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7분설교 10집

7분 설교집(Ⅹ)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1. 성경으로 은혜 받음 9


제1과 성경의 권위 (요 10:34~36) 9 바로가기

제2과 믿을만한 증거 (행 17:30~34) 11 바로가기

제3과 읽는 것을 깨닫느뇨 (행 8:26~40) 13 바로가기

제4과 말씀묵상 (시 1:1~3) 15 바로가기

제5과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 (사 1:18~20) 17 바로가기

제6과 하나님을 발견함 (출 6:1~9) 19 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 연구 (요 14:6) 21 바로가기

제8과 진리 접촉의 섭리 (고후 4:3~6) 23 바로가기

제9과 성경을 강론함 (행 17:1~3) 25 바로가기

제10과 성경 상고법 (행 17:11~12) 27 바로가기

제11과 질문과 토론 (눅 2:46~47, 마 12:1~8) 29 바로가기

제12과 만나 요리 (출 16:23~24, 민 11:8) 31 바로가기

제13과 유두고의 떨어짐 (행 20:7~12) 33 바로가기

제14과 예언과 실천 (행 20:22~23, 21:1~14) 35 바로가기

제15과 말씀체험⑴ (사 48:17) 37 바로가기

제16과 말씀체험⑵ (창 45:7) 39 바로가기

제17과 부스러기 교훈 (마 15:27~28) 41 바로가기


2. 초대교회적 신앙 43


제18과 시작하는 교회 (행 2:37~47) 43 바로가기

제19과 시작하는 교회의 특징 (행 4:32~37) 45 바로가기

제20과 초대교회의 모범 (행 6:1~7) 47 바로가기

제21과 초대교회의 특징 (행 2:37~47) 49 바로가기

제22과 원조신앙 (고전 11:1) 51 바로가기

제23과 신사적 신앙생활 (행 17:11~12) 53 바로가기

제24과 전형(典型)적 신앙인 야곱 (창 47:7~10) 55 바로가기

제25과 칭찬받을 믿음 (마 15:28, 8:10) 57 바로가기

제26과 신앙은 변화되는 것 (요 2:5~11) 59 바로가기


3. 하나님과 섭리 61


제27과 분명하신 하나님 (출 16:17~18) 61 바로가기

제28과 삼손을 쓰신 섭리 (삿 16:28~31) 63 바로가기

제29과 유다와 섭리 (마 26:20~25) 65 바로가기


4. 구원과 전도의 섭리 67


제30과 구원과 전도의 섭리 (롬 10:13~15) 67 바로가기

제31과 구원의 부정적 섭리 (롬 11:17~24) 69 바로가기

제32과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 71 바로가기

제33과 스데반의 전도사역 (행 7:51~60) 73 바로가기

제34과 빌립의 사역과 내시 (행 9:26~40) 75 바로가기

제35과 성령님의 전도역사 (행 16:6~34) 77 바로가기

제36과 바울의 선교여정 (행 13:4~14) 79 바로가기

제37과 장로들과의 작별 (행 20:16~38) 81 바로가기


5. 믿음생활과 교회부흥 83


제38과 신앙적 이끌림 (행 18:5~11) 83 바로가기

제39과 교회생활의 지혜 (딤전 3:15~16) 85 바로가기

제40과 교회의 위기 (마 16:15~18) 87 바로가기

제41과 교회생활의 기초 (마 7:24·25) 89 바로가기

제42과 작정한 규례 (행 16:4~5) 91 바로가기

제43과 교회의 부흥 (행 16:1~5) 93 바로가기

제44과 성장하는 교회 (행 9:31) 95 바로가기

제45과 교회부흥의 방편 (행 19:20) 97 바로가기

제46과 고린도교회의 부흥 (행 18:1~11) 99 바로가기

제47과 교회의 상징 (행 7:37~38) 101 바로가기

제48과 안식일의 지식 (골 2:16, 갈 4:10~11) 103 바로가기

제49과 성수주일의 의미 (요 20:19~21) 105 바로가기


6. 은혜의 생활 107


제50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 4:8) 107 바로가기

제51과 성숙한 믿음 (히 10:22) 109 바로가기

제52과 신앙은 개인적이다 (마 16:26) 111 바로가기

제53과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2~43) 113 바로가기

제54과 앉은뱅이를 일으킴 (행 3:1~10) 115 바로가기

제55과 베드로를 구출하심 (행 12:1~19) 117 바로가기

제56과 그리스도인 (행 11:24~26) 119 바로가기

제57과 고넬료의 권속이 은혜를 받음 (행 10:1~8, 44~48) 바로가기

제58과 마음에 합한 자 (행 13:21~23) 123 바로가기

제59과 하나님을 찾읍시다 (행 17:26~27) 125 바로가기

제60과 쓸 것을 채우심과 영광 (빌 4:19~20) 127 바로가기

제61과 봄 같은 은혜 (아 2:10~13, 슥 10:1) 129 바로가기

제62과 신령성의 의미 (고전 2;13~16) 131 바로가기

7. 사명자의 반성 133


제63과 교육 없는 세대 (수 24:29~33, 삿 17:1~13) 133 바로가기

제64과 도강준비 (수 3:1~13) 135 바로가기

제65과 바나바 (행 4:36~37) 137 바로가기

제66과 바울의 이력서 (행 9:10~22) 139 바로가기

제67과 바울을 쓰신 섭리 (행 22:1~21) 141 바로가기

제68과 바울의 목회적 모범 (행 20:17~35) 143 바로가기

제69과 바울의 다섯 가지 고백 (행 24:14~16) 145 바로가기

제70과 목사직 반성 (딤전 6:11~14) 147 바로가기

제71과 포도원집 주인 (마 20:1~14) 149 바로가기

제72과 보람 있는 일 (시 73:23) 151 바로가기


8. 반성과 정화에 대한 말씀 153


제73과 심판지식 (창 18:25) 153 바로가기

제74과 기드온의 사역과 교훈 (삿 8:22~35) 155 바로가기

제75과 반성 (눅 14:11~14) 157 바로가기

제76과 보상과 회개 (마 5:23~26) 159 바로가기

제77과 요시야 왕의 역사 (대상 34:1~7) 161 바로가기

제78과 아나니아 사건의 의미 (행 5:1~11) 163 바로가기

제79과 도적질하지 말라 (출 20:15) 165 바로가기

제80과 3금5행 (시 37:1~11) 167 바로가기

제81과 포도원을 허는 여우 (아 2:15) 169 바로가기


9. 기도에 대한 말씀 171


제82과 기도할 마음이 생김 (대상 17:25, 삼하 7:27) 171 바로가기

제83과 기도에 대한 지식 (눅 18:1~8) 173 바로가기

제84과 기도할 제목들 (빌 3:14) 175 바로가기



10. 부활, 감사, 권면 177


제85과 예수님의 부활 (고전 15:3~8) 177 바로가기

제86과 은혜를 생각함 (약 1:17) 179 바로가기

제87과 은혜를 더듬어 찾음 (행 17:27, 창 28:15~16) 181 바로가기

제88과 돌이켜 감사하라 (엡 5:4) 183 바로가기

제89과 교인권면 (롬 8:28~29) 185 바로가기



11. 세속의 헛됨 187


제90과 지식이 헛됨 (전 1:12~16) 187 바로가기

제91과 세속적 쾌락이 헛됨 (전 2:1~11) 189 바로가기

제92과 모든 것이 헛됨 (전 1:1~11) 191 바로가기



12. 복에 대한 말씀 193


제93과 복 받기를 사모함 (시 2:11~12) 193 바로가기

제94과 행복을 찾읍시다 (신 10:13) 195 바로가기

제95과 복 받는 법 (신 30:15~20, 약 1:17) 197 바로가기

제96과 모든 것을 더하심 (마 6:33~34) 199 바로가기

제97과 매일의 복된 생활 (약 4:13~17) 201 바로가기

제98과 세 가지 축복⑴ (요삼 2절) 203 바로가기

제99과 세 가지 축복⑵ (요삼 2절) 205 바로가기

제100과 영혼이 잘됨 (요삼 2절) 207 바로가기

제101과 무엇을 구할까요 (요 14:13~14, 요일 5:14~15) 209 바로가기


13. 종교와 기독교 211


제102과 종교에 대한 연구 (행 17:22~23, 26:5) 211 바로가기

제103과 기독교의 특성 (행 4:1~12) 213 바로가기

제104과 기독교의 세 가지 성격 (엡 5:15~17) 214 바로가기

제105과 종교사업자 시몬 (행 8:9~25) 217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7분설교 9집을 교정 차 읽은 후 이미 준비된 10집을 제목별로 편집하고 이글을 씁니다.

제가 7분설교집을 기록하게 된 배경은 성경강론을 기록하면서 평소에 묵상하는 습관에 따라 마음에 떠오른 설교를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강해문을 묵상하는 중에서(출애굽기, 민수기), 또는 어떤 분의 설교를 듣거나 문서를 본 소감 중에서 그리고 항상 저자신이나 현실 교회의 문제들을 반성해 보는 중에서 떠오른 내용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매 과목마다 7분이란 시간제한을 갖고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설명과 취지의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한 것을 발견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전체를 다 읽으신다고 가상하면 중복된 내용과 사상을 발견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내용과 중복된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이유는 전체를 다 읽지 않고 한, 두 과목만 읽는 경우를 생각한 것입니다.

필자가 자신의 글을 일괄적으로 읽고 느낀 것은 좋은 내용도 있지만 피상적으로 넘어가는 내용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 것은 독자에게 지루함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님들이 누구의 설교문을 읽으실 때는 반드시 설교자가 그 문장을 기록하면서 느끼는 감정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시면서 긍정적으로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원액이라 한다면 설교문은 원액을 희석시킨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성경본문을 상상 하시면서 설교문을 꼼꼼히 읽으신다면 은혜가 안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제가 교회정치초안을 연구하는 것이 있어서 다음에 7분 설교 11집이 나오려면 상당기간을 요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이 항상 저의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속히 나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 합니다.




2004. 11. 11.


저자 지 영 근

 

 

1. 성경으로 은혜 받음

제1과 성경의 권위 (요 10:34~36) 목록으로


성경의 권위를 가장 존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성경의 권위”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성경의 권위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따라서 성경에 몰두하지 않거나 성경을 가볍게 보고 넘기는 성도들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소극적으로 대할 말씀도 아니려니와, 그렇게 대하면 은혜의 깊은 지경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의 한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성경이 곧 하나님이시라”(요 1:2)는 믿음만은 꼭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도가 성경을 얼마큼 권위 있게 믿으셔야 하는가 하면

1)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문자에 나타난 내용으로 임재하신 줄로 믿으셔야 하고(요 1:1),

2) 또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함께 동반하는 것으로 믿으셔야 하며(행 20:32, 눅 1:37),

3) 또 중요한 것은 성도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이 직접 말씀 하시는 것처럼 받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임금이 교지를 내리면 그 교지가 신하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그것을 받는 자는 그 교지 앞에 절을 하고 받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태도라 할 것입니다(살전 2:13). 믿음생활과 축복의 관건이 오직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2. 왜 성경을 그만큼 권위 있게 믿어야 할까요? 성경의 권위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내용이 많습니다.

1)성경이란 뜻이 거룩한 말씀입니다.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 하셨고 시 12:6 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순결하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한 은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학설이 있고 인간의 궤변이 있어도 “성경이 이렇다”하면 그것이 표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말씀이란 명칭이 3500회 이상 나타난다고 합니다.

2) 이 말씀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여호와)이 가라사대, 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하신 말씀이 많고(창 1:3~29, 민 1:1, 사 22:25, 렘 15:6, 마 4:7, 12:46, 18:22) 또 “성령님이 말씀하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마 10:20, 행 16:6~7, 히 3:7).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말씀을 전달하실 때 성령의 감동(영감, 벧후1:21) 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뜻을 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 거절할 수 없게 하셨고(겔 2:5, 마 10:14, 요 13:20), 자의로 말하지 못하게 하셨으며(신 18:20, 겔 13:3, 고전 2:13), 말씀을 선지자의 입에 두어(신 18:18, 렘 1:9) 주시는 말씀만 나타내게 하셨습니다(민 22:3, 23:5,12,16, 호 1:1, 암 1:3). 그래서 어떤 때는 말씀증언자가 뜻을 몰라도 증언하였고(단 8:9, 벧후 1:19~21, 계 5:1~4), 때로는 완악한자들이 듣지 않아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겔 2:5, 딤후 4:2). 영감으로 말씀을 주실 때 오류 없이 전달하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모세를 신이라” 하신 뜻이 바로 말씀전달에 권위가 있고 오류가 없음을 나타내신 뜻인 것입니다.

3) 이 말씀의 기록 과정에도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기록하라”하셔서 기록하였고(출 17:14), 기록한 다음에 또 기록하라(신 6:9) 하셨으며, 어떤 율법은 친수로(기적으로)기록해 주시기도 하셨으니(신 9:10, 출 24:12) 이는 구약의 기록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성경을 신약에서 입증한 말씀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나(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요 10:34), 베드로나(행 2:17, 욜 2:28~32), 바울사도(롬 15:11, 시 117:1)나 다른 저자도(행 13:35, 시 16:10) 구약을 정경으로 믿고,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저주를 받는다(갈 3:10)” 하셨고, 또 신약이 완성되는 시기인 주후100년경에 사도요한은 말씀계시에 “가감하면 저주를 받는다(계 11:18~19)” 하시므로, 완성된 성경 66권의 의미를 확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4) 모든 성경이 66권이고 이 말씀이 기록된 시기는 1600년간(BC1500~AD100) 이며, 저자는 왕, 목자, 어부, 학자 등 다양한 신분 40여명이 기록을 하였는데, 그 사상이 일치하고 모든 예언이 사실대로 성취된 것은, 성경의 통일성과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3500년 이상 보존되고 전파 되면서 2355방언으로 번역이 되었고, 많은 영적, 도덕적 구원과 변화를 일으킨 것은 역시 성경의 권위를 입증함이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제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면,

1) 성경의 진리성과 권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중, 그들은 인간의 이성적 비판으로 부정하고 오류를 지적하려 드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권위로 변증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기 위함이요,

2) 성경만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계시로 나타내 주신 것은 성경뿐이기 때문에, 성도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옳게 할 수 없기 때문이요,

3) 성경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로, 또는 하나님의 지도와 능력으로 믿으셔서 말씀제일주의의 신앙을 확보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시 119:105)” 하신 말씀을 또 한번 유의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제2과 믿을만한 증거 (행 17:30~34) 목록으로


1. 이 본문 끝에 보시면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신 것이 무엇일까요? 또 “무엇을 믿으라”고 증거를 주셨다고 생각 하십니까?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만한 증거는 만물입니다. 롬 1:20에서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무디 선생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자는 바다로 보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필자가 부산에서 태풍을 겪은 일이 있고, 또 울릉도를 다녀오면서 흉용하는 바다를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최초 우주 비행사는 우주에 다녀온 후에 아무리 살폈어도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또 가장 작은 미생물을 보면서 “저렇게 작은 미생물 속에 하나님이 아니시고야 어떻게 내장을 만들어 넣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을만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택한 백성들이 믿을만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어야 하며, 또 그것을 믿을만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하고, 그것을 믿을만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기 전에, 그것을 못 믿은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를 허물로 추궁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몰라서 못 믿었으니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무지를 허물로 여기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죽인 것이니까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 무지도 용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에 예언 되었지만, 실제로 성취되기 이전이므로, 알지 못한 것을 허물하시지 않거니와, 이제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백일하에 나타난 만큼, 그것이 곧 믿을만한 증거인 것입니다. 역대의 종교 중에 부활과 승천을 나타낸 종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독교에만 그 사건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요, 은밀하게 된 일이 아닙니다. 수백 명이 체험한 일입니다(고전 15:6).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믿을만한 증거입니다.

3. 성경이 믿을만한 증거입니다. 성경의 신빙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다”(시 12:6) 하셨고, 또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시 19:8) 하셨으니, 신앙의 모든 기초가 성경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에 오류가 있었다면 3500년을 내려오면서 오류를 제거, 또는 교정한 성경을 만들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성도가 믿어야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예언하셨고(사 53:1~11, 시 16:10, 사 26:19), 예수님도 오셔서 예언하셨으며(마 20:19, 막 9:9, 14:28, 요 2:19~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돌아가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승천할 것도 예언하셨고(시 110:1, 마 22:44), 그대로 성취하셨으며(행 1:9), 부활 하신 후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열네 차례나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20)하고 순교하면서도 증거를 한 것입니다(행 7:55~56, 20:22~24). 따라서 사도들이나 본 자들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입니다.

4. 이적을 나타내신 것은 믿을만한 증거입니다. 이적의 극치는 돌아가신지 3일 만에 예수님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부활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많은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이적이 나타나니까 예수님을 죽이도록 지휘한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라”(눅 23:47)하였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서도 반대하는 무리들이 시인을 하지 않았습니까?(행 3:8, 4:7), 예수님이 이런 능력을 나타내신 이유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시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요 10:38), 히 2:4을 보십시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할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만물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이시고(롬 11:36), 보존자이시며(히 1:3), 통치 하시고(시 103:9), 경영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시 139:14~16, 잠 6:33, 마 10:29~31, 행 17:27~28, 엡 4:6, 빌 2:13). 그리고 불신자라도 하나님의 이적은 믿습니다. 또 거듭난 성도는 무엇이 믿을만한 증거냐 하면, 만물과 성령과 이적과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이 증거에 의해서 믿어야 할 것은, 성경이 진리란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예수님이 구원자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한 사실, 그리고 때가되면 만유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3과 읽는 것을 깨닫느뇨 (행 8:26~40) 목록으로


본문 30절에 보시면 “읽는 것을 깨닫느뇨?”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출 33:19에서 “하나님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신다”하셨는데, 하나님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그가 성경을 읽도록 감동하셨고, 또 사마리아에 있는 빌립을 명하셔서 그 내시에게 성경교사의 역할을 하도록 섭리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의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났고, 내시가 성경을 읽을 때 “읽는 것을 깨닫느뇨?” 하였으니, 여기의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로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으셔야 할 것은, 이 질문이 내시에게만 주신 질문으로 여기실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을 읽는 성도 자신에게 주신 질문으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성경을 읽으시지만, 깨달음을 위하여 깊이 상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3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이 본문에 기록 되었지만, 원 글은 사 53:7~8절의 말씀입니다. 신약에 인용된 성경을 읽으실 때는 반드시 구약 어느 곳에서 인용한 말씀인가를 확인하시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확인은 관주 성경을 통하여 쉽게 아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다음에는 읽으신 본문의 뜻을 알고 읽으셔야 하겠지요.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렸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하신 것은 주전 약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신 다음에,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다”함은, 정당하고 공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하셨다는 뜻인데 ‘낮을 때’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로 이해한다면 “낮아진다, 몸을 낮춘다”는 뜻인가? 그렇게 되면 그 다음 말씀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몸을 낮출 때 공평한 재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덜 통하는 것 같으니까 이 ‘낮을 때’란 용어와 번역을 더 살피시든지 아니면 교사에게 묻든지 하셔야 하겠지요. 그래서 조금 더 연구를 하면 이 원문이 ‘에가쏜(ὲλάσσων)’이란 용어인데, 영어로는 '디나이(deny)', ‘부정하다, 거절하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재판장이 심문할 때 “그런 일 없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였지만 공평한 판단을 하지 않고 밀어 붙이기 식으로 재판을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한 뜻은 그 악한 세대를 항거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고, 그런 경우로 인하여 “그 생명이 땅에서 뺏김 이로다” 하시므로 메시야가 돌아가실 것을 예언한 뜻이라고 이해하면서 읽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성경이 한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을 예언한 것’ 까지는 이해를 하였는데, 그가 누구인지 예언자 자신을 말함인지, 아니면 타인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르면 어떻게 하셔야합니까? 성경을 모르면 성경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시 111:2에서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 하셨고, 또 딤후 3:14에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으며, 본문에서는 성경교사(목사)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하였을 때, 겸손하게 시인하고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시가 그렇게 한즉 빌립교사는 그분이 곧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려 주었고, 결국 확신과 구원의 지식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계 5:4에 보시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책을 펴볼 자가 없어서 크게 울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책을 열어 알릴분이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성경배우기를 노력하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택시기사가 아는 장로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았는데 “당신이 은혜를 받고 싶으면 3개월 안에 신구약성경을 한번 읽으시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하여 성경을 읽는데, 3개월이 못되어 그 장로님이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 참석하셨다가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말씀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히 4:12, 사 55:11). 성경을 읽다가 도적을 쫒은 예도 있고(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성경을 가슴 주머니에 넣고 전쟁하다가 총탄을 막은 사실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하물며 성경을 읽고 배우는 자가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요 5:39), 성경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관련하여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구분한다면 말씀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이 있고(유치원), 조금 뜬 사람이 있으며(초보생), 기는 사람,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나는 사람이 있으니 일반 성도는 그 중간, 걷는 사람쯤은 되셔야 할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하여 굴로 들어가셔야 합니다(실천하시라는 뜻). 믿음은 들음에서(롬 10:17), 확신은 배움에서, 배움은 정성과 노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행 16:14에서 주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을 때 그가 말씀을 청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제4과 말씀 묵상 (시 1:1~3) 목록으로


시편 1편을 본문으로 하여 “복 있는 자”란 제목으로 설교를 못 들으신 성도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수차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또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 내용이 떠오르는 것은 그 말씀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늘 읽고 잘 아는 말씀이라도 묵상하면 새로운 깨달음과 교훈들이 생각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감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 성령님이 말씀과 함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14:26에 보시면 “말씀을 생각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무엇이 새로운 교훈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지만,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또 “다 형통할 그 행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도 구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악인 꾀, 죄인의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멀리한 사람), 율법(성경)을 주야묵상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를 멀리하기 위하여 노력 하셨습니까? 죄를 멀리 하시려면 우선 죄를 아는 노력부터 하셔야 하고, 그 다음에 죄를 피하거나 대항하여 싸우는 노력도 하셔야 합니다. 죄와 싸울 때 희생도 치러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죄를 연구할 때는 악한 것도 죄이지만 불법과 부덕도 죄이고, 자신 스스로의 무지와 게으름도 죄인 것을 깨달을 때 그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서 범죄 방지를 위하여 노력하시라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우선 선택 받은 자가 복 있는 자이고, 그 외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시 2:12),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시 32:1), 정직한 자(시 112:2),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시 84:5), 지혜와 명철이 있는 자(잠 3:13, 18), 말씀을 읽고, 듣고 느끼는 자(계 1:3), 주 안에서 죽는 자(계 14;13), 부활에 참여 하는 자(계 20:6), 두루마기를 빠는 자(계 22:14), 그리고 그 이외에 또 8복이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말씀을 하나로 종합하면 복 있는 자는 예수님을 닮은 자이고, 복을 많이 받은 자는 내세에 상급을 많이 예비한 자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복 주실만한 입장을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2. 본문에서 강조하신 복 받을 만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만 묵상하여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계 1:3에 보시면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는데, 듣는 것은 증거자가 있어야 하고 지키는 것은 실천행위가 따르는 것이므로 쉽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묵상은 혼자 하는 것이고 다른 일을 거의 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는 말씀묵상 하기 어렵고, 또 주야묵상 하려면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취미가 대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만큼 즐거워해 보신일 있습니까? 말씀이 즐겁고 주야 묵상을 하시려면 성령이 충만하셔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묵상하는 즐거움에 빠져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기쁨을 설교에 의존하고, 또 대인관계에서 자기의 입지를 알아주는 것에 의존 합니다. 그런데 설교에서 상처를 받거나 이웃이 자기의 입지를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피곤해지고 믿음의 보람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옮기는 경향까지 생깁니다. 이것에 대한 치유 방법은 자신이 스스로 성경을 묵상하는 즐거움에 빠져야 하고, 또 사람의 인정을 떠나서(거기에 관심 갖지 않음)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해 주시는가에 큰 관심을 갖고 사신다면, 이것은 말씀토양에 스스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준 것과 같아서 누구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받고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하여 실족할 우려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로 설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자연수를 스스로 공급받는 나무입니다. 시냇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고입니다. 나무가 언덕에 있어서 시냇물과 거리가 멀면 비 안올 때 사람이 물을 퍼부어 주어야 한즉 그것이 곧 설교 아닙니까? 따라서 말씀묵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맺는 특권적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된 자 라고 하셨습니다.

3. 이런 성도는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하셨으니, ‘무릇 그 행사’란 어떤 것을 의미 할까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에게 무슨 큰 행사가 있겠습니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는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가장 복된 일로 여기기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고, 있다면 그의 생존문제와 그의 연고자들의 생존문제 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것을 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세속이나 세상정욕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광 돌리는 삶을 원하시기 때문에 성도가 그 일에만 충실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영광 돌릴 모든 일에 대하여 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제5과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 (사 1:18~20) 목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본문 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 1:39에서도 “성경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유력해져야 합니다. 계 2:1~4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님을 발견하는 방법”을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교회사역자에게 편지하시는 예수님, 교역자를 오른손에 붙드신 예수님, 교회를 두루 순회하시는 예수님, 성도의 행위를 총찰하시는 예수님, 처음사랑 버린 것을 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처럼,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내시되 “오라하시는 하나님”, “변론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죄를 없애주시는 하나님”, “순종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 “배반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와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오라”하셨고, 시 65:4에서는 “가까이 오라” 하셨으며, 엡 2:13에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를…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사 50:8). 또 “돈 없는 자도 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 한 것 같다”고 생각되는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몹시 친해지시라는 것입니다. 먼 관계에 있던 친구가 가까운 관계로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이어도 괜찮고, 돈이 없어도 괜찮으며, 그 형편이 만신창이 같아도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2. 변론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변론이란 죄를 짓고 발뺌하는 논리가 아니고, “서로 변론 하자”하셨으니까 하나님과의 많은 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길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말을 길게 하면 답답하시죠?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가 길다고 “짧게 하라”하시거나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길게 하는 성도가 다 성공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하려면 자기의 생각도 많이 여쭈어야 하고, 또 기도해 주는 대상도 많이 넓혀야 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도 넉넉하게 갖춰야 합니다. 요즈음 부모 자식간에도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성도와의 대화를 넉넉하게 가지시기를 원하신 즉, 변론하는 차원에서 오래 묵상하시고, 오래 기도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초지종 아뢰면서 기도를 깊게 하는 습관이 60대부터 생겼습니다. 그 이전에는 논리적이고, 제목적이며, 종합적 기도만 간단히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60대부터 자신의 연약을 더 느끼면서(큰 교회 목회할 때는 연약을 느끼지 않음, 교회가 후원하니까) 더 자초지종 아뢰는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런 기도가 더 큰 효력을 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제 마음속 구상과 모든 생활의 절차까지 소상히 아뢰는 습관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다 하시지 않고 변론을 좋아 하시니까 많이 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성경)도 많이 듣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죄를 용서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하셨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신다”하셨으며, 또 탕자의 비유교훈으로도 용서를 강조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9:12, 18:22, 눅 15:11~23). 본문에서 죄를 주홍색, 진홍색으로 표현하신 것은 죄의 악독을 강조하신 뜻이고, 죄를 없애실 때 눈과 양털로 비유하신 것은 그만큼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자신의 죄의 심각성과 그 죄로 말미암아 당하고 있는 불행이 어떻다는 것과,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을 때에 어떤 행복이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변론 하실 때는 자신의 연약과 죄에 대한 변론도 많이 하시고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퍽 기뻐하시고 용서는 물론 은혜를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교만과 고집과 인간정욕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지 못하는 줄로 압니다. 그것을 토하고 벌거벗은 자신을 그대로 시인할 때 하나님은 용서와 함께 새출발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즐겨 순종하는 자에게 아름다운 소산을 주신다”고 하셔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산은 땅의 양식이고, 현실의 복입니다. 제가 마 6:33을 근거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신다”고 할 때, ‘이 모든 것’이란 꼭 필요하고 적당한 현실의 복을 뜻한다고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산을 주시는 것도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현실적 과욕은 허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땅히 필요한 것만 주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6:8,32, 딤전 6:9~10).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순종하셔야 합니다. 자기의 직업에는 만족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즐거워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에게 칼을 보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삼키는 칼입니다. 무질서, 폭력, 전쟁같은 것이지요. 거절은 하나님의 권고를 사양하는 것이고, 배반은 은혜를 감사할줄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권고를 예사로 무시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예사로 망각한다면, 그는 평안치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 말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을 잘 깨달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오라”하셨고(마 11:28), 본문에서는 “죄악으로 얼룩진 백성들을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사 55:1).

 

제6과 하나님을 발견함 (출 6:1~9) 목록으로


옛날에 욥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가서 그 앞에 호소하고 변백할 말을 채우며 하나님이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 23:3).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모든 필요한 말씀을 성경으로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 5:39에서도 “이 성경이 곧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희들이 읽은 본문에서는 어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1.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1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셨고, 2절에서는 “말씀하여 가라사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말씀으로 뜻을 전하시는데 그 뜻을 육법전서처럼 성경으로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로써 뜻을 전하는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 뿐 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을 많이 아는 성도가 믿음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인간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왕에게 “강한 손을 더하시는 분”이라고 두 번을 강조 하셨습니다. 여기의 강한 손은 고난을 당하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왕에게 속박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바로에게 힘을 가하여 고난을 주신다면 그것이 선민에게는 덕이 되고 해방의 기회를 맞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에게도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18:1에서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하였고, 사 40:29에서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명철로 또는 건강과 활동력으로, 인내력과 증거력 등을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도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셨습니다.

3.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신 하나님”입니다. 3절에 보시면 “나는 여호와라”하시고, 과거에는 전능의 하나님으로만 알렸으나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자기 신분을 알리면 반드시 그 신분에 맞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는 하나님이 최고의 신분임을 나타내신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에 거스르는 일은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사랑한다 하시고 선민들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의 명성에도 빛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경을 받을 일만 하신다는 약조가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한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을 거두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사 42:8에 보시면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4. 언약을 하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 언약을 실천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선민의 조상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를 언약하셨더니 이제 그 자손의 신음을 듣고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언약을 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십니다. 400년 만에 출애굽 언약도 지키셨고, 600년 만에 메시야 언약도 지키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언약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재림의 언약이나 상선벌악의 언약이고, 천국의 언약이며, 성도에게 길을 인도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한 모든 언약을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미래에 있을 행복도 믿으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민의 출애굽 사역도 언약을 성취하시는 일입니다(창 15:13~14).

5.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또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어 건지고…너희를 구속하여 내 백성을 삼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해방을 중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해방은 정치적 해방입니다. 하나님은 노예해방 외에도 모든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고뇌에서도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곧 자유와 평안 주시는 은혜입니다(요 8:32, 14:27). 성도는 정신적 자유와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이 은혜는 세상이 주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주관하시는 성령님께서 마음에 진리를 채워주실 때 세상이주는 현세의 복을 받지 않아도 자족을 느끼며(빌 4:11), 진리로 만족하고(시 23:1), 고난과 죽음을 소망으로 삼는 생활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롬 5:3, 빌 1:21). 하나님이 고난과 현세적 핍절에서도 만족주시는 은혜를 꼭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6. 7절에 보시면 “너희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만유의 하나님으로써 만유 중에 자기의 백성들을 특별히 상대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국가적 선민이 없은즉, 성도 개인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하나님, 자기의 아버지로 모시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에는 8절에서 “너희를 인도 하시고 그 땅을…기업으로 삼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의 필수품과 터를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마 6:8, 23에 보시면,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발견 하셨으면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의지하며,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제7과 예수님 연구 (요 14:6) 목록으로


“예수님 연구”란 제목으로 묵상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광대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예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시로 나타내주신 범위 안에서 성실히 배울 뿐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 근거한 다른 설교문도 있지만, 이 시간에는 세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본문을 해석할 때 길이란 표준과 사명과 인도 받는 일을 생각할 수 있고, 진리란 참과 정의를 생각할 수 있으며, 생명은 곧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표준에 대한 것과 능력, 그리고 인도 받음에 대하여 교훈을 받으 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표준 이십니다. “길”이란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고, 또 요 13:15에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본받으라.”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을 어떤 목적으로 또는 어떤 방법과 취미로 살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성을 띠우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정치에, 어떤 이는 법률에, 어떤 이는 과학에, 어떤 이는 예술이나 스포츠에 목적을 두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옛것을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늘 새로운 것만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초가에 살던 사람은 기와집을 좋아 했는데 이제는 양옥집을 좋아하고, 특히 아파트를 좋아하다가 전원주택으로 가기도 하고, 아주 원시적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상태는 한마디로 표현할 때 문화나 유행에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연구해 보면 예수님은 정치가도, 법률도 아니시고, 과학자나 예술가도 아니시며, 기와집이나 양옥집도 가지신 바가 없고, 형편대로 사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33세의 인생이 짧다고 하신 일도 없고, 가정이 없어서 외롭다는 말도 하신 일이 없으며, 가진 것이 없었으면서도 가난을 느끼신 일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은 세상을 어느 정도 초월하신 상태에서 사신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는 뜻은, 그 시대의 예수님 생활을 그대로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세상을 대하신 태도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신 자세에 우리의 표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일이었습니다(요 4:34, 6:39).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는 일도 오직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데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 생애의 목적과 방법에 표준을 두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이라 하신 뜻은, 바로 최고의 능력자란 뜻입니다. 요 1:1에서 예수님은 창조자라고 하셨습니다. 능력의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생이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능력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주십니다. 모세가 능력 받은 것이 그 실 예이지요. 또 옳은 것을 구하면 주십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를 구하여 받은 것이 그 실 예이지요. 그리고 또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주십니다. 그것이 곧 일용할 양식이고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입니다. 선민을 광야에서 40년 살게 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적의 능력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필요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이상 인간에게 능력을 주셔서 초인간이 되게 하신일은 없고 반드시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해결의 은혜를 주셨으니, 그것이 곧 5병2어의 이적이나 병고침의 은혜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께 영광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필수적인 것들을 구하여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꼭 필수적인 것만 구하여 받으시기 바랍니다(눅 11:5~10).

3. 인도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라”하신 뜻에는 성도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이시고(창 12:1), 이삭을 장가보내기 위하여 배우자를 잘 만나게 하신 하나님이시며(창 24:12), 야곱이 애굽에 갈 때 동행하셨고(창 46:4), 선민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 하셨으며(출 13:21), 친히 자기 백성을 인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출 29:46).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1) 우선 맡겨진 일에 충실 하는 것이 곧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2) 멀리 계획하지 마시고 하루 일과 또는 한주간의 일과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이 건설적인 길을 열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멀리 계획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래 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고, 또 한 가지는 자기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인 것입니다. 또 성도가 자기 일에 충실 하는 그 차체가 미래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것을 맡기시기 때문입니다(마 28:21). 마치 안개 낀 앞길을 인도 하시는 것처럼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준이시고, 필요한 능력이시며, 인도자이심을 믿고 의지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8과 진리 접촉의 섭리 (고후 4:3~6) 목록으로


“진리 접촉의 섭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시 3:8) 하셨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라고 하셨습니다(히 2:10).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를 구원하시는데(행 15:11) 반드시 구원의 말씀을 보내시고(행 11:14, 13:26) 접촉하게 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행 2:47에 보시면 “주께서 구원 받는 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접촉섭리*

1. 비택자들 에게는 진리가 가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하셨으니, 과거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것이나 앞으로도 전파되지 않는 곳에는 택한 백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끝이 온다”(마 24:14)는 말씀은 구원의 대상이 있는 곳까지 전파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택한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7:9).

2. 하나님은 구원하셔야 할 백성들에게 먼저 말씀을 보내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나가셨을 때, 비두니아 쪽으로 가려 하시니까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가고, 마게도냐에서 우리를 도우라는 계시를 받고 소아시아 지역을 포기하고 헬라지역으로 가신일이 있었습니다(행 16:6~10). 이것은 그 지역에 또 그시기에 구원받을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성도의 걸음도 인도하시거든(잠 16:9) 하물며 전도자의 길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하신 줄 압니다(롬 10:15).

3. 진리를 전달하심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십니다. ‘스바’여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배워간 사실이나(왕상 10:1~10), 오순절 때에 각 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진리를 받아간 사실, 또 에디오피아 왕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와서 배워간 사실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행 2:8~11, 8:26~39). 이렇게 와서 받아가게 하시는가 하면 전도자를 오게 하여 진리를 듣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오게 하셨고, 빌립보 감옥에 계신 바울사도를 끌어내어 간수의 집에 가셔서 전도하게 하신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행 10:1~48, 16:24~34). 이렇게 복음접촉의 기회는 전도자의 발걸음 따라 주십니다. 최초의 발걸음은 핍박을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시면서 이방에 전파할 기회를 주셨습니다(행 8:1).

4. 듣게 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복음을 들어 깨닫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명수를 먹어야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듣고 깨달으라”(마 15:10)하셨고, 바울사도는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롬 10:14). 여기의 ‘듣는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드리는 통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각 장애자라도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전달수단은 듣게 하는 일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지금은 문서로 보게 하는 법도 있고,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신 29:4을 보시면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에 오기까지는 그것을 주시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기는 모세의 지도에 무조건 따르게 하신 때였습니다. 그 후 율법을 주시면서 귀와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잠 20:12에 보시면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하셨는데, 문제는 이것이 있다고 하여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의 ‘보고 듣는다’는 것은 신령한 진리의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이 깨달음은 하나님이 마음눈을 밝혀 주셔야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5. 그리하여 은혜 받을 자에게는(출 33:19) 마음을 열어 주시는데, 이에 대한 표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여신다는 말씀(눅 24:45), 마음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엡 1:18),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신다는 말씀(엡 1:17),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는 말씀(단 9:22), 말씀 듣는 자에게 성령을 부으신 일(행 10:44~47), 또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고(요 18:13) 또 생각나는 은혜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6). 또 중요한 말씀은 바울이 루디아에게 말씀을 전할 때 “주께서 저의 마음을 여시고 청종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행 16:14). 성도가 말씀을 받을 때 꼭 이같은 은혜로 받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시기에는 그 문이 닫힌다는 사실입니다. 사 6:9~10에 보시면, “백성으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하니, 염려컨대 보고 들어 고침 받을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생명강수와 같아서(겔 47:9) 소성시키고 고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시 107:20에 보시면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상한 심령을 고치는 약입니다. 심령뿐 아니라 육체의 병과 사건도 고칩니다. 그러나 완고한자,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의 통로를 막아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받을 기회를 못 갖는 사람,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성도가 혹 징계 받는 기간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행 2:38), 회개에 희망을 걸고 시행하면 다시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2004.5.14 10시에 탄핵소추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발표가 있었지요. 그때에 소추인 대표나 변호인대표들 그리고 관심 있는 국민들의 그 발표를 듣는 자세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때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들으라’는 말이 ‘샤마’인데, 이 뜻에는 선민의 생사가 달린 말씀이라고 합니다. 암 3:1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살고, 듣지 않으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마음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9과 성경을 강론함 (행 17:1~30) 목록으로


바울사도의 성경강론 규례(설교습관)를 살피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자기규례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였다” 하였고, 행 18:4에서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 하셨으며, 행 19:9에서는 “날마다 두란노서원에서 강론” 하셨고, 행 24:25에서는 “심판을 강론하셨다” 하시므로 강론식 설교(디아레고마이 : διαλέγομαι)를 전문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주로 안식일에 강론 하셨고, 회당을 이용하신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모이는 것을 이용하셨기 때문이고, 강론하신 방법은 “성경을 가지고(본문)”, 뜻을 풀어 가르치시되, 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돌아가실 것과 다시 살아나셔야할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시고 그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중점을 두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언한 말씀과 그 예언이 예수님으로 성취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문제를 증명해준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증거하신 격식을 요약하면,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 강론하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신 것”입니다.

1.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강론식 설교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하셨고, 또 “모든 성경이 믿음과 구원과 교육에 유익하게 때문에”(딤후 3:14~17) 성경을 전체적으로 양식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66권이고, 929장이며, 23,214절입니다. 3년 동안에 성경전체를 강론식으로 살핀다면, 한주 간에 148절을 살펴야하고, 매일로 따지면 21절씩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루에 한절씩만 배운다면 64년을 배워야하고, 10년으로 단축하려면 매일 여섯 절씩 배워야 하며, 주일날 세 시간씩만 배운다면 15절씩 배워야 10년 안에 마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20절씩 살피면서 3년 안에 마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성경을 다 배우려고 애쓰는 성도가 희귀하고 또 성경을 다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사역자도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 10:33에 보시면, 고넬료의 가족들이 베드로가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때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들으려고 한다” 하였고, 행 5:20에서는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끌어낸 후에 “너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모세는 받은 율법을 다 전하였고 다 시행을 한 것입니다(출 17:14, 39:42~43). 따라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피려면, 베뢰아교회 성도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야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도 본문강론을 순서대로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성도가 본문강론에 뜻을 두고 “오늘은 마태복음 1장을 배우고 다음에는 2장을 배운다”는 식으로 취미를 붙이면 대단히 재미있고 스스로 연구하는 기쁨도 맛보실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야 성경에 끌립니다.

3. 지금 읽으신 본문도 연구를 하실 때,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이 바울사도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있은 일임을 아시고, 1절에 ‘저희가’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이며(행 15:40, 16:3), ‘암비불리아와 아블로니아’는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갈 때 동쪽 해변 길로 돌아가면서 두개의 항구도시를 거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마게도냐의 큰 도성이고 항구입니다. 지금은 ‘그리스’의 두번째 도시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유대인들끼리 모여 종교행사 등으로 쓰는 공회당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마디 한마디씩 살펴 나가면 재미에 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맛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강단설교의 매력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설교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본문강론이면 좋은데 대부분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TV방송에서 큰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가 나오는데 듣는 성도들에게 큰 기쁨과 매력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을 한절 또는 몇 절씩 강론하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생활에 문제되는 것을 많이 말씀합니다. 결국 그 설교의 목적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예를 들면, 아내도 사랑하고 이웃봉사도 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려면 모든 재산등기를 아내의 이름으로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려면 많이 주고 이웃의 불우한 사람들보다 더 사치하지 마십시오. 사랑실천의 설교로 재미를 붙이고 인기를 끌다보면, 본문강론은 멀리가고 교인들도 귀만 갖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증언자는 말 잘하는 설교를 연구 하게 되고, 그렇게 하다보면 재미있는 말도 구상하지만 실수도 많이 하지요. 그러나 성경본문을 강론 하는 데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평신도로 하여금 “본문연구와 이해에 이끌리는 교인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만담 같은 것은 없어져야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살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 잘하는 목사보다 성경본문이 더 권위 있게 떠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본문의 뜻을 알기 위하여 배우려는 성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강단의 체질이 많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10과 성경 상고법 (행 17:11~12) 목록으로


성경은 상고하셔야 합니다. 베뢰아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을 상고하므로 신사적 교인이란 말도 들었고 교회도 부흥되었습니다. 성경을 상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좋은 교사를 만나셔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또 잘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딤후 3:14에서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하셨습니다.

2. 성경관을 먼저 배우고 상고하셔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백과’ 220p에 ‘박윤선 목사의 성경관’이 수록되었으며 꼭 읽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인격과 능력이 동반합니다.

3) 그리고 축자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4) 정확무오 합니다.

5) 믿음과 본분의 유일법칙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의미만이라도 확신을 가지시고 배우셔야 합니다.

3. 연장(성경연구에 필요한 도구)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A.H.Strong이란 신학자가 말하기를, 성경을 연구하려면 열심과 인내가 있어야 하되 “마치 맏창이 뚫릴 때까지 땅굴을 파는 심정으로 인내하라”하였고, 또 언어, 역사, 문학, 철학, 물리학이 필요하며, 경건한 자세로 임하고, 성령님의 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2:11, 엡 1:17).

그리고 직관적 깨달음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직관적이란 성경을 읽은자 자신이 그 본문에서 느끼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난제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연구의 과제로 여겨 차근차근 접근하는 자세를 취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신령한 말씀인즉 알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습니다. 욥 11:7에 보시면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온전히 알겠느냐?”하셨고, 롬 11:33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판단은 측량할 수 없고 그 길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내용은 때가되면 밝혀지는 것이 있습니다(요 16:4,19).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릴 것이 아니니…날이 새어 샛별이 마음속에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고 억지로 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벧후 1:19, 3:16).

5. 그러면 실제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순서는 교역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순서와 같고, 또 강론을 하는 순서와도 같은 것입니다.

1) 우선 읽으십시오. 읽으시면서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시고 한 사건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확인 하십시오. 이런 확인은 주석성경에는 다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적 문장이 아니고 시편이나 편지서 같은 문장은 본문분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용상의 분류를 해 보셔야 합니다.

2) 내용상의 분류로써 한 문장이 선택되면, 또 한번 정독하시면서 어문학으로 무슨 내용인가를 파악 하십시오. 여기에서 파악하는 것은 전체내용의 총제목이 됩니다. 부분적 내용으로 따진다면 제목이 여럿 나올 수도 있지만 전체로 포괄하는 제목은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 하나의 제목이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읽으신 본문의 총 제목은 “베뢰아 성도들의 성경과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베뢰아 지역과 데살로니가 지역에 대한 지식을 터득하셔야하고, 또 신사적이란 의미도 해석하셔야하며, 성경을 상고한 태도와 그 결과에도 주목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용이 국문학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다른 번역 성경을 참고 하셔야하고 그래도 안될 때는 주석을 보셔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원문의 ‘유게네스(εύγενήs)’로 “잘 태어난, 가문 좋은, 귀한사람, 마음이 고상한 사람”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 네가지 뜻 중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마음이 고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신사는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헬라말로 ‘유게네스’는 “마음이 고상한 사람”을 뜻하니까 교양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양 있게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이 스스로 또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의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상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로써 자신들의 믿음이 성숙해질 뿐 아니라, 헬라의 귀부인(유력한 사람의 부인)과 남자들도 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이쯤 살피신 다음에는 이 문장이 왜 기록되었을까? 후세인들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기록하셨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 기록하셨을까요? 이 글을 읽는 성도들이 “베뢰아 교회성도들의 성경상고를 본 받으라”는 뜻이라고 생각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전도나 교회의 부흥도 성경 상고하는 입장에서 말미암게 되고 교양이 있는 신사적 성도라면 마땅히 자기의 믿음양식을 스스로 연구하여 깨달아야 할 것을 교훈하심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교사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성도들 자신도 70%교사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1과 질문과 토론 (눅 2:46~47, 마 12:1~8) 목록으로


성도들이 모이면 성경과 신앙생활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많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또 몇 가지 까다로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드리기 위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열두살 때에 성전에 가셔서 성전에 있는 자들과 함께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며 지혜로운 대답을 하셔서 사람들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받으셨고, 또 한때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빈것 때문에 바리새인들로부터 항의를 받으셨는데, “시장할 때 밀 이삭 비빈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하시고,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시장하였을 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레 24:5~9)을 먹었어도 죽지 않은 사실을 예로 드시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므로 명쾌한 대답을 주신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질문할 내용들이 없습니까? 많이 있겠지요. 질문하고 토론하셔야 합니다.

1. 사형제도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살인을 금한 것은 개인감정의 살인입니다. 그리고 사형제도는 하나님이 권세자에게 주신 권세로 하는 것이고,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하는 것인데 존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인즉 양심에 거리껴야 할까요? 중범자가 이웃에 큰 피해를 주어도 가두고 먹이기만하면 될까요?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생명이 중해도 죄를 짓는 자의 생명은 귀할 수 없고, 따라서 진실은 생명보다 귀하며 생명을 희생시키면서라도 죄는 방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요, 사형제도는 하나님이 선민을 통치하실 때 중한범죄를 어거하시기 위함과 또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시행하신 것인데, 어찌 하나님만 못한 인간이 죄가 더 관영된 세대에서 그것을 금하려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혹 양심가처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지 의심이 갑니다.

2. 군 입대 거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쟁하시는 여호와라”(시 24:8)하셨고, 또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신다”(삼상 2:6)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전쟁이냐?”하는 것입니다. 영토침해나 인권문제로 다툼이 생기면 전쟁할 수도 있고, 협상할 수도 있습니다. 협상은 전쟁에 자신감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눅 14:31~32). “죄인을 벌하기 위하여 사형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즉, 정의의 명분이 있고 죄를 방지하는 목적이 뚜렷하면 전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말씀은 개인적 문제이고, 또 국가적인 원수도 국민이 합의 하면 사랑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전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란 자격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국민의 자격은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국방의 임무나 군인되는 임무가 양심에 거리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대법원판례).

3. 교회가 정치적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할 때, 교회는 신령한 믿음의 단체인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작시키는데 힘쓸 것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것(신령성)과 가이사의 것(정치성)을 구별하라”하셨은 즉, 정치는 성도 개인이 국민의 자격으로 할 것이요, 교회로 끌어드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정치에 가담하여 의견이 상충된다면

그 교회는 갈등의 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4. 교인이 노동조합원이 되어 파업에 동참하여야 하는가? 할 때, 먼저 자신이 몸담은 기업이나 국가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가? 또 자신의 이기주의 확보를 위하여 이웃에 피해주는 일이 정당한가? 또 자신이 양보를 안 하면서 사랑실천이 되겠는가를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타낸다면 극단의 대결을 피할 수 있을 것이요, 합리적 질서 안에서 얼마든지 부조리한 것을 고쳐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 입니다. 만일 나라의 국민들이 공익보다 이기주의 선통이 크다면, 그 나라는 머지않아 무거운 짐에 눌려 가라앉는 배처럼 될 것입니다.

5. 여자목사는 왜 안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엡5:22)는 것은 가정의 일이고, 딤전 2:12~14에서 “여자는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니 조용히 배우라”하셨는데, 그 이유는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아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혹받는 취약성이 남자보다 더 민감한 것을 실 예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지가 굳고 정의성과 지식이 남자보다 더 크면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나 남자지도자가 없는 교회에서 여전도사의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교단에서는 여자목사 반대하는 이유로 제사장과 사도(히 3:1, 믿는 도리의 사도인 예수님표상)에 여자가 없다는 것을 드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과 사도가 예수님의 모형이지 목사의 모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여자목사가 없는 교단은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자가 남자 다스리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씀이 교인 통솔에 지장을 준다면, 여자목사의 지도를 싫어하는 남자가 남자목사 교회로 나가면 될 것입니다. 딤전 2:12의 말씀(남자주관 금지)은 절대차별이 아니고, “여자가 먼저 유혹받은 것을 감안하여 겸손을 차리고 더 조심하라”는 뜻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6. 그 외에도 현실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율법주의적 형태, 교역자의 권위와 자질문제, 교회 이기주의 문제, 교회의 사업주의 문제, 교회의 금융사업 문제,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문제, 예배당을 교회로 보는 문제, 전통을 우상시하는 문제, 교회를 명예 발판으로 이용하는 문제, 신분의 진실성을 숨기는 문제, 순교자의 정의문제, 등 토론하고 알아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2과 만나요리 (출 16:23~24, 민 11:8) 목록으로


만나는 그 당시에 육신의 떡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영혼의 떡, 말씀의 상징입니다(마 4:4, 요 6:35,58). 본문에는 그 요리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갈고, 찧고, 굽고, 삶으며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또는 기름 섞은 과자 같다”하셨으니, 먹으면 달고 고소하여 늘 기쁨을 느끼며 먹게 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그것만 먹고도 부족함 없이 살수 있을 정도 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도 말씀을 다양성 있게 요리하여 성도로 하여금 먹게 하여야 하고, 성도들도 말씀 먹는 방법과 맛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속담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이는 조기나 갈치를 구어서 뼈도 안남기고 다 먹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터득하는 방법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증언자의 설교가 성경의 핵심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그렇다고 하여 전체를 다 증언하지 않고 핵심만 증언하고 비켜가도 안되며, 말씀을 듣거나 배우고 터득하는 성도들도 어설프게 배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축자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글자나 점 하나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마 5:18). 그렇다면 전체문장에서 글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 한 마리 잡으면 버릴 것이 있습니까? 가죽, 뿔, 뼈, 창자, 다 쓰지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똥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반죽하여 집을 짓거나 말려서 숯 대용으로 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 하나까지라도 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여기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밝히 말씀하셨고(요 11:14, 16:25), 자세히 설명 하셨으며(눅 24:27), 성령님도 밝히 말씀하신다(딤전 4:1)”고 하셨고, 또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 하시므로 사도들도 말씀을 밝히 증거하고(행 18:5, 빌 2:16)또 다 증거 하였습니다(신 18:18, 엡 3:3). 그렇다면 오늘날 말씀을 증언하는 사역자들은 어떻게 증언하셔야 하며, 또 듣는 성도들은 무엇을 들으려고 하셔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들으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닌 사회이야기, 정치이야기, 철학이야기가 나온다면 듣기는 좋아도 복되지 않다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생명의 떡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증언자가 성경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크게 실망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들어 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2. 성경 본문 내용을 들으려고 하셔야 합니다. 혹시 교인을 지도하기 위하여 본문에 근거한 제목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감사절을 지키니까 감사설교를 해야 하는데, 성경에 감사설교를 길게 할 수 있는 본문이 적습니다. 구약에서 감사절 말씀과 신약의 열 문둥이 중 한사람 이야기 외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제목설교로 하게 될 때는 제목에 따라 여러 곳의 말씀을 설명하게 되는데, 그 경우에도 성경 예화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겸손합시다, 감사합시다.”하고 혹 제목설교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성경 본문 해석설교로 하여야 하고, 성도들도 그것을 들으려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 본문을 읽으셨는데 어떻게 설명하시는가?”하고 영어로 말하면 문법과 번역을 하고, 수학으로 말하면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그 본문의 뜻을 알려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본문의 뜻보다 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 본문의 출처와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문을 연즉 누가 떡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떡 맛을 보고 ‘맛있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누가 왜 갖다 놓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출처와 목적을 아셔야 하겠지요. 알아보니 옆집에서 친교목적으로 준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떡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설교를 위하여 읽은 본문도 반드시 그 개론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고 성도는 그것을 들으려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는 그 본문에 있는 단어, 문구, 역사적 내용 등을 다 설명한 후에,

5. 마지막으로 핵심적인 내용을 성실하게 증거하고 또 성실하게 알려고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시간에 읽은 본문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요?

1) 개론을 말해야 하겠지요. 이 말씀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영감을 받아 기록한 말씀이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인즉 우리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2) 내용은 선민이 광야여행 때 기적의 양식 만나를 주셨는데, 그 만나의 요리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고, 찧고, 굽고, 삶아 먹으면 좋다는 뜻입니다. 처음 보는 양식이니까 당연히 요리법과 먹는 분량을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먹이신다는 뜻

②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야 한다는 뜻(하나님이 성도를 다스리시는 섭리로 나타내신 것이 구약의 역사임)

③ 영적 양식의 예표란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처럼 잘 요리하여 맛있게 먹으라는 뜻입니다.

 

제13과 유두고의 떨어짐 (행 20:7~12) 목록으로


바울사도일행이 3차 전도를 헬라지역에서 마치시고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 지역인 ‘드로아’에 오셨습니다(18:23~21:6). 동행자들이 여러 명 있었으니,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와 누가(21:1,12)까지 동행 하였는데, 한 주간을 ‘드로아’에 머물러 계시면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큰 성회를 열고 밤중까지 강론을 하셨는데 유두고라는 사람이 3층 다락 창에 걸터앉아 강론을 듣는 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거룩한 모임에 큰 불상사가 생긴 것입니다. 9절에서 “떨어진 사람을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하셨고, 바울은 10절에서, 그 죽은자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저에게 생명이 있다”하고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이것은 성찬예식으로 보아야함. 7절)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으며, 그 아이는 살아나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나, ‘죽었다’는 말씀과 ‘살아났다’는 말씀이 더 힘을 주는 만큼 바울사도가 죽은 자를 살린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읽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를 연구하셔야 합니다.

1. 바울사도의 선교여정이 퍽 바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5일 만에 오셨고(행 20:6), 오순절전에 예루살렘에 가셔야 하는 바쁜 일정 때문에(행 20:16) 에베소도 들리시지 않았습니다. 이 ‘드로아’는 바울이 2차 전도를 행하실 때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서 “마게도냐로 가라”는 지시를 하셨던 곳입니다(행 16:6~10). 그곳에서 한 주간 집회일정을 보내시고, 마지막 밤에 성찬예식을 앞두고 강론을 길게 하시는 중에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일정이 바쁜 바울사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유두고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저는 유두고의 실수가 우리, 또는 여러분들의 실수가 되시지 않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유두고는 예배시간의 지각생입니다. 남이 먼저 와서 자리 잡은 다음에, 앉을자리가 없은즉 창문턱에 앉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늦어도 5분, 10분전에 오셔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 10분전에 빨리 가서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는 제목을 구상 하면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진 이유 첫째는 지각생으로 자리를 옳게 못 잡은 것이요.

2) 둘째는 위험한 장소에 걸터앉은 것입니다. 요즈음 이런 위험을 예사로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쪽은 실내공기를 마시고 또 한쪽은 바깥공기 마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신령한척하고 밖에 나가서는 방탕하는 것처럼 천국과 세속을 왔다 갔다 하면서 두 마리의 토기를 다 잡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립적인 것이나 양쪽의 이득을 다 보려고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마 6:24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곧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걸터앉아서 양쪽을 다 누리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보호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떨어지고 죽은 것입니다. 반드시 세속은 멀리하려고 애쓰시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 위하여 세속의 정욕을 손해 보는 방향으로 사셔야 합니다.

3) 세 번째 이유로는 깊이 존 것입니다. 그때는 밤중까지 강론하는 바람에 졸았다고 합시다. 오늘날은 30분 설교에도 조는 사람 많지요. 피곤해서 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여 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과, 이 말씀에 생사가 달렸다”는 인식을 갖고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졸음마귀가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유두고는 말씀 청취하는데 실패하여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2. 그러면 저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배시간 잘 지키시고, 양쪽 재미를 다 보려하지 마시며, 어찌하든지 말씀 듣는 귀를 여시고 열심히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행스럽게도 유두고는 살아났습니다. 이는 그 시기에 예수님이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을 나타내 주신 것은 복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히 2:4, 마 11:3~5, 요 14:11). 그러나 이 시대는 사도들이 기독교(복음)의 기초를 완성한, 후 시대이기 때문에(고전 3:11, 엡 2:20) 사도시대처럼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시거나, 아주 안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 62:11과 계 7:12에 보시면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권능이 “내게 있는 것으로 준다”(행 3:6)하신 것처럼, 성도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떨어져서 죽으면 사람은 살릴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죽은자를 살린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적은 언제라도 주시니 죽은자라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잘못된 것 인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두고처럼 실수하시지 않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4과 예언과 실천 (행 20:22~23, 21:1~14)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바울사도가 3차 전도를 순행하시고 돌아오실 무렵에 “예루살렘에 가시면 핍박과 위험이 있다”는 제자들의 예언이 수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복음 증거하는 일이 생명보다 귀하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한다”는 뜻을 나타내므로 제자들이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21:1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심령의 매임’, ‘성령의 증거’(20:22~23), ‘성령의 감동’(21:4), ‘성령의 말씀’(21:11), ‘주의 뜻’(21:14)이란 용어가 나오고, 제자들의 뜻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셔야 하는데, 바울은 가셔야하는 감동을 받고 계셨으니, 이 사실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예언이란 뜻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문 9절에 “빌립 집사의 딸 넷이,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하셨는데, 이 예언의 뜻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계시를 받아 전하는 예언이고, 또 한 가지는 받은 계시를 가르치는 예언입니다. 계시를 받아 전하는 예언은 방금 읽으신 말씀 10~11절에 나타난 것입니다. ‘아가보’란 예언자가 바울의 띠를 풀어 자기의 수족을 매면서,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이렇게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길 것이라”한 것이요, 또 가르침의 성격을 띤 예언은, 고전 13:2, 14:5, 29에 나타난 내용으로, 받은 계시를 풀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시절에는 계시적 예언이 있었으나, 계시가 완성된 신약시대에는 예언을 설교의 뜻으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심령에 매임이나, 성령의 증거나, 성령의 감동이나,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선한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동이 주의 뜻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은 대부분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하였는데,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가야한다”하셨고, 또 제자들은 바울의 결단을 꺾지 못한 상태에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였으니, 주의 뜻이 성령의 감동보다 한 단위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주의 뜻이란 하나님의 섭리에 해당하고, 예언이란 절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주님의 뜻에 대한 격차를 설명함에 있어서 성령의 감동은 주의 뜻을 이루는 절차에 해당하고, 주의 뜻은 성취되는 것이니까 섭리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를 예를 들면, 마 22:14의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입니다. 청함을 받았으니까 잔치 집까지는 오는데 예복이 없어서 음식을 못 먹고 쫓겨납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사람은 예복을 입고 와서 음식대접도 받고 주인을 상면한 후 가게 되지요. 왜 이렇게 하나님이 이중사역을 하시는가? 하시겠지만, 이것은 마치 유명한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이 거동하면 많은 수행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더 일할수 있도록 쓰실 섭리가 있다고 믿고, 또 그렇지 않으실 때는 죽을 각오를 하는데, 바울을 사랑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는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충동으로 성령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성령의 감동은 당사자의 형편과 사명의식에 따라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밀레도에서 예배소교회 장로들과 작별하실 때 “다 내 얼굴을 다시보지 못 할 것이라”(20:25)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 섭섭하여 울고 헤어졌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예루살렘 가까이 오도록 이어지니까 마치 사람을 죽음의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로’에 도착하였을 때 제자들이, 또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하였으니, 이 감동은 제자들이 바울을 아끼려는 사랑의 충동으로 감동하신 것이었고, 또 ‘가이사랴’에 도착하니까 ‘아가보’란 선지자가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수족을 매면서 “바울이 이렇게 결박 될 것이라”하였으니, 수족을 맨 것은 입체적 계시 또는 시각적 계시인데, 내용은 바울이 어떤 일을 당할 것만 나타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가보는 “가시지 말라”는 계시는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계시를 함께 받은 제자들이 “가시지 마십시오”(행 21:12)하고 권하였으니, 이것은 아가보의 계시에 제자들이 의견을 말한 것입니다. 21:4에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가시지 말라”하였는데, 이것은 사랑의 충동을 일으킨 감동이라고 말씀드렸고, 21:12의 ‘만류’는 아가보의 예언에 의한 반응 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난, 핍박이 있을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아셨습니다(20:23). 그러나 성령님이 직접 “가지 말라”는 감동을 하신 일이 없었고, 바울은 오직 생명을 받치기까지 받은 사명을 실천하셔야 한다는 굳은 의지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니까, 바울이 간 것은 사명과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따른 것이요, 제자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은 어디까지나 바울을 사랑하는 도덕적 수준으로 감동하신 것이라고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15과 말씀체험⑴ (사 48:17) 목록으로



믿음생활을 오래하니까 그동안 말씀체험한 일들이 생각납니다. 이 말씀체험은 믿음성숙을 기대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할 줄로 믿어서 몇 가지를 글로 남기면서 말씀드립니다. 믿음생활을 얼마나 하였길래 오래 했다고 할까요? 해방되기 전 수전(헌금)을 2전(연필 한자루 값)씩 낼 때 주일학교에 다닌 기억이 있고, 해방 후에도 가끔 할머니 독촉으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13세 때(중1) 6.25난후 더 열심히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21세 때 은혜 받은 체험을 하였고, 군대생활을 하면서 기도생활을 더 힘썼으며, 5년간 신학을 거쳐서 29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35세와 46세에 노회장을 했고, 52세에 작은 신학원 원장 2년도 해보았습니다. 목회는 목사되기 전에 4년쯤 했고, 목사된 후 7교회 7당회를 36년째 하고 있으며, 노회는 목사후보생 시절부터 거친 노회가 일곱 노회입니다. 위임은 세 번 받았는데, 다 한노회에서 받았습니다. 아홉 식구를 부양하면서 목회를 하였으니까 믿음을 오래한 경력으로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결론으로 할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할말들을 준비하는 중에 말씀체험이 포함 되는 것입니다.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하셨고, 히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셨으며, 또 눅 1:37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하셨으니, 반드시 말씀대로 성취 되는 것을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말씀이 옳구나”하는 확신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성경을 잘 몰랐기 때문에, 또 누가 “이 말씀을 체험해 보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없기 때문에, 나 혼자의 생활역사 속에서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성경을 먼저 읽고 그 말씀대로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 119:103에서 “말씀은 맛이 있다”하셨고, “그 맛은 꿀보다 달다”하셨으며, 히 6:4에서는 “말씀과 은사와 능력을 맛보고 알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체험으로 맛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마 7:7)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면 “받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체험해 보셨습니까? 대하 16:9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몰두하고 매달리면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던 무렵에 새벽기도의 열심과 성경읽기와 3일 금식을 포함해서 노력한 일이 있었는데, 3개월 만에 회개하는 체험, 말씀이 두려워지는 체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체험이 있은 다음부터 군대생활, 신학공부, 목사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 7:7과 대하 16:9은 내가 체험한 말씀이 된 것입니다.

2. 사 48:17을 보시면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익하도록 가르친다”는 말씀에서 저는 일반대학(공군사관학교)을 가려고 하였으나, 물질사정으로 가지 못하고 2년쯤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 하였는데, 군 생활 때부터 신학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그런 여건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 길과 그 배움이 가장 유익하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신학과 성경연구는 죽을 때까지 취미로운 것이고, 또 대통령의 정치보다 보람되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교회 임지를 맡아가는 것이나, 목회를 잘하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이 원할 때 맡아야하고 싫어하기 전에 떠나야 하며, 어디로 가든 의식주는 해결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꾸준히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말씀대로 유익하게 가르치셨고 또 유익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 인도는 하나님께로 갈 때까지 영광되고 유익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3. 의식주문제 해결입니다. 오늘의 풍요한 생활과 40년 전의 생활은 큰 차이가 있지만, 지금이라 하여 다 넉넉한 것도 아니고 옛날이라 하여 다 굶고 산 것도 아니지요. 그때나 이때나 있는 자는 있고, 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마 6:25~34 말씀은 신앙초기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 말라”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키우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하신 말씀인데, 저는 이 말씀을 믿을 때 노력 없이 해결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고, 누가 말하기를 “공중의 새도 쉴 사이 없이 노력한다”는 말을 들었고, 또 “나는 특정직업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으면서 “먹고사는 문제 염려 말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믿은 증거가 무엇이냐? 하겠지요. 제가 결혼했을 당시에 산아제한 강조기였기 때문에 자녀 많이 낳는 사람도 드물었고, “자녀 많으면 키우기 어렵다”하여 제한을 하였지만, 저는 생각하기를 사내 남(男)자가 열 식구 먹일 힘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무슨 일을 해서라도 먹이고 고등학교까지는 시킬 자신 있다는 생각으로 가족을 늘렸는데 정말 성경말씀대로 의식주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가족수가 늘면 느는 대로 주셨고 정말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히4:16). 지금도 취직을 하러 나간다면 ‘배달운전사’하라면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리전달 사역이 아직도 얼마든지 있어서 늘 바쁩니다. 말씀체험을 많이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16과 말씀체험⑵ (창 45:7) 목록으로

 

4. 시 91:7을 보시면,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하셨는데, 이 말씀은 생명 지켜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체험 하셨길래 지금까지 살아계신 것 아닙니까? 살아오시면서 삼풍이다, 9.11이다, 6.25다, 비행기 추락이다, 전철화재다, 전염병이다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죽어갑니까? 그런데도 살아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지요. 하나님의 보호의 체험인데, 저는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죽음의 위험이 네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물에서 죽을 뻔 했는데, 안종인(6.25때 형이 면장을 하였기 때문에 그해 겨울에 총살당함)이가 끌어내 주었고, 두 번째는 소달구지를 타고 가다가 소가 뛰어서 달구지가 길 아래로 쓰러졌는데, 그 때 발목이 부러질번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빨치산들이 딱콩총을 여러방 쏘았는데 맞지 않았으며, 네 번째는 저의 아버님이 6.25때 가난하게 살면서도 피난간 사람들의 땅을 경작하지 않은 관계로 곤욕과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이런 재앙이 가까이 못하도록 지금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위험에 나가는 일은 계속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 받으셨다면 이 말씀을 체험하신 것입니다(이 글을 쓴 다음날, 2004.8.16 오후3시 운전 중 뛰어드는 어린아이를 치었으나 별 이상이 없는 이적을 또 체험하였음).

5. 전화위복의 체험입니다. 애 3:38을 보시면 “화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로부터 임하는데, 가난해도 복이 있고 애통해도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3~4). 과거에 불행으로 알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좋아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체험을 하셨다면 그것도 말씀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시절에 가난하게 자랐고 또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과거의 환경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30세 되서야 “나의 과거의 어려운 환경이 나를 사람 되게 하는 교육 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감사한 것입니다. 훈련은 악조건에서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 45:7에서 “요셉이 애굽에 온 것은 흉년 때 가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셉은 억울한 옥살이와, 애굽의 노예와, 형들의 미움과, 어머니 일찍 여읜 불행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런 불행이 연결되고 절차를 이루어 성공하였으니까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또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쫓겨 갈때, 사울의 족속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지요. 이때에 다윗의 신하가 시므이를 죽이려 하니까 다윗이 말렸습니다. “아들도 반역을 하는데 사울의 족속이 저주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나님이 나를 화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시키신 것이다. 이 수모를 잘 견디면 하나님이 선으로 갚아 주실 수도 있을 것이라”(삼하 16:12)하였으니, 이것도 “화를 복되게 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이런 말씀을 믿고 체험 하신다면 어떤 안 좋은 일에서도 넉넉히 위로받고 복으로 바꾸어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6.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체험입니다. 시 119:97에 보시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 하나이다”또 “말씀의 맛은 꿀처럼 달다”(103절)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체험 하였습니다. 저는 10여년째 말씀에 끌려있고, 말씀에 끌려 목회를 중단 하였으며, 33° 더위에 앉은자리에 땀이 배는데도 말씀 연구에 임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말씀에 끌리는 체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만 연구하고 앉아야 가장 편안하고 행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 30:11, 14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먼데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과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실감 있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7. 다음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 116:1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기도는 항상 해야 하는 만큼(눅 18:1), 기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대표기도 10분하면 졸 분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이 대표기도를 하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곤하고 집중력이 안 올 때는 휴식하시고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삼하 7:27) 하는 것이 좋고, 또 기도가 의식에 얽매이는 것보다 생활에 합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식사기도를 음식 놓고 하는 것보다 미리 해 놓는 것은 어떨까요? 점심식사 기도를 한 시간 전부터 했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의 생활화인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고독할 때(돈 없고 도와줄 사람 없을 때) 기도하는 맛이 특별한데, 그것을 체험하면 기도의 큰 발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갈망해지는 체험, 진지하게 기도하는 체험, 응답받는 체험을 꼭 하시기를 바라고,

8. 마지막으로 또 중요한 체험은 세상을 부정하는 체험입니다, 롬 8:24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하셨고, 고후 4:18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하셨으며, 요일 2:15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싫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지려면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 더 좋은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믿음”입니다. 세상이 좋고 세속이 좋으면 그 신앙은 현세주의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롬 12:2).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체험은 “세상이 멀어지고 싫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적당히 먹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17과 부스러기 교훈 (마 15:27~2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예수님이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를 사모한 것도 칭찬스럽거니와, 그것으로 소원도 성취하였습니다. 성경에 천국 간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러지는 것(부스러기, 찌꺼기)으로 배불리려 하였는데,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낙을 누리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도 부스러기를 성실하게 먹거나 이용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부스러기 설교를 모았습니다.

1. 주일성수는 신앙과 축복의 제1조건입니다. 주일을 안식일에 근거하여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되고 자신에게는 영적 축복에 덕이 되도록 지키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주의 날’이란 말씀이 계 1:10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요한이 시작한 날이고 초대교부인 익나디어스(117년경), 이레네어스(177년경), 테둘리안(200년경), 역사가 유세비어스(315년경)도 성수주일을 강조한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황해도의 어떤 집사는 주일날 소낙비가 와서 논둑이 터졌는데, 예배 중에 나갈 수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더니 떠내려 오는 큰 나무 뿌리가 터진 둑에 걸려 둑이 막혔더란 것입니다. 그 해에 벼농사를 폐농하고 그 자리에 조를 심었는데, 나중에 잡곡 값이 쌀보다 비싸서 오히려 소득에 덕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리고 62년에 5.16이 일어나고, 63년 봄에 화폐개혁이 되었지요. 서울 충현교회가 주일날 은행에 가서 돈을 바꾸지 않으므로 많은 재정이 무용할 뻔 하였는데, 결국은 청와대에 진정하여 돈을 바꾸고 성수주일의 좋은 이미지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김창인 목사님은 그 아들이 주일날 시험치는 1류 대학을 포기하고, 2류 대학에 진학하므로 장학금은 물론 미국에 유학하는 길까지 열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현실적으로 자신을 못박을 때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좋은 예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고(행 17:31),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며(요 5:22), 또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계 20:13)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더 큰 죄(요19:31), 더 큰 심판(약 3:1)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지옥에 가도 등급이 있고, 천국에 가도 상급의 차이가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히 11:6)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심판을 믿는 자처럼 보여 지도록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생활을 잘 하는 성도는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히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앙이 홀로 설수 있기 위하여 힘을 씁니다. 현시대가 이웃성도나 교역자나 교회로부터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홀로 서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핍박만 환난이 아니고 기독교 변질이 환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연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고, 스스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방도를 세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부패할 무렵에 신도들은 성경을 직접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교권주의나, 문예부흥에 편승하여 성당 짓는 데만 몰두 했습니다. 그러다가 룻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자국민에게 반포하였을 때 종교개혁이 힘을 얻었고 성사된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다시 안 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권세자의 정치가 국민의 정치로 돌아가는 것처럼 성직자나 교권주의 정치도 부패하면 일반성도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무장이 꼭 필요합니다.

4.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을 의식적 예배에서 교육과 연단 받는 기회로 돌려가야 합니다. 혹이라도 의식의 권위에 눌려서 의식 그 자체로 복 받는 줄 착각하실까 두렵습니다. 은혜는 의식참여 보다도 성경의 깨달음과 실천으로 받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설명을 한다하여도 ‘은혜의 방편’은 예배라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많이 돌리는 의식인데, 이 예배에는 반드시 믿음, 지식, 감사, 회개, 순종, 충성, 사랑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예배, 하나님 아는 지식 없는 예배, 감사와 회개 없는 예배, 순종과 충성 없는 예배, 사랑 부족한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예배는 영광을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예배의식에 참여하기 전에, 열 시간 예배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믿음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이 되고, 특히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에서는 더욱 종이 되셔야 하며, 사랑과 봉사의 모범자만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생활은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성도의 사랑이 중요하며, 그 다음에 하나님께 나가는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 교훈으로 성수주일과 하나님의 심판과 믿음생활의 중요성과 교회의 생활과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2. 초대 교회적 신앙

제18과 시작하는 교회 (행 2:37~47) 목록으로


“누구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당연히 외칩니다. 우리 새 교회도 초대교회 즉, ‘시작하는 교회’를 본받기 위해서 이름을 ‘새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교회는 사도행전 1장부터 나타납니다. 시작하는 교회가 어떠하였습니까?

1. 복음적 신앙에 기초 하였습니다. 이 복음적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님을 믿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이전에 예수님의 신분을 알리신 것과 십자가와 부활이 성취되고, 행 1장에서는 성령님의 약속과 승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분을 아는 것,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 부활, 승천을 아는 것, 그리고 성령님과 그 분의 역사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복음적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고백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아는 것이었지요(마 16:16). 예수님은 거기에 기초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신앙고백입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님도 예수님 아는 지식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사실을 생생한 역사로 목격하고 확인한 사람들이었고, 또 그 사람들의 말을 직접들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복음적 신앙을 무엇으로 받습니까? 오직 성경계시로 받는 것입니다. 복음적 사건을 본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성경으로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에 나타난 복음적 사건을 확신하는데 기초를 두셔야 합니다.

2.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의 기초신앙을 가질 때도 성령님이 내적으로 역사 하셨습니다(요 3:3, 마 16:17, 고전 12:3). 그런데 또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도록 역사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엔진이 살아났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받아야할 성령은 바로 능동 하는 힘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날이 못 되어 줄터이니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5). 또 그 성령님이 오시면 “능력을 받고 증인 노릇을 하여야 한다”(행 1: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적 신앙을 가진 120명의 시작하는 교회의 식구들이 다 모여 기도에 힘쓰면서 기다리다가 7일 만에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40일간 계셨고, 오순절(유월절부터 50일째)에 성령님이 강림하셨으니까, 7일이란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시면 “누구누구가 다 거기에 있었다”하셨고, 14절에 보시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하셨으니, 전체의 모임과 합심과 기도에 힘쓴 것이 곧 성령을 받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제자의 결원을 채우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는 짝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짝을 채워 조직을 갖춘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자가 목적 없이 구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믿음에 있든지, 사명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있든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자의 결원을 보선한 것은 복음전파의 새 출발을 준비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작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특징은 “약속하신 사실이 처음 성취된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강림하신 성령님이 모든 성도에게 개별적으로 역사하시니까 성령 충만의 은혜를 오순절 때처럼 재연하는 방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성도 개인이 노력하면 크게 역사하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도 있고,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7, 눅 11:13)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시작하는 교회에서 다 성령 충만을 받으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1) 행 2:4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으니, 말은 증언이고 방언은 이적입니다. 그 당시 15개 지역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왔으니까 외국어 방언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그러나 설교하고 증거하려면 한 단계 올라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 지옥 천당 믿어라”하려면 심령의 감동과 담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예사로 이루어지고,

2) 성경의 깨우침이 생기는 것입니다. 행 2:14~36을 보시면, 베드로의 증언과 그의 성경 깨우친 내용이 나옵니다. “모르고 읽었던 그 내용이 바로 그것이로구나”하고 깨우쳐지면서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우침, 곧 성경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3) 전도의 열매가 많이 맺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가 3,000, 5,000씩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처음 그물을 던진 때이니까 많이 잡힌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잡은 다음에 또 잡으려니까 잘 안되는 것이지요.

4) 성도의 가족적 생활이 성숙되어진 것입니다. 43~47절의 말씀이 바로 시작하는 교회가 가족적 평화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있고, 기사와 표적도 많이 나타나고(주는 표적은 없어도 받는 표적 많다), 모여서 예배도 드리며, 서로 돕고 좋은 일을 한즉, 하나님이 교회를 확장시켜 주셨고 거기에 근거하여 핍박도 이기면서 세계선교를 나가게 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복음적 신앙에 든든히 서서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9과 시작하는 교회의 특징 (행 4:32~37) 목록으로


시작하는 교회의 특징은 기독교회이 표준이고, 모든 성도가 흠모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들은 시작하는 교회로서의 특징을 보이지만,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계시록 등에 나타나는 교회는 시작할 때와 꼭 같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쪽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의 형편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 3:14에 보시면 “우리가 시작할 때의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시작하는 교회의 특징이 어떻하였습니까?

1.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된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도 한마음, 한뜻 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까? 가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 큰 것(부활)을 보고 자기를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마 16:24). 이것은 마치 보화를 발견한 후 자기의 집 재산을 다 판 사람처럼, 예수님이 “생명의 주요 구세주이시구나”하는 믿음에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있어야 무엇을 내세우는데 자기가 없어지니까 하나님 뜻만 바라게 된 것이고, 따라서 사욕이 없어진 것입니다. 구세주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판에 무슨 사욕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께 돌릴 영광뿐이고,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데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이렇게 목적이 하나(영광)이고, 사욕이 없어지며, 사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니까 뜻이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 먹고사는 문제나 명예욕 같은 것은 마음 주변에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모든 물건의 통용입니다. 32절을 보시면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고, 자기 물건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에게 맡겨 필요에 따라 쓰게 하였으니” 이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빠른 시간 내에 생활공동체로 변화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가난한자의 편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한 입장에서 무슨 현세적 영달의욕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는 하루세끼 먹으면 그만이고, 가진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입장이며, 머지않아 자신도 부활 천국에 갈 것인즉, 물질관리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산을 다 포기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시겠지만, 모든 성도가 다 상부상조 하려고 하니까 먹고사는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따로 살림하는 자녀들을 한대모아서 살아 보세요. 주택관리비, 식비등 상당한 절약이 있을 것입니다. 부정한 욕심 갖는 사람이 없고 다 근실하고 근검하니까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proletariat(하층노동사회)주의가 바로 이 원리를 본 딴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신성시하여 일만하면 같이 생산하여 같이 쓰는 것이다, 욕심도 없고 갈등도 없다”는 사상인데, 이것이 실패된 것입니다. 왜 평등사회, 평등생산, 평등분배가 실패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성경의 표면만 본 받으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무상통의 뜻은 같으나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인데 공산주의는 무신론주의이고, 기독교는 신령적 내세천국인데 공산주의는 물질적 지상천국이고, 기독교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원하는 것인데, 공산주의는 정치적 억압을 당하니까 그런 입장에서 자기부정이나 현세적 정욕을 다 버리지 못하고 시행하니까 축복될 수 없고, 또 갈등을 안 빚을 수도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특징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증거에 권위가 있으셨고(막 1:27, 눅 4:32), 사도들도 능력을 받았으니까 또한 권능이 있었으며, 또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역사적으로 오래되지 않을 때 였으니까 권능의 증거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권능있는 증거가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라도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면 권능있게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을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증거의 권능이 왜 약한지를 설교자들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시대에 유무상통에 들어가서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고 세례요한처럼 외친다면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4. 네 번째 특징이 말씀과의 관계가 긴밀하였던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보고 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20)하였고, 사도들은 말씀에 붙잡혀 행동하였으며(행 18:5,9),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고(행 19:20), 평신도가 교역자처럼 성경을 연구 하였으며(행 17:11), 브리스길라 같은 평신도가 율법사 아블로를 깨우칠 정도였으며(행 18:24~26), 에디오피아 내시가 병거위에서 성경을 읽었고(행 8:28), 고넬료 집안이 부흥회를 했으며(행 10장), 바울이 안디옥에서 1년, 고린도에서 1년 6월, 에베소에서 2년(행 11:26, 18:11, 19:10)을 가르치셨고, 드로아에서는 밤중까지 가르치시다가 유두고가 떨어지는 사건까지 있었으니(행 20:7), 그 말씀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핍박을 이기고 이방전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작하는 교회의 특징은 한마음, 한뜻된 것, 유무상통할 만큼 사랑이 넘친 것, 큰 권능으로 복음을 전한 것, 말씀과의 관계가 긴밀하였던 점을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셔야 하겠기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0과 초대교회의 모범 (행 6:1~7) 목록으로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음식도 원조를 내세우니까 신앙과 교회는 더욱 그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초대교회의 모범은 사도행전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고,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에 국한할 수 있습니다. 이방지역의 모범적 교회들은 있지만(데살로니가교회, 빌라델피아교회 등), 예루살렘교회에서 나타난 모범만큼 크게 역사되지는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여 예루살렘교회의 특징은 유무상통과 사도들을 통한 능력이 나타난 점이라 할 것입니다.(행 2:44, 4:28~31) 본문 말씀에서 초대교회의 모범을 찾는다면,

1. 원망, 불평거리를 해소해주는 모범입니다. 본래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때는(행 2:4) 핍절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는데(행 4:34~35),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구제의 불공평이 드러난 것입니다. 같은 믿음세계 안에서 히브리파 과부들에게보다 헬라파 과부들에게 구제하는 일이 소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전문기관을 두기위하여 집사회를 만들었으니까 교회의 불공평을 해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불평 중에는 이유 있는 불평도 있겠지만, 이유가 안 되는 불평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목회방법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이유가 못됩니다. 표준이 있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평한 구제를 못 받는다”하는 것은 조정해 줄 필요가 있겠지요. 서울시가 버스노선을 전면개편 하지 말고 불편한 요소만 해소해 주었다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일종의 안식처이니까 짐을 지우는 일터 보다는 부담 없는 쉼터가 되어야 더 좋은 것입니다. 예배나 설교는 길지 않은 것이 좋고, 오고 가는 일이 너무 많아도 안 되며, 그렇다고 하여 진리공급이 적어도 안 되고, 여러 가지 사무적 절차가 복잡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나가기 싫은 교회”란 글을 보았는데, “목사가 자기자랑 많이 하고, 이상한 작태로 사람을 끄는 행위가 보기 싫다”고 하였더군요. 많은 대중들은 작태나 외식을 싫어하고 자연미 그대로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불평도 불평거리가 되지만, 신앙사상이나 교리문제 같은 불평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직무분담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1~2절에 보시면 ‘구제와 공궤’란 말씀이 있는데, 구제는 봉사이고 공궤는 재정 출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면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자는 물질적이고, 후자는 신령적인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목사가 성경 가르치는 사명(설교)이 있다면, 성경을 잘 알아야하니까 성경에 몰두하여야 합니다. 행정, 심방, 친교, 총회, 노회일 다 한다면 사실상 성경을 연구할 시간이 없지요. 그런데도 설교를 잘 합니다. 말재주만 있으면 성경 한 줄만 갖고도 설교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연구하여 가르칠 수 있어야 증거자로써의 사명을 다한다 할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데도 분업이 있고, 음식요리를 하는데도 전문성이 있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섬기는데도 은사에 따라 전문성이 있으니까 그 전문성을 조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전문단체로 구제를 하게하고, 또 재정전문가로 공궤와 교회 살림을 하게하고, 기도전문가로 기도를 많이 하게하며, 또 말씀전문가로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게 한 것이 초대교회의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3. 사도가 아닌 성도들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평신도중에 성령 충만, 지혜 충만, 칭찬 충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지만, 초대교회 모범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일곱 사람이나 뽑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집사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집사란 용어가 없고, 안수만하여 구제와 공궤를 맡긴 것입니다. “집사 됐다”는 공포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직분명칭보다 사역 그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일 맡은 자를 구별하여 부르려니까 “집사로 부르자”하여 생긴 것입니다(롬 16:1, 딤전 3;8). 초대교회의 모범은 땅 팔고 집을 판 헌금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직분도 사역이 중요할 뿐 명칭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끝으로 중요한 것은,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져서 제자의 수도 많아지고, 잘못가는 제사장의 무리들도 돌아오는 역사가 있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큰 특징은 말씀이 왕성해진 것입니다. ‘죽인다’고 해도 말씀을 전하였으니(행 4:20, 7:54~60, 20:23~24, 롬 8:35~37),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살후 3:1에서는 “말씀이 달음질을 한다” 하셨고, 행 20:32과 살전 2:13에서는 “말씀이 역사한다” 하셨으며, 행 12:24, 19:20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다”하셨는데, 여기의 ‘흥왕’이란 원문이 유카넨(ἤυξανεν)인데, 이것이 능동형이기 때문에 말씀자체의 능력의 역사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증거자의 언어적 재간에 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에 졸한 사람”(고후 11:6)이라 하였는데 그가 어찌 웅변설교로 감동을 주었겠습니까. 말씀 그 자체의 능력으로 역사된 것입니다. 저는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는 행 5:20의 ‘다’라는 한 글자 때문에 환경이 바뀐 사람입니다. 성도는 꼭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행 18:5) 초대교회의 모범을 본받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시대적 유행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제21과 초대교회의 특징 (행 2:37~47) 목록으로


좋은 교회, 바른 교회를 연구하려면, 지상에서는 모범교회를 찾기가 힘들고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 곧 근원적 초대교회의 형편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맑은 물을 구하려면 샘 근원으로 가야하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근원도 시작할 때의 형편을 기록한 것이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명기1장 강론을 쓰는데 거기에 나타난 내용이 출애굽기, 민수기의 어느 부분과 일치하는지를 연구하다가 피로를 느껴서 “쉬운 설교문이나 한편 써야 하겠다”하고 장웅일 목사님의 설교집을 보고 거기에 제가 아는 예화 몇 가지를 첨부하여 ‘초대교회의 특징’이란 문장을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을 본받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1. 초대교회 특징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이 때가되매 임하셨기 때문이고, 또 기도하면서 기다리다가 받은 성도들도 있고, 의외로 체험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성령 충만을 받았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2. 두 번째 특징은 “마음에 찔림 받고 어찌할고 하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37~38절). 성령 충만은 회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황해도 재령의 김익두 목사는 27세부터 전도사일을 하다가, 1910년 37세때 신학을 졸업하였는데, 그가 회개하기 전에는 많은 사람을 괴롭힌 깡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을 받고 회개할 때, 자신이 깡패 노릇하던 장터에 나가 “내가 과거에 깡패 죄인이니 나를 때려 억울함을 푸시요”하고 길에 엎드려 사죄를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회개를 이룹니다. 제가 가끔 과거에 어리석었던 실수를 기억하면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으니, “그것도 성령 충만의 덕이 아니겠나?”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3. 40~41절을 보시면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하니 세례를 받고 돌아온 자가 3,000이나 더하더라” 하므로 전도의 불이 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하는 교회가 초대교회이고 전도역사가 곧 성령 충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하셨으니, 이것은 성경배우고 친교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초대교회를 닮으시려면 성경을 배우고, 묻고, 늘 살피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간의 친교는 항상 중요하지요. 또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것은, 다른 일을 다 팽개치고 기도만 했다는 뜻입니다. 소낙비 장마에 개울둑이 터졌는데 주일예배 마치고 나가니까 떠내려 오는 나무뿌리가 터진 둑을 막았더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 충만하면 아침 먹을 양식이 없어도 기도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깁니다.

5. 43절에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란 말씀이 있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경건을 차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를 보시면서 칼을 가신다고 하셨습니다(시 7:12). 병원에 가면 “수술해야 된다”는 말을 밥 먹듯 합니다. 몸에 칼을 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회개를 힘쓰면 하나님이 가시던 칼을 버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6.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43절). 여러분 성령 충만하시고 기적체험을 많이 하십시오. 기적은 꼭 죽은 자가 살고 병이 낫는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사건기적이 많습니다. 어떤 성경학교 다니는 처녀가 기숙사에서 도적을 맞았는데 시집간 후에 도적맞은 성경책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남편이 도적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그 성경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 아닙니까? 저의 자동차에 전우성이란 어린이가 뛰어들어 범퍼에 치였는데, 진단하니 아무 일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PT에서 떨어졌으나 안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필죤목사(1834~92, 영국)가 청년 때에 성대연습을 하기위해 지하실에 들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하고 외쳤는데, 그 건물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사람이 신의 음성으로 듣고 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기적입니다. 나는 또 대구에 있는 아들이 장가가게 된 것이 “기도응답이고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함양의 문집사가 집을 팔아 전세로 들어가고 그 돈으로 예배당을 지었는데, 겨우 지붕만 덮다보니 아이들이 ‘뼈다귀 예배당’이라고 놀리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전주 예수병원에서 눈을 비싸게 산다는 말을 듣고, 눈을 팔아 예배당을 완공하려고 가니까 “부인의 동의를 받아야 된다”하여 부인께 말한즉 부인이 깜짝 놀라 허락을 안하더란 것입니다. 이때에 부인 앞에서 찬송가 226장(웬말인가?…)을 다 부르니까 동의를 해주었는데, 병원에서 “무슨 돈이 급하여 눈까지 파느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대답했더니 예수병원 원장이 감동을 받아 직원회를 열고 눈값 20만원을 거저주어서 예배당을 완공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이 곧 기적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부흥시킬 때도 브리스길라, 아굴라, 그리스보, 디도유스도 같은 봉사자들을 만났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될 수 있었으니 그것도 기적의 은혜인 것입니다.

7. 그 외에도 서로 돕는 일(44절), 모임에 힘쓰는 일(46절), 기쁨과 찬송이 있는 교회(46~47절), 칭송받는 교회(47절)가 되므로 초대교회가 부흥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에 초대교회의 특징 여러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사모하고 기도하며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제22과 원조신앙 (고전 11:1) 목록으로

 

‘원조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조신앙’이란 가장 좋은 신앙을 뜻합니다. 깨끗한 물은 물 근원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신앙도 믿음의 주(히 12:2)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들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하시므로, 예수님과 바울사도 그리고 선지자와 사도들을 본받는 것이 곧 원조신앙이고 잘 믿는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엡 2:20). 원조신앙을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1. 성경중심의 신앙입니다. 성경만 표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만 표준으로 해야 하는가 하면, 기록된 말씀을 더 주시지 않고(히 1:1, 계 22:22~23) 고전 4:6에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 고후 13:8에서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만 신앙과 생활의 지침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크게 높이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성경에 나타난바 대로 실천하기를 힘쓰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원조적 신앙은 예수님의 인품과 생활을 본받는 것입니다. 신앙의 원조가 예수님이고 그 다음이 사도들 아닙니까?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시고(마 11:29), 말을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니며(마 6:7, 전 5:2), 다투지 않으시고, 들레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긍휼이 많으시며(마 12;19~20),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분이라(시 86:15)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착한분이시고 좋은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욕심 가지신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십니다. 마 5:37을 보시면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옳으면 하시고 옳지 않으면 거절하실 뿐 수단과 방법으로 그른 것을 실천하시는 분은 아니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할 줄 압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생베 조각을 낡은 것에 붙이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으니(마 7:6, 9:16), 이것은 거룩보존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신 말씀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시므로(요 5:17) 항상 근면하게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고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돌아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최대한 닮아야 원조신앙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원조신앙은 절차와 서드리(외모와 의식)에 치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시거나 설교하실 때 별도의 예복을 입으신 일이 없었고, 사도들도 제사장처럼 예복을 입은 일이 없었으며, 회당에서 말씀증거 하셨고, 다락방을 빌려 성찬예식을 하셨으며, 산이나 바닷가 어디서든지 장소나 건물에 구애 없이 말씀전하셨습니다. 저는 현실교회가 불필요한 허례의식에서 떠나야하며, 말씀과 십자가의 도리 아닌 것으로 권위를 나타내려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는 물론 사치나 과소비도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물질주의, 현실주의, 형식주의 등에 얽매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실교회는 어떻습니까? 우선 성직자가 명예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 안수식에 간즉, 안수하는 목사 여섯 분이 다 박사라고 하면서 “훌륭한 목사님들이 안수한다”하므로 은혜를 많이 전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에게 무슨 박사란 명칭이 필요합니까?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의 종된 것으로만 만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가 명예와 인기를 좋아하고, 큰 교회 목사 되기를 원하며, 큰 예배당, 큰 시설만 좋아한다면, 이는 다 사치와 과소비와 명예와 현실주의에 치우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원조신앙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4. 바울사도는 원조신앙의 핵심인물로써 어떤 단체를 배경으로 인정을 받거나 그 권위를 앞세워 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래 율법주의 바리새인 중에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거듭남을 받았고, 또 사도의 직분도 직접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즉, 바리새파에서는 배신자로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 사도회에서는 바울이 사역한 근거와 실적을 듣고 인정한 정도였습니다. 갈 2:6~8을 보시면 “사도들이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하셨고, 또 “바울은 사람들의 천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후 3:1~2)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확실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생활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의 기독교단체가 무용하다거나 폄하하는 뜻이 아니고,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성경과의 관계에 서지 못하고 교파나 교회나 어떤 성직자의 휘하에 서므로, 독자적 신앙을 확립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나 교회의 단체가 거룩하면 그 단체를 폄하는 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직자가 세속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원조적 신앙을 고수하지 못할 때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직자의 생활터전에서 해방될 때 많은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교회가 금융사업을 하고, 은급사업을 하며, 장례식 사업을 하고, 물질주의, 시설주의, 먹자주의로 나간다면 그것은 신령한 단체이기를 포기하고 협동조합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십자가와 말씀은 멀어지고, 만담과 속설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이 반성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 떠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또 나의 믿음과 생활이 원조신앙에 있는지를 늘 반성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23과 신사적 신앙생활 (행 17:11~12)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베뢰아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신사적으로 한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신사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구체적인 내용은 “스스로 성경을 상고한 것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신뢰를 갖고(그 말씀이 그런가하여) 타인이 증거하는 말씀을 간절하게 받으며 자기 스스로 성경을 상고한즉, 수준있는 귀부인과 남자들이 믿음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사란 원문이 유게네스(εύγενήs)로 “귀한사람, 마음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을 신사라고 합니까? 문명이 앞서고, 성숙하며, 점잖고, 소인배 아닌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수준이 다 신사급에 오른다면 참으로 어른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하여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사적 신앙생활’이란 제목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1. 우선 베뢰아교회의 신사적 성도는 성경을 상고할 줄 아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수준이 성숙한 것을 의미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지요. 지금 이 자리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받는 성도님들이 얼마나 계실까요? 졸립고,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닥을 못 잡은채 끝나기만 바라시지는 않는지요. 말씀을 간절하게 듣고, 받는 것도 은혜 받는 진도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수준은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수준보다 더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는 뜻이고, 자기 영혼의 양식을 전폭적으로 교역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따라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히 5:13~14에 보시면 “말씀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어린아이라”하셨고, “말씀을 경험하고 지각을 사용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을 장성한자라”고 하셨습니다. 장성하지 않으면 신사일수 없습니다. 신사적 성도는 설교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서도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연구로 선악을 분별하였으면 악을 중지하고 선을 따라야 하겠지요(롬 12:9). 또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지요(살전 5:22). 따라서 신사적 신앙생활은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술, 담배를 못 끊고 시간을 유흥으로 낭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신사적 신앙생활에서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는 지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라면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닮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사적 신앙생활은 성경을 상고할줄 알고 스스로 자립하여 선악을 분별할줄 알면서 선에 속하여 사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 같은 초보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젖만 먹지만 어른은 단단한 식물을 먹는다”고 하셨습니다(히 5:13~14). 우리나,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수준을 보면 아직도 어린아이 탈을 벗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많이 반성하고 회개하며 성숙하여야 합니다. 2004년 올림픽때 브라질의 마라톤선수가 중간에 훼방자로 인하여 동메달에 그쳤는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 같으면 불평도하고, 국가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 훼방자를 용서하고, 자신은 올림픽 정신에 따라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한다”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하였을 때 세계가 놀란 것입니다. 그의 신앙을 크게 칭찬하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신앙의 폭은 이렇게 넓어야하고 미래중심적 이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가 강도를 만나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도 그대로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대로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돌보아 주었다면 그 중에 누가 신사적 신앙생활을 한 자입니까? 100년 두어도 괜찮을 예배당을 리모델링한 교회가 많고, 100년 써도 괜찮을 강대상을 아크릴로 바꾼 교회도 많지요. 나는 그런 일을 목사가 주장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내는 교인들이 주장하였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나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이 그들 눈에는 안보이고, 물질과 숫자와 먹는 것과 노는 것만 보일 것이니 이런 것은 신사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신사 앞에만 가서 손을 내밉니다. 이 때에 신사는 도와 줄 것입니다. 따라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셔야만 신사적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3. 교양이 있어야 합니다. ‘귀한사람, 유게네스’는 곧 교양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중이 모일 때는 의복도 깨끗하고 단정하여야 하며, 말에 실수가 없고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신사는 무슨 일을 너그럽게 해결할 것이고,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린아이 식으로 얕은 신앙에 머물지 마시고, 외식과 현실을 많이 탈피하여 좀더 고상한 신앙생활을 하시자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24과 전형(典型)적 신앙인 야곱 (창 47:7~10) 목록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다 가정을 갖고 가정중심으로 의무를 갖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세월이 각박해지고 경제가 안 좋으면 우리 삶도 고달파집니다. 건강하고 경제여유가 있으면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겠지요. 그래서 풍족을 못느끼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힘입어 보호받고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기복신앙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어떻게 믿음생활을 잘하고 얼마큼 복을 받아야 만족할까요? 성경에 그런 모범자가 누구일까요? 신약에서 예수님, 세례요한, 바울사도, 베드로 등이 가족은 몇이고 어떻게 부양하고 살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혼자 살았으니까요. 그러면 구약성경에서 가정을 이끌며 성공한 모범자가 있습니까?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욥, 다윗 등의 생활역사가 있지만, 가장 많은 분량으로 기록한 것이 야곱의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사도 있지만 야곱만큼 전형적 가정생활이 못됩니다. 전형적이란 말은 모범적 틀을 말하는 것인데, “그가 잘 살았다”는 모범이 아니고, “자수성가한 한 가정의 모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 섭리 따라 받는 것도 있고, 노력 따라 받는 것도 있으며, 때로는 실수하고 미련하여 고생하는 경우도 있고, 깨닫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서 점차 좋아져가는 것인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야곱도 힘들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이나 복 받은 것도 그 모형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늘 건설적으로 노려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야곱이 130년을 살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고 성경에 계시된 전형적(모본을 나타낸) 인물입니다. 요셉은 잘되어 애굽왕의 배려를 받는 바람에 17년 동안은 편안한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130년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으니 오죽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에게 복을 주셔도 놀고 먹이시는 분은 아닙니다. “땀을 흘려야 한다”하셨고,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새가 새끼를 먹이기 위하여 얼마나 분주하게 납니까?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롬 9:13). 그래서 마음속에 믿음의 싹이 났고, 또 할아버지, 아버지의 신앙승계로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어느 정도 배웠지만 오늘날만큼 성경적으로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선지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축복을 받으면 좋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거짓으로 축복받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몰랐습니다. 나쁜 줄 알았으면 어머니가 권면해도 딱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유혹에 또 넘어갔습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 성도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되기를 바라고 불법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간에 갈등이 생겼고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하고 고독해진 것입니다. 지팡이만 들고 떠났으니 무일푼입니다. 고독해 지니까, 또 두려우니까 하나님께 홀로 기도한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려면 반드시 고독을 느껴보셔야 합니다. 돈 없고 이웃 없는 고독입니다. 게다가 양심에 가책까지 받는 고독이지요. 이때에 기도하면 눈물도 납니다. 야곱은 그때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었고, 또 의지하여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사히 외삼촌 집에 갔지요. 일거리도 있은즉 받아주고 인건비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 붙일 겨를 없이 노력했습니다. 그 집 딸과 연애하는 위로도 받았고, 자기 것으로 구별되는 양떼가 늘어나는 복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노력은 늦추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둘이나 얻었습니다. 잘못된 것 같지만 사람이 귀한 때이니 만큼 하나님이 간과해 주셨습니다. 고의가 아니었으니까요. 12아들, 딸 하나를 낳아 키웠으니 큰 가장이 된 것인데, 가족수가 늘어남에 따라 재산도 늘어나니까 먹고사는 걱정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형과 화해하는 문제로 고역을 겪었습니다. 회개하고 사람과 화해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도는 그것을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이 먹은 아들들이 철이 들지 않아서 어린 아들을 미워하고, 거짓말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으니 어찌 속이 썩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형편이 믿음의 조상의 형편 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들 하나는 잊어버렸고, 요셉을 잃은지 20년이 훨씬 넘어서 흉년이 들어 이리저리 다니며 양식 구하는데 골몰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아들들이 철이 들고 형제우애를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나타났고 애굽에 가서 좋은 세월을 보내게 됐지만, 147세를 산 야곱이 130년을 험하게 또 힘들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 중에는 만고풍상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축복도 주시고 시험을 통하여 연단도 주시며, 피할 길도 주셔서 성도의 믿음을 키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을 받아도 고달프게 노력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다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25과 칭찬받을 믿음 (마 15:28, 8:1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믿음을 칭찬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읽은 백부장에게는 “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의 능력 믿는 신앙”을 칭찬하신 것이고, 다음에는 “기도와 소원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돌이키게 한 끈질긴 노력이 믿음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웅담 때문에 곰이 값진 것처럼, 하나님은 물질이나 명예나 현실적 특권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도의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도 ‘칭찬받을만한 믿음’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칭찬받을 믿음입니까?

1. 믿어져서 믿는 믿음입니다. 수동적 신앙이지요. 거듭나야 천국을 볼수 있고(요 3:3), 베드로의 믿음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는 말씀(마 16:17)이나,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주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3:3)는 말씀, 그래서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다”(살후 1:10)는 말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성도는 성경이나 기독교의 어떤 역사에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도 믿는 쪽으로만 생각할 뿐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좋아하십니다. 벧후 1:10에서 “택하심을 굳게 하여 실족하지 않는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 말씀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창 12:4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하셨고, 행 18:5에서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증거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66권 중심으로만 믿고, 다른 허탄한 말을 하지 않으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붙잡혀 사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판사가 판결을 해도 판결문이 와야 일이 성취되는 것처럼, 성경은 문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확실한 계시입니다. 고후 13:8을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하셨고, 수 1:7에서는 “모세가 명한 율법을 다 지켜…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다”하셨으며, 고전 4:6에서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중심의 신앙이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할 목적으로 믿음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무 은혜를 안주셔도 자신이 피조물로써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경외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호강 시켜주지 못했어도 자식에게 효도의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합 3:17을 보시면 하박국이 재물 받은 것이 없습니다. “농장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어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하였고, 욥은 “자기 집에 큰 재앙이 미쳤어도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욥 1:12)하였으며, 영광을 등지고 산 세례요한은 “주님은 흥하셔야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하였으니, 이 말씀은 다 은혜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이락의 어떤 테러자가 “유언을 남기고 천국에서 보자”하고 폭탄차를 타고 가다가 폭파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는 보복 목적만 있고 자기는 없는 것입니다(비유가 적절치는 않지만). 성도들도 피조물되고 존재한 것만으로 하나님을 공경할 의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구원을 안주셔도 경외할 것이냐?”할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약할 뿐이고 하나님만 은혜를 주시는 분인즉(약 1:17),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말라는 뜻도 있고(시 146:3),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분있는 것만 바라야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분수를 넘어서 욕심껏 무엇을 구하면 안 되고(기복에 치우치면 안된다는 뜻) 꼭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필요한 것을 위하여 의지하고 간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고, 사람은 사랑과 봉사의 대상일 뿐이라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족의 대상입니다. 시 73:25에서 그렇게 고백하였고, 인생의 목적을 기록한 헌법에도 “하나님을…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만족으로 충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은 말씀사모, 기도, 찬송, 교회생활로 주님과의 동행을 선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려면, 사람을 멀리함이 좋고 세속이나 세속적 향락에서도 당연히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6. 칭찬받을 믿음은 주님의 뜻만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시 40:8을 보시면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하였고,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만 행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요 4:34, 양식은 뜻). 아버지의 뜻이 고난의 죽음이었어도 순종 하셨습니다. 칭찬받을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따르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해도 뜻 따르지 않으면 무익하며(마 7:21~23),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욕을 못박은 다음에(마 16:24, 갈 5:24) 주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뜻만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헌신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믿음입니다(시 73:23,28). 부자관계도 가깝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이루셔야 합니다. 그것이 큰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26과 신앙은 변화되는 것 (요 2:5~11) 목록으로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 물로 포도주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말씀(이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을 나타내신 것으로 기독교적 신앙생활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변화 받아야 할 것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요. 여러분 변화 받는 체험 잘하고 계십니까? 성도의 변화의 목표는 마귀 닮은 형편에서 예수님 닮은 형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골 4:13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충만하게 닮는 변화를 이루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당에 있는 돌항아리에 담긴 물이 포도주로 변한즉, 먼저 색이 변하고 다음에 맛이 변했으며, 맛이 변한즉 용도가 달라지니까 마당에서 식탁으로 옮겨졌으며, 그 값 또한 물 값에서 포도주 값으로 뛰어올랐을 것입니다. 본래는 마당에 있는 돌항아리의 물이 손발 씻는 용도였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고 포도주가 되니까 귀빈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존귀한 음식이 된 것입니다.

1. 성도는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입니다. 우선 변화된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도는 변화받기 전에 변화된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변화입니다.

1) 성령으로 거듭난 변화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씨를 의미하고 또 영적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근거요,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요소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이고,

3) 천국시민의 자격이며,

4) 성령님이 함께 하심이고,

5)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처럼 말씀이 없었습니다. 계시를 적게 주셨고,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율법만 주셨으며, 또 인쇄술, 매스컴부족으로 잘 전달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의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취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문명이 발달한 만큼 믿음생활의 여건이 좋아졌지요.

2.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롬 12:2에 보시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대란 세상유행이고, 세상문화나 전통이며, 사람중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차단하거나 통제할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식이 뛰어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지식에 비하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요즈음 세상의 선전은 건강장수 비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음식이 좋다, 무엇이 약이 된다, 병은 조기 발견하여 수술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병이 왜 달라붙었는지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사 28:27, 60에 보시면 “하나님이 달라붙게 하신다”하셨고, 출 15:26과 시 107:19~20에 보시면 “하나님이 치료하시되 말씀을 보내어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런 지식을 갖는다면 생각하는 차원도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엉뚱하게 뒤집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셨으니까요(사 55:9). 따라서 변화의 방법은 이 세대 풍습을 떠나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3. 무엇이 변화되어야 합니까?

1) 지식이 변해야 합니다. 모르는 지식은 알고, 잘못된 지식은 고쳐야 합니다. 지식이 없거나 잘못되면 망합니다(호 4:6). 모르면 하나님 아들도 죽이니까요(눅 23:34). 옳은 지식인 것 같으나 잘못된 지식도 있습니다. 잘 먹는 것이 좋은 것 같으나 비만으로 해로운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나 복음사역자가 부자로 사는 것은 구제를 많이 하고 적당하게 사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질병도 치료하면 된다는 식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지식의 변화를 갖으십시오. 철학의 지식에서 하나님 아는 지식으로 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현세의 가치관은 세상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름길이 출세이고 돈을 버는 것입니다. 정치의 목적, 경제의 목적도 현실적으로 영광을 누리는 것인데,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보면 하나님이상 더 존귀하고 값진 대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일, 성경을 연구하는 일, 기도하는 일,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에 가치를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알았을 때(현실적으로)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셨고(빌 3:8), 롬 8:24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하시면서, 고후 4:18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요, 영원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이 보이는데 있습니까? 안 보이는데 있습니까? 반드시 신령한 복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3) 가치관에 입각한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상태로 변화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가치관에 아무리 사람이 많고 떠들썩해도 취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고 조용한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있을 때 TV를 보면, 축구에 열광하거나 해수욕장에서 바글바글하는 모습을 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즐거워하는 모습과 말씀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대조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최고의 취미로 느낄 수 있도록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 변화를 중요히 여기십시오. 지식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며, 보이지 않는 가치에 취미를 가지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섭리

제27과 분명하신 하나님 (출 16:17~18) 목록으로


이 시간 말씀드릴 제목은 ‘분명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약속을 지키시고 모든 일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만 보시지 마시고 세밀한 부분도 보시면서 하나님의 성격을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뭐 그런 것까지 따지냐? 적당히 넘어가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세심하지 않고 약속을 성그럽게 지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을 본받아 분명하고 세심하며, 규모가 있고 질서가 있으며, 적중하고 적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밥을 하면 꼭 먹을 만큼만 하여 다 먹고 찬밥을 남기지 않는 생활이 좋다는 뜻입니다. 시간도 역시 적중하게 쓰고 잘 지키면 좋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고전 14:33), 적당한 것을 좋아하셨으며(고전 14:40), 규모를 강조하셨고(롬 2:19, 살전 5:14), 모든 일을 합당하게 하라(빌 1:27)고 하셨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50명씩 줄지어 앉히라”(눅 9:14)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이고,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자 이시면서도 폐품을 거두셨습니다. 인간은 소비자이면서도 아낄 줄 모르면 그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규모 있고 적당하게 하시는 분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져도 규칙적으로만 살면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무너지면 금방 무질서와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성경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잘 아시는 내용으로 하나님이 선민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신 말씀입니다. 만나 먹은 것을 누가 모르나? 하시지 마시고 “그 만나를 1인당 한 호멜씩 거두라”하셨는데, 되가 없이 짐작으로 거둔 것입니다(1호멜은 1되2홉). 넉넉히 거두는 것은 욕심의 본심이고, 넘치지 않게 거두는 것은 양심의 본심입니다. 갖고 와서 되어보니, 더 갖고 온자도 있고 덜 갖고 온자도 있었는데 먹으면서 결과를 본즉, 적게 갖고 온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고 많이 갖고 온 사람도 남지 않았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주밀하신 조화가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출애굽 기사에서 더욱 생생하게 느낀 것입니다. 약 500년 전에 조상 아브라함에게 출애굽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고(창 16:16),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으며,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모세를 예비하셨고, 열한번의 재앙으로 바로왕을 어거하셨으며, 또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 하신 것을(창 13:17) 이행하시기 위하여 선민을 출애굽 시키셨으니까 그때부터 보호와 양육과 인도의 책임을 이행하시게 된 것입니다. 개구리재앙도 “내일 없앨 것이라”(출 8:10, 23, 29)하셨으면 꼭 그때에 없애셨고, 우박재앙도 “내일 준다”하시고(출 9:5,18) 그대로 하셨으며, 메뚜기재앙도 “내일 없앤다”(출 10:4)하시고 그대로 하셨습니다. 양식이 없다고 부르짖을 때 책망도 안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16:2~5)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 또 1인당 한 호멜씩, 안식일 전날은 안식일을 위하여 갑절을, 혹 안식일에도 있는가? 하여 나가본즉 없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게 조정 하셨으며, 남는 것은 두번 못쓰도록 상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대로 꼭 일용할 양식주의 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 농산물로 대치되었을 때 만나 공급은 그쳤습니다(수 5:12). 얼마나 놀랍습니까? 만나는 비상양식입니다. 곡식은 온전한 양식이구요. 온전한 것이 있을 때 임시적인 것은 없애시는 규모도 나타난 것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이 바로 임시적이고 비상적인 은사입니다.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계시를 끝내시고(히 1:1) 항상 살아있는 성경(벧전 1:23)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사도의 터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1, 엡 2:20). 고전 13:10에 보시면 “온전한 것(성경)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하셨고, 히 8:13에서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살아있는 성경만 소중하다는 것입니다(유 3).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질서 있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홍해는 열렸는데 애굽군이 추격합니다. 그래서 선민을 무사히 건너게 하시기 위하여 애굽군에게 흑암을 주셨고(14:19~20), 애굽군이 홍해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의 행렬을 교란(14:25)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기상조건도 유익하게 해주십니다.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레 26:14, 신 11:14, 욜 2:23). 그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됩니다(히 4;16). 그런데 비가 너무 오고 바람이 너무 불어 태풍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경고라고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질서는 죄악의 산물이고 적당하지 않은 것도 잘못된 결과이며 약속이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활의 나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신 분입니다. 또 주밀하십니다. 머리털을 헤아리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30). 질서 있고 적당하게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8과 삼손을 쓰신 섭리 (삿 16:28~31) 목록으로


‘삼손을 쓰신 섭리’를 살피려고 합니다.

1. 섭리란 하나님의 전체적 통치와 경영을 의미합니다. 우주만물과 영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 1:8에 보시면, 영계와 현실을 아울러 다스리시는 말씀이 있고, 롬 11:36에서는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으며 주께로 돌아간다”하시므로 만물통치에 대한 말씀이 있으며, 행 17:24~26에서는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자로써 혈통과 생명과 호흡과 거주연대와 경계를 한하신다”는 말씀이 다 전체적 섭리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런 중에서 하나님은 선민과 이방인들과 그의 나라들을 자기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인물을 쓰시기 위하여 미리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선민의 계열을 잇기 위하여 아벨대신 셋을 주셨고(창 4:25), 이삭도 마찬가지요, 선민의 기근대책을 위하여 요셉을, 선민의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가나안의 정복과 통치를 위하여 사사를, 복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을, 이방에 복음전파를 위하여 바울사도를(행 9;15) 미리 예비하여 쓰시는 분입니다. 기록을 다할 수 없지만 모든 인간들이 창조자의 필요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이 그에게도 적용되고 삼손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다 목적에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할 일을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한 지혜입니다.

3. 삼손은 왜 태어났는가? 할 때, 그 시대에 선민을 블레셋의 통치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물론 감추어진 다른 목적도 있을 것입니다). 선민의 열네 번째 사사 압돈이 8년을 다스린 다음에 블레셋에게 40년을 붙이셨다가(13:1) 삼손을 세워 20년을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적절한 시기에 삼손을 출생시켜서 쓰셨는데, 본래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 ‘마노아’를 특별섭리로 잉태시켜서 출생하게 하셨으니까 그 경위가 세례요한과 비슷한 것입니다(삿 13:2~5, 눅 1:7~17).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을 성별되게 키워서 나실인이 되게 하라”하였기 때문에 부정한 식물과 독주와 삭도를 금하고(13:7) 양육하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받친 자가 될 것이라”(13:7)하셨으니, 이 뜻은 죽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임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그 죽음까지 쓰임이 된다면 좋을 것입니다.

4. 삼손이 커서 장정이 되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블레셋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강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전쟁으로 굴복시켜야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민족이나 이방족이 군사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약간의 세력의 우세로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략적으로 싸우고 힘을 꺾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삼손이 블레셋족을 접촉하려면 혼인을 빙자하는 것이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인데, 이 목적을 부모는 몰랐고, 이 방법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14:4)하셨으니까, 삼손의 이방결혼이나 부모에게 불효한 죄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하기 위하여 ‘딤나’에 가는데, 사자를 만났고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여(14:5) 사자를 죽였으며, 또 수수께끼 패배로 30명을 죽여서 의복을 배상할 때도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했다”(14:19)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략적 혼인은 블레셋족 접촉의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그때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인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발설한 것이 잘못이라면, 30명을 죽일 때 성령님이 역사 하셨겠습니까? 결국은 30명을 죽이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여인은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는데, 그다음에 그 구실을 잡고 여우300마리로 블레셋 농장에 불을 질렀지요. 전쟁의 성격이니까 잘한 것입니다(여우 300마리를 어떻게 잡았을까는 연구하십시오. 그것도 전쟁의 계략이니까 미리 덫이나 함정을 파서 잡았겠지요). 이것이 대결의 불씨가 되었고, 전면전에 승산이 없기 때문에 삼손만 인질로 넘겨졌는데, 삼손이 포로 신세로 가서 또 결박을 끊고 나귀턱뼈로 블레셋군 1000명을 죽였는데, 그때 “목마르다”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발견케 하셨다”(15:19)하셨으니, 거기까지도 잘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가사(블레셋지역)에 가서 ‘들릴라’여인을 사랑하였는데, 블레셋 방백들이 힘의 원인을 알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칡 일곱 가닥으로, 다음에는 새줄로, 또 머리를 베틀에 짜는 것으로, 마지막에 “머리를 밀라”하였다가 하나님이 역사 안하시니까, 눈 뺌 당하고, 맷돌 돌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후에 머리가 자란다음(16:22) 하나님께 기도하고(16:28) 기둥을 뽑고 수천 명과 함께 죽었습니다.

5. 중요한 것은 머리털과 능력인데 이것은 나실인적인 순결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능력주신 것을 의미하고, 들릴라에게 그 비밀을 알린 것이 잘못인가? 에 대하여 삼손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출처를 모른듯합니다. “시험 삼아 해보라”한 것이 그렇게 된 것인데, 사사 중에 불행한 사사가 삼손뿐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목적대로 선민을 구원하셨고, 삼손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과정에서 사명을 생각하기보다 여인(특히 들릴라)에게 빠져들어 간 것이 자기불행을 자초한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힘 빠지는 시험을 한 것이 사명의 망각이고, 힘이 머리털과 함께 나오는 것을 알자 그의 종말이 된 것입니다.

 

제29과 유다와 섭리 (마 26:20~25) 목록으로


1. 성경에 ‘유다’란 인물이 구약에서 두 명(창 29:35, 느 11:9), 신약에서 여섯 명이 나옵니다(눅 3:30, 요 14:22, 마 13:55, 행 5:37, 9:11, 15:22). 그래서 그 중에 예수님을 판 유다를 지목할 때는 그의 고향인 ‘가룟’을 붙여서 ‘가룟 유다’라 하여 구별을 하는데, 이 ‘가룟’이란 지역은 예루살렘 남쪽 70리쯤의 지역이라고 하나 지도상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룟’이란 말은 원문의 이스카리오스(Ἰσκαριώs)의 번역인 만큼 지도공부를 하실 때 참고하셔야 합니다.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제자 선발할 때 나오는데,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을 판자”라 하므로(마 10:4, 막 3:19) 그 성경의 기본문서가 예수님을 판 다음에 기록된 것을 알 수 있고, 누가와 요한은 “예수님을 팔자라”(눅 6:16, 요 6:70)하므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전에 기본문서 초안이 잡혀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를 발탁하실 때, 그 인물을 모르고 발탁하시지는 않았다고 보셔야 합니다. 우선 가룟유다와 그의 행동이 나타날 것을 구약성경에서 예언을 하셨고, 예수님은 그 예언이 응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시 41:9에 보시면, “내 떡을 먹던…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다”하셨는데, 이 말씀을 아시는 예수님이, 요 13:10~11에서 “열두제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 하실 때 자기를 팔자가 누구임을 아셨음이라”하셨고, 또 시 69:25과 109:8에서도 “유다의 말로를 예언”하셨는데, 거기에 보면 “저희 거처로 황폐케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하였고, 또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신다”하셨는데, “그 예언이 응하였다”고 행 1:20에서 베드로가 증언을 하였으니, 이 사실로 볼 때 가룟유다의 계획은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함께 미리 예비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다윗시대의 글인 만큼 예수님 시대로부터 약1000년 전에 예언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구속사역에 대한 섭리도 주밀하게 하시지만, 성도의 생활에 대한 것도 유익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시 복음서에 나타난 유다의 경력을 살펴보겠습니다. 요 12:1~6에 보시면 유월절 6일전에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었는데, 유다는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좋을 뻔 하였다”하였고, 여기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외식적 언사요, 사실은 자신이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본심은 물욕에 있었고 가난한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공금이 생기면 그것을 훔치는데 마음을 두고 행동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아시고 묵인하신 것은, 잠 16:4말씀처럼,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히 쓰시는 섭리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눅 22:3에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을 갖기 전에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하셨으니, 유다는 그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배신계획을 세웠다고 볼 수 있고, 그다음에 만찬석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음만 못하다”하신즉, 유다가 “내니 잇가”하였고, 예수님은 “네가 대답하였다”하셨으니(본문) 충분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또 요 13:18~30 중에 나타난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18절, 시 41:9)이 응할 것과, 함께 있는 제자가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아시고 민망함을 느끼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내가 한 조각을 찍어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고 떡을 유다에게 찍어 주셨을 때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고(유다의 배신결심) “너 할일을 속히 하라”하신즉, 다른 제자들은 돈을 맡은 유다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는 말씀으로 오해하였지만, 실은 “예수님 파는 일을 속히 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요, 유다는 떡조각을 받고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이 겟세미네 동산에서 기도할 기회를 가지셨고, 그 시간에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은30을 미리 받았고(마 26:14~16), 군병들과 함께 갯세미네 동산에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춤으로(마 26:48~49) 예수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출 때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3. 그 후 예수님이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갔을 때,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은30을 내주며 무죄한 피를 팔았다”하고 스스로 회개의 표시를 나타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유다는 그 은을 성소에 던지고 목을 매어 죽었으며, 제사장들은 그 돈을 성전고에 넣을 것이 아니라 하여 나그네의 묘지 값으로 썼다”(마 27:3~10)하므로, 이것까지 구약의 예언(슥 11:13~14)이 응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성취되기 위하여 유다의 행사가 있을 것을 섭리하셨고, 하나님은 그 섭리대로 역사를 진행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세계에 악이 출현하는 것도 하님의 섭리에 기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악을 행함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란 전체적 역사를 진행시키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유다의 악을 아시면서 그대로 두신 것은 구속사역과 예언의 성취를 위함이었으며, 끝가지 원수를 친구로 대하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본래 비택자로서 외식하던 자요, 그의 뉘우침은 신앙에 근거한 회개가 아닌 만큼 아무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불행한 인간의 표본이라 할 것입니다.

 

4. 구원과 전도의 섭리

제30과 구원과 전도 섭리 (롬 10:13~15) 목록으로


앞에서 ‘구원의 부정적 섭리’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이루실 때 안 좋은 일을 나타내시기도 하였고, 또 악한자의 악행을 이용하기도 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안 좋은 일들이 있음으로써 그것을 인하여 더 좋은 은혜를 베푸신 것을 믿고, 부정적 사건들과 함께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도 깊이 섭리하시는 것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복음전달의 한 방법이고, 구원의 방법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전도를 받으려면 그 당사자에게 지각이 있어야 하는데, 복음은 지각과 거듭난 생명으로 받고 여기에 성령의 힘을 힘입어 믿음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요 3:3), 성령으로라야 주를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고전 12:3). 따라서 지각이 없는 자는 하나님이 전도와 상관없이 구원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마 3:9)하신 말씀이, 완악 이외에도 그런 뜻을 포함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전도의 방법으로 구원하실 것을 섭리하셨습니다. 딛 1:3에 보시면, “하나님은 자기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하시므로, 진리를 전도로 나타내시고, 또 나타내실 자를 지명하여 명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선 하나님이 전도를 섭리(계획, 통치)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이루실 때, 때를 정하고 하시니까(전 3:1) 언제 어느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는 “때를 따라”(히 4:16)란 말씀과, “때가 되매”(눅 22:14, 요 13:1)란 말씀이 있으니, 하나님은 중대한 일이 아니라도 때를 정하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열려진 때도 있습니다(요 7:6). 성도의 입장에서 준비된 때는 회개하는 때(마 5:25), 은혜 받는 때(고후 6:2), 전도하는 때(요 7:6), 경성하는 때(눅 18:1, 21:36)등이 있지만, 주권자의 입장에서는 때를 정하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복음이 120년 전에 들어 왔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조상들에게는 구원계획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고후 4:3에 보시면 “복음이 가리우는 것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계획이 없거나 때가되지 않을 때 그 장소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때를 따라 전도자를 명하시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같은 전도자는 구약시대에 예언하셨고, 모태로부터 준비하여 세우셨으며, 모세도 일찍 준비하신 것처럼 바울사도도 이방인의 때에 이방인을 위하여 세우신 전도자였던 것입니다(눅 21:24, 행 9;15). 본문 5절에서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전도자를 파송하는 섭리를 나타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 2:7).

4. 그다음에는 전도의 은사를 주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전도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고전 12:8)또 사도나 선지자 교사직에 포함되는 은사입니다(고전 12:28, 전도의 은사란 말씀이 따로 없음). 성도마다 특종은사에 끌리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기도에 끌리고, 말씀에 끌리며, 전도, 봉사에 끌리는 등 여러 가지 신령한 취미에 끌리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전도의 은사가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은사입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하셨으니까, 은사주시는 성령님께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대화를 걸고 전도하고 싶은 충동이 불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은사를 주십니다.

5. 갈 곳을 인도 하십니다. 본문에 보시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하셨고(15절), 행 16:9에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전도의 길을 인도하여 “마게도냐로 가게 하신일이 있었으며, 또 하나님이 ‘가이사’ 앞에 서게 하신다”하셨는데(행 27:24), 그 절차가 죄수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가는 것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전도 목적으로 가는것만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고, 핍박을 받고 감옥엘 가든지(행 16:24~34), 기도하는 장소엘 가든지(행 16:13~14), 전도의 목적 아닌 발걸음도 하나님은 전도의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섭리가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6. 만나게 하시는 섭리가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행 16;13에서, 바울은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전도하여 루디아와 그 가족을 얻은 일이 있었고(감옥, 행 16:30, 몬 10),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광야에서 만나 전도하였으며, 고넬료 가족은 베드로를 모시고 가정부흥회를 열었는데, 이 과정을 다 성령님이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도와 만남의 섭리를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요.

7. 마지막으로는, 심령을 열고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하셨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을 하나님이 주신다”하셨으며(잠 20;12), 성령님이 루디아의 귀를 열어 청종하게 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눈도 열어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눅 24:30~31). 그렇다면 전도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전도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구체적 계획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면서, 자기은사소질대로 노력하고, 복종하는 자세만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쓰임의 대상이 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관사가 운전하면 기차는 ‘왔다 갔다’하면 되는 것처럼, 의지하고 복종하며 노력하는 것 세 가지만 잘하는 것이 전도자의 의무일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과 거두시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인 것입니다.

 

제31과 구원의 부정적 섭리 (롬 11:17~24) 목록으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좋은 일만 있는 것이 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보면, 언제나 나쁜 일이 있고, 그 나쁜 일을 원인이나 절차로 이용하여 좋은 일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많은 것을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는 것인데 우선 대표적으로 한 말씀만 드린다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돌을 버렸다’는 것은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세워 돌아가시게 한 것인데,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더 요긴하게 쓰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도 연달아 부정적 사건(안 좋은일)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구원과 천국이 있고, 또 유대인들이 완악하였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잘 이해하신다면 언제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무슨 더 좋은 일이 생긴다는 희망을 갖으시라는 것입니다. 전화위복이란 뜻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실 때 나타난 부정적 사실(안 좋은일)이 무엇인가? 할 때,

1.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스스로 타락할 수 있도록 자유 의지적 인간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앞으로 가는 시설만 만든 것이 아니라, 정지하고 뒤로 가는 시설도 만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뒤로 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이 타락을 할 때 하나님이 아시고 관망(허용)하신 것입니다. 타락 못하도록 붙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분명 좋은 일이 아니지만 타락이 없으면 구원이 있겠습니까? 롬1:24에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내버려두셨다”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세우신 것은 창조 전인데, 이 때에 하나님이 독생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여 구원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엡 1:4에서 “하나님이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하시므로, 구원도 좋지만 구원하시는 방도로써 독생자를 고난으로 희생시키실 것을 전제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큰 부정적 사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거져 용서하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살후 1:7).

4.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소수의 선택이 있는가 하면, 선택 뒤에는 다수의 버림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 좁고 찾는자가 적다”는 말씀에서(마 7:14) 긍휼의 대상과 구원의 대상은 적고 버려진 자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인류가 다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의 소중함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자가 있기 때문에 구원의 소중함을 알게 된것인데, 하나님은 한편의 불행을 통해서 성도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게 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구원을 나타내신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선민 또는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창 12:2, 롬 4:11).

5. 그런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일에 대하여 무조건 아브라함의 혈통이 다 구원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선 선민적통치의 대상을 삼으셨는데, 아들로는 이삭(아들8명중, 창 25:1~2), 손자로는 야곱의 후손에 한 하였으며, 그것도 바벨론 포로시까지, 약 1000년간 지속하시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언약과 복음을 깨달은 자만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기다렸다”하였고(요5:56), 다윗이 십자가를 예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시 22:1, 2:6). 따라서 구약시대에도 십자가의 복음이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짐작으로는 구약시대에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성도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셨지만, 대부분 선민적 선택이고, 구원적 선택은 적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그런데 선민의 완악이 “이방인 구원의 문을 열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때에 비택자들을 제외시키신 것처럼 유대인의 완악을 내버려 두시고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에게로 돌려 그 수효를 확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따르므로 좋은 열매가 맺는 것을 감람나무 접붙이는 것으로 비유설명을 하셨습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침이 되려면, 돌감람나무도 가지가 꺾여야 되고(하나님의 은혜로 악에서 떠나는 원리), 참감람나무도 가지가 꺾여져야 그 꺾여진 자리에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여서 참가람나무의 진액을 공급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자, 완악자가 있는 반면에 구원받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7. 그 뿐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악한자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선한백성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리새인 들이나 가룟유다나 로마의 병정들을 적당하게 쓰신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배격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뜻에 따라“악인도 적당하게 쓰신다”고 하셨습니다(잠 16:4). 하나님의 선택은 변함이 없습니다(욥 23:14, 롬 11:29). 하나님은 타락할 자를 선택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타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길가나 덤불에 뿌려진 씨이고, 곡식밭에 자라는 가라지이며, 예복 없이 잔칫집에 온자요. 등불 없는 신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들을 청하셨을까요? ‘택함 없이 청한 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22:14) 그들은 다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한 들러리에 쓰신 것입니다. 부정다음에 긍정이 있듯이 성도들도 환경에 나타나는 부정적사건들을 반드시 긍정의 동기와 절차로 삼는 지혜를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전 마지막 부탁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제목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고, 전파할 자는 모든 성도(제자들)요, 전파 받아야할 대상은 온천하의 모든 사람이며,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기 위하여 다녀야하는데 오늘날은 다니지 않아도 전파되는 방법이 많습니다. 복음이 전파 되었을때 믿고 세례를 받는자(목음에 순종함)는 구원을 받고(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받은 후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심판은 면하게 되고 선행에 대한 상급만 있음), 믿지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전파해야 할 복음의 내용’과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의 분별’입니다.

1. 우선 전파해야할 내용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복음이며 반드시 전파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란 뜻으로, 죄와 심판과 멸망에 처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도리가 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사에 물렸으나 고치는 방법이 있다”(민 21:8)는 소식입니다. “뱀에 물렸으니까(죄를 졌으니까), 그대로 두면 죽습니다. 지옥 갑니다. 그러나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하였을 때, 이 소식(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두 종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한 종류는 “내가 무슨 뱀을 물렸다고 하느냐?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무일 없다. 설령 뱀독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죽으면 되니까 염려없다”는 사람이 있어서 관심없이 자기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행 8:21에 근거하여 ‘구원의 도리에는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지만 복음을 시도한 이상 책임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종류는, “내가 뱀 물린줄 아니까(죄를 졌으니까) 고치는 방법을 알아보겠다” 하면서 전도자를 따르고 교회에 출석하여 구원의 도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2. 전도자나 교회는 구원이 도리를 확실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무엇이 구원의 도리인가? 할 때, 요 3:16에 근거하면, “하나님, 세상,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 주심, 멸망치 않고 영생 얻음”의 내용이 그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히 11:6에 보시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구원의 도리를 잘 몰랐을 때도 “만물이 있는 것을 보니 창조자 하나님은 계시다, 절대자가 계시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싹트면서 구원의 도리를 배워서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한 다음 세상을 알려야 하는데, 세상은 타락한 세상, 즉 인간의 죄인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이란 뜻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형벌이 있음을 말하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의 방도를 베푸셨는데, 그 구원의 방도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요, 중보사역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치 빚을 져서 종이 되었어도 누가 빚을 갚아주면 종에서 놓임받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님과 예수님의 중보사역인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는것과 믿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엡 4:13).

3. 이렇게 믿음을 갖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믿어져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신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죄지은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믿어야 할 일이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짓고도 두려울 것이 없다면 누가 죄를 안 지으려 하겠습니까? 분명히 범죄는 두려운 것으로 아는 것 자체가 심판을 믿는 것 안겠습니까? 심판을 믿다보니 구원의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스스로 구원할 방도가 없다보니 하나님이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방법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이 사실을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자기 능력으로 복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은혜로 믿음 갖게 된 말씀을 소개하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택하였다”는 말씀(요 15:16),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씀(요 3:3),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엡 2:1), “성령으로 신앙고백하게 하셨다”는 말씀(마 16:17, 고전 12:3), “말씀을 전하니 너희에게 믿어졌다”는 말씀(살후 1:10)등입니다. 이렇게 믿어진 것은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고난이나 불이익이 와도 믿어진 신앙을 뽑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벧후 1:10을 보시면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언제든지 실족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5. 결론적으로 제한성과 성실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는데,

1) 다 믿어지지 않고 택하신 자만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살후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구원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는다는 말씀, 행 13:48) 안 듣고, 안 믿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는 성실성과 관련된 문제로, 믿는자는 믿는자의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과 행위가 따로 있을 수 없고(약 2:14), 나무와 열매가 같지 않다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12:33).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의 전도방법이 메시지 전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의 빛을 발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빛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복음전도를 들을 사람을 곁에 오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과 멸망을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고전 1:18). 다 믿어도 십자가의 도리를 의심하거나 성경이 진리임을 믿지 않으면 그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전도자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3과 스데반의 전도사역 (행7:51~60) 목록으로


행 6:8~7장 까지는 ‘스데반의 전도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스데반의 믿음과 전도사역과 순교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스데반의 이름의 뜻은 ‘스테파노스’로 ‘왕관, 면류관’을 뜻한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최초 7집사중 한사람인데, 다른 집사들과 함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고, 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자”라고 하였습니다(행 6:3). 그런데 또 8절을 보시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고 또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고 변론도 하였으며(6:9~10절), 사람들을 가르쳤고(6:11), 그 당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대제사장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으며(7:1~50), 나중에는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였는데 반대자들은 여전히 헛된 말로 모함하여 결국 그를 돌로 쳐서 죽게한 것입니다(본문6:13~14).

1.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과 지혜와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은사가 있었는데, 6:8~15에 보시면 변론을 잘하다보니 반대자들로부터 미움과 음모를 받았지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15절)고 하였습니다. 6:10에 보시면“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변론할 때 반대자들이 그의 말을 당하지 못하여(반대자들은 각처에서 온 어떤자들이라, 9절, 하였지만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말잘하는 사람을 시켜서(11절) 스데반을 모함하였는데,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하게하고 백성들과 장로, 서기관들을 출동시켜 공회로 끌고 가서, 거짓증언자를 내세워(13절) “스데반이 성전(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했다.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준 규례를 고친다고 했다”하면서 모함을 한것입니다. 요2:19~21에 보시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일으키리라”하셨는데, 이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뜻한 의미라고 설명하셨지요. 그리고 누구도 “율법 고친다”는 말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보다 더 좋은 계시인 예수님이 오셨은즉, 예수님의 뜻과 생활만 본받으면 율법의 취지를 넉넉히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나, 반대자들은 말꼬투리를 잡아 모함 하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6:15을 보시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하였는데, 성경에는 천사의 얼굴형태를 말씀한 곳이 없습니다. 광명의 천사(고후 11:14), 형상이 번개같다(마 24:3), 사람처럼 나타나 대화 하였고(마 28:5, 행 10:4, 눅 1:34), 부리는 영이라(히 1:14)하신 말씀이상으로 그 얼굴을 설명한 곳이 없으니까, 천사의 얼굴은 온유, 복종미가 있고, 또 능력이 있는 만큼 희망과 승리감이 차있는 표현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이 증거한 바를 사실대로 증거 하였으니, 이 증거내용은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구속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스데반이 창세기 출애굽기를 메시야의 구속사역을 목표로한 계시임을 이해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서를 읽으면서 율법만 이해하고, 그 말씀이 메시야를 증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증언하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그 증표로 할례를 받게한 사실(7:1~8), 선민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살게 된 사실(7:9~16), 하나님이 모세를 예비하시고 40세에 그를 불러 선민을 광야교회로 인도한 사실(7:17~38), 광야에서 율법을 주신 사실(7:38), 광야에서 선민들이 우상을 만들고 백성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이 바벨론군대(하늘의 군데, 7:42)에 붙이신 것을 선지자가 예언하였다는 사실(7:40~44, 암 5:25~27), 선민의 광야에서 장막성전을 사용하였는데 그 성전이 ‘증거의 장막’이란 사실(메시야 구속사업), 그 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성전을 지었으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갇혀계신 것이 아니요, 하늘을 보좌로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말한 다음(7:44~50) 백성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하나님의 보좌까지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지 못한 채 책망한 것을 보면 듣는 자들이 더 이상 말을 못하도록 어거한 탓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와, 조상들의 선지자 핍박한 사실과, 완악함과 의인 예수님을 잡아준 살인자요, 율법을 범한자”라고 책망을 한즉(51~53절),

3. 들은 자들이 죄를 알고 마음에 찔리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스데반을 죽이려고 이를 가는 차에 스데반은 이미 하나님 앞에 갈 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한즉, 듣던자들이 귀를 막으며 돌을 들어 쳤고,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영혼을 받으소서”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잠들었다’고 한 것입니다(54~60절). 이 때에 재판절차도 무시된 상황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악인들이 거짓증거를 하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에 이미 하나님 앞에 가기로 작정을 한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보좌를 보여 주신 것이지요. 스데반같은 사명자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지만, 스데반이 일찍 순교하므로 다른 성도들에게 끼친 감화와 전도열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가 아닌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지역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더 넓게 광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8:1). 하나님은 세례요한이나 스데반을 일찍 데려가실지라도 자신의 영광과 복음사역에 피해를 보실분이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하고 스데반의 좋은 신앙과 사명적 헌신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빌립의 사역과 내시 (행 9;26~40) 목록으로


‘빌립의 사역과 내시’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성경에 빌립이 네 사람 나옵니다. 대 헤롯의 아들 두 사람이 있고(마 14:3, 눅 3:1), 사도 빌립이 있으며(마 10:3, 요 1:45~46), 본문에 나타난 ‘빌립’은 스데반과 함께 봉사직분을 받은 집사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집사라도 사도에 버금가는 은사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집사보다 탁월하였다고 구별합니다. 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할 때, 큰 표적을 나타냄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주의 사자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셔서 순종하고 간즉 그 길이 광야 였습니다. 광야는 길이 있어도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인데 주의 사자가 명한 것이므로 사마리아 전도의 좋은 상태를 저버리고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복음사역은 자기 타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이 있는 일이면 무조건 자신을 포기하고 영광목적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도시의 큰 교회에서 시골의 작은 교회로 가라 하여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 복음사명의 성격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그곳에 가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에디오피아’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자(재무장관)가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병거를 타고 돌아가면서 그 병거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으니, 그 내시는 예배를 중요시 한 점과 성경을 가까이 한 것과, 에디오피아(구스)에서 예루살렘까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서 왕복 약4500리를 여행한 정성인즉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정성을 보시고 은혜주시기로 작정하신줄 압니다. 대하 17:9에서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하신 말씀에 따라 그 내시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사마리아 도성에서 일하는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보내시고 만나는 것만 섭리하신 것이 아니라, “병거로 가까이 나기라”는 명령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내시에게로 가까이 나갔고 내시가 이사야서 읽는 소리를 듣고,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고 말을 붙인즉, “지도하는 사람이 없은즉 어찌 깨닫겠느냐?”고 하면서 성경 배우기를 갈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성경교사를 만난 내시는 빌립을 자기의 병거위에 함께 앉게 하고 읽은 성경의 뜻을 물었으니, 그 내용은 사 53:7~8의 말씀으로 ‘메시야 고난에 대한 예언의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구를 가리킨 글입니까? 선지자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빌립은 그 말씀이 “예수님과 그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이라”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내시는 “복음을 깨달았은즉, 세례를 받을수 있지 않겠느냐?”하여, 그 길옆에 물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세례를 베풀고 언덕으로 올라오는 사이에 성령님이 빌립을 이끌어가므로(흔적이 없어진 상태) 내시는 흔연히(기쁜모습) 자기의 길을 갔다는 것이요, 그 다음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아소도’란 지역은 지중해변에 있는 작은 항구이고 현재 텔아비브 수도에서 남쪽 100리쯤이요, 가사 에서는 북쪽으로 120리쯤 되는 지역입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갔다”하신 것은 공간을 초월하여 부활체를 움직인 것처럼 몇십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1. 개인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복음의 시작처는 예루살렘인데 에디오피아는 예루살렘에서 광야와 바다를 지나는 2000리가 넘는 곳이지만,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셨고, 또 빌립을 강권적으로 보내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또 이 내시가 구원을 받은데는 ‘에디오피아’뿐만 아니라 전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실 계획까지 실현하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찬란한 기독교역사가 애굽지역에 많기 때문입니다.

2. 빌립이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 받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나귀의 입도 열어서 쓰시지만, 빌립의 신앙인격을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7집사를 뽑을 때 지혜, 성령, 칭찬이 충만한 사람들을 뽑았는데, 빌립도 그 중 한사람입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구약성경을 가르칠 만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명의 기본소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말씀을 증거 하게 하셨고, 이적을 나타내게 하셨으며, “도시사역을 떠나라”하신즉, 사심 없이 떠났고, 부흥사가 노방전도자로 변했는데, 하나님은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없어지고 몇 십리 떨어진 아소도에 나타나게 하시는 일까지 있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쓰임받는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에디오피아 내시의 열심과 배우는 자세입니다. 예배를 위하여 2000리 길을 가는 열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 인천 송현감리교회에 무슨 책임이 있었는데, 고향 강화에 갔다가 토요일에 오지 못하자, 20리 길을 걸어서 초지나루를 건너, 대명리에 가서 거기서 또 20리를 걸어서 버스를 타고 두시경에 인천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두시에 청년회 월례회가 있은 듯). 얼마나 힘들었고 열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에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을 배우는데 열심이 있었으니 여행 중에 병거에서도 성경을 배운 것입니다. 제가 성도님들에게 여쭙고 싶은 것은 믿음 생활에 열심이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충심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심령에 성령의 불을 붙여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눅 12:49).

 

제35과 성령님의 전도역사 (행 16:6~34)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성령님이 전도자의 길을 인도하신 일과, 사람을 만나 전도하게 하신일과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을 여신일과 전도자의 장애를 제거하시고 핍박에서 구출하신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성령님의 전도역사’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이 전도자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룻스드라를 떠나려 할 때, “성령님이 소아시아 쪽으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고 하셨습니다(6절). 룻스드라에서 서쪽으로 직행하는 것을 막으시고 북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도록 길을 여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렇게 길을 인도하시는 데는, 말씀으로 계시를 주시는 방법도 있겠지만 말씀이 아닌 사건으로 인도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시아 쪽으로 교통이 험하거나 전염병 같은 것이 있으면 그 길을 피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북쪽지역을 거쳐서 서쪽 ‘드로아’항구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서 바울이 환상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는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 지역으로 직행하게 되었으니(11절), 이것이 다 성령님의 인도였던 것입니다. 소아시아 쪽은 막으셨고, 북서쪽으로 가는 길은 여셨으며, 또 환상계시를 주셨고, 직행하는 선편도 주신 것입니다. 성도의 일반적 출입도 지키시거든(시 121:8) 하물며 전도자의 발길이겠습니까? (롬 10:15)

2. 만남이 관계도 인도하십니다. 마게도냐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마게도냐 첫성인 ‘빌립보’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행8:27에서, 성령님은 빌립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광야에서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게 하신 것처럼 빌립보에서도 전도대상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일행은 전도자들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기도할 장소를 찾다가 문 밖 강가에 모인 여인들을 만나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만남의 은혜와 전도할 기회와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늘 “만남의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령님은 말씀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고 잘 듣게 하는 역사도 하십니다. 전도는 강가에 모인 여자들이 받았는데, 그 중에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은 여인은 소아시아 지역 ‘두아디라’에서 장사 차 ‘빌립보’에 온 나그네 ‘루디아’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말씀을 청종하고 전도자 일행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의 성도로 인정한다면 내 집에 와서 유하며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열매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여시며 믿게 하시고 섬기게 하는 감동까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꼭 그런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4. 전도의 장애를 제거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전도자 일행이 루디아의 집에서 기도처를 향해 가는데, 귀신들리고 점치는 여종이 바울일행 앞으로 달려와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인데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여러날을 그렇게 떠드는 것입니다. 말은 바른말을 하는데 그 여자의 신분은 귀신들린 점쟁이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전도에 협조한다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미친사람이 전도를 한다면 좋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귀신들린자의 전도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천사들도 있고 복음사역자들도 있는데 왜 귀신들린자를 쓰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도 그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귀신아) 그에게서 나오라”한즉 귀신이 즉시 나가고 그가 깨끗한 사람이 되었으니 성령님께서는 이런 역사로 전도의 장애를 없애주시기도 한 것입니다.

5. 마지막에는 핍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또 한가정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경위는 귀신병 고쳐진 자의 주인이 여종의 귀신 들린 영험으로 점쳐서 돈벌어 주던 일이 그친 것을 감정으로 그 지역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선동을 하니까, 치안을 담당한 군인들이 바울일행을 때려서 착고에 채워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그 때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찬송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며 착고가 풀리니까, 간수가 도망한줄 알고 자결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일행은 도망하지 않고 “우리가 여기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하였고, 바울은 “예수를 믿으라”한즉, 그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바울일행을 선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 전도자의 움직인 노력도 있었지만, 거의가 성령님의 역사에 이끌린 도구처럼 쓰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전도사역도 꼭 그와 같은 입장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성령님, 인도해 주십시오. 만나게 해 주십시오. 증거하게 해 주십시오. 청종하고 믿게 해 주십시오. 귀신도 나가고 속박에서의 자유도 주십시오.”하는 기도가 저희들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36과 바울의 선교여정 (행13:4~14) 목록으로


민수기 33장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여정이 나오는데 옮겨서 진친곳만 40곳입니다. 그러니까 1년에 한번씩 옮겨간 셈이지요. 이 시간에 살피려고 하는 것은 바울의 선교여정입니다. 1차, 2차, 3차를 다녀오신 후, 로마로 가신 4차까지 여정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의 1차 여행은, 안디옥(시리아의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자로, 마가요한을 수종자로 보내서 안디옥에서 가까운 해변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부로’섬 동쪽 ‘살라미’와 서쪽 ‘바보’에 이르러, “엘루마”란 박수(무당)가 훼방을 하므로 그를 소경되게 한 일이 있었고, 거기서 배를 타고 터키 남부지역에 있는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도(道)의 안디옥에서 긴 증언을 하였는데, 유대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이고니온으로 갔고, 거기서도 돌로 치려는 무리들이 있어서 루가오니아(도)의 ‘룻스드라’와 더베 근방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 때 ‘룻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숭배 받을 뻔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핍박자의 끈질긴 추적이 있어서 다시 갔던 길로 되돌아 올 때에 비시디아와 밤빌리아 지역을 거쳐 ‘버가’에서 전도하고 출발지인 안디옥으로 돌아왔으니, 이것이 1차 선교의 여정이었습니다(행 13;1~14:26).

2. 그 다음 바울의 2차 선교는 역시 안디옥에서 출발 하였으며(행 15;35~36), 실라를 대동하였고, 수리아, 길리기아 지역을 거쳐 더베와 룻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전도 하셨는데, 그 때 룻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대동하였습니다. 또 거기서 성령님이 “마게도냐로 가라”는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터키영지 남쪽으로 가지 않고 중앙부를 거쳐 서쪽으로 가시게 된즉, 부르기아와 갈라디아와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 항구로 가셨고, 거기에서 마게도냐 사람을 보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면서 중간섬인 ‘사모드라게’에서 하루를 지내시고 헬라영지 마게도냐 지역의 항구인 ‘네압볼리’에 내려서 약간 들어가는 ‘빌립보’에 이른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에게 전도하였고, 거기에서 핍박자들의 송사로 옥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이 구출해 주시면서 간수의 집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해변가 암비볼리와 아블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가르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베뢰아에 들렸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른 길로 오게 하고 바울 혼자 아덴으로 오셔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덴의 남쪽 200리쯤 떨어진 고린도에 오셨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고, 또 흩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만났습니다. 고린도에서 회당장 ‘그리스보’가 믿었고, 1년 6개월간 목회를 하셨는데, 거기에서 약간의 핍박을 받았습니다(행 18:12~17). 그래서 출발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할 것을 계획하고(18:18), 부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떠나올 때 고린도 동쪽에 있는 항구 ‘겐그레아’에 와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어서 머리를 깎고, 배를 타고 소아시아 지역인 예배소로 온신 것입니다. 예배소는 이 때에 처음 오신 것인데 여기에서 “3년 계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행 20:31). 그리고 에베소에서 직접 뱃길로 지중해를 건너 ‘가이사랴’로 오셔서 1000리 북쪽에 있는 안디옥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이 역사는 행 15:40~18:22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3. 3차 전도여행은 행 18:23에서 시작됩니다. 2차 전도여행을 마친지 얼마 있다가 또 안디옥을 떠났는데 이때도 출발노정은 2차여행과 비슷하였고, 올 때는 가셨던 지역에 60%쯤 다시 들려서 돌아 오셨습니다. 안디옥을 출발하신 다음 터키영지 중앙지역인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거쳐 에베소로 가셨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셨으며(19:1~20), 큰 능력과 부흥을 이룩하셨고, 거기서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셨습니다(행 19:21~22). 그 당시 에베소에서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으로 많은 시련을 겪으셨습니다(19:22~41). 그리고 행20:1~3에 보시면 바울도 디모데 일행을 뒤따라 마게도냐와 헬라에 가셨습니다. 마게도냐로 가신 것은 데살로니가와 빌립보, 베뢰아를 거치신 것으로 보아야 하고, “헬라에 이르렀다”함은 고린도를 들리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출발지에서 가장 먼 곳이 고린도인데, 귀환할 때 아시아 쪽을 거쳐 귀환하신 만큼, 헬라지역을 두루 거쳐 빌립보에 모여서 가장 가까운 아시아 땅의 ‘드로아’로 건너온 것입니다. 이 때에 동행자가 많았습니다. 행 20:4에서 아시아까지 함께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있었고, 실라는 같이 떠났으나 거론되지 않았지만, ‘우리’란 대명사 속에(20:5, 6, 13)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와 실라가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집회를 하고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와서, 에배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권면하고,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배를 타고 ‘두로’에 온 것입니다. 두로에서 남쪽 돌레마이(악고 라고도하며, 가멜산 약간 북쪽에 있음)를 거쳐 ‘가이사랴’에 와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마친 것입니다(행 21:1~17).

4. 4차 전도여행으로 로마에 가신 경로를 살피면,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아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가셨고 하나님이 “증인으로 보내신다”고 계시를 주셨으며(행 23;11) 아그립바왕(길리기아 관할)과 베스도 총독의 재판을 받기위하여 안디바드리(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중간지역)를 거쳐 가이사랴에 다시 와서 재판을 받다가,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므로 로마로 가시게 되었는데, 그가 탄 배가 ‘가이사랴’에서 신돈을 거치고 ‘무라’를 경유한 후 ‘니도’맞은편과 ‘그레데’섬의 미항을 거쳐 풍랑의 위험을 겪으며 멜리데 섬까지 갔고, 거기서 ‘수라구사, 레기움, 보디올’을 거쳐 로마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행27:1~28:15).

 

제37과 장로들과의 작별 (행 20:16~38) 목록으로


‘장로들과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상고 하겠습니다. 바울사도가 3차 전도를 마치시고 마게도냐 지역에서 소아시아 지역으로 건너오신 후, ‘밀레도’에 오셨는데 해로로 오시면서 에베소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에베소’는 ‘드로아’에서 해로 직행에 많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전에 예루살렘에 오셔야 하는 바쁜 일정을 단축하기 위하여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작별하기로 한 것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2차(18:19~21) 3차전도 때에 3년이나 계셨던 곳이고(31절), 많은 역사를 나타낸 곳입니다(행 19:1~41).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서 오라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훈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시면 다시 오시거나 만날 날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작별차 만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장로란 위치는 오늘날 장로와 거의 비슷한 직분자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17절에서는 ‘장로’라 하셨고, 28절에서는 ‘감독자’라고 하셨는데, 이런 감독은 빌립보교회에도 있었습니다(빌1:1). 사도는 ‘아포스토로스’라 하고, 목사는 ‘포이멘’이라고 하는데, 감독은 ‘에피스코포스(ἐπίσκοποs)’라 하고, 장로는 ‘프레스부테로스’라고 합니다. 복음사역자를 도우면서 교회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까?

1.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교회에 3년간 계시면서,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본을 보였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본을 보이고 가르치신 말씀이 18~21절, 26~27절, 33~3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모든 겸손과 눈물로 가르쳤고 유대인의 간계와 시험을 이기면서 주를 섬겼으며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개인과 공중에게 전하여 가르치셨고 유대인과 헬라인과 함께 차별 없이 대하셨으며,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증거 하셨고, 각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니(누구도 해롭게 하신 일이 없다는 뜻), 이는 “거리낌 없이 다 증거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아무의 은이나 금도 취하신 일이 없고, 자신의 손으로 수고하여 동행인들의 쓰는 것을 감당하여 범사에 본을 보였으며 수고하고 약한자들을 도왔으니, 이는 주예수님의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시행하신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요약하면(바울의 교훈과 본) “겸손, 눈물, 시험을 이김, 주 섬김, 유익한 것을 다 전하고 가르침, 대인, 헬라인 무차별, 회개와 믿음에 관한 것 증거, 이웃에 대하여 깨끗하고 거리낌 없음, 물질결백, 수고하여 봉사함, 약한자를 도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음을 가르치고 시행하심 등”인 것입니다. 저희들도 꼭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2.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22~25절). 즉,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주님이 주신 사명에 복종한다는 뜻)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각성에서 나에 대하여 감동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결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나를 다시 보지 못할 줄로 믿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에게는 영감을 주셨지만, 바울은 그 영감을 받지 않으셨고, 또 “가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순교해도 좋으니까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바울의 사명이 생명을 바치는 헌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부탁을 하셨습니다(28~32절).

1) 28절에서 사명에 충실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삼간다’는 말은 프로세코(προσέχω)란 말로 “주의하고 조심하며 몰두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소극적 표현이 아니고, 적극적 표현입니다. 감독자들은 덕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감독자를 세워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돼지를 친다”(눅 15:15)하실 때는 ‘보스코’라 하였는데, “교회를 치라”하실 때는 ‘포이마이노’(ποιμαίνω)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먹이는 것과 양육하는 것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감독의 책임은 ‘포이마이노’입니다.

2) 29절에서 “유대주의 이단에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흉악한 이리의 궤계를 경계하고, 어그러진 말로 유혹할 것인즉, “바울이 3년 동안 쉬지 않고 눈물로 일깨운 바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시고 눈물로 기도하고 작별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과 그 말씀이 든든히 세워 기업을 얻게 하실 것”을 강조 하셨습니다.

 

5. 믿음생활과 교회부흥

제38과 신앙적 이끌림 (행 18:5~11) 목록으로


신앙의 사람은 반드시 이끌려야 할 일에 이끌려야 합니다. 이끌리지 말아야 할 일에 이끌리면 큰 손해를 봅니다.

1. 무엇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까?

1) 세속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에게 이끌리지 마셔야 합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롬 12:2), 이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며(요일 2:15),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라(약 2:27)고 하셨습니다.

2) 미혹에 이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벧후 3:17). 성도의 주변에는 미혹 천지입니다. 그 미혹을 떨치려면 세상욕심이 많이 빠져나가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고 하셨으니까요(약 1:15).

2. 무엇에 이끌려야 합니까?

1) 말씀묵상에 이끌리고, 말씀증거에 이끌리며, 또 말씀가르침에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의 모범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말씀에 붙잡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말씀묵상입니다. 바울사도가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14권의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밝히증거 하였는데, 이 증거는 핍박을 받으면서 증거하신 것입니다. 말씀상고나 전도하는 일도 끌려야 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시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에 끌리십시오.

2) 기도에 끌려야 합니다. 눅 22:39에 보시면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하셨고, “새벽 미명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막 1:35)하셨으며, “항상 기도하라”(눅 18:1)하셨고, 또 바울사도도 빌립보에서 “기도처를 찾으셨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행 16:13, 살전 5:17)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항상 기도에 깨어 있으려면, 기도에 끌려야 합니다. 기도에 끌린다는 뜻은, 하나님께 부탁하는 심정이 간절하여야 합니다. 기도를 안하고 하루생활을 시작하면 몹시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때 즉시 기도하셔야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한가지 덜 부탁한 것이 있으면, 마치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안받은 것 같아서 또 다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정으로 기도에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를 밀려가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밀릴만큼 예비하는 것처럼 기도도 미리 부탁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응답의 체험을 많이 하시면 더 잘 끌리게 될 것입니다.

3) 마 4:1, 눅 4:1에서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일까요? 성도가 성령에 이끌리려면 우선 성령에 충만 하여져야 할 것입니다. 술을 많이 먹어야 술주정이 나오는 것처럼,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야 거기에 이끌릴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성령에 이끌림인가를 아시려면 성령님의 본질을 아셔야 합니다.

 성령님의 본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까(행 5:3~4)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 또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 14:17)이시니까 진리(성경)에 이끌리는 것이 그것이며,

 또 성령님은 능력의 신이시니까(슥 4:6)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거기에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무엇부터 성취하셔야 할까요? 병부터 고쳐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계명 실천입니다. 계명의 강령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실천에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지요.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사랑에 끌리고 있습니까? 그것에 끌리고 그 일에 취미가 있으면 성령충만을 받은 증거가 될 것이고, 그것이 미흡하면 가난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저에게 묻기를 “당신은 무슨 취미로 사느냐?”하신다면, “말씀에 끌리는 취미로 산다”고 감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치아를 보수한 후부터 음식에 대한 취미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맛있고 잘 먹어야 한다는 정신이 흐려져 버렸습니다. 추석이라 하여 식탁을 돈 들여 차리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식탁은 두,세가지 반찬이면 족합니다. 누가 비싼 음식을 대접하려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면 정한 시간에 시작하고, 간결하게 끝내야 마음이 편고, 늘 테이블에 앉아서 성경이나 신앙문서를 쓰고 앉아있어야 가장 편하고 안정감을 느낍니다. 더운 여름철에 앉은자리에 땀이 차도 말씀연구에 붙잡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 생활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생활, 또는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큰 행복감에 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직장생활이나 맡은 일은 하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적당히 주무셔야 하고, 식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무엇에 쓰십니까? 청년들은 밤12시까지 무엇을 하는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고, 집에 있는 식구들은 별 유익 없는 TV에 시간을 뺏기는 줄 압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세속에 끌리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일에 이끌리는 사람은 자신의 여가를 육체적, 현실적 취미에 방림하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 휴식하면서 즐길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신앙적이고 건설적인 일에만 이끌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드리는 것입니다.

 

제39과 교회생활의 지혜 (딤전 3:15~16) 목록으로


‘교회생활의 지혜'란 제목으로 몇말씀 드리겠습니다.

1. 성도가 교회생활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성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닮는 목적에 위배되는 다른 뜻은 되도록이면 갖지 마셔야 합니다. 그 다른 뜻이란 것이 대부분 현세욕에 해당하는 것인데(요일 2:15), 육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유한한 것들입니다. 시24:4에서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성화를 위해서 주신 말씀을 열거해 보면, “마음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마 5:3),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마 16:24),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날마다 죽으라”(롬 6:4, 고전 15:31),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갈 1:10),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고후 4:18), “내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18:36) 하신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고(롬 8:29), 성도의 최고의 복이며, 목회자의 가장 큰 보람이기도한 것입니다(고후 3:1~3).

2. 성경을 배우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한다는 생각을 갖고 나오십시오. 행 17:11~12에 보시면, “뵈레아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데, 그것이 신사적이고 그 일로 인하여 헬라의 귀부인 등 믿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성경공부보다 예배의식을 더 비중있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은줄 압니다. 성경공부를 끝내고 예배드립니다하고 ‘땡’하면 긴장을 더하니까요. 명절 때 어른에게 인사드리지요. 선물을 들고 가서 절하는 것을 예배의식에 비유한다면 덕담을 듣는 것이 말씀상고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양식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친교하는 수단입니다. 또 매일 먹어야할 영혼의 양식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실 때 모든 말씀을 다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마 4: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읽으시다가 이해되면 그대로 지나가시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주석으로 연구하시고 그래도 이해되지 않으면 그 부분을 기록하여 목사님께 문의서를 제출하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해 못하는 부분을 그대로 넘어간 다면, 이것은 음식을 받아놓고 먹는 방법을 몰라서 되돌려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3. 교회를 사랑의 도장으로 이해하십시오. 요일 4:7을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하셨고, 11절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전체에서 믿을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행할 것은 사랑뿐입니다. 누구를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를 제외하고는 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 목사님, 교역자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모든성도님, 믿음 약한 초신자나, 문제가 있는 성도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선적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서면 믿지 않는 이웃들이 있는데, 그들도 사랑의 대상입니다. 지금은 동물과 자연도 사랑하라고 계몽하지 않습니까?

4. 선한 일에 합력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선한 일을 안하는 것이 송구스럽기 때문에 이런 일, 저런 일을 만들어서라도 좋은 일을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어떤 개인이나 기관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기꺼이 협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혼자 못하는 일을 협력하여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반대하지는 마시고 힘대로 협력하고, 자유롭게 협력하는 것입니다. 협력자들 중에는 많이 협력할 분도 있고, 적게 협력할 분도 있으며, 또는 마음으로는 협력하나 행동으로 협력을 못할 분도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반드시 역지사지하는 뜻으로 상대방을 서로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협력 못하거나 안하는 사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겸손한 협력이 있을 뿐입니다.

5. 물질주의 다수주의를 앞세우지 말고, 남녀노소가 한 가족처럼 융합하는 생활을 하셔야 한다고 저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경제중심을 앞세워도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내게 은과 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물질사업을 앞세우는 것은 복음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입니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쓰는 교회가 되십시오. 그리고 다수주의가 꼭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0:5에 보시면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하셨고, 눅 12:32에서는 적은 무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물량주의에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남녀노소간의 유화와 친교입니다. 아이는 어른에게서 배워야하고 어른은 어린아이를 교육시키며 보호하여야 하니까 남녀노소가 따로따로 끼리끼리 모이려 하지 마시고 가급적이면 함께 즐기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4대가 한집에서 살면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등 다양한 식구가 한 식탁에 앉는 것처럼, 그런 조화와 다양성을 모색하는 교회생활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 기쁨과 유익도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의 지혜,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40과 교회의 위기 (마 16:15~18) 목록으로


1. ‘교회의 위기’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도 많고 큰 교회도 많으며 교회사업도 활발한데 왜 위기라 하느냐? 하시겠지만 잘 살펴보면 성경과 예수님정신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을 보시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하셨으니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그렇다는 뜻이고,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가 택한백성이며, 교회가 어지러워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뜻은 반석, 든든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으므로 구원을 받고, 또 그런 성도가 모인 교회라야 사탄이 흔들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왜 교회가 위기라고 하느냐? 하시겠지요.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성령에 예언되어 있고, 또 하나는 그런 사실이 상당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예언을 보면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하셨고(눅 18:8), “가라지가 알곡밭에 있어 추수 때까지 간다”하셨으며(마 13:29),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벧전 5:8~9),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고후 11:14),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이적으로 미혹하며(계 13:13, 19:20),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고(마 24:24),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눅 22:31) 전도자를 미혹하기 위하여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하셨습니다(눅 22:31).

3. 그 다음에 사탄이 복음사역자나 성도를 유혹하는 구체적 방법을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딤전 4:1에 보시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을 것이라”하셨고, 그렇게 될 때에 “자기사랑, 돈사랑, 자긍, 교만할 것이며(딤후 3;1~5),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진리에서 돌이켜 헌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며(딤후 4:3~5), 미친 선지자도 생길 것이요(벧후 2:16, 발람), 민간에 거짓이 유포되고, 성도로 이익(명예, 재물)을 삼으며(벧후 2:13),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을 것이라(딤전 6:5)”하시고

4.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경고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수단)로 전도하지 말고 십자가만 소개하는 미련한 방법을 써야한다”(고전 1:21~23)하셨고,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육체의 남은 때를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하며(벧전 4:2), 또 사욕을 본삼지 말아야하고(벧전 1:14. 롬 6:12), 근신하며 깨어 믿음을 굳게 하고(사탄의 잘못된 역사를), 대적하여야 한다”(벧전 5:8)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발람같은 선지자를 ‘미친자’라 하셨는데, 요즈음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거나, 하나님처럼 대접받으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벧후 2:21에서 “의의 도를 알고 불순종하는 자는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고 잘못가는 자를 역겹게 보시는 말씀입니다. 또 벧후 3:16~17에서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자기주장에 맞도록 해석함) 멸망에 이르는 자도 있으니…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5. 믿음이 잘못된 성도가 많으면, 그 원인은 잘못 가르친 자에게 있고, 그 교회는 병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병든 교회의 모형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어지럽고 화평이 없는 교회였고(고전 14:33), 에베소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이며(계 2:4, 교회이기주의), 두아디라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함과 동시에(계 2:20, 권세아부) 사탄의 궤계를 모르는 교회요(계 2:24, 진리오해), 사데교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는 교회이고(계 3:2, 합당한 생활결여), 라오디게아교회는 열심이 빠진 교회라(계 3:15)고 하셨습니다. 이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진리분별을 못하는 두아디라교회 입니다. 다른교회도 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후시대에도 그런 교회가 있을 것을 아시고 경계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진리를 옳게 분변 하십니까? 신학을 안 배워서 어렵다고 하시겠지만, 예수님의 행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치부를 하셨습니까? 현세욕을 가지셨습니까? 외식을 하셨습니까? 자기를 자랑하고 들레셨습니까? 말의 실수를 하셨습니까?

6. 교회의 위기를 어디에서 느끼는가? 하면, 십자가로 전도하지 않고 돈으로 전도하는 것, 믿음의 열매보다 숫자나 돈을 더 좋아하는 것, 성경에 겸손히 굴복하려하지 않고 성경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딤전 6:5), 기복주의의 팽배, 명예와 인기를 앞세우며, 겸손과 경건으로 본을 보이지 않고 권위로 누르려 하는 것, 판단력 없이 아멘하는 사람들, 사회주의로 나가고 세속을 따르는 것, 신학이 없는 상태에서 실수 하는 설교, 메시지의 검증이 없는 교계, 교회를 기업화하는 것, 물리적 수단으로 성령의 역사를 빙자하는 것, 외식과 지나친 의식과 제도와 율법주의에 편중하고 말씀의 터에 믿음을 심지 못하는 것 등 많은 부조리들 때문에 이것을 치료, 정화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41과 교회생활의 기초 (마 7:24~25) 목록으로


여러 해 목회를 하면서 교역자가 배척을 받는 사례도 많이 보았고, 반대로 교인들이 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교회를 이동하여 움직이는 상태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성도자신의 적응력에 문제가 있어서 떠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교역자가 생활대책을 위하여 교역을 하였다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못 받을 때는 당연히 중단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인도 잘못된 중심으로 교회생활을 하다가 그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는 불만을 품고 대립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은 승패를 당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는 그 실 예를 몇 가지 말씀드리고 성도의 교회생활의 기초를 말씀드리므로 교회생활의 적응력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1. 공치사형이 있습니다. 교회에 헌금봉사, 접대, 비품, 예배당건립의 공로 등을 내세워 그만한 인정과 대접받기를 바랐으나, 실권세력에 눌려 대접을 받지 못할 때는 불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마음의 가난함과 자기부정(마 5:3, 16:24), 그리고 헌신적 사명정신(눅 17:7~10)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마 6:4,6). 봉사하고 겸손하면 더 큰 복받는 것을 믿으십시오.

2. 직분봉사형 입니다. 이 성도는 교회생활의 가장 큰 취미를 앞장서서 봉사하고, 직분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직분이란 대체로 기관장이나 장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그런 목적으로 하면 안됩니다. 장로되기 위하여 3년동안 새벽 기도회 잘 나오다가 교회를 옮긴 사람도 보았습니다. 목적을 정욕적인일 또는 허탄한데 둔 것입니다. 그런데서 깨끗이 벗어나서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3. 기복형 입니다. 이 성도는 신령한 복이나 천국이나 내세상급은 덜 중요하고 우선 사업, 자녀의 진학문제, 또는 건강 등에만 주력합니다. 당연히 성경연구에 빠져들 기회는 못 갖습니다. 그래서 축복기도, 축복성회 같은 것을 좋아하고, 교역자가 그런면에 관심 써주기를 원하지만, 여기에 부족하면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친교형 입니다. 본래 친구를 따라 출석하는 경우가 많고, 상부상조하는 이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경우입니다. 진리중심에는 비중이 없고 자기와 상부상조하는 인원의 수에 비중을 둡니다. 그래서 그 측근들이 교회에 남으면 자기도 남고, 그들이 떠나면 자기도 떠는 것입니다. 성경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시 146:3), “사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것을 없애신다”고 하셨지요(사 3:1). 그런 사례를 직접 보신일이 없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두 마리의 토기를 쫓는 것과 같아서 다 놓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5. 은사중심형 입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은사를, 어떤 성도는 찬송(박수치며 부르는 복음성가)의 은사를, 또 어떤 성도는 병고침의 은사나 계시 받는 은사(잘못된 것이지만)를 귀중히 여기는데, 교역자가 그 부분에 힘써주지 않을 때는 교역자를 은혜 없는 분으로 격하 시키려하고, 자신도 기쁨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실족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자신이 받은 특별은사를 스스로 간직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과 동화되는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각자의 받은 은사를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6. 독재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당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목사가 헌법대로 또는 민주주의 식으로 당회를 운영하지 않을 때(이것은 목사의 잘못임), 장로들이 반대를 한다하여 불평하는 경우와, 당회원들이 민주식 표결(다수가결)에 승복하지 않고 불평하는 경우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목사는 법을 준수하여 덕으로 화합시켜야 할 부분이 있고, 장로는 다수결의에 승복하는 정신이 있어서 화합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본을 보일지언정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벧전5:3). 어떤 장로는 “재정부장을 안 할 바에는 장로할 필요없다”하고 10여년 재정부장을 한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자기 뜻대로 안되면 실족하겠지요.

7. 설교정취형 입니다. 이 사람은 귀만 갖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들을만 하냐? 본문 설교냐, 제목 설교냐, 감화력을 주느냐, 현대적 감각이 있느냐, 기냐, 짧으냐, 하면서 유식하게 따지기 때문에 유명한 간판을 가진 자의 설교가 아니면 잘 적응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대부분 설교 잘하는 큰 교회로 가야합니다. 그런 성도는 초급전도사를 모시고 개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생활의 기초는 이상 일곱 가지를 다 초월하거나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말씀중심의 신앙입니다. 현실도, 인간도, 목사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재물도, 명예도 관심 밖으로 돌립니다.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수단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깨달으며 다른 일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성경에만 기초를 둘때, 든든함이 있을 것입니다.

 

제42과 작정한 규례 (행 16:4~5) 목록으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여러 성으로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한즉, 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부흥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작정한 규례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점을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란, 최초교회의 최고의회를 의미합니다. 그 의회에는 영감을 받는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의회에서의 결정은 성경과 다름없는 권위를 나타낸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교단총회가 있습니다. 교단총회가 그와 꼭 같지 않은 것은 사도가 아닌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회의 에서는 표준을 제시하지만 현실교단 총회에서는 표준계시인 성경에 근거하여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총회의 결의가 권위 있는 것은 신앙생활의 대표자들이 연구하고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우수한 결정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작정하는가? 할 때, 교리(어떻게 믿을 것인가?)와 윤리(어떻게 행할 것인가?)와 정치(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1.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초신자가 이해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와 전문가의 단체가 연구하여 “종합적이고 일관성있는 뜻을 요약하고, 그 요약된 뜻(신앙고백이고 교리임)을 역사적으로 평가하여 성경의 뜻을 잘 반영한 것이다”할 때 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교리가 교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파의 결정 중에 가장 바른 것을 정통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면, 도그마(δόγμα)라고 하는데, 성경의 ‘명령, 금령, 조서’(눅 2:1, 단 2:13, 6:8, 더 3;7)란 말과, 신약의 ‘율법, 증서, 규례, 가결’(엡 2:15, 골 2:14, 행 16:5, 15:22)로 나타납니다. 의미는 ‘곧은 막대기’를 뜻합니다. 성경이 있는데 무슨 교리가 또 필요하냐? 하신다면, 연필로 직선을 그어 보십시오. 자를 대고 그은 것과 안대고 그은 것의 차이가 있는지, 곧은 막대기를 대고 그은 것이 더 좋아 보이면 교리가 그만큼 필요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 교리의 결성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방대한 것을 요약하기 어렵고, 윤리가 변해지며, 개인적 특성을 방해하고, 도덕이 침해받을 수 있으며, 행복추구에 지장이 있고, 개인의견(독사, δοξα)과 경험을 무시하게 되며, 성경을 멀리하기 쉽고, 통일에 지장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리를 무시하면 기둥 약한 집처럼 될 것이고, 목표 없이 떠도는 방랑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표준요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교리는 성경을 배워 신앙체계를 세우는데 필요하고(마 16:16), 전도는 물론 교파선택에도 필요하며, 이단방지 및 같은 신앙끼리 합력하는데 더 큰 유익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가 사도신경으로 전해오다가, 어거스틴시대에 더 큰 필요를 느꼈고, 종교개혁시대에 와서 각종 신앙고백서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장로교회 교인들은, ‘칼빈주의’라는 KS마크가 찍힌 신앙노선을 믿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또 이 교리를 생산하는데 대해서도 의견이 많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성경과 전통(외경)에 근거해야 한다”하고, 신비주의자들(슐라이막허)은 “체험에 근거해야한다”하며, 누구는(발트, 불트만) “행위계시에만 근거하여야 한다” 하여 성경 이외의 것을 끌고 들어가지만, 칼빈주의에서는 오직 성경에만 근거를 두되, 역사적 비판과 논쟁을 거쳐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신학자 ‘하낙’은 “국제적 기독교회가 채택해야한다” 하였으나, 큰 교파가 불건전한 신학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도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바른 교리를 알고 역사적으로 계속 검토하면서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2. 행동윤리에 대한 것을 결정합니다. 산아제한, 안락사, 사형제도, 정치적 형태, 효도규례, 정치참여 문제 등 표준을 찾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신앙대표자들이 모여서 합리성있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율법의 권위는 빛을 잃었습니다. 제사, 할례, 안식일, 십일조, 우상의 제물, 부정한 음식 피하는 것 등을 일시에 폐지하려면 그만한 복음적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형편에서 율법의 제도를 무시하려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과격하게 폐지하지 말고 “가장 혐오한 것들(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이는 것, 피를 먹는 것)만 삼가라”고 한 것입니다. 나중에 지식이 들어가면 우상이나 피에 대한 것도 초월할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고전 8:4~10). 이런 차원에서 행동윤리를 지도하는 것입니다.

3. 단체를 다스리는 정치입니다. 나라에 법이 있듯이, 교회 단체도 법이 있어야 운영상 편리하니까 교회헌법을 제정하여 지키게 한 것입니다. 상회가 타락하면 지교회나 성도에게 유익이 없지만, 잘 지도하면 좋고, 순종만 하면 될 것입니다. 자기 차로 부산을 가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하지만 돈을 주고 기차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는 것처럼, 교회가 상회의 지도만 따르면 그 만큼 신앙생활하기에 수월하기 때문에 교회가 든든히 서고 부흥이 된 줄로 아는 것입니다. 작정한 규례의 성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상회가 본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경계하셔야 합니다.

 

제43과 교회의 부흥 (행 16:1~5) 목록으로


‘교회의 부흥의 뜻’을 원만하게 설명한다면 “예수님 닮은 성도가 많아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질적으로 양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적, 양적 부흥을 표현한 말씀이 본문 5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곧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하셨으니, 믿음이 더 굳어지는 것은 질적 부흥이고, 여러 교회의 수가 더하는 것은 양적 부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흥이 우리교회에도 있기를 바랍니다(제가 오늘 시찰회에 가서 15개 교회의 보고를 받았는데, 한 교회도 숫자 늘은 교회가 없고, 교인이 이사 가고 떠나는데 환멸을 느낄 지경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중에 저는 평소에 자랑하지 않다가, 이번에는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새교회는 3세대 8명(목사가족 5인)으로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10세대 18명이 되었으니, 120% 부흥된 것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웃기위한 이야기입니다만 비례적으로 따져보세요. 120% 부흥한 교회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본문에서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더라”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물리적 조건으로 볼 때, 어느 지역이나 “처음 전도할 때 잘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바다에 나가서 처음 그물을 던진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회 세울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택한백성을 모아 드렸기 때문에 그만큼 전도하기가 어렵고 또 교회가 덕을 잃은 관계도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부흥은

1.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물리적 조건이 좋았습니다. 그것은 초기전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로 그 지역에 가서 전도하였는데(행 13:1~15:4), 여행처럼 지나갔었고, 그리고 2차 전도로 바울이 실라와 함께 또 간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관심이 컸을 것이고, 또 그 주위에서 이적 나타난 소식(행 14:8~13)도 들었을 것이므로 은혜를 사모하던 차에 바울이 또 가셨으니까 전도가 더 잘 되었을 것입니다.

2. 부흥된 조건은 그곳에 복음의 예비적 발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고(아버지는 헬라인), 디모데가 젊은 청년으로 그 지역에서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디모데’를 칭찬할 때, 그의 외조모 ‘루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해서 믿음을 배운자라 하였은즉, 바울만큼 유력하지는 않으나 그 지역 전도의 예비적 기초가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지역이 한곳이 아니고 ‘더베와룻스드라’인 것을 보면 디모데가 200리 거리의 두 지역을 순행하면서 전도한 것입니다. 또 본문 1절에서 디모데를 제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가 전도자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3. 바울과 실라 일행이 그지역의 전도자 디모데를 만난것이 큰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모르는 외처사람의 전도보다 그 지역 전도자와 합력한 전도는 더 큰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를 담임교역자와 부교역자라 하여도 좋고, 전도의 동역자라 하여도 좋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복음의 명예만을 위한 사역자인즉 협력하는데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될 수 있었던 것이요,

4. 디모데에 대한 오해를 씻어준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바울이 유대인을 인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가 복음적 신앙을 가졌을 때, 할례대신 세례만 주면되었을 것인데, 율법적 의식을 거부한 바울사도가 할례를 준 것은 그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전도의 대상)이 이방인 접근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의 유대인들은 디모데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라 하여, 반 이방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인 만큼 그가 유대인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면 완고한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못하므로 접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지역에 살면서도 이방인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율법에 “죄인의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씀(시 1:1)을 오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한 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접근하여 전도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전도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었을 것입니다.

5.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 규례의 성격은 오늘날 교단총회의 결의 성격으로 교리와 정치를 뜻하며 교회가 상회의 지도를 잘 순종하면 유익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작정한 규례는 행 15:20, 28:29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으면서 율법의 제도를 한꺼번에 폐지하려니까 거부감이 생겨서 그것을 “점차적으로 폐지하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네가지 방법을 통하여 질적, 양적부흥을 아울러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44과 성장하는 교회 (행 9:31) 목록으로


성경에 보시면 예루살렘교회가 최초의 교회이고, 그다음의 교회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이며(본문), 세 번째가 안디옥교회요, 그다음에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본문에서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였고 든든히 섰으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무조건 수가 많아진 것은 성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벽돌을 많이 모아놓았다 하여 집이 된 것이 아니지요. 그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았을 때 집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무조건 많이 모였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된 것은 아닙니다. 성도 개개인이 평안의 은혜를 받고 믿음이 견고해지며,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또 스스로 성령의 위로를 받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서 그 단체가 커질 때 성장하는 교회 또는 부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장하는 교회는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올리는 것처럼 성도 개인 개인의 신앙이 성숙해지므로 성숙한 교인의 단체가 커질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개인 각자가 앞에서 말씀드린 네가지 은혜와 사명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교회전체를 포괄해서 “무엇 무엇이 있었다”하셨지만 교인 중에 평안치 못한 성도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교회는 평안치 않은 것이니까, 개인적 은혜확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교회가 평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평안하려면 성도 개인의 생활도 평안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단체적으로 분쟁하지 않는다 하여 평안한 것이 아니고, 성도 개개인이 평안의 은혜를 힘입고(요 20:21) 평안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는 뜻도 깨달아서(요 14:27) 어떤 육체적, 현실적, 신앙적 고난이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영광섭리로 믿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변론을 게을리 하여, 1심, 2심에서 다 졌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성실한 변호사를 만나 사건을 부탁해 놓고 많이 안심하였습니다. 과연 대법원에서 이겼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평안치 않은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안심할 줄 아는 믿음이 바로 평안을 힘입어 누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모든 성도가 이런 문제를 사람에게 의존하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줄 아셔야합니다. 또 교회적으로도 갈등이 없어야 하겠지요.

2. 믿음이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집이 든든히 서려면 기초도 든든해야하고, 벽이나 지붕도 든든해야 태풍에 요동이 없겠지요.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든든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성경기초위에 서고, 정통신학기초 위에서며, 성경지식 위에서고, 사랑실천에 목적을 두며 특별히 세속을 떨치고 내세지향적 이라야만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없이 믿는다하거나 그런 사람의 단체는 든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은 고사하고 불건전한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개인이 성경, 신학, 지식, 사랑, 내세지향적 신앙에 든든히 서야할 것입니다.

3. 주를 경외함이 확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경외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롬 11:35에 보시면(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는데)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현실적으로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선물은 성도의 믿음뿐이고, 감사와 찬송뿐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는 생활뿐입니다. 믿음, 감사, 찬송, 복종, 기도를 통한 친교,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사랑실천하는 것, 예배, 성도의 친교, 전도, 봉사, 말씀연구, 그런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이나 하나님의 교회가 이것을 할 줄 모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부족할 때는, 다른 것이 족해도 목적이행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을 때만 영광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위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위로는 고난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연단위한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저하면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하셨고, “사도들은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기를 원하였으며”(행 5:41) 그런 신앙에 근거하다보니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롬 5:3) “근심하는 것 같으나 속에는 기쁨이 있고, 없는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임”(고후 6:10)을 간직하였으며,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행 16:10),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교인으로서 자격이 있습니까? 이상 말씀드린 네 가지 은혜를 실현하도록 노력하시지요. 오래전에 미국교포 목회하시는 한종희 목사님을 만났는데, 미국에는 20~50명되는 교포교회가 많고 목사 생활비는 두, 세가정의 헌금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복잡한 일이 없으며 교회는 오직 수에 연연하지 않고, “순결에만 목적을 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교회부흥의 방편 (행 19:20) 목록으로


교회부흥의 다섯 가지 방편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말씀, 기도, 전도, 사랑, 규모입니다.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1. 말씀이 흥왕해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하셨으니, “말씀이 힘이 있었다”는 것은, 말씀사역(전파, 교육)이 넉넉함을 뜻하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것”은 부흥입니다. 교회부흥에 왜 말씀사역이 중요한가? 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요 1:1) 또 말씀이 운동력이었으며(히 4:12), 말씀 스스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 55:11을 보시면, “내 입에서 나간 말은 헛되이…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셨을 때, 희한한 능력이 나타나서 바울의 쓴수건이나 앞치마만 병든자에게 얹어도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고(행 19:9~14), ‘드로아’에서는 밤새도록 설교하셨는데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가 살아났으며(행 20:6~12), 고넬료의 집에서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쉬운 예로 요즈음 교회도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이 나야 교회가 부흥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흥도 역시 ‘말씀 달음질’에 있었습니다(살후 3:1). 부흥을 원하시면 먼저 말씀 다름질을 할 수 있도록 성경에 매달리셔야 할 것입니다.

2. 기도가 부흥의 방편이 됩니다. 기도를 만능의 열쇠라고도 합니다. “구하라 주신다”(마 7:7)고도 하셨고,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도, 그 백성들의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겔 36:37), 기도를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자는 대구 남일교회 시무할 때, 교회 부흥을 위하여 금요철야기도회를 두 달쯤 시행하였는데, 어려운 여건에서도 등록하는 교인이 많아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오순절 성경강림도 이미 약속하신 것이지만, 모인 무리들이 기도를 힘쓴 다음에(행 1:14) 강림하셨고(행 2:1), 핍박 중 전도하다가 베드로가 갇히게 된 것은 큰 위기라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이 요한마가의 집에서 간절히 기도하므로(행 12:5, 12), 베드로가 하나님의 이적으로 구출받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바벨론 포로로 묶여 있을 때, 다니엘은 선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기도한즉, 머지않은 장래에 은혜주실 것을 약속하신 바가 있었습니다(단 9:20~27). 고넬료도 기도한 중에 부흥의 응답을 받았고(행 10:2), 바울도 기도처에 가다가 루디아를 전도하게 되지 않았습니까?(행 16:13~14) 따라서 성도들은 부흥을 원하는 만큼 기도하셔야 합니다. 성도가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서 교역자로 하여금 혼자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한다면, 크게 무례한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온 성도가 다같이 짐을 지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3. 전도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이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므로 일어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하셨고, 롬 10:14~15에서도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하시므로 전도가 구원사역에 한 몫을 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으며(롬 10:17), 듣고 믿어 순종케 된다”고 하셨습니다(행 18:8, 롬 1:5). 전도는 곧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블 에서는 열매를 못 맺어도, 옥토에 닿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970년 영국이 남양군도의 ‘피카렌’섬을 개발하기 위하여, 100명의 인부를 보냈는데, 그들이 분쟁을 일으켜 선장을 배에 실어 정처없이 떠나버리게 하고, 그곳의 토인여성들과 결혼하여 살았는데 선장이 다행히 돌아와서 그 보고를 하여 가보려 했으나, 1804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가보지 못하다가, 30년만에 가본즉, 예배당과 학교가 있고 잘 살더란 것입니다. 그 때, 그곳에간 ‘아담스’란 사람이 어머니의 권유로 성경을 갖고 갔기 때문에 그런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씨를 뿌린 것입니다. 뿌림이 없으면 거둘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4. 사랑과 화합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으뜸인즉(마 22:36~40), 사랑실천을 잘하면 주님이 큰 복을 주십니다. 행 2:44~47은 초대교회의 사랑의 분위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냉정한 세계는 사람이 머물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라야 머물고 말씀을 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 5:6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하셨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흥도 ‘사랑의 수고’를 내세웠습니다(살전 1:3).

5. 질서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단체생활을 화합적으로 잘 하려면, 교회법을 잘 지켜서 질서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 16:5에 보시면 “총회의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한즉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무질서한 부흥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규모와 질서를 강조하신 것입니다(고전 14:4, 살후 3:6~7, 11).

결론적으로 교회의 부흥은 교역자 한사람의 역할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온 성도가 일심동체가 되어 말씀을 흥왕케 하고, 기도에 주력하며, 전도와 봉사와 사랑과 질서를 세우고 인내하며 기다릴 때(소망의 인내, 살전 1:3), 때가 되면 하나님이 성취시켜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46과 고린도교회의 부흥 (행 18:1~11) 목록으로


고린도는 헬라영지 아덴에서 남쪽으로 80km쯤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뷔너스’란 여신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근거지이고, 항구도시란 특성 때문에 사치, 방탕도 많으며, 운동경기도 성행한 곳 이었다고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그곳에 부흥이 일어났으니 “회당장 그리스보와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또 부흥을 가져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 일행이 2차전도 여행시기에 처음으로 고린도에 가셔서 1년 6월간 사역하시므로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바울사도의 전도는 전업적 몰두였습니다. 자기의 사생활을 하면서 기회 따라 부업처럼 전도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전도사역에 나선 것이니, 아무래도 전심전력할 때 열매가 맺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 큰 것입니다. 대하 16:9절을 읽어 보세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2. 믿음 있는 한 가족을 만났으니, 그가 곧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잘 되게 하시기 위하여 믿음 있는 성도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이 부부는 유대인으로 복음을 깨달았고, 로마에 가서 살다가 ‘글라우디오’황제의 유대인 축출령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 헬라땅 고린도에 온 것인데, 장막 만드는 업이 바울과 같아서, 대화를 하는 중에 신앙이 서로 통하게 된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시는데는 로마황제의 축출령과 그들의 발걸음을 고린도로 향하게 하심과, 천막업의 일치를 이용하여 만나게 하셨으니, 성도들은 자기 주위에서 되어져가는 일들을 무엇이나 예사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목적에 응하는 것을 지켜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셋째 딸이 대학을 나오고 작곡하는 회사에 잘 다니다가 스스로 퇴사를 하였습니다. 이유인즉, 자영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손으로 강해문 식자를 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출애굽강론과 민수기강론을 다 치게 하였습니다. 10일쯤 샌드위치 판매를 하였는데, 방금 전에 가지고 간 분량을 다 팔았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직장생활의 소득의 1/5도 못되지만, 저는 메시지 식자 등, 하나님이 나의 하는 일을 돕게 하시려고 그렇게 인도하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유익하게 하시는 섭리로 믿으시면 그 믿음대로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사 48:17, 마 9:29).

3. 동역자와의 합세입니다. 바울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혼자 오셨고,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흩어졌습니다(행 17:13~14). 그래서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떠나면서, 실라와 디모데에게 연락하여 고린도에서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행 17:15). 그런 경위로 고린도에서 만났으니, 사역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바울, 실라,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5명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합세하였은즉 부흥이 잘된 것이지요.

4. 5절에서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잡힌 것과, 밝히 증거한 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이로 인하여 ‘디도유스도’란 사람이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고, 또 회장당 ‘그리스보’가 믿으면서 수다한 고린도사람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은즉, 짧은 기간 안에 교회가 부흥된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배척하면 나는 이방인에게 전한다”하시고 증거 하셨는데 많은 이방인들이 믿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만, 전도자가 ‘말씀에 붙잡히는 것과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는 것’은 귀한 일이고 성령님의 직접역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9~10절을 보시면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며,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전도자와 동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고, 핍박이 있을 때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가 어려움을 당하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고 믿으셔야할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세례요한이나 스데반이나 야고보가 순교할 때는 버려두셨고, 베드로와 바울이 갇혔을 때는 기적으로 보호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 이상과 같은 은혜에 힘입어 1년 6월동안 계속 사역을 하시므로 고린도교회를 정착시키게 된 것입니다. 8절 말씀대로 성도들은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들을 줄 알아야 믿음이 생기고, 믿어야 순종력이 생깁니다. 어떤 권사가 불신남편을 교회로 인도했는데, 늘 하는 말이 “목사가 무엇을 떠드는지 알지 못하겠다”하여 늘 안타깝게 여기다가 권사가 임종하게 되었는데, 죽을 때 영감님의 귀를 쑤시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감님의 듣는 귀를 열어달라는 뜻이지요. 그 후부터 그 영감님이 귀가 열려서 말씀을 깨닫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부흥의 관건은 말씀사역이 세력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47과 교회의 상징 (행 7:37~38) 목록으로


성경에는 “교회가 이런 곳과 같다”라고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교훈이 있습니다. 본문에 ‘광야교회’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 우선 교회를 가정집으로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16:19에 보시면 ‘브리스길라의 집에 있는 고린도교회’라 하셨고, 골4:15에서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골로새교회’라 하셨으며, 딤전 3:15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의 성격은 가족적 분위기를 뜻합니다. 가족적 분위기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혼인잔치집입니다. 예수님이 이 혼인 잔치 집에 축하하러 오셔서 처음으로 이적을 나타내신 것은 큰 의미를 주신 것입니다. 혼인은 신랑, 신부의 결합이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행사입니다. 마 25:1에서도 “천국은 마치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즐거워하는 세계가 곧 성도의 교회의 생활입니다. 잔치 집에 가면 신랑, 신부가 행복한 것은 물론이요, 거기 참여한 사람들이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이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님과 친구하고(요 15:15) 좋은 말씀 받으며, 축복받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과 친교하므로 기쁨누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2. 목장으로 상징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 23:1~3에 보시면,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며…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신약에서는 요 10:1~18에서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요, 양의 문이라 하시고 모든 양의 이름을 아시며 불러내사 앞장서서 인도하시되…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목장의 특징은 양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보호하며 안식을 주는 곳입니다. 세상이 바다라면 교회는 배와 같은 곳입니다. 세상은 세속이 들끓고, 죄악과 유혹이 위험수위를 넘은 곳이지만, 교회는 명실 공히 영혼과 믿음의 피난처이고, 또 안식처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잘하시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필요한 것으로 공급을 받을 것이며, 시험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목장과 같은 곳입니다.

3. 교회는 치료를 받는 곳입니다. 종합병원과 같은 곳이지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곳이 병원인데, 예수님은 죄로 인한 문제와 육체의 병을 다 고치시는 분입니다. 마 9:2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하시고, 죄 문제와 중풍병을 아울러 해결해 주셨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되, 병든자에게라야 쓸데있다.”하시면서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 9:12~13). 그리고 베데스다 못에 오셔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으니(요 5:1~9), 이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모든 문제(죄 문제, 질병문제, 생활에 관계된 문제 등)를 해결해주시는 시은소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교회생활을 통하여 먼저 죄사함 받고, 영혼이 치유되며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자유를 누리실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사도요한의 기도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 될 것이고, 육체도 강건해진다”고 하셨습니다(요삼 2). 교회생활을 잘 하시므로 문제를 해결하시고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4. 교회는 일하는 농장과 같은 것입니다. 마 13:24~30에 보시면, “천국은 자기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다”하셨고, 그 밭에 사탄이 와서 가라지도 뿌렸기 때문에 한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상의 교회에 외식자가 섞일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마 20:1~16에는 “천국은 마치 포도원농장에 품꾼을 들여보내는 것과 같다”하시고 그 품꾼의 성질에 따라 인건비를 지불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일터로 상징한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을 잘 키우고, 연합을 잘하여 충성하면 하나님이 그 수고에 따라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하여 충성을 할 때, 개인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지만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업이나 신학교운영 같은 것은 혼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연합하여 큰일을 하는 일터’와 같은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교회는 연단의 장소요, 기관입니다. 본문 38절에서 ‘광야교회’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자 모세가 있고,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이 있으며, 애굽(세속)을 박차고 나온 백성이 있은즉, 교회요소가 성립된 것입니다. 신약의 에베소서도 교회론을 강조한 말씀인데, 1:1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역자인 바울이 있고, 신실한 성도가 있으며, 은혜와 평강이 있은즉 교회의 요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광야에 있다는 것은 시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혼자 엎드리면 겸손해지는데,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을 하면, 교만도 생기고, 명예욕도 생기며, 또 경쟁심이 생겨서 덕을 잃을 소지가 많은 것입니다. 또 여러 사람 중에는 가라지같은 외식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교훈을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단체생활을 하는 교회는 연단의 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선민의 40년 광야생활은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생활한 세계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것이 없는 곳이요. 위험만 있는 곳인즉, 연단의 장소로 적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여 연단을 받은 곳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8과 안식일의 지식 (골 2;16, 갈 4;10~11) 목록으로


성경토론을 하다보면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안식일과 다른 절기 등에 대하여 폄론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따른다면 안식일에 대하여 말을 안해도 괜찮겠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공부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의 출처와 규례와 선민과의 관계와 신약시대에 폐지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본래 안식일은 창조 7일에 하나님이 쉬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때 그날을 거룩하게 한다(창 2:1~3)하셨지만, 안식일이란 용어는 출 16:25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신 목적은 피곤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창조세계를 천국의 모형으로 나타내시고, 인류에게 그날 복주시기 위하여 구별하신 것인데, 그 후 2000년이 지난 아브라함 때나, 또 500년이 지난 출애굽 때까지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제도는 출애굽 때부터 선민상대로 계율로 주신 제도가 된 것입니다.

2. 어떻게 주셨습니까? 유월절을 지키게 하면서, 첫 날과 7일을 성회라 하였고(출 12:16), 그 날이 안식일의 근거가 된 듯하며, 출 16:25에서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하시므로 정확한 안식일을 지적한 것입니다(이날은 성령님이 보증하신 날임). 따라서 중간에 요일을 붙였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약 3500년동안 이어져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주신 것입니다(출 20:11).

3. 규례를 보면, 6일동안 힘써 일하고 쉬어야 하며, 모든 식솔이 다 쉬어야하고(출 20:10), 양식을 구하러 나가지 말아야 하며(출 16:23~25), 나무도 하지 말아야 하고(민 15:32), 매매는 물론 쾌락 즐기는 일도 금지 되었습니다(암 8:5, 느 10:31, 사 58;13). 그리고 안식일에 나무하러 간 죄로 돌로 쳐 죽이는 형벌도 시행하였으니(민 15:35), 얼마나 무서운 계명입니까?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식생활과 제사에 참여하는 일(5리 이하로 걷는 일, 행 1:12)만 용납 되었을 뿐인데(마 12:5~7, 출 16:23), 이 제도를 랍비들이 엄격하게 시행하면서 전통적 계율을 만들어, “머리에 댕기, 바늘이나, 의복에 장식품이나, 손수건도 싣고 다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제도를 만들었고, 따라서 안식일로 인하여 복 받은 사례와(사 58:13~18) 벌 받은 사례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렘 17:24~27).

4.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신앙이 타락하면서 안식일 계율도 복된 날이 갈구치는 날로 전락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고 영광 돌리기 위하여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식구들이 “또 안식일이 됐느냐? 어서 안식일이 지나야 매매를 할텐데…”하는 식으로 귀찮게 여기기도 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악행도 범했습니다(사 1:13). 하나님은 마음에 없는 제사나, 자원하는 봉사가 아닌 것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타락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절기가 폐지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호 2:11). 그리고 또 “안식일에 대하여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도 예언하셨습니다(애 2:6). 어찌보면 징벌로 폐하신 것 같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자동적으로 복음은 빛을 내고 율법은 숨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5. 그러자 계시의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율법의 주인인 줄만 알았으면(마 12:8) 많이 깨달았을 것인데, 홍보도 부족했고 무지하니까 그때도 안식일 지킨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시는가? 하여 여러 차례 항의하기도 하였지요(이것은 과도기의 상태임).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신 일이 없으셨고, 다만 안식일이라도 사람모인 곳이면 가셔서 전도하고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니까 꼭 지켜야 할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안식일을 폐하신다” 하셨으니까, 그것을 선포하실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신 말씀이나, 변화산 모세 앞(율법)에서 하나님이 “너희는 저(예수님)의 말을 들으라”하신 말씀이 바로 그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6. 그 다음에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고, 율법은 세례요한까지요(마 11:13),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시며(롬 10:4), 신약의 성도들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야 하며(엡 2:20, 고전 3:10~11),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모였고(요 20:19), 부활하신 날(오순절) 성령을 받았으며, 계시를 가장 마지막에 받은 사도요한이 ‘주의 날’이란 것을(고전 16:2) 선포하므로(계 1:10) 주일이란 새로운 날이 탄생한 것입니다. 고전 13:10과, 히 10:9에 보시면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있던 것은 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전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율법이고요. 율법은 사랑을 증거하는 내용인데, 증거만 하고 실천이 없기 때문에 부분적 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모범적 실천자요, 천국의 주인이신즉 현세천국도 보이셨습니다(막 1:15).

7. 따라서 안식일 제도는 율법과 함께 뚜껑을 덮으시고(골2:14), 대신 주일을 생각하시되 “어떻게 하면 주일을 복되게 지키고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예수님의 입장에서(눅 14:1~5, 눅 6:5)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날과 달, 또는 절기 같은 것을 인하여 폄론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이 율법적 제도로 끝난 것처럼 십일조도 율법인즉, 그 이상의 헌신 봉사에 포함되어 없어져야 하는데 아직도 한국교계는 십일조의 율법적 성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49과 성수주일의 의미 (요 20:19~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수주일의 의미’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큰 부담 없이 주일을 지키거나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다른 볼일도 있고 직장일, 돈벌이, 또는 약속 등이 있어서 주일이 아니었으면 좋을 뻔했으나 주일이니까 지켜야하므로 어렵게 또 세속의 일을 포기하고 나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여야만 하는가? 성수주일은 신약의 교회에서 교리처럼 강조하니까 예수를 믿으려면 성수주일 약속부터 해야 하는 줄로 아시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성수주일을 왜 엄격하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수주일 하는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에 보시면 ‘안식 후 첫날’이란 말씀이 있는데, 그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날 모였던 사람들은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만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눅 24:33에 보시면, “열한사도와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였다”하셨고, 요 20:19절에서는 문들을 닫았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포하셨으니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념할 만하고 모일만 한 날이며,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행 20:7에도 주일에 모여 말씀집회를 하신 일이 있고, 사도요한은 계 1:10에서 그 날을 ‘주의 날’이라하고 말씀계시를 받은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주의 날은 두가지로 해석됩니다. 살전 5:2과, 살후 2:2과, 벧후 3:10의 ‘주의 날’은 재림일을 의미하고 우리가 지키는 ‘주의 날’은 계1:10에만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일도 기념하는데 주님의 부활을 어찌 기념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도들이 그 날에 의미 있는 일을 하였으니까 저희들도 그 모범을 따라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의 모범에 따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뜻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2. 사도들은 어떻게 지켰느냐? 하실 것입니다. 일단 성도들이 모인 모범이 있고(요 20:1, 고전 16:2), 기도한 모범이 있으며(행 1:14), 말씀들은 모범이 있고(행 20:7), 떡을 뗀 모범이 있으며, 또 구재한 모범도 있는 것입니다(고전 16:2). 기도한 모범은 오순절 성경강림 때 기도를 힘쓴바가 있는데, 오순절이란 절기가 안식일 다음날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고, 구제와 선행은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명할 때에, “안식 후 첫날 모여 구제금을 모으라”하신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주님의 날에 모여서 말씀, 기도, 성례, 친교, 구제를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축복을 하셨으니, 이것이 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행사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영적교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수주일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주님의 부활 기념에 있고, 또 한가지는 사도들의 행사를 본 받는 일인데, 거기에 예배와 선행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3. 성수주일의 의미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은혜, 재충전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은혜란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고 식어진 것을 가깝게 하고 뜨겁게 하는 뜻입니다. 성도의 생활에 주님이 멀어지면 석양에 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만사가 위험해 지는 것입니다. 부산 태종대 가는 쪽 동삼동을 아시지요, 그곳에서 서울 오는 차가 기름이 떨어져서 동삼동 언덕 우측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 입구가 좁아서 모르고 지나친 것입니다. 왼쪽에는 주유소가 보이지만 오른쪽에 없으니까 그대로 영도다리를 건너 도시고속도로를 타고 오는데 계속 주유소가 없습니다. 도시고속도로에서 일반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곳에도 없습니다. 양산 톨게이트에 와야 있습니다. 자동차 정지 될까봐 얼마나 마음이 탔는지 모릅니다. 성도가 영적재충전 없이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영적재충전을 하시기 위해서 주일을 지키는 의미가 있음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등산하는 일이 퍽 힘들지요. 그런데 한참 오르다 보면 쉬는 장소가 있고, 또 그곳에서 음료수를 공급하기도 합니다. 푹 쉬고, 땀 닦고, 물 잡수신 후 다시 출발하면 힘이 생겨서 다음 쉴 자리까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 붙어 있습니까? 장작불을 활활 태우려면 풍구질을 하셔야 합니다. 그 풍구질을 해주는 사람이 말씀증거하는 사역자이지요. 제가 몇 일전에 청남대를 갔는데, 청남대 남쪽 끝에 초가집이 있고, 거기에 옛날물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가 못 본 것은 거의 없어요. 그리고 쇠로 된 풍구가 두개나 있더군요. 그 쇠로된 풍구는 해방 후에 나온 것인데 별로 오래된 것은 아니지요. 부채로 아궁에 불 피우다가 그 다음세대에 쇠 풍구가 나왔는데, 그것은 돌리기만 하면 바람이 계속 들어가니까 불이 잘 타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불, 말씀의 불, 기도의 불, 사명의 불이 계속타서 자동차에 기름이 가득 있는 것처럼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요삼 2절). “영혼이 잘되고 있을 때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성도들이 한 주간 세속에 빠져보세요. 심령에 불이 다 꺼지고 식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풍구질하기 위하여 성수주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남대에 가서 쇠 풍구를 보고 이 말씀을 구상하였습니다.

 

6. 은혜의 생활

제50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약 4:8) 목록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하신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느냐? 하면, 믿는 사람이면 다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에게는 성령님이 그의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가까이 하라는 것인가? 하실 것입니다. 비유를 들으시면 곧 이해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혈연적관계이고, 법률적관계입니다. 그런데 부모와 친교를 하는 자녀들도 있고 친교하지 않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뜻은 부모와 친교관계를 갖는 자녀처럼 하나님과 친교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가까이하는 방법을 알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합니다.

1) 우선 하나님은 하늘을 그의 보좌로 갖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곳에 보좌를 두셨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곳의 반대는 속세입니다. 먹고 노는 자리가 아니란 뜻입니다(행 7:49).

2) 하나님은 정의세계에 계십니다. 성도가 죄를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은들 곁으로 와 주시겠습니까?(요 9:31) “하나님은 의로운 길로 행하시고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신다”(잠 8:20)하셨으니까 정의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할 것이요.

3)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6:6). 그러니까 복잡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지 마시고, 골방 은밀한 곳, 혼자 있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4) 또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요 1:1) 성경으로 성도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행 20:32)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5) 또 하나님은 성도(자녀)와의 친교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셨고, 자기를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찬송하라”고 하셨으며, 성도가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만큼 그대로 생활하셔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6) 잠 8:17에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대상은 보이는 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적으로 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외식적이거나 수단적 방법으로 가까이 할 수 없고 오직 진실한 믿음과 신앙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노력을 하면 “하나님도 가까이 해 주신다”하셨으니까 하나님이 가까이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은 쉬운말로 은혜 받는 증표입니다. 은혜의 맛을 알아야합니다. 무슨 일이나 재미를 느껴야 능률이 있듯이, 신앙생활에도 반드시 재미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1) 그 재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가까이 오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 6:44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되고 믿음으로 교회로 이끌려지는 체험을 하셔야 합니다.

2)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에 이끌리는 체험 없이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체험을 하셔야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도 담배 맛을 알고 피운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담배를 못 피운 사람이 다른 사람 피는 것을 한 모금, 두 모금만 빨자고 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맛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성경과 성경토론의 갈망과 기도에 끌리는 입장에 들어가셔야 하고, 그것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있구나”하는 것을 아시게 되고,

3) 사랑의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계명의 강령은 사랑이고, 은혜를 받으면 사랑의 심정이 커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정이 커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부족을 이해해주는 마음과 범죄자에 대한 용서와 포용이 커지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노력도 해야 하고, 원수같은 대상도 마음을 열고 영입을 하는 자세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발전이 있고, 죄를 경계하는 열심이 강해질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줄로 깨닫고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기도응답의 신속성입니다. 기도응답에 민감하지 않으면 막연히 기다리다가 기도응답된 사실도 감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수록 기도가 민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 55:6에 보시면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하셨고, 사 65:24에서는 “부르기 전에 응답하신다”는 말씀이 응답의 신속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저는 기도응답의 신속성에 대하여 두가지 체험이 기억납니다. 한번은 비 그치는 문제를 1시간 안에 응답받은 일과, 치아보수 문제를 20분 안에 응답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써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5) 마지막으로는, 마음의 쉼을 얻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주님께 나오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마 11:19)하셨고, 또 “자유를 준다”(요 8:32)하신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면 든든함과 만족과 자유를 반드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 73:23에 보시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오른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더욱 든든함을 느끼고 만족과 소망을 가질 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51과 성숙한 믿음 (히 10:22) 목록으로


믿음의 싹은 순간적으로 나타나지만, 성숙된 믿음은 시일을 두고 항상 연마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씨앗이 순간적으로 싹트지만 좋은 열매를 맺기까지는 계속 농부의 관리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우선 종자 선택을 잘 하여야 하고, 그 종자에 맞는 토질을 개선하여야하며, 거름을 주고 병충해관리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조건의 혜택을 잘 받을 때 비로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숙한 믿음도 평생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연구도 평생 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요즈음 시장에 나가면 순수한 무공해식품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도의 순수한 믿음이나, 온전한 믿음이나, 성숙한 믿음을 찾기도 어렵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현세욕 갖은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나라는 하늘에 있다, 하셨고(요 18:36), 세상을 사랑하지 말며(요일 2:15), 자기를 부인하고 정욕을 못박고 주님을 따르라”(마 16:14, 갈 5:24)하셨지만, 그런 생활에 목표를 두고 사는 성도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순수하고 성숙한 믿음’되는 연구부터 해보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1. 우선 성숙한 믿음은 순수한 마음(좋은 종자에 해당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하나입니다. 참이 아닌 거짓이나 외식에서는 온전한 믿음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이 참입니다(진리란 뜻이 바로 참이고 진실이니까요). 그러니까 추호도 거짓이나 외식은 믿음에 용납되지 않는 것이고 진실을 떠나면 성숙한 신앙으로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표현할줄 아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백성들에게 꽃씨를 주면서 “좋은 꽃을 키워오면 상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좋은 꽃을 키워왔는데 한사람은 임금이 준 씨를 심고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 화분을 갖고 와서, “정성이 부족하여 싹을 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엎드린 것입니다. 임금이 바란 것은 바로 ‘진실의 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칭찬과 상급의 욕심에 취하여 싹이 안날 때다 다른 씨를 심어 꽃을 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빈 화분 그대로 갖고 온 성도가 참마음을 가진 성도인 것입니다. 진리를 의심하거나, 자신을 아주 죽이지 못하는 교만이나, 현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기복주의로 믿거나, 누구의 체면을 위하여 외식으로 따라다니거나 거역하는 마음을 품거나, 떡 얻어먹는 맛에 따르는 것처럼 기분에 끌리고 이권의욕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다 순수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좋아하시고 “천국백성이 이런자의 것이라”하신 것은 바로 어린이들의 순수성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짓과 외식이 없고 자기를 못박고 모든 현세적 이권을 외면하면서 정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다음에 성숙한 믿음 단계로 들어가셔야 하는데, 우선 신앙이 성숙하면 자유를 얻게 되고,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원의 새가 자연으로 나간 것 같아야하고, 하늘을 나는 새와 같아야하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믿을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성숙의 목표인 것입니다. 정치세계는 신앙세계와 완전히 반대됩니다. 정권야욕이 눈에 보이지요. 상대방의 주장에 꼭 이의를 답니다. 그래서 순수하지 않게만 행동하는 것이 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다 너 가져라, 좋은 것은 너부터 해라”하면서 자신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입장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결과는 자유와 만족이고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성숙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1)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순수하고 진실하게(자기를 못박고)시작하는 것입니다. 작은 배를 바다에 띄울 때는 그 배를 바람에 맡기는 것처럼,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배우며 깨닫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깨닫기 위하여 읽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왜 기록으로 남겨주셨을까? 를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연구의 열쇠를 가지시고 스스로 문을 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실천이 따라야 함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실천은 믿음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성숙의 열매를 보이는 것이며, 하늘의 상급을 쌓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설교를 잘 하는 분들이 많은 대중을 모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급의 근거가 될까요? 말만하고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책망의 대상이 됩니다(마 23:2). 상급은 사랑실천으로 받는 것이고, 사랑실천이 곧 계명실천 입니다. 율법이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실천모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천모범을 보이시므로 본이 되셨습니다.

4) 마지막으로 믿음성숙에 들어가려면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은 곧 성경말씀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셨지요. 제가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이 그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그 뜻에 복종하는 중입니다. 주님 지켜보십시오.”하면서 늘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활을 최고의 만족으로 느끼면서 사는 것이 성숙한 믿음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신앙은 개인적이다 (마 16;26) 목록으로


‘신앙은 개인적이다’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성도들 중 크게 문제스러운 일이 뿌리박혀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로 여기지 않거나 그것을 소홀히 여기고 다른 것에 더 집중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 점입니다. 제가 평소에 신앙의 자립성과 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많이 강조한 것도 그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1. 제가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란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구상하던 중,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하신 말씀을 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고 가상할 때, 온천하속에는 재물 있고, 명예, 권세도 있으며, 자기 주위에 천명, 만명의 팬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기의 생명이 없어지면 어찌됩니까? 온 천하를 손에 쥐어 준다 해도 가질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오래 살고보자는 의욕이 생기는 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보다 귀하지요. 만일 “내가(또는 여러분이) 온 천하는 다 얻었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자신이 쟁취한 온천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불신자는 그래도 그 맛에 산다(지옥에 가는 것은 죽어보아야 하는 것이니까)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신앙은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였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온 천하를 얻은 생명은 퍽 무의미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역사인물 중에 후세인 같은 사람이 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성도 개인이 모시고 경외하는 것이지 단체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단체의 힘을 빌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잘 경외해 보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많이 상대해 보았습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고 믿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목사님 고생 많으시죠. 교인이 적어서 힘드시겠습니다. 어떤 교회는 어떻게 부흥됐다고 하는데 힘써 보시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교인이 적어서 문제될 일도 없고, 돈이 없어서 문제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하지 않거나 자신이 진리를 탐구하지 않고 또 자신이 세속을 좋아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믿음과 말씀으로 하나님만 든든히 모시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00m 탄광이 무너져서 광부가 갇혔더라도 산소파이프만 물고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3.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성도를 단체적으로 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구약의 단체는 선민국이고, 신약의 단체는 교회인데, 이 단체가 잘 나가면 좋으나 잘못가면 큰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선민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들이 잘못갔을 때 금송아지 사건으로 3000명 죽이셨고, 모세아론 원망사건으로 15,000명(주동자가족 땅속에, 250장로 불로, 또 염병으로 14700명)이상을 죽이셨으며, 나중에 발람사건 때 또 24,000명이 죽고, 또 불뱀으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벌하시고 죽이시며 없애는 하나님입니다. 단체가 죄를 지으면 이렇게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단체도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가르치고 바른 모범을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교회이어야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이 바르지 못한 단체에 접근하거나 의지하는 일이 있을까하여 염려됩니다. 요즈음 교회단체마다 은급비를 거두어 성직자노후대책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그 돈을 잘못 취급하여 소송을 하고 교회적 생활에 큰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교회적으로 안 해도 될 일을 하고 있고, 바로 가르칠 것을 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근검하면 하나님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니 그리하라”고 가르쳐야(마 6:31, 히 4:16)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교회를 보험회사로 만들고 있으니 거기에 무슨 신령한복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4. 여러분 신앙은 개인적입니다. 목사가 성도의 신앙생활을 대신해 줄 수 없고, 교인이 많다 해도 그들이 누구의 신앙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며, 돈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멀리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먹어야 내 배가 부르듯이, 하나님을 자신이 가까이 모셔야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개인상대 하셨고, 야곱과도 그러하셨으며, 사무엘이나 엘리야나 요나같은 선지자도 개인적으로 상대하셨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지중해 바다를 건널 때도 개인적으로 상대해 주신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행 27:23~24).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성경깨달음,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교통이 있기를 바라고, 또 여러분들의 소원하는 문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므로 과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3과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2~43) 목록으로


사도행전 13장은 바울과 바나바 사도가 1차 전도사역을 하는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전파한즉, 말씀을 달게 받은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이 말씀을 해 주시요”하고 부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들을 줄 알아야하고, 듣고 깨달음이 생기면 그 말씀을 더 잘 알기 위하여 수차 반복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생 밥을 먹고 사는 것처럼, 성경 말씀도 자주 같은 내용을 상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도가 그곳 성도들과 대화할 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라”고 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히 4:16에서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은혜 받는 노력을 하라는 뜻입니다.

1. 성도가 은혜 가운데 거하려면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하겠지요? 롬 3:24을 보시면,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하셨으니 은혜는 “거저 구원받는 것이라”하셨고, 롬 6:15에서는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하시므로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죄를 경계한다고 하셨으며, 롬 1:7과, 고전 1:3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하시므로 은혜에 평강이 따라가는 것을 말씀하셨고, 요 1:14, 17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요약하면, “값없이 구원받고, 죄를 멀리하며, 평강이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도가 예수님만 든든히 모시고 살면 예수님이 구원도 주시고, 시험도 이기게 해 주시며, 평강도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예수님을 가까이, 또 친근히 모시고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갖고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다 해결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 곧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노력이 곧 은혜를 받는 생활입니다. 성령충만의 방법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방법은 말씀과 기도가 기본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 죄지을 시간과 세속에 처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은 염려를 안 해도 됩니다. 오순절 성령을 기도로 받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행 1:14, 2:1). 에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고(행 8:27~38), 고넬료의 식구들은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았으며(행 10:44), 빌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행 8:26, 39). 그러고 보니, 계 1:3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고, 예수님과 가까워진 표현은 말씀, 기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세속은 잠깐 접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가 세속에 끌리고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에게 있지 않고(요일 2:15) 오히려 원수가 되기 때문에(약 4:4) 무슨 기도를 해도 잘 안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도가 은혜 가운데 거하시려면 몇 가지 구비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1) 육신생활의 안정입니다. 육신생활이 안정되려면 양식 공급과 몸을 의탁하는 공간이 필요한데,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적당히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자연의 보전이고, 선민의 광야생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나친 사치를 떠나서 적당하게 사는 것을 만족하고 감사하며 노력하신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육체건강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해결해 주실 것이니까 꼭 맡기는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2) 영적생활의 안정입니다. 영적생활이 안정되려면 자기신앙의 확립과 교회생활의 만족 두 가지를 항상 갖고 계셔야 합니다. 자기신앙의 확립에서는 다른 사람의 영적생활에 의존하지 마시고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 받는 은혜가 크지만, 교회와 상관없이 자립하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 교역자도 의지하는 대상이 없고, 아무 교인도 의지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놀라울 만큼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없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 끝날 때 까지 교회가 존속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의 연합체인데 교회생활의 안정이 있어야만 은혜 가운데 거하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가 이상적 교회라야만 하겠지요. 교회가 이상적 교회가 되려면 사람은 다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의 모임으로는 가능성이 없고 교회의 방침이 바로서야 합니다. 예를 들면,

① 진리(예수님)중심에 굳게 서야하고,

② 세속과 전통과 유행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③ 사랑이 풍족하도록 힘쓰는 교회이어야 하고,

④ 신령한 양식에 주력하는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은혜 가운데 있으라”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자”는 의미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4과 앉은뱅이를 일으킴 (행 3:1~10) 목록으로


성경을 읽으면 설교(교훈)가 눈에 보여야합니다. 지금 읽은 말씀의 중심내용은 ‘앉은뱅이를 일으킴’입니다. 그러나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교훈들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한 사실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과 가장 적은 사람과의 조화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연령차이가 극복되어야 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성경을 배울 수 있으며 전도할 수도 있고 교회생활을 하는데 지장없어야 합니다. 교회생활 중에 연령, 성별, 세대차이를 극복 못하는 경우가 많고, 구역원만 바꾸어도 불평하는 교인들이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누구와 짝을 지워 주어도 적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은 시간을 정하고 합심기도를 하였으니,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자유기도보다 훨씬 박력 있는 기도입니다.

3)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성전마당에서 기도한 것은 예수님이 “내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전을 기도의 처소로 우선한 것인즉, 그 기도가 “더욱 잘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기도의 필요와 규칙적 기도 그리고 합심하는 기도를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난 것입니다. 이 때에 믿음 없는 성도는 부담감이나 불쾌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소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부정적 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남의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창 24:12). 강도를 만나면 피해를 보고,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어떤 대상 만나기를 좋아하십니까? 예배당 문전으로 찾아 온 사람과의 만남인즉, 귀천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이 무슨 섭리가 있으셔서 보낸 것이 아닌가?”하면서 잘 영접하고 자기로서의 할 일을 다하는 자세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만나 대접하고 복 받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남의 대상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성도가 항상 하여야 할 일입니다.

3. 6절에서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앉은뱅이는 불구자에 가난을 겹친 사람인데, 그가 구하는 것은 물질이었지만, “사도들에게는 물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역을 물질로 앞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리로 사역할지언정 돈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돈으로 사역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먹자주의, 관광주의, 쏟아 붇는 구제, 유통사업, 보험사업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신이 말씀이나 예수님께 있지 않고 대부분 물량주의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부자는 은혜받기 어렵다”고 하셨지요(마 19:24). 또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 하셨구요(딤전 6:10). 그러니까 돈 없는 교회가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4. 사도들은 그 앉은뱅이에게 “내게 있는 것이라”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하는 은혜”를 전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되, 걷게 하는 능력까지 전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도들은 이적을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하면서 나타냈으니까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능력(이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시 62:11)” 일어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더라도 예수님만 알리면 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권능주신 말씀이, 마 10:1과, 막 16:17~18에 기록되었고, 그 사실이 초대교회 당시에 거의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초사역이 끝난 다음에는 사도적 능력을 중지하셨기 때문에(빌 2:26, 딤후 4:20), 교회시대에는 일반은총에 의한 회복이나 고침을 더 많이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그 임무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의 주,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증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그 앉은뱅이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앉은뱅이는 그 사람이라”고만 생각지 마시고 “바로 내가 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셔야합니다. 믿음이 약하여 일어서지 못하는 자, 걷고 실행하지 못하는 자, 말만하고 불평하는 자, 다른 사람의 협조만 받아야 하는 자, 도움 받는 자, 성전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문전에서만 서성이는 자(즉 신앙의 깊이가 없이 얕은 마음만 갖는 자)이면 자신도 그런 불구적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우선 일어섰습니다(깨달은 것이지요). 걸었습니다(실천이지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예수님께로 가까이 나간 것입니다). 뛰기도 하였습니다(신앙의 성숙해진 것임).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으니 그 인생의 목적을 다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건강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 중에서라도 영광만 돌리면 되고 불행까지 치유되면 더 좋은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는 “이 일을 기이히 여기며 놀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는 이 사건이 이벤트사건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예수님을 모시는 일과 변화된 생활로 깜짝 놀라게 해야 합니다. 무슨 연예인이 오고, 경품을 뽑으며 구경거리를 만들어서 깜짝쇼를 하는 것보다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는 이벤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에서 여섯 가지 교훈주시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55과 베드로를 구출하심 (행 12:1~19) 목록으로


본문을 근거로 하여 ‘베드로를 구출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초대교회당시에 핍박이 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대적자 사탄이 존재하는 한 진리에 역행하는 자들과 성도에 대한 핍박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핍박하고 의인을 죽인 마당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은 의당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4절이 곧 핍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런 핍박은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잘못된 교인들이 사도들을 가둔 일이 있었고(행 5:18), 복음사역자들을 능욕한 일이 있었으며(행 5:4),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행 7:60).

본문에서는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요한의 형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쳐 죽였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옥에 가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헤롯왕이 세 사람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 탄생시에 있었던 대헤롯이고, 두 번째는 그의 아들, 곧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안디바’란 이름을 가진자요, 본문에 나타난 헤롯은 안디바의 아들이 아닌 대헤롯의 계통에서 출생한 ‘아그립비1세’란 이름을 가진 손자라고 합니다. 그가 기독교인을 핍박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기독교를 함께 배척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어’(명령발동을 뜻함) 교회 중(주동자) 몇 사람을 죽이려한 것이고, 그 목적으로 야고보를 죽였는데 유대인들이 좋아하니까 또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가두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즉시 죽이지 않았는가? 하면 무교절 명절시기였기 때문에(어차피 유대인들을 위한 일인 만큼) 명절을 지나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가두고 감시하는데 옥졸 16명이 필요하였고, 감옥 안에서도 두 군사가 지켰으며, 베드로를 두 쇠사슬로 양손을 묶어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2. 이런 일을 당한 성도들은 어찌할 바가 없으므로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었다”(5절)고 하였습니다. 12절에서 “마가요한의 집에 모여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으로 약하기에(강하면 싸워서 구출하겠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다른 어려움을 당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섭리에 맡기고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베드로를 끌어내려는 전날 밤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여 구출해 주셨습니다. 천사가 옥중에 나타난 베드로를 깨우고 손에 쇠사슬이 벗겨지면서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하여 따라가면서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는데, 첫째, 둘째 파수꾼 앞을 의연히 지났고, 성 밖으로 통한 쇠문이 저절로 열려져서 나왔는데 나온 후에 천사는 떠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자연적 섭리는 “이런 방법으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베드로는 밖에 나와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적을 체험할 때는 환상을 보는 것 같았으나 감옥 밖으로 나와서 정신을 차린즉, 주님이 자신을 헤롯과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분명히 알고 제자들이 모인 장소로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적은 자기정신 아닌 상태에서도 체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시 깨달아야 합니다.

5. 베드로가 그 밤으로 제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문을 두드렸을 때, 어린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한즉, “아이가 미쳤거나 베드로의 천사가 온 것인데 착각 한다”하면서 믿지 않다가 계속 주장을 하니까 나중에 문을 열고 베드로를 보고 놀란 것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주님이 구출해 주신 것을 사실대로 알리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항시 있을 것으로 예비하지 못한 잘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도 응답하실 수 있음을 예측하고 항시 응답을 기다리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응답은 천천히 나타나도 나타나는 일들이 응답과 관련이 있거나 연계되는 경우도 있은즉, 늘 주의깊이 관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6. 이튿날 죄수가 없자, 헤롯왕은 파수꾼들을 죽였으니, 그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이 파수꾼들을 통치하시는 섭리적 계획에 있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삼상 2:6).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이신 즉,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을 그 뜻대로 하십니다. 세례요한과 스데반과 야고보는 죽도록 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살리셨고 바울도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뜻과 계획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생명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모면할 인간적 방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부탁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의 뜻 안에서 세례요한처럼 죽게 하시든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살려주시든지 하실 것이요, 성도는 생사문제를 주님 뜻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제56과 그리스도인 (행 11:24~26) 목록으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과(행 8:1)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교회(행 9:31) 다음으로 세워진 교회인데, 바나바와 바울이 합력하여 1년간 가르쳤을 때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얻게 되었다 하셨으니 이 호칭의 의미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성도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기독교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명칭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 교인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 중에는 외식자가 포함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성도에는 신앙인의 본질적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진실한 성도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에 안디옥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이 초기에는 믿음을 학습하는 사람들에 불과하였지만, 1년동안 배우고 학습을 한 다음에는 “성도라 부르기에 합당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호칭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습하고 연단받은 성도를 지식적으로, 신앙고백으로, 생활로 테스트한 다음에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혹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종류별로 구분한다면, 몇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확신 없이 취미로 다닌 사람, 사회적 목적(친교, 사업)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믿음은 싹트나 확신이 없는 채 믿어보기 위하여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세례를 받고 정착하는 수준에 있는 교인이 있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를 쓰는 성도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에 세례를 받고 믿음에 정착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성도가 바로 ‘그리스도인’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추어야 할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기도 하지만,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신다. 하나님의 징계가 무섭다”는 것을 느끼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의 주이시고, 자기 인생의 섭리자이신데 어찌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갈망하고 성경과 기도를 힘쓰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중심의 생활만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하신 것처럼 성경중심에서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된 것이 교회에서 되었고, 교회는 예수님이 피로 구속하신 백성들이 모인 곳이며, 또 예수님이 교회를 자신의 몸이라 하셨기 때문에 교회의 성격을 잘 알고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행 20:28, 골 1:24). 여기에서 “교회의 성격을 잘 알고 사랑해야 한다.”하였는데(엡 5:25), 교회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성격은 거룩한 성도의 단체이지요. 그러면 이 단체의 교회적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믿음을 키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랑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생활 중에서 항상 유의하셔야 할 것은, “믿음 키우는 일을 하고 있는가?”, 또는 “이것이 믿음 키우는 일에 해당하는가?”, “순결을 보전하고 있는가?”, “사랑의 목적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잘 살펴서 지혜롭게 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순결하게 만든다고 사랑을 부셔서도 안 되고, 사랑을 키운다고 순결을 눈감아 주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랑에는 반드시 이해와 인내와 화평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충성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면 우선 자기 뜻을 포기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믿음, 정의, 사랑 등)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충성한 분으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로 행한 자를 죽이지 않으시고, 사도를 삼아 일하게 하신 것을 크게 감사하여 죽도록 충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항상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거기에 감격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본 예화인데, 중국 초나라의 장(將)왕이 촛불을 켜고 신하들과 연회를 하다가 바람에 불이 꺼진즉, 무관신하 중 張兆라는 사람이 왕후를 연모하였는데, 깜깜해진 틈을 타서 왕후의 손목을 잡은 것입니다. 이 때에 왕후가 소리를 지르며 장조의 갓 끈을 떨구고 “갓끈 떨어진 자의 소행이라”한즉, 왕이 모든 신하에게 명하기를 “다 갓끈을 끊으라”하여 끊은 다음에 불을 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을 보전 받은 장조가 그 후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고 왕이 주는 상을 사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충성하는 성도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성도의 최고의 존칭입니다. 그리스도인보다 박사를, 목사보다도 박사를 더 귀히 아는 성도들이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도, 기독교인이상 더 영광스러운 명예가 없다는 것을 아셔서, 그 명예에 일치하는 생활에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명칭은 생각도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57과 고넬료의 권속이 은혜를 받음 (행 10:1~8, 44~48) 목록으로


고넬료의 권속이 은혜를 받은 내용은 많이 알려진 줄 압니다. 고넬료의 가족이라 하지 않고 ‘권속’이라 한 것은 고넬료와 관련 있는 식구들(가족, 하인, 이웃, 종졸들)의 범위를 넓힌 뜻입니다. 1절에 보시면 그의 신분이 ‘이달리야대(로마의 군부대이름)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파송된 장교로 지위가 높은 사람입니다. 주후50년경에 ‘가이사랴’에 거주하였고,

1. 2절을 보시면 그의 평소의 신앙생활을 말씀하셨는데, 경건하고 가족이 합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를 하였으니 신앙의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속을 멀리하며, 신령한 은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온 가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즉, 구제를 힘썼고(사랑실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실만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예측한 대로 고넬료에게 은혜 베푸실 방도를 계시해 주셨으니, 곧 고넬료가 기도할 때 환상을 보여 계시하셨고,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된 만큼,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시몬)를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남쪽 120리쯤의 항구입니다. 고넬료는 환상의 계시를 믿고 분부대로 사람을 보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계시를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할 때 비몽사몽으로 본 것이 있었는데, 하늘이 열리고 각종 부정한 동물들이 보자기에 싸여 위에서 내려오는데 “베드로야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동물들이 율법에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없다.”한즉,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셨는데,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된 후에 그쳤습니다. 베드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할 때에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의 집에 도착하였고, 성령님께서 “내가 준 계시인즉 두 사람의 초청에 응하라”고 깨우침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까지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명확한 계시로 베드로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 때에 고넬료의 종들은 베드로에게 자기 주인을 칭찬 하였으니, “고넬료는 의인이고,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는 자로써 천사의 지시를 받고 왔다.”고 말한즉, 베드로가 감동과 깨달음을 받고 초청에 응하게 된 것입니다.

3. 그 다음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한 정황을 말씀하셨는데, 고넬료는 베드로가 도착하기 전에 일가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렸으며, 고넬료가 도착하자 그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자신이 받은 계시를 사실대로 보고하면서,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하나님 앞에 있사오니 말씀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나라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다 받으시는 줄 안다”하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요, 심판자이며, 믿는 사람들이 다 그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성령님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4. 44절을 보시면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크게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이방인 단체가 성령을 받은 최초의 사건이요, 그 성령충만의 형태가 오순절 때와 흡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받은 고넬료의 권속들이 세례를 받고, 복음신앙에 확고히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 베푸실 자를 찾고 계십니다(대하 16:9). 고넬료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주로 말씀을 사모하고, 듣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계시를 생각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환상을 깨닫지 못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고넬료의 권속들은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5. 고넬료가 또 한 가지 은혜를 받게 된 중요한 이유는 그의 겸손이었습니다. 벧전 5:5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하셨는데, 이 말씀이 겸손한 고넬료가 은혜받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 백부장이면, 그 식민지 백성 앞에서 장군과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베드로에게 절을 하고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한 것은(10:25) 은혜 받을만한 겸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879년에 일본의 초대국회의장 가다오까 겐기찌(片岡健吉)는 크게 존경받는 정치가였는데, 자기의 고향 고지교회의 직분자로 있으면서 순진한 초년생 목사를 모셔온 후, 그의 가방을 들고 안내하며 평신도의 신을 챙겨주니까 이 소문이 일본전역에 퍼져서 그것을 구경하러 온 사람으로 예배당이 가득 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생활을 본받으시고 특별섭리로 은혜주시는 체험을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58과 마음에 합한 자 (행 13:21~23) 목록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보신즉 마음에 합하여 그를 선민의 왕으로 또 메시야 모형적 인물과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다윗을 많이 닮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을 연구하시려면 3,000년전 역사로 돌아가서 성경에 근거하셔야 합니다. 다윗의 신앙을 그가 기록한 시편에 근거하여 연구한다면 그 내용이 방대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의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몇 가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째아들인데, 하나님이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삼상 16:7)하셨으니, 외모는 제외됩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을 몹시 사모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모한 일에 대하여 글을 남겼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주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입니까, 정직하고 진실하며 공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시 15:1~2)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가 여호와께 한 가지 일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사모할 것입니다(시 27:4)”하므로 하나님을 사모하는데 그 이상 따를 자가 없은듯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자를 합당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2. 악을 대항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자나 곰에서 양을 뺏는 용기로 죄악에 대항한 인물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시 4:4)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 하리이다.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 하리이다”(시 17:3, 39:1)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주의도를 가르치리이다”(시 51:4)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악을 대항하는 용맹은 골리앗과 싸우는데서 나타난 것입니다.(삼상 17:34~51) “하나님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를 친다”하고 맨손으로 강하게 무장한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워 이겼으니 그 용맹이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죄를 대항하여 싸우는 용맹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그것이 대단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박차고 옷을 뺏긴 채 나오는 그런 모습입니다.

3.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 9:1~2에 보시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하였고, 그 외에도 “의를 따라 감사하며…높으신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또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라”(시 30:4)하였고, 시 30:12에서는 “영영히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환난 중에 자신을 붙드심이라”(시 31:7)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라(시 32:11). 수금으로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하며, 또 새노래와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하자(시 33:1~3) 하였으니,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평소에 수금을 잘 탄 것도 믿음 안에서의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삼상 16:16). 여러분 기쁨과 감사가 어느 정도 입니까?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이 아닐 수 없고, 감사는 은혜를 깨달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4. 다윗에게는 의리와 법도가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여러 차례 음모도 많이 꾸몄고, 그것이 안되자 군사를 풀어 이 잡듯이 추격을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말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라”(삼상 24:6)하면서 자기 생명보다 왕의 생명을 귀하게 여겼으니 백성 중에 백성이고 충신 중에 충신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는 의리의 친구였습니다. 그 아버지 사울이 원수같이 행하였어도 그 아들 요나단과는 의리를 지켜서 나중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불구자)을 자기상에서 먹게 하지 않았습니까?(삼하 9:1~8)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신하의 의리와 백성의 본분과 친구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고,

5. 마지막으로는 회개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가 왕노릇 하면서 음행죄와 살인죄를 범하였지만, 선지자의 깨우침을 받을 때 죄를 시인하고 통절하게 회개하였던 것입니다(삼상 12:1~15). 시 41:4에 보시면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하였고, 51:2에서는 “내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깨끗이 제하소서.”하였으며, 또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신다”(시 6:6)하였으니, 그의 회개하는 태도가 진실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모하는 자, 죄를 대항하는 용기 있는 자,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 의리와 법도를 지키는 자, 회개할 줄 아는 자를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셔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이루게 하셨으니(삼하 7:13), 그 뜻이 곧 메시야의 조상이 되고 메시야의 모형적 계시자가되며, 성군의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제59과 하나님을 찾읍시다 (행 17:26~27) 목록으로


1.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은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거주를 경계하여 온 땅에 거하게 하셨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며 저희의 연대를 정하셨은즉,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는 우리 각사람 중에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은즉 가까운 곳에서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여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생명을 붙드시는 분이며, 또 만물을 친히 주신분인즉, 인간이면 그 하나님을 모르거나 멀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은 “멀리 가서 찾아야할 분도 아니시라”고 하였습니다. 가까이 계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왜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여야 하는가? 하면, 사람마다 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과 거듭난 백성이 하나님을 찾아야하기 때문에 전체가 아니라는 뜻에서 ‘혹’이란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듬어 찾아야 한다”는 뜻은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마 7:7에서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하셨고, 마 13:44에서는 “감추인 보화를 찾듯하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을 못 찾은 자의 형편은 어떤 것입니까? 이 사람은 믿되, 집나간 아버지처럼 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의 아버지가 자식들이 속을 썩이니까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가족들 곁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보다 어려운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찾을 체를 하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하면서도 가까이하지 않는 상태가 곧 하나님을 못 찾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는 성도로써 극히 불행한 일이기 때문에 금식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한다고 마 9:15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집의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사는데, 1년에 한두번 명절 때나 만나고 연락 없이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부모를 멀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루를 살면서도 수십 차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일주일에 한번쯤 하나님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하나님을 찾아 가까이 모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선민이나 성도를 멀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 1:15에 보시면,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하셨고, 사 6:10에서는 “자기 백성들의 귀와 눈을 어둡게 하셔서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하셨으니, 왜 이런 경우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노여워하시고 진노하셔서 아예 가까이 와주시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징계를 받는 성도는 매우 불행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시 22:1에 보시면, 다윗도 그런 시절을 겪었고, 또 그와 꼭 같은 일을 예수님도 겪으신 것입니다(마 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호소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4.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든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잘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 55:6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하셨고, 호 10:12에서는 “지금이 하나님을 찾을 때라”하셨으며, 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도 나타나 주신다”(사 65:1)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말세의 심판을 앞두고 계속 은혜를 베푸시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곧 고후 6:2에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5.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야합니까?

1) 사모하고 갈망하셔야 합니다. 시 42:2을 보시면, “내 영혼이…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어느 때에 하나님을 뵈올고”하였고, 시 107:9에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마 5:8에서는 “마음이 청결하여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벧전 3:31에서는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마음과 착한 양심은 회개를 뜻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멀리한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 14:21에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4:23). 예배는 의식만이 아닙니다. 예배는 전체적으로 경건한 생활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많겠지요.

4) 가까운데 계신 하나님을 어디가서 찾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만물계시와(롬 1:20), 손에 들고 있는 성경계시 속으로 들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말씀에 붙잡히고, 끌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까이 모시는 결론은 성경을 가까이 접촉하므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경을 사모하고 가까이 할 수 있다면, 그는 곧 하나님을 찾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읍시다. 만납시다. 그리고 즐거워 하셔야 합니다.

 

제60과 쓸 것을 채우심과 영광 (빌 4:19~20) 목록으로


제가 빌립보서 강론을 다 쓰고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 10편을 보충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빌 1:27~28에 보시면 “너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저희들의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또 2:3~8을 보시면 “너희는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을 품으라”하셨지요.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점거하셔야 합니다. 또 3:10~12을 보시면, 바울이 알려고 애쓰신 것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체험, 부활권능을 알려고 애쓰시며 고난을 받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또 3:12~14에 보시면 “푯대를 향하라”하셨고,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간다.”하셨으니, 바울의 푯대(목표)는 앞에 있는 부름의 상입니다. 천국에 가서 좋을 것만 목표로 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취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바울사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바울의 기쁨의 생활이 있고(4:1, 4, 10),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며(4:6~17), 이 시간에 간증하고 싶은 내용인 ‘모든 쓸 것을 채우심’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뻐하면서, 모든 쓸 것을 주님이 채워주신다면 얼마나 즐겁고 만족하겠습니까? 성도들 중에는 교회생활에서 위안과 만족을 얻는 분들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은 일주간에 하루정도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 사이 6일 동안은 무슨 만족을 누릴 것입니까? 또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기쁨과 만족을 거시는 줄 아는데, 그것은 목사님이 좋은 말씀을 준비하셨을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24시간 주님과 즐거워하는 일이 있어야하고, 또 보람을 느끼는 일이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응답이 잘 되고,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즉시즉시 이루어 주신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제가 40년 가까이 교회생활하고, 설교하였으며, 그 나름대로 은혜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배경을 거의 떠나서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해도 거의 맞는 말인데, 나는 지금처럼 사는 생활이 참으로 만족합니다. 주님이 곁에 계시고, 내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주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또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것이 너무 현저하고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체험에 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성도님들이 저와 같은 입장에 이끌려 오신다면 제가 은혜 받는 보람을 같이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19정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영광 가운데(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풍성한 대로(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너희 모든 쓸 것을(필요한 것, 꼭 필요한 것, 꼭해야 될 일들) 채우신다.”하셨으니, 그런 체험을 해 보셨습니까? 또 시 37:4에 보시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하셨지요. ‘마음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묵상기도로 간청한 것이겠지요. 또 마음으로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마 6:8, 32)하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 26:4과 신 11:14과 욥 2:23에 보시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시고, 비를 주시되 그 시후에 주셔서 땅이 산물을 내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런 은혜를 성도 개인이 체험하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만족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은혜에 거의 매일 취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글로 남기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소원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들의 믿음과, 자녀들의 깨달음과, 아들, 딸들의 혼인에 관한 것인데 현재 네 자녀의 혼인 문제는 다 성취되었고 두 아들만 남았는데, 그것도 속히 성취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가장 잘 안되는 것이 믿음성숙과 깨달음에 관한 것인데, 시일을 두고 은혜를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잘 이루어 주시는 것은 매일매일 생활필수에 대한 대책입니다. 우선 2004, 8, 16, 오후 2시50분에 좁은 도로에서 전우성군이 뛰어들어 차 범퍼에 치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큰 수난을 각오하였지만 진단결과 상한곳 없이 무사하였습니다. 9월11일에 5cm×3cm×70cm 깨끗한 각목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을 찾기 위하여 나섰다가 바로 옆집대문 앞에 나타나 있어서 사용하였고, 1자폭 2m높이의 신장을 제조하려 하였는데, 꼭 같은 크기의 물건을 발견하여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9월18일에는 여름에 더위를 먹은 속처럼 위장에 이상이 있었는데, 이봉근전도사님이 거기에 적합한 ‘쿨맥스’(소화제)를 사왔고, 항상 소화에 이상이 있어서 진단을 해보려고 하였는데, 딸들의 배려로 종합진단과 위내시경검사를 하게 되었으며, 셋째 딸 혼사문제로 빌려준 돈을 받아야 하는데(둘째딸 때는 그 돈을 못 받고 다른 방도로 결혼하였음), 쓸 시간에 그 돈을 받았으니 이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9월18일경에 OOO장로님 아들 결혼축금을 염려하였는데, 하루전날 OOO장로님이 방문예물비로 금일봉(같은 금액 5만원)을 가져오므로 그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필요할 때 주시는 하나님을 꼭 체험하십시오. 믿고, 기도하시며,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우리의 쓸 것을 채워주실 분은 풍성한 은례를 가지신 하나님뿐이심을 믿으십시오.

 

제61과 봄 같은 은혜 (아 2:10~13, 슥 10:1) 목록으로


1.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이 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방금 읽으신 아 2:10~13은 예수님을 모형으로 하는 신랑이 어여쁜여자, 즉 믿음 있는 성도와의 교제를 “봄동산에서 누리자”하는 것은 성도가 주님과 영적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은혜를 주시는 때는 항상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도 있고(요 7:6),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고후 6:2) 그래서 은혜는 항상 주시는 것이로되 저희들은 이 불철에 추위도 지나고 만물이 소성하는 계절이니 은혜를 더욱 사모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가을에 타락하였는데(창 2:16, 3:8) 아가서의 신부는 봄에 신랑을 가까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환경이 봄이란 것은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우기는 11월~5월간이고, 6월~10월은 건기인즉, 이 시기는 5, 6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되었으며…무화과나무에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 하였으니, 이는 젊은 남녀가 사랑의 친교를 나누기 좋은 계절을 의미한즉, 이는 성도의 영적생활의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생활의 환경은 스스로 만들어야합니다.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갖는 습관을 길러야하고, 그 시간에 성경을 살피고 묵상,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하며,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업을 택하여야 하고, 세상 취미를 갖지 말아야하며, 범죄를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오직 경건에만 몰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을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많은 불신자들이 여러분들을 괴롭힐지라도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방법으로 산다”하고 뿌리쳐서 오직 신앙의 환경을 봄바람불고 포도향기 날리는 동산처럼 만드셔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부정, 현세욕부정 등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합니다. 슥 10:1에 보시면 “봄비 때에 비를 구하라”는 말씀도 있고, 호 10:12에서는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땅을 기경하려면 비온 다음이어야 합니다. 또 묵은땅 이란 것은, 뒤 엎어야할 자신의 묵은 습관 또는 잘못하는 일들입니다. 그것을 일시에 뒤엎을 수 있도록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모압에 살던 나오미가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일,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일처럼 강한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활습관과 환경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생활의 자유가 있습니까? 무엇에 훼방을 받는다면 그것이 죄인지, 현세욕인지, 나태인지, 직업상 문제인지를 진단하셔서 고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영적으로 손해나는 일, 성경에 위반되는 일, 예수님과 멀어지는 일은 하시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2. 봄 같은 은혜가 무엇인가? 할 때,

1) 봄은 녹는 계절입니다. 겔 36:26을 보시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을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이 녹아서 부드러워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온유한 마음이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 앞에 가거나 무슨 회의석상에 나갈 때, 더욱 자신을 못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녹고 녹아 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봄은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따뜻하다는 것은 사랑의 분위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따뜻한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요일 4:11에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도 좋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폭력적인 사람, 진실치 못한 사람, 자신에게 손해를 준 사람들을 사랑하기 어렵겠지만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극복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하시고 기도해 주시면 될 것입니다.

3) 봄은 씨 뿌리는 계절인즉, 전도를 힘쓰시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봄철, 부활절을 즈음하여 양적부흥을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의 씨, 말씀의 씨를 많이 뿌리면 “말씀이 스스로 역사하여 뜻을 이루고 형통케 하신다”고 사 55: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의 은사를 받는 성도가 많아질 때, 양적부흥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4) 봄은 싹 나고, 꽃이 피며, 향기 나는 계절인즉, 성도의 생활에서도 그런 것들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싹, 구제하고 섬기는 싹,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 싹 등 좋은 일들을 선택하여 시작하시고 꽃과 향기는 기쁨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꽃이 핀 것은 성도가 활짝 웃는 모습인즉, 기쁨을 의미할 수 있고, 향기는 성도의 칭찬스러운 소문입니다. 고후 2:15에 보시면, “성도는 하나님 앞이나, 구원받는 자들이나, 망하는 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봄 향기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변화된 것은 예수님을 닮아 살기 때문이라”는 증표를 드러낼 때 향기를 발하는 것이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봄 같은 은혜가 많아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2과 신령성의 의미 (고전 2:13~16) 목록으로


‘신령성의 의미’란 제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신령한 일, 신령한 것, 신령한 자”란 말씀이 있고, 또 “지혜의 가르친 말, 성령의 가르치신 것, 또는 영적으로 분별함”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다 신령성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령하다”하면 은혜가 많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신령한 목사님,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데, 때로는 그 “신령하다”는 뜻이 신비한 일이나 특별한 이적 등으로 선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령하다”는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말은 시대에 따라 이해하기 나름입니다. 이북에서 천출이란 말을 하늘이 낸 것(天出)으로 이해하는데, 남한에서는 천출이란 말은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로 이해합니다. 이것 때문에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 어려움이 있었지요. 기독신문 김영우칼럼이란 기사에서 『신령과 경건은 같은 뜻이다. 198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신령이란 용어 대신 경건이란 용어를 많이 썼는데, 20년쯤 지나면서 영성이란 말로 바뀌었다. 그래서 “모임이 있다”하면 ‘영성운동’이란 주제를 내세운다. 종교개혁자들은 영성이란 말 대신 경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그 뜻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모습이라” 하였으며, 20세기 후반에 와서 영성이란 용어가 많이 활용되는데, 그 진정한 의미는 “세속적 삶을 저버리고 거룩을 지향하는 취지에서 대두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영성이란 뜻은 경건과 같은 것이고, 성결과 성령님의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용어가 잘못된 신비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영적이란 말과, 신령하다는 말과, 경건이란 용어의 원문을 살피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롬 12:1에 보시면, ‘영적예배’란 말씀이 있는데, 이 ‘영적’이란 말이 ‘로기코스’ (λογικόs)로 합리적이란 뜻입니다. 사리가 조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배란 용어는 ‘유세베이아’(εύσέβεια)인데, 이 뜻은 ‘공경한다, 경건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합리성, 공경, 예배, 경건이 다 같은 뜻이요, 또 고전 2:14에서는 ‘영적’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은 ‘프뉴마티코스’로 영적요소가 많은 것을 뜻하고, 그 다음에 ‘신령’이란 뜻은 프뉴마(영)로써 역시 영적요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이란 뜻과 신령이란 뜻이 같은 것입니다.

3. 그러니까 영적예배라 할 때는 합리적 지식과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공경을 뜻하고, 신령한 일(고전 2;13)은 영성이 풍부하여야 하니까, 그것이 곧 요삼서 2절 말씀처럼,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지 않으면 합리적 일 수도 없고, 신령할 수도 없으며, 경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성, 신령성, 합리성, 경건성, 영혼이 잘되는 것은 다 통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보시면 ‘신령과 진정’(요 4:23), 신령한 은사(롬 1:11), “신령에 있다”(롬 2:29), “율법은 신령하다”(롬 7:14), 신령한 것(롬 15:27), 신령한 자, 신령한 너희(고전 2:15, 3:1, 갈 6:1), 신령한 식물(고전 10:3~4), 신령한 반석(고전 10:4), 신령한 몸(고전 15:44~46), 신령한 복(엡 1:3), 신령한 노래(엡 5:19, 골 3:16), 신령한 지혜(골 1:9), 신령한 젖(벧전 2:2), 신령한 집(벧전 2:5)이란 말씀이 있고, 또 경건한 자(신 23:8), 경건의 비밀(딤전 3:16), 경건에 관한 교훈(딤전 6:3), 경건의 모양(딤후 3:5), 경건한 유대인(행 2:5)이란 말씀이 있는데, 믿음과 경건이 일치하고(딛 1:1), 의로움과 경건이 일치하며(딛 2:12), 거짓과 경건은 헛것이 되고(약 1:26), 더러움과 경건이 함께 있을 수 없으며(약 1:27), 무엇에든지 경건하여야 하고(빌4:8),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되며(딤전 6:5~6),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벧후 2:9).

5. 성도여러분, 영성이 무엇입니까? 경건한 것이고, 합리성 있게 사는 것입니다. 또 영혼이 잘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서 있는 것입니다. 예배 그 자체가 경건이고 생활입니다. 이 영성을 능력과 결부시킨다면 성경을 깨닫는 지혜와 능력이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실행이 맞지 않을 때 회개하는 능력이고, 신령해지기 위하여 세속을 항거하는 능력이며, 예수님을 왕노릇하시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못박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성취를 위하여 힘쓰는 능력으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신령한 몸’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부활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썩어질 몸과 없어질 현실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은 신령합니다. 이 영은 성령으로 거듭난 영이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요소이며, 이 영이 성령충만에 감싸일 때 더욱 신령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신령하지 않으나 부활체는 신령하고, 예수님의 육체적 생활은 신령하지 않으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영적, 신앙적 생활은 신령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영적, 신앙적 생활(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을 본 받으므로 신령성을 확보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사명자의 반성

제63과 교육 없는 세대 (수 24:29~33, 삿 17:1~13) 목록으로


여호수아 24장은 여호수아가 110세에 세상을 떠날 무렵에 백성들에게 믿음생활 잘 할 것을 다짐하고, 맹세를 받으며 기념돌을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후 시대에 자기의 믿음정신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까 하여 몹시 우려하고 다짐하였는데, 결국은 “여호수아 생존시에 살았던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만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자기시대에 전쟁도하고 교육도 잘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바로 다음시대까지는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잘한 것 같은데, 그들이 그 다음세대를 계승하지 못하여 사무엘선지자가 출현하기까지 약320년 동안을 율법 없는 시대처럼 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가 373년을 지냈는데, 그 역사를 기록한 사사기 전체 중에 17장에만 제사장 이름이 거론되는데, 그것도 가짜제사장 이야기만 나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그 역사 연결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사명이나 교육연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한 세대의 고리만 끊기면 그 전시대와 후시대는 멀어진다는 사실을 아셔서 반드시 역사적 사명의식을 가지시라는 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어두운 시대의 한 장명을 기록한 것입니다.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란 소년이 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산지가 어디냐 하면,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아들들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수 24:30, 33). 다시 말하면, 조상의 유적을 쟁쟁하게 갖고 있는 신앙의 동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은 없고, 사람의 소견대로 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 자율주의로서 참으로 위험하고 망령된 생활이 아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본문에 보니, 미가의 어머니는 은 1,100개를 저축하였습니다. 이 재물의 가치는 우상 만드는 조각비가 은200이고, 제사장 1년 사례비가 은10개이니까 그 값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목적 없이 그 재물을 모았다가 아들 미가에게 도적을 맞았는데, 아들이 도적임을 모르고 저주만 퍼부었습니다. 사람이 저주한다고 저주 받는 것도 아닌데 저주하였고, 또 저주의 소리를 들은 아들은 그 저주에 효력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화복의 근거를 사람에게 두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율법에는 “복과 화가 하나님께 있다”(신 30:15)하였는데, 이들은 사람 자신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미가는 어머니의 저주 바람에 회개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뉘우치는 역사는 저주나 공갈, 엄포아래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말씀표준 앞에서 성령의 감화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그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아들을 용서하고 더 많은 복을 받게 하려고 그 재물로 우상을 만들고 신당을 세운 후,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한아들(다른 아들인 듯)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니, 이것이 다 인간자율주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르니까 마음대로 저주하고, 우상과 드라빔이 복주는 줄로 알았으며, 제사장도 정통이 아닌 아무나 세워도 되는 줄 알았으니,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것이고, 결국 그의 재물은 아들에게 도적맞은 것보다 더 못하게 쓰여 진 것입니다. 교육 없는 세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4. 유다 베들레헴에 사는 어떤 레위인이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자기 고장을 떠나 미가의 집이 사는 에브라임 산지를 갔다가 미가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미가소년이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지파사람이란 말을 듣고, 그에게 자기 집 신당의 제사장을 부탁하면 하나님이 복을 더 주실 줄 알았습니다. 율법에 “레위지파가 성전봉사를 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부탁하기를 “내가 해마다 은 열개와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줄 것이니,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비가 되라’는 뜻이 신앙의 아비인지, 아니면 과부인 어머니와 혼인하라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살 곳을 찾아간 차에 좋은 조건을 만나니까 무조건 수락을 하였는데, 11~12절을 보시면 “그 소년(나그네)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고, 아들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한 것이 변하여 아들처럼(고용인)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나그네가 젊은 소년이기 때문에 아비로 영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그 어머니가 거절하고, 그 대신 고용인이 되다보니 주인아들의 아들처럼 된 것입니다. 임의대로 세운 제사장, 아론의 후손도 아닌 제사장, 또 사람 밑에 고용된 제사장(사람에게 고용된 성직자를 생각함)을 세워놓고, 13절에 보시면 자기만족에 빠져서 “내가 레위인 제사장을 세웠으니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모순이 나오고, 모순이 또 모순을 만드는 어지러운 세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역사의 고리, 교육과 책임의 고리를 연결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자기시대에 바른 지식을 알아야하고, 반드시 자기 후시대로 그 바른 지식과 책임을 계승시켜야만 잘못되고 헛된 생활을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64과 도강준비 (수 3:1~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선민이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여러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선민이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선민이 지향하는 목적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고, 천국가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선민이 그 목적을 단기에 이루는 것이 아니고, 40년 만에 이루는데 여러 단계를 거쳐서 성취하게 됩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나와야하고, 두 번째는 광야의 긴 세월을 보내야하며, 셋째는 요단강을 건너야하고, 그 다음에는 그 땅의 족속들을 쫓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 과정이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한 가지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영광과 천국이라고 하였지요. 그것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역시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① 믿음을 가져야 하고(출애굽에 해당),

② 성경지식이 상당해야 합니다(계명에 해당).

③ 자기부정이 있어야 합니다(40년 연단에 해당, 광야에 있는 인생은 속수무책입니다.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④ 무조건 순종입니다(본문에 해당하는 교훈임).

성도가 목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처럼 성도는 반드시 인생의 목적과, 생애의 목표와, 매일매일 삶의 과제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선민이 출애굽하여 요단강 앞에 올 때까지 어떤 과정을 밟아 왔습니까? 모세를 부르실 때 이적을 보여주셨고, 바로왕 앞에서 장자를 치는 재앙까지(뱀, 피, 개구리,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 열 가지로 치셨고, 나올 때 애굽군의 추격을 막으심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 40년 동안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의복과 신과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또 전쟁에 이기는 것까지 은혜를 베푸셔서 40년 만에 요단강에 당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는 동안 벌 받은 자도 많았고, 죽은 자도 대부분이었으며, 지도자 모세도 죽었습니다. 능력도 많았지만 고역도 심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출애굽과 광야통과라는 두 단계를 거쳤는데 아직도 또 두 단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것과, 쫓겨나가지 않는 점유자들을 싸워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명령을 주셨으니, 이 명령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명령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필요한 명령입니다.

1) 요단에 이르러 3일간 유숙을 시켰습니다(2절).큰일을 하려면 휴식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일은 큰일입니다. 충분히 주무시고 휴식하고 오셔야합니다.

2) “제사장들이 언약궤 메는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3절). 제사장은 신앙의 지도자이고.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메는 것은 접촉이니까 “제사장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을 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때에 제사장이 물로 들어가는 것은 모험적 순종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목사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모시고 사는지를 보라”는 뜻입니다.

3) 그것을 보거든 “너희는 그 뒤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 받으라는 뜻입니다. 지도자는 본을 보이고 성도는 그대로 따르라는 뜻입니다. 못따를 경우에도 반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4) 따르기는 따르되, 상거 2,000규빗의 간격을 두라고 하였습니다. 2,000규빗이면 3,000자, 900m입니다. 이 900m의 간격을 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라고도 합니다. 법궤를 신성하게 취급하고, 군중이 멀리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법궤 앞에서 방종하다가 죽은 예도 있으니까요(삼하 6:3~11).

5) 5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큰일을 도모할 때 부정이 끼면 큰 화를 당합니다. 아간의 부정이 그 실 예 아닙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주의하셔야 할 것이 바로 부정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부정 때문에 다 벌 받지 않습니까?

6) 이렇게 본을 보일 자는 본을 보이고, 앞서 갈자는 앞서가며, 뒤따르는 자는 순종하여 따라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까?

① 4절에서 “너희 행할 길을 알리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사람이 미리 준비 안 해도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인도하시는 체험을 하십시오).

② 7절에서 “오늘부터 시작하여(그전에는 명성이 없었음)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힘 있는 사역자로 쓰시고 인정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10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이지요.

④ 요단강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서(13절) 마른땅으로 건널 것이라(17절) 하셨으니, 이것은 역경이 형통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⑤ 10절에서 “가나안 7족들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알것이라”하셨으니, 이 뜻은 대적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본을 보이면 하나님은 이 같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복종하며 의지하십시오.

 

제65과 바나바 (행 4:36~37) 목록으로


본문에서 ‘바나바’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구브로’에서 출생한 레위지파 사람이요, 본래 이름은 ‘요셉’인데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권위자, 권면과 위로를 잘 한다는 뜻)로 고쳐 불렸습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권면위로하기 위해서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전하였으니, 복음사역 시작부터 큰 결심을 갖고 헌신을 다짐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 행 11:21~30을 보시면,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스데반이 순교 당했을 때 전도자들이 베니게(갈멜산 위쪽 해변지역)와 구브로, 안디옥으로 흩어져 전도를 하였는데, 안디옥에서 많은 교인이 생기니까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의 교역자로 파송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나바의 신앙 년조가 다른 사도들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초대 교역자로 가서 하나님의 은혜(안디옥교회의 부흥)를 보고 기뻐하였으며, 성도들에게 “굳음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권면 하였는데, 그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큰 무리가 등록하는 부흥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사역자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면 거기에 따라 교인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은 많고 교사가 없어서 문제됨을 알고, 사울(바울, 13:9)의 고향인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1년간 큰 무리를 함께 가르쳐 효력을 보았고, 또 그 당시에 유다지역에 흉년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과 협력하여 구제금을 갖고 가서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12:2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나바가 사울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바리새인이란 것은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그가 회개하고 개종한자로써 성경지식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울을 핍박자로만 알고, 개종자요, 실력자라는 것을 잘 모른 것입니다. 그런 중에 바나바가 사울을 잘 알았기 때문에 사울의 신앙적 신분을 추천하여 일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행 9;27, 갈 2:1~9).

2. 행13장에서 안디옥교회가 사울과 바나바를 서방지역의 선교자로 파송하면서 사울의 이름을 바울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은 희망이란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란 뜻인데, 고전 15:9에 보시면 바울이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핍박자가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작은 자로 나타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라는 직책을 받은 것이 선교사로 발탁되고 이름을 바꿀 때부터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는 바나바가 앞섰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은 율법과 학문을 많이 터득하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행 22:3, 26) 바나바보다 더 유력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1차 선교를 잘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13:4) 살라미(구브로 항구), 바보, 밤빌리아,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룻스드라, 더베 까지 다녀서, 올 때는 구브로를 안거치고 갔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바보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굴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났고 (13:6~12), 룻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14:8~13).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사역을 할 때, 행 14:1, 14에 보시면 두 사람이 다 사도라는 명칭을 썼습니다. 흔히 바울은 사도로 알지만 “바나바가 무슨 사도냐”고 하실까하여 확인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3. 두 사역자가 없는 사이에 안디옥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여 율법의식을 복음신앙으로 소화시키는데 문제가 생겼는데, 이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파송을 받아와서 사도들과 함께 그 문제를 토론하여 할례 받지 말 것을 결정해 간 일이 있었고, 그 다음 2차 전도를 바울과 지역을 나누어 시행한 기록이, 행 15:36~41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바나바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많은 성도들이 유명한 사도로 베드로와 바울과 야고보, 요한만 잘 알고 바나바를 잘 모르시는 경우가 있는데, 바나바와 바울을 비교하면 바나바가 바울의 선배요, 후견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 자신에게도 유력한 면이 많았습니다. 우선 바울보다 선배란 점을 들 수 있고, 바울의 사명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며, 처음 사명에 들어 갈 때 밭을 팔아 헌납하고 들어갔으니 결단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의 본명이 ‘요셉’이지만 권면과 위로를 잘하기 때문에 바나바로 이름을 고쳐 부를 정도였고, 교사역할을 잘하여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게 하였으며, 선교는 물론 동역자와 포용을 잘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명한 사람이지만 바나바의 후배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추천하고,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뜻을 맞추어 동역을 잘하였으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1차전도 때 마가요한이 중도탈락을 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2차전도 때 그를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여전히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사역하러 간 것입니다(행 15:37~41). 마가를 포용하느냐, 안 하는냐에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행선지가 달라졌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바울과의 동행을 포기하면서 마가요한을 포용하므로 그만큼 대인관계가 원만하였음을 나타내준 것입니다.

 

제66과 바울의 이력서 (행 9:10~22) 목록으로


바울의 모든 것을 성경에서 발췌해보고 싶지만, 워낙 방대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것이 퍽 안타깝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이력서를 대강 살피려고 합니다.

1. 바울은 본래 이름이 사울인데, 길리기아지방 다소에서 주전 1년경에 출생하였다고 합니다(행 7:58, 9:11). 어떤 책에서 주전 1년이란 연도를 보았으나 짐작으로 아시고 참고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길리기아’ 다소는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서북쪽 직행(바다건너) 150Km거리쯤이고, 육지로 돌면 약 200Km쯤 될 것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 전성시대이니까 어디를 가나 로마의 행정구역입니다. 지금 그 지역은 터기영지에 속하였는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지역을 살피면, 길리기아, 밤빌리아, 루기아, 비시디아, 부르기아, 아시아, 무시아, 비두니아, 갈라디아로 나누어져 있고, 거기에 도성이름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도’처럼 지역이름에는 거의 ia발음이 끝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라고 하였습니다(롬 11:1).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졌다고 한 것과(행 22~25~28), 당시 학자로 유명한 ‘가말리엘’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 것을 보면(행 22:3~5) 대단히 유력한 가문의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지식경력을 본다면, 일반학문이 높은 것 외에 율법지식이 많은 바리새인이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후 율법의 의로 흠이 없을 만큼 철저하였고(빌 3:5~6), 또 히브리인으로서(빌 3:5) 로마어, 헬라어 등 몇 개국의 외국어를 할 정도였으며(행 21:37~22:2), 율법주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열심 하였던 사람입니다(행 22:3). 그런데 그의 율법주의 열심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핍박의 몽둥이로 쓰여졌습니다. 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의 무리와 작당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되, 스데반을 죽일 때에도 합력하였고(행 7:58~8:1), 죽이기도 하였으며, 성도를 핍박하여 옥에 넘기기도 하였습니다(행 22:4, 딤전 1:13). 바울이 개종하기 직전에도 성도에 대한 반감으로 살기등등하여 대제사장이 “성도를 핍박하라”고 명한 문서를 다메섹에 있는 회당에 전달하는 사명으로 가다가 변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변화 받은 과정은 행 9:1~1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3. 변화의 경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고전 9:1, 15:8) 바울을 강권적으로 굴복시키신 것이었고,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 선지자를 통해서 “바울을 이방전도자로 쓰시려고 택하신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에게 안수하여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 다음의 이력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변화되었고, 다메섹 도성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행 9:19을 보시면, 바울이 변화를 받은 후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몇일을 있으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였다”고 하셨는데, 이때가 변화 받은 직후냐, 아니면 아라비아를 다녀온 다음이냐 하는 것을 살펴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갈 1:16~17을 보시면,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바울을 택하여 은혜로 부르셨다”하셨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최초의 변화시기란 뜻)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를 만나러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하셨고, 갈 1:18에서는(돌아온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 15일간 교제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라비아에 간 것은 자숙과 정진을 위하여 갔을 것인데 변화 즉시 간 것이고(행 9:18~19), 아라비아에서 3년간 있은 것이 아니며, 돌아와서 3년간 다메섹에 있었던 것입니다(갈 1:17~18).

4. 행 9:19~25을 보시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하고 핍박받는 기간이 ‘여러 날’로 표기되었는데, 그 기간이 갈1:18의 3년 기간에 포함되는 것이고, 19절에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킨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핍박하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밖으로 도피시켰고(행 9:25, 고후 11:32~33), 도피하자 바나바의 안내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에게 인사하고(행 9:26~30, 갈 1:18) 자기의 고향인 다소로 가게된 것입니다.

5. 그전부터 예루살렘에서는 핍박이 일어났고, 전도자들이 흩어져서 안디옥에 교회를 세운즉, 바나바가 가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교인이 증가하자 바나바가 다소에 거주한 바울을 초빙하여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1년간 사역하였고(행 11:19~27), 이어서 1차 전도여행을 다녀왔을때(13:1~14:28), 할례에 대한 변론 때문에 예루살렘에 다녀왔으며(행 15:1~35), 또 2차 전도여행과(15:36~18:22), 3차 전도여행(행 18:23~21:17)을 끝내시고 예루살렘에 오셔서 송사를 받고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가신 것입니다(행 28:14). 행 28:30에 보시면 로마에서 2년을 셋집에 거하시면서 전도사역을 하셨습니다. 그 전도사역과 순교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고, 순교직전의 옥중생활에 대하여서만 딤후 4:9~18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52년경에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고린도전서를, 55년경에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를 보내셨으며, 62년경에 옥중서신과 디모데전서를, 그리고 67년경에 디도서와 디모데후서를 보내셨다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제67과 바울을 쓰신 섭리 (행 22:1~21)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사도가 3차 전도를 마치신 후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자신을 송사하는 무리들에게 변명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말씀 중에 바울의 변화의 과정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쓰셨다는 말씀도 있어서 ‘바울을 쓰신 섭리’라는 제목을 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선택하신 그릇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갈 1:16에 보시면,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택정하셨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택정은 그 이전일 것이고, 모태로부터 택정하신 뜻은 택정이 실현되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1:4).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선택하시면 그 목적에 소용되도록 그릇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유익하게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무엇인가? 할 때,

1. 그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즈음 마음이 깊지 못한 성도들은 자기교회 목사의 인물이 미남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때 어떤 신부가 자기교회 목사님은 얼굴이 껌어서 안 좋으니, 목사님이 주례해 줄 수 없느냐?하여 그것을 설득하는 애를 쓴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과 풍채가 없다”(사 53:2)하셨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행 10:34). ‘바울과 데글리아의 행적’이라는 책에 바울의 모습을 말하였는데, 바울은 체격이 적고, 무릎이 안으로 굽었으며, 대머리에 코는 크고, 승리적인상이라고 기록되었다니, 하나님이 그의 외모에 신경을 안 쓰신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은 인간의 표준이라는 뜻입니다.

2. 상당한 약점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선 약점이 그 육체에 있었으니(갈 4:14), 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갈 4:15, 6:11). 또 “언변이 졸하다”하였으니(고후 10:10), 설교자로서는 치명적이지요. 전혀 못 보는 사람도 성직을 감당하니까 문제될 것이 없고, 복음은 뜻을 나타내는데 목적이 있을 뿐 웅변의 덕을 안보아도 된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줄 압니다. 말씀권위에 붙잡힌 성도는 뜻만 알면 족한 것입니다. 장황스럽고 유창한 웅변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한글자로도 권위가 충분하고, 간접적 발표(서신=성경)로도 충분하게 뜻과 능력을 전달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전 2:1)는 말씀이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연고로 바울사도는 말로 증거한 것보다, 14권의 서신으로 증거한 것이 2,000년 이상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 하나님이 자기를 대적한 원수였던 것과 완악한 것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완악한 것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는 능력으로 변화시키면 되고(마 3:9), 또 과거에 교회를 핍박한 것은 넓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명에 유익한 것은, 바울이 원수 같은 자기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사명을 주시되 존귀한 직분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큰 감동으로 받고 생명을 거는 충성을 하게 되었으니(딤전 1:12), 하나님은 그 점도 섭리에 참고하셨을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을 아는 만큼, 더 큰 충성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4. 그러면 긍정적 입장, 즉 바울의 좋은 점에서 바울을 쓰신 섭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에게 율법지식이 능하였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은 경력이 있었으니”(행 22:3, 26:5) 이것이 복음과 합할 때 유익한 신앙의 지식이 되고,

2) 거기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지식도 유익할 것이며,

3) 또 로마의 시민권과 몇 개국 언어에 능통함이(행 22:28, 21:37~40) 외국 선교에 유력한 조건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주시는 은사도 있고, 또 일반은총에 의하여 배운 것을 쓰시는 것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 바울의 진실한 회심입니다. 사명자가 회개를 철저하게 못하면, 바른 사명자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도 그런 자를 아시기 때문에 크게 쓰시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깨달았을 때, 깨닫지 못하여 예수님께 죄지은 것을 크게 뉘우쳤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발견하자 아라비아로 간 이유가 연단을 위해서라고 말씀드린 일이 있는데, 그는 연단에 앞서 “회개하기 위하여 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명자에게 회심의 체험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딤전 1:12~13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훼방한 것과 예수님이 자기를 참아 주시고, 은혜주신 것을 항상 감사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사명에 나서는 자세입니다.

1) 가정을 포기했습니다(고전 9:5).

2)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고전 2:2).

3)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그리스도의 존귀에만 두었고(고전 10:31, 빌 1:20),

4)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만 목표를 세웠으며(롬 14:7~8),

5) 주님을 위하여 죽기로 각오를 하고 부름의 상 만을 위하여(빌 3:14) 자기정욕을 못박은 후에(갈 5:24, 빌 3:8, 롬 8:24) 사명을 시작한 것입니다(행 20:23~2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옷 벗김)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깊이 떨구는 것)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 38~39)하였고, 이 사명은 개종하자마자 “주여 무엇을 하리잇가?”(행 22:10)하면서 사명에 뜻을 두고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68과 바울의 목회적 모범 (행 20:17~35) 목록으로


‘바울의 목회적 모범’이란 제목으로 살피겠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3년간 시무하신 경력이 있기 때문에(31절) 목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사도가 시행한 내용이 본문에 나타난 있습니다. 모범을 살피면,

1. 모든 겸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으며, 자기가 일한 것은 다 주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8~10). 그리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 받았다”(마 11:29, 고전 11:1)하셨으니, 대단히 겸손하셨던 것입니다. 목회자는 겸손하게 말씀만 증언하면 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풀어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하고 증언할 뿐, 그 이상 권위를 세우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 교역자나 성도가 다 같이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표준이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에 넉넉함이 없은즉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눈물’이라 하셨는데, 31절에서는 “눈물로 권면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마음을 좋게 한다”(전 7:2)하셨고, “슬퍼하며 애통하고 울라”고 하셨습니다(약 4:19).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도 눈물이 나와야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도 눈물이 나야하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미치는 지를 생각할 때도 눈물이 나와야하고, 부모님을 잘 섬기지 못한 것을 생각하거나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을 볼 때도 눈물이 나와야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악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눈물로 권면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목회의 세계는 군림이나 권위나 살벌함이 아니고 눈물의 세계란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 많은 자를 사랑하십니다(마 5:4).

3. 훼방자의 간계와 시험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어디를 가나 반대자 대적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복음운동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니까, 참고 진리를 내세우며 사랑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아시면서도 끝까지 친구라 하셨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마 26:26, 50). 우리도 악한 자들이나 이단자들을 미워하지 말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4. 주를 섬긴 것입니다. 31절에 보시면 “일깨여(3년간) 쉬지 않고 섬겼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항상 경성하고, 근면, 성실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 주님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부탁은 복음전도입니다. 마 28:18~20과, 행 1:8에서는 전도할 것을 명령하셨지만, 고후 5:19, 살전 2:4에서는 “부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탁은 진리전파입니다.

2)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주님이 “자기의 몸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골 1:24).

3) 복음사역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보낸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 10:40)고 하셨기 때문이요.

4) 소자를 살펴주는 것입니다(마 25:45). 그 이유는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되, 특히 성도의 믿음 키우는 일을 위해서 쉬지 않고 눈물로 권면하신 것입니다.

5. 유익한 것은 다 전달하셨습니다. 복음사역자 자기의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내용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는 율법인즉 폐지되었고 이제는 은혜아래서 교회유지를 위한 의무금을 내는 것입니다”(헌법적규칙 2조5항)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나,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은즉, 많이 낳으셔야 합니다”하는 진리나, “교회를 다스리는 법이 이렇습니다”하고 헌법을 가르쳐야하는 일들에 대하여 나타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사랑의 구체적 실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 실천위치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는 가족의 십자가를 벗고, 또는 지고 나서든지 아니면 자신의 생활 대책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야 바른 가르침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마 16:24). 바울은 모든 것을 가르침에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6.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과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7. 아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취하신 일이 없었으니(33절),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만 족하게 여기셨고(딤전 6:8),

8. 자급자족하실 뿐 아니라, 친히 손으로 수고하여(천막짓는업, 행 18:3)동행인들의 쓰는 것을 감당하셨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눅 6:38)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철저히 기억하고 이행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사역자들이 이 모범을 본받으려 한다면 마땅히 물질주의를 초월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신으로 행하든지 아니면 가족은 별도의 생활비로 살게 하고, 자신만 나서서 나그네처럼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명자가 목회와 관련하여 직업적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생활의 모범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제69과 바울의 다섯 가지 고백 (행 24:14~16) 목록으로


바울사도가 3차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변사 ‘더둘로’를 내세워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지역으로 다니면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복음적 신앙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애쓴 소문이 예루살렘 전역에 퍼졌을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도 유대주의자들이 볼 때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으니까 가장 크게 활동하는 바울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들은 변사 ‘도둘로’를 시켜서 바울은 “염병과 같은 사람이다(나쁜 사상을 전염시키는 자). 유대인을 소요케 한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다. 성전을 더럽히려한다”(행 24:5~6)는 죄목을 붙였으나, 모두가 종교에 관한 것일 뿐 총독이 재판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일단 송사를 받았으니까 총독이 재판석에서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자기의 신앙과 사생활에 대하여 사실대로 고백을 하였으니, 그 고백이 다섯 가지 였습니다.

1. “송사자들이 믿는 도리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14절). 송사자들이 믿는 도리는 구약성경인데, 바울도 그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는 만큼 다른 것이 없는데 송사자들은 바울을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사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송사자들과 바울과의 차이는 성경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차이뿐임을 변명한 것이고,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2.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로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하였으니, 이 말씀은 바울의 구약성경에 대한 고백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말할 때, 율법(토라)과 선지자(내비힘)의 글입니다. 여기의 역사서인 캐투빔이 빠졌지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으로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믿는다”는 뜻인데, 특별히 단서를 붙인 것은,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영감된 기록의 순수성을 믿고, 순수한 말씀이므로 빠짐없이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성경을 믿을 때 기록을 믿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능력이 기록된 말씀 자체에서 나타나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문자로 보여주어도 성경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웅변적 설교나 증거가 아니라도 말씀효력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성경관을 저희들도 믿으셔야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일찍 지혜가 열리면 사람에게는 소망을 둘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변질되며,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의지한 사람이 있을 것이나 부모가 늙고 돌아가시는 것을 경험하면 알게 되고, 자식을 의지해보려고 하나 그것도 순간일 뿐 멀리 가는 경우가 있으며, 돈을 많이 모아놓고 의지하려 하였는데 자기 몸이 쇠약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늙어 쇠해지고 병들면 갈 길은 하나뿐인데 누가 동행하겠습니까? 아무도 같이 가줄 사람은 없고 예수님만 동행하실 것인즉,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있고 건강하다고 하나님을 멀리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만 빈틈없이 의지하고 소망하셔야 할 대상임을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4.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인)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악인)도 다 부활합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먼저 성도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남은 자가 변화되며(살전 4:16~17), 악인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로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계 20:6, 요 5:25). 바울사도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는 뜻은 바로 천국의 영생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세계의 영생을 두고 현실에 미련을 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5.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을 아십니다. 그래서 절대로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고후 8;12).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왕하 4:2)하시고 그것만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만 성실을 다하시되,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도록 노력하시고 사람을 대하여서도 스스로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계명 지키는 일을 잘하셔야 하고, 사람 앞에서는 이웃에 대한 자신의 의무만 잘 감당하도록 노력하시면 될 것입니다. 거리낌이 없이 사셔야 평안이 오고,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다섯 가지 고백이 저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70과 목사직 반성 (딤전 6:11~14) 목록으로


이번 노회에서 10명이 목사 임시직을 받았습니다. 총회 안에 노회가 90개가 넘습니다. 본 총회 안에서만도 1,000명 가까이 목사가 생산되니까 초교파적으로 계산하면 1년에 수천명씩 목사가 나온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많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사역이 그만큼 활성화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사역을 얼마나 잘했느냐? 고 묻는다면,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저는 이 시대에 목사되는 분들을 볼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서 “과거에 목회하던 방법대로 다시해라”한다면 못한다고 사양할 것 같습니다. 한 주간에 공예배 설교 네 번 정도, 새벽기도회 설교 7회, 낮 공부, 구역예배 등 4회, 그 주간에 대심방을 한다면 5일간에 50가정쯤 하니까, 그 설교회수가 60회쯤 됩니다. 항상 몸은 피곤하고, 설교는 자신이 평가해도 6,70점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목회는 다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는 목이 쉬어있어야 하고, 항상 골방에 엎드려야 하며, 설교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 선배목사님들은 저희들이 젊었을 때, 3방 3준비란 말로 권면을 하였습니다. 3방이 무엇이냐? 하면, 골방(은밀 기도), 책방(공부), 심방(전도)입니다. 딤전4:14에 보시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그 말씀대로 하려면 골방, 책방을 떠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사우나탕에 자주 다녀서 배척받은 예가 있었는데, 요즈음 골방에 머물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리고 3준비가 무엇인가? 하면, ‘설교준비, 이사준비, 죽을준비’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준비는 왜하여야 하는가? 하면 교인이 만족을 못 느끼고 적응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40년 전만하더라도 감리교회에서는 지방감리사가 교역자 인사권을 행사하였는데, 4년에 한번씩 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에서 “교역자 바꾸어 달라”고 신청하면 초등학교 교사 임명하듯이 교역자를 바꾸었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 저도 40년 중에 9교회를 전임교역자로만 거쳤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많아지고 임지가 적어지면서 교역자의 처신이 달라졌지요. 위임식 할 때마다 “관속에 들어가서 나가라”하였고, 이번 노회 때도 정평수 목사님이 권면하기를,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버틸지언정 포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권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버티고 인내할 때 손해 보는 교인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서 교인이 손해 보면 안되니까 교회와 교인을 위해서 목사가 희생하므로 교회를 더 이롭게 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목사님들은 옛날 목사님들처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문화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화는 달라져도 성경적 교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반성의 기회를 갖고 이 설교를 준비한 것입니다.

1.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가족이 많으면 가장노릇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 노릇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일 외에는 다른데 신경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성직자가 가정에 얽매인 사례가 없습니다. 군사라 하셨으니까요(딤후 2:4).

2. “이것들을 피하라”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재물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6:8절에 보시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하거나 부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직자가 가족이 있으면 이 말씀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겨우 살아가는 봉급으로 어떻게 메이커제품을 살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가족들은 비싼 용품만 사려고 하니 목사가 물질에 신경을 써야하고, 때로는 가족들과 다툼도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피하려면’ 혼자 뛰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3.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섯 가지는 다 죄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직자가 성결을 얼마큼 힘써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로 증거 하신 예수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할 것도 없도록 이 명령을 지키라”하시므로 성직자가 바른 생활만 하여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와 경건이 아닌 것, 믿음과 사랑이 아닌 것, 인내와 온유가 아닌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이란 명목으로 사랑 아닌 것을 하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이런 것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곧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안 짓는 전쟁을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5. 끝으로 “영생을 취하라”하셨으니, 이 뜻은 “내세의 상급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영생은 노력 아닌 믿음으로 받으니까, 취하여야 할 것은 오직 영생에서 누릴 상급을 바라보고 완전한 사명에 임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성직자가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71과 포도원 집주인 (마 20:1~14) 목록으로


본문의 포도원 집주인은 예수님을 뜻하고, 포도원은 교회 또는 세상의 일터를 의미하며, 일꾼(품꾼)은 성도와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며 일군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본문에는 포도원주인으로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만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여기에서 포도원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품꾼들을 모아 일을 시키는 분입니다. 품꾼들에게 일을 시킬 때 정당한 인건비를 약속하고 일을 시켰으니까,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은 일찍 일어나셔서 일하시는 분이요, 또 백성들에게 일을 하도록 맡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으려면 부지런하여야하고, 일찍부터 자기의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거져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당한 품값을 주신다”하셨고, 계 22:12에서는 “일한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포도원은 사람의 일터입니다. 교회도 되고, 이웃과 사회도 될 수 있습니다.

2. 포도원 주인은 일군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전 9시경에도(3시) 더 많은 일군을 찾아 나서셨고, 장터에서 놀고 섣는 자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섣는 사람들을 좋게 보시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노는 것도 좋지 않으려니와, 자기가 노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노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할 일이 없어서 논다”고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공원에 가서 휴지를 줍더라도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반드시 자기의 할 일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있고(요 5:17), 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는다”는 말씀도 있으며(창 3:19),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살후 3:10)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하여야 하고 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인 만큼 취미롭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3. 포도원의 일은 무슨 일을 의미할까요? 이 포도원은 노아의 기업이었고(창 9:20), 그 다음에 유대인교회를 의미하였으며(사 5:7, 27:2, 렘 12:10, 마 21:33),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고(요 15:1),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와 복음의 축복으로 상징한 말씀이 있으니까(마 26:27~29, 잠 9:2,5, 사 55:1) 포도원의 일은 다양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는 일(요 6:29), 복음을 전파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사회, 국가에 충성하는 일,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인데, 이 중에 어떤 것을 실천하든지 자신이 받은 은사(소질)에 따라서 시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일의 종목은 다른 사람이 안하려는 일을 할 때 성공도 할 수 있고 보람도 있는 것입니다. 저의 셋째 딸이 대학을 나와서 작곡계통의 직장에 잘 다니다가 더 나은 일을 한다고 나왔는데, 그 나은 일이 사람들 모이는 장소에 가서 ‘샌드위치’를 파는 것입니다. 한달쯤 하였는데 직장에서 하루 5만원이상 벌던 것을 겨우 12,000원 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것을 칭찬하였습니다. 정신적 휴식과 육체적 활동이 있으니 건강에 유익하고, 여가를 이용하여 저의 원고 식자를 쳐주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의 귀천을 가리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성도가 희생하는 정신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 포도원 주인은 늦게까지 찾아다니면서 일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늦게라도 깨닫고 일을 하면 된다는 뜻이고, 늙어서 죽을 때가 임박했어도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하다가 죽으라는 뜻입니다. “늙고 죽을 때가 됐은즉 놀다 죽어야지”하는 마음을 접고, 숨이 멎는 시간까지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시란 것입니다. 육체건강이 쇠하면 말씀묵상과 기도로 마음을 쓰면 됩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 3시(9시), 6시(12시), 11시(저녁7시)에 온자들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했다고 하였는데, 주인은 그것을 알고 시킨 것입니다.

5. 그런데 일군의 종류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른 아침에 와서 한 데나리온씩 약속한 사람이 있고, 중간에 온 사람들은 주인이 “상당하게 주리라”하였을 때 그대로 믿고 일한 사람들이며, 세 번째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다”하였을 때 “너희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한즉 아무런 약속이나 바라는 것 없이 들어가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데나리온의 계약을 하고 하루 일을 채운 사람들과 ,상당하게 받을 줄로 믿고 하루를 못 채운 사람들과, 조건 없이 한 시간 일한 사람들로 나누어지는데, 주인은 다 같은 품값을 주고 또 늦게 온 자부터 주었으니, 결국은 조건 없이 일한 사람들이 덕을 많이 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댓가소득으로 하려하지 말고, 또 기복주의(상당하게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로도 하지 말며, “일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고 의무이니까 한다”는 식으로 댓가와 상관없이 수고할 때에 하나님이 더 큰 복과 댓가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바라지 않고 주려고 애쓰는 자를 더 후하게 주시는 분임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눅 6:38). 받는 것은 신경 쓰지 마시고 일하는 데만 몰두하시면 되고 일을 끝냈을 때 주인의 처분대로 받으십시오.

 

제72과 보람 있는 일 (시 73:23) 목록으로


성도들은 세월을 아끼고(엡 5:16)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시간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람 있는 일을 자기 환경의 적절한 범위 안에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선 보람 있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시간을 생산성 있게 쓸지언정 비생산적인 일에 쓰지 않아야 할 것이고, 하루의 생활일과를 반드시 생산성 있게 계획한 후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도 어떤 때는 비생산성적인 일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포츠나 산책이나 TV시청하는 일 등인데, 이런 것에 시간을 보낼 때는 반드시 자기의 보람된 일을 휴식해야 하는 틈을 이용하거나, 휴식의 차원에서 취미활동을 할지언정 절대로 보람된 일을 양보하는 상태에서 비생산적인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야구관람에 자기의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을 안 하는 것을 생각하면 퍽 안타까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1. 주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입니다. 동거에 대한 말씀이 요 14:23, 계 3:20에 있고, 동행에 대한 말씀은 창 5:22과 6:9에 있는데, 이 동거, 동행은 곧 하나님과 함께(또는 가까이)있는 것입니다. 마 28:20에서 “예수님이 성도와 함께 계시겠다”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면 오른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은 바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수주일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주님과 하루만이라도 또 몇 시간 만이라도 가까이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성직자의 생활이 복된 것입니다. 먹고사는 걱정 없이 매일 기도할 수 있고, 성경연구 할 수 있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 이것이 주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방법입니다. 백성이 왕하고 함께 있었으면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그 다음 두 번째로 보람된 일은 신령한 사명(복음적 사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명이란 죄사함 받게 하고, 영생 얻게 하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수고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고, 성경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고, 복음사역자를 돕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유한한 것을 위한 사역이 아니고 영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역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교역자들이 앞장서고 있지만 성도들도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사명을 이행할 때 댓가를 받고 일하는 것과, 댓가 없이 일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상급은 댓가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이 더 많이 받을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런 사역이 두 번째로 보람되지만 은사 없이는 못합니다. 반드시 은사를 많이 받아서 신령한 사명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수일 전에 장웅일목사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그 분이 쓰신 사도행전 설교집에서 소개한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장목사님이 영하 10°나 되는 날씨에 서울역 앞을 거닐 때, 전도성구를 의복에 붙이고 맨발로 다니면서 전도하는 사람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 ‘맨발로 다니면서 전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고,

② 편안하면 주님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경성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데, 아무리 추워도 동상 걸리거나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분은 자녀들도 성공하였고 생활기반도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영하 10°에 맨발로 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그분으로서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경성하며 또 신령한 사역에 헌신하는 일이라면, 오늘 우리들은 어떤 방법으로 경성하며 또 신령한 사명에 응하는 지를 살펴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첫째보람은 주님과 함께 하는 일, 두 번째 보람은 영적사명에 헌신하는 일이면,

3. 셋째는 무엇일까요? 셋째는 사랑실천 하는 일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주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며, 모든 환난당한 사람들을 도와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죄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며 사는 사랑의 실천행위인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의 법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에 덕 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여야 하겠지요. 직업적으로 실천하는 자선은 참된 자선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할애하고 자기의 즐거움을 희생하여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 보람 있는 사랑실천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과의 동행, 둘째는 영적사명, 셋째는 사랑실천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는 분들이 “그러면 먹고사는 문제는 어떡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당연히 먹고사는 물질문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스스로 해결하셔야 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상태 안에서 보람된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과 봉사실천은 잘 못해도, 첫째, 둘째는 잘하고 있습니다. 저는 돈버는 직업이 없어도 먹고사는 환경에 처해있으니 큰 복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나의 인생을 첫째, 둘째에 많이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벌어야 하고, 직장을 가져야할 분들은 첫째, 둘째, 셋째를 앞세워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먼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생활을 확립한 다음,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단계적으로 보람 있는 일을 시행해 나가셔야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생산성 없는 일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목표를 세워야합니다. 허탄한 일들로 목표를 세우지마시고 꼭 생산성 있는 일로 목표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자립(자기의 십자가 지는 일)을 위하여 기도, 노력하시고, 그 다음에 사랑실천과 영적사명과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하여 단계적으로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8. 반성과 정화에 대한 말씀

제73과 심판지식 (창 18:25) 목록으로


시 73:1~9에 보시면, 사람이 아는 대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다가 나중에 깨달았다는 말씀이 있고, 렘 12:1~5에서도 선지자가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 때문에 고민을 하였는데, 의인의 고난은 연단주시는 섭리라고 대답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탤런트 김혜자씨가 아프리카 빈민국 자선사업정황을 KTV에서 조영남씨와 대담하는 중 “신이 계시다면 왜 그들이 굶어 죽고, 다른 곳에서는 살을 빼려하는가?”하면서 도무지 하나님의 심판섭리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2004.5.10).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섭리를 성경에서만 연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인간은 알지 못하여 질문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 줄 믿습니다”(렘 12:1)한 것처럼, 저희들도 그런 자세로 성경을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일반적인 연구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고 공의롭게 하신다”(창 18:25)하셨고, 그 심판의 대상은 “땅 끝 만민에게 미친다”(삼상 2:10, 시 7:8)하셨으며, 또 그 심판권을 “예수님께 맡기셨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 5:22). 전 3:17에 보시면, “의인과 악인을 다 심판하신다”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의인(성도)의 심판 성격을 아셔야 합니다. 본래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요 5:24), 현생애에서 죄를 지을 때 징계로 벌주시는 것을 심판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이 심판이란 용어가 현세에서 징계 또는 상급으로 복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뜻은 축복을 제하거나 긍휼 없이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 2:13에 보시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하셨으므로 홍수나 불심판으로 죽고, 굶어 죽는 경우가 그런 말씀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죄 값으로 일시징계를 받아도 “죄보다 벌을 약하게 하시고(스 9:13)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베푸신다(합 3:2)”하시므로 마치 부모가 잘못하는 자식을 때리듯 징계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의 죄 값을 얼마나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지만, 그 범위가 넓고 주밀하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 범죄는 크고 넓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범죄는 그보다 좁습니다. 그런데 한인간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심판하신 사례도 있은즉, 그것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죄과이기 때문에 심판을 감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죄와(히 4:12, 행 8:21, 창 6:5) 은밀한 중에서의 죄(전 12:14)를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 20:6에 보시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였을 때 “온전한 마음으로 하려 하였기 때문에 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범죄가 심판의 근거가 되고, 자범죄는 물론(겔 7:4) 조상의 죄(출 20:5), 족속의 죄(삿 20:35), 자녀의 죄(삼상 2:12, 29~36), 백성의 죄(사 53:8), 인류의 죄(창 6:11~12)등을 감안하셔서 신속히 또는 적절한시기에 그 당사자나 연고자에게 심판을 하신즉 그 심판의 오묘막측한 비밀을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있다면 “왜 저 사람은 죄가 없는 것 같은데 재앙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 이십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심판이 역사를 살피면 인류의 패역으로 노아시대에 홍수가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400년간 괴롭게 하신다”하셨으며, “그 후에 애굽을 징치한다”하셨고(창 15:12~14), 소돔성 등이 죄악으로 불심판을 받았으며(창 19:29), 그 다음에 애굽인들이 그의 왕인 바로의 완악 때문에 장자의 죽임당하는 벌을 받았는데, 이 벌과 함께 선민이 해방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은 사례는 가나안족의 멸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나안땅에 선민을 살게 하기 위하여 그곳 본토 족을 쫓거나 죽이는 것은 가혹하다고 느끼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자를 우상으로 바꾸는 죄를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민을 70년간 괴롭게 한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이 성경에 나타난 이방인 심판의 실 예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신자는 마지막 심판 때에 모두 불못에 넣는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에 선민을 징계하신 사례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족이 애굽에서 430년간 고난당한 것이 벌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나, 아브라함의 제사에 문제가 있은 다음에 선포하신 것을 보아(창 15:8~14) 그것이 조상의 죄 값이라면 그 형벌은 원인이 생긴 때로부터 약 200년 후에 나타나서 430년을 계속한 것이고, 광야에서 거역한 백성들은 40년 안에 다 죽임을 당하므로 장수 못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변치 않고 순종을 잘한 여호수아, 갈렙은 장수하였습니다. 사사시대에 선민의 믿음이 떨어지면 여지없이 전쟁으로 치셨습니다. 또 회개하면 지도자를 세워 구원해 주셨고, 나중에는 선민국가를 아주 없애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하며, 아비멜렉왕이 그를 아내로 취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의 양심을 감찰하여 벌하지 않으셨고, 여호수아가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기로 맹세한 것을(수 9:15) 약 360년 후에 사울왕이 위반하였는데(기브온족 죽임, 삼상 22:19) 그 위반이 있은 후 약 10년 후에 흉년이 들었고, 그 연고를 알았을 때, 사울왕의 두 아들과 외손자 다섯이 죽이므로 하나님이 노를 푸셨으니, 한마디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심판섭리는 넓고, 세밀하고, 오묘하며, 심판의 방법과 시간의 기점을 사람은 헤아릴 길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공의롭다고 믿을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74과 기드온의 사역과 교훈 (삿 8:22~35) 목록으로


‘기드온’하면 그의 별명 ‘여룹바알’을 기억하실 것이고, 7년간 미디안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출한 여섯 번째의 사사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사가 15명인데(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바락, 기드온, 아비멜렉,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엘리), 그전에 있던 여호수아도 사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마지막 때에 사무엘과 그의 두 아들도 사사로 여길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행 13:20, 삿 8:1~2). 사사 입다의 출현시기가 주전 1109년이란 근거가 있고(삿 11:26), 그 근거에 따르면 기드온의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입다보다 48년 앞선(야일22, 돌라23, 아비멜렉3) 주전 1157년쯤에 사사가 되어 40년간 나라를 평온케 한 사사입니다(삿 8:38). 민 1:11에 보시면 벤야민지파 족장 아비단의 아버지 기드온이 있습니다만, 그는 사사 기드온이 아닙니다. 사사 기드온은 므낫세지파 아비에셀 집안의 요아스의 말째아들로 태어난 사람입니다(삿 6:11,15, 수 17:2, 대상 7:17,18). 그리고 그 종족이 거주한 지역은 ‘오브라’로서 벧엘의 북동 20리쯤 지역으로 므낫세 지파의 분깃에 속한 지역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족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즉,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라”하실 때 기드온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이적(증표)이 어디 있습니까…나는 므낫새 지파 중 제일 작고 극히 약한 자라”한즉, 하나님의 사자가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반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워 응답해 주셨습니다(6:11~24). 또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에 기드온 부족들이 섬기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신상을 헐고, 그 장소에서 “그의 아비의 7년 된 둘째수소(첫 것보다 더 좋은듯함)를 취하여 제사를 드리라”하셨을 때,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이 모르게 바알의 단을 다 훼파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즉, 집안에서 큰 난리가 났지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이 강한 신이고 아들이 훼파하였은즉 그들끼리 쟁론할 것이라”하므로 잘 무마시켜 주었습니다. 그 후에 기드온은 자기 부족 ‘아비에셀’족과, 또 므낫세 지파와 이웃동족인 아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용병 모집에 협조를 받은 후 또 하나님께 두 가지 증표를 구하여 응답을 받고(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함과, 또 양털에만 이슬이 없게 함, 6:36~40) 모집된 용병 32,000명을 300명의 정병으로 줄인 후에, 미디안의 진을 정탐하고 나팔과 질그릇과 횃불의 기습작전을 써서 대적을 물리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나중에 전쟁소식을 듣고 협력한 에브라임 지파가 적의 두목 ‘오렙’과 ‘스엡’을 죽인 후에 “왜 우리와 처음부터 합력하지 않았느냐?”는 항의를 받았을 때, 그들의 공을 크게 치하하므로 에브라임 지파의 노를 풀어준 사실이 있었습니다(7:24~8:3). 그 후에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잡아 처형하고, 또 기드온 군사를 돕지 않은 숙곳 거민들과 브누엘 거민을 징벌함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8장).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완전한 승리가 있은 후에 있은 일입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라”하였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라”하고 사양을 한 후, 전리품을 거두어 에봇(제사장이 입은 겉옷)을 만들었는데, “그 백성들이 그 에봇을 음난하게 숭상하므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옮무가 되었다”(27절)하셨고,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40년간 태평을 누리면서 여러 아내로부터 70명의 아들과, 세겜땅에 사는 첩에게서 ‘아비멜렉’이란 아들을 두고 죽었는데, 기드온이 죽은 다음 그 자녀들이 믿음 보존을 못한 상태에서 다시 바알을 섬기게 되었고, 또 세겜의 첩의 소생 아비멜렉이 홀로 왕이 되기 위하여 외척 식구들과 공모하여 자기의 70형제를 다 죽이고(요담만 제외됨, 9:5) 왕이 된 사실이 9장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국사역과 기드온의 개인적 처신에 관한 것입니다.

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농부인 기드온도 용사가 될 수 있었고,

② 기드온은 이적을 체험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으며,

③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한즉 호응도 잘 되었고 대적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개인적 처신에서는 잘한 것과 못한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고, 확신을 가진 후에 순종으로 일관하였으며,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④ 승리한 다음에 에브라임 지파의 공을 칭찬하고, 겸손하므로 그들을 포용하였으며 “왕이 되라”하였을 때도 사양을 하므로 하나님이 다스려 주셔서 40년간 태평한 것입니다.

⑤ 그런데 잘못한 것은 에봇을 만든 것이니, 이것이 제사장 직분을 탐한 결과로 여겨지고, 그것으로 백성들에게 우상의 빌미를 주었으며, 처, 첩을 많이 두어 다산 하였으나 그들을 종교적으로 지도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가정의 무질서로 큰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역사를 살피면서 잘 잘못이 무엇인 것과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제75과 반성 (눅 14:11~14) 목록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너무 반성할 것이 많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고, 탄식의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식이 사람을 잡는다”는 속담이 바로 예수 잘못 믿는 우리를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의 뜻 반대로 행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으면서 몇 가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은 예수님이 초청을 받고 교훈하신 것인데, “너희가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 어려운 자들을 청하라. 그들이 대접을 받고 갚지 못할 때 너희에게 복이 되고, 부자나 친척이나 벗이 받은 대접을 갚을 때는 복이 되지 않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성도들이 잔치할 때, 벗이나, 형제, 친척을 제외하고 걸식하는 사람들만 모아서 잔치하는 것 보셨습니까? 반성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눅 16:25에 보시면, 음부에서 고통 받는 부자에게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세욕을 누리는 데만 급급하다가 죽었는데, 안 믿은 탓으로 지옥(음부)에 갔고 많이 누린 탓으로 고민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 믿은자의 지옥에도 등급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 나사로는 믿은 자이지만 불행하게도 재물과 건강이 없어서 부자가 버린 것으로 배불리려하다가 죽었는데 행복의 결과는 나사로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없는 부자의 호화생활은 부러울 것이 없고, 나사로의 생활도 불행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을 하면서 나사로처럼 쓰레기 뒤지는 것을 좋게 여길 성도가 얼마나 있겠는가? 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사 26:13에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하셨고, 시 146:3~5에서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인간이나 현실적 대상은 의지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사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늙은 부모가 자식을 바랄 수 있고, 자식이 부모를 의지할 수 있어도 그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현실적 대상에게 바라지 않을 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다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4.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자기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고(마 22:39) 원수를 사랑하되 줄 것을 주고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눅 6:27~29, 롬 12:20)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김일성을 많이 미워했는데 요즈음은 이북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데올로기 감정도 많이 좋아진 줄 압니다. 이단, 신학사상, 타교파 등에 대해서도 몹시 강하게 상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순해졌습니다. 잘못된 교리나 사상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이 순해졌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은 다 사랑하고 종교적 관점이나, 정치적 사상은 각각의 자유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미운대상이 없어야 하고, 특히 원수 같은 상대가 있다면 그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항상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므로 사랑의 심정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반성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5. 받아서 유익하려 하지 말고 베풂으로써 복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눅 6:38에 보시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아내로부터 인색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족 때문에 베풀지 못하고 사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일 혼자라면 문을 안 잠그고 잘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나 많은 성도들이 베풀므로 복 받는 원리를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과제를 반성의 대목에 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받을 때는 하나님이 주는 자에게만 복을 주시는 줄 아시고(행 20:35) 내가 줄 때는 자신이 복을 받는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6. 지식을 활용하는 믿음이 얼마나 많은 지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호 4:6에서 “지식이 없어 망한다”하셨고, “예수님 아는 지식이 없은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한다”(눅 23:34)고 하셨습니다. 참 무식은 무서운 것입니다. 도적이 올 줄 알면 지킬 것인데 그것을 모르니까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홍해가 막혔을 때 백성들은 부르짖었으나 모세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자”고 하였지요. 이것은 과거의 경험지식을 이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하셨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시험인 줄 알고 이삭을 바친 것입니다(히 11:17). 성경지식, 예비지식이 있으면 유익합니다. 그런데도 배움에 게으른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반성 하시자는 것입니다. 선조대왕 때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이 담력 자랑을 하면서 떡내기를 했습니다. 밤중에 떡을 갖고 매장지에 가서 묘봉에 떡을 한개씩 놓고 오면 이기고, 기절하거나 쓰러지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떡을 묘에 돌리는데 느닷없이 거적에 덮인 송장이 “나 하나 더 줘”하고 손을 내민 것입니다. 기절했을까요? “죽은 놈이 하나면 됐지 무얼 더 달라는 거야?”하고 거절한즉 그가 바로 오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리 짐작하고 예견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은 것입니다.

 

제76과 보상과 회개 (마 5:23~26) 목록으로


‘보상과 회개’란 재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23절에 보시면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구약시대의 제사를 계속 진행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율법의 제도가 예수님시대로 끝나지만(롬 10:4) 그 당시가 과도기이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중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형제로부터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먼저 화목하고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급히 사화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고소당할 때 일이 더 커지고, 26절에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과의 불화가 하나님과의 불화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요일 4:20), 사람과의 화해 대상을 형제(성도)로 표현하신 것은 성도간의 화목을 장려하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아닌 이웃들과는 불화하여도 된다는 것인가?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기 때문에 성도와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도 될 수 있다”(마 10:26)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과의 원한관계를 그대로 두어도 되는가? 할 때, 풀기 어려운 이해 관계는 사회법으로 보상하고 벌 받는 규례로 해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26절에서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법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재판으로 손해를 변상하다 보면 적은 금액까지 계산하는 것을 봅니다. 그와 같이 법이나 심판은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도 죄사함을 깨끗이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이 말씀이 구원적 속죄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믿음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갈 날은 가깝고 10대 소년시절의 죄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 친구들과 이웃집 농장에 피해를 주고, 닭 잡아먹으며 나쁜 짓한 것을 회개하고 보상해주고 싶은데 보상받아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데, 성경에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하셨으니, 이것이 “가책되는 죄를 회개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닌지 염려된다”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죄를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염려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보상과 회개와 용서와 구원받는 문제를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출 22장, 23장에 보시면, 도적질, 상해, 살인, 또는 타인에게 피해준일 등에 대한 보상규정이 기록되었는데, 이 규정은 그 시대의 선민들에게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성도들이 이웃에 피해준 것을 회개하고 화해하라는 뜻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형제(성도)와 화목하고 재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불화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신앙의 도리를 놓고 불화할 때는 화해할 수 없지요. 그러나 도덕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을 지고 보상도하며 화해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상받을 자가 없을 때 그 거리끼는 문제를 어떻게 해소하고 용서를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잘 깨달으셔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으면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전체적으로(과거, 현재, 미래의 죄, 그리고 원죄) 또 포괄적으로(누구에게 잘못한 것이든)다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구원이 확보됩니다. 이것은 마치 부산가는 사람이 KTX를 타고 앉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김없이 갚아야 한다”고 하셨느냐 하면, 기차를 탔어도 1등석인지 3등석인지는 분별을 하여야 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은 받되 회개를 잘하였으면 1등석에 앉을 것이고, 회개를 잘 못했으면 3등석에 앉아야하기 때문에 “회개를 철저히 하고 계명을 잘 지키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 13:10의 “이미 목욕한 자는(십자가를 믿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하셨지요. 여기의 발 씻는 뜻이 바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목욕은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목욕하므로 ‘의롭다’는 은총을 받았으니, 이는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회개는 구원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 앞에 칭찬 받고 징계의 매를 모면하는데 필요하며 자신을 성화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상 받을 자가 없어서 보상 못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하나님 앞에 자복도 하였고 포괄적으로 용서를 받은 만큼 구원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죄 지은 줄 몰라서 회개 못하는 성도도 많고, 또 대인관계에서 죄를 졌지만 상대자가 없어서 보상 못하는 경우와, 자신이 파산지경에 있기 때문에 보상이나 화해를 못하고 죽은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고, 만일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 원만한 보상을 못 받는 입장이 되었다면, 그는 그 상태를 하나님의 징계나, 사랑실천으로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사함 받는 회개(행 2:38),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 7:10), 생명 얻는 회개(행 11:18)란 말씀이 있는데, 이 뜻은 다 구원의 범주 안에서 영광과 상급에 관련된 행사란 점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77과 요시야 왕의 역사 (대상 3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시야왕의 역사’를 말씀드리고, 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섭리를 배우려고 합니다. 요시야는 유다 19대 왕으로, 8세에 왕이 되어 31년간 통치하였는데 결국 애굽군과 싸우다가 39세에 전사 하였습니다(BC598~568). 요시야왕의 할아버지는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인데, 므낫세는 55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만 행하였고(왕하 21:1~12), 그 아들 ‘아몬’도 므낫세를 본 받아 악을 계속하니까 2년 만에 신복들이 그를 죽이고, 아들 요시야를 왕 세우게 된 것입니다(왕하 21:19~26). 요시야 왕의 역사는 왕하 21:~23:, 대하 34:~35:에 기록되었는데, 본문 3절에 보시면 “요시야는 오히려 어렸을 때 비로써 하나님을 구하였다”하였으니, 그 때가 임금 된지 8년이요, 16세였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16세에 하나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의 앞길은 복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면 과감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하나님을 구하는 믿음을 가졌을까? 가 궁금합니다만, 주위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힐기야’란 제사장이 있었고, 서기관 사반이 있었으며, 또 왕의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 ‘훌다’가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었은즉(34:14~18, 22~25), 그들의 바른 지도로 어린 왕이 믿음에 붙잡혔을 것으로 예측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왕 된지 8년, 16세 되던 해에 모든 우상을 훼파하였는데, 우상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에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그 제사장들의 뼈를 그 우상의 단에서 불살랐으니 참으로 강하게 훼파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왕 된지 18년 만인 36세 때에는(8절) 성전 수리 공사를 명하였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입니다(35:3). 솔로몬 왕은 주전 942년의 사람이고, 요시야 18년은 580년이니까 362년 된 성전을 수리하게 된 것입니다. 잘 지은 성전이기 때문에 잘 보존되었고, 오래되었은즉 수리할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여 서기관이 그것을 왕에게 읽어드리게 된 것입니다(34:14~18). 왕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옷을 찢으며 크게 회개하고, 열조와 자신과 백성들이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지노가 크실 것인즉,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 때에 ‘훌다’란 여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를 “왕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백성에게 내릴 재앙을 보지 않고 평안히 열조에게로 돌아갈 것이라”하였으니, 이 뜻은 “왕의 시대에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회개는 아주 큰 은혜를 받는 수단’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에 유월절시기가 돌아왔을 때 그동안 우상만 섬기고 하나님의 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을 크게 되살려 대대적인 유월절 행사를 지키게 하고 전 국민을 신앙적으로 깨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시야 왕이 잘한 것을 열거하면,

① 우상타파, 사이비 종교 철폐요,

② 성전 수리이니, 이것은 신약시대로 보면 신앙제도 확립입니다(예배당 수리가 아니고 신앙생활을 정화시키는 것).

③ 율법청취인즉,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요,

④ 회개요(민족적 회개),

⑤유월절 행사인즉, 신약적으로 볼 때는 십자가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신정통치국이고 왕권으로 단행하는 것이니까 일하기 좋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기독교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도를 통치하는 교회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우상숭배신앙을 멀리하고 자신의 믿음생활의 터를 든든히 닦아 자리를 잡으며, 성경연구와 회개에 몰두하고, 모든 성도가 십자가중심 생활로 깨우치는 것이 바로 요시야 왕의 통치를 답습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킨지 2년 만에(왕노릇 31년) 그의 나이 39세에 애굽군을 맞서 싸우다가 전사를 한 것입니다.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정복을 구실삼아 “유다영토를 통과 하겠다”하였을 때 당연히 그 길을 열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훌다’선지자의 예언대로 “나라가 망하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 쉬게 함이라”(34:27~28)고 하셨습니다. 39세에 죽은 것이 불행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31년 동안이나 왕 노릇한 것과 또 화액 전에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사 57:1) 오히려 큰 축복이라고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 정화운동, 그 담력, 그 열심, 그 회개를 저희들도 본받으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개하는 성도에게 반드시 그만한 댓가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78과 아나니아 사건의 의미 (행 5:1~11) 목록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의미’를 살피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기의 소유물인 땅을 팔아 사도들에게 드리기로 약속을 하고, 그 소유를 판 다음에 값의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그들이 이런 봉사를 하게 된 것은 그 당시에 성령님의 감화도 컸고, 또 성도간의 유무상통이 이루어지면서 ‘바나바’가 밭을 팔아 헌납하는 모범도 보았기 때문에 감동과 감심으로 사도들 앞에 작정을 한 것입니다. 봉헌물을 사도들에게 드린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헌물을 드린 자세를 보면 ‘바나바’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고, ‘아나니아’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감사헌금 얼마를 강단위에 드리는 것과 땅 판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것(드림이 아니고 두는 것임)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강단위에 드리는 것은 “나 헌금했으니까 광고하고 축복해주시요”하는 뜻이고, ‘발 앞에 두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고 겸손을 차리면서 남모르게 슬쩍 놓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돈으로 바꾸어 드리는 것뿐이고, 더 감사하고 더 많이 드려야 좋을 것을 그렇게 못하니까 겸손을 차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헌금 드리는 자세와 차이가 있으면 성경에 나타난 사실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베드로는 그가 헌납한 땅의 시세를 알았던지 아니면 영감을 받았든지 아나니아의 갖다 놓은 헌금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네가 어찌하여 사단의 유혹을 용납하고 성령을 속여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을 팔아 드리도록 성령님이 감동하셨거늘 어찌하여 땅 판돈을 임의로 드릴 수 없었더냐? 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한즉 그가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즉시 시신을 싸서 장례를 지냈는데, 세 시간이 채 안 되어 그 아내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같은 질문을 한즉 같은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네가 어찌 주의 영을 시험하려 드느냐,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이들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한즉, 그도 죽어 남편 곁에 장사하니 그 일을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기록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진실치 못하면 불행해진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못 지킨 것이나, 사도 앞에 거짓말한 것이 진실치 못한 것인데, 그것으로 인하여 큰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속일 수 없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과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하지 말고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말라”(신 23:21, 시 15:4)고 하셨습니다. 특히 성령님의 감동 하에 작정한 것을 위반하는 것은 성령님을 속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이 사건은 물욕과 탐심으로 범죄함이 된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하신 말씀(마 19;24, 딤전 6:9~10)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요. 재물, 탐심, 물욕 때문에 죄를 짓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재물에 깨끗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아간이나, 게하시나, 발람이나, 가룟유다가 돈에 깨끗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정치가들 중에도 돈에 깨끗지 못하여 망신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여러분, 물질에 대하여 깨끗하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우선 돈을 벌 때 불법이나, 거짓이나, 허영이나, 가난한 자를 누르는 방법으로 벌면 안되겠지요. 거리낌 없이 정당한 소득을 얻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쓸 때는 더 힘이 듭니다. 불쌍한 사람을 동정 못하니 거리끼고, 못사는 사람 앞에서 잘사는 것도 거리끼며, 봉사의무 못해서 거리끼고, 또 봉사, 자선을 많이 한 후에 명성을 얻어도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실감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없이 살면 더 편안하고 많이 가지면 더 불안한 것입니다. 아나니아 사건은 재물로 범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3.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깨끗케 하시는 섭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깨끗해지려면 부정한 자를 책망하고 회개시키며 또는 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명성을 얻고 교회를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왜 회개할 기회도 안 주었을까? 또 약속어기고 거짓말하였다고 죽게 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고도 괜찮기를 바란다면, 그도 그런 거짓말을 예사로 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죄짓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 3,000을 죽였고(출 32:28) 발람사건 때는 24,000명을 죽이지 않았습니까?(민 25:9) 이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를 엄격하게 다스려서 죄를 정화시켜 깨끗케 하셔야 할 필요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숫자 적어도 좋으니 “구별되고 성결한 교회를 만들라는 엄명”과 같은 것입니다. 거짓으로 인한 불행, 물질로 인한 범죄, 그리고 교회정화운동의 필요성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79과 도적질하지 말라 (출 20:15) 목록으로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니까 쑥스러운 듯 합니다만, 깊이 반성할 점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도적을 막으려고 철장시설을 하는데, 성남 옆 광주 면소재지의 어떤 집은 집을 지은 후 20여년동안 대문을 닫고 잔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 세계에서는 이 설교가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도적질은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불법으로 취하는 것’인데 여기에도 종류가 많고 생각해 볼 일이 많습니다.

1. 우선 도적질이 나쁘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데, 열 계명중 하나로 주셨고 예수님께서도 ‘도적질하는 일을 악심, 살인, 간음, 거짓증거, 훼방과 일치하여 경계’하신 일이 있었으며(마 15:19), 구약에서는 아간이 도적질한 죄로 전쟁도 패하고 자신도 죽었으며(수 7:24~26), 율법에서 도적질이 발각되면 “4배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19:8, 출 22:1,3). 또 말 3:8~9에 보시면 선민들이 십일조를 도적하므로 흉년이 오고 저주가 온다고 하셨기 때문에(민 18:21, 신 12:6) 대단히 두려워할 계명이 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십일조에 대하여 가책을 받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부족하면 가책을 받되, 율법적 형벌의 차원에서 가책 받지 마시고 혹 십일조 금액보다 적은 봉사를 했다면 하나님 일에 대한 태만을 인하여 가책을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율법적 가책은 직접 형벌이 따르지만, 신약의 성도는 정죄와 의식적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거역한 가책이 아니고, 충성이 미흡함에 대한 가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제도가 십자가로 소멸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요(마 11:13, 롬 10:4, 골 2:14, 고전 13:10, 히 10:9). 문제는 마 23:23에서 “이것(의, 인, 신)도 행하고 저것(근채의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하신 말씀의 해석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적 차원에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롬 10:4), 헌신의 차원에서 “넉넉하게 섬기라”는 뜻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부분적 계시)이 예수님계시 속에 포함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시대의 헌금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믿음성의에 따라 율법의 제도 이상을 헌신차원에서 드리도록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으로 율법에 따라 충성하던 것이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지께 충성하는 것으로(격식상) 변화가 왔기 때문에, 법에는 얽매이지 않으나 충성은 더 잘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음을 아셔야할 것입니다.

3. 도적의 유형이 많다는 것입니다. 흔히 ‘도적’하면 빈집에 들어가서 훔치는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많겠지요. 예수님이 가룟유다 보고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6).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쓰시는 선교비(요 6:5~7, 전도중 식비)를 훔친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교회의 공금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니까요. 예배당도 하나님께 헌금한 것으로 짓거나 봉헌을 하면 하나님의 것이 되는데,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써야하는 것입니다. 법을 위반하고 물질을 가장 많이 챙기는 도적은 정치자금 빼먹는 도적과 세금을 포탈하는 도적일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셔야 하며 나라의 세금을 안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교회도 재산세 같은 것은 솔선하여 잘 내야합니다. 교회가 비영리단체라는 구실을 붙여서 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사랑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성도가 타인에게 갚아야 할 채무를 고의적으로 늦추는 경우입니다. 레 19:13에 보시면,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미루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품꾼이 삯을 받아 그날 저녁양식을 사먹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봉급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됩니다. “30일날 돈 나오니까 갚겠습니다”하였는데, 30일에 돈을 주어야할 기업주가 예고도 없이 안 준다면 그 책임이 클 것이고, 혹 이자타산 때문에 고의로 며칠을 늦추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것이 바로 도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안냈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행 5:1~11). 성경에는 압살롬이 왕 되기 위하여 인심사는 일을 ‘마음도둑’이라 하셨고(삼하 15:6), 또 렘 23:30에서는 거짓선지자가 임의로 지껄이면서 “하나님 말씀이라”하는 것은 ‘말씀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입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메이커도적, 상표도적, 기술도적, 저작권도적, 명예, 공로도적, 골동품도적, 개도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상돌, 망두석도 가져갔음).

4. 그렇다면 성도가 도적에서 멀어지려면 어떻게 할까요? 안일(일할 것), 향락(놀지 말 것), 탐심, 이기주의를 멀리하셔야 하고 가장 큰 복인 예수님을 풍성하게 모셔서 물질주의를 배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도적을 안 맞으려면 도적질 못해가는 믿음, 도적이 구명을 뚫지도 못하는 하늘의 상급(마 6:20)을 많이 쌓으셔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도적으로서의 가책 받을 일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한다면, 그 이상의 것으로 도적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출 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제80과 3금5행 (시 37:1~11)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세 가지 금할 것과 다섯 가지 행할 것’이 나타나 있어서 ‘3금5행’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금할 것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어떤 행악자(흉악범)가 나타났을 때, “저럴수가 있나, 저런 나쁜 놈이 있나”하고 미운 마음을 갖게 되고, 또 그 사람이 죄보다 가벼운 벌을 받게 되면 자신이 큰 손해를 본 것처럼 분을 느끼는데 그것이 곧 불평입니다. 사람이 그런 불평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자신은 “그런 범죄인이 아니고 그보다 의롭다”하는 자긍심이 있기 때문이고, 또 행악자가 많으면 사회적으로 여러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니까 불평하는 줄 알지만 불평 그 자체가 죄를 방지하거나 죄인에 대한 심판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악자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소관이고 하나님이 다 정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이 비를 주셔야 해결되는 것처럼 행악자에 대한 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세상 끝 날까지 있는 것입니다(계 22:11).

2)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의만 투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눈 깜짝하는 방법(불의한 방법)으로 큰 것을 챙겼을 때 그것을 투기하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가 죄를 짓고 성공하는 것을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9절에 보시면 “대저 행악자는 끓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정선거하고 당선되었을 때 좋아하다가 몇 달 후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시 73:18에서는 “파멸에 던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사람을 본받으려 하거나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면 온갖 유혹에 다 빠집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3)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8절에 보시면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성도는 이것을 믿음과 수양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남의 일이나 자신의 일들로 분을 느낄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는 우선 건강에 좋지 않고, 덕을 세우는데도 좋지 않습니다.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길 때, 사울 왕가의 ‘시므이’가 비난을 한즉, 다윗의 신하가 그를 쫓아가 죽이려 하니까 다윗이 “그러지 말라, 내 자식도 내 생명을 찾는데 사울의 자손이 나를 멸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하면서 그 마음을 안정시킨 일이 있었고, 예수님은 나사렛과 사마리아에서 배척받으셨으며, 유다에게도 배신당하셨고, 억울한 재판으로 돌아가셨지만, 다 참으셨고 다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시면서 분내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분낼 일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이 “참으라”하셨고(눅 22:51) 참음의 본을 보이셨으며, 또 심판주가 되신 것입니다. 분노를 자제할 줄 아는 성도가 예수님을 많이 닮은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시다”고 하셨으니까요.

2. 그 다음 5행의 첫째는,

1)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을 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들은 대부분 성품이 온유합니다. 온유해야 장사도 잘 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의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하셨고, 또 5절에서는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고 맡기면 하나님이 이루시되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정오의 빛은 태양이 가장 가깝게 쪼이는 시간으로, 밝은 인도, 정면에서 가깝게 간섭해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법은 ‘기도와 성실’입니다. 기도는 항상 부탁하는 것이고, 성실은 자기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게으르고 입으로만 부탁하면 잘 안 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꼭 잘 들어 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3) 4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영원한 동반자 이십니다. 부모, 자식, 형제, 친구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명예, 예금통장 등 다 영원히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만 영원히 함께해 주실 분이니까 그분만 가장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 주신다”하셨으니, 이것은 기도응답을 잘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돈이 최고이면 돈을 의지하시고, 의사가 최고이면 의사를 의지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최고이시면 생명과 건강도 하나님께 맡기세요. “덜 살아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으로 큰 만족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4) 6절에 보시면 ‘의’라는 말씀과 ‘공의’란 말씀이 있습니다. 의와 공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의’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공의’는 선과 악, 또는 여러사람에 대하여 합당하게 취하는 태도입니다. 까다롭고 어려운 행동이지만 노력하셔야 할 것이고,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7절의 ‘잠잠하고 참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데는 순서가 있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의지하며, 성실하면서 기다릴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81과 포도원을 허는 여우 (아 2: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우리를 위하여”하셨는데, 여기의 ‘우리’는 예수님과 성도를 비유하는 신랑(목동)과 신부(술남미 여인)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누릴 행복을 위하여’란 뜻입니다. 그러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라 하였으니, 포도원은 무엇을 뜻하며, 또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의 ‘포도원’은 신부의 일터이고, 신부가 신랑을 그곳에 모시고 즐기는 장소인즉, 이 포도원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포도원을 교회로 표시한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라 하신 말씀이 있고(요 15:1~2), 애굽에서 불러낸 선민을 ‘한 포도나무를 심은 것’으로 말씀하셨으며(시 80:8), 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도 하셨습니다(사 5:2, 7). 그러니까 포도원은 교회로, 포도나무는 예수님으로, 포도주는 보혈로로 상징하여 교훈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랑신부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기업을 해치는 것이요, 교훈상으로는 교회의 대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지키는 포도원에 작은 여우가 구멍을 뚫고 들어와서 포도꽃을 해친즉 포도원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24). 예수님이 보실 때에 흠과 주름잡힌 것이 없도록 순결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엡 5:27).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였을 때, 머리끝으로부터 발끝까지 또 의복 입은 맵시와 속마음까지 다 아름다워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성도의 신앙도 좋아야하고, 제도도 좋아야하며, 나타나는 열매(사랑)도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비유된 신부(즉 성도의 믿음)가 좋으면 신랑이신 예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부에 대한 예화를 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 밑에 있으면서 전쟁을 하고 돌아올 때 목이 말라서 우물가에 서있는 여인에게 물을 구했더니 그 여인이 물그릇에 버드나무 잎을 얹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느냐? 물은즉, 큰일을 하셔야할 장군의 몸 이신즉 급히 물을 잡수시다가 체하면 안 되기 때문에 천천히 잡수시라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퍽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건이 그 후에 그 여인을 왕후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혜 있는 여인이 신랑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좋은 교회, 좋은 성도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중국 제나라 민왕이 민정을 살피러 나갔는데, 길가의 많은 사람들이 왕을 보려고 가까이 몰려드는데, 길옆의 뽕밭에서 뽕을 따는 아가씨는 뽕만 딸뿐 왕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왕이 이상해서 행차를 멈추고 그 처녀에게 이유를 물은즉 “아버지로부터 뽕을 따오라는 분부만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기특하게 여기고 그 소녀를 유심히 본즉, 목 뒤에 혹이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참으로 착하고 예쁜데 목 뒤에 혹이 있어서 안됐구나” 한즉, 소녀의 대답이 “저에게 혹이 있다하여 부모님을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고, 혹이 없다하여 부모님을 더 잘 섬길 이유가 없으므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너무 가상하여 “내가 너를 왕후로 삼을 터이니 궁으로 가자”한즉, “대왕의 분부가 지존하시나 아버지의 승낙 없이는 할 수 없다”하므로, 결국 아비의 승낙을 받고 ‘숙류비’란 왕후가 되었는데, 그 당시 4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좋은 신부가 복 받는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좋아야합니다. 교회가 좋은 것은 성도의 신앙이 좋아야 하고 생활도 좋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포도원을 여우가 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여우는 교회를 해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무엇이 교회를 해치는 요소일까요?

1. 사랑을 해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다 사랑의 관계만 유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를 해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살펴서 거짓, 욕심, 교만, 약속불이행, 폭언, 말의실수, 불공평, 책임불이행 같은 일들로 인하여 불신감이 조성되거나 화목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의 관계를 유리그릇 보존하듯 잘 보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규모 없는 생활입니다. 좋은 교회는 반드시 규모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규모와 질서를 강조하였습니다(살전 5:14, 살후 3:6,11, 고전 14:40). 성도의 단체가 단합을 잘하고 순결을 지키며 법과 질서를 지켜나갈 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사람이 없으면 그 나라가 좋은 나라인 것처럼 법과 질서를 이루어 나가는 교회 역시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허는 여우를 잡으려면 인내심과 준법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잘못된 교리나 사상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뜻은, 잘못된 교리와 사상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성경을 잘못 또는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이고, 잘못된 사상은 성경을 생활에 적용할 때 잘못 또는 이상하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주장하거나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는 등, 인본주의, 물질주의, 신비주의, 사회복음주의 등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오직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는 데만 전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순수한 교회의 모범을 해치는 모든 요소를 제하셔야할 것입니다.

 

9. 기도에 대한 말씀

제82과 기도할 마음이 생김 (대상 17:25, 삼하 7:27) 목록으로


‘기도할 마음이 생김’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두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여쭙겠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오실 때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기도회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런 분 저런 분들이 계시겠지요. 문제는 기도할 마음, 기도의 갈망함, 또 무엇을 부탁드려야 하겠다는 필요성, 또 시급히 기도하여야 한다는 조급성을 갖고 기도회에 오신다면 퍽 은혜롭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단체기도회에 오시면 오히려 자기 기도를 못하게 됩니다. 인도자의 지도에 따라 단체적 제목으로 기도하고 끝내니까 자신이 갈망한대로 기도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기도할 마음을 갖는 성도는 단체기도회에 참석하여 단체적 기도를 드리고 또 기회를 만들어서 자기의 기도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라”하셨으니까(눅 18:1)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함이 마땅하지요. 그런 취지에서 식사기도 정도는 습관이 된 줄 알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출근하면서도 기도하며, 차를 타고 조용히 앉았을 때도 기도하고, 무슨 행사를 시작할 때도 기도하는 등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할 마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혹 자기의 가족들 중에 기도에 관심 없이 하루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 하셨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이나 자녀들이 기도에 관심 없이 집을 나간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할 마음을 갖는 사람은 퍽 초조해집니다. 자신과 자신의 연고자들이 퍽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 거짓의 유혹, 위험한 일등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도의 필요를 안 느낀즉, 이런 상태에서 기도할 마음을 갖는 자만 조급한 것입니다. 가까운 아내하고 같이 기도를 하려고 살피면, 아내는 TV, 드라마나 야구관람에 빠져있으니 그는 기도할 마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도할 마음을 갖는 자와 안 갖는 자의 신앙적 차이,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물론 이편도 있고, 저편도 계시겠지만 세상일이나 연락 등에 빠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할 마음을 잘 못가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기도할 마음이 안 생기는 경우와 또 하나는 생기는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성도님들이 스스로 경험하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찍이 모신 성도는 기도할 마음이 안 생길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 나는 새를 잡으려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 대화할 체를 하지 않지요. 대화는 가까이 있는 대상과 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평안하면 기도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돈 있고, 건강하며, 아쉬운 것 없는데 하나님께 무엇을 부탁하겠습니까? 사람이 평안하면 자존심만 강해지고 그 자존심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가로막습니다. 항상 자신이 지혜롭게 해서 아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할 마음을 막는 것은 마음의 불화입니다. 두 사람이 다투고 기도가 나옵니까? 원망하고 욕한 후에도 기도가 막히지요. 본래 기도는 감사하는 마음과 의지하는 마음과 자복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자세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인데, 다투거나 원망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는 기도를 할 수 없지요. 가장 중요한 실 예가 부부와의 다툼이 있으면 서로 기도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3:7에서 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믿음이 약하여 하나님을 멀리 모신 사람, 평안하고 아쉬운 것 없는 사람, 세속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에 감사와 화평을 못 느끼는 사람은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언제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까?

1. 하나님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연인들끼리 전화 많이 거는 것 보셨지요.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하나님을 사모하면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2. 무슨 중대한 일이 자기 앞에 있을 때 기도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중대한 일이란 여러 가지입니다. 좋은 일 어려운 일도 있고, 불행하고 무서운 일도 있으며, 또 위험한 일도 있겠지요. 가족이 병들고, 수술을 해야 한다든지, 땅을 팔고 집을 산다든지, 누가 죽을 위험에 있다든지, 차를 타고 긴 여행을 하는 등 무슨 우환이나 일거리가 있으면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무엇을 원하신다는 뜻을 알 때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단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궁궐을 짓고 성전 짓기를 갈망한 즉,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고(솔론몬왕계승) 또 그 위를 영원히 보존하신다”하신즉(이 ‘영원’이란 뜻은 메시야적 구원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깨달았을 때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하셨고, “그 은혜를 감사히 받아 누리겠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대상 17:27).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꼭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기도의 맛을 아셔야 합니다. “기도가 좋더라”, “기도하니까 잘되더라”, “기도이상 더 큰 보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기도의 만족과 만능성을 아셔야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항상 생겨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83과 기도에 대한 지식 (눅 18:1~8) 목록으로


본문의 취지는 약한 자의 정당한 소원이 응답된 것을 말씀하셨고, 악한 재판관도 청원자의 번거로움에 못이겨 들어주었거든 하물며 자비하신 하나님이 쉽게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는 뜻입니다. 혹 응답이 더디더라도 참고 기도를 꾸준히 하라는 뜻입니다.

1. 기도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능력과 관계되는 기도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의 대화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과거에는 큰 소리로 하는 기도를 두,세시간 하였는데, 요즈음은 그런 기도가 힘들어서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사명을 잘 이루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고 그런 기도를 통해서 목회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마 4:2의 예수님의 40일 기도나, 행 1:14에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이나, 롬 8:36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힘쓰다가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기도의 특징은 주밀한 계획적인 내용을 아뢰기보다, 계획에 없는 말을 토하는 경우가 있어서 기도한 다음에 자기의 증언 부언한 말을 다 기억 못하는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 남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위하여 애썼다는 사실이고, 응답을 받으면 사명에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시작은 믿음과 용기에서 비롯되는데 몸이 피로하고 용기가 적으면 자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화적 기도는 자기가 환경에 당면한 대로 자신의 생활과제를 순서대로 부탁하고 의지하는 것이므로 뚜렷한 과제에 따라 기도하고 또 마음의 묵상이나 적은 음성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자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하루일과를 위하고, 또 측근자들의 과제에 따라 하나님께 사실을 고하고 부탁하는 기도가 크게 필요한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대가없이 또는 시험에 들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일이 크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능력구하는 기도는 사명이 불탈 때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대화적 기도는 항상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기도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2. 기도를 방해하는 환경을 극복하셔야 합니다. 어떤 문서에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 열세가지’를 기록한 것이 있어서 이 설교를 쓴 동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왜 기도를 못한다”고 해야 하는지, 그 대답이 바로 그 장애요소일 것입니다. 문서대로 기도 방해요소를 기록하면,

1) 기도응답에 무관심 하는 것이요,

2) 게으른 생활이며,

3) 생활에 분주함이고,

4)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이며,

5) 세상적인 욕심이고,

6) 자신의 잘못된 감정(마음을 옳게 갖지 못함)이며,

7) 대중매체에 빠지는 것이고,

8) 잘못된 인간관계이며,

9) 죄악의 거리낌이고,

10) 자만심과 교만이요,

11) 시간적 핑계(시간을 내는 용기를 안 가짐)이고,

12) 편견이며,

13) 불신앙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숙고하면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은 왜 기도를 못하십니까? 기도 못하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기도를 못할 때가 없었다”고 하겠지만, 기도를 적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설교준비에 쫓기면서 피곤한 때문이었고, 또 고독을 느끼기 전에는 기도의 간절함을 크게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독과 연약과 위험을 느끼면서 기도의 비중을 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기도의 장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의 기회를 주는 요소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기회를 주는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남을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중대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요청 되니까요.

3) 신변의 위험이나 생활상의 어려움으로 연약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기도를 잘 안하게 된다는 것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4) 사명의욕이 생길 때입니다. 이럴 때는 기도로 힘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힘쓰니까요.

5) 말씀을 사모하면 성경을 펼친 상태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6) 기도로 마음이 든든해지고 안정되는 체험을 하였을 때(만일 적기에 기도를 못하면 초조해지니까),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로 모든 자초지종을 부탁드렸을 때 안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7) 기도응답의 체험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필요성을 100% 절감하게 되고, 항상 기도에 빠져사는 생활을 안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도를 잘 하시는 데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자신의 연약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이렇게 연약을 알아야 기도하게 되겠지요.

2) 자기의 생활목표에 따라 기도내용을 구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생활목표를 자기 집 안마당과 교회로 목표를 삼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그것을 넘어서 노회, 총회, 세계선교까지 목표로 삼는 이가 있고, 또 어떤 이는 남북통일, 세계평화, 정치, 경제, 기아, 질병 등 더 광범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다만 기도의 내용은 자기가 관심 갖는 범주 안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 없이 마구하는 기도는 중언부언으로 그칠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하루생활, 가까운 관계, 자신이 관심 갖는 목표와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라고 그런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막힐 일이 없는 것입니다. 생활 그대로 자기의 과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니까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성도님들의 기도가 항상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또 내용상으로 막힘이 없기를 바라서 드린 것입니다.

 

제84과 기도할 제목들 (빌 3: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할 제목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표대를 향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목적을 두고 생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생활과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는 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하셨습니까? 또 하나님이 천국에서 주실 상급을 예비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셨습니까? 이런 일들을 잘 하기 위하여 기도의 제목을 정하실 때,

1. 우선 기도가 생활화되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하신 말씀은 기도를 생활화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나 식사할 때만 기도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대화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말이고 성경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2. 기도가 생활의 무기가 되도록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대화만을 목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을 성취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만능적 무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일해주시도록 구하는 방법입니다. 기도응답을 받은 사실을 많이 체험하셨겠지요? 그 체험을 깨달을 줄 아셔야 합니다. 물질의 궁색함이 없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고, 그것을 족하게 여기라”(딤전 6:8)고 하셨습니다. 또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건강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운동을 통해서 성도의 건강을 지키게 하십니다(우리 교회는 운동기구가 많으니까요). 반드시 기도가 생활화되고 기도가 생활의 무기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말씀이 매일 매순간 양식이 되고, 또 말씀의 맛을 느끼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신 것은 성경을 양식 삼으라는 뜻이고, “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하신 것은 말씀의 맛을 달게 또는 기쁘게 느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식욕이 다르듯이, 성경말씀을 상고하거나 배울 때 자기 취향에 맞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선 교역자가 가르치는 방법에 최대한 적응을 하고, 그 다음에 자기 취향에 맞도록 연구 방법을 정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을 취미롭게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순서와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합니다”할 수 있도록 방법을 세우고 또 맛을 느끼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마 5:37에서, “오직 너의 말은 옳다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게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 왕도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3:9). 선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이것이 옳다, 그것은 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주 선악을 묻고 불법을 묻는 성도가 되시고, 또 그것을 대답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악을 배격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있어 기도하라”(마 26:41)하셨고,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라”(엡 6:11)하셨으며, 또 “죄는 불법이라”(요일 3:4)하셨으니까 죄를 배격하는 힘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썩은 냄새가 나면 파리가 붙듯이 성도가 세속에 가깝거나 세속욕이 강하면 많은 불법의 마귀들이 유혹을 합니다. 그러니까 냄새나는 세속적 욕구를 상당하게 멀리하시고 또 현세적 특혜나 불법의 유혹을 아울러 배격할 수 있어야만 순결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할 때에 정의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을 배격하고 의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항상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6. 사랑실천의 힘을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은사 중에 최고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2:31). 구제도 사랑이고, 용서도 사랑이며, 인내도 사랑에 속하고, 온유, 겸손, 예절도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면 내가 사랑의 승리자가 되고 사랑 아닌 것을 삼갈 수 있을까?”하는 과제를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7. 봉사와 충성의 힘도 기도로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권능 받고 하라”(행 1:8)하셨지요. 힘이 없으면 봉사와 충성이 잘 안됩니다. 봉천교회 전광학 목사님이 장로 장립식 때 권면하시기를 “헌금의 성실함이 떨어질 때 믿음도 같이 떨어지는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피스토스’의 뜻에 진실과 충성이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진실과 충성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형편에 따라 봉사하고 충성할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시고 충성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가지 기도의 제목을 말씀드렸습니다.

 

10. 부활, 감사, 권면

제85과 예수님의 부활 (고전 15:3~8) 목록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예수님 자신의 여러 차례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대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돌아가신 사실에서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부활의 의미를 먼 훗날에 있을 사건으로 예측하였거나 또 아니면 현실적사건을 떠나서 영적, 환상적 사건으로 느꼈는지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몇몇 여인들도 부활과는 상관없이 시체에 향유바를 목적으로 3일 되던 날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과 천사의 증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당일 새벽에 무덤앞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 주셨고(막 16:9, 요 20:18), 이어서 무덤에 찾아갔던 다른 여인들에게도 나타나 주셨으며(마 28:9, 눅 24:10), 여인들이 이 사실을 모인 제자들에게 알리자, 베드로와 요한이 급히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 베드로에게도 나타나 주셨습니다(눅 24:34, 고전 15:5). 그리고 그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셨고(막 16:12, 눅 24:13~35), 다시 예루살렘 다락방에 오셔서 도마가 없는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니(눅 24:39, 요 20:20), 이처럼 부활 당일에는 다섯 번 나타나 주셨고, 또 8일 후에 도마가 있을 때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도마로 하여금 몸을 만져 확인하게 하셨습니다(요 20:26). 그리고 또 갈릴리에서 세 번(요 21:1, 마 28:16, 막 16:14, 고전 15:6),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시면서 두 번(고전 15:7, 막 16:19, 행 1:9, 눅 24:50) 나타나심으로, 40일 만에 11회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역사를 자세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사실을 증언하시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믿음 안에서 어떤 의미로 깨달으셔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저는 우선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게 될 때,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최고의 이적입니다. 부활보다 더 큰 이적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구세주 되시고 승리자 되시며 심판자 되심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2. 진실증명입니다. 약속을 하셨고 예언을 하신만큼 성취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만일 부활을 약속만 하시고 이행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의 참되심을 증명함이 되므로 성도들은 믿고 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자의 증명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순간의 종교일 뿐이고 영원한 종교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이 영원히 계시지 않으면 어찌 피조물인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부활은 영원자의 증거이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영생과 천국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전능하심과 생명의 주되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창조, 통치, 심판 이 세가지는 전능자요 절대자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체 창조가 생명체 아닌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 그 능력이 크기 때문에 부활은 가장 큰 이적이 되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 보일 것이 없다”하신 뜻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최고의 이적이란 뜻이 아닙니까?(마 12;39) 따라서 성도는 능력이 부족함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나를 이만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의 부활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승리하는 모습을 체험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에 승리를 택하셨으니 만큼 저희들도 세상 떠난 다음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세적 출세가 불가능해져도 다음세대의 승리를 내다보는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김재규씨가 한동안 흉악범처럼 사형을 당하였는데, 요즈음에 와서 “그는 독재자를 꺾은 공로자라”고 다시 평가하자는 여론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사후 승리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6. 신령체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막 16:12). 또 문을 닫쳤는데도 들어오셨지요. 그 몸을 만질 수도 있었고(요 20:27), 음식도 잡수셨으며(눅 24:43), 훌쩍 하늘로 올라 없어진 것입니다(행 1:9). 신비한 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체가 신비한 만큼 내세천국도 신비한 것입니다. 이 지상에도 인간세계, 동물세계, 물고기세계, 미생물의 세계가 있는데 왜 신령한 세계가 없겠습니까?

7.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영원한 동반자이시고 또 중보자란 사실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므로 성령님이 강림한 사실은 다 아실 것입니다(요 16:7).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이유는 영원한 중보자, 즉 대제사장으로서의 직임을 수행하시기 위함입니다. 히 4:15~16을 보시면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신 예수님이 큰 대제사장이시고(히 4:14) 영원하시매, 성도가 그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일곱가지 의미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86과 은혜를 생각함 (약 1:17) 목록으로


성도는 감사절기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늘 생각하셔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런 목적을 일깨워 드리기 위하여 (‘은혜를 더듬어 발견함’이란 설교도 있음, 87과) 이 내용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읽으신 말씀에 보시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하셨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는 신앙적 또는 현실적 재능을 뜻하고, 온전한 선물은 필수적이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축복일 것입니다. 은사는 영적은사도 있지만 영적사역과 관련 있는 현세적 재능도 있다고 봅니다(출 35:30~35). 여하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만가지 은혜를 받으므로 생존도하고 구원도 받습니다. 생명의 은혜, 자연의 은혜, 믿음, 지혜, 성경, 성령님의 역사, 말씀, 기도, 전도, 봉사, 속죄, 양자, 영생, 상급, 보호, 인도, 응답, 심판 등 많이 받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은혜를 실감하지 못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고전 4:9에 보시면 “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느뇨?”라고 하셨습니다. 받고도 받은 줄을 모르고, 받았으면서도 안받은 척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줄 압니다.

1. 하나님이 생명보호하시는 은혜를 깨달으셔야 하겠습니다. 시 27:1에서 “여호와는 내생명의 능력이라”하셨고, “호흡을 주관하신다”하셨으며(사 42:5, 시 104:29, 행 17:25), 삼상 25:25에서는 “하나님이 원하는 자의 생명을 자기와 함께 생명 싸게 속에 싸서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은즉 하나님의 생명보호의 은혜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함께하시는 은혜입니다. 동행하심(창 5:22, 6:9, 46:4), 거처를 함께하심(요 14:23), 음식을 함께 잡수심(눅 24:28~31, 계 3:20),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키심(시 121:4), 또 “싫어 버리지 않는다”고도 하셨고(사 41:9), “끝까지 사랑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요 13:1). 우리는 가까운 친구 집엘 가도 오래 함께 하지 못합니다. 또 자신이 바빠서 오래 있어주지 못합니다. 또 밤을 새면서 지켜주지 못합니다. 미운 사람과는 가까이 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리를 선택하실 때 죄인임을 아시고 무조건 선택하셨고, 우리가 부족하지만 싫어 버리지 않으시며 끝까지 함께하시고 곁에 함께 계서 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뙤약볕이 있을 때 그늘에만 서도 위로가 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항시 하나님을 의식 하시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가 죽을 때도 함께하시고 성도의 길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요 14:1~3). 성도의 모든 생활에서 떠나는 시간이 없으십니다.

3.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은혜입니다. 히 1:3에 보시면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하셨습니다. 무거운 것은 위에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땅은 공중에 있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혜성이 지구에 떨어질지도 모른다”하여 초조해진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땅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충돌 안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 1:3에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시 121:3에서는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신다”(실족은 낙망, 범죄, 타락을 뜻함)하셨고, 또 121:7에서는 “환난을 면케 하신다”하셨으며, 또 사 48:17에서는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보호 인도의 은혜를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좋은 이웃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란 교회와 사회입니다. 교인은 사랑하려고 애쓰고, 나라의 정치는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반독재, 온독재하는 나라가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라면 그늘 속에서 억울함 당하는 백성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좋은 정치로 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여, 야대립에서 비도덕성이 나타나지만 그래도 좋은 이웃을 갖고 사는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또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은 하나님이 심판주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억울한 일 당하면 속상하지요.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해결하여야만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재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변호사비용이 수백만원 들어갑니다. 1심, 2심, 3심을 거치고, 3~4년을 끌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공의롭게 심판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믿으셔야 합니다. 억울한 일 당하셨으면 하나님께 부탁하고 10년, 20년 기다리세요. 그리고 결과를 보세요. 결과에 변동이 없으면 천국에 가서 알아보세요. 욥이 억울하여 호소한 말 가운데 “천국에 가서 변백하겠다”(욥 13:15)고 하였습니다. 김선일씨가 이락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아주 떠들썩한 죽음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 값을 주셔야 합니다. 문선명 이단과 싸운 박목사님이란 분이 암 말기 환자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그것도 사람은 보상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만 판단하시고 억울함 당한 성도를 신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은혜는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입니다.

 

제87과 은혜를 더듬어 찾음 (행 17:27, 창 28:15~16)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이는(여기의 ‘이는’은 앞절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사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고 저희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삼아주신 일임)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지 않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느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것”으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계시지 않은 것처럼 은혜도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 예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고 기동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호흡은 바로 하나님이 가장 가깝게 주시는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데 있는 은혜를 더듬어 찾아 발견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자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큰 APT나 거금의 통장에서 찾으려 하신다면 가난한 사람은 그 은혜가 멀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은혜가 호흡에 있는 것을 모르면 안 될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 은혜천지입니다.

1. 하나님은 인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안 주셨으면 우리는 죽었거나 불행한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물 부족할 것을 하시고 벌써 장마를 보내시지 않습니까? 있어야 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빌 4:6에서는 “감사가 기도의 조건, 간구의 조건이라”하셨고, 빌 4:11, 고후 12:9에서는 “감사가 연단의 방법”이며, 고후 9:12에서는 “감사로 인하여 넘쳤다”하시므로, 감사가 “큰 은혜를 받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골 2:7에서 “넘치는 감사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모르면 더듬어야 합니다.

2. 창 28:15에 보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어디로 가든지 지키시는 은혜”, “다시 자기 있을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1) 사람은 존귀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복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겠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 미처 몰랐다”하면서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실감하십니까? 인간이 자기 곁에 우글거리면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고, 고독해지면 더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2) “어디로 가든지 지키시고 자기 있을 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하셨으니 그런 은혜를 느끼십니까?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출입을 지키신다”(신 32:10, 시 121:6)하셨고, 또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쓰러져도 이 재앙이 너희에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시 91:7, 욥 5:19),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않게 하신다”(시 121:5~6)고 하셨는데, 실감하셨습니까? 천인 만인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은 지진이나 큰 정변으로 나타나는 일이고, 낮의 해가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은 바람이나 구름으로 일사병을 막는 것이며, “밤의 달이 너를 해치 않는 것”은, 달의 인력으로 바닷물의 수위를 조정하여 해일을 방지해 주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고는 여행 중에 납니다.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 지하철까지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서 저는 여행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기도합니다. 제가 5월21일에 전임지 교회 권사님이 경영하는 어린이집 50주년 기념식에 설교를 맡고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에서 8시 KTX를 꼭 타야합니다. 그것을 타면 9시45분에 동대구역에 내립니다. 처음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가는 것이 몹시 부담이 되어 두시간 전에 출발을 하였는데, 남한산성역에서 복정역으로 또 수서역으로 충무로역으로 서울역에 잘 간즉 반시간이 남더군요.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 또 고속철도가 너무 빠르고 태풍 온다는 소문도 있고 하여 잘 가야 할 텐데하고 탄즉, 새마을호와 별 차이가 없고 금방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또 감사하고 대구 전철이 그 곁에 있어서 처음 타니까 퍽 좋았는데, 대구역 다음이 ‘중앙로’ 역입니다. 그 역이 어떤 역입니까? 잘 아시지요? 나라하여 그런 재앙에서 제외될 특권이 있습니까? 없지요. 성경 눅 13:4의 망대 무너진 말씀에서 “이 사람들이 다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수 있다”하셨는데, 그 “중앙로 역을 무사히 자났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고 설교 감당하고 사례비 받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런 것이 곧 곁에 있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 그런 은혜 안 받았나”하지 마시고 마음으로 뜨겁게 느끼고 감사하시라는 것입니다.

3. 구별하시는 은혜가 있고(출 8:22~23) 또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 베푸실 때 선민과 구별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조개가 모래를 물어 진주를 만들 때 아무모래나 막 물지 않고 ‘아비클리테’란 요소가 있는 모래만 물어서 ‘나카’란 요소를 생산하여야 하는데, 또 그것을 뱉어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물고 괴로움과 죽음을 당하면서 진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이 성도를 선택하여 천국백성을 삼으시는 것과 비슷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자나무가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까 우쭐하여 “감사하라, 절하라”하였는데, 태양이 보다 못해 “내가 빛을 안주면 네가 어찌 그늘을 만들겠느냐?”한즉 정자나무가 정신을 차렸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꼭 가까운 은혜, 숨은 은혜를 찾아 발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8과 돌이켜 감사하라 (엡 5:4) 목록으로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길로 걸어 다니면서 구상한 말씀을 집에 와서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혼자 걸어 다녀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30분쯤 치과에 걸어가면서도 두 번쯤 서서 메모를 합니다. 감사설교를 하려니까 감사 잘하는 말씀을 구상하지 않을 수 없지요.

1. 본문에 보시면 “돌이켜 감사하라는 말을 하라”하셨으니 감사하라는 말씀인데, ‘돌이켜’는 무슨 뜻입니까? “감사 안하려는 근성에서 돌이키라”는 뜻이지요. 타락한 인간의 심정에는 감사 안하려는 근성이 있습니다. 감사하면 상대방에게 빚진 자처럼 될 수도 있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겠지요. 또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감사하는 말을 잘 못합니다. 감사는 신사적 인격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사도께서는 “감사 안하는 근성에서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2. 골 2:7을 보시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넘치게 감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10만원 감사헌금 할 것을 100만원 하라는 것인가? 또 100만원을 하면 감사가 넘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감사로 보상을 한다 해도 은혜의 값을 다 치를 수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를 넘치게 한다는 것은 뜻이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고전 1:4, 엡 5:2, 살후 1:3)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잘 안되어도 그것은 “자기 생각에 안 된 것일 뿐 하나님이 유익하도록 주신 은혜다”라고 생각하여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와서 고생하며 산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45:6~7, 5:20). 넘치는 감사의 뜻을 말씀드렸습니다.

3. 그렇다면 감사의 뜻이 물질적 인가? 정신적 인가? 할 때,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일”을 어찌 감사헌금으로 다 채울 수 있겠습니까? 감사를 물질로 보답해야 된다면 하루에도 수없이 감사헌금을 드려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행위는 정신적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정신적으로 고맙게 여기면서,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감사는 사실상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고(은혜는 하늘처럼 많으므로),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것입니다. 감사헌금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베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감사가 중요함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4. 어떻게 하여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연구해 보셨습니까? 제가 길로 걸어 다니면서 연구하였습니다.

1)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셔야 합니다. 무엇, 만든 것 있습니까? 인간이 만든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모래 한 알갱이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2) 자신보다 더 어렵고 불행한 사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3) 자신이 받은 은혜와 형편이 분복에 맞는 것인 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일제 때 보험든 것을 한일 협정에 의하여 박 정권 때 찾은 일이 있는데, 7,000원 찾았습니다. 나는 그때 한밑천 잡았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왜 7,000원 뿐입니까? 너무 적은 금액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복 받을 근거가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적게 받았을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생각을 돌려 후하게 받은 줄로 믿으셔야합니다. 고후 12:9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형편이 어려워도 불만 갖지 마십시오.

4) 감사하는 인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 감사를 말하는 자”(엡 5:4, 골 1:3)가 감사하는 인격자입니다. 좋은 일하고 희생한 후에 공치사를 하면 그 희생의 빛이 흐리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이가 나라에 충성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유가족이 “마음은 아프지만 좋은 죽음을 받았으니 다행입니다. 국민이 어찌 나라의 보상을 바라겠습니까?”했다면, 이것은 고난을 감사로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보상 많이 주어야 합니다. 특권도 주어야 합니다”하면 역시 좋은 죽음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감사하는 인격이 아쉬운 때라는 것입니다.

5) 감사에는 댓가성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도 기복을 바라고 감사한다면, 역시 참된 감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기도로 은혜를 구해도, 감사하는 성도는 기복심을 갖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5. 감사의 근거는 믿음이어야 하고 감사는 기도와(빌 4:6) 찬송과(골 3:16) 섬김(딤후 1:3)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후 1:3에 보시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하라”하셨고, 또 다른 말씀에서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찬송에 감사가 없으면 가짜 돈 갖고 물건 사는 사람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충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시간에 감사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된 감사로 영광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9과 교인권면 (롬 8:28~29) -임직식 권면- 목록으로


1. 교인은 교인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으로서의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죄사함과 천국은 믿음으로 성취하는 것이고 교회생활도 일종의 노력인데 이 노력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성화되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자신이 성화되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교인은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시는 줄 아시고 열심히 닮으십시오.

2. 교인이 예수님을 닮으려면 열심히 노력할 것이 많은데, 그 중에 우선 중요한 것이 헌탄한 것을 떠나서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하데 두지 않는 자라”(시 24:4)하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지요(마 16:24). 자기 부인이란 것은, 현실적인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신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나 현실이 아닌 영혼과 신령한 것을 생각하고 사람이 알아주는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인정받는 것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보이는 것은 다 잠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헌탄한 것입니다(고후 4:18). 갈 5:13에 보시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자유는 믿음으로 받는 영적 축복이고, 육체의 기회란 현실 정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복주의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깨끗한 빈 그릇에 진리만 간직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이것을 잘 실행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 6:33). 현세욕(요일 2:15), 이기주의(마 16:24), 명예욕(갈 1:10)을 떠나서 은혜를 구할 때 주님이 가까이 와주시는 것입니다.

3. 교회에 오시는 목적을 성경 공부하는데 비중을 두시라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혼자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설교로 가르침 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닌 생활과 결부된 것이고, 공예배만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의 성장은 말씀깨달음에 있는 것일 뿐, 의식참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는 기독교 서적이나 다른 정보로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교회에 성경교사로서 목사님과 교역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은 반드시 설교를 열심히 들어서 성경을 배우시고, 또 집에 가셔서는 성경을 틈틈이 연구하시다가 의문점이 나타날 때는 그것을 메모하여 다음 주일에 목사님께 여쭙고, 또 그다음 주일에는 그 답변을 받아가는 식으로 연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만 듣고 연구안하는 성도들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지식이며, 성경지식은 배워서 얻고, 배워서 얻은 지식이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4.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인은 교회에 나오셔서 성경배우시고 예배드린 후에 사랑만 실천하시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예수님도 모범을 보이셨지만, 고전 13장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늘 강조하기를 교회는 사랑의 도장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연습장이란 뜻이지요. 우선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가르치는 교역자를 사랑하세요. 그리고 모든 성도를 사랑하시되 성도 중에는 믿음이 약하여 수준에 미달되는 교인도 있을 것인데 그들을 집중적으로 사랑하시고, 그 다음에 혹 미운자가 있다면 “내가 왜 저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가?”를 반성하면서 그 사람도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교회출석의 사명입니다. 성도에게 원수는 있어서도 안되지만, 혹 원수가 있다면 반드시 그도 사랑하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만 실천하는 곳이 교회요(시 133:1),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5.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본문). 교회는 연합 봉사를 하는 기관입니다. 혼자하기 어려운 선을 합력하여 하는 곳이니 만큼, 누가 “선한 일을 하자”하면 분수에 알맞게 협력하는 교인이 되십시오. 자기 협력이 부족하다 하여 선한 일 자체를 반대하지는 마시고 서로의 능력대로 자유롭게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이때 선동한 성도는 협조를 못받는다 하여 언잖게 생각지 마시고 형편대로 하십시오.

6. 장로님을 공경하시고 장로님의 본을 따르십시오. 70년대 초에 경북에서 이와 같은 임직식이 있었는데, “장로권면을 간단히 하라”하니까 서도항 목사님이 “본때를 보이는 장로가 되시요”하고 끝낸 일이 있었습니다. 또 부산 송도교회 김마태 장로님은 임직식 권면에서 “목사님은 예수님만 본받고, 장로님은 목사님만 본받고, 교인은 장로님만 본받으면 그 교회는 잘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데 절기헌금 드린 것이 적으니까 집사들 세계에서 “그 정도 헌금하려면 나도 장로하겠네”하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민망하여 어떤 권면석상에서 중직자는 특별헌금에 본이 되기 위하여 적금을 드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본을 보이는 노력을 하시라는 뜻). 이제 장로님이나 모든 제직이 본을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은 반드시 그 본을 따라 충성하실 때, 영광이 되고 부흥이 되며 그 자신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11. 세속의 헛됨

제90과 지식의 헛됨 (전 1:12~16) 목록으로


앞부분에서는 “인간의 삶이 욕구와 목적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헛되다”하였는데,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18절에서 “지식이 헛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3:12에 보시면 솔로몬 왕이 “지혜를 받았다”하였고, 본문 16절에서도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보았으며, 자신이 큰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지혜가 더 낫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또 17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지혜를 알고 지혜에 반대되는 것(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려고 애를 썼으나, 그것이 바람 잡는 일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가진 자와 안가진자와의 큰 차이가 없더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가 있어서 큰 관직에 올랐는데 부정에 몰려 벌을 받고 낙오되었다면, 지식이 없어 노동하며 건강지키고 평안히 산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혜를 써서 인생의 모든 일을 살핀즉, 인생은 수고하고 괴로운 존재임을 알았고(13절),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될 뿐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헛된 이유는 타락 상태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권을 가지고 40년 동안 지혜로운 왕으로 통치해 보았으나,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었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었다”(15절)할 정도로 지혜와 지식이 정화를 가져오지 못하였으니, 결국 지혜가 많으면(악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니까)번뇌가 많고, 지식을 더하는 자는 배움에 쫓겨 근심도 더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여기의 “지식이 헛됨”은 하나님 아는 지식이 아닌, 세상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알아보는 것이 이시간의 주제입니다.

1. 인간의 지식이 타락과 죽음과 고난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식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창 3:5~7을 보십시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 불순종하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보다 높이 된다”하였고, 아담은 자기의 지식으로 판단하여 불순종 하였으며, 그 결과로 밝아진 눈은 하나님 보는 눈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밝아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죄도 못 짓습니다. 요즈음 법률지식, 컴퓨터지식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치지 않습니까? 이렇게 지식이 죄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헛되고,

2. 인간이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바벨탑이 그 실 예이고, 바리새인들도 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습니까? 요 9:41에서 “차라리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요”(고전 3:19) 따라서 “지혜자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19). 그리고 지혜를 내세우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높여 주셨던 것입니다(마 11:25). 인간이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3. 인간이 지식으로 타락에서의 회복을 못합니다. 타락할 때는 지식으로(꾀) 타락하였지만, 회복은 지식으로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을 죽일 때는 몽둥이로 때려죽였는데, 살릴 때는 그 몽둥이로 살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식으로 문명은 개발할 수 있어요. 그런데 타락의 결과에서 회복시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에서 회복시키는 구원은 하나님의 최고 지혜로만 하실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독생자의 회생입니다.

4. 인간의 지식은 큰 위험을 안겨줍니다. 지식의 발달은 사람의 몸을 움직이지 않게 합니다. 리모콘이 그것 아닙니까? 어떤 집의 비대가 폭발했다고 하지요. 지식과 문명이 육체를 해치고 병을 만들어 줍니다. 그 뿐입니까?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듭니다. 항공학교 교수가 죽은 것도 지식 때문에 죽었습니다. 지식을 믿고 연습비행기를 탔으니까요. 인류가 거의 지식의 영향으로 죽습니다. 문명기구와 함께 죽으니까 그런 것이지요.

5.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대의 힘으로 정치를 해보았는데 민주주의 다 파괴시켰고, 철학을 전공한 대통령이 해보았는데도 별수 없었으며, 가장 적게 배운 대통령이 오히려 부정부패를 많이 정화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최고의 지혜자라고 자처하면서 40년 왕권으로 행사하였지만 “이지러진 것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하였으니 지식의 평가는 끝난 것입니다. 오히려 지식이 없으면 순해지고, 지식이 많으면 경망스러워지니 지식이 헛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1=2되는 것도 몰라야 합니까? 자급자족할 만큼은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의 지식을 반드시 유익하게만 써야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데만 쓰고 죽이는 데는 쓰지 말며, 법을 지키는 데만 쓰고 위반하는 데는 쓰지 말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에만 쓰고 거역하는 데는 쓰지 말며, 공익을 위하는 데만 쓰고 개인욕심에는 쓰지 않음으로써 지식의 헛됨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91과 세속적 쾌락이 헛됨 (전 2:1~11) 목록으로


본문 1절은 서론으로 “솔로몬이 계획적으로 세속적 쾌락을 누려 보았는데 헛되더라”는 내용이고, 11절은 결론으로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는데, 결국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고 무익하다”하였으니, 어떻게 쾌락을 누렸는가? 하는 점과, 왜 헛되다고 하였을까? 하는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쾌락을 즐겨본 내용입니다.

1) 지혜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술로 육신을 즐겁게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지혜로 마음을 다스렸다는 것은, 자기를 방탕에 방림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획적으로 술을 먹고 쾌락이 어떤 것인지를 시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 알아본 것입니다.

2) 어리석은 자들이 어떻게 쾌락을 누리는 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천민들)의 종신토록의 생활을 알아보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어리석은 자들은 다 세속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그것을 체험해보기 위하여 시행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돈 많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재미를 느끼나”하고 연구하여 쫓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래서 우선 사업을 벌이되 집들을 지어보았고, 포도원을 만들어 보았으며, 또 동산과 과원을 만들어 거기에 각종 과목을 심어 보았으며, 그 과목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연못을 팠고, 노비를 사기도 하고 낳게도 하여 거느려 보았으며,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보다 소와 양떼를 더 많이 가져보았고, 왕이니까 은, 금, 보배도 많이 모아 보았으며, 노래하는 남녀는 물론 처, 첩들도 거느렸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자들보다 무엇이나 더 많게 가졌고, 많이 누려보았으며, 무엇이든지 눈이 좋아하는 것이면 보게 하였고,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도 막지 않았으며, 원하는 대로 수고하고 “얻는 것을 분복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세속의 쾌락을 최대한 누려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못 누려보고는 평가를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다 누려보았고 최고로 누려보았으니까 결론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결국은 그 평가가 별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헛되고 헛되며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은 것은 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2. 세상의 재미를 많이 보았는데, 왜 그것이 헛되었을까요?

1) 과거의 복락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로 볼 때, 과거에 대접도 많이 받았고, 어떤 해는 1년에 양복 일곱 벌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퍽 흐뭇하였겠지만 지금은 갖고 있는 것도 없고, 그때에 기억을 더듬어 누리는 것도 없습니다. 결산은 인생 말년에 하는 것입니다.

2) 쾌락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수고의 값으로 얻어지는데, 수고 값에서 쾌락 값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 수고로 그 쾌락을 누리는 것일 뿐, 공짜가 없으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여 수고가 욕구충족을 다 시켜줍니까, 돈 있으면 건강 없고, 건강 있으면 돈 없고, 쾌락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3. 영원지속이 안됩니다. 솔로몬이 젊어서 쾌락을 누리다가 늙어지니 얼마나 서운하였겠습니까? 만족을 준만큼 끝날 때는 다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겠습니까? 수고로 얻는 쾌락도 계속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때가되면 죽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습니다. 제가 몸에 좋다는 것을 녹용 빼고는 다 먹어 보았습니다. 꿀, 인삼, 콤푸리, 쑥즙, 솔잎, 알로에, 홍차버섯, 구연산, 쇠뜨기풀, 잡곡차, 정수기, 알카리수 등 그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의 건강에 무슨 큰 의미를 줍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만 못합니다. 솔로몬 왕이 최고로 누려본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헛되다” 하였으면 믿어야지요. 왜 미련을 둡니까? 허리가 아파서 쓰러질 지경인데도 추석에 음식 한가지라도 더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나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평소에 세가지 놓고 먹다가 명절에 다섯가지쯤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명절기분을 신앙으로 초월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당하지 않도록 훨훨 날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을 때는 70세에 죽으나 80세에 죽으나 별 차이가 없고, 80세에 죽으면 잘 죽었다 할 것이고, 70세에 죽으면 아깝다고 라도 할 것입니다.

4. 세속적 쾌락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고(히 11:6),

5. 그 쾌락이 하늘의 상급을 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란 말이 21회 나옵니다. 나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마시고, 티끌처럼 여겨야 합니다(창 18:27).

결론적으로 세속적인 쾌락을 멀리 하십시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로가 넘칩니다(고후 1:5). 그리고 또 쾌락을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바꾸세요. 그래야 영원한 내세의 영광이 더 많은 것입니다(롬 8:18, 벧전 3:14).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2:24, 빌 3:8)하신 말씀을 깊이 음미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92과 모든 것이 헛됨 (전 1:1~11) 목록으로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은 솔로몬을 뜻하고, 그는 ‘전도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주전972~932년에 재위하였고,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면서(왕상 3:12~13, 대하 1;12) 3,000잠언과 일천 노래를 지었습니다(왕상 4:32). 그가 1,000명의 후궁을 거느렸었고(왕상 11:3), 현세에서 마음으로 누려보고 싶은 것은 다해보았다고 하였습니다(전 2:1~11). 한때에 노회장하는 경쟁이 대단하여 제가 그 당사자에게 “별 것 아닌즉 서둘지 말라”하였더니, “당신은 해보았으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일 뿐, 당신도 안했으면 나와 같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경험자의 말을 참고하면 좋은 발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영광을 전무후무로 누린 솔로몬 왕이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이 헛되다”하였으면 그대로 믿고 헛된 것에 집념하지 말고 헛되지 않은 것에 집념한다면 인생의 큰 보람을 찾을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헛됨을 5회나 강조한 것은 대단한 강조요, 전도서 12장중에는 37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헛되며 헛된 뜻”은 무엇입니까? 헛된 것은 이 세상(현실)이고, 인생자체이며 또 인생이 경영하는 일들입니다. 이 세상이 헛된 것은 자연현상의 변함이 없는 것이고(매일 보는 것 그대로), 인생자체는 유한하며, 인생의 경영하는 욕구가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헛되다”는 뜻은 “별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김동길 교수님의 말을 빌리면, 옛날에 어떤 선비가 큰 공을 세워 비석을 세워주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니까 개가 그 비석에 볼일을 보더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공적을 세워도 그때일 뿐 지나가면 소용이 없고 보존해주거나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부모의 사진이나 유품도 보존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4.19이후에 철거되었고, 후세인의 동상이 참화당하는 꼴을 보며,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았다면 벼슬도 헛되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따라서 무엇이 헛된지를 살펴보면

1. 3절에서 “사람이 해아래서(세상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하셨으니, 이 말씀은 인간의 현실적 수고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킴에 있어서 헛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수고를 많이 해도 성취감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는 한정이 없고, 현실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영광목적을 다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더욱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창조자의 목적을 따라 영광을 돌리려면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것이고, 해 아래서의 현실적 수고는 인간자신의 삶을 위한 것일 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2. 왜 그렇게 인간의 수고가 헛될까요?

1) 먹고 살기위해서 수고하는 것인데, 사람 사는 생활이 계속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또 별 재미도 없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사람 아닌 동물들도 스스로 해결합니다. 인간이 수고하여 굶지 않고 살았다면 스스로 식생활을 해결하는 동물수준에 오른 것뿐인데, 그것으로 수고하다가 죽는 인생이 대부분이면 헛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한 인생이 꾸준히 사는 것이 아니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기 때문에 연속이 안되는 것은 땅이 영원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시에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오니, 산은 옛 산이로되 인걸은 간데 없네”한 것처럼, 사람이 살다가 없어져 버리니까 헛되고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분들이 그립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도 “청년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아무리 가난했어도 굶지는 않았고 밥맛은 좋았습니다. 지금 생활은 사실상 옛날만 못합니다. 정신만 복잡하고, 운전을 하면서 졸아야하고, 전화를 받아야 하는 세상이 무엇이 좋습니까? 그러니까 힘들게 살아보았자 욕구충족은 안되는 것입니다.

3) 영원히 있는 땅과 우주가 새것을 나타내 주지 않으니 별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늘 보는 그 자연, 늘 경험하는 사시사철, 매일 아래로만 흐르는 강물(5~7절), 매일 보는 것 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만물이 피곤해 보임(8절)은 생태계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8절).

4) 인생의 한정 없는 욕구를 채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8절에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으며, 해 아래는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8~10절). 솔로몬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이시대의 사람들이 솔로몬처럼 살아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명이 새것인 것 같아도 근본적인 새것은 없는 것입니다. 쇠고기보다 더 맛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 한 세상은 새것이 없는 줄로 아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5) 그리고 이전 세대를 계속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요즈음 장례문화를 바꾸려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잘 매장한 무덤들이 다 없어져가고 있고, 역사는 순수하게 보존되지 않으며, 사람 사는 세계는 늘 소용돌이치며 변하고 있은즉,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히 인간의 욕구를 채울 것이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솔로몬은 태평한 시대에 40년 집권을 하였지만, “굽고 이지러진 것을 펼 수 없었다”(15절)하므로 바른 세상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나타냈으니, 그 인생과 그 생활이 어찌 헛되지 않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보람을 찾아야한다”는 뜻입니다.

 

12. 복에 대한 말씀

제93과 복 받기를 사모함 (시 2:11~12) 목록으로


여러분 복 받기를 사모하십니까? 종이 주인을 잘 만난다는 것은 그 종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복을 받아야 형통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정신을 갖고 거기에 매달려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분당의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TV설교를 하면서, 어린아이와 놀이기구를 탔는데 너무 높이 올라가고 흔들리는 바람에 아이가 울고 놀랄 것 같아서 “하나님 무사히 내려가게 하시면 5만원 감사하겠습니다.”하였다가 또 무서움이 계속되니까 “20만원 감사하겠습니다”하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시지 않지만 의지하는 자 입장에서 그만큼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내려오고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67세라도 아직 손주가 없는데 둘째딸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였는데, 기침을 하는 감기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임신 중에 약을 먹을 수 없은즉, 기도할 것밖에 없다하고 저와 제 아내가 두세 차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기침이 나았느냐? 하니까 “좀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임을 믿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평안할 수 있다”는 다짐을 또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많이 안 살았는데도 두려움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지요. 그러나 저는 인생을 70년 가까이 살면서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늙었으니까 연약하고, 살날이 적으니까 실수로 망하지 않아야하고, 또 우리 주위에는 속이는 일과 위험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주심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어떤 자에게 복을 주시며, 또 어떤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지를 성경에 나타난 대로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복 받은 대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시 29:11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또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은 성도입니다. 우선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큰 은혜와 복으로 여기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일반인들에게도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다”하셨으니, 이 복은 특별한 것입니다. 광야 40년에 주신 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 같은 복을 뜻하겠지요.

2) 잠 10:6을 보시면 “의인의 머리에 복이 임한다”하셨고, 시 1:1에서도 “죄를 멀리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의인은 계명 지키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비롯하여 신앙과 충성의 계명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이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시 73: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하셨고,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와 동행하시고, 또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 3:20, 시 73:23).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세속을 멀리하셔야 하고, 다음에는 정의로운 길에 서야하며(잠 8:20), 또 다음에는 기도하고 성경연구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시 1:2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4) 시 112:2에 보시면 “정직자의 후대가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진실이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거짓을 말할 수 없어서 죽는 사람이 많아야하고, 거짓을 회개하지 않을 때나 속이는 일을 일삼을 때는 중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롭고 진실한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직자의 후대에 복을 주신다”는 뜻은, 그 조상이 정직하게 살다가 상을 못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 후대에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5) 시 84:5에서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생활을 장애물 없이 할 수 있는 성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주일 지키는데 장애가 없고 예배드리는 데도 장애가 없는 환경을 가진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6) 잠 16:20, 시 2:12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항상 자기를 약하게 여기고 세상의 죄악과 재난을 두렵게 여깁니다. 그래서 늘 “주여 주여”하며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7) 창 12:3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복 받을 일이 많지만 여기까지만 생각하시고,

2. 다음에는 무엇에 복을 주시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출 23:25에 보시면 “물에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식물로 인한 질병을 예방 해 주시는 뜻).

2) 신 14:29에 보시면 “범사에 복을 주신다”하셨고,

3) 신 23:5에서는 “저주도 복이 되게 하신다”하셨으며,

4) 신 28:1~14에 보시면 더 많은 복이 열려있는데,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시고, 성읍이나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들어가도 복 받을 수 있고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으며(이 뜻은 장소와 환경에 구애가 없다는 뜻), 소생(자녀들)도 잘되고, 목축이나 농사도 잘되며(28:4, 11), 떡반죽 그릇에도 복을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비도 적당하게 주시고(12절) 꾸러다니지 않게 하시고 꼬리가 되지도 않게 하신다”(13절)고 하셨습니다. 또 8절에 보시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도 복을 주신다”하셨으니, 자신감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에게 주시는 복(약속된 복)을 확실히 믿으시고 힘있게 출발하신다면 “반드시 복이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94과 행복을 찾읍시다 (신 10;13) 목록으로


제가 청남대에 가서 50년 전에 사용하던 풍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수주일의 의미”란 제목으로 설교를 꾸몄는데, 성수주일의 의미를 영적 은혜의 재충전으로 설명하면서 꺼져가는 장작불을 풍구질하여 활활타게 하는 것처럼 심령을 일깨우는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무엇을 보고 듣던지 그것을 신령한 은혜의 방편으로 삼는 일에 주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 전에 TV에서 잠시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고, 또 서울에 가서 다단계 식품을 선전하는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저분의 말을 몇 가지 인용하여 “‘행복의 의미’란 제목으로 설교를 꾸며야 하겠다”하였는데, 그때 들은 것을 메모해 놓지 않은 것 때문에 막상 말씀을 준비하려니까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행복에 대한 설교를 해야하겠다”는 충동을 느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제목은 “행복을 찾읍시다”인데, 성도가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생각과 지혜를 주십니다. 행복은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성경에 행복(마카리스오스)이란 말씀이 세 번 나오는데(신 39:29, 롬 4:9), 이 행복을 누가 누리느냐? 에 따라 목적과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행복을 하나님이 주신다”하셨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복되게 하신 의미”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주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복은 성도에게 주시는 행복일 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략 어디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치한 생활, 안일한 생활, 사람이 알아주는 명예에서 가장 많이 느낄 것입니다. 사치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안일하려면 직업이 좋아야 하며, 명예를 얻으려면 출세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런 세계에 목표를 두고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와 경외하지 않는 자의 차이는 소속의 차이와 목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취미와 행복의 차이도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에 소속을 두어야하고, 목적도 거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하나님께 소속과 목적을 두지 않고 자기와 사람의 칭찬에만 목적을 둘 것이므로 행복을 느끼는 방법과 취미에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행복을 마음에 두고 이 말씀을 기록할 때 우편물이 도착하고 그 우편물에서 행복과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때에 하나님이 저에 대하여 그만큼 섭리적으로 가까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니까 작은일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제외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어떤 장애인 교사가 자폐증이 있는 어린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만원짜리, 천원짜리, 100원짜리 돈을 놓고 “어느 돈이 가장 큰 돈이냐?”물은즉 한참 살피더니 100원짜리가 가장 크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까 자기는 100원을 갖고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엄마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이는 목적이 엄마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고, 엄마 곁에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만원짜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만 알면 이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인즉” 다른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부분들이 바로 성도가 추구하셔야 할 행복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 소속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기 때문에, 첫째 목적이 하나님 영광에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자신의 목적으로 알고 또 행복의 과제로 아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이 부모에게 예속되었음을 압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가 없듯이 부모 없는 자신도 없은즉, 부모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행복과제의 두 번째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도 중요하지만 이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이웃을 해롭게 해도 된다”는 말씀은 없지요. 그러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좋다”는 말씀은 있으니까 자신보다 이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덕되게 하는 일을 행복의 과제로 삼아야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즐겁고 보람을 가져야하며 또 행복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 찾는 의미가 많이 좁아졌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떠난 행복은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시에 기쁘시게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이웃과 자신이 함께 보람 있고 유익할 수 있도록 행복의 소재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니까 행복하다”, “내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드렸으니까 행복하다”, “내가 부족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였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나의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았으니까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행복을 추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모았고, 명예를 얻었으며, 또 어떤 목표를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또 그것을 성취하였을 때 큰 만족을 얻고 기념잔치를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일이 아니거나 이웃사랑에 관한 결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칭찬과 상급이 없을 것인즉, 그 행복도 순간일 뿐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행복은 언제나 자기 곁에서 찾을 수 있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95과 복 받는 법 (신 30:15~20, 약 1:17) 목록으로


“복 받는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 받기를 원하면서도 바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줄 아셔야 합니다. 복뿐 아니라 화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과 화를 사람 앞에 두셨다”고 하셨으니까요. 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믿지 않고 어떤 잡신이나 미신행위나 인간의 노력으로만 받는 줄 아신다면 크게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복 받는 방법도 바로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그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이 는 그분이 창조자이시고, 섭리(통치)자이시며, 구원자요,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화도 내리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심판자이시고 인생의 목적을 두고 창조하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복의 근원이 없는 줄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복 주시는 방법을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네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시는 복인데 이것을 섭리적 축복이라 하고 구원받는 복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 연고자의 덕으로 계승받는 복이 있는데, “조상의 덕으로 천대까지 베푼다”(출 20:6)하셨고, 아브라함의 덕으로 말미암아 놋이나 그 후손이 복 받은 실 예입니다.

3) 서로의 축복기도로 받는 것인데, 이는 성도가 이웃이 잘되기 위하여 서로 축복하는 기도의 덕입니다. 복음사역자가 성도를 위하고(요삼 2, 고후 13:13) 성도가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며(엡 6:19), 백성이 왕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딤 2:1~2)과 같은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종하고 계명을 잘 지키므로(선행) 복을 받는 것입니다. 신 30:15~20 본문의 뜻입니다.

조상이 덕을 축적한 것이 없으면 받기 어려울 것이고, 세상이 각박하기 때문에 서로의 축복이 목마를 수 있기 때문에 섭리적으로 받는 것과 노력으로 받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2. 복 받는 방법으로 중요한 문제는 헛된 대상을 의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신을 숭상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는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의지하려 하고, 부모가 자식을 의지하려 하며, 형제가 서로 의지하려하고, 약소국가가 강대국을 의지하며, 가장 심각한 것은 교인이 목사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과연 의지의 대상이 됩니까? 안됩니다. 시 146편에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나 방백(권세자)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도 떠나고 형제도 갈라지며, 목사님도 힘들게 사는 존재이시고, 강대국도 의지하면 빗나갑니다. 사 3:1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여전도사님이 홀로 아들을 키우다가 전도사 사례로 대학교육을 시킬 수 없게 되자 사명을 떠나 장사를 해서 대학을 졸업시켰는데, 졸업 7일 만에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시체를 붙잡고 “너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통곡한 사례가 있습니다. 유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방지해 보려고 애굽을 의지한즉 애굽이 유다를 친 사실도 있습니다(대하 36:2~4, 렘 2:36). 성경은 자기의 포학이나 힘을 의지하지 말고(시 62:10, 사 27:5), 재물(잠 11:28, 사 49:6), 친구(미 7:5), 명철(잠 3:5), 방백(시 146:3) 등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호흡이 코에 있는 인간을 의지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모실 때 아무 목사님이나 “무흠하다”하면 모시세요.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시면 더 좋지만, 설교를 잘 못해도 그 설교를 의지하지 마세요. 설교는 설교대로 듣고 설교가 부족하면 설교집이 얼마나 많고, TV설교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실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죄를 멀리하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성도가 계명대로 살면 그것이 곧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계명대로 못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화를 자초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짓는 대로 화를 당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말씀 따라 사는 자는 복이 있으니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하셨습니다. 계명 따라 사는 것과 죄를 멀리하는 것은 다 복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4. 주는 것이 복 받는 방법입니다. 눅 6:38에서 “주라 그러면 흔들어 넘치게 주신다”하셨고, 구제는 씨를 심는 것과 같으며(고후 9:6) 준다는 것은 곧 사랑의 실천으로 사랑실천을 잘하는 것이 곧 자신이 복을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이 좋은 경치를 주고, 동물, 식물을 사랑하면 또 그것들이 열매를 주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면 그들이 서로 상부상조하여 복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 20:35을 보시면 “이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5.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누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딤전 6:17, 전 5:19, 잠 13:2). 죽으면 누리지 못합니다. 건전한 믿음과 정신이 없어도 그렇습니다(약 4:13~17). 아무쪼록 하나님만 의지하시고 복 받도록 노력하여 많이 받고 많이 주며, 많이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런 인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요셉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됐으니 많이 받았지요. 그 다음에 자기 가족 75명을 먹이고 그 자손의 삶을 430년 유지시켰지요. 그리고 자기는 110세까지 누리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제96과 모든 것을 더하심 (마 6:33~34) 목록으로


지금 읽은 본문으로 증거한 글이 몇 곳에 있는 줄 압니다. 강해문에도 있고, 설교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또 기록하고 증거하는 이유는, 제가 쓴 글을 전체적으로 안보시고 7분10집만 보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고, 또 한 가지 강조하는 점은 “이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의미를 보충하려고 한 것입니다.

1. 이 본문의 ‘먼저’란 말씀에서 성도는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수 있어야함을 강조합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의복을 입는데 순서가 있고 집을 지을 때 순서가 있듯이 매사에 순서가 있습니다. 성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부터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잘되는 것과(요삼 2절), 믿음이 좋아지는 것과(마 9:29, 막 9:23),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시 73:23, 약 4:8)을 먼저 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먼저 할 것을 먼저 하라”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그 순서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먼저하고 예배를 먼저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을 반드시 먼저 하십시오.

2.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하셨으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무엇이며, 또 그것들을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하는가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은 마귀의 나라이고 세상의 나라이겠지요. 눅 4:6~7을 보시면, “세상의 나라는 마귀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마귀에게 절만하면(마귀의 뜻에 따라 불법을 행하면) 다 준다”고 하였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서는 나라(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세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세계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개인생활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고 주님과 동행한다면 그 세계는 개인적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성도개인이 예수님을 모시고 개인적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때 큰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이 믿음으로 화합하여 주님의 뜻에 복종하면 그것은 가정적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 믿는 성도의 단체가 주님 뜻대로 사는 세계는 교회적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마귀의 유혹을 떠나서 주님의 뜻 안에 있고 주님과 함께하면 이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의 천국입니다. 그곳은 죄가 없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나라(즉 내세천국)는 구하여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하여 가는 하나님 나라는 지상세계에서 최대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과 동행하는 세계인데, 주님은 그런 세계를 먼저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2) ‘그의 의’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의’이지요. 여기의 의는 뜻 의(意)자가 아니고 옳을 의(義)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시겠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계명으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옳지 않은 길이나 장소에는 계시지 않습니다(잠8:20). 세속적인 곳에 하나님이 안계실 것이고, 죄짓는 곳에도 안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에 맞는 곳에만 계시고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것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구한다’는 의미는 ‘주여 주여’하며 기도로 구하는 뜻이 아니고, 추구하는 노력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잘 지키고 옳게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 의를 구하는 뜻이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른 의미의 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의”입니다. 롬 8:30에 보시면 ‘의롭다’하셨고, 롬 4:11에 보시면 ‘믿음으로 된 의’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의는 ‘옳게 사는 의’가 아니고, “죄인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고, 또 벌 받을 입장에 있는 것인데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을 때 “네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대신 갚아 주셨은 즉,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는 벌 받을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포해주신 의인 것입니다. 성도는 다 이런 의를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구해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고 옳게 사는 의는 추구하므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하셨으니,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현세적 문제에 관한 축복인데 여기의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을 보면 “이미 주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미 필요한 것을 주셨지만 더 풍족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의 “더 주시고 풍족하게 하신다”는 뜻이 결코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시는 뜻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족을 배우라”하셨고(빌 4:11)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후 6:8)하셨으며, 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하시고(마 6:11) “부하게도 마시고 빈하게도 마시며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 하라고 가르치신 하나님이 그 분수를 넘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이란 필수적 요건, 생존에 관한 것, 적당한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을 주셔서 취급하게 하실 때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서 섭리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할일에 유의하시고 그 나라와 그 의의 뜻을 말씀 드렸으며, “더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제97과 매일의 복된 생활 (약 4: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는 것은 “매일 매일 복된 생활을 하시자”는 것이고, 그 복된 생활이 무엇인가? 를 알려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잘 사는 것이 그 인생을 잘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잘 사는 것은 그때그때 주어진 시간을 명분 있고 생산성 있게 썼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내일 일을 모르니 그날에 충실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34, 히 3:13). 6일 동안 집에서 살고 7일째 교회에 나온 것은 한주간의 생활을 점검하고 재충전하는데 있다고 보셔야할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의 뜻을 살피면

1) 사람의 1년 계획이 보장성 없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계획 세우다가 죽는 사람도 많고, 좋은 집을 지어서 7일 살고 죽은이도 있습니다. 하물며 1년을 도시에 가서 유하며 장사하는 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돈을 벌려는 계획에도 보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안 벌어질 수도 있고 벌었지만 저축이 안 되는 경우도 있으며, 오히려 벌어놓은 돈이 화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은 내일 일을 모르는데다가 인생 자신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루하루씩 충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충실한 생활은 “무엇이나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요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허탄한 자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주의 뜻대로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규칙적인 생활을 잘하면 됩니다. 적당한 식사, 적당한 활동, 적당한 휴식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매일의 복된 생활도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중심 생활입니다. 하나님 중심 생활에서 세속으로 끌려가면 여지없이 하나님 중심 생활은 망가지게 되고, 그 대신 온갖 세속의 우수사려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덮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의 복된 생활을 위하여 주신 말씀 네귀절을 늘 기억합니다.

1) 신 28:6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이래도 복 받고 저래도 복 받으며 들어와도 나가도 어디서나 잘된다”는 말씀이고,

2) 시 1:1~3로 “성도가 죄를 멀리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면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한다”는 말씀이요,

3) 마 6:33로써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이고,

4) 요삼 2절의 “영혼이 잘될 때 범사와 건강도 잘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의 공통된 의미는 “믿음중심의 생활을 잘하면 현세복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복되고 희망적인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어떻게 하여야 매일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역자는 딤전 4:13에서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성도는 교역자처럼 말씀에만 착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매일의 복된 생활

1) 항상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묵상합니다. 이런 하나님, 저런 하나님, 선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선민에게 벌도 주시는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성도의 적을 벌주시는 하나님, 이적으로 벌주시고 복주시는 하나님, 악인을 강퍅케하여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 능력을 전파하게 하시는 하나님, 성도와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등등 말씀으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은 시 1:2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크게 복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일 집이 없다면 어디서 살며, 양식이 없다면 무엇을 먹으며, 시내버스가 없다면 어찌 가며, 햇빛이 없으면 어찌 살며, 공기가 없으면 어찌 숨쉬며, 생명이 없으면 어찌 낙을 누리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저것을 다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 “족한 줄 알라”(딤전 6:8)는 말씀은 있어도 “부족을 느껴 짜증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출애굽 때 그런 짜증하다가 벌만 받았지요(출 16:8, 17:7~8).

3)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느 8:10을 보시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애인을 기뻐하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는 두려움과 복종과 섬김이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뻐할 때는 자기만족이 따르는 것입니다. 과연 이 만족이 현실적 만족을 능가, 초월하는 지를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항상 부탁기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 26:41)는 말씀도 있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도 있으며, 인생은 연약하기 때문에 항상 실수와 연약이 붙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주여 주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5) 자기 생활, 자기 십자가(현실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마 16:24에 보시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의 뜻과 자기의 목적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자신이 감당할 책임)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를 매일매일 충실하게 이행하실 때 그 생활이 복된 생활이고 정리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분의 설교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매일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98과 세 가지 축복⑴ (요삼 2절) 목록으로


‘세 가지 축복’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의 영혼이 잘되는 복(신령한 복,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복), 범사가 잘되는 복(물질 사업, 대인간계의 복), 강건의 복(정신과 육체의 건전함)도 세 가지 복인데, 사도요한이 이 세 가지 복을 간구로서 축복하였습니다.

1. 저도 여러분들이 이 세 가지 복 받기를 기도합니다.

1) 영혼이 잘된다는 뜻은 믿음이 좋아진다는 뜻이고, 믿음이 좋아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고 만사가 다 주님의 뜻 안에서 OK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을 많이 아셔야하고, 그 하나님을 성경으로 아셔야 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아버지 역할을 하시도록 그 관계가 민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되고 성령 충만과 구원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범사가 잘되는 일은 사업이고 물질인데, 그 사업과 물질은 반드시 대인관계의 상부상조를 통해서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사람 사랑하는 분야로 생각하였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야이고) 땅도 사랑하면 좋은 경치를 주고, 나무도 사랑하면 열매를 주며, 짐승도 사랑하면 보답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 사랑이겠습니까? 계명의 강령은 하나님과 이웃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마 22:36~40). 모든 인간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면 그 사랑의 댓가가 씨를 뿌린 것처럼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사업과 모든 일이 잘되어 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3) 다음에는 강건의 복인데, 이 복은 누리는 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강건해야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강건이란 정신 건강과 육체건강을 아울러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건강하고 범사가 잘되어도 정신이 강건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장애인 남녀가 결혼을 하면서 자신들의 장애문제는 없는 듯이 알고 결혼의 기쁨에만 취하여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성도는 표준을 예수님이나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두지 않고 항상 현실적으로 잘사는 사람에게만 두고 항상 욕구불만에 쌓여 감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장애인 부부는 역경에서도 누리는 것이고, 욕구불만에 쌓인 성도는 은혜를 많이 받고도 누리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지 못하니까요(히 13:5). 정신과 육체가 강건해야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2.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는 세 가지 축복은 “받는 복과 주는 복과 누리는 복”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1) 여러분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과 덕을 많이 나누세요(남을 주려고 하시라는 뜻). 그리고 자신도 많이 누리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잘 안되니까 문제지 하시겠지만, 가까운데 있는 복을 착각하고 멀리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을 착각합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복을 사람에게 기대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다 자기 살기에 힘들고 누구를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울 일이 없는 인생이나 권세 있는 방백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시 146:3~5).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주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시며, 은혜가 풍족하시고, 흔들어 넘치게 주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모든 인생은 축복에 대하여, 거부하시고(누구도 바라지 마시라는 뜻)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능력으로 주실 수 있으니까요(롬 4:17). 인간은 네 가지로 복을 받되,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네 가지 방법은,

① 섭리적으로 주시고(구원의 복),

② 조상이나 연고자의 은덕으로 주시며(아브라함과 놋),

성직자나 성도간의 축복기도를 통하여 주시고(본문, 엡 1:19, 약 5:16, 딤전 2:1~2),

성도자신의 믿음과 생활노력으로 받는 것입니다(신 28:1~6, 시 1:1~3, 욥 8:5~6).

주의하실 것은 반드시 자신이나, 가족이나, 교인이나, 성직자 등 인간을 기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식이 아버지께 구하여 받는 것처럼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물을 쓸 바에는 사람이 줄서 있는 물을 받아 쓰려하시지 말고 바닷물을 퍼 쓰시라는 것입니다.

2) 주는 복입니다. 이 주는 복은 사랑실천의 복이기도 합니다. 눅 6:37~38에 보시면 “성도가 이웃에게 주고 베풀면 하나님이 그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다”하셨고, 또 고후 9:6에서는 “이웃에 베푸는 것이 농부의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는 것은 곧 자신이 복을 받는 것일 뿐, 결코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놋에게 양보하고 더 큰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행 20:35에 보시면, “내가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경우에서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모든 이웃은 내가 베풀 대상이다, 내가 사랑할 대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생활이 습관화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복을 줄 수도 없고 방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에 합당한 자가 있으면 어떤 훼방 속에서라도 주십니다(출 33:19).

3) 그리고 누리는 복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딤전 6:17에 보시면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전 5:19, 단 7:18). 누리는 여건이 바로 건강한 정신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로 받고 주고 누린 대표적 인물이 요셉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므로 많이 받고,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은 것처럼 많이 주고, 또 주는 복을 인하여 더 많이 받고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99과 세 가지 축복⑵ (요삼 2절) 목록으로


뜻있는 예배를 맞이하여 ‘세 가지 축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세 가지 축복은 영혼이 잘되는 것과 범사가 잘되는 것인데, 먼저 이 복의 의미를 잘 아셔야 합니다.

1) 영혼이 잘되는 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가까이 모시면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처럼 만사형통 할 수 있습니다. 만족, 기쁨, 소망도 누릴 수 있고, 필요한 것을 공급 받을 수도 있으며, 어려운 문제도 이기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천국도 하나님의 것인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범사가 잘되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이웃과 좋게 사는 것입니다. ‘범사’라 하면 사업을 먼저 생각하실 텐데, 사업은 물질과 관련이 있고 사회적으로 신뢰와 교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사업을 하든지 이웃의 협조가 있어야 하니까 거기에는 신뢰가 따라야하고 결국은 재물과 명예의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3) 강건의 복인데, 이것은 자신의 정신과 몸의 건강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른 정신과 건강한 몸을 갖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창조자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건전한 정신이 아니지요. 또 효도나 가정의 책임을 모르는 사람도 역시 건전한 사람이 아니요, 담배꽁초나 오물을 길에 버리면서 잘못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건전한 정신이 아닌즉, 이 사회에는 잘잘못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다 정신건강의 결함자들 입니다. 따라서 육체적 건강문제는 정신건강에 비할 때 덜 중요하지만 그래도 건강하여야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 가지 축복을 깊이 생각해보면 영혼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범사가 잘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이며, 영육의 강건은 정신과 육체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축복을 어떻게 받는가? 할 때,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 가장 좋은 방법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서 대구를 오려면 버스, 기차, 비행기 편이 있고 기차도 세 가지 종류가 있지요.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을 시간에 맞추어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복 받는 방법도 그런 것입니다.

1)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 직접 부탁하고 직접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간에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잘 안될 때가 많고, 잘되도 신세를 갚아야 하니까 불편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갚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베푸신 줄만 알고 믿음으로 감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하신 말씀이 바로 직접 구하고 체험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2년째 식생활을 혼자 해결하는데, 채소만 먹다보면 두 달에 한번쯤 고등어찌개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한지 24시간도 안 되서 고등어 매운탕을 갖고 오는 분이 있습니다. 생각이 없을 때는 안 가져옵니다.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다른 사람을 감동하여 보내주시는 것입니다(시 103:14, 히 4:16, 렘 32:17, 학 2:7). 그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면 사람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할 때,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연약하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대상도 못되고 오히려 사랑 받기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은혜는 하나님께 구하고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을 베풀 대상으로만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사람은 다 사랑의 대상일 뿐이고 은혜와 복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받는 믿음을 키우셔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뜻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씀수요 잘하는 것, 성령 충만한 것, 교회생활에서 만족 느끼는 것, 기도로 깨어 있으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등일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게 되는 데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섭리적으로 받는 것도 있고(요 15:16), 자신의 성실한 노력으로도 받을 수 있으며(대하 17:9 욥 8:5~7, 마 7:7), 또 성직자나 이웃의 기도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섭리적으로 받는 축복이 가장 크고, 노력으로 받는 복이 그 다음이며, 이웃의 기도로 받는 것은 가장 적은 것입니다. 남 잘되라는 축복을 많이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이 축복한 것처럼 저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과 해당 교회와 기관이 다 잘되기를 축복합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 다음의 일은 다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와 강건도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의 샘물을 퍼쓰려면 경쟁, 싸움, 혼란만 있고 넉넉한 물도 못쓰겠지요. 거기에서 갈등과 불화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샘물대신 바닷물을 퍼쓴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웃끼리 갈등할 이유도 없고, 풍성한 물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축복은 무한한 중에서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고, 이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의 대상으로 수용할 때, 진리 안에서 큰 자유와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더 행복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100과 영혼이 잘됨 (요삼 2절) 목록으로


사도요한은 그의 성도(자녀)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축복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혼이 잘되는 문제”를 연구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하셨고, 주야로 묵상하며(시 1:2) 또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일이라”(벧전 1:10)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구상하는 일은 기도나 소원을 묵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은혜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영혼이 잘됨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있는데, 그중에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정신(이성) 계통을 의미하는가? 믿음 계통을 의미하는가? 할 때, 영혼은 두 역할을 다 하니까 믿음과 이성역할이 다 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신앙의 역할의 순서는 먼저 신앙역할이 앞서고 그 다음에 이성역할도 잘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습니다”(요 6:69)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또 연구의 대상도 되십니다. 따라서 “영혼이 잘된다”는 뜻은 성도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즉 가까이 모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의 많은 혜택을 받아 누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잘되는 것을 건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진대사만 하는 건강이 있고, 또 하나는 힘을 써서 활동하는 건강이 있습니다. 쌀 한가마를 옮길 수 없는 건강은 건강 축에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이 잘된 것도 구호로 외치는 믿음이나 제도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생활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가까이 누리는 믿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영혼이 잘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사도의 축복만 있고 노력하는 방법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성직자의 축복이나 성도의 축복도 필요하지만 노력에 따라 더 잘될 수 있습니다. 시 23;8을 보시면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말씀이 있는데, 누가 소생시키느냐 하면 “목자되신 하나님이 소생시킨다”고 하셨습니다. 소생이란 죽어가는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풀이 다 말랐는데, 비가 온 후 하나씩 싹트는 것을 소생이라고 합니다. 겔 47장에 보시면 “성전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강물을 이루고, 그 강물이 통하는 곳에 수목과 어족이 살고 실과와 약재료가 재배된다”고 하셨지요? 그 생수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4:4).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먹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말씀의 공급을 받지 않으면 영혼과 믿음은 좋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곧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자신을 만물과 성경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만물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자연통치의 섭리들을 깨닫고, 성경으로는 구체적인 면에서 구원의 섭리와 인류통치에 대한 것과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을 연구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을 확립할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이 잘되는 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말씀으로 주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맛을 아십니까? 성경의 맛을 모르시고야 어찌 날마다 묵상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밥 냄새의 특이한 맛을 모르면서 하루 세끼 먹는 사람이 많은줄 압니다. 그러나 말씀의 맛만큼은 아셔야 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시 119:103)라고 하셨고, 히 6:4~5에서는 “하늘의 은사와 선한 말씀을 맛본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맛을 알라”는 말씀은 “끌리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끌려야 영혼이 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 설교나 성경공부에 중심을 두지 않고 예배만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성경이 예배도구일 뿐 자기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입니다. 그 개인적 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말씀이 하는 것입니다.

4. 왜 성경이 영혼을 잘되게 하는가? 도 아셔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령받으면 영혼이 잘될 수 있지 않은가? 하시겠지요. 혹 말씀의 맛을 모르거나 성경에 마음이 열리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만 힘쓰는 성도가 있지요. 이 경우에 성경의 맛을 아주 적은 분량부터 배워나가야 합니다. 기도가 물이라면 성경은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요 1:1)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꼭 믿음의 시작과 달음질을 성경에 두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진리와 말씀은 하나입니다(요 14:6, 17:17). 그런 중에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 14:17)이시기 때문에 진리를 앞세워 역사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요 16:13). 따라서 성경으로 예수님을 연구하시고(요 5:39), 예수님을 많이 본받은 성도가 되었을 때 그의 영혼은 잘된 것입니다. 영혼이 잘된 것은 어떤 봉사능력이나 제도적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말씀에 사로잡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고후 13:8).

 

제101과 무엇을 구할까요 (요 14:13~14, 요일 5:14~15) 목록으로


이제 읽으신 두 요절 말씀은, 성도의 간구가 힘있게 응답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고, 또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영광을 얻으시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고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만 구하라”고 가르쳤는데, 요 14:14에 보시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구하면 예수님이 시행하신다”는 말씀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응답의 중보자도 되시고, 응답의 주체도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만 되시고 예수님이 중보자 되시는 것은(마 6:9, 요 14:13) 삼위일체 원리 안에서 논리적인 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본문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신다”는 것인데, 이 ‘무엇이든지’란 것이 인간의 정욕대로 구하는 것이 다 성취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시행하신다”는 말씀 앞에 “아버지로 영광을 얻으시게 한다”는 말씀과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한다”는 말씀이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구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구하면 무엇이나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자기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요, 자기의 목적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다면 기도의 종목도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마 6:8, 32에 보시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현실적 욕구, 의식주)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하셨으니, 성도는 그런 것을 가급적 구하지 않음이 좋다는 뜻이고, 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주신즉,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과(마 6:11), 일용할 양식을 주신 말씀과(출 16:13~20), 3일을 굶고 따른 무리들에게 기적의 양식을 주신 일과(막 8:1~9),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할 줄 알라”(딤전 6:8)는 말씀은 있어도, “주택을 구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잠잘 자리가 없으면 모르되, 있으면 감히 “넓은 주택을 달라”고 구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머리둘 곳이 없어 감람산으로 가셨은즉, 그런 주님을 생각하면서 “집을 달라, 돈을 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독교인의 생활은 사치나 생활의 규모를 떠나서 형편대로 사는 것이 생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구하지 않았는데도 잘 형통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하셨습니다(약 1:15). 그러니까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기도내용이 될 수 없지요. “돈을 많이 주시면 구제 하겠습니다”하였을 때, 꼭 구제만 잘하고 떼어먹지는 않을 것인지 보장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적당하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고전 14:40). 그러니까 적당하지 않은 것도 기도로 구할 것이 못됩니다. 규모와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규모의 하나님 이십니다(골 2:5, 살전 5:14). 혹 20세쯤 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였다면, “인생경험, 사회경험을 좀더 하고 경륜을 쌓은 다음에 하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아이가 어른을 다스리는 것은 질서와 규모에 위반되기 때문입니다. 꼭 같은 행운을 놓고 두 사람이 갖고자할 때 서로 양보를 안하면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것을 나에게 주십시오”하였다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눅 11:8, 18:5에 보시면, 가난한 사람이 친구를 대접하기 위하여 떡 세 덩어리를 친구에게 빌리고자 하였을 때,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얼마나 다급하면 밤중에 와서 구하겠느냐? 그 강청함을 인하여 주리라”하셨고, 또 한 가지는 가난한 과부가 번거롭게 재판관을 찾았을 때, 그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은 두려워할 줄 몰라도 자기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들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기도의 과제가 적절하다는 말씀은 안하셨지만, 연약한 자가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한 것입니다. 밤중에 온 손님을 굶겨 재울 수 없는 실정, 악한 재판관이 과부를 무시하는 사건은 아무리 구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줄 일도 없고, 또 욕심으로 구하는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강청하였은즉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구할까요? 하는 제목의 결론입니다.

1) 우선 하나님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주신 것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꼭 깨닫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2) 성도가 욕심을 떠나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면 여러 간청에서 뺄 것이 많을 것입니다. 명예적이고, 현세적이며, 경쟁적인 것들을 많이 제외시켜야 합니다.

3) 그렇다면 다급한 것만 구해야 하는데 그 구하는 종목이 하나님의 뜻에 맞여야하고, 또 영광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행하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가를 잘 아셔서 구하셔야 되는데 그 종목들을 살피면, 믿음에 관한 것(히 11:6), 말씀에 관한 것(요 1:1, 14:23), 성령 충만과 열매에 관한 것(엡 5:18, 갈 5:22~33), 사명에 관한 것, 그리고 최종목표가 예수님 닮음에 관한 것(롬 8:29) 등입니다. 이것들을 포괄적으로 구한다면 현세와 육체영달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과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것을 구하여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였고, 현실적 영달의 은혜도 아울러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왕상 3:4~13).

 

13. 종교와 기독교

제102과 종교에 대한 연구 (행 17:22~23, 26:5) 목록으로


종교에 대하여 또 연구해 봅니다. 이 연구는 기독교 종교의 절대성을 이해하는데 도움되기 위하여 살피는 것입니다.

1. 성경에 ‘종교’란 용어가 세 번 나옵니다. 한번은 본문의 ‘종교성’으로, 원문에 데이시 다이모니온(δεισι δαὶμονιων)으로 표기되었고, 또 한곳은 행 25:19에서 ‘종교’란 말로 데이시 다이모니아(δεισὶ δαιμονία)이며, 또 한곳은 행 26:5로 같은 종교란 번역인데 여기에서는 드레스케이아(θρησκεία)로 표기 되었습니다. 앞에 있는 두 종교는 이방인들의 잡다한 종교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고, 뒤에 있는 종교는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라 함으로써 특별하게 유일한 종교를 말할 때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표기된 Religion은, BC106~43에 생존한 로마사람 Cicero가 “조심하여 경의를 표한다”(Relegar)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하며, 또 AD270~340년에 산 로마 황실의 교사 Lactentius는 “다시 연결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용어의 뜻은 어떤 대상에 대한 “경외와 연결의 뜻”이었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宗敎는 마루 종(높은 곳), 가르칠 교字 인즉, 수준 높은 교훈이라는 뜻이 있는 듯 합니다. 따라서 용어를 가지고 종교를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2. 그러면 종교의 뜻이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에는 “절대, 무한의 초인간적인 대상(神 佛)을 숭배, 신앙하며,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런 해석은 사전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무한능력자를 숭배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무한능력자가 아닌 피조물을 숭배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즉 그 설명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칭호에 부합하려면 숭배대상이 있어야하고, 전적 숭배의 태도가 있어야하며, 그 태도가 본능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바른 종교든 그릇된 종교이든 대상이 있어야 하고, 본능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3. 종교의 출처에 있어서 인간으로 비롯되는 종교가 있고, 신으로 말미암는 종교가 있습니다. 신으로 말미암는 종교는 초자연적 성격을 포함하고, 사람으로 말미암는 종교는 초자연적 성격을 갖지 않습니다. 신으로 말미암는 종교는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배제한 상태에서 피동적으로 믿게 되지만, 인간적으로 말미암는 종교는 지식적,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서 나타나고 인간의 연약한 특성을 이용하여 종교가 탄생합니다.

1) 원시종교는 자연의 위용을 느끼는 인간이 그 자연 앞에 연약을 느끼는 상태에서 본성으로 자연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겨서 태양이나, 물이나, 나무나, 동물들을 종교의 대상으로 삼아 발생한 것인데, 여기에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등 사물숭배 종교가 많이 생겼습니다.

2) 그리고 나라마다 신화에 근거한 종교가 있으니, 중국, 일본, 페르시아, 바벨론에 그런 것들이 많았다 하며 우리나라에는 단군신화에 근거한 ‘단군교’가 그것입니다. 신화란 막연한 것으로 그 종교를 숭상하는 것도 막연한 일입니다.

3) 유교는 조상숭배사상과 도덕성에 근거하여 생겨진 종교이고,

4) 불교는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겨진 종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뇌를 극복하기 위한 불교가 세속의 욕심을 버리면 많은 고뇌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5) 정치목적과 사상으로 생겨진 종교도 있으니, 그것이 곧 왕을 신격화 하는 종교요, 종교를 아편으로 본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왕이나 사상을 숭배하되 생명을 걸고 충성하니까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6) 여기에 또 신의 계시나 능력으로 말미암는 종교가 있는데, 잡신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무속종교가 있고, 유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종교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종교는 계시관에 따라 여러 종파가 생겼습니다. 그 종파가 바로 유대교, 천주교, 기독교, 회회교, 기타 이단종교들입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만 믿고, 천주교는 신구약과 외경을 믿으며, 회회교는 신구약과 코란경을 믿고, 이단종교는 다른 구세주와 다른 구원을 내세우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 신본주의 종교 중에 기독교가 참 종교인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신 계시만 표준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과 구속사업을 계시한 말씀이고, 신약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전개하신 표준 계시이며, 표준계시 이외에 다른 계시를 주신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요 21:25, 히 1:1, 계 22:22~23). 따라서 기독교는 천래의 계시로 인간에게 주셨고, 또 이 종교를 수납하는 믿음도 성령님의 역사와 감동으로 주셔서 믿게 하시는 종교입니다(엡 2:1, 고전 12:3). 따라서 기독교는 천래의 초자연적 종교이고, 은혜로 믿게 되는 종교이며, 죄의 불행을 씻어내고, 내세와 영생을 바라보는 생명의 종교인 동시에 절대 종교인 것입니다.

 

제103과 기독교의 특성 (행 4:1~12) 목록으로


본문을 읽으시면 “기독교의 특성”이란 제목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1절은 “사도들이 전도를 하였고”, 2~3절은 “이단자들이 핍박하고 가두었으며”, 4절은 “핍박 중에도 많은 전도의 열매가 맺혔고”, 5~10절에서는 “잘못가는 자들은 이적과 능력을 확인하고도 믿지 않았으며”, 11~12절에서는 “예수님만 구원자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특성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는 특성이 있고, 또 핍박이 있어도 믿을 자는 믿는 특성이 있으며, 셋째는 “능력 나타나는 특성”이 있고, 넷째는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1. 본문 1~3절에 보시면 “사도들은 도를 전하였는데 핍박자들은 부활의도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전도하는 종교, 즉 나팔을 부는 종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여기있다”하고 알려야 할 것을 예수님이 분부하셨고, 구원의 도리를 전도로 나타내어 열매로 거두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1, 딛 1:3). 그런데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왜 이 도를 싫어하였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율법주의 종교인들이 복음주의 종교로 가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본래 인간배경을 의지하고 살던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신봉하는 종교보다 낫거나 능력 있는 종교가 나타나도 거기에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능력 있는 분임을 알았을 때 자기의 제자들을 다 예수님 따르도록 권하지 않았습니까?(요 1:36~37) 그러나 잘못가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인기 떨어지는 것을 크게 의식하기 때문에 더 좋은 종교가 나타나도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도들 앞에 함께 세워놓고 “누구의 권세로 이 사람이 건강해 졌느냐?”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거기에 동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믿음은 이적을 보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가 살아와도 모세의 글(성경)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눅 16:31)고 하셨겠습니까?

2.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왜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면 좋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세력자들이 전도자들을 가두었었고, 17~20절에 보시면 위협하고 금지시켰는데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계속 증거를 하였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파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1) 성령님이 역사하시니까 그렇습니다. 렘 20:9에 보시면 “중심이 불붙듯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지요.

2)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부인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덮으려 하거나 왜곡시키려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 양심, 정의의 힘으로 증거한 것이지요.

3) 생명의 힘입니다. 부활이 곧 생명 아닙니까? 생명있는 씨앗이 굳은 땅을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생명의 힘은 강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

4) 상급도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너희의 받을 상이 크니 기뻐하라”(마 5:11~12)고 하셨습니다. 이런 네 가지 이유 때문에 핍박을 이기며 전도하는 것입니다.

3. 핍박 중에도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날따라 믿는 자의 수가 5,000이나 되었으니, 초대교회에 나타난 전도의 열매로는 가장 많은 수입니다. 왜 핍박받는 종교가 흥왕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섭리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위적으로 구원하거나 구원을 폐하는 종교가 아니요, 구원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달린 종교이기 때문에 선택받은 백성은 어떤 여건에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핍박과 구원은 시간문제일 뿐 궁극적 목적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4. 능력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이 나타난 것은 기독교에서만 나타난 특성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종교는 없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이 요즈음 무슨 이적이 나타나느냐? 하실지 모르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연계의 이적과 인간이 상상 못하는 이적을 많이 베푸신 것을 믿으셔야 하고 또 깨달으셔야 합니다. 높은 APT에서 떨어진 아이가 죽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이 이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상상이외의 사건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이적에 속하는 것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유일무이한 구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만 구원의 종교란 뜻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자를 주신 일이 없다”하셨으니까, 예수님만 믿고 구원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이름, 다른 방식, 다른 구원, 다른 천당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구원, 다른 방법을 갖고 와서 기독교와 합하자고 할 때 합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지도 않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종교의 통합은 제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의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성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104과 기독교이 세 가지 성격 (엡 5:15~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기독교를 잘 주의하여 깨닫고 세월을 아끼며 주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아는 지식과 생활을 점검하면 주님의 뜻에 위반되는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시간에는 “기독교의 세 가지 성격”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세 가지 성격은 절대성과 충족성과 제한성입니다.

1.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독교를 절대종교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절대종교를 믿으면서도 이단을 무서워하고, 잡 종교를 억세게 의식하며, 때로는 그것들로 인하여 크게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종교를 믿는 자 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반드시 이단이나 귀신들 앞에서 허리 펴고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어느 신이나 잡종교가 하나님을 따를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은 모든 사정을 아시고 거기에 적절히 대처하시는 분입니다. 풍랑이 일어나도 큰 배만 탔으면 문제없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만 증거하면 진리 아닌 자는 자동적으로 가려지는 것입니다.

2. 기독교의 충족성입니다. 충족성이란 성도 개인 개인에게 충만한 자유와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어떤 단체나 국가에 충족한 은혜를 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선민국가제도가 있을 때, 이스라엘 나라에 태평성대를 주신 때가 있었지만 계속되지 않았고, 또 현재 기독교가 성행한 나라들이 있지만 그 국민들이 다 만족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령한 단체인 교회도 교인 전체가 다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가 단체적으로 충족을 주는 종교는 아닙니다. 다만 성도 개인에 대하여 그의 믿음에 따라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주시는 종교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을 드려볼까요? 우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막 9:23)하셨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즉 내게 부족함이 없다”하셨으며,(시 23:1) “진리를 알면 자유가 있다”하셨고(요 8:32),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고 소망이 항상 있다”(고후 4:9, 고전 13:13)하셨으며,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며”(마 6:8,32, 히 4:16) 병을 고쳐주시고(출 15:26), 환난에서 건져주시며(시 50:15, 40:1~2), 인도해 주시고(민 27:17),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하시므로 어떤 어려움에서도 충족할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도 원망하지 않았고(욥 1:21), 하박국은 가난 중에서도 기뻐하였으며(합 3:18), 바울은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였고(롬 5:3),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8). 여하튼 기독교는 믿는 성도에게 모든 은혜를 충만하게 주셔서 큰 만족을 누리게 하실 수 있는 종교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에 문제가 있거나, 은혜 받는 방법에 문제가 있거나, 대인관계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은 까닭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고, 모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란 것을 확고하게 실행하신다면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갈등이나 교역자와의 갈등은 없어져야 합니다. 갈등이 있으면 사랑으로 치료하고, 사랑으로 치료할 일이 아니면 갈등을 피하여야 하며, 교역자는 성직을 이행하면서 물질적, 명예적 이기주의에서 완전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생활의 충족성을 맛보시게 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넉넉한 종교를 믿으면서 핍절하면 안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기독교의 제한성입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가 만인을 다 구원하고 세계를 다 정화시켜야 할 줄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성도의 빛된 생활이 있는 부분만 밝은 세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도 세상이 다 밝아지기를 바라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부분만 구원하시고 예수님이 제한적으로 속죄하셨으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의 대상을 성도에게 국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부흥되고 성도가 많아지면 더 밝은 세계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것으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일 뿐 온 세상이 다 빛되기를 바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섭리적으로 말세에 죄가 관영하고,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면서(눅 18:8) 세상이 어두움으로 끝날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 6:13,14)하시고, 또 계 22:11에서 말씀하시기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내가 속히 오리니…일한 대로 갚아주리라”하신 말씀은 세상이 다 정화되지 않고 망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전체구원이나 전체정화에 목표를 둔 종교로 아셔서는 안 되고, 택한 백성의 부분에 한하여 빛된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이며, 또 세상은 영원히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버리실 것이고, 성도와 함께 설립하신 천국만 영원히 보존하여 영광의 세계를 삼으신다는 점에서 제한성을 띠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전체적으로 다 잘되기를 바라지 마시고, 또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크게 상심하시지도 말며, 오직 모든 성도가 자신의 거룩을 지키는 일에만 노력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제105과 종교사업자 시몬 (행 8:9~25) 목록으로


본문에는 “빌립의 사역과 시몬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시몬은 일종의 종교사업자 였습니다. 요즈음도 종교를 앞세워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독교는 사업을 밀어주는 종교가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하겠기로, 제목을 “종교사업자 시몬”으로 정하였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전달함에 있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는 말씀도 유의하셔야 하고, 사도들에게 “은과 금이 없었다”는 말씀도 유의하셔야 하며(행 3:6), “복음사역에 생필품을 주신다”(마 10:10, 고전 9:9)는 말씀이 있으니까 대가를 받아도 되는 것이 있는데, 종교적 은사를 받아서 그것을 돈버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거나 죄가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사마리아 도성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가 마술을 잘하여 “자칭 큰 자라”하였고(9절),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0절)는 칭송까지 받았으니, 그는 마술, 요술, 속임수로 인기의 덕을 보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의당히 돈을 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빌립’이 전도를 하러 왔습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같은 시간에 안수를 받고 봉사역군이 된 사람인데,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50리 떨어진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말씀을 증거하면서 귀신들린 자, 중풍병자,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으니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을 만큼 전도의 효력을 본 것입니다. 이때에 시몬의 마술에 따르던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와 이적에 놀라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으니까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전심으로 따라다니며 표적과 기적을 보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마술로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줄 알았는데, 마술로 할 수 없는 능력이 나타나니까 마술사로써는 더욱 큰 실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사마리아에 부흥이 있다는 소식을 사도들이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그곳에 가서 이적만 나타났을 뿐 성령받은 일이 없음을 알고 성도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한즉 사도들의 안수와 함께 성령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으로부터는 병고침의 이적만 타나났는데 사도들의 안수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으니, 이것은 한 단계 더 높은 은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의 “성령을 받았다”는 뜻은, 행 2:1~4에 나타난 오순절 성경강림의 역사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마음의 감동은 물론 몸으로 느낄만한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18절에서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하므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시몬이 보기만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체험을 하였는지는 기록된 바가 없으나, 시몬이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닌 상황을 보면(13절) 우선적으로 체험을 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 6:4에 보시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지상교회는 가라지가 용납되니까(마 13:29~30) 빌립이 믿고 따르는 자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 원곡식과 가라지를 선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가룟유다가 열두제자에 오른 것과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을 참 믿음은 심령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고, 표면으로 나타나는 실천은 진실일 수도 있고 외식일 수도 있는 중, 여기의 시몬의 경우는 외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충만 받는 것을 보고, 즉시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장사꾼이 이 남는 장사가 있다면 왜 안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에게 “내가 돈을 줄터이니 그런 권능을 내게도 주어서 내가 안수하는 자에게 성령을 받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청원을 한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가치와 하나님의 가치가 같으며 그 신령한 은사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고, 사도들도 돈이면 다 들어주는 장사꾼처럼 오해를 하였으며, 또 쉽게 표현하여 신앙생활이나 전도사역을 한낱 장사수단으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구령사업은 헌신하는 것이고 피할수 없는 은혜의 소득으로 생활(의식주)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소득수단이 아니란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시몬은 마술사의 사업적 심리를 영적사업에 그대로 적용해 보려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모독한 일이고, 또 사도들을 돈버는 사역자로 무시한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성령)을 돈주고 살줄로 알았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하라, 하나님 앞에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진리와 상관없고 분것도 없다.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사하여 주실 것이다”한즉, 시몬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므로 이런 저주가 임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 매듭을 사도들이 풀어주었다는 말씀은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무지한 범죄와 탐심의 죄는 시몬이 졌고, 사도들은 저주와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아울러 시행하였으니, 그 다음에 시몬의 회개가 철저하였다면 저주가 면제되었을 것이요, 그것이 미흡하였다면 사도들의 저주가 그대로 유효할 것입니다(마 16:19).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몬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이지요. 시몬은 마술로 인기를 얻어 먹고 산 사람인데 더 큰 능력이 나타나니까 그것을 사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다가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갈 5:13에서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하셨고, 엡 2:3에서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질과 세상은 허탄한 것인데,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는 성도가 교회나 신령한 은혜를 자기의 사업에 이용하려고 한다면 천부당만부당한 것입니다. 믿음발전을 구실로 장사를 하되(교환) 개인 정욕을 위하여 덕을 보려하면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