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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과 예레미야의 탄식과 기도 (애 1:1~11) 7 바로가기

제2과 증거와 기도 (애 1:12~22) 9 바로가기

제3과 하나님의 진로를 탄식함 (애 2:1~12) 11 바로가기

제4과 선지자의 증거와 기도 (애 2:13~22) 13 바로가기

제5과 예레미야의 받은 고난 (애 3:1~18) 16 바로가기

제6과 고난 중의 신앙 (애 3:19~39) 18 바로가기

제7과 고난 중의 설교와 기도 (애 3:40~66) 20 바로가기

제8과 재난에 대한 탄식과 비교 (애 4:1~11) 22 바로가기

제9과 범죄로 인한 진노의 상황 (애 4:12~22) 24 바로가기

제10과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애 5:1~22) 26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이 강론서는 본래 계획에 없었던 것이었으나 몇 편의 설교문을 요약하려는 과정에서 순서대로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평신도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시도록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예레미야의 입장만 이해하시면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범죄로 인한 선민(자기 민족)의 멸망의 참상을 애도하며 기도한 내용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선지자의 뜨거운 심정도 아울러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003. 9. 29.


필자 지 영 근 드림

 

예레미야애가 강론 서론 목록으로


이 애가서 강론을 읽으시기 전에 필자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에 수록된 애가서 개론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예레미야서를 읽으시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멸망 전에 예언한 것이고, 이 애가서는 유다 멸망의 참상에 대한 것과 선지자의 뜨거운 심정 표현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수록되었습니다. 고통이 연속되는 생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좋은 교훈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평신도가 읽으면서 이해하는 식으로 기록하였을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부분적으로나마 개론을 보충한다면 예레미야의 신분과 역사적 환경을 이해하심이 중요합니다.

1. ‘예레미야’란 이름의 뜻은 ‘일메야후’의 합성어로 “하나님이 던지심” 또는 “하나님이 멀리하심”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셨거나 선민을 버리신 일에 대한 기념 칭호로 느껴집니다. 예레미야는 렘 1:1~3에 기록된 것처럼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고, 19대 유다왕 요시야 13년(주전 585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 사역을 하던 중, 38년 후인 유다 마지막 왕 23대 시드기야 11년(주전 547년)에 유다 조국의 멸망을 체험한 것입니다. 요즈음 전쟁은 도덕성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실권자나 군인만 참살하지만 옛날 그 시대의 전쟁은 분별없이 창검으로 백성들을 죽이고, 양식을 늑탈하는 전쟁을 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공포와 참상이 오늘날과 다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전쟁은 무섭고 비참한 것입니다. 유다국의 국세가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에 먼저 요시야 왕이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임 당한(주전 598년) 후부터, 유다 나라는 애굽에 이어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하 36장과 렘 52장을 참고하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레미야가 유다국 말기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유다를 징벌하시는 시기에 예언을 하면서 죄의 책망과 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때문에(렘 25:9) 왕이나 백성들이 그의 예언을 불쾌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심한 핍박까지 하였던 것입니다(렘 28:24).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한 후에 친바벨론자로 낙인이 찍혔고, 무리들과 함께 애굽에 가서도 같은 예언(죄값으로 하나님이 바벨론을 드셔서 선민을 치시니 그 뜻에 순복하고 회개하라; 렘 27:11-14)을 하다가 돌에 맞아죽었다고 합니다. 렘 52:28~33을 보시면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간 기사와 여호야긴 왕이 포로된(주전 558년) 후 37년 후의 기사를 쓴 것을 볼 때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 후에도 26년을 더 살았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본서는 유다가 멸망한 후 어려운 상황들을 체험하면서 이 기록을 남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2. 본서 초두에 저자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대하 35:25에 기록이 있고 예레미야가 그 시대에 적합한 인물인 점과 문체가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내용과 같은 점(처녀 유다, 딸, 내 백성, 눈물 흘림 등; 애 1:15, 16, 2:11, 렘 8:21, 9:1, 13:17)이 많으므로 예레미야의 저자성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3. 개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각 장이 히브리어 알파벹 숫자인 22절로(3장은 66절) 통일된 점과 각 절의 초두 단어를 알파벹 순으로 넣은 점(3장은 3절씩 묶어서 알파벹 순으로 넣었음)은 시적 표현을 강하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

 

제 1 과 예레미야의 탄식과 기도 (애 1:1~11) 목록으로


1장은 두 번에 나누어 살피기로 하였습니다. ① 1~9절은 “예레미야의 탄식”이요, ② 10~11절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1. 예레미야의 탄식(1-9절)

본문의 3절만 유다(국가를 상대로 한 말씀)라 하였고, 그 이외의 말씀은 전부 예루살렘 도성을 상대로 탄식하였습니다. 1절의 이 성(城), 4절의 “시온의 도로”, 6절의 “처녀 시온”, 8절에서 ‘예루살렘’이라 하였으므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전화(戰禍)의 참상을 탄식한 내용입니다. 다윗 왕 때로부터 견고하였던 나라가 465년 만에(주전1012~547; 시드기야 11년) 망하였으되 심히 비참하게 망하였으므로 그 탄식 또한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1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읍의 황폐된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백성들이 벌 받은 사실을 슬퍼할 줄 아는 것이 선지자의 심정입니다. “슬프다 이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하므로 전쟁으로 죽고 포로로 잡혀가고 생활의 터전이 황폐되었은즉 희소하게 남은 자들이 소망 없이 쓸쓸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탄식한 것이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음”은 본래 유다국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국위를 떨쳤었는데(대상 22:18, 왕상 5:4)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한즉 외롭고 연약한 과부처럼 그 형편이 처량해진 모습을 탄식한 것이며,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다” 하였으니 “열방 중에 공주 됨”은 주변 국가에서 유다 나라를 공주처럼 흠모하고 받들었다는 뜻이요(왕상 10:1-10), “이제 조공 드리는 자가 된 것”은 요시야 왕 대에 국세가 약해진 때도 있었거니와(대하 36:3) 전체적으로는 바벨론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2절에서는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 하였으니 “위로자가 없는 이유와 또 친구가 배반한 이유는 전쟁의 참화로 죽거나 흩어진 상태인 점과, 또 한 가지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으므로(3:27~31, 렘 27:1~22, 32:1~5) 비애국자 또는 매국노의 취급을 받아 측근들이 대적자로 변하였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3절의 ‘유다’란 예루살렘을 초월한 국민적 대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유다는 많은 환난과 많은 수고로 사로잡혀 갔도다” 하였으니, 여기의 “환난과 많은 수고”란 전쟁의 위협에서 나라를 붙들기 위한 환난과 수고였을 것이고, 그것은 바벨론에 대한 반역이므로 척결의 대상이 된 것이며,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은 그들이 바벨론 군사들의 추적을 피하여 다른 열방으로 피난을 갔으나 평안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모든 핍박하는 자(바벨론 군사들)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즉 주위의 열방 국가들(애굽, 아라비아 등)까지 점령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4절에서 “시온의 포로가 처량하여 절기에(제사하러 성전에) 나가는 자가 없고 모든 성문이 황적함이여(출입자가 없다는 뜻)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다” 하였으니 제사장들은 성전의 황폐와 인종의 희소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이고, 처녀들은 끌려가야 하는 대상이므로 근심함은 물론 저도(그들 자신) 곤고를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5절에서 “저의 대적(바벨론)이 머리(지배자)가 되고 저의 원수(바벨론)가 형통함은 저(유다 국민)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징벌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하였으니, 그런 근거가 대하 36:10, 20과 단 1: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처녀 시온(예루살렘의 애칭)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牧佰(정치적 지도자)은 꼴을 찾지 못하는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같도다” 하시므로 망한 나라의 정치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쫓기는 형편을 나타낸 것입니다.

7절에서 “예루살렘(백성들)이 환난과 군박(전쟁 수난)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핍박받고 노예가 됨)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초라한 모습)을 비웃는다”고 하였습니다.

8절에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으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벌을 받아 초라하고 더러워진 모습) 전에 높이던 모든 자(유다 민족을 흠모하던 이방족)가 그 적신(헐벗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갔다”고 하였습니다. 존귀가 일시에 무너진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형편을 나타낸 것입니다.

9절에서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백성들의 대표적 죄악으로 여인들의 음행성 어린 노출과 방종을 지적한 것) 결국(죄로 오는 징벌)은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탄식하면서 여러 가지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2.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10~11절).

9절 하반부터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 하오니 나의 환난(민족의 수난을 연대적으로 당함)을 감찰하소서”, 10절에서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백성들의 보물은 물론 성전의 보물을 가져간 사실을 말함; 대하 36:18) 주께서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신 23:3, 느 13:1) 저희(이방인, 바벨론 군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백성들)이 보았나이다”, 10절에서 “그 모든 백성들이 (굶주린)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양식)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하므로 선지자가 자국민을 대표하여 어려운 정황을 사실대로 하나님께 아뢴 것입니다. 탄식과 기도가 다 사실에 근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 과 증거와 기도 (애 1:12~22) 목록으로


본문의 12~19절은 “백성들에게 증거함”이요, 20~22절은 “또 하나님께 기도함”입니다. 이 두 대지를 합하여 “증거와 기도”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백성들에게 증거함(12~19절)

12절의 “무릇 지나가는 자”란 말씀이 증거의 대상인데,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레미야의 말을 듣거나 근심하고 기도하는 자가 없으므로 선지자의 답답한 심정을 지나가는 자(재난대책에 관심 없는 듯한 자들)에게 함께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한 것으로 “너희는 (이 일에)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것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하므로 선지자는 자신의 괴로움 당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실하게 알린 것입니다.

13절에서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심”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깊은 마음까지 재난으로 괴로움을 주셨다는 뜻이며, “이기게 하셨음”은 재난을 주는 대적을 선민들 앞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것이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고적(외로움)하여 곤비하게 하셨다” 하시므로 적군에게 패배 당한 모습을 그물에 갇히는 물고기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14절의 “내 죄악의 멍에”란 예레미야가 민족의 죄를 연대적으로 책임지는 표현이고, “그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은 민족의 죄를 한데 묶어 큰 짐으로 부각시킨 표현이며, 따라서 죄짐으로 인한 피곤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음”은 죄짐을 진 상태에서 큰 대적을 만나 그 보응을 받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15절의 “주께서 내 지경(아군들 측)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하심은 선민의 군대가 대적 기만술에 패하도록 섭리하신 것과 술틀에 포도를 밟듯이 진멸 당하게 하셨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전쟁과 그 승패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삼상 17:47, 대하 20:15).

16절에서는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다” 한 것은 하나님만이 영을 소성(마음에 힘주심)시키시고 위로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때이므로, 가까이 계셔주시지 않음을 탄식한 것이요,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로워졌음”은 바벨론의 강세로 유다 민족이 외로워진 것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7절에서 “시온(하나님의 백성들)이 두 손을 폈으나(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모습) 위로할 자가 없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야곱(선민)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시므로 예루살렘이 불결한 자 같다” 하심은 8절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18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였으니 성도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하시다는 뜻이요(렘 12:1), “내가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였다” 함은 역시 민족의 죄를 연대책임 진 표현으로 죄와 고난의 원인이 자기 백성들 편에 있음을 고백한 것이요,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소년과 처녀들이 사로잡혀갔다” 하므로 전화를 당한 실상을 알린 것입니다.

19절에서는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속임수에 끌려가는 소년들과 처녀들을 부른 뜻)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행복을 준다고 속일 수 있음)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기아 상태)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다” 하므로 기아의 참상을 증거한 것입니다.

2. 또 하나님께 기도함(20~22절)

20~22절에서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민족의 죄)이 심히 큽니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적군의 포학)이 있고 집(사회의 내부 사정)에는 사망 같은 것(죽임 당할 위험)이 있나이다. 저희(이웃 사람들)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하셨으니 선민이 도움과 위로를 받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함이라고 한 것이요,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함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응징하실 날이 이르면 그들이 환난 당하는 선민의 처지로 바뀔 것이라는 뜻입니다.

22절에서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악을 인하여 행하신 것처럼 저희에게 행하시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나이다” 하심은 주께서 선민의 대적 바벨론을 응징하실 때 그들의 모든 악을 기억하시고 선민의 악을 인하여 응징하신 것처럼 그들도 벌하여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응징하실 때 선민이 당하는 괴로움과 그런 괴로움을 당하도록 전쟁을 섭리하는 일과 그런 지경에서는 선민이 오직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음을 나타낸 기도인 것입니다.

 

제 3 과 하나님의 진로를 탄식함 (애 2:1~12)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시종일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수 갚듯 진노하셨다”는 뜻을 강조하고, 예루살렘이 황폐된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① 1~4절은 “예루살렘 도성이 황폐된 것을 탄식함”이고, ② 5~7절은 “왕궁과 성전의 황폐를 탄식함”이며, ③ 8~9절은 “계획적인 진노로 말씀을 없애심”이고, ④ 10~12절은 “귀인과 어린이의 패망의 참상”을 슬퍼한 내용입니다.

1. 예루살렘 도성이 황폐된 것을 탄식함(1~4절)

1절에서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처녀란 존귀를 뜻하고 시온은 예루살렘 도성을 뜻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하므로 진노하신 하나님을 강조하였으니, 5절에서도 “주께서” 하셨고, 6, 7, 8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구름으로 덮으신 뜻”은 재앙을 내리신 장엄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왕궁, 성전, 처녀, 방백, 재물 등임)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진노의 뜻을 베푸셨고,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장소(땅을 발등상이라 하셨음; 사 66:1)에 애정을 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 “주께서 야곱(이스라엘족)의 모든 거처(북왕국, 남왕국 전부)를 (바벨론을 들어)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남방 유다국)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정치가들)을 욕되게 하셨다” 하였으며,

3절에서 “맹렬한 진노(바벨론의 침략)로 이스라엘 모든 뿔(권세자를 뜻함)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바벨론 군사들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크게 노여워 하시고 징벌하실 자세를 표현한 것)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다” 하셨으니 이는 도성의 점령을 불길에 휩싸여 탄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이) 원수같이 활을 당기시고 대적처럼 오른손(힘있는 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미움의 대상)를 살육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다” 하시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섭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왕궁과 성전의 황폐를 탄식함(5~7절)

5절에서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왕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다” 하셨고,

6절에서는 “성막(성전을 쉽게 훼파한 뜻으로 초기의 호칭을 사용한 것)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공회(선민의 회당)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하심은 유대인들의 왕과 백성들이 가장 의지하고 바라는 제사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성전을 훼파하셨는데,이는 그들이 왕과 제사장들은 멸시한 결과란 것입니다.

7절에서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집의 담)을 원수의 손에 붙이시며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지껄이는 태도)하기를 절기 날과 같이 하였다” 하였으니 이 뜻은 거룩하고 정결하여야 할 성전이 세속의 놀이터처럼 짓밟힌 것을 탄식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외식적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단을 아낌없이 훼파하실 것은 렘 12:7에서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아끼신 영광의 시설을 훼파하신 것입니다.

3. 계획적인 진노로 말씀을 없애심(8~9절)

8절에서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오래 참으셨지만 회개하지 않으므로 진노를 결심하신 것임; 암 3:6~7, 벧후 3:9)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하시므로 하나님은 진노의 재앙을 계획하시고 그 범위를 줄 띠워 정하시며 뜻하신 분량이 차기까지 하시는 일(손)을 거두시지 않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2003년 9월12일은 추석 다음날로 매미호 태풍이 지나간 날입니다. 그 태풍은 초속 60m로 강하였고 진로는 제주도로부터 남해 항구 주변으로 울릉도까지 지나간 것을 체험하였지요. 많은 방송 보도가 있었지만 바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의지하자는 신앙적 대화는 들어볼 수 없었으니 아쉬운 일입니다.

9절에서는 전쟁의 재난으로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유다의 왕과 방백들이 율법을 모르는 다른 나라로 포로 되었거나 흩어진 상태를 의미함)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말씀 계시)를 받지 못한다” 하시므로 말씀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왕상 19:12)이 멀리 떠나신 재앙을 탄식하였습니다.

4. 귀인과 어린이의 패망의 참상입니다(10~12절).

10절에서 “처녀 시온의 장로들(귀인을 뜻함)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권위가 상실되어 말할 입장이 못 됨)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탄식의 표현임; 수 7:6, 삼상 4:12, 느 9:1)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하였으니 “처녀들이 머리를 땅에 숙임”은 존귀와 자존심이 연약과 공포로 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로 인하여 “내 눈이 늘 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이는 괴로움의 극치를 표현한 것임)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가 길거리에서 혼미함은 먹지 못한 연고로 정신을 잃어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크게 다친 자)처럼 혼미하며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죽음의 뜻) 그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였으니 이는 굶어죽는 상태를 사실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선민의 죄로 인한 징벌은 이렇게 참혹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죄값을 다 치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 9:13).

 

제 4 과 선지자의 증거와 기도 (애 2:13~22) 목록으로


본문 ① 1~17절은 “증거의 말씀”이고, ② 18~22절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증거와 기도”란 제목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또 1대지는 세 가지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3~14절은 “큰 파괴와 속임 당함”을 증거한 것이고, 15~16절은 “원수들이 비소한 사실”이며, 17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시행하심”입니다. 그리고 2대지에서 18~19절은 “기도할 것을 권고함”이요, 20~22절은 “예레미야 선지자신의 기도”입니다.

1. 증거의 말씀(13~17절)

13절에서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예루살렘의 애칭)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하시므로 선민들이 멸망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인 바 재앙이 너무 심하므로 그 위로할 말이 풍부하지 않으므로, 무엇으로 비유할 어법조차 없음을 근심한 내용이며, 14절에서 위로의 말이 필요한 이유는 “파괴됨이 바다같이 커서 사람이 고칠 수 없이 된 일”과, 15절에서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거짓 선지자의 잘못된 예언들; 왕상 22:24, 대하 18:23)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죄를 통제하지 않은 뜻) 네 사로잡힌 것(죄에 깊이 빠진 것)을 돌이키지 못하고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여러 모양으로 속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15~16절에서는 원수들의 비소거리 된 사실을 말씀하셨으니 “무릇 지나가는 자(선민의 멸망을 기뻐하는 자)는 다 너희를 향하여 박장(손뼉 침)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경멸하는 뜻)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과거에 자랑한 뜻)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비소하였고), “너의 모든 원수(바벨론)가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었다. 우리가 (전리품을) 얻기도 하고(망하는 광경을) 보기도 하였다” 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1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범죄한 민족을 징벌하시기로 작정하신 일, 사 1:20)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렘 46:26, 12:7~13)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도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적국의 왕)로 높이 들리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벌하시되 작정하시고 예고하신 후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2.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18~22절).

(이 부분에서 1~17절까지 소급 설명하고 말미에서 본문 설명을 드립니다.)

1) 왜 유다국이 멸망의 참상을 당하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14절에서 선지자의 말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 선지자들(선민들에게 말씀을 증언하는 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한 것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부분별로 살피면 ① 거짓 선지자가 거짓 계시를 본다는 사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뜻대로도 거짓말을 할 수 있겠지만, 사탄의 역사로 거짓 계시를 보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인본주의적 사견도 말하겠지만, 사탄의 말과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뿐입니다. ② 거짓 선지자들이 받아 증언한 계시는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이며 죄악을 드러내지 않는 계시였고, 또 죄에 사로잡힌 자를 돌이키게 하지 못하였으며, ③ 거짓 경고와 미혹할 것만 나타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민이 망한 원인은 거짓 선지자의 잘못된 예언과 그 예언을 분별없이 받아들인 것과 참된 선지자의 경고를 외면하고 또 그를 핍박하는 일과 민족적으로 회개하지 않은 것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진리 아닌 유혹이 많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유다 멸망의 참상을 넋두리처럼 설명하였습니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선민에 대한 애칭)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빛을 거두어가셨다는 뜻). 아름다운 것(성전 제도와 선민의 복된 생활)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하나님이 땅 위에 임재하신 처소를 뜻함; 대상 28:2, 행 2:49)을 기억하지 않으셨다”(1절), 또 “주께서 야곱(선민을 대표하는 칭호)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므로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2절). 맹렬한 진노(바벨론의 침략)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권세자)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 (선민을 보호하는)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로… 사르셨도다(3절). 하나님이 선민에게 원수처럼 되셔서… 살육하시고 노를 불처럼 쏟으셨으며(4절)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고(5절) 성막(성전)을 동산의 초막처럼 헐어버리시며 절기와 안식일도 잊어버리게 하시고 왕과 제사장도 멸시하셨도다.(6절) 제단과 성소도 미워하셨고 궁장(궁궐의 담장)도 원수의 손에 붙이시니 저희(바벨론의 군사들)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지껄임)하기를 절기 때처럼 하였고(7절) 시온의 성을 헐어 성과 곽(성벽; 사 26:1)으로 통곡하고(시적 표현) 쇠하게 하셨으며(8절) 성문 빗장은 꺾이고 왕과 방백들은 율법이 없는 자처럼 되었고 선지자들은 묵시를 받지 못하니(9절)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할 말을 잃은 상태) 티끌을 무릅쓰며 베를 허리에 두르니(슬픔의 표시) 내 눈이 눈물에 상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간이 땅에 쏟아지는 듯 하다(10~11절)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엇에 비교할 수도 없고 파괴가 바다같이 크니 위로할 수도 없으며(12~13절) 지나가는 자들의 비소거리가 되었으니(15~16절) 이는 옛날(이사야 시대)에 명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요, 하나님이 선민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원수로 하여금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며 그들의 뿔(권위)을 높이 들어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3) 이런 참상에 대하여 선민이 할 일은 “기도와 회개하는 눈물뿐이라”고 하셨습니다(18~22절). ① 먼저 18~19절에서는 망한 민족들에게 기도할 것을 호소합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시온의 성곽아(이것은 훼파된 무인격체에게 호소함임, 망한 민족을 비유함도 됨)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네 눈동자를 스스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고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손을 드는 것은 기도로 호소하는 뜻)”라고 하였고, ② 선지자 자신도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여인이 어찌 그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살육을 당하오리이까. 노유는 길에 엎드러졌고 처녀들과 소년들은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사 긍휼을 거두신즉 두려운 일이 임하였고 살육자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으니 마치 절기 때 무리들을 모음 같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으니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들(선지자가 사랑하는 대상)을 원수(바벨론 군사들)가 다 멸하였다”고 하였습니다(22절). 예레미야의 기도는 멸망의 정황을 사실대로 아뢰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있어주실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선민들을 망하는 길로 유혹하였습니다. 그 망하는 길은 참 선지자를 멸시한 일이었고, 회개를 일삼지 않은 것이며, 백성들의 눈까지 흐려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과 올바른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제 5 과 예레미야의 받은 고난 (애 3:1~18) 목록으로


본문은 하나님이 선민에게 진노하사 그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시니 그 고난을 함께 당하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민족의 고난을 대표하여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고난을 대표한 “예레미야의 받은 고난”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① 1~9절은 “고난을 당한 정황”이고, ② 10~18절은 “고난을 주신 하나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고난을 당한 정황(1~9절)

1절에서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는 내로라” 하므로 선민이 고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인데, “고난당한 자가 내(예레미야)로라” 함은 예레미야만 고난을 당했다는 뜻은 아니고, 많은 국민들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의함임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매를 맞는 줄로 아는 자가 예레미야 선지자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2절에서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음”은 선지자가 큰 죄인이 아니라도 민족의 연대적 죄책 때문에 헤어날 수 없는 고난을 함께 당한 것이며, 3절에서 “종일토록 손(권고의 손길)을 돌이켜(외면하심)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하므로 선지자가 대적으로부터 매 맞게 된 일을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으로 믿고 표현한 것입니다. 4절에서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역시 사람에게 매를 맞고 육체와 뼈가 상하는 것을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 5절에서 “담즙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음”은 담즙을 고난의 쓴 잔으로, 수고를 괴로운 일로 비유하여 하나님이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몽둥이를 쌓아놓고 때리신 것처럼 하셨다는 것입니다. 6절의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2절과 같음),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다” 함은 희망 없는 대상으로 여겨 오랜 기간 버리셨다는 뜻이요, 7절에서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음”은 대적하는 무리들이 예레미야를 둘러서서 폭행하고 사슬로 묶은 사실이 하나님의 명하심에 의하여 그렇게 당하였다는 뜻이고, 8절에서 “내가 부르짖어(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셨음”은 선지자의 고난 중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9절의 “다듬은 돌을 쌓으사 내 길을 막으사 첩경을 굽게 하셨다” 함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하여금 도망할 수 없도록 섭리적으로 길을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저기에 감시자나 파수꾼이 있다면 자신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다듬은 돌”로 성을 쌓으면 쉬 무너지지 않으므로 “막힘이 견고하다”는 뜻이고, “첩경(지름길)을 굽게 하셨음”도 통로를 어지럽게 하여 도망할 수 없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갇힌 상태에서 큰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2. 고난을 주신 하나님(10~18절)

10~11절에서 “저(하나님)은 내(예레미야)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같으사 나의 길로 치우치게(접근되게 하심) 내 몸을 찢으시고 나로 적막하게 하셨다” 하므로 하나님의 징계의 노여우심이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쫓는 것처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12~13절에서 사냥꾼처럼 “활을 당기고 선지자로 과녁을 삼으시며 전통으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하므로 핍박자들의 핍박이 마치 익숙한 사냥꾼이 사냥한 짐승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처럼 괴롭게 한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14절에서 “나는 내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래거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바벨론의 채찍을 순히 맞으라”고 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동족인 예레미야 선지자를 조롱한 것입니다. 15절에서 “나를 쓴 것으로 배 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5, 19절과 같은 뜻), 16절에서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돌로 이를 때려 상하게 한 뜻)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하였으니 “재로 덮었다” 함은 비천하게 만든 의미인 것입니다. 17~18절에서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적 고난과 심령의 고난이 아울러 끊이지 않은즉 복의 의미를 기억할 수 없었고, 신앙적 인내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소망을 갖지 못한 상태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당한 고난은 참으로 대단하였던 모양입니다.

 

제 6 과 고난 중의 신앙 (애 3:19~39) 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고 총제목을 “고난 중의 신앙”으로 정하였습니다. 애가서 내용 속에 예레미야와 그 민족이 당하는 고난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19절). 그런 중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또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소망을 내다보고 기다림이 좋다” 하였고, 또 “만유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함이 좋다”는 말씀을 하였기 때문에 이 내용들을 종합하여 “고난 중의 신앙”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① 19~26절은 “고난 중의 신앙의 처신”이고, ② 27~39절은 “섭리에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1. 고난 중의 신앙의 처신(19~26절)

1) 19절에서 고난 중의 신앙의 처신은 기도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고초와 재난을 쓴 맛으로 비유한 것)을 기억하소서” 하였으니 하나님이 성도의 고초를 알아주시면 성도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계 2:2~3). 고초를 당하는 자가 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이 아시지만, 기도로 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시므로 더 확신을 줍니다(시 116:1, 4:3).

2) 20~23절은 고초를 당하는 자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할 때 큰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다. “내 심령이 그것(고초)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성도가 고난만 기억하면 희망을 가질 수 없음) 중심에 (하나님을)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으니 (이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초를 당하는 자는 기도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할 때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또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게 되므로 낙심이 소망으로 변하는 것이고, 이런 소망이 아침마다 새로워져서 힘을 얻도록 성령님이 인도하시니 주님의 성도를 붙드시는 은혜의 성실함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3) 24절에서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신 성도는 하나님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내 심령에 이름”은 마음에 확신을 갖고 다짐하는 뜻이요, “여호와를 기업이라” 한 뜻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을(시 73:28) 생활의 목적과 만족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저를 바라리라(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고 한 것입니다.

4) 25~26절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모시고 바라는 성도는 당연히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와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신다” 하셨으니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고, 구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은혜(선)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섭리에 굴복하는 뜻) 기다림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고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전 3:1~2).

2. 섭리에 복종하라(27~39절)

이 본문에서 선지자는 유다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함으로 위로하는 교훈을 줍니다.

1) 27절은 하나님은 그 원하시는 인생에게 유익한 연단을 주시는 분이므로 “사람이 젊었을 때에(청년을 상대하신 말씀) 멍에(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의 고난)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청년의 시기는 기초교육에 유익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8절에서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모든 고난)을 메우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혼자 앉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순종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또 소망 있는 교훈은 29절에서 “입을 티끌에 대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태도요, 30절에서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 불릴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징벌하실 때 눈을 딱 감고 맞는 수치를 감수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31절에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32~33절에서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라” 하셨으니, 참고 매를 맞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징계가 기뻐서 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34~36절은 선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의 악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말씀하시므로 그들이 벌 받을 때는 선민에게 희망이 있을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셨으니 곧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밟는 것(약자를 학대하는 죄)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감찰하시는 눈)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시므로 하나님이 공평치 못한 행위를 엄히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4) 37~39절은 인생의 화복이 하나님의 섭리적 명령에 달렸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하시므로 산 자의 고난은 그 자신의 죄의 응보요, 복과 화는 하나님의 섭리적 명령에 달린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 중의 신앙은 기도로 시작하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고난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굴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면서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7 과 고난 중의 설교와 기도 (애 3:40~66)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40~46절은 “고난 중의 설교”이고, ② 47~55절은 “백성들이 당면한 고난”이요, ③ 56~58절은 “하나님의 응답”이고, ④ 59~66절은 “신원(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뜻)을 간청함”입니다. 총제목을 “고난 중의 설교와 기도”로 정하였습니다.

1. 고난 중의 설교(40~46절)

1) 40~41절에서 선지자는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 내용이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뿐 아니라 없을 때라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 없는지, 또 하나님을 멀리함이 없는 지를 살펴 돌이켜야 합니다. 41절에서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나님께 들자”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앙망하는 태도입니다.

2) 42~43절은 하나님의 진노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음을 말하였으니 곧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시지 아니하시고 진노하여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어렵게 만드는 뜻) 살육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다” 하였고,

3) 44~46절은 기도가 상달되지 않는 것과 비천해진 것과 대적에게 패한 것도 그런 원인이라고 하였으니, 44절에서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심”은 하나님의 보좌를 하늘 높은 곳으로 생각하고 땅으로 통하는 사이에 장애(죄의 장벽)가 있음을 구름으로 표현한 것이요, 따라서 기도의 통로를 막았다는 뜻이며, 45절의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티끌)와 폐물(쓸데없는 존재)을 삼으셨다” 함은 비천해짐을 뜻하고 “우리의 모든 대적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린 것(패전의 뜻)”도 역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는 연고라는 것입니다.

2. 백성들이 당면한 고난(47~55절)

1) 47~50절에서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손해와 괴로움을 주는 뜻)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의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린다” 하였으니 슬픔에 따른 눈물이 억지로 나올 수 없을 것이요, 눈물에도 한계가 있을 것인즉 이 경우는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선지자의 사랑에 하나님이 그런 감정을 주시는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51절에서는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여자들이 끌려가서 바벨론 군사들에게 음행의 대상이 되게 하는 상태)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하였고, 52~54절에서는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처럼 심히 쫓으며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고 하였도다” 하므로 선지자 자신이 대적들에게 핍박을 받아 구덩이에 넣고, 죽일 듯이 고문 받은 정황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이 경우에 선지자는 55절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방도 밖에는 없었을 것이므로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자신을 부르라”(시 50:15)고 하셨으니까요.

3. 하나님의 응답(56~58절)

1) 56절에서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하나님은 응답을 즉시 안 하셔도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심)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고충)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소서” 하므로 응답을 갈망하는데, 57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것을 말하였으니, 곧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은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고, 이 응답은 말씀 계시나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2) 그리하여 선지자는 58절에서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일단 기도가 응답되었고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 하셨은즉 일은 잘 해결된 것입니다. 그 일이란 바로 마음의 원통함을 푸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속하는 것(성도의 생명을 원수의 손에서 뺏어서 하나님 수중에 둔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받든지, 생명을 버리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처리하시는 것은 큰 행복에 속하는 것입니다.

4. 신원을 간청함(59~66절)

끝으로 선지자는 의지의 대상인 하나님을 접하였으므로 하나님께 신원해 주실 것을 59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원통함을 푸는 뜻)하옵소서. 저희가 나를 보수(원수 갚듯 함)하며 나를 모해(손해 주려고 꾀함)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파하며 나를 모해하는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는 것(비난하는 어조)을 주여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손으로 행한 대로(폭력 등 모든 악행) 보응하사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강퍅해짐은 벌 받음을 뜻함; 롬 1:24) 저주를 더 하시며 진노로 저희를 군축(억압하는 뜻; 43절)하사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하므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뜻대로 하시되 속히 처리해 주실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겔 36:19, 계 20:9~10, 13~15).

 

제 8 과 재난에 대한 탄식과 비교 (애 4:1~11) 목록으로


본문을 상고함에 있어서 무조건 11절까지 나누어 상고합니다. ① 1~5절은 “민족의 재난에 대한 선지자의 탄식”이고, ② 6~10절은 “다른 상황과 비교함”이요, ③ 11절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난에 대한 탄식과 비교”로 제목을 정하고 살펴봅니다.

1. 민족의 재난에 대한 선지자의 탄식(1~5절)

1) 1절의 “슬프다”는 탄식은 1:1, 2:1, 4:1에 나타났는데, 이는 감정의 표현도 있지만 시문학적 규모를 장식한 뜻도 있는 듯 합니다. “슬프다. 어찌 그리 (성전의)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함은 바벨론 침략으로 임한 성전의 훼파를 탄식한 것입니다. 성전에 장식된 금과 기명의 금들은 다 훼파되고 가져갔기 때문입니다(대하 36:18).

2) 2절의 뜻은 시온의 아들들(선민을 존칭한 말) 보배와 정금처럼 존귀하였으나 토기장이의 질항아리(아낌없이 깰 수 있는 천한 존재)같이 여김이 된 것을 탄식한 것이요, 3절에서 “선민의 자녀들이 들개만도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광야의 타조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민의 어린 자녀들을 그 부모가 키울 수 없어 버리게 된 상태를 들개만도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들개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지만 선민은 자녀를 양육할 힘이 없어 버린즉 많은 기아와 고아가 생긴 처지를 탄식한 것입니다. “타조처럼 된 것”은 타조가 새끼에 대한 인정을 다른 짐승들처럼 나타내지 못함에 비유한 것입니다(욥 39:13~18).

3) 4~5절은 어린이의 불행한 상태를 말씀한 것입니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 천장에 붙음이여.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줄 사람이 없다” 하셨고, “진수(좋은 음식”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버려진 상태). 전에는 붉은 옷(존귀한 자가 입는 옷; 마 27:28, 31)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더러워진 몸)를 안았다”고 하였습니다.

2. 다른 상황과 비교함(6~10절)

1) 6절에서 아브라함 당시에 “소돔성은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순식간)에 무너졌는데 처녀 내 백성의 죄가 (그때보다 더 중하여) 예루살렘은 사람의 손에 망하고 오래 끌며 고생한다”는 것이요,

2) 7~8절에서는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피부)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갈아서 빛을 낸 것)한 청옥(보석 종류) 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6·25 때도 존귀하게 양육 받던 아이들이 부모가 죽고 천한 신세가 되어 얼굴도 못 씻고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3) 9절에서는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 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라” 하므로 칼에 죽은 자는 금방 죽은즉 고통을 일시에 당하고 끝내지만 주려 죽는 자는 마치 무엇에 찔린 자가 점차 쇠하여 고통스럽게 죽는 것처럼 선민이 오랜 고통 끝에 죽어가는 모습을 비교 설명한 것이요, 10절에서는 “백성의 멸망이 있을 때에 자비한(착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의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은 예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기아가 넘치는 세계에서 인육을 먹는다는 말은 요즈음도 보도되고 있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입장에서 부녀가 죽은 아이를 고기로 먹었겠지요.

3. 하나님의 진노(11절)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하심은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사 예루살렘을 적국에 의하여 불사름 당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있다”(삼상 17:17) 하였은즉 하나님이 아니시고야 누가 그런 일을 임의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제 9 과 범죄로 인한 진노의 상황 (애 4:12~22) 목록으로


1. 12절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을 세상의 열왕들과 천하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다”는 말씀이며, 13절은 “멸망의 원인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인 바 그 죄악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요새지 언덕에 있고,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에 “여부스”란 동리에 건립되어(대상 1:6, 삼하 5:4~5, 왕상 9:20, 21) 464년 동안 한 번도 점령당한 일이 없던 성이라 열왕과 백성들이 그 도성의 멸망을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졸지에 6·25를 만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피 흘린 죄악”이란 그들이 거짓 선지자가 되고 위선자가 되어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을 의미합니다(왕상 22:8~28; 이사야도 전설에 의하면 톱질을 당하여 죽었다 하고, 예레미야의 고난당한 정황도 본서에 잘 나타남, 애.3:52~54).

2. 14~15절은 수난 당한 백성들의 몸이 질병 등으로 부정해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하며(갈 곳이 없음) 그 옷이 피에 더러워졌음으로 사람이 만질 수 없다” 한 것은 살육의 현장에서 피뿌림 당한 의복을 정결케 하지 못한즉 위생적으로 몹시 더러워진 상태를 뜻하고, “그것을 사람이 만질 수 없음”은 역시 위생적 전염성 때문에 접촉을 꺼려야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레 15:2~12). 15절에서 “사람(피로 더러워진 자)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피 묻은 의복을 입은 자의 외침은 문둥병자의 경우(레 13:45~46)처럼 타인의 접근을 막는 뜻이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회복을 부정한 것은 선민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저주하고 비난한 태도입니다.

3. 16절에서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13절)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망할 당시에 아주 망하도록 버려두신다는 뜻; 70년 후에는 권고하셨음, 단 9:2)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않았고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시므로 신앙적 타락으로 성직자를 존경하지 않은 것과 도덕적 타락으로 장로들을 섬기지 않은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4. 17~19절은 망할 때의 상황을 회고한 내용입니다. 17절은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애굽)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위험이 오고 적군이 침략해 올 때 애굽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그곳에서 군사가 오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눈이 상할 정도로) 오지 않은즉 부끄럽고 허탈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다 없애신다고 하셨습니다{5:6, 사 3:1~3, 31:1, 호 7:11, 16(“네가 애굽을 의지하도다.”)}. 18절은 선민이 적군을 두려워하며 숨어보려고 하지만 적군이 선민의 자취를 엿보는 만큼 자신들의 끝이 가깝다고 확신한 내용이요, 19절은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다” 함은 선민이 적군을 피할 수 없는 이유로서 적군의 재빠른 태도가 독수리 이상으로 날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5. 20절은 왕과 방백을 의지한 것이 허사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콧김(생존, 호흡을 뜻함)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시드기야 왕)가 저희의 함정(적군 수하에 들어갔다는 뜻, 대하 36:20)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라” 하므로 유다의 마지막 왕조를 믿었으나 다 붕괴된 것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대하 36:5~20).

6. 21절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는 에돔(에서 족의 나라)에 대한 감정 표현입니다. “우스 땅(아라비아 북방 지역; 욥의 거주지, 욥 1:1; 이곳에 에돔의 후손이 거주하였음)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에돔의 자존심을 인정한 호칭)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미움의 대상 유다가 망하였은즉). 그러나 잔(고난과 멸망의 잔, 마 26:39, 요 18:11)이 네게도 이를찌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넘어지고 수치스럽게 되는 모습) 하셨으니, 이는 에돔 족이 사는 아라비아 지역도 점령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사 21:13~17).

7. 22절에서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하심은 형벌에도 기한이 있은즉 그때가 되면 다시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요, “처녀 에돔아 주께서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라” 하심은 에돔 족이 범죄한 일과 선민을 미워한 일에 대하여 그 보응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전체의 내용의 의미는 “범죄로 인한 진노의 상황”을 진술한 것입니다.

 

제 10 과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애 5:1~22) 목록으로


1절에서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특히 성도의 고충을 늘 감찰하십니다(시 139:1~4, 계 2:2~4). 특별히 감찰해주실 것을 부탁한 것과 고난의 상황을 아뢴 것은 구원을 호소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호칭할 때 성호인 “여호와”로 호칭한 것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잡신들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성호인 만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호칭함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여호와라 하신 일이 없고 아버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우리 기업(성전을 중심한 예루살렘 통치, 렘 12:8)이 외인(바벨론)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다” 하셨으며,

3절에서는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민족의 고독과 수난을 비유한 것)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다” 하였으니, “어미”란 유다 왕실을 뜻하는데 그 왕실이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4절에서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땔감)을 얻으오며(물과 땔감이 귀한 것을 뜻함), 5절에서 “우리를 쫓는 자(바벨론 군사)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심한 핍박을 뜻함)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6절에서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 불리고자 하였나이다” 하였으니 사람과 권세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시 146:3, 렘 9:23~24) 아하스 왕 때와 멸망 당시에 앗수르와(왕하 16:5~9) 애굽을 의지한 사실을(사 31:1) 부끄럽게 여겨 회개한 것입니다.

7절에서는 열조(조상들)의 죄를 후손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으니 곧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한다” 한 것이요(출 20:5),

8절에서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그 손에서 건져낼 자 없다” 함은 바벨론의 하등 계급(천민)들이 선민을 지배하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9절의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보초병이 지키는 뜻)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는다” 함은 광야에서 사냥이나 열매 등 양식을 구하는데 나가서 활동하기에 위험하다는 뜻이요,

10절의 “주림의 열기(굶주림이 극심한 뜻)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다” 하였으니 여기의 “검다”는 말 “탈울”은 뜨겁게 달았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더운 지방, 그늘 없는 곳에서 굶주린 육체가 햇빛에 타고 마른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11절에서 “대적이 시온(예루살렘)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다” 함은 전쟁 시에 흔히 있는 일이며(일제의 정신대 징발처럼),

12절에서 “방백들의 손에 매어 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함은 과거의 권세자(정치가)들이 힘있는 대적자들에게 매달리듯 사정하는 신세가 되었고, 존경 받은 장로들도 낯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만큼 비천한 신세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3절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곡식을 갈아먹기 위하여 도구를 준비하여 운반함) 아이들이 섶(땔감)을 지다가 (기운이 없어) 엎드러지오며”, 14절에서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고 소년을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하였으니 노인은 지역의 원로로서 백성들의 송사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성문에 앉아 재판을 한 일이 있었는데(룻 4:1~5) 그것을 못한다는 것이고, 아이는 기쁨을 잃었기 때문에 노래를 못하는 것입니다.

15~16절은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 머리에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하므로 민족이 죄값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영광이 떠난 것을 호소하였고,

17~18절은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 눈이 어두우며(피곤하면 시력도 약해짐) 시온산이 창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을 누리던 예루살렘 도성이 짐승이 서식할 정도로 황폐되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19~22절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과 사랑의 속성에 근거하여 권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존재의 영원성) 주의 보좌(주권 통치)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근거하여 호소함이고 또 “오래 버리셨다”는 말씀을 보면 이 글이 멸망 후 상당 세월이 지난 후에 기록한 듯함).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태평성대의 시절)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이 선민을 주께로 돌이키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야 돌이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겔 36:24~28). 하나님은 징계하시는 기간에 저희의 완악한 마음을 버려두시다가(사 6:9~12)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은혜주실 때가 되면 회개하는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70년 후에 권고하실 뜻을 세우셨을지라도 성도의 구하는 기도는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겔 36:33~34, 37).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지금은 선민국이 없으므로 성도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하는가를 선지자의 기도 모범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것입니다. 회개와 기도가 필수적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