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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사무엘상 강론

제1과 사무엘의 출생 과정 (삼상 1:1~8) 8 바로가기

제2과 한나의 고백과 제사장의 부패 (삼상 2:1~17) 11 바로가기

제3과 축복과 책망과 저주 (삼상 2:18~36) 14 바로가기

제4과 사무엘이 계시를 받음 (삼상 3:1~21) 17 바로가기

제5과 패전과 엘리 가족의 몰락 (삼상 4:1~22) 20 바로가기

제6과 블레셋에게 내리신 재앙 (삼상 5:1~12) 23 바로가기

제7과 법궤를 돌려보냄 (삼상 6:1~21) 25 바로가기

제8과 사무엘의 사역 (삼상 7:1~17) 29 바로가기

제9과 백성이 왕을 구함 (삼상 8:1~22) 32 바로가기

제10과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 (삼상 9:1~27) 35 바로가기

제11과 사울로 왕 되게 하심 (삼상 10:1~27) 38 바로가기

제12과 사울이 암몬을 물리침 (삼상 11:1~15) 41 바로가기

제13과 사무엘의 확실한 태도 (삼상 12:1~23) 43 바로가기

제14과 불리한 전세 (삼상 13:1~23) 46 바로가기

제15과 요나단과 사울의 승리 (삼상 14:1~23) 48 바로가기

제16과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 (삼상 14:24~52) 51 바로가기

제17과 사울을 버리심 (삼상 15:1~35) 54 바로가기

제18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 (삼상 16:1~23) 58 바로가기

제19과 다윗이 전쟁터에 감 (삼상 17:1~30) 60 바로가기

제20과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삼상 17:31~58) 62 바로가기

제21과 세 사람과의 관계 (삼상 18:1~30) 65 바로가기

제22과 다윗의 도피 (1) (삼상 19:1~24) 68 바로가기

제23과 다윗의 도피 (2) (삼상 20:1~42) 71 바로가기

제24과 다윗이 놉과 가드로 피신함 (삼상 21:1~15) 74 바로가기

제25과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 (삼상 22:1~23) 77 바로가기

제26과 사울이 다윗을 추격함 (삼상 23:1~29) 80 바로가기

제27과 엔게디 굴에서 있은 일 (삼상 24:1~22) 83 바로가기

제28과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 (삼상 25:1~44) 85 바로가기

제29과 하길라 산에서 있은 일 (삼상 26:1~25) 88 바로가기

제30과 다윗이 가드로 망명함 (삼상 27:1~12) 91 바로가기

제31과 사울이 신접한 자를 찾아감 (삼상 28:1~25) 93 바로가기

제32과 다윗의 출전 취소 (삼상 29:1~11) 96 바로가기

제33과 침노자 아말렉을 추격함 (삼상 30:1~30) 98 바로가기

제34과 사울의 죽음 (삼상 31:1~13) 100 바로가기


사무엘상 설교보충 102

설교보충 1. 하나님이 패하게 하심 (삼상 4:1~11) 102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법궤에 대한 지식 (삼상 6:1~11) 104 바로가기

설교보충 3. 법궤를 끄는 소 (삼상 6:7~16) 10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선민의 부흥운동 (삼상 7:1~6) 108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왕을 구한 사람들 (삼상 8:1~9) 110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천륜을 어기는 정치 (삼상 8:6~7) 112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사울의 우월성 (삼상 9:1~10) 114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징조와 교훈 (삼상 10:1~12) 116 바로가기

설교보충 9. 기름부음의 뜻 (삼상 10:1, ???) 1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개혁의 성질과 목표 (삼상 10:6)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읽으면서 깨닫는 교훈 (삼상 12:1~7) 122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요나단의 좋은 점 (삼상 14:1, 4~15) 124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순종을 배웁시다 (삼상 15:22~23) 126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버린 자에 대한 섭리 (삼상 15:22~27) 128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하나님의 보호 섭리 (삼상 19:23~24) 130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아비가일과 다윗의 대화 (삼상 25:23~35) 132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다윗과 관련된 말씀들 (삼상 26:7~13) 134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사무엘상하의 강론을 기록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과 피로 등으로 어렵게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이 붙드셔서 졸서이나마 기록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제가 목회할 때 사용하였던 필기된 원고를 재정리하여 남겨 두는데 목적이 있고, 혹 평신도가 이 글을 접하게 되면 성경 본문을 한번 읽은 다음 이 강론을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였습니다.

1. 1956년에 출판된 개역성경이 가장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꼽히는데 요즈음 여러 번역서가 나오므로 그 수명이 나의 시대로 끝난다는 느낌인즉 앞으로는 본문 대조에 다소 불편이 있을 것을 예상한 점이고,

2.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의 내용이 역대상하에도 기록되었는데 현재 역대상하를 강론할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면밀하게 대조 설명을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 점이며,

3. 저 자신이 묵상한 것이 대부분으로 깊은 신학적 연구가 부족한 상태에서 초신자, 평신도 중심으로 보편적 지식을 제공하는데 그쳤다는 점이고,

4. 그런 중에도 혹 앞뒤 관계에 모순을 초래한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 다윗, 솔로몬이 각 40년씩 120년간 선민통합국을 다스렸다고 말하게 됩니다만 사실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간 왕노릇을 했기 때문에 120년의 연대를 113년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짧은 지식인지라 과거에 잘못 안 것들도 많이 나타나는데 성경을 입체적 또는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 보니 완전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발견되면 원칙이 아닌 연구의 재료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 글이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수단으로 읽혀지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빛을 보게 해 주시지 않는 한 거기에는 큰 자신을 못 갖습니다. 성경글자를 헤아리며 연구하는 평신도나 교역자가 희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홈페이지나 CD롬, 그리고 출판물로 남겨지고 전파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복”이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2006. 1. 5.


저자 지 영 근

사무엘상 강론

제 1 과 사무엘의 출생 과정 (삼상 1:1~8) 목록으로


이 강론은 가급적 본문중심으로 설명을 드립니다. 우선 기독교 신앙백과에 나타난 “사무엘상의 개론”(544p)을 읽으십시오. ① 본문 1~8절은 “엘가나의 가정과 신앙생활”이고, ② 9~20절은 “한나의 기도와 응답”이며, ③ 21~28절은 “한나의 서원이행”입니다. 그러나 전체의 제목을 요약하면 “사무엘의 출생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엘가나의 가정과 신앙생활(1~8절)

1) 1~2절은 엘가나의 가정을 소개하신 말씀인데, 엘가나는 에브라임지파이고, 4대 조상까지 소급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여로함, 엘리후, 도후, 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인물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자주 조상이나 족보를 말씀하신 예가 있는데 이것은 선민의 긍지와 순결을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방법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는 “한나”와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이 일부다처제는 그 시대에 관행상 있었던 일로 야곱이 그러하였고, 또 몇 십년전 사사시대에는 기드온이 70 아들을 둘만큼 여러 아내를 거느린 것에 비하면 두명 정도의 아내는 많은 것이 아니지요. “신앙인이 이럴 수 있는가?” 하시겠지만(창 2:24, 말 2:15) 관행적으로 덮어온 것이고, 또 자녀번성이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그렇게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야곱이나 다윗에게(삼하 12:8) 지적하시지 않았으니까요.

2) 이들이 산 곳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인데 이 말의 뜻은 “소빔의 두 언덕”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이 산지의 높은 언덕인데 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1:19, 2:11에서는 요약하여 “라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라마”란 지역은 다섯 곳이나 됩니다(수 18:25, 19:36, 29, 길르앗 라못의 한성, 사사 드보라의 고향, 삿 4:5). 이 다섯 중 사사 드보라의 고향이 에브라임 산지인 만큼 같은 지역으로 추측됩니다.

3) 3~5절은 그 가정의 신앙생활의 일부를 말씀하신 내용으로 매년에 자기 성읍(같은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실로(이곳에 성소가 있었고, 수 18:1~10, 그 이후에 법궤가 벧엘로 옮긴 사실이 있었으나, 삿 20:28, 그 당시에는 형편에 따라 간이 성소가 있었음)의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당시의 제사장은 엘리와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시무하였으므로 이 시대는 사사시대 말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의 “매년”은 특별한 절기 때를 의미하고, 4~5절에서 엘가나는 가족이 제사를 드리러 갈 때에 브닌나와 자녀들 보다 한나에게 갑절의 제물을 주었으니, 이는 “그를 사랑한 때문”이라 하였고, 한나는 “성태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성태치 못하므로 위로하고 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몫으로 제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4) 6~8절은 한나와 브닌나 사이의 갈등을 말씀하셨는데 브닌나는 제물을 더 받는 한나를 시기하여 하나님의 집에 올라 갈 때마다 한나에게 심한 격동과 번민을 안겨 주므로 한나가 울며 먹지 않은즉, 그 남편 엘가나가 한나에게 위로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으냐” 하였으니, 이로써 한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으나, 6절에서 “하나님은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엘가나는 두 아내를 두지 않았으면 좋았고, 브닌나는 시기하고 불평하기보다 사랑함이 좋으며, 하나님이 한나의 성태를 막으신 이유는 적당한 때에 사무엘을 출생시켜야 하는 섭리가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선만 행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한나의 기도와 응답(9~20절)

1) 9~12절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는 실로에서(제사드리는 기회에) 성소의 마당에서 괴로운 마음을 갖고 기도할 때 엘리제사장은 성소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고,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사 기억하시고 아들을 주시면 평생 그 아들을 나실인처럼 키워(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뜻)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 하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아들 없는 것이 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명분만 취하고 남은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서원한 것입니다.

2) 이때에 한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본 엘리제사장은 13절에서 그의 입술만 동하는 것이 보이고 음성이 들리지 않으므로(엘리는 늙었기 때문에 귀가 어두울 수 있음) 술이 취하여 그런 태도를 나타내는 줄로 착각하고 14절에서 “술을 끊으라” 하면서 단속하자 15~16절에서 “한나는 자신이 술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요 원통하고 격동함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즉,

3) 17절에서 엘리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의 기도로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이어서 한나는 18절에서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한다” 하였으니, 이 뜻은 제사장의 축복이 효력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심정을 토로하는 것임을 나타내 주셨고, 인간 제사장의 중보기도(구약시대에는 인간 제사장이 중보자 예수님을 모형하는 뜻으로 중보기도를 하였음. 지금은 중보기도를 예수님과 성령님만 하심. 히 5:7, 롬 8:26)가 효력이 있음을 믿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한나는 18절에서 “가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 하였으니 기도의 효력을 믿는 신앙인의 태도라 할 것입니다.

4) 19~20절은 기도응답과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사무엘(하나님께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19절에서 “그들(엘가나의 가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라마로 돌아갔고…하나님이 그를 생각하신지라”, 20절에서 “한나가 아들을 낳아 사무엘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잉태하게도 하시고 성태치 못하게도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6, 19절).

3. 한나의 서원이행(21~28절)

1) 21절에서 엘가나와 그 온 집(전 가족)은 매년제(1년에 한번씩 절기에 성소로 제사드리러 가는 행사, 3절), 서원제(서원을 이행하면서 제사드리는 것)를 드리러 성소로 올라갈 때, 22~23절에서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면 한번에 가서 서원을 이행하고 옴이 좋다” 하여 남편의 허락을 받았고, 남편도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시기를 원한다” 하므로 젖을 떼기까지 양육하며 기다리다가,

2) 24~25절에서 “젖을 뗀 후에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42ℓ)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제물로 갖고 가서 아이와 함께 엘리 제사장에게 보이고”, 26~28절에서 “자신이 (과거에) 제사장 곁에서 기도하고 축복 받은 여자인데,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하셔서 자신이 서원한대로 아이를 하나님께 평생토록 드린다 하고 그 아이도 하나님께 경배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나의 기도와 제사장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도 귀하지만 한나가 “젖 뗀 아이를 서원한대로 성소에 맡기고 평생토록 그를 하나님 섬기는 일에 드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서원대로 그 일을 시행한 점”이라 할 것입니다. 젖 뗀 아이를 놓고 오는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성도는 그런 것도 허탄한 일로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잉태와 자녀의 복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주실까요? 만일 구하는대로 주신다면 자식없는 염려는 안해도 될 것이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에 보면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과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 특별한 은혜로 태어난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날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섭리 속에서 모든 생명이 태어나느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7분설교 5집 후편에 “한나의 기도”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 하십시오.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을 때 기도는 간절해 집니다. 한나는 슬픈 심정을 갖고 마음을 통하는 기도를 오래하였으며, 제사장의 인정과 축복을 받았고, 또 그 기도와 축복을 믿고 수색이 없을 만큼 평안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확실히 성취될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막 11:24).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좋은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 2 과 한나의 고백과 제사장의 부패 (삼상 2:1~17) 목록으로


본문 1절에서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 ① 1~10절의 내용을 보면 “자신이 받은 은혜와 깨달은 내용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② 11~17절까지는 “제사장들의 부패성”을 기록하였기로 총 제목을 “한나의 고백과 제사장의 부패”로 정한 것입니다.

1. 한나의 고백(1~10절)

이 부분에서 한나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달은 바를 고백하였습니다.

1) 1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자신의 신분이 크게 높아지고 존귀해진 것을 감사하는 고백으로 “내 마음이 하나님을 인하여(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심으로) 즐거워하게 되었고, 또 내 뿔(권위를 뜻함. 무자할 때는 권위가 없었음)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내 입이(평소에 떳떳한 말을 못했으나) 원수(자기를 멸시하는 대상)를 향하여 열려졌고(위축받을 일이 없다는 뜻), 주의 구원(여기서는 하나님이 가까이 하사 권고해 주신 뜻)을 인하여 기뻐하게 된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고 종을 내쫓을 만큼 권위가 생긴 것을 보면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믿음 생활은 한나의 과거 생활과 같은 것으로 성도에게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2) 2~10절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또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필요에 따라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은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한나의 깨달은 고백을 말씀드리면 2절에서 “하나님처럼 거룩(순결)하시고, 하나님처럼 주(절대 능력자)되시며,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든든한 보호자) 같은 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과 능력과 보호자 되심을 고백한 것이요, 3절에서는 “사람이 심히 교만한 말을 하거나 오만한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강자가 강한 조건에서 약자를 멸시하거나 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하는 것은 퍽 어리석은 일임을 나타냈으니, 이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음지가 양지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처럼 사람의 지위와 환경이 뒤집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인데, 한나는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로 변화되는 것을 알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또 3절 중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모든 사물과 인간의 언어, 행동, 생각까지라도 하나님은 모르심이 없고, 그것을 일일이 저울질(평가) 하시는 분임을 저희들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4~5절은 강자와 약자가 바뀌도록 섭리하시는 뜻을 말씀하신 것인데 “용사의 활이 꺾이고 넘어진 자가 힘으로 띠를 띤다”는 말씀으로, 또 “유족하던 자가 주리고 품팔던 자가 다시 주리지 않는 것”으로, 또 “잉태하지 못하던 자가 일곱 자녀를 두고, 많은 자녀를 두었던 자가 쇠약해지는 것”으로 설명을 하였으니, 이런 일은 저희들 주변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일인 줄 압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핍박받고 억울한 중에 있던 자가 주권자 입장에 서고, 옛날에 농가의 일꾼을 하던 집이 부자가 되고, 그 일꾼을 부리던 집이 더 가난하게 되는 일을 본 일이 있습니다. 한나 주위에도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 일곱 자녀를 낳아 (한나는 4남 2녀를 가짐. 21절) 잘 되고, 또 많은 자녀가 있다고 큰 소리치던 사람이 오히려 몰락하는 경우가 있음을 경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6~7절은 “하나님이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부활)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하셨는데 이런 일들이 사무엘서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또 “음부에 내리고 올린다” 함은 이 경우에 지옥(스홀, 하디스, 눅 6:23)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 23:4)을 뜻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진토(낮은 곳)에서,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추한 곳)에서 높이셔서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신다” 하셨는데, 이런 일들이 성경에도 있고, 이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나 요셉,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이 다 목자 출신 아닙니까? 이 시대에도 귀족제도는 없어졌고, 능력 따라 출세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런 원리라 할 것입니다. 또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기둥) 위에 세우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집이 기둥으로 말미암아 서 있는 것처럼 땅과 우주도 하나님의 붙드심(히 1:3)에 의하여 보존됨을 나타낸 것이요, 9~10절은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한 내용으로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와 심판하시는 대상”을 말씀하셨습니다. “붙드시는 자는 거룩한 자(순결하게 사는 자)의 발(하는 일)을 지키시고, 자기 왕(하나님이 세우셔서 쓰시는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은 자(제사장, 선지자)의 뿔(권위)을 높이시되 심판 받을 자는 악인으로 흑암 중에 있는 자(회개하지 않고 빛 가운데로 오지 않는 자)를 자기의 힘으로 이길 수 없게 하여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지게 하시되 하늘 우뢰로도 치셔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땅 끝”이란 이 세상 어디로도 도망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나는 평범한 주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깨달은 선각자 같은 여성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제사장들의 부패성(11~17절)

1) 11절에서 엘가나의 가족들은 라마의 자기 집으로 갔고,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성장하며) 엘리의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으니, 곧 제사장들의 심부름을 한 것입니다. 12절에서 “엘리의 아들들(홉니와 비느하스, 34절)은 불량하여 하나님을 알지 않았다” 하였으니, 여기의 “하나님을 알지 않았다” 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도 교회에는 출석하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는 중, 때로는 성직자도 비양심적 행사에 이끌리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일들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2) 13~17절에서는 제사장들(12절, 엘리의 아들들)의 관습적 악행은 “제물을 갈취하는 것과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음행하는 일(22절)”이었습니다. 실예를 들면 누가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레 7:15에 보시면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그 날에 먹는다” 하셨고, 또 레 6:25~26에도 속죄제의 희생물을 제사장이 먹는 규례가 있음. 민 18:8) 제사장이 사환을 보내어 갈고리로 찔러 먼저 나오는 것(큰 고기 덩어리)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물욕이고 음식의 욕심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부언할 것은 삶은 고기라도 사람이 먹기 전에 하나님께 요제로 드린 다음 먹어야 할 것이 있으니(민 6:19~20) 이런 것은 물욕이 아니라 제물 갈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온 이스라엘 사람들(제물 갖고 오는 사람마다)에게 행할 뿐아니라, 15절에서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기름 태우는 규례, 레 1:12~13, 3:3~5, 7:15~17) 마땅히 태워 하나님께 화제로 향기를 올려야 하는데 그 전에 사환을 보내어 제사장에게 “먼저 구어 드릴 날고기를 태우기 전에 달라” 하면 제사 드리는 사람이(제단에서 태우는 레위인 일 듯)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취하라” 하여도 듣지 않고, 억지로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향기를 미리 가로채는 죄악입니다. 17절에서 이 소년들(어린 제사장)이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함으로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먹을 것을 갈취하는 것은 물욕이고 제물을 갈취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욕을 위하여 하나님을 멸시함이며, 제사장직을 빙자하여 제물을 갖고 온 성도나 제물을 태우는 자의 뜻을 어거하는 것은 성직자의 잘못된 권위주의라 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제사장들이 이렇게 부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후손들로만 세습되었고(출 29:29~30) 현직 제사장들 중에서 한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선출한 줄 압니다.

제 3 과 축복과 책망과 저주 (삼상 2:18~36)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8~21절은 “제사장이 엘가나 가정에 축복함”이고, ② 22~25절은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을 책망함”이며, ③ 26~29절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책망함”이요, ④ 30~36절은 “하나님이 엘리 가문을 저주하심”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축복과 책망과 저주”라 함이 마땅합니다.

1. 제사장이 엘가나 가정에 축복함(18~21절)

1) 18~19절은 “사무엘이 어렸을 때, 세마포 에봇(출 39:2~5에 나타난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이 아닌 실용적 조끼임)을 입고 여호와 앞(성소에 대한 봉사)에 섬겼다” 하였으니, 이는 생활비를 받고 섬기는 레위인과는 차원이 다른 헌신이요, 에브라임지파로서 제사장을 도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 내외는 매년제 때마다 작은 겉옷(세마포 에봇)을 지어다가 사무엘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에게 소용되는 것을 보급한 것입니다.

2) 20~21절은 제사장 엘리가 사무엘의 부모에게 축복하기를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엘가나) 후사를 주사 (이미) 간구하여 얻은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였으니, 이때 한나는 자녀를 더 구한바가 없었으나 엘리 제사장이 스스로 그의 자녀에 대한 필요성을 알고, 축복한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적으로 받은 축복도 그렇게 성취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한나를 권고 하셔서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성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서 성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을 책망함(22~25절)

1) 22절에서 엘리는 늙었고, 그 아들들(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의 범죄는 여전하였는바 심지어는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까지 한 사실이 엘리에게 알려지자,

2) 23~25절에서 엘리는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 이런 일을 행하느냐 내가 이 모든 일을 백성에게서 듣노라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은즉 그리하지 말라 너희가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이 뜻은 모범아닌 지도자를 백성이 따른다는 의미도 있고, 백성의 제사를 범죄로 이끄는 의미도 있음)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또는 법관, 각주)이 판결하시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이 뜻은 그 당시 엘리 제사장으로서 중보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지 못한 뜻)” 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 하셨으니, 이 “뜻하셨다”는 내용은 모든 사건이 전개된 후에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가 그 정황을 회고하면서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권면이나 책망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책망함(26~29절)

26절에서 사무엘이 점점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은총을 받을 때, 27~29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선지자 또는 천사처럼 나타났을 것임)이 엘리에게 와서 책망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 있을 때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느냐 또 모든 지파 중에 내가 그(아론)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대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입는 겉옷, 출 39:2~5)을 입고…모든 화제(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제물)를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않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감사로 드리는 것)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내 백성이 (나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하셨으니, 따끔한 책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책망하시는 분이시고(요 16:8) 엘리는 직접 범죄자가 아닐지라도 자식을 바로 다스리지 못한 잘못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을 져야 하는 뜻으로 하나님이 지도자인 그의 아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책망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엘리 가문을 저주하심(30~36절)

1) 30절에서 “제사장과 영영히 함께 하신다는 언약을 취소하시고 경멸히 여기신다” 하셨으니, 곧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이 약속은 출 27:21, 29:9에서 그의 조상에게 약속하셨음) 하였으나, 이제는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하셨고, 또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 주시는 약속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 효력을 나타내시고, 그렇지 않을 때는 취소하십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영적 은혜의 언약과 달라서 현세적인 복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충성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2) 31~34절은 저주의 말씀으로 “네 팔과 네 조상의 팔(지체같은 후손을 뜻함)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도록 할 것이라”(늙기 전에 죽게 하신다는 뜻) 하셨고, 또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실로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하여 언약궤를 전쟁 진영으로 옮기게 되는 환난” 즉, 4:2~11에 나타난 내용이 실현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33절에서 “내 단에서 끊어버리지 아니 할(성실한 사역자이면 오래 쓰신다는 뜻) 너의 사람(엘리의 아들들)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을 것이며”, 또 34절에서는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한 날에 죽으므로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의 자녀들이 엘리의 눈을 쇠잔케 한다”는 뜻은 아들의 잘못을 그 아버지가 가볍게 여기거나 단속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의 눈을 어둡게 한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 저주의 예언이 4장에서 실현되지 않습니까?

3) 35절은 충실한 역군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엘리와 그 아들들 같지 않은 충성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엘리 집처럼 몰락하지 않을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받은 자(왕을 뜻함)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엘리 다음에 일 할 수 있는 사무엘을 세우신 뜻이거나(사무엘도 제사장 같은 일을 하였음. 7:9, 10:8, 16:5), 다윗왕(기름부음받은 왕) 앞에서 일한 충성한 제사장 사독(삼하 8:17, 15:24~28)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구히 행한다”는 뜻은 중도에 벌 받아 끊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충실한 제사장”이라 하셨으므로 어디까지나 구약시대에 충성한 제사장을 세워 메시야 오시기까지 신앙의 명맥을 이을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36절의 “네 집의 남은 사람(엘리의 친족등 제사장 계통)이 은 한조각과 떡 한덩이(적은 수당)를 위하여 그(하나님이 세우실 충실한 제사장)에게 엎드려 한 제사장의 직분을 얻어 떡 한조각(적은 생활수당)을 먹게 하소서 하게 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엘리의 후손들도 제사장 직임이 몰락되어 호구지책의 수단으로 그 직분을 구걸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잘 되는 성직자는 목회를 잘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임지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스러우셨으면 엘리와 그 아들들을 죽게 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그 후시대의 제사장들까지 맥 빠진 사람이 되게 하셨겠습니까? 이상의 말씀들은 다 성직자들로 하여금 크게 반성하도록 주신 줄로 압니다. 반대로 조상의 충성과 헌신이 있을 때 그 후손의 성직에도 복 주실 것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신 줄 압니다.

제 4 과 사무엘이 계시를 받음 (삼상 3:1~21)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제목은 “사무엘이 계시를 받음”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김”이고, ② 2~10절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이며, ③ 11~14절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고, ④ 15~18절은 “말씀을 엘리에게 전달함”이며, ⑤ 19~21절은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심”입니다.

1.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김(1절)

1) 1절을 보시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셨습니다. 레위지파가 하나님을 섬기고(민 3:6) 레위지파 중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을 하는 것인데(레 1:5, 8:12~13) 어떻게 에브라임지파인 사무엘(삼상 1:1)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나실인처럼(삭도를 안댐. 삼상 1:11) 성별되게 자랐고, 또 하나님께 바친 상태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레위인은 보수를 받고 직업적으로 성소의 일을 하였지만 사무엘은 순결한 헌신자이기 때문에 더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긴 뜻”은 엘리 제사장의 지도에 따라 수종들고 청소하는 등 제사 드리는 일에 협력한 것을 의미 합니다.

2)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계시주시는 방법 중 한 가지. 히 1:1)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강상태임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엘리 제사장의 가족이 타락한 상태이므로 하나님이 타나나 주시지 않은 줄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인즉 성도들은 정의롭게 살면서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시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셔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2~10절)

1) 2~3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 받기 전의 상태”를 말씀하셨는데, 그 당시에 엘리 제사장은 노령이어서 눈으로 잘 보지 못하는 상태로 자기 처소(성소 옆에 있는 숙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성소를 밝히는 등대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이는 밝기 전을 의미합니다. 성소의 불은 밝을 때는 켜지 않습니다(출 27:21). 그 때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지성소로 여겨집니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 1회 들어가서 피 뿌리는 제례를 행하지만(히 9:7) 관리상의 출입은 허용된 줄 압니다. 이 때 사무엘은 성소를 사랑하고 지키는 의미로 그 곳에 있다가 눕게 된 것입니다.

2) 이 때에 4절에서 “사무엘아” 하는 음성을 들었는데 이 음성을 이상 중(3:1)에 들었을 것인데 사무엘은 이 음성을 처음 듣는 일이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음성으로 착각하여 달려간즉 “아니라” 하여 다시 와서 누웠는데, 6절에서 다시 반복되므로 또 달려갔으나 “아니라” 하였고, 8절에서 세 번째 같은 일이 있게 되자 그때서야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임을 직감하여 사무엘로 하여금 그 음성이 있을 때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고 들으라” 고 하였습니다.

3) 그리하여 10절에서 하나님이 또 사무엘을 불러 말씀하시게 되었으니, 앞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순결하고(마 5:8)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자에게 말씀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도 진리 분별력이 없을 수 있고(요 20:16, 눅 24:25~3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경험따라 익숙해 지는 것처럼 성경말씀도 자주 접하고 늘 묵상에 매달릴 때 깨닫는 영안이 열리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시 1:2, 119:97).

3. 하나님이 주신 말씀(11~14절)

1)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은 사무엘 자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엘리의 집에 대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엘리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2:27에서 직접 주셨음) 간접으로 주신 것은 2:25에서 “이미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2) 11절에서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깜짝 놀랜다는 뜻)” 하시고, 12절에서는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2:30~36)을 끝까지 그 날(재앙의 날, 4:11)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하셨고, 13절에서는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 하겠다” 하시고, “이는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죄악”은 알고 행한 죄, 즉 고의적 범죄, 또 죄지은 것을 알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또 자식이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 금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식의 범행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금했어도 그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부자가 연대적 책임을 져야하는 것인데 엘리는 금하는 책망을 하기는 했으나(2:22~25) 소극적으로 행한 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파면을 시켰어야 하는 것입니다.

3) 1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하나님)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실천적 결심)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시므로 일체 용서하시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물이나 예물로 속죄 받지 못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도 된 즉 가롯유다의 경우와 같다 할 것입니다.

4. 말씀을 엘리에게 전달함(15~18절)

1) 15절에서 사무엘은 이상의 계시를 받고 엘리 제사장을 만나는 것도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본 이상(계시받은 상태)을 엘리 제사장에게 알리기를 두려워 하였는데, 16~17절에서 엘리는 사무엘에게 계시의 뜻 알기를 원하였고,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내게 숨기지 말라…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므로,

2) 18절에서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엘리 제사장은 말하기를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라” 하므로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존중하고 복종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잘못을 금하지 못한 연약이 있었을 뿐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과 하나님의 주권섭리와 공의를 존중하는 귀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심(19~21절)

1) 19절에서 “사무엘이 자라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신다는 뜻)”, 20절에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북쪽 끝과 남쪽 끝 전역을 뜻함)까지 전체의 선민들이 사무엘을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로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받은 것(2:31~34)을 백성들에게 증언하였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때(땅에 떨어지지 않을 때) 더욱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임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21절에서 “여호와께서 실로(성소 있는 곳)에서 다시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이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였다”고 하셨습니다(4:1).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아무에게나 계시하시지 않고 꼭 원하는 자를 통해서만 나타내셨습니다. 문자로 주신 성경도 깨닫지 못할 자에게는 감추시고(호 8:12, 사 6:10), 깨달을 자에게는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엡 1:17)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성직자의 종교적 만행은 자신뿐 아니라 전쟁의 원인이 되어 민족에게까지 큰 화를 끼치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제 5 과 패전과 엘리 가족의 몰락 (삼상 4:1~22) 목록으로


본문 ① 1~2절은 “블레셋에게 1차 패함”이요, ② 3~5절은 “언약궤를 이용함”이며, ③ 6~11절은 “블레셋에게 2차 패함”이요, ④ 12~17절은 “전세보고”이고, ⑤ 18~22절은 “엘리 가족의 몰락”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제목을 “패전과 엘리 가족의 몰락”으로 정하였습니다.

1. 블레셋에게 1차 패함(1~2절)

1) 1절에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 에 전파됨”은 사무엘의 선지자적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고, “그의 증언한 말”은 3:11~14의 말씀(엘리 가족에 대한 심판)이며, 그 이외에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2) 1~2절은 블레셋군사들이 “에벤에셀”에 진치고, 이스라엘은 “아벡”에 진쳤는데, 에벤에셀은 실로에서 서쪽으로 36㎞쯤 되는데(지도상 지점은 찾기 어려움) 아벡과 멀지 않은 곳이며, 아벡은 욥바에서 2시 방향으로 18㎞쯤의 지점입니다. 이때에 양측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측 군사 4,000명 가량이 죽고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이는 선민이 타락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고(삿 13:1), 또 하나님께서 엘리 가족에 대한 심판을 예고 하셨으므로 그 실현적 방책이 나타난 것입니다.

2. 언약궤를 이용함(3~5절)

1)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선민의 대표자들 또는 신앙의 원로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왜 우리를 블레셋에게 패하게 하셨는고?” 하였으니, 전쟁에 패배한 이유를 알고 싶으면 자신들의 범죄성을 살피거나 아니면 사무엘 선지자가 “엘리 제사장이 심판 받을 것”을 나타냈은즉(1절), 그런 연유로 인함인 줄을 깨달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스스로를 살피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인 줄로 잘못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지시 받은 바도 없이 실로(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군사들이 있는 진중으로 가져와서 “그것으로(법궤자체)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전쟁에 이기는 것)하게 하자” 하고,

2) 4절에서 “실로에 가서 그룹 사이에 계신(법궤가 안치된 곳에 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조각물을 뜻함, 출 25:18~19, 민 7:89, 히 9:5)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레 16:2, 언약궤-민 10:33, 증거궤-출 30:6 등 명칭이 많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 물건임. 민 14:43~44)를 진중으로 가져왔고”, 그 때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와 함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이 언약궤가 진중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이 땅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하였으니, 이 외침의 뜻은 법궤로 말미암아 승리를 기대하는 시위적 함성이었을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함성을 크게 지를 때가 있으나, 여호수아와 기드온 때는 그것이 통했지만(수 6:16, 20, 삿 7:18~21) 항상 그런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블레셋에게 2차 패함(6~11절)

1) 6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신인 여호와의 궤를 진중으로 가져오면서 환호성 치는 소리를 “블레셋 진에서 듣고 알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이스라엘 진을 히브리 진”이라 한 것은 선민의 고대 명칭을 뜻한 것입니다. “히브리”는 “건너오다”란 뜻으로 아브라함이 유프라데 강을 건너온 때부터 그 민족을 히브리족으로 이름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시대에 와서 “이스라엘(하나님의 얼굴)”로 고쳐주신 것입니다(창 32:28).

2) 7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을 재앙으로 애굽을 친 신들(그들이 아는 다신 사상)이라 하면서 화가 미칠 것을 크게 두려워하였고, 8절에서 “아무도 건질 자가 없으며, 재앙으로 애굽인들을 친 신을 당할 자가 없음”을 알고, 9~10절에서 총궐기하여 일사각오로 싸우게 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이 또 패하여 3만명이 죽었고, 11절에서는 법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은 것입니다. 문제는 법궤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전쟁에 이겨야 하는데, 오히려 적군의 사기만 높여주었고 패배를 당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법궤와 함께 역사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기인 한 것이고, 선민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회개함이 없이 법궤만 능력의 성물로 알고 이용하려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면에 대한 영적 지식이 어두워 있었으니까요.

4. 전세보고(12~17절)

1) 12~15절에서 전쟁에 패배하던 당일에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 나와 그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이 태도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하는 행위임) 전황을 알리기 위하여 실로에 이르렀고, 13절에서 그 때에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면서 길 곁 의자에 않아 기다렸으니, 그의 연세는 98세였고, 눈도 어두운지라 제보자가 들어올 때, 온 성이 부르짖은 즉 그 소리를 들었고, 제보자가 “빨리와서 엘리에게 전황보고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4절의 “훤화”는 떠들썩한다는 뜻입니다.

2) 16~17에서 엘리는 진 중에서 온 자에게 전황을 물었고, 그는 “자신이 오늘 진 중에서 도망하여 온 것과 이스라엘 군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한 것과 백성 중에 큰 살육이 있었으며,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도 빼앗겼다”고 하였습니다. 엘리는 법궤를 진 중에 보낸 것이 가장 마음에 거리껴서 그것을 두려워 하였는데, 결국 전쟁은 패하고 두 아들과 함께 많은 백성들이 살육 당함과 법궤를 뺏긴 일까지 생긴 것입니다.

5. 엘리 가족의 몰락(18~22절)

1) 18절에서 엘리는 보고자가 법궤를 말할 때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비둔한 연고라” 하였고, 사사된지 40년이라고 하였습니다.

2) 19~22절에서 그 당시에 그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산기가 가까운 때에 같은 소식을 듣고, 몸을 구부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 곁에 있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다” 하였으나 관념치 않고 “영광이 떠났다” 하며 그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없음)”이라 하였으니, 이는 시부와 남편이 죽고 법궤를 빼앗겼으므로 그렇게 말하고 죽은 것입니다. 20절에서 “죽어갈 때에 그렇게 말한 것”이므로 그 며느리도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서 엘리의 가족은 몰락하였고, 사무엘에게 예언하신대로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심판하셨고, 또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없이 어떤 성물을 숭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4:1~11, 중간에 첨부된 “하나님이 패하게 하심”이란 설교문 참조하십시오).

제 6 과 블레셋에게 내리신 재앙 (삼상 5:1~12)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블레셋에게 내리신 재앙”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5절은 “다곤 신상에게 내리신 재앙”이고, ② 6~8절은 “아스돗에 내리신 재앙”이며, ③ 9~12절은 “에그론에 큰 환난을 더하심”입니다.

1. 다곤 신상에게 내리신 재앙(1~5절)

1) 1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뺏은 후 아스돗으로 옮겨왔습니다. “아스돗”은 지중해변에서 동쪽으로 6㎞쯤 내륙에 있는데 욥바 남쪽 40㎞쯤이고, “가사”에서는 북쪽으로 해변을 따라 50㎞쯤 되는 블레셋의 도시입니다. 아스돗을 신약성경에서는 “아소도”라 하였고(행 8:40), 법궤를 뺏은 싸움터(에벤에셀)에서 아스돗까지는 8시 방향 45㎞쯤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 신을 모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2) 2~3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그 법궤를 자기들이 숭상하는 다곤 신상 곁에 두었다가 이튿날 본즉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상이 인위적 힘을 가하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을 것인데 이상한 조화이지만 좀 더 지켜 보려고 하였겠지요. 4절에서 그 이튿날 또 가본즉 그 때는 “다곤이 궤 앞에 엎드러졌을 뿐 아니라 머리와 두 손목까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통만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곤 제사장들이나 그 신당에 들어가는 자는 “문지방을 딛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다곤 신상이 닿았던 자리를 신성시한 의미일 것입니다.

3)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6절과 9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손이 더하사” 하셨으므로 그 이전의 재앙이 “하나님께로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신이 다곤 우상신과 같지 않음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2. 아스돗에 내리신 재앙(6~8절)

1) 앞절에서는 다곤 신상의 훼손만 말씀하셨으나 6절에서는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 부정한 우상 곁에 둔 백성들을 하나님이 독종으로 치신 것입니다.

2) 그리하여 7~8절에서 아스돗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의 조화”임을 알고, “그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 것이라” 하여 방백들을 모아 의논하고, 그 신의 궤를 “가드”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스돗에서 가드까지는 동쪽으로 15㎞쯤 됩니다. 아스돗, 가드, 에그론은 모두 블레셋의 도성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조금 이상한 징조만 나타나도 신의 조화임을 쉽게 직감합니다. 그만큼 예민한 정신이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줄 압니다. 그 법궤는 하나님이 “만들라”하여 만든 신성한 것인즉,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지키시기 위하여서라도 그만한 조처를 내리심이 마땅한 것입니다.

3. 에그론에 큰 환난을 더하심(9~12절)

1) 9절에서 법궤가 가드로 옮겨지자 “하나님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셔서 아스돗에 내리신 것보다 더 심한 환난이 큰 자나 작은 자에게 독종으로 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0절에서 또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에그론은 라기스와 가사 사이에 있고, 라기스와는 10㎞쯤, 가사와는 20㎞쯤에 있으며, 가드에서 “에그론”은 7시 방향으로 20㎞쯤에 있습니다.

2) “에그론” 거민이 심한 독종의 재앙을 받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리하여 10~11절에서 “그들의 재앙이 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온 것을 알고, 방백들을 모아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본처로 돌아가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힘 있게 재앙을 내리신 뜻)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하였고, 12절에서 “죽지 않은 자들이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부르짖되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칠 만큼 컸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법궤가 옮겨지는 곳마다 다곤 신과 아스돗 거민, 가드 거민, 에그론 거민이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사 42:8에 보시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상의 부족 앞에서 스스로 명예를 지키신 일로 사료됩니다. 자기의 섬기는 신이 여호와 신보다 약하고, 여호와 신으로 말미암아 당한 재앙을 다곤 신이 물리칠 능력이 없을 때는 그들이 숭배하는 신을 바꾸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인 줄로 압니다(요 3:3, 마 16:17, 고전 12:3, 살후 1:10).

제 7 과 법궤를 돌려보냄 (삼상 6:1~21)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내용은 “법궤를 돌려보냄”입니다. ① 1~2절은 “법궤 환송의 서론”이고, ② 3~5, 16~18절은 “법궤에 첨부 할 속건제물”이며, ③ 6~12절은 “새 수레에 실어 보냄”이고, ④ 13~15, 19~21절은 “법궤 영입과 큰 재앙”입니다.

1. 법궤 환송의 서론(1~2절)

1절에서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들, 장소)에 일곱 달 있었다” 하였으니, 그 지역은 “에그론”이고(5:9), 그동안 독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 거민들이(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낼 것을 결의 하고) 제사장들(다곤 신)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가르치라”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법궤를 취급하는데도 두려움이 있었으므로 여호와 신이 노하신 것을 어떻게 진정 시키는가?에 대한 것을 자문 받게 된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재앙이 있을 때에 그들의 신이 노하신 것을 진정시키는 의미로 제물 드리는 관습이 있었으니 오늘날도 그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법궤에 첨부 할 속건제물(3~5, 16~18절)

1) 3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돌려보내려 하면 거저 보내지 말고 속건제(제물을 들어 보이고 드리는 것)를 드려야 병(독종)도 낫고 그 손(하나님의 재앙내리는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않는 연고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은 여호와 신이 제물이 부족하여 재앙내린 것으로 짐작하고 사실이 그런 것인지를 속건제물로 알아보려고 한 것이요,

2) 4~5절에서는 속건제물의 내용과 분량으로 물었을 때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드리라” 하였으니, “(이는)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금독종”이란 금으로 독종(부스럼) 모양을 만든 것을 뜻하고, “금쥐”는 역시 금으로 쥐의 형상을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받고 있는 재앙이 독종과 쥐떼의 피해이므로 여호와 신께 예물을 드리므로 그 재앙이 없어지거나 재앙의 손을 경하게 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15절).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과 일반이라”는 뜻은 금독종이 독종의 재앙을, 금쥐가 쥐의 재앙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런 사상이 어디에 근거 하였는지는 모르나 민 21:6~9에 보시면 모세가 “불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쳐다보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런 역사를 소문에 의하여 답습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무속종교에서는 그런 모양새를 갖추는 식의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놋뱀을 쳐다보게 하신 것은 십자가 계시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과는 본질상 차이가 있습니다.

3) 16절은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법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자기들의 고장인 에그론으로 갔다”는 말씀이요, 17~18절은 속건제물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한 것입니다. 블레셋 족에는 다섯 성읍의 방백이 있었으니, 곧 아스돗, 가자,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입니다. 그래서 금독종을 한 성읍과 방백을 하나로 정한 것이고(17절), 18절에서는 “금쥐 다섯(4절)은 하나님의 궤를 놓은 큰 돌(이스라엘의 벧세메스에 있는 곳)이 있는 곳까지, 즉 다섯 방백이 관할하는 모든 시골 동리의 성읍 수효대로라” 하였은즉, 이 뜻은 각 성읍의 대표 방백과 성읍예하에 있는 시골 동리의 수대로 더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큰 금쥐 5개와 작은 금쥐 여러 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18절에서 “그 돌(법궤가 머물러 있던 곳)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벧세메스는 유다 북부지경에 있음. 수 15:10, 여호수아는 그 지역의 거민임)의 밭에 오늘까지(기록 당시)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3. 새 수레에 실어 보냄(6~12절)

1) 6절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보내게 된 이유를 말씀한 내용으로 (과거에) “애굽이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재앙을 받고, 이스라엘을 떠나게 한 것”을 실예로 말하였습니다. 즉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처럼 하지 말자”는 것이요, 그 때 그가 (여호와 신) 그들(애굽) 중에서 기이하게(이적으로 10가지 재앙 내린 일) 행한 후에 그들(애굽인들)이 백성(이스라엘 족)을 가게 하여 떠난 것처럼 우리도 그 법궤를 떠나보냄으로 재앙을 멎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2) 7~8절은 법궤를 보내는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 방도를 세웠는데 정성을 기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소(수레 메는 것이 서툴지만 신의 궤를 끌고 가는 것이므로 무슨 이적이라도 나타나는지를 보려한 것임. 또 이런 소는 제물로서의 가치가 있음)로서 송아지 딸린 젖 먹이는 소 둘을 택하였으니, 여기에도 어미 소가 송아지를 떼어 놓고 멍에를 멘 채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역시 신의 역사와 징조를 보려고 한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또 금보물(없어져야 할 재앙으로서의 금독종과 금쥐) 상자도 그 곁에 실어 보낸다”는 것이요,

3) 9절에서 “그 궤가 본 지경(이스라엘 진영) 길로 올라가서(예루살렘 쪽을 올라간다고 표현함)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이 그(여호와 신)로부터 온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손(여호와의 손)이 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된 일로 알 것이라”고 하였는데, 벧세메스는 에그론(법궤 출발지)에서 4시 방향으로 12㎞ 지점입니다. 그 사이에 블레셋과 유다 지경의 경계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동쪽 25㎞쯤 됩니다.

4) 10~11절은 그 시행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었으므로 자기들의 생각대로 된 것을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10절에서 “두 어미 암소로 하여금 각 송아지 새끼들을 집에 가둔채 수레의 멍에를 메고 그 수레 위에 법궤와 속건제물 상자를 실은즉, 12절에서 두 암소는 벧세메스 길 대로로 가며 울었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은즉 블레셋 방백들은 (하나님의 신의 역사임을 확신하고) 벧세메스 경계까지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방인의 제물을 받으신 것 때문에 법궤가 평안히 돌아오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대로라면 그런 방식으로 법궤를 운반하는 것이 아니지만(민 4:15) 율법이나 법궤는 선민에게만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율법을 이방인들에게는 적용시키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선민은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도 이방인은 율법대로 운반하지 않았어도 간과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 법궤가 무사히 선민의 진영에 온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계약(레 11:44~45)을 끝까지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4. 법궤 영입과 큰 재앙(13~15, 19~21절)

1) 13~15절은 “법궤가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위에 섰다” 하였으니, 이는 소들이 신비하게도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 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레위 사람들은 가까이 와서 법궤와 금보물 상자를 큰 바위 돌 위에 옮긴 후, 두 암소를 제물로 하고 수레를 나무로 삼아 제사를 드렸고,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도 하나님께(법궤 앞에서) 번제와 다른 제사(예물 드림 같은 것)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선민들이 규례를 엄중히 지킨 줄 압니다.

2) 그런데 19절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것 때문에 하나님이 큰 살육으로 치셔서 (5만) 70인을 죽이시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 즉, 일반 백성들이 법궤를 가까이하거나 들여다보면 안됩니다. 법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취급하는 것입니다(민 3:~4:). 그것을 모르고 일반인들이 들여다 보았으니, 이는 하나님을 경홀히 대하는 죄에 해당합니다(신 32:15). 그래서 하나님이 (5만) 70인을 죽게 하신 것인데 여기의 5만이란 수가 ( )안에 있는 것은 그 수가 기록된 사본도 있고, 없는 사본도 있기 때문에 개역 성경에만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공동번역이나 영문번역에는 5만이란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원문학적이나 사본의 지식으로 해명해야 하는데, 수를 말하는 글자를 사본에 옮길 때, 착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히브리 글자 중 ץ (아인)은 70을, נ (뉜)은 5만을 뜻하는데 첫 단어에서 그것을 착각한 모양이라고 해석한 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5만 70이 아닌 70명이 죽은 것으로 이해하심이 마땅합니다. 그 당시 벧세메스의 인구 중 장정이 5만쯤 되려면 20만명 이상이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가장 큰 도성인 예루살렘 인구가 7만명을 넘지 않았다 한 즉 5만명의 죽음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3) 20절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고” 하며 두려워 하였으니, 이는 그곳 주민이 70명이나 죽었으므로 그렇게 할 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을 보시면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법궤 가져온 것을 알리고 너희가 내려와서(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에서 동북쪽 15㎞쯤에 있는데 그곳이 높은 지역인즉 내려오라고 한 것임) 그것을 너희에게 가져가라”고 통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럇여아림”에 통지를 하였을까요? 이 지역은 유다 땅 북단에 있고(수 9:17) 예루살렘 서쪽 13㎞쯤에 있는데, 단지파가 라이스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 진을 쳤던 곳일 뿐(삿 18:12) 법궤와 관련된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법궤를 영입할 뜻이 있는지를 알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다라 거민들이 돼지떼 2,000마리가 죽었음을 인하여 예수님을 다른 곳으로 가시게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막 5:17, 마 8:28~34). 재앙이 있으면 회개하고 법궤를 모시는 방법을 연구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신앙생활하기에 퍽 힘들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것은 유형한 제례의식이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참으로 은혜시대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로 속죄 사역이 끝났고 중보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성경으로 완전한 계시를 주셨고, 또 특별한 의식에 얽매임 없이 어느 곳에서나 인간중보자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셨으니 항상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6:7~16을 본문으로 한 “법궤를 끄는 소”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제 8 과 사무엘의 사역 (삼상 7:1~17) 목록으로


본문 1~2절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벧세메스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 법궤를 영입한 말씀이고, 그 이외의 말씀은 다 “사무엘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사무엘의 사역”으로 정한 것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2절은 “법궤의 영입”이고, ② 3~4절은 “사무엘의 1차 정화 사역”이며, ③ 5~6절은 “사무엘의 2차 정화 사역”이고, ④ 7~14절은 “블레셋의 침략과 해결”이요, ⑤ 15~17절은 “사무엘의 다스림”입니다.

1. 법궤의 영입(1~2절)

1) 1절에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구별하여…궤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궤를 옮기는 중에 무사하였음이 큰 다행이요, 하나님의 뜻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법궤를 사모한 점과 그것을 경건하게 모신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이라 하였는데, 이 산이 언덕, 곧 “기브아”란 말인데 “기브아”란 지명(기럇여아림에서 동쪽으로 14㎞쯤)이 또 있은즉 혼돈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곳에 아비나답의 집과 그 아들 엘리아살은 법궤를 모시고 지키게 한 사람인데 이들은 그 지역(유다지파)에 속한 족이 아닐 것이요, 레위지파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한 점”과 여호수아 당시에 레위지파에게 거처를 줄 때 유다지파에서 준 땅도 있기 때문에(수 26:4) 레위족이 그 곳에 거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당한 재앙을 받았은즉 다른 지파 사람을 법궤 지키는 자로 구별하여 세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궤가 그곳에 들어간 날부터 20년간 오래 있었고, 온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하였다” 하였으므로, 성소에 관한 일과 평화에 관한 일이 상당하게 안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무엘의 1차 정화 사역(3~4절)

여기에서 사무엘은 처음으로 지도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사역이 백성들을 각성시킴에 있어서 “너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하였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그렇게 하였다” 하였으니 1차 정화 사역이 잘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지도가 있었고, 그 지도를 받은 자들이 이방신들(애굽이나 가나안족들이 섬기던 각종 신들을 의미함)과 아스다롯(가나안 지역의 여신상)을 과감히 제하였으며,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하므로 전심을 하나님께 기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전 국민이 마음이 하나되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큰 정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사무엘의 2차 정화 사역(5~6절)

사무엘의 2차 정화 사역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회개 운동을 일으킨 것이니, 곧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 물을 길어 붓고, 금식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회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미스바는 성경에 여러 곳이 있지만(삿 10:17, 수 18:26, 삼상 22:3) 여기의 미스바는 벧엘에서 7시 방향으로 5㎞쯤에 있는 에브라임 땅의 미스바로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그 이유는 미스바의 북쪽에 벧엘이 있고 동쪽에 길갈이 있으며 남쪽에 기브아와 여부스(예루살렘)가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단을 쌓고 물을 길어 부은 뜻은 그 지역에 물이 귀하므로 그것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뜻”이고, “금식하며 자복한 것은 회개의 진실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살아있는 동안 미스바에서 뿐만 아니라 16절에서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다스렸고”, 또 17절에서는 “자기 집이 있는 라마(미스바에서 5시 방향 4㎞쯤)에서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또 라마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것이나(17절), 미스바에서 단에 물을 부은 것은(6절) 당시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옮겼다는 의미가 아니고, 특별한 장소에서 선지자의 자격으로 제사와 예물을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4. 블레셋의 침략과 해결(7~14절)

1) 7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선민의 모임행사(미스바에서 회개하고 우상을 타파한 것)를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온즉,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8절에서 “사무엘로 하여금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해 달라”하였으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선지자를 의지함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함이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2) 9절에서 이때에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한즉(부르짖으매-안타까운 호소를 뜻함)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젖 먹는 어린 양”은 레 22:18, 27에 근거한 제물이고, “온전한 번제”란 신앙적 의미를 바로 적용한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의 의미와 헌신을 뜻하였을 것입니다(히 10:5~9). 응답의 방법은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3) 10절에서는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왔고 그날에 하나님이 큰 우뢰를 발하여 적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하였다” 하셨고, 11절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지명을 찾기 어려움) 아래까지 쳤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믿지 않을 때 별안간 나타난 천재지변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성도는 자연계나 생명계 또는 어떤 사건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들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10:30, 욘 4:7).

4) 12절에서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지명확인 어려움)을 사이에 세우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그 돌 이름을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13절에서 그때에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손이 막아 주시므로 블레셋이 굴복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 14절에서는 빼앗겼던 성읍도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회복하게 되니 그 사방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아모리 사람(가나안 땅에 사는 블레셋족 이외의 이방인을 총칭한 뜻) 사이에도 평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때, 백성들의 신앙과 생활이 정화되고, 바른 선지자의 권위로 백성을 지도한 즉, 하나님이 전쟁도 이기게 하시고, 평화의 세계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사무엘의 다스림(15~17절)

위 3대지 5~6절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사무엘 선지자 한 사람의 역할이 국방을 대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본문 7:1~6을 본문으로 한 “선민의 부흥운동”이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제 9 과 백성이 왕을 구함 (삼상 8:1~2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늙었을 때 그의 두 아들이 사사로 있으면서 타락한 행동을 취하자 백성들은 왕의 통치를 사모하여 구하게 되었고, 그 왕을 구함이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거절하고 이방인의 제도를 답습하는 것이어서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여 만류하였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고 계속 요청하므로 하나님이 그대로 허락하신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백성이 왕을 구함”이고, 대지를 나눈다면 ① 1~3절은 “사무엘의 아들들의 타락”이요, ② 4~9절은 “왕을 구하는 요청”이고, ③ 10~18절은 “왕의 제도를 알림”이며, ④ 19~22절은 “백성들의 요청과 허락”입니다.

1. 사무엘의 아들들의 타락(1~3절)

2절에서 “사무엘이 늙었으므로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아’로 사사를 세워 브엘세바(창 28:10, 야곱의 출발지, 헤브론 서남쪽 45㎞쫌)에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아들들이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관리가 부패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나타날 것인데, 사무엘은 엘리처럼 늙어서인지 “아들들을 바로 잡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의 아들들(사사)의 부패가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세워 달라”한 원인이 된 줄로 압니다. 왕이 세워지면 아무래도 체제가 바뀔 것이니까요.

2. 왕을 구하는 요청(4~9절)

1) 4~5절에서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7:17)에 와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으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청원한 것입니다. 여기의 “라마(성경에 여러 곳이 있지만, 수 18:25, 19:29, 36)”는 에브라임 산중의 한 성읍으로 드보라의 고향도 되고(삿 4:5), 미스바의 남쪽 4㎞쯤에 있는 곳입니다. 사무엘은 늙었고 정치는 부패한 상황이며 이방인의 침략이 우려되고 하니까 차라리 왕의 체제를 취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하여 열방의 정치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2) 6절에서 사무엘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혹 아들들의 사사직 박탈을 섭섭하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한즉 7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나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한 의도는 선지자를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 사람중심의 통치를 받기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유감을 표명하신 것입니다.

3) 8~9절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좇음같이 네게도 그리하는 것인즉 그들의 말을 듣되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민들이 출애굽 이후에 수없이 하나님을 거역한 사실과 끝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유감을 나타내시면서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차선책을 허락하시는 섭리도 있고, 백성들로 하여금 왕의 제도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직접 받는 것보다 못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멀리한 만큼 하나님도 그들을 상당부분 멀리하시는 뜻입니다(레 10:3, 신 4:7, 약 4:7).

3. 왕의 제도를 알림(10~18절)

1) 10절에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알린 왕의 제도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이라”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나타내신 왕의 제도를 그대로 전한 것으로

2) 11~17절을 보시면 ① 왕이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징집)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하셨는데, 이는 왕에 대한 호위, 또는 사열을 의미하고(11절), ②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와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한 것은 관원등용을 뜻하며(12절), ③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한 것은 왕실을 위하여 섬기는 것을 뜻하고(12절), ④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은 왕의 신분 보호를 위한 무기제조를 의미하며(12절), ⑤ “그가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음”은 궁궐내의 취사를 맡게 하는 것이고(13절), ⑥ “그가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한 것은 관리대접을 의미하며(4절), ⑦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이외의 세금을 거두어 관리들의 생활비 주는 것을 의미하고(15절), ⑧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의 일을 시킬 것이며” 한 것은 왕의 권위로 인권을 침해하여 사욕 취하는 것을 뜻하고(16절), ⑨ “너희 양떼의 십분일을 취하리니(15절과 같은 뜻)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종에서 사람의 종으로 전락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한마디로 표현할 때 왕의 제도는 인권과 노동력과 물질에 많은 피해를 본다는 뜻이요, 이로 인하여 18절에서 “너희가 왕 세웠음을 인하여 그날에(왕의 폭정이 있는 날)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 백성들의 요청과 허락(19~22절)

1) 사무엘이 이상의 말을 할 때에 백성들은 19절에서 “그 말 듣기를 거절하였고”, 20절에서는 “우리도 열방과 같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왕이)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대적들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적이 패하는 것을 잘 실감하지 못한 것 같고, 또 하나님의 특별보호를 기대하는 신앙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왕이 앞장서서 싸워주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2) 21절에서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기도로) 하나님께 아뢴즉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므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전하고 백성들을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교제하는 환경을 선택하셔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적접적 관계를 맺는 생활을 힘쓰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함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시고 성도 각자에게 가까이 계신 자신의 아버지이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의지하려 하거나 어떤 성직자를 의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만큼 간격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선민들은 선지자 개인의 지도를 받다가 왕의 다스림을 받으려 했으니, 하나님은 더 멀어진 셈이 되었고, 또 얼마나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 약한 눈높이의 수준대로 따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약한 자의 수준대로 통치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제 10 과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 (삼상 9:1~27) 목록으로


본문 ① 1~2절은 “사울을 소개함”이요, ② 3~10절은 “나귀를 찾으러 감”이며, ③ 11~18절은 “사무엘을 만남”이고, ④ 19~27절은 “사무엘이 사울을 영접함”인즉 전체의 제목을 “사울이 사무엘을 만남”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사울을 소개함(1~2절)

베냐민지파의 유력한 사람 “기스”가 있는데,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고(대상 8:33에는 넬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별명인 듯함), “스롤”의 손자이며, “베고랏”의 증손이고, “아비아”의 현손(고조)인데, 그 기스의 아들로서 준수한 소년 사울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으니, 그는 키가 크기를 다른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의 준수함은 외모만으로 나타내신 것이고, 그의 아버지 기스가 유력한 사람인 것은 그 지역에서 유지급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이 상태가 왕 될 자격을 말씀하신 것은 아닌 줄 압니다(삼상 16:7). 그러나 그는 백성들 중에서는 견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10:24).

2. 나귀를 찾으러 감(3~10절)

1) 3~5절을 보시면 기스가 암나귀를 잃고 사울을 시켜 한 사환과 함께 찾게 한즉, 사울이 그 사환과 함께 사알림 땅, 베냐민 땅, 숩 땅까지 다니며 찾다가 “오히려 부친이 잃은 암나귀 보다 자신들을 염려하실까 두려워 한다”고 그 사환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여기의 사알림은 오브라와 림몬의 동족 4㎞쯤이고, 라마의 동북쪽 7㎞쯤, 길갈의 북서쪽 8㎞쯤의 지역이요, “베냐민 사람의 땅”은 같은 족이 사는 지역을 뜻하고, 숩은 라마와 미스베의 중간, 또는 벧엘의 남쪽 4㎞쯤 됩니다. 그러니까 약 20리 안팎을 다니면서 찾은 셈입니다. 그리고 이 숩 지역에 라마(사무엘의 고향, 삼상 7:17, 25:1) 성읍이 있습니다.

2) 6절에서 사울의 염려를 들은 사환이 “그 지역에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말(예언)은 반드시 응한 즉 찾아가서 여쭈면 우리의 갈 길(소 찾는 방향)을 가르칠 것이라”고 하자, 7절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음을 염려하였고, 8, 10절에서 “사환은 자기에게 은 한 세겔의 1/4이 있음을 말하여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으로 가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은 한 세겔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12g쯤이라고 합니다. 9절 말씀은 그 지역의 전통을 말씀하신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물으려면 선견자(선지자의 옛날 명칭)를 찾아간 사실이 있었으므로 사울과 그 사환이 선지자를 찾은 것은 그같은 풍속에 의한 자연스러운 태도임을 나타낸 것이요, 여기에서 사울은 부모가 걱정하실 것을 염려하였고, 사환의 말도 들을 만큼 여유가 있었으며, 또 선지자를 찾아 뵐 때 예물을 갖고 가야 하는 예절까지 있었던 것은 그의 큰 덕행이라 할 것입니다.

3. 사무엘을 만남(11~18절)

1) 11~14절은 사울이 사무엘을 쉽게 만난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 성(숩 지역에 있는 사무엘의 고향 라마성으로 추정됨)에 이르러 물 길러 나오는 소년에게 선지자의 거취를 물은즉, 마침 그분이 산당에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그 일행보다 앞서 산당쪽으로 갔은즉 곧 만날 것이요 산당에 제사 드리러 온 백성들은 그가 와서 제물을 축사한 후에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성읍으로 올라가서 산당으로 들어갈 때 사무엘도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서로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지역의 산당이란 임시로 제사 드리는 처소일 것이고, 또 그때에 사람들을 청한 것은 사무엘이 미리 계시를 받고 사울을 소개하기 위하여 한 것입니다(22~24절). 하나님의 궤는 그때도 기럇여아림에 있었으니까요(7:1). 역사가 물 흐르듯 지나가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통치섭리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16절).

2) 13~16절은 “사울이 그곳에 오기 전날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상달하여 그들을 돌보았다” 하셨으니,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이 하나님의 계획적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울의 아비 기스의 소가 도망하는 일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을 보내고 또 사환을 동행시키시고 사환이 사무엘을 소개하고, 또 소년이 길을 인도하는 일까지 섭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의 작은 행사라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17~18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 하나님이 (또) 이르시되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므로, 그가 왕 되어야 할 자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18절에서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를 물었으니, 사무엘 선지자의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선지자로서 특별한 모습을 갖추었다면 쉽게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직자들도 사무엘의 모습처럼 평범한 차림으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것입니다.

4. 사무엘이 사울을 영접함(19~27절)

1) 19절에서 사울의 질문에 사무엘은 “내가 선견자라” 하였고, 사울의 신분에 대하여는 이미 알게 되었으므로 묻지 않았으며 “너는 나에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날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암송아지 찾는 것, 또는 이상하게 여긴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하였고, 20절에서 “삼일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찾았으니 염려하지 말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왕을 구하는 것)가 바로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니라” 하였으니, 이는 지도자가 될 것을 예고한 뜻이지만 여기에서 “왕 될 자”란 말까지는 나타내지 않았습니다(10:1).

2) 21절에서 사울은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베냐민지파이고, 나의 가족은 그 중에서도 가장 미약한데 당신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으니, 여기에서 베냐민지파가 작아진 것은 사사기 20장에서 크게 도륙 당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자기의 집이 작다는 것은 어떤 세도를 부린 일이 없으면서 스스로 겸손을 차린 때문일 것입니다(9:1).

3) 22~24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객실로 인도하여 청한 자 30명가량 중 수석에 앉히고, 미리 요리인에게 알려 특별한 부분(넓적다리 부위의 고기)의 음식을 내놓게 하였으며, 그 음식을 준비케 한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는 것을 알리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초청된 30명은 사무엘이 왕 될 자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찬치를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25절에서는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와 성읍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지붕”은 동양인 같은 지붕이 아니고 그들의 생활문화에 맞는 다락처럼 높은 곳으로 대화의 장소와 침소를 뜻합니다. 26절에서 “다음날 아침 동틀 때 일어나서 사무엘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27절에서 “성 끝에 왔을 때 사환을 앞서 가게 한 후(사울이 혼자 있는 상태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 하고 그가 왕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한 후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였습니다(10:1). 일찍이 하나님이 선민에게 왕을 세우시는 절차가 이와 같았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즉 선지자를 통하여 세우셨고, 또 그가 왕 되는 지위에 오르도록 모든 과정을 배후에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제 11 과 사울로 왕 되게 하심 (삼상 10:1~27)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내용은 “사무엘이 사울을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선포함”입니다. 따라서 “사울로 왕 되게 하심”으로 요약하였습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1절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음”이고, ② 2~9절은 “사울의 앞에 있을 일을 예언함”이며, ③ 10~16절은 “예언이 응함”이요, ④ 17~24절은 “미스바에서 왕됨을 선포함”이고, ⑤ 25~27절은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1.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음(1절)

사무엘이 사울을 배웅하며 성읍 끝에 와서 사환을 먼저 가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9:27) 하였는데, 1절에서 “사무엘은 이에 기름 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어 가로되 하나님이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왕)를 삼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의식은 제사장 임직식(출 40:13~15)이나 왕의 대관식(본문, 삼상 16:13, 왕상 1:34), 그리고 선지자를 세울 때(왕상 19:16)에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왕을 세움에 있어서 선지자가 왕될 자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인침”으로 나타낸 것이요, 또 여기에 따라 “성령으로 은혜주실 것을 약속하신 일”이라 할 것입니다(6, 9~10절)

2. 사울의 앞에 있을 일을 예언함(2~9절)

1) 2절에서 “네가 오늘 나를 떠나 베냐민 경계(에브라임 지역에서 남쪽에 있는 베냐민 경계) 셀사(지역표시 어려움)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암나귀 찾은 사실을 알리고 네 아비가 너희를 인하여 걱정한다는 말을 할 것이라” 하였고, 3~4절에서는 “더 나가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인데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또 한 사람은 염소새끼 셋을, 또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갖고 있으면서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어 네가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볼”이란 지역은 성경에 세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드보라가 싸운 곳이고(삿 4:6~16), 또 한 곳은 스블론, 잇사갈의 경계에 있는 곳이며(수 19:12, 22), 본문의 다볼은 베냐민 경내에서 벧엘로 가는 근처의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과 5~7절에 예언한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앞일을 내다 본 것과 사울이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되는 일에 대하여는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미래를 예언하고 그것이 응하였을 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갖도록 알린 것일 뿐 떡 세 덩이를 갖고 두 덩이를 준 것이나, 선지자의 무리가 악기를 든 것(5절)등의 의미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5~7절에서는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기브아의 높은 곳, 사울의 고향임. 26절, 11:4, 15:34, 이곳을 하나님의 산이라 한 것은 그곳에 제단이 있기 때문임)에 이르리니 그곳은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기브아)으로 들어갈 때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면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할 것이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예언”은 오늘의 설교 외침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모든 움직임을 낱낱이 주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에라야만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음도 알려 주셨습니다.

3) 8~9절에서는 사울이 2~7절까지의 행보를 끝낸 다음에 또 할 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벧엘서 4시 방향 20㎞쯤)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그때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하였으니, 이 약속은 사울이 왕으로 선포된 다음 13:8에서 응할 것을 예고적으로 명한 것입니다(성경에는 다른 길갈이 또 두 곳 있습니다. 왕하 2:1, 신 11:30). 9절에서는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그 징조(사람 만나는 일)도 다 응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날 징조가 응한 것(3~6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사울이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몸을 돌이킬 때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기도하고 묵상할 때만 받는 것이 아니고, 행동할 때도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10절).

3. 예언이 응함(10~16절)

1) 10절에서 “그들이 산(기브온의 하나님의 산, 5절)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악기로 찬송한 선지자, 5절)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5~6절의 예언이 응한 것을 의미하고 또 성령님은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에도 임하였을 뿐 아니라 예언을 하는데도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11~13절은 평소에 사울을 예언자로 알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의 예언하는 것을 보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그가 기스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놀란 표시를 하였다”는 말씀이고, 또 13절에서는 “사울이 예언을 마치고 산당(기브아의 제단)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예언도 전격적으로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14~16은 “사울의 숙부가 사울을 만나서 어디로 다녔는지를 묻고 또 사무엘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물었을 때 암나귀를 찾았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고 전하면서 다른 말(왕 되는 일)은 고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일이 완전히 성취되기 전에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의 예언이 응한 것은 “사람을 만난 일과 성령으로 변화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4. 미스바에서 왕됨을 선포함(17~24절)

1) 17절에서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백성을 불러 하나님 앞에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미스바는 7:5에서 설명 드렸지요. 18절에서 “하나님이 선민을 애굽인의 손에서 또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신 것”을 말하였고, 19~21절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 위에 왕을 세워 달라 하였은즉 너희 지파대로 1,000명씩 여호와 앞(제단)에 나오라 하여 어느 지파, 어느 가족, 어느 개인에게 제비가 뽑히는지를 시행한 결과 베냐민지파 마드리(이 이름은 사울의 직계 조상의 별명으로 여겨짐)의 가족이 뽑혔고, 또 그 가족 중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는데, 그 당시에 사울은 자리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잠 16:33의 말씀처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일을 작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2) 22절에서 사울이 제비에 뽑혔으나 그가 회중에 없자 “그들이 하나님께 여쭈었다”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다” 하셨으니, 여기의 행구(行具)는 수레같은 것이 아니고 “쌓아놓은 수하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외딴 곳 짐 속에 숨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왕 될 당시에 이렇게 겸손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묻고 대답을 받은 것은 기도로 묻고 사무엘에게 계시로 알리셨을 것입니다. 단순한 것은 제비를 뽑거나 우림과 두밈법(출 28:30, 레 8:8)을 쓰지만 자세한 내용은 말씀계시로 주셔야 하니까요.

3) 23~24절에서 백성들은 사울을 데려왔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다 하니 백성들이 만세를 외쳐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5. 백성들의 태도(25~27절)

1) 25절에서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8:10~17)를 백성들에게 말하였고 (그것을) 기록하여 여호와 앞(제단)에 두고 모든 백성들을 각기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26절에서 사울이 자기 집으로 갈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자들은 그와 함께 갔어도,

2) 27절에서 어떤 비류는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않았으나 사울은 잠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단체나 찬반론이 있듯이 여기에서도 선지자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받지 않는 불순종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절차로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왕을 세워 주신 것입니다. 왕이 잘하면 복이 되지만 잘못 할 때는 그만한 피해가 그 당사자와 백성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라 할지라도 이런 방법으로 왕이 선출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계시의 완성으로(유 3) 그때 그때 계시를 따로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12 과 사울이 암몬을 물리침 (삼상 11:1~15)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사울이 암몬을 물리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으나 대관식도 안했고, 왕궁도 없은즉 여전히 농사일을 하면서 나라의 대표자처럼 지내는 중에 암몬 족이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승리를 거두고 길갈에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암몬의 위협”이고, ② 5~11절은 “사울의 응전과 승리”요, ③ 12~15절은 “나라를 새롭게 함”입니다.

1. 암몬의 위협(1~4절)

1) 1절을 보시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암몬족이 놋의 자손이란 점은 잘 아실 것이요(창 19:38) 암몬족의 영토는 요단강 동편, 갓지파와 므낫세반지파 영토의 동쪽입니다. 그리고 “길르앗 야베스”는 길르앗 지역의 야베스로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 있는 므낫세반지파에 속한 성읍입니다. 이 지역을 지도상으로 확인하신다면 사해북단에서 2시 방향으로 40㎞쯤에 암몬 영지가 있고, 길르앗 야베스는 암몬 지역에서 11시 방향으로 40㎞쯤이며, 사울왕이 있는 “기브아”는 사해 북단에서 10시 방향 25㎞쯤에 있으므로, 야베스에서는 기브아가 서남방 70㎞쯤인즉 지도를 살펴보십시오. 암몬왕의 위협이 있자 야베스의 백성들은 굴복을 전제하여 “암몬을 섬길 것이니 언약을 하자” 하였지만, 2절에서 “나하스는 너희의 오른 눈을 빼야 언약을 하고 온 이스라엘을 모욕할 것이라”고 호통을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길르앗 야베스는 사연이 있는 곳입니다. 삿 21:8~14에서 이스라엘 총회에 참여하지 않은 연고로 도륙을 당하고 처녀 400명을 빼앗김 당한 지역이므로 적을 대항할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암몬의 침략을 받았으니 총회 일을 돕지 않은 보응인지도 모릅니다.

2) 3절에서 이때에 야베스 장로들은 “칠 일의 유예를 주어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어 보고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굴복하러) 네게 나갈 것이라” 하고, 사울왕이 있는 기브아에 사자를 보내어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고하니 “백성들이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2. 사울의 응전과 승리(5~11절)

1) 5절에서 그때에 “사울왕은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백성의 울음소리의 연유를 듣고 알았다” 하였으니, 왕이라 할지라도 일반 백성처럼 생활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6~8절에서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여움이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각 지파에 두루 보내어 누구든지 나와 사무엘을 좇지 않으면 그 소들(백성의 소)도 이와같이 하리라” 하였는데, 하나님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여 그들이 한 사람처럼 나온즉 베섹(당시 집결지로 야베스 길르앗 서편 15㎞쯤)에서 계수한 자가 30만이요, 유다지파에서만 나온 사람이 3만이라고 하였습니다.

2) 9절에서는 야베스에서 온 사자들에게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를 구원 할 것이라” 하였고, 그들은 그 소식을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한즉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0절에서 야베스 사람들은 대적 암몬 사람들에게 “내일 나갈 것이니 좋을대로(눈을 뺀다는 것, 2절) 하라” 하고, 10절에서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세 대로 나누어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사람을 치매, 둘도 함께 한 자가 없도록 다 흩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사울을 감동하신 일과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니(6, 7절) 백성들이 단결하여 싸우므로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3. 나라를 새롭게 함(12~15절)

1) 12~13절은 사울이 미스바에서 제비에 뽑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를 멸시한 비류들(10:27)을 죽이자”는 백성들의 청원이 있을 때 사울이 말하기를 “이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라”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크게 의식하였고, 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 자들에게 배려의 뜻을 베풀만큼 너그러웠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 14~15절은 그때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기브아에서 2시 방향 20㎞쯤, 여리고에서는 동쪽 3㎞쯤, 사해 북단에서는 11시 방향 15㎞쯤, 수 4:19~20, 5:10, 14:6)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하였으니 사울왕을 중심으로 한번 싸움에 승리한즉 국방을 위한 새로운 체계와 왕권의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 장소를 “길갈”로 정한 것은 여호수아 때의 역사적 의미도 있고(수 4:19~20), 또 암몬족의 침입을 가까운 곳에서 대비하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5절에서 백성들이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정식으로 대관식을 한 것임)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음과 복종으로 정상화한 뜻이고, 모든 사람이 기뻐한 것은 반대자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사울왕을 택하여 세우실 때 10:24에서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다” 하실 만큼 백성들 중에 뛰어난 인물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가 어깨 위만큼 장대한 외모만 선호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삼상 16:7). 사울이 왕 되는 과정에서 그에게 상당한 탁월성이 나타난 것을 살피실 수 있으니 여기에 대하여 9:1~10을 본문으로 한 “사울의 탁월성”이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 하십시오.

제 13 과 사무엘의 확실한 태도 (삼상 12:1~23) 목록으로


사무엘의 사역이 더 남아 있고 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까지는 생존하지만 그는 늙었음을 자각하여 백성들에게 선지자로서의 할 일을 확실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백성들에게 할 말을 하고 깨우칠 것을 깨우치며, 또 자신의 생애 중 혹이라도 불미한 점이 있다면 그것도 회개하로 정리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부르셔서 갈 때는 가더라도 생존시에 할 일은 하고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본문 ① 1~5절은 “자기반성에 대한 객관적 확인”을 한 것이요, ② 6~18절에서는 “백성들에게 깨우칠 것을 확실히 함”이며, ③ 19~23절은 “백성들의 회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사무엘의 확실한 태도”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자기반성에 대한 객관적 확인(1~5절)

1) 1~2절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한 말(왕을 세워달라는 요청, 8:4~5)을 듣고 그대로 시행하여 왕이 출입하는 것을 확실히 알렸고, 또 자신이 늙은 것과 자신의 아들들도 백성들 앞에 출입하는 것을 확인” 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부정의 대상이 되지 않고(8:2~3) 백성들 앞에 출입한 것을 보면 그들이 회개하고 사사직에서 떠나있었든지 아니면 백성들의 빈축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3절에서 사무엘은 이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 앞과 기름부음받은 너희의 왕 앞에 있은즉 (이 자리에서 나의 잘못에 대하여) 내게 증거하라 내가 뉘 소나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거나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취하였느냐? 그렇게 한 일이 있다면 (내 아들의 일을 포함하여) 이 자리에서 갚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 사실은 자신의 결백 문제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처리하려는 처사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여 사무엘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결백한 생애로 사명 다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3) 그리한즉 4~5절에서 백성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속이거나 압제하지 않았고 뇌물도 취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사무엘은 “너희가 내 손(한 일)에서 아무것(혐의)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하나님과 기름부음받은 왕이 증거함이라” 하였고, 백성들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증거하신다”한 것은 “하나님이 증거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머지 않아 과학이 발달되면 금속이나 거짓말 탐지기처럼 부정을 측정하는 기계가 나오겠지요. 따라서 공직자와 지도자가 자기의 직임을 마치고 나올 때, 그 탐지기를 통과하여 나올 수 있는 시설이 생긴다면 깨끗한 사회가 되겠지요. 사무엘은 이 일을 스스로 왕과 백성들 앞에서 인정을 받고 통과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 백성들에게 깨우칠 것을 확실히 함(6~18절)

사무엘이 백성들을 깨우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왕을 구할 때도 유감을 표한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자와 만유의 주로서 선민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사 부족함 없이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그것을 기억하거나 감사하지 않고 사람을 왕으로 삼아 섬기겠다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요 큰 충격적 사건인데도 그런 느낌없이 왕을 구한 것이 큰 잘못임을 인식시키고 하나님이 그들의 요청에 따라 주셨은즉 왕과 백성들이 일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1) 그래서 6~9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한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담론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세워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셨고, 이곳에 거하게 하신 것이라 한동안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하나님을 잊었을 때 하솔 군장 시스라의 침략을 받은 일이 있었고(삿 4:2) 그 다음에도 블레셋의 침략과(삿 10:7) 또 모압의 침략(삿 3:12)이 있었지 않았느냐? 그럴 때마다 10~11절에서 너희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우상을 훼파하고 기도한즉 하나님이 (드보라, 삼손, 에훗을 세워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여룹바알과 베단(이 이름을 바락으로 번역한 성경도 있다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셔서 사방의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사 안전하게 거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에서 9절의 침략자들과 11절의 방비자들이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은 전체적 침략의 역사와 방비책을 요약한 사실로 보셔야 하고, 11절의 “베단”이란 이름이 생소한 이름으로 여겨지는 것은 70인역에서 베단을 바락으로 번역한 만큼 그 “베단”이란 글자가 사본상 바락의 오기이거나 또는 바락의 별명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12절에서 방금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 “너희가 암몬왕 나하스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여호와가 너희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으니, 이것은 그 백성들이 평소에 자주 있었던 나하스의 침략위협을 느끼고 왕을 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너희의 왕을 보라 (하나님이)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다” 하였고, 14~15절에서는 “너희와 너희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면 좋으려니와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손이 열조를 치신 것처럼 너희를 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로서 꼭 할 말을 한 것입니다.

3) 16~18절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큰 일을 보라 하고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비가 오지 않는 때라는 뜻)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그것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알게 하시리라” 하고 사무엘이 하나님께 아뢴즉 “그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시니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우뢰와 비의 이적을 보인 것은 그들이 왕 되신 하나님을 사람으로 바꾼 일이 큰 죄임을 알리는 동시에 7:10에서 우뢰가 나타나 블레셋 군인들을 파한 것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일깨운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를 알았으면 그 하나님을 멀리하려 하지 않았을 것임을 깨우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왕으로, 명령자요 지배자이시며 보호자이심을 또 한번 확인하십시오. 하나님을 결코 인간이나 인간의 과학이나 세상의 물정 다음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크게 후회하실 것입니다.

3. 백성들의 회개와 사무엘의 격려(19~23절)

1) 19절에서 비와 우뢰를 체험한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우리를 죽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오 우리가 모든 죄 위에 왕을 구한 악을 더하였다” 하면서 회개를 하였으니, 선지자는 이로서 충분히 깨우칠 것을 깨우친 것이 된 것이요,

2) 20~21절에서는 격려하는 말씀으로 “두려워 말라 너희가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고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우상주의)을 좇지 말라” 하였고,

3) 22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즉 그 크신 이름(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 하셨으니, 이 사실은 사 41:9~10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택하신 백성을 싫게 여겨 버리시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4) 계속된 격려의 말씀으로 23~24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을 것이고, 또 선하고 의로운 도로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출애굽 이후 선민에 대한 보호, 인도, 공급의 역사)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되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신실히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또 25절에서는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직접적인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인간 왕을 중간에 두었으니 많이 불행해진 것입니다. 인간 왕이 잘못하여 잘못된 통치를 받게 되면 성도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행할 기회를 잃게 되므로 크게 위험해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믿을 수 없은즉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교훈하신 줄 압니다.

제 14 과 불리한 전세 (삼상 13:1~23) 목록으로


전체의 내용을 보면 사울이 40세에 왕이 된 후 2년 되었을 때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① 1~7절은 “블레셋과의 대치 상태”이고, ② 8~14절은 “사울이 질책을 받음”이며, ③ 15~23절은 “불리한 전세”입니다. 선민과의 전쟁은 누가 먼저 침략을 하였던지 선민 편에서는 그들을 없애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출 15:14, 수 13:2) 계속 그 지역을 정복하지 못한 것이 선민의 불찰입니다.

1. 블레셋과의 대치 상태(1~7절)

1) 1절에서 “사울이 40세에 왕 되었다”는 말씀이 잔글씨로 기록된 것은 원문에 없기 때문에 그가 소년인 점(9:2), 40년 왕위에 있은 것(행 13:21), 요나단이 용사인 점 등을 감안하여 짐작한 것임을 아셔야 하며, 1~2절 말씀은 “사울이 40세에 왕이 되고 2년 되었을 때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 3천을 택하여 그중 2천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라마에서 동북쪽 5㎞쯤, 벧엘에서는 5시 방향 6㎞쯤)에 있게 하고, 1천은 요나단(사울의 아들)과 함과 베냐민 기브아(벧엘 남쪽 12㎞쯤, 예루살렘에서 11시 방향 5㎞쯤)에 있게 한 후 남은 백성을 집으로 돌려보냈으니, 그 당시에는 군사의 수가 넉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3~4절에서 “요나단이 게바(라마 동쪽 3㎞쯤, 기브온에서는 동쪽 8㎞쯤됨)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듣고 (대항해 올 것이 예측되므로)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게 된 사실을 알린즉) 백성들이 길갈(여리고에서 동북쪽 2㎞쯤, 믹마스에서는 동쪽 16㎞쯤임)에서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2절의 3천 군사외에 새로이 모집한 것입니다(16절).

3) 5절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모은 블레셋 군사는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이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는데 그들이 벧아웬 동편 믹마스(벧아웬에서 2시 방향 1㎞쯤에 믹마스가 있음)에 진을 친즉 6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하고 절박하여 은밀한 곳에 숨고 어떤 히브리(이스라엘 사람)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블레셋 쪽을 멀리 피하여)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과 함께 길갈에 있는 모든 백성은 떨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길갈”은 새롭게 병사들을 집결시킨 지역이고, 실제로 전투한 지역은 2절, 5절, 16절에 나타난대로 믹마스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울이 질책을 받음(8~14절)

1) 8절에서 이때에 사울왕은 사무엘의 지도를 받으려고 7일(이 7일은 10:8에 예언된 것과는 상관없이 안식일 주기에 맞춘 선지자 일정의 관행으로 여겨짐)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질 조짐을 보이므로 9절에서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는데, 9절에서 번제를 드리자 사무엘이 왔고 “이미 번제 드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2) 10~12절에서는 “사울이 자기의 상황과 다급한 중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기로 부득이 번제를 드렸다”고 말하였을 때, 13~15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하고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왕이 하나님의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다 하고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기브아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사울왕이 임의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번제는 율법에 의하여 제사장이나 직접 계시를 받는 선지자가 드렸어야 하는데 사울왕이 그 사실을 알고도 어긴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처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10:3~4에 나타난 징조가 생각납니다. 그것은 “벧엘로 가는 세 사람으로부터 떡 두 덩이를 받으리라고 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으로부터 떡은 받아 먹을 수 있지만 직접 제사를 드려서는 안될 것을 보여준 계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드리는 제사법을 어기거나 하나님 앞에 직접 망령된 행위를 할 때에 크게 진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실예로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두 번 친 것을 망령된 행위로 보시고 질책과 동시에 직무를 여호수아에게 넘긴 사실과 같다 할 것입니다(민 20:10~13, 시 106:32~33).

3. 불리한 전세(15~23절)

1) 15절에서 그때에 길갈에서 사울과 함께한 군사는 600명 가량이며, 16절은 2절과 5절의 재설입니다. 17~18절에서 그때에 노략군들이 블레셋에서 나와서 한대는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고(오브라는 벧엘 동북 7㎞쯤, 수알은 넓은 지역임), 한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으며(벧호론은 베냐민과 에브라임 경계에 있고 3㎞ 상간으로 상하 벧호론이 있음. 수 16:3, 5), 또 한대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짜기 지경길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스보임은 소돔과 함께 망한 스보임이 아니고(신 29:23, 호 11:8) 베냐민 지경으로 예측됩니다(느 11:34). 그들이 이렇게 흩어진 것은 선민을 상대로 노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19~22절은 그 당시에 사울의 군사들은 무기가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는 중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창과 칼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또 선민들이 농기구를 빌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가서 부탁할 형편이었은즉 싸울 때에도 백성들에게 칼과 창이 없었고,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방이 쇠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블레셋 사람의 부대가 믹마스 어귀에 이른 것은 5절의 뜻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할 때 선민군사는 3,600명 정도에 무기가 없는 형편이고, 블레셋 군사는 36,000을 헤아리는 군사로 병거, 마병등(5절) 10배의 병력이었다고 아시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개인 또는 소그룹전이나 기습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제 15 과 요나단과 사울의 승리 (삼상 14:1~23)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① 1, 4~15절은 “요나단이 승리한 내용”이고, ② 2~3, 16~23절은 “사울왕이 승리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요나단과 사울의 승리”로 정하였습니다. 14장의 내용 분량이 많아서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기로 하였습니다.

1. 요나단이 승리한 내용(1, 4~15절)

1) 13:2을 보시면 “요나단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기브아에 진쳤다” 하였는데, 본문 1절에서는 병기든 소년과 함께 그 아버지 왕에게 고하지 않고 블레셋의 한 부대를 습격하였습니다. 4~5절에서 요나단이 블레셋의 한 부대를 기습하는데는 이편(들어가는 쪽), 저편(그 건너편)에 험한 바위가 있는데 이편 바위 이름은 보세스(빛나는 자의 뜻)이고, 저편 바위의 이름은 세네(가시나무의 뜻)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편 바위는 북에서 믹마스(라마에서 동북쪽 5㎞쯤)쪽으로 일어섰고, 또 하나는 남에서 게바(라마 동쪽 3㎞쯤) 앞에 일어섰다”고 하였습니다. 믹마스와 게바 사이는 2㎞쯤입니다. 여기에서 이 지형을 말씀한 것은 그 바위 안쪽에 있는 블레셋 부대가 그 바위벽을 요새로 하였기 때문에 그쪽을 경시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고, 요나단이 그 험한 바위를 올라 적진에 들어가므로(13절) 적을 놀라게 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6절에서 요나단은 자기의 병기든 자(호위병)에게 험한 바위 너머에 있는 “블레셋 부대를 기습하자” 하였고, 그들은 할례 없는 자들(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란 뜻)이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 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고백을 하므로 요나단이 족히 신앙 있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에 7절에서 병기든 소년도 요나단의 뜻에 일치하여 뒤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게 하시는 일을 수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영광을 받으시는 일도 수에 구애 받지 않으시는 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이때 요나단은 그 병기든 자와 함께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서 표징을 정하였으니, 이 표징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한 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였거나 특별 영감으로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 표징이란 9~10절에서 “그들이 적에게 신분을 노출하였을 때 적이 말하기를 너희도 기다리라 하면 올라가지 말 것이요 반대로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올라가야 할 것이니 이렇게 되는 것이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뜻이요 표징이라”고 하였습니다.

4) 11~12절에서 두 사람이 적진 앞에 보인즉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며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죽이거나 사로잡는 일)을 보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하나님이 붙여주신 줄로 믿고 13절에서 험한 지역을 손발로 기어 올라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때 블레셋 부대원들은 두 사람을 무시하였거나 올라오지 못할 줄 알고 방심하였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5) 14~15절에서는 “큰 승리와 두려움이 있었음”을 말씀하셨으니, 곧 “요나단과 그 병기든 자가 반일경(한나절 밭갈이 할 수 있는 넓이)지단(한계가 있는 지역)에서 적 20인 가량을 도륙하였는데, 그때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으며,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니…이는 큰 떨림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때에 “땅이 진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온 동리와 부대와 노략군들을 떨게 한 것”은 지진이 동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렇게 하여 기습작전에 승리를 한 것입니다. 14절의 반일경지단(地段)이란 싸움터 공간의 넓이가 “한나절 밭갈이 할 만큼의 터”라는 뜻인데, 이 뜻이 원문적 번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70인역에서는 “투창과 팔매질과 밭의 돌”로 번역하므로 무기의 뜻을 나타냈고, 공동번역에서는 “하루갈이 밭을 반이랑 갈아치우듯 싸웠다” 하는 부사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역은 싸움터로, 70인역은 무기로, 공동번역은 싸움을 수식하는 비유적 방법으로 나타냈으니, 성경연구와 해석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1956년에 발행된 개역성경의 본문을 중심으로 이 강론을 씁니다. 그리고 과서 수십년 동안 선배님들로부터 일점일획의 축자영감을 믿고 가르친 신앙 안에서 교훈을 받았는데 지금이 2005년 말인즉 개역성경의 수명이 오랜 중에 있습니다. 많은 번역문이 나와서 개역성경활용이 줄어드는 추세에 있으니 앞으로 더 지나면 새로운 글로 번역된 성경을 볼 때 내용의 혼란은 물론 이 강론의 뜻도 많이 훼손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잘 보존하고 원문적 의미에 가깝도록 노력하십시오.

2. 사울왕의 승리(2~3, 16~23절)

1) 2~3절에서는 “사울왕의 병력과 그 당시 제사장과 요나단의 비밀출정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왕은 600명 가량의 백성들(싸움할 군사)과 함께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13:2에서 믹마스와 벧엘산 사이에 있다가 미그론으로 옮긴 것인데, 그 당시에는 3,000명의 군사 중 2,000명을 갖고 있었으나 여기서는 600명 가량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1,400명의 군사가 다른데 있거나 중간에 다른 전쟁으로 없어졌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주밀하게 연결되지 않고 그때 그때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만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건들과 전쟁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 당시에 제사장은 “아히야”인데 그가 에봇을 입고 사울과 함께 있은 것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려고 노력한 정황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아히야는 이가봇(삼상 4:19~22)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고 비느하스의 손자이며 엘리의 증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왕에게 알리지 않고 블레셋을 기습한 것을 작전상 잘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2) 16절에서 베냐민 지역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순이 요나단의 습격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이 기브아는 본래 요나단의 진지였으나(13:2) 바뀌었고 사울도 그 당시에는 믹마스에 있다가 다시 기브온으로 진지를 바꾼 것입니다. 사울은 17절에서 누가 허락없이 블레셋을 쳤는지를 점고한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사울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적을 치려하였고, 그 전에 18절에서 아히야 제사장에게 “실로에 있는(3절)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 함은 전쟁터가 아닌 실로의 성소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14:3).

3) 그런데 19절에서 블레셋 진에서 더 큰 소동이 있음을 알게 되어 사울이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법궤 가져오는 일을 취소시킨 것) 하고, 20절에서 백성들과 함께 블레셋 진으로 가까이 가본즉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는 내란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 것이고 전쟁의 작전상 좋은 정보를 수집한 것입니다.

4) 21~23절은 사울의 군사의 증강과 전승에 대한 내용입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 조용히 지냈던 히브리 사람(선민)들이 자기들과 함께 거주하였던 블레셋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사울의 진으로 와서 이스라엘 모든 군사와 합하게 되었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한 소식을 듣고 출전에 임하여 도망하는 블레셋 사람들(22절의 그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즉 전쟁이 벧아웬(믹마스와 게바 사이, 블레셋 진에서 서쪽 1㎞쯤)을 지나쳐 추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하나님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단의 용기있는 기습으로 지진과 혼란으로, 또 적이 서로 치는 자중지란과 블레셋의 귀순과 병력증강으로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18~19절에서 “법궤를 가져오라” 하였다가 곧 취소한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 된 것입니다. 왕이 임의로 법궤를 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16 과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 (삼상 14:24~52) 목록으로


① 24~30절은 “맹세로 금식케 함”이고, ② 31~35절은 “맹세를 풀고 음식을 먹게 함”이며, ③ 36~46절은 “맹세 위반자가 있음을 알게 하심”이요, ④ 47~52절은 “전쟁의 승리와 사울의 측근들”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맹세로 금식케 함(24~30절)

1) 23절에서 사울의 모든 군사들이 블레셋을 추격하여 “벧아웬”까지 간 일로 몹시 피곤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사울왕은 백성에게 맹세(이 맹세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임, 창 28:20, 삿 11:30) 시키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운수를 치는 일)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식사할 겨를 없이 원수를 끝까지 무찌르려는 의욕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뜻으로 백성들에게 명령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도 그 맹세에 동참하였으므로 시장하였지만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맹세가 두려워서 그것을 입에 대는 자가 없었다”(25~26절)고 하였습니다.

2) 그런데 27절에서 “요나단은 그 맹세를 명할 때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찍고 그것을 입에 대어 먹은즉 눈이 밝아졌다” 하였으니, 이 “눈이 밝아진 것”은 기운없는 상태에서 꿀을 먹었으므로 그만큼 기운을 차릴 수 있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때에 28절에서 백성중 하나가 “백성들에게 왕의 금식 맹세가 있었던 사실과 그런 연유로 군사들이 피곤해 있는 사실”을 알린즉 29~30절에서 요나단은 그 일을 마땅치 않게 논평하였으니, 곧 “내 부친이 이 땅(그 지역의 군사들)으로 곤란케 하였도다 내가 이 꿀을 조금 맛보았어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그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더 많이 살륙하지 않았겠느냐?” 하였으니, 이는 왕의 처신을 아들과 신하된 입장에서 비판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요나단의 뜻은 군사가 먹으면서 싸워야 힘을 낼 수 있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일단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 맹세를 풀고 음식을 먹게 함(31~35절)

1) 31절에서 “그날에 믹마스(라마에서 동북쪽 6㎞쯤)에서 아얄론(서쪽의 게셀과 동쪽의 기럇여아림 사이 10㎞쯤 중간에 있고, 믹마스에서는 8시 방향 25㎞쯤)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기 때문에 군사들이 피곤하였고”, 그들은 그것으로 맹세조건을 지킨 것으로 알고 32절에서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잡아 피 있는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혹 피를 금한 율법(창 9:4, 신 12:16, 15:23)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시장한 중이라 율법규범을 유의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32절에서 이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지자 사울은 무신(無信)하게 먹은 것을 지적하였고, 33~34절에서는 “큰 돌을 굴려오라 하여 박석을 만든 후 그 밤에 그곳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가려내고 먹을 것을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또 35절에서는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단을 쌓은 사례는 많습니다(창 8:20, 출 17:15, 수 8:30, 삿 6:24). 여기에서 단을 쌓은 것은 적당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 감사의 뜻을 표함이었을 것입니다.

3. 맹세 위반자가 있음을 알게 하심(36~46절)

1) 36절에서 사울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가서 동틀 때까지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하였으니, 이 밤이 34절의 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장한 중 음식을 먹게 한 다음 휴식 시간도 없이 그 밤부터 동틀 때까지 적을 치자고 한 것같고, 백성은 동의 하였으나, 이때에 제사장(아히야)이 “하나님께 나가자(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고 하였습니다.

2) 37절에서 사울이 제사장의 뜻을 따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으면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주시겠습니까?” 하였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때에는 우림이나 두밈법을 쓰지 않고 직접 계시가 있기를 바란 듯합니다. 아무 결론을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3) 38~39절에서 이리하여 사울왕은 “이것이 누구의 죄임을 직감하고 백성들의 어른들을 모아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였고, 그 범인이 아들이라 하여도 반드시 죽으리라(저주한 뜻)하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대답(호응)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백성들은 그 사건이 요나단의 맹세위반으로 인한 것임을 짐작한 듯하고, 또 요나단을 돕고자 하는 뜻을 드러낸 듯 합니다. 요나단은 전공을 많이 세운 자로서 사울왕이 맹세시킨 사실을 비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4) 40~41절에서 “사울은 공평한 제비를 뽑게 하기 위하여 자신과 요나단이 백성과 떨어져 있었고, 사울이 하나님께 기도로 실상을 보이소서 한 다음 백성들끼리 제비를 뽑은즉 요나단과 사울이 뽑혔고, 또 나와 내 아들 사이에 뽑으라 하여 뽑은즉 요나단이 뽑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에게 맹세위반한 자를 뽑으신 것인데 중요한 것은 요나단이 그 사실을 모르고 범한 것이지만(27절) 맹세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 사실을 나타내신 줄 압니다. 수 6:26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재건축하는 자를 저주한 일이 있었고, 그 사실이 178년쯤 후에 성취된 일이 있은 것처럼(왕상 16:34) 하나님께 대한 맹세나 선지자적 저주는 그대로 성취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요나단이 뽑히자 43절에서 요나단은 꿀을 맛 보게 된 사실을 말하면서(왕이 저주한 사실인즉)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였고, 사울왕도 하나님께 맹세한 것인즉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44절) 하므로 맹세의 지엄한 약속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때 45절에서 백성들이 요나단에 대하여 그의 공적을 말하면서 강한 구명운동을 펴므로 그를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였지만 결국 그 저주의 효력은 그를 전쟁에서 죽게 한 것이니(삼상 31:1~2),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취소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6절에서 그 시기에 전쟁을 일단락 되었습니다.

4. 전쟁의 승리와 사울의 측근들(47~52절)

1) 47~48절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에 사방의 모든 대적인 모압, 암몬, 소바의 왕들(이 지역은 예루살렘 서쪽 10㎞ 지점임)과 블레셋과 싸워 이겼고, 또 아말렉(유다영지 남쪽이고 사해 서남방임) 사람을 쳐서 이스라엘을 약탈하는 손에서 건지기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49~51절은 사울의 가족들로서 아들은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요 딸은 메랍과 미갈이며 아내는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이고 군장은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 아브넬(사울의 사촌)이며 사울의 아비는 기스요 기스는 넬과 함께 아비엘의 아들입니다.

3) 52절에서 “사울의 사는 날 동안 블레셋과의 큰 싸움이 없었기 때문에 사울은 힘있는 자나 용맹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제 17 과 사울을 버리심 (삼상 15:1~35) 목록으로


본문의 중요한 핵심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말렉을 진멸함”이고, 또 하나는 “사울을 버리심”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이 전개되면서 나타난 내용들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3절은 “아말렉을 멸하라 하심”이요, ② 4~9절은 “사울이 아말렉을 멸함”이며, ③ 10~15절은 “하나님의 후회와 사울의 실수”이고, ④ 16~21절은 “사무엘의 지적과 사울의 변명”이며, ⑤ 22~28절은 “하나님의 버리심과 사울의 뉘우침”이요, ⑥ 29~35절은 “하나님의 뜻과 두 사람의 태도”입니다.

1. 아말렉을 멸하라 하심(1~3절)

1) 1절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뜻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나)를 보내어 사울을 왕세우셨은즉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한 후에 2~3절에서 만구의 여호와(모든 군사의 통솔자)께서 출애굽 당시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길에서 대적한 일을 추억하시고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였으니,

2) 이 말씀에서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며(창 26:12), 사해바다 남단에서 서남쪽에 분포되었고, 아로엘 남쪽 10㎞ 이남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시는 분으로 출애굽 당시에 선민을 광야에서 대적한 사건(출 17:8)은 약 400년 전의 일이며, 또 사사시대에도 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삿 3:13). 하나님이 그 부족을 멸망시키라는 말씀을 출 7:14, 신 25:17에서도 하셨는데 이번에도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의 특별한 조건은 “모든 소유 즉 우양, 약대, 나귀, 그리고 남녀, 소아, 젖먹이를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소아와 젖먹이가 다 남녀에 포함되지만 “어린이까지 긍휼히 여기지 말고 다 없애라”는 의미로 강조하신 듯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2. 사울이 아말렉을 멸함(4~9절)

1) 4~5절에서 명을 받은 사울은 백성을 소집하여 들라임(지도상으로 찾기 어려움)에서 계수한 즉 보병 20만(유다지파 외에서), 유다사람 일만이었으므로 이들을 아말렉 성에 복병케 한 후, 6절에서 겐 사람에게 알리기를 “아말렉 사람 중에서 따나라 너희까지 멸할까 하노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선대하였느니라” 하여 “그들이 아말렉 중에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겐”이란 지역이 어디일까요? 삿 1:16을 보시면 “모세의 장인이 겐 사람이라” 하였고, 모세가 그를 만난 것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이 미디안 광야는 시나이 반도 동쪽에 있는 갈대바다 동쪽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시나이 반도 좌우에 좁은 바다가 있는데 서쪽바다는 홍해이고 동쪽바다를 갈대바다라고 합니다. 그 바다 건너편 아라비아 땅입니다. 그 당시 모세는 그 바다를 건너서 40년간 피신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 족속들이 선민의 출애굽때 무슨 선대를 하였는가 할 때, 우선 모세의 장인이 친히 방문하여 자문과 안내를 하였고(출 18:10, 19, 민 10:29, 32), 그 후 사사시대에 와서 드보라 사사때 헤벨의 아내가 적장 시스라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삿 4:11). 그 미디안 땅이 겐 족속의 고향이지만(출 2:16~18) 그 이후에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여 살았고, 민 24:21을 보시면 모세가 그 부족에게 “거처가 견고하다”고 축복하였은즉 그들이 아말렉 중에 거주하였을지라도 보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화를 피하라”고 한 것입니다.

2) 7~9절은 “사울이 하윌라(지도상으로 에디오피아 동북지역에 있지만 그곳은 아니고 아말렉이 거주하는 유다 남방의 어떤 곳으로 추정함) 애굽 앞 술(출애굽 초기 시발지쯤임)까지 아말렉을 쳐서 왕 아각을 사로잡고, 모든 백성을 진멸하되 양과 소의 좋은 것(기름진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고 낮은 것(아깝지 않은 것들)은 진멸하였으니” 결국 명령대로 완전하게 시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후회와 사울의 실수(10~15절)

1) 10~11절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상태를 보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 하셨으니, 이 후회의 뜻은 “니타메리”로 유감의 표명이라고 합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시므로 사무엘이 근심되어 “온 밤을 부르짖었다(기도한 뜻)”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명하신 후에 그대로 지키는지 안지키는지를 지켜보시는 분이시고, 또 복종하지 않을 때는 쓰신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밤새워 기도한 것은 사울을 왕 세운 사람으로서의 실망이 컸기때문이요, 사명자로서의 기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었은즉 이는 성도들 세계에서도 문제되는 일이 있을 때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2) 12절은 사무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소식을 들은즉 “사울이 갈멜(지중해변의 호미곳이 아니고 마온과 십 사이에 있음, 사해 서편 23㎞쯤)에 가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것은 자신이 전쟁에 여러 번 승리한 것을 자찬하여 기념한 뜻일 것인즉 인간을 내세운 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고, 갈멜에서 길갈은 서에서 5시 방향으로 110㎞쯤의 거리인즉 이런 행사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 만난즉 “사울은 아무 거리낌 없는 자세로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면서 하나님의 명을 다 행하였다” 하였는데, 14절에서 사무엘이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우양의 소리는 어찜이냐” 하였으니, 그때에 사울은 아말렉에서 뺏은 전리품들을 가까운 곳인 길갈로 모으게 한 것이었습니다. 15절에서 사울은 우양을 남겨온 일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여 우양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온 것일 뿐 다른 것은 다 진멸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의 뜻을 부가하여 잘못 시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사무엘의 지적과 사울의 변명(16~21절)

1) 16~19절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사울에게 말하였습니다(16절).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겸손) 백성의 머리가 되었고 하나님도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셨으며(17절) 또 아말렉을 다 없이하라고 명하신 일과(18절) 사울왕이 탈취에만 급하여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일(불순종과 사람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행하였다”고 지적을 한즉,

2) 20~21절에서 사울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였다는 뜻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였고 아각왕을 잡아왔으며 또 백성들이 그 땅의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여 우양을 갖고 왔은즉 정당하게 할 일을 하였다”고 변명을 한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 뜻을 어기고도 정당한줄 아는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하면서 정당한 줄로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버리심과 사울의 뉘우침(22~28절)

1) 22~23절에서 사무엘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번제나 다른 제사(예물)를 그 목소리(말씀, 뜻) 순종하는 것만큼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의식)보다 낫고 듣는 것(순종)이 수양의 기름(값진 제물)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미신행위)와 같고 완고한 것(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였으니, 여기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뜻은 왕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고 끝내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모세는 한번 지적받고 직임을 떠나게 되었지만(민 27:12~20) 사울은 13:8~14에서도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백성과 달라서 말씀을 지키는 성의가 더 확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24절은 사울이 뉘우침으로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당신의 말을 어긴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였음입니다” 하고, 그 원인을 백성에게 돌리려 하였으나, 이는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왕이 백성을 두려워 한 것은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사울왕은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26절에서 사무엘이 말하기를 “나는 왕과 함께(성소 또는 제단)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려(권위 있는)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한즉, 27절에서 사울은 돌아가는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으매 “그 옷이 찢어졌다” 하였고, 또 사무엘은 28절에서 “하나님이…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다” 하였으니, 이는 옷자락 찢어진 것을 하나의 징조로 설명한 것이며, 장차 그의 나라가 찢어져서 사울이 죽었을 때 두 나라가 되어 대부분은 다윗왕이 차지하고, 2년 동안은 나라가 분리된 상태에서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삼하 2:8~10, 3:6). “나라를 왕에게서 뗀다”는 말 “칼라츠”가 “옷이 찢어졌다”는 내용에도 같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6. 하나님의 뜻과 두 사람의 태도(29~35절)

1) 29절에서 “지존자가 한번 세운 뜻은 변케하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욥 23:13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 또는 제정적 섭리에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회개를 하였지만 왕을 버리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요,

2) 30~31절에서 “사울이 백성 앞에 자기를 높이사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한즉,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가서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하였으니, 사무엘은 여전히 사울을 동정하였고, 이때 하나님께 경배한 장소는 길갈이었습니다.

3) 32~33절은 사무엘의 행보입니다.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내여 하나님 앞에서(제단 앞) 찍어 쪼갰다” 하였고, 아각은 사무엘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즐겁게 오면서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다” 하고 왔으나 결국 죽었으니 선지자가 선처하여 살려줄 줄 알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이 안한 일을 대신 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죽일 때 말하기를 “네 칼로 이스라엘 여인들로 무자하게 한 것처럼 너의 어미도 무자하리라” 하므로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출 21:24).

4) 34~35절에서는 “사무엘은 라마의 본집으로, 사울은 기브아의 본집으로 가므로 서로 헤어진 것과 그 후 사울을 다시 만나지 못한 사실과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피하였으니 이는 아쉬운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요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11절, 유감의 뜻)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후회하시는가? 하시겠지만 이 뜻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요 사울이 겸손하여 왕 되게 하셨는데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적중하지 못하므로 버리시면서 아쉬운 마음을 가지셨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면밀히 살펴 하나님의 말씀 뜻을 파악하고 그대로 복종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성 있는 설교자가 필요한 줄 압니다(본문에 따른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제 18 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 (삼상 16:1~23) 목록으로


본문 ① 1~3절은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심”이고, ② 4~13절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이며, ③ 14~23절은 “사울왕과 다윗의 만남”입니다. 총 제목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입니다.

1.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심(1~3절)

1) 15:35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인하여 슬퍼 하였다” 한 일에 대하여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하셨으니, 연민의 정도 절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과 호흡(감정 갖는 일)을 같이 하여야 함이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감정이 있으신 분입니다(긍휼도 있으시고 불쌍히 여김도 있으심. 출 34:6, 7, 왕하 13:23).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베들레헴 이새의 짐으로 가라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언하였다”고 하셨습니다.

2) 2~3절에서 이때에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 여쭙기를 “이 사실을 사울이 알면 나를 죽이겠나이다” 한즉,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아들들까지)를 청하라 그때에 행할 일을 가르칠 것이요 내가 네게 알리는 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이 떠날 때 자신의 신분보호를 위하여 두 가지 목적중 하나를 숨긴 것인즉 거짓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은 다음에 어떻게 하라는 지시는 없었습니다.

2.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심(4~13절)

1) 4~5절에서 “사무엘이 말씀대로 베들레헴에 이른즉 그곳 장로들이 (선지자임을 알아보고) 떨며 그를 영접하면서 평강을 위하여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후 제사를 드리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되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드리는 제사의 경우는 화목제를 드리고 그 남은 고기를 함께 먹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2) 6~7절에서 사무엘은 그들(이새와 그 아들들)이 올 때 그들 중에 “엘리압”을 보고 그가 기름 부을 대상인줄로 예측하였으나 그렇지는 않았으니, 그 당시에 말째 아들 다윗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신장과 용모)가 뛰어났던 사울(9:2)을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도 유전으로 받은 외모나 사람이 꾸민 외모를 중요시하지 마시고 중심으로만 바로 설 것을 부탁드립니다.

3) 8~10절에서 이새가 다음 아들들로 “아비나답”과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고, 계속 일곱 아들들을 선뵈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으므로, 11절에서 이새에게 묻기를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한즉, “아직도 말째가 양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데려오게 하였고, 그가 오기까지는 식탁에 앉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2~13절에서 “이에 다윗을 데려오매 그는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났으며 얼굴도 아름다웠다” 하였고, 이때에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라” 하여 기름을 부은즉 그날 이후로 다윗이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왕이란 선포는 하지 않았고, 사무엘은 고향 “라마”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인을 치신 자에게 성령님의 역사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3. 사울왕과 다윗의 만남(14~23절)

1) 14~16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울왕은 하나님의 신(성령님)으로부터 멀어졌고 대신 악신에 사로잡혀 번뇌를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은 왕의 번뇌를 치료하는 방책으로 “수금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그 앞에서 수금을 타게 하므로 번뇌의 악신을 쫓게 함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주술이나 무당의 행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2) 이리하여 17절에서 사울은 허락을 하였고, 18절에서 소년 중 한 사람인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이 수금은 물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소개하였고, 19절에서 사울왕은 그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사울왕의 거처는 “기브아”이었은즉 기브아와 베들레헴은 6㎞정도 밖에 안됩니다.

3) 사울의 초청을 받은 다윗은 그 아버지 이새의 배려로 20절에서 떡과 포도주와 염소새끼를 선물로 나귀에 실어 사울왕에게로 가게 하였고, 21~22절에서 “다윗이 사울왕 앞에 선즉 사울이 크게 사랑하여 병기든 자(호위병)를 삼고 그에게 은총을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17:55~58을 참고 할 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의 일로 아셔야 합니다.

4) 23절에서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졌고 악신이 떠나 낫는 체험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악신도 필요에 따라 쓰시는 것을 알 수 있고(욥 1:8, 잠 16:4), 다윗의 수금소리와 함께 성령님이 역사하신즉 악신이 떠나는 사실도 실제로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성령이 떠나시면 악신이 찾아오게 되어 있으니, 이는 빛이 떠나면 어두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버리신 자의 길과 쓰시고자 하시는 자의 길을 인도하시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를 그렇게 섭리하십니다.

제 19 과 다윗이 전쟁터에 감 (삼상 17:1~30)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다윗이 전쟁터에 감”으로 제목을 정하였고, 17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10절은 “골리앗에 대한 내용”이고, ② 11~19절은 “다윗이 전쟁터에 감”이며, ③ 20~30절은 “싸움의 용기를 피력함”입니다.

1. 골리앗에 대한 내용(1~10절)

1) 1~3절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대립하여 진친 장소를 말씀하셨는데 “블레셋 사람은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인 에베스다임에 진을 쳤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는 엘라 골짜기에서 항오를 벌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3절에서는 “이쪽 저쪽 사이에 골짜기가 있더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두 진영은 에베스다임과 엘라요, 에베스다임은 소고와 아세가 사이인데, 아세가는 베들레헴 서쪽 27㎞쯤의 지역으로 현재 델사가랴 지역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영인 “엘라”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25㎞쯤에 있으며 그곳에 50m 이상의 산이 있고, 400m 넓이의 골짜기가 있다고 합니다. 지도에서 소고(shochoh)와 에베스다임을 찾을 수 없어서 위의 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고 말씀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2) 4~7절은 블레셋 진영의 싸움을 돋는 골리앗에 대한 말씀입니다. 골리앗의 키는 6규빗 한뼘이요(1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임. 약 1.5척), 그의 무장은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놋 5,000세겔(1세겔은 14g, 약 130근)의 어린갑(물고기 비늘처럼 제조된 갑옷)을 입었으며, 어깨에는 놋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600세겔(16근 정도)이며, 또 그 앞에 방패든 자가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장대한 자가 무장을 든든히 갖춘채 호위병까지 앞세운 것입니다.

3) 그리고 8~10절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향하여 말로 외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상대하려고)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인즉 한 사람만 택하여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겠고 내가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를 섬겨야 할 것이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내가 너희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고 하면서 싸움을 돋우었으니, 골리앗의 위세는 당당하였지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습니다(잠 16:8).

2. 다윗이 전쟁터에 감(11~19절)

1) 11절에서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세를 인하여 크게 두려워하였고, 12~14절에서 다윗은 베들레헴(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 이름임. 창 35:19, 룻 4:11)에 사는 노인 이새의 여덟째 아들인바 그의 장성한 아들 엘리압과 아비나답과 삼마가 사울왕을 따라 싸움터에 나갔으며, 15절에서 다윗은 사울왕 앞에 왕래하면서 그 아버지의 양을 치는 중에 있을 때, 16절에서 블레셋 사람(골리앗)은 40일간이나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며 위협 또는 과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2) 이런 중에 17~18절에서 이새는 아들들의 안부가 궁금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전황을 알아보고 오도록 하였을 때, 볶은 곡식 한 에바(약 40ℓ)와 떡 열덩이를 갖고 가게 하였고, 또 천부장(군지휘관) 몫으로 치즈 열덩이를 주고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게 하면서 증표(천부장을 만난 증거)를 갖고 오게 하였습니다. 19절에서 이때에 사울과 그들(형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3. 싸움의 용기를 피력함(20~30절)

1) 20~21절에서 다윗이 일찍 일어나서 자기의 양떼를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엘라의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사들이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을 치며 양측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고 있는 중에 22절에서 다윗은 짐을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군사들 있는 곳에까지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을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23절에서 블레셋 사람중 싸움을 돋우는 가드(아스돗 동쪽 20㎞쯤, 기브아에서 서남쪽 30㎞쯤)사람 골리앗이 나와서 전과 같은 말(8~10절)을 하는 것을 다윗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2) 24~25절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였고, 그중에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너희가 저 사람을 보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온 자이다 왕이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재물로 부하게 하고 딸을 주어 사위를 삼음으로 그 아비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케 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케 한다”는 뜻은 세금이나 병역같은 것을 면제하거나 또는 종의 신분에서 해방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3) 26~27절은 다윗의 출전의욕을 표현한 말로서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하고 큰 소리를 쳤고, 백성들은 27절에서 전과같은 말(25절)만 되풀이 하고 있었는데,

4) 28절에서 다윗의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태도를 책망한즉 29~30절에서 다윗이 대답한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때에 엘리압은 노를 발하며 다윗을 책망하기를 “들에 있는 몇 양(적은 수를 칭한 뜻)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마음의 완악(고집을 뜻한 듯)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한즉, 다윗이 대답하기를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형과의 대면을 피한 듯) 전과같이(26절) 말하매 “백성들도 전과같이(25, 27절)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장형 엘리압은 말째 동생 다윗의 거동을 몹시 마땅치 않게 여겨 책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여 블레셋의 골리앗을 중심한 위세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맥을 추지 못한 것인데, 그중에 심부름 차 갔던 소년 다윗만 큰소리를 친 것입니다. 이러한 담력은 성령님이 주셨다고 봅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소설처럼 의역을 하였으나, 저는 개역의 뜻을 보존하는 상태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 20 과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삼상 17:31~58)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 또는 “다윗이 전쟁을 승리로 이끔”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31~37절은 “다윗이 출전허락을 받음”이고, ② 38~44절은 “다윗의 출전 상황”이며, ③ 45~47절은 “다윗의 신앙적 언사”이고, ④ 48~54절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이요, ⑤ 55~58절은 “사울왕이 다윗의 승리를 확인함”입니다.

1. 다윗이 출전허락을 받음(31~37절)

1) 31~32절은 다윗이 26절에서 출전 의욕을 나타낸 사실이 사울왕에게 알려졌고, 사울왕이 다윗을 불렀을 때, 왕에게 고하기를 “그를 인하여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의 종이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울 것이라” 한즉, 33절에서 사울왕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는 소년이고 그는(골리앗) 어릴 때부터 용사인즉 네가 싸우기에 능하지 못할 것이라”하며 출전허락을 하지 않으려 하자,

2) 34~47절에서 다윗은 “평소에 자신의 용맹스런 경력이 있었음”을 말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경력을 말할 때 34~36절에서 “자신은 아비의 양을 치면서 사자나 곰이 양떼의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 맹수를 치고 새끼를 건져냈고 또 그 짐승이 자기를 해코자 하면 그 수염을 잡고 쳐 죽였은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저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쯤은 그 짐승들처럼 이길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건지실 것입니다” 하여 37절에서 사울왕으로부터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다윗의 출전 상황(38~44절)

1) 38~39에서 사울왕은 용기있는 다윗에게 자기의 군복과 놋투구와 갑옷을 착용케 하고 군복 위에 칼을 차도록 해본즉 체구의 차이도 있고 익숙하지 못한 이유로 “착용하지 않겠다” 하여 다시 벗었습니다. 그리고 40절에서 손에 막대기(양칠 때 사용하던 것일 듯)를 갖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목자용 제구 주머니에 넣은 후 물매를 갖고 순수한 목동차림으로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간 것입니다.

2) 41절에서 이때 블레셋 사람(골리앗)이 방패든 자를 앞세우고 점차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들은 42절에서 다윗을 둘러보고 그가 젊고 붉으며 용모가 아름다움을 업신여겨 말하기를 43절에서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갖고 내게 나왔느냐 하고 그 신들(다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다윗의 신앙적 언사(45~47절)

45~47절에서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외친 신앙적 언사 다섯 마디가 있으니, 읽는 자들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1) 45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또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또는 하나님의 신분을 앞세워”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신분과 뜻을 앞세워 행동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한 이 말에 성령이 충만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와 현실의 것을 의지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성도는 만유의 주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법궤를 앞세운 것의 실제적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갖고 갔으나(삼상 4:5~10) 패한 것은 바로 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46절과 47절에서 “오늘 하나님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자기와 현실을 의지하는 자와 만군의 주를 의지하는 자의 대결에서 성도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시 146:3~4).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였습니다(시 54:4).

3) 46절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로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것이니 성도는 반드시 승리의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요 16:33).

4) 47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음을 이 무리로 알게 한다”는 것이요,

5)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성경의 사사기와 사무엘상의 모든 기록을 보면서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4.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48~54절)

1) 48절에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항오(싸움의 행렬) 앞으로 빨리 달리며, 49절에서 물맷돌을 취하여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 졌으나, 50절에서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51절에서 “그에게로 달려가 그를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골리앗)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2) 52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한즉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이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이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으며, 이때에 53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쫓다가 그들의 진으로 돌아와서 노략을 하였고, 54절에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당시 여부스)으로 가져가고 그의 갑주는 벗겨 자기 장막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는 효수용으로 큰 성읍으로 가져간 것이고, 갑옷은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블레셋 군인들이 쫓겨갈 때 52절 앞부분에서는 “가이와 에그론”이라 하였고, 같은 절 뒷부분에서는 “가드와 에그론”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가이는 가드(gath)의 오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드를 가이로 쓴 이유는 원문표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원문표기가 “가이”로 된 것은 사본상 실수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70인역과 영문역은 다 “가드”로 되어 있다고 하며, 공동번역도 두 곳 다 가드(갓)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개역만 원문표기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지는 소고와 아세가 사이 에베스다밈인데, 소고는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20㎞쯤이고, 아세가는 같은 방향으로 25㎞쯤인즉, 에베스다밈은 그 중간이요, 가드는 아세가의 서쪽 7㎞쯤이고, 에그론은 아세가에서 10시 방향 15㎞쯤 된즉 지도를 확인하십시오.

5. 사울왕이 다윗의 승리를 확인함(55~58절)

1) 55~57절에서 다윗이(한 용사가) 블레셋을 향하여 나가는 것을 사울이 보고(멀리 본 것인즉 확인이 어려우므로) 군장 아브넬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브넬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가 다윗이 머리를 갖고 돌아왔을 때에야 알았고, “그를 사울왕 앞으로 인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58절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16:14~23절의 내용은 역사적 순위로 볼 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다음의 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을 때 “수금을 잘 타고 골리앗도 죽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을 불러 수금도 타게 하였고 그를 사랑하여 사울왕의 병기든 자를 삼은 것”이라고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사랑스럽고 용맹한 자로 사울왕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제 21 과 세 사람과의 관계 (삼상 18:1~30)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세 사람과의 관계”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요나단과 다윗과의 관계”이고, 또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란 뜻입니다. ① 1~4절은 “요나단과 다윗과의 언약”이고, ② 5~9절은 “다윗으로 군대의 장을 삼음”이요, ③ 10~16절은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함”이고, ④ 17~30절은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음”입니다.

1. 요나단과 다윗과의 언약(1~4절)

1)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사울왕 앞에 와서 그 사실을 알리게 되었을 때, 1절에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다윗을 귀하게 보고 우정을 일으켜 사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절에서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그곳(사울의 집인지 왕궁인지 알 수 없음)에 머물게 하였고,

2) 3절에서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되 “서로 생명같이 사랑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4절에서 “요나단은 자신이 입었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용맹한 모습을 보았고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몫을 할 인재로 여겨 기뻐한 것입니다.

2. 다윗으로 군대의 장을 삼음(5~9절)

1) 5절에서 다윗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지혜롭게 행하여(승전 보고를 해오므로) 사울을 그에게 군대의 장을 삼았으니, 이는 16:21의 병기든 자(호위병)에서 크게 승격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온 백성들과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하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2) 6~7절은 전쟁에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에 백성들이 모든 성에서 나와 각종 악기(경쇠는 옛날 악기의 일종) 소리를 내며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사울왕을 환영하였는데, 그 노래의 가사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 하므로서 왕보다 다윗의 전공을 높이는데 의미를 나타냈으며, 이 소리를 들은 사울왕의 마음은 편안치 않았습니다.

3) 그리하여 8~9절에서 “사울은 불쾌함과 동시에 심히 노하였고(장차 민심이 다윗에게로 기울어진다면), 장차 나라의 권세까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면서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사울왕은 권세욕과 의심증과 시기심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과 의심증 등에 사로잡히면 정신적 우울증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함(10~16절)

1) 10절에서 “그 이튿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여 사울왕이 집에서 야료하는 태도(까닭없이 트집 부리를 행위, 정신분열증, 스트레스 같은 것)를 나타냈다”고 하였습니다. 이 원인은 악신(사탄)의 역사로 시작되었고, 사탄의 역사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떠나시므로 비롯된 것이며, 그 행위는 욕심, 시기, 의심 등의 죄와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8, 12절). 그래서 평일과 같이(16:20~23)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왕 앞에서 수금을 타게 하였는데, 그때 “사울의 손에 창을 갖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11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갖고 있는 창으로 수금타는 다윗에게 던졌고, 다윗은 두 번이나 피하므로 위기를 면하였으니, 이것은 사울의 계략행위이면서도 미친체 하는 행동으로 나타낸 줄 압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역자를 쓰실 때는 은혜로 그를 높이시고, 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과 복종심을 갖게 하여 쓰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사울이 왕이라도 하나님이 다윗편에 계신즉 그가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3) 13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고 경계한 나머지 군장을 천부장으로 격하시켜 자기 앞을 떠나게 하였고, 다윗은 “천부장직 위치에서 백성들 앞에 출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4절에서 다윗은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으며, 15절에서 사울왕은 다윗의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두려워 하였으나, 16절에서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겸손하게) 백성들 앞으로 출입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4.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음(17~30절)

여기에서 “사울을 사위로 삼음”은 충성된 마음으로 적과 싸우다가 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일 계교를 씀”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1) 그 계교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17절에서 사울왕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죽이게 하리라 하고 큰딸 메랍을 주어 사위를 삼을 것이니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18절에서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처지가 비천함(왕족이 아니란 뜻)을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결국 19절에서 “큰딸 메랍은 므홀랏(meholothite, 지명 찾기 어려움) 사람 아드리엘에게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다윗은 왕을 높이는 뜻으로 겸손하게 사양한 줄 압니다.

2) 그 다음에 사울왕은 20절에서 “둘째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21절에서 같은 계획을 끈질기게 추진하였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올무에 끌려들도록 구상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을 설득하게 한 것인데, 22절에서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에게 전하기를 “왕이 너를 기뻐하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한다 그런즉 왕의 사위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23절에서 다윗은 “너희가 왕의 사위 되는 일을 쉽게 생각하느냐?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어찌 그 일을 감당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이는 공주와 결혼함에 있어서 그 엄청난 비용을 생각한 의미도 있고, 또 겸손의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사울왕은 다윗을 전쟁에서 죽게 하려 하였지만 다윗은 전쟁과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17:45~47).

3) 신하들로부터 다윗의 말을 전해들은 사울왕은 계속 설득하는 방법으로 24~25절에서 “왕이 폐백(결혼 예물) 비용은 원하지 않고 원수를 보복함으로 블레셋과 잘 싸워 블레셋 사람의 양피(생식기를 잘라 오는 것) 100개를 원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다윗을 전쟁에서 죽게 하기 위한 계교”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 다윗은 이 말을 좋게 여겼고, 27절에서 기다리는 시기가 되기도 전에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여 갑절의 양피를 바치고 사위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수도 갚고 왕의 뜻도 복종하며 아내도 얻게 된 것입니다.

4) 28~29절에서 “사울은 이 사실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사실을 알았고,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였으며, 사울왕은 점점 다윗을 두려워하면서 그의 대적이 되었다” 하였으니,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면서 대적하는 것이 곧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30절에서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적의 대장들)이 나올 때마다(그들은 전쟁의 시비를 걸었을 것임) “모든 신하들보다 지혜롭게 행하여 천부장으로서의 그 명성이 심히 귀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쓰시고자 하시면 이상과 같은 일반적 절차로도 형통하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2 과 다윗의 도피 (1) (삼상 19:1~24)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다윗의 도피”입니다. ① 1~3절은 “다윗을 죽이라고 명함”이요, ② 4~7절은 “요나단의 진정”이고, ③ 8~12절은 “다윗의 도피”요, ④ 13~17절은 “미갈의 변명”이고, ⑤ 18~24절은 “라마 나욧에서 있은 일”입니다.

1. 다윗을 죽이라고 명함(1~3절)

1) 1~2절에서 사울왕은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하였는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기뻐함도 있지만 생명같이 사랑하기로 언약을 맺은 바도 있기 때문에(18:3)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고 “아침에(조회하여 왕을 만날 때 나가지 말고)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

2) 3절에서 또 말하기를 “내가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네게 대한 정보를 알면, 즉 너를 죽이지 말라고 진정한다는 뜻) 그것을 네게 알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친구의 우정도 귀하게 여겼지만 부왕이라도 잘못하는 것은 따르지 않는 정의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2. 요나단의 진정(4~7절)

1) 4~5절에서 요나단은 사울왕에게 나가서 다윗을 포장(칭찬하여 높이는 뜻)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왕은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소서 그는 왕께 득죄함이 없었고 오히려 심히 선한 일만 하였으며 또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큰 구원 베푸신 것을 왕도 기뻐하셨거늘 어찌하여 그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고 진정하였는데,

2) 6절에서 왕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하였으니, 이는 요나단의 진정이 잘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행하지 않은 맹세는 거짓일 수도 있고, 또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7절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사실을 알리고 다윗을 사울왕 앞으로 인도하므로 다윗이 사울 앞에 여전히 있게 되었으나, 그것은 일시에 불과하였습니다(10절).

3. 다윗의 도피(8~12절)

1) 8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또 큰 전공을 세웠는데, 9절에서 사울왕은 집에서 단창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또 악신에 사로잡혔고 다윗이 전과 같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탈 때에, 10절에서 사울은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피하는 바람에 창만 벽에 박혔고, 다윗은 그 밤에 (집으로) 도피하였는데, 11절에서 또 사울은 “사자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죽이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그런데 11~12절에서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이 밤에 생명을 구하지 않으면 내일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고 다윗을 창에서 달아내려 (밖으로) 도망하여 피신하게 하였습니다.

4. 미갈의 변명( 13~17절)

1) 다윗이 도피한 후에 미갈은 13절에서 사람처럼 생긴 우상을 취하여 다윗의 침상에 뉘우고 위장하여 덮었는데, 14절에서 사울이 사람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였을 때 미갈은 “그가 병들었다” 한즉, 15절에서 사울이 그 보고를 받고 “다윗의 침상채 가져오면 내가 그를 죽이리라” 하였는데, 16절에서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위에 우상만 있는 것을 확인하여 또 보고하게 된 것입니다.

2) 17절에서 사울이 미갈에게 “너는 왜 나를 속여 (우상으로 위장한 것)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하였을 때, 미갈이 꾸며 대답하기를 “다윗이 자기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라고 말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미갈이 다윗을 붙잡은즉 자신을 죽이려고 하여 놓아 보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미갈은 세 번 거짓을 자행하였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병들었다한 것이고, 또 한번은 우상으로 위장한 것이며, 세 번째는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다윗에게 덮어 씌운 것입니다. 미갈이 거짓말을 안하려 하였다면 “내가 어찌 내 남편을 죽게 하겠습니까? 그의 신변이 위험해 보여서 도망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미갈은 세상 사람의 지혜를 발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진실을 지키려면 반드시 생명을 걸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거짓변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5. 라마 나욧에서 있은 일(18~24절)

1) 18~19절에서 다윗은 도망하여 사무엘 선지자가 거주하는 라마로 가서 자기의 일을 다 사무엘에게 고하고 그곳에 있었는데 “혹이 그 사실을 사울에게 알렸다”고 하였습니다. 18절의 나욧이나 19절의 라마 나욧은 지역과 동리를 구분한 것으로 보셔야 합니다. 이 당시에 사울왕의 거주지가 예루살렘일 듯하나(17:54)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울의 원 거주지인 기브아(삼상 11:4, 15:34)인지, 혹 길갈(삼상 10:8, 11:14~15, 15:32)인지, 또는 골리앗의 머리를 확인한 예루살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라마까지는 북으로 12㎞쯤 됩니다.

2) 20~21절은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하여 3차에 걸쳐 사자들을 사무엘이 거주한 곳에 보냈으나 매번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자들이 다윗을 잡으러 라마에 가서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신학생들이 말씀을 배우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말씀 교수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군인들이 선지자 생도들이 수련 받는 곳에 가까이 갔을 때 성령님의 감화에 힘입어 나쁜 짓(다윗을 잡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그 말씀 수련 받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사실을 보고 받았을 때 계속 두 번이나 더 보냈지만 다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이는 성령님의 강한 역사에 군병들이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22절에서 결국 사울왕이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그 동리 이름)에 있는 큰 우물가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있는 곳을 물어 찾아갔는데, 23절에서 그는 라마 나욧으로 가는 중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여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예언을 한 것입니다(삼상 10:6의 성취임). 성령님의 역사로 방언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사를 나타내 주신 일입니다. 24절에서는 “그가 또 옷을 벗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무사의 입장에 있을 수 없으므로 갑옷을 벗은 뜻이며, 역시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였고(이는 말씀을 배우고 반복한 뜻),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미친 사람의 행동이나 비정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운 날씨에 별실에서 갑옷을 벗고 휴식에 들어간 것을 뜻하고, 성령의 강한 역사에 취하고 감동되어 자신이 다윗 잡는 일을 포기하고 말씀 배우는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는 말까지 떠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입신을 한다” 하면서 정신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사례도 있었다고 하나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제 23 과 다윗의 도피 (2) (삼상 20:1~42)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처음 라마 나욧으로 도피하였을 때 사울이 와서 잡지 못하고 예언만 하고 돌아간 후, 여전히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아니하므로 다윗이 계속 피하게 되는 상황에서 그 경위와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었으므로 “다윗의 도피 (2)”로 정한 것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다윗이 요나단을 만남”이요, ② 5~9절은 “다윗이 월삭에 불참함”이며, ③ 10~17절은 “요나단과 다윗의 대화”요, ④ 18~22절은 “요나단이 신호로 피하게 함”이며, ⑤ 24~34절은 “월삭모임에서 있은 일”이고, ⑥ 35~42절은 “다윗과 요나단의 헤어짐”입니다.

1. 다윗이 요나단을 만남(1~4절)

1) 1~4절은 다윗이 피신 중 (은밀하게) 요나단을 만나 대화를 하는 중, 1~3절은 다윗의 말이고, 2, 4절은 요나단의 대답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슨 잘못, 무슨 죄를 지었길래, 또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지은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한즉, 요나단의 대답은 “결코 아니라 (죄로 인함이 아니라는 뜻) 네가 죽지 않을 것이라 내 부친은 대소사를 내게 알리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 일인들 숨기겠느냐 그렇지 않으니라(요나단에게 알리지 않은 일인즉 문제될 일이 아니라는 뜻)”고 하자, 다윗은 또 맹세코(강조의 뜻) 말하기를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아시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일에 대하여 네가 슬퍼 할까 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라 그러나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요나단의 생명은 든든하여 맹세의 증거가 된다는 뜻)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한 걸음뿐”이란 뜻은 생명을 찾는 세력이 가까이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 말에 요나단은 또 대답하기를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하였으니, 이 뜻은 “다윗의 생명이 안전해지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이 월삭에 불참함(5~9절)

1) 5절에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말하기를 “내일 있는 월삭(매월 첫날에 모이는 종교적 행사, 민 10:10)에 마땅히(사위로서) 왕을 모시고 식사를 하여야 하지만 나를 (집으로) 보내어 제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도록 허락해 주고”, 6절에서 “만일 네 부친이 나에 대하여 물으시면 내가 베들레헴에서 가족들과 함께 매년제(1년에 한번 정하여 드리는 제사, 삼상 1:21)에 참석하기 위하여 떠나기를 간청하기로 허락하였다고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 시기에 가족적 매년제 행사가 있음을 이용하여 사울을 떠난 후 사울의 심중을 살펴보려고 한 것입니다.

2) 7~8절에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계속 말하기를 “(왕께서) 그의 말이 옳다 하시면 네 종(다윗 자신을 왕자인 요나단 앞에서 낮춘 말)이 평안하려니와 만일 노하시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하신 줄 알지니 그런즉 종에게 인자를 베풀라 이는 네가 네 종 사이에 (두 사람) 하나님 앞에서 맹약한 것이라(18:3) 그러나 내게 죄가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냐” 한즉, 요나단이 말하기를 “결코 이 일이 네게 있지 않을 것이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고 결심한줄 알면 내가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하므로 요나단이 다윗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3. 요나단과 다윗의 대화(10~17절)

1) 10절에서 다윗은 요나단과의 대화를 계속합니다.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다윗에게 인자를 베풀지 않는 뜻) 대답하시면 그 사실을 누가 내게 알리겠느냐” 한즉, 11~13절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데리고 들로 가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증거하시거니와 (하나님이 증거하신즉 확실히 시행한다는 뜻) 내가 내일이나 모래 이때쯤 부친을 살펴서 네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네게 (사람을) 보내어 알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한다면 이 일도 네게 알려 너로 평안히 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셔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내 부친과 함께 하심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한 후에

2) 14~16절에서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요나단 자신을 전쟁 중에 잘 지켜달라는 뜻) 하나님이 너의 대적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이때는 다윗이 세력을 잡았을 때를 의미함. 요나단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음. 삼상 23:14)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하였고,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요나단의 예언의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신의 부친보다 더 사랑한 증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요나단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3) 17절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4. 요나단의 신호로 피신케 함(18~22절)

1) 18~19절에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내일 월삭에 네가 왕과 함께 있지 않음을 왕께서 자세히 물으실 것인데, 너는 (집에 가서 매년제 볼일을 보고) 빨리 그 있었던 날에 숨었던 곳(5, 10절) 곧 에셀바위(확인하기 어려움) 곁에 있으라” 하였고, 또 약조하기를

2) 20~22절에서 “(내가 그곳에 가서) 과녁을 쏘는 것처럼 화살을 쏜 다음 아이에게 화살을 찾으라 하고, 네 이편에 있다 하면 너는 무사할 것인즉 돌아오고, 만일 …네 앞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신 줄로 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므로 그 약조가 하나님 중심으로 한 것이므로 변함없이 지킬 것을 약조한 것입니다.

5. 월삭모임에서 있은 일(24~34절)

1) 24~26절에서 “다윗은 들에 숨어있고 월삭이 되던 첫날에 사울왕과 요나단과 아브넬이 함께 있는 중 다윗의 자리가 비어있었으나 그날에 사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울이 생각하기를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있거나 부정한 일(절기에 참석 못할만한 불결한 일, 레 5:2~6, 7:19~21)이 있어서 그러한 줄로 여겼다” 하였으니, 여기의 사울왕의 심정까지 꿰뚫어 알고 기록한 것은 성령님이 저자에게 주신 영감일 것입니다.

2) 그런데 27절에서 사울이 그 이튿날도 다윗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보자 그때는 그 연유를 요나단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 물음에 요나단은 28~29절에서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니, 곧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가족적으로 행사하는 매년제에 그의 형으로부터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고 요나단에게 간청하므로 가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3) 이때에 30~31절에서 사울은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며 패역부도(도덕성 없음을 지적하는 욕)한 계집의 소생(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다윗)을 택한 것(좋아하고 믿는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왜 알지 못하느냐 그가 산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이제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므로서 다윗이 역적 될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죽일 뜻을 말한 것입니다.

4) 이때에 요나단은 32절에서 “그가 죽일 일을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따졌으나, 사울은 33절에서 요나단에게 단창을 찌르려 하였고, 요나단은 그 일로 부친의 다윗에 대한 생각이 확고함을 알게 되었는데, 34절에서 요나단은 이 일로 인하여 “심히 노하였고 그날 식사자리에서 떠나 먹지 아니하였으니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므로 다윗을 위해 슬피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을 생각함에 있어서 부자의 입장이 상극된 상황임을 알 수 있고, 또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충신을 제거하여야 자신의 입지가 좋아진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6. 다위과 요나단의 헤어짐(35~42절)

1) 35~39절에서 요나단은 (월삭 삼일 되는)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정한 시간과 장소(들)로 나가 화살을 쏜 후, 아이를 보내면서 “화살이 네 앞에 있으니 지체 말고 빨리 달리라” 하여 왕의 뜻이 불길함을 다윗에게 알렸고, 그 신호의 뜻은 “다윗만 알 뿐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40~41절에서 “요나단이 병기를 아이에게 주어 보냈을 때, 다윗이 곧 에셀바위(19절) 남편에서 일어나서 요나단에게 엎드려 세 번 절하고(상관에게 나타내는 예절)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고 서로 울되 다윗의 울음이 더 심하였다” 하였고,

3) 42절에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평안히 갈 것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또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영원히 계시리라고 축복한 후에 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요나단이 죽은 것은 그 아비의 죄때문으로 여겨지며, 사울의 가정이 몰락되었으나, 다윗은 요나단의 후손을 끝까지 돌보아주므로(삼하 9:6~7, 19:24~30, 21:7) 맹세의 의리를 지킨 것입니다. 요나단이 화살로 신호를 준비했을 때는 그 곳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인데, 막상 그날 형편에는 화살 줍는 아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보낸 후 다윗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부분의 글을 후시대의 삽입으로 인정한다고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 24 과 다윗이 놉과 가드로 피신함 (삼상 21:1~15) 목록으로


본문에서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은 사울의 영역에서 멀리 떠나야 할 입장이 되어 먼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고 또 이방 나라인 가드로 피신하게 된 사실이 기록되었기로 총 제목을 “다윗이 놉과 가드로 피신함”으로 정하였습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2절은 “다윗이 놉으로 피신함”이고, ② 3~6절은 “거룩한 떡을 먹음”이며, ③ 7~10절은 “이방나라 가드로 감”이요, ④ 11~15절은 “다윗이 자신을 위장함”입니다.

1. 다윗이 놉으로 피신함(1~2절)

1) 1절에서 “다윗이 놉(여부스에서 1시 방향 3㎞쯤, 기브아에서 4시 방향 5㎞쯤, 놉에서 라마는 11시 방향 6㎞쯤에 있음)으로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는데, 아히멜렉은 떨면서 다윗을 영접하였다” 하였고, 또 “왜 함께 한 자가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엘리 제사장의 증손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이 있었고(삼상 2:34), 비느하스는 아히둡과(삼상 14:3), 이가봇(삼상 4:21)의 두 아들이 있었으며, 아히둡의 아들로 아히야와 아히멜렉이 있었습니다. 또 아히멜렉의 아들은 아비아달입니다(삼상 21:18~20). 그런데 그 당시에 “놉”에도 제사드리는 단과 제사장이 근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궤는 가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서 옮긴 일이 없으나(삼상 7:2) 간이제단은 여기 저기 많았습니다. 실로에도 있고(삼상 1:9), 벧엘, 길갈, 미스바, 라마에도 있어서(삼상 10:3, 8, 7:15~17) 사무엘과 제사장이 관리한 것을 알 수 있고, 그중에 또 한 곳이 놉의 제단입니다. 이때에 다윗을 본 제사장 아히멜렉이 왜 떨며 영접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추적 대상임을 이미 알았고, 또 그 처소에 사울의 신하인 도엑이 있는 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공동번역은 “당황하여”로 번역하였음). 제사장은 다윗을 돕기 위하여 영접을 한 것입니다. “왜 홀로 있고 함께 한 자가 없느냐” 한 것은 다윗이 천부장으로서 거느린 군사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것이고, 5절을 보시면 “우리가”란 용어가 있어서 몇 명의 일행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2절에서 “왜 함께 하는 자가 없느냐” 한 질문의 대답으로 다윗이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왕이 자신에게 일을 명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여 같이 온 소년들을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사울왕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몸입니다” 하였더라면 사태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제사장은 그의 사정을 모른 만큼 대접을 하여 보낸 것 때문에 그곳의 제사장들과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또 “삼상 2:31~32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거짓말 할 기회가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줄 돈을 주지 않고 태만히 하기로 “내 생활이 몹시 어렵다”고 전화를 해 놓고 뉘우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몹시 어렵게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그 은혜를 돈 받기 위하여 부정했으니 큰 잘못 아닙니까? 다윗도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여 거짓을 꾸민 것인데, 그런 시험에 들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배척에 대하여 숨긴 것은 그의 허물을 덮어준 것인즉 잘한 일일 것입니다.

2. 거룩한 떡을 먹음(3~6절)

1) 3절에서 다윗은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부탁하기를 “수중에 무엇이 있습니까 떡 다섯덩이나 무엇이든지 있으면 주십시오” 하였으니, 다윗과 몇 명 동료들이 몹시 시장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에 제사장은 4절에서 “항용 떡은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으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 안하였으면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항용 떡”은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을 뜻하고, “거룩한 떡”은 제단에서 물려낸 것으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번제와 함께 드렸던 것과(출 29:39~42) 안식일마다 한번씩 떡으로만 드리는 제물이 있는데(레 24:5~9) 이 떡은 거룩한 곳(성소)에서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 떡이라도 부정한 일만 없으면 주겠다” 하면서 부정여부를 묻는 말로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줄 것이라” 한즉, 5절에서 다윗은 “우리가 3일 동안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였고, 또 “보통 여행 중(가사에 의한 것)이라도 그릇(육체를 뜻함)이 청결해야 하거든 하물며 (왕의 사명을 받고 행사하는) 오늘날 더욱 성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성결하다는 뜻을 말하고, 떡상에서 더운 떡을 바꿔드릴 때 물려낸 떡을 주어 받게 된 것입니다. 제단에서 물려낸 떡은 제사장만 거룩한 곳에서 성결한 상태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은 시장끼를 면해줄 목적으로 제사장 아닌 자들을 또 여인을 가까이 안한 부분(출 19:14~15)만 확인하고 준 것인데, 이 사실은 예수님도 정당한 일로 평가하셨습니다(마 12:4, 눅 6:4). 이는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함에 있기 때문입니다(마 22:36~40). 다시 말하면 베고픈 자 앞에서 의식을 앞세워 고통 받는 자를 외면하면 안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만일 그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면 크게 불법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3. 이방나라 가드로 감(7~10절)

1) 7절은 그 당시에 사울왕의 신하요 목자장인 에돔 사람 “도엑”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다윗의 거동을 알고 있었다” 하였는바, 결국 그가 다윗의 행보와 그곳 제사장들이 다윗을 도와준 것을 사울에게 고발하여 그곳 제사장 85명을 죽게한 것입니다(삼상 22:9~19, 22). 그 후에 다윗은 이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겨 시 52:1~9에서 도엑의 악함을 노래로 지적하였지요. “도엑”이 에돔인이면 에서의 후손, 즉 이방족인데 “그가 어떻게 사울의 신하가 될 수 있었을까” 하시겠지만 신하와 목자장은 원래 종에 해당하는 신분이므로 이방족이라도 선민대열에 귀순하면 합류한 사례가 있습니다(출 12:43~44, 48).

2) 8절에서 다윗은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창과 칼이 있는지를 묻고 자신은 “왕의 일이 급하여 자신의 칼과 병기를 갖지 못하였다” 한즉, 제사장은 9절에서 “골리앗의 칼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하였고, 다윗은 “그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칼을 가지고 떠난 줄로 압니다. 본래 다윗은 “골리앗의 갑주를 자기 장막에 두었다” 하였는데(삼상 17:54), 칼은 아히멜렉 제사장이 별도로 보관한 모양입니다.

3) 10절에서 “그날에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가드는 블레셋 족의 소왕국으로 베들레헴에서 서쪽 26㎞쯤이고, 벧세메스에서는 서남방 12㎞쯤에 있습니다.

4. 다윗이 자신을 위장함(11~15절)

1) 11~12절에서 다윗은 가드왕의 영지에서 조용히 피신할 수 있기를 바라고 갔으나, 아기스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그 땅(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아보고 이 사실을 아기스왕에게 고한 후, 왕 앞으로 데려갈 때에 다윗은 13절에서 오히려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므로(침을 흘리고 낙서를 함) 신분을 감추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러날을 두고 진행된 일일 것입니다.

2) 14~15절에서 “아기스왕이 다윗을 확인할 때, 그의 광기를 보고 오히려 책망을 하여 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용장임을 숨기려 하였으나, 알려지게 되자 그렇게 위장한 것인데 이때에 하나님의 특별 보호가 있은 사실을 시편 34편과 56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적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 것은 작전에 속한 일로 죄가 되지 않습니다.

제 25 과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 (삼상 22:1~23) 목록으로


본문 ① 1~5절은 “다윗이 의병장이 되어 피신함”이고, ② 6~10절은 “사울이 고독 중에 고발을 받음”이요, ③ 11~19절은 “제사장들을 심문하고 죽임”이며, ④ 22~23절은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감”입니다. 이 내용들 중에 이슈되는 내용이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임”이기 때문에 이것을 총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1. 다윗이 의병장이 되어 피신함(1~5절)

1) “가드”에서 위험을 느낀 다윗은 1절에서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 하였습니다. 이 “아둘람”은 가드에서 4시 방향 16㎞쯤에 있고, 베들레헴에서는 8시 방향 20㎞쯤에 있습니다. 이곳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친구인 히라의 고향이고(창 38:1) 가나안 31 성읍중 하나입니다(수 15:35). 그때에 “그의 형제와 아비의 본 집이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고 하셨는데, 이는 다윗을 찾는 사울이 그 가족의 생명도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이 사실이 두루 소문 나자)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이니 그 수가 400명 가량이었고 다윗은 그 장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인권 침해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뜻을 합하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 용사가 많았다 하였으니 꼭 대상 12:8~15, 22절을 확인하십시오.

3) 3절에서 다윗의 단체는 아둘람을 떠나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왕에게 부모를 인도하여 인사하게 하고 그 지역 요새에서 상당기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미스베는 미스바와 혼돈된 발음으로 기재되어 구별하지 않으며 성경에 다섯 곳이 있습니다(창 31:48~49, 수 11:1~9, 15:38, 18:26, 본문). 다윗이 피난간 미스베(미스바)는 모압 지역에 있는 곳이고 모압은 사해바다 동편 지역이므로 직선 거리가 아둘람에서 70㎞쯤인데 사해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사해북부 해안으로 돌아서 더 먼 거리를 여행하였을 것입니다.

4) 4~5절에서 “선지자 갓이 모압 땅의 요새에 있지 말고 유대땅으로 가라” 하여, 또 그곳을 떠나 유대땅 헤렛 수풀(지역을 확인할 수 없음)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2. 사울이 고독 중에 고발을 받음(6~10절)

1) 6절에서 사울이 고향인 기브아의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요단 골짜기에 많고 봄에 꽃이 핀다고 함. 공동번역은 석류나무라 하였으니 설명하기 어려움) 아래에 신하들과 함께 앉았을 때,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헤렛 수풀에 있었으므로) 나타났다”는 정보를 듣고, 7절에서 곁에 섰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베냐민 사람들아(베냐민 지파로만 신하를 세웠음) 들으라 이새의 아들(다윗)이 너희에게 밭과 포도주를 주며 천부장 백부장을 세우겠느냐” 하였고, 또 8절에서는 (다윗이 너희를 등용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맹약하였으되(이 맹약 사실을 나중에 안 모양임) 내게 고발하는 자도 없고 나의 (고독한) 입장을 인하여 슬피하는 자도 없으며 또 내 아들이 신하를 동원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하는 것을 고발하는 자도 없다” 하면서 다윗과 요나단을 동시에 의심하고 증오하며 자신의 고독한 입장을 신하들에게 하소연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3) 이때에 9~10절에서 도엑(21:7)이 신하 중에 섰다가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에게 온즉 아히멜렉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묻고(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구한 뜻, 15절에서 시인하였음), 식물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도엑은 거짓되고 아부하는 자이며 다윗에 대하여 동정하지 않는 자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도의 주위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26:41).

3. 제사장들을 심문하고 죽임(11~19절)

1) 11~13절에서 사울은 놉에 있는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아비의 온 집(여기의 그 아비란 아히둡뿐만 아니라 그 선대에 이르기까지 소급하여 그 자손들을 의미함)의 제사장들을 불러 모은 다음 “아히둡의 아들들아 들으라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하여금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였느냐” 하였으니, 제사장은 공모하였거나 의도적으로 사울을 해롭게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실을 잡아 문책한 것입니다.

2) 14~15절에서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다윗은 왕의 모든 신하 중에 왕의 사위와 모신(모략을 세우는 신하)도 되며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닙니까 또 내가 다윗을 위하여 물은 일이 처음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허물)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왕과 다윗과의 문제 되는 일)에 아는 바가 없다” 하였으니 사실대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16절에서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17절에서 좌우에 섰는 시위자들에게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이 다윗과 합력하였고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하지 않은 죄라” 하였으니, 제사장들은 합력한 사실도 없고, 또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하는 줄도 몰랐지만(21:2, 8) 단지 다윗을 옹호한다는 일로 인하여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에게 무고한 혐의를 씌워 죽게 한 일은 현실독재 정치에도 나타났던 것이니 소위 인혁당 간첩사건 같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울은 정적이 아닌 하나님의 사자들을 무참히 죽인 자였습니다. 17절 하반에 보시면 “왕의 신하들이 제사장 죽이기를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그런즉 18절에서 사울왕은 도엑에게 명하여 “네가 죽이라” 한즉 그가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을 입은자 85인을 죽였고, 또 19절에서는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에 사는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이들과 소와 나귀와 양까지 칼로 쳤다” 하였으니, 이 일은 왕 앞에 불려온 제사장들과 놉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까지 다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85인 외에 수많은 가족이 다 죽었고, 제사장들의 종노릇하던 기브온 족까지 죽인 것입니다(수 9:15, 삼하 21:1~9). 따라서 사울의 죄는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사무엘을 통한 저주의 예언(삼상 3:11~14)이 성취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4.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감(20~23절)

1) 20절에서 아히둡의 손자요 아히멜렉의 아들 중 아비아달(아론의 11대손, 대상 6:1~9 참조)이 죽음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도망하였고, 21절에서 모든 사실을 다윗에게 고한즉, 22절에서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기를 “그날에 에돔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알았다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바로 나의 연고인즉, 23절에서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나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할 때 다윗이 쓴 시편 말씀을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시 31:1~5, 35:1~10).

2) 하나님은 어려운 역경을 통하여 다윗을 연단시키시면서 보호하셨고, 사울왕과 도엑은 악의 상징인즉 심판의 대상일 수 밖에 없으며(잠 6:16, 신 19:10, 시 55:23, 출 21:14), 아히멜렉 가문은 의인을 변호하였지만 그 조상의 죄값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죽음을 당하였은즉 이는 오직 심판자만 아시는 일입니다. 또 다윗은 “자신으로 인하여 제사장들이 죽음 당한 사실”을 시인하고, 아비아달이 자신과 함께 있으므로 보호 받을 것을 확신하므로 위로를 베푼 것입니다.

3) 유다왕 요아스는 대제사장이며 자기의 은인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였는데(대하 24:20~22) 자신은 아람군대의 칼에 죽었고(대하 24:24~25), 또 이스라엘왕 살룸은 전왕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더니 자기는 가드의 아들 므나헴에게 죽임 당하였고(왕하 15:10~15), 또 베가는 므나헴왕의 아들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되더니(왕하 15:22~27) 자신은 호세아에게 죽임 당하였으니(왕하 15:29~30),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겔7:3~4, 9, 9:10).

제 26 과 사울이 다윗을 추격함 (삼상 23:1~29) 목록으로


본문 ① 1~5절은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함”이고, ② 6~13절은 “다윗이 그일라를 떠남”이며, ③ 14~18절은 “요나단이 다윗을 만남”이요, ④ 19~29절은 “사울의 추격과 다윗이 보호를 받음”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사울이 다윗을 추격함”입니다.

1.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함(1~5절)

1) 다윗이 요나단과 헤어진 때부터(20:42) 그의 피신한 경로를 살피면 ① 처음에 놉에 있는 제사장에게로 가서 떡을 먹고 골리앗의 칼을 받은 후에(21:1, 9) ②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가(21:10) 그의 신하들에게 신분이 노출되어 미친체 하고 자신을 위장한 후 다시 그곳을 떠나서 ③ 아둘람 굴로 온즉(22:1), 아비의 가족과 뜻 있는 용사들이 모여 400명 가량을 이루었는데(그곳에서 그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④ 모압땅 미스베로 가서 요새에 있으면서 그 부모를 모압왕과 함께 있게 하였는데, 갓선지자가 그곳을 떠나라 하여(22:3~5) ⑤ 유대땅 헤렛 수풀로 이동하였습니다(22:5). 그 당시에 사울이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살아남은 아비아달로부터 그 소식을 들으며 함께 있는 중 블레셋의 침략을 받은 “그일라”를 구원하게 되어 잠시 그곳에 있었으나(23:1) 또 사울에게 추적당하자 ⑥ 황무지 요새와 십 황무지 요새에 있었는데(23:14~15) 그곳에 다윗이 있는 것을 알고 요나단이 찾아와서 격려를 하였지요(23:16~18). ⑦ 그 다음에 마온 황무지 아라바로 이동하였는데(23:24) 사울의 추격이 있었으나 블레셋의 침략 소식이 와서 추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⑧ 그 다음에 또 엔게디 요새로 가게 된 것입니다(23:29). 본문 말씀은 유대땅 헤렛 수풀에 거할 때 “그일라”를 구원하는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2) 1절에서는 다윗이 그일라 거민들의 침략 당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일라”는 벧엘 서남쪽 25㎞쯤이고, 라이스의 동북쪽 15㎞쯤의 성읍입니다. 2~5절에서 (다윗은 자신도 피하는 몸이지만 동족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여쭌즉 하나님이 허락을 하셔서 3절에서 “그곳에 습격한 블레셋 군인들을 격파하고 거민과 그들의 재산을 끌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왕에게 쫓기면서도 대적과 싸워 동족을 구원한 것입니다.

2. 다윗이 그일라를 떠남(6~13절)

1) 6절에서는 “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도망해 올 때에(22:20) 에봇을 갖고 왔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가 이동하면서도 제사장 활동을 계속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또 에봇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됩니다. 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 받은 사실”은 다윗도 선지자 입장에 있음을 의미할 수 있으나, 에봇을 갖고 온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기도하고, 우림과 두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7~8절에서 “다윗이 그일라 성읍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이 군사들을 편성하여 그곳을 에워싸려 하자 이 계교를 알게된 다윗은 9~12절에서 아비아달 제사장으로 하여금 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의 손에 붙이겠습니까” 하고 여쭌즉 (우림과 두밈법으로 제비 뽑아 여쭌 것) “그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 하시므로, 13절에서 다윗은 그곳을 떠나 피할만한 곳으로 간 곳이 “십 황무지 수풀”이었고(15절), 다윗이 그곳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추격을 멈추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의 은혜로 구원받고도 다윗을 배척하는 은혜를 떠난 자들이었습니다.

3. 요나단이 다윗을 만남(14~18절)

1) 14~15절에서 “다윗이 십 황무지 요새와 산골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매일 그를 찾았으나 하나님이 다윗을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 하셨고,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알고 있었는데,

2) 16~17절에서 그때에 요나단이 수풀에 들어가 다윗을 만나 격려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그 다음이 될 것을 부친도 안다” 하였고,

3) 18절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서로 신뢰하고 도울 것을 또 한번 언약한 후(20:42) 다윗은 황무지 숲으로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4. 사울의 추격과 다윗이 보호받음(19~29절)

1) 19~20절에서 “십(다윗이 은거한 지역) 사람들이 기브아(사울의 출신지이며 집권한 장소임, 11:4, 15:34)에 와서 사울왕에게 이르기를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다윗의 은거지를 구체적으로 한 말)에 있은즉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하였으니, 백성들 중에는 다윗을 보호하였다가 피해볼 것을 우려하여 고발자로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21~23절에서 사울이 그 말을 듣고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축복한 후 “다윗은 심히 공교하게(지혜롭게) 행하는 자라 하니 그의 은적지와 발견한 관정을 더 자세히 탐지하여 실상을 알려주면 내가 너희와 함께 가서 유다 천천인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19절과 24절에“ 광야”란 말씀이 있는데 각주를 보시면 “에시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에시온이 광야란 뜻인데, 이 뜻을 지명으로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각주가 표기된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광야 대신 에시온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중의 “천천인”이란 뜻도 각주에는 “그 족속”이라고 하였지요. 공동번역에서는 “유다부락들 중에서”라 하였고, 영어성경에서는 “유다의 전지역”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뜻은 전체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4) 24절에서 “십”의 고발자들은 사울보다 먼저 자기들 곳으로 갔고, 다윗은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다” 하였으니 자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광야 남편은 유다지역 남방을 뜻하고 “마온 황무지”는 역시 유다 남방에 속한 광야로 헤브론에서 5시 방향 20㎞쯤, 또 사해 서쪽 20㎞쯤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아라바”는 사해 남쪽 끝과 갈대바다 북쪽 끝 사이를 말합니다.

5) 25~26절은 사울과 다윗이 마온 황무지의 산과 아라바 지역에서 쫓고 쫓기는 상황을 기술하였고, 결국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며, 사울은 다윗과 그에 속한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였으니,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였는데, 이때에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는 섭리로서 27절을 보시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침략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28절에서 사울은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기 때문에 다윗이 보호를 받고 그곳 이름을 “셀라하마느곳”(분리하는 바위란 뜻, 사울이 다윗에게서 멀어진 뜻)이라고 명칭한 것입니다. 그곳 이름을 이렇게 명칭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6) 27절에서 다윗은 또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엔게디”는 마온 광야와 사해 사이를 말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여러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곧 다윗이 환난 중에서도 동족을 사랑하여 대적자 사울왕이 할 일을 도운 사실과,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 한 일과, 은혜를 입은 그일라 거민들이 다윗으로부터 자기들의 생명을 보호 받고도 다윗을 보호하지 않은 사실과, 사울이 어두운 심령으로 고발자들을 축복하는 일, 그리고 악인의 끈질긴 핍박과 의인의 연단과 보호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27 과 엔게디 굴에서 있은 일 (삼상 24:1~2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총 제목은 “엔게디 굴에서 있은 일”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7절은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벰”이요, ② 8~15절은 “다윗이 사울을 깨닫게 함”이며, ③ 16~22절은 “사울의 뉘우침”입니다.

1.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벰(1~7절)

1) 1~2절은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23:28) 돌아왔을 때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말을 듣고 3,000명의 사람을 선택하여 거느리고 다윗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갔는데, 3절에서 “길가에 있는 양 우리에 이른즉 그곳에 굴이 있어서 그곳으로 발을 가리우러(취침, 휴식을 뜻함, 룻 3:7~9) 들어갔는데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이때에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원수를 그의 손에 붙이시리니 소견대로 행하라 하신 것이 이때인즉 (소견대로 행하소서)” 하였으나, 다윗은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만 베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신다” 하신 말씀은 전쟁할 때마다 주신 말씀이지만(17:47, 23:4, 삼하 5:19) 여기서는 다윗의 신복들이 원수를 사울로 여기고 한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원수로 여긴 적이 없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였고, 또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만 있음”(신 32:35)을 명심하였기 때문에 사울을 해롭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3) 5절에서 “다윗은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벤 것을 인하여 가책을 받았다” 하였고, 6절에서는 자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내 주(왕)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니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삼상 2:28에 보시면 제사장은 “하나님이 택하여 하나님의 단에 오르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엄히 구별하셨다는 뜻인즉 사람이 해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해하는 일을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말씀은 출 22:28에서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 하셨으니, 왕은 관원에 해당하고 제사장도 관원에 속하는 것을 행 23:4~5에서 바울사도가 말씀하셨습니다.

4) 7절에서 “다윗이 이상의 말로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고, 사울은 (자기의 옷이 굴 안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굴에서 나가 자기의 길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2. 다윗이 사울을 깨닫게 함(8~15절)

여기서는 다윗이 굴에서 나간 사울왕을 불러 “그 앞에 절하고 자신은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라 해할 수 없음을 안다 하면서 그 증거로 베인 옷자락을 보이고 자신의 결백을 알리며 하나님이 판결하사 신원하시고 건져주실 줄로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절별로 다시 살피면 8절은 다윗이 “내 주 왕이여” 하고 사울을 부른 후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는 말씀이고, 9절은 “다윗이 사울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거짓된) 말을 믿지 마시라”는 내용이며, 10절에서는 “왕이 굴에 계실 때 하나님이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아셨을 것인데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지만 왕을 아껴 해하지 않은 것은 왕이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하였고, 11절에서는 “베인 옷자락을 보이며 내가 왕을 죽일 뜻이 없고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십시오” 하였으며,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시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왕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13절에서도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속담까지 말하면서 왕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14절에서는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르며 누구를 쫓습니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는 것이 아닙니까” 하므로 자신을 왕 앞에 낮추었고, 15절에서는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사 나와 왕 사이를 판결하실 것이요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왕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좋은 설교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3. 사울의 뉘우침(16~222절)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확실하게 감동받은 사람처럼 뉘우치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1) 16~18절에서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사위를 뜻하는 말)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않았으므로 너의 선이 나타났느니라” 19절에서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나에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고,

2) 20~21절에서는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않을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하였을 때, 다윗은 22절에서 “사울에게 맹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울은 (기브아의)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엔게디 황무지의) 요새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3) 여기에서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기로 하였다면 이상의 회개가 진실이겠지만 26장에서 그렇지 않은 사실이 나타나는 만큼 일시적 기만술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으로 하여금 마음을 푹 놓고 자기 곁에 와서 쉽게 죽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 하셨는데(삼상 15:23, 26, 16:1) 어찌 진정한 회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다윗의 설교는 사울의 외식적 회개를 이루었을 뿐인데 이런 사례가 성도들 세계에도 자주 있는 일일 것입니다. 20절에서 사울이 “다위의 왕 될 것과 나라가 다윗의 손에 견고히 설 것을 말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상태에서 그의 생각을 말한 줄 압니다. 그 당시에 사울에게는 계시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까요(28:15).

제 28 과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 (삼상 25:1~44) 목록으로


본문 1절과 44절만 나발과 무관한 말씀이고, 2~43절은 “다윗과 나발에 대한 말씀”이므로 총 제목을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로 정한 것입니다. 내용이 길지만 핵심은 간단합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절은 “사무엘의 죽음과 다윗의 이동”이요, ② 2~42절은 “다윗과 나발 사이에서 있은 일”이며, ③ 43~44절은 “다윗의 처에 대한 일”입니다.

1. 사무엘의 죽음과 다윗의 이동(1절)

8:1에서 “사무엘이 늙었다”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죽었다” 하셨고, “무리들이 애곡하며 라마의 집에서 장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24:1)에서 바란 광야로 갔으니” 바란 광야는 애굽과 미디안의 중간지역, 또는 시나이 반도의 중앙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사해 중앙부 서쪽에서 남쪽으로 300㎞쯤 내려간 셈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이 여전히 사울을 피하고 또 블레셋과의 전쟁이 잦은 과도기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2. 다윗과 나발 사이에서 있은 일(2~43절)

1) 2~3절은 “나발과 아비가일 집의 산업과 두 사람의 인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의 집은 마온(갈멜에서 남쪽으로 2㎞쯤, 사해 서쪽 24㎞쯤, 23:24)에 있었고 목장사업은 갈멜(마온 북쪽 2㎞쯤)에 있는데, 심히 부하여 양이 3천, 염소가 1천인데(그 시기에) 양털을 깎고 있었고 나발은 완고하고 악한 갈멜 족속(지역에 오래 산 사람)이며,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2) 4~8절은 다윗이 광야에 있으면서 나발이 양털 깎는다는 사실을 듣고 소년 열명을 나발에게 보내어 평강의 뜻을 통보하고 “좋은 날에 왔은즉(양털 깎는 일은 경사스러운 일로 잔치를 한다함) 은혜를 얻게 하되 네 손에 있는대로(음식을 뜻함)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함께 있는 자들을 그의 종들로 자신을 그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한 가족처럼 친교하고 가까운 유대관계에 있음을 표한 것이요, 또 은혜를 구할만한 근거를 말할 때, 7절에서 “다윗의 소년들이 나발의 목자들과 양들을 보호해 준 것을 말하고, 그 사실을 나발이 자기의 소년들에게 직접 들어 확인하라” 하였으니, 그 친절과 공로를 생각할 때 푸짐한 대접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3) 그런데 9~12절에서 나발은 다윗의 청원을 받고 의외로 거절을 한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기를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왕을 뜻할 수도 있음)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들도 많다더라 내가 어찌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만든 떡과 물(포도주)과 고기를…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하고 거절한즉 소년들이 돌아와서 사실대로 고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발은 자신을 도와준 자에 대한 의리와 친절을 저버린 사람이었고, 또 사울왕에게서 떠난 다윗의 입장을 비난한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4) 13절에서 이때에 다윗은 너무 분한 나머지 자기를 따른 600명 중(아둘람 굴에 있을 때 400명이었는데, 그일라 거민을 구원할 당시에 200명이 증가되었음. 22:2, 23:13) 200명은 자신의 본진에 있게 하고 400명에게 칼을 차게 한 후 나발의 모든 것을 처치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출발시킨 것입니다.

5) 14~16절에서 이때에 나발의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다윗이 “나발의 종들을 선대하고 또 밤낮으로 담이 되어 주듯이 보호했으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17절에서 “지금 주인의 온 집을 해할 것을 결정하고 오는 중인데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은즉 이제 부인께서 어떻게 할 것을 생각하시라”고 하였습니다.

6) 18~20절에서는 아비가일이 급히 떡 200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양고기 다섯 마리분과 볶은 곡식 다섯세아(1세아는 14ℓ)와 건포도 100송이와 무화과뭉치 200을 취하여 나귀에 싣고 소년들을 앞세워 보낸 후에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은채 자신도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험한 골짜기)을 따라 내려오는 중 다윗의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이고, 이때에 다윗은 21~22절에서 자신의 공로를 짓밟은 나발에 대하여 “그가 악으로 을 갚는 자인즉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남긴다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라” 하였으니, 여기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일종의 신념을 말한 것으로 자기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즉 확실하게 실현할 결심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7) 23~31절은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한 말입니다.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저에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께 말하게 하시며 여종의 말을 들어주소서(24절). 원하옵나니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소서 그는 이름의 뜻대로 나발(어리석음)입니다. 여종은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25절).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다윗)의 손으로 피 흘려 보수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막으셨으니(신 32:35),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6절). 이는 남편 나발을 저주한 뜻도 있지만 그를 다윗의 원수로 비유하여 그 원수들이 다 나발처럼 어리석은 자이기를 바란 뜻입니다. 여종이 갖고 온 예물을 받으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남편을 바로 받들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왕위의 권위)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입니다(27~28절).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게(생명보호의 섭리)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하나님이 (골리앗처럼) 그것(시체)을 던지실 것입니다(29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기름 부을 때 왕 되게 하신다는 말씀, 삼상 16:13)대로 모든 선(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왕)로 세우실 때(30절)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렸다던지 내 주께서 친히 원수를 갚으셨든지 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거리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희를 용서하시면) 슬퍼(후회)하실 것이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31절)” 하였으니 대단히 지혜롭게 말을 한 것입니다.

8) 32~35절에서 다윗은 이 말에 감동을 받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하나님께 찬송 할 것이라”(32절) 하므로 아비가일을 만난 것을 하나님의 보내신 섭리로 믿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혜를 칭찬하였고, 피 흘림과 보수(원수 갚는 것)를 막은 일을 인하여 아비가일에게 축복하였으며(33절), “만일 그의 만남이 없었다면 맹세코 날이 밝았을 때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고(34절), 그의 예물을 받은 후 평안히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35절).

9) 집에 돌아온즉 “나발은 큰 잔치를 배설하여 취한 상태에 있었고 아비가일은 그동안 된 일을 말하지 않다가(36절) 아침에 술취함이 깨었을 때 그 말을 한즉 나발은 낙담하여 몸이 돌같이 굳어지더니(37절) 한 십일 후에 하나님이 나발을 치셔서 죽게하셨다(38절)”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발처럼 은혜를 모르거나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자를 치십니다. 다윗이 원수 갚을 기회를 안 가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고 사람이 보수하는 일을 포기할 때 하나님이 보수하는 일을 감행하시는 것입니다.

10) 39절에서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하나님이 나의 당한 욕(수모)을 신설(伸雪, 풀어 씻는 것)하사 그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다” 하였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고자 사환을 통하여 뜻을 전달하였더니 40~42절에서 사환의 청원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말하기를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라” 하고 급히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큰 부잣집 여주인으로서의 아비가일의 겸손은 대단하였고, 그는 다윗의 청혼을 들었을 때 기본생활의 모든 것을 뒤돌아보지 않고 다윗을 따랐으니, 이는 비유컨대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현세의 미련을 떨쳐야 할 것을 비유적으로 교훈하시는 바도 있는 것입니다.

3. 다윗의 처에 대한 일(43~44절)

1) 44절에서 다윗은 미갈을 아내로 취한 일이 있었으나(18:27) 미갈이 다윗을 도망시킨 후(19:11~17) 서로 만나지 못한 중에 사울은 그 딸을 갈림(베들레헴 동남쪽 4㎞쯤)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각주에는 다윗의 원수라 하였고,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이라 하였음)에게 주었고,

2) 43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일 외에 이스르엘(가멜산 동남쪽, 수넴의 남쪽 8㎞쯤에도 있으나(삼상 31:1, 그곳은 아니고 이곳은 갈멜과 마온의 동쪽, 사해 서쪽 20㎞쯤 되는 곳임) 여인 “아히노암”을 취하므로 두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밧세바(삼하 11:27)와 아비삭(왕상 1:3~4)도 취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이 왕 또는 메시야의 모형자로 나타난 사실(30절)과, 은혜를 모르는 나발의 말로와,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태도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 29 과 하길라 산에서 있은 일 (삼상 26:1~25)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하길라 산에서 있은 일”로 정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① 1~7절은 “잠자는 사울을 발견함”이요, ② 8~13절은 “창과 물병을 취함”이며, ③ 14~16절은 “다윗이 아브넬을 책망함”이고, ④ 17~25절은 “사울과 다윗의 대화”입니다. 24장에서는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사울의 옷자락을 벤 사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십 광야 하길라산에서 누워 자는 사울의 창과 물병을 취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 잠자는 사울을 발견함(1~7절)

1) 1절에서 십 사람(십은 유대광야에 속한 성읍으로 그 지역은 사해바다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25㎞쯤 되는 광야임)이 기브아에 와서 다윗이 십 광야 히길라란 산(23:19)에 있음을 알리자 2~3절에서 “사울은 또 다윗을 찾으려고 3,000의 사람을 택하여 하길라산 길가에 진을 쳤고, 다윗도 그 황무지에 있으면서 사울이 자기를 따라 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피하는 몸이므로 바란 광야에서(25:1) 다시 십 광야로 옮긴 것이고, 사울은 다윗 추격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 4~5절에서 “다윗이 탐정을 보내어 살핀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그의 백성들은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사울의 백부 넬의 아들)과 함께 사울을 둘러 진을 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6절에서 자기의 신복 헷사람 아히멜렉(헷사람이면 가나안땅 이방족인데 다윗이 400명을 규합할 때 합세한 것으로 여겨짐, 22:2)과 스루야(다윗의 자매, 대상 2:16)의 아들 요압의 아우(스루야의 아들은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셀임, 대상 2:16) 아비새 중 한사람을 적진에 함께 들어갈 자로 선택하기 위하여 의향을 물은즉 아비새가 자원을 한 것입니다.

3) 그리하여 7절에서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진에 이르러 살핀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자고 있고 창은 그 머리 곁에 꽃혀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2. 창과 물병만 취함(8~13절)

1) 이때에 아비새가 말하기를 8절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셨으니 가서 그를 죽이도록 명하소서 단번에 찔러 죽이리이다” 하였을 때, 다윗은 9절에서 “죽이지 말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24:10에서 설명하였음) 하고 만류한 다음,

2) 또 말하기를 10절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즉 하나님이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하였으니, 이 뜻은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방법을 말한 것뿐입니다. 다윗이 사울왕 죽기를 꼭 바랐다면 그는 원수를 미워한 죄를 졌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줄 압니다. 나중에 사울이 죽었을 때 많이 슬퍼했으니까요(삼하 1:17~18).

3) 그래서 “창과 물병만 갖고 가자” 하였고(11절), 창과 물병을 갖고 떠나올 때 깨거나 보거나 아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12절). 성경에는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하시는 일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들면 “사람이 원수 갚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하나님이 그를 치시는 일(삼상 25:26, 26:10)”, “아비가일을 보내어 다윗을 만나 감동케 하시는 일(삼상 25:32)”, 그리고 본문에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시는 일”등입니다. 하나님은 잠자는 일과 깨는 일을 주관하십니다(삼상 26:12, 시 127:2, 139:3, 3:5, 4:8). 그후에 다윗은 사울의 진영 건너편으로 가서 상거를 두고 산꼭대기로 갔습니다(13절).

3. 다윗이 아브넬을 책망함(14~16절)

1) 사울의 창과 물병을 들고 건너편 산꼭대기에 선 다윗은 사울의 백성들과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외치기를 14~16절에서 “아브넬아 네가 용사가 아니냐 왜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않느냐 백성 중 한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너의 행한 일이 선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다는 뜻)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보호하지 않았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미움과 추격대상이 된 상황에서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고, 또 “사울의 신분을 보호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곧 원수를 사랑함일 것입니다(출 23:4, 마 5:44).

4. 사울과 다윗의 대화(17~25절)

사울왕은 다윗이 아브넬에게 책망하는 말을 듣고 다윗에게 사과하는 말을 하였고, 다윗은 거기에 대응하는 대답을 합니다. 사울의 상습적, 또 외식적 회개는 24:16~2에도 나타납니다.

1)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확인하였을 때(17절) 18~20절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으며 저의 손(행사)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이 나를 제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죽이셔도 좋다는 뜻). 그러나 인자(사람의 뜻)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다윗의 대적자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을 섬기라 하며 나를 쫓아내어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사람의 뜻으로 선민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쫓는 것은 죄가 됨을 일깨운 뜻)” 하였고, 또 20절에서는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성소의 위치)에서 먼 이곳에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않게 하소서 이 산에서 메추라기를 산양하는 것처럼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한즉,

2) 21절에서 사울은 “내가 범죄 하였다 나의 아들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지 않으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대단히 잘못되었다” 하였으니, 말로서의 회개는 충분하다 할 것이나 그는 하나님이 버리신 자인즉 근본적 회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22~24절에서 다윗이 또 말하기를 “왕은 한 소년을 보내어 이 창을 가져가게 하소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하나님이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왕이 기름부음받으신 분이므로 내가 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왕의 생명을 중히 여긴 것처럼 하나님도 내 생명을 중히 여기셔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였을 때,

4) 25절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을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이라” 하므로 축복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건의 성격은 24장의 성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사울을 버리셨은즉 일의 승리는 다윗에게로만 돌아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길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 추적을 포기하고 기브온으로 간 것이고, 다윗은 계속 피해 다니면서 사울을 경계하게 된 것입니다.

제 30 과 다윗이 가드로 망명함 (삼상 27:1~12)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다윗이 가드왕에게로 망명한 사실”과 “가드에 있으면서 이방족을 무찌른 사실”이 기록되었기로 그중에 한 대목을 전체의 제목으로 정한 것입니다. ① 1~7절은 “다윗이 가드왕을 의지함”이요, ② 8~12절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을 침”입니다.

1. 다윗이 가드왕을 의지함(1~7절)

1) 1절에서 다윗은 “사울왕의 손에 망하지 않으려면 블레셋 사람의 지역으로 피하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이 먼저 이스라엘 땅을 수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3절에서 추종자 600명과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대동하고 가드왕 아기스에게 가서 사실을 말하고 배려를 받아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의 가드는 블레셋 성읍으로 골리앗의 고향이고(삼상 17:4), 21:10에서 1차로 피신하였을 때 그 신하들에게 신분이 알려지려고 하여 미친체 하면서 자기를 위장하여 도망하였던 곳입니다. 아기스왕은 다윗이 자기의 왕으로부터 쫓김을 당하여 망명한 것인즉 정치적 목적으로 배려한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으로서는 몹시 자존심 상하고 원치 않는 일이었겠지만 600명과 함께 생존을 유지하려니까 그런 방법을 선택한 줄 압니다. 골리앗과 그 군사들을 할례없는 족속으로 무시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긍지를 높인 일을 생각하면(삼상 17:10, 36, 45) 타락에 가까운 입장처럼 된 셈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이방인들에게 사정할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할 것이고, 필히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4절에서 사울은 “다윗이 가드로 도망한 사실을 알고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2) 5~6절에서 다윗은 “아기스왕과 함께 왕도에 거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아기스왕에게 은혜를 청하고 600명의 단체가 생활하는 것이므로 특정 공간이 필요하여 지방의 한 성읍을 달라한즉 왕이 시글락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글락 성읍은 여호수아 때에 유다지파에게 분정된 것인데(수 15:31) 시므온지파가 그곳에 거하였고(수 19:5), 나중에 또 블레셋에게 뺏긴 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유다지파인 다윗에게 다시 준 것입니다. 그 후에 또 아말렉의 침략으로 뺏겼다가 다윗 때에 탈환한 사실도 있습니다(삼상 30:1, 14, 26). 7절에서 “다윗은 그곳에 1년 4개월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그술, 기르스, 아말렉을 침(8~12절)

1) 8~9절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창 14:7, 36:16, 민 14:15) 사람들을 쳐서 다 죽이고 그들의 짐승들과 의복을 취하여 가져왔고, 10절에서 아기스왕이 “누구를 침노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을 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600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의식주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다음에는 아기스왕의 신세를 지고 있는 만큼 선물제공의 의무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도륙할 근거는 무엇일까요? 8절을 보시면 “그들은 술(수르 광야, 출 15:22)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고 하였은즉 약 420년전 선민의 출애굽 당시에 선민을 침략한 족속인데(출 17:8~16), 출 17:16에서 “하나님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은즉 그들을 하나님의 적으로 여겨 심판을 가하는 뜻으로 그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10~11절에서 아기스의 질문에 “유다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고향, 삿 1:16)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으로 답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드왕 아기스가 같은 이방족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도 있고, 다윗이 사울의 통치구역인 “선민족을 쳤다” 하면 다윗이 자기동족을 확실하게 배반했다는 증거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아기스의 의심을 제거하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 그 족속을 하난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인 이유는 “그 지역 거민을 누가 없앴다”는 소문조차 없애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거하고 있는 동안 “다윗은 가끔 타국을 치는 습관이 있다”는 평판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런 인정을 받게 된다면 아기스왕이 그의 반역을 두려워하여 그를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짓말은 전쟁하는 작전으로서는 정당할지 모르나 아기스 왕에게는 거짓 죄를 범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방왕을 의지한 것과 거짓을 감행한 잘못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약이 성도들의 생활 속에도 수시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의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12절에서 다윗은 그 일로 인하여 아기스의 신임을 더 받게 되었으니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은즉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드왕에게 충성할 사람)가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제 31 과 사울이 신접한 자를 찾아감 (삼상 28:1~25)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다윗이 신접한 자를 찾아감”입니다. 1~2절을 제외하고는 다 총 제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① 1~2절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함”이고, ② 3~10절은 “사울이 신접한 자를 찾아감”이며, ③ 11~14절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림”이요, ④ 15~20절은 “신접한 자의 예언”이고, ⑤ 21~25절은 “신접한 여인의 접대”입니다.

1.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함(1~2절)

1) 1절에서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하였는데, 가드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너의 사람들도 나와 함께 군대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전쟁참여를 권고하였습니다. 여기의 블레셋 사람은 “가드왕국”만 의미하는지, 또는 주위의 다른 이방국과의 연합성을 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본문에서는 가드왕국에 국한된 말씀만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밝히 알라”는 뜻은 강한 요청을 의미하고, 또 2절에서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안다” 함은 가드왕이 임무를 주는대로 다윗이 순종하겠다는 뜻이며, 그 임무에 수반하여 다윗을 “영영히 자신의 머리를 지키는 자를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2) 여기에서 다윗은 사울과 동족을 상대하는 전쟁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인즉 마음에 적지 않은 고통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이요 삶의 시설을 제공한 아기스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고, 또 그의 요청대로 동족을 해할 수도 없으니, 이런 갈등이 생겨진 원인은 이방왕국에 가서 피신한 것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을 써도 정당하고 진실하게 하여야 하고 선한 대상에게만 의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위기를 모면케 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신 것입니다(시 40:2, 롬 4:17).

2. 사울이 신접한 자를 찾아감(3~10절)

1) 3절에서는 “사무엘이 죽어 장사한 사실(25:1)과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이 죽은 사실을 두 번 기록하신 이유는 사울 곁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역자가 없음이 “하나님의 벌이요, 또 사울을 버리신 증거”라는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고, 또 사울이 신접한 자나 박수를 쫓은 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출 22:18에서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하였고, 신 18:10에서는 “복술자나 요술자, 진언자, 무당, 신접자, 초혼자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을 쫓아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여도 그들을 필요로 하여서는 안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그들을 찾았으니, 그 행위가 곧 타락을 증명한 것입니다.

2) 4~5절은 “전쟁의 대치 상황에서 사울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씀인데, 블레셋 사람은 수넴(수 19:18, 잇사갈지파의 땅에 있고, 다불산의 서남 8㎞쯤이며, 므깃도에서는 동북쪽 15㎞쯤임)에 진을 쳤고,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성읍이 아닌 지역임, 수넴의 8㎞쯤 남쪽)에 진을 쳤는데 이때에 사울의 마음이 크게 떨렸으니, 이는 하나님이 담력을 주시지 않은 증거라 할 것입니다(삼상 11:6~7).

3) 6~10절은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자 신접한 여인을 찾아 만나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6절에서 사울이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꿈과 우림으로도 대답지 않으셨고 선지자로도 대답지 않으셨다” 하셨으니, 여기의 “우림으로도 대답지 않으셨다”는 뜻은 우림과 두밈의 추첨에서 무효의 결과를 나타낸 뜻이고, 선지자로도 대답지 않으심은 선지자를 만날 수 없었거나 어떤 선지자에게 물었다 하여도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엔돌(다불산 남방에 있는 므낫세지파의 성읍, 수 17:11, 수넴에서 동북쪽 5㎞쯤, 길보아에서는 북으로 12㎞쯤됨)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8절에서 변장하고 밤에 그를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신앙생활은 확실하여야 합니다. 사울이 신접자를 필요로 한 것은 꿩대신 닭을 써보자는 수단인데, 이런 것은 신앙의 방법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타락한 수단이지요. 그리고 그의 모양새를 변장한 것도 진실치 못한 태도입니다. 왕같은 모양으로 나타났을 때 만나주지 않을 것을 우려한 듯합니다. 9~10절에서 사울이 그 여인에게 초혼술을 부탁한즉, 그 여인은 (왕이 그런 부류들을 쫓아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나를 죽음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느냐” 하고 거절 하였으나,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므로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초혼술은 미신종교인들에게 흔히 있는 것입니다.

3.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림(11~14절)

1) 11절에서 신접한 여인은 “누구를 불러 올리랴” 하였고,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부탁하였는데, 12절에서 이때에 그 여인은 “당신이 어찌 나를 속입니까 당신은 사울입니다” 하고 사울의 신분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평소에 사울을 몰랐다 하더라도 신접한 술법으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도 아는 것이 많으니까요(고후 11:14, 막 5:7, 행 19:15).

2) 13절에서 사울은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였고, 14절에서 여인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하였으니, 여기의 “신”이란 죽은 자의 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에서는 가당치 않지만(눅 16:26) 미신을 숭상하는 자들은 그런 일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3) 14절에서 “그 모양이 어떠하더냐” 한즉,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다” 하였는데,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런 일이 성경적으로 가능할까요? 성경적으로나 성령님의 역사로는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눅 16:19, 26에도 나타나있지만 전 3:21에서도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불신자, 시 49:20)의 혼은 땅으로 간다” 하였으며, 눅 23:43과 요 14:3에서는 “예수님이 성도의 영을 자기 계신 곳으로 인도하신다” 하셨은즉, 땅에서 불러 올린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영이 올라온 일에 대하여 이것은 마귀의 장난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사울은 노인이라는 말만 듣고 무조건 사무엘 선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4. 신접한 자의 예언(15~20절)

1) 15절에서 신접한 자는 마치 사무엘이 말하는 것처럼 표현하여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분요케 하느냐” 하였고, 사울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군급(어렵고 답답함)한 중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로 당신을 불러 나의 행할 일을 알고자 하여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영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지 않다 하여도 신접자나 초혼자의 술법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2) 16절에서 “사무엘이 가로되” 하셨지만, 이 뜻은 사무엘이 올라오지 않은 만큼 신접한 자가 사무엘의 입장을 대신 하는 것처럼 말한 것뿐입니다. 16~18절은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한 말인 만큼(삼상 15:9, 26~28) 생소한 예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를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진전된 예언입니다. 즉 “사울과 사울의 아들들이 블레셋에게 패하고 내일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것까지 예언할 수 있을까요? 신 13:1~3을 꼭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탄도 어느 정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너와 네 아들들이 나(사무엘)와 함께 있으리라” 한 것은 그들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인데, 이것으로 사울과 요나단이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어디까지나 사탄이 속이는 차원에서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혹 신접한 자가 그럴듯한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추종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이 말을 들은 사울은 20절에서 “갑자기 땅에 엎드러졌고 기력이 쇠하여졌으며 종일 종야 먹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종교도 이런 면에서 큰 영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추종자와 복종하는 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5. 신접한 여인의 접대(21~25절)

1) 신접한 여인은 사울의 태도를 보고 퍽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21~22절에서 왕이 자기의 예언을 잘 듣고 굴복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고맙게 여겨 대접을 하려 한즉 23절에서 “사울이 거절하였으나 다시 강권하매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2) 24~25절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무교병을 구워 왕과 신하들 앞에 놓은즉 먹고 일어나서 그 밤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성도들은 버리신 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해 주신 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사울은 대적자를 만났고, 그는 연약과 두려움을 느꼈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의 지도도 떠났고, 오히려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도 속임수에 빠지는 불행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제 32 과 다윗의 출전 취소 (삼상 29:1~11) 목록으로


28:1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울 것을 계획할 때 가드왕 아기스가 다윗의 협력을 부탁하였는데 다윗은 거절할 입장이 못되므로 순종할 뜻을 표하였는데, 본문에서는 다윗이 그 출전에 아기스와 함께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다윗은 크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동족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기스의 명을 전폭 거역할 수도 없는터라 출전에 임하는 방법에서 무슨 돌파구를 찾으려고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의심하여 혹이라도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갖고 사울에게 가서 화친을 청하면 어찌하나” 하는 의심을 품고 아기스 왕에게 강하게 항의한즉 아기스왕은 방백들의 항의를 거절하지 못하여 다윗을 시글락 본 고장으로 돌려보내고 자기들끼리 싸움에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역경을 그런 방식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줄 압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다윗의 출전 취소”라 하였고, 대지를 나눈다면 ① 1~5절은 “출전에 대한 항의”요, ② 6~11절은 “출전이 취소되어 돌아옴”입니다.

1. 출전에 대한 항의(1~5절)

1) 1절을 보시면 “블레셋 군인들의 진영은 아벡(aphek)이고, 이스라엘의 진영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역사서를 연구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지명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도 아벡과 이스르엘이 여러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지명사전을 찾아보면 아벡이 네 곳이나 있고, 또 가장 상세하게 나온 (그러나 없는 곳도 많음) 지도에 나타난 위치가 맞지 않는 것도 있으며, 설명을 한 것도 합리성이 없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본문의 “아벡”은 “잇사갈지파의 땅에 있다”(오인명 저, 288p) 하였으나, 지도상으로는 그 지역에 아벡이 없고, 이스르엘도 지도상으로는 두 곳(사해 중앙부 서쪽 20㎞쯤, 갈멜과 마온 지역, 또 한 곳은 잇사갈 지역의 서남방, 기손강변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벡은 삼상 4:1, 29:1, 수 13:4, 19:30에 나타난 곳으로 위치가 다 다른 곳입니다. 지도를 살펴보면 갈멜산 오른쪽에도 아벡이 있고, 갈릴리바다 오른쪽에도 있으며, 욥바 동북쪽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아벡과 어느 이스르엘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유대땅 욥바 동북쪽 16㎞쯤의 아벡과 사해 서편 갈멜과 마온 근처에 있는 이스르엘로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아벡이 가드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북쪽 40㎞쯤에 있기 때문이고(아벡에서 시글락까지 3일 길임, 29:1), 또 유다진영의 이스르엘이 되는 이유는 29:11에서 “올라갔다”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올라간다는 뜻은 언제나 예루살렘 쪽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진영의 거리는 10시 방향에서 5시 방향으로 60㎞쯤 됩니다.

2) 2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가는 중, 3절에서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에 대하여 아기스 왕에게 묻기를 “이 사람은 이스라엘왕 사울의 신하가 아니요” 하였을 때, 아기스가 말하기를 “그가 나에게 망명하여 여러날, 여러해(1년 4개월, 27:7) 있었으나 그의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기로 함께 출전한 것이라” 한즉, 4절에서 방백들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할 것이니 그가 혹 전장에서 대적이 될까 두려운즉 자기 처소로 돌려보내소서 그가 무엇으로 그의 주(사울)와 화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가드 군사)의 머리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바로 과거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므로 백성들로부터 찬사(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 삼상17:7)를 보낸 자가 아닙니까” 하면서 그의 출전을 반대하였으니, 이것은 다윗의 뜻대로 되는 일이요, 또 하나님이 사울을 심판하시고 다윗을 왕 되게 하시는 일에 결격사유를 제하시는 일(삼상 25:30~31)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이 나타난 것입니다.

2. 출전이 취소되어 돌아옴(6~11절)

1) 6~7절에서 아기스는 방백들의 반대에 부딪혀 다윗의 출전을 취소하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말은 선민의 하나님이 보증자가 되신다는 뜻) 당신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당신에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좋아하지 않은즉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지 말고 평안히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방 나라의 왕에게 흠잡히지 않은 것은 뛰어난 미덕이라 할 것입니다.

2) 8절에서 다윗이 아기스에게 “무엇을 잘못하였기에…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였으니 이 말은 왕의 신임을 한번 더 다짐하려는 의미의 말일 것입니다. 다윗이 이방왕 아기스를 자기의 주라 한 것은 마음에 없는 말일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선민을 아주 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아기스는 다윗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의 사자처럼 선한 것을 안다” 하므로 재차 칭찬하고, 10절에서 “새벽에 일어나 밝거든 곧 떠나라”고 종용합니다. 아기스왕도 방백들의 뜻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고, 다윗은 선민을 치는 전쟁에서 마땅히 빠져나와야 한즉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8:28).

3) 11절에서 “이에 다윗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기 사람들로부터 그곳(아벡)을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시글락)으로 돌아갔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서) 이스르엘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아벡에서 이스르엘 쪽으로 오려면 예루살렘 높은 지역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또 다윗이 반드시 시들락으로 와야 할 이유는 시글락에 있는 가족들을 대적의 침략에서 구출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30장). 하나님은 역경을 섭리로 해결해 주시는 일이 많고, 사울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데, 하나님은 이런 일에도 공의로운 통치를 하시는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제 33 과 침노자 아말렉을 추격함 (삼상 30:1~30) 목록으로


다윗이 아벡에서 가드왕 아기스로부터 전쟁 불참령을 받고 3일을 여행하여 본 고장인 시글락에 왔을 때, 시글락 성읍이 아말렉 사람들의 침노를 받아 불사름 당하고 대소여인들을 잡아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전장에서 돌아온 사실은 이모저모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본문 ① 1~6절은 “시글락이 침노를 당함”이고, ② 7~20절은 “침노자 아말렉을 추격함”이요, ③ 21~25절은 “전리품을 분배함”이며, ④ 26~30절은 “이웃에 선물을 보냄”입니다. 총 제목은 “침노자 아말렉을 추격함”입니다.

1. 시글락이 침노를 당함(1~6절)

1) 1~3절은 서론에서 말씀드렸고, 4절은 다윗과 그 백성들이 시글락의 참상을 보고 몹시 슬퍼한 내용이며, 5절은 그때에 다윗의 두 아내 이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잡혀갔다고 하였습니다.

2) 6절에서는 “백성(다윗과 함께 전장에서 돌아온 백성임, 4절)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였을 때 다윗은 크게 군급하였고 이때에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인 이외의 사람들, 특히 자녀들을 죽였다”는 말씀은 없으나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픈 것”을 보면 대소여인들만 살려 잡아가고, 남은 자들은 다 죽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돌질하려던 백성들은 가족들을 두고 다윗의 출전에 동행하게 된 것을 원망하여 일시 반항심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됩니다. 슬픔과 군급함이 있을 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할 때, 또는 위급할 때 하나님의 권고가 나타납니다. 그때에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시 18:1).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였는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인들 회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시 40:2)

2. 침노자 아말렉을 추격함(7~20절)

1) 7~8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은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20:20~23)에게 청하여 에봇을 가져오게 하였고, 그 에봇을 이용하여 “그들을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여쭌즉, 하나님이 “쫓아가라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을 것이라”고 응답을 하셨습니다. 여기의 질문과 응답은 세 가지인즉, 하나는 “쫓아가리이까?”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미치겠습니까(따라 잡는 뜻)?” 한 것이요, 셋째는 “도로 찾겠습니까?” 한 것인데, 이 세 가지에 대한 제비가 다 긍정으로 나타나므로 응답을 확신한 줄 압니다.

2) 9~10절에서는 다윗이 600명을 거느리고 아말렉 무리를 뒤따를 때, 브솔시내(유다영토 서남방, 가사 남쪽에 지중해와 연결된 브솔강을 뜻함, 그 남쪽은 애굽임)에 이르러 피곤하여 속히 갈 수 없는 200명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00명만 거느리고 쫓아갔는데, 11~12절에서 그때에 들에서 애굽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날 굶어서 몹시 기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에 13절에서 그의 신분을 물은즉 “그는 애굽사람이고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3일 전에 병이 들자 주인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들이 그렛사람의 남방(cherethiter, 갈멜과 시글락 근처일 듯 함)과 유다에 속한 갈멜(27:3)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즉, 적을 만난 것이지요.

3) 그리하여 15절에서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를 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한즉 “자신을 죽이거나 주인의 손에 붙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인도하겠다” 하여 10~20절에서 그의 인도를 받아 내려간즉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였고, 블레셋과 유다의 땅에서 크게 탈취한 것을 인하여 먹고 마시며 춤추는 것을 발견하고, 17절에서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친즉 약대를 타고 도망한 소년 400명 외에는 다 전멸시켰고, 두 아내와 모든 탈취물도 다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20절에서는 뺏긴 것 외에도 그들이 갖고 있는 양떼와 소떼들을 더 탈취하여 갖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3. 전리품을 분배함(21~25절)

1) 21절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리품을 갖고 돌아올 때, 브솔 시내에 대기하였던 200명의 사람들이 영접하러 나왔다” 하였고, 22절에서 다윗과 함께 갔단 400명 중 악한 자와 비류들이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와 함께 간 자들이 아닌즉 처자만 돌려주고 재물은 주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2) 이때에 다윗은 23~24절에서 “나의 형제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셨고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셔서 된 일이니 만큼 그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쟁에 나간 자나 소유물 곁에서 지킨 자가 일반인즉 같이 분배할 것이라” 하였고, 25절에서는 “그날부터 그렇게 하는 일이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3) 이상의 말씀을 보면 피곤하여 못 따라간 200명도 자기 고장을 지키는 책임에 임한 것을 알 수 있고, “싸운 자나 지킨 자를 다 공로자로 여긴 일이 오늘까지 이르렀다” 하심은 사건당시와 본서의 역사기록 당시에 상당한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이웃에 선물을 보냄(26~30절)

본문에서 다윗은 “전리품들을 유다의 여러 성읍에 있는 친구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였으니, 이것은 600명의 생활을 위한 정치적 보조자가 없지 않았을 것인즉 자신을 알리고 감사 또는 협조를 구하는 인사 예우를 한줄 압니다. 보낸 장소 이름은 13처인데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12㎞쯤에 있고, “남방 라못”은 베냐민 땅, 벧엘의 남쪽 7㎞쯤이며(북라마는 납달리 땅에 있고, 갈릴리 바다 서북쪽 15㎞쯤임), “얏딜”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 30㎞쯤으로 답닛과 르홉 중간에 있고, “아로엘”은 네게브 지역, 브엘세바 동남방 15㎞쯤이며, 아르논강 북쪽에도 있는데 본문의 아로엘은 어느 쪽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에스모드”는 헤브론 남쪽 15㎞쯤, 얏딜 동북쪽 7㎞쯤이고, “라갈”은 70인역에서 갈멜로 되었다 하며(삼상 15:12, 25:2), “겐”(창 15:19, 수 14:6, 14)은 갈대바다 동쪽에 있으나 유다지역으로는 알기 어렵고, “호르마”는 사해 남부에서 서쪽으로 35㎞쯤에 있으며, “헤브론”은 사해 중앙부에서 서쪽 30㎞쯤에 있고, “십못(siphmoth)”, “여라므엘(yerameel, 삼상 27:10)”, “고라산(borashan”, “아닥(athack)”은 유다 성읍으로 지명사전이나 위치를 표기한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알기 어렵습니다.

제 34 과 사울의 죽음 (삼상 31:1~13) 목록으로


사무엘상의 내용은 엘리제사장의 부패와 사무엘과 사울왕의 사역과 그들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① 1~6절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이요, ② 7~13절은 “사울의 죽음의 뒤처리”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사울의 죽음”으로 정하였습니다.

1.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1~6절)

1) 1절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이 패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었다” 하시므로 패전의 장소가 길보아 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진쳤던 아벡에서 길보아 산까지는 동북쪽 55㎞쯤 되고, 이스라엘 군이 진친 이스르엘에서는 동남방 10㎞쯤 됩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군사들이 4배 정도의 거리를 더 추격해 온 것입니다. 사울은 전쟁 초기부터 떨었고(28:5), 신접한 여인을 만나는 등 중심이 흔들렸은즉 그의 패배는 예고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28:4을 보시면 처음에는 블레셋이 아벡에서 수넴까지 72㎞쯤 북상하여 진을 친 것이고, 이스라엘이 진친 곳은 이스르엘인데, 이스르엘은 수넴의 남쪽 8㎞쯤입니다. 그곳에서 길보아 산까지 동남쪽으로 10㎞쯤 도망치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블레셋 군인들이 길보아 산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인 사실”을 말씀하셨고, 3~6절에서는 사울이 죽게 된 사실을 더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패전하여 활 쏘는 자에게 쫓기다가 중상(심히 근심)한지라 병기든 자에게 이르기를 “할례 없는 자가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하노니 네가 나를 찌르라” 하였으나, 그가 두려워하여 즐겨행치 아니한즉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여 그 위에 엎드러져 죽으므로 병기든 자도 이 사실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에 엎드러져 죽은즉 이때에 “사울과 세 아들들과 병기든 자와 사울의 모든 사람도 함께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활 쏘는 자에게 “중상 당한 것”을 각주에는 “심히 근심한 것”으로 나타난 일에 대하여 신 2:25에서는 같은 원문을 “근심하니라”고 번역하므로 중상과 심한 근심이 비슷한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할례 없는 자로부터 모욕과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으니, 죽는 시간까지 선민의 자존심을 지킨 것은 좋으나 그의 죽음은 자살이라도 블레셋에 의한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보호에서 멀어지면 명분과 생명을 다 잃게됨을 알 수 있습니다. 병기든 자는 왕에게 충성하여 생명을 함께 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와 함께 하므로 같은 결과를 당한 것이고, 사울의 아들들도 역시 같은 길을 가다가 망한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와 같은 길을 가느냐? 하는 것과 어떤 싸움을 싸워야 하느냐? 하는 일에 대하여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사울의 죽음의 뒤처리(7~13절)

1) 7절에서 “골짜기(길보아산 골짜기, 28:4, 31:1) 저편(방향은 알 수 없음)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요단 건너편(동편 길르앗 지역)에 있는 자들이 사울의 패배한 것과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기들의 성읍을 버리고 도망한즉 블레셋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거주하였다” 하므로 상당한 영토를 뺏긴 것입니다.

2) 8~10절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와 갑옷을 처리함에 있어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8절), “사울의 머리를 베고 갑옷을 벗겨서 그것을 그들의 신당과 각 처에 보냈다(9절)” 하였으니, 이는 자기 부족들로 하여금 사울의 죽음을 확인시킨 후 사기를 돋우기 위함이었을 것이요, 갑옷은 10절에서 “아스다롯의 집에 두었다” 하였으니, 이 “아스다롯”은 지명도 되지만(창 14:5, 아스드롯 가르나임, 갈릴리 바다 동쪽 33㎞쯤에 있고, 바산왕 옥에게서 빼앗은 땅임, 신 1:4, 수 9:10, 12:4) 블레셋 사람들의 신의 이름(바알은 남신 아스다롯은 여신의 이름임)인즉 사울의 갑옷을 신당에 두어 전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시체는 벧산 성읍 성벽에 못박아 전시하였다” 하였으니, 패배의 수모를 시체까지 당한 셈이요, 하나님을 떠난 왕실의 몰락이 비참하게 끝난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벧산”은 수 17:11에서는 “벧스안”이라고도 하는데 영문표기로서는 Bethshan(본문), Bethshean(수 17:11)으로 다르지만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지역은 갈릴리 바다 남쪽, 요단강을 따라 25㎞쯤에서 서쪽으로 6㎞쯤 됩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은 사울이 죽은 길보아 산에서는 동쪽으로 10㎞쯤 되는 곳입니다.

3) 11~13절은 “길르앗 야베스(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요단강으로 34㎞쯤 와서 동쪽으로 10㎞쯤 되는 곳임)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밤새워 벧산 성벽까지 가서(벧산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서북쪽으로 요단강을 건너 22㎞쯤됨) 그 시체를 취하여 야베스로 갖고 와서 화장하여 그 뼈를 야베스 에셀나무(창 21:33, 삼상 22:6, 요단 골짜기에 많은 관상수라함) 아래 장사하고 7일을 금식하였다”고 하였습니다(창 50:10, 민 20:29, 신 34:8). 길르앗은 요단 동편 넓은 지역을 의미하고, 삿 21:8~14에 보시면 선민 총회가 베냐민족을 칠 때 참가하지 않은 죄로 도륙을 당하여 처녀 400인을 뺏긴 일이 있었으나, 그 후에 삼상 11:1~11에서 암몬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초기에 암몬을 공격하여 구출해 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에 대한 보답으로 좋은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행 공덕은 언제나 받을 날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대목입니다. 삼상 31:1~13은 대상 10:1~14에도 기록되어 있은즉 참고하십시오.

사무엘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은 그 자녀들이 일시 타락하였던 것 외에는 그의 생애가 선지자로서 무난하였고, 사울은 초기에 왕 될 때는 일시 겸손을 나타냈으나 왕노릇 하면서 초심을 붙잡지 못한 채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신의 왕권보존에만 급급하여 악을 행하다가 버림받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으며, 다윗은 왕재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용기와 연약을 거듭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실족하지 않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6. 1. 6)

설교보충 1. 하나님이 패하게 하심 (삼상 4:1~1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사인데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두 번이나 패하였습니다. 한번은 블레셋 사람들이 “아벡”에 진 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싸웠는데, 4,000명이 죽고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3절에서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 하고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진중에 두지 않아서 그런 줄 알고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가(“메어다가” 하지 않았음)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언약궤를 물건처럼 여긴 뜻)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여 언약궤를 가져온즉(고핫 자손들이 메어와야 하는데 그런 말씀은 없음) 그것이 진중에 도착할 때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치니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블레셋 진에 알려지니까 그들은 크게 두려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신은 애굽을 재앙으로 꺾은 능한 신인데 우리가 그들에게 지면 히브리인들 앞에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대장부처럼 싸워야 한다” 하고 대장부처럼 싸우는 바람에 3만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죽고 또 패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벱궤를 가져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불량자)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법궤까지 뺏긴 것입니다. 이 상황을 보는 저희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며, 또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1절에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는 말씀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의 말이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사무엘은 3:15~16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죄를 말하고 하나님이 그 집을 심판하실 것을 나타낸 만큼 제사장의 부패와 백성들의 최악과 제사장 가정의 심판을 전파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심판 받는 것은 백성의 불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므로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전쟁에 이길 궁리만 하다가 법궤를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과거에 조상들이 법궤를 앞세웠을 때 요단강물이 역류하였고, 법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으니, 이번에도 법궤를 진중에 모시면 구원이 있을 것으로 알고 행하였는데 아무 효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문제된 것이 무엇입니까?

1) 법궤를 하나님의 명에 의하지 않은 채 옮긴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멈추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는데, 이번에는 장로들이 임의로 옮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함께 동행하였지만 4절의 “법궤를 가져왔다”는 내용이 “메어왔다”는 말과 달라서 고핫 자손이 어깨로 메어 와야 하는 것을(민 4:4~6,15) 그렇게 안하였는지 의문이 있고,

2) 그들이 법궤를 이용한 근거는 경험이나 전통에 근거한 것입니다. “과거에 조상들이 법궤를 앞세워 능력을 힘입은 일이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해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상의 유전 따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때 말씀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짐작으로 믿거나 불확실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치우치지 말고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며 오직 말씀을 지킬 따름이라”(수 7:1, 고전 4:6, 7:19)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하나님과 동행하면 승산이 있어도 무엇을 갖고 가는 것(물질적인 것)은 신앙에 위배될 수도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또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함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옮긴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또는 성물)을 이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회개하고 복종하면서 기도로 의지하는 것이고, 자율적으로 성물을 취급하는 것은 이용입니다. 요즈음도 교회나 성물이나 믿음을 인간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신령한 은혜를 세속적 목적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복을 기다리는 생활을 할지언정 신령한 은혜를 세속에 이용되지 않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법궤를 이용한 것은 우상적 신앙입니다. 마치 선민의 조상들이나 이방인들이 드라빔이나 서물숭배를 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요즈음도 무엇을 갖고 다니면서 그것을 수호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십자가나 염주, 달마대사 그림, 부적같은 것이지요. 성도는 그런 것에 속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심령)으로 모시는 것이니까요(롬 1:9, 10:10).

5) 시위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 큰 소리로 외쳐 땅이 울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 때에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할 때 한 것(수 6:10, 16)과 기드온이 미디안을 점령할 때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삿 7:18) 하였지요. 그것은 일거수 일투족까지 하나님이 명하셨고, 그 행위에 따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해보면 될 줄 알고 시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술사가 아니면서 요술 흉내를 내 보세요. 그대로 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최고, 최종의 은혜의 방편으로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통이나 제도나 경험을 무시하고 성경말씀대로 깨닫고 순종하면 그 이상 더 유익한 방도가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시 119:100).

설교보충 2. 법궤에 대한 지식 (삼상 6:1~11) 목록으로


“법궤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려는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한 일과 웃사가 법궤를 만졌다가 죽게 된 사실과 관련하여 교훈을 생각해 보는 것인데, 기존 원고의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제목의 범위를 넓히게 된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430년 동안(출 12:40) 애굽의 우상 세계에서 선민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성막제도를 설립해 주셨습니다. 성막제도란 신령하신 하나님을 유형한 존재로 모시고 섬기게 하는 제도인데 그 유형한 존재로 표현한 물건이 곧 법궤입니다. 출 25:10~27:까지는 성막제조를 명하신 말씀이 있고, 출 35:10~38:까지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성막을 제조하였는데 그중 37:1~9에서 법궤 제조 내용이 나타나고, 민 4:5, 15에서는 법궤 운반법이 기록된 것입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큰 뒤주만하게 만든 상자인데 그것을 금으로 싸고 양쪽에 채를 만들고 윗면에는 속죄소란 테를 붙이고 그 양쪽에 그룹이란 천사모양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고 온 십계명 동판(출 25:16)과 만나 항아리(출 16:33, 히 9:4)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 17:10, 히 9:4)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물건의 의미는 곧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 조상의 위패를 모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비하면 훨씬 실제성이 있습니다. 우선 법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생명의 싹이 있으며, 광야에서 먹은 이적의 양식이 있으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궤의 명칭이 여러 가지인데 하나님의 궤, 율법궤, 언약궤, 거룩한 궤, 권능의 궤(삼상 3:3, 출 21:12, 수 3:11, 대하 35:3, 시 132:8) 등입니다. 그리고 민 4:5, 15에서 이 법궤를 운반할 때는 아론의 자손 중 고핫지파의 자손들이 반드시 어깨에 메도록 명하셨고, 거기에 채까지 꿰어 있는 것입니다. 이 물건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엄위하게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앞세우는 의미로 법궤를 메고 나갔는데 요단강을 건널 때(수 4:7)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수 6:6~20) 물이 멈추고 성이 무너지는 체험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블레셋과 싸울 때도 갖고 갔었는데 그때는 패하여 법궤까지 빼앗겼지요. 왜 그랬을까요? 법궤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물건일 뿐이고, 신앙은 법궤와 맺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맺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궤를 앞세워도 하나님과의 신앙관계에서 앞세워야만 하는 것인데, 신앙과 계명은 뒤로하고 법궤만 앞세우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바람에 블레셋 거민들이 법궤를 소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돌아온 법궤를 벧세메스 거민들이 함부로 들여다 보다가 70명이나 죽었습니다(삼상 6:19). 그래서 그들이 법궤 보관을 못하고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사람들이 가져다가 20년이나 보관한 것입니다. 이때에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법궤 관리자로 구별하였는데 그가 레위 지파인지 고핫족인지는 알 수 없고 20년 후 다윗이 나라를 평정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하였을 때는 아비나답의 다른 아들 웃사와 아효가 따라오게 된 것인데 그때에 이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와서 소들이 뛰는 바람에 법궤가 수레에서 흔들리니까 옆에 있던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진노하시고 치셔서(충돌의 뜻) 그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3. 그 법궤가 블레셋 진영에서 이스라엘 진영까지 올 때는 새 수레에 실렸거나 멍에 메지 않은 두 소가 끌었거나 아무 일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가 치우치지도 않고 잘 왔는데(삼상 6:12) 하나님의 선민들이 잘못 취급했을 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대로 두신 줄 압니다. 그러나 선민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고, 특히 하나님을 엄위하게 섬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뺀 무리 3만을 모으고 그 법궤를 메어오려 하였는데(삼하 6:1~2), 왜 중간에 새 수레에 싣고 오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이 수레에 싣고 가자고 제의를 했을 것입니다.

1) 목적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니까 구태여 445년 전의 말씀을 그대로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제가 연구한대로는 출애굽 연도가 주전 1449년경이고, 성막 건립한 것이 2년 뒤입니다(출 40:17). 그리고 다윗이 왕된 연도는 주전 1012년경인데 법궤를 운반한 때는 아무래도 10년쯤 왕노릇한 다음일 것으로 추산하면 율법을 받은 시기는 445년전쯤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목적만 따지고 방법을 무시하다가 생명공학 부정사건이 난 것 아닙니까? 웃사가 죽은 것도 수레를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인데 그들이 수레를 쓴 것은 바로 목적만 살리고 방법을 무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적 목적도 좋지만 반드시 방법도 합법적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편의주의 때문입니다. 어깨에 메는 것은 초라해 보이고 힘드니까 문화적 산물을 이용하여 편의주의에 따른 것입니다.

3) 이방인의 법을 모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만 모방하시고 다른 사람의 것은 모방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절대로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궤에 대한 지식과 함께 웃사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목적만 앞세웠든지, 이방주의, 편의주의 또는 정성 없는 태도가 죽음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3. 법궤를 끄는 소 (삼상 6:7~16) 목록으로


“법궤를 끄는 소”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사 1:3에 보시면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안다” 하신 말씀이 있고, 민 25:28에서는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시매 나귀가 “발람 거짓선지자를 깨우치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소가 짐승이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사람보다 나은 교훈을 준다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5장에서 선민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다가 선민이 패하였는데 법궤까지 뺏겼습니다. 그 당시의 전쟁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이 그 가정을 몰락시키겠다”고 응징선언하신 일에 뒤따른 전쟁인 만큼 두렵게 여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가 시급한 것인데 회개할 체를 하지 않고 싸워 이길 궁리만 하다가 “하나님의 법궤를 앞에 모시고 나가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일찍이 선민들은 법궤를 앞세워 요단강 물을 역류 시킨 일과 여리고 성을 돈 다음 무너뜨리는 이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법궤를 그런 용도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잘 모시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성도가 무엇에 이용한다면 큰 잘못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를 앞세워 능력을 힘입었을 때는 하나님이 법궤를 앞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에게 패배하고 법궤를 뺏겼을 때는 사람이 임의로 운반한 것이니까 무례를 범한 것이고, “이용했다”는 말이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그것은 정신 빠진 신앙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음으로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정신이 빠지면 하나님도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법궤를 들고 나간 것은 일종의 우상주의 신앙입니다. 법궤를 드라빔처럼 생각한 것이니 얼마나 무례합니까? 그래서 법궤는 있으나 마나했고, 전쟁은 패하여 법궤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들이 다곤 신당에 두었는데, 1차, 2차로 다곤 신상이 넘어졌을 뿐 아니라 온 블레셋 거민에게 독종이 생겨 많은 사람이 죽고, 거기에 가세하여 쥐떼의 재앙까지 일어나니까 결국은 “그 재앙이 법궤를 빼앗아 온 잘못이라” 하여 다시 돌려보내게 된 것인데, 그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여호와신인 법궤를 잘 모셔야 하고, 또 예물도 흠뻑 드려야 재앙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 하여 금독종, 금쥐를 넣은 예물상자를 법궤와 함께 새수레에 싣고 멍에 메본 일이 없는 송아지 딸린 암소 두 마리에게 메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법궤가 7개월만에 에그론에서 멛세메스로 가게 된 것인데, 에그론에서 벧세메스까지는 4시방향 10㎞쯤 됩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재앙을 받은 것이 정말 여호와신의 조화냐, 아니냐를 그 암소 두 마리로 시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을 잘하나 못하나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은 몰라도 “기독교인이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험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 송아지 딸리고 멍에를 안 메어본 소를 택한 것입니다. “분명히 수레를 바른 길로 끌고가지 않든지 송아지 울음소리를 듣고 안갈지도 모르는데 잘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신의 역사가 틀림없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마리의 암소가 송아지를 생각하며 울기는 하면서도 돌이키지 않았고 또 벧세메스를 향하여 곧게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소도 덕을 세우고 모범을 보이는데, 성도가 성령충만을 받아 더 큰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교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소의 행보를 보고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소들이 보인 모범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에 붙잡혀 행동한 소입니다.

1. 12절에서 “대로로 가며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대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이고, 운 것은 젖 먹을 새끼의 인정을 끊은 것입니다. 짐승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인정을 끊은 것이고,

2. 또 12절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정도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처음 멍에를 멘 소일지라도 그것을 엄격히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편법과 불법을 많이 씁니까? 그러나 소는 처음하는 일이지만 길따라 곧게 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들의 신앙생활도 정도로 가고 표준으로만 가야 합니다(고후 13:8).

3. 두 소의 협동입니다. 옛부터 일본사람은 개인은 약하나 협동은 강하고, 한국사람은 개인은 강하나 협동은 약하다고 했습니다. 요즈음도 국회에서 협동을 못하고 사학법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까? 두 마리의 소는 발을 잘 맞추어 간 것입니다.

4. 다 가서는 어찌 되었습니까? 벧세메스 사람들이 와서 그 소를 잡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쟁기를 잡고 뒤를 보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눅 9:62),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며(수 1:7),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있고(마 10:38),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말씀이 있으며(고전 1:10, 빌 1:27), 마지막으로는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말씀이 있는데, 소는 그 말씀을 그대로 다 실천한 것입니다. 참으로 소의 헌신을 본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성령님이 간섭하시면 소도 그렇게 하는데 저희들이 정신차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설교보충 4. 선민의 부흥운동 (삼상 7:1~6) 목록으로


“선민의 부흥운동”이란 제목입니다. 성도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적 부흥에 좋은 교훈이 되시기를 바라서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몹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선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타락한 상태였고,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블레셋의 침략이 있었으며, 엘리 집안은 몰락하였고, 법궤는 블레셋 진영으로 뺏겼으며, 그때 사무엘 선지자는 사역을 시작할 때쯤이었습니다. 다행하게도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냈고, 그 법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영입하다가 함부로 들여다본 잘못 때문에 70명이 죽게 되자 그들이 간수를 못하고 기럇여아림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궤를 모시게 하여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법궤를 실로에 있는 성소에 모시지 못한채 임시 보관된 상태이므로 그만큼 신앙에 정착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무엘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의 부흥이 일어났으며, 여기에 따라 하나님이 블레셋을 정복시키셨고, 아모리족과의 사이에서도 평화가 있게 하셨으니(7:4), 선민의 부흥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부흥의 발단과 경위에 대하여 살펴보면,

1. 부흥의 발단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법궤가 20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어도 1년에 한번은 성소에 가는 것인데 20년 동안 실로의 성소에는 법궤가 없고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 보관만 해 놓은 상태니까 성전제도도 옳게 시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 섬기는 자들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는 만족을 못하였을 것이고, 하나님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 주신다는 말씀이 많습니다(시 19:10, 27:4, 42:2 119:40, 130:6, 대상 29:3, 벧전 2:2). 또 “기다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시 40:1)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시대에 20년 7개월 동안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2. 그렇게 되자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사무엘이 성장하여 사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큰 일을 하실 때는 지도자를 통해서 하십니다.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사가 다 그런 인물 아닙니까? 언제든지 그 시대에 적절한 인물이 나와야 백성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무엘과 같은 백성들의 호응 받는 선지자가 없다면 백성들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민에게 부흥을 주시려니까 귀한 사역자가 그 시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3. 선지자의 외침이 있은 것입니다. 3~4절을 보시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라 이방 우상을 제하라 그리고 하나님만 섬겨라” 하였고, 5~6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여라 하나님께 기도해라 예물(물)을 드려라 또 금식하여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회개하라” 하였고, 그렇게 할 때 선지자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외침을 보면 영적 각성이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모이라(합심) 기도해라 금식해라 예물을 드려라 완전히 이방신와 우상주의를 떠나고 전심으로 돌아와서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였을 때, 백성들이 그 외침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중보기도는 “백성들의 선행적 결단이 있을 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중보기도가 백성들의 회개와 함께 힘있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4.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궐기한다는 소식을 블레셋이 듣고 그 방백들이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기도하고 회개했는데 왜 전쟁이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블레셋을 죽이기 위하여 끌어온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때 애굽의 마병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였지만 결국은 그들이 홍해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하나님이 선민을 보호하시고 복주시기 위하여 블레셋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성도들은 언제나 어려운 일 다음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또 복 주실 것을 기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전쟁이 나니까 백성들은 사무엘을 찾아와서 “우리를 위하여 쉬지말고 기도해 주십시오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게 해 주십시오(8절)” 하였고, 사무엘이 어린양의 제물로(레 22:27) 온전한 번제(히 10:12~14,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중보적 제사를 의미함)를 드리고 기도한즉 하나님이 응답을 하셨는데, 적군에게 우뢰소리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패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격하여 치므로 승리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소낙비란 말씀은 없고 우뢰라고만 하셨으니까 우리 말로는 날벼락입니다. 날벼락에 풍비박산이 되어 패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숙적 블레셋을 그들의 성읍인 에그론에서 가드까지 점령을 한 것입니다(10~11절).

6. 그렇다고 하여 다른 이방족의 침략이 없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선민의 권위를 높이시니까 주위의 아모리 족속과도 평화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14절). 주위의 이방족들이 이스라엘을 얕보면 자주 침략을 하겠지만 블레셋을 꺾은 민족인즉 두렵게 여겨 평화무드가 조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유지되었고,

7. 이렇게 되었을 때 사무엘 선지자가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와 고향인 라마를 순회하면서 단을 쌓고 백성을 지도하므로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 평화롭게(15절)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민의 부흥운동은 궐기와 회개로 시작하여 승리와 평화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왕을 구한 사람들 (삼상 8:1~9) 목록으로


“왕을 구한 사람들”이란 제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당시부터 사울이 왕 되기까지 약 387년 동안 왕이 없이 지냈는데 그동안 광야 40년 중에도 전쟁을 치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수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어떤 전쟁이든지 이겼는데 사무엘이 늙고 사무엘의 아들시대에 와서 백성들이 단결하여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열방의 방법대로 살기위 하여 요청을 한 것입니다(삼상 8:4~5).

1. 그렇다면 저희들이 왜 이런 요구를 했는지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왜 400년 가까이 왕 없이 살아오다가 열방 사람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였을까요?

1) 첫째 이유는 사무엘 선지자의 아들들이 사사직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닮아 선하게 행하지 않고 판결을 굽게 하는 등 바른 다스림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차라리 왕을 세우면 저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에 부정이 많고 빈부격차가 심하면 차라리 부패가 적고 공평하게 먹고 사는 정치가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 신앙이 식으면 우상이라도 갈망하고 지자가 타락하면 무당이라도 찾아가는 근성 때문에 백성들이 열방의제도를 바라게 된 것입니다.

2) 둘째는 외적의 위험이 항상 있는데 왕이 없으니까 정규군도 없고 파수도 안서며 그때 그때 사사가 일어나서 의병을 모아 전쟁을 하려니까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처럼 왕과 장관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여 파수도 서고 하면 더 좋으리라고 생각 한 것이요,

3) 그렇게 생각을 하는 데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 감정이 작용한 것입니다. 조상들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능력 주셨다는 말은 듣고 있지만 자기들 시대에 그런 능력을 계속 주시는지에 대하여는 회의감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사무엘 선지자의 신앙과의 격차입니다. 성도들도 대부분 신앙의 격차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더 알고 덜 아는 격차, 하나님과의 관계가 뜨겁거나 덤덤한 격차, 환난이 있으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덜 믿는 것의 격차인 것입니다. 삼상 7:14~15을 보시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평화가 있었고 그가 여러 곳에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 있는 사무엘을 보시고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이웃에 사는 아모리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크게 보고 “침략하면 안된다” 하여 그 땅에 평화가 있은 것이니 이럴 때는 군대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여 왕과 군대가 필요하다는 실정이고 사무엘은 하나님만 잘 경외하면 평화도 주시고 승리도 주시니까 괜찮다는 생각인데, 사무엘이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 대책으로 왕을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왜 하나님이 백성들의 편을 들어서 왕을 세워주셨습니까? 처음에는 사무엘이 반대를 했지요. “왕의 제도가 번거롭고 백성들에게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이라” 하고 그 불합리성을 설명해 주었지만(8:10~17)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8:18~22). 그 이유는

1) 8:7에서 “사무엘을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으로 하여금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하시고 퍽 섭섭히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할 성도가 “사람을 왕 삼겠다” 하니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도가 성경중심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중심으로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럴 경우에 하나님은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자유를 인정하신 셈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왕을 의지한다니까 “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이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신앙 수준에 따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무엘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설령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신앙 수준에 못 미치니까 고기를 못 먹이고 죽을 먹이는 것처럼 번거로운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3. 그렇다고 하여 아주 멀리 하신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의 소원대로 왕을 세워주시는데도 역사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냐민지파 사울이 그런대로 괜찮은 인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보다 나은 인물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는데 그 절차를 보면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그것을 찾도록 명을 내릴 때 사환과 같이 가게 합니다. 이리저리 다녀도 못 찾고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성까지 가까이 갑니다. 그때에 사환이 “이곳에 유명한 선지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분의 말이면 틀림없이 이룬다고 하는데 가서 만나보고 여쭈어 봅시다” 하여 찾아가는데 또 어떤 소년이 인도를 잘 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셔서 “사울을 왕 세워야 하니까 기름을 붓고 사람 앞에 소개를 하라” 하신즉 그대로 만나고 대접하고 30명이나 되는 유지들에게 인사시킨 다음에 그 이튿날 아침 성으로 나올 때 혼자 있는 상태에서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뜻을 인쳐주고, 12지파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지파별 제비를 뽑고 가문별 제비를 뽑은 다음, 마드리의 가족 중에서 제비를 뽑아 사울을 왕으로 선포하였으니, 이렇게 되는 과정이 전부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구한 이유와 수준따라 통치하시는 일과 소를 잃고 사환의 말을 듣고 사무엘을 만나는 일과 그 다음에 또 성령감화도 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사일 같으나 그것이 다 왕 되는 길이요 하나님의 섭리란 것을 배우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천륜을 어기는 정치 (삼상 8:6~7) 목록으로


제목은 “천륜(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정치” 또는 “천륜을 어기는 생활문화”라고도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바른생활을 하려면 우선 교육을 잘 받아야 하고, 또 정치적 힘으로 잘 다스려야 하며, 모든 인생은 순리대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20년 혹은 30년 내에 생활문화가 많이 바뀌었지요. 핵가족 제도, 바쁜 생활, 많이 먹고 활동을 적게 하는 것, 아이는 육아원에서 키우고, 노인은 나라가 먹이며, 부부는 맞벌이를 해야 하고, 남자, 여자는 권리와 책임이 꼭 같다고 하는 것 등 많이 변하였지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천륜을 어김에 있어서 정치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천륜을 모르니까 인본주의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읽은 성경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사사시대 357년 합하면 약 400년인데 400년 동안 왕이 없이 살았습니다(정부가 없었다는 뜻). 그때에는 선지자와 족장들과 재판관들만 있었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의병장(사사)이 일어나서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출했지요. 그런데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세워달라” 하니까 하나님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다스림을 받자는 것인즉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원하니까 왕을 세워 주시면서 “왕을 세우면 왕궁을 다 먹여야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복종해야 하니까 좋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 사는 방법이나 정치에 있어서 천륜을 어기지 않으면 좋겠는데 천륜을 모르니까 그것을 어기는 바람에 더 살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저는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륜을 어기는 정치와 삶이 무엇이냐 하시겠지요.

1. 남녀동등권입니다. 성경에 “여자가 남자만 못하게 지었다”는 말씀이 없고, “남자없이 여자없고 여자없이 남자없다”(고전 1:11) 하셨으니까 인권은 동등합니다. 그런데 직무도 같습니까? 요즈음에 와서 여자들이 “직무도 같다”하면서 설거지도 같이 해야 한다 하고 미국에서는 95세 할머니가 군인에 나가겠다는 식으로 남녀 구별 없이 일도 꼭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표를 의식하여 그 일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강인한 체질과 부드러운 체질, 1년 임신해야 하고 2년 보육해야 하는 여자가 남자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남자, 여자 필히 그 신체와 성격에 맞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천륜이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붙여주실 때 분명히 “돕는 배필”(창 2:18)이라 하셨고,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거의 깨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깨지면 깨진 문화가 정착되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가정 정서에서 사회정서로 변해갑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간의 인정도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적되면 짐승사회처럼 변한다고 보셔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2. 남녀구별을 하는 문제입니다. 여자, 남자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좋으나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가 남장을 해 보십시오. 그것은 율법이 금하는 것입니다(신 22:5).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일을 다 하고 싶고, 남자가 여자 일을 다 하고 싶어 하다가 결국은 동성애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동성애 법을 통과시킨 나라도 많은 줄 압니다. 남자가 가정주부 노릇을 하면서 보람 있다고 하는 사회가 되었지요. 그것은 여성의 직장을 동등시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 직무와 체질상 천륜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3. 효도의 계명을 깨는 것입니다. 아이를 어머니가 안 키우고(직장가야 하니까) 보육원에 맡겨 사회적으로 키우는 것처럼 노인들도 자식이 맡을 필요 없이(맡기 힘든 사회임) 나라가 부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비용은 그 자녀, 그 국민들이 내지만 운영은 나라가 하니까 자녀들은 부모부양에서 멀어져도 된다는 식입니다. 왜 이렇게 만듭니까? 천륜을 모르는 정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부양의 책임을 젊을 때부터 가져야 하는데 “나라에서 연금 준다니까 나는 나 먹을 것만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하도록 사회문화가 변질되어 있는 것입니다.

4. 벌 주는 일입니다. 성경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신 19:21)는 말씀이 있고, “너 죄지으면 천벌 받는다”는 말이 속담처럼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를 벌하여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지은 사람이 버젓이 활동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저명한 인사나 재벌가들이 징역 사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죄는 통제할 힘이 없고 따라서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5. 성경에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 쉬라”고 하셨지요(출 20:9). 그런데 5일만 일한다고 합니다. 천륜을 어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닷새는 힘써 일합니까? 아닙니다. 노는 것을 최고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시간을 빼앗아 전부 오락과 식도락으로 끌고갑니다. 만일 나에게 권세를 준다면 나는 당장 TV에 뉴스와 교육적인 것만 방영하게 할 것입니다. TV를 보면 거기서 먹을 것이 나옵니까? 안나오겠지요. 먹을 것은 노동과 기술로 만들어 낸 농산물에서 나옵니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 되는 이유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농산물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인구 중 굶어 죽는 이유는 농산물 수급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바로 우리들) 농사 아닌 방법으로 돈을 잘 벌어서 양식을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인구 중 농사짓는 사람이 적어졌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세계인의 식량이 다 부족하겠지요. 그때 화성에 가서 쌀을 사오겠습니까? 땅을 파서 건져내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일 그 자체가 필수품 생산이어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국민을 오락으로 내몰면서 어떻게 빈곤이 해결되기를 바랍니까? 요즈음 정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공익요원을 간병인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간병은 70세가 넘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청년들은 공부할 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6. 고전 14:1을 보시면 “사랑을 구하라” 하였고, 고전 13:13에서는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나라 교과서에 사랑과목이 있습니까? 없지요. 사랑의 “사”자도 없지요. 그러니까 개인욕심을 통제할 길이 없고, 집단 이기주의를 교화시킬 길이 없지 않습니까? 이기주의를 박애주의로 바꾸는 것이 바로 사랑교육일 것입니다.

설교보충 7. 사울의 우월성 (삼상 9:1~10) 목록으로


“사울의 우월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 했으며, 또 제사장까지 학살한 죄(삼상 22:18) 때문에 사울의 인식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처음 왕될 당시에는 상당한 덕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는 더 클 만큼 준수한 체구라 하였는데, 하나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면서 키 큰 것을 왕재로 여기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삼상 16:7). 그리고 삼상 10:24에서 “사울에 견줄 자가 없다” 하신 만큼 그 지역에서 유력한 인물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우월한 덕목이 무엇입니까?

1.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9:3에 보시면 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잃고 찾아보라 하였을 때, 그 주위 20~30리 동리를 3일 동안 찾아다녔고, 또 왕으로 선포를 받고도 소를 몰고 농사를 지었던 사람이니(11:5) 얼마나 성실합니까?

2. 효도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하인을 데리고 암나귀를 찾으라”(9:3) 하였을 때 나귀 찾는 일이야 하인들만 보내도 되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부친이 시킨 일이니까 순종을 한 것이고 3일 동안 헤메고 다닐 때 “부친이 나귀는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 하실 것 같다”고 한 것은 효도에 관한 사항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집을 나간 후 소식 없이 안 들어오면 궁금히 여기고 또 염려를 하지요. 그래서 그것을 아는 자녀들은 자주 연락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어떤 자식은 그런 생각조차 안하고 연락도 안하는 경우가 많지요. 오늘의 시대에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사울은 효자였습니다.

3. 겸손하였습니다. 사울의 겸손이 세 번 나타나는데 한번은 암나귀 찾으러 숲에 이르렀을 때 하인이 “그 지역 라마성읍에 선견자를 찾아가 물어봅시다”(9:21) 하였을 때 하인의 말을 무시하지 않은 겸손이 있고, 그 다음에는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 만나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라” 하였을 때 “나는 가장 작은 베냐민지파하고도 가문 작은 집의 아들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9:21) 하였고, 또 사무엘이 미스바에 와서 백성들을 모으고 제비를 뽑을 때도 행구 사이에 가서 숨을 만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였으니(10:22) 그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요즈음 대통령 될 때 그렇게 하는 사람 없지요. 사울은 부끄럽게 여기고 숨을 만큼 겸손하였습니다.

4. 예절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환이 라마성에 이르러 “선견자를 찾아가자” 하였을 때 예물을 준비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하느냐 한즉 그 하인이 “은 1/4 세겔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예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격의 됨됨이를 보려면 먼저 예절을 보지 않습니까? 사울이 부모의 걱정하실 것을 생각한 것이라든지, 선견자를 뵈러 가면서 빈 손들고 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예절을 차린 사람임을 알 수 있고,

5. 말에 신중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자기 동리인 기브온으로 가서 산당에 올라갔을 때 숙부를 만났는데 숙부가 사울의 행보를 물었고, 또 “사무엘 선지자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암나귀를 찾았다”는 말을 하였다는 말만 하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이란 미리 하여 좋을 것도 있지만 나쁠 것도 있은즉 정치가나 지도자로서 말의 신중성이 있어야 함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은 가사에 대한 말만하고 정치적 문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6. 10:27을 보시면 사울이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비류들이 비난하기를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예물도 드리지 않았는데 사울이 이 상태에서 “잠잠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단한 인내성이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왕된 것을 지지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취하는 사람에게 입을 다물고 대응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인내가 아닐 수 없지요. 대통령도 억울한 것을 못 참고 변명을 하지 않습니까? 왕은 거기에 비할 때 절대적 존재라 할 것입니다.

7. 암몬이 쳐들어와서 그들을 물리치고 승전을 하였지만 자기의 공을 내세운 일도 없고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왕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니까요. 그때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이르기를(11:12~13) 사울이 왕 되었을 때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하고 비난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고 하자, 이 사실을 안 사울이 말하기를 “이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라” 하므로서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고 또 자신의 공로가 아닌 상태에서 승리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보복할 수 없다한 것은 상당히 합리적 사리를 구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공로를 힘입어 개인적 보복을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화합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13을 보시면 길갈에서 대관식을 가졌는데 거기에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기뻐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화목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뜻하고, 모든 백성들과 기뻐한 것은 사람들과 친한 것을 뜻합니다. 왕은 권위주의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처음 왕 되었을 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으니 자격 있는 사람을 왕 세운 것이 사실인데, 왕노릇 2년을 한 다음부터(13:1) 권세욕에 사로잡혀서 병들기 시작하였고, 충신 다윗을 의심하고 미워하다가 결국은 큰 학살까지 하고 폭군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을 무시한데서부터 시작되었고(삼상 15:26),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즉(삼상 16:1) 회개할 힘을 잃고 회복할 수 없는 어두움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징조와 교훈 (삼상 10:1~12) 목록으로


제가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하게 된 것은 이 부분의 강론이 미흡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미흡함이란,

1.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이유로 세 가지 징조를 말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 징조란 사울이 자기 집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있게 될 일을 말한 것인데, 하나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이라 그들은 네가 찾으려 한 암나귀를 찾았다 할 것이요 사울의 부친이 사울이 돌아오지 않음을 염려한다는 소식을 알릴 것이라”고 한 것인데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 징조는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벧엘(제단이 있음, 삿 20:26, 삼상 10:3, 7:16)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인데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또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으며, 또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는데 그들이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어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그대로 성취되었고, 세 번째는 “블레셋의 영문이 있는 하나님의 산(이 산은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의 높은 곳을 뜻하고 그 경내에 블레셋의 영문이 있음은 블레셋이 기브아 지역을 장악한 의미가 있음)에 이르러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 선지자의 무리들(그 당시 그곳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선지생도를 가르쳤다고 볼 수 있음)이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하나님의 말씀을 악기 소리와 함께 선포한 뜻)을 볼 것이요 그때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다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10~12절). 그러면 이런 징조를 말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나타낸 사실을 확신케 하는 점,

2) 하나님이 사람의 발걸음이나 미래를 다 아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리는 사실,

3) 나타나는 징조에 따라 사울이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훈련시키는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훈련시키는 의미에서 첫 번째 두 사람의 만남은 무슨 교훈을 줍니까?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가는 사이에 “문제되었던 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해결해 주신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부친이 자기를 염려한다” 하였은즉 속히 고향으로 가서 부친 만나는 일을 하였어야 할 것인데, 그는 징조가 다 응한 다음(9절) “기회를 따라 행하라”는 지시를 받고도(7절) 산당으로 갔고, 숙부만 먼저 만났으니(13~14절) 기회따라 행한 일 치고는 미흡한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제사 드리러 벧엘로 가는 세 사람이 염소새끼 세 마리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졌으면 그 제물은 그들의 몫인데 어떻게 그들로부터 떡 두 덩이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 시장하여 사환과 함께 먹으려고 떡을 구하였는지는 모르나 하나님 앞에 드릴 세 사람의 제물을 중간에서 사람이 받아먹었으니 역시 지혜롭지 못하게 한 것 같고, 세 번째는 기브아 산당에 올라갈 때 악기를 들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선지자들로부터 영접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같이 예언을 하였는데 그 당시에 사울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이르되 “그도 선지자냐 그 아비가 누구냐 기스의 아들이 당한 일이 무엇이냐 하여 그 말이 속담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사울을 칭찬한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신이 감동을 하셨어도 신령한 직임에 조금 살피는 일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중에 제사드린 문제(13:9)와 관련할 때 성급한 일이었던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한 예언은 그대로 체험하기에 앞서 “지혜롭게 행하라”는 교훈과 연단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에도 겸손과 절제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갈 5:22~23).

2. 8절을 보시면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7일을 기다리라” 하였는데, 그 사실이 암몬을 쳐서 이기고 난 다음에 11:14~15절에서 “제사를 드리고 대관식을 하고 나라를 새롭게 한 사실로 성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7일을 기다려 만나서 행사했다”는 말씀이 없을 뿐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할 이유는 시간적 흐름에 맞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사실을 설명 드리는 이유는 7일이란 약속과 함께 길갈에서 사무엘을 만난 사실이 13:8에서 또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때는 사울왕이 “왕된지 2년 후”라고 하였습니다(13:1). 그러니까 왕될 때 “길갈에서 7일 기다려 만나자”한 10:8의 말씀이 2년 후의 일을 예언한 것 같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13:8에서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7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므로 번제를 드렸다” 하였으니, 그 7일이 10:8의 7일이 아니겠느냐 하시겠지만 선지자와의 만남의 기회는 안식일 관계로 7일을 주기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관행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일 후 길갈에서 만나자”한 10:8의 약속은 그 당시 왕될 때 길갈에서 있었던 대관식 행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고, 13:8의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7일이라”한 것은 안식일 주기로 7일에 한번씩 순회하여 만나는 관행적 약속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 보면 10:8의 예언이 13:8에서 응한 것으로 쓴 것도 있어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13:8에서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하나님과 영영 격리되는 불행을 당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예고가 왕될 때 징조경험에서 예시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9. 기름부음의 뜻 (삼상 10:1, ???)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기업(선민단체)의 지도자를 삼으셨다” 하였고, 그 기름부음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변하여 새사람이 될 것”을 예언하였는데, 9~10절에서 그 말씀대로 “다 응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고난 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7절), 새마음을 주셨으며(9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음은 물론 예언을 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10절). 이런 상황에서 저희들은 기름부음의 뜻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름은 몰약, 나드, 감람유가 대표적입니다. 몰약은 단장용이나 방부제로 쓰고(더 2:12, 요 19:39), 나드는 화장품용으로 쓰며(막 14:3), 감람류는 식용(왕상 17:22), 등불용(출 25:6, 막 25:3), 약용(막 6:13, 약 5:14) 등으로 쓰는데 성소의 불을 밝히는 일과(출 30:24, 레 24:2) 제사장(출 40:13), 왕(삼상 9:16), 선지자(왕상 19:16)를 임직할 때 그 머리에 붓는 의식용으로도 사용을 합니다. “팔레스틴 땅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감람유라” 할 정도로 감람유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꼭 알고 싶은 것은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구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름을 부을 때 아무 사람에게나 붓지 않습니다. 꼭 선택하여 구별할 자에게 붓는 것입니다. 출 30:29~30을 보시면 “특별히 제조한 관유를 모든 성물에 바르고 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서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양쪽으로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고 세속에서 뽑아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구별된 자는 구별된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문서에 도장을 찍었으면 그 도장 찍은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왕은 한 사람입니다. 백성들 중에 그를 구별하여 세우는 의식으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2.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름은 진액입니다. 그 진액을 부었으니 풍성한 것이지요. 시 133:2에 보시면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다” 하였는데 여기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으로 흘러 옷깃까지 내린 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큰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눅 2:11에 보시면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였는데, 이 “그리스도”란 뜻이 “기름 부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로부터 기름부음받으신 일은 없지만 기름은 어디까지나 상징이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부으심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요 1:14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그중에도 성령충만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3. 깨닫게 하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의 성소에는 의미를 가진 성물들이 있습니다. 지성소의 법궤와 성소의 향단과 떡상과 등대입니다. 이것들이 다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상징물인데 불빛이 있어야 보일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곱촛대를 세우는 것인데, 그 촛불은 기름이 타야 빛을 발하겠지요. 그래서 사물을 밝히기 위하여 등잔에 자주 자주 기름을 부어야 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은사를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직접 말씀하신 성경이 있습니다. 요일 2:20에 보시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하셨고, 요일 2:27에서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기름부음을 성령님의 가르치시는 은사로 상징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요 4:25을 보시면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하므로 기름부음받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자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깨닫는 은사 또는 변하여 새사람되는 은사를 뜻하는 것이요,

4. 형통하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기름을 약용이나 윤활유로 생각해 보십시오. 약용은 병을 고칠 것이고, 윤활유는 돌아가게 하겠지요. 사울이 암나귀를 찾으러 나가서 3일 동안 다녀도 못 찾았습니다. 그 다음에 집에 계신 부친이 염려할 것까지 걱정이 되었는데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고, 대접을 잘 받은 후에 성을 나서면서 기름부음을 받았지요. 그리고 헤어질 때 사무엘이 말하기를 “네가 베냐민 경계…라헬의 묘실 곁에 가면 두 사람을 만날 것이고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암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형통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성도들도 각자가 기름부음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성령충만이고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기름치면 뻑뻑한 기계도 잘 돌아가듯이 하나님이 성도의 행사에 형통하는 복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왜 신약시대에는 목사, 장로 임직할 때 기름을 붓지 않습니까? 하시겠지요. 그것은 시대가 발전하면서 의식문화가 바뀌기 때문에 그렇고, 그런 근거에 의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기름 붓는 의식을 안수로 대치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할례가 세례로 변했고, 세례도 강물에 가서 받던 것을 집에서 물 뿌려 받지 않습니까? 옛날에 장례식 지낼 때 거성 옷을 입던 사람들이 이제는 완장하나 띠면 상주인줄 알아보는 것처럼 의식은 문화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뜻만 잘 아시고 구별된 생활과 성령충만에 임하실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개혁의 성질과 목표 (삼상 10:6) 목록으로


“개혁의 성질과 목표”란 제목으로 몇 말씀드립니다. 저는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개혁자가 개혁을 표방하는 선문에 “모든 것은 성경대로 하자”는 구호를 썼습니다. 이것은 개혁의 성질과 목표를 나타낸 것입니다. 개혁의 성질과 목표는 성경대로 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을 시도하는 생활에서부터 성경대로 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1. 개혁은 어떤 기성교회나 단체의 부조리를 거부하는데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개인 또는 자연인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을 개혁자로 비유했을 때 그가 자기 아비 집의 신당을 훼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처럼 하여야 하고, 또 사무엘 선지자를 개혁자로 본다면 삼상 7:3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먼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고 한 것처럼 개혁자도 모든 부조리에서 떠나 하나님만 섬기는 자세, 즉 성경만 표준하는 자세로 돌아와서 사람의 눈치나 전통에 얽매임 없이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리모델링하는 것보다 헐고 새 집을 짓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많은 성직자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 때 세례요한처럼 생활하지는 않아도 그런 정신과 검소한 생활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상류층의 생활에 임하시지 않으실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이 세상적 사치나 욕심을 가지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고후 8:9). 그런 의미에서 상류층의 성직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주님을 따르기 전에는(마 19:21) 개혁의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2. 개혁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어 개인적 생활에서부터 개혁적 자세를 나타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개혁자들이 개혁을 시도할 때, 사람단체의 힘이나 물질관계, 선전 등으로 개혁을 시작하는 것 같은데 어찌보면 물량주의에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심령과 생활의 변화를 도외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들레시지 않았고(마 12:19), 누룩같은 역할을 권장하셨습니다(마 13:33). 성도의 누룩같은 역할은 성도가 개인적으로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자기 주변부터 밝히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상 10:6을 보시면 사울이 평범한 농사꾼이었으나 그가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예언도 할 수 있었고,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을 음미하셔야 합니다. 사울은 성령충만을 받기 전에도 열 가지 미덕이 있었습니다(준수한 체구를 제하고, 삼상 9:3~4, 5, 7~8, 20, 21, 10:16, 21~22, 11:13, 15). 그런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즉 더 힘이 있었던 것처럼 개혁자들도 자신이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금력, 명예의 힘을 나타내거나 의지하려 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 변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수만 많고 조직만 커지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3. 개혁은 개혁적 신앙인이 지도하되 그 개혁성을 계속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앙은 민감한 것이고, 성경해석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치에서도 색깔문제, 코드문제가 나오는 것처럼 신앙세계는 이런 것이 더욱 민감한 세계라고 봅니다. 아예 기독교 단체를 둘로 나누어서 사회적 복음주의와 신령적 복음주의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사회적 복음주의는 사회정화나 국가발전을 위하여 양심적으로 노력하고, 신령적 복음주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는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교계는 여기에 구별없이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의 단체는 그 개혁성의 목표에 따라 코드가 맞는 성도들끼리 모여져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단체는 많은 목사를 그들의 신앙고백과 실력에 따라 모집을 하는데 그들의 각자 행보에 대하여는 자유를 줍니다. 만일 그 자유로운 성직자들이 개혁의 진정한 목표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더 큰 혼란만 초래할 것입니다. 진리와 개혁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하겠지요(마 7:13).

4. 개혁은 먼저 회식성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성직자가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 특수한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장황스러운 것은 과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성의를 입고 명예적 덕을 보라는 말씀도 없고, 성의가 은혜를 더한다는 말씀도 없는데, 그것을 입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삼상 9:18~19을 보면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고, 사울은 사무엘을 찾는 중이었는데 사울이 사무엘에게 묻기를 “선견자의 집이 어디냐”고 하였스빈다. 이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평범한 옷차림으로 다닌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을지라도 “그가 생존한 동안 나라가 평안할 만큼(삼상 7:15~17) 하나님은 그를 간성으로 쓰셨던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혁의 목표는 정통적 신앙고수이므로 확실한 신학사상의 일치로 단결하여야 하고, 물질, 명예, 조직 등 유형한 것을 내세우거나 앞세우지 말고 오직 말씀과 성령님에 의존하여야 할 것과, 그 누구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딤전 6:5). 교회나 선교단체가 성직자를 고용하려면 그만한 선교비를 지출해야 한즉 부조리가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고 사명적 헌신자가 많이 일어나서 자기 십자가(생활문제, 마 16:24)를 자신이 지면서 국내 또는 외국에 거주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읽으면서 깨닫는 교훈 (삼상 12:1~7) 목록으로


1. 삼상 1장을 읽으면 8절에서 하나님이 한나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브닌나가 한나를 번민케 하였고, 그 다음에 한나가 기도를 하고 서원을 하였으며, 19절에서 하나님이 생각해 주셔서 사무엘을 낳고 서원대로 그를 양육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무엘같은 선지자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그런 방법으로 섭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뜻이 잘 안 이루어지거나 격동, 번민이 있을지라도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정만 받으면 얼마든지 형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시는 줄 압니다.

2. 삼상 2장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그 사실을 알고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즉 자식들과 연대적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주하신즉 한 날에 삼부자와 며느리까지 다 죽고 몰락하였습니다. 성직의 타락은 개인 집안 뿐 아니라 나라에까지 큰 타격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제사장 집안을 저주하시기 위하여 블레셋과의 전쟁까지 일으키신 것을 볼 때,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변란이 일어난 사례가 있습니다.

3. 삼상 4장을 보시면 선민들이 블레셋에게 패하자 법궤를 갖고 나가 싸워서 이겨보려 했지만, 오히려 패하고 법궤까지 뺏겼지요. 법궤를 전쟁 이기는 물건으로 착각한 것을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법궤가 독립적으로 능력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하나님이 제사장을 저주하신 전쟁에 성물을 이용한 것은 우상주의 신앙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성물 숭배주의가 없어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살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삼상 5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법궤 곁에 있는 다곤 신상을 부수시고 독종과 쥐의 재앙을 내리신 즉 그들이 하나님과 법궤의 권위를 인정하고 되돌려 보냈습니다. 사 42:8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삼상 6장에서 법궤를 실은 수레를 멘 두 마리의 암소는 수레도 잘 끌었고, 송아지의 인정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도 않았고, 목적지에 와서는 그대로 제물이 되었으니 성령의 지도를 받으면 소도 이렇게 충성하거든 하물며 성도이랴!

6. 삼상 7:14에서 “사무엘이 산 동안 평화가 있었다”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국방의 보루가 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그러하였습니다(왕하 2:12). “의인 10명으로도 소돔을 보존한다” 하신 것처럼 한 사람의 비중도 이만큼 크다는 것을 아셔서 혼자라도 바로 서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7. 삼상 8장을 보시면 백성들이 왕을 구했을 때 그 제도가 좋지도 않으려니와 만왕의 왕을 멀리하고 사람을 왕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잘못하는 것인데도 그것을 구하는 백성들의 무지가 안타깝고, 하나님은 안타까우시면서도 백성들의 자유와 신앙 수준대로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후 직접 지도(성경)를 받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면 그만큼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는 신앙보다 골방으로 들어가는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고, 은혜를 잊었으니 감사할 것이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멀리 계신즉 기도하지 않다가 대적의 침략이 오니까 임금의 통치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하나님이 보호, 인도 하시는 체험을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다가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은 크게 위험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8. 함께 첨부된 설교 중 “사울의 우월성”과 “징조와 교훈”이란 설교도 참고하십시오. 사울이 왕될 때에는 그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도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가 씨가 되어 제사장직을 탐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권세보존에만 급급하다가 불행한 종말을 당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깨끗하게 시작하여 깨끗하게 자기의 생애를 끝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깨끗하게 시작한 것은 성소에서 나실인처럼 양육받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두 아들들이 사사로 있으면서 옳게 못하여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나 삼상 12:1~5에서 늙은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 왕, 백성들 앞에서 심판을 자청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늙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 생애에 거리낀 일이 있다면 그것을 회개로 청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임종에 앞서 자기를 반성하고 회개한 다음 깨끗한 입장으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사무엘의 그런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몇일전 EBS TV에서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절차를 연극처럼 재연하는 것인데,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 눕고 뚜껑을 닫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붓는 것인데 수의를 입고 관에 눕기 전에 유언서를 읽는 것입니다. 그 유언서 내용에 반성과 회개가 있더군요. 깨끗한 생활과 죽음을 권장하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면서 즉각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요나단의 좋은 점 (삼상 14:1, 4~15) 목록으로


“요나단의 좋은 점”이란 제목으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은 삼하 1:18~27절에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죽었을 때 “활 노래”란 시를 기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이 활 노래는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한 노래인데, 사실은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입니다. 사울왕은 죽을 때까지 다윗이 죽기를 바란 사람인데 다윗이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은 한 나라의 왕이 죽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고, 요나단은 다윗과 절친한 친구로서 우애와 협력이 좋았던 사이요, 다윗이 사울왕의 표적이 될 때는 그것을 알려주어서 다윗을 피하게 하였고, 자신이 큰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다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삼상 18:1~5, 29, 19:7, 20:17~25, 23:17). 사울왕은 첩을 얻은 기록은 없습니다. 본처 아히노암에서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 세 아들과 메랍과 미갈 두 딸만 있었으니까 그 중에 요나단이 장남으로서 무용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지요. 요나단의 좋은 점을 살피면,

1.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믿음을 증명 한다면,

1) 하나님의 뜻에 의한 전쟁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습니다. 본래 가나안족은 선민들이 애굽에서 400년 종노릇할 때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작정된 자들이고, 그 심판의 몽둥이를 선민의 칼로 쓰시는 것입니다. 출 9:3~4절을 보시면 “그들을 파하사 엎드러지게 하신다” 하셨고, 삼상 15:3에서도 “아말렉을 깨끗이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전쟁인데 거기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복음 사명자가 그 사명에 생사를 거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는 “목숨 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의적으로 생각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표징을 보면서 전쟁을 하였습니다. 삼상 14:10을 보시면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을 기습할 때 그쪽에서 쫓아오면 싸움을 피하고 올라오라 하면 그것이 그들을 붙여주신 하나님의 표징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표징을 보고 행동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성경에 비취어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승낙하시면 하는 것이 역시 믿음 있는 증거요,

3)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 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수의 다소에 있지 않다” 하였고(신 20:1~4), 또 10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 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힘을 의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 중심에 서고, 매사를 여쭈어 행하며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행하는 신앙이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요나단은 좋은 우정을 갖고 산 사람입니다. 삼상 18:1~4, 20:42을 보시면 다윗과의 우정이 기록되었는데, 서로가 “그 친구를 생명같이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그 친구 다윗을 보호해 주고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위은 요나단이 죽었을 때 활 노래를 불러 주었고, 나중에는 요나단의 자녀들도 크게 보살펴 준 것입니다(삼하 9:1~8). 요나단의 그 우정의 정신은 다윗에게만 해당한 것이 아닐 것이요, 이는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신일 줄로 믿는 것입니다.

3.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삼상 14:11~15에 보시면 요나단이 적진을 기습할 때 자기와 자기의 병기든 자 두 사람이 감행하였고, 또 적진에 잠입하는 길에는 보세스와 세네라는 암벽이 있었는데, 적들은 누구도 그 암벽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믿고 방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 암벽을 타고 넘어가므로 적진에 들어간 것입니다(신 31:6). 그리고 그 사실을 사울왕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렸다면 두 사람이 적진에 들어가는 것을 무모한 일로 생각하여 막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갈 때, 그 사실을 사라에게 알리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선한 일에 용기를 내면 반드시 성공을 합니다. 요나단에게도 그때에 하나님이 지진으로 도우셔서 큰 전과를 얻지 않았습니까?(15절)

4. 명예욕이 전혀 없는 사람이요, 실력주의자입니다. 요나단은 왕위를 이어 받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가 왕위 보존을 위하여 능력있는 다윗을 제거하려고 할 때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기를 만났을 때 피할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까?(삼상 18:29, 20:9~10, 20~23)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있으면서 전공을 세우는 것을 본즉 자기보다 훌륭한 것을 알았고(18:5~7), 또 백성들의 여론을 본즉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하니까 나중에 왕될 자는 다윗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23:17을 보시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다닐 때 요나단은 다윗이 숨어 있는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을 만나 말하기를 “장차 네가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왕자가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실력대로 일을 맡아야 나라가 든든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명예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치가들이 실력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양심입니다. 그 당시에 왕에게 바른 말 한 사람은 요나단과 높에 있는 제사장들 뿐이었습니다(삼상 22:14~15, 19). 그 제사장들은 다윗을 충신이라고 했다가 다 죽었지요. 삼상 19:4~5을 보시면 요나단은 과감하게 “다윗은 충신인즉 그를 해하면 안된다”는 조언을 강하게 하였고, 또 사울이 “금식을 하고 적을 추격하라”고 맹세(삼상 14:24~27) 시킨 일에 대하여서도 지혜로운 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으니, 요즈음으로 말하면 왕자가 야당이 된 셈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양심이 권세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요나단의 좋은 점 다섯 가지를 고찰해 보았습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본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13. 순종을 배웁시다 (삼상 15:22~23)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순종을 배우자”는 교훈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전격적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잊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왕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사울뿐일 것입니다. 처음 왕이 될 당시에는 타에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이 왕 되게 하셨는데, 왕된지 2년 후부터(삼상 13:1)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사를 드린 일도 있고(13:9), 군사를 피곤하게 다그친 일도 있었으며(14:24), 나중에는 자신의 왕권유지를 위해서 인권을 탄압하고 살생을 감행하기도 하였는데 그보다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려 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이 “아말렉을 치되 짐승이나 어린아이까지라도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섭리에 사울을 쓰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왕 아각과 값나가는 우양을 남긴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의 실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심판 섭리를 잘 몰랐고, 말씀의 일점일획까지 민감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순종보다 제물을 더 좋아 하시는 줄로 오해하였고, 또 백성들이 “그렇게 하자” 하니까 그들을 의식하고(15:9, 15, 21) 두려워하여(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니, 이것은 인본주의를 신본주의보다 앞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멀리하셨고, 그의 왕위를 끝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사울왕은 뉘우치면서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기까지 매달리며 은총을 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불순종이 이렇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순종을 배우는 일에 주력하셔야 하겠습니다. 히 5:8~9에 보시면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셔서 온전하게 되셨다” 하였고, 바울사도도 딤전 4:7에서 “경건을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1. 순종을 배워야 할 성도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드는 것이 값진 제물(헌금, 봉사)보다 나으며 거역하며 완고한 것(회개하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 행위과 같음”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불순종 하면 쓰시다가도 버리시는 것이 마치 물건을 쓰다가 격에 맞지 않으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순종 대상을 아셔야 하는데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계명에 순종하시려니까 계명을 배워서 할 것과 말 것을 잘 구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계명은 나타난 계율을 의미합니다.

2) 계명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순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2부로 나눕니다. 전반부는 4계명으로 하나님 경외에 대한 것이고, 후반부는 6계명으로 사람 사랑에 대한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이 열 가지 계율이 모든 행위를 다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원리에 따른 목적과 뜻이 많지요.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달란트를 맡겼다”고 할 때(마 25:15) 그 맡긴 뜻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달란트를 맡긴 뜻은 보관에 있음이 아니요 증가 시키는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를 보시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연구하시고 설교를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셔야 하고,

3) 양심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제 2의 계명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롬 2:14~15). 마음에서 통제하는 양심에 복종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4)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뜻에 순종 안하는 것을 효도라 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효도가 분명히 자신의 앞길을 복 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순종의 대상을 이만큼 배우셨으면 순종의 방법도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1) 묻지 말고 또 뒤를 돌아보지 말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된즉 아멘으로만 받는다” 하셨고(고후 1:20), 따라서 “오직 지킬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120년 배를 만든 것이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이나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돈 것 등 모두가 무조건 순종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나가라” 하셨을 때 이유를 달 것이 많았겠지만 순종한즉 모든 뒷일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즐겁게 순종하셔야 합니다. 믿음생활이나 계명 지키는 일도 즐겁게 자원하여 하셔야 합니다. 사 1:19에서 “너희가 즐겨 순종할 때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하셨고, 신 15:16~17을 보시면 “자원하여 종신 종이 되는 규례”가 있습니다. 종이 6년간 주인을 섬겼으면 7년째는 해방되는 법이 있으나, 그 종은 자기의 주인 섬기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종신 종 되기를 원하면 귀를 뚫어 증표를 삼고 그렇게 허락하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순종도 역시 즐거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다면 제물의 가치가 없어져서 구속사역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즐거움의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짐도 알맞게 지시고 즐겁게 뛰셔야 합니다.

3) 목표에 적중하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잘못된 열심은(롬 10:2) 목표에 적중하지 않겠지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씀이 있지요(마 23:24). 그것은 조건이나 이기주의에 따라 순종한다는 뜻이니까 목표에 적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명과 뜻의 전체적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4. 이 순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롬 1:5에 보시면 “믿어 순종케 되나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을 때 순종력이 생깁니다. 그때에 성령님이 주십니다.

2)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비우고(마 5:3) 자기를 부인할 때(마 16:24) 또는 자신을 날마다 죽일 때(고전 15:31) 순종력이 생깁니다. 대부분의 불순종이 자기 정용에 끌려 못하는 것이니까 자신과 세상을 멀리하면 그만큼 순종하기 쉬운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버린 자에 대한 섭리 (삼상 15:22~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버린 자에 대한 섭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울왕을 버리신 일과 관련하여 살피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선민들이 왕을 세워 달라 하였을 때 “이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일이라”(8:4~18) 하시고 허락지 않으셨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고 계속 원하니까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8:19~22) 하셔서 베냐민지파 사람 사울을 선택할 때 외모가 준수한 것만 보고(9:1~2) 왕을 세웠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는 “하나님이 합당한 자라” 하시고(행 13:23), 사람은 용모와 신장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16:7) 하시면서 다윗을 지적하여 기름을 붓게 하셨으나(16:12~13) 사울은 하나님이 직접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뽑아 세운 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사울을 왕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을 왕 세울 때는 간접섭리로(말리지 않는 정도) 버려두셨는데, 하나님이 바라신 뜻과 너무 멀어지니까 왕에서 물러나도록 버리신 것입니다. 삼상 15:11, 23, 26을 보시면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안됐다고 생각하심) 하셨다” 그래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고 왕을 버리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의 왕직과 관련하여 은혜의 길을 막으신 것인데 이것을 영적 구원문제와 관련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기도의 통로를 막으신 것”을 볼 때 다 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16:1). 사울을 버리신 것이 영적 관계까지 다 버리셨다면 이는 가룟유다나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된 것인데 그럴 수도 있는가?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를 안하시고(민 23:19) 은사과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시며(롬 11:29) 택한 자는 버리시지 않는다(창 28:15)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영적 구원의 대상은 버리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이나 가룟유다처럼 버리시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에 부합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적 방법을 허용하셨다가 다시 간섭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왜 사울을 버리셨습니까? 그 이유는 사울왕이 기대에 어긋날 만큼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면 버리시고 심판하십니다. 사울의 죄를 살피면,

1) 은혜를 모르는 죄입니다. 사울이 왕 될 때 하나님의 인도섭리로 된 만큼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를 믿고 감사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고(15:11, 17),

2) 제사장직을 탐하여 임의로 제사를 드린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죄 같은 것입니다.

3)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여 불순종한 것이요(15:2~3, 9, 24),

4) 거짓으로 변명하면서 회개하지 않은 것이고(15:15),

5) 말씀을 버렸다 하셨으니(15:23)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울의 왕이 된 것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이렇게 특권 주신 것을 버리시면 어떤 절차와 어떤 방법으로 버리시는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버리시면 기도의 줄이 끊깁니다. 16:1을 보시면 “내가 사울을 버렸는데 왜 너는 그를 위하여 슬퍼하느냐” 하셨으니 이 말씀은 기도해도 소용없고 동정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들도 기도가 멀어지면 그것이 하나님과도 멀어지는 절차라고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의 줄이 끊기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2) 왕의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준비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명하여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으니까요(16:12). 왕의 권위가 서서히 깨집니다. 사울의 타락이 왕된지 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왕을 버렸다” 하시고도 38년동안 왕노릇하게 하시면서 서서히 등불을 끄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다음 지도자를 준비하시는 섭리이겠지요. 가나안족을 서서히 쫓아내시는 것처럼(출 23:29~30, 신 7:22), 그러니까 하나님의 버리시는 섭리가 천천히 진행되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3) 악신에 사로 잡혀서 옳지 않은 행동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사울이 악신에 잡혔다”(16:5)는 것은 번뇌가 생기고 자기 마음을 옳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미워하고 그에게 창을 던지는 것 아닙니까?

4) 그 다음에는 장애로운 일이 생깁니다. 그것이 이방족의 침략입니다(17:1). 삼상 7:13~14을 보시면 (그때는 사울이 왕 되기 전임)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뺏겼던 성읍이 회복되고…평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즉 외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한을 자기 힘으로는 진압을 못합니다. 골리앗이 나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연약을 당하는 것이지요. 이때 다윗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하니까 다윗은 올라가고 사울은 인기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5) 사울이 다윗을 죽이러 쫓아다니고 제사장 85인까지 죽였을 때(22:1~24:22) 사무엘 선지자도 죽었습니다(25:1). 사무엘 선지자는 때가 되어 데려가셨지만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고갈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말씀이 고갈되면 버리시는 시작이 아닐런지요.

6) 말씀이 없고 선지자가 없으면 거짓 선지자에게로 끌려갑니다. 그것이 곧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것 아닙니까(28:5~7)? 이것은 마치 성도가 말씀 지식이 없자 세속이나 이단을 따라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단을 믿으면 참으로 돌아오기 어렵겠지요. 아편 끊기 어려운 것처럼 될 것입니다.

7) 마지막은 전쟁에 죽도록 버려두십니다(31:3~4). 시편기자는 91:7에서 “천인, 만인이 엎드러져도 이 재앙이 가까이 못한다” 하였는데, 하나님의 버림이 되면 하나님이 전쟁을 죽일 기계로 쓰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시 7:13).

설교보충 15. 하나님의 보호 섭리 (삼상 19:23~24) 목록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합당한 자로 보셨고(행 13:22)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셨으며(삼상 16:13) 그를 메시야 모형자로 쓰시기로 하셨으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섭리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를 배우시면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저희들에게도 은혜 주시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 하는 것입니다. 시 40:2을 보시면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가 막힐 수렁과 웅덩이에서 끌어올려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삼상 18:29을 보시면 “사울은 다윗의 평생 대적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왕 되게 하시려니까 왕을 상대하는 핍박과 위험을 견디는 연단을 주신 줄 압니다. 사울은 왕된지 2년후(13:1)부터 잘못하기 시작했고, 다윗을 알게 된 후 약 35년쯤 다윗 죽이기를 쉬지 않은 줄 압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1. 다윗의 최초 위험은 골리앗과 맞대결 할 때였습니다. 목동 소년과 유명한 장수와의 대결인데 이때에 다윗은 하나님이 골리앗을 자기에게 붙여주실 줄로 믿었습니다(17:46). 적과의 전쟁에서는 이겨야 자기가 사는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14:10, 붙이심).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쟁에 이기게 하여 원하는 자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물맷돌을 힘 있게 던지는 것과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도록 하나님이 섭리를 하신 것입니다. 전쟁할 때마다 이기게 하셨으니까요.

2. 사울이 미친척 하면서 단창을 던질 때였는데 두 번은 다윗이 창을 피했고(18:11~13) 한번은 창이 벽에 박혔으니(19:10) 이때에 다윗이 민첩하게 피한 것도 하나님의 보호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피할 힘도 주시고 또 던지는 자의 실수에도 섭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 18:34~35을 보시면 “주께서 내 팔로 놋활을 당기게 하시고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활을 잘못 쏘거나 방패가 능숙하면 찔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섭리하셔서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3.도움 줄 사람을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천사의 도움도 받았지만(왕상 19:5) 하나님은 그보다 앞서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제일 먼저 미갈(처, 사울의 딸)이 도망가게 하였고(19:11), 그 다음에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면서 서로 도울 것을 맹약하고(20:42) 사울의 눈치를 살펴 도망가게 하였고, 또 놉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도움을 주었으며(그 일로 제사장 85명이나 희생되었음, 22:9, 17~19), 또 그 외에도 가드왕 아기스가 이방왕이지만 은혜를 베풀었고, 그때 다윗의 신복은 400에서 6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22:2, 23:13). 아비가일 여인도 그를 도왔고(먹을 것을 제공하고 죄짓지 않게 하였음), 25:32을 보시면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였으니, 이는 “아비가일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보내심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늘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았을 때는 친구 후새의 도움이 컸고(삼하 15:33~34), 많은 신복들과 마하나임에 피신했을 때는 로글림 사람 바실래가 생필품을 지원하였습니다(삼하 17:27~28). 누이의 아들인 요압과 아비새도 큰 도움을 주었지요. 이렇게 여러 종류로 돕는 사람을 붙여 주셔서 다윗의 생명과 생활을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우리 주위에서 서로 돕는 이웃들을 예사로 생각지 마시고 반드시 하나님이 붙여주신 은혜로 아시고 감사하며 늘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도 꼭 그런 도움 받은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역사적 지배로 다윗을 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자이시고 만유의 주로서(대상 29:11~12) 하늘을 펴시고 만상을 명하시는 분이라(사 45:12, 학 2:6~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곧 역사의 지배자란 뜻이지요(시 103:19). 사울왕이 제사장 85인을 죽였을 때, 다윗이 십 황무지 산골에 있다가 마온으로 피했는데 사울이 그 사실을 알고 이 잡듯 수색해 옵니다. 그때 삼상 23:14을 보시면 “사울이 다윗을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하였고, 그 아니하시는 방법이 다윗이 숨은 마온에 가까이 올 때 “블레셋의 침략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추격을 취소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23:14, 19, 27). 이것이 다윗을 보호하시는 역사적 섭리인 것입니다. 흔한 말로 “줄 잘 서야 되고 시기를 잘 타야 한다”고 하는데 성도는 그것을 우연이나 사람의 지혜로 알면 안됩니다. 또 한 가지 실예를 들면 다윗이 가드에 망명하였을 때 가드왕이 “이스라엘을 치는데 합력하자” 했을 때 난처한 입장이 됬는데 출전을 하는 도중에 가드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의심하여 함께 전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동족 치는 전쟁의 위기를 면했지요. 그때 자기가 거처한 시글락에 온즉 아말렉의 침략을 받아 가족들이 다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출전 취소로 왔기 때문에 아말렉을 추격하여 복구를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렇게도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롬 8:28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5.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씀으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뜻이지요. 다윗이 라마나욧으로 피신하였을 때 사울이 사자들을 보냈으나 그들이 다 말씀의 감동을 받고 다윗을 못잡아 왔지요. 그래서 사울이 직접 왔다가 자신도 감동을 받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이나 말씀의 능력은 큰 것입니다. 오늘은 성경말씀이 그 역할을 합니다. 그 당시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직접 주시기도 하시였습니다(22:5, 23:11~12). 삼상 30:6에서는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섭리 속에서 다윗이 보호 인도를 받다가 결국은 사울이 블레셋 군에게 죽습니다(31:5). 사울은 블레셋 군에게 다윗을 죽게 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지만 결국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18:21).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폈습니다.

설교보충 16. 아비가일과 다윗의 대화 (삼상 25:23~35) 목록으로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다윗의 무리들이 엔게디 광야에 있을 때, 그 근처 마온이란 곳에 큰 목장이 있었는데 그 주인은 나발이란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아름답고 총명하나 나발은 어리석고 완고하며 그 행사가 다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칠 때에 짐승이나 대적의 위험이 따르지만 다윗의 군사들이 울타리처럼 파수가 되어 있어서 목양 안전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나발의 집에 양털 깎는 행사가 있다는 말을 다윗이 듣고, 다윗이 음식을 구하여 자기 소년들에게 먹이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어 그 사정을 말할 때 정중하게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본래 양털 깎는 행사는 경사스러운 일이라 잔치로 손님 대접을 하면서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 나발이 딱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다윗의 공로를 치하하지도 않고, 오히려 다윗이 주인에게 죄를 범하고 도망친 자처럼 모함하는 말까지 하니까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군사 400을 거느리고 그 집 남자들을 다 죽이러 가는 중인데, 그 소식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려졌고, 아비가일은 크게 놀라서 푸짐한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마중 나와 다윗을 만난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남편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다윗의 노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지혜롭게 말한즉, 다윗이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노와 보복을 풀고 오히려 축복하고 헤어진 후 나발이 죽은 다음에 아비가일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한 사실이 25장의 기록인데 여기에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과 다윗의 대답 중에서 귀한 교훈들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1. 24절에서 “남편의 죄악을 내게로 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의 죄를 대신 담당해 보셨습니까? 부주의로 다른 사람의 차량에 손해를 입히고 뒤처리를 해 보셨습니까?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보험으로 차를 고쳐주고도 시간수당과 사업 손해를 거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험이 사고를 담당해 주면 큰 공로이듯이 타인의 죄를 담당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란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이요, 죄를 담당하는 사랑 이상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2. 26절에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인데 다윗이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막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신 32:35, 롬 12:19을 보시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운 자를 미워해도 원수 갚는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미운 자를 미워하고 기도대상에서 제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깨달은 것은 “내가 원수를 미워하면 보복도 옳게 못하면서 죄만 짓고, 또 내가 미운 자를 미워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맡아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경대로(마 5:44) 미운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다윗은 나발을 원수로 여겨 죽이려고 가다가 아비가일을 만났고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냄을 받아 다윗으로 하여금 원수 갚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수긍했을 때 하나님이 그 이튿날 나발을 죽이신 것입니다.

3. 27~28을 보시면 “가져온 이 에물을 받으시고 여종의 허물을 사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죄가 없었지만 남편의 죄를 짊어진 것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 된 것이고, 본래 나발이 죄인 된 것은 의리없이 음식을 안 보낸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까 그 보상으로 예물을 받고 용서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냥 용서 하시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대속물을 받고 용서하시거든요. 그 대속물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아닙니까? 다윗이나 하나님도 예물에는 약한 것입니다. 다윗도 예물을 받고 용서를 하였고, 하나님도 예수님의 희생을 받으시고 용서 하셨으니까요.

4. 28절에서 “하나님이 내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라” 하므로 다윗이 왕될 것을 예고하였고, 또 같은 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것임을 안다” 하므로 다윗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존된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 말하기를 “내 주의 일생에 악한 일을 찾을 수 없다” 하였으니, 이 뜻이 다윗이 정의롭게 살았다는 뜻도 있지만 그가 메시야 모형임을 나타낸 뜻도 있는 것입니다. 또 29절을 보시면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이 생명 싸개로 싸서 보호하시듯 지키실 것이고 다윗의 원수는 물매로 멀리 던지듯이 없어지게 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선지자로 예언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앞을 내다보는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 30절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의 선을 보시고 왕을 세우실 때 무죄한 피를 흘렸거나 원수 갚는 일을 하였다면 그 일이 크게 거리낌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진리에 어긋난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감동을 받고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2절을 보시면 “너를 보내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네 지혜를 칭찬하며 네가 복이 있을 것이라” 하고, 그 선물을 받은 후 “평안히 가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도는 진리를 말할 때 듣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아비가일의 미모보다도 그의 신앙과 지혜로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 다음날 그의 남편 나발이 충격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비가일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할 의욕을 갖고 소식을 보냈더니 아비가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여종만 데리고 와서 그의 아내가 되었고, 나중에 첫 왕비가 되었으며, 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은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옳게 선택한 것도 교훈이 되고 아비가일의 한 일도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다윗과 관련된 말씀들 (삼상 26:7~13) 목록으로


제가 사무엘상하를 살피면서 강론도 쓰고 부분적 설교문도 썼는데 설교 한편 분이 못되는 부스러기 내용들을 버릴 수 없어서 여기에 정리를 한 것입니다. 가다라의 여인은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왔을 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만 주셔도 자기 딸의 병이 낫겠다”고 한 것처럼(마 15:27) 부스러기 은혜를 귀히 여기서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도 5병 2어의 이적을 베푸신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고 하셨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부스러기에서도 많이 주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1. 사울은 나라를 위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인기가 다윗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다윗은 많은 위기를 겪으며 피신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울왕이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두 차례나 창으로 다윗을 찌르려 하였고, “100개의 양피로 사위를 삼는다” 하면서 죽을 기회를 주었으며, 미갈의 방에서 병들었다 할 때도 자객을 보냈었고, 제사장들이 다윗을 돕고 변호했다 하여 85명을 죽였으며, 사울이 본문에 나타난 하길라 산에 온 것도 정병 3,000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러 온 것이니, 사울은 다윗의 큰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시 40:2을 보시면 “기가 막힐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지셨다”고 하였습니다.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시 91:7에 보시면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엎드러져도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 시 127:3에 보시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휴식이 필요할 때 잠을 잘 자게 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사울의 무리들로 깊이 잠들게 하시므로 다윗이 그 곁에 가서 창과 물병을 갖고 와도 모르게 하셨으니 이는 대적을 잠들게 하여 의인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시 4:8에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유의하셔서 자고 깨는 문제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으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치면 죄가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리 행사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로 세운 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시대의 기름부음된 직임은 목사라고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을 대리한 교회의 대표자이고 또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례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직임을 존중히 여기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부음받은 자가 원수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다윗은 자기 생명을 찾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그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치면 죄가 된다”는 점과 또 하나는 “원수 갚는 권이 사람에게 없고 하나님께만 있다” 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롬 12:19). 그러면 기름부음받았다는 사람이 마음대로 악을 행할 때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요. 삼상 24:12을 보시면 “하나님이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시되 자신이 직접 원수에게 손을 대지 않아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 갚는 일을 시도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안 하실 것이고 오히려 원수 갚는 자만 정죄를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름부음받은 종에 대한 신념과 개인적 원수는 스스로 나서지 않아야 함을 철저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블레셋 군인들로 그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10절).

4. 다윗은 은혜 갚는 정신이 투철하였습니다. 성경에 은혜를 악으로 갚은 사람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도 배신하였고(삼상 24:17~18), 다윗이 자기를 위하여 싸워준 은혜도 배신하였습니다. 결국 가룟유다처럼 된 것입니다. 자기를 목자에서 뽑아 왕을 세우시고 보호 인도하신 은혜지요. 그래서 그 은혜의 보답으로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하였더니 하나님이 사양하셔서 결국 재료준비로 끝냈습니다(대상 22:6~10, 28:2~3). 그 다음은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입니다. 요나단은 친구이면서 다윗이 위기에 처할 때 피신하도록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울왕가가 망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그 집안의 유산을 다 물려주고 므비보셋을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배려하였지요. 그 다음에는 암몬왕 나하스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어서 그것을 갚으려고 했더니(삼하 10:1~2) 암몬의 신하들이 그 뜻을 모르고 정탐이라 하여 수모를 준 때문에 결국 싸움을 일으킨 사례가 있었습니다.

5.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삼하 7:16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메어올 때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기뻐하였으면 법궤를 하나님 본 듯이 기뻐하고 힘을 다 하여 춤추며 찬송하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처 미갈은 “왕이 춤출 때 체통을 잃었다”고 말했다가 오히려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라는 체통보다 어린이의 순진함이 더 귀한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더 자세히 살피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 합니다. 말씀의 부스러기 속에도 큰 은혜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