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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열왕기상 강론

제1과 아도니야의 반역 (왕상 1:1~27) 8 바로가기

제2과 솔로몬을 왕 세움 (왕상 1:28~53) 10 바로가기

제3과 다윗의 유언과 반역자 처리 (왕상 2:1~46) 12 바로가기

제4과 일천번제와 지혜로운 재판 (왕상 3:1~28) 16 바로가기

제5과 번창한 왕국 소개 (왕상 4:1~34) 19 바로가기

제6과 성전건축을 시작함 (왕상 5:1~18) 22 바로가기

제7과 성전건축과 축복 (왕상 6:1~14) 24 바로가기

제8과 성전의 내부시설 종료 (왕상 6:15~38) 26 바로가기

제9과 왕궁 건축과 두 놋기둥 (왕상 7:1~22) 28 바로가기

제10과 바다와 기명들을 만듦 (왕상 7:23~51) 30 바로가기

제11과 법궤안치와 봉헌사 (왕상 8:1~21) 34 바로가기

제12과 솔로몬의 기도 (1) (왕상 8:22~34) 36 바로가기

제13과 솔로몬의 기도 (2) (왕상 8:35~53) 39 바로가기

제14과 축복기도와 제사 (왕상 8:54~66) 41 바로가기

제15과 성전 봉헌 후에 있은 일 (왕상 9:1~28) 43 바로가기

제16과 스바여왕의 방문 (왕상 10:1~29) 46 바로가기

제17과 솔로몬의 타락과 대적 (왕상 11:1~22) 49 바로가기

제18과 솔로몬의 대적과 죽음 (왕상 11:23~43) 52 바로가기

제19과 분국섭리 (왕상 12:1~24) 55 바로가기

제20과 자율제단 (왕상 12:25~33) 58 바로가기

제21과 자율제단을 책망하심 (왕상 13:1~34) 60 바로가기

제22과 두 왕의 역사 (왕상 14:1~31) 64 바로가기

제23과 두 나라의 왕의 역사 (왕상 15:1~34) 67 바로가기

제24과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 (왕상 16:1~34) 71 바로가기

제25과 엘리야와 나타난 이적들 (왕상 17:1~24) 74 바로가기

제26과 우상주의 척결과 은혜 (왕상 18:1~46) 78 바로가기

제27과 도피 중에 있은 일 (왕상 19:1~21) 82 바로가기

제28과 아람과의 1차 전쟁 (왕상 20:1~21) 85 바로가기

제29과 2차 전쟁과 예언 (왕상 20:22~43) 87 바로가기

제30과 포도원 때문에 범죄함 (왕상 21:1~29) 90 바로가기

제31과 선지자의 대립된 예언 (왕상 22:1~28) 93 바로가기

제32과 패전과 두 왕조의 역사 (왕상 22:29~53) 96 바로가기


열왕기상 설교보충

설교보충 1. 주의 마음에 맞음 (왕상 3:10~15) 99 바로가기

설교보충 2. 헌신과 축복 (왕상 9:1~9) 101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세 사람의 잘못 (왕상 13:1~19, 33~34) 103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엘리야의 사역 (왕상 17:1~9) 105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엘리사의 사명적 은혜 (왕상 19:19~21) 107 바로가기

설교보충 6. 갑옷을 벗자 (왕상 20:11) 109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열왕기상 20장의 교훈들 (왕상 20:1~12) 111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열왕기상하의 말씀에 대하여 묵상하고 증언한 것을 글로 남기게 되어 기쁩니다. 또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신명기로부터 계속 쓰면서 7분 설교 등 많은 것을 기록하였는데 너무 집중하다 보니 70 가까운 나이에 많은 피로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열왕기상하가 저의 목회 중에 사용한 기존 원고를 마지막으로 정리하여 없앤 것이기 때문에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꼼꼼한 성격인지라 모든 설교나 강론에 대한 원고를 남겼는데, 이것을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보존 가치가 없게 되므로 그대로 폐기할 수 없는 아쉬움 때문에 힘들여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의 필적은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적 남기는 목적으로 성경 66권을 기록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국문표기법이 너무 어려워서 표기상 오자가 많이 있을 것에 대하여 느꼈고, 두 번째는 개역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문장 그 자체가 어색해짐을 느꼈으며, 셋째는 개역성경의 사용수명이 점차 줄어들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개역성경을 연구하여 이 글을 읽을 성도들이 얼마나 되겠나 하여 아쉬움을 느꼈고, 넷째는 새로나온 번역의 성경을 참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일정하지 않은 뜻으로 증언됨에 대하여 이런 혼란을 어찌하나 하는 아쉬움을 느꼈으며, 다섯째는 깊은 연구와 넓은 내용으로 해설과 교훈을 다 적지 못한 점의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게 설명한 주석들도 많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제가 쓴 다른 강해문도 그러합니다만 이 강론도 평신도님이 성경본문을 한 장씩 정독하신 다음 이 강론을 읽으시므로 본문의 내용이 어려운 단어 설명과 함께 좀 더 명확하게 마음속에 새겨지도록 하는데 의미가 있는 만큼 그 목적은 다 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꼼꼼히 읽고 기도하면서 묵상하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 한 글자, 한 문장까지 꼼꼼히 살피는 습관을 가지시라고 강조를 합니다. 또 아쉬운 것은 그렇게 작심하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연구할 성도가 얼마나 계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도 저에게 건강과 시간을 주시는 한 저는 글쓰기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글을 더 많이 쓰려고 하느냐? 하시겠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2006. 5. 10.


저자 지 영 근

열왕기상 강론

제 1 과 아도니야의 반역 (왕상 1:1~27) 목록으로


이 강론서를 읽으시기 전에 제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 546p에 기록된 “열왕기상하 개론”을 먼저 읽으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 부분의 총 제목은 “아도니야의 반역”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다윗에게 아비삭을 데려옴”이고, ② 5~10절은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이며, ③ 11~27절은 “반역을 왕께 고함”입니다.

1. 다윗에게 아비삭을 데려옴(1~4절)

1) 1절에서는 “다윗이 늙으므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때에 다윗의 나이는 70세였습니다. 30세에 왕이 되고 40년(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예루살렘에서 33년, 삼하 5:4~5, 대상 3:4) 재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수족이 차지는 증세가 있습니다. 다윗은 건강이 더욱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 2절에서 열이 부족한 늙은 왕에게 젊은 여인(처녀)으로 수종들게 하였으니 이는 고대 의사들의 치료법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는 몸에 열이 강한즉 그 온기로 회춘의 힘을 얻거나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3~4절에서 “전국적으로 아리따운 처녀를 찾은즉 수넴(잇사갈 지파의 딸, 갈릴리바다 남단에서 서남쪽 25㎞쯤, 므깃도에서 동쪽 13㎞쯤, 다불산 서남쪽 8㎞쯤, 수 19:18)의 여인 아비삭을 오게 하여 왕을 봉양하고 수종들게 하였는데, 왕이 동침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동침하지 않은 것은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5~10절)

1) 다윗이 몸이 쇠하여짐을 알자 왕자들 중에서 후계왕에 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인데, 5절을 보시면 “이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자신이 왕될 의욕을 갖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인을 예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하 3:2~5에서 다윗의 여섯 아들을 순서대로 소개할 때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순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들의 어미는 다 다르고 헤브론에 있을 때 낳은 자들로 아도니야는 넷째 부인 학깃의 아들이며, 솔로몬 이외의 다른 아들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또 많이 낳았습니다. 병거(군비 이동 수단)와 기병(말탄 병사들)과 전배(호위하는 하속들, 삼하 15:1) 50을 둔 것은 자신의 위용을 떨쳐 힘을 과시한 것인데 이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 하였으니 곧 자신을 높이는 거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2) 6절에서는 “아도니야의 체용(몸과 용모)이 준수한 중에 부친 다윗으로부터도 지적받은 일이 없을 만큼 무난하게 지내온 터”였는데, 7~8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군대장관(19절)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 옹립에 가담하였고,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아론 집의 족장, 삼하 8:18, 대상 12:27)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다윗 때의 용사, 왕상 4:18)와 레이(설명된 곳 없음)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의 모의에 같이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때에 아도니야는 자신과 친근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졌을 것입니다.

3) 9~10절에서 아도니야가 반역성을 나타낸 행위를 말씀하셨으니, 곧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8절)과 자기의 (이복)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않고, 다른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형 길르압도 빠졌음)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곁(실로암 못에서 남쪽 400m쯤이요, 기드론 시내 옆에 있다 함)에서 푸짐한 잔치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제 중 참석 안한 자는 형 길르압과 동생 솔로몬 뿐이고, 여기서는 잔치에 대한 말씀만 있지만 “아도니야를 위하여 만세를 불렀다”는 말씀이 25절에 나타난 만큼 선왕의 허락없이 다윗의 후계왕으로서 아도니야를 추대한 반역의 뜻을 충분히 나타낸 것입니다.

3. 반역을 왕께 고함(11~27절)

1) 11~14절은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에게 아도니야의 반역을 진압하므로 밧세바와 솔로몬이 살아남아야 할 일에 대하여 밧세바의 할 일을 말한 내용입니다. “당신은 아도니야가 왕 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까? 당신과 솔로몬의 생명을 구원할 계교를 말하게 하소서…당신은 다윗왕에게 들어가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솔로몬이 정녕 왕이 되리라 하셨는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습니까? 하고 여쭐 때 나단 자신도 들어가서 당신의 말을 증거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솔로몬으로 후계왕 세울 약속을 언제 하였는가? 하는 것인데, 이는 분명히 솔로몬이 출생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와 밧세바 앞에서 그런 약속을 한 일이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이 사실은 밧세바의 처음 낳은 아이가 죽고 다음 아들 솔로몬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사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뜻)로 개명해 주시면서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대상 28:5) “장차 솔로몬이 왕될 것이라”는 맹세(17절)를 한 줄로 압니다. 또 대상 22:9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솔로몬이 왕이 되어 성전을 짓게 될 것을 약속받은 사실이 있었은즉, 그 당시에 “그 사실을 밧세바에게 맹세로 언약한 사실이 있었음”을 30절에서 다윗이 시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밧세바는 급히 그 일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15~21절에서는 밧세바가 왕에게 들어가 과거에 왕이 맹세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아도니야의 한 일을 사실대로 말하고, 또 온 이스라엘이 “왕이 후계자를 지명해 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렇게 하시지 않을 때는 왕이 별세한 다음에 밧세바와 솔로몬이 죄인이 될 것임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22~27절에서 나단이 또 들어가서 밧세바의 말과 같은 말을 하고 25절에서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불렀으니…이것이 왕의 하신 일입니까? 왕은 종에게 그 일을 알리신 바가 없습니다” 한즉, 왕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워 대관식 할 것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제 2 과 솔로몬을 왕 세움 (왕상 1:28~53) 목록으로


① 28~31절은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함”이요, ② 32~37절은 “대관식을 지시함”이며, ③ 38~40절은 “솔로몬왕 대관식”이요, ④ 41~48절은 “아도니야가 소식을 들음”이며, ⑤ 49~53절은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용서함”입니다.

1.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함(28~31절)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대로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내위에 앉으리라 내가 그대로 행하리라”(28~30절) 한즉,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고 다윗의 만세수를 기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31절). 여기에서 솔로몬이 왕될 자로 지명 받은 것은 그가 출생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란 뜻으로 개명(여디디야, 삼상 12:24~25)해 주신 것이 섭리적 근거이고(대상 28:5), 이 사실을 밧세바에게 맹세한 것은 밧세바가 전남편 우리아가 죽고 또 다윗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들이 죽었으므로 큰 슬픔을 당하였을 때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면서 그 맹세를 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2. 대관식을 지시함(32~37절)

32~35절은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제사장)를 앞세워 솔로몬을 왕세우도록 지시한 “대관식 절차의 내용”입니다. 즉 “너희 주의 신복들(다윗의 신복들)을 데리고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운 후, 기혼(예루살렘 동문 밖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 샘이 있는 곳, 왕하 20:20, 대하 32:30)으로 인도하여 내려가서(왕궁은 높은 곳이고 기혼은 낮은 곳임)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고 양각 나팔을 불며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고 저를 따라 올라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한즉, 36~37절에서 그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고 또 왕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솔로몬왕과도 함께 하셔서 그 위를 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을 하였습니다.

3. 솔로몬왕 대관식(38~40절)

1) 38~39절에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블렛 사람(삼하 8:18, 다윗이 가드에 피신할 당시쯤 블레셋 거민이 다윗에게로 귀순하여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로 추정됨)이 솔로몬을 다윗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33절)으로 내려가서 그곳 성막 가운데서(기혼에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다고 여겨짐) 사독 제사장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양각 나팔을 불며 솔로몬왕 만세를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2) 이때 40절에서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왕궁쪽 높은 곳으로)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한즉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 듯(크게 소리난 뜻) 하였고 이 소리는 아도니야가 잔치하는 스헬렛(9절)까지 들렸다” 하였으니(41절) 그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아도니야가 소식을 들음(41~48절)

41절에서 “아도니야가 이 소리를 듣고 연유를 물었고”, 42~45절에서는 “반역에 가담한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잔치에 불참한 상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고하였으며”, 46~48절에서는 “솔로몬이 나라 위(왕좌)에 앉았고 다윗의 신복들이 다윗왕과 솔로몬왕에게 축복한즉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하나님께 기도한 자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라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다”는 사실까지 보고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나단의 아비, 제사장 아비아달은 역모하는 단체에 참여하였으나 요나단은 그 일을 전혀 모른 듯합니다. 그리하여 아도니야의 역모는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5.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용서함(49~53절)

1) 49절에서 “아도니야와 함께 하였던 자들은 다 놀라서 각기 갈 길로 갔다” 하였고, 50절에서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제단은 기혼에 있는 성소의 번제단 네 모퉁이에 뿔처럼 시설된 것을 의미합니다(출 27:1~2). 그런데 “그것을 잡은 의미”는 용서를 구하는 태도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왕상 2:18에서 요압도 그리하였습니다. 우발적 범죄로 구제를 받게 한 도피성 법(신 4:42)과는 성질이 다릅니다. 제단은 속죄 제물을 바치는 곳인 만큼 용서받기를 원하는 자의 태도가 그렇게 나타나도록 관행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제단 뿔을 잡고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2) 51~53절에서는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자기를 죽이지 말 것을 맹세해 달라”고 청원을 하였고, 솔로몬은 “저가 선한 사람이 될진대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짐이 없을 것이나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여 용서를 받고 솔로몬왕께 절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나중에 죽음을 당하였으니(왕하 2:13~27) 그는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는 사람의 뜻대로 취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고(롬 13:1) 합법과 선행만이 살 길임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3 과 다윗의 유언과 반역자 처리 (왕상 2:1~46) 목록으로


① 1~11절은 “다윗의 유언과 죽음”이고, ② 12~25절은 “아도니야의 망발과 죽음”이며, ③ 26~34절은 “아비아달과 요압을 처리함”이고, ④ 35~46절은 “요직 임명과 시므이의 죽음”입니다.

1. 다윗의 유언과 죽음(1~11절)

1) 1절에서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였은즉” 하신 이 말씀이 곧 유언의 의미를 갖는 것이요, 유언의 내용은 여러 가지를 말하였으니 우선 2절에서 “자신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행 17:26) 살 만큼 살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만인의 공도라 한 만큼 다윗은 죽음을 보편적 행사로 받아들인 것이고, 또 이 죽음은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내세)으로 간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므로 죽음 앞에서 의연한 자세와 소망을 가진 것을 나타냈습니다. 또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하였으니, 이 대장부란 왕의 기질로서도 필요하지만 모든 이의 으뜸이 되어야 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2) 3절에서는 “하나님의 명(법률, 계명, 율례, 증거, 율법, 시 19:7~9)을 지켜 그 길로 행하되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으나 하나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기록은 확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말은 와전될 수도 있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기록으로 주신 것입니다. 고전 4:6에서도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셨은즉 반드시 말씀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그리하면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무엇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 행사를 뜻하고, “어디로 가든지” 하심은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신 28:3, 6).

3) 4절에서 “하나님이 내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함은 다윗과 그 후손들의 장래를 말씀하신 것을 뜻하고,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율법 지키는 일에 유의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진실하게 (또) 하나님 앞에 행하여야 함”은 신 6:5에서 명하신 말씀이며,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은 삼하 7:12에서 주신 말씀인데 다윗은 이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기 위하여 율법에 성실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4) 5~6절에서는 당시 군대장관으로 있는 요압(삼하 24:2)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그가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사울의 군장, 삼하 2:8)과 아마사(압살롬의 군대장관, 삼하 17:25, 다윗이 군대장관을 시키려고 하였음, 삼하 19:13)를 태평시대(전쟁의 대적이 아닌 상태)에 전쟁 때처럼 피를 흘리고 그 피로 자기의 허리띠와 신에 묻혔으니(안 죽여도 될 자를 직접 죽인 뜻)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스홀, 저승)에 가지 못하게 하라” 하므로 적당한 방법으로 재판하여 죽일 것을 명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요압의 반역죄(1:7)와 압살롬을 죽인 불복죄(삼하 18:14)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큰 죄를 지적하므로 충분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말씀은 삼하 3:27과 삼하 20:10에 기록되었습니다.

5) 7절에서는 “길르앗(로글림, 삼하 17:27~29) 사람, 바실래의 아들(삼하 19:37에서는 왕의 종 김함이라 하였음)에게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있게 하는 은혜를 베풀라”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압살롬의 난으로 마하나임에 피하여 있을 때 그가 생필품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삼하 19:31~38을 보시면 다윗이 그럴만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잘 대우하였을 것입니다(렘 41:17).

6) 8~9절에서는 (사울 가문의 남은 자요) 바후림의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하였으나(삼하 16:5~8) 난을 진압하고 귀궁할 때 먼저 영접하여 자복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죽이지 않기로 맹세하였다(삼하 16:5~8) 그러나 저를 무죄자로 여기지 말고 너는 지혜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행할 일을 알지니”한 말씀은 다윗의 맹세를 어기지 않는 상태에서 그에게 응징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맹세나 조상이 하나님 앞에 한 맹세는 후손이 지킬 의무가 있고(수 9:15~19) 그 당사자의 다른 죄로 죽는 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는 결심하고 기도한 것이나 또는 선언으로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7) 10~11절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된지 40년 만에(헤브론에서 유다왕 7년 6개월과 예루살렘에서 33년, 삼하 5:5) 세상을 떠난즉(누워 잠) 다윗성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2. 아도니야의 망발과 죽음(12~25절)

1) 12절에서 “솔로몬이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였다” 하셨고, 13~18절에서는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찾아가서 온 이스라엘이 얼굴을 자신에게로 향하여(백성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 왕위가 자기 것이 될 뻔하였는데 아우에게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줄 압니다(자기는 포기하였다는 뜻). 한 가지 소원이 있은즉 나를 괄시하시지 말고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으로 나의 아내를 삼도록 부탁해 주십시오.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을 때, 밧세바는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 하였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또 미묘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아비를 수종든 여인을 아들이 취한다는 것은(고전 5:1, 레 18:8) 망발에 해당하는데 그 요청을 밧세바가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추종 세력들을 의식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밧세바는 그 일을 작은 일로 여겼으니(20절) 그 요청이 성사되도록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2) 19~21절에서 밧세바는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요청을 수락해 주도록 정중히 요청하였지만 솔로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아도니야에게 역적 모의성이 있었고, 또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2절에서 솔로몬은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또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들은 다 역적 모의에 가담한 자들임)을 위하여서도 구하옵소서” 하였으니, 이는 모친이 인정에 치우쳐 가당치 않은 요청을 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23~25절에서 솔로몬은 그를 죽일 것을 하나님으로 맹세하고 군대장관 될 브나야를 보내어 그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아도니야는 반역성과 패역성을 나타내므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3. 아비아달과 요압을 처리함(26~34절)

1) 26~27절은 솔로몬왕이 역모에 가담하였던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여 고향 아나돗(삼하 23:27)으로 보냈습니다. 제사장 임명권과 재판권이 왕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도니야와 아비아달에 대한 유언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를 믿었기 때문이겠지요(6절). “너는 마땅히 죽을자로되 네가 내 부친 앞에서 하나님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 너도 받았은즉(삼상 22:20~23)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않는다” 하였으니, 27절에서 (이는)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하였습니다. 이 근거는 약 80년 전으로 소급하여 삼상 2:27~26에서 예언된 말씀인데 그 말씀 30절에서는 “제사장직 계승이 중단될 것”을 예언하셨고, 36절에서는 “제사장직이 비천해질 것을 예언하신 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2) 28~33절은 요압의 말로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아비아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요압은 자신도 역모의 주동자인즉 죽을 각오를 하고 아도니야처럼 성소의 제단 뿔을 잡았고, 이 사실을 안 솔로몬왕은 브나야를 명하여 “저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나야가 제단 뿔을 잡은 요압에게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제단 뿔 곁에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사형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말이었는데, 그는 “내가 여기(제단 곁)서 죽겠노라” 하므로, 브나야가 그 사실을 또 왕에게 알린즉 “저의 말과 같이 제단 곁에서 죽여 묻으라 까닭없이 의롭고 선한 두 사람(아브넬과 아마사)을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부친은 알지 못하셨나니(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이고 다윗에게 적당히 변명하였으므로 다윗이 그 살인경위를 오해하였다는 뜻) 저희(아브넬과 아마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무죄자를 죽인 갚음이 죽인 자와 그 자손에게로 간다는 뜻)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 35절에서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제단이 바닥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음) 저를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었으니”, 매장된 것 자체는 그의 공적을 생각해 준 덕이요 거친 땅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뜻한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왕권에는 인정이 용납될 수 없으나 정상은 참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요직 임명과 시므이의 죽음(35~46절)

1) 35절에서 요직 임명은 간단합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 요압을 대신 할 군대장관을 삼고,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 할 제사장을 삼았으니 이 대신하는 직위가 곧 대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2) 36~37절에서 왕이 시므이를 불러 “너는 예루살렘에서 집을 짓고 살되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가까운 출타를 금한 뜻) 정녕 죽으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자기의 죄로 죽는다는 뜻)” 하므로 다윗이 그에 대하여 “죽이지 않겠다” 한 맹세(삼하 19:23)를 그대로 지키되 금족령만 발한 것입니다. 38절에 시므이는 “왕의 명령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그리하겠다”고 한 후에, 39절에서 “3년 후 그의 두 종이 가드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한 것을 알고 가드에 가서 도망한 종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각이었든지 아니면 왕명을 경홀히 여긴 잘못이요 스스로 왕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어서,

3) 이 사실을 안 솔로몬왕은(41절) 42~45절에서 “시므이의 맹세위반과 명령 불복죄를 추궁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친께 행한 죄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이라(다윗이 살려줄 것을 맹세하였으나 하나님이 푸신다는 뜻) 그러나 솔로몬왕은 (공의롭게 행하였으므로) 복을 받고 다윗의 위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견고히 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6절에서 “브나야로 하여금 시므이를 죽이게 하니 나라는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문제의 인물들을 대부분 지혜롭게 정리한 셈이고, 잘못한 죄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그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 4 과 일천번제와 지혜로운 재판 (왕상 3:1~28) 목록으로


본문 ① 1~3절은 “솔로몬의 일반적 생활”이고, ② 4~9절은 “일천번제를 드림”이요, ③ 10~15절은 “좋은 것을 주시는 섭리”이며, ④ 16~28절은 “지혜로운 재판”입니다. 여기에서 전체의 제목을 정한다면 “일천번제와 지혜로운 재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솔로몬의 일반적 생활(1~3절)

1) 1절에서 “솔로몬은 애굽왕 바로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그 딸을 취하여 데려다가 다윗성에 두었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솔로몬의 배우자에 대한 내용이 처음 나오나 7:8에서 그가 첫 왕후임을 기록하였습니다(대하 8:11). 애굽과 국교를 맺어 화평하게 지내면서 바로의 딸을 데려온 것입니다. 성경에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한 말씀도 있지만(출 34:16, 신 7:3) 이방인이라도 신앙이 일치한 상태에서는 허락되었습니다(신 21:10~13). 보아스와 룻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룻 4:13).

2) 또 솔로몬은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렸다” 하였으니, 이는 왕이 된 후에 계속 궁과 성전과 성곽에 대한 공사를 하였음을 뜻하고, 2~3절에서는 “그때에는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때이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였고 솔로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부친의 법도(다윗이 부탁한 말)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여 분향하더라”고 하였습니다.

3) 여기에서 “산당”은 간이 제단으로 각처에 시설된 것을 의미합니다. 길갈, 실로, 기브온, 예루살렘 등 여러 곳에 제단이 있었습니다. 4절에서도 보시면 솔로몬이 기브온 제단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지만 그 당시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니(삼하 15:24~25, 29) 언약궤 없이 제단만 있고 제사장만 파송되어 제사드리는 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 분향을 하였다”는 뜻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의 성소가 아닌 기브온의 산당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릴 정도로 제사의 정성을 다윗보다 더 힘썼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브온 산당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있는 성소에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삼하 6:17~19). 여기의 “오히려”란 뜻을 다윗의 제사에 반대되는 부정적 방법으로 산당제사를 드린 것처럼 해석한 예도 있지만(풀빛주석) 저의 견해는 “다윗처럼 법궤가 있는 성소에서만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당에서도 제사를 드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준공식을 한 후부터 단일 성전제도가 확립된 줄 압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봉헌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왕상 8:22~61).

2. 일천번제를 드림(4~9절)

1) 4절에서 “솔로몬왕은 기브온의 큰 산당에 가서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0㎞쯤 되는 곳인데(수 9:3, 삼하 2:12) 그곳 제단이 크다는 뜻은 대하 1:3에서 “법궤를 제외한 모든 시설이 모세 때의 것을 그대로 시설한 곳이라” 하였은즉 의미있는 성소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일천번제(천 마리의 희생물을 번제로 드린 뜻)를 어떻게 드렸을까?”에 대하여 대하 1:2~5을 보시면 “천부장, 백부장, 재판관, 온 이스라엘의 방백과 족장들이 함께 가서…회중으로 더불어 드렸다” 하셨은즉 왕이 혼자 천 번을 드린 것이 아니라 여러 방백들에게 명하여 드리게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장황스럽고 정성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2) 5절을 보시면 솔로몬은 그날 기브온에서 잤는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꿈에 나타나셔서(꿈에 계시를 주신 것은 가끔 있었던 일임, 창 28:11~16, 욥 23:15~16, 히 1:1)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셨으니, 제사로서의 정성을 받으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고 작정하셨으면서도 “그 당사자의 소원과 기도에 응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겔 36:24~31, 37). 하나님은 솔로몬의 제사 정성에 감동을 받으시고 “소원을 구하라” 하였으니, 이때에 구하는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반되지 않는 것이면 다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소원에도 소원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한 가지 소원만 구하라” 하신다면 저는 “제가 기록할 만큼의 기독교 문서를 잘 마칠 때까지 건강과 지혜와 시간을 주십시오” 라고 할 것입니다.

3) 6~9절의 말씀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대답한 내용으로 6절에서는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하나님이 저(다윗)를 위하여 큰 은혜(왕, 메시야 약속)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다윗)의 위에 앉을 아들(자신)을 저(다윗)에게 주셨나이다” 그리하여 7~9절에서 “제가 적은 아이로…아비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사온데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왕노릇하기에 미숙하다는 뜻) 백성은 많으며 기록(왕실 역사나 재판 기록 같은 것) 할 수도 없사오니 어찌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선악을 분별하여 재판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대답의 취지는 “다윗왕의 공의로운 정치와 신앙의 덕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왕위에 있게 하셨다는 감사의 뜻과 함께 자신은 어리고(보통 30세쯤으로 짐작함,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지내고 예루살렘에 와서 밧세바와의 관계를 맺고 첫 아이가 죽은 후 다음에 낳았은즉 40년에서 10년쯤 뺀 나이임, 왕상 4:11, 15에서는 사위도 두 사람이 등장함) 백성은 많으므로 왕노릇하기에 미숙한즉 지혜를 주셔서 선악분별을 잘 하므로 공의롭게 재판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4) 10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 구한 것을 “하나님 마음과 맞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수와 부와 원수의 생명(원수 갚는 일)을 구하지 않고 송사를 위한 지혜 구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구하지 않음”은 이기주의가 아닌 박애주의를 뜻하고 “수와 부를 구하지 않은 것”은 현세적 정욕을 피한 것이며, 또 “원수 갚음을 구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일(롬 12:19)일 뿐 아니라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12절에서 하나님이 더 많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셨고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되 너 같은 자가 전무후무 할 것이요”, 또 13~14절에서는 “네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요 또 네 아비 다윗처럼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하시므로 부귀와 영화와 장수의 복까지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섭리를 깨달으셔서 되도록이면 이기적, 정욕적, 현세적인 목적의 것을 피하고 신앙적, 사명적, 박애적 목적으로 기도하는 일을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5) 15절에서는 “솔로몬이 꿈에 계시 받은 것을 깨닫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소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꿈을 꾼 사실을 기록에 남긴 것을 보면 제사 드리기 전에 신복들에게 사실을 알렸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번제”란 레 6:8, 출 29:38~42에서 말씀한 제사의식으로 희생물(소, 양, 비둘기)을 불태우는 제사를 일괄하여 표현하는 용어이고, 수은제란 레 3:1~7, 7:11~21에 나타난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할 때, 또는 감사와 서원을 할 때 그런 목적을 위하여 드린 제사를 의미합니다(레 7:12, 16, 23:19). 사람이 어떤 때는 생시와 비슷한 꿈을 꿀 때가 있고, 또 말씀이나 기도 등으로 신앙과 관련된 꿈을 꿀 때가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계시처럼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성경보다 더 밝은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계시이고(히 1:1), 단번에 주신 성경만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유 1:3). 고전 4:6에서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 지혜로운 재판(16~28절)

1) 이 말씀은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재판을 잘 한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송사의 내용은 “창기 두 여인이 한 집에서 3일 간격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단 둘이 있는 중에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눌려 죽이고, 다른 여인이 잠든 사이에 죽은 아이와 산 아이를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두 여인은 다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 하여 왕을 찾아온 것”입니다. 범인은 아이를 죽인 어미이지만 그것을 지목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억울함을 당하였고, 한 사람은 범인이면서도 아닌 척 하는 행태를 보였을 때, 솔로몬은 “칼로 아이를 나누어 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한 여인은 “아이를 죽이지 말고 (산 아이를 가진) 여인에게 주어 키우게 해 주십시오” 하였고, 한 여인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도록 나누자” 하므로 솔로몬은 “아이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여인이 그 어미라” 하여 그에게 아이를 차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아이의 생명을 사랑하는 여인이 그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것 같으나 지혜로운 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지식과 다른 것이 이런 일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5 과 번창한 왕국 소개 (왕상 4:1~34) 목록으로


본문 ① 1~6절은 “솔로몬 왕국의 관리들”이고, ② 7~19, 22~23절은 “지방 장관과 양식 공급”이며, ③ 20~21, 24~28절은 “평화 지역과 병기 유지”요, ④ 29~34절은 “솔로몬이 받은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총 제목은 “번창한 왕국 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솔로몬 왕국의 관리들(1~6절)

1) 1절에서 “솔로몬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은 12지파중 제외된 백성이 없음을 뜻하고, 2~6절에서는 각종 관리 또는 특종 직임자(제사장)를 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사장은 “사독(이 사람은 다윗 때부터 제사장임, 삼하 8:17, 20:25)의 아들 아사리아(사독의 아들로 아히마아스도 있음, 삼하 18:19)와 또 사독과 아비아달이라(4절)” 하였으니, 이 아비아달은 왕상 2:27에서 파면되었으나 직분 명칭만 기록하였든지 아니면 상당기간 후에 다시 복직시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2절에서 서기관(삼하 8:17)은 시사(삼하 8:17, 20:25)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이고, 사관(삼하 8:16)은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이요, 4절에서 군대장관은 여호야다의 아들이고, 다윗 당시에 시위대장이었던(삼하 20:23) 브나야요, 5절에서 나단(이는 나단 선지자가 아닌 솔로몬의 형으로 보아야 함, 삼하 5:14, 눅 3:31)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chief of the district governors)이요, 또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며, 왕의 벗이요(삼하 8:18, 15:37), 6절에서 아히살은 궁내 대신이며,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세금 및 역사(役事)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군대장관은 2:35에서도 브나야가 임명되었습니다.

2. 지방 장관과 양식 공급(7~19, 22~23절)

1) 22~23절에서 (솔로몬 왕궁에서 사용되는) 하루의 식물은 “가는(고운) 밀가루 30석, 굵은 밀가루 60석, 살찐 소 열 마리, 초장의 소(목장 소)가 20마리,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도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라” 하였으니, 이는 왕궁의 규모가 상당한 것을 나타내 주신 말씀으로 거기에 따라 국력도 커진 것을 의미합니다. 7절에서는 “솔로몬 왕궁에 필요한 양식을 열 두 지방 장관이 한달씩 맡아 예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8~19절에서는 열 두 지방 장관과 그 구획을 말씀한 내용인데, 이때는 여호수아와 사사기 시대처럼 지파간의 분정된 구획에서 지파별 또는 그 영역이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으니 ① 에브라임 산지(이 지역은 팔레스틴 중앙부로 북쪽 잇사갈과 남쪽 베냐민 땅의 중간 넓은 지역임)에는 벤훌이요, ② 마가스, 사알빔, 벧세메스, 엘론벧하난(이 지역은 욥바와 블레셋 지역에 인접한 곳임)에는 벤데겔이요, ③ 아룹봇, 소곳, 헤벨 온 땅(이 지역은 지중해쪽 갈멜산 바로 남쪽임)에는 벤헤셋이며, ④ 돌 높은 땅 온 지방(이곳은 갈멜산 바로 남쪽임)은 벤아비나답(솔로몬의 딸 다밧의 남편)이고, ⑤ 다아낙과 므깃도와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스안 온 땅과 아벨므홀라와 욕느암까지(이 지역은 에브라임 지역 북쪽과 잇사갈 지역 남쪽 사이임)에는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이며, ⑥ 길르앗라못과 므낫세의 아들 야일의 모든 촌과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 있는 큰 성읍들(요단 동북편, 길르앗 북쪽)에는 벤게벨이고, ⑦ 마하나임(길르앗 남쪽, 요단 남동쪽)은 잇도(대하 9:29)의 아들 아히나답이요, ⑧ 납달리(갈릴리바다 북쪽)에는 아히마아스(솔로몬의 딸 밧스맛의 남편)이며, ⑨ 아셀과 하롯셋(갈멜산 북쪽) 후새(삼하 15:33~37)의 아들 바아나요, ⑩ 잇사갈(갈릴리 바다 바로 남서쪽, 요단강 상류 서쪽)에는 비루아의 아들 여호사밧이며, ⑪ 베냐민(예루살렘 북쪽)에는 엘라의 아들 시므이요, ⑫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이 다스리던 길르앗 땅(사해바다 동북쪽)은 우리의 아들 게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에서는 열 두 지역의 구획과 지방장관과 그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평화 지역과 병기 유지(20~21, 24~28절)

1) 20절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고(많다는 뜻, 창 22:17),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므로 태평세대임을 말씀하였으며, 21절은 이방 지역에서도 솔로몬에게 굴복해 오므로 그 나라들이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 공(貢)을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이방 지역은 “하수(북쪽 유프라데 강을 뜻함, 창 15:18~21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지역부터 남쪽 애굽 강까지 주신다고 약속하심에 근거함)에서부터 블레셋(팔레스틴 서남쪽) 땅에 이르기까지, 또 애굽 지경(시나이 반도와 팔레스틴 경계)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이방족)라”고 하셨습니다.

2) 24절은 “솔로몬이 하수 이편(남쪽) 딥사(유프라데 강 남쪽의 큰 도시, 하맛의 동북쪽 120㎞쯤)에서 가사(블레셋 땅 남쪽 항구, 욥바 남쪽 70㎞쯤)까지에 있는 모든 왕을 다 관할하므로 그 지역에 평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수에서 가사까지에 분포된 이방 왕들이 어떤 나라들일까요? 이들은 다윗 때에 정복한 수리아 지역의 왕들과(삼하 8:6~14, 10:19) 블레셋 왕들(삼하 8:1)을 의미할 것입니다. 25절의 “단과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전역을 뜻하는 말로 자주 나온 내용(삼하 3:10, 17:11)이고, “각기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아래서 살았음”은 평화를 의미한 뜻입니다.

3) 26~28절은 “솔로몬의 병기를 관리하는 외양간이 4만이요(대하 9:25에서는 4천이라 하였음, 여기에 대한 설명은 4만은 유다 전역에 있는 것이요, 4천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무리한 해석이고, 사본상 기록에서 착오된 듯하며, 4천이 맞는 듯 함), 마병이 12,000이라 하였고, 앞에서(7절) 말씀한 열 두 장관이 왕실의 양식은 물론 말의 사육재료(보리와 꼴)까지 담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솔로몬이 받은 지혜(29~34절)

1) 29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많이 주셨고 넓은 마음(이해심과 포용성)도 주시되 바다의 모래같이 하셨다” 하셨으니, 지혜와 총명을 구별하기 어려우나 지혜는 평화와 해결력에 속하고, 총명은 기억력과 연구력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해 봅니다. 그리고 “바다 모래 같음”은 풍부하게 주신 뜻이라 할 것입니다. 30절에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의 모든 사람(아라비아를 뜻한다고 함) 또는 애굽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하였으니, 이는 31절에 근거할 때 지혜있는 자들과의 대결을 통해서 결론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31절에서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 예스라(지역미상)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 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의 모든 나라에까지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3) 32절에서 “솔로몬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잠언 일부가 잠언서에 기록됨) 그 노래는 일천다섯개이며(시편중 72편, 127편)”, 또 33절에서는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흰 산이란 뜻, 팔레스틴 북쪽 지중해변 시돈 항구가 있는 현재의 레바논 지역)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출 12:22, 민 19:6, 현재 ‘카피리스 스피노자’라는 식물이라 함)까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동식물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터득하였다는 뜻입니다. 34절에서 “이 소문이 모든 민족 중에 퍼져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왕이 “스바”여왕입니다(왕상 10:1). 따라서 솔로몬은 신앙인으로서 정치가도 되고 동식물, 또는 시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6 과 성전건축을 시작함 (왕상 5:1~18) 목록으로


본문 ① 1~6절은 “두로왕의 협조를 구함”이요, ② 7~11절은 “두로왕이 기쁨으로 협력함”이며, ③ 12~18절은 “두로왕과의 약조”입니다. 따라서 본 장의 총 제목은 “성전건축을 시작함”입니다.

1. 두로왕의 협조를 구함(1~6절)

1) 1절은 “두로왕이 솔로몬의 왕된 사실을 알고 축하 사자를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두로국은 지중해변 갈멜산에서 북쪽으로 37㎞쯤에 위치한 두로항(옛날 베니게의 도성, 수 19:29, 겔 27:3)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다스리는 왕국이요, 왕은 “히람”입니다. 히람은 다윗왕 때에 궁궐을 지을 때도 협력하였고(삼하 5:11), 본문에서는 “히람이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2절에서 축하 사신을 맞이한 솔로몬은 히람왕에게 기별하여 말하기를 3~5절에서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을 인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을 발바닥 밑에 두시기(정복의 뜻)까지 기다리셨는데, 4절에서 이제야 하나님이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사 대적과 재앙이 없으니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신 대로(네 위에 오를 네 아들이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삼하 7:12~13)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6절에서 당신은 나를 위하여 영을 내려 레바논의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일) 할 것이요 나는 당신이 말씀하는 대로 당신의 종의 삯(인건비)을 붙여드릴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시돈(두로 북쪽 35㎞쯤의 항구 역시 두로 지역임) 사람처럼 벌목을 잘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는 뜻을 전했습니다.

2. 두로왕이 기쁨으로 협력함(7~11절)

1) 7절에서 “두로왕은 솔로몬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찌로다” 하고 또 “저(하나님)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였으니 그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혹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없었다 하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종교에 대하여 또는 그 신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절대자를 섬기는 절대종교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종교를 갖지 말라는 법은 없은즉 혹 그들의 상대적 종교행위가 건설적 목적에 응한다면 그 응하는 부분에 대하여 존경하고 협동할 수 있어야 하고(예를들면 사랑과 봉사행위 같은 것), 기독교 계명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동화하지 않는 자세로서 협력과 화목과 분별을 임의로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타 종교를 무조건 증오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이것이 틀려서 동화될 수 없다”는 것만 밝히면 될 것입니다. 종교가 맞지 않는다 하여 무슨 제품 불매 운동을 한다면 이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2) 두로왕은 솔로몬에게 기별하기를 8절에서 “솔로몬의 요청을 허락”하였고, 9~10절에서는 “그 물품(백향목과 잣나무 재목)을 떼로 엮어 바다로 수운하여 지정된 곳에 보내어 풀 것인즉 당신은 받으시고 나의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식물을 주소서” 하고 목재를 보낸즉, 11절에서 솔로몬은 히람에게 “그 궁정의 식물로 밀 2만석과 맑은 기름(감람유로 추정됨) 20석을 주고 해바다 그와같이 주었다” 하였은즉 양국이 필요한 물자로 교역을 한 것입니다. 성전도 공짜로 지어드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삼하 24:24).

3. 두로왕과의 약조(12~18절)

1) 12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3:12)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약조를 맺었으니” 그 약조 내용은 9~11절의 교역 통상조약과 13~18절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히람의 협조를 이방인의 개입으로 여겨 부당하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일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근거한 것이고(5:12), 히람도 하나님을 찬양한 만큼(5:7) 외인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이외의 기술도 두로로부터 도입하였습니다(대하 2:7).

2) 13~14절에서 “솔로몬은 3만의 역군을 동원하여 만명이 한달씩 레바논(두로를 의미함)에 가서 일하고 두 달은 집에 있게 하였으며, 아도니람이 이 일에 감독하였다(6절)” 하였고, 15~16절에서는 “담군(재료 운반책)이 7만이요 산에서 돌 뜨는 자가 8만이며 그 외에 그 역사를 동독(감독하여 독촉함)하는 자가 3,300인이라”고 하였습니다.

3) 17~18절은 “왕이 크고 귀한 돌을 떠 다음어서 전의 기초석을 놓게 하였고 또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발”은 갈대아의 그발 강이 아니고 겔 1:3 베니게(레바논)의 해변성읍을 별도로 나타낸 것임, 수 13:5)이 그 돌을 다듬어 건축하게 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두로국과의 친교 및 성전건축의 인력과 재료수급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7 과 성전건축과 축복 (왕상 6:1~14) 목록으로


이 6장의 말씀은 전부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인데 두 번에 나누어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① 1절은 “성전건축의 시작시기”요, ② 2~3절은 “성소의 낭실의 넓이”이며, ③ 4~6, 10절은 “교창과 다락방”이고, ④ 7절은 “조용한 역사”이며, ⑤ 8절은 “중층과 3층의 계단”이고, ⑥ 9절은 “지붕 재료”요, ⑦ 11~14절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1. 성전건축의 시작시기(1절)

이 시기는 “솔로몬 4년 시브월(그 당시 유대력은 2월이고, 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한다 함)이고 그때는 출애굽 480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사시대(가나안 입국부터 사울왕 되기까지)의 기간을 알려면 광야생활 40년과 사울왕 40년과 다윗왕 33년과 솔로몬왕 4년을 빼야합니다. 그러면 그 기간이 363년이 됩니다. 연대를 추정함에 있어서 이만큼 확실한 기록이 많지 않음을 아십시오. 37~38절에서는 제11년 불월(8월, 양력 10~11월)에 필역하므로 확실하게 7년 6개월 공사를 한 것입니다(38절에 7년이란 약식표현임).

2. 성소와 낭실의 넓이(2~3절)

1) 2절에서 “성소의 넓이와 높이는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 높이가 30규빗이라”고 하였습니다. 1규빗은 1자 반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90척×30척=2,700평방 척이되고, 이것을 36으로 나누면 75평이 됩니다. 그러면 이 넓이를 모세의 성막과 대조해 보면 꼭 같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출 26:7~9을 보시면 덮개의 말씀이 나오는데 “4규빗 폭에 30규빗 기장의 앙장을 11폭 붙이라” 하였지만, 한폭은 반씩 양쪽 모수리에 접게 되어있기 때문에(출 26:9) 실제 길이는 10폭 길이, 40규빗이 됩니다. 따라서 40×30(1규빗이 1.5척인즉)은 60×45=2,700평방 척이 되므로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높이는 출 36:21에서 성막 높이 널판길이가 10규빗(15척)인즉 솔로몬의 성전 높이는 30규빗이므로 그 3배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지요(출 38:29, 39:43). 솔로몬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명하신 법대로 만들었음을 대상 28:11~19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광야의 성막은 여행용이지만 솔로몬의 성전은 정착용이기 때문에 규모가 다를 수 있고,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므로 단일 성전제도가 정착된 것입니다(왕상 8:22~34).

2) 3절의 성소 앞 낭실(들어가는 현관)은 장은 광과 같이 20규빗이고, 광은 전 앞에서 10규빗인즉 기본 성소폭인 30규빗에 앞부분 10규빗(19평)이 더 증설된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크고 웅장한 성전으로 연상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골의 100평쯤 되는 아담한 예배당을 연상하게 됩니다.

3. 교창과 다락방(4~6, 10절)

1) 4절에서 전을 위하여 (밝기와 환기를 위하여) 붙박이 교창을 만들었으니 이 창은 출입용이 아닌 광선과 환기용으로 출입문 위나 다른 적당한 곳에 시설함을 뜻하고,

2) 5~6절에서는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밖으로) 돌아가며 골방(단층)과 다락(2, 3층)방들을 만들었으니, 넓이는 7규빗으로 하였고, “전의 벽 밖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들보가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음”은 다락의 들보를 벽 속으로 꿴 것이 아니라 벽돌에 턱을 만들어 그 위에 얹은 것을 뜻하며, 또 하층부터 벽을 쌓아 3층 위에 지붕을 얹되 그 넓이가 2층에 1규빗, 3층에 1규빗씩 더 넓게 한 것인데, 이는 외부의 추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곳은 제사장들의 용도로 쓰기 위함입니다. 10절에서는 성소의 벽 밖으로 돌아가면서(낭실 쪽은 제외) 골방을 짓되 그 높이는 5규빗(7척 반)인즉 3층을 올려도 15규빗의 높이가 되므로 전체 성소 높이의 반쯤만 올라간 것을 표시하였습니다.

4. 조용한 역사(7절)

“모든 재료를 다른 곳에서 규격에 맞도록 가공해 온 관계로 전 안에서는 방망이나 망치나 모든 연장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엄숙하고 조용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럽거나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들레시거나 큰 소리를 내시는 분이 아니라”(마 12:18~21)고 하셨지요. 시끄럽게 신앙생활을 하시지 마시고 조용히 또는 질서있고 공교하게(시 33:3) 예배드리고 이웃에게도 시끄러움을 주시 않으면서 교회생활과 믿음생활을 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5. 중층과 3층의 계단(8절)

“중층 골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나사모양의 사다리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하였으니, 낭실 좌우편에 그 계단을 만든 것으로 사료됩니다.

6. 지붕 재료(9절)

9절에서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다” 하셨은즉 이는 지붕처리를 의미합니다. 지붕을 덮을 때 서까래와 널판을 덮은 것은 이해되나 비를 막는 덮개(지붕) 재료로 나무를 쓴 것은 적당한 방수재료를 첨부하였을 것입니다.

7. 축복의 말씀(11~14절)

솔로몬이 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고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삼하 7:13,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심)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에서는 세 가지(나라의 견고함, 함께 하심, 버리지 않으심)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은즉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므로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법도에 성실한 것이 복 받는 비결임을 교훈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4절은 성전의 외부공사가 끝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8 과 성전의 내부시설 종료 (왕상 6:15~38) 목록으로


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성전 내부장식에 관한 것입니다. 매 절에 나타난 내용을 이해하시는데 중점을 두십시오.

15절은 “성전 전체를 잣나무 마루로 깔고 4면 벽(문과 창문 제외)은 천정에 닿기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입힌 것”이요,

16절은 성전의 전체 길이 60규빗 중, 뒷쪽 20규빗을 지성소로 구별한즉 그 사이에 칸을 막아 내소(지성소)와 외소(성소)를 구별하는데 그 공간 전부(문 제외)를 천정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막은 것을 뜻하고, 따라서 17절은 60규빗에서 20규빗으로 지성소로 구별한즉 외소(성소) 길이가 40규빗이란 뜻이며,

18절의 “전 안의 백향목 벽에 박(돌외 식물)과 핀 꽃을 아로 새겼으니” 이는 그룹이 조각된 밑부분에 새겼을 것이요, 따라서 “모두 백향목이라 돌이 보이지 않음”은 돌로 쌓은 벽 내부 전체를 백향목 판자로 장식하였으므로 돌이 보이는 곳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19~20절은 언약궤를 두기 위한 내소의 넓이를 정4각면체가 되도록 20규빗씩 공간을 잡았은즉 양쪽 편에 5규빗씩의 공간이 있게 되고, 천정도 10규빗의 공간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모두 정금으로 입혔고(21절에도 중복 기록됨), “백향목 단에도 입혔다”함은 지성소가 성소에서 한 계단 높인 것을 의미합니다.

21절에서 내부 벽에 정금을 입힌 것은 지성소 뿐 아니라 성소 안에도 마찬가지요 “내 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 질렀다”함은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백향목 벽에 양쪽으로 정금판을 입히면서 양쪽 금조각이 함께 붙도록 볼트로 고정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2절은 “온 전 내부를 금으로 또 단의 전부(지성소의 한 계단 높은 단의 바닥)도 금으로 입혔다”고 한 것입니다. 성소 내부는 전부 금만 보이게 된 것입니다.

23절은 “내 소 안에 감람목으로 두 그룹(날개달린 천사의 모양)을 10규빗 높이로 조각하였다” 하였으니, 20규빗 폭에 10규빗 높이로 두 그룹이 조각된 것을 의미합니다. 24절에서 한 그룹의 한쪽 날개가 5규빗인즉 두 그룹이 20규빗에 적당히 차지한 것입니다. 높이가 20규빗이지만 그룹의 높이는 10규빗을 차지하는 것이 적당하였을 것입니다.

25절에서 “다른 그룹도 10규빗…한 척수 한 모양”, 또 26절에서 “높이도 10규빗”인 것은 24절의 설명처럼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10규빗 사이에 그룹 한 쌍씩 배열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실을 27절에서도 설명하셨으니 곧 “그룹의 날개가 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은 것”이라고 하신 것이요, 28절에서는 “그룹들도 금으로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29절에서 “내외소 4면 벽에 모두(10규빗 공간에) 그룹들(한 쌍)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 새겼다” 하였으니, 여기의 “꽃을 아로 새긴 것”은 18절의 의미와 같으며, 30절의 내용도 22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32절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에 대한 말씀으로 “문은 감람목으로 만들고 문의 규격은 전체 벽(30규빗)의 1/5(6규빗)을 할애하여 중심부에 시설한 것”을 의미합니다. “인방과 설주(재료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외부 문처럼 감람목으로 사료됨, 33절)”란 문 위에 가로지른 턱이고 설주는 문의 돌쪽을 박는 세로 기둥을 의미합니다. 문 재료는 감람나무라도 겉은 다 금으로 입혔고, “그룹들과 종려에도 금으로 입혔다” 하였으니, 그룹과 종려 등의 문양을 조각한 공간을 전체 공간 10규빗에 한폭(그룹 한 쌍)을 할애하여 조각된 것을 의미합니다(35절).

32~34절은 밖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문은 규격이 벽(30규빗)의 1/4(7.5규빗)이고, 문설주는 감람목이며 문은 잣나무로 하고 문 네 짝을 두 짝씩 붙여 접도록 만들었습니다.

35절에서 거기에 첨부된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은 지성소 출입문의 경우와 같으며(31절) 다 금으로 입히되 “그 새긴 데를 맞게 함”은 32절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전체 화폭(10규빗 공간)에 연결된 조각을 의미한 것입니다.

36절은 “다듬은 돌 세 켜와 두꺼운 백향목 판자 한 켜로 안뜰을 만들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소의 중앙부분(앞에는 향단이 있고 좌우에 촛대와 진설병상이 있는 중간)에 공간을 장식하는 의미로 화단같은 시설을 만든 것으로 사료됩니다. “돌 두켜와 백향목 한 켜”란 뜰의 둘레를 쌓은 것을 의미합니다. 뜰에도 제사장의 뜰과 큰 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대하 4:9). 이렇게 하여 1절에서 설명드린 대로 7년 6개월만에 필역한 것입니다(37~38절).

제 9 과 왕궁 건축과 두 놋기둥 (왕상 7:1~22) 목록으로


7장은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핍니다. 본문 ① 1~12절은 “왕궁 추가 건축”이요, ② 13~21절은 “성전 낭실의 두 기둥 장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왕궁 건축이 추가 건축인 이유는 삼하 5:11에서 다윗왕 때에 두로왕 히람이 1차로 지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삼하 7:1, 11:2).

1. 왕궁 추가 건축(1~12절)

1) 1절에서 “솔로몬은 자기의 궁을 13년 동안 건축하여 전부를 준공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다윗궁을 더 확장한 것이고, 또 두로왕 히람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함께 건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로왕 히람은 13~14절에서 “납달리 지파의 과부 여인과 두로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사람(히람의 아버지)이 놋점장이(철공 기술자)였기 때문에 아들 히람왕도 그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의 외가의 나라이므로 상부상조를 잘 하게 된 것입니다.

2) 2~3절은 궁궐의 넓이와 기둥과 들보에 대한 말씀으로 “넓이는 50규빗(75자), 100규빗(150자)이고(312평), 높이는 10규빗(15자)이며, 기둥이 네 줄이라” 하였은즉 50규빗 사이에 네 개를 세우고, 사방의 벽은 벽돌임을 감안하셔야 하고(9절), 또 성소의 길이쪽으로 15기둥을 세운 후 중간기둥 즉 실내 부분으로도 15개씩 두 줄이 세워진 것입니다. 3절에서 그 위에 들보 45개가 15개씩 세 줄로 얹히게 된 것입니다(재료가 넉넉하였으므로 돌벽은 기둥 밖으로 쌓았을 것입니다).

3) 4~5절은 창과 문에 대한 말씀으로 “창과 창이 세 줄로 서로 대하였음”은 기둥 네 개가 있는 외벽 사이에 한 창씩 마주 대하게 하면서 높이가 30규빗인즉 10규빗 사이에 하나씩 두어 세 줄을 만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문과 문설주는 큰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었다” 하였으니, 필요한 곳에 여러 개의 문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이요,

4) 6~7절은 본관 건물에 인접된 낭실(성전 현관처럼)을 지었으니, 그 위치는 본관 건물 중앙일 것이며 “또 기둥을 세워 짓되 장(100규빗 중앙 부분)이 50규빗, 광(앞으로 나온 부분)이 30규빗이라” 하였고, “또 기둥 앞에 한 낭실이 있고 또 그 앞에 기둥과 섬돌(오르는 계단)이 있음”은 넓은 낭실 앞에 또 부속실을 연계한 것을 뜻합니다. 이때에 당연히 오르는 계단(섬돌)이 있는 것이요, 이 부속실들은 “심판(재판)하기 위한 낭실이며 온 마루를 백향목으로 덮었다”고 하였습니다.

5) 8절은 “솔로몬이 거처할 궁과 장가든 바로의 딸(왕상 3:1)을 위하여 지은 집이 있으니 이는 왕궁의 낭실 뒤 다른 뜰에 지었고 지은 방법(공작)은 일반이며 (규모가) 낭실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낭실의 넓이는 94평 정도).

6) 9~12절은 궁궐을 지을 때 돌을 다듬어 정교하게 사용한 것과 백향목 재료와 큰 뜰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9절에서 “이 집들은 안팎(외벽, 내벽)을 귀하고 다듬은 돌로 지었고 척수대로 톱으로 켠 것(정교하게 절단 된)이라 기초석에서 처마까지 또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였다” 하였고, 10~11절에서는 “귀한 기초석 10규빗, 8규빗 되는 큰 돌, 척수대로 다음은 귀한 돌과 백향목도 있으며”, 12절에서는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뜰 주위 경계에 적당한 방법으로 돌과 나무를 장식한 것 같은데 어떤 모양으로 쌓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잘 상상되지 않습니다(13~14절은 1절에서 설명됨).

2. 성전 낭실의 두 기둥 장식(13~21절)

1) 15절에서 저(히람)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각각 18규빗(27자), 넓이는 12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한즉 이 굵기는 반경 3.8규빗(5자 7치)으로 여섯자 가까이 되는 반경의 굵기입니다. 16절에서 이 기둥은 놋을 녹여 부어 만들었고 5규빗 되는 기둥머리를 만들어 기둥 위에 얹었은즉 전체 높이는 23규빗이 된 셈이며 여기의 낭실의 높이는 성전 높이와 같은즉(30규빗, 왕하 6:2) 23규빗 위에 7규빗의 공간이 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낭실 높이가 본당 높이보다 7규빗 낮은 23규빗 위에 지붕이 얹혀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2) 21절에서 이 두개의 기둥은 낭실 앞에 세우되 좌우편에 세워 현관의 기둥으로서 모양새 있게 되었을 것이요, 우편 기둥을 야긴(저가 세우리라의 뜻), 좌편 기둥을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라 하였은즉 이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선민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지기를 바란 뜻이라 할 것입니다.

3) 17절은 5규빗 되는 기둥머리의 장식을 말씀하신 것인데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모양으로 땋은 것을 만들어 각각 일곱 개씩 양 기둥머리에 꼭 같이 장식을 한 것”입니다. 그물로는 기둥머리를 둘렀고, 사슬은 아래로 늘어지도록 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18절에서는 “두 줄 석류(방울로 된 것)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물, 사슬 외에 더 첨부된 장식을 의미합니다.

4) 19절에서 “낭실 기둥머리에 있는 머리의 4규빗을 백합화 모양으로 만든 것”은 기둥머리(17절) 자체의 모양(위로 향한)을 백합화처럼 만든 것을 의미하고, 20절 말씀은 17절의 “두 줄 석류의 장식”을 자세히 설명한 말씀으로 석류 200알이 (위 아래) 두 줄로 둥글게 돌아가면서 장식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개의 놋기둥은 신앙적으로 능력과 축복을 구하는 의미도 있고, 또 성전의 전면, 현관이기 때문에 그 기둥머리 부분을 화려한 악세사리로 장식한 줄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 하였는데, 글만 보고 구조를 상상하려니까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이해하시는 정도만 되셔도 다행일 줄 압니다.

제 10 과 바다와 기명들을 만듦 (왕상 7:23~51) 목록으로


본문 ① 23~26절은 “바다를 만듦”이고, ② 27~37절은 “물두멍 받침 열을 만듦”이며, ③ 38~39절은 “물두멍 열을 만듦”이요, ④ 40~51절은 “기타의 기명들을 만듦”입니다.

1. 바다를 만듦(23~26절)

1) 23절은 “(놋을 녹여, 영어성경에는 ‘놋바다’라 하였음)부어서 바다를 만들되 그 바다의 직경은 10규빗, 높이는 5규빗, 둘레는 30규빗의 줄을 두를 만하다” 하였으니, 이것을 자로 환산하면 15척×7.5척의 둘레는 17.5×3.14로 할 때, 55척이 됩니다. 둘레 30규빗은 45척이므로 10척의 차이는 대략으로 기록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 바다가 무엇입니까? 이 용어는 육지의 반대인 바다(얌)를 뜻하는데 영어로는 round tank(둥근 탱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물 담는 둥근 그릇입니다. 그 둥근 그릇의 직경이 15척이고 높이가 7.5척인즉 몽고의 둥근 토담집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바다”라고 명칭하였을까요? 그것은 물이 귀한 곳에서 많은 물을 말할 때 바다로 과장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의문나는 것이 있지요. 거기에 물은 얼마나 들어가며 그 물을 무엇에 쓰려고 그런 시설을 하였을까요? 26절 끝에서 “그 바다는 (물을) 2,000밧을 담겠더라” 하셨는데, 1밧은 부피의 단위로 23ℓ정도라 하니 2,000×23=46,000ℓ이고 200ℓ을 한 드럼(10말)으로 잡으면 460드럼의 물이 들어가는 놋그릇을 말합니다. 이 물의 용도는 제물을 씻고 제사장들이 몸을 씻으며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일에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많은 물이 필요하겠는가? 하시겠지만 솔로몬의 일천번제나 절기 때의 제사 행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2) 24절은 그 바다의 주변에 무늬를 조각한 말씀입니다. 집채 만한 대접으로 상상하시고 “그 가장자리 아래로 돌아가며 박(6:18, 식물 이름)이 있는데 1규빗에 박 그림 열개씩 새겨 넣었는데 이것은 부어 만들 때 두 줄로 부어(놋물 붓는 통로가 둘이란 뜻으로 사료됨)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3) 25절은 바다를 받치고 있는 시설이 소 열 두 마리를 조각하여 세쌍씩 동서남북에 세우되 소머리를 다 밖으로 향하게 하고 열 두 소의 등 위에 바다가 얹혀지도록 한 것입니다. 26절에서는 그 바다의 눗 두께가 “한 손 넓이 만하다”(아홉치 또는 한자쯤) 하였고, “그 가(바다의 위쪽)에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술잔)가의 무늬처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2. 물두멍 받침 열을 만듦(27~37절)

1) 27절은 보시면 “놋으로 받침 열을 만들었는데 그 받침의 크기는 기장과 폭이 각 4규빗이고 높이가 3규빗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평 정도의 넓이에 높이가 보통사람 어깨쯤 올라오는 크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받침을 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아셔야 받침을 만든 설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2) 28절에서 물두멍 열을 놋으로 만들었는데(물두멍은 4규빗 폭인즉 바다보다 작은 물그릇을 뜻함) 그 크기는 40밧(40×23ℓ=920인즉 4.4드럼)의 물을 담게 되는데, 그 물두멍의 직경이 4규빗인즉 그 둘레와 폭이 받침의 크기와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 받침 위에 열 물두멍이 각각 하나씩 얹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받침”이란 물두멍의 받침이고, 이 물두멍에 4드럼 정도의 물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고 그것을 운반하거나 용도에 알맞고 편리하게 만든 것이 “받침”이라고 생각하시면 그 받침의 제도(28~37절)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물두멍의 용도는 바다의 물을 나누어 사용하는데도 필요하고(출 30:17~21), 또 그 물두멍이 놋솥과 같은즉 소 한 마리 정도를 삶을 수 있으므로(삼상 2:14~15) 절기 때에 모여든 수 천명의 사람들에게 고깃국을 제공하는데도 쓸 수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3) 37절을 보시면 “이 받침을 다섯은 전 우편에, 또 다섯은 전 좌편에 두었고 전 우편 동남쪽에는 바다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른편은 남쪽마당이며 번제단은 장막 성전대로라면(출 40:6~7) 성전 동문 앞에 있어야 하지만 8:64을 보시면 바다의 맞은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29~36절은 받침을 만든 방식(제도)입니다. 37절은 “받침 열개를 다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시려면 한절 한절의 내용을 상상하시되 큰 솥을 담아 운반하는 구루마를 연상하시고 그 용어상의 표현이 옛날 용어를 번역함에 있어서 현재용어와 적당하지 않음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상상한 내용대로 설명한 주석을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① 28절에서 “받침의 제도”라 하시고 “받침”이란 용어가 여러차례(30, 34, 35절) 나오는데, 이 용어는 구루마 형태의 기본 틀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4규빗 넓이로 4각형 입방형체의 윤곽틀을 의미합니다. 그 윤곽틀에는 놋판을 끼울 수 있는 틈이 있고, 또 버팀발과 뚜껑을 유연성 있게 폈다 접었다 할 수 있게 된 것과 앞, 뒤, 밑에 바퀴 축이 있는 것까지의 골조, 기본형태를 의미합니다. “옆 변죽 가운데 판이 있다”는 뜻을 공동번역에서는 “판자가 틀에 끼워져 있다”고 하였은즉 이는 변두리의 사방에 동판이 끼워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닥은 막은 것이 없고 4면만 3규빗 높이로 막아진 것입니다.

② 29절의 “변죽 가운데 판”이란 사면 변두리 판의 중앙이란 뜻이요, 거기에 “사자와 소와 그룹들이 (조각되어) 있고”, 또 “변죽 위에 놓는 자리가 있음”은 그 받침 중앙이 솥을 놓을 자리란 뜻이요, “사자와 소 아래에 화환 모양이 있음”은 그 조각 무늬 밑에 새겨진 무늬를 말씀한 것이며, 30절에서 “그 받침에 각각 네 놋바퀴와 놋축이 있음”은 바퀴축 네 개가 받침틀에 접합되어 있으며, 거기에 바퀴가 끼워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동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또 “받침 네 발(이것은 네 바퀴 또는 고정 다리를 뜻함) 밑에는 어깨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어깨 같은 것은 물두멍 밑편에 부어 만들었고 화환은 각각 그 옆에 있다” 하였는데, 여기의 “어깨 같은 것”을 공동번역에서는 “받침두리들”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닥이 둥근 물두멍에 고정된 것으로 받침 안에 넣을 때 연접되게 한 시설로 사료됩니다. “화환이 그 옆에 있다” 함은 물두멍을 넣었을 때 물두멍과 옆의 판(28절)이 밀착됨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31절에서 “그 받침 위로 들이켜 고가 한규빗 되게 내민 것이 있음”과 “그 내민 판들이 네모진 것”은 윗판 4면을 돌출시켜 탁자용처럼 쓰기 위한 것인 듯 하며, “그 면은 직경 한규빗 반 되게 반원형으로 우묵하다” 함은 솥처럼 생긴 물두멍의 둥근 것을 제외한 네 귀퉁이의 공간인 듯합니다.

③ 32절은 바퀴의 시설로서(30절) 바퀴의 고가 한규빗 반은 바퀴의 직경이 3규빗을 뜻하는 것으로 땅과 받침의 공간을 의미하며, 33절에서 “바퀴의 제도가 병거바퀴 제도와 같다” 하였고, “그 축(가로지른 축)과 테(바퀴 외부 땅 닿는 부분)와 살과 통(바퀴 중심부)이 다 부어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④ 34~36절은 앞에서 설명한 부분과의 관계를 재설한 내용인 듯합니다. 예를들면 “받침 네 모퉁이에 어깨 같은 것이 넷이 있는 것”은 물두멍이 둥근 것인즉 네 모수리의 공간에 손잡이 같은 것이 나와 있을 수 있고, “받침 위에 둥근 테두리 반규빗”도 둥근 물두멍을 안착시키기 위한 시설이며, 또 “받침 위에 버팀대와 옆판”들은 28, 31절을 재설한 것이요, 36절의 “빈 곳을 따라 무늬를 놓은 것”은 둥글고 움푹해진 네 모수리에 무늬를 놓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⑤ 지금까지 29~36절까지의 말씀을 상상하면서 설명 드렸는데, 이 설명으로 받침 전체를 도면으로 보는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용을 확실히 알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 드려 보려고 애쓴 성의”를 나타낸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봉함(열려 깨닫지 못함) 되었을 때 사도요한은 “크게 울었다”고 하였습니다(계 5:4). 성도들도 모르는 말씀 때문에 근심할 수 있어야 하겠고, 때가 되면 알려질 것도 있은즉(벧후 1:19) 유의하며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덜 중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성전이나 성전 기구를 성경으로 계시하신데도 분명히 목적이 있으실 것인즉 성경 어느 부분이나 깊이 연구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이 제도의 상징적 교훈은 결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3. 물두멍 열을 만듦(38~39절)

앞대지의 2), 3)항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4. 기타의 기명을 만듦(40~51절)

1) 40절은 “추가로 만든 것과 모든 제작을 마침”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만든 것이 “물두멍, 부삽, 대접들”이라 하였는데, 물두멍은 38절에서 “열 개를 만들었다”고 하였지요. 여기의 물두멍은 38절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닌 물통(공동번역에서는 물독)으로 번역함이 옳다고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을 보면 델리취(Delitzsch)의 해석을 인용하여 기록하시기를 “원문 글자의 착오 사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사본에는 תוֹדי󰘏(통, 또는 솥들)로 표기된 것인데, 필사자가 תוֹדי󰗑(물두멍)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앞 글자 한자의 차이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두멍은 큰 솥이고, 여기의 물통은 작은 그릇이며, 부삽은 아궁의 불을 쳐내는 삽이고, 대접들은 식기에 해당합니다. “모든 일을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2) 41~42절은 “두 기둥을 만듦에 대한 재설”로서 기둥 둘(15절), 기둥머리 둘(16절), 기둥머리의 그물장식(17절), 그물에 매단 400석류(18절)이고, 또 43~45절은 23~40절에서 제작한 것을 역시 재설한 내용으로 “열 받침, 열 물두멍, 한 바다(23~26절), 바다 아래의 열두 소, 솥(물통), 부삽, 대접들”이라 한 것이며,

3) 46절은 “놋그릇을 제작할 때 사용한 거푸집 흙을 요단 평지의 숙곳과 사르단 지역에서 채취한 차진 흙이라” 하였으니, 숙곳은 요단강 중간쯤의 동편으로 갓 지파의 성읍이고(수 13:27), 사르단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물이 역류하여 쌓였던 곳으로(수 3:16) 숙곳 남쪽 7㎞쯤입니다. 마치 우라나라의 낙동강 하류의 흙처럼 코로이드화된 고운 흙을 의미합니다(낙동강 하류, 과거 행정구역으로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의 벌판은 열 길을 파도 돌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47절은 “기구가 심히 많으므로 솔로몬이 (무게를) 다 달지 않고 두었으니 그 놋 중수(무게 분량)를 능히 측량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4) 48~50절은 위에서 설명하지 않은 기명에 대한 내용으로 “전의 모든 기구들, 곧 금단(향단), 진설병의 금상(떡상), 내소(지성소) 앞에 좌우로 놓는 두 정금 등대, 또 등잔과 등대에 장식한 금꽃, 등잔과 불집게(등잔불똥 청소용), 정금대접, (아궁용) 불집게, 주발, 숟가락, 불 옮기는 그릇(부삽으로 담아 붓는 그릇), 지성소와 외소 출입문의 금 돌쩌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51절에서 솔로몬은 “이 모든 기구들과 다윗이 준비해 놓은 은금들을 다 여호와의 전 곳간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5)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셨고 계시하신 대로 성전을 짓게 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계시의 의미”와 “속죄사역의 의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헌신의 방법”을 나타내시므로 이것을 시행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요 2:21, 히 9:1~8, 왕상 3:1~5). 재료나 규격, 무늬에 실제적 또는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상상하십시오. 재료는 최고재료가 금인즉 이는 불변성과 존귀를 뜻하고, 규격은 용도의 실제성을 나타내며, 무늬의 박그림이나 백합화 화관은 기쁨을, 사자는 힘, 소는 희생, 그룹은 가까이 모심 등의 의미를 상징한 것으로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제 11 과 법궤안치와 봉헌사 (왕상 8:1~21)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① 1~11절은 “법궤안치와 영광”이고, ② 12~21절은 “솔로몬의 봉헌사”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법궤안치와 봉헌사”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법궤안치와 영광(1~11절)

1) 1절에서 솔로몬왕은 성전이 완공되었은즉 “다윗성 곧 시온(예루살렘 서남쪽 시온산과 기드론 계곡을 의미함, 그곳에 임시 성소가 있었고 법궤도 있었음, 삼하 6:12~15)에서 법궤를 새성전으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두목들(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임)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으니” 이는 거국적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2) 2절에서 그 시기는 “솔로몬왕 12년 에다님(7절)월 절기때라”고 하였습니다. 이때가 솔로몬왕 12년이 되는 이유는 성전 건축을 솔로몬왕 4년 시브(2월)월(출애굽 480년)에 시작하여 7년 6월이 지난 솔로몬왕 11년 불(8월)월에 끝났는데(왕상 6:1~2, 37~38) 본문에서는 7월에 행사를 가졌은즉 1년 뒤의 7월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기는 7월인즉 7월 10일은 대속죄일이고, 7월 15일은 초막절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레 25:26~36).

3) 3~4절에서는 “법궤를 제사장들이 메었고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메고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성소 안에 시설하는 모든 거룩한 기구들은 고핫 자손들이 메도록 명하셨지요(민 4:4, 15, 신 10:8). 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이고, 아론의 증조부입니다(대상 6:1~3). 따라서 고핫 자손은 곧 아론의 후손인데,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직을 맡았으니까(민 3:10, 16:40) 하나님의 명대로 성물을 취급한 것입니다. 그때에 5절에서 “왕과 그 앞에 모인 회중이 법궤 앞에서 수많은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제사의 의미는 감사와 속죄 등 여러 가지의 뜻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4) 6~9절은 법궤안치에 대한 내용으로 “그 언약궤는 지성소에 시설된 그룹들의 날개(6:23) 아래 안치한즉 양쪽에 10규빗으로 세워진 그룹들의 날개가 법궤와 그 채를 덮었기 때문에 8절에서 그 채가 (좌우쪽으로) 긴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는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그 채는 그 당시(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 궤 안에는 두 돌판만 있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선민들과 언약하실 때 만들어 주신 것을 모세가 그 안에 넣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지만(출 16:33~34, 민 17:10, 히 9:4) 48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는 없어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세세토록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벧전 1:24).

5) 10~11절은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고 법궤를 지성소 그룹 아래 안치한 후)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므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사실을 구름의 징조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구름을 나타내사 몇가지 의미를 보이신 일이 있으니 곧 임재의 의미(출 13:20~21, 33:14~15, 34:5), 인도의 의미(출 13:2, 40:36~37, 민 9:17~25), 영광 받으시는 의미(본문, 출 16:10, 40:34~35, 계 10:1), 보호의 의미(사 4:5)를 나타내 주신 것이었고, 또 “이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길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 구름은 밖에서 문을 통하여 들어온 구름으로 사료됩니다.

2. 솔로몬의 봉헌사(12~21절)

이 봉헌사를 살피면 12~13절은 “성전을 하나님의 처소로 드린다”는 봉헌사요, 14절은 “이스라엘 온 회중에 대한 축복”이며, 15~21절은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을 송축하라 하고 그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12~13절의 봉헌사는 “하나님이 캄캄한데 계시겠다 하셨으나(이 뜻은 하나님이 다윗의 건축 계획을 사양하시면서 삼하 7:6에서 “지금까지 집에 거하지 않고 어두운 장막과 회막에 거하신 상태를 연장하신 의미”임)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입니다” 하고 봉헌한 것입니다. 여기의 “영원히 계실 처소”란 하늘의 성소에 연계된 의미를 나타낸 뜻인 줄 압니다(히 8:5, 9:23, 12:22, 계 4:2).

2) 14절에서 솔로몬왕은 뒤에 서 있는 회중으로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하였고, 15절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선민이 하나님을 송축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입으로 다윗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의 손으로 이루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삼하 7:12~13에 나타난 내용대로 “다윗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시고 왕위를 견고케 하신 후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3) 16~21절은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하시기까지의 경위를 말씀한 내용”으로 “선민을 출애굽 시켜 인도하신 날부터 자기 이름(내 이름)을 둘만한 집(화려한 성전을 뜻함)을 위하여 아무 성읍도 택하여 지적하신 바가 없다가 다윗을 택하여 선민을 다스리게 하셨고,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을 때 그 마음을 좋게 여기셨지만 (그 뜻을 그에게 허락지 않으시고, 대상 22:7~8) 그 몸에서 낳을 아들이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이루어주셨으므로 내가 내 부친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서 왕위에 앉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출애굽 당시에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계명)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지성소)를 설치하였다” 하므로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과 법궤와 지성소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봉헌사에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강조하며 영광 돌릴 것을 훈시한 것입니다.

제 12 과 솔로몬의 기도 (1) (왕상 8:22~34) 목록으로


본문은 솔로몬왕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법궤(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한 다음 하나님께 기도로 고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분석하면 6대지로 분류하여 살피실 수 있습니다. ① 22~26, 52~53절은 “기도의 자세와 응답하실 근거”이고, ② 27~30절은 “성전을 향한 기도의 전제”요, ③ 31~34절은 “범죄에 대한 기도”입니다. 나머지 3대지는 다음 과목에서 계속 살피겠습니다.

1. 기도의 자세와 응답하실 근거(22~26, 52~53절)

1) 기도의 자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반적 자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아는 지식입니다. 일반적 자세는 22절에 나타났는데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제단) 앞에서 회중에 마주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한 것”이요, 하나님 아는 지식에 대하여는 23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일반적 조건도 필요하지만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갖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을 아십시오. “상천하지의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이 23절에 나타나 있고, 39절에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문을 읽으시면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 많이 터득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일반적 자세에서 솔로몬왕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였는데, 그 장소가 대표자의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소 안에는 제사장만 들어가니까요. 제단 앞이나 마당이 성도의 기도처임을 아십시오. 그리고 백성을 대표한 기도인즉 백성을 마주 대하여 한 것이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편 것”은 하늘(높은 곳)에 계신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표현입니다. 손을 들고 하는 기도가 대표자 또는 제사장에게는 어울릴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외형적 자세같은 것은 교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한 내용들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행 7:60, 엡 3:15), 묵상기도(삼상 1:13), 얼굴을 땅에 대는 기도(민 16:22, 수 5:14), 환자일 경우에는 벽을 향하고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왕하 20:2).

2) 응답하실 근거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절대자 또는 무소부재하심)”이시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요, 24절에서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이루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로 25절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의 길을 삼가서 네(다윗)가 내 앞에서 행한 것처럼…행하면 네게로 좇아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끊어지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을 다윗을 위하여 (다윗에게 언약하셨은즉 그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이 다윗에게 언약하셨다는 말씀은 삼하 7:22, 왕상 2:4, 대하 16:9에 근거를 둔 내용이며, 25절에서도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확실하게 하옵소서” 하므로 거듭 응답의 근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3) 52~53절에서도 하나님이 은혜로 기도에 응답하실 근거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간구와 부르짖음”에 의함이요, 또 한 가지는 “선민으로 구별하여 주의 산업을 만드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52절에서는 “종의 간구와 백성의 간구를 보시고 무릇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 하였으니, 여기의 “간구와 부르짖음”은 선민의 기도의 성실함을 나타낸 말씀이요, 53절에서 “출애굽 때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출 19:5~6, 신 9:26)처럼 주께서 만민 가운데서 저희를 구별(선택)하여 주의 산업(영광 받으실 대상)을 삼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주실 근거를 간구와 선택 두 가지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2. 성전을 향한 기도의 전제(27~30절)

1) 27절은 “하나님의 임재의 초월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무소부재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성전은 물론 하나님의 보좌를 하늘이나 하늘들의 하늘(높은 곳을 강조한 의미임)에 보좌를 두신다 해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땅 뿐 아니라 높은 곳에 보좌를 만들어도 우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좌소로서는 부족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겸손의 뜻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헌납이 부족하더라도) 28절에서 “종의 기도와 간구 및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기도, 간구, 부르짖음, 비는 기도”는 기도의 소재와 간절성의 차이를 나타낸 표현입니다. 기도는 소재의 범위가 넓고, 간구는 특정 내용의 간청이요, 부르짖음은 위급한 상태에서의 호소를 뜻하고 비는 기도는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2) 29절에서 “주께서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신 12:11)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소서” 하였고, 또 30절에서는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여 주십시오” 하였으니, 여기의 “이곳을 향하여”란 장소를 전제적 조건으로 하는 의미가 있고, 또 제사장 외에는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즉 가까운 곳인 성전 마당에서 기도를 하나, 먼 곳 어느 곳에서 기도를 하거나 성전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의 성질을 꼭 같게 여겨 달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은 지상의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닌즉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인 천국보좌(하늘보좌로 표현한 곳, 계 4:2)에서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민의 단일 성전 제도가 이 말씀에서 확립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은 성소에 대한 구심점(일정한 처소)이 없었습니다. 여기 저기에 산당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솔로몬이 (선지자의 입장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 천국보좌에서 응답해 주십시오” 한 만큼 그때부터 선민의 단일 성전 제도가 시행된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북왕국이 분리된 후에 예루살렘 성전과의 격리를 위하여 북방 이스라엘(여러보암)이 벧엘과 단에 이질적 제단을 건립한 것(왕상 12:29)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구약시대가 끝나는 때(이방인 전도가 시작된 때)까지 시행된 것입니다. 혹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 하신 말씀을 오해하여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 마당처럼(기도응답의 전제적 처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신약의 예배당은 공예배 처소, 또는 기도할 환경을 적절하게 만들어 주는 처소일 뿐 특별한 응답을 전제하는 장소가 아니란 점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을 만민의 기도의 집이라” 하신 것은 구약시대에 사용한 그 성전 마당을 기도의 장소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3. 범죄에 대한 기도(31~34절)

1) 31절은 “범죄한 개인이 회개하는 증표로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면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재판관들을 감동하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그 당사자를 일컫는 뜻)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십시오” 하였으니, 이는 “죄인과 의인이 공의로운 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임과 동시에 성전의 제단에서 맹세하는 일(죄인이 회개와 보상을 약속하는 맹세)을 수렴해 주십사 하는 뜻이요,

2) 32절에서는 “민족이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고 주께로 돌아와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면 하나님이 하늘(보좌)에서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므로 범죄로 인한 전쟁의 패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을 은혜 베푸시는 장소로서의 방편으로 써 주십사 하는 소원(29절의 뜻도 그러함)과 개인 또는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중보자적 기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목사라도 중보기도 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성령님만 중보기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눅 22:31, 23:34, 살후 3:5, 롬 8:26). 그러나 구약시대에서 솔로몬의 기도가 중보적 성격이 있다고 보는 이유는 그가 선지자와 왕의 입장에 있었고(선지자는 계시를 받은 사실이 있음을 뜻함, 왕상 6:11~12), 또 구약시대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대한 계몽이 없는 상태에서 제사장과 선지자가 중보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 1:17, 7:5).

제 13 과 솔로몬의 기도 (2) (왕상 8:35~53) 목록으로


계속해서 8장을 살피겠습니다. ① 35~40절은 “기근과 온역을 위한 기도”이고, ② 41~43절은 “이방인을 위한 기도”이며, ③ 44~51절은 “전쟁으로 인한 간구”입니다.

1. 기근과 온역을 위한 기도(35~40절)

1) 35~36절은 “범죄로 인한 가뭄이 있을 때 주의 종들과 백성들이 주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치시며 주의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려 주십시오” 하였고,

2) 37~39절에서는 “(가뭄이 아닌 상태에서 나타나는 기근) 즉 온역이 있거나(온역은 질병이기도 하지만 농사를 짓지 못하여 기근을 주기도 함)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 메뚜기, 황충 또는 적국의 침략과 재앙 외 무슨 질병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이나 또는 주의 온 백성들이 다 각각 자기 마음의 재앙(범죄)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무슨 기도나 간구를 드리면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신즉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하므로 여기에서 “인생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두 번 강조하였고, 인생의 마음을 알 때 바른 심판을 할 수 있으며, 그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죄, 환난, 성전을 향한 기도와 회개, 용서, 회복, 공의로운 심판의 순서로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3) 40절에서 “그리하시면 저희(죄사함 받은 백성들)가 주께서 주신 열조의 땅에서 사는 동안 주를 경외할 것이라” 함은 선민이 하나님의 영광 받으실 기업인즉(51절) 하나님과 그 백성들과의 관계가 정상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평안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매일 기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이런 관계 유지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2. 이방인을 위한 기도(41~43절)

여기에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해 주실 것과 성전을 향한 기도에 대하여 선민들과 꼭 같은 은혜를 주실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1) 41절에서 “이방인은 선민(주의 백성) 중에 들지 않은 자이고 또 주의 이름으로(하나님을 경외하는 전제하에)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42절에서는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절대자 하나님을 높인 뜻)과 주의 능한 손(전능성을 믿는 것) 주의 펴신 팔(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음)을 믿고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실것”과

2) 43절에서는 “그들의 부르짖는 대로 이루어 주시고 땅의 만민(모든 택한 백성만 돌아오지만 전도의 목표를 보편성 있게 구한 것임)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그들도 선민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성전에 대한 신앙도 선민처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곳임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방인 전도에 대한 열망과 예언 또 이방인과 선민이 동등한 은혜를 받음에 대하여서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 전쟁으로 인한 간구(44~51절)

1) 44~45절은 “선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을 하러 나갈 때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돌보아 주십시오” 하였고,

2) 46~51절은 “전쟁의 패배로 끌려간 포로가 원근을 막론하고 그 적국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건축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은혜를 힘입게 해 주십시오” 한 기도입니다. 이 문장에서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① 포로가 된 것은 전쟁의 패배를 의미한즉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에 패배할 수도 있음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44~45절에서는 출전할 때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패배한 것입니다.

② “그 패배와 포로된 원인이 죄로 인한다”고 하셨습니다. 46~48절에서 “범죄하지 않는 자가 없고 저희가 주께 범죄하여 주의 진노로 적국에 붙이시므로” 적국으로 끌려간 것이요, “저희가 사로 잡혀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패역한 행위를 고백하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에 건축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③ 49~50절에서 “주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보아 주시며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고 사로잡아간 자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옵소서” 하므로 포로된 자가 구체적으로 은혜를 힘입어야 할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51절에서 “저들은 주께서 철풀무(극한 환난)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산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범죄치 않는 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으니까요(롬 3:10, 시 14:1~3). 불행은 죄로 말미암았을지라도 행복의 열쇠는 회개에 있는 것입니다. 46절에서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를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 붙이셨다” 하셨은즉 불행이 죄에서 온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48절의 말씀처럼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돌보아 주시되 50절에서 사로잡아간 자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면 환난은 죄로 말미암았으나 원근을 물론하고(46절) 하나님께(구약시대에는 성전을 향하여, 신약시대에는 무소부재한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면 자신을 괴롭힌 적국의 사람으로부터 긍휼을 힘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정리는 이 말씀이 다니엘과 같은 사람에게는 예언으로 응했다는 사실입니다(단 1:6~7, 6:10).

제 14 과 축복기도와 제사 (왕상 8:54~66) 목록으로


본문을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① 54~61절은 “권면과 축복기도”요, ② 62~66절은 “각종 제사를 드림”입니다.

1. 권면과 축복기도(54~61절)

1) 54~55절에서 “솔로몬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22절) 기도와 간구를 마치고 단 앞에서 일어나서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백성을 위한 축복기도는 서서 큰 소리로 백성을 향하여 한 것입니다. 축복기도의 내용이 백성들에게 들려야 믿고 복을 받을 것입니다. 56절에서는 축복하기 전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송할 것을 권면” 하였고, 다음에 “하나님이 (그의 부친 다윗에게) 허락하신 대로(삼하 7:11~13, 왕상 3:12~13)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모세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신 것을 감사하였음, 수 21:45, 23:14) 무릇 허락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다” 하므로 하나님이 약속 이루신 것을 감사한 동시에 찬양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2) 57절에서는 백성을 축복하는 내용으로서 “열조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고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거 동행이 얼마나 중요하며 큰 복인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58절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자기 반성을 철저히 하는 뜻, 시 119:26, 1411:4) 그 모든 길 곧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한다” 하였으니, 이 축복의 내용은 자기를 살피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119:56에서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축복의 의미를 주의 법도 지킨 것으로 아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3) 59절에서는 “간구의 말씀을 하나님이 항상 유의해 주실 것과 왕과 백성들의 하는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보아 주실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잘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있는 점과 날마다 당하는 대로(사태, 환경이 변하는 뜻) 돌보아 주시는 일”은 매일, 매순간 평안과 형통의 복을 받는 일인즉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60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 절대자이심을 만민이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 하였고, 61절에서는 “마음을 하나님과 화합하여 완전케 하므로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뜻)과 같은 것이 하나님과의 화합이고 완전케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뜻으로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하셨지요(빌 2:5). 또 만민이 하나님만 신이요 절대자이심을 알게 하려면 성도가 절대자 하나님을 부각시키고(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등 초자연성을 증거하므로) 절대자를 믿는 성도의 특별한 생활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항상 아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는 중 절대자를 섬기는 단체를 같은 범종교의 부류에 넣어 보편화 취급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또 절대자 하나님을 섬기는 단체나 개인 중에도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참신앙의 계통과 그렇지 못한 계통이 있는 것을 부각시켜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권면은 “감사하라 찬양하라 하나님과 화합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축복은 “함께 하셔서 모든 행사를 복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2. 각종 제사를 드림(62~66절)

1) 62절은 “왕과 백성이 함께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즉 누가 누구의 신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왕과 모든 백성들이 다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63절은 “솔로몬이 화목제를 드렸으니 그때에 드린 제물이 소가 2만 2천, 양이 12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의 낙성식을 행하면서 드렸은즉 감사의 뜻으로 드린 것입니다. 출 20:24을 보시면 “너희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장소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성전이고, “너의 번제”란 개인 개인의 몫으로 하라는 뜻인즉 많은 제물이 소요된 것이 여러 백성들, 개개인의 몫에 해당한 것인 줄 압니다. 화목제의 뜻은 감사의 뜻과 함께 하나님과 일치 화목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뜻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의식 절차는 레 3: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64절에서는 “낙성식 행사가 커서 지정된 제단으로는 다 수용할 수 없어 전 앞 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여 그곳에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와 기름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번제는 레 1:1~17을, 소제는 레 2:1~16을, 감사제(화목제)는 레 3:1~17을 참고하시고 기름은 소제에 섞는 것입니다(레 2:1~5). 지정된 성전제단이 적을 때에 장소를 넓혀 사용하는 것은 제사장이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일은 단일 성전제도에 위반되지 않습니다.

3) 65~66절은 “낙성식 기간과 모임의 범위와 기쁨으로 돌아간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2절에서 그 시기가 “7월 절기 때라” 하셨는데, 분문에서는 “7일, 7일, 14일”을 지켰으니 7월 15일~21일은 초막절인고로(레 24:34) 그 시기에 자유를 주기 위하여 8일~14일까지 행사한 백성들을 귀가시킨 것입니다(66절). 그때에 그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 종 다윗과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런 분위기에서 살 수 있는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모인 큰 회중들의 지역 범위는 “하맛 어귀에서 애굽 하수까지라” 하셨는데, 이 범위는 솔로몬의 통치구역 최북과 최남단을 의미합니다. 수 13:5, 민 13:21, 34:8에서는 그 하맛(갈릴리 바다 북쪽 약 400㎞ 지점)을 목표지점으로만 말씀하시고 점령하지는 못하였으나 다윗시대에 점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하수는 나일강 지역을 의미합니다. “하수”란 원문이 곧 “나일”이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때는 애굽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은즉(왕상 7:8) 그 지역과의 왕래도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제 15 과 성전 봉헌 후에 있은 일 (왕상 9:1~28) 목록으로


본문 ① 1~9절은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이고, ② 10~19절은 “건축보답과 다른 건축들”이며, ③ 20~26절은 “건축과 관련된 일들”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성전 봉헌 후에 있은 일”입니다.

1.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1~9절)

1) 1~2절에서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의 건축을 마쳤을 때 하나님이 기브온에서처럼(왕상 3:5)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계시가 임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을 오늘의 성도님들도 성경의 깨달음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을 마친 때”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꼭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는 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솔로몬이 받은 은혜입니다.

2) 3절에서 하나님이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것과 또 기도의 청원대로 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곧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시고 하나님의 눈(감찰하심)과 마음(관심을 쏟으심)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구약의 성전이 구별된 것과 하나님이 임재하신 처소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보람을 느끼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못갈 형편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3) 4~5절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게 행하면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다윗처럼 마음을 온전히 바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명하신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과 사람을 성실하게 사랑하는 계명의 강령이라” 할 것입니다(마 22:37~40). 또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심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의미도 있거니와(대상 22:9) 메시야 왕국에까지 연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으로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마 1:1).

4) 6~8절에서 축복에 반대 즉 “저주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며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선민이라도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으로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릴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엄하게 공의를 실현하신다는 뜻입니다(렘 12:7). 그렇게 되면 “모든 민족 가운데 (비난 받는) 속담과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고 이 전이 높을지라도(권위있는 성전의 뜻)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을 것이며 여호와 신이 왜 이렇게 하였느냐 하면 그 백성들이 애굽에서 인도한 자기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부종(附從) 숭배하므로 여호와가 재앙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350년쯤 후에 예언으로 응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경계인 동시에 예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는 신앙 일변도의 길을 열심히 행하여 복을 받으실지언정 다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건축보답과 다른 건축들(10~19절)

1) 10~11절은 솔로몬이 성전과 궁을 20년(성전 7년, 궁궐 14년)만에 마치고 갈릴리 땅(갈릴리 바다 서남지역)의 성읍 20을 히람왕에게 떼어주었으니, 이는 솔로몬이 요청한 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지공(바친 뜻, 支供)한 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왕상 5:10~11에 거래내역이 있은즉 여기에서 20성읍을 준 것은 도의적 보너스로 통치권의 영역을 넓혀준 것인 줄 압니다.

2) 12~13절은 히람왕이 갈릴리 20성읍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초라한 성읍들이었던 것 같음) 나의 형(솔로몬)이여 내게 준 성읍이 이 정도입니까? 하고 그 지역 이름을 가불 땅이라 하였으니 “가불”은 “변경, 혹은 국경”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또 다른 사전에는 “기쁘지 않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히람이 다스려볼만한 성읍으로 여기지 않은 뜻이요, 따라서 대하 8:2을 보시면 “후람(히람)이 자기에게 준 성읍을 다시 건축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곳에 거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일감을 받은 셈입니다. 14절에서 “그때에 히람이 금 120달란트를 왕에게 보냈으니 이는 자기의 통치구역을 넓혀준 것의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히람은 경제적 타산을 떠나서 지혜로운 솔로몬왕과 친한 것을 은혜로 여기고 서로 돕는 좋은 사이였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달란트는 무게를 뜻하는 단위로 중, 경 두 가지로 쓰며 중(重)일 경우는 42㎏이고 경(輕)일 경우는 21㎏이라고 합니다.

3) 15절에서 “솔로몬왕이 역군을 일으켜(공동번역은 강제노역) 하나님의 전과 자기의 궁과 밀로(공동번역은 밀로궁, 삼하 5:9, 삿 6:9)와 예루살렘성과 하솔(수 11:11, 삿 4:2, 삼상 12:9)과 므깃도(수 12:21, 삿 1:27, 왕상 4:12)와 게셀(수 10:33, 삿 1:29, 삼하 5:25)을 건축(공동번역은 증축) 하였는데, 16절에서 게셀은 전에 애굽왕 바로가 올라와서 그 성을 탈취하고 불사르며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 딸(솔로몬의 아내)에게 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게셀은 욥바에서 5시 방향으로 28㎞쯤에 있고, 바로가 그 성을 탈취한 기록은 성경에 없는 것 같습니다(위의 지명에 성경을 기록한 것은 그 지역의 역사와 위치를 본문 또는 강론문으로 참고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4) 17~19절에서도 역시 건축한 성읍들을 기록하였는데 “게셀 아래 있는 벧호론(수 10:10, 삼상 13:18), 바알랏(수 14:44, 15:11), 그 땅(바알랏)의 들에 있는 다드몰(다메섹에서 동북 200㎞쯤의 사막에 있는 성읍, 대하 8:4)을 건축하였고, 또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과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의 건축하고자 한 것을 다 건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건축에 대하여 공동번역은 증축이라고 하였습니다.

3. 건축과 관련된 일들(20~26절)

1) 21~2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다 멸하지 못한 이방족(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출 3:8)들을 노예와 역군으로 삼았고(창 9:25 예언의 성취임)”, 2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를 삼지 않았으며 저희는 군사와 신복과 방백과 대장과 병거와 마병의 장관이 되었다” 하므로 나라의 힘이 되는 요직에는 이방인을 쓰진 않았으니, 이는 신 17:15의 “타국인을 세우지 말라”는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2) 23~24절에서는 건축역사를 할 당시에 감독자의 수가 550명이었음과 바로의 딸이 다윗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건축한 밀로궁에 있게 하였으니, 이 밀로궁은 왕궁보다 약간 높은 지역에 있는 별장으로 사료됩니다. 대하 8:11을 보시면 “애굽 여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궤가 있는 다윗성에 있음이 합당치 아니하여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정치적 결혼 또는 불신 결혼을 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신 17:17). 다시 말하면 선민과 이방인을 격차있게 대한 듯 합니다.

3) 25절에서는 “솔로몬이 해마다 세 번씩(대하 8:13, 출 23:14~17) 그가 쌓은 단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였으니”, 이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였을 것이요, 여기에 세 번은 무교절(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초막절(수장절)을 의미할 것입니다(출 23:14~17). “이에 전 역사가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26~27절에서는 “솔로몬이 에시온게벨(에돔 땅, 홍해 물가 엘롯 근처, 갈대바다 끝 지역임)에서 배를 만들었고 이때에 히람이 익숙한 조선공들을 보냈으며 저희(히람의 신복들)가 오빌(아라비아 남쪽 지역, 금이 유명함, 욥 22:24)에 가서 금 420달란트(14절)를 얻어 솔로몬에게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방의 왕이 이방의 재물을 바친 것은 속국으로서의 조공의 의미가 있지만 장차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일에 대한 예표적 행사로 해석한 글을 보았습니다(사 60:1~9, 계 21:24~26).

제 16 과 스바여왕의 방문 (왕상 10:1~29) 목록으로


본문 ① 1~13절은 “스바여왕의 방문”이고, ② 14~22절은 “각종 기구를 제작함”이며, ③ 23~29절은 “솔로몬의 풍부한 자산”입니다. 대표적 제목으로 “스바여왕의 방문”으로 총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스바여왕의 방문(1~13절)

1) 1절을 보시면 솔로몬왕 때에 스바여왕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이 스바왕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에 대하여 우선 그 종족을 살피면 창 10:7에서 함의 손자요 구스의 아들 스바(Seba)가 있습니다. 함의 후손이 아프리카로 이주하였고 아프리카 동북쪽에 구스왕국이 있었는데, 민 12:1에 보시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는데 70인역 번역에서 구스를 에디오피아로 번역한 것을 보면 구스왕국이 에디오피아 왕국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또 “스바”로 변했는가? 할 때 그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창 25:3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손자(욕산의 아들)로 “스바”가 또 있는데, 영문표기는 “Sheba”로 표기가 다릅니다. 이 자손들이 아라비아 남단으로 가서 사베안 왕국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솔로몬왕 때 방문한 스바왕은 에디오피아 왕이 아닌 아라비아 남단의 사베안 왕으로 보는 해석이 더 적절한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했다” 하였는데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정치력과 재판 잘 하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니까 스바여왕이 만나고 싶고, 알고 싶으며, 또 정치적 수완에 대하여 자문도 받으려니까 찾아온 것인 줄 압니다. “어려운 문제로…시험했다”는 것을 수수께끼 문답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하나 여하튼 솔로몬의 지혜와 정치적 수완을 알고 싶은 문답을 한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란 “하나님이 그의 명예를 높여주셨다는 뜻”입니다.

2) 2절에서 그 스바여왕에게는 “수원(수행원)이 많았고 많은 금은보석을 약대에 싣고 왔는데 10절을 보시면 금 120달란트(1달란트 42㎏)요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솔로몬왕에게 선사하였는데, 그렇게 많이 온 적은 다시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스바지역에서 그런 보석과 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2~3절에서 “그가 묻는 것을 다 대답하므로 감추인 것(은미)이 있거나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4~5절에서는 “스바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헤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관리들의 의복)과 술관원들과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깜짝 놀랄만큼 두리번거리게 된 뜻)해졌다”고 하였습니다.

3) 6~9절은 스바여왕이 소감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입니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이제 와서 목도(직접 본 뜻)한즉 내게 들려준 말은 절반도 못되며 당신의 지혜와 복이 소문난 것보다 더 합니다. 당신의 사람들과 신복들은 항상 당신 앞에서 지혜를 들으니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공과의(바른 다스림)를 행하게 하셨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바여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복받고 정의롭게 사는 자가 그의 하나님(신)을 경외함에 대하여 성원을 보낸 일이라 할 것입니다(마 12:42).

4) 11절에서 히람은 오빌(9:28)에서 금과 백단목(인도가 원산이며 상록향목이라 함)을 운반해 왔고, 12절에서 “솔로몬왕은 그 백단목으로 하나님의 전과 왕궁의 난간과 노래하는 자를 위한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으며 이같은 백단목(양과 질을 뜻한 듯함)은 전에도 온 일이 없었고 오늘(이 말씀 기록 당시)까지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에 무역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솔로몬왕은 규례대로 스바여왕에게 물건(선물)을 준 것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주었고 그는 신복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2. 각종 기구를 제작함(14~22절)

1) 14~15절은 “솔로몬 왕실의 1년 세입금의 중수(금으로 받는 무게)는 666금달란트(금 27,972㎏)요, 또 상고(장사하는 사람)와 무역하는 객상(개인상인)과 아라비아왕들과 나라의 방백들에게서도 받는 것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16~17절은 “금을 쳐서 늘인 금으로 매방패에 600세겔(800g)씩 들어간 금방패 200을, 또 같은 방법으로 매 방패에 금 3마네(2,700g)가 들어간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어 레바논 나무궁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레바논 나무궁”이란 레바논에서 가져온 나무로 지은 궁궐의 부속된 병기창고를 의미합니다.

3) 18~20절은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거기에 금을 입혔는데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는 둥근 머리(의자 뒤의 모양이 아취형인 듯)가 있으며 앉는 자리 양편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조각)가 하나씩 섰으며, 또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는 열 두 사자가 (여섯씩 양편에) 섰으니 아무 나라에도 이런 보좌는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4) 21~22절은 “솔로몬이 마시는 (사용하는) 그릇은 다 금이고 레바논 나무궁에서 쓰는 것도 그러하며 은 기물(그릇)은 없었으니 이는 솔로몬 시대에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요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다시스로 왕래하는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였고 그 배로 3년에 1차씩 금, 은, 상아, 잔나비(원숭이), 공작(새)을 실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아라비아의 오빌이 동방의 보물창고라면 다시스는 서방의 바다 건너의 보고인 것입니다. “다시스”는 지도상으로 이태리 반도 서편 바다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지역이 확실치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스페인 남부 지브랄타 해협에 속한 곳이라 하였는데 근대 학자들은 이태리 앞 사르디니아 섬쪽이라고 한다 하니 확실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시스에 대한 문헌이 있으면 더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3. 솔로몬의 풍부한 자산(23~29절)

1) 23~25절은 “솔로몬의 지헤와 재산이 천하의 열왕보다 큰지라 천하가 다(넓다는 표현)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주신 것을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은, 금그릇과 의복, 갑옷, 향품, 말과 노새의 정한 수를 해마다 갖고 왔다” 하였고,

2) 26~27절은 “솔로몬의 마병과 병거를 모으매 마병이 12,000이요, 병거가 1,400이라 병거성에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처럼 많게 (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28절에서 “솔로몬의 말들은 왕의 상고들이 애굽에서 정가하여 떼로 사오게 하였는데 애굽에서의 병거 값은 은 600세겔, 말은 은 150세겔로 수입(공동번역)하여 이것을 헷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왕들에게 수출(공동번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겔은 11g정도라 하며 헷사람의 왕과 아람왕이 그것들을 솔로몬의 상고들을 통하여 사가게 되었으니 이는 일종의 무역인데 신 17:16에서는 “애굽의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헷족속(창 10:15, 출 3:8, 왕상 9:20)과 아람왕(삼하 15:8) 등 많은 이방족들이 솔로몬에게 복종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이 커 보이지만 별 것 아닌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6:29).

제 17 과 솔로몬의 타락과 대적 (왕상 11:1~22)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솔로몬의 타락과 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장 후반에도 대적은 계속 됩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3절은 “솔로몬의 여인 관계”이고, ② 4~8절은 “솔로몬의 신앙타락”이며, ③ 9~13절은 “하나님의 진노”요, ④ 14~22절은 “대적자 하닷”입니다.

1. 솔로몬의 여인 관계(1~3절)

1) 1절에서 “솔로몬왕은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절 끝에서는 “저희를 연애하였다” 하였은즉 이방 여인들에게 빠져 적극적 교제를 한 것이 사실인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왕이 색욕에 빠지면 안될 것과(잠 31:3) 많은 아내를 갖는 것을 율법(신 17:17)이 금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왕이 최초에 여인을 취한 기록은 왕상 3:1과 7:8에 나타났는데 거기에서 “바로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궁궐을 지어주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최초에 왕비를 맞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압은 다윗 때에 정복하였고(삼하 8:2, 12), 모압의 북편지역인 암몬도 그러하였으며(삼하 11:1), 에돔과(삼하 8:14, 왕하 3:8) 시돈(왕상 5:6)과 헷(창 23:16~20, 26:34)도 다윗 왕국의 위세에 복종한 나라들로서 그 지역 통치자들이 솔로몬에게 여인들을 천거 또는 진상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부일처제가 창조원리이지만 왕이나 족장들에게는 이를 간과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삼하 12:8).

2) 2절 말씀은 하나님이 일찍이…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였으나 솔로몬은 저희를 연애하였다” 하셨으니, 이 내용의 근거는 신 7:3~4, 출 34:16, 수 23:11~13을 요약하여 증언한 것인데, “너희(이스라엘 남녀)는 저희(이방인 남녀)와 서로 혼인하지 말며 저희(이방인 남녀로 이해하게 되는 문구임)도 너희(이스라엘 남녀)와 서로 통하게 말라”한 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이게도 경고를 주신 것처럼 이해되나 그 시대에 하나님이 이방인 상대로 말씀주신 일이 없기 때문에 번역문이 불안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공동번역은 “너희는 외국 여자를 아내로 삼지 말고 외국 남자를 남편으로 삼지 말라”고 번역하므로 개역 본문의 오해를 해소시켰으나 원문상의 접근에 대하여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3) 3절에서 “왕은 후비(원문의 “사라”)가 700이요 빈장(원문의 “필레게쉬”)이 300이라 왕비(원문은 “게비라”, 4절)들이 왕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 우상주의, 이방신 따르는 형편으로) 돌이켰더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왕비”라 한 “게비라”를 렘 13:18에서는 “왕후”로도 번역하였은즉 왕비로 이해함이 옳으나, 바로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는 기록은 없고, 에스더를 왕후로 말할 때는 “말카”란 용어를 쓰므로 용어상의 다양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첩”이란 히브리어는 “나시임(복수)”이라고 합니다(대하 11:21). 아 6:8에서는 “솔로몬의 왕후(말카)가 60인이요, 비빈(펠레게쉬)이 80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복잡한 용어로 볼 때 왕비나 후궁들의 급수가 있은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왕은 암몬 여인 나아마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왕상 14:21). 따라서 솔로몬이 왕후를 맞이할 때 이방여인과 선민여인을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후비 700과 빈장 300을 어떻게 거느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후비와 빈장 주위에 딸린 식구를 포함하여 대략 총괄한 수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봅니다(아 6:8). 그리고 “그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다”는 것은 신 7:4에서 “이방여인들이 네 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이 예언으로도 응한 줄 압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신앙타락은 여인들을 잘못 취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솔로몬의 신앙타락(4~8절)

1) 4절에서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20세쯤 왕되었을 것으로 추측, 40년 통치하고 죽었은즉 50대로 추정함)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신 7:4) 다른 신(5절)을 좇게 하였으므로…그 마음이 부친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타고 가던 자전거가 멈추면 쓰러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도 열심이 떨어지면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아방인 왕비들이 자기들의 신과 신앙을 소개한즉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부친 다윗은 세상 떠날 무렵까지 믿음을 잘 지키고 자손들에게 신앙의 대장부가 되도록 유언까지 하였으나(왕상 2:1~4) 솔로몬은 늙어가면서 세상적 향락과 함께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2) 그리하여 5~8절에서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삼상 7:3)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바알같은 남신이라 함)을 좇을 뿐 아니라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삿 11:24, 정복자의 뜻)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태양신을 뜻한다 함)을 위해서도 그같이 하였으며 이방의 후비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신들에게 분향 제사를 하도록 자유를 준 것”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함이요 그 부친 다윗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않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눈앞”이란 하나님이 어디서나 감찰하시는 것을 알면서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오만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등은 다 이방인들의 우상신의 이름인즉 솔로몬도 유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다신론주의자로 전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9~13절)

1) 4절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다” 하셨는데, 9절에서는 “하나님을 떠났다” 하셨고, 이로 인하여 “진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왕상 3:5, 9:2) 이 일(다른 신 좇는 일)에 대하여 명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11절에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하시므로 솔로몬의 악행으로 인한 보응을 하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솔로몬이 직접 받은 말씀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역사를 받은 선지자나(혹 아히야일지도 모름, 11:29~36, 대하 9:29) 또는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저자(예레미야로 추정함)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종합하여 기록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라를 신복에게 주신다”는 사실은 26~40절과 1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2) 12~13절에서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하나님이 다윗에게 솔로몬의 왕위를 견고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 삼하 7:12~13, 15~16) 네(솔로몬) 아들(르호보암)의 손에게 빼앗으려니와 다 뺏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언약한 사실) 나의 뺀 예루살렘(성전을 인하여 영광 받으시는 일)을 위하여 한 지파( 다 지파)를 네 아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사실에 대하여 진노하시되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시면서 벌은 벌대로 내리십니다. 솔로몬이 범죄한 죄값을 그 아들의 대에 갚으시는 일은 심판자의 뜻으로 3, 4대까지도 갚는다고 하셨습니다(출 20:5~6). 그대신 솔로몬은 아비의 신앙으로 덕을 본 셈입니다. 12지파 중 11지파를 뺏기는 것은 큰 벌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비하면 벌이 경하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본래 기업에 들지 않았습니다.

4. 대적자 하닷(14~22절)

1) 14절에서 “하나님이 에돔왕의 자손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대적이 없는 것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는 평화를 거두시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될 때에는 대적자가 생기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그 뜻이고,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도 아들들의 죽음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에돔은 에서족으로(창 25:30) 세일과 숙곳에 거주하였으니(창 33:16~17) 이 지역은 사해 남단과 갈대바다 끝(에시온게벨 또는 에일랏)의 동편 땅입니다. 삼하 8:14을 보시면 “다윗이 에돔을 정복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가 저를 대적한 사실은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25절에서 “솔로몬의 평생에 환난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닷은 왕의 자손인즉 에돔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15~16절은 다윗과 에돔과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 역사를 기록한 말씀으로 이는 삼하 8:14과 대상 18:12~13에 근거를 둔 내용입니다. “전에 다윗이 에돔을 정복하고 그곳에(잠시) 있을 때 군대장관 요압이 죽임 당한 자(자기 백성 전사자들)들을 장사하고 그곳 남자를 다 쳐서 없이하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6개월을 그곳에 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7~20절에서 “그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였는데 그 아비의 신복 중 두어 에돔사람과 함께 미디안과 바란광야를 지나 애굽으로 도망하였는데 애굽왕 바로가 저에게 집과 양식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을 뿐 아니라, 19절에서 더욱 은총을 베풀어 자기의 왕비인 다브네스의 동생을 그에게 아내로 주어 아들 그누밧을 낳게 되었고 그누밧은 바로왕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의 아들들과 친하게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3) 21~22절에서는 “하닷이 애굽에 있으면서 다윗과 요압이 죽은 소식을 듣고 고국으로 가도록 바로에게 청하였고 바로가 불편없이 배려했지만 그가 에돔으로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솔로몬을 대적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은 곧 에돔왕이 온 것인즉 솔로몬에게 조공 바치는 일을 중지하고 그 통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대적자가 생기는 과정이 그러함을 알려주시는 대목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대적자가 없으려면 하나님 경외하는 일과 사랑실천하는 일에 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주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 18 과 솔로몬의 대적과 죽음 (왕상 11:23~4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3대지로 나누면 ① 23~25절은 “대적자 르손”이요, ② 26~40절은 “대적자 여러보암”이며, ③ 41~43절은 “솔로몬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솔로몬의 대적과 죽음”이 됩니다.

1. 대적자 르손(23~25절)

1) 23절에서 “하나님이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에게 대적이 생기는 원인과 과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누구의 경우나 다 같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으니까요. “르손은 그 주인 소바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소바왕국은 다메섹 북쪽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지도 공부를 하시다 보면 예루살렘(여부스) 서쪽 10㎞쯤에도 소바가 있지만 그곳은 아닌즉 혼돈하지 마셔야 합니다. 본문의 소바는 일명 하맛소바(대하 8:3, 삼상 14:47)로 사울(삼상 14:47), 다윗(삼하 8:3)과도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르손이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이유는 반역성을 나타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24~25절에서 “르손은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삼하 8:3)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소바의 남쪽 약 40㎞ 지점인 다메섹으로 가서 왕이 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르손”은 수리아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수리아는 다메섹을 중심한 나라이고 앗수르는 니느웨를 수도로 한 티그리스강이 있는 서부 아시아에 있는 지역인즉 혼돈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멀리한즉 하나님이 여기 저기에서 대적이 생기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 대적자 여러보암(26~40절)

1) 26절에서 “에브라임족 스레다(벧엘 서북쭉 20㎞쯤) 사람 느밧의 아들(어미는 과부된 스루아) 여러보암이 손을 들어(반역을 선언한 뜻)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솔로몬의 신복이었다”고 하였습니다.

2) 27~39절은 “여러보암이 솔로몬을 배반하게 된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다른 대적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처럼 이 경우도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밀로(삼하 5:9, 왕상 9:5)를 건축하고 다윗성의 무너진 곳을 수축하였는데(27절) 이때에 여러보암은 큰 용사요 부지런하였으므로 솔로몬이 이 사람을 요셉족속(에브라임과 므낫세족)의 역사 감독자로 세웠는데(28절) 그즈음 여러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 실로(수 18:1~10, 삼상 1:9) 사람 아히야 선지자를 길에서 만났고 그때 아히야는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29절). “이때에 아히야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31절) 오직 내 종 다윗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뺀 성 예루살렘(성전 중심으로 섬기는 자들)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줄 것이다(32절) 이는 저희가 내 뜻대로 행하지 않음이라(33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솔로몬과 동화된 무리들)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숭배하며 다윗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3절). 이때에 아히야가 찢어야 할 새 옷을 입은 것은 하나님이 선민국을 찢어 분리시키실 것을 보이시기 위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3) 34~36절에서 “그러나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법도를 지켰으므로(다윗에게 언약하신 바도 있음, 11절) 내가 저(천국에 있는 다윗)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뺏지 않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열 지파를 뺏어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솔로몬 다음 왕)에게는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성전을 의식한 말씀, 삼하 6:2, 왕상 8:29)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메시야 계열)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 것이라” 하시므로 한 지파는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남겨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옷 열 두 조각을 찢어 여러보암에게 열 조각을 취하라” 하시고(31절), 32절에서는 “한 지파만 솔로몬에게 주신다” 하셨으니 솔로몬이 받은 한 지파는 다윗의 조상인 유다 지파인 것을 알 수 있지만 열 지파에 들지 않은 또 한 지파는 어느 지파일까요?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딸려 기업도 없고 정치성도 없이 제사에 봉사할 레위 지파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왕상 12:10~11에서 유다 지파에 베냐민 지파가 합세한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할 것입니다(세월이 지나면서 12지파의 세력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삿 20:43~21:6에 보시면 베냐민 지파가 거의 전멸될 뻔 하였으나 그 지파에서 사울왕이 나오면서 많이 복구되었고(삼하 4:1~3), 신명기 33장에서 모세가 12지파를 축복할 때 시므온과 납달리 지파는 그 축복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계 7:4~8에서 12,000명의 인 맞은 자를 말씀하실 때는 단 지파가 빠졌은즉 이런 말씀들은 다 각 지파의 발전에 대하여 영향을 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지파의 발전에 변화가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37~38절에서는 “하나님이 여러보암을 왕세워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방만이 아닌 통치권을 주신 뜻)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율법)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고 내 종 다윗의 행함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처럼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줄 것이라” 하시고, 또 39절에서는 “내가 이로 인하여(나라를 분국 시킨 일) 다윗 자손(솔로몬과 유다 지파)을 괴롭게 할 것이나 영원히 그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보암을 중심으로 나라를 분국 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 자손들을 징계하시기 위함이요 여러보암이 반역의 중심에 서는 것도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리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선민국가의 통일을 뜻하는 것이 아닌, 신약시대에 성도와 교회의 세계로 통일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6) 이상의 섭리로 인하여 솔로몬의 신복인 여러보암이 반역의 기치를 들게 된 것이고, 40절에서 “솔로몬이 여러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러보암이 애굽으로 도망(망명)하여 애굽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그곳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타락하면서 애굽과의 관계나 이방과의 우호관계도 점차 깨지고 악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섭리가 정치적으로 나타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솔로몬의 죽음(41~43절)

1) 41절에서 “솔로몬의 남은 사적(열왕기상에 기록되지 않은 것)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대하 9:29을 보시면 “솔로몬의 시종행적이 나단의 글과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책에 기록되었다” 하셨은즉, 이 세 사람이 솔로몬 시대에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기록과 역대기에 기록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42~43절에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40년을 통치하고 그 열조와 함께(열조들처럼) 자매(세상을 떠남) 그 부친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모친은 암몬여인 나아마임, 왕상 14:21, 대하 12:13)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제 19 과 분국섭리 (왕상 12:1~24) 목록으로


이 본문의 핵심은 선민국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두 나라로 갈라졌고, 따라서 그 원인과 경위를 설명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분국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5절은 “백성이 르호보암왕께 청함”이고, ② 6~15절은 “의견수렴과 결정”이며, ③ 16~20절은 “분국성취”요, ④ 21~24절은 “분국을 막지 못하게 하심”입니다.

1. 백성이 르호보암왕께 청함(1~5절)

1) 1절에서 (솔로몬이 죽은 후에) “온 백성들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 세우기 위하여 세겜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왜 예루살렘을 두어 두고 예루살렘에서 45㎞쯤 북쪽에 있고 사마리아성에서 동남쪽으로 12㎞쯤 위치한 세겜으로 갔을까요? 세겜이 전체 팔레스틴 지역의 중심지라는데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고, 또 세겜은 역사적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제단을 쌓은 곳이요(창 12:1~7, 33:18~20), 여호수아 때에도 민족적 집회를 한 곳입니다(수 24:1, 16:5, 10). 유다 중심이 되지 않고 전체 지파를 어우르는 의미로 중앙 지역을 택한 듯 합니다. 그곳에서 순리로 왕된 것을 보면 솔로몬이 죽기 전에 지목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암몬 여인의 아들을 택한 것을 보면 모계혈통, 특히 이방인 혈통을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의 조상(증조부)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출생한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2) 2절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이스라엘의 정변 소식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여러보암(11:26~33, 40에 근거하여 솔로몬에게 반역하고 애굽으로 갔음)을 불러오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를 앞세워 단결한 후에 르호보암의 정치를 견제하여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그리하여 3~4절에서 “여러보암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르호보암왕에게 가서 부친처럼 백성들에게 고역의 멍에(건축과 세금 등)를 무겁게 메우지 말고 가볍게 해 주셔야 백성들이 왕을 잘 섬길 것이라” 한즉, 5절에서 “르호보암왕은 3일 후에 대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새로 집권한 사람에게 백성의 소원에 따른 정책을 펴 달라는 청원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의견수렴과 결정(6~15절)

1) 6~7절에서 “르호보암은 먼저 솔로몬왕을 모셨던 노인들에게 자문을 구한즉 왕이 백성들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눅 22:25~26) 좋은 말(백성들의 짐을 덜어주는 뜻)로 대답하시면 백성들이 왕을 영영히 섬길 것이라” 하였으나 왕은 그 자문을 고려하지 않았고,

2) 8~11절에서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는 젊은층을 뜻함,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이 되었으나 정치연령이 어리고 마음이 약하였음, 왕상 14:21, 대하 13:6~7)에게 또 의견을 물은즉 그들은 백성의 뜻에 반대로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10절). 즉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이는 차원이 다름을 비유한 뜻) 내 부친이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나는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징치(징계하고 다스림)하였으나 나는 전갈(더 심한 징치)로 하리라” 라고 답할 것을 자문하자 르호보암은 소년들의 자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정치하는 방법으로 말하면 온화책과 강경책의 대립이고, 화합주의와 권위주의의 대립과 같은 것입니다. 경륜 많은 노론을 떨치고 이성에 원만하지 못한 소론을 택한 것을 의미하는데, 15절을 보시면 “이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과정 속에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권위주의로 정치하던 시대가 있었지요. 그러나 힘들게 그 권위주의를 꺾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우고 있지만 아직도 준법정신의 보편화와 개인 또는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권위주의로 약한 백성들을 누르고 군림하려 한 것입니다.

3) 그리하여 12~14절에서 “3일 후에 백성들에게 대답할 때 포악한 말로 대답하면서 젊은이들이 자문한 대로 채찍보다 강한 전갈로 징치할 것이라” 하므로 백성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니, 이는 11:30~31에서 “하나님이 아히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신 것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론과 자문과 선택하는 마음 속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3. 분국성취(16~20절)

1) 16절에서 왕이 백성들의 요청을 거부함에 따라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다윗의 자손이 백성을 덕 되게 하지 않는다는 뜻) 이새의 아들(역시 다윗의 자손이 왕된 것을 뜻함)에게서 업(생활을 이롭게 할 대책)이 없도다 하고 다윗이여(르호보암 왕실) 당신은 당신의 집(유다 지파)이나 돌보시오 하고 자기들의 장막으로 돌아가니 17절에서 결국 유다 성읍에 사는 자손들에게만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2) 18~19절에서 “르호보암이 역군(나라의 사역) 감독으로 아도니람을 파송한즉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이므로(왕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고) 왕은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으며 이같은 배반의 역사가 오늘날까지(이 성경이 기록된 시기)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전국의 중심지인 세겜에 가서 나라를 갈라내고 유다 지파의 왕만 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입니다.

3) 20절에서 “온 이스라엘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11:26) 여러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온 사실을 알고 저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유다,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왕을 삼았고 이때에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나라가 분국된 시기는 주전 908년경 르호보암이 네 번째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최초의 다윗처럼(삼하 2:4, 5:5) 유다 지파의 왕으로 전락하였고, 같은 시기에 북왕국 즉 여러보암 왕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4. 분국을 막지 못하게 하심(21~24절)

1) 21절에서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아 용사를 계수한즉 18만명이라 이들이 여러보암에게 속한 족속과 싸워 분국을 막으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역 북쪽에 인접한 곧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지파인데 이 지파가 부분적으로 유다 지파와 뜻을 같이한 줄 압니다. 23절에서는 “베냐민 온 족속이 유다 지파에 속한 것”으로 말씀되었고, 또 20절에서는 “유다 지파만 르호보암을 따랐다” 하시므로 혼돈이 됩니다. 여기의 20절은 최초의 상황이고, 23절은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와서 군사를 계수했을 때의 상황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분국될 때는 유다 지파로만 시작하였는데 그 다음에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에 합세한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또 유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22~24절에서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마야 선지자에게 임하여 가로되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들(분리 상태에서 여러보암에게로 아주 가지 않은 백성들)에게 고하기를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은즉 올라가서 형제와 싸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을 때 그 말을 좇아 돌아갔다” 하시므로 하나님이 분국되도록 끝까지 섭리하신 것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예언에 잘 복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 한 마디가 전쟁을 막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권위있는 지도자나 평화의 권위가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20 과 자율제단 (왕상 12:25~33)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제목은 “여러보암(북왕국)의 자율제단”입니다. 자율제단은 하나님이 솔로몬의 성전을 받으셨고, 그곳에 언약궤를 안치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이름을 그곳에 두셨다”(왕상 8:29) 하신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할 때 모든 것(동기, 방법, 제도, 목적 등)이 자율 곧 불법에 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보암을 택하여 선민 열 지파를 떼어 주시면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보암에게 말씀하시기를 11:37~38절에서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리려니와 내가 명한 일에 순종하고 내 눈에 합당하게 행하여 다윗처럼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워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하셨는데, 그는 지혜롭게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가 지혜롭게 행한다면 유다와 화친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같이 사용하였어야 하겠지요. ① 25절은 “왕궁과 성읍건축”이고, ② 26~27절은 “자율제단을 세운 이유”이며, ③ 28~33절은 “자율제단의 격식”입니다.

1. 왕궁과 성읍건축(25절)

여러보암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서(11:26) 왕이 되었은즉 에브라임 산지에 소재한 세겜에 왕궁을 건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부느엘(세겜의 동쪽 30㎞쯤, 요단강 동편 얍복강 하류 옆) 도성을 건축하였으니 이는 국방의 요새로 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 자율제단을 세운 이유(26~27절)

1) 26절에서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염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나라를 굳게 세울 결심을 하기 전에 염려부터 하였으니 이는 르호보암 왕국의 전통(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전통)에 눌려 스스로 연약을 느낀 것이라 할 수 있고,

2) 27절에서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제사 드리러 올라가면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끌려(종교적 권위 때문에 끌린다는 뜻) 자신을 죽이고 유다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종교의 힘이 정치보다 강할 수 있은즉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율제단을 세운 이유는 종교적 유혹에 빠져 유다로 귀화하는 백성이 없게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는 종교를 혼돈케 하여 정치의 덕을 보는 수단을 쓴 것입니다.

3. 자율제단의 격식(28~33절)

1) 28~30절에서 “이에 계획하고 금송아지들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우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올린 너희 신인즉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 한즉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되었고 백성들이 단(갈릴ㄹ리 바다 북쪽 50㎞쯤, 헬몬산 남쪽, 팔레스틴의 북단을 의미함)에까지 가서 그 하나(금송아지)에게 숭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우상종교로 바꾼 만행이었습니다.

2) 31~32절에서는 “또 산당도 짓고 레위 지파 아닌 자들로 제사장을 삼았으며 절기 날짜를 8월 15일로 정하고 절기 종목은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자신이 벧엘의 제단에 올라가서 그와같이(제사장처럼)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하였고 또 벧엘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33절도 이상과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시설과 제도가 다 자율적이었습니다. 벧엘은 세겜의 남쪽 30㎞쯤에 있는 곳으로 그곳도 조상들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창 28:19, 35:6, 수 18:13, 삿 20:26, 삼상 10:3). 여러보암의 이 자율제단은 신앙도 역행한 것이려니와 민족의 동질성을 종교로서 이질화 시킨 아주 잘못된 일을 한 것입니다.

제 21 과 자율제단을 책망하심 (왕상 13:1~34) 목록으로


본문 ① 1~10절은 “하나님의 사람의 역할”이요, ② 11~19절은 “늙은 선지자의 유혹”이며, ③ 20~32절은 “유혹받은 자의 말로”이고, ④ 33~34절은 “여러보암의 완악과 죽음”입니다. 이 본문에는 문제와 교훈이 많지만 전체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나님이 자율제단을 책망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역할(1~10절)

1) 1절에서 “여러보암왕이 벧엘의 단 곁에서 분향할 때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즉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단이 있는 벧엘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보암왕은 자율제단만 세운 것이 아니라 우상도 만들어 숭배하였고, 율법이 금하는 제사장 직책까지 임의로 행하고 있었습니다(삼상 13:9~13). 이때에 하나님의 사람은 2절에서 단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외치기를 “단아 단아 장차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이 나와서 네 위에(네가 만든 제단 위에) 분향하는 제사장을 네 위에(네가 만든 제단 위에서) 제사할 것(불태운다는 뜻)이요 사람의 뼈(자율제단에서 일하는 자들의 시체)를 네 위에(네가 만든 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334년쯤 후에 유다 19대왕 요시야(주전 606년, 여러보암은 주전 940년에 왕 되었음)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전역의 우상제단을 훼파, 정화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334년 후에 요시야가 이 일을 시행한 기록은 왕하 22장과 23장에 기록되었음). 따라서 이 예언은 자율주의 제사 행위를 책망한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을 당장 멸하지 않으시고 300여년을 끌면서 관망하신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섭리 속에 가리워져 있는 일입니다.

2) 3~5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계속 외치기를 “(나의 증거를 입증하는 뜻으로) 예조(징조를 미리 나타내심)를 보일 것인데 곧 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러보암이 이 말을 듣고 “손을 펴서 저(하나님의 사람)를 잡으라” 하였을 때, 그의 편 손은 말라 거두어지지 않았고(편 팔이 굽혀지지 않은 뜻),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대로 예조가 나타나서 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지게 된 것입니다. 6절에서 여러보암왕은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 손이 성하여지게(다시 낫게) 해 달라” 한즉,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하므로 “전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여러보암왕은 자신의 잘못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권위도 상당하게 이해하였습니다.

3) 7절에서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감사하려는 뜻으로) “나의 집에 함께 가서 쉬고 또 예물을 드리겠다” 하였으나, 8~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처음부터 사명을 받고 올 때 “떡을 먹거나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을 도로 가지도 말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말한 후 “왕이 집 절반을 준다 하여도 함께 들어가거나 이곳에서는 먹고 마시지 않을 것이라” 하여 강경하게 거절하고 벧엘로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유다를 향하여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을 외칠 때, 2절을 보시면 여러보암에게 외치지 않고 단(제단)에게 외친 뜻이 무엇일까?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일단 여러보암왕이 들었으니까 “증거의 목적을 다했다”고 볼 수 있고, 또 대접받지 않고 왔던 길을 다시 가지 않은 것에 대하여도 말씀대로 잘 이행한 것입니다.

2. 늙은 선지자의 유혹(11~19절)

1) 11절은 보시면 “(자율제단이 있는)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아들로부터 위 1~10절에 나타난 사실에 대하여 듣고 알게 되었다” 하였고, 12~15절에서 그는 나귀를 타고 그의 뒤로 따라가서 그 사람을 만나 확인한 후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고 권한즉, 그 하나님의 사람은 16~17절에서 먼저 왕에게 대답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고하고 사양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18절에서 그 늙은 선지자는 “나도 당신 같은 선지자인데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당신을 집으로 데려다가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으니 함께 가자 하고 그를 속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9절에서 그 하나님의 사람은 속는 줄도 모르고 왔던 길로 따라가서 떡과 물을 먹게 된 것입니다(14, 17절). 이 늙은 선지자가 왜 이런 망녕된 일을 하였을까요? 이 늙은 선지자는 벧엘에 살면서 자율제단에 대한 불법을 지적하지 않은 듯하고, 또 하나님의 사람이 능력까지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였는데도 그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또 거짓말을 예사로 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유혹 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즉 악한 선지자였고 영감과 사명에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늙었다”는 것은 원로 선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영감과 사명에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거짓으로 그를 꾀인 것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를 망하게 하려는 계획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론적인 말씀(오늘로 말하면 성경말씀)에 유의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선배들이 현실 기독교를 출현시켰습니다. 현실 기독교가 성경과 다 부합됩니까? 부합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시대의 사역자들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것을 전통으로 깔아 놓았기 때문에 계속 맹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다에서 온 젊은 선지자가 늙은 선지자의 속임수에 비판없이 따라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눈에는 참으로 민망한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추기경을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들이 의복이나 감투(머리에 쓰는 것)로 권위를 세우고 추앙을 받는 모습입니다. 마 20:28을 보시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는 대접받는 감투를 쓰면 안되겠고, 땀 딲는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무엇입니까? 마땅히 본은 보이고 섬기는 자로서 가르치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가상할 때, 어떤 이들처럼 찬란한 의복과 면류관 같은 것을 쓰시겠습니까? 저는 평범하고 겸손한 위치에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직을 빙자하여 영광을 누리는 사실이 2,000년 동안 비판없이 내려오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성경주의에서 벗어나 원로 사대주의를 그대로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도 하나님의 원론적인 계시에 굳게 서지 못했고, 늙은 선지자의 말에 비판없이 또는 점검없이 따라갔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의 사명의 길을 망친 것입니다.

3. 유혹받은 자의 말로(20~32절)

1) 20~22절은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유혹받은 선지자를 징벌하는 내용을 그 당사자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은고로…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결국 그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이지만 자신이 병 주고 죽음까지 선포하였은즉 대단히 안됐고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선지자(또는 하나님의 사역자들)들 간에는 이런 모순 된 일이 없어야 좋겠지요. 그러나 그 시대나 현시대에 어찌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문제는 모든 성도나 사명자가 다 자신의 믿음과 행위를 반성하여 하나님의 원론적인 성경말씀 위에 옳게 섣는 지를 반성하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23~24절에 “늙은 선지자는 그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나귀까지 태워 보냈으나 그는 노상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자는 그 사람만 죽이고 나귀나 그 사람의 시체에는 손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섭리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의 당한 일에 대하여 행인들로부터 소식을 들었고, 26절에서 “그의 죽음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로 하나님이 사자에게 붙이셨다” 하였으며,

3) 27~31절에서 그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 묘실(가족의 시체를 보관하는 굴)에 안장한 후 슬피 울며 “오 내 형제여”라고 하였으니, 그 자신도 많은 가책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섣불리 시험하고 거짓말 한 것이 큰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벧엘의 단과 산당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2절 내용)이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뼈를 그 하나님의 사람의 뼈에 함께 두라”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늙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의 예언이 이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뼈가 사이비한 선지자로 구별되어 화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왕하 23:1~18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334년 후에 요시야왕이 산당과 자율제단을 불사를 때 요시야왕이 그 무덤의 연유를 물은즉 이는 “벧엘의 단을 책망하기 위하여 유다에서 온 선지자의 묘라 한즉 그대로 두라(왕하 23:17~18) 하여 사마리아(벧엘쪽)에서 온 선지자의 뼈까지 그대로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묘하게 피한 사실을 사람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혼탁한 시대에 누구도 믿기 어려운즉 오직 성경만 믿고 행하셔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심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여러보암의 완악과 죽음(33~34절)

1) 33절에서 “여러보암은 (그만한 연단을 받고도) 그 일 후에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또 자원하면 산당 제사장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34절에서 “이 일이 여러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보암의 멸망에 대한 것은 왕상 14:10~16, 15:29~30에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저 넘기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사 45:23).

2) 여기에서 솔로몬이 타락한 것이나 여러보암이 회개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만한 위치에서 그만한 은혜를 받고 깨달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또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에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한 아버지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신앙과 사상을 따르는 것이 어찌 쉽습니까? 잘 되는 경우보다 안 되는 경우가 분명히 많은 줄 압니다. 크게 각성할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반드시 인간주의, 원로주의, 전통에서 맹종만 할 것이 아니라 용기있게 벗어나 성경만 표준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제 22 과 두 왕의 역사 (왕상 14:1~31) 목록으로


본문은 크게 나누어 두 대지입니다. ① 1~20절은 “여러보암의 남은 역사”요, ② 21~31절은 “르호보암의 남은 역사”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두 왕의 역사”로 한데 묶었습니다.

1. 여러보암의 남은 역사(1~20절)

1) 1절에서 “그때에(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제단에서 예언한 후, 13장) 여러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보암왕은 범죄자로 인정을 받은 후인지라(13:33~34) 이 상태를 불길한 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2~3절에서 그의 아내로 하여금 변장(자신이 여러보암의 아내임을 숨김)하고, 실로에 사는 아히야 선지자를 찾아가서 “병든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게 하였습니다. 선지자를 만나러 갈 때에 떡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갖고 갔으니, 이는 평범한 서민으로 가장하면서 평상시의 예절을 갖추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왕비임을 숨겨야 하였을까요? 이는 아히야 선지자가 왕의 아들에 대한 예언을 할 때 권세에 눌리거나 또는 인정에 치우쳐 하나님의 예언을 왜곡되게 전달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의미도 되고 또 상대방을 먼저 의심하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왕이나 왕비 앞이라 하여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2) 4절에서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시행하여 아히야의 집에 이르렀을 때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선지자도 늙는 것과 쇠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5~6절에서 하나님이 아히야에게 “여러보암의 아내가 다른 사람인체 하면서 그 아들의 병듦을 인하여 찾아온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셨으므로 아히야는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 그 발소리를 듣고 “여러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왜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하고 그의 진실치 못함을 책망한 후에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흉한 말로 고한다”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달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앞에 진실하지 않은 것은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갈 6:7).

3) 하나님이 여러보암에게 주신 말씀은 이러하였으니 곧 7~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7~9절은 여러보암의 죄상이고, 10~16절은 그 죄에 대한 징벌을 말씀하셨으니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였고 나를 다윗의 집에게 찢어 주었으나 너는 나의 종 다윗처럼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한 것처럼 하지 않고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 더 악을 행하고 또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등 뒤로 버렸다” 하셨으니, 곧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고 신과 종교를 바꾸었으며 정직하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을 배신한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노를 선포하시되 “그의 집에 재앙을 내려 그에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종된 자)나 놓인 자(자유 자)를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 같이 하여 성에서 죽은 자는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게 할 것이라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 그 아이는 죽을 것이라 온 백성이 이를 슬피하여 장사지내려니와 여러보암에게 속한 자는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갈 것인즉 이는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이 일에 대하여 사 57:1~2을 참고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한 왕을 일으키신즉 저가 그렇게 할 것이요 곧 이제라”(10~14절) 하였으니, 여기까지의 재앙은 여러보암의 아들 나답이 2년간 왕노릇 한 후에 세 번째 왕으로 바아사가 군림할 때 나타날 사실을 예언하신 것이요(15:28~30), 또 15~16절에서 예언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전국)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힘없음을 뜻함)처럼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뽑아 하수(앗수르 땅의 유프라데 강) 밖으로 흩으시리니(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뜻) 이는 저도 범죄하고 백성들로도 범죄케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범죄하고 남까지 범죄케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여 하수 밖으로 끌려간다 함”은 그 시대로부터 약 260년 후인 19대 호세아왕 9년에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정복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이 사실은 모세도 예언하였는데(신 28:63~64, 29:28) 이 예언의 성취는 왕하 15:29, 17:23, 18:11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왕국이 망하는 이유는 망할 당시의 죄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나라의 초대왕부터 범죄한 죄값이 누적되어 나타난 심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17~18절에서 “여러보암의 처가 일어나 디르사(세겜에서 1시 방향 9㎞쯤, 에브라임 성읍, 수 12:15, 2, 북왕국의 수도임)로 돌아가서 (왕궁의) 문지방에 이를 때 아이가 죽은즉 아히야의 예언대로 온 백성이 슬피하며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으니, 14:12~13의 예언대로 성취된 것이요,

5) 19~20절에서는 “여러보암의 남은 행적이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 하셨는데, 이 역대지략이란 용어가 열왕기상하나 역대상하(대상 29:29, 대하 9:29)에도 자주 나타납니다. 따라서 역대상하를 뜻함이 아니고 왕궁의 국정일지를 뜻합니다. 에 10:2에 “열왕의 일기”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보암은 왕된지 22년에 죽은즉(그 열조와 함께 자매 하신 것은 전쟁이나 객사가 아닌 통상적 죽음을 뜻함) 그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보암은 유다왕 르호보암과 같은 해에 왕이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17년 재위하였고, 그 아들 아비얌이 3년 재위하였은즉 그 다음 아사왕 2년에 북왕국의 두 번째왕 나답이 왕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르호보암의 남은 역사(21~31절)

1) 21절은 “르호보암이 41세에 왕된 것과 예루살렘에서 22년 왕노릇 한 사실과 그의 어미가 암몬 여인 나아마(대하 12:13)임을 말씀”하셨고, 22~24절에서는 유다(왕과 백성들)의 죄를 말씀하셨으니 곧 “유다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열조의 행한 일보다 뛰어나게 더하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북왕국처럼) 산위나 푸른 나무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삿 2:13, 페니키아와 알메니아의 우상)을 세웠고 남색(남자끼리의 음행)을 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이방인들)의 모든 가증한 일(이방종교를 답습하는 행위)을 본받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남방 유다라 하여 북왕국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2) 그리하여 25~28절에서 남방 유다가 애굽의 침략을 받고 방위력이 약한 나라가 되었으니, 곧 “르호보암왕 5년에 애굽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몰수히 뺏고 또 솔로몬이 (솔로몬왕 때에) 만든 금방패를 다(상당한 분량) 뺏김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의 위험이 있을 때는 상당한 보물들을 감출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왕 말기부터 나라는 쇠하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금방패를 다 뺏긴 르호보암왕은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시위대 장관에게 맡기니 왕이 하나님의 전에 갈 때에 시위하는 자(방위병)가 그 방패로 호위를 하고 또 시위소로 가져갈 정도로 놋방패도 귀한 형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3) 29절 말씀은 19절의 뜻과 같고, 30절에서 “르호보암과 여러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다가 르호보암이 17년 만에 열조와 함께 자니(20절 참고) 다윗성에 장사되었고 그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죽은 때는 주전 923년경으로 여러보암 17년이요, 아비얌이 유다왕이 된 해도 같은 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 23 과 두 나라의 왕의 역사 (왕상 15:1~34) 목록으로


본 장에는 유다왕 “아비얌”과 “아사”에 대한 것(1~24절), 다음에 이스라엘 왕 “나답”과 “바아사”에 대한 내용(25~34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두 나라의 왕의 역사”가 총 제목이 됩니다. 열왕기 전체의 내용이 다 두 나라의 왕의 역사이지만 우선 초기 왕에 대한 것만 이렇게 제목을 정해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8절은 “아비얌에 대한 것”이요, ② 9~15절은 “아사왕의 정화사역”이며, ③ 16~24절은 “아사가 바아사의 침략을 받음”이요, ④ 25~34절은 “나답과 바아사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아비얌에 대한 것(1~8절)

1) 1~2절에서 “(이스라엘 왕) 여러보암 18년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이 유다왕이 되었고 그의 모친은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이며 예루살렘에서 3년간 치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5절에서는 “아비얌이 옳게 행하지 않았으나 그의 증조부 다윗왕의 덕으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아들 아비얌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후손이 조상의 덕을 보도록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비얌이 그의 부친 르호보암처럼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다윗같지 않았으며 온전치 못하였으나 다윗을 위하여(다윗의 후손에게 복 주신다는 약속) 그 아들(르호보암의 아들, 또는 다윗의 후손을 뜻함)을 후사로 세우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평생에 우리아의 일(삼하 11장) 외에는 정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다(5절)” 하였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중요시 하심과(3절) 성도의 모든 행위를 통계적으로 치부하시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자식이 부모를 계승하여 잘 하는 일이 극히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하시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2) 6절에서는 “르호보암(유다국)과 여러보암(이스라엘국) 사이에 (그들이)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다” 하셨는데, 이와 같은 말씀이 16절과 32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16, 32절에서 두 번이나 “아사(유다)와 바아사(이스라엘) 간에 평생 전쟁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또 7절에서는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과 여러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고 아비얌의 남은 사적이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14:19 참조)”, 8절에서는 “아비얌이 (왕된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울, 다윗, 솔로몬왕은 선민 통합 왕국으로 각각 40년씩 다스린 것이고, 르호보암과 아비얌과 아사는 유다왕국으로 세 번째(종교적 정통 국가로서는 4대, 5대, 6대 왕임), 여러보암과 나답은 이스라엘국으로 1대, 2대째 왕된 것을 본문에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2. 아사왕의 정화사역(9~15절)

1) 9~10절에서 “아사왕은 이스라엘왕 여러보암 20년에 유다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41년을 치리하였으며 그의 모친은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아사왕이 잘한 일은 조상 다윗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것과 남색(왕상 14:24)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낸 것과 그 열조가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앤 것과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출 34:13, 왕상 14:15)의 가증한 우상을 만든 일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왕상 2:37) 시냇가에서 불살랐고(11~13절), 또 14절에서는 “마음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온전하였으며”, 15절에서는 “그 부친(아비얌)이 구별한 것(하나님께 드린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자기가 하나님께 성물로 드린 것)을 하나님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명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기구들입니다.

2) 잘못한 일은 14절에서 “산당을 없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부터 안 없앤 것은 아닙니다. 상당 부분 없앴지만(대하 14:3~5, 15:17) 정화의 한계를 드러낸 일입니다. 산당은 각 지역에 작은 규모로 있는 것인데 사무엘 선지자 때에는 사용하였던 것인데(삼상 10:12~14) 유야무야 할 수 있었을 것인즉 거기까지 철저하게 없애지 않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3)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셔야 할 것은 2절에서 “아비얌의 모친이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라 하였는데 10절에서는 아사왕의 모친도 같은 사람이라” 하므로 혼돈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공동번역이나 영어성경은 10절의 모친을 조모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모순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본을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하였거나 아사왕의 어미가 죽고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를 모격 위치에 있게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됩니다(원문상 연구가 필요함).

3. 아사가 바아사의 침략을 받음(16~24절)

1) 16~17절에서 “유다왕 아사와 이스라엘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토록 전쟁이 있었고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이 지역은 예루살렘 북쪽 8㎞쯤의 언덕이며 베냐민 땅 북쪽임, 수 18:25, 마 2:18)를 건축하며 이스라엘 사람을 유다왕 아사에게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본래 여러보암왕이 벧엘과 단에 자율제단을 세운 것도 그런 뜻이 있었던 것처럼(왕상 12:27~29) 예루살렘으로 통행하는 언덕에 성을 쌓아 통로를 막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유다가 관할하던 지역인데 바아사가 그 지역을 요새화 하기 위하여 점유하는 침략을 한 것입니다.

2) 아사왕은 스스로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자 18절에서 “성전과 왕궁에 있는 은금을 전부 취하여 다메섹(아람국의 수도)에 있는 벤하닷왕(헤시온의 손자이고 다브림몬의 아들)에게 신복을 통하여 전달하고 외교적 도움을 청하게 된 것”입니다. 내용은 19절에서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한 뜻은 “나와 당신 간에 약조를 맺자”는 뜻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석을 보았습니다. 또 “내 부친과 당신 부친 사이에도 (약조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내용은 대하 16:3에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시면서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서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유다와 아람의 두 전 왕 간에 서로 약조가 있었다”는 근거는 과거 삼하 8:5~6에서 다윗왕 때 “아람이 조공을 바친 사실 외에는 알기 어려우나 그동안 전쟁이 없던 시절에 평화적 언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내가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이스라엘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아람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를 깨뜨리므로 유다에 대한 침략에서 떠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람의 위협을 느끼면 유다를 넘겨다 보지 못할 것을 예상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하 16:7을 보시면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을 의지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로서 하나니 선견자를 통하여 “아람왕의 군대가 아사의 손에 있지 않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3) 20~21절에서 “벤하닷이 아사왕의 말을 듣고 군대장관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치므로 바아사가 라마건축(17절) 그치고 디르사(이스라엘의 수도, 14:17)에 거하였고”, 22절에서 “아사왕은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동원하여 라마건축을 중단한 돌과 재목들을 거두게 하여 그것으로 베냐민(베냐민 지파 땅)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지명을 점검하신다면 “이욘”은 두로에서 2시 방향 32㎞쯤의 지역이고, “단”은 이욘에서 5시 방향 15㎞쯤의 라이스 지역이며, “아벨벧마아가”는 단, 곧 라이스의 남쪽이고, “긴네렛 온 땅”은 게네사렛, 즉 갈릴리 호수 서북쪽이요, “납달리 온 땅”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 또는 단과 갈멜산 중간 지역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침략한 것입니다. 또 “베냐민의 게바”는 라마(17절)의 동쪽 3㎞쯤에 있고, “미스바”는 라마에서 11시 방향 4㎞쯤에 위치합니다.

4) 23절에서 “아사와 남은 사적(모든 권세, 그 행한 일, 성읍 건축)은 유다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14:19절 참고) 하셨고,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다” 하셨는데 대하 16:12을 보시면 “아사 39년에 그 발이 병들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 저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4절에서 결국 병든지 2년 만에 “아사가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 왕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때는 아사가 41년을 왕노릇 한 후(대하 16:13)인즉 연대로는 주전 879년쯤이며, 이스라엘국으로는 7대 아합왕이 10년째(22년 중) 왕노릇 할 때였습니다(열왕의 연대표를 참조하십시오).

4. 나답과 바아사에 대한 것(25~34절)

나답은 여러보암의 아들이고(이스라엘 2대 왕), 바아사는 잇사갈 지파 아히야의 아들로 이스라엘 3대 왕입니다.

1) 25절은 “유다왕 아사 2년에 여러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어 2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주전 918년에서 916년쯤 됩니다. 26절에서 “나답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여러보암)의 길로 행하였고 아비가 백성들로 범죄하게 한대로 그 죄(모든 자율제단과 우상숭배 등) 중에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27절에서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싸우던 중)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악하거나 정치를 잘못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혁명 등 정변이 나지 않습니까? 깁브돈은 단 지파의 영지요 레위족에게 준 땅으로(수 21:23) 지도에 나타난 바알라에서 2시 방향 8㎞쯤, 게셀에서 서쪽 6㎞쯤이며, 이 지역은 본래 블레셋 지역이므로 그곳을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은 나답의 군사가 바아사의 반란군에 쫓겨 그곳을 요새로 삼고 싸운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곳은 고원지대로 블레셋족이 사는 성읍이 아닐 것이요 또 국경선에 접근된고로 블레셋과의 저항이 없었을 것입니다.

3) 28절에서 “유다왕 아사 제3년(다음해, 25절)에 나답을 죽인 바아사가 이스라엘 세 번째 왕이 되었는데”, 29절에서 “그때에 여러보암의 온 집을 쳐서…다 멸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왕상 14:10~14)과 같이 된 것이라” 하셨고, 또 30절에서는 “이는 여러보암의 죄와 또 백성들로 범죄케 한 죄로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범죄도 큰 죄악이지만 타인을 범죄케 하는 유혹이나 지도도 큰 악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소자를 실족시킨 죄인은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마 18:6)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31, 32절은 16절과 14:19에서 설명된 부분이며,

4) 33~34절은 “유다왕 아사 3년(25절에서는 2년이라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수습하는 동안에 해가 바뀐 것임) 바아사가 왕이 되어 그들의 수도인 디르사(14:17)에서 24년을 다스렸다” 하였는데, “그도 여러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으니”, 이는 26절에서 나답이 행한 대로 행하여 다를 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아사는 바른 정치나 정의를 위하여 왕된 것이 아니라 권세 자체를 위하여 군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4 과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 (왕상 16:1~34)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의 내용은 이스라엘 열왕, 즉 3대(바아사), 4대(엘라), 5대(시므리), 6대(오므리), 7대(아합) 왕의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 라고 정하였습니다. 열왕기의 내용이 다 남(유다)북(이스라엘)조 열왕의 역사이지만 우선 이 부분의 제목을 그렇게 정해 본 것입니다. 여러보암이 22년, 그의 아들 나답이 2년 왕노릇 한 후에 혈통적 왕맥이 끊기고, 잇사갈 지파 사람 바아사가 왕이 되어 24년 지낸 후에 그의 아들 엘라가 계승했으나 겨우 2년 하고 그의 병거를 통솔하는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이 되었으나 7일 만에 다른 군대장관 오므리가 시므리를 대항하자 시므리가 열세에 몰려 왕궁에 불을 지르고 죽은즉 또 오므리는 라이벌되는 디브니 세력이 저항하므로 그와 싸워 디브니를 죽이고 오므리(어느 지파란 명시가 없음)가 왕이 되어 12년을 다스리다가 죽은즉 그의 아들 아합이 7대 왕이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그런 과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7절은 “하나님이 예후에게 주신 말씀”이고, ② 8~14절은 “시므리가 엘라를 모반함”이며, ③ 15~28절은 “오므리가 왕되는 과정”이요, ④ 29~33절은 “아합이 왕된 과정”이며, ⑤ 34절은 “여호수아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이 예후에게 주신 말씀(1~7절)

1)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2~4절 말씀은 예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아사를 꾸짖은 내용입니다. 곧 “하나님이 너를 진토(미천한 위치)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셨거늘 네가 여러보암의 길로 행하고 내 백성으로 범죄케 하여…나의 노를 격동케 하였다 내가 바아사 네 집을 쓸어버려…여러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리니 네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5절에서 “바아사의 남은 사적이 역대지략에 기록된 것”은 14:19의 뜻과 같고, 6절에서는 “바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디르사(이스라엘의 수도, 14:17)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으니” 이 시기는 주전 894년쯤이요, 그때에 유다왕은 아사 26년이 됩니다. 7절에서는 바아사의 집이 재앙을 선포 받게 된 이유로서 그 집을 꾸짖으심은 “저가 여러보암의 집을 본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 손의 소위(우상을 섬긴 행위)로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시게 한 것과 또 그 집(이스라엘왕 나답의 왕실)을 쳤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15:27에서 바아사가 나답을 깁브돈에서 죽일 때 하나님의 허락없이 살해한 것을 갚아주시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민을 통치함에 있어서 여러보암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반역한 것처럼(왕상 11:26~38) 하지 않고, 바아사처럼 임의로 한 것은(15:25~27)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으니(7, 13절) 혁명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시므리가 엘라를 모반함(8~14절)

1) 8절에서 “유다 아사왕 2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24년 왕노릇 하고 죽었으므로(15:26, 16:8~10) 그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왕이 되어 2년을 다스리는데(16:8)”, 9절에서 “엘라가 궁내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 나라의 병거 절반을 통솔하는 신복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엘라왕을 쳐 죽이고 대신 왕이 되니 이때가 아사왕 27년이라”고 하였습니다. 8절의 26년이, 10절의 27년이 된 것은 시므리가 모반하고 왕되는 어간에 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권세자는 유흥을 삼가야 합니다. 요즈음도 국무총리나 국회의원이 골프나 향응의 구설에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2) 11~12절은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이 될 때 바아사의 온 집(남자는 족속이든 친구이든)을 멸하였으니 이는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은 말씀(2~4절)이 성취된 것이라” 하셨고, 이 모든 일은 13절에서 “바아사의 죄와 백성들을 범죄케 한 일과 헛된 것(우상숭배 등)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한 때문이라(7, 19절)”고 하셨습니다. 14절의 말씀은 14:19의 뜻과 같습니다.

3. 오므리가 왕되는 과정(15~28절)

1) 15절에서 “유다왕 아사 27년에 엘라를 죽이고 왕된 시므리는 7일 동안 왕위에 있다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15:27을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다”한 것처럼 그당시에도 15:27처럼 엘라의 군사들이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16절에서 “시므리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진에 있는 무리들이 군대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고 깁브돈에서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싼즉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경호하는 곳)에 들어가 불을 놓고 자결하므로 그의 왕된 수명은 7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19절은 “이 모두가 그의 범죄로 인함이라” 하신 말씀으로 13절, 26절과 같고, 20절의 역대지략에 대한 말씀도 14:19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2) 21~22절은 오므리가 왕이 되었지만 자신이 시므리에게 반역자가 된 것처럼 자신은 다브니에게 반역을 받았습니다. 깁브돈에 모인 사람들이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을 때 백성의 절반은 기닛의 아들 디브니를 왕 세우려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민심이 반반으로 나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오므리 편과 디브니 편의 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디브니가 죽으므로 오므리가 제6대 이스라엘 왕이 된 것입니다.

3) 23절에서 오므리가 왕될 때는 유다왕 아사 31년이었고, 연대로는 주전 889년쯤됩니다. 오므리왕이 12년 왕노릇 하면서 “디르사(본래의 수도)에서 6년을 치리하였다” 하였은즉 그 다음 6년은 24절에 따라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저가 은 두 달란트(100 또는 50근)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한 후 그 성의 이름을 그 땅 임자였던 세멜(사마리아로 발음됨)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 곧 “사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4) 25~26절은 “오므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보다 더 악하게 행하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다”는 말씀이고, 27절은 “그의 남은 행적이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는 말씀이며, 28절은 “오므리가 (7년 왕노릇 하고) 죽으니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합이 대신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4. 아합이 왕된 과정(29~33절)

1) 29절에서 “아합은 유다왕 아사 38년에 이스라엘의 7대 왕이 되었고 사마리아에서 22년을 다스렸으며”, 30~33절은 아합의 죄상입니다. 아합의 죄상은 모든 사람보다 더 심하였다는 점과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신당에)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바알사당을 건축한 후 그 사당 안에 바알을 위한 단을 쌓았으며 또 아세라 목상까지 세워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여러보암의 죄보다도 더 심하게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범죄와 완악은 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훨씬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잡된 우상에 끌려가지 않는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잡된 우상이 곧 세속적 일들입니다.

5. 여호수아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34절)

그 시대 곧 아합왕 시대(주전 874~855년쯤)에 벧엘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 스굽을 잃으므로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수 6:26)이 이루어졌으니, 약 500년 만에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비단 나라는 갈라졌고 신앙은 잘못 가고 있었지만 그들도 선민에 속한 만큼 하나님이 특별 섭리로 통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변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면 일반역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중에서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시므로 특별 통치하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17:1).

제 25 과 엘리야와 나타난 이적들 (왕상 17:1~24) 목록으로


가장 악명 높은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가 출현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권고가 그 범죄하는 백성들에게 여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는 몇 가지 이적이 나타났는데 이는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로부터 떡과 고기를 공급받은 사실과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않은 사실이며, 또 그 집 주모(사르밧 과부로 추정됨)의 죽은 아들을 살린 사건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적 두 가지를 더 추가하여 총 제목을 “엘리야와 나타난 이적들”이라 정하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을 주신 이적과 시냇물을 마르게 하신 이적도 추가하여 묵상하려고 합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7절은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음”이고, ② 8~16절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유함”이며, ③ 17~24절은 “주모의 아들을 살림”입니다.

1.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음(1~7절)

1) 1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전달되게 하셨다”는 내용으로 엘리야는 길르앗(요단 동편 전역을 뜻함)의 디셉(얍복강 북쪽 10㎞쯤의 성읍) 사람이고 그가 아합에게 고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내 말”이란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뜻합니다. 이 기도로 인하여 비가 오게 된 것은 18:36~38, 45절에서 성취되었는데, 그때 바알의 제사장들을 타파한 다음 기도하고 큰 비가 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로 하여금 이 말을 아합에게 고한 것은 아합의 죄로 가뭄과 흉년이 있음을 경고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에게 말씀을 전달하게 하실 때 “엘리야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이란 말을 하게 하신 것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을 잘 섬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맹세할 만큼 철저하게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위대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섬긴 일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는 일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명령이면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지자에게 말씀도 주셨고, 능력도 나타내시며 시대의 사명자로 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8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습니다. 희귀하게 임하고 특별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만 임하셨고, 또 그 임하는 상태가 성령님의 영감에 의한 이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모든 계시를 성경으로 단번에 주셨고(유 3), 그리고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경을 깨달아 실천하면 된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깨닫는 정신, 곧 엡 1:17에 나타난 “계시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이 계시의 정신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골프를 치러 다니지만 계시의 정신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계시의 정신”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이적에 속한 일이란 것입니다. 이런 이적이 이 말씀 속에 숨겨진 것이고, 또 숨겨진 이적 한 가지는 “엘리야의 기도가 없는 한 그 땅에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만 이적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기도를 하지 않는 한 3년 6개월이라도(약 5:17) 비가 안 오는 이적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3절을 보시면 “너는 여기(아합이 있는 사마리아로 추정함)를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습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저주로 비가 오지 않는 줄 알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계획할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그를 피하게 하십니다. 그릿 시냇가는 길르앗 지역 고지에 있는 골짜기라고 합니다. 서에서 동으로 약 50㎞는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곳에 숨게 하신 것은 의인 보호 섭리와 함께 계속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대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4) 4절에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5~6절을 보시면 과연 그대로 “까마귀가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와서 먹었다” 하였고, 6절에서는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로 하여금 그 시냇물을 마시게 하신 것이 비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비 오지 않은 지가 상당기간 되었고, 그릿 시내는 깊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물이 남아 있었던 것뿐인데 계속 비가 오지 않으니까 그 물까지 마른 것입니다. 저희들이 엘리야의 입장처럼 되어 까마귀가 갖다 주는 양식을 먹는 다면 굉장한 이적으로 여기고 신통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같은 환경을 당하려면 큰 어려움에 처해야 하겠지요. 지금도 하나님은 저희들에게 까마귀가 아닌 사람이나 다른 방도를 통해서 필요할 때마다 적당하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사르밧 과부의 집에 유함(8~16절)

1) 그릿 시냇물이 마른즉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른 대책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8, 9절의 말씀인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섬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시돈”은 항구 성읍도 있지만 여기서는 지중해변 북쪽의 넓은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르밧”은 시돈 지역의 항구인데 갈멜산에서 북쪽으로 70㎞쯤의 해변 항구이고 시돈과 두로 중간에 있으며 예수님 시대에는 사르밧을 “사렙다”라고 하였습니다(눅 4:26). 지역 이름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예사로운 일입니다(언어변화나 풍속에 따라 달라짐). “하나님이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공궤하게 하였다” 하셨는데, 과연 그곳의 과부가 그런 계시 명령을 받았을까요? 성경에 “고넬료처럼(행 10:3~6) 받았다”는 명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는 계시를 안받은 상태에서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섭리하신 뜻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물과 떡을 달라” 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고, 나그네를 대접하라(신 10:19)는 계명이 있으니까 그런 계명에 복종하도록 섭리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길르앗에서 디셉은 이스라엘 땅 동쪽 끝에서 서북쪽 끝까지 140㎞쯤 된즉 한 15일쯤 걸어왔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2) 10~12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 줍는 것을 보고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한즉 그 과부가 순종하고 갈 때 또다시 불러 청하기를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그 여인은 하나님 앞에 맹세하며 말하기를 “떡은 없고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만 있는데 나무가지를 주워다가 자기와 자기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양식이 더 이상 없은즉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이 여인이 “자기와 아들이 먹는다”한 대답에서 그가 과부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요, 13~14절에서 다시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음식을 만든다는 뜻)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시는 날까지(양식 소산을 먹게 되는 날을 뜻함)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한즉, 15~16절에서 “저가 그 말대로 하였고(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저와 엘리야와 식구(아들)가 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다하거나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와 엘리야가 함께 기근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섭리해 주셨고, 그 방법으로서 과부의 순종과 하나님의 사역자를 우선적으로 섬기는 정성에 부응하여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과부의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하여 교역자를 잘 섬기는 성도가 많고, 그렇게 섬길 때 더 풍요해지는 복을 받는 성도들이 많은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다른 방법으로 응용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최종적 은사, 남은 은사, 또는 최후에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성실히 행하여 복 받는 사례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어떤 대학 교수가 청년시절에 만원 한 장을 갖고 집을 나와서 어렵게 노력하여 성공한 사례를 방영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 노력하면 그것이 남은 가루와 남은 기름처럼 역할을 하여 형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과부가 자기의 최후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를 섬겼고, 또 자기 생명이나 아들의 생명을 돌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은즉 그만한 이적과 능력을 체험함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3. 주모의 아들을 살림(17~24절)

1) 17절에서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주모와 그 여인의 아들은 바로 그 집의 “과부된 여인과 그 아들”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가난하여 나무가지를 주울 때는 과부 신분으로 나타났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한즉 주모 또는 여인으로 기록한 줄 압니다. 18절에서 이때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 하였으니, 그 여인은 엘리야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준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아들을 죽게 한 것이 자신의 죄를 더 깨닫게 하려는 엘리야의 행한 일로 믿고 추종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죄 중에 큰 죄는 불신앙죄요, 선지자가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죽은 아이가 살아난 후에)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압니다” 하였으니, 그 이전에는 이적을 체험하면서도 엘리야 선지자의 신분과 말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부분을 깨우치시려고 그의 아들을 죽게 하신 줄 압니다.

2) 19~21절에서 엘리야는 그 죽은 아들을 달라 하여 여인의 품에서 취한 후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의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어(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그 집에 역경이 자주 있었다는 뜻)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습니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이 자세는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자기의 체온을 전달하고 싶은 사실을 행동으로 나타낸 뜻인 듯함) 또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한즉, 22절에서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 “혼이 떠나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행 5:10). 혼은 곧 영적실체요 생명입니다(창 2:7). 그 혼이 다시 그 아들의 몸에 돌아왔은즉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23~24절에서 살아난 아이를 그 어미에게 준즉 그 여인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임을 믿겠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여인의 믿음이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여인이 깨닫고 믿게 된 신앙은 죽었다 살아나는 능력과 생명에 비교될 만큼 귀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롬 4:17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바로 그 과부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제 26 과 우상주의 척결과 은혜 (왕상 18:1~46)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의 대지를 나눈다면 ① 1~2절은 “엘리야를 아합왕에게 보내심”이요, ② 3~15절은 “궁내 대신 오바댜의 역할”이며, ③ 16~20절은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함”이요, ④ 21~29절은 “우상주의의 헛됨”이고, ⑤ 30~38절은 “엘리야의 제물을 불로 응답하심”이며, ⑥ 39~46절은 “우상주의 척결과 비를 주심”입니다. 이 내용들을 한 제목으로 종합한다면 “우상주의 척결과 은혜”라 함이 좋을 것입니다. 우상주의는 아합왕과 이세벨왕비와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서 권세와 합력하여 역사하는 세력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상종교를 대항하는 세력으로 나타난 사람은 엘리야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왕상 19:10). 이세벨의 핍박이 있을 때에 100명의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은밀히 숨어 지냈기 때문에 우상의 대적자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지자와 우상주의와의 대결은 1:1,000과 같은 외로운 싸움으로 하나님의 신적 능력이 아니면 승리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심(1~2절)

1~2절의 말씀은 우상주의 척결을 시도함에 있어서 서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3년”이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은 기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가뭄의 기간이 3년 반이었음을 눅 4:25과 약 5:17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엘리야가 아합을 만난 때는 곧 비가 온 때이므로 엘리야가 그릿 시내에 머문 기간은 6개월쯤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너는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갈 때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다(2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3년 반의 때를 정하시고 그 백성을 징계하셨으며, 또 우상숭배자들에 대하여서도 3년 6개월간을 참아주셨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 궁내 대신 오바댜의 역할(3~15절)

1) 3절에서 “오바댜는 궁내 대신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하여 나타난 증거는 4절에서 “왕비 이세벨이 (왕권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를 50명씩 나누어 두 곳의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여 보호해 준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바댜는(소선지자 오바댜가 아님) 핍박받는 선지자들을 은밀하게 보호하면서 아합이나 이세벨과 종교상으로 충돌하지 않았으니, 지혜로운 면도 있지만 어용종교인처럼 악을 척결, 또는 책망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면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왕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호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2) 5~6절에서 아합왕은 오바댜에게 “꼴을 얻어 말과 노새와 짐승을 살리기 위하여 물근원을 찾아 나서자”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이편 저편으로 나누어 가게 되었는데 “두 사람이 다 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왕과 궁내 대신이 각각 홀로 갔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오바댜를 신임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적당한 수행원을 대동하였을 것이나 물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홀로 있었음을 뜻할 것입니다. 7~8절에서는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러 가다가 먼저 오바댜를 만났고 오바댜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당신이니이까” 한즉 엘리야는 자신의 신분을 확인케 한 다음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아합에게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3) 이때에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9~14절에서 “나를 죽게 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노니 내 주(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지 않은 족속과 나라가 없는데 그들이 엘리야가 없다 하면(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맹세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여기에 있다고 고하라 하시지만 내가 당신을 떠나 아합왕께 고하러 간 사이에 하나님이 당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끌어 가시면 내가 아합에게 고한 후 당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나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당신의 종(오바댜 자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일 때 선지자들 중 100명을…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인 사실을 주(엘리야)께서 들어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고 나타나지 아니하시면 왕이 나를 죽일 것입니다” 라고 말한즉, 15절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대화 중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그 말을 진실한 뜻으로 믿는 관행이 있었습니다(창 26:28, 출 22:11, 신 6:13, 10:20).

3.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함(16~20절)

1) 16절에서 오바댜가 아합에 엘리야의 출현을 고하였고,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갔으며, 그가 엘리야를 보았을 때에 엘리야에게 이르기를 17~18절에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 하였고,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대대로 아비로부터)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19절에서 “그런즉 (이 사실의 진위를 판단할 것이니)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이세벨이 섬기는 우상 제단)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지중해, 서해변 호미곶)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한즉, 20절에서 “아합이 모든 자손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참신과 거짓신의 진위를 가리는 문제가 있은즉 아합이 순종할 수도 있었겠지만 성령님의 감동적 권위로 아합을 굴복케 하셨을 것입니다(마 4:1).

4. 우상주의의 헛됨(21~29절)

1) 21절에서 엘리야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어느 쪽이든 하나님을 따라야 할 것 아니냐” 하고 책망하였으니, 이때에 모인 많은 백성들은 대부분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갈등하는 백성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또 바알신이나 아세라가 참신인 줄로 착각하는 무리들이 많았을 것이니 이런 불확실의 신앙은 오늘도 많다고 봅니다. 그것이 곧 숭배의 대상을 잘못 정하는 것인데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섭리(사 6:10) 또는 교육과 연단의 불성실함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선택을 서두르라” 하였을 때,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불확실함과 무지의 결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22절에서 “바알의 선지자는 450인이요(여기에서 아세라 선지자는 생략하고 말한 것임) 하나님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바댜가 굴에 숨기고 먹인 100명은 왜 그 자리에 없었을까요? 그들은 흩어졌거나 위험한 곳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바친 군사같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본문 24절에서 “하나님 종교와 바알 종교가 대결하되 제물을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신으로 분별하자” 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 선언에 옳다고 수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3~25절에서 양편이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을 잡아 각을 떠서 장작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편으로 하여금 먼저 자기의 신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기도를 하게 한 것입니다.

3) 26~29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알신을 부르며 큰 소리로 외치고 뛰놀았지만 오정까지 소식이 없자 엘리야가 더 큰 소리로 불러 보아라 너희 신이 묵상을 하든지 잠들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여 조롱하였을 때 그들은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기까지 하였고 저희가 저녁 소제를 드릴 때(그들 나름대로 시간이 있었음) 진언(신을 꾸짖는 태도)까지 하였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큰 소리, 뛰 노는 일, 몸을 상하는 일, 진언같은 것은 대체적으로 이방 종교나 무속 종교에서 많이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이적이 나타나는 수도 있지만 아무 소식이 없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입니다. 귀신도 아주 무능력한 것은 아니니까요(고후 1:14, 계 13:13).

5. 엘리야의 제물을 불로 응답하심(30~38절)

1) 30~35절에서 그들의 제사 응답이 실패되자 엘리야는 “모든 백성을 가까이 오게 하여 하나님의 단을 수축하되 열 두 지파의 수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여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창 32:28) 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단을 쌓고 그 주위에 곡식 두세아(1세아는 7ℓ)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단 위에 나무를 벌인 후 그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 놓고 네 통의 물을 번제물 위에 세 번 부으니 물이 도랑을 가득 메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열 두 돌은 선민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해 주시라는 뜻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표현이라 할 수 있고, 도랑과 물을 부은 것은 하나님의 응답의 불이 불가항력적으로 나타나 주실 것을 알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정성껏 제사를 드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36~38절은 엘리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출 29:41)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부른 뜻)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임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과 저들이 마음 돌이키는 것(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알게(행하게) 하옵소서 한즉 하나님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은 것처럼 말리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6. 우상주의 척결과 비를 주심(39~46절)

1) 이로 인하여 39절에서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가 하나님이시라 하여 엎드렸을 때 바알의 선지자들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여 죽이라 한즉 곧 그들을 잡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서 거기서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기손강은 다불산에서 갈멜산 북쪽만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다불산은 갈릴리 바다 남쪽에서 서쪽 15㎞쯤에 위치합니다.

2) 41~42절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의 소리가 있다” 하여 비의 소식을 전하였고, 또 아합에게 먹고 마시라 하였으며, 아합이 먹으러 올라갈 때에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 올라가서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깊숙이 머리를 숙인 뜻) 하나님이 비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43~44절에서 사환으로 하여금 바다편을 바라보며 비 오는 정황을 알리게 하였는데, 7회까지 산 정상에 오르내리며 정황을 살폈을 때 비로소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엘리야가 아합으로 하여금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어 내려가게 하였는데,

3) 45절에서는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려 아합이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로 가지 못하고) 이스르엘(갈멜산에서 4시 방향 45㎞쯤에 있고 잇사갈 영지 남단에 위치함, 사마리아는 갈멜산에서 5시 방향 55㎞쯤에 위치함,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는 남쪽으로 30㎞쯤 더 가야 함)로 가니, 46절에서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한즉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의로 바알을 척결한 다음 왕을 위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뜻으로 그 앞에서 안내역을 맡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임하여 허리를 동이고 마차 앞에서 달려갔으니” 이 능력은 성령님께서 강하게 붙들어 달릴 수 있게 하신 은혜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제사를 드리고 기도한 장소는 갈멜산 꼭대기였은즉(19, 42절) 그곳에서 비를 기다리고 일곱 번이나 관찰한 후 또 이스르엘까지 달려오는 거리 등을 감안할 때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면서 전개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악을 이기고 악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 받는 모습을 보일 때 전도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입니다.

4)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상주의와 악을 그만큼 척결하고 계몽하며 대적하는데도 여전히 그 편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7 과 도피 중에 있은 일 (왕상 19:1~21)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들을 죽인 일로 인하여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도피하게 되었고, 도피 중에 있은 일들이 기록되었기로 총 제목을 “도피 중에 있은 일”로 정하였습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8절은 “엘리야가 광야로 도피함”이요, ② 9~18절은 “호렙산에서 계시를 받음”이며, ③ 19~21절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름”입니다.

1. 엘리야가 광야로 도피함(1~8절)

1) 아합은 이스르엘을 거쳐 사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1절에서 “그는 엘리야의 무릇(헤아려 생각함)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우상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인 것을 (왕비) 이세벨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세벨은 2절에서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같게 할 것이라 (만일) 그렇게 안한다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림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이때에 엘리야는 이미 몸을 숨겼기 때문에 사자들이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하였을 것으로 예측합니다. 엘리야를 가까이 대할 수 있다면 직접 죽이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신들”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세벨은 다신론주의자가 틀림없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는 불로 제물을 태웠거나 일당천으로 싸워 1,000명을 이긴다 해도 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적은 믿음 발생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이적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더 신뢰하겠지만 믿음이 발생할 수 없는 비택자는 “죽은 자가 살아가서 믿으라 하여도 안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16:31에서 “모세와 선지자(구약성경을 뜻함)에게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 3절에서 “엘리야는 그 형편을 보고(인지한 뜻) 일어나(통상적 어법, 눈을 들어 밭을 보라는 식)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렀으니”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는 동쪽으로 50㎞쯤이고(18:19, 46),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는 남쪽으로 160㎞쯤 됩니다. 또 브엘세바에서 사환을 머물게 하고, 4절에서 스스로 하룻길쯤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우리나라의 개나리 나무 비슷함) 밑에 앉아서 기도로 구하기를 “여호와여 넉넉하오니(나를 이만큼 쓰셨으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하였으니, 몹시 피곤하고 힘들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6절에서 “누워 잔즉 천사가(이 형태는 창 18:2, 28:12을 연상하십시오)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하여 깨어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어서 그것을 먹고 다시 잤는데, 7절에서 또 같은 방법으로 천사의 반복되는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나타난 천사가 말하기를 “일어나 먹으라 네가 길을 (멀리가야 하므로) 이기지 못하리라” 하므로, 8절에서 “일어나 먹고 마신 후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 40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으로(시내산의 어느 부분을 뜻하지만 구별하여 알기는 어려움, 출 24:18, 34:28, 신 9:9, 18) 시나이 반도 끝쪽에 있고, 브엘세바에서 그곳까지는 남쪽으로 320㎞쯤 된즉 40주야를 거쳐 온 것은 하루 8㎞쯤 걸었다는 뜻이나 그곳은 지형이 험하므로 거의 갑절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엘리야는 한번 먹은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길을 걸었다고 생각됩니다.

2. 호렙산에서 계시를 받음(9~18절)

1) 9절에서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있을 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는 계시의 말씀이 있어서 10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별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의 언약(말씀)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정통적 제사를 훼방하는 뜻)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나만 홀로 남았으나 내 생명까지 취하려 하나이다” 한즉, 11~12절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능력으로 위엄을 나타내신 뜻)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거기에도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말씀 계시)로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당시에 바람과 지진, 화산 같은 것이 나타난 것으로 사료됩니다. 엘리야는 이 상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체험하였겠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의 말씀은 세미한 소리로 임한 것을 뜻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임재입니다(요 1:1). 성도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면접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2) 13절에서 엘리야가 (세미한 소리를) 듣고 얼굴을 가리우고(모세를 연상함, 출 3:6, 34:33~35) 굴 어귀에 서매, 9~10절의 말씀을 13~14절에서 반복하시고(반복은 강조 또는 재확인 하는 의미가 있음) 엘리야가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곧 15~16절에서 “너는 네 길로 돌이켜(남쪽으로 왔는데 북으로 돌이키라는 뜻) 광야를 따라(말미암아) 다메섹에 이르거든 하사엘(아람왕 벤하닷의 신하임, 왕하 8:7~13)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왕하 9:2,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였음, 손자를 아들이라 함은 후손의 뜻으로 구별없이 표현한 뜻)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갈릴리 남단에서 요단강을 따라 45㎞쯤 서쪽에 있음, 디르사에서는 2시 방향 15㎞쯤임) 사람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을 받은 엘리야는 먼저 엘리사를 만나 겉옷을 던져 그를 따르게 하였고 직접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은 일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엘리사로 하여금 남은 사명을 하도록 지시한 줄 압니다. 따라서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붓게 한 일은 엘리사에게 맡긴 것으로 왕하 8:10~14, 9:1~6에 나타납니다. 하사엘에게는 엘리사가 말로만 왕될 것을 전하였고, 예후에게는 엘리사가 선지생도를 보내어 기름을 붓게 하였습니다.

3) 17절에서는 “(아람왕)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이스라엘왕)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셨으니, 이는 아합왕 때에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한 죄에 대하여(10, 14절) 응징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왕하 8:12, 28, 10:32, 13:3, 22, 9:24~33 등에서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중 “엘리사가 죽인다”한 뜻은 그가 칼을 쓴 일이 없으므로 상징적 의미의 말씀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나 선지자의 선포를 통하여 하시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그러나(아합이 선지자를 많이 죽였으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000인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만 홀로 남았다”(14절)는 엘리야의 오해를 깨우치심과 동시에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섭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나만 홀로 무엇을 하는 줄 알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름(19~21절)

1) 19절에서는 “엘리야가 (호렙에서) 떠나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 둘째 겨리(끝쪽)와 함께 있기로 그리로(농장으로) 건너가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겉옷을 던진 뜻은 자신을 따르라”는 의미, 또는 후계자를 삼는 상징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유품 또는 소중한 것을 주는 의미일 것입니다.

2) 20절에서 “엘리사는 (즉시)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 와서 나로 부모와 입맞추게(작별 인사) 하소서 그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한즉, 엘리야가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였으니, 이 뜻은 인사하러 가는 일을 막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3) 21절에서 “엘리사는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에게로) 가서 그를 좇으며 수종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소의 기구를 불살라 고기를 삶은 것”은 삼하 24:22에 나타난 말씀처럼 소와 거기에 딸린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따라서 이 잔치는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와 함께 가족과 동리 사람들과의 송별연을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알아보았고 신속하게 복종하였습니다.

제 28 과 아람과의 1차 전쟁 (왕상 20:1~21) 목록으로


왕상 20:1~34절까지는 아람의 이스라엘 침략으로 2차에 걸친 전쟁 상황을 기록하였습니다. 본 과목에서는 1차 전쟁에 관한 것만 상고하고, 22~35절은 다음 과목에 기록합니다. 이 부분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12절은 “아람왕이 싸움을 걸어옴”이고, ② 13~21절은 “한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1. 아람왕이 싸움을 걸어옴(1~12절)

1) 1절에서 “아람왕 벤하닷이 (주위의 속국왕) 32인을 모아 그들의 군대와 병거들을 대동하여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하였으니, 아람국은 갈릴리 바다의 북동 지역으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데려온 곳이고(창 28:2), 일찍이 다윗에게 정복되었던 소바, 아람, 벧르홉 지역이기도 합니다(삼하 10:6). 그곳은 사마리아보다 낮기 때문에 “올라왔다” 하였고, 그곳에서 사마리아까지는 100㎞쯤 될 것입니다. 벤하닷은 벤하닷 2세입니다(왕상 15:20).

2) 벤하닷은 사마리아성을 에워싼 상태에서 사자들을 아합왕에게 보내어 2~3절에서 “너의 은금과 너의 처자들 중 아름다운 것은 내 것이라(달라는 뜻)” 한즉, 4절에서 아합왕이 이를 시인하여 대답하였는데, 아람왕은 또 5절에서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네 은금과 처자들을 보내라 하였거니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들까지 수탐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들(즉 좋은 것들)을 다 가져갈 것이라” 하므로 추가 요청까지 한 것입니다.

3) 이때에 아합왕이 나라의 장로들을 모아 7절의 말씀대로 아람왕의 잔해성(모든 것을 수탈해 가려는 태도)을 말한즉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은 8절에서 “일체 거절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아합왕은 먼저 허락한 것까지 취소할 수 없으므로 9절에서 “처음 요청은 허락하려니와(2~4절) 나중 요청(5절)은 할 수 없다”고 전달한즉, 10~11절에서 또 한 번씩 사신이 오고 가게 되었는데 벤하닷은 10절에서 “부스러진 것(처음 요청한 것, 가치가 적은 것)이 나를 좇는 백성을 주어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하므로 왕이 주는 것만 받고는 족하지 않기 때문에 침략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였고, 아합왕은 또 11절에서 사신에게 전하기를 “갑옷을 입은 자(침략자를 뜻함)가 갑옷을 벗는 자(평화주의자를 뜻함)처럼 자랑(큰 소리 치는 것)치 못할 것이라” 하므로 서로가 대응할 태세를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12절에서 벤하닷과 32왕들이 장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성을 향하여 진을 베풀라” 하였으니 이로서 사마리아 성을 진격할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2. 한 선지자의 역할(11~21절)

1) 11절에서 이때에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왕 아합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으니, 이 한 선지자는 그 시대에 있었던 선지자의 무리 중에 한 사람이요(35절), 하나님이 이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선민이 수모 당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2~13절에서 그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네가(아합)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리라 하셨다” 한즉, 14절에서 아합이 “누구로 (나가서 싸우게) 하시리잇가”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왕이 싸움을 시작하여 각 도(각 지파별 행정구역)의 방백의 소년들(방백이 거느린 어린 군사들)로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이리하여 15절에서 “아합이 각 도의 방백들의 소년들을 계수한즉 232인이요 그 이외의 모든 자손들(싸움할 만한 의병을 모집한 것)을 계수한즉 7,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16~17절에서 “이들이 정오쯤 벤하닷의 장막으로 먼저 나갔을 때 벤하닷은 32왕과 함께 마시고 취한 중이었고 벤하닷의 탐정이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벤하닷은 18절에서 “저희가 화친하러 나와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와도 사로잡으라” 하였는데,

3) 19~20절에서 “이스라엘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과 저희를 좇는 군사들이 각각 적군을 쳐죽였으므로 아람 사람들이 도망하게 되었고 이스라엘군이 쫓아간즉 벤하닷은 말을 타고 마병들과 함께 도망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21절에서 “아합왕은 아람의 말과 병거와 군사들을 크게 도륙하였다” 하였으니, 선지자의 말대로 1차 전쟁에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 승리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제 29 과 2차 전쟁과 예언 (왕상 20:22~43) 목록으로


본문 22~23절까지는 “2차 전쟁에 관한 말씀”이고, 35~43절은 “한 선지자의 에언”이기 때문에 총 제목을 “2차 전쟁과 예언”으로 정한 것입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22~27절은 “벤하닷의 2차 전쟁계획”이고, ② 28~30절은 “아람의 패배”이며, ③ 31~34절은 “벤하닷을 놓아줌”이요, ④ 35~43절은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1. 벤하닷의 2차 전쟁계획(22~27절)

1) 1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명의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이르기를 22절에서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할 일(국방)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돌아오면 아람왕이 (또) 치러 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23절에서 또 아람왕의 신복들은 왕에게 고하기를 “저희(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산에서의 싸움만 돕는다는 뜻)이므로 우리보다 강하였지만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싸운다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 것인즉…”,

2) 24~25절에서 새로운 작전에 대하여 말하기를 “왕들(32왕)을 장관들로 교체하고 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충수(보충)하고 말과 병거도 그리한 후 평지에서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 것이라 하여 아람왕이 그대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작전과 보충을 하여 또 싸울 계획을 한 것입니다.

3) 해가 돌아와서(22, 26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점고(헤아림)한 후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였으니 아벡은 사마리아 서남부 30㎞쯤의 지역이요, 세겜에서도 서남방 40㎞쯤의 지역입니다. 여기에 따라 2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도 군사를 점고하고 군량을 주어 마주 나가서 저희 앞에 진을 치니 이스라엘은 염소새끼 두 떼(적은 무리를 뜻함)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아람의 패배(28~30절)

1) 28절에서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이 있어서 이 사실을 아합왕께 전하였으니 곧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 23절)의 신이 아니라 한즉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잘못 아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사 제한을 받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골짜기(평지)에서는 능력발휘를 못하는 분으로 오해하는 것을 깨우치시고 여호와가 전능한 신이심을 알게하고저 아람 군사들을 다 선민의 손에 붙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29~30절에서 “진이 서로 대한지 7일만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보병 10만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27,000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신하들의 권면을 받은 것을 보면 역시 아벡 성읍임)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적은 군사(염소새끼 두 떼, 27절, 15절에서는 232인과 7,000인)로 어떻게 하루에 10만의 적을 죽일 수 있으며 또 아벡 성읍(30절)이 어떻게 시설되었기로 그것이 무너져 27,000인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만 분명코 사람의 무기로 다 죽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기로 쳐 죽인 자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특별섭리를 나타내셨다”고 여겨집니다.

3. 벤하닷을 놓아줌(31~34절)

1) 31절에서 벤하닷의 신복들은(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최후의 수단을 고안하여) 벤하닷에게 고하였으니 곧 “이스라엘의 왕들은 인자하다는 말을 들었은즉 (죄인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왕에게 나가면 혹시 왕의 생명을 살려줄 것이라” 하였으니, 죽지 않으면 살 수도 있는 반반의 확률을 믿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이 인자하다”는 것은 다윗과 솔로몬 때의 소문을 적당히 인용한 듯하고, “굵은 베를 동이고 테두리를 쓴 것”은 슬픔 또는 겸손이나 회개의 표시로 상대방으로부터 동정심을 사기에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32절에서 “저희가(왕과 신복들)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죽은 생명들처럼 변장한 뜻) 아합왕 앞에 나아가 나의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한즉, 아합이 말하기를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다행이란 뜻) 저는 나의 형제니라” 하면서 호의로운 뜻을 나타냈으니, 그들의 행색을 보아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저는 나의 형제로다”한 뜻은 용서와 함께 화합, 친교의 인물로 받겠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이런 아량이 있은 이유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2) 33절에서 (아합이 저는 나의 형제로다 하였을 때) 그 사람들은 (이 말을 살려준다는 뜻의) 어조로 여기고 얼른 그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벤하닷은 왕의 형제입니다” 하였고, 왕은 벤하닷을 나오게 한 후 저의 병거에 올렸으니, 이는 사람들 앞에 존귀와 왕으로서의 복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 것이 과연 벤하닷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심이었는지를 두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34절에서 벤하닷이 아합에게 고하기를 “내 부친이 당신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돌려보낼 것이요 또 내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기념도로를) 만든 것처럼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기념도로)를 만드십시오” 하였으니, 이는 벤하닷이 자신을 호의롭게 대해주는 아합왕에게 굴복과 충성의 표시로 아부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이 모든 승리는 하나님이 선민을 보호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또 원수에 대한 응징의 섭리였는데, 아합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자신에 대한 인기와 현세적 욕심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벤하닷이 고한 내용으로 “내 부친이 이스라엘 성읍을 뺏은 사실”은 왕상 15:20에 나타나 있고, 그때 유다의 아사왕을 협력한 벤하닷은 벤하닷 1세입니다. 또 “그가(벤하닷 1세) 사마리아에서 기념거리를 만들었다”는 근거는 성경에는 기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때에 아합은 “이 약조(속국되고 뺏은 성읍을 돌려주며 다메섹에 아합의 기념거리를 만드는 것)를 다짐하고 벤하닷을 돌려보냈다” 하였으니, 현실적 외교와 비슷하였던 것입니다.

4. 선지자의 예언(35~43절)

1) 35절에서 이 시기에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에게 또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여 전개되었는데 이 계시의 목적은 아합의 잘못된 전범처리를 깨우치고 그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계시를 전개시킬 때 사람의 일반적 생각과 태도를 이용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상대방의 일방적 생각에 따라가신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그 상대방의 기정된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이 계시의 목적과 같기 때문에 시청각 교육적으로 그렇게 이용하시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계시의 방법은 왕하 13:16~19에도 나타나있습니다. “한 선지자가 그 동무에게 나를 치라 하였는데 그 동무가 치기를 싫어한 것”은 하나님이 벤하닷을 치라고 붙여주셨으나 아합이 그를 형제라 하면서 치지 않은 것을 깨우치심이고, 36절에서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은즉 네가 나를 떠나갈 때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하셨는데 그대로 되어 그가 떠나가다가 그 동무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왕상 13:24의 경우처럼 아합이 연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다가 불행하게 죽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 35절에서 선지자의 동무가 선지자를 치지 않으므로 그가 사자에 물려 죽은 것은 어찌 보면 억울한 죽음 같으나 그는 하나님의 계시용도에 쓰여지면서 하나님의 다른 심판섭리를 적용하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왕상 21:17~29에서 더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2) 37~40절에서 그 선지자는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치라” 한즉, 그가 상하도록 쳤는데, 이로 인하여 부상을 입은 선지자가 수건으로 눈을 가리워 변형하고 길가에서 왕을 만나 소리 질러 말하기를 “종이 전쟁에 나갔는데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끌고와서 나에게 이 사람(포로)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으면 네 생명으로 대신하거나 은 한 달란트(21㎏, 또는 42㎏, 많은 벌금)를 내야 한다 하였는데, 종이 이리저리 일을 볼 동안(실수한 뜻) 저가 없어졌나이다” 하므로 실제의 일처럼 왕에게 선처를 구한 것입니다. 이때에 왕은 주저하지 않고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선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랐고 전쟁 부상자로만 알았을 것이니까요. 여기에서 선지자는 다른 사람을 계시방편으로 이용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또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여 벌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3) 41~43절에서 왕의 말을 들은 선지자가 급히 가리운 수건을 벗자 왕은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보았고, 그때에 선지자가 왕께 고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므로 왕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적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이 왕과 그 백성들을 대신 심판하실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아합왕은 벤하닷에 대한 뒤처리를 할 때 하나님의 간섭으로 이긴 전쟁임을 알고 선지자에게 그 일을 물었어야 할 것입니다. 43절에서 “왕은 근심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사마리아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제 30 과 포도원 때문에 범죄함 (왕상 21:1~29) 목록으로


본장의 ① 1~4절은 “아합의 포도원으로 인한 근심”이요, ② 5~16절은 “포도원을 취하게 됨”이며, ③ 17~24절은 “아합이 받을 재앙을 예언함”이고, ④ 25~29절은 “아합의 회개와 재앙 연기”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아합이 “포도원 때문에 범죄함”으로 정하였습니다.

1. 아합의 포도원으로 인한 근심(1~4절)

1) 1절에서 “그 후에(20장 이전의 사건 후) 이 일이 있으니라” 하셨고,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는데 사마리아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르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1시 방향 32㎞쯤에 있은즉 80리 북쪽에 있는 것을 어찌 가깝다고 하였을까요? 이는 분명 아합의 별궁이나 수양처 옆에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2절에서 아합은 나봇에게 청하기를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있은즉 더 좋은 포도원과 바꾸든지 합의하면 값을 돈으로도 지불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합이 별궁 곁의 땅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저 한 것이 욕심일 수도 있지만 정당하게 교환하려고 제의한 것인즉 있을 수 있는 일 같으나 율법을 지켜야 할 선민으로서는 잘못된 청원인 것입니다.

2) 2절에서 나봇은 왕에게 대답하기를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라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아합은 율법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고, 나봇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레 25:23에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인즉 영영 팔지 말라” 하셨고, 민 36:7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을 다른 지파로도 옮기지 말라” 하셨으며, 겔 46:18에서 “왕은 백성의 기업을 뺏거나 쫓아내지 말 것이요 자기의 산업으로만 아들에게 줄 것이라” 하셨은즉 왕이 그 포도원을 탐낸 것은 도리가 아니므로, 나봇은 그것을 깨우치고 거절하였으니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엄격한 계율이 없어도 조상이 남긴 것을 보존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방 한칸의 공간만 더 붙이면 그것을 넉넉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수백년, 수천년 묵은 골동품이 그래서 생기는 것 아닙니까? 조상의 유품보존이 곧 문화보존이고 역사보존이란 것을 후손들이 알아야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조상이 쓰시던 중요한 유품들을 다 버린 사람인데 늦게 깨달아서 책 몇 권, 유기그릇 몇 개, 할아버지 도장, 아버지의 필적, 선산 1,000평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7만원을 주시고 병풍을 사셨는데 제가 독방을 드리지 못하여 한 번도 써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추억과 함께 그 병풍을 버리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 노인이 공무원 생활을 하시고 75세쯤 돌아가셨는데, 그 분의 문패가 그 집 대문 옆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적을 보존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3) 4절에서 “아합은 조상(열조)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는 나봇의 거절 때문에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가 침상에 눕고 식사를 안했다” 하였으니, 욕심과 자존심이 성취되지 않아서 그런 입장까지 된 것입니다. “왕의 청원인즉 꼭 승인하리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한 것이고, 조상의 유업 전승을 생명보다 귀하게 안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미래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선입견에 사로잡혀 낙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포도원을 취하게 됨(5~16절)

1) 5~6절에서 왕비 이세벨이 왕의 고민하는 이유를 물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7절을 보시면 이세벨이 왕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일어나 식사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드리려고 한 것일까요?

2) 8~13절에서 “이세벨왕비가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은 금식일(특별한 일이 있을 때 모임을 갖게 하는 것, 렘 36:6, 욜 1:14, 2:15)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모은 후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비류(건달, 깡패 같은 자, 삿 19:22) 두 사람(증인의 수, 신 17:6~7)으로 그 앞에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모이고 고발하며 재판하고 죽인 장소는 사마리아에 와서 한 것으로 아셔야 합니다(21:19, 22:38). 이세벨은 이방 우상주의자라도 선민 백성을 죽일 때는 간교하게도 율법을 적용하였으니, 출 2:28에서 “백성은 재판장(관원)을 욕하거나 유사를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레 24:16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회중이 그를 돌로 치라” 하신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나봇은 왕을 욕했거나 저주한 일도 없었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 일도 없지만 왕의 요청을 거절하므로 이세벨이 그를 큰 죄인으로 만들어서 비류들을 시켜 증언하게 하고 또 두 사람이 증언케 하여 법적 요소를 확보한 후 그를 죽이게 한 것입니다.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이렇게 뒤집어 씌워 사람을 죽게 한 일은 근대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14~16절에서 이세벨은 이 사실을 아합에게 알린 후 “나봇이 죽었은즉 그 포도원을 취하라” 하였고, 아합은 그것을 취하러 그곳으로 내려갔다(사마리아보다 이스르엘이 낮은 지역임)고 하였습니다.

3. 아합이 받은 재앙을 예언함(17~24절)

1) 17~19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셨는데 “너는 일어나 (이스르엘로)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아합왕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갔나니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죽이고 또 뺏었느냐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고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2) 이리하여 20절에서 엘리야가 아합을 만났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내가 찾았노라” 하였으니 이는 이스르엘 지역에서 찾았다는 뜻이요,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팔려(이세벨의 범죄에 따라간 뜻, 이세벨의 주장에 노예처럼 끌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20절), 21~22절에서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매인 자는 어떤 사명이나 책임에 얽매여 중요한 일을 해야 될 자를 의미하고, 놓인 자는 노인이나 어린이처럼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뜻함)를 다 멸하여 네 집으로 여러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왕상 15:28~29에서 시행됨)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왕상 16:3, 11에서 시행됨) 하리니 이는 네가 하나님의 노를 격동케 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요, 23~24절에서는 이세벨에 대하여서도 개들이 그 시체를 이스르엘성 곁에서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상의 예언은 22:37~39과 왕하 9:8, 36에 성취된 기록이 있습니다.

4. 아합의 회개와 재앙 연기(25~29절)

1) 25절에서 “예로부터 아합처럼 아내에게 충동되어 스스로 팔려(아내에게 자기를 노예처럼 되게 한뜻)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는 없었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역사적으로도 있고 없는 것을 살피시는 것을 알 수 있고, 26절에서 아합의 죄는 “하나님이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이방인의 높은 조상, 창 10:16)의 행한 것(우상행위)같이 우상에게 복종하므로 심히 가증하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27절에서 아합은 엘리야의 증언과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증표를 드러냈으니 곧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를 천천히 한 것”인데, 하나님은 이 사실을 29절에서 “겸비한 태도”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이는 회개, 겸손, 자숙의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20:31에 기록된 벤하닷의 회개와 비슷한 상황을 나타낸 것입니다.

3) 28~29절에서 이 상태를 보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나타냈은즉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않고 그 아들(아하시야)의 시대에 내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섭리는 당사자의 회개에 따라 적절하게 변경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의 경우에는 집 전체를 멸하시는 일에 대하여 시대를 연기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현실적 탐심에서 벗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셔야 되며, 또 나봇처럼 권세자의 위력에도 자기의 양심을 지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찰과 심판은 항상 공정하였습니다.

제 31 과 선지자의 대립된 예언 (왕상 22:1~28)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왕과 유다왕이 뜻을 합하여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는 싸움을 하게 될 때에 선지자들에게 전쟁의 승패 여부를 묻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대립된 예언이 나타납니다. 결국은 다수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전쟁을 합니다. 전쟁의 결과와 두 왕의 역사는 다음 과목에서 설명 드리기로 하고, 본문의 총 제목은 “선지자의 대립된 예언”으로 정합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절은 “아람과의 전쟁을 합의함”이요, ② 5~16절은 “선지자들의 예언”이며, ③ 17~23절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고, ④ 24~28절은 “미가야가 핍박을 받음”입니다.

1. 아람과의 전쟁을 합의함(1~4절)

1) 1절에서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없이 31년을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20:31~34에서 벤하닷이 아합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간 다음 3년간 복종한 기간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20:1에서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에서 수탈하려고 이스라엘에 왔다가 크게 패한 후 회개하고 부왕이 뺏은 이스라엘 영토를 돌려드리는 조건으로 아합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왕상 20:34), 그 후 3년 동안 그 약속을 지켰다가 시일이 지난 후 다시 길르앗 라못을 취하고 이스라엘과의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2절의 “제3년”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벤하닷이 3년 섬기다가 반항하고 길르앗 라못을 다시 뺏어 반항 지역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때에 유다왕 여호사밧(아사 다음 왕, 7대)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갔으니(사마리아가 예루살렘보다 낮은 지역임) 그 시기에는 남북 양국 간에 평화가 있었고,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을 자부로 맞아 사돈간이 되었습니다(왕하 8:18).

2) 이때에 3절에서 아합왕(20, 40절)은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동남쪽 45㎞쯤, 갓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고 수 21:38, 다윗과 솔로몬 때에도 통치하였음, 삼상 30:27, 왕상 4:13, 19)을 아람왕의 손에서 취하기 위하여 함께 싸우지 않겠느냐” 하였으니, 이는 두 왕이 사돈관계이고 동족이란 동질성도 있지만 만일 북왕국이 침략을 받으면 남왕국도 따라서 위협을 받게 되어 있는 만큼 합력하여 국방에 힘쓰자는 제의였습니다. 이때 4절에서 여호사밧이 대답하기를 “나와 당신 내 백성과 당신의 백성 내 말들(병력)과 당신의 말들이 일반이라” 하였으니, 이는 동족개념에서 하나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남북관계는 퍽 좋았습니다.

2. 선지자들의 예언(5~16절)

1) 이때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왕에게 5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절에서 아합왕이 선지자 400명을 모이게 하여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한즉 저희가 이르되 “싸우러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실 것이오” 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여호사밧은 7절에서 “이들 이외에 또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습니까” 한즉 여호사밧이 이르되 8절에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있기는 하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므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길하나 흉하나 받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여호사밧은 그 말을 듣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2) 그리하여 9절에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였고”, 10절에서는 “두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 보좌에 앉아서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게 되었는데”, 여기에 앞서서 11절을 보시면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란 선지자가 쇠로 만든 뿔을 갖고 와서 보이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멸하라고 하셨다” 하고, 12절에서 모든 선지자들도 “여호와가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쳤은즉 올라가 얻으소서” 하였으며, 또 13절에서는 미가야를 불러온 사자가 미가야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당신도 저들의 말처럼 여출일구(여러사람의 같은 말)로 길하게 예언을 하라” 하였으니, 이는 그렇게 되도록 인위적인 방법으로 수단을 쓰는 일인즉 하나님의 계시만 말하는 선지자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이때 미가야는 14절에서 “하나님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말할 것이라” 하였고, 15절에서 왕앞에 간즉 왕이 또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이때에 미가야가 말하기를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였으니, 이 말의 의도는 미가야가 계시를 접하기 전에 “왕들의 뜻대로 되면 좋겠다”는 자신의 개인 생각을 말한 것이거나, 왕상 18:27의 뜻처럼 다수의 거짓 지자들의 말만 따르려는 왕들의 잘못된 심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내용일 것입니다.

3.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17~23절)

1) 17절에서 미가야는 계시를 받은 대로 말하기를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처럼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목자의 역할을 하시지 않을 것인즉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합왕은 18절에서 여호사밧에게 말하기를 “자기의 예상대로 길한 예언을 하지 않은 것이 맞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

2) 19~23절에서 미가야는 자신이 본 계시의 광경을 또 자세히 말하였으니 곧 “내가 보니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천사들)이 그 좌우편에 모셔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길르앗 라못에 가서 죽게할꼬 하신즉 (만군 중의) 하나는 이렇게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채택된 의견이 아니므로 생략한 것) 한 영이 나와 말하기를 내가 저(아합)를 꾀이겠나이다 한즉 하나님이 어떻게 꾀이겠느냐 하시니 자신이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그대로 이루라고 하시더란 것”입니다. 이상의 절차로 “많은 선지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또 하나님은 왕에게 화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여기에서 지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천상보좌의 통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이고 속으며 죄를 짓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생각하는 것과 일거수 일투족까지 상세히 섭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 10:30, 시 17:8, 139:1~5). 여기에서 두 왕은 어느 예언이 진실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29절에서 출전한 것을 보면 결국 그들은 미가야를 핍박하고(26절) 다수의 말을 추종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아합을 죽이려 하신 계획(19절)대로 된 것입니다.

4. 미가야가 핍박을 받음(24~28절)

1) 24절에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어떻게 출동하여) 너에게 가서 말씀하시더냐” 한즉, 25절에서 미가야가 대답하기를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하였으니, 이는 전쟁에 패하였을 때 그가 골방에 숨게 되면서 자신의 예언이 틀린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2) 26~27절에서 “아합왕은 부윤(행정 사무책)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 명하여 미가야를 끌고 가서 옥에 가두고 자신이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죽지 않을 만큼 연명만 시키는 뜻)로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3) 그때 미가야는 28절에서 또 말하기를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실진대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라” 하고, 또 “백성들에게도 다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란 호칭과 명분은 같으나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거짓을 말하고,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복잡한 현실을 성도들은 예의주시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은 오직 그 말이 성경과 일치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선지자 분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성경계시로 완전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만 표준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 32 과 패전과 두 왕조의 역사 (왕상 22:29~53) 목록으로


본문 ① 29~38절은 “패전과 아합의 죽음”이고, ② 39~42, 51절은 “두 나라의 왕조 역사”이며, ③ 43~50절은 “여호사밧의 치적”이고, ④ 52~53절은 “아하시야의 죄”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패전과 두 왕조의 역사”로 총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패전과 아합의 죽음(29~38절)

1) 29절에서 “유다왕이 (탈환 목표지인 길르앗 라못으로 먼저)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실감날만큼 자세하게 전달 받았지만(17~23절) 숫자 많은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다수에 진리가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7:13, 눅 13:24, 12:32). 아합이 진리분별을 잘 못한 것은 그를 죽이기 위한(20절)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아도(선택은 자신이 했어도) 일을 작정하시는 이는(결과에 적중함)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잠 16:33).

2) 30절에서 이스라엘왕이 유다왕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갈 것인즉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여 그렇게 하였으니 이스라엘왕 아합은 자신의 신변보호에 신경을 쓰면서 싸움에 임한 입장이고, 유다왕 여호사밧은 신변을 드러낸 상태에서 통솔자의 입장을 취한 것인즉 몸을 감춘 아합보다 여호사밧이 더 위험한 입장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31절에서 아람왕은 32장관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적의 졸병이나 장수)와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왕(아합)과 싸우라” 하였으니, 결국 아합왕만 적의 표적이 되고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죽게 하시려니까 불리한 쪽에 처하게 된 줄 압니다.

3) 32절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아람군은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왕인줄 알고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을 때 적들은 (음성으로) 그가 이스라엘왕이 아님을 알고 쫓기를 그쳤다” 하므로 여호사밧은 위기를 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게 하시려는 자는 이렇게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34절에서 적의 한 사람이 우연히 쏜 화살(이스라엘왕을 알고 쏜 것이 아니란 뜻)이 아합왕의 갑옷 솔기(두 폭을 맞대고 꿰멘 사이, 즉 화살이 들어갈 수 있는 공백)에 맞아 부상을 당하니까 아합이 병거 모는 자에게 “병거를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절에서 “전쟁이 맹렬하여 나가지 못하고 아람군을 막다가 피가 흐르니까 피는 병거바닥에 고이고 아합은 그날 저녁에 죽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화살이 솔기에 맞은 것이나 도망을 못하고 싸우게 된 것은 아합왕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환경이 된 것인데 이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러자 36절에서 퇴각 명령이 떨어졌고, 남은 병사들이 귀향한 것입니다. 37~38절에서 아합의 시체는 사마리아에 장사하였는데, 그 병거에 고인 피를 사마리아의 못(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에 가서 씻은즉 개들이 그 피를 핥으므로 “여호와의 하신 말씀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이란 왕상 21:9에서 아합왕이 나봇을 죽였을 때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너의 피도 핥으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므로 21:11~13에서 나봇이 죽은 곳은 이스르엘이 아니라 금식일을 사마리아에 와서 선포하고 그곳에서 죽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의 결론은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면 사람은 아무리 살려고 애를 써도 죽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2. 두 나라의 왕조 역사(39~42, 51절)

1) 39절에서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헤아려 살핌) 그 행한 일과 그의 건축한 상아궁과 모든 성은 이스라엘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 하셨고(14:19, 왕궁일지를 뜻함), 40절에서는 “아합이 열조와 함께 자매(앞서 간 조상들의 죽음에 따라간 뜻)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합이 22년 왕노릇 한 기록은 왕상 16:29에 기록되었습니다.

2) 41~42절에서는 “아합 4년에 (유다국은)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35세에 왕되어 25년을 다스렸고 그 모친 이름은 실히의 딸 아수바라”고 하였습니다(대하 20:31). 유다 출신 갈렙의 아내도 “아수바”였습니다(대상 2:18~19).

3) 51절에서 “유다왕 여호사밧 17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왕이 되어 2년을 다스렸다” 하였으니, 그 시기는 주전 862~861년쯤인데 이런 연대는 남북조 열왕연대표를 참고하시면 쉽게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에는 이스라엘 7대왕 아합까지 기록되었고, 유다왕은 역시 7대왕 여호사밧까지 기록되었으며,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부터 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부터는 열왕기하에서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3. 여호사밧의 치적(43~50절)

1) 43절에서 “여호사밧은 그 부친 아사의 행적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아사처럼, 왕상 15:13)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오히려 산당에서 분향하고 제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깊이 연구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단일 성전제도에 협력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저기에 산당(하나님께 개인이 제사드리는 제단)을 두었을까요?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먼 관계로 편의상 제사를 드린 장소로서 요소 요소에 시설된 것을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것인데 백성들이 위한을 받는 면도 있었겠지만 이질적 제도로 변해가는 온상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2) 여호사밧은 44절에서 “이스라엘왕과 화평하게 지낸 특징이 있고”(왕하 8:16~18), 45절에서는 “그의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한 것은 유다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지략은 그 당시의 궁중일기장이란 뜻입니다. 또 46절에서는 “그 부친 아사시대에 남아있던 남색(남자끼리의 음행, 14:24, 15:12)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냈으며”, 47절에서 “그때에 에돔(에서의 후손들, 창 25:30, 36:1, 사해 남단에서 에시온게벨까지의 동편 땅, 세겜 지역이라고도 함)에는 왕이 없고 섭정왕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섭정왕의 원문 “네쳅”이 왕상 4:7, 19에서는 “관장”으로도 번역되었는데 이 사실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여호사밧이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3) 48절에서는 “여호사밧이 다시스(10:22에 설명됨)를 왕래하는 선척(배)을 만들고 오빌(9:28, 10:11에서 설명됨, 아라비아 남쪽)의 금을 취하러 보냈는데, 그 배가 에시온게벨(갈대바다 끝에 있는 항구를 뜻함, 거기에서 아카바만을 나와 왼쪽으로 닿는 곳이 아라비아의 오빌임)에서 파손되어(풍랑 등으로) 가지 못하였는데, 49절에서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자기의 종들과 함께 가도록 해 달라(상업을 목적으로 한 동업) 하였으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은 함께 할 수 있었어도 상업을 함께 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50절에서는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사밧(유다 7대왕)이 25년을 치세하고 세상을 떠난 때는 주전 854년경이고, 이 당시에 이스라엘왕은 제9대왕 여호람 5년에 해당합니다(왕하 8:16, 아하시야와 함께 아합의 아들임). 따라서 그 시기에는 남북조 임금이 다 여호람인데 유다는 8대 여호람이고(왕하 8:16), 이스라엘은 9대 여호람입니다. 또 이스라엘왕 여호람은 “요람”이라고도 합니다(왕하 8:16).

4. 아하시야의 죄(52~53절)

1) 51절에서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로 사마리아에서 2년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아들이 없어서 그의 형제 여호람이 다음 왕이 되었습니다(왕하 1:17).

2) 52절에서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아합)의 길과 그 어미(이세벨)의 길과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러보암의 길(왕상 12:25~33)로 행하였으며,

3) 53절에서는 “바알을 섬겨 숭배하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케 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처럼 하였다” 하였으니,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9대왕까지 거의 의로운 왕이 없었다고 아시면 됩니다.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에 대하여 정통성을 상실하였으니까요.

열왕기하로 계속되는 열왕의 역사는 아합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8대왕 아하시야와 그의 형제 여호람(요람, 9대)으로 이어지고, 유다왕은 8대왕 여호람(여호사밧의 아들)으로 이어집니다(왕하 8:16~24).

설교보충 1. 주의 마음에 맞음 (왕상 3:10~15) 목록으로


본문 10절을 보시면 “솔로몬의 하는 일이 주의 마음에 맞아서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현세적 영광도 더하여 주셨다” 하셨고 그렇게 받았습니다. 또 성경에는 “이것만 잘 하면 저것도 주신다”는 말씀이 있지요. 예를 들면 “복 있게 살면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고 영혼이 잘 되면 범사도 잘 되며 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이지요(시 1:1~3, 요삼 2, 마 6:32). 다윗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으므로(행 13:22)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왕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것”이 있어서 구하지 않은 부귀, 장수도 받은 것을 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복 주시는 섭리를 알게 되고, 솔로몬이 무엇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였나?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성경을 읽는 저희들도 솔로몬처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일을 잘 해서 복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잘한 일은 성전 건립을 제하고는 2장, 3장에서 다 나옵니다. 그리고 부귀영화는 꼭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물론 구하는 것도 잘 해야 하지만)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지혜 구한 것이 “꿈에서 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꿈을 계획하고 꾸지는 않지요.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솔로몬에게도 하나님이 꿈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지혜 구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의 좋은 점을 그의 생활 속에서 아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지혜를 구한 것이 전혀 솔로몬의 뜻이 아니라고 해도 맞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꿈이란 뜻을 그 사람의 소원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생시에 먹은 마음이 취중이나 잠꼬대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꿈에 지혜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감동과 솔로몬의 소원이 합쳐서 나타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을 행한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1.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마자 뒤처리를 잘 했습니다. 반역자들을 나서서 척결하지 않고 기회를 보고 있다가 그들의 소행에 따라 척결하였습니다.

1) 문제의 사람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이복형인데 처음에 용서를 받고도 스스로 왕을 포기한 공로를 내세우면서 아버지의 첩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청탁을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통해서 부탁하므로 도덕적 무례와 반역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였으니 잘 하였고, 어머니의 청탁이란 인정과 형이라는 인정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2) 다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문제인데 이 사람은 다윗과 고난을 같이 한 사람이지요. 제사장 85인이 죽을 때 살아서 다윗을 따른 사람이니까요. 솔로몬은 그가 제사장인즉 죽이지 않고 직임만 파면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니, 그것도 잘한 일이요,

3)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평화시에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는데 다윗이 그 살인죄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여(2:32) 놔두었는데 나중에 역적모의에 가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죽기를 자청하여 제단 뿔을 잡고 떠나지 않으므로 죽음을 당하였으니 역시 공의로운 처리요,

4) 다윗을 비난한 시므이는 다윗이 안죽이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죽이지 않은 대신 금족령만 내렸는데 3년 후에 도망간 종을 찾으러 나갔다 온 것 때문에 죽었으니까 솔로몬은 다윗의 맹세를 지켰고 그는 자기 죄로 죽은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솔로몬의 공의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실래의 아들을 대접하라”는 유언도 잘 지켰습니다(렘 41:17).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고(3:1, 5:~8:),

3. 솔로몬은 선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아도니야가 역적이 되었을 때 그가 먼저 제단 뿔을 잡고 솔로몬에게 살려줄 것을 청했지요. 그때에 솔로몬이 말하기를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된다면 그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망발을 부리다가 죽었지요. 여기에서 솔로몬이 선을 추구한 사실을 나타낸 것이요,

4. 하나님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소에서 제사 드렸지만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3:3)에까지 가서 일천번제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 법궤는 예루살렘 성소에 모셨고, 모세 때에 가져온 다른 기구들은 기브온 산당에 시설되었습니다(대하 1:3). 일천번제란 천 마리의 희생을 드렸다는 뜻인데 이것을 이 시대의 성도들이 의미상으로 재연한다면 말씀과 기도와 계명 실천에 성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생활이지요.

5. 자기의 사명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의 사명은 왕노릇을 잘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우선하는 것이 재판입니다. 싸움을 말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줄꼬” 하셨을 때 지혜를 구한 것 아닙니까? 성도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신앙사상과 믿음 수준이 많이 반영됩니다. 교회중심인지 가정중심인지 말씀중심인지 기복주의인지 그의 신앙생활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무엇을 줄꼬” 하셨을 때 가장 신앙적이요 요긴한 것을 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나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안 구한 것을 잘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부귀, 영화, 원수 갚는 일 같은 것입니다. 부귀, 영화는 이기주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적당한 것을 구하라” 하셨으니까 현세욕에 대한 것은 시험에 들지 않을 만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잘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습니다. 5절 끝에서 “무엇을 줄꼬” 하셨을 때 필요한 것을 구하기 전에 다윗에게 주신 은혜와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말부터 길게 아뢴 것을 보십시오. 그는 감사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 헌신과 축복 (왕상 9:1~9)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나타난 내용을 묵상하면 아주 좋은 교훈이 떠오르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 나타난 몇 가지 좋은 교훈을 종합하여 “헌신과 축복”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1. 1절에 보시면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쳤다” 하였는데 왕궁은 자신이 쓰는 것이지만 성전은 다윗왕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이 하나님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한 것입니다. 성전 짓기 전에는 일천번제도 드린 일이 있었지요. 그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성전을 또 지어서 영광을 돌린즉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서 제사장이 섬길 수 없을 정도였고(왕상 8:10~11), 본문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았은즉 어찌 하시겠다” 하고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연구하셔서 단기 또는 장기계획을 세우시고 한두 가지를(무엇을 하겠다 또는 무엇을 드리겠다 하는 취지) 하신다면 “이 말씀 기록에 따라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와 성전을 봉헌하여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습니다.

2. 1절에서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성전 봉헌사(8:12~53)에서 길게 기도드린 내용입니다. 개인을 위한 축복, 단체를 위한 축복, 기근, 온역, 가뭄에 대한 기도, 이방인을 위한 기도, 전쟁을 위한 기도, 포로를 위한 기도, 용서에 대한 기도 등입니다. 솔로몬이 한 왕으로서 기도의 제목이 많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각자의 형편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의 내용이 항상 같습니다. 그것은 “이루기를 원하는 내용이 꼭 같기 때문”입니다. 성취될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하니까요(눅 18:1). 그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녀들이 독립, 자립하는 생활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목회와 함께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셋째는 죽을 준비에 앞서서 생활 정리를 하는 것이고, 넷째는 문서사역을 잘 끝내는 것이고, 마지막 다섯째는 그것을 다 이루기까지 나와 연고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만 했다 하면 이 다섯 가지 테마에 변동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들도 뚜렷한 목표를 만들어 소원하시라는 것입니다.

3. 그 이루기를 원하던 것이 응답되는 축복입니다. 1절을 보시면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다 마쳤다” 하셨고, 3절을 보시면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다” 하셨으니, 이 기도의 응답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시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그 문제를 인하여 기도를 안 해도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이에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뜻이지요. 성도에게 이런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즉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소원대로 지혜도 주셨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가 견고해지며 영광 누리는 복까지 주셔서 받았으니 저희들도 소원이 있고 기도하여 응답 받는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2절을 보시면 성전을 헌납 받으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기브온에서 나타나신 것처럼 또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저희들은 어떻게 받습니까? 저희들도 꿈으로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성경을 깨달으므로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정성을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경을 잘 깨닫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이 불행의 첫 단계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복을 받거나 응답을 받을 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잘 깨달으시면 처방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시 107:20을 보시면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5. 성도가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거기에 큰 관심을 가져주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라고 지어드린 전이온즉 백성들이 그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꼭 응답해 주십시오” 하였더니, 3~4절에서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은즉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할 것이요 내 눈과 마음이 항상 그곳에 있고…너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금반지를 해 드린 일이 있었는데 퍽 좋아하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끼고 계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대단히 기뻐하시고 거기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입니다. 말 3:16에 보시면 “성도가 하나님 존중하는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7~18절을 보시면 “그를 특별한 소유로 삼고 사람이 자기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그를 아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헌신자가 받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4~5절을 보시면 “네가 만일 다윗처럼 행하고 마음을 온전히 하며 바르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온갖 것을 순종하여 지키면 네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 하셨으니, 이것은 성실한 계명 실천에 하나님이 대대로 복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왕은 최고의 복인데 왕통이 끊어지면 안되겠지요.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이 그 후손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계명에 성실한 만큼 변함없이 복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계명순종과 복을 약속하실 때는 반드시 그 반대의 것도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7~8절입니다. 성도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면 하나님도 복에 대한 약속을 화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헌신과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3. 세 사람의 잘못 (왕상 13:1~19, 33~34) 목록으로


본문에는 “여러보암”과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 세 사람의 행적이 나옵니다. 이 세 사람이 다 자기의 위치에서 잘 하였으면 큰 복을 받을 것인데, 다 잘못하여 불행을 자초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꼬집어 보고 저희들이 경계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여러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본래 솔로몬의 신복이었으나 솔로몬이 타락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그 나라 4/5쯤을 찢어서 여러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보암이 왕이 되면서 반역죄를 범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솔로몬의 타락으로 나라를 찢어준다는 사실과 다윗처럼 잘 하면 튼튼한 큰 나라를 세워 주실 것이라 하셨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왕상 11:30~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 반역자가 되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이 선민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출 20:4을 위반하였고, 또 그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 세우고 거기에 제단을 만들어서(각 처에 자율산당도 세움) 자기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말고 자신이 만든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으며, 아무나 자원하면 제사장을 세우고 자신도 제사장이 되어 제물과 분향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잘못은 여러 가지이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선민에게 주신 하나님의 종교와 제도를 일축하고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창시한 것입니다. 종교 대상만 하나님일 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버린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그 믿음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여러보암은 신본주의를 인본주의로 바꾸고 절대자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러보암이 이런 잘못을 범한 이유는 하나님 섬기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고, 다만 백성들을 성전이 있는 남방 유다로 뺏기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한 것인즉 (결국) 백성들의 신앙을 뺏고 백성들을 정치에 이용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22년이나 왕노릇하게 하시고 나중에 망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34절).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본주의나 세속주의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인즉 극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벧엘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보암의 자율제단에 대하여 책망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인데 “너는 벧엘에 가서 (그곳 제단에서 제사하는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장차 요시야란 사람이 나타나서 (320년 후에 나타날 유다 19대왕) 이 제단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뼈를 이 제단에서 불태우게 될 것이라 하고 그 증거로서 이 제단이 헐리고 재가 쏟아질 것이라” 한 후에 돌아올 때는 “갔던 길로 다시 가지 말고 떡이나 물도 먹지 말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벧엘에 가서 외칠 때 사람에게 외치지 않고 제단에게 외쳤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지시였는지 또는 임금이 분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때 마침 임금(여러보암)이 분향을 하다가 들었으니까 증거의 목적은 다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때 여러보암이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기가 만든 제단이 화장터가 되고 무너진다고 하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었는데 뻗은 손이 굽어지지 않자 겸손하게 “기도해 달라” 하여 그 선지자의 기도로 회복되니까 “사례를 할 것이니 자기 집으로 가자” 하였을 때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받은 것(왔던 길로 가지 말고 떡이나 물을 먹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그 말을 전하고 그런 이유로 왕이 집의 반을 준다 하여도 갈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 하였으니, 참으로 말씀에 충실한 사역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는데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가 자기 집에서 대접을 받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때 못 간다는 사유를 말했더니 “지난 밤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를 대접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말을 믿고 가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나그네를 속였습니다. 그는 속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을 어겼고 그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나도 당신같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에 속은 것입니다. 기본 계시는 성경입니다. 누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기본 계시에 어긋나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민 23:19을 보시면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명령이 바뀔 때는 상당히 조심하고 판단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고, 드릴 때는 “중단하라”고 하셨지요. 그때에 중단할 만한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여쭙지도 않았습니다. 선배, 전통이라 하여 비판 못할 바는 아니지요. 그러니까 절대로 “선배님의 말씀”이라 하여 다 따르지 마시고 본받지 않아야 할 것이 있음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계시와 자기와의 관계를 옳게 분변 못하여 불행해진 사람입니다.

3.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를 쓰시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에 아히야나 스마야 선지자는 쓰셨는데(왕상 11:29~33, 12:22) 물론 늙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벧엘에 불법제단이 생겼어도 유다에서 사람이 와야 할 만큼 나서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듣고 무시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였고, 또 손 마른 것을 고쳤으며, 예언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단이 갈라진 일까지 있은 것을 들었으면 그 선지자의 말씀에 굴복해야 하는데 그를 거짓으로 유혹하였으니 그는 거짓과 함께 하나님의 정통적 말씀을 무시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징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 다음 세대에 벌하시려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엘리야의 사역 (왕상 17:1~9) 목록으로


엘리야 선지자는 성경으로 글을 남긴 것은 없지만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역한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왕과 그 아들 아하시야왕 때로 주전 882년~858년 사이쯤 됩니다. 그때 아합왕은 22년, 그 아들 아하시야왕은 2년을 다스렸는데, 가장 죄가 많고 왕이 악하며 또 나라에 재앙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남방 유다는 아사왕과 여호사밧왕이었지만 엘리야는 북왕국에서만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길르앗 즉 요단 동편 디셉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사적이 왕상 17:~19:, 21: 후반, 그리고 왕하 1:~2:으로 끝납니다. 강론에도 기록을 하였습니다만 엘리야의 사역과 관련하여 몇 가지 특징만 발췌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17:1에서 “엘리야의 말(기도)이 없으면 하나님이 땅에 비를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대행자로 쓰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공의 섭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땅에 우상숭배가 심한 이상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민족을 위하여 비를 구하지 않는 엘리야를 미워했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숨기시며 먹이시고 필요에 따라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의로운 사역자를 그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쓰시는 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방법을 쓰셨는데 한번은 요단 그릿 시내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로 하여금 떡과 고기를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물이 마르니까 시돈 밑에 있는 “사렙다”로 가게 하시고, “그곳 과부를 명하여 공궤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그 과부는 계시를 받고 엘리야를 공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 마지막 양식까지 대접하였더니 하나님이 자기 집 양식그릇에 이적을 나타내셔서 “기근이 다할 때까지 먹게”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접대하는 것과 그 집에 복 주시는 것을 겸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집 아들이 죽었을때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로 죽은 아들까지 살려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3. 그 다음에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에게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합은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했고 엘리야는 피해 다녔는데 “가라” 하시므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의 자리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섭리도 믿겠지만 보호섭리가 없을 때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엘리야에게는 그런 것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을 만났고 담판을 지었습니다. “제물을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하나님이신즉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때 바알, 아세라 선지자는 950명이었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기도한 선지자는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숫자 편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제물만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명하여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라” 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한즉 비가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만족이 올 때 복을 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뚜렷하게 보여주었어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자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4. 이세벨(왕비)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선전포고를 해온즉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도주하였는데 얼마나 목마르고 피곤하였겠습니까? 너무 고생스러워서 “하나님 이제 그만 쓰시고 데려가 주십시오” 한즉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주시며 어루만져 주셨을 뿐 아니라 잠든 사이에 두 번이나 그런 은혜를 주셔서 먹고 힘을 얻은 후에 40주 40야를 걸어 호렙산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할 때도 적당하게 은혜와 힘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브엘세바나 호렙에는 피하기 위하여 갔을 것입니다.

5. 그런데 하나님이 호렙에서 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북쪽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 대신 선지자기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심판할 도구로 쓰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왕이나 선민의 왕이나 선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달렸고 엘리야가 그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졌다”는 말씀만 있고, 세 사람에게 기름을 부은 내용이 없지만 엘리야는 그대로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6. 그 다음에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 그들이 재앙을 받아 죽을 것을 예언하였고(왕하 21:17~24), 아합이 예언대로 죽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병이 들었을 때 왕이 사자로 하여금 바알신을 찾아가서 “병이 낫겠는지를 묻게” 하였는데 이때에 하나님의 명이 엘리야에게 내려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다고 바알신에게 물으러 가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고, 이때 왕이 엘리야를 만나려고 50부장과 50인을 보냈지만 두 번이나 불이 내려 죽게 하였으며, 그 다음에 직접 만나서 말한 사실이 있었습니다(왕하 1:).

7. 마지막으로 왕하 2장에서는 엘리야가 따라오는 엘리사를 뿌리치면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고 엘리사가 그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갖고 와서 대를 이어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띤 외모나(왕하 1:8) 그 심령이 세례요한을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말 4:5, 눅 1:17).

설교보충 5. 엘리사의 사명적 은혜 (왕상 19:19~21) 목록으로


“엘리사의 사명적 은혜”란 제목으로 말씀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사명자 즉 선지자 사역을 하기 위하여 받은 은혜”란 뜻입니다. 아무나 자기 힘으로 또는 저절로 사명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엄연히 주체의 역할과 객체의 역할이 있고, 과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엘리사가 받은 사명적 은혜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택해주셔야 구원을 받듯이 사명자도 택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명자를 선택하시는 데는 상당한 근거를 갖고 계시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발표되지 않습니다. 모세를 왜 선택하셨는지, 엘리야, 엘리사는 왜 선택하셨는지, 세례요한과 바울은 왜 선택하셨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모태로부터 택정하셨다”(갈 1:15) 하셨고, 세례요한도 400년 전에 예언하시고 모태로부터 준비를 하셨습니다(말 4:5~6, 눅 1:13~17).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하신 근거는 알기 어렵지만 그렇게 선택을 받은 자는 계기와 과정에 접근되고 연단되어 결국 만족할 만큼 쓰임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도 그의 직업과 관계없이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 지목을 하셨으니까요.

2.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누구를 지목하는 것은 선택이지만 “이 시간부터 나를 따르라” 하는 것은 사명의 계기, 즉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그에게 던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진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겉옷을 던진 의미는 “네가 사명을 갖고 나를 따르라”는 신호인데 왜 이 뜻을 말로하지 않고 상징적 표현을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말로 설명하고 따르라” 하면 0.5%라도 설득과 권면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무언의 상징적 행위”에는 설득 받는 것이 없고 오직 당사자의 깊은 생각과 자발적 충동(본래 그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가 응하는 것)에 의하여 따르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실이 왕하 2장에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엘리사를 동행에 붙이려 하지 않고 여러 번 격리시키려 하였지만 엘리사가 따라 잡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겉옷은 유산의 가치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유명한 선지자의 겉옷이니까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겉옷을 던진 것”은 “내가 너를 후계자로 세운다”는 충분한 뜻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사명에 들어서는 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명자가 다 그런 계기를 맞습니다. 저도 신학교 가고 목사되는 꿈이 본래 없었는데 오명동 목사님이 “신학을 하지 않겠느냐” 하셨고, 그 당시에 군생활을 하면서 광주 신학교 2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인데 이런 계기는 사명자만 받는 것입니다.

3. 확실하게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하셨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도 (겉옷을 그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밭과 밭갈이도 버렸겠지요) 내가 부모와 입맞추고(작별인사) 따르겠습니다” 하니까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였으니, 이 말 뜻이 이해하기 애매하지만 “너 하는 일 내가 말리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집으로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잡아(화목제사를 드렸을 듯하고) 동리 사람들과 송별잔치를 하고 엘리야를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100% 헌신에 나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평소에 늘 유감스럽게 생각해 오던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성직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직업적 성직이고 또 하나는 헌신적 성직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직업적 성직은 구약시대의 레위인과 제사장이 그것이고, 신약에서는 “일군(목회자)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전 5:18) 하신 것과, 고전 9:9~14에서 직업적 성직(교회에서 생활비 받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직업적 성직은 성직자가 성실하게 교회 일하고 만족한 뜻으로 생활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노사갈등 일어나는 것처럼 부작용 생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직업적 성직을 갖는 것은 옳되 하나님의 사역자의 입장에 든든히 서서 바르게 성직을 수행하고, 비도덕적 문제가 개입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종류별로 또 다른 성직은 “헌신적 사명자”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헌신적 사명자이기 때문에 가진 것도 버려야 되고 가족과의 인연도 멀리하면서 자기의 몸과 생애를 전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바울사도 같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직업적 성직보다 헌신적 성직이 훨씬 상급도 많고 또 성직상의 효력도 더욱 크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런 헌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4. 어디든지 따라가는 은혜입니다. 이 말씀은 왕하 2장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시고자 할 때 하나님이 나를 길갈에서 벧엘로 가라 하시니 너는 여기 머물라” 하였는데 엘리사는 “엘리야와 안 떨어집니다” 하고 따라갔고, 또 여리고로 요단으로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세상 떠날 때 되어오니 나 따르면서 힘든 고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은혜를 더 받아야 합니다” 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는 취지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눅 9:62)을 생각하면 송구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바울사도가 죽기를 각오한 것처럼(행 20:24) 엘리사도 그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 네 가지 은혜를 사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6. 갑옷을 벗자 (왕상 20:11) 목록으로


아합왕은 이스라엘 7대왕이고 대단히 악한 왕이었지만 그가 다급한 지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입장에서 좋은 말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그 말이 바로 “갑옷을 입은 자가 갑옷을 벗는 자처럼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인데, 아합왕은 이 말을 침략자 벤하닷에게 하였습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왕도인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왕궁과 신하들 집의 보물이나 사람들을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왕이 장로들을 모아 의논을 한즉 버티고 싸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벤하닷에게 “못한다”고 전하니까 또 벤하닷이 말하기를 “너희 것을 빼앗아 나와 신하들의 마음을 족하게 안한다면 신이 나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 하면서 침략태세를 강하게 취했을 때, 아합이 또 응수하기를 “갑옷을 입은 자가 갑옷을 벗는 자처럼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너 벤하닷아 큰 소리치지 말아라 너는 갑옷을 의지하고 싸우려 하지만 나는 갑옷을 벗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즉 누가 이기나 보자” 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양쪽 진영이 전쟁을 했는데 아람왕이 졌습니다. 그래서 “노예처럼 충성하겠다” 하고 용서를 받고 풀려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갑옷을 입고 벗는 의미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갑옷을 입는 뜻은 싸움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싸움을 좋아하면 싸움에서 죽습니다. 성경에 싸움 좋아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골리앗이 그 실예이고, 사울, 요나단, 아브넬, 아마사도 싸우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제가 역사를 잘 모릅니다만 헬라의 알렉산더, 중국의 한무제, 몽고의 징기스칸, 독일의 히틀러 등도 다 전쟁하고 죽은 사람들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갑옷을 입고 싸움에 나가는 사람은 그만큼 위험에 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셨고(마 5:9), 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롬 12:18). 화평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갑옷을 벗는 사람입니다. 저희들은 “왜 내가 상대방과 화평하지 않은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말 실수, 욕심, 책임 불이행, 또는 범죄…등” 그런 것들로 말미암을 것입니다. 내가 혹 저를 미워하거나 저가 나를 미워해도 원인이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갑옷을 벗고 화평을 도모하려면 이상과 같은 취약점을 잘 보완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갑옷을 입는 뜻은 싸움, 불화, 다툼이요, 갑옷을 벗는 뜻은 화평과 사랑인데 사랑을 실천해야만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갑옷을 입는 뜻은 인간적 방법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인간적 방법만 의지하는 줄 압니다. 하나님 의지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성도는 인간적 방법보다 반드시 하나님을 더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갑옷을 의지했으나 죽은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골리앗이지요. 골리앗이 “갑옷을 입고 베틀채 같은 창을 가졌다” 하였지요. 그는 그 갑옷을 크게 의지하였을 것인데 결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다윗의 물맷돌에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왕의 갑옷을 받았으나 그것을 벗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간 것입니다. 골리앗은 창과 칼과 갑옷을 의지하였고, 다윗은 갑옷을 벗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는데, 다윗의 물맷돌이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골리앗의 이마를 맞춘 것입니다. 이것은 갑옷을 입었는데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 한 사람은 아합왕입니다. 아합이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갑옷을 입고 왕인 것을 숨기고 병졸 사이에 들어가 싸우는데 적의 우연히 쏜 화살이 갑옷의 솔기에 맞아 옆구리를 찌른 것입니다. 솔깃은 갑옷과 갑옷(즉 앞뒤판)을 연결시킨 부분으로 거기에 공백이 있는데 하필 그 공백으로 화살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무리 사람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단을 써도 소용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헤엄치는 사람이 물에서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들으면 인간의 수단으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이 죽었다는 소식도 있고,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죽었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그분들이 갑옷이 부족해서 죽었겠습니까? 갑옷 한 벌(죽음 방비책)에 1억이라도 사 입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사람은 다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 방비에 완전할 수 없어서 죽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 안 하실 만큼 “갑옷, 갑옷, 좋은 것, 좋은 것” 하시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너무 좋은 것만 좋아하고 좋은 것으로 건강을 지키려 하니까 건강과 관련있는 상품이 얼마나 많이 나왔습니까? 저도 그런 물건들을 많이 씁니다만 차라리 “보리밥 먹고 땀 흘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십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무개는 갑옷보다 나를 의지한다” 하실 때 은혜를 베푸시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6대왕이 “아사”인데 이 왕이 우상도 타파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발에 병이 나서 심히 중하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만 의지하다가 2년만에 죽었다”(대하 16:12~13)고 하였습니다. 이 왕은 갑옷만 의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반대로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때 “하나님 우리와 어린 것들과 재물을 지켜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는데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왕에게 호위병을 붙여달라고 구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에스라는 “기도로 부탁해 놓고 또 호위병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하나님만 의지하였는데 하나님이 보호,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7. 열왕기상 20장의 교훈들 (왕상 20:1~12) 목록으로


열왕기상 20장을 읽고 강론문을 길게 썼습니다만 그래도 몇 가지 교훈을 따로 설명드려야 좋을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 아합왕 때에 북방의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치러와서 사마리아도성을 에워싸고 “왕실의 은금과 왕의 처자들을 내놓으라” 하니까 왕이 대항할 능력이 없어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하닷이 그것으로 부족하여 “신하들의 집에서도 좋은 것을 다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아합왕의 신하들이 “앉아서만 당할 수 없으니 싸우자” 하여 “2차 요청은 응하지 못한다” 하니까 선전포고를 해 왔는데 이때에 아합이 말하기를 “갑옷을 입은 자가 갑옷을 벗는 자처럼 자랑하지 말라” 하므로서 큰 소리치고 교만을 나타내는 벤하닷에게 앉아서만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니까 벤하닷이 화가 나서 사마리아성 밖에서 진을 친 것입니다. 이때에 적군은 32왕과 연합을 하였고, 군마가 퍽 많았는데 죽은 자만 127,000명이었고, 이스라엘군은 기본 군인 232명과 모집병 7,000 뿐이었고, 또 아합은 악한 왕이었는데도 하나님이 그 전쟁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합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기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하고 오만한 벤하닷을 미워하신 것이고, 아합왕이 악했어도 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이며, 하나님을 바로 알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아합왕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있고, 이방인들은 산에서 전쟁을 패한 후에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은 산신이기 때문에 산에서만 이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평지에서 싸우면 여호와신은 능력을 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말을 듣고 노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장 “평지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바로 알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2. 벤하닷이 전쟁포로가 되었을 때 생사의 기로에 있었는데 신하들이 “이스라엘왕은 선하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깊이 회개하고 복종하면 살려 줄 것이라” 하여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마치 상복을 입은 사람처럼 회개의 표시를 하고 빼앗은 성읍을 돌려준다 하면서 다메섹 도성에 아합을 기념하는 도로를 정하겠다 하니까 아합이 만족하게 여기고 그를 병거에 올려 방면을 하였으니, 이것이 잘한 것입니까? 어찌보면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잘한 것 같지요. 그러나 잘못한 것입니다. 많이 잘못했습니다.

1) 전쟁이 났을 때 선지자가 “이긴다”고 하여 이겼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겼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에 대하여는 감사하지 않았고,

2) 전쟁에 이긴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면 포로를 처리할 때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심을 쓴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저희들의 생활에도 꼭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은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 목적 중에 벤하닷을 없애려는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이 묶어놓은 벤하닷을 풀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할 것을 비유계시로 나타내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병사가 포로를 맡기면서 지키라. 놓치면 큰일 난다 하였는데 놓쳤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까 아합왕이 대답하기를 “놓친 자가 그 생명을 대신해야 할 것이라” 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벤하닷을 방면한 죄값을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였던 것입니다(그러나 벤하닷처럼 회개하는 것은 용서 받을 만한 회개란 것도 배우셔야 할 것임).

3. 전쟁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적의 수는 죽은 자만 127,000명이니 안 죽은 자를 포함하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는 7,263명입니다. 하루에 10명을 죽이려면 한 사람이 14명을 죽여야 하는데 가만히 죽을 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27,000명은 성이 무너져서 죽었으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재앙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전쟁이 사람의 수나 무기에만 달린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사 2:22을 보시면 “사람은 코로 숨을 쉬기 때문에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약한 존재라” 하였고, 삼상 17:45에서는 “칼과 창이 무용할 것이라” 하였으며, 또 삿 7:6에서는 “메뚜기떼 같은 미디안 군사를 기드온의 300명이 해냈고”, 삼상 13:5에서는 “블레셋 군대가 바다 모래 같았으나 사무엘 선지자의 역할로 이긴 예”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인간이 노력하고 힘쓰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늘 기도를 힘쓰시라는 뜻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계시와 관련된 교훈입니다. 35절에서 “선지자가 나를 치라” 했으면 선지자의 말이니까 쳐야 하는데 선생님을 때리기가 민망하니까 치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사람 억울하게 죽은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죄없는 사람을 죽게 하시겠습니까? 욥이 고난을 당한 것처럼 그에게도 심판섭리가 있으실 것이라는 점이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히 1:1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꿈이나 환상이나 말씀이나 우림, 두밈법이나 또는 사람의 태도까지 쓰시는 것입니다. 소설보다 연극이 더 실감있는 것처럼 계시도 말씀만 주시는 것보다 형태가 나타나면 더 실감있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실례가 렘 13:1과 왕하 13:18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는 입장에서 인간을 쓰시는데 “나를 치라” 해서 치면 하나님도 치시고, 안치면 하나님도 안치시며, 또 세 번 때리면 하나님도 세 번 때리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 하는 대로 하나님이 따라 하신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계시에 쓰임 받은 자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하는 것까지 아시고 또는 그렇게 되도록 역사하셨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