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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전도)설교

지 영 근 목사 著

목 록

제 1 부 사명(헌신)에 대한 설교


제 1 과 사명자의 조건(갈 2:9-10) 바로가기

제 2 과 일하는 복(요 5:17-18) 바로가기

제 3 과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출 35:30-35) 바로가기

제 4 과 자기 부정의 의미(마 16:24-25)바로가기

제 5 과 값진 헌신(롬 14:7-8)바로가기

제 6 과 선한 사업에 부요함(딤전 6:17-19) 바로가기

제 7 과 저주와 축복(삿 5:23-27) 바로가기

제 8 과 사명적 교훈(딤전 1:18-19) 바로가기

제 9 과 세월을 아끼라(엡 5:16) 바로가기

제 10 과 청지기의 사명(창 24:1-9, 눅 12:42-48) 바로가기

제 11 과 쓰임 받은 모세(출 4:1-17) 바로가기

제 12 과 헌심하게 됨(출 32:25-29) 바로가기

제 13 과 두 사람을 쓰심(민 13:25-33) 바로가기

제 14 과 모세의 사명자적 특징(신 34:9-12) 바로가기

제 15 과 두 개의 기념돌(수 4:1-9,19-24) 바로가기

제 16 과 이사야가 소명을 받음(사 6:1-13) 바로가기

제 17 과 마땅히 행할 일(잠 22:6, 행 2:46-47) 바로가기

제 18 과 하나님의 일을 분담함(대상 9:22-34) 바로가기

제 19 과 늙어도 결실함(시 92:12-15) 바로가기

제 20 과 연합에 힘쓰라(전 4:9-12) 바로가기

제 21 과 사명자의 각오(마 10:34-39) 바로가기

제 22 과 포도원의 일(마 21:28-32) 바로가기

제 23 과 잠깐 쉬어라(막 6:30-33) 바로가기

제 24 과 바르게 자라자(눅 2:52, 골 1:28) 바로가기

제 25 과 복 있는 종(눅 12:35-48) 바로가기

제 26 과 작은 일에 충성하라(눅 16:10-12) 바로가기

제 27 과 믿음과 충성의 성격(눅 17:5-10) 바로가기

제 28 과 사명자의 지혜(요 13:31-38) 바로가기

제 29 과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요 21:15-23) 바로가기

제 30 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23) 바로가기

제 31 과 무엇을 하리이까(행 22:3-16) 바로가기

제 32 과 주님의 것과 자유(롬 13:7-9) 바로가기

제 33 과 뵈뵈와 브리스길라(롬 16:1-4) 바로가기

제 34 과 충성자의 조건(고전 4:1-2) 바로가기

제 35 과 충성의 뜻(고전 4:1-5) 바로가기

제 36 과 주의 일에 더욱 힘씀(고전 15:55-58) 바로가기

제 37 과 약한 것을 자랑함(고후 12:5,9) 바로가기

제 38 과 교회의 기둥되라(갈 2:9, 계 3:12) 바로가기

제 39 과 바울의 육체적 헌신(빌 1:20-21) 바로가기

제 40 과 바울의 사명적 입장(골 1:24-29) 바로가기

제 41 과 사명자의 착념할 일(딤전 4:11-13) 바로가기

제 42 과 헌신자의 자세(딤후 1:12) 바로가기

제 43 과 사명적 승리의 고백(딤후 4:7-8) 바로가기

제 44 과 사명의 승리자(딤후 4:6-8) 바로가기


제 2 부 직분자에 대한 설교


제 45 과 직분자를 세우심(엡 4:11-12) 바로가기

제 46 과 바울의 사명자적 고백(빌 2:1-4) 바로가기

제 47 과 주 안에서 하는 일(히 13:15) 바로가기

제 48 과 찬양에 대한 지식(고전 12:4-7) 바로가기

제 49 과 은사받은 자의 책임(고전 12:4-7) 바로가기

제 50 과 집사가 알아야 할 교훈(딤전 3:1-13) 바로가기

제 51 과 예비하는 그릇(딤후 2:21) 바로가기

제 52 과 합당한 그릇(딤후 2:20-21) 바로가기

제 53 과 신령한 직분의 성격(딤전 1:12-17) 바로가기

제 54 과 목회자의 유래와 직임(요 10:1-6) 바로가기

제 55 과 성직자의 자세(딤전 6:11-14) 바로가기

제 56 과 사모님들이 맡은 일(고전 4:1-2) 바로가기

제 57 과 직분자의 할 일(롬 12:3-13) 바로가기

제 58 과 목사와 장로(딤전 5:17) 바로가기

제 59 과 당회와 제직회(딤전 5:7, 행 6:1-7) 바로가기

제 60 과 직책에 충성함(고후 6:1-10) 바로가기

 

 

제 3 부 전도에 대한 설교 1


제 61 과 구원의 복음(요 3:16) 바로가기

제 62 과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바로가기

제 63 과 전도의 역사(요 1:35-42) 바로가기

제 64 과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8-25) 바로가기

제 65 과 전도자 빌립(행 8:26-40) 바로가기

제 66 과 바울의 전도(행 17:22-31) 바로가기

제 67 과 전도자의 요건과 증언(벧전 3:13-17) 바로가기

제 68 과 전도자가 예비할 것(벧전 3:15) 바로가기

제 69 과 안디옥 교회(행 11:19-30, 13:1-3) 바로가기

제 70 과 성령이 임하시면(행 1:8) 바로가기

제 71 과 전도의 효력(막 1:38-39) 바로가기

제 72 과 혼인 잔치와 부흥(마 22:1-14) 바로가기

제 73 과 심방의 필요성(히 3:12) 바로가기

제 74 과 한국 선교 100주년의 의미(마 7:13-14) 바로가기

제 75 과 노아의 전도(창 6:13-22, 벧전 3:19-20) 바로가기

 

제 3 부 전도에 대한 설교 2


제 76 과 덕을 세우는 모범(창 13:6-914-18) 바로가기

제 77 과 네게 속한 자들을 이끌어내라(창 19:17, 벧후 2:6-10) 바로가기

제 78 과 광야의 시련(출 14:1-14) 바로가기

제 79 과 선민의 진영과 책임(민 1:45-54) 바로가기

제 80 과 전도자의 적극적 자세(민 13:30, 14:6-12) 바로가기

제 81 과 이스라엘이 흥하는 비결(신 6:16-19) 바로가기

제 82 과 여호수아에게 주신 명령(수 1:1-9) 바로가기

제 83 과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수 3:1-17) 바로가기

제 84 과 여리고성이 무너짐(수 6:1-7) 바로가기

제 85 과 미디안을 쳐 부심(삿 7:15-23) 바로가기

제 86 과 요나의 전도(욘 3:1-10) 바로가기

제 87 과 전도의 비유 교훈(시 126:5-6) 바로가기

제 88 과 백성을 이끌어내라(사 43:3-8) 바로가기

제 89 과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사 43:8-13) 바로가기

제 90 과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사 44:9-20) 바로가기

제 91 과 땅끝의 모든 백성아(사 45:20-25) 바로가기

제 92 과 전도자의 핵심(고전 2:1-5) 바로가기

제 93 과 바울의 전도 자세(고전 9:16-27) 바로가기

제 94 과 바울의 옥중 전도(빌 1:12-18) 바로가기

제 95 과 바울의 전도 사역(살전 2:1-12) 바로가기

제 96 과 바울의 선교 성공(딤후 4:1-8) 바로가기

제 97 과 전도인의 일을 함(딤후 4:5) 바로가기

제 98 과 귀하는 행복하십니까?(벧전 3:15) 바로가기

제 99 과 전도자의 받을 은사(벧후 1:1-9) 바로가기

제 100 과 출애굽과 신앙 생활(계 11:7-8) 바로가기

제 101 과 전도의 실천(마 5:13-16) 바로가기

제 102 과 지혜로운 전도자(마 10:16) 바로가기

제 103 과 전도의 문제점(마 10:16) 바로가기

제 104 과 핍박을 견디는 전도(마 10:16-23) 바로가기

제 105 과 전도 전쟁(마 11:12) 바로가기

제 106 과 전도에 대한 연구(마 10:16-23) 바로가기

제 107 과 전도자의 주의할 점(마 10:16-20) 바로가기

제 108 과 거저 주라(마 10:8) 바로가기

제 109 과 전도의 대상(마 11:28) 바로가기

제 110 과 전도의 성격(막 16:15-16) 바로가기

제 111 과 전도의 사명(막 16:15-16) 바로가기

제 112 과 최초의 전도 모범 사례(요 1:29-34, 막 1:35-39) 바로가기

제 113 과 개인 전도 교육 자료(요 1:35-50) 바로가기

제 114 과 예수님의 개인 전도(요 4:1-26) 바로가기

제 115 과 증인의 자격(행 1:6-11) 바로가기

제 116 과 수가 더 많아짐(행 9:31) 바로가기

제 117 과 전도의 대상(행 10:1-8, 딤전 2:4) 바로가기

제 118 과 두 가지 자세(행 10:33,44) 바로가기

제 119 과 효력있는 기도의 요소들(마 7:7-12) 바로가기

제 120 과 안디옥 교회(행 11:19-30, 13:1-3) 바로가기

제 121 과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0-32) 바로가기

제 122 과 전도의 핵심 내용(행 17:22-31) 바로가기

제 123 과 전도에 힘쓰자(롬 10:13-15) 바로가기


제 4 부 교육에 관한 설교


제 124 과 교사적 사명(신 6:6-9, 엡 4:11-12) 바로가기

제 125 과 권위자의 사명(행 4:36-37) 바로가기

제 126 과 교회의 교육 책임(마 28:19-20) 바로가기

제 127 과 좋은 교사(엡 4:11-12) 바로가기

제 128 과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행 13:1-3) 바로가기

제 129 과 모범 교사 바나바(행 11:22-25) 바로가기

제 130 과 교사를 세우신 목적(엡 4:11-12) 바로가기

제 131 과 가르침을 권장 하심(신 31:11-13) 바로가기

제 132 과 주교 운영의 과제(딤전 4:12-13) 바로가기

제 133 과 교회의 교육(딤전 3:14-17) 바로가기

제 134 과 교사의 받을 심판(약 3:1-12) 바로가기

제 135 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함(딤후 3:13-15) 바로가기

제 136 과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21) 바로가기

제 137 과 파숫군의 사명(겔 3:17-21) 바로가기

제 138 과 역사적 산 교훈(고전 10:1-13) 바로가기

제 139 과 선을 행하라(갈 6:9-10) 바로가기

제 140 과 구역의 활동(마 18:19-20) 바로가기

제 141 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방법(요일 2:1-6) 바로가기

제 142 과 예수님의 습관(눅 4:16-20) 바로가기

제 143 과 청소년의 유의할 일(롬 12:1-2) 바로가기

제 144 과 스승에 대한 감사(딤전 5:17-18) 바로가기

제 145 과 빛의 자녀 되라(엡 5:8-9) 바로가기

제 146 과 믿음 성장의 요소(벧후 3:18) 바로가기

 

 

제 5 부 헌당(헌금)에 대한 설교


제 147 과 헌금 지식을 위한 문답 바로가기

제 148 과 성전에 대한 지식(시 84:1-12) 바로가기

제 149 과 성전 수리와 재건(왕하 22:1-13, 스 3:1-13) 바로가기

제 150 과 (부록,교육재료) 집사가 알아야 할 지식 바로가기

 

 

 

먼 저 드 리 는 글


필자가 목회 중에 설교한 내용을 글로 남기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남겨 놓은 설교집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설교집은 “사명설교”에 속합니다. 사명을 일깨우는 내용, 직분자의 봉사에 대한 내용, 전도설교, 교육에 관한 내용 등으로 대략 분류하여 수록하였습니다. 더 좋은 설교집이 많이 출판된 것을 알기 때문에 폐기할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였으나 필자는 작은 말씀 한 쪽이라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 있고, 또 길을 가다가 쓸만한 폐품이 있어도 그것을 가져오는 성격이 있어서 이 설교문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문이 일반 설교문 보다는 교회 교육에 더 필요할 줄 알았고, 가급적 본문 설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글은 논리적으로 연결되도록 집필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대상에게 독립적으로 사용한 내용을 그대로 수록하였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도 있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설교문은 그것을 증언한 자의 심정을 가지시고 깨닫기를 갈망하면서 읽으신다면 은혜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2001. 12. 12.

지 영 근


 

 

제 1 부 사명(헌신)에 대한 설교


제 1 과 사명자의 조건 (갈 2:9-10)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교훈들을 종합하면 “사명자의 조건”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사명자의 조건

1.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의 기록이므로 바울사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라면

1)율법주의 이단 신앙에서 복음주의적 바른 신앙인이 된 것이요,

2)예수님을 핍박하였던 자신을 사도가 되게 하신 은혜요,(딤전 1:12-14)

3)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사명을 주신 은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만가지 은혜를 알아야만 사명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기둥같이 여김을 받는 힘을 쓰는 사명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야고보와 게바(베드로)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역할을 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기둥은 집을 버티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든든히 섬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의 봉사가 없으면 교회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2)교회의 기둥은 말씀선포자 임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의 생각이 재정을 담당하는 성도를 기둥처럼 여기지만 교회는 돈이 없어도 유지할 수 있는 단체란 것을 아셔야 하고 따라서 기둥역할은 진리의 증언으로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3)그 다음에 사랑과 봉사와 기도와 전도의 역할도 잘 하면 기둥역할을 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둥이 되는 요소는 ① 큰나무 ② 단단한 나무이어야 하고 ③ 이 나무들이 잘리고 죽고 마르고 벗기운 다음 ④ 곧게 깍기운 다음이어야 기둥에 쓸 수 있으며 ⑤ 기둥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들도 어떤 신앙의 연단을 받아야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명자들 간에 일치와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에서 “교제의 악수”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본래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의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김받는 세 사람의 사도와 교제의 악수를 갖는 것은 친교뿐만 아니라 신앙사상과 사명의 일치를 확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상이 다르면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하기 어렵습니다.

4. 사명자들 간에 직임을 분담한 것입니다. 야고보, 게바, 요한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전도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로 분담하였고 또 그 당시에 유대땅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방인 전도자들에게 구제의연금을 부탁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명자의 조건은 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는 것과 ② 기둥같은 역할을 하도록 자신을 연마하는 것과 ③ 사명자들 간에 일치, 협력을 잘 하는 일과 ④ 사명의 분담을 잘 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제 2 과 일하는 복 (요 5:17-1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일하는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①일하는 것이 다 죄값으로 주신 벌이 아니란 사실과 ② 일을 안하고 노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란 사실과 ③ 일에 취하여 사는 생활을 복으로 알고 ④ 무엇보다도 내가 하기 싫거나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는 사람들을 봉사적인 사람으로 존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활동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1)생명체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생명있는 씨앗이 굳은 땅을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생명체에게 힘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3:6)

2)힘이란 활동의 동력이고 또 정신과 지혜를 주신 것은 역시 활동의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이 무한적 발전의 기능을 잠재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을 알 수 있고

2.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창 1:26)는 말씀이 일하도록 주신 명령인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활동을 하지 않으면 생육, 번성이 어렵습니다. 또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거스리는 대상을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투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복”을 인류타락 전부터 주셨습니다. 일하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 다음에 인류가 타락하였을 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 즉 네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창 3:19)하시므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입니다.

1)그 징계는 인류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낙원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고통스런 일거리를 나타내 주셨고

2)동산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었던 환경에서(창 2:16) 엉겅퀴를 제거한 밭에서 채소 농사를 지어 먹으며 땀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엉겅퀴를 거두고 밭을 일구어 노동이 죄로 말미암아 가중된 것인데 그것은 말씀을 거역한 대가로 아담과 또는 그 후손들에게 부분적으로 주시는 징계의 방법인 것입니다.

3)범죄한 사람만 징역을 받는 것처럼 인류가 다 삶의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서 한 평생 고생없이 사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수고와 노동(땀흘림)은 인류에게 다 주신 징계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엿새동안 네 모든 일을 힘써 일하고 이레되는 날을 쉬라”고 하시므로(출 28:8-9) 6대1로 수고와 휴식을 아울러 취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은 성수 주일같은 신앙적 의미도 있고 수고하므로 소득을 취하는 생산적인 의미도 있으며 또 육체 건강조절의 의미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인류의 모범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셨고, 바울사도께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하시므로 “일”이란 생활형편이 좋아도 항상 하여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먹는 것과 일하는 것을 결부시켜 말씀하셨고(창 3:19, 살후 3:10), 또 예수님은 기적의 양식을 만드실 수도 있지만 기적으로 양식을 해결하여 잡수지 아니하시고 항상 일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란 인간을 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 인간이 일을 열심히 할 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1)정신 노동(연구)은 무한한 잠재적 기능에 의하여 많은 발전을 초래하고

2)육체적 노동을 열심히 하면 ① 건강에 좋고 ② 산업에 발전이 있으며 ③ 일에 취하여 잡념이 없어지므로 범죄 유혹을 막을 수 있습니다. ④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 때는 이웃 봉사에 대한 사명이행이 되는 것입니다.

카네기(1835-1919)는 미국의 강철 왕이요, 실업가이며 교육자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하며 자랐지만 열심히 일하고 부모 공경하며 실감는 공원에서 우체국 배달원으로 또 통신기사에서 실업가 강철대왕이 된 사람인데 어느 직업을 갖던지 열심히 일하여 성공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목표를 정하고 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의 환경과 맡겨지는 일에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는 자를 형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일에 취하여 죄지을 기회가 없고 일에 취하여 현실향락을 돌아볼 기회가 없도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에게 봉사 될만한 일을 열심히 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목록으로

(출 35:30-35)


이 시간에는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31절에 보시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란 말씀이 있고, 32-33절에도 “일을 하게 하시며”하셨고, 34절에서는 “가르치게 하시며”하셨고, 35절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며”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고, 또 “공교로운 일을 연구하게 하셨다”하셨고, 36:1에서는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시고 또 일을 하게 하시면 하나님의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져서 이 말씀을 상고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 지을 것을 말씀하시고, 성막 내부에서 쓰는 각종 그릇 등과 장식품들을 만들게 하실 때 “브살엘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일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순서를 보면

1. 먼저 “브살엘”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30,34절) “브살엘”은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이고, “오홀리압”은 단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왜 이 사람들을 쓰셨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타내신 것을 보면 분명히 그 조상들이 복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 중에서 일꾼이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쓰실 자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지명받은 자가 마른 막대기처럼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출 36:1)

1)그리고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31절)

2)하나님의 신, 즉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① 지혜로운 마음으로 감동되고(34,35절) ②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공급되며(31절) ③ 금은보석의 일은 물론 공교하게 새기는 일과 각색실로 수놓는 일까지 할뿐 아니라 ④ 스스로 연구하여 일할 수도 있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쓰시기 위하여 필요한 일꾼을 만드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자기의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기술이 있어도 하나님이 맡겨 주시지 않거나 하게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학벌있는 자들이 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력이 없는 자라도 기술을 익혀서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시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은 목자로 있는 자를 쓰셨고, 엘리사나 아모스는 농사짓는 사람을 쓰셨으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어부를 쓰셨고, 마태는 세리를 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무능한 자라도 원하시면 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을 쓰실 때 성령충만한 자를 만들어 쓰셨으니 만큼 저희들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믿음과 지혜와 사명이 있고 또 겸손하여 자신을 깨끗한 빈 그릇으로 예비한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자기 부정의 의미 (마 16:24-25)목록으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는 조건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고 ②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며 ③ 주님을 따르면서 생명 바칠 것을 각오하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발 벗고 복음 전선에 나서는 전적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씀이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적 헌신을 힘쓰는 사역자들이 교훈받고 시행해야 할 것과 일반성도의 입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헌신하는 교훈을 살펴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1)“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존재는 있으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하나님의 것이니까 “자기의 인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루터”선생님이 말하기를 “인간의 자기의 것”이란 죄뿐이라고 하였습니다.

2)바울사도가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애쓴 사실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갈 5:24),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사신다”(빌 6:21)라고 하셨습니다.

3)예수님을 따르는 사역자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부인하다 보면 명실공히 예수님의 종이 되고 사환격이 되는 것입니다.(요 13:16, 히 3:5) 상전 밑에 있는 종이나 사장 밑에 있는 사환이 무슨 실권이 있습니까? 시키는대로 복종만 할 따름일 것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자기의 목적이나 포부나 의견을 말하지 못합니다. 주인의 명대로 기계처럼 시행하면 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하셨으니까(고전 11:25) 하나님 앞에서는 인권이나 지혜나 공로 등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채 “하나님이 띠 띠워 사람이 원치 않는 곳으로 보내셨고(요 21:19), 바울은 서반아까지 가서 전도하고 싶었지만(롬 15:23)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건설적인 뜻을 이루어 보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복종하는 것만 못함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자기가 죽어야 할 십자가를 자기가 지는 것이니까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계 2:10에 보시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있지요.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정년제를 반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의 방법을 교훈하신 뜻도 있습니다. 자신이 흥하기 위한 목적으로 헌신하지 말고,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으로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하셨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전폭적으로 헌신한 사역자들이 그 대가로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받았다”는 말씀이 없는 것은 오직 희생적 헌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2)“자기의 책임을 자기가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나는 이런 책임과 고난이 있는데 주님이 이것을 책임져 주시면 내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하는 조건부가 없이 자기의 책임과 자기의 고난을 그대로 감당하면서 주님께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자기 가족의 생계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게 하고 단신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요, 바울사도는 처음부터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자기의 헌신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부담드린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가 “자기 부친 장례를 치르고 주님을 따르겠다”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셨지요.(마 8:22) 왜 거절하셨을까요?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건을 다는 헌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조건없는 희생을 하라는 뜻입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살기 위한 수단을 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를 위한 헌신이 되기 쉽고, 또 전폭적 헌신이 될 수 없으므로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고 따를 때 그것이 오히려 보호받는 길이라”고 하셨는데도 베드로는 죽음과 핍박이 두려워서 일시적으로 타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들의 헌신은 일사각오였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런 각오로 노력하여 성공을 하였습니다.

4. 그러면 오늘의 사역자들 중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할 때 불교나 천주교에는 단신으로 헌신하고 끝내는 분들이 많지만 개신교 성직자들 중에서는 거의 없는 실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헌신이 못되는 것이지요. 저도 지금 헌신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례를 받아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 생계 수단을 빨리 만들어 놓고 몇 년이라도 독립된 헌신을 해보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신교에도 제도상으로 조건없이 헌신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권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 평신도의 입장에서 “자기 부인”이란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자기 부인의 뜻

1)큰 겸손의 뜻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성도는 창조적 면에서, 구속적 면에서(고전 6:20, 벧전 1:18) 또 연약한 면에서 볼 때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만 생명과 사역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은 성도의 품위도 되고, 은혜의 보존과 은혜를 더 받는 방법이 되며 나가서는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로(창 18:27), 바울은 자신을 괴수죄인 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딤전 1:15) 하셨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시중자의 자격도 없다(눅 3:16)고 하였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절을 하며 겸손하였던 일, 모세는 겸손하고 사양을 하였는데도 하나님이 쓰셨고, 사울은 겸손할 때 왕이 되었다가 교만해지면서 형통하지 못했던 일, 다윗은 자신이 왕 되기를 원치 않았는데도 자기 외에는 왕 될 자가 없게 되어 왕이 된 일을 기억하시면 겸손이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또 담긴 그릇은 주인이 쓸 수 없고 산 나무로는 재목을 쓸 수 없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평신도의 자기 부인은 역경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소망을 걸고 요나처럼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경을 순경으로 돌리고 고달픈 삶을 하나님께 의존하여 하나님이 풀어 주시게 만드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 5:7에 보시면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연약을 느끼는 것일수록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하는데 자기 부인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도 맡겨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해결도 못하면서 욕구 불만이 오고 거기에서 염려와 두려움이 쌓이고 그것이 “신경 노이로제”로 변하여 병도 없으면서 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그 병으로 죽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괴로운 질병에 걸렸을 때 “내 생명, 내 인생, 나의 삶이 다 주님의 것이니까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면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맡긴 것이 되어 쉽게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내가 죽으면 큰일인데.....나 없으면 안 되는데.....시시한 병원에 가면 안되는데....”하는 마음을 가지면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부인을 못하여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고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들로써 자기 부인의 의미를 이해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5 과 값진 헌신 (롬 14:7-8)목록으로


교회의 여러 기관들이 값진 헌신을 드리기 위하여 헌신 예배를 드리는 줄 압니다.

1. 헌신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요,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 하되(눅 10:27)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마 7:21) 값진 헌신을 원하는 성도들은 헌신의 뜻에 대하여 오해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성경에 보시면 헌신을 값지게 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 32:29에 보시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므로 악하고 방자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도륙하여 범죄 행위를 척결한 다음에 비로소 헌신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고, 고후 8:5에서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다음 물질로 유대인들을 구제하였다”하셨으며 모세가 애굽의 영화를 박차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들과 고난받는 것을 선택한 것이나(히 11:25-26)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칭찬하셨고(마 11:11) 또 머리털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옥합을 통째 깨뜨려 부은 여인을 칭찬하신 말씀(막 14:3-9)들이 다 값진 헌신을 드린 사례인 것입니다. 같은 물건도 비싼 것이 있고 싼 것이 있습니다. 헌신하는 일은 집짓는 일로 비유할 때(고전 4:12-13) 좋은 설계, 좋은 재료, 좋은 기술로 지은 집이 좋고 또 헌신을 운동경기로 비유한다면(고전 9:25-26) 법을 지키며 절제를 잘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딤후 2:5, 고전 9:27)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따랐으나 버려졌고,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졌으나 값진 헌신이 못되었습니다.

3. 우선 헌신하는 성도는 깨끗한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삼손이 나실인 되고(삿 13:4-5) 사무엘이 성별되게 자랐으며(삼상 2:21) 이사야의 입술을 성령님이 깨끗게 하셨고(사 6:6-7) 세례요한이 성별되게 자란 것(눅 1:15) 등은 다 헌신자로서의 성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헌신자로서 변화받는 체험을 하셨고, “깨끗한 그릇으로 예비될 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행 9:17-18, 딤후 2:2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헌신자는 최대한의 순결을 위하여 정과 욕심을 최대한 못박고(갈 5:24)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요일 2:15, 약 1:27) 죄를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헌신의 목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헌신이란 일반적 봉사나 구제와는 다릅니다. 영적 구원과 진리 선양과 믿음발전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봉사가 아닌 신앙적, 영적 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 헌신과 관계있는 일이 무엇이며 헌신과 직접 관계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지 않는다”(롬 10: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배당을 지어서 자기들이 쓰는 것은 헌신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헌신이요, 교회에서 커튼이나 가운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그것을 만들어 사용한 후 빨래를 하는 것도 헌신에 속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인간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요 6:28) 또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어떤 제도나 의식에 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뜨거운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수주일이나 예배나 봉사로 믿음 생활의 만족을 느끼지만 믿음생활의 실제는 하나님과 자신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의 목표를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신앙발전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월드컵 축구경기에 열을 올린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기관에서 임원 단합대회를 한다고 설악산 호텔에 가서 잠시 기도회를 갖는데 눈이 와서 2박 3일이 걸렸습니다. 이 경우에 헌신은 단합을 위한 기도회 시간 뿐이요, 가고 오며 잠잔 시간은 헌신에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적, 개인적 소모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5. 진정한 헌신의 목표를 영적 신앙의 발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 선교 또는 자기신앙의 발전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많이 하여 가난한 자를 유족하게 하였어도 예수믿는 하나님의 일과 무관하다면(요 6:28) 헌신이 아닙니다. 헌신은 하나님의 영적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헌신의 목표가 되는 영적 신앙의 발전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개선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해 주시며 내가 그 사실을 뜨겁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값진 헌신은 자신의 몸이나 재물이나 지식을 드리기 전에 값진 믿음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요, 그 믿음이 곧 하나님과 영적 뜨거움을 갖는 것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시 1:1) 말씀에 이끌리는 것(행 18:5)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시 73:23, 약 4:8) 그리스도의 사랑의 뜨거움을 느끼는 것(롬 8:35, 고후 5:14) 가난해도 감사하고 괴로워도 만족하는 생활이(욥 1:21, 합 3:17-18)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뜨겁게 갖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없는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마 5:19, 8:8)

6. 기회를 선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기회가 있습니다.(삼상 10:7, 히 12:17, 계 2:21)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 생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헌신한 여인이었습니다.(막 14:3-9)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사건이 있을 때 적당하게 헌신하는 것도 기회요, 또 자신이 세상 떠나기 전에 미리 헌신하는 것도 기회선용입니다. 문제가 지나간 다음이나 자신이 헌신할 힘이 없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기회를 선용하고 앞당겨야 할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값진 헌신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되도록 자신과 자신의 생애를 많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계 2:10에 보시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잘 살기 위하여 충성하고 복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흥하지 않고 쇠하도록 충성하는 것이 죽도록 충성함일 것입니다. 제가 30년 목회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피곤하게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대가로 저의 가족 아홉 식구가 살았으니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테레사”수녀가 유명한 것은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헌신 내용을 보시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들의 생애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요, 삶의 의미와 목적도 오로지 헌신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어떻습니까? 자신과 세상에 치우치는 일이 너무 많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분량이 너무 적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 번 살고 한 번 헌신하는 인생인 만큼 값진 헌신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① 헌신의 의미를 잘 알고 ② 자신을 깨끗게 한 후 ③ 헌신의 목표를 바로 세워서 ④ 헌신아닌 것에 허비하지 말고 ⑤ 기회를 선용하여 ⑥ 값진 믿음으로 많은 분량을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선한 사업에 부요함 (딤전 6:17-19) 목록으로


“선한 사업에 부요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1)“이 세대의 부한 자들”은 이웃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얼마의 재물을 가져야 부자인가?할 때 그 기준은 자기의 생활비를 쓰고 얼마나 남느냐?로 측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생활비 수준이란 근검하게 소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에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때 성도는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히 10:24) 부자란 큰 재벌이 아니라도 경제적으로 이웃보다 잘 사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사역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여 명령할 특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의 빚을 탕감하고 그를 종으로 여기지 말 것을 명령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몬 18-19)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사역자의 명령을 예수님의 명령처럼 받으라는 것입니다.

3)그 명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후배를 지도하는 내용입니다. ①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신분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난할 때의 마음과 부자되었을 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는데 가난할 때의 겸손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라는 것입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롬 12:16)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 자세인 것입니다. ② “정함이 없는 재물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정함이 없다”는 뜻은 있는 재물이 없어질 수도 있고, 또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재물이 편리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범죄의 올무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갖기만 하고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오히려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강도 지존파에게 불행한 일들을 당하였고 LA교포들은 재물 때문에 흑인들의 반감과 폭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③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면 하나님을 적게 의지하는 결과가 옵니다. 병원을 의지하면 병원에 자주 가게 되고 질병이 있어도 자기의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사람은 병원에 자주 가지 않습니다. 또 자기를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오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장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다 “물질이나 자신이나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교훈의 실례인 것입니다.④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만물과 독생자와 천국을 주셨습니다. 자연의 경치를 보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서 “이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내가 누린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롬 8:32) 어떤 이는 소득만 하고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고 또 후하게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분임을 아셔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⑤ “선한 일에 부하라”고 하셨습니다.(18절) 선한 일을 장려하신 말씀이 성경에 많습니다. ㉠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갈 6:9) ㉢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고 힘쓰라(딛 3:1,8) ㉣ 선한 일에 본이 되고 열심하라(딛 2:7,14) ㉤ 감독은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한다(딤전 5:10) ㉥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가 된다(약 4:17) ㉦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는 것은 귀한 일이라(벧전 2:20) ㉧ 너희의 선한 일을 훼방받지 않게 하라(롬 14:16, 고후 8:20, 행 6:1)하시므로 선한 일을 크게 장려하신 것입니다.

2. 선한 일에 대하여 세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선교사업이 선한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최대의 복이고 선한 사업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33에 보시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되.....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의 비용은 돈으로 하지만 실제는 말씀 전파와 빛된 생활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만 내면 선교가 되는 줄로 여기실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의 위치에서 이웃에게 전도할 수 있고 또 빛과 향기를 드러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구제사업입니다. 이것은 물질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구제의 대상은 자기 생활보다 어려운 사람이지만 구제를 받으려는 사람은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자립하는 생활에 힘써야 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행 20:35) 따라서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진 것이 없을 때 구제 받는 것을 정당한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3)교육을 위한 장학사업입니다. 선교, 구제, 장학 사업은 다 물질을 갖고 하는 것입니다. ① 물질로 선한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좋은 목적을 위하여 순서 있게 하여야 합니다. 고전 10:31에 보시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또 33절에서는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하셨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영광 목적과 신령한 은혜를 공급하는 목적으로 시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지 않는 자가 장학회의 도움으로 지식을 터득하여 현실적 성공을 하였다 할지라도 자기의 성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거나 이웃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② 그런 취지에서 대상을 정할 때 반드시 믿음 안에서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 공부는 잘 하나 학비가 없어서 배우지 못하게 된 자녀들을 선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믿음에 열심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만일 이런 학생들이 신앙으로 오르지 못한다면 나중에 그의 지식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데 이용되기 쉬울 것입니다.(마 12:50, 딤전 5:8, 약 2:15, 요일 3:17) ③ 장학 사업에 봉사하는 성도는 자신이 사회적 교육 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를 갖고 힘을 내셔야 할 것입니다. 물질을 보람없는 일에 사용하거나 물질이 범죄나 불화의 매개체가 된다면 없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인의 인격을 양성하는데 사용하여 장차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역군이 되게 한다면 큰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④ 그리고 가급적 모든 사업을 독자적으로 행하는 것이 더 좋고 단체나 기관을 통하여 하는 것은 의견 일치 문제나 조직 관리를 원만하게 하는 일들이 퍽 부담스럽기 때문에 뜻맞는 가족들끼리 합력하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선한 일을 함에 있어서 선교로 영적 사업을 하고 구제로 육적 사업을 하며 장학으로 교육 사업을 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선한 사업에 부요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7 과 저주와 축복 (삿 5:23-27)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저주받을 자와 축복받을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23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해야 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여호와를 도와 용사(적군의)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고, 또 반대로 24절을 보시면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므로 메로스 거민에게는 저주를,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는 축복을 각각 선포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교훈받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는 ① 메로스란 거민이 저주받게 된 이유를 살펴 저희들은 저주받을 일을 하지 마셔야 되고 ② 야엘이 축복받은 이유를 살펴서 저희들도 축복받을 일을 힘쓰시고 칭찬과 축복의 대상이 될지언정 결코 유감스런 대상이 되거나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을 교훈받으셔야 하겠습니다.

1.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문 말씀의 역사적 줄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위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시대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 일부를 정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완전하게 정복하라”고 명령을 주셨지만(수 1:2-4) 그 일을 완성하지 못한채 여호수아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수 23:11-) “너희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가나안 땅의 남은 족속을 완전히 멸하여 정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 족속을 남겨두는 날에는 나중에 그들이 너희에게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가시가 되어 수시로 너희를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은 여전히 나태해져서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① 오랜 세월 전쟁을 하니 전쟁에 싫증이 날만도 하고 ② 사람 죽이는 일이 싫어지기도 하였고 ③ 또 본토 족속을 그대로 남겨두면 그들을 종으로 부릴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타산과 안일에 빠져서 그들을 용납해 둔 것인데 이것이 점점 심해져서 죽여 없애야 될 자들과 오히려 교제를 하고 통혼을 하며 심지어는 본토족들의 생활을 따라 우상숭배에까지 물들어 버리는 지경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실 축복으로 그 땅을 정복케 하셨고, 또 본토족을 남겨 놓으면 신앙적으로 생활적으로 덫이 되고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없애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 말씀을 불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상적 생활에까지 동화되어 성민과 비성민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3)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혼잡된 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그 징계로 ①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다사임”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쳐서 8년간 괴롭게 하시다가 다시 긍휼을 베풀어 “옷니엘”이란 사사로 하여금 나라를 구출케 하셨고 ② 그런지 40년 후에 모압 왕 “에글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쳐서 18년간을 괴롭게 하시다가 다시 긍휼을 베풀어 “에훗”이란 사사로 하여금 나라를 구출케 하셨으며 ③ 또 80년 후에 블레셋의 침략을 주셨다가 “삼갈”이란 사사를 통하여(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용사 600명을 죽임) 나라를 구출케 하신 일이 있었는데 ④ 그 후에 또 가나안 지역 하솔에 도읍한 “야빈왕”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서 자그마치 20년을 괴롭히므로 그 백성들의 곤경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군 “바락”이 하솔 왕을 상대로 싸워 보려고 했으나 적장 시스라 장군이 갖고 있는 철병거 900승의 힘을 당할 길이 없어서 감히 싸우지를 못하는 실정에 있었습니다.

4)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로 호소를 하였더니(삿 4:3)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다시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또 사사를 일으켜(4:4) 주신 것이 여선지 “드보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보라” 사사에게 능력과 승리의 약속을 주시면서 바락 장군과 합력하고(4:9) 각 지파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과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게 사신을 보내어 의병들의 출전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5)명령을 받은 각 지파의 백성들이 즐겁게 출전하고 헌신적으로 잘 싸워줌으로써(5:2,9) 많은 성과를 거두는 중에 하나님이 또 뇌성과 비와 지진을 일으켜 주시므로써(5:4,21) 적군을 혼비하게 만들고 철병거 900승이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구덩이에 빠져 못쓰게 되고 적군의 시체가 기손 강물에 표류되게 하시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라를 구출한 다음에

6)“드보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논공행상”(누가 헌신, 봉사를 잘 하고 못한 것을 평)을 하신 말씀이 바로 삿 5:의 말씀인 것입니다. ① 우선 삿 5:2,9에서 “여러 지파의 백성들의 즐거운 헌신이 있었다”고 격찬을 하였고 ② 삿 5:18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더욱 기쁘게 출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으며 특히 스불론 지파에서는 대장군들이 나와서 공을 세웠다”(5:14)하셨으며 ③ 잇사갈 지파에서는 “존귀한 방백들이 나와 일반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여 주었다(5:15)”하였고 ④ “마길”이라는 므낫세 지파에서는 역시 다스리는 자들이 나와 큰 도움을 주었고(5:14) ⑤ 에브라임과 벤야민 지파도 의무를 감당해 주므로 “하나님의 기적의 은혜와 함께 승리를 얻게 되었다”고 칭찬과 격려를 한 것입니다.

7)그런데 칭찬의 반대로 유감의 뜻을 표명한 지파도 있었으니 이것은 칭찬과 상급에서 제외되는 지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① 삿 5:16을 보시면 “르우벤 지파는 남이 싸울 때에 시냇가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자기 앞길만 살피기 위하여 거룩한 싸움에 불참하였고 ② 삿 5:17 ”단 지파는 배를 타고 장사 다닌다는 핑계로 전쟁에 합세하기 싫어서 바다와 배위에 거하며 회피하였고 ③ 아셀 지파 역시 해변과 강가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유감스럽다고 하신 것입니다.

8)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하게 저주받아야 마땅한 백성은 “메로스 거민”이고, 또 특별히 축복받아야 마땅한 사람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란 것입니다.

2. 그러면 “메로스 거민”은 왜 저주를, “야엘”은 왜 축복을 받아야 하는가?

1)여기에 “메로스 거민”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써 그 전쟁에 합세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도와 적군의 용사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이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를 하자 적장 “시스라”가 도망을 쳐서 달아날 때 메로스 거민이 사는 동리로 도망을 했는데도 잡을 체를 안 하고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이런 무책임과 비협조와 이적의 행동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느끼지 못하는 비협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쟁에 손해를 주는 태도는 마땅히 저주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2)그런데 헤벨의 아내 “야엘”은(아셀 지파 창 46:17, 민 26:45, 대상 4:18-그가 이스라엘 지파와 따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출전명령을 받지 않은 것 같음) 자기 집에 피하여 들어온 “시스라”가 하솔국의 장군인 것을 알아차리고 따뜻한 우유를 주어 평안히 잠들게 한 후에 장막 말뚝을 그 머리에 박아 죽임으로써 홀로 집안에서 큰 전과를 이룩하였으니 그의 숨은 봉사와 공적이 인정되어야 하고 또 축복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평가하신 말씀입니다.

3. 그러면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1)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일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없애라”는 본토민들을 남겨둔 것이 결국은 말씀대로 덫이 되고 올무가 되어 자신들의 거룩에 손상을 입었으니 성도는 무조건 말씀 순종을 잘 하여 혼잡을 피하고 거룩의 손상을 입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심이요

2)여러 차례 징계를 받았던 민족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역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교훈하셨고,

3)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 그 백성들이 전쟁하는 노력을 통하여 주시는 만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전쟁은 곧 하나님의 원수를 파하는 전쟁이므로 적극성있게 참여하고 헌신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셨으며

4)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는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참여하여 공을 세웠는가?를 평가하시고 거기에 따라 상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의 교회 봉사나 복음 전선에서 헌신하고 활동하는 것도 역시 주님이 평가하셔서 칭찬과 상급과 벌을 주신다는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출전 명령에 기쁘게 호응한 자, 생명을 걸고 용맹스럽게 싸운 자, 장군과 다스리는 자와 방백을 보내어 유익하게 도와 준 지파, 적은 일을 핑계 삼아 안 나온 지파,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나간 지파, 놀면서 출전 안 한 지파 등을 세심하게 평가하신 것”과 그 중에도 비협조적이고 심지어는 이적행위까지도 저지른 메로스 거민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고 반대로 헤벨의 아내 “야엘”은 “홀로 자기 집에서 큰 공적을 세웠으니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성도들의 봉사적인 행위를 따라 갚아 주시는(계 2:23) 섭리를 그대로 나타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영적 전쟁이요, 악을 대적하는 선한 싸움임을 아셔야 합니다. 때로는 불법을 대항하기 위하여 인정을 초월하고 대립하여야 할 때도 있고, 선으로 악을 대항하다 보면 큰 피해를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 하나님은 선한 싸움을 하는 성도의 동기와 목적과 참여성과 성실성, 봉사성, 희생의 정도를 다 아시며 이기주의, 개인주의, 안일주의 등에 빠져서 작은 일로 핑계하고 영적 전쟁에 뛰어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도 아십니다. 따라서 선한 싸움에 동참할 때 사랑과 공의에 분명한 목표를 두고 확실한 의지와 용기를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8 과 사명적 교훈 (딤전 1:18-1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사명적 교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후배 사역자를 “아들”이라 하시고, 교훈을 주셨습니다.

1. 그 교훈의 내용은

1)“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바울이 디모데를 임직 안수할 때 주신 교훈이고,(딤후 1:6) 또 성경으로 주신 모든 말씀을 뜻합니다. 그 성경 말씀대로 잘 하라는 것입니다.

2)“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그것”이란 예언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무기로 삼고, 또 성경 말씀을 목표로 삼아 성경 말씀대로 실천되도록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안에도 성경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노회나 총회도 교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총회가 은급 사업을 한다고 보험회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은급비를 내면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하여 모집을 해 놓고 이제는 “몇 가지 혜택만 준다”고 일방적으로 삭감을 했으니 교회가 금융기관이 되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도 말하는 이가 없습니다. 굽은 나무를 펴기 어려운 것처럼 믿음 세계 안에는 선한 싸움의 소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싸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3)“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긴밀히 가지라”는 뜻이고, “착한 양심”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양심은 자기와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나 깨끗한 마음이 떠나면 하나님도 멀어지십니다. 성도가 가장 두려워할 것이 바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나 무엇이 되려 할 때 돈봉투 돌리는 것은 나쁘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것을 하나 받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고 고민하다가 “예수님 판 돈으로 나그네의 묘지를 사는데 썼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그네가 잠자는 방에 전기 패널 놓는 비용으로 쓰라고 준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돈을 내 소용에 썼다면 착한 양심이 흐리워질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엄청난 외식자로 보실 것을 생각하니까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착한 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 가지 원칙에서 결함이 나타난다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배와 같을 것이라”하셨으니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목회와 직분에 취임을 받는 여러분들 모두가 신앙적으로 퍽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십자가 종탑이 많아도 사명의 여건은 어렵습니다. 그 이유

1)물질이 넉넉하기 때문에 생활적으로 하나님 의지할 일이 많지 않고,

2)전쟁이 일어나서 주여 주여 할 때와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시기를 대조할 때 역시 긴장을 풀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주여 주여 할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3)교회가 다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에 세속화의 농장에서 신령한 소득을 거두기란 어려운 일인데 오늘의 사역자들이 이런 판도에서 사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량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 향락주의가 판을 치는 세계에서 순수한 신앙의 기초가 흔들림은 물론 교회가 일반 회사로 전락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뜻을 펴나가야 하니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제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일을 해 보려 하니까 제 아내도 호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명자들이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직임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어떻게 잘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선 소극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1)너나 할 것 없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마 16:24)하셨고,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셨습니다.(갈 5:24)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믿음 생활의 시작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은혜를 받게 되며 또 하나님의 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물량주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교회가 물질을 앞세워 일하려 하면 구제사업은 될지 몰라도 구령사업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은 물질로 구제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은 “내게 은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하려면 믿는 자와 성경만 있으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 있어야 한다,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하면서 물질을 필요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벌써 변질된 기독교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상 인류를 다 구원하라”고 하셨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택한 자만 빠짐없이 구원하신다” 하셨고, 다수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노아 당시에는 여덟 명 구원하시고도 만족 하셨고, 출애굽 때는 두 사람만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생명을 구걸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물량주의, 숫자주의로 나가려 합니까? 사람 수가 많으면 믿는 자도 많겠지만 쭉정이도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 수만명을 다 떨구시고 적은 무리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눅 12:1,32) 목회자나 교회가 물량주의를 앞세우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명예와 인기주의를 떠나야 합니다. 인기로 목회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시행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찬송, 기도, 예배는 혼자도 할 수 있습니다. 성례식은 목사가 합니다. 결혼식, 장례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목사를 모신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지도받기 위함이라고 아셔야 합니다. 목사에게 무슨 인기와 학위가 필요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가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인들은 더 좋아하니까 큰 문제 아닙니까? 예수님은 명예적 시험을 이기셨고, 들레시지 않았습니다.

4)향락을 좋아하거나 인정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어떤 목사는 사우나탕에 자주 다니다가 고스톱치는 시험에 빠졌고, 그것 때문에 목회의 수난을 당한 일이 있었으며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을 때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다 나의 가족이라”하시면서 인정에 치우치지 않으셨습니다.

5)세속주의에 끌려가면 안됩니다. 성도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말과 행실과 생활이 다 경건하고 구별되어야 하는데 불신자들의 풍속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냄새를 풍길지언정 세상 냄새를 풍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먼저 자기 부정을 한 후 물량주의, 명예, 인기주의, 향락주의, 세속주의를 극히 삼가야 하고,

4. 그 다음에 꼭 필요한 것 네 가지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른 신앙 생활에 꼭 필요한 것

1)성경에 끌리고 말씀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성령 충만이 가능하고 자기 부정이 가능하며 또 세상 정욕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성경만 배우고 사랑만 실천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3)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3단계로 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다음에는 맡겨진 일에 충실하며 그 다음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덕을 세우려고 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더 힘있게 봉사하여야 한다”는 자세로 충성하여 그 충성의 효력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신앙 생활의 전부라는 마음을 가지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숨쉬듯 이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실천이 있을 때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비로소 섬기는 교회가 칭찬받는 좋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 9 과 세월을 아끼라 (엡 5:16)목록으로


“세월을 아끼라”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세월을 아끼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가장 효율성 있게 쓰라”는 뜻입니다.

2. 각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가장 효율적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1)창조자의 목적에 가장 합당하도록 생활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자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을 육성시키는 일이요, 모든 성도가 성숙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정욕대로 살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는 일들만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 달란트에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지위, 향락이나 생활 문화를 따르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또 삶의 목적과 관련하여 자기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현실적 사역보다 신령한 사역이 더 가치가 있고, 또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생활이 더 나으며 또 인간을 가까이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더 귀한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사도께서 왜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을까요?

1)시간은 생명처럼 귀한 것이고, 시간과 생명이 결탁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시간이 있다는 것이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곧 생명이 없다는 것이니까 시간은 곧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시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롬 12:11)하셨고, 선교의 바쁜 일정을 보내셨으며(행 20:16) 그의 마지막 생애에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범적 인물들은 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실 겨를이 없었다”(막 3:20)하시고, 배위에서 주무셨으며(마 8:24) 야곱은 눈붙일 겨를이 없이 살았다(창 31:40)는 말씀이 있습니다.

2)바울은 시대의 빠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빠른 것은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고,(시 109:23, 욥 7:6)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롬 13:11)하셨으며 또 “때가 단축하여졌는고로.....더욱 말세를 대비하여 살라”(고전 7:29-3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시간은 생명처럼 귀하고 빨리 가기 때문에 아껴써야 하는 것입니다.

4. 세월 아끼는 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목적 설정을 잘 하고 항상 더 보람있는 일을 하도록 일감의 선택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럴려면 믿음과 사명을 위하는 일을 먼저 선택하고 다음에 자기의 건강을 위하는 일, 그리고 남을 위하는 일로 순서를 정해야 되겠지요.

2)근면, 성실하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도록 휴식이나 운동 등을 소홀히 하면 안될 것입니다. 자기 관리 부족으로 건강을 잃으면 더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놀기 위해 놀지 말고, 휴식과 건강을 위해 놀아야 함.)

3)시간을 잘 지키고 부스러기 시간을 이용하며 또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바쁠 것이라”고 생각하여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환경을 탓하지 말고, 환경에 적응하는 자기의 사명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욥은 병든 중에서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였고, 하박국은 가난한 중에서도 요셉은 감옥에서도 다니엘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여전히 자기의 할 일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면서 할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 믿음이 값진 믿음이 될 것입니다.

5)시간을 제공하는 봉사는 곧 몸을 바치는 봉사이기 때문에 그것이 값진 봉사이고, 하나님도 “몸으로 산제사 드리는 것”을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셔서 헌신을 잘 하는 것이 세월을 값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할 일 없이 먹고 노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음을 아셔서 세상 떠나는 날까지 항상 무엇을 하다가 부름을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10 과 청지기의 사명

(창 24:1-9, 눅 12:42-4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청지기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이 바로 교회의 청지기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말씀한 청지기의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1)우선 본문에서 아브라함 집의 청지기는 그 집 소유를 맡았고, 주인의 뜻과 명령에 성실히 받들어 시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 15:2, 24:1-61)

2)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왕궁의 살림을 맡은 청지기가 있었으며(창 46:16) 또 열왕 시대에는 왕을 접대하는 직임으로,(왕상 16:9) 다윗왕과 국사를 의논하는 직임으로,(대상 28:1) 왕의 훈육을 맡은 자로 일한 사례가 있습니다.(단 1:11)

3)예수님 시대에는 헤롯왕의 청지기 “구사”가 있었고,(눅 4:3) 포도원의 품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으며(마 20:8)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되 채무자의 부채를 탕감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재무를 맡긴 일도 있었습니다.(눅 16:1)

4)본문에서 예수님은 청지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으로부터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하셨고, 베드로는 말하기를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10)

2. 청지기가 자기의 사명을 잘 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1)모든 것의 소유자는 주인일 뿐 자기의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줄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유컨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죄를 제하고는) 성경에는 “만물과 땅 위의 충만한 것과 모든 은금과 사람의 육신까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1, 요 1:3, 시 24:1, 학 2:8, 고전 6:19)

2)청지기는 오직 주인의 뜻에만 복종하여야 합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3:16)

3)청지기는 주인의 명분에 손해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청지기가 취급하는 것은 재산이지만 주인의 명예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무개 집 청지기가 어떻게 하였다”는 것은 주인의 명예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가 청지기이면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그의 사명일 것입니다.(마 25:29)

4)청지기는 주인에게 큰 충성을 하였더라도 인사나 대가를 받을 체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종이 밭에서 일하고 왔다 하여 주인보다 먼저 식사를 할 수 없다” 하셨고, 또 주인에게 먼저 수종을 들었다 하더라도 “주인이 종에게 사례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17:9) 따라서 청지기는 자기의 할 일을 다 한 후에 “나의 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하고 겸손을 차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눅 17:10)

5)청지기가 섬기는 직이라면 예수님도 “그 직임을 위하여 오셨다” 하셨으니(막 10:45)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 직임이 있음은 더욱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지요.(요 13:5) 또 “종의 형체를 힘입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빌 2:7) 바다같이 넓은 터에서 목재소를 하는 사장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 분은 꼭 그 회사의 사환이나 일꾼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것을 청지기의 사명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본문에서 청지기에게 교훈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청지기는 항상 경성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35절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서 있으라”하신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부자집 주인이 밖에 나가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대문은 2겹 3겹으로 닫혀있어서 밤낮 문전에 서서 기다려야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 지키는 청지기가 깨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도적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2)예비하는 일을 잘 하여야 합니다. 40절에 보시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하셨는데 이 예비는 주인이 밤중에 오니까 등불을 예비하여야 할 것이고, 또 “때를 따라 주인과 집 사람들에게 양식 나누어 줄 것”도 예비하여야 할 것입니다.(42절) 만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하지 못하면 매를 많이 맞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청지기에게 예비가 부족하면 매 맞을 일에 해당하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청지기는 주인 앞에 자기의 모든 사무를 회계(계산)할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 히 13:17, 눅 16:2에도 있습니다. 본문 48절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인즉 자신이 받은 은혜와 맡은 일을 살피고 주인에게 떳떳하게 보고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청지기의 직분 성격과 사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청지기는 ① 주인 앞에서 자기의 것이란 없다, ② 주인의 뜻에 복종할 뿐이다, ③ 주인의 기업에 손해를 주면 안 된다, ④ 섬기는 직임이다, ⑤ 또 잘 하고도 대가나 사례를 구하지 못하는 직임이다, ⑥ 또 항상 경성하고, ⑦ 예비하여야 하며 ⑧ 반드시 주인 앞에 계산(회계)할 것을 알고 준비하여야 하는 직임입니다. 저희들도 선한 청지기답게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 11 과 쓰임 받은 모세 (출 4:1-17)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쓰임 받은 모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소명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쓰심에 응하게 되었는가 하면

1.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에 의하여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선 모세의 부모나 모세 자신이 유명한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거나 소원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선민이 핍박을 받는 시기인지라 모세를 버려야 하는 입장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살리셨고, 애굽 왕국에서 40년, 광야의 목자 생활로 40년간을 연단시키신 후에 때가 되매 무조건 모세를 불러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도 그러하였고,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사무엘이나 신약 시대의 디모데는 그 부모의 소원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자랄 때 자기 민족을 생각해주는 마음은 가졌지만 그 민족의 해방 지도자가 될 것은 꿈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명이 있을 때 “자신은 연약하여 못하니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쓰시라”고 세 번이나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책과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자기의 계획과 주권으로 쓰신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를 얼마나 큰 사역자로 쓰셨습니까?

1)한 민족의 해방 지도자로 쓰셨고,

2)애굽의 왕의 권위를 대항하는 사역자로 쓰셨으며

3)하나님의 말씀을 모세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출 4:16) 애굽왕 앞에 신처럼 쓰셨으며(출 7:1)

4)80세로부터 120세까지 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노년기 40년을 쓰셨습니다.

3.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모세를 쓰실 때 모세에게 쓰실 만한 요소가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마른 막대기 같아도 싹을 나게 하여 쓰실 수도 있지만 모세에게는 소명자 될 만한 요소가 있었으니

1)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그 어머니의 양육을 받을 때 신앙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2)그리고 그는 “온유하고 겸손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습니다.(민 12:3)

3)자기 만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였습니다.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4)정의를 위하여 희생하고 영광을 포기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히 11:24에 보시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애굽 왕궁에서의 영화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다” 하였으니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그 외에도 모세에게는 순종과 지혜와 전폭적인 헌신과 일사각오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① 모세에게는 순종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소명을 받을 때 여러 번 사양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무조건 순종하였습니다. 바로왕 앞에 나가서 왕과 대결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순종한 것이요, 그 외에도 율법 선포나 시행에 대한 순종을 뛰어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하였더라”(출 39:43)한 말씀이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따라서 순종 제일의 인물입니다. ② 지혜의 특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하여 던진 것과 또 “뱀의 꼬리를 잡으라”하여 잡은 것도 순종이지만(출 40:3-4)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뱀에게 물리지 않기 위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뱀을 사탄으로 비유하였을 때 그 꼬리를 잡는 것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성도의 지혜를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전적 헌신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세가 갖고 있었던 것은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80세 된 모세에게 지팡이는 요긴한 것입니다. 호신용과 양 치는 용도로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던지라” 하셨으니 이것은 모든 의존의 대상에서 모세를 고립되게 하시는 것이고, “마지막 요긴한 것까지 다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먹고 죽을 양식으로 엘리사를 대접한 것이나(왕상 17:11-12) 어린 아이가 도시락을 바친 것이나(마 14:19) 베드로나 세례 요한이 헌신한 것,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 헌신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④ 일사각오의 정신입니다. 모세가 바로왕을 대결할 때나 또 군중이 모세를 반역하였을 때나 민족이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모세는 수차 생명의 위기를 당하였고, 또 민족의 위험이 있을 때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민 12:13, 16:13)

하나님은 모세의 이상과 같은 사명적 소질을 충분히 이용하시고, 또 미리 연단시키셔서 지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권과 섭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나 모세의 자질과 특성 만큼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심에 있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후천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제 12 과 헌신하게 됨 (출 32:25-2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헌신함”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아론과(25절) 백성들이 타락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등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타락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때에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율법 돌판 두 개를 갖고 내려오다가(출 32:15-17) 그 율법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린 후 금송아지 우상을 불사르고 부수어 가루를 만든 다음 물에 타서 백성들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또 “그들의 행동은 방자한 것인즉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으므로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들이 그들을 도륙하되 형제나 친구나 이웃을 가릴 것 없이 죽여야 할 것이라”한즉 그대로 실행하여 그 날에 우상 숭배 죄로 죽은 자가 3000명 가량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하기를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고 또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헌신”이란 그 자체보다도 상황 여건의 명분이 있어야 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롬 10:2에 보시면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것인지의 상황 여건이 있어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이 바라시지 않는 일에 열심을 쏟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오늘날 헌신하게 되었다”는 말씀처럼 헌신하는 입장과 방법을 바르게 취하라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헌신”이 무슨 뜻입니까?

1)보통 알기로 “몸을 드린다”는 뜻이라고 이해하실 것입니다. 드릴 헌자, 몸 신자(獻身)이니까요. “몸을 드린다”하여 육체 노동만 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마음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의 실천이 곧 헌신입니다.(신 6:5, 마 22:37, 눅 10:27) 고후 8:5에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라”하신 말씀도 역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2)성경에는 헌신이란 용어가 본문에 한 번 나타나 있는데 히브리어로 “밀레우에르켐”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손을 채운다, 자신을 드린다, 자신을 정화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손을 채운다”는 뜻은 “넉넉하게 봉사한다”는 의미가 있고, “자신을 드림”은 역시 헌신의 뜻이며 “자신을 정화한다”는 뜻은 순결에 그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을 종합하면 “순결을 전제하여 자신을 드리되 넉넉하게 드리라”는 것이 헌신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3)그런 의미에서 모세가 부패를 척결한 것은 헌신의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① 우선 헌신자는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26절) ② 그들은 각각 칼을 차고 나왔는데 이는 죄를 척결하기 위한 의의 검, 또는 말씀의 검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헌신자는 죄를 척결 정화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③ 그리고 인정을 초월하여 그 형제, 그 친구, 그 이웃을 가리지 않고 범죄에 가담한 자들을 다 죽였으니 이는 정화 사역의 능력이 인정을 초월하여 나타낼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에 있고, 죄를 척결하는 무기가 있으며 또 인정을 초월하여 범죄자를 척결하는 힘이 있을 때 비로소 헌신할 자격이 있고, 또 정화된 환경이 이룩되었을 때 헌신하여야만 능률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생선을 사서 배를 따지 않고 더러운 물에 씻었다면 그 일을 열심히 하였다 하더라도 그 음식은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헌신은 순결과 순결한 상황이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헌신을 잘 하시려고 한다면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1)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결한 자신과 순결한 여건이 필요한 것이고,(딤후 2:21)

2)꼭 자기 부인이 따라야 합니다.(마 16:24) ① 헌신자가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와 함께 모든 것이 다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의 뜻과 목표와 취미와 생애의 계획도 없어지고 자기의 생명과 몸과 지혜와 재물과 아름다움과 명예와 권세도 자기의 것이 아닌 것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울 때 주님의 뜻대로 쓰여질 수 있을 것인즉 이것은 마치 빈 그릇이어야 용도에 응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또 헌신자가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의 가장 약한 면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없고, 들렐 것도 없으며 자기를 죄인처럼 여겨 겸손해질 것이요, 자기의 연약을 인하여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자세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연약한 자에게 더 가까이 해 주실 것입니다.(고후 12:8-9)

3)마지막으로 헌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전심 전력하여야 합니다. 딤전 4:15에 “전심 전력”이란 말씀이 있고, 대하 16:9에 “전심으로 향한다”는 말씀이 있으며 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마 22:37)는 말씀도 있으니 성심과 정성을 다하여 맡은 일에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을 잘 하면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는 것이 별무할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만 남겼고, 엘리야는 겉옷만 남겼으며 세례 요한은 가죽띠를 남겼을 것이고, 예수님은 무덤도 남긴 것이 없으며 성철 스님은 검은 고무신만 남겼습니다. 헌신의 의미를 잘 이해하시고 뜻있는 헌신이 되도록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13 과 두 사람을 쓰심 (민 13:25-33)목록으로


하나님이 기드온의 군사 32000명 중에 300명만 쓰신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흐르는 물을 먹을 때 엎드려 입을 대고 먹는 자와 두루 살피며 손으로 퍼먹는 자 중에 후자의 사람들을 쓰셨으니 이는 경성함과 민첩함을 보시고 쓰신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당시에도 열 두 정탐 중 두 사람만 쓰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인데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하나님이 용사로 쓰셨고, 다른 이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열 두 정탐을 지파별로 뽑아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지경을 40일간 정탐하도록 하고 그 보고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공통되는 보고는 “그 땅은 좋은 땅이다(27절), 그 곳 성읍들은 견고하다(28절), 여러 족속들이 거하고 있다(29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열 정탐과 두 정탐 사이에 상반된 보고와 의견이 또 나왔습니다. 열 정탐의 보고와 의견은 이러하였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 땅의 거민들은 우리보다 강한즉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 같은 존재이므로 능히 그 땅을 쟁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크게 울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악평하는 말에 대하여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 땅은 아름다운 땅이요,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 그러니 거역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민 14:6)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막의 생활인즉 물이 없고 채소가 없으며 기후 조건, 짐승들과 해충의 위험, 또 대적의 침략, 고라당의 반역 등 어려움이 계속 되는 상황에서 믿음과 소망과 용기가 아니면 전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타개함에 있어서 적합한 인물을 쓰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기의 뜻에 공감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뜻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강한 대장부요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 같다”고 느끼는 자들을 하나님이 쓰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강한 민족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중심에 있나이다”(시 40:8)하는 사람, 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마 7:21)하신 말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14)하며 자기의 생각을 다 포기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뜻에 공감하고 따르는 자를 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필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하여 자기의 정욕을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도우시면 무엇이나 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게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으니 저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하나님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주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하는 믿음을 갖고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기가 허락하는 일이면 다 이루신다”(창 28:15)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민 14:8)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또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는 말씀이나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말씀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왕하 16:9)

3. 따라서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소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 명의 정탐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으나 두 명의 정탐은 역경에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쓰신 책에서 사명 수칙 첫째가 의욕과 설레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이 되면 사명을 이행할 것을 기다릴 때 마음이 조급하고 의욕이 넘치며 가슴이 설레인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부정적 관념은 사라지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의욕으로만 가득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빌 4:13) 이런 사명자들이 많아져야만 교회도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 중에 낙관하며 소망을 갖는 것도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한 동안 허리가 아파서 활동이 불편했었으나 “서서 못하면 앉아서 할 것이고, 앉을 수 없으면 누워서 할 것이며 누울 수도 없게 만드시면 그것은 제가 더 살아서 하나님 앞에 필요할 것이 없다는 뜻이니까 미련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데도 난관이 많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는 그 난관에 구애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부정적 자세로 일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믿고 결사적으로 매달려도 힘드는 일인데 부정적 활동으로 발전이 되겠습니까? 비상한 믿음과 능력을 발휘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 1:8의 “권능받고 전도자 되라”는 말씀을 “이적 행하는 권능”으로 해석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서 그 권능은 복음 사역자의 증거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 시대에 어느 사역자가 이적으로 부흥시킨 일이 있었습니까? 한경직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등 큰 교회 목사님들이 이적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지요. 말씀으로 부흥시킨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신은 떠났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힘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시 18:1, 빌 4:13) 말씀으로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하셨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하시므로 제자들에게 용기 가질 것을 일깨우시고 악당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 “내로라”하시고 자기를 나타내신 분입니다.(요 18:6) 어거스틴이 장기간 탈선에 빠졌다가 어느 기회에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롬 13:12-13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읽게 되자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켜 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요, 말씀의 변화시키는 역할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붙잡히지 않으면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배짱과 용기는 다른 것입니다. 근거 없는 만용이 배짱이고, 도움을 받으며 힘쓰는 담력이 용기입니다. 용기를 갖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 27:1-3) 하나님은 용기를 갖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쓰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따르는 자, ②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 ③ 긍정적 사고 방식을 갖고 소망을 갖는 자, ④ 용기 있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아셔서 저희들도 그런 믿음의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14 과 모세의 사명자적 특징 목록으로

(신 34:9-12)


“모세가 유명한 사역자요, 또 하나님이 그렇게 쓰셨다”는 사실은 잘 아시는 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모세의 사명자적 특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사명자적 특징”으로 네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그 후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남이 없었다”하시므로 가장 큰 일을 한 사역자로 쓰셨다는 말씀을 하셨고, 두 번째는 80세로부터 120세까지 노년기에 사명 생활을 끝낸 후 후계자 여호수아를 안수하여 그에게 직임 인계를 잘 한 점이며 셋째는 평소에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하시므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또는 직접 교제한 은혜를 받은 사역자이며 넷째는 “이스라엘 민족과 애굽왕 앞에서 큰 권능을 행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특징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사역의 능률을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역자를 귀하게 쓰시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모세의 특징 될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1. 어릴 때에 신앙 교육을 잘 받은 것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는 유아 시절을 그의 어머니 요게벳과 제사장 아버지인 “르우엘” 밑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시기가 “젖떼는 동안 얼마동안”(출 2:10)이라 하였으니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으나 애굽 왕궁에 있을 때에도 그 가족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유아시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잠 22:6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유아 시기에 신앙의 부모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선민 의식을 강하게 교육 시킨 줄 압니다. 그래서 “모태 신앙이 귀하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아 교육에 근거하여 나타난 최종 결과로 모세는 “자기 동족과 고난 당하는 것을 애굽 왕궁의 영화보다 더 큰 보화로 여기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자녀들에 대한 유아 교육의 중요성(특히 신앙과 도덕성에 관하여)을 인식하셔야 하겠습니다.

2. 연단을 잘 받은 것입니다. 신앙과 민족성과 도덕적 교육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지식과 정치는 애굽 왕궁에서 받았으며 겸손, 온유, 인내, 근검, 근면은 광야의 목자 생활에서 터득하였습니다. 연단은 곧 훈련이고, 훈련이 잘 된 정병이라야만 쓰임 받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모세가 연단 받은 기간은 80년 간이었습니다. 요즈음 사역자들이 몇 년 배워 지도자가 되는지 대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 온유, 겸손한 특징입니다. 이 온유, 겸손은 천부적 성품일 수도 있고, 연단을 통하여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딤전 4:8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온유, 겸손하셨는데(마 11:29) 모세의 온유와 겸손도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였다”(민 12:3)하셨으니 대단히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온유, 겸손은 하나님이 지도자로 쓰시는 귀한 조건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마 5:5) 하셨고, 또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겸손할 때 쓰셨고, 교만할 때 버리신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삼상 15:26, 16:1) 또 하나님은 모세를 쓰실 때 그가 온유와 겸손을 지키는 동안 쓰셨습니다.(민 27:12-20) 목회자는 온유를 상실하고 혈기를 부릴 때 신임을 잃게 되고 모든 사람들도 겸손과 온유를 나타내지 못할 때 그 이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4. 순종의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맨 처음 지팡이를 던지고 뱀을 잡을 때부터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버리고 홍해를 가르는 등 모든 이적들이 다 모세의 순종에 뒤따라 나타난 것입니다. 히 3:5을 보시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처럼 충성하였다” 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출 39:22,42, 40:16)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지중해 쪽으로 직행하면 7일이면 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시나이 반도 광야로 돌리시고 40년을 끌 때에도 순종한 사람입니다.(출 13:7,17, 민 14:34) 이렇게 사명자 되는 특징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5. 선악을 판단하는 지혜가 탁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과 함께 재판하는 직임을 주셨습니다. 재판에 공의가 상실되거나 재판이 신속하지 않으면 그 만큼 무질서와 피해가 늘게 됩니다. 모세의 재판과 징벌은 인정에 치우침이 없이 공의로웠습니다.(민 15:36, 출 32:25-35, 18:21-26) 그리고 최종 판결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태평 성대를 이룩한 것도 솔로몬왕이 재판을 잘 한데 있었습니다.(왕상 3:16-28) 성도의 생활과 하나님의 교회에도 공의와 사랑이 겸전할 때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기도와 희생적 봉사인 것입니다. 모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였습니다.(출 17:11)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 역할”을 교훈하셨고, 그 교훈대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처럼 모세도 그 백성들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려 하였고, 또 대신 징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출 32:32에 보시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었을 때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책에서 도말하시고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고, 또 신 3:26에서는 죄는 백성들이 짓고 징계를 모세가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하려고 하다가 희생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는 노년기 40년 동안 자기의 사역을 다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희생적 정신이 있었습니다.(롬 9:3)

7. 노년기에 사명 인계를 잘 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노쇠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더디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직에도 연령 제한이 있었습니다. 30세부터 50세까지 였습니다.(민 4:3, 8:25) 모세는 자기의 임기가 끝날 부렵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여호수아를 그 후계자로 세우고 물러났으니(민 27:12-23) 참으로 잘 한 일이요, 자기 사명의 유종의 미를 거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남은 일을 그 다음 세대에 맡기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고 그것을 지키며 생활에 적응한 일에 대하여는 더 말씀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말씀의 사역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쓰신 모세에게는 기초 신앙, 다양한 연단, 온유, 겸손, 순종의 탁월함, 선악을 판단하는 지혜, 기도와 희생 정신, 말씀의 사역자인 점, 그리고 끝맺음을 잘 하는 좋은 특징이 있었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두 개의 기념돌 (수 4:1-9,19-2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두 개의 기념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 강물이 기적으로 쌓이고, 백성들이 요단강 바닥을 마른 땅으로 행하여 건넜을 때 모세는 두 개의 기념돌을 쌓게 하였습니다. 하나는 요단강 바닥에 12개의 돌을 세우게 하였고,(4:9) 또 하나는 요단강 바닥에 있는 돌 열 두 개를 운반하여 유숙처에 두었다가(4:3) “길갈”이란 곳에 와서 또 세웠습니다.(4:19-20) 그리고 후시대의 사람들이 그 돌비석의 의미를 물을 때 그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넌 사실을 말하고 후손들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잘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4:21-24)

1. 우선 이 사실에서 요단 강물이 멈춘 경위를 살펴보면

1)이것은 홍해 바다가 갈라진 상태처럼 된 것이 아니고(출 14:22) 흘러내리던 물이 흐름을 중지하고 상류 쪽으로 역류 현상을 일으킨 것입니다.(수 3:13,16, 4:7) 흐름이 중단되고, 쌓이다가 역류되고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가 “마른 땅이 되었다”(수 3:17)하였으니 백성들이 건너는 시간과 돌을 취하고 또 돌기둥을 세우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장시간 그런 기적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이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고,(수 3:7-8)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물로 들어가라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물을 밟을 때 흐르던 물이 멈추고 쌓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시행하였을 때 흐름이 중단되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2. 저희들은 이 사실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나 물의 흐름이 중단되는 이적은 그 당시에만 나타내셨고, 그 후시대에는 주신 일이 없으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란 사실과 만유의 주되신 분으로 성도의 행복을 위하여 많은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보면 자연 현상 속에서만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자연의 기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허공에는 물체가 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새와 비행기는 떠 있고, 온 지면을 홍수로 뒤엎는 무거운 물이 공중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람이 자연 법칙 안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제가 이 글을 쓰는 무렵에 김천에 사는 처남이 쌀을 한 가마 택배로 보내왔습니다. 그 당시에 쌀이 떨어져서 사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마 6:25,32-33, 히 4:16) 그 이유는 이런 사실이 2년 이상 6회에 걸쳐 네 사람이 보내왔는데 꼭 식량이 떨어져서 사러 가려고 준비할 때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은혜를 하나님의 기적 섭리로 믿고 더욱 감사히 여긴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성도님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가까이 하시고, 보호 인도하시며 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모든 성도님들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도우시고 사람이 상상 못하는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표현하실 때 롬 4:17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길갈에 세운 기념돌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교육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요단강 바닥의 기념돌도 발견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헛된 일을 하게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사 55:11) 그러면 무슨 교훈을 주려고 기념돌을 세웠을까요?

1)선민된 조상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받은 사실을 알라고

2)여호수아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실을 깨우치며

3)그 일을 모범하여 후손들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하나님의 특별 은총과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5.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개인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좋은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너희 조상 OOO는 이런 일을 하였다”는 증거물을 남기는 것입니다.

1)어떤 성도는 자신이 예배당을 짓고 기념 글귀를 남긴 예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는 많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2)또 어떤 교회는 교회가 부흥된 증거로서 예배당을 잘 지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당이 교회 부흥의 관건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당 그 자체가 신앙의 전부는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실 확보를 위하여 12회 이상 대출을 받았고, 자기 집을 대출 용도로 담보하지 않은 교인이 없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도봉구의 어떤 교회는 “자금 융통 약정서”라는 것을 돌려서 무이자의 돈을 교회에 융통해 주므로 건축에 이용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예배당이 웅장하면 “후시대에 그 교회가 큰 발전을 하였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그것 역시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3)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기념돌을 세워야 할 것입니까? ① 후시대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일깨워줄 만한 역사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념돌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② 후시대 성도들을 깨우칠 만한 역사라면 우선 자신이 많이 깨달은 것과 많이 변화된 것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산 생활의 역사를 성경과 함께 남기는 일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는 말씀에 근거하여(마 11:12) 침노하는 신앙 생활을 힘써서 천국 생활의 보람을 더욱 느끼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이사야가 소명을 받음 (사 6:1-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따라 “이사야가 소명을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이사야가 소명을 받게 된 시기와 경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1)이사야는 유대 나라 웃시아왕 때에 아모스의 아들인데 그의 아버지 “아모스”는 웃시아왕의 아버지 “아먀샤”와 형제간이란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약 70년 동안 왕족의 신분으로 예언을 하였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핍박을 모면한 일도 있었지만 말년에 가서는 므낫세 왕의 핍박으로 톱으로 켬을 당하여 순교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2)이사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던 시대는 유다 나라 13대 웃시아왕의 죽던 해로부터(주전 758년 경)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왕까지 다섯 왕의 치세를 거쳤고, 북방 이스라엘왕으로는 여러보암 2세로부터 호세아왕까지 여섯 왕이 통치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 70년 간의 5왕, 6왕의 교체는 나라의 정변을 뜻하므로 결코 그 당시의 나라들이 평안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3)그런 중에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당시 만큼은 52년간을 장기 집권한 웃시아왕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으로 세상을 떠나던 해였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한 나라의 왕을 문둥병으로 저주하셨겠습니까? 대하 26:16 이하를 보시면 웃시아왕이 자기의 왕위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하여 제사장의 직권을 임의로 시행하고 제물을 드리다가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이 들어서 고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을 때는 그 백성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징계도 그만큼 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류 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을 복되게 하려던 만물이 저주를 받아 땅이 엉겅퀴를 내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대단히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았고, 또 “어려운 일을 감당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4)그러면 그가 시행해야 될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할 때 ①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징계하시려는 시기에 이사야를 불러서 징계를 선포하는 선지자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고, ② 상당한 기간 징계가 있은 다음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권고해주신다는 약속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가 관영하고 그 죄의 분량이 차면 징계하시고, 또 회개하면 싸매 주시는 분이십니다. 얼만큼 징계하시고 또 얼마 만에 싸매어 주시느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범죄한즉 그 부모가 자식을 내쫓았다가 상당 기간 후에 다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삼하 13:37-39, 14:33) 따라서 하나님은 그 백성에 대한 징계와 훗날의 위로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어떤 방법으로 부르셨습니까?

1)먼저 예수님의 천상 세계의 영광을 계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①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셔서 만왕의 왕이시고, 심판주이신 위엄을 나타내셨는데 그 옷자락이 제단까지 드리워진 것을 보니 그 의복은 중보자인 대제사장의 의복이었고, 그 옷자락이 위엄스러우리만큼 제단까지 드리워진 것을 보니 이는 구약 시대에 나타내주셨던 성전의 일부분을 보여주신 것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속죄제와 중보 사역을 이사야로 하여금 상기하도록 하신 것이었고, ② 또 “스랍”이란 여섯 날개 가진 천사들이 그 주위에서 예수님을 받들며 영광을 돌리는데 두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또 두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우고 남은 두 날개의 힘만으로 하나님의(예수님) 거룩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③ 그때에 그 찬송 소리의 웅장함 때문에 성전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는가 하면 그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연기는 구름과 달라서 진노의 뜻을 나타내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출 19:9-18, 시 18:8, 계 15:8)

2)그러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 왜 이런 광경을 보여주셨을까요? ① 그것은 이사야로 하여금 “고난을 이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저주 선포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천상 세계의 영광을 확신하지 않으면 지상의 고난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요, ② 스랍과 같이 겸손하게 봉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스랍은 여섯 날개의 능력을 가졌으나 둘로는 자기의 겸손을 위하여 얼굴을 가리웠고, 또 둘로는 자기의 노출되는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발을 가리웠으며 나머지 둘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데 사용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2/3의 능력을 자기 처신에 사용하고, 1/3의 힘으로만 하나님께 봉사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나 사역자들도 그런 방법으로 충성하여 먼저 덕을 세운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이사야를 회개시키시기 위하여 엄위하신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예수님의 위엄과 웅장한 찬송 소리와 문지방의 터가 요동함과 연기가 가득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의 부정한 죄를 깨달으며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5절 말씀에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하고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이사야의 진지한 회개의 태도인 것입니다. 입술의 범죄는 각 가지 죄악을 대표한 것이요, 또 개인과 민족의 죄를 아울러 고백한 것입니다. “망하게 되었다”함은 “죽게 되었다”는 뜻이니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그 영광의 빛에 소멸되어 죽는다는 말씀이 출 19:21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어두움에 비취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본 것이기 때문에 죽게 된 것은 아니었고, 오직 계시로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가 자신의 입장을 회개할 때에 천사가 화저깔로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네 입에 닿았은즉 네 악이 제하여졌고 또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제단의 숯불이 부정한 입술에 닿은 것은 십자가의 공로(제단)와 성령님의 역사(불)로 죄를 정결케 하시고 용서하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고, 또 회개시키시고 정결하게 만들어서 자기의 사역자로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실 때 “사명자의 자원하는 충성자를 쓰시기 위하여 누가 나를 위하여 가겠느냐?”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명자라도 기계처럼 쓰시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명받은 자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님 뜻대로 나를 쓰십시요”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의 주장을 앞세워 충성하는 자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써 주십시요”할 때는 주님 뜻대로 쓰시라는 것입니다.(벧전 5:2, 요 10:18, 행 9:10, 26:15)

3.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먼저 징계와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고, 그 다음 아주 먼 훗날에 구원의 은총이 있을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1)이사야서 자체가 전부 66장인데 그 중 39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고, 40장 부터는 구원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상당 기간(70년)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2)9절 이하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포할 내용을 주실 때에 “너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둔하여지고 귀는 막혀지며 눈은 감겨질 것이라 하나님은 너희들이 깨닫고 돌아와서 고침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징계와 저주를 선포하고 백성드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다가 므낫세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3)앞의 말씀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너무 깜짝 놀라서 “주여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하니까 대답하시기를 “너희 성읍이 황폐하여지고 거민과 가옥이 없어지며 토지가 전폐되고 사람들의 신앙이 멀리 떠나서 형편없이 될 때까지라” 하셨으니 이 시기는 바벨론 포로 이후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와 인권과 종교 제도와 성전과 선지자와 말씀을 다 잊어 버린채 겨우 일부만 신앙의 명맥을 붙잡고 나가는 형편이었습니다.

4. 그러나 13절 말씀에서 “그 시기가 지난 다음에는 베여진 밤나무나 상수리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는 것처럼 남아 있는 유대 민족 중에서 메시야가 오시므로 다시 구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범죄한 시일을 따라 징계하시는 분입니다.(겔 4:5, 민 14:34) 그리고 그 징계하시는 기간은 “형벌의 날이요 보응의 날이라”(호 9: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범죄의 분량이 찰 때에 때를 정하시고,(호 10:10) 진노를 하시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습 3:8)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고, 반드시 징계의 기간이 지난 다음이라야 회복과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는 것입니다.(습 3:17)

2)이 예언에 따라서 이스라엘 북왕국이 망한 것은 주전 675년경이므로 메시야가 탄생하여 구원의 은총이 시작된 복음 시대까지 약 700년간 징계에 버려두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때를 정하시고 일하시는 분입니다.(전 3:1) 애굽에서의 400년 노예 기간(창 15:13), 또 바벨론 포로 70년 기간(단 9:2), 또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기간도(요 2:4) 작정대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어떤 고난도 때가 될 때에 해결해 주시는 섭리가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① 선지자를 불러쓰시는 하나님, ② 징계의 때와 권고의 때를 알리시는 하나님, ③ 메시야의 복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 17 과 마땅히 행할 일 목록으로

(잠 22:6, 행 2:46-47)


1. 성경에는 “마땅히 행할 길”이란 말씀이 있습니다.(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이란 어떤 길일까요?

1)천국가는 길입니다. 잠 16:25에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십자가의 좁은 길이여야만 할 것입니다.(마 7:13) 반드시 천국 가는 길을 바로 인도 받고, 그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이어야 합니다. 어디서 살고 어떻게 살며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고, 함께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5:22, 6:9) 그리고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계 3:20)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가시는 길로만 가고 주님과 동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3)의로운 길 가운데로 가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정통 신앙이고, 생활로는 합법적 생활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갓길로 가거나 차선을 위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닌다”(잠 8:20)하였고, 그런 자가 재물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잠 8:21) 따라서 성도의 생활은 어떤 문화나 풍부한 생활에 목적을 둘 것이 아니라 의로운 방법에 따라 사는 것을 우선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에는 “반드시 행할 것”을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행할 바라” 하셨고,(시 33:1) 또 “하나님께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히 11:6) 그러니까 성도가 마땅히 할 바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고, 그에게 찬송 드리는 것이며 또 그의 칭찬과 상급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을 의식하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살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요,

2)찬송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며

3)상 주심을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기 위하여 충성되히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충성과 봉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의 미래는 항상 그 자리에 머물고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는 자(섬기는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눅 6:38)

3. 교회 생활로서 성도가 마땅히 행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 일을 행 2:46-47에서 찾아냈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 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주시는 것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자의 수가 그 교회에 더 하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교인의 수가 늘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는 교회일수록 이 말씀을 실천하셔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 하셨다” 하셨으니 그 방법을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1)성도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웬만한 일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 가족 같고, 또 서로 위하고 모든 일에 마음이 하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해와 배려가 많고 한 가족이란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믿음과 교회 제도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모이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떡을 떼고 찬미하는 것은 성찬과 예배를 의미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성도의 친교입니다.(이 음식 먹는 성도의 친교를 편리한 방법으로 시행하도록 노력하셔야 함.) 예배와 친교를 날마다(자주) 하는 것입니다.

3)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의 교회적 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도록 선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합니다.”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자랑 같고 무슨 수단을 쓰는 것 같지만 요즈음은 옛날과 달라서 남의 생활에 기웃거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대문을 같이 쓰면서도 인사를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도의 차원에서 자신들의 교회 생활의 즐거운 모습과 신앙의 모습을 알리고 외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인정을 받을 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부흥된 경위를 살피면 거의 다 그렇게 부흥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마땅히 행할 일”이란 제목 아래 “마땅히 행할 길”은 천국 가는 길,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 의로운 길이요, 반드시 행할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일과 찬송하며 즐거워하는 일이요, 또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생활로서 마땅히 할 일은 성도가 마음을 같이 하고 자주 모여 예배와 친교를 가지며 백성들의 칭송 받는 단체가 되는 일이라고 교훈을 받았습니다.


 

제 18 과 하나님의 일을 분담함 목록으로

(대상 9:22-34)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을 분담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후에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와 찬양을 드리는 규모가 커지자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여 직임을 분담시킨 내용입니다.

1)솔로몬왕이 성전을 짓기 이전에 모세가 지은 성막을 관리할 때에도 작은 규모이지만 직임 분담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3장과 4장에 보시면 ① “제사장은 아론과 그 후손이 맡으라”(민 3:4,10), 여기의 아론은 레위 지파이고, 모세의 형이었습니다. ② “제사장을 돕고 성막을 관장하는 일은 레위 자손이 맡으라” 하시고 레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게르손의 후손은 성막의 포장을 맡고,(민 3:25-26) 둘째 아들 고핫의 후손들은 성막에서 사용하는 법궤와 제사 드리는 기구 등을(내부 휘장)을 맡고,(민 3:31) 셋째 아들 므라리의 후손은 성막을 세울 때 사용하는 널판과 띠와 기둥 등을 맡아서 봉사에 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기도와 감사 기도를 전담한 사실도 있었습니다.(삼상 12:23, 느 11:17)

2)그런데 이와 같은 분담 제도는 사도들이 집사들을 세워서 신령한 직임과 봉사에 관한 직임을 분담시킨 사실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행 6:2-4)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 시대에 제사장직은 역시 아론의 후손이 맡았고,(대상 9:10-13) 그 이외의 제사장을 돕는 일과 성전의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레위 지파에게 맡기셨는데 본문 22절을 보시면 ① 레위 지파 중에 문지기 된 자가 212명이요,(22절) 그들과 그 자손들이 합력하여 성전문의 동서남북을 지켰고, 4분대로 나누어 두목을 두었으며 반차(교대 근무)를 정하고 성전을 지키는 자들인 만큼 성전 4문에 거주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22-27절) ② 그 중에 어떤 자는 성전의 그릇을 맡았는데 필요에 따라 수효대로 내주고 받아들이는 일(창고지기)을 하게 하였고,(28절) ③ 또 성소 안에서 사용하는 기구와 소제(떡), 전제(포도주, 기름)와 향을 맡은 사람이 있었고, ④ 그리고 향기름을 만드는 직은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맡겼으며(30절) ⑤ 화목 제물을 삶아 먹을 때에도 냄비에 지지는 일을 맡은 자가 있고,(31절) ⑥ 안식일마다 떡을 진설하는 일을 맡은 자가 있었으며 ⑦ 또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가 있었는데(찬양 대장) 그는 저희의 골방에 거하며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다 레위인들의 족장급이요, 으뜸 가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렇게 “분담”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므로 최고의 전문성을 살리고 질서와 목적의 효력을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동차 공장이나 TV 공장에도 가보면 역시 분담제로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달란트에 합당한 사역으로 분담을 할 때 더 효력이 있고, 질서가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제 19 과 늙어도 결실함 (시 92:12-15)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노인들에게도 사명적 결실의 희망이 있음”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도 나이가 64세이므로 늙은 사람에 속합니다. 제가 58세 때 400명 가까이 모이는 교회의 시무를 사임하고 부목사에게 넘겨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늙어서 젊은 사람처럼 진보적인 목회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그 외에 나에게는 “늙어서 할 일”이 더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내가 아니라도 젊은 목사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은 내가 더 늙기 전에 하여야 하므로 늙을수록 일감과 할 일이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공원에 갈 기회가 적은 사람이지만 몇 년 전에 부산의 대덕 공원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 많은 노인들이 서성대며 놀고 있다가 천주교 기관에서 점심을 제공한즉 그 대접을 받는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형편이고, 여기 저기에서 노닐다가 점심을 얻어 자시고 사는 형편이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그것을 할 때마다 보람과 은혜를 느끼며 늙어도 심심치 않게 살 수 있다는 행복감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이끌리고 말씀과 함께 주님을 가까이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지금도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산책을 못합니다. 많은 노인들이 늙으면 할 일이 없는 줄 알고, 또 병 중에 오래 시달릴 때는 더욱 그런 줄 알아서 사명의 손을 놓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 시간을 통하여 크게 깨달으시고 노인들이라도 큰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노인은 인생의 황금 시기를 살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1)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삶의 철학을 가장 유익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시기란 점입니다. 경험 없는 젊은이들이 사리에 어긋나게 사는 것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많지 않습니까?

2)노인의 시기는 자기의 인생을 결산하는 때이기 때문에 또한 값진 것입니다. 자식을 잘 키웠으면 효도를 받아야 하고, 은퇴를 하셨으면 연금을 받아야 하며 경험을 하셨으면 그 경험에 따라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가실 준비를 하셔야 하는 시기이므로 또한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백발을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잠 16:31)

2. 성경은 성도가 “늙어도 결실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결실할 것인지는 계속 살피셔야 하겠지만 본문에서는 성도를 여호와의 궁정에 심겨진 종료나무와 백향목으로 비유하며 설명하셨습니다. 백향목은 장수하는 상록수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가 “진액이 많고 빛이 청청하다”는 것은 늙은 성도의 영적 신앙의 강건함을 뜻하고, 결실의 내용은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는 순간까지라도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는 일”만큼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늙었을지라도 건강하여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나타낼 수 있으며 병들었어도 성도로서의 소망을 말할 수 있고, 병과 싸우면서도 믿음 지키는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죽음의 소망까지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능하신 분이며(본문에는 바위라 하셨음.)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얽매이지 않는 만큼(딤후 2:9) 믿음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고전 13:13) 그러면 왜 이렇게 늙어도 결실할 수 있는 것일까요? 늙으면 쇠하는 것이 원리인데.....그 이유

1)성도는 우선 영원을 살고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할 수 없고,(요 11:26)

2)반석되신 하나님이 영원한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며(시 121:7-8)

3)세상 일을 끝낸 다음이니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4)성도가 맺어야 할 결실이 “신령한 열매”(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늙으면 돈 버는 일이나 전도하는 일이나 노동하는 일은 못할지라도 “자신의 신앙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진실하신 분이라”는 증거는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평안하고 형통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듯이 늙거나 병들거나 죽을 때도 하는 것이니까 그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직하심(즉 진리)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늙어도 결실한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는 말씀도 역시 그런 뜻입니다.

3. 그러면 실제로 결실하는 생활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우선 건강을 지키시면서 젊은 마음을 갖고 사시는 것입니다. “늙었으니까 일을 안 하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마시고, 그 반대로 죽는 날까지 일하고 젊게 사시라는 것입니다. 수 14:10에 보시면 “갈렙의 나이가 85세이나 옛날과 같이 건강한즉 싸울 수 있다”하고 아낙 자손들을 물리친 후 유다 지파의 기업을 넓힌 사실이 있었습니다. 부산 남성 교회의 김정근 장로님은 성악가인데 74세 때에도 손녀딸이 피아노를 치고 젊은이도 내기 어려운 고음 발성으로 찬송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2)기도로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반드시 기도의 제목을 정하시고 기도하신 후 그 기도의 응답 여부를 세심하게 관찰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노력보다 더 큰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3)하나님과의 친교 관계를 점점 더 좁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 관계가 좁혀지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보려는 생활에서 사람이 싫어지고 골방이 좋아지며 더 큰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날을 따라서 믿음의 힘도 더 커지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새 힘도 솟아날 수 있습니다.(신 33:25, 사 40:30)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실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만 할 수 있어도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이라”할 것입니다. 크게 분발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20 과 연합에 힘쓰라 (전 4:9-12)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연합의 힘이 크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지만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두 사람 이상이 힘을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체가 있고, 또 교회 안에도 여러 기관을 만들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것은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말처럼 연합의 정도에 따라 힘을 모을 수 있고, 단체의 크기에 따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할 수 있고, 두 손뼉이 마주 치면 소리가 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면 패할 것을 두 사람이면 당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11-12절)

2)“저희가 수고하므로 좋은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연합적 수고를 잘 하므로 능률있게 봉사하고 더 좋은 상을 얻게 되는 것이 연합 사역의 유익이란 뜻입니다.

3)“혹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지만 홀로 있다가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을 때는 화가 있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연합의 성격이 힘을 모아 전진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거나 쓰러졌을 때 다시 일으켜주는데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고,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협력하고 주고받는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도의 썬다싱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눈오는 벌판을 걸어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자 같이 가던 사람이 그를 구출하려 하다가 함께 죽을 것을 염려하여 그대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그 쓰러진 친구를 업고 땀을 흘리며 목적지로 오고 있는데 먼저 혼자 오던 친구가 또 쓰러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다 구조할 수는 없으므로 그대로 한 사람만 업고 오던 중 자기 몸의 열이 그 친구의 몸을 녹이자 그도 깨어나게 되었고, 자기도 얼어죽지 않은 상황에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미국의 “캐트너”란 사람은 친구와 등산을 갔는데 같이 간 친구가 실족하여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고함을 쳤으므로 뒤따라가던 자기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서 구출해 준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두 세 사람의 연합은 한 생명을 살리는 조건이 된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연합은 협력도 되고, 예방도 되며 구출하는 대책도 되는 것입니다.

4)“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힘도 큰데 세 사람 이상이야 더욱 힘이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는 논이나 밭에서 가래로 도랑치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삽질은 혼자 할 수 있지만 가래질은 꼭 세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세 사람이 손을 맞추어야 잘 됩니다. “삼겹줄을 꼰다”는 뜻은 기술적으로 화합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남녀가 결혼하여도 이혼율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입장에서 결혼하였는데도 화합을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화합”이란 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화합이 되지 않고 상대방이 내 뜻과 같지 않습니다. 가정의 화합도 어렵거든 교회와 이웃과의 화합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따라서 화합을 잘 하는 사람은 그 인격과 신앙 수준을 높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겹줄을 꼬는 것도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돕는 것도 은사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2:28)

2. 어떻게 연합을 잘 할 수 있을까요?

1)우선 모든 사람들이 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이 신앙의 첫째 미덕입니다.

2)자기를 부정하고 특권을 양보하며 봉사의 사명만 이행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3)불법을 삼가고 합법을 장려하며 규모와 예절에 힘쓰고, 자기의 사명을 책임져야 합니다.

4)대의명분에 뜻을 모아야 합니다. 연합을 목적하는 사람이 교만하거나 특권, 이기주의에 마음을 쓰거나 봉사에 솔선하지 않거나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타인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연합할 체를 마셔야 할 것입니다. 겸손 안 해도 될 사람이 겸손을 차리면 갑절의 덕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겸손과 양보가 화합의 큰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연합의 역사가 있을 때 큰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합심 기도가 힘이 있다”(마 18:19) 하셨고, 합심 기도에 성령님이 임하셨으며(행 1:14-15, 2:1-2) 네 사람의 합심 봉사에 중풍병자의 고침을 받았고,(막 2:1-5) 고넬료의 집에서는 합심 사경회 때 성령을 받았으며(행 10:44) 무엇보다도 외국 선교 사역은 합력이 아니면 이루기 어렵고 신학의 고등 교육이나 복음 사역자를 배출하는 문제는 더욱 연합의 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작은 단체나 큰 단체를 막론하고 연합에 힘쓰셔서 좋은 연단도 받고 좋은 사역의 결과를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화합 잘 하는 단체는 사랑이 있는 단체로 분명히 발전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사명자의 각오 (마 10:34-39)목록으로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전도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전도자라면 사명을 가진 제자들이고, 교역자 등의 사명을 갖고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하는 사역자들입니다. 이들이 사명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몇 가지 든든한 각오를 갖고 따라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신앙적 싸움꾼이 될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본문 3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탄이나 불법과 싸워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이 자기의 가족일 수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데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핍박할 수 있으며 또 가까운 이웃들과 멀어지고 때로는 원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주먹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믿음을 지키면서 인내와 법과 덕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옳은 일이니까 옳지 않은 일을 하라는데는 굴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립이 있게 되고 더 나가서는 핍박을 받게도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단체와 성직자간에 극단의 싸움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히 잘 하는 것과 바로 하는 방법이 있는데 절차와 규모를 지키지 않으면 단체간에도 대립이 되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성도는 잘잘못의 시비가 붙어도 법대로 재판하여 결과를 기다리고 자신의 잘못이 나타났을 때는 회개하고 사과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적은 불법이 큰 감정 대립이 되고 나가서는 서로 강퍅해지면서 신앙의 반대 양상을 띠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에 불법을 바로 잡기 위한 투쟁이 큰 싸움의 양상처럼 나타날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에 사명자는 사랑과 친교와 규모를 따르면서 계속 불법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세를 늦추지 않아야 하고,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각오로 사명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인정을 초월하는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본래부터 육신적 삶과 현세욕, 그리고 인정을 초월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육체와 현실이 무상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7절에 보시면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족적 인정에 치우치지 말고 사명 생활에 전심 전력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도 많은 성직자들이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나야 할 입장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유명한 제자가 된 것은 그가 사명을 느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데 있었다”(눅 5:11)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단신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가족을 갖게 되면 그만큼 마음이 나누어진다”(고전 7:32-33) 하셨고, 또 때가 단축하여진 때에 사는 성도는 “아내가 있어도 없는 자 같이 하라”(고전 7:29) 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은 다 가족에 인정을 두지 말고 초월한 상태에서 자기를 주께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모세도 상당 기간을 아내와 떨어져 산 기록이 있습니다.(출 4:20,25, 18:2,6) 순교 사화에 보면 성도의 신앙의 의지를 꺾기 위하여 핍박자들이 권세로 그의 자녀들을 학대한 사실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주님께 합당한 종이 될 것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할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막 8:34과 눅 9:23에서는 같은 교훈을 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여야 할까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를 헌신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목적, 자기의 계획, 자기의 취미, 자기의 유익, 자기의 영광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릇이 비어 있을 때 주인이 임의로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내세우겠습니까? 연약한 인생과 죄밖에 없으니까 어린 아이처럼(마 18:1) 어른의 처분만 바라고 사랑을 기대할 따름인 것입니다. 성도나 사명자가 순진한 어린 아이처럼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필요한대로 쓰시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취미나 목적을 앞세우는 것은 비단 좋은 일이라도 자신을 부인함이 아닌 것입니다. 사는 것과 무엇을 하는 것과 죽는 것까지 자신을 부인한 생각 속에 묻어야 할 것입니다.

4.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각오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8절을 보시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도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에게 부과된 책임을 고난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부과된 책임은 십자가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그런 십자가를 지우셨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성도들에게도 각자에게 맡겨진 고난스러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감당하면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지요. 그런 책임을 고난으로 감당하면서 주님의 사명도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마리아 모친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는 책임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나 사명자에게 주신 십자가가 있을 때 그것을 벗고 주님을 따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지고 그 책임을 감당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만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전심 전력 할 것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대하 16:9) 하셨고, 바울 사도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하셨으며 또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을 수 있다”(마 11:12) 하셨고, 사도 요한은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을 모신다”(요2:8) 또 “미지근하지 말고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계 3:15,19) 하셨으며 베드로는 “즉시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으니”(마 4:22) 이 말씀들은 다 적극성있게 열심있게 사명에 몰두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사명자된 입장에서 이상의 다섯 가지 각오를 든든히 갖고 실천에 옮기신다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거두실 것입니다.


제 22 과 포도원의 일 (마 21:28-32)목록으로


“포도원의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포도원 주인이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하셨습니다.

1)여기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비유하신 것이요,

2)“포도원”의 뜻은 넓은 의미로 볼 때는 선민적 생활이고, 좁은 의미로 볼 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과(요 15:1) 이스라엘 족속을 포도원으로 비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사 5:7, 27:2, 렘 12:10) 거기에 따를 때 “포도원”은 선민적 생활과 사명의 세계, 또는 신약 시대의 교회의 사역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3)맏아들은 누구를 가르킨 것인가?할 때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마 21:33에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하고 시비를 거는 질문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꼬인 마음을 아시고 대답을 피하셨다가 이 비유 교훈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맏아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율법주의적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 사역에 대한 일을 성실하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2. 그런데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겠습니다 하고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포도원으로 가겠습니다”하고 접근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우선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2)말만 하고 시행하지 않는 것이며(약속 위반)

3)포도원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인데 거기에 동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의 뜻과 구원 사역에 일치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를 따르고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서므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 것입니다.

3. 그래서 그 주인은 또 둘째 아들에게 “같은 일을 하라”하니까 그는 처음에 “싫소이다”하고 불순종하였으나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1)여기의 둘째 아들은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까? 본문 31절에서 “세리와 창기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고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시킨 천민 계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들이 “싫소이다”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 하고 “범죄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3)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하셨고, 또 “병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하신 말씀대로 죄인들을 회개시켜 복음을 믿게 하시니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유대인 선민들에게 구원 사역과 구원의 특혜를 먼저 주셨으나 그들이 받지 않으므로 이방인들에게 그 특권을 넘겨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강하게 외쳤을 때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적 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천대하는 세리들과 창기들은 믿고 귀한 사역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나 삭개오는 세리였고, 수가성 여인과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창기같은 자였지만 그들이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4. 포도원의 일은 대략 어떤 것입니까? 포도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일인데 이것은 성도의 교회적 사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우선 포도 농사를 잘 지으려면 몇 가지 필수 조건이 있는데

① 울타리부터 잘 만들어야 합니다. 포도원을 허는 여우같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아 2:15) 이단자들, 불건전한 자들, 세속적인 자들, 외식자들, 불법자들을 막는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교리와 사상을 잘 가르치고 교단의 지도를 받는 것이 울타리 역할에 해당합니다.

②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나무의 양분이 열매로 모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 25:28에 보시면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뺏기리라”하셨고, 또 “한 므나를 뺏어서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눅 19:2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실리적 용도에 사용하여 신령한 열매를 충실하게 맺도록 진력하라”는 뜻이요, “교회의 성격을 비중있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자를 것은 자르고 보존할 것을 보존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③ 거름을 잘 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말씀 양식의 공급입니다.

④ 병충해의 예방입니다. 육체나 심령도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나무의 병충해를 예방하듯 교회의 생활이나 성도 개인의 생활에도 건강을 위하여 예방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공급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이 있을 때 사탄이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랑 실천에 문제가 있을 때도 역시 심령의 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대인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것이 신앙에 관한 병충해 예방입니다.

2)마지막으로 포도원을 교회로 비유하였을 때 성도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헌법적 규칙 제 2 조에 보시면 집회 참석의 의무, 사랑과 선행의 의무, 물질적 봉사의 의무, 성경 연구의 의무, 직분자로서의 책임의 의무, 진리 보수와 법규 준수의 의무를 규정하였으니까 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 세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① 자기 신앙 유지를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하고 안 하는 사람 되지 말고, 혹 “아니요”하였더라도 속히 뉘우치고 바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유대 관계를 가깝게 유지하셔야 하는 것이요, ② 사랑의 실천으로 원만한 대인 관계를 잘 유지하셔야 합니다. ③ 기도, 전도, 봉사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101:6에 보시면 “하나님의 눈은 충성된 자를 살펴 함께 하신다”하셨고, 대하 16:9에서는 “하나님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여 자기에게 전심을 기울이는 자를 찾아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포도원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 꼭 필요한 일에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7 과 잠깐 쉬어라 (막 6:30-33)목록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사역 보고를 받으신 후에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는 자들에게 휴식을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휴식의 의미는 우선 휴식하기 전에 열심히 일을 하여야 합니다.

1)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하시고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창조 사역으로 일을 끝내신 분이 아니고, 계속 만물의 보존과 통치를 위하여 일하시며 구속 사업도 계속하시는 분입니다.

2)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일하신 것을 알 수 있고, 사마리아 동리로 가시다가 “행로에 곤하여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다”(요 4:6)는 말씀도 있으며 앉으셔서 물을 얻어 잡수시며 그 시간에도 전도하신 일이 있고,(요 4:39) 또 시장함을 느껴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일도 있었습니다.(마 21:18)

3)가버나움에서 전도하시고 가다라 쪽으로 배를 타시고 가실 때 피곤하여 주무신 사실도 있었고,(막 4:38) 낮에는 전도하시고 밤에는 감람원에 가셔서 기도하신 후 쉬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막 11:19, 눅 21:37)

4)그리고 천국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지만 7일 중 하루를 안식하게 하신 것은 영원한 안식을 모형으로 계시하신 휴식의 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7일에 안식하던 것이 안식 후 첫날로 변동되었지만 7일 중 하루를 지키는 주일에도 휴식의 의미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6일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 가장 이상적 건강 유지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6일 쯤은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2. 예수님이 사역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휴식을 명하신 장소는 한적한 곳이고, 그 곳은 예수님이 머무신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한적한 곳은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벳세다 지역이었습니다. 막 6:1에 보시면 “예수님이 자기의 고향에서 12 제자를 파송하셨다”하셨는데 이 고향은 나사렛이 아닌 제 2 고향 가버나움입니다.(마 4:13) 그리고 파송자들의 보고를 받으신 곳도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휴식할 제자들을 배로 태워 벳세다 쪽으로 가게 하셨으니 이것도 제자들을 휴시하게 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때에 뭍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예수님의 행선지가 벳세다인 것을 알고 배를 타고 오는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하였는데(막 6:33) 그들이 시장한 것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5병 2어의 기적을 베풀어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시장할 때 먹을 것을 주시는 것도 휴식에 속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5병 2어의 기적으로 무리들을 먹이신 후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막 6:34,44-46) 그런데 막 6:45-52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선을 독촉하셨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벳세다에 와서 잠깐 쉬었어야 할 제자들이 일찍 도착하지 않고 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그 곳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풍랑 만난 바다 위에 예수님이 나타나 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후 그들을 “게네사렛”으로 보내신 후 예수님도 그 배를 함께 타시고 “게네사렛”에 가셔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풍랑을 만났을까요?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뱃놀이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설령 징계의 풍랑이 아니라도 명령대로 휴식처에 속히 왔으면 풍랑은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순종한 요나의 앞길에 풍랑이 있었던 것처럼 불순종이나 죄가 관련되었을 때 어려움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아셔서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실 때 잠깐 주셨습니다. 휴식은 육체의 피로를 푸는데 있을 뿐 노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할 일을 위하여 건강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잠깐 휴식하는 것 이상의 것을 명하신 일이 없고, 또 잠깐 휴식하는 일도 수고를 많이 하여 피곤해진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이나 육체는 활동하므로 건강을 유지하게 되어 있음을 아셔서 열심히 일하고 피로가 심할 때 휴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벌이에 바빠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나 목회에 너무 힘들어서 몸살날 지경이 되는 것은 휴식을 명하신 주님의 뜻에 맞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심방하고 설교 준비에 시달리면 밤 늦게 자게 되고 새벽 기도회에 또 일어나는 것은 무리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에 휴식을 하여 피로를 푸는 것이 오히려 잘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항상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여름 행사 같은 것도 수련회와 수양회와 피서를 확실히 구별하여 건강과 위험에 무리 없게 시행함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마다 방학 기간이 되면 수련회, 수양회 등 행사를 하는데 교회는 신령한 목적을 도모하는 행사만 책임을 지고 교통의 위험이나 물의 위험 같은 것은 계획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맡은 일에 열심하고 피로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적당히 휴식하면서 믿음 생활과 현실 생활을 적당하게 적응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4 과 바르게 자라자 (눅 2:52, 골 1:28)목록으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바르게 자라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옛말에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 여러 가지 이겠지만 이 시간에는 조기 교육의 중요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생스러운 환경에 태어나서 발전하고 성공하기 어려운데도 여전히 극복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넉넉하고 좋은 환경에 태어났는데도 어릴적부터 잘못된 길로 나가서 자기를 후퇴시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크게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릴적부터 무엇이나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다 역으로 행하는 심보가 있었습니다. 담배와 술이 나쁜 것을 알고 증오하였으며 일을 안 하고 노는 것과 남의 돈을 꾸어 쓰면서 사는 어른들의 생활을 증오하여 그 반대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눅 1:52은 예수님이 자라나실 때 원만하게 성장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하고 지혜롭게 또 사랑스럽게 성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골 1:28의 말씀은 바울 사도의 목회상 수고하시는 목적이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게 하기 위함이라”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성장 과정에 있어서 온전한 인격자가 되고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으로 본문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 학생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하였지요? 어릴 때부터 기초 자체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르게 자라는 사람은

1.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여야 합니다. 혹 장애자라도 건강하기만 하면 그 나름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의 방법에는 믿음의 방법과 심신 수련의 방법이 있습니다.

1)믿음의 방법은 육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고,

2)심신 수련의 방법은 낙관적, 또는 소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먹고 일하며 쉬는 일을 적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을 지키는 것은 헌신의 도구로서도 필요하고, 또 효도의 차원으로 볼 때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음 가짐으로 건강을 지킨다는 말씀이 있고,(잠 4:22) 약으로 효험을 본다는 말씀도 있으며(잠 24:13, 딤전 5:23) 또 신앙으로 성취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요삼 2절) 무엇보다도 규칙적 생활이 건강에 중요한 것입니다.

2.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은 점차 배워서 터득하지만 바른 정신과 지혜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고, 그것이 바르게 행동하는 근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바로 갖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바로 갖되

1)창조자를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본주의 사람, 인본주의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믿음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또는 천국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믿음을 갖지 못하는 백성은 버리운 자로 인정하십니다.(롬 9:21) 여러분 무엇을 버립니까? 쓰레기를 버리지 않습니까? 고후 13:5에 “버리운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하셨습니다.(전 12:13)

2)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 사회에 거짓이 자행되면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외식하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실치 못하다”는 판단을 받을 때는 참으로 불행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믿음은 진실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거짓되어도 진실한 사람은 끝까지 삶의 보람을 느끼며 성공한다는 사실을 믿고 더욱 진실하여야 할 것입니다.

3)착한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포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소리 크고 포악한 사람이 잘 되고 이기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착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포악은 악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악인은 다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 145:20) 이것은 사나운 동물이 유순한 동물보다 번성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자신의 성품을 점검하되 예수님처럼 온유,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마 11:28, 눅 18:19) 성내지 않고 겸손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4)인내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쉽게 되지 않고 다 때를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참고 기다릴 때 성취가 됩니다. “급히 흐르는 물이 벼랑을 만난다”는 말처럼 급히 서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인내하는 순간에 더 살필 수 있고, 더 연단받을 수 있으며 때를 더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방지하고 완전한 행동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5)희망을 갖는 성품입니다. 매사를 낙관적으로 내다보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더 좋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보람 없는 날을 보내게 될 것이요, 식량만 축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7전 8기란 말이 있듯이 넘어지고 넘어지며 실패를 하여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승리자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일곱 번 안된 일이 있었으나 소망을 갖고 나중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안된 일을 헤아려 볼까요? ①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②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③ 형들이 죽이려고 구덩이에 넣었습니다. ④ 애굽 가는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⑤ 노예가 되었습니다. ⑥ 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갔습니다. ⑦ 감옥에서 나가는 장관에게 부탁하였으나 2년 가까이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번 넘어졌지요. 그러나 노예로도 충성하고 감옥 에서도 충성하였으니 이 충성과 노력이 곧 소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형통하는 때를 주시겠지”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요셉이 소망 가진 근거는 창 50:20에 나타나 있습니다. 애굽에서 야곱이 죽었을 때 그의 형들이 요셉을 두려워하며 “자기들을 선대해 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은 악한 일도 선으로 바꾸시며 자기가 애굽에 팔려온 것은 흉년에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것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소망의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은 성도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바른 생활을 나타내야 합니다.

1)부모님께 효도하여야 합니다. 효도는 백행지본이고, 축복이 약속된 계명입니다. 여러분들 주위를 살펴보세요. 부모 중심, 효도 중심으로 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녀들 중 누가 더 발전하였는지를...분명한 것은 효도 중심으로 자기의 생활을 설계해 나간 사람이 더 발전하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발전할 것 같으나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엡 6:1-3)

2)정의로워야 합니다. 불법을 피하고 부정에 개입하지 않으며 정도로만 가야 할 것입니다.(잠 8:20, 고후 13:8) 의와 불의를 잘 분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생활하는 것이 바른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넘기면서 불의를 예사로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바른 생활하는 성도는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정의롭게만 행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3)맡은 책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법적으로 맡은 일과 도의적으로 맡은 일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맡은 일은 국가적, 법률적 책임과 약속에 관한 사항이고, 도의적으로 맡은 책임은 인륜에 관한 것과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입니다. 여기에 소홀하면 좋은 생활이 될 수 없고, 또 자기도 괴로움을 당하며 좋은 이웃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4)근면하여야 합니다. 이 근면은 맡은 책임 사항 외에 여가 선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쓸 때 TV에서 바캉스 화면이 나왔습니다.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잠자는 장면입니다. 제가 과거에 목회를 하면서 교회 행사에 끌려 여름에 한 번씩 그런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에 내가 어떻게 저 텐트 속에서 편안히 잠을 잤을까? 지금은 시간 낭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도저히 못할 일이라”하였더니 제 아내 말이 “당신은 그때도 텐트 안에서 책만 보고 글쓰지 않았느냐”하기로 “사실 그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가 선용을 안 하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따라서 휴식을 제하고는 주어진 시간에 꼭 할 만한 일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근면한 사람은 시간이 자원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나 타산성 있게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분수에 알맞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분수란 것은 자기 형편에 알맞고 적자 없이 살며 사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절도 분수에 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다 분수를 차릴 줄 안다면 나라가 더 부강해졌을 것입니다. 사치나 기분, 필요 없는 제도 등을 분수 차리는 차원에서 과감히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바르게 자란다는 것은 미래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릴적부터 건전한 환경에서 건설적으로 자라기를 소원합니다. 바르게 자라는 방법은 건강을 지키면서 바른 정신을 갖고 바른 생활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이런 생활을 힘써서 성공의 시일을 앞당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5 과 복 있는 종 (눅 12:35-48)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37,38절) 저희들도 “복 있는 종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어떻게 한 종이 복이 있습니까?

1)깨어 있는 종이 복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자”(35절)는 항상 출동 태세가 되어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잔치 집에 간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면 즉시 열어드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이 2경, 3경이라도 깨어 있어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2)그러면 “깨어 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조건 잠을 안 자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완전한 준비를 하고 출동 태세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설명한다면 “항상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가깝고 민감하게 접촉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기도를 힘쓰고 말씀을 연구하며 죄를 멀리 하고 사명 생활에 힘쓴다면 주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현세욕에 치우치고 외식을 좋아하며 진실이 결여된다면 그런 상태에서 주님이 가깝게 계시다거나 깨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자기의 사명을 잘 아는 종입니다. 주인의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며 또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종의 사명이 “주인이 올 때 문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의 부자는 대문도 여럿이고 바깥 대문이 퍽 먼 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대문 앞에 가서 주인이 문 두드리는 시간까지 지키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청지기 사명에 대한 말씀도 있지요.(눅 12:35-38) 하인들을 거느리고 주인의 재산을 맡아 경영하는 책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종은 달란트를 받아 갖고 가서 “장사하라” 하였는데 장사도 안 하고 밑천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큰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지요.(마 25:24-29) 주인은 종들이 노는 것을 싫어하였고, 장사 기술이 없어서 혹 밑지더라도 성실하게 노력만 하였다면 칭찬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주인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놀았다가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을 사명도 있고, 또 각자가 하셔야 할 일도 있으며 맡은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할 일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아는 종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4)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예비하는 종이 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미리 미리 또 넉넉하게 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도 미리 준비하고 헌금도 미리 준비하며 자기의 책임에 관한 것이면 다 미리 또 넉넉하게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비를 잘 하는 종은 지혜 있는 종입니다. 집을 나설 때 바늘과 실을 예비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열쇠를 안에 넣고 잠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비가 부족한 종은 모든 면에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사명도 옳게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깨어 있고 자기의 사명을 알며 예비하는 종이 되어 복있는 사역자 또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2. 복 있는 종이 어떤 복을 받습니까? 본문 37절에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니....주인이 띠를 띠로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와 수종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종이 잘 하였다 하여도 주인이 종을 섬기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눅 17:7에 보시면 종이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주인이 종에게 “앉아서 먹으라”하고 수종들며 사례하겠느냐? 하시고 종이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있는 것을 어찌 합니까? 주인의 권위만 생각하는 종은 칭찬 정도만 하고 종을 섬기는 일까지는 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을 사랑하고 또 겸손한 주인은 종의 노고를 생각하여 충분히 수종들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 아프면 병을 고쳐주어야 또 일을 시킬 것이고, 종이 피곤해졌으면 휴식을 시켜야 또 일을 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의 주인은 예수님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종이 복 있는 종이 되면 예수님이 그 종에 대한 모든 것을 더 잘 보살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맡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시 37:5)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할 것을 먼저 만들어 놓으시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자녀에 대하여 필요할 것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든다”는 뜻은 “주님이 경성하신 상태에서 그 성도와 종을 살펴주시므로 평안케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꼭 믿고 복 있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이나 일반 역사에도 보면 본이 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1)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애굽 왕궁의 영광보다 더 귀하게 여긴 사람이고,

2)여호수아는 신앙과 지조와 용기와 상관에 대한 신뢰가 뛰어난 사람이며

3)다윗은 용맹과 통치력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던 사람이며

4)요나는 죽음의 장소에서도 죽지 않는 체험을 하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크게 쓰셨고, 바울 사도도 그러하였지요.

5)세례 요한 역시 자기의 영광을 등지고 주님의 명예만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친 자입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은 종들은 다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 실례 한 가지를 든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온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이 본래 자기 상전의 하인으로 따라 다니던 사람인데 그 얼굴이 원숭이처럼 생겨서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큰 야심을 품고 상관을 잘 섬겨서 그 상관이 그를 높이 써주므로 큰 장군이 됐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추운 절기에 상관을 수행하면서 그 상관이 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리는 순간에 그 상관의 신을 가슴에 품어 데운 후에 그 상관이 나오려는 시간에 갔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상관이 상당히 오랜 후에 그 사실을 알고 풍신수길을 더 신임하고 그에게 큰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그만큼 주밀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쁘시게 보시고 복 있는 종으로 여기셔서 은혜를 많이 주실 것입니다. 히 3:5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작은 책임의 충성이 더 큰 복을 받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26 과 작은 일에 충성하라 (눅 16:10-12)목록으로


예수님은 “성도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혹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니까 큰 것만 감찰하시고 큰 일만 귀히 여기시는 줄로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일생을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셨는데 이는 가난하고 비천한 자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함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고후 8:9)

1.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관련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 일”(마 12:20),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일”(마 12:20), “소자 중 하나를 실족지 않게 하신 일”(마 17:6),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일”(마 11:5), “소자 섬기는 일을 자기 섬긴 일로 여기신 일”(마 10:42), “병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일”(마 11:5),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강조하신 일”(마 17:20),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지켜보신 일”(막 12:42), “모든 이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일”(마 11:17), “이적을 행하시고도 남은 것을 거두게 하신 일”(요 6:12), “참새 한 마리가 죽는 것도 간섭하시는 일”(눅 12:6), “100마리 중 잃은 양 하나를 찾으신 일”(눅 15:4),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일”(마 21:19), “수가성 여인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마리아 성을 통과하신 일”(눅 4:49) 등 자질구레한 일과 관련된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세심하게 살고 작은 일을 귀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작은 일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예수님도 작은 일을 외면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요,

2)예수님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되다 하시고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일과 큰 축복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우리는 작은 그릇이라 큰 일은 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셨고, 또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사기꾼을 칭찬하신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도록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취급하는 종이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여 쫓겨나게 되자 자기가 주인의 재산을 취급하는 동안에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써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어차피 쫓겨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쫓겨나면 탕감 받은 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계획적 범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악한 종의 행동을 지혜롭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악한 종(옳지 않은 청지기)은 주인의 돈을 임의로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지혜롭게 한 것은 자기의 생활 대책을 위하여 빚을 탕감해 준 일입니다. 그러니까 못한 것과 잘 한 것을 명확히 구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샀다”는 것은 그 악한 종의 소행을 말씀한 것이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하신 것은 그 악한 종에게도 지혜가 있어서 주인이 그를 지혜로운 놈으로 여겼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의롭게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한 성도에게 큰 상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또 악한 재판관도 번거롭게 부탁하는 원고의 소원을 들어주었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겠느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눅 18:7-8) 따라서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뜻은 바로 작은 일이라도 정의에 성실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의 기도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적은 무리의 하는 일도 귀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19-20, 눅 12:32)

3. 작은 일은 대략 어떤 것들입니까? 예배당을 혼자 짓거나 선교사를 혼자 파송하거나 교회 경상비를 혼자 부담하는 일은 큰 일이겠지요. 그것에 비할 때

1)만나서 인사하고 미소 짓는 일,

2)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는 일(마 12:9),

3)꾸준히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일,

4)가끔 손님 대접하는 일,

5)예배 시간 잘 지키는 일,

6)예배 시간에 전화벨을 끄는 일,

7)찬송은 열심히 부르고 기도에 졸지 않으며 설교를 들으려고 애쓰는 일,

8)진실을 지키는 일,

9)약속 이행하는 일 등은 다 작은 일들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31일날 주어야 할 인건비를 토요일날 결재가 늦었다 하여 다음 월요일에 준다고 하였습니다. 2일을 늦게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갖고 있지 말라”(잠 29:7, 욥 7:2, 레 19:13)하신 말씀이나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지기까지 끌지 말라”(신 24:15)는 말씀을 알았더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품값을 당일에 주는 것은 정당하고 작은 일”이란 뜻입니다.

10)특히 성도가 시간을 지키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 작은 일을 시행 못 하면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제가 큰 교회 목회를 할 때 9시에 개업 예배를 위하여 교회에서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목적지가 서울입니다. 그래서 9시에 모인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9시 10분에 어디에서 누구를 또 태우도록 약속하고, 또 9시 20분에는 누구를, 30분에는 누구를 어디서 타라고 하였는데 한 두 성도가 시간에 오지 않아서 정시에 출발을 못하게 되니까 그 다음 사람들이 기다리는 시간을 다 허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작은 일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일에도 신용이 없을 것이 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독교인이면 “어느 정도 진실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진실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신용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물질 거래와 물질 취급에서 진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작은 듯 하나 큰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말씀 신앙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몰라도 “나는 성경 제일주의자”입니다. “전통이나 유행이나 인간의 문화는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믿어야지요”하고 주장하는 것은 작은 일이면서도 큰 일이 될 것입니다. 저희들이 작은 일만 잘 하여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충성이 되리라”고 믿어져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27 과 믿음과 충성의 성격 (눅 17:5-1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과 충성의 성격”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의 5,6절은 “믿음의 성격”을 말씀하셨고, 7-10절은 “충성의 성격”을 말씀하신 것으로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1. 믿음의 성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고,(히 12:2) 성령님이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며(요 3:3) 믿음의 역사도 아울러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살전 1:2-5) 또 예수님은 믿음을 붙들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사탄이 베드로의 믿음을 밀까부르듯 할 때 예수님이 “그 믿음 떨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눅 22:31-32) 따라서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일 뿐(약 1:17, 엡 2:8) 결코 사람이 만들어 갖거나 갖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믿음은 기도를 통하여 분량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란 말씀이 롬 12:3에 있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이란 말씀도 엡 4:7에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말씀도 엡 4:13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뜻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과도 상통함이 있습니다.(엡 5:18) 성령이 충만하면 믿음 분량이 많아집니다. 또 말씀 지식이 많아져도 역시 믿음 분량이 많아지는데 이 모든 방법을 기도를 통하여 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을 때 “더”라는 말이 분량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습니까? 또 기도는 믿음 분량을 더 받는 방법이니까 기도에 의하여 많아지고 적어지는 것이 믿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믿음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하셨는데 마 13:31-32에서는 천국의 성격을 말씀하실 때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큰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 겨자씨 한 알 만큼 주신 다음에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키워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양귀비씨 만큼이나 작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깃들일 정도라” 하셨으니까 하나님을 마음 속에 담고 천국을 마음 속에 담을 만큼 무한정 커지는 것입니다. 마치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나는 다 배웠고 다 경험하였다”고 할 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믿음은 얼마나 자라고 있습니까? 여름에 오이 자라는 것과 어린 아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 자라는 것도 반드시 측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4)믿음은 능력이 동반하는 것입니다. 분량이 큰 믿음만 능력이 동반하는 것이 아니고, 분량이 아주 적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졌는데도 능력은 동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기도를 하였는데 응답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어떤 집사가 기도를 하였는데 암이 고쳐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명한 부흥 강사의 기도라야만 암이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이 시간에 그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구원도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 겨자씨는 죽은 씨가 아니고 생명 있는 씨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믿음 많은 사람보다는 적겠지요. 그러나 적다면 얼마나 적겠습니까? 겨자씨 만한 것이 가장 적은 것일지라도 그 믿음에 기도 응답이 따를 수 있고, 능력이 따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구의 기도를 받으려 하시지 말고 꼭 스스로 기도하여 응답 받고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작은 믿음에 관계 없이 큰 능력도 나타내 주실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작은 믿음 분량을 뜻하지요. 그리고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는 것은 큰 능력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한 것은 믿음의 역사이고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있다”하고 가만히 있는데 뽕나무가 뽑히는 것은 아닙니다. “뽑히고 심겨져라”하는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능력이 큰 능력인가?할 때 그것은 본문에서 큰 능력을 상징한 말씀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곡괭이로 뽕나무를 뽑고(뽕나무는 무화과나무보다 뿌리가 깊다 함.) 바다에 흙을 메운 다음 거기에 심는다면 큰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금방 산이 평지되고 바다가 육지가 되니까 큰 능력이 아니지요. 따라서 암을 고치는 능력만 못할 것이나 하나님은 평범한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암도 고쳐주시니까 적은 믿음에서도 큰 능력을 주시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적은 믿음이라고 주눅 들지 마시고 생명 있는 작은 믿음만 있으면 이 말씀을 믿고 주여 주여 하면 잘 되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충성의 성격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 위하여 충성할 때 반드시 충성된 종처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종이란 노예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루 일하고 일당 받는 품군이 아니고 인권과 물권이 없는 노예를 뜻하는 것입니다. 종의 성격

1)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밭에서 종일 일하고 왔지만 또 집에 와서는 주인께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쉴 시간 없이 일을 많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자기 사정을 살피지 말고 우선적으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밭에서 종일 일하고 들어온 종이 피곤하여 먹고 누워야 하겠지만 그보다 우선 할 것은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나 자기의 사정은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의 일보다 주님의 일을 더 살핀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자기의 일을 더 크게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3)주인의 명령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명령대로 복종하는 종, 명령을 성실하게 행하는 종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욕망이 없고 오직 주인만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롬 14:8)

4)주인의 명대로 다 행하고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의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례를 바랄 수 없고, 의무를 다한 것 뿐이며 결코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도 없으며 무익한 종으로 겸손을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으로 믿음과 충성의 성격을 교훈받았습니다.



제 28 과 사명자의 지혜 (요 13:31-38)목록으로


저희들은 다 복음적 사명이 있고 하나님께 헌신하셔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를 대상으로 하여 “사명자의 지혜”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요한복음 13장에는 사명자에게 주시는 교훈이 많습니다.

1)1절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이른 것을 아시고도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하시므로 고난과 죽음에 관계 없이 사랑을 지속하셨고,

2)3-12절에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 가진 것을 아시고도 제자들에게 겸손과 봉사와 속죄의 도리를 본보이시고 가르치시기 위하여 발 씻기는 일을 시행하셨으며

3)16절에서는 종이 상전보다 또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깨달아서 종이나 보냄을 받은 자는 무조건 그 윗 상전에게 복종할 것을 교훈하셨고,

4)18-19절에서는 가룟유다의 배신을 실제 사건으로 인용하여 “하나님의 예언이 사실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믿음을 가져야 한다”(시 41:9)고 교훈하셨으며

5)21-30절에서는 유다의 배신을 민망하게 여기셨으나 그 과정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하시게 되므로 “너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하시면서 자신의 민망함과 고난보다 구속 사역을 이루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시기 위하여 노력하신 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본문에서는 사명자의 지혜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할 때

1)하나님께 영광되도록 사명 생활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1절에 보시면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의 생활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여기에서 “영광을 얻었고”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미구에 있을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과거형을 쓴 것임.) 사명자들의 헌신하는 방법과 결과도 꼭 그와 같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선

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야 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겸손히 행하는 것입니다.(미 6:8) 내게 무슨 특기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려 하시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해야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교만을 나타내면 여러분들도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③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이라도 이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광을 자기가 다 챙기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삶는 솥에서 갈고리로 좋은 고기를 다 건져 먹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행해진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영광의 반대는 욕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하여 “욕”을 당하지 않고는 영광의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욕을 당하시므로 최고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대한 것은 성도가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욕을 당하면 그것이 복될 뿐만 아니라 그 욕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시되 “곧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벧전 4:14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셨고, 본문 32절에서는 “만일 하나님이 저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를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리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대로 헌신하시고 곧 영광으로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실 때는 정말로 자신이 욕을 당하면서 헌신하신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뜻만 따르고 겸손히 행하며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사랑의 본은 ① 죄인을 사랑하셨고, ② 원수를 사랑하셨으며 ③ 끝까지 사랑하시고, ④ 핍박과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배척하였으며 바리새인과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변함 없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큰 봉사자보다 사랑 실천자가 필요합니다. 어떤 집사가 와서 “자기는 봉사 능력이 있는데 누구 때문에 봉사를 못하니 그 사람을 없애주면 잘 하겠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봉사보다 사람 사랑하는 포용과 화합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고전 13:3에서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서로의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은 살려서 협력하는 사랑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헌신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3)독립성 있게 헌신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협력자가 없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여지 없이 자기도 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로 모이자” 하였는데 모인 사람이 없다고 자기도 가버린다면 그런 것은 독립성이 없는 연약입니다. 믿음도 혼자 지켜야 하는 것처럼 사명도 혼자 해보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출 24:12에 보시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 산하에 백성들을 기다리게 하고 여호수아만 데리고 올라간 후에 또 여호수아를 머물게 하고 모세 혼자 정상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고 율법을 받아 내려왔을 때 여호수아는 혼자서 40일 동안을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나 끈질긴 독립적 사명 수행입니까? 따라서 저희들도 누가 협조하든지 안 하든지 사명이면 혼자서라도 끝까지 행하는 독립적 헌신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본문 어디에 있습니까? 20절에서는 “유다의 배신”을 아셨고, 38절에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수제자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저주하였을 때 다른 이들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다 멀리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의 협조와 동정도 못 받으신 상태에서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사명을 다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들은 “내 믿음, 홀로 설 수 있다, 내 사명, 홀로 자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헌신하는 종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명자의 지혜 ① 영광되게 헌신하는 것, ② 사랑의 실천으로 헌신하는 것, ③ 협력자와 칭찬하는 자가 없어도 홀로 헌신하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 29 과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목록으로

(요 21:15-23)


이 시간에는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1. 재기하는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퍽 높은 데까지 급작스럽게 올라갔다가 몹시 아래로 깊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은혜를 크게 받았다가 크게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의 고향과 일터에까지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부르셨으니 만큼 재기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한 번 실수하고 신용을 잃으면 다시 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쳐 쓰시는 능력이 있고, 예수님이 고치시면 고장나기 전보다 더 좋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1)베드로는 짧은 시간에 갑자기 높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높이 올라갈 때 신앙의 모험도 많이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이 너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되게 하겠다”하시니 배와 모든 것(눅 5:11)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을 하였고, 또 풍랑 만난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명하시니 물 위로 뛰어 내려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베드로를 수제자로 세워 야고보, 요한과 함께 제자들 앞에 세우시니 삽시간에 높아지게 되었고, 또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존심으로 다른 이의 신앙을 과소 평가하며 교만한 마음을 갖기도 하였던 것입니다.(마 26:33)

2)그러나 사탄은 그를 밀까부르듯 하였고, 베드로는 자기를 과신하면서 기도를 나태히 하다가(마 26:41) 떨어지기를 시작하는데 ① 대적 앞에서 혈기를 부리고, ② 폭력으로 대적의 귀를 치며 ③ 로마 병정들이 무서워서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④ 나중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후 ⑤ 또 예수님을 저주하는 지경까지 들어가므로 ⑥ 사명도 잊은채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니 다른 제자들도 “형님이 가니까 우리도 가자”하여 단체적으로 사명을 멀리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한 후에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심히 통곡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귀향을 하였던 것입니다.

3)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일터에 까지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사명의 길로 다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의 과거도 베드로처럼 부끄럽고 험악할 수 있지만 일단 자기를 반성하고 회개한 자이면 하나님은 다시 들어 써 주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마가”라는 제자도 1차에 바울을 수종들 때는 실수하고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재기하여 새출발을 하니까 나중에는 모든 선교 사업에 큰 유익을 준 인물이 된 것입니다.(행 13:13, 15:38-41, 골 4:10, 벧전 5:13) 그런 고로 저희들도 과거에 실수나 연약이 있었으면 힘써 회개하고 새출발을 잘 하여 다시 쓰임 받는 역군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에 보시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고, 세 번 꼭 같은 다짐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저희들을 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신다면 저희들도 “사랑한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또 얼만큼 사랑해야 하는 것인지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23, 고후 13:8) 요 14:23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 하셨고,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② 교회가 예수님의 지체요 몸인 만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골 1:24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셨고, 엡 5:29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열심이 있으나 지혜를 따르지 않으므로 오히려 해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고로 지혜로운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되 지혜롭게 사랑하여 예수님을 위하는 식구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③ 복음 사역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④ 지극히 작은 소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 10:40에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함이라” 하셨고, 마 25:45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시므로써 예수님 사랑은 바로 성경과 교회와 복음 사역자와 소자를 위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얼만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시니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들”이란 베드로의 동료자들이요, 같은 사명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요즈음으로 말하면 동료급, 목사님들, 친구 목사님들임.) 그런데 왜 예수님이 “네가 돈이나 명예보다 또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사랑하느냐”하시지 않고 “네 동료급 사명자들보다 더 사랑하는냐”고 하셨는가?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① 예수님 당시에 사도들의 신앙이 제일 좋았듯이 오늘날도 목사님의 신앙 급수가 제일입니다.(목사가 목회를 하니까) ② 그런데 목사가 제일 약한 것이 무엇이냐?하면 동료자 의식 구조에 무조건 따라가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한다, 동료 목사님들도 묵인하니까 나도 묵인한다, 불법을 지적하고 싶지만 동료 목사 신분에 해가 되니까 말하지 말라...” 사명자가 재물과 명예와 현세 영달을 떠나서 과감하게 일을 하다가도 “동료 성직자가 잘못을 할 때는 정의를 주장하지 못하므로써 공의를 굽히고 연약해지며 비겁해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옳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 때문에 가족의 인정은 떨굴 수 있어도 동료자의 인정에는 약해지는 경향이 사명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가장 강한 사랑을 요구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먹이는 것과 치는 것은 다 같은 뜻입니다. 사도로써 성도에 대한 목양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양 치는 목자는 축산업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목회도 올바른 신앙인을 키우는데 주력하려면 말씀 교육을 잘 하여야 하고, 성령님의 권고를 기도로 구해야 하며 거짓 교훈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하고, 사랑 실천이 잘 실현되도록 도와야 하는 사명을 이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성도를 기드온의 300명처럼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이행하는 사명이 모든 교회와 교역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신앙 양육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20절과 23절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강조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준히 따르지 못하였던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1)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려면 베드로의 과거처럼 “스스로의 길”을 걸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율주의, 자기 뜻, 자기 욕망을 버리고,

2)자기의 팔을 벌리며 원치 않는 곳이라도 주님의 뜻이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3)그리고 죽음이 자기 앞에 와도 죽음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19절 설명)

5.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독자적인 사명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곳으로 너를 가게 하고 네 팔을 벌리게 할 것이라”하셨을 때 베드로의 마음이 초조해지면서 “동료자 요한의 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기를 “이 사람의 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세상에 재림할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한다 할지라도 너는 상관할 것이 없고 오직 네게 준 사명만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는 동료자의 사명과 동료자의 생활하는 방법이 나의 생활 목표가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하고, 오직 나에게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독특한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자기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① 재기하여라. ② 예수님을 사랑하여라. ③ 양을 잘 먹이고 쳐라. ④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독자적인 사명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 30 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목록으로

(요 21:15-23)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디베랴 바다가에 가셔서 제자들과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먹게 하신 다음 베드로에게 예수님 사랑에 대한 확인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사명자로 쓰시면서 성도의 목양을 맡기신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시 타락하였던 베드로를 다시 쓰시고저 함에 있어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고 세 번 답을 받으신 후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었고, 심각한 대답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1)우선은 반성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후 13:5에 보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 사랑에 관한 질문을 받고 즉시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또는 현재도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꼭 같은 반성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이 자기에 대한 사랑을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만큼 받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고기 잡는 이적을 보았고, 물 위를 걸은 일과 변화산에서 놀라운 광경을 본 일과 믿을 만한 고백을 하고 칭찬 받은 일, 그리고 야고보, 요한과 함께 수제자격으로 대우를 받은 것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3)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의 큰 사랑을 받고도 큰 변화를 나타내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의 신앙을 무시할 만큼 교만하였고, 자기를 과신하였으며 혈기로 악을 대항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결국 예수님이 끌려가는 입장이 되셨을 때 여지 없이 넘어지고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수제자로써의 면모를 조금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4)베드로는 반성할 때 “이것이 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약속이 쉽게 무너진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5)시 91:14에 보시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하신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고 다시 사명의 길로 건져주시기 위하여 만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세 가지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비교급을 쓰신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랑이란 용어를 처음에 ἀγάπμ(아가페)로 두 번, 나중에 φιλέω(필레오)로 한 번 질문하셨는데 베드로는 계속 “필레오”로만 대답을 한 것이요, 세 번째는 세 번을 묻고 다짐을 받으신 점입니다.

1)예수님이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는데 여기의 “이 사람들”은 동료 사도들이고 가장 인정있는 이웃들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사명을 가질 때 어부직과 어업 도구와 고향 동리를 떠나기는 쉬웠습니다. 왜 쉬웠습니까? 그때 혼자 나온 것이 아니고 동료자 친구들(요한, 안드레, 빌립 등)과 같이 나오니까 외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다 보면 그들과 떨어져서 혼자 갈 길을 갈 수도 있고, 그들과의 인정을 끊을 수도 있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고독이란 어려운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창 22:12)하신 것이나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지 않아야 한다”(눅 9:62)는 말씀이나 “아비나 어미를 더 사랑하지 말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1:37, 16:24)는 말씀은 모두가 이와 같은 의미(“이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직업과 재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남은 울타리는 “동료자들의 친교”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끊지 않으면 안되겠기로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비교급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아가페”(사랑)로 질문하셨는데 베드로가 연속 두 번을 “필레오”(사랑)로 대답하니까 세 번째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을 따라 “필레오”로 물으시고 역시 “필레오”로 대답을 받은 것입니다. “아가페”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심 같이 풍성하며 부요한 사랑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하겠느냐”하시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없었던지 “주여 나는 인간적이고 상대적이며 우정적인 필레오의 사랑 밖에는 더할 수가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인 것과 또 넘어졌던 저의 나약성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하는 식의 겸손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이 더 확실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모르고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였으니 주님이 자기를 아는 것을 더 권위있게 내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께서 아시나이다”하는 용어도 15,16,17절에 세 번이 나오는데 처음 두 번 “아시나이다”할 때는 οίδας(호이다스)를 써서 직감적으로 아는 뜻을 나타냈고, 세 번째 질문에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할 때는 γίνώσκεις(기노스케이스)를 사용하므로 구체적인 판단에 의한 앎의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안다”는 의미를 직감적, 표면적 앎에서 구체적, 내부적 앎으로 발전시키므로 주님은 모든 성도를 구체적으로 아시는 분이란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3)예수님이 사랑의 확증을 위하여 세 번이나 질문하신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주께 대한 사랑에 동요가 없도록 다짐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다짐 하고 또 강조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 꼭 행운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욥 2:10에서 말씀하시기를 “복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하신 것처럼 혹 재앙스러운 형편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이 어떤 분부를 내리셨는가?하는 것입니다.

1)“내 양을 치라”하시므로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의 성도를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은 다 사람 따라 행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함”을 말씀하셨고,

2)베드로의 미래가 순교로 끝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즉 사명을 갖기 전에는 많은 일들을 마음대로 하였지만 ① 늙어서는 남이 제게 띠 띠우고.....핍박으로 인한 타인의 지배를 받게 되고, ②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가기 싫은 곳이지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시므로 베드로가 말년에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알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내다보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명자라야 참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명자는 고난이 있어도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다른 사람의 일을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사도 요한(만찬 때 주님의 품에 안겼던)의 앞 일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여쭈니 예수님은 “그를 세상 끝날까지 세상에 머물게 한다 한들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를 뿐이라”고 하시므로써 ① 사명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직접적 관계에서 실천되는 것이고, ② 하나님은 사명자의 길을 정하여 사명을 따로 주시는 분이시며 ③ 사명자는 주님이 자신을 쓰시는 목적에 따라 순종할 따름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들어 쓰시는 섭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도 하시며 또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도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될 때에 결코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모방하려 하여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저희들은 주님을 변함없이 또 끝까지 사랑하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라야 그의 양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주님을 사랑하여 사명에 임하는 자는 원치 않는 일이라도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자기의 형세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사명을 이행하고, ③ 더 나가서는 자기의 미래에 고난과 고독과 순교가 따라온다 할지라도 변함 없이 십자가의 짐을 지고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엡 6:24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31 과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3-16)목록으로


바울이란 사람은 본래 기독교를 등지고 성도를 핍박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강하게 적대시하던 사울을 변화시키시고 선교의 사명을 주실 때 그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주셨습니다.(행 13:9) 바울은 기독교를 배척할 당시에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주의자였으며 하나님께 열심하여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이단자였습니다. 기독교인 핍박에 대하여 살기 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을 향하여 가다가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을 때 갑자기 변화를 받고 엎드러지게 되었으며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하는 사명자로 급히 변화된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명이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반 성도들은 오래 믿고 믿음이 들어가야 점차 사명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자 마자 주일 지키고 십일조 내며 봉사를 잘 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성도가 확실하게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거듭나고 회개한 후 예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일시에 결심하고 사명자로서의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엇을 하리이까”하는 사명은

1)변화가 확실하여야 하는데 확실한 변화는 거듭나는 은혜와 능력을 크게 체험하는데 따라서 강도가 더하여 질 수 있고,

2)무엇을 할 수 있는 은사 소질도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학문이 많은 사람이고, 헬라어, 히브리어 등 언어가 능통하였으며 로마의 시민권 있는 것이 여행과 거주에 큰 도움을 주고, 또 율법의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명적 은사가 다양하였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만 있으면 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택정하셨다가 쓰신 것입니다. 아무리 확신이 크고 은사 소질이 있어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사명에 응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쓰신 것입니다.(행 9:15) 본래 바울의 일행이 있었지만 변화와 능력과 소명의 체험을 바울만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행 9:7)

2. 바울이 무엇을 하리이까?한즉 예수님께서 “너의 행할 일을 이룰 자가 있을 것이라”(10절)하시고, 미리 “안나니아”에게 예고하신 후 만나게 하셨으니(행 9:11-17)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에게 일감을 주실 때 직접 주시기도 하지만(행 16:9) 다른 사역자들을 통하여 인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인도를 받아 사역하였습니다.(행 11:25-26) 오늘날 성도들에게 할 일을 주시는 분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일감을 주십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많은 할 일을 주십니다.

3. 할 일을 알았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시행하셔야 합니다. 본문 16절에서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확신이 서고 할 일을 알았으면 주저하지 말고 속히 시행하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신속한 생활은 곧 기회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밀하게 살다 보면 별 것을 다 깨닫습니다. 마 25:16에 보시면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주고 “장사하라” 하였을 때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이를 남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 하였을 때 새벽부터 서둘러 급히 순종하였습니다. 경산의 어떤 교회는 예배당 지을 돈을 예비하였으나 장로 부인인 권사에게 “예배당을 지으라”는 계시가 안 내려서 짓지 않다가 물가가 올라서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기회는 새꼬리와 같아서 뒤에서 잡으면 뽑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은 앞에서 서둘러야 기회를 잡습니다. 시내 버스를 타러 가면서 걸음을 천천히 걸으면 꼭 10m 부족하여 버스를 놓칩니다. 또 길을 가다가 쓸만한 물건이 버려져 있을 때 즉시 취하지 않고 “오다가 가져가야지”하면 올 때는 그 물건이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에게 삼계탕을 대접하려고 준비를 잘 한 후 여섯 시에 오라고 초청을 하였는데 그날 따라 그 목사는 오래간만에 친구와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것도 오후 2시경에 4인분을 3인이 먹었으니 몹시 배부른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봉사 접대를 하려고 해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미리 연락하였으면 그 날 점심을 간단히 먹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선행도 신속해야 효력을 보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습니까? 어떤 제자가 “부친 장례식을 끝내고 주님을 따르겠다” 하니까 주님이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 9:60)하신 말씀도 기회를 선용하라는 교훈이지요. 베드로도 확신이 서자 마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눅 5:11) “루디아”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확신이 생기자 즉시 자기의 집을 전도의 근거지로 삼아 바울을 도왔습니다.(행 16:15) 이렇게 기회 선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4.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방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1)우선 기도를 자주 하고 많이 하며 기도에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끌리고 또 끌리는 성도님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2)말씀에 끌리고 끌리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3)사랑과 봉사에 끌리고 끌리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4)사명 생활에 끌리고 끌리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무엇이 교회 발전에 보람된 일인가”를 아셔서 자기의 적성에 맞는 봉사와 전도 활동을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거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갑절 부지런 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먹고 살아가는 문제와 예수 믿는 교회 생활을 다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할 일, 말씀 상고 할 일, 사랑과 봉사에 끌리고 사명 생활에도 끌리는 일을 먹고 사는 일 외에 더 하여야 하므로 항상 부지런히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만 할 것입니다.


제 32 과 주님의 것과 자유 (롬 13:7-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님의 것과 자유”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 때 풍성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혹 이런 문제에 대하여 실감을 느껴보시지 못한 분을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강 건너 어떤 집에 불이 났다고 가상하였을 때 그 집이 내 집 불타는 것이 아닌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구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집이 타고 있다면 대단히 안타까움을 느낄 것입니다. 요즈음도 이스라엘국과 팔레스틴족 간에는 자주 불상사가 일어나는데 우리는 뉴스만 들으면 그만일 뿐 큰 자극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만일에 내 집에서 싸움이 났다든지 우리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퍽 근심스럽고 애타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생각할 때 “내 것”이란 큰 부담을 안겨주고 남의 것이나 주님의 것일 때는 부담이 없는 만큼 자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배당을 샀는데 교회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려 하였으나 담보하고 대출받기가 어려워서 개인의 이름으로 사니까 여러 가지로 돈이 많이 들고 부담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산이 교회 명의로 되면 취득세와 재산세가 면제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것으로 가졌다면 취득세, 재산세 내고도 의료 보험도 더 내야하고 그 재산에서 나오는 부가가치세를 내야하며 늘 수리하여야 하고, 또 임대 받는 사람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을 갖는 것이나 안 갖는 것이 매일반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복과 자유를 주시는가를 깨닫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2. 본문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우리가 주의 것”이란 나와 여러분도 주님의 것이고, 나와 여러분들께 속한 것도 주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임금이 굴복하면 모든 백성도 따라 굴복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있고 천하가 있듯이 내가 없으면 천하도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주님의 것인즉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과 나와 관련된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의 말씀대로 죄 빼놓고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시 50:11)

2)성도가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믿는데는 근거가 있습니다.(롬 11:36) ①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②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어 보존 통치하시니까 하나님의 것이며 ③ 하나님만 만물을 처분하실 수 있고 또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④ 또 성도 각자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 된 이유는 타락하고 쓸모 없으며 심판 아래 있는 자들을 예수님이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므로 새 인생을 만들어 주셨으며 주님이 성도의 속에서 살아주시니 주님의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시 50:11)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값 주고 사셨다”(고전 6:19)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어 주님과 연합하였다”고 하셨습니다.(롬 6:5-6, 갈 2:20) 또 주님은 상전이시고 성도는 종이며(요 13:13) 육체는 “성령님의 전이라”고도 하셨습니다.(고전 6:19) 성도님들이 다 아시는바와 같이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런 것이지요.

3. 그렇다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나를 강 건너 집 보듯 하셔야 하겠지요. 나를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지갑처럼 생각하셔야 하겠지요? 여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니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롬 11:36에서는 “만물이 주의 것이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하셨고, 빌 1:23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도가 완전히 주님 중심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 중심으로 바꾸어졌습니까? 어떤 성도가 신앙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니까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일 지키고 진실하게 살며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니까 몹시 힘들겠지요. 그러나 그 결과의 책임은 주님이 지실 것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라”고 하셨으니까 당연히 책임 지실 것이고 형통함을 주실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세상 중심으로 살려 하고 또 믿음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산다면 그것은 종이 상전을 거역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고, 그런 생활 속에서는 시원한 성취도 없고 부자유함만 계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바람이 하나님의 인도라면 우리는 노아의 방주처럼 또 마른 막대기처럼 떠내려가면서 살 때에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기도하라”(시 50:15) 하셨으니까 기도하고 “염려를 주께 맡기라” 하셨으니까 맡기고(벧전 5:7) “치료하고 건져 주시리라” 하셨으니까(출 15:26, 마 8:16, 시 91:14) 믿고 기다리면서 소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죽음이 임박할 때 “내 인생과 생명이 주님의 것”이란 믿음을 갖고 소망을 갖는다면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이 설교를 쓸 무렵에 김정부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병실에 가서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는데 그 사모님이 “큰 격려를 받았다” 하였고, 또 그 무렵에 박송걸 목사님의 사모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성경으로 위문서를 보냈더니 역시 큰 격려를 받고 “그 성경 구절을 벽에 붙히고 늘 묵상한다”고 하셨습니다.

2)성도가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든지 아니면 더 좋은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든지 둘 중에 하나를 가져야 호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내 생명과 내 인생이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아내는 한 차례 난산으로 장례 치를 구상까지 한 일이 있었고, 그 외에도 수 차례 “죽을 병이 아닌가”하는 염려에서 해방된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몇 번 장례를 치른 셈입니다. 직장에 이상이 있으면 직장암이 아닌가? 식도에 이상이 있으면 식도암이 아닌가? 자궁에 이상이 있으면 자궁암이 아닌가? 위장에 이상이 있으면 위암이 아닌가?.....이런 것들이 신경을 자극하여 기운을 잃게 하다가 진단 결과가 “아니라”하면 즉시 호전되는 경우를 여러 차례 체험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살고 죽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었습니다.

3)남의 이야기이니까 쉽게 한다고 하시겠지요. 저는 죽을 준비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나는 오래 안 살 수도 있다 나의 조부님은 54세에, 나의 부친은 52세에 가셨으니까 내력으로 볼 때 나는 50세에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고, 늘 죽음의 준비 때문에 촉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5세쯤 되었을 때 몸에 피로도 있고 혓바늘이 자주 돋으며 치통이 있고 하여 사는 것이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자 직장에 이상이 생겨서 그것이 내 인생을 끝내는 원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니까 두 가지 못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자녀들은 다 성장하였으니까 내가 없어도 잘 살겠지만 내 생전에 선조의 묘역 정리를 못한 것과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과 한창 쓰고 있는 신앙 문서 집필을 못다 하고 죽는 것이 퍽 안 됐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하신 말씀이 있고,(빌 1:23) 또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그런고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라”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와 나의 삶의 목적이 주님의 것인즉 ①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하고 싶어도 생명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② 만일 하나님이 내 생명보다 책이 필요하시면 생명을 연장시켜서 책을 쓰시게 하실 것이고 생명을 데려 가실 때는 그 책이 필요 없기 때문에 데려 가시는 것이니까 내가 “그 책에 미련을 둔다”는 자체도 나의 뜻을 앞세우는 잘못이다. ③ 내가 하고저 하는 일과 내 생명을 하나님은 꼭 같이 보시니까 “거기에도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나는 죽었고 내 소욕은 포기되었으니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리 하셔도 좋고 저리 하셔도 좋습니다 흐름 따라 내려가겠습니다”하는 신앙을 갖게 되자 큰 자유를 맛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병적 증상은 없어지고 어려운 일은 한 동안의 연단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큰 장애는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의 정욕 중심이 자꾸 살아나는 것이라”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나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신앙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 33 과 뵈뵈와 브리스길라 (롬 16:1-4)목록으로


여성도의 봉사와 충성을 일깨워드리는 말씀으로 “뵈뵈와 브리스길라”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뵈뵈와 브리스길라는 바울 사도의 선교 시기에 크게 기여한 여성도 일군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 말미에서 이 두 여성도에 대하여 천거하는 말씀과 칭찬하는 말씀을 하시므로 여성도 사역의 필요성을 나타내셨습니다.

1. 뵈뵈는 어떤 사람입니까?

1)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고 하셨습니다.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 시에서 동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항구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일군”이란 일 많이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교회 안에는 대접받는 사람,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는 사람, 앞장서서 봉사하는 사람, 옆에서 협조만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 중에서 뵈뵈는 솔선하는 일군이었습니다. “일군”이란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집사로 번역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빌 1:1, 딤전 3:8,10) 따라서 집사와 일군은 같은 뜻으로 아셔야 합니다.

2)“뵈뵈”는 바울 사도의 특별 천거를 받은 여성도였습니다. 로마에서 특별히 일할 수 있는 여성도를 고린도 지방 겐그레야 교회에서 발탁하여 추천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가 로마 교회에서 무슨 사명을 맡게 하였는지는 모르나 우선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성경)를 가지고 가서 전달하였을 줄로 압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로마까지는 수로가 1500리요, 육로가 1300리인데 이런 긴 여행 중에 소중한 편지를 휴대하여 전달할만한 믿음과 능력이 그 여성도에게만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겐그레야 교회에도 남자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여성도 “뵈뵈”가 바울의 천거를 받아 특별 사신이 된 것을 보면 그는 신앙과 봉사의 능력이 남자보다 뛰어났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보호자”란 말은 “환자의 보호자, 어린이의 보호자”란 의미도 있지만 “원조자”란 의미로서 “성도와 전도자의 생활비를 공급해주는 봉사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비를 도와주었고, 특히 바울 사도의 전도상 소요되는 경비를 많이 협조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전도비가 필요하였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 없는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집사”라는 직분의 성격이 물질 봉사나 구제를 주임무로 하는 것이요,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여성도가 감당하였으니 일군 중에도 큰 일군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뵈뵈”는 ① 교회에서 인정 받는 일군이요, ② 바울의 특별 천거를 받은 사신이며 ③ 전도비와 구제를 전담하는 보호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모범을 모든 전도 회원들이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2. “브리스길라”는 어떤 여성도입니까?(“브리스길라”라고 기록된 곳은 행 18:2,18,26이고, “브리스가”로 기록된 곳은 본문과 고전 16:19, 딤후 4:19임.)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으로서 본도(터키 북단 흑해 연안 지역)에서 출생하였고, 부부가 로마에서 살았는데 로마의 4대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축출하는 바람에 헬라의 아가야 지역인 고린도에 와서 머문 중에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유대인이란 점과 기독교 신앙이 같고 사명있는 공통점이 있으며 또 천막업이 같아서 바울과 함께 전도 사역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행 18:1-3)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다 신앙과 성경 지식에 유력한 부부이지만(행 18:26) 성경에는 “브리스길라”를 “아굴라”보다 먼저 호칭하여 문안과 칭찬을 하였습니다. 어떤 점을 칭찬하였습니까?

1)바울 사도는 “브리스길라”를 동역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동역자란 같은 사명을 갖고 함께 일한 자를 의미하며 바울 사도처럼 다른 일에 구애받지 않고 헌신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행 18:18을 보시면 “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떠나 ”수리아, 겐그레아“ 지방으로 가실 때에 ”브리스길라 부부도 같이 따라갔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이 가정은 직업이나 개인 사업에 얽매임이 없이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선교에 도움을 준 가정입니다. 따라서 가정이 합력하여 바울의 전도 사역에 봉사하므로 가정이 없이 혼자 사는 바울의 모든 불편한 점을 보충해주므로 동역을 한 것입니다.

2)이 부부가 성경 실력자로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 “아볼로”라는 사람은 유명한 성경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행 18:24에 보시면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구약과 사도 요한에 관한 것만 증거할 뿐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에 관하여 증거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의 성경 실력을 잘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학자의 부족한 부분을 일깨워주는 여성도였습니다.

3)바울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놓은 자라고 하셨습니다.(4절) 어떤 경우에서 생명을 대신하려고 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바울의 생명이 위태해졌을 때에 차라리 그들이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희생할 각오를 갖고 일하였던 것입니다. 갈 4:15에 보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도 바울의 눈이 좋지 못한 것을 동정하여 자기의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전도 사역을 하는 종들에게 눈을 빼주려 하거나 생명을 담보하려 하는 성도가 있는 정도라면 그의 전도나 목회 사역은 뜨겁지 않을 수 없고, 그 열매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혹 교회의 사소한 일들로 갈등하는 성도가 있다면 (복음 사역자를 위하여) 생명을 담보하는 브리스길라 부부를 보면서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성도의 신앙과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본받는 시간이 되시고 뵈뵈의 일군됨과 천거를 받은 사실과 사역자의 보호자 된 사실, 또 브리스길라 부부의 동역자 되고 성경 교사된 점과 생명의 담보자 된 사실을 기억하시고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34 과 충성자의 조건 (고전 4:1-2)목록으로


“충성자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충성자의 조건 첫째는 우선 사람의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사람의 신용을 받아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오해를 피하는 문제도 있고 권위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1)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서 일하실 때 유대주의자들이 바울 사도를 이단자로 선전하여 의심받게 하고 신용을 잃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핍박이고 궤휼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나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알거든 내가 전하는 편지가 곧 주의 명령임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4:37)

2)인격적으로 신용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동리나 단체에서도 인격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전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오히려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자는 반드시 그의 옳은 신앙과 인격적 생활에 대하여 사람의 신임을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세우신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말씀에는 “그리스도가 세운 일군, 그리스도를 위한 일군”이란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명과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단자들은 바울이 스스로 사도를 자칭하는 것처럼 선전하였지요. 그러나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하면서 사도된 증표를 갖고 있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10, 롬 15:18, 갈 1:1,12, 고후 3:1-5) 그 증표는 바울의 확신에 있는 것이고, 또 사역의 열매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를 가리켜 “바울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고후 3:3)

3. “그리스도의 비밀”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비밀은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확신을 가진 것이 곧 그리스도의 비밀인데 또 한 가지 비밀은 충성자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받고 느끼는 비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비밀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체험하는 비밀을 갖고 있을 때 충성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읽으므로 알 수 있고,(엡 3:3) 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셨습니다.(빌 3:8) 복음의 비밀은 물론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비밀도 꼭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자기의 맡은 일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맡은 자에게 충성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뚜렷이 아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사모하는 마음(시 107:9,), 준비하는 예물(고후 9:5), 규모와 질서를 지키는 일(살후 3:6, 고전 14:40, 시 15:4), 정신 집중(마 22:37), 힘을 다 하는 일(요 4:24) 등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다 자기의 사명을 알고 계십니까? 성도이면 성도의 모범된 생활의 사명이 있고, 직분을 받았으면 그 직분에 대하여 할 일이 있으며 또 국민이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가 있을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은사가 있으면 그 은사 활동에 대한 사명도 있을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가장이면 가장으로서 통솔의 책임이 있고, 주부이면 주부로서, 학생이면 학생으로서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신분과 책임 여하에 따라서 맡은 일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하면 다른데 시간과 마음을 쓸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헛된 영광을 위하여 격동하거나 투기하지 말라”(갈 5:26)고 하셨습니다. 일하는 일군에게 헛된 영광이나 명예적 유혹이 생기면 그때부터 일하는 것은 명예를 위한 일이될 것이므로 항상 명예를 떠나서 자기의 할 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일군다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지혜와 봉사력입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일군이니까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군되는 것이 단시일에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경험에서 소질을 익혀야 합니다. 교회의 생활을 오래 하면 교회의 일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겸손과 지혜로 하셔야 하겠지요.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6.25 나던 해 가을에 제가 외갓집에 가 있을 때 30대쯤 된 피난민 장정 한 분이 “일을 하고 밥을 먹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외조모님이 “농사 지은 경험이 있느냐”하였더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을 대접하고 내일 벼 벨 일을 말씀하였는데 그날 밤 달 밝은 밤에 혼자 나가서 논 한 배미의 벼를 다 베고 들어와서 새벽잠을 잔 후 다음 날 “다른 일감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이웃이 다 놀라고 그가 일군임을 인정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도 반드시 일 잘 하는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노하우가 곧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지혜와 능력입니다.(행 1:8) 예배드리는 일 한 가지에도 정성을 기울이고 지혜를 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도 지혜롭고 능률있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충성자의 조건은 ① 사람에게 인정 받는 자 되고, ② 하나님이 자기를 사명자로 세우셨다는 확증이 있어야 하며 ③ 그리스도의 비밀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비밀을 알아야 하고, ④ 자기의 맡은 일을 알아야 하며 ⑤ 일군다운 능력과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은혜를 주셔야 할 것입니다.


제 35 과 충성의 뜻 (고전 4:1-5)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충성의 뜻”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충성의 뜻을 설명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저 나름대로 깨달은 것 네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충성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 충성의 대상은 나라나 단체나 이념이 아닌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1. 충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감에 적당하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충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자는 아무리 큰 능력과 큰 일을 이루어낸다 하여도 그는 지옥의 자식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마 7:21-23) 달란트 비유 교훈에서 “악한 종이 된 것”은 그 종이 주인의 뜻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마 26:26) 또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은 자는 많이 맞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의도)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적당하게 쓰임이 된다”고 아셔야 합니다. 충성이란 한문의 뜻은 中心言成입니다. 따라서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적중하지 않으면 참된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2.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일감을 주실 때 작은 일부터 주십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하셨고, “작은 일에 충성하였은즉 큰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눅 6:10, 19:17) 그런 뜻에서 성도는 작은 일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란 큰 노력이나 큰 계획을 안 하고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때로는 종이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비천한 신분이 할 수 있는 일이 작은 일이고, 단순하고 쉬운 일이 작은 일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장로 의사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쓴 “생명과 사랑”이란 책에서 “그분은 어떤 거지가 찾아와도 그 신분을 묻지 않고 있는대로 구제하는데 노상에서 구걸하는 자를 만났으나 돈이 없자 자기앞수표를 내준 일이 있었고, 또 며느리에게는 평생 엽서로만 편지하며 병원에서 치료비가 없어 퇴원 못하는 환자에게 도울 수도 없고 규칙을 위반하여 삭감해줄 수도 없은즉 차라리 도망을 하면 좋겠다는 언질을 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1940년에 의학박사가 되어 대전 도립병원으로 갈 수도 있으나 평양의 기홀 병원이 기독교 계통의 병원이어서 교계의 권면을 받고 그 곳에 갔는데 외과 과장으로 두 달 있다가 원장으로 승진된 후 또 두 달 만에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 김명선 박사가 그 곳의 과장으로 오라 하였을 때 원장이나 과장의 명예에 관계없이 “나의 사명은 환자를 돌보는 것 뿐이라”하며 자기 일에만 충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막사이사이” 상을 받은 7명 중 1인이었습니다. 일본 회사의 사장들은 사원을 채용할 때 의례히 사환의 일부터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야 어린 아이가 할 일이지”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작은 일입니다. 작은 일은 오직 어리고 비천하며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최대한 노력하는 충성입니다. 성경에는 “전심을 기울인다”(대하 16:9),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전 5:58), “죽도록 충성하라”(계 3:10),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는 여러 배의 상급을 받는다”(마 19:29)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다 “최대한 노력하고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주님께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순교를 하셨으니 이것은 모든 것을 바친 것이고, 최대한 노력한 결과입니다. 더 이상 힘쓸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4. 대가성이 적을수록 충성의 의미가 커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전문 사역자도 역시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은 아무 실권이 없는 노예를 뜻하고 주인을 위하여 있는 존재이며 대가를 바랄 수 없고 이기주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29-30)하였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좋은 일 하는 것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 하시고,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4) 이런 말씀들은 다 대가성 없는 선행이나 충성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일도 다 감찰하시고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적은 교인을 상대로 목회하면서 생활비나 대접을 적게 받고 무명한 사역자로 힘들게 일하는 목사님들이 더 큰 충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자신이 힘든 일을 하고도 자기가 쉬어야 할 시간에 또 주인을 섬겨야 하며 또 일을 많이 하고도 주인의 사례를 기대할 수 없고, 혹 주인이 칭찬을 한다 하여도 “나의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눅 7:10) 바울 사도도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하셨고,(고전 15:10) 또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갈 5:13) 대체로 절에 사는 스님들이 대가성 적은 종교 생활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충성의 의미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충성하는 성도는 말없고 변함없으며 불평 없이 어떤 환경에서나 꾸준히 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환경에 변화가 오거나 자신의 목표한 바에 뜻이 안 맞으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또 여러 사람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다분히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열심 내려 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그만 두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본래 주님을 따르는 정신은 자기를 부정하거나 자기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시작하는 것인데(눅 16:24, 갈 5:24)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끝까지 충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도중 하차는 마치 불꺼진 장작처럼 되어져서 많은 후퇴와 시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충성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잘 시행하여 “충성된 종”이란 칭찬을 꼭 받으시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 36 과 주의 일에 더욱 힘씀 목록으로

(고전 15:55-58)


이 시간에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 ① 주의 일이란 무엇이며 ② 왜 더욱 힘써야 하며 ③ 더욱 힘쓰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1. 주의 일이란

1)“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요 6:28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한즉 대답하시기를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주의 일”은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는 바로 믿어야 하겠지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가 우리의 구속주 되심을 믿고 그가 계시해주신 성경을 진리로 믿으며 성경에 나타난 모든 내용을 믿고 또 그대로 순종하는 생활이 곧 “주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이 곧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요 14:12에 보시면 예수님이 빌립에게 복음을 전하신 후에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보다 큰 것”이란 이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눅 4:42-44에 보시면 “날이 밝자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시니 무리가 주님을 찾아 만난 후에 자기들을 떠나시지 못하도록 만류하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두 주님이 하시는 일이요, 또 우리에게도 부탁하신 일입니다.

3)이 세상에서 이 일을 하는 기관은 교회뿐이기 때문에 “교회 일”이 곧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을 정부나 경찰이나 학교나 농촌지도소가 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 만이 이 일을 전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 하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사역을 사도들과 교회와 그의 택하신 성도들에게만 부탁하시고, 다른 이에게는 부탁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서는 다 교인이 되셔야 하고, 또 교회에서 맡기는 직임을 순종으로 받음은 물론 교회 중심 생활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양이 목장을 떠나서 살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4)주님의 일은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마 10:40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함이라” 하셨고, 갈 4:14에서도 “바울 사도 영접하기를 주님 영접하듯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돕는 일이 좋은 은사일진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를 기도와 봉사로 도우시므로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왜 저희들이 주님의 일을 더욱 힘쓰셔야 하는가?할 때

1)신앙은 힘쓰지 않으면 녹이 슬어버립니다. 신앙은 생명체나 기계와 같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면 심령적 활동이 녹이 슬고 퇴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전거가 가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과 같고, 사람이 먹고 활동을 안 하면 일할 수 없는 약체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또 신앙은 성장과 발전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달란트를 현상 유지 시킨 것은 인플레에 비춰볼 때 실제적인 손해인 것처럼 신앙과 충성도 전진이 없으면 퇴보된 줄로 아시는 것이 바른 지식입니다. 그 이유는 마귀의 역사가 성도의 신앙 활동 침체 중에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 10:38에서도 “오직 의인이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의 마음이 저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3)부활의 축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충성과 봉사가 더욱 커져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앞 부분에 있는 고전 15장의 말씀은 “성도의 부활 축복”을 역설하셨습니다. 부활 축복을 역설하신 다음에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쓰신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영생으로 인도해주신 만큼 더욱 힘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4)내세의 상급 때문입니다. 본문 끝에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다” 하셨고, 히 11:6에도 “믿음이 있다 하는 것은 곧 그의 상 주심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쓰시고 봉사하는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이란 것을 믿는다면 힘 안 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운동 경기에 승리하여 복될 것을 아는 선수가 힘써 싸우는 것처럼 저희들도 상을 받기 위하여 더욱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3. 어떻게 힘을 써야 합니까?

1)우선은 본문 58절 말씀대로 신앙과 사명 생활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견고하다”는 것은 믿음의 뿌리가 깊음을 뜻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외부적 환경에 변동이 없을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견고하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조그마한 시련이 있다고 하여 그런 것 때문에 신앙 생활이 흔들린다면 이 사람도 주의 일을 못할 사람입니다. “나를 알아준다”하여 나오고 “안 알아준다”하여 들어가며 “추수감사절에 떡을 준다”하여 나오고 “오는 주일에는 연보한다더라”하여 안 나오고 한다면 이것은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또 직분자들이 신앙 생활에 모범을 못 보이고 자기의 직임을 못하면 그의 직분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누구나 개인적 신앙과 또 맡은 직분에 흔들림이 없도록 든든히 서야 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 모녀가 교회를 나오는데 그 어머니가 집사입니다. 그 딸이 장성하여 혼처를 구하는데 불신 총각이 많이 와서 선을 보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어머니 집사를 만나서 “불신 혼인을 방만하면 되느냐”고 권고를 하였더니 “층층이 웃어른들이 계시니 어떻게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 교회 나오니까 당사자가 반대하면 안 되겠느냐” 하였더니 “그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집사가 어지간히 담력도 없고 잘 해 보려는 성의조차도 없이 핑계만 잘 한다”고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몇 일 후에 어떤 “믿는 집 총각과 결혼을 하게 됐다”고 주례를 부탁해 왔기로 다행으로 여기고 혼인날 주례를 해주는데 별안간 신랑 신부 두 사람이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면서 쓰러지려고 하여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을 하고 간단히 예식을 마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14일 만에 부부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후에 소식을 들으니까 그 신랑도 신부도 집사의 아들, 딸이란 명분만 가졌을 뿐 신앙 생활을 옳게 못하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복이 되지요. 신앙 생활을 못하면서 잘 하는척 하거나 축복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충성하는 성도는 우선 자기 위치에서 흔들리지 마셔야 합니다.

2)열심히 주님을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눅 8:1-3에 보시면 예수님이 각 성과 각 촌에 두루 다니실 때에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 여인들도 따라다녔습니다. 여인들의 봉사가 큰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눅 8:3을 보세요. “여러 여자들이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더라” 하셨고, 빌 1:6과 4:18에서는 “전도자 바울사도의 생활비를 댄 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께 “심방에 동행하시자”하면 그것은 “차비와 점심값을 대라”는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자기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겨 나서주는 직분자들이 많습니다. 그 기회에 목사 대접하고 복 받으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상 17:8-16에서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먹고 죽을 양식으로 엘리야를 접대한 후 축복을 받았고, 눅 21:4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것 전부를 바쳤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요, 흑암 대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리빙스톤”(미국, 18C)이 선교하러 아프리카로 떠날 때에 한 여성도가 평생 저축한 돈을 내놓으면서 “내가 직접 가서 봉사할 수 없으므로 이 돈으로 나 대신 그 곳에서 비서 한 사람을 고용해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빙스톤은 그 곳에 가서 그 돈으로 “세반티노”라는 사람을 비서로 채용하였는데 리빙스톤이 산악지대 전도를 가다가 사자에게 팔을 물려 뺏겼습니다. 이때에 그의 비서 세반티노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와 싸워서 리빙스톤의 생명을 구하였으니 그 여성도의 물질 봉사의 공력이 얼마나 컸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일”은 물질이나 또 다른 것으로서 주의 종들을 받드는 일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주의 일은 믿는 일이요, 전하는 일이며 교회의 일이요, 또 종들의 일입니다. ② 더욱 힘써야 될 이유는 우리의 믿음과 축복에 성장이 있고, 영생 얻은 은혜의 보답과 함께 내세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 힘쓰는 방법은 믿음과 직분에 견고하고 열심히 따르며 주의 종들을 받드는 일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37 과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 12:5,9)목록으로


1.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를 위하여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남의 장점은 자랑하고 남의 약점은 말하지 않지만 자신의 약한 것은 자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후 11:31에서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무슨 약함이 그리 많았을까요?

1)갈 4:14에 보시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하셨고, 고후 12:7에서도 “육체의 가시가 자기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안질이나 침침한 눈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갈 4:15, 할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주었으리라.)

2)고후 1:6에서 “말이 졸하여 웅변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눈병이 있거나 말이 유창하지 않은 것은 복음 사역자의 약점 중에 큰 약점일 것입니다.

3)그리고 자신을 약한 자처럼 낮추는 노력도 하셨습니다. “글로 대할 때는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고후 10:10) 하셨고, 또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하지 않겠느냐”(고후 11:29)하시므로 약한 입장을 취하면서 사시기도 하였습니다.

4)그리고 또 자기의 연약하였던 과거지사를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처음 개종한 후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다메섹왕 아레다의 신하들이 자기를 잡으려 하였을 때 그 핍박이 두려워서 광주리를 타고 성밖으로 도망한 적이 있었다”고 기탄없이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와 약점을 자랑하신 것입니다.(행 9:25, 고후 11:32)

2. 그러면 바울 사도가 자기의 연약을 자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자기의 진실을 사실대로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딤후 2:13) 우리도 우리의 사실을 부인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의 약점을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상대방을 약점 없는 사람으로 오해할 때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점포에 가서 물건을 샀을 때 그 물건에 약점이 발견되었다면 “왜 속이고 팔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약점을 말하여야 하는 것은 타인을 속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2)“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2:9) 고후 12:10에도 보시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약한 상태를 알면 자기도 조심하고 하나님께 더 의지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의 약점을 알면 그 사람도 나의 약점에 돕는 일을 할 것입니다. 자동차 운전 면허를 금방 딴 사람이 “나는 초보자요”하는 글을 써붙이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다 주의해 주는 것처럼 겸손하고 진실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도 자기의 연약을 알고 그 연약을 인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편에서 능력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진실 표현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약함을 자랑하여야 하는데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숨겨서 덕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니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3. 성경을 보시면 바울 사도의 유력한 점도 많습니다. 많이 배워 학식이 많고 외국어가 능통하며 가문이 좋고 로마의 시민권과 바리새당파의 세력을 업고 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퍽 유족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자로 나선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에 그리스도를 핍박한 이단자였고, 끈질기게 유대주의자들의 반항을 받은 상태였으며 육체의 가시가 있고, 말 표현이 졸한 것 등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유세비오 역사에 의하면 “피부는 검고 키는 작으며 등은 굽고 다리는 앵기 다리 모습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볼품이 없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 중에는 바울의 실수를 기록한 일이 없습니다. 몹시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니까 벌떡 일어서는 외식을 범했을 때 바울은 여지없이 베드로를 책망할 만큼(갈 2:11) 완벽에 가까운 사역을 하셨던 것입니다.

4. 제가 이 설교를 구상하면서 자신의 연약도 많이 반성하였습니다. 지식과 학벌도 적고 건강도 약하고 성품상 고집이 있고, 특히 신앙의 교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들으려면 우선 지루하고 “핵심은 그것인데 말이 길다”는 느낌을 가지며 “10번 설교에 한 번쯤 새로운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타인의 설교에 뜻을 두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신앙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양심에는 교만보다도 나 자신의 신앙의 생산성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을 돌아보면 연약하고 헛된 일에 분요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1)교파 싸움에 교회가 갈라지면 결국 예배당 건물 싸움으로 번집니다. 재산 가르고 마음 편한대로 믿음 생활하면 되는데 한 파를 쫓아내고 원수시하며 예배당 뺏는 운동에 가담하여 괴로움 당한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또 한 동안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용공적이고 비정통이라 하여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면서 용공 사상은 얼음 녹듯이 자자들었고, 정통과 비정통은 교파마다 다르니까 자기의 정통 신앙만 잘 지키고 그대로 선전 발표만 하면 되는데 그것 때문에 반목 질시한 일도 많았습니다.

3)요즈음 교회가 예배당 짓는 일과 문화 시설 때문에 많이 피곤합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으로 끌려와야 합니다. “예배당이 좋아야 교인이 온다”고 한다면 “예배당 보고 나오는 교인”을 모으려는 뜻이겠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경의 사람이고,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셨습니다. 제가 21세 때 기도원 생활을 할 때 가장 은혜를 많이 받은 시기였고, 강도사 때 상주 죽암 교회를 시무하면서 가장 편안한 목회를 하였는데 그때 죽암 교회 예배당은 열평 초가집에 난로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런 세계가 사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것을 모르고 물량주의만 좋아하였으니 그때가 퍽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4)89년도에 성지 순례를 가서 사진을 35통 찍어 왔고, 그것을 사진첩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 2,3년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즈음은 TV나 비디오로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사진의 허탄함에 대하여 3년 뒤를 내다보지 못한 어리석음이 또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5)바울 사도는 선배 동역자 베드로의 잘못이 나타났을 때 면박을 주듯 책망하였습니다. 저도 어떤 선배 목사님이 상납금도 안 내면서 발언을 많이 하시기에 “상납금도 잘 안내면서 노회에서 발언할 자격이 있느냐”하니까 그 목사님이 그 말을 달게 받고 “내가 생명을 걸고 상납금을 내겠다”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제가 당회에서 장로의 부족과 연약에 대하여 강한 책망을 못하고 적당하게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장로와 대립하면 목회가 힘들고 교회에 파당이 생기며 목회에 지장이 있을까 하여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교만한 장로나 불순종하는 장로를 책망하여야 하는데 거기에 몸을 사린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연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목회의 발전을 저해하였을 것입니다.

6)어떤 집사가 방문하여 상담을 들어보면 “누구 때문에, 또는 무슨 일 때문에 낙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저는 “그 일이 당신의 신앙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할 말을 못한 경우도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의 나팔을 확실히 불지 못한 벙어리개 같은 어리석음이지요. “당신 믿음 약하다, 당신 성경 지식 너무 없다, 당신 아직도 교만이 빠지지 않았다, 당신 명예욕과 공명심을 버려야 한다”는 식의 권면을 거의 못하고 목회를 한 것입니다.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교인의 비위를 맞춰주고 헌금 받고 대접 받기 위한 목적이었을까요? 또는 교회 숫자를 불려서 교세가 약해지지 않았다는 평을 들으려 한 것일까요? 먹고 살기 위하여 시무하고 있는 위치를 그대로 보존하려는 것일까요? 참으로 뉘우칠 일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 자신의 약점을 거론하는 것은 항상 반성하고 회개하는데 목적이 있고, 바울 사도처럼 자신의 약점을 인하여 주의할 때 그리스도의 지혜와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함임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8 과 교회의 기둥 되라 (갈 2:9, 계 3:12)목록으로


갈 2:9에 보시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이 여기는 존재라” 하셨고, 계 3:11-12에서는 기둥 역할을 잘 하고 사명에 승리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새 예루살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전자는 충성의 기둥이고, 후자는 상급의 기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태우는 잡목이 되지 말고 꼭 기둥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기둥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우선 집을 버티는 기둥이 있고,(삿 16:29)

2)왕궁의 기둥이 있습니다.(더 1:6)

3)하나님의 성전의 기둥도 있습니다.(계 3:12, 왕상 7:3)

4)역사를 증언하는 기념비로서의 기둥도 있고,(출 24:4, 수 4:20, 창 28:18, 31:51, 35:20, 삼하 18:18)

5)상징적 의미로서의 기둥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 입구에 세운 야긴(세운다)과 보아스(능력)같은 기둥입니다.(왕상 7:21-22, 욥 26:11, 삼상 2:8)

2. 기둥의 재료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나무 기둥(출 27:1,9-19), 백단목 기둥(왕상 10:12), 돌기둥(창 35:14), 쇠기둥(렘 1:18), 놋기둥(왕하 25:13), 대리석 기둥(더 1:6), 화반석 기둥(아 5:15)이 있는데 또 이상한 것은 소금 기둥이 있고,(창 19:26) 구름 기둥과 불기둥도 있으며(출 13:21, 계 10:1) 연기 기둥이 있는가 하면(욥 2:20) 진리의 기둥도 있습니다.(딤전 3:15) 기둥의 목적은 성도가 교회에서 맡아 일하는 책임을 뜻하고, 기둥의 재료는 각자가 받은 은사에 해당할 것입니다.

3. 기둥의 특징은 견고하여야 하고 곧아야 하며 자기 위치에 든든히 서서 서로 연결된 재목과 연합을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것도 다 그와 일치한 뜻이 있습니다. 믿음이 견고하여야 하고 생활이 곧아야 하며 자기 직분 위치에 든든히 서서 이웃과 서로 사랑하고 협력 관계를 원만히 이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를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반드시 기둥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봉사와 전도”를 집짓는 일로 표시한 곳도 있습니다. 딤후 3:15에 보면 “교회를 가르쳐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하셨고, 엡 2:21에서는 “예수님이 모퉁이돌이 되셨으니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가고 또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것이라” 하셨으며 고전 3:10-12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터를 닦았은즉 그 위에 어떻게 세울 것을 조심하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 중에 타지 않을 재료로써 지어야 할 것이라”하심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확장 발전 시켜 나가기 위하여 좋은 기둥을 세워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5.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처럼 여김 받는 세 인물이 있었으니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이 분들이 기둥 역할을 잘 하였기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을 이기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의 모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설교를 기록할 무렵에 어떤 “연립 주택이 무너졌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 집이 무너진 이유는 한 쪽 기둥이 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집이란 여러 재목들이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만 지탱을 못해도 집 전체가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삼겹줄을 잘 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 기둥만 약해도 전체가 기울어진다는 점은 참으로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박목사란 분이 처음 개척을 할 때 십일조를 많이 하는 한 사람을 보고 시작하였는데 그 분이 사업에 실패하고 떠나자 교회를 문 닫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중직 한 사람 흔들리는 것이 교회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빠지면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 교회의 기둥인 것입니다. 대구 남일 교회의 전이석 장로님의 어릴 때를 회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장로님의 아버지가 평북 정주의 어떤 교회의 장로님인데 주일이 되면 수 십명의 교인이 자기 집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메주나 김장을 퍽 많이 하였고, 그 동리의 기와집은 자기 집 뿐인데 예배당을 짓고 기와를 올리다가 비는 오려하고 기와 한 평이 모자라서 걱정할 때 그 아버지가 손짓을 하며 “우리 집 이편 기와를 벗겨서 예배당에 올려라”하여 예배당 기와를 완공하고 자기 집의 기와 있던 자리에는 일군들을 시켜 영을 올리게 한 다음 교회가 완공되고 자기 집 기와를 벗긴 일로 인하여 크게 만족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늘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로님은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런 충성이 곧 교회의 기둥 역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6. 기둥은 보이는 기둥도 있지만 숨은 기둥도 있는 것입니다.(삼 16:29) 모세를 보좌한 아론과 훌, 바울을 보좌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또는 바나바와 디모데, 누가와 같은 사람들, 다윗의 보조자 요나단, 룻터의 보조자 멜랑톤, 쥥글리, 쌕션 공작, 무디의 보조자 쌩키 음악가, 엘리야 선지자 당시에 있었던 7000명의 선지자(왕상 19:14) 등은 다 보이지 않는 기둥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7. 어떤 나무가 좋은 기둥감일까요? 나무 기둥을 가지고 생각해 보지요.

1)나무가 견고하여야 합니다. 대나무처럼 속이 비었다든지 1년에 20자씩 자라는 백양목처럼 그 나무가 여리면 썩는 수명도 짧기 때문에 기둥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둥감은 ① 나무 종류 자체가 견고하여야 하니 이것은 확고 부동한 기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고, ② 나이가 많이 먹은 나무일수록 견고하니 이것은 신앙의 연조를 의미하는 것이며 ③ 풍파를 많이 견딘 나무가 견고하니 이것은 믿음의 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확고한 신앙과 연조와 연단을 잘 받은 신앙인이 곧 기둥감이 되는 것입니다.

2)곧게 자란 나무라야 합니다. 나무가 곧게 자라지 못한 것은 기둥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곧게 자란 성도는 진실하고 순결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진실과 결백이 결여된 사람을 “패역하다, 구부러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패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흠이 있어 구부러진 종류”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그 시대의 악한 백성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 하셨으며 행 8:21에서 베드로는 요술쟁이 시몬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보기에는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너는 이 도에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진실과 결백이 결여된 사람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셉 같이 공사 간에 정직하고 여호수아와 같이 위험 중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세례 요한처럼 생사간에도 지조를 지킬 수 있는 성도라야 하는 것입니다. 시 15:1,4에 보면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참소, 악행, 훼방하지 아니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3)베어진 나무 즉 죽은 나무라야 되는 것입니다. 산 나무로는 재목이 될 수 없으니 베어진 나무, 죽은 나무, 바싹 마른 나무라야 되는 것은 성도가 자기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자기를 생명 없는 죽은 나무처럼 겸손하게 낮추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롬 6:3-4에서 바울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 곧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은 것이고 따라서 함께 장사된 것이라”하므로 자신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고,(롬 6:1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뜻과 영광도 부정한 후 오직 하나님의 뜻만 행할 수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그릇 같은 것입니다.

4)곧은 나무, 베어진 나무라도 깎고 밀고 골라야 합니다. 어느 나무든지 산에서 베어다가 그대로 기둥에 쓰는 나무 없습니다. 어지간히 곧게 자란 나무라도 먹줄을 대고 깎아서 바로 잡아 쓰는 것입니다. 먹줄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권고와 선배의 지도를 의미합니다. 딤후 3:16에서 “성경은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셨고, 딤전 3:9에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말씀하신 후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직임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교육과 훈련이 잘 된 인격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를 시험해보고 “기둥 역할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5)백향목 같은 나무는 향기가 있어서 좋고 또 그 향기가 해충을 막는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8. 이상과 같은 좋은 인재가 기둥 자리에 섰으면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다른 목재와 연합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끝까지 인내로 버티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 같은 직분자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증언하였습니다.











제 39 과 바울의 육체적 헌신 (빌 1:20-21)목록으로


본문 21절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의 육체적 헌신”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본문 말씀의

1)“살든지 죽든지”란 어떻게 살든지 또는 일찍 죽든지 오래 살든지를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2)“내 몸에서”란 말씀이 원문의 “엔토쏘마티”(εν τῷ σώματί)는 “내 몸 안에서”란 뜻이어서 육신을 갖고 사는 동안 또는 육신을 이용하여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삶과 방법은 어찌 됐든지 자기의 몸과 생애로써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만을 중히 여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3)또 바울이 자기의 육체적 쾌락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게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 바울 사도가 “자기의 몸으로 헌신한다”는 말씀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왜 육신을 주셨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님은 인간을 천사와 구별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실 때 영혼과 육체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2)그리고 육체는 영혼이 거하는 장막이 되며(고후 5:1) 또 성령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6:19) 성령님은 몸에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령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성도에게서 성령님이 떠나시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고,(롬 8:9,15) 그 사람의 영이 떠나면 죽은 몸이 된다(약 2:26)고 하셨습니다.

3)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지만(창 3:19) 나중에 내세의 천국을 전체적으로 가동시키실 때는 모든 육체가 다 부활하여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된 상태에서 영생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롬 8:11)

4)또 고전 6:13에서 “성도의 몸은 죄의 도구(음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영광 돌리는 도구”로 주셨고,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며(롬 12:1)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고전 6:20) 잘 보존하셔야 하고 하나님도 몸을 위해 주시며(고전 6:13) 그 몸으로 영광 돌리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5)어떤 사람들은 몸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요, 반드시 몸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골 2:17) 귀히 여기는 것이 성경적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6)또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고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에(고전 12:25) 몸의 어느 부분을 더 귀히 보고 어느 부분을 덜 귀히 여기는 것도 잘못 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몸을 그 영혼에 비하여 소홀히 취급한 점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마 6:25) “영혼과 몸을 다 지옥 보내는 것은 겁을 내도 몸만 죽이는 것은 겁을 내지 말아라”(마 10:28)하신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육신이 영혼에 비할 때 유한한 것으로 취급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영은 영원히 있지만 육은 흙으로 갔다 와야 하기 때문에 영혼보다는 덜 귀하게 여긴 것이 사실입니다.

7)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이나 영혼의 더러움을 다 같이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고후 7:1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는 말씀입니다.(롬 8:23) 혹 저희들 생각에 “육신은 영혼의 도구일 뿐인데 어떻게 육신이 죄의 책임을 지고 씻어야 하느냐”하시겠지만 육신이 죄의 책임을 질 것은 아니나 죄의 책임을 영혼과 인격이 져야 하니까 육신을 포함한 자신의 인격이 “죄의 도구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다 불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제가 군대 있을 때 어떤 이발사가 이발 가위로 자기 아내를 찔러 죽인 일이 있어서 그 가위와 칼을 증거품으로 갖고 왔는데 어떻게 무섭고 더러운지 곁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위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마는 사람이 그 가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 그것을 더럽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도 그 더러움을 씻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롬 8:10에서 “몸이 죄로 인하여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8)이렇게 육신이 죄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에 성도는 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갈 5:16,24),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 8:13)”고 하셨습니다.

3. 이만큼 성도와 육체와의 관계를 아셨으면 바울 사도가 자기 몸으로(육체적 생활로) 하나님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어떻게 헌신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머리를 깎은 일이 있었으니 이것도 몸의 헌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8:18, 21:24을 보시면 “그가 하나님께 서원하는 뜻으로 머리를 깎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서원은 고난을 무릅쓰고 몸을 바쳐 충성을 결심하는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몸을 바치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손이 나실인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던 일이 있는데 이것은 그 반대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형무소의 죄수들이 머리를 깎습니다. 그런데 딤전 1:15과 고후 1:9을 보면 바울 사도가 자기를 “괴수 죄인”이라 하셨고, 또 “자신은 핍박에 대비하여 항상 사형 선고를 받은 자로 생각하신다”고 하신 것을 보아서 머리를 깎은 이유 중에는 “자기를 큰 죄인으로 여기신 의미”도 있는 것 같고, 또 우리 나라에서는 사치를 외면하는 중들이 머리를 깎는 것처럼 바울 사도도 역시 그런 생활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서원이 있다든지 극단적인 마음을 가졌다든지 아니면 사치를 떠난다든지 할 때 머리를 깎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치한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바울 사도의 생활을 통하여 알 수 있고, 또 사치가 어떤 경우로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서 사치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머리를 깎은 것은 몸으로 주님을 존귀케 하기 위한 결단의 방법이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독신 생활로서 주님을 위하는데 헌신을 하셨습니다. 고전 7:8에서 바울 사도는 “그냥 지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특별한 은사로 독신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육신 생활에 불편이 많은 대신에 하나님께는 더 많은 충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7:32에서 “독신자가 결혼을 하면 아내와 자녀에게 그 마음을 뺏긴다” 하셨고, 눅 14:20에서는 “주인의 청함을 받은 자가 장가든 것을 핑계로 나태해질 수 있다” 하시므로 가정이 충성을 삭감하기 때문에 고전 7:29에서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하셨고, 지나친 현실 생활에 집착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저도 가정이 없이 살 수만 있었다면 세례 요한처럼 되었을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마는 그런 특수한 은사가 없기 때문에 아홉 식구의 가장이 되다 보니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독신 생활을 통하여 충성을 더하시므로 몸의 헌신을 잘 하시게 된 것이고,

3)고기를 잡수시지 않으므로 몸의 헌신을 하셨습니다.(고전 8:13)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믿음 약한 성도의 양심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중은 고기 안 먹는 규례를 갖고도 먹는 자가 있는데 바울 사도는 먹을 수 있는 신앙을 갖고도 믿음 약한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고기를 안 잡수신다” 하였으니 얼마동안 안 잡수셨는지는 모르나 그런 것이 믿음 약한 자를 위한 육체적 몸의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4)스스로 비천한 생활에 처하신 것입니다. 가난에 대비하신 면도 있지만 연단을 위하여 비천에 처해 보기도 하셨고,(빌 4:12) “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않더냐”하시므로 성도의 연약하고 궁핍한 생활에 동참하시는 뜻으로(고후 11:29) 비천에 처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생활을 일부러 가난하게 하여 몸에 고통을 주고 이웃을 덕되게 하신 것은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요,

5)육체의 고난을 수없이 겪으신 일들이 또 많았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당하신 육체적 생활의 고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육체에 고난의 흔적을 가지셨다”고 하셨습니다. 갈 6:17에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셨으니 이것은 사명 생활 때문에 몸에 상처나 질병을 가진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고후 11:23-30을 보시면 바울 사도가 사명 생활 때문에 옥중 생활, 매맞음, 돌에 상함, 깊음의 생활, 각종 위험, 굶주림, 잠 못 잠 등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시므로 그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생각하고 지내셨다(고후 1:9) 하셨으니 이런 사실들이 모두 육체적 헌신에 속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몸의 헌신 생활을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믿음 생활과 사명 생활을 하시다가 어지간한 육체의 피곤과 고난이 와도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늘 기쁨으로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40 과 바울의 사명적 입장 (골 1:24-29)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영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전체의 내용을 살피면 성직자(바울 사도를 뜻함.)가 사명을 받게 된 경위와 목적, 그리고 어떤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울의 사명적 입장”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바울 사도가 “사도”라는 사명을 받게 된 경위를 보면 25절에서 “내가 일군 된 것은.....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갈 1:1에서 더 자세히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비단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직분자들도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된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비단 사람의 기도로 성직자가 되는 목적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주신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3)

2. 일군되게 하신 목적을 말씀하셨는데 25절에서 “너희를 위함이라” 하셨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셨으며 27절에서도 “이 비밀의 영광을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또 28절에서는 “그를 전파하며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세우신 목적을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너희를 위함이라”하시므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모든 이방인들을 위하여 바울을 세우셨다” 하시므로 사역의 대상이 이방인들임을 지명하셨고,

2)“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한다” 하셨으니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지요.(롬 3:29)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감취어 있어서 유대인들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때를 오순절 이후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이후가 되신즉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의 비밀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26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은 주전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사 45:22) 하셨고, 예수님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6:15, 마 28:19, 행 1:8) 이 말씀들이 곧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명을 맡은 것은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틈 없이 성취됩니다.(롬 15:19)

3)“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들에게 풍성하게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이 비밀”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뜻하고, “그 비밀의 영광이.....풍성하게 알려짐”은 진리 전파를 통한 성령 충만을 이루게 하는 사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에서 말씀과 성령 충만을 동일시하시면서 그 은혜의 충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엡 5:18-19, 골 3:16)

4)“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성숙하게 되어 있고,(고전 3:1-4) 열매로 말하면 여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라 하셨는데 이 뜻은 완전 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난한 성도의 인격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비를 어느 정도는 닮아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을 많이 닮아야 하는데 바울 사도는 그런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해산하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갈 4:19) 이렇게 하나님이 바울을 세우신 목적은 이방인을 위하고 말씀을 이루려 하셨으며 또 비밀의 영광을 풍성하게 전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완전한 성도를 만들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이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1)“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여야 한다”(24절)고 하셨습니다. 믿음 성숙에 관한 일, 교회의 일, 전도에 관한 일 등으로 괴로움 당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기뻐하며 만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란 중에서도 기뻐하셨습니다.(롬 5:3)

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속을 목적하신 십자가의 고난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다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남은 고난”이란 “복음 전파와 믿는 자의 신앙 육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수고”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공생애 때에 현세에서 하시다가 승천하시고, 그 남은 일을 복음사역자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누구나 사명 생활을 하려면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에 보시면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 하여 수고한다”하시므로 먼저 성령님이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고 그 역사에 따라 자기는 몸과 마음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수고를 “육체에 채우는 남은 고난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그런 수고를 하시되 모자라도록 하시지 말고 반드시 수고와 고난의 분량이 분수에 차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3)“그를 전파한다” 하셨으니 전도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고, “성도 안에 계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7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모셔지도록 전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28절) 여기에서 권하는 것과 지혜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각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단체적 교육에서 각 사람에 대한 교육이 부실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개인 상대, 개인 신앙 점검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사명자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역 상대는 이방인들이며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고 그들로 은혜가 풍성하게 하며 또 완전케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의 방법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분수에 차도록 수고하되 전도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런 일들을 힘쓸 때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 41 과 사명자의 착념할 일 목록으로

(딤전 4:11-13)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사명자의 착념할 일” 몇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나이가 연소하여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권위와 명예를 보존하라”는 것이요, 다음에는 “신앙 인격에 본이 되라”는 것과 “교훈에 착념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에 두 가지를 앞뒤로 첨부하여 다섯 가지 착념할 일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명자가 착념할 일

1. 사명감을 계속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떤 칭찬이나 명예나 대가를 받지 않아도 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불타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대가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거기에 몰두하며 자기의 생애와 생명을 하나님의 것으로 깨닫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은혜, 사명 주신 은혜,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항상 값없이 하여야 할 일”이 복음 사역이란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2.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상태에 착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말씀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뜻하고, 말씀에 이끌림이 없으면 세상 정욕을 멀리 하기가 어려우며 말씀이 곧 가르쳐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사명자는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행 18:5)

2)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기도에 붙잡히면 다른데는 시간을 쓸 겨를이 없게 되고, 다른 행사는 전부 말씀, 기도만 못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명자의 권위와 명예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디모데”는 연소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자는 교만하거나 들레려고 하여도 안 되지만 또 무시를 당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가 업신 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그만한 권위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권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1)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서의 권위가 있고,

2)신앙 인격과 실력이 있으므로 권위가 있으며

3)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므로 권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는 실력 갖추는 일과 본이 되는 일을 한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은 겸손을 취하여도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명예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데 착념하여 명예 보존을 힘써야 합니다.

4. 교육에 착념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곧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육에 소질이 없으면 사명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교육이 곧 진리를 주입하는 일입니다. 혹 사명자가 가르침에 능하지 못하여 업신 여김을 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가르침이 능하기 위하여 연구를 많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과 말과 생활에 본이 되어 가르침에 착념하셔야 하겠고,

5. 점검에 착념하여야 합니다. 점검이란 가르침의 효력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결과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참포도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맺는다면 그 밭을 갈아 엎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사 5:1-5)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데 있으니까 그 변화의 상태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변화되지 않으면 사명자에게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상대방이 외식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명자의 착념할 것은 ① 쉬지 않고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요, ②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생활이며 ③ 권위와 명예를 보존하는 일이요, ④ 전도와 교육에 착념하는 것이며 ⑤ 말씀 교육의 결과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제 42 과 헌신자의 자세 (딤후 1:12)목록으로


바울 사도의 “헌신자적 자세”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또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저 하는 성도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세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12절의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요, 다음에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는 것이며 셋째는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헌신 충성하려는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저희들도 그런 자세로 충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있고, 또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지 않은 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죄 되는 일이 없으면 부끄럽지 않습니다. 또 자기의 뚜렷한 주관대로 살면 부끄럽지 않고 더 떳떳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하는 방법대로 모방을 못하면 부끄럽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고생하는 것도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과소비 하거나 사치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고, 체통 세우기 위하여 음식 찌꺼기 남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못 사는 사람들 앞에서 잘 사는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것은 복음 사역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 생각하셨고, 사명 수행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명 생활을 하면서 비양심적인 일을 행하거나 대가를 많이 받거나 꾀를 부린다면 그것이 부끄러운 일일 것이요,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받기 위하여 소명 받은 종으로 알았고,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전 11:23-27에 보시면 “넘치는 수고, 옥에 갇히는 일, 매맞음,(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음.) 파선당한 일, 강도,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목마르고 주리며 헐벗고 잠 못 잔 일” 등 너무 많은 고난을 당하여 자신은 늘 사형 선고를 받은 자이므로 “사형 집행 당하는 때만 기다리는 자세로 살았다” 하셨고, 자기 몸에도 “고난의 흔적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갈 6:17, 고후 1:8-9) 바울은 이런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충성한다”는 목적 의식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부끄럽기는커녕 오히려 떳떳하였던 것입니다.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성도는 인간들 앞에 연약을 보이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홀로 서는 것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인 “씨자”는 말하기를 “용자는 홀로 있을 때 강하다” 하였고, 반대로 “나폴레옹”(17-18C)은 죽을 때 소녀에게 동정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하셨으니(행 26:29) 그것이 곧 고난을 영광으로 여긴 고백인 것입니다. 성 “다미엔”이 나환자 소굴에서 누추한 옷을 입고 병자를 치료해 주고 있을 때 황태자가 찾아와서 그 모습을 안 된 것처럼 위로한즉 “이 옷은 황태자도 입을 수 없는 귀한 옷이라”하면서 그의 동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로 고난을 받는 일이겠습니까? 헌신자는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을 인하여 받는 괴로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잘 안다”는 뜻이며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신가에 대하여서도 잘 알며 끝까지 주님께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증오하고 핍박하였지만 예수님을 안 후부터는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던지고 주님께 목숨 바치며 충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요 13:1) 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왜 그런 분을 의뢰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고난을 받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않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울 분이 아니라”(욥 23:17) 하였고, 또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한다”(욥 13:15)고 하였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의 불변성과 언약의 불변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헌신자는 하늘의 상급을 믿고, 또 “내가 의뢰한 하나님이 나를 추호도 섭섭하게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 크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자기와의 영적 친교를 가깝게 수립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주님께 의탁하였을까요? 바울은 단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1)자기 생명을 “주님의 것이라”하면서 의탁하였습니다.(롬 14:7-8, 빌 1:21)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를 자기가 맡거나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됩니다. 서울 마포의 아현 교회는 김현봉 목사님이 시무하는 유명한 독교회인데 교회의 재정을 목사가 다 맡아 처리하니까 교인들이 그것을 불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말씀이 “돈도 맡기기 어려운 사람에게 어떻게 영혼을 맡기느냐”고 하여 아무 말도 못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2)사명에 관한 것을 맡기고 의지하였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오로지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명 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버렸으니까요.(고전 2:2) 우리도 각자의 신령한 사명에 대하여 다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할 것입니다.

3)상급과 영광에 대한 것을 다 맡겼습니다. 롬 11:36에서 “영광은 주님께만 돌려져야 한다” 하셨고, 또 딤후 4:7-8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영광과 상급을 주님께 맡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고난을 부끄러워 말고 의뢰자 예수님을 알고 또 우리의 의탁한 것을 상급주시는 날까지 이루어주실 줄을 믿고, 사는 것과 죽는 것과 사명에 관한 것과 영광 상급에 관한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헌신,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3 과 사명적 승리의 고백 (딤후 4:7-8)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명 생활을 끝낸 상태에서 사명적 승리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고백의 내용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자기를 위한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어 그 날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이요, 바울 자신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면서 충성한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의 사명적 승리의 고백도 되고, 또 모든 충성된 성도들에게 헌신적 충성에 대한 교훈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로마 옥중에서 순교로 세상 떠날 날을 몇 일 앞두시고 후회 없는 생애를 사심에 대하여 고백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우리도 바울처럼 사명적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하여 바울의 변화로운 생활과 사명 생활의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명적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 두 가지 변화를 확실하게 일으킨 것입니다.

1)거듭난 변화입니다. 거듭난 변화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성경을 진리로 믿는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 체험을 점차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바울처럼 뜨겁게 느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고기 잡는 순간에 뜨겁게 느꼈습니다.(눅 5:8) 바울은 다메섹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전격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행 9:4) 역시 거듭나는 체험을 뜨겁게 느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물에 순식간에 들어가서 뜨거움을 느끼는 것과 미지근한 물로부터 점차로 들어가서 더 뜨겁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느낌의 차이는 있으나 변화의 결과는 같은 것인데 뜨거운 변화를 받을수록 확신의 감정을 더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생활 태도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위치에서 회심도 크게 하였고,(딤전 1:12-15) 사명적 변화도 크게 가졌습니다. 우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알았을 때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현세적 모든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렸고,(빌 3:8) 자기의 생명과 생애에 관한 모든 일과 죽는 일까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롬 14:7-8) 이같은 생활 태도의 확실한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2. 생활 목적이 뚜렷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 목적은 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고, 그 나름대로 자기의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생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고, 사는 방법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1)영광 목적에 대한 말씀을 보면 롬 11:36에서 “영광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셨고, 또 고전 10:31에서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2)롬 14:7-8에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의 목적도 하나님을 위함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3)생활 방도에 대하여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존귀만 위하여 행하고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셨습니다.(빌 1:20, 고전 2:2) 사람이 삶의 목적과 방법만 뚜렷하면 힘차게 나갈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 당하는 일을 즐거워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빌 1:20) 하셨고, 오히려 환란 중에 즐거워하셨으며(롬 5:3) 환란이 연단과 소망을 이루는 줄 아시고 항상 기뻐하셨던 것입니다.(살전 5:16) 성도가 믿음 생활이나 사명 생활에서 당하는 괴로움을 보람과 희망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사명 생활을 힘써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명자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힘들거나 괴로움이 있으면 우선 그것을 연단 받는 기회로 알고 즐거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롬 5:3) 온실에서 자란 나무는 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울릉도 높은 벼랑 돌틈 사이에 서 있는 나무가 바다 바람을 모질게 쏘일 때 값비싼 나무가 되는 것처럼 고난은 신앙 인격과 사명 발전에 좋은 약이 되는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이란 바로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요, 연단과 헌신의 차원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보람을 느낀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변하여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시면 주인의 뜻을 옳게 분변하지 못한 종이 달란트 밑천을 땅에 묻었다가 책망을 받았고, 또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여도 주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마 7:21-23, 25:24-30)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서로의 취미와 목적 같은 것을 오래 교제하면서도 잘 몰라서 충돌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여 바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예수님의 생활 방법을 깊이 살펴 주님의 의도하시는 바를 잘 이해하고 복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딤후 2:15, 살전 4:3)

5. 마지막 생애를 옳게 장식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가 옥중에 계시면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편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돌아가시기 몇 일 전에 기록하신 것이지요. 그 말씀에 “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기를 힘쓰라” 하셨으니(딤후 2:15) 바울은 더욱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로 자신의 믿음과 사명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젊은 때보다 늙은 때에 약하여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못한 것들을 노년기에 많이 깨닫고 반성하면서 더 완전한 일에 나가도록 노력하셔야 하고, 마지막 생애를 더욱 믿음과 사명으로 결과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충분한 교육과 주의 사항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순교하시므로 그의 마지막 생애를 더욱 빛나게 장식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의 승리적 고백은 ① 확실한 변화, ② 확실한 목적과 방법, ③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 ④ 또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여 ⑤ 마지막까지 사명적으로 생애를 마치신 것입니다.


제 44 과 사명의 승리자 (딤후 4:6-8)목록으로


“사명의 승리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명의 승리자는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 시행하고 자신의 죽음 당할 일이 가까워지는 것을 예견하신 후 로마 감옥에서 지금 읽으신 본문의 내용을 고백하셨습니다. 이 내용의 뜻을 요약하면 “사명의 승리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의 내용을 보면 “나는 나의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또 “나의 달려갈 길도 다 마쳤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주실 것을 확신한다”, “이 면류관은 나처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이다”라는 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평소에도 성도들에게 “아무 일에나 부끄럽지 않게 살라”(빌 1:20) 하셨는데 자신의 사명 생활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고백하신 것을 볼 때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어떻게 사명 생활을 잘 하여 승리자가 되셨는지를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1. 바울이 본래 핍박자요. 이단자에서 변화받고 사명자가 된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1)바울은 본래 율법주의 종교인으로 유대인 중심으로 결성된 바리새 당파에 속하여 기독교를 몹시 핍박하였던 사람입니다.(딤전 1:13)

2)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격적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을 변화시키셨고, 복음의 깨달음과 사명을 주셨을 때 바울은 큰 확신을 갖고 사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행 9:1-18)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갈 1:1)

2. 바울이 사명의 길로 들어설 때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1)복음의 확신이 있고,(고전 2:2,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 외에는 전하지 않음.)

2)“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헌신적 정신이었으며(롬 14:8)

3)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는 희생적 정신도 가지셨습니다.(행 20:24, 롬 9:3, 딤후 4:6)

4)3년 동안 연단을 받으신 후에(갈 1:17-18)

5)가족 없이 혼자서 뛰신 것입니다.(고전 9:5) 사명자가 가족을 부양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단신으로 뛰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3. 바울이 무슨 사명을 위하여 헌신하셨습니까?

1)십자가를 증언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상대로(고전 2:2, 행 9:15)

2)말씀을 밝히는 사명이 있었습니다.(빌 2:16)

3)이방 선교와 목회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4)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시므로(고전 11:1) 사도로서의 본을 보이는 사명을 수행하신 것입니다.(엡 2:20)

십자가 증언, 말씀을 밝히는 일, 선교와 목회, 그리스도의 본을 나타내는 일이 사명 목표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빌 1:20)

4. 바울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는가?하는 것입니다.

1)늘 회개하는 자세를 가지셨습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였을 때 그리스도를 핍박한 죄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괴수 죄인처럼 여긴 것입니다.(딤전 1:12-15) 이것은 죄사함의 도리를 모르셔서가 아니고 겸손과 반성의 자세로서 늘 죄의식을 가지신 것이었습니다.(행 20:21)

2)감사를 넘치게 하셨습니다. 자기 같은 핍박자요, 폭행자를 사명자로 불러주신 은혜를 감사한 것입니다.(딤전 1:12) 물론 다른 은혜도 감사하셨지요.(살전 5:17)

3)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의탁한 자를 안다” 하셨고,(딤후 1:12)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함보다 낫다”(고전 1:25) 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자신의 연약을 자랑하면서 사역하셨습니다.(고후 12:5,9) 만일 사명자가 자신의 연약을 자랑하거나 나타내지 않는다면 진실치 못한 자요, 사특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 실례로 “변화를 받고 초기 전도 사역을 할 때 핍박을 무서워하여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 밖으로 도망한 사실도 있었다”는 말까지 하셨습니다.(고후 11:30,32-33, 행 9:19-25) 사명자가 자기의 연약이나 약점을 인정하는 것은 그만큼 진실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빌 4: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4)겸손이 뛰어날 정도였습니다. 고전 15:8-10절에 보시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할 자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더 많이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 하셨으니 그 이상 더 겸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5. 선교 사역상 당하신 고난을 살펴보면 고후 11:23-2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넘치는 수고, 감옥에 들어감, 매맞음, 여러 번 죽을 뻔한 일, 태장을 맞음, 돌에 맞음, 세 번이나 파선 당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내심, 여러 번 여행 중에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 핍박의 위험, 이방인 핍박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등이요, 그 외에도 수고하고 애쓰며 주무시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추위와 헐벗음 등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도 “교회와 성도를 위한 염려는 끊이지 않았다” 하셨으니 그 고난의 생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또 목회상 당하신 일들을 살피면 역시 고난과 충성됨이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행 20:31-35에 보시면 에베소 교회의 3년 목회 소감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1)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 하셨다.(31절)

2)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신 일이 없고 오히려 손으로 수고하여 자신과 동행인들의 쓰는 것을 감당하였다.(33-34절)

3)수고하며 약한 사람들을 돕고 범사에 본을 보였다.(35절)

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시행하였다.(35절, 눅 6:38)

5)유익한 것은 다 가르쳤다.(20,27절)

6)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하였다.(19절)

7)갈 4:19에서는 “성도의 변화와 교육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다” 하셨고, 별난 사람들 때문에 지긋 지긋할 만큼 고생하신 사실도 말씀하셨습니다.(부겔로, 허모게네, 딤후 1:15, 후메네오, 빌레도, 딤후 2:17, 구리장색 알렉산더, 딤후 4:14)

7. 마지막으로 후계자 디모데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보면(딤후 4: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스라 범사에 오래 참고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하라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고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왜 이렇게 어려운 목회와 선교를 하게 하셨는지 저는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어려움 당하는 선교와 목회가 성공의 비결인 듯도 합니다. 난초의 뿌리는 작은 화분에서 고난을 당해야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고난의 밑거름으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죽을 자가 사는 일이니 쉬울 수 없겠지요. 바울의 승리적 사명 수행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제 2 부 직분자에 대한 설교


제 45 과 직분자를 세우심 (엡 4:11-12)목록으로


본문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시는 일과 그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본문의 “그가”란 대명사는 교회의 주(행 20:28, 딤전 3:15)되신 예수님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도 직접 직분자를 불러 세우셨고(마 10:1)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고전 12:4-11) 이때에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그 원하시는 대상에게 직접 직분을 주시기도 하시고 또 교회의 사역자들을 통하여서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후에(행 9:13) “아나니아”사역자를 통하여 직분주시는 의식을 베풀게 하시므로 전달해 주셨습니다.(행 9:12) 따라서 교회시대의 모든 직분도 성령님의 역사와 교회의 제도를 통하여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를 통하여 전달된 사실은 사도회에서 “맛디아”를 뽑은 것이나 일곱 집사를 세운 일, 그리고 장로회에서 “디모데”를 안수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딤전 1:6, 4:14)

2. 주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실 때에 모든 이를 다 세우시지 않고 은사와 직임을 주시고자 하는 대상에게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혹”이란 말씀이 “혹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므로 누구에게나 다 주신다는 뜻이 아니며 성령님께서 각종 은사를 주실 때도 그의 뜻대로 주시며(고전 12:11)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2:29-30)

3. 주님께서 세우시는 직분을 다섯 가지로 소개하셨는데 이 직분은 다 계시의 말씀과 관련이 있는 직분입니다. 예를 들면 다스리는 장로직이나 봉사하는 집사직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다섯 가지 직분의 성질을 살펴보겠습니다.

1)사도직입니다. 이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열 두 사도와 부활 이후에 세우신 맛디아와 바나바와 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이 세우셨고, 초대교회 시에 바울사도로 끝난 직임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도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인하게 하셨고, 계시적 영감과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게 하셨으며 범사에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선지자와 함께 신앙 생활의 모범자가 된 것입니다.

2)선지자는 사도와 비슷한 은사와 사역을 하였으나 사도가 초대교회 당시에 사역을 하였다면 선지자는 구약의 열왕시대에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도는 구약시대에는 이름도 없었지만 선지자는 신약시대에 이름만 나타냈을 뿐 사역의 기사는 거의 없습니다. 혹 사도와 선지자의 다른 점을 지적한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이 임명하여 세우신 기사가 없고 구약의 선지자는 특정 사역의 지시를 받았을 때만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사도는 예수님이 세우신 후에 복음 전파와 교회의 기초사역의 책임을 주셨던 것입니다.

3)복음 전하는 자를 세우셨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자는 오늘날 전도의 사명을 갖는 일반 전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행 21:8에 “전도자 빌립”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한 은사를 부가하여 세우신 사역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행 8:4-8,26-40) 모든 성도가 전도의 사명을 갖고 실천할 수 있으나 교회가 전도자로 세워 직분을 맡긴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전도사님들도 교회가 세운 것은 사실이나 특수한 은사 면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와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4)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① 목사와 교사는 성경과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직분으로 공통성이 있고 ② 가르치는 직임 외에 목사의 특수한 직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과 목양하는 직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으로 교회의 대표가 되고(당회장, 공동의회장. 제직회장) 예수님을 대리하여 축복과 성례를 시행하는 것이며 또 목양하는 사역 속에 진리를 선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장로와 함께), 권면․징계하는 일, 기도하는 일 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최초 목사는 “디모데”(딤전 4:14, 5:19)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로회에서 안수하였고, 교훈과 치리의 직임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장로, 집사, 권사의 직임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가장 중요한 직임으로 성경 교육과 관계있는 직임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직임을 주시는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고 또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는 진리의 전달과 교육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 봉사나 정치는 일반적 조건에 해당하므로 신령한 교회를 만드는데는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4. 교회의 직분을 세우시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가르치는 직임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성도로 온전케 하며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1)여기에서 “성도로 온전케 하신다”는 설명은 “성화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의 글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변화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2)봉사하는 인물을 만들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봉사 역군이 많이 생길 때 보람을 갖게 될 것이고 또 가르침을 받은 자도 자신이 예수님을 닮으면서 봉사의 사명을 갖게되는 일에서 발전의 열매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3)“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엡 1:23, 5:29) 그러니까 “몸을 세운다”는 뜻은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전달과 말씀교육으로 세워지고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자를 통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전도하고 전도받고 믿은 자를 교사가 가르치고 진리의 지식가진 자를 목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받은 성도를 교육하여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게 하며 그런 성도를 많이 육성하였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다스리는 직임, 봉사하는 직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를 온전하게 육성하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오직 말씀 사역으로만 가능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한 인격과 교회의 육성은 오직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46 과 바울의 사명자적 고백 목록으로

(행 20:26-35)


이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1,2,3차의 전도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중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하시면서 자신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 어떻게 목회하신 것을 고백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복음사역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1.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교회를 “주의 피로 사신 교회”라 하심으로써 교회의 성격과 가치를 예수님의 생명처럼 여기셨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출현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성령님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으셨다”하시므로 교회의 감독자를 세우신 것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직접 세우신 것임을 믿고 성령님의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감독자는 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삼간다”는 뜻은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지키는데 먼저 주력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개인생활과 대인관계에 있어서 거리끼는 일이나 부덕한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4.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유순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나타내신 것이고 또 성도들을 교훈함에 있어서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음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들 중에는 문제스러운 점을 갖고 있는 식구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수하게 어린 아이처럼 믿음생활을 하려 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이기적으로 정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에 목회자를 크게 괴롭히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신 것은 그런 일들로 인한 간절함과 안타까움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5.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장이시기 때문에 부탁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고 말씀께 부탁하신 것은 말씀을 예수님의 인격으로 믿고 말씀의 역사가 가장 강한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도를 붙들고 권면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상 더 힘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직에는 목사 이상 없고 은혜에는 말씀이상 없는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6.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 등 물질을 탐하지 않으셨다”(33절)하셨고

7. 오히려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약한 자를 도우며 모본을 보이셨으며

8.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눅 6:30,38)

바울이 ①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기관으로 깨달은 점 ② 성령님께서 감독자의 직분을 주신 점 ③ 감독자들이 먼저 자신을 삼가 바른 위치에 있어야 하는 점 ④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고 ⑤ 말씀을 최고의 은혜의 방편으로 여기신 점 ⑥ 물질을 탐하지 않고 ⑦ 손수 노력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신 점 ⑧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일깨우신 점을 깊이 유념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47 과 주 안에서 하는 일 (빌 2:1-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 안에서 하는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절에서 “주 안에서 하는 일”을 다섯 가지로 발표하셨는데 대표적인 것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1)권면하는 일입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2)사랑의 차원에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성도나 이웃 중에 어려운 일 등으로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3)성령의 교제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여기의 “성령의 무슨 교제”란 은사 교환과 말씀에 따른 활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고전 14:26)

4)긍휼을 베푸는 일입니다. 긍휼은 주로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같은 것이요

5)자비는 불쌍한 자에게 동정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일의 특징은 다 사랑실천에 관한 것이요, 좋은 일입니다. 주안에서 하는 일이니까 다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런 좋은 일을 할 때 방법도 좋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뜻을 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거나 한 마음을 품는다”는 말씀이 전부 같은 뜻입니다. 즉 목적과 방법이 같아야 하는데 오직 사랑 성취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2)허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주의에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3)겸손한 방법을 쓰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4)자기의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소홀하거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 덕을 베풀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성도가 주안에서 무슨 일을 할 때 ① 뜻을 합하고 ②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하도록 하며 ③ 허영을 떠나고 ④ 겸손하게 하기만 하면 다툼이 없는 사랑의 세계만 이루어 질 것입니다.

3. 성도가 서로 화목하고 주안에서 할 일을 잘하면 복음사역자인 바울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는 복음사역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복음사역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주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복음사역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바른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합하는 일에 있어서 각자의 개성이 다르지만 서로 양보할 수도 있고 화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추나 파나 마늘이 다른 성분이라도 한 가지 요리에 다 필요한 것처럼 각자의 개성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화합적으로 융화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뜻을 합하는 방법입니다. 좋은 일을 좋은 방법으로 시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48 과 찬양에 대한 지식 (히 1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찬양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1)여기의 “그러므로”는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씀한 내용이 앞에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13:12,14에서 “예수님이 고난으로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고 성도는 그 구속의 은혜로 영생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엡 1:3-5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선택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찬송할 이유는 “독생자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존귀와 영생을 힘입은 것”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찬송할 때마다 십자가의 구속과 영생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이 찬송받으셔야 할 이유를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성경 제목사전 참조)

2)“예수로 말미암아”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찬송할 수 있는 힘과 조건이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주님이 주시고 찬송을 열납시키는 중보의 사역도 주님이 하시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셨습니다. ① “찬송을 항상 드리라”는 뜻은 무시로 또는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과 같은 뜻이요(엡 6:18, 눅 18:1) ② “찬미를 제사라”하심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성도의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4)“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하심은 찬송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여 전도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찬송에 대하여 연구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1)찬송의 뜻에 대하여 기독교 대사전(830P)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찬송은 성령에 사로잡힌 기독교인의 심정의 시적 발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음악적 예술이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성도가 성령님의 감화로 자기의 심정을 시적 내용과 음악적 예술로 영광 돌리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과 사전에 수록된 내용을 소개하면 “찬송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는 대상을 찬미하는 기도의 노래”라 하였고,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노래”라 하였으며 어거스틴은 정의하기를 “찬송은 노래로써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요, 그 하나님 찬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2)찬송의 용어에 대하여 성경에 보시면 찬미, 찬송, 찬양이란 용어가 약 300회, 시와 노래란 용어가 274회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고 구별할 수 없습니다.

3)찬미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도의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과(삼하 22:4, 시 22:23) “예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계 5:12, 요 12:13, 마 21:9) 성령님도 찬송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나 성경에 명시된 것은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

4)찬송이 은혜의 방편인가?할 때 찬송은 영광의 방편이요, 은혜의 방편은 아닙니다.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기도)라고 교리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찬송으로 영광 돌린다”하지 않고, “찬송으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찬송으로 은혜를 받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에 성도가 공감하는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지도에 의하여 찬송의 의미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으니 예를 들면 ① 예배를 드리기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 ② 기도와 전도의 방편으로 ③ 감정을 흥기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찬송의 목적은 가사 내용에 따라서 전도용 찬송도 있고 기도용 찬송도 있으며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위한 찬송도 있지만 저희들이 주의할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도와 기도를 위한 노래로 또 그 보다도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불러야 할 것입니다.

5)성경에 나타난대로 찬송의 역사를 살펴보면 ① 창 4:23-24에서 “라멕의 노래”가 있으나 하나님께 드린 찬양이 아니었으며 최초의 찬송은 창 9:26에서 노아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한다”하므로 최초의 찬송 기사로 나타났고, 출 15:1-18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찬송이 있었고 이어서 미리암의 소고 연주와 찬양이 있었습니다.(출 15:21) 그 후 주전 1000년 경에 다윗의 찬송 기사가 시편 등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② 신약 성경에 나타난 찬송의 역사는 마리아의 찬송(눅 1:46-55), 사가랴의 찬송(67-79절), 시므온의 찬송(2:29-32), 예수님의 찬송(마 26:30)이 있었으며 ③ 사도시대에는 바울의 찬송(행 16:25, 엡 1:3)이 있고, 유월절같은 절기에 시 113편이나 114편 같은 내용에서 찬송가의 내용을 인용하였으며 ④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핍박 중에서 공인을 받자 찬송이 활기를 띄우고 음악적 체계로 발전하여 서방교회의 사교인 “암브로시우스”가 최초로 찬송가를 편찬하였고, 그 후 64대 그레고리 1세(604년) 교황이 성가를 대집성하였지만 이것은 라틴어와 헬라어로만 부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대중적이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우리 개신교의 찬송가의 보급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개혁자요, 순교자인 “요한 허스”가 1501년에 90여 곡을 1505년에 400여 곡을 출판하였고, 또 성직자요, 음악가인 Ruther가 그의 친구 요한 발터(Johanes Walter)의 도움을 받아 각종 찬송가를 독일어로 소개한 후 또 독일의 민요곡을 편곡하여 가사를 시편에서 발췌하여 새로운 찬송가를 많이 보급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383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한 찬송이 시 46편의 내용을 본딴 것입니다. 그 후 17세기에 이태리의 바룩(Barock)의 찬송이 유명하였고, 그 다음 18세기에는 독일인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가 근대 음악으로 완전한 4성 체계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6)찬송을 잘 하는 방법에 대하여 ① 믿음의 찬송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찬송하라”(본문)는 말씀이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한다”(엡 5:18-19)는 말씀이 그 뜻이요 ② 감사와 기쁨으로 불러야 합니다. 시 9:2에서 “내가 주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하셨고, 눅 1:46에서도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③ 최대한의 음악적 예술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찬송은 예술적 경배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시 33:1-3에서 “악기로, 새 노래로 공교히 연주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웨슬레 선생님은 일곱 가지 방법을 교훈하였으니 곡조를 배우고 악보대로 부르며 전부 부르고 열심있게 부르며 소리를 지르지 않는 방법으로 조심하고 속도를 빠르게 하고 영적으로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④ 찬양의 전문가로 찬양하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왕 때에 노래하는 찬양대의 수가 4000명이었고(대상 15:16-24, 23:5) 솔로몬 왕때도 찬양대가 수금, 비파 등 악기 제조가 있었습니다.(왕상 10:12, 대하 9:11) ⑤ 성경에는 춤추며 찬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149:3, 150:4)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여인들이 춤추며 찬양하였고(출 15:20-21) 다윗왕도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운반할 때 춤추며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삼하 6:5,14) 찬양이 제사이므로 춤추며 찬양하는 것은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롬 12:1) 그러나 여기에 문제되는 것은 성도의 거룩한 춤은 이방인의 추는 세속된 춤을 모방하지 말고 세속성을 부추기지 않는 성별되고 건전한 춤을 개발하여 추어야 할 것입니다.

3. 찬송으로 얻는 유익에 대하여

1)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에 최대 효력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며 간접 제물이 아닌 직접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예배의 기도나 설교의 부분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이 부모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불러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신앙고백에도 의미가 있으니 찬송가의 내용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부르는 성도의 신앙고백이 되어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신 것처럼 신앙고백 표현에 효력이 있고

3)기도의 표현으로서도 효력이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 중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영광의 가사도 있지만 그 외에 많은 가사가 감사와 회개와 간구의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이 기도의 정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찬송은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서 전도의 효력을 주게 됩니다. 찬송 소리에 감동을 받고 교회로 이끌려와서 믿음 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찬송은 부르는 사람의 인격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찬송을 부르는 성도와 일반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의 인격과 생활에 차이가 있음은 곧 신자와 불시자의 차이를 나타냄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찬양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 96:4에서 “극진히 찬양할 것이라” 하셨고, 시 145:3에서는 “크게 찬양할 것이요”, 시 104:33에서는 “나의 전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에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 49 과 은사 받은 자의 책임 (고전 12:4-7)목록으로


이 시간 태평 교회의 임직식을 맞이하여 부족한 사람이 말씀을 증언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임직식을 맞이하여 세 가지 말씀을 생각하고 증언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고전 12:4-7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은사 주시는 목적이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은사는 하나님이 주시고 또 각 사람에게 특징있게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임직식을 하게 하신 것도 성령님이 교회를 통하여 각인에게 은사로 직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의 특징을 잘 살려서 은사대로 충성하게 하시되

2)“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이라”하셨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하고 둘째는 이웃에게 유익하며 셋째는 교회의 발전에 유익하도록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 고전 10:31에서 “너희는........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직분을 이행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력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곧 믿음과 순종과 동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먼저 자기의 믿음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이 믿음은 신앙고백을 하고 구원을 받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닮아 행하는 온전한 믿음, 거룩한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충성․헌신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말씀의 능력을 믿은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또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등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을 거울 삼아서 반드시 귀한 믿음의 그릇이 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항상 성경연구와 사랑 실천과 기도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② 고전 10:33에 보시면 하나님의 은사 주신 목적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특별히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웃에 덕을 세우되 신령한 덕(즉 구원의 복)을 세우기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못하거나 자기 유익을 앞세우면 이 목적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의 직분을 주신 목적이 이웃에 덕을 세움에 있음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교회를 유익하도록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2에 보시면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직분이 좋은 은사라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으면 거치는 결과를 주기 쉽습니다. 만일 직분자가 사명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실하게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마치 천국문을 닫고 자신도 안 들어가면서 들어가려는 자도 막는 격”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순서대로 잘 하고 순서대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먼저 믿는 성도가 본을 보이지 않으면 나중 믿은 성도가 책임자를 앞서서 더 잘 하는 것을 보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유익되게 섬기는 방법은 범사에 본이 되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믿음에 앞선 성도가 모임과 기도와 성경공부와 겸손과 봉사와 헌금과 사랑에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어떤 목사님이 임직받는 장로를 권면할 때 장로의 절기 헌금이 집사보다 적으면 덕이 안되니까 절기 헌금을 성실하게 드리기 위하여 적금을 들라고 권면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또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중요한 것은 교역자를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중직자들이나 교인들이 기도, 전도, 봉사로 많이 돕는 줄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의 일을 담임한 사역자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역자에게 근심이 되거나 부담을 드리는 말을 삼가고 항상 격려하고 위로하며 순종하고 섬기는 일만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로나 제직이 교역자보다 더 유력한 듯이 자기를 내세우면 그것은 교역자의 힘과 사역을 깎는 일이 되어서 오히려 교회가 유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합당하게 쓰시는 그릇에 관한 말씀입니다. 딤후 2:20-21에 보시면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예비함이 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시면서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하셨고, 바울사도께서도 교회의 은사적 직분자를 그릇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려면

1)자기 위치에 있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밥그릇이 화장실에 있거나 휴지통이 식당에 있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본분과 자기의 책임적 위치에 든든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깨끗한 그릇이어야 합니다. 장관이라도 고급 의복 소문에 휘말리니까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쓰시는 그릇도 깨끗한 것만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가진 성도는 무슨 유명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3)그릇은 가벼워야 잘 쓸 수 있습니다. 무거운 그릇, 움직이기 어려운 그릇, 민첩하지 못하거나 순종이 더딘 그릇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4)깨지기 쉬운 그릇은 크게 조심스럽습니다. 믿음 약한 성도에게 사명을 맡기면 그것을 사명으로 알지 않고 짐으로 여기다가 낙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5)소리 안나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공로를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어떤 조건에 의하여 충성할 때 유익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임직을 받는 성도님들은 꼭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시고 순결하고 순종적이며 인내와 겸손이 넘치는 정말 헌신적인 직분자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계 3:10에 보시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한다”고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자기의 이기주의에 목적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가를 바라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희생을 각오하고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충성의 대가로 약속하신 상급을 받을지라도 충성을 할 때는 그런 상급에 연연하지 말고 희생적으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불살라 번제로 드리듯이 자기의 모든 것 전부를 드리는 헌신적 충성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의 직분을 ②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한 덕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감당하시되 ③ 하나님이 합당하게 쓰실만한 그릇이 되어 쓰임을 받고 ④ 죽도록 충성하는 직분자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50 과 집사가 알아야 할 교훈 목록으로

(딤전 3:1-13)


1. 본문 설교

제 목 : 집사의 자격과 상급 (딤전 3:8-13)

1)집사의 자격(이 교훈은 남녀에게 다 해당함. 8-12절)

① 단정할 것.(차림새, 언어, 행동 등이 반듯하여야 함.)

② 일구이언을 안 할 것.(거짓, 외식, 약속 불이행 등의 결함이 없고 진실할 것.)

③ 술에 인박이지 않음.(음주로 인한 부덕이 일체 없어야 함.)

④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 것.(직업이 정당하고 불의한 이득을 피해야 함.)

⑤ 깨끗한 양심을 가질 것.(정직하고 순결한 마음, 양심은 믿음의 터전임.)

⑥ 믿음의 비밀을 가짐.(나타난 믿음도 있지만 잠재적 신앙도 있어야 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적 체험이 많을수록 좋음.)

⑦ 한 아내의 남편이 될 것.(결혼을 전제로 함이 아닌 혼인의 순결을 뜻함.)

⑧ 여자들도 단정하여야 함.(앞에서 설명하였음.)

⑨ 참소하지 말 것.(말에 덕을 세우라는 뜻. 특히 이간될 말을 삼가야 함.)

⑩ 절제할 것.(분수에 맞도록 생활할 것. 사치와 방종이 없어야 함.)

⑪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함.(얼마큼 잘 다스려야 할까요? 잘못 양육된 자녀로써 이웃에 피해를 주거나 비난 받을 일이 있으면 안됨. 너무 구차한 생활로써 이웃에 덕을 세우지 못하여도 안된다는 뜻. 자녀의 신앙 생활은 그 부모가 다 책임지기 어려움.)

⑫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함.(성실성과 봉사성이 있어야 함.)

⑬ 이상의 사실을 시험해 보고 책망할 것이 없을 때 세우라 하셨음.(시험하는 방법은 성경 지식에 근거한 신앙 고백과 실제 생활을 여론에 비추어 판단해야 함.)

※ 여집사에게 안수하지 않는 이유 : 성경에 여집사에 대한 자격과 세운 근거가 있으나(자격 : 딤전 3:11, 세운 근거 : 롬 16:1) 안수한 근거가 없기 때문임.

2)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에 대한 상급(13절)

① 아름다운 지위를 얻음.(이 세상에서도 칭찬을 받고 존귀해지며 내세의 상급도 있다는 뜻.)

② 믿음에 담력을 얻음.(믿음의 담력이란 신앙생활의 자신감을 갖고 성숙 상태를 알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됨을 뜻함.)


2. 집사직의 성경적 근거.(행 6:1-6)

1)초대교회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이 7 집사를 세운 근거가 있음.

여기에서 집사란 명칭은 나타낸 바가 없고, 구제와 공궤(봉사사역)를 힘쓰게 하기 위하여 세웠으므로 그 직분의 성격이 집사에 해당함.

처음에는 사도들이 복음 사역과 구제 사역을 다 하였으나 업무가 많아지므로 두 가지 사역에 결함이 생기자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 물질적 사역을 집사들에게 맡겨 원만한 사역을 하고저 집사를 세우게 되었음.

2)따라서 사도들의 주관으로 집사를 세우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교인들로부터 칭찬 받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사도들이 안수하므로 집사를 세웠으니 여기의 7명이란 자격자로 부각된 수일 것이고, 선발은 교인들의 표결에 의하였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신령한 사역과 물질적 사역을 분담케하므로 사도들의 복음 사역에 더 큰 효력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3)명칭의 뜻 :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라 함. 이 뜻은 “일군” 또는 “섬기는 자”란 뜻으로 행 6:1-6에서 7 집사를 세울 때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구제와 공궤”(행 6:1-2)하는 일이 곧 봉사하는 일이므로 행 21:8에서 “빌립”을 일곱(집사)중 한 사람이라고 번역하였고, 롬 16:1에서 “뵈뵈”를 천거할 때 이 “디아코노스”를 “일군”으로 번역하였음.

또 “섬긴다”는 동사로 διακονίο(디아코니아)가 있으니 이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준비한다”고 할 때, 또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고 봉사한다”고 할 때(행 12:25, 21:19) 사용되었고, 그 외에도 “봉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엡 4:12, 빌 2:17, 3:3, 벧전 4:10-11)

따라서 “디아코노스”는 하나님의 집에서 “일군 또는 봉사하는 자”(옛날의 청지기. 집사)로 이해하여야 함.

4)사도행전에 나타난 집사의 직임은 특수한 직임임.

① 스데반은 순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행 7:54-60)

② 빌립 집사의 사역이 사도적 사역을 하므로 사도들과 방불하기 때문이며(행 8:5-40)

③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실 때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실 만큼(빌 1:1) 그 직분을 비중있게 보셨기 때문임.

5)따라서 교회 시대의 집사직의 성질은 사도행전의 7 집사의 입장과 다른 점이 있으니 7 집사는 계시적 영감과 관련이 있었고, 교회 시대의 집사는 계시가 완성된 이후의 직분이란 점입니다.


3. 헌법적 교훈.

6장 1조 집사직 : 집사직은 목사와 장로직과 구별되는 직분이다.(목사는 예수님 사역의 대리자요, 교회의 대표자이며 신령한 직임을 전무하고, 일반적 직임도 감독 지도함. 장로는 목사와 함께 정치와 권징을 하고 교회 제반 사항 을 감독 지도함. 집사는 재정 사무와 봉사직에 일군이며 교회 정치나 감독의 입장에 서지 않음으로 구별됨.)

무흠한 남교인으로(성경에 여자를 집사로 세워 일하게 한 근거가 있으나 안수로 임직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남자만 안수로 임직함.)

그 지교회 교인들의 택함을 받고(입교인들의 2/3 투표로 선택함.)

목사에게 안수 임직을 받는(당회장 또는 당회장이 인정하는 목사의 안수를 받음.)

교회의 항존직임(매년 임명 받는 서리 집사가 아님, 70 정년까지 항존직이며 무흠하게 은퇴하였을 때는 종신토록 집사 명칭을 보존함.)

6장 2조 집사의 자격 : 선한 명예와 진실한 믿음,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 존숭을 받고 행위가 복음에 합당하여야 함. 그 생활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자 중에서 선택함. 봉사적 의무는 일반 신자의 마땅히 행할 본분인즉 집사된 자는 더욱 그러함.(딤전 3:8-13) (자격의 충실성을 점검, 연구하여야 함.)

6장 3조 집사의 직무 : 집사는 목사와 장로와 협력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 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 감독 아래서 행하며 교회에서 수금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함.(행 6:1-3) (수납, 지출하는 사무를 우선적으로 주어야 함. 목사와 장로가 감독권이 있으므로 재정 현황을 수시 파악할 수 있지만 재정 사무는 제직 회의 결의에 따라 이행하므로 집행하는 과정에서 재정 서기, 회계, 재정 부장, 제직 회장(당회장)의 결재를 요함. 재정 사무는 그 전체를 다스림에 있어서 제직회에서 시행함이 원칙임. 장로가 재정 부장되는 것은 재정을 집행하는 차원에서 제직 회장인 목사를 보필하기 위함임. 물질 사역은 신령한 사역과 정치적 사역에 비할 때 그 비중이 크지 않은 것이나 현실 교회가 물질 사업을 크게 보는 것이 문제임.)

13장 1조 선거 방법

각 지교회가 공동 의회 규칙에 의하여 선거하되 투표 2/3 이상의 찬성을 요하며 당회가 후보를 추천할 수 있음.(수와 자격에 대하여)

13장 2조 임직 승낙

집사는 당회가 심사하고 본인도 승낙한 후 당회가 임직함.(당회 없는 교회는 “당회가 임직한다”는 조문 때문에 장립 집사를 세울 수 없었으나 95년 80회 총회에서 허락하였음.)

13장 3조 임직 순서

당회장 또는 당회가 합당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당사자와 교인들에게 합당한 내용으로 서약케 하고 권면, 기도한 후 공포하면 됨.(임직식의 복잡한 순서나 비용들임이 영광돌리는 것은 아님. 간단히 10분 안에 할 수 있음.)

13장 4조 임기

집사직의 임기는 만 70세(생일 기준)까지임. 자동 제직회 회원이 됨.

단 7년에(3년이 금년에 개정됨) 1차씩 시무투표할 수 있고, 그 표결수는 과반수를 요함.(은퇴 장로, 은퇴 집사 제도가 생겼음. 정년이 되어 명예 은퇴를 하면 은퇴 집사라는 명칭을 종신까지 갖게 됨.)

13장 5조 자유 휴직과 사직

노혼 신병으로 시무할 수 없든지 이단이나 악행은 없어도 교회원 태반이 그 시무를 원치 않으면(신임 투표한 것이 아니고 여론에 의한 것.) 본인의 청원으로 자유 휴직 또는 사직을 할 수 있다.(자유 휴직은 스스로 시무를 포기함이고, 자유 사직은 집사직 자체를 포기함이니 이를 당회 또는 당회장이 수락한다. 기간을 정하고 휴직하였을 경우에 다시 복직하려면 공동의회를 거쳐야 함.)

13장 6조 권고 휴직과 사직

5조의 경우와 방불한 상태에서 당사자가 청원하지 않으므로 교회가 덕스럽지 않을 때는 당회 또는 당회장이 권고 휴직 또는 사직케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당사자가 부당하게 여기면(권고 휴직, 사직이 시벌은 아니나 시벌같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므로) 노회에 상소할 수 있음.


※ 무임 집사의 의미

무임이 되는 경우 :

1. 휴직, 정직되거나 공동의회에서 신임 투표에 미달되었거나 교회를 옮기기 위하여 이명 증서를 발부받았을 때 성취됨.

2. 무임 집사는 집사의 명칭만 가진 입교인 평신도임.

3. 교회를 옮기지 않은 상태라면 복직 절차를 밟아야 하고

4. 타 교회에 가서 복직 절차를 밟을 때 먼저 서리 집사를 임명받아 봉사하다가 투표에 의하여 취임할 수 있음. 재취임할 때는 안수는 다시 하지 않음.


4. 통상적 교훈. (집사의 직분을 유익하게 감당하는 비결)

1)신앙 확립이 필요함 : 예수님을 닮음에 진력하여야 함. 상당한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함. (기독교 신앙 백과 280제목) 헌법 지식도 있어야 함.(교회 헌법 연구, 700문답집) 겸손하며 충성에 앞장서고 이해력과 포용력이 있어야 함. 교역자 의존적 신앙에서 독립적 신앙으로, 의식, 제도적 신앙에서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대인 관계적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신앙으로, 현실과 현실적 명예와 현실적 영달을 멀리하는 신앙으로, 설교는 잠시 교훈받는 것일 뿐 성경을 연구하고 문의하여 배우는 신앙을 가질 것, 교역자나 다른 이웃은 자신이 받을 은혜를 저해하는 사람이 아님. 은혜는 성경으로 받는 것임. 또 자기 이웃에 자신이 받을 축복을 통제하는 사람도 없음. 오직 자신이 할 탓임.

2)하나님과의 관계 : ① 성경 연구에 주력함. ② 기도를 힘씀. ③ 거리끼는 일을 삼감. ④ 충성과 헌신을 노력함. 이 네 가지 실천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여야 함.

3)교역자와의 관계 : 교역자를 성경 선생님으로 모실 것.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도하는 선생님으로 모실 것. 예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사랑하고 접대할 것(마 10:40) 교역자의 부족 때문에 자신이 은혜를 적게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하다는 뜻임. 부족한 교역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모시고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야 함.

4)성도와의 관계 : 항상 화목하고 자신을 낮은 자의 위치에 두며 이웃을 사랑과 봉사의 대상으로만 여김. 자신이 이웃 성도에게 부덕, 또는 거치는 존재가 아닌지를 반성하며 생활할 것(부족하게 따라가거나 반대 의사가 강하면 버거운 존재가 되기 쉬움.)

5)기타 주의 사항

① 자신의 봉사적 공력을 나타내려 하지 말 것.

② 집사가 서리 집사에 대조할 때 장로 후보란 의미는 헌법에 없음.

③ 목사와 장로가 구별되듯 집사는 장로와 구별됨.

④ 당회의 행정에 간섭하지 말고, 당회의 지도에 순응하는 자로 인정을 받을 것.

⑤ 교회의 중직자란 취급을 받으려면 봉사적 비중이 커야 함.(재정 봉사의 짐을 져야 함.)

⑥ 오네시보로 같은 성도가 될 것.(딤후 1:16)

⑦ 모든 부조리한 일들이 발견되면 자신의 과오일 경우에는 속히 인정하고 회개의 태도를 보일 것이며 타인의 과오일 경우이면 너그럽게 대처할 것.


제 51 과 예비하는 그릇 (딤후 2:21)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비하는 그릇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청년들은 자라나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곧게 자라고 크게 자라야 쓸모있는 재목이 될 것입니다. 구부러지게 자라면 용도가 희박합니다. 곧게 자라야 쓸모가 많겠지요. 또 크게 자란 나무라도 용도에 쓰임이 되려면 베어져야 하고 벗겨져야 하며 말라야 되고 깎여야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제가 어렸을 때 강화도 바다의 개펄에 긴 참나무를 묻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용도를 몰랐는데 약 3년 후에 그 나무를 파내어 말려서 배의 노를 만드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재목이 용도에 적합하려면 몇 년을 개펄 속에서 소금물에 절여져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청년들은 젊었을 때부터 어른들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다 간섭 하려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실제의 과제(일거리)가 맡겨질 때 잘 할 수 있기 위하여 예비하며 기다리는 청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비할 것입니까?

1. 자기를 깨끗하게 보존하여 예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본문에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이란 “누구든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입니다.

2)“자기를 깨끗케 하여야 한다”는 뜻은 죄를 삼가는 순결보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유대주의 이단자였습니다. 이단자를 개종시켜서 복음사역을 하게 하실 때 과거의 오명과 잘못된 인식을 돌이켜 주기 위하여 바나바 사도가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자라난 요셉,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난 사무엘, 모태로부터 성령충만을 받은 세례요한 같은 분들은 순결보존이 잘 된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더욱 합당하였던 것입니다.

3)이렇게 하나님의 쓰심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거룩하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이 되는 것도 거룩하게 구별됨이고, 또 하나님은 선한 일만 하시는 분이므로 역시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4)자기의 순결을 지키는 것은 곧 자기 성화에 힘쓰는 것이고, 자기의 인격을 예수님의 인격으로 닮아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롬 12:2에서는 “변화를 받으라”하셨고, 골 3:9에서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하셨으며 또 엡 4:13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에 입각하여 바울사도는 고전 15:10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하시므로 바울사도가 크게 변화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그러면 자신의 순결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에 그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시 119:9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하셨고 ② 요 17:17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하셨으며 ③ 딤전 4:5에서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나니라”하셨으니 거룩해지는 방법은 성경을 실천하고 또 시험이 있을 때 기도로 은혜를 구하면서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④ 그리하여 고후 13:8의 말씀처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⑤ 순결은 세상의 영광이나 출세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 119:56에서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되는대로 살고 은혜 주시기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은 꼭 은혜를 주실만한 자에게 주시니까(출 33:19) 순결보존을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경험과 연단을 많이 쌓으면서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은 실력에 속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과정을 허술하게 나온 사람, 박사학위를 쉽게 받은 사람, 연단부족한 사람을 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 30대, 50대, 70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해방전의 생활, 6․25의 생활, 자유당 시절, 5․16시절을 다 겪은 사람과 그것을 못 겪은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관이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바람을 많이 맞은 성도는 옛날과 오늘의 신앙적 변화를 알지만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경험과 연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응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년 자란 나무는 부지깽이에 적당하고, 3년 자란 나무는 작대기감이며 10년 자란 나무는 석가래감, 50년 이상 자라야 기둥감이 되고 100년 이상 자라야 들보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일에도 오래 연단받은 신앙인이 귀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시기 위하여 그를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40년간 왕궁에서, 40년간을 광야에서 연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청년들이 연단을 받는 동안 지식과 경험을 많이 축적하여 하나님의 쓰심에 예비함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처음 예수 믿은 때는 “예수 믿는 성도가 혈기를 부려서 되나”하고 충격을 받고 믿음까지 흔들리다가 겨우 믿음생활을 지속하는데 그 다음에는 집사가 혈기를 부리고 또 장로에게서 실망을 느낄 때 또 믿음이 흔들리고 실족을 느끼다가 겨우 믿음을 지키는데 나중에는 목사도 거짓말하고 사람을 미워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볼 때 또 충격을 받고 “믿음 대상은 목사도 아닌 하나님 뿐이시로구나”하고 자기 믿음이 제자리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단을 겪으면 나중에는 목사가 폭력을 부려도 보통으로 알고 자기의 신앙을 지켜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연단과 경험은 신앙의 좋은 무기요 방책이 될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나 자녀 양육이나 사회적, 교회적 경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아시고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입니다.

3. 작은 일에 충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눅 16:10에서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라”하셨고, 눅 19:17에서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은 즉 더 많은 일(많은 고을)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1)성도는 아무리 큰 충성을 하여도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으로부터 육체와 건강과 시간과 지식과 물질 등 모든 달란트를 받은 것으로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2)그리고 또 “작은 일”이란 하나님의 필요에 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하고 종치고 문단속하는 것, 전화하고 시간 지키는 것 등이 작은 일이면서도 요긴한 것입니다. 열쇠가 작아도 그것이 아니면 문을 못 열듯이 하나님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 작은 일입니다.

3)또 작은 일은 자기의 환경에 알맞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산을 떠오거나 별을 따오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담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하는 것입니다. 고후 8:12에서 “하나님은 있는대로 받으시는 분일 뿐 없는 것을 받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외상헌금(돈나올 가망이 없는데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부담없이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것도 맡기신다”하셨으니까 주인의 쓰심을 위하여 예비하는 성도는 반드시 작은 일을 마다하지 말고 충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 지키는 일”은 작은 일에 속합니다. 옛날에 가리방 글씨로 주보를 열심히 봉사하다가 큰 목사된 분이 두 분 있고, 할 일이 없어서 예배당 지을 때 모래 자갈을 나르다가 미장 기술자가 되어 성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작은 일은 그 성도의 주밀성의 표현이 됩니다.

4.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 3:1에 보시면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 “때가 있다”는 말씀은 많이 기억하였지만 “범사에 기한이 있다”는 말씀은 이번에 더욱 느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일도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영원히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직책과 달란트도 기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일을 맡기시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야 할 때가 있었고, 돌아가신 것도 때가 되어 돌아가셨습니다.(요 7:6) 벧전 5:6에서는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왕후로 있을 때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왕후된 것이 그 때를 위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더 4:14) 성도마다 하나님이 쓰시는 때가 있으니까 그 때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준비에 몰두하여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의 미래는 창창합니다.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크게 쓰시기 위하여 부르실 때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① 자기 성결과 ② 연단받는 일과 ③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을 하면서 더 요긴하게 써 주실 때를 기다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52 과 합당한 그릇 (딤후 2:20-21)목록으로


이 시간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제목을 의미상으로 고치면 “하나님이 기쁘게 쓰실만한 헌신자가 됩시다”라는 뜻입니다.

1. 본문말씀은 바울사도가 후배사역자인 디모데에게 교회 사역을 충성되이 잘 할 것에 대하여 권면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타난 비유적 교훈이 다 하나님의 일(또는 교회의 일)을 충성되게 잘 할 것에 대하여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2. 본문에 보시면 네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① 큰 집이란 뜻이고 ② 금, 은, 나무, 질그릇 등 재료에 따른 여러 가지 그릇이고 ③ 용도에 따른 구별로서 귀히 쓰는 것과 천히 쓰는 그릇이란 말씀이 있고 ④ 깨끗한 그릇이 될 때에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다 하시므로 쓰임이 되는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1)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사는 큰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는 없는 그릇과 없는 도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세간을 두고 있는데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릇의 성격을 살펴보면 ① 우선 많이 쓰는 그릇이 있고 ② 또 어떤 그릇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는 그릇도 있으며 ③ 또 어떤 그릇은 큰 잔치 혹은 명절 때만 쓰는 그릇이 있고 ④ 어떤 그릇은 두고 보는 그릇, 대대로 보존만 하는 그릇도 있습니다. ⑤ 또 크고 적은 그릇도 있습니다. ⑥ 그런데 화장실에서 쓰는 도구를 제하고는 깨끗지 않은 그릇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릇은 다 깨끗해야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그런데 여기의 “큰 집”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각종 사역을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직종이 있으니 이 직종들이 다 그릇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어떤 직종들이 필요합니까? ①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직종이 필요한데 이 그릇이 곧 목사입니다. 목사가 예수님을 대리하여 축복하고 또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대표자 역할을 예수님을 대리하여 시행합니다.(그것이 곧 당회장입니다.) 또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례를 집행하니까 교회에 목사라는 그릇은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엡 1:1) ② 가르치는 직종이 있으니 이것이 곧 교사직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제일 방편이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그릇이 꼭 있어야 하고 ③ 기도와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그릇이 있고 ④ 다스리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당회와 같은 행정기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체생활을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다스리는 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⑤ 전도, 친교, 봉사하는 기구요 ⑥ 건물이나 돈이나 청소 등 관리하는 직임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도 이 여섯 가지 직종의 책임만 잘하면 그 교회의 그릇들은 다 확보했다고 보아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3)사람이 사는 큰 집에는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하셨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다음에는 교회의 화장실 청소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한 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라 결코 천한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하게 여기시는 것은 가장 싫어하시는 마귀와 죄일 뿐입니다. 인간에 근거를 둔 일은 존귀한 직과 천한 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근거를 둔 일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다 거룩한 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무수리(왕궁의 물긷는 처녀)를 보면 금방 그 무수리가 빈으로 상승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다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대로 귀중한 일을 하는 것일 뿐 천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들은 다 필요해서 쓰시는 것이니까 어떤 은사와 직종이든 긍지를 갖고 감사하므로 충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쓰시는 합당한 그릇이 되려면 우선 그릇에 대한 연구를 하여야 합니다.

1)그릇의 재료로 볼 때 ① 비싼 재료 ② 값싼 재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 등입니다. 이것은 그릇으로 쓰시는 사명자의 신앙의 비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행실과 연단을 갖춘 온전한 믿음(히 10:22)의 소유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거듭난 성도가 보편적으로 소유하지만 사명을 행하여 영광돌리는 믿음은 분량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재료가 비싸고 싼 그릇이 있는 것입니다.

2)용도로 볼 때 다용도 그릇과 그렇지 못한 그릇이 있는데 이것은 충성자가 다양한 은사를 받아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단순하게 한 두 가지의 재질만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 기도, 심방, 전도, 봉사, 관리, 찬양, 행정을 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관리, 봉사만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3)그릇의 중량으로 볼 때 가벼운 그릇과 무거운 그릇이 있습니다. 돌그릇, 쇠그릇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나무 그릇이나 양은 그릇은 가볍습니다. 이것은 사명자가 주인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얼마큼 신속하게 동하느냐 혹은 신속하게 순종을 안하고 게으르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4)견고성으로 볼 때 질긴 그릇 즉 안 깨지는 그릇과 쉽게 깨지는 그릇이 있습니다. 금속으로 된 그릇은 떨어뜨려도 안 깨지지만 사기나 유리 그릇은 잘 깨지는 그릇이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명자가 사소한 일로 낙망하거나 불평하여 자기의 신앙과 사명을 쉽게 저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5)소리가 잘 나고 안 나는 그릇이 있습니다. 소리나는 그릇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알아 달라는 뜻이요, 소리 안 나는 그릇은 나타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말없이 겸손하게 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6)더럽거나 깨끗한 그릇이 있습니다. 깨끗한 그릇이라야 주인이 쓰신다고 하였습니다.

7)그릇의 위치로 볼 때 가까운데 있고 먼데 있는 그릇이 있는데 항상 가까운 곳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대기하는 그릇이어야 쓰기에 합당하고,

8)무엇이 담긴 그릇과 빈 그릇이 있으니 빈 그릇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을 조건상으로 뽑아보면 아홉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①곁에 있는 그릇 ②제자리 지키는 그릇 ③깨끗한 그릇 ④비어있는 그릇 ⑤가벼운 그릇 ⑥깨지지 않는 그릇 ⑦소리나지 않는 그릇 ⑧값싼 그릇 ⑨다용도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홉 가지 그릇의 성격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에 복음전하는 그릇으로 선택하셨습니다(행9:15). 바울이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가까이 있는 그릇입니다. 눅12:35-37에 보시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항상 대기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의 혼인은 밤에 합니다. 주인이 밤중에 돌아옵니다. 부잣집 대문은 이중, 삼중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전에 나가서 계속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전화통화하기도 힘든 경우가 있고, 또 교회와 너무 먼 거리에서 사는 경우가 있어서 봉사하기 힘든 경우가 있으니, 항상 일터 가까운 곳에 대기하는 그릇이 필요한 것입니다.

2)제자리를 지키는 그릇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서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갔다가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며 내려오지 않을 때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다가 모세를 맞이하였습니다(출14:13-18, 민14:24-30). 이렇게 여호수아처럼 자기의 위치와 입장을 지키는 것이 곧 제자리에 있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자주 출타하므로 자리를 못 지키는 성도나 자기의 입장과 설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3)깨끗한 그릇입니다. 딤후2:21에서 “자기를 깨끗케 할 때, 주인이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나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가 깨끗한 사람입니다. 대통령후보 아들이 병역의무만 면제를 받아도 부정이 있지 않느냐? 하고 논란을 벌이는 것을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구는 무엇이 어떠하여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최대한 깨끗하고 순결한 성도이어야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빈 그릇입니다.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으면 쓸 수 없을 것입니다(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여야 한다”하셨고, 갈5:24에서는 “그리스도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주장, 자기취미, 자기고집을 담은 그릇은 주님의 뜻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운 그릇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고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5)가벼운 그릇입니다. 창22:3에 보시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은 아브라함이 “새벽에 일어나서 시행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마25:16에서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받자마자)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명령을 받았을 때 가볍게 움직여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21:3에 보시면 나귀 새끼를 끌고 오면서 “주인에게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즉시 보내리라”하신 말씀도 역시 신속한 순종과 봉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6)소리나지 않는 그릇입니다. 양은 세숫대야를 시멘트바닥에서 끌어보신 일이 있지요? 가슴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플라스틱이나 나무그릇은 그렇게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눅17:10에서 “종이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하여야 한다 하셨고, 고전15:10에서 바울사도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하였으며, 대상29:14에 보시면 성전 건축을 위하여 많은 헌금을 하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알아달라”하고, 무슨 일을 했으니까 “알아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소리내는 그릇은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깨지지 않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그릇을 쓰는 주인이 혹 실수하여 섭섭하게 하거나 손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불평하고 낙망하는 것이 곧 깨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좋은 그릇은 던져도 깨지지 않습니다. 마5:10-11에 보시면 “주님을 인하여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하라”하셨고, 행5:41에서는 “주님을 인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히 여겼다”하셨으며, 고전13:4,7에서는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손해로운 일이 있어도 잘 참고 건설적으로 수습할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보에 이름자가 틀렸다느니, 다른 사람과 이름 순서가 바뀌었다느니, 교회소식을 자기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느니...하는 사소한 일로 불평하고 문제를 삼는 졸렬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8)값싼 그릇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귀족이었습니다. 사6:8에서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고”하셨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왕족이 선지자가 되어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쉽게 헌신하였습니다. 교회가 적은 사레를 정하고 좋은 교역자를 초빙하려고 한다면 선뜻 올 사역자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요즈음 그 사례를 받고 갈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전화를 받은 일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값싼 그릇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싼 그릇만 있으면 작은 교회에서는 써볼 생각을 못할 것입니다. 사례나 생활비에 구애없이 일만 하는 사역자가 값싼 그릇이며, 그 그릇이 하나님 보실 때는 사실상 귀한 그릇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11:11과 17:12를 대조해 보시면 그 의미를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9)다용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은사를 받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12:4-11과 28-30에 보시면 각종 은사 소질과 각종 직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은사들은 “성령님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고전12:1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은사를 한가지씩만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누어주시되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못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기도, 심방, 교육, 전도, 청소, 운전, 행정... 얼마나 많이 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 직종을 할 수 있으면 경우에 따라서 다용도로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다 만족하실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령충만하면 잘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령에 충만하여 본이 되는 교회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53 과 신령한 직분의 성격 목록으로

(딤전 1:12-17)


“신령한 직분의 성격”이란 제목으로 몇 말씀 상고하겠습니다. 복음 사역자들 중에 신령한 직분의 성격을 잘 모르고 세속적 직분처럼 혼돈하거나 또 이 직분 명예를 현실적인 일에 이용하는 잘못된 일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목사직보다 박사를 더 선호하는 일입니다. 정 코스로 훌륭한 박사가 되었다 하여도 가급적 자제하고, 목사로서의 직무만 다 해도 부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박사된 것을 선전하고 기념식을 하며 또 예배당에서까지 박사된 축하 행사를 만드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와 예배당은 누구의 박사된 것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 목사 명칭보다 박사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사 축하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그 순서에 목사 명칭 대신 OOO박사 기도, OO박사 설교, OO박사 축도로 기록한 경우는 참으로 안됐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혹 있지만 과거 한 동안은 가짜 박사가 남발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간단히 문서로 주고 받은 후 박사를 받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목회상 인기를 얻는데 필요하여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색깔있는 후드를 입고 나가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허탄한 일들이고, 또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하는 일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직은 세속적 명예로 덕을 보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신령한 직분은 어떤 것이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복된 직분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또 직분도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았고,(고전 15:10, 갈 1:15)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보시면 “나를 능하게 하시고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 하셨고, 13절에서는 “본래 그리스도를 훼방하였는데 모르고 잘못한 것을 감안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직분까지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신령한 직분자가 될 입장이 아닌데 하나님이 주셔서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능력도 주시고 긍휼도 주셔서(딤전 1:12,16) 사도가 된 것인 만큼 은혜로 받은 직이 아닐 수 없고, 따라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진리 전파를 위하여 받은 직분입니다. 진리 전파가 아니면 복음 사역자나 신령한 직분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증거하는 사역과 가르치는 사역을 으뜸으로 여기셨고,(요 14:16, 15:26) 예수님도 그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증거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범입니다.(막 1:38, 4:1) 따라서 신령한 직임자는 진리 해설과(눅 24:26) 전체적 증언(신 31:24, 행 5:20)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증언의 목적은 예수님을 밝히 나타내는데 있으므로 진리와 생활을 아울러 시행하여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언제나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세우신 목적도 역시 증거에 있었습니다.(행 9:15) 신령한 직분의 성격이 진리와 관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직분자는 항상 진리에 잡혀 있어야 하고, 다른 직분도 진리를 위하여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의 성격을 가진 직분입니다. 고전 12:30에 보시면 여러 가지 은사직을 말씀하신 후 “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고 방언,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시고, 그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3장) 그리고 고전 14:1에서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자가 자기의 직분을 수행할 때에 설교도 사랑을 따라 하고 심방도 사랑을 따라 하며 구제도 그렇고, 심지어는 책망과 권면도 사랑을 따라 함으로써 화목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무능한 교역자를 괴롭혀 내보냈다거나 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하여 까다로운 성도를 내쫓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따라 구한 것이 아니며 교회가 사랑보다 교세를 앞세운 격이 되는 것이니 사랑 떠난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떠난 직무 수행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하신 하나님은 인간적 수단을 앞세우는 포교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마 3:9) 그래서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라”(고전 1:21)고 하셨습니다. 또 “사랑 안에서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셨고,(엡 1:4)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며 먼저 본이 되라(벧전 5:3)” 하셨고, “헌금도 자유 의사를 존중하라”(몬 1:8)고 하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권하듯 하고,(살전 2:11) 유모가 자녀를 기름 같이 하며(살전 2:6) 눈물로 권면하고,(행 20:31) 해산하는 수고를 하라(갈 4:19) 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이 다 사랑을 내세우기 위한 교훈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에 위배되는 성직을 수행하면 안 될 것입니다.

4. 신령한 직임은 사람과 현실의 영광을 구하는 직임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며 내세의 상급에 의존하는 직분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사람으로부터의 영광과 기쁨을 구하면 안 됩니다.(살전 2:6, 갈 1:10) 바울 사도는 “사람 앞에 무명하고 죽는 자 같으며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며 가난한 자 같았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요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고후 6:8)고 하셨습니다. 이런 보상은 내세의 상급 외에는 기대할 곳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목사직이 아니라도 교회의 모든 직임은 신령한 직임을 위하여 봉사하는 직임입니다. 신령한 직분의 성격은 ① 은혜로 받은 성격, ② 진리 증거를 위한 성격, ③ 사랑 실천의 성격, ④ 십자가만 지고 내세의 상급에만 의존할 직분인 것을 아시고 거기에 합당하도록 봉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54 과 목회자의 유래와 직임 (요 10:1-6)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목회자의 유래와 직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제가 목회자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성경에 나타난 목자(창 49:24, 요 10:2), 선지자(삼상 3:20), 또는 사도(마 10:2), 목사(엡 4:11), 사도의 후계자(딤전 4:11-16)를 종합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성경의 목자나 목사는 같은 원문 “포이멘”(ποιμήν)의 번역입니다.

2.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직임인가?할 때에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되도록 지도해주고 나가서는 성도의 단체를 지도하는 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목회자의 직임은 방대합니다. 전도하고 말씀 강론하며 예수님을 대리하여 축복과 성례를 집행하고 권면, 위로, 교육, 봉사하며 권징도 하고 교인 단체를 다스리는 역할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목사가 할 때 목회라 하고 목사 아닌 사람이 할 때는(다 하는 것은 아님.) 교역이라고 합니다.

3. 이런 직임이 성경 역사의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할 때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사도 후계자들로 계승된 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모세 이전에는 목회자 같은 사역자는 없었습니다. 초창기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가 아담, 가인,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에 까지 직접 교제하셨고, 어떤 특정한 신앙의 지도자를 내세우신 일이 없었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선지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자기 가족 이외의 백성들에게 신앙의 지도자 역할을 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분들을 목회자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2)그렇게 하시다가 출애굽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 단체를 결성하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것이 목회 사역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아 전달하는 선지자 역할과 그 율법을 집행하면서 선민의 단체를 광야에서 인도하고 재판하며 여러 가지 생활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노력을 하므로 신앙적, 정치적 지도를 겸하게 되었습니다.(행 7:38)

3)모세 이후 시대에는 사사와 왕과 선지자가 등장하였는데 최초의 사사는 여호수아였고, 최초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목자 역할을 할 자로 예언하셨으나(창 49:24) 다른 사사들은 다 선민에 대한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적 지도자는 선지자였으며 최초의 선지자가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신앙과 정치를 함께 한 목회자였고, 모세 후 시대에는 왕이 정치를 하고 선지자가 신앙을 지도하다가 예수님이 큰 목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민 즉 믿는 자의 구주 역할만 하셨습니다.(딤전 4:10)

4)예수님은 위대하시고 완전하신 목회자이셨습니다. 복음적 신앙자들로 자기를 따르게 하셨고, 그들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요 10:1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큰 목자라 하였고,(히 13:20-21)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5:4) 따라서 예수님은 목회자의 왕이시오, 표준 사역자이신 것입니다.

5)예수님은 자기의 목회 사역을 계승할 자로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 사도는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시기에 계시적 영감과 능력을 받고 직임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경과 모범으로 기독교의 기초와 모범을 세웠습니다.(고전 3:10-11, 엡 2:20) 사도들이 “기독교의 기초와 모범을 세웠다”는 점은 오늘의 목회자의 직임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자의 직임은 기초를 닦는 직임이 아니고, 닦아놓은 기초 위에 집만 짓는 직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사도 시대 즉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생활의 모범을 따르자는 뜻입니다.

6)그러면 사도 시대 이후에는 어떤 직임으로 계승되었는가?할 때에 장로란 직임으로 계승되었고, 그 계승 방법이 사도의 총회에서 안수로 시행되었습니다.(딤전 4:14, 딤후 1:6) 그리고 그 최초의 인물이 디모데인 것입니다.(딤전 4:11-16) 여기에서 “장로”란 직임을 오늘의 치리 장로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딤전 5:17에 보시면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지니라”하시므로 장로직에 치리장로와 말씀, 교육 장로(교사)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말씀 교육 장로가 곧 현재의 목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모세, 선지자, 예수님, 사도들, 장로들로 그 유래를 형성해 온 것입니다.

4. 제사장은 어떤 존재인가?하실 것입니다. 제사장이 많은 유대인들의 신앙적 지도자가 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신약 시대에 와서 복음적 지도자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다만 구약 시대에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모형적 인물로 수고하였을 뿐 완전한 신앙의 지도자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목회자와 성도의 역할을 살피면 ① 목회자는 양을 각각 불러낸 후 그들 앞에서 모범적으로 나가야 하며 ②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들을 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음성을 듣거나 따르지 않아야 하며 ③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목회자는 성도를 상대로 한 직임이고, 모범과 말씀으로 성도를 인도하는 직임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5 과 성직자의 자세 (딤전 6:11-14)목록으로


63회 황동노회 개회 예배를 맞이하여(84. 10. 16.) “성직자의 자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직이란 존귀한 직임으로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때때로 나타나는 무지, 연약, 실수 등으로 자책을 느낄 때도 있는 줄 압니다. 따라서 더 성경적이고 건설적인 목표를 향하여 힘써야 하겠습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을 살피면

1)바울 사도께서 디모데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음미한다면 성직자는 ①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사람, ②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사람, ③ 하나님의 일을 대리 사역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귀한 신분임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2)바울 사도께서는 성직자인 디모데에게 피할 것과 취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피할 것은 성경적이 아닌 다른 교훈이요, 분쟁과 물욕과 해로운 정욕이며 ② 취할 것은 “의로운 일과 경건한 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믿음의 선한 싸움이며 누구에게나 선한 증거로 증거하는 것이요, 또 영생을 취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이 이런 일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3)13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소개하셨는데 ①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신 분이라” 하셨고, ②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성직의 사역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직자가 성도의 심령을 소성시키며 생명력있게 양육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고, “빌라도에게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예수님”의 뜻은 성직자가 증거의 유연성을 나타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14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할 것이 없도록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가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으려면 실수를 줄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고,(빌 3:14)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며(고전 15:58) 큰 상을 받으려면(마 5:12) “점이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조심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약 3:1에서 “선생된 자의 심판이 더욱 크다”하신 말씀도 역시 성직자에게 주의를 요하는 말씀입니다. 성직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의 의를 사람에게 나타내거나(마 6:2)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처럼 건져 먹는 것이 많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교역자님들 중에는 고난을 당하는 분도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물질, 명예, 대접, 특권 등 건져 먹는 것도 많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 된 것도 아니며 되지 못한 부분도 많은데도 하나님은 과분하게 주시는 줄 압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 부흥 시기에 표상적 인물입니다. 그 분은 늘 생각하시기를 “어떻게 하여야 순교를 할 것인가” 하셨고, 또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는 부탁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역자들은 노후 대책 준비를 어떻게 할까?하는데만 정신을 쓰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좋은 고기만 건져 먹은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러 온 여인들까지 농락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교회 생활을 빙자한 향락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 그러면 결론적으로 성직자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합니까?

1)항상 회개하며 새 출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역자가 교훈은 완전하게 하지만 실천은 따라 가지 못하며 때로는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변화의 새 출발을 하지 못한다면 자기 발전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자주 회개하며 새로운 결심을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차례 새 결심, 새 출발을 하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새 출발 결심을 한 일이 있었고, 그 다음 목사 될 때도 그러하였으며 목사 된지 3년 되었을 때 도시 교회로 목회 진출되기를 갈망하다가 고전 15:8-10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겸손에 관한 말씀에 부딪혀서 또 새 출발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의 붙드심을 받아 성직을 유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항상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의 온유, 겸손, 들레지 않으심, 고난을 받되 잠잠하시고 나귀 새끼를 타신 모습과 빌라도에게도 선한 증거로 증거하시는 모습을 본받으셔야 하겠고, ② 또 세례 요한처럼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 못할 자라”하신 말씀과 “그는 흥하여야 하되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며 ③ 또 바울 사도의 겸손과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하신 베드로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을 만큼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3)질서와 규모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질서와 규모에 대한 말씀이 고전 14:33과 살전 3:6에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질서와 규모를 앞장서서 무시하는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렬이나 제사 제도 같은 것이 엄격한 것은 역시 교회의 질서와 규모를 교훈 하신 것이고, 특히 헌법이 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임직을 받을 때 헌법 지킬 것을 서약하지 않습니까? 반드시 그 서약을 변하지 말고 지키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공의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공의”는 의롭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며 사랑은 이웃에게 덕을 베푸는 것입니다. 의롭고 공평한 것이 절대로 사랑에 위배될 수 없고, 약한 자에게 덕을 베푼다는데 공의로운 자가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와 사랑이 상충되는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가 범죄하면 교회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 유익하고, 그것이 곧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가 그 반대로 이해합니다. 교회가 공의를 실현하여 벌을 주는 것이 사랑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더 큰 벌 주실 것을 가벼운 벌로 대신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의롭게 벌하고 사랑으로 위로해주는 일을 꼭 시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사 1:17, 미 7:8)

5)맡은 직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지도를 잘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많습니다. “목사, 장로도 거짓말하느냐? 관광지에 교회 차가 많다, 무허가 예배당이 많다, 교회가 이기주의다” 등등 나쁜 말이 떠도는 것은 다 교역자의 불충성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충성하고 성실하며 몰두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딤전 4:13),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라”(행 6:4), “모든 일에 본이 되라”(딤 4:12),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눅 10:27)는 말씀들입니다. 과연 저희들이 성실을 다합니까? 모임에 성실하고 시간에 성실하며 메시지에 성실하고 문서에 성실하며 금전에 성실하고 규칙에 성실하며 기도와 성경 연구에도 성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의 자세가 바르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될 줄 믿고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56 과 사모님들이 맡은 일 (고전 4:1-2)목록으로


이 시간은 사모님들과 마주 앉아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본문에서 “그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목사를 내조하시는 사모님들이 맡은 일을 잘 아셔서 충성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제 아내도 저의 목회에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런 면에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1. 우선 소극적인 면으로 생각할 때 “이래서는 안 된다”할 것이 있습니다.

1)믿음과 사명의 의미를 모르거나 인간 정욕, 세상 정욕이 죽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드문 일이지만 사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나 심판주 되심에 대하여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모된 입장에서 다른 사람이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세상 살이의 재미를 적당하게 외면하지 못하면 가난한 목회자를 내조하기 어렵고 생활이 넉넉하다 하여도 사치성이 나타나므로 교인들과의 생활의 균형을 깨는 경우가 있어서 덕이 되지 않습니다.

2)지나칠 만큼 물질 재테크의 전문가가 되어 실패를 하고 목회의 생명까지 끊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 부인이 교인을 상대로 계주 노릇을 하다가 나중에 사기를 당하고 교인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목회를 떠나 이민을 간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잠 30:8)하신 말씀이 꼭 목회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30년 목회를 꼭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모가 돈의 욕심을 내어 사업을 하다 보면 잘 될 때는 돈의 위세를 나타내게 되고 못 될 때는 목회의 생명을 끊으니까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모님이 목회자를 내조하지 않고 세상 직업에 붙잡히면 목회도 그만큼 제어를 당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사모가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시골의 어떤 전도사 부인은 군것질(간식)을 참지 못하여 쌀을 퍼주고 엿을 사먹거나 돈을 꾸어 과자를 사먹다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돈을 꾸어 쓰고 그것이 누적되어 비난을 받다가 쫓겨난 사례를 보았습니다. 그런 일이 없을 듯 하지만 병적으로 그런 것인지 그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덕있는 사모가 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4)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는 제직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주장에 앞서 간섭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교사나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는 것은 좋게 여겨야 하는데 어떤 교회의 ,어떤 장로님은 “사모님이 찬양대에 앉은 것이 보기 싫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점잖게 인사나 하고 교인이나 살피지 왜 찬양대원에 끼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찬양보다 교인과의 친교가 중요하다”는 뜻인 듯 합니다. 이럴 경우에 찬양을 고집하지 말고 불평하는 성도를 포용 지도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5)말 많은 것을 피하여야 좋습니다. 말이 많다 보면 안 해야 좋을 말도 나가기 때문입니다.

2. 사모님의 맡은 일이 무엇입니까?

1)사모님은 모범 성도에 속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직분은 받지 않았으나 권사, 전도사님의 역할에 동참할 수 있는 만큼 그 신앙 수준이 제직 수준 이상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2)사명에 대하여 목사님과 공감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성직자와 결혼할 때 사명의 공감을 갖고 성사시키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결혼할 때 성직자의 생활을 잘 모르고 하였더라도 부부인 만큼 공감하고 동조하는 생활을 하도록 사명 일치를 도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3)사모가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 심령이 어두워지고 신앙 생활이 광야를 떠도는 듯 할 것입니다. 혹 남편과 불화가 있었다면 그의 설교가 더욱 심령에 닿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임을 생각하여 사람은 감추고라도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4)목사의 기도할 사명을 도와주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목사는 피곤하여 기도 사명을 충분히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사모가 대신 기도할 수 있다면 목사는 큰 도움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사모가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일로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명을 힘쓰는 사모를 동반한 목사는 대부분 목회에도 성공하는 것을 봅니다.

5)가정사에 많은 비중으로 일하고 특히 자녀 교육에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의 목회 방법이 목사에게 많은 피곤을 주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목회가 목회자를 혹사시키는 환경에서 말씀으로만 지도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6)사모의 가정일 중에 중요한 것이 남편에 대한 내조입니다. 우선 식사를 알맞게 공급하는 일과 깨끗한 의복을 제공하는 일과 집안을 정결하게 정리하는 일을 하여야 하고, 목사의 스트레스를 잘 받아주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사모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을 수 있지만 목사만큼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믿음 약한 성도나 이기주의 성도나 폭력성 있고 교만한 사람들을 대할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도 인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모 앞에서 속상한 심정을 푸념할 수 있고, 그러자니 사모에게 스트레스가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사모가 잘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불끄는 소화기 역할을 할 수 있으나 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부부 싸움이 되어 더 큰 우환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식욕과 성욕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배고픔을 느끼면 잠이 오지 않는 것처럼 성욕도 그렇습니다. 남자의 생리는 이 성욕을 오래 참을 때 정신적, 육체적 생활이 안정되지 않고 따라서 일상 생활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아는 전도사 한 분이 결혼한 후 사모가 잠자리에 가까이 와주지 않아서 크게 고민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또 경산에서 교역을 하던 어떤 전도사 부부는 성적 욕구의 균형을 조절하지 못하여 서로 싸우다가 이혼한 사례도 있습니다. 고전 7:1-9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결혼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부부의 생리를 경험한 듯이 교훈하셨으니 과연 성령님의 뜻이 아닐 수 없지요. 성적 욕구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역할이 부부간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모는 그것을 고의적으로 피하여 남편에게 큰 괴로움을 주고 직무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7)목회에 관련된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이 유익하고,

8)목사와 교인 간에 의견 갈등으로 다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모는 반드시 극단적 목사 편이 되지 말고, 중립에 서서 목사와 교인 간에 완충 지대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설령 화해에 앞장 서는 책임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교인이 목사 내외와 대립하는 것보다는 목사 한 사람과 대립하고 사모와는 대화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 화해나 사건 수습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모든 책임들을 감안할 때 사모의 직임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완벽하게 감당하려면 쓰러지겠지만 적당히 짐을 지고 또 가족들과 협력하여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모의 사명이 크기 때문에 거기에 힘입어 목사는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상급은 꼭 같이 나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전 3:7)


제 57 과 직분자의 할 일 (롬 12:3-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직분자의 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구약 시대에는 교회(선민 단체)의 직분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사사, 서기관, 왕, 레위인들이 있었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 장로(목사), 집사, 권위자, 전도자가 있었으나 사도나 선지자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없어졌고, 목사, 장로, 집사, 전도사, 권사, 교사 등의 직분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또 교회의 헌법에 의하여 교회 봉사에 알맞도록 직종을 만든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직분자는 일반 성도보다 모범되는 자로 교회에서 어떤 책임을 맞게 한 대상을 의미하겠습니다.

2.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주신 모든 직분들은 다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사의 직분을 “자기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 하셨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받아지지 못하게 하시며(갈 1:1) 사람의 소원과 기도로 된다 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빌 2:13) 따라서 모든 직분은 사람의 노력과 방법으로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행 9:17)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 회의에서(행 6:6), 바울을 사명자로 세울 때 아나니아의 안수로(행 9:17), 디모데를 사역자로 세울 때 장로회에서(딤전 4:14) 세운 절차를 아실 것입니다. 이미 직분을 받으신 분들은 교회가 헌법 절차를 지켜서 행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잠 16:33)

3. 하나님께서 특별한 성도에게 직분을 주실 때 “은혜로 또 믿음 따라 적당하게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예언(말씀 증거직)도 믿음의 분수대로 주시고,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권유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주시되 역시 믿음의 분수대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같은 종류의 직분이라도 믿음의 분량이 다름에 따라 차등 있게 일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성실하게 일할지라도 열매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직분인 만큼 받은 자는 감사하고(딤전 1:12) 큰 애착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직분에 애착을 갖지 못하면 직분 감당을 성실하게 이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목사의 직분을 보존하기 위하여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하였습니다. 목사의 직임도 귀하고 목사 노릇 하는 일도 먹고 살아가는 일과 함께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5. 책임감을 갖고 할 일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책임감에 대한 것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저는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일 대예배를 참석하지 못하였거나 주일에 몸이 아파서 예배를 인도하지 못한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 여기에는 하나님이 붙드신 은혜도 컸지만 성수 주일과 예배에 대한 책임도 성실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직분자들도 그 직분 성격에 따라 성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하 16:9에 보시면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하셨고, 골 4:17에서는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 하셨으며 딤후 4:5에서는 “네 직무를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과 짐이 있으면 반드시 힘있게 감당하는 직분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6.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평신도)는 불신자들 앞에서 본을 보여야 하고, 직분자는 반드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딤전 4:12) 베드로 사도는 “감독자가 양 무리에게 본이 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벧전 5:3) 직분자는 평신도보다 나아야 하고, 모든 면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수 주일에 본이 되고 기도에 본이 되며 봉사와 사랑에 본이 되고, 헌금에 본이 되는 일까지 잘 하여 평신도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새한 교회 임익곤 목사님이 어떤 임직식에서 권면을 할 때 교회의 중직자는 “절기 헌금을 하기 위하여 적금을 들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절기 헌금 집계를 할 때에 서리 집사가 중직자 비판하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로는 목사의 보좌관인데 서리 집사가 그의 생활 형편을 알고 헌금 적은 것을 비판하니까 퍽 민망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신도도 얼마를 했는데 OO 직분자가 이렇게 해서 되느냐”는 식으로 말할 때 퍽 안 됐다는 것입니다. 유익한대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직분자의 봉사 수준이 평신도 보다 적으면 덕이 안 되기 때문에 직분자의 덕 세움을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58 과 목사와 장로 (딤전 5:17)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목사와 장로에 대한 공부를 하겠습니다.

1. 우선 신약 시대의 목사와 장로를 말씀한 근거는 행 14:23에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이 있고, 오늘 본문에는 치리 장로와 교훈하는 장로로 나뉘어 있는데 “교훈하는 장로들을 더 존경하라” 하셨으니 이 교훈하는 장로가 곧 목사인 것입니다. 처음 사도가 있었을 때는 사도들이 성직의 으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이 장로를 세워 사도와 장로회를 만들었는데 그 기관에서 목회자와 감독자를 배출하였습니다.(딤전 4:14, 행 20:17) 그리고 성경이 완성되자 사도 시대는 끝나고 교회 시대가 되면서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으뜸직이 된 것입니다.

2. 목사란 말은 엡 4:11에서 ποιμήν(포이멘)이란 말을 목사로 한 번 번역하였지만 요 10:11 등에서 예수님을 목자로 호칭할 때도 역시 같은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목자나 목사는 같은 뜻으로 목회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장로직을 겸하였었기 때문에(벧전 5:1, 요이 1:1) 처음에는 사도와 장로직에 별 구별이 없다가 나중에 가르치는 장로가 목회자가 되고, 다스리는 장로가 목회를 보좌하는 직이 되어서 그 두 직종을 구별하는 규칙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3. 따라서 마지막 사도의 사역이 바울 사도로 끝나면서 바울이 장로회에서 디모데를 안수하여(딤전 4:13) 사도적 직임을 제외한 모든 성직을 맡길 때 같은 장로를 존경하는 문제와 송사를 받는 문제까지 부탁하신 것을 보면(딤전 5:17-18) 디모데의 직임이 오늘의 목사나 당회장에 해당함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면 구약 성경에 나타난 장로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 세계에 있던 장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교회를 섬기거나 다스리는 목적으로 세운 직이 아니고,(그 당시는 교회가 없었음.) 다만 선민 세계(출 3:16) 또는 이방인 세계(창 50:7)에서 백성들의 어른으로 추대하여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참여시키고 각 고을에서 교훈이나 재판을 맡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수 23:2, 삿 21:16, 룻 4:2, 마 27:41, 행 4:5) 다시 말하면 성직의 의미가 아닌 사회적 의미가 있는 어른으로 오늘로 말하면 도의원이나 시의원 같은 위치가 아니었겠나? 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신약 시대의 목사와 장로는 뚜렷한 구별이 있습니다.

1)우선 목사의 직임을 살피면 예수님을 대리하여 교회의 대표자가 되고, 복음 전파자가 되며 교훈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축복하는 사역을 하게 하였고,

2)장로는 목사와 함께 일하되 교인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고, 다스리는 일에 전무하며 다른 일로는 목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3)혹 목사를 구약의 모세에 비교하고 장로를 아론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장로가 목사를 보좌하는 뜻에서 교훈한 것일 뿐(출 17:10-12) 같은 직종은 아닌 것입니다. 모세는 선지자직이고, 아론은 제사장직이기 때문에 이 두 직분이 다 신약 시대의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선지자직과 아론의 대제사장직의 성격을 모르고 목사는 모세 같은 직분이니까 아론 같은 장로는 목사를 섬겨야 한다든지 또 목사는 제사장직이니까 십일조를 먹어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경적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지자는 계시를 받는 자이고,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모형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경 계시가 끝난 시대에는 선지자나 제사장이 없는 것이고, 다만 성경을 더 연구하고 더 잘 실천하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목사의 신분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직자가 성직을 빙자하여 신적 권위를 힘입은 자처럼 자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일시적으로 힘입었다 하더라도 더 겸손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목회자이고 장로는 성도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 시무 목사와 시무 장로가 있으면 당회가 구성될 수 있고, 정식 조직 교회가 되어 민주 행정을 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장로가 교인을 대표하여 목사를 초빙하고 목사가 교인의 동의를 얻어 노회의 승인을 받으면 시무 목사가 되는데 이때에 장로가 있으므로 임시 아닌 위임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이 잘 되어야 은혜롭고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사이가 금슬 좋은 부부처럼 협력할 수 있다면 이상적 교회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7. 그러나 어떤 교회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부처럼 목사, 장로가 화합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서의 교회 생활은 양쪽이 다 불행한 것입니다.

1)흔히 장로가 목사에 대하여 “설교가 길다, 내용이 충실치 못하다, 기도를 적게 한다, 심방을 게을리 한다”하면서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장로는 목사의 견제자는 될지언정 감독자가 아님을 알아야 하고, 또 자기가 목사의 수고비를 주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여서는 더욱 안 되며 은혜받는 일 전부를 목사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방의 연약과 부족을 수용함은 물론 그 부분을 보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또 어떤 교회 장로는 신앙 사상적으로 목사와 일치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목사의 목회에 큰 차질을 빚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를 세울 때 칼빈주의 신앙 사상에 대하여 많은 교육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또 어떤 장로는 목사 위에 앉아서 목사를 시험하고 연단을 주려는 이도 있고, 너무 아는 것을 자랑하여 목사가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4)이런 경우에서 목사가 장로의 신임과 협조를 못 받으면 장로회 정치 원리 안에서 목회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여 어느 한 쪽을 불행하게 만들바에는 차라리 그런 목사, 그런 장로가 함께 일하지 않도록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랑이 실천되고 협력이 수행되어도 힘드는 것이 복음 사역인데 왜 구차한 환경을 만들겠는가?하는 것입니다.

5)제가 시무하였던 어떤 교회는 장로가 여러분 있었는데 목회상 어려운 환경을 주고 있었습니다. ① 절대로 분업을 안 하려 합니다. 직종과 책임을 분담시키고 책임을 맡지 않은 장로님들은 보고만 받고 수용하면 좋은데 모든 일을 당회원 전체가 이해하고 합의하려니까 어려운 것이고, ② 다수가결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 뜻이 맞아야만 한 발자국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여러 장로들의 단결로 목사 1인의 뜻을 꺾습니다. 결국은 목사로 일할 수 없게 만들어서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신앙 생활의 방도에 맞지 않는 세상적인 행동입니다. 똑똑한 목사의 덕을 보려는 교회는 결코 부흥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가 다 자기를 죽일 때 주님이 일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여 교회 안에서 마귀의 뜻을 따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8. 목사는 목사 나름대로 예수님을 닮고 사도들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목사의 자질과 생활에 문제가 있으면 그 교회는 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생활에 대하여 상회가 감독하여야 합니다. 장로 역시 교회를 사랑으로 이끌어 가는 봉사를 하여야 하고, 시무 교역자를 신나게 만들어 주고 감격하게 만들어 주는 역군이 될지언정 부담을 주거나 부자유를 주는 그런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경건과 언어와 봉사와 덕을 세움에 본이 되어야 하며 특히 목사와 장로 사이에 이러한 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59 과 당회와 제직회 목록으로

(딤전 5:7, 행 6:1-7)


이 시간에는 “당회와 제직회”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딤전 5:7의 말씀은 “당회가 교회를 잘 다스림”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행 6:1-7의 말씀은 처음 집사를 세울 때 집사의 필요성과 세운 방법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집사직의 필요성은 구제와 봉사를 위함이었고, 세운 방법은 신앙과 덕과 민주 방식을 적용하고 사도들의 안수로 세웠습니다. 당회와 제직회에 대하여 교회 헌법이 잘 설명하였고, 저는 “교회 헌법 연구”란 책을 써서 상당한 내용들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중요한 요점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당회에 대하여

1)당회란 담임 목사와 시무 장로로 구성하여 지 교회를 감독, 치리하는 최고의 기관입니다. 부목사라도 교인의 투표로 세우지 않은 직임은 당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2)목사는 예수님을 대리 사역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직임이며 장로들은 교인을 대표하여 목사와 함께 민주 정치를 펴나가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목사나 장로가 교인들의 투표에 의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스릴 특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에게 유고가 있을 때 다른 목사가 임시 당회장을 할 수 있지만 특정 사건이나 잠정적 기간에 한하여 노회의 감독아래서 시행할 뿐 정상적 당회원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3)또 당회는 어디까지나 행정적 또는 사범적 기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어떤 행사를 결정할 수는 있으나 신령한 기관 그 자체는 아니며 노회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사무적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혜에 접근하는 것은 목사나 장로 각 개인이 신앙적으로 할 일입니다.

4)당회의 당회장은 헌법적으로 목사에게만 줍니다. 그러나 목사가 1인 이상의 회원권 행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수 장로가 있는 당회에서 장로 과반수가 목사의 제의를 받지 않으면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의 소신대로 일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목사가 없을 때 장로가 혹 당회장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경우는 사건 처리가 급하고 목사 당회장이 적시에 없거나 맡으려 하지 않을 때 부득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5)헌법 정치 9장 5에 보시면 “당회의 직무”에 대하여 제정한 법이 있습니다. ①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감독 지도하는 것처럼 당회에서도 그 문제를 총찰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살피기도 하고 분석도 하여 적절한 지도를 하도록 의논, 결정하는 것입니다. ② 교인의 입회와 퇴회를 주관합니다. 세례 받은 성도를 입교시켜 교인이 되게 하는 일, 또는 출타하였거나 연고가 있을 때 입교인권을 제제하는 일과 타 교회로 간 성도를 이명해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③ 성례를 주관합니다. 세례 문답하고 세례 받을 자격자를 선별하며 성찬식과 세례식에 대한 일정을 정하고 당회장과 함께 집례 시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당회장은 예수님을 대리하여 집례하지만 장로들은 수종드는 일과 행정에만 역할하는 것입니다. ④ 권징을 합니다. 범죄한 성도가 있어서 엄히 벌하지 않으면 안될 사건이 있으면 당회가 재판국으로 체제를 변동하여 권징 조례에 따라 재판을 하여야 하고, 또 누가 송사 사건을 제출했을 때도 적법하게 재판하여야 합니다. 이때에 범죄한 성도를 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공의에 입각하여 시행하는 것일 뿐 절대로 감정이나 미움이 앞서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⑤ 기관을 감독합니다. 교회에는 직속 기관이 많습니다. 주일 학교, 찬양대, 전도회, 청년회, 선교회, 장학회, 심지어는 유치원까지 있을 수 있는데 이 모든 기관을 최고회인 당회에서 운영 지침을 만들어 지도 감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직회는 교회의 기관이지만 당회원 전부가 그 회원이 되기 때문에 제직회는 당회가 특별 위원을 두어 감독하지는 않습니다. ⑥ 노회 총대를 파송하여 상회의 일을 맡아 협력하게 하는 것이 있고, ⑦ 예배를 전관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목사 혼자 예배를 인도하는 것 같으나 그 책임은 당회에 있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모든 기관을 감독하면서 공예배와 기도나 예배를 다 주관하여야 하니까 그 시간과 장소와 인도자 문제를 의논 결정하고 더 나가서는 공예배를 드릴 때 기도 인도 순서나 찬양 맡기는 일, 헌금 수금하는 일, 광고까지도 심사해서 차질 없고 불평 없이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사 혼자 어떤 광고를 하였다가 그 광고에 합리성이 없어서 취소해야 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예배의 분위기 문제, 또는 강사를 초빙하는 문제까지도 당회에서 심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목사에게 맡기는 당회도 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목사보다 경험 많은 당회가 더 지혜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가 강하게 밀고 나가면 속도는 빠르나 부작용이 따르고 장로들과 의논을 잘 하면 화기애애하지만 속도가 더딘 흠이 있는 것입니다.

2. 제직회에 대하여

1)제직회는 당회장 목사와 시무 장로, 시무 집사, 시무 권사가 항존직이 되고, 부목사, 전도사, 서리 집사는 당회가 해마다 임명하여 제직회 회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2)제직회 회원에 여러 종류가 있고 서리 집사라 하여 장립 집사보다 크게 차별 대우하지 않는 실정이지만 장립 집사는 교회 재정을 맡기기 위하여 세워진 직임인 만큼(헌법 정차;6장 3조) 장립 집사에게 재정 시무를 우선적으로 맡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장립 집사가 세워지지 않았거나 맡을 능력이 없을 때는 구애받지 않습니다.

3)제직회의 직무는 헌법 정치 11장 2조 3항에 나타난바대로 교회 재정 취급과 봉사에 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은 예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당회가 주관합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을 교인의 결의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제직회의 할 일입니다. 여기에서 목적있는 특정 헌금하는 것을 당회나 제직회가 함께 결의할 수도 있지만 당회가 결정한 것을 제직들이 잘 순종하면 됩니다. 헌금과 봉사는 강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직 회원 중에 당회원 아닌 회원이 많다 하여 당회의 제의를 무시하거나 비협조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 교회는 경색된 교회요, 편안하지 않은 교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회와 제직회가 상부상조할 때 그 교회는 순풍에 돛을 달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 60 과 직책에 충성함 (고후 6:1-10)목록으로


3절에 보시면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맡은 직임에 애착을 갖고 그 직책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대단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또 예수님이 교회를 통하여 주신 직책에 대하여서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직책에 대하여 귀중히 느끼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피면 직책에 충성할 것을 교훈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직책에 충성하려면

1. 자신의 직책 수행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1절)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이 있는 것도 복인데 함께 일하는 것이야 더 큰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의 동행이며 큰 행복이요, 내세의 상급을 예비하는 일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안전상으로도 보장을 받은 일입니다. 따라서 직책에 충성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받은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1절) 구원 받은 것도 큰 은혜이고, 보호 인도 받는 것도 큰 은혜이며 따라서 직분을 받은 것도 큰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보답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성도 노릇을 잘 하고 직책 받은 성도가 그 직책에 충성을 잘 하면 받은 은혜가 크게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폭넓은 은혜를 베푸시므로 더욱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3. 3절에서 “직책이 훼방받지 않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직책에서 떠나거나 징계로 면직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곧 자기 직책에 훼방을 받은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가 직책을 받으려 할 때부터 역사하고 계속 흔듭니다. 그래서 직책에 훼방을 받지 않으려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늘 기도하시고 노력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1)우선 아무 일에나 거리끼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아주 경미한 일도 교인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단정치 못함, 교회의 것을 이용하려는 처사, 게으르고 욕심내는 일, 헌금에 인색함 등.) 그러니까 거리낌이 없고 신용 타락에서 자기를 지키려면 세심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그리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힘쓰라”고 하셨습니다.(4절) 이 말씀은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말고 “내가 맡은 일이요”하고 힘있게 나서서 감당을 하라는 것입니다. 직책에 관한 모든 일을 감당할 때

① “육체적 고통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4,5절) 예를 들면 환란, 궁핍, 고난, 매맞는 일, 갇히는 일, 요란함을 당하는 일, 수고하고 잠 자지 못하며 먹지 못하는 일 등입니다. 성도가 직책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예배당을 짓는 것은 교인의 결정으로 시작하였는데 건축비를 내는데는 아무도 힘쓰지 않고 목사 혼자서 고역을 치르도록 만드는 일이 있고, 또 부채에 얽매인 교회를 당회장이 인수 받고 그 부채 청산에 대하여 고역을 치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일단 모든 종류의 고난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② 도덕적으로 정결한 인격을 지켜야 합니다.(6절) 그것이 곧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성령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이런 면에서 도덕적 인격이 원만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덕을 잃고 직책의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③ 영적 은혜도 있어야 합니다.(7절) “진리의 말씀 곧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직책은 신앙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행정이나 노동으로 감당하기 전에 그 모든 일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은혜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믿음 떠난 봉사는 원하시지 않습니다.(히 11:6) 따라서 말씀에 근거하고 성령님의 감동 아래서 의로운 행동(의의 병기)으로 힘있게 감당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④ 영광과 욕됨에 관계 없이 직책 수행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8-10절) 8절에 보시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일도 있으나 욕되는 일도 많고, 또 욕되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것이 영광스러운 일인즉 그런 영욕에 구애 없이 자기의 직책을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악한 자란 이름이 남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아름다운 명예를 얻을 수도 있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며 죽는 자 같으나 그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일이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속으로) 기뻐하는 자이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즉 영욕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이 사셨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부요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베드로, 요한도 “은과 금은 없으나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모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행 3:6) 따라서 사명으로 직분을 수행할 때 약하게 보일 수도 있고, 패배자 같기도 하며 미련한 취급을 받고 심지어는 죽게 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란 것은 믿음 있는 자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욕에 관계 없이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흠없이 일할 때 그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4. 교회의 직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 점(갈 1:1, 딤전 1:12), 신령한 직임으로서 존귀하다는 점(고전 12:4-11), 또 하늘의 상급이 약속된 직임이란 점에서 귀한 것입니다.(계 2:10, 3:11)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마귀가 이 일에 반기를 들고 훼방할 것을 알아야 하며 그 훼방에서 직책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향과 가족과 직업과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에서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의 곁에 남은 것은 그의 동료자들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향이나 직업이나 가족이나 재물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많은 무임 장로, 무임 집사가 직업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본 교회를 떠나고 직책의 해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성도가 직분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에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증언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종에 대하여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마 6:33, 빌 4:17-19)



 


제 3 부 전도에 대한 설교


제 61 과 구원의 복음 (요 3:16)목록으로


(구원의 확신없이 죽음의 때를 기다리는 환자에게 깨우쳐야 할 메시지)

지금 귀하께서는 오랫동안 병중에 계셨고 앞으로 어떤 기적이 나타나서 병고침을 받지 않는 한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나셔야 하는 입장에 계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역자를 청해서 희망의 메시지 듣기를 원하셨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목사가 무슨 말을 한다”는데 대하여 들으신 바도 있으실 것이나 이 형편에서 꼭 듣고 믿으셔야 할 구원의 복음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만물과 인생의 주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만물과 인생이 어디서 나왔겠으며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자연의 힘과 생명의 신비를 생각해 보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고 또 자신의 질병과 자신의 생명을 인간이 임의로 주관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배하는 다른 힘, 즉 하나님이 계신 것을 더욱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만물과 인생의 주이시고, 모든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도끼가 스스로 나무를 찍는 것이 아니고 도끼 자루를 잡은 자의 힘에 의하여 쓰여지는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생명이 보존되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오고 가는 것을 마음대로 조정하였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국에서 쓰는 전자제품은 수명을 길게 만들고 외국에 수출하는 제품은 그보다 짧게 만든다고 합니다. 전자제품의 수명을 만드는 자가 임의로 조정하는 것처럼 사람의 수명도 하나님이 작정하여 때가 되면 끝내신다고 성경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귀하께서 꼭 믿으셔야 할 것은 생명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혼과 육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대로 “육체는 흙에서 취하셨다”하셨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창조의 원리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세상에서 살다가 육체는 유한한 요소로 지으셨기 때문에 때가 되면 병들고 쇠하며, 영혼은 쇠한 육체를 떠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누구나 다 죽게 되는데 죽은 후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없어지지만 영혼은 계속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꿈을 꾸어 보셨지요. 육체는 잠들었어도 영혼이 따로 활동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의 육신이 죽음을 당해도 영혼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인생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불행한 상태에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1)인생이 하나님께 죄짓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타락(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 졌습니다. 어떤 상태로 불행해졌느냐 하면 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이것을 영적 사망이라고 함) ② 하나님의 진노로 현실적 고난과 육체적 죽음이 임하였고(이것을 육적 사망이라고 함) ③ 육을 떠난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이것을 법적 사망이라고 함)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타락하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도 이 세 가지 진노에서 스스로 헤어 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다면 현재도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죽은 다음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범죄한 자가 형무소 생활을 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생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① 이 구원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인데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적은 수의 백성들만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②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죄가 없고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요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택한 백성들) 형벌을 받게 하시고, 그 사실을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③ 그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이시고, 그 분이 33세에 죄가 없으나 죄인의 형편이 되어 십자가에 돌아 가신 것이 바로 인간의 죄를 대신 형벌 받으신 사건인 것입니다. ④ 그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부활의 몸으로 40일을 계시다가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⑤ 이 사실을 전도 받았을 때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과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의 죄를 담당하신 속죄사역이란 점과 ㉢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사실과 ㉣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⑥ 그리고 이런 믿음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영적 죽음에서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이고(요 3:3, 엡 2:1) 거듭나고 믿음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를 삼으시며(요 1:12) 이 세상 끝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하셔서 육체의 사망을 회복시키시고(살전 5:14-18) 또 정죄와 형벌의 심판을 하시지 않으므로(요 5:24) 법적 사망에도 이르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⑦ 귀하께서는 이 세상 떠날 날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귀하의 영혼이 가셔야 할 곳은 천당과 지옥 중의 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형선고 받은 자라도 대통령이 사면하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겠다”하시면 영생과 행복이 있고, “지옥에 갈지언정 못 믿겠다”하신다면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꼭 믿으셔야 하겠지요? 믿으십시오. 파리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갈 수 있겠습니까? 파리의 힘으로는 100리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가는 사람의 어깨에 의지하면 비행기를 같이 타고 미국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사함과 영생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고 인간은 어차피 스스로 구원받을 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무조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꼭 확인하십시오.

5. 이제 귀하께서는 천국가실 때를 기다리시면서 “인생이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야 하는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목적이 먹는데 있다면 돼지 신세와 다름이 없고, 또 평안하게 사는데 있다면 서양 사람들이 키우는 개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효도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생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인생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 대가로 지옥에 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히 11:6에 보시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돈이나 지식이나 명예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과 거룩(거룩은 죄를 안 짓는 것임)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갖는 것”과 “거룩을 보존하는 것”은 병상에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성한 사람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믿음 갖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병상에 가만히 계신 분은 성경 말씀을 묵상하시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모할 수 있습니다. 평안한 자의 믿음보다 고난 중의 믿음이 오히려 더 귀한 것입니다. 또 건강한 사람들은 활동하면서 죄짓기 쉽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가만히 계신 분은 자기를 비우고 세상살이를 거의 포기하셨기 때문에 더 순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사는 목적을 하나님 앞에서 더 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출세를 영화로 느끼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고 꼭 “믿음”과 순결을 영광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귀하의 영혼을 데려 가실 때는 반드시 예수님과 천사들이 찾아 오셔서 모셔 갈 것입니다. 그때는 꿈꾸듯이 인도를 받으실 것입니다. 요 14:1-3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처소를 예비한 후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희망스러운 초청입니까? 그때에 귀하께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1),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롬 14:8), 겉사람은 날로 부패하나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우리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고후 4:16,18)”하는 고백을 하시면서 영원한 세계 곧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7. 그런 세계를 동경해 보셨습니까? 천국이라는 세계 말입니다. 이 세상에도 여러 종류의 세계가 있지요. 땅을 디디고 사는 세계, 공중에 날며 사는 세계, 숨을 안 쉬고 물에서 사는 세계, 더러운 것을 조금도 못 먹는 사람의 세계, 아무 것이나 다 먹어도 괜찮은 짐승의 세계가 있지요. 하늘의 세계, 우주의 세계도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육체의 세계와 영의 세계도 있고 영광의 세계와 저주의 세계(지옥)도 있는 것입니다. 나비가 알을 낳고 그 알이 생명체가 된 후 또 그 생명체가 번데기로 변하고 그 번데기가 또 다른 생명체로 변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세계가 왜 없겠으며 또 영혼의 세계가 왜 없겠습니까?(고전 15:35-44) 인생은 나그네처럼 잠시 다녀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본향을 찾아가실 때가 된 것입니다. 파리가 미국 가는 손님의 어깨에 의지하는 것처럼 꼭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시고 또 천국과 지옥을 믿으시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영접하실 때를 기다리시는 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갖고 귀하께서 구원을 받으시면 귀하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있고 남아 있는 자손들에게도 큰 위안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될 것입니다.


제 62 과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목록으로


모든 성도는 다 전도의 사명을 갖고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독교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또 증거 할 수 있는 담력과 전도의 사명까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기독교는 이런 종교라”고 발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몇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는 어떤 종교이며 유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불교, 유교는 토착 종교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면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지만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요. 그러나 절대적인 종교 하나만 알면 상대적 종교나 사이비한 종교들은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진리도 다 모르면서 어떻게 비진리까지 알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에게도 이단 비판 서적이 많지만 먼저 진리 연구를 끝낸 다음에 보려고 미루어 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은 기독교인이니까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고 알기 쉽게 말해 줄 수 없느냐? 할 때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전도자를 영접도 안 하는 판에 기독교 진리를 듣겠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당연히 알려 주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만일 “나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으나 기독교에 대하여 잘 소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성도의 위신도 떨어지고 또 전도의 기회를 떨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소개의 핵심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기독교는 절대자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을 터인즉 우주 만물과 인생과 모든 생물체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하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창조자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절대 유일신으로 창조와 섭리(통치)와 구원과 심판을 하시는 분으로 영으로 존재하시고 영계의 천국과 현실을 다 통치하시는 분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2.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종교입니다.

1)인간의 타락이란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타락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고 타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가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죄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은 다 타락하였기 때문에 이 죄에 해당하지 않는 자가 없고

2)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가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선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 심판은 때가 있으니 마치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선별 처리하는 것처럼 이 세상 끝날에 심판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모든 악인들에 대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인류가 다 심판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근거하여 전체적 심판에서 제외될 대상을 선택하시고 그들에 대한 구원의 방도를 베풀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1)악인에 대한 심판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면 의인에 대한 심판은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 되고 악인이 의인되어 영원한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2)하나님은 이 구원의 방도를 베푸셔서 악인을 의인되게 하여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3)어떻게 악인을 의인되게 하시는가?에 대하여는 대속의 방법과 믿음의 방법을 쓰셨습니다. ① 대속의 방법이란 죄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받을 벌을 대신 받게 하신 것이요 ② 믿음의 방법이란 하나님의 대속의 방법을 구원받을 자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 대속자에 대하여는 죄없는 영원한 인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되게 하여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신 것인데 그 사건이 바로 2000년 전에 유대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 나셔서 33년간을 죄없이 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④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예언을 하셨고 때가 되매 하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보좌에 영원히 계시며 큰 영광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⑤ 그리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에게는 이상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그 사실을 믿도록 감동하셔서 믿게 하시며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자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의를 힘입는 것이고 이같은 의를 힘입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과 천국의 시민되는 특권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영생얻는 구원을 가장 큰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4.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로 믿는 종교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진 기독교 원리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감”이라고 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성경 66권을 인간들(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거와 발생과 모든 행사가 성경에 근거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생활의 모범은 예수님과 선지자와 사도들을 본받아 생활하는 것이 삶의 목적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 살려고 애를 씁니다. 또 은혜를 받고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답게 사는 표준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1)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2)봉사적으로 사셨습니다.

3)봉사가 지나쳐서 희생하셨습니다.

4)재물을 치부하지 않으셨습니다.

5)죄는 아시지도 못할 만큼 결백하셨고,

6)무저항주의로 사셨으며

7)온유한 성품으로 사셨고,

8)유품이나 유골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9)다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 때문에 핍박자 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고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나 향락의 경쟁대열에 서시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기독교를 말할 때는 ①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고 ② 그 하나님이 창조자, 섭리자, 구원자, 심판자이심을 나타내며 ③ 인간이 타락하여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을 말하고 ④ 선악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며 ⑤ 사랑과 독생자의 대속으로 구원하시는 것과 ⑥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것과 ⑦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과 지옥 ⑧ 그리고 성경이 진리임과 ⑨ 예수님처럼 사는 생활이 표준이 됨을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63 과 전도의 역사 (요 1:35-4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의 은사와 기회가 저희들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의 역사”를 살피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사례와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고 여기에서 저희들은 전도의 방법도 배우고 또 성령님께서 전도가 잘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은혜를 간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전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믿음 세계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고 구원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먼저 믿는 성도들의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2. 전도는 은사적 기술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나 잘 되지 않습니다.(롬 10:15) 확신과 사명과 은사가 주어질 때 능률있게 잘 할 수 있고, 혹 은사적인 능숙한 전도를 잘 못해도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나타내는 생활만 잘 한다면 그것으로도 전도의 큰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적 전도만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빛된 생활과 사랑의 실천도 전도가 될 수 있습니다.

3. 또 전도는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이요 성령님께서 전도가 잘 되도록 인도하시고 지도해 주시는 바가 있음을 성경에서 발견하셔야 할 것입니다.(행 16:7-10, 27:24)

4. 전도의 역사는 세례요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선민구원에 목적을 두셨고, 예수님 시대까지도 유대인 중심으로 전도를 하셨습니다.(마 10:5, 15:26) 그러나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곧 전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소개한 세례요한이 전도의 선구자가 되었고, 그 다음에 예수님 자신이 전도하셨으며 그 다음에 열 두 제자들과 다른 70제자들이 전도하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과 집사들과 모든 평신도들이 다 전도인이 되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5. 저희들은 교회의 부흥과 교인의 증가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부흥이나 전도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옷부터 입고 밖에 나가야 하는 순서와도 같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 일을 먼저 힘쓰면서 전도자 역할도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6.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방법을 전략으로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모범적인 것은 성경에 나타난 사례를 참고하고 모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1)먼저 세례요한의 전도를 살펴보면 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계시적 영감을 통하여 알았습니다.(요 1:32) ②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 분이라”(요 1:29)고 소개를 한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도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니까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따르게 한 것입니다. 여기의 두 제자는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었습니다.(요 13:25, 21:20) 세례요한의 전도 방법은 실제로 예수님을 보여 준 것입니다.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 5:35)는 의미가 그 뜻인 줄 압니다. 그래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 계신데(거처) 까지 가서 자세히 확인하고 믿었습니다.(37-38절) 이때에 예수님은 “나를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41절) 또 그 이튿날 예수님은 빌립에게 전도하셨고(43절)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전도를 하였는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면서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빌립은 “와 보아라 와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확인해 보고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도방법은 “예수님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전도를 받은 자들은 다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확인하고 믿은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전도하고저 할진대 먼저 우리의 인격과 생활로 예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니 예수님도 믿고 구원 영생도 받자”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의 전도 역사입니다. ① 예수님은 막 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셨고, 막 1:38에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순서는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어려운 사람들에서부터 유족한 세계로 전도하셨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전도도 낙심자를 먼저 찾고 어려운 대상에게 먼저 전도하도록 순서를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전도가 갈릴리 해변 쪽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 4:15-16) ② 또 예수님은 전도자 파송을 하셨습니다. 먼저 열 두 제자를 잃은 양을 상대로 파송하셨고(마 10:5, 눅 9:1,6), 다음에 70인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일이 있었습니다.(눅 10:1,17) 그때에 예수님은 그 전도자들에게 권능을 주어 보내셨는데 그들은 돌아와서 보고를 할 때 귀신이 항복한 사실에 대해서만 보고하고 얼마의 수가 믿음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하여는 보고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서 믿겠다고 따라 나온 수가 수 만명에 이르렀지만 나중에는 적은 무리로 축소된 사실이 눅 12:1,32에 나타나 있습니다. 반드시 전도의 열매는 선택받은 대상이어야 하며 구경꾼들처럼 서성대는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예수님은 그 외에도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으로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신 일이 있었고(요 2:10),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여 열매를 얻으신 사실(요 4:7-30), 또 “나사로 부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신 사실”(요 11:45, 12:1),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후 전도하여 믿게 하신 사실(요 9:38), 수전절 때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신 사례 등이 있었습니다.(요 10:22-42)

3)저희들이 참고를 잘 하여야 할 전도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오순절 성령충만을 생각할 수 있지요. 오순절적인 역사가 있으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역사는 그 동기가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오순절 역사를 예언하셨고(욜 2:28-32), 예수님도 예언하셨으며(요 14:26, 15:26, 16:7) 행 1:5에서는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대로 오순절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 모여서 합심기도”를 했습니다.(행 1:13, 2:1) 따라서 “다 모여 합심기도를 힘쓰는 것”은 은혜를 받는 방법이고 또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이런 방법으로 기도시키고 전도 실천케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오순절 역사는 단회적 사실이라도 성령충만을 위한 노력은 계속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② 행 2:41에 보시면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000이나 더하더라”하였으니 어떻게 이런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전파한 때문이었고(2:4,14:36) ③ 또 행 2:47에서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전도방법은 “모임과 합심과 교제와 유무상통”이었습니다. “유무상통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은 대단할 것입니다. ④ 또 행 4:4에 보시면 “믿는 자의 수가 남자의 수만 헤아려 약 5000이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는 사도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막 가두고 때리는 판국이었지만 고난과 생사를 초월하여 전도하는 바람에 큰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⑤ 행 5:14에서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하셨습니다. 이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착취한 죄 때문에 징계를 받아 죽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냈을 때, 부정을 힘있게 척결했을 때 부흥이 된 것이요 ⑥ 행 6:1에 보시면 “그때에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하셨는데 그 앞에 보시면 사도들이 능욕을 받고 나와서(5:41-42)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꾸준한 교육과 전도가 제자의 수를 늘린 것이었고 ⑦ 8:12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었음”은 빌립의 전도에 이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며 ⑧ 행 8:38에서는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 왔던 내시가 성경을 읽다가 빌립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내시의 성경에 대한 열심과 성령님의 인도로 믿음을 갖게 된 것이요 ⑨ 행 9:31에 보시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인은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있는데 있었으니 안정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⑩ 행 9:42에 보시면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렸을 때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하셨고, 10:48에서는 고넬료의 가정 부흥이 있었으며 ⑪ 행 11:21,24의 안디옥에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온 것”은 최초로 강력한 전도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며(11:19-21) ⑫ 행 13:48에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주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유력한 전도자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를 열심히 했을 때였습니다.(13:14) 유력한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고니온 전도 때는 바울과 바나바(두 사도)의 전도로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고 돌아왔으며”(행 14:1) 16:5에서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하신 것은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주어 지키게 한 때문”(4절)이었고 ⑬ 16:34에서 “간수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먼저 루디아의 가족을 입교시킨 후(16:14)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했을 때 그 간수가 감동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그 간수를 살리기 위하여 도망가지 않고 그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16:27-28) ⑭ 17:2에서 “그 중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뢰아 성도들이 성경을 상고하면서 신사적인 생활을 하였을 때 얻어진 열매였습니다. 성경 연구와 신사적 생활로 전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⑮ 17:34에서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우상의 도시인 아덴에서 전도하였을 때(17:16-24) 하나님이 생명의 주이심과 부활과 심판을 증거하고 우상을 타파하는 말을 하였을 때 몇 사람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⑯ 19:20에서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흥의 방법은 곧 주의 말씀이 흥왕한 것이었습니다.(살후 3:1) 성경 충만이 있을 때 부흥이 된 것입니다. ⑰ 28:24에서 “그 말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잠깐 풀려 나온 사이에 말씀을 강론한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23절)













제 64 과 사람을 낚는 어부 (마 4:18-25)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란 제목아래 본문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본문을 보시든지 먼저 하나님(예수님)을 발견하는 일과 사람의 사역을 발견하는데 초점을 두시고 또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교훈을 찾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1. 이 말씀에서 계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임을 보여 주셨습니까?

1)갈릴리 해변으로 다니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18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23절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① 갈릴리 해변은 갈릴리 호수 서쪽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 바다 서쪽이 갈릴리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② 예수님이 왜 그 곳을 다니셨을까요? 산책하시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전도의 대상인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다니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예수님은 전도의 대상을 천민과 서민으로 먼저 상대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부자와 권세자들은 마지막에 전도를 하셨습니다. ④ 또 갈릴리는 예수님이 자라신 고향이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도하신 것입니다.

2)사람을 살피는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시몬)와 안드레 형제를 가까이 하시며 살피셨고, 그들의 그물 던지는 모습과 어부인 것을 확인하셨고, 또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가까이 하셨으며 그들이 부자간에 모여서 그물 깁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갈릴리 해변 동리에 있는 회당에서 많은 병자들도 만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상대하는 목적으로 다니신 것입니다.

3)전도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교훈과 병 고치는 능력에서 그의 신분이 나타나고 입증이 되기 때문에 구태여 예수님의 신분 밝히는 것을 전문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마 12:19)

4)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진리에 대한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교육의 큰 권위자라고 하셨습니다.(막 1:27, 눅 4:32)

5)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하셨고, 24절에서도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접근한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생명의 주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6)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전도자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19절에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전도의 사명자가 되게 하시고 또 전도하는 은사를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전도는 모든 성도에게 주신 사명이지만(마 28:18,19, 5:14) 은사와 권능을 받아야 잘 할 수 있습니다.(행 1:8, 고전 12:8) 은사에 따른 전도는 말씀의 권능과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없이 하는 전도는 성도의 덕 세우는 일과 빛된 생활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 즉 전도자를 삼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은사를 받을 때 전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모습 여섯 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전도자를 왜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셨을까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하는 일을 물고기 낚는 것으로 비교하여 설명하신 것이니까 낚시질하는 사람들에게 배워서 고기잡는 방법과 전도의 공통성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년 총회장 신세원 목사님이 전국 전도회 연합회에서 “사람 낚는 어부란 제목”으로 설교하신 것을 보았는데

1)낚시질하는 사람들은 우선 “어디가 고기가 많으냐”를 알아서 물고기가 많은 바다나 강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전도도 사람 많은 곳으로 먼저 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2)도구가 없으면 고기를 못 잡기 때문에 반드시 고기 잡는 도구, 배, 그물, 낚시 등을 준비하여 장비 이용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데 무슨 장비가 필요할까요? 교회라는 배경도 중요합니다. 전도자 자신의 인격도 중요합니다. 전도의 내용, 말씀도 있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전도자로서의 인격을 잘 닦아야 할 것입니다.

3)기회를 잘 선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오거나 천둥, 번개 치는 날은 잘 안 잡힌다고 합니다. 좋은 날씨와 한가한 여가를 이용하여 주의 깊게 시도해야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기가 평화롭게 놀 때 낚시질이 잘 되듯이 전도의 대상인 사람도 바쁠 때, 화날 때는 기분이 상쾌할 때만큼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망할 때, 연약을 느낄 때, 한가할 때, 심심할 때, 연고가 있을 때는 더 잘 되니까 그런 기회를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4)낚시질은 떠들면서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조용한 것이 좋습니다. 요즈음 떠드는 전도가 많지만 큰 능률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소리없이 감동을 끼치는 전도가 더 좋을 줄로 아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큰 덩어리를 부풀리는 것처럼 소리없이 조용하게 전도하는 선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고기 잡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를 감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생물이든지 붙잡으려는 대상이 있는 것을 알면 도망할 것입니다. 전도자가 자기의 그림자를 감춘다는 뜻은 자기의 업적이나 인간의 유력성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을 차려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모든 이에게 겸손하고 모든 이와 함께 동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6)고기 잡는 사람은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낚시질도 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주 자리를 옮기면 안 되는 것처럼 전도도 인내하면서 꾸준히 오래도록 기다리며 해야 합니다. 한 시대가 바뀌면 역사가 달라지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 변화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6․25 이전에 저의 고향에는 믿는 사람이 한 동리에 한 집씩 밖에 없었고 이웃들이 참으로 완고하였습니다. 30년 후쯤 고향에 갔을 때 완고한 집들이 다 예수 믿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구 서문교회도 퍽 오래된 교회인데 3,4대를 한 교회 섬기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런 중에서 교회가 성장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인내하면서 오래도록 꾸준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전도하시고 자기를 나타내신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1)우선 전도를 받은 네 사람은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또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고 결국 사도가 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린 것은 자기 사업을 버린 것이고, 부친을 버린 것은 가족과 인정을 초월한 것입니다. 전도자의 자세는 이만큼 과격한데가 있어야 환영을 받는 모양입니다.

2)24절에서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까지 퍼졌다”고 하였습니다. 소문은 잘 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반드시 소문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3)25절에서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았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초창기요 또 능력을 동반한 전도사역이었으므로 큰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형편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4)옛날과 오늘은 복음은 같으나 환경이 다릅니다. 전도자의 길이 옛날같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힘 닿는대로 노력하여 좋은 전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전도사명은 우리에게 있고 믿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제 65 과 전도자 빌립 (행 8:26-40)목록으로


(위 본문의 자세한 내용은 본인이 집필한 강해서를 참고하십시오.)

1. 빌립의 신분

1)빌립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음.(행 6:3)

2)빌립은 구제의 직분을 받았으므로 집사에 해당함.(행 6:1-6)

3)빌립은 전도도 하고 표적도 나타내었음.(행 8:5-6)

4)빌립은 전도자적 역할로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음.(행 8:7)

2. 빌립이 전도자의 사명을 어떻게 이행하였습니까?

1)주의 사자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하여 사마리아를 떠나 가사로 가는 길(광야)로 감.(행 8:26) 또 병거로 가까이 감.(행 8:29)

2)빌립은 사욕의 타산을 버린 자임. 예를 들면 사마리아 도성의 인기있는 대중적 사역에서 미련없이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광야로 간 것임.

3)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을 위하여 개인전도를 함. 전도자는 한 사람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하고 그 한 사람의 사역을 기대하여야 함.

4)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충실하였음. 내시가 깨닫지 못하며 읽는 말씀을 깨닫도록 지도함.

5)확신을 가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인침.

6)자기의 사명을 마친 다음에 흔연히 그 곳을 떠남.

초대교회 당시의 전도자의 순수한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빌립이 전도한 내시가 애굽전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66 과 바울의 전도 (행 17:22-31)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전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전도의 모범서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충만한 사역자들과 전도자들이 전도한 내용이므로 후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사도행전의 전도 모범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특히 스데반과 베드로와 바울사도의 전도사역과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먼저 전도의 의미를 말씀드리면

1)전도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전도의 결과로 성도를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3)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되 성령님의 역사와(요 3:3) 말씀의 사역으로(벧전 1:23) 거듭나게 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된 자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4)그리고 택한 백성은 제한된 수이고, 또 적은 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도의 열매가 적다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고

5)중요한 것은 전도 잘하는 은사와(엡 4:11) 능력(행 1:8)을 받고 시행하여야 좋으며

6)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 역할에 따라 상급을 받습니다.

2. 바울사도가 전도하신 특징을 살피면

1)바울사도는 시간있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셨습니다.(22절) 그것은 바울사도가 “아레오바고”에서 전도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덴 서남쪽에 있는 유원지입니다. 그 곳에는 주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바쁜 사람들을 붙들고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길가에 뿌려지는 씨가 되서는 안되고 분명히 마음에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2)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성을 이용하여 대화를 시작한 점입니다.(23절) 종교성이란 자기보다 능력있는 대상을 신으로 섬기고 의지하려는 심리입니다. 헬라인들은 우상을 많이 섬기면서 그 우상마다 이름이 있었고, 어떤 우상은 “알지 못하는 신”이란 표시를 한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도 대상에게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하는 대화로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을 설명하고 “연약한 자가 전능하신 분을 의지함이 마땅하다”는 논리로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상대방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하였을 때) 그 종교에 대한 불합리한 점을 듣기 좋게 지적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변명하는 말을 듣고 거기에 대응하는 말을 하다가 기독교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아는 신을 섬겨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그는 “아는 신이 어떤 신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어떤 이방종교를 신봉한다고 할 때는 먼저 그들이 섬기는 종교의 원리를 듣고 그 종교의 불합리한 점을 듣기 좋게 말한 후 “기독교의 원리”를 아시느냐?고 물어서 “모른다”고 하면 간단히 알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또 “안다”고 하면 그의 아는 기독교 지식이 바른지 그른지도 확인하는 차원에서 대화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4)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자기의 아는 하나님(신)을 열심히 증거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만유의 주이시다. ② 하나님은 절재자이시라 인간의 섬김을 받아야 할 어린 아이같은 분이 아니시다.(이방 종교인들은 우상 앞에서 어린아이 섬기듯 합니다.) ③ 하나님은 만물을 인간에게 주셨고 인간의 생명과 호흡과 수명과 거주의 경계까지 주관하시는 분이다. ④ 하나님은 인간들과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인간이 그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 ⑤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동하고 있은 즉 하나님을 목석같은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면 안 된다. ⑥ 하나님은 심판주가 되시고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으며 정하신 사람(예수님)으로 심판주가 되게 하셨고 ⑦ 그 심판주 예수님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함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 전도의 내용은 길면 안되고 짧을수록 좋습니다. 전도내용의 핵심이 어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3. 제가 생각하는 전도내용의 핵심은 열 가지입니다.

1)“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2)“인간이 창조자를 경외하는 것은 효도와 같은 본분이다”

3)“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그의 뜻을 어기는 것은 큰 죄이다”

4)“하나님은 심판주시요 용서받지 못하면 영벌을 받는다”

5)“유대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6)“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7)“예수님은 부활승천하여 영원히 계시다”

8)“성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다”

9)“이상 여덟 가지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10)억지로는 믿지 마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시면 믿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전달, 주입시키는 방법을 모색하여 모든 개개인에게 이 내용 열 가지가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 곧 전도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 67 과 전도자의 요건과 증언 목록으로

(벧전 3:13-17)


1. 전도자가 먼저 갖출 것이 무엇입니까?

1)자기 신앙생활의 확신과 보람을 복음적 차원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확신에 근거하여 믿음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그 체험의 실제를 전도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2)전도자의 구비사항을 본문에 근거하여 살피면 ① 13절에서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 ②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 ③ 15절에서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시는 것” ④ 소망에 관한 진리를 소유하는 것 ⑤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나타내는 것 ⑥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하셨고,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 있다”(마 3:9) 하셨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당시에 최봉석 목사님은 “예수믿고 천당”이라고만 외쳤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가 기도를 통하여 성취받을 수 있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2. 불신자들이 예수 믿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섭리의 차원에서 연구할 것이 아니라 전도의 차원에서 연구하셔야 합니다.

1)예수 믿지 않는 이유를 섭리의 차원에서 살핀다면 비택자요,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여야 하지만 그들이 선택받은 자가 되어 믿음을 가질 때는 깨닫는 단계가 있습니다.

2)따라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①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② 만유의 창조자와 섭리자를 모르며 ③ 영혼의 세계를 모르고 ④ 죄로 인한 불행을 모르며 ⑤ 낡은 사상의 개혁이 중요한 것을 모르며 ⑥ 더 나가서는 기존 신앙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전도자는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 백과” 32번(108P)을 참고 하십시오.

2)인간의 무능함과 피조물 됨을 일깨우고 창조자 하나님이 만유를 섭리하심을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운전수가 없이 차가 바로 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있으므로 우주가 기동하고 있음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3)영혼 불멸의 세계가 있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미국인 61%가 영혼과 천국을 믿는다고 합니다. 꿈의 세계, 정신 이상자를 통한 마귀의 세계가 그런 것들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세계도 놀랄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숨을 안 쉬면 잠시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고기의 세계는 숨을 안 쉬고도 물 속에서 산다는 사실입니다. 또 사람은 깨끗한 것을 먹지 않으면 세균감염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지상에는 썩은 것, 더러운 것을 먹어도 넉넉히 사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생명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어찌 신령한 세계가 없겠습니까?(고전 15:38-41)

4)죄에 대한 심판과 상선벌악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어도 괜찮고 남을 억울하게 하여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타작의 비유, 재판의 사례가 바로 영원한 심판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5)우리 민족이 원시적 생활에 멎어 있다면 만족하겠습니까? 개혁하므로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생활 문화만 개혁할 것이 아니라 사상과 제도도 개혁을 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시대적 종교에만 사로 잡힐 것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에 근거한 제사법이나 종교에 근거한 생활문화도 다 개혁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종교도 더 나은 종교를 지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보다 더 나은 생명의 종교는 없는 것입니다.

6)기존 신앙세계의 부정적 요소가 있음을 시인하고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교회단체가 종합병원이나 가라지를 보유한 농장과 같음을 인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전도에 적합한 내용들을 항상 연구하여 설득력있게 증언할 수 있는 전도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8 과 전도자가 예비할 것 (벧전 3:15)목록으로


본문에서 전도자가 예비할 것 세 가지를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주”로 모십니까?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의 진리로 알고 믿음의 근거와 생활의 계율을 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곧 왕의 명령입니다. 요 13:13에서 “예수님을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성경을 예수님의 명령으로 든든히 간직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에게 흠 잡힐 일이 없도록 순결함을 보존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 자로서 성도의 존귀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칭찬받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3.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1)성도는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먼저 제자들에게 주셨고(마 28:20, 행 1:8), 그 다음에 일반성도들에게는 은사로 주셨습니다.(롬 12:6-8, 고전 12:4-11) 이 은사란 전도를 잘 하는 지혜와 소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2)많은 성도들이 전도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은사는 지식과 사명감의 충동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① 지식이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소망의 소식인 복음(구원의 도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복음적 지식이 부족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게 되므로 풍부한 지식을 가짐이 필요합니다. ② 사명감의 충동은 전도하는 일을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보다 다른 것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4. 또 전도자는 들으려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알릴 사명이 있습니다. 겔 2:5을 보시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은 줄은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증언했으면 전도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일깨워주는 파숫군의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겔 3:17) 무엇을 일깨워야 할까요? 여기에 대하여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 백과” 9번(38P)과 19번(62P)을 참고 하십시오.

5. 그런데 어떤 사람은 관심있게 이야기를 듣고 질문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에 지혜롭게 대답을 하셔야 하는데 대략 열 두 가지로 이유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①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의식주 문제보다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하다고 하셔야 할 것이요(막 8:36) ② 이 세상은 잠깐 사는 나그네 생활이요(고후 4:18) ③ 요즈음 굶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④ 부자가 되었다 하여도 크게 유익한 것이 없으니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 어렵다” 하셨고, 예수님과 성인들도 가난하게 사시지 않았느냐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19:23-24)

2)“분주하고 틀에 매인 생활이라 주일을 못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① 이 때에 6일을 일하고 7일에 쉬는 것이 이상적 생활임을 알리셔야 하고 ② 예수님도 수고한 후에 쉬라 하셨으며 그 쉬는 날 복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사람은 자기의 죽을 날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세상 일에만 몰두하여 살면 죽음에 대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사람 사는 목적이 아니라”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사는 목적은 창조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3)“나는 글도 모르고 무식하여 못 믿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① 이 때에 예수님은 비천한 자들을 먼저 구원해 주셨고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문벌 좋거나 유식한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하셔야 합니다.(고전 1:26-27, 막 1:16-17) ②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은 지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으며 ③ 하나님도 가장 쉽고 미련한 전도의 방식으로 구원의 대상을 부르신다(고전 1:21)고 하셔야 합니다. ④ 교회에 나가면 점차로 배워진다고 하여 지식이 없어도 문제 없음을 설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4)“부모와 어른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① 여기에 대하여 인생은 내 인생을 사는 것이지 부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며 ② 우리나라 헌법에도 개인적 종교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③ 영생을 하느냐, 영멸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부모의 만류로 포기한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하셔야 할 것이요 ④ 핍박을 받는 믿음이 더 귀함을 말해야 합니다.

5)재미가 없어서 못 믿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① 예수 믿는 것은 재미로 믿는 것이 아님을 알리고 ② 사명으로 믿는 것이며 ③ 구원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이고 ④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므로 신앙생활의 진미를 맛보게 될 것을 말해야 합니다.

6)의복, 헌금, 물질 궁핍 때문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①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삼상 16:7) ② 예수님은 약대털옷을 입은 요한을 귀히 여기셨다. ③ 그리고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의 형편을 도와주는 곳일 뿐 부담을 주는 곳은 아니라고 하셔야 할 것이요

7)“아이들 떠드는 것 때문에 못 나간다”는 것입니다. ① 이 경우에는 예수님이 어린 아이 오는 것을 환영하셨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자녀의 축복과 교육을 위하여 교회에 더 나가야 한다. ② 교회는 아이들의 기도를 위하여 특별한 투자를 하며 교육을 시킨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8)너무 늙어서 죽을 때가 다 됐는데....① 이 때는 더욱 천국 가시기 위하여 믿으셔야 합니다. ② 천국은 공로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가기 때문에 ③ 교회에 가셔서 어린 아이처럼 하시면 된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9)우리 집 아이들이 잘 다니니까 나도 그 덕을 볼 것이라는 사람입니다. ① 그러나 아이들이 먹었다고 어른의 배가 부르지 않은 것처럼 인생은 다 각자의 인생이요 구원받는 믿음도 각자의 믿음으로 받는 것이요 ② 부모가 믿지 않으면 장차 내세에서 갈라질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해야 합니다. 또 ③ 온 가족이 합심하므로 더 큰 복을 받는다는 사실도 말해야 할 것입니다.

10)나는 술, 담배도 안하고 도적질한 일도 없으니 죄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죄가 많아서 못 나간다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인간은 의인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11)“나는 절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종교는 다 같다”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인간이 어찌 인간을 구원하겠느냐?하시고 창조자요, 생명의 주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독교에만 영생구원이 있음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12)가장 마음 아픈 것은 “믿는다는 사람들의 하는 꼴을 보면 더 못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예수님을 닮으러 나가는 것이지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며 교회는 종합병원과 같은 곳으로 의인만 모이는 곳이 아님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특별한 축복을 전하는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1)복음은 감취었던 비밀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요(골 1:26)

1)큰 자랑거리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랑할 일입니다.(고전 2:2)

3)이 복음은 최대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롬 8:32, 갈 1:6)

그런고로 아주 귀한 것을 전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말하셔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못하는 것처럼(마 7:6) 귀한 복음을 권위없이 남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있음을 전파한 후에(겔 2:5)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진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자신의 거룩을 보존하며 전도의 지식을 풍부하게 가진 후 사명감에 불타야 하며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69 과 안디옥 교회 (행 11:19-30, 13:1-3)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안디옥 교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행 8:1, 11:22) 다음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이 아니고,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200리 떨어진 곳입니다.

2)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순교 등으로 핍박을 받은 성도들이 사마리아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고(행 8:5-8) 그 다음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가서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므로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11:20-21)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설립된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 사도를 교역자로 파송하였는데(행 14:14) 그 때에 교인이 많아지므로 그 당시에 개종하고 변화받은 사울(바울)을 초빙하여 함께 1년간 교육에 힘쓴즉 큰 무리가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본문 26절에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얻었다”는 뜻은 성도답고 참신한 세례교인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1년 교육으로써 성도되기에 충분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학습기간, 세례기간을 합하면 1년이 되는데 1년간 어떻게 교육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 1년이 지나도 옳게 변화받지 못하는 이유는 ①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든지 ② 아니면 배우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10년 쯤 된 교인이라면 교육과정이 부족하였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배운 성도에게도 자질상의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신앙적 결함을 유발할 만한 문제를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전에 자라지 못하는 돼지를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돼지의 밥통에서 이쑤시개같은 불순물이 여러개 나왔습니다. 그 돼지는 그것 때문에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 중에도 교육은 받으나 자신의 영적 질병 즉 교만, 외식, 무지, 나태, 명예, 권세, 인간 정욕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 등 불순요소들을 보유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신앙도 비정상적이요, 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른 교육으로 좋은 성도, 좋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2. 안디옥 교회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교와 구제였습니다.

1)초대교회의 외국 선교 시발지가 안디옥 교회이고, 바울의 1차, 2차, 3차 선교의 시발지도 역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13:1-3, 15:35-40, 18:22-23) 선교사의 파송과 기도와 비용을 교회가 담당한 것이요

2)글라우디오 황제 때에(AD 41-54) 유다 전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상당한 부조금을 거두어 보낸 사실이 있었습니다.(11:27-30) 이렇게 교회의 사명은 선교(전도)와 구제인데 선교는 영적 사명이고 구제는 육신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사명을 만족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3)영적 사명, 육신적 사명 이외에 사회적 사명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마 5:13-14) 그런데 교회는 빛된 성도만 모인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변화된 성도 개인이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3. 안디옥 교회가 이같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할 때

1)신앙중심의 성도들이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초가 된 성도들은 은혜받고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는 성도들입니다.(23절)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핍박이 있었을 때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신앙을 위주로 모임을 갖고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인의 신앙과 발전의 근거가 청교도에 근거한 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청교도;영국의 구교신앙을 가진 메리여왕이 개혁교회 성도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땅 “프리머스”에 상륙하여 먼저 예배당을 짓고 목사의 집과 자신들의 집을 짓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한 단체 임.)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되는데는 기초 신앙인들과 출발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2)좋은 교역자를 만났습니다. 좋은 교역자는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였습니다. 지식과 영적 수준이 최고에 달한 사람들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최고로 꼽지만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한 사람이요(갈 2:11) 바나바는 유명한 바울을 천거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권면과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요 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4:36, 11:23) 그 다음에 바울사도는 전설에 의할 때 잘 생기지 못한 것과 말 표현이 졸한 것과(고후 11:6) 육체의 약함을 가진 것(갈 4:13, 고후 12:7) 외에는 전부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지식문제와 영적 관계에 대하여는 퍽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교역자를 초빙하려고 할 때 바울사도처럼 키는 작고 얼굴은 검고 등은 굽고 다리는 앵기다리이며 또 눈도 나쁘고(갈 6:11) 병색이 있고(고후 12:7) 그런데다가 설교를 하는데 말까지 졸하여(고후 6:11) 유창하지 않다면 그런 사역자를 좋다고 초빙할 교회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 바울사도를 옳게 이해하고 그의 지도를 받는 것이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훌륭한 교역자를 모셨습니다.

3)융화를 잘한 교회입니다. 융화란 것은 성도간에 화합과 친교를 잘하는 것인데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초신자와 기신자 사이에,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잘 믿는 자와 못 믿는 자 사이에, 또 복음 사역자와 성도 사이에 융화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뜻에 안 맞거나 자기 목표에 미달하면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교회되는데는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융화와 사랑과 친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헬라인도 있었습니다.(11:21) 바나바는 선배요, 바울은 늦게 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몬은 흑인이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아프리카 사람이요,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귀족입니다. 만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융화를 못했다면 교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융화의 방법은 신뢰와 겸손과 봉사성이 있어야만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사가 많았습니다.(13:1) 행 11:25에 보시면 바나바와 사울(바울)이 1년 간 성경을 가르쳤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것은 1년간 잘 가르쳤고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1년 배워서 성숙한 교인되는 사례가 드뭅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성도는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변화를 이룩한 성도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계실 때에도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행 19:20)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기초가 없이는 믿음도 사역도 능력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5)상회의 지도를 잘 받은 교회입니다. 어떤 사역자나 어떤 교회는 상회의 지도를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거역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성경적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니까 그 당시 사도들을 주축으로한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사역자로 파송했습니다. 그 때 파송받은 바나바를 순종하여 모신 것이 바로 상회의 지도를 순종한 것입니다. 또 행 15장에 보시면 윤리 문제에 대하여 의견차이가 생겼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회에 보고하여 지도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곧 상회에 순종한 것이고 상회를 받드는 것입니다. 목사가 세례를 주어야 교인이 생기는 만큼 목사는 교인의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또 목사가 안수를 해야 직분자가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직분자의 어머니 격입니다.(세례 준 총 인원 761명-한남교회에서 299명) 또 목사는 노회가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회는 목사의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생각해 볼 때 총회와 노회와 지교회는 마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같은 관계를 가졌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 잘 섬기는 효자가 복이 있듯이 교회도 상회를 잘 받들고 상회의 지도에 순종할 때 믿음이 더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행 16:4에 보시면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교와 구제의 사명을 잘한 안디옥 교회는 ① 신앙중심의 성도들이 기초가 되었고 ② 좋은 사역자의 지도를 받았으며 ③ 융화를 잘 이룩하였고 ④ 성경을 열심히 배웠으며 ⑤ 상회의 지도를 잘 받음으로써 좋은 교회가 되고 좋은 사명을 다 하였다는 것을 깨달으셔서 현재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어지기를 힘쓰시며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제 70 과 성령이 임하시면 (행 1:8)목록으로


행 1:8은 전도를 강조하는 핵심 요절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전도 설교를 수없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우선 이 말씀이 “전도하라는 명령이냐? 아니면 제자들이 전도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냐?”할 때 이 말씀은 명령이 아닌 예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 증인이 되어라”하시지 않고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의 전도에 대한 섭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할 것을 명령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마 28:20에서도 명령하셨고, “권능을 주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시고”(마 10:1-6),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마 10:16)하신 것이나 “두 사람씩 짝지워 보내신 일”(눅 10:1), 또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막 1:38, 행 5:42)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명령이 아닌 예언이란 사실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령이 임하시면”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1)이 말씀은 오순절 때 보내주신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아버지께로 가신 후 성령(보혜사)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16:7, 행 1:5) 따라서 “그 성령님이 오시면 전도를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2)여기에서 두 가지 내용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거듭날 때부터 주신 성령님과 오순절 때에 보내주신 성령님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점이요, 또 하나는 왜 전도를 오순절 이후부터 하도록 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① 성령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과 성도에게 내주하는 사역을 계속 하셨습니다.(요 3:3, 엡 3:16-17) 그런데 오순절 때에 임하신 성령님은 기독교가 절대구원의 종교인 것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강하게 역사하신 점과(히 2:4, 6:4-5)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이 세상에 상주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28:20) ② 이 성령님이 오신 다음부터 전도 사역을 나타내신 것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근거를 이룩하셨고, 또 타락한 유대인 대신 이방인을 구원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롬 11:11-12,25)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 섬기는 법을 세습받았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방인들은 전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때”를 정하셨는데(고후 6:2) 그 때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 성취된 오순절 이후였던 것입니다.

3)“성령님이 임하신다”는 뜻에는 권능있게 역사하실 뜻을 약속하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어떤 권능을 나타내려 하신 것인지를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권능을 받게 된다고 하셨지요. 이 권능은 평상시의 역사보다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① 모든 사람들이 다 충만하여지는 권능이었고 ② 바람소리와 불이 갈라지는 물리적 현상이 나타났으며 ③ 다른 방언을 하여 언어가 소통되었고 ④ 전도의 말문이 터졌으며(행 2:14) 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2:43) ⑥ 믿음의 역사와(2:41) ⑦ 기도의 역사와(2:42) ⑧ 이적의 역사(2:43) ⑨ 사랑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행 2:44-45) 이 때에 나타난 사랑의 역사는 친교와 유무상통이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오순절 당시의 성도들이 받은 권능이었습니다.

3.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받아야 할 권능은 어떤 것들입니까? 방금 전에 오순절 때 받은 권능을 아홉 가지로 소개하였는데

1)보편적 견지에서 이런 역사가 오늘날 다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우선 ① 다 충만한 것 ② 바람 소리와 불같은 물리적 현상 ③ 이적으로 되는 의사소통 ④ 각종 이적의 역사 등입니다. 이런 역사는 교회 시대에는 희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기초 사역(성경 완성 및 입증)이 끝났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으므로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2)그렇다면 오늘의 성도들이 받아야 할 권능은 무엇입니까? ① 진리 지식의 권능입니다.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했지만(행 4:20) 지금은 성경 말씀의 지식을 전하기 때문에 성경 아는 권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② 사명력을 받아야 합니다. 사명력은 곧 전도하고 싶은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억지로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③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건 능력이란 하나님을 믿음과 인격의 성숙함과 기도와 실천과 감화력 등을 의미합니다. ④ 그리고 사랑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유무상통은 못하더라도 상당한 이해와 친교와 봉사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능력을 힘입고 전도하여야만 그 전도가 힘이 있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전도는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1)예수님 또는 예수님을 증언한 성경, 특히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2)구원의 도리는 간단하게 요약을 하여도 “사도신경”의 내용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또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하는 식으로 기독교의 핵심을 전하면 더욱 좋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 불빛과 교회가 있는 것만 전달하고 실제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전도는 효력이 없습니다.

3)반드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구원 성취를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이 있은 사실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4)전하고 난 다음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심고 물 주는 일은 사람이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전 3:6)고 하셨습니다.

5)마지막으로 전도 대상의 순서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향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이웃에는 전도의 대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① 증거할 내용의 지식과 ② 증거할 수 있는 사명력과 ③ 경건의 능력(인격, 기도실천, 감화력)과 ④ 사랑의 능력을 힘입고 우리의 이웃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도하는 사명의 역군들이 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71 과 전도의 효력 (막 1:38-3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전도의 효력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우선 전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1)전도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딛 1:3)

2)좁은 의미로는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행 16:31) 요 3:16이나 행 16:31이나 사도신경을 나타내는 것이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전도입니다.

3)그래서 행 5:42에서는 가르치는 내용과 전도를 구별하셨습니다.

2. 성도가 전도를 왜 하여야 합니까?

1)하나님이 전도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뜻하셨기 때문이고(롬 10:14,17)

2)예수님이 본을 보이셨으며(막 1:38,39, 마 11:1)

3)사도들도 본을 보였고(행 5:42, 8:12)

4)또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19, 행 1:8, 딛 1:3)

3. 전도하는 방법을 어떻게 시행할 것입니까?

1)골 4:3에서 “전도할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사람을 찾아가든지 (가서 전도하라 하심:막 1:38) 고넬료처럼 사람을 데려 와서 하든지(행 10:24) 불신 대상을 만나서 전하는 것입니다.

3)“지혜의 말로 하지 말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21, 2:4)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불신자들이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십자가의 도입니다.(고전 1:18) 즉 십자가의 도리만 나타내는 것입니다.(고전 2:2)

4. 그런데 현실교회의 전도 방법은 방대하고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1)우선 구제 위문을 합니다. 그것은 전도가 아닌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는 전도를 들어주는 보답을 하기 때문에 전도의 실제적 유익을 줍니다.

2)전도자의 권위나 기적을 내세우는 신비성이나 현실성 있는 사업이나 지도자적 영웅주의 등을 앞세워 무조건 이끌려 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것은 전도의 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전도의 효력이 무엇입니까? 전도의 효력은 믿을 내용을 알리는 것입니다. 전도를 사람 낚는 어부로 비유하신 말씀(마 4:19)에서 낚시의 이밥을 제공하는 것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 이밥을 본 물고기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마 10:29) 전도를 듣고 믿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자의 힘으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 전도자가 전도의 열매를 못 얻었을 때 전도의 방법에 문제가 있나? 또는 전도자가 자격이 부족하여 그런가?하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 3:6에서도 씨뿌린 자나 물 준 자가 있어도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 사역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7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도를 통하여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몇 가지 유의하실 점을 말씀드리면

1)택한 백성은 한정되어 있고, 그 수가 적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는 점이고

2)사람의 방법이나 사람의 생각대로 믿음의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맡기고 전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리빙스톤은 1842-1873년까지 31년간 아프리카의 미개한 지역에 가서 선교한 영국 사람입니다. 29세 총각으로 선교지에 가서 3년 후인 32세 때에 의사의 딸과 결혼을 했는데 그 두 사람의 기능이 목사, 의사, 간호사, 교사, 농부, 목수 등 6가지 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교지로 택한 “초누아네”란 곳의 사람들은 어찌나 미개한지 흙벽돌을 둥글게는 만들어도 네모나게는 만들지 못하고 가물 때 비오게 하려면 추장이 기우제를 하는데 박쥐 껍데기, 늑대간, 사자의 콩팥을 나무뿌리와 함께 불태워 연기를 올리면 그 연기로 인하여 비구름이 몰려온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장의 명령이면 절대 복종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도 추장이 앞장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빙스톤은 아프리카 선교 3년만에 초누아네의 추장 세첼레가 예수를 믿게 했는데 그가 훌륭한 크리스챤이 된 것은 리빙스톤 일생선교의 단 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는 믿은지 3년 되도록 첩들을 정리하지 못하여 세례를 미루다가 첩을 다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받은 결단은 좋았지만 되돌아가게 된 첩들의 집안에서 기독교를 더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또 추장이 예수를 믿자 가뭄이 극심하니까 추장이 예수 믿어서 신이 노하여 비를 안 준다고 하는데 추장이 기우제마저도 안 하니까 반감이 더욱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물있는 곳으로 이주할 줄도 몰랐는데 리빙스톤이 그 가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곳에서 150리쯤 떨어진 콜로벵그 강변으로 이주 시켜서 거기서 농사법을 가르치니까 추장과 백성들이 크게 만족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① 리빙스톤이 문화의 혜택을 보이면서 사랑을 베풀어도 안 믿고 ② 리빙스톤의 의료기술과 농사기술을 보여주어도 여전히 예수를 안 믿고 ③ 나가서는 추장이 “때려서 믿게 하자”고 했을 때 “부하를 때려서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서서히 이해시켜야 한다”하니까 추장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장이 “나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는데도 추장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는 좀처럼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추장도 이상하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이 실제적 사실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발생하는 것은 사랑이나 문화 혜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또 직권자의 명령으로 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스스로 우러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님들은 사랑실천으로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복음은 교역자가 전할 수 있습니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만 다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72 과 혼인잔치와 부흥 (마 22:1-1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혼인잔치와 부흥”이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교회 부흥의 시각으로 관찰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 말씀은 세 가지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혼인잔치를 배설함이요, ② 손님들을 초청해오는 일이며 ③ 예복을 입고 주인을 접견하게 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려면 교회가 혼인 잔칫집 같아야 하고, 손님 초청을 잘 해야 하며 예복 입은 성도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1.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혼인 잔칫집 같아야 하겠습니다. 혼인 잔칫집에는

1)신랑 신부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예수님이 좋아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니까 참으로 훌륭한 신랑이십니다. 그런데 신부는 예수님이 보실 때 신앙적으로 아름다운 성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이 교회 안에 모든 성도님들이 다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인정해 주실 만한 좋은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좋으면 여기 저기서 선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신부가 좋지 않으면 보러 오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 잔칫집에는 좋은 신부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신부가 바로 예수님을 많이 닮은 믿음 좋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어 오찬을 준비하였다”하셨으니 음식을 정성껏 준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잔칫집에 와서 음식을 대접받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복 받는 내용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음식 대접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복을 입고 임금을 알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임금은 하나님을 비유하니까 음식을 먹는 것은 세속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고, 임금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맺는 신령한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증언을 통해서 복 받는 방법을 증언합니다. 신령한 복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까 믿음의 복음을 증언하여야 하고, 현실의 복은 계명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니까 계명을 잘 지키도록 지도하여야 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써 내려온다”(약 1:17)하셨으니까 교회에서는 진리를 소개하고 복 받는 방법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잔칫집에는 즐거움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잔칫집은 초상집이 아닙니다. 또 잔칫집은 물건 거래처도 아닙니다. 잔칫집은 출세의 도장도 아닙니다. 다만 오래간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 기뻐하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고 주인을 만나보고 돌아가는 장소인만큼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반갑고 즐거워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간의 사랑의 친교입니다. 잔칫집에 가면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그들이 다 연고가 있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되지요. 이와같이 교회는 친교가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초청하는 일을 잘 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곧 전도입니다.

1)본문에서 잔치 주인인 왕은 종들을 보내어 먼저 초청한 대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으니 오라”고 하였지만 ① 돌아보지 않은 자, ② 밭으로, 상업차로 나간 자, ③ 심지어는 초청하는 종들을 능욕하고 죽인 자까지 있어서 왕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리를 불살랐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선적 초청을 유대인들이 거절하고, 예수님을 핍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복을 유대인에게 먼저 알려주셨지만 그들이 거절한 것입니다.(롬 11:11, 10:18-19) 무관심하여 돌아보지 않는 자, 자기의 바쁜 일로 외면하는 자, 핍박하여 죽이고, 반항하는 자로 나누어지면서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동리를 불살랐다”하셨으니 이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죄로 인하여 주후 70년에 로마 군인들에게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을 미리 예고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무슨 이유였든간에 장차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그래서 임금은 두 번째로 사람을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하여짐으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향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거리 동서남북 어디서든지 또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대로 데려오라”하여 가득할 만큼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전도의 방법인데 이때에 청함받아 온 사람들은 바로 저희들같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눅 14:21에 보시면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역시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청하였는데 초청함 받은 자들이 밭을 산다, 소를 시험한다, 장가를 간다”하고 안 오니까 시내거리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여 데려왔는데 또 자리가 비니까 “길과 산울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① 초청에 응한 사람은 땅이나 소가 없고, 장가도 못 갈 형편의 불행한 사람들이 잘 올 수 있다는 것이요, ② 초청하는 전도자는 사거리 골목 등으로 다니면서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여 야 할 것입니다.(바쁜 사람, 세상에 취한 사람은 전도지도 안 읽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있는 사람, 실직자는 전도지를 읽을 시간이 있습니다.) ③ 그래도 자리가 비니까 주인은 “강권하여 채우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전도의 열심을 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은 구원하실 대상을 빠짐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잔칫자리”란 것이 어떤 예배당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천국 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예복을 입고 임금을 만나야만 주인이 베푼 잔치의 의미와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택함받은 성도를 많이 모으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복을 입고 왕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두 종류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예복을 못 입은 자와 예복을 입고 주인을 만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예복을 못 입은 자는 현실 복에만 목적이 있고, 하나님과 구원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진리와는 멀고 현실 복을 받는데만 뜻을 두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복을 입고 주인을 만나는 택한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온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도가 많을 때에 그 교회는 부흥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73 과 심방의 필요성 (히 3:12)목록으로


1. 심방은 교역자가 성도를 찾아다니면서 살피고 축복하며 지도하는 일입니다. 교역자 중심으로 목회를 한다면 성도가 문제를 가지고 교역자 실에 찾아와서 상담하고 지도받으며 축복 기도를 받는다면 교역자에게 많은 협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가 있다든지 어떤 행사가 있을 때는 교역자의 심방이 부득이 하며 이런 일들과 관련하여 전도를 겸하는 일과 성도의 생활 사정 등을 살피는 일로 심방의 당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마 4:23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촌을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백성들의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하셨고, 행 2:46에서는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하셨으며 히 10:24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모이기를 힘쓰라”하셨고, 히 3:12에서는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오는 강퍅함을 면하라”하신 말씀들이 심방의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선지자의 순회가 있었습니다.(왕상 4:8)

3. 기성교인들은 교역자나 성도의 심방을 복으로 알고 영접을 하지만 심방의 의미를 모르는 성도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원치 않는 심방을 하여 받는 가정에 시간적 피해를 주고 번거롭게 할 때는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형편을 잘 파악하여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심방의 종류를 살핀다면 성도를 살피는 정기 심방, 또는 구역원의 심방, 전도 심방, 연고 심방, 기타 행사를 위한 심방을 하게 됩니다.

4. 심방의 성질은 교역자가 예수님을 모시고 방문하는 것으로 믿게 할 것과 진리의 말씀과 축복 기도를 가지고 가므로 은혜를 전달하는 발걸음인 것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축복 받는 기회로 믿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심방할 때에 유의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꼭 필요할 때 할 것과 초청 또는 허락에 의할 것과 방문에 부담주지 않을 것, 시간과 동행자 조정, 머무는 시간을 적당히 하고, 권면, 축복, 격려 외에 불필요한 말이나 실수되는 잡담을 금할 것과 접대받는 일로 부담주지 말 것과 두루 전도의 기회를 살펴 권면함이 필요합니다 심방을 받는 가정은 예배 시간에 방해되는 것들(전화벨, 방문자와 대화, 아이들 단속 등)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방에 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지만 교역자나 받는 가정이 다함께 더 필요한 일을 위하여 시간 절약에도 유의하여야 합니다.






제 74 과 한국 선교 100주년의 의미 목록으로

(마 7:13-14)


위 본문에서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했습니다.

1. 1884년 9월 20일이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알렌 의사가 미국 공사관 의사로 한국에 와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동년 12월 4일부터 고종 황제로부터 선교자유의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선교의 비공식 접촉은 그보다 훨씬 앞선 1832년에 화란의 선교사 구출라프의 방문과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또 1867년부터 1873년 사이에 만주 국경을 통해 전래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활동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공인을 받고 시작된 선교는 1884년 12월 부터였습니다.

3. 1885년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가 동시에 입국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1934년에 개신교 희년 대회를 행한 역사가 1884년을 선교의 시발로 규정함이 되었다고 합니다.

4.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전래 역사는 1884년 이전을 전래 시대라 하고 1984년부터 1909년(한일 합병직전)까지를 포교시대라 하며 한일 합병되던 1910년부터 희년대회를 가진 1934년까지를 부흥시대, 또 일제 탄압이 시작된 1934년부터 광복까지를 기독교 수난시대,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사로 나눕니다.

5. 따라서 1884년 이전인 천주교 전래 시대에도 심한 박해가 있었으므로 토마스 목사 순교시까지 어려운 상황에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고종 21년(1884년)부터 순종 즉위(1907년)까지 23년간 포교 시기를 가졌다가 순종 즉위 3년만에 한일 합병을 당하여 일본의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6. 1935년에 강한 신사참배 강요에 부딪혀 10년간 침체되었다가 1945년에 해방과 더불어 신앙의 자유를 누렸으나 5년만인 1950년에 또 6.25 동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공상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인사에 대한 핍박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6.25 동란이 오히려 남쪽에 기독교 부흥을 일으킨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7.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수난 중에 성장하였고, 수난이 오히려 신앙을 일으킨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선교사들은 말하기를 일본의 선교 역사가 한국보다 길지만 일본의 기독교가 한국만큼 부흥하지 못한 것은 일본인들이 성경을 지식과 비판의 대상으로 받았기 때문이요, 한국인들은 약소 민족의 입장에서 성경을 겸손과 믿음과 회개로 받았기 때문에 더 큰 부흥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8. 그러나 급속한 성장에 버금가는 문제가 없지 않음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1)기독교 100년 역사로 한국만큼 부흥된 나라는 세계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다의 대중 집회, 최고의 대교회, 새벽기도를 비롯한 열심은 세계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2)그러나 많은 이단의 발생과 무속적 신앙, 기복적 신앙, 신학사조의 무분별한 난립, 교파의 발생 등으로 문제도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권주의 팽창, 신학 교육을 빙자한 교육 사업, 성직자들의 세속화 현상 등을 살필 때 양은 있으나 질이 문제됨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또 기독교 일치 운동이란 명분으로 무분별한 통합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학이 일치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통합 운동은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위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릇에 담겨질 좋은 고기가 얼마나 될 것인가?(마 13:47)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는 얼마나 될 것인가?(마 7:13) 성경은 신앙의 일치를 말씀하시지만(엡 4:3-6)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치를 도모하려는 것은 오히려 성경에 위반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고후 6:14-17)

9. 결론적으로 선교 100주년의 의미를 요약하면

1)수난 중에 전래되었고,

2)수난과 순교의 대가로 발전했으며

3)네비게이토식 선교방법이 발전에 유익하였음과

4)시련 속에서 갑자기 부흥된 상황이 질적 신앙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5)선교 2세기를 향한 한국의 기독교는 바른 신학의 정착과 보급을 힘써 기독교 정화에 앞장서야 하며

6)자랑과 과대 선전을 피하고 겸손하게 반성해야 할 것과 선교의 빚을 갚기 위하여 바른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7)과연 성도 자신과 현실 교회가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어떤 교수의 강의 요약임).


제 75 과 노아의 전도 목록으로

(창 6:13-22, 벧전 3:19-20)


이 시간에는 원시 시대 인류의 조상인 노아가 전도하신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전도를 확인할 때 뚜렷하지 않은 점도 있는 것 같으나 위의 두 요절을 서로 대조할 때 주전 2500년 경 노아가 방주를 지을 무렵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전도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피조물)의 범죄 사실이 거론되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심히 역겹게 여기셨으며(5,6절)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시지 않을 것과 지면에서 쓸어버릴 것을 계획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고 하셨습니다.(3,7,8절)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는 뜻은 노아도 의롭게 살았지만 구원의 은총이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주어짐을 뜻하며 또 노아 개인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도 포함되게 하신 것입니다.(벧전 3:20, 창 8:16, 9:18) 그리고 그 방법대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방주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의인을 구원하시려는 방책이므로 영적 구원의 예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 6:3에서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하시므로 그 당시의 죄인들의 수명을 한정하신 것은 홍수 심판의 때를 120년 후로 잡으시고 “그 때까지는 참아주시겠다”는 뜻인데(벧전 3:20,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 하심.) 그 다음에 “노아가 전도하였다”는 말씀이 창세기에는 없으나

2. 노아의 사적을 설명하신 베드로 사도의 글에서 “노아의 최초 전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벧전 3:19-20 말씀을 보시면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저”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도 계시면서 노아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알리고 방주에 오를 것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다른 뜻으로도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18절) 영으로 지옥에 가셔서 전파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이 해석은 천주교나 루터교에서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이 지옥에 가신 일도 없거니와(눅 23:43)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다”고 하셨으니(시 6:5, 사 38:18, 눅 16:26) 어찌 지옥에 있는 영혼을 위하여 전도를 하셨겠습니까? 또 어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가 부활하여 이렇게 승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신 승리의 선포라고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바른 해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전파하시니라”고 현재적 용어를 쓰셨는가? 하시겠지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 “전파하시니라”는 “엑케루세인”이 헬라어 부정과거형(혹 동작이 연속될 수도 있는 과거형)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전파하셨습니다”라는 과거형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과 새번역 성경, 또 현대인의 성경도 전부 과거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벧전 3:19-20의 말씀은 “예수님은 과거에도 성령의 역사로 노아 등을 통하여 전도하게 하셨고,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120년을 참으시면서 전도하게 하셨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므로 구원받지 못하였고 순종한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았으니 그들은 겨우 8명 뿐이었으며 그때에 믿지 않은 자들은 지금도 다 지옥에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3. 그러면 결론적으로 노아의 최초 전도에 대하여 무슨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1)노아의 시대는 아브라함을 선택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인류 전체에게 전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 인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노아의 방주가 “전체 인류를 다 수용할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에 노아의 전도를 듣고 방주에 들어오는 자에 한하여 수용할 수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제나 믿고 따르는 자에 한하여 구원하시는 책임을 확실하게 이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자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고 다 보전하여 주신다”는 말씀도 그런 의미입니다.(요 17:12)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의 방도를 세워놓으신 다음에

2)노아로 하여금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 전파의 내용은 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120년 후에 물로 심판하신다는 것과 ② 구원받는 방도로 방주를 지으라 하셨으니 방주 제조에 같이 협력도 해주고, ③ 또 “방주로 들어오라 할 때는 들어와서 구원을 받자”고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3)그러나 그 전파가 무색할 정도로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방주 제조할 때는 얼마나 협조하였는지 모릅니다. 결국 노아는 전도에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물이 땅에 차 오를 때 가까이 살던 가족은 믿음이 있었던 없었던 쉽게 들어올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살다가 홍수가 나니까 방주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자는 방주 가까이 사는 자요, 그것이 곧 믿음 생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주의 구원이 영적 구원을 상징한다면 이것은 성도의 교회 생활이나 신앙 고백을 의미하는 뜻이 될 것입니다.

4)많은 사람들이 노아는 “120년 동안 전도를 꾸준히 하였다”고 증언을 합니다. 그 당시의 인류들이 얼마나 완악하였으면 하나님이 멸하시겠습니까? 노아의 전도가 잘 통하지 않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파 사명만 다할 뿐 구원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 7:16을 보시면 기한을 정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17일부터 40주야를 물로 범람케 하셨는데 이 일이 시작되기 전 모든 생물들이 들어가도록 하신 후 문을 닫으시므로 “구원의 문이 닫히는 때”가 있음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도 심판 때에 따라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전도자는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성경에 근거한 노아의 전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방주로서의 구원은 구원과 멸망을 실제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노아는 전도하였으나 그 당시 인류들은 노아의 방주 짓는 취지를 믿지 않았고, 나중에 홍수를 당하면서 믿으려 하였겠지만 구원의 방주가 자기들 곁에 있지 않으므로 기회를 놓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와 구원도 기회가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제 76 과 덕을 세우는 모범 목록으로

(창 13:6-9,14-18)


창세기는 인류의 역사와 선민의 발자취를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전도의 모범적 기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중심 인물들 몇 사람에게서 “전도인의 소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 시대에 계셨으면 전도를 잘 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 하려면 “덕을 세우는 모범”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마 5:13-16)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전도자는 우선 불신자들로부터 “복받은 자” 또는 “잘 사는 자”라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잘 산다”는 표준은 하나님께 있고, 또 “자신이 느끼는 표준”에 따르지만 불신자가 볼 때에 흠모할 만큼 잘 사는 것이 없으면 그가 전도를 해도 잘 수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요셉은 다 복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대하여지고, 복의 근원되는 은혜까지 받았으며(창 12:2) 이삭도 거부가 되었고,(창 26:12-14) 야곱도 신앙과 재물의 복을 받았으며(창 28:21-22, 32:10) 요셉 역시 크게 형통하여 애굽 사람이 그의 형통함을 보았다(창 39:3)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세의 복을 적게 받은 것이 잘못이거나 부족의 척도가 아니지만 불신자의 표준으로 따질 때는 전도를 막는 요소가 될 수도 있은즉 성도는 현세의 복을 받았을 때 더욱 전도의 은사로 알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과 놋과 요셉은 나그네 접대를 잘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놋은 천사로 가장하여 온 하나님을 접대하였고,(창 18:1-8, 19:1-3)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을 잘 접대하여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창 45:5-11) 전도가 이웃에게 음식 접대를 자주 하면서 친교하고 사랑을 베풀면 전도에 좋은 효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손님 접대를 의무화 하도록 강조하셨습니다.(롬 12:13)

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화해 실천자와 화평주의자였습니다. 성품이 포악하거나 억울한 것을 참지 못하거나 다툼을 만들어 자신의 입장에 시원함을 느껴야만 되는 성품의 소유자는 전도하다가 덕을 상실하기 쉬운 것입니다. 불신자나 믿음 약한 쪽의 실수를 적당하게 보아 넘기는 인내와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놋과 분거를 결정할 때에 먼저 놋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는 미덕을 보였고,(창 13:9) 이삭도 블레셋족과 우물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도 세 번이나 양보한 사실이 있습니다.(창 26:12-22) 양보할 줄 모르며 욕심을 표현하고 이기주의 원칙으로만 살려는 성도는 전도자로서의 여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도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민 12:3) 하셨고, 백성들이 믿음 없는 행위를 드러낼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희생주의로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민 11:11,15)

4. 전도자는 근실성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할 일 없이 노는 사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믿음 생활의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덕이 되지 못합니다. 논다는 그 자체가 다른 사람의 덕으로 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농사하여 백배를 거둔 일이 있었고,(창 26:12) 야곱은 눈 붙일 겨를 없이 20년을 수고하여 발전했으며(창 31:40) 요셉도 주어지는 환경을 따라서 어디서나 성실하였으며 그의 성실함으로 그 주인집을 발전시켰습니다.(창 39:2-4)

5.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자신의 고생한 과거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창 45:5)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으니(창 50:17-18) 이것도 큰 미덕이요, 아브라함이 매장지가 필요하였을 때 헷족속이 “거저 쓰시라”하였어도 그 호의를 받지 않고, 은 400세겔로 값을 준 것도 역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후덕이요, 물질 거래의 분명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믿음과 진실과 사랑과 봉사 등에 덕을 세우는 모범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제 77 과 네게 속한 자들을 이끌어내라 목록으로

(창 19:12-17, 벧후 2:6-10)


1. 베드로 사도는 소돔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1)“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소돔성의 죄악이 한계에 달했을 때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흠이 있는 과일은 잠시 보존해 두지만 형편없이 썩은 과일은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죄악의 한계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 그 심판의 방법은 “재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니 이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함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소돔, 고모라는 두 성만이 아니고, 아드마와 스보임성도 포함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창 14:8, 호 11:8)

3)또 이 사실(소동성의 멸망)을 “후대의 불경건한 자들에게 본이 되고 경고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이 시대의 교훈으로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4)그 당시의 백성들의 대표적 죄악은 경건치 않음과(불신앙을 뜻함;6절) 무법함과 음행이라고 하였습니다.

5)놋은 이런 죄악들로 인하여 “고통하며 마음을 상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성도가 죄를 볼 때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며 또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의 태도일 것입니다. 창 18:20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있다고 하신 것은 약자의 호소, 또는 놋의 기도였을 것이니 이 사실은 성도가 자신과 다른 이들의 범죄를 인하여 얼마나 심령을 상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가를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6)하나님은 경건한 성도를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하시되 또 심판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또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고 주관자 하나님을 멸시하며 영광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죄에 담대하고 고집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놋은 어떤 사람입니까?

1)놋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아브라함의 집에서 키움을 받고 소돔성에 우거한 사람이었습니다.(창 11:27, 12:4-5, 13:11-13)

2)놋도 의로운 자라 하셨으니(벧후 2:7) 그가 죄를 인하여 마음을 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창 18:20) 아브라함처럼 손님 접대를 잘 했으며(창 18:1-8, 19:1-3) 천사로 가장한 하나님을 영접하였고, 희생의 정신도 강한 사람이었음을(창 19:8) 나타내 주셨습니다.

3)하나님이 이같은 놋을 구원해 주셨지만(벧후 2:7) 놋은 그의 삼촌인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에 입각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창 19:29) 이 언약이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며(창 18:25-26) 아브라함의 경건의 덕을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은 놋의 가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창 19:29)

3. 하나님은 선민의 권속까지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택하실 때(창 17:1-8) 그 구원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때에 할례는 아브라함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해당이 되었으니 곧 서자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타국인까지 전부였으니(창 17:9,23,27) 이는 하나님이 택자의 전 가족과 친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또 그 때에 적자 이삭은 출생도 하기 전이었으니 만큼(창 17:24-25) 구원의 언약이 적자 혈육에게로만 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적자의 계통은 메시야 계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 17:19)

4. 그러면 하나님이 놋의 가족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으며 그 사실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전도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1)하나님은 먼저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확인하십니다.(창 18:20-21)

2)그 죄악이 관영되었을 때 심판을 작정하시고,(벧후 2:6) 이 사실을 모든 이에게 경고하십니다. 우선적으로 믿음 있는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고,(창 18:17) 구원의 대상인 놋에게도 알려주셨으며(창 19:13) 그 집사람들에게도 알리셨고,(14절) 또 모든 사람에게도 알려주시므로(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백성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마 26:21-26)

3)악인에 대한 심판도 때가 있는고로 구원받을 자는 주어진 기회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23절에서 소돔성의 멸망은 해가 돋는 시간이었고, 구원 받는 기회는 동틀 때까지였습니다.(15절) 이렇게 심판의 시기와 심판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시기도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작정하신 기간이 되기 전까지만 참아주시는 것입니다.(벧후 3:9)

4)천사로 가장하여 오신 주님께서는(창 19:1,19) “소돔성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크므로 하나님이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너희는 이 곳을 떠나라”(13-14절) 하셨고, 또 12절에서는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고 하셨으니 여기에서 ① 구원의 대상은 놋의 가족과 모든 연고자에 해당하고, ② 그들은 멸망 시간 이전에 성을 떠나야 함이 구원의 방도였으며 ③ 놋의 두 사위는 이 사실을 농담으로 여겨 끝내 듣지 않았고, ④ 이들에 대한 설득 때문에 놋은 자신의 탈출에도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따라서 설득은 효력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⑤ 그때 두 천사는 동틀 무렵에 더욱 재촉하였고, 시간이 급박하였을 때에 ⑥ 천사들이 친히 놋과 그 아내와 두 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냈다고 한 것입니다.

5. 따라서 전도의 사명자가 받아야 할 교훈

1)언제나 시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바쁘고 피곤한 상황 때문에 죽어가는 심령을 등한시 한다면 항상 권면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도자가 결사적으로 노력할 때 구원을 위한 희망적 기회를 분명하게 접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구원의 대상이 “믿는 성도의 측근에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나 놋의 가족(권속)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자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우선적으로 전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3)또 일어나 “이 곳을 떠나라”(14절)하는 것보다 “이끌어내라”(12절)하시는 말씀은 상당한 강요를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의 방법에서 무리하고 부조리한 강요를 시행할 것은 아니지만 상당하게 박력있는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도 깨닫게 하시는 것이며

4)아무리 강요와 설득을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믿는 자는 구원 받는 일에 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님도 그런 자를 구원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5)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시행하려고 하나 힘이 부족하여 신속한 행위를 취하지 못하는 자에 한하여서만 하나님이 그 천사들을 통하여 이끌어내 주시는 은혜로 구원받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의 노력을 힘닿는 한 하시되 한계가 있음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제 78 과 광야의 시련 (출 14:1-14)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광야의 시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불신앙과 죄를 떨치고 믿음 생활에 들어오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생활은 신앙 생활 과정에서 받는 연단이기 때문에 이 생활 속에서 개인과 단체가 겪는 여러 가지를 신앙적 관점으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1)모세의 순종과 지도력이 있었고,

2)백성들의 신뢰와 단결이 있었지만

3)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셔서 바로의 마음을 꺾지 않으시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해주셨기 때문에 출애굽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신앙인이 되는 변화도 하나님께 달린 것이니까 저희들은 전도를 목적할 때에 더욱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출애굽으로 믿음이 시작된 다음에는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들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신자가 든든한 믿음과 용기를 내지 않으면 낙심하기 좋을 만큼 어려운 일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1)우선 그들이 당면한 어려움은 그들의 여행 기간이 예측 없이 40년을 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안 나올 백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출 14:12) 그러나 처음에는 몰랐고, 다만 “노예를 면하고 본향에 간다”는 욕망만 갖고 나서 보니 되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지중해 변경인 블레셋 땅을 거쳐가면 40일이면 될 것을 동북방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40년을 끄셨는가?할 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지요. ① 블레셋 쪽으로 가다가 그들로부터 전쟁을 만나면 위험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출 13:17) ②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연단을 주시기 위해서였으며(신 8:2) ③ 하나님을 원망하고 끝까지 신뢰하지 않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민 14:33) 이렇게 은혜와 연단과 심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목적지는 알았지만 방향 감각은 없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였으니 이는 예수 믿는 성도의 생활 방법이 오직 성경 뿐인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2)그 다음에 나오자 마자 뒤따르는 어려움이 애굽 군대의 추격이었습니다. “라암셋”이란 지역을 떠나서 “비하히롯”이란 지역에 왔는데 그 지역은 막막한 광야를 향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바로왕이 얕보고 추격하여 군중을 다시 끌어가기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의 군사를 마지막으로 무찌르시기 위하여 섭리하신 것인데(출 14:2-4) 바로는 이것을 모르고 군사를 풀어 추격해 온 것입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죽음의 위기에 놓였으니 이것은 예수 믿는 성도에게 따르는 불신앙적 핍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르면 종교인들끼리의 대립이 불가피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으려면 불신 세계로부터 오는 핍박을 각오하여야 합니다.(출 14:2-9) “핍박을 잘 받으면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든든히 각오한 후 기쁨으로 이길 수 있는 자세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홍해가 막혀서 피할 길이 없었지만 백성들은 홍해 바다까지 담대히 나갔습니다.(출 14:8) 이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져서 길을 열어 주셨고,(출 14:13-16) 애굽군의 병거 바퀴를 극난하게 하셨으며 또 흑암을 주시므로 무난히 전진하게 하셨습니다.(출 14:25) 그리고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추격할 때에 물을 흐르게 하셔서 모든 적군들을 깨끗이 수장하셨으니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시험을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핍박을 만나든지 “이것이 나의 신앙을 더 복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담력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출 17:8-13에 보시면 거기서도 아말렉을 이긴 사실이 있는데 이렇게 애굽이나 블레셋이나 아말렉은 모두 불신앙적 핍박을 모형하는 것으로 그들과 싸워 승리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3)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어려움입니다. 그들이 사막 여행 중에 먹고 입는 문제는 당연히 따르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을 단물로(출 15:23), 양식을 만나와 메추라기로(출 16:3,12-14), 또 신 광야에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주시고(출 17:1,6), 의복과 신은 닳지 않게 하시므로(신 29:5) 해결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서 가난의 위험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면서 선한 방법으로만 살려고 하면 소득이 없어 죽을 것 같아도 여전히 살게 하시는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물욕을 멀리 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먹여주실 것입니다.

4)생활의 사치와 현실욕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것은 민 11:4-9에서 생선, 과일, 채소가 없고 정력 쇠약을 인하여 원망하며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만나와 메추라기 이상으로 해결해주시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것 정도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과 성도가 영적 축복에 만족하면서 세속적 의욕을 적당하게 물리칠 수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무질서한 부도덕에 대하여 경계해야 하는 연단을 주셨습니다. 미리암이 적은 일(모세가 구스 여인 취한 일)로 모세를 비방하였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일이 있었고,(민 12:1,9) 가나안 정탐의 찬반 보고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 의견에 용기를 주셨으며(민 13:17-33) 백성들 일부가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였을 때 전염병으로 징계하셨고,(민 14:1-2,12,29) 고라당의 반역에 대하여 땅을 갈라 250인을 삼키게 하셨으며 또 염병으로 14700명을 죽게 하셨고,(민 16:1,31,35,47) 에돔족이 통과를 허락지 않았을 때에는 조용히 충돌을 피하여 돌아가게 하셨으며(민 20:21) 모세를 원망하는 자들에 대하여 불뱀에 물려 죽거나 놋뱀을 쳐다보므로 구출 받게 하셨고,(민 21:5-6,9) 아모리왕과 바산왕을 격파하신 일(민 21:21-33) 등은 모두 무질서한 부도덕과 시기, 원망, 싸움, 불평, 작당, 내분, 좌절 등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을 경험으로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 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대인 관계의 융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사랑과 화평과 협조로 대할 수만 있다면 그의 신앙 생활은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6)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거짓 선지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인 발람의 사건에 연루되어 음행죄에 빠진 것 때문에 염병으로 24000명이 죽고 발람도 미디안으로 도피하였으나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까지 쳐들어가서 미디안을 멸망시키고 발람을 죽인 사실이 민 22:-24:, 25:9, 31:1-9에 나타나 있습니다. 발람의 사건은 이단 풍조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를 경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교훈, 우상 숭배, 이방적 제례에 동참하는 것, 음행의 위험 등을 경계시키는 교훈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광야 생활 중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많은 것들을 교훈하시고 연단시키셨습니다. 전도를 받고 신앙 생활을 시작한 성도가 다방면으로 교육과 연단을 받아야 함이 믿음의 시작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과제가 많다는 것을 아셔서 늘 배우고 연단 받는 연습을 쉬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광야의 시련은 곧 교회 생활의 연단인 것을 믿으시고 더욱 잘 적응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 79 과 선민의 진영과 책임 (민 1:45-54)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선민의 진영과 책임”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구약의 선민은 신약 시대의 교회 회중을 의미하고, 구약 선민의 단체 생활, 특히 광야의 행진은 “신약 교회의 단체 생활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구약의 “민수기”는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며 전도의 사명을 가진 성도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동의 표준을 어디에 두었는가?, 명령 체제를 어떻게 갖추었는가?, 직무 분담을 어떻게 하였는가?, 진영 배치를 어떻게 하였는가?, 행진의 순서는 어떠하였는가?, 인구 조사는 어떻게 하였는가? 등을 통하여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들은 애굽을 탈출할 때 담대하게 나왔습니다. 바로왕의 마음이 꺾여 이스라엘의 해방을 허락한 후에 다시 강퍅한 마음이 생겨서 병거를 동원하여 추격해 왔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히 숙곳을 떠나 홍해 쪽으로 나갔다고 하였습니다.(출 13:20, 14:7-8) 이것은 마치 성도가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불신앙의 마귀가 와서 여러 가지로 유혹을 하여 과거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유혹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에 믿음을 시작한 성도는 과감하게 전진함은 물론 되돌아갈 수 없도록 확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여야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서 그들을 다 수장시켜 주시므로(출 14:21-28) 유혹을 물리치고 담대히 나가는 자에게 형통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2. 그들의 행동 지침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1)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지 않으면서(출 13:22) 구름 기둥(낮)과 불기둥(밤)의 보이는 계시로 행진을 인도하신 것이고,

2)모세에게 직접 말씀의 계시를 주셔서(출 14:15-16) 지도하셨으니 이는 성도가 오직 하나님의 계시(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활동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 선민 단체의 명령 체제는 ① 하나님, ② 모세, ③ 모세를 보좌하는 아론과 훌, ④ 아론의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민 4:19, 7:8), ⑤ 레위인 족장의 어른 엘르아살(민 3:32), ⑥ 레위의 아들들, ⑦ 12 지파를 4분하여 대표 지파를 세웠으니 동쪽 진영은 유다지파, 서쪽 진영은 에브라임지파, 남쪽 진영은 르우벤지파, 북쪽 진영은 단지파로 대표하게 하셨고, ⑧ 12 지파의 각 두령(족장)을 두어 통솔하였으니 그 명령 체제가 대단히 조직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홍해를 건넌 다음 인구를 계수함에 있어서(민 1:1-3) 싸움에 나갈 만한 20세 이상의 장정만을 계수한 것은 퍽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특별 취급한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계수에 들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신앙을 대적하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전신 갑주를 입고 전쟁하는 자세로 생활하여야 합니다.(엡 6:10-13, 딤전 6:12) 신앙 생활을 전쟁으로 알고 싸울 수 있는 교인이어야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인 정신으로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성도만 전도인의 자격이 있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성도의 수가 얼마나 될까요?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있는 신앙의 정병이 많을 때 전도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5. 이스라엘의 진영 배치와 직무 분담에서 계속 되는 교훈을 받겠습니다. 민 1:47을 보시면 “레위인은 계수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인을 왜 계수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

1)레위인은 성전 장막에 관한 일체의 책임을 맡은 대신에 그 이외의 사회적, 군사적 책임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따라서 레위인을 통솔하는 권한도 제사장이 하게 되어 있었으며(민 3:32)

3)레위인의 수가 얼마이든지 그들에 대한 생활 대책을 무제한으로 보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생활 대책의 보장”이란 뜻은 민 18:21,24에서 12 지파의 십일조를 전부 레위 지파에게 줌으로써 그 생활 대책을 세워 주셨습니다. 이는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 전임하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신령한 일에만 전임케 하고(행 6:4) 그 육신적 생활에 따른 대책을 교회에 드려진 헌금 등으로 생활하게 하는 제도와 같은 것입니다.(고전 9:9-11, 딤전 6:8)

6. 아론은 모세와 함께 레위 지파로서 그의 자손들에게는 제사장의 직임을 부여하였고,(민 3:2-4) 레위 지파는 성막 관리를 담당케 할 때(민 3:17) 그의 세 아들 “게르손”, “고핫”, “므라리”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장막의 덮개 용품(성막, 장막, 휘장, 줄 등)을 취급하게 하여 장막 뒤쪽인 서편에 진을 치게 하였고,(민 3:23-25) “고핫” 자손들에게는 제사에 관련된 성물들(법궤, 상, 등대, 제단, 각종 기구들)을 취급케 하되 그것들을 직접 어깨로 메어 운반하게 하여(민 7:9) 남편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민 3:29) “므라리” 자손은 성소의 골격 기구(널판, 기둥, 받침 등)를 취급케 하여 북편에 진을 치게 하였고,(민 3:35-36) 성소의 전면인 동편에는 모세와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쳐서(민 3:38) 외인의 잠입을 막고 성소의 직임을 봉행하게 한 것입니다.

7. 여기에서 주시는 신령한 교훈은

1)직무 분담이 철저하였다는 점과

2)그 직임을 잘 이행할 수 있기를 위하여 성막 측근에 자리 잡고 관리하였다는 점과

3)이렇게 할 때에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함”이라 하신 말씀의 뜻이 있으며(민 1:52)

4)제사에 직접 사용되는 기구들을 운반할 때는 편의한 방법으로 운반하지 못하고 직접 어깨에 메게 하였으니 이는 게르손 자손에게 두 수레와 소 넷을 준 것과 또 므라리 자손에게 넷 수레와 소 여덟을 준 것과 대조할 때(민 7:7-8) 제사에 직접 사용되는 도구는 기계적 방법을 쓰지 말고 피부로 접촉하는 방법으로 애착있게 시행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이 교회적 사명을 친근하고 애착있게 또 피부에 느끼도록 그 책임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시행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다시 한 번 각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민 1:53)

8. 성막 사면에 레위 지파가 진을 친 다음 전체 지파들도 4분 하여 동(유다, 잇사갈, 스블론), 서(단, 아셀, 납다리), 남(르우벤, 시므온, 갓), 북(에브라임, 므낫세, 벤야민)에 진치게 하였고, 방위별 대표 지파로 동은 유다, 서는 단, 남은 르우벤, 북은 에브라임이 맡도록 하여 그의 기를 꽂고 통솔을 할 때에 유다와 에브라임과 단은 지파 인구(계수 병력)가 많은 특징이 있고, 르우벤은 시므온 지파보다 병력이 만 여명 적지만 장자 지파의 권위를 감안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막 보호의 철저를 기한 사실과 실력 위주와 서열 위주로 책임자를 뽑은 것을 엿볼 수 있고, 행진의 순서는 12 지파가 동남소북의 순위로(민 2:17) 질서있게 진행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80 과 전도자의 적극적 자세 목록으로

(민 13:30, 14:6-12)


1.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가나안 땅 정탐과 이에 대한 보고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신 1:19-39에도 재설되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의 북쪽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신 1:19) 모세가 백성들의 의사에 따라서(신 1:22) 12 지파 별로 족장(두령, 민 13:2-3)을 뽑아 가나안 땅을 탐지 하게 하였습니다.

2. 탐지를 시킨 목적은 장차 그 땅을 점령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그 땅의 지형과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땅의 비옥성 여부와 성읍의 보호 형태와 토질과 실과 등을 알아보고 참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에(창 17:7, 26:1-5) 정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열두 정탐들이 북쪽 하맛 입구 “르홉”까지와 또 가나안 지경 남쪽인 헤브론 지역과 또 가나안 남방 헤브론에 가까운 “에스골” 골짜기 지경을 정탐한 후 그 곳에서 어깨에 멜 만한 큰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갖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4. 문제는 그들이 와서 보고한 내용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혹은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0대2로 보고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1)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하면서 악평하여 이르기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장대한 대장부가 사는 땅이며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 같은 존재라”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곡하고 원망하며 소리 높여 부르짖게 하고 “장관을 새로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감이 낫겠다” 하도록 하였고,

2)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절망적 보고에 대하여 옷을 찢으며 분노한 태도로 “그렇지 않다 그 땅에 올라가서 취하자 능히 이길 것이라(13:30) 그 땅은 아름다운 땅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더라”하니 온 백성들이 그를 돌로 치려할 때에 하나님은 그 반대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그들은 “나를 멸시한 자요 믿지 않는 자인즉 그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너로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 이 사실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나 전도자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고, 자칫하면 훼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1)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어야 하고,

2)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림에 있어서 추호도 소극적 자세나 비관적 자세나 절망적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확신으로 전진하여야 하고, 담력이 있어야 하며 무조건 순종함과 희생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전도의 대상 앞에서도 담력과 자신감을 갖고 정신적, 지식적(신앙 지식)으로 그를 정복하지 못하면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먼저 자신이 강하여지는 체험과 담력을 보유하여야 할 것입니다.(엡 1:18-19) 이 능력은 말씀과 기도와 연단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6. 어떤 직분자는 교회의 일을 할 때에 필연적으로 성취해야 될 일인줄 알면서도 자기 만의 연약을 중심으로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런 일을 극히 조심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혼자의 뜻과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81 과 이스라엘이 흥하는 비결 목록으로

(신 6:16-19)


모세의 율법에는 “이스라엘이 흥하는 비결”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선민을 뜻하고,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성도의 세계, 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세계나 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의 의미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신명기에 나타난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흥하는 비결”을 살피면

1)우선 본문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믿음을 갖는다는 뜻)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대적을 몰수히 쫓아내 주시고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땅”은 가나안 복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창 13:14-17)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한 은혜를 쉽게 받아 누리는 것을 뜻하고, 이 사실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신령한 믿음의 발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된다면 세 가지 은혜를 성취함이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한 축복이 성취되는 것이고, 둘째는 신앙이 정착하는 복이며 셋째는 생활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축복을 받아 흥왕하는 비결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신 7:12-15에도 보시면 “너희가 하나님의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인애를 베푸셔서 모든 짐승과 소산에 복을 주시고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너를 번성케 하시고 만민보다 우승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질병은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임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복을 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율에 대한 순종이고, 복을 주시는 방법은 번성함과 소산의 풍성함과 건강을 주심과 대적을 질병으로 치시는 방법을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3)신 10:20-22에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그는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나니 애굽에 내려간 열조가 겨우 70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당시에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이 70명(75명;행 6:14)이었는데 모세 당시에는(주전 1879년-1449년)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만한 장정만 60만이라 하셨으니 그 수의 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민 1:46, 11:21)

4)신 11:8-9에 보시면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하시므로 기업의 땅에 정착하고 젖과 꿀을 얻으며 후손의 날이 장구하고 또 강성하므로 선민이 흥한다고 하셨습니다.

2. 갱니적으로 흥하는 비결을 말씀하신 것도 있습니다.

1)욥 8:5-7에 보시면 성도 개인이 흥하는 방법으로 “네가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고 전능하신 이에게 빌며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돌보아주실 때 형통하고 나중이 창대한다”는 것입니다.

2)또 대상 4:10에 보시면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셨는데 여기의 “지경이 넓어지고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된다”는 것은 역시 흥왕의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이상의 말씀을 참고하여 흥하는 비결을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선민에 대한 보호와 양육을 약속하셨으면(출 3:7-10,17) 어떤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며 원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16:16에 보시면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 사건이 바로 광야에서 물이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불신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불신앙과 의심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신 16:17, 17:12) 이 말씀은 곧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 규례, 율례, 법도 등으로 호칭하였지만 교회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집약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들으며 살피고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할 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청결하고 정직하며 선량한 일을 하는 것(신 16:18, 욥 8:5-6)도 역시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의 할 일입니다.

3)“기도로 구하고(욥 8:5, 대상 4:10)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친근히 하며 그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신 10:20-22) “기도, 섬김, 경외, 친근히 함, 또 충성을 맹세함” 등은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복된 자를 흥왕케 하시는 방법은

1)우선 번성하게 하십니다. 후손이 번성하려면 생산을 많이 하여야 하고 건실하게 자라야 합니다.

2)재물의 복을 주시는데 소산의 복과 짐승의 복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3)평안의 복입니다. 복된 백성에게는 질병을 멀리 떠나게 하시고, 대신 그들의 원수들에게 질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신 7:12-15)

4)강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융성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미국을 강성한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러를 당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그 강성함도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 원하는 백성들에게 번성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강성의 복을 주십니다. 그 복을 받는 방법은 바로 개인이나 백성들의 믿음에 있고, 말씀 중심 생활에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근히 하는 생활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82 과 여호수아에게 주신 명령 (수 1:1-9)목록으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민 27:18-20) 광야 40년 생활 중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죽지 않은 인물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으니 여호수아는 그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민 26:65)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정 40년을 끝냈을 때 모세는 세상을 떠났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여호수아의 시대가 전개되었을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여행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은 영적 축복의 열매를 거두는 일입니다. 저희들도 믿음 성숙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 교회 부흥의 열매 등을 거두기 위하여 여호수아 같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앞장 서는 지도자의 책임을 이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2절에서 “모세가 죽었으니 너는.....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은 모세의 명령에만 순종하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역자에게 의존하여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말고 직접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사명을 수행하라는 뜻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자신이 바로 사명자요, 충성할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충성할 자가 따로 있거나 다른 사람이 앞장서야만 따라가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바로 자신이 앞장서야 할 책임자임을 자각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누구도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백성들과 더불어 행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백성들과 더불어”란 민심을 모으고 민심에 따라 민주적 활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국가나 교회나 민심을 하나로 모아 행하는 것이 정치의 바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명분있게 행하고 뜻이 다를 때는 설득, 권면하면서 무슨 일이나 합심, 노력으로 성취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어떤 여행을 할 때에 모든 사람이 다 타야 차가 떠나는 것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타지 않으므로 그 차가 기다려야 하고 지체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도가 다같이 합심 노력하는 것을 보시고 역사하실 때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역사도 다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 하셨고,(행 2:1)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며(행 2:4) 사무엘 시대에 회개 운동과 구국 운동도 온 백성이 다 모였을 때 역사해 주셨습니다.(삼상 7:5-12)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12 제자가 함께 하였다(눅 8:1)” 하셨고, 성만찬의 은혜도 12 제자와 함께 나누셨습니다.(마 26:20-29) 따라서 전체적인 합력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중요한 방법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여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실 것이라”하신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 자신과도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되 떠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으신즉 “평생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넉넉한 돈이 있다면 어깨를 펴고 활기차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부족하니까 위축될 때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확신 아래 어깨를 펴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힘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가난한 성도들 중에서 이런 믿음 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초조하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염려하지 않고 사는 성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