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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사무엘하 강론

제1과 사울의 죽음을 슬피함 (삼하 1:1~27) 137 바로가기

제2과 두 세력의 갈등 (삼하 2:1~32) 139 바로가기

제3과 아브넬의 행보 (삼하 3:1~21) 142 바로가기

제4과 아브넬의 죽음 (삼하 3:22~39) 145 바로가기

제5과 사울 왕가의 몰락 (삼하 4:1~12) 147 바로가기

제6과 다윗이 전국의 왕이 됨 (삼하 5:1~25) 149 바로가기

제7과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김 (삼하 6:1~23) 152 바로가기

제8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 (삼하 7:1~29) 156 바로가기

제9과 이방 정복과 요직 임명 (삼하 8:1~18) 159 바로가기

제10과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품 (삼하 9:1~13) 162 바로가기

제11과 암몬과의 싸움 (삼하 10:1~19) 164 바로가기

제12과 다윗의 큰 범죄 (삼하 11:1~27) 166 바로가기

제13과 다윗을 책망하심 (삼하 12:1~15) 169 바로가기

제14과 아이의 죽음과 암몬 점령 (삼하 12:15~31) 172 바로가기

제15과 징계로 나타난 일 (삼하 13:1~39) 174 바로가기

제16과 압살롬 귀향 작전 (삼하 14:1~17) 177 바로가기

제17과 다윗이 압살롬을 만남 (삼하 14:18~33) 180 바로가기

제18과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1~37) 182 바로가기

제19과 피난 중에 있은 일 (삼하 16:1~23) 186 바로가기

제20과 양측의 대결 양상 (삼하 17:1~29) 189 바로가기

제21과 압살롬의 죽음 (삼하 18:1~33) 192 바로가기

제22과 귀궁 중에 있은 일 (1) (삼하 19:1~23) 195 바로가기

제23과 귀궁 중에 있은 일 (2) (삼하 19:24~43) 198 바로가기

제24과 세바의 난 (삼하 20:1~26) 200 바로가기

제25과 사울의 남은 죄 심판 (삼하 21:1~22) 203 바로가기

제26과 다윗의 찬송 (1) (삼하 22:1~28) 206 바로가기

제27과 다윗의 찬송 (2) (삼하 22:29~51) 209 바로가기

제28과 마지막 말과 용사 소개 (삼하 23:1~12) 211 바로가기

제29과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 (삼하 24:1~25) 214 바로가기


사무엘하 설교보충 218

설교보충 1. 다윗에게 주신 은혜 (삼하 7:8~17) 218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다윗의 범죄 (삼하 11:22~25) 220 바로가기

설교보충 3. 범죄 후에 있은 일 (삼하 12:1~14) 222 바로가기

설교보충 4. 두 아들의 범죄 (삼하 13:10~14, 28~29) 224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다윗을 괴롭힌 사람들 (삼하 15:24~25) 226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아마사의 혈육관계 (삼하 17:25) 228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마음에 새길 것 (삼하 20:1~10) 230 바로가기

설교보충 8. 하나님의 심판 섭리 (삼하 21:1~9) 232 바로가기

설교보충 9. 다윗의 노래 (삼하 22:1~7, 23:1~7) 234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베들레헴의 물을 구함 (삼하 23:13~17) 236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사무엘상하의 강론을 기록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과 피로 등으로 어렵게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이 붙드셔서 졸서이나마 기록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제가 목회할 때 사용하였던 필기된 원고를 재정리하여 남겨 두는데 목적이 있고, 혹 평신도가 이 글을 접하게 되면 성경 본문을 한번 읽은 다음 이 강론을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였습니다.

1. 1956년에 출판된 개역성경이 가장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꼽히는데 요즈음 여러 번역서가 나오므로 그 수명이 나의 시대로 끝난다는 느낌인즉 앞으로는 본문 대조에 다소 불편이 있을 것을 예상한 점이고,

2.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의 내용이 역대상하에도 기록되었는데 현재 역대상하를 강론할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면밀하게 대조 설명을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 점이며,

3. 저 자신이 묵상한 것이 대부분으로 깊은 신학적 연구가 부족한 상태에서 초신자, 평신도 중심으로 보편적 지식을 제공하는데 그쳤다는 점이고,

4. 그런 중에도 혹 앞뒤 관계에 모순을 초래한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 다윗, 솔로몬이 각 40년씩 120년간 선민통합국을 다스렸다고 말하게 됩니다만 사실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간 왕노릇을 했기 때문에 120년의 연대를 113년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짧은 지식인지라 과거에 잘못 안 것들도 많이 나타나는데 성경을 입체적 또는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 보니 완전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발견되면 원칙이 아닌 연구의 재료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 글이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수단으로 읽혀지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빛을 보게 해 주시지 않는 한 거기에는 큰 자신을 못 갖습니다. 성경글자를 헤아리며 연구하는 평신도나 교역자가 희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홈페이지나 CD롬, 그리고 출판물로 남겨지고 전파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복”이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2006. 1. 5.


저자 지 영 근

사무엘하 강론

제 1 과 사울의 죽음을 슬피함 (삼하 1:1~27) 목록으로


사무엘하의 말씀은 사무엘상에 나타난 역사적 내력이 그대로 계속됩니다. 다윗은 시글락에 있으면서 아말렉을 치고 돌아왔고, 사울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하여 부자가 다 길보아 산에서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연속되는 말씀이 사무엘하에 기록된 것입니다. ① 1~10절은 “사울의 죽음을 제보함”이요, ② 11~16절은 “다윗이 제보자를 죽임”이며, ③ 17~27절은 “활 노래”입니다. 총 제목은 “사울의 죽음을 슬피함”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사울의 죽음을 제보함(1~10절)

1) 1~4절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제보를 받게 된 경위를 말씀한 내용으로 다윗이 아말렉을 도륙하고(삼상 30:9~20) 시글락에 와서 3일을 유한 때에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에 흙을 묻힌 사람이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다” 하면서 다윗을 찾아와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진에서 왔다”는 뜻은 사울 편에서 싸운 군사라는 뜻인데 그는 거짓말로 공을 세워 무슨 이득을 보려 한 사람인즉 그의 말은 “전쟁의 패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 소식” 외에는 진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의 소식을 물었을 때, 그는 4절에서 “이스라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여 죽은 자가 많고 사울과 요나단도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2) 5~10절에서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에 대하여 자세한 증거를 대라” 하였을 때, 그 제보자가 말하기를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본즉 사울은 창을 의지하였고 적의 병기와 기병은 사울을 촉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불러 이르시기를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나는 아말렉 사람입니다 한즉 내 목숨이 아직 내게 남아있어서 고통중이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 다시 살 수 없음을 알았기로 자신이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갖고 왔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삼상 31:3~6의 내용과 다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사울이 죽은 사실만 알고 자신이 공을 세운 것처럼 위장하여 다윗이 실권을 잡으면 무슨 혜택이라도 누릴 타산으로 아부한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사울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증거로 갖고 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울왕이 전쟁터에서 죽을 때 면류관을 쓰고 있었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공을 세우려는 일은 흔히 있는 것같습니다. 이 때에 다윗은 그의 말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 다윗이 제보자를 죽임(11~16절)

1) 11~12절에서 “다윗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은 사울과 요나단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까지 옷을 찢으며 슬퍼하였고, 또 울며 금식하였다” 하였으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왕과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13절에서 다윗은 그 제보자의 신분이 외국인 곧 아말렉 사람임을 그의 대답을 통하여 듣고, 14~15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죄를 물어 소년으로 하여금 죽이게 한즉 그가 치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16절에서 다윗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거듭 말하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뜻) 이는 네 입이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였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3) 여기에서 성도들이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성직자)는 그 잘못에 대하여 개인적 보복을 삼감이 필수적이고(롬 12:19), 오직 하나님(또는 교회)께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사울왕의 실예로 잘 나타난 사실입니다. 또 사울의 죽음을 알고 그 사실을 적당히 조작하여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무슨 유익을 바랐던 사람 역시 죄값을 그대로 받았으니, 이는 그가 아말렉(선민의 적) 사람이란 점과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인 사실과 그것으로 공을 인정받으려 한 모든 잘못의 죄값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의 거짓된 주장이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거짓의 요소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도 가짜 박사등 거짓된 공로를 선전하여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사례가 많은데 성도는 이런 것을 큰 죄로 여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활 노래(17~27절)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애가를 지어 야살의 책(의로운 자의 시집)에 기록하고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애가의 제목을 “활 노래”라 한 것은 활 잘 쏘는 사울과 요나단을 생각하여 그리한 것입니다(17~18절, 22절). 19절에서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왕은 선민의 대표자요 영광임)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니 두 용사(사울과 요나단)가 엎드러졌도다”, 20절에서 “이 일을 블레셋의 딸들이 기뻐할 것인즉 (그들의 고장인) 가드나 아스글론에 전파하지 말라 할례 받지 못한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딸들이 기뻐함은 그들의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기 때문임)”, 21절에서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없고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그곳에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림이 되었고 사울의 방패도 기름부음받지 않은 자처럼 되었기 때문이라(이 뜻은 길보아 산을 저주한 뜻으로 상징적이고 시적인 의미임)”, 22절에서 “죽은 자의 피와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않았고 사울의 칼이 헛되지 아니함이라(이는 두 용사가 용감하게 싸운 것과 그 죽음이 헛되지 않는다는 뜻임)”, 23절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관계가 사랑스럽더니 죽을 때도 서로 떠나지 않았구나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절에서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찌어다 저가 붉은 옷(좋은 옷)을 너희에게 입혔고 금노리개를 너희에게 채웠도다(왕의 국방과 경제정책을 찬양한 뜻)”, 25~27절은 두 용사의 죽음을 거듭 탄식하면서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하므로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그 사랑의 성격에 대하여 다윗은 “기이하고 아름답게 여겼고 또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 하였으니, 그 사랑의 성격은 주님과 성도와의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한 사랑입니다. 이 활 노래는 다윗의 조사도 되고 애가도 된즉 그의 왕에 대한 충성과 우정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제 2 과 두 세력의 갈등 (삼하 2:1~32) 목록으로


사울왕이 죽은즉 유다지파 사람들은 헤브론에서 자기 지파의 사람인 다윗을 왕으로 세웠고,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넬의 아들 아브넬(사울의 백부의 아들)은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남은 혈육 중 한 사람인 이스보셋을 사울왕의 후계자로 세웠으므로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서로의 갈등, 또는 세력 경쟁을 하게 된 사실이 본문에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두 세력의 갈등”으로 정하였습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유다지파가 다윗을 왕 세움”이고, ② 5~7절은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를 축복함”이며, ③ 8~11절은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왕 세움”이요, ④ 12~23절은 “힘 대결로 살생함”이요, ⑤ 24~32절은 “대결 중지와 쌍방의 피해”입니다.

1. 유다지파가 다윗을 왕 세움(1~4절)

1) 1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보에 대하여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사울왕이 죽었은즉 그가 이방 나라의 땅인 시글락에 머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삼상 27:5~7). 그리하여 “유다 땅으로 올라가리이까” 하는 것과 “헤브론(아브라함이 살던 곳, 창 13:8, 유다지파의 중심지)으로 가리이까” 하는 것을 여쭈어 응답을 받았으니 이는 아비아달(삼상 22:20~23) 제사장을 통하여 우림과 두밈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출 28:29~30, 삼상 14:41).

2) 2~3절에서는 “다윗이 두 아내(아히노암과 아비가일)와 자기와 함께 한 종자들(추종하는 부하들)과 권속(집안 식구들과 친척들)들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그 지역의 각 성에 거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3) 4절에서는 “유다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다윗에게 또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두 사람만 아내로 거느린 줄 압니다. 그러나 헤브론에 가서 왕된 후에는 더 많은 처자들을 거느린 것이 삼하 3:1~5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유다지파 사람들이 자기 지파의 왕을 삼은 것이므로 한 지파의 통치자가 된 것인즉 다른 지파에서 문제 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2.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를 축복함(5~7절)

1) 4절 하반절에서 다윗은 “사울의 시신을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장사 지냈다”는 소식을 접하였는데, 이 사실은 삼상 31:11~13에서 설명드린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크게 다행한 일로 여겼습니다. 전쟁으로 패배한 상황에서 시신을 거두어 드리는 일은 생명을 걸고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그리하여 5~6절에서 그곳에 사자들을 보내어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은혜(거저 주시는 복)와 진리(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복)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한다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을 것이라” 하였고,

3) 7절에서는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찌어다” 하였으니, 이는 왕이 죽었지만 힘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 되었을 때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암몬의 침략을 받아 위험에 처했을 때 사울이 출병하여 적을 물리쳐 준 사실이 있었음을 상기 시키는 뜻이고(삼상 11:1~15), 다윗 자신은 “유다 족속으로 말미암아 유다의 왕이 되었은즉 앞으로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여 그들을 격려하게 된 것입니다.

3.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왕 세움(8~11절)

1) 8~9절에서 사울왕이 죽은 후 그의 군장이었던 아브넬은(사울왕의 백부 넬의 아들)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세 아들은 전쟁에서 죽고 남은 아들임, 삼상 31:2)을 대동하여 마하나임(창 32:2, 수 13:26, 21:38, 요단 동편 갓지파의 성읍)으로 가서 길르앗(수 22:9, 13, 요단 동편의 넓은 땅을 일컬음)과 아술(asher, 확인하기 어려움), 이스르엘(수 17:16, 삼상 29:1), 에브라임(에브라임지파 사람들, 수 17:15, 19:50, 삼상 14:26)과 베냐민(사울왕의 부족임, 삼상 9:1~2, 12:21)과 온 이스라엘의 성원에 힘입어 왕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다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이 사울왕조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스보셋왕의 수하에 다 포섭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10~11절에서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역할로 40세에 왕이 되었고 다윗은 30세(삼하 5:4)에 유다지파의 왕으로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도읍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요약하여 7년이라고도 함, 왕상 2:11).

4. 힘 대결로 살생함(12~23절)

1) 12~13절에서는 “아브넬 및 이스보셋의 신복들(사울의 계승자들)과 다윗의 신복들이 만남의 기회가 있었는데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신복들이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고향인 기브온(예루살렘에서 11시 방향 10㎞쯤, 삼상 11:4, 15:34)으로 왔고, 스루야(다윗의 누이, 삼상 26:6, 대상 2:16)의 아들 요압(아비새, 요압, 아사헬 3형제임, 대상 2:16)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못을 가운데 두고 만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반가운 사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싸울 대상도 아닌 어설픈 관계였을 것입니다.

2) 14~15절에서 이때에 아브넬이 요압에게 장난하는 싸움을 걸어오자 요압도 기꺼이 응수 하였으니, 이는 자기 편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라 할 것입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걸오온 장난을 27절에서는 “흔단의 말”이라 하였는데, 14절의 장난은 “쉬켇”으로 전쟁놀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놀이를 화목하기 어려운 상대와 하는 것인즉 싸움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음을 알고 시행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흔단의 말”은 실속없는 실마리, 또는 장난으로 상대방을 약올리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양측에 각 12명씩 뽑아 싸움을 붙였는데(15절),

3) 16절에서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 일제히(사로 다) 쓰러졌다”고 하였습니다. 다 죽었은즉 무승부가 된 셈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헷갓핫수림(날카로운 칼밭)”이라 하였고, “그 지역이 기브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장난은 살생이 있다보니 싸움으로 비화되어 17절에서 “그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이때에 18절에서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즉 다윗의 조카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대상 2:16)이 있었는데 아사헬은 들노루처럼 빨리 뛰는 자라” 하였고, 19절에서 아사헬이 대적 아브넬을 치기 위하여 쫓아간즉, 20~22절에서 아브넬이 뒤를 보며 아사헬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를 쫓지 말고 차라리 다른 소년을 잡아 군복을 뺏아가라” 하였으나(적당히 분풀이 하고 끝내라는 뜻), 아사헬이 계속 아브넬을 쫓은즉 또 말하기를 “너는 나 쫓기를 중단하라 내가 너를 쳐서 죽게 하면 네 형 요압을 어찌 대면 하겠느냐” 하였으니 이들은 과거에 사울을 왕으로 모시고 적과 싸울 때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3절에서 “아사헬이 치우치지 않고 쫓은즉 아브넬이 창 뒤끝(창을 뒤로 진격시킨 것)으로 아사헬의 배를 찔러 죽게 한즉 아사헬의 뒤를 따르던 자들도 그곳에 멈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장난이 싸움으로 비화된 격전은 휴전이 된 것입니다.

5. 대결 중지와 쌍방의 피해(24~32절)

1) 24절에서 아사헬의 두 형인 요압과 아비새도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가인 기아 맞은편 암마산(기아는 기브온의 한 지명이고, 암마산은 기브아 맞은편의 언덕이라 함)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졌고, 25절에서 “베냐민 족속(아브넬 편)은 아브넬을 따라 함께 모여 한 떼를 이루어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고 하였습니다.

2) 이때에 26절에서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치기를 “언제까지 칼이 그 형제를 상하도록 하겠느냐 더 참혹한 일이 생길 것인즉 형제 쫓기를 그쳐야 할 것이라” 한즉, 27~28절에서 요압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라 하고 나팔을 불어 싸움을 중지 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싸움은 서로의 교만과 불화에서 비롯된 것인바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서로 감행한 것으로 더 큰 적대감만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3) 29절에서 아브넬과 그 종자들은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렀으니 기브온, 아라바, 요단강, 비드론, 마하나임을 지도상으로 살피면 좋을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사해로 들어가는 하류쪽이 “아라바”이고, “비드론”은 마하나임 쪽에서 서쪽 요단강으로 흐르는 강 이름입니다. 따라서 기브온에서 아라바 지역을 거쳐 북으로 올라가 요단강을 건너고 비드론 강을 따라 마하나임까지 가는 거리는 60㎞쯤 됩니다. 150리를 밤새도록 행하였다는 것은 도보로는 힘든 길입니다.

4) 30절에서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무리를 모은즉(승리한 편인즉 적당한 장소에 모였을 것임) 19명이 죽고, 또 아사헬이 죽은 것을 확인하였으며, 31절에서 그때에 아브넬 편에는 360명 죽인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2절에서 “무리들이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아비의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헤브론에 온즉 날이 밝았다”고 하였습니다. 싸움을 시작한 기브온에서 벧엘까지는 1시 방향 10㎞쯤이고, 벧엘에서 헤브론까지는 남쪽으로 40㎞쯤 됩니다.

이상의 말씀들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작정으로 기름부음받은 다윗이 섭리적 인도에 따라 왕이 된 사실과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에게 은혜를 베푼 길르앗 야베스 거민은 좋은 칭찬과 축복을 받은 사실이며, 사소한 대립과 장난이 큰 싸움을 일으켜 살생에 이른 사실과 아사헬이 빠른 것만 믿고 상대를 무시하였다가 죽음을 당한 사실, 싸움은 계속되면 피해가 큰즉 싸움을 그치자 할 때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제 3 과 아브넬의 행보 (삼하 3:1~21) 목록으로


① 본문 1절은 “두 계파의 대립과 강약”이고, ② 2~5절은 “다윗의 처자들”이며, ③ 6~11절은 “아브넬의 통간과 반역”이요, ④ 12~16절은 “아브넬과 다윗의 협약”이며, ⑤ 17~21절은 “아브넬이 통일의 뜻을 모음”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중심은 “아브넬의 행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넬의 행보는 2장부터 시작됩니다. 2장에서는 자기 군사와 다윗의 군사로 싸움을 붙여 자기편 군인 360명과 다윗편 군인 20명을 죽게 하였는데, 분문에서는 사울왕의 첩과 통간하고 이스보셋을 배역하였으며 다윗에게 귀순하는 일을 행하다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므로(3:27)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1. 두 계파의 대립과 강약(1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다” 하였으나 사울의 후계자인 이스보셋이 왕으로 있었던 2년간일 것이요, 한 나라가 두 계통으로 갈라진즉 서로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싸움이 불가피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다윗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졌으니”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삼상 16:1, 13)과 백성들의 신망이 다윗에게로 쏠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 되게 하시는 섭리가 아브넬을 통하여 계속 나타나는 것을 아실 수 있게 됩니다.

2. 다윗의 처자들(2~5절)

1) 본문에서는 다윗의 아들들을 열거하시되 출생 순위로 말씀하면서 여섯 아들만 소개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 7년 반 있으면서 낳은 자를 기록한 것입니다. 아들 순위대로 기록하면 ① 암논(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 ② 길르압(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 ③ 압살롬(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 그술왕국은 헬몬산 남쪽에 있는 작은 왕국임, 수 12:5, 13:2), ④ 아도니야(학깃의 아들), ⑤스바댜(아비아달의 아들), ⑥ 이드르암(에글라의 소생)이라 하였으니, 다윗의 처는 이외에도 최초의 여인 미갈(삼상 25:44)과 밧세바(삼하 11:27)와 최후의 여인 아비삭(왕상 1:1~4)이 또 있습니다. 솔로몬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과 딸들이 그 후에도 많이 출생되었을 것입니다(5:13~16).

2) 성경에 나타난 1부 1처제에 대하여 잘 아실 것입니다(창 2:24, 말 2:15, 마 19:5). 그런데 구약시대에 족장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다처와 첩을 거느린 사실이 있고, 사울, 다윗, 솔로몬 등 왕에게는 더욱 제한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기독교 윤리상으로 어떻게 설명하여야 좋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부일처제가 정도이나 인종이 귀하던 때에 다산을 위하여 하나님이 간과하셨고, 왕에게는 특권을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삼하 12:8에서 “하나님이 사울왕의 후궁들을 다윗에게 주셨고 또 다윗에게 이것 저것을 더 주실 수도 있다” 하였은즉 왕실의 번성을 위하여서는 허용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3. 아브넬의 통간과 반역(6~11절)

1) 6절에서는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1절) 아브넬은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았다” 하였으니, 이 권세는 무력한 왕을 따돌리고 자기 휘하의 군사를 믿고 힘을 떨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이스보셋(사촌동생)을 왕 세워 놓고 실권을 자기가 잡은 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2) 뿐만 아니라 7절에서 아야의 딸이고 사울의 첩인 리스바와 통간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스보셋왕이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문책하였을 때, 8절에서 아브넬은 이 사실을 몹시 분하게 여겨 대답하기를 “내가 유다(사울왕실에서 유다지파 쪽을 멸시하는 말)의 개 대강(개의 머리처럼 멸시하는 말)이뇨” 하면서 왕이 자신을 “유다의 개 대가리처럼 멸시한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이 여인과 관계된 일로 나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고,

3) 또 9절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맹세하신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 하면서 즉시로 반역의 뜻을 밝혔는바, 그는 “하나님이 다윗으로 왕 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뜻은 18절에서도 밝혔는데 그 근거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을 당시부터 나타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삼상 15:28~29, 16:1, 12, 28:17). 아브넬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서 이스보셋을 왕 세운 것은 극히 권세를 탐한 계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리하여 10절 말씀에서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 그 위를 단(북쪽 끝)에서부터 브엘세바(남쪽 끝)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라” 한즉, 11절에서 이스보셋왕은 이 말에 대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 한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왕을 거역한다면 백성들로부터 반역자의 누명을 쓸 것이고, 또 자신이 왕이 된다 하여도 다윗의 세력에 망할 것이 확실하므로 차라리 통일의 공신을 택하려고 그렇게 한 줄 압니다.

4. 아브넬과 다윗의 협약(12~16절)

1) 12절에서 아브넬은 자기를 대신 한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 땅이 뉘것입니까(백성들의 것이란 뜻) 당신이 나와 더불어 언약하면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아브넬이 요구하는 언약은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 되게 하는 댓가로 자신들을 죽이지 말고(과거에 다윗의 원수였음) 적당히 대우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협력이 없어도 점차 세력이 커져서 전체 왕국을 만들 수 있지만 아브넬이 귀순하면 그만큼 시기와 노력을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리하여 13절에서 “다윗이 좋게 여겨 언약함에 있어서 반드시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폐백으로 주고 아내를 삼은 자일 뿐 아니라 아브넬의 5촌 조카 딸로서 다윗이 쫓길 때 도피하도록 권유한 생명의 은인도 됩니다(삼상 18:27, 19:11~17). 그러므로 그 은혜를 갚는 뜻과 제휴의 뜻으로 미갈을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14절).

3) 이 사실이 아브넬과의 언약에서 된 일이므로 다윗은 14절에서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자신의 처인 미갈(이스보셋의 누이)을 돌려 줄 것을 청하였고, 15절에서 이스보셋은 이를 시행하였으니 아브넬이 가서 그의 남편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취하여 올 때, 16절에서 그의 남편 발디엘이 울며 바후림(베냐민의 한 성읍, 예루살렘의 남쪽 5㎞쯤)까지 따라오다가 아브넬이 “돌아가라” 하여 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미갈을 다윗의 승인 없이 타인에게 준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5. 아브넬이 통일의 뜻을 모음(17~21절)

1) 17~18절에서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임금 삼도록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하나님이 이미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고, 또 19절에서는 같은 뜻으로 베냐민 사람들에게 말한 후 “온 집이 이 사실에 대하여 선히 여기는 뜻을 다윗에게 고하려고 헤브론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2) 20~21절에서는 아브넬이 종자 20인과 더불어 다윗을 만난즉 다윗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에 아브넬이 말하기를 “자신이 모든 백성을 모아 더불어 언약(대관식 언약)하게 하고 다윗이 원하는 대로 다스리게 할 것이라” 한즉, 다윗이 허락하여 아브넬은 (대관식 준비차) 평안히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과목을 기대하십시오.

제 4 과 아브넬의 죽음 (삼하 3:22~39) 목록으로


① 22~27절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이요, ② 28~29절은 “다윗이 요압을 저주함”이고, ③ 30~35절은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함”이며, ④ 36~39절은 “백성이 다윗을 기뻐함”입니다.

1.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22~27절)

1) 22~23절에서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늘 이방족과의 싸움이 있었음)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고 평안히 갔다는 소식을 듣고, 24~25절에서 왕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신 일입니까 아브넬이 왕에게 왔는데 왜 평안히 가게 하셨습니까 그는 왕을 속이러 온 자입니다 왕의 출입하는 것과 모든 것을 알고자 함입니다” 하면서 다윗의 한 일을 마땅치 않게 지적한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자기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때부터 그를 적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며, 다윗과의 인적 관계(다윗의 누이의 아들) 및 군대장관을 빙자하여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음이 이스보셋왕 앞에 아브넬 같은 입장과 비슷한 점을 짐작하게 합니다.

2) 26절에서 요압은 다윗과의 대화를 끝내고 나와서 (다윗의 허락도 없이)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는데, 시라 우물(sirah, 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움, 현재 “아인사라”라 함)가에서 저를 만나 다시 헤브론으로 데리고(유인한 듯) 왔는데, “다윗은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7절에서 요압은 “다시 돌아온 아브넬을 만나 종용히 말할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성문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가 자기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한을 갚는 뜻으로 동생 아비새와 함께(30절) 그의 배를 찔러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요압이 원수를 갚은 사실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것이었고(롬 12:19, 신 32:35), 따라서 전국 통일의 기회도 상당기간 지연 시킨 일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자신의 왕적 실권이 약한 것을 탄식하며 괴로워 하였습니다(39절).

2. 다윗이 요압을 저주함(28~29절)

1) 28절에서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다”는 사실을 그 후에 듣고 “나는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영원히 무죄하다”고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계교로 아브넬을 죽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오해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27절). 그리고 29절에서 “그 죄가 요압의 머리(요압이 주체적으로 한 일이므로)와 그 아비의 온 집(집안을 저주한 것)으로 돌아갈찌어다” 하였으니, 그 죄의 값은 요압 자신과 요압을 출생시킨 집안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영어성경은 임질로 번역함)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라” 하였으니, 이는 귀한 인재를 잃음으로 몹시 분함을 나타낸 결과입니다. 요압은 다윗 생전에 버거운 인물로 남았다가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상 2:28~34).

2) 31~32절은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아브넬의 죽음을 크게 애통하며 헤브론에 장사하였고, 33~34절에서는 애가를 지었으니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않았고 네 발이 착고에 채이지 않았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자신을 미련하게 방심하여 죽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3) 35절에서 “석양에 뭇 백성이 나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였으나 다윗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해지기 전에 음식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 하며 거절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아브넬의 죽음을 그만큼 애석하게 여긴 뜻입니다.

4. 백성이 다윗을 기뻐함(36~39절)

1) 36절에서 “온 백성이 다윗을 기뻐하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기뻐하였은즉 그만큼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37절에서는 “이날에야(아브넬을 장사지낸 날, 32절)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다윗이 지시한 바가 아님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넬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윗은 큰 손실을 본 것이 화합과 통일을 속히 주선할 자를 잃은 것이고, 요압을 견제할 인물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2) 38절에서 “왕은 그 신복(요압과 아마샤로 여겨짐)에게 이르기를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아브넬이 유다지파를 제외한 전체 이스라엘의 중심인물임을 부각시킨 것이요, 또 39절에서는 “내가 기름부음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요압과 아비새)을 제어하기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찌라” 하므로 왕권이 허약함을 탄식하였고, 왕권에 도전하는 악행자에 대하여 하나님이 통제하시고 갚으실 것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요압과 아마샤가 없는 곳에서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제 5 과 사울 왕가의 몰락 (삼하 4:1~12) 목록으로


본문의 ① 1~4절은 “사울 왕가의 남은 자들”이고, ② 5~7절은 “이스보셋의 죽음”이요, ③ 8~12절은 “두 군장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총 제목은 “사울 왕가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사울 왕가의 남은 자들(1~4절)

1) 1절에서 “이스보셋은 사울의 군장(삼하 2:8)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손맥이 풀렸고(힘을 잃은 뜻) 온 이스라엘(백성들)도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왕을 멸시하였어도 그는 나라의 방패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보셋이 낙심한 것이고 백성들도 그러하였습니다.

2) 2절에서 “이스보셋에게 두 군장이 있으니 베냐민족속 브에롯(기브온 남쪽 4㎞쯤의 성읍, 수 9:17) 사람 림몬의 아들들로 바아나와 레갑이라” 하였고, 3절에서는 “그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브에롯에서 10시 방향 25㎞쯤)으로 도망하여 오늘날까지 우거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 지역에 이방족의 습격이 자주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4절에서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이 있는 것을 소개하였는데, 그가 절뚝발이가 된 이유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이스르엘에서 듣고 그 유모가 급히 도망하면서 다섯 살된 므비보셋을 떨어뜨리므로 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울 왕가의 남은 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왕과 그를 호위하는 두 군장과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말씀한 것입니다.

2. 이스보셋의 죽음(5~7절)

1) 5~6절에서 (위에서 소개한) 이스보셋의 두 군장은 볕이 쬘 때 즈음(더운 낮을 으미함)에 이스보셋왕이 집에서 낮잠 자는 것을 보고 밀을 가지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으니, 이는 자신들이 왕 죽인 것을 숨기려 함이었을 것입니다.

2) 그 다음 또 7절에서는 같은 행동을 말씀하면서 그때는 “찔러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하였으니, 그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따라서 “도망하였다”는 것은 전체 행동의 서론격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아나와 레갑 두 형제는 이스보셋왕의 군장으로 있으면서 사울 왕가의 몰락을 예견하고 다윗에게 귀순할 것을 결심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공을 세워서 다윗왕 앞에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니 자기의 왕에 대한 배신이 뚜렷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왕은 왕된지 2년만에 그렇게 죽었습니다(2:10).

3. 두 장군의 죽음(8~12절)

1)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진 두 사람은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왔으니 기브온에서 아라바 광야까지는 동남쪽 15㎞쯤이고, 아라바 광야에서 헤브론까지는 서남쪽 45㎞쯤 된즉 도합 70㎞쯤을 행군한 것인데 남쪽으로 직접 오지 못한 이유는 중간에 여부스(예루살렘) 고원지대가 있기 때문에 평원으로 돌아 행한 것 같습니다.

2) 8절에서 그들은 다윗에게 와서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기를 “왕의 생명을 해하려던 원수 사울의 아들의 머리를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우리 주(다윗)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신 것입니다”라고 하였을 때, 다윗은 9~10절에서 말하기를 “내 생명을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전에 사울이 죽은 소식을 좋은 일로 여겨 전달한 자도 그를 시글락에서 죽여 갚음을 삼았거든 (11절에서)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침상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너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을 것이라” 하고 12절에서 소년들에게 명하여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무덤에(3:32)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일과 의인 죽이는 일을 극히 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사울 왕가에 남은 남자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뿐이 된 것입니다.

제 6 과 다윗이 전국의 왕이 됨 (삼하 5:1~2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부분적으로 구별하면 ① 1~5절은 “다윗이 전국의 왕이 됨”이고, ② 6~10절은 “시온성을 빼앗음”이요, ③ 11~12절은 “두로왕의 봉사”이며, ④ 13~16절은 “다윗의 자녀들”이고, ⑤ 17~25절은 “블레셋을 두 차례 물리침”입니다. 이 내용의 중요한 것은 “다윗이 전국의 왕이 된 사실”이기 때문에 대표로 총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다윗이 전국의 왕이 됨(1~5절)

1) 1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모든 지파의 대표 장로들)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왕에게 나와 “우리는 왕의 골육입니다” 하였으니, 여기의 골육이란 한 조상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도 한 조상, 야곱도 한 조상입니다. 2절에서는 “전에 사울왕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사울왕 때에 블레셋의 침략으로 선민이 출입조차 못하였으나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므로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음을 뜻한 말이요, 또 “하나님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다윗이) 내 백성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는데, 이 내용이 사무엘상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삼상 16:1, 12~13) 대상 17:6~7에는 “목자를 삼고 주권자로 세웠다” 하신 말씀이 있은즉 다윗에게 기름 부으실 당시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히 그런 말씀을 하신 줄 압니다.

2) 3절은 통일 왕국의 왕으로 대관식을 이행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모든 장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하나님과 왕과 백성간의 서약) 저희(원로 대표자들)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첫 번째는 예언적 기름부음이었고(삼상 16:13), 두 번째는 유다왕 되는 기름부음(삼하 2:4)이며, 이번에는 이스라엘 전체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입니다. 이 기름부음의 뜻은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로 역사하심과 동시에 왕된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3) 4~5절은 “다윗이 30세에 왕 되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재위 기간은 40년 6개월입니다.

2. 시온성을 빼앗음(6~10절)

1) 가나안 정복의 꿈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다윗 시대에도 계속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6절의 “왕과 그 종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여부스는 가나안의 아들로 여부스족의 조상임, 창 10:13, 15:21, 따라서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이름임)을 치려한즉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예루살렘이 높은 지역에 있는 요새지란 점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러나 7절에서 “다윗은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시온(봉오리란 뜻) 산성이란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그 산이 동남쪽 기드론 골짜기를 이루면서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애칭하는 뜻으로 활용되었고, “그 성이 곧 다윗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성을 빼앗을 때 “누구든지 수구(굴로 된 물 통로)로 들어가서 다윗이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여 여부스인들의 수모적 발언(5:6)에 응징하는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소경과 절뚝발이는 내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3) 9절에서 “다윗은 그 산성(산 위의 도성 예루살렘)에 거하여 (그곳을) 다윗성이라 하였고, 밀로(토성을 의미하고 다윗성 북쪽에 동서로 건립되었으나 솔로몬 성전이 밀로성 북쪽에 건립되므로 이 성은 도성 중간 경계가 되었음)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4)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모든 성도들에게도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3. 두로왕의 봉사(11~12절)

1) 11절은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궁궐)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두로국은 지중해변 호미곶(가멜산)에서 50㎞쯤 북쪽에 두로 항구를 중심으로 한 나라요, 옛 베니게 영토이고 여호수아 시대에 아셀지파에게 분정된 땅이지만(수 19:29, 삿 1:31~32) 점령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리고 두로왕 히람이 대하 2:3에서는 후람으로 되어있으나 같은 사람을 옛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두로왕이 다윗왕국을 도와 다윗궁을 짓는데 크게 봉사를 한 것인데,

2) 이는 12절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 하므로 이런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임을 다윗이 알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면서 도움의 손길까지 예상외의 일로 나타난다는 것을 체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의 섭리적 도움을 체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시므로 큰 행복을 느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4. 다윗의 자녀들(13~16절)

이 말씀에서는 다윗이 왕된지 7년 반 후에 예루살렘에 와서 얻은 처첩과 아들, 딸을 말씀하신 중 아들의 이름만 열거하였습니다. 그 이름들은 삼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 입할, 엘리수아,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 엘랴다, 엘리벨렛(11명)입니다. 대상 3:2~9을 꼭 살펴보십시오. 거기에는 이름이 다르게 표기된 것과 추가된 것과 어머니에 대한 분별까지 기록되었은즉 더 자세합니다. 이름이 다른 것은 발음상 차이 또는 별명일 수 있습니다. 특히 삼무아(시므아, 대상 3:5), 소밥, 나단, 솔로몬은 밧수아(밧세바, 삼하 11:3)에게서 낳은 아들들인데, 왕이 되었고, 또 마태복음 1장의 족보계열이며, 나단은 누가복음 4장에 나타난 양자족보의 계열이 된 것입니다.

5. 블레셋을 두 차례 물리침(17~25절)

1) 17절 말씀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의 왕된 사실(이스라엘 왕)을 알고 다윗을 찾아 없애기 위하여 다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온즉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대응하기 위하여 요해처(방어작전 지역)로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요해처가 어딘가에 대하여 23:13~14에 근거 아둘람 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또 수 15:8에 근거하여 벤힌놈의 골짜기(르바임 골짜기 북편 끝)로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 요해처에서 블레셋을 1차로 격파하고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돌파의 소유자란 뜻, 물을 흩음같이 적을 격파한 의미로 호칭한 것)으로 칭하였으니, 여기에는 지도상으로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18절에서 다윗이 요해처에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하였다” 하였으니, 이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곳의 넓고 기름진 평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수 15:8, 18:16) 본문에서는 골짜기를 말씀하였으므로 삼상 23:13, 대상 11:15을 근거로 아둘람 굴 맞은편쯤 되는 곳을 의미할 줄 압니다.

3) 이 전쟁이 있을 당시에 19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 여쭈었으니, 이는 제사장을 통하여 우림과 두밈법을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공격)”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실 것입니까?(승리)” 하는 것이었는데, 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전쟁 승패의 결과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심판과 축복섭리 포함)과 정의에 입각한 전쟁에 승리를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4) 20~21절에서는 다윗이 저희를 치되 하나님이 물을 흩음같이 치게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17절에서 설명)이라 하였는데, 이때에 적들은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이 그것들을 치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1차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였는데,

5) 22절에서 “블레셋이 같은 르바임 골짜기에 또 올라와 편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이 또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은 23~24절에서 “앞으로 올라가지 말고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정보수집, 적이 가까이 온 걸음소리 전달을 뜻함) 곧 동작하라 그때에 여호와께서 네 앞서 나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시므로 25절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렀다” 하시므로 2차 전쟁에도 승리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해하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방법과 게바와 게셀의 지리적 관계입니다. 본래 계시는 하나님이 영감의 말씀으로 자세히 주시기도 하지만(민 12:8) 그런 것은 선지자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다윗도 선지자처럼 쓰임을 안 받은 것은 아니지만(시 22:1, 16:10) 본래 무인들에게는 작전상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 작전 방법을 하나님께 여쭈어 우림과 두밈법으로 가부를 알게 하시는 계시의 방법도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24절에서 “여호와께서 네 앞서 나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셨는데, 이것은 천사의 역할이나 이적으로 치실 수도 있고, 또는 다윗의 군사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적을 약하게 하셔서 패하게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바”는 베냐민지파에 속한 지역이고(수 18:24), 예루살렘 북쪽 9㎞쯤, 믹마스 서남쪽 3㎞쯤 되니까 게바에서 게셀까지는 서쪽으로 약 25㎞쯤 됩니다. 여기의 지명을 실핀 것은 전쟁의 상황을 지도상으로 찍어보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연구한 풀빛주석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결정적 교훈은 성경을 자세히 살피는 노력과 전쟁 승리의 축복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제 7 과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김 (삼하 6:1~23) 목록으로


본문 ① 1~5절은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옴”이고, ② 6~11절은 “웃사의 죽음”이며, ③ 12~19절은 “법궤를 다시 옮김”이요, ④ 20~23절은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김”입니다. 전체의 제목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김”입니다.

1.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옴(1~5절)

1)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읍하였은즉 하나님의 법궤를 왕도로 옮기려 한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성소를 사모하였으나 쫓기며 전쟁하는 바람에 성소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시 23:6, 84:10). 그러면 그 전에는 법궤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법궤는 블레셋에서 돌려받은 후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법궤 관리자로) 구별하여 세웠습니다(삼상 6:21, 7:1~2). “기럇여아림”은 유다지파에 분정된 땅으로(수 9:17, 15:9) 수 15:60절에서는 “기럇바알”이라 하였고, 본문 2절에서는 “바알레유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인들의 남신으로 “주 또는 소유자”란 뜻이라고 합니다. 기럇여아림에 하나님의 법궤가 보관되자 유다의 주란 뜻으로 그런 지명이 생긴줄 압니다.

2) 1절에서 “다윗은 무리 3만명을 뽑아 모으고 그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였고,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법궤 양편에 그룹이란 천사 모양의 조각이 새겨 있음을 뜻함)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일컫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3만명이나 동원한 것은 국가의 큰 행사로 성취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2절에서 “메어오려 하던 것이 새 수레에 싣는 것으로 변동”이 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고핫의 자손들이 없었거나(민 4:15) 행사를 크게 보이기 위함이었거나 인본주의적 또는 블레셋 이방인들의 관행을 분별없이 모방하였거나…여하튼 성경대로 운반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곧 말씀(하나님의 뜻) 본위에서 인간본위로 움직이는 타락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으며”, 4절에서는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때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였고”, 5절에서 “다윗과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수금은 거문고의 일종으로 harp라 하고, 비파는 둥근 몸체에 자루는 곧고 네 줄, 네 기둥이 있으며 lute라 하고, 양금은 harp의 일종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바탕에 놋쇠 현이 있는 것이라 하며, 제금은 타악기의 일종으로 cymbals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여호와 앞에서 주악을 했다” 함은 법궤 행열 앞에서 하나님께 연주한 것을 뜻할 것입니다.

2. 웃사의 죽음(6~11절)

1) 6절에서 “저희가(법궤를 운반하는 모든 일행)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몇 마리란 명시가 없음)이 뛰므로(원문의 뜻은 비틀거림이라 함)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 하였고, 7절에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사 저를 치시니 웃사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곤의 타작마당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타작마당은 길 보다는 평평했으리라 추측되고, 웃사의 잘못이라면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뿐인데 궤를 붙드는 일은 벱궤를 수레에 실을 때도 붙들어 옮겼을 것입니다. 웃사가 혹 고핫의 자손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법궤를 운반한 방법부터 계명을 어긴 것인즉(민 4:15) 하나님이 그 전체적 실수를 응징하신 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꼭 “웃사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그가 법궤운반의 성경적 책임자로서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과(민 4:15,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게 하지 않은 것) 신성한 법궤를 함부로 붙든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분명하고 예민하게 지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수 1:7).

2) 그리하여 8절에서 “하나님이 웃사를 충돌(공동번역은 진노하여 치셨다 하였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마음에 상처를 받은 뜻) 그곳을 베레스웃사(웃사를 치심)라 하여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9~10절에서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성으로 옮겨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가드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가드사람 오벳에돔이 다윗이 피신했던 블레셋 성읍을 의미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삼상 17:4, 21:10).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방사람의 집에 법궤를 맡긴 결과가 된즉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의 “가드”는 블레셋 성읍 가드가 아니고 단지파 지경에 속한 레위인 성읍 가드림몬(수 19:45, 21:24)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블레셋 성읍 가드는 다윗이 피난 갔던 곳으로(삼상 21:10, 27:2~7) 기럇여아림에서 8시 방향 25㎞쯤에 있고, 가드림몬은 기럇여아림에서 서북향 35㎞쯤(욥바에서 1시 방향 6㎞쯤)에 있으며, 또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은 4시 방향 14㎞쯤 됩니다. 또 얼마쯤 오다가 불상사가 생긴 것을 감안 할 때 거리변동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 지역의 가드(삼상 21:10)가 다윗의 점령지가 되었다면 가장 가까운 곳일 수도 있고, 또 오벳에돔이 가드사람(가드림몬)으로서 웃사가 죽은 타작마당 지역에 거주하였을 수도 있은즉 연구 할 문제입니다.

3) 11절에서 “여호와의 궤가 가드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 하셨으니, 그는 법궤를 보관한 일로 복을 받은 줄 압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물(특히 교회 재정)만 취급해도 복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는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법궤를 다시 옮김(12~19절)

1) 12절에서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이 하나님의 법궤 보관으로 인하여 소유(재물)에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성(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하였으니, 이 뜻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고핫 자손들로 하여금 메고 올라가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대상 15:26).

2) 13~15절은 법궤를 운반한 상태를 설명하신 말씀으로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였을 때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여섯 걸음의 의미는 알기 어려우나 제사는 화목제로 하나님께 올렸을 것으로 추정됨, 19절),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뜻) 춤을 추었는데 그때에 베 에봇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베 에봇은 삼상 2:18에 어린 사무엘이 입은 것과 같은 의복의 성격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예복처럼 입는 의복이란 뜻입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은 재료와 격식이 다릅니다(출 28:6~8). 그리고 온 족속들도 즐거이 부르며(특별한 찬양노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삼상 25:32, 시 122:1~9, 126:2~3) 들어온 것입니다(대상 15:25~29).

3) 16절에서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미갈이 다윗의 춤추는 것을 보고 왕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일로 여겨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즐거워 한 일은 종교적 또는 신앙적 행사로서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면 미갈이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나 신앙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즉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다음 대지를 참고 하십시오).

4) 17~19절은 “무사히 법궤를 지정된 장소에 안착시킨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왕이 백성들에게 축복한 후 잔치를 하여 백성들로 음식을 먹게 한 내용”입니다. 이때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미리 성소 장막을 예비 하였었고, 그 장막 지성소에 법궤를 안치 하였을 것이며, 새로 건립된 성소의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을 것이요,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축복하였고,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누어 주는 잔치를 하매 백성들이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4.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김(20~23절)

1) 20절에서 다윗이 법궤 운반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에게 축복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울의 딸(조강지처)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 몸을 드러내셨다” 하였으니, 국문상으로 표현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 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라고 하였으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미갈이 “왕의 몸 드러낸 것과 춤추는 꼴을 언짢게 보고 지적하여 비난한 상태”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2) 21절에서 이때에 다윗은 미갈에게 대답하기를 “이는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 저(하나님)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사울의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여 나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여) 뛰는 것이라” 하므로 다윗의 그 행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요 감사와 기쁨의 표출임을 말하였고, 또 22절에서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이보다 더 경망히 굴 것이요 그대는 천하게 보겠지만 지금 말한 그 여편네들은 나를 더울 우러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다윗이 하나님을 즐거워 함으로 춤춘 일에 사람의 비난거리가 되어도 상관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 천해지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할 것이요 그 일로 나를 업신여긴 여인들이 있다하더라도 나중에(깨달을 때) 그들은 나를 존경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22절에서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기 보다는 다윗의 사랑을 적게 받으므로 동침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다윗은 미갈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사랑은 존경하고 이해하는 대상끼리 좋아집니다. 성도는 부부간의 사랑의 불을 끄지 않도록 노력하고 특히 서로 업신여기는 마음을 삼가야 할 줄 압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왕궁도 짓고 하나님의 법궤도 장막집이나마 왕도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성소에서 일한 제사장은 놉에서 살아남은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과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있었을 것이고(삼상 22:20, 삼하 8:17), 6:3의 아비나답과 그의 아들 (웃사와) 아효는 오벳에돔의 집에서 임시로 세운 법궤보관의 책임자로 짐작됩니다.

제 8 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 (삼하 7:1~29) 목록으로


본문 ① 1~3절은 “다윗의 성전 건축의 뜻”이요, ② 4~17절은 “나단에게 주신 말씀”이며, ③ 18~29절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해석은 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다윗에게 주신 약속”으로 정한 것입니다.

1. 다윗의 성경 건축의 뜻(1~3절)

1) 1~2절은 “하나님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다” 한즉, 3절에서 나단이 왕께 고하기를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시라”고 하였습니다.

2) 이상의 말씀에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국에 평안히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다윗이 자신은 궁궐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궤를 휘장 가운데 둔 사실을 민망히 여긴 점”과 또 “나단 선지자의 뜻이 다윗과 같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대적을 파하시고 시험을 이기게 하시며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또 한번 의식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혜택과 하나님의 권속들이 누리는 혜택도 비교하십시오. 선지자도 사람인즉 하나님의 뜻과 다른 뜻을 말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깊이 살피는 일이 중요함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나단에게 주신 말씀(4~17절)

1) 4~5절에서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다윗에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하셨으니, 이는 다윗의 뜻을 가상히 여기신다는 뜻이요,

2) 6절은 “하나님이 선민을 출애굽 시킨 때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시지 않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셨다” 하셨으니, 그 기간은 약447년간 입니다. 출애굽 연도를 주전 1449년 쯤으로, 또 다윗이 10년쯤 왕노릇 한 때(주전 1002년, 기독교신앙백과, 272P참조)로 계산하면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을 생각하시면서(마 8:20) 하나님의 장막을 연상하십시오.

3) 7절에서는 하나님은 “무릇 어느 지파에게도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한(그러한 명령도 하신 일이 없음)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일 있었느냐”고 반문하셨으니, 그런 일이 없으셨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4) 8절에서 또 “다윗에게 말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의 주권자를 삼고”, 9절에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계셨으며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셨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처럼 네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줄 것이요”, 또 10절에서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신 뜻) 저희로 자기 곳(소유를 삼게 하신 뜻)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셨고”, 또 11절에서 “사사를 통하여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시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고 또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며(국권을 견고히 하심)”, 12절에서 “네가 수한이 차서 네 조상과 함께 잘 때에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요”, 13절에서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성전)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하신 이 말씀(16절)은 세상왕국을 영원한 천국으로 비유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님이 영원한 왕국의 주가 되실 것을 약속해 주신 뜻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국이 교회, 즉 성도의 나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5) 14절에서 “나는 그(다윗의 계승자 솔로몬)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내게 범죄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사람을 징계 도구로 쓰심)으로 징계하려니와 사울처럼 폐하여 은총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 또 15절에서 “네 집(왕실)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선민국이 성도의 세계로 전환됨) 네 위(다윗을 메시야 모형으로 말씀하신 것)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시므로 나단이 이 말씀을 “사실대로 다윗에게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 허락 대신에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13, 16절).

3. 다윗의 기도(18~29절)

앞 대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에게 과거의 은총과 현재의 은총, 그리고 후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시며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은총과 메시야 왕국까지 영원히 주실 것을 약속한 사실인데 여기에 대하여 다윗이 기도로 아뢰기를 깊은 감사와 함께 주의 뜻이 이루어져서 영원히 복 받게 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1) 18절에서는 다윗이 여호와 앞(성소에 접근한 뜻)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하기를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여기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축복이 과대함을 뜻함)”, 19절에서 “주께서 오히려 이것(지금까지 베푸신 은혜들)을 적게 여기시고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메시야 왕국)을 말씀하셨사오니 이것이 어찌 인간의 규례이겠습니까(사람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은총이란 뜻)”, 20~21절에서 “주 여호와는 종을 아시오니 제가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작정하신 섭리)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신 것이니이다”, 22절에서 “주는 광대하시니(우주와 역사를 포괄 통치하시는 분이란 뜻) 이는 우리가 들은대로 주와 같으신 이가 없고(하나님은 절대자이시라는 뜻) 주 외에는 참신이 없음입니다” 하므로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과 광대성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2) 23~24절은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 선민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하며 감사의 뜻을 말하였으니, 곧 “땅의 어느 나라가 주의 백성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애굽에) 가셔서 구속(해방시킨 뜻)하사 (이스라엘족으로) 자기 백성을 삼으셨고 주의 명성을 나타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출애굽 사건을 뜻함)을, 주의 땅(가나안 입국)을 위하여 두려운 일(가나안 입국시의 이적들)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이방 종교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 백성 앞에서 행하셨으며, 또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으니(이는 영생의 은혜를 염두에 둔 말씀임)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 25~26절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드렸으니, “하나님이여 주의 종과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성취의 뜻)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시고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케 하소서” 하였으며,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다” 하므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추어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냈습니다. 무조건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기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도 하나님의 뜻을 알 때 생기는 줄 압니다.

4) 28~29절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하였으니,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절대자)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성전 건립 대신 주신 메시야 왕국의 은혜)을 주셨으니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므로 약속에 대한 실천이 말씀 언약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주신 메시야 왕국의 약속입니다. 이는 구약의 선민의 역사가 다윗의 자손(마 1:1)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다윗의 감사와 겸손과 기도의 성실함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9 과 이방 정복과 요직 임명 (삼하 8:1~18) 목록으로


본문의 1~14절은 “다윗의 이방 정복에 대한 말씀”이고, 15~18절은 “다윗의 정부 조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이방 정복과 요직 임명”이라 하였고, 대지를 나누면 ① 1~6, 13~14절은 “정복한 나라들”이요, ② 7~12절은 “전리품 처리”이며, ③ 15~18절은 “정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정복한 나라들(1~6, 13~14절)

1) 1절에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을 받고 그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고 하였습니다. 블레셋족은 가드와 가사쪽에 많이 살지만 빼앗은 지역을 알기 어려우나 같은 역사를 기록한 대상 8:1~2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았다” 하였은즉 그 당시 세력 있는 나라를 정복한 것입니다. “메덱암마”란 뜻은 “모성의 굴레”란 뜻으로 가드가 모성(母性)이면 그 주위 성읍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대상 18:1).

2) 2절에서 “다윗이 또 모압(사해동편, 창 19:30~37, 신 23:4~6, 민 21:21~30, 32:1~5, 수 13:15~28)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려서 저희로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두 줄 길이, 한 줄 길이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떤 주석에 본즉 “한 줄 길이”는 한 충만한 줄, 다시 말하면 긴 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줄 세워 엎드리게 한 후 두 줄 길이에 있는 사람은 죽이고 한 충만한 줄에 엎드린 자들을 살린 것은 긍휼을 베풀어 많이 살린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많이 연구하던 중 이 사실은 포로들을 처치함에 있어서 강한 자들을 없애고 약한 자를 남기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엎드린 포로들로 하여금 두 줄 안으로 들어가야 희망이 있다 하였을 때 힘겨루기를 통해서 강한 자들이 그곳을 점유하고 약한 자는 그 안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에 강한 자들을 죽이고 약한 자들을 살려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주석을 보면 “엎드리게 했다”는 원문 “사카”가 “눕게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줄 길이 즉 키가 큰 사람(장대한 자)을 죽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3~4절에서 “소바왕 하닷에셀(르홉의 아들)이 자기의 권세를 회복하려고(잃은 영토를 찾기 위하여) 유프라데 강으로 갈 때 다윗이 그들을 쳐서 마병 1,700과 보병 2만을 사로 잡았는데 병거 일백승만 남기고(사용가치 있는 것만 분별한 것) 그 이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다” 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말로 하여금 전쟁용도에는 못 쓰게 한 것입니다. 이 소바 지역은 다메섹(갈릴리 바다 북변에서 1시 방향 75㎞쯤)과 하맛(다메섹에서 북쪽 165㎞쯤) 중간에 있는 나라인데 예루살렘에서는 320㎞쯤 북쪽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유프라데 강은 동쪽 320㎞쯤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나 소바왕이 다 원정을 나선 것인데 소바국이 다윗에게 패한 것입니다.

4) 5~6절은 “다메섹 아람 사람들(아람 사람들이 다메섹을 중심도시로 한 것)이 소바왕 하닷에셀의 원정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사람 22,000명을 죽이고 다메섹 아람을 지키는 수비대를 둔즉 아람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모압, 소바, 아람을 정복한 것이요,

5) 13~14절은 “다윗이 염곡(사해남부, 소금 골짜기란 뜻)에서 에돔사람(에돔은 에서의 별명, 창 25:25, 또 사해남부 세일산 지역을 의미함) 18,000을 죽이고 돌아와 명예를 얻었다” 하였고, 또 “에돔 온 지역에 수비대를 두므로 그들이 다윗의 종이 되었고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통케 하시는 은혜가 계속된 것입니다.

2. 전리품 처리(7~12절)

1) 7절에서 다윗은 “하닷에셀(소바왕)의 신복들이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고”, 또 8절에서는 “하닷에셀의 고을(소바왕도의 고을)인 베다와 베로데에서도 매우 많은 놋을 빼앗았으며”

2) 9~10절에서도 “하맛(다메섹에서 북쪽 165㎞쯤)왕 도이가 다윗이 소바왕 하닷에셀을 쳤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문안, 축복을 하였으니, 이는 도이가 하닷에셀과 전쟁 중에 있었는데 다윗이 하닷에셀을 쳤으므로 은, 금, 놋그릇을 갖고 와서 답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11~12절에서 다윗은 모든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는 성전 건축에 쓰기 위한 준비였습니다(대상 22:3, 14, 18:8, 왕상 7:51, 대하 5:1).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11절) 곧 아람, 모압, 암몬, 블레셋, 아말렉에서 얻은 것들(삼상 27:8~9, 30:1~20)과 또 소바왕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전쟁은 왕국 확장에도 뜻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 건립을 위한 물자 준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하였을 때, 전쟁하는 것마다 이기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므로 복을 주신 것입니다. 대구의 서현교회를 지을 때 한의사 정규만 장로님이 큰 역할을 하셨는데, 그분은 한의사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건축 책임자에게 헤아려 보지도 않고 꺼내주었고, 그 당시에 환자들이 밀려들어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경우로도 복을 주신 것입니다.

3. 정부 조직(15~18절)

1) 15절에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으니” 이는 공평하고 의롭게 재판을 잘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의롭도록 정치를 잘 하였다는 뜻입니다. 시 101:6에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16~17절에서 스루야의 아들(누이의 아들) 요압은 군대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궁중역사 기록자)이 되며,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아히둡의 손자요 아히멜렉의 아들임, 삼상 22:9~10, 20, 피하여 다윗에게 간 사람)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왕궁의 서기, 율법도 연구함, 대하 34:13, 스 7:6~10)이 되며, 여호야다(아론의 집 족장, 대상 12:27)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사람(삼하 20:7, 15, 22~23, 왕상 1:38~39, 지도상 확인불가)과 블렛사람(왕상 1:38~39, 지도상 확인불가)을 관할하였으니, 이는 그 지역의 지방장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렛과 블렛은 블레셋 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라는 주석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로서 다윗에게 전향하여 충성한 족속으로 이해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아들들(5:14~16)은 대신(장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정부 조직은 극히 일부분일 것입니다(대상 18:1~17 참조).

제 10 과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품 (삼하 9:1~13) 목록으로


본문 ① 1~4절은 “사울의 집의 남은 자”요, ② 5~8절은 “므비보셋을 데려옴”이며, ③ 9~13절은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혜”입니다. 전체의 제목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품”입니다.

1. 사울의 집의 남은 자(1~4절)

1) 1절에서 “다윗이 사울의 집의 남은 자를 찾았으니 이는 요나단을 인하여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는 형제적 우애와 신의로 결속된 사이였고,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서로 축복하였으며, 특히 요나단은 자기의 집(후손들)을 위하여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삼상 18:3, 20:8, 15~16, 42, 23:18). 다윗은 신의의 사람인고로 그 은혜와 약속을 성실히 보답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배신하였지만(삼상 19:6, 24:16~22) 다윗은 배신자라도 그가 왕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았고 나발과 그일라 거민으로부터도 배신당한 일이 있었으나(삼상 23:12, 25:15)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2) 2절에서는 다윗이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 알아보았고, 3절에서 “남은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리라” 하였으며, 시바가 고하기를 “남은 자는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므비보셋)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왕이 “그가 어디 있느냐” 한즉 “로드발(갈릴리바다 남쪽 15㎞쯤에서 요단강 동편임)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바가 므비보셋을 절뚝발이라 한 것은 그를 쓸모없는 자로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나 다윗의 뜻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또 3절에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푼다” 하였으니, 다윗은 결코 자기의 것으로 주는 것처럼 나타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아는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9:14). 이런 사상은 세례요한과 바울사도도 그러하였습니다(요 3:27, 고전 4:7).

2. 므비보셋을 데려옴(5~8절)

1) 5절에서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려 왔고, 6절에서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왕께 절하며 자신은 주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2) 7절에서 다윗은 “므비보셋이여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주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 것이라” 한즉, 8절에서 저가 절하며 말하기를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은 불구자라도 상황파악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아이였습니다.

3.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혜(9~13절)

1) (7절에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9~10절에서 왕은 사울의 사환이었던 시바에게 명하기를 “사울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사울과 요나단)의 아들을 공궤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므로서 요나단에 대한 신의를 성실히 지킨 것입니다. 시바는 사울의 사환이라도 “아들이 15명이요 종이 20명이라” 하였으니, 사울이 몰락한 사이에 므비보셋을 내쫓고 사울의 가업을 자신이 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삼하 19:24~30).

2) 11절에서 “시바는 왕명을 준행 하겠다 하였고 미비보셋은 왕자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12~13절에서 므비보셋에게 “미가”란 젊은 아들이 있었고(이 기록이 상당한 시일 후에 기록된 뜻), “시바의 집에 거한 자들은 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었으며 므비보셋은 항상 예루살렘에 거하였으니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설같은 감동을 줍니다.

제 11 과 암몬과의 싸움 (삼하 10:1~19) 목록으로


본문 ① 1~5절은 “암몬과의 불화동기”요, ② 6~14절은 “암몬의 패배”이며, ③ 15~19절은 “2차 대결에도 승리함”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암몬과의 싸움”입니다.

1. 암몬과의 불화동기(1~5절)

1) 1~2절은 “암몬자손의 왕(나하스)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 되었을 때에 다윗이 죽은 암몬왕 나하스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이 사실에 대한 것은 설교보충 6. “아마사의 혈육관계”란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그 은혜를 받은 것처럼 그의 아들 하눈에게 갚기 위하여 신복들을 보내어 하눈의 죽음을 조상하라”고 하였습니다. 암몬은 모압 북편지역에 있고(창 19:38, 삼상 11:2), 은혜를 기억하며 보답하는 일에 성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2) 그런데 다윗의 조문 사절들이 암몬 땅에 이르렀을 때, 3절에서 암몬의 방백들은 그들을 순수한 조문객으로 보지 않고 “성을 엿보고 정탐하여 함락시키려는 행위”로 취급하고 그 사실을 하눈왕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런즉 4절에서 하눈왕은 “그 신복들을 잡아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간(볼기가 나오도록)을 잘라 큰 수치를 주어 돌려보낸즉”, 5절에서 이 사실이 다윗에게 보고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수치를 자기에게 나타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여리고(예루살렘에서 2시 방향으로 20㎞쯤, 암몬 쪽에서 오는 길목임)에서 수염이 자라기까지 머물다 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신하들의 수치스러운 일에 대하여서도 마음을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암몬은 스스로 싸움의 불씨를 심은 셈입니다.

2. 암몬의 패배(6~14절)

1) 6절에서 암몬은 자신들이 다윗의 미움대상이 된 것을 (스스로) 알고, 전쟁을 예비함에 있어서 이웃의 병력을 청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사자들을 벧르홉 아람사람과 소바 아람사람에게 보내어 보병 2만과 또 마아가왕의 군사 1천과 돕사람 1만2천을 고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용이란 것은 의리상의 지원이 아닌 군사비용을 주고 병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벧르홉 아람과 소바 아람은 아람에 인접된 것을 나타낸 것으로 “벧르홉 아람”은 아람 서쪽에 인접된 지역이고, 아람과 시돈 사이에 있으며 또 단의 북쪽입니다. 따라서 모압과 갓지파 땅의 북쪽에 있는 아람 지역에서는 먼 북쪽 120㎞쯤에서 오게된 것이요, “소바 아람”은 “벧르홉 아람”의 북쪽에 인접된 곳이며, “마아가”는 아람의 남쪽, 단의 서남쪽에 있고, “돕”은 암몬의 북쪽 40㎞쯤에 위치한 곳으로 바산의 남쪽, 길르앗의 동쪽 지역입니다.

2) 7~8절에서 이 사실이 다윗에게 알려지자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어 싸우게 하였고 암몬 자손은 자기들의 성 어귀에 진을 쳤으며 고용된 군사들은 따로 들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요압은 9~12절에서 적이 앞(자기 성읍의 진) 뒤(들에 있는 군사들)에 진친 것을 보고 작전을 짰습니다. 곧 “뺀 무리 중에서 또 정병을 뽑아 아람사람(들의 진)을 대하여 진을 치고 남은 군사는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에게 붙여서 암몬사람(성읍 진)을 대하여 진치게 한 후,

3) 11절에서 적의 강세에 따라 서로돕자 하였고, 12절에서는 (요압의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담대하라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니, 이 작전은 적을 대항하여 싸우되 담대함과 서로 돕는 일과 하나님과 백성을 위하여 싸우는 정신과 하나님의 선히 여기시는 섭리를 ale고 의지하는 방법을 쓴 것입니다.

4) 그리하여 13절에서 “아람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간즉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을 하는 것”입니다. 또 14절에서 “암몬사람(주권국가)은 아람(지원국)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암몬도 전쟁의 승산이 없었고 요압은 성을 진격할 준비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2차 대결에도 승리함(15~19절)

1) 15절에서 “아람사람(고용된 군사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한 후 다시 모였다” 하였고, 또 16절에서는 “소바왕 하닷에셀(삼하 8:3)이…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사람을 불러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른즉 하닷에셀의 군대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렸더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2차 전쟁은 소바왕이 주동자가 되고 아람은 거기에 합세한 격이 되었으며, “강 건너편”이란 강은 아람과 헬람 사이에 있는 강으로 추정된즉 헬람은 갈릴리바다 동쪽 55㎞쯤에 있고, 아람은 헬람의 북쪽에 인접한 곳으로 갈릴리바다 동북쪽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은 아람 영지에서 갈릴리바다 동북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일 것입니다(현대 지도를 펴 놓고 그 부분의 강을 확인하심이 좋을 듯함).

2) 17절에서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온 이스라엘을 모아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헬람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 110㎞쯤에 위치한즉 요단강을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싸웠으나, 18절에서 “아람이 패하여 도망한즉 다윗이 아람의 병거 700승의 사람과 마병 4만을 죽이고 또 군대장관 소박을 쳐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3) 19절에서 “하닷에셀(소바국)에게 속한 왕들(암몬왕은 확실하고 벧르홉 아람왕과 마아기왕과 돕왕도 협력한 줄로 앎)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아람사람들이 암몬 돕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돕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암몬과 그 연합국들은 결국 패하여 다윗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나 하나님이 다윗을 번영하게 하시려니까 그들을 자승자박의 길로 섭리하여 패하게 하신 줄 압니다.

제 12 과 다윗의 큰 범죄 (삼하 11:1~27) 목록으로


본문 ① 1절은 “암몬과 또 전쟁함”이요, ② 2~5절은 “다윗의 음행”이며, ③ 6~13절은 “범죄 은폐”이고, ④ 14~25절은 “살인과 전세보고”요, ⑤ 26~27절은 “밧세바의 슬픔과 득남”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은 “다윗의 큰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암몬과 또 전쟁함(1절)

“해가 돌아와서(이듬해)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암몬이 계속 복종하지 않고 싸움을 걸어온 때문이요, 이로 인하여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어 암몬과 싸우게 하니 다윗의 군사들이 암몬을 멸하고(전세의 기수를 잡은 뜻) 랍바(암몬의 수도)를 포위하였으며 이때에 다윗은 예루살렘(궁궐)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암몬의 수도 랍바는 사해바다 북변에서 동북쪽 45㎞쯤입니다.

2. 다윗의 음행(2~5절)

1) 2절에서 다윗은 (부하들을 암몬과의 전쟁에 출전시킨 상태에서) “저녁 때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오후에 낮잠을 잤다는 뜻)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고 그 모습이 심히 아름다와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시험을이기려는 성도는 여기서 눈길을 돌리고 다른 집무에 마음을 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조치를 못할 때 더 깊은 시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 3절에서 결국 그 여인의 신분을 알아보게 하였고,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가나안 원주민이 아닐 것이요, 창 10:15, 15:20, 23:16~20, 일정한 지역을 파악하기 어렵고 온 땅에 분포된 헷족속의 거주지에 고향을 둔 것으로 예측함, 수 1:4, 삿 1:26, 영어 성경으로는 창 5:20과 삿 1:26은 Hittites이고, 수 1:4과 본문은 Hittite로 번역되었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 하였습니다.

3) 4절에서 다윗은 사자를 보내어 밧세바를 데려오게 하였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여인에게 경도같은 유출이 있으면 부정하여 동침을 금지시킨 율법이 있는데 이를 깨끗케 하였다는 뜻은 그 유출이 멎을 때까지 또는 부정을 깨끗케 하는 7일간의 기간을 기다린 뜻을 의미함, 레 15:19, 18:19) 동침하고 돌려보냈는데, 5절에서 “여인이 그 일로 잉태한 사실을 다윗에게 알린 것”입니다. 왕이 신하의 아내를 음행한 것은 7계명을 범한 죄가 됩니다. 그것도 전쟁에 나가서 왕을 위해 싸우는 군인의 아내를 범하였으니 왕이라 하더라도 많은 반성과 회개를 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3. 범죄 은폐(6~13절)

1) 6절에서 다윗은 밧세바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하여 그의 남편 우리아를 귀환케 하여 결국 그가 왕 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는 우리아가 와서 아내와 동침하면 그 일로 출생한 아이가 생길 것인즉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하여 음행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죄를 은폐하려는 근성을 성도들은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용감하게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세를 취함이 바르고 치료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2) 다윗은 7~8절에서 휴가 온 우리아에게 전황의 안부를 묻고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였으니, 이 뜻은 “집에 가서 몸을 씻고 휴식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왕궁의 식물을 뒤따라 보냈습니다. 이것은 음식으로 힘을 보충한 후에 정력을 일으켜 아내와 동침하게 하는 기회로 유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문(파수병 있는 곳)에서 왕의 신하들과 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신하들로부터 듣고 우리아를 불러 이유를 물은즉, 10~11절에서 우리아가 고하기를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채(진영을 뜻함)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군대가 머문 뜻)하였거늘 내가 어찌 집으로 가서 내 처와 동침하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않기로 왕의 살아계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이란 왕의 존귀의 불변성을 믿으면서 그 앞에 맹세하였다는 뜻입니다. 맹세의 대상은 불변하고도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3) 그때 다윗은 또 말하기를 12절에서 “너는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였으니 왕궁에 하루 더 있은 후에 부대로 귀대케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아가 하루 더 예루살렘(왕궁)에 유하였는데, 그 이튿날 13절에서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게 하므로 취하게 하였으나 우리아는 그때도 저녁에 나가서 (집으로 가지 않고) 왕의 신복들로 더불어 잤다” 하였으니 결국 취기 중에서라도 맹세를 지키고 아내의 곁으로 가지 않음이 확실해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취중에 집으로 가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나 그리되지 않았으니 우리아의 충성심은 대단하였습니다. 가족과 아내에 대한 인정은 물론 정욕을 이기면서 오직 나라와 왕을 위하여 같은 군인들과 동등한 대우에서도 벗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의 은폐 계획은 이로써 실패한 셈이 되었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은폐 계획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4. 살인과 전세보고(14~25절)

1) 다윗은 결국 우리아를 죽일 결심을 하고 아침이 되었을 때 14~15절에서 요압에게 편지로 보내기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고, 그 내용을 기록한 편지를 우리아를 통하여 보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아가 죽는다면 적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밧세바를 거리낌 없이 취할 수도 있다는 계략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아를 죽게 한 것입니다. 명을 받은 요압은 16~17절에서 “적의 용사들이 있는 줄로 아는 곳에 요압을 두고(맹열히 싸우게 한즉)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과 함께 우리아도 죽게 하였으니” 혼자 죽은 것이 아닌즉 위장이 잘 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2) 다음에 할 일은 다윗에게 우리아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18~19절에서 요압은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황 보고를 하게 할 때 보고를 한 다음 혹이라도 왕이 “어리석게 싸워 부하를 죽였다”고 책망하면 21절에서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20~21절은 다윗이 어리석게 싸웠다는 책망을 할 듯한 내용을 요압이 가상하여 한 말입니다. 왕이 노하여 “왜 성에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여룹베셋(여룹바알의 별명임, 베셋은 보셋(부끄러움)에서 와전된 것으로 바알이름을 부끄럽게 여긴 의도로 표현한 별명이라 함)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 죽인 자가 성에서 맷돌을 던진 일로 그가 데벳스(삿 9:50~54, 아비멜렉이 죽은 성읍)에서 죽지 않았느냐” 하면서 작전의 어리석음을 책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22~24절에서 사자가 전황 보고를 사실대로 하면서 “성에 가까이 나간 자들에게 적이 활을 쏘아 죽였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한즉 다윗은 요압에게 전하는 말로 그 사자에게 말하기를 25절에서 “너는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는 것이다 너는 군사들을 담대하게 하여 더욱 힘써 그 성을 함락시키라” 하므로 오히려 격려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다윗의 음흉한 범죄 수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5. 밧세바의 슬픔과 득남(26~27절)

1) 26절은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호곡(히브리 원문은 호곡에 대하여 여섯 가지 다른 용어로 표기됨, 창 50:10, 출 13:30, 렘 7:29, 렘 9:19, 미 1:10, 본문, 소리 내어 운다는 뜻)하였다” 하였고,

2) 27절에서는 “그 장사를 마친 후 다윗은 저를 궁으로 데려와 처를 삼고 아들을 낳았다” 하였으니 이 기록은 역사의 현장에서 상당기간 후에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들은 나중에 병으로 죽었습니다(삼하 12:14~18).

3)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칭찬 받을 일만 행하다가 결국 방심하여 범죄하고 결국 하나님의 눈에 거슬린바가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계속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다윗을 책망하심 (삼하 12:1~15) 목록으로


12장을 두 번에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본문 ① 1~4절은 “비유로 죄를 지적함”이고, ② 5~6절은 “다윗의 분노와 판단”이며, ③ 7~15절은 “책망과 징벌”입니다. 총 제목은 “다윗을 책망하심”이 적합합니다.

1. 비유로 죄를 지적함(1~4절)

1) 1절에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거나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오늘의 설교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비유로 증언한 이유는 다윗 스스로 자신의 죄가 큰 것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그동안 은폐 수단도 많이 썼은즉 우리아를 죽인 일과 음행도 은밀 세계에서 행한 것이므로 어두운 양심에 사로잡힌다면 직설적 책망에 반항 할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서 나단 선지자는 직설적 책망을 피하여 자아반성에 의한 시인을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지각이 부족한 자나 완악한 자 등에게 깨우치는 효과가 있습니다(마 13:10~13).

2) 1~4절은 비유내용입니다. “한 성에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와 암양 새끼 한 마리를 사서 딸처럼 키우고 그 외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잣집에 어떤 행인이 오자 그가 자기 것을 아끼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자기 집에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으니 (왕은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왕이 아니라도 자신의 일이나 남의 일에 대하여 늘 지혜로운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벌을 주기 위한 판단이 아니고 어느 것이 더 지혜롭고 더 어리석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재판의 주석인 만큼 더욱 판단이 지혜롭고 공의로워야 할 것입니다.

2. 다윗의 분노와 판단(5~6절)

1) 다윗은 그 사람의 잘못한 행위에 대하여 크게 노한 후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이 부분은 노가 과격한 상태에서 형량을 높인 것인데, 범인을 증오한 표현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임) 저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4배로 갚아 주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4배를 말한 것”은 출 22:1을 적용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2)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판단할 때에 자신의 일을 빼는 경우가 있고, 또 남과 자신의 과오에 대한 판단을 격차있게 하는 경우가 있으나 오히려 자신을 더 책망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자세를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7절에서 “당신이 곧 그 사람이라”는 지적을 강하게 한 줄 압니다. 선지자가 그의 범죄 사실을 안 것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시 139:1~4)이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3. 책망과 징벌(7~15절)

1) 7~8절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왕을 삼기 위하여 기름을 부었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였으며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었고(왕과 왕실을 넘겨준 뜻)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족속을 네게 맡겼다” 하셨고, 또 “만일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것 저것을 더 주었을 것이라” 하셨으니 전체의 뜻은 은혜를 많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은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었다”는 말씀인데, 이 뜻은 “죽은 사울왕의 처를 다윗이 취하여도 된다”는 뜻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뜻은 왕권의 범위를 말씀한 것일 뿐 “다처주의를 일 삼으라”는 뜻은 결코 아닌 줄 압니다. 누구나 배우자가 죽으면 재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왕의 처인들 재혼을 못하겠습니까? 사울이 죽으므로 다윗은 전왕의 처를 취할 수도 있는 입장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족을 맡겼다”는 것은 유다 지파의 왕에서 전체 선민의 왕이 된 것을 의미하고, “만일 부족이 있을 때 이것 저것을 더 주실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한 부귀영화나 다처도 더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니 그 당시에 족장급이나 왕들에 대하여는 자손번성을 위하여(특별한 경우에) 다처제도를 간과하신 것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간과란 부당하지만 응징하시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12지파를 그의 다처소생으로 구성하셨으니까요.

2)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죄입니다. 9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을 지적하셨으니까요. 9절에서 “그러한데(큰 은혜를 받은 자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나(하나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하셨고,

3) 또 범죄의 악날한 수법도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살인죄와 그 방법은 악하였습니다. 음행을 은폐하고 또 그의 처를 빼앗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인 점, 자신이 죽인 자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암몬사람의 칼로 죽게 한 점(11:24의 화살로 죽은 것은 다른 신복들임을 알 수 있음), 죽이라는 명령의 편지를 그 죽을 자로 하여금 전달케 한 점, 그리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점, 우리아를 죽게 하기 위하여 다른 신복들까지 함께 죽게 한 점 등은 참으로 악날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그리하여 진노를 선포하셨으니, 10절에서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하셨고, 11~12절에서는 “내가(하나님이)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킬 것이라” 하셨으며, 또 “네 처들을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 (너는 은밀히 동침하였으나) 그 사람이 네 처들과 백주에 동침할 것이라”고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이 예언과 경고의 성취는 13장부터 진행됩니다.

5) 이때에 13절에서 다윗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고 시인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죄를 지적 받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넬”같은 사람이지요(삼하 3:7~11). 그러나 다윗은 깨우칠 때에 시인하였고, 또 깊은 회개를 하였습니다(시 6:6, 51:17). 이때에 나단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시므로 죽이시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5절에서 다윗이 판단한대로 악한 부자를 죽여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다윗을 죽게 하시지는 않는다” 하셨으므로 그것 자체가 용서를 받은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을 면하는 용서를 부분적으로 크게 받은 것입니다.

6) 그러나 14절에서 “이 일로 인하여 (남은 징계가 있으니) 여호와의 원수(마귀)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을 것이라” 하고, 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15절).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18절). 여기에서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뜻은 원수 마귀가 성도를 훼방할 수 있는 재앙꺼리를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마귀가 환난에 동할 수 없음입니다(욥 1:12). 하나님은 징계를 하시되 범죄의 분량대로 다 하시지 않고 훨씬 가볍게 하시는 것을 모든 성도는 그의 긍휼의 은총으로 깨달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스 9:13).

제 14 과 아이의 죽음과 암몬 점령 (삼하 12:15~31) 목록으로


본문 ① 15~25절은 “아이를 죽게 하심”이고, ② 26~31절은 “암몬을 점령함”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아이의 죽음과 암몬 점령”으로 정한 것입니다.

1. 아이를 죽게 하심(15~25절)

1) 15절에서는 “나단이 돌아간 후에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들(음행으로 잉태한 아들)을 하나님이 치시니 앓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이의 질병과 죽음의 원인이 그 부모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17절에서 다윗은 그 아이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로부터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회개와 기도로 하나님이 돌이켜 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금식 철야하며 땅에 엎드려 간구하였다” 하였고, 또 왕궁의 원로들이 다윗을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2) 결국 18절에서 “그 아이가 병든지 7일만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것마다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맞는 것을 주시니까요(요일 5:14). 그때 다윗의 신복들은 아이의 죽음을 왕께 고하기를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음식을 잡숫도록)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셨는데 아이의 죽은 소식을 알면 더 몸을 훼상하시게 할 것이 아니냐”하며 수군거릴 때, 19절에서 다윗이 그 눈치를 채고 물은즉 결국 죽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3) 이때에 다윗은 20절에서 “기도를 중단하고 몸을 씻은 후 단장하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후 음식을 먹은즉”, 21절에서 신복들이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오히려) 일어나서 잡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였을 때, 다윗이 대답하기를 22절에서 “아이가 살았을 때에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시지 않겠나 하여 그렇게 하였으나” 23절에서 “이제는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겠느냐 내가 그를 돌아올 수 있게 하겠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이것은 다윗이 부활의 능력을 불신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로 죽게 하신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4) 24절에서 “다윗은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하여 또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평화의 뜻)이라 하였으니, 25절에서 이때에 하나님이 그(솔로몬)를 사랑하여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로 지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 하나님이 그 이름에 간섭하신 대상은 솔로몬뿐인데 결국 그가 다윗의 후계왕이 된 것입니다.

2. 암몬을 점령함(26~31절)

1) 26절에서 “요압이 암몬의 도성 랍바(물들의 성이란 얍복 강물이 그 성을 둘러 요새화됨을 뜻함)를 취한 후, 27~28절에서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이제 왕이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을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였으니,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다” 함은 “요압의 공으로 빼앗은 성이라”하여 요압의 명성이 드러나면 그것이 왕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하로서 왕을 높이는데 진력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압 자신이 아브넬을 죽일 때 왕명을 거역한 것을 몹시 뉘우친 것으로 여겨집니다(삼상 3:21, 27, 39). 성도가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배우게 합니다(마 6:9).

2) 29~31절에서 “다윗이 군사를 모아 랍바를 쳐서 취하고 무수한 노략물과 보석(금) 한 달란트(중 42㎏, 경 21㎏)나 장식한 면류관을 취하여 썼으며, 모든 성의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 써레질, 도끼질, 벽돌구이를 하게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는 동안 전쟁이 지연된 듯 하였는데 다윗이 회개한 후 그 일이 일단락 된 것입니다.

제 15 과 징계로 나타난 일 (삼하 13:1~39) 목록으로


본 장의 내용이 길지만 한 과목으로 요약하여 살펴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12:13~14에서 “하나님의 용서로 죽음은 면하나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거리를 얻게 하신다(사탄의 역사로 징계하신다는 뜻)” 한 예언대로 다윗 가정에 나타난 징계의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징계의 순서는 음행으로 낳은 아들의 죽음, 장자 암몬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함, 이로 인한 가족들의 불행,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그리고 압살롬의 도망과 반역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범죄의 후유증 또는 징계로 나타난 일, 암논의 범죄와 죽음” 등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① 1~14절은 “암논의 범죄 경위”요, ② 15~22절은 “가족의 불행”이며, ③ 23~29절은 “암논의 죽음”이고, ④ 30~39절은 “압살롬의 망명”입니다.

1. 암논의 범죄 경위(1~14절)

1) 1~2절에서 “그 후에 암논(다윗의 맏아들,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 삼하 3:2)이 자기의 이복 누이 다말(다윗의 셋째 처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에게서 낳은 딸, 그의 오라비는 압살롬, 삼하 3:3)을 연애(연모)하나 취할 수 없어 병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취할 수 없는 이유는 처녀를 함부로 취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된 것인데,

2) 3~5절에서 암논의 사촌인 친구(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 32절)가 간교한 자로서 암논의 사정을 듣고 다말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도를 자문해 주었습니다. 즉 “아픈 척하고 꾀를 부리면 부왕이 병문 올것인즉 그때 다말을 보내어 음식수종을 들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다말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자기 죄를 계획적으로 은폐하듯 암논도 계획적으로 범죄를 전개시킨 것입니다.

3) 6~11절에서 “암논은 계획적 수단으로 다말과 함께 있는 기회를 잡아 그를 붙잡고 동침을 강요” 하였는데, 12~14절에서 “다말이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악행하지 말고 왕에게 청하여 혼인허락을 받으면 될것인즉 절차를 따르자 하였지만 암논이 듣지 않고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암논의 이같은 행실은 “괴악하고 수치스러운 일로서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일”이라고 증오한 것을 보면 혼인과 관련없이 억지로 동침하는 것은 크게 부덕한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이런데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2. 가족의 불행(15~22절)

1) 15절에서 “암몬은 다말을 범한 후에 그를 심히 미워하였으니 그 미움이 연애할 때보다 더하여 다말을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내쫓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미워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욕구를 성취한 후에 책임질 부담을 느꼈든지 아니면 다말이 도덕성을 주장하는 일이 비위에 거슬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6절에서 다말은 “자기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쫓아내는 것은 강간보다 더 악한 행위라”고 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2) 17~19절에서 암논은 종을 통하여 다말을 내쫓고 문을 잠그게 하였습니다. 이때 다말은 “채색 옷(처녀 공주가 입는 긴 옷)을 입은채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에 얹고 크게 울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강간 당하고 버림받음에 대한 강한 비통의 표현입니다.

3) 20절에서 다말이 슬픈 표정으로 오라비 압살롬의 집으로 간즉 이 사실이 그의 오라비인 압살롬에게 알려졌고, 압살롬은 다말에게 “잠잠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 하였으며, 다말은 그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21절에서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심히 노하였으며, 22절에서 압살롬은 다말에 대한 감정으로 암논과 말하지 않는 상태였은즉 미갈의 슬픔, 다윗의 진노, 압살롬의 감정이 쌓여 가족들은 일시에 불행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3. 암논의 죽음(23~29절)

1) 23절에서 “2년 후에 압살롬이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양털 깎는 행사를 하면서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알하솔”은 예루살렘 북쪽 24㎞쯤, 세겜의 남쪽 26㎞쯤에 있는데, 이곳을 에브라임 곁(공동번역은 근방으로 번역)으로 표기한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 지역은 베냐민 영토 경계선의 약간 북쪽이고 벧엘과 가까운즉 벧엘 또는 베냐민 경계 곁이란 뜻으로 보셔야 좋을 듯합니다.

2) 24~25절에서 압살롬은 왕과 그의 신복들과 종들도 청했지만 왕은 누를 끼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26~27절에서 압살롬은 형 암논을 꼭 같이 가게 해주도록 왕이 명령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암논이 같이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물었지만 압살롬이 간청하므로 다윗은 왕과 왕의 모든 아들이 같이 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상한 눈치를 챈 듯하고 다윗은 왕자들의 안전에 신경을 쓰기 위하여 암논과 모든 왕자들을 함께 보낸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양털 깎는 행사에 암논을 청한 이유를 다윗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잔치하는 기회인만큼 화해와 친교를 위한 구실을 내세웠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왕이 이유를 물었을 때 그만한 구실이 아니면 허락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3) 28~29절에서 결국 압살롬은 계획대로 암논을 죽였고, 왕자들은 노새를 타고 도망하였으니, 이때에 압살롬은 미리 사환들에게 명하기를 “잔치에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 두려워말고 죽이라”하여 그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다윗의 장자는 그 자신과 그의 부친의 죄값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4. 압살롬의 망명(20~39절)

1) 30~32절에서 “저희(다위일행)가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이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진즉 신복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섰는 중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왕께 고하기를 압살롬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결심한 것이온즉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 하고 다윗의 염려를 덜게 하였으니, 요나답도 이 일에 가담한 죄가 없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34절에서 압살롬은 살인죄를 범하였으므로 37절에서 그술왕 암미홀의 아들 달매(압살롬의 외삼촌)에게로 망명하였고, 살아남은 왕자들도 왕 앞에 와서 함께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35절). “그술”은 갈릴리 바다 동쪽 헬몬산과 바산 사이의 작은 왕국으로 다윗왕국과 친교한 사이였습니다(삼상 3:3, 수 12:5,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취하였으나 주민을 다 축출하지는 않았음). 이쯤 된즉 다윗도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37~39절에서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슬피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죄값으로 그런 죄를 범하게 된 것을 알기 때문이요(삼상 12:10), 압살롬은 그술에 가서 3년간 거하였고, 다윗은 압살롬을 간절히 연민하였으며,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를 잊어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슬픔과 유감도 세월이 가면 진정되는 것입니다. 3년 후에 압살롬이 돌아오게 되는 내용은 다음 장에 계속됩니다. 결국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집안은 그 자녀들 세계에서 하나님의 징계 섭리에 따라 음행과 불화와 살인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죄책은 다윗과 그 당사자들이 함께 져야 할 것입니다. 암논의 범죄는 부패성이 그 아버지의 성격대로 유전되었고, 간교한 요나답을 가까이 둔 것이 1차 화근이요, 2차 화근은 다말의 의로운 권면(12~14절)을 듣지 않은데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나 천하장사라도 간사한 자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며 또 의로운 권면이나 바른 말에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압살롬 귀향 작전 (삼하 14:1~17) 목록으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외가의 나라인 그술로 피신한지 3년이 되었을 때(13:38)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임, 삼하 2:13, 18)이 “다윗의 마음을 돌이켜서 압살롬을 용서하게 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이 본문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1~3절은 “요압의 계획”이요, ② 4~7, 15~17절은 “여인이 왕에게 한 말”이며, ③ 8~11절은 “왕과 여인의 대화”이고, ④ 12~14절은 “대화의 목적을 진술함”입니다.

1. 요압의 계획(1~3절)

1) 1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압살롬을 생각함은 당연합니다. 그는 아들들중 “출중(준수함)해 보이는 자라”고 하였습니다(25~26절). 또 그의 범죄는 자신의 범죄와 관련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12:9~11)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압살롬의 입장을 도우려 하는 것은 평소에 압살롬을 아는 관계도 있지만(요압의 이종사촌임) 다윗과 압살롬과의 불화의 관계도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를 용서하기 어려운 법의 장벽이 있은즉(출 21:12) 이것을 왕의 절대 권력으로 무마시키고 화해케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심중이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방책을 써서 유도한 것입니다.

2) 2~3절에서는 “요압이 드고아에 사는 슬기 있는 여인에게 부탁하여 그가 과부된 여인처럼 상복을 입게 하고 다윗왕에게 나가서 무슨 말(두 번째 대지의 내용)을 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 18㎞쯤이고, 베들레헴 남쪽 9㎞쯤으로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입니다(암 1:1). 아비가일(삼상 25:3)같은 여인을 보낸 줄 압니다. 그 여인에게 “상제 된 것처럼 상복을 입게 하고 기름을 바르지 않게 한 것”은 슬픔 있는 여인처럼 위장한 것이었습니다. 슬픔 당한 여인을 동정하려는 왕의 감정을 일으켜 목적을 성취하려한 것입니다. 왕은 법이나 공의보다 자신의 말과 명령을 앞세우는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15:29, 에 3:10~11, 8:11~12, 왕명은 취소를 못함). 3절에서 요압은 그 여인에게 할 말을 알려주었습니다.

2. 여인이 왕에게 한 말(4~7, 15~17절)

1) 4~7절에서 드고아 여인은 요압이 시킨대로 왕께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남편이 죽은 것과 두 아들이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죽이므로 (그 지역) 온 족속이 일어나서 살인자 큰 아들을 죽여야 하니 그를 내놓으라고 여인을 핍박한다”는 사실은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 큰 잘못이기 때문이요, 9절에서 “그 죄는 나와 내 아비 집으로 돌린다”는 말과 11절에서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내 아들을 죽일까 하나이다”한 말을 참고 할 때, 그 여인의 입장이 실제상황과 같으므로 요압이 그 여인을 왕 앞에 나가게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 왕의 동정을 힘입어 동생을 죽인 큰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원칙을 압살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의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남편의 이름과 씨를 남겨두지 않는다” 함은 집안의 대를 끊게 됨을 의미합니다. 동정받기 위한 사정을 말한 것이지요.

2) 15~17절은 다윗이 그 여인의 입장을 동정하여 아들을 살려주기로 8~11절에서 허락한 다음에 여인이 또 사정하는 내용을 아뢴 것입니다. 논리의 순서가 맞지 않음에서인지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7~8절 사이에 배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개역이나 영문성경은 왜 그대로 두었을까요? 여기에서 다윗이 허락한 다음에 또 사정한 것은 이것을 기록한 저자가 여인이 다윗에게 한 말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4~7절의 말과 15~17절의 말을 연속적으로 왕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15절의 “왕께 말씀을 여쭘”은 부탁의 의미가 있고 “백성들이 여인을 두렵게 하므로 여종이 왕께 아뢰어 여쭈면 혹 들어주실 것이라 믿고”, 또 16절에서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산업에서 끊으려는 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리라” 믿으며, 또 17절에서 “계집 종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으로 나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함은 내 주 왕이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셔서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건대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나이다” 하였으니, 왕이 감동을 받도록 말을 잘 한 것입니다. 여기의 14절, 17절 말씀은 여인이 “다윗왕을 메시야 모형자로 높이 받든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만 주의 주, 만 왕의 왕, 계 17:14, 그 나라와 권세가 영원함, 단 7:4, 전능하신 하나님, 시 19:6).

3. 왕과 여인의 대화(8~11절)

1) 8절에서 왕은 여인의 사정을 듣고 (동정심에 이끌려)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그 여인의 아들을 죽이지 않도록)을 내리겠다”고 하였을 때, 9절에서 그 여인이 왕께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비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여기의 “그 죄”란 왕이 살인자 아들을 죽이지 않게 하는 것이 “살인자를 죽이라”(출 21:12)는 율법을 시행하지 않는 죄책을 그 여인의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겠다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청하여 이룬 일이니 만큼 율법을 범한 죄책을 왕이나 왕실이 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그때에 왕은 그 죄를 당사자들이 지겠다 하였은즉 더욱 편한 자세로 말하기를 10절에서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내가 명령하면) 저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 못하리라” 하였을 때, 11절에서 여인은 또 말하기를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하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같은 역사적 상황을 갖고 있음이 사실이고 또 여기에서 “여호와를 생각하사”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를 안하면 혹 취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므로 그의 아들을 추호도 해하지 못하도록 약속하고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왕의 뜻이 확실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마침내 요압의 계략은 성공하였고, 압살롬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할 근거를 찾은 것입니다.

4. 대화의 목적을 진술함(12~14절)

1) 이때에 여인은 “한 말씀으로 왕께 여쭙겠다” 하여 허락을 받은 후, 12~13절에서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는 내어 쫓긴 아들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왕의 방침에 맞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닙니까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차별있게 대하시면 되겠습니까” 하고 지적을 한즉, 이로써 왕이 그 여인을 동정한 것이 결국 자기의 이율배반적 처사를 드러낸 결과가 된 것입니다.

2) 14절에서 여인은 또 말하기를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뺏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로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라고 하였으니, 여기의 “우리가 필경 죽고 쏟은 물처럼 모으지 못한다”함은 피조물 된 인생이 때가되면 다 죽게 되고 죽은 자는 물이 땅에 스며 없어진 것처럼 없어졌은즉 죽은 아들 암논을 잊으라는 뜻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생명을 뺏지 않고 방책을 베푸시며 내어쫓겨 버린 자 되지 않게 하심”은 다윗왕을 메시야의 모형자로 생각하면서 구세주의 역할을 압살롬에게 나타내 달라는 뜻입니다. 17절의 말씀도 이와같은 뜻이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정리하여 교훈을 요약한다면 요압은 압살롬과 왕을 다 좋게 해 주므로 왕실의 사랑 받는 자 되기를 원하였을 것이요, 그 방책으로 비슷한 사건을 가진 지혜로운 여인을 보내서 왕의 동정심을 사게 하였고, 그 여인은 왕의 동정심으로 허락받은 명령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 맹세시킨 후 왕이 율법을 어겨 살인자를 용서한 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지겠다” 하므로 결국 왕으로 하여금 율법과 공의를 어기게 만들면서 왕을 그 올무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왕이 이 일을 당하고 매우 씁쓸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그렇게 하여 살아남은 압살롬은 결국 반역을 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4~7절에서 그 여인이 왕께 한 말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한 것(삼상 12:1~5)처럼 비유적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슬픈 표정을 지은 것만 위장이고 그 여인의 당한 일은 실제적 상황이라고 보며, 또 그 여인은 아비가일 만큼(삼상 25:24~31)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17 과 다윗이 압살롬을 만남 (삼하 14:18~33) 목록으로


이 본문 ① 18~27절은 “압살롬을 귀향케 함”이요, ② 28~33절은 “다윗이 압살롬을 만남”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다윗이 압살롬을 만남”입니다.

1. 압살롬을 귀향케 함(18~27절)

1) 18~19절은 계교에 말려든 다윗이 그 일을 꾸민 자가 요압임을 짐작하고 그 사실을 확인합니다. 왕은 그 여인에게 “묻는 것을 숨김없이 대답하라” 한 후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공모) 하였느냐”고 물은즉 여인은 사실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여인의 대답에서 “내 주 왕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 하옵나니 무릇 내 주 왕의 말씀(요압의 계교를 말할 사실)을 좌로나 우로 옮길 자가 없다” 함은 이 사실은 요압과 자신과 왕만 아실뿐 누설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누설되면 요압은 구설에 오르고 왕은 말려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명한 것과 말할 내용까지 준 것”을 사실대로 고하였습니다.

2) 20절에서는 요압이 이 일을 꾸민 목적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일의 형편을 변하려 함이라” 함은 “도피한 상태의 압살롬을 화해시켜 데려오고자 함이란 뜻”이요, “내 주 왕의 지혜도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아신다” 함은 다윗이 요압의 계교를 알아낸 것을 예찬한 것으로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자같은 지혜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태자격으로 예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3) 21~22절에서 왕은 맹세한대로 실행할 수 밖에 없이 되었고, 따라서 “요압에게 명하여 압살롬을 데려오라” 한즉 요압은 “엎드려 절하고 왕에게 축복한 후 자신이 (원하던 일이 성취되었으므로) 은혜 힘입은 줄 안다” 하였고, 23절에서 압살롬을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24절에서 “예루살렘에 온 아들 압살롬을 만나기를 원치 않으므로 압살롬은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보려하지 않은 것은 본래 자신이 원해서 이룬 일이 아닌데다가 요압과 여인에게 속은 감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25~26절은 “압살롬의 외모의 준수함”을 말씀하신 것이고, “깎은 머리털이 200세겔임”은 1세겔을 무겁게 달 때는 14g, 경하게 달 때는 7g이라고 합니다. 14g×200= 2,800g, 7g×200=1,400g의 무게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27절에서는 압살롬의 아들, 딸에 대한 말씀으로 “압살롬은 세 아들과 다말이란 아름다운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2. 다윗이 압살롬을 만남(28~33절)

1) 28절에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렀지만 왕을 만나지 못한지 2년이 되었다” 하였고, 29~30절에서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하여 요압을 두 번이나 불렀으나, 요압이 오지 않자 사람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게 하였습니다. 요압이 만나주지 않은 이유는 면목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31절에서 불 지른 사건으로 인하여 요압이 압살롬을 만났고 “왜 불을 놓았느냐?” 하였을 때, 32절에서 “나를 그술에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왕께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요 왕을 만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술에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인즉 나로 왕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3) 이 일로 인하여 요압은 33절에서 이 사실을 왕께 말한즉 “왕이 압살롬을 불러 그 앞에 나아가 절하고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었다” 하므로 압살롬이 범죄한 후 5년 만에 왕의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제 18 과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1~37) 목록으로


본문의 전체적 내용은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① 1~6절은 “압살롬의 민심도용”이고, ② 7~12절은 “왕됨을 선포함”이며, ③ 13~23, 30절은 “다윗의 피난”이요, ④ 24~29절은 “제사장을 머물게 함”이며, ⑤ 31~37절은 “후새를 머물게 함”입니다.

1. 압살롬의 민심도용 (1~6절)

1) 압살롬은 다윗과 화해한 후에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데 힘을 씁니다. 1절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호위병과 같은 뜻) 50명을 세웠다” 하였으니, 이는 왕자의 권위를 세워 백성들의 주목을 끄는 행위요 자기를 위하여 병거를 갖는 자체가 왕권에 도전하는 싹을 나타낸 일입니다.

2) 2~3절에서 “그는 일찍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불러 그의 신분(지파)을 묻고 무조건 너의 말이 옳다마는 (송사를 굽게 한 뜻) 왕이 송사해줄 재판관을 세우지 않았은즉 4절에서 내가 재판관이 되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는 내가 공의를 베풀 것이라” 하여 임의로 또 거짓으로 민심도용을 일삼은 것입니다.

3) 5~6절에서는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잡고 입을 맞추므로 그의 마음을 도적하되 재판을 받으러 오는 모든 이에게 그와같이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사로운 방법으로 측근과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간 것입니다.

2. 왕됨을 선포함(7~12절)

1) 7~9절에서 4년 후에 압살롬은 왕의 허락을 받아 헤브론으로 가는데 이 헤브론은 다윗왕이 7년 반 동안 왕노릇 한 곳입니다(삼하 2:4, 11). 반역자의 도읍지로서는 적절한 곳입니다. 압살롬은 왕으로부터 그곳에 갈 수 있는 허락을 받기 위하여 자신이 그술에서 생활할 때(13:34~38)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자유의 몸이 된다면) 하나님을 섬길 것을 서원하였은즉 그 일을 위하여 헤브론에 가야 한다”고 청한즉 다윗은 축복하면서 허락을 한 것입니다. 헤브론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고(창 13:18), 또 여호수아 때에는 아론 자손의 거주지였으며(수 10:36, 21:10~12), 다윗의 7년 반 동안의 왕도이었던 만큼 그곳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시설이 있었을 것입니다.

2) 10절에서는 압살롬이 헤브론에 가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로 정탐을 보내어 (특정 시일에 요소요소에서 마다) 나팔을 불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곳곳에서도 그런 선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주도면밀한 작전에 의하였을 것인즉 일시에 진압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11절에서 그 당시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고 예루살렘까지 따라온 200명은 그 사기(事機 : 사건의 내용과 기회)를 알지 못한 채 가담한 일도 있었고”,

3) 12절에서 “압살롬은 제사를 드릴 때에 (이 제사를 드린 것은 청해서 온 200명과 예루살렘 성소에서 드린 것으로 추정됨) 다윗의 모사(참모)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청하여 반역에 가담시켰으며,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연구자에 의하면 “길로”는 예루살렘 서남쪽 4㎞쯤, 또 벧엘 북쪽 4㎞쯤에 위치하는데 또 지도상에는 예루살렘 서남방 50㎞쯤에도 길로가 있다고 합니다. 압살롬이 상당한 세력을 규합하여 일시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인 만큼 승산이 있어 보이는 혁명인지라 추종자들이 생길 수 있음은 짐작이 됩니다. 압살롬의 청년 시절을 감안하면 다윗의 치세 중반기 이후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3. 다윗의 피난(13~23, 30절)

1) 13~15절에서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을 선포한 사실과 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급히 도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할 것”을 결정하였으니, 이는 예루살렘 방위가 압살롬의 반군을 격파하기에 미흡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복들도 거기에 동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그리하여 예루살렘 궁을 떠날 때 16~17절에서 “후궁 열명을 남겨 궁을 지키게 하고 권속(신복들과 가족)을 데리고 떠나니 모든 백성들도(신복들의 가족들과 군인들) 따라 벧메르학에 머물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후궁 열명을 남긴 것은 나단 선지자의 예언(삼하 12:11)이 이루어지는 섭리에 의하였음이고, “벧메르학”이란 특정 지역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집” 즉 도성의 끝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영문성경은 “벧메르학”을 last house로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은 “거리를 빠져나와 마지막 집(궁)에 이르러”로 번역하였습니다. 일단 도성 변두리에 집결하여 함께 떠날 자들을 모아 출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3) 18절에서는 “모든 신복이(피난 행렬처럼)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그렛과 블렛은 블레셋 지역임, 삼상 30:14, 삼하 8:18)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600명도 왕 앞에서 행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상 27:1~2절을 보시면 다윗이 사울왕을 피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가서 시글락에 거할 때부터 다윗을 따른 정병이 600명 있었고, 또 그 지역 그렛과 블렛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귀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4) 19~20절은 따라오는 잇대(가드에서 귀순한 이방인, 그렛과 블렛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임)에게 다윗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가드에서 온 이방인이란 뜻)이니 (나와 함께 고생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왕(압살롬)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하므로 정권이 바뀐 상태라도 “그대로 있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너는 어제 왔고(이방인으로 귀순한 기간이 짧다는 뜻) 나는 정처없이 가니 나를 따르지 말고 네 백성(그렛, 블렛 사람들)들과 함께 돌아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하였지만,

5) 잇대는 21~22절에서 “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여 사생결단하고 왕만 따르겠다 하여 그와 그 종자들까지 다 건너갔다” 하였으니, 여기에 건너간 것은 기드론 시내(감람산과 예루살렘 사이로 흐르는 시내)를 의미합니다. 잇대는 이방인이라도 다윗만 따르는 충신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23절에서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피난 안하는 사람들) 앞에서 왕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 동남쪽 유다) 광야길로 향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0절 말씀도 다윗이 피난가는 초라한 모습을 말씀한 것입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동쪽의 감람산 언덕길로 올라가게 되는데 “다윗이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니 백성들도 그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 초라한 모습은 나단 선지자의 예언(삼하 12:10~12)을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제사장을 머물게 함(24~29절)

1) 24절은 “당시의 제사장인 사독(아히둡의 아들이요 아히멜렉의 형제임, 삼상 22:20, 삼하 8:17,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제사장 85인을 죽일 때 피하였음, 위의 두 절을 대조하면 아히멜렉과 아비아달의 부자간이 혼돈되어 있음)과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벧메르학에)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기드론 시내가 낮은 곳이고 동쪽으로 언덕을 넘어 광야로 나오게 됨) 모든 백성이 성에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였고,

2) 이것을 본 다윗은 25~26절에서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다시 나를 인도하사 그 궤와 그 계신데(성소)를 보이실 것이요 또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 하시면…선히 여기시는대로 하십시오 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의 긍휼과 섭리에 맡기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3) 다윗은 사독에게 또 말하기를 27~29절에서 “너는 선견자(선지자와 같은 뜻, 삼상 9:9)인즉 너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하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의 전황을 살피고) 내게 기별하라 내가 광야 나룻터(이 나룻터는 요단강의 한 줄기로 여겨짐)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요나단을 사독의 아들(실제는 조카이지만)로 표현한 것은 사독과 아비아달이 형제란 뜻입니다. 따라서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독의 아버지 아히둡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독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5. 후새를 머물게 함(31~37절)

1) 31절에서 다윗은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 중에 아히도벨(밧세바의 조부인듯함, 삼하 11:3, 23:34)이 모반에 가담한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였으니, 아히도벨이 역모에 가담한 것도 나쁘지만 그가 다윗에게 좋지 않은 모략을 베풀 자로 짐작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모사로 등용하였지만 다윗의 기도가 응답되므로 그의 모략은 후새의 모략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습니다(삼하 17:1~14).

2) 32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감람산 언덕에 제단이 있었던 것같음)에 이르렀을 때 아렉(archite, 벧엘의 서남쪽 8㎞쯤, 벧엘과 윗벧호른 사이)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슬픈 모양을 나타낸 뜻) 따라왔다” 하였는데, 후새는 “다윗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대상 27:33). 33~36절에서 다윗은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가면 내게 누가 될 것인즉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거짓) 귀순자가 되어라 그러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게 되리라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도 함께 있은즉 네가 궁중에서 듣는 모든 것을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라 두 제사장에게는 각각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있은즉 그들의 편으로 너희가 듣는 것을 내게 전달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7절에서 “다윗의 친구 후새는 곧 성으로 들어갔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3) 34절은 후새가 압살롬을 맞이하면서 말하게 한 내용입니다.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부친의 종이었으나 내가 이제는 왕의 종입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한동안은 다윗왕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그의 아들의 종이 된 것인즉 당연한 일처럼 위장하여 압살롬을 돕는 자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전쟁을 위하여 대적을 속이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삿 7:15~18).

제 19 과 피난 중에 있은 일 (삼하 16:1~23) 목록으로


본문에는 다윗이 예루살렘 궁궐을 떠나 피난 중에 있을 때에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① 1~4절은 “시바의 간계”요, ② 5~13절은 “시므이의 저주”이며, ③ 14~23절은 “압살롬과 두 모략인”입니다.

1. 시바의 간계(1~4절)

1) 1절에서 다윗이 마루턱(15:32)을 조금 지났을 때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두 나귀에 음식물을 싣고 와서 다윗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음식물은 “떡 200, 건포도 100송이, 여름실과 100, 포도주 한 가죽부대”였습니다. 2절에서 다윗이 시바에게 음식물 가져온 뜻을 물은즉 “나귀와 음식물을 왕의 권속들이 다 사용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맨발로 걷는 입장이었던 것을 생각하면(15:30)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2) 3절에서 다윗이 옛 주인(사울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 대하여 안부를 물었을 때 시바가 고하기를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사울왕가)의 나라를 내게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바가 므비보셋을 배신하고 거짓으로 주인을 모함한 후 어떤 이득을 보려한 간사한 수단이었습니다. 혼란이 있을 때는 여러 가지 간계와 모함도 있게 마련입니다.

3) 4절에서 왕은 므비모셋이 역심을 품었다는 그의 종 시바의 말만 듣고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라” 한즉 시바는 별안간 종이 주인 된 격이 되었고,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다윗의 이 처사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어려운 상황에서 일방적 말만 듣고 다급히 처리하므로 결국 시바의 모함에 이용당한 것이 되었습니다(삼하 19:24~30). 송사와 시벌은 반드시 증거와 변호를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2. 시므이의 저주(5~13절)

1) 5~6절에서 “다윗 일행이 바후림(예루살렘에서 5시 방향 4㎞쯤으로 요단강 쪽으로 가는 길가라 함)에 이르렀을 때 사울왕가의 남은 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다윗과 모든 신복들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는데 그때에 다윗의 모든 백성들과 신복들이 다 왕의 좌우에 있었다” 하였고,

1) 7~8절은 시므이가 저주한 내용으로 “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사울족이 죽은 피값)를 하나님이 네게 돌리셨구나 그(피값)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이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붙이셨다 보라 너는 피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는 것이라” 하고 연하여(여러번) 저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시대가 아주 끝날 줄 알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 말로서 저주를 한 것입니다.

3) 이때에 9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요압의 동생)가 다윗에게 청하기를 “이 죽은 개(무시하는 뜻)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아까 청컨대 저로 그의 머리를 베라고 명하소서” 한즉, 10절에서 왕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요압과 아비새)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이 뜻은 다윗이 저주 당하는 일에 대하여 스루야의 아들들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뜻임)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하나님의 심판섭리) 때문이니 누가 감히 그 일을 탓하겠느냐” 하므로서 다윗은 자신이 수모당하는 일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는 하나님의 징계로 믿은 것입니다. 이 내용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성도들도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생각하면서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 11~12절에서 다윗은 계속 말하기를 “내 몸에서 낳은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겠느냐” 하였고, 또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므로 성도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또 까닭없이 저주를 받으면 하나님이 선으로(좋은 축복) 갚아주시는 섭리가 있음을 믿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믿음으로 잘 참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13절에서 “다윗과 그 종자들은 그대로 가고 있었고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렸다”고 하였습니다. 돌을 던지거나 티끌을 날린 것은 훼방하는 행위요 그가 연속 저주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참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믿을 때는 참고 순종하는 것이 만회하는 방법입니다(히 12:5~11).

3. 압살롬과 두 모략인(14~23절)

1) 14~15절에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다 곤비한 중 한 곳에 이르렀고(여기의 곤비함을 각주에는 그 지역 이름 “아에빔”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역 이름의 앞 글자가 지워져서 남은 글자만 뜻으로 번역한 것이라 함), 압살롬도 아히도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16절에서 다윗의 친구 후새가 “왕이여 만세 만세” 하며 압살롬에게로 나온즉, 17절에서 압살롬이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나온 것이 친구(다윗)를 후대하는 것이요 왜 친구(다윗)와 함께 가지 않았소” 한즉, 18~19절에서 후새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친구를 버린 뜻이 아니라는 것) 나는 하나님과 이 백성 즉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함께 거할 것인즉(부분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당신은 그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왕을 섬길 것입니다” 하여 의심없이 용납을 받았습니다.

2) 20~22절은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자신이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하여 “모략을 베풀라” 한즉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왕궁에 남아 있게 하여 궁을 지키게 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을 하면 백성들이 아비가 압살롬을 얼마나 미워하였으면 저렇게 하리요 하고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더욱 힘 있게 하여 압살롬의 왕권이 강해질 것이라” 하였고,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친즉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나단의 예언(삼하 12:11)이 응한 것입니다. 더 특이한 것은 다윗이 왕궁 지붕에서 거닐며 유혹을 받던 곳에서(삼하 11:2) 아들은 아비의 후궁들과 대낮에 동침을 한 것입니다. 범죄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것입니다. 약 1:15에서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3) 21절에서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하나님의 계시처럼 믿고 받았다는 뜻이요, 또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았다” 한 것은 다윗도 과거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대상 27:33에서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배역하기 전에 다윗이 아히도벨의 말을 그만큼 신임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배역한 다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15:31). 결국 압살롬은 다윗을 배반한 모사 아히도벨과 거짓으로 배반한 모사 후새를 자기 앞에 세운 것입니다.

제 20 과 양측의 대결 양상 (삼하 17:1~29) 목록으로


본문 ① 1~4절은 “아히도벨의 모략”이고, ② 5~14절은 “후새의 모략”이며, ③ 15~22절은 “정보 전달”이고, ④ 23~29절은 “양측의 입장”으로 전체의 제목을 “양측의 대결 양상”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아히도벨의 모략(1~4절)

1) 쫓기는 자와 추격하는 자 간에 싸움은 시작된 것입니다. 1~3절에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사람 12,000명을 택하여 오늘 밤으로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 엄습하여 무섭게 하면 저와 함께 한 백성이 도망할 것인즉 그때 왕만 죽이면 백성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왕의 찾는 이 사람(왕이 필요로 한 자신, 15:12)에게 달렸으니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할 것이라” 한즉,

2) 4절에서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의 후궁을 음행하라는 것부터 급히 추격하여 다윗(아비)을 죽이라”는 것까지 다 악하였습니다.

2. 후새의 모략(5~14절)

1) 그러데 5절에서 압살롬이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도 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도우시려고 그의 기도(15:31,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를 응답하시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4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겼으면 그대로 따를 수도 있을 것이나, 사람의 생각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스 6:22, 잠 21:1, 빌 4:7)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2) 그리하여 6절에서 후새의 모략도 말한즉, 7절에서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선하지 않다(no good)”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서 8~13절에서 “왕도 아시거니와 다윗과 그 종자들은 용사이며 곰이 새끼를 뺏긴 것처럼 격분한 중에 있고 또 부친은 병법에 익숙하여 백성과 함께 자지 않고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함부로 추격하다가) 혹이라도 압살롬의 군사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 가운데서 압살롬이 패하였다 한다면 (민심이 변하여져서) 용감한 압살롬의 병사라도 마음이 저상(기운을 잃음) 할 것입니다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을 용사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쉽게 생각하지 마시고 완전히 준비하여 접전하시되) 단에서 브엘세바(전체 영토의 북과 남)까지 (동원령을 내려)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을 모으고(시간을 벌게 하기 위함) 왕이 친히 전장에 나가시며(왕에게 죽을 기회를 주는 뜻) 우리가(후새 자신도 전쟁에 나가므로 압살롬이 신임하게 함) 그 만날만한 곳에서 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처럼 엄습하여(인해 전술로 이 잡듯 조여 나가는 작전) 다윗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할 것이요 만일 저가 성 안에 있다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성 사람들)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곳에 한 작은 돌(사람을 성벽 돌로 비유한 뜻)도 보이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줄로 끈다는 뜻은 사람이 새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고, 물로 끌어 수장시킨다는 것은 요단강 옆에 있는 성읍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은 급히 또 자신이 12,000명으로 기습 추격하여 왕만 죽이고 백성은 돌이키게 한다는 것인데 반하여 후새는 주도면밀한 준비로 전국의 의병을 모아 바다 모래같은 수로 왕과 자신도 나가서 인해 전술을 써서 다윗의 무리가 밖에 있거나 성 안에 있거나 이 잡듯 색출하여 다 없앤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3) 14절에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다윗에게 불리한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까지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3. 정보 전달(15~22절)

1) 압살롬의 모략이 결정되자 후새는 그 사실을 다윗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15절에서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두 모략건을 다 말하고(혹이라도 아히도벨의 모략으로 변할지 모른즉) 빨리 사람을 보내어 오늘 밤에 나룻터(요단강)에서 자지 말고 건너가므로 몰살당할 위험을 피하라”고 하였습니다.

2) 17절에서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은 이 사실을 전달할 요나단(아비아달의 아들 15:27)과 아히마아스(사독의 아들, 15:27)에게 알려야 하는데 눈치를 챌까하여 그들을 성 밖 에느로겔(로겔 샘이란 뜻)에 있게 하였고, 어떤 계집종으로 나가서 저들에게 알리게 하였으며, 저희가 광야 나룻터에 있는 다윗(15:28)에게 알리게 되는데, 18절을 보시면 이 과정에서 두 소년이 움직이는 것을 압살롬에게 알리므로 두 소년이 쫓기는 입장이 되었고, 그들이 빨리 달려 바후림(삼하 16:5, 베냐민 성읍으로 예루살렘에서 요단으로 통하는 길가에 있음)의 어떤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 갔는데, 19절에서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그 위에 찧은 곡식을 널어 놓으므로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20절에서는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찾았을 때 그들이 시내를 건너더라 하므로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조국을 배신하면서 거짓말을 하였지만(수 2:1~7) 이 여인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성으로 두 사람을 구해준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다윗을 도와주시기 위한 섭리로 그 여인을 쓰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전쟁 중에는 적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 이는 작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21~22절에서 “다윗은 두 소년으로부터 압살롬의 작전 상황을 다 듣고 새벽 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요단을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힘든 여정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양측의 입장(23~29절)

1) 23절에서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그 아비 묘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라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꺼진 것을 느끼고 자살한 듯하며 그의 고향과 아비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삼하 11:3, 대상 3:5 참고).

2) 24절에서 다윗은 요단을 건넌 후 마하나임에 이르렀으니, 이 지역은 역사가 많은 곳이며(삼하 2:8, 창 32:2, 수 13:26, 30, 21:38), 사해바다 북변에서 북으로 45㎞쯤에서 요단강 동편으로 13㎞쯤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넜다” 하였고, 25절에서 압살롬이 요압(다윗의 군장이므로)을 대신하여 아마사로 군장을 삼았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각주에는 이스마엘이라 하였는데 이는 사본의 글자가 선명치 못한 상태로 추정되나 유다 지파가 아닌 이스라엘 선민이란 뜻으로 보셔야 함, 18:6, 16) 이드라의 아들이요, 그의 어미는 나하스의 딸 아비갈이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은 둘째 고모(대상 2:16)의 아들을 군장으로 삼은 것인데, 이 부분은 “아마샤의 혈육관계”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왕권을 놓고 집안 친척까지 대립양상이 나타난 것이지요.

3) 26절에서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 하였는데, 대체적으로 요단강 동편을 길르앗 땅이라고 합니다. 마하나임도 역시 길르앗 땅에 속한 것인즉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27~29절에서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암몬 사람에게 속한 랍바(성읍 이름, 우리아가 죽은 곳, 삼하 11:1, 12:26) 사람 나하스(암몬왕, 삼상 11:1~12, 다윗이 그로부터 받은 은헤를 갚으려 한 일이 있었음, 삼하 10:2)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삼하 9:1~4에는 로드발로 되어 있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보호한 마길의 집이 있었음, 이 로드발은 마하나임 북쪽 40㎞쯤, 또 갈릴리 바다 남쪽 15㎞쯤에서 동쪽으로 8㎞쯤에 위치함)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Rogelim, 위치확인 어려움) 사람 바르실래(삼하 19:31~39, 왕상 2:7)가 각종 필수 품목을 갖고 와서 시장하고 피곤한 백성들을 먹게 하였으니 큰 후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8~29절에서 그들이 섬긴 품목을 보면 “침상, 대야, 질그릇, 밀,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 팥, 볶은 녹두, 꿀, 버터, 양, 치즈 등(음료)”인즉 얼마나 주밀하게 생필품을 도왔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도우신 은혜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압살롬의 죽음 (삼하 18:1~33) 목록으로


본문 ① 1~5절은 “다윗의 군사 편성”이요, ② 6~18절은 “압살롬의 패전과 죽음”이며, ③ 19~33절은 “압살롬의 죽음을 알림”입니다. 전체의 제목은 “압살롬의 죽음”입니다.

1. 다윗의 군사 편성(1~5절)

1) 후새의 모략을 인하여 다윗은 시간을 얻었고 마하나임에서 군사를 편성하였으니, 곧 1절에서 “백성(군사)의 수를 계수하고 천부장, 백부장을 세운 것이요(1,000명, 100명 단위로 중대, 소대를 편성한 것과 같은 뜻), 2절에서는 전체 군사를 3대로 나누어 1/3은 요압의 수하에, 또 1/3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대상 2:16에는 아비새가 앞에 기록됨, 삼하 2:18)의 수하에, 또 1/3은 가드 사람 잇대(15:19~22)의 수하에 두어 출전케 하고 다윗 자신도 반드시 함께 나갈 것이라” 한즉,

2) 3절에서 다윗의 백성들은 왕을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왕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지만 “적들은 아군이 패하거나 절반이 죽어도 왕만 죽이려고 할 것이란 것입니다 왕은 백성의 만 명보다도 중하신즉 성안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습니다” 한즉, 4절에서 “왕은 그 말을 따르기로 하였고 왕이 문곁에 서서 백성을 출전 배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이때에 5절에서 왕은 세 장수(요압, 아비새, 잇대)에게 명하기를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죽이지는 말라는 뜻)” 하였는데, 이 말을 할 때 “백성들도 다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려 한 것은 역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압살롬을 통하여 자기 집안에 살육이 있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울왕가의 사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니 대항하지 말라”(삼하 16:5~13)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군사는 조직편성과 명령계통이 중요하고, 또 군왕제도에서는 백성의 다수보다 왕이 중요하며, 또 다윗이 아들에 대한 인정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징계섭리를 생각한 것이 이 부분에서 주시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2. 압살롬의 패전과 죽음(6~18절)

1) 6절에서 “이에 백성(다위측)이 이스라엘(압살롬측)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에브라임 수풀”이 어디냐? 할 때, 에브라임 지역은 요단강 서편이고 다윗과 압살롬의 군사들은 다 요단강을 동편으로 건너 길르앗 땅에 주둔한 만큼(17:26) 그들이 “들로 나왔다” 하여도 요단강 서쪽으로 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에브라임 수풀이란 에브라임 사람들이 어느 적당한 시기에 길르앗 땅에 가서 자기 지파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웠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삿 12:1~6을 보시면 사사 입다가 전쟁을 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돕지 않은 이유로 42,000명을 죽인 일이 있는데 그 당시의 전쟁터, 또는 그들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7~8절을 보시면 “그곳에서 싸웠는데 이스라엘(압살롬)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여 그곳에서 죽은 자가 20,000에 이르렀으니 그때에 칼에 죽은 자보다 수풀에서 죽은 자(갇혀 죽은 듯)가 더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속결로 끝난 것이 아니고 상당 기간을 끌었을 것으로 예측되는 것입니다.

2) 9절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압살롬이 노새를 탄채 다윗의 신복과 마주쳤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나갈 때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나무에 걸려 공중에 달린 신세가 된 것”입니다. 압살롬의 좋은 머리털(삼하 14:26)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화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신 11:29, 30:1, 15). 다윗의 건강도 음행죄를 범할 때는 화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노새도 그렇고 상수리나무도 그렇습니다. 노새도 탈 때는 좋았지만 그것이 화근을 주었고, 상수리나무도 전쟁할 때 숲으로 유익을 줄 수 있지만 걸릴 때는 화가 된 것이고, 그 에브라임 수풀이란 장소도 입다 때는 이스라엘 전군이 이긴 장소인데, 화가 될 때는 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복은 반드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때에만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3) 10~15절은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이 죽임을 당한 내용입니다. 10절에서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을 보고 한 병사가 이 사실을 요압에게 알렸는데, 11절에서 요압이 “왜 죽이지 않았느냐 네가 죽였다면 내가 (상급으로) 은 열개를 주었을 것이라” 하였을 때, 12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 손에 은 천개를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인즉 이는 왕이 세 장군들에게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으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롭게 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문책)하였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그 신하는 왕명에 절대 복종하는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이 말을 들은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였으니” 이는 왕명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압살롬이 죽었으므로 요압은 16절에서 “나팔을 불어 전쟁을 중지시키고 진영으로 돌아왔으며 17절에서는 무리가 압살롬의 시체를 수풀 가운데 있는 큰 구멍에 던지고 돌무더기를 쌓으니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자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8절에서 “압살롬은 살았을 때에 자신의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자기 이름으로 호칭(압살롬 기념비)하는 비석을 왕의 골짜기에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삼하 14:27에서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고 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후사될 수 없는 입장(죽음)으로 변하였기 때문일 것이요 그런 연고로 한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비석을 세웠다는 왕의 골짜기가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창 14:17을 보시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이란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의 “사웨”는 넓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왕곡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있었던 것인데 그 위치는 사해 서편 헤브론 근방이 아닐까 예측할 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족적(삶의 흔적)을 남기려는 뜻은 누구나 있을 것인데(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중 하나도 그러함) 자신의 명예를 과장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흔적으로는 좋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압살롬의 죽음을 알림(19~33절)

1) 19절에서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15:27~28, 17:15~16)가 왕에게 승전의 소식을 전하려 하자 20절에서 요압이 이를 만류합니다. 승전의 소식은 좋으나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왕이 슬피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다윗의 입장과 요압의 입장이 서로 대립된 양상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감정의 사람이고 신앙의 사람(압살롬의 잘못에 자신의 책임을 느낀 것)이라면 요압은 정략적인 사람으로 인정을 살피지 않고 후환을 없애는 주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짢은 소식을 아히마아스에게 전하지 않게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이므로 봐준 뜻이 있을 것입니다.

2) 그리하여 21절에서 이 소식을 구스 사람(구스는 사해 남쪽을 의미하고 에디오피아도 구스라함)으로 하여금 전하게 합니다. 22~23절에서 아히마아스는 자신이 소식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15:27~28) 자신이 구스 사람의 뒤를 따를 것을 청하자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이 좋은 소식이 아님을 일깨워 주면서 허락을 하니 아히마아스는 그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였습니다.

3) 24~25절에서는 성문루에서 살피는 파숫군이 “전령 한 사람이 온다”고 하였을 때, 왕은 “저가 혼자 오면 좋은 소식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패전의 전령이면 위험이 따르므로 둘이 오지만 승전시의 전령은 위험이 없으므로 혼자 오는 것임을 예측한 때문이요, 26절에서 “뒤에 또 한 사람이 온다” 하였을 때, “저도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라” 한 것은 역시 혼자 온 뜻과 같기 때문이며, 27절에서 또 이어서 앞에 오는 사람이 “아히마아스”라 하였을 때,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한 것은 다윗이 제사장을 축복의 사람, 또는 충성된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4) 28절에서 “아히마아스는 왕께 절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며 하나님이 대적을 붙여주셨다” 하므로 승전 사실을 보고하자 29절에서 왕은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히마아스는 “왕의 종(요압)이 나를 보낼 때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으나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으니, 이는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왕의 노를 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30~31절에서 왕은 아히마아스를 물러서게 하고 구스 사람의 보고를 들었는데, 그가 “왕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갚았다”고 하자, 32절에서 또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기를 원한다” 하므로 죽었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돌려서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 구스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왕명에 따라 죽이지 않았어야 할 자를 죽이고 보고를 하려니까 크게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5) 33절에서 왕은 압살롬의 죽은 사실을 충분히 알고 심히 아픈 마음으로 문루에 올라가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외치며 통곡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비를 거역하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심정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을 그리스도의 모형자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한 그 소원이 예언적으로 성취되어 그리스도께서 대신 희생하신 사실을 예시한 말씀이라고 보셔도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반란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제 22 과 귀궁 중에 있은 일 (1) (삼하 19:1~23) 목록으로


본문은 한 제목을 가지고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본장 전체가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귀궁 중에 있은 일”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8절은 “왕이 슬피함”이고, ② 9~14절은 “왕의 입궁 행사”이며, ③ 15~23절은 “시므이를 용서함”입니다.

1. 왕이 슬피함(1~8절)

1) 1~3절은 “왕이 압살롬의 죽음을 인하여 울며 슬피한다는 소식이 요압과 백성들에게 들리자 모든 백성들에게도 슬픔이 되었고, 따라서 백성들이 싸움에 이기고도 진 자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며 도망하는 자처럼 조용히 성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다면 위기를 면한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적당한 벌을 줄 뻔 하였는데, 요압의 잘못으로 초상집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2) 4절에서 “다윗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압살롬을 외치니” 요압이 들어가서 왕을 달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요압이 압살롬을 고의로 죽인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5~7절에서 왕에게 말하기를 “왕과 왕의 자녀들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신복들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이 미워할 자는 사랑하시고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제 깨달으니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다 죽었어야 마땅할 뻔 하였습니다 왕이 이러나 나가셔서 신복들을 위로하소서 내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옵나니 만일 왕이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왕과 함께 머물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요(맹세의 의미는 요압 자신도 떠난다는 뜻) 그러면 그 화가 지금까지 당한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즉,

3) 8절에서 “그때에 왕이 일어나 성문(마하나임성)에 앉았고 이 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고한즉 백성들이 왕 앞에 나왔으며 이스라엘(압살롬 편에서 싸운 자들)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승리와 슬픔과 유감이 함께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2. 왕의 입궁 행사(9~14절)

1) 9~10절에서 이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백성들, 10절)이 변론하여 “왕을 예루살렘으로 입궁시킬 채비를 하라”고 독촉하였습니다. 이는 피난 할 때처럼 초라하게 입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왕이 우리를 원수(이방국들)의 손에서와 또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가셨는데 우리가 기름을 부어(헤브론에서 대관식을 한 뜻, 15:9~10)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은즉 너희가 어찌하여 다윗왕을 모셔오는 일에 잠잠하느냐” 하였으니, 그들의 이 변론 요지는 왕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이고, 또 왕이 도성을 피하여 나간 것이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피한 입장이기 때문에 반란죄가 크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왕을 다시 모셔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2) 이런 분위기를 알게된 다윗은 11~12절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말하기를 “제사장들이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이 있은즉 너희가 앞장 서서 환궁 절차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 13절에서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인즉 이 일에 나중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였으니, 다윗은 어디까지나 제사장들과 유다 지파를 앞세워 귀궁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요압은 퍽 쑥스러운 입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3) 13절에서 또 아마사에게 전달하여 이르기를 “아마사는 내 골육인즉 내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 있을 군장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하게 여긴다” 하므로 장차 아마사를 기용할 뜻을 전하게 하였습니다(다윗과 아마사와의 관계는 “설교보충 6. 아마사의 혈육관계”란 설교문 참조). 아마사는 압살롬이 군대장관을 세웠던 자인데(17:25) 다윗이 왜 이렇게까지 그를 선대 하려고 하였을까? 이는 연고자이므로 신뢰감이 있고, 요압을 떨구려는 의욕이 강하였으며, 또 압살롬 반역에 가담한 것을 용서하면 충성을 더 잘 할 것으로 예측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의 충성된 활약을 기대하여 뜻을 전한 것입니다.

4) 14~15절은 제사장들과 유다 장로들의 역할(11절)로 유다 사람들의 뜻이 결집되어 저희가 “왕은 모든 신복들과 함께 돌아오소서” 하므로 왕의 귀궁 행사에 유다 지파가 앞서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전체 선민의 왕이지만 다윗의 귀궁에 유다 지파가 주동할 이유가 있는가? 할 때, 다윗이 유다 지파이고 처음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 있었으며, 7년 반 후에 전국왕이 되었으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압살롬이 전국의 민심을 자기에게로 도용한 사실이 있어서 전체 선민의 단결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렇게 된 것이 20장에 나타난 “세바의 난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3. 시므이를 용서함(15~23절)

1) 15절에서 왕이 신복들과 함께 마하나임을 떠나 “요단에 이르렀을 때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게 하려고 길갈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길갈은 요단강 서쪽 6㎞쯤에 있고 길갈 서남방 2㎞쯤에 여리고가 있습니다.

2) 16~20절은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바후림(삼하 3:16, 16:5, 17:18, 19:16, 예루살렘 동남쪽 4㎞쯤의 동리)에 사는 시므이(다윗을 저주한 자, 16:5~10)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으러 나왔다” 하였으니, 이는 다윗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힘입기 위한 정성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는 또 베냐민(자기 족속) 사람 1,000명을 대동하였고, 사울의 사환(요나단과 므비보셋의 종) 시바도 아들15명과 종 20명을 대동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왔는데, 18절을 보면 왕이 도강에 쓰시게 하기 위한 배를 자신들이 타지 않은 상태에서 얕은 물로 밟고 배를 인도하여 온 것입니다. 시므이는 자기 죄가 너무 큰 것과 또 죽을 입장에 있는 것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최대한 회개하는 징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급히 온 것은 그 지역 주민인 요셉족(므낫세와 에브라임족이 각각 그 지역 동편, 서편에 거주하였음)보다 먼저 나오기 위함이었고(20절), 거기에 유다 사람들과 자기 부족 1,000명과 시바의 가족들까지 무리를 지어 나와 엎드리므로 회개의 정성을 보인 것입니다. 19~20절에서 시므이가 왕께 엎드려 고하기를 “주여 원컨대 나에게 죄를 주지 마옵소서 종의 패역을 기억지 마옵소서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내가 범죄한 줄을 알고 요셉의 온 족속 중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합니다” 하였으니 솔직한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본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징계로 믿고 보복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16:11~12).

3) 그때 21~22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요압과 함께, 22절)가 “기름부음받은 왕을 저주한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을 때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16:10의 뜻과 같음)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각주에는 사탄)이 되느냐” 하면서 만류하였습니다. 원수를 갚거나 회개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사탄이 일삼는 일이므로 거기에 말려들면 안될 것을 단언한 것입니다.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네가 죽지 않으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를 하였으니” 다윗의 이 용서와 시므이의 받은 은혜는 구세주의 용서와 성도의 진정한 회개를 예표하는 계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3 과 귀궁 중에 있은 일 (2) (삼하 19:24~43) 목록으로


앞 과목에 연속하여 나타난 내용은 ① 24~30절에 “므비보셋의 영접”이요, ② 31~39절은 “바실래에게 보답함”이며, ③ 40~43절은 “귀궁 행사의 주도권 논쟁”입니다.

1. 므비보셋의 영접(24~30절)

1) 시므이의 영접과 용서가 끝난 다음에 24절에서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내려와서(예루살렘 쪽이 언덕이고 요단강 쪽이 하류임) 왕을 맞이하였는데,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않고(장식과 사치를 금한 뜻) 수염도 깎지 않았으며 옷도 빨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애석한 일을 당하였을 때 사치를 금하는 슬픔의 표현 풍속입니다.

2) 25절에서 다윗은 피난갈 때 시바로부터 “므비보셋이 사울왕가의 왕권 복귀를 원한다”는 아첨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 고로(16:3~4) “네가 어찌하여 (내가 피난 갈 때)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물은즉, 26~27절에서 “자신은 저는 자이므로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가려하였는데 종(시바)이 나를 속이고 (왕이 같이 갈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속였을 것임) 내 주 왕께 (거짓으로) 참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주 왕은 하나님의 사자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십시오” 하고, 또 28절에서 “내 아비의 온 집은 왕 앞에서 죽은 자와 같사온데 왕이 저를 한 식탁에서 먹는 은혜까지 주셨으니 무슨 의가 있어서 부르짖겠습니까(억울한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 하였으니, 므비보셋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감수할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3)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시바의 모함에 격분하였을 것이고, 그 당시에 자신이 일방적 말만 듣고 처리한 것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시바에게 베푼 은혜를 다 취소하면 왕적 행사의 권위에 손상되므로 취소를 못하고, 29절에서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신세스럽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하고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하였습니다(16:4에서 준 특혜를 반 돌리라는 뜻). 그러나 므비보셋은 30절에서 “왕의 귀환만으로 만족한즉 전부를 시바에게 주소서” 하고 사양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는 므비보셋이 왕의 귀환을 만족하며 물욕에서 떠난 뜻도 있지만 자신이 바른 말로 자기의 종 시바를 어렵게 만든 사실을 나타내지 않기 위한 배려때문일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덕이 있는 성도의 모형입니다.

2. 바실래에게 보답함(31~39절)

1) 길르앗 사람 바실래는 길르앗 지역 로글림 사람으로 다윗이 마하나임 성에 피신하였을 때 그 지역 사람(소비와 마길, 17:27)과 함께 생필품을 제공하여 다윗을 도운 사람입니다. 다윗이 귀궁 길에 올라 요단강에 왔을 때, 80노구로 배웅을 하러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리공부를 하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요단 나루까지는 2시 방향 30㎞쯤 되고, 그 나룻터에서 마하나임까지는 1시 방향 40㎞쯤 되며, 마하나임에서 로글림까지는 역시 1시 방향으로 38㎞쯤 됩니다. 그러니까 바실래가 다윗을 배웅하려고 요단 나룻터까지 온 거리는 78㎞쯤 됩니다. 나귀를 타고 왔겠지만 그 정성이 대단합니다. 그는 거부라고 하였습니다(31~32절).

2) 왕을 찾아온 바실래에게 다윗은 “예루살렘에 가서 공궤(신세를 갚으려는 뜻)할 것이니 같이 가자”고 한즉(33절), 34~37절에서 “종은 왕이 요단을 건너기까지만 배웅할 뿐 늙은 몸이라 좋은 것을 느끼지 못한즉 오히려 왕께 누가 될 것이라” 하면서 왕의 배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자기를 집으로 보내어 부모의 묘 곁에서 죽기를 소원하였으며 자기 대신 “김함(측근자에 속함)”을 따라 보내면서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라” 한즉,

3) 38~39절에서 “다윗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또 네(김함)가 구하는 것을 바실래를 위하여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입맞추고 자기 곳으로 헤어졌습니다. 바실래의 봉사와 겸손도 귀하고 다윗의 보답하려는 정성도 귀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귀궁 행사의 주도권 논쟁(40~43절)

1) 40절에서 “왕이 김함과 함께 요단을 건너 길갈로(7㎞쯤, 여리고와 가까움)올 때 온 유다 백성(유다 지파의 많은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유다 이외의 지파 사람들)이나 왕을 호행하였다” 하였는데, 41절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유다 지파 이외의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사울왕 치세에 있던 사람들임)이 왕께 나와 고하되 어찌하여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왕의 일행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시게 하였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전체 선민의 왕을 유다 지파에서 독점으로 행사한 것이 마땅치 않다는 뜻입니다.

2) 이때에 유다 사람들은 42절에서 “우리는 왕이 우리의 지친이기 때문에 그리한 것뿐이요 왕으로부터 무엇을 받거나 먹은 것이 없은즉 분낼 일이 아니라” 한즉, 43절에서 전체 지파를 대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12지파 중 10지파란 뜻, 요셉 지파가 두 지파되었으므로 레위 지파를 빼고도 12지파가 됩니다. 여기에서 유다 지파와 예루살렘 지역을 차지한 베냐민 지파가 빠진 10지파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솔로몬 왕국이 갈라질 때도 그렇게 나뉘었으니까요. 왕상 12:21, 대하 11:1)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왕을 모시는 일에 우리와 의논하지 않았느냐” 하였는데,

3) 이때에 오히려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강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사람들의 단결력이 그만큼 더 컸음을 의미합니다. 부분은 부분적으로 전체는 전체적으로 의논하여 시행함이 좋고 특정인들로 편벽되게 정치적 행사를 하는 것은 합력과 포용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경에서는 전체 이스라엘 사람 중에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설득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 24 과 세바의 난 (삼하 20:1~26) 목록으로


왕의 입궁시부터 유다 지파와 다른 선민들 간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세바의 난”이란 시험이 터진 것입니다. ① 1~3절은 “세바의 선동과 후궁 처리”요, ② 4~5절은 “아마사에게 명한 일”이며, ③ 6~13절은 “아비새가 아마사를 죽임”이고, ④ 14~22절은 “세바의 죽음”이며, ⑤ 23~26절은 “다윗의 조직 개편”입니다.

1. 세바의 선동과 후궁 처리(1~3절)

1) 1절에서 “마침 거기에(길갈을 경유할 때, 19:40) 난류(worthness character, 정치깡패같은 사람) 하나가 있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인데 저가 나팔을 불며 말하기를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分誼)가 없다” 하였으니, 이 원문은 컬렉으로 Share portion, 몫, 할당, 분배, 유산 등의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물려받을 유산이 없다” 하였고, 현대인 성경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동기는 왕을 유다 지파가 독점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19:43). 따라서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다 이스라엘아 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다윗을 섬기지 말라는 뜻)” 한즉, 2절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예루살렘 쪽으로)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므로 유다 사람들만 왕에게 합하여 예루살렘까지 갔다”고 하였습니다. 세바의 난동으로 모든 지파의 단결이 일시 와해된 것입니다.

2) 3절에서 다윗은 예루살렘 본궁에 도착하여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명(15:16)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준 후 동침하지 않으므로 저희가 갇힌 상태에서 죽는 날까지 생과부(남편없는 여인)처럼 지냈으니 이는 압살롬에게 희롱을 당한 때문이었습니다(삼하 12:11, 16:22). 이들도 다윗의 범죄와 관련하여 희생당한 피해자라 할 것입니다.

2. 아마사에게 명한 일(4~5절)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마하나임에서 돌아올 때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용납하여 그를 군대장관으로까지 기용할 뜻을 말한 사실이 있었는데(19:13), 본문에서는 아마사에게 직접 사명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3일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해 오고 너도 여기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뜻은 세바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병력을 모아와서 공을 세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3일 안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지체할 형편이 있었겠지요. 왕명도 중하지만 전시와 같은 시국인지라 지체할 수 없는 시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일을 또 아비새에게 맡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압과 아비새를 의식한 문제도 있었을 것입니다.

3. 아비새가 아마사를 죽임(6~13절)

1) 6절에서 다윗은 아비새에게 명하기를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신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세바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기 전에 해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7절에서 아비새는 “형 요압의 군사들과 그렛, 블렛 사람들(삼하 8:18, 15:18의 해석을 참고하십시오)과 모든 용사들을 데리고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을 나와 기브온(삼하 2:12, 3:30, 수 10:12~14, 예루살렘에서 서북쪽 11㎞쯤) 큰 바위 곁에 왔을 때, 아마사가 그들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사는 아비새의 군사들이 11㎞쯤 갈 만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2) 그때에 8절에서 “요압은 군복을 입고 칼집에 꽂힌 칼을 허리에 맸으나 저가 행할 때(아마사에게로 접근할 때) 칼이 빠져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계획적이었을까요? 주석을 보면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다(나중에 그렇게 된 뜻)”를 “저가 나갔을 때에 칼은 떨어져 나왔더라(미리 칼을 칼집에서 없앤 뜻)” 하므로 상대방을 긴장시키지 않기 위하여 미리 무장해제를 나타낸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아마사에게 접근하여 형은 평안하뇨(이종형제간임) 하면서 오른 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는 체 하면서 (아마사는 요압의 다른 손에 칼이 있음을 주의하지 못하였고) 칼로 그의 배를 찔러 죽인 것”입니다. 요압이 그를 죽인 것은 왕의 관심의 대상인 그를 시기하여 죽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마사가 세바의 난을 평정하고 군대장관에 오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뜻이지요(19:13). 롬 1:29에서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을 함께 묶어 악의 요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3) 이렇게 아마사를 죽인 후에 요압과 아비새가 세바를 쫓을 때, 11절에서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시체) 곁에 서서 (아마사가 모집해 온 유다 사람들에게) “요압을 좋아하고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하였고, 12절에서 “한 소년이 아마사의 시체를 큰 길에서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른 모든 백성들이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옷을 덮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백성들이 아마사 시체 앞에 멈추었다”는 뜻은 아마사의 신복들이 그의 죽음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 줄 압니다. 그리하여 13절에서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세바를 쫓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아마사의 노력은 요압의 세력에 합류한 셈이고 자신은 불행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4. 세바의 죽음(14~2절)

1) 14절에서 “요압(잔글자)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갈릴리 바다에서 서북쪽 30㎞쯤)과 벧마아가(단의 서쪽 6㎞쯤, 단은 갈릴리 바다 북쪽 45㎞쯤에 위치함)와 베림(알 수 없음)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모든 군사들)도 다 모여 저를 따랐다”고 하였는데, 원문에는 초두에 “요압”이란 용어가 없기 때문에 추격당한 세바의 행적으로 볼 수도 있어서 14절의 번역은 다른 번역서에 비할 때 차이를 이룹니다. 개역은 14절을 “요압이 세바를 추격하는 내용으로 번역하였고 지역을 알 수 없는 베림에 이른즉 그 지역 사람들이 요압을 따랐다” 하였는데, 영문번역이나 공동번역은 “세바가 자기몸을 피하여 가면서 비그리 사람들(베림을 Bichri, 또는 Bikri로 표기하여 지명으로 나타낸 뜻, 그러나 비그리는 세바의 아비인즉 인명도 되고 지명도 될 수 있음)도 그와 함께 뭉쳤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베림(Berites)”이 왜 “비그리”가 되었는지가 의문입니다.

2) 15절은 요압이 세바의 은신한 장소가 벧마아가 아벨(14절에서는 이 두 지역이 인접된 성읍으로 표기됨)임을 알고 그곳을 포위하였으나 성은 높고 성 주위에 해자(물호수 또는 물고랑)가 있어서 공격하기 어렵자 “해자언덕과 성벽 상이에 토성(둔덕)을 쌓아 진격하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6~17절에서 이때에 성안의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상대로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말한 내용은 18절에서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냈다” 하였으니, 이 뜻은 옛부터 아벨성 안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많아서 무슨 문제든지 잘 해결되게 하여 그런 속담까지 생긴 것인즉 “말로 해결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또 그 여인은 19절에서 “나는(그 성읍을 대표한 뜻) 나라의 화평과 충성을 도모하는 자인데 무슨 이유로 어미(지도층)같은 성을 멸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려 하는가” 하고 물은즉,

3) 이때에 요압이 대답하기를 20~21절에서 “결코 멸하려는 것이 아님을 3차나 강조한 후 에브라임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왕을 대적하였기 때문에 저만 내어주면 떠나갈 것이라” 한즉 여인이 “세바의 머리를 던질 것이라” 하고, 22절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일을 실천케 하여 그대로 시행하므로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을 흩어지게 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로 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이리하여 세바의 난도 역시 요압과 아비새가 진압을 한 것입니다.

5. 다윗의 조직 개편(23~26절)

1차 정부 조직은 삼하 8:16~18에서 이방족들을 정복한 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부에서 일어난 압살롬과 세바의 난을 평정하면서 다시 개편한 것입니다.

1) 23절에서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아론의 집 족장, 대상 12:17)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었으며(그렛, 블렛은 삼상 30:14, 삼하 8:18 참고,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있을 때 그 주위의 부족이 귀순한 것으로 추정됨),

2) 24절에서 “아도니람(아도람, 왕상 4:6)은 감역과(役事를 감독하는 자, 감찰직)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었으며(삼하 8:16과 같음),

3) 25~26절에서 “스와(사워사, 대상 18:16)는 서기관이 되고(문서관장을 뜻함),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며(삼하 8:17과 같음), 야일(Jail, 작은 동리일 듯) 사람 이라는 대신(정승같은 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국권이 잘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왕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런 방법과 절차로 통치되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제 25 과 사울의 남은 죄 심판 (삼하 21:1~22) 목록으로


본문 1~14절까지는 “사울의 남은 죄 심판”인데, 제목을 더 자세히 정한다면 “전시대의 민족 지도자(사사)가 하나님 앞에 맹약한 사실을 후시대의 지도자(왕)가 위반한 죄로 받는 심판”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여기의 전시대의 지도자는 사사 여호수아이고, 후시대의 지도자는 사울왕입니다. 시대적으로 설명 드리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 초기(주전 1409년쯤)에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맹약한 사실(수 9:3~27)을 후시대의 지도자인 사울왕이(주전 1055년쯤) 그 맹약을 위반한 일(삼상 22:17~19)에 대하여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노릇하는 말기(주전 985년쯤)에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흉년으로 3년, 그리고 사울의 두 아들과 외손자 다섯 명을 죽게 하신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맹세가 400년 가까이 대대로 지켜왔다는 사실과 범죄사건이 있은 후 70년쯤 후에 심판을 하시되 혈통조상이 아닌 선왕의 맹약을 위반한 후시대 왕의 잘못을 그의 혈통에게 벌을 내리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선민의 지도자는 선민적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맹약한 것을 지킬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하신 새로운 교훈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3절은 “3년 기근”이고, ② 4~6절은 “기브온족의 요청”이며, ③ 7~9절은 “7인의 죽음”이요, ④ 10~14절은 “호의적 장례”이며, ⑤ 15~22절은 “전쟁의 승리”입니다.

1. 3년 기근(1~3절)

1) 1절에서 다윗의 시대(서론 참조, 다윗왕 말기로 추정됨)에 년부년(연속의 뜻) 3년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근 또는 흉년에서 벗어나도록) 간구한즉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이는 사울과 피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도 선지자이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여러차례 직접 받았습니다(삼상 23:2~4, 11~12, 30:8, 삼하 2:1, 5:19, 23~25). 그리고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사실”은 서론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상 22:17~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2절에서는 “기브온(위치는 예루살렘에서 11시 방향 10㎞쯤)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이들을 히위족이라고도 함, 수 9:7)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여호수아 때, 수 9:3~27)에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여 제사장들을 수종하는 기브온족만 죽인 것이 아니라 “이방족을 척결하라(신 7:1~2)”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족과 싸울 때에도 분별을 두지 않고 죽인 사실을 의미할 것입니다.

3) 그리하여 다윗왕은 하나님이 기브온족의 원한을 갚으시는 뜻으로 재앙이 내려진 만큼 3절에서 기브온족에게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야 속죄가 되며 너희가 (원한을 풀고) 하나님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받겠느냐” 하였으니,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 속죄하는 것과 원한 있는 자들과 화해하여 복을 받게 하는 일이 필요함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섭리에는 이와같은 오묘한 뜻도 담겨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반드시 이웃으로부터 원한 갖게 하는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런 일들이 잠재되어 있을 때 축복의 길이 막힌다는 사실도 인지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5:23~24).

2. 기브온족의 요청(4~6절)

1)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벌주는 방법을 기브온족에게 물은 것이 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그 방법으로 시행한 결과가 기도응답으로 귀결된 만큼(14절)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과 섭리에 속한 것입니다. 4절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사울과 그 집(개인과 집안)과 우리 사이는 은금에 있지 않으며(물질피해가 아닌 생명피해란 뜻, 출 21:23~24)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자신들은 그 일을 시행할 권세가 없다”고 하자 다윗이 (왕권으로 말하기를) “너희 말하는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한즉,

2) 5~6절에서 기브온 족이 말하기를 “우리를 학살하고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사울)의 자손 7명만 주시면 그들을 사울의 고을(고향) 기브아(삼상 11:4)에서 목매어 죽이겠다” 하므로, 다윗이 이를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이 피해자의 뜻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시행한 것과 죄값이 죄지은 자의 자손으로 인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삼하 24:1, 13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징계 받을 종류를 당사자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3. 7인의 죽음(7~9절)

1) 이상의 요청에 의하여 다윗은 사울의 자손 7명을 선발해줄 입장에 처하였습니다. 7절에서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아껴 제외할 생각을 하였으니” 이는 요나단과의 맹약(삼상 20:8, 42, 23:18)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빼고 사울의 남은 자손을 찾은즉,

2) 8절에서 “아야의 딸 리스바(사울의 첩, 11절)에게서 낳은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요나단의 아들이 아니고 사울의 아들임)과 사울의 딸 메랍(큰딸, 삼상 14:9)에게서 출생한 외손자 5명을 선택하였으니, 이들의 아비는 므홀랏(삼상 18:19, 지역미상) 사람 바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이라고 하였습니다.

3) 9절에서 “그들을 기브온 족에게 주니 그들이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의) 산 위에서 하나님 앞에 목을 매달아 죽였는데 그 시기가 처음 곡식인 보리베기를 시작하는 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매달았다”는 뜻은 기브아에 제단이 없는 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기도와 함께 집행한 듯하고, 또 그 시기가 첫 보리 수확기임은 초실절(출 34:22) 시기로 기근을 면할 시기에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징계와 추수할 시기와 기근 모면이 섭리적으로 연결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4. 호의적 장례(10~14절)

1) 10절에서 자식을 잃은 리스바의 슬픔은 당연한 일인데 그는 “굵은 베를 반석 위에 펴고 시체에 공중의 새나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도록 지키기를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지켰다” 하였으니, 이는 슬픈 표현에 앞서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벌이지만 비를 오게 하여 기근을 면하려 하는데 있었으므로 그 일을 기원하는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자(11절),

2) 12~14절에서 다윗은 사울의 집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장례를 치러주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자 그 시체가 벳산 성벽에 못박혀 있던 것을 길르앗 거민이 길르앗 야베스 에셀나무 밑에 화장하여 뼈만 장사하였던 것을(삼상 31:8~13) 다윗이 와서 기브아로 가져와서 그들의 조상인 기스의 묘에 함께 장사지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 주셨다” 하셨으니, 공의 실현(징벌시행)이 곧 기도응답의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모든 성도나 한국 교회가 각성할 일이라 할 것입니다.

5. 전쟁의 승리(15~2절)

공의의 시행이 있은 후 비도 왔고, 곡식도 생겼으며, 기도응답과 함께 전쟁까지 승리하였으니, 하나님의 공의 시행이 복 받는 방법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 15~16절에서 “블레셋의 침략으로 다윗이 나가 싸우다가 피곤하였는데, 이는 장대한 자의 아들 중 300세겔 무게 되는 놋창(골리앗의 창은 창날이 철 600세겔이라 하였음, 삼상 17:7, 1세겔은 14g정도라 함)과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과 대결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장대함”의 원문은 “라파”(각주)인데 이 뜻이 “거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라파”가 르바임(족속이름, 창 14:5, 수 12:4) 족을 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역과 영문번역은 거인으로, 공동번역은 르바임족으로 번역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2) 17절에서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이스비브놉을 쳐 죽이고 다윗의 종자(신복)들이 다윗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도록 맹세까지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등불(중요한 인물)인즉 꺼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왕은 민족의 구심점일 뿐 아니라 안전과 발전의 중요한 인물로 여긴 줄 압니다. 18~22절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은 세 차례나 또 있었습니다.

3) 한번은 18~19절에서 곱(깊은 구멍이란 뜻, 지역미상)에서 후사(베들레헴 서쪽 7㎞쯤)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 “삽”을 쳐 죽였고(18절), 다음에는 곱에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뜻)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자루는 (골리앗처럼, 삼상 17:4~7) 베틀채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잔글씨로 기록된 라흐미를 골리앗의 아우로 기록한 것은 대상 20:5에 근거한 것입니다.

4) 20~22절에서 “또 가드(가사에서 1시 방향 40㎞쯤, 욥바의 남쪽 30㎞쯤에 위치함)에서 전쟁할 때에 6손 6발가락을 가진 장대한 자가 있었는데 그를 다윗의 조카인(다윗의 셋째 형, 삼상 17:13)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므로 장대한 자 넷이 다 다윗의 신복에게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기브온족의 원한을 풀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 드린 다음에 받은 기도의 응답으로(14절) 성취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제 26 과 다윗의 찬송 (1) (삼하 22:1~28) 목록으로


삼하 22장을 살피면서 여기에 나타난 내용이 시 18편에도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 1절에서 서론의 내용만 다를 뿐 그 다음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문구상으로 다 같지는 않지만 내용과 취지가 같은즉 한 문장으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제가 시편을 먼저 살피면서 시편 설교 23과와 24과에서 이 말씀을 더듬어 기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엘 선지자(및 그 시대의 선지자 갓과 나단)가 기록한 다윗의 글이 시편에 편집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다윗의 시가 사무엘서에 기록될 형편은 충분합니다. 그 이유는 노령층의 사무엘 선지자와 청년기의 다윗이 상당기간 한 시대에 살았고, 다윗이 역경을 견디면서 간증한 신앙의 문서들이 사무엘 선지자의 유품에 보존되었다가 사무엘의 말년에 기록에 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시편에는 또 어떻게 오를 수 있었을까요? 시편은 대부분 다윗의 글인데 사무엘 선지자와 다윗의 시대가 노년기와 청년기의 차이일 뿐인 만큼 시편을 편집한 사람들이 사무엘하 22장에 기록된 다윗의 시를 시편에 편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론상의 차이는 다윗의 글이나 생활을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다윗의 글 또는 그의 사상표현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본 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① 1~4절은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함”이요, ② 5~20절은 “구원의 역사를 노래함”이며, ③ 21~27절은 “의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전체의 내용은 “하나님께 아뢰는 다윗의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함(1~4절)

1) 1절에서 “다윗은 모든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때에 이 노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특별한 고난과 연단을 받았지만 모든 성도들도 어려웠던 과거를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제라도 여러분들이 과거에 어려움을 견딜 때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지나오게 하신 것을 회상해 보십시오. 다윗도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으로 노래를 지었던 것입니다.

2) 2~3절에서는 자기를 환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였으니, 곧 “하나님은 자기의 반석(기반), 요새,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은신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제단뿔로서의 의미가 있음, 왕상 1:50),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가 되셔서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하나님을 열 가지로 표현한 뜻은 다윗이 생명의 위험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구원의 방편들로 이용되게 하신 사건들입니다. 그런 일들이 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로 나타난 것을 감사한 의미입니다.

3)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찬송을 받으셔야 하고 또 계속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 구원의 역사를 노래함(5~20절)

1) 5~6절은 다윗이 당한 환난의 정황을 시적으로 묘사한 말씀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해일을 생각하십시오. 어제는 1,400명 이상을 태운 애굽의 여객선이 홍해에서 침몰했다는 뉴스가 있었음)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 하므로 자신의 생명의 위험한 정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7절에서 “그때에 다윗은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전에서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시 116:1).

2) 8~16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연계 통치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창조 하시는 과정을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면 더욱 놀랐겠지요. 그러나 만물 창조 다음에 피조 된 인간은 자연의 조화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다윗은 능력의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능력의 하나님을 자연통치로 묘사한 것입니다. 8절의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땅을 뜻함)가 요동함”은 지진을 연상한 것으로 이것을 “그의 진노라” 하였고, 9절의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은 화산을 연상한 것이요, “그 불에 숯이 피었음”은 사람이 그 불을 이용하였음을 뜻하며, 10절에서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그 발 아래가 어둑캄캄함”은 구름의 하강을 뜻하고(출 16:10), 11절의 “그룹을 타고(천사들의 호위를 뜻함) 날으시며 바람날개 위에 타심”은 하나님의 거동이 바람처럼 신속함을 뜻하며, 12절의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장막을 삼으심”은 하나님이 물 가운데(공중이나 바다의 물)도 계실 줄로 믿은 것이요, 13절의 “그 앞의 광채(태양)로 인하여 숯불이 핌”은 하나님이 주신 태양열을 사람이 불로 사용하게 됨을 뜻하고, 14절은 “하늘의 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묘사”한 것이며, 15절의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고 번개로 파하심”은 뇌성의 직격탄을 연상한 것이고, 16절에서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다” 한 것은 자연의 재해를 하나님의 꾸중으로 느낌과 동시에 바람의 역사를 하나님의 콧김에 불과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며, 또 그 바람의 힘으로 물 밑이 드러난 것은 홍해와 요단강이 바람의 힘으로 밑바닥이 나타난 것을 연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시는 능력자이신데 그 분이 곧 다윗 자신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3절).

3) 17~20절에서는 능력의 하나님이 자신을 환난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신 것을 나타낸 말씀으로 17절에서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환난)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하셨는데, “저가 위에서 보내심”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 능력으로 섭리(통치)하여 구원하셨다는 뜻이요, 18절에서는 “강한 원수(다윗보다 힘센 자)와 미워하는 자에게서(더 능력 있는 하나님이) 건져주셨다”함이며, 19절에서는 “저희(원수들)가 나의 재앙의 날(다윗이 징계로 고난 받는 기간)에 내게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나의 의지가 되셨다” 함이요, 20절에서는 “또 나를 넓은 곳(자유로운 요새)으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3. 의를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21~27절)

1) 21절에서 “하나님은 내 의(믿음의 의와 행실의 의가 있음)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시 24:4, 정결한 생활을 뜻함)을 좇아 갚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의는 곧 22절에서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았음”이요, 23절에서 “모든 규례를 자기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않았음”이며, 또 24절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여(완전한 인정을 받도록) 스스로 지켜 죄를 피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25절에서 하나님은 “의대로 그 목전에서 나의 깨끗한 대로 갚아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25~28절은 하나님은 형편에 따라 적당한 은혜로 처리하시는 것을 깨닫고 간증한 내용으로 “하나님은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고 완전한 자에게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완전하도록 힘쓰는 자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신 속성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 마 5:8) 깨끗한 자에게도 그렇게 하시나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사특하게(허탄한 이기주의에 얽매인 것) 나타내는 자도 있으니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아시고 그 형편에 맞도록(주의 거스르심:징계에 해당하는 사건) 대응하신다는 뜻입니다.

3) 그런 원리에 근거하여 28절에서 “하나님이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는 살피셔서 낮추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과 또 악인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섭리를 체험한대로 간증한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 27 과 다윗의 찬송 (2) (삼하 22:29~51) 목록으로


다윗의 찬송이 계속됩니다. 찬송의 가사를 분류하면 ① 29~33절은 “하나님과 다윗과의 관계”요, ② 34~41절은 “전쟁을 이기게 하심”이고, ③ 42~46절은 “내란 평정(平定)과 이방정복”이요, ④ 47~51즐은 “감사와 찬송으로 결론지음”입니다.

1. 하나님과 다윗과의 관계(29~33절)

1) 29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등불이시니…나의 흑암을 밝히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등불은 어두울 때 길을 밝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는 것을 흑암으로 비유한다면 그가 하루 아침에 총리가 된 것은 등불과 같다 할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환경을 수없이 반복하였으니까요. 30절에서 “하나님을 의뢰의 대상이라” 하였으니 곧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는다”고 하였습니다. 의지의 대상은 능력자이어야 하고 또 “자기를 의지하라”고 허락하셔야 합니다. 32절에서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절대능력을 상징한 뜻)뇨” 하므로 하나님의 절대성을 표현하였으니, 이는 시 23:1에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되신다”한 말씀이 곧 의지의 대상이 되어 주신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2) 31절에서는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시 19:7~8)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라” 하므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의지의 대상, 또는 보호자(방패) 되심을 말씀하였습니다. 또 33절에서는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보호의 은혜)요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하시므로 전쟁 중에 지형지물을 이용함에 있어서도 적당하고 요긴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저는 2년 후에 정년퇴임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적당한 곳으로 인도하여 남은 사명을 다하게 하셔야 하는데…” 하고 늘 기도하는 중에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에서 한층 더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등불이 되시고 의뢰의 대상이 되시며 절대자로서의 방패, 바위, 요새, 그리고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 하므로서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전쟁을 이기게 하심(34~41절)

1) 하나님은 다윗이 선봉에 선 전쟁을 이기게 하시기 위하여 34절에서 “다윗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셨고(빨리 달음질 할 능력을 주신 것) 또 다윗을 높은 곳에 세우셨다” 하였으니, 이는 “싸움에 유력한 고지를 점령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35절에서는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게 되었다” 하므로 힘 있게 놋활을 당기며 싸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간섭임을 말씀하였고, 또 36절에서는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셨다” 하므로 방패로 적의 무기를 막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온유하신 성품(마 11:29)을 다윗이 본 받아 행한 것이 자신이 크게되고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하였던 것처럼(민 12:3) 다윗도 모든 이에게 온유한즉 인심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인심을 얻음이 땅을 기업으로 넓히고 자신이 크게 된 이유였음을 말씀한 것입니다(마 5:5, 시 37:11). 또 37절에서는 “내 걸음을 넓게(멀리 뜀)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넘어지지 않음) 하셨다” 하므로 전쟁할 때 “빠르게 뛸 수 있고 넘어지지 않게 됨”이 곧 하나님의 붙들어 주신 은혜란 것입니다.

2) 그리하여 37~39절에서 “원수를 따라 멸하고 저희를 무찌를 수 있었으며 저희를 파하므로 그들이 발아래 엎드려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고”, 40~41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지도하셨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전쟁하게 하시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셨고(힘을 쓸 수 있게 하신 뜻),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굴복하게 하셨으며, 또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도망하게 하신 뜻) 하셨고, 나로 하여금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방인들과는 직접 싸웠지만 자기를 대적하는 사울왕과는 직접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다 물리쳐 주신 것입니다.

3. 내란 평정과 이방정복(42~46절)

1) 42절에서 “저희가 둘러보아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않으셨다” 한 것을 보면 이들은 선민 중의 반역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사울의 신복들과 압살롬이나 세바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으나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았음을 뜻하고, 그런 중에서 다윗은 43절에서 “그들을 땅의 티끌처럼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처럼 밟아 헤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말씀은 44절 말씀과 함께 내란 평정을 말씀한 것입니다. 44절에서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선민간의 내란)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셔서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 45~46절에서는 이같은 은혜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이 나의 소문(풍성)을 듣고 내게 굴복하며 순복할 것이요 그들이 쇠미해져서 그들의 견고한 곳(요새나 성읍)에서 떨며 나오게 될 것이라” 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란이 평정되고 이방인을 정복하므로 다윗의 왕국이 든든할 것을 믿고 아뢴 것입니다.

4. 감사와 찬송으로 결론지음(47~51절)

1) 47절에서 “여호와는 생존하시니(영원히 계심, 시 102:12) 나의 바위(5절)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절대 능력을 비유한 말씀)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하였고, 48절에서는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원수를 갚아주심)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신 분”이며, 49절에서는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건져주심) 하시고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드시며(적 앞에 강한 자로 세우심)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셨다” 하므로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 찬송 할 이유를 말씀한 것입니다.

2) 50절에서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모든 이방인들과 함께)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라” 하였고, 5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왕(다윗 자신)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받은 자(왕 자신)에게 인자를 베푸셨으니 (이는)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다윗과 그 후손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인자의 대상이 됨은 다윗의 자손들이 선민의 왕노릇도 하겠지만 특별한 약속으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오셔서(마 1:1) 영원한 나라(천국)의 왕될 것을 언약하셨기 때문에(삼하 7:12~13)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제 28 과 마지막 말과 용사 소개 (삼하 23:1~12) 목록으로


본문 ① 1~7절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요, ② 8~12절은 “으뜸용사 세 사람”이며, ③ 13~17절은 “30두목 중 세 사람이 한 일”이고, ④ 18~23절은 “두 용사에 대한 소개”요, ⑤ 24~29절은 “31인 용사의 명단”입니다.

1. 다윗의 마지막 말(1~7절)

1) 이 “마지막 말”이란 유언의 뜻이 아니고 노래로서의 마지막 글이란 뜻입니다. 1~2절에서 다윗은 자기를 소개할 때 “이새의 아들(평범한 서민이란 뜻),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왕된 은혜),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지혜를 힘입은 뜻)라” 하였으니, 이는 자긍하는 뜻이 아니라 미천한 자를 높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려는 뜻입니다. 또 2절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다” 함은 자신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선지자임을 직접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2) 3~4절에서 “이스라엘의 바위(선민과의 약속을 불변케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롭게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희망을 주는 태양)같고 구름없는 아침(미래를 희망있게 나타내 주시는 뜻)같으며 비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 돋는 새 풀 같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믿음(하나님 경외)과 공의(바른 행위)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가 크게 희망있고 번창할 것을 말씀하신 뜻”입니다.

3) 그런 중에 5절에서 “나의 집(다윗의 왕국)이 하나님 앞에서 이같지 않으냐”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이 언약은 삼하 7:8~16에서 말씀하셨음)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왕국의 든든함)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다윗이 공의로운 왕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코자 하는 일들)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하므로 하나님이 다윗 자신과 다윗의 나라를 통하여 뜻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6~7절에서 “사악한 자는 버려야 할 가시나무 같으니 이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며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음이 될 것이라” 하므로 사악한 자를 엄하게 벌할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다윗의 정치적 소신을 말한 것인데 여기의 “돋는 해”를 계 22:16에 기록된 새벽별(아침별 또는 태양)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또 7절의 “철과 창자루”를 계 12:5에 기록된 “청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예수님”이란 말씀과 연계하여 이 부분을 메시야 예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윗을 공의로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자로 나타내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으뜸용사 세 사람(8~12절)

다윗의 왕국이 든든해진 것은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되 하나님이 헌신적 용사들을 일으켜 쓰셨으니,

1) 첫째는 8절에서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입니다. 이 이름을 대상 11:11에서는 “야소보암”이라 하였는데, 또 본문에서 그의 별명은 “에센 사람 아디노”라 하였으니 별명을 갖는 사례는 많이 있으나 두 연고지를 말씀한 사례는 처음입니다. “에센 사람 아디노”란 말이 영문성경이나 공동번역에는 없고 공동번역에서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을 “하그모니 사람 이스보셋”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발음상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에 “에센 사람 아디노”가 첨부된 것은 사본 또는 번역상의 오류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그몬(Tachemon)이란 지역은 찾을 수 없고 이 사람은 군장의 두목(참모총장격)으로 한때에 800인을 죽인 사실이 있다 하니 대단한 장수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9~10절에서 “아호아(Ahohite, 지명을 찾을 수 없음)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이 사람은 블레셋과 싸울 때 자기 군사들이 물러간 상태였지만 싸움을 돋우고 저가 (혼자)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손이 굳어져서 칼 잡은 손이 펴지지 않을 정도로, 공동번역) 적을 쳐서 승리한즉 백성들이 돌아와서 따라가며 노략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도 대단한 장수입니다.

3) 세 번째 사람은 11~12절에서 “할랄(Harar, 지명을 찾을 수 없음) 사람 도대의 아들 삼마인데 이 사람은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이 도망하였지만 저는 (혼자) 그 밭 가운데 서서 블레셋 사람을 친즉 하나님이 큰 구원을 이루셨다”고 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다한즉 하나님이 도우신 것을 뜻합니다. 이상의 세 용사는 다 적 앞에서 후퇴하지 않고 홀로 싸워 승리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도 이렇게 싸우고 충성하는 인물을 쓰시는 줄 압니다.

3. 30두목 중 세 사람이 한 일(13~17절)

1) 이 부분은 다윗의 한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본문 13절에 보시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라” 하셨는데, 삼상 22:1~2에서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400명의 신복들과 함께 아둘람 굴에 있은 적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7시 방향 5㎞쯤에 있고, 아둘람 굴은 8시 방향 26㎞쯤에 위치한즉 아둘람에서 베들레헴까지는 2시 방향으로 20㎞쯤 되고 그 사이에 블레셋 진영인 르바임 골짜기가 있으므로 대략의 위치파악을 할 수 있으며, 이때에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면서 블레셋을 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의 역사가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일 것이라”는 추측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14~15절에서 다윗은 산성(요새지)에 있고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던 블레셋 사람의 영채(진영을 뜻함, 공동번역은 수비대라 하였음)가 베들레헴에 있을 때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먹고 싶어 한즉 16절에서 30두목 중 세 용사(이름을 밝히지 않았음)가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그 물을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입니다. 이때에 다윗은 16절에서 “그 물 먹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고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3) 17절에서 “다윗이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부하들에게 지나친 요청을 한 것을 후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나타냈으니, 그 물의 값은 세 용사의 생명과 다윗이 물을 먹지 않은 금식 만큼의 가치있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희들은 무명 세 용사의 충성과 제물의 가치와 다윗이 하나님께 제물드리는 정성에 대하여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두 용사에 대한 소개(18~23절)

1) 18~19절에서는 “아비새”를 소개하면서 “저는 그 3인의 두목이라” 하시므로 13절의 세 사람 중의 두목이며 저가 창으로 300명을 죽이므로 그 두목이 되었으나 첫 3인(8~12절)만은 못하다 하셨고,

2) 20~21절에서는 “브나야”를 소개하면서 그는 “갑스엘 용사의 손자요 여호야다의 아들로 효용한 일(뛰어날 만한 큰 일)을 행한 자로서 일찍이 모압(인)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또 장대한 애굽인을 죽일 때 자기 손에 창이 있는데도 막대기를 갖고 가서 그 애굽인의 손에 있는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죽였다”는 것이요, 22~23절에서는 “그가 이런 일을 행하여 세 용사에 뽑히는 이름을 얻었고, 30인 보다 존귀하나 첫 3인(8~12절)만은 못하며…다윗이 시위 장관(경호실장)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5. 31인 용사의 명단(24~39절)

1) 여기에서 소개된 명단은 31명입니다. 지명의 연구를 생략하고 이름만 열거하면 아사헬, 엘하난, 삼훗, 엘리가, 헬레스, 이라, 아비에셀, 므분내, 살몬, 마하래, 헬렐, 잇대, 브나야, 힛대, 아비알본, 아스마렛, 엘리아바, 요나단, 삼마(11절의 삼마 아님), 이히암, 엘리벨렛, 엘리암, 헤스레, 바아래, 이갈, 바니, 셀렉, 나하래, 이라, 가렙, 우리아로 정리됩니다.

2) 39절에서 “도합 37인이라” 하셨는데, 이 숫자를 어떻게 맞추어야 할까요? 6명을 더하면 37인이 되겠지요. 우선 큰 사람 요셉밧세벳(8절)과 엘르아살(8절)과 삼마(11절, 33절의 삼마와 같은 사람이 아님)와 다음에 나타난 두 용사 아비새(18절)와 브나야(20절의 브나야가 아님)까지 합하면 37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명단에서 군대장관(24:2) 요압이 빠진 것은 다윗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특별한 사람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 합하면 39인입니다.

제 29 과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 (삼하 24:1~25) 목록으로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라 하셨으므로 그 말씀대로 총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진노받을 근거”요, ② 5~9절은 “인구조사 시행”이며, ③ 10~14절은 “자책과 벌을 선택함”이고, ④ 15~17절은 “진노의 상황”이요, ⑤ 18~25절은 “제사와 응답”입니다.

1. 진노받을 근거(1~4절)

1)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노하여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짓기도 전에 죄를 짓도록 감동하여 죄를 짓게 하시고 벌하시는 분인가? 할 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설령 죄 짓는 것을 두고 보셨다 하더라도 죄를 지은 다음 회개하지 않을 때 벌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사건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신 것을 의미할 뿐 하나님이 범죄 할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을 감동시켰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쁜 감동(10절에서 자책 또는 큰 죄라 하였음)을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인구조사 계획을 구상할 때 하나님이 사탄의 역사를 허용하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다른 죄도 없지 않을 것인즉 벌하시려고 다윗이 좋지 못한 구상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롬 1:24). 따라서 “다윗을 감동시킨 것”은 사탄이 한 일이고(대상 21:1), 하나님은 그 배후에서 섭리하셨다고 보셔야 합니다(왕상 22:22).

2) 2절에서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북쪽 단에서 남쪽 브엘세바까지)의 인구(여기에서의 조사 대상은 싸움에 나갈만한 장병을 뜻함, 9절, 민 1:3)를 조사하라” 한즉, 3절에서 요압이 왕께 고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백배나 더하게 하시고 (또 이 사실을)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온데 왕은 왜 이런 일을 하시나이까” 하고 만류하였지만(대상 21:3) 왕은 요압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4절에서 “요압과 군대장관들(당시 군대장관은 아비새이고, 23:18, 30두목이 다 장관임, 23:13)을 재촉하여 그들이 복종하려고 왕 앞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2. 인구조사 시행(5~9절)

1) 5~7절은 인구조사원들의 조사를 위한 지역순행 기록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였을 것이고, 5절에서 “요단을 건너 갓 지파의 땅 골짜기 가운데 성읍인 아로엘(사해바다 중앙부에서 동쪽 20㎞쯤에 위치함, 또 다른 아로엘은 네게브 지역 즉 사해남단에서 10시 방향으로 40㎞쯤에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삼상 20:26) 우편 곧 야셀(사해 북단에서 2시 방향 28㎞쯤) 맞은편에 장막을 치고 인구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의 “아로엘 우편 곧 야셀 맞은편”은 공동번역에서 “아로엘과 계곡 한 가운데 있는 도시에서 시작하여 야셀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지명 위치에 모순이 없어야 하겠지요. 다음 6절에서는 “길르앗과 닷딤홋시와 다냐안에 이른 다음 시돈으로 돌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길르앗은 요단 동편 지역이고, 시돈은 서쪽 지중해변 북쪽 항구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 지역인 닷딤홋시와 다냐안이 지도상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6절 말씀의 번역문이 공동번역과 영문번역에서는 다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즉 “길르앗에서 헷 지역에 있는 가데스에 이르렀다가 다시 단으로 갔다”고 되어 있으므로 닷딤홋시를 헷 지역으로, 다냐안을 가데스로, 시돈을 단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이 뜻은 헷 족속의 땅에 닷딤훗시가 있고 가데스에 다냐안이 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의 가데스는 출애굽 당시에 통과한 곳이 아닙니다(민 32:8, 신 1:2).

2) 7절에서는 “시돈에서 40㎞쯤 남쪽에 있는 견고한 성인 두로항에 왔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으로 지나서 유다 남편 브엘세바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히위 사람 지역은 팔레스틴 땅의 중앙부로 야곱이 그 지역에서 산 일도 있었고(창 34:2), 기브온 족이 그곳에 있으면서 여호수아를 속인 곳이기도 합니다(수 9:3~21). 또 “가나안 사람의 모든 땅”이란 창 10:6, 19에서 잘 설명되었고 대체적으로 요단 서편 땅을 일컫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구조사의 노정은 요단 동편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북서쪽을 통하여 중앙부로 거쳐 남단 브엘세바까지 와서 마쳤다는 뜻입니다.

3) 8~9절에서 “저희 무리가 국중(나라 전역)을 두루 돌아서 9개월 20일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유다지파 이외의 선민, 사울왕이 통치하였던 백성들)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이요 유다 사람 중에서는 50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정병이 될 만한 사람만을 적당 수준에서 계수한 줄로 압니다.

3. 자책과 벌을 선택함(10~14절)

1) 10절은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일에 대하여 “자책하며 심히 미련하였다” 하였고, 또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나님께 아뢰면서 용서를 구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사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족히 인식하였습니다. 또 징벌 받을 염려를 느끼면서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구하였으니, 그의 정병계수가 왜 그렇게 큰 죄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본문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윗의 이 행위가 죄 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하나는 자기의 세력을 헤아리고 의지하려 한 것이요, 또 하나는 세계정복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진 자가 피조물이나 사람을 의지한다면 어리석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일이겠지요. 칼과 단창을 갖고 달려오는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리친 다윗이(삼상 17:45) 자신의 군사를 계수하고 의지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앙을 다 쏟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시 33:16, 146:3~5, 렘 17:5). 또 만일 다윗이 영토확장이나 국권신장을 원했다면 그것은 전쟁을 계획함인즉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한 자신의 고백(삼상 17:47)을 뒤집는 잘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11~13절에서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임하였고 갓을 통하여 나타내신 징계의 내용은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3절에서 그 징계는 “왕의 땅에 7년 기근”과 “왕이 대적에게 쫓겨 3개월간 도망하는 일”과 “3일간의 온역”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범죄와 징계의 관련성에 있어서 왕이 범죄한 일에 대하여 징계가 왕과 백성들까지 포괄적으로 나타내신 것인데 이런 사례는 아론이나 여러보암이나 르호보암이 잘못하였을 때에도 연대적으로 백성들에게 벌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출 32:25, 왕상 14:16, 대하 12:1, 사 3:12, 9:16). 또 징계의 종목에 대하여 징계받을 자의 의견을 수렴하시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의 가능성과 긍휼에 입각한 인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시는 섭리라 할 것입니다.

3) 14절에서 다윗은 “내가 곤경에 있도다 하나님은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므로 3일간의 온역을 선택한 것입니다. 7년간 기근이 있게 되면 사람들간의 갈등이 생길 것이고, 또 석 달을 전쟁에 쫓기는 것은 직접 사람에게 빠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온역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으로 사람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한 것인데 그것이 잘 적중되었습니다(16절).

4. 진노의 상황(15~17절)

1) 15절에서 “이에 그 아침(다윗이 징벌을 선택한 시기)부터 선민 전역에 온역이 일어나 백성의 죽은 자가 7만명이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서 “온역을 내리는 천사(아브라함과 놋과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를 연상하십시오, 창 18:2, 19:10~13, 32:24)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할 때 하나님이 뉘우치시고 족하다 하시며 재앙을 거두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뉘우치신 것”은 징계가 실수로 이행된 뜻이 아니요, 다윗의 회개(10절)를 감안하시려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2) 17절에서 이때에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하나님께 아뢰기를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사오나 이 양 무리(백성들)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를 치소서” 하였으니, 범죄의 책임을 통감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때는 16절에서 하나님이 이미 긍휼을 베풀어 재앙중단을 결심하신 후였습니다.

5. 제사와 응답(18~25절)

1) 18절에서 “이날에 갓(선지자)이 다윗에게 고하되 여부스(이삭이 제물된 곳이고 예루살렘 성전터가 된 것임, 창 22:2, 대하 3:1) 사람 아라우나(대상 21:15에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였고, 19~21절에서는 “다윗이 갓의 말대로 시행하기 위하여 신복들과 함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온즉 아라우나가 절하며 왕이 오신 이유를 물었고 왕은 재앙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2) 이때에 아라우나는 22~23절에서 “번제드릴 소와 땔 나무로 쓸 제구(타작 기구들)가 있은즉 원하는 대로 쓰시라”고 하였지만 24~25절에서 왕은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은 50세겔(14g×50=700g, 은값으로 환산해 보십시오)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즉 하나님이 그 땅(선민의 나라)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므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값진 제사에 대하여는 23:17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모리아 산의 지역임과 동시에 솔로몬의 성전터가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대하 3:1).

3)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대상 21장을 보면 몇 가지 상이한 기록을 발견하시게 됩니다. ① 대상 21:5에서 정병을 계수한 수가 80만, 50만이 아니고 110만, 47만으로 되어 있는 것과, ② 대상 21:25에서는 제사용 값으로 금 600세겔을 주었으니 은 50세겔에 비하여 큰 차이가 있는 점이며, ③ 다윗의 드린 제물을 불로 응답하셨다는 내용(대상 21:26)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문제 될 것이 없고, 은 50세겔은 타작마당과 소값이라 하였는데, 금 600세겔은 기지(성전터)값이라 하였으니까 성전 지을 때의 터 값을 의미한즉 문제될 것이 없지요. 그리고 정병계수의 차이가 문제인데 어떤 주석을 본즉 “이스라엘(유다 지파 이외의 지파) 지파의 수가 30만명 증가된 것은 그들과 함께 동거하는 이방인 장정까지 포함한 수이고, 유다 지파에서 3만명이 감소한 것은 그 지파 중에 포함되어 거주하는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선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대서의 기록을 바벨론 포로 이후로 보는 만큼 그 시대의 통계의 표준도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난제에 대한 해석은 더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2006. 2. 10)

설교보충 1. 다윗에게 주신 은혜 (삼하 7:8~17) 목록으로


다윗이 환난에서 보호받고 왕이 된 후에 대적을 파하고 또 좋은 왕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장막에 445년쯤 있는 것을 몹시 송구하게 생각하여 성전을 지어 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결심하였을 때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나단을 통하여 주신 말씀이 본문에 나타나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가 18~29절에 나타나 있는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또 다윗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하는 점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란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은혜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7장 전체에서 교훈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1절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을 파하시고 다윗에게 왕궁을 주셔서 평안히 거하게 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왕이 아니니까 대적을 위해자로, 왕궁을 주택으로 축소하여 위해자는 떠나고 주택을 주시며 평안을 주실 수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하실 수 있습니다.

2.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궤가 휘장 가운데 계신데…출애굽때부터 오늘날까지 445년쯤 계시면서 나(왕)에게 집을 달라고 하시지 않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6절). 이것은 예수님이 집 없이 사시고 바울사도가 셋집에서 사시면서도(행 28:30) 집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안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만큼 현세욕에서 멀리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줄 압니다. 아브라함도 평생을 장막에서 사셨으니까요(히 11:9).

3. 2절에는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존귀하신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하였으니 자신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보다 현세영달 누리는 것을 크게 송구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과 봉사와 분배가 많이 좋아질 것입니다. 자신은 잘 살면서 이웃이 못 사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든지 성도가 자신은 부요하면서 하나님을 부요하게 섬기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 성도와 교회와 교역자를 함께 생각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결심(성전 건립)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대단히 만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 것은 많습니다. 자기를 목동에서 불러 보호, 연단하시고 이방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주권자를 삼으신 것과 이웃 나라의 존경을 받으며 왕궁까지 짓고 대적을 물리쳐 주셨으니 보통 은혜가 아니지요. 다윗은 그것을 잘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성전을 지어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도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반해 오면서 하나님을 기뻐하여 춤을 추고 찬양한 것을 보면(삼하 6:14) 하나님이 만족 안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희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엡 5:10)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계속 보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아주 큰 은혜(영원한 메시야 왕국)를 주셨습니다.

5. 8~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 대하여 양을 따르는 데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고(8절), 함께 있으시며 대적을 멸해 주셨고,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셨으며(9절), 한 곳을 정하여 정착하게 하시고, 악한 유가 해하지 못하게 하셨으며(10절), 평안케 하여 집을 이루게 하셨고(11절, 시 127:1), 수한대로 살게 하신 후 그 몸의 후손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여 나라를 견고하게 하셨으며(12절), 또 후손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시고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셨으며(13절), 사람 막대기,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시지만 은총을 뺏지는 않으시고(14~15절), 나라를 메시야 왕국으로 변하여 영원히 보존케 하신다(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다윗의 육체적 자손이 왕노릇 하다가 언약의 자손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왕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6.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깨닫고 감사하였으니 그 말씀이 곧 19절의 “이만한 은혜를 적게 여기시고 인간 규례(더 갖기를 원하는 사람의 욕심)대로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7. 21~24절에서는 “자기의 큰 뜻을 종에게 알리시는 하나님, 또 광대하신 하나님(모든 것을 포괄 통치하심), 절대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였고, 또 “자기의 명성을 위하여 큰 일을 열국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며(23절), “이스라엘을 선택하사 영원한 주의 백성을 삼고 저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24절) 말씀대로 영원히 확실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25절)”고 하였습니다.

8. 2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원한 집(메시야 약속과 천국)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또 28절에서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은 참되시고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시는 분이라” 하면서 “주의 은혜로 이러한 복이 종의 집에 영원히 있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29절). 기도 할 마음은 주시는 자의 약속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요 근거가 있을 때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성전 짓는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은 몹시 기뻐하시고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나라의 견고함, 평안한 죽음, 왕위의 계승, 메시야 약속, 영원한 왕국까지 주셨는데, 다윗이 성전 짓는 특권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그보다 더 큰 것을 주셨으니, 그것이 곧 메시야를 통한 영원한 왕국을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설교보충 2. 다윗의 범죄 (삼하 11:22~25) 목록으로


다윗의 좋은 점만 교훈을 받다가 다윗의 범죄를 생각한즉 황당한 느낌이 듭니다. 타락이란 순간에 닥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다윗이 유혹을 받은 것은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 왕궁의 지붕을 거닐 때였습니다. 왕이 낮잠을 못 잘 이유는 없지만 그 당시에 부하들과 군인들은 암몬족과 전쟁을 하는 시기였는데, 다윗은 왕궁에서 한가한 시간을 갖고 지붕 위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가한 시간에 산책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나 유혹의 마귀는 그런 기회를 틈타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가끔 아이들의 차량편의를 제공할 때가 있는데 그 사이 사이에 10분, 20분씩 기다리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성경묵상을 하고 강론을 썼습니다. 이 설교도 그런 기회를 이용한 것입니다. 저는 5분이나 10분도 무의미하게 기다리는 일을 못합니다. 그 시간에도 무엇이나 하여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가하면 유혹이 오니까 유혹에 틈을 주시 마시자는 것입니다. 다윗이 한가할 때 시험을 받았으니까요.

2. 다윗이 받은 시험은 목욕하는 여인의 나체를 보고 아름답게 여긴 것인데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도들도 그런 정도의 유혹은 받을 수 있습니다. 욥도 말하기를 “내가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하였습니다. 보고 지나치는 것은 괜찮으나 눈으로 따라가면서 주목하는 것은 유혹에 끌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여인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계속 마음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신분을 알아보았고, 데려오라 한 후 동침까지 하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만일 그 여인이 임자가 없었다면 왕으로서 크게 죄될 것이 없지만 그 여인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충성된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범하였기 때문에 죄가 된 것입니다.

3. 그러고 보니 다윗은 음행죄 외에도 충성된 신하를 배신하는 죄를 범하였고, 자신의 육체적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으며(벧전 2:11,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또 중요한 것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히 13:5). 다윗이 여자가 없습니까? 그런데도 족한 줄을 모르고 범죄를 하였으니 이것은 왕이라는 권세를 남용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빌 4:11, 딤전 6:8). 이렇게 부수적으로 따라가는 죄가 더 많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성도가 죄를 범하면 회개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몇 차례 더 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니 이렇게 회개하지 않고 끄는 것을 완악, 또는 강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의 시일 또는 늦게 회개하는 정도에 따라 벌하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호 4:9, 마 13:30).

5. 그 다음에는 밧세바로부터 잉태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는 그것을 속여 은폐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죄를 짓고 거짓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은폐하려 하였습니까? 전쟁에 나간 그의 남편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게 한 것입니다. 왕은 우리아에게 “집에 가서 쉬라” 하였는데도 우리아는 전쟁 중에 다른 군인들이 야영을 하는데 자기만 집에 가서 처와 잠잘 수 없다 하여 안 가기로 하나님께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 이튿날 다윗이 술을 주어 취하게 하였는데도 안가니까 결국은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은폐 수단은 그 잉태한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려 했으나 안 된 것입니다.

6. 그래서 살인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아를 치열한 전쟁에 앞세워 죽게 하라”는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군대장관 요압에게 전달하였지요. 그래서 요압이 왕명에 따라 우리아를 포함한 군인들을 적장들이 있는 위험한 곳에 보내어 의도적으로 죽게 하면서 다른 군인들도 함께 죽도록 한 것입니다(24절). 이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닌 살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왕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고 자기 집 침소에도 가지 않은 충신을 그의 아내를 탐하여 죽였으니 신의를 앞세웠던 다윗으로서는 완전히 그 반대의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혹과 타락은 순간적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것과 경건도 연습하면 숙달되듯이(딤전 4:7~8) 죄도 짓는 대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 다윗의 신하들은 왕께 보고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작전으로 충신과 군인들이 죽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요압이 다윗에게 전세를 보고하러 가는 신하에게 부탁하기를 만일 왕이 “왜 어리석게 진행하여 군인들을 죽게 하였느냐” 하고 문책하면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말하라” 하였는데, 이 보고자는 처음부터 “우리아가 죽었다”고 보고를 하니까 왕이 책망은커녕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는 것인즉 그 일로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사기를 돋우어 암몬성을 함락하는데 주력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아 죽은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다른 군인 죽은 것도 아깝지 않게 생각한 몰인정한 마음과 언어는 타락의 절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가 손바닥이라면 죄와 타락은 손등과 같은 것입니다. 펴면 바닥이고 엎으면 등인 것처럼 의와 악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왕 되지 않고 고난 중에 쫓겨 다닐 때는 오히려 유혹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권세가 있고 건강하며 여가가 있은즉 그것들이 유혹받는 기회를 만나게 해 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환경이 어려운 것을 결코 불행으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환경이 어려워도 죄의 유혹을 안 받는 것이 좋은 환경에서 유혹받고 범죄하여 징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장 27절을 보시면 “다윗이 그 일로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다윗의 소위를 보시고 악한 일로 낙인을 찍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뒷일이 평안하겠습니까? 그 일로 인하여 다윗의 집안에 불행이 연속될 것이 뻔한 것입니다. 다음 말씀에 관심을 두십시오.

설교보충 3. 범죄 후에 있은 일 (삼하 12:1~14) 목록으로


다윗의 범죄 후에 있은 일을 상고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시고(시 139:1), 모든 은밀한 일을 아시며, 또 그것을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단 2:22, 전 12:14). 어떤 이는 죄를 짓고 사람 앞에 숨기는 일을 일삼으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더 악한 것입니다. 욥 12:22에서 “어두운 중에서의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라” 하셨으니 가장 두려우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은밀한 범죄를 알고 계신 것을 아셔야 하며, 따라서 다윗의 경우는 “그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다윗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기를 상당기간 기다리신 줄 압니다. 임신의 소식을 듣기까지도 한달 이상 기간이 있었고, 우리아가 죽은 다음에도 상당기간이 있었지만 그 사이에 회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밧세바를 데려다가 처를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 전에도 120년간 기다리셨고, 소돔의 멸망 때도 죄의 분량이 차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창 6:3, 18:20~21). 따라서 범죄 직후가 회개의 기회요, 속히 회개 할수록 유익한 것입니다(마 5:25, 눅 15:11~20). 이는 중병이라도 조기 발견하면 희망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 그래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받지 않을 자에게만 전달되는 것입니다(마 11:25, 13:11~14). 여러분들이 목사의 설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권고의 대상이기 때문임을 믿으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이 좋게 보신 대상(행 13:22)이기 때문에 그의 일시적 타락을 치료해 주시려고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바로 이 시대의 설교자임을 아십시오.

4.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죄를 깨우치는 것을 선지자의 사명으로 주셨습니다(겔 2:1~8, 3:17, 12:1~2). 나단 선지자는 왕의 죄를 깨우칠 때 지혜롭게 설교하였습니다. 악한 부자와 가난한 암양 새끼를 비유 설명하여 다윗의 기본 심사를 타진한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암양을 빼앗았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고 그 물건은 4배로 갚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 뜻은 율법의 정신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출 21:16, 24, 22:1). 그러면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할 체를 하지 않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일깨워 주었을 때, 다윗은 시인하고 회개의 자세로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한 번 실수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실수를 만회하는 길은 다윗처럼, 또는 베드로처럼 속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회개한 사실이 본문에서는 시인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시 6:, 32:, 38:, 51:, 102:, 130:, 143:이 그의 철저한 회개를 증거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율법대로 판단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속히 회개하시면 절망을 소망으로, 또는 적절한 치료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회개하지 않고 망한 사람을 기억하십시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지 말라”는 제사장들의 권면을 무시하고 그들을 다 죽였고 결국 집안까지 다 망하였지요(삼상 22:11~18). 사울의 부자 뿐아니라 딸의 자식까지 다 망하였습니다(삼하 21:1~9).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도 사울의 사촌인 입장에서 사울의 첩을 취한 죄를 자신이 세운 왕 이스보셋이 지적하였다 하여 회개하지 않고 그를 배신하였다가 자기도 죽지 않았습니까?(삼하 3:6~30)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였은즉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5. 다윗의 회개가 있었을 때 그 다음에 있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것으로 용서하시고 작은 것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비유적 설명을 들었을 때 “그런 범죄자는 죽어 마땅하고 암양은 4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을 다윗에게 적용하면 죽음은 면하고 징계는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죄는 사하셨으니 죽음은 면하려니와 마귀의 훼방거리가 생기고 그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훼방거리란 다윗 집안에 일어날 불상사를 뜻하고, 다윗을 죽지 않게 하신 대신에 음행으로 출생한 아이가 죽었고, 다음에 솔로몬(여디디아)을 출생시켜 주셨으며, 솔로몬이 왕의 후계자가 된 다음 또 메시야의 계열이 되어서 1,000년 후에 예수님이 출생하여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출현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집안에 일어나는 징계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메시야 축복에 비할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매는 매대로 맞고 메시아적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6. 그 매가 무엇입니까? 음행의 씨앗으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아들이 죽은 것은 다윗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그 아이가 병 낫기를 위하여 금식철야 기도를 하였지만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요 9:31에서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기도자는 순결과 경건 유지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훼방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고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망명하였다가 역적이 되어 왕실을 엄습하니 다윗이 도망하게 되고 다윗의 처첩들은 백주에 아들 압살롬이 겁탈하였으며(12:10~11), 아버지와 아들이 큰 전쟁을 치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범죄는 그 후유증이 자식의 대로 넘어갔고 나라가 평안하지 않았으며 형제간의 갈들과 살생으로 이어졌으니,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13:14, 21~22, 28, 37, 15:7, 18:7, 20:1~26, 왕상 1:5~6). 성도 여러분! 자신을 살핍시다(마 7:4~5, 고전 11:28~29, 빌 2:4). 회개는 속히 합시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틈을 주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4. 두 아들의 범죄 (삼하 13:10~14, 28~29) 목록으로


1. 본문에는 다윗의 두 아들의 범죄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는 다윗의 장자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유인하여 강간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다윗의 셋째 아들이고(부인은 다 다름) 강간당한 다말의 오라비인 압살롬이 자기 여동생을 강간한 이복형 암논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다윗의 한 아들은 강간을 하였고, 한 딸은 강간을 당했으며, 또 한 아들은 강간한 형제를 살인 하였고, 또 얼마 전에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음행으로 낳은 아들도 죽었으니 왕의 집안에 정신없이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2.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삼하 12:10~14에서 다윗이 밧세바와 음행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징계 섭리를 전달하였습니다. “음행으로 얻은 아이는 죽는다 칼이 너의 집을 떠나지 않고 네 집에 재화가 있을 것이며 원수 마귀로 훼방거리가 있게 하고 네 처들을 백주에 음행 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죄값으로 아들들이 범죄한 것인즉 그들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범죄자에게 죄를 짓도록 방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범죄자가 스스로 범하는 죄를 막아주시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인간이 짓는 것이고 하나님은 섭리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시험의 기회를 막아주시는 것인데 성도가 징계를 받게 되면 하나님이 보호 간섭을 멀리 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선뜻 느껴지는 것은 범죄 성격이 다윗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다윗도 음행, 암논도 음행, 다윗도 살인, 압살롬도 살인, 또 다윗이 충성된 신하들을 죽인 대신에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역적 쿠데타를 당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행위 따라 벌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계 20:13에서 “행위대로 심판한다” 하셨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셨으며(출 21:24), 삼하 22:26~27을 보시면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로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으로…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으로 나타내 주신다” 하시므로 행위성격에 따라 대응하시는 섭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전자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 18:24~27에서 다윗도 이와 똑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압살롬이 형을 죽이고 그술왕 달매, 즉 외삼촌에게로 도망하였을 때 다윗이 압살롬을 생각한 것은(14:1) 자기의 범죄 때문에 압살롬이 범죄한 줄로 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식들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 보아도 그렇게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4. 그러면 선대의 죄가 자식에게 징계로 나타날 때 몇 대까지 계승될 것인가가 궁금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 20:5~6에 보시면 “죄의 징계는 3~4대 까지라” 하셨고, “축복의 계승은 수천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의미를 상징이나 대충 말씀하신 것으로 알지 않고 글자대로 믿습니다. 성도에 한하여 “선조의 죄값은 3~4대까지 전가되다가 그친다”고 믿고, “수천대까지 주신다는 축복”은 영원축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주시는 긍휼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나 버리운 자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악한 종족이 벌 받은 사례가 있고, 또 버림받은 자가 벌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악한 종족의 벌은 심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데 노아 홍수, 소돔 멸망, 가나안족 섬멸, 바벨론의 멸망을 들 수 있고, 악한 개인은 애굽의 바로, 느브갓네살, 충이 먹어 죽은 신약시대의 헤롯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을 따르다가 버림받은 자로서는 아간, 사울, 가룟유다, 아나니아, 삽비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왕이 은혜를 많이 받고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정도에 서지 못했을 때 아들, 손자, 외손자까지 다 죽었지요(삼하 21:8). 심판이 외손자까지 내려갔으니까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혹이라도 우리 당대에 조상의 죄값을 치를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의로운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나” 하는 의문은 갖지 않는 것이 좋고 다만 “나는 자손이 벌 받을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5. 회개한 자와 회개하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몇 차례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그 반대로 사울을 몇 차례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안 죽인 것을 사울이 알았을 때 “자신은 잘못하였고 다윗은 의롭다”고 선언을 하면서도(삼상 24:16~21, 26:21, 25) 행실을 돌이키지 않으므로 회개를 못한 것처럼 암논도 다말이 “그런 죄를 범하지 말자”고 권면, 간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12~14절) 범죄하였고, 또 범죄한 후에도 다말을 쫓아내는 악을 범하였는데, 이들은 다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을 때 회개하였고, 또 시편에 나타난 고백을 보면(시 6:6, 51:1~17)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정상을 참작하십니다. 회개의 값을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네 집에 칼이 떠나지 않고 사탄으로 훼방거리를 준다” 하신 말씀대로 실천하셔야 하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닥칠 화근은 그대로 주시고 먼 장래에 있을 축복을 위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죽지 않으므로 40년 집권 후 와석종신 할 수 있었고, 아들 솔로몬에게 양위할 수 있었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영광을 돌렸고, 464년 동안 다윗왕실이 계승되다가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속히 회개하면 큰 희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암논과 압살롬의 범죄가 다윗이 범한 죄의 징계 섭리로 나타난 사실을 말씀드렸고, 아울러 회개의 효력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5. 다윗을 괴롭힌 사람들 (삼하 15:24~25) 목록으로


“다윗을 괴롭힌 사람들”이란 제목입니다. 사무엘상하를 읽으면서 다윗을 괴롭힌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 47:9을 보시면 야곱이 복 받은 자이었으면서도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한 것처럼 다윗도 크게 복 받은 자이지만 괴로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것부터 비롯되었고, 야곱의 고난은 욕심 때문에 아버지와 형에게 죄를 짓고 집을 떠난데서부터 비롯되었지요. 다윗의 축복도 하나님의 선택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여러 가지 고난은 대표적인 범죄(음행, 살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칼이 집을 떠나지 않고 마귀로 훼방거리를 얻게 한다”(삼하 12:10, 14) 하신 후부터 자기 주위에 자주 괴롭히는 대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마귀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곁에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1. 사울은 다윗이 범죄하기 전부터 있었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시켜서 인정을 받게 하식 위하여 세우신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울은 악하였지만 다윗은 사울을 선대하였고, 선으로 악을 이겼기 때문에 다윗이 높아진 줄 압니다. 사울은 대단히 무정하고 악하며 거짓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왕권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충신의 공도 모르고 사위라는 인적관계도 모르며 자기 잘못을 뻔히 알면서 “잘못하였다” 하고 또 죄를 짓는 몰염치한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면서 바른 말하는 제사장들을 85명이나 죽이는 사람이니 무슨 인간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런 사람의 우선적 표적이 되어서 수십년간 쫓김을 당했으니 고난과 연단치고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고난 속에서도 사울을 미워하지도 않고 저주하거나 해하지도 않으면서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 왕 되는 절차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은 범죄한 후에 어린 아들이 죽었고(삼하 12:18), 큰 아들 암논이 자기의 자매와 음행을 했으며(삼하 13:14), 또 형제간에 살인이 있었고(삼하 13:28~29), 압살롬이 패륜아가 되었습니다. 옳지 못한 자녀가 곁에 있으면 그 부모에게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형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왕이 자기를 가까이 해 주지 않은 일에 감정을 품고 반역을 하였을 뿐 아니라 아비의 후궁들과 음행을 하고 아비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싸웠으니 얼마나 패륜합니까? 다윗은 사울왕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또 아들들 때문에 평안치 않았습니다.

3.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군대장관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 문제의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이 유다왕으로 있을 때 사울왕이 죽었고,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왕의 백성을 모아 다윗에게로 귀순하기로 약속을 하여 다윗이 그를 이용하려고 하였는데, 요압이 왕에게 묻지도 않고 그를 죽였고, 또 “반역자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 하였는데도 요압이 그를 죽였으며,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한 다음에 아마사를 용서하여 쓰려고 하였는데 그도 역시 죽였습니다. 요압은 자기의 군대장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기 위하여 자기를 나타내는 인물이었으며 자기와 대등한 자는 무조건 죽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도 다윗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으니 다윗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양위를 하면서 요압이 그런 사람임을 알렸는데, 다윗이 죽자 요압은 압살롬 다음에 출생한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하려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상 1:7, 50~53, 2:19~25)

4. 다윗은 왕위에 있으면서 압살롬, 아히도벨, 아마사, 시바에게 배신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들로서 배신을 하였고,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는데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다가 후새의 모략에 패하자 자살을 하였으며, 또 아마사는 압살롬이 군대장관을 세우므로(17:25) 거기에 응하여 다윗을 배신하였고, 시바는 요나단의 종으로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어 시바를 살게 해 주었는데도 다윗이 피난 가는 기회에 주인을 배신하고 아첨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 다윗도 40년 왕노릇을 하고 70세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축복 받은 사람들도 다 평안한 세월을 산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하였듯이 모세도 그러하였고, 다윗이 그러하였듯이 예수님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평안이란 것은 세상살이의 평안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평안과 기쁨을 맛보셔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백남준씨가 뇌졸중 등으로 74세에 미국에서 별세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그분이 예술계의 유명한 분이라고 하는데 오고 싶은 한국에도 못 오고 몹시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뜬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다 힘들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5.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궁궐을 떠나 피난을 간즉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같이 떠나려고 하였을 때 다윗은 법궤와 제사장을 성소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법궤와 제사장이 동반한다고 하여 다윗에게 능력이 되고 승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환난 당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 앞에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이곳에 오도록) 인도하여 그 궤와 그 계신데(성소)를 보이실 것이요 만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십시오 하고 자신을 맡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 중에 갖는 다윗의 신앙입니다. “나는 회개하오니 처분대로 하십시오” 하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아마사의 혈육관계 (삼하 17:25) 목록으로


“아마사”는 다윗의 둘째 누이의 아들로 나타납니다. 계보를 가장 상세하게 정리한 대상 2:13~17에서 이새의 일곱 아들과 다윗이 말째임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저희(7형제)의 자매는 스루야와 아비가일(삼하 17:25, 19:13에서는 아비갈로 됨)이라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과 요압과 아사헬이라” 하였는데, 삼상 26:6에서 “아비새가 요압의 동생이라” 하였은즉 이 동생이란 명시에 근거하여 요압이 맏형인즉, 따라서 대상 2:16의 말씀이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대상 2:17에서 “아비가일은 아마사를 낳았는데 아마사의 아비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었더라” 하셨는데, 이 부분과 같은 의미를 기록한 본문에서는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각주에는 이스마엘로 되어 있음, 이것은 기록상의 문제인데 이스라엘 사람이란 대체적으로 이방족과 구별할 때 쓰지만 여기서는 유대 지파가 아닌 선민을 의미함, 18:6, 16) 이드라(대상 2:17에서는 예델로 기록됨)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비가일이 아비갈되고 이드라가 예델이 된 것은 발음상의 문제일 뿐인데 또 지적되는 것은 삼하 17:25의 이스라엘이 각주에 이스마엘로 되어 있는데 대하 2:17에서도 이스마엘로 되어 있어서 연구상 상당한 혼돈을 줍니다. 이스마엘이 맞는다면 이드라가 이방인이란 뜻이 되고, 이스라엘이 맞는다면 유다 지파를 제외한 선민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또 본문 25절을 계속 살피면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아마사)를 낳았는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라” 하신 부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비갈은 나하스의 딸이라” 하였으니 여기의 “나하스”는 삼하 10:2에 나타난 암몬왕인데, 다윗이 왕 된 후에 나하스에게 신세진 일이 있어서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 되었을 때에 은혜를 갚으려고 조문사를 보냈다가 정탐이란 오해를 받고 부끄럽게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삼하 10:2을 강론하면서 “다윗이 나하스에게 무슨 신세를 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본문에서 “아비갈이 나하스의 딸이고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동생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신세를 진 것이 나타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도망을 다닐 때 가드왕 아기스의 신세를 졌던 것처럼(삼상 27:1~7) 어느 때에 암몬왕 나하스와도 관계를 가졌을 것인데 나하스가 자기의 딸을 다윗 가문에 보내어 스루야의 동생으로 의형제를 맺게 한 것으로 추측되는 것입니다. 혹 암몬왕 나하스가 그 딸 아비갈을 다윗의 아내되게 하기 위하여 주었는지 모르나 그것은 우리의 추측일 뿐이고,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아마사를 낳았고 그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라” 하셨으니까 아비갈의 아버지는 이새가 아닌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의형제 동생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요압에게 두 번이나 실망을 한 후(한 번은 아브넬을 죽인 것이고, 삼하 3:27, 또 한 번은 압살롬을 죽인 것임, 삼하 18:5, 11~15) 요압의 군대장관 자리를 아마사에게 줄 뜻을 비쳤을 때, 삼하 17:25, 19:13에서 두 번이나 “아마사 너는 내 골육이라” 하였으니, 이드라와 나하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마사를 그렇게 칭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이미 아마사의 어미가 다윗의 누이 스루야와 의형제를 맺은 이상 친누이의 아들처럼 대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아마사에게 군대장관 자리를 줄려고 한 사실 때문에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게 되었고(20:9~10), 또 이 아마사는 압살롬이 왕 되었을 때 압살롬의 군대장관으로 임명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17:25). 그의 활약이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압살롬을 도와서 다윗군과 대립한 것이 사실일 터인데, 20:4~5을 보시면 압살롬이 죽은 다음에 다윗이 그에게 유다족 소집책임을 맡겼고, 그 일로 인하여 요압의 세 번째 피살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한 번 실수한 자라도 유익하게 쓰려 한 사람이고(아브넬, 압살롬, 아마사가 다 그 대상임)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하면서 왕과 뜻이 달라도 문제가 있거나 있을 듯한 자이면 무조건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을 대단히 버거운 인물로 여기다가 죽을 때 그 사실을 솔로몬에게 알려서 죽음 당하게 한 것입니다(왕상 2:5~6, 28~34). 또 아마사의 혈통을 해석함에 있어서 “나하스”가 암몬왕이 아니고 어떤 여성의 이름이라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성경에 다윗의 어머니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나하스가 이새의 다른 부인 일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아비갈은 다윗의 이복 누이가 될 것이고 아마사는 이복 누이의 아들로서 조카가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삼하 18:2에서 다윗이 군대를 편성할 때 “1/3은 요압의 수하에 두고 또 1/3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공동번역은 요압의 친동생이라 하였으니 여기에도 문제가 있음) 아비새에게 두었다” 하여 스루야와 요압과 아비새를 접근시키고, 아마사는 좀 떨어진 인물이 되어서 다윗이 등용하려고 애쓴 흔적(19:13)을 보면서 다윗과 스루야와 아비갈과 아마사와의 관계를 더 살피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혼돈, 아비가일과 아비갈, 이드라와 예델, 나하스의 딸 아비갈, 아비갈이 스루야의 동생되는 일, 또 골육이라 한 점 등이 성경의 혈유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선명하게 주(註)를 다는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설교보충 7. 마음에 새길 것 (삼하 20:1~10) 목록으로


신 6:6에 보시면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며 유의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삼하 20장까지 강론을 쓰고 마음에 집히는 일들이 있어서 마음에 떠오른 것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몇 자 기록하는 것입니다.

1. 죄를 지으면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1)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제사장들을 죽이고, 또 의로운 다윗을 죽이려 하더니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즉 자기도 죽었고, 훌륭한 아들 요나단도 죽었으며 나중에 다른 아들과 외손자들까지 다 죽었습니다(삼하 21:7~9). 그런 중에 요나단은 아비의 죄로 함께 죽었지만 요나단에게 선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2) 다윗은 음행하고 신하들을 죽인 죄 때문에 어린 아들이 죽었고, 아들이 딸을 음행했으며, 아들이 아들을 죽였고, 아들이 자기의 후궁들과 음행하였으며,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서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결국 다윗의 범죄의 후유증은 가정 불행으로부터 내란과 압살롬의 죽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 나단의 예언은 사실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2. 세바의 난리는 정치적 균형을 잃은 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을 7년간 하다가 사울의 통치영역을 통합하였으면 유다 지파에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유다 지파는 베냐민 지파를 포함해서(삼하 12:21) 1/6밖에 안됩니다(19:43). 그러니까 중요한 행사를 할 때 전체 지파의 뜻과 힘을 모아서 균형성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난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 유다 지파를 앞세워 귀궁하였고, 다른 지파들이 그것을 항의하니까 “유다 지파의 목소리가 컸다”고 하였습니다(19:43). 요즈음도 인맥에 치우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균형성 있게 처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다윗은 고쳐 쓰는 인물이고 요압은 척결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군대장과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유다의 왕을 할 때 늘 대적이 되어있었지만 사울이 죽은 후에 그가 백성의 민심을 다윗에게 끌어온다 하니까 다윗은 아브넬을 잘 쓰려고 하였는데 요압이 죽였고, 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들이고 장수이기 때문에 잘 고쳐 쓰려고 하였는데 역시 요압이 그도 죽였습니다. 잘 포용하고 고쳐서 쓰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경험 많은 사람이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소는 한 번 미끄러졌던 돌은 디디지 않는다고 합니다(삼하 3:17~26).

4. 회개를 신속하게 잘 하여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의 종 시므이와 시바인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을 나가니까 권세가 아주 없어지는 줄 알고 시므이가 다윗을 비난하면서 돌을 던지고 수모를 주었지요. 당연히 죽을 죄를 진 것입니다. 또 시바는 다윗이 은혜를 베푸는 므비보셋의 종인데 모비보셋이 다윗과 피난 가는 일을 막고 “사울의 왕권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바란다(남은 자는 자기뿐이니까)고 했다”는 모함을 하여 주인의 재산을 받았는데 그것이 들통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요단강 앞에 왔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와서 엎드렸는데 자기 가족들과 베냐민 사람 1,000명과 타 보지 않은 배를 갖고 와서 왕을 환영하면서 엎드린 것입니다. “내 죄를 내가 압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내가 죄값으로 더 많이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회개의 증표를 나타내니까 “시므이를 살려주었고 시바는 재산을 반씩 나누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속한 회개가 화를 면한다”는 뜻입니다(삼하 16:5~8, 19:16~20).

5. 충성은 하면서 자기 욕망은 다 채우는 사람이 요압인데 결국 그는 길게 가지 못하였습니다. 왕을 섬기려면 왕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왕이 위기에 빠지면 전쟁으로 구출해 주고 자신이 왕노릇 하듯 하고 자신의 군대장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라이벌 되는 인물을 무조건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넬과 압살롬과 아마사를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라 왕의 암적 존재입니다. 왕이 그의 군대장관 자리를 떨구려해도 후계 인물을 죽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를 시기하는 일이 교회 안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을 때 그 문제를 유언했는데 결국 솔로몬이 그를 살려줄 수도 있었지만 그가 반역에 가담한 일도 있었고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여 그를 죽인 것입니다. 끈질기게 실권보존하려 하다가 오래가지 못한 것입니다(왕하 2:5).

6. 주의 임무를 잘못하여 아쉽게 죽은 사람이 아마사입니다. 다윗은 평소에 아마사를 좋아하여 그에게 군대장관을 맡기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압살롬의 군대장관이 되었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용서하고 “세바의 난리를 평정하라”고 기회를 주었는데 “3일 안에 오라”는 약속을 위반했습니다. 전시에는 약속이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반했으니까 기회를 놓쳤고, 나중에 요압을 만나서 포옹 당할 때 자기 몸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몰랐으니 많이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귀는 엿보고 틈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5:18, 엡 4:27). 장수쯤 되면 항상 자기 방비를 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세바도 어설프게 혁명가가 되려고 하다가 죽었습니다(삼하 20:4~5).

7. 마지막으로 아벨마아가 성읍의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요압이 세바를 잡기 위하여 그 성을 포위하였을 때 여인이 나와서 “말로 해결하자 무슨 일이나 아벨성에 오면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한즉, “반역자 세바를 내놓으라” 하였지요. 그래서 세바를 내놓은즉 끝난 것입니다. 세바가 무엇입니까? 역적이니까 도성의 암이지요. 그를 없애니까 조용해진 것처럼 성도들도 대화의 중요성과 말씀에 따라 잘못된 요소를 제하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삼하 20:16~22).

설교보충 8. 하나님의 심판 섭리 (삼하 21:1~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다윗의 통치 말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1. 나라에 3년 동안 기근이 든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때에 하나님이 3년간 백성들에게 기근을 주신 이유는 “옛날에 여호수아가 선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맹세한 바를 그 후시대에 사울이 지키지 않은 사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맹세는 “기브온 족이 이방인이라도 죽이지 않고 선민의 종으로 살리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맹세가 사사시대 300여년 동안 지켜졌는데 사울이 왕 된 후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제사장들이 다윗을 변호하였다 하여 제사장 85인을 죽이면서 그들에게 수종드는 기브온 족도 함께 죽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울이 왕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 후에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블레셋과 싸우다가 자신과 아들 요나단이 죽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2년쯤 후에 다윗이 전체 선민의 왕이 됐으니까 자신을 해하려 한 사울왕가를 원수 갚음으로 다 없앨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원수 갚는 일이나 기름부음받은 왕을 해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울왕가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통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큰 은혜를 베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맹약을 위반한지 약 70년 후에 그 범죄 사건이 심판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 앞에 맹세한 민족적 약속은 민족적으로 계속 지켜야 한다는 사실과,

2) 민족의 대표자가 맹세한 것은 항상 그 민족의 대표자, 또는 통치자가 지켜야 한다는 사실과,

3) 만일 맹세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는 그것이 개인만의 일이 아니므로 왕과 백성들이 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과(그래서 백성들도 3년이나 기근을 당했고, 사울왕의 후손도 죽은 것임),

4) 하나님의 심판은 당장 내리실 수도 있지만 상당기간 후에도 하신다는 사실과,

5) 범죄의 이삭(남은 부분)까지 다 챙겨서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주밀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3년 기근 중에 다윗이 기도한즉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시고 일깨워 주셔서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다윗이나 요나단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나가서 싸우면 적을 붙여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전쟁하고 승리한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고 신앙적으로 잘 처리하는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진격에 패배하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간을 처치하여 해결한 일이 있었는데, 사울은 블레셋의 침략이 있었을 때 법궤를 메고 나가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가 패한 일이 있었고, 다윗은 이번에도 기도를 한 덕분에 원인도 알고 처방할 수도 있었으니 기도는 문제해결의 처방이고 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족의 원한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나 다윗이 기브온 족을 불러서 “민족이 너희들에게 죄를 진 것이니 너희의 원한을 푸는 방법을 말해보라” 하였고, 그 말대로 시행한즉 “기도가 응답되었다(14절)” 하였으니까 기브온 족에게 물은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 5:23~24에도 있습니다. “재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형제로부터 원망 들을 일을 먼저 해결하고 나가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다윗도 그런 취지로 물었을 것입니다. 기브온 족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물질의 피해가 아니고 생명을 죽인 것인즉(율법대로라면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것인데, 출 21:23~24) 우리는 사람 죽일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너희 소원대로 시행할 것인즉 원하는 생명을 말하라” 하니까 “기브온 족을 죽인 것은 사울인즉 그의 자손 7명만 주어서 우리가 그의 고향인 기브온 언덕에 가서 그들을 하나님 앞에 목매어 죽이겠다” 하여 그대로 승낙하게 된 것입니다.

4. 다윗이 사울의 남은 자 중에 요나단의 자손만큼은 해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기로 약속을 하였으니까(삼상 20:18, 24)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빼고 사울의 가까운 혈육부터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울의 직계로는 사울의 첩 리스바의 두 아들 밖에 없어서 사울의 큰 딸의 아들 다섯(외손자)을 포함하여 7명을 넘겨준즉 그들이 기브온으로 끌고가서 죽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가슴 깊이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기의 아비 죄 때문에 죽었고, 또 다섯 아들은 자기의 외할아버지 죄 때문에 죽었은즉 어찌하든지 사람을 맞이할 때는 돈이나 명예를 보시지 말고 죄를 적게 지은 집과 인연을 맺으심이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5. 그렇게 하고 나니까 좋은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드린 것이고, 좋은 일은 기도가 응답되고, 비가 오며, 먹을 양식이 생기고, 전쟁에 네 번이나 승리하여 장대한 적장을 네 명이나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 드린 것은 마치 죄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해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악인의 범죄를 보시고 속을 썩으시면서도 참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고통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분적이나마(내세 심판이 완전함) 공의를 실현하시니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출 32:29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을 때 레위 사람들이 칼을 갖고 진에 들어가서 형제와 이웃과 친구 3,000명을 도륙하였을 때, 모세가 말하기를 “각 사람이 그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공의 실현이 복 받을 길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는 권징을 잘 할 때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비 오고, 기도 응답되며, 곡식 받고, 전쟁에 이겼다는 말씀이 10~22절 사이에 나타난 것을 살피실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9. 다윗의 노래 (삼하 22:1~7, 23:1~7) 목록으로


삼하 22장부터 23:7까지 다윗의 노래가 기록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으로 강론도 쓰고 설교도 썼는데(시 18편, 시편설교 23, 24과 참조), 이 글을 전체적으로 또 한 번 살피는 중에 “다윗이 이것을 노래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떠오른 내용을 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코끼리를 볼 때 전체적으로 보아야 바로 보는 것처럼 성경을 보는 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동리에 있는 앞산을 보았다고 할 때 사방에서 보는 모양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정상에 올라가서 그 산의 전체를 한꺼번에 내려다 보았다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이겠지요. 이때에 전체적으로 보는 모습이 가장 정확하다 할 것입니다. 제가 다윗의 노래 57절을 내려다 보니까 일곱 봉오리가 있는데 그 봉오리마다 특징 있는 내용이 나타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인생을 거의 다 산 다음에 “자기의 과거와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일곱 가지를 노래하였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1. 1~7절에서 “구원의 방편이 되어주신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나에게 반석이 되어 주셨고, 요새가 되어 주셨으며, 건져주시는 자가 되셨고, 나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나의 피할 바위와 방패와 구원의 뿔(싸우는 자의 무기, 또는 도피성의 제단뿔을 의미함, 왕상 1:50, 2:28), 높은 망대, 피난처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방편, 저런 방편이 되어 주셔서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다윗이 환난 중에 기도하였을 때 그렇게 응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 8~16절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데는 자연계의 위력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소리없이 눈이 왔는데 아침에 일어난즉 차들이 꼼짝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셔서 땅이 진동한즉 하늘 기초가 흔들리고, 하나님이 화산을 뿜게 하신즉 마치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으며, 하나님이 안개를 드리우신즉 발아래까지 어둑캄캄해지며, 바람속도가 빠른 것을 보니 하나님이 그룹을 타시고 날으시는 것 같고, 공중의 빽빽한 구름이 하나님 계신 물장막 같은데 그것이 움직이면 구름 속에서 광채가 나오고, 뇌성을 발하시니 하나님의 음성같고, 번개를 치시니 하나님의 화살이 나는 것 같다”고 노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연계의 조화로 증명을 한 것입니다.

3. 17~20절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한 것은 다윗이 궁지에 처한 것을 물에 빠진 것으로 비유하였고(시 40:2), 그 위험에서 건져주신 것을 마치 능력의 손이 위에서 붙드신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있었을 때 완전히 포위당하였는데 적들이 다 피하여 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본즉 블레셋 군이 쳐들어와서 사울왕이 추격을 중단하고 갔다는 것입니다(삼상 23:24~29). “하나님이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은 바로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 한 것입니다.

4. 21~28절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의를 따라 상 주시고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시며 하나님의 도를 지킨 자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의대로 또 깨끗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라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로서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하심으로서 깨끗한 자에게는 깨끗함으로 갚으시고 사특한 자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거스림(징계)으로 갚으시며 또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는 낮추시는 분이라” 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한 것입니다.

5. 31~43절에서 “전쟁에 이기도록 역사하신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31절은 방패가 되셨고, 32절은 바위가 되어 주셨으며, 33절은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방패로 적의 화살이나 창을 막았을 때, 또 바위틈에서 자기 몸을 보호할 때, 또 안전한 요새에 가서 몸을 휴식할 때 바로 그 시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 암사슴처럼 빨리 달음질 할 때(34절), 팔에 힘을 주어 놋활을 당길 때(32절), 하나님이 자기를 이기도록 역사하시는 은혜를 깨달았고, 또 특별한 내용은 36절에서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으로 나를 크게 하셨다” 하였는데 여기의 방패는 철판이 아닌 인간방패(다윗을 호위하는 사람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는 뜻은 다윗이 온유함을 나타낸즉 자기를 돕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의 걸음은 실족치 않게 하셨고(37절) 다윗의 대적은 엎드러지고 굴복하게 하셨다(38~42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6. 43~51절에서 “나라를 평정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백성의 다툼(사울왕의 세력과의 알력, 압살롬과의 대립, 세바의 반역 등)에서 건지셨고 이방족을 점령하여(45절)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셨다(44절)”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48~49절)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해야 할 것이라(47, 50절)”고 한 것입니다. 나라를 평정시켜 왕위를 굳게 해 주신 은혜는 영원한 왕국을 주신 천국 약속의 모형입니다(51절).

7. 23:1~7의 말씀은 다윗의 마지막 말인데 “공의로워야 복 받는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시면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바위 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릴 때 그가 아침 빛 곧 돋는 해같이 되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온 후의 광선같고 땅에서 움돋는 새 풀같을 것이라” 하였고, 또 5~6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집은 영원한 언약을 세워 견고케 하시나 사악한 자는 가시나무 같으니, 그들은 손으로 잡을 수 없어 철과 창자루로 다스려 불살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3~4절은 메시야 예언도 됨). 이렇게 일곱 가지 제목을 노래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베들레헴의 물을 구함 (삼하 23:13~17) 목록으로


“다윗이 베들레헴의 물을 구함”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은 다윗의 생애 중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1. 1절을 보시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여러 차례 갈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이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기록한 것을 감안할 때(사 34:16) 삼상 22:1~2절과 연관된 시기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시기였고, 사울이 놉에서 제사장 85인을 죽이므로 다윗이 놉을 떠나 마온으로 갔다가 또 아둘람으로 갔는데 그때에 다윗의 가족이 함께 하였고 다윗을 따른 무리가 4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피하는 중에 있고, 또 광야에서만 헤매다 보면 목마름을 느끼는 일이 자주 있었을 것입니다.

2. 그래서 다윗의 30두목 중 세 용사가 다윗에게 왔는데(다윗이 특별히 불렀다고 생각됨) 다윗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나로 마시게 할꾜”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상사가 부하에게 물 심부름 시키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2시 방향으로 약 60리의 거리이고 그 사이에 르바임 골짜기가 있으며 그곳과 베들레헴 성문 앞에는 블레셋 군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주저하지 않고 블레셋 군대와 충돌을 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갖다 바친 것입니다.

3. 다윗이 이런 위험한 일을 알면서 그런 요청을 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후회한 것을 보면 단순한 발단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마름이 심하고 베들레헴이 자기의 고향이니까 향수심이 생겨서 그런 요청을 한 것입니다. 혹 신하들의 충성심이나 블레셋 군의 동태를 살피려는 이중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도 다윗을 예수님의 모형자로 생각할 때 주님이 “누가 나로 하여금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먹게 할꼬” 하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씨 뿌릴 때부터 수확을 거둘 때까지 결코 헌신, 봉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26:6을 보시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갖고 돌아오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저절로 커진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광주 동명교회 최기체 목사님이 “동명교회가 자신도 이유를 모를 만큼 쉽게 부흥되더라”는 말을 하시기로 그래도 그분이 무등산 기도원에서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부흥을 주셨겠지…하고 생각하였는데, 제가 작년에 그 은퇴식에 갔는데 저에게 차비를 넉넉하게 주신 분이 교회가 아니고 “양회선 장로드림”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이 누군지 모르나 은퇴식을 준비할 때 “목사님 친구 분들의 여비는 그분이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그런 봉사, 헌신자가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윗의 왕국은 천국의 모형이고 교회도 천국의 모형입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충성자가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장수가 있었고, 또 30 장수가 있었는데 세 장수만 못한 30두목 중 세 사람이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생명을 걸고 충성한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을 하실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목이라도 내놓으려 했고 갈라디아 성도 중에는 눈이라도 빼 주려한 성도가 있었다고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롬 16:3~4, 갈 4:15, 요 12:3~ 8). 교회에는 이런 헌신자들이 있을 때 부흥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고, 저희들은 주님이 “누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하시면 주저없이 세 사람의 용사처럼 충성 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다윗은 그 세 용사가 물을 가져 왔을 때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전에 하나님을 생각하였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이 왜 나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충성하나” 하는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또 “하나님이 저런 충성자를 보내 주셔서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였을 때, “이 물은 물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지 않고 가져온 사람들의 피와 같은즉 이것을 내가 먹을 수 없고 하나님께 바침이 마땅하다” 하여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기도한 후)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물을 주면 물의 가치로만 받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과 정성과 노력을 함께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물을 물로 여기시지 않고 세 사람의 정성과 노력과 생명의 피로 받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하 16:9을 보시면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 26:9을 보시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정신을 받으셨고, 또 믿음을 받으셨으니 곧 “그것이 내 장사를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막 12:44을 보시면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이 그의 생활비 전부이기 때문에 부자의 헌금보다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성도의 헌신과 충성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사모한 물을 안 먹고 하나님께 드렸으니 그 물을 보고도 안 먹은 극기가 금식 이상의 효력 있는 제물이 되고 정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이 저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하나님께 값진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값진 예물은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고, 정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도 마음과 정성을 집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하 24:24에서도 다윗은 값있는 제사를 드린 사례가 있습니다. 두 번째 교훈은 생명을 걸고 충성한 세 용사의 헌신입니다. 이런 충성자가 있을 때에라야만 성도의 왕국과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