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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의식)설교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부 신년 설교 10


제1과 시작할 때 확실한 것 (히 3:14) 10 바로가기

제2과 잘 사는 인생 (시 90:12~17) 13 바로가기

제3과 신년 목표 세 가지 (롬 12:1~2) 15 바로가기

제4과 새 출발의 교훈 (롬 12:1~3) 18 바로가기

제5과 성도의 생활 목표 (고후 13:8) 20 바로가기

제6과 성도의 네 가지 책임 (벧전 2:9~10) 23 바로가기

제7과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1~24) 26 바로가기

제8과 성도의 가치관 (빌 3:5~9) 28 바로가기


제2부 고난주간의 설교 31


제9과 예수님의 고난 (히 2:9~10) 31 바로가기

제10과 어린양을 보라 (요 1:29~34) 33 바로가기

제11과 십자가 중심 생활 (고전 2:1~5, 갈 6:14) 34 바로가기

제12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 (막 14:17~42) 36 바로가기

제13과 십자가 곁의 사람들 (요 19:23~27) 39 바로가기

제14과 십자가의 삼면관 (사 53:1~9) 41 바로가기

제15과 다 나를 버리리라 (막 14:27~31) 43 바로가기

제16과 중보자의 고난 (히 5:1~10) 45 바로가기

제17과 겟세마네의 기도 (막 14:32~42) 47 바로가기

제18과 깊이 생각할 것 (히 3:1) 49 바로가기

제19과 재판을 받으심 (막 14:43~65) 51 바로가기

제20과 십자가의 7언 (눅 23:34, 46) 55 바로가기

제21과 십자가를 바라봄 (요 19:23~27) 57 바로가기

제22과 십자가의 고난 (마 27:27~50) 59 바로가기

제23과 십자가의 현장 (1) (마 27:27~44) 61 바로가기

제24과 십자가의 현장 (2) (마 27:45~56) 65 바로가기

제25과 운명하신 후에 있은 일 (마 27:51~66) 68 바로가기

 

제3부 성찬예식 설교 70


제26과 성례식과 은혜 (마 28:19~20, 26:26~30) 70 바로가기

제27과 성찬예식의 의미 (마 26:26~29) 72 바로가기

제28과 세례와 성찬 (마 28:16~20, 26:26~30) 74 바로가기

제29과 누가복음의 성만찬 (눅 22:7~20) 76 바로가기

제30과 세례에 대한 지식 (마 28:19) 78 바로가기

제31과 제자삼는 표 (마 28:19~20) 81 바로가기

제32과 십자가를 지는 자 (마 16:24~25) 83 바로가기

제33과 세례에 대하여 (막 16:16) 85 바로가기

제34과 성찬에 대하여 (눅 22:14~22) 87 바로가기

제35과 성례에 대한 지식 (마 26:17~30, 28~20) 88 바로가기


제4부 부활주일 설교 89


제36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 (요 6:64~68) 89 바로가기

제37과 부활의 진리 (요 11:25~27) 92 바로가기

제38과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요 11:25~27) 94 바로가기

제39과 2000년 부활절 (고전 15:12~19) 96 바로가기

제40과 마태가 증거한 부활 (마 28:1~20) 98 바로가기

제41과 마가의 부활 증언 (막 16:1~13) 100 바로가기

제42과 부활과 복음 전파 (막 16:14~20) 102 바로가기

제43과 마음이 뜨거워짐 (눅 24:13~35) 105 바로가기

제44과 부활의 의미와 종류 (요 11:25~27) 107 바로가기

제45과 요한의 부활 기사 (요 20:1~10) 109 바로가기

제46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요 20:19~31) 111 바로가기

제47과 세 번째 나타나심 (요 21:1~14) 115 바로가기

제48과 부활을 믿을 근거 (행 17:30~34, 26:8) 118 바로가기

제49과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2~19) 120 바로가기

제50과 부활의 참뜻 (고전 15:20~22) 122 바로가기


제5부 어린이 및 교육에 관한 설교 124


제51과 어린이 같이 되는 신앙 (마 18:1~4) 124 바로가기

제52과 어린이에 대한 축복 (마 19:14~15) 127 바로가기

제53과 어린이를 사랑하자 (마 18:1~10) 129 바로가기

제54과 주일학교 시책 (신 31:11~13, 엡 4:11~12) 130 바로가기

제55과 교육의 과제와 방도 (잠 22:6) 133 바로가기

제56과 예수님처럼 자라자 (눅 2:52) 136 바로가기

제57과 어린이에 대한 사명 (막 10:13~16) 139 바로가기

제58과 자녀에 대한 신앙 (시 127:3) 142 바로가기

제59과 어린이 교육 과제 (잠 22:6) 144 바로가기


제6부 가정과 효도와 결혼에 대한 설교 146


제60과 좋은 집을 짓자 (마 7:24~27, 신 28:1~6) 146 바로가기

제61과 고부간의 행복 (룻 1:15~18) 149 바로가기

제62과 행복한 가정 (마 12:46~50) 151 바로가기

제63과 협동의 은혜 (전 4:9~12) 153 바로가기

제64과 복된 결혼 생활 (시 1:1~3) 154 바로가기

제65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 (마 19:4~6) 156 바로가기

제66과 사명자의 가정 (벧전 3:1~7) 158 바로가기

제67과 행복의 비결 (시 128:1~6) 160 바로가기

제68과 이상적인 가정 (시 128:1~3) 161 바로가기

제69과 결혼과 성경 (창 2:18, 22~24) 162 바로가기

제70과 가정의 복 (엡 6:1~3) 164 바로가기

제71과 복된 가정 (마 19:4~6, 엡 6:1~3) 167 바로가기

제72과 효도하는 종교 (엡 6:1~3) 169 바로가기

제73과 효도의 교훈들 (엡 6:1~3) 173 바로가기

제74과 룻의 효도 (룻 1:15~18) 176 바로가기

제75과 예수님의 효도 (요 19:25~27) 179 바로가기

제76과 가정과 교회 (엡 5:22~33) 181 바로가기

제77과 혼인에 대한 교훈 (마 19:4~6) 184 바로가기

제78과 말세와 효도 (딤후 3:1~5) 185 바로가기

제79과 효도하는 법 (출 20:12, 엡 6:1~3) 188 바로가기

제7부 성령강림절 설교 190


제80과 성령충만의 결과 (엡 5:18) 190 바로가기

제81과 성령님의 역사 (요 14:16~17) 191 바로가기

제82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 (요 14:16~17) 194 바로가기

제83과 성령님의 역사 토론 (요 16:13) 196 바로가기



제8부 감사절 설교 199


제84과 감사에 대한 3대 절기 (출 23:14~17) 199 바로가기

제85과 감사의 교훈들 (시 118:1~9) 201 바로가기

제86과 감사하며 삽시다 (시 138:1~8) 203 바로가기

제87과 모든 은혜 (시 116:12~14) 205 바로가기

제88과 은혜와 감사 (시 116:12~14) 208 바로가기

제89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1~25) 210 바로가기

제90과 감사의 제사 (시 50:11~15) 214 바로가기

제91과 감사의 시 (시 100:1~5) 217 바로가기

제92과 은혜를 감사하라 (눅 17:11~19) 219 바로가기

제93과 바울의 감사 신앙 (고후 1:8~11) 222 바로가기

제94과 바울의 감사 생활 (고후 9:14~15, 골 2:6~7) 225 바로가기

제95과 감사할 줄 아는 신앙 (고후 4:15) 227 바로가기

제96과 맥추절과 수장절 (출 23:16, 심 16:16) 229 바로가기

제97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17) 232 바로가기

제98과 에벤에셀 (삼상 7:5~14) 234 바로가기

제99과 감사할 은혜 (신 32:7~12) 237 바로가기

제100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240 바로가기

제101과 네 가지 큰 은혜 (요 1:16) 243 바로가기

제102과 말할 수 없는 은사 (고후 9:10~15) 245 바로가기

제103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17) 247 바로가기

제104과 감사의 생활 (골 2:6~7) 249 바로가기

제105과 초막절의 의미 (신 16:13~17) 251 바로가기


제9부 성탄절 설교 154


제106과 성탄에 대한 지식 (마 1:18~25) 254 바로가기

제107과 동방박사들의 성탄절 (마 2:1~12) 257 바로가기

제108과 마리아의 찬양 (눅 1:46~55) 259 바로가기

제109과 사가랴의 예언 (눅 1:67~80) 262 바로가기

제110과 왕을 영접하라 (사 9:1~7) 264 바로가기

제111과 성탄과 이적 (눅 2:1~14) 267 바로가기

제112과 의미있는 성탄 축하 (눅 2:8~20) 269 바로가기

제113과 한 아들을 주심 (사 9:6) 272 바로가기

제114과 예수님의 통치 (사 9:1~7) 275 바로가기

제115과 흑암 중의 빛 (사 9:1~7) 277 바로가기

 

제10부 연말 설교 279


제116과 송구영신에 중요한 것 (시 90:12~14) 279 바로가기

제117과 어리석은 인생들 (약 4:13~17) 282 바로가기

제118과 인생의 고백과 기도 (시 90:9~15) 285 바로가기

제119과 우리가 반성할 일들 (눅 12:13~31) 288 바로가기

제120과 변화의 전환점 (히 11:24~29) 291 바로가기

제121과 반성할 것들 (갈 6:1~5) 293 바로가기

제122과 믿음의 예결산 (갈 6:1~10) 295 바로가기

제123과 반성과 목표 (빌 2:1~8, 3:13~14) 297 바로가기

제124과 반성과 결심 (롬 12:10~13) 299 바로가기

제125과 세 가지 예산 (눅 14:25~33) 302 바로가기


제11부 질병과 죽음과 장례식 설교 305


제126과 병에 대한 지식 (눅 5:31~32) 305 바로가기

제127과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 15:26) 308 바로가기

제128과 큰 자를 부르심 (마 18:1~6) 311 바로가기

제129과 죽음에 대한 예비 (눅 12:40) 312 바로가기

제130과 죽음에 대한 신앙 (계 14:13) 315 바로가기

제131과 죽음에 대한 지식 (삼상 2:6) 318 바로가기

제132과 다비다의 죽음 (행 9:36~43) 320 바로가기

제133과 성도의 생사관 (롬 14:7~8) 322 바로가기

제134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6~5:4) 324 바로가기

제135과 산 자의 유심할 일 (전 7:1~4) 325 바로가기

제136과 주 안에서의 죽음 (계 14:13) 326 바로가기

제137과 자는 자들에 대한 지식 (살전 4:13~18) 328 바로가기

제138과 성도의 가는 곳 (계 21:1~7) 330 바로가기

제139과 나사로를 깨우러 오심 (요 11:38~44, 25~27) 332 바로가기

제140과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6) 333 바로가기

제141과 죽음에 대한 신앙 (히 9:27) 335 바로가기


제12부 구국 충성에 대한 설교 338


제142과 나라를 지키는 자 (왕하 13:10~19) 338 바로가기

제143과 이스라엘의 회개 운동 (스 10:1~12) 341 바로가기

제144과 6.25의 역사적 교훈 (호 6:1~3) 344 바로가기

제145과 나라를 위한 기도 (딤전 2:1~4, 잠 14:34) 347 바로가기

제146과 제 2 의 광복을 사모함 (겔 37:15~23) 349 바로가기

제147과 민족 부활의 소망 (겔 37:1~14) 352 바로가기

제148과 3.1절의 신앙적 의미 (단 6:1~10) 354 바로가기

제149과 주께서 주신 자유 (갈 5:1) 357 바로가기


제13부 명절, 운동회, 은퇴 설교 361


제150과 절기에 대한 신앙 (호 2:11, 골 2:16) 361 바로가기

제151과 구별된 생활 (민 6:1~8, 22~27) 363 바로가기

제152과 운동회의 신앙적 의미 (고전 9:24~27) 365 바로가기

제153과 운동 경기와 신앙 (고전 9:24~27) 367 바로가기

제154과 은퇴한 복 (수 14:7~12) 369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절기 예배나 의식 설교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부활절 설교나 효도 설교에 대한 새로운 소재를 이끌어내는데 고심한 것입니다. 따라서 1년에 두 차례쯤 성례식을 하거나 감사절을 맞이할 때도 역시 그런 문제로 고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변변치 못한 글이나마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절기, 의식, 교리 설교집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1년 절기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신년과 고난 주간이 있고,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맞이할 때 성례식을 하는 경우가 있으며 5월에는 가정의 달로 어린이 교육 문제, 효도 또는 가정의 발전을 위한 설교를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성령강림절, 맥추․추수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과 연말로 이어집니다. 그 외에 의식으로는 임직식과 결혼식, 장례식이 대표적 행사인데 임직식 설교는 “전도 ․헌신 설교집”에 편입하였고, 결혼식 설교는 이 책의 가정의 부분에 첨부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구국에 대한 설교와 몇 편의 교리 설교를 첨부하였사오니 먼저 목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설교집을 정리하면서 내용의 빈약함은 물론 반복되는 내용도 있음을 발견하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밀하게 묵상하면서 꼼꼼히 읽는다면 읽는 분의 정성에 따라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남기게 된 것입니다.




2001. 11. 10.


저자 지 영 근

 

 


제1부 신년 설교

제1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히 3:14) 목록으로


오늘은 98년도를 시작하는 첫주일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① 확실한 목적으로 시작하라 ② 꾸준한 노력으로 끝까지 행하라 ③ 결과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처소에 참예하는 것이라”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는 목적이고 하나는 방법이며 하나는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시작의 때를 맞이하였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신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새출발의 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금년이 무인년인데 60년을 살아야 평생 두 번 맞이합니다. 시기적 의미가 없을 때 새로 시작하려면 더 힘들 것이고 적당한 때를 따라 시작하려면 그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날이 날아간다”하면서 “빨리 가는 날수를 계수하는 지혜를 달라”하였으니(시 90:12) 이 뜻은 “매일 매일 의미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깨워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행하였으며(단 1:8) 바울사도도 “푯대를 향하여 좇아갔다”고 하였습니다.(빌 3:14) 이 시간에 말씀드릴 제목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입니다. 시작은 하였는데 무엇이 확실해야 할까요?

1. 목표가 확실하여야 하겠습니다. 목표없는 행동은 의미가 없습니다. 길을 모르면서 여행을 떠나면 큰 고생을 합니다. 방법도 확실해야 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확실하게 알고 목표를 정한 후에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새출발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의 최고 목표가 무엇입니까?

1)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리 문답 1문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하였고,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0:31)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니까 나의 행복관과 삶의 방법도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러하였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다”(요 3:29)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현실적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을 즐거워한 것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굳게 간직하셔야 할 것입니다.

2)그 다음 목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두 번째 목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온갖 기술을 다 부려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칭찬도 못 받고 영광돌리지도 못하며 그 삶이 헛되고 심판만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디서 찾습니까? 당연히 성경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나타내셨는데 인간은 저렇게 행동하면서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많을 줄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이 대단히 희귀하게 나타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의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방법을 잘 모르고 또 하나님의 뜻이 좁은 길에 있다고 할 때 좁은 길로는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멀리 떠나 있으니 이는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많이 반성하고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목표로 정하고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3)그리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임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현실에 목적을 두면 두 마리 토끼를 따르는 격이 되고 피곤하며 죽어 성취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 안식처는 바닷 바람 신선한 동삼동이다”한다든지 “현실의 출세라”한다든지 “높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는 이것도 성취 안되고 천국가는 길도 더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출세도 하고 또 하나님이 주시면 좋은 집에서 살게 될지라도 “오늘을 사는 나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천국가는 마음가짐과 준비생활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요, 생활입니다. 히 11:9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천국 본향을 사모하여 육체의 고향에 갈 기회가 있었으나 가지 않았고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자손들과 장막에 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저희들도 우리의 목적지가 천국인 만큼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 영광, 삶의 방법은 하나님 뜻, 최종 목적지는 천국 목표입니다. 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정하고 시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어떻게 살 것이냐?하는 생활 방법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성공한 릭웨렌 목사님의 “새들백 교회”란 책을 보면 반짝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 “21세기 교회는 숫자 많은 교회보다 건강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교회가 부흥되는 방법을 연구하지 말고 부흥되지 않는 이유를 찾으라”는 내용도 있며 “교회마다 발전하는 특성이 있는데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 인물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 재정으로 운영하는 교회,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교회, 시설로 움직이는 교회, 구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사회 사업)등이 있다. 그러나 자신은 목적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교회는 성경따라 움직여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면서 생활 목표를 세워 보셨습니까? 시장엘 가도 무엇 무엇을 사와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고상한 목적을 세우셔야 할 것입니다. 고상한 생활 목적

1)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까이 좁히는 것입니다. ① 성경을 점점 의미있게 살피시고 ② 성경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③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반드시 성경에 취미를 갖고 성경 공부에 이끌려 가는 체험을 하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진리를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심령이 열려지고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옷깃 스치는 정도로 교제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기분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요 6:54) 주님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에서 뜨거운 관계로 변화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방여인 룻은 시어머니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이 패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의 신앙고백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돌아가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장사 될 것이라”(룻 1:17)한 고백은 효도의 고백이기 전에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신 뜨겁고도 확고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와 기도와 실천을 힘쓰시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접근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2)예수님 닮는 목표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적 인간의 계시자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신 분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악이 아닌데도 상대방이 나를 만족하게 못해주면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로 이기적이란 뜻이지요. 예수님이 이기적인 인물이시면 십자가에 희생을 하셨겠습니까? 저희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 모범을 잘 터득하여 본받아야 할 목표를 세우시고

3)그 다음에는 교회생활, 가정생활, 자녀양육, 경제생활, 건강생활, 대인관계에 대한 처세도 어떻게 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시행하시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불굴의 의지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만”이 일곱 번이라도 순종하였고, 베드로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진 것이 바로 의지적 결단에서 시행한 것입니다. 푼돈을 저축할 줄 모르는 사람은 큰 돈을 만들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적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실천을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믿음으로 실천하면 순종이 되고 믿음이 약한 중에서 실천하면 모험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험적으로 순종하여도 은혜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강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흐르던 물이 쌓였고, 길이 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때 길을 열어 주십니다. 강한 순종과 불굴의 실천을 계속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자전거는 전진해야 쓰러지지 않습니다. 바다의 배가 풍랑을 이기는 것도 추진력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신앙생활에도 추진력이 계속될 때 시험을 이기고 목적 성취에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적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나와 두 세 사람이 뜻을 맞추어 기도하고 충성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부흥은 싹에서부터 시작되고 때가 되어야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확실한 목표를 정하고 시작을 잘 하여 금년에 큰 변화와 큰 발전이 있으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과 잘 사는 인생 (시 90:1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잘 사는 인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년동안 잘 사신 줄 압니다만 새해부터는 더 잘 살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지음받은 인생은 소중한 것이고 또 연습이 없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목적에 따라 잘 사셔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12절에서는 “잘 사는 방법”을 말씀하셨고, 13-17절에서는 “인생이 잘 살 기 위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잘 사는 방법을 말씀드리면

1.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1)여기의 “날을 계수한다”는 뜻은 “몇 일을 살았느냐”를 뜻하는 것보다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를 점검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루 하루를 잘 살라”고 말씀하신 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과(마 6:10)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한 날의 생활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는 말씀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라”(히 3:13)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잘 사는 인생은 하루 단위로 그 날 그 날을 잘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 주변에는 세 종류의 중요한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첫째는 하나님이시요, 둘째는 자신이며 셋째는 이웃입니다. 그래서 이 삼각관계에서 잘 사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께 대하여는 믿음 생활을 잘 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셔야 하고 ② 자신에게는 만족과 보람과 기쁨과 감사와 희망이 있는 생활을 반드시 하셔야 하며 ③ 이웃에게는 부모나 형제나 친구나 먼 곳 사람이나 가까운데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이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누구에게나 사랑의 유대관계를 갖는 일에 승리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를 잘 이루어 나갈 때 그 성도는 자기의 인생을 잘 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믿지 않는 사람들이 잘 사는 표준을 생각해 보면 ① 고생을 안해야 잘 사는 것이고 ② 돈을 많이 쓰면서 사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③ 남이 하는대로 할 수 있어야 잘 사는 것이며 ④ 장수하는 것을 잘 사는 복으로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인생을 가장 잘 사신 예수님의 생애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생을 안 하시지 않았고 예수님은 좁은 나라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고 예수님은 사람 표준으로 사시지도 않으셨으며 또 자기 소욕대로도 살지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위하여 사시다가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표준은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잘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여섯 가지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저희들에게도 신년에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1)“여호와여 돌아오소서” 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이 큰 복이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시 73:23,28) 따라서 말씀과 기도와 순종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2)“긍휼히 여기소서”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와 공로가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받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어떤 공로를 내세워 은혜를 구할 입장이 못됩니다. 따라서 긍휼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만족케 하소서”한 것입니다. 만족과 보람과 감사와 희망을 맛보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만족을 모른다면 그것도 허무한 것입니다. 반드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만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기쁘게 하소서”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곤고케 한 날수대로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기쁨을 주시되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곤고하고 화를 당한 분량대로 기쁨을 주시는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곤고와 화를 당한대로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5)주의 행사를 나타내 주시라는 것입니다. 주의 행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부흥이 잘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17절)

6)“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이런 여섯 가지 은혜를 힘입어 잘 사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과 신년 목표 세 가지 (롬 12: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년 목표 세 가지”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첫째가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 예배는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라 하셨고, 요 4:24에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영적 예배”란 어떤 것이며 “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을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영적 예배는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라”하셨으니까 몸과 거룩한 산제사의 의미를 파악해 본다면 ① 몸은 자기 자신, 자기의 인격 다시 말하면 자기 아닌 것으로 대치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써 명절 때 선물만 보내지 말고 직접 찾아 뵙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직접적인 헌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거룩이란 깨끗하고 순결한 자신을 뜻하고 ③ 산제사는 구약의 의식적 제사가 아닌 신약 시대의 생활의 모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의 깨끗한 인격과 생활로 예배를 삼으라는 뜻입니다.

2)예수님과 바울사도께서 영적 예배를 강조하신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① 하나는 “구약적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으니까 그런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의미가 있고 ② 신약적 예배를 “신령한 예배,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표준할 때 우리들의 예배가 순서 의식에 고착되는 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보에 나타난 순서대로 진행만 하면 “예배가 드려진 것”으로 인정하게 될만큼 제도적 예배로 정착된 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도상의 예배를 탈피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현대에 와서 생동감있는 예배 또는 열린 예배라 하여 강단을 개방하고 누구나 올라 와서 춤을 추고 악기 연주를 하며 기분을 고조시키는 추세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식에 편중하는 행사적 예배를 원하신 것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그러면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성도 개개인의 믿음과 순결한 생활과 헌신을 원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생겨야 예배드릴 수 있고 단체가 있어야 예배드릴 수 있는 줄로 아는 성도도 많을 것입니다. 특히 일정한 교회에서 쫓겨 나온 성도들은 “어디 가서 예배드려야 하느냐?”하고 주일 날 퍽 망설였을 것이고, 교회적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예배가 안 되는 줄로 알았던 성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어느 곳에서든지 혼자라도 드릴 수 있는 신앙 행사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개인의 특권이지 교회의 독과점 행사가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강조드리는 이유는 순서 진행을 하는 것은 예배의 포장일 뿐 알맹이는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지식이요, 감사와 기쁨이며 순결과 직접적인 자기 헌신”인 것입니다. 예배 진행에서 이것이 내용적으로 빠지면 그 예배는 형식에 불과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축복을 받으려면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 그 예배의 의미를 “진지한 자세로 드리는 것”,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교훈과 감동을 받도록 집중하는 것”으로 설명을 하였는데 그 결과로 목회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어떤 성도나 예배를 잘 드리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은 제도적 예배가 형식적 예배가 되지 않도록 힘쓰라는 뜻이요,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예배의 성격은 그런 제도적이고 단체적인 예배를 초월하여 개인적이고 알맹이를 내포한 생활예배를 중요시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무엇입니까? 본받지 않아야 할 것이 이 세대입니다. 본받을 것은 성경에 있고, 믿음의 선진들이 생활한 모범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 아닌 것은 다 이 세대이겠지요. 사람의 뜻, 전통, 유행, 인간적 문화, 자기 정욕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전통, 문화, 관습 때문에 피곤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나라에서는 성인식을 할 때 몸에 큰 상처를 주는데 어른이 된다는 성취감 때문에 그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법으로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하는데 반대자가 많다고 합니다. 블란서에서는 동성결혼을 허가하는 법이 거의 결정 단계에 있다고 합니다. 동성끼리 어떻게 살든지 제 3자가 관여할 것 없고, 재산을 동성부부가 공유하는 문제 때문에 그 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경에 없는 문화를 사람이 만들어서 끌려가는 문제들인데 성도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위반되지 않은 것이면 이웃을 의식하지 마시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전통)을 지키다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된다”(마 15:9)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또 정치가들이 관행을 따르다가 망한 것을 기억하셔서 이 세대 본받는 일을 맹종하다가 신앙을 그르치는 성도들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이니까 문화 발달이 저조한 원시적 시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시대의 사람,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하셨고(창 12:1-4, 15:1,6)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으며(롬 4:11)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요 8:39-40,56)하실 정도로 표준 인물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 신앙을 키우는데는 오히려 원시적 신앙이 아쉬울 뿐, 현실 문명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변화를 먼저 시행하고 그 다음에 모범적 선진들을 본받는 일에 주력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마 7:21) 소요리 문답 1문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31, 롬 11:36, 시 73:24-26, 요 17:22-2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1)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① 히 11:6에서 믿음이라고 하셨지요. ② 또 마 8:10에서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이지요. ③ 또 성도의 화목과 친교를 기뻐하시지요.(시 133:1) ④ 성령충만을 기뻐하십니다.(눅 10:21) ⑤ 정직을 기뻐하시고(대상 29:17) ⑥ 순종도 기뻐하시고(삼상 15:22) ⑦ 충성도 좋아하시며(마 25:21) ⑧ 회개도 기뻐하십니다.(눅 15:24, 마 18:22)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연구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아주 싫어하시고(마 16:24) 감사하며(눅 17:18)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마 15:25-28) 의지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맡겨버리는 것”은 더 좋아하십니다.(시 37:5, 사 48:17, 벧전 5:7)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도가 어린아이처럼 되어(마 18:3) 순진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교역자도 목회를 할 때 어른같은 신자들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인간적인 타산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인간적 타산꾼들은 똑똑한 타산은 하면서 속지 않고 손해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개가 진주 알을 먹었다”고 가상할 때 조개의 고통만 생각하고 그 속에서 진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에 맡기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인간의 가공이 없는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신 27:6)하신 것도 그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조직에 성공을 하려면 오랜 세월 물갈이를 하면서 독재를 해야 합니다. 그 어간에 성도의 단체는 여러 번 깨집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의존하려고 한다면 인간적 조치를 가급적 통제하고 자연적 추세에 맡기는 것이 마치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되고 거기에도 유익이 있으며 목적 성취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 10:7에 보시면 “기회를 따라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봄철을 주실 때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히 5:16) 또 “제비는 사람이 뽑아도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잠 16:13) 또 하나님은 악도 유익하게 쓰시고(잠 16:4)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 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를 앞세우지 말고 순리대로 살면서 복종만 잘하면 하나님이 손해없는 열매를 거두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맡기는 생활, 어린아이처럼 어리숙하게 사는 생활을 하심이 좋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그 아버지가 아셨다면 못가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감으로 성공했고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 “안됐다”라고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을 것이나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옥사장 가족까지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위험하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가셨고, 로마에까지 가셔서 전도하셨으니 그것이 순리대로 사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자기를 맡기는 생활입니다. 저는 이런 생활 방법을 퍽 늦게 깨달았습니다. 한남교회 사임한 후에 구체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보다 환경이 찾아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그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무대로 아셔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증언하려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금년 한해도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일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최대한 시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과 새 출발의 교훈 (롬 12:1-3) 목록으로


95년도 “신년맞이를 예배로 시작하는 것”은 퍽 의미있는 일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년맞이 새 출발을 하셔야 잘하는 것일까요? 나름대로 많이 생각해 보셨겠지요. 새 출발의 교훈

1. 우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같은 새 출발의 날”이 없다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정에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은 굉장한 용기요, 변화입니다. 이런 용기와 변화가 여러분들 자신의 결단과 용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셔서 앞으로도 그런 용기와 결단이 연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시작을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시작만 잘 하고 계속 적극성있는 생활을 못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작한 보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2. 본문 2절을 보시면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발을 하고 새옷을 갈아 입는 일, 새로운 APT로 이사가서 가구를 바꾸는 일”은 잘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마음을 바꾸는 일”만큼은 잘 안되지요? 혹 점차로 자기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 55:8에 보시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저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차이가 많다면 이는 새롭게한 마음이 아닐 것이므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빌 2:5)

1)성도들이 새마음을 가지시려면 우선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반성”은 성경과 나를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 바늘에 실을 꿸 때 분명히 바로 넣었으나 실이 안 들어가는 것처럼 저희들의 생활에도 분명히 바르게 한 것 같으나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일들이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성격반성, 생각반성, 언어반성, 행동반성, 진실반성 등을 잘하여 나태, 이기주의, 부덕, 불법, 불충 등이 없었는지를 경험상으로 깨달아서 시정할 수 있는 새로운 결심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좋은 결심을 하는 자에게 그 시작부터 기도를 응답하신 사례가 있는 것입니다.(단 9:23) 뿐만 아니라 결심과 시작을 잘하면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겔 33:14-16) 겔 33:14-16에 보시면 “가령 내가 악인에게......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자기의 죄에서 돌이켜.......법과 의를 행하여.....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하시므로 변화와 새생활은 죄사함의 복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만큼 “새마음, 새결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헌신입니다. 헌금봉투만 드리고 “나는 바쁘니까 알아서 하십시요”하고 돌아가는 것은 물질을 드릴 뿐 몸을 드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시간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으로 드리는 제사를 가장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얼마큼 헌신하면 좋을까요? 교역자는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하나님의 일로 헌신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 성도님들은 7일 중에 하루만 헌신하면 족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주간에 24시간만 하나님께 드리신다면 헌신이 잘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주일날 9-5시까지 8시간, 매일 새벽기도 1시간씩 7시간, 매일 가정예배 20분씩 2시간 20분 정도, 수요일 기도회 2시간, 다른 봉사 3시간 40분하면 꼭 24시간이 됩니다.) 그 정도의 헌신이면 적당할 것입니다. 그 시간은 오직 예배와 기도와 말씀공부와 교회 봉사를 위하여 쓰여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OO년도에는 몸으로 산제사 드리는 일을 피하시거나 인색하게 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이 세대를 본받지 않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이 세대”란 성경에 위배되고 신앙을 해치며 성도의 거룩을 파하는 이방인들의 생활문화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성도의 표준”을 알지 못하거나 상실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표준은 그리스도의 형상인 거룩을 지키고 성경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경건에 유익없는 것을 좋다하고 따라가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TV에서 경건아닌 것을 따라가고 사회풍조에서 신앙에 도움 안되는 것을 따라가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것들을 피하고 오직 경건에 착념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나 하나님께 대한 영광은 세속의 집착으로는 맺어질 수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 이끌려야만 하고 그렇게 이끌리는 은혜를 받을 때 “세상이 별 것 아니라”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시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살펴야만 합니다. 본문 3절에 보시면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25:에 보시면 “나발이란 사람이 생각을 잘못하였고 거기에 따라 다윗장군도 생각을 잘못하였으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생각이 옳았던 것을 나타내신 것처럼 사람은 조급하거나 이기적이며 지식이 부족할 때” 잘못된 생각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신 말씀은 “자기의 신앙형편에 따라 말씀상고를 잘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성질은 같으나 분량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자가 작다고 하여 고양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음의 성질만 같으면 분량에 차이가 있어도 절대로 충돌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믿음의 본질만 같으면 그 중심과 목표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목적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시행하기를 힘쓰시는 새해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금년에는 다른 해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이상 더 큰 복은 없습니다.(시 73:28)

2)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은 “말씀, 기도, 순종”입니다.

3)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신다”(시 73:23)고 하셨습니다.

4)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이 곁에서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신 32:10)

 

제5과 성도의 생활목표 (고후 13:8) 목록으로


신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생활목표를 재확인하는 뜻에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미 증거된 것이고 또 잘 아시는 말씀인데도 그 결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또 다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성도의 생활목표는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1)“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하셨고(고후 13:8),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 갈 수 없으며”(고전 4:6),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하셨고, 또 구약에서는 “율법을 다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하셨고,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 소유는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시 119:56)고 하였습니다.

2)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신앙과 본분의 유일법칙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일”이란 말을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이나 전통이나 유행을 첨가하여 시행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문화적 관습을 아주 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대단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는 줄로 아셔야 하고 성경 말씀이 뚜렷하게 부각되게 하기 위하여 성경아닌 것을 의식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아닌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곧 인간을 의식하는 흔들림이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3)또 “예수님과 선지자 사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본받으라”는 말씀이 많습니다.(요 13:15, 17:7,17, 딤전 4:5, 벧전 1:15, 고전 4:6, 11:1, 엡 2:20, 히 13:7) 과연 예수님과 선지자, 사도는 성도의 모범할 표준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행적이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표준이 곧 그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4)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등불처럼 여기지 않거나 잣대처럼 생각지 않은 경향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성경과 자신의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지를 연구하고 대조하며 맞추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의 생활목표는 신령한 복에 비중을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1)신령한 복이란 보이지 않는 복입니다. 고후 4:18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보이지 않는 것이니......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나 현세적인 것은 다 잠깐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익한 것이라(고후 4:16, 요 6:63)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신령한 복이나 영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도마뱀은 꼬리를 잡으면 꼬리를 끊고 도망합니다. 도마뱀의 꼬리는 몸에 붙은 것인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복을 중요시하여야 할 성도는 현실적인 타산에 얽매였을 때 그것을 탁 끊고 하나님 편에 붙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아무쪼록 현실애착이나 지나친 현실집착을 떠나서 신령한 복에 비중을 싣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에서가 신령한 복과 관련이 있는 장자의 명분보다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팥죽 한 그릇에 무게를 싣다가 불행해진 것을 교훈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가다라 거민들이 돼지 떼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한 일이나 부자 청년이 재산 손실을 우려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을 성경은 미련한 행위로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현실의 복보다 신령한 복에 비중을 두는데는 현실을 걷어 차는 용기가 아니면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3)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고 유력하게 여겨주는 잘못된 잣대인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헛된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영원하다”하셨는데도 많은 성도들이 옷 잘 입고, 말 잘하고, 돈 잘 쓰며 인간 자랑하는 것을 대단히 값지게 여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좋은 옷을 입고 예배당에 나왔을 때 좋은 자리에 앉히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내 발등상에 앉히라”(약 2:1-3)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였습니다. 옷 잘입은 사람이 나와서 훌륭한 분인 줄 알고 허리를 깊이 숙여 영접을 하였고, 심방을 가보니 좋은 집에서 좋은 시설을 차려 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믿음도 없고 성경도 모르는 형편입니다.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교회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나온 것입니다. 고맙기는 하나 믿음의 알맹이가 없으면 존귀가 뚝 떨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정하고도 막상 사람을 선택할 때는 믿음없고 돈 있는 사람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믿음도 수입품 쇠고기가 나쁘듯이 사이비한 믿음이 많으니까 잘 분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결을 목표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성결목표는 예수님의 거룩을 본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순결의 뜻이고, 죄 안되게 행하는 것입니다.(요 17:17, 벧전 1:15) 또 이것은 목적도 좋고 방법도 좋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빌 4:8-9에 보시면 성도의 생활방법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하게 하라”하셨고, 또 빌 2:4에서는 “자기의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을 함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생활에서 도덕성이 뛰어나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참되어야 하고 옳아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하며 칭찬스러워야 하고 또 다 함께 유익하여야 하니까 여간 주의하여 시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참되다”는 뜻은 솔직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구 앞에 공개하여도 괜찮은 일이어야 하고

2)“옳다”는 뜻은 “정의롭다”는 뜻으로 법을 어기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며

3)사랑스럽고 칭찬스러워야 함은 모든이에게 유익함이 있도록 행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런 표준을 알게 될 때에 성도들은 무슨 일에나 조심하고 확인한 후에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생활이 칭찬스러우려면 흠없이 덕을 세워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기록하는 시간에(99.2월 초) 국회의 경제청문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청문회에 나와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정의를 목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앞으로 전진만 하는 것입니다. 빌 2:16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하는 것을 “달음질하는 것”이라 하셨고, 딤전 4:15에서는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하셨으며 또 히 10:38에서는 “뒤로 물러가면......저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생활이나 사명생활을 하다가 약하여지지 말고 박력있게 행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끝을 보기 전에 낙망하면 결국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을 대항하여 싸우거나 충성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꾸준한 신앙생활을 지켜나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지구력이 약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질 손실이나 명예 손실이나 질병같은 것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세로 극복하는 연단을 주시기 위함인 줄로 아시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연단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 26:3에 보시면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마음이 든든해 질 것인가”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할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환란은 환란대로 극복하면서 전진만 하다가 끝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승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새출발을 또 한 번 시도하시면서 ① 성경대로 사는 생활 ② 신령한 복에 비중을 싣는 생활 ③ 성경을 중요시하는 생활 ④ 전진만 하는 생활을 목표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과 성도의 네 가지 책임 (벧전 2:9-10) 목록으로


신년을 맞이하여 새출발 하셔야 할 성도님들에게 “네 가지 책임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성도의 신분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긍휼을 얻은 자”라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은 대단히 존귀한 신분이란 점과 하나님의 큰 긍휼을 힘입은 자로써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도 변함없이 성도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심에 있어서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생활이고, 두 번째는 가정에 대한 책임이며 셋째는 교회에 대한 책임이고, 넷째는 이웃사회에 대한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1. 개인생활에 대한 책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항상 성도란 신분의 긍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나는 택한 백성이다.(벧후 1:10) 왕같은 제사장이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어두움에서 부름받아 빛되신 주님과 함께 있고 또 빛의 세계로 들어갈 자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자이다. 또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존귀한 신분임을 생각하면서 긍지를 갖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신분이 특수하면 긍지와 책임을 갖지 않습니까? “나는 왕손이다”, “나는 종가집 맏며느리다”하여 체통을 차리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항상 의식하여야 합니다. 아내나 자녀들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서신을 보시면 예수님 안에서(빌 1:1), 성령안에서(엡 6:18), 그리스도 안에서(엡 1:4,7,10)란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성도나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보호․인도하시는 하나님, 장차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여 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방법으로 성경묵상과 탐구, 그리고 기도를 항상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곧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친교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직접 상고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문서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고, 기도는 묵상 또는 개인기도, 단체기도를 통해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이런 생활이 반드시 습관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는 것입니다. 인격은 자기를 성숙시키는 것이고, 생활은 매사를 거리끼지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본받으라”고도 하셨지만(요 13:15, 엡 5:1, 롬 8:29) 어린아이처럼 되라(마 18:3) 또는 “사도들의 본을 행하라”고도 하셨습니다.(고전 11:1, 빌 4:19) 바울사도께서는 빌 4:9에서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하며 칭찬받을 만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활에 거리낌이 있으면 이것은 마치 병든 몸과 같아서 그 생활이 활발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인격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의 가정에 대한 책임입니다. 한 가정에 여러 식구가 살면서 식구마다 자기가 하는 일들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시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1)그 첫째가 가족 기도회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가장이 기도회 시간을 정하고 “모여 기도회를 갖자”할 때는 급히 자기의 일을 중단하고 참석하는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가족 기도회는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의 도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그리고 온 가족들이 가정의 발전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합니다. 쓸 것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비생산성있는 일에 소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어른들도 본을 보이고 자녀들도 거기에 따르도록 지도하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가정이 전체생활에 있어서 가장 많이 머물고 싶은 낙원이 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숙식소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 얽매이기 때문에 가정이 좋아도 머물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정보다 더 좋은 곳이 있어서 나가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집은 싸우고 갈등하는 일 때문에 자녀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 집보다 더 안전한 보금자리가 있는가?할 때 없습니다. 교회도 가정만큼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행사를 구실로 범죄 유혹에 말려드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교회의 예배당 창고가 밀회의 처소로 사용된 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아닌 곳에 있으면서 “떳떳하고 안전하게 있다”고 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빨리 집에 가서 머물러야 하는데”하는 조급한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 들이는 가정이 되도록 재미있고 실속있게 유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생활의 책임은 어떻게 감당하여야 좋겠습니까?

1)교회와 성도를 가족처럼 여기고 친척처럼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나의 가족이고 친척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꼭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형제, 자매, 모친이라”(마 12:50)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하셨고(딤전 3:15), 바울은 성도를 자식처럼 사랑하셨으며 디모데 또한 “자식이 아비에게 하듯 하였다”(고전 4:14, 빌 2: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함을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33:1) 가나 혼인 잔치나 열 처녀 비유 교훈은 잔치집 같은 교회의 성질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성폭력방지법 10계명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직장 동료들은 반드시 가족, 친척처럼 여기라”는 조문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도 가족, 친척이면 이해와 포용성이 따르지 않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란 사실을 아셔서 반드시 그런 관계로 교제하셔야 할 것입니다.

2)교회를 신앙생활의 도장으로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연마하는 곳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설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이 마치 종합병원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예배도 있고 교훈도 있으며 합심하는 생활도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도 있으며 때로는 책망도 있고 인내의 대상도 있으며 여러 가지 필요한 조건이 다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도 교회에서 배우고 말씀과 성례를 통한 은혜도 교회에서 받으며 사랑, 인내, 충성도 교회 안에서 하고 문제의 해결도 교회를 통하여 지도 받음으로 반드시 교회를 신앙연마의 도장으로 이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아서 순결 보존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신 말씀은 엡 1:23, 4:12, 골 1:18,24, 요 2:19 등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 하신 것은 소중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몸이 머리와 연결된 것처럼 예수님 자신과 연합되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단체인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세 가지 방면에서 순결을 도모하여야 하는데 ① 교리적인 면에서의 순결이고 ② 도덕적인 면에서의 순결이며 ③ 사명적인 면에서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리적 순결 보존은 이단의 침투를 막아야 하는 것이고, 도덕적 순결은 성도 간에 사랑과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적 할 일은 복음전파와 교육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양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화합을 중요시하지 않거나 교회를 가정 또는 도장으로 여기지 않을 때는 교회의 사명과 관련하여 책임을 이행하는데 힘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집을 버티는 기둥은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4. 이웃에 대한 성도의 책임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도는 이웃에게 빛의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요 1:5), 또 새벽별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2:16) 새벽별은 아침별로 번역할 수도 있고, 나가서는 태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양이면 성도는 달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누누히 속으면서도 아직도 버리지 않는 인식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사람은 무슨 일에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마 5:13-14) “소금도 되고 빛도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특히 법을 지키는 일이나 이웃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모범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 앞에서 실수를 하면 염려해 줄 수 있지만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실수나 부덕을 나타내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성도는 그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함과 칭찬스러움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죄많은 세상에서는 정의롭게 살면 소득이 적은 것을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득이 적으면 가장 적은 상태에서 살 각오를 하고 정의를 지킨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형통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옛날에 부정을 안하는 버스 기사가 오랫동안 부수입없이 살다가 그 사실이 인정되어 사장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중역이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초창기에는 전도로 복음을 나타냈지만 오늘은 성도의 빛된 생활만 보여도 충분한 전도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신년 새출발을 하시면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가정과 교회와 이웃에 대한 사명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래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7과 새사람을 입으라 (엡 4:21-24) 목록으로


설이 되면 새옷을 입습니다. 저희들도 신년을 맞이하면서 새옷을 입듯이 새인격, 새생활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새사람 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할 무렵에 안병욱 교수의 교양 강좌가 있었는데 그 강의에서 “인간은 세 종류가 있다. 그것이 곧 미숙인, 반숙인, 성숙인이다. 미숙인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고, 반숙인은 미숙인 보다는 낫지만 욕심, 교만, 투기, 미움, 포악, 거짓, 외식, 허영같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요, 성숙인은 지식, 교양, 이해심, 양보심, 봉사심이 있어서 결코 남에게 덕을 줄 지언정 손해를 주지 않는 자인데 민주주의는 성숙인만이 할 수 있는 정치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성경에도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육신에 속한 자가 있으며 또 신령한 자가 있다”는 말씀을 떠올려 보았고(고전 2:14-3:1), 또 거미같은 사람(피해를 줌), 개미같은 사람(자기만의 삶), 꿀벌같은 사람(상호유익)이 있다는 말도 떠올려 보았습니다. 지금 저희들의 형편도 반숙인, 또는 육신에 속한 자의 형편이 많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빌 3:12-14)고 하셨으나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과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감당하시고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하셨지요.(요 19:30) 그러나 저희들은 미완성 부분이 많습니다. ① 인격 미완성(롬 7:19-21) ② 사명의 미완성(빌 2:17, 행 21:13) ③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소원 성취의 미완성 ④ 구원의 미완성도 있는 것입니다.(빌 2:12) 구원의 완성은 부활의 은혜를 받을 때 성취되지만 그 나머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과제들을 생각하시면서 새사람으로 옷입듯 하기를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1. 그러면 새사람 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예수님 안에서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21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은 거듭난 성도가 예수님을 진리와 구세주로 믿는 것을 의미하고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미숙성과 현세적 정욕을 말씀으로 깨닫고 성령님의 감동을 힘입어 변화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서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 것처럼 유혹의 욕심이나 썩어져가는 구습들을 용기있게 떨쳐 버려야 합니다. ① 썩어져가는 구습들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의 행위겠지요.(롬 6:6, 골 3:9)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숙인 상태입니다. 거짓, 욕심, 이기주의, 시기, 원망, 보복 등을 버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또 지식과 교양과 이해심과 양보심과 정의감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현세욕이 있으면 성숙인이 될 수 없고,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옛사람의 요소 하나 하나가 예수님의 인격 모범과 성령님의 역사로 무너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② 썩어져가는 구습을 없애려면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현세적 가치관에서 영원한 가치관으로 목적을 돌리고 땅에서 잘 되는 일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가치관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으로 성공, 실패를 가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고독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은밀하게 보시고 인정해 주시는 일에 가치관을 정해야 옛사람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3)이렇게 가치관을 변화시켰을 때 예수님이 그 마음에 좌정하실 것입니다. 엡 3:17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뜻은 의와 진리와 거룩의 속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인격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딛 3:5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사람이 된다”하셨고, 본문 24절에서도 “의와 진리로 거룩하여진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2. “입으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입는다”는 말씀은 “새옷을 입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옷을 입지 않으면 벌거벗은 것이 드러나고 벗은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계 3:17-18) 또 “수치스럽다”는 뜻은 죄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죄와 수치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 주셨는데 이것이 곧 의의 은총을 상징한 것입니다.(계3:18)

2)사람이 옷을 입는 목적은 ① 수치를 가리고 ② 몸을 보호하며(마 6:25,30) ③ 문화가 발달하면서 멋으로 입기도 하고(눅 7:25, 딤전 2:9) ④ 왕복, 법복, 제사장복 같은 직분의 권위를 나타내는 뜻도 있습니다.

3)그러나 본문이 말씀하시는 옷은 육체와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고 신앙 인격의 변화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듯 하라”는 것입니다.(롬 13:14) 또 이와 같은 표현으로 예수님은 순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깨끗한 세마포를 입으라”는 말씀도 하셨고(계 19:3,4,18), 또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는 의미로써 “피뿌린 옷”(계 19:13)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옷을 입는 뜻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사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4)어떤 방법으로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까? 먼저 헌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새옷을 갈아 입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새옷을 입은 후에는 깨끗하게 보존하는 일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① 헌옷을 벗는다는 뜻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욕심, 불법, 교만, 투기, 나태, 방종, 허영, 다툼, 현세욕 등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고 ② 목욕을 한다는 뜻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의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의의 은총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③ 새옷이란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서 자기 아닌 그리스도가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도는 마음에 심겨집니다.(약 1:21) 그리스도는 온유, 겸손, 순결, 진실하신 분입니다.(마 5:8, 11:29, 딤전 1:19, 3:9, 히 10:22, 벧후 3:1) 사랑과 용서도 한이 없고(마 18:22, 갈 6:1)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입니다.(빌 2:8) 사람이 새옷을 입고 나서면 큰 변화의 인상을 줍니다. 그와같이 신앙인격의 큰 변화를 이루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또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8과 성도의 가치관 (빌 3:5-9) 목록으로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는 성도는 “가치관 정립”을 잘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치관”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제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생을 살 때 무엇으로 보람을 느끼며 무엇으로 만족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일반인들은 대부분 자기의 취미대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2)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의 유행이 변하면 또 거기에 따라가는 것을 큰 만족을 여깁니다.

3)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예와 인기를 좋아하고 재물과 사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4)그래서 옛날부터 오복을 꼽기도 하였습니다.(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

2. 성도의 가치관은 어떠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1)불신자들의 가치관과 같을 수 없겠지요. 하나님을 모신 자와 안 모신 자, 영생을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또 심판을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간에 가치관이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가치관을 생각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탈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생이 없고, 자기와 현실만 있기 때문에 물질, 건강, 장수 같은 유한한 것에만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가치관을 변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배고픈 사람은 양식이 제일이고, 병든 사람은 건강이 제일이며 부자유한 사람은 자유를 최고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환경에 따라 가치관을 변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거나 없거나(욥 1:21-22, 2:10) 재물이 있거나 없거나(합 3:17-18) 상관 없이 하나님의 뜻에만 가치관을 두기 때문에 그 기준부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 무엇이 값 있는 일입니까? 하고 여쭌다면 하나님이 답하시기를 “하나님 외에 절대자가 없은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니라”고 하실 것입니다.(시 73:25)

2)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되므로 생활의 가치관이 크게 달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우선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놋”이 하란에서 살다가 자기의 둘째 삼촌과 누이와 매부를 떠나서 첫 번째 삼촌(큰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이주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놋은 세 사람 연고자의 친분을 끊고 한 사람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중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말씀 따라 이주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놋이 하나님의 말씀 쪽을 따른 것입니다. ②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③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대접하는 쪽으로 시간을 쓰지 않고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 기회이므로 “말씀 듣는 편을 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편이 더 건설적이며 가치있는 일인가를 따져서 실리적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④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가치관을 변화시킨 말씀입닏. 바울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할례 받은 일, 이스라엘 민족이요 베냐민 지파라는 족보 따지는 일,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된 일, 율법에 열심한 일” 등을 중요시하였는데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확 달라졌습니다. 그 달라진 결과로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더 가까이 모시기 위하여 힘써야 하겠다”는 가치관으로 변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말씀들로 성도의 가치관의 변화를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관도 고상한 것에 그 목표를 두셔야 할 것입니다.

1)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거기에 몰두하면서 신령한 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또 그 일을 후회없는 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자신의 선택은 아니지만 여하튼 큰 은혜이며 또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일이고, 또 영생을 힘입는 일이며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의 특권을 누리는 것인 만큼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신앙 생활은 생명이나 이 세상의 어떤 특권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말씀, 기도, 순종 등으로 노력을 많이 하셔야 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투자하고 노력을 하여도 후회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친교하다가 세상 재미를 못 보게 되거나 고난을 당하여도 여전히 보람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두번째로 보람있고 가치있는 것은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불의, 불법, 부도덕하지 않고 계명을 잘 지키면서 지적 잡힐 만한 일이 없도록 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칭찬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사무엘 선지자처럼 어릴적부터 순결하게 자란 것입니다. 이것은 때 안 묻힌 의복이 세탁한 의복보다 더 좋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을 다 준다 하여도 마귀에게 고개 숙이는 일이면 안 하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이 모자라서 하실 일을 못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이 방법을 쓰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성취하시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순종을 원하시고 역사(큰 일 성취)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전도를 못한다 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실 백성들을 구원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나타내시는 분이시고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한다”는 것보다 “자신이 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여 순결을 지킬 때 그것이 크게 값있는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시 1:1)

3)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을 큰 가치관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만 가지 사명을 다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와 소임에 따라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갈 길과 사도 요한의 갈 길이 다른 것입니다.(요 21:21-22)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모방하면서 따르려하지 마시고 자기의 할 일과 맡은 일만 성실히 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분을 다하고 교회의 책임을 다하며 가정을 살피고 자기의 맡은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또 보람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였는냐?하는데서 큰 만족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충성의 상급이 많은 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면 헛되지 않다”(고전 15:58),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계 2:10), “내가 속히 오리니....각 사람의 일한대로 상을 주신다”(계 22:12)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내세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가치관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목표를 두시고 믿음 생활과 순결 생활에, 또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2부 고난주간의 설교

제9과 예수님의 고난 (히 2:9-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이 말씀은 제가 쓴 히브리서 강해문에도 나타나 있음)

1)“예수님은 천사보다 잠깐동안 못한 상태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잠깐동안”이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셨던 33년 간을 의미합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악 세상에 오셔서 인간적 고난을 당하신 것이 육신없는 천사보다 못한 상태였음을 나타내신 것이요

2)“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택한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하심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선민의 죄책을 짊어지시게 하는 뜻으로 고난과 죽음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적 은혜의 계획은 하나님이 하셨고, 구원의 대상은 택한 백성에 한하며 구원의 방도는 죄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자격으로 죄책을 짊어지시되 고난과 죽음으로 대신 짊어지게 하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예수님은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대가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는데 이는 부활과 영원한 영광과 심판권을 받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만물의 원인자이신 하나님이 예수님 외에 다른 많은 아들들을 영광의 천국 백성으로 구원하시는 일을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루심(온전케 하심)이 합당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생이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되는 과정을 예수님의 고난과 생명의 희생으로 구원하여 정하심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2. 이상의 말씀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고난이 저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1)예수님은 죄가 없는 중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2)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은 한 인간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귀한 신분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3)그리고 그 고난은 33년 동안의 인간고를 포함하여 몸에 상처를 받으시고 여섯 시간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고난으로 가장 극심하게 받으신 것입니다.

4)이 고난은 하나님의 계획된 구속사업을 성취하여 드리기 위한 순종과(마 26:39) 자원으로 이행하신 것입니다.(요 10:18)

5)예수님이 인간의 죽음을 맛보심은 대속의 목적과 함께 성도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연약한 사정을 체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 4:15)

6)그리고 성도를 하나님의 값진 아들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의 희생을 치르셨으니 저희들은 하나님의 값진 아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들에게 죄사함과 존귀와 영생의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하는 고난만이 크게 영광이 되고 유익이 된다는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제10과 어린양을 보라 (요 1:29-34) 목록으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으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저희들도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하는 선구자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 3:3) 따라서 요한이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푼것도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라”(31절)고 하셨습니다.

2.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증거하였습니다.

1)“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죄”란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의미하고, “그것을 진다는 뜻”은 “대신 벌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선민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시면 그 선민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죄를 지신다”는 뜻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것을 예언한 뜻도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속죄 제물에 대한 상징으로 양을 받으셨는데 1년된 어린 양을 받으셨습니다. 대단히 귀엽고 가치있는 제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제물의 실제적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요, 33세 청춘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중보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3)그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뒤에 오셨고 후에 나타나셨지만 훨씬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님은 “성령이 함께 하시고 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머물렀다”하셨고, 요 1:14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라”하셨으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은 성령을 보내시고 받게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요 16:7) 따라서 성령님은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또 일치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끝으로 세례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라”하였고, 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1)저희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보고 밝히 아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는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그리고 말과 행실로 예수님을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저희들이 ① 예수님을 많이 알지 못한 것과 ② 충분하게 닮지 못한 것과 그리고 ③ 말과 행실로 예수님 모습이 아닌 것을 나타낸 일에 대하여 크게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11과 십자가 중심 생활 (고전 2:1-5, 갈 6:14) 목록으로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십자가의 도리만 알고 십자가만 증거하며 또 십자가를 증거할 때 인간의 말과 지혜로 증거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십자가만 자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십자가 중심으로 사셨다는 뜻입니다. 저희들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십자가 중심생활을 한층 더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1. 십자가는 로마의 형틀로서 가장 악한 죄인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사형법 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신 21:23)하였고,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면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입니다.(갈 3:13)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지시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일을 미리 계획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택한 백성에 대한 속죄의 제물로 이용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만방에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수치를 양의 가죽으로 입혀주신 사실과 소나 양으로 제물을 삼게 한 사실과 또 시 22편이나 이사야 53장에서 직접 예언하신 일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도 여러 차례(21회) 예언하시고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말 8:34)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먼저 지실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3. 이 예언에 따라 또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에 따라 때가 되매 예수님이 죄인되는 재판을 받으시고 주후 30년 봄 유대력으로 나산월 15일(금) 아침 9시에 못박히신 후 6시간 만에 운명을 하신 것입니다.(막 15:25,34) 하나님은 이 일을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셨다”고 하셨습니다.(엡 1:4)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사건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이라”(시 118:22, 마 21:42)하시므로 죄인들이 핍박하여 죽이고 버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와 중보자가 되게 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 따라서 십자가 사건에 함축된 의미는 신령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가 있습니다.

1)먼저 신령적 의미로는 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현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섭리로 예수님을 죽게 하셨고, 사랑의 섭리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에 우리의 죄값을 전부 짐지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를 평안케 하시고 심판을 면한 후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사 53:5) ③ 십자가의 신령한 의미에는 영광의 부활과 승리를 기약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2)십자가에 함축된 도덕적 의미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 중심으로 생활하여야 할 성도들이 본받고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까요(빌 2:8) ②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겸손하며 희생하여 자기를 못박듯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십자가 지는 자가 적기 때문에 혼란한 것입니다. ③ 십자가는 죽기까지 인내하는 것이고 ④ 영광과 소망은 죽은 다음에 바라는 것이요 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서는 원수를 위하여 희생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령한 의미는 믿고 도덕적 의미는 시행하시되 믿음과 용기로 시행하면 “가벼운 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 11:30) 아무쪼록 십자가 중심으로 생활을 잘 하다가 주님을 영접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12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 (막 14:17-4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날”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자정을 기점으로 하지만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지는 시점입니다.(신 23:11, 24:13-15, 엡 4:26) 무슨 일이나 해가 떨어지면 다음 날이기 때문에 그 날 할 일은 해지기 전에 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지 순례차 아덴에 갔을 때 그 곳 시내의 모든 점포가 해지는 시간에 닫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① 출생 8일에 결례식차 상경하신 일이 있었고,(눅 2:22) ② 12세때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상경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전례대로 한 것이라”하시므로(눅 2:41-42) 그 횟수가 여러 번임을 시사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전도 초기에 상경하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하신 일이 있었고,(요 2:13-22) ④ 초막절에 또 가신 일이 있었으며(요 7:10) ⑤ 그 다음이 마지막 입성인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4복음 중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다음의 일은 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사로 아시면 됩니다.(마 21:2, 막 11:2, 눅 19:30, 요 12:15) 예수님의 행적이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4복음서를 다 대조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적으로 순서있게 정리하기가 힘듭니다. 대략 맞추어 놓은 것이 있지요. 그런데 한 가지 주목을 끄는 것은 눅 1:3에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모든 일을 근원부터 살펴......차례대로 써 보낸다”는 표현을 하였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기록은 역사적 시간에 맞춘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일치하는 것만큼 공통성이 적고, 생략된 부분과 보충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역사 순위를 알기 어렵습니다. 제가 누가복음을 살피면서 예수님의 여행 노정을 살펴보았더니 1장, 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기록이고, 3장에서 9:50까지는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이요, 9:51 이후는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사역한 기록입니다. 그 중에 예루살렘의 마지막 하루의 기사는 성경에서 거의 일치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마 26:17-27:, 막 14:12-15:, 눅 22:-23:, 요 13:-19:까지인데, 요 13:-18:까지는 교훈과 기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음.) 예수님의 한 주간의 일정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거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이날을 종려주일(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폈다는 뜻)이라 하고,(막 11:1-10) 그 다음 월요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으며 가시는 도중에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또 성전을 청결케 하셨지요.(막 11:11-18) 그 다음 화요일과 수요일에도 역시 성전에 가셔서 여러 가지 교훈을 하셨습니다.(마 11:19-13:) 그리고 유월절 양을 잡는 첫날이 금요일인데 금요일은 해가 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 날 해지기 전 목요일에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초청을 받아 식사하셨고, 그때에 한 여인이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이 있었다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마 26:6-13, 막 14:1-11) 그 식사를 마치신 다음 해가 지고 금요일 마지막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하루의 일정은 대단히 분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이 끝나고 금요일을 맞이하면서 유월절 만찬을 가지시는 시간까지 상당히 많은 분량의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 교훈의 내용은 요 13장에서 17장 등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① 교훈하심. ② 성찬 베푸심. ③ 기도하심. ④ 잡히심. ⑤ 재판 받으심. ⑥ 돌아가심. ⑦ 장사지냄 까지 일곱 가지 사건이 진행된 것입니다.

1. 많은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기사가 마 21:10과 막 11:9과 눅 19:38곽 요 12:13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 기사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하신 교훈이 다 마지막 주간에 하신 것이고, 마지막 날에는 만찬석에서의 교훈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내용인데 그 분량도 상당합니다. 한 마디로 설교와 교훈으로 피곤한 시간을 보내신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2. 성찬 예식을 진행하신 것입니다.(막 14:17-26) 막 14:17에서 “저물매 제자들과 다 앉아 먹을 때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만찬 준비를 시키신 것은 해지기 전이었고,(막 14:12-16) 마지막날 첫 시간에 성만찬을 잡수신 것인데 그 장소는 도성에 있는 어떤 제자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은 예수님과의 마지막 송별연도 되고, 십자가의 의미를 일깨워 주시면서 믿음과 충성을 다짐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자정이 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으로 기도에 힘쓰신 사실과 중보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을 음미할 수 있고, 그 찰나에 제자들이 경성하지 못한 연약한 면도 살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약한 자의 무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고난을 감당하심에 있어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기도가 다 끝났을 때 새벽 닭울기 전이었습니다. 군병들이 가룟유다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의 집 뜰로 끌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을 뽑아 한 병정의 귀를 치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책망하셨고, 아무런 반항도 없이 끌려가시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리 피하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까지 붙들려 가셔서 종교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자 새벽 닭이 울었습니다.(막 14:64,72)

5. 그리고 닭이 울 무렵부터 유다 총독 빌라도의 관정에 가셔서 또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형 집행권이 종교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집과 빌라도의 관정은 멀지 않게 인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기도 전에 빌라도와 헤롯왕(눅 23:6-7, 갈릴리, 뵈뢰아, 요단 동편 치리자)이 미리 출근하여 대기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죄없는 것을 알고도 유대인들의 인심을 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도록 승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급히 재판을 한 것은 유월절 절기 행사 전에 모든 것을 끝내려 한 것입니다. 세상 재판은 모함하고 증인만 세우면 다 마음대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재판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재판이 끝났을 때는 해뜰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6. 그리고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시게 하고 거기서 십자가에 못박은 시간이 3시이니까 이 시간은 우리 나라 시간으로 환산할 때 6시간 늦은 시간이므로 오전 9시가 되는 것입니다. 못박히신지 세 시간 됐을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또 세 시간 후인 9시(오후 3시)에 운명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오후 3시이니까 해질때까지는 두 세시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7. 그런데 그 시간 안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란 사람이 와서 빌라도에게 시체를 인계받아 사용하지 않던 새 무덤에 그 시신을 장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고, 또 “저주받아 죽은 시체는 밤새도록 매달아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라”(신 21:22-23)는 규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일에 장사지낸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사지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의 마지막 날”이란 제목으로 하루의 역사를 살폈습니다. 부지런히 말씀 가르치시고 제자들과 작별 연회를 하신 후 상당하게 기도의 책임을 다 하시고, 침묵으로 재판을 받으신 후 고난의 여섯 시간을 인내로 견뎌 돌아가신 모습에서 많은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13과 십자가 곁의 사람들 (요 19:23-27) 목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본다는 의미에서 “십자가 곁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현장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① 예수님이고, ② 로마 병정들이며 ③ 같이 형을 받는 강도들이고, ④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다섯 사람이었습니다.

1. 죄가 없으시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 만유의 주이시지만 그 존귀나 명예는 물론 육체와 생명, 그리고 단 한 벌 입으셨던 옷까지 다 벗김을 당한채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피 한방울 남김없이 다 흘리신 후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돌아가셨습니다.(사 53:11) 따라서 저희들은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사형 집행한 군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없는 예수님을 가해할 때 권세자의 명령이란 구실 하에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증오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조롱하였고, 예수님에게서 벗긴 통으로 짠 옷을 서로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는 추태를 벌였습니다. “사형수의 옷을 가지면 재수가 좋다”는 속담에 의한 일이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시 22:18) 여하튼 군병들은 악에 악을 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3.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다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을 하였습니다.(마 27:44) 그러다가 나중에 한 강도가 뉘우치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눅 23:40-43) 회개하지 않은 강도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책이 전혀 없이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너와 나를 구원하라”하면서 비방을 하였고, 구원 받은 강도는 자신이 받는 형벌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은 죄없이 돌아가시는 분이라”고 변호였고, 또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상 세 종류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 같은 구세주의 죽음이 있고, 사정없이 악하기만 한 군병들이 그 곁에 있었으며 또 십자가 곁에 구원받을 자와 못 받을 자가 다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다섯 사람들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서 바라본 사람들은 많았습니다.(마 27:55-56, 눅 23:49, 막 15:14,40) 그러나 가까이 있던 사람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1)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임종시까지 곁에 계시므로 모자간의 애타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마음에 큰 충격을 느꼈을 것이요,

2)예수님의 이모는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로 예측을 합니다.(막 15:40, 요 19:25) 그는 부활하시던 미명에도 향품을 갖고 무덤으로 간 여인이었습니다.(막 15:40, 눅 19:3)

3)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인데 그의 아들 “글로바”는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이요,(눅 24:18)

4)막달라 마리아로 이 여인은 복음의 초창기에 일곱 귀신이 들려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끝까지 따르며 충성한 여인이요, 예수님의 부활도 가장 먼저 목격하고 만난 여인이었습니다.(요 19:25, 막 15:47, 16:1)

5)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장 젊은 제자로서 그의 어머니와 또 마리아 이모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생애를 맡는 충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부양을 위하여 사도 요한을 오래 살도록 붙드셨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또 다른 여인들처럼 충성심을 가지고 가까이 하셔야 할 것이요, 추호도 예수님을 괴롭게 하거나 근심하시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어떤 두려움과 위험의 환경까지 감수할 수 있는 담력을 가져야만 우리 앞에 당면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눅 9:23-24)

 

제14과 십자가의 삼면관 (사 53:1-9) 목록으로


“십자가의 삼면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십자가의 삼면관”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1절에 보시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하시므로 십자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언하셨고, 4절에서는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입장을 말씀하셨으며 6절과 10절, 11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며 또 그가 상함과 질고를 당하시기를 원하셨고, 주님이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실 것이라”하시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십자가의 관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주전 700년경에 미리 예언을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보시는 십자가는

1)공의의 심정으로 보신 것입니다. 공의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예수님께 담당시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인생을 죄책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요 3:16, 요일 4:9에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인생)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하셨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곧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살리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의 죄책을 예수님께 지우는 것이 공의이고, 그 목적은 죄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실 때 마음을 닫고 공의의 심정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과 눈을 덮으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인격에 어려운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하나님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해가 빛을 잃는 것”으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눅 23:44)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독생자에 대한 인정을 초월하신 심정으로 십자가를 대하셨고, 고난과 희생으로 대속의 짐을 지우셨기 때문에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가 실현될 때 만족을 느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느끼시는 십자가는 어떠 하였을까요?

1)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념을 가지셨으니 곧 순종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한다”(요 3:34)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도 그렇게 하셨으며(마 26:42)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셨습니다.(빌 2:8, 요 10:18)

2)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다는 마음으로 견디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자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고,(사 53:6) 예수님은 그것을 지식으로 간직하신채 기도로 반영하셨으며(사 53:11, 요 17:9,11) 또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요 12:24, 17:9,20, 히 9:22)

3)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하셨으니 예수님은 고난을 참으실 때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려면 하늘의 상급과 내세의 영광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4)또 예수님은 “구원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셔야 하고,(히 4:15) 죽음도 맛보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히 2:9)

3. 십자가를 보는 인간들의 반응은 어떠 하였습니까?

1)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태에 대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사회라”(마 11:17)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대하여 냉담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2)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거나 또는 이단자들로서 기독교를 훼방 또는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에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기에 해당되었고, 오늘에는 기독교와 대립하는 이단 종교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3)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 섭리로 받아 믿고 구원을 받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볼 때 ①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로 믿습니다. ② 그리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최고의 사랑과 지혜로 믿습니다. ③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믿으며 ④ 더 나가서는 자기의 인격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큰 교훈으로 받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전 1:18)하셨으니 이 능력은 죄를 사하는 능력, 구원의 능력, 또는 인격 변화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하나님이 보신 십자가는 공의의 눈으로 보셨고, ② 예수님은 순종과 경험과 대속의 희생과 부활 소망의 심정으로 감당하셨으며 ③ 멸망하는 자들은 미련하고 의미없는 사건으로 보았고, ④ 성도들은 구원의 방도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와 능력으로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15과 다 나를 버리리라 (막 14:27-31) 목록으로


예수님이 성만찬을 끝내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시고, 이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슥 13:7)하신 예언의 성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마 26:2)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 중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1)이 말씀은 예언의 의미가 있지요.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이룰 것이라”하셨고, 또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니까 한 점도 어김없이 그대로 될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2)“주의하라” 또는 “믿음을 굳게 붙들라”는 경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상청에서 “태풍이 불 것이라”하였으면 태풍이 오는 것도 기정 사실이지만 최대한의 방비 대책을 세우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중대한 경고로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님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돌아가시더라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변함없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족”이란 기대를 저버리고 낙망하거나 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연약한 자는 환경이 어려우면 의연한 자세를 변하기 쉬울 것입니다. “욥”은 그렇지 않았지요. “욥”은 재앙을 당했을 때 실족의 반대되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욥 1:21, 19:26)

2.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기대에 어긋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언과 경고로 받지 않고 사리 판단을 못하는 자의 말처럼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과소 평가하고 자기는 과신하는 대답을 하였으니 참으로 많이 잘못 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곧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경청하였다면 주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되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않는 태도에 대하여 사탄의 역사로 간주하시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마 16:23)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자기의 생각만 못한 것으로 여길 때는 그것이 곧 불신앙이고, 사탄의 역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신 다음에 이어서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는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때도 깨닫지 못하고,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하였으니 여전히 자기를 과신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1)자기를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2)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약하게 보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3)예수님의 말씀을 예언적 진리로 믿어야 하고,

4)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때 더 큰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5)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 앞에 절대로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적으로 성취되었고, 자기를 과신한 사실은 그 반대로 되어 허물어졌으며 결국 부끄러운 입장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제16과 중보자의 고난 (히 5: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중보자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아론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제사장)의 직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직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 받은 자만 하였는데 대제사장의 직임은 하나님과 죄지은 인간을 화해시켜서 구원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직임을 “중보자”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모형하는 직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 인간 제사장의 모든 직분은 끝났고, 없어졌으며 예수님이 홀로 그 직임을 영원히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은 구약의 제사장과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이 완전한 중보자요, 영원한 제사장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 제사장이 불완전한 이유는 자신도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때 먼저 자신을 위한 제물을 드려야 하되(히 4:3) 모형적으로 드려야 하며 그 다음에는 자주 세습하여 바꾸어야 하고, 또 모형적 인물이니까 실상이 올 때는 언제든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하신 중보자요, 대제사장이신데 어떤 면에서 그 자격 조건이 충족되는가를 본문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신분이 존귀하여야 합니다. 아론도 존귀한 자 중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존귀한 입장을 살피면

1)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하셨습니다.(히 7:27)

2)죄가 없어야 합니다. 히 9:14에서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하셨고, 히 8:26에서도 그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3)사람 중에서 선택되어야 하고,(히 5:1)

4)영원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임이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대표한 영원한 중보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히 7:24-25)

2. 인간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1)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인간을 체험하시려니까(히 4:15) 그 연약을 느끼실 때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리셨습니다.(히 5:7)

2)인간을 체험하는 뜻은 고난으로 온전케 되시기 때문이며(히 2:10) 이는 고난의 체험이 중보자의 자격 조건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피흘리셔야 하고,(히 9:14,22) 죽음도 맛보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2:9) 또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시는 것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히 7:27) 따라서 예수님은 33년 동안의 생활에서도 많은 고난을 체험하셨습니다. 저는 그 고난의 역사를 마태복음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헤롯왕의 핍박(2:13), 나사렛 사람이란 멸시(2:23), 40일 금식 기도(4:1), 집 없는 가난(8:20), 피곤(8:24), 음모 받으심(12:14, 26:4), 고향에서의 배척(13:57), 눈물과 통곡의 기도(히 5:7, 14:23), 음모와 오해받으심(16:14), 시장하심(21:18), 시험받으심(22:23,34), 탄식하심(23:37), 배신당하심(26:21), 슬픔 당하심(26:37),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이같은 인간고를 몸소 체험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인정과 허락(임명)을 받아야 합니다. 죄없이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 인정을 받고(히 5:8,9) 또 임명을 받을 때 맹세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며(히 5:4, 7:21)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요 10:18) 결국 이런 제사장은 예수님 뿐인 것입니다. 본문8-9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은즉.....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중보자 되시는 일의 최후 절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하신 생애 전체의 고난이 전부 다 중보자 되시는 과정에 해당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사 53:4-9)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고난을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 사실이 700년경 전에 예언되었으니 곧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셨다(4절), 그는 찔림과 상함을 당하였으며 징계와 채찍을 받으셨다(5절), 또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7-8절)”고 하셨습니다.

5. 이로 인하여 중보자의 사역이 네 가지 단계로 성취되는데 그것이 곧 대속, 속량, 유화, 화목입니다. 중보자의 최종 목적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해인데 거기에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1)대속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사 면제하심이요,(욥 36:18, 잠 21:18, 사 53:4-6)

2)속량이란 죄사함 받은 자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심이요,(눅 1:68, 갈 3:13, 4:5, 호 13:14)

3)유화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심을 푸시는 것이요,(욜 2:18)

4)화목이란 하나님과 죄인간의 친교적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후 5:18, 엡 2:16)

이 시간에 중보자의 성격과 중보자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주님의 인간고가 따른다는 사실과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이렇게 계획적이고, 심오한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17과 겟세마네의 기도 (막 14:32-42) 목록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그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었고, 기도하시게 된 과정에 대한 말씀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끝내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계곡 겟세마네 골짜기로 가셨습니다.(막 14:26,32, 요 18:1) 그때에 가룟유다는 성찬에 참여한 후(눅 22:21) 대제사장들에게로 갔고, 예수님의 기도가 끝날 무렵에 대제사장들과 그 하속들과 함께 예수님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막 14:43) 예수님은 겟세마네 골짜기에 오셔서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한 여덟 제자들에게 “자신이 기도할 동안 그 장소에 앉아 있으라”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조금 더 나가신 후에 슬픔과 심히 고민하시는 표현을 나타내시면서 세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하시고, 또 조금 나가셔서 혼자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지 않고, “앉아 있고 깨어 있으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1. 여기의 “앉아 있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기도하라”는 뜻일까요? 38절에 보시면 피곤하여 잠자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신 것을 보면 분명히 기도를 부탁하신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기도로 깨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중보적 기도와 십자가를 감당하셔야 하는 기도를 혼자 끝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기도하여야 할 성격과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제자들이 기도하여야 할 이유는 자신들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 기도를 게을리 하므로 예수님 수난시에 시험에 들어 옳게 처신하지 못하였습니다.

2)예수님은 중보 기도와 십자가를 위한 기도를 혼자 하신 것입니다. 중보자는 예수님 뿐이시니까 예수님만 중보 기도를 하셔야 함이 당연하고, 또 십자가 구속 사역도 예수님이 홀로 감당하셔야 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 협조를 구하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속 사업은 예수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일부 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속 사역의 공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한 기도의 협조를 받으시지 않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까지도 예수님의 수난을 확실하게 예측하지 못했으며 혹 제자들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구속 사역에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 중보자의 자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하셨습니까?

1)35절에 보시면 “조금 나가사” 하셨으니 이것은 인적 방해를 받지 않는 분위기에서 기도하시되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고, 몹시 애쓰시고 힘들여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2)“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으니” 이것은 고난의 순간이 잘 감당되어 지나가기를 기도하신 것이요,

3)“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잔”이란 것은 십자가 자체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의 대상으로 버리시고 외면하시는 것을 영적 고난의 잔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옮겨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 버리실만큼 외면하시는 것은 영적으로 당하시는 큰 고난인데 예수님은 그것이 면하여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간구하신 것입니다.

4)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반복하시는 것은 마음에 안위와 응답의 확신으로 용기가 일어나기까지 하신 것이었습니다.

5)그리고 41절에서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그만 되었다)”하신 것은 기도로서 용기를 힘입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해도 되었다 하시고 끝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자가 간절하게 기도한 후에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를 끝내시자 이어서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계속적인 수난의 시간을 승리로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때 그 기도가 아니었더라면 다른 순간에 그와 같이 기도를 하실 기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18과 깊이 생각할 것 (히 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 주간에 깊이 생각할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 관한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려면 그에 대한 가까운 관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본문에서 세 가지를 생각할 것이 있으니

1)성도를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입었음”은 천국 백성이란 존귀를 뜻하고, “거룩하다”는 것은 순결함을 뜻하며 “형제”란 가까운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존귀함과 순결함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셔야 하는데 먼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그 보내신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모범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으로 전달되었고, 모범은 사도들의 생활로 전달된 것입니다. 고전 3:10에서 “사도들이 터를 닦았다”는 말씀과 엡 2:20에서 “너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씀이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의 모범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교훈과 생활 모범을 깊이 연구하여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킨 중보자를 뜻합니다. 그 중보 사역이 곧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역입니다. 자신이 화해의 제물이 되어 희생하시고, 믿는 자의 죄를 사함받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소나 양의 제물로 상징적 희생을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 상징의 실상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로서 자신의 몸을 고난과 죽음에 넘겨주어 희생의 제물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인간을 대표한 입장에서 받으시는 것이고, 중보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인성과 신성을 겸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하셔야 할까요?

1)그의 존귀한 신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 죄없이 거룩한 신분, 또 완전한 인간과 신을 겸한 신분입니다. 고난은 인간적으로 받으시고 생명의 희생과 중보는 하나님의 아들 신분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존귀한 신분에는 무죄성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아니면 여러 사람을 구원하는 속죄 제물과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히 5:6) 그래서 신인양성의 신분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분과 또 흠없이 거룩한 신분을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중보자가 고난으로 대신 벌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53:6) 여기에서 고난은 정신적, 육신적으로 받으셨는데 정신적 고난은 비하의 고난과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의무감이며 육체적 고난은 생애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고, 죄많은 인간 세계에 오시되 종의 형편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비하의 정신적 고난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의 모든 죄를 지식으로 깨닫고(사 53:11) 그 죄에 대한 속죄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변호하는 책임이 역시 정신적 고난입니다. 그리고 종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약자의 입장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육체적 생애의 고난이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난도 역시 육체적 고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고난을 참으셨고,(눅 24:26, 히 12:2)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으며(히 5:8) “고난으로 구원의 주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히 2:10)

3. 고난 주간에 생각하실 것은 범죄 또는 연약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희생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은즉 마땅히 죄를 원수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와 죄는 상극입니다. 따라서 고난 주간에는 특별히 죄와 연약을 삼가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요,

4.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십자가의 전제조건이고, 또 자기의 죄를 사함 받는 조건도 되며(눅 6:37)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여는 것도 됩니다.(마 5:23, 18:18) 만일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자신도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약 2:13)하셨고, 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시 32:1)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벧전 3:9) 이렇게 고난 주간에는 이웃에 대한 용서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충성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 2:10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려면 먼저 자신을 못 박는 일, 다시 말하면 정과 욕을 죽이는 일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 주간에 깊이 생각할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② 예수님의 고난과 모범, ③ 그 신분의 가치를 생각하시면서 ④ 죄를 멀리하고 회개하며 용서하고 자기를 못 박으며 충성할 것을 결심하시는 기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9과 재판을 받으심 (막 14:43-65) 목록으로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신 기록은 4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으나 표현의 차이가 있어서 그 정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우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난 기사는 대동소이 합니다.(마 26:47-48, 27:11-26, 막 14:53-65, 15:1-15)

1)마태복음의 내용을 먼저 살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붙잡혀 오셨는데 “그곳에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57절)하였고, 마가는 계속 “모이더라”고 하였습니다.(막 14:53)

2)대제사장들(안나스와 가야바)과 공회(종교 회원)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고, 두 사람이 나타나서 “성전을 헐고 삼일에 짓는다는 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증거가 서로 합하지 않았다”는 말씀과(막 14:56)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막 14:61)

3)이때 대제사장이 “그것이 사실이냐”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았고,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 “네가 말하였다”고 하시므로 질문자 스스로 대답하게 하신 후 “이 후에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하시니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며 “참람한 말을 하였은즉 더 증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으니 너희 생각은 어떠냐?”고 공회원들에게 물어 “사형에 해당한다” 하니까 그대로 인정하였고, 그시로(무리들이) 야유와 폭행을 자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57-59절)

4)그 다음에 빌라도 총독의 집으로 끌고 갔고(그 다음에 유다의 뉘우침의 기사가 있음, 27:3-10) 총독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총독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다”하신즉 총독은 예수님께 “제사장들의 고발에 대한 항변을 하라” 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때에도 대답을 피하셨습니다. 이때에 총독의 아내가 “꿈에 의인을 위하여 애쓴 일이 있은즉 예수님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는 통지를 접한 기사가 있고, 유월절 명절에 죄수 1인을 석방하는 관행이 있어서 빌라도가 그 경우로 예수님을 석방하려 하였으나 역시 고발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하므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민란을 우려하여 손을 씻으며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하고 사형에 넘겨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가는 기록하기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 주었다”고 하였습니다.(막 15:15)

2. 누가복음에 나타난 재판 기사를 보충하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눅 22:66-70, 23:1-25)

1)눅 22:66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말하라” 하였을 때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또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하시므로 예수님이 대답하시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셨고, 또 69절에서는 “이제 후로는 내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마태, 마가의 기록 중 “이후에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장차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시고 재림하실 때에 모든 인류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70절)하신즉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다는 말을 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재판을 끝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그 다음 빌라도의 법정으로 갔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고소자들이 예수님은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요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 하고 또 자칭 왕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였을 때 “네 말이 옳다”고 하셨는데도 빌라도는 “내가 보니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 또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정치적 반역이 아닌 종교적 의미로 받고 또 유대인들의 시기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7:18, 막 15:10) 그때 무리들이 “예수는 갈릴리에서부터 유다까지 백성을 소동케 하는 자라”(5절)하였을 때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관할상의 시비가 없기 위하여 헤롯왕에게 보냈습니다. 마침 그 당시에 갈릴리왕 헤롯(헤롯, 안디바, 갈릴리 뵈뢰아, 요단강 동쪽을 치리함.)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에 보낸 것입니다. 헤롯의 시무처도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헤롯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한 것 때문에 보기를 원하였는데 만나게 되어 기뻐하였고, 여러 말로 심문을 하였으나 예수님이 대답하시지 않자 고소하는 말만 듣고 죄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희롱만 한 후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습니다. 이는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일(통치자끼리 서로의 관할권을 존중해 준 일)로 인하여 빌라도와 헤롯 사이가 원수 지간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3)빌라도는 다시 재판을 하면서 절기에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때리기만 하고 살려 주려고 하였으나 무리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23:23) 그들의 구하는대로 사형에 넘겨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부패한 법정에서 목소리 큰 자의 편을 들어 준 것입니다. 이때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 보려고 세 번이나 다짐하는 노력을 하였지만(눅 23:14-25) 결국 정치적 타산을 생각하는 편으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3. 요한복음에 나타난 재판 과정 설명이 더 특이한 것입니다.(요 18:12-36, 19:1-16)

1)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에게 갔을 때 “가야바”가 아닌 “안나스”에게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 대제사장직을 사위에게 넘겨주고 은퇴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도를 한 것입니다. “가야바”는 처음 예수님을 핍박할 당시부터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을 하였으니(14절) 이것은 예수님을 죽이자는 뜻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을 “구속 사업의 예언”으로 섭리하셨던 것입니다.(요 11:49-52) “안나스”가 예수님께 “무슨 교훈을 하였으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은밀하게 교훈한 일이 없으니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하신즉 안나스의 하속이 불쾌히 여겨 “예수님을 때렸다” 하였고, 예수님은 “말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치느냐”고 하셨으며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상태로 사위 “가야바”에게 보냈다고 하였습니다.(21-24절) 그리고 “가야바”가 재판한 것은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안나스”가 사위를 대신하여 처리한 것만 기록을 한 것입니다.

2)그래서 닭이 울 무렵에 빌라도의 법정으로 갔는데 고발자들이(28절 저희) 그날 해가 지면 유월절 잔치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죄인(예수님)을 데리고 법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송사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에게 아부하는 태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 잔치를 앞두고 부정한 일(죄인을 사형언도하는 것)을 하시게 하여 미안하다는 표이기도 한 것입니다.(18:28-32) 그래서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서 상황을 알아보고 “너희가 법대로 재판하라” 하였으니 이 말은 중범자가 아닌 경우 자기의 재판권을 대제사장에게 일임한 것이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총독이 하셔야 한다” 하니까 빌라도가 관정으로 들어오게 하여 재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빌라도는 재판석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총독 당신이 나를 왕으로 알고 묻는 것이요 아니면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묻는 것이요” 하니까 총독은 “너희 나라 사람들이 너를 왕이라고 하여 묻는 것이라” 하였고, 예수님은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다 만일 나의 나라가 이 세상이라면 나의 종들이 싸워 나를 너희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임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또 묻기를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하였을 때 대답하시기를 “내가 왕이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고 또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러 왔으니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하시니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하고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대로 예수님을 놓아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대도 따랐다고 한 것입니다.

4)그리고 요한복음에 특기된 사실은 19:1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성경과 대조하면 빌라도가 때려서 석방을 시키려고 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눅 23:16) 그리고 밖에 있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니까(19:4) 무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한즉 그 소리에 못이겨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묻기를 “너는 어디서왔느냐” 하였으나 예수님이 대답하시지 않자(8-9절)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못 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말하지 않느냐” 하였고,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을 것이니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을 썼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또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라”고 소리를 지르자 제사장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한즉 무리들이 “그렇게 해 달라고 하므로 결국 못 박도록 넘겨 주었다”고 하였습니다.(19:14-16) 요한복음에 나타난 재판 기사는 더 자세한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도록 선동하였고,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였으며 다만 종교적 차원에서 핍박받는 “유대인의 왕”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정치적 공세에 밀려 거리낌을 감수하면서 못박도록 넘겨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섭리를 따라 죄없이 돌아가셨으되 불법한 종교계와 정치계의 악한 궤계에 의하여 부당한 재판을 받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4 복음서에 나타난 특징을 살피면서 재판의 역사를 되새겨 본 것입니다.

 

제20과 십자가의 7언 (눅 23:34,4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십자가의 7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여섯 시간 매달린 상태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첫 마디와 끝 마디가 지금 읽은 말씀에 기록되었고, 나머지는 요한복음과(19:26,28,30) 마태복음(27:46)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일곱 마디의 순서는 구원 사역에 대한 말씀과 어머니 부탁에 대한 말씀, 그리고 고난을 절규하시는 말씀과 운명에 관한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집행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46)

1)이 기도는 사형을 집행하는 병정들을 위한 기도인데 그들의 죄의 용서를 구하신 것입니다. 이 용서를 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빌라도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죄라고 하기 어렵고 다만 그들이 메시야를 모르고 죄인으로만 아는 상태에서 가혹 행위를 한 것은 큰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백부장과 예수님의 시체를 지키던 군인들이 그 당시에 된 일들(성소 휘장 찢긴 일, 지진 등)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 27:54)고 고백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죄사함의 기도가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그때 예수님은 병정들이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모르고 학대한 일에 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렇습니다”하고 동정은 하셨으나 모르고 범한 죄도 역시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2. 회개하는 강도를 향하여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23:43) 처음에는 양 편의 두 강도가 다 예수님께 욕을 하였습니다.(마 27:45)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편의 강도가 자기의 받는 벌을 마땅히 여기고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변호하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그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뜻으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낙원은 구원받은 영혼이 즉시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구원의 주로서 구원 사역을 완전하게 이행하신 것입니다.

3. 십자가 곁에 섰는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셨고, 또 그 곁에 섰는 사랑하는 제자(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요 19:26-27) 여기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호칭하신 것은 헬라어의 “구나이”(γύναι)로 좋은 호칭대명사라고 합니다.(요 2:4)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의 기록에서 마리아에게 “어머니” 호칭을 쓰신 일이 없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실제는 이모임)고 하셨지요.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하셨지만 그의 피를 받지 않으셨고, 성령으로 잉태하셨으며

2)마리아의 양육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아들이요, 공적 인물이신 점,

3)또 구속 사업의 사명을 행하실 때 가족과 인정을 초월하여 시행하신 점(마 12:49-50, 19:29) 등으로 가족적인 용어를 쓰시지 않은 것으로 예측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양의 책임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못다 하신 효행과 부양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운명하시기에 앞서 또 말씀을 하셨는데 “나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신 것입니다.(마 27:46) 이 말씀은 아람어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고, 시 22:1에서 다윗이 메시야를 모형한 인물로 등장하여 자신의 고뇌를 호소하는 기도를 할 때 같은 내용을 말하여 예언을 하였는데 예수님이 그 예언의 성취로 그와 같은 호소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난보다도 하나님의 저주로 버리심 당하는 일을(물론 일시적이지만) 가장 괴롭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현실적인 불행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가장 큰 불행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마 9:15)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런 호소를 하신 것입니다.

5.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19:28) 예수님이 목마르신 것은 피와 땀으로 수분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히 9:22과 벧전 1:19에서 “피로 구속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를 다 흘리신 것입니다.(요 19:34)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은 물을 요청하시기 보다 구약의 예언을 응하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시 69:21에서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예수님이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셔야 하는 것이고, 저희들은 예수님이 갈증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19:30) 무엇을 다 이루신 것일까요? 고난으로 감당하는 구속 사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의 할 사명을 다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못다하고 죽는 아쉬움이 없도록 미리 미리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기도하신 후 영혼이 떠나신 것입니다.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평안히 천국으로 가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저희들도 죽음의 평안한 과정을 주시도록 늘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신 것입니다.(히 4:15) 보통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일, 구원하시는 일, 효도하시는 일, 자기의 목적 완수를 선포하시는 일,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가시는 부탁까지 할 일을 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고난 중에 못할 일이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21과 십자가를 바라봄 (요 19:23-27) 목록으로


고난 주간을 맞이하였으므로 “십자가를 바라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은 고난 주간 뿐만 아니라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 수반된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앙적 절기에만 얽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평소에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다가 고난 주간에만 생각한다면 잘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대속의 영적 의미가 있으며 셋째는 십자가에 순종과 겸손과 고난의 인내와 생명의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십자가를 바라보시거나 생각할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적 은혜와 충성이 있었음을 아시고 바라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려면 가까이 그 곁에 까지 갔어야 할 것입니다.

1)우선 예수님을 못박기 위하여 끌고 간 군병들이 있었습니다.(17-24절)

2)그 다음에는 유대인 제사장들과 죄패를 써붙인 “빌라도”도 그 곁에 갔었습니다.(요 19:21)

3)그리고 중죄를 짓고 같이 사형받으러 끌려간 두 강도도 있었습니다.(눅 23:39)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으나 누구 누구인지는 성경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고,(눅 23:48)

4)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 멀리서 바라보다가(막 15:40) 나중에 가까이 왔으며(25절)

5)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하셨고,

6)또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예수님의 모친을 부탁하신 점으로 보아 요한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십자가 곁에 있었다”하여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제사장, 빌라도, 군병들, 예수님을 욕한 강도가 십자가 곁에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멀리 서서 구경만 한 사람들도 역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까?

1)신앙적 관계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관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 방도로 믿는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분은 죄없이 돌아가시는 것이며 또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므로 그 분은 나의 구세주이시다, 그 분은 다시 부활하셨다, 나는 그 분의 제자요 종이므로 그분께 죽기까지 충성할 것이다”라는 믿음의 지식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적 관계없이 십자가를 대한다면 구경꺼리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2)하나님의 높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하셨는데 그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뜨겁게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큰 것을 자식들이 모를바 아니지만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대신 버림 받아 죽어주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여 둘도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숭고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외식적인 신자가 될 것이요, 또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없이 생활할 것인즉 이기주의를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헬몬산 같이 높고 사해바다 같이 깊으며 광야 같이 넓고 요단강처럼 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엡 3:18-19) 누가 자식을 희생의 제물로 준 일이 있습니까?

3)십자가를 보는 저희들은 충성된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충성된 마음으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① 우선 회개할 마음이 생깁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겸손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되시고, 죄없는 죄인이 되셨으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어찌 감히 인간이 부끄러움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③ 사랑의 넓은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로 죄인들을 감싸 주셨으니까요. ④ 고난과 인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여섯 시간을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난이었습니다. 이 고난을 저희들이 상상한다면 우리도 주님을 인한 고난을 많이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⑤ 봉사하고 희생할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되신 희생, 인간의 고난을 33년이나 받으신 희생, 죽음의 고난, 그리고 인간적으로 부활하신 몸을 영원히 지니고 계신 것은 하나님의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바라본다면 기독교적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 올 것입니다. 반드시 ① 신앙의 눈으로 ②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마음으로 ③ 또 충성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가까이 바라보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22과 십자가의 고난 (마 27:27-5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이 진행되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사형 집행하도록 넘겨준 다음부터(마 27:26) 운명하실 때까지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들로부터 미움받는 고난을 정신적 고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영적 고난으로 그 다음에 육체의 고통과 도덕적 생활의 고난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정신적 고난을 살펴보면

1)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입니다.(마 26:56) 이 일은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지목으로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 가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요 19:25-26에 보시면 십자가 곁에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 한 사람(사도 요한)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그들은 가족과 친척 차원에서 가까이 간 것일뿐 다른 이들은 다 도망한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베드로도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약한 것을 생각하시면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2)군병들과 구경꾼들의 조롱입니다. 군병들이 왕노릇을 흉내내게 하면서 조롱하였고, 옷을 벗겨 제비 뽑는 추태를 벌였으며 또 함께 십자가에 죽는 두 강도가 비난을 퍼부었으며(한 강도는 나중에 회개함)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네가 남을 구원한다니 먼저 자신을 구원해 보이라”, “네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구원하시나 보자”는 말로 괴로움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참으셨다고 하였습니다.(히 12:2)

3)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한다면 의인을 죄인으로 아는 무리들이 죄없는 사람을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죄인을 만들어서 유죄 판정을 받게 하고 사형까지 당하도록 만드는 불법한 행위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까?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고난입니다.

1)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만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시는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이 육체의 짐이라면 만 백성들의 죄짐은 영적으로 지시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사 53:11에 보시면 “친히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영혼의 수고”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이의 죄를 마음 속에 기억하시고 그것들을 속죄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희생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2)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고난입니다.(신 21:23, 갈 3:10)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빛이 비취어야 하는데 그 대신 캄캄함이 임하여 기도 응답과 교제의 단절을 예고한 것입니다.(45절) 이것은 일시적이지만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살기를 체념하여야 하는 고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가 시험을 당하면 피할 길도 주시고,(고전 10:13) 스데반이 죽을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여 주었지만(행 7:56)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빛과 희망 대신 어둠과 침묵만 있었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신 영적 고난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3. 육체적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은 인간으로서의 기적없는 고난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것이나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신 것이나 손과 발에 굵은 쇠못으로 박힘을 당하시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3시-9시) 여섯 시간을 매달리신채 피흘리며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 세상에서 그 이상으로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막 15:25, 마 27:45-50)

4. 도덕적 생활의 고난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 노릇을 잘 하려고 해도 많은 고난이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그런 고난을 받으며 사셨습니다. 예를 들면

1)낮아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빌 3:10) 하나님의 아들이 죄많은 세상에서 종처럼 사셨으니까요. 그것을 비하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2)악과 싸우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죄와 싸울 때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 12:4)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일생을 사시면서 죄를 짖지 않으셨으니 그 고난이 어떠하였겠습니까?

3)인내의 고난입니다. 억울함을 당하시거나 아픔을 느끼시거나 모든 불의함을 보실 때마다 인내하셨을 것이요,

4)봉사와 희생의 고난도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외에도 비하의 고난, 악과 싸우는 고난, 인내와 희생의 고난을 감당하시는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에게 속죄와 중보와 영생을 주셨고, 다른 고난은 우리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23과 십자가 현장 (1) (마 27:27-44) 목록으로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어서 “마태가 목격한 십자가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 말씀을 상고하실 때 먼저 기억하셔야 할 것은

1)십자가의 현장을 말씀한 내용이 4 복음서에 다 나타나 있지만 저희들이 “마태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셔서 본문에 나타난 현장만을 살피시는 것이고,

2)예수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당하심을 이해하지 못한채 목격하였지만 지금은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현장을 바라보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죄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받을 죄의 형벌을 짊어지시고 고난으로 버림을 당하신다고 믿으니까 이것을 모르고 보는 자와 알고 보는 자 사이에 큰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이 시간에 상고하는 말씀의 범위는 “예수님이 불법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집행을 하도록 내어준 시점부터 운명하시기 직전까지의 사실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읽은 본문 말씀에는 ① 예수님을 재판정에서 관정으로 끌려가서 온갖 희롱으로 수모를 받게 한 사실과 ② 사형장인 골고다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게 하는 과정에서 그 발걸음이 더디시자 구레네 사람 시몬을 끌어들여 억지로 지고 가게 한 사실과 ③ 골고다에 이르러 못을 박아 세워 놓고 벗긴 옷을 제비 뽑아 나누며 죄패를 써서 붙인 일에 관한 것과 ④ 그 십자가 주위에서 함께 못 박힌 자들과 구경하는 자들의 희롱하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내용들을 주밀하게 상상해 보시면 저희들이 직접 십자가의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석에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김을 받았습니다.

1)죄없는 예수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사형 선고를 내리는데까지 많은 시기와 음모와 거짓증거와 선동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안 재판관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선동에 못 이겨 “예수님을 죽이라” 하였으니 결국 백성들은 예수님을 시기와 반항으로 죽인 것이고, 빌라도는 정치적 제물로 희생시킨 것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는 희생의 제물로 허용을 하셨던 것입니다.

2)이리하여 군병들은 예수님을 관정안으로 끌고 가서 더 많은 군대를 모아 놓고 먼저 희롱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형무소에 들어가면 희롱을 받는 일이 있으나 사형장에 나가는 죄수에게는 그런 일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버린 자의 입장이 되셨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는 무리들이 사형집행 전에도 여러 방법으로 희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그 희롱의 내용을 보면 ① 거짓 왕노릇을 하게 하였습니다. 본래 입으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것은 왕이 입는 의복을 흉내낸 것이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운 것도 역시 왕의 면류관을 흉내낸 것이며 갈대를 오른 손에 들려 왕의 홀을 흉내 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며 야유를 한 것입니다. ② 야유를 끝낸 다음에 그 얼굴에 침을 뱉았고, ③ 손에 들린 갈대를 뺏어 그 머리를 쳤으며 ④ 이런 희롱을 끝낸 다음에는 다시 옷을 바꿔 입히고 밖으로 끌고 나갈 준비를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죄수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3.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틀을 지우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형틀에 죄수를 죽이는 법이 그 형틀을 죽을 자에게 지워간다는 것입니다. “골고다”라는 곳은 “그 언덕이 해골 같다” 하여 생겨진 이름이고, 관정에서 골고다까지의 거리는 약 1Km 정도인데 그 당시에 그 길은 험한 길이었고, 또 예수님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므로 피곤하셨는데다가 채찍을 맞으시고,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채 피를 흘리시며 150근 정도의 나무로 제조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시기에 많은 고통과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란 사람이 그 곳 가까이서 구경하고 섰는 것을 군병들이 강제로 끌어들여 십자가를 지게 하니까 그는 “억지로 그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고를 도와드린 것이 사실이나 이것이 결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도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구레네 사람 시몬은 사형 집행하는 군인들의 시간의 지연을 단축하도록 도와 준 것뿐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가 목적하는 일 밖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엉뚱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무슨 일로 예루살렘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자기 소관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행진을 구경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만일 시몬 자신이 구세주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한 것을 알았거나 또 그 자손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오히려 보람있는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후손들은 말하기를 “우리 선조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기쁨으로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며 아쉬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모든 정의로운 일에 기쁨으로 봉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에서 된 일입니다.

1)34절에 보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준 목적은 쓴 맛을 맛보이려는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고통을 면하게 하려는 뜻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시고 쓸개 탄 포도주 임을 아시자 마시지 않으셨으니(막 25:23) 이는 포도주에 의해 고통을 덜 느낄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정신을 흐리게 함과 동시에 마취성을 주기 때문에 고난으로 속죄하셔야 할 목적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끝까지 맑은 정신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2)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대체로 못박는 과정은 겉옷을 벗겨 사람을 십자가 위에 뉘운채 양쪽 팔을 벌려 양 손바닥에 못을 박고, 두 발은 한데 모아서 못을 박고, 줄로 허리를 동여맨 후 일으켜 세운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당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는가? 만일 우리들이 그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있었다면 우리의 심정이 어떠 하였겠는가?를 상상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죄를 함부로 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라면 “참으로 죄 짓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3)군병들이 그 벗긴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으니 여기서 옷을 제비 뽑아 나눈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① 시 22:18의 예언이 성취되는 의미가 있고,(구약에서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라고 예언됨.) ②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단벌의 옷까지도 뺏김을 당하는 완전 헌신을 나타내신 것이고, ③ 사형수의 옷을 간직하면 재수가 좋다는 풍설이 있어서 사형수의 의복을 골동품처럼 탐내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37절에 보시면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붙였다고 하였습니다. 죄패라는 것은 사형수의 이름과 죄목을 적은 것인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신 죄로 못박혔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을 못박아 세워 놓은채 계속 조롱하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 주위에는 예수님 다음에 그 좌우에서 못 박힌 ① 두 강도가 있었고, 그 다음에 ② 지나가면서 구경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며 ③ 예수님을 죽이도록 선동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못박아 세우고도 자기들의 욕구가 덜 풀린 듯이 온갖 희롱을 계속 하였습니다.

1)강도 두 사람은 자기들의 죽을 죄로 사형을 받으면서도 44절에 보시면 “다른 이들과 같이 욕을 하였다” 하였으니 한편 강도가 회개를 한 것은 욕을 하다가 뉘우쳐 돌이키게 된 것이고,

2)지나가던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세우는 음모자들의 선전만 믿고 실권자들에게 아부하려니까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기를 네가 성전을 헐고 3일에 짓는다 하였으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던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하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한 죄의 대가인 것처럼 조롱을 하였고,

3)또 예수님을 못박도록 선동한 종교적 지도자들은 “저가 남은 구원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였으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을 것이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한다 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저 상태에서 아들을 구해줘야 할 것이 아니냐”하면서 조롱을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① 예수님은 참으로 완악한 자들의 손에 죄없이 처형을 당하셨고, ② 악한 자가 영안이 어두우면 의인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뜻을 몰라보는 것이요, ③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을 성경이 자세하게 말씀한 것을 볼 때 그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뚜렷한 것인가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④ 다만 저희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자로써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대속하심”이란 확신으로 그 현장을 바라보셨은즉 ① 오직 예수님만을 구세주로 믿고 ② 그 분을 위하여 충성하되 어떤 고난이나 멸시나 천대를 받을지라도 오히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인내로써 주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24과 십자가의 현장 (2) (마 27:45-5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현장”을 살펴보시겠습니다.

1. 예수님의 온갖 조롱과 매맞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이 막 15:25에 의하면 3시였습니다.(유대땅의 시간은 우리 시간보다 6시간이 늦기 때문에 3시=아침 9시임.) 그러니까 3시-6시 까지 된 일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고, 본문 45절에서는 6시-9시 사이에 된 일을 기록하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에 신포도주를 해융에 머금게 하여 마시운 일이었습니다.(45절) 이것은 예수님이 “목마르다”(요 19:28)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냉수나 단포도주 대신에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도록 잡수실 수 없는 독한 물을 준 것입니다. 9시 즈음에 “영혼이 떠나셨다”고 하셨으니까 6시간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채 6시간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큰 고통일 것입니다.

2. 6시-9시 사이에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났는데 그 사실들을 정리해 보면 ① 온 땅에 어둠이 계속 된 것과 ②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과 ③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고, ④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시체)이 일어난 것이고, ⑤ 무덤에서 살아난 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에서 “어둠이 계속 된 것”만 운명 직전에 있었고, 나머지는 운명 후에 일어난 사실인데 여기에서 이런 이변들이 나타나게 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1)온 땅에 어두움이 계속 된 사실에 대하여 눅 23:44에서는 “해가 빛을 잃었다”고 하였으니까 글자 그대로 태양광선이 빛을 내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구름이 가리워 어두워질 수 있다”고 하고,(의미있는 해석임.) 또 어떤 이는 일식 현상이라고도 하지만 그 시기가 유월절인 만큼 유월절 시기는 만월이기 때문에 달이 낮에 뜨지 않으므로 그 해석도 합당치 않으니까 하나님의 기적에 의하여 해가 빛을 내지 않으므로 온 땅에 어두움이 왔다고 보셔야 하는데 왜 이 때에 하나님이 어둡게 하셨을까?에 대하여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독생자의 고난의 정황을 직시하심에 민망하여 밝히 보시지 않으려는 표현”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고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민망할 만큼 큰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2)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과 성도의 영역이 상통한 것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찢어진 휘장은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은 휘장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찢어지니 하나님의 영역인 지성소와 성도의 영역인 성소가 하나로 개통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제사 제도가 십자가로 완성되었으므로 폐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는 인간 제사장을 통하고, 성전의 제사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갔지만 십자가 후에는 이런 것이 필요없이 직접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예시해 주신 것입니다.(히 4:16, 10:20)

3)“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주님이 구속 사업으로 돌아가시지만 장차 온 천하를 정리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예조로 보이신 것입니다.(마 21:44)

4)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것은 역시 주님의 부활과 장차 있을 성도의 부활을 예표로 나타내 주신 것이고,(살전 4:16)

5)“그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부활의 진리를 전파하여야 가장 잘 납득 할 것인가?할 때 천사가 증거하는 것보다 또는 부활한 사람이 증거하는 것보다 부활을 믿는 현세적 사람이 증거하는 것이 가장 유력한 것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나 부활체는 현세적 사람과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도하는 직임을 성도들에게 맡기신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기적이 십자가 현장에 동반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죽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셨는가?하는 것입니다. 46절에 보시면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다 하였고, 50절에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운명하시기 직전까지 똑똑한 정신으로 고난을 당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전체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본문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만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무슨 뜻인가?할 때 이것은 시 22:1을 그대로 인용하신 구약 성경이요, 히브리 말로써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후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동시에 사용되다가 주전 700년경부터 히브리어가 쇠퇴되고, 예수님 당시까지는 아람어가 대부분 통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보면 헬라말 사이에 간간히 아람어가 들어간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달리다굼(막 5:41), 고르반(막 7:11), 아바(막 14:36), 골고다(15:22), 알게다마(행 1:19)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구약 시편 22:1의 히브리어 그대로이며 문제는 “예수님이 운명시까지 성경 말씀을 기억하셨고, 읽으셨다는 점과 하나님께 버림당하시는 입장에서도 성경을 기억하시며 안타까운 기도를 하셨다는 점”이 저희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큰 소리를 지르신 것은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4. 그 주위에서 된 일들이 무엇인가?할 때 그 주위에서 네 가지 사건이 나타났는데

1)그 자리에 섰던 어떤 이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말씀을 “엘리야를 부르며 그에게 호소하는 말이라”고 와전시키니까 그 남은 자들이 또 그 말을 듣고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지 보자”하며 비난을 하였고,

2)한 사람이 달려가 “신 포도주를 해융에 찍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한 것”은 요 19:28에서 “목마르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니까 어떤 이가(먹나 안 먹나 보려고) 신 포도주를 입에 대주자 49절에서 “남은 자들이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구원할테니 보자”하며 만류하였으니 이것도 일종의 야유인 것이요,

3)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감탄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적과 이변을 보고야 믿었지만 저희들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믿는 신앙의 역군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4)끝으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면서 따라온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세베데의 아들들의 어머니 등 많은 여자들이 멀리 서서 바라 보고 있었으니 ① 이들은 여성의 신분으로써 성경에 기록될 만큼 예수님을 섬기며 가까이 따랐고, ② 십자가 현장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멀리 서서 바라 보고 있었으니 도망 간 제자들 보다는 가까이 따른 것이며 성경에 “멀리 서서 보았다” 하셨은즉 십자가 곁에 가까이 있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군병들을 동원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혹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하거나 평소에 들은 부활한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마 27:64)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십자가 현장을 말씀으로 목격하였습니다. 따라서 ①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와 주님의 고난과 희생에 감사하셔야 하고, ② 주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의 십자가 질 것을 결심하셔야 하며 ③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셔야 하겠고, ④ 되는 일을 보고 믿기 전에 말씀 그대로 믿으셔야 하며 ⑤ 십자가를 멀리 따르거나 구경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주님 가까이 나아가 고난의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하셔야 할 것을 교훈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25과 운명하신 후에 있은 일 (마 27:51-6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운명하신 후에 있은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 27:50에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 오후 3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을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운명을 하셨습니다. 마 27:51-61까지는 당일에 된 일이고, 62-66절까지는 그 다음 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마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51절) 이것은 기적으로 된 일이며 성도가 예수님의 중보로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구약 시대부터 내려오는 성전과 제사 제도가 있었는데 그 성전의 구조는 마당과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습니다. 이 때에 일반 성도는 제물을 갖고 마당까지만 가고, 일반 제사장은 성소까지만 들어가며 대제사장만 1년에 1차씩 피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져서 둘이 된 것은 구약 시대의 성전 제도가 폐지되면서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직접 열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하늘 보좌에서 직접 중보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성전 제도는 물론 인간 제사장도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이후의 성도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롬 14:12과 벧전 4:5에 보시면 “성도가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직고한다” 하셨고, 벧전 2:9에서 “성도를 왕같은 제사장이라”하셨으며 히 10:20에서도 “그 길은 우리를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2. 부활의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51절에 보시면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무덤 속에서 자던 성도의 몸(시체와 유해)이 일어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린 것”은 지진의 현상이고, “시체가 일어나 예루살렘성에 까지 들어가 보인 것은 부활의 현상인데 지진도 부활을 이루기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이런 기적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미래에 있을 성도의 부활을 예고하시고, 또 예수님을 죽인 악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부활한 성도의 형편은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또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이 부활체는 나라로 부활과 성격이 다른, 즉 다시 죽을 수는 없는 영화로운 것이므로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기적의 역사로 부활과 승천의 의미를 넉넉히 증거한 것입니다.

3. 54절에서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나 이변을 보고 믿음을 가지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듣고 믿었더라면 좋을 뻔 하였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것입니다.

4.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루살렘의 공회원이었습니다.(눅 23:50) 평소에 그는 은밀히 예수님을 존경하였습니다.(요 19:38) 또 요 19:40에 보면 “니고데모와 함께 시체에 향품도 발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말씀만 살펴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제자인데 그가 빌라도에게 찾아가 “시체를 달라”고 청하여 받은 후 세마포로 싸서 자기를 위하여 예비한 바위 속 새 무덤에 넣고, 큰 돌로 아구를 막으므로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 본래 사형수의 시체는 사형수 묘지에 장사하거나 짐승에 뜯기도록 버리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님의 시체를 “요셉”이 정중하게 장사 지낸 것은 그가 평소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섬기지 못한 한을 돌아가신 후에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체가 “부자의 묘실에 들어갈 것”에 대한 예언이 사 53:9에 말씀되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셉은 예언의 성취자로써 생전에 못 섬긴 한을 돌아가신 후에나마 섬겼고, 또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더욱 확실히 증거함이 되는 것입니다.

5. 이렇게 하여 당일이 지나고 다음 안식일(토요일)이 되었는데 이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 총독이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저지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성일로 지키는 날인데 이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유혹하던 예수가 살았을 때 3일 만에 살아난다는 말을 하였는데 만일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 해가고 살았다고 거짓을 유포하면 그 유혹이 지금보다 더 클지 모르니 잘 지켜야 하겠다”고 청원을 하니까 빌라도도 그럴듯하게 여겨서 “돌문에 인봉을 하고 힘대로 지키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 악한 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가능성을 믿었으나 인간의 힘으로 무덤을 지켜서 제지하려 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들은 만일 예수님이 부활을 한다면 거짓말을 유포하여서라도 부활 사실을 부인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활 반대론은 오늘까지도 계속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으로 부활하여 빈 무덤이 되었으니 이들의 소행은 오히려 부활을 증거하는데 도움을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운명하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은 ①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 ② 지진과 함께 시체가 부활 한 사건, ③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신앙을 생각하게 된 일, ④ 요셉이 장사를 지낸 일, ⑤ 부활 반대 운동이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제3부 성찬예식 설교

제26과 성례식과 은혜 (마 28:19-20, 26:26-30) 목록으로


1. 성례식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명하신 신앙적 의식으로 세례식과 성찬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 의식의 근거는? 예수님이 모범으로 시행하시고 또 시행할 것을 명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또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제도를 시행케 하신 것과 결례식이 신약시대의 세례와 상통하는 의미가 있고, 유월절 행사를 하게 하신 것이 신약시대의 성찬예식과 상통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1)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고, 또 베푸신 일도 있으며(요 3:22)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2)세례의 의식은 침례의 근거보다 “물 있는 곳에 세워 놓고 물을 끼얹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3)세례의 뜻은 구약의 할례 뜻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도장 찍어 증명함)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특징 ① 믿는 성도다 ② 죄사함 받았다 ③ 하나님의 자녀다 ④ 천국시민이다 ⑤ 교회의 회원이다 라는 자격으로 세상 앞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4)세례로 통한 은혜가 무엇인가? 우선 예수님 말씀대로 복종한 은혜가 있고, 중대한 일에 증명서를 받는 것만큼 현실적으로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5)그렇다면 확신도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왜 세례를 주는가? ① 구약의 할례 대상이 믿는 자의 집에 거하는 모든 남자라는 점. ②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었다”하실 때 신앙고백을 못한 어린이들도 구원에 포함되기 때문이요 ③ 어린이의 연령을 만 2세 미만으로 하는 것은 철이 들어 스스로 믿음을 배반하는 힘이 생기기 전에 부모들의 신앙적, 교육적 책임 하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빗나가지 않을 것을 책임지게 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공노릇하는 구원선에 태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성찬예식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1)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의 대속물이 될 것을 몇 시간 앞두시고 대속의 방법과 은혜를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시행하셨고, 또 시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2)식사하실 때 - 떡을 자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기념하여 먹게 하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고난과 공로를 상상해 봄으로 대속의 은혜를 강하게 실감하며 또 믿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시청각적으로 재연할 때 더 느끼는 바가 큰 것입니다.

3)이것은 어떤 사건을 말로만 듣는 것보다 연극 또는 다큐멘터리로 들으면 더 실감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먹는다”는 뜻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또 성찬예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4)저희들이 이 예식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의미는 ① 우선 명령대로 복종하는 은혜가 있고 ② 십자가의 공로를 더 실감있게 확신하며 ③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여 먹음으로써 주님과 나와의 연합의 관계를 든든히 하는데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매일 성찬예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다 적게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도 매번 설교만 하시다가 마지막에 한 번 성찬식을 시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전하는 은혜보다 말씀으로 전하는 은혜를 더 비중있게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천주교회에서는 신부가 기도를 한 후에는 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 것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그 성분의 변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눅 22:19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의 몸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또 루터파에서는 기념이 아닌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찬예식은 주님을 모신 자리에서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으로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믿는 신앙 안에서 주님이 더 가까워지고 주님의 사랑이 더 뜨거워지며 성도간의 화목이 고취되고 십자가 희생을 흠모하는 사명이 생기게 되며 주님의 몸이 내 몸에 들어가는 것처럼 주님과 연합된 생활에 들어가라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27과 성찬예식의 의미 (마 26:26-29) 목록으로


이번 성찬예식을 집행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성찬예식의 의미”를 또 한 번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우선 성찬예식에 관한 교훈이 성경 어디에 기록되었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1)예수님께서 성찬예식의 모범을 시행하신 말씀은 본문과 막 14:22-26, 눅 22:19-20로서 공관복음에만 세 번 기록되어 있고

2)실제 모범은 아니나 성찬의 의미를 말씀하신 기록은 요 6:47-59, 고전 11:23-24에 기록되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성찬예식을 시행하도록 명하신 이유를 아셔야 하는데

1)예수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은혜를 실감있게 깨닫고 십자가 중심 생활에 접근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떡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상징하여 먹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대속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내 몸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 또는 십자가와 연합된 생활을 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2)예수님의 구속사업을 기념하고 전파하는 뜻이 있습니다. 고전 11:25-26에 보시면 성도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기념하고 또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몇 가지 국경일이 있듯이 중대한 일은 기념하고 전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나 또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념하고 전파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3)예수님과 성도간에 사랑의 친교를 더욱 뜨겁게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1)사랑의 친교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만찬을 가지시므로 나타내신 것이고

2)“사랑의 친교가 더욱 뜨거워야 함”은 평상시에도 성도간에 또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친교가 있었는데 특별히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고 준비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갖는 애연의 만찬이므로 사랑의 뜨거움을 더욱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도간에 사랑의 친교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4)문제성을 지적하고 반성하며 회개하고 새 출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범죄를 지적하신데서 비롯된 것이고, 또 고전 11:27에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가 없어야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하면서 참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부정한 자세로 성찬을 받았습니다.(마 26:23, 눅 22:21) 그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29-32)

3. 우리들 자신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무엇입니까? 성찬의 의미에 부합되는 몇 가지 취약점을 살핀다면

1)믿음 지식의 부족일 것입니다. 믿음의 지식이 없다면 성찬에 참여 할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살필 때 믿음 지식의 확실성이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지식의 풍성함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2)사랑의 부족일 것입니다. 성찬은 친교적 애찬으로 시작되었고, 배신자 같은 자가 있어서는 안되며 서로 서로를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처럼 희생을 못한다 하여도 서로 존경하며 받드는 양보심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3)인본주의 현실주의에 끌려가는 부족입니다. 인본주의를 떠나려면 사람이 하는 일을 본받지 말고 성경만 지켜야 하고 또 현실주의를 본받지 않으려면 고독한 중에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세계로 달음질하지 말고 예수님만 나를 알아주시는 세계로 달음질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취약점은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신을 살피며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고 죄 안짓기 위하여 노력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끊임없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성찬식의 의미를 잘 살려서 십자가와 복음 전파와 사랑의 친교와 회개를 성취하고 또 이에 대한 취약점을 보완하여 새 출발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8과 세례와 성찬 (마 28:16-20, 26:26-30) 목록으로


1. 대부분의 교회가 봄, 가을에 세례식과 성찬식을 갖습니다. 이것을 시행하는 시기는 특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시행할 수 있습니다.

2.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를 가리켜서 “성례” 또는 “성례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례”라고 하는 이유는 세속세계에서 시행하지 않는 구별된 의식인 점도 있고, 또 예수님이 직접 본을 보이시고 명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례”란 거룩한 예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거룩”이란 용어는 하나님께 대하여서만 사용하는 절대적 용어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나 물건들이 하나님께 직속될 때에만 거룩한 것 또는 거룩한 일로 분별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이 곧 세례식과 성찬예식입니다. 세례식은 신앙고백을 바로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교회 안에서 인치는 의식이고, 성찬예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의미를 상징적 의식을 통하여 기념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기독교회에서는 이 성례식을 성경말씀과 함께 은혜의 방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은혜의 방편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성경말씀으로 은혜를 전달하시고 또 성례를 통하여서도 은혜를 전달하신다는 뜻입니다. 설교를 듣고 잘 깨달은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5. 그런데 세례를 받고 은혜를 받은 줄 알거나 성찬을 받고 은혜를 받은 일에 대하여는 표현을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떤 의미에서 성례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인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1)세례에 대하여 ① 이 세례식은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 자체가 실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다음에 말씀 드릴 성찬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세례의식이나 성찬예식이나 구약의 제사의식이 다 의식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의식이 갖는 의미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② 그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선 우리들은 “여차 여차히 세례를 베풀라”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은혜받는 방법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시느냐”하고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일단 순종해야 한다”는 그 자세가 복을 받는 방법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③ 그리고 세례를 받는 의미는 많습니다. ㉠ 우선 십자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물” 그 자체가 씻음의 재료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 없이 흘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공로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피를 죄씻음의 재료로 말씀하신 것이고(히 9:14) 또 피의 상징으로 물을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 죄사함을 깨닫게 합니다. 세례의식은 물로 때를 씻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보혈의 공로로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확인인 것입니다. 집을 살 때는 돈을 주어야 합니다. 집주인은 돈을 받아야 집을 내 줍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 집을 주었다는 표는 계약서입니다. 이와 같이 죄사함은 십자가 보혈로 되지만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사람 앞에서 확인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나님은 확인 안하셔도 아시지만 지상의 유형교회에서는 어디까지나 사람들 사이에서 구별하여야 하기 때문에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 죄사함 받은 자에게는 따라가는 은혜가 많습니다. 심판을 면하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되는 은혜, 영생하는 은혜, 따라서 세속과 구별되고 교회의 회원이 되며 하나님의 특별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은혜 등이기 때문에 세례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2)성찬에 대하여 성찬예식이 왜 은혜의 방편이 되는가? ① 이것도 의식 자체가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고 일단 순종으로 은혜를 받으며 또 세례처럼 성찬예식이 보여주는 의미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② 세례의 물이 “십자가의 보혈을 생각나게 한다” 한 것처럼 성찬예식에도 여러 가지로 보여주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 십자가를 보여 주십니다. 포도주와 떡이 바로 그것입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상징이고, 떡은 그 살의 상징입니다. 피와 살점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요, 피는 생명을 버리심으로 주시게 되었고, 살은 고난을 당하시므로 주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때 주님의 고난과 희생을 깊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예식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바라보는 적절한 방법입니다. ㉡ 친교적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만찬의 주인이 되셨고, 여러 제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죄사함과 구원없는 잔치는 하나 마나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만찬은 구원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사랑과 성도간의 사랑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 연합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이 우리의 몸으로 들어 가는 연합인데 이것은 영적으로의 연합을 뜻합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이런 의미로서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9과 누가복음의 성만찬 (눅 22:7-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누가복음의 성만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만찬의 기록은 마 26:17-30과 막 4:17-26 그리고 지금 읽으신 눅 22:7-20에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만찬이란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의하여 떡을 예수님의 살로 기념하고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기념하여 먹는 의식입니다. 성찬예식은 세례식과 함께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의하여 지키는 기독교적 의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성례라 하고 은혜의 방편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저녁을 잡수시는 자리에서 “떡을 취하여 축사하신 후 이 떡은 내 몸이니 이것을 먹으므로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잔을 취하신 후 역시 축사하시고 이 잔은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시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를 시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성찬식 설교를 많이 들으셨겠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살피면

1. 15절에서 성찬식을 가리켜 “유월절을 먹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없는 떡(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장자들이 죽게 되는 재앙을 피한 사건이요(출 12:11) 그것이 절기가 되어 1월 14일-21일까지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미래에 있을 것을 기다리면서 기념하는 절기인데 예수님이 성만찬을 유월절에 지키신 것은 의식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는 뜻이며 다만 구약시대의 유월절은 십자가를 기다리면서 기념하는 의식이고 신약시대의 성찬식은 십자가 사건이 성취된 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유월절과 성찬식의 의미는 같은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같은 말씀에서 “그 유월절 잡숫기를 원하고 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예식을 원하고 원하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 성찬식의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핍박을 받으시는 환경에서 모일 시간과 장소 등이 불편하셨기 때문에 마음을 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편리한 시설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못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다락방까지 빌려쓰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성찬식의 의미가 중요한 것을 여러 차례 인식하시고 다짐하셔서 원하는 성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찬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성찬식을 하라고 하셨으며 또 성찬식이 은혜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피의 제사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제단에 피를 전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예수님의 순종과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손과 몸을 찢으시는 고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희생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로 하여금 이 성찬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깊이 새기라는 것입니다.

2)예수님과의 관계를 연합시키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예수님이 생명으로 속량해 주신 관계입니다. 1억을 주고 죄에서 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고 건져 주셨으니 그 관계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또 이 성만찬은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는 친교의 관계가 있습니다.(고전 11:20-21) 주님이 직접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고 함께 음식을 먹는 분위기입니다. 대속자의 관계, 함께 회식하는 관계가 있고 또 연합을 뜻하는 중요한 뜻은 상징적 의미이지만 음식을 먹어서 자신의 피와 살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식이 몸에 들어가서 피와 살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므로 주님과 내가 그렇게 연합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3)예수님과의 연합이란 나의 옛사람을 없애고 거듭나는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인격으로 사는 것입니다. 들포도나무가 참포도나무에 접붙임이 되면 들포도순이 참포도나무의 진액을 받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빌 1:21)

4)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기념하게 하시기 위하여 의식을 만드신 것은 잊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음식 잡수시던 입맛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모여서 음식을 먹은 기억은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김OO 대통령과 같이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 부산방면의 기장에 가서 멸치회를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추억이 잊어지지 않는 것처럼 식사를 통한 성만찬도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게 하시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촉구하는 것이 곧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본문 17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신 후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 헌법에는 “장로로 나누게 하라”하니까 장로없는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 장로를 빌려 모시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장로의 권위주의를 나타낸 흔적이 있는 것이요, 또 대부분의 성찬식이 떡을 먼저 나누고 포도주를 나중에 나누지만 누가복음에는 포도주 다음에 떡, 또 그 다음에 떡을 나눔으로써 나누는 격식에 일정한 규칙이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성찬예식은 거룩하고 신성한 의미를 갖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성찬예식을 통하여 주님과 더욱 연합된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30과 세례에 대한 지식 (마 28: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례에 대한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세례”란 뜻은 원문의 “밥티즈마”(Βἀπτισμα;명사) 또는 “밥티조”(Βαπτίζω;동사)로서 “바른다, 씻는다, 잠근다, 뿌리다”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많은 물체를 위에서 쏟아 내릴 때 폭탄 세례, 오물세례란 말을 하기도 하고, 여자가 화장품을 몸에 바르는 작업도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물을 뿌리며 씻는 의식을 세례라고 합니다. 침례교회에서는 “밥티조”란 용어의 “잠근다”는 뜻을 인용하여 침례를 한다고 합니다.

2.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베푸는 근거는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고, 그 시행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것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시고 시행하도록 명하신 예식은 세례식과 성찬식뿐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의식을 “기독교의 성례”로 구별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

3. 세례의 뜻을 설명드린다면 “구원의 복음을 확신하고 고백한 성도에게 지상의 유형교회에서 표식을 주는 의식”입니다. 쉬운 비유를 든다면 국민된 자에게 주민등록증을 주는 것과 같고 또 기술 가진 자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에서는 그런 표식과 확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하는 의식도 있을 터인데 왜 하필 물을 뿌려 시행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1)물은 씻는 재료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보혈을 죄사함의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

2)이런 의미를 갖는 의식이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한 할례의식이고(창 17:10-13, 21:4), 또 한 가지는 출애굽 때부터 시행한 결례식이었습니다.(레 14:23,32) 할례는 생식기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보혈을 상징하고, 또 그것으로 선민에게 인을 치는 의식을 삼았습니다. “결례”란 것은 부정을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부정하여진 몸에 관유(출 29:7, 30:25)를 뿌려 “깨끗해졌다는 표식”을 나타낸 것으로 여기의 관유는 역시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주님의 피 흘리심”에 뜻을 둔 것이고, 결례는 부정을 깨끗케 하는 사실(죄사함)에 뜻을 둔 것입니다.

3)이와 비슷한 의식은 이방종교에도 있습니다. 파사교나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몸을 씻어 정결함을 나타내는 의식이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5. 그러면 기독교의 세례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할 때

1)요한(세례)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3:11)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세례 주기를 시작하였고(마 3:6),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며(마 3:11, 요 1:33)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하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마 21:25)

2)여기에서 저희들은 요한의 세례 성격을 살피면서 예수님이 명하신 세례와는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를 알아 보셔야 할 것입니다. ① 요한의 세례는 삼위의 이름으로 시행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세례였고 ② 회개의 세례(회개한 증표)를 주었으며(막 1:4, 눅 3:3) 또 회개케 하기 위하여 주었고(마 3:11) ③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베풀었다고 하였으며(요 1:31) 그 증거로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마 3:11)고 하였습니다. ④ 또 예수님은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받았다(마 3:14)고 하셨습니다. ⑤ 행 19:7에 보시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아볼로가 바울사도로부터 다시 세례를 받은 것을 볼 때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이 명하신 세례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천주교 트렌트 신경 7부 1장에서도 같지 않음을 명시하였다 함)

3)그러면 무엇이 다를까요? 요한의 세례는 ①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표식으로 주었고 ②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었으며 ③ 죄없는 예수님은 율법의 의(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절차)를 이루시기 위하여 받으신 것 뿐 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세례를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기독교의 세례의 근거가 예수님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것일진대 예수님과 사도의 모범에 따르는 것이 요한의 세례를 근거로 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신 방법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사도들이 물로 세례를 베푼 사실만 (의식을 설명하지 않은 상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4)그러면 요한의 세례와 기독교의 세례의 차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기독교 세례의 뜻을 아셔야 하겠지요. 그 뜻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셨으며 예수님의 구속을 힘입은 자”라는 사실을 유형교회에서 인정해 주는 표식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물로만 나타내는 의식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불과 성령 즉 성령님의 내적 사역에 의한 신생의 은혜를 인치는 의식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행 19:1-17)

6. 그러면 신생(거듭남)의 은혜 속에 따라가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1)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인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던 자가 거듭나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① 불신앙을 회개합니다.(행 10:43-48, 16:33) ② 믿음의 확신을 갖고 입으로 시인을 합니다. 여기에는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이 포함됩니다.(행 16:31-33, 롬 10:10) ③ 그리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것이 곧 성경말씀에 이끌리는 생활입니다. ④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될 것을 고백합니다.(마 28:19) 제자가 되고 믿고 따를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세례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행 2:31-33)

2)거듭남과 동시에 받는 은혜가 또 있으니 ① 죄사함받고 심판을 면하는 은혜(행 22:16, 고전 6:11, 행 2:38) ② 하나님의 자녀되는 은혜(요 1:12) ③ 영생의 복을 받는 은혜(막 16:16) ④ 예수님과 연합되는 은혜(고전 12:27, 갈 3:27, 골 2:12) ⑤ 그리고 주님의 몸된 지상교회의 회원의 자격을 받는 은혜인 것입니다.

7. 세례 베풀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베푸셨고, 사도들이 베풀었으며 사도들의 감독하에 있거나 사도적인 특별한 은사를 받았던 빌립과(행 8:38) 아나니아가 세례를 베푼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행 22:16) 그런데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마술사 시몬은 타락을 하므로(행 8:12,21) 경솔하게 세례 베푼 결과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세례를 많이 안 베푼 것을 감사”하셨고(고전 1:14) 따라서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딤전 5:22) 오늘날은 예수님 대행자로 교회가 세운 목사가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세례의식을 구원의 절대 방편으로 삼기 때문에 금방 믿음을 갖고 세상 떠날 자에게 신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때는 다른 신자라도 세례를 줄 수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세례 자체가 지상교회에서 구별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더라도 확고한 믿음만 갖춘다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세례 의식에 있어서 세례와 침례 중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백과에 수록된 “꼭 침례를 받아야 합니까?”(472P)란 제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례의식이 사도들의 모범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제31과 제자삼는 표 (마 28:19-20) 목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있은 다음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1. “모든 족속에게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옛날보다 전달수단이 좋아져서 미개한 지역은 꼭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얼마든지 통신수단을 통해서 복음을 전달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2. 모든 족속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그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3. 오늘 학습을 받으실 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문하생으로 입학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인정받고 표를 받는 시간입니다.

4.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신앙과 함께 죄씻음 받으므로 이를 인치는 뜻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5.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으며 성령님은 그 은혜를 전달해 주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을 쳐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6. 물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씻어 없어졌음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7. 이렇게 해서 제자된 자들을 “계속 또 가르치고 말씀을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배움과 실천은 평생 따라야 할 일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8.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성도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동거뿐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갖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9.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교인이 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1)여러 가지 특혜가 있으니 ① 죄사함 받음과 ② 하나님의 백성이 됨과 ③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주심과 ④ 영생은 물론 ⑤ 섬기는 교회의 회원 자격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2)또 의무가 있으니 ①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셔야 하고 ② 모든 일에 협력하여 교회 발전에 노력하셔야 하며 ③ 성경을 배우고 ④ 헌금, 봉사, 헌신을 하셔야 하며 ⑤ 이방인들의 부덕한 생활에서 돌이켜 변화로운 생활을 하셔야 하고 ⑥ 성수주일은 물론 교회의 법규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10. 다음에 성찬을 받으시는 분들은 성찬의 의미를 잘 기억하시면서 주님과 더욱 연합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저희가 먹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이 어떤 생활과 어떤 목적으로 또 어떤 가치의 몸과 피를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몸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죄책을 대신하여 영원하고 거룩한 자신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4)이 사실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과 인내와 희생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 중심생활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5)저희들이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반드시 십자가 중심의 생활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6)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입으로 십자가 찬송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겸손, 인내, 봉사, 희생 등을 힘쓰지 않는 것 때문에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 성찬 예식을 이행하게 하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은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제자로서 사명을 다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가지시고 성찬을 받으시는 분들은 “내가 한층 더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가지셔야 할 줄 알아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2과 십자가를 지는 자 (마 16:24-25) 목록으로


이 시간 성례식을 맞이하여 “십자가를 지는 성도님이 되시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10:37과 눅 14:27에서는 “가족들 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하셨고, 막 8:34, 눅 9:23과 본문 말씀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위하여 죽고저 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오히려 생명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는 ① 십자가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자요, ② 십자가 정신으로 생활하는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십자가는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 이상 인간을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만물과 함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요, 이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한의 사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십자가는 구원의 유일한 방도입니다. 죄인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 대속” 외에는 없기 때문에 유일한 독생자를 고난의 제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방도인 것이요,

3)하나님과 죄인들과의 원수 됨을 화목으로 바꾸어 주시는 방법입니다. 십자가 형틀의 구조가 수직과 수평으로 연결되고, 그 사이에서 주님이 희생당하신 것은 바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로 연결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2.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만이 지실 수 있는 구원의 십자가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주님의 뜻을 따라 충성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지고 주님을 따를 것입니까? 그 방법은

1)자기를 부인하여 자기 전부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음모, 조롱,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고통 중에 생명을 버리시면서 입을 열지 않으신채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곧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과 관련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셨고,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여 겸손하지 못하면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입니다.

2)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과 충성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도록 순종하고 충성하면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구원과 영광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마 19:29)

3)인내하며 끝까지 희생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고, 연단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까지 모든 것을 인내하시고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인내를 생활화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봉사와 희생을 넓혀나가는 연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성례식을 맞이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는 ① 하나님의 최고 사랑의 표시요, ② 구원의 유일한 방도이며 ③ 하나님과의 화해의 방도란 것을 깊이 이해하시고, ④ 자기를 부인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죽기까지 인내하므로 십자가 중심의 생활에 더욱 접근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세례에 대하여 (막 16:16) 목록으로


1. 세례는 성찬과 함께 기독교에서 성례로 구별하여 시행하는 특수한 의식입니다. 천주 교회에서는 세례, 성찬 외에 5종(고해, 경신, 임직, 결혼, 종유)을 포함하여 성례로 구별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근거한 것만 성례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성례 아닌 것을 성례처럼 신성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임직이나 길흉사까지 성례처럼 엄격하게 구별하여 의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친히 세례를 받으셨고,(마 3:15)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으며(요 3:22) 세례요한도 다른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마 3:6,11, 요 3:23)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세례 베풀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따라서 세례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미와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는 뜻, 그리고 새 사람된 입장을 고수하도록 결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골 2:12, 롬 6:2-10) 그리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성도가 오순절 이후에 예수님의 명하신 세례를 다시 받은 사례가 있지만(행 19:3-5) 이는 회개함을 확증한 세례를 받은 다음(눅 3:2-3) 다시 성령으로 거듭난 신분을 확증하려고 다시 받은 것일 뿐 세례요한의 세례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요 3:22-23,27) 성질상 다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삼위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준 기사가 없을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한 것이 사실이므로 그 성격이 같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행하는 세례식은 구약 시대에 같은 의미로 시행한 할례 의식과 결례식을 종합하여 간단하게 변화된 의식입니다.(히 8:5, 롬 2:29) 창 17:10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후 그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시행케 하신 일이 있었고, 이 규례가 출애굽 시대에 와서 율법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레 12:3, 출 12:48, 수 5:2) 즉 하나님의 선민적 언약의 대상임을 인친 의식입니다. 결례식이란 죄씻음 받은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으로 관유라는 향유를 제조하여(출 30:22-25) 우슬초로 찍어(시 51:7) 부정한 사람(정신적 범죄나 위생적 불결)에 뿌려 죄씻음 받은 표를 삼은 것입니다. 그 관유가 성령을 상징할 때는 임직 받는 자의 머리에도 뿌렸고,(출 25:6, 30:26-30) 또 언약의 피를 상징할 때는 일반 성도에게 뿌려(출 24:8)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였는데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 와서 세례식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할례나 결례나 신약의 세례가 다 같은 의미를 같되 희생의 피나 관유를 씻음의 재료인 물로 바꾸고 할례 의식을 세례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4. 그러면 무엇을 인치는 것이며 꼭 인침의 의식이 필요한가?할 때

1)선민된 것 또는 거듭난 것, 그리고 신분의 변화된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일반인이 예수를 믿으면 거듭난 자가 되고, 죄사함 받은 자가 되며 천국의 시민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이 확보되며 또 교회의 회원이 된 것을 겸하여 인치는 것이 됩니다.

2)인침이 필요한 것은 마치 군인에게 군복을 입힌 것이나 부부가 혼인 신고를 하고 사는 것이나 매매할 때 계약을 하고, 집을 샀을 때 등기를 올리므로 유익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성도된 것을 발표하는 것과 같아서 어는 곳에서나 그 신분의 입장을 숨길 수 없은즉 특별한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5.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사도들 또는 사도적 은사를 받은 사역자(행 8:26,38)가 시행하였던 것을 교회 시대에는 목사가 하도록 교회에서 결정하였고,(행 16:4) 세례를 받을 자는 믿음을 결심한 자(행 16:33-34),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자(행 8:36, 10:43-48), 제자된 자(마 28:19)가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례를 받은 성도는 진리의 확신 아래 제자된 사명을 이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성찬에 대하여 (눅 22:14-22) 목록으로


성찬 예식에 대한 기사는 공관 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19-30, 막 14:12-2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성찬 예식을 시행하시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까지 그 예식을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찬 예식은 세례식처럼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따른 성례가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성찬 예식을 어떻게 시행하셨습니까?

1)먼저 음식 잔치를 준비시켰습니다.(8절) 장소와 음식과 마음 준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그리고 가룟유다를 그 자리에서 깨우치셨습니다.(마 26:21, 눅 22:21) 순결한 자세를 필요로 하신 것이지요.

3)그리고 평상시에 잡수시는 준비된 음식으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떡은 예수님의 성체와 고난을, 포도주는 예수님의 생명과 희생을 자연스럽게 상징한 것입니다.

4)떡을 놓고 기도하실 때는 축복으로(율로게아스:εύλογηάς) 잔을 놓고 기도하실 때는 사례를(유카리스테라스:εὐχαριστησάς) 하셨으니 이는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축복과 감사로 받으라는 뜻입니다.(마 26:26, 막 14:22, 눅 22:19)

2. 예수님은 본문 15절에서 “이 의식을 원하시고 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우선 예수님이 자기가 세상 떠나실 것을 아셨으니까 제자들과 마지막 친목을 나누시고 송별하시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2)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충분히 깨우치시고 또 기념하게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지 또 그 십자가의 은혜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 바울 사도도 성찬 예식은 믿음의 지식과 자기를 살피는 회개와 구속 사업에 대한 깨달음과 기념, 그리고 전파의 의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1:29-30)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동시에 성도 스스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정과 욕을 못박을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마 16:24, 갈 5:24-26)

3)구약의 유월절 의식을 간소하게 바꾸어 주신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의식은 다 “모형과 그림자라” 하셨고,(히 8:5) 신약 시대에는 “할례도 마음에 행하고 신령함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롬 2:29)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예언적으로 시행하던 유월절 의식이 신약 시대에는 성취된 십자가를 상기하고 기념하는 성찬식으로 간소화된 것입니다.(출 12:1-14, 13:6-7)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돌아가시므로 유월절 제물의 예언적 의미를 성취하셨기 때문에(막 14:41, 요 7:30, 8:26) 그 의식을 대폭 간소화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로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상징하는데 충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성찬을 받을 때 준비하고 회개하며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에 부합하도록 생활할 것을 결심하시며 또 구속 사업의 기념이 되고 전도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35과 성례에 대한 지식 (마 26:17-30, 28:20) 목록으로


“성례에 대한 지식”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례란 낱말의 뜻은 구별된 예식, 거룩한 예식이란 뜻입니다. 이 예식은 불신자는 시행하지 않습니다.

2. 성례의 실제 의식은 세례와 성찬이 있고 이것이 성례로 지정된 것은 예수님이 시행의 본을 보이시고 친히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1)성례중 세례의식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인치는 의식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몇 가지 절차를 거치는데 ① 거듭난 생명을 받고 ② 믿음을 가지며 ③ 죄사함 받고 ④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받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힘입으면 영생을 확보하게 되고 ⑥ 지상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해 주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세례의식을 “할례”로 시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간소하고 의미있는 방법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물을 뿌리는 것”은 죄를 씻는 상징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2)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고전 11:24) 사회에도 기념식이 많지 않습니까? “3․1절 기념식”하면 그때 그 사건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자랑한다”(고전 2:1-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상기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런 의식을 거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찬예식도 예수님이 새롭게 만드신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유월절 예식을 역시 간소하고 의미있게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이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 1월 14일부터 21일까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없는 떡을 먹게 하신 것인데(출 12:1-517)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절기 때에 “떡으로 고난 당한 몸을 기념하게 하셨고 포도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3)그러면 예수님이 왜 구약의 의식을 간소화시켰을까? 하시겠지요. 그 이유는 구약의 의식이 십자가를 예표한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간소화 시켜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성경으로 십자가를 밝히 깨닫고 성만찬으로 십자가의 뜻을 더욱 다짐하므로 우리의 마음 속에 십자가에 대한 신앙과 십자가 중심의 생활이 풍성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4)예수님이 성찬식을 베푸실 때 외식자 가룟유다를 지적하셨고, 고전 11:28에서도 “자기를 살핀 후 이 떡을 먹으라”하신 것은 먼저 회개하는 일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새로운 마음가짐과 결심을 굳게 하는데 있습니다.

5)그리고 주님의 몸과 피를 먹게 하신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뜻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과 연합된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성례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곁으로 더 가까이 나가시고 주님과의 친교는 물론 뜨거운 애정을 느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부 부활주일 설교

제36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 (요 6:64-68) 목록으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에 배신자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아셨고(요 6:64) 또 가룟유다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을 때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지 않은 제자들이 많이 물러갔다고 하셨습니다.(66절) 이 사실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서(오게 하심) 믿게 되는 수동적 결과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살후 1:10) 이 때에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요 14:6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오직 예수님 뿐이라 뜻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말씀할 때 원문에는 정관사가 다 붙어 있습니다. 그 정관사의 용법은 하나뿐인 길, 하나뿐인 진리, 하나뿐인 생명 바로 그것이란 뜻입니다. 부정관사의 용법은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정관사의 용법은 하나뿐인 바로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도리는 기독교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1.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1)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변이 아니고 계획된 사실 그대로인 것입니다.

2)영생을 말씀하신 교훈이 진리이기 때문에 부활하시지 않을 수 없고

3)예수님은 모든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셔야 하며

4)또 성도에게 약속한 영생을 주셔야 하고

5)심판과 영원한 중보자 되심과 영원한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부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영생을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절대적인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참된 증거는 힘이 있고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 내용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악당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도적하였다”고 거짓유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본 제자들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눅 24:16,31) 도마는 예수님을 못 본 상태에서 믿지 않으려 하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보고 믿었고(요 20:24-29) 사울은 기독교를 대적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개종하였으며(행 9:3) 사도들은 “(확실하게)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고 증언한 것입니다.(행 4:20) 죽음을 각오하고 사실을 말할 자는 있어도 죽음을 각오하고 거짓을 말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3. 그런데 부활과 영생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거짓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와 유교의 제도인 것입니다.

1)석가모니는 부활한 사실도 없고 “영생의 극락”이 있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영생 극락이 있다면 석가모니가 거기에 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불교의 윤회설은 극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의 무덤은 지금도 인도 살수(薩水)해안에 그대로 있고 공자의 무덤도 중국 창평향(昌平鄕)에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나 부활을 못한 교주는 영생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중이 시체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워도 그 종교에는 부활과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불경에 “부운설”(浮雲說)이 있는데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할 때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구름장이 일어 났다가 없어지는 것 같으니 그 뜬 구름 자체의 실체가 없음 같이 사람이 살고 죽으며 가고 오는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인생관은 무로 시작하여 무로 끝나는 것입니다.(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 浮雲滅,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体 本無實 생사거래 역여연-生死去來 亦如然) 죽으면 끝나는 것일뿐 아무런 미래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허무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2)유교에도 내세는 없습니다. 유교의 핵심은 “수신제가(修身濟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로 도덕과 평화를 위하여 생겨진 종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유교의 전통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혼은 떠돌아 다닌다고 합니다. 유교의 전통으로 초상이 나면 팥죽을 끓여 대접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런 전통이 왜 생겼을까요? 공자의 제자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태산(泰山)이 무너지고 동양(棟梁)이 기울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셔서 낙심 절망하고 위로 받을 근거가 없어서 자녀들이 몇 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니까 기운이 떨어져서 세상이 빙빙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이 무너지고 기둥과 들보가 내려앉는 것 같다”고 하니까 그것을 부축해 주려고 이웃에서 팥죽을 끓여 와서 그것으로 상주들을 대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내세의 소망을 가르쳤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계로(季路)”란 사람이 공자에게 죽음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이 “살아서의 일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의 일을 알리요”(감문사 미지생 능언사-堪問死 未知生 能言死)라 하였고, 또 귀신에 대하여 질문을 한 즉 “사람의 일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에 대한 것을 알리요”(문사귀신 미능사인 능언사귀-問事鬼神 未能事人 能言事鬼)라고 하였으니 역시 영생과 내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형식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부활과 영생의 종교는 기독교 뿐인 것입니다.

4. 그러면 결론적으로 영생의 종교를 믿는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영생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며 소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2)절대로 세상 떠나는 일을 아쉽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3)이 세상에서 길게 살거나 짧게 살거나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짧은 인생, 긴 인생을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이요(행 17:26) 죽음이란 부활의 씨를 심고 천국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4)“죽으면 좋은데 간다”는 막연한 교리를 믿는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의 집”에 가서 줄을 선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서 죽으면 장례비 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죽음의 집에 가서 죽어 편의를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의 건너편이 삶의 현장보다 훨씬 행복한 곳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도들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의연하고 소망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히 2:14-15에서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심과 부활을 맛보신 것은 사망의 세력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5)나사로가 죽었다가 산 것 때문에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12:11) 천국을 소망하며 영생을 사는 저희들도 소망없는 자들에게 무슨 볼거리를 제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생천국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하고 기쁨과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셔야 할 줄로 알아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만 천국가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백성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37과 부활의 진리 (요 11:25-27) 목록으로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진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부활의 진리,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알고 믿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1)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2)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시므로 부활하게 하실 수 있고, 또 자신도 부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는 자는 육신적으로 죽어도 다시 영화로운 부활을 받을 것이고 또 살아서 믿는 성도는 그 영혼이 심판을 받지 않는 상태로 영원한 천국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또 죽은 나사로 가족들에게 부활 진리의 확신을 고백 받으신 다음에 장사 지낸지 4일이 된 나사로의 시체를 말씀 한 마디로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5)이 사실에서 ① 예수님은 생명의 주시요 부활이시며 ② 성도가 부활신앙을 가져야 할 것과 ③ 그 신앙을 근거로 하여 영화로운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2. 부활 진리에 대한 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부활”이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2)그런데 이 부활에는 종류가 많습니다. ① 영적 부활이 있습니다.(벧전 1:3,23) 이것은 사람의 정신적 실체 중에 도덕적 실체가 아닌 영적 실체가 있는데 이것을 “영적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의 영적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27)하신대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영적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죽으면 신앙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전적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하실 택한 백성들에게는 중생 또는 거듭나는 은혜로(요 3:3, 엡 2:1) 그 죽은 영적 생명을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적 부활을 힘입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되고 저희들이 현재 그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② 죽은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께서 다시 살려 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썩은 육체를 다시 생생하게 하시고 떠나간 영혼을 다시 연합시켜서 죽은 자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성경에 아홉 번 나오는데 일곱 번은 장사 지내기 전에 살리셨고 두 번은 무덤에서 썩은 다음에 살리셨습니다. 무덤에서 살린 사건 하나는 나사로를 4일 만에 살리셨고, 또 한 번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공동묘지가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병을 고쳤으나 또 병들어 죽는 것처럼 얼마 있다가 다시 죽을 몸으로 부활한 것입니다.(마 27:52-53) ③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사 지낸지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다시 죽을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천사같은 몸이고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몸이며 공간을 초월하는 몸이고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이며 천국과 지상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④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죽은 몸이 다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공중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때까지 땅 위에 살아 있으면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채 에녹이나 엘이야처럼 산채로 변화되어 다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부활인데 이 사실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씀과 살전 4:16-18, 계 20: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⑤ 악인의 부활도 있습니다. 이 악인의 부활은 성도들에 대한 상급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행 24:15과 계 20: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할 때 “혀가 뜨거웠다”하셨으니 악인의 부활은 고통과 심판을 받기 위하여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렇게 부활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음을 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부활이 다 예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1)믿는 것 같아도 안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례식 설교를 할 때 “죽은 자가 부활할 것입니다”하면 어떤 이는 “아멘”하고 어떤 이는 목사를 허황된 말하는 사람으로 유심히 쳐다 봅니다. 창조자를 믿고 생명체의 신비를 믿고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을 믿으면 부활의 역사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도 제자들이 속히 믿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을 확인한 후에 믿었고 도마는 못자국을 만져 보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믿고 사도들의 증언과 신앙고백을 통하여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할 근거를 말하라”한다면 ① 예수님은 생명의 주이시고(행 3:5, 요 14:6) ② 영존하시는 분이며(히 1:11) ③ 거짓없이 약속대로 이루시는 분이며(고전 15:4) ④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셔야 하고(롬 4:25) ⑤ 고난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만큼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시는 것이 순리이며(눅 24:26) ⑥ 또 영원한 심판자요 중보자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4. 부활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생명의 여유가 무한한 영생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처럼 초조하게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히 2:14-15)

2)죽음은 천국의 관문이며 믿음 생활은 현세와 내세로 연결되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며

3)현실에서 고난스러운 것이나 억울한 것을 탓하지 말고(마 5:8-12)

4)항상 위엣 것을 찾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골 3:1-3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제38과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요 11:25-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3일 만에 자기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이때에 살아나신 예수님은 다시 죽을 수 있는 세상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고전 15:42,44) 그 신령한 몸이란 이 세상의 육체처럼 적응을 하면서 공간을 초월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는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예수님의 이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닌 오래 전부터 미리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주전 1000년 경의 사람 다윗도 예언하였고(시 16:10), 요나의 사건으로도 예언하셨으며(마 12:39-40) 예수님도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마 16:21, 17:23, 20:19)

3)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을 세상에 계시면서 10여 차례 그리고 500여 성도가 모인 자리에서 보여 주셨고, 또 활동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도 특별한 사역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4)이 사건은 너무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에 많은 본사람들이 증거하였고,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5)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비추어 역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증거를 거짓으로 돌리는 것이고 또 3000여년 보존되어온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의 역사는 창조나 다름없는 큰 이적입니다. 이런 이적을 믿지 않는 것은 역시 만물의 창조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이 부활을 믿는 신앙은 합리적이고 정상적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1)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하나님이신데 부활 그 자체가 창조적 역사와 대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요 1:1-4에서도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행 3:15)란 사실을 믿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란 말씀이 본문과 행 3:15에도 나타나 있습니다만 부활은 이 사실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3)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주신이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행 17:25에서도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주장하지 못합니다. 또 생명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생명의 주”가 계시고 생명의 소유권자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만물도 예수님의 것인 것처럼 우리의 생명도 주님의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예수님이 생명을 주신 분임과 같이 장차 우리의 생명을 데려가실 분임이 확실한 것입니다. 요 14:3에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인생의 생명을 데려가심에 대하여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세상 떠날 것과 다른 사람이 세상 떠나는 고통을 연관하여 생각할 때 생명을 데려가실 예수님을 깊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삼상 2:6) 참으로 저희들이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이 평안하게 데려가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5)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의 부활을 근거로 성도들에게도 영광의 부활을 받게 하실 분입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는 부활이 있으니 이것을 거듭남 또는 중생이라고 하지요. 성도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 거듭남의 부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엡 2:1, 골 3:1, 벧전 3:21에 기록되었습니다. ② 죽은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본문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신 말씀과 고전 15:20의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이란 말씀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이므로 거기에 뒤따라 다음 열매가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6)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성도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을 생의 끝으로 알아서는 안될 것이요, 영원을 사는 한 순간의 전환점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현실과 천국을 연결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7)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자의 승리요 따라서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의 승리를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죽음의 위협이고 현실 고통의 위협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현실과 사망의 고통을 이기고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에 대한 승리가 되고 또 마귀의 역사인 죄와 불법에 대한 승리도 되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기념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반드시 부활의 일곱 가지 의미를 믿으시므로 영생과 상급을 바라는 희망에 거하고 또 영생의 특권을 누리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9과 2000년 부활절 (고전 15:12-19) 목록으로


부활절 설교가 많지만 2000년 부활절이기 때문에 말씀을 새롭게 구상해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부활을 역설하신 말씀으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적인 약속이나 증언이나 고난의 의미나 소망이나 죄에 대한 속죄나 천국의 소망 등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우선 기독교인들 중에 부활 교리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1)부활 교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성도들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부활을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고, 악인의 부활은 지옥에 들어가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의 시기는 예수님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2)그러면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영원자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 때문에 일시 죽음을 맛보실 수는 있어도 영원히 죽어 계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 선지자들과 예수님 자신이 여러 차례 부활을 예고(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다”는 약속을 이행하셔야 진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진실이 증명되지 않으면 믿을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구원자가 되시려니까 부활하셔야 합니다. “구원”은 성도를 영생하도록 천국에 보내는 것인데 만일 천국의 주인이 죽어 계시면 누가 천국문을 열고 인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이 부활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④ 예수님이 마귀에게 패하실 수 없지요. 따라서 승리자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말 하는 무기, 유혹하는 무기, 죄짓게 하는 무기, 죽음으로 위협하는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무기가 최후 무기입니다. 따라서 마귀를 이기려면 그 최후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요, 또 “죽음을 이기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⑤ 예수님은 심판자가 되셔야 하니까 그 심판석에 군림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회에 죄를 단속하는 기관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막가파가 설칠 때 살 수 있겠습니까? 이만한 사회 질서가 있는 것은 심판 기관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세상의 모든 악이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성과 당위성을 갖는 것입니다.

3)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습니까? ① 먼저 육체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② 시신이 장사되었습니다.(이것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갔다는 뜻이요, 육체가 썩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③ 그런데 부활체는 무덤을 터쳤고, 빈 무덤을 만들었으며 그 몸은 신령한 몸이 된 것입니다. ④ 신령한 몸은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으며 천국과 지상을 왕래하고 장애물을 통과하며 만질 수도 있었고, 육체 모양의 흔적도 있으며 음식을 먹고 말을 하며 승천한 신비한 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천사같은 존재였습니다. 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한다면 마른 씨앗이 싹을 내고 영하 200℃에 보존된 정자가 생명 역할을 하며 인간 과학의 세계도 상상을 초월하는데 하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슨 불가능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부활의 진리를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타당성에 의하여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에게 주시는 의미를 알고 거기에 부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은 주님과 꼭같은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① 육체의 죽음을 회복하고, ② 천국의 실체를 받는 것이요, ③ 공의로우신 심판주를 모시는 것입니다. “죽음 회복, 천국 실체, 심판주 모심” 이 세 가지를 받은 것입니다.

1)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육체적 죽음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죽을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을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양옥집을 짓기 위하여 판자집을 헌다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부활의 소망을 갖고 반드시 죽음을 낙관적으로 맞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하셨습니다.

2)주님의 부활은 천국의 실체를 받는 것입니다. 천국 티켓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천국에 영원히 계십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 순간 영혼은 천국에 갑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을 끝내실 때 모든 인간의 육체가 다 부활체를 받고, 영생할 자는 천국으로, 심판받을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천국의 실체를 주신 것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계를 펼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육체적인 피곤과 고통이 있고,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습니다. 불만 투성이고 고달픔이 많습니다. 천국 열쇠를 받는 자가 이런 세상에 미련을 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나는 더 살아야 한다”는 미련을 싹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자식을 위하여 더 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몇 가지 집필을 위하여 시간이 있었으면...”하는 것과 “개혁 교회의 시작”을 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아셔서 현세적 미련을 끊는 2000년 부활절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공의로운 심판자로 군림하여 심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경대로 시행하면 상급의 심판을 받고 성경적인 생활을 떠나거나 불의를 행하고 비양심적인 일을 행하며 인간적 타산에만 얽매여 산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명예를 사양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모든 부조리와 거짓된 행위가 다 주님의 심판대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의 부활절은 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② 현실적 미련을 끊고, ③ 명예적이고 이기적인 범죄 유혹을 힘있게 뿌리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느끼는 것이 아니며 받고 누리고 행하는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40과 마태가 증거한 부활 (마 28:1-20) 목록으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부활 증언은 세 가지로 살필 수 있습니다.

1. 죽은 자를 살리시고 부활의 모습을 보이시므로 실제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1)예수님은 전도 초기에 갈릴리의 본 동리인 가버나움(9:1)에서 한 직원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일이 있었고,(마 9:23-26)

2)또 제자들을 전도에 파송하실 때 죽은 자 살리는 능력을 포함하여(마 10:8) 귀신을 쫓고 각종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는데(마 10:1) 그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여인 “다비다”를 살린 일이 있었습니다.(행 9:32-43)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그리고 마태복음의 기록은 아니지만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일과(눅 7:11) 또 그의 친구 나사로를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요 11:43)

4)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자기의 몸을 부활의 몸으로 변형시키시고 역시 부활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신 사건이 있었는데(17:2) 이것도 역시 예수님과 성도의 부활을 예표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5)또 한 가지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땅이 진동하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사실은 주님의 부활과 모든 성도의 부활을 충분히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마 27:52)

2.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직접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1)마 12:4-, 16:4에서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이루실 분이라”고 두 번 말씀하셨고,

2)또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 것을 네 번 말씀하셨습니다.(17:9,23, 20:19, 26:32)

3)그리고 예수님이 장차 “심판주로 오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도 역시 부활을 예고하신 것인데 네 번을 말씀하셨습니다.(12:20, 16:28, 19:28, 25:31) 그 외에 다른 복음서에도 많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것은 요 2:21에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하신 것도 그 실례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예표와 말씀으로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28:6) 장차 그와 같은 성도의 부활도 확실하게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마태의 실제적 증언입니다.(28:1-20) 우선 마태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낸 것과(27:57)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혹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파숫군들로 하여금 3일 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27:62-66)

1)“주일날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성묘요, 그들은 그 무덤에 힘있는 사람들이 와서 무덤돌을 굴려내주면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바를 준비도 하고 왔습니다.(이 사실은 마 16:1-3에 기록됨.)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지만 아쉽게도 부활을 기대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2)그들이 무덤에 왔을 때 이미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무덤돌을 굴려낸 후 그 돌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눈같은 흰 옷을 입었으며 파숫군들은 떨면서 죽은 자같이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3)이때에 천사가 그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는 줄 알지만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으니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빈 무덤)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고하여라 살아나신 예수님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인즉 너희가 거기서 뵐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하였으니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7절)한 말은 “증거의 책임을 다했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증거를 하였으면 반드시 다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4)그래서 그 여인들은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되는 중에 그 곳을 떠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여인들에게 “평안하뇨” 하신즉 여인들이 나아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서워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여인들이 그 분부를 받고 제자들에게로 가는 중에 파숫군들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가 그 사실을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보고 경험한대로 고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이 밤에 와서 군인들이 잠잘 때에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유포, 증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지키지 못한 죄를 문책 받으면 총독에게 부탁하여 무마시켜 줄 것이라” 한즉 군병들이 그대로 증언을 하므로 오늘날까지도 부활이 아닌 도적설이 퍼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6)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떤 산에 가셔서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와 만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은 그 심정이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분부로 “모든 족속에게 전도하여 제자를 삼을 것과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것과 주님의 모든 말씀을 잘 가르칠 것을 명하시고 또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기사가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기록한 자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니까 각 복음서의 기록대로 더 연구하여 일관성 있는 내용으로 정리한다면 더 유익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모든 성도와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주님의 분부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또 부활의 주님이 항상 성도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시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 부활 소망, 전도 사명, 제자 삼음, 그리고 주님과의 동행을 잘 이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1과 마가의 부활 증언 (막 16: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가의 부활 증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해가 저물 무렵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자기가 예비해놓은 무덤에 장사하였는데 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주면서 백부장을 통하여 “운명한지 오랜 것을 확인한 후 내주었다” 하였고,(막 15:42-44) 그때에 “니고데모”도 함께 와서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장사를 지냈는데 그 광경을 “막달라 마리아와 몇 여인들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막 16:1, 눅 23:54) 이것은 예수님이 확실하게 돌아가신 것과 장례가 끝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의 부활 증언을 살피면

1. 안식 후 첫 날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시체에 바르기 위한 향품을 미리 사두었다가 무덤으로 갖고 가면서 “누가 무덤돌을 굴려 줄 것인가”를 염려하였다고 하였습니다.(1-3절) 여기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전도 초기에 귀신병을 고침받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며 섬기던 여인이고,(요 19:25, 20:11, 막 15:47, 16:1,9)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곧 예수님의 어머니이며(마 13:55, 막 6:3) “살로메”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예수님의 이모에 해당합니다.(막 15:40, 요 19:25) 이 세 여인은 평소부터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그들은 미리 향품을 준비하였고, 안식일 다음날 새벽 해돋은 때에 향품을 갖고 예수님의 무덤에로 간 것입니다.(2절)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밝기 전 미명에 갔다” 하였고,(마 28:1, 요 20:1) 눅 24:1에서는 “새벽에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미명과 해돋을 때는 시간상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만하게 번역한 어떤 성경은 “해돋은 때”를 “동틀때”로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날짜의 기점을 해 또는 시간에서 해 떨어지는 시간으로 정하고 밤에는 모든 성문을 닫고 작업이 중지되기 때문에 “날”로 치지를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이 다하여 가는 때”는 토요일 해지기 직전을 뜻하고, “안식이 지난 때”는 토요일 해진 다음이요, “안식 후 첫 날 매우 일찍이 동틀 때”는 어두운 시간에서 밝아지는 때를 의미하는데 우리 나라의 표현으로는 먼동 틀 무렵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 여인은 먼동 트기 전 미명부터 출발하여 동트는 시간쯤에 무덤에 도착한 것입니다. 세 여인은 새벽부터 무덤에 가는 일을 서둘러 시작한 것입니다.

3. 그리고 그들은 가면서 무거운 무덤돌 굴려낼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세 여인의 힘으로 굴려내기 어려운 큰 돌로 막은 것이므로 당연히 그런 염려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3절)

4. 그러자 막상 무덤에 도착한즉 상황이 생각과 같지 않았습니다.(4-8절) 무덤을 막은 큰 돌이 옮겨져 있었고, 무덤 구멍이 열려져 있어서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님 시체가 있던 자리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청년이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찾으나 그 분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아라 그의 누우셨던 곳이라 너희는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셨으니까 거기서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무덤 밖으로 도망치듯 나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누구든지 죽은 이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이런 광경을 당하면 무섭기도 하고 벙벙해질 것입니다.(8절)

5.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본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먼저 보이셨다” 하셨고, 11절과 12절에서도 “보이셨다, 나타내셨다”하신 것을 보면 부활체는 주님 자신이 보여줄 때 보게 된 것입니다. 또 12절에서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하심으로써 필요에 따라 그 모습을 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무덤에 나타난 천사가 청년으로 보이듯이 부활체의 나타나심도 그런 면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슬퍼하면서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여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11절) 또 부활의 주님을 시골 가는 길에서 만났다는 두 제자의 말도 믿지 않으므로(11-12절) 상당한 완악성을 나타냈습니다.

7.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가 모여 음식 먹는 자리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고, 또 부활한 자기를 본 자들의 말도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고,(14절)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과 믿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 것과 또 믿는 자들에게 기적이 따를 것 등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승천하셨다고 하였습니다.(15-19절)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으셔야 할 것은

1)믿을 만한 자의 말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 예수님을 본 자들의 말을 믿어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모든 것을 종합한 성경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천사가 “빈 무덤, 즉 누우셨던 곳을 보라”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요,

3)주님은 부활의 사실을 “전하라 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들이 부활의 증언자가 될 뿐 아니라 주님을 가까이 모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부활하신 주님은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다른 제자나 다른 여인들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만한 영적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몹시 사랑하고 사모하는 태도였을 것입니다.

5)예수님의 부활체는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것은 곧 완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 있는 자가 되어 혹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하여도 알아 볼 수 있는 만남의 자격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18-20절 내용은 “부활과 복음 전파”란 설교문 참조.)

 

제42과 부활과 복음 전파 (막 16:14-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부활과 복음 전파”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명하신 말씀이고, 또 15절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놀라운 부활의 사건을 전파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신학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그것은 9-20절 까지 〔 〕안에 기록된 내용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 )는 문제되지 않으나 〔 〕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정경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 〕안에 있는 이유도 있지만 17-18절에 나타난 기적의 내용을 이용하여 “뱀을 집어도 괜찮고 죽은 자가 산다”고 하면서 떠들썩하게 과장된 이적을 선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그러면 왜 〔 〕안에 기록이 되었을까요? 신약 성경을 기록한 기본적 단편 문헌이 약 2000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유명한 사본이 다섯 종류가 있는데 곧 시내산 사본(S),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베자 사본(D)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이 말씀이 기록된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단편 문서 중 하나인 캠브리지 사본에만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본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이 말씀이 성경에 오를 수 없는 것입니다.

3)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본에 있고 없는 차이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마가복음이 완성되기 전에 사본을 하였거나 아니면 기록된 마가복음에 다른 사람이 추가로 기록을 하였을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인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추가 기록설이 정설이라면 이 기록은 정경에 해당할 수 없을 것이요, 마가가 다 기록한 것이라면 정경이 될 것입니다.

4)그러면 이렇게 불확실한 것을 왜 성경에 기록하였는가?할 때 특수한 문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이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말씀 뜻에는 부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수한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뱀을 집을 수 있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에 물렸어도 괜찮았던 사건이 바울 사도때 성취되었고,(행 28:3-6) 독을 마시고도 해를 받지 않은 일은 성경에 기록이 없지만 20절에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하셨고, 유세비오 역사에도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경에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약 30년 전에 이 말씀을 무조건 믿고 독을 마셨다가 죽은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광신적 신앙을 책망받았을 때 본을 보인다고 먹었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 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2.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14절) ① 이 꾸짖음은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 나타나셔서 꾸짖으셨습니다. 열 한 제자가 함께 있을 때는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 믿음을 가졌을 때일 것입니다.(요 20:19-20) 그러니까 부활하신 날로부터 8일 후입니다. ② 그리고 여기의 “나타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식으로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거동하시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요, ③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본 자들의 말도 믿지 않은 상태”를 지적하셨으니 만큼 예수님의 말씀이나 증언자의 증거 등으로 부활을 믿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자”로 인정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④ 그리고 그들의 완악이란 불신앙, 즉 믿음 갖지 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범죄는 죄로 여기지만 무지와 불신앙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신앙을 회개하여야 할 완악으로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도적질 안 하면 되었지 믿음 없는 것이 무슨 죄인가?”하신다면 크게 깨닫고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2)“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15절) 부활을 믿고 부활의 은혜를 힘입을 성도는 다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할 범위는 온 천하 만민입니다. 택한 백성만 구원받게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택자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상대로 전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3)“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16절) 이 말씀에서 믿는 자와 세례를 받는 자와 구원을 받는 자는 하나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믿는다 하면서 고의로 세례를 피한다면 그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다 믿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이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또 그 수가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눅 13:23-24)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과 정죄 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하나에 속하는 것입니다.

4)전도자들에게 기적의 능력이 따를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귀신을 쫓고,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합리성 있는 해석을 하여야 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 합리성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 말씀은 14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열 한 제자(즉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후 시대의 모든 전도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② 그 능력을 주신 목적이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로 입증하는데 있는 것입니다.(히 2:4) 죽은 자를 살리는 종교가 아니고서야 어찌 구원의 종교가 되겠습니까? 또 구원자가 부활을 못하면서 어떻게 영생을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뜻에서 비상한 기적을 나타냄으로 절대 종교인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저희들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믿음을 발생시키는 요인으로 아시면 안 됩니다. 기적은 체험일 뿐 거듭나는 능력을 주거나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였고, 예수님은 눅 16:31에서 “모세의 율법을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서 전도를 해도 믿지 않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④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의 성도들이 어떻게 응용하셔야 합니까? ㉠ 사도시대에 성취된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절대의 종교입니다. ㉡ 이 말씀에 나타난 능력이 “오늘도 역사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은 믿지 마셔야 합니다. 그들이 역사하는 능력은 흉내내는 것 뿐이고, 교회 시대에는 실제적으로 그런 능력이 나타난 바가 없다고 역사가들이 증언을 한 것입니다. ㉢ 그러면 이 시대에는 기적이 아주 없다고 믿고 포기하여야 하는가?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섭리에 따라 역사하시되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혹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약 5:15에서 “믿음의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 시대에 비상한 역사를 나타내시지 않는 대신에 과학 문화의 발달로 기적같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다를 막는 일, 바다에 길을 내는 일, 심장을 수술하고 간을 이식하는 일 등.....과학적인 기적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을 호소하는 성도들은 일단 일반 은총에 먼저 의존하고 그 다음 최후 방책으로 하나님의 특별 섭리를 의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 섭리는 무조건 사람의 욕구에 따르는 것이 아니란 사실과 또 기적은 전도의 수단이 아닌 “절대 종교의 입증”이란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과 제자들이 분부대로 전도할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이 확실하게 성취된 것을 증거하였다”(19-20절)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중보하고 계시고, 또 보내주신 성령님과 함께 하게 하신 사실을 아셔야 하며 그 당시 사도들에게 약속한 말씀들이 그 시대에 다 능력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영생하는 성도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43과 마음이 뜨거워짐 (눅 24:13-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마음이 뜨거워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32절) 저희들도 그런 체험을 꼭 하셔야 하겠습니다.

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상황을 살피면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글로바”란 제자와 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 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의 이름이 없는 한 사람은 이 말씀을 기록한 “누가”일 것으로 예측을 합니다. 누가는 12사도에 들지 않은 사람이고, 또 이 날의 정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글로바와 동행한 사람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면서 이야기 한 내용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여인들이 11제자들에게 알리고 제자 중 두 사람이 또 빈 무덤을 확인한 후에 그 사실을 듣고 예루살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오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면서 그동안 된 일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하는 중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동행을 하셨지만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당신들이 지금 말한 내용이 무슨 말이요?”하였을 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3일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과 당일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대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나사렛에서 온 예수란 사람이 능력있는 선지자이어서 우리는 그가 구속자일 것으로 바랐는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3일 전에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는데 오늘 아침에 우리와 함께 있던 여자들이 그의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부활하였다는 천사들의 증언을 들었고, 또 우리와 함께 있던 두 사람도 그의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함과 더디 믿는 불신앙을 책망하시고, 성경을 자세히 가르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셨는데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후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뜨거움은 심령의 충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왜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을까요?

1)책망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들은 답답할 만큼 무지하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의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이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정당한 책망을 받는 자는 마땅히 마음의 뜨거움을 느낄 것입니다. 책망으로 깨닫는 가책, 특히 지식없고 믿음 없으며 더디 믿는 죄를 회개하는 마음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2)말씀을 깨달음으로 인한 감화의 뜨거움입니다. 예수님은 그 책망 받은 자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시고,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성도가 진리를 깨달으면 뜨거운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억제하려 하였을 때 “중심이 불붙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친다”(렘 20:9)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깨달음으로 마음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말씀을 사모하는 심정이 간절함으로 느낀 뜨거움일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우다가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계속 가시려고 하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객실로 유하러 들어가셨고, 그 곳에서 음식도 함께 잡수셨습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신 것은 성경 말씀을 사모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열심을 갖게 되고, 그 열심이 곧 뜨거운 마음인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는 어떤 교회에 사경회가 있을 때 지방에서 쌀을 짊어지고 몇 십리, 또는 몇 백리 집회소에 와서 밥을 해 먹으면서 성경 공부를 하며 은혜를 사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뜨거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심령이 뜨겁지 않으면 은혜를 사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이렇게 뜨거움을 느낀 두 사람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기의 가던 목적을 변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슬픈 기색과 절망을 느끼며 고향으로 가서 옛 생활로 돌아가려던 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다시 사명의 길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인 열 한 제자들을 다시 만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확실하게 고하고 그들과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들도 ① 말씀을 깨달을 때 심령이 열리고, ② 말씀은 배워야 깨닫게 되며 ③ 심령이 열려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④ 또 마음의 뜨거움은 불로 가슴을 지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깨우침 받는 심령의 충격적인 감동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4과 부활의 의미와 종류 (요 11:25-27)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의 “ἐγό είμι ὴ άναστασις καί ὴ ζώ”는 주님만 그 부활, 그 생명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믿을 때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죽어도 산다”는 뜻은 예수님 재림시의 부활을 뜻하고, “살아서 죽지 않는다”는 뜻은 영적으로 영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이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1)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셨는데(시 16:10, 고전 15:3) 예수님이 그 예언의 성취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 26:54)

2)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가 아니면 메시야가 될 수 없겠지요. 메시야는 생명의 구원자이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니까요.

3)사망과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이기신 승리자임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일찍이 애굽왕 바로로부터 이세벨 왕후, 느부갓네살왕, 안디오커스에피파네스, 헤롯왕 등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의 조상을 없애려 하였지만 결국 그들은 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패배자가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 제사장들, 헤롯 당원 및 유대인들도 역시 예수님을 대적하였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패배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리자이시므로 성도들도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4)예수님을 부활이라 하신 것은 자신도 부활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부활케 하여 구원을 주실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 없이는 구원과 천국 건설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부활의 종류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곧 ① 과거의 역사적 부활과 ② 현재의 영적 중생이며 ③ 미래의 신령한 몸의 부활인 것입니다.

1)저희들은 과거의 역사적 부활을 꼭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역사적 부활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과거에 있었던 부활 사건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시면 ① 엘리야의 사역으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과(왕상 17:19-20) ②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난 예가 있고,(왕하 4:32-35) 신약에서는 ① 예수님의 부활을 포함하여(고후 5:14) ②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눅 7:15) ③ 야이로의 딸과(마 9:25) ④ 나사로를 살리셨으며(요 11:43) ⑤ 베드로의 사역으로 다비다가 살아났고,(행 9:36-42) ⑥ 또 바울의 사역으로 유두고가 산 것입니다.(행 20:9-10)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모든 부활을 믿는 것이 과거 부활의 신앙입니다. 저희들은 반드시 과거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활을 바르게 믿지 않는 신학 교육이 많이 유포되기 때문입니다. 통합측 신학교 교수였던 길기수 선교사는 요나의 사건을(마 12:40) 신화로 주장하였고, 감리교 신학 대학원 원장이었던 윤성범 박사도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보다 신앙의 문제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72. 4. 1. 영남일보)하여 역사적 부활을 은폐하였습니다. 또 “칼빠르트”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부활로 믿지 않았고,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있는 교훈을 주기 위하여(기록한) 초월 세계의 영상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가장 큰 교단인 연합 장로 교단에서 채택한 67년 새신앙 고백서에는 “바르트” 신앙을 근거로 하여 그 고백서 2부 1장에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은 인간 사회의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잘못을 극복하게 하는 약속을 발견케 한다” 하였고, 같은 고백서 3부 1장에서 천국을 말할 때에 “천성, 아버지의 집,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서적 환상들로서 죽은 후에 성도의 세계가 그렇게 좋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에 불과하다” 하므로 요나의 사건은 신화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영상이며 천국은 비유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주장하기를 “슈바이쳐가 부활을 안 믿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Burth나 루돌프 불트만(예수님의 전기-연구가)도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느냐? 성경에 있다고 무조건 다 믿는 것은 ‘옛 것을 무조건 좋다’는 복고주의로 돌아가는 모순이다 그러니까 부활의 현대적 의미는 믿기 어려운 것을 구태여 믿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중요한 사랑과 봉사를 더 강조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미국 “마운트 홀 요크”대학 “딘 월렴 픽” 박사도 부활문제로 떠들썩하지 말고 절충성 있게 해석하여야 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란 내용을(크리스쳔 센츄리;미 기독교 기관지)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차제에 저희들은 과거의 부활을 역사적 기적의 사실로 분명히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두 번째 부활의 종류는) 현재의 부활로써 거듭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거듭났다”는 말씀은 요 3:3, 엡 2:1, 벧전 1:3 등에 있고, 또 엡 2:15, 4:25에서는 거듭난 인격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셨으며 골 3:1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닭은 인가로 나가고 꿩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는 항상 신령한 것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확신을 갖는 것이 현재의 부활을 믿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벧후 1:10)

3)미래의 부활입니다. 성도의 미래의 부활은 주재림시에 있을 육체적 신령한 부활이며 이 부활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과 약속에 의하는 것입니다. 또 본문의 “죽어도 산다”는 말씀을 비롯하여 고전 15:15,20, 살전 4:13-18, 행 17:32, 23:6, 24:11-15, 계 20:6에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부활할까요? 나사로처럼 다시 죽을 육체로 부활할까요? 그렇지 않고 다시 고통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처럼 부활한다고 고전 15:2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가 어떠 하였습니까? ① 악인들에게는 보여진 일이 없었고, ② 음식을 잡수실 수 있었으며 ③ 그 몸을 만질 수도 있었고, ④ 흔연히 안 보이기도 하였으며 ⑤ 공간에 제제없이 문닫힌 방에도 들어오셨고, ⑥ 말씀도 옛 모습처럼 하셨으며 ⑦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시기도 하셨고 ⑧ 승천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입니다. 이런 미래 부활의 소망이 저희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고 그 때와 그 세계를 동경하며 기다리고 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5과 요한의 부활 기사 (요 20:1-10) 목록으로


요한의 부활 기사는 요한복음 20장과 21장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의 내용을 분류하면 7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10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간 기사요, ② 11-18절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기사요, ③ 19-23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사요, ④ 24-29절은 도마를 깨우치시는 기사요, ⑤ 21:1-14절은 디베랴 바다에서 나타나신 기사요, ⑥ 15-23절은 베드로를 재소명하신 기사요, ⑦ 20:30-31과 21:24-25절은 이 말씀을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살피면

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일입니다.(1-10절) 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은 여러 사람이었는데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만 기록하였고,(마 28:1) 마가는 “살로메”를 추가하였으며(막 16:1) 또 누가는 요안나와 다른 여자들을 추가하였습니다.(눅 24:10) 그런 중에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가서 무덤들이 옮겨진 것을 보고 급히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으며 이 소식을 받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가 달려가서 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놓인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없어진 것은 믿었으나 부활하신 것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2.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무덤에 와서 울며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을 때 두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들에게 예수님의 시체에 대하여 물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였으며 불신앙과 슬픈 감정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실 때 알아보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다녀오기 전에는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17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셔야 하는 일은 속죄제의 열납을 위함일 것입니다.(레 1:3)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렇게 뵙고 다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 만난 사실을 또 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 28:8-9에서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순간적으로 다녀오신 후에 만나주신 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엠마오 노상에서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눅 24:13-35)

3. 그 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문이 닫혀져 있었지만 주님이 그 곳에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부활의 몸을 확인하게 하시고 축복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축복은 “평강이 있을 것과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요, 사명은 전도의 사명과 용서의 사명인 것입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말씀을 많이 기록하셨습니다. 축복은 받고 사명은 이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제자들이 도마가 돌아왔을 때 예수님 만난 사실을 말하였으나 도마는 완강하게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직접 보고 못 자국을 확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일 후에 예수님이 도마가 있을 때 그 처소에 다시 오셔서(26절) 평강을 선포하신 후 도마를 책망하시고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보고 믿는 자보다 말씀대로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29절) 본다는 것은 일종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체험보다 앞서야 하고, 믿음을 가진 다음에 체험하여야 합니다. 체험을 하여서만 믿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5. 그 다음에 예수님은 약속대로(마 28:7)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셨으므로 여러 제자들이 그 곳으로 갔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라고 하셨습니다.(21:1-2)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가자”하여 배를 타고 밤새도록 바다에서 수고하였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는데 주님이 바닷가에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셔서 던졌더니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명령하신 분이 주님이신 줄 알고, 베드로는 먼저 물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가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에 고기를 옮겨 실은 후 육지에 댄즉 이미 그 곳에 “숯불과 생선과 떡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물고기를 세어본즉 153마리였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함께 생선을 구워 떡과 함께 조반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약속대로 갈릴리에서 만나주셨고, 수고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예비하여 함께 잡수셨으며 또 고기를 많이 잡게도 하시고, 그들의 그물이 찢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시는 통치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쌀과 생선을 갖다 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반드시 믿으셔야 할 것이며 이 각박한 세대에 양식 걱정 없이 사셨다면 그것도 그물을 찢어지지 않게 하신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임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6. 그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재소명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하고 멀리 하였던 넘어진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붙드신 것입니다. 주님이 잡게 해 주신 물고기 153마리를 헤아리는 것처럼 저희들도 은혜를 헤아릴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하여 확답을 받으신 후에 “내 양을 치라” 하셨고, 그가 늙어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1:18-19)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이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재물 이 아닌 사람들(제자들, 동역자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알아차린 베드로가 곁에 있는 다른 제자(요한, 20절)를 가리키며 “이 사람의 미래는 어찌 되겠습니까?”하고 여쭌즉 “그의 미래는 너와 상관이 없은즉 너는 나를 따를 뿐이라”(22절)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나 모든 제자가 다 자기의 갈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길을 따르려하지 마시고, 자기의 받은 은사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나 동역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때에 주님이 붙드시고 인도하시며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7.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을 쓴 요한 사도는 이 글을 쓴 목적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려서 믿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란 것과(요 20:30-31) 또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이 많지만 세상이 이를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적당한 내용만을 기록으로 남긴다”고 하신 것입니다.(요 21:24-25) 이 말씀은 성경 기록의 목적과 제한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내용만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2:23, 3:2, 6:2, 7:31, 12:37) 성경 이외의 다른 말씀은 없다는 뜻입니다.

 

제46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요 20:19-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수님이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다음 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② 베드로에게와 ③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④ 또 주일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①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 처음 나타난 사실과 ② 또 여드레 후에 그 곳에 두 번째 나타나신 사실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1.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간 세상에 계셨고,(행 1:3) 승천하시기 전에 개인과 단체 중에 13회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복음서에서는 일곱 차례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① 첫 번째는 주일 새벽에 무덤을 보러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간 여인들에게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나타나 주셨고,(마 28:8-9, 막 16:9, 눅 24:9) ② 두 번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이 황급히 열한 제자들에게 와서 그 사실을 고했을 때 베드로와(눅 24:12) 다른 제자(요 20:2-4)가 급히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는데 그 당시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이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자신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를 하였고,(눅 24:34) 이 사실을 바울 사도도 증언한 것을 보면(고전 15:5) 베드로가 두 번째로 부활의 주님을 본 것이 사실이요, ③ 세 번째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눅 24:31,34 막 16:12) 자신을 알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주님을 본 때는 아침경이었고, 베드로가 주님을 본 때는 정오경이었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본 것은 그 날 저물 때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가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서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 저녁에 당도하여 그 사실을 말했더니 다른 제자들은 이미 여인들의 증언과 베드로의 증언을 듣고 있었습니다. 또 그 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오전경에 여인들로부터 부활의 증언을 듣고 확신 없이 길을 떠났다가(눅 24:23) 저물 때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되돌아온 것이었고,(눅 24:31,34, 막 16:12) 그들이 함께 하여 저녁 식사를 나누는 중에 주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요 20:19) ④ 또 네 번째는 8일 후에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지금 읽으신 본문의 기사이며(막 16:14, 요 20:26) ⑤ 다섯 번째 나타나신 것은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고기잡을 때에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며 베드로를 다시 부르신 사실이 있었고,(요 21:1-) ⑥ 여섯 번째가 8복산에서(8복을 명하시던 산) 나타나신 일이며(마 28:16) ⑦ 일곱 번째가 감람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신 기사입니다.(막 16:19, 눅 24:50-51, 행 1:6-9) 이 말씀들은 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게 하는 증언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이 어떤 상황으로 나타나셨습니까?

1)제자들이 유대인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숨은 자들처럼 있었는데 부활의 주님은 그 방 가운데 나타나 서신 것입니다. ① 이렇게 부활한 형체는 공간의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로 활동하셨고 때로는 변형된 모습으로도 나타나신 것입니다.(막 16:12) ② 여기에서 저희들은 주님의 부활체나 우리의 부활체가 자유활동할 수 있음을 감탄하기 전에 그 부활의 주님이 지금도 영으로나 어떤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 28:20에 보시면 “부활하신 주님이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부활의 주님은 그 신령한 형체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 성도가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 숨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 계신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부활의 주님은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왜 보여주셨을까요? “부활을 믿으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손발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 찔리신 바로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선뜻 믿었다면 손발의 상처까지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심이 너무 가득 찬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제거하고 확실하게 알고 믿으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어떤 일에나 의심이 가면(그 의심 자체가 불신앙이요 연약인 줄 알면서) 확실히 깨닫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부활 이전에 평강을 선포하신 것과(요 14:27) 부활 이후에 평강을 선포하신 것과 대조하면 큰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인간의 연약을 맛보시는 중에서 베푸셨고, 후자는 승리자 되시고 심판자가 되신 상태에서 베푸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 베푸신 평강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겠지만 부활한 주님의 평강 선포는 왕권으로 직접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에 주님의 선포에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시는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부활 당시 승천하셨다가 오셨음. 요 20:17,21-22) 부활절을 맞이하는 저희들에게도 주님의 큰 평강의 복이 있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4)사명을 주셨습니다. 무슨 사명입니까? 부활 증언의 사명이고, 또 전도의 사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말씀이 바로 사명을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속 사업하시도록 보내셨고, 예수님은 그 사명에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저희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전도의 사명을 위하여 주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전도 할 방법은 참 많습니다. 저는 서적 보급을 통하여 전도를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5)“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체로서의 예수님도 숨을 쉬셨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것은 ① 성령님이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보내주시게 됨과 ② 머지 않아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주일을 뜻있게 보내는 성도는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행 1:8, 엡 5:18) (어떤 평신도의 간증에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점검한 일이 있었습니다. 48세 된 부천의 어떤 감리교회 주부 성도인데 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 배속까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② 성경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한 생각이 든다. ③ 주일 학교 선생을 20년째 하면서 깨닫는 은혜가 많다. ④ 8남매 중 셋째 며느리인데 중풍으로 똥싸는 시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모셨는데 효도할 작정으로 기도하고 모시니 불쌍한 마음이 들더라는 것이요, ⑤ 시아버지가 안 좋은 일을 할 때 시어머니가 그의 영감님을 욕하고 불평하더라는 것, 그래서 며느리인 자기가 펄쩍 뛰면서 병 때문에 그런 아버님을 왜 구박하느냐?고 절대 그러시지 말라 하고.....“내가 다 처리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⑥ 남편과 의견 충돌로 대립될 때 내가 죽어야지 하고 항상 “내가 잘못했다”고 하니까 평안해지더라는 것, ⑦ 사람 앞에서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여자가 가족을 인도한 것을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당신 같은 여인이 교회 안에 많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절을 지켰으면 성령의 충만을 꼭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6)“누구의 죄이든 용서하고 자신의 죄도 용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속죄 사업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은즉 서로 용서의 덕을 세우고 화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용서없이는 화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화목하는 방법입니다. ② 그런데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셔야 내 죄도 용서 받는다”는 말씀은 용서 자체로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리를 믿는 성도는 그 믿음 자체의 힘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와 사랑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서를 못하는 신앙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누구의 죄이든 용서하고 자신의 죄도 사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떠나셨는데 늦게 온 “도마”란 제자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더니 그는 “눈으로 보고 못자국, 창자국을 만져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피부로 확인하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도마는 말씀 불신앙에서 부활 불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8일 후에 도마가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것입니다.

1)예수님은 나타나시자 마자 도마에게 못자국, 창자국을 확인시켜 주시면서 “부활을 믿으라”하시니 그때서야 “믿는다고 하면서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인하고 체험하고 믿는 것은 뒤떨어지는 신앙인줄로 아셔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체험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은 믿음 약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요 10:38)

2)도마가 “부활을 믿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는 본고로 믿느냐 말씀대로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꼭 “복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복된 믿음이란 체험이 없고, 받은 복이 많지 않으며 어떤 신비한 징조가 없어도 성경 그대로 믿고 그대로 행하며 그대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부활 이상 더 큰 기적이 없듯이 성경 이상 더 진실한 것은 없다고 믿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이 사실은 본문에서도 강조하셨습니다.(30-31절) ① 예수님의 다른 표적이 많았지만 그것을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 믿음을 주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요, 또 다른 기적을 더 기록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부활 기적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② 따라서 성경에 부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은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니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그 이름으로 영생(생명) 얻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③ 따라서 믿음은 부활을 증언한 성경으로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 주일을 지키는 저희들은 오직 성경으로 믿음이 더 좋아지면서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힘입어 증인이 되고, 평강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성도와 이웃 간에 화목한 생활을 하시다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제47과 세 번째 나타나심 (요 21:1-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 1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1)첫 번째는 부활하신 당일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을 때 나타나신 사실이 있고, 두 번째는 그때로부터 8일 후에 도마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주셨으며 세 번째는 본문에서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여러 제자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2)예수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처음 만나셨던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가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제자들도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28:7,10) 그래서 열한 제자와 함께 갈릴리의 지정된 산에서 만나시고 전도의 사명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28:16-20)

3)그런데 지금 읽으신 본문 내용은 “세 번째 나타나신 일”이라고 하셨으니까 “갈릴리의 산에서 만나신 것보다 앞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예루살렘에 모여 있다가 갈릴리로 왔을까?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

1)예루살렘에서는 핍박이 있었고,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니까(요 20:19) 조용한 곳을 찾아 예루살렘을 떠나기를 원하였을 것이요,

2)그런데다가 마 28:7,10에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3)이리하여 갈릴리 고향에 도착한 제자들이 그 곳에 오자 마자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보니(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다가) 수제자인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하니까 같이 있던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과 또 다른 두 제자까지 합세하여 배와 그물을 갖고 옛날에 하던 방법대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고기를 잡지 못하고 날이 새려하기 때문에 바닷가로 나오는데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신 상태로 “고기가 있느냐” 하시므로 “없나이다” 하니까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져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그 곳에서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153마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3. 여기에서 몇 가지 더 설명을 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1)그들이 고기를 잡을 때 오징어 잡듯이 횃불을 밝혀 고기떼가 불빛을 보고 오도록 유도하여 잡기 때문에 배에 탄 사람들은 배에서 비취는 불빛에 가리여 고기 노는 것을 잘 볼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반대 편 어두운 곳에서 “이쪽으로 던져라 저쪽으로 던져라”하고 지시한다고 합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지시를 보통 사람이 알려주는 것으로 알고 그물을 던졌는데 의외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입니다.

2)따라서 그때의 제자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 줄을 모르고 그 분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인 줄을 모르고 순종하였으나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라도 성경대로 살면(구원은 못 받지만) 현실의 복은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런데 이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날이 새어 갈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왜 날이 새어 갈 때에 나타나셨을까요?

1)날이 새는 때는 고기 잡는 일과의 마지막 때를 뜻함이요,(고기를 밤에 잡으니까)

2)날이 새기 때문에 “고기가 안 잡히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난 마지막에 일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부들은 그 기회가 은혜 받는 마지막 기회일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회를 놓지 않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마지막 기회에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도 미래에 주실 은혜와 생애의 끝날에 주실 은혜를 기다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마지막에, 나만의 문둥병이 고쳐진 것도 마지막에, “영생의 강이 흐르리라”는 성령님의 약속도 명절 끝날에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 생애 중에서도 마지막 생애에 은혜 주실 것을 꼭 기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사람은 날이 밝으면 고기를 못 잡지만 예수님은 흑암 중에서도 빛을 일으키시는 분이고,(사 5:20, 58:10, 9:2, 42:16)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롬 4:17) 어떤 환경에서라도 요셉처럼 형통하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사람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무슨 일이나 인간이 다 할 수 있는 듯이 교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교훈은 홍해 바다 앞에서도 나타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 앞에서 어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외치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기다려보라”(출 14:13-14)고 하였는데 결국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이 그 곳에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1)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으니 그 고기가 153마리요,

2)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은혜까지 나타내 주셨습니다.(11절)

3)“숯불에 생선을 굽고 떡과 함께 조반을 먹도록 나누어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9,12-13절)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①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하시다는 사실과 ②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실감하도록 보여주신 것이요,(15절, 잡수심.) ③ 떡과 생선으로 조반까지 주실 정도로 제자들의 일을 세심하게 돌보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며 ④ 가장 큰 목적은 베드로를 중심한 제자들을 다시 사명으로 인도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15-19절) 그 당시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 6명은 복음 사명에서 현실적인 직업으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보이는 예수님만 따라다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예수님의 사명을 어떻게 돕는 것인지 조차 몰라서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그대로 따라 갔다가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6.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보이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부활체, 나타났다 안 나타났다 함.)을 따르는 일이 익숙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말씀(성경)으로 따른다”는 사실에 익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베드로가 수제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기다려 보지도 않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한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고, 그것이 다른 제자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 것인 만큼 지도자들의 바른 솔선이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동일한 능력자이시고, 또 조반 먹는 문제까지 살펴주실 정도로 자상한 분임을 아셔야 하고,

4)그 제자들이 153마리나 되는 현실적 축복 또는 물질 축복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 사명에 헌신하였다는 점에서 사명적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보내는 저희들도 ① 믿음의 더 큰 확신과 ② 은혜의 더욱 풍성함을 이루어 ③ 현실보다 신령한 사명을 더 중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8과 부활을 믿을 근거 (행 17:30-34, 26:8) 목록으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로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하였고, 바울은 아그립바왕에게 “어찌하여 당신들은 부활을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과거의 부활, 현재의 부활, 미래의 부활을 다 믿습니다. 과거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죽은 자의 부활이고, 현재의 부활은 거듭나는 은혜이며 미래의 부활은 모든 인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부활을 믿을 근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 창조 원리에서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생명 창조를 하셨습니다. 인과 법칙에 의하여 생명의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자들도 생명의 창조자와 주관자가 계시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인하면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지성인들이 생명의 주가 계신 것을 부인한다면 자기의 조상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창조를 믿는 신앙에 근거하는 것입니다.(히 11:3)

2. 거듭나는 은혜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요 3:3, 마 16:77, 고전 12:3, 히 12:2, 막 9:24) 이 거듭나는 은혜를 받아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십자가가 구속의 사역이며 성경이 진리임을 믿게 됩니다. 그 중에서 부활이나 영생 천국에 대한 것도 거듭나면 다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자를 믿어야 하는 문제는 거듭나지 않아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롬 1:19-20) 그러나 거듭나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리를 다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약 3500년의 역사를 가졌고, 신약이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나타난 부활의 기록이(시 16:10, 사 26:19, 마 20:19, 막 9:9, 14:28, 요 2:19-22) 그대로 성취되었고, 따라서 바울 사도도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땅에서 살다가 전쟁을 피하여 흩어졌을 때 그 자리에 와서 살던 백성이 팔레스틴 민족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족이 본토에 와서 땅을 차지하니까 팔레스틴족과 싸움이 일어났지요. 팔레스틴족은 바벨론 포로 이후 약 1600년을 살았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족은 “그 이전에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에게 주신 땅이라”는 근거가 성경에 있지 않느냐?하고 성경을 근거로 주인 행세를 한 것입니다. 성경은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들의 증언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들이 핍박을 받으며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행 4:20) 그리고 부활을 증언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행 7:51-56, 17:18) 증거자들이 거짓을 말하고 죽는 법은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죽지요. 따라서 믿을 만한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안 하였다가(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음.) 책망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막 16:14)

5. 부활을 전파하고 기념하는 전통에 근거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약 2000년 동안 부활 주일 행사가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신빙성이 없거나 부활하시지 않은 증거가 나타난다면 이 행사가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활 주일 행사를 “근거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일본의 교과서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부활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6. 부활 종교의 발전을 근거로 하여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거짓이고 기독교에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서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 불교는 372년에 들어왔으니까 1600년이 넘었고, 기독교는 1884년에 들어왔으니까 겨우 120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교세와 성장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생명있는 씨가 굳은 땅을 밀고 나오는 것처럼 부활의 종교이니까 발전한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을 근거는 모든 인간들에게 영생하고저 하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영생의 본성을 주셨고, 그 영생을 성취할 수 있는 대책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상대성 원리라고 합니다. 만일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인생에게 영생의 본능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아서 부활을 부인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갔다느니, 아주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도망을 쳤다느니 또는 부활의 의미가 관념적이거나 영상 세계의 표현이라는 등 구구한 설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성도들은 반드시 믿어져야 하고 그 믿음의 근거는 ① 창조 원리, ② 거듭난 은혜, ③ 또는 성경, ④ 믿을 만한 자들의 증언, ⑤ 부활 전통, ⑥ 부활 종교의 발전, ⑦ 영생을 사모하는 상대성 원리가 믿을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49과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2-19) 목록으로


본문 1-11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들과 또 살아 있는 사도들의 증언, 그리고 성경의 예언과 자신의 체험을 들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큰 모순이 초래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부활의 타당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일반 인간들의 부활을 더 믿지 않는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성도나 모든 인간들이 죽어 그 시체가 썩은 다음에 부활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도 이런 추세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요 5:28,29, 6:39,40,44, 눅 24:26) 또는 하나님과(마 22:29) 성령님의 능력으로(롬 8:11) 부활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 13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일에 죄 없는 것을 제하고는 예수님이 예외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실 수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것은 인간의 부활을 실제화 하신 것입니다.

2. 14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전도하는 일과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구원의 도리를 전파하는 것인데 그 구원의 도리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이고, 부활 없는 전도는 헛것이 되는 것이며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도 역시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음과 구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이신데 돌아가시고 안 계신 예수님이라면 믿음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모든 전도자들이 거짓 증인이 되어야 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나 선지자는 거짓 증언자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성경도 거짓말이 되며 성경에 근거한 부활을 증언한 사람도 그렇고 부활의 주님을 보고 증언한 자들도 역시 거짓자가 될 것이니 진실을 증언한 사람들이 거짓 증언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은밀하게 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

4. 15-16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도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요, 예수님도 다시 사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모순된 일을 발생시키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항상 일치된 관계에 있습니다.(요 12:49) 따라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다 부활을 예언하시거나 이루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 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어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제는 부활, 승천, 열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요 20:19, 고전 15:24, 레 1:3) 따라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에 나가셔서 그의 수고한 제사를 받으시도록 하고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6. 18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을 경외한 성도들은 대부분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셔야 할 예수님이 부활을 안 하셨다면 어떻게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가 없이는 다음 열매를 기대할 수 없겠지요.(고전 15:20)

7. 따라서 부활과 내세의 소망이 없으면 의를 행하고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는 심판자의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활과 내세의 상급을 믿고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살았을 것입니다.(갈 5:24) 또 사명있는 성도들은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기도 하였고,(빌 3:8) 그리스도를 인하여 능욕 받은 것을 즐겁게 여기며 고난을 감수하였을 것입니다.(행 5:41) 이런 사람들에게 “부활이나 내세가 없다”고 한다면 역시 논리적으로나 이치상으로도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러한 논리와 사실을 근거로 하여 부활의 타당성을 말씀해 주셨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아울러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제50과 부활의 참뜻 (고전 15:20-22) 목록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의미, 또는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교훈과 유익을 주시는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경이 진리됨을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 15:3-4에 보시면 “예수님이 성경대로 돌아가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대로”라는 말씀은 성경에 미리 예언한대로 돌아가시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여러 차례(사 53:, 시 16:10) 예언하셨고, 또 예수님 자신도 여러 차례 돌아가실 것과 다시 사실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요 2:19, 마 12:39)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거짓이 되어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요, 참이며 우리가 의심 없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입증을 하여야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을 응하게 하셨고,(요 13:18) 성경을 진리로 입증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증명은 하실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란 증명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는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시는 것을 “참람하다”하여 죽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인정될 수도 없고, 따라서 유한한 피조물처럼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 5:26에서 “하나님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졌다” 하셨고, 시 102:26에서 “주는 영존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영존하신 예수님이요, 생명의 주이시니까 마땅히 죽음을 이기실 수 있어야 하고, 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니까(행 17:25,28) 더욱 영원히 살아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의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히 2:14에서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의와 악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죄냐 의냐, 빛이냐 어두움이냐, 진리의 역사냐 마귀의 역사냐?하는 상대적 대결에서 싸우는 세상인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의의 대장이시고, 마귀는 죄의 대장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의 병졸들이고, 진리와 정의를 반대하는 자들은 마귀의 병졸들인데 이 둘이 세상에서 서로 대결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의로운 예수님이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돌아가시듯이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패배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고 사후 심판이 없다면 의인의 고난과 희생과 패배를 어떻게 변상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악인의 최고 무기인 사망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악한 자들과 마귀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뚜렷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 되심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히 5:6에 보시면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고, 히 10:12에서는 “영원한 제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란 중보자의 직임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그 제사를 하나님께 열납드리기 위하여 부활하셨으며(고전 15:24) 계속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구원 받은 자에 대한 중보 사역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제사장으로 영원한 속죄(히 10:15)와 중보를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5. 성도에게 주실 영생과 부활과 심판주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1)본문 20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된 성도에게 영생의 부활이 뒤따라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첫 열매란 것은 미구에 다른 열매가 뒤따를 것을 예상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요 5:24- 보시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고,(죽은 자=비중생자인) 또 “무덤속에 있는 자가 그 음성을 들을 때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그리고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고, 또 장차 예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영생이 없고, 부활의 소망이 없으며 공의로운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자가 가장 불쌍해질 것이니 결국은 의인이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는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 영생과 공의로운 심판을 약속해 주신다는 점에서 큰 뜻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① 성경의 진리됨. ②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 ③ 의인의 궁극적 승리, ④ 영원한 제사장 직무 이행, ⑤ 영생, 부활, 심판을 주시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어떤 역경에서라도 침체되거나 실족하지 마시고, 부활의 주님을 본 제자들이 큰 용기와 소망을 갖고 새 출발을 한 것처럼 기쁨과 감사와 능력과 희망에 넘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5부 어린이 및 교육에 관한 설교

제51과 어린이 같이 되는 신앙 (마 18: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어린아이 같이 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의 귀중함을 배워 받들기도 해야 하지만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함도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1. 어린아이 같이 되는 신앙이 천국에서 크게 인정받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또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크게 인정받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서열과 명예적 의식이 팽배되어 있었습니다.(막 9:34, 10:37) 그러나 “성도 및 신앙의 지도자들은 그런 의식을 가지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막 10:42-43에 보시면 “이방인 집권자들은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명예, 권세, 서열 같은 것은 따지지도 말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란 현세와 내세를 통 털어서 “하나님이 크다”고 인정해 주시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소인배, 졸장부, 거목, 위인이란 말을 합니다. 또 사람은 어떻게 취급하든지 하나님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이 그의 위대함을 모르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7:12)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 중 그가 가장 큰 자라”(마 11:11)하셨으니 하나님이 보시는 평가와 사람이 보는 눈은 그만큼 차이가 있음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본문이 아니라도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 5:19에서 “계명을 실천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 하셨고, 또 마 11:11에서는 세례요한을 가장 큰 자라 하신 후에 “천국에 있는 자는 저보다 크다”하셨으니 이것은 완전히 성화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마 20:26에서는 “섬기는 자가 크다”하셨고(마 23:11, 막 9:43, 눅 22:26-27) 눅 9:48에서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고 하셨는데 “가장 작은 그 이”는 어린아이처럼 되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3절) 이 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 어린아이는 모형적 인물로 내세워 관심을 집중시키신 것이고 교훈의 뜻은 어린아이들의 갖고 있는 천국백성의 성질과 태도를 깨우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같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하셨으니 어린아이들에게 무슨 믿음의 요소가 있는가?할 때 어린아이들에게는 믿음과 신뢰의 요소가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농약 넣은 우유를 먹여 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주는 음식을 의심치 않고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어린 아이는 어른의 말을 무조건 믿을 뿐 아니라 부모를 의지하여 염려를 안하고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젖먹는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무조건 빱니다. 결코 감정하고 빨지 않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젖을 주는 어머니만 의지합니다. 성도가 어린 아이처럼 진리를 믿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어른들은 복음을 받을 때 비판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무조건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음을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1:25) 따라서 “어린아이들 같아야 천국에 간다”는 뜻은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의심없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저희들 주위에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알겠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퍽 부끄러운 일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작아지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어린아이들처럼 사는 것이 큰 자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해 보셔야 할 일입니다.

1)성경에 보시면 어린아이를 신앙과 관련하여 설명할 때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깊지 않다”(고전 13:11), “신앙의 전체적 미숙을 뜻한다”(고전 3:12)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 교훈은 부정적 면에서 보완하셔야 하고 긍적적인 면은 긍정적으로 선양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그런데 “어린아이는 미숙한 상태라”하셨으니까 성도들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미숙한 상태인 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하여야 하나님이 크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상태인 것을 모르고 교만하면 항상 작은 취급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이라도 우리들 자신에게 “자신의 인간적 점수를 높여서 내가 유력하다”하는 생각을 가질 때는 큰 충격을 느끼면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벧전 5:5)

3)제가 처음 목사 노릇할 무렵에 큰 의문을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친구 목사가 나보다 유력해 보이지 않는데도 내가 시무하는 교회보다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척도 받지 않고 조용하게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이 퍽 어리석기 때문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그 친구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는데 예상한 것 이상으로 새벽기도회에 많은 성도가 나왔고, 그 목사님은 기도를 어떻게 많이 하는지 날이 밝아도 잠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거의 두 세 시간 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좌석에서나 말이 없이 겸손했습니다. 그 후에 그 분의 사명생활과 나의 사명생활의 방법을 분석해 보니 “나는 나의 똑똑한 것으로 내가 하려는데 왜 하나님이 팍팍 밀어 주시지 않나”하는 타입이고, 그는 “나는 부족하오니 주님만 믿습니다”하고 퍽퍽 우는 타입임을 알았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더 크게 쓰시고 또 그의 목회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부족해도 겸손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잠잠하도록 교인들의 입을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나 성직자도 교만하면 교만한 비례대로 대적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어린아이의 기질은 신앙의 긍정적 면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막 10:14)고 하셨습니다.

1)우선 어린아이는 순결합니다. 죄 때가 거의 없습니다. 거룩에 가까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2)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벧전 2:2)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어린아이가 어머니만 의지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시 40:3)

4)어린아이는 진실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입으로 나오는 찬송을 온전케 하신다”(마 21:16)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꾸밈이 없습니다.(막 9:36, 눅 9:47)

5)어린아이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벧전 5:7)

6)어린아이들은 단순합니다. 저희들도 믿음생활만 중요시하면 좋습니다.

7)어수룩한 면도 있습니다. 어수룩하게 살아야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8)어린아이들은 활동이 민첩합니다.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9)어린아이는 심부름 잘하고 순종을 잘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신앙이 미숙할 때는 차라리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섰다 하다가 넘어지는 것”보다는(고전 10:12) 어린아이처럼 되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옛날에 90세, 70세, 50세 된 3대 노인들이 한 집에서 살았는데 90세 된 노인이 70세 된 아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70세 된 아들이 물그릇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엎어져서 엉엉 우니까 90세 된 아버지가 “저 녀석이 아직도 어린애 탈을 못 벗었다”고 하면서 크게 웃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웃으시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같은 신앙인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막 10:13-16)

 

제52과 어린이에 대한 축복 (마 19:1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어린이에 대한 축복”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1. 본문 내용을 살피면

1)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그 아이들에게 안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안수 기도가 복주시는 방법이었고,(예수님은 안수하여 병을 고치신 예가 있음. 마 8:15) 사람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그런 방법으로 복받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들도 자신과 함께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올 때에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그러나 제자들은 가까이 오는 아이들을 꾸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중심을 모르고 예수님의 행진을 편하게 해 드리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3)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용납하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 하시고 안수로 축복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좋아하셨으며 칭찬하시고 축복해 주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과 관련된 내용들을 좀 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하신 말씀의 뜻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이 어린아이들은 어떤 종류의 아이들인가?하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태아와 갓난 아기를 표기한 “브레포스”(βρέφος;눅 1:42,44)가 있고, 일반적 어린이를 말씀한 “파이디아”(παιδία)나 “네피오스”(νηπιος)란 말이 있는데 여기에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일반적 어린이에 속합니다.

2)그렇다면 어른과 구별되는 어린이의 특징을 알아야 예수님이 어린이를 좋아하신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특징이 많겠지만 어른과 구별되는 특징은 범죄를 계획할 만한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14:20에 보시면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어린 아이는 순결한가?할 때 어린 아이가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았다 하여도 원죄의 죄책과 부패성을 갖고 있는 것이니까 순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지혜의 성장이 없으니까 비판도 잘 못하고(그러니까 순진함) 욕심에 따른 범죄 계획을 못하니까 어른에 비할 때 그 만큼 순결함을 인정할 수 있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어린이의 그런 면을 좋아하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3)그러면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하신 말씀이 구원을 주신 뜻인가?할 때 “구원을 주신 뜻이 아니라”고 할 단서가 없습니다. “이런 자의 것이라” 하셨으니까 그들이 천국 백성에서 제외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도 구원하실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아셔야 할 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주”란 사실입니다.(히 2:10) 또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능력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3:9) 그런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너도 오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눅 19:9) 하셨고, 사형장에서 아시게 된 강도에게도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눅 23:43) 따라서 “천국은 너희 것이라”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4)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이 곧 어린 아이들을 다 구원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다 구원하시지 않는 것을 우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엄연히 선택자와 비택자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 9:7-8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요(이삭과 이스마엘이 구별됨) 또 육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5)그러면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하신 말씀에 다른 뜻이 없는가?할 때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은혜를 주셨음을 짐작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순결 면으로 볼 때 어른들보다 복받을 요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의문스러운 것은 그들이 지각이 부족하여 어른들처럼 믿음과 신앙 고백을 나타낼 수 없는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어린 아이들은 신앙 고백을 할 만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능아나 지식 공급이 안 되는 불구자들도 같은 범주에 포함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 없이 받는 구원에 대하여는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거나 구원 언약을 받은 자라면 신앙 고백의 절차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행 16:31)

6)그러면 성도의 자녀이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인가?할 때 구원 받을 확률이 많은 것으로 믿고 유아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택자라도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비택자였고, 이삭이 택자라도 그의 아들 에서가 비택자인 사실을 볼 때에는 예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이 더 많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다”(시 127:3), “하나님은 후손의 하나님도 되신다”(창 17:7), “유업을 잇게 하시는 복이 있다”(갈 3:17),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마 19:4)하신 말씀이 있는가 하면 방주 안에서 함께 구원 받은 일과 문설주에 피발린 집에서 함께 구원 받은 일(출 12:48)이 그 실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아 세례의 근거로써 루디아의 집과 스데바나의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사실입니다.(행 16:15, 고전 1:16) 또 고전 7:14에서는 가족적 관계에서 믿음 전수가 잘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런 의미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적 교훈을 잘 하라”고 하셨습니다.(신 6:2,7)

7)그러면 이 자녀들이 꼭 혈육의 자녀이어야만 하는가?할 때 성경은 양자나 서자나 동거인도 다 한 가족의 범주에 넣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인으로 딸려 나온 사람과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에게도 할례를 베푼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며(창 17:23-27, 출 12:48-49) 이같은 근거에 의하여 부모 중 한 사람만 믿어도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복된 일이 많고 믿음의 집에서 동거하는 자녀들도 구원 받을 확률이 많으므로 그 중 어린이들은 선택 받은 자로 가정하여 구원에 동참한 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53과 어린이를 사랑하자 (마 18:1-10) 목록으로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를 사랑하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성도가 어린이를 사랑할 이유.

1)예수님이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며 잘 받들라”하시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막 10:13-16) 어린이는 천국 백성의 표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사랑하셨으므로 성도들도 극진히 사랑하셔야 할 것입니다.

2)“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마 18:5)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어린이는 곁에 있는 예수님과 같습니다.(마 25:44-45)

3)“어린 아이를 받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들라”(막 10:15)하신 말씀에서 교훈하신 것입니다. “천국 생활을 받들되 어린 아이 받들 듯 하여라” 하셨으니 어린이를 잘 보호하고 즐겁게 해주며 또 잘 양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4)어린 아이는 복된 자요 축복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순결하기 때문에 복받을 자이고, 또 상급으로 받은 자이며(시 127:3) 가정이 받는 축복을 미래로 계승하는 자이기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린이를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어린이를 수에 넣지 않을 만큼 무시한 때가 있었습니다.(마 15:38) 마 18:19에서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저희의 천사들이 하늘에서(지켜보며) 대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른들이 자기의 지혜와 성숙만 믿고 미래의 희망을 가볍게 보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실족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실족이란 낙심시키거나 죄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고 양육의 책임을 다하면 아이들은 실족하지 않고 건전하게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실족을 방지하려면 어른들의 철저한 대비와 교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어린이를 사랑하는 최대의 방법은 기도와 교육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고, 교육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교육하는 방법에 있어서 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일체의 부당한 언어나 행실을 보여주지 말아야 합니다. TV에서 폭력이나 절도 행각을 보고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② 부모나 어른들이 솔선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담배가 나쁜 것이면 어른들이 먼저 끊어야 합니다. 또 게으른 것이나 낭비가 나쁜 것이면 그것도 어른들이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③ 어린이들의 취미와 재질을 살려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④ 특히 어린 아이의 신앙 교육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성경을 진리로 믿는데서부터 확실하게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할 이유와 사랑하는 방도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54과 주일학교 시책 (신 31:11-13, 엡 4:11-12) 목록으로


교회마다 주일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예산도 많이 쓰고, 노력도 많이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를 어떻게 운영하여야 잘 되겠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이 시간의 과제입니다.

1. 우선 성경에서 자녀 교육과 관련된 말씀을 살펴보면

1)출애굽 당시에 계명으로 주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신 6:5-9에서 “부모가 먼저 말씀을 마음에 새긴 후에 무시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중하게 주신 명령입니다. “앉든지 다니든지 누울 때든지 가르치라” 하셨으니까요.

2)여호수아 시대에 이르러서 수 8:34-35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한 객들 앞에서 낭독하지 않은 말씀이 없었더라”하시므로 여호수아가 어린이와 모든 백성들에게 낭독하는 사명을 감당한 것을 말씀하셨고,

3)사무엘 선지자는 어렸을 때부터 그 부모가 성전에 보내어 제사장을 섬기면서 율법과 믿음 생활을 배우게 하셨으며(삼상 2:21,26)

4)그 다음 바벨론 포로 이후 느헤미야 시대에 와서도 느 8:1-4을 보시면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 놓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릇 알아들을 만한 남녀(어린이까지를 의미함.)에게 율법을 낭독하였다” 하시므로 어린아이와 전체 백성에 대한 성경 교육을 힘썼습니다.(우리나라도 좀 더 발전하면 토요일은 휴식하고, 주일은 성경 공부와 예배와 신앙 활동으로 전폭 사용하는 시대가 와야 할 것입니다.)

5)잠 22:6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 하시므로 어릴 때의 교육이 노년기까지 그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하셨습니다.

6)그 다음 자녀 성경 교육에 관한 신약의 말씀을 살피면 눅 2:46에서 “예수님은 12살 때에 성전에서 성경 문답을 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그때에 예수님의 성경 지식이 “뛰어났다”고 하셨으며

7)마 14:21이나 15:38에 보시면 말씀 배우러 따라다닌 사람들 중에 어린 아이들도 있어서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솔선적으로 떡과 물고기를 드렸던 사실이 있고,

8)행 10장에서 고넬료는 자기의 모든 식구들을 전부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게 하였으며

9)바울사도는 교사의 직임을 말씀하심과 동시에(엡 4:11, 고전 12:29) 디모데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 배운 것을 칭찬하셨고,(딤후 3:15) 엡 6:4에서는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며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녀 성경 교육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주일학교 시책에 대하여 이미 잘 하는 교회도 있겠지만 더 잘 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줄 압니다.

1)제일 중요한 것이 교사의 자격입니다. 교사가 믿음이 있고 지식(특히 성경 지식)이 있으며 헌신적 사명이 있고, 기술적 지혜가 있으면 어떤 제도나 경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사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잘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무디 선생님이 청년 시절에 사명의 불이 붙었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많이 배워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으나 교회에서 주교사를 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 교사직을 달라고 청원한즉 “학생들과 교사들이 다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리가 없으니 주일이나 어느 날이든지 자신이 전도하여 새 아이들을 모집해오면 그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이때부터 의욕이 충천하여 자기의 돈으로 사탕과 선물을 사들고 다니며 아이들을 모았는데 교회에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아이들을 모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을 열심히 하면서 그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전도도 그런 지경에 이르도록 심령이 뜨거워져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사의 자격을 논한다면 신앙의 뿌리가 확고하고 성경과 교리의 지식이 있으며 전도와 교육 사명에 불타있고, 거기에 가르치는 재간까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르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폭발을 하여야 하고, 열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목사의 격려나 간곡한 부탁을 받아야 겨우 일할 정도라면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사의 자격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는 “장로와 교사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라”한다면 마땅히 장로를 포기하고 교사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직은 정치하는 직이고, 교사는 진리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직임이기 때문입니다. ① 미국 정부가 “죤 와나메커”란 사람에게 “문교부 장관을 하라”하니까 “교회에서 주교사직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못한다”고 한즉 매주일 비행기편을 허락하여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장관직을 허락하였다 하며 ② 또 카터 대통령 역시 대통령에 취임할 때 교회의 공직을 사면하였지만 워싱턴 제일침례교회의 주교사직만은 사임치 않았으며 ③ 일본의 아라끼 대학 총장도 40년 동안 주교사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교사직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는 실례인 것입니다.

2)주일학교의 조직과 운영의 묘도 중요하겠지요. 어떤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하는데 당회가 있고 당회가 주일학교 운영 위원회를 두었으며 그 다음에 주일학교 규약을 만들고, 교장, 부장, 교사, 회계를 임명하고, 또 재정 예산을 짜고, 교육 전도사를 모신 후 복잡한 행정과 사무 절차를 밟으면서 운영하는데 자주 자주 충돌이 일어나고 혼란에 빠지는 일이 많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아이들에게 성경과 생활을 가르치는 사명만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잡한 행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좋을 것입니다. 교사 한 사람이 학생들만 몇 명씩 맡아서 충실하게 가르치고 친교하며 예배를 드리도록 하여 믿음만 키워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주일학교 운영이 행사에 그칠 우려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이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도록 지도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가 하나님을 부모 이상 모시고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3)주일학교 운영에 성공한 교회의 실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교회는 부산 서부교회인데 우리 교단은 아닙니다.(또 그 교회 성직자가 조금 다른 교리를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음.) 1990년경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의 장년 교인이 2800명쯤 되는데 주일학교 학생은 어린이로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26200명이라고 합니다. 그 교회는 모든 체제가 특수하여 공예배를 드릴 때는 ① 유년부(초등학교 이전) ② 중간반(중1-고1까지) ③ 장년부(무조건 고2 이상)로 나누어 드리고 다른 기관 단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사 중에는 75세된 할머니도 계시고, 60세 넘은 교사가 여러분이요, 시간은 주일 아침 9시에서 10시가지 꼭 한 시간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년부 교사에게는 일체 접대가 없고, 직무상의 괴로움이 있을 때는 십자가를 생각하며 성경으로 위로를 주는 것 뿐이고, 중간반 교사는 거의가 신학생들이기 때문에 월 7만원씩 사례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 방법은 목사가 사명가진 사람들을 살펴서 교사로 임명하면 학생은 교사가 전도하여 자기반 학생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여야만 애착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학년이나 6학년이나, 남자나 여자나, 전도된대로 자기반 학생을 삼아서 그 이름과 주소를 수첩에 적고, 그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토요일, 주일에는 꼭 심방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와 공과에 대하여서는 목사가 한주일 전에 대예배 설교한 내용의 요약문을 주일학교 부장에게 주면 부장이 교사를 모아서 그 교안으로 다시 공부를 시키고, 주교사가 그 내용에 따라 한 주간을 구상하고 자기 생활의 양식을 삼아서 다음 주일에 가르치는데 먼저 예배 중에 부장이 그 내용으로 15분 설교를 하고, 다음에 공과 시간에는 교사들이 또 그 내용으로 다짐과 문답을 하여 깊이 깨우친 다음 1시간 안에 예배와 성경공부를 마친 후 2부 순서나 다른 오락 같은 것은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학년 차이로 오는 교육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인이나 무식인이나 다 받아야 하는 것이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어른 세계에서 무식자나 유식자를 함께 가르치는 것처럼 아이들 세계도 역시 쉽게 가르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교사는 목사님의 낮예배 설교를 4-5회 반추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교회의 주교 시책의 특색을 정리한다면 ① 교사가 전도하여 자기 학생을 삼는 것, ② 통반하여 쉽게 가르치는 것, ③ 성경 교육 외에 다른 것은 안 하는 것, ④ 교안은 목사의 설교로 하되 복습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있고 실력있는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고, 실력있는 교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사명의 짐을 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형편에 따라 다소간 변동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모든 교회가 이런 방법을 시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55과 교육의 과제와 방도 (잠 22:6)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교육의 과제와 방도”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요즈음 자녀 교육에 대한 실태가 어떻습니까? 대단히 엉성하고 비관적이며 자신감이 없어지는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교육시켜야 할 부모님들이 너무 바쁘고, 아이들은 부모와 마주 앉는 시간을 주지 않으며(친구, 오락, 컴퓨터, 학교, 과외, 스포츠 등) 세상적 물결이 범람한 데다가 어른과 아이들 간의 세대 차이까지 나타나서 교육이나 권면이 잘 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공부해라, 시간 아껴라, 절약해라, 인사를 잘 하여라, 효도하여라”는 교훈들이 다 잔소리로 끝나는 실정입니다. 차라리 못 살고 고생하는 부모의 생활이 자식에게 도덕성을 일깨워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TV에서 농구 선수하는 아들이 아버지가 가구 공장에 가서 먼지를 쏘이며 일하는 작업에 동참해보고 그제서야 “부모가 어떻게 고생하여 가정을 붙들어 나가는지를 배웠다”고 하면서 그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그런 환경이 좋은 교육과 감화를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육 전문가들이 문교 정책을 써서 자녀들을 교육하지만 청소년들의 도덕성은 점점 문란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또 교회의 신앙 교육에 만족하십니까? 극소수의 자녀들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교육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80년도에도 교회의 청소년들이 믿지 않는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교육을 시킨다는 것보다 당사자가 일찍 지혜와 총명이 생겨서 바른 생활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기도할 것 뿐이란 뜻이지요.(사 45:11) 이렇게 교육의 실태가 기대에 못 미치는 만큼 기도와 전문적 교육이 더욱 절실함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교육의 과제, 즉 무엇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신앙 생활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겠지요. 신 6:4-9에서 말씀하신대로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신앙 교육은 거듭난 심령만 진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두려워하고 복종하며 의지하는지를 확인하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고후 13:5)

2)뚜렷한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을 물질, 출세, 평안, 향락 등 현세욕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또는 정의롭게 사는 생활, 또는 예수님처럼 사는 생활을 가장 가치있는 생활로 느끼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먼저 그 반대의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 큰 문제입니다. “못 살아도 의롭게 살아라”하지 않고 현세욕만 부추기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해방 전에 윤심덕이란 가수는 일본 공연을 마치고 현해탄을 건너오다가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하지요. 그의 가치관이 가수 노릇하는데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1940년대의 미국의 듀폰트 회사의 사장인 듀폰트의 맏딸, “에델 듀폰트”가 그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았고, 최고 학부의 지식을 배웠으며 거기에 인물도 뛰어나서 그 당시의 “댄 홀리원”이란 미술가가 그 여인을 가장 품위 있는 사람으로 찬사를 보냈고, 32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셋째 자부가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행복한 여인으로 보았는데 그 여인은 49세때 “나는 인생을 더 이상 살 의욕과 보람이 없다”하고 목욕탕에 들어가 잠옷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행복이 물질, 명예, 지식, 인물, 가문 등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것에서 가치를 추구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일하는 취미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나 성도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천직을 찾아서 거기에 가치관을 설정하여 생활하도록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3)도덕과 예절이 중요합니다. 진실할 줄 알고, 책임을 느끼며 겸손, 근면하고 사랑할 줄도 알고, 봉사할 줄도 알며 인내도 하고, 용서, 화합하며 위, 아래를 분별할 줄 아는 도덕성이 지식이나 명예보다 훨씬 귀한 것임을 알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나 모세, 사무엘, 세례요한, 예수님, 디모데 같은 분들이 다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마 1:18)

3. 교육의 방법을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요?

1)부모님들이 교육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우선 어린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좋아하시고 축복하셨으며(막 10:13-16) 어린이의 찬송을 기쁘게 여기셨고,(마 11:6) 어린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라 하셨으며(마 18:5) 어린이를 실족시키지 말 것과 실족시키는 죄가 큰 것과 하늘에서 각 어린이를 살피는 천사가 대기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마 18:10) 그리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막 10:14)하시고, 어릴적부터 구원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하게 하셨습니다.(창 17:14, 출 4:24)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교육을 철저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부지런히 가르치셨고,(요 6:59) 제자들도 각처에서 가르치며(고전 4:17, 14:6,19) 피차 가르치라(골 3:16) 하셨고, 또 “노엽게 하지 말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의 정신에 입각하여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2)말씀 교육에 중점을 두셔야 합니다. 말씀이 만물을 붙들고,(히 1:3) 말씀이 믿음을 든든히 세우며(행 20:32) 말씀이 운동력이 있고,(히 4:12)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며(살전 2:13) 말씀이 그 인격을 붙드신다(행 18:5)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 교육이 중요하고, 성도는 말씀에 붙잡혀 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3)신앙적 가정의 화목한 분위기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의 교육 실패가 불신앙적 가정의 불화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통계상으로도 증명이 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집을 뛰쳐나와 방탕아가 되는 이유는 부모가 늘 싸우고 가정에 평화가 없으며 자녀들에게 사랑의 관심 대신 불쾌한 분위기를 주는 것이 큰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시 128:3에서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라”고 축복하신 것은 가정의 화목한 분위기에서 주시는 축복이며 또 말 2:15에서 1부1처 제도를 만드신 이유도 경건한 자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적이고 경건하며 화목한 가정이 바로 자녀 교육을 옳게 배양하는 온상이란 것을 아셔서 최대한 가정 신앙과 가정의 화목한 분위기 조성에 힘쓰셔야 합니다.

4)자녀들의 교육을 맡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나 모든 선배님들이 언제나 교육적인 입장에 서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외할아버지는 멍석에서 흩어진 벼알갱이를 주워담으시면서 “쌀 한톨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잘 알아서 귀히 여기라”는 말씀을 하셨고, 저의 아버님은 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셔서 제게는 “쌀 한톨도 귀히 여기고 심는대로 거둔다”는 정신이 꽉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은 물질 귀한 것도 모르고 저축도 모르며 낭비가 너무 심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명예 의식을 주지 않기 위하여 “어느 단체에서나 회장되려 하지 말라, 회장이나 부회장을 하면 봉사의 부담이 따르니 차라리 중간에 서라”고 당부를 합니다. 어떤 부모는 “네가 1등 해야지, 네가 회장되야지”하면서 아이들에게 명예욕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안 좋은 일입니다. 겸손과 봉사와 인내와 근검을 가르치기 위하여 솔선하시는 부모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5)자녀 교육은 교회 생활에 얽매이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깨끗지 못하다 하여도 이 세상에서는 교회가 가장 깨끗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는 예배가 있고, 성경 교육이 있으며 기도가 있어서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고 붙잡는 곳입니다. 혹 실수나 부조리가 있다 하여도 늘 반성하고 평가하며 시정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금보다 귀한 신앙을 얻는 곳이고, 예수님같은 인격을 본받는 곳이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자녀들이 교회 가고 안 가는 것을 대스럽지 않게 여기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세상의 죄악성을 모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주일학교 출신들입니다. 19C 영국의 철학자 “러트킨”은 말하기를 “자기가 철학자 된 동기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성경 구절을 들어 둔 덕이라” 하였고, 미국의 33대 트루만 대통령도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으며 열두살까지 어머니의 권유로 성경을 두 번 읽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과 더불어 보냈다”고 하였으며 “어거스틴, 요한웨슬레, 아브라함 링컨도 역시 주일학교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생활 방법과 가치관이 꼭 교회에서 심어지도록 교육하셔야 할 것입니다.

6)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자녀 또는 어린이를 위한 기도를 끊이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잘 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장래를 부모가 맡는 것보다 하나님이 맡으시는 것이 더 낫고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나 사회가 맡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유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비할 때 너무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146:3에 보시면 “방백들도 의지하지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기 때문이라 그런고로 야곱의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소망있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녀를 키우시는 부모님들이나 지도하시는 교사님들은 기도를 힘쓰시기 위해서라도 꼭 기도하는 모임에 열심히 나오셔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교육의 과제가 무엇이며 또 어떤 방법으로 교육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제56과 예수님처럼 자라자 (눅 2:52)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전체 주일학교 졸업식을 맞이하여 예수님처럼 성장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환경에서 사셨습니다.

1)우선 나라 없는 식민지의 백성으로 사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전 600년 경에 바벨론에 망한 후 예수님 시대까지 다른 나라의 통치를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어려움은 일제 36년간의 통치를 받아본 사람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2)예수님은 그 외에도 비천한 백성으로 사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란 사실과 또 섬기는 종의 입장으로(마 20:28, 막 10:45) 사신 것입니다.

3)그 중에도 예수님은 실세자(바리새인)들의 핍박을 받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인생이 잘 살고 못 사는데 있어서 환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잘 산다”는 표준이 현실적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정의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죄없이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또 이웃 사랑을 위하여 산다면 환경에 상관없이 잘 산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배움이란 잘 사는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 세상을 가장 잘 사신 분은 예수님이신 만큼 예수님처럼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키가 자라셨다”고 하셨습니다.

1)“예수님의 키가 자랐다”는 뜻은 건강하게 성장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여러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을 제일 원하십니다.

2)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자랄 것인가?를 연구해 본 일이 있습니까? ① 질병과 불행이 죄에서 오니까 일단 죄를 멀리 하면서 회개하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계”로 질병을 주시는 수가 있고,(약 5:15) “죄사함과 병고침”이 같은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6) 그러나 예수님은 “질병으로 편찮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이렇게 건강의 첫째 비결은 “죄사함의 은혜”에 있습니다. ② 영혼이 잘 되어 믿음이 좋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혹 바울사도처럼 믿음이 좋아도 육체의 가시 같은 질병을 가지신 일이 있고, 혹 욥처럼 믿음이 좋아도 질병을 가진 사례가 있으나 이것은 특수한 실례이고, 대체적으로 믿음이 좋고 영혼이 잘 되면 요3서 2절 말씀의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신 말씀”에 따라 믿음이 좋으면 육신 건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자는 자기의 육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여지기 위하여 하나님께 맡기고 헌신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③ 건강 비결은 물리적인 노력입니다. ㉠ 정신적 평안, ㉡ 규칙적 생활, ㉢ 적당한 운동, ㉣ 영양 공급, ㉤ 휴식, ㉥ 조기 치료 등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신앙적 지혜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꼭같은 인간처럼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자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지혜가 예수님처럼 자랄 것입니까?

1)믿음으로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혜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믿음과 기도로 받습니다.(행 6:3, 약 1:5) 이 지혜의 값은 물질로 계산되지 않는 영원의 가치인 것입니다. 이 지혜로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영생을 힘입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2)지혜는 배우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배워서 남주지 않습니다. 배운 지식은 먼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까 성경은 물론 세상의 모든 학문을 많이 배울수록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3)지혜는 고난으로 연단을 받을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나 어느 시대나 평안하면 발전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넘칠 때 발전도 생기고 연단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학생들은 꾸준한 배움과 고난당하는 경험을 귀한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어떤 학자가 산아제한을 반대한 일이 있는데 그 이유인즉 2차 대전 후에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팽창되었고, 생활난으로 어려움 당했던 그 시대에 “인간의 두뇌 발달이 가장 컸다”는 통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많아지고 살기가 어려워지면 그 가운데서 창조적인 발전이 모색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고난과 경험이 지혜를 일깨워준다”는 좋은 예화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배움과 고난적 경험이 지혜 얻는 방법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셨습니다. 우리 청소년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셔야 합니다.

1)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려면 ① 하나님께로부터 낳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는 중생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신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백성,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니까 거듭남으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얻어야 하고, ② 순종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이요, ③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먼 친척이 이웃 사촌 만큼 가까울 수 없는 것은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이라도 부모를 만나지 않으면 정이 멀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늘 하나님을 가까이 교제하여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마지막으로 사람 앞에 사랑 받는 사람이 되시려면 ① 진실하여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시간도 잘 지키고 자신의 약점도 숨기지 않으며 약속을 지키고, 사실대로 사는 것입니다. 한번 속고 두 번 속으면 누가 그 사람과 거래를 하며 좋아하겠습니까? 따라서 진실하여야만 사람의 신용과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②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 알아달라, 왜 나를 외면하느냐, 내가 해야 된다, 내가 했다”는 식으로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남에게 덕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하물며 사람이 교만한 자를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③ 사람의 사랑은 근실하고 봉사적인 태도를 취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나태하거나 꾀를 부리거나 봉사성이 없고 이기주의만 있으면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사람은 사람의 사랑을 먼저 받을 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우애를 할 줄 알고, 효도할 줄 아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처럼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7과 어린이에 대한 사명 (막 10:13-16) 목록으로


5월 5일은 세상에서 지키는 어린이 날이고, 5월 첫주일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린이 주일이요, 많은 교회가 5월달을 가정의 달이라 하여 가정 중심의 기도와 교훈을 많이 강조합니다 본래 어린이 주일은 미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의 메사추세츠주 첼시시의 제일유니버살 감리교회에서 “찰스레오날드” 목사가 “어린이의 신앙과 헌신”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그것이 전국 교회에 퍼져서 1866년에 감리교회 총회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정하여 어린이 중심의 기독교적 교훈을 강조하고, 어린이 보호 육성에 주력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1. 그러면 성경은 어린이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1)“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 막 8:36) 하시므로 생명의 귀중함을 말씀하셨고,

2)시 127:3에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며 또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창 33:5) 소중한 존재란 뜻입니다. 요즈음 “무자식이 상팔자”란 속담도 있지만 성도는 성경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린 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 하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을 좋아하신 것입니다. 마 21:16에서도 성전에서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송을 하였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온전케 하셨다” 하시므로 역시 어린이들의 접근과 찬미를 즐거워하시며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또 본문 말씀만 보시더라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전도의 일정이 바쁘셨으나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달라”고 하였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 행사에 지장이 있는 일로 생각하여 꾸짖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분히 여기시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분을 잘 안 내시는 분이십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하는 가룟유다나 제사장들 앞에서도 분을 안 내셨습니다.(다만 성전에서 비둘기 파는 것을 보셨을 때 한 번 분을 내셨음.) 그런데 어린아이들 제지하는 것을 보시고 분을 내신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소란을 떤다고 “목사님 왜 단속을 안 합니까?”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만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여 잘 참으시고 적응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4)또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천국을 어린 아이 받들 듯 받들라” 하시므로 어린이들에게 천국 백성의 기질이 많은 것곽 어린 아이들을 천국처럼 받들어 키워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천국 백성들은 어린 아이처럼 순결하고 진실하여야 합니다. “순결과 진실”은 어린 아이들이 많이 가진 천국인의 기질이요, 예수님이 그것을 가장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의 순결한 기질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신다면 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5)부모가 어린아이를 자발적으로 잘 받드는 것처럼 천국 생활도 그렇게 받든다면 믿음 생활을 더 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6)예수님께서는 마 18:10에서 “삼가 소자 하나라도 없수히 여기지 말라 저희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하시므로 어린이를 실족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7)막 9:37에서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를 예수님 영접하듯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 받아야 할 어린이가 다 미국의 홀트 양자 기관을 통하여 수출되는 실정이 아닙니까? 성도가 성경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예수님 영접함인 줄로 알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영접한다면 기독교인이 많은 나라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저희들의 신앙 생활은 그늘이 많고 헛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어린 아이들에 대한 인식을 많이 고쳐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거나 생활의 안일주의에 빠지면 어린이를 경시하게 되지만 성경 말씀에 깊이 들어가면 그 인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18세기는 민중 발견의 세기요,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한 세기이며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하였듯이 이번 기회에 저희들은 어린이의 소중함을 더 발견하여야 하겠습니다.

1)어린이는 기쁨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상급”이라 하셨고, 또 예수님도 어린아이를 기뻐하여 영접하셨기 때문이요,

2)보호, 육성의 대상이니(마 18:10) 이는 예수님이 어린이를 안아주시고 안수해 주셨으며 어린 아이 보호를 위한 천사를 파송하셨고, 어린 아이 경시하는 것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3)어린이를 기업의 대상으로 소망하셔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장차 부모를 부양할 기업이고, 또 축복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자식보다 돈을 의지하려는 부모도 계시지만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4)어린이는 구원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어린이에게 천국 백성 되는 소재가 많다는 것이요,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받들고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5)그리고 어린이가 받는 보호와 축복을 어른들이 나누어 받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른이 잘 하여 아이가 복받는 줄로 알지 마시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순결한 아이들을 위하여 주신 복을 어른이 함께 복을 나누어 받는 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시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6)가정에서 식구들이 싸우면 어린아이가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잘 아는 김일상 목사님은 아이가 아플 때 부부가 성전에 나가서 “회개하고 병고친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런 일은 저 자신도 수없이 체험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는 그 가정의 축복이나 징계 문제와도 크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키우시는 부모님들은 어린이에 대한 몇 가지 사명을 가지셔야 하는데

1)어린이나 자녀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실 것과

2)어린이가 복받을 대상으로써 어른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아셔서 귀히 여기시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셔야 할 것이요,

3)어린이를 실족시키지 않도록(마 18:6) 힘쓰실 것이며

4)어린이의 생명도 천국 생명의 하나로 차별없이 계산된다는 것을 아셔서 영원한 구원의 백성으로 취급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셔야 하며

5)어린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마음을 크게 넓히시고,

6)어린아이의 기질과 순결 속에 천국 성도의 자질이 풍부하게 담긴 것을 발견하여 늘 본받고 순진하게 사셔야 할 것이며

7)장차 봉사의 역군이며 기업의 계승자임을 잊지 마실 것이요,

8)양육과(엡 6:4, 사 49:15) 훈계의 책임(엡 6:4, 신 4:10, 6:7, 11:19)을 각별히 다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녀 가진 부모의 책임이 참으로 큽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책임 소홀로 자녀의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한다면 그 민망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제58과 자녀에 대한 신앙 (시 127:3) 목록으로


“자녀에 대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자녀는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선물인줄 아셔야 합니다.

1)자녀 생산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잉태의 힘,(힘 11:11, 룻 4:13) 모태에서 조성함,(사 44:2) 또 “은혜로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창 33:5) 하나님은 태를 닫기도 하시고(삼하 6:2) 열기도 하십니다.(왕하 4:16) 따라서 생산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2)하나님이 자녀를 은혜와 복으로 주실 때 상급 또는 기업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창 33:5, 시 127:3) 상급이란 충성의 대가이고, 기업은 노년기에 부양할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기업이 되고 상급이 되는 것은 양육 과정에서 특별한 은혜와 교육이 더 필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자녀들이 행복을 뺏어가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자녀는 양육과 교육의 대상으로 주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 22:6) 자녀를 생산만 하고 양육하지 못한다면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상당한 교육을 감당하셔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자녀를 양육할 때 유의할 점이 많습니다.

1)은혜를 감사하되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됩니다. 자칫하면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인간이나 물질이나 어떤 상태를 우상시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섭리가 있습니다.(사 3:1)

2)태중에서부터의 교육(태교)이 중요함을 믿으셔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의 은혜를 힘입었다”고 하였습니다.(눅 1:15) 이런 교육을 태교라고 하지요. 태교와 유아 교육은 유태인들이 가장 잘 한다고 합니다.

3)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하셔야 합니다.(잠 22:6) ① 신 6:4-9에 보시면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도록 부지런히 언제나 힘써서 가르치라”하셨고, 신 30:19에서는 “너와 네 자손이 잘 되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 하셨으며 딤후 3:14에서는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②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잠 22:6에서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래야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아이 때에 배워진 지식과 마음의 인상이 늙도록 그 자신을 지배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릴 때의 교육과 연단이 교육적 가치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부모가 교육시킬 수 있는 시기는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1학년 이전 뿐입니다. 자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춘기에 이르면서 여지없이 세속의 물결에 자기를 던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 자기를 바르게 통솔하는 지혜와 능력을 교육으로 다져놓아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친 부모들은 대부분 지난 일을 후회할 것입니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이미 부모의 관심 밖에서 살기 때문에 그때에 부모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자녀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년기에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신앙적, 도덕적 심리의 바탕을 다져놓아야 합니다. ③ 교육의 방법으로는 기도와 성경과 생활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하십시요.(사 45:11) 그리고 신 6:4-9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십시오. 그 다음에 신앙 생활, 교회 생활, 봉사 생활, 사랑 실천 등에 대하여 모범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인생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게 사는 가치관을 마음 속 깊이 심어주어야 합니다. 가치관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공덕이 자녀에게 수천대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출 20:26) 부모가 방탕하며 모범을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담처럼 성공하는 자녀가 혹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감화가 있는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어린 자녀들이 어른에 비할 때 더 순결하므로 예수님이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 하셨은즉(마 18:34) 하나님이 어린이에게 복을 더 주신다고 믿으셔야 하며 따라서 어린이를 복받는 선물로 귀하게 양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신앙 ① 복주신 선물이요, ② 복받을 자격자이며 ③ 축복의 계승자이고,(시 100:5) ④ 양육 및 교육의 책임 대상이며 ⑤ 상급과 기업이 되는 대상이란 점을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제59과 어린이 교육 과제 (잠 22:6) 목록으로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마땅히 행할 것”은 교육의 과제요, “아이에게”란 교육의 대상이며 “가르침”은 교육의 방법이고, “늙어도 떠나지 않음”은 교육의 효력과 결과입니다.

1. 이 시대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육의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 교육이 아닌 신앙 교육과 도덕 교육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신앙 교육의 책임자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교육은 교회에서도 가르치지만 부모가 더 많이 가르쳐야 합니다. 신 6:1-2에 보시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고, 신 6:5-8에서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다닐 때나 언제든지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강론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신앙 교육을 교회에만 맡기지 마시고 부모가 직접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은 성경을 가르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실제적 생활은 가정에서라야만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부모에게 책임지워 주셨습니다.(신 6:5-8)

2)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효도인 것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시 127:3) 하셨고, 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율을 주셨는데도(5계명, 출 20:12) 부모를 책임지고 모시려는 자녀들이 많지 않고 부모들도 자녀들보다 돈을 의지하여 살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의 사명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명만큼 가르쳐야 하고,(마 15:5-6) 또 효도하는 모범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3)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교육의 과제인 것입니다. 학문만 배우고 효도를 못 배운 사람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때 실망이 큰 것처럼 모든 기술을 다 배운 사람이라도 이웃 사랑을 못 배우면 좋은 사회 건설에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두뇌를 갖고 어학과 법률을 배웠으나 그 어학은 외국인을 상대한 범죄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법률 지식은 죄를 피하는 방책에 이용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법을 전공하여 판검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1억을 줄터이니 사위가 되어달라”고 하자 1억도 탐이 났지만 1억을 주는 사람의 딸도 훌륭한 여성이므로 마음에 끌려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결혼하기 이전부터 교제한 여인이 있어서 그 여인과 결혼을 하여야 할 책임을 망각하고, 1억을 받는 바람에 그 신의와 책임을 팽개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고소를 당하였는데 판사들이 그 사건을 볼 때 “공의로운 재판관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정당한 책임을 이행 못하고 1억에 인정을 버리고 질서를 위반하였으므로 그에게 벌을 주어 판검사 노릇을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술과 능력이 많아도 이웃 사랑은 그 보다 더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 효도하는 법,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 후에 학문과 기술을 가르쳐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은 성경교육과 생활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성경 가르칠 자격이 부족한 줄 압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부모가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하고, 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생활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2. 교육의 대상은 어린 자녀들입니다. 성숙한 다음에는 스스로 배울 수도 있겠지만 굵은 나무를 굽히기 어려운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태중에서부터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신부는 항상 좋은 마음과 좋은 음식, 좋은 말과 좋은 생활로 태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출생하면 식욕 본능에 따라 젖먹는 방법을 익히고,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귀로 듣고 냄새 맡는 감각까지 예민하게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옛말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바로 “아이에게 가르친 것이면 늙어도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초기 교육이 그만큼 인상적이고 효과적이란 것입니다.

3. 가르침의 방법이 중요합니다.

1)가르치는 방법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모범을 보였는데도 잘 안 되었다면 부모는 교육의 책임을 다 하였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2)그리고 배움의 과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부터 시행하는 습관을 키워주어야 하고, 잘못된 유혹을 피함은 물론 생산성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며

3)아침에 일어나면 묵상과 성경 읽는 일,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일, 음식을 조절하고 건강을 위하여 운동하는 일, 자기 일과에 충실하는 일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4)특히 중학교 이상 청년들은 퇴폐 풍조에 유혹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 대하여 사회적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교육의 힘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따라서 지혜와 총명이 일찍 생겨져서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경계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5)가르치는 교사는 일단 지식 소재와 생활 모범과 가르침의 기술이 있어야 하고, 한 생명, 한 어린이라도 귀하고 희망있게 여겨서 성실을 다할 때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화초를 가꾸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4. 어릴 때의 교육이 “늙어도 떠나지 않는다” 하심은 그만큼 인상적이어서 그의 마음과 미래의 생활을 좌우한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자녀들이나 어린이들의 조기 교육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6부 가정과 효도와 결혼에 대한 설교

제60과 좋은 집을 짓자 (마 7:24-27, 신 28: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좋은 집을 짓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7절에 보시면 “좋은 집은 비바람이나 창수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이라”하셨고, 25절에서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기초를 반석위에 놓았기 때문이라”하셨으며 또 24절에서 “기초를 반석위에 놓았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의미하므로 결국 이 집은 진리를 실천하는 자의 신앙의 집을 뜻한 것이었습니다.

1. 성경은 이렇게 “신앙의 집”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여기 저기를 살펴보면 신앙의 집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1)우선 성도 자신이 신앙의 집입니다. 신앙의 집이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격체(성도) 또는 그 단체를 의미합니다. 인격체는 개인 성도를 말하고 인격체의 단체는 교회를 의미하거나 성도의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① 우선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에 계시고 성도와 함께 계시다”하셨으니 성도 자신이 신앙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계신다”(창 28:15, 마 28:20), “그리스도가 성도의 마음에 계시다”(엡 3:17),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에 심겨진다”(약 1:21), “성령님이 성도의 속에 계시고(요 14:17) 또 성도의 몸을 성령님의 전으로 삼고 계시다”(고전 6:19)하시므로 성도 자신을 “신앙의 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② 이 신앙의 집이 좋은 집이 되려면 성도 자신이 말씀 위에 굳게 서고 항상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주님과 동거하므로 인정을 받는 입장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2)교회도 신앙의 집입니다. 성도 자신이 신앙의 집이면 성도의 단체도 역시 신앙의 집입니다. 저희들은 이 집(교회)도 좋은 집이 되도록 지어야 할 것입니다. 딤전 3:15에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집에 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지어지게 하신다(엡 2:22)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 자신의 마음에 주님이 계실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거주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뜻에 맞는 깨끗한 교회를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수 있는 신앙의 집(교회)은 오직 진리 위에 바로 서고 사랑 실천을 잘 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다.

3)천국의 집도 있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신앙의 집입니다. 요 14:2에서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지요. 그 곳에는 거룩한 성도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4)중요한 집은 가정의 집입니다. 이 가정의 집은 천국 다음 가는 성도의 안식처로서 부부 생활의 축복과 함께 인류 최초부터 주신 인간의 보금자리입니다. 신 28:1-6에서 말씀한 복은 다 가정에 관한 복을 말씀하신 것인데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어디에서 살든지 어디로 이동하든지 장소에 관계없이 복을 주시되 소생의 복과 산업의 복과 광주리의 복과 떡반죽 그릇의 복을 주신다”하셨고, 또 시 127:1-5에서도 “가정의 복”을 말씀하셨지요. 거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집을 세워 주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하셨고, 또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인간의 노력과 근면도 헛되어진다”(2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집을 세워주실 때는 “잠을 자도 복되게 하시고 자식을 잘 되게 하여 기업이 되게 하시며 어떤 역경에서도 수치(실패)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가정의 집이 잘 되는 복과 그 방법을 다시 한 번 상고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① 하나님이 가정의 집을 잘 되게 하실 때 ㉠ “거주지의 바람을 타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지역에 가서 살든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람으로 갔으나 성공하였고 요셉이 애굽에 가서 살았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버렸을 때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어도 멸망됐지요. ㉡ 소생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육으로 자녀를 성공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외국으로 보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후천적 교육보다 선천적 축복이 더 귀하다”는 사실은 속담에도 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데는 교육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 산업의 복입니다.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가 복받는다”는 말씀이 곧 산업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고 흑암 중의 보화를 발견하여 취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신 8:18, 잠 8:21) 또 농사나 소산에도 복을 주시니까(창 26:12, 신 33:24) 산업의 흥망 성쇠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좋은 가정의 집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광주리에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광주리는 소산을 거두어 모으는 그릇이기 때문에 저축의 은혜를 뜻합니다. 잠 8:21에 보시면 “나의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신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저축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인가?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다 인정하셨고(행 10:2) 부자의 재물이 신앙적으로 쓰여질 때 오히려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눅 19:8,9) 또 성도가 원시적 생활을 할 때는 하루 쓸 것으로 족하지만 문화 생활이 들어오면서 쓸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의 학비같은 것을 미리 예비해 놓아야 유익합니다. 이런 은혜가 곧 광주리의 복입니다. 비상적 은혜를 체험할 수도 있겠지만 근검 절약하여 저축하고 예비하면 생활의 질서를 더 잘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는 뜻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복입니다. 저는 옛날에 양식없는 고충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나 저의 어머니는 “양식 떨어지지 않는 은혜”를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또 양식(음식)을 잘 먹어 없애는 건강과 입맛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먹는대로 건강에 도움을 주는 은혜입니다. 다니엘은 채식을 먹었어도 육식먹은 자들보다 건강이 좋았고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너무 잘 먹어서 당뇨병이나 비만에 걸리는 경우가 있지요. 이런 경우에 떡반죽 그릇에 복을 주시면 맛있게 먹고 건강에만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 목회에서 사임하고 나왔을 때 특별히 대접받을 기회가 없어져서 늘 집에서 먹는대로 식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 입맛을 주셔서 비싼 음식이 아니라도 잘 먹었고, 또 자주 먹었던 보신탕을 1년 가까이 먹지 않았는데도 그 음식에 대한 생각조차 안하고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떡반죽 그릇에 복을 주시면 이렇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고 또 반대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는 몇 시간 내에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들의 모임에 간 즉 젊은 목사 한 분이 기도로 다이어트를 성공하여 체중을 4㎏이나 줄일 수 있었다는 간증 하는 것을 듣고 이것도 떡반죽 그릇의 복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체중 줄일 목적으로 기도하였더니 강한 식욕이 떨어져서 식사를 적게 하게 되므로 그 목적을 성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는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한남 교회를 사임할 때 교인 분리의 우려가 있어서 장로님들이 저로 하여금 성남을 떠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를 “교인 갈라 낼 목사로 의심”한 것입니다. 이때 저는 장로님들의 요청의 부당성이나 교회 이기주의 또는 제게 대한 의심 등에 대하여 변명하려 하지 않았고 “들어가도 복받고 나가도 복받는다”는 본문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개척은 성남에서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끝냈습니다. 지금 만 3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고 있습니다. ㉦ 또 가정의 복은 자녀 번성으로 성취됩니다. 시 127:4,5에 보시면 “젊은 자의 자식을 화살에 비유하셨고 그것이 전통에 가득할 때 더욱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반드시 이 말씀을 믿음으로 시행하셔야 할 것입니다.(창 1:28) ② 그러면 마지막으로 가정이란 좋은 집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을까요? ㉠ 계명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신 28:1-2) 이 순종은 온 가족이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온 가족이 다 앞장서서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독신문에서(98.8.19) 박용묵 목사님의 7남매가 다함께 아버지의 신앙과 교육과 사랑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적 생활과 사명에 임하는 것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 가족이 주 예수님을 모신 생활 속에서 주님과 친교(말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 예배를 통한 기도와 성경 교육은 여러모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부부는 물론 어른들과 어린이들 사이에 합심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 사랑과 인내로서 가정의 집을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인내가 없으면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가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의 집이 잘 지어져 있습니까? 또 저희들이 몸담아 살아가는 교회의 집도 진리와 사랑과 순결로 잘 지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마음의 집과 교회의 집이 중요한 중에 또 가정의 집을 잘 짓도록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행하지 않는 자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같아서 비바람과 창수가 있을 때 견디지 못하지만 실천이 따르는 믿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어떤 일에도 동요됨이 없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3) 아무쪼록 마음의 집, 교회의 집, 가정의 집을 잘 지으시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61과 고부간의 행복 (룻 1:15-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정의 행복과 관련이 있는 말씀으로 “고부간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룻기는 4장의 짧은 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아실 것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한 가정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그 가정의 남자는 다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부간의 생활 역사만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고부간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메시야의 조상의 계열이 어떻게 이어졌는가?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면도 있는 것입니다.

1. 이 가정의 역사를 말씀드리면 유대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부부가족이 말론과 길룐 두 아들을 데리고 살던 중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이방지역인 모압땅으로 갔는데 그 곳에 가자 남편이 먼저 죽었고, 두 아들로 하여금 이방여인인 모압의 딸들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큰 자부는 “오르바”요, 둘째 자부는 “룻”인데 그들이 자녀 생산도 하기 전에 두 아들이 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 고부만 남았는데 시모인 나오미는 이렇게 된 일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깨닫습니다.(1:13) 즉 약속의 땅과 선민의 세계를 떠나 이방땅에 오고 또 이방인 자부들을 맞이한 잘못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젊은 과부 두 자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큰 자부는 자기 일신의 유익을 위하여 시모를 떠나 친가로 돌아갔지만 둘째 자부 “롯”은 시모에 대한 효심 때문에 기어코 시모를 떠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두 고부가 유대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살 길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룻기는 “나오미와 룻”이란 고부의 생활 역사로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2. 오늘날 한국의 가정 형편은 대부분 고부간의 갈등으로 불편을 느낀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자기의 딸처럼 생각하지 않거나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배타적으로 상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혹 이런 형편이 있는 성도는 나오미와 룻과의 관계를 더 많이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은 물질의 풍부나 다양한 인간조건에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남자와 자녀와 물질이 없는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행복이 창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그러면 먼저 시모의 며느리에 대한 미덕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시어머니는 신앙의 사람이요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② 다시 말하면 며느리가 복이 없어서 자기 집안이 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적 처신이 잘못되어 며느리를 고생시킨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1:13, 2:21) 악한 시어머니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두 아들이 다 죽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반대였습니다. ③ 그래서 며느리를 자기 집안에서 더 고생을 시켜서는 안되겠기에 그들의 행복한 길을 열어 주는 방법으로 친가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 그대로입니다. ④ 그 다음 자기를 따라 유대땅에 온 룻과 함께 살면서 며느리의 행복을 위하여 염려하던 차 근족 보아스에게 중매를 하여 남편을 얻게 하고 ⑤ 거기에서 낳은 자녀를 자기의 친손자처럼 양육하는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낳은 손자가 “오벳”인데 이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으므로 결국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그 집안이 메시야 계열의 맥을 잊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나오미는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더니 결국은 그 며느리의 덕을 보게 된 것입니다.

2)룻은 또 어떻게 효도를 하였습니까? 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시어머니를 따를 때 자기 일신상의 영화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을 꿈꾸었다면 큰동서처럼 친가로 가서 다른 곳에 시집을 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위하여 자기 나라, 자기 백성, 자기 고향, 자기의 종교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른 것입니다. 죽는 일 외에는 시모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시어머니의 나라로 시어머니의 종교로 시어머니의 유숙처로 따라 갔으니 그 효도의 정신과 정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시어머니와 자기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을 졌습니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이삭을 주어 자기 집에 곡식을 쌓아 놓고 시모를 봉양한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효부대상 받을 일을 한 것입니다. ③ 시어머니의 뜻에 순종을 잘 하였습니다. 그 순종이란 집안의 기업을 이을 자와 결혼하도록 하는 일에 따른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 비할 때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2:5) 그러나 그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 룻의 순종인 것입니다. ④ 그리고 자기의 낳은 아기를 시모로 하여금 양육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시모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시모의 취미를 갖게 한 일입니다. 요즈음 까다로운 어머니는 자기의 아이를 시모에게 맡기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어떤 시모는 손자를 보고 싶어도 며느리가 아이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가는 바람에 섭섭하더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부가 뜻이 맞고 자부가 시모에게 효도를 잘 하니까 초라한 형편으로 고향에 왔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오자 마자 인심을 얻게 하시고(1:19) 물질의 혜택을 받게 하시며(2:8-9,16) 좋은 남편을 주시고 좋은 아들을 주셔서 메시야의 계열에 동참하는 은혜까지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제62과 행복한 가정 (마 12:46-50)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 하여 “행복한 가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전도하실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 왔었습니다. 이 때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가서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께 말하려고 밖에 섰다”고 하였더니 예수님이 그 말한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으로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나의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일깨워 주시는 내용들은

1)예수님에게도 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 13:55에 보시면 예수님의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남편 요셉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2)그 동생들이 복음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때에 그 동생들이 찾아 온 것은 예수님을 협력하려는 의미로 찾아 온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동생들을 형제로 영접하시지 않고 손길을 제자들 쪽으로 돌리시면서 “나의 모친(믿음의 여성들)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동생들이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믿고 훌륭한 사역자가 된 “야고보”가 있었습니다.(갈 1:19)

3)예수님은 남이라도 믿는 자를 형제와 가족으로 생각하셨고 또 한 집 식구라도 믿음을 갖지 않았을 때는 형제와 가족적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셨으며

4)이 말씀에서 성도는 한 가족과 같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가정의 유래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1)본래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한 할아버지와 한 할머니로 시작되게 하시므로 인류의 시작은 생산성 있는 가정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의 결합이 가정의 중심이고 그 이외의 부모나 형제는 가정의 부수적인 협력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만 같이 살거나 부모 중 한 분이 안 계실 때는 가정의 진정한 의미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한 집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것도 넓은 의미로 볼 때는 가정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이유는 ①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관은 가정입니다. ②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셨습니다. 가정은 먹고 마시는 곳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가정은 후손을 생산하여 생육 번성시키며 땅을 정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창 1:28)

3)가족이 있을 바에는 여러 식구가 많이 함께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조화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핵가족 제도가 생기면서 노인 따로 부부 따로 아이들 세계 따로 사는 것은 교육상으로도 퍽 안 좋은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일반 생활과 어떤 행사(예배나 친목)에 꼭 합류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일까요?

1)온 집 식구가 다 믿음 생활을 잘 하여야 합니다. 한 집 식구 중에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간다면 그 얼마나 안된 일입니까?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가족 누구는 붕괴된 속에 갇혀 있고 누구는 살아 있는 상태에 있는 형편을 연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2)모든 가족들이 다 하나님 뜻대로 잘 살아 주어야 합니다.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도 믿음있는 사람의 상태와 믿음 약한 상태의 사람의 생활 방식, 목표, 소망이 다 다릅니다. 이럴 때에 가족이 다 은혜받은 형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가정은 다 믿는 가족이지만 형제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3)가족이 다 자기 책임을 성실히 하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 어머니는 어머니의 책임, 아이들은 아이들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연탄가는 책임을 지고 시행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책임을 소홀히 하면 그 가정은 생활의 질서를 잃게 되고 혹 가족 한 사람이 책임에 반대되는 방탕을 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들 책임은 공부하는 것이니까 그것도 잘 지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가정에 어려운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정에 병자나 사업의 어떤 실패가 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만 방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121:7-8)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여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종합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가정예배입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가정 행복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가정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제63과 협동의 은혜 (전 4:9-12) 목록으로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맞이하여 “협동의 은혜”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지혜자 솔로몬은 협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결혼은 곧 부부의 협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

1)“두 사람이 협동을 잘하여 수고하면 좋은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9절)

2)한 사람이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로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붙들어 주고 일으켜 줌으로 넘어짐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협동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협동에는 힘이 소생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할 것이요 삼겹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하심은 협동의 분량이 커질수록 힘이 더하여짐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2. 그렇다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서 어떤 협동이 필요합니까?

1)생각을 같이하는 협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 2:2에 보시면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어 겸손과 존경을 서로 앞세우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부부가 아닌 사람들끼리에서 해당이 되는 것이고, 부부 사이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강조된 것입니다.(엡 5:22, 골 3:18, 벧전 3:6)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여 협동을 잘 한다면 거기에서 더 좋은 이상적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며 섬기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할 때에 마음의 협동이 가장 잘 될 줄로 아는 것입니다.

2)신앙의 협동이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불화한 일이 있었거나 신앙의 협동이 잘 안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막힌다”고 하셨습니다.(벧전 3:7)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의 원만을 기하기 위하여 합심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같이 하고 성경공부를 같이 하며 믿음의 사상과 생활을 같이 하므로 협동하는 것입니다. 마 18:19에 보시면 “두 사람의 합심하는 기도가 성취력이 강하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조건이 부부간 일 것입니다.

3)생활의 협동을 잘 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서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돈을 벌어야 할 것이요, 부모와 어른들에 대한 예절을 지켜야 할 것이며 자녀들을 교육적으로 양육하여야 할 것이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로 항상 바쁘고 피곤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부부가 분담을 잘 하고 협동을 잘 할 때 더욱 행복한 가정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인은 인생의 대사요, 새 출발이며 또 두 인격의 연합입니다. 두 사람이 협동하여 하나의 좋은 예술품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의 협동과 신앙의 협동과 생활의 협동을 잘하여 행복하고 발전하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64과 복된 결혼 생활 (시 1:1-3) 목록으로


오늘 두 사람의 혼인 예식을 맞이하여 “복된 결혼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복된 결혼 생활이 되려면 몇 가지 여건이 조성되어야만 합니다.

1. 두 사람의 만남이 어느 정도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란 두 사람의 성격과 자라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100% 이상적이란 기대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몇 가지 공통점은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1)같은 신앙 안에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려고 애쓰는 신앙입니다.

2)삶의 같은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목적이란 서로 사랑하고 효도하며 이웃에 빛과 소금역할을 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3)삶의 방식에 협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란 일종의 취미입니다. 이 취미에 두 사람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 좋은 취미는 과감하게 근절하고 좋은 취미에 개성이 다를 때는 조화를 잘 시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TV를 보다가 “나는 이 프로그램을 저는 저 프로그램”을 보려고 할 때는 시간 조정을 하든지 아니면 한 대를 더 장만하여 서로의 만족을 차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조화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화의 방법에서 각자의 개성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되도록 서로 양보해서 두 사람이 같은 취미의 생활을 하여 서로 거리를 두지 않고 사는 방법이 더 훌륭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결론 생활이 복되려면 새출발과 연합을 잘 해야 합니다.

1)혼인은 인륜지사의 제일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새출발을 잘 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하다가 이제는 서로 비슷한 두 인격과 두 육체가 연합한 생활이기 때문에 상호 협력을 잘 하되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또 다른 가족들간에 친척들이나 이웃간에 조화가 잘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침묵할 때 침묵하고 인내할 때 인내하며 기다릴 때 기다리고, 줄 때 주는 생활을 잘 하여 조화와 연합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2)“그릇에 금이 가면 안 간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새출발을 잘 하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불화와 갈등과 말다툼의 기회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화합을 잘 하는 방법으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엡 5:22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하시므로 아내의 남편에 대한 절대 복종을 먼저 명하셨고,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을 잘 하면 남편은 자동적으로 그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3)결혼 생활은 예술하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힘이나 물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것이 아니라 지혜와 기술로 서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조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한 기술로 실수없이 임하는 것처럼 결혼 생활도 그와 같은 예술적 소질을 가지고 살아갈 때 더 큰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3. 복된 결혼 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본문 말씀에서 복있는 사람은 ①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을 고의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②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일이나 잘 살펴서 죄되고 덕 안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③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존재만을 최고로 내세우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불효보다 몇 배 더 악한 죄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죄나 부덕에 대하여 함께 따르지도 말고 서지도 말며 앉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④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율법,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임재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최고의 복입니다.(시 73:28)

2)이렇게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무릇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만남이 이상적이고 새출발과 연합을 잘 하며 하나님 앞에 복있는 자가 되시면 두 사람의 가정과 미래가 크게 행복하고 발전이 있을 것으로 믿어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65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 (마 19:4-6) 목록으로


이 시간 OOO군과 OOO양과의 혼인 예식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혼인의 당사자인 신랑, 신부는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꼭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1. 4절에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1)사람을 지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으니까 ① 하나님은 사람의 주이시고 ②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③ 또 하나님이 목적을 두시고 사람을 지으셨으니까 인생의 삶의 목적도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④ 모든 인생은 물론 만물과 오늘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목적도 하나님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⑤ 그러면 피조물된 인생의 하나님께 대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전 10:31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사는 목적, 결혼의 목적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이 본래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1)이것은 인류의 시작이 부부로부터 출발한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고

2)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족하며 이러한 1남 1녀의 결합이 창조의 원리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가정 생활을 하다가 한 남자, 한 여자의 결합이 깨지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순리를 깨는 것이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요, 그 불행해지는 대표적 실예가 “경건한 자손을 얻지 못한다”고 말 2:15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3)일반 사회에서 많은 남녀가 부부관계의 순리를 깨기 때문에 후손들의 시대가 점점 경건에서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6절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하셨습니다.

1)두 사람의 만남은 하나님이 짝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털이 희고 검는 것까지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5:36) 표면적으로는 사람이 중매도 하고 연애도 하지만 혼인이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는 것입니다.

2)그러면 하나님이 짝을 지우실 때 어떤 원리를 적용하실까요? ① 신앙의 통일성이고 ② 사랑의 일치성이며 ③ 당사자들과 가족들의 합일성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가 부합되면 이 혼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3)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하나님의 뜻(천생연분)이라고 믿을 때 자신의 분신을 다시 찾은 듯한 반가운 마음과 확고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4. 5절 말씀에서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여기의 “부모를 떠난다”는 뜻은 사랑과 인정으로 부모와 유착되었던 생활을 부부간의 생활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은 2촌이지만 부부지간은 무촌이기 때문에 한 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여기에서 “한 몸이 된다”는 뜻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연합을 잘 하면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연합의 줄은 사랑입니다. 연합을 잘 하려면 ① 삶의 목적과 방법이 일치하여야 합니다. ② 그리고 자기의 책임과 봉사를 선호하여야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다음에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문화인일수록 부부간의 연합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1)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주어졌으니 읽어서 잘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본래 성경 말씀은 글로 주셨습니다.(골 4:16, 계 1:3)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받고 깨닫는 지성인적인 신앙생활을 잘 하기 바랍니다. 행복을 붙잡으러 다니지 말고 찾아오도록 하여야 합니다. 신 28:6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받고 나가도 복받는다”하셨고, 엡 6:3에서는 “부모 공경을 잘 할 때 자신들이 잘 되고 장수한다”고 하였으며 눅 6:38에서 “이웃을 사랑하여 주는 것을 잘 할 때 하나님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부모 사랑, 서로 사랑, 이웃 사랑이 바로 행복해지는 비결이요, 복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의미있고 보람있는 인생의 새출발이 되고 발전과 영광의 결실을 맺는 좋은 가정이 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으로 교훈한 것입니다.

 

제66과 사명자의 가정 (벧전 3:1-7) 목록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며 복되게 사는 사명자의 가정이 되기를 바라서 몇 말씀드립니다.

1. 결혼생활이 복되려면

1)먼저 두 사람이 짝을 이룬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법률적으로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가족”이라고 믿을 때 큰 희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원칙을 전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 상태는 서로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언제나 하나요, 바로 자신이란 것을 전제할 때 영원한 계획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사랑으로 연합 성취를 잘 하여야 행복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두 인격과 두 이성과 두 지체가 연합하지 않으면 자주 모순이 발생하는데 이 모순은 서로의 특권과 행복을 뺏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일치시키는 노력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이기적 목적을 차리기 전에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4)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생활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가정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였고, 도덕적인 최고의 미덕으로 사랑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명자의 가정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1)사명자의 가정이기 때문에 사명을 앞세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① 가정의 행복과 발전은 나의 일이고, 복음적 사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②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일이 앞서고 자신의 일은 그 다음에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앞세울 것을 위하여 이차적인 취미와 특권을 포기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명자가 교회의 일을 맡으면 주택도 마음대로 못 갖고, 돈도 많이 축적을 못하게 되고 잠도 자유롭게 잘 수 없고 세상 살이에 대한 모든 자유가 통제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중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먼저 교인을 살펴 줄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 첫째이고, 자신의 문제는 그 다음이란 것을 사명으로 알고 실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2)사명자의 가정은 부부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처럼 아내가 남편의 지도에 잘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평범한 부부라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명자의 직분이 있고, 부인은 그 내조자이니까 더욱 그런 것입니다. 부인이 똑똑하여 일이 잘 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복종을 잘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기를 기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사명자의 가정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가족적인 화목도 그렇고, 모든 이웃과도 그렇습니다. 모든 이웃 중에는 덕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덕이 안 되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지 사랑과 협조의 자세만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의 대상은 무조건 선택이었고 일반적 사랑의 대상은 가장 어려움에 처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 베푸시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4)생활의 표준을 일반 사람들대로 따라가려 하면 안됩니다. 사는 방법을 일반 사람들대로 따라가려 하면 신령한 은혜에 균형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생활 방법이 신령한 은혜에 도움되게 하는 방법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과 생활 방법이 다르고 또 기독교인 중에 평신도와 교역자의 생활방법이 다른 것은 교역자에게는 영적 은혜의 확보라는 과제가 특별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5)사명자의 생활에는 신령한 은혜에 이끌리는 생활이 항상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과 기도에 끌리는 마음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멈춘다면 사명의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잘 실천하여 행복한 가정으로 발전하고 또 신령한 사명생활로도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67과 행복의 비결 (시 128:1-6) 목록으로


결혼은 현실에서의 최고 행복의 수단입니다. 신령한 은혜로 행복을 느끼는 것 다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네 가지 행복의 비결을 말씀드리면

1.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적 관계에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발전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행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2. 보람있게 수고하므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잘 놀았으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일을,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촌음을 아끼며 행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상적 가정생활로 느끼는 행복입니다. 부부생활의 이상적 결합과 가족들과의 이상적 교제로 느끼는 재미로움과 만족으로 가정을 지상천국처럼 느낄 수 있도록 다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어느 한 사람만의 왕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 등 모든이의 안식처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3절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4. 성도는 교회생활로 느끼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시온에서 복을 주시고.......예루살렘의 복을 본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을 점검해 보세요. 교회생활은 반드시 은혜롭고 사랑스럽고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말씀과 관계가 있고, 사랑은 언행과 관계가 있으며 자유는 대인관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인간을 의식하게 하는 교회는 부자유하고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자유에 속박을 받지 않는 교회생활로서의 행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68과 이상적인 가정 (시 128: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수고하는 것”과 “형통하는 복을 받는 일”과 “아내와 자식”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바로 그 도에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여기에 성실한 수고가 있을 때 하나님이 형통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통하는 복을 가정에 허락하시면 아내의 역할이 큰 실속을 차리게 되고 따라서 자녀들의 미래가 희망스러워 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상적인 가정”으로 형통하려면

1. 부부의 만남이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1)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일치되고

2)조화를 잘 이룩하며

3)근면한 생활을 하고

4)효도를 할 수 있을 때 이상적 가정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2. 가족 구성원이 이상적이어야 합니다. 부부가 자식과 부모를 동반하여야 이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젊은이들 중에는 두 부부가 사는 것만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꽃송이 하나를 꺾어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화원이 있고, 꽃나무가 있고 봉점이 있는 자연의 경치를 보는 것처럼 가정도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으며 어른(부모)이 있는 세계를 구성해야 이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상적 가족 구성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인 면으로나 정서적인 면으로 볼 때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 곳에 참신한 신앙이 있고 예절이 있으며 인생교육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상적으로 만나서 조화있는 가족을 구성하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각자의 책임에 근실할 때에 이상적 가정이 이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69과 결혼과 성경 (창 2:18, 22-24) 목록으로


이 시간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맞이하여 “결혼과 성경”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이 최초에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남자가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사 배필을 지어주셨다고 하셨습니다.(창 2:18) 여기에서 하나님은 2성지합을 원칙으로 여기셨고, 또 그 상태를 아름답게 보신 것이요, “돕는 배필”이란 뜻은 일방적 봉사만 하라는 뜻이 아니고 부부가 서로 돕게 하신 뜻이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가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하셨는데 이것은 부부일신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하신 것입니다.(창 2:21,24-25) 부부는 부모지간보다 더 가까운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므로 부부가 되게 하셨으니(창 2:22) 이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으로 성혼시켜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하셨습니다.

4. 바울사도께서 부부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엡 5:22-25, 골 3:18-19)

1)“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교훈의 모범자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미덕을 예로 들었습니다.(벧전 3:5-6) 사라는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고, 남편을 “주라 칭하며 복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 남편은 자기 몸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또 그것이 자기를 사랑함인줄 알라”(엡 5:25,28) 여기에 부언하여 베드로 사도는 남편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하여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5. 바울 사도께서는 또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인간이 혼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과 서로 돕는 일과 생육번성에도 목적이 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음행의 연고를 피하기 위함인즉(고전 7:1-5) 기도할 목적으로 부부가 합의하여 얼마 동안은 분방할 수는 있지만 그 외에는 서로 분방하지 말 것이요, 또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하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서로가 성적 의무를 다하라”는 교훈입니다. 바울 사도는 결혼을 안하였던 분인데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을 보면 성령님의 지도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성도가 혼인할 때는 “주 안에서만 할지라”고 하셨습니다.(고전 7:39) 이 말씀은 “믿음의 화합을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혼인을 할 때는 성도끼리 하여야 하고 양심상 상대방을 즐거워하여야 하며 또 효도의 차원에서 부모의 승낙을 받았을 때 그 혼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믿는척 한다면 결국 믿지 않는 태도가 드러나거나 성경의 지도를 거스릴 때 불행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오직 믿음안에서 진실한 결합을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은 하나님이 복주시는 방법으로 세워주신 법도인 만큼 주 안에서 혼인한 성도들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시행할 때 큰 행복과 발전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제70과 가정의 복 (엡 6:1-3) 목록으로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가정이 복받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믿음을 통하여 주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1)가족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2)가족이 다 믿을수록 좋으며 가족 중에 한 두 사람이 믿음에 합력해 주지 않을 때는 그것을 불평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기지 마시고 유익하도록 이용하는 지혜를 쓰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가족 누구는 나의 전도 대상이요, 기도대상이며 또 사랑과 봉사와 설득의 대상이고 또 나의 신앙생활을 지적할 수 있는 상전이요, 감독자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거기에도 보람과 희망이 있고(때가 되면 믿음에 합류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믿는 가족에게 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3)믿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방법이고, 또 믿음 행위가 좋아질 때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집을 세워주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고 하셨습니다. 가정에 평안이 깨지면 행복할 수 없겠지요. 이 평안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 14:27) 그러니까 늘 평안을 구하셔야 하고 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따라서 가정의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 또 이 은혜는 기도를 받는다는 것을 아셔서 기도를 힘쓰시되 제일 잘하는 방법은 아침 가족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일 하기 어려우면 일주간에 두 번만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다 모여 주지 않을 때는 모이는 사람만이라도 시행하고 두 사람이라도 시행하면 참 좋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하루의 생활을 가족 기도로 시작해 보세요. 생활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모든 복의 원천이 가족들의 신앙과 합심기도회를 통해서 주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고 쉬운 방법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2. 가족의 수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옛날에 “아비없이 자란 아이는 OO자식이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것은 가족 구성이 허술할 때 그만큼 교육적 취약점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부모없이 큰 아이에게 문제가 많다면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 큰 아이나 형제가 없이 큰 아이도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 많은 것은 교육으로나 공동체의 생활적응으로 볼 때 유익한 점이 있고, 또 효도나 봉사의 차원에서도 익이 있으며 경제 절약에도 유익이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다 무시하고 개인적 자유만을 위하여 단조롭게 사는 것은 이기주의 속성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와 같이 살지 않는 것을 복이나 낙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 상태에서는 성공이 있을 수 없고, 혹 현세적 성공을 하였다 하더라도 인생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결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가정은 지상 낙원으로서 최고의 안식처란 사실을 믿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집에 잘 안 들어오는 남편이 있거나 아이들이 있으면 분명히 그들은 가정보다 더 좋은 곳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좋은 곳이 정의로운 곳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의 취미도 가정에 있게 하고 청소년의 취미도 가정에 있도록 끌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밖에 나간 사람은 누구나 “빨리 집에 가야지”하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용돈을 갖고 밖에 나가서 쓰지 말고, 그 돈을 집에서 쓰면서 친구와 함께 집에서 놀아라”하는 식으로 끌어들여야 교육상으로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잘 안 들어오는 책임은 아내에게 있고, 아이들이 안 들어오는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하시고 자기 가정을 최고의 낙원, 안식처로 만들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4. 가정의 행복은 재정적 생활자립에 있음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어야 합니다. 벌기도 잘하고 쓰기도 잘하여 생활에 자립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정행복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궁색한데서 시험드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생활기반을 잡을 때까지는 최대한 절약하여 살고 경제적 자립궤도에 올랐을 때부터 소비를 늘려가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재정자립은 근면과 근검과 십일조 신앙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가족의 구성원들 간에 윤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가족은 네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간, 고부간입니다. 고부간도 부모 자식간이기는 하지만 옹서간 처럼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데려온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부부는 어떻게 하고 부모에게는 어떻게 하며 형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는 윤리 문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1)부부간에 대하여 - 부부는 인류 시작의 근원이고 가족의 구심적 존재입니다. 성경은 부부가 어떻게 할 것을 충분히 교훈해 주셨습니다. ①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존경하며 내조하고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내가 이 의무를 다 하지 않으면 가정을 거칠게 만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②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여겨 지혜롭게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시 128:3, 창 3:16, 엡 5:28, 벧전 3:7) ③ 그리고 “부부가 합력하여 서로 돕는 배필이 되고 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전 7:5) 그리고 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원칙을 이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마 19:6) 그렇게 되면 부부간의 행복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2)자식이 부모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땅히 효도하여야 하겠지요. 효도하는 방법으로서 ① 자식은 무조건 효도할 것이요 ② 효도가 자신을 잘되게 하는 방법인 줄로 알 것이요 ③ 부모와의 교제관계를 친근하게 가져야 할 것이요 ④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필요하면 설득하고 거역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할 일로 알 것이요 ⑤ 부모님의 뜻을 따르고 필요한 것을 공급할 것이요 ⑥ 이런 일을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사위가 처부모에게 먼전 솔선하고 친자식들은 거기에 따라가야 더 원만한 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형제간에 대하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우애하고 사랑하여야 하겠지요. 형제간에는 절대로 이기주의나 욕심을 피하고 서로 균형있게 살도록 도와주는 원칙을 이행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하는 형제에게는 꼭 도와줄 필요가 없고 또 성실하게 사는 형제가 가난하면서도 도움받기를 원치 않을 때는 안 도와주어도 되지만 그의 검소한 생활에 대하여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다”란 프로에서 전북의 어떤 형제는 동생이 뇌성마비된 형을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보조역을 담당하였는데 동생은 치과 의사가 되었고, 형은 “동생의 노고만큼 보답하는 역할에 힘쓰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때 동새은 “자기의 반평생을 형의 어려움과 나누어 산 삶이었다”하면서 그것을 보람있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제간에 욕심과 이기주의를 피하고 서로 도와주며 우애하는 윤리의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4)부모가 자식에게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야 하겠지요. 이 자식 사랑은 설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② 범사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③ 성경에서는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노여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④ 교육을 잘 시켜야 하는데 학교 교육은 돈으로 시키면 되지만 그 이외의 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건강을 지키게 하는 문제, 인내심, 사회적응, 자립심, 겸손, 근면, 예절, 봉사적 인물이 되게 하는 교육이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기주의적 교육을 삼가셔야 합니다.

5)고부간의 윤리의식입니다. 이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딸처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친정 어머니처럼 생각하도록 인식을 바꾸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또 며느리가 먼저 효도하듯이 시부모도 며느리를 더 사랑하면 좋을 것입니다. 혈연지간은 사랑의 정이 두껍지만 며느리나 사위는 혈연지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과 관심을 더 앞세워야 균형이 맞는다는 뜻입니다.

6. 마지막으로 가정의 행복은 각자의 책임에 대한 근실함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장은 가장의 책임, 주부는 주부의 책임, 학생은 공부하는 책임 등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과 주부의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서동걸 목사님의 어머님이 양반 가문 민씨의 후손인데 18세때 서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면서 5가지 결심을 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① 부부가 한몸처럼 뜻을 합하여 효도와 형제우애를 잘하고 화평한 가문을 이루어 종부의 대의를 지키며 ② 혼인을 귀히 여기고 자녀 생산을 잘하여 입신양명하도록 교육시킬 것과 ③ 수신제가와 예의 범절에 힘써 양반가문의 부덕을 나타낼 것과 ④ 특정종교를 신봉하고 구도에 힘쓸 것과 ⑤ 근검, 근면으로 재산을 윤택하게 하여 남에게 신세지는 일이 없이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도록 여유를 갖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18세 처녀가 이런 결심을 하고 시집을 왔는데 요즈음은 28세가 넘어도 사명의식 없이 호강하려고 결혼을 하니 가정 윤리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노인들이 불쌍해지고 공원이나 거리로 나가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가정되도록 소원하시고 또 좋은 가정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올바른 지식과 땀 흘리는 노력, 인내, 그리고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도를 힘쓰시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므로 복있는 가정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71과 복된 가정 (마 19:4-6, 엡 6:1-3) 목록으로

-이명택, 양해자 주례(99.5.5)-


두 사람의 결혼과 함께 “복된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을 말하려고 합니다. 결혼의 목적은 행복에 있고, 가정을 발전시키는데 있으며 하나님은 인류가 그런 행복을 누리게 하실 목적으로 혼인의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이란 부부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의 구성원은 부부, 부자, 형제간이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행복해지고 발전을 하려면

1.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요, 섭리자이시고 또 복의 근원자이십니다. 만가지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약 1:17), 또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히 4:16)입니다. 그 하나님이 땅을 주셔서 우리가 그 위에서 사는 것이고, 공기를 주셔서 숨을 쉬고 있으며 또 햇빛을 주셔서 세상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를 중요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간이 자기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꼭 믿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행복을 위한 인간의 책임과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힘쓰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1)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존경하고 사모하며 복종하고 내조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일에 마음을 쓰기 전에 먼저 남편에게 할 일을 꼭 힘쓰기 바랍니다.

2)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지혜롭게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연약한 그릇처럼 다스리는 일이 지혜를 쓰게 하는 것입니다.

3)그리고 “두 사람의 혼인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매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과 분방하지 않는 원칙을 항상 고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4)효도하는 것이 곧 “자신이 잘되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효도는 인륜의 도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잘 되기 위하여 효도해야 한다는 믿음과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효도는 부모를 가까이 모시는 것이고 부모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부모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시가 어른들에 대하여는 며느리가 앞장서고 처가 어른들에 대하여는 사위가 앞장서야 더 좋습니다. 그리고 형제 우애도 효도에 한 몫을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끼리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한다면 그 부모가 얼마나 기쁘고 든든 하겠습니까?

5)자녀 교육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학교 교육은 다 알아서 잘 합니다. 그러나 예절 교육, 도덕 교육, 사회적응 교육, 불건전한 일에 빠지지 않는 교육, 이기주의를 떠나서 봉사적 요인이 되게 하는 교육은 취약할 수 있는데 그것을 명심하고 잘 하여야 합니다. 이런 교육은 대가족 제도 안에서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아버지 한 사람만 없어도 교육이 취약하다”고 하는데 대가족 제도안에 있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형제들의 교육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6)경제적 자립에 힘써야 가정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경제가 자립됐으면 근검하게 살면서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집도 사고 생활비의 고정수입도 확보해야 된다”고 할 때는 열심히 땀 흘리고 근검 절약하여 속히 자립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자는 가난을 낙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는 그런 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은 “땀 흘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하셨고,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며 또 재물을 저축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신 8:18, 잠 8:20-21) 근검절약의 교훈으로 예수님은 5병 2어 기적의 양식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고 하셨습니다.

주례자는 20만원짜리 의복을 입고 예배드린 일도 있고 2000원짜리 양복을 입고 예배드린 일도 있습니다. 국민적 차원에서 사치 풍조나 과소비는 추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인생을 새출발하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믿음과(약 4:18) 행복을 위한 노력(부부간의 노력, 효도, 형제우애, 교육, 자립)을 잘하여 속히 성공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72과 효도하는 종교 (엡 6:1-3) 목록으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불효의 종교로 낙인찍히고 핍박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의 기일에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믿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기독교가 최고 효도의 종교란 사실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도 효도를 제일로 삼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 불교에서는 효를 다룬 경전이 9권이나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내용은 부모를 정성스럽게 또 공손하게 모셔라, 음식과 의복 봉양을 잘 하고 부모의 교훈과 명령을 어기지 말며 부모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드리라는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당연한 내용입니다.

2. 유교의 효도 전통은 더욱 대단합니다. 사대주의 사상을 본받은 양반 세계에서의 효도 이행은 철저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할 수 없는 풍조가 조성되었고,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또 옛날부터 정부에서 효도 시책을 편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유학자들이 지방에 파송되어 효도를 가르친 예가 있고, 고려시대에는 왕의 시호를 효와 관련하여 고려 태조를 장효대왕, 혜종을 명효대왕, 광종을 이효대왕으로 호칭한 일이 있으며 태자가 직접 효경을 가르쳤고, 무관에게 효도 휴가를 주었으며 8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자에게 병역 면제 혜택을 주었고, 관리의 부모상에 28일의 휴가를, 또 복역자의 부모상에는 집행 유예를, 특별한 효자에게 효자문 포상을 하였으며 실수로 부모에게 상처를 입혀도 3년 징역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말씀인 논어에서 “부모를 물질로만 섬기는 것은 견마 같은 일이므로 마음의 효심이 중요하고 효는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의 기초라” 하였고, 중자의 말인 예기에는 “부모를 모시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부모를 욕보이지 말 것과 물질과 봉양할 것을 교훈하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유교적 전통에는 불효자가 동리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있고, 또 부모의 묘소를 3년씩이나 떠나지 않으면서 살피는 일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묘소를 지키는 것” 효심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건설적 생활의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또 부모의 시신의 묘소에 참배를 안 했다 하여 그것을 불효로 인정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겠지요.

3. 유교의 전통과 관련하여 옛날 사람들의 효도 생활이 지극하였던 사실을 예로 들면

1)명심보감에 손순의 효도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조 19대 숙종대왕 때 가난하게 사는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데 부모 접대하는 반찬을 아이가 먹으니까 부부가 의논을 하였습니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돌아가시면 다시 오시지 못하니 아이를 없애자”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 아이를 생매장하려고 구덩이를 파는데 그 자리에서 소리나는 종이 나와서 이상한 징조로 생각하여 계획을 거두고 그 종을 처마에 달고 쳤다고 합니다. 그 종소리를 들은 임금이 그 연유를 묻고 갸륵히 여겨 쌀 50석으로 상을 내리니 그것으로 더욱 효도를 잘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2)또 어떤 책에 기록된 내용인지는 모르나 “상가승무노인탄”이란 말이 있습니다. “상복을 입은 남자는 노래를 부르고 여승은 춤을 추고 노인은 탁식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숙종대왕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젊은 부부가 홀로 되신 아버지를 섬기는데 아버지의 생일날이 돌아왔으나 너무 가난하여 며느리가 머리를 깎아 팔아서 장만한 음식상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아들은 어머니가 작고하신 일 때문에 상복을 입은 상태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머리를 깎은 자부는 춤을 추니 그 아버지가 일찍이 재물을 모아주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3)또 이조 철종 때의 도씨는 숯을 팔아 고기를 사서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하루는 고기를 들고 오다가 솔개에게 채임을 당하자 주저앉아 울었더니 솔개가 그 고기를 자기 집 뜰에 던졌다 하며 그 후 조모가 병이 들어 누워서 감을 찾거늘 도씨가 감나무 수풀에 가서 감을 찾으려고 헤매는데 별안간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태워 100여리 떨어진 동리에 내려놓거늘 그 곳에 제사 집이 있어 들어가 보니 홍시가 있는지라. 그 연유를 물은즉 “작고한 선친이 감을 좋아 하여 해마다 가을에 200개를 굴 속에 저장하면 겨우 7,8개가 남아서 그것으로 제사를 한다”하기로 자기의 사정을 말하니 “이상하게도 금년에는 50여개가 성한 것이 있어서 이상히 여겼으나 당신의 효도에 보답하라고 하늘이 준 복인 모양이라”하고 감을 주어 들고 나오는데 역시 그 호랑이가 지켜 있다가 그를 태워 집에 오니 새벽이라. 그것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나중에 그 어머니가 천명으로 돌아가니 피눈물을 흘리더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4)또 늙고 눈 어두운 부모가 뒷밭에 있는 닭을 꿩으로 알고 “뒷밭에 꿩이 내려온다”고 하였을 때 그 아들은 쇠고기, 닭고기는 잠수실 형편이 못된즉 꿩고기를 잡숫고 싶어 하시는 심정으로 이해하고 꿩을 잡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5)귀가 어두운 부모님이 기차의 기적 소리를 돼지 잡는 소리로 오인하였을 때 그 아들이 돼지 고기를 대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6)90된 노인이 70된 아들을 아이로 여긴즉 70된 아들이 물 심부름을 하면서 일부러 엎어지며 울 때에 90 노인이 “아직도 어린 아이 티를 벗지 못했다”하면서 크게 웃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 부모의 뜻을 존중하여 받드는 예라 할 것입니다. 유교와 관련한 효도의 전통은 너무 방대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효도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최고 대효의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1)인륜 계명의 으뜸으로 주셨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계명의 첫째가 효도란 것입니다.(출 20:12)

2)잘 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잘 안 되고 단명한 사람들이 불효자가 아닌지를 알아 보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의 교훈에 축복을 약속한 효도 계명이 있습니까?(엡 6:1-3)

3)예수님이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효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부모에 대한 순종으로(눅 2:51) 부모의 뜻을 받드시므로(마 12:46) 어머니의 요구를 들으시므로(요 2:3)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어머니의 생애를 요한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요 19:26) 예수님은 일찍 돌아가시면서도 부모에 대한 생계 대책을 책임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양할 사도 요한은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느 종교의 교주가 효도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4)그리고 기독교는 또 다른 종교와 달라서 불효자에 대한 벌칙을 엄하게 규정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욕보인 함이 저주받은 일이나(창 9:25) 어미를 저주하는 자와 부모를 치는 자를 사형에 처하였고,(출 21:15,17) 경홀히 여기는 자를 함께 저주하며(신 27:16) 불순종자를 고발하여 돌로 쳐서 죽게 하고,(신 29:18) 부모의 물건을 도적하는 자도 멸망자의 동류로 여기라(잠 28:24)고 하셨습니다.

5)핑계하지 못하게 하는 법도 주셨습니다.(마 15:4) “하나님 공경하기 때문에 효도 못하였다”는 식의 핑계입니다. 이런 종교가 불효의 종교처럼 오해를 받을 때 한 전도사가 효도 계명을 강조하므로 한 가문을 전도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황해도 평산군에 신씨 가문이 있었는데 어떤 전도사님이 그 가문을 전도하기 위하여 문중의 제일 높은 어른을 찾아가서 큰 절을 하고 “저는 어른에게 하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무엇을 여쭈러 왔다 하면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 노인이 반가운 태도로 “무엇을 물으러 왔느냐”할 때에 혹 어른께서 기독교의 “3행7금법이란 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쭈러 왔습니다”하니 그 신씨 어른은 기독교의 3행7금법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어른 체통에 “모른다”고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하여 모른다고는 못하고 “보아하니 자네는 예의범절도 있고 학문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누구 집 자손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전도사님은 “예 저는 아무데 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그 노인은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가 다 양반의 가문인 줄은 알지만 아브라함의 문중은 금시초문이요, 그 문중 사람이 그렇게 예의 범절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으며 도대체 아브라함의 문중도 있나?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역시 그것까지 모른다고 하면 또 체면 손상이 될 것 같아서 말을 못하고, 마음속으로 “내가 삼강오륜도 알고 칠거지악도 알지만 기독교의 3행7금법과 아브라함의 문중을 왜 미처 몰랐던가?”하며 망설일 때 그 전도자는 “어른께서 잊으셔서 그렇겠지요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하고 “십계명”을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공자, 맹자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인데 세 가지 행할 것과 일곱 가지 금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세 가지 행할 것이란 ①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공경할 것과 ②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할 것과 ③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고, 일곱 가지 금할 것은 ①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 것과 ② 그 이름을 망녕되히 일컫지 말 것과 ③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탐심을 갖거나 행하지 말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하니까 “내 일찍이 그런 교훈을 몰랐는데 그런 좋은 교훈이 어느 책에 있느냐?”하여 “성경책에 있다”하니 그때부터 그 노인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 보고는 자기와 신씨 문중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시 34:8에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것이라” 하셨는데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맛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맛을 알면 예수를 믿습니다. 성도는 성경의 맛을 더욱 알아서 그 맛에 이끌리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기독교가 대효의 종교란 사실을 아시고, 효도를 잘 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복도 받고 전도의 효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3과 효도의 교훈들 (엡 6:1-3) 목록으로


1. 효도란 자식이 부모님을 기쁘고 만족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큰 공로를 주지 못하였어도 자식이 의무적으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2. 효도는 하나님의 계명이나 인륜의 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서 명령하신 말씀이 많고,(출 20:12, 레 19:3,32, 신 5:16, 잠 10:1, 16:31, 23:22-26, 엡 6:1-3, 골 3:20, 딤전 5:1, 요일 4:20) 인륜의 도리란 보은의 원리로 시행하는 것입니다.(시 116:12, 고후 6:13) 사람은 네 가지 대상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는데 첫째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둘째가 임금님의 은혜이며 셋째가 부모님이고, 넷째가 스승의 은혜라고 합니다. 혹 자식이 없는 노인이 계시면 이는 경노사상에 근거하여 나라가 정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류적 도리에 의하여 효도를 하는데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과 약속된 축복에 근거하므로 더욱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옛날에 비할 때 오늘의 형편은 효도가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효도를 잘 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1.4후퇴 때 남쪽으로 온 분이 다시 사선을 넘어 고향인 함경도로 가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나와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아들을 공부시켜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부인이 죽고 90세 된 노인이 되어 병중에 있게 되자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하여 교수직을 그만둔 분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간호하는 일을 교수직보다 귀하게 여긴 것은 좋은 효행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그러나 현실에 와서 효도가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입니다. 효도, 효도하는 자녀들이 별로 없고, 대소사를 부모의 뜻에 따라 사는 자녀도 별로 없는 줄 압니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 빈곤이 닥쳐오고 생활 문화가 많이 바뀌면서 효도 전통도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농경 사회가 산업 사회로 바뀌고 핵가족 분열이 일어난 후 사람 사는 생활이 더 바빠졌습니다. 따라서 생활의 가치관이 어른 중심, 효도 중심에서 개인주의, 이기주의, 안일주의, 향락주의로 바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지금 효자에 속하고 있습니까?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 돈 2,30만원을 아껴서 큰 고생을 하시게 한 일이 늘 거리낍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병원에 안 가시겠다 하여도 모시고 갔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저의 어머니는 제가 효자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을 하셨습니다. 효가 인정을 받으려면 아들, 며느리가 다 효도를 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혹 한 편이 억지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은 부모에게 만족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은 안 하셔도 부모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자식이 건설적으로 생활하지 않거나 몸이 병들고 약해지거나 근검, 성실하지 않으면 그것이 다 부모님을 만족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청도의 유경옥 집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위암 걸린 것을 아시고 농약을 잡숫고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약 한달 후에 아들도 갔습니다. 아들이 먼저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부모 앞에서 자녀된 자의 건강은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건강과 장수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마음 한 구석에 “빨리 돌아가시면 좋겠는데...”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요? 저는 저의 어머니가 “음식도 싫다, 구경도 싫다, 들리지도 않는다”하시면서 세상 재미를 못 느끼실 때 “천국 밖에는 가실 때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였는데 심부전증으로 고통이 자주 자주 닥쳐올 때는 “주무신 듯 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였는데 새벽 어느 순간에 가버리셨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싶은 심정일 뿐 귀찮게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를 귀찮게 여기는 것이 바로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이고,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6. 불효의 원인을 살피면 믿음 없고, 게으르며 돈 없고 이기주의, 안일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부부, 형제간의 의가 좋지 못하며 부모에 대한 감화가 부족하면 효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충 시행하는 것이 효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효도할 방법을 연구한다면

1)하나님의 계명을 믿고 시행하셔야 합니다.(엡 6:1) 또 믿음으로 시행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으시고(막 9:23)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사모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

2)부모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혹 부모의 공로가 적어도 낳아주시고 어릴 때 양육하여 인생을 살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무능한 부모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부모는 없습니다. 방금 전에도 아들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어떤 80대 노인은 60대 아들이 먼저 갔을 때 그 무덤 구덩이에 들어가 누우므로 한 시간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또 대구 신병설 장로님은 하관한 부친의 관을 열고 입을 맞춘 일이 있었으며 저의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와서 “부산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하라” 하니까 “연락했다가 안 죽으면 어쩌겠느냐 오지 말라 하라”하여 돌아가신 다음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는 일들인 것입니다.

3)효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중심을 보시는 것처럼(삼상 16:7) 자식이 마음은 있는데 못하는 줄 아셔도 부모에게는 위안이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드리는 효도”입니다.(잠 23:22-26) 예수님도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마음을 달라”고 하셨습니다.(마 15:8)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4)언행도 중요합니다. 공손한 말, 감사하는 말, 존댓말, 여쭙는 말, 용서를 비는 말이 효도에 필요하고, 거기에 따라 섬기고 순종하는 행동도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소금섬을 물로 끌고 들어가라, 송아지를 지붕에 올려라”하는 말이 있지요. 이것이 다 부모의 말씀을 절대 순종한다는 효의 사상을 일깨우는 용어로 생긴 것입니다.

5)가정 화목, 형제우애, 그리고 부모 곁을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부, 형제 간에 혹 싸움을 하다가도 부모가 들어오시면 별일 없는 듯이 감추는 것입니다. 부모를 보이는 하나님처럼 생각하여도 과하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요일 4:20)

6)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여 매사를 의논드리는 일과 보고하는 일, 또 부모에게 자식으로서 기업이 되어드리는 일(시 127:3), 부모님에게 나가시고 들어오시며 쉬시고 잡수시는 자유를 드리는 일, 심심하지 않게 해드리는 일도 효도에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7)우선 그럴려면 가난 극복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고 후한 마음과 믿음으로 효를 시행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후히 주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제74과 룻의 효도 (룻 1:15-18) 목록으로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전국 교회가 효도를 일깨워드리는 설교를 하기 때문에 저도 교회와 사회의 효도 운동에 맞추어 효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효도에 대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새로운 설교를 드리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만 금년에는 “룻의 효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룻”이란 여성도는 주전 1300년경에 살았던 이방 나라 모압의 여인인데 그가 유대인 남자와 결혼하여 모압에서 살다가 그 시가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큰 괴로움을 겪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시가가 징계를 받은 내용은(룻 1:20-2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 길론을 데리고 유대 땅의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이방 땅인 모압땅으로 이거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앙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떠나서 우상의 근거지인 모압으로 이거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여 “하나님과 신앙 생활을 멀리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에 와서 또 잘못을 범한 것이 있었으니 모압 여인들을 자부로 맞는 이방 결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 등으로 하나님은 그 가정을 징계하여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자손도 없는 중에 데려가 버리시므로 시어머니 과부와 젊은 두 며느리 과부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한 집에 세 과부만 남게 되었으니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때에 시모인 “나오미”가 깨닫고 “내가 신앙을 찾고 하나님을 찾으며 유대 땅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여생을 마쳐야 하겠다”는 결심을 갖고 젊은 두 며느리에게 권하기를 “너희들은 젊은 청춘으로 재산 없는 늙은 시모를 따라 유대 땅에 간들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 그러니까 친정을 의지하고 모압에 남아서 행복한 삶을 찾아가라”한즉 큰 며느리 “오르바”는 그 권면을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떨어졌는데 둘째 자부 룻은 그렇지 않고 그 시모에 대하여 지극한 효성을 보였으니 그 효성에 대한 것을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룻의 효도는 고부간의 효도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룻의 효도는 며느리의 효도입니다. 아들, 딸도 효도할 수 있지요. 이것은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이니까 효도하여야 마땅하지만 며느리는 자기를 낳아 기르지 않은 시부모님을 섬기는 것이니까 며느리의 효도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는 아들, 딸도 하여야 하지만 특히 며느리가 효도를 할 줄 알아야만 그 가정이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 아들, 딸은 효도를 못해도 부모와 혈연지간이기 때문에 약간 섭섭하고 불평스러워하다가라도 그대로 화합이 되지만 며느리의 불효는 시부모와 갈등하게 되고, 때에 따라서는 아들과의 사이를 곤란하게도 만들며 또 자식을 두어두고 쫓겨난다든지 같이 못 사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흥망을 좌우하는 관건은 그 집에 시집가는 며느리가 그 시부모에 대하여 얼마나 효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크게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서 며느리 되신 분들은 특별히 책임감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2)고부간의 효도입니다. “어머니”라는 대명사는 “사랑과 인정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시어머니”란 대명사가 불효한 며느리에게는 “감독자, 별난 사람”이란 뜻으로도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시어머님들이 좀 별나서 친정 부모님이나 시아버지 섬기기보다 더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시어머니, 시부모 섬길 자신이 없다 하여 아예 시부모 때문에 혼사를 파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고부 간의 문제가 단순치 않은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런 중에서 효부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효도의 기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룻은 파산당한 집안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보통 여성들이 남편 없고 재산 없는 시어머니(그것도 노인)를 존귀하게 보겠습니까? 옛날을 생각하면 약간 인정은 가지만 남편도 없겠다 돌아서면 남이라 하고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망한 집안에서 머물러 있다 한들 무슨 소망이 있다고 기대를 하겠습니까? 많은 여성들이 이런 상황이 되면 미련 없이 시가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파산당한 집안이지만 일단 시집와서 한 가족이 된 이상 그 집을 떠날 수 없고, 그 집에서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 것이 자기의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파산 지경에서도 효도를 한 것입니다. 어려운 때를 잘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슬기일진대 가정이 어려울 때 물러서지 않고 가정의 식구나 명분을 지켜주는 것이 큰 효도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는 계대 결혼이란 것이 있어서 형이 죽으면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여 형을 위해 후사를 남겨주는 방법이 있지만 그 집은 형제가 다 죽은 집이기 때문에 가문의 계대에도 거의 희망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파산당한 가정을 떠나지 않고 섬기는 중에 다행스럽게도 그의 근족인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되어 “오벳”을 낳으므로 기적처럼 가문을 이어주었으니 큰 효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벳은 다윗왕의 할아버지입니다.

3.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를 섬김의 대상으로 받들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에 파산당한 가정의 늙은 시어머니를 귀히 받들 며느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큰 짐으로 여겨서 “왜 일찍 안 죽나, 아들 앞세우고 무엇이 좋아서 저리 오래 사나”하면서 속히 죽기를 바랄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자녀들 중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늙은 부모님들을 짐으로 여기는 자녀가 있고, 또 하나는 늙은 부모님을 상급으로 아는 자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자식인가? 우리 집에 오신지 벌써 몇 일이 지났는데 왜 큰 아들 집으로 안 가시나?”한다면 이것은 부모를 짐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부모님을 섬겨야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인즉 나를 복받게 하기 위하여 제 집에 계십시오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계셔만 주세요”하는 자녀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룻을 떠나라 하였을 때 룻은 말하기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하였으니 이는 “며느리를 벌 안 받게 하시려면 제발 같이 있도록 해주십시요”하고 사정을 한 것입니다. 룻은 그렇게 하여 시어머니를 모신 것입니다. 참으로 부모님 안 계신 분들이나 다른 형제에게 부모님을 뺏긴 분들은 불행한 분들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으셔서 방 한 칸 더 늘리고 의지할데 없는 노인 한 분쯤 모셔다가 자기 부모처럼 섬겨 보실 마음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4. 룻이 어떻게 시모를 섬겼습니까?

1)육신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모셨고,

2)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며 어머니의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돌아가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하는 식으로 모든 일에 그 어머니의 뜻을 따랐으며

3)가난 중에서도 보리 이삭을 주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옛날에 효자들은 밖에서 자기만 잘 먹고 손에 든 것 없이 부모 앞에 오기가 민망하여 먹은 것을 토하고 들어오는 예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요. 그럴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것이 다 귀찮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보리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효성이야 말로 귀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효도는 가난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효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성의 효도가 더 중요하고, 그 중에도 며느리의 효도는 더욱 중요한 것을 꼭 아셔서 룻의 효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5. 결론적으로 효도는 이웃 사랑의 첫째 계명이고, 가장 큰 이웃은 바로 우리의 부모님들이십니다. 효도 잘 하면 자기가 장수하고 땅에서 잘 된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본분을 지키고 칭찬을 들으면서 복받는 것이 바로 효도인 것입니다. 룻은 그런 효도를 하였는데 유대땅에 돌아가자 마자 과부 며느리가 늙은 시모를 따라 온다, 보리 이삭을 주어 시어머니를 섬긴다...하면서 온 동리에 칭찬이 퍼지고 명성이 높아지더니 얼마 안 가서 유력한 근족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손의 계통에서 예수님을 오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마 1:5-6) 보아스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이스라엘족의 여인보다 더 신앙있고, 더 복된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도 효도를 잘 하여 복받는 체험을 꼭 하시도록 결심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5과 예수님의 효도 (요 19:25-27) 목록으로


예수님의 효도는 계명과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1. 계명은 성경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1)십계명 중 인륜 계명의 첫 계명으로 주셨고,(출 20:12)

2)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약속으로 주셨으며(출 20:12, 엡 6:1-3)

3)“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하셨고,(레 19:32)

4)“자식은 부모에게 상급과 기업이 되라”하셨으며(시 127:3)

5)“부모를 해하거나 때리거나 저주하면 죽이라”하셨고,(출 21:15)

6)“부모를 경홀히 여길 때 단체적으로 저주하라”하셨고,(신 27:16)

7)“불순종하는 패역한 자식이 있을 때 책망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 부모가 고발할 것이요 모든 성중의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이므로 단체의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신 21:18-21)

그 외에도 계명이 많겠지만 생략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실제적 효도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효도 모범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으나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1)예수님은 부모님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일이 있었고,(눅 2:41)

2)나사렛에서 자라나실 때도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하셨으니(눅 2:52) 부모님과의 동행과 순종은 좋은 효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자신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신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인데 예수님은 그런 효도도 잘 하셨습니다. 눅 2:40에 보시면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강건하게 자라셨고 지혜가 충족하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럽게 자라셨다”(눅 2:52)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녀는 상급과 기업”인데 그 자녀가 병들거나 미련하거나 사고를 저지르면 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 앞에 일찍 죽는 자식도 효자일 수 없듯이 이모 저모로 부모의 속을 섞이는 자식은 효자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신 것이 예수님의 모범적 효도요, 우리의 효도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4)예수님은 부모의 뜻을 살펴 그 뜻을 존중하여 받드셨습니다. 요 2:3에 보시면 가나 지방에 혼인집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먼저) 거기 계셨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아 같이 그 혼인집에서 만났는데 그 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사실을 그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알려드렸는데 예수님은 그 말씀에 따라 포도주 이적을 행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모친의 뜻과 의도를 100% 성취시켜 드린 것입니다. 그때에 그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했겠습니까? 효도는 부모님을 앞에 모시는 일이고, 부모님의 주권을 받드는 일입니다 성인된 자녀가 부모를 의지하려 하거나 무엇을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5)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부모님에 대한 부양 책임을 절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중대한 순간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그 곁에 서있는 요한 제자에게 “요한아 네 어머니라”하시므로 부모의 생애를 부탁하시는 뜨거운 효도의 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자여”하신 “구나이”(γύναι)는 “부인이여”하는 존경의 뜻인데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관계를 떠나서 자신을 공적 사역자로 나타내신 일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니이다”하실 때는 “호 후이오스 수”(ὁ υἱός σου)하시므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하셨고, 그 다음 사도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으니 떠나는 아들은 공적인 아들로, 모시는 아들은 친모자지간이 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의 모친을 모시고 부양하라”는 의미로 알고 그 후부터 요한이(성경에는 요한이란 명시가 없으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으로 해석함.)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다른 동생들에게 맡기시지 않았을까?하시겠지만 요 7:5과 마 13:56에서 “4명의 남동생들과 누이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하게 부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형제 중 야고보와 유다가 크게 변화되어 사역을 하였음.)

이렇게 예수님은 교훈상의 효도와 실제의 사명을 다 이행하셨습니다. 부모님과 동행하셨고, 순종은 물론 부모님의 뜻을 받드셨으며 건강하게 자라셨고, 어머니에 대한 부양도 끝까지 이행을 하셨습니다. 사도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사도 요한이었으니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신 덕분으로 장수하였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76과 가정과 교회 (엡 5:22-33)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과 교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공통되는 점을 비유로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대한 교회의 생활이 부부 연합의 생활과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교훈하시면서 교회가 순결하고 영광스러워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먼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머리가 된다”는 뜻은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창 3:16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당시 하와는 분별을 잘못하여 유혹을 받고, 범죄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험스럽기도 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였는데 “남편은 그를 다스리라” 하셨으니까 동거자의 입장에 있으면서 다스리는 책임을 지게 하신 것입니다.

2)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면 “아내는 남편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비유 설명입니다. 골 2:19에 보시면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힘의 공급을 받고 자란다” 하셨으니 이는 머리가 몸을 지배한다는 뜻이요, 몸이 머리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고전 11:10) 따라서 아내가 남편의 몸의 입장에 있다는 것은 남편의 지도와 힘 아래서 산다는 뜻입니다.

3)한 가정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남편이 사고나 질병을 당하여 주장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하나님의 창조적 원리로 볼 때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고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신 것이 사실입니다.(창 3:16, 2:18) 그러니까 남자가 장가를 가려면 반드시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식견과 물력을 가지고 배필을 맞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한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총각이 장가를 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의 생활력을 점검하고 결혼을 허락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할 때는 랍비가 주례를 서되 그의 아내는 신부에게 성교육을 두 시간 정도 강의를 한 후에 성혼을 시킨다고 합니다.

2. 아내와 남편, 상호간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1)두 사람이 믿음 안에서 결혼하였으면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고,

2)“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남편의 뜻에 절대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 안 되는 일이면 복종하면 됩니다. 타산성이 약할 때는 남편을 설득해보고 안 되면 소금섬이라도 물로 끌로 들어가면 됩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지 않다가 자주 손해를 보면 나중에는 듣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뜻을 미련하게 생각하고 듣지 않으면 그 가정은 자주 싸워야 할 것이요, 갈등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 갈등의 상처는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남편은 다스릴 의무(창 3:16)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제 몸을 사랑하고 보호하듯 남편이 아내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면 이는 곧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지혜를 써야 하고, 사랑하여야 하며 아내는 복종하는 것을 의무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아내의 복종을 먼저 말씀하셨으니까 아내가 먼저 복종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 풍속으로는 3년을 그렇게 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집 가면 소경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짧게 두 달만 복종 잘 하면 충분히 남편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복종하는 아내의 자세를 볼 때 남편은 자기의 미련함도 깨닫고 복종하는 아내를 소중한 대상으로 여겨서 사랑을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는 “먼저 사랑을 받아야 복종할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복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권위가 복종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남편은 사모의 대상이고,(창 3:16) 권세의 대상이기 때문에 권세 아래 있는 표로써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1:10) 그런데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만을 떠는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내는 사랑을 받을 때 여지없이 남자의 권위를 꺾으려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살려 할 때 복종할 수 있겠지요.

3. 교회의 성격은 어떠합니까?

1)본문 23절에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또 예수님은 “몸의 구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의 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교회는 머리와 몸의 관계와 같은 것이 마치 남편과 아내가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몸을 돌보듯이 예수님은 자기의 교회를 돌보시는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교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머리와 몸으로 비유되는 공통점이 있고, 다스리고 사랑하며 복종하는 공통점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몸을 주셨는데(행 20:28)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것도 공통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가 신비한 연합을 이룬 것처럼 부부관계도 그렇기 때문에 “그 비밀이 크다”고 하셨습니다.(32절) 상호 연합의 비밀을 잘 이해하는 성도가 되실 때에 가정이나 교회를 바르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자기의 몸된 교회가 자기 앞에 영화로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영화로운 교회가 되려면 ① “물로 씻는다” 하셨지요. 이것은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를 받고 새생활을 시작하라는 뜻이지요. ②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을 받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시 119:9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애야 합니다. 의복으로 말하면 먼저 빨고 잘 말려서 다림질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티의 흔적을 없애고 새것처럼 말들어야 하니까요. ④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하셨으니 이것은 완전 순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 이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다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상의 교회에서 가능한가?할 때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전체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가라지를 뿌린 농장과 같은데 그 가라지를 심판 때까지 두어두라고 하셨지요.(마 13:24-30)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가라지가 아닌 곡식은 가라지 틈에서 시달려도 곡식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곡식이면 가라지 되려 하지 마시고 곡식의 신분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절대로 곡식이 될 수 없고, 곡식 또한 가라지가 될 수 없지만 곡식이 가라지를 좋아하면 자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 22:11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내가 속히 오리니.....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상 교회의 성도가 외식자들의 생활에 동화되지 말고 최대한의 순결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인의 수가 적어도 영화로운 교회가 되도록 다같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가정의 순결과 교회의 순결을 아울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제77과 혼인에 대한 교훈 (마 19:4-6) 목록으로

 

이 시간에 “혼인에 대한 교훈”을 드리겠습니다.

1. 혼인은 인류 생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당시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들어 인류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남녀가 함께 살지 않는 것은 반쪽의 인생 또는 비정상의 삶이란 뜻입니다. 두 분은 오늘부터 합리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합리적이고 필연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의 길과 행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시 23:2-3, 잠 16:9) 종교적 관념으로는 천생연분이라 하고, 무종교적 관념으로는 운명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것은 결합에 큰 힘을 줍니다. 기독교인의 세계에서는 신앙이 일치하고, 당사자들의 뜻이 일치하며 양측 부모가 이 사실을 승낙하였을 때는 그 성혼을 하나님의 인도로 믿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원칙을 변함없이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

3. 5절에서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부된 상태에서 결혼 생활을 이루어갈 때 연합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가족이니까 마음과 생활을 융화시키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될지라”하신 말씀은 동거, 동행, 동숙, 동사(事) 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떨어지지 말고 항상 고락과 생활을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고전 7:5) 처음 만난 부부가 성격과 취미와 문화관의 차이가 너무 나면 융화하기 어렵겠지만 이 때에는 반드시 민주적으로 화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그리고 결혼 생활의 전제 조건은 “사랑”입니다.(엡 5:22-25) 사랑에 대하여는 고전 13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니까 항상 연구 실천하실 것이요,

5. 끝으로 가정에는 반드시 부모, 형제, 자매 등 가족적인 이웃이 있습니다. 그 가족적인 이웃에 대한 윤리적 사명을 다 하여야 할 것이요, 더 나가서는 사회에 빛을 발하고 유익을 주는 작은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78과 말세와 효도 (딤후 3:1-5) 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말세와 효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시겠습니다. 효도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무관심하고 회개하지 않거나 효도를 더 잘 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분들이 이 시간을 통하여 교훈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효도하라”는 계명이 많습니다. 효도의 계명은 신앙적 계명이 아니고, 인륜 행위에 관한 계명이기 때문에 믿는 성도만 효도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도 다같이 하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5월달마다 효도 잘 한 사람을 나라에서 표창할 때 성도가 당선되지 않고 불신자가 효도상을 받는 예가 더 많다는 것은 성도로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마 5:20에 보시면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승하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성도가 도덕적 인륜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불신자 보다 못하다면 결코 이웃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제목인 “말세와 효도”란 뜻은 “말세인 이때에 효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말세일수록 효도를 더 잘하여 계명을 지키고 자신들이 복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 성경에는 “말세에 효도를 잘 안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본문 말씀에도 나타나 있고, 마 10:21에도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는데 내어 주리라” 하셨는데 과연 요즈음 소식에도 “자식이 부모를 토막내어 처치했다”는 소름끼칠 뉴스가 나돌고 있는 것입니다. 사 3:5에 보시면 “말세에는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예언의 말씀대로 요즈음 시대는 노인이나 부모님보다 아이와 자식을 더 존중시하는 시대가 되었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행은커녕 업신 여기고 배반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음을 볼 때 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경 말씀에는 효도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도) 공자님의 제자들(유교인들) 보다 효도를 잘 못한다”하면서 기독교에는 효도의 교훈이 미약한 듯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도 효도에 관한 교훈이 얼마든지 있지요. 예를 들어서 ① 부모의 수치를 감싸지 않은 함이 저주를 받았고,(창 9:25) ② 십계명 중에 효도를 인륜 계명의 첫 계명으로 주셨으며(출 20:12, 신 5:16) ③ 효도 계명을 주실 때에 효도하는 자가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겸하여 주셨고, ④ 엡 6:1이나 골 3:20에서 부모 공경하는 방법은 순종을 잘 하는 것이요, 잠 23:25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며(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딤전 5:4에서는 “부모의 은공을 깨달아서 보답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⑤ 롬 1:30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큰 죄악이요, 잠 15:5,20, 겔 22:7에서는 거역뿐만 아니라 업신여기는 것도 죄악이며 신 27:16에서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모든 백성은 거기에 아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⑥ 아비를 치고 어미를 치는 자는 당장 죽이라고 하셨으니까(출 21:15) 효도의 계명이 여간 엄하다는 것을 잘 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왜 성도들이 이 효도를 잘 못합니까?

1)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①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요. ② 믿음만 있으면 “부모 공경하라”는 말씀을 지키지요. ③ 믿음만 있으면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도 그 방법을 쓰겠지요. ④ 믿음만 있으면 땅에서 잘 안되고 건강치 못하며 단명할까 겁이 나서도 효도를 하겠지요. ⑤ 믿음만 있으면 왜 효도를 안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이 “복받는 방법으로서의 효도 교훈”에는 어두워져 있어서 “주여 주여”하는 방법은 써도 효도로 복받는 방법은 잘 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니까 효도도 못하고 축복도 많이 못 받는 것입니다.

2)안일주의 즉 게으름에 빠져서 효도를 못하는 실정입니다. 자기 자식도 키우기 싫고 섬기기 싫어서 산아 제한을 하는데 부모 공경처럼 고달픈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안일주의, 게으름병 때문에 늙으신 부모님들이 섬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 부모님들, 젊은이는 게을러서 노인을 안 섬겨도 노인들은 게으르지 마시고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힘있게 활동하시기를 바랍니다.

3)효도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피아노나 컴퓨터 작동 방법은 배워도 효도 방법은 배우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입니다. 총각, 처녀에게 무슨 기술, 무슨 자격증을 받았느냐? 돈 버는 대책은 있느냐?고 따져 물어도 “효도의 방법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효도할 것이냐”하는 것은 중매 조항에 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모 안 모실 것이고 부모 없는데 시집간다”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참으로 큰 일이요, 큰 변화입니다.

4)왜 이 말세에는 효도가 이렇게 땅에 떨어지게 됐습니까? ① 경북대학 어떤 사회학 교수 권규식씨가 400명 노인에게 설문조사를 받아보니 “자기의 자녀들이 부모 부양을 당연히 여기며 부모를 소외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는 조사가 나왔기 때문에 효도의 긍정적 반응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나 또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200명에게 설문을 받아보니 “부모가 잔소리를 많이 해서 죽을 지경이라 부모가 가정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는 것이고, ② 공부 많이 한 여자 대학생들에게 어떤 남편을 좋아하느냐? 물으니까 “돈 있고 부모 없는 남자가 좋다”고 하므로 지성있는 여자들이 부모를 경시하였으며 ③ 남자 대학생들에게 “어떤 아가씨가 좋으냐” 하니까 “맞벌이 할 동갑 여성이 좋다”고 하였으니 맞벌이 할 아내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란 것입니다. ④ 어떤 사람이 외국의 간호원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나는 늙은 어머니의 중병 간호를 2,3일 한 후에 한국으로 바캉스를 떠날 것이니 그때 만나자”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즉 중병 앓는 부모에게 한 두 번 간호하고 들여다보면 됐지 꼭 임종을 봐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바캉스 외유를 할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 선진국 노인들도 자녀들에게 소외를 당하여 늘 심심한 생활만 하다가 염세병을 느껴서 자살을 빚는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5. 왜 이런 추세가 세계적으로 밀어닥쳐 왔을까요?

1)인간의 지식과 문화 발달이 노인을 천시 학대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 12:4에 보시면 “말세에는 사람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정보화 또는 지식 전달 시대가 되었습니다.

2)지식이 발달하니까 효도와 관련하여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① 안일주의로 살려니까 능숙한 의술로 산아를 제한하여 아이의 수를 줄였습니다. 아이의 수가 줄었으니까 아이가 천금보다 귀해졌고, 물론 늙은 부모보다 더 귀해진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하여 부모를 자식보다 귀히 여겼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이는 더 못 낳고 어른은 어차피 갈 것이니까 어른은 희생시켜도 아이는 덕되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변한 것입니다. ② 인간의 의술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여간하여 노인이라도 50대나 60대에 가지 않고, 70대, 80대 이상을 사시기 때문에 노인들이 많아지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초등학생은 줄고 길거리나 공원마다 노인들이 많이 계시게 되어 노인보다 아이가 중하다는 인식을 주게 된 것입니다. ③ 산업 발달이 노인을 무시해도 될 만큼 되어져 버렸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옛날 노인 살던 방법대로 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민속촌에 있는 연자방아가 30년 전까지 사용했던 것인데 이제는 그것을 안 쓰니까 30년 전의 노인들은 참 무식했어 하고 무시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부모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자식 키우는 것을 목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심정도 멀어졌습니다. 부모에게 짚신 삼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는 지났고, 젊은이들이 자기의 생활 방식을 사회에 나가서 얻기 때문에 부모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추세에 우리 성도들도 따라가야 할 것인가? 할 때에 저희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런 세속 풍조의 물결을 거슬러서 도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시대가 아무리 지식적으로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모를 경홀히 여길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다시 한 번 각성하셔서 효도하는 방법과 효도되는 환경을 적극 연구하여 시행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① 아무쪼록 부모님이나 노인들을 업신여기지 마시고,(겔 22:7) ② 경홀히 여기지도 마시며(신 27:16) ③ 주 안에서 무조건 순종하시고,(엡 6:1) ④ 공경하시며(출 20:12) ⑤ 마음을 드려(말 4:6) 즐겁게 해 드리시고,(잠 23:25-26) ⑥ 자녀들로도 자기의 효도를 배우게 하여 효도에 약속된 축복으로 더 형통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79과 효도하는 법 (출 20:12, 엡 6:1-3) 목록으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효도할 이유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마다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시간을 통하여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1. 효도할 이유.

1)믿지 않는 사람들도 효도를 합니다. 왜 할까요? ① 인륜의 도리이기 때문이요, ②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입니다. 부모의 은혜가 적지 않습니다. 요즈음도 먹고 살기에 힘들어서 가족을 늘리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 어려운 시절에 여러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육 시킨 공로를 생각해보세요. 결코 작은 은혜가 아닙니다.

2)성도들은 왜 효도를 하여야 합니까? ① 성도들도 인륜에 의한 효도가 해당됩니다. ② 하나님의 명령이요, ③ 하나님의 명령에 축복과 저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효도를 잘 하면 복을 받고, 효도를 못하면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나 불신자나 자녀된 사람은 마땅히 효도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떻게 효도를 하여야 합니까?

1)효도의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목표는 네 가지입니다. ① 부모님을 안심하시도록 ② 자녀에 대한 기대를 가지시도록 ③ 기쁨을 드리도록 ④ 만족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첫째와 둘째만 해도 좋습니다. 기쁨과 만족은 그 다음 일이니까요.

2)그 목표에 이르도록 생활하는 방법. ① 신앙 생활을 잘 하셔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효도를 백행지본으로 믿는다면 성도는 신앙을 제일주의로 꼽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만 잘 가지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효도도 신앙 안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신앙 안에서, 바른 생활을 하는 것도 신앙 안에서 다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복받는 비결이고, 또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따라서 효도할 자녀들은 꼭 부모님에게 믿음있는 표시를 나타내야 합니다. 거듭난 확신으로, 성수 주일과 예배를 갈망하는 일로, 성경과 기도에 붙잡히는 일로, 항상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으로,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 등으로 믿음있는 표시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안심하고 기대를 갖게 되니까요. ② 부모, 형제에 대한 예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예절은 의식이 아닌 마음의 사랑입니다. 부모를 자주 만나려 하고, 가까이 있으려 하며 섬기려 하고, 또 보고하고, 의논하며 순종하고, 형제 우애를 하며 항상 부모의 장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부모 모시고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안 계시면 약속있는 계명의 축복을 못 받으니까 장수의 복을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자녀가 속히 철이 들어야 부모의 염려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 시간이나 물질 절약 하는 문제, 자기의 건강 돌보는 문제, 잘 때 자고 일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 친구들을 가려 사귀는 문제 등 기본 생활이 흐트러져 있지요. 그런 면에 신속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일찍 깨달아도 세상과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살던 사람일수록 속히 철이 들고, 넉넉한 시대에 살수록 철이 늦게 드는 것 같습니다. 삶의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④ 부모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물려 받은 가업도 있을 것이고, 또 스스로 만들어서 성취하려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3대, 4대까지 짓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짓던 집을 아들이 짓고, 아들이 짓다가 못다한 것을 손자가 마무리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뜻과 과업에 협력하는 것도 효도의 한 방법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 가족, 특히 부모에 대한 예절(사랑), 속히 철 드는 일, 부모의 과업에 대한 협조” 등을 통해서 부모를 안심케 하고 기대를 가지시게 하며 더 나가서는 기쁨과 만족을 가지시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7부 성령강림절 설교

제80과 성령충만의 결과 (엡 5:18)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를 살피기 전에 이 시간에는 “성령충만의 결과”를 말씀드리므로 성령 충만의 은혜를 사모하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성령 충만의 결과는 “말씀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골 3:16에서 말씀의 풍성함과 성령의 충만함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 1:14에서도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바른 지식과 풍성함이 곧 성령충만의 결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행 11:24에 보시면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말씀 지식을 근거로 합니다. 따라서 말씀 지식이 충만한 것은 곧 믿음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 즉 실천이 따르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모시되 충만하게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게 됩니다. 엡 4:13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라”하셨고, 롬 8:29에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님도 하나님의 인격이시기 때문에 그 성도가 예수님의 인격(성품과 지식과 생활)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닯은 사람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은 자인 것입니다.

4. 사랑 충만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또 계명의 순종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강령이 사랑이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수록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계명의 강령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 6:8에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권능은 기적을 나타내는 권능으로만 아실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 계명을 순종하면서 사명에 충성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행 2:44-46)

5. 성령이 충만하면 성도에게는 기쁨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눅 10:21에 보시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갈 5:22에서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기쁨(희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성도가 기쁨을 체험하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의 결과는 ① 말씀 풍성 ② 믿음 충만 ③ 예수님 닮음 ④ 사랑 실천 ⑤ 기쁨 충만 등의 결과가 있음을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여기에 대하여 본인이 집필한 “성령님에 대한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제81과 성령님의 역사 (요 14:16-17) 목록으로


부활 주일이 지난 후 일곱 번째 돌아오는 주일을 오순절 주일이라고 합니다.

1. 이 “오순절”이란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세 번 나오는(행 2:1, 20:16, 고전 16:8) 말씀이지만 구약 시대에는 이와 비슷한 절기가 있었습니다. 구약 레 23장에 보시면 절기법이 있는데 안식일, 유월절, 초실절, 7주 안식일,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구약의 이 절기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예표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절기의 절차가 예수님의 십자가나 부활, 성령 강림의 날짜와는 일치되지 않으나 유월절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표하고, 초실절은 부활을 예표하며 7 안식일(50일째 되는 날)은 성령 강림을 예표하고, 나팔절과 초막절은 감사절기요, 속죄절은 특별한 회개 운동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실절 안식일이 지난 후(초실절=일자 기준 없음. 레 23:9-14) 50일째 되는 날에(레 23:16) 새소제를 드리라”는 말씀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과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구약의 초실절을 성령 강림절의 예표로 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자 계산에서 분명히 다른 것은 구약의 50일째 성회가 유월절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고, 초실절부터 계산된 것인데 신약의 오순절은 유월절부터 계산된 것으로 추리하여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50일째 되는 주일을 오순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런 문제를 적당한 상징이나 예표로만 알지 않고 구약의 날짜를 엄격하게 계산하여 예수님의 재림 날짜까지 점을 치는 잘못을 범하는 일을 경계하시라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오순절 주일”이란 뜻은 구약적인 성회 날짜와 관계없이 부활 주일 후 50일째 되는 주일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이 주일을 생각하는 것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절에 버금가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대로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주일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면 본문 말씀따라 성령님의 역사를 살피시기 전에 성령님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을 먼저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1)성령님은 어떤 존재이신가?할 때 쉽게 말씀드려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존재와 권능과 영광이 하나님과 같으신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담당하심에 있어서는 성부 하나님은 계획을 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속의 방도를 제공하셨으며 성령님은 그 은혜를 전달하시는 사역을 맡으셨습니다.

2)그리고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으뜸가게 사역을 하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님이 같은 뜻 안에서 협동 사역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기도 하시고,(출 3:6) 성자 하나님이 나타나기도 하셨으며(창 18:2) 또 성령님만으로 나타나신 사실도 있었습니다.(시 139:7)

3)그러다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부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시의 할 일을 하셨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의 역사는 거의 잠적한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이 예수님을 잉태시켰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난 정도였습니다.

4)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지금 읽으신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시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 성령님이 예수님 부활하신 후 50일 되던 날 즉 오순절 주일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5)그런데 성령님은 이미 이 세상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의미를 삼위 하나님 중 성령님이 표면에 서시고 또 강하게 역사하시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때에 이미 강림하셔서 지금도 저희들과 함께 계시므로 “성령이여 강림하사”하며 강림을 다시 소원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시간의 제목대로 성령님은 오셔서 무엇을 하셨으며 또 무엇을 하실까요?

1)우선 성령님은 성경을 주시는 영감 사역을 하셨습니다.(벧후 1:21) 이것은 진리 사역에 성령님이 앞장 서신 것입니다.(요 14:17)

2)기독교를 인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능력과 기적의 역사인 것입니다.(히 2:4)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것이지요.

3)성도 개인에게 중생, 신앙, 회개,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은혜가 말씀 사역을 통해 전달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벧전 1:23, 요 17:17, 살전 4:16-17)

4)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밝히신 성령님의 사역을 살피면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① 보혜사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성령님의 명칭을 “보혜사”라고 하셨지요. 이 “보혜사”라는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의 뜻은 “돕는 자, 중재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성도와 예수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시고, 모든 연약한 부분에 대하여 도와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귀한 사람이 어디를 다닐 때 그를 보호하는 보디가드가 옆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와 도와주심과 중재 사역을 힘입고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진리의 사역을 하십니다. 본문에서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고,(요 14:6) 또 그의 말씀인 성경입니다.(요 17:17) 따라서 성령님이 진리의 사역을 하신다는 것은 “성경으로 예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성경을 영감하여 기록하게 하셨고, 보존, 전파하시며 연구, 교육하는 능력을 주시고, 성경을 실천하는 자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진리 운동을 펴시는 일이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사역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멀리 하는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역사는 불신자들에게는 접촉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7절)

③ 성령님은 성도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17절 끝에 보시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항상 함께 계신다”(마 28:20)고 하셨는데 그 말씀도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성도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을 받기 위하여 이리 가고 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은 배우러 다닐 수 있지요. 성령님은 어떤 특정인의 손가락질에 따라 던져지는 그런 존재도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절대자의 능력을 가지시고 성도와 함께 계셔서(딤후 4:16) 자기의 뜻에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함께 계신 것을 깨닫는 성도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며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성도의 마음 속에 내재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엡 3:17) 만일 성령님이 왔다 갔다 하셔서 성도가 성령님을 좇아다니면서 붙들어 모시는 것이라면 이는 날아가는 새를 붙잡으려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성령님을 좇아가서 모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성도가 거듭날 때 성도의 마음 속에 오셔서 항상 계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 속에 깨달아지고 성경을 실천하려는 마음의 결심이 이루어지면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님과 격리될 수도 없고, 성령님을 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는가? 음부에 가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에 계시다”고 하였습니다.(시 139:7-10) 이렇게 성령님은 동거하시고 내재하시며 진리로 역사하시고 보혜사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꼭 깨닫는 이번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의 방법은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이고, 또 성령 충만의 결과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어떤 이가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것이 부족하면 역시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82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 (요 14:16-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성령님의 명칭을 일컬을 때 “보혜사”라는 명칭과(요 14:16, 15:29, 16:7) 또 “진리의 영”이란 명칭을 각각 세 번(요 16:13, 14:17, 15:26) 쓰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란 말로 “대언자”란 뜻도 있고,(요일 2:1) 또 “안위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요일 2:1에 보시면 “예수님”을 “파라크레토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신다”는 의미는 “성령님 중에 또 다른 성령님이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고, 본래는 예수님이 대언자 역할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아닌 다른 대언자, 즉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2. 본문 16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 즉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하시므로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파송되어 오신 것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오셨고,(요 3:16)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것처럼(마 1:18) 성령님도 예수님의 청원과 하나님의 허락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3. 성령님은 오신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너희 속에 계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1)여기에서 “성령님을 너희에게 주사”하신 것은 성도가 성령님을 소유한 것처럼 마음껏 힘입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으로써 절대자의 주권을 가지셨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는 성도의 연약을 도와주시고(롬 8:26) 안위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너희에게 주사”라는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2)그 성령님은 성도와 함께 거하시되 “너희 속에 계신다” 하셨으니 성령님이 성도의 단체 즉 교회에도 계시고, 너희 속 즉 성도 개개인의 심령에도 계실 것을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성령님이 성도들 세계에도 계시고 개개인의 심령 속에도 계신 줄을 확실히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그러나 그 성령님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는 “함께 하시거나 내재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배척 받는 곳에는 들어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받지 않는 불신앙의 세계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님도 그들 세계에는 계시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총은 오직 믿는 성도에 한하여 주시고 역사하시는 은혜인데

4)그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계실 때에 “영원토록 계신다” 하셨으니 성령님은 언제나 성도를 떠나시지 않는 줄로 아셔야 하며 따라서 오순절 당시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결코 떠나시지 않는 단회적 강림 사역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의 요지는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어떤 사역을 하시며 또 어떤 결과를 나타내 주시겠는가?”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령을 받았다”하면서도 성령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는 곧 “성령님을 체험하면서 성령님과 함께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미국인하고 같이 살면 그 사람의 문화를 닮아가고, 시골 사람과 같이 살면 농사꾼이 되는 것처럼 성령님과 함께 하시면 역시 성령님을 닮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1)성령님은 인격의 신이시라. 성도에게 온전한 인격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형체와 모습이 없지만 “인격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 또는 예수님의 인격과 동일하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시고.(눅 10:21) 언잖은 일이 있을 때 근심하시며(엡 4:30) 안위하시고,(행 9:31) 슬퍼하시며(사 63:10) 죄가 드러날 때 책망하시고,(요 16:8)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요 15:26) 연약을 도우시고,(롬 8:26)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8)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롬 15:16) 롬 15:16을 보시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하시므로(고전 6:11) 성령님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과 동거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그 인격적인 생활인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2)성령님과 함께 하시면 성경을 깨달아 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이 진리의 영으로(요 14:17) 가르치는 사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진리를 가르치실 때 생각나게도 하시고,(요 14:26) 증거도 하시며(요 15:26)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하셨으니 성령님과 동거하는 성도는 마땅히 성경을 배우고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하셨고.(딤후 3:16) 말씀을 무기로 삼으시며(엡 6:17) 성경을 앞세워 역사하시기 때문에(요 16:13) 성경 중심의 생활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완성되고 끝내셨기 때문에(고전 13:8, 엡 3:5, 유 3) 성경 이외에 다른 말씀을 구할 필요가 없고 오직 주신 말씀만 따르며(고전 13:8)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4:6)

3)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교제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교통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고후 13:13에 보시면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하시므로 성령님은 교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교통”이란 용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로서 “연결 지우는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기줄로 전기가 통하고, 수도관을 통하여 물이 통하는 것처럼 성령님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연결 지워 주시고, 성도와 성도 사이도 사랑으로 연결지어 주셔서 늘 교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통은 말씀과 기도로 교통하게 하시고, 성도 간의 교통은 사랑과 봉사로 행하게 하시며 성령님의 증거하시는 역할은 성도의 전도 활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기도에 많이 끌리고 전도와 봉사를 많이 하는 성도가 곧 성령님과 동거하는 생활을 잘 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과 함께 사는 성도는 주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성경 중심으로만 살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을 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83과 성령님의 역사 토론 (요 16:13) 목록으로


크리스챤 신문 995호와 997호(81. 6.6, 6.18.)에서 여러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 운동에 대하여 토론하고 진정한 의미의 성령 운동에 대한 글을 남긴 일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그 토론 내용에 근거하여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하였습니다. 학자들마다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은 성경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토론에 참여한 신학자는 총신대 교수인 차영배씨와 장신대 교수인 박봉배씨, 그리고 미국의 맥 B. 스톡스 교수였습니다. 그 분들은 이구동서으로 “한국 교회가 성령 운동을 통하여 부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많이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하고, 성령 운동은 부흥 강사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인식 되었으며 또 이 운동을 “회개와 믿음과 심령의 역사에 치중하지 않고, 육체적, 물질적, 현세적 운동에 치중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회개, 겸손, 기도, 생활의 변화 등 내적 사역에 목적을 두었으나 오늘에는 사회 풍조에 편승되어 물질 문명 쪽으로 달려가고 있으며 기형적이고 대중 집회 의존적 형태로 비화되면서 교회나 교단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이 성령 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연구나 회개 운동이 등한시 되는 성령 운동은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하고, 또 공동체적 유익을 무시한 개인적 체험을 앞세우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성령 운동가 “홀텐버거”씨는 말하기를 “성령 운동이 기독교적이 되기 위하여는 이 운동이 꼭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또 자기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에 이바지 하여야 하며 또 개인보다 공동체적 강조가 뚜렷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운동은 진리와 사랑과 교회에 공통 합일과 유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토론에 근거한 내용을 몇 가지로 발췌하면

1)진리의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요 16:13) 진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요 14:6) 따라서 내용과 인격성을 포함합니다.

2)그리고 “그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의 목표는 성도를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고 읽게 하시며 연구하게 하시고 또 사랑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시 119:97)

3)그리고 또 성령님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셨으니 여기의 “자의”란 것은 그리스도와 기존적 성경을 떠나서 독단적으로 계시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요, 꼭 “듣는 것”만 말씀하시는데 이 “듣는 것”이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내실 것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장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냐”하시겠지만 이 장래 일을 말씀하시는 원칙도 역시 예수님과 공통합일된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요한복음 저자를 통해서 장래에 계시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님과 예수님과 성경”이 일치 역사됨을 강조하셨고, 또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계시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요 1:18, 14:9-10) 성령님을 대동한 삼위의 하나님과 성경 진리와는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4)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실 때 “보혜사” 또는 “진리의 영”이란 명칭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 성령님이 오시면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뚜렷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본문과 요 16:7-9에 보시면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즉 인간의 죄인됨과 인간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잘못과 인간이 공평치 못하게 판단한 일들) 세상을 책망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요 15:26)과 영원토록 성도와 함께 계실 것과(요 14:16) 성경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요 14:25)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성경과 동반하시고, 성도의 심령에 내재하시며 잘못을 지적, 책망하시고, 진리를 생각나게 하여 깨닫도록 가르치시며 진리 가운데로 향하여 실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성령님의 주된 역할에 따라서 진리와 가까워지는 은혜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마지막으로 성령에 대한 학술 세미나에서

1)총신대학 교수 차영배씨는 강조하기를 “성령님의 사역은 말씀의 윤리적 사역을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직접 사역도 하여 우리 영혼의 깊은 곳까지 능력을 미치게 하신다”, 또 “성령님은 말씀과 더불어 혹은 말씀을 가지고 사역하시며 오순절 이후에 내림하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되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범죄할 때에 책망하시고 근심하시며 회개치 않는 자에게 아주 떠나시지는 않으나 멀리 하시기도 하시고, 또 성령님은 피조물이 아니신 존귀한 인격이시기 때문에 기도도 하시고 원하는 자에게 더욱 가까이 하신다”(계 22:17)고 하였습니다.

2)그리고 장신대 교수이신 박봉배씨는 성령론적 윤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령론적 윤리는 규범과 상황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이고, 명령과 자유로운 복종을 일치시키며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특수성을 잘 조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려운 상황, 부조리하고 일치되지 않는 상황을 선하게 잘 극복하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하면서 부조리나 불일치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선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성령의 역사를 바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또 성령님에게 붙잡혀 사는 자는 언제나 성령님이 자기 속에서 자기를 주관하시고 말씀 표준에 입각하여 바른 결정을 내리시도록 자기를 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미국의 오랄 로버트 대학 교수인 “맥 B. 스톡스”는 “성령과 성도의 삶”에 대하여 성령님이 성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여섯 가지로 말하였는데 ① 성령은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시고 죄를 고백시키시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는 역사를 하신다. ② 성령님은 택한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갖게 하신다. ③ 성령님은 성도의 믿음을 차원 높게 인도하시며 성화의 체험을 하여 예수를 닮게 하신다. ④ 성령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임을 확신케 하신다. ⑤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 속에 내재하시어 하나의 세례와 믿음과 소망과 생명을 결속시킨다. ⑥ 성령님은 말씀 전파와 교육과 기도와 영혼의 질병 치유 등 유익한 은사를 베푸신다 고 하였습니다.

3. 이상의 증거에서 저희들이 결론적으로 깨달으셔야 할 것은

1)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성령님의 역사를 두고 잘못된 생각과 행동에 빠져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주시하셔야 하고, 또 이런 상황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표준에 의하여서만 지적되고, 교정할 수 있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또 성령님은 말씀 전파를 떠나서 역사하시지 않으며(과거 우리 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전무하였음.) 언제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과 성경에 일치되는 사역만 하시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① 성경 지식이 능해지고, ② 자기 죄를 회개하며 ③ 죄를 두렵게 여기고, ④ 믿음의 확신을 가지며 ⑤ 충성과 헌신을 겸손하게 행하고, ⑥ 적극성 있게 진리를 복종하며 ⑦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고, ⑧ 부조리한 상황을 선하게 극복하며 ⑨ 그 다음에 말씀 전파나 기도나 권면이나 병고침 같은 은사의 활동도 주신 은혜 따라 유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갈망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고 진리를 더 연구하시며 내재하신 성령님이 성경을 앞세워 감동하시는 뜻대로 자기의 생활을 맡기면서 최대한 복종하고 헌신할 때 더 발전할 수 있고, 더 영적 차원이 높은 신앙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8부 감사절 설교

제84과 감사에 대한 3대 절기 (출 23:1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의미로 “감사에 대한 3대 절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무교병의 절기와 맥추절과 수장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무교병의 절기는 유월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절기이고, 맥추절과 수장절은 물질과 관련한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 3대 절기 속에는 신령한 은혜를 감사하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생의 양의 피로 나타낸 계시적 의미가 있어서 보혈의 공로와 속죄의 은총을 감사하는 뜻이 있고, 맥추절은 신약시대의 성령강림절의 예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1. 무교병의 절기인 유월절은 어떤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까?

1)유월절은 “넘어간 절기”란 뜻으로 애굽의 초태생을 죽일 때 문설주의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재앙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요, “무교병의 절기”란 그 유월절 기간에 “무교병(누룩없는 떡)”을 먹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왜 누룩없는 떡을 먹게 하였을까?할 때 그 당시에 바로왕의 강퍅속에서 출애굽의 명령을 기다리는 상태이니까 누룩을 넣어 부풀린 떡을 만들 기회가 없었을 것이요 또 딱딱한 떡을 먹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2)이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21일까지 7일 동안 지키는데 유대력으로 1월을 “아빕월”이라 하고 그 시기는 양력으로 3-4월 어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관련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① 재앙을 면하는 은혜입니다. 그 때에 애굽의 초태생은 다 죽는데 선민의 집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유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양의 피 즉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심판의 재앙을 면하는 은혜를 뜻하는 것이요 ② 출애굽 자체는 해방의 자유를 얻은 복인데 정치적 자유, 신앙적 자유, 인권의 자유, 생활의 자유, 그리고 옛날 조상의 고향에 갈 수 있는 자유까지 힘입는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노예에서의 해방은 곧 인권의 자유요, 바로왕의 속박에서의 해방은 정치의 자유요, 우상의 나라 애굽에서의 탈출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유인 즉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이 모든 은혜를 다 받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 반대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유를 위하여 고향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때로는 생명도 버리는데 가족이 반대하는 정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큰 연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자유얻는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는 불신앙에서 믿음을 갖고 천국을 향하는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생활 이상 더 보람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맥추절은 77절이라고도 합니다.(출 34:22) 77절이란 유월절을 지키는 7주 지난 때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또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리는 절기이어서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출 34:22, 레 23:10) 맥추절, 77절, 오순절, 초실절이 같은 뜻인데 맥추절, 초실절은 농사 열매를 잘 거둔 복을 감사함이요, 77절, 오순절은 성령강림을 예표하는 은혜요, 또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고전 15:20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맥추 감사도 물질적 은혜에만 국한하는 절기로 알지 않으심이 좋을 것입니다.

3. 수장절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년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의 혜택과 병충해 예방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소출을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어떤 농부든 자기의 노력과 기술로 소득을 얻은 줄 알면 안 될 것입니다. 땅과 햇빛과 공기와 비와 결실기를 주셨고 씨를 주시고 병충해의 예방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하고 그것을 저장하여 겨울을 지내도록 하시는 은혜입니다. 또 이 수장절을 초막절이라고 신 16: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의 절기는 양력으로 9,10월 어간이고(유대력은 7월) 15일 간을 지키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초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레 23:33-34) 그러니까 농산물 소득의 감사의 목적도 있고 또 이스라엘 조상들의 광야 40년동안 초막생활 속에서 지켜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최고의 문화 혜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혜의 말씀인 성경이 넉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감사와 감사 생활은 항상 넘쳐야 할 것입니다. 이모 저모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성도의 감사를 기대하시지 않겠습니까? 선민에게 3대 절기를 주신 하나님은 성도의 감사 생활을 잘 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절기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감사로 영광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85과 감사의 교훈들 (시 118:1-9) 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감사의 교훈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저희들은 맥추 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의 유래는 출 23:16에 근거한 것으로 이 계명을 주신 때는 출애굽 때였고 이 계명을 실천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곡식인 보리를 거두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에 드린 감사의 의미는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일과 가나안 땅을 주신 것과 또 처음 곡식으로 보리를 수확하게 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리수확은 양식주신 은혜이고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는 자주 국가와 농경지를 허락하신 은혜이며 또 출애굽에 관한 은혜는 영적으로 구원의 은혜는 물론 현실적으로 보호, 인도 및 생존케 하신 모든 은혜를 포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맥추 감사절을 전통에 의하여 지키거나 감사의 설교를 듣고 헌금하는 절기로만 지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희들의 감사 생활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고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감사 생활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일깨움을 받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서 감사 생활을 장려하신 말씀들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살펴 보시겠습니다.

1)제사와 예배는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최초에 드린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자기가 농사 지은 소출로 예물을 드렸고, 노아의 제사는 홍수에서 구원받은 후에 감사로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예배란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한 성도의 응답”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배와 제사가 곧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시 56:12)

2)또 레 7:13(겔 46:2)에 보시면 “감사제” 또는 “화목제의 감사 희생”이란 말씀이 있으니 이것도 제사를 통한 감사의 표현을 나타내신 것이요, 또 하나님께 나갈 때는 감사하므로 나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시 95:2, 100:4)

3)기도할 때도 “감사하므로 아뢰라”(빌 4:6, 살전 1:2)고 하셨으며

4)천국에도 감사가 넘친다고 하셨습니다.(계 4:9)

3. 감사 드리는 방법에 대하여

1)제사(예배)로 감사하고

2)전심으로 감사하며(시 9:1, 138:1)

3)예물을 드려 감사하고(렘 17:26, 레 7:13, 겔 46:2)

4)찬양으로 감사하며(느 12:24,27,38,46)

5)감사의 전문가를 두어 반차를 좇아 감사하고(느 11:17, 12:24)

6)감사의 내용을 소상하게 아뢰라 하셨으며(대상 16:8-36, 시 136:1-36)

7)정직한 마음으로 감사하고(시 119:7)

8)밤중에 일어나 감사하며(시 119:62)

9)기쁨으로 감사하고(시 51:3)

10)자원하며 감사하며(겔 46:12)

11)기도로 감사하고(단 4:34)

12)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하며(골 2:17)

13)쉬지 말고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 2:13, 골 4:6)

4. 무엇을 감사하였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감사하는 내용들을 보면 현실적 축복에 대한 것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집을 사서 감사합니다. 자동차를 구입하여 감사합니다. 생일을 감사합니다. 입학을 감사합니다 등등. 그러나 현실적인 축복은 성도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받는 것이고 특히 의식주 같은 것은 인간 아닌 동물들도 받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현실의 복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으면 그 일들에 대한 감사를 많이 할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도가 보편적으로 감사하는 일들과 성경에 나타난 감사에 대하여 대조해 보면 많은 성도들이 자신과 현실에 대한 문제로 감사를 많이 하고 성경에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일들을 감사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 11:25에서 “하나님이 계시로 자기를 나타내 주신 일”을 감사하였고, 요 11:41에서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였으며 롬 1:8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전파되는 것”을 감사하였고, 고전 15:7에서는 “부활과 함께 이김을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였으며 고후 9:15에서는 “여러 가지 은사 주시는 것”을 감사하였고, 살전 5:18에서는 “범사”를 감사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성경에 나타난 감사의 내용이 얼마나 고상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5. 그런데 또 중요한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하신 일들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분에 대한 감사는 마치 자식이 위대한 아버지를 두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시 118:1에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롭고 능력이 있으며 사랑과 공의로움에 대하여서도 당연히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기사가 대상 16:8-36에 나타나 있고 또 시 136:1-36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실 때 베푸신 모든 은혜와 능력에 대하여 감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택한 백성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신 하나님,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 등입니다. 이 내용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심에 대한 감사가 잘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취지는 감사의 내용을 확대하는 깨달음을 가지시되 하나님 신분에 대한 감사와 영적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86과 감사하며 삽시다 (시 138:1-8) 목록으로


1. 본문은 다윗의 감사시 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대목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곧 감사를 받으실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내용과 감사할 이유와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본문 중에 “주께”란 말씀과 “성전을 향한다”는 말씀, “주의 이름” 또는 “여호와의 도를 노래한다”는 말씀이 감사받을 대상을 말씀하신 것이고

2)감사할 이유는 인자하심이 성실, 영원하고 말씀을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으며(성경의 권위를 감사한다는 뜻) 기도를 응답하시고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시며(믿음을 굳게 하여 주심) 높은 왕들도 말씀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시며 높은데서도 낮은 자를,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고 원수의 노를 막으시며 환란 중에서도 소생하게 하시고 오른손으로 구원해 주시며 자신과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감사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한 것처럼 저희들도 감사할 내용을 많이 아셔야 할 것입니다.

3)감사의 방법은 찬양과 경배라고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의 성전을 향해” 경배하였습니다.(2절)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임재하여 마음 속에 계시고 어느 곳에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감사 받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것으로 주시기만 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죄를 빼놓고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의 것으로는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감사의 표현 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도로 감사하며 찬송하고 복종하며 헌신하고 소산의 첫 열매와 예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또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살후 1:3)하셨고, 또 감사의 절기로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출 23:14-17, 신 16:10) 감사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절 때에 세 가지 은혜를 받고 감사하였습니다.

1)처음 수확으로 밀과 보리 양식을 거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두 차례 수확을 합니다. 초여름에 밀과 보리 등을 거두고, 가을에 포도와 감람 등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추절 때는 처음 익은 열매 소득으로 감사하고, 수장절 때는 마지막 거둔 것을 감사하면서 겨울철에 먹을 것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맥추절 때의 소득은 현재의 식생활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고, 수장절 때의 소득은 미래의 양식 주시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 성도들은 양식 걱정을 안하고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다음 맥추절 때 주신 두 번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출 19:1-20, 20:21에 보시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가 유월절을 지낸 후 50일 후에 받았는데 그때가 곧 칠칠절이고 오순절이며 맥추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과 성경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십니까?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지요.(요 1:1) 또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라”고도 하셨습니다.(눅 1:37)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기 때문에 종일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시 119:97,103) 요즈음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참으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능력과 함께 삶의 방도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제주도 수련회에 가신 장로님이 혼자 가서 미안하다는 전화를 받고 ‘괜찮습니다. 나는 공짜로 데리고 간다 해도 안 갔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말씀에 끌리는 것을 더 큰 은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3)세 번째로 맥추절 때 주신 은혜는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다 하나님이십니다. 성탄은(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란 이름을 갖고 세상 사람처럼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33년 만에 다시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성령님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는데 성령님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 때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시지 않고 항상 성도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오순절 시기는 곧 맥추절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에 받은 보리 양식 주신 은혜, 율법의 말씀주신 은혜, 성령 보내신 은혜를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방황하면서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연단시켜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셔야 하겠습니다. 욥 23:10에 보시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하였고, 시 119:71에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저는 어려운 교회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또 있을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무슨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교육과 연단의 기회로 이용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 생활이 환란이라면 바울사도가 환란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를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가장 위대한 자가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이지요?(마 11:11) 그러면 세례요한이 왜 죽었습니까? “왕이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잘못이라”라고 지적한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자신과 직접 관련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적 정화를 위하여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적 평화를 위하여 어려움을 견디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잘 감당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87과 모든 은혜 (시 116:12-14) 목록으로


1. 이 시간에 말씀 드릴 제목은 “모든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란 뜻입니다. “은혜”란 뜻은 거저 받은 선물이란 뜻입니다. 선물은 좋은 의미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다 은혜인데 다 좋은 의미로 주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맥추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처음 곡식을 수확하여 40년 만에 보리밥 먹게 된 것을 감사드린 절기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첫 곡식 보리 농사 지은 것을 감사하는 절기”로 알기 쉽지만 기가 막힐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40년 동안 곡식 구경을 못했습니다. 만나만 먹었으니까요. 또 40년 동안 농사 지을 땅도 디디지 못했다가 자기 땅, 자기 밭에 농사를 지었으니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3. 요즈음 농촌에서 보리 농사 지으면서 감격할 만한 은혜로 여길 사람이 있을까요? 농사 짓기 싫고, 보리밥은 맛없고, 땀 흘리는 직업은 천한 직업이라고 불평하며 감사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농사 짓는 직업에 불만을 품으며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4. 농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보리 농사입니다. 보리 농사는 낫으로 베어 말려서 타작할 때 날씨는 덥고 땀은 나고 보리 깔깽이 먼지를 써야 하며 또 보리 방아를 찧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돌절구에 소두 한말쯤 붓고 물을 부어가면서 돌 괭이로 한참 찧어야 껍질이 벗겨집니다. 그렇게 많은 수고를 하여 보리밥을 만들면 “노인들은 맛없고 토각거린다”고 합니다. 또 꽁보리밥을 부끄러운 음식으로 여겼습니다.(제가 신학생 때 부산의 가야 제일교회를 개척하신 오상진 목사님(당시 전도사)의 초청으로 그 교회에 갔을 때 예배당은 작은 부록크 집에 가마니 거적을 펴고 15명 정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오전도사님의 사모님이 저녁 밥상을 차려왔는데 완전한 꽁보리밥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사모님을 37년 만에 만났습니다. 나는 그때 손님으로 가서 꽁보리밥을 대접받은 것이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놀랐습니다. 37년이 지난 엇그제 전국 교역자 수양회에 가서 그 사모님을 보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자녀들에 대하여 물은즉 그 목사님은 2남 2녀를 두셨는데 큰 아들 목사가 목사 장로를 가르치는 유명한 목사가 된 것입니다. 제가 그 당시 꽁보리밥 추억을 말씀드렸더니 “그 당시 가난한 환경에서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이 아버지 목사를 원망하며 목사 되라 하여도 안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큰 목사가 되었다”고 감사히 여기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취지는 그 목사님의 옛날 가난한 생활의 환경이 지금 가야 제일교회가 된 밑거름이었고, 또 아들을 신앙으로 가르친 밑거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성도이면 반드시 현재 당면하는 여러 가지 환경에 대하여 은혜로 여기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환경만 모든 은혜가 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은 불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는 불만의 대상이나 불만의 환경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6.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저도 오래간만에 교역자 수양회에 가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더 주시지 않고 발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같은 목사가 생각하기를 “이까짓 작은 교회, 몇 사람 안 되는 성도, 적은 생활비, 믿음 약한 교인”하면서 새교회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안다면 그것은 나에게 주신 교회 환경을 모든 은혜에 넣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왕이 사약을 내리면 그것도 “성은이 망극하다”하고 왕께 절하고 무릎을 꿇고 마시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된대로 자기 받은대로 자기 환경대로 사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을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생긴대로 사는 것을 좋게 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머리 색깔, 쌍꺼풀, 귀 뚫는 것 등 별 것을 다 장식하여 자기의 모양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7. “혹 사람이 자기 환경에 만족하고 그대로 있으면 발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환경을 무조건 만족하여 모든 은혜에 귀속시키는 것과 더 이상의 발전을 구하는 것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자기의 환경을 다 은혜로 여기면서 감사하고도 얼마든지 더 좋은 환경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며 소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혼자 사는 것을 좋은 환경이 아닌 줄로 여기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의 십자가(개인 또는 가정의 고난 꺼리)를 지는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부산에 황택관 집사 가족은 장애인 딸을 데리고 삽니다. 나이는 22세인데 정신 연령은 4세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까? 안 여겨야 합니까? 성경은 은혜로 여겨야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은혜” 속에는 좋은 것, 어려운 것이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장애인 수용소에 가서 봉사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 선진국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중증 장애인을 입양해 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 된 부모가 주님의 이름으로 장애인을 돌보려 할 때 “하나님이 자기의 딸을 장애인으로 주셔서 봉사하게 하셨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나는 그런 말로 황집사 가족을 격려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8. 야곱의 생애는 험악하였습니다.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130년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떠나고 나그네 생활 20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노력한 고달픈 생애, 노력의 대가도 외삼촌께 많이 뺏겼습니다. 어찌 좋은 날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창 33:11에 보시면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소유도 많아졌고, 자식들도 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으며 또 형님으로부터도 은혜를 힘입으려고 합니다.(33:5,8)”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의식 속에는 자기의 고달픈 것과 각박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별로 의식되지 않았고, 반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란 생각만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자녀 13명을 낳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성도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야곱은 열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저나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이웃과 생활 조건들에 대하여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감사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9. 만일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과 이웃에 대하여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만명을 상대로(여자와 아이를 제하고 5000명을 먹이셨음) 떡 5개와 물고 두 마리를 놓고 축사하신 뜻은 지극히 작은 것, 또는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괴로운 것도 은혜다. 이 형편이 바로 은혜다. 이 환경이 바로 은혜다. 참 감사합니다.”하는 신앙의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88과 은혜와 감사 (시 116:12-14) 목록으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은혜와 감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보답(감사)에 관한 문제로 마음을 쓰고 연구하는 자세를 나타냈습니다. 또 본문에서 은혜에 관한 것은 말씀하지 않았으나 감사의 보답을 이행하는 방법으로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 앞에서 자기의 서원을 갚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감사 생활의 결론은 “구원 받은 심령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서 자기의 서원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만한 어떤 서원(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서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라(갚는다. 감사로 보답한다)고 한 것입니다.

1.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나는 은혜의 보답으로 이런 일을 행하여 영광을 돌리겠습니다.”하고 그 선원한 것을 하나님과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성실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감사의 생활치고는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 교회는 감사를 물질로 표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 감사의 예물로 소자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또 주님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쓰는 것도 역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사람이 쓰는 것이고, 하나님이 직접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을 직접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신앙에 관한 열매인 것입니다. 영적 신앙에 관한 열매는 하나님이 직접 느끼시고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희들은 감사의 예물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신앙을 키우는 일로 서원을 이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이나 사과나 고기를 안 잡수십니다. 돈을 한 봉투 드려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돈은 인간들이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11:6) 그러니까 성숙한 믿음의 열매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어린 아이 같지 않을 것이고, 세상 사람 같지도 않을 것이며 예수님을 많이 닮은 성인 같이 되겠지요.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는 사람이 아니고 창공을 나는 신령한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를 쳐서 창공을 날음같이 올라갈 것이라”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성도들의 신앙도 “하늘로 날라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그런 믿음 가질 것을 서원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먼저 감사하고 보답하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또 신령한 믿음으로 서원 기도를 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가 무엇입니까? 순서대로 생각해 보시지요.

1)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생명이상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 명예, 권세보다 생명, 건강, 자기가 제일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주님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2)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창조자를 거역하고 영생없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마치 마귀의 노예나 짐승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할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구원의 잔을 들고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존재란 짐승과 같다고 성경이 말씀하셨습니다.(시 49:20) 또 저희들은 구원의 은혜 속에 포함된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 속에 기가 막힐 은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① 선택의 은혜가 포함되었습니다.(당선...미국 대통령:부시, 고어) ②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범을 보이셨고. 우리의 친구와 형제가 되셨으며 십자가로 구속해 주셨고, 또 영원토록 중보해 주시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그 속죄 은총에 따라서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④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셨습니다. ⑤ 그 다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또 성경 말씀과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3)만물의 은혜를 주셨습니다.(롬 8:32) 땅 한 평 없는 것이 아쉬우면 지리산 정상에 올라가서 “보이는 땅이 다 내 땅이라”고 생각하시고, “그 곳의 맑은 공기가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마땅히 만물의 은혜를 깨달을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함께 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실감하십니까? 만족과 희망의 대상이 없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으나 존경과 희망의 대상이 있는 모임에는 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미천한 인생들을 자녀로 삼아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여러분을 찾아 오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마음 속에도 계시고(엡 3:17) 집에도 계시며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창 5:24, 46:4) 핸드폰을 쓰면서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5)보호 인도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겨에 보시면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과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 많습니다.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독수리의 새끼처럼 훈련시키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신다”(신 32:10-11),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셨다”(사 49:16), “어머니가 젖먹는 아이를 기억하듯 하신다”(사 49:15), “암닭이 병아리를 품듯 하신다”(마 23:37), “바다 끝에서도 너를 인도하신다”(시 139: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실감있게 깨닫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6)희망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고(롬 15:13), “소망은 항상 있는 것이라”고 하셨지요.(고전 13:13) 그러니까 환란과 억울함과 역경과 죽음에서도 소망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소망이 없다면 짐승처럼 “살았으니까 먹고 먹었으니까 사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침마다 소망을 주시고(애 3:23) 소망을 안 주시는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롬 5:3, 빌 1:2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겠지요. 이 시간에는 대표적인 것들로써 생명의 은혜, 구원의 은혜, 만물의 은혜, 함께 해 주시는 은혜, 보호 인도해 주시는 은혜, 희망을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들은 은혜를 실제적 체험으로 깨닫고 값진 감사의 생활로 보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89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1-2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제목 아래 바울 사도의 감사 생활에 대한 신앙 고백을 교훈받고저 합니다. 바울사도는 신앙 생활과 사명 생활의 모범자이십니다. 고전 11:1을 보시면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신앙 생활, 사명 생활, 감사 생활을 본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1)바울은 본명이 사울인데 그가 개명한 후 선교사 파송을 받으면서 이름을 바울로 고쳐 썼습니다.(행 13:9) 사울이란 이름은 희망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이란 이름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방 지역과 로마 영지로 선교 사역을 나가는 만큼 로마식 이름이 필요하였을 것이요, 또 바울의 이름이 “작은 자”란 뜻을 가진 것은 그가 사명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기를 “작은 자”로 취급하는 겸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바울의 이름이 드러난 때가 오순절 직후인데 그때에 청년으로 알려진 것을 보아서(행 7:58) 바울의 나이를 예수님의 출생과 비슷하게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 “벤야민 지파”라 하였으니까(빌 3:5-8) 정통 유대인이 틀림 없고, 출생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타국 영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조상들의 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학문(가말리엘 문하)과 어학(헬라어)은 물론 율법에도 능통하였고, 유대인의 가규에 따른 장막 만드는 법도 익혔으며 그 당시 종주국인 로마의 시민권을 받는 등 현실적인 축복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3)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복음적 신앙에 반대되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 신앙에 얽매여 있었고, 또 바리새인 단체원이 되어 복음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방조하였음은 물론 많은 사람을 잔해하였고,(행 9:21, 갈 1:13) 더 나가서는 다메섹에 사는 신자들을 호별 수사하여 그들도 핍박하려고 제사장의 공함을 가지고 살기 등등(행 9:1)한 자세로 행하다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에 굴복당하여 이끌림을 받고 변화 개종되어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4)그러면 이 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 그의 생활이 어떠하였는가?할 때에 그는 전적으로 사명에 자기를 헌신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현실적 기복은 전부 내던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고난에 참예하기를 더욱 힘썼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은혜 받고 예수 믿은 덕택에 잘 되고 평안하며 또 명예로워지기를 바라는데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한 것입니다. 빌 3:10을 보시면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고 힘써 노력을 하셨다”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았음 같이 자신도 주님을 위한 고난을 받고 더 영광스런 부활을 받으려고 힘을 쓰신 것입니다.

5)그래서 바울은 우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현실적 축복들을 배설물처럼 내버렸습니다.(빌 3:8) 명예, 물질, 권세를 다 내버리고 오직 하늘에서 주실 부름의 상을 위하여 진력을 하시니(빌 3:14)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충만과 사명의 충실함과 고난과 내세의 상급을 많이 예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6)또 바울은 신령한 은혜와 사명을 위하여 고난을 자초하셨으니 그 고난의 생애가 어떠 하였습니까? 가정도 없이 항상 나그네 생활만 하시면서 핍박자들로부터의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생명의 위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만을 겪으셨습니다. 누가 바울의 고난을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고후 11:25-를 보시면 “수고를 넘치도록 하셨고 옥고도 많이 치렀으며 여러 번 매맞아 죽을 뻔하였고 태장과 돌로도 맞고 파선하는 위험으로 깊음에서 1주야를 지냈으며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또 날마다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니.....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난한 자 같고 무명한 자 같으며 욕을 당하는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았다(고후 6:8-10)”고 하셨습니다. 또 딤후 4:13을 보시면 바울이 마지막 옥중 생활을 하실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갖고 오라” 하시므로 옥중에서의 추위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고, 또 딤후 4:14에서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을 몹시 해롭게 하여 고난을 받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바울 사도 앞에서는 자기의 수고나 충성이나 고난이나 희생을 내세울 수 없을 만큼 그는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흔적”을 가졌다고(갈 6:17)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이렇게 믿음과 사명을 위하여 한 평생을 고난으로 살아간 바울이 무엇을 감사 하셨는가?할 때

1)죄에서 건짐받은 은혜를 감사한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사망과 지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인데 오직 예수님이 자기를 사망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에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 것입니다. 질병은 육신 생명을 끝내주지만 죄는 영원히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죄에 이끌리는 자신의 연약을 생각할 때 몸서리 쳤으나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함을 느껴서 자기의 생애를 불태워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은혜도 귀하지만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 만큼은 성도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이므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롬 7:24-8:2)

2)사명주신 은혜를 감사하신 것입니다. 딤전 1:12을 보시면 “내가 내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히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자신은 본래 하나님께 대하여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하여금 변화받게 하셨고,(고전 15:10) 능력도 주셨으며(딤전 1:12) 또 죄인 괴수였던 자기에게 직분까지 주셨으니 그 은혜가 대단히 컸던 것입니다. 평신도님들도 교회에 나오셔서 조금만 숙달되면 다 직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직분을 받을 때는 직분의 명칭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분을 어떻게 주셨으며 “내가 그 직분을 어떤 자세로 감당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직분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는 꼭 주인이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실 것입니다.

3)주님을 따르는 중에 당하는 고난을 감사하며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충성하다가 고난 받는 것을 괴롭게 안다면 어떻게 그 고난을 감당해 나가겠습니까? 고난을 당하는 성도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고난은 의례 따르는 것이고, 흥미로운 것이며 희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야만 고난을 견대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롬 5:3을 보시면 “환난이 성도에게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주기 때문에 즐거워한다”하셨으며 딤후 1:12에서는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셨고, 고후 8:1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구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지요. 또 고후 12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사셨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한 줄로 믿어 감사하셨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한 연약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한다”(고후 12:9-10) 하셨으니 이것이 곧 고난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감사였던 것입니다.

4)범사에 감사하셨습니다. 살전 5:18에서 말씀하셨지요. 우리 성도는 범사에 소망을 갖고 감사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를 유익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롬 8:28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신다” 하셨고, 사 48:17에서도 “하나님은 성도를 유익하게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자녀들이 대학을 못 가면 “이것이 안 되는 일인가”하여 감사를 안 하실는지 모릅니다만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다른 인도가 있으실 줄로 믿으시고 더욱 희망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갈 때 안 되는 것 같았으나 잘 되었고, 모세가 나일강에 떠내려갈 때에도 안 되는 것 같았으나 잘 된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것을 유익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을 믿는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죽음이 기다린다”하면서 얼마나 말렸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붙잡히고 결박받으며 재판까지 받았지만 결국은 그 길이 로마의 시위대원들에게(빌 1:13-14) 복음을 전하는 방편이 될 줄은 하나님만 아시고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체험을 너무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일보다도 성도가 은혜 받는 일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등을 크게 기뻐하며 감사하셨습니다. 흔히 감사 헌금을 드릴 때는 자신이 받은 은혜 때문에 감사하지요. 다른 이의 은혜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거나 또는 교회와 복음의 명예 드러난 것 때문에 감사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성도의 믿음 자라는 것을 보니 감사하다”(롬 1:8), “너희가 구변과 지식이 있으니 감사한다”(고전 1:4), 또 “골로새 교회가 사랑으로 화목하고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바라본다니 참 감사하다”(골 1:4-5),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졌다니 참으로 감사한다”(살전 1:2-3)하시므로 복음의 역사가 확대되고 교회가 평안 중에 발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들을 자기가 받는 세상의 복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서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감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감사절을 맞이한 저희들도 바울 사도와 같이 ①죄사함 받은 은혜, ② 사명과 직분 주신 은혜, ③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은혜, ④ 범사를 유익하게 하시는 은혜, ⑤ 성도가 은혜를 받아 영광 돌리는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이고, 그 감사의 방법으로는 자기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며 더욱 헌신하는 생활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90과 감사의 제사 (시 50:11-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감사 생활이 기도 응답의 첫째 조건이 됨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① 7-13절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해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일깨워주신 말씀”이고, ② 14-15절에서는 “환난에서 건짐 받는 방법”으로 감사와 서원을 실천하는 것과 기도의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의 첫째가 “감사의 생활”임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감사 생활과 감사의 제사(예물)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환난에서 건짐 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를 일깨워주심에 대하여

1)“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하셨으니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억세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형통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하고, 누예는 뽕을 먹어야 살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을 하여야만 형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똑똑한 것도 아시고 미련한 것도 아시며 어떤 인간이 지혜롭다고 자처하면서 자기 함정으로 들어가는 것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모든 인생의 길을 통치하시며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자기의 유력성을 내세워 형통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여 내가 주의 말씀을 듣겠나이다”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귀를 기울이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2)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조용하게 계시고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으시면 멀리 계시고, 성도와 상관 없이 계신줄 아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7절에서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면서(사 45:15) 성도를 감찰하시고(시 139:1-4) 지키시며(시 121:3-6) 호흡을 주관하시고(행 17:25) 머리털까지 헤아리신다(마 10:30)고 하셨습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는 그 품에 안은 자녀를 잊어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성도를 잊지 않는다(사 49:1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관심을 민감하게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은 짐승을 좋아하시고 짐승을 필요로 하시는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데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계시하는 의미가 있고, 따라서 성도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믿음과 헌신을 드려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짐승의 고기를 좋아하시는 줄로 오해하고, 또 자기 것으로 좋은 예물을 드리므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하지 않으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라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수 염소를 취하지 않으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내 것이라...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8-13절)고 하셨습니다.

4)그러면 구약의 성도들에게 왜 양이나 소나 비둘기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수소나 염소의 고기를 잡수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지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상징적으로 알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① 짐승이 죽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② 짐승이 피흘리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③ 그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를 열납하시고 우리의 죄책을 대신 담당케 하실 은혜를 예표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짐승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오해하였으니 참으로 큰 무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여기에서 저희들은 올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①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요,(창 1: ) 조성자이시며(렘 10:16) 주인이요,(행 17:24) 통치자이시며(시 93:1) 처분자(롬 11:36)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인생도 하나님의 것입니다.(사 43:1, 44:24) ② 또 하나님은 만물을 인생들에게 주셨습니다.(행 17:25) 생명과 호흡을 겸하여 “만물을 다스리라”(창 1:26)하셨고, 여기에 덧붙여서 독생자까지 주신 것입니다.(롬 8:32) 만물은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고, 모래 한 알도 처분은 못합니다. ③ 사람은 흔히 자기가 얻은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도 하나님의 뜻대로 쓰게 하시기 위하여 임시로 맡겨주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하는 재물을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주관하십니까? 신 18:18에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고, 사 45:3에서 숨은 보화를 발견하여 얻게 하시며 잠 8:21에서 그것을 저축하게 하시고, 또 전 2:24, 5:19에서 그것을 누리게도 하시며 또는 전 6:2에서 타인이 누리게도 하시고, 눅 12:20에서 “타인에게로 넘어가게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④ 따라서 모든 물질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보존되며 또 주께로 돌아갈 날이 있으니(롬 11:36) 만물의 마지막이 있고,(벧전 4:7) 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므로(계 21:5) 모든 물질은 이 세상에서만 임시로 활용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⑤ 어떤 이는 재물이란 다 복으로만 누려지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래 만물이나 재물이 다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감사로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질 때는 버릴 것이 없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딤전 4:4) 그러나 재물을 잘못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취급하지 않으면 일만악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6:10) 물질은 의지의 대상이 되거나 유혹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⑥ 그리고 물질을 가장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마 6:21)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물질을 적당하게 쓰고 남는 것을 하나님의 교회에 드려서 주님이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⑦ 또 나는 물질이 적으니까 은혜를 부족하게 받은 줄로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물질을 과하게 가졌다가 하루 아침에 후회 막급한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한 성도가 물질을 많이 지니고 사는 것은 의로운 생활이 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 앞에서 물질을 적게 받았다 하여 복을 못 받은 줄 알면 안됩니다.

2. 마지막으로 “환난에서 건짐 받는 방법은

1)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4,23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셨습니다. 이 “감사의 제사”가 바로 여러분들의 일반 감사 헌금, 맥추, 추수 감사 헌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을 만났어도 그 환난 주신 은혜를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환난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기뻐하였다”(고후 12:8-9)고 하셨습니다. 기도자나 은혜를 구하는 성도는 모든 일에 감사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되고, 또 감사의 제사(예물)를 성실하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 서원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서원이란 성직자에게는 특정한 약속이 될 수도 있지만(삼상 1:11,21) 성도들의 보편적 서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성도는 세례를 받을 때 “잘 믿겠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겠습니다. 교인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등등의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런 서약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3)그리고 나서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건져 주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 살고 있고, 하나님은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신앙적인 성도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환난과 염려가 없다”할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치 못한 분이 상당히 많지요. 또 육신이 건강하면 명예에 관한 문제가 있고, 명예에 걱정이 없으면 책임 완수에 관한 문제가 있으며 책임 완수를 잘 하는 것 같을 때는 영적 빈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힘입는 방법은 ① 감사의 생활을 넘치게 하시는 것이고, ②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시는 것이며 ③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힘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 주일에 감사를 성실하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91과 감사의 시 (시 100: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감사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와 감사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중에 감사의 시를 발표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더욱 기뻐할 수 있으며 또 찬송하며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만족과 사모의 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이 “소자를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마 25:45)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소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행 17:25)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믿음과 찬송과 성실한 생활로 만족을 드리는 것이요, 실제로 섬김을 받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감사의 시를 읊게 된 내용

1.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되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로 말하면 선민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고, 신약 시대로 말하면 성도(거듭난 자)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적인 의미에서 모든 이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도 자신이 거듭난 은혜를 확신할 때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성도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으시면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고, 자신과의 관계를 특별하게 가져 주신 일에 대하여 큰 감사를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개인 자신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매일 매일 또 항상 느끼면서 사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며 영광 돌리지 않으면 다른 인간이 이를 대신할 자가 없다는 것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기를(또는 성도를) 지으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만물을 다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어째서 성도만 자기를 지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할까요? 불신자나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타락한 상태에서 거듭나는 은혜로 재창조하여 다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창조 해 주시지 않았으면 변화될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나게 하시는 것을 “새로 지음 받은 것이라”(갈 6:15)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하셨습니다. 육체적 창조도 중요하지만 영적 창조에 대한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보완과 성장도 역시 영적 재창조의 연장으로 여겨서 완전함에 나가는 생활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히 10:22)

3. 성도가 “하나님의 것” 또는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이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부모가 되어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의 것”이란 소유 개념을 뜻하고, “그의 백성과 그의 양”은 통치 양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자기와 가족 관계를 맺었으면 그 자식이 장성하기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하나님이 보호, 통치, 양육의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란 하나님의 보호를 뜻하고, “그의 백성”이란 통치를 뜻하며 “그의 기르시는 양”은 합당한 양육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시를 읊은 성도는 자기의 하나님이 자기에 대하여 보호, 통치, 양육해 주시는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아침 저녁으로, 또는 순간 순간 깨달아서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자기에 대하여 대대에 이르는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성도를 대하시지 않는다면 성도라 할지라도 항상 매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지 않으면 성도는 미래의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책임은 완벽하고 영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든든하고 희망스러운 일입니까? 세상이 아무리 혼돈하고 악이 성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악을 지배하시고 질서를 잡으시는 분이시며 또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도에 대한 책임이 영원 성실하시기 때문에 그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깊은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이 말씀을 늘 음미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92과 은혜를 감사하라 (눅 17:11-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를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2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촌에서 문둥병자 10명을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는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있습니다. 문둥병은 살이 썩고 냄새가 나며 몹시 부정한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대하 26:21, 레 22:2-4) 성전에 들어오지도 못하였고, 전염성이 있으므로 성한 사람과 격리되어 살아야 하며(민 12:10, 14:15, 5:2) 또 불치의 병으로 인정이 되어서(왕하 5:7)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것 외에는 치유의 방도가 없었습니다.(민 12:13-14, 왕하 5:8-14) 이렇게 성전에 나가지 못하니 저주의 병이고, 불치의 병이니 죽음의 병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많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또 성도들은 이 병에 대하여 부정적 인식을 가지면 안 될 것입니다.

2. 그때에 그 병자들은 멀리 선채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요”하고 외쳤습니다. 문둥병자는 성한 사람 앞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문둥병이 발병하면 즉시 제사장에게 진단을 받아야 하며 “부정하다”는 진단을 받으면 격리 생활을 하여야 하고, 혹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으면 또 제사장의 진단을 받아 “정하다”는 인정을 받고 결례식을 행한 후에 성한 사람처럼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므로 예수님께 호소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조차 없기 때문에 먼 곳에서 큰 소리로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즉시로 긍휼을 베푸셔서 그 열 사람의 병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1)“고쳐주셨다”는 말씀이 바로 14절에 나타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때는 병고침의 변화가 있을 때 “정하다”는 진단을 받고, 결례식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레 14:1-9) 그러니까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 것은 “너희 병을 고쳤으니 성한 사람되는 절차를 밟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루살렘 쪽으로 가다가 자기들의 병이 나아진 사실을 도중에서 스스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3)이 사실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전체적이고, 무조건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이라는 것은 열명을 다 고쳐주신 것이고, 무조건적이란 그들에게 병고침에 대한 특수한 믿음을 요청하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고질적인 사망의 병을 고침 받은 것을 깨달았을 때 크게 놀랬을 것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이 사망의 병을 고침 받은 열 명 중에 단 한 명만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1)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시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베풀라”고 교훈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들은 다 감사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명 중 감사의 책임을 느낀 자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해도 너무 했다, 설마 그랬을까?”하시겠지만 그렇게 감사가 인색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란 것을 잊으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 문둥병보다도 더 불행한 저희들의 죄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죄병은 말씀만으로 고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의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허락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의 죄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순간적으로라도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저희들도 감사를 외면한 사람들 측에 속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구할 때는 “주여 주여”하고 서원을 하면서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며 자기 고집대로 행하고 서원을 지키지 않으며 엉뚱한 정욕적 생활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3)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본문 16절에서 감사하러 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라 하셨고, 또 18절에서 “이방인 한 사람만 감사하러 왔다”하신 것을 보면 감사를 외면한 아홉 명은 모두 유대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감사를 안한 것은 오늘날 먼저 믿는 신자가 감사 생활을 인색하게 하는 것과 같고,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한 것은 마치 초신자가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또 문둥병을 고침 받고도 감사하지 않은 것은 저희들이 구원의 은혜와 자연계의 은혜 등 특별한 은혜를 힘입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5.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감사하러 왔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반응과 태도를 살펴보시면

1)“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하시므로 예수님은 열 사람의 병을 다 고쳐주신 것을 알고 계셨음을 말씀하셨고,

2)“그 아홉은 어데 있느냐”하시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사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의당하다”는 뜻을 표명하셨으며

3)또 “그 아홉은 어데 있느냐”하셨으니 “이제라도 그 아홉 명이 와서 감사함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4)“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하시므로 감사는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5)19절에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나니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죄사함의 영적 구원을 아울러 힘입혀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사 없는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을 고쳤을지라도 영적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린 이방인은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아울러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까지 힘입게 된 것입니다.

수십년 전에 총신생 김동길군이 “福樂園”이란 책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란한 가정에서 부모형제와 살았는데 그 아버지가 병이 들어 가산을 탕진하고 가난해졌는데 놀랍게도 그 아버지의 병이 문둥병으로 진단이 나와서 정든 가정을 이별하고 소록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몇 년만에 또 김동길 군의 형이 같은 병에 걸려서 역시 소록도로 가서 부자가 장기간 치료를 받는 중에 김동길 군은 구두닦이로 구걸을 하며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 그 아버지와 형이 음성 나환자로 퇴소하여 온 가족이 같이 만나고 같이 노력하여 과거보다 더 잘 사는 생활이 되니 크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내용의 책인 것입니다. 그때에 그 김동길 군은 아버지의 문둥병이 형님에게까지 번졌을 때 자기도 걱정을 하였는데 자기는 그 병에서 제외된 일이 큰 감사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는 사실과 자기의 온 가족이 그 큰 수난을 겪는 중에서 믿음을 주시고 역경을 견디는 힘까지 주신 것과 가족적인 절망 상태를 하나님이 치료해 주셔서 자기의 가정을 복락원으로 바꿔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어떤 역경과 불행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상당하게 붙들어 주시고 평안케 하시는 은혜를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93과 바울의 감사 신앙 (고후 1:8-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사도의 감사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성경에서 바울 사도 만큼 감사를 강조하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1)“항상 감사하라” 하셨고,(골 4:6, 살전 1:2, 살후 1:3, 엡 5:20)

2)“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하셨으며

3)바울 사도 자신도 환난 중에 즐거워하셨고,(롬 5:3, 고후 12:9) 오히려 소망을 가지셨으며(고후 4:17) 환난을 자랑하기도 하셨습니다.(살후 1:4)

4)또 자신의 일로 감사하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로도 감사하셨고,

5)기도할 때마다 감사를 앞세우게 하셨으며(빌 4:6, 골 2:7, 딤전 2:1)

6)감사하는 말을 하는 인격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고,(엡 5:4)

7)특히 죄사함 받은 은혜를 감사하셨으며(롬 6:17, 7:25)

8)또 과거에 보호받았고, 현재에 보호를 받으며 또 보호받을 것을 믿으면서 감사 생활을 나타내신 것입니다.(고후 1:10)

2.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실제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범사”라는 범위는 과거의 일, 현재의 일, 미래의 은혜가 다 포함되고, 또 자신을 위한 일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일까지 감사하신 것입니다. 모든 일 중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고, 괴로운 일, 즐거운 일도 있으며 소망적인 일과 절망적인 일도 있고, 또 성공적인 일, 실패하는 일도 있을 것인데 분명히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에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저희들은 반드시 믿음을 성숙시켜서 그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과 그것을 못하는 사람과의 인격 차이는 대단한 것입니다. 매사에 긍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과 부정적 자세를 갖는 사람, 매사에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과의 차이, 매사를 건설적으로 고쳐나가는 사람과 이를 포기해 버리는 사람과의 인격 차이는 대단한 것입니다. 또 믿음이 있고 없는 차이, 사랑이 있고 없는 차이, 감사가 있고 없는 차이는 바로 마귀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3. 그러면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은혜를 감사하였습니까?

1)바울 사도는 “환난과 심한 고통과 소망 끊어짐과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같은 고난이 무엇이었는지를 본문에서는 밝히시지 않았지만 다른 성경에 근거하여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들의 핍박과 살해 음모이고,(행 21:11, 23:12) 선교 여행 중 풍랑의 위험, 강도의 위험, 추위와 굶주림, 태형받은 일, 옥에 갇힌 일, 돌에 맞은 일, 육체의 가시(고후 12:7), 전염병의 위험 등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이런 위험이 항상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바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거기에 “맹수의 위험도 있었고 자기 질병의 위험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딤후 4:17-18)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런 위험에서 건짐을 받고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칼빈의 제자 “베자”란 사람은 600번이나 죽을 뻔한 체험을 하였다는 기록을 읽어보았습니다. 저희들도 “무수한 역경에서 구출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죄에서 건지신 일, 마귀에게서 속량하신 일, 심판에서 면제해 주신 일, 환난과 질병과 죽음의 위기 등에서(자신도 모르게) 건져 주신 일”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현재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을 감사하셔야 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하시므로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보호, 인도해 주심을 확신하면서 감사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시 136:1-2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착한 일을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이루시고(빌 1:6) 우리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21:7,8) 만유인력이 없으면 우주가 안정될 수 없고, 정부가 없으면 평화가 유지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가 없으면 우리가 평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또 하나님의 불편한 사랑이 우리의 미래를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오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질까?하는 점입니다.

1)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은 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사함과 영생을 소유하였으며 또 만물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고 능력이며 소망이고 구원이며 아버지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3)성도마다 주 안에서 보람있는 삶을 느낄 때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병욱 교수의 수필집에서 “사람이 왜 사느냐고 물으면 제멋에 겨워서 사는 맛에 산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제멋에 사는 보람이 꼭 있어야만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열 가지 일을 하는데 그 중 한 가지라도 보람을 못 찾으면 그에게는 기쁨이나 만족이나 감사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만이라도 보람을 느낄 때는 그 맛에 살게 되고 거기에서 행복과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작은 글을 썼는데 “나는 행복을 느낀다”는 제목입니다. “아침을 먹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설 때 행복을 느낀다, 직장에 가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업무를 시작할 때 행복을 느낀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행복을 느낀다, 집에 와서 가사를 정리하고 평안히 누울 때 행복을 느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느끼는 행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는 주일날 커피 한 잔 먹는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밖에 나섰다 하면 속히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 가서 마태복음 강해서를 써야 하는데 성경을 연구할 때 큰 행복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행복을 느끼십니까? 믿음 안에서 꼭 제멋에 사는 행복이 있어야만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범사에 감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고, 고난으로도 유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유익으로 요리할 수 있는 믿음과 미래를 소망적으로 내다보는 믿음이 있을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 시간에 ①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말씀드렸습니다. ② 바울 사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은혜를 감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③ 바울은 건짐 받은 은혜, 보호받는 은혜, 자신의 변화된 은혜를 감사하셨습니다. ④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믿음에 근거하되 받은 은혜를 알고 자기 생활에서 만족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환난에서도 유익을 건질 수 있을 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신앙 갖는 성도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제94과 바울의 감사 생활 (고후 9:14-15, 골 2:6-7) 목록으로


“바울의 감사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강조해 주십니다.

1)“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감사하신다”는 내용이고,(고후 9:15)

2)또 한 가지는 감사의 생활이 “간구에 대한 응답의 방편이 된다”는 교훈입니다.(빌 4:6) 그래서 바울 사도는 “범사를 감사의 제목이 되게 하라” 강조하셨습니다.(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셔야 범사가 잘 될 것입니다.

2. 바울의 감사의 특징을 살피면

1)육체적, 현실적으로 각박한 형편 속에서 감사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유명한 사도로 아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존경하지만 바울의 실제적 생활은 현세 영달을 등진 아주 서민적이고 구차한 생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깨달았을 때 문벌이나 학문 등 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리셨고,(빌 3:5-8, 행 22:25)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신을 못 박으며 고난 받는 것을 보람된 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딤후 1:8, 2:3) 바울은 육체적 인품 조건도 좋지 않았습니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았으며(고후 10:10) 역사에 의하면 “키도 작고 등이 굽었으며 다리도 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서 상당한 시련을 겪으면서 전도하셨습니다. 고전 4:9-13과 고후 11:22-33에 보시면 “핍박, 질병, 생활고, 생명의 위험 등으로 늘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고난스럽게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특별한 신앙을 가지신 때문이었으니 저희들도 각박한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게 된 것과 또 사도의 직분까지 받은 것을 생각할 때 그 은혜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아시고 크게 감사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고전 15:10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하셨고, 또 딤전 1:12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히 여겨 직분을 주셨으니.....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자기를 긍휼히 여기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생애와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께 감사 생활을 힘쓰셨던 것입니다. 중국의 영계기란 사람은 80세때에 짐승의 비참한 죽음과 여자의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를 짐승 아닌 사람으로, 또 여자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며 하루 세 번씩 손자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하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야만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3)바울은 고난의 이면에 특별한 은혜와 상급이 있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래서 “환난도 즐거워한다”하셨고,(롬 5:3) “성도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고전 15:58), 육체의 가시도 은혜이고(고후 12:10),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딤전 1:8, 2:3)”고 하셨습니다. 이런 지식과 신앙이 없으면 고난 중에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죄인이 의인되고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멸망받을 자가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된 축복을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같은 원수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존귀한 사도의 직임까지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에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 등 고난 후에 성공한 인물들이 많지요. 이와 같이 성도의 세계에도 고난으로 복되게 하시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① 일제때 어떤 공장을 경영하는 분이 처음 교회에 나갔다가 마침 추수감사절에 나갔는데 감사의 설교를 들었지만 잘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많은 전기세 고지서가 나와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전기세가 많다”하고 곰곰히 생각하든차 전기보다 몇 배 밝은 태양빛에 대하여는 왜 고지서가 없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설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이 들어서 그 다음 주일에 1년 전기세의 10배액을 감사 헌금으로 드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 “에디슨”이란 발명가는 그가 기차안에서 화공약품을 실험하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차장으로부터 따귀를 맞았는데 그때 너무 세게 맞아서 귀가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후에 말하기를 “내가 발명왕이 된 것은 귀먹은 상태에서 잡음의 훼방을 받지 않고 연구에 몰두한 덕이라”고 하였으며 ③ 1620. 11.21이 청교도의 감사절인데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바와 같이 이 청교도들은 구라파에서 천주교의 핍박을 받아 신앙의 자유를 바라는 신교도 102명이 67일 동안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프리마운트항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추위와 풍랑으로 52명이 죽고 50명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자기 집보다 예배당을 먼저 지었고, 첫해 농사를 지어 감사절 축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 첫 농사에 많은 황충떼가 몰려와서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어서 이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50명 신자가 철야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50명이 모여 1명으로부터 50명까지 순서적으로 대표기도를 마치자 난데없는 메추라기떼가 날아와서 황충을 잡아먹으므로 농사를 잘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화들은 다 고난과 감사 생활과 관련있는 내용입니다.

4)바울은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도 감사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본문 14절에 보시면 “나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고 감사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드리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지요. 반드시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한 다음에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 감사하였습니다. 구원의 은혜와 사도된 은혜를 감사하였고, 또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까지 감사하였으며 더 나가서는 고난의 유익을 깨닫고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고난 그 자체를 감사히 여기는 신앙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잘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은 범사에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의 응답이기도 한 것입니다.

 

제95과 감사할 줄 아는 신앙 (고후 4:15) 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장차 부활하여 자신과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는 “바울의 수고가 성도들의 감사 생활을 일깨워주므로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감사할 줄 아는 성도의 신앙은

1)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목적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으면 감사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사를 자기 뜻대로 성취하실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내 뜻을 성취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자기의 삶의 목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2)감사가 더 큰 은혜를 받는 방법인 줄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많은 사람의 감사로 은혜가 더하여 넘쳤다”하셨고, 빌 4:7에서는 “성도가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감사함으로 아뢰야 응답된다”하시므로 감사가 은혜 증가의 방법이고, 또 기도 응답의 선행 조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후 8:6에서는 “성도의 헌금이 씨뿌리는 분량대로 거두는 것과 같은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감사하므로 더 큰 은혜를 받은 성도가 많습니다. 눅 17:19을 보시면 문둥병을 고침 받은 자가 감사하였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이라”(18절)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를 해 주셨습니다.

3)모든 복된 은혜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셨으며 우리는 빈손 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가장 불행한 부패성과 조상의 죄책만 갖고 와서 또 죄를 지으므로 불행의 요소만 축적한 죄인일 뿐입니다.) 대상 29:14을 보시면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모든 물질을 드린 다음에 말하기를 “부귀를 주께서 주셨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자이시며 하나님이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감사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까지 주셨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님께 드렸을 뿐이라” 하므로(고전 4:7) “주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드린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확신을 굳게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병자를 볼 때 자신의 건강을 감사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볼 때 유족한 환경을 감사하며 전쟁하는 나라를 볼 때 평화의 환경을 감사하는 마음을 꼭 가지실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감사할 줄 아는 신앙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내게 유익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손해되는 일이다”할 때는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유익하게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며(사 48: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어떤 징계를 받고 역경에서 연단을 받거나 어려움에 처하여도 그 속에 유익이 있고, 복이 있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새옹지마”란 말이 그런 뜻이 아닙니까? 요셉의 생애가 불행한 것 같으나 형통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은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생활이고, ② 감사의 생활을 은혜받는 방법으로 아는 것이며 ③ 모든 은혜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믿는 것이고, ④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유익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인 줄로 믿게 될 때에 감사의 신앙이 확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96과 맥추절과 수장절 (출 23:16, 신 16:16) 목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 3차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출 23:15-16)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라” 하셨고, 신 16:16에서는 “무교절과 77절과 초막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맥추절과 77절이 같은 뜻이고, 수장절과 초막절이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77절은 유월절(무교절) 지난 50일째 되는 날로 그 시기가 맥추절(초실절, 출 34:22)에 해당하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 오순절 절기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맥추절은 처음 소득의 시기요, 수장절은 년종 수확의 시기인데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40년 동안 여행하던 것을 기념하면서 감사를 드렸는데 그 시기가 수장절과 같은 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을 지키는 의미는 영적으로는 구원의 은혜이고, 세상적으로는 해방과 자유의 은혜를 기념하여 감사하는 절기이고, 맥추절과 수장절은 먹고 입고 보호받으며 인도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애급군의 위험, 전염병의 위험, 해충의 위험, 또 물 없고 양식 없는 위험,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과 여행의 위험, 이방인 침략의 위험 등 말할 수 없이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이 기적의 양식과 보호로 인도하셨고, 나중에는 가나안 땅의 기업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생활 안정을 확보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양식을 얻은 후에 감사의 절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감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복주신 분량을 따라 힘대로 예물을 드리라”(신 16:17) 하셨고, 또 레 22:29에서는 “감사 희생을 드릴 때 열납되도록 드리라”하시므로 감사하는 성도가 상당한 믿음과 지식과 정성을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그러면 이상의 말씀들과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생각하셔야 할 감사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1)우선은 양식 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난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설움 중 가장 큰 것은 배고픈 설움이라”고 하였습니다. 8.15 전후, 6.25 이후에 배고픈 고생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이 없고, 내복이 없으며 밀가루 음식, 대만미밥, 꿀꿀이죽 등을 먹으면서 살아온 과거를 생각할 때 양식 주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간들과 모든 생물들에게 먹을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을 먼저 지으셨고, 타락 전에 식물성 양식을 주셨으며(창 1:29-30) 타락 후 노아시대부터 동물성 양식도 주셨습니다.(창 9:13) 그리고 자연의 풀 한 포기까지 하나님이 키우시면서(마 6:26) 인간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마 6:25,32) 일반 은총으로 양식 공급이 안될 때는 기적으로도 주셨습니다.(출 16:13-20, 막 8:1-10)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자유 주신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곧 자유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은 것이 곧 자유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 정치가 백성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불평하고 비판하는 자유도 있지 않습니까? 자유 없는 민족들이 우리의 자유 생활을 본다면 “너희는 종교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재산 축적의 자유, 마음껏 놀고 돈쓰며 비판할 자유까지 있어서 좋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갈 5:1)

3)문화 발달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옛날에 힘들게 살던 시대가 기계 문명과 컴퓨터 발달로 너무 편안하고 움직이지 않는 시대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짧은 시간에 많은 능률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육체 활동이 적어지면서 비만과 성인병이 나타날 정도입니다. 옛날에는 소로 밭을 갈고 손으로 모를 심고, 호미로 김맨 후 낫으로 베고 도리깨질하고, 절구나 연자매로 돌려서 양식을 먹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문화의 발달로 TV를 보게 되었고, 세계 일주를 앉아서 다 구경하는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은혜들을 두루 두루 연구하여 감사함을 느낄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감사하는 성도가 몇 가지 취약점을 보완할 것이 있습니다.

1)식사 때만 감사 기도하는 습관에서 모든 것을 감사하는 습관으로 바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 먹을 때 기도하는 것은 습관이 잘 되어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놓고 감사 기도를 하니까 곁에서 본 친구가 “너희 집 식구들은 다 너처럼 음식 먹을 때 눈감고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 집에서는 소, 돼지, 개와 닭만 빼고는 다 기도를 한다”고 대답을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사 1:3) 모든 일을 복되게 하실 때 또는 연단을 주실 때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차선책에 대한 것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선책이란 1차 소원이 거절되었을 때 2차 방도를 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류 대학에 지원을 못해도 2류 대학에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고, 방도가 전혀 없지 않음에 대하여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 마음과 생활을 낮은 수준으로 산다면 차선책 뿐 아니라 그 이상 어려운 일에 대하여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 두 다리를 다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3)작은 것에 대한 감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박넝쿨의 그늘이 은혜란 사실을 몰랐다가 그 박넝쿨이 시들어 그늘이 없어졌을 때 박넝쿨의 그늘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 불편한 마음을 가졌고, 또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바람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다가 하나님이 동풍으로 뜨겁게 하셨을 때에도 죽기를 바랄지언정 서늘한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작은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은 그만큼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음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① 유대인의 자선가 “몬테피오레”의 가정에서는 그 가정의 표어로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는 글을 붙여 놓고 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를 힘썼는데 결국은 그 가정에서 훌륭한 신학자가 났다는 것이요, ② 또 미국의 교육가인 “P. 카네기”는 말하기를 오늘날 지구상의 비극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감사할 줄 모름에서 온다”고 말을 하면서 수많은 돈을 받고 우리의 양쪽 눈을 팔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수 많은 돈으로 우리의 두 다리나 두 손, 그리고 우리의 귀나 자녀나 가족을 팔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금 보다도 더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거기에 대하여 감사할 줄을 모르니 될 말인가? 이렇게 인생들은 꼭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하여서는 감사할 줄을 모르고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곧 비극이요, 따라서 복받지 못할 태도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맥추절과 수장절의 의미를 살펴서 양식 주신 은혜, 자유 주신 은혜, 문화 혜택의 은혜를 감사하시고, 또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 기도하는 습관과 차선책 또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