니까 역시 같은 뜻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하는 것”은 육체적 심장이 멎지 않는 것만큼 중요하고 심장이 뛸 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성도는 기도가 계속 될 때 영적 경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혹이라도 누가 묻기를 “기도가 무엇 하는 것이냐?”한다면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나타내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선 감사가 있고, 보고가 있으며 자복이 있고, 문의가 있으며 간청이 있는데 이 간청에도 자기 위한 간청, 타인이나 국가나 단체를 위한 간청이 있을 것입니다. 또 간청의 내용으로서는 영혼(믿음)을 위한 간청, 육체(건강과 생활)를 위한 간청, 이웃과의 관계를 위한 간청, 공급과 평화를 위한 간청, 신령한 사명을 위한 간청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 때에 비중 있고 영원한 것을 간청할수록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3). 그것만 잘 성취하면 “이 모든 것(인간적으로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신다” 하셨으니까 마땅히 그 쪽에 비중을 두셔야 할 것입니다.

4. 기도의 내용을 구상할 때 감사의 내용이 많아야 하겠지요. 그러려면 보호, 공급, 인도의 은혜를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하루 생활이나 순간적 생활을 소상하게 보고하시고, 특히 대인 관계에 관한 일을 소상하게 보고 하시면 좋습니다. 거리낀 일이 있으면 회개하시되 되도록이면 회개의 내용이 많아지지 않도록 매일 매일의 생활을 바쁘고 충실하게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죄를 가장 적게 짓는 방법이 근면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 식사하면 쉬어야 하니까 죄 지을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할 일이 없어서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하고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노는 신간을 갖는다는 것이 유혹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무엇에 취미를 가지라는 것인가?할 때 일을 열심히 하시고 그 일로 한 가지 두 가지 성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어떤 이는 기도를 앉은 자세에서 보통 두 세 시간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초지종을 고하기 때문에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가 생활적 기도보다 비중이 클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그 긴 기도를 다 들으시겠는가? 하나님도 바쁘실 텐데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광대 무한한 분이셔서 모든 이의 기도를 다 개인적으로 들으십니다. “항상 기도하라” 하셨으니까 항상 들으시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6. 또 묵상 중에 깨달으셔야 할 것은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듣고 응답하실 분이 계셔야지요. 그 분이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아파트에 들어가려 해도 수위가 “무슨 일로 몇 호에 갑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런 아파트는 특수층이 사는 곳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갑니다“하면 통과시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중보 사역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은 ”기도를 잘 하도록 감동하시고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롬 8:26).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성부, 성자, 성령님을 다 가까이 모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7. 기도를 잘 해야 되는데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하시고(약 1:6) 평소에 순종을 잘 하셔야 하며 부족한 점이 있으시면 먼저 회개, 자복을 하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위하여 먼저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간구할 때는 꼭 욕심에 해당되지 않게 하시고 타인의 손해나 경쟁 대열에 서지 마시며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에 부탁하는 기도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를 하실 때는 모임의 형편과 시간 조정을 잘 하셔야 하고 타인의 잘못을 거론할 때 인신공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8.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근거로 “기도를 하라” 하시고 또 응답을 하시는가?할 때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와의 대화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은혜가 많으시고 긍휼이 무궁하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잘 안 되면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유익하지 않습니다(렘 14:21, 사 42:8). 그래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간청을 이루어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에 빠져 사는 사람은 경건을 힘쓰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응답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선 성경으로 깨달음을 주시지요. 성경이 문의와 기도에 첫째 응답이고, 그 다음의 응답은 섭리적 성취입니다. 제가 장기목 목사님이 부른 찬송가 테이프을 잃어버리고 기도하였는데 약 20일 만에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합당한 간청에 꼭 응답을 기다리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19과 기도 잘 하는 법 (눅 11:1~4)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 하였고, 요한도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하였으며 예수님도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요약된 내용”만 가르치셨습니다. 저도 이 시간에 그 동안 기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도 잘 하는 법 일곱 가지를 간단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 잘 하는 법

1.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긴밀하게 확보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군신 관계도 되지만 기도할 때는 부자 관계로 하셔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은 가장 임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 관계라도 가깝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역하는 자식, 내쫓긴 자식, 아버지와 대화를 안 하는 자식,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은 부자 관계라도 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을 때 가깝고 뜨거운 친교와 신뢰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신뢰 관계를 가깝게 하는 것이 곧 회개와 순종입니다. 회개는 멀어진 상태를 좁히는 것이고, 순종은 아버지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좁힌 다음에

2. 기도할 것을 사모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즉흥적 기도가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해야 될 텐데, 언제하나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시간에 없네”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으로 사모하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시 42:2을 보시면 “내 영혼이 하나님.....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하였고, 또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과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으니까(시 107:9, 애 3:25) 평소부터 기도를 사모하고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리고 세 번째는 기도할 기회를 결정적으로 잡아야 합니다. 새벽이든지 세수한 후든지 아니면 하루 일과 시작 전이든지 또 취침 전이든지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과거에 청도의 동산 기도원장 하태호 원장은 하루 8회를 기도했는데 12시, 3시, 6시, 9시 세 시간 간격으로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수고입니다. 이 기회를 잡을 때 혼자 하는 기도는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두 사람 이상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합력하는 기회를 잡으려면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저는 혼자 하는 기도보다 아내와 둘이 하는 기도를 힘씁니다. 혼자 정신 차려 기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서 내가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은 대표 기도와 같기 때문에 경성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 “합심 기도가 더 힘이 있다” 하셨으니까(마 18:19) 그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는 바쁜 일도 처리하면서 피곤하지 않을 때 기도해야 하니까 거기에도 신경이 많이 써집니다. 어떤 이는 저보고 “등산이나 산책을 하라”고 합니다. 산책이 아무리 좋지만 눈이 감기는데 어떻게 다닙니까? 눈이 감긴다는 것은 피로와 잠 오는 일로 몸이 곤한 것인데 어떻게 나가서 걷습니까? 그 때는 푹 쉬어서 몸이 개운해지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것처럼 기도가 아무리 중요해도 기도는 정신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곤하고 졸음이 오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휴식을 취하고 졸리지 않은 기회에 또 때로는 두 사람 이상이 자기 할 일(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하고, 짬을 내어 하려니까 기회 잡는 일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를 하시되 교회에 나와서 하셔도 좋고 골방에서 하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교회 기도회는 골방에서 드리는 가족 기도회만큼 안정적이고 간절하게 드리기 어렵습니다.

5.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확실히 알고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본래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기도할 때는 “내가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희생시켜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한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전도나 믿음을 위해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건강을 위하여는 기도할 수 있는가?할 때 애 3:33을 보시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셨으니까 평안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가 축구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어느 나라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실지” 모르니까 기도하기 어렵고 또 제 며느리와 딸이 임신 중인데 역시 하나님이 아들을 좋아하실지 딸을 좋아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이 좋으신 대로 주십시오”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뜻을 알고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 이론도 중요하지만 이론이 부실해도 마음을 바로 전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가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같은 내용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렘 11:20), 마음의 소원도 열납 하시니까요(시 37:4). 그래서 논리가 부족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는 개인 기도와 대표 기도를 잘 구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기도라도 공기도, 대표 기도를(롬 8:27, 살전 2:4) 할 때는 합당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기도의 내용이 자신에게는 합당해도 모든 사람에게는 공감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왜 여기서 다르고 저기서 다를까? 하시겠지만 그것은 성도의 양심 생활에 각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표 기도를 할 때는 자기 양심만 생각하면 안 되고 어디까지나 통일성 있고 보편성 있는 내용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뜻입니다.








제20과 혀가 마를 때 응답하심 (사 41:17~20) 목록으로


1.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한 부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사 1:1을 보시면 유다왕,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연대로는 주전 790년~680년 쯤 되는 것이고,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되기 약 100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는 총 66장인데 39장까지는 예언과 경고(범죄 하면 망한다)를 나타냈고, 40장부터는 위로와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도 41장의 말씀이니까 위로와 회복과 응답에 대한 말씀이지요. 그러면 어떤 일에 대한 응답과 회복의 말씀일까요? 그것은 주전 600년경(그러니까 100년 쯤 후)에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와 민족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고통이 대단할 즈음 즉 견디기 어려울 즈음에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유다와 바벨론 사이가 좋았습니다. 사 39:1을 보시면 히스기야왕이 병들었을 때에 바벨론왕 “므로닥 발라단”이 병문안을 왔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때 바벨론왕은 예루살렘에 와서 좋은 것을 많이 보고 갔는데 그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왕궁 백성들이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가?하면 좋은 관계도 하나님이 벌을 주시려고 하면 적이 된다는 뜻이지요.

2.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한다는 것은 어려움 당한 민족의 참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정권이 망하고 부자와 권세자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며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분산되었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가뭄에 시든 풀 같을 것입니다. 거기에 양식과 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민족의 수난을 예고한 것입니다. 다음에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란 무슨 뜻입니까? 고난이 많이 진행된 것을 의미하겠지요. “물이 없어 혀가 말랐다”는 것은 거의 죽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에야 응답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권고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야 권고하시고 응답하실까요?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가 많겠지만 우선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전 3:1에 보시면 “천하범사에 때가 있다” 하셨고, 민 14:34에서는 “정탐이 정탐한 날 수 40일을 년으로 곱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지내게 하신다” 하셨으며 이런 원칙에 의해서 선민의 바벨론 포로 기간은 70년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단 9:2). 그러니까 갈증으로 혀가 마르기 전에는 권고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고 갈증으로 혀가 말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분량이 찬 것을 뜻하고, 또 고난을 연단으로 주신 경우에는 결코 버리시지 않고 죽기 전에 고통이 극에 달하였을 때 구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또 18~19절의 “자산에 강을 열고 골짜기에 샘이 나며 광야에 못이 되게 하고 마른 땅에 샘이 나며 백향목....감람나무, 잣나무 등을 심게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화와 희망의 삶이 되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지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고 자유만 얻어도 고향에 돌아가서 평화롭게 산다면 마른 땅에 샘을 파고 잣나무를 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이 이루어주셨음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20절). 애굽에서의 행방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은 영적 속박에서 자유를 주시는 의미도 있습니다(계 11:8, 14:8, 요 8:32).

3. 어떤 직분자가 가정 문제와 경제 문제가 풀리지 않자 저와 상담을 하면서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리라”(시 1:3) 하셨는데 자신의 형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교역자로서 그 분의 장점과 단점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있다면 교인 중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영을 부실하게 하여 여유 있게 살지 못하니 그 봉사력이 다른 이에 비할 때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본문을 읽고 “갈증으로 그 혀가 마를 때 은혜를 주신다” 하셨은즉 더 많이 깨닫고 연단을 받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도가 약 5억짜리 상가주택을 갖고 있는데 부채는 4000만원 쯤 됩니다. 그런데 세금도 밀리고 전세도 빼주지 못하니 이렇게 끌려가는 경영을 하여서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여쭌다면 “너는 많은 재산을 갖고 만족해 보았느냐?”하실 것이요, 또 “있는 재물을 갖고 경영을 잘 못한다”하실 것이며 또 “너는 어찌 하여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교회를 섬기는 봉사가 그렇게 미약하냐?”고 하실 것을 생각해보았느냐? 하였습니다. 나는 전셋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시는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간증합니다. 그러니까 그 성도는 “목사님 기도는 많이 응답하시는 것 같은데 제 기도는 왜 안 들어주실까요?” 하기로 우선 적자 금액을 청상하기 위하여 대출을 받고 그 집이 경매에 붙여지기 전에 팔아서 부채를 갚은 후 생활공간을 변두리로 옮기고 남는 금액으로 활용함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합당한 생활은 우선 빚이 없거나 독촉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사를 땅에 묻지 말고 경영하고 바쁘게 노력하여 융통성 있게 생활하도록 시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연단을 끝내시면 반드시 혀가 마르기 전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21과 기도 불 응답 (사 1:13~17) 목록으로


나는 평소에 기도 응답 받은 사실을 감사하는 뜻으로 많이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기도 응답 안 된 사실이 두 번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셋째 딸의 결혼식 날 비가 온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둘째 딸이 유산을 한 것입니다. 나는 기도 응답의 자부심을 갖고 “그 날 좋은 일기를 주십시오”, 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인즉 감사합니다, 잘 육성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를 수시로 간절하게 하였는데 간청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도들에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한 신앙적 처방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는 기도 응답 받은 일과 응답 되지 않은 일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하셨고, 또 “환난 날에도 응답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20:1, 40:1, 50:15). 그러나 응답 안 된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이 “병든 아들을 살려 달라” 하였을 때 응답하시지 않았고(삼하 12:15~25), 또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하였을 때도 거절하셨으며(삼하 7:1~7, 대상 28:3) 예수님은 귀신병 고침 받은 자의 사명적 소원을 거절하셨고(막 5:18~19), 나사로를 죽도록 버려두셨으며(요 11:1~6)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질병)를 제거 받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고후 12:7~9). 그러니까 기도(간청)는 다 응답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꼭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어떤 경우에 기도 응답이 안 되는가?에 대한 것도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1)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 1:15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만신창이 같다 하셨는데 그들이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시고 많이 기도하여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회개하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2) 징계의 기간에 듣지 않으십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할지라도 속히 주시지 않고 그 혀가 마를 때(즉 징계의 한계가 다 하였을 때)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사 41:17). 그리고 징계 기간에는 하나님이 영적 눈을 어둡게 하시기 때문에 바른 기도도 잘 할 수 없게 됩니다(사 6:9~10).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단 9:12).

3)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약 4:3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으로 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자기 욕심, 자기 이기주의를 위한 기도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목적이 사랑에 있는 것이므로 그 기도가 적당하지만 이기주의 기도는 남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을 가로채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파트 당첨이나 운동 경기의 승리나 대학 입시를 구할 때는 “나를 주십시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심이 마땅한 것입니다.

4) 응답 안 되는 경우는 하나님의 계획적 섭리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 많지만 감취어 있는 것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여 선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여 버리셨는데(롬 9:13) 그 뜻을 모르고 “에서를 선택해 주십시오” 하였다면 들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을 안 고쳐 주신 이유는 그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리하신 것처럼 섭리에 맞지 않는 것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를 때는 어떻게 기도하셔야 할까요? 예를 들어서 믿음, 사랑, 전도 목적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이 권장하시는 것이니까 잘 되도록 구해도 되지만 섭리에 감취어진 것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6:39). 십자가의 고난이 쉽게 넘어 가기를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것처럼 섭리적 여유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하였다가 안 되는 것은 퍽 허망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기도는 “믿습니다”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병자를 놓고 “주여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하는 간청은 다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수명을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행 17:26).

4. 그러면 내(필자) 기도가 응답 안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계속 가물다가 꼭 그 날만 비가 왔는데 나는 혼인을 부족하게 성취한 것은 없습니다. 비가 와서 못 온 사람이 있거나 옷을 버린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비로 인하여 초목에 유익이 있었거나 우산 장사가 돈을 벌어야 할 유익 같은 것이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다른 목적이 성취 된 것을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딸의 유산도 누구의 유익을 위한 것일까?할 때 그렇지 않지요. 그것은 그 당사자나 누구의 죄 값일 것입니다. 딸이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형부하고 전화상으로 말다툼한 후에 형부와 언니가 잘 살면 용서하고 화목해야 되는데 그것을 상당 기간 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은 새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는데 형부는 다른 교회로 유리하면서 믿음에 정착을 못하였으니 그것이 작은 일입니까? 그래서 제가 딸에게 권면하려는 것입니다. 형부와 화해하고 용서한 후 자신의 부족도 용서 받고 새로운 은혜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생활은 직결되어 있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마 5:21~22).

 

4. 은혜를 구함에 대한 말씀

제22과 형통한 은혜 (대하 26:4~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한 사례와 형통을 바라는 성도의 생활”에 대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1. 우선 형통한 사례를 살펴보면

1) 창 24:56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자부를 구하기 위하여 하란으로 출발하면서 “순적하게 만나는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고 떠났는데 목적지에 가까이 가서 한 우물곁에 선즉 마침 처녀들이 나왔고 그 처녀 중에 아브라함의 동생의 손녀딸이 나왔으며 그의 안내로 그 집에 찾아가서 사실을 말한즉 당사자와 가족들이 흔쾌히 응하므로 쉽게 목적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 창 39:1~6에서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셉이 형통한 과정을 살피면 먼저 그 아버지 야곱이 양치는 광야로 요셉을 심부름 시켰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뜻에 순종하고 갔지요. 그런데 그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고, 죽일 생각을 하면서 깊은 구덩이에 넣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애굽으로 팔려갔고, 애굽에서 또 시위 대장 집으로 팔려갔고, 시위 대장 집에서 감옥에 들어갔으며 거기에서 바로왕 앞으로 끌려 나왔고, 하나님이 계시를 주셔서 예언을 하고 총리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도 자기 선택이나 자기 의도대로 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다윗의 형통입니다. 다윗은 8형제 중 말째 아들인데 그 형들이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삼상 17:28). 그러나 다윗은 용맹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삼상 17:31~37). 사울왕은 그를 전쟁터에 내보냈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였으며 명성이 올라갔고, 사울왕은 교만하다가 전쟁에 죽었으며 다윗은 감히 왕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기어코 왕을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왕은 안 되려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4) 본문은 웃시야왕의 이야기입니다. 웃시아왕은 유다 13대 왕인데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장기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형통하지 않고서야 어찌 52년이나 왕노릇을 하겠습니까? 본문에 보시면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구하였으며 그 구할 동안에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웃시아왕이 형통한 비결은 성경을 잘 아는 선지자의 말을 잘 들은 것입니다. 시 1:3에 보시면 “죄를 멀리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릇 그 행사를 다 형통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형통의 특징은 자기의 선택이 제외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에게도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5) 제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은 나의 길을 어떻게 인도하셨나?”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는 본래 목사 되기를 원해서 신학교를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이 그 쪽으로만 열리니까 간 것이지요. 목사의 사명을 느낀 것은 목사 될 당시부터였습니다. 어차피 목사 되었으니까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를 해야만 목사직이 유지되고, 목회를 하려면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야 하는데 초년생에게는 그런 청빙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은 아는 친구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전 5:19)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고, 절대로 “나를 내세우거나 나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은 안 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큰 교회에서 교역자를 구할 때마다 “나를 소개해 주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생각을 몇 번 했습니다. 그러나 “나 죽소”하고 참았습니다. 제가 상주 죽암 교회에 있을 때 친구 서동걸 목사님이 나를 의성 빙계 교회로 끌어가다시피 인도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꼭 같은 방법으로 청도 동곡 교회로 인도하였는데 그 후에 또 어떤 장로님이 나를 화양읍 교회로 데려 갔고, 그 다음에 현명길 목사님이 대구 남일 교회로 인도 하셨고, 그 다음에 권봉태 목사님이 성남 한남 교회로 인도하였으며 지금은 김종찬 장로님이 “같이 일하자”하여 이 곳에 머무른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에게 목회의 길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 일에 대하여 당사자인 나는 노력도 안 했고 선택도 안 했는데 끌려가서 일을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열 번 노력하고 열 번 성취 된다면 그것은 형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력보다 성취가 많은 것이 형통입니다.

2.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든든히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 73:23에서 “내가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하셨습니다.

2) 자기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시 37:5). 설계도를 그려서 구체적으로 맡기지 마시고 집이 필요하면 “눌 자리를 주시겠지”하는 뜻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맡겼으니까 자신은 누구를 찾아가서 부탁하거나 어떤 계획을 선택하지 말고 섭리적으로 열리는 길이 있으면 가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에 쪽박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맡기는 것입니다. 물은 낮아지면 흐르고 길은 뚫린 대로 가는 것입니다.

4) 그 대신 당면한 환경에서 할 일 만큼은 충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요셉이 시위 대장 집에서 충실하였고, 또 감옥에서도 충실한 것처럼 어느 환경에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성실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형통하는 은혜와 받는 자의 처신”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제23과 여호와이레 (창 22:14, 빌 4:19) 목록으로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수양을 발견하게 하셔서 제물로 쓰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없이 나무만 갖고 갈 때 그의 종이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한즉 아브람이 대답하기를 “여호와이레”라고 하였지요(창 22:8).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꼭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체험을 해 보셨습니까? 많이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빌 4:19 말씀은 “하나님이 너희의 쓸 것을 채워주신다”는 말씀인데 이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로마 감옥에 계신 바울에게 위문과 선물을 보냈을 때 바울 사도가 그 사실을 칭찬하시고 “내가 선물을 받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이 풍부하다 그러나 너희들의 복음 사역자에 대한 봉사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다 따라서 그 제물(복음 사역자 섬김)을 받으신 하나님이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마 6:8, 32), 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며(히 4:16)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6:33). 저도 타인에게 의존하여 살지는 않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쓸 것이 넉넉해지기 위하여 저를 섬긴다면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성도가 형통하고 넉넉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상 17:9에 보시면 가난하여 죽게 된 사렙다 과부가 자기의 마지막 양식으로 엘리야를 대접하고 가난을 극복한 사실이 있고, 왕하 4:8에서 수SPA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극진히 대접하고 아들을 낳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배 어른 고 남수복 목사님이 부흥회에 가셔서 이 설교를 하시니까 아들 없는 부부가 “아들 낳도록 기도해 달라”하여 대접을 잘 해야 될 것이 아니냐?한즉 “양복을 한 벌 해드리겠다”하여 기도를 하셨는데 아들을 낳지는 못했으나 누가 좋은 아들을 대문 앞에 두고 가서 결국 아들을 얻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저는 준비하시는 하나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2004년 11월 28일 주일 오후에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행사에 쓸 것을 준비해주시는 일에 대하여 너무 많은 체험을 하였지만 이번에 아들, 딸의 혼사 두 건을 한 달 사이에 치른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예비해 주시는 은총이 너무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감사, 전파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년 전에 둘째 딸을 결혼시켰지요. 제가 누구에게 빌려준 돈이 있어서 3개월 전부터 상당 금액을 독촉하였지만 허사였는데 다행히도 변통할 방도가 있어서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건의 혼사에 변통할 방법이 없었는데 채무자가 상당 금액을 반환하였고, 모든 재력을 다 동원하다 보니 유동 재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200만원이 필요하였습니다. 염려하며 기도하였지요. 바로 어제 저녁에는 함이 왔는데 본래 예물 교환을 안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함 값 주는 예산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위 될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 대단히 난처하였는데 출가한 둘째 딸이 결혼하는 동생을 위하여 협력하는 돈으로 함 값을 상당액 주고 부모가 준 것처럼 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딸의 덕을 톡톡히 본다 이것이야말로 여호와이레라”고 믿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200만원을 준비하기 위하여 특별한 분에게(사정할 분은 그 분 뿐임) “혼인이 일주간 남았는데 혼주가 피로연 비용이 없으니 어찌해야 좋으냐?”한즉 “목사님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혼인날 100만원을 가지고 갈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하고 쉽게 대답해주므로 또 한 번 “여호와이레”를 체험하였지요. 그런데 100만원은 또 어찌합니까? 12월 4일은 혼인날이고 5일은 첫 주일인데 “5일 날 교회에서 받을 사례를 4일에 받게 되면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갖고 주일 예배 후에 어렵게 부탁하려고 하였는데 부탁도 안 받은 회계 집사가 미리 알고 12월 사례를 한 주간 전에 주지 않겠습니까? 너무도 감사하여 “여호와이레”를 또 한 번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줄줄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 가실 대에 세금 요청을 받으셨지요. 그때에 제자들에게도 돈이 없었는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지면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 입에 돈이 있을 것인즉 그것으로 세금을 내라”(마 17:27)고 하셨습니다. 실감이 나십니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롬 4:17). 또 있습니다. 마지막 성찬 예식 때 장소가 없었지요. 막 14:13, 눅 22:10에 보시면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너희가 성 안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갖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에게 내가 쓸 객실을 물으면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니 거기서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쓸 것을 예비해주시고, 또 채워주시는 분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필요한 사건도 그런 방법으로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시 1:3에 보시면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행사”는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하지만 그것도 형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자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세금), 복음 사역자를 잘 섬기는 자에게(사렙다 과부와 수넴 여인), 또 셋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라”고 하셨으니 꼭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제24과 복에 대한 연구 (애 3:38~39) 목록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도 복을 받아야 더 행복합니다. 복 받는 일에 적극성을 띠기 위하여 “복에 대한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1. 본문 말씀대로 복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화도 다스리십니다(신 11:26, 30:15, 말 2:2, 렘 44:17). 그러니까 화 받을 일은 없어야 하고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신 23:5). 제가 복에 대한 것을 성경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복이란 문구를 345개를 점검하였고, 거기에서 86개의 요절을 뽑은 후 대략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두 세 시간쯤 걸렸습니다. 복 받는 것이 중요하지 무슨 연구가 그리 중요하냐?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야로 연구하는 생활을 복으로 여기기 때문에(시 1:3) 이미 복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에는 복의 종류도 많고 복 받는 방법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복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복은 하나님 목표대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가장 많이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며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행복의 근거를 많이 닦는 것이고, 지상에서도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잠시 보이는 것으로 “무조건 복이다” 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누리는 것을 보아야 하고(전 5:19, 딤전 6:17), 그 누린 결과가 천국에서도 좋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단 7:18, 눅 16:25). 복을 크게 나눌 때 신령한 복과 세속의 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신령한 복을 좋게 여기셔야 합니다. 얼마큼 크냐 하면 영원과 유한의 차이입니다. 신령한 복을 설명 드린다면 믿음의 복(믿음 생활로 느끼는 복), 영혼이 잘 되는 복, 청함을 입고 부활에 참여하는 복(계 19:9, 20:6), 죄의 가리움 받는 복(롬 4:7, 14:22), 말씀 묵상의 복(시 1:1), 읽고 듣고 지키는 복(계 1:3), 하나님과의 화목(욥 22:21), 신앙고백의 복(마 16:17), 충성의 복(마 24:46, 잠 28:20), 실족하지 않는 복(마 5:11), 의로 인한 핍박 등(마 5:10, 벧전 3:14, 4:14) 영원한 천국까지 가지고 가면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것 등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런 복을 세상의 어떤 특권보다도 귀하게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취해 보았자 별 것 아니다”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만큼 신령한 복은 적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때 하늘의 복(신령한 복. 엡 1:3), 땅의 복으로 나누어 축복을 하였지요(창 49:25~26). 그러면 땅의 복들은 무엇입니까?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태의 복이었고(눅 1:42), 젖먹이는 복이 있고(창 49:25~26), 생명의 복(신 30:15), 다자한 복이 있으며(신 33:24) 범사에 잘 되게 하시고(창 24:1, 신 14:29), 온 집에도 주시며(삼하 6:11) 후손과 연고자에게도 전달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창 30:30, 벧전 3:9). 또 아내를 얻는 복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지내는 복도 있으니(잠 18:22, 고전 7:40) 이런 경우는 결과의 소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신령한 복을 따진다면 하나님을 모시는 복(대상 26:5), 심령이 가난한 복(마 5:3), 하나님을 의뢰하는 복(렘 17:7, 시 2:12),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신 6:16), 주 안에서 죽는 복 등입니다(계 14:13).

3. 물질에 대한 복과 도덕성에 대한 복도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땅의 복, 물의 복이 있고(신 33:13, 출 23:25), 수고한 복(신 12:7, 욥 1:10), 소출의 복(레 25:21), 소유의 복이 있으며(삼하 6:12, 신 28:5, 대상 13:14) 쌓는 복(말 3:10, 잠 8:21), 주는 복도 있다(눅 6:38, 행 20:35) 하셨고, 또 도덕성에 대한 복으로는 온유와 긍휼, 청결, 화평(산상보훈) 등이 있고, 또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않는 복도 있습니다(계 16:15). 세속에 관한 복으로는 물질 외에 존귀(시 16:3)가 있는가 하면 건강의 복도 있습니다. 막 5:34에서 예수님이 “건강할지어다” 하셨고, 사도 요한도 건강을 축복하였으며(요삼 2) 치료의 복과 예방의 복도 있습니다(출 15:16, 약 5:15).

4. 특별한 내용입니다만 하나님은 축복을 죽음 다음에 나타나게도 하십니다. 자녀에게 주시는 것도 그렇지만 당사자가 죽은 다음에 살펴보니 “그것이 복이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선한 왕으로 31년간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침략으로 전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데려 가셨을까요? 화를 면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사 57:1). 역사적으로 지은 민족의 죄 값으로 바벨론에게 망하는 참상을 면케 하시기 위하여 미리 데려 가신 것입니다(대하 34:38). 나사로가 죽었지만 죽고 보니 부활이 있었고(요 11:5), 눅 23:29을 보시면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자녀 없는 것이 복이란 뜻입니다. 이 뜻은 그때 자녀를 생산했다면 37년 후에 그들이 로마 병정들에게 참살 당할 것을 방지한 것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무슨 일에 성취가 안 되었어도 반드시 나중을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말씀 드릴 것이 복 받는 방법입니다.

1) 방법 없이 하나님이 주셔서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택 받고 복의 근원 되며 창대해지는 복과 같은 것입니다(창 12:2, 18:18). 저희들도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2) 복 받은 자를 축복하거나 이웃의 축복으로 받는 것입니다(창 12:3). 민 6:27에 보시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축복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자신이 복 받는 방법이 되는 것이요,

3) 부모나 연고자로부터 계승 되는 복입니다. 놋이 참촌인 아브라함의 덕을 본 사례가 있고(창 19:29), 또 “부모의 덕이 천대까지 이른다”(출 20:6)는 말씀입니다(신 5:16, 12:25).

4) 자신의 노력과 덕으로 받는 복입니다. 이것이 곧 계명을 잘 실천하므로 받는 복입니다(신 28:1~5, 15L4~6, 29:18, 요 13:17, 렘 7:23, 약 1:25).

5) 또 읽고 듣고 지키는 자도 복이 있고(계 1:3), 믿는 자(눅 1:42), 참는 자(약 1:12), 기다리는 자(사 30:18, 단 12:12), 시험을 이긴 자(신 8:16), 의롭고 성실한 자(잠 10:6, 28:10), 징계를 잘 받는 자(욥 5:17), 약자를 살피는 자(룻 2:19)도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복의 개념을 잘 깨달으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5과 봄비 때에 비를 구하라 (슥 10:1~7) 목록으로


평신도가 이 성경을 읽으셨다고 할 때 어떻게 이해하셔야 할까요? 성경 공부하는 법을 소개할까 합니다.

1. 우선 이 말씀을 기록한 스가랴 선지자와 그 시대적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슥 1:1을 보시면 “다리오왕 2년 8월이라” 하셨고, 7:1에서는 “다리오왕 4년 9월이라” 하셨으며 이 말씀의 저자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가랴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리오왕은 파사국의 왕으로 주전 558~486년에 집권하였다 하니 그 시기는 주전 557년쯤이고,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지 약 50년이 된 때였습니다. 또 학개 1:1, 2:1에 보시면 학개 선지자도 다리오왕 2년에 말씀을 받고 증언하였는데 주로 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는 선민들이 포로에서 해방된 후 귀향자들이 성전 재건을 힘썼지만 훼방꾼들로 인하여 지연되었고, 이때에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협력하여 수고하던 시기였습니다(라 5:1). 성경에 “스가랴”의 이름이 30명쯤 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다리오왕 2년~4년에 사역한 선지자를 지목하여 이해하셔야 하고 “다리오”도 1세, 2세, 3세 중 1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본문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셔야 하겠지요. 1절은 “봄비 때에 번개를 내는 하나님께 비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무리에게 소낙비(흡족한 은혜)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2~3절을 보시면 “복술을 의지하는 자들이 곤고를 당할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복술을 의지하는 자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동안 선민을 괴롭힌 자들을 의미합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목자들(이방인 지도자들) 즉 수염소 같은 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2~3절은 이방인들이 벌 받을 때가 온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절 중반부터 7절 끝까지는 “하나님이 유다 족속 즉 선민에게 복 주신다”는 말씀을 길게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교훈상으로 뜻이 떠올라야 합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일을 경영하실 때 때를 정하고 하십니다(전 3:1). 그래서 비를 구하려면 겨울에 구하지 말고 봄에 구하는 것이 적절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징계하셔서 70년 동안 나라를 잃고 큰 곤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선민에게 은혜를 주시고 선민을 괴롭힌 이방족을 벌하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선민이 복을 받게 되고, 이방인들에게 진노가 임하고 있으니 그 시기에 속히 은혜를 구하여 성전도 재건하고 신앙 부흥도 일으키도록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봄비 때는 계절상 우기를 뜻합니다. 그때 비를 구하면 하나님이 비를 주시려고 할 때 구하는 것이니까 큰 소낙비를 주셔서 채소를 넉넉하게 먹도록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구하라”는 뜻입니다.

4. 그 시기에 이방인들은 벌 받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벌을 받는가?하면 거짓 계시를 따르므로 망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의 목자(지도자)를 치셔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2~3절). 드라빔(점치는 도구)이 허탄한 것을 말하고 복술자, 꿈꾸는 자(거짓 계시)가 그 적국(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왕들(목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수염소)을 벌하시니까 망하게 되고,

5. 반대로 선민에게는 복을 주시는데 3절 하반에서 “유다 족속은 권고하여 그들을 전쟁의 준마처럼 강하게 하신다” 하셨고(여기의 유다 족속은 끝까지 남아서 예루살렘을 지키다가 망한 남왕국을 전체 선민의 대표로 칭한 것), 4~6절에서는 “모퉁이 돌(메시야, 마 21:42)과 싸우는 활과 권세 잡은 자가 다 그(유다 지파)에게로서 나와서 대적을 밟아 승리하게 하시므로 유다 족속을 견고케 하고 요셉 족속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요셉 족속을 구원하신다” 하심은 남방 유다의 기본 멤버가 유다와 요셉 지파(벤야민, 에브라임)이기 때문입니다(수 16:1~10, 17:14~18, 분국 당시 르호보암왕의 백성이 됨. 왕상 12:21~24). 그래서 유다와 요셉, 또는 에브라임(7절)을 선민의 대표로 호칭하신 것입니다. 6~7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 귀환하게 하시고......함께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그 백성들을 즐겁게 해 주실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때가 되므로 선민들이 은혜를 힘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겼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속히 성전 중건에 힘쓰라는 뜻이 있고, 또 한 가지는 “모퉁이 돌”이 메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에(마 21:42) 장차 메시야를 통한 구원사역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6.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받은 그 시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며 오늘 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그 시대 사람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유다의 회복과 성전재건에 힘쓰고 메시야를 대망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사는 저희들은 메시야 사역이 끝난 때이고, 또 은혜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는 때이기 때문에 항상 봄비 때에 살고 있은즉 언제나 회개하고 언제나 은혜를 구하여 성령 충만에 이르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고후 6:2, 요 7:6). 신약 시대는 계속 은혜의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성도들이 은혜 받는 노력을 힘쓰셔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더 가까워지고 유다 족속이 견고해지고(6절), 에브라임이 용사 같이 된 것처럼 저희들도 믿음의 용사가 되셔야 하며 또 7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되 포도주를 마심같이 기쁨을 누리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신 예언이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은혜를 깨달음

제26과 내게 주신 은혜를 앎 (갈 2:9) 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내게 주신 은혜를 앎”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속담도 있지요. 호 4:6에 보시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 하셨고, 요 17:3에서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내게 주신 은혜를 안다” 하셨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바울이 받은 은혜를 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진리를 옳게 깨닫고 개종한 생활을 잘 하고 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들도 자신이 은혜 생활 잘 하고 있음을 주위 사람들이 알고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다른 이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덕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친교)를 할 수 있었고, 또 복음 사역을 분담하는데 있어서 이방인 상대로 전도하도록 맡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받은 은혜를 아는 것, 또 인정받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성도 각자가 다 자기가 받은 은혜가 무엇임을 확실히 아셔야 자신 있게 다른 이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는 것이고, 또 저를 포함해서 성도님들 각자가 “자신이 받은 은혜의 특성을 살피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내가 받은 은혜를 살피기 전에 먼저 바울 사도가 받은 은혜를 살펴보셔야 하겠지요.

1) 바울은 사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곧 “나의 나 된 은혜”인데(고전 15:10) 크게 변화된 인격입니다. 저는 아직 “나의 나 된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인간성이 다 빠지지 못하였으니까요. 바울은 “날마다 죽으면서 그 인격을 형성하셨을 것”입니다(고전 15:31).

2)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아신 것입니다(빌 3:8). 그래서 구원도 받았고 세상을 멀리 하실 수 있었지요. 저는 이런 은혜에 대하여 조금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도 된 은혜입니다. 훼방자요, 포행자가 사도가 되었으니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딤전 1:13).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라면 죽을 각오까지 한 것입니다. 구원도 귀하고 사도도 귀하기 때문에 주님만 위하여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롬 14:7~8).

4) 능력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딤전 1:12~13) 하셨고, 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하시므로 특별한 것 네 가지를 간증하셨고, 그런 은혜에 힘입어 성공적인 삶과 복음 사역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자신의 은혜를 더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은혜 받은 것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말씀을 믿고 기다린 신앙의 은혜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헌신한 은혜나 요셉이 여인의 유혹을 걷어 찰 만큼 담대한 행동이나 모세가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영화보다 귀히 여긴 신앙, 그리고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신앙도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목사 된 은혜가 귀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크게 알아주지 않습니다. 성직자가 너무 세속화 되지 않았습니까? “성직은 사업성이나 물질성에 관련이 없거나 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40년 목회를 하면서 물질성과 관련 있는 목회를 한 것이 크게 후회되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누구나 성직자가 되려면 사업성과 물질성 또 명예적 문제를 완전히 떠나서 헌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혼자 헌신하든지 아니면 먹고 사는 문제를 대책 세워 놓고 진리 사역을 한다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30년간 9명의 식구를 부양했는데 큰 은혜지요. 그런데 이것도 보편적 은혜입니다. 어느 교역자는 자기 가족 부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시는 것을 체험하였다” 하니까 많은 목사님들이 다 “그런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교 잘 하는 은혜를 받았다 할 수도 없고, 기도 많이 하는 은혜를 받았다 할 수도 없고, 저는 한 교회에서 14년 이상 견디는 목회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로 목사님 된 분을 “대단한 분이라”고 칭송했더니 그 교회 장로님이 “목사님이 20년 이상 견디는 것보다 장로나 교인들이 그 목사님을 모시고 같이 견디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말입니다.

4. 요 9:25을 보시면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다음에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확실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각자가 받은 그 은혜를 많은 사람과 나누도록 노력하십시오. 제가 받은 은혜를 몇 가지 소개하면

1) 과거보다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일반 교회 목회할 때는 활동에 바빠서 주님을 가까이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주여 주여 말씀 말씀”하면서 사니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하는 맛에 삽니다. 이렇게 묵상 기록하는 맛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게 주신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3) “남이 쓰다 버린 물건을 쓰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살다가 죽어야 하겠다”하는 것이 진정한 바람입니다. 세상과 사치가 싫습니다(빌 3:8). 나는 그것이 세속을 사랑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요일 2:15).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 관한 자립입니다. 난제성구 몇 개의 해석을 제하고는 누구의 자문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스스로 성경에 입각하여 생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7과 구원의 즐거움 (사 9:1~7) 목록으로


“구원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성도가 기뻐할 일”(크게 기뻐함)을 연구하다가 남은 재료가 있어서 한 편의 설교를 더 만들게 된 것입니다. 방금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50년 전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여러 가지로 불행한 일들이 행복으로 바꾸어질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들을 종합하면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즐거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고통과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메시야가 큰 빛으로 임하실 것과 멸시 받던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멍에, 채찍, 압제자의 막대를 꺾으시며 싸우는 자들의 피 묻은 옷을 섶처럼 불태우시고 공평과 정의가 보존되는 나라를 창성케 하셔서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니 마치 추수하는 즐거움과 전쟁의 승리로 탈취물을 나누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하셨고, 이런 즐거움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의 구원 사역으로 성취되어 큰 즐거움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근거로 “구원의 즐거움”을 구상하게 된 것입니다.

1.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최초의 절차가 복음을 받는 것인데 이 복음을 받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즐겁게 받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마음이 안 열린 사람입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 거듭난 사람은 복음을 즐거움으로 받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 자체가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고(눅 2:10),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과 같기 때문입니다. 잠 25:25에 보시면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 자체는 좋은 소식인즉 만반진수를 대하는 즐거움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으로 받는다”고 하셨지요(마 13:20). 또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 하니이다”하신 시편 기자의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시 119:103). 여기에 아울러서 전도자의 즐거움도 있다고 하셨지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도 아름답다”(롬 10:15) 하셨고, 또 예수님의 70인 제자들이 전도가 잘 되었을 때 기쁨으로 돌아와서 보고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 10:27). 그때 귀신 나가는 역사를 크게 부각시키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므로 구원의 즐거움이 귀신 항복하는 역사보다 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보화 발견의 기쁨입니다(마 13:44).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 같다”고 하셨지요. 이 뜻은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자의 기쁨입니다. 감추인 보화는 캐면 확실한 것처럼 구원의 은혜도 확실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그 재물을 적당하게 취급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구원의 가치와 도리를 깨닫는 자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복권은 잠시 누리겠지만 구원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증을 따 놓았으니 크게 든든할 것입니다(눅 10:20). 그런 즐거움과 만족을 항시 누리셔야 할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도 자기의 즐거움으로 아는 것입니다. 행 10장에는 이방인 고넬료 가족이 구원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11장에는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문제로 토론하다가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구원을 주셨다”한즉(행 11:18) 행 11:23에서 “하나님이 이방인 구원하신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기쁨의 소재였습니다. 성도들은 신령한 은혜를 보고 기뻐할 줄 아셔야 합니다. 누가 집을 사고 땅을 샀으며 자동차를 샀다고 기뻐한 일은 없습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집들이 한다, 돌잔치 한다” 하면서 기뻐하지만 성도의 즐거움의 소재는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신령한 은혜가 전개되는 상태, 또 그것을 누리면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슥 9:9을 보시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약 400년 전에 예언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도 기쁨의 소재가 명시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되 그 분이 왕이라는 사실이고, 공의로운 왕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기뻐하라는 것이고, 또 왕이신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것입니다. 왕이 거만하거나 권세를 휘두르면 백성이 고달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구원은 은혜로 주시고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만큼 백성들과 동화되어 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즐거움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소식을 들은즉 목사가 모든 것을 자기 주장대로만 하기 때문에 모든 제직이 다 “당신 알아서 하십시오”하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협조하면 “저주 받는다”고 하고, 십일조 헌금만 강조하여 교회에 재정은 넉넉한데 교회에 가면 아무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님이 겸손하여 성도들과 동화되어 주면 좋겠는데 “나는 왕인즉 너희는 충성만 하라”는 식이어서 교회 생활의 즐거움을 잃은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겸손하므로 즐거움을 누리셔야 합니다.

4. 핍박을 즐겁게 누리는 것입니다. “핍박 받으면 하늘의 상이 크니까 즐거워하라” 하셨지요(마 5:12). 또 초대 교회 사도들도 핍박을 받을 때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였고(행 5:41), 바울 사도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요(고후 6:10), 고통스러운 가시에 대한 원인을 깨달았을 때에도 크게 기뻐하므로(고후 12:10) 주님으로 인한 고난을 기쁨의 소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의 소재는 복음, 복음 전파, 깨달음, 신령한 은혜, 상급을 예비하는 충성과 고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8과 날 때부터 소경됨 (요 9:1~7) 목록으로


1절에서 “예수님 길 가실 때에” 하셨으니까 그 장소가 어느 지역인가?를 알아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앞 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하셨으므로 그 지역이 예루살렘 도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곳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도 함께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소경을 보자마자 “누구의 죄로 저렇게 불행해졌을까?”하는 것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의문 사실을 예수님께 물었지요. “저의 소경됨이 그 자신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여기에서 제자들이 그런 엄청난 사실을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창조주요, 또 모든 인류의 섭리자로 믿었기 때문이니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인데 “그 자신의 죄입니까?”한 것은 당치 않은 질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 당사자가 태중에서 범죄 할 까닭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난이 죄 값이란 것은 창 3:17~19에도 나타난 말씀이고, 또 중풍병을 고치시면서 “네 죄사함 받아라” 하셨으니(마 9:5) 불행과 죄를 연계시킬 수도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욥이나 나사로가 죽은 것이나 바울이 육체의 가시 같은 것을 가진 것은 꼭 죄 값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욥 1:8, 요 11:4, 고후 12:7). 따라서 구체적 원인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니까 예수님께 질문할 수 있는데 이 때에 예수님이 대답해 주시기를 “이는 그 당사자나 그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 하셨으니 참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이 계몽되었지만 장애인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 장애인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할 때 우리는 “장애인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장애인이 아닌 나에게도 특별한 뜻이 있어서 성한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각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은 메시야 증거에 해당하는 능력입니다(마 11:5, 히 2:4). 또 능력의 질을 따질 때 생후 발생한 병을 고치는 것보다 날 때부터 불구된 것을 고치는 것은 더 큰 능력이라 할 것인데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나타내시어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시려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배우면서 저희들은 약자나 불구자를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욥 4:7에 보시면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박 넝쿨은 시들었고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없어졌으며 또 8절에 보시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쬐게 하셔서 요나를 혼곤하게 하였다” 하셨으니 이렇게 뜻이 계셔서 벌레와 동풍과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준비하신 하나님이 자기를(성도) 준비하신 뜻이 없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자신이 태어나고 사는 목적을 아셔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문서 내용에서 감동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손가락만 쓸 수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당신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쓸 수 있는 두 개의 손가락을 쓰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처절함을 느끼지만 두 개의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치면서 열심히 살아서 “자기 때문에 고생한 부모님에게 효도하려고 한다”는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빛이 있을 동안에 일을 한다” 하시고, 그 소경을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를 구별하셨습니다. 빛의 세계는 진리 사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이고, 어두움의 세계는 세상 권세 아래서 진리 사역을 할 수 없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아직은 빛의 세계이니까 메시야를 증거하는 진리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기회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셔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할 수 없지 않느냐?”하는 뜻도 내포된 것 같습니다. 그 어두움의 세계란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징계를 쏟아서 진리 운동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막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6:9~10). 그런 환경이 바벨론 포로 시기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복음을 전하고 충성할 수 있는 기회에 열심을 다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또 중요한 것은 “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게 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침은 약보다 더러운 인상을 갖게 하는 것이고, 진흙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거부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암 물이 그 곳에서 멀지는 않겠지만 1.2㎞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아무 반항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씻으라”고만 하셨고, “씻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흙을 발라 씻게 하신 것은 불평 없이 순종하는 것을 보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 가지는 고맙다는 사례를 받지 않으시려고 자신을 감추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감추시면서 사례 받는 일 없이 행하셨는데 오늘날 기도와 이적으로 병 고친다는 사람들 중에 사례 헌금을 구하고 자신을 나타내려 하는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본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29과 소경이 아는 것 (요 9:24~34) 목록으로


“소경이 아는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의 소경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였습니다(9:1). 그가 소경된 원인은 자기 죄로 이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예비 된 자라”고 하셨습니다(9:3). 나사로의 죽음도 그러 하였지만(요 11:4) 이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경된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뜬 다음에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님과 함께 송사의 대상이 되어서 눈 뜨게 된 전말을 조사 받는 중이었습니다. 송사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고, 그 소경은 예수님의 고쳐 주심에 응한 것입니다 .종교가 다른 악한 무리들은 능력 베푸신 예수님을 경외하기 전에 송사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건을 고발하였을 때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소경이었는데 보게 된 그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 파는 “소경이 어떻게 눈을 뜨느냐 하면서 그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네가 그냐?”하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그 눈 뜬 자에게 묻기를 “네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라고 믿느냐?” 하였을 때 자신은 “선지자로 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어지지 않아서 또 그의 부모를 불러 확인하기로 하였습니다. 부모를 불러 “이 사람이 소경으로 있던 너희 아들이냐?”한즉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아들에게 들어서 알지만 대답을 회피하면서 당사자에게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회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능력자나 그리스도로 나타내기를 싫어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온전치 못함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마음으로 믿고.....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롬 10:10) 그러니까 그 부모는 믿음에는 이르렀으나 열매에는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믿고 시인하고 행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 당사자를 불러서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라 우리는 저 사람(예수가)이 죄인인줄 안다 그렇지 않으냐?”하고 다그친즉 눈 뜬 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가 죄인인지는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이었는데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라”한즉 또 “그 사람이 네게 어떻게 하였느냐?”고 물으니 “왜 여러 번 대답하게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한즉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눈 뜬 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한 자를 들으시는데(시 66:18) 창세 이후로 소경이 눈 뜬 일이 언제 있었으며 또 그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담대히 증언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경이 아는 것은 “자기는 소경이었으나 보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자신이 보게 된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만큼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 뜬 자의 이 지식은 너무도 생생한 체험의 지식인지라 조금도 숨기거나 굽힐 수 없는 사실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에 대하여 아는 지식도 역시 그러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진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소경은 소경인 만큼 어두운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 받는 지식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체험으로 안 것입니다. 소경이 보게 된 확실한 은혜를 체험하였고, 창세 이후 그런 이적은 처음임을 알았으며 그런 능력을 행할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하나님이 죄인으로 하여금 그런 능력을 나타내실 리가 없은즉 그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틀림없다고 안 것입니다. 이 지식이 체험적이고 산지식이기 때문에 주저함 없이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배워서 알고 경험으로 알며 또 주저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이 본문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체험과 실천이 없는 교훈은 산 교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실천 못 했고 또 경험 못 했으나 성경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경험하고 실천 하십시오” 하였다면 당장 “자기도 경험, 실천을 못 했으면서 어찌 우리보고 하라고 하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는 것” 네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① 내가 과거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내가 아는 것입니다. ② 내가 밤이나 낮이나 성경 말씀에 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오늘도 설교를 세 편이나 썼으니까요.). ③ 내가 세상의 좋은 것들(먹고 입고 쓰는 것)이 점점 싫어지고 60년대처럼 살았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하다는 사실입니다. 비싼 것은 다 하기 싫은 것입니다. 의복도 싼 것만 입고, 음식도 사치에서 떠나고 좋은 집이 있어도 나는 예배당 곁방이 좋고 일체 사치한 생활이 싫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④ 내가 묵상하고 증거 한 것은 거의 다 글로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목회 40년을 했지만 자랑할 것이 없고, 노력은 하였지만 나타나는 열매는 실망이 더 컸습니다. 무엇으로 내 인생의 결론을 맺을 것인가?할 때 눈 뜬 자가 자기의 아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말한 것처럼 저희들도 그런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0과 성도의 신분과 책임 (엡 2:19~2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제목을 “성도의 신분과 책임”으로 정해보았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었을 때 받는 대우(또는 은혜)가 선민과 꼭 같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신분을 생각한 것이고, 20~21절은 성도의 신앙생활, 특히 교회 생활을 집 짓는 일로 비유하여 집을 잘 지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이방 지역이고, 그 곳에도 선민이란 신분을 뽐내는 유대인들이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유대인들만 아브라함 때부터 특허 받은 것처럼 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관계가 없거나 아니면 서자 취급 받는 것처럼 선전하여 이방 성도로 하여금 위축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9절에서 선민과 이방인이 받는 은혜가 같은 것을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1. 19절의 “그러므로”하신 것은 “동일한 시민 되고 하나님의 권속 된 이유”를 말씀하신 것인데 앞에 있는 15~18절을 보시면 성도된 과정을 설명하시면서

1) 하나님이 새사람을 만들어 자기와 화평하셨고(15절),

2) 또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원수된 것(심판의 대상됨)을 소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셨으며(16절)

3) 오순절 이후에 먼데 사람이나 가까운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의도가 같고(17절),

4) 이방인과 유대인(우리들)을 한 성령님이 하나님께 나가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받는 믿음의 특혜가 꼭 같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그 믿음의 특혜가 무엇입니까? 그 특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차별 없는 대우를 받는 것인데 본문에서 “이제부터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 없는 외인(제쳐놓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고 잠시 맛만 보고 가는 손 같은 입장도 아니며 “유대인 성도들(복음을 시발지에서부터 받은 사람들)과 동일한 시민(천국 백성으로서의 차이가 없음)이고, 하나님의 권속(하나님의 자녀 및 가족이란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 성도가 아무 차이 없다는 것과 우리도 “꼭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권속”이라는 긍지를 갖고 특권을 누리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특권을 누릴까요? 누구 못지않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3. 20~21절은 책임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자녀로서의 책임 또 천국 시민이면 천국 시민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의 내용은 신앙생활 특히 교회 생활을 잘 하여 성결에 이르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1) 교회는 예수님을 모신 성도의 연합체입니다. 여기에서 개인 성도의 변화가 있어야 단체도 변화되는 것인데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단체로서의(교회) 순결과 성장을 권장하였습니다. 그 근거로서는 21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 된다”하실 때 서로 연결되는 것이 복수 결합이고, 또 “성전이 되어 간다”하신 것은 여러 성도가 규합된 교회를 상징한 것이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 하신 것도 구약 성전으로 비유한 신약 시대의 교회를 뜻하고, “함께 지어져 간다”하신 것은 “건물마다 연결 된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을 집 짓는 것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마 7:24~27과 고전 3:10~15에도 나타나 있는데 “성전을 짓는다”는 뜻을 개인적 신앙생활(고전 6:19) 또는 교회 성장의 뜻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집을 짓든 성전을 짓든 다 “그(예수님) 안에서,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라고 네 번을 강조하셨습니다. “주 안에서”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뜻과 도우심 안에서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성령의 전이라” 하셨고(고전 6:19), 성전을 “하나님이 계실 처소”라고 하셨는데(21절) 이것은 성도의 생활이 순결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끗지 않은 곳에 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을 기꺼이 모실 만큼 자기를 깨끗이 한다는 것은 바로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요 14:23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삼위의 하나님이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든든히 하는데 그것이 바로 20절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 뜻은 주님께서 신앙생활의 모범과 원리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셨기 때문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성경에만 기초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전 3:11에서 “다른 터는 없은즉 반드시 성경의 터 위에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데는 재료와 기술이 다를 수 있겠지요. 이것은 성도의 생활 노력에 따라서 차등이 있음을 뜻합니다. 지상에 많은 교회가 있는데 성경이 같고 신앙 고백이 같으면 다 한 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잘 믿는 성도들(예수님 닮음)이 많고 어떤 교회는 초보적 신자가 많다고 할 때 그것은 각각 다른 재료로 집을 지은 차이와 같겠지요. 성도의 신분은 유대인 성도나 이방인 성도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 같고, 성도의 책임은 예수님과 성경을 기초로 하여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인데 바울 사도는 이 책임을 크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6. 신앙생활의 지혜(1)

제31과 네 자신을 돌아보라 (갈 6:1) 목록으로


본문에 나타난 대로 “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이 제목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다른 사람의 범죄가 드러났을 때 “네 자신을 돌아보라” 하셨으니까 이것은 범죄 한 상대방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지혜를 주시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전 11:28에서는 “성찬에 앞서 자기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살핌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살피라”는 뜻입니다. 또 본문 6:4을 보시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살피는 일은 항상 할 일 이로되 십자가 앞에서 항상 살피고 또 다른 형제가 범죄나 실수를 하였을 때도 살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소에 자기를 살피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있어도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도 자기를 살피면 죄지은 자를 책망하기에 앞서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의 연약을 앎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살핀 후에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 하셨고, 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도 하셨습니다(딤 1:15, 고전 15:9). 또 자신을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고백하셨을 때는 그 자신의 어리석었음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자신도 무지와 실수 등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주여 주여”하고 소리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하튼 자신을 돌아보면 낙관보다 비관이 많을 것이고, 비관이 많을 때 겸손해질 수도 있고 기도할 수도 있으며 주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익이 많은 것입니다. 화학자 “론손”이란 사람이 수년 전에 사라이 죽으면 그 시체의 사용 가치가 얼마나 되겠는가?를 연구하였는데 2500원 상당이라고 발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시체를 의과 대학에 팔면 더 받겠지요. 문제는 살아 있을 때 값있게 살아야 보람이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다음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엎드린 것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눅 5:8). 대부분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그는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약점 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개신교 지도자 휫필드가 말하기를 “나는 꼭 짐승 같고 마귀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이 나를 짐승처럼 여기지 않는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상대방을 짐승처럼 여기려면 그의 속을 들여다보아야 하겠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속을 모르니까 짐승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면 돼지 같은 욕심, 호랑이 같은 포악, 염소 같은 교만(에헴 하는 자세), 구렁이 같은 계책 등 짐승 같은 속성이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 한쪽은 밝으나 한쪽은 어두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회사업가가 몸을 씻지 못한 추한 아이를 보고 “저 아이의 부모는 몹시 게으른 사람이라”고 지적을 한즉 그 말을 들은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만 사랑하고 아이 몸의 때를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고 당신은 때만 미워하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를 비난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때를 미워하는 만큼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부족을 일깨운 말로 교훈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늘진 부족이 우리들에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연속 살피면 부족만 나타나고 모순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늘 겸손히 낮출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저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충성이 부족한 것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기쁘고 힘 있게 충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어떤 목사님이 자급 전도를 하는데 그 돈을 의사인 부인이 제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비를 타 쓸 때마다 공치사를 하여 민망하였는데 중간에 공치사가 뚝 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왜 기쁜 마음으로 주느냐?”고 물은즉 “처음에는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손해를 안 보려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복음을 위하여 손해를 보려고 작정을 하였기 때문에 잘 드리는 것이고 오히려 기쁘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그 후 병원 사업은 더 잘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복을 받으려고 충성하는 것은 기복 신앙이고, 손해를 본다는 각오로 충성하는 것이 진실한 헌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는 흥하셔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요 3:30). 저도 이런 말씀을 묵상하고 그 정신을 살려 보려니까 항상 마음과 생활에 갈등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바라보셔야 할 것입니다. 15세기 모라비안 교파 창설자인 “진센돌프”가 타락 중에 있을 때 그 어머니가 예수님의 십자가 화상이 있는 박물관을 다녀오게 하였습니다. 갔다 온 후에 “무슨 느낌을 받았느냐?” 하니까 아무 느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기 가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 그림을 보라”하여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그 마음에 “내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는 깨달음이 와서 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반성하고 자기를 살피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성도는 항상 자신을 돌아볼 때 회개와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제32과 가난을 즐기자 (합 3:18~19) 목록으로


여러분 “사난을 즐겨본다”는 생각을 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별로 없겠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가난함 중에서도 즐거움을 갖고 생활한 분이 있으니 곧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본문 17절은 가난을 설명하였는데 농경 사회에서 소출이 없고 짐승이 없으니 가난한 것이 사실인데 18절에서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였고, 또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가난은 쌓은 재물이 없고 또 일정한 소득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까?” 하시겠지만 옛날 속담에 “가난한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은 귀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너희 집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묻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양식이 변통되어 산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믿음이 있었다면 일용할 양식을 구했을 것이고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로 양식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가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였고,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므로 기쁨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보다 가난한 자에게 가까이 와 계시고 구원의 은총도 우 적으로 주시니 기쁘지 않을 수 없지요. 그것이 곧 높은 곳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에게 가까이 계신 증거는 예수님이 가난한 세계에서 사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고, 예수님이 가난하셨던 것은 말구유 탄생, 비둘기로 제사 드린 것(눅 2:24),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고후 9:9에서는 “다른 이의 부요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가난한 자에게 구원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가난하고 천한 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4:15에 보시면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쳤도다” 하셨고, 마 11:5에서는 “장애인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박국도 그런 신앙을 갖고 하나님과 가까워졌을 것입니다. 재물이 넉넉하여 물질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재물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특별 대책을 구하는 신앙은 큰 차이가 있으니 이는 마치 동물원의 사자를 보는 것과 광야에서 사자를 만나는 것과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의지할 데가 없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달라질 것이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서 먹이신 것처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거지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성도가 물욕을 떠나서 적당히 사는데 목표를 두고 서민 생활에 동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특별한 사명이 있는 성도이면 독자적 생활로 세례 요한처럼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가난을 즐기지 못한다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려면 인생을 거의 돈 버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즐거워 할 시간은 그만큼 줄겠지요. 그리고 재물을 많이 벌어서 자기를 위하여 쌓아 놓았다면 그것도 바른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 쌓은 자를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그 영혼을 찾겠다고 하셨습니다(눅 12:20).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려면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을 본받아야 하고(고후 9:9), 또 재물이 잘 모아지면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고(마 6:24),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하며(고후 9:9, 시 112:9) 또 사명자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에(마 19:21) 성도는 서민 수준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성도가 부를 양보하고 서민 수준에서 살거나 하나님이 재물의 복을 적게 주셔서 가난하게 산다 하여도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고 만족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기독교인들이 굶주리는 인류를 생각하지 않고 먹자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유한 자들의 먹자 주의를 경계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물질을 위주로 하는 현세욕이 마음에 싫어지지 않고 탐욕스러워진다면 그것을 멀리 하기 어렵고 오히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의복, 좋은 음식 등 사치한 환경이 오면 반가워하고 큰 축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혹 그런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바울 사도처럼 현세의 복이나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해로 여기거나 배설물처럼 여기면 하나도 좋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런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는 목사님 몇 분이 계신데 식사 때가 되면 700원짜리 라면을 먹고 즐깁니다. 또 저의 셋째 딸에게 혼수가 왔는데 그때 받은 반지와 목걸이를 두고 집을 비울 수 없어서 그 패물을 성경 가방에 넣고 교회에 간 일이 있었고, 그 결혼식 때는 25000원짜리 뷔페를 먹게 되었는데 나는 1500원어치 정도만 먹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처럼 산다면 25000원을 1500원으로 줄여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의 배드윈족이나 남미의 원시족들은 문화적 생활을 싫어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자유와 취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성도가 가난하거나 검소하게 살면 그것이 주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고,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이 되기 때문에 보람도 있고, 자신은 주님의 사랑을 더 받으면서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이웃에게 덕을 주거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필요한 동안은 비싼 도시에서 살지만 그 사명이 끝나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60년대의 나무 때는 생활을 다시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이유는 옛 추억도 있고 주님의 생활 모범도 있으며 또 믿음 안에서 가난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제33과 마땅히 알아야 할 것 (호 4;6) 목록으로


여러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잠 22:6에서는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것도 알아야 가르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그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믿음의 주체를 뺏는 뜻) 또 율법(말씀)을 버렸으니 나도 그 자녀를 버리리라(나라를 망하게 하여 자녀들의 미래를 끊으심)”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지는 큰 불행이고 죄악이며 무지하면 하나님의 아들도 죽이는 것입니다(눅 23:34). 무서운 것이 무지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호 6:3에서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신분(속성), 하나님이 하신 일, 또 하시는 일, 또 하실 일, 그리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싫어하시는 일, 하나님의 계획, 성품, 능력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성경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격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성도가 친교적으로 하나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2. 그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네 자신을 돌아보라” 하셨고(갈 6:1), 아담이 타락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셨지요. 그 말씀도 자신이 원 위치에서 벗어난 것을 알라는 뜻입니다. 우선 자신이나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남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나”에 대하여 시험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알아주는 사람이 없거나 희소합니다. 사람이 나를 알아주면 대통령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짜증을 내고 교역자 앞에서 하소연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이유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려운 데가 있으나 잘 짚어지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나 속히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또 병은 있으나 병명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이 자기를 옳게 진단 못하여 할 일을 바로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무조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하는 자세를 취해야만 실수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바른 위치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은혜를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아야 하고 사람이 자기에게 베푼 은혜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면 만족이 없고 감사할 수 없으며 만족이 없을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왜 은혜를 모를까요? 생각하는 방법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창조자가 아니면 다 받은 것뿐인데 그 받은 것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또 많이 받은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적게 받은 사람도 보아야 하겠지요. 또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내다보는 눈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받은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감사하는 신앙이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9:12). 하나님께서 대단히 위대한 종 모세와 바울 사도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한 줄을 왜 모르느냐?” 하시고 지적하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쓰임을 받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하셨고(신 3:25~26),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원수로 대항하던 입장에서 용서 받고 믿음을 받은 후에 사도직과 신령한 은혜를 받고도 육체의 가시를 뽑아 달라고 기도하였다가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한 줄을 알아야 한다”(고후 12:9) 하시는 바라에 크게 깨달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은혜를 모르거나 족한 줄을 알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4. 받은 은사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보편적 축복이라면 은사는 특별하게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계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 천국 가는 은혜, 국가적 혜택, 다같은 성경을 받은 것은 거의 공통적입니다. 그러나 건강, 지식, 명예, 재물은 더 받고 덜 받은 사람이 있고, 또 신령한 은사에 있어서도 말씀 은사, 기도 은사, 찬송 은사가 다르고 교회의 직분도 목사, 장로, 집사가 다른 것처럼 각자가 특수하게 받은 노하우를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은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밑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것을 파악해야 자기의 사명과 할 일을 깨닫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왕하 4:2에 보시면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게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지요. 그때 한 병 기름만 있다고 하였지요. 그 한 병 기름을 따라서 빚을 갚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달란트”로 장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없어도 기도할 밑천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알아야 하고,

5. 마지막으로는 은사 활동의 과정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그 날 저녁에 돈을 헤아려 얼마를 벌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직업도 은사입니다. 은사 활용을 잘 하셨습니까? 잘 했는지 못 했는지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목적이고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성도가 마땅히 아셔야 할 것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은혜를 알고 넷째는 은사를 알며 다섯째는 은사 활동의 상황을 앎으로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은혜를 받고 자신을 알면 실수하지 않으며 은혜를 알면 감사할 수 있고, 은사를 알면 사명을 이행하게 되고 은사의 활동 상황을 알면 능률과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34과 강한 자가 됩시다 (딤후 2: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후계 사역자 디모데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은혜 속에서 강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아셔야 하고, 또 어떤 면에 강해져야 하는가 하는 강함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셔야 할 줄로 압니다. “은혜 속에 강해지는 것”은 앞으로 말씀드릴 과제이고, 우선 무엇에 강해야 하는가?할 때 믿음을 지키고 마귀를 대적하며 충성하는데 강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려면 환난과 핍박을 이겨야 하겠지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하신 말씀과 바울 사도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 곤고, 위험, 칼이랴”(롬 8:35) 하셨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 지키는데 강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 대적에 강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이기신 것을 생각하셔야지요. 물욕을 이기셨고(돌로 떡 만듦), 명예욕을 이기셨으며(성전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것) 현세욕(천하를 준다는 것)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기게 된 근거가 말씀에 꽉 붙잡혀 계신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충성하는데 강한 것은 세례 요한처럼 자기의 영광을 떠나서 오로지 진리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생활에 강한 사람은 돈을 잘 벌 것이고, 출세에 강한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하겠지만 성도는 믿음 지키고 마귀를 대적하며 헌신을 잘 하기 위하여 강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도 강하고, 세상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줄로 압니다. 어떻게 하셔야 강해질까요? 수 1:6,7,9에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가나안땅을 점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1. 강영기 목사님은 강해지는 방법으로

1) “발바닥처럼 자신을 낮추라” 하였고(수 1:3,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주심, 노력을 뜻함),

2) 수 3:8에서 법궤를 앞세운 것처럼 “하나님을 앞에 모시라” 하였으며

3) 수 5:8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처럼 육적 몸을 벗고 영적 심령으로 자리 잡는 것이라” 하였고,

4) 수 6:4에서 여리고성을 7바퀴 돈 것처럼 “주님이 가시는 대로 따라가며 동행하라” 하셨으며

5) 수 8:1~2에서 여리고성을 치기 위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것처럼 용병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본문을 살펴보시면 “은혜 속에서 강하라” 하셨으니 강한 은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그들은 충성된 사람들이며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강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며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는 좋은 군사 같아야 하고, 또 “법대로 경기하는 경기자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강해야 믿음 지키고 강해야 세상을 이기며 강해야 마귀를 뺨칠 수 있고, 강해야 모범을 가르칠 수 있고, 강해야 신앙의 전선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3. 어떻게 하셔야 강해질까요?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스스로 연구해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1) 일단 강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종이가 벽에 든든히 붙으면 찢을 수 없고, 뚫을 수 없지 않습니까? 종이가 혼자 있으면 바람만 불어도 찢어질 만큼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돈이나 사람이나 인간 권력 같은 것을 의지하지 마시고 꼭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렘 17:5)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고후 12:10에서는 “인간이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나 인간은 다 비우고 하나님만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지식이 있어야 강해집니다.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나온 사람은 기업체에서 정직원이 될 수 있어도 학력이 낮은 사람은 임시직 밖에 못하는 형편이 신앙에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알고 어떻게 믿으며 어떻게 행할 것을 아는 사람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밖에 내보내고 안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아는 것이 없어 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3)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앞에 지적 받을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도 상당하게 떳떳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가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약해진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떳떳해 보세요. 누구 앞에서나 큰 소리 칠 수 있고 힘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4) 연단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훈련이 잘 된 군사를 정예 부대라고 합니다. 어떤 싸움에나 이길 자신을 갖겠지요. 운동 경기자도 역시 훈련을 많이 받아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급히 강해지려 하시지 마시고 연단을 은혜로 여기셔야 하며 따라서 어려운 일 닥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이겨 나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나 교회나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있어도 보통 일로 알고 처리,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죽을 각오를 했었고(단 3:16~18), 에스더가 그러 하였으며(더 5:16) 바울이 그러 하였지요(행 20:24). 그들이 다 강하였고 승리하였습니다. 강영기 목사님은 성도를 “요 14:1~4에 근거하도록 키워야 한다”하기로 살펴본즉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때가 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할 것인즉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더군요. 그것이 곧 죽음을 앞에 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강해지십니다(고후 4:7~10, 6:8~10).

 

제35과 주님과 동행함 (눅 2:41~47, 24: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님과 동행함”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제목의 말씀을 몇 차례 드린 줄 압니다(창 5:24, 6:9). 이 말씀이 필요하지만 찾아 읽지 못하실까 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동행에 대한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 또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300년간) 하였는데 그는 산 채로 승천하였고,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969세란 최장수를 하였습니다. 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그는 인류 멸절을 면하고 제2의 인류 시조가 되었고, 눅 7:11~16에 보시면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인성으로 동행하다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는 것을 본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도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눅 2:44에 보시면 예수님의 부모가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올 때 예수님이 동행중에 계시지 않았는데 계신 것으로 착각을 하고 다시 3일 길을 되돌아가는 손해를 겪은 일이 있었지요. 그러나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은 동행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눅 24:15에서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고 계신데도 그들의 눈이 어두워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동행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같은 뜻으로 구레네 사람 시몬도 골고다로 가는 길에 예수님과 동행하였으나 그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으니 그것도 진정한 동행은 아닐 것입니다(마 27:32). 동행과 비슷한 내용으로 “함께 하신다”(창 28:15, 마 28:20),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 14:23, 계 3:20)는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하신다” 하는 것은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하는 것을 뜻하고, “동행”은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목적 하시는 일에 동조자가 되는 뜻이므로 전자는 생활성이요, 후자는 사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동행하실 때 “브엘세바”에서도 나타나 주셨지만 그가 애굽으로 갈 때는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너를 정녕 인도한다”(창 46:4) 하셨고,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가면서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은 그의 곁에 계셨다”(행 27:23)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길로만 다니시고(잠 8:20) “울분한 자와 동행하면 피해를 본다”(잠 22:24)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주님과 동행을 잘 하는 것은 믿음 생활을 가장 잘 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 가장 복 되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동행의 의미를 갖추려면

1. 우선 예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이 동행중에 계신 줄로 착각한 것은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따라오시려니 하였기 때문이니 그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가까이 어개를 맞댈 만 하고 얼굴을 보며 대화가 오순도순 들릴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시 73:28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요 내가 그 하나님을 피란처로 삼는다” 하였고, 약 4:8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도 가까이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민감해지도록 가까이 하시라”고 늘 강조하는 것입니다.

2. 주님과의 동행은 단독 동행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100명이나 1000명이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과 내가 단 둘이서 동행하는 것을 대조해 보십시오. 단 둘이 하는 동행이 더 즐겁고 의미가 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멀리하고 인본주의를 떠난 예수님 중심의 생활입니다. 은밀한 처소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상태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3. 동행자끼리는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싸움을 하고 오해를 풀지 못하였거나 화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동행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암 3:3에서는 “두 사람이 의합지 않고서야 어찌 동행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중요합니다. 욥 22:21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깊이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 없이 살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동행은 어느 방향 또는 어느 길로 가느냐에 대하여 주님의 뜻에 내가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이 주님께 있고 길도 주님께 있으며 방법도 주님 뜻에 달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도는 내 목적과 내 방법을 구상하지 마시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묵묵히 따라가는 생활 습관을 길러야 할 줄 압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이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거리낌 없이 시행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시기 때문에 결코 앞길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이 틈으로 흐르는 것처럼 항상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자신을 부정한 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5. 대화 없는 동행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많이 묵상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자신의 말은 곧 기도인즉 기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필요할 때만 하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시간에 기도할 수 없지요. 주님이 말씀 다 하셨을 때 기도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데는 다섯 가지 요소가 따라야 합니다. “가까이 모심, 혼자 모심, 주님과의 화목, 주님 뜻에 따름, 대화”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가 주님과 동행하면 어떤 보람이 있을까요? 우선 책망 받을 일이 없습니다. 졸병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상사가 책망하려고 부른즉 사령관하고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책망을 못하겠지요. 다음에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일을 맡기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도가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은 그가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만족해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이고, 넷째로 동행의 보람은 모든 문제를 함께 계신 예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는 점입니다(계 3:20).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제36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요 13:13~15) 목록으로


신앙생활 중에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맺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수박의 겉부분은 맛이 없는데 그것도 먹지 못하고 핥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박겉핥기”란 말입니다. 만일 성도가 “예수님과 자기의 관계가 어떻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 관계에 대한 효력을 맛보지 못한다면 역시 수박겉핥기의 신앙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줄 압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의 목적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이 맺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잊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성도(자신)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 다섯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주와 종속자에 대한 관계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예수님은 성도의 주”라 하셨고, “종이 상전보다 크지 않음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란 뜻은 모든 것의 주이고, 백성의 왕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물과 자기 생명이 주님의 것이고 자기 인생도 주님의 것입니다. 생명과 만물은 자기가 살고 있는 요소인데 이것의 주가 예수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병 등으로 죽음의 문턱을 일곱 번이나 밟았는데도 역시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몸이 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붙드시면 죽지 않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명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주님께 있고 주님이 공급해 주시므로 받는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창조자이시자 통치자이신즉(통치 속에는 구원과 심판도 포함됨.) 사람이 산다는 것과 행복에 대한 모든 문제가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폭적인 복종과 경외와 의지함과 찬송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이신즉 나는 그의 종속자에 해당함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 16:16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한 신앙 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가?하면 “주”는 우주를 포괄하는 주이고, “구주”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영적 축복의 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눅 2:11에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는 불행과 사망과 심판과 지옥을 안겨주는 것인데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셔서 죄짐을 대신 짊어져 용서받게 하셨고, 그로 인하여 심판도 면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도 받고 영생 천국에도 들어가게 된 것 아닙니까? 또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중보 기도도 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 및 교통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이신 것은 일반적 모든 것의 주란 뜻이고, “그리스도 구세주”란 뜻은 모든 신령한 복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령한 복을 원하시면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형제 관계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롬 8:29), 성도는 그 다음의 자녀들입니다(요 1:12). 마 12:50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라” 하셨고, 히 2:11에서는 예수님이 “형제라 칭함을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주님이 성도와 형제적 우애를 돈독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형제적 우애란 사랑과 협조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는 만물 공급의 원천이시고, 구세주는 영적 축복의 원천이시며 맏형이 되어주신 것은 사랑과 협력 관계의 원천이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관계인가?하는 것입니다.

4. 선생님과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선생이 되셔서 본을 보였으니 그렇게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은 인격과 지식과 생활의 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먼저 예수님을 닮되 그 인격(예수님의 마음, 빌 2:5)을 본받고 다음에 그의 지식을 많이 배우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 것을 퍽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 고민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성도이면 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 연대로 2000년의 차이가 있고 거기에 따라 문화적 차이가 있으며 정치적 환경도 다르고 또 가족적 구성 요소가 다르니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가?하는 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마음은 기본적 마음이 겸손, 긍휼(꺼져가는 심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생활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 중심, 성경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세속욕, 권세욕, 재물욕, 향락욕 같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중심을 두시고 약자의 편에 서서 사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 생활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의 실천 방도는 구원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그 원리를 따라 무엇이 사랑인지를 잘 판단하셔서 사는 것이 곧 예수님 생활을 본받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요 15:15에서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 하시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줄 수 있는 친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대속의 십자가 지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본문에서는 친구의 특징을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친구처럼 사귀면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친구는 심심치 않게 하는 대상”이란 것입니다. 요즈음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가 들은 바로는 은퇴 목사님들이 그것을 많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모님도 먼저 가고 아들, 며느리, 손자들도 떨어져 살며 할 일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으면 심심하지요. 인간 친구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동거동락 하면 반드시 죽는 그 날까지 심심하지 않을 것이고 꼭 그러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생과 내생의 영원한 친구시오, 동반자이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친교의 방식은 말씀 연구와 기도이며 또 기도의 응답 체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37과 믿음의 비밀 (히 10:22)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 하셨는데 마음에 성령님이 심겨지면 거듭남이 되고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면 죄사함이 됩니다. 그런데 죄사함에 대한 것은 그 다음 말씀인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다 거듭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고 회개한 후 죄사함 받은 것입니다. 다음에 참마음은 진실이고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의 목적과 자기의 목적을 다 충족시키는 분량의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갖는 데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도 있고, 자신이 무엇을 성취하는 목적도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값진 믿음이고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것은 상자 속에 금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고 각종 보화가 들어 있는 것처럼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에 대한 것을 많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우선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셔야 합니까 즉 믿음을 무엇이라고 설명하셔야 합니까?

1) 거듭난 심령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심령은 믿음의 진실성을 확보해주고 그 믿음이 성령님의 역사로 갖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으로 알되 하나님도 나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요 17:3)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말씀)에 의한 순종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셨고, 또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약 14:14~17).

3)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충성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智, 行, 信, 의지, 충성의 요소를 갖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무엇을 얻습니까? 우선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일반적 관계를 갖지만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이 양자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특별 통치를 해 주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특별 통치를 설명할 때 운동회 하는 날 그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해서 점심을 준비해 갖고 운동장에 가서 구경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하여 특별 음식을 만듭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할 때 자기 자녀가 언제 어디서 뛰는지를 주목하고 응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믿음 가진 자의 관계는 특별하고 나가서는 영생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에 대한 특별 통치를 선민의 역사를 통해서 잘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믿음으로 받는 것은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 특별 통치, 영생 천국인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인데 합당한 것이면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나 이기주의 아닌 것,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많이 구하여 받고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이 성도의 믿음을 인하여 받으시는 수확이 무엇입니까? 그 수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내용으로 따지면 독생자를 닮은 양자를 만드셔서 천국의 가족을 확장하시는 것입니다. 롬 8:29에 보시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한 분 뿐이라 외로우셨습니다. 그래서 구원하는 방법을 쓰셔서 많은 성도로 하여금 양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그의 적자인 예수님을 닮은 것을 보시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자신이 구원 받는 것 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적을 성취한다면 자신이 예수님을 잘 닮아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적 양육의 목적도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가 믿음으로 무엇을 얻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4. 믿음의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의 의미로서의 비밀을 말씀드렸고, 두 번째는 믿음으로 얻는 것에 대한 비밀을 인간편, 하나님편으로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는 믿음의 가치로서의 비밀을 아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윷놀이를 해서 제가 2등을 하였는데 상품은 휴지인데 2등 상품의 부피가 3등 것보다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뀐 것 아니냐? 한즉 작아도 속이 단단하기 때문에 더 비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중시계가 괘종시계보다 더 비싼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도 거품처럼 부피만 있는 믿음이 있고, 거품 없이 내용이 있는 알찬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히 11:6에 보시면 “하나님이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기뻐하시면 믿음이 많고 클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롬 12:3에서는 “믿음의 분량”이 있고, 마 15:28에서는 “큰 믿음이 있다” 하셨으며 본문에서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신앙고백도 잘 못하고 성경도 잘 모릅니다. 어떤 이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하나님의 뜻 분별을 잘 못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지각으로 선악 분별을 잘 못합니다(히 5:14). 어떤 이는 하나님이 예배당에만 계신 줄 압니다. 또 어떤 분은 목사를 통해서만 은혜를 받는 줄 압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목사 노릇할 만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랑 실천이 미흡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도에 따라서 믿음 분량의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거품을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으니까요(요 7:24).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은 자신의 믿음을 많이 연구, 점검하셔서 가치 있는 믿음으로 승화시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고 많은 문제를 성취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8과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음 (히 11:17~19) 목록으로


2005년 1월 9일 밤 TV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도 “아브라함이 시험 받은 사실을 기록에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의 20대손이고, 노아의 11대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민 조상이 되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대단히 의미 있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이고, 본 이름은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후에 “열국의 아비”란 뜻으로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창 17:4~5). 아브라함의 고향은 유프라데강 하류인 “갈대아우르”인데 그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가기 위하여 약 900㎞ 서북쪽인 하란에 가서 35년을 머물다가 205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인 것을 보면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40세 때요, 하란에서 35년을 산 것입니다. 데라가 가나안땅으로 가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하란에서 35년을 머물렀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떠났다는 말씀은 없습니다(창 11:31~32). 그러니까 아브라함 75세 때에 처음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시험이란 어려운 명령, 고난스러운 일, 또는 죄의 유혹, 이 세 가지가 시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시험은 하나님의 처음 계시가 나타나면서 “너는 네 아비집 35년 산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가나안땅이지만 정착지는 모름. 히 11:8)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창대한 복을 주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창 12:2~3)고 하셨습니다. 축복은 크나 고향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 나이 75세에 아내와 조카 놋과 종들을 데리고 가나안땅 벧엘까지 약 600㎞를 옮겨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창 12:5~9).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면 이사하는 일을 예사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때의 생활 조건은 목축에 적합한 지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었겠지만 장막 생활을 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옮긴 것입니다. 1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지요. 믿음생활을 위하여 이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2.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드는 2차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가뭄이었을 것입니다. 가뭄으로 초목이 마르면 비만 오면 해결되는 것인데 그것을 못 참고 하나님의 지시 없이 애굽으로 간 것이 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애굽 땅은 사해바다 남쪽 시나이 반도부터입니다. 지도상으로는 큰 사막이지만 지중해 쪽으로는 살만한 고장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정착할 곳은 가나안땅이요, 애굽 땅이 아닌 만큼 기근이 있을 때 참고 제단 쌓는 정신으로 비를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애굽에 간 것이 시험에 낙방한 것입니다. 성도는 무슨 일을 행할 때 꼭 하나님의 뜻과 정도를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창 12:10~11).

3. 세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애굽에 간즉 양식은 구할 수 있었는데 그 곳의 세력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뺏으면 어찌하나?”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배나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를 하든지 속히 나오든지 하여야 되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낸 것이 “아내를 여동생으로 속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뺏겨도 자기는 살고 보자”는 심산이었고, 그 아내 역시 “몸은 버려도 죽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졌으니 진실을 거짓으로 바꾼 것입니다.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는 것은 큰 죄악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진실보다 생명을 중히 여기므로 시험에 낙방한 것입니다. 금방 소문이 그렇게 나니까 바로왕이 “데려오라”하여 사라를 취한 연고로 후대를 받았으니 속인 것대로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사라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창 18:10) 바로를 징계하여 되돌리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니(창 12:14~13:1) 수치로 재물을 얻은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또 당한 시험은 아브라함의 종들과 조카의 종들 간에 가축 사육 문제로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래부터 조카에게 한 몫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놋에게도 종과 가축이 있은 것인데 목장의 한계가 있으니까 서로 다투게 된 것입니다. 다툼은 시험입니다. 해결책을 세워야지요. 조카를 멀리 쫓는 방법도 있고 특정 지역을 나누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젊은 조카에게 선택권을 먼저 준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재산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복을 주신즉 양보의 결단을 내릴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 좋은 것을 먼저 택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시험을 바로 이긴 것입니다. 반면에 놋은 삼촌에게 양보할 줄도 모르고 배려를 받은 대로 살기 좋은 고장인 소돔으로 이거를 한 것입니다.

5. 다음에 무슨 소식이 왔습니까? 놋이 사는 고장이 그 주변 국가들의 침략을 당하여 도륙되고 조카의 가족들도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웃이 환난을 당하면 성도에게 책임이 생긴 것인데 이 때에 아브라함은 가병 318명을 인솔하여 조카의 가족들과 포로들을 찾고 재물도 뺏어 왔습니다. 성도가 이웃을 돕는 일은 힘닿는데 까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이웃이 환난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하나의 시험입니다.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하는 시험이지요. 아브라함은 이웃을 도왔은즉 그 시험에 승리한 것입니다.

6. 그런데 또 시험이 생겼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오는데 도움 받은 왕들이 환영을 하였고, 그 때에 “멜기세댁”이란 제사장이 축복을 한 것입니다 .축복을 공짜로 받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삼하 24:24). 그래서 전리품의 십일조를 그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소돔왕이 “포로만 돌려주어도 감사하니 전리품은 다 가지라” 하였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물욕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재물 얻을 특권이 있으나 그 주위에 재물 뺏긴 족속이 많기 때문에 욕심 부리면 가질 수도 있지만 이웃을 배려하려면 안 가져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이 결단을 선하게 한 것입니다. “나는 전리품으로 부자됐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 군사들의 식비만 주고 다 가져가라”하므로 놋을 보낼 때처럼 또 한 번 아량을 베푼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물욕에 대한 시험인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안 것이고(눅 12:15), 애굽왕으로부터 아내를 뺏겼을 때 받은 사례에도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이길 때마다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창 15:1에 보시면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7. 그런데 또 큰 시험이 왔습니다. 나이는 계속 늙어 가는데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 자손에게 보이는 땅을 영원히 주신다”(창 13:15)하신 약속은 성취되지 않은즉 “종을 후사로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하나님께 여쭌즉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된다”는 것입니다(창 15:4). 그리고 먼저는 “티끌을 세보라”(창 13:16)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하늘의 별을 세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번성케 하신다는 뜻이지요(창 15:5). 이때에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창 15:6) 그 약속(가나안땅 기업)을 무엇으로 알리잇가?하고 증표를 구한 것입니다. 사람끼리는 각서나 확인서가 필요하지만 하나님 보고 “확인 각서 써주십시오”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믿음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으면서 체험은 하시되 증표는 구하지 마십시오. 아멘하고 죽을 때까지 믿으셔야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이 애굽에서 400년간 징계를 받고 나올 것을 예언하신 후 제물 응답을 하셨으니(창 15:17) 아브라함의 후손(선민)이 400년간 징치 받은 사실이 아브라함의 신앙 문제, 제사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면 믿고 기다릴 뿐 다른 의심이나 염려나 확인 방도를 쓰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8. 그런데 또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되었을 때(창 16:3) 그의 아내 사라가 “여종에게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자식은 낳아야 하고 젊은 여종이 있고 또 본처가 “첩을 얻으라” 하니 강한 유혹을 받게 된 것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100세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시험을 이기는 것인데 그것을 못하여 첩을 얻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만 믿음은 그 수준 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성취 안 되도 천국에 가서 따지라는 것”이 믿음의 성격입니다(욥 13:15, 23:1~4). 그때 아브라함이 잘 하였더라면 오늘의 중동 문제의 갈등은 없었을 것입니다(창 16:11~12). 아브라함은 여인의 시험, 아들 생산의 시험에 낙방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의 은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히 7:28, 10:14, 창 9:16).

9. 첩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자 본처와 첩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종의 편을 들지 않고 본처의 편을 들었습니다(창 16:6). 여종이 주인의 아들을 낳았다고 큰 소리 칠 수 없는 것이 도리인즉 부정한 쪽을 두둔하지 않은 것이 바른 처신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은 시험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 하나님의 권고를 받고 돌아왔습니다(창 16:15~16).

10.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아들 “이삭”을 주실 것과 할례 할 것과 개명할 것을 말씀하셨고(창 17:1~10), 또 그 후손이 복 될 것을 약속하셨는데(창 18:17~19) 그때에 소돔고무라의 심판도 알게 된 것입니다(창 18:20~21).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아브라함은 기도하였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다 죽이지 마시고 의인의 입장을 살펴 달라”는 간청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의 가족을 죽음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때 만일 아브라함의 기도가 없었다면 롯이 죽을 뻔 하였습니다. 롯이 반드시 살아야 할 만큼 의롭지는 않았습니다(벧후 2:7~8). 그래서 롯은 아브라함의 덕을 본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이웃과 연고자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웃의 불행한 소식에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동남아의 해일로 20만 이상이 죽었지요. “우리의 기도 한 마디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지 마시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웃을 배려하는 일에 다 승리한 셈입니다. 그 후 소돔고무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11. 그런데 창 20장에서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창 13:18) 거주지를 옮겨 남서쪽 50㎞ 지점인 “그랄”에 가서 우거하다가 또 한 번 “아내를 누이라”하여 그랄왕에게 사라가 끌려갔고, 하나님이 그랄왕을 책망하여 풀려난 일이 있었으니 이 때에 왜 “그랄”에 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방인 세계는 다 두려운 곳입니다. 두려운 곳에 함부로 가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어야 왕이 죽지 않는다”(창 20:17)는 말씀을 하시므로 그랄왕을 크게 혼내셨고, 아브라함의 권위를 높여 주셨으니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실수와 거짓을 범하였지만 하나님의 큰 배려를 받았던 것입니다.

12. 그 다음에 100세, 90세에 이삭이 태어났으니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도 체험을 하였습니다. 서자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14년 위인데 이삭이 자라자 서자가 적자를 희롱한즉 사라가 서자를 내쫓으려 하였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로 말씀하시기를 “서자를 그 어미와 함께 내 쫓으라”는 것입니다. 그 서자의 미래도 번성할 것이고(창 17:20) “그도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창 21:18). 이것이 어려운 시험 아닙니까? 적자와 서자, 택자와 비택자, 성도와 불신자를 확실히 구별하시는 섭리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서자도 혈육이니까 인정에 끌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그 인정도 끊어야 하겠지요. 창 21:14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물 한 가죽 부대를 메어주고 서자와 함께 떠나게 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인정을 초월한 순종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랄왕 아비멜렉으로부터 평화조약 제의가 왔습니다(창 21:33). 그래서 평화 조약을 맺는 복을 받았습니다.

13. 그 다음에 가장 큰 시험으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지요. 여기에 대한 자세한 뜻은 많이 설명을 드린 줄 압니다. 문제는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을 죽여서 불태워 번제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고향을 떠나고 재물을 양보하며 이웃을 위하여 전쟁을 치르고 서자와 첩을 내 쫓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 만큼은 하나님 약속과도 맞지 않고, 인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기업 계승에도 문제가 있은즉 순종 못할 입장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 합격만 한다면 큰 축복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하셨고, “능히 다시 살려 주실 줄로 믿고 행했다”고 한 것입니다(롬 4:17).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하신 데는 여러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하냐?를 시험하신 것이고, ②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하여 시험하신 것이며 ③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는 일을 계시하심과 동시에 ④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그 아버지의 아픔과 구원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나타내시는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목적으로 당한 시험을 과감하게 시행하므로 어려운 고비도 면하였고,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창 22:15~18). 대부분의 성공자들이 순종 잘 하고 헌신을 잘 한 사람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14. 그 다음에 사라가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137세였고, 이삭의 나이 38세일 때 아내가 늙어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가정에 초상이 나고 측근이 죽으면 그것도 견디기 힘든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묘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사정한즉 배려해주므로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사서 사라를 장사하고 그것을 가족 묘지로 삼게 된 것입니다(창 23장). 그 막벨라 굴에는 사라와(23:19) 아브라함과(25:9) 이삭과(창 35:28~29) 리브가와 레아와 야곱이 장사되었으며(창 49:31) 나중에 요셉도 거기에 장사된 줄 압니다(창 50:25~26, 출 13:19). 아브라함은 장례 치르는 일에 익숙하였습니다.

15. 그런데 하나 뿐인 아들을 장가보내지 못했으니 그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자기 십자가를 성도의 가정적, 사회적 책임으로 해석합니다(마 16:24). 38세 된 이삭을 두고 그 어머니 리브가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들을 장가보내야 하는데 그 시대에 여자가 귀하였고, 이방인과 혼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근친결혼까지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종에게 맹세를 시킨 후(창 24:2~3) 고향인 하란에 가서 같은 족속의 딸로 자부를 데려 오게 하였는데 그 충성된 종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찾아 나선즉 순적히 만나고 나홀의 손녀(아브라함의 동생의 손녀)가 즐겁게 승낙하여 리브가를 데려온 것입니다. 이때에 이삭의 나이는 40세인데 그 후 20년 만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창 25:20, 26).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잘 진 셈입니다.

16. 그리고 137세 된 노인이 혼자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창 2:18). 그런데 하나님이 “그두라”란 여인을 후처로 주셔서 여섯 아들을 더 낳았습니다. 그리고 175세에 죽은즉(창 25:1~10) 이삭과 이스마엘이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 아들 이삭에게 계속 복을 주셨고,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은 것입니다(창 25:26). 아브라함도 엘리야처럼 우리와 성정이 같습니다. 연약하여 시험에 든 일도 있었고, 또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범위 안에서 어려운 시험을 이기기도 한 것입니다. 시험에 패하면 그만한 고난이 뒤따랐고, 시험에 이기면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의 생활이 전부 시험입니다. 이때에 “이기느냐 지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흥하고 쇠하는 관건이란 것을 아시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9과 인간의 7 종류 (요 9:1~23)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인간의 7 종류”가 나옵니다. ① 소경으로 출생한 성인, ② 제자들, ③ 예수님, ④ 이웃 사람들(유대인, 18절), ⑤ 바리새인, ⑥ 눈 뜬 소경의 부모, ⑦ 소경으로 있다가 눈 뜬 사람입니다.

1.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출생 경위를 다 아실 것이고,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아직 빛이 있는 낮(사역하실 만한 기회)이라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소경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밝히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입장으로 비유할 때 무지하고 어두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눅 6:39) 하셨는데 여기의 인도하는 소경은 진리를 잘못 아는 바리새인들이고, 인도를 받는 소경은 바리새인들을 선생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을 소경으로 비유하셨습니다(요 9:39~41). 저희들에게도 어두운 요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제자들인데 제자들은 그 소경을 보았을 때 불쌍한 생각도 하고 동정할 생각도 하여야 하지만 그 쪽으로는 관심이 없고, “누구의 죄로 저렇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만 생겼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해명하신 일”이 있었지요(눅 13:1~5). 여기에서 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공의이고, 동정심을 갖는 것은 사랑인데 성도가 꼭 아셔야 할 것은 타인의 약점을 볼 때는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자기 약점을 볼 때는 공의의 심정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공의로운 심정으로 자신을 볼 때 “회개하게 되고 또 자신을 벌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7:10~11).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자신에게 겸손과 감사와 능력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습니다(고후 12:9~10). 타인의 약점을 공의의 눈으로 보다가 그것이 아닐 때는 큰 실수와 정죄를 가할 위험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자들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3.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의 형편과 소경된 원인을 알고 계셨고, 또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고 기회가 있는 한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잘 대답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경됨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셔야 할 사명을 느끼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빛을 보게 하시므로 예수님이 진리의 빛 되심을 나타내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빛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다 거듭난 은혜를 받아서 영적 눈을 뜨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그의 말씀을 보고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도록 지시하시고 떠나셨습니다. “왜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물에 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그렇게 안 하셔도 눈 뜨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 소경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자기를 감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이적 행하는 사람들도 돈 갖고 와서 감사하라 하지 말고 슬쩍 고쳐 주고 자신을 감추면 좋을 것입니다. 인기와 물질에 사로 잡혀서 소리치는 것은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때 소경은 눈 뜨는 은혜를 받았으나 자신과 그 부모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모방하지 못해도 그 도덕성과 인격성만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이웃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저가 소경인데 본다거니 그가 아니라거니” 설왕설래만 하다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친 것을 고발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으니 소경이 눈 뜬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고 공의의 척도로만 생각하여 예수님을 고발한 아주 나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교적 이질성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바리새인들도 유대인들과 꼭 같았습니다. 정죄하려면 그가 눈 뜬 소경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모를 불러 물은즉 눈 뜬 자기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 어떻게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맞다 아니다 하다가

6. 부모에게 물어보자 하여 물으니까 부모는 예수님을 능력자라고 말했다가 유대인 단체에서 출회될까 염려하여 “당사자에게만 물어보라”하고 몸을 사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나쁘고 바리새인들도 나쁘며 소경의 부모는 더 나쁩니다. 유대인 단체를 믿고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는 다 구덩이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솔직하지 못한 오늘의 성도들이 아닌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무섭고 교인 단체가 무서워서 말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 목사가 부시 선전을 했습니다. “부시는 낙태를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이니까 찍어라” 했는데 안 찍은 교인이 있는 것을 알고 “교회를 떠나라” 하니까 목사가 정치에 말려들어 교회를 더럽힌다고 광포를 했습니다.

7. 그런 상태에서 눈 뜬 소경은 아는 대로 경험대로 증언하였으니 이 눈 뜬 소경의 순진한 신앙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소경이 아는 것”이란 설교를 참고 하십시오.).

 

제40과 히스기야왕의 특별한 점 (왕하 18:1~8, 20:1~7) 목록으로


히스기야왕은 남방 유다 16대 왕으로(북방 이스라엘 19대 호세아 3년) 25세에 왕이 되어 29년을 다스리고 54세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좋은 명예를 남겼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그의 좋은 점을 찾아서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그의 특별히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1.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입니다. 성도가 무엇이나 하나님께 나타낼 때는 진실 그대로 나타내야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진실해야 합니다. 또 사람에게 사실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사실대로 다 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을 인정받지 않겠습니까?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 어려운 사정을 기도할 때(왕하 19:14) 적국 사신이 보낸 편지를 하나님의 전에 갖고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하였으니 여기에서 사실을 가감하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말보다 서신의 증거가 더 확실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함을 인정받으셔야 하겠습니다.

2. 조상의 잘잘못을 분별하여 본받았습니다. 3~4절을 보시면 “다윗의 모든 행위는 본받았고 아버지 아하스왕 때에 있었던 산당과 아세라 목상은 타파하였습니다. 조상이 잘한 것만 본받고 못한 것을 타파하는 정신은 특별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쳐들었던 놋뱀은 귀한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적 증표로서 700년이나 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거기에 분향을 하기 때문에 부셔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정화 운동이고 개혁 운동인데 그것을 주저 없이 힘 있게 단행한 것입니다.

3. 5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자기 힘으로 쉽게 되는 것이 없지요. 지식, 물질, 질병, 출세 문제 등 쉽게 되는 것이 있습니까? 인생의 연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까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질병에 약했고, 앗수르 침략에는 연약을 느꼈습니다(왕하 18:13~16). 이렇게 연약을 느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왕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더 큰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왕적 권위를 떠나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니까요.

4. 6절에 보시면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연합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같은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자기의 일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힘쓴다 해도 계명을 안 지키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 9:31). 형통한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앗수르 군사를 물리쳐 주신 것이고(왕하 19:35~36), 또 병을 낫게 해 주셔서 15년을 더 살게 하신 것입니다(왕하 20:1~7).

5. 히스기야왕의 특별한 점은 진리를 밝혀 개혁을 시도하면서 나라를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왕 때에 못하였던 우상 타파, 거기에 놋뱀까지 부순 일, 대하 29:3,5,17에 보시면 성전의 제도와 기물을 복구하였고, 유월절을 부활시켜 국가적 행사로 삼았으니(대하 30:2) 이런 일들이 다 진리를 밝히며 정화한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왕이 나라를 사랑하였다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사실입니다.

6.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오래 살기를 원하였을까요? 왕하 20:1에 보시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를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였지요. 이 말씀에서 “더 살아야 하는데”하는 마음은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까 왕권을 인계하라”는 말씀에 어찌 더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그때 히스기야는 이미 중병이 들어 있으므로 누운 채로 벽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한 것만 기억해 달라” 하였으니 이 기도의 심정을 분석해 보면 더 살기를 간청하는 뜻이 아니고 젊은 나이(39세, 25+29-15)에 죽음을 당하는데 자기의 짧은 생애 중에서 진실과 성실로 살아보려고 애쓴 것만은 사실인즉 그것이라도 기억해 주셔야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부끄럽지 않을 것이 아닌가?하여 “죽을 준비로써의 자복과 은혜를 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왕에게 죽음을 고하고 자기 성읍에 들어오기도 전에 길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다시 임하여 “너는 히스기야에게 다시 가서 네 기도와 눈물을 보았은즉 3일 만에 일어나서 15년을 더 살 것과 하나님을 위하고 다윗을 위하여(다윗을 위함은 메시야 언약 실천으로 보셔야 함. 사 11:1~2, 시 22:1) 앗수르의 손에서도 구원하실 것이라 하라” 하여 다시 돌아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 약 처방을 지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음을 예고하신 것은 죽음을 예고 받았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다 죽음을 예고 받고 있습니다. 암, 혈압, 사고, 각종 질병 등으로 죽음을 예고 받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회개를 힘쓰고 진실과 성실을 인정받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회개와 믿음과 진실과 성실 없이 병원에 갈 것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시고 죽을 준비를 하셔야 더 살 길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의 특별한 점을 본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1과 크게 기뻐함 (요 3:29~30) 목록으로


성경에 “기뻐하라”는 말씀이 많고(빌 4:4), 또 “크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도 하셨습니다(시 112:1, 슥 9:9, 빌 4:10). 성도들에게 “크게 기뻐하라”하면 박장대소 할 만한 일이 무엇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웃을 일이 없이 웃고, 기뻐할 일 없이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신 이상자일 것입니다. 또 기뻐하지 않아야 할 일을 기뻐하거나 참된 기쁨을 누려야 할 소재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도 성숙된 신앙인이 아닐 것이요, 또 성도가 세속적으로 노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기쁨의 소재를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무엇으로 기뻐하셨습니까?

1) 성령 충만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눅 10:21에 보시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은 곧 성령 충만으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기쁨이란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기쁨입니다. 부부 사이가 좋으면 기쁨이 있을 것이고, 가족은 물론 친구 사이도 가까우면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요 15:11을 보시면 “내가 이것을 말함은(이것은 계명 지키는 일) 내 기쁨이 너희 안에도 있기를 바람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므로 기쁨을 가지셨는데 성도들도 하나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여 기쁨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3) 성도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눅 15:7에 보시면 잃은 양 찾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 기쁨의 분량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 하셨으니 그 기쁨이 대단하셨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포츠 광장에 가셔서 손뼉을 치셨을까요? 가족 오락 대항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런데 관심도 갖지 않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으로 말씀드리면 성령 충만과 계명(사랑) 실천 하신 일과 회개하는 성도를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2. 세례 요한은 무엇으로 기뻐하였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신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의 기쁨의 소재가 중요한데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 친구로 비유하시면서 신랑이 신부를 취할 때 그 광경을 보는 친구가 기뻐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런 기쁨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할 것이라” 하셨으니 요한의 기쁨의 소재는 바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예수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 하므로 요한의 기쁨의 소재가 자기에게 해당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이 자기 기쁨의 소재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기주의가 0.1%도 없었습니다.

3. 베드로는 무엇을 기뻐하셨을까요? 베드로가 기뻐한 말씀은 벧전 1:6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 받는 일”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 기뻐하셨는가? 하면 시험은 잠깐 있는 것이고, 그 시험이 믿음의 시련을 주어서 칭찬 받을 더 좋은 믿음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믿음은 시험으로 연단을 받습니다. “부산 수영로 교회 정필도 목사님은 교회의 시험을 기도로 해결한 경험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슨 시험이 있다 하면 기쁨이 오고 기대감을 갖는다”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베드로도 시험(어려움 당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던 것입니다(하늘의 상도 핍박 받으므로 받음. 마 5:12).

4. 사도 요한은 무엇을 기뻐하였습니까? 요삼 1:3을 보시면 “심히 기뻐하노라” 무엇을?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을 듣는 것 이상 더 즐거움이 없고 따라서 심히 기뻐 한다”고 하셨습니다. 헌금이 많이 나오는 것이나 예배당을 지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성도들이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이 교역자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5. 바울 사도는 무엇을 기뻐하셨습니까?

1) 진리를 깨달음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족보의 차이를 이해하고 크게 기뻤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로서 은혜 받는 기쁨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 주신 이유를 깨달았을 때 크게 기뻐하셨고(고후 12:9), 다니엘이 자기 민족에 대한 징계의 기간을 몰라서 고민하다가 예레미야의 글(렘 25:12)을 통해서 그 시기가 70년 이란 것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성도들은 그런 기쁨을 반드시 맛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하는 기쁨(고전 13:6), 계명을 즐거워하는 복(시 112:1), 말씀을 밝히 아는 즐거움(느 8:12)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도 큰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2) 성도의 사랑의 싹이 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빌 4:10).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한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바울 사도가 로마 옥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과 함께 위문 사절을 보냈을 때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교역자는 그런 기쁨을 맛볼 때 그 교회를 떠나기 어려운 것이고, 교역자의 즐거운 장기 목회가 실현될 때 교회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큰 교회에는 다 장기 목회자가 있지 않습니까? 목사가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그런 목사를 오래 모시며 견디기도 어려운데 양쪽이 다 그 일에 성공할 때 큰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3) 바울 사도는 “동족이 구원 받는 일이라면 자기를 관제로 드리는 희생도 기뻐하겠다”(빌 2:17~18) 하셨으니 이렇게 자기의 희생을 기뻐한 사도는 참으로 드문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서도 죽기를 각오하였으니(행 20:24)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제가 이 설교를 드리는 취지는 세속적 기쁨에서 적당히 돌이키실 것과 고상하고 신령한 은혜로서 기쁨을 맛보시는 성도가 꼭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자신과 세상의 정욕을 더 죽이시고 신령한 은혜를 더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7. 신앙생활의 지혜(2)

제42과 경홀히 여기지 말 것 (신 32: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경홀히 여기지 말 것”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여수룬”은 “옳은 자, 사랑받는 자”란 뜻으로 선민을 지칭하신 것입니다. “여수룬이 살찌매....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32:10~14을 보시면 하나님이 선민을 황무지 같은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주시고 보호 인도 하셨으며 독수리 새끼처럼 연단시키시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주시며 대적까지 쫓아주셔서 살찌고 편안한즉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발로 찼으니(강조한 표현) 어찌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경홀히 여기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고(창 28:15, 마 28:20), 천지에 충만하시며(수 2:11)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피할 수 없고(시 139:7), 늘 숨어 계시다(사 45:15)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크게 든든함을 느끼셔야 합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보다 또 권총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든든함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또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대화를 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또 부끄러움도 느낄 수 있고 주의도 하게 됩니다. 저의 집 이웃에 교회에 나가는 운전사가 있는데 그가 나를 목사로 알고 있는 줄 압니다. 하루는 주차 관계로 몹시 속상한 일이 생겼는데 20분이 지나서야 그 불법 주차자가 왔습니다.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려고 북받쳐 올라오지만 곁에 제가 서 있는 것을 의식하여 나오는 대로 욕을 다 못하고 참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만큼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 순간 의식을 합니까? 경홀히 할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거나 망녕되히 일컬으면 안 됩니다. 출 20:7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히 일컫지 말라” 하셨지요. 이 뜻은 호칭을 할 때도 그렇고 영광 가리울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하고 존칭을 쓰셔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경 사본을 하는 학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자를 쓸 때는 목욕을 하고 붓을 빨아서 썼다는 말이 있고, 또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도나이”란 용어가 있는데 그 용어의 뜻이 “주님”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였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은 생명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안 지키면 하나님이 크게 노하시기 때문입니다. 수 9:18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기브온족에게 속아서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도 그대로 실천을 하였는데 그 후 350년쯤 후에 사울왕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다윗왕이 어려움을 당하고 사울왕의 후손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삼하 21:1~6). 성도는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어떤 성도가 조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칼빈 선생은 그것을 죄로 여겨 징벌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3. 작은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겨자씨가 커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이고, 개울이 흘러 큰 강이 되며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만큼 작은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만 자라는 것이 아니고 또 어린 아이가 내놓은 오병이어가 큰 은혜의 근거가 되었으며 사렙다 과부는 떡 한 덩이의 봉사로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감사는 넘치게 받는 방법입니다. 고후 9:12에 보시면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떡 부스러기를 긁어 먹는 것을 보셨지요. 그것도 적은 은혜를 경홀히 여기지 않는 생활 습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길에 떨어진 흰 종이를 꼭 집어오고 그것을 원고 기록하는 용지로 씁니다. 우리들 생활 속에는 작은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작은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그것 때문에 큰 은혜가 막힌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저 아는 분이 왼쪽 수족에 힘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은즉 뇌혈관 경색증이라고 하더군요. 뇌로 통하는 작은 혈관의 문제로 왼쪽 수족이 힘을 못 쓰는 것입니다. 그만큼 작은 은혜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것을 주신다”(마 25:23)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4. 하나님의 통치를 경홀히 여기시면 안 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없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유의 주”라 하지 않습니까?(엡 4:6)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지요(마 8:26). 동풍을 일으키셨습니다(출 10:13, 욘 4:8). 불기둥, 구름기둥(토네이도)을 인도하셨고(출 13:21), 벌레를 준비하셨으며(욘 4:7) 메뚜기 재앙, 가뭄, 전염병, 전쟁은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 다스리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작은 일이 변동되거나 성취 되는 일까지 주의 깊게 관찰하셔서 하나님이 이 시대와 인생과 자신을 다스리시는 일을 잘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저절로 된 일로 지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시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아닌 것이 없으니까요.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계명의 작은 것을 경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하지 않습니까?(마 23:24) 요즈음도 성수주일과 십일조는 크게 여기고 사랑의 적은 부분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은 알게 모르게 적은 불법을 시행한다는 뜻이고, 약대를 삼키는 것은 이기주의를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 숨겨진 모범도 경홀히 여기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하나님의 명예, 작은 은혜와 감추인 은혜, 하나님의 안 보이는 통치, 그리고 감추인 계명과 모범을 경홀히 여기지 않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3과 믿음 생활의 상극 (히 12:14~17) 목록으로


사람의 음식물에 농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농산물을 먹고 사는 것이 예사입니다. 혹 유기농 농산물을 사먹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상극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귀를 가까이 하는 것이 상극이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엡 4:20),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틈타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불신, 거짓, 외식, 현세욕, 갈등, 싸움, 그런 것들이지요. 지금 읽으신 말씀에 보시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요소로서 “쓴 뿌리”란 말씀으로 표현을 하시고,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하지 못하는 것, 또 거룩함을 좇지 못하는 것, 음행하는 것, 에서처럼 한 그릇 식물로 장자 특권을 파는 현세주의 같은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놈이 여우인 것처럼 성도의 믿음 생활을 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상극인데 마치 농약으로 재배한 양식을 그대로 먹는 것처럼 믿음의 상극을 양식 삼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것을 깨우쳐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쓴 뿌리 곧 믿음 생활의 상극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1.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의심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잘 몰라도 “하나님과 성경은 진리입니다”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의심이 곧 신앙의 상극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의심한다고 가상해 보세요.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논리나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참 진리는 하나님(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리라”하신 것을 믿을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고 인간들은 다 타락자이기 때문에 진리를 증명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의심이 첫째 상극이요,

2. 인간 자신의 교만이 상극입니다 교만하면 진리를 받으려 하지는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우려고 하니 어찌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벧전 5:5). 겸손에는 순종도 따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고 불순종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불순종해 보세요. 그것은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므로 믿음과 은혜가 성립될 수 없겠지요. 그래도 교만하고 불순종하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3. 신앙생활의 상극은 거짓입니다. 이 거짓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말로도 나타나고 외식으로 더 많이 나타납니다. 진리는 참이란 뜻이고 참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이가 거짓을 믿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거짓을 믿을 때는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가짜 돈을 진자 돈인 줄로 믿는 사람이 그것을 끝까지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거짓은 진리 또는 믿음과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거짓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성도들도 거짓에 말려드는 경우가 많지요.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고, 노인이 젊은 척하였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또 어떤 젊은 여인이 그 검은 머리 노인을 젊은이 인줄 알고 데이트를 청했거나 결혼을 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이 쉽지 않겠지만 성도들 세계에서 외식을 과장하여 참된 것을 왜곡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인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싼 옷, 비싼 음식, 비싼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자인 줄 알고 돈을 맡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빚쟁이라고 가상해 보십시오. 결국 빚진 자가 돈 있는 척하여 타인의 돈을 갈취하는 것이지요. 또 많은 세금을 안 낸 사람이 믿는 장로라는 보도가 나왔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을 의식으로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대털로 옷을 입고 메뚜기로 양식 삼은 세례 요한에게 더 크게 있었습니다. 그는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메시야를 알아본 뜻)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의식은 얼마나 장황스러우며 물질적으로 수선을 떠는데 그것이 다 믿음으로 인정되겠습니까? 믿음은 개인적이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일 뿐입니다. 나는 성도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 진실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세계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일삼는 사람은 다 나타나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검은 자루에 담긴 사과를 샀는데 속에는 다 나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혹 우리 국민의 현주소가 아닐런지요. 거짓은 믿음의 상극입니다.

4. 세속주의입니다. 현세적이고 허탄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팥죽으로 장자를 넘겨 준 에서가 그런 유형이지요. 믿음 생활의 목적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명예에 있는 것도 아닌즉 따라서 직분욕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성욕도 멀리 떨쳐야 하고 정치적인 실권욕이나 교회를 사업주의로 이용하려는 것도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세계는 현실을 초월하여 내세를 갈망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현세욕이나 현실적 애착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 되고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약 4:4, 요일 2:15) 하셨는데도 교회가 먹고 살아가는 일이나 현세적 문제들을 더 선호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세적 영달을 상극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속주의를 떠나지 못하면 사랑 실천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신이 먼저 잘 먹고 잘 누려야 하는데 이웃 사랑이 실천되겠습니까? 믿음의 상극, 믿음의 대적, 쓴 뿌리가 많겠지만 우선 의심, 교만, 거짓, 세속주의 만이라도 멀리 하여 칭찬 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무지 또한 신앙생활의 상극이 될 것입니다.).

 

제44과 소자의 증언 (마 18: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소자의 증언”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가 소자의 증언에도 있은즉 결코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분들이 설교자의 명성으로 증거자를 평가하고 또 “저 분은 명성이 있는 분이니까 좋은 말을 할 것이라”하여 명성 있는 자의 증거는 권위 있게 듣고 그렇지 않은 자의 증거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인식을 고치시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시면 TV 설교를 들으시면 됩니다. 거기는 대부분 명성 있는 분들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외람되게도 저는 TV 설교보다 내가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말씀을 묵상합니다.

1. 우선 예수님은 소자를 업신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소자를 귀히 여기시며 많이 쓰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천국 백성이라”고도 하셨고(마 18:3), 본문에서도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소자입니까? 어린이가 소자이고, 힘없는 자가 소자이며 또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소자이고, 유명해도 자신이 모르고 무시했다면 그에게 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막 9:13).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마 25:45) 하셨고, 또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라” 하시므로(마 12:20) 소자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시고, 학벌 없는 어부들을 중심으로 복음 사역자를 세우셨습니다. 이런 취지에 따라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 4:12)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지요(고후 4:7). 보배는 진리이고, 질그릇은 증언자를 뜻하는데 천하고 쉽게 깨질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소중하되 증거자는 소자도 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진리를 위대한 사람으로 나타내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천한 자, 소자를 쓰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누가 증거하든지 자신을 위한 증언으로 믿고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에 보시면 소자의 증언을 들어서 잘 되고 듣지 않아서 망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 소년이고 노예이며 옥에 있는 요셉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풍년 5년과 흉년 7년의 12년이 지나야 요셉의 말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말을 듣고 믿은 것이 그에게는 큰 복이 되지 않았습니까?(창 41:14~24) 그 다음에는 “나발”이란 사람이 다윗의 신분을 잘 모르고 다윗의 청을 거절하였다가 큰 멸망에 처할 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왕권에 도전하는 인물로 오해를 하고 그의 말과 청탁을 업신여긴 것입니다(삼상 25:10). 그가 죽음 당할 위기에 있을 때 다행하게 그의 처 아비가일의 지혜로 죽음을 면하였으나 결국은 놀래서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왕하 5장에서 나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만 장군은 아람 나라 군대 장관으로 문둥병자였는데 자기 집에 이스라엘 포로로 데려온 소녀가 있었는데 이 소녀야 말로 나만에게는 소자입니다. 그런데 그 소자가 “자기 나라인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찾으면 주인의 병을 고칠 것이라” 하였을 때 나만이 그 소자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병 고칠 의욕으로 검불이라도 잡으려는 격이었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았고,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물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는데 그만 엘리사 선지자를 소자의 말로 인정하여 듣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선지자를 자신의 장관 직위보다 못하게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소자의 말로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을 뻔 하였는데 결국은 자기 종들의 말을 듣고 병을 고친 것입니다. 군대 장관이 종들의 말을 들은 것은 역시 소자의 말을 들으므로 유익해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람왕 벤하닷은 자기의 군대 장관의 문둥병을 고쳐준 이스라엘을 침략하였고, 사마리아성을 포위하니 사마리아 도성은 기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 문둥병자 네 사람이 양식 구할 곳이 없자 아람 군대 진영으로 들어간즉 아람 군인들이 양식을 두어둔 채 다 철수하고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도성에 와서 “아람 군인 진영에 양식이 있다” 하였을 때 사마리아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양식을 구한 것은 곧 소자의 말을 들은 것이고(왕하 7:9~10), 또 앗수르 백성들이 요나의 전도를 들은 것도 역시 소자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욘 3:5). 마지막으로 메시야가 누구십니까? 나사렛에서 출생하고 목수의 아들인 천민에 속한 분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사람이 나겠느냐?”(요 1:46)하고 관심 두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권위주의에만 얽매여서 유명하다는 목사만 모시려고 학벌이 어떻고 연령, 경력이 어떻고, 학위가 어떻고 합니다.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에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낙엽을 쓰는 청소부와 길게 대화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자가 진리를 전하거나 무경력자, 무학벌자가 진리를 전할지라도 그가 전하는 진리가 나에게 접촉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그의 증언을 통하여 나를 만나시려는 뜻인 줄로 믿으시고 누가 설교하든지 유명하지 않은 증언자로부터도 은혜를 빼놓지 않고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질그릇에 담아 주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45과 독수리에게 배울 점 (신 32:11~12) 목록으로


누구나 모르면 아는 사람 앞에 겸손하여야 합니다. 저는 컴퓨터를 잘 몰라서 아이들에게 혼이 납니다. 배우는데 귀천을 가려서는 안 되겠지요. 맨손으로 쥐 잡는 방법을 배우려면 고양이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에 독수리에게 배우라”는 말씀이 있느냐?하실까 하여서입니다. 잠 6:6에 보시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하셨으니까 개미보다 큰 독수리에게 못 배울 것도 없지 않겠지요. 잠 30:25에 보시면 “개미는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한다”고 하셨습니다. 저축성이 없는 사람도 개미에게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동물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동물이 지진 일어날 것과 비 올 것을 먼저 알고 심지어는 약초를 알아서 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인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소나 나귀나 개에게 배우셔야 하고(사 1:3) 암탉이 병아리에게 모성애를 나타내는 것이라든지(마 23:37) 수탉이 새벽을 일깨우는 일이라든지(마 26:74~75) “뱀처럼 지혜로우라” 하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0:16). 뱀이 무슨 지혜가 있느냐 하시겠지만 그 놈도 지혜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멀리 살피는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절대로 먼저 해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싸울 때 먼저 치는 사람이 불리합니다. 뱀은 재판석에 가 본 일이 없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적의 침해를 받을 때 머리를 먼저 피한다는 것입니다. 몸보다 머리가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지요. 성도들도 육신보다 영혼이 귀하고 현세보다 내세가 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귀한 것을 먼저 챙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독수리에게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1. 독수리는 힘이 가장 큰 새입니다. 출 19:4에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셨다” 하셨고, 사 40:31에서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 하셨는데 이 말씀이 다 독수리의 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전도자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지요(행 1:8). 성경에 보시면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고”(시 62:11)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나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슥 4:6). 권능이 필요한 시대인데 성도가 어떤 권능을 받아서 무엇에 써야 할 것 같습니까? 권능은 성령 충만이고, 용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엡 5:18, 약 4:7). 독수리가 새의 왕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 힘 때문인 것처럼 성도들도 성령 충만의 은혜를 힘입어서 진리 터득에 능숙해야 하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셔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에 능숙하여야 하고 또 중요한 것은 마귀의 간계와 역사를 파헤쳐서 드러내고 전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데 그 능력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독수리가 강한 새라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성령 충만으로 믿음의 힘을 키우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막 9:23).

2. 독수리는 높이 나는 새입니다(잠 23:5, 욥 1:4). 독수리가 높이 올라가면 멀리 보는 것과(욥 39:29) 빨리 나르는 특성을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삼하 1:23, 렘 4:13). 1) 독수리가 높이 난다는 것은 성도의 신앙이 고상하고 수준이 높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꼭 같은 법대를 나왔어도 법관이 된 사람과 못 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성경 지식이 많고 신령한 은혜를 많이 추구하는 고상한 믿음의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기복적이고 현세적 축복에 얽매이면서 신령한 복은 형식적으로 추구하는 얕은 물가의 신앙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성경과 기도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행사에 발전이 있다고 자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높이 나는 신앙입니다.

2) 멀리 보는 것입니다. 멀리 본다는 뜻도 현실적 타산으로 멀리 보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멀리 보는 성도는 하늘의 상 받을 일만 위해서 달음질 할 것입니다.

3) 독수리는 빠르고 움켜 쥔 먹이를 놓치지 않습니다(렘 4:13, 말들이 독수리보다 빠르다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말의 속도를 과장 표현한 듯). 독수리의 빠른 생활을 성도들이 본받으셔야 합니다. 바쁘지 않은 성도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일을 안 하려 하시는 분들은 일에 취미를 갖고 있을 하셔야 하며(요 5:17) 일이 없는 분들은 알맞은 일을 만드셔서 바쁘게 사는 생활을 만드셔야 합니다. 식사 시간이 반시간쯤 남았으면 성경 3장을 읽고 식사를 하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시간에 쫓길 것입니다. 제가 구정 전에 신명기 강론을 다 쓰려고 하였는데 세 장을 못 쓰고 구정을 맞이했습니다. 며느리가 오고 사위가 오는데 못 본척 할 수도 없고 결국 한 주간을 더 늦춰서 끝을 냈습니다. “빠르게 산다”는 뜻은 곧 근면입니다. 성도가 독수리에게 배울 때 힘있게 올라가는 신앙, 멀리 보는 지혜, 근면한 생활을 본받으셔야 하겠고,

3. 독수리는 새끼 연단을 잘 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사실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새끼가 안일하면 훈련과 연단을 못 받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너무 감싸고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데 그것은 교육과 연단에 좋지 않습니다. 되도록이면 스스로 자립하도록 내던져야 하는 것이 독수리의 연단법입니다. 그리고 독수리 새끼가 떨어질 위험이 있을 때는 붙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성도 연단법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광야로 인도하셨고, 고난을 주셨으며 또 교육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상 세 가지 외에도 독수리는 안전 지대(높은 벼랑)에 거하는 특성도 있고(욥 39:27~28), 또 늙지 않고 새로워지는 특성도 있다고 합니다(시 103:5).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하는 찬송가처럼 성도님들의 신앙이 신령한데 이르기를 바라서인 것입니다.

 

제46과 신앙생활 반복 사역 (사 28:9~11) 목록으로


“신앙생활의 반복적 사역”이란 제목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성도가 믿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주일 지키는 일이나 기도하는 내용이나 설교를 들을 때 같은 행사, 같은 내용이 반복되므로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7장을 보시면 성막을 완성한 다음 12 지파의 대표들이 제물과 예물을 드렸는데 지파 이름만 다르고 꼭 같은 내용을 12회 기록한 것입니다. “제사는 이렇게 드렸는데 12 지파가 다같은 방법으로 드렸더라”한다면 글자 내용을 ⅟12로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12회 기록하셨으니 성령님이 그렇게 감동하신 것을 누가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뜻이 있었겠지요. “하나님이 각 지파의 제물과 예물을 개별적으로 관심 있게 받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은 “선지자의 외침이 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고 비난한 내용입니다. 선지자는 자의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개와 순종과 사랑이 미흡하니까 항상 외쳤을 것인데 그것을 비난하면 하나님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을 듣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 뜻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앗수르 군사들의 말을 듣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대단히 중한 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행 13:44에 보시면 바울이 구브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즉 “다음 안식일에도 오셔서 오늘 증거한 말씀을 다시 듣게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수차 반복해서 들어야 하고, 또 어려운 내용은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 철학 개론 강의 카세트가 있는데 몇 번을 들어도 정리가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TV를 보면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가 나오는데 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설교이고, 또 증거한 내용들이며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사랑 실천하며 화평 하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들으면 “항상 같은 말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제가 강조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라는 것입니다. 한 주간 세속에 묻혀 살면서 주님과 멀어졌으면 주일이나 예배 시간을 통해서 더 가까워지고 또 하나님과의 동행을 잘 하시라는 것입니다. 부흥 강사 설교 열 번을 들어도 뜻이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 새로 부임을 하여 꼭 같은 대예배 설교를 네 번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난리가 날 만한 일이지요.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두 번째, 세 번째는 실수인가? 했다가 네 번째 설교를 듣고는 실수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항의한즉 그 목사님의 대답이 설교 듣는 자세에 교훈을 주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첫 번 설교는 새로 온 목사의 설교 테스트로 듣고, 두 번째 설교는 목사가 저런 실수를 하네 하면서 지적하는 뜻으로 들으며 세 번째 설교는 “오죽 내용이 없으면 또 하랴” 하면서 목사를 무시하는 뜻으로 듣고, 네 번째 설교는 “목사에게 따져야지”하는 뜻으로 들으니 그것이 어찌 은혜 받는 자세냐?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자신을 깨우치기 위하여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인즉 테스트나 지적이나 무시나 따지는 정신으로 듣지 말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깨달아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은혜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가족이나 신분에 현세 복 주시는 은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 현세복을 잘 받은 사람은 거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 신앙생활 반복 사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이 세상에도 반복 사역이 많다는 것을 헤아려 보셔야 합니다. 춘하추동, 낮과 밤, 씨 뿌리고 농사짓는 일, 일어나고 먹고 일하며 잠자는 일, 아침, 점심, 저녁, 매 시마다 밥 먹고 김치 먹는 일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여름 되면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 되면 봄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육체의 일에 반복이 있으면 영적인 일에도 반복이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사역에 있어서의 반복은 같은 성경, 같은 사도 신경, 같은 주기도문, 같은 기도 내용, 같은 설교, 같은 교회 생활이 있습니다. 같은 성경, 같은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법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고, 같은 기도, 같은 설교가 반복되는 것은 목표가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법원에 제출하면 한 번 신청으로 족하지만 기도의 소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눅 18:1에 보시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 하시면서 가난한 과부가 법관 앞에 매일 찾아가 졸랐고, 들어줄 때까지 매달렸으니 “기도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도 과제가 있습니다. 자녀들 혼인과 독립시키는 일, 목회 잘 끝내는 일, 달란트 사역 잘 마치는 일, 노후에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취 될 때까지 할 것이니까요. 주일 새벽과 수요일 기도회 때 대표 기도 4~50분하는 목사는 저뿐일 것입니다. 더 좋은 기도 내용이 있으면 적어 오세요. 나는 성도들의 생활과 과제를 대략 알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목표가 뚜렷하니까 기도, 설교도 같은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설교의 반복은 실천이 미흡하거나 처음 듣는 성도가 계시거나 가끔 한 번씩 일깨우기 위하여 하게 된즉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강조는 아무리 하여도 과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통사고의 위험이나 어려운 질병의 위험이 내년에는 없어집니까? 여전하지요. 그러면 평안을 위하여 같은 기도를 내년에도 하셔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2004년 12월인데 내년에 마귀가 휴가 갑니까? 휴가도 안 가고 방학도 없이 틈만 찾습니다(엡 4:27). 그러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경성하고 기도해야 하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새노래로 노래하라”(시 149:1)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찬송만큼은 새롭게 하도록 노력하시되 다른 것은 반복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47과 믿음 생활의 7대 요소 (막 9:23, 히 11:6) 목록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믿음 생활이고, 믿음 생활 이상 보람된 것은 없지요. 성도는 믿음 생활의 기술자가 되셔야 합니다. 성경에는 장성한 자의 믿음(연단 받고 선악 분별, 히 5:14), 온전한 믿음(히 10:22), 큰 믿음(마 15:28),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씀(히 11:6), 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막 9:23)는 말씀 등 성도가 믿음 생활을 잘 해야 할 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여기 저기서 음식 선전은 많이 하지만 만드는 방법을 다 가르쳐 주는 예는 거의 없더군요. 제가 자장면을 좋아합니다만 그 맛을 내는 방법을 쉽게 배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시간에 “믿음 생활의 7대 요소”를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잘 깨달으시고 잘 활용하시면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아주 큰 은혜를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1. 주일을 지킬 줄 아셔야 합니다. 주일이 기다려져야 하고 주일에는 교회에 가는 일 외에 별 일이 없도록 만드셔야 하며 주일을 믿음 생활 또는 교회 생활로 보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잘 안 되는 줄 아셔서 주일 지키는 일 만큼은 사수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날이라면(창 2:3) 신약 시대의 주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계 1:10, 마 28:1~6). 성도가 예수님의 날을 예수님 중심으로 지키는 것은 복받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을 잘 지키는 직업을 갖도록 하셔야 합니다. 여러 가지 연장이 믿음 생활의 도구라면 주일 성수는 연장을 꾸린 보자기와 같은 것입니다.

2. 예배를 드릴 줄 아셔야 합니다. 이 예배는 취직을 하려는 사람이 사장님 앞에서 면접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취직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은 미리 준비도 하고 의복도 단정히 하며 시간도 지키고 예절을 갖추어야 하며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여야 하겠지요. 사장이 질문을 하는데 졸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너무 피곤하면 졸수도 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조는 것이 피곤입니다. 그러니까 실컷 주무시고 안 졸릴 때 간단하게 예배드리는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정신도 차려야 합니다. 정신 차리는 방법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찬송에 집중하고, 기도에 집중하며 설교는 믿음으로 받되 마치 무슨 지적 사항을 찾기 위하여 듣는 사람처럼 열심히 듣고 그 말씀을 새김질하려고 노력을 하세요. 그러면 듣는 맛도 나고 깨달음도 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하는 보람도 느낍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상태에서 성도가 예절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생각하신다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빨리 간 듯 느껴져야 합니다.

3. 성경 공부를 할 줄 아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듣기만 합니다. 또 성경 교사님들은 누군가 만든 공과에만 의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올라서서 성경을 스스로 구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을 구상하였는데 설교자가 그 뜻을 설명하면 “내 생각과 같구나”할 것이고, 또 설교자가 새로운 내용을 말하면 “그 해석이 신통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 연구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말씀 연구에 취미를 못 붙이면 목사가 마음에 맞는 설교를 못할 때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다”하고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 스스로 문답도 할 수 있고, 말씀의 기갈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과 생활을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4. 기도를 할 줄 아셔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동물원에 갇힌 사자를 보면서 기도하는 것과 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기성 교회 목회를 하면서 생활 대책을 해결 받고 목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즉 각박한 환경에서) 기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가 그런 체험을 하셔야 기도도 발전할 수 있고 기도의 맛을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민감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민감한 대화가 되도록 기도할 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중대한 결과가 따라 붙겠지요.

5. 봉사할 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푸시는 분일뿐 누구의 덕으로 사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은 베푸는 것입니다. 한 번 신세지고 한 번 갚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는 내 것을 베풀고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날 봉사하러 나간다”하는 자세로 교회에 오실지언정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점심 대접 받고 예수님 차로 집에 온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봉사는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나 연고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불편 느끼는 대상, 안 만났으면 좋을 대상, 미운 사람, 손해 보이는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면 안 되지 저 불쌍한 인간 기도해 줘야지”하는 심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보다 더 발전하면 원수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또 고전 13:1~7을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전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곡식이 여물면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믿음 생활의 요소가 충족되면 그 결실이 전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전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의욕이 생겨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믿고 이렇게 생활하니까 복 되더라”하는 체험이 있으면 누구에게 나타내거나 복음을 전할 때 자신감이 생겨서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온전해지려면 성수주일, 예배, 말씀, 기도, 봉사, 사랑, 전도의 노하우를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성숙한 믿음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제48과 믿음 생활의 바라는 목표 (고전 3:10~15) 목록으로


“믿음 생활의 바라는 목표”란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지도자나 설교자마다 반드시 바라는 목표가 있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거룩을 목표하셨고 그 거룩을 위하여 성령의 불이 떨어지기를” 바라셨으며(요 17:19, 눅 12:49) 세례 요한은 “주님은 흥하시고 자신은 쇠하기를” 바랐으며(요 3:30) 베드로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본다”(벧후 3:13) 하였고, 바울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살고 주님만 존귀케 하는 것이라”(빌 1:20) 하셨으며 사도 요한의 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요일 4:11)고 하셨습니다. 저도 목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본문을 선택한 것인데 본문에는 “지혜로운 건축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건축으로 비유한다면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되셔야 합니다. 건축 기술자 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일을 주 목적으로 하는 만큼 믿음 생활의 기술자가 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혜로운 건축자는 “터를 바로 닦아야 한다” 하셨고, 그 다음에는 “재료를 바로 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을 다 지은 다음에는 불로 태워보아야 하는데 그 집이 불타 없어진다면 공력이 다 소멸되는 것처럼 믿음 생활도 소멸되도록 하면 안 됩니다. 망하거나 죽어도 일어서는 방법으로 하셔야 하겠지요. 고후 4:9에 보시면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하셨고, 빌 1:21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신 것처럼 믿음 생활은 향상과 소망만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의 선배요, 지도자로서 모든 성도에게 바라는 목표를 말씀드리면

1. 성경관을 옳게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매일 읽고 듣는 성경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하지만 말씀 앞에서 떨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옳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박윤선 목사님의 성경관”이란 글을 20페이지나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출판까지 하였는데 읽은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동상이몽한다는 뜻이니 어찌 은혜가 전달되겠습니까? 집에 가셔서라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2. 성경을 네 가지로 터득해야 하는데

1) 옳은 해석을 이해하셔야 하고,

2) 하나님(예수님)을 아셔야 하며

3) 성경에서 구원의 도리를 아셔야 하고,

4)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학자의 TV설교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거룩한 피를 받고 오셨기 때문에 마리아를 존중히 여기신다, 사도들이나 오늘날 사제들이 직분을 받은 것은 다 마리아의 중보의 덕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뜻을 존중하여 받드신다”고 하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인간이기 때문에(눅 1:47) 거룩한 피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이해하시고 성경에서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을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해석 판단, 하나님을 아는 일, 구원의 도리를 아시는 일, 그리고 의인은 어떻게 통치하시고 악은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바른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생활 모범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활 모범이 예수님 만으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은 것까지 전달되었으니까 저희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생활이 어떤 것임을 성경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과 사도들만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 13:13, 고전 11:1, 엡 2:20). 따라서 표준과 모범은 성경에만 나타나 있는 것이고, 바울 사도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전 4:6). 그러니까 표준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또 표준의 잣대는 성경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무엇이 표준이란 것을 어느 정도라도 아시면 내가 표준대로 사는지도 살피셔야 하고, 또 우리의 이웃이나 교회가 어떤 면에서 표준에 있지 않은지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는 표준에 없는 의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말씀 보급을 많이 뺐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는 천주교 반대로 갔지요. 의식은 간소화하고 말씀은 넓혔는데 이제는 개신교가 천주교 의식을 본받고 천주교는 말씀 교육을 많이 하며 개신교는 생활 관계의 설교만 많이 하는 실정 아닙니까? 자신과 모든 이의 생활 중에서 무엇이 표준이고 무엇이 표준이 아닌지를, 또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인본주의인지를 가려낼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신 다음에는 과감하게 개혁을 하셔야 하겠지요.

5.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어떤 불교 강의자가 하나님의 창조와 만물을 무시하는 뜻으로 말하기를 “자기 없으면 만물도 없기 때문에 자기가 제일이라”고 하더군요. 잘못된 말이지요. 내가 없어도 만물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 생활의 경성입니다. 모든 형통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성도의 목표는 자기 생활을 확립한 다음 “믿음 생활은 이런 것입니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0:10에 보시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셨는데 시인(증거)할 수 있는 믿음이 곧 확신 갖는 믿음이고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자기의 믿음과 믿음 생활의 만족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능숙한 믿음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발전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9과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신 32:10~14)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통치하셨는가?에 대하여 잘 나타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은 바로 오늘의 성도들이고 성도의 단체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통치하신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본문이 기록된 것입니다. 어떻게 통치하십니까?

1. 우선 어려움 당한 성도에게 가까이 와 주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황무지 또는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이 황무지와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 환경이기도 하면서 400년간 노예 생활로 고난당하는 환경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 오셨고, 출애굽하게 하셨으며 또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광야에서 만나(말씀)를 주신 것입니다. 시 50:15에서는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하셨고, 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오라” 하셨으며(마 11:28) “병든 자와 죄인도 오라”(눅 5:31)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건강하게 살다가 병들고 돈 없이 자식의 집으로 들어 왔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효자이면 잘 모시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반갑게 모실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연고이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하시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죽을 병이 들었을 때 반드시 사람이나 의술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자기의 죽음과 영혼 문제를 부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23:46)

2. “보호하시고 호위하시며 눈동자처럼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잘 지켜 주신다는 말씀은 시 121:3~8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꼭 그것을 실감하셔야 합니다. 전철은 대부분 지하로 들어갑니다. 두 시간 동안 전철을 타면서 혹이라도 어떤 지점에서 불이 난다면 어찌할까?하고 옆에 있는 소화기를 만져 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묵상 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이나 탔는데도 아무 사고가 없었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영적으로 둔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드려도 실감이 안 갈 것입니다. 전철 사고는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것을 가지고 왜 긴장을 하느냐? 하시겠지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것과 호위하시는 것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것을 실감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동자는 신경도 예민하고 눈물과 속눈썹과 겉눈썹으로 방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보호가 주밀한 것을 뜻합니다. 사람 사는 세계가 마치 풍랑에 조각배 같고 광야의 나그네 같습니다. 위험 투성이고 속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건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 성경에는 암탉이 병아리 품는 것으로(마 23:37),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젖먹이는 것으로(사 49:15), 선한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으로도(요 10:11) 비유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호 통치를 하십니다.

3. 연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연단시키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둥지에 가만히 있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미가 보금자리를 헤쳐 풍비박산을 만듭니다. 새끼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살아보려고 날개짓을 하겠지요. 그러다가 힘이 없어 떨어지게 되면 그 어미가 날쌔게 내려가서 새끼를 업어 올리고 또 떨어뜨리고 하여 연단을 시키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그런 경우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질병은 곧 죽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하나님 앞에 가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후배 목사 서O수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몇 분 목사님과 방문하고 “젊은 목사님인즉 살려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더 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 환자 목사님 말씀이 “암을 고친다 한들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차라리 평안히 떠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더군요. 그 목사님은 죽을 준비가 된 분이지요. 연단을 그만큼 받으셔야 합니다. 쇠가 용광로에 여러 번 들어가고 많이 두드릴 때 좋은 쇠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환난으로 연단시키시는 것을 아시고 달게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유익한 길로 인도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사 48:17, 롬 8:28). 지팡이만 들고 집 떠난 야곱을 하나님이 그 목적 하시는 뜻을 다 이루시도록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창 28:15).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자(요 1:12) 기업이고 분깃이기 때문에(신 32:9, 렘 12:7, 10)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사 48:9). 저희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으시고 그 인도에 복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동으로 가느냐 서로 가느냐가 아니고 어디서나 성경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순종이고, 노아의 배가 아라랏산에 멈춘 것은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인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의외로 간암이 발견되어 조기 수술을 잘 하고 그 사고 낸 운전사에게 사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인도”입니다(롬 8:28).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하시면 모두 다 그 앞길을 유익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도 자신의 길을 꼭 하나님께 맡기시고(시 37:5) 인도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만나 주심, 보호, 연단, 인도하심, 그 다음에는(13~14절) 공급해주시는 통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통치를 꼭 깨달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0과 믿고 두려워 말라 (신 1:29~33) 목록으로


1. 먼저 본문의 뜻을 말슴 드립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인도하여 34번째 진을 치고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주위에 있는 아모리족을 하나님이 주신 땅인즉 “주저하지 말고 치라”(신 1:21) 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명을 거역하였고, “정탐을 해보자”하여 정탐을 하였으나 열 정탐이 반대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큰 낙망에 처한 것입니다. 이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격려한 말씀입니다. “아모리족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 앞서 행하시고 이제도 싸워주신다 너희가 지난 날에 아말렉을 쳐부실 때도 경험하지 않았느냐”(출 17:11), “하나님은 행로 중에서 너희를 안아 주시듯 보호하셨고 앞서 행하시며 너희의 장막 칠 곳을 찾으시는 분이시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기 있게 아모리족을 두려워하지 말고 쳐부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여러분들이 두려워하는 아모리족이 무엇입니까? 아모리족은 없지만 살아감에 있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경제적 기반이 부족한 사람은(나 같은 사람 많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굶어 죽게 될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순수한 믿음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적 기반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면 질병과 재난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암이나 성인병이 너무 많다 보니 그것을 미끼로 약 장사를 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보험이나 다단계 판매가 대부분 그런 종류입니다. 옛날에 적었던 성인병이 많이 생기는 것은 생활 문화가 무노동과 식생활에서 문제를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당히 먹고 노동 체질을 만들지 못하는 환경 때문입니다. 여하튼 가난과 질병과 사고가 우선적 두려움의 대상이고 돈이 많은 사람은 명예와 향락에 훼방 받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못 사는 것”을 두려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 10:28에 보시면 “몸만 죽이는 마귀는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다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여기에서 마귀가 몸을 죽인다는 뜻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실 것). 하나님을 두려워할지언정 마귀나 죽음이나 먹고 사는 문제를 두려워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그 이유를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제가 3년 후 정년 은퇴를 하면 어느 위치, 어떤 장소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마음에 두고 염려도 하며 기도도 하는데 본문 33절에서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신다”는 말씀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할 때 40번 진을 옮겼습니다. 그 많은 백성들이 임시 정착을 하려면 기후 관계, 물 관계, 초목 관계, 안전 관계를 다 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그때마다 앞서서 찾아주신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9회 이사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잘 인도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믿고 의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주택 걱정을 안 하겠지만 저는 오히려 교회의 신세를 적게 지는 것을 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원로 목사 안 된 것을 후회하거나 실수한 것으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이 부족하여 주실 것을 못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롬 4:17).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되 참으로 필요 적절하게 인도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그것을 깨달을 때 믿음 생활의 맛이 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31절에 보시면 “광야에서 너희가 당한 일을 기억하라” 하셨지요. 홍해도강 사건, 아말렉 무찌른 사건, 만나와 반석의 물 사건 등 많은 경험을 믿음의 증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경험은 증표가 될 것이고, 거기에 또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은 믿음의 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무서워말고 두려워하지 말 이유가 무엇입니까?

1) 30, 33절에서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차를 타고 떠날 때 기도하는 이유도 하나님이 앞에서 행해주시는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2) 30절에서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아말렉을 칠 때 싸워주신 것처럼 이제도 아모리족을 칠 때 싸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이제도”란 말씀은 그때 그 환경에 적당하게 싸워주시는 것처럼 현재 우리의 환경에서도 적당하게 역사해 주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현재의 일에 역사해 주시니까 성도는 자기가 현재하고 있는 일이 바른 일인지 또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지 어떤 부분이 어려운 점인지를 점검하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오게 하셨다” 하시므로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이 “자기의 아들을 안음 같이 하신다” 하셨고,

4) 장막 칠 곳을 찾으신 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명확성을 뜻합니다. 지금 정당한 일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인도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믿으시면 염려나 두려움도 멀리 떠나고 또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영적 휴식에 대한 말씀

제51과 무거운 짐을 벗자 (마 11:28~30) 목록으로


“무거운 짐을 벗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말씀이 있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쉬는 방법과 가볍게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하고, 다음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 가볍게 해 주시는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 본문 교훈의 핵심입니다. 우선 무거운 짐을 생각해 보시지요.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고충이 있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1. 신앙적 의미에서 무거운 짐은 죄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만 가지 불행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짐은 마음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과 범죄 성격에 따른 각종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된 것인데 그 짐을 지고 예수님께 와서 해결을 구한다면 무슨 방책을 주실까요? “십자가 대속의 도리를 믿으므로 죄책에서 해방되라”하실 것이고, 범죄하고 고민하는 짐을 진 자에게는 “회개하고 새출발하여 고민의 짐을 벗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죄와 용서로 죄짐을 벗겨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2. 자기 십자가의 짐입니다(마 16:24).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지요. 자기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물, 지식, 명예, 건강이 넉넉한 사람은 자기 할 도리를 쉽게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돈을 버는 힘이 약해서 돈으로 자기의 할 도리를 하는데 힘들고, 지식이 부족 하여서 교육적 책임을 다하는데 힘들며 건강이 모자라서 짐을 무겁게 져야 하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자기의 십자가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 신앙의 책임이고요. 의식주 비용, 교육비용, 의료비용, 이웃과 국가에 대한 비용을 짐 지려면 돈 버는 일이 보통 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이 “그런 사정을 다 아신다” 하셨고(마 6:8, 32), 또 빌 4:19에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가 자녀들 혼인을 치르면서 친척에게 청첩장을 보냈는데 사촌, 오촌, 육촌이 못 오는 경우가 있고, 또 가까운 교역자들(그 분들의 길흉사에 관심을 가져준 대상)에 몇 장을 보내본즉 90%가 응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물질이 궁하여 도의적 짐을 지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돈이 넉넉하면 청첩장 오는 것이 반가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이웃이 저를 포함해서 90%는 될 것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소득은 늘지 않는데 공과금과 물가는 계속 오르니 생활의 짐이 점점 무거워지는데 이 짐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합니까? 성경에는 물질 문제 해결해 주신 사례도 많지요. 만나 사건, 과부의 빚 갚아 주신 사건, 5병 2어 등이지요. 그리고 계명을 잘 지키면 “꾸어줄지언정 꾸러가지 않는다”(신 28: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난을 호소해 보십시오. “근면해라(창 3:19), 계명 지켜라(신 28:4~5), 절약해라(요 6:12), 복음 사역자를 섬겨라(빌 4:18~19), 십일조를 내라(말 3:10), 주는 자가 되라(눅 6:38) 그러면 풍족한 재물을 주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사람 노릇, 성도 노릇 할 만큼 모든 은혜를 주셔서 자기 십자가를 가볍게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인본주의 짐을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마 15:6,9에서 “사람의 유전을 따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람의 유전이 곧 문화와 전통인데 사람들이 힘도 없으면서 유전이나 풍습을 따라 힘들게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풍속 때문에 더 가난해진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 백성들이 가난의 짐을 벗으려면 길흉사부터 간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남 하는 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죄 짓는 기분을 가질 정도로 인본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 앞에 체면 세우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생활을 모방하지 않고 인본주의를 따르면서 과소비하여 고달픈 성도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집이 없고 자동차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신다면 예수님을 부끄러운 인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고, 나귀 한 마리도 없으셨으니까요.

4. 세속의 짐을 가볍게 하셔야 합니다. 이 뜻은 현실주의에 마음 쓰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가 부자 되고 명예 얻기를 원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뜻도 아니고 경쟁의 대열에 서야 한즉 큰 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재물 쌓는 것을 위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천국 가기 어렵다”(마 19:23), “돈은 악의 뿌리다”(딤전 8:10), 부를 누리려는 자는 미련한 자다“(눅 12:20), 적당히 살아라”(고전 14:40, 잠 30:8, 마 6:11) 하셨고, 가진 것이 많으면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후 9:9, 시 112:9) 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적당히 살고 일용할 양식 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생활로 주님과 가까이 하면서 생활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옷 한 벌만 갖고 앞서 가시면 나도 옷 한 벌만 갖고 따라가 보십시오. 예수님이 값싼 음식을 잡수시면 나도 그렇게 행하여 보십시오. 적게 벌어도 오래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주님과의 동행에 투자하여 즐거움을 누릴 때 세속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힘든 생활을 도와주십시오” 하신다면 ① 믿음으로 죄짐을 벗고, ② 성실하게 노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③ 인본주의 전통을 버리고, ④ 세속의 짐을 가볍게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제52과 쉼을 주시는 예수님 (마 11:28~30) 목록으로


1. 예수님은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이 무슨 수고를 합니까? ① 우선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수고합니다. 넉넉한 사람은 이런 수고를 안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성도는 가난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② 그뿐입니까? 건강 지키는 수고도 대단하고, ③ 자녀 교육 시키는 수고, ④ 체면 지키면서 이웃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수고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또 그 다음에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① 생활고의 짐, ② 질병이나 우환의 짐도 있겠지요. ③ 그리고 짐에 대한 대표적인 것은 죄짐입니다. 죄짐은 무거운 것입니다. 큰 죄를 지은 자가 재판을 기다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같은 무거움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약자요, 불쌍한 자들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희망을 주시려고 “오라”하신 것입니다. 대단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불쌍한 죄인들을 오라 하겠습니까? 긍휼과 능력이 무한하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고,

2) 능력이 많으신 분이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해보면 바로 저희들이 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입니다. 늙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약자가 있고 강자가 있을 때 어느 쪽을 사랑하시렵니까? 어느 쪽에 붙을 것입니까? 반드시 나은 편을 택하겠지요.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약자의 편에 서실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영화를 버리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생활을 선택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어렵고 불쌍하며 약한 자를 택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인간의 심리와 정반대입니다. 또 예수님이 약자의 편이 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실 때는 그만한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인데 이 능력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창조자이신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자가 아니시면 어떻게 불쌍한 자를 구제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유의 주이시니까 가능하고도 넘치는 것입니다.

3. 오라 하셨으니까 가는 방법을 아셔야 하겠지요. 결혼 청첩장에 보면 약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 장소에 찾아 가는 방법을 명시한 것이지요. 이와 같이 예수님께 나가는 방법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구원의 주 포함),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받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행 2:36, 4:26에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는 만왕의 왕이시고, 그리스도는 대속자 또는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대로 믿고 또 성경을 진리로 믿으면서 복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큰 변화이지요. 자기의 인권과 사업을 버리고 다른 회사의 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또 구세주로 모시고 그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순종하는 자세가 곧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하기로 신앙 고백을 하시고 나온 분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주이십니다.

4. 그러면 쉼을 얻으셔야지요. 자기의 짐이 가벼워지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쉼 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지게로 쌀 짐, 장작 짐을 많이 져보아서 쉼의 성격을 잘 압니다. 그 쉬는 맛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 쉬는 방법

1) 나의 멍에(예수님이 져주시는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멍에는 둘이 아니니까 자기 멍에(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을 벗고 주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 멍에 메면서 수고를 많이 하였는데 그것을 벗는다는 뜻은 그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먹고 사는 문제, 자녀들 진로 문제, 심지어는 건강과 생사 문제까지 다 주님께 맡겨 버리면 마음에 큰 휴식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쉼도 감당할 만큼 주십니다. 늙은 부모가 살림을 하다가 아들이 맡으면 쉼을 얻는 것처럼 내 짐은 다 예수님께 넘기고 예수님의 짐을 지면 심부름꾼처럼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되니까 큰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 의식을 떠나서 종의 심정으로 일하니까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하신 말씀은 선생님이 착한 분이시기 때문에 배우기 쉽도록 본을 보이며 가르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선생이 엄하면 무섭지만 예수님은 친구처럼 대하시니까 배우기 좋은 것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의 지식과 생활을 배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지식만 배워서 말만 앞세우고 생활을 본받지 않는 경향이 많은 줄 압니다. 생활도 본받으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5. 그런데 왜 예수님이 지게 하시는 짐이 가벼울까요?

1) 예수님은 질 만한 짐을 주십니다. 밑천만큼 일하고 은사만큼 일하게 하십니다. “시험을 받아도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이 다 그런 뜻입니다. 적당하게 하시니까요(고전 10:13, 14:40).

2)예수님의 짐이니까 예수님도 져주십니다. 그것이 곧 성령님의 도우심이지요(빌 4:13).

3) 짐을 져도 자원함과 취미와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갖고 하기 때문에 힘이 좀 들어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의 자료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심방 다니면서 대접 받는 것보다 훨씬 힘든 것입니다. 견비통 고생을 하면서 씁니다. 그러나 즐겁고 계속 하고 싶어서 합니다. 무거워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가볍게 지고 쉼을 얻는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꼭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53과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9) 목록으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받은 백성이 누구뇨 하나님은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고 너는 그들의 높은 곳(요새, 점령지, 머리)을 밟으리로다” 하시므로 선민이 행복한 이유로 하나님이 대적과 싸워 승리 주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행복한 자로다” 하셨을 때 여러분도 행복을 느끼십니까? 반드시 느끼셔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행복을 느끼셔야 합니까?” 신 10:13에 보시면 “행복을 위하여 계명을 지키라” 하셨고, 신 6:24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행복을 누리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시면서 행복을 느끼시지 못한다면 잘 깨달으셔서 바르게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인생의 본분을 다하게 된 것을 행복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은 창조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전 13:13). 본문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뜻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시 49:20)

2. 죄사함 받고 구원(천국, 영생) 받은 은혜로 행복을 느끼셔야 합니다. 성도가 이 은혜를 실감 있게 느끼지 못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하여 믿다가 현세주의로 떨어지면 안 되겠지요. 롬 4:6~9에 보시면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하기를 불법을 사함 받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은 자가 복이 있는데.....이 죄사함의 행복을 무할례자인 이방인에게도 주셨다” 하시면서 죄사함과 구원을 행복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성도는 세상이 나그네 시절이 되고 죽음은 천국 가는 여행이 될 것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어 주시는 행복입니다(요 1:12). 따라서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 되시는 셈이지요(히 2:11). “좋은 부모님을 못 만나서 내가 고생하며 자랐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계시면 그동안 내가 고아처럼 컸는데 왕 같은 부모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행복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친아버지처럼 모시지 못하고 양아버지나 의붓아버지처럼 어색하고 거리감 있게 대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로서의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긴밀히 누리시므로 행복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행복입니다. 동거에 대한 말씀은 요 14:23과 계 3:20에 있고, 동행에 대한 말씀은 창 5:22과 6:9과 미 6:8에 있습니다. 공기가 보이지 않아도 있으니까 숨 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성령님과 말씀으로 함께 계셔 주시고, 늘 동행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을 느끼셔야 합니다. 결코 그 하나님을 없는 듯이 생각하고 다른 것을 끌어드리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도록 방심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하신 말씀은 믿고 깨닫고 느끼며 실천하는 만큼 누리게 하신다는 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막 9:29).

5.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 행복이지요.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마 6:8~32),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니까요(히 4:16). 몇 일 전에 제가 수박 값을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만원 정도면 한 개를 사려고 하였는데 17,000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못 샀는데 세 시간 후에 어떤 집사님이 수박을 사오셨어요. 저는 이 때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이런 정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고 염려와 걱정을 멀리 하게 되지 않습니까? 반드시 여러분들도 그런 체험을 많이 하시고 보람과 행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성취감이나 우월감이 있어야 행복을 느끼는 점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무엇을 성취해 가는 것이 있습니까? 그 성취는 이룬 것도 있지만 이루어 가는 것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이루어가며 기다리는데 행복을 느끼십시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꿈, 좋은 계획을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갈 때 행복함을 느끼실 것이고, 또 여러분이 “어떤 특기나 노하우가 있다”할 때도 그 우월감으로 인한 행복을 느끼실 것입니다. 교회나 교역자와 맞지 않아서 고생하는 성도가 많은 줄 압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것인데 왜 교회나 교역자나 성도나 이웃 때문에 고생합니까? 반드시 무지하거나 정상에 오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과 정통 신앙을 이해해 보세요. 그렇게 되면 사람을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다”는 체험을 하신다면 인간을 의지하다가 실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더 큰 행복을 느끼시려면 두 가지에 성취감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늘에 상급을 많이 예비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늘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에 행복이 꺼져 감을 느낍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1:1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다” 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본받으면 예수님을 본받은 것이 된다” 하셨고, 딤후 4:7~8에서는 “내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웠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나를 위한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닮은 일에 성취감을 갖고 내가 헌신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상급이 많다는 확신과 우월감을 갖는다면 그 행복의 느낌은 대단할 것입니다. “너는 행복한 자로다”. 이상의 일곱 가지 행복의 요소를 깊이 생각하시면서 행복을 느끼고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4과 가장 중요한 일 (창 28:15~22) 목록으로


여러분은 본문을 읽으시고 중요한 것 네 가지를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나타난 야곱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야곱이 성도 자신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저희들에게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1. 첫째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자기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데도 그러 하였습니다. 제가 어떤 성직자의 자녀들이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사의 자녀들이고 예배당 터에서 자랐는데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이지요. ‘주일 학교에서 잘 가르치겠지’하고 부모가 1:1로 꼭 붙잡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적당주의로 자라지 않습니다. 각별한 노력 속에서 자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성경을 배우려고 하는지 또 기도의 필요를 느끼며 죄를 경계하는지 그것으로 믿음 점검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이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실 줄 압니다.

2. 야곱이 하나님을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하나님 깨닫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망합니다(호 4:6).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지요. 하나님이 꿈에 천사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꿈으로 계시를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이 어느 개인 뿐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하여 성경으로 또 일괄적으로 계시를 다 주시고 끝내셨습니다(계 22:18~19, 히 1:1, 요 21:24~25). 그러니까 오늘의 성도들은 성경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것을 영안 또는 계시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설교에 눈을 뜨다가 나중에는 성경에 눈을 떠서 스스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깨달으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셋째로 중요한 것은 야곱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

2) 어디로 가든지 지키시는 것,

3)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

4) 하나님이 허락하신 뜻을 다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때는 필요한 것으로 공급도 하십니다.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은 인도하신다는 뜻이요, 또 야곱에게 허락하신 뜻이 있듯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살게 하신 뜻을 깨달아서 자기의 맡은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깨달은 야곱의 변화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변화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1) “두렵도다 이 곳이여” 하고 하나님 계신 곳을 두렵게 생각하였으니 하나님은 더욱 두려워하였겠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시 2:11)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었으니 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고, 오늘의 성도로 말하면 경건을 차리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장소가 본래는 룻스인데 “벧엘”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오래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벧엘의 뜻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란 뜻인데 그가 그 곳에 하나님 계신을 체험한 것은 계시의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집이 되고 임재가 되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결심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신 대로(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며 양식과 옷을 공급해주시고 내 아버지 집으로 잘 가도록 인도해 주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나 혼자 섬겨야 할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내가 이 기둥 세운 것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그 곳에서 제사 드리겠다는 뜻. 미래의 성전과 예수님을 예언한 뜻인 듯도 함.) 반드시 십일조도 드리겠습니다” 하였으니 이 말은 하나님을 잘 경외한다는 뜻이고 아브라함 때에도 제사장과 십일조 제도가 있은 것을 보면 모세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그런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을 깨닫고 믿음이 성숙해지면서 새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생활에도 야곱처럼 중요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① 하나님을 모시는 단계, ② 하나님을 깨닫는 단계, ③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아는 단계, ④ 그리고 결심한 후 섬기며 변화되는 단계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5. 이상의 말씀들과 관련하여 결론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을 든다면 건강과 의식주이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자녀 교육과 출세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 믿는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를 잘 믿는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든다면 성수주일, 예배, 찬송, 기도, 성경, 헌금, 봉사, 전도, 선교, 구제, 사랑 실천, 예배당 건축....총회, 노회, 신학교 등등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과 교회들이 교회적 활동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할 때 그 중요한 것들을 시행하는 목적을 아셔야 하겠지요. 중요한 것들의 목적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영광일까요? 교회의 부흥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제가 강조해 드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 자신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느끼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과 친교를 가지며 은혜도 받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까이 간섭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새출발의 시동이 걸렸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반드시 그런 은혜의 경지에 들어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 9:15에 보시면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으나 신랑을 뺏길 때는 금식을 하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금식하고 회개하며 말씀, 기도에 매달려서라도 반드시 가까운 관계가 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9:15).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켜주시고 먹을 것, 입을 것 주시며 아비 집으로 인도하여 뜻을 이루게 해 주신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를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않게 하시고.....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으니 그런 은혜가 나에게 지금도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30년 목회하기까지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식구가 늘어갈수록 물질 공급이 따라왔고, 아내하고 언쟁을 하면 즉시 아이가 아프고 수요일 설교를 마치고 들어가서 음료수를 찾으면 5분도 채 안 되어서 감주를 가지고 오는 집사님이 계셔서 “다행이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구나”하고 그 이상으로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을 때 “보아라 내가 목마르다 하면 하나님이 물주시지 않느냐”하고 아내에게 자랑을 하면 “비웃으면서 목사가 그런 말하면 이상한 취급 받는다”면서 경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행사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하게 역사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단히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기성 교회 목회를 사양하고 말씀 연구에 힘쓰면서 주님이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9년 반 전에 한남교회를 사임하면서 “나는 말씀에 끌려 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사임 합니다 내가 큰 것(목회로 9식구 먹고 사는 것)을 포기하였은즉 하나님이 나에게 더 좋은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는데 그 큰 은혜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저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증거한 말씀들이 문자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보화는 자기 소유 다 팔아야 산다 하셨고(큰 은혜는 그만한 노력과 대가로 받게 됨.), 고독한 중의 골방 기도는 기도의 의미를 한 단계 올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연구에 집착한즉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처럼 다가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고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원리를 깨닫는 성도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인도로 딛는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많습니다만 보호의 은혜, 공급의 은혜, 인도의 은혜, 기도 응답의 은혜를 잘 깨달으셔야 하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여러분 보호의 은혜 많이 받으셨죠.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으니까 이 위험한 세상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여행할 때 미리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공중이나 바다나 땅속은 잘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큰 사고가 대부분 거기서 나니까요. 그런데 KTX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떠났는데 대구까지 1시간 45분 동아이나 보호해 주셔서 잘 갔는데 또 지하철을 타고 대명동을 가면서 중앙로역(화재사건)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했지요.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을 때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2) 공급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계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느꼈는데 저는 필요한 것으로 공급을 받고 느꼈습니다. 그 공급이 적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산에서 떡과 생선을 받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 동치미 국물을 먹으면서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더욱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체질 따라 먹을 기회를 주십니다. 용돈도 그렇게 주십니다.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시 3:7, 마 27:46). 꼭 하나님의 공급 하시는 은혜를 체험해 보십시오. 그러나 욕심은 금물입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조석으로 주시면서 그때 시내가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은 주시지 않았지요. 그때 사르밧 과부에게 기적을 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으로 떡을 먹고 굶어 죽을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그 환경, 그 믿음이 있을 때 이적을 주실 것인데 우리는 그런 환경을 가질 가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질 이적을 바랄 수는 없지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뜻이 곧 먹고 살아가게 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인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 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보셨습니까?”하면 잘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시 73:23에 보시면 “내가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주님께 오른손 붙들려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고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지 목사를 증언자로 택하신 후에 안 목사님 마음을 감동하셔서) 저를 청하게 하신 것입니다. 안 목사님이 저에게 빚진 것이 없고, 제가 이 자리에 올 것에 대하여 꿈에도 구상해 본 일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 하셨기 때문에 이 만남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요셉도 인도 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람으로 가서 외삼촌을 만나게 하셨고, 요셉은 애굽에 가서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하셨지요. 왜 하나님의 인도를 못 느낍니까? 물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그 인도의 뜻을 따르십시오. 제가 몇 일 전에 하나님의 인도로 진토리 교회의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한시도 떠나시지 않습니다(시 121:5, 8)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9. 교회 및 교역자와의 관계

제55과 새교회의 목표 (마 5:15~16, 엡 5:27) 목록으로


제목은 새교회의 목표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름을 “새교회”로 붙인 뜻은 교회의 부정적 요소를 없애고 새로운 모양의 교회를 시작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부정적 요소를 없애는 것이 개혁의 목표입니다. 교회의 면모는 십자가 종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의 사명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성도의 믿음 양육이고, 성도가 믿음 양육을 받으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교회로서의 독자적 사명을 말한다면 진리 보존, 해석, 전파 사명, 그리스도의 모범을 나타낼 사명(그리스도의 모범 속에 정의, 사랑, 봉사, 전도의 모범이 있음), 그리고 성도를 위안해야 할 사명으로 휴식과 자유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좋게 하고 새롭게 하려면 우선 부정적 요소(일반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 비난 대상)를 먼저 없앤 다음에 사명적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 교회가 비난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교회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흠이 없고 거룩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깨끗한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1. 우선 새교회에 발붙이지 않아야 할 부정적 요소를 살피셔야 합니다.

1) 교회가 교역자의 직업적 터전이라는 비난을 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의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주는 생활비로 사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런 비난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역자의 생활비 때문에 지나칠 만큼 헌금을 강요하거나 교역자의 생활이 지나치게 사치하여 가난한 교인들의 생활에 동화 되어 주지 않거나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 갈등을 해소해 주지 않을 때 그런 현상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사역자가 자기의 생활 때문에 목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실증을 보인다면 좋을 것입니다.화성의 진토리 교회 목사님이 “생활비를 안 받으면서 트럭을 타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교회가 특정인의 기업체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예배당 사치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적당한 처소에서 예배드리면 되는데 예배당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것만 못한데도 건물을 선호하는 것은 일종의 외모를 드러내는 일이고, 대교회 또는 물량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수천 명이 모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사치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또 외식의 일종으로 성직자의 가운이나 학위복을 입는 것은 역시 성경적 근거도 없고 보편성이 없으며 그 옷차림으로 권위를 나타내려는 외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황, 천주교 신부, 목사, 무슨 교주 등 화려한 의복 차림으로 무식한 성도를 억눌러서야 되겠습니까? 가운 문제는 큰 교단에서도 긍정도 못하고 부정도 못하는 결론을 냈는데 개혁은 외식에서 자연미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한국 교회는 성직자의 권위주의가 너무 심합니다. 존경 받을 만큼 행하고 존경할 대상으로 여기면 됩니다. 교역자를 신앙생활의 지도자요, 모범자로 알게 하면 족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중보자처럼 군림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앞서 가는 모범자가 되면 좋을 것입니다. 천국 열쇠는 주님이 가지신 것이고 영광의 주는 예수님 뿐임을 알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교회는 사랑의 단체일 뿐 이기주의 단체가 아닙니다. 자기 교회만 커지기 위하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이웃 교회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양보 하면서 오는 교인만 수용해야 하며 특권의 보따리를 서로 양보하니까 그 보따리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직분 때문에 시험에 드는 교회가 많습니다. 겸손과 양보와 사랑을 가르치는 교회라면 명예, 특권 같은 것이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6) 교회 재정 시책입니다. 수입은 감사 헌금과 교회 운영 헌금과 사업 목적을 위한 헌금을 하되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 목적을 위한 헌금은 사업에 따라 구제, 선교, 친교, 건축 등으로 나누어 시행하고 감사와 운영 헌금은 예수님께 드린 것으로 구별하여 주님 뜻대로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항목은 모호한 것입니다. 십일조가 모호한 이유는 폐지된 율법이기 때문이고,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며 또 십일조가 옳게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헌법에 나타난 것처럼 의무금, 교회 운영금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사용할 때는 예수님 돈을 쓰는 것처럼 적당한 용도에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돈은 교회 운영이나 선교와 구제에 쓰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7) 교회가 성경과 사도 모범이 아닌 것은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 교회가 문화와 전통을 따르고 인본주의를 따르며 세속화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세속화와 문화를 도구로 사람을 끌지 않습니까? 문화를 보고 오는 자는 문화인이 되겠지만 십자가를 보고 오는 자라야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할 일을 점유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회적인 일은 사회인이 하도록 기회를 주고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서 영광 돌리는 일만 잘 하면 족할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는 성도의 친교 외에 사회적 재미를 보려 하지 말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는 어른으로부터 어린 아이까지 한 사람도 영광 받는 자가 없도록 하여야 하며

9) 또 교인의 양심의 자유와 교회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하고,

10) 또 상당 한 휴식을 주어야 합니다. 상당한 휴식을 주려면 예배와 교육 제도가 많이 간소화 되어야 하고, 성경 지식의 실리를 취하게 하여야 하며 하나님과 성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결속시켜서 독립적으로도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로 육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명실 공히 등경 위에 있는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56과 하나님의 교회 (딤전 3:15~16) 목록으로


이 시간은 “하나님의 교회”란 제목으로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성도님들이 교회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시거나 또는 진정한 의미가 아닌 것에 지나친 관심을 가져 빗나가는 경우를 방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교회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교회라는 기관을 설명할 때 “예수 믿는 성도 또는 믿음 생활하기를 노력하는 사람들의 단체”라고 하면 그 설명이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구속하여 설립하셨으며(행 20;28)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 하셨고, 엡 1:23에서는 “예수님의 몸이라” 하셨으며 또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이 교회 속에 “큰 경건의 비밀이 있다” 하셨으니까 일단 교회는 예수님처럼 존중해야 할 귀한 기관이라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하나 취급하다가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다”하면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할 때 앞에서 “믿는 성도의 단체”라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깊이 이해 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교회를 믿는 성도의 단체라고 할 때 이는 순수한 성도를 말하는 것이고, 천국 열매이며 또 이런 성도는 세계에 산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 안에는 믿음이 순수하지 못한 외식자들도 수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곡식 밭에 가라지를(마 13:25~28), 또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를 용납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또 이해 하셔야 할 것은 교회의 목적을 이행하기 위하여 인간 사역자나 단체의 조직이나 건물 비품이 필요하지만 교인 단체가 스스로 교회의 목적을 잘 시행한다면 구태여 인간 유급 사역이나 무슨 조직체나 장황스러운 건물과 시설이 꼭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세월이 좋아서 기독교의 자유를 갖고 사니까 무조건 나팔 불고 멍석 피며 인간 과시, 물질 과시를 앞세워 나타내지만 만일 핍박 세계에서 믿음 생활을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교인이 30명이라면 그 30명이 다 모였다 헤어졌다 할 수 없을 것이고, 2,3명씩 나누어서 또 집집마다 어느 지하실에서 찬송 소리도 내지 않고 은밀하게 성경 배우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교회는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대표자도 없고, 조직체도 없으며 어떤 직분을 줄 겨를도 없을 것이고, 예배당 같은 건물은 더욱 만들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경 교사 한 사람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의식이나 포장 같은 것이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요소는 아니란 뜻이요, 교회의 진정한 요소는 "하나님의 백성, 믿음 가진 영혼, 또 영적 신앙의 분량“ 그 자체라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실 교회가 기본 요소(즉 성도의 영적 신앙)에 치중하지 않고 상당 부분 물량주의나 외식에 치중한다는 점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교회의 목적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는 공예배 드리는 곳으로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를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 공예배가 됩니다. 요즈음 공예배의 인식은 주일 11시에 드리는 교인 전체의 장년 예배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예배를 11시 예배에 붙잡아 매는 것은 성수주일이나 다른 교회에 못 가게 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느 시간에라도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 공예배로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시려면 단결에도 협력하셔야 하니까 연합과 사랑의 결속을 잘 하셔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일 예배는 귀한 것이로되 그것만 공예배로 여기시지는 마시고 예배는 누가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 입니까? 그 목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집”이란 말씀을 하셨지요. 그 집은 등기 건물이 아니고 가족 같은 사랑의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사명을 가진 단체란 것이요, 또 한 가지는 진리 사명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셨고, 또 “이 비밀이 크다” 하신 것은 진리 사역 속에 비밀이 많다는 뜻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 사역은 네 가지입니다. 보존, 해석, 교육, 전파입니다. 이 사역을 교회에 주신 것인데 개인이 못하면 단체가 하고 개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스피드 시대이고 미니 시대입니다. 어떤 이에게 100만원쯤 구제할 일이 있는데 교회 단체가 조직을 하고 구제금을 걷고 시간을 내서 갖고 가니까 어떤 성도가 미리 개인적으로 이미 구제를 하였다고 할 때 그 단체의 행사가 얼마나 더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교단이 나서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졸업생을 배출한 후 설교 자격을 주어서 “8년 만에 설교하라” 했더니 교인들이 말하기를 “그런 설교 다 아는데요” 하였다면 그 교역자 양성이 얼마나 멀리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한테 듣고 배웠느냐? 하니까 성경으로 배웠고 아무 신학자가 쓴 글로 배웠으며 또 TV를 통해서 많은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여간하여 새로운 교훈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평범한 사역자가 설 자리는 다 평신도가 서게 되고,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역자가 아니면 먹혀들지 않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신앙과 사역자들의 지도 방침이 디지털 시대를 따라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57과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 (1) (롬 16:1~4) 목록으로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초창기에는 교역자를 배척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또 있다 하여도 전임을 시켰는데 70년대 후반부터 교역자를 배척 또는 갈등하는 사례가 드러났고, 80년대쯤부터는 도시 집중 현상이 일어나면서 교역자가 교회를 개척하여 자기 집 가장처럼 군림하여 통치하는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취지는 지금 많은 성도들이 자기 교회 목사님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신앙적으로 갈등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상당수의 교인들이 목사를 배척하고 또 목사님이 나가주지 않는 문제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사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 하려면 상당한 적응력을 가지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에는 “뵈뵈”라는 성도가 “바울의 천거자가 되었고 또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 하였으니 참으로 좋은 관계임을 알 수 있고, 또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라 하였고, 또 그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으려고 하였으니 역시 좋은 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딤후 1:15을 보시면 아시아의 어느 교회에서 “브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을 버렸다” 하셨으니 이들은 교역자를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한때 바울을 위하여 눈이라도 빼주려 하였고, 바울을 천사처럼 대한 일이 있었는데 잘못된 신앙 사상이 들어가면서 그 사랑의 관계를 변질시켰다고 하였습니다(갈 4:14~15).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섬기는 교회에서 교역자님에게 얼마나 신뢰와 존경과 감사를 느끼십니까? 신뢰와 존경과 감사를 많이 느끼시면 양쪽이 다 행복하고 교회도 잘 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저는 모든 교역자와 성도가 다 그런 관계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서 그 이유를 분석하면 우선 교역자의 문제부터 짚어보아야 합니다. 교인은 신앙의 어린이로 들어왔으니까 교육과 연단의 대상인즉 문제를 교인에게서부터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역자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면 크게 나누어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참 많지요. 첫째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사상을 갖고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과 인정을 떠나서 노회 같은 상급 기관에 진정을 하여 처리해 주도록 부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잘 시정되었다면 순응하셔야지요. 그러나 시정 안 될 때는 노회의 처리로 근절시켜야 하는데 일부 교인들이 목사와 한 편이 되어 교회를 분리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튼 잘못된 교리에서는 격리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교역자의 도덕성입니다. 교역자가 거짓말을 한다든지 외식을 한다든지 재물에 분명치 않다든지 사치, 세속, 이성 관계 등 덕이 안 되게 행하면 그 정도에 따라서 대응하시되 경미한 것이면 지도층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권면하여 시정하게 하시고, 교회 일치에 문제 만큼 심각하면 노회와 의논하여 시정하는 조치를 취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회개로 해결됐다면 용서하고 신뢰하는데 인색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교역자도 성자가 아닌 인간이란 것을 이해하시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정치적 불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헌법대로 통치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장로회 정치가 독재가 되고 불법이 되며 다른 직분자(당회원 장로)의 실권을 짓밟는 일이 되기 때문에 도덕성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도 심각한 도덕성의 문제처럼 처리하셔야 하되 먼저 목사님께 불법성을 말하고 시정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시정할 수 없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일이 될 때는 노회에 소원을 하여 시정하셔야 합니다. 혹 목사님이 법을 몰라서 잘못한 것을 시인하면 한 번 있는 실수로 인정하고 관용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성도가 교역자를 사랑하시면 관용을 잘 하실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관용을 못하는 대신에 사랑의 실격자가 되니까 타인의 흠을 잘 가리워주는 성도가 되시면 더 좋을 것입니다. 넷째는 목회자로서의 유력성의 미흡입니다. 지식이나 설교력이나 처세가 미흡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지적할 사항으로도 애매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성도가 교역자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유력한 교역자가 되시도록 만드셔야 합니다. 교역자가 기도가 부족할 때 교인들이 기도를 더 앞서야 하고, 교역자가 가르치는 지식이 부족할 때 성경을 자주 질문 하십시오. 그러면 속히 변화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도가 교역자를 은혜 공급자로 여기지 마시고 말씀 공급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을 때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부족하면 성경을 질문하여 답을 받으세요. 그만한 수준이 될 때 그 성도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여 감동받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마시고 자신이 모르는 성경의 뜻을 목사님의 연구 발표의 재료로 깨달아서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먹여주는 것을 먹지만 조금 자란 아이는 스스로 먹는 것처럼 성도가 꼭 교역자의 증언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유지하신다면 어떤 교역자에게든지 실족하지 않고 은혜의 생활을 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교역자적 사명을 갖는 때가 오기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계속 목사님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제58과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 (2) (고전 14:1) 목록으로


“교역자와의 관계 극복”이란 제목으로 두 번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목회를 잘 하면서 다른 교회의 일에 간섭을 안 하는 분들은 어려운 교회의 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같은 경우는 어려운 교회 문제에 대한 문의를 자주 받기 때문에 어려운 사정을 많이 아는데 법적으로 5~6년씩 투쟁하는 과정도 잘 압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뜻이 맞지 않으면 나누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어떻게 하면 교역자와 성도 간의 갈등이 없도록 조치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차원에서 늘 구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은 “사랑을 따라 구하고 예언에 집중하라” 하셨는데 여기의 예언은 말씀 증거를 통하여 은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 중심으로 하고 교회 생활은 사랑 중심으로 하면 되니까 그런 환경이 되도록 노력하시고 그런 환경에 방해되는 요소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문제의 순서는 교역자나 지도부에 있고 교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1차적 책임은 없다 해도 끈질기게 인정에 치우쳐서 정도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큰 애로를 느끼게도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항상 바른 신앙 노선을 지키고 교회법상 무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도덕성과 신령성에도 상당한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노회가 조직 교회에 전도 목사를 파송했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 전도 목사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위임 목사나 임시 목사를 교인의 투표로 청빙해야 할 교회에 그렇지 않은 상태로 교회 없는 곳에 전도하도록 보내야 할 전도 목사를 파송했으니 이런 것은 그 노회가 속히 시정해 주어야 하는데 목사를 대책 없이 내보낼 수 없는 인정 때문에 법을 알면서도 교인과 교회를 손해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조리한 일을 지도자들이 감행한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노회가 공의를 발동하여 교역자를 해임시켰는데도 교역자가 순종하지 않고 자기를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한 단체를 만들어가지고 반항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경우에는 그 한 편 된 교인들까지 공의를 떠나서 인정에 치우치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요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폭력 대항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쉽게 끝나지 않고 일반 사회 법정까지 가지고 가서 3~5년간 끌면서 큰 피해를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 목적, 사랑 목적, 축복 목적을 다 상실하고 주도권 대립과 예배당 차지하는 물질 쟁투만 남아서 허탈한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부패하고 노회가 공의를 상실하며 성도가 바른 판단을 못하면 배는 산으로 올라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까?

1. 성직자가 사명적이어야 합니다.

1) 우선 자격을 잘 갖추고,

2) 합법적 시무를 하며

3) 도덕성에 존경을 받도록 힘써야 하고,

4) 사치나 현세욕에 빠지지 말며

5) 되도록이면 교회의 보수와 자기 가족과의 생활 문제에 관련 지워지지 않도록 함이 좋고,

6) 다수 교인이 교역자를 반대하면 교역자가 순순히 나가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이상의 여섯 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그 교회는 항상 평안할 것입니다.

2. 성도들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목사님(교역자)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가 모셨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깨닫고 시행하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큰 소리 내고 떠들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의 말씀 공급이 부족하면 항상 질문해서 배우세요. 질문조차 할 줄 모르는 성도는 그만큼 신앙의 눈을 뜨지 못했다는 증거니까 덮어 놓고 아멘하지 마시고 교회 일에 앞장서지도 마셔야 합니다. 알만한 지식을 알아야 하니까요. 성경도 알고 교회 헌법도 알며 사랑도 실천하셔야 하는데 성경 질문에서 막히니까 다른 것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많이 배우셔서 유력한 성도가 되시면 목사의 유력성과 무능성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니까요.

2) 말씀으로 은혜 받는 것과 사랑의 실천에만 힘을 쓰세요. 그러면 직분, 명예, 인간적 친교, 자신을 알아달라는 문제, 그런 것은 마음에서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에서 서로 갈등하는 문제가 생기면 회개할 것, 회개하고 화해할 것, 화해하며 법으로 처리할 것은 법으로 하고, 사랑을 따라 구하면 모든 일이 다 잘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이를 다 균등하게 사랑해야 하고, 불필요한 인간 단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으며 약한 자를 더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 외에 절대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3. 예배당을 내 교회로 삼지 마시고, 모든 지상의 교회를 다 내 교회처럼 생각하셔야 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여 좋은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마음이 그 예배당에 끌려서 담임 목사와 대립을 해도 자신은 나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 물건이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담임 목사가 쉽게 나가지 못하는 올무는 교회에 생계를 걸어 놓은 문제와 승리감을 못 갖는 명예 문제인데 이것을 교회나 성도의 신앙생활 문제보다 더 크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명적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고, 성도는 자기 나가는 교회가 자기의 이상에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좋은 교회를 선택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을 감안할 때 조건이 퍽 좋아야만 큰 교회가 이룩될 수 있겠지요. 그 대신 건전한 작은 교회가 많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악성 질병을 고치기 어려운 것처럼 교회에 정착한 상태에서 교역자와 성도의 갈등 또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갈등을 노회에 소원하면 노회가 교인 편을 들지 않고 무조건 목사를 비호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또 성직자가 양보를 안 하고 맞 대항을 하기 때문에 난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지혜로운 성도는 교회 단체보다 말씀을, 예배당에 대한 미련보다 사랑을 선택하시고 교역자는 “교회나 성도에게 추호도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시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요 3:30).

 

제59과 교회의 부흥 (행 9:31) 목록으로


“교회의 부흥”과 관련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그리하여”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 하시므로 부흥의 상태를 평안과 든든함과 경외, 위로, 진행 그리고 수가 더한 것으로 설명하셨는데 그 원인을 “그리하여” 앞에 있는 말씀과 연결을 하였으므로 그 앞의 말씀을 살피면 “사울이 핍박자의 입장에서 개종하여 전도자로 변한 사실과 사울이 바나바의 천거를 받고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담대히 전파하고 변론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유다,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의 부흥은 핍박자 사울의 변화와 전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요즈음 교회마다 부흥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특별한 교회는 부흥이 되는데도 있는 줄 압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진정한 부흥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나와서 자선 사업을 많이 하면 그것을 교회 부흥으로 아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성도의 마음이 감정적으로 흥분되어 큰 소리로 찬송하거나 기도하면서 열광할 때 그것을 부흥으로 아는 경우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는 성도이면 부흥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평안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경외가 있으며 핍박 중에도 든든히 서는 믿음이 있고, 전진과 수의 더함이 있으면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부흥은 나무로 비유할 때 뿌리를 깊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신앙이 든든함을 뜻하고, 다음에는 그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는데 이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역에 해당하며 셋째는 그 나무를 많이 가져야 하겠지요. 그것이 곧 성도의 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믿고 바르게 살며 그런 성도가 많아지는 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잘 믿고 잘 실천하는 일을 못한다면 진정한 부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제가 2005. 5. 2.에 강화의 강남 감리 교회(모교회) 100주년 기념 예배에 다녀왔는데 그때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어떤 외국인의 책에서 부흥 안 되는 원인 다섯 가지를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흥 안 되는 교회는 그런 요소를 연구하셔서 시정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부흥 안 되는 원인

1) 부정적 비판적 요소가 많으면 부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교인이 많고 또 지적 사항이 많은 상태에서 협력을 잘 안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교역자의 뜻을 받들어 “믿습니다”하고 협력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하고, 비판 사항을 속히 시정하는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평을 계속 하면 부흥이 안 되지만 개혁의 차원에서 속히 시정하고 합력시켜야 좋게 될 것입니다.

2) 변화가 없는 교회라고 합니다. 이 변화의 뜻은 교훈의 변화가 아니고 교회의 제도나 생활을 뜻합니다. 예배 의식이나 찬송가 곡조의 변화, 예배당 시설의 변화, 사업의 변화 등이겠지요. 이것은 새 것을 좋아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인데 초신자들은 변화를 좋아할 것이지만 이 변화가 세속의 유행을 따르는 변화이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성경적이고 창조성 있는 변화를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찬송가 곡조의 변화와 소위 열린 예배라 하여 청년들이 강단에서 춤추는 식의 예배 의식이 있는데 필자는 대단한 불안을 느낍니다. 진리 중심에 서서 사역의 변화를 시도함이 좋을 것입니다.

3) 속죄양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헌신과 희생적 봉사를 앞장서서 시행하는 성도를 뜻합니다. 감리교 인천 제일 교회의 예배당을 지을 때 세 사람의 희생양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무명 성도가 거금을 헌납하므로 큰 예배당이 세워졌고, 또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솔선자, 희생자가 없으면 발전, 부흥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 뜻을 갖고 교회를 개척한 성도나 교역자가 계시면 반드시 자신들이 희생양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을 때 많은 열매가 맺는다”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12:24).

4) 봉헌을 소홀히 하는 교회에 발전이 더디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 은혜가 있습니다(마 6:21, 대하 16:9). 그러니까 성도로 하여금 봉헌과 봉사를 일삼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담스러운 짐을 강요해도 안 되지만 자발적인 봉헌이 없어도 안 되고 그것을 방치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에게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눅 6:38).

5) “분파적 요소가 있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장로회가 따로 있고, 집사들끼리의 모임, 누구 누구끼리의 모임 등이 있어서 서로 수군거리면 전체적 신뢰감과 친교가 없어지고 단결이 안 되어 좋지 않은즉 되도록이면 전 교인이 하나로 뭉치고 다함께 친교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해 본 부흥의 요소는 네 가지입니다.

1) 우선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돈 것을 기도로 비유해 보십시오. 매일 말없이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나 돌았습니다. 이것은 꾸준한 기도를 선행하는 것입니다.

2) 메시지 전달에 생동감이 있고, 적응성이 있어야 합니다. 귀가 열리는 설교를 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3) 모든 성도 특히 초신자나 우환 있는 성도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펼쳐야 합니다. 말씀과 사랑만 뜨거워도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4) 교인을 무급 전도사처럼 키워야 합니다. 성경 지식이 상당하고 전도와 봉사와 교회 부흥에 사명을 느끼는 사역자처럼 양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인이 사역자가 되고 사명을 느낄 때 그 교회는 크게 부흥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교인들이 교회 부흥의 꿈을 갖고 “내가 바로 그 꿈을 이루어야 할 사명자다”라는 고백과 함께 노력을 하신다면 그런 성도의 섬기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10. 사명과 섬김에 대한 설교

제60과 사명자에 대한 이해 (고전 12:4~11, 딤후 2:20) 목록으로


“사명자에 대한 이해”란 제목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평소에 사명자로서의 부족을 많이 느꼈는데 어떤 때는 나보다도 못하고 답답해 보이는 사명자를 대하면서 “저 사람이 무슨 이유로 사명의 일선에 섰는가?”하는 생각을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사명자 쓰시는 섭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명자는 그 신분의 차이가 많아도 하나님이 폭넓게 쓰시는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비단 어린 아이가 사명을 가졌다 하더라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하시고 어린 아이를 들어 보이실 때 그 어린 아이가 쓰임의 대상이 된 것이고, 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이용하셔야만 슥 9:9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린 아이나 나귀도 귀히 쓰임이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읽은 말씀 중 고전 12:4~11 부분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누구에게나 “사명적 은사를 주신다”는 말씀이고, 딤후 2:20은 “큰 집(교회를 비유함)에는 여러 종류의 일군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큰 집에 큰 그릇, 작은 그릇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도 크게 일하는 사람과 작게 일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이 있듯이 어떤 그릇은 귀한 손님이 와야만 1년에 한두 번 쓰는 것도 있고, 어떤 그릇은 매일 힘들게 쓰임 받는 그릇도 있는 것입니다. 그릇이 “천하게 쓰인다”는 뜻은 천한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가혹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천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일도 결코 천한 일이 아닌 줄로 아셔야 합니다. “적재적소”란 말이 있습니다. 적당한 것이 적당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작은 못을 박을 때는 망치도 작아야 합니다. 큰 못을 박을 때 망치가 작으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사람, 여러 환경에서 적당히 쓰실 수 있는 은사를 여러 사람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목적은 하나라도 쓰여 지는 도구는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깨끗한 벽에 굵은 못을 박는다고 가상해 보세요. 몇 가지 기구가 필요하겠는가? 굵은 못, 드릴(드릴이 100v이면 변압기), 디딤 발판, 연결 전기줄, 망치, 펜치, 비, 쓰레받기, 걸레도 있어야 하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 사역을 할 때 여러 종류의 직분과 은사가 필요한데 때로는 너무 잘 아는 것도 가르침 받는 대상에게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교회에서 경영하는 유치원을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유치원 교사를 보모라고 하였습니다. 보모를 모셔야 하는데 한 사람은 깔끔하고 피아노를 잘 치는데 실력은 인정이 되나 아이들하고 잘 놀아주지를 않아서 재미가 적은데 한 보모는 실력이 모자라지만 너무 헌신적이고 아이들과 친해주니까 그것이 더 인기가 있어서 아이들 수가 느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귀족적 타입만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하면서 헌신적인 타입이 더 요긴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부로 잔 뼈가 굵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먼저 능력을 보여주신 후에(고기 잡는 이적)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신다”(눅 5:10~11) 하셨는데 결국 베드로는 오순절 때 능력을 받고 큰 일을 한 것입니다. 모세도 능력을 보여주시고 꼼짝 못하도록 붙들어 쓰셨는데 모세가 “말 표현력이 부족하다” 하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말 잘 하는 아론을 보조자로 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모세 5경을 기록할 만큼 문장 쓰는 은사가 있어서 모세가 중언한 모든 것을 글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말에 졸하다”(고후 11:6)고 하셨지요. 그러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았고, 문장력이 있어서 신약 성경의 약 40%를 기록으로 주셨습니다. 구약의 요나는 잠깐 쓰신 인물입니다. 그러나 니느웨 도성을 살렸고, 신약의 세례 요한도 잠깐 사역한 인물이지만 가장 칭찬스럽고 위대한 사역(메시야 소개)을 남긴 것입니다. 막 5:19을 보시면 예수님이 “가다라”에서 귀신병 중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시고 “네 동리에 가서 네가 어떻게 고친 것을 나타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가 귀신들린 자인 것을 아는 세계에 가서 나타내야 증거의 효력이 있을 것을 아시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오래 쓰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스데반, 야고보, 아나니아 같은 사람은 요긴한 일에 잠깐 쓰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을 보시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핍박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눈 뜨게 된 것을 안식일에 한 일이라고 괴롭히니까 그 부모가 시인하기를 주저하고 “당사자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을 때 그 눈 뜬 본인은 유명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 하면서 자신은 이미 그의 제자인 것을 당당하게 말하였으니 이것도 사명의 일종이고, 또 사마리아에서 물 긷던 여자도 전도자로 변신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 4:28). 복음 사역자가 도덕성 있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교수력과 경력과 기도력과 조직력과 행정력과 처세술이 능하면 다양한 그릇으로 쓰임 받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한두 가지 은사만으로 한두 가지 사건에 일시적으로 쓰임 받는 일이 허다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너무 표현력이 없어서 그 교회는 교인이 적을 줄 알았는데 새벽 기도회에 60명이나 나온 것을 보고 놀랜 일이 있었고, 또 어떤 목사님은 경력이 너무 부족하여 그가 개척 교회를 해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반대였으며 필자는 교회 경력이 40년이나 되는데도 알아주는 교인이 적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쓰시고 유력한 자나 무능자나 하나님이 쓰실 때 능력자가 되는 것이므로 부족해도 무시할 수 없고 유력해도 교만할 수 없는 것이 사명자의 입장임을 확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61과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더라 (눅 8:1~3) 목록으로


“섬기는 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전도하러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필자의 조모님의 세례명임)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홉 교회를 시무해 보았는데 당회 없는 두 교회는 빼고 당회 있는 교회만 일곱 교회를 시무하였습니다. 현재 시무하는 새교회에서는 심방은 안 하기 때문에 모르지만 다른 교회에서 남자나 여자나 심방 전도 대원을 모시고 나갈 때는 그 동행한 성도가 차비나 식사를 대접 안 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동행할 분에게 전화를 하거나 대심방 때 동행 배정이 되면 그 분들은 점심값과 차비를 갖고 나옵니다. 그 대원 중에 장로, 권사, 여집사가 있으면 대부분 “제가 내야죠”하고 장로가 먼저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시간 있는 분들이 동행을 자주 합니다. 자주 동행하면 자주 대접할 기회가 생기는 것인데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교회 성도님들도 앞으로 심방 전도하는 교역자가 오셔서 동행을 부탁할 때는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으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으면 타인에게 신세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눅 6:38을 보시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사랑하고 봉사하면 하나님이 흔들어 넘치도록 자신에게 주신다” 하셨으니까 특별 예산을 세워서라도 그렇게 노력하여 더 많은 것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구제비를 많이 낸 성도를 칭찬하여 말씀하실 때 고전 9:6에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신 말씀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그대로 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아브라함을 보세요. 창세기 18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하여 정오에 장막문 앞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길이 멀고 덥고 피곤하실 터인즉 제 집에 오셔서 씻고 잡수시고 쉬어 가십시오”하면 나그네가 집으로 오겠지요. 그러면 그 아내 사라가 떡 반죽을 하고 하인이 짐승을 잡아 요리를 하여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봉사 하는 일에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그 다음 창 18:18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전에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집안이 번성하여 조카 놋을 분거시킬 때 조카에게 “물질적 터전이 좋은 곳을 먼저 택하라”고 하였지요.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 13:9)하여 아브라함이 그만큼 물질주의를 양보하였지만 아브라함은 건재하였고, 물질주의를 따라간 놋은 소돔의 멸망으로 망하지 않았습니까? 요셉도 자기 형제 열 한 가족에게 기업을 주었으니까 많이 봉사한 인물이지요. 그 대가로 두 몫의 기업을 받았고, 그 큰 아들 므낫세가 받은 기업이 다른 형제 지파의 분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는데 그들은 조상 요셉을 내세워 더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많이 받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김성은씨는 국방 장관을 오래 하고 있었고, 저는 시골 교회에 시무하면서 증경 총회장이신 김상권 목사님의 부흥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김상권 총회장님이 전도사 때 경남 어느 지역에서 김성은씨의 모 교회를 시무하였는데 그 김장관의 모친이 봉사와 대접을 잘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댁에 심방을 가면 가난한 중에서 쌀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대접을 하고는 밖에 나가서 성은이가 학교에서 오는 것을 기다린 답니다. 마침 성은이가 책 보따리를 어깨 매고 배고픈 모습으로 달려오면 그 어머니가 마중 나가서 붙잡고 “집에 전도사님이 오셔서 식사하시니까 다 잡수신 후에 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고픈 아이가 들어 와서 전도사님이 쌀밥 잡수시는 것을 보면 “나도 쌀밥 줘요”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전도사님이 그 밥을 다 못 잡수실 염려가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제가 이 말을 남기려고 이 설교를 준비한 것입니다.) “지금 그 성은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국방 장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을 주십니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제가 그 설교를 듣고 “내가 시골 교회에서 겨우 밥 먹는 것이 우리 할머니 덕이로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할머니도 믿음 갈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면 옥수수, 밤, 빵 대접 하였고, 점심도 한 두 번 하신 줄 압니다. 그런데 감사나 특별 헌금은 늘 푼돈으로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내가 대박 터지지 않는 것은 우리 할머니가 큰 봉사를 못 하셨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목회 중에 가장 큰 봉사를 받은 것은 한남 교회에서 이영합 장로님이 340만원(3개월 봉급)을 드려서 성지 순례를 시켜준 것입니다. 제가 목회 회고록을 쓴 것 중에 그 기록도 있고, 몇일 전에 만나서 그 일에 대하여 또 감사하였습니다. “제가 성지 순례한 덕분에 성경에도 많이 밝아졌고, 사도행전 강론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봉사를 잘 하는 사람들치고 어렵게 사는 분은 하나도 없는 줄 압니다. 앞으로 작은 교회가 커지려면 교역자가 20년을 내다보고 견뎌야 합니다. 20년 동안 목마르지 않도록 교역자를 붙잡는 책임이 교인에게 있습니다. 교역자도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자주 기름을 쳐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62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벧전 4:7~10)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1.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는 자신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밑천이나 재능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각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은총이고, 은사는 종류에 따라 할 수 있는 재능입니다. 롬 12:6에 보시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그 종류를 몇 가지 열거하면) 예언, 봉사,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등)이 있는데 다 믿음의 분수(믿음과 관련된 분량)대로 하라” 하셨고, 고전 12:1~6,11에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님은 같고 직임도 여러 가지나 주님은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하나님은 같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한 성령님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은사는 기도 없이도 받는 것인가?할 때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시는 것이지만 고후 1:11에 보시면 “기도로 얻은 은사도 있다”고 하셨으니까 내가 어떤 은사 활동을 하고 싶을 때 기도할 수도 있고, 그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 되는 일이 하나님이 섭리하실지라도 그것을 받는 과정에서 기도가 없을 수 없고, 또 가르치는 일(설교)을 함에 있어서도 은사로 주시는 바가 있지만 기도와 노력을 통하여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은사(재질), 여러 가지 직임, 또 여러 가지로 역사하게 될 때 이 모두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은 뜻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본문을 상고하면

1)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말세의 관념을 촉박하게 가지라는 뜻, 자신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을 모르기 때문.) 정신을 차리고(마음을 지키는 것임. 잠 23:23, 설교문 참조) 근신하여(자신을 반성하여 살피는 것)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악한 세대에서 특별한 과제를 가지고 잠깐 사는 것임을 아셔서 크게 경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하시므로 사랑에 가책이 없도록 자신을 정비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격됨이고, 세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때를 기다릴 때 할 일은 신앙적 경성과 사랑의 실격을 면하는 일입니다.

3)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인데 이 뜻은 “사랑에 근거한 봉사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봉사를 서로 해야 함은 여러 사람에게 다 해당하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4) 10절에서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신 말씀에서 성도는 각각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적 없이 은사 없이 인간을 내셨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고, 또 은사는 하나님이 각양으로 주신 것인데 왜 주셨는가? 자기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은사를 이용하여 이기주의 목적에만 쓴다면 그것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과 모든 이를 유익하게 하는 목적으로(고전 12:7) 봉사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사의 뜻과 은혜와의 구별과 은사 주시는 분과 은사의 종류와 또 은사를 받는 방법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까지 다양하게 말씀드렸는데

3.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

1) 자신이 받은 은사를 파악하시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나는 무엇을 잘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 사회적인 면에서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인 줄 믿으시고 거기에 충실하여 달음질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2)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를 더 좋게 여겨서 그것을 모방하려고 한다면 부작용이 일어나겠지요. 즉 성령님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또 모방 자체가 어색하고 서툴러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받은 본질의 은사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방은 약간 보충할 것뿐이지 은사 자체를 바꾸려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자신이 받은 은사를 꾸준히 행하면 그것이 한 우물을 파는 격과 같아서 그것으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은사에 한 눈 파는 일이나 욕심을 버리고 할 수 있는 일과 맡은 일에만 충실하셔야 하겠지요.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교역자마다 받은 은사가 다릅니다. 어차피 저와 여러분들이 한 교회 식구로 만났으면 본 교회 교역자가 받아 가르치는 은사의 교훈을 잘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듣고 배우는 보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예배당 앞 정류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더니 순복음 교회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집회에 가는 모양인데 거기서 가르치는 목사님이 받은 은사를 나누어 받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격식을 많이 생략하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여 알맹이만 주워 담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로 자유를 맛보게 하는 사람이고, 성경과의 관계를 직접 맺게 하는 사람이며 독립적 신앙을 확보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생활을 필수적으로 강조하지만 부조리한 부분에까지 동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고, 냉정한 입장에서 “교회 제도의 많은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받은 은사는 대략 그런 것이니까 저와 함께 생활하시는 동안 그런 은사도 잘 배워두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제63과 이사야를 불러 쓰심 (사 6:1~13) 목록으로


어제 이성광 목사님이 이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확신 있는 사람,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 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고 감사한 바도 있지만 나는 강도사 고시 때 이 본문을 받아 설교를 작성하여 제출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어렵게 설교문을 써서 보낸 일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때는 한 마디로 표현하여 본문의 의미가 머릿속에 포괄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본문을 읽으면 전체의 의미가 머리에 구상되고 무엇을 설명해야 한다는 주제도 떠오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선 이사야를 알아야 하고, 그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여야 하며 그리고 보좌에 앉은 분, 스랍과 스랍의 역할, 이사야의 회개와 숫불로 짓는 뜻, 하나님의 소명, 이사야의 응답과 백성의 완악성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어려운 시대에 소명을 받은 이사야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많이 묵상하셔서 성경을 읽으시면 그 말씀에서 “무엇을 배우셔야 한다”는 정도의 감이 떠올라야만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대선지자라 하는 것은 예언서를 많이 기록한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함께 일컫는 말이고, 이사야는 사 1:1에 나타난 대로 유다왕 웃시야(52년 재위), 요담(16년), 아하스(16년), 히스기야(29년) 시대에 사역하였고, 아모스의 아들이란 것 외에는 나타난 글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증언할 뿐 왕족이니 무엇이니 하는 추측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것도 역시 추측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환상 중에 이사야와 대화를 가지셨고, 자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때는 웃시야왕이 죽던 해인데 웃시아왕은 52년간 장기 집권자로 죽을 때는 제사장 직위를 탐하다가(주전 739년경) 문둥병으로 죽었으니 이는 왕의 타락을 보여 주신 것인데 그 당시에는 백성들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알지 못할 만큼 둔한 상태라”(9절) 하셨으니 그 시대가 대단히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분은 누구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뜻은 무엇입니까? 이 분은 예수님이시고(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즉) 제사장의 직임으로 계신 것을 뜻하며 그 옷자락이 가득한 것은 위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스랍”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원문으로 “세라핌” 복수인데 천사의 이름으로 본문에만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의 이름이라면 그룹이나 미가엘, 가브리엘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천사는 얼굴과 발과 여섯 날개가 있는 것으로 예수님 근위에서 예수님의 거룩을 찬양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가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자신을 감추는 겸손이고, 또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태도요(발은 냄새나는 부위를 상징함), 두 날개로는 움직이는데 사용하였으니 그 천사의 겸손한 활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창화(찬송의 웅장함)함을 인하여 문지방이 요동하고 집에 연기가 충만한 것은 영광의 목적이 크게 고조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는 큰 겸손과 경건과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본 이사야는 두려워하였고, 자신의 부정함을 생각하면서 탄식을 한 것입니다. 풍랑이나 태풍을 만나면 두려워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을 생각할 때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기 잡으시는 위엄에 눌려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고,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주여 무엇을 하리잇가?”하여 굴복한 것처럼 이사야는 예수님의 위엄을 보았을 때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럽고 또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죄인인데 거룩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으니 어찌 할고” 하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진실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 때에 스랍 중 하나가 제단으로 가더니 핀 숯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고는 “이것이 네 입에 닿았은즉 네 악이 제하여졌고 또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한 것입니다. 제단은 속죄제를 드리는 기구입니다. 따라서 제단 불을 입술에 댄 것은 중보자의 희생으로 죄사함 받은 사실을 예언적 또는 상징적으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해 주셨고, 이사야가 하나님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즉 십자가의 공로와 믿음을 근거로 죄사함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결론은 이사야가 진리를 알고 회개한 후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삼위일체, 또 천국 백성들)를 위하여 (증거하러) 갈꼬?” 하시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사역자를 쓰시되 기계적으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느끼게 하셔서 자원하는 자를 쓰신다는 뜻입니다. 이 때에 시사야는 “나를 보내소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죄사함 받았은즉 하나님의 쓰심에 헌신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런 절차로 사명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가서 증언하되 이 백성이 완악하여 하나님이 어둡게 하실 것이라”고 증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죄 때문에 민족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망할 것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하나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신다고 할까요?” 한즉 “땅이 황폐하고 백성이 옮길 때인즉 바벨론에게 망하여 머문 시기까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망할 것을 경고하라” 하셨으니 그 경고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증거하고 망하나 안 증거하고 망하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는 질문이 생략된 것 같지요. 이 때에 하나님이 “9/10도 망하고 나머지 1/10도 망하겠지만 그래도 밤나무, 상수리나무의 그루터기처럼 거룩한 씨가 조금은 남을 것인즉 그들을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증거는 망할 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씨 또는 소수의 회개할 자를 위하여 증거의 사역자를 쓰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소수라도 깨닫고 회개할 자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64과 의인의 간구 (약 5:16~18) 목록으로


“의인의 간구”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의 의인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신 말씀을 보니까 성도로서 회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죄사함 받은 자 또 성결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정죄에서 해방된 자라도 자신의 거룩을 훼손하는 죄를 범할 수 있는데 이것까지 회개하면 또 용서를 받고 의인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병으로 징계하실 수 있고(고전 11:30, 계 2:22), 그가 회개하고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을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을 예증으로 엘리야의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지만 그가 의로운 중에 기도한즉 3년 6월 비가 오지 않았고(왕상 17:1, 18:1), 다시 기도한즉 비를 주셨다(왕상 18:42~4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즉(요 9:31) 의인의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잠 21:20).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한 이유는 모세와 예수님과 바울 사도가 의인의 입장에서 무슨 소원과 간구를 하셨는가를 살피고 저희들이 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좀 더 신령하게 세련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모세의 기도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었습니다.

1) 모세가 선민의 지도자가 되어 출애굽 하였을 때 백성들이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울며 항의할 때 민 11:14~15을 보시면 “차라리 나를 죽여 이 곤고를 보지 않게 해 달라” 하셨으니 이는 백성들의 필요한 조건을 채워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곤고를 해결해 달라”는 지도자로서의 기도였던 것이요,

2)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를 거두어 주시라”는 기도였으니 출 32:1~14, 신 9:25에 보시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올 무렵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을 때 그 진노에서 용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중보 기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000명 가량만 죽고 진멸을 면한 일이 있었고,

3) 그 다음에는 민 27:16~16에서 후계자를 구하여 자신의 직임을 인계하기 위한 기도를 하였으니 모세는 명실 공히 사명을 위한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사명이 있다면 전도, 봉사일 것인즉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할 때

1) 눅 12:49에 보시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므로 제자들이 성령 충만할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신앙의 자립을 뜻합니다. 결국은 이 소원이 오순절 때에 응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희들도 성령 충만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신 줄 압니다. 요 17:17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죄사함과(마 18:21) 죄 용서 하시는 주기도문과(마 6:12) 베드로의 타락 방지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눅 22:32)을 보면 성도의 거룩한 생활 또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시는 기도를 많이 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3) 마지막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인데 이 기도는 중보자로서의 구원 사명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마 26:39) 그리고 “자기가 맡은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구원 받게 해 달라”는 중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요 17:9~10). 여기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성령 충만과 거룩과 구원 사명을 위한 기도를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또 한 가지 첨부한다면 평안을 위한 간구입니다. 제자들에게도 “평안을 빌라”하신 일이 있었고(마 10:12), 예수님도 평안을 축복하신 일이 두 번이나 나타납니다(요 14:27, 20:21). 따라서 예수님은 성도의 편안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간구입니다. 바울 사도의 정신은 하나님 영광이고(롬 11:36, 고전 10:31), 이방인 구원하는 일이 사명이지만(갈 2:8) 유대인 구원도 힘썼으며(롬 9:3)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히 모시기 위하여 노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11:7~8, 빌 1:20). 그리고 간단하지만 바울 사도의 종합적 기도는 엡 1:16~19과 3:14~19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셨는가? 하면 ①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셨고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십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곧 성경으로 깨닫는 총명을 뜻합니다. 성경으로 깨달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마음눈이 밝아집니다. 마음눈이 밝아지면 생각이 건전해지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로 받는 소망과 하늘의 기업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의 정신을 주십사”하고 구한 것입니다. ② 그 다음에 엡 3:14~19을 보시면 “성도들이 속사람으로 강건케 되기를 기도” 하셨는데 이 속사람이란 것은 마음이 소성되고 견고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정신적 축복입니다. 성도의 정신이 영특해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③ “믿음으로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 하셨는데 이 뜻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신 기도요, ④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서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 하셨으니 이 뜻은 사랑 실천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환경 따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굳게 다져지기를 기도하신 것이요, ⑤ 그 다음에는 “모든 성도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그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많이 연구하여 깨닫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을수록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⑥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뜻은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엡 5:18).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가 강조하신 기도는 계시의 정신, 사랑의 견고함,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 그리고 성령 충만해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65과 어려운 시대의 선지자 (왕상 17:1~16) 목록으로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어려운 시대의 선지자”란 제목으로 증거하려고 합니다.

1.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아합왕과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가 나옵니다. 아합왕은 북왕국 7대왕으로 주전 874년~852년 까지 사마리아 수도에서(왕하 16:29) 22년을 다스린 왕이요, 이 본문에 나타난 지명으로는 길르앗과 디셉과 요단 앞 그릿 시내와 시돈에 속한 사르밧 입니다. 이 지역에 대하여 대략 살피셔야 합니다. “길르앗”은 길르앗산도 있고 “길르앗라못”도 있지만 여기서는 넓은 지역(도)을 의미합니다. 그 지역은 요단강 중앙부 동편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 지역 안에 디셉(엘리야의 본적)도 있고, 그릿 시내란 강도 있으며 이 지역은 요단 동편 므낫세 지파 기업의 남부에 속합니다. 거기에서 사마리아성은 서쪽으로 50㎞쯤 되고, 얍복강은 남쪽으로 10㎞쯤 됩니다. 성경을 살피실 때 시대와 장소를 배우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2. 문제는 어려운 시대란 점입니다. 선민을 다스리는 왕이 이방나라인 두로왕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이하여 이방 종교인 바알신 섬길 것을 권장하여 나라가 온통 이방 종교로 뒤집힌 상황이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니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신 29:23~26에 보시면 “선민이 출애굽한 사실을 잊고 다른 신을 섬겨 절하면 하나님이 극렬하게 진노하여 소돔 고무라처럼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합왕 시대가 바로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진노가 없겠습니까?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자기의 사역자로 쓰셨고, “엘리야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를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비를 갈망하는 백성들에게도 퍼졌고, 아합왕에게도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비오도록 구하지 않으니까 그를 나라의 원수라 하여 잡으러 다녔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바알을 파하거나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야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알 선지자들과 아합왕이나 이세벨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엘리야는 아합의 원수이며 왕이 빗나가면 그 백성이 고역에 처하고 그보다 더 불행한 것은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하는 선지자가 큰 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그 때에 많은 선지자들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왕상 19:14). 하나님의 뜻대로 3년 6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은즉 그 기근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3.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특별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만일 엘리야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바른 말을 감추거나 곧은 길을 걷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붙들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고 신분의 위험을 느끼게 되자 하나님은 피난처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는 것이었고, 까마귀로 먹을 것(떡과 고기)을 전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은즉 까마귀가 조석으로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고, 물은 시냇물이 마르지 않은 때라 그것을 마셨는데 얼마 후에는 그것도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광야의 만나 이적이나 그릿 시냇가의 이적의 성격은 다 불가피할 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물은 있었기 때문에 안 주셨으며(로뎀 나무 밑에 있을 때는 떡과 물을 다 주셨음. 왕상 19:6) 만나도 농작물을 먹게 되자 그쳤습니다(수 5:12). 그러나 물이 떨어지니까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인도하여 유하게 하셨고, 또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공궤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나러 갔는데 성문에 이르자 쉽게 만났습니다. 쉽게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창 24:12). 그래서 먼저 물을 조금 구한즉 순종하고 가지러 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지만 주저하지 않고 공궤하려고 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가는 여인을 다시 불러서 “떡 한 조각도 가져오라”한즉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구워 아들과 함께 먹은 다음 (굶어)죽으려고 나무를 주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엘리야가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작은 떡 하나를 먼저 구워 나를 주고 그 다음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리하면 비를 지면에 내릴 때까지 너의 집에 양식이 다하지 않으리라”한즉 그대로 시행하여 이적을 체험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역을 끝마치기까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심에 있어서 선지자도 쓰시고 과부도 쓰시며 까마귀도 쓰시고 기상도 이용하시며 기적은 반드시 필요할 때만 성도의 순종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 싶어도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루 식사는 두 끼가 적당한 듯합니다(까마귀도 조석으로, 만나도 조석으로 주심). 저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주시는 것을 자주 체험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에 근거하여 복음 사역자를 섬기고 복 받는 사례를 봅니다. 사렙다 과부가 어차피 먹고 죽을 바엔 조금 큰 떡을 먹고 죽으나 작은 떡을 먹고 죽으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봉사를 한 것인데 그것은 큰 떡, 작은 떡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의 마지막 특권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굶어 죽기를 각오한 정신을 꼭 본받으십시오. 저는 굶어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최O준 목사님이고(금식 기도로 별세), 또 한 사람은 이O진 권사님의 모친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100일 단식했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죽기를 각오할 때 기적도 있고 방책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혹 성도가 어려운 질병으로 세상 떠날 때 다른 사람에게 큰 부담을 줄 바에는 단식(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과부의 신앙도 귀하고 엘리야도 귀한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66과 선한 싸움 (딤후 4:7~8) 목록으로


바울 사도가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의의 면류관이 예배되었고, 이 면류관은 “주님의 재림과 상급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예비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의의 면류관을 받도록 힘쓰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있는데 가시 면류관이 있고(마 27:29), 시들지 않는 면류관도 있으며(계 4:4, 벧전 5:4) 사랑의 공로로 받는 사랑의 면류관이 있고(살전 2:9), 생명처럼 귀한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12:10), 영광을 나타낸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사탄도 영광을 좋아하여 열 면류관, 일곱 면류관을 쓴 사실이 있고(계 12:3, 13:1), 예수님도 열 두 별의 면류관과 많은 면류관을 쓰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계 12:1, 19:12). 그중의 의의 면류관은 의롭게 산 자에게 주시는 좋은 상급입니다. 상급도 중요하지만 상급을 받게 하는 선한 싸움이 더 중요합니다. 무엇이 선한 싸움입니까? 바울 사도의 생애로 말한다면 핍박 중에 선교하고 순교하면서 믿음 지킨 것이고, 자기의 달려갈 길(자기가 맡은 사명 또는 자기의 십자가 지는 사명)을 다 달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한 싸움을 승리하신 분인데 40일 금식을 이기셨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으며 각종 핍박을 이기셨고, 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시고(요 16:33) 다 이루신 의미는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시며 믿음과 사랑에 실패하시지 않고 죄(사탄)와 싸워 이기시고 복종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한 싸움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어떤 경우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믿음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군인이 죽음을 각오하는 것처럼 믿음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상의 핍박은 없습니다.

2. 싸움의 대적은 죄와 마귀일 뿐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일 뿐 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와 빌라도를 미워하고 죽이실 수 있지만 미움으로 대항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진리를 붙잡고 진리를 따르며 진리를 증거 하면 되는 것이지 진리 반대자나 다른 종교인들을 미워하거나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자 앞에서도 “진리는 이것이다”하면 됩니다. 이렇게 진리가 비진리인들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시는 능력이 있으시고(히 1:11, 벧전 1:25),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되 그 목적 성취에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엡 1:4, 요 17:9, 사 41:9) 다시 말하면 구원 사역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 지키는 일에 대하여 이단자나 이방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라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 실천에 힘쓰면서 자기의 믿음을 지키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전파 때문에 어떤 핍박을 받아도 그 핍박 대상을 사랑하면서 믿음 지키는 것이 선한 싸움이요,

3. 세상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눅 4:6과 욥 1 :7에서 세상은 마귀의 판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 하셨으니(요 16:33) 성도의 세상과의 싸움이 곧 선한 싸움입니다.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1) 세상을 사랑하지 마셔야 하고(요일 2:5),

2)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하며(약 1:27)

3) 마귀를 대적하여(약 4:7) 이겨야 합니다. 어떤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까? 죄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일반인처럼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었다”(히 4:15) 하신 것처럼 모든 유혹을 떨치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에도 물질의 유혹과 명예의 유혹과 현세욕의 유혹을 이기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또 핍박을 이기시면서 믿음과 사랑의 자세를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귀를 따돌리며 세상을 이기고 있는지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자기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렸다” 하셨고, 예수님도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지키며 죄의 유혹을 떨쳤더라도 자기의 십자가, 자기의 사명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싸움의 완성이 아닌 것입니다. 열매를 따려고 나무에 오르는 것처럼 자신이 받은 사명을 달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하셨으니까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감당하셔야 하고, 다음에 주님을 따르는 사명도 감당하셔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신의 생활 문제, 사회 문제, 일반적 사명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 영광에 관한 것과 복음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며 정치에 대한 변론도 잘 하는데 자기의 가족을 굶긴다면 그는 자기 십자가 지는 선한 싸움을 안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자립하는 선한 싸움을 먼저 싸우고 그 다음에 복음적 사명에 헌신하여야 선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이나 질병과 싸우는 것은 자기 십자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 사역처럼 수고하는 것이 선한 싸움이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싸움입니다. 성도가 이런 싸움을 싸우려면 누구를 미워할 겨를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할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악인을 대적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오직 마귀를 대적하고 비진리를 대적하는 것인데 진리는 절대적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진리만 내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참이기 때문에 죽어도 믿는다”, “진리는 사랑의 승리자이다” 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면서 복음적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성도의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제67과 내 상이 무엇이냐 (고전 9:18~23)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하심으로써 바울 사도 자신이 “상 받을 만한 근거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바울 사도는 평신도의 입장이 아니고 사명 일선에 선 복음 사역자의 입장이란 것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사명자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일반 성도들도 자기 특권을 많이 포기하면서 주님을 위한 고난과 헌신성이 많을 때 내세의 상이 더 크다는 사실은 꼭같이 적용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가 하늘의 상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상 받을 일을 적게 하고 평신도들에게만 강조한다면 잘 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같이 상 받을 일에 주력하고 거기에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하겠지요. 여러분들은 상 받을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바울 사도의 상 받을 일 첫째는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요즈음으로 말하면 자신이 돈을 벌어 생활하고 자신의 비용을 들여 선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선교를 떠났지만 그 당시에 보급품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시면 자비량이란 말씀이 있고(고전 9:7), “업이 같다”는 말씀이 있으며(행 18:3)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모본을 보였다”(행 20:34) 하셨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셨은즉 자립적 선교를 많이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단신 또는 가족을 초월한 상태에서 사명자가 되셨기 때문에 생활비로 인한 짐이 그만큼 가벼웠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보수를 받는 사역을 부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일하는 소에게 말을 씌우지 말라, 신령한 것을 뿌린 자가 육신의 것을 거둠은 과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전 9:9,11,1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경우에 복음 사역자는 교회가 합법적으로 (정당한 시무) 자원하는 생활비를 받을지언정 배척 받는 상태에서 오래 끌거나 교회를 헤치는 식의 잘못을 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값없이 또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데 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행사할 권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하고, 분명히 그 권리를 쓰지 않으므로 타인이나 하나님께는 유익이 되나 자신에게는 희생이나 고난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에게는 징계권이 있습니다(마 16:19). 또 책망도 할 수 있고(딛 2:15), 또 한 번 책망하면 무서운 벌을 당하기도 합니다(행 5:1~6). 복음 사역자가 권징권을 발동하면 상당하게 편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에 위배된 죄를 다 벌한다고 가상할 때 사랑이 부족하여 괴롭히는 대상을 다 쫓아 낼 수 있으니 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권을 다 쓰지 않으면 자신은 괴롭고 상대방은 위로를 받겠지요. 복음 사역자에게는 여러 가지 권세가 있습니다. 말씀 증거할 권이 있고(단상 설교), 성례권이 있으며 축복권도 있고(말씀 선포와 함께), 직분 임명권도 있으며(딤후 2:2) 교회 대표권도 있고, 헌금 징수권도 있으며(몬 8) 가족 동반권이 있고(고전 9:5), 다른 사람처럼 먹고 마실 권도 있으며(고전 9:4) 보수를 요구할 권리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전 9:6~7에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는 일(사업)을 하면서 선교를 하셨는데 “자신들이 보수 받을 권리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를 심은 자가 그 포도를 먹고 양을 키운 자가 그 양의 젖을 먹는 것처럼 자신들도 복음 사역의 보수를 받을 수 있으나 그 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나 치리회가 권위를 남발하면 교인이나 교회가 손해를 보고 치리자는 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바울 사도는 이기주의를 차리지 않으므로 자기의 권을 다 쓰지 않은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상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권위를 앞세우거나 법으로 이기주의를 선호하는 사역자들이 있다면 크게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도나 복음 사역자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인권을 가진 것이 아니지요. 다 평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대상을 만나 전도를 하려면 전도 목적으로는 만나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봉사자 또는 종처럼 되어 주는 것입니다. 바쁠 때 자기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누가 배척하겠습니까? 시골에서 어떤 전도사 부인이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 가서 모내기를 도와주면서 전도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 계획상 그 집의 종이 되어 준 것입니다. 종은 겸손의 상징입니다. 누구나 겸손하고 봉사적이면 배척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을 이용하여 전도를 하려니까 자신의 인권이나 자존심을 내던지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인이 원시인들에게 접근하려니까 같이 놀아주지 않다가 “그 백인이 자기의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원시인처럼 차리고 나서니까 동화되어 주더라”는 말처럼 바울 사도도 자기의 생활 취미나 문화를 떠나서 자신은 복음 주의자이지만 복음을 모르는 유대인과 같이 생활하였고, 또 율법주의자들과도 동화되었으며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도 동화되었고, 약한 자들과도 같이 생활하므로 그들의 종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친교하고 깨우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희생입니다. 사상과 생활 문화가 맞지 않는 사람들과 동화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바울은 그런 대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권과 생활 특권을 포기하고 종처럼 낮은 입장을 취하였으니 “그런 일들로써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핍박 받은 일이나(고후 11:23~30) 생명을 돌아보지 않은 일(행 20:24)이나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다한 일(딤후 4:7~8)도 역시 큰 상급 거리가 될 줄로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비량 사역, 특권을 다 쓰지 않은 일, 또 모든 사람들 앞에 종처럼 겸손해진 일로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1. 개혁의 과제들

제68과 개혁의 필요성 (마 23:37~39) 목록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말씀을 구상하였습니다. 성경에 “개혁”이란 용어가 히 9:10에 한 번 나옵니다. 그 용어의 뜻은 구약 시대에는 율법에 입각한 신앙 행위가 있었으나 십자가 이후에는 예수님 모범에 따른 복음적 신앙생활로 바꾸어져야 할 것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부터는 구약 시대에 있었던 제사 제도가 폐지되었고, 율법 시행도 의식주의에서 목적 지향주의(사랑)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개혁의 원조이십니다. 본문 말씀과 이 설교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시겠지요. 23장 전체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개혁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일곱 번이나 “화있을진져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하시고, 그들의 죄악과 비개혁성을 책망하셨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며 탄식하신 말씀이 본문이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개혁자이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하게 된 동기는 기독 신문을 보는 중에(2005. 3. 21.) 장달윤 목사님의 개혁을 필요로 하는 글을 보았는데 거기에 보면 1908년에 “프레드릭 메킨지”란 영국 기자가 “조선은 개혁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였는데 결국은 개혁을 못하여 망했다 하였고, 1905년 1월에는 러시아 쨔르 황제가 노동자들의 개혁 요구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므로 왕실은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탄생하였으며 한국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조광조, 김옥균, 김구 같은 분들을 다 죽이면서 개혁을 거부하다가 일본의 지배를 받고 나라를 망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교회도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천주교가 속죄권 발매 운동으로 부패가 절정에 닿았을 때 개신교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서 지금까지 오는 중에 전통을 개혁하지 못하는 천주교도 문제이고, 개신교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옷을 입으신 일이 없으셨는데도 요즈음 구교, 신교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이 이상한 단장을 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교회에 가면 좋은 설교, 좋은 찬양, 옷 잘 입은 사람, 정치가, 학자들, 자동차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데 왜 부패했다고 하느냐? 하시겠지요. 그것은 신앙의 원리를 모르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장달윤 목사님의 개신교에 대한 한 가지 지적은 목사의 종신직에 대하여 신임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물은 흐르는 물이 깨끗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장기 목회를 선호 할 이유도 있지만 부정적 사유도 많기 때문에 가끔 신임 투표를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기독 신문 2005. 3. 28. 자에 “만평 만화”가 실렸는데 “예수님 다시 부활 하셔라” 하고 땅 속에 불법, 비리, 도덕성, 파업, 대형화, 폭력, 황금만능, 분열, 세습, 세속화, 타락, 형식, 대립, 권위주의, 사치, 기복신앙(16종)을 기록해놓고, 개구리가 못 견뎌서 뛰쳐나오는 그림과 작은 식물의 싹이 나오는 그림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가라앉은 부패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활 부활”하니까 답답하다는 것이지요. 같은 신문에서 임종권(편집 국장)씨의 글을 보면 “부활절은 없다”는 제하에서 부활절 연합 예배의 각종 비리를 다 적어 놓았습니다. 교파 갈등, 주도권 싸움, 설교자 되는 경쟁, 개교회 이기주의(헌금) 등의 부조리를 적어놓고, 이런 상황에서 무슨 “부활절이 있다”고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죄에 대한 실상을 잘 기록하신 곳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롬 1:29~32입니다. 보세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불효,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한 자라” 하셨고, “또 그런 자를 옳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딤후 3:1~5을 보시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 사랑, 돈 사랑 하며 자긍, 교만, 훼방하며 감사, 거룩하지 않으며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고 자고하며 쾌락 사랑을 하나님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또 계 22:11을 보시면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줄 것이라”(12절) 하시므로 말세까지 악이 근절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중에서 의로운 자는 “자신의 의와 거룩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남이야 어찌하든지 나 스스로의 거룩을 이루어 가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단체입니다. 교회가 정결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정결치 못한 것이 많으니까 개혁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고, 자기 방법이 옳다고 하면서 예수님 모습이 아닌데도 꿈쩍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혁하기 힘듭니다. 누가 김OO의 정권을 꺾겠습니까? 천재지변 같은 이적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사람마다 생명의 수한이 있으니까 기다리면 다 없어집니다. 그때를 기다리면서 지금부터 개혁의 씨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소리 중에는 개혁의 소리가 없습니다. 큰 교회 목사가 외쳐야 되는데 대형 교회 주의가 개혁의 대상이기 때문에 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혁의 소리나 진리의 외침은 세미한 소리 속에만 있습니다(왕상 19:21). 다시 말하여 개혁의 의지와 사명은 있으나 힘이 약한 사람들은(개혁의 대상을 상대하지 말고) 자기 혼자 개혁의 씨를 심고 서서히 싹을 내면 하나님이 그것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출발이 중요하고 변화된 지도자와 새로운 교회 헌법이 생겨져야 한다는 것을 저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69과 교회 생활의 부자유 (요 8:32) 목록으로


여러분 교회 생활의 부자유를 느껴 보셨습니까? 초신자나 은혜를 받는 시기에 있는 성도들은 잘 못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 뜻의 진의를 파악 못하거나 자신이 은혜 받는 일에만 주력하다 보면 기쁨과 만족만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상당 기간 하다보면 교회 정치도 비판하게 되고 성경적 생활도 두드려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이것이 성경적인가? 또는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상당 부분 교회 생활의 부자유가 있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진리는 자유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진리를 안다”는 뜻은 예수님과 성경을 잘 알고 주님 뜻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자유를 누리게 되는데 이 자유는 주 안에서의 자유이므로 자기 욕구 충족의 자유가 아니고, 주님의 뜻과 계명을 기쁨으로 수행하는 생활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는 예수님의 종인데 종이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생활을 즐거움과 보람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은 자기의 뜻이 곧 주인의 뜻이므로 주인의 뜻에 복종하면서 만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의 뜻에 합당하게 복종하므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를 신앙생활의 교육장 또는 안식처로 주신 것인데 이 교육장과 안식처가 인간의 이기적 수단에 의하여 잘못 되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교회 생활을 영적 축복이나 사랑 실천에 역행하도록 지도하기도 하고, 교회의 생활을 인간적 이기주의 사업으로 끌어드리기도 하며 때로는 성경을 왜곡하여 진리를 벗어나는 잘못된 생활로 유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잘못된 결과가 개인적 명예와 인기주의, 물질적 사업주의 ,전통 고수 주의 또는 지나친 개방, 성직자의 중보자 또는 정치적 권위주의가 교회 안이나 교단 내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만 높여야 하는데 어떤 성직자가 교황처럼 높여졌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거기에 열광하거나 손뼉 칠 수 없겠지요. 또 교회가 영적 축복(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도록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사회적 사업을 앞세운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바꾸는 것처럼 되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를 물질 사업으로 일으키려 하지 않습니까? 물질주의를 떠나서 믿음이 성장해야 하는데 떡 얻어먹는 맛에 교회에 출석하는 경향을 장려하고 있다면 역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물질이 아무리 좋아도 신앙은 진리에서 싹이 나야 합니다. 만일 사랑에서 신앙의 싹이 났다면 그것은 도덕적 신앙에 불과할 것입니다. 좋은 전통이라도 시대에 따라 일그러질 수 있습니다. 차량이 없을 때는 5리 이상을 금했지만(행 1:2) 차량이 있으므로 그 거리가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상황의 변화가 많은데도 전통이 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외식이나 사치, 교회적 이기주의, 성직자의 부도덕한 일들이 있는 상태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란 대단히 힘들 줄 압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 강조나 독촉을 받았다고 할 때 또는 새벽기도회를 의무적으로 강조했다고 할 때 이것을 자의적 충동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성도는 교회 생활에 상당한 부자유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이 한 교회에서 장기 목회를 하는 것은 퍽 힘든 일입니다. 교인들이 새로운 것과 발전을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힘듭니다. 그래서 원로 목사라는 상급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장로님의 말을 들은즉 “목사를 오래 모시는 교인들이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새로운 맛이 없거나 부도덕한 목사의 설교를 길게 듣고 또는 책망을 듣고 “아멘” 하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수십 년씩 시행하고 기다려야 하니 그런 상황을 연단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바로 교회 생활의 부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런 부자유를 해소하려면 교인들이 마음대로 교회를 선택하도록 자기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 죄지으러 나가거나(상대를 불신임하니까) 부자유 하러 나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교역자는 3년에 한 번이라도 신임 투표를 하여 반대하는 교인을 상대로 목회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야만 교인들의 부자유를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과 교역자의 불신임 관계를 몇 년씩 끌고 가는 상태는 교회 생활의 부자유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역자는 자기와 신뢰 관계에 있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목회를 하여야 하고, 교인들도 어느 교회 기본 교인이라는 명분과 전통을 떠나서 성경적 입지와 근접한 교역자나 교회를 찾아 생활을 하여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진리대로 살고 부담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부담이 있다면 이를 자기의 책임으로 해석해야 하고, 상당한 책임은 자원함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교역자)와 코드를 잘 맞추셔야 하고, 다양한 적응력을 가질수록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없어졌으면 좋겠으며 사치나 허례허식 같은 전통도 사라졌으면 좋겠고, 또 사회가 해야 할 사회사업을 지나치게 선호하지 말고 (그것은 사회의 몫이니까 사회에 맡김) 적당하게 구제하면서 영적 믿음에 주력하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압축시키는데 주력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 노회나 총회는 물질 봉투 나누는 일을 없애야 하고, 공의만 일삼아야 하며 최소한의 행정 경비만 쓰고 물질 부스러기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려는 추세가 일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급비 사업이나 납골당 사업 같은 것도 교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인 만큼 하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돈은 사회에서 벌고 교단이나 교회 안에서는 일체 하지 말아야 하며 교회를 오직 신령한 믿음의 전당으로만 만들 때 교회적 부자유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70과 교인의 자유 (갈 5: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인의 자유”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인의 자유”를 가르치는 설교를 들어 보셨습니까? 장로교 헌법 원리 2조에 “교회의 자유”란 항목이 있습니다. 그 뜻은 교회가 개교회 또는 단체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교리나 정치와 생활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취지 하에서 교회 헌법과 지교회 규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영적, 신앙적 은혜가 핍절한데도 자유롭게 은혜를 추구할 수 없도록 속박하는 경우가 있어서 은혜 추구를 위한 교인의 자유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의 의미는 율법에서 해방되는 자유이기도 하지만 양심의 자유와 영적 자유는 누릴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헌금을 강요해도 적당하게 할 자유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적 자유란 성도가 자기 방법대로 은혜를 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 기쁨(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족하는 것)이 부족한데 교회나 교역자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하면서 “나를 떠나지 말아라”하는 것은 성도의 영적 자유를 속박하거나 괴롭게 하는 것인즉 그리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교회에 나왔고, 복음 사역자를 만났는데 왜 영적 자유가 부족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산부인과에 갈 사람이 비뇨기과에 간 것처럼 자신의 은사적 특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신자는 은사의 특징이 없지만 경험을 가진 성도 중에는 은사적 고유 특징을 가진 자가 있는데 이들이 교역자의 기본 신앙에 적응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가르치는 사람이나 교회가 다양한 은사의 교사를 두고 등급에 따라 또는 적성에 따라 가르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팔방미인처럼 활동하는 사역자가 교인을 많이 확보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데(고전 12:11) 다 똑같이 주시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2:29~30). 그러니까 복음 사역자마다 은사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신앙 수준도 다르고 또 은사 받은 특징이 다릅니다. 신앙 수준이 다른 것은 고전 3:1에서 젖 먹는 어린이와 육신에 속한 자를 “초보자 또는 미성숙인”으로 말씀하셨고, 성숙한 자를 “신령한 자라” 하셨으며 또 히 5:14에서 젖 먹는 자는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자요, 장성한 자는 “연단도 받았고 지각으로 선악을 분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 깨달음이 부족하면 미성숙한 상태이고, 말씀을 민감하게 깨닫고 선악을 분변하여 시행하는 사람은 장성한 자에 해당하는 것인데 장성한 사람이 죽을 먹을 수 없고, 미숙한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까 다양한 메뉴가 없는 교회에서는 성도가 자기 적성에 맞지 않으므로 영적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과자나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청소년쯤 되면 핸드폰이나 용돈을 좋아합니다. 또 성인이 되면 결혼이나 집이나 자동차를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신앙이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를 닮으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 즉 잘 먹고 잘 살고 명예로운 것까지 다 싫어집니다. 세례 요한처럼 세상 영광을 등지고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은사의 차이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성숙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만족이 핍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까지 영적 은혜의 공급을 못 받는 곳에 머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증경 총회장님께 교인을 어떻게 모으셨습니까? 물은즉 “나는 들어온 교인이 나를 떠난다 하면 무조건 심방 가서 운다 그러면 못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인정으로 속박하는 것인데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영적 만족을 못 느껴서 나가려는 교인을 붙들어 그 영혼을 괴롭게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문을 막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마 23:13). 그러니까 교역자는 어떤 성도가 자기의 교훈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적응될 만한 교회로 간다고 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허락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은 은혜를 추구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입장에서 주의하셔야 할 것은 자신이 감동을 적게 받거나 깨달음이 적다 하여 가르치는 교역자를 과소평가(은혜가 없다, 영력이 없다는 식)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사가 다르고 사역의 몫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즈음 신명기 3장을 살피고 있습니다. 연구를 순서대로 하려면 지도 공부부터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었습니다(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구했지만). 그래서 그 이유를 연구하여야 합니다. 또 므낫세 지파에게 기업을 줄 때 왜 반(半) 지파로 나누어 주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연구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르칠 때 지도를 보고 성경에 줄을 치면서 흥미 느낄 교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런 방식으로 연구하면서 즐기는 성도와 궁합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는 은사가 좋다고 찾아오는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하고 마주 앉아서 성경 연구에 맛을 들인 목사님 몇 분이 계십니다. 시간 되면 정확하게 모여서 연구하고 감탄하며 즐거워하고 만족합니다. 그 분들과는 궁합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을 많이 모으도록 목회를 하시지 왜 연구에만 몰두하느냐? 하시겠지요. 쉽게 대답하자면 그 일이 싱겁기 때문입니다. 호박꽃 속에서 꿀을 먹는 벌은 사람이 와도 모릅니다. 말씀 연구하고 연구한 말씀을 기록하는데 “심방 갑시다”하면 그것이 싱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심방 가면 대접도 받지요. 심방이나 일반적 목회는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연구하는 은사에서 떠나기 싫으니까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예수님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하시고 칭찬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눅 10:42). 성경은 성령님이 감동하여 기록하신 진리입니다. 성도가 성경을 떠나서 신앙을 확립할 수 없고, 또 성경을 떠나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가까이 하고 연구하는데는 성령 충만의 붙드심이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의 결과는 같은 것입니다(엡 4:18~19, 골 3:16).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을 영적 인물이 아닌 지적 인물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지적 인물은 성경 아닌 세상 지식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사람이고, 성경을 진리로 믿고 연구하는 사람은 무조건 성령 충만에 이끌린 사람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님만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말한다”고 하셨지요(고전 2:10).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은사가 가장 고상한 은사에 속한다는 것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행 17:11에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뵈레아 교회 성도를 신사적이라”고 칭찬하신 것이 그런 뜻입니다. 성경 연구하는 은사가 좋은 것인데도 적응을 못할 때는 은사 일치하는 환경을 찾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은 네 가지 자유를 지혜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자유인가? 하면 ① 교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좋은 교파를 선택하셔야지요. 무조건 십자가만 보고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우리나라에 장로교회 교파가 150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의 교파 선택은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② 교회 선택입니다. 대부분 교회 선택은 목사님 설교 들어 보고 하니까 목사 선택과 거의 같습니다. 제가 성경 연구형의 지적 목사라도 저를 선택한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대구의 윤O재 장로님은 통합측에서 은퇴 장로로 나오신 후 7 교회를 다녀 보시고 나를 택한 분이었고, 한남 교회의 어떤 여성도는 6개월 동안 등록을 안 하기로 이유를 믈은즉 “여러 교회 다녀 보고 온다”는 것입니다. 상대원에 사는 분이 중동으로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왜 등록을 늦게 하느냐?”고 물은즉 자기의 영혼을 맡기는 일인데 어찌 살피지 않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살핀 후에 등록하였다가 의정부 쪽으로 이사 갔습니다. 대구 남일 교회 함승만 장로님은 일부러 저를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설교체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하고 궁합 맞는 사람도 있기는 있구나”하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목사 선택이 중요한데 그 자유가 성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 위안을 줄 수 있는 목사님이 부산에 계시다면 그 쪽으로 이사를 갈 만큼 중요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목사는 좋은데 교회는 나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나쁘면 목사가 좋아도 좋게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③ 봉사의 자유가 있습니다. 많이 할 자유도 있고 적당하게 할 자유도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에게 은혜 추구하는 자유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 세계는 너무 혼탁해서 좋고 나쁜 것 가리기가 너무 힘듭니다. 어떤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면 좋겠다 하여 따라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는 사람, 3년 만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잘 몰라서 그렇고 또 자신이 연약해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예수님만 표준 하셔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연합회 임원이 목사인데 학력을 속였다고 하여 언론에서 두드려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진실을 말하고 사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만큼 부패하고 거짓이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학력을 속였다가 징역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목사는 자기의 학력을 속였어도 징역을 안 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그만큼 거짓을 용납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성도가 자유 누리는 것은 좋은데 잘못 살피고 선택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성도님들이 은혜 추구하는 선택을 잘 하여 자유도 누리시고 기쁨도 맛보시며 만족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교회나 성직자가 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의 성격을 낮은데서 높은 데로 또 단순함에서 다양성 있게 향상시키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1과 목회와 가족 (고전 9:5~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목회와 가족”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나서다가 처자식을 돌려보낸 사실이 있고(출 4:20~26, 18:2, 시내 광야까지 왔을 때 다시 옴), 신약 성경에서 대표적 인물인 세례 요한, 예수님, 바울 사도가 단신 사역을 하였으며 본문에 보시면 바울과 그 일행이 역시 단독 사역을 하였는데 그 때에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는 아내를 동반하였다” 하였고, 바울 사도 일행도 그렇게 할 권한이 있지만 “사명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일선에 선 사역자들이 생활비나 대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근거로서 포도를 재배한 자가 그 열매를 먹고 양을 치는 자가 그 젖을 먹으며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울 수 없고, 성전의 일을 하는 자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처럼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복음의 영적 축복은 귀한 것인 만큼 육신의 것(물질적 사례)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과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 일행은 단신 사역에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사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행할 때 단신 자비량으로 시행한 것이고, 내외가 다 사명자이니까 내외가 동반하여 생활비를 받고 시행한 사실이 본문 5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부부가 사명자이면 분명히 자녀들도 있을 것인데 성경에 누가 그의 가족을 어떤 방법으로 부양하였다는 말씀은 없으나 부부 동반 사역자는 가족 부양을 한 것이 사실인데 전체를 교회적으로 부양 받게 하는 경우와 축적된 재산이나 다른 방법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진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는(눅 5:11) 그 가족 부양을 기본 직업에 의하여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 전도 사역으로 자주 유동할 때는 가족 동반이 번거롭겠지만 목회 사역으로 정착하는 경우에는 가족이 있음으로써 크게 유익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교회가 재정이 넉넉하고 교역자가 실력이 풍부하여 목회도 잘 하고 가정도 잘 지도하여 환영을 받는 상태에서 생활비를 받을 때만 유익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세가 약하거나 사역자에게 물질적 여유가 없으면서 그 사역이 성실치 못하여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할 때는 서로의 유익도 없고 영광이 안 되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력이 뛰어난 교역자가 큰 교회를 시무할 때는 목회와 가족 동반에 문제가 없지만 많은 교회가 재정 실력이 약하고 교역자의 자질이 부족함으로 나타나는 부조리의 양상이 더 큰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 오면서 나타난 부작용이 바로 물량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바울 사도처럼)를 제외하고 모든 사역자들이 복음 사역을 하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교회적 사례) 생활하고, 모범적 가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교인들이 교역자의 본을 보고 좋은 신앙, 좋은 가정을 이룬다면 좋은 일일 것입니다. 본인은 목회자가 가족을 동반하였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본 일도 있고 체험한 일도 있어서 그런 부작용을 미리 방지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경험을 말씀드리면 저는 청빙 받은 교회에 가서 시무하였고, 생활비는 주위에서 대우하는 관행이나 가족 수로 비례할 때 항상 80%쯤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심령이 침체되는 듯 할 때 다른 교회의 청빙을 받고 전임하였으므로 배척 또는 거부 반응이 있기 전에 나온 것입니다. 이 뜻은 억지로 주는 생활비를 받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총 아홉 교회를 다녔으니까요. 그런데 자녀 6명과 모친을 포함한 아홉 식구를 부양하면서 생활비를 넉넉하게 쓰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족들의 불평을 받았고, 이웃이나 친척에 대한 봉사를 거의 못하였으니 그런 정도가 가족을 부양한 부정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가족들의 욕심에 기인하는 것일 뿐 하나님이 그때 그때 쓸 일에 대하여 합당하게 주시고 인도하신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유감스럽게 느낀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교역자가 배척을 받으면서도 나가지 않는 것이나 또 노회가 합법적 시무를 명하지 않았는데도 나가지 않는 경우입니다. 여기에는 명예에 관한 문제와 생활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있다고 봅니다. 이 경우에 목회자는 억지로 주는 생활비를 받거나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려 하거나 적게 받는 생활비로 어렵게 살면서 가족과 이웃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신 것은(마 16:24) 가정적, 사회적, 일반적 사명을 감당하면서 복음 사역에 나서라는 뜻입니다. 만일 교역자가 가족 생계를 약한 교회에 전폭적으로 짐을 지우려 한다면 물량 주의 부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재정 중심의 교회를 만들려 할 것이고, 물질 봉사자의 권위를 앞서기 어려울 것이니 만일 그런 취약점을 보완할 수 없다면 단신 사역이 오히려 바람직 할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 직업의식이 접목되는 부작용을 없애야 하고 복음 사역자는 성경의 뜻 그대로 나타낼 수 있는 입장에 확실하게 서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구상해 본 것입니다.


 


제72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함 (딤후 3:1~5) 목록으로


저는 내가 증거 한 메시지도 사랑하지만 다른 분의 설교도 존중하고 참고합니다. 피종진 목사님의 설교문(2004. 11.28.)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자신을 보는 사람,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사람 되라”는 말씀을 읽고 오늘의 성도들이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부응해야 할까?” 하는 것을 묵상해 본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의 사회적 사명을 말씀한 곳이 있습니다. “빛과 소금되라, 이웃 사랑을 네 몸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돕고 관원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 등입니다. 그리고 또 성도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면 시대적 요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잘 아셔야 합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이나 국민들 보고 이 시대의 요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다면 우선 경제라고 할 것입니다. 또 그 다음 순서를 말하라 한다면 핵무기로 인한 안보나 교육 개혁이라고 할 것입니다. 4대 법안의 개혁안을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을 뉴스로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15만의 죽음을 내다보는 현실입니다. 우선 그 희생자들을 돕는 것을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적 요청은 생각하는 바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말세에 있을 문제스러운 일들을 열거하셨는데 모두가 이 시대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들입니다. 성경은 그 문제되는 일들을 열거하신 후에 “네가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하셨으니 문제되는 일은 시대적 요청이고, 돌아서는 일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함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잘못된 일은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도전”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도전은 “어떤 사건을 찝쩍거려서 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 되는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거기에 반항하고 싸워야 하니까 항전 또는 역주행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네가 이같은 일에서 돌아서라” 하셨으니 모든 부조리에 대하여 역주행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줄 압니다. 시대적 요청은 사람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제 생각대로 말씀드리면

1. 진실 결핍입니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고 속이는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좋은 소고기, 무공해 식품, 진짜 참기름을 점포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자기의 나이를 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또 돈거래가 계약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은행이나 큰 기업체가 부도나는 것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믿음 세계는 거의 없고 거짓, 외식, 포장, 허풍만 판을 치는 세상인즉 이 때에 성도가 여기서 돌아서는 방법은 진실만 표방하고 진실을 생명처럼 귀히 여겨야 하며 사회에서도 속이는 것을 살인 이상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진실성이 없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마땅히 친교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속이는 개인이나 속이는 단체, 속이는 나라는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절약을 안 합니다. 무엇이 그리 풍부하다고 절약을 안 합니까? 길에 나가면 흰 종이가 널려 있고, 음식점에 가면 남기고 버리는 것이 많으며 목욕탕에 가면 물을 흥청망청 쓰고, 세 번 쓸 휴지를 한 번에 쓰고...물질 뿐입니까? 시간 절약을 할 줄 모르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고 오락 프로그램을 만들어 백성들의 시간을 뺏으며 시간을 선용하는 교육은 시키지 않고 구경거리만 장려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질 낭비, 시간 낭비가 문제입니다. 성도가 여기서 돌아서려면 알뜰하게 살아야 합니다.

3. 편안한 것이 문제입니다. 노동을 싫어하고 땀 흘리는 것이 싫으며 또 움직이기도 싫어하고 노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지 어찌 늙어서 노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어떤 노인은 90세에도 일을 한다 하는데 어떤 곳에서는 노인들을 놀게 한다 하면서 노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니 일하는 것은 건강과 발전이 있으나 노는 것은 먹고 병을 만들 것입니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노는 것을 수치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죽는 날까지 일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요 5:17).

4.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 낳았으면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데 “정부가 키운다”고 합니다. 많이 낳아도 좋다 하면서...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데 정부가 노인 대책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나라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가용 굴리는 시대에 신학교는 100년을 계속 보조만 청원합니다. 돈을 못 버는 거지들이 다 신학생이 된 것 같아요. 목회에 성공한 최기채 목사님은 신학을 하기 위하여 돈을 벌었고, 그 정신으로 목회하여 성공하였습니다. 보조를 청원하는 것은 자립이나 책임에 위반되기 때문에 성도로서는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사회가 책임에 대한 강조보다 떠넘기고 남이 도움 받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니 아쉬운 것입니다.

5. 조화를 못합니다. 여당, 야당이 협상을 못합니다. 여당이 60%이면 60쯤 들어 주고, 야당이 40%이면 40을 넣어 섞으면 될 텐데 그것을 못하지 않습니까? 연합하는 지혜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존중도 하고 양보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고, “불법이 성하며 사랑은 식고 거짓 교훈은 많다” 하셨으며(눅 18:8, 마 24:12~24) 바울 사도는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불효, 원심, 참소, 부절제, 배반, 조급, 쾌락 사랑이 있고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 하시면서 “네가 이같은 일에서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배반하여 판다”는 것은 충성된 하인을 늙었다고 팔아버리는 것 같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도님들 나름대로 시대적 요청을 살피셔서 거기에 도전하는 생활을 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12. 잠언 설교

제73과 지혜로운 생활 (잠 1:1~6) 목록으로


성도님들이 잠언을 많이 읽으시고 “지혜로운 생활” 하시기를 바라서 말씀을 드립니다. 잠언은 1절 말씀대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입니다. 잠언의 뜻은 “경계하는 말씀”이란 뜻인데 훈계 또는 지혜자의 말, 오묘한 말로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솔로몬의 잠언을 영감의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3절에서 성도로 하여금 “지혜롭고 의롭게 또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하게 하기 위하여 훈계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는 이 말씀으로 슬기롭게 되고 젊은 자에게는 지식과 근신함(자기 살핌)을 주시기 위함이라”(4절) 하셨고, 또 5절에서는 “지혜 있는 자가 학식이 더할 것이고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하셨는데 여기의 “모략”이란 용어가 좋은 뜻이 아니라 “남을 등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번역상 연구 대상입니다. 원문에 모략으로 번역된 말씀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모엣소트”로 잠 22:5, 20에 나타났고, 또 하나는 “타크블로스”로 본문과 20:18, 24:6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들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영어 성경에는 “모략 얻는다”는 말을 “안내자 또는 길잡이(guidance)가 된다”고 번역하였고, 현대인 성경에서는 “좋은 교훈을 준다”로, 공동 번역에서는 영어 성경을 따라 “남을 이끌 힘을 얻는다”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일단 그렇게 이해하시고 모략이 좋은 뜻인 줄 아시면 됩니다. 인간은 항상 미련합니다.

1. 잠언을 읽고 깨달으시면 3절에서 “지혜롭고 의로우며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할 일을 알게 된다” 하셨으니까 우선 이 네 가지 용어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지혜란 인간의 모든 삶을 생산성 있게 행하는 방법입니다. 지혜는 배워서 터득하기도 하고(잠 1:1~3), 하나님이 주셔서 받을 수도 있는데(왕상 3:11) 사람은 너무 미련하기 때문에 생활의 상당 부분을 지혜롭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칼막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약 140년 동안 지혜롭지 못한 공산주의를 주창했었고, 청소년들이 대부분 철들기 전에 지혜롭지 못한 삶을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비쿼터”란 말은 모든 시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제, 활용하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시설을 큰 지혜로 알고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이어트에 성공한 어떤 청년은 말하기를 사람의 몸이 활동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리모컨식 생활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생활을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의는 법에 저촉 없이 바르게 사는 것인데 이 법이란 범위가 넓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나 국법, 도덕적 규범 또는 양심의 법까지 포괄합니다. 그리고 “공평함”이란 공의란 말과 같다고 보셔야 합니다. 의는 개인적 입장에서 바른 것이고 공평이나 공의는 여러 사람 입장에서 바른 뜻입니다. 나 혼자 있고 배가 고플 때 떡이 두 개 있다면 그것을 다 먹어도 의에 위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상태라면 떡 두 개가 자신의 소유라 할지라도 혼자 다 먹는 일이 거리끼게 된즉 의와 공의의 뜻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 의보다 공의로운 생활은 더 어렵다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정직하게 행하는 일도 교훈을 통해서 더 잘 연마할 수 있으니 성도들은 이 잠언을 통하여 지혜와 의와 공평과 정직을 연마하셔야 하고 또 지혜로운 생활을 잘 하여 발전을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들은 지혜로운 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음 자세와 언어 표현과 행동하는데 지혜로워야 합니다. 마음은 언어와 행동의 근거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마음은 언행의 기초이므로 하나님도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잠 16:2, 히 4:12).

1) 성도는 마음을 쓸 때 우선 겸손을 생각해야 하고(빌 2:3, 8, 딤전 1:15, 마 11:29, 벧전 5:5, 엡 3:8, 고전 15:8~9, 31, 막 1:7, 요 3:30),

2) 하나님께 영광 돌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고전 10:31, 갈 1:10, 요 3:29).

3) 하나님과 사람 사랑하는 일을 동시에 생각하셔야 합니다(마 22:37~40, 요일 4:20, 마 5:44).

4) 건설적이고 낙관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고쳐주시고 치료하시며(마 12:15, 출 15:26)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시며(롬 4:17) 처음보다 나중을 더 좋게 하시는 분입니다(욥 8:7, 42:12~17).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신 뜻을 이해하시고 모든 환경과 행사와 실패에 대하여서까지라도 낙관하면서 어려운 사태를 수습하고 재기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이끌어가는 마음을 반드시 가지셔야 합니다. “꿈을 가지라”는 말이 그 뜻이고, 바울 사도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하신 말씀을 생각하시고 모든 일을 낙관하셔야 할 것입니다(빌 1:20~21, 4:12~13).

5) 언어 표현은 우선 말하기를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말은 “배의 키와 같고 불과 같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약 3:5, 6). 그래서 적게 하고 천천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약 1:19, 3:2, 전 1:2, 5;2). 또 선한 말과 덕을 세우는 말을 힘쓰시고(엡 4:29, 5:4), 말을 해야 할 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애 4:4~5). 말의 실수로 망하고 죽는 경우가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행동하는 지혜입니다. 행동도 말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 하셨지요(엡 5:5). 우선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 것만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정의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옳은 일은 빨리 시행하고 근면할수록 좋습니다(엡 5:16, 출 20:9). 근면하되 규모와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살후 3:6~7, 고전 14:33, 40). 적당하게 하고 절제하며 법도와 예절에 위반되지 않게 하는 것이 다 규모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속히 지혜로워 지십시오. 지혜를 일깨우는 제일의 방법은 성경으로 깨닫는 것이고(본문), 그 다음이 경험입니다. “주의 법도를 지키면 노인보다 승하다”(시 119:100) 하셨는데 노인의 자문을 받는 것이 성경 다음입니다. 빨리 지혜로워질수록 지혜로운 자의 앞날이 밝아질 것입니다.

 

제74과 말씀의 은혜와 마음을 지킴 (잠 4;20~23) 목록으로


“말씀의 은혜와 마음을 지킴”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0~22절은 “말씀으로 받는 은혜”의 내용이고, 23절은 “마음을 지킴”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말씀으로 받는 은혜는 “생명과 온 육체의 건강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은 육체 생명을 뜻한즉 생명은 영적 생명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생명인 구원과 육체의 건강까지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인즉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잘 활용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활용하여 은혜를 받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합니다. 물을 먹으려면 우물가에 가서 서성대야 하고 법관 되려는 사람이 법률에 관심두는 것처럼 성도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에서 무슨 열매를 얻으려고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경책이 개인의 손에 없었은즉 절기 때에 성전에 모여서 듣고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방도가 많지요.

3)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하셨으니 그 당시에는 율법의 필사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것을 눈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연구하라는 뜻이지요.

4) “마음속에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잊어버리지 말고 마음에 새겨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 107:20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는 말씀과 사 26:3의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7분 설교 6집 92과 ‘평강 누리는 법’ 참고).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구원도 주시고 건강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장수하신 줄 압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영적, 육적으로 가장 건전한 생활 지침서이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을 지킴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7분 설교 6집 94과 ‘마음과 육체의 건강’ 참고). 23절을 보시면 마음 외에도 “무릇 지킬 만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 외에 지킬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건강, 재물, 신용, 지식, 국방, 명예, 가문 같은 것입니다. 건강 지키는 것도 대단한 실력입니다. 재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지요. 신용은 더욱 그렇습니다. 약속을 두 번만 어기면 신용 떨어진 줄 아셔야 합니다. 지식도 계속 학습하셔야 하고 특히 명예 같은 것은 한 번 지적 받으면 끝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평안을 위하여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중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지킴”이 분명 앞에서 말씀드린 다섯 가지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1) 왜 마음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중요한 것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마음이 믿음의 좌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다” 하셨고(엡 3:17), “말씀의 씨가 마음에 심긴다” 하셨으며(마 13:23, 약 1:20) 따라서 믿음의 역할을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롬 10:10). ② 마음이 자신을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생각하고 마음이 결정하며 마음이 명령할 때 행동이 나타납니다(마 12:35~36).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③ 마음으로 행복과 불행을 느낍니다. 괴로워도 마음이 “괜찮다”하면 행복한 것이고, 많이 가졌어도 마음이 “더 있어야 한다” 하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은 믿음 역할을 하고 자신의 생활을 통치하며 행복과 불행을 느낀즉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마음을 “잘 지키라”고 하신 줄 압니다.

3. 마음을 지키는 뜻과 방법을 알아야 하겠지요. “마음을 지킨다”는 뜻은 정신을 차린다는 뜻이고, 또 바른 정신 작용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고, 중국 속담에는 ‘精神一到 何事不成’(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뜻은 한나라의 李廣(이광)이란 사람이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그 호랑이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일념 하에 화살을 당겨 분명히 맞혔는데 호랑이가 꼼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며 서서히 다가가 본즉 바위 모양이 호랑이로 보인 것입니다. 정신력이 큰 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려면

1)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혼과 생각을 지키시고(시 121:7, 빌 4:7),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며(시 51:10) 또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겔 36:36), 지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약 1:5). 그런 중에 히 13:9을 보시면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다” 하셨으니까 기도하셔야 하는 것이고,

2) 기본 자세를 성경에 매어 놓고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본 자세란 참 마음이며(히 10:22) 예수님 닮은 마음이고(빌 2:5), 청결한 마음이며(마 5:8) 깨끗한 양심이고(딤전 3:9), 또 선한 양심(벧전 3:21, 히 13:18)인데 이 마음이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을 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런 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바르지 못한 사람과는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로 서 있는 자에게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치고 순수한 마음은 어린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19:14) 그래서 꼭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간직하셔야 하겠습니다. 갓난아기, 어린 아이는 누구를 미워할 줄도 모르고,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욕심, 투기도 없습니다. 염려도 안 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어머니를 가장 필요로 할 것입니다. 성도가 그런 마음을 지키신다면 영적 은혜는 물론 평강도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제75과 성경의 활용 (잠 6:20~23) 목록으로


성경 또는 성경을 배우는 법, 성경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또 그런 설교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설교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문 21절에서도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1. 성경에 대한 말씀이고, 또 제가 좋아하는 말씀들을 몇 구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구약에서 수 1:7~9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네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고, 신 6:6~9을 보시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한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앉았을 때나 다닐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도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또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문설주에도 기록할지라” 하셨으며 신 30:14은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셨고, 시 1:2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 하셨으며 시 107:20에서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 하셨고, 시 119:97, 102에서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니이다” 하였으며 또 105절에서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 하셨고, 렘 15:16에서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약에서 예수님은 마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고, 요 5:39에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 하셨으며 또 사도들은 증거 하기를 행 17:11에서 “베뢰아 사람은.....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 하셨고, 골 3:16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한다” 하셨으며 가장 많이 읽는 딤후 3:16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셨고, 계 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셨으며 계 22:18~19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는 구원이 제외되고 심판의 벌이 가중된다” 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은 한 마디로 성도가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며 보존하고 지켜서 복 받아야 할 것을 엄중히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그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성경을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펼쳐보는 책 정도로 취급하는 분들이 계신 줄 압니다. 성경책이나 하나님 말씀을 보석처럼 여기지 않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말씀의 일점일획까지 소중하게 여겨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신 것입니다. 저희 집에는 성구 액자가 많이 있는데 길가에 쓰레기로 버려진 것을 마음 아프게 보고 가져온 것들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이 길에 버려졌는데 만일 그것을 외면하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오래 교회에 나온 성도님 댁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성경책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서 한참 찾는 분들이 있고, “성경 어디를 찾으십시오” 하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면서 전도사님에게 “찾아 달라”하는 분이 계시며 또 “같이 읽자”고 하면 잘 못 읽는 성도들도 계신 것입니다. 읽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멀리 한다는 뜻 아닙니까?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과 복 받을 일을 안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교역자 접대와 함께 축복 기도로 복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설교를 가시 뽑는 심정으로 듣겠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찬송, 기도할 때는 졸지 않다가 성경 봉독할 때부터 졸고 설교를 들어 흡수하지 못하는 성도님도 계신데 이것은 신앙의 큰 병입니다. 집에서 일 많이 안 하시고 많이 주무시고 왔는데도 역시 조는 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통하는 면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서에 취미 없는 어떤 처녀가 남자와 교제를 하는 중에 남자가 책을 한 권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두어 달 지난 후에 “내가 준 책을 한 번 읽어 봤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전혀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다 못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그 책은 그 청년이 연구하여 쓴 책이란 것입니다. 이 때에 그 처녀는 정신을 차리고 집에 와서 책을 본즉 그 남자의 이름이 있고 하여 열심히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컴퓨터를 선물로 보내왔는데 사용할 줄을 몰라서 두는 사람처럼 성경을 대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 66:2~3에 보시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재물이나 의식에만 얽매이는 자는 살인자나 우상 숭배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말씀에 무감각하고 의식과 제도에만 얽매이는 것이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목적은 성경을 사랑하시고 성경에 취미를 붙여서 성경 제일주의로 생활 하셔야 함을 깨우쳐 드리는 것입니다.

 

제76과 미물의 지혜 (잠 6:6~11, 30:24~28) 목록으로


성경에는 “미물의 지혜”를 칭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미물은 개미와 사반과 메뚜기와 도마뱀, 그리고 뱀도 해당됩니다(마 10:16).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자이시고(삼상 2:3, 욥 11:11),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는데(왕상 3:12) 가장 많이 주시고 동물과 미물들에게도 지혜를 주십니다. 솔로몬왕에게는 지혜를 많이 주셨고, 또 구하는 자에게 더 주실 수 있다 하셨으며(약 1:5) 일반 동물들에게는 저능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욥 39:13~17에 보시면 “타조가 날개를 치지만 그 깃털로 인자를 베풀지 못하고(새끼를 품지 못함) 알을 땅에 버려서 모래 위에서 더워지게 하지만(알을 부화하게 하는 뜻) 그 알이 깨질 것과 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타조알은 여간하여 깨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더한 것도 있고 덜한 것도 있는 것입니다. 미물들의 생존적 지혜가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1950년대에 박재봉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납니다. 동해 바다에서 큰 고래가 멸치 같은 작은 고기들을 삼키고자 할 때 “그 작은 고기들이 모여 큰 고래 형상을 만들면 고래가 거기에 속아 도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미물들이 보호색 등으로 자신을 방어 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미련하면 지혜 있는 미물에게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절)고 하셨습니다. 개미의 지혜

1) 더운 여름을 견디는 지혜가 있습니다. 개미가 뜨거운 여름에 햇빛을 덥다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더운 여름을 잘 견디느냐?고 물으면 “더워서 옷을 안 입고 일하다가 땅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하기 때문에 견디고 또 더워도 열심히 일을 해야 겨울을 지내지 않겠느냐?”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2) 개미는 열심히 일하는 미물입니다. 개미는 노는 법도 없고, 열심히 움직이며 일합니다. 더위를 이기는 것을 역경을 견디는 지혜라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시험을 따돌리는 지혜입니다. 밤새도록 오락에 취하다가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들은 반드시 개미의 근면한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3) 협동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단결을 잘 하고 무거운 짐도 합력해서 잘 움직입니다. 무거운 것을 합력해서 움직이는 데는 사람보다 훨씬 잘 할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으며 주권자도 없으되(합력을 잘 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단결과 합력을 못 한다면 반드시 개미에게라도 가서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4) 겨울 양식을 여름에 예비하는 것입니다. 겨울 양식을 여름부터 예비하는 것은 그만큼 예비성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자녀를 낳자마자 교육 보험을 넣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예비할 것이 참 많습니다. 물질적 예비도 필요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금방 대답하고 떠나도 정리 못한 부분이 없도록 예비하고 기다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가셔서 상 받을 것도 예비하셔야 하겠지요. 저는 연장을 많이 모읍니다. 혹 말년에 시골에 가서 살면 다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예비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비용의 절약을 줄 것입니다.

5) 개미는 일사각오의 지혜가 있습니다. 자기 집에 다른 대적이 침략을 하면 몸 사리는 자가 하나도 없고 다 일사각오로 싸우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범과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잠 30:26에서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반”은 히브리 원문인데 이 사반이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없기 때문에 부정한 생물로 구별되었지요(레 11:5). 그런데 이것을 번역할 때 토끼, 너구리, 오소리로도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망구스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놈이 작고 연약하지만 집을 바위 사이에 짓기 때문에 안전하니 지혜롭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개미는 작지만 노력해서 자기 앞을 꾸리는 지혜가 있고, 사반은 약하지만 강자 앞에 살아남기 위하여 안전한 곳에 집을 짓는 지혜가 있습니다. 인간이 연약한 중에 보호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반석이신 예수님께 피하는 자가 되셔야 하겠지요. 예수님만 안전한 피난처가 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시 71:3)

3. 메뚜기의 지혜인데 메뚜기는 임금이 없어도 일제히 떼를 지어 나간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누 떼가 떼 지어 이동하는 것을 봅니다만 메뚜기는 작은 곤충인데도 그런 단결과 질서를 보이니 대단한 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28절에서 “잡힐만해도 안 잡히는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의 정확한 번역은 “너희가 너희 손으로 잡는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풀핏 주석). 이것이 무슨 도마뱀의 큰 지혜입니까? 도마뱀은 사람의 손에 잡힐 만큼 연약한 것인데 그것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흠모하는 왕궁 출입을 임의로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솔로몬왕은 왕궁에 거한즉 왕궁의 귀함을 느끼지 않겠지만 이 본문은 솔로몬이 지은 것이 아니고 “야게의 아들 아굴”(30:1)이 기록한 것인즉 그는 왕궁을 신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 뜻은 연약한 존재, 또는 적게 배운 자가 크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마치 요셉이 배운 것 없지만 지혜로우므로 출세한 것을 비유하신 교훈인 줄 압니다.

결론적으로 잘 견디는 것과(고전 13:7) 근면과 단결과 예비함과 일사각오는 개미에게서, 자기 보호에 만전을 기하는 것은 사반에게서, 단결과 질서와 일제히 나가는 것은 메뚜기에게서, 또 연약하지만 크게 쓰임 받는 것은 왕궁에 있는 도마뱀에서 지혜를 배우라는 교훈입니다. 게으르고 준비 없는 사람은 개미만도 못한 상태가 아닐까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고도 하셨습니다(마 10:16).

 

제77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잠 8:17~2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란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18절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있는데 “부와 귀와 의”라고 하셨습니다. 부에 대하여 잘 아실 것이고, 귀는 존귀(명예)를 뜻하며 의는 죄사함 받는 복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를 다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 중의 부와 귀는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주실 수 있다”고 17절에서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길게 주실 수도 있고, 길게 주시지 않으면 또 쉬 거두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장구한 재물”이란 말씀이 있고, 21절에서는 “재물을 얻어서(얻게 하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심. 신 8:18, 사 45:3) 그 곳간에 채우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재물을 길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19절에 보시면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낫고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낫다” 하셨는데 이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좋을 줄 압니다. “내 열매, 내 소득”이란 하나님 편에서 상급으로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관의 거래에서 대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지만 성도가 “무엇을 하였으니까 무엇을 주시오”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고 싶어서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조건적으로 받는 은혜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가 더 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금이나 정금보다 나음”은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크다는 뜻이고, 또 “천은보다 나음”은 사람이 크다고 보는 표준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가 교회와 계약을 맺고 봉급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고의 대가를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역자가 교회와의 계약 없이 무보수로 일을 많이 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를 기쁘게 여기시고 열매와 소득을 주셨다면 이렇게 인간이 바라지 않은 것이라도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은혜가 더 값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지 않은 것이라도 얼마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 4:17을 보시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그를 찾고 만나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길로만 행하시고 공평한 길 가운데로만 다니신다” 하셨으니까(20절) 자신이 의롭거나 공평하지 못하면 그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으며 주시는 은혜를 족히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본문의 설명인즉 성도가 의로운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셔서 재물과 존귀와 의의 은총을 받으시고, 또 장구하게 누리는 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주셨는데 성도가 재물의 복을 못 받아서 남의 신세를 지거나 구제에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면 많이 반성하고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밥을 못 먹는 식구들이 많았습니다. “3일이나 먹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씀이 있으니까요(막 8:1~3). 그래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마 6:11) 하시면서 그 해결법까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것 없는 사람에게 기도하여 먹을 것이 생기면 먹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은 노력이라고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창 3:17, 시 128: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이(창 1:28) 수고하고 노력하여서 먹고 살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이 수고에 있는 것을 모를 때는 “공중의 새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고라도 교훈을 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6:26). 새는 놀지 않으니까요. 여기에서 가난을 극복하고자 할 때는 노력에 아울러 근검, 절약 등 열심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의 능력이 있으시면서 “남은 음식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 하셨고, 또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눅 19:17) 하신 말씀에도 근거하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듯이 작은 것을 절약하고, 저축성 있게 살면 재물을 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저는 이 말씀을 항상 생각하면서 물자와 음식을 적중하게 취급합니다.). 혹 질병 등으로 노력을 할 수 없는 입장일 때는 그 환경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 처방하셔야 할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죄로 인하여 전체 민족에게 흉년을 주시는 경우도 있는데(신 11:17, 삿 6:11, 마 24:21, 삼하 21:1) 이런 일은 개인이 혼자 해결할 것이 아니라 민족적 또는 단체적으로 처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존귀의 복을 주십니다. 요셉이 총리 되고 다윗이 왕 된 것 같은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를 백성들 앞에서 높이셨다”(수 1:9)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존귀를 받으려면 하나님과 모든 이 앞에 겸손하고 봉사적이며 신용 있는 자가 되고 또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의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은 재물의 복을 받으면 장구히 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물질을 우상시해도 안 되고(딤전 6:10, 마 6:24, 욥 22:24~25), 재물 때문에 범죄 해도 안 되며 또 혼자 누리려고 해도 안 될 것입니다(고후 9:6, 행 20:35, 눅 6:30). 재물의 복을 받아 복 되게 사용한 사람은 “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뜨겁게 사랑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고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8과 지혜자에게 있을 것 (잠 21:20) 목록으로


1. 지혜자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네 가지 지혜가 있는데 사람의 지혜(전 8:1, 마 11:25), 육체의 지혜(고후 1:12), 이 세상의 지혜가 있으며(고전 1:20, 2:6)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중(고전 2:7) 지혜자란 하나님의 지혜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혜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귀한 보배와 기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 13:44에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는데 이것은 진리를 의미하고, 또 고후 4:7에서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하셨는데 여기의 질그릇은 연약한 인간이요, 보배는 역시 예수님 모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한 보배는 최고의 가치인 예수님 곧 진리를 모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기름은 무엇일까요? 마 25:1~13에 기록된 열 처녀 비유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름은 등불을 계속 있게 하는 것이고, 등불은 시 119:105에서 “주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름은 성령님 또는 말씀의 역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자의 집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의 역사가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혜 있는 자인지 아닌지는 자기의 개인적 생활 속에 예수님이 왕노릇 하시며 말씀의 역사를 나타내는지 안 나타내는 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진리 탐구)를 하다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게 되면 식탁 앞에 TV가 켜져 있습니다. 그 TV 화면에서 춤추는 모습이 나오면 세속적이라는 비판을 하기 전에 설교 준비하던 심정과 정서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프로그램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TV 채널이 78개입니다. 그것을 다 오르내려 보아도 맞는 것이 없어서 TV를 끌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이 세상은 세속적인 것만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60번이 기독교 방송인데 그것도 내가 성경을 연구하는 정서와는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값진 보화와 기름이 있다”는 것을 연구하는데 다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여기에서 제가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나는 값진 보화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세속에는 그것이 하나도 없구나”하는 것을 느끼면서 “세속은 참 세속이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예수님을 빛내는 보화와 진리를 비취는 성령님의 역사를 예비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동행인데 그것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지혜자의 생활이 성경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1)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시 111:10)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 스승의 권고를 잘 듣고(잠 12:15),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법이 없으며(잠 3:7, 사 5:21) 길거리에서도 지혜를 얻으려고(잠 2:2) 심지어는 개미를 선생으로 모시고도 지혜를 더 배우려 한다고 하셨습니다(잠 30:25).

2) 또 지혜자는 학식도 더한 자이고(잠 1:3, 10:14), 경험을 통해서 얻기 때문에 늙은 자나 장수자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욥 12:12). 다시 말하면 지혜자는 연장자를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3) 지혜자는 “아비를 기쁘게 한다” 하시므로 지혜자에게 효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잠 10:1). 여기에 따라서 지혜자는 물질보다 “사람을 얻으려 한다”고 하셨습니다(잠 11:30). 하나님은 원칙상 모시고 있으니까 그 다음으로 가까이 할 대상은 물질, 권세가 아니고 사람이란 것입니다. 산에 가면 산이 좋고 바다에 가면 바다가 좋아서 “여기에 살았으면”하는 마음을 갖다가도 자연만 갖고는 심심할 것 같아서 사람이 있고 친구가 있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자는 하나님 다음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4)기초를 든든히 하므로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환난에 흔들리지 않고(마 7:24),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서 재판을 잘 한다고 하셨습니다(왕상 3:11). 솔로몬의 집에 그런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분별 잘 하고 재판을 잘 하는 것. 그런데 “지혜보다 강한 것은 뇌물이라”고 하셨습니다(신 16:19).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덫에 걸린 지혜자들이 오늘 날도 많은 줄 압니다.

5) 또 지혜자의 말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고(고전 12:8), 남을 가르칠 수 있으며(골 3:16) 화평을 도모할 줄 알고(약 3:13, 17),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지므로 자기 영혼을 얻은 자라고 하셨습니다(딤후 3:15, 잠 19:8). 그래서 “궁창의 빛처럼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잠 12:3).

6) 지혜자의 집에는 예비가 있어야 합니다. 기름 준비한 처녀처럼 세상 사는데도 예비가 필요하지만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날 예비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철사 한 도막, 나사못 하나라도 예비해 놓으면 필요할 때 멀리 구하러 나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예수님 만날 예비는 회개와 헌신을 잘 하는 것입니다.

7) 분별 잘 하는 것이 꼭 있어야 합니다. 앞설 것과 뒤설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보다 먼저 할 것이고(마 6:33), 선지자를 대접하는 것도 자기 먹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인 것입니다(왕상 17:13). 좋은 음식이 생겼을 때 “목사님 맛보신 다음에 우리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정도이면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의 뜻이냐? 인간적 뜻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고(마 7:21), 또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며(고전 12:31) 임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법을 세우고 사랑을 손해 보거나 돈을 벌고 인정을 버렸다면 이런 것은 대소를 분별 못한 것이고, 또 신령한 복을 도외시하고 현세복을 취하였다면(롬 8:24) 그 집은 지혜자의 집이 아닐 것입니다. 지혜자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꼭 예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9과 진리의 확실한 말씀 (잠 22:17~21) 목록으로


1. 먼저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그 다음은 스승, 원로, 부모의 교훈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 중에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부모의 말씀을 유의하여 듣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스승의 교훈을 유의하여 잘 듣습니다. 성도들 중에 성경에 깊이 빠져드는 성도는 믿음이 비약적으로 자라지만 대부분 듣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며 성경에 끌려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진리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알고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내 지식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은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간직하라”는 뜻이지요. 또 18절에서 “네 속에 보존하며 입술에 있게 하랴”하신 것은 간직과 함께 증언하고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잠언 기자가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1절 에서는 말씀 전하는 방법과 목적을 피력하셨는데 방법은 특별히 알게 한 것이고, 또 모략(좋은 뜻의 계략임. 1:5 설명)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기록하여 전한 것입니다. 기록이 전달 수단의 최고 방법입니다. 보존하면서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목적은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고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너를 보내는 자(너에게 말씀 듣도록 보내는 자 또는 진리를 배우려 하는 자로 해석함.)에게 회답(알려 주는 대답)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따라서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 확실한 깨달음, 가르침의 사명”임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의뢰해야 할 인생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시 9:20에 보시면 “인생뿐임을 알게 하소서” 하셨는데 인간이 피조물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타락자요, 유한한 존재이며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광야에 버려진 벌거벗은 어린 아이 같은 존재인즉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여 살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꼭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미숙아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셔야 할 줄 압니다.

2)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는 문제”입니다. 진리의 확실한 말씀은 20절에 “기록하였다”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기록으로 주신 성경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셔야 할 것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내신다” 하셨는데(사 9:1~7)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신 것과 그 생활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5:39에서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 빌 2:6, 마 3:17) 구세주이신 것과(마 16:17) 심판자 되신 것을(요 5:27)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인류 중에 성경을 진리로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82년 11월 우리나라 통계에 의하면 77.7%가 종교인인데(2977만 명) 불교인이 1113만 명, 유교인이 520만 명, 천도교, 원불교가 108만 명으로 총인구 38,316,846명 중 ⅔이상이 이방 종교인인즉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개신교인이 764만 명, 천주교인이 108만 명이니까 합한 수 872만 명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수가 전체 인구의 ⅓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미국인들은 “73%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였으니까 ⅔가 넘고, 우리나라는 ⅓이 못 되는 실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점점 좋아져간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자연과 인류는 진화된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이 있었으나 점차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의 확실함을 개달음에 있어서 “확실한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야 함”이 중요하고, 또 인간은 피조물로서 연약한 존재인즉 반드시 절대자 하나님을 의뢰하여야 한다는 사실과 또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진리)이므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이 인간 생활의 최선책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⅓ 가까운 수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개신교나 천주교에 나가는 교인들인데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성도가 얼마나 되는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을 사실대로 증언하는 교회는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학위복을 입으신 일이 없었지요. 또 예수님은 자신을 들레시지도 않았습니다(마 12:19).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에서 자기의 생활 모습을 낱낱이 밝히셨습니다. 하나님 모습, 구세주 모습, 목자의 모습 등을 보이셨으니까 반드시 그 모습을 닮는 성도와 교회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배우려는 자에게 보여 주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요즈음 “성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하고 말로는 가르치지만 생활로는 보여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 반대의 생활을 하는 지도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유의하셔서 반드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결론을 맺으면 “진리의 확실한 것”을 개달아야 하는데 ① 진리의 주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깨닫고 ② 인류가 연약한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깨달으며 ③ 성경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서 예수님과 성경과의 관계를 맺으시고 ④ 또 원하는 자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시도록 지혜자의 말씀을 성실히 듣고 배우실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제80과 마음을 주께 드림 (잠 23:25~26) 목록으로


본문에서 “마음을 주께 드리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우선 본문 25절을 보시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고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효도하라”는 뜻입니다. 효도는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려면 부모가 무엇을 즐겁게 여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음식을 좋아하는지 의복을 좋아하는지 믿음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복종을 좋아하는지를 아셔야 하고 모르면 여쭈어서 시키는 대로 복종하면 됩니다. 성격이 까다롭거나 고상한 목표를 갖고 사는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파악하여 부모의 의도를 따르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그런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는 뜻은 남존여비의 세계에서 어머니가 겪은 고초가 더 큰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효도하는 자녀는 부모와의 대화를 많이 하는 자녀이고 부모의 소원과 기뻐하는 일에 대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부모에게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자녀는 부모의 가업을 중요시 여겨서 엿장수 업을 계승하거나 대장간 업을 계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효도임이 분명하지만 성도는 믿음의 가업을 잘 계승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에 속할 것입니다.

2. 26절에 보시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자식이 부모에게 마음을 주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셔야 하고, 또 “눈으로 훈계자의 길을 즐거워하라”하신 말씀은 “부모의 하는 일을 기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잠 1:1과 10:1에서 이 글이 솔로몬의 잠언임을 명시하셨고, 거의 장장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셨는데(2:1, 3:1, 4:1, 5:1, 6:1, 7:1) 이 아들은 솔로몬의 혈육의 아들도 되지만 그의 백성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솔로몬의 말이라도 성령님이 감동하셨으면 하나니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이 “내 아들아”하신 것이면 그 아들은 곧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뜻과 사역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마음을 달라”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주지 않는 백성들을 지적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은 없고 제물 드리는 일과 제사 의식에만 얽매여 성전에 출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마당 밟는 일에 불과하다”(사 1:10~13) 하시고, “몹시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살펴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마음 없는 일로 나타내신 것이요, 또 사 29:13을 보시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이 먼 것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람의 계명(전통, 자율적 행위, 형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이 말씀이 예언적으로 성취되어 700년쯤 후 예수님 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이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 15:8~9에서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멀고(말로는 주장하고 가르치나 실천은 없음.) 사람의 계명으로 앞세워 가르치니 하나님을 헛되이 가르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강령은 사랑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먹이고 입히라” 하셨으니까요(마 5:43, 롬 12:20). 그런데 성도나 교회가 서로 대립하는 이웃에 대하여 인심을 쓰지 않고 이기주의로 행동하였다면 그것은 사랑과 계명에 위배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지 않는 일이 많지요. 서로의 비밀과 각자의 이기주의를 챙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시 62:8에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신즉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솔직히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4.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 받기를 원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시 51:17). 다시 정리하면

1) 허탄한데 신경 쓰는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시라는 것이고,

2)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며

3)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공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하고,

5) 말로만 주장하지 말고 실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하면서 서로가 그 상대방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5.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1) 우선 하나님이 마음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낙망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붙잡히는 마음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빌 4:7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하셨고, 행 20:32에서는 “은혜의 말씀으로 마음을 붙드신다”(히 13:9)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행복과 불행을 마음이 느끼지 않습니까?

2) 마음을 드리면 그 마음은 곧 제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의의 제사가 있고”(시 4:5), “상한 심령의 제사가 제물보다 낫다” 하셨으며(시 51:16~17) “찬미의 제사, 신령한 제사가 있다”하셨으니(히 13:15, 벧전 2:5) 마음을 드리는 것은 물질 제사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성도는 항상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즐거워하고 감사와 회개를 힘쓰면서 성경 말씀에 이끌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81과 말씀의 비유와 역할 (잠 25: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의 비유와 역할”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마 4:4을 요절로 한 마태복음 설교 7과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역할에 대한 말씀을 더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당 구절을 뽑아서 그 비유적 교훈과 말씀의 역할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먼 땅에서 온 좋은 기별”이란 복음의 소식 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비유한 것이고,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다” 하심은 갈망하는 심령에 시원함, 상쾌함 또는 소성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성경 말씀을 비유하신 말씀을 먼저 살피면

1) 우선 하나님의 말씀은 먼 땅에서 온 좋은 기별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이 그런 것 아닙니까? 죽고 심판 받아야 할 죄인에게 복음적 구원의 희소식이 왔은즉 좋은 기별이 아닐 수 없지요. 어떤 어머니가 어려운 시절에 3남매를 양육할 힘이 없어서 외국에 입양을 시켰는데 27년 만에 그 삼남매를 다 만나고 방문하는 TV 방영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때에 그 소식은 갈급한 심령에 냉수 같은 시원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그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 13:23에서 “좋은 씨가 옥토에 뿌려져 열매를 맺는다” 하셨고, 약 1:21에서는 “마음에 심긴 도(말씀)”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씨가 흙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듯이 말씀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지면 변화의 생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3) 말씀은 등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 119:105에서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됨이며 내 길에 비취니이다” 하셨은즉 성경은 성도의 생활과 진로의 길을 비추어 밝혀 주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말씀이 없는 세계는 흑암의 세계, 사망의 그늘진 땅과 같은 것입니다(사 9:2).

4)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다 하셨습니다. 렘 23:29에서 “내 말이 불같지 않느냐?” 하셨으니까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눅 24:32)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성경을 깨달을 때 마음에 뜨거움을 느낍니다. 어떤 성도에게 세례 요한을 “켜서 비취는 등불”(요 5:35)이라 하신 의미를 말했을 때 마음에 충격을 받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족보의 차이를 깨달았을 때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뜨거우면 눈물도 납니다. 말씀은 불같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불같다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5) 방망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렘 23:29에 “내 말이 방망이 같지 않느냐?” 또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니누웨 백성의 죄를 쳐서 외치라”(욘 1:2)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하면서 말씀을 방망이처럼 썼습니다. 죄를 때려 부수는 방망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6) 검으로 비유하셨고(히 4:12, 엡 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또

7) 스승으로 비유하셨습니다(시 119:24, 주의 도는 나의 모사라). 성경은 마귀를 대하며(마 4:4~11) 심령의 죄를 수술하는 칼이고, 가장 지혜롭게 살도록 지도하시는 모사요 스승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성경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1) 거듭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벧전 1:23에 보시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시므로 말씀이 성도의 심령에 진리로 와 닿는 것을 또는 심기는 것을 거듭나는 역사로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 곧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요 5:29)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계시하신 만큼 성도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성경은 믿을 근거를 주시고 믿을 내용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보여야 믿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내용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란 형태가 손으로 쥘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 역사가 대단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곧 믿을 근거와 내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4:13을 보시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하셨는데 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을 성경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4) 성경은 영혼과 믿음의 양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란 말씀(요 6:41, 55), 얻어먹었다는 말씀(렘 15:16),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마 4:4), 도의 젖이란 말씀(벧전 2:2), 꿀 같다는 말씀(시 119:103)이 성경의 양식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야 묵상(시 1:2)하시고, 항상 마음에 머물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보다 조금 더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속죄와 거룩의 은혜를 주십니다. 엡 5:26을 보시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말씀으로 알게 되고 말씀을 따라 삶으로 깨끗하게(거룩)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 119:9을 보시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속죄와 거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요 17:17, 딤전 4:5).

6) 구원의 지혜를 주시고 의의 지침서 역할을 합니다. 딤후 3:15~17에서 “모든 성경은.......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하셨으니까 구원과 교육을 반드시 성경에서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7) 말씀은 죄에 대한 예방도 하고, 오염이 되었으면 수술도 하는 것입니다. 시 119:11에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다” 하였으니 이 뜻은 말씀으로 죄를 예방한다는 뜻이고, 앞에 말씀드린 비유적 설명에서 말씀을 검으로 비유하신 것도(엡 6:17, 히 4:12) 오염된 죄를 말씀 칼로 척결하는 것을 뜻하니까 역시 예방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민감해지시라”는 뜻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제82과 현숙한 여인이 되십시오 (잠 31:1~31) 목록으로


본문의 교훈적 특징은 “현숙한 여인이 되어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현숙한 여인이 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솔로몬왕의 글이 아니란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르므엘왕이 그의 어머니의 훈계를 기록한 것”인즉 다른 말씀에 비할 때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구상한 말씀이 아니고, 어머니의 훈계를 기록하였는데 그 어머니는 아들 “르므엘”왕이 좋은 왕비를 맞이할 때 반드시 참고하도록 준 교훈입니다. 그리고 10~31절까지는 절수가 22개절인데 매절 첫 글자에 히브리어 알파벳 22개 글자가 매 절마다 첫 단어에 순서대로 들어가도록 시문학으로 배열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도 그런 식으로 되었습니다. 어느 남자가 현숙한 여인을 마다 하겠습니까만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현숙한 여인이 되어 주셔야 하겠지요. 어려운 일이지만 성도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빌 4:13). 본문을 분석하면 ① 10절은 “현숙한 여인의 가치”요, ② 12~22절과 24~27절은 “현숙한 여인의 생활”이며 ③ 11, 23, 28~29절은 “현숙한 여인을 맞이한 가족의 행복”이요, ④ 30~31절은 “현숙한 여인 되는 조건과 상급”입니다.

1. 현숙한 여인의 가치는 “진주보다 더 하다”고 하셨습니다. 황금만능의 시대라도 현숙한 여인은 물질로 비교할 수 없으며 고상한 사람, 기술적인 인간으로서의 큰 가치가 있는데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하시므로 현숙한 여인이 귀한 만큼 그런 여인을 맞이할 남자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만 있는 것을 보면 현숙한 여인만한 남자는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어떤 동리에 특별히 칭찬 받는 주부가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2. 현숙한 여인의 생활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않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배우자인 남편을 심적 또는 신체적으로 불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격상의 고집이나 자존심에 근거하여 고의로 협조하지 않을 때 그런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의 사랑과 인정을 받도록 협력하는 여인입니다.

2) 가정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근면함에 있어서 양털과 삼 또는 솜뭉치, 가락으로 길쌈을 하여 천을 짭니다(14, 19절). 그리고 무역을 통한 장사도 합니다(14, 18절). 또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 가족을 먹이고 종들에게 하루 일감을 맡긴즉 가족들도 게을러질 수 없으며 밤늦게까지 불을 끄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18절), 그 손으로 번 돈을 모아 밭을 간품(좋은 토질의 밭을 고르는 것)하여 산 후 거기에 포도원을 심허 농업을 확장하고, 또 17절에서 “힘으로 허리를 묶고 팔을 강하게 한다” 함은 근면 활동 그 자체로서 자신의 몸을 건강체질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제가 아는 여인은 연탄 배달을 수년간 하였는데 그 신체가 단련되어 크게 건강해진 것을 보았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를 허약하게 만들고 있으나 현숙한 여인은 힘든 일을 하므로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간곤(어려운 사람)한 사람에게 구제의 손길도 폅니다. 자기 집 사람들의 의복을 철따라 제조하여 입히고(21절), 또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허리에 띠는 띠, 화려하게 제작할 수 있음.)를 만들어 상고(장사꾼)에게 넘기기도 하며(24절) 입을 열어 지혜의 말과 인애의 법을 말하고(26절), 집안일을 보살피되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으며(27절)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음”은 남의 일을 할 때나 자기의 일을 할 때 꾀부리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하셨습니다. 23절 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베게로 번역함이 옳다고도 함.)을 짓고 세마포와 자색옷을 입는다” 하였는데 이 뜻은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단장함을 의미합니다. 일을 많이 하는 여성이 몸단장에 소홀하거나 정갈스럽지 못할 수 있으나 현숙한 여인은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방석과 베게라는 의미는 깨끗한 자리에 앉고 눕는 것을 의미하므로 추하거나 지저분한 상태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3절 하반에서는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는다” 하였으니 이는 모든 일을 자신감 있게 시행하고 처리하며 후일을 웃을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산다는 뜻입니다. 남편에게는 여자이면서 가정에서는 가장이고 사업가이며 주부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3. 현숙한 여인을 맞이한 가족의 행복이 어떠하다고 하셨습니까? 11, 29절에서 “남편은 그를 믿고 또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뛰어난다”고 칭찬하게 되며 “자식들은 그 어미에게 사례한다” 하였고(28절), “그 집에 산업이 핍절치 않으며(11절) 또 그 남편은 (덕행 있는 아내의 권위를 힘입어) 그 지역 장로들과 더불어 성문에 앉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문에 앉는다는 뜻은 그 당시에 그 장소가 지역 사람들이 모여 재판하고 증언하는 곳입니다(4:1~6, 나중에는 회당을 사용함.). 따라서 현숙한 여인의 남편도 사회의 인정을 받아 원로의 대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4. 현숙한 여인이 되는 조건과 상급으로 조건은 인물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30절에서 “고운 것도 거짓되고(화장한 뜻)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늙기 때문)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어야만 칭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불신자는 현숙해 보여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 있고 현숙할 때 그 손(수고)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구원과 상급으로), 또 그의 행한 일로 인하여 성문에서 사람들의 칭찬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83과 덕행 있는 여인 (잠 31:10, 29~31)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덕행 있는 여인”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잠 31:10~31에 근거하여 “현숙한 여인이 되십시오”한 설교문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0절에는 “현숙한 여인”이라 하셨고, 29절에서는 “덕행 있는 여인”이라 하셨으며 또 30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여성이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는 데는 이 세 가지 명칭이 다 적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우선 사회에서 칭찬 받은 여인 몇 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1970년도 5월에 신문에 난 덕행 있는 여인들입니다. 한국 전력에서 추천한 박정완 여사(47세)는 6․25 당시에 남편을 읽고 아들, 딸을 다 대학까지 교육을 시켰는데 그의 딸 유영애양이 70년도에 미스코리아에 당선되어 그의 어머니를 표창한 것입니다. 이 박여사의 덕행은 남편 없이 홀로 일어선 삶의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국 일보사에서 추천한 박소아 할머니는 역시 홀로 살면서 아들 3형제를 키워 비행사를 만들었다고 장한 어머니로 표창을 하였고, 또 42세 된 김순한 여사는 자신도 정신박약자이면서 정신 박약한 딸을 구화학교에 보내고 2년 동안 빠짐없이 그 학교에 가서 장애아들의 뒷바라지를 해 준 일로 구화 학교에서 표창을 한 것이요, 57세인 염순근 여사는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 믿음 생활을 하면서 중학교와 보육 전문학교를 나와 공민학교 교사를 하던 중 해방 직전에 일본군에 의하여 중국 안동으로 끌려가서 교포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자기의 친구가 부모 없는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는 혼인 권면을 받고 믿음과 희생 정신으로 수락을 하였는데 결혼한즉 남편의 자녀가 15~3세까지 7남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27일 만에 남편이 급성 맹장염으로 죽자 그 남편이 경영하던 제재소 재산을 정리하여 해방되면서 본국 경주 방면으로 돌아와 경주 문화 여학교 교편생활을 하였고, 밤이면 노점상을 하여 7남매 전부를 대학, 대학원까지 보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특별한 덕행입니다. 현실적으로 당면한 경제적 여건을 이기고 자선에 힘쓴 여성들입니다. 특히 염순근 여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내, 근면, 사랑의 투지로서 덕행을 나타낸 분이라 할 것입니다. 4세기의 성자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관련하여 큰 감동을 줍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깊은 신앙에 끌려오지 못하고 수사학(감동되도록 말하는 언어), 철학, 문학을 전공하여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30세 때 마니교 이단(3세기에 마니가 창설, 합성 종교.)이 난무하는 로마로 가려할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탈선을 염려하여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로마에 가는 것은 하나의 출세로 여겼고 발전으로 여겨 가게 되었는데 그 때 모니카의 교회의 담임 목사는 “기도의 어머니가 계신즉 잘 될 것이니 기도만 하시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모니카는 기도만 계속 하는데 어거스틴이 로마에 간지 3년 후에 “암브로스”란 유명한 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33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말씀을 묵상하던 중 롬 13:13~14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난, 호색, 쟁투,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에 뜨거운 감화를 받고 고향에 돌아온즉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유언에서 “네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변화 받은 어거스틴이 어머니의 기도와 관련하여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 어머니의 기도 열매로 탄생한 성직자가 된 것입니다. 부총회장을 지내시고 경산, 부산에서 시무하신 남수복 목사님은 매일 아침 그의 어머니에게 절을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목사된 것은 어머니의 덕입니다” 하면서. 저는 “할머니의 기도 응답으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한국 선교 초기에 강화 삼산면에서 선교사의 지도로 믿음 생활을 시작 하셨는데 저의 아버님이 술에 인박혀 살림을 못하시고 매일 밤 12시경에 술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오셔서 여러 식구를 잠 못 자게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초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에게 “기도하고 자자 애비 들어오면 기도 못한다” 하시고 등잔불 밑에서 아버지의 방탕을 하소연 하시고, “손자 OO는 하나님의 종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제 나이 7~15세 간에 자주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기도의 열매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목사된 후 수년이 지난 다음에 할머니의 기도 덕분인 것을 깨달았으니 얼마나 미련합니까? 30절 말씀에서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만 항상 하실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면 성취 될 때까지 또는 세상 떠날 때까지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자녀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또 한 가지 부가되어야 할 것은 “제가 남겨 놓은 메시지를 자손들을 통하여 후시대에라도 많이 펼쳐지게 해 주십시오”하는 소원을 드립니다. 남자들도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여인의 덕행이 있어서 남편이 출세하고 자녀들이 효도하는 사례를 말씀하신 만큼 우리나라, 우리 교계에도 많은 덕행 있는 여성도가 출현하여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3. 욥기 설교

제84과 욥기의 서론 (욥 1:1~5) 목록으로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욥기의 처음 부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혹 욥기를 처음 읽으신 성도님이 계시면 성경 66권 중 어느 것을 읽으셨든지 그 성경의 개론적 입장을 어느 정도 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기록한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개론적 입장입니다.

1) 우선 시대를 아셔야 하는데 시대를 알 만한 근거는 “욥이 140세를 살았다”는 말씀과(욥 42:16) 욥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1:5)는 말씀을 참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그의 아버지 데라가 205세를 살았고(창 11:32, 25:7), 그 이후에는 140세를 산 사람이 없는 만큼 그 시대를 아브라함 다음 시대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실제적 인물임. 겔 14:14, 약 5:11). 또 욥기에는 “소고, 수금, 피리” 같은 악기도 나옵니다(21:12). 이런 악기는 창 4:21에서 제조된 바가 있고, 바벨탑 이전에도 유흥 문화가 있었으며(창 11:1) 아브라함과 야곱도 제사 드린 기록이 있은즉 그 시대에 포함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요,

2)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욥인가?에 대하여는 본문에 욥의 말도 있고 친구들의 말도 있지만 성경으로 기록할 때는 누가 기록하든지 영감으로 기록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틀림이 없으나 욥 19:24을 보시면 욥이 “자기의 말이 철필이나 연으로, 책 또는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기록의 소원만 하였을 뿐 직접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 만큼 혹 그의 후시대에 욥의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대필한 기록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은 욥기가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처럼 시문학적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저술 시기를 후시대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시문학이 모세 이전의 글로 여긴다면 욥기는 모세 5경보다도 앞서 기록된 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욥은 동방의 “우스”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우스”란 지역은 애 4:21에서 “에돔땅을 일컫는 표현”이 나온 것 외에는 짐작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2. 욥기에는 대략 무슨 말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2장을 보시면 “욥이 의로웠으나 고난에 빠지는 내용”이 나오고, 3~31장까지는 “욥이 세 친구와 함께 병상에서 고난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내용”이며 32~37장은 “욥의 가장 연소한 친구 엘리후의 토론 내용”이고, 38~41장은 “하나님의 해명하시는 말씀”이며 42장은 “욥의 깨달음과 축복 받은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3. 우선 본문을 살피기 전에 욥기 전체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인간은 결백할 수 없다(25:5). ② 결백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의로울 수는 있다(1:8). ③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도 필요에 따라 고난을 주실 수 있다(1:13~20). ④ 하나님은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거나 다른 일을 하실 때 사탄의 역사를 쓰시기도 한다(1:12).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허용하신 것처럼(눅 22:3, 욕 13:27) 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르고 공의만 생각하여 욥에게 들려진 고난만 보고 그를 잘못 정죄하려 한 점이 드러나고, ⑥ 욥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킨 중에 나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더 큰 복을 받은 사실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읽어가면서 뜻을 배우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4. 본문을 보시면 1절은 “욥의 사람됨”이고, 2~3절은 “욥이 받은 축복”이며 4~5절은 “욥의 성결 생활”입니다.

1) 욥의 사람됨에서 욥은 “순전하고(진실, 겸손, 이기주의 없음) 정직하며(거짓이나 외식이 없음) 하나님을 경외하고(경외 :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 악에서 떠난 자라” 하였는데 이 사실은 “악에서 근본적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악을 최대한 미워하여 멀리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욥의 이런 사실은 오늘의 성도들이 크게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그가 받은 축복인데 자녀의 복으로 7남 3녀를 두었고, 재물의 복으로 양, 약대, 소, 암나귀를 합하여 11,000마리인즉 한 고을을 다 차지하였을 것이요. 종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짐승의 수는 말씀하시면서 종들의 수를 말씀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자녀의 수와 짐승의 수를 종류별로 말씀하셨으면 종들도 몇 명쯤 된다고 하실 법한데 “종이 많다”고만 하셨으니까 100명 훨씬 넘는 수를 거느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명예의 복인데 “동방 고을에서 가장 큰 자”라 하셨으니까 그대로 말하면 한 성읍의 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삼상 2:7) 부와 존귀가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습니다(잠 8:18).

3) 욥의 성결한 생활입니다. 욥이 자녀들의 성결을 위하여 자녀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자신의 성결인들 어찌 힘쓰지 않았겠습니까? 그 자녀들이 형제우애가 좋아서 시집간 누이들까지 오게 하여 생일잔치를 하였는데 그 잔치가 끝나면 욥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배반하는 죄”를 범하였을까 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잔치를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배반하는 죄를 범할까요?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감사를 안 하든지 연락에 취하여 경건한 마음을 상실하든지 자신들만 잘 먹고 이웃의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죄를 범하기 쉬울 것입니다. 욥은 그런 것까지 염려하여 속죄제를 드렸으니 그의 경건한 생활이 크게 모범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의 생활을 꼭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의로움을 인정하셨으니까요(욤 1:8).

 

제85과 고난 받게 된 욥 (욥 1:6~22)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보면 “고난을 받게 된 욥”이라고 제목을 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3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6~12절에서 “욥이 고난을 받게 되는 과정”이고, ② 13~19절까지는 “고난의 상황”이며 ③ 20~22절에서는 “고난으로 인한 욥의 탄식과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욥이 고난을 받게 된 이유는 그 원인이 욥의 죄로 인한 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자기의 뜻에 의하여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주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그렇고, 죄 없이 고난을 주셨다 하여 공의에 어긋나도록 처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욥이 고난을 당하고 모범을 보이므로 교훈을 주시는 면도 많고 욥도 그 공로로 갑절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42:10~17). 그런데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 사탄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그 장소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구원받은 영들)도 있었고, “사탄도 그 곳에 왔다” 하였으니 사탄이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에 의함일 것이요, 또 사탄은 세상을 두루 다니지만 천국에서까지 자유로 영향력을 나타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용하시고, 이용하시는 범위에서만 천국 출입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도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의 개인적 생활을 보시고 사실대로 평가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찬동하지 않고 “욥이 잘 하는 것은 주께서 그에게 손으로 하는 일을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가 산울로 두를 만큼 많게 하신 때문일 뿐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그 소유물들을 없애시면 정녕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재물을 잃었다 하여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배반함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러한지 사탄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보시고 칭찬하신 것이 맞는 것인지를 판단하실 목적으로 사탄에게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고 소유물만 네 손에 붙였으니 그것을 없애라”고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이 바로 욥이 고난을 받게 된 경위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다는 자와의 판단입니다. 지금도 인간 세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이의를 붙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확실한 입증을 주시기 위하여 이런 드라마를 연출하게 하신 줄 압니다. 이 때에 사탄의 의견이 옳지 않음을 확실하게 입증하시려면 사탄의 역할로 확실한 고난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구경만 하고 천사들을 통하여 고난을 전개시켰다면 사탄은 “천사의 행동에 위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또 이의를 붙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탄을 설득시키시기 위하여 이런 사건을 전개시키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설득하실 필요도 없고 설득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욥기 중에 사탄이 “내 의견이 틀렸습니다 하고 시인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어떤 세력의 주장에도 동요되어서는 안 될 것을 만천하의 성도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욥이 교관 역할을 한 것이라고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도전합니다. 결국 사탄의 진리 도전이 헛된 것임을 입증하여 성도로 하여금 역경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욥에 대한 사건을 성경으로 주신 것입니다.

2. 고난의 상황입니다. 이 고난을 주관한 것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욥에 한하여 고난을 주도록 사탄에게 임시 특권을 주신 것이지요. 만일 사탄이 욥이 받는 고난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위장된 재앙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으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하여 한정된 재앙권을 위임하셨던 것입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맏형 집에서 음식을 먹는데 갑자기 스바(에디오피아를 뜻함. 왕상 10:1~13)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칼로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나귀를 빼앗아 갔고, 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서(벼락을 일컫는 뜻) 양들과 종들을 살랐으며 또 이어서 갈대아 사람(페르시아 지역에 분포된 바벨탑 사건의 후손들. 창 11:27~28)들이 세 떼나 쳐들어와서 종들을 죽이고 약대를 탈취하였고, 또 욥의 자녀들이 맏형 집에서 식물을 먹을 때 대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지므로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과 종들과 짐승들이 욥의 소유인데 이것이 하루 안에(13절) 다 없어졌으니 사탄의 말대로 그의 소유물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떼강도, 벼락, 태풍(인재, 천재)으로 다 없어지고 욥과 그의 처만 남았습니다(2:9). 재앙의 종류는 다양하나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3. 이 때에 욥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20~22절은 “고난(재앙)으로 인한 욥의 탄식과 믿음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고통과 슬픔을 당한 자의 표현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은 찢어진 베옷을 입고 딸들은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재산도 없어졌지만 10남매가 하루에 다 죽는 참상을 당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졸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슬픔의 표시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태를 나타낸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 앞에 보이기 위하여 행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민 상태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하였으니 이런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고, 오직 하나님과만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알몸)으로 나왔은즉 적신으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로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 하지 아니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큰 재앙을 당했는데 그가 무슨 범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범죄는 낙망과 원망입니다. 그러나 욥은 낙망도 원망도 안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그대로 거두어 가신 것뿐이고 사람은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재물이란 없애고 죽으나 죽어서 못쓰나 마찬가지인즉 거기에 동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죽은 일에 대해서도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으로 끝났을 뿐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셨은즉 어찌하랴” 하는 마음으로 당당히 위로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욥은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마 10:37). 하나님은 그런 욥을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사탄은 그럴듯한 이의를 붙였으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고 시인하지 않았으니 사탄은 영원한 거짓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 8:44). 그러니까 “진리는 영원히 진리다”라는 확신을 가지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진리다”하는 사람은 다 성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님들은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꼭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는 진리의 말씀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역경과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참된 분이시라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조상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사탄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속이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또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을 싫어하셔서 그 선악과를 못 먹게 하는 것이라”고 유혹하였지요. 결국 사탄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지 않은 것이 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성격의 타락에 베드로도 흔들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1:21~23). 그 유혹이 바로 성경을 의심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아닌 것을 크게 중요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모자라게 주시지 않았습니다(요 21:25). 더 주실 필요가 없어서 66권으로 끝내신 것입니다(계 22:18~19). 우리 주위에는 성경 아닌 것을 경전으로 하여 종교의 이름을 갖고 포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봉하는 성도들이 종교인이라는 차원에서 연합을 시도하는 것은 참으로 안된 일이요,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로 구원 받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를 종교라는 이름에서 빼버리고 차라리 “성경 제일주의 단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2) 역경과 믿음에 관한 교훈인데 외식하는 사탄은 인간이 복을 먼저 받은 다음에 그 복 받은 값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선호하고 그렇게 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도 복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복 떨어지면 경외도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생각을 지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이고, 사탄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탄의 것이지요. 욥에게는 기복주의가 없었습니다. 만일 욥에게 기복주의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복을 다 거두어 가셨을 때 “내가 복 받자고 하나님 믿었는데 복을 다 뺏어 가신 바에야 무엇하러 믿겠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적신으로 나왔고 또 적신으로 갈 것이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즉 하나님은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고 믿고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하였으니 이 신앙은 축복과 관계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은혜로만 사는 존재인즉 자신의 고난이나 상황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는 것이 욥의 신앙이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86과 정상에 서는 법 (욥 8:1~7)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정상에 서는 법”이란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사 40:9에 보시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성도를 의미함)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상에 서는 법”이란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일 뿐 가장 높은 자가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정상에 서면 좋다는 뜻입니다. 미국인 지그지글라씨가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을 내서 본 일이 있는데 그 내용의 뜻은 “노력을 잘 하여 성공하라”는 뜻입니다.

1. 그러면 성도들이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은 “내가 무엇에 대하여 정상에 서지 못했는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정상”이란 뜻은 가장 높은 자 되는 뜻이 아니고 “정착된 생활에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을 이리 저리 살피면 우선 지식도 모자라고 건강에도 문제가 있으며 도덕성은 물론 물질적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문제되는 것이 많지요. 그러나 이것을 한 개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두 가지 정상에 올라야 하는데 한 개의 열쇠란 하나님께로 나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하는 것이고(다른 방도는 없음), “두 가지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스스로 확립할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과 또 하나의 정상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덕을 세우며 살 수 있도록 자기의 기반을 닦는 것입니다.

1) 지금 많은 성도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처럼 성경을 갖고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에 의존해야 되고, 교회 생활에 의존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교회를 멀리 하도록 성경과의 관계를 확립하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 없는 곳에 혼자 있을지라도 성경만 있으면 된다”는 신앙을 확립하셔야 신앙적인 면에서 정상에 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상에 서신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전도사다” 생각하시고 성경 연구를 계획적으로 시도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2)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열쇠로 풀어야 할 과제는 성도의 이웃과의 관계인데 지금 성도가 이웃에게 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성도는 어느 위치에서나 덕을 주는 입장에 서야지 덕을 보려는 입장에 선다면 그것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원수라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을 물질로서 표시할 때는 내가 그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때 자기의 책임이나 덕을 이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정상에도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 생활수준을 의미하는 것인데 사치나 과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이웃에게 사람 노릇하고 덕을 세우기 위한 대책으로 생활수준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1년에 두 세 차례 고향엘 가지만 고향의 친지들을 만나 인사를 못하고 옵니다. 그 이유는 적어도 열 세대 정도에게 선물을 가지고가야만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벌초하는 수고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연구 중인데 1000만원을 저축한 이자로 벌초를 하고, 또 1000만원을 저축한 이자로(부조금 갚는 것을 빼고) 고향 방문비를 쓰면 그것으로 정상에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연구 중입니다. 그 외에도 돈 나가는 일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성도가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열쇠를 가지고 신앙에 관한 것과 생활에 관한 것 두 가지를 반드시 정상에 올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이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교훈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욥은 재물과 자녀들과 종들과 명예를 다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질병으로 고난과 탄식이 가득차 있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빌닷”이 와서 심방 설교를 한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은 오늘날 바닥에 있는 성도들이 일어서서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나중이 심히 창대해지는가? 하면

1) 탄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비참해졌지만 2절에서 “어느 때까지 이런 말(탄식)을 하겠느냐 네 말은 광풍과 같구나” 하였으니 광풍이 무익한 것처럼 탄식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하나님은 재판이나 공의를 굽게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성도가 왜 탄식하겠습니까?

2)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욥이 죄 없다고 장담하면 자녀들의 죄라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절에서 “네 자녀들이 득죄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그런 고난을 주셨는지 살펴야 할 일이 아니냐” 하였으니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고난에서 일어서야 할 형편이면 회개하는 일부터 철저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되도록이면 불법이나 죄를 안 짓는 방향으로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한 다음에는 5절에서 “부지런히 구하고 전능하신 이에게 빌라”고 하셨습니다. 마 7:7과 겔 36:37에서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은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우선 필수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세심하신 분입니다(마 12:20, 막 8:1~3, 12:41~44, 요 6:12). 자초지종 기도를 꾸준히 힘쓰시기 바랍니다.

4) 청결, 정직, 의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남을 속이려 하거나 불법을 안 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죄가 섞이면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과일을 샀는데 속에는 나쁜 것만 있고, 땅콩을 한 홉 샀는데 그 되 안에 널판을 댔더군요. 왜 이렇게 속입니까?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줄 압니다. 그렇게 돈 벌면 복 되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구하는 것”도 일종의 근면입니다. 근면과 땀으로 돈을 벌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5) 미약한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권 당첨을 바라지 말고 100원, 1000원을 저축해서 재산을 모아야 합니다. “시작이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해진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시작하고 꾸준히 행할 때 나중이 창대 하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상의 다섯 가지 방법을 잘 실천하셔서 영적으로, 생활적으로 정상에 오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7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욥 13:15) 목록으로


본문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12:1). 그런데 이 내용은 개역 성경에 두 가지로 번역이 되기 때문에 번역대로의 내용도 살피셔야 하고, 또 왜 이렇게 번역의 차이가 생기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보셔야 합니다. 말씀에서 깨닫는 교훈도 중요하지만 또 말씀을 연구하는데 재미를 갖는 것도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을 보시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이 말은 욥이 고난을 극복해 보려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힘썼지만 아무 효험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데려가시기로 작정하신 줄 믿고 그 뜻에 복종하려고 결심한 내용입니다.) 그래서(나는 이 세상에서) 더 살 소망은 없다 그러나(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는가에 대하여 그 분(즉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선하게 산 것)를 변백할 것이라” 하였으니 여기의 변백이란 뜻은 “하나님께 여쭙고 이유를 알아보겠다”는 뜻입니다. 좋은 신앙의 고백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성도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거나 회개를 해도 여전히 고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 한다”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다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알아 볼 것이라는 믿음이 귀한 것인즉 잘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번역문은 각주에 나타난 대로 “그가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 (장차)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할 것이라” 하므로 하나님이 욥의 생전에 복을 주시지 않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다가 그대로 죽이신다 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좋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성도가 고통을 당하면서 죽을 지경에 있더라도 계속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고난 중에 인내하는 믿음을 귀하게 보셔서 은혜를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왼쪽 어깨 통증(50견)으로 약 8개월 고생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침 맞는 것을 주저하여 운동 요법으로 고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 2개월쯤 고생할 때에 아는 분을 통해서 오가피진액을 받아먹게 되었는데 그 약이 어깨 통증을 낫게 하는 좋은 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약 7개월쯤 고생하며 약을 먹었는데도 잘 낫지 않았는데 그 때에 저는 바울 사도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란 것을 생각했습니다(고후 12:7~10). 과거에는 그 가시의 의미를 바울의 안질로 이해를 하였으나 제가 어깨 통증을 경험하면서 그 가시가 바로 50견 같은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50견이 바로 어깨에 가시 박힌 것과 꼭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도 필요하여 가시를 주신 것이니까 “나도 바울 사도처럼 이 고통을 뽑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여서 우선 겸손에 힘쓰고 고난 중에 또는 부족함이 많은 중에도 감사를 힘쓰며 하나님이 나의 약한 중에서 능력이 머물러 계시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하고 감사하면서 견뎠더니 약 20일 전부터 그 가시가 점점 빠져 나가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 준비하기 전에 그 병상 일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고난 중의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면 죽자하고 섭리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순종하는 신앙을 보시고 오히려 낫게 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의 신앙이고, 바울의 신앙 아닙니까?

2. 다른 번역 성경도 참고 해 보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분 앞에서 내 행위를 변명 해야겠다” 하므로 개역의 원문을 따르되 변백을 변명으로 고쳤고, 공동 번역에서는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 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 하였으니 여기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한 하나님의 뜻을 수동으로 받아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이라 하였고, “소망이 없노라” 하는 뜻은 하나님의 무응답으로 살 소망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한 것은 욥 스스로 현실 전체를 바라지 않는 뜻으로 표현하였으며 행위를 걸어 온 발자취로, 변백을 “낱낱이 밝히는 것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내용의 이해도 필요하지만 원문과의 관계를 더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To days English Version이란 영문 번역서를 찾아본즉 “The Best hope so what if God kills me I am going to state my case to him"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개역 본문 그대로와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변백을 진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고난 극복의 방법을 배우셔야 하는데

3. 왜 그런 이중 번역이 나왔을까요?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의하면 원문 글자의 점 하나가 있는 것이 맞는지 없는 것이 맞는지를 판단할 수 없어서 두 가지를 다 번역하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에 “로”라는 같은 발음의 글자가 있는데 그 글자의 모양을 “אל”로 보면 “없다는 뜻”이고, “ןל”로 보면 “그에게”라는 뜻이 되어 두 내용을 다 사용한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 일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도 배우시고 성경도 자세히 연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제88과 고난 중의 욥 (1) (욥 23:1~9) 목록으로


“욥이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받은 사실과 그 고난 중에서 신앙적 처신을 잘 하여 모범이 되고 더 큰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친구의 방문을 받았고 친구 “엘리바스”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손을 깨끗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22:29~30). 고난 중의 욥이 겸손하지 못하여 응답을 못 받거나 아니면 손이 깨끗지 못한 죄(손으로 범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줄로 알고 권면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여러 말로 권면했을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권면(죄와 회개)은 욥에게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권면에 대하여 욥이 대답하기를

1. “나는 오늘도 혹독히 원망한다 나의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 하였으니 여기의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은 고난에 비하여 탄식을 적게 한다는 뜻이고, “혹독히 원망한다”는 말씀에서 원망(시아크)이란 말을 근심이나 수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는 주석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고난 중에서라도 원망이나 탄식을 몹시 자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은 대체적으로 죄 값(22:30, 벧전 2:19)이고, 죄 값 아니면 연단(고후 12:7, 벧전 1:7), 연단 아니면 섭리(욥 1:12, 요 11:4), 또는 믿음으로 인한 핍박(행 14:22, 마 24:22, 딤후 3:12, 마 5:10) 등이 원인인데 여기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본래 인내하는 사람입니다(약 5:11). 괴로움이 혹독하였지만 하나님도 원망하지 않았고(1:21~22), 탄식도 크게 자제하였던 것입니다.

2. 욥은 고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찾을고”한 말씀에서 욥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였고(기도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줄로 알고 있었으며 우선 하나님을 만나면 고난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하기 전에 왜 자신이 그런 고난에 처해져야 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소에만 임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고 무소부재하시지만 그 당시에 욥의 신앙 지식으로는 제사 드리는 장소에만 오시는 줄로 알았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을 만나서 해결하려고 한 것인데 이것은 곧 기도의 응답으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 전화가 귀할 때는 전화 있는 집에 가서 건 예가 있지만 지금은 무선 이동 전화 시대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연결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과 24시간 통신이 열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하나님과 통하시라는 뜻입니다.

3.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실 때 진노하는 뜻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내게도 그렇게 하실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욥 자신은 크게 책망 받을 일을 저지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즉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진노하시거나 다투려 하시지 않고 내 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의 또는 진노의 하나님으로 알기 전에 자신에게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으로 대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믿음대로 되라” 하셨으니까 그대로 나타나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6절의 “그가 큰 권능(때리는 권능)을 갖고 나와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하였으니 마치 부부 싸움을 하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중 상태 살피기를 힘쓴 것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긴밀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감정도 풍부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친교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인즉 하나님의 뜻 살피는 일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4. 욥은 정직한 자의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7절에서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다” 하였는데 여기의 거기란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를 일컫는 것입니다. 욥은 13:15에서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정직한 영으로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정직한 자란 욥 뿐 아니라 진실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그 앞에 호소한다” 하였는데 이 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할 말을 다할 수 있고, 연약한 입장에서 호소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충분한 시간을 주시면서 모든 하소연을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따뜻한 영접입니다. 제가 어떤 치과에 가서 치아 상태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그 분이 미국 유학 다녀 온 변장로인데 “목사님 치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제가 더 아는 전문의인데.....말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쁜 시간에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대서방이나 변호사 앞에 가서도 할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울 만큼 할 말을 다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거기에 적절한 대답으로 깨닫게 해 주시니 이렇게 될 때에 모든 궁금증은 풀릴 것이고, 마음에 큰 휴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오랜 기간 응답이 안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 변백한다고 하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대부분 응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분량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백을 한 후 7절에서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난다”는 뜻은 죄가 있어서 고난당한다고 말하는 주장이 영영히 기각될 일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죄사함 받고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벌 받는 심판대에는 서지도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심판자에게서 멀리 떠날 것을 피력한 것입니다.

5. 또 “전후, 좌우 또는 왼편, 오른 편에서 일하시고 돌이키시나 만날 수 없다”는 뜻은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자연 현상의 계시 등을 통해서 주변에 나타나고 있지만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안 하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응답을 안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목적과 기한을 두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욥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호소한 것은 잘 한 일이고, 좀 더 기다리며 인내하면 될 것이란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제89과 고난 중의 욥 (2) (욥 23:10~17) 목록으로


앞에 있는 말씀에서 고난 중의 욥은 ① 고난만큼 탄식하지 않았고, ② 하나님께 천국에서 변백하리라 하였으며 ③ 하나님의 뜻(심정)을 깨달으려 노력하였고, ④ 긍휼하심을 믿었으며 ⑤ 공의로우신 심판자의 손에서 반드시 벗어날 것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계속 됩니다.

1. 욥은 고난 중에서 “나의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길”은 인생의 길이고, 사람이 어떻게 쓰임 받고 얼마큼 사느냐 하는 문제를 하나님이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바울을 인도하신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유익하도록 인도 하신다”고 하셨지요(사 48:17).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욥처럼 고난이 있든지 없든지 전폭적으로 맡기셔야 하겠습니다(시 37:5).

2. 하나님이 자신이나 성도를 고난으로 단련하시는 것이 있으니 그 단련을 받으면 “(믿음이) 정금처럼 귀해진다”고 믿어 거기에 소망을 두었던 것입니다. 어느 때 저의 집에서 아래층 물을 쓴즉 물이 적게 나온다 하면서 불편을 말하기로 나는 즉시 옛날에 저의 어머니가 우물 먼 집에 사시면서 질그릇 동이에 물을 이어 나른 것을 기억하였고, 즉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등잔불 쓰던 자가 전등을, 나무 지게 지던 자가 도시가스를 쓰는 세상에 무슨 불편이 있습니까? 차라리 자연을 벗 삼고 전기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여유로운 마음은 오직 연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연단 적은 쇠가 좋을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을 적게 맛 본 성도의 신앙도 강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강한 군사는 훈련을 많이 시키지 않습니까? 고난이 있을 때는 연단을 생각하십시오.

3. 욥은 11~12절에서 자기 반성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내가 무슨 죄로 고난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어겼을까?” 하고 자기 반성을 해본즉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을 치우치지 않았고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양식보다 중요히 여겼다” 하였으니 반성해도 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고난을 회개의 기회로 삼는다면 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견비통(50견)으로 8개월 고생하였습니다. 늦게 깨달은 것이 “내 아픔도 하나님이 바울 사도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 같은 성격이라”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대로 처방하려고 노력한즉 2~3주 만에 나았습니다. 왼쪽 팔이 훨씬 가늘어져 있습니다. 고생한 증거지요. 그러나 깨닫고 은혜 받고 나았습니다. 연단의 덕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4. 욥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려고 하였습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신즉 누가 그를 돌이키겠는가?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의지대로 자기의 일을 이루실 것인즉 욥에게 작정한 일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하므로 자신이 받는 “고난을 돌이켜달라”하는 것보다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 없이 일하시겠습니까? 운동선수를 만들려면 훈련 계획이 있는 것처럼 욥에게 고난을 주시고 견디게 하시며 깨달음과 상급을 주시고 많은 고난자들에게 연단의 교훈을 주시면서 또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진리란 것을 사탄을 대항하여 증명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즉 그런 계획에 자신을 맡기고 부탁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 것입니다.

5. 복종을 하자니 계속 아픔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하나님) 앞에서 떨며(닥쳐오는 아픔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한다” 하였고, 이 아픔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낙심케 하시며.....또 두렵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픔에 견딜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두려움과 탄식과 낙심을 갖지만 그것이 고난의 분량만큼 따라 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23:2).

6.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감사한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긍휼을 믿은 것은 앞부분 6절에서도 나타난 것처럼(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에게 다툼의 자세로 노여워하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긍휼하신 낯으로 내 말을 들으실 것이라고 믿은 것) 본문 17절에서도 (내가 아무리 괴로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않으셨고(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놓지 않는 것임) 또 흑암으로 나의 얼굴을 가리우시지 않으셨다” 하였으니 여전히 은혜의 선상에 있음을 나타내면서 감사를 한 것입니다. 여기의 “어두움을 주고 흑암으로 얼굴을 가린다”는 뜻은 그대로 소망 없이 죽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울함 당한 인생은 정의를 붙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놓지 않은 것인데 여기의 과거형(....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끊거나 흑암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을 미래 확신의 강조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니까 흑암이 덮여 있어도 내세 심판 때는 다 벗겨 주실 것으로 믿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현세 소망, 내세 소망을 다 믿는 해석이고, 후자(과거형을 미래 강조형으로 믿을 때)는 내세에서만 승리를 믿는 신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과적으로 현세에서도 빛을 보았으니까(42장) 욥의 희망적 신앙은 현세와 내세를 다 종합한 것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 이해하시는 성도님이면 어떤 고난이나 불행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90과 하나님을 만나야 함 (욥 23:3~5, 8~9) 목록으로


3절을 보시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고난 문제에 대하여 변론할 생각인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도 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으며 분명히 하나님이 왼편에서 일을 하시는데 만날 수 없고,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는데 뵐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형편을 보면 우선 장소를 선호하였고, 보이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신 것을 모를 수 있으며 천사로 나타나 주시는 하나님을 선호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방법은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주시지 않더라도 계시나 기도 응답으로 고난이 해결되면 만나주신 줄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지지도 않고 응답 되지도 않으니까 답답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하나님이 영으로 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고(요 1:1, 4:24) 무소부재하신 것을 아니까(신 4:39, 수 2:11, 시 139:7~10)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부를 수 있지만 구약 시대에는 아무에게나 쉽게 나타내 주시지 않았습니다. 혹 제사를 받으실 때 징조나 계시로 선지자들에게만 나타내 주셨으니까(창 8:20, 9:16, 행 17:24, 대하 6:21, 33) 욥도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인데 그 중에도 욥은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기 위하여 특정 기간 동안 문을 닫으셨기 때문에 더욱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은 성경에 접하고 기도 응답을 받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를 아셔야 하겠지요.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존재하신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요 14:6). 또 마 28:20에 보시면 “항상 성도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함께 하시는 정도가 “거처를 같이 한다”(요 14:23) 또는 “성령님이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다”(고전 6:19) 또는 “말씀과 성령님이 심령에 거하신다”(엡 3:17, 5:18) 하셨으니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내 속이나 가까운 곳에 말씀과 성령으로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은 친교적으로 상대해주시고 간섭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서 사는데 서로의 대화도 없고 예절도 없으며 아들이 “아버지”하고 불렀으나 아무 대답 없이 주무시기만 하고 간섭도, 도움도 안 준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만남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줄 알고 “주여 주여” 하였는데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시고 간섭하시지 않았다면 역시 욥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 같은 형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가까운데 하나님도 되시고 먼데 하나님도 되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렘 23:23).

2. 성도가 일단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느 장소에서나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만나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깨달음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껴지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은 길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한 길로만 다니시는데 내가 공평치 못한 길에 섰다면 만나지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잠 8:20). 그래서 믿음과 생활의 일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 45:15에 보시면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다” 하셨고, 또 성도에게 죄악이 있으면 “손을 펴고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신다”(사 1:45)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개하면 탕자라도 기쁘게 영접하시고(눅 15:20) “나 여기 있다” 하시고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58:9). 여기에서 하나님이 숨으시거나 만나주시지 않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바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을 마 7:7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하셨고, 행 17:27에서는 “더듬어 찾아야 하며”, 대하 16:9에서는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회개뿐만 아니라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겔 36:37에서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라도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은밀한 처소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마 6:18).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여 결론을 맺으면

1)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또 가까운데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고,

2)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데는 성경이 제일이란 것을 믿으셔야 하며(요 5:39)

3) 구약 시대에는 만날 만한 때를 말씀하신 일이 있으나(사 55:6) 신약 시대는 그렇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집 대문이 열렸다고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열리지 않고서야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 하시고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없겠지요(눅 18:1, 살전 5:17). 그러니까 식사하다가도 기도할 수 있고,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서 성경을 보며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못 만난다”는 것은 신약 시대에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나 여기 있다” 하시고 나타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응답이 안 되고 더딜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길을 잘못 섰거나 하고 있는 일이 다르거나(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는 뜻) 회개하지 않았거나 찾고 두드리는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응답이 더딜 수 있고, 또 희귀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작정하신 기간 닫힐 수도 있으니까 그런 정도는 연단의 기간으로 믿고 기다리셔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내 문제를 목사님께 까지 가서 부탁할 필요 없이 내가 나의 하나님께 직접 부탁하는 것이 제일 쉽고 편리한 길이야”할 정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만나는 성도가 되신다면 참으로 좋은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제91과 연단의 과제들 (욥 23:10) 목록으로


“욥”은 고난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고난으로 연단시키시는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시키신 후에는 자신의 믿음이 정금처럼 귀하게 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에 연단에 대하여 주신 말씀이 많고, 또 귀하게 쓰시는 사역자일수록 연단시켜서 쓰신 사례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환난과 인내가 연단과 소망을 준다” 하셨고(롬 5:4), 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안다” 하셨으며(빌 2:22)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연단을 받을 때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된다” 하셨고(히 5:14), 베드로 사도는 “탐욕에 연단된 자가 있으니(벧후 2:14) 불로(환난) 연단을 받아야 할 것이라” 하셨으며(벧전 1:7) 사도 요한도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고 하셨습니다(계 3:18). 또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시면 요셉은 가정 연단 외에 객지 생활로 13년을 연단 받았고, 모세는 왕궁 연단 40년, 서민 연단 40년을 , 여호수아도 모세 밑에서 40년간 연단을 받았으며 다윗은 사울이 왕노릇 하는 동안 40년 연단을 받았고, 바울도 변화된 후에 아라비아와 고향 다소에서 연단을 받았으며 디모데도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정 중에서 연단을 시켜서 후계자를 세웠습니다. 연단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히 12:11을 보시면 “성도가 징계로 고난을 받아도 그것으로 연단을 받으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 사회 생활이 곧 연단인 줄로 아시면 좋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단의 과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연단은 연습, 훈련, 경험, 배우는 것, 고난 극복 등으로 연마하는 것인데

1. 성품 연단입니다. 죽어도 자기 성격을 못 고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셨고(마 11:29), 믿음의 좌소는 마음인데(약 1:21) 옥토 같아야 하고(마 13:23), 청결하고 착하며 진실된 마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1:5). 하나님은 모세의 온유한 마음을 연단시키셨습니다(민 12:3). 그런데 한 번 온유를 떠났을 때 직위 해제시키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민 27: 12~19). 성도가 온유한 마음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것이고(민 27:14), 또 “망령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시 106:32~33). 그래서 온유 연단을 받으려면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날마다 죽이면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31), 예수님도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성품이 유순하지 못하니 매일 가슴치며 연습하고 연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받으셨고(눅 4:29), 가다라 사마리아에서도 배척 받으셨으며(마 8:34, 눅 9:54) 또 제자였던 유다의 배척을 받으셨고(마 26:48), 더 중요한 것은 빌라도가 정죄하여 사형 언도를 내릴 때도 온유와 선한 말씀을 나타내시므로(딤전 6:13) 온유,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았을 때 “무시당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연습이고, 연단입니다.

2. 경건의 연단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딤전 4:7). 예배와 관련된 모든 일이지요. 주일 지키는 일, 시간 지키는 일, 성경 공부와 예배에 참석하는 일, 찬송을 열심히 부르고 설교를 정신 차려 들으며 기도에 공감하고, 헌금 봉사에도 인색하지 않으며 회개 잘 하고 충성하는 것이 다 경건에 속한 연단입니다. 아직도 예배 시간 3~5분을 인색하게 쓰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집회 시간 4시간을 견뎌 보았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짐을 덜어 드리려고 예배와 성경 공부를 합해서 1시간 이상 소요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듣는 연단도 필요하고 헌금 봉사도 연습하세요. 제가 예배당 짓는 일로 헌금 연단도 받았는데 그 결과는 “내 집에 와서 예배드려라” 하는 것입니다. 경상비 약한 교회 생활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경상비 주인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교회 살림 다 할 수 있으니 여러분들은 내 집 교회에 나와서 믿음만 키우고 선한 사업이나 물질 사업은 스스로 알아서 하시라”는 것입니다. 독촉, 강요는 금물입니다. 연단을 받으니까 그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하고 하는 기도도 연단을 받으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다 수용됩니다. 경건 연습을 많이 하시면 의식이나 제도에서도 크게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가 사역은 하되 명예나 물질 소득이 없는 교회를 하려고 꿈을 꾸는 것입니다.

3. 세속을 멀리 하는 연단입니다. 세속을 멀리 해야 한다는 말씀은 요일 2:15과 약 4:4과 갈 5:17과 빌 3:8에서 강조하셨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 줄은 끊어진다, 그것이 심하면 (세상과 벗됨) 하나님과 원수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첫째는 현실적 사치 향락에서 떠나야 하고, 다음에는 산다는 것 자체를 나그네로 생각하셔야 하는데 기와집 지을 꿈을 버리지 못하니 이것도 연단 받고 교육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송가 534장 4절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 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 가리” 큰 풍파가 일어나면 세상 줄을 끊어야 하는데 더 살려 하고 더 애착 갖고 생명 보험 드니까 세속을 멀리 하려면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도마처럼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요 11:16) 세상을 멀리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4. 고난을 견디면서 기다리는 연단입니다. 하나님은 견디는 은혜도 주십니다(고후 1:6, 6:4, 골 1:11). 기다리는 것도 인내의 은사이구요. 믿음 생활에는 안일보다 고통이 따르고(행 14:22) 특히 말세에는 “죄가 많음과 동시에 고통 하는 날도 많다”고 하셨습니다(딤후 3:1). 하나님은 견디는 연습을 은혜로 주시는 분입니다(렘 12:5, 롬 5:3). 그러니까 견디고 기다리는 연습도 하시고,

5. 마지막으로는 사랑 실천의 연습을 하시는데 누구나 연고자 사랑은 잘 하니까 무연고자를 사랑함에서 미운 자 또는 그 이상의 미운 자에게로 확대해 나가는 연습을 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연단을 잘 받아 정금 같은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92과 욥의 반성과 재판 (욥 31:1~40) 목록으로


욥은 고난 중에 있으면서 죄에 대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성도가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내 죄에 대한 징계를 주셨는가?” 하며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흔하지 않으나 있는 일입니다. 흔하지 않다는 것은 많은 성도가 무슨 죄에 대하여 지적을 받을 때 좋아하지 않거나 변명 또는 반항하는 일이 있고, “내가 회개할 것이니 내 잘못을 지적해 주시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올라서서 “자신이 그런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하고 자신을 재판하는 재판관 입장까지 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후 7:11을 보시면 바울 사도께서도 “성령으로 하는 근심은 자신을 벌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욥의 생활을 본받아 반성과 스스로를 벌할 줄 알고 회개를 힘쓰는 생활을 하셔야 할 줄 압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욥이 자신의 죄를 열 가지로 반성하고 “얼마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1) 1~4절에서 이성(처녀)을 주목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음행인데 만일 욥이 그런 음심으로 처녀에게 주목을 했다면 “분깃과 자기 사업이 없어져야 마땅하고 불의한 자는 환난을 행악자는 재앙을 받아야 한다” 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길을 감찰하시고 자기의 걸음을 다 헤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고 걸음을 헤아리시는 만큼 성도가 길 가다가 마음과 눈으로 죄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5~6절에서 “허탄한 행위, 궤휼한 행동”을 반성하였습니다. 허탄한 것은 현세욕이고, 궤휼은 진실치 않은 것입니다. 만일 자신에게 그런 죄가 있다면 마땅히 공평한 저울(하나님의 심판)에 달려 벌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정직을 알아주시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3) 옳지 못한 행위입니다(7~8절). 정도를 벗어나는 것, 자기 정욕대로 행하는 것(걸음이 길에서 떠나고 마음이 눈을 따르며 손이 더럽게 행함)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자기 농장의 곡식을 타인이 먹고 소산이 뿌리채 뽑히는 재앙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고,

4) 어떤 여인을 연연하여 유혹하는 행위인데 그런 죄는 중죄에 속하는 것이라 벌을 받되 “자기의 처가 타인과 동침함이 마땅하고 재판장을 통하여 벌을 받되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큰 불)로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5) 종을 멸시하는 죄, 즉 인권에 관한 죄입니다(13~15절). 만일 종들의 사정을 일방적으로 멸시하였다면 이것은 인권에 관한 죄인즉 “자신과 종을 사람의 태속에서 만드신 하나님께 무엇이라 답하겠느냐?” 하였고,

6) 또 가난한 자(과부, 고아)를 멸시하였다면 “자기 어깨뼈가 빠지고 부러지는 것이 마땅하다”(16~23절) 하였으며

7) 24~26절에서는 “은금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의뢰하며 거기에 기쁨을 두고 또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면 역시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지은 것인즉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며

8) 미운 자가 재앙 받는 것을 보고 은근히 기뻐하는 죄를 범한 일이 없고(29~30절),

9) 나그네를 서운하게 보낸 일이 없은즉 이는 그 집 종들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 없다”고 증언하는 바이며(31~32절)

10) 33~35절에서는 “큰 무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증언을 하지 못하고 피한 일이 있는가?할 때 역시 그런 일이 없고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으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다“ 하므로 증언에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11) 자기를 고소하는 자가 있다면 기쁘게 응할 뿐 아니라 그 소송장을 면류관처럼 여기고 사실을 진술할 것이며(내 걸음의 수효를 고함) “그를 왕족처럼 대할 것이라”(35~37절) 하였으니 이런 태도는 오늘의 타락한 사역자들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12) 38~40절에서는 “경계선을 침범(토지 이랑 이움) 하였거나 타인의 재물을 떼어 먹은 것이 있다면 자기 밭에 밀이 찔레로 변하고 보리 대신에 잡초가 나야 할 것이라”하므로 재물의 결백에 대하여서도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죄는 온갖 불행의 원인인즉 고난이 있을 때만 반성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늘 반성하고 회개하셔야 할 것이요, 대중 앞에 죄가 드러났을 때는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거나 관대한 처분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며 또 자신의 죄를 인하여 소송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그를 존경하면서 회개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 욥의 태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마지막으로 성도 자신들이 반성할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입니다.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놀기를 좋아하거나 과소비, 유흥이나 예절의 모자람이나 게으르고 정결치 못한 것이나 이기주의나 약속 또는 시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과하지 않는 것이나 교회 생활을 명예적으로 하려 하거나 자기 의견만 관철시키려 하거나 성경 지식이 부족하거나 봉사에 인색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하는 등 반성할 일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적 반성이 필요할 줄 압니다. 바른 삶일수록 피곤하겠지요. 그래서 성도는 속히 안식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목적 없이 또는 유익 없이 누리게만 하실 분은 아닐 것입니다. 누리는 것도 목적과 부합되어야 하겠지요. 목사가 축도를 하고 뒤로 걸어가는 시간에 교인이 가버리는 예가 있지요. 그 분들은 인사도 안 하고 가는 무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가정에 심방 갔을 때 기도하는 시간에 과일을 준비하여 깎는 가족도 있습니다. 기도는 한 마디까지라도 중요하고 또 합심 기도가 중요한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또 저희들 세계에서 잘못된 고정관념도 많다는 것을 아셔서 항상 배우는 일과 깨닫는 일과 회개하는 일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셔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93과 욥기의 결론 (욥 42:1~17) 목록으로


1. 욥은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에 동방 우스땅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가 받은 영광이란 가족들과 종들과 많은 재산과 존경 받는 명예를 누렸고, 항상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욥과 같은 성도가 계시겠지만 그처럼 결백한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욥은 2차에 걸쳐 큰 재앙을 받았습니다. 1차에는 욥과 처만 남고 존귀까지 다 없어지는 재앙이었고, 2차 재앙은 병든 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1차 재앙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2차 재앙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변한 일은 없지만 탄식은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욥처럼 고난을 당한다고 할 때 죽기까지 “주여 주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3. 욥이 고난을 당하니까 그의 친구(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사람이 와서 많은 말로 권면하였고, 욥도 그 권면에 응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의 권면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공의를 역설하면서 욥이 죄가 있거나 숨긴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인즉 “깊이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욥은 그럴 만한 죄도 없으려니와 많이 살피고 반성을 하지만 그럴 만한 죄가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흐르고 고난은 계속 되었으니 여기에서 욥은 죽지 않으니 참을 수밖에 없고 고난이 심한즉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 5:11에 보시면 “욥의 인내”란 말씀이 있고, 고전 14:4, 7에서는 인내가 사랑의 열매라 하셨으며 또 갈 5:22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도 하셨고, 롬 5:3에서는 “인내가 연단의 도구”라 하셨은즉 고난과 인내를 은혜로 받아들이면 정금 같은 믿음의 열매를 거두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과 인내를 은혜로 여기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4.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우면서 회개할 것을 권면한 것이 진리임은 사실이나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은 것인즉 욥 자신이 고난의 원인을 모르는 것과 같은 성격이요, 사람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오묘 막측한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기다리는 일을 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얕은 지식으로 원인을 알려고 애쓰다 보니 불필요한 논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권자요 섭리자이며 광대 오묘하신 분인즉 공의 아닌 뜻으로도 고난을 주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욥 23:3에서 욥은 하나님 만나기를(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기를) 사모하였으나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다가 인간의 어리석은(원인 파악을 못하는) 토론 기간이 지난 다음에 38장부터 말씀 계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욥은 굉장히 반가웠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성경 연구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욥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큰 권능을 갖고 나타나셔서 나와 더불어 다투시지는 않고 내 말을 들으시리라” 하였는데(23:6)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38:1에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하셨으니 하나님이 위엄을 보이신 표현이고, 말씀을 많이 하시되 인간이 하나님과 변론(무엇을 따지는 행위) 하려는 자세 취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말씀하셨습니다. 38:2에 보시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시므로 욥과 그의 세 친구의 말 많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있었느냐?, 땅의 기초를 무엇에 세웠는지 알며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는지 아느냐?(38:4, 8),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했느냐?, 네가 바다 근원에 갔었느냐?,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38:12, 16, 19),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39:1), 타조가 알 낳는 지혜를 제가 주었느냐?(39:14), 들소가 어찌 네게 복종하며 외양간에 머물겠느냐?”(39:9) 하신즉 욥이 “나는 미천한즉 변론할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다” 하였으며(40:1~4) 그동안 말 많이 한 것을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40:5). 하나님은 “욥이 대답 못 하겠다”한 말을 들으시고도 40:6~41:34까지 계속 하나님의 오묘한 통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6. 결국 욥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영에 대하여 깨달았고, 자신이 무지한 말로 말한 것을 재를 무릅쓰며 통절하게 회개하였던 것입니다(41:1~6). 또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에게도 책망을 하시되 그들이 욥에게 해당되지 않는 권면한 것을 회개하게 하셨고(7~9절), 또 욥이 그들에게 축복하게 하셔서 화해하게 하셨으며(10~11절) 나중에 욥을 치료해 주시고 더 많은 복을 주셔서 140년을 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12~17절). 문제는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오묘하신 섭리자요, 주권자이시고 인간은 멀리 또는 깊이 알지 못하는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 맞서 변론할 자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왜 애굽에 가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지(창 15:10~14), 아이성 전쟁에 왜 패했는지(수 7:10~11), 다윗왕 때에 왜 3년 기근이 일어났는지(삼하 21:1), 여리고성을 건설한 히엘과 그 아들 스굽이 죽은 이유가 무엇인지(수 6:26, 왕상 16:34)”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 계획이 몇 백 년 전에 세워진 것인즉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난은 여러 원인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회개하는 일이요, 원인을 알고저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고, 아는 체 하거나 하나님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를 취해서는 더욱 안 되며 인내로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일에 감사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오묘하신즉 무조건 복종하고 기다리는 연단을 받으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믿음을 지키고 승리한 표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4. 절기 관련 설교


제94과 신년 맞이의 의미 (마 9:17) 목록으로


신년 맞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도들이 신년을 맞이하려 할 때 몇 가지 행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자정 예배가 있고, 또 어떤 단체에서 주관하는 신년 하례 행사가 있습니다. 새 출발을 잘 해 보자는 뜻으로 좋은 행사라 할 것입니다. 요즈음은 기독교 TV 방송이 있어서 신년 새 출발 예배나 절기 설교 등 수많은 설교를 대하게 됩니다. 대부분 설교가 다 비슷합니다. “새해에 희망을 가집시다, 뒤DPT것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새 출발 합시다, 죄를 청산하고 정의롭게 시작 합시다” 하는 취지의 설교를 접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돌이켜보면 망년회 술판이 많고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고함도 지르고 숭배의 뜻으로 합장을 하며 머리 숙이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추위를 극복하고 바닷물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양을 맞이하되 산에서 뜨는 해는 별 의미가 없는 듯 꼭 바다로 나가서 동해에서 뜨는 태양을 맞이합니다. 금년에도 경포대, 태백산, 정동진, 호미곶, 제주도 등에 인산인해의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우리도 한 번 정동진을 가자”는 의견을 내기로 저는 부정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정동진에 가자는 제의는 여행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려는 뜻이겠지만 연초에 태양을 바라보는 일에 동화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태양을 신으로 숭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음력 정월 보름에는 산에서 뜨는 달을 보고도 여러 가지로 숭배 행사를 하지 않습니까? 피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아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이라도 숭상하거나 의지의 대상을 삼지 마십시오. 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무엇을 맹세하지도 마십시오. 그 태양이 무슨 증거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밤을 새워 동해 바다에 나가고 시간과 비용을 쓰며 바다와 태양을 보는 것이 신년 맞이에 무슨 큰 의미와 유익을 주는 것인지 타산을 잘 해 보십시오. 저는 실용주의자라 타산에 맞지 않으면 잘 하지 않습니다. 제 평생에 태양을 보며 기도해 본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89년 2월 3일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뜨는 해를 보면서 십계명을 읽고 기도하였는데 태양이 뜨는 것과 기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신년이란 것은 달력의 주기가 바뀐 것 뿐 거기에 따라 나이가 한 살 더해지고 1년을 살았다는 뜻이며 또 살날이 적어진다는 뜻도 되지만 “땅은 영원히 있다”(전 1:4);는 말씀처럼 자연이나 태양은 아무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변해야만 신년 맞이의 뜻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선 성경에서 신년 맞이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을 몇 군데 찾아보았습니다. 히 3:14에 보시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 하셨으니 확실한 새 출발이 필요함을 교훈하셨고, 또 고후 5: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인즉.....새 것이 되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적 변화에 따라 새생활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빌 3:13~14에서는 “뒤엣것을 잊어버리고 앞엣것을 잡기 위하여 푯대를 향하고 달음질 하라”는 말씀인즉 과거 청산도 중요하고 앞을 향하는 목표도 중요한데 그 목표는 “위에서 주시는 내세의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청산도 잘 하고 시작도 잘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간의 본문 말씀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 술은 새해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새 부대는 그 목표를 향하는 달음질일 것입니다. 새 술은 발효(교)의 힘이 강합니다. 그래서 헌 부대에 넣으면 터질 수 있습니다. 새 술이 잘 보존되려면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올바른 목표를 올바른 방법으로 시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년 맞이의 의미를 어디에 두셔야 할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1. 과거(지난 해) 청산을 잘 하셔야 합니다. 죄 청산도 잘 하셔야 하고, 물질 청산 같은 것도 잘 하셔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공과금은 12월 31일까지 내라고 고지서가 나옵니다. 깨끗이 청산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작은 일 같아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또 새 출발의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책임이나 실수나 연약에 대하여 묵은 에 청산할 것은 반드시 청산을 하셔야 새 출발을 잘 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년 맞이에 한 것은 목욕이었습니다. 때를 없애지 않고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처럼 과거의 청산은 중요한 것입니다.

2. 신년의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빌 3:14에서는 목표를 정하되 “부름의 상을 목표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름의 상”이란 뜻을 다시 한 번 상고하면 “주님이 천국에서 나를 부르신다”는 뜻이고,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 참으로 초조하고 바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언제 부르셔도 천국에 가서 상 받을 수 있도록 목표를 세우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목표는 현세 영달의 목표가 아니고 신령한 믿음과 신령한 사명에 대한 목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년에 땅 사고 집 산 후 자동차 사야지”하는 목표가 아니고 대단히 고상한 목표입니다. 물론 현세적 목표도 필요하지만 순서를 세울 때 영적 생활을 앞에 두시라는 뜻입니다(마 6:33).

3. 이렇게 목표를 뚜렷이 세우셨으면 옆이나 뒤를 보지 마시고 앞만 보시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푯대만 향하지 않고 옆과 뒤(전통 의식, 인간 의식, 문화 의식 같은 것)를 보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년 맞이는 의식이나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거 청산과 영적 은혜를 추구하는 목표 설정과 새 출발의 생활이 중요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95과 삶의 변화 (신 30:19~20) 목록으로


해마다 연초가 되면 “새 출발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저도 “삶의 변화”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이성광) “새 출발의 목표”에 대하여 약 1:19~27을 읽고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은 더디 하며 더러운 것과 악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 마음에 심으며 실천에 힘쓰고 경건하기 위하여 정결과 구제에 힘쓰며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뚜렷이 기록된 말씀이지만 자세히 묵상하면 아주 큰 교훈을 주신다고 생각하여 다시 말씀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말에 주의하고 성내지 않는 것만 실천하여도 큰 변화요, 거룩함과 구제와 세속을 멀리 하는 것까지 실천하면 큰 도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변화를 갖고 싶으십니까? 반드시 변화 되어야 하고 변화를 이룩할 때 발전하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름을 “새 교회”라 한 것은 새로워지고 싶어서였습니다. 기성 교회 방법대로 나가면 새로워지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물량주의와 현실주의로 나가는 것을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확 뜯어 고치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되 목사가 깨달은 중심으로 시작해야만 가능한 것을 알고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님의 모범만 따르려고 힘써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성도의 단체인 교회가 등경 위에 빛처럼 바른 것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취약한 것이 성경을 신학적으로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사랑은 강조하나 교회나 성직자의 이기주의는 자제하지 못하며 세속과 물량주의를 부흥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고 진리를 높이지 않거나 기복주의, 신비주의 같은 것을 추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시정할 것들이 많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성도로서의 자기 책임을 이행하도록 가르쳐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새 출발하는 의미에서 삶의 변화를 가질 때 하나님은 “복과 저주의 두 길”을 제시 하셨은즉 성도가 살기 위하여 반드시 생명을 택하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인류 앞에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복이고, 사망은 저주입니다. 생명은 영생이고 사망은 지옥인데 이 사실을 “천지를 불러 증거 하심”은 하나님의 불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인즉(천지는 불변하니까) 반드시 저주에서 떠나 생명과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선택을 잘 하시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곧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네 가지 변화의 생활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대부분 두 가지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에서 하나를, 선과 악에서 하나를, 성공의 길과 실패의 길에서 하나를, 천국과 지옥의 길에서 하나를, 하나님과 인본주의 길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망하고 죽는 길을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처럼 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도 하는 것입니다. “담배 나쁘다, 도박 나쁘다, 방탕 나쁘다, 부정 부패 나쁘다”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와 국가의 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 기독교인은 구별된 백성으로 건설적인 사람들이니까 마땅히 변화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삶의 변화

1. 신앙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사 1:18~20에 보시면 “내 백성들아 하나님께로 나오라” 하셨고, “나와서 변론하자” 하셨으며 “하나님께 나오면 인간의 불행의 근본인 죄를 청산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의 근본 열쇠는 죄 청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겨 순종하면 평화와 소산을 주시고 거절하고 배반하면 전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변화의 생활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중심 생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신앙적인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2. 정의를 택하는 것입니다. 법에 걸리는 일이라면 피하시고 정도로 가는 길만 선택하셔야 합니다. TV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회사를 경영하는 집사가 세금을 철저히 내면서 운영을 하다가 파산이 되었는데 그 종업원들에게 깨끗이 인건비를 다 주고 망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종업원들이 그 집사 나오는 교회에 찾아 와서 등록을 하고 말하기를 “자기 사장님이 옳게 하고도 망하였기 때문에 믿음 생활을 중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기 때문에 자기들도 그 종교를 믿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그 목사님이 “정의롭게 하고도 사업이 망한 이유”를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금을 잘 내고 정도를 걸으며 망하였어도 낙심하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을 구원한 것입니다. 정의는 오로지 성공하는 길임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3. 인륜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법에 안 걸리면서도 부끄러울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예절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이지요. 신앙의 길은 신본적이고 정의의 길은 사회적이며 인륜의 길은 도덕성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위배되는 길은 부정하시고 도덕적 인륜의 길을 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생산성 있는 길입니다. 나의 하는 일이 목표(성공)에 덕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따져서 소모적인 길을 박차고 생산적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실리적으로 살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생명의 길을 택하여 삶의 변화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96과 자기 십자가 (마 16:24) 목록으로


여러분 “자기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셨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문제에 앞서 “자기를 부인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짐을 져야 하는 셈입니다.

1. 자기를 “부인 한다”는 뜻은 매사를 자기의 뜻이나 욕망대로 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실권 없는 종처럼 되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개성도 있고 취미도 있으며 욕망도 있는 것인데 자기를 부인해 버리면 이것이 다 없어지니까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대로 동이면 동, 서이면 서, 장소나 환경을 가리지 않고 복종만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사명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문제”부터 설명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르는 복음 사역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데 “광야로 가라” 하시니 그대로 갔고,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쓰는데 성령님이 “마게도냐로 가라”(행 8:26, 16:9) 하시니까 그대로 간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이나 목표나 취미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뜻을 못 펴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구 불만증이 생겨서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 것 같습니까? 그 방법은 오직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즐거움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진리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을 최고의 낙으로 알고 또 최고의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다 부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 부인을 다 못하니까 현세욕을 다 떨치지 못할 것이고, 자기의 욕구 충족을 조금씩 하려니까 진리에도 100% 만족을 못한즉 이 쪽도 부실하고 저 쪽도 부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만족하게 못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것”입니다(눅 9:62). 쟁기를 잡은 것은 사명에 선 것이고, 뒤를 보는 것은 자기의 욕망에 미련을 두는 것이지요. 그러면 쟁기가 바로 갑니까? 쟁기 잡은 자가 잠깐 한 눈을 팔면 쟁기는 바로 가지 않습니다(필자는 쟁기를 잡아 본 사람입니다.). 복음 사역자가 길 열리는 대로 사역지를 찾아가지 않고 만족한 조건만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고, 쟁기를 잡은 채 뒤를 보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사명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의 가족을 다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눅 5:11)는 말씀에서 일단 자기 십자가는 가족을 멀리 하거나 가족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일로 지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전도사가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면서 “나는 전도사일 때문에 부모를 못 모신다” 하니까 “그리하라” 하여 그 부모 모시는 십자가를 둘째 아들이 진 사실이 있습니다. 만일 둘째 아들이 없다면 두 노인은 아들 없는 사람처럼 노후 생활의 십자가를 스스로 져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빗나간 것입니다. 사명자가 부모 모시는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의 일도 해야 하고 효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 식구가 열인데 한 달에 200만원은 가져야 생활합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그들을 먹여 살렸는데 주님이 나를 사역자로 쓰시고 우리 집에 200만원씩만 주십시오” 하였다면 예수님이 어찌 하셨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인건비를 모아 놓고 사람을 쓰시지는 않았습니다. 열 두 제자에게 봉급을 주셔서 그 가족들을 부양하게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 돈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이 사역하고 축복하였을 때 “은혜를 받는 자가 대접하는 것은 받고 배척하면 발에 먼지를 떨고 나오라” 하셨고(마 10:8~13), “일꾼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니 이는 마치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과 같다”(마 10:10, 고전 9:9~10) 하시므로 사역자가 사역의 대가로 대접 받는 것을 마땅히 여기셨는데(딤전 5:18)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의 의식주에 한하였던 것이고(딤 전 6:8), 그것도 계약 조건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복음 사역으로 축복을 받는 편에서 자원하여 섬기는 것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잘 존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헌신을 하든지 가족 생계를 스스로 유지하게 하고 자신만 헌신을 하든지 미리 돈을 벌어서 가족 생계를 책임지면서 헌신을 하고 자신에 대한 생활은 성도의 자발적 사례로 유지하도록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먹고 살아가는 일은 야생 동물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스스로 해결합니다. 일반 성도들도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해결합니다. 그런데 신앙에 앞서가는 사명자가 “나에게 얼마를 주시고 내 가족을 책임져 주시면 내가 헌신하겠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헌신 충성이 아니고 오히려 짐을 벗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지면서 주님께 충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생살이 고달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뜻대로 살면 주님이 은혜와 섭리로 그에게 형통하는 은혜를 주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능력 있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사명자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 책임으로 여겨야 할 것과 교회에서 교인들이 사역자를 배척하여 억지로 주는 생활비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7과 부활이신 예수님 (요 11:25~27) 목록으로


“부활이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살피시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죽은 지 4일 만에 무덤에서 살려 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1. 우선 예수님이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뜻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시고(행 3:!5, 시 42:8) 부활의 능력자란 뜻입니다. 생명은 창조성을 띤 것이고, 부활은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니 우선 씨앗이 싹트고 자라는 식물성 생명이 있고, 몸이 움직이는 동물성 생명이 있으며(사람도 동물성 생명에 속함) 또 한 가지는 영적 생명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정신적 요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2:1, 요 3:3).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그 육신적 생명을 거둘 때 존재가 없어지지만 사람은 육적 생명을 거두어가도(사망) 영적 생명은 없어지지 않으므로 성도일 경우에는 그 영적 생명이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불신자의 경우에는 그 영적 생명이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되는데 이 두 가지를 다 본질상 같은 영적 생명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거듭난 영적 생명은 신령성과 탁월성을 갖는 것이고, 불신자의 영적 생명은 탁월성과 신령성이 없는 영적 생명으로 구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구별하기 위하여 불신자의 영적 생명을 “혼”이라고도 하지만 성경적 용어로는 영과 혼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합당치 않게 봅니다. 이처럼 생명의 종류가 있다는 것과 그 생명들의 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의 입장에서 “생명의 주”이시면 당연히 부활의 능력도 있으셔야 하고 오직 예수님만 부활의 능력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 11:15을 보시면 “예수님이 부활의 주이신 것을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을 창조자로 믿을 때(요 1:3) 부활의 주 되신 것을 못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망설임이나 증명을 구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과 여러 종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도 종류가 있느냐? 하시겠지요.

1) 우선 엡 2:1에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하셨으니 이것이 영적 거듭남이고(요 3:3) 영적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없으면 진리를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2) 요 11:44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사건 외에도 여러 차례 살리신 일이 있었지요. 그러나 이 부활은 육신적 부활로서 또 죽어야 하고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이 일어나....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27:52~53).

3)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은 다시 죽을 수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인데 이 부활체는 세상과 천국을 임의로 왕래할 수 있는 영광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활을 세상 마지막 날에 세상을 떠난 성도들에게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살전 4:16~17). 그러니까 영적 중생의 부활은 성도가 믿음을 가질 때 주시는 것이고(요 3:3, 엡 2:1, 벧전 1:23, 3:21), 육체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내신 것뿐이며(요 11:15) 예수님의 부활은 영화로운 부활로서 1차로 나타내신 것이고, 그 다음에 성도의 부활은 역시 영화로운 부활로 2차에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계 20:5~6). 그러면 3차 부활도 있는가? 요 5:29에 “심판의 부활”이 있고, 행 24:15에는 “악인의 부활”이 있으며 계 20:13에서 (구원받은 영혼을 위로하신 다음에)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 하셨으므로 마지막에 악인의 부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부활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신 말씀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죽어도 산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 재림시에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시기만 다를 뿐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고전 15:20, 첫 열매는 예수님, 성도는 그 다음 열매이므로 부활의 성질이 동일함.). 고전 15:43에서도 “욕된 것으로 심고(매장을 뜻함)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고 하셨습니다.

2)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음”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우리는 살아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 성도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뿐 그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이고, 또 성경은 심판을 죽음으로 표시한 경우가 많은데(롬 6:21, 계 20:14)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으니까 “죽지 않는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이며 또 한 가지 해석은 “살아서 믿는 자”를 예수님 재림 때에 믿는 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죽지 않고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산 채로 변화 받을 것이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① 우선 거듭난 생명 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거듭난 생명을 받으면 믿음으로 끌리고 스스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거듭난 생명은 불꽃과 같습니다. 연료가 접근하면 척 붙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받거나 전도 권면을 받을 때 쉽게 동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전도사역을 함에 있어서 지나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봅니다만 아무래도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할 일에 비하여 지나친 인간적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인위적 수단으로 전도하지는 마십시오. 억지로 또는 현실적 이득을 위하여 움직이게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② 생명은 예수님께 달렸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그렇습니다(마 10:29). 생명의 기한을 정하시고 호흡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고 맡기셔야 할 것이요(행 17:25~26), ③ 성도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는 것을 확신하셔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④ 현세와 내세를 의연하게 연속적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98과 부활과 은혜 (고전 15:12~19) 목록으로


“부활과 은혜”란 제목입니다. 다시 설명 드리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가 받는 은혜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이 생명의 주(행 3:15, 요 11:25, 14:6)이시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주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모르면서 사는 것과 같겠지요.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행 17:25에 보시면 “주님이 친히 생명과 호흡을 주신 분이라” 하셨고, 빌 1:21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생명으로 살고 주님의 능력으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은혜를 아는 것이니까요.

2.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성도가 죄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만 하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완전한 속죄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거쳐 하나님 보좌에 가셔서 열납을 시켜야 끝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부활이 없으면 죽음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를 이기지 못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죄와 마귀에 대한 승리자가 되시는 것이고, 부활 승천이 있어야 속죄제의 완성과 열납이 끝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순종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열납은 전부 속죄제에 속한 단일 사건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육체적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자신도 살아나셨습니다. 마치 누에가 실을 감고 고치로 들어갔는데 누가 그것을 보고 죽음이라고 애석하게 여깁니까? 봄이 된즉 그 속에서 나비가 나옵니다. 성도의 죽음도 그와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히 2:14~16과 요 14:1~3에서 명쾌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한 혈육에 속하여 사망하셨으나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고(부활하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시기 위함이라”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죽음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때가 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시므로(눅 23:43, 죽는 강도와 함께 낙원에 이르심) 성도가 죽을 때 그 영혼을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을 겁내지 않습니다. 또 총을 가진 자는 강도를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주님을 모신 성도는 죽음을 겁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을 체휼하신 분입니다(히 4:15).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모든 성도를 중보해 주십니다. 세상에 계실 때도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셨고(요 14:13), 베드로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하셨으며(눅 22:32) 또 모든 성도를 위하여서도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요 17:1~26). 그런 중에 롬 8:34을 보시면 “누가 정죄하리요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예수님이시니 그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성령님도 그러하심. 롬 8:26). 그러니까 성도들이 예수님의 중보로 기도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형편을 따라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과 지식을 갖고 주님을 의지하며 든든함을 느낄 때 주님이 그 믿음을 따라 은혜를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5. 현재의 성도가 영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 11:26에 보시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하셨으니 이 뜻이 “영적으로 안 죽는다”는 뜻도 있고, “심판을 안 받는다”는 뜻도 있으며 또 예수님의 재림 때 살아 있는 성도는 엘리야처럼 산 채로 올라간다는 뜻도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영생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내세의 집이고 이 세상은 주님 모시고 사는 임시 집입니다. 이 곳에 살면 살아 있는 친구들 하고 살고 천국에 가면 먼저 간 친구들하고 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 곳에도 계시고 천국에도 계십니다. 부산이나 외국에 집이 있으면 왔다 갔다 하겠지요. 이 뜻은 더 살고 덜 사는데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혹 세상에서 아쉬운 이별을 하더라도 천국에 가서 다 보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다 믿으시겠지만 더 사나 덜 사나 매일반이란 것을 꼭 확신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승리자 되시고 심판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요 5:27). 선악간에 심판하시고(전 12:14), 행한 대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계 22:11~12). 고전 15:32절을 보세요. (만일 부활이 없을 때) “내가 범인처럼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6:25을 보시면 “지옥 갈 부자가 좋은 것을 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구원 받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데도 그른 취급 받는 사람, 의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 정의를 위하여 사람이 안 알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 모든 문제를 주님이 다 심판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저희들에게 “생명과 죄사함과 중보와 사망 공포의 해방과 영생과 합당한 심판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큰 감사와 희망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99과 예수님과 나사로 가정 (요 11:1~44) 목록으로


본문 1~44절을 보시면 “예수님과 나사로 가정에 대한 일”이 기록되었고, 또 눅 10:38~42에서는 예수님이 그 집에서 “마르다”로부터 음식 대접을 받은 사실과 마리아가 말씀을 열심히 들으므로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신 일이 있고, 또 요 12:1~3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엿새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후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긴 일로 칭찬 받은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2장에 기록된 마리아의 향유 부은 봉사를, 11:2에 기록한 것을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이 역사 순서대로 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가 끝난 다음에 종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이 많습니다. 살펴보면

1.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이고(11:11)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대접과 칭찬이 어울린(12:7~8) 집인즉 주님을 가까이 모신 믿음의 집인데도 나사로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믿어야 건강하고 믿음 약하면 병들 수 있다”는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 선지자도 죽을 병이 들었었고(왕하 13:14), 바울 사도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으며(고후 12:7) 전도에 힘쓰던 에바브로디도나 드로비모도 병을 앓았으니까요(빌 2:26, 딤후 4:20). 따라서 지혜로운 성도는 건강을 믿음 있는 증거로 자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가정에서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나사로의 병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이었고, 그가 병들게 된 목적도 아셨으며 그 병의 뒤처리가 어떻게 될 것까지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도 알고 계셨는데 바로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신즉 우리의 모든 것도 그렇게 아시고 그렇게 통치하실 수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기록하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6절을 보시면 그 소식을 들으신 주님이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에 오신즉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퍽 멀리 계셨고, 또 천천히 오셨으며 그 계시던 곳은 요단강 저편 갈릴리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 10:40). 그리고 이틀 후 베다니로 오려 하실 때 “나사로가 잠들었다” 하셨으니까 그가 죽은 것도 아셨고, 나흘쯤 여행 길로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응답의 지연이며 또 예수님이 성도의 죽음을 아시고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4:3). 예수님은 성도의 병든 것과 죽는 것은 물론 아시고, 또 그 질병과 죽음을 통하여 어떻게 영광 돌릴 것도 아시는 분이시니까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질병과 죽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실 수 있어야 합니다.

4. 나사로 집에 오신즉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안 죽었을 것이나 이제라도 예수님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21~22절) 하였고, 또 예수님이 무덤으로 가실 때 늦게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셨으면 안 죽었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의 병 고치심의 능력을 믿되 가까운데서 역사하시는 것만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먼데서도 다 받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셨을 때 마르다가 처음에는 장래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믿으면서(24절) “마지막 날에 다시 살줄로 믿습니다”(24절) 하였는데 나중에 “무덤 돌을 굴리라” 하셨을 때는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므로(39절) 현재 부활의 믿음이 회의적임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고 현재와 장래의 부활이심을 확실히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서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하실 것입니다. 여기의 “살아서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음”은 성도가 죄 값으로 죽는 일이 없으니 만큼 천국 가는 과정으로 또는 성화 되는 과정으로 육체의 장막을 벗는 과정으로 변화되는 것일 뿐 죄 값으로 죽는 뜻이 아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5. 그리고 장사 지낸지 나흘된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려내셨습니다. 말씀은 그때 하신 말씀이나 기록된 말씀이 본질상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삶은 현세적, 육체적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질병의 결과에서 회복시키신 것이지요. 돈 없어서 병을 못 고친 줄 알지 마시고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임을 믿는 신앙도 가지셔야 합니다. 또 나사로의 부활은 영화(마지막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질병이나 죽음을 꼭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저는 치료비도 겁나고 주사도 겁나기 때문에 병원에 잘 안 갑니다. 그런데 위 내시경 검사를 해야 되는 기회가 생겨서 많이 고민하고 취침 내시경을 하러 갔는데 “노인이어서 약을 약하게 넣었으니 불편하더라도 조금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불편 있기를 기다리는데 잠이 오지 않더군요. 눈을 가만히 떠본즉 간호원이 곁에 와서 “검사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잠도 안 잤고 불편도 없었는데 “끝났다”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이것은 사람의 의술 덕분입니다. 하물며 주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의 영혼을 인도해 가실 때 고통을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꼭 믿으시고 주님 앞에 갈 것과 부활을 기다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0과 효도, 어찌 할고 (엡 6:1~3) 목록으로


1. “효도 어찌 할고”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효도를 잘 못한 사람인데 어찌 할고”, “효도도 잘 못한 자가 효도하라고 교훈을 전하고 있으니 어찌 할고”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은즉 깊이 회개할 일이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의 부친은 제 나이 25세(신학교 1학년 때)에 돌아가셨으니 효도할 기회가 없었고, 어머니는 60세 때 돌아가셨으니 기회가 많았지만 아홉 식구 생활과 시간의 쫓김 등으로 효도를 옳게 못하였습니다. 돌아가실 무렵에 병원비를 절약하려고 미리 입원해 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됩니다. 어찌 할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2. 저희들은 아셔야 합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모신 자녀의 몫이란 것을 본문에서 “자녀들아” 하시고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효도는 자녀들이 할 것이요, 사회나 교회의 몫이 아님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없는 노인들은 친척 자녀들이 우선 하여야 하고, 그런 조건이 안 될 때는 교회나 사회가 하여야 하는데 요즈음은 그 순서를 떠나서 사회가 효도하려고 하니 잘못된 것입니다.

3. 효도의 뜻부터 말씀드려 볼까요?

1) 효도는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2) 부모님에 대하여 감사와 존경심을 갖는 것이며

3) 부모님의 마음과 생활을 편안케 해 드리려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알면서도 시행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겠지요. 이런 경우에 불효자는 자신이 왜 효도를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서 효도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이고, 또 효도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적극성 있게 효도하는 방법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우선 나라에서는 자녀들로 하여금 효도하도록 기회와 도움을 주어야 하고, 자녀가 없는 노인들은 교회 단체나 사회단체에서 이차적 협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부모님을 모신 분들 들어보세요.

1) 우선 부모님의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 주심은 물론 이 세상 인간 중에 자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주실 분이 부모님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멀리 하려 하거나 돌아가시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어떤 이는 먹고 살만한 데도 부모를 배척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나라에서도 크게 벌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할 때 부모님이 유능한 분이어서 자신을 행복하게 키워주셨으면 크게 감사하셔야 하고, 혹 부모님이 연약하여 자신을 고생스럽게 키웠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느 부모든지 자식을 고생스럽게 키우려는 부모는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양육한 것은 부모의 본의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고, 또 어릴 때의 어려운 환경이 속히 자신을 철들게 하여 사람 사는 바른 방법을 터득하게 된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TV에서 표창 받는 효자, 효녀들이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4) 귀하가 효도를 하고 싶으면 반드시 믿음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주 안에서 효도하라” 하셨고, “주 안에서 효도할 때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안 받아도 효도를 하셔야 하지만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명하셨은즉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효도할 때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자신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님이 믿음을 갖고 하늘의 백성이 되셨는데 자녀가 믿지 않으면서 효도를 한다면 어찌 될까요? 그 효도는 잠시 형식에 그치고 그 자녀는 지옥 갈 자녀로 낙인 찍힐 것인즉 마치 암선고를 받은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그런 뜻에서 반드시 믿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또 그 다음에는 마음과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합니다. 부모를 학대하는 자녀는 부모와 대화를 하려 하지 않지요. “나와도 그만 들어가도 그만 진지 잡수세요”하는 말도 안 합니다. 즉 마음과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으니 결국 부모 없어도 괜찮다는 뜻이지요. 이런 자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자녀가 늦게 철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효도하려고 할 때 그 부모는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6) 대부분 물질 때문에 섬기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과거와 다릅니다. 지금은 풍요로운 때도 자녀 생산을 안 하지요. 옛날 어려울 때 부모님이 여러 자녀를 양육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효도하기 위하여 열심히 돈을 벌고 효도하기 위하여 근검, 저축해 보세요. 반드시 재산이 모일 것입니다. “효도하면 땅에서 잘 된다” 하셨는데 하나님이 가난하도록 두시겠습니까? 분명히 재물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중직자는 4대 절기(성탄, 부활, 맥추, 추수) 헌금을 드리기 위하여 적금을 들라”는 말을 하셨는데 저는 “효도 기금을 모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즈음 자녀 교육 보험을 많이 선전하더군요. 그러면 당연히 효도 보험을 먼저 드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효도의 중요한 방법은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효도도 자기 좋은 방법대로 하려 하지 말고 부모님의 뜻에 복종하는 방법으로 하세요. 자녀들이 어버이 날에 꽃을 보내고 음식을 대접하려 하기로 받기는 하였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자녀들이 평소에 근면, 성실하게 살면서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더 실리적 효도가 된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먹거나 돈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리적으로 섬기고 가족적으로 형제 우애하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효도로 복 받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101과 성찬 받을 준비 (고전 11:20~34) 목록으로


기독교의 유일한 의식은 세례식과 성찬 예식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성례(거룩한 의식)라고 합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인치는 의식이고, 성찬 예식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는 의식입니다.

1. 의식의 출처와 방법은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2일 전이고, 잡히시기 전 날(수요일) 저녁에(마 26:17, 무교절의 첫 날) 예루살렘 성안의 어떤 이의 집에서(마 26:18)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시게 되었는데(유월절이란 주전 1500년경에 이스라엘 선민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애굽의 초태생을 다 죽이셨지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에는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므로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유월절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들이 1월 14일~21일까지 그 절기를 지키면서 양고기와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절기를 지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절기에 양을 잡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고, 무교병이나 쓴 나물을 먹은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선민들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켰다는 말씀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출애굽 당시의 방법을 모방하였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출 12:15~20). 그래서 그 날 저녁에 음식 잔치를 하게 된 것인데 그 때에 예수님이 떡과 잔(포도주)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고 이 잔은 너희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구원 언약을 실천하신다는 의미)” 하시고 축사하신 후 나누어 먹게 하셨고, 또 눅 22:19에서는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모범을 보이시고 시행 명령을 하시니까 사도들도 그대로 실천하였고(행 2:46, 20:7),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에서 시행한 사실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이 이 예식을 하게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1) 구약 시대의 유월절 의식을 간소화 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양의 피를 흘리고 무교병, 쓴 나물을 먹게 하셨던 것을 평상시의 음식인 포도주와 떡으로 변경시킨 것이요,

2) 예수님이 이틀 후에 구약 시대에 주셨던 유월절 예언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사건을 그대로 믿으면 되니까 아주 폐지하셔도 상관이 없지만 교훈과 기념을 위하여 간소하게 남겨 두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십자가를 믿어 구원 받는 것과 믿는 자를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인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에 대하여 의식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성찬식의 구비 조건이 무엇이었는가?할 때

1) 미리 준비를 시켰습니다(마 26:17, 눅 22:8). 중요한 의식이기 때문에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성찬 예식을 미리 광고하는 뜻도 거기에 있습니다.

2) 친목과 교제의 요소가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연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친목의 요소는 성도 간의 사랑입니다.

3) 반드시 떡과 포도주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떡으로 예수님이 희생당하신 몸을 상징하고(또는 고난을 상징하고), 포도주로는 예수님의 피와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는 의미는 무엇인가?할 때 그 떡과 그 잔을 먹으므로 내 몸의 양식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공로를 성도가 믿음으로 힘입어 자기의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의식을 끝내시고 “찬송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하여(마 26:30) 찬송하는 것까지 성찬 예식에 포함되는 것처럼 알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성찬 예식에 근본 요소는 어떤 믿음과 어떤 자세로서 떡과 포도주를 먹느냐?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성찬 받을 자의 입장은 어떠하여야 합니까?

1) 방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도와 회개와 믿음과 사랑과 충성으로 잘 준비하셔야 합니다. 믿음은 성찬의 의미를 아는 지식이고, 기도와 회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며 사랑은 이웃과의 관계가 무흠한 것이고, 충성은 십자가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2) 본문을 보시면 성찬 받을 자세의 결격 사유로서 사랑의 미흡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자기 음식을 갖고 와서 성찬 예식을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음식을 갖고 온 사람들끼리 먹었다가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 중에 배부른 자가 있고 시장한 자가 있어서 되겠느냐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한 것은 교회를 업신여긴 일이라 그러니까 서로 기다려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분쟁, 편당이 있었고, 상대방 배려 없이 이기주의만 차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런 자세로는 성찬을 받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믿음 지식과 회개와 사랑과 사명 정신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나쁜 생각을 갖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예수님이 깨우쳐 주시면서도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마 26:21~25, 눅 22:3). 예수님은 자기를 판 가룟 유다도 미워하신 일이 없으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빌라도 총독에게도 선한 말씀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딤전 6:13).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철저한 회개로 준비하시고,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바다 같이 넓은 이해와 용서로 화목한 자세를 갖고 성찬과 함께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새 출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02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마 1:18~2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이러하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할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이렇다”하고 말할 수 있으려면

1,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뜻부터 아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란 이름은 본래 아람어로 표기 된 것인데 그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란 헬라 말은 “기름(크리오) 부어진 자”란 뜻으로 기름 부어 세우는 자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뜻합니다. 또 20절에 보시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있지요. 이것은 히브리어의 뜻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란 누구일까요? 모든 성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인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구원자란 뜻이고, 그리스도는 구원 사역을 나타내신 이름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직을 가지신 분이란 뜻이며 “임마누엘”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예수님께 속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만들어 주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순결하고 영원하지 않으면 구원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자격까지 구비하신 분이 곧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인성, 신성구비, 순결, 거룩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므로 구원자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직임이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 있는 인간을 화해시키는 직임이며 왕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심판자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33년 만에 세상의 일을 다 끝내셨습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의 나심이 어떠하였습니까?

1) 신앙적으로 경건한 계통, 경건한 집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여기의 경건한 계통이란 택한 백성의 계열을 뜻하고, 경건한 집은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하셨고, 의로운 행동을 나타냈으며(가만히 끊고자 한 일,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은 일 등) 마리아도 경건하였습니다(눅 1:46~56). 여기에서 계통이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이 이행된다는 점입니다.

2) 예언에 의한 성취로 오셨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시고, 23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사 8:7~8), 2:6에서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미 5:2)을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은 아담 이후 약 4000년 동안 수없이 하셨고, 그 다음에 이사야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는 예수님이 나실 장소와 방법, 그리고 예수님의 생활과 사역이 어떠할 것까지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사 53:1~12). 성경에 예언에 의하여 출생한 사람은(이적으로 아들 낳을 것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뿐입니다(사 40:3, 말 4:5~6).

3)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예언을 하셨습니다(사 7:14). 동정녀 탄생이란 부정 모혈 없이 창조적 이적으로 출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몸을 집처럼 쓰게 한 것이고, 잉태의 기간만 채워 해산한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가? 하시겠지만 창조적 능력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셨는데 왜 안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도 신비하지만 땅과 바다는 얼마나 신비합니까? 식물이 꼭 같은 땅에서 영양 공급을 받는데 열매를 다르게 맺고 맛도 다릅니다. 살구를 시게 하기 위하여 거름을 줄 때 식초를 줍니까? 사과를 달게 하기 위하여 거름을 줄 때 설탕을 줍니까? 그렇지 않은 데도 단맛, 신맛, 고소한 맛, 쓴 맛, 매운 맛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꼭 같은 바닷물에서 노는 고기도 종류 따라 맛이 다르니 이것이 창조적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동정녀 탄생도 그런 신비와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나셔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왜 인간의 부정 모혈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순결한 몸으로 오셔야 하고 인간의 부패성을 전가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피를 받은 인간은 다 부패성을 전가 받고 있습니다. 원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히 9:14)란 말씀이 있고, 행 20:26~27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죄를 짓지 않음이 곧 자기의 피를 깨끗케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범죄 하면 그 피가 더러워지는 것이고, 피는 곧 생명이면서 인격과 성품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깨끗한 분으로 출생하셔야 하고 또 죄를 짓지 않으셔야만 죄 지은 인간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녀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또 어떻게 출생하셨는가? 하면 그 당시에 호적령이 내려서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정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에 유숙할 곳이 없자 어떤 집 마구간에 유숙을 하셨는데 마침 거기서 출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기를 누일 데가 없자 말구유에 눕게 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요즈음 죄 많은 인간들은 호텔 같은 병원에서 출생하지요. 예수님이 가난한 환경에 출생하시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신 것은 성도가 낮은 자리에 처하라는 뜻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성도가 다 낮은 자리에 처한다면 하나님이 부자의 것을 적당한 방법으로 옮겨서라도 얼마든지 잘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요즈음 TV에서 음식 광고를 많이 하는데 굴로 비빔밥을 해 먹고 생선으로 회를 묻혀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선전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 곧 마구간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이 성탄절을 보내면서 사랑 실천의 방도로서 마음도 낮아지고 생활도 낮아지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15. 초신자 관련 전도 설교


제103과 선교적 섭리 (행 27:18~26) 목록으로


“선교적 섭리”란 제목으로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섭리란 만유를 지배하시는 뜻을 말합니다. 만유란 온 세상의 창조와 통치와 심판이 다 포함됩니다만 이 시간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치 섭리를 살피려는 것이고, 그 섭리와 바울 사도의 이방 선교가 어떻게 관련이 되었는가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속 사역의 전개를 위하여 많은 것을 쓰셨지만 복음 사역의 전개를 위해서도 많은 섭리와 방도를 나타내셨습니다. 구속 사역의 전개를 위하여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계보상의 연속을 이으셨고, 그 사이에 선지자들의 예언, 그리고 상징적 계시 등을 주셨다가 예수님 때에 와서 바리새인들, 가룟 유다, 로마 병정들까지 쓰셔서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을 쓰셨는데 그들을 순교의 제물로까지 쓰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울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핍박하였지만 그를 변화시켜서 쓰셨고, 그의 학문, 언어 및 로마의 시민권도 유익하게 쓰셨으며 갇히는 일과 송사 당하는 일과 상소하는 일과 폭풍이 대작하는 일까지 개입이 되어 결국 로마의 가이사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벌레가 박 넝쿨을 씹어 요나를 깨우치는 일로 시작하여 뜨거운 바람, 또는 광풍, 폭풍에 이르기까지 섭리 안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주위에서도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시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탄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먼저 사공들이 나서서 그 원인을 규명(제비 뽑음)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이방인들도 신의 섭리를 헤아리려고 노력하는데 요나는 무심히 잠자고 있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1. 우선 하나님은 선교적 섭리로 바울을 쓰셨습니다. 특별 섭리(기적 부활의 주께서)로 바울을 변화시키셨고, 아나니아와 바나바로 그의 안내 역할을 하게 하셨으며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쓰신다 하셨고, 또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도 서게 하실 것이라(27: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교적 섭리로 많은 사역자를 쓰시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2. 전도자가 핍박을 받는 일도 선교 사역의 한 방법으로 섭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핍박 그 자체는 참으로 나쁜 일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나쁘고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받고 송사를 받은 일 때문에 로마에 갈 수 있는 여건이 생겼으니까요. 여기에 시민권 자격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시민권이 없으면 가이사에게 상소를 못 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처음 쓰실 때부터 그의 외국어 실력이나 시민권 자격도 보셨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섭리 안 하시는 사건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을 모기 때문에 불편이 많으셨겠지만 거기에도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기성 교회를 사임할 때도 몇 가지 부정적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건들을 이용하셔서 나를 나오게 하는데 힘을 주셨고, 현재는 다른 방법으로 저를 쓰시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이 선교 사역을 하실 때 자연계를 쓰십니다. 바울의 행선에 폭풍이 일어난 것이지요. 갈릴리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마 8:24~26). 그리고 “바람 날개로 다니신다” 하셨으니(시 104:3) 바울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보셔야 합니다. 요나 때의 폭풍 대작도 기억하실 것이요(요 1:9,12),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신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욘 4:7). 그러면 왜 광풍을 주셨을까요? 바울이 지중해를 횡단하는 중에 “그레데”섬에서 “행선이 위험할 수 있으니 과동하자”고 하였는데 선장은 “괜찮을 것이라” 했고, 백부장은 “선장의 말을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광풍을 만나 살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21절에서 “내 말을 들었으면 좋을 뻔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복음 사역자의 권위가 세워졌지요.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도 사역자의 권위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주께서 어제 밤에 내 곁에서 말씀하시기를 배는 깨지되 사람은 산다고 하셨다” 하니까 그때부터 바울의 말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후 14일을 광풍에서 떠밀리다가 사공들이 거루를 타고 도망하려는 것을 발견하고 바울이 “배에 그대로 있어야 산다”고 하니까 군사들이 여지없이 거루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 거루줄을 끊는 의미는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뜻이고, 또 복음 사역자의 의견(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현세적 소망과 향락, 그리고 물질, 명예 같은 허탄한 거루줄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생명과 함께 배에 탄 사람 276명을 살려 주신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살리신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쓰실 목적이시지만 같이 탄 275명은 왜 살리셨을까?하는 것도 생각해 보셔야지요. 그 중에는 죄수들이 많고 이방 종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깨진 배가 육지에 가까이 왔을 때 군사들은 “도망 갈 죄수들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42절). 그런데 백부장이 바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것을 반대하였으니 이 사실도 예수님이 바울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24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살리시기 위하여 백부장의 마음을 감동하신 것이고, 그 배에 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일에도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풍랑 만난 배에서 바울은 신의 존재 같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 종교인들이나 다른 죄수들이 다 큰 감화를 받았을 것이니 그들이 로마에 가서 복음 전도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핍박이나 고난이나 풍랑도 선교적 목적에 계획적으로 쓰시는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희들도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을 믿음 연단과 전도와 선교의 섭리로 이해하는 영안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04과 전도 섭리 (롬 10:13~15) 목록으로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전도 설교)을 처음 듣는 분이 와 계십니다. 전도자가 어디서부터 어떤 증거를 하여야 할까요?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면 “예수 믿고 천당”이란 말만 외쳐도 효력을 보는 경우가 있지만 지식으로 자란 믿음은 더 온전해진다는 점에서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1. 전도를 처음 받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깨우쳐야 할 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통차지아십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서 어떤 원두막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 원두막이 저절로 그 곳에 있겠습니까? 분명히 어떤 농장 주인이 목적이 있어서 지어 놓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주의 존재와 인간과 자신의 존재도 역시 창조자의 뜻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란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의 싹이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할 때 어느 피조물이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2.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통치 섭리 하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조종사가 있어야 하고, 그 조종사는 오르고 내릴 때 통제관의 지휘를 받으며 항공 노선이 있고, 규칙이 있듯이 우주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도 하나님의 주밀하신 섭리에 따라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내 마음대로 이 자리에 나오신 것 같지만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빌 4:7) 감동하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은 성도의 걸음을 인도하신다(잠 16:9)”고 하셨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아무도 주위에 간섭하는 이가 없는 것 같지요. 히 1:3을 보시면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신다”고 하셨는데 만일 하나님이 만물을 놓으신다면 땅이 움직이고 바닷물이 덮칠 터인데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를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행동할 수 없고 하나님의 붙드심과 인도하심에 의하여 통치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서로 만나게 하시는 일을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만남,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여러분들과 그 주위 분들과의 만남도 역시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나셨을까요? 역시 하나님의 인도로 만나는 것입니다. 창 24:12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의 자부될 자를 만났는데 그 종이 합당한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리브가를 만남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은즉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창 24:50, 56). 하나님은 서로 만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돈을 물고 있는 물고기도 낚시에 걸려 만나게 하셨고(마 17:27),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를(행 8:26~27), 고넬료의 가족과 베드로를 만나게 하셨습니다(행 10:5, 21). 또 막 14:13에서는 “동리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갖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라” 하셨고, 마 24:20에서는 “안식일에 난리를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도 만나게 하시고 사건도 만나게 하시며 또 피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여러분들이 전도자나 누구를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전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데 전파자도 스스로 나타날 수 없고, “하나님이 보내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전파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 하셨으니 지금 말씀을 전파하는 이 사람이 스스로 이 자리에 섰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에 의해서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세속에 빠져 있겠지요. 믿는 자가 전도자 되고 말씀 증거자 되는 것이 보통 은혜가 아니지요. 분명코 하나님께 붙잡혀 온 것입니다. 이와 꼭 같이 전도를 처음 받는 성도의 발걸음도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만나게 하신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일단 오셨으니까 말씀을 들으셔야지요. 한 시간 듣고 가는데 별로 거부감이 없으니까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어떤 여 집사가 저를 대접한다고 하여 서울에 갔습니다. 대접을 한 후에 “다단계 식품 선전을 한 시간 듣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단계를 불신하는 사람이지만 대접 받은 값으로 한 시간 들어주는 것이 별 손해가 없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설교에 인용할 말들도 있더군요. 문제는 다단계 판매를 불신하는 사람이 어떻게 쉽게 한 시간을 들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그 여 집사를 협력하는 뜻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불신자가 평소에 복음을 안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바로 우연이 아니란 뜻입니다. 행 17:14에 보시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저희들이 이 자리에서 만나고 복음을 증거하고 듣는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혼자 사시려고 합니까? 전능하신 섭리자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따라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신용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그의 말씀인 성경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그대로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의 접근과 성도를 인도하시는 뜻이 얼마나 주밀하고 완전하신지에 대하여 뜨거움을 느끼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처음 나오신 성도님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05과 거듭남과 믿음 (요 3:3, 요일 3:9) 목록으로


1. 이 사간에는 “거듭남과 믿음”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남의 뜻은 “하나님이 완고한 자의 마음에 믿음 가질 요소(영적 생명)를 넣어주시는 뜻”입니다. 로봇이 움직이는 것은 그 안에 장치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믿음 가질 자의 심령에도 하나님이 영적 생명을 넣어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야 천국을 본다, 하나님의 씨가 그 마음에 거한다(본문),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신다(엡 2:1),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바른 신앙 고백을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마 16: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고(완고한 자를 변화시키시는 뜻, 마 3:9), 예수님과 성도를 원수처럼 여겼던 사울을 일시에 변화시킨 사실도 있지 않습니까?(행 9:10) 그러니까 믿음은 어린 아이처럼 지식이 없거나 악하고 고집 센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거듭나는 은혜로 새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시면 불가항력적으로 믿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 이 자리에서 믿음에 관한 전도를 듣는 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선택한 백성으로 부르실 때가 되어 거듭나는 은혜 즉 생명의 씨를 넣어주셨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생겼고 들을 기회가 생겼으며 또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듣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택한 백성이 아니거나 거듭난 심령이 아니면 진리, 교회, 성경, 전도 같은 것이 연결되지 않습니다(고후 4:13).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선택 받은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 사실을 들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습니까? 안 믿고 하나님 멀리 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2. 이런 결과로 믿음의 싹이 나면 생각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1) 이 세상은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선 보이지 않는 공기가 물체로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공기가 물체라 하여 땅 위에 얹혀 있습니까? 공기는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움직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성령님)을 “루학” 즉 바람으로 표기한 것은 성령님을 현상적인 용어로 표기하실 때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뜻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또 세균이나 원소 같은 것도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그 세계가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일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사람도 육체는 보이는 것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하신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다는 사실과(요 4:24) 사람 또한 영혼과 육체의 두 실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실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실체의 세계가 있습니다. 산에 가서 짐승을 만나면 그 짐승이 사는 세계가 있고,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만나면 물고기의 사는 세계가 있습니다. 땅 속에서 사는 미생물의 세계도 있지요. 바울 사도는 고전 15:39에서 여러 가지 형체 중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형체를 말씀하셨고, 그것들이 사는 세계와 영광이 다르듯이 “땅 속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도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전도를 받는 사람이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고 또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만물에 포함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으로 계시다는 사실과 인간 자신도 영의 세계가 있으니 그것이 영원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떠올리시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3. 나는 여러분들이 영적 세계를 실감하시기 위하여 좋은 꿈을 많이 꾸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꿈을 꾸면서 갑절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그대로 자면서 사람도 만나고 좋은 집을 가져 보기도 하며 어떤 때는 공중을 날기도 하고 스키도 탑니다. 꿈에 느끼는 감정과 생시에 느끼는 감정은 같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꿈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세계요, 영적 세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꿈이 왜 꾸어지는지 생시에 생각도 안 했던 엉뚱한 일이 왜 꿈에 나타나는지를 몰라서 고민하였는데 이제 깨달은 그 대답은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꿈의 세계를 통하여 영의 세계를 알고 영의 세계가 있음을 알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세계(천국)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곧 영적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고 영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도 생령이 되게 하시므로(창 2:7)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만큼 그 영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 받은 영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고 구원 받지 못한 영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이 사실을 깨달은 분은 잠깐 있는 현실과 육체를 위하여 사는 것보다 영원히 있는 영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이 바로 영을 위하여 사시는 일이고(요삼 2), 구원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일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이는 것이 있으면 안 보이는 것도 있고, 또 미래가 있으면 영생과 천국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106과 베드로의 입문 경위 (눅 5:1~11) 목록으로


“베드로의 입문 경위”란 제목으로 묵상을 하시겠습니다. 천주교, 개신교 신자가 다 베드로를 존경하니까 베드로의 인기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입문 경위란 베드로가 예수님께 꽉 붙잡히게 된 경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에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1. 그런데 그의 형제(동생)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메시야입니다” 하면서 한 번 만나보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비택자 같으면 “성경이고 메시야고 나는 그런 것 모른다 너희 예수쟁이들이나 만나러 가”하고 거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관심 있게 따라 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유하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사신 일이 있고(마 4:13), 가버나움이 갈릴리 바다 해변이니까 베드로도 그 주위에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막 9:40에 보시면 “반대하지 않는 자는 위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택한 백성, 구원 받을 자, 거듭난 사람은 진리를 기다리기도 하고 거부하지 않으며 서서히 접근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전도자들을 통하여 그렇게 인도하시고 이끄십니다. 여기에서도 안드레의 권면을 거절하지 않고 따라가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왔지요. 아주 초보적이었습니다(요 1:40~42).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 되실 법한 선생님이다”하는 정도로 깨닫고 존경의 대상으로만 알고 왔습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으나 확신은 갖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어촌으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를 구원하셔서 쓰셔야 하니까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시기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잡지 못한 상태에서 날이 밝은즉 배를 육지에 대고 그물을 씻던 중이었는데 그 때에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도 있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일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큼 배에 오르셨고 바다로 나가기를 청하셨으며 또 그 곳에서 설교하셨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이 싹트는 증거였을 것입니다. 진리를 받는 자는 이렇게 거절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보셔야 합니다(겔 36:26). 또 말씀을 듣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십니다. 행 16:14에 보시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증언을 듣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 자리에 외식자가 앉았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진땀을 흘리며 말 끝나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은 분명한 성령님의 역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끝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순종의 용기를 낸 것이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는 관건이 된 것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한다”고 선언을 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런 지식을 그 장소에서 설교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그 시간에 그물을 씻고 고기를 잡지 않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려면 순종할 필요가 없지만 어차피 말씀에만 의지하는 것이니까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고기를 잡으라”는 것이고,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순종을 한즉 잡힌 고기가 넘쳐서 다른 배를 오라 하여 두 배에 가득 담게 된 것입니다. 순종으로 큰 소득을 얻었고, 다른 배에까지 나누어 받았으니 은혜는 순종으로 받고 받은 은혜는 나누어야 하는 뜻이 된 것입니다.

4.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달라진 것입니다. 선생님이 주님으로 예수님의 신분이 자신과 같은 입장에서 교제할 수 없는 평범한 분이 아니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고기를 자기의 그물 속으로 넣는 분임을 알았을 때 자신의 비참한 입장을 더욱 깨닫고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뿐 아니라 회개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절대자요 메시야로 믿었으면 자신을 주님께 의지하는 의미로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시라”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요, 거부하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과 회개와 연합 관계가 성립된 것입니다.

5. 이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복음의 사역자로 쓰시기를 원하셔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각주에 보시면 “취한다”는 말씀이 “사로잡는 뜻”이라 하셨고, 마 4:19(막 1:16)에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을 취하는 것은 “복음 전파로 믿는 자 되게 하라”는 뜻이지요. 거기에는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있으셔야 하지만 전도자는 우선 사람을 취하는 인간적 사교적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고넬료나 간수나 루디아가 다 자기 가족을 믿음으로 인도한 것을 봅니다(행 10:2, 16:15, 34). 또 성경에 보시면 아무나 다 전도자 된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자에게 전도의 은사를 주셨는데 다 진실하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내가 사람 취하는 힘이 있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면서 봉사적인 인물이 될 때에 사람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하셨으니 배를 육지에 대고 좇은 것은 일단 배에서 내리자 배와 물고기 잡은 것도 버려두고 자기 집에 가서 인사하고 서성댈 시간도 없이 그대로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나중에 “아내와 동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고전 9:5). 헌신자나 사명자도 종류가 있습니다. 나타나게 일하는 사역자가 있고 은밀하게 일하는 사역자가 있으며 속히 맺는 열매를 또는 서서히 맺는 열매를 또 현세에서 좋은 것을 많이 받는 사역자와 많이 못 받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현세에서 거의 받지 못한 사역자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제107과 초신자 지도 방법 (벧전 3:15) 목록으로


제가 대구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새 성경책을 갖고 등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제일 은행 지점장에서 정년퇴직하고 허전한 감정을 다스리려고 스스로 종교를 택하여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를 초신자로 영접하여 체계 있게 지도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을 따라 믿음 생활을 학습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제가 초신자 지도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라” 하셨고, “거룩하게 하라” 하셨으며 “소망에 관한 이유(예수 믿어 좋은 점)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하시고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초신자와의 대화는 온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할 것은 말과 행실에 실수할까 조심하라는 뜻이지요. 여러분들도 다 누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이러하여 믿게 됐다, 이렇게 믿으니까 좋더라”는 말을 하실 수 있어야 하고, “당신도 이 방법대로 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거나 성경 진리를 접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의 대상으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인도를 받은 것이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성경 행 13l48을 보십시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예수를 믿더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판교에 신도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의 방도와 대상을 작정하시고 이행하신다는 것을 아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엡 1:4).

2. 귀하가 혹이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추상적으로 믿으려 한다면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시고 확실히 계신 것을 믿으시라고 권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면 인과론적 논증(결과로 원인자를 파악하는 것), 목적론적 논증(나타난 것은 다 목적에 의함, 창조자가 계시다는 뜻), 종교적 논증(연약한 인간이 절대자를 숭배하는 마음을 갖는 것), 도덕적 논증(양심과 선이 기초를 이룬 것), 심미학적 논증(만물의 오묘성), 종말론적 논증(선악의 결국) 등을 설명하셔서 초신자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 합니다”하고 하나님을 확실히 믿도록 인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하나님이 당신의 주이신즉 이제는 그 하나님을 당신의 주로 모시고 “당신은 그의 종이 되라”고 권하셔야 할 것입니다. 요 13:14에 예수님이 주라 하신 말씀이 있고, 또 16~17절을 보시면 “주종 관계를 잘 유지해야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이치로 판단하게 하십시오. 피조물이 조물주 앞에서 스스로 주인인척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창조의 순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하니까 하나님께 여쭙고 명령만 순종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십시오.

4.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느냐?”고 당장 물을 것입니다. 이 때를 놓치지 마시고 성경 66권이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이 3500년이나 내려오면서 가감 없이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인격과 똑같이 숭상하는 진리라고 깨우치십시오. 이 세상에 많은 경전과 서적과 학설이 있지만 그것들은 다 인간의 말일 뿐이고, 또 죽은 사람의 말이지만 성경만큼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하십시오. 죽은 자의 약속은 이행 될 수 없지요.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또 그 말씀의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절대적 권위가 있고, 기독교인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뜻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를 시키십시오. 그리고 무슨 질문을 할 때는 “항상 성경이 이렇게 나타내주셨다”고 지도하십시오.

5. 하나님이 귀하를 믿게 하신 목적이나 귀하가 믿음 생활을 하는 목적이 같은 것인데 그 목적이 바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이 무엇이며 영광은 어떻게 돌리는 것이냐고 묻겠지요. 구원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형벌 곧 지옥에 가야 마땅한 것인데 하나님이 인류의 한 부분을 선택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을 삼으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죄 짐을 십자가로 지게 하시고 그 공로를 믿는 믿음을 근거로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중요히 여기고 믿는 것이라”고 대답하시고(요 1:29, 3:16, 사 53:1~6),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피조물의 마땅한 본문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대로 사는 것이 그 방법임을 강조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성경대로 또는 예수님처럼 못 사는 것을 많이 비판하십시오.

6.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가깝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깨우치십시오. 그 이유는 인격이 통하고 가족 관계(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는 형제요 친구도 됨)와 주종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영광도 되고 자신이 덕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써 옵니다(약 1:17). 그러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동행 또는 거처를 함께 함”으로 표현하셨습니다(창 5:22, 요 14:23, 계 3:20).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까이 하는 것이냐?고 묻겠지요.

1) 죄를 회개하고 멀리 하는 것이고(하나님은 의로운 길에만 계심. 잠 8:20),

2) 기도로 아뢰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화하듯 기도를 많이 하시고 성경을 연구 터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7. 그러면 마지막으로 주일은 왜 지키며 교회 생활은 왜 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때에 주일과 교회 생활은 예수님이 필요하여 시행하게 하신 것인데 무엇에 필요하냐 하면 성경을 배우고 성도가 친교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데 필요하여 주신 것이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전문가가 성경을 가르친즉 혼자 연구하는 것보다 좋고 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사랑을 펼침에 있어서도 단체 활동이 필요하며 더 나가서는 진리의 왜곡을 막고 성도의 바른 생활을 지도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 제도와 교회 제도를 주신 것이라고 대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만큼만 깨우치면 초신자가 상당한 지식을 갖고 믿음의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기회 있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과 예배의 의미도 가르치셔야 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