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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여호수아가 죽은 후 (1) (삿 1:1~20) 6 바로가기

제2과 여호수아가 죽은 후 (2) (삿 1:21~36) 9 바로가기

제3과 여호수아 후시대의 타락상 (삿 2:1~23) 12 바로가기

제4과 옷니엘, 에훗, 삼갈 (삿 3:1~31) 15 바로가기

제5과 드보라, 바락, 야엘의 사역 (삿 4:1~24) 18 바로가기

제6과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 (삿 5:1~31) 21 바로가기

제7과 기드온을 부르심 (삿 6:1~21) 24 바로가기

제8과 기드온의 사역 시작 (삿 6:25~40) 27 바로가기

제9과 기드온의 전쟁과 승리 (삿 7:1~25) 30 바로가기

제10과 승리와 그 다음에 있은 일 (1) (삿 8:1~17) 33 바로가기

제11과 승리와 그 다음에 있은 일 (2) (삿 8:18~35) 35 바로가기

제12과 아비멜렉의 집권 (삿 9:1~21) 37 바로가기

제13과 아비멜렉과 세겜을 심판하심 (삿 9:22~37) 40 바로가기

제14과 돌라, 야일 또 타락 (삿 10:1~18) 43 바로가기

제15과 입다의 출현과 외교 (삿 11:1~28) 46 바로가기

제16과 입다의 서원과 승리 (삿 11:29~40) 48 바로가기

제17과 동족과의 싸움 (삿 12:1~15) 50 바로가기

제18과 삼손을 예비하심 (삿 13:1~25) 52 바로가기

제19과 삼손의 1차 복수 (삿 14:1~20) 55 바로가기

제20과 삼손의 2차, 3차 복수 (삿 15:1~20) 57 바로가기

제21과 삼손의 흔들림 (삿 16:1~14) 59 바로가기

제22과 삼손의 실수와 마지막 (삿 16:15~31) 61 바로가기

제23과 자율 신당 건립 (삿 17:1~13) 63 바로가기

제24과 단 지파의 원정 (삿 18:1~31) 65 바로가기

제25과 한 레위인의 불행 (삿 19:1~30) 68 바로가기

제26과 하나님 백성의 총회 (삿 20:1~17) 71 바로가기

제27과 벤야민 군사를 진멸함 (삿 20:18~48) 74 바로가기

제28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함 (삿 21:1~25) 77 바로가기


설 교 보 충 80


     제1과 가나안 땅을 주시는 섭리 (삿 1:27~36) 80 바로가기

     제2과 사사기의 일관된 교훈 (삿 3:1~11) 82 바로가기

     제3과 기드온의 역사와 교훈 (삿 6:11~15) 84 바로가기

     제4과 삼손의 행보 (삿 14:1~9) 86 바로가기

     제5과 사사 삼손의 특징 (삿 15:15~20) 88 바로가기

     제6과 삼손의 바른 정신 (삿 16:18~31) 90 바로가기

     제7과 미가의 집과 단 지파 (삿 17:1~5, 18:1~2) 92 바로가기

     제8과 레위인의 고발과 결과 (삿 21:1~7) 94 바로가기


제목 없음

1. 먼저 드리는 글



 하나님의 은혜로 사사기 강론을 쓰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현재 7분 설교 12집과 병행하여 이 글을 쓰면서 건강상 문제로 많이 피곤하였지만 하나님이 붙드셔서 쓰게 된 줄 압니다.

 이어서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를 쓰려고 합니다. 그 두 권만 쓰면 제가 과거에 사용하였던 초기 원고는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계획적인 집필 목표를 열왕기하까지 둔 것인데 그 다음에도 하나님이 건강과 기회를 주시면 성경 요절 사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 인물 공부에 대한 글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있고, 회고록에 대한 것도 있으며 앞으로 교회가 큰 교회 추세에서 벗어나 작은 가족 교회가 많이 생기리라고 예측되며 따라서 작은 교회를 다스리는 정치 원리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현재 작은 교회를 시무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옳게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에 빛과 소금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가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현실 교회의 정치와 동떨어진 개혁 교회의 정치를 구상하려고 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강론집의 성격은 평신도가 성경 본문을 한 장씩 읽으신 다음에 이 강론문을 읽으시면 이해하시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출판은 마지막 기회에 하겠지만 그 이전이라도 홈페이지 인터넷을 통하여 무료로 제공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연락처를 찾아 문의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5. 12. 2.


                                                저자      지 영 근

 


제1과 여호수아가 죽은 후 (1) (삿 1:1~20) 목록으로


지금부터 사사기 공부를 시작하시겠습니다. 사사기(士師記)란 히브리 원문은 “샤파팀”인데 이 뜻은 샤파트(심판한다, 벌한다, 다스린다의 뜻이 있다고 함)의 복수명사로 “심판자들 또는 재판자들”이란 의미라고 합니다. 이 뜻을 공동 번역에서는 “판관(옛날의 원님 같은 뜻)기”로 번역하였고, 영어로는 Judge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 최초의 사사는 옷니엘(삿 3:9~10)로 시작하여 삼손으로(삿 13:24~25) 끝나는 줄 알기 쉽습니다. 그 수는 13명이지만 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사사 말기에 엘리 제사장도 사사였고(삼상 4:18), 사무엘 선지자도 사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평안하였을 뿐 아니라(삼상 8:6, 15~17) 사무엘이 그 아들을 사사로 세운 기록이 있고(삼하 7:1, 8:1, 행 13:20), 또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한 사실이 있습니다(삼상 4:11). 따라서 사사의 시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부터 사울이 왕 되는 시기까지(삼상 10:24) 약 450년간이라 하셨으니(행 13:20) 이 연대는 사울이 왕 된 시기(주전 1050년쯤부터 주전 1500년쯤까지)로부터 그 이전 450년간의 시대에 해당되는 것이요, 사사의 역할은 전쟁, 재판, 다스림도 있으나 계시 전달 또는 제단을 쌓은 사례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삼상 7:6, 17, 8:6). 하나님이 선민을 이방인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사를 세우셨고(삿 2:16), 또 그에게 힘을 주신 사실이 있으며(삿 2:18) 그가 뛰어난 신앙으로(히 11:32) 나라를 구출한 일도 많았지만 때로는 사사들도 무력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삿 2:11~19).(사사기 본문 공부를 하시기 전에 기독교 신앙 백과의 사사기 개론을 꼭 읽으십시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피겠습니다. 본문의 총 제목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있은 일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정하여 설명 드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① 1~7절은 “유다 지파의 선봉적 진격”이고, ② 8~16절은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 점령”이며 ③ 17~20절은 “유다 지파 갈렙의 전과”이고, ④ 21~29절은 “벤야민과 요셉 자손의 전과”이며 ⑤ 30~36절은 “다른 지파들의 상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유다 지파의 선봉적 진격(1~7절).

1) 1~2절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각 지파의 두령들)이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울까요?”하고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 싸우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봍였다”고 하셨습니다. 강한 저항자들을 없앴고, 제비를 뽑아서 지파별 경계는 나누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본토족을 전부 토벌한 것이 아닌 만큼 그들을 내쫓든지 기세를 꺾든지 또 싸움에 대항해 오는 자들은 멸절 시켜서 영토를 점유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계속하여야 하는데 그들은 40년 동안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시대로만 따른 경력이 있은즉 큰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질문하였고, 하나님의 대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귀한 신앙입니다. 약 4:15에서도 “우리가 주의 뜻이면.......이것 저것을 하리라”한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은 귀한 일인데 누가 어떻게 질문하고 계시를 받았을까요?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 여호수아 같은 후계자를 세운 일이 없으나 원로인 갈렙이나 세상 떠난 제사장 비느하스(수 24:33)의 아들 아비수아(대상 6:4)가 대제사장이 되어 계시를 받았을 것으로 사료되고 또 각 지파의 두령들 중에서 계시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로 묻고 계시로 말씀을 받았겠지요. 이때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 것이요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셨으니 여기의 “가라사대” 또는 “~하였느니라”하신 말씀은 말씀 계시가 분명한 것입니다(히 1:1). 그런 의미에서 “우림과 두밈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해석은 합당치 않다고 봅니다.

2) 3~5절에서는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적 싸움에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심으로 큰 전과를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대항해 온 강적들을 거의 소탕한 후였기 때문에(수 10:40~43) 부분 부분에 남아 있는 본토족을 쫓아내는 일이 각 지파의 임무였고, 그 때에도 반항자가 있을 때는 전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으니 이는 한 제비에 해당하는 영토를 함께 나눈 이유도 있지만(수 19:9) “두 지파의 거주지에 인접한 적들을 소탕할 때도 함께 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협력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고, 그 결과 큰 효과를 얻었습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셔서 그들이 베섹(세겜에서 1시 방향 24㎞쯤)에서 1만명을 죽이고, 또 아도니 베섹과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였다”(4~5절)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은 한 부족의 이름이지만(창 10:6, 18~19) 팔레스틴 각처에 분포된 연고로 그 지역의 대표족으로 호칭한 것이고, “아도니 베섹”은 베섹의 우두머리란 뜻입니다.

3) 6~7절에서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 것을 쫓아가 잡은 후 그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었으니” 이는 무기를 잡지 못하고 또 도망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도니 베섹”이 엄지 수족을 잘렸을 때 말하기를 “자신도 옛적에 70왕의 엄지 수족을 끊고 자기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게 한 일이 있었는데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하나님의 보복이 비슷하게 임하였다고 말한 후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불신자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범죄와 유사하게 임하는 것을 자신의 느낌에 따라 고백한 것입니다(시 90:8). 다시 말하면 아도니 베섹이 영감을 받아 운운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2.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 점령(8~16절).

1) 8~11절은 “유다 자손(시므온 자손과 합세하였을 것으로 사료됨. 3절)이 예루살렘과 헤브론과 드빌(기럇세벨) 지역의 거민을 쳐서 정복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예루살렘은 여부스와 같은 지역인데(21절) 여부스는 종족의 이름을 딴 지역 이름입니다. 문제는 그 지역이 벤야민 지파에게 분정된 땅인데(수 18:16) 그 땅을 유다 지파가 점령한 것은 전술에 의하여 도와준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또 헤브론 지역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그 곳 족장급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으며 또 드빌(이 지역은 사해바다 북서쪽이고, 벤야민 지파의 남쪽 경계, 동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추정됨)을 쳤다” 하였으며(10~11절)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아르바(달의 도성이란 뜻)”이고,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세벨”임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12~13절에서 갈렙은 제비 뽑아 받은 유다 지역에서 본토족을 물리칠 의지가 강하였기 때문에 군사들로 하여금 용기 있게 싸워 승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럇세벨을 치는 자에게는 자기의 딸 악사를 주어 사위를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공을 세운 장수에게 상급을 제시한 것입니다. “기럇세벨”은 학자의 성읍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곳을 고대 문화의 중심지로 보며 그 후에 그 이름을 “드빌”로 고쳤고(11절), 현재는 “델벳밀심”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헤브론 서남방 20㎞쯤에 위치합니다. 13절에서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하여 약속대로 그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입니다(3:9). 그렇다면 이 문장을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라 하지 말고 “갈렙의 아우인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표현해야 좋았을 것입니다. 위 본문의 개역은 옷니엘이 갈렙의 아우일 수도 있도록 번역한 잘못이 있습니다. 근친 결혼은 그 당시에 관행상으로 있어 오던 일이었습니다(창 11:29, 24:40, 왕상 2:17~18).

3) 14~15절은 악사가 옷니엘과 혼인한 후 유다 남방 땅으로 가면서 “그 아비에게 밭을 구하여 윗샘과 아랫샘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이므로 샘을 받고 멀지 않은 남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4) 16절은 모세의 장인과 그 자손이 유다 지파의 땅에서 살게 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민 10:29~32에서 모세의 장인(이드로. 출 3:1, 호밥. 민 10:29)이 광야에서 모세를 만났을 때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함께 가기를 권유하였으나 사양한 일이 있었는데(민 10:29~32) 이 본문에서는 그 가족이 유다 지파의 기업지에서 함께 산 것을 기록하였으니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선민족에 합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겐족속”이란 뜻은 모세 장인의 부족 이름이고,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 올라가서 아랏 남방에 거하였다” 하였는데 이 문장은 영어 성경과 공동 번역 성경이 개역과 같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겐사람 모세의 장인의 후예들이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로부터 와서 유다 남방 아랏 남쪽에 있는 아말렉 사이에 거하였다” 하였고, 공동 번역은 여리고란 용어가 없이 영어 성경과 같이 되어 있으므로 개역 성경에는 아말렉과 여리고가 빠진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원문 번역과 실제로 대조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나무 성읍은 곧 여리고를 뜻하고(신 34:3, 대하 28:15), “아랏 남방”은 헤브론 남쪽 30㎞이상 떨어진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은 하맛과 인접된 곳인데 그 당시에 그 곳에 아말렉족이 거주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모세가 “장인의 가족을 선대하겠다”한 약속이 나중에 성취된 것입니다(민 10:32). 그 이전부터도 선민족에게 이방족이 합류한 사례가 많이 나타납니다(레 16:29~30, 출 12:44, 수 6:25).(삿 1:1~3, 16~21, “가나안 정복의 사연”이란 설교문도 참고하십시오. 7분 설교 3집 전 41과)

 

제2과 여호수아가 죽은 후 (2) (삿 1:21~36) 목록으로


3. 유다 지파 갈렙의 전과(17~20절).

1) 17절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합세하여(3절) 스밧을 진멸하고 그 이름을 호르마(멸망, 저주의 뜻)라 하였는데 이 스밧은 브엘세바에서 5시 방향 15㎞쯤, 또 아랏의 서쪽 5㎞쯤에 위치합니다(꼭 같은 이름 Zepherth(스밧)이 므낫세 지역 즉 므깃도에서 8시 방향 20㎞지점에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 18절에서 또 “유다 지파는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 지역을 취하였다” 하였는데 가사와 아스글론은 유대땅 남쪽 지중해 변에 있고, 에그론은 아스글론에서 5시 방향 15㎞쯤에 위치합니다. 19절에서는 그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산지 거민은 쫓아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음을 인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철병거에 겁을 먹고 신앙의 사기를 잃었거나 또는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남기신 듯 합니다(출 23:29~30, 삿 3:1~2).

3) 20절에서는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수 14:6~15, 15:13~14)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고, 그가 거기서 아낙 자손(민 13:33)인 그의 세 아들(민 13:22,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을 쫓아냈다”고 하였습니다. 강한 세력을 쫓아낸 것입니다.

4. 벤야민과 요셉 자손의 전과(21~29절).

1) 21절은 “벤야민 지파의 전과”인데 그들이 받은 기업 중 예루살렘 곧 여부스 성읍이 있었으나(수 18:28)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부스 사람이 벤야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함께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뜻을 힘입어 이 성을 점령할 것을 예언하였고(수 3:10), 이 성의 백성들이 다른 왕들과 규합하여 여호수아의 군사를 대적했을 때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을 죽인 일까지 있었지만(수 10:1~5, 23) 점령하지 못하였는데 후에 다윗왕이 요압으로 하여금 공취한 후(대상 11:6) 도읍지를 삼았습니다(삼하 5:4~5). 따라서 여호수아의 예언이 약 350년 후에 성취된 것입니다.

2) 22~26절은 요셉 족속의 전과를 말씀하셨는데 27~29절에서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전과가 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요셉족이 “벧엘”을 점령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벧엘은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의 남쪽 경계에 있음. 수 16:1~9) 29절 말씀과 함께 에브라임 지파의 전과에 해당합니다. 23절에서 “벧엘의 본 이름은 룻스라” 하였는데 수 16:2에서는 “벧엘에서 룻스까지”란 말씀이 있은즉 본래는 인접된 두 지역이었으나 나중에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벧엘”로 부르면서(창 28:19) 벧엘이 된 줄 압니다. 에브라임 군사들이 그 성을 정탐할 때 그 곳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출입구를 물은즉 그가 선대 받을 약속을 받고 가르쳐 주었으므로 (쉽게) 그 성을 치고 약속대로 입구를 가르친 자와 그 가족을 살려 보낸 즉 그가 헷사람의 땅(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서 막벨라굴을 샀은즉 창 23:16~20, 그 지역이 헤브론 지역임을 알 수 있음. 창 23:1~9)에 가서 살면서 그 지역 이름을 자기의 본 고향의 이름을 따서 “룻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벧엘을 점령할 때 출입구를 알려준 행위는 라합이 정탐을 숨긴 일과 비슷한 뜻이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임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뚜렷하게 나타난 만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 된 것이므로 복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29절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여리고 서쪽 45㎞쯤에 있고, 벧엘에서는 8시 방향 30㎞쯤에 있은즉 에브라임땅 서남부에 위치함)에 거한 가나안족을 쫓아내지 못하여 그들도 함께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27~28절은 므낫세 지파의 전과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도 비교적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벧스안과 다아낙과 돌과 이블르암과 므깃도와 그 향리(주변땅)들을 쫓아내지 못하니 그 곳에 거 한 가나안족이 결심하고 거하였다” 하였고, 또 “강성한 후에 그들에게 사역(일 시키는 일, 지배하는 뜻)을 시켰으며 계속 다 쫓아내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다 쫓아내지 않은 것은 종으로 부리는 유익을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수 17:11~13을 보시면 “므낫세의 소유가 잇사갈과 아셀의 땅에도 있었으니 곧 벧스안과 이블르암과 돌과 엔돌과 다아낙과 므깃도이며 그 향리들이라” 하시므로 본문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므낫세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돌(호미곳 남쪽 22㎞쯤 해변에 있음)과 므깃도(호미곳에서 5시 방향 40㎞쯤), 다아낙(므깃도에서 5시 방향 10㎞쯤), 이블르암(다아낙에서 5시 방향 10㎞쯤)은 아셀땅이란 곳이고, 벧스안(이블르암에서 2시 방향 22㎞쯤)은 잇사갈땅이 되는데 이러한 영토 분배의 모순은 형편상의 착오로 충분히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기록된 사사기의 말씀에 므낫세의 땅임을 나타낸 것이 기정화된 사실일 것입니다. 문제는 다 쫓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5. 다른 지파들의 상태(30~36절).

1) 30절에서 “스블론은 기드론(수 19:2, 기슬롯) 거민과 나할롤(수 19:15, 나할랄)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역을 하였다”는 뜻은 함께 어울려 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신 7:2~5 말씀을 위반한 것입니다.

2) 31~32절은 “아셀 지파가 악고, 시돈, 알랍, 악삽, 헬바, 아빅,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하였으니 이는 (힘으로) 쫓아내지 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힘이 없은즉 고의성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지명은 수 19:24~31을 참고 하십시오.

3) 33절에서 “납달리는 벳세메스,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 곳의 본토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다” 하였으니 쫓아낼 힘이 없은즉 함께 살았다는 뜻이며

4) 34절에서는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단 자손은 수 19:40~48을 참고하면 “단 지파가 욥바 동남부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영토 확장을 위하여(수 19:47) 레센을 취하였다” 하였는데 본문과 대조하면 아모리족들로부터 영토 사용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북벌에 나선 것으로 사료됩니다.

5) 35~36절은 “아모리족과 요셉족과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아모리족이 단 지파의 영토 점유를 통제하고,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는 중 요셉(에브라임족) 족속이 강성하여 그들을 억누르고 사역을 시켰으며 이로써 아모리족의 지계(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쪽이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헤레스산은 아얄론 근처이고, 아얄론은 여호수아가 “태양아 머무르라”할 때 기록된 지명이며(수 10:12) 사알빔은 엠마오 북쪽 3㎞쯤에 있고, 아그랍빔은 사해 남단 신 광야 사이의 비탈이라고 합니다(수 15:3, 민 34:4).

결론적으로 여호수아 후 시대에 각 지파들이 자기 영토내에 있는 본토족을 시원스럽게 다 쫓아내지 못한 이유와 또 다른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1)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① 12지파 군사가 단일 지파로 축소되면서 전쟁의 사기를 잃었기 때문이고, ② 약간 강성해진즉 이방족을 부려먹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입니다(신 7:2~5)

2)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적 의미가 있었으니 ① 그들이 천천히 쫓겨나므로 들짐승의 번성을 막고(출 23:29~30, 신 9:22), ② 후시대 자손들로 전쟁 경험의 대상이 되게 하시며(삿 3:1~2) ③ 선민의 타락을 예언하심에 따라 성취되는 의미가 있고(신 31:15~21, 27~29, 수 23:8, 12~13, 24:19), ④ 성도의 “성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영적 의미를 계시하신 뜻이 있는 듯 한 것입니다(롬 3:10, 갈 2:!6, 3:11). ⑤ 또 삿 2:22~23, 3:4에서는 “시험의 과제”라고도 하셨습니다.

 

제3과 여호수아 후시대의 타락상 (삿 2:1~23) 목록으로


사사기 1장은 “선민이 지파별로 분배받은 지역의 본토족을 다 없애지 못하였음”을 기록한 말씀인데 이는 여호수아 후시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을 인함이라”고 본문 2, 19~20절에서 말씀하셨고, 본장 ① 1~5절은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이고, ② 6~10절은 “세대간의 차이”요, ③ 11~15절은 “타락과 재앙”이며 ④ 16~23절은 “사사기의 서론”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 제목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여호수아 후시대의 타락상”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1~5절).

1) 1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우는 자들의 뜻)에 이르러 선민들(너희)에게 책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길갈과 보김은 서쪽, 동쪽 20㎞쯤의 상간에 있고, 두 지역 다 에브라임 영토 남단에 있는 지역이며 여기의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처럼(창 18:2) 또는 놋에게 나타난 사람들처럼(창 19:10, 12)” 나타났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때에 나타난 분들을 “천사”라 하였고(창 19:4), 창 22:12에서는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자를 사람 모습으로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길갈”은 선민이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과 언약한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요(수 24:19~27), “보김”은 책망을 받은 백성들이 “소려 높여 울었다”는 뜻으로 개명한 장소 이름인즉 기존 이름을 알기 어려우나 혹자는 그곳을 벧엘(길갈의 서쪽 20㎞쯤)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제단이 그 곳에 있었고(수 1:5),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렸은즉(5절) 그 곳을 벧엘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은 “하나님은 선민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고, 선민에게 세우신 약속을 영원히 지키시는 분이지만 선민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고(2절), 또 가나안족과 그들의 우상의 단을 멸하지 않았으며(2절, 신 7:2~5)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른 것”입니다(11~12절).

2)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대적인 본토족을 쫓아내시지 않으므로 그들이 선민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괴로움을 주는 뜻) 그들의 신들(우상 종교)도 선민을 유혹하는 올무가 될 것이라(3절)” 하셨으니 이 사실은 신 7:2~5과 수 24:19~27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선민이 언약을 범하였을 때는 약속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마땅히 벌을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 벌은 가나안족이 축출되지 않고 선민의 신앙을 타락시키며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4절에서 이 말을 들은 자손들이 “울었다” 하였고, 그들이 울었음(회개하고 깨달은 것)을 인하여 그 장소를 “보김”이라고 개명한 후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의 “울고 제사를 드린 행위”는 일시적 깨달음과 회개를 나타낸 것입니다(이 본문의 설교 “하나님의 사자의 외침이 7분 설교 3집 전 30과에 있음).

2. 세대간의 차이(6~10절).

1) 6~7절의 내용은 “여호수아가 세상 떠나기 전에 각 지파를 그들의 제비 뽑은 땅으로 보낸 사실과 그들이 자기의 고장에 돌아가서 여호수아 및 여호수아를 아는 원로층들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는 내용이고,

2) 그 다음 8~10절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 지낸 내용과 여호수아 및 원로급이 산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로 역시 앞 절과 함께 수 24:29~31에 이미 기록된 것입니다. 지도자의 지도력과 그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추억하는 중의 생활이 그만큼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다른 세대는 하나님과......하나님이 선민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시키는 일을 직업의 전수만도 못하게 여긴 듯 합니다. 신앙의 전수를 중요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여기에 대하여 왕하 1:1~4 “아하시야의 불행”이란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3. 타락과 재앙(11~15절).

여기서는 선민의 타락상을 말씀하셨고, 결국 “하나님이 맹세하신대로 재앙을 내리시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재앙에 대한 말씀은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출 20:1~5, 신 7:25~26, 수 24:19~20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그들의 타락상은 “하나님의 목전에서(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중 감찰하심)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겼고 열조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좇은 것”인데 여기의 다른 신은 바알(베니게와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남신 또는 태양신)과 아스다롯(풍요의 여신)을 섬긴 것입니다.

2) 따라서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14~15절에서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노략을 당하게 하시는 것과 사방 모든 대적에게 파셔서(지배를 받게 하시는 뜻) 그 대적을 당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 어디를 가든지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 괴로움을 심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재앙은 “선민에게 맹세하신대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맹세하신 내용을 다시 읽어보십시오(출 20:1~5, 신 7:25~26, 28:14~19, 수 24:19~20). 어떻게 선민들이 한 두 세대 지난 후에 이런 타락을 할 수 있겠는가? 하시겠지만 요즈음처럼 문명이 발달한 세대에도 우상 종교가 성행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세대의 연결고리만 끊기면 그 다음 후손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위험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습과 계승이 중요한 것입니다.

4. 사사기의 서론(16~23절).

이 부분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사기에 나타난 내용의 서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16절에서는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사사를 세우셔서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하셨으니 이 내용이 곧 사사기에 나타난 내용이며 17절에서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않고 음난하듯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의 도를 떠난 것”은 사사의 지도력이 상실되거나 중단되었을 때 다시 옛생활(본토족의 풍속)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고, 18절에서 “하나님이 선민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셨을 때는(하나님이 선민을 구원하시려고 세우신 만큼) 그 사사와 함께 하시고 그 사사가 산 동안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때에 선민들이 “대적들로부터 압박과 괴로움 당함을 인하여 슬피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그러나 그 사사가 죽으면 또 열조보다 패괴하여 타락을 그치지 않으므로(19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고(19절), 그 진노의 내용은 “여호수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 주시지 않은 것이라(20절)”고 하신 것입니다.

2) 22~23절에서 하나님이 가나안족을 다 물리치시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선민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열국을 여호수아의 손에 다 붙이지 않으시고 남겨두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 2과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나안족을 다 쫓아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것을 추가로 더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성도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그의 섭리적 생활 여건 속에서 지켜보시는 분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4과 옷니엘, 에훗, 삼갈 (삿 3:1~31) 목록으로


본문 ① 1~4절은 “남겨두신 열국”이요, ② 5~7절은 “선민의 타락상”이며 ③ 8~11절은 “사사 옷니엘의 사역”이고, ④ 12~30절은 “사사 에훗의 사역”이며 ⑤ 31절은 “사사 삼갈의 사역”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옷니엘, 에훗, 삼갈”로 정하였습니다(1~11절을 근거로 한 설교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방법”이 7분 설교 4집 전 40과에 있음).

1. 남겨두신 열국(1~4절).

본 절에서는 “남겨두신 열국”과 “남겨두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2~3절에서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블레셋 다섯 방백”은 수 13:3에 근거하여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남아 있으므로 자주 선민과 싸우게 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② “가나안 모든 사람”은 팔레스틴 전역에 흩어져 정착한 이방족을 일컫는 말로서 출 34:11과 신 7:1, 수 3:10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5절에서 말씀한 족속들을 의미합니다. 종합하면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히위, 여브스 사람 그리고 기르가스 사람들입니다. ③ 시돈 사람은 시돈 지역에 사는 본토족이고, ④ 또 (먼 곳에 흩어져 사는) “히위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바알 헤르몬산과 헤르몬산을 따로 구별한 사실이 대상 5:23에 나옵니다. 따라서 지명은 다르나 가까이 인접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맛은 헤르몬산에서 북쪽 20㎞ 지점이고, 레바논은 헤르몬산과 하맛의 서쪽 해변 지역인즉 이는 히위족이 가나안땅으로부터 훨씬 북쪽에 흩어져 사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이 열국을 남겨두신 섭리에 대하여 1절에서는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선민의 후손들을 시험하려 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가나안족을 진멸하라”(신 7:2)하신 명령을 전쟁 실천으로 지키나 안 지키나를 보려 하신 뜻이고, 또 2절에서는 “그들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대적을 남겨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를 4절에서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족이 잔류한 것은 선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순종과 타락에 해당하고, 하나님편에서 볼 때는 선민에 대한 연단과 교육의 목적으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도 적당하게 하신다”(잠 16:4) 하셨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악을 모퉁이의 머릿돌을 놓은 것처럼 쓰심으로써 구속 사역을 하신(마 21:42) 것입니다.

2. 선민의 타락상(5~7절).

1) 5절에서 선민의 타락 생활 첫째는 이방족과 합류 생활을 한 것입니다 5절에서 “그들 사이에 거하였고”, 6~7절에서는 “통혼하고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으며 하나님 목전(무소부재하시며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과 그 제단 앞에서)에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본토족의 우상 숭배와 잡신을 받아들인 후 동거하고 통혼하였으니 선민이란 신분과 긍지는 물론 하나님까지 버린 것인즉 큰 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사사 옷니엘의 사역(8~11절).

1) 8절에서 타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공의의 섭리이고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왕 구산리다사임에게 붙여 8년을 섬기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메소포타미아”는 바벨론 지역의 나라로 아시면 됩니다. 그 나라와 가나안땅이 상당히 멀기는 하지만 그들이 원정을 와서 선민을 괴롭게 한 줄 압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나중에는 선민의 나라까지 아주 없앴으니까요(왕하 25:1~7).

2) 9절에서 “선민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세워주셨는데 그가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옷니엘의 역사는 수 15:13~19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10~11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신즉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고(지도자 또는 구원자로 부각된 뜻), 구산리다사임과 싸울 때 그들을 옷니엘의 손에 붙여 이기게 하시므로 40년간 태평세대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신”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능력도 힘입고 지도자도 될 수 있으며(삼상 2:7) 대적이 힘을 잃고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도 성령님의 충만을 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눅 12:49, 행 1:8, 엡 5:18).

4. 사사 에훗의 사역(12~30절).

1) 12~14절은 “선민의 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모압왕 에글론의 침략을 받아 18년간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한 것”은 6~7절의 내용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적국이 강해지는 것부터 하나님의 징계 섭리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이 강성해지자 에글론왕은 주위의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 나라 종려 성읍을 점령하였습니다. 여기의 모압이나 암몬, 아말렉은 창 19:38, 민 22:3, 24:20, 신 23:3~6 등에서 이미 나타난 지명으로 요단강 동남쪽 지역에 사는 부족들입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 것은 삿 1:6, 신 34:3, 대하 28:15에 나타난바대로 여리고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선민들이 큰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2) 15~30절은 “에훗의 구원 사역”인데 선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벤야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세워주셨습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도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시면 에훗이 사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그를 의탁하면서 모압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쳤다” 하였으니 이는 모압왕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한 뜻이 있고, 백성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거사의 때를 기다렸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에훗은 왼손잡이 용사였습니다. 오른쪽 다리의 옷 속에 1규빗(약 1척 반)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차고, 공물(조공 바치는 것) 운반하는 사람들을 친히 인솔하여 공물을 바치면서 에글론왕이 비둔한 것과 또 그의 거취를 알아 놓았을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시면 “공물 바친 백성들을 돌려보낸 후 에훗이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왕이 있는 곳으로 왔다”한 것을 보면 왕의 거취를 아는 것과 의병에 대한 준비 작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당시에 용사, 역사(力士) 일만명 가량을 죽였으니까요(29절). 에훗은 왕의 처소에 찾아가서 “은밀히 말할 것이 있다” 하였을 때 왕은 그가 공물을 바친 충성된 백성으로 알고 주위를 물리쳤고, 그때에 에훗은 칼로 그를 찔러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와서 “다락문을 잠갔다”고 하였습니다(23절).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나타납니다. 왕의 신하들은 왕이 자는 줄(발을 가리움)로 알았고, 상당 시간 기다려도 왕의 거동이 없자 나중에야 문을 열어보고 그의 죽음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24~25절). 에훗은 그 사이에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지역을 알기 어려움)로 도망하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어 의병의 출동을 명하였으니 길갈과 돌 뜨는 곳과 스이라가 다 에브라임 지역 남단 또는 요단강 하류에 가까운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단강 나루를 지켜 모압인들로 하여금 본토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길갈쪽에 와서 선민을 괴롭힌 모압 용사 일만명 가량을 죽인즉 모압이 항복하므로 18년간의 태평시대를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사사 삼갈의 사역(31절).

에훗 사건 이후에 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가 되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생긴 동기와 처방도 옷니엘, 에훗의 경우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시고 쓰시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5과 드보라, 바락, 야엘의 사역 (삿 4:1~24) 목록으로


본문 ① 1~3절은 “선민의 악과 학대 받음”이고, ② 4~5절은 “드보라가 사사됨”이요, ③ 6~10절은 “드보라의 받은 계시와 작전”이며 ④ 12~16절은 “싸움의 과정”이고, ⑤ 11, 17~24절은 “야엘의 전과와 최후 승리”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드보라, 바락, 야엘의 사역”으로 정하였습니다.

1. 선민의 악과 학대 받음(1~3절).

1) 1절은 “에훗이 죽은 후에 선민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 하셨는데 여기에서 어느 지파의 악행인지를 말씀하지 않은 것은 특정 지역을 중심하여 여러 지파가 합류된 상황이기 때문이고, 또 악행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앞의 경우(삿 3:6~7)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2) 2절에서 “하나님은 하솔(갈릴리 바다 북쪽 15㎞쯤에 위치함)에 도읍한 가나안왕 야빈의 손에 선민을 파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파셨다”는 뜻은 팔려간 노예처럼 강자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이 가나안왕 야빈은 여호수아 때에도 선민을 대항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 11:1, 11). 가나안왕 야빈의 군대 장관은 이방(선민이 사는 지역이 아니란 뜻) 하로셋(Harosheth. 에스드라 엘론 평원의 서단이란 기록이 있으나 지도상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움)에 거하는 “시스라”이며 3절에서 이들이 “철병거 900승을 갖고 위세를 나타내면서 20년 동안 선민을 학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이 때에 선민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3절) 고난과 회개와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드보라가 사사됨(4~5절).

1) 4절에서 “이때에 랍비돗의 아내요 여선지자인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성으로서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임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빌립의 딸들도 예언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 21:9). 이 예언의 의미는 성경을 주시던 시대에는 계시 전달과 교육(설교)을 포함하지만 계시 완성(히 1:1, 유3) 후에는 “전파와 교육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보라가 사사된 일은 성령님의 지도에 의하였을 것입니다.

2) 5절은 “드보라”가 사사의 직무자로서 재판에 임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브라임 지파의 땅) 라마와 벧엘 사이에 위치한 드보라의 종려나무(드보라의 거주지) 아래에 거하였고, 백성들이 그에게 나와 재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라마”란 지역이 다섯 곳이나 있습니다(수 18:25, 19:29, 36, 본문, 마 2:18 등). 본문의 “라마”는 에브라임 산 중의 동리로 아셔야 합니다. 사사의 직임은 재판과 함께 나라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3. 드보라의 받은 계시와 작전(6~10절).

1) 본문 6절 하반과 7절, 9절 중에 드보라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내용은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스드라 엘론 평원의 둥근 산, 갈릴리 바다와 호미곳만 사이의 중간쯤)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다볼산과 남족 모래 언덕에서 호미곳만으로 흐르는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고, 또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여인이 그를 죽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보라는 이 말씀을 받고 대적이 기손강에서 패할 것과 대적의 장군 시스라가 한 여인의 손에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리하여 드보라는 전쟁의 작전을 계획하였으니 납달리 지역 “게데스”에 사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그 사실을 말하고 “의병을 지도하여 전쟁에 임하라”한즉 바락은 “혼자 가지 않고 드보라와 함께 가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선지자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에 드보라는 함께 갈 것을 약속하면서(함께 간다하여) 그것으로 바락이 승리의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요, 적장 시스라는 하나님이 한 여인의 손에 파셔서 죽게 할 것을 예고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게데스(갈릴리 바다 북쪽 22㎞쯤, 남달리 지역임)로 갔고(9절), 그 곳에서 스블론 지파와 남달리 지파를 상대로 의병 1만명을 모아 다볼산쪽으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10절). 게데스에서 다볼산까지는 약 45㎞ 됩니다. 그리고 지역이 남쪽으로 올수록 높기 때문에 “올라간다”(10절)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4. 싸움의 과정(12~16절).

1) 12~13절에서 “바락의 군사들이 다볼산에 오른 것을 어떤이가 시스라에게 고하였고, 시스라는 모든 군사와 철병거 900승을 동원하여 이방 하로셋(2절, 시스라의 고향)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았으니 한편은 높은 곳에 있고, 한편은 낮은 강가에 있게 된 것입니다.

2) 14~16절에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기를 “일어나라 하나님이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하나님이 네 앞에서 행하시지 않느냐”한즉 바락이 1만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내려갔을 때 하나님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므로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하였고, 바락의 군사들이 시스라의 남은 군사들을 추격하여 하로셋까지 이르니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락의 군사들도 용기 있게 싸웠겠지만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행하신다”는 믿음과 함께 싸운 것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은총의 근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스라와 야빈왕은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5. 야엘의 전과와 최후 승리(11, 17~24절).

1) 17절에서 도망한 시스라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러......영접을 받고 쉬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겐 사람 헤벨의 내력을 살피셔야 합니다. 이 가족은 모세의 장인 가족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웠을 때 그 장인의 방문이 있었고(출 17:1~16, 18:1, 27), 그 다음 출애굽 2년 후에 또 방문하였는데 그때에 모세가 “가나안땅으로 함께 가면 선대하겠다”고 권했으나 사양한 일이 있었습니다(민 10:11, 29~30). 그런데 모세가 죽은 후에 그 가족들이 유다 지파가 사는 여리고(종려나무 성읍. 신 34:3, 대하 28:15)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에 본문 11절에서는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 가까운 사아난님(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움)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살았다” 하였으니 몇 가족일지는 모르나 또 이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 와서 “하솔왕 야빈과 화평하게 살고 있었다”(17절)고 하였습니다.

2) 18절에서 이 때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도망하는 시스라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우유를 마시우고(19절) 안심하고 쉬게 한 다음 시스라가 자기를 숨겨달라고 부탁하였지만(20절) 깊이 잠든 사이에 장막 말뚝을 그 몸에 박아 기절하여 죽게 한 것입니다(18~21절).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세의 처가라는 친척 관념이 있었고, 또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 단체에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선민의 편을 든 것입니다. 또 드보라의 예언대로 되었구요(9절).

3) 22~23절은 바락이 시스라를 뒤따라왔을 때 야엘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된즉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왕 야빈은 힘을 쓰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패하게 되었고, 마침내 야빈을 진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사기의 역사는 항상 “선민의 타락, 하나님의 국가적 사회적 진노, 백성들의 부르짖음, 하나님의 사사를 통한 특별한 은혜로 구출하심”의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6과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 (삿 5:1~31) 목록으로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전쟁에서 승리하였은즉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올린 것입니다. 전쟁과 관련된 사실들을 회고하면서 감사와 전파를 권장하였고, 역사적 내용을 가사에 담은 것입니다. ① 1~3, 10~13절은 “찬송과 전파를 권장함”이고, ② 4~9절은 “승리하도록 인도하신 과정”이며 ③ 14~22절은 “각 지파의 전공과 하나님의 역사”이고, ④ 23~27절은 “메로스를 저주함과 야엘을 축복함”이요, ⑤ 28~31절은 “시스라 가족의 망상을 비웃는 내용”입니다(제가 쓴 사명<전도>설교집 7과에서 “저주와 축복”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1. 찬송과 전파를 권장함(1~3, 10~13절).

1) 1~3절에서 노래(찬송)한 자는 드보라와 바락이고(1절), 찬송 받으실 대상은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송한 것이며(2~3절) “왕들과 방백들도 이 노래를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왕들과 방백”은 이방 나라의 집권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찬송할 이유는 2절에서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의병들)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승리의 원인이 “두령들의 통솔력과 백성들의 헌신적 참여에 있지만 근본은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2) 10~13절에서는 “부자들과(10절) 가난한 자들도(11절) 드보라, 바락과 함께 경성하고 찬송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0절의 “흰 나귀를 탄 자들,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먼저 이 놀라운 일을 선파 하여야 하고, 그 다음 11절에서 “활 쏘는 자들의 지껄임(무사들의 자축하는 장면)과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한적한 곳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을 인하여 성읍에 있지 못하고 잠시 외지에 나가 있던 사람들)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전쟁 승리의 사건)을 칭술하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칭술(자랑스럽게 나타내는 말)할 이유를 두 가지로 또 두 번을 강조하였으니 하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이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전자는 “구원 사역의 의”로 이해하시고, 후자는 “선민 통치의 의”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다”한 것은 적의 침략으로 출입문 쪽에 나가지 못하였으나 적을 물리쳤으므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2. 승리하도록 인도하신 과정(4~9절).

1)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드보라”가 과거의 선민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야곱의 시대 또는 선민이 광야 여행할 때부터 하나님이 도우신 것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세일(세일산)이란 지역이 성경에 두 곳 나옵니다. 하나는 사해 남쪽 70㎞쯤의 에돔 지역이고(민 24:18, 신 1:44), 또 한 곳은 유다 영지 북쪽 중간쯤(예루살렘 서쪽 14㎞쯤, 기럇여아림에서 8시 방향 6㎞쯤, 수 15:10)의 지역입니다. 이 유다의 세일은 드보라 이전 시대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고, 에돔의 세일은 하나님이 에서의 땅으로 주신 일과(창 33:14, 16, 수 24:4) 선민의 광야 여행 때에 아모리족을 물리친 사실이 있었으므로(수 11:17, 12:7) 그때부터 하나님이 선민 편이 되셔서 역사하신 것을 나타낸 내용입니다. 그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낸 사실”은 드보라의 “고유적 계시에 의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5절에서 “산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진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있었던 일을 상기한 것입니다(출 19:16~19).

2) 6절 말씀은 “아낫의 아들 삼갈이 출전하였을 때(블레셋의 침략 때. 3:31)와 야엘의 날(가나안왕 야빈의 침략 때, 4:2)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이 소로로 다녔으며 이스라엘 관원이 그쳤다”한 것은 적의 출몰로 인하여 밖으로 다니지 못한 것과 관원의 역할이 중지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7~8절에서 그때에 “드보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는데(여성 지도자) 이는 무리(선민)가 새신(이방의 다른 신)을 택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4만명(인구)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그렇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9절 말씀에서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여(싸워준 때문인즉)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속수무책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과 백성들의 즐거운 헌신의 출전은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3. 각 지파의 전공과 하나님의 역사(14~22절).

1) 14~19절은 각 지파의 전공을 말씀하였는데 그 중에는 옳게 협력하지 못한 지파도 있음을 사실대로 거론하였습니다. 4:6을 보시면 “납달리 지파와 스블론 지파에서 1만 명을 거느리라” 하셨으나 다른 지파에서도 상당한 지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① “에브라임(지파)에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라”하신 것은 에브라임 지파가 이방족 아말렉을 다 쫓아내지 못한 연고로 그들과 한 고장에서 살면서 출전한 것을 의미하고, ② “그 다음 벤야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하신 것은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너희 백성” 즉 바락의 백성인 납달리 지파 군인들과 합세하여 출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공동 번역은 “네 형제 벤야민이 귀족들과 합세하였다”로 번역하였은즉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③ (므낫세 지파인)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지휘관급)들이 내려왔고, ④ 스블론 지파에서는 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장군급)들이 내려왔으며 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였는데 잇사갈의 심사(작전 계획)를 바락도 가지므로 작전 계획에 차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⑥ “그 발을 좇아”하신 것은 지파별로 출전한 인솔자들을 따라간 발길을 뜻하고, 여기에 따라 “골짜기로 달려가니 르우벤 지파가 시냇가에서 큰 결심(출전 약속)을 하였으나 16절에서 그들이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피리) 부는 소리를 듣게 함은 어찜이뇨”, 또 “르우벤은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하므로 결심은 했으나 출전을 망설여 잘 협력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⑦ 길르앗(요단 동편에 자리 잡은 므낫세 반 지파)은 요단 저편에 있으므로(출전하지 못한 것을) 나타냈고, ⑧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하므로 단 지파도 무역을 핑계로 출전하지 못했으며 ⑨ 아셀도 해변에 앉고(바다에 나간 뜻) 자기 시냇가에 거하면서 출전하지 않았고, ⑩ 18절에서 “스블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백성”이며 ⑪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스블론 지파처럼) 그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스블론, 납달리 지파는 싸움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4:6) 생명을 아끼지 않은 줄 압니다. 그리고 르우벤 지파는 약속만 하고 불참하였으며 길르앗(므낫세)은 멀어서 불참하였고, 단과 아셀은 생업을 핑계로 나오지 못했으며 유다 지파가 역시 멀어서 나오지 못한 듯 합니다. 자원적 출전이기는 하나 공적에 대한 것은 확실하게 평가한 줄 압니다. 19절에서 “열왕(즉 가나안 열왕, 수 10:3~5)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선민들로부터)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전쟁의 패배를 인함이었습니다.

2) 20~22절에서는 “자연의 조건으로 이기게 된 사실”을 말씀한 것입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다”하신 것은 천기의 여건상 시스라의 전세가 불리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21절에서 “기손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킨 것”도 그러하며 “이 기손강은 옛 강이라”(강은 변함이 없다는 뜻) 하나님이 대적들을 강물에 표류시키도록 섭리하시므로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게 된 것이라”고 자신을 일깨워 표현한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그 당시에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릴 만큼 군마가 빨리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철 병거 900승의 소리인즉 대단하였을 것이지만 별들의 싸움(어두움)과 강물의 범람 등으로 인하여 그것들을 강물에 표류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메로스를 저주함과 야엘을 축복함(23~27절).

여기에서 “메로스 거민은 여호와를 돕지 않고 용사를 치지 않았음을 인하여 저주를 받아야 하고 반대로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5과의 내용과 “저주와 축복”이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5. 시스라 가족의 망상을 비웃는 내용(28~31절).

1) 28절은 적장 시스라의 어미의 바람을 풍자적으로 비웃는 내용입니다.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출전한 아들이 전리품 실은 병거를 타고 왜 빨리 오지 않는고”하고 기다릴 것이지만 “헛되다”는 내용이요,

2) 29~30절은 시스라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그 주인 시스라 어미의 기다림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겠습니까?(전쟁에 승리하였을 것인즉)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한 두 명의 처녀를 얻었을 것이고, 시스라 장군도 수놓은 채색옷을 얻었을 것입니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일 것인즉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31절은 결론의 말씀으로 찬송한 자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이(희망을 뜻함) 하옵소서”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그 시대에 “40년 동안 태평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제7과 기드온을 부르심 (삿 6:1~21) 목록으로


이 부분의 내용을 살피면 ① 1~6절은 “선민의 고난의 정황”이고, ② 7~10절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이며 ③ 11~14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남”이고, ④ 15~24절은 “기드온이 표징을 구함”입니다. 전체의 제목을 “기드온을 부르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선민의 고난과 정황(1~6절).

1)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하나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악을 행한 일에 대하여 4:5~7의 해설과 “사사기의 일관된 교훈”이란 설교문(삿 3:1~10)을 참고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이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으니” 여기의 7년은 범죄의 시일을 따라 정하신 징계의 기간도 되고(겔 4:5) 또 선민이 회개하지 않는 완악의 기간(사 1:5, 본문 6절)이기도 한 것이요, 미디안족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으로 일찍부터 가나안땅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선민과 멀어진 관계에 있었습니다.

2) 2~5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디안족에게 선민을 붙이신즉 그들이 선민을 이기고 착취를 일삼아 행하므로 선민은 산이나 굴에 피신처를 만들고 피하면서 살았으나(2절) 파종한 때에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창 25:6, 29:1, 욥 1:3에 나타난 지역으로 하란과 유프라데강 쪽을 의미함)까지 올라와서(3절) 진을 치고 가사(예루살렘에서 8시 방향 75㎞쯤 지중해변, 현재도 가자지구라 함)에 이르도록 선민의 토지소산을 멸하고 식물과 짐승을 남겨두지 않았으며(4절) 계획적으로 짐승과 장막을 갖고(정착함) 메뚜기떼처럼 멸하려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5절).

3) 6절에서 선민은 미약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였으니 7년 동안 대적으로 인한 고생 끝에 비로소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2.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7~10절).

1) 7~8절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미디안이 주는 고난을 인하여 부르짖었기 때문에 한 선지자를 보내셨고,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목소리(말씀)를 청종치 않은 죄값”임을 경고하고(10절), 아울러 희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 9~10절에서 “하나님은 선민을 애굽의 학대에서 인도해내신 분이고 또 가나안족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신 분이며.....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즉 아모리 사람의 땅에 있는 신들을 두려워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 사역이 나타나기 전에 선지자의 증거 사역을 먼저 내세우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남(11~14절).

1) 1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서 그 곳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았다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을 피하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모양”은 창 18:2, 19:1의 아브라함과 놋에게 나타난 사실을 참고 하심이 좋고, “아비에셀”은 사해 바다 남단에서 서남쪽 20㎞쯤의 지역 이름으로 요아스의 고향이란 뜻이고, 오브라는 성경에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벧엘에서 2시 방향 6㎞쯤에 있는 벤야민 산지에 속한 지역(수 18:23, 삼상 13:17)이고, 또 한 곳은 잇사갈 영지,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7시 방향 25㎞쯤에 있는데 이 곳은 남쪽 벧엘 근방의 오브라보다 60㎞쯤 북쪽이므로 고향 가까운 쪽의 오브라로 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또 그가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한 것은 적에게 타작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 이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이르되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2절) 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용사로 쓰실 것이라”는 뜻이지만(삼상 2:6~8) 농부인 기드온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13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이 모든 일(대적의 침략과 괴로움)이 왜 미쳤습니까?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나올 때 있었던 이적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줄 압니다”하고 대답한즉

3) 14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음) 너는 이 네 힘(농사짓고 밀 타작하는 건강의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면 복종하고 가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일할 때는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4. 기드온이 표징을 구함(15~24절).

1) 15절에서 기드온 자신은 연약한 농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집에서 제일 작은 자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겸손의 의미도 있으며 가문(친족)도 약하고, 또 자기 집 막내에 해당하는 농사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한즉 1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런데 기드온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처음 만난 하나님의 사자를 존칭하는 의미로 주라고 하였으나(13절) 진실로 자기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표징을 나타내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 위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주이시면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마 14:28) 하였지요. 그래서 물 위로 걸어갔고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확인한 것처럼 기드온도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3) 그래서 17절을 보시면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으면 나와 말씀하시는 분이 주(하나님)이신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내가(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물을 갖고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한즉 “그렇게 하시겠다”고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급히 집으로 가서 염소 새끼를 잡아 고기와 국을 준비하고 곡식 가루 한 에바(용량의 단위 22ℓ)로 무교전병(빵을 만들되 누룩을 넣어 발교시킬 시간이 없으므로 누룩 없이 만든 떡을 의미함)을 하나님의 사자가 기다리는 상수리나무 아래로 갖고 와서 드린즉(19절) 하나님의 사자가 “고기와 무교전병을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부으라”하여 그대로 하니(20절) 하나님의 사자가 잡은 지팡이 끝을 제물(고기와 무교전병)에 댄즉 반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운 다음 떠나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게 된 것입니다(22~24절). 여기에 교훈도 있고 문제도 있습니다. 교훈은 아무나 진리와 일치되고 진리를 위한 사역자로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성경)로 나타내 주셨지만 하나님의 사자는 진리와 일치되는 사실을 확인하셔야 함이 중요한 교훈이고, 또 문제인 것은 “이적이 일어났다”하여 다 하나님의 사자이거나 진리와 일치된다고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도 기적을 행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고후 11:14, 계 13:13).

4) 22절에서 기드온은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출 3:5, 33:20, 23)는 인식 때문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임을 알았을 때(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한 것을) 슬픔을 표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슬픔의 표현은 두려워한 뜻과 하나님을 만난 감회가 어울렸을 것입니다. 이 때에 23절에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말씀이 임하여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기드온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 오브라를 ‘여호와 살롬(여호와는 평강이시라)’이라 하였으니 그 장소가 오늘까지(이 말씀이 기록된 시기) 있더라”(24절)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쓰시려고 선택하셨고, 기드온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22절).

 

제8과 기드온의 사역 시작 (삿 6:25~40)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의 ① 25~27절은 “기드온의 결단적 의지를 시험하심”이고, ② 28~32절은 “주민의 반항을 진압함”이며 ③ 33~35절은 “대적의 동태와 의병 모집”이고, ④ 36~40절은 “구원의 증표를 구함”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기드온 사역의 시작”으로 정하였습니다.

1. 기드온의 결단적 의지를 시험하심(25~27절).

1) 25~26절에서 “이날 밤(하나님을 확신하던 날)에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7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상을 찍고 이 견고한 성 위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제물로) 취한 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신 이유는 기드온의 신앙적 결단과 의지를 보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증표를 구한 만큼 하나님도 기드온의 신앙과 결단적 의지를 시험하신 줄 압니다. 그 당시에 기드온 아비의 터전에 그 성민들과 함께 사용하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의 아비가 그 우상의 단을 관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그 아비의 제단이란 점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제단이란 점에서 타파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들의 훼방을 의식하여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감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지혜로운 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대낮에 파괴하려 하였다면 크게 저지를 받아 타파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앙적 결단은 이렇게 기회를 따라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으로 감행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25절의 “7년된 둘째 수소”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점과 26절의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하신 말씀에서 규례가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7년된 소를 취한 것”은 “7년간 고난당한 것(1절)을 없앤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둘째 수소”란 뜻은 70인역(헬라어로 번역한 것)에서 “그 살찐 수소”로 번역하였고, 월겟역(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 천주교에서 사용함)에서는 “너의 아비의 수소”로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공동 번역에서는 70인역을 따라 “살찐 수소”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7년은 7년 고난을 상징하고 둘째 수소는 “양을 끌어낼 때 두 번째 나오는 살찐 양을 쓰라는 뜻”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이요, “제단의 규례”는 출 27:1~8에 나타난 말씀을 상기시킨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미 조상들이 시행하였던 것이니까요.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제단과 제물을 준비하고 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상을 찍어 장작을 만든 후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의 용기와 결단이 그만하다면 큰 은혜를 받고 쓰임에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2. 주민의 반항을 진압함(28~32절).

1) 28~29절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그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 기드온의 아비나 주민들이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소행인가를 알아본즉 기드온의 소행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30절에서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에게 몰려와서 기드온을 죽일 것이니 끌어내라”고 하였는데 31절에서 그 아비의 말이 지혜롭게 나온 것입니다. “너희가 바알(훼파된 것)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복구)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바알의 복구를 바라는 행위)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 때에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는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셨을 것이요, 요아스는 바알을 훼파한 아들이 죽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바알신이 아들만도 못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31절에서 “바알이 과연 신 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그 신이 (스스로) 쟁론(대적자를 죽이는 일)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바른 이론으로 주민을 설득하였고, 또 강한 불평을 권위로 진압한 것입니다.

2) 32절에서 “그 날에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그의 이름을 여룹바알(바알과 쟁론함)로 개명하였다” 하였고, 이로서 기드온이 계속 바알과 쟁론하고 바알의 무리들과 싸울 것을 예견하게 된 것입니다.

3. 대적의 동태와 의병 모집(33~35절).

1) 33절은 대적의 동태로서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3절)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11절 오브라 지명 설명 참고)에 진을 쳤다” 하셨고,

2) 34~35절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매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 그를 좇고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 그를 좇았으며 아셀과 스블론과 납달리도 보낸즉 그 무리들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였다” 하시므로 선민이 전역에서 출정한 상태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아비에셀”은 지명도 되지만(11절) 사람 이름이기도 합니다(대상 7:17~18). 그러나 본문의 아비에셀 족속은 아비에셀에 사는 백성들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예루살렘, 남방 유다 지역이고, 므낫세 지역은 가나안땅 중간 지역이며 아셀, 스블론, 납달리는 북쪽 지역인 만큼 가나안땅 전역에서 의병이 출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구원의 증표를 구함(36~40절).

이 말씀은 기드온이 두 번째로 증표를 구한 말씀입니다. 제물을 불로 응답하신 것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는데(22~24절) 왜 또 증표를 구하였을까요? 본문 36절과 37절에 보시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또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하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이 증표를 구한 이유입니다. 첫 번 증표는 하나님을 확인하는 증표였고, 이번의 증표는 기드온이 백성을 구원함에 대한 증표입니다. 사실 이 증표는 안 구해도 됩니다. 그 이유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또 구하였으니 이는 엄청난 큰 일을 하면서 자기의 믿음에 더 큰 확신과 용기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책망하시지 않고 두 번이나 요구대로 응해 주신 줄 압니다. 첫 번 증표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던지고 밤을 지냈을 때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는 것이었고, 다음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안 내리고 마당에만 이슬이 내리는 증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고 또 그의 말씀인 성경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최고의 증표입니다. 양털과 이슬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하나님은 이슬이 내리는 것도 조정하시는 분임을 알게 해 주셨고, 또 자기의 말씀이면 차질 없이 시행하시는 분이심을 믿도록 나타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9과 기드온의 전쟁과 승리 (삿 7:1~25) 목록으로


이 말씀의 ① 1절은 “양측 군사들의 집결”이고, ② 2~8절은 “정병을 선별함”이요, ③ 9~15절은 “기드온의 손을 강하게 하심”이며 ④ 16~23절은 “작전을 세워 감행함”이고, ⑤ 24~25절은 “도망하는 적을 추격함”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기드온의 전쟁과 승리”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양측 군사들의 집결(1절).

“여룹바알(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들이 일찍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을 쳤다” 하였으니 그 때에 모인 군사의 수는 32,000명이었습니다(3절). 하롯샘의 위치는 므낫세 지파의 땅 길보아산 근처로 벳스안, 르홉 근방이며 오브라의 남쪽 15㎞쯤에서 지도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기드온 군사)의 북편인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레산”은 길보아산 북쪽 15㎞쯤이고,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7시 방향 15㎞쯤 됩니다. 따라서 두 진영의 거리는 남북으로 약 12㎞쯤 떨어진 곳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2. 정병을 선별함(2~8절).

1) 하나님은 2절 말씀에서 “기드온을 좇은 백성이 너무 많다” 하시고, 그 많은 군사들에게는 미디안을 붙이지 않을 것인즉 선민이 하나님을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적은 군사로도 많은 적을 물리치실 수 있는 분이시고(6:1~6, 시 33:16), 또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였다”고 자긍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고전 15:10, 렘 48:29). 그래서 자긍의 기회를 주시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시려고 하셨은즉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복종과 수고를 하였을지라도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눅 17:10).

2) 3절 말씀은 1차 선별 방법으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전쟁이 두렵고 떨리는 자는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였으니 여기의 “백성”이란 뜻은 훈련 받은 군인이 아닌 의병을 뜻하고, “두렵고 떨리는 자”란 전쟁에 자신이 없거나 사명과 의욕이 없는 자를 뜻하며 “길르앗산에서 귀가시킨 것”은 이 곳이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므낫세 지파의 지역이기는 하나 전체의 1차 집결지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1차 시발지에서 귀가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으니 처음에는 32,000명의 의병이 모였던 것입니다.

3) 4~8절에서는 2차로 선별한 말씀인데 이때는 군인의 민첩함과 정신적 경성을 근거로 1만 명 중에서 300명만 뽑은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아직도 백성이 많으니 물가로 가서 내가 너를 위하여(기드온이 함께 할 병사) 그들을(개별적으로) 시험하리라” 하시고, 5절에서 기드온으로 하여금(백성들로 물을 먹게 하고) “개처럼 물을 핥거나 무릎을 꿇고 그같이 하는 자를 따로 세우고 그 다음에는 손으로 물을 퍼서 입에 대고 핥는 자를 따로 세우라” 하셔서 그리한즉 1만 명 중 300명만 무릎을 꿇지 않고 물을 손으로 퍼서 핥아먹은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그 300명으로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붙일 것이라” 하셔서(7절) 남은 자들을 자기 처소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8절에서 이때에 “그 9,700명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300명만 머물게 하였는데 그 당시에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미디안진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 있었다” 하였으니 정병을 뽑는 동안 대적과의 관계는 지형적으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와의 전쟁이나 일반적 전쟁에서도 정병 쓰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딤후 2:3~4, 엡 6:10~13).

3. 기드온의 손을 강하게 하심(9~15절).

1) 9절에서 그 날 밤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르시기를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미디안 병사)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하시고, 또 10~11절에서는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전쟁에 임하는 일) 두렵게 여기거든 네 부파 부하를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의 말(동태를 살피는 일)을 들은 후에 네 손이 강하여진 다음(자신감을 얻는 일) 그 진을 칠 것이라 하셔서 그렇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2) 12절에 기드온과 부라가(밤에) 적진으로 가까이 나가 살핀즉 적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음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도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한 것을 알았고(이 표현은 많은 것을 표현한 뜻임), 또 13절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는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동무(병사)의 꿈의 내용은 “보리떡(밀 타작하던 기드온을 뜻함) 한 덩어리가 미디안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 엎어뜨리니 곧 쓰러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불길한 꿈을 꾼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때 한 동무가 대답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모든 군사를 그의 손에 붙이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기드온은 그 손이 강하여졌을 것입니다(11절). 하나님이 기드온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과정을 보여 주신 줄 압니다. 반대로 대적은 꿈을 통하여 사기를 꺾으셨고, 승리를 주실 자에게는 그런 과정을 통하여서도 힘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기드온은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하였고, 진 중으로 돌아와서 군사를 일깨우며 하나님이 미디안 군사를 너희 손에 붙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분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사 40:39).

4. 작전을 세워 감행함(16~23절).

1) 16~18절은 작전 계획의 말씀입니다. “300명을 세대로 나누고 군사들의 각 손에 나팔과 빈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한 후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17절) 하되 기드온을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면 군인들도 진 사면에서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고 말하게 한 것입니다. “외치라”는 말씀이 없으나 큰 소리로 나팔 소리와 함께 외치게 하였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요즈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연회석에서 잔을 들고 “누구 또는 무엇을 위하여”하는 구호와 함께 잔을 마시는 일이 있는데 혹 이 행사가 이 말씀에서 유래하여 전달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신앙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일임). 따라서 이 작전은 혼란전법 또는 “헤치는 전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상과 같이 작전을 세운 다음에 3파로 나누인 300명이 이경초(저녁 9시~10시 사이) 번영의 체번(적진의 파수꾼이 교대할 무렵)할 무렵에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고 좌우로 나팔을 불며 갖고 있던 항아리를 부순 후 우수로 횃불을 들어 비춰지게 한 것입니다. 주위의 온 산이 불바다처럼 변하였을 것이고, 사방의 나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아주 많은 사람이 온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하는데 충분하였을 것입니다(20~21절).

3) 22절에서 “이 때에 온 적군이 달음질하며 부르짖고 도망하였는데 하나님이 그 온 적군들로 하여금(경황없이 혼돈 속에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싯다에 이르고(이 장소는 영문 표기로 Zereath와 Bethshittah인데 지도상으로 찾을 수 없음)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에 이르렀다” 하셨은즉 양 지역으로 도망한 것을 의미합니다. “답밧”은 갈릴리 바다 남쪽에서 요단강을 따라 30㎞쯤 내려온 오른쪽에 있고, “아벨므홀라”는 같은 방향으로 40㎞쯤 내려온 왼쪽에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4) 23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 아셀, 므낫세에서 모여 미디안 사람을 쫓았다”고 하였습니다.

5. 도망하는 적을 추격함(24~25절).

1) 24절은 기드온이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기 위하여 “에브라임 온 산지에 사자를 보내어 미디안 사람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바라(요단강 동쪽 나루 ‘아바라’라고 함)와 요단에 이르기까지 나루턱을 취하라 하여 그대로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요단 동쪽으로 도망하는 자들을 쫓기 위함이었고,

2) 25절에서는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바위에서 스엡은 스엡의 포도주 틀에서 죽였으며 미디안 사람을 추격하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저편(동쪽)에서 (요단 서편에 있는) 기드온에게 가져오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의 사역이 6, 7, 8장에 나타나 있는 중 이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① 삿 6:11~18 “기드온을 쓰시는 하나님”(7분 설교 2집 후 17과) ② 삿 6:16~18 “세 가지 확신을 가짐”(7분 설교 2집 후 29과) ③ 삿 7:1~8 “정병을 쓰시는 하나님”(일반 설교 1집 130과, 7분 설교 2집 전 52과 두 편) ④ 삿 7:15~23 “미디안을 쳐부심”(사명전도 설교 85과), “미디안에게서 구원하심”(7분 설교 2집 후 45과) ⑤ 삿 8:22~35 “기드온의 사역과 교훈”(7분 설교 10집 74과)이 있습니다.

 

제10과 승리와 그 다음에 있은 일 (1) (삿 8:1~17) 목록으로


8장의 말씀은 “기드온의 승리와 그 다음에 있은 일”입니다. 분량이 많은 고로 두 과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립니다. ① 1~3절 말씀은 “에브라임 거민의 항의”요, ② 4~9절은 “숙곳과 브누엘 거민의 비협조”이며 ③ 10~17절은 “숙곳과 브누엘의 지도자들을 응징함”입니다. 대적의 왕들을 사로잡은 다음 비협력자들에게 보복을 한 것입니다.

1. 에브라임 거민의 항의(1~3절).

1) 1절을 보시면 “에브라임 거민이 기드온에게 나와서 왜 처음부터 출전할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한 것입니다. “같은 민족인즉 국방의 의무가 있는데 왜 의병을 모집할 때 부르지 않았느냐?” 하였으니 당연한 질문입니다. 삿 6:34~35에 보시면 기드온이 군사를 모집할 때 오브라를 포함한 아비에셀 족속과 므낫세, 아셀, 스블론, 납달리(에브라임 북쪽 지역에 한함) 거민에게만 연락하여 소집을 한 것인데 나중에 적군이 요단강 동편으로 도망할 때는 그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에브라임 산지의 거민들에게까지 연락을 하여 협조를 구하게 되었고(7:24), 그 일로 인하여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미디안의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잡고 추격하는데 공을 세웠은즉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일 또는 공을 세울 일”이라 하여 혼자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잘 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때에 2~3절에서 기드온이 좋은 말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대답의 취지는 “내가 처음부터 통지를 못한 탓으로 처음부터 출전하지는 못했으나 당신들이 세운 공은 더 크니 치하를 드린다” 하면서 “나는 아직 완승을 하지 못하여 적의 왕을 추격하고 있지만 그대들은 적의 두 방백을 잡았으니 그 공이 더 큰 것이요,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 자신을 뜻함)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소”하고 그들의 공을 치하한즉 그들의 분이 풀려 화해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타인의 공로를 치하하는 미덕이 필요함을 나타내주신 교훈입니다. 그러나 공명심을 나타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2. 숙곳과 브누엘 거민의 비협조(4~9절).

1) 4~7절에서 기드온의 군사는 요단쪽으로 도망하는 적들을 추격하는 일로 몹시 시장하고 피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숙곳(요단강 중간쯤에서 동쪽 5㎞쯤에 위치함)의 방백들을 찾아가서 “대적 미디인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권세를 나누어 가졌거나 부자간일 수도 있음)를 추격하는 중인즉 식사 공급(떡 덩이)을 해달라” 하였더니 “세바와 살문나가 어찌 당신 손에 있관데(잡지 못한 상태를 비난하는 뜻) 어찌 떡을 주겠느냐?”하면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내가 그들을 잡으면 너희를 들가시와 찔fp(고난을 준다는 뜻)로 대할 것이라” 하였고,

2) 8~9절에서는 “다시 브누엘(사해 북쪽 55㎞쯤이고, 얍복강과 숙곳 사이에 있음) 거민에게 가서 같은 부탁을 하였으나 역시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말하기를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 이 망대를 헐 것이라”하므로 보복, 응징할 약속을 하였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출전한 군사들에게 이해심은 물론 봉사에도 인색한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3. 숙곳과 브누엘의 지도자들을 응징함(10~17절).

1) 10절에서 “그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남은 군사 15,000명 가량과 함께 갈골(지도상으로 보면 사해 동쪽 200㎞쯤에 있음) 있었고, 그 당시에 그의 군사는 칼든 자 12만명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의 작전은 300명으로 하여금 기습적으로 적군을 흩은 것이고, 그 흩어진 군사들을 정병 300명과 함께 지역에 있는 의병들이 추격하여 무찌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11~12절에서는 “적군이 (갈골에) 안연히 거하는 중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편 장막에 거한 자의 길로 올라가서 적군을 쳤다” 하였으니 이 노바와 욕브하는 갈골로 향하는 지름길로 이해하시되 얍복강 상류에 있는 지역일 것입니다. 결국 그 곳에서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고 그의 온 군대를 파하여”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습니다.

3) 이렇게 전쟁에 승리하고 두 왕을 포로로 잡은 상태에서 돌아올 때 13~17절에서 헤레스 비탈 전장(戰場. 이 곳은 갈골에서 전쟁을 끝내고 숙곳 쪽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지역으로 아시면 됩니다. 여기에 “전장”이란 용어가 첨부된 것을 보면 그 곳에서도 전쟁을 치른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 이 지역 이름은 아얄론 근처의 산 이름이기도 합니다. 삿 1:35)에서 숙곳 쪽으로 돌아오다가 숙곳 소년을 만나 숙곳의 방백과 장로 77인의 명단을 확보한 후 숙곳에 와서 전에 기롱(비웃는 뜻) 하였던 자들에게 세바와 살문나를 보이고 그 지도자들(방백과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였고, 또 브누엘에 가서도 “약속대로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 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전쟁에 비협조한 잘못으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제11과 승리와 그 다음에 있은 일 (2) (삿 8:18~35) 목록으로


앞 과목에 계속하여 ④ 18~21절은 “미디안의 두 왕을 죽임”이요, ⑤ 22~27절은 “왕을 사양하고 에봇을 만듦”이며 ⑥ 28~31절은 “태평시대의 기드온의 가족들”이고, ⑦ 32~35절은 “기드온의 죽음과 그 후의 형편”입니다.

4. 미디안의 두 왕을 죽임(18~21절).

1) 18~19절에서 기드온은 포로된 두 왕에게 전쟁 초기에 누구를 죽였는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볼에서 죽인 자가 어떤 자이었느냐?” 하였으니 여기의 “다볼”은 최초의 전쟁 지역인 모레산 앞 골짜기를 의미합니다(7:1). 그 모레산 골짜기가 다볼산과 인접되었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그의 대답이 “그들(자신들이 죽인 자들)이 너와 같아서 모두 왕자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너와 같다”는 뜻은 기드온을 닮은 데가 있음을 뜻할 것이고, “왕자 같음”은 다 화려한 옷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때 죽임 당한 사람들이 “내 형제, 내 어머니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이는 6:2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디안의 학대를 피하여 숨어 다니다가 죽임 당한 것을 확인한 것이고, 그들이 바로 기드온의 가족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절에서 “너희가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하고,

2) 20절에서 아들 “여델”에게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어린 고로 두려워하여 칼을 빼지 못하자 21절에서 세바와 살문나가 말하기를 “네가 (기드온이) 우리를 치라 대저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 하였으니 공동 번역에는 “사내대장부답게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기드온이 일어나서 그들을 죽이고 그 약대에 꾸몄던 새, 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새, 달 형상이란 우리 말 번역에만 있고, 영문 번역에는 “약대들의 목에 있는 장신구를 취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새, 달 형상”의 의미는 장신구의 모양을 말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기드온은 장식품(패물)을 좋아하고 필요로 하였습니다. 24절에서 그 말씀이 나옵니다.

5. 왕을 사양하고 에봇을 만듦(22~27절).

1) 22절에서 전쟁이 끝나자 나라는 조용해졌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당신이 나라를 구하였은즉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이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였으니 이는 “왕이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23절에서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리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말인 줄 압니다(삼상 8:4~7).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서는 왕도 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24절에서 기드온은 그 대신 특별한 것을 청구하였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걸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적들(이스마엘 사람)은 금 귀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전리품으로 취하였던 것입니다. 25절에서 “그들은 금 귀걸이를 즐겁게 주었다” 하였는데 26절에서 그 분량은 금 1700세겔(1세겔은 11.4g이므로 19㎏ 이상임)과 그 외에 다른 것들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무엇에 쓰려고 그것을 구했을까요?

3) 27절에서 기드온은 “그 금으로 에봇(제사장이 입는 조끼)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하였으니 이 뜻은 그가 제사장직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사용하였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 대신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난하게 위하므로(은밀하게 우상으로 섬긴 뜻)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우상 숭배의) 올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살전 5:22) 잘못하여 화근의 원인을 만든 것입니다. 우상적 물질 숭상은 화 받을 죄이니까요(출 20:4).

6. 태평 시대의 기드온의 가족들(28~31절).

1) 28절에서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복종하므로 기드온이 산 동안 40년의 태평함이 있었다” 하셨고,

2) 29~31절에서는 기드온의 가족 현황을 말씀하신 것으로 “기드온이 많은 처를 두어 70 아들을 두었고 세겜에 사는 첩에게서도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윤리와 분수를 넘는 잘못된 생활입니다. 기드온은 에봇으로 인한 신앙적 문제와 처첩들로 인한 윤리적 또는 가족적 결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7. 기드온의 죽음과 그 후의 형편(32~35절).

1) 32절에서 “기드온은 나이 많아 죽었고 고향인 아비에셀의 오브라에 있는 묘실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2) 33~35절은 기드온이 죽은 후에 나타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타락상”을 말씀하셨는데 “그 자손들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바알들을 음난하게(숨어서 행동하는 것) 위하고 또 바알브릿(세겜 사람들이 섬긴 이방신, 삿 9:46에서는 엘브릿이라 하였음)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으며 자기들을 사면의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신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않았고, 또 기드온의 집에게도 후대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35절에서 “기드온은 바알을 훼파하여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가졌고,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가 많았지만 역시 그 은혜를 따라 기드온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측컨대 기드온의 자손들이 신앙과 덕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과 덕을 이루어 나가는 일은 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 일만큼 중요하게 여기셔야 하며 또 후시대의 자손들에게도 그 중요함을 알려서 잘 계승되게 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12과 아비멜렉의 집권 (삿 9:1~2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아비멜렉의 집권”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6절은 “아비멜렉이 왕된 경위”이고, ② 7~21절은 “요담의 바른 말”입니다.

1. 아비멜렉이 왕된 경위(1~6절).

1) 1~2절은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세겜에 사는 첩의 소생, 8:31)이 그의 외가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시오(전하라는 뜻) 여룹바알의 아들 70인(본처들의 소생)이 당신들을 다스리는 것과 골육지친인 나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어느 것이 좋겠소” 하였으니 이는 골육지친인 자신을 왕으로 세워 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2) 3~6절에서는 결국 세겜족들이 여룹바알의 70아들(요담이 도망하였으므로 69명임. 8:30)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3절 말씀은 “세겜족들이 아비멜렉의 뜻을 따라 마음이 기울어지도록 힘써 주었다”는 내용이고, 4절 말씀은 “아비멜렉이 바알브릿묘(세겜 사람들이 선택한 우상 신당. 8:31)에서 은 70개로 경박한류(깡패같은 자들) 사서 자기를 좇게 하였다”는 내용인즉 아비멜렉은 폭력배의 두목같은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그들을 데리고 세겜에서 아비의 고향인 오브라(6:11)로 가서 아비의 아들 곧 자기의 이복형제 70인을 한 반석(적당한 방법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에서 죽인 것”입니다. 이 때에 말째 아들 요담이 스스로 숨어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본처의 아들 70명중 요담이 빠졌으므로 “69명이라”고 해야 하는데 “70명이라”한 것은 저자의 대략적 표현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이요,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10시 방향 25㎞쯤에 있고, 오브라는 세겜에서 1시 방향 75㎞쯤에 있습니다. 6절에서 이리하여 “세겜 사람들은 그 이웃 지역인 밀로 족속과 함께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우상의 처소인 듯) 아래에서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살생으로 혁명을 일으켜 권세를 잡은 것으로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2. 요담의 바른 말(7~21절).

1) 7절에서 혹이 이 사실(형들이 죽은 사실)을 요담에게 고하여 요담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리심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하고 비유적인 내용(8~20절)을 외쳤으니 요담이 이렇게 외친 것은 선지자적 증언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세겜은 사머리아에서 5시 방향 10㎞쯤에 있고, 그리심산은 세겜에서 5시 방향 5㎞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고로 대중 상대로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들어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한 내용이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을 입증하고 또 그의 저주한 내용(20절)이 그대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22, 53절).

2) 8~15절은 요담이 외친 비유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옳은 행위를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로 비유하였고, 옳지 못한 행위를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아비멜렉의 악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담의 비유적 선포는 “나무들이 나무들 중 하나를 기름 부어(왕 세우는 제도를 말한 뜻,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을 부어야 왕이 된다는 뜻. 삼상 10:1) 왕을 삼으려 하여 먼저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라 한즉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어찌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요동하겠느냐”하고 사양하였다는 것입니다. “감람유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은 그 기름이 성직 위임과(출 29:20) 성소의 등불용(출 27:20)과 제물로 쓰임(창 28:18, 레 2:1)이 되기 때문이고, “사람을 영화롭게 함”은 양식과(왕상 17:21) 약용(신 28:40, 막 6:13)에 쓰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나무를 있게 하신 뜻은 기름의 합당한 용도를 위하심인데 어찌 그것을 버리고 왕이 되어 사람(나무들) 위에서 요동(권세를 부리는 뜻) 하겠느냐? 하므로 천직을 떠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한즉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버리고 어찌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하므로 무화과나무의 천직은 단 열매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포도나무에게 같은 말을 한즉 포도나무도 “자기의 새 술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천직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포도주가 제물로 드려지기 때문입니다(출 29:40). 그리고 포도주와 감람유는 팔레스틴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라고 합니다(신 7:13). 나무들은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한즉 가시나무는(선 듯) “너희가 내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비유한 것입니다. 가시가 사람을 찌르는 것처럼 폭력성이 있음이고, “내 그늘에 피하라”는 뜻도 덕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보호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4절). “그리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른다”는 것은 만일 백성들이 자기 밑에 피하여 굴복하지 않으면 자신이 불을 뿜듯 폭력을 휘둘러 선한 자들(반대자들, 레바논의 백향목)을 다 죽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비멜렉이 그런 방법으로 왕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며 또 그의 난폭한 행동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3) 16~18절은 요담이 아비멜렉을 왕 세운 세겜 사람들의 만행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17절에서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미디안 손에서 건져내었거늘 18절에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70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으니 16절에서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의 집을 선대한 것이냐? 또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한 것이냐?” 하였으니 이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잘못이 확실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비멜렉도 나쁘지만 세겜 사람이 더 나쁜 것을 지적한 것이요,

4) 19~21절에서는 “공의의 판단” 또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하였으니 19절에서 “너희가 여룹바알의 집에 행한 것이 진실과 의로운 것이면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고,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20절에서 그렇지 아니 하면 아비멜렉에서 불(환난)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세겜에 있는 보루, 삿9:6, 20, 47)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라” 하였으니 그들의 행위가 공의롭지 못하므로 심판주의 섭리에 의하여 서로 대적자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22절 이하의 말씀은 그 예언대로 심판 받은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5) 21절에서 “요담은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달려 도망하여 브엘에 가서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브엘”의 지명은 선민의 광야 여행 중에 나타나기도 하였지만(민 21:16~17) 그 곳은 이 사건의 지역과는 역사적 또는 거리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명확하게 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3.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1) 은혜를 모르는 자의 잘못된 행위를 경계할 것과

2) 폭력, 살인, 불법에 의한 집권은 잘못된 일이란 점과

3) 사람마다 천직에 충실하며 겸손할 것과

4) 가시나무처럼 덕도 세우지 못하면서 명예, 권세욕에 빠져 있는 잘못과

5) 요담의 담대한 증언과

6)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따른다는 점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8~13절을 본문으로 한 “포도나무의 교훈”이 7분 설교 5집 73과에 있음).

 

제13과 아비멜렉과 세겜을 심판하심 (삿 9:22~37)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아비멜렉과 세겜을 심판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어떤 악을 행하였는가?에 대한 말씀은 앞 과목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비멜렉은 살인과 폭력으로 왕이 된 자이고, 세겜의 거민들은 그런 자를 골육이라 하여 방조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본문 22~23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3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 사이에 악신을 보내어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하셨다” 하셨고, 24절에서도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 피 흘린 죄를 세겜 사람들에게 갚으신다” 하셨으며 또 35~37절에서는 심판의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곧 “아비멜렉이 죽음으로 백성들이 자기 처소로 돌아갔고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그 형제 70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형제를 해함은 그 부모에게 죄를 짓는 일임)을 갚으셨다” 하셨으며(56절) 또 “세겜 사람의 모든 악(왕상 8:32, 렘 32:19)을 그들의 머리(개인적 생명)에 갚으심으로.....요담의 저주가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제목의 의미를 설명 드리기 위함입니다(22~24, 55~57절). 남은 말씀을 구분하면 ① 25~29절에서 “세겜 사람의 저항과 가알의 출현”이고, ② 30~38절은 “성읍 장관의 고발과 대진”이며 ③ 39~49절은 “가알의 패전”이요, ④ 50~54절은 “아비멜렉의 죽음”입니다.

1. 세겜 사람의 저항과 가알의 출현(25~29절).

1) 하나님이 심판 대상에게 악신을 보내신즉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는데(23절) 25절에서 “그들은 산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였고, 또 그 길로 지나는 자를 겁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아비멜렉을 엿본 것”은 그가 혹 사냥이라도 나오면 암살할 계획을 세웠을 듯 하고, 또 “지나는 자를 겁탈함”은 가알의 잘못된 일로써 정치적 혼란을 일으켜 백성의 원성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 26절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들과 함께 세겜에 왔을 때 반항하는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의지하였으니” 이는 반역에 뜻을 맞추어 행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벳과 가알의 지파나 신분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같은 세겜 사람으로 장수의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27절에서 세겜의 거민들은(가알과 함께) 포도주 연회를 배설하고 그 신당(46절, 엘브릿 신당, 계약의 신이란 뜻, 바알브릿으로도 불리움. 삿 8:33, 9:4)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였고, 또 28~29절에서는 가알이 아비멜렉을 반항하는 말을 하였으니 곧 “아비멜렉은 여룹바알의 아들이고 그 장관은 스블이 아니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비멜렉을 섬기겠느냐? 차라리 세겜(본토족)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다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할 것이라 하고, 또 아비멜렉에게 군사를 더하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아비멜렉에 대한 적극적 반역이 나타난 것입니다.

2. 성읍 장관의 고발과 대진(30~38절).

1) 30~31절에서 “그 성읍(세겜) 장관 스블이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아비멜렉에게 사자를 보내어 사실대로 보고” 하였고, 32~33절에서는 반항 세력을 없애는 방법으로서의 작전을 제시하였으니 그 작전은 “아비멜렉이 자신을 좇는 백성들과 함께 밤에(세겜성 밖의) 밭에 매복하였다가 아침 해뜰 때에 일찍 일어나 성읍을 엄습하면 그때 가알을 따르는 백성들이 대적할 것인즉 기회를 보아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을 택한 것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기 위함일 것입니다.

2) 34절에서 “아비멜렉은(스블과 함께) 위의 작전대로 시행하되 네 떼로 나누어 매복” 하였고, 35절에서 “가알이 성문 입구에 설 때에 매복하였던 아비멜렉의 백성들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가알은(스블의 군사를 위협할 목적으로) 36절에서 “보아라 백성이 산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느냐” 하였으니 이는 25절에서 나타난대로 가알편의 사람들이 산 위에 매복하였다가 일어날 것을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블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였으니 이 때가 해 뜰 무렵이어서 가알의 사람들이 민첩하게 나타나지 않은 듯하고,

3) 37절에서는 스블이 가알을 위협하기 위하여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로 좇아 내려 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길로 좇아오지 않느냐?”, 38절에서 “네가 아비멜렉을 업신여겼는데 그 입이 어디 있느냐? 이가 너의 업신여기던 백성이 아니냐?”한 후에 청하노니 밭에 매복한 사람들을 일으켜 “이제 나가 싸우라”고 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알편이 불리해졌습니다.

3. 가알의 패전(39~49절).

1) 39~40절에서 “가알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도망하게 되었고 그 때에 많은 상해자(엎드러진 자)가 났으며 성문(세겜 성읍) 입구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세겜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41~42절에서 “그때에 아비멜렉은 아루마(세겜에서 5시 방향 7㎞쯤)에 거하였고, 아비멜렉의 장군인 스블이 가알과 그 형제를 쫓아내어 세겜에 거하지 못하게 하더니 이튿날 (성에 있던) 가알의 백성이 밭으로 나오므로 그것을 혹이 아비멜렉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43~45절은 아비멜렉의 백성들이 세겜성에서 나온 가알의 백성들을 척결한 내용입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떼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고, 가알의 백성이 나오는 것을 치되 한 떼는 성문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두 떼로 나온 자들을 죽이므로.....필경 성을 취하고 그 성을 헌 후 소금을 뿌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소금을 뿌린 뜻은 “멸망을 확인하는 상징적 표시”라고 여겨집니다(습 2:9, 막 9:49). 이로써 세겜성 안의 반항하는 백성은 다 진멸되고 세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 46~49절은 세겜성 밖에 있는 가알의 남은 백성들과의 싸움 기록입니다. 46절에서 “세겜 망대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당의 보장으로 갔다”한 것은 세겜 망대에 있던 가알의 백성들이 세겜성의 패전 소식을 듣고 2차 진지로 옮겼다는 뜻인데 여기의 “보장”이란 뜻은 신당 주위의 요새지(보호 장막)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7~49절에서 “이 소식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졌고, 아비멜렉은 살몬산(아루마와 엘브릿 신당 사이에 있는 산으로 추정됨)에 올라가서 도끼로 나무를 찍어 어개에 메고 따르는 백성들도 그와 같이 하게 한 후 그 나무들을 보장에 대어 놓아(통로를 만들고) 세겜 망대에서 엘브릿 보장으로 들어간 사람들 남녀 1천명 가량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가알이 아비멜렉을 죽이려한 계획은 이루지 못하고 패배로 끝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알이 패한 것은 세겜 사람을 죽게 하신 섭리였습니다.

4. 아비멜렉의 죽음(50~54절).

아비멜렉은 반역하는 백성들을 계속 진압하기 위하여 세겜 근방에 있는 데베스(현재 도바스라고 함) 성을 취하였는데(50절) 데베스 성민들이 아비멜렉을 피하여 성 중에 있는 견고한 망대로 올라가 문을 잠갔고(51절), 아비멜렉이 그 망대로 가까이 나가 불을 놓으려 할 때(52절) 한 여인이 성문 위에서 맷돌 위짝을 내려 던져 아비멜렉의 두 골을 깨뜨렸다(53절)고 하였습니다. 이때 아비멜렉은 병기 잡은 소년을 불러 “내가 여인에게 죽었다”할까 하노니 “네가 나를 찌르라”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54절). 시스라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손에 죽듯이(삿 4:17~21) 아비멜렉도 여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은 죽을 때도 체면을 세우려고 합니다(삼상 31:3~4). 이리하여 아비멜렉과 세겜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 섭리는 공의롭게 감행하시되 3년 후에 반항하는 백성들을 통하여 전쟁으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가알을 추종한 백성들이 승리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뜻 안에서 그만한 이유가 또 있었을 것입니다. 불의한 권세는 얼마 못가서 망한다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14과 돌라, 야일 또 타락 (삿 10:1~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4 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고, 총 제목은 “돌라, 야일 또 타락”입니다. ① 1~5절은 “돌라와 야일의 기사”요, ② 6~9절은 “선민의 타락과 곤고함”이며 ③ 10~16절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이고, ④ 17~18절은 “출전준비”입니다.

1. 돌라와 야일의 기사(1~5절).

1) 1~2절에서 “아비멜렉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면서 사사 생활 27년을 하였고,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유다 지역에도 사밀이 있지만(수 15:48) 본문의 사밀은 에브라임 산지라고 하였습니다. 잇사갈 지파의 사사가 에브라임 산지에 묘를 쓴 것은 그만한 지위와 인심이 작용한 결과일 것입니다.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에브라임 지경에 장사된 것처럼(수 24:33).

2) 3~4절에서는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22년간 사사를 하였는데 그는 아들 30명이 있어서 그들이 나귀 30을 탔고, 길르앗에 30성읍을 두었으니 그 지역을 오늘까지 하봇야일(야일의 마을)이라고 칭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기록된 “돌라”처럼 그의 공적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돌라는 사치한 생활 기록이 없음에 반하여 야일은 30아들, 30나귀, 30성읍을 누린 기록이 있으니 이는 역사가 그의 생활을 그렇게 평가한 줄 압니다. 5절에서 “야일이 죽으매 가몬(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5시 방향 15㎞쯤에 있음) 장사되었다” 하셨는데 이 지역은 므낫세 지역이고, 길르앗이 므낫세의 손자인 만큼(마길의 아들. 수 17:1) 야일이 자기 지파의 땅에 장사된 것입니다.

2. 선민의 타락과 곤고함(6~9절).

1) 대체로 집권자가 사치 생활을 하면 백성들의 충성이 해이해집니다. 야일의 아들 30명이 각기 성읍을 통치하면서 사치와 권세를 부렸을 것인즉 백성들이 평안하였겠습니까? 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소유자라는 뜻, 베니게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남신)들과 아스다롯(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여신), 아람의 신들(아람은 셈의 다섯째 아들인바 창 10:22, 그 자손들이 아람국을 형성하고 유프라데 및 시리아 지역에 분포되었음. 영어 성경은 아람을 시리아로 번역하였으니 이는 아람족이 후시대에 시리아 국민이 되었기 때문임)과 시돈의 신들(시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특징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됨)과 모압의 신들(그모스신, 사 51:1~11)과 암몬 자손의 신들(창 19:30, 모압의 북쪽, 밀곰과 몰록을 숭배하였음. 왕상 11:5)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욥바와 가사의 인접 지역, 다곤과 아스다롯신을 섬겼음. 삿 16:23, 삼상 5:3, 31:10)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질 때 세속에 가까워지다가 결국 다른 종교에 까지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선민이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저버리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7~9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과 암몬 사람의 손에 파시매(영어로는 Let...Conques로 번역하였으니 “공략 또는 정복하게 하셨다”는 뜻) 그들이 그 해(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 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동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지역에는 므낫세 반 지파가 사는 곳임)이 18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또 9절에서는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서쪽으로) 건너서 유다와 벤야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다”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방족의 침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전쟁과 침략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삼상 17:47).

3. 하나님께 부르짖음(10~16절).

1) 10절은 범죄한 백성들이 곤고에 시달려 하나님께 부르짖어(갈망하는 표현) 기도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습니다”하므로 신앙적 잘못을 회개한 것입니다.

2) 11~14절까지는 하나님의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방 사람들의 손에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 하였느냐(11절) 시돈, 아말렉,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으나(12절) 너희가 (또)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니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리라(13절) 너희가 택한(이방) 신에게 부르짖어 환난 때에 너희를 구원하게 해보라(14절)” 하셨으니 하나님은 상습적 범죄에 대하여 쉽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셨고, 선민의 상습적 타락을 노하셨으며 또 고난스러울 때마다 부르짖는 일을 한낱 수단처럼 쓰는 것을 가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은 선민에게 일곱 번 은혜 베푸신 것을 상기시키셨으니 애굽으로 인한 학대와 구원은 출 1~4장에, 아모리에 대한 것은 민 21:21~24에, 암몬에 대한 것은 삿 3:13~21에, 블레셋에 대한 사건은 삿 3:31에, 시돈으로 인한 사건은(가나안왕 야빈과 합력한 것) 삿 4:1~3에 아말렉 사건은 삿 7:12~23에, 마온의 침략 사건은(마온은 미디안임) 삿 6~7장에 기록된 사건들입니다.

3) 15~16절은 “백성들의 회개가 부르짖음에서 실제 행동 변화로 발전한 사실”을 기록하셨고, 하나님은 “선민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5절에서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모시기에 좋은대로 하시려니와 우리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 주십시오”하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벌을 주시되 대적의 손에서만 건져 달라”는 호소였고, 16절에서는 “자기 가운데서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을 섬겼다” 하였으므로 기도의 단계에서 실제적 변화의 단계로 회개가 진보된 것을 나타냈을 때 하나님이 선민의 곤고를 감안하신 것입니다.

4. 출전 준비(17~18절).

하나님이 선민의 곤고를 인하여 근심 하셨은즉(여기의 근심은 범죄에 대한 용서와 긍휼을 베푸심에 대하여 인격적 갈등을 의미함) 무슨 방도를 세워 주실 것이요, 17절에서 그때에 암몬 자손이(7절) 길르앗(요단강 동편 지역, 8절)에 (침입하여) 진을 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벧엘에서 7시 방향 5㎞쯤, 에브라임과 벤야민 영토 중간)에 진을 쳤으니 길으앗과 미스바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 거리가 60㎞쯤 될 것입니다. 18절에서 “길르앗 백성들과 방백들(출전한 선민의 대표족)은 누가 먼저 나가 적과 싸움을 시작할고 그는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 하면서 용기 있는 용사가 나오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제15과 입다의 출현과 외교 목록으로


암몬이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진친 상태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진에서는 전군을 통솔할만한 장수가 없어서 진격을 서두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10:17~18). 이때에 “입다”가 출현하였고, 입다는 전쟁하기 전에 적에게 사신을 보내어 침략의 부당성을 말했으나 암몬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① 1~3절은 “입다의 신분”이고, ② 4~11절은 “적침으로 입다를 영입함”이며 ③ 12~28절은 “사신을 통한 외교”입니다.

1. 입다의 신분(1~3절).

1) 1절에서 “입다는 길르앗 사람 중 큰 용사요, 길르앗이 첩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길르앗이 므낫세의 손자이지만(수 17:1) 여기의 길르앗은 그 후시대의 인물입니다. 2절에서 “길르앗은 본처의 아들들도 있었는바 그들이 다른 여인의 소생인 입다에게 아버지의 기업을 함께 이어 받지 못한다” 하면서 미워하자

2) 3절에서 “입다는 그 형제를 피하여 돕(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4시 방향 70㎞쯤, 길르앗 지역의 근지임)에 가서 거하며 잡류(불량배)들과 어울렸다”고 하였습니다. 입다는 용사이지만 신분상 형제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못하여 스스로 퇴보된 생활을 한 것입니다.

2. 적침으로 입다를 영입함(4~11절).

1) 4~5절에서 이스라엘이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길르앗(침략을 받은 지역) 장로들은 입다를 데려오기로 하여 “돕”에 가서 입다를 만나 말하기를 “우리가 암몬과 싸우려 하니 당신이 와서 우리의 (군대) 장관이 되라”(6절)한즉 입다가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냈는데 이제 환난을 당하였다고 내게 왔느냐”(7절)한즉

2) 8절에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암몬 자손과 싸우기 위함이니 (승리하면) 당신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한즉 9절에서 입다는 그 사실을 길르앗 장로들에게 확인하는 질문을 다시 하였고, 10절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이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라”고 확답하였습니다.

3) 11절에서 입다는 그 약조에 근거하여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갔고, 백성들은 입다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았으며 입다는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하나님이 대적을 자기 손에 붙여 주셔서 이기게 하시면 백성들이 자기를 머리되게 하기로 약조한 사실. 9~10절)을 하나님께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들과 자신 사이의 약조 의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입다는 “하나님이 대적을 붙여 주셔야 이기고 또 자신이 백성들의 머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9절).

3. 사신을 통한 외교(12~28절).

1) 12~13절에서 입다는 무조건 전쟁에 임하지 않았고, 외교적 노력으로 침략을 저지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니 곧 암몬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왔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때에 암몬왕은 13절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사해 바다 중간 동쪽에 아르논강이 있고, 그 북쪽 요단강 중간쯤 동쪽에 얍복강이 있는바 이 지역은 모압 북부 길르앗 남부 지역으로 선민이 출애굽할 당시에는 아모리인의 땅이었음. 민 21:21~32) 자기의 땅을 취한 연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모리인은 모압과 미디안과 암몬족이 병합된 족속입니다.

2) 14~28절까지는 입다가 2차로 사신을 보내어 암몬왕의 침략 이유가 합당치 않음을 역설하였으나 암몬왕은 듣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28절). 입다가 보낸 사신의 말을 요약하면 15절에서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의 땅을(이유없이) 취하지 않았음을 말하였으니 선민이 애굽에서 올때 가데스에 와서(16절) 먼저 에돔왕에게 목적지(가나안땅)로 가는 통로를 지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17절, 민 20:14~22, 신 2:9) 광야를 지나고 모압땅을 둘러 와서 아르논 저 편(외과 지역이란 듯)에 진을 치고 들어가지 않았으며(18절) 헤스본왕 곧 아모리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통로를 부탁하였으나(19절) 시혼왕이 선민을 믿지 않고 백성을 모아 야하스(시혼의 성읍. 민 21:23, 신 2:32)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쳤기 때문에(20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붙여 주셔서 아모리 사람의 온 땅을 취한 것이며(21절)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강까지 또 광야에서 요단까지 아모리 사람의 온 지경을 취한 것이라(22절)고 하였습니다.

3) 23~24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모리 사람을 쫓아내셨기 때문에 그 땅을 얻은 것인즉 줄 수 없음은 마치 너희가 그모스신(정복자의 뜻, 모압의 신도 됨, 암몬왕이 모압 사람이어서 암몬의 신 밀곰을 섬기지 않고 그모스를 섬긴 듯 하다는 기록이 있음)이 주었다면 받지 않겠느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시고 주신 것인즉 받은 절차가 합당하다” 하였고, 또 25절에서는 “모압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발락은 싸우지 않았다” 하였으며(민 22:1~14) 또 26절에서는 “선민이 그 땅(헤스본, 아르엘과 아르논 연안의 모든 성읍)에 거한지 300년이 되도록 찾지 않았은즉 침략할 명분이 없다” 하였고, 따라서 27절에서는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 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악을 행하고저 하느냐”하고, “원컨대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에 판결해 주십시오”(이는 신의 뜻에 부탁한다는 뜻)하고 외교적 주장을 하였으나 암몬왕은 듣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헤스본은 사해 북변에서 동쪽 20㎞쯤에 있고, 아로엘은 네게브 지역 브엘세바에서 5시 방향 20㎞쯤에 있으며 아르논은 사해 중앙에서 동쪽으로 뻗은 강을 뜻합니다. 지도상으로 지역을 확인하시면서 공부하십시오. 전쟁이 있을 때는 전쟁의 억지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며 “입다”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받은 땅이므로 침략 받을 이유가 없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제16과 입다의 서원과 승리 (삿 11:29~40) 목록으로


전쟁은 필연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제목은 “입다의 서원과 승리”로 정할 수 있고, ① 29~31절은 “출전과 서원”이고, ② 32~33절은 “입다의 승리”이며 ③ 34~40절은 “입다의 서원 이행”입니다.

1. 출전과 서원(29~31절).

1) 29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입다에게 전쟁의 용기와 지혜를 주심일 것입니다. 입다는 길르앗(암몬 지역 서북쪽에 선민이 사는 곳)과 므낫세(요단 동편에 자리 잡은 므낫세 반 지파의 영토, 암몬 지역 북쪽임)를 지나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렀으니 이 곳은 암몬 영지 서쪽 5㎞쯤이고, 서편의 요단강과는 25㎞쯤 됩니다. 그 당시 암몬족이 사는 곳은 사해 북단에서 북동쪽 45㎞쯤에 위치하였습니다. 입다는 길르앗 미스베에서 동쪽 5㎞쯤에 상거한 암몬족과의 싸움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2) 30~31절에서 이 때에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니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면 개선하여 돌아올 때 자기집 문에서 먼저 나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돌려 번제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입다가 이런 서원을 한 이유는 하나님이 승리의 은혜 주실 것을 믿고 전쟁 승리에 대한 감사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겠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누구나 가족 이상 소중한 대상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서원을 건설적으로 해석하면 “값진 감사를 드리겠다”고 한 것인데 가족 중 소중한 사람을 예물로 드리면서 “헌신에 그치지 않고 번제로 드리겠다”고 한 것이 문제이고, 또 그렇게 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입다는 율법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으로 사람(자녀)을 불태워드리는 것을 엄금하신 사실(레 18:20, 20:25, 신 12:31, 18:10)을 미처 알지 못하였고, 암몬 사람들이 암몬의 신 몰렉에게 그렇게 하는 사실을 보고(레 18:20) 하나님께 대한 충정만 생각하여 그렇게 서원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29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역사하신 것”은 전쟁의 용기와 승리를 주시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고, 서원하는데는 간섭하시지 않으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성경(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서원을 하게 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입다의 승리(32~33절).

“입다가 적과 싸울 때 하나님이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므로 아로엘(두 곳이 있음. 네게브 지역의 아로엘은 브엘세바의 동남쪽 15㎞쯤에 있지만 이 본문의 아로엘은 사해 바다 중앙부에서 동쪽 25㎞쯤 아르논강 주위에 있음)에서부터 민닛(암몬 영지, 꿀과 기름의 산지라 함)에 이르기까지 20성읍을 치고 또 아벨그라밈(암몬 영지의 서남쪽 끝 지역으로 사해 북변에서 동북쪽 28㎞쯤에 있음)까지 크게 도륙하여 암몬 자손이 항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신 전쟁인즉 필연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3. 입다의 서원 이행(34~40절).

1) 34절에서 “입다가 전쟁을 끝내고 미스바로 돌아와 무남독녀의 영접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미스바”의 위치가 어디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곳은 야곱이 라반과 화해한 길르앗 지역의 미스바입니다(창 31:21~23, 48~49). 이 길르앗 지역의 미스바는 29절의 “길르앗 미스베”와 같은 지역으로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29절에서 “비스베”라 한 것을 34절에서 같은 뜻의 “미스바”로 표기한 것이고, 따라서 입다의 딸은 출전 지역인 그 곳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입다를 영접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미스바”란 지역이 5처가 표기되었는데 창 31:48~49(본문과 같은 곳), 수 11:3, 8에는 미스바로, 수 15:38, 18:26, 삼상 22:3은 “미스베”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미스베(29절)와 미스바(34절)를 구별없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땅에서 전쟁을 끝내고 요단 서편에 있는 다른 미스바로 갔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2)35~36절에서 무남독녀의 영접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생각하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으니 이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6절에서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참담한 표정과 함께 출전 당시 서원한 내용을 알았고,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서원하셨은즉 서원대로 행하시라”하면서 암몬 자손의 원수를 갚은 것이 자기 한 생명보다 중하다는 뜻을 나타냈으니 입다와 그 딸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정신으로 충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37~38절에서 입다의 딸은 “두 달 기한을 받고 처녀로 죽음에 대한 애곡의 절차 밟는 일을 동무들과 산에 올라가서 갖기로”하여 그대로 시행하였으니 이는 죽음의 준비를 여러모로 이행한 절차라 할 것입니다.

4) 39절에서 딸은 두 달 만에 돌아왔고 입다는 서원한대로 행하여 그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한채 죽었고, 40절에서 “이를 인하여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4일씩 애곡하는 규례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았던 입다는 서원을 이행하였고, 가장 소중한 것을 감사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을 보면 “중세시대 이전에는 위의 뜻과 같이 해석하였으나 중세시대 이후에는 그 해석을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도 잘 알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며 성령님의 신까지 받은 만큼 율법에 어긋나고 또 이방인 제사의 풍습을 따라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서원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 서원은 헌신을 의미하는데 그 헌신의 의미를 번제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의 서원한대로 딸을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사무엘처럼) 드린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서원한 내용과 딸이 죽음을 준비하고 시행한 모든 내용이 헌신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입다는 값비싼 예물을 생각하여 서원한 것이고, 서원을 하였은즉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며(시 15:4) 전쟁에서 죽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율법을 기억 못한 것은 실수이지만) 값진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것과 이방 풍속을 따른 것은 잘못인즉 하나님이 판단하시겠지만 서원을 이행한 것과 뼈를 깎는 고충과 함께 소중한 딸을 드린 것은 하나님이 그대로 평가하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제17과 동족과의 싸움 (삿 12:1~15) 목록으로


본문은 입다의 암몬에 대한 승리가 있은 후 에브라임족이 입다에게 반기를 들어 입다를 포함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을 크게 살육하였고, 그 후에 입산, 엘론, 압돈 세 사람의 사사가 출현하였던 역사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서 에브라임족과 싸운 기사가 많으므로 제목을 “동족과의 싸움”이라고 정하였습니다. ① 1~3절은 “에브라임 지파의 반기”요, ② 4~6절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족을 척결함”이며 ③ 8~15절은 “입산, 엘론, 압돈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에브라임 지파의 반기(1~3절).

1) 1절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북(미스바)으로 가서 입다에게 항의를 하였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암몬과 싸울 때) 함께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로 사르겠다” 하였으니 완강하게 반기를 든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 때에도 그런 항의를 한 일이 있었는데(8:1) 이번에도 또 그리한 것입니다.

2) 이 때에 입다는 2~3절에서 “나와 나의 백성들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은 고로 내가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건너가서(적진에 아르논강이 있음) 그들을 쳤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왜 나와 싸우고저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한 자를 칭찬은 못할망정 “추궁을 하고 불사르겠다”한 것은 잘못이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평소에 무시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입다 역시 길르앗족에서 벗어나 기생의 아들로 돕에 가서 별거하며 비류들과 회동한 것을 알고 멸시한 줄로 압니다.

2.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족을 척결함(4~6절).

1) 4절에서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에브라임에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에브라임 땅과 므낫세 땅(길르앗)을 전전하는 불순자들로 취급한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2) 5~6절에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척결할 때 “요단 나루턱을 지키고(도망이라 하였으므로 요단 서편 에브라임 영토에서 요단 동편 므낫세(길르앗 쪽) 영토로 도망하는 것을 의미한 듯) 에브라임족인지 아닌지를 선별하여 42,000명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3) 이 때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지파로 위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발음의 특성이 강한 것을 꼬집어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건너는 자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할 때는 “십볼렛(무거운 짐을 뜻함)을 발음해 보라”하여 강세 없이 발음을 하면 그는 살려 보냈고, 강세 있는 발음으로 씹볼렛(옥수수 이삭 또는 개울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면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숨기기 어렵습니다.

4) 7절에서 “입다가 사사 된지 6년 만에 죽어 길르앗의 한 성읍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사소한 일로 다투어 큰 화를 당한 것은 퍽 안 된 일입니다.

3. 입산, 엘론, 압돈에 대한 말씀(8~15절).

1) 8~10절은 “입산”에 대한 말씀으로 “입다 이후에 베들레헴(유다 땅) 사람 입산이 사사가 되어서 아들 30과 딸 30을 두었는데 딸을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자부들을 타국에서 데려왔으며 사사된 지 7년 후에 죽은즉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입산의 공적이 기록된 것이 없고 그가 자녀들을 많이 두어 하나님이 금지시키신 국제 결혼을 일삼아 허용한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국제 결혼을 막으신 것은 신앙의 순결을 혼돈치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고전 7:39, 신 7:3~4).

2) 11~12절은 “엘론에 대한 말씀”으로 “그 뒤에 스블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그가 죽으매 스블론 땅 아얄론(예루살렘 10시 방향 20㎞쯤, 게셀에서는 3시 방향 10㎞쯤. 수 10:12의 아얄론 골짜기도 같은 지역이지만 본문의 아얄론은 스블론 땅이라 하였으므로 갈릴리 지역 가나의 남쪽 또 므갓도 북쪽의 어느 지점이 될 것임, 영문표기로 Aijalon이 같음)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3) 13~15절은 “압돈에 대한 말씀”으로 “그 뒤에 비라돈(Pirathon. 세겜에서 8시 방향 10㎞쯤 에브라임 땅 북변임)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는데 그에게는 아들 40과 손자 30이 있어서 어린 나귀 70필을 탔었고, 8년 만에 죽어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에브라임 지역이지만 본토족이 거주한 뜻) 비라돈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압돈 역시 공적의 기록은 없고 많은 자녀를 둔 것과 넉넉하게 생활한 기록만 나타나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앞으로 나타날 사사는 삼손과 엘리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그 아들들)가 있는데 이스라엘 12지파 중 르우벤, 시므온, 갓, 아셀 지파 중에서는 사사가 나온 일이 없고, 옷니엘은 유다 지파(갈렙의 아우, 3:9), 에훗은 벤야민 지파(3:15), 삼갈은 알 수 없으며(3:31) 드보라는 에브라임 지파(4:5), 바락(사사가 아닌 장군)은 납달리 지파(4:6),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6:11), 아비멜렉은 사사라 할 수 없으나 3년간 통치한 것이 사실이고(므낫세 지파, 9:1), 돌라는 잇사갈 지파(10:1), 입다는 므낫세 지파(11:1), 입산은 유다 지파(12:8), 엘론은 스블론 지파(12:11), 압돈은 에브라임 지파(12:13~15), 삼손은 단 지파(13:2, 24), 엘리와 사무엘은 레위 지파입니다(삼상 3:12). 따라서 유다 지파,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레위 지파는 두 명씩 배출한 셈입니다. 좋은 지도자가 배출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므로 살펴본 것입니다.

 

제18과 삼손을 예비하심 (삿 13:1~25)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삼손을 예비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목전에 다시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40년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셨다”(1절)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악을 행한 것과 어떻게 붙이셨는가?하는 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부르짖고 회개하였는가?”에 대하여서도 기록을 생략하신 줄 압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2~5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여인에게 말씀하심”이고, ② 6~7절은 “여인이 남편 마노아에게 알림”이며 ③ 8~11절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남”이요, ④ 12~20절은 “제물의 응답”이며 ⑤ 21~25절은 “삼손의 출생”입니다.

1. 하나님의 사자가 여인에게 말씀하심(2~5절).

1) 3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잉태하지 못하여 생산하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의 하나님의 사자의 나타나심은 창 18:2과 19:1 즉 아브라함과 놋의 경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잉태의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삼하 6:23). 그리고 2절에서 그 여인은 “소라 땅에 사는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의 아내”라고 확실한 신분을 말씀하셨습니다. “소라”는 단 지파의 땅 남단에 있습니다. 지도를 찾으신다면 예루살렘 서쪽 25㎞쯤이고, 게셀에서는 5시 방향 12㎞쯤이요, 야르뭇에서는 북쪽 8㎞쯤이며 가드에서는 동북쪽 15㎞쯤인즉 확인하십시오.

2) 4~5절에서는 “그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임신 중 여인이 태아에게 해로울 음식을 삼가게 하신 것으로 오늘날에도 충분히 교육을 시키는 일이요, 또 5절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이 됨이라” 하셨는데 여기의 “나실인”은 하나님이 그를 구별하여 쓰시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민 6:1~5, 13~20, 레 10:8~10을 참고 하십시오. 여기에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게 하신 뜻”은 그 의식이 나실인 되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삼손에게 능력을 주시려고 섭리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털과 함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16:17, 22). 행 18:18에서 바울은 특별한 헌신을 각오하였을 때 머리를 깎은 일이 있었고, 그와 같은 방법을 디모데에게도 적용하신 일이 있었습니다(행 21:24). 하나님은 또 그 여인에게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여인이 남편 마노아에게 알림(6~7절).

이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 만난 것을 그 남편에게 말할 때에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웠었고, 어디서부터 온 것을 묻지 못하였으며 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들을 낳을 것과 음식 삼갈 것을 말하였고, 또 그 아이는 출생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사실대로 고하였습니다. 이는 아내로써의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 같다”하여 하나님의 사자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용모를 거창하게 또는 호화롭게 꾸며 사람의 이목을 끌거나 권위를 나타내려 한다면 그것은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남(8~11절).

1) 아내의 말을 들은 마노아가 몹시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입장인즉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8절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으니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확인의 목적도 있고, 또 한 사람이 아는 지식을 두 사람이 알고 행하면 더 유익이 있음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2) 9~11절에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밭에 홀로 앉은 여인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그의 남편은 함께 있지 않았으므로 여인이 급히 가서 그 사실을 고하고 남편을 데려와서 만나게 하였으니 이 경우에 하나님을 만날 만한 특성이 남편보다 그의 아내에게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20절). 꼭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더 깨닫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계시의 민감성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신다”할 것입니다. 기도는 마노아가 했는데도 하나님의 사자는 그의 아내에게 먼저 보이신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11절에서 마노아는 “바로 그 분이 아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4. 제물의 응답(12~20절).

1) 12~14절에서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씀한 사실을 다시 말씀해 주시도록 부탁하였고, 하나님의 사람은 그 내용을 다시 재설하였으니”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기도록 2차, 3차 복습하셔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15절에서 마노아는 그 하나님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 하나라도 잡아서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16절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식물을 먹지 않을 것이니 번제를 준비하려거든(제물을 드릴 수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마노아가 “자기에게 말씀하는 분을 하나님의 사자인 줄로 알지 못하고, 선지자 같은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여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이 특수한 계시의 방법으로 즉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17절에서 이 때에 마노아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하였으니 그는 그 나타난 분의 이름이 “여호와”이기를 바랐을 것인데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 존숭한다” 하므로 그때까지도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내 이름은 기묘니라” 하였으니 마노아가 더디 믿는 것을 지적하였고(눅 24:25),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하게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기묘”이기도 합니다(사 9:6). 인간들은 무슨 표적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는 근성을 버리고, 말씀(성경) 그대로 믿는 신앙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마 12:39, 16:1, 막 8:11~12, 16:20, 요 4:48).

4) 19절에서 마노아는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곡식 제물)을 반석 위에 놓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의 사자는 이적을 행하였으니” 곧 20절에서 “그 아내가 본즉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자도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계시는 마노아의 아내만 보았습니다. 이렇게 영적 계시의 정신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 9:3~7). 성도는 말씀 깨달음에 특별하셔야 합니다.

5. 삼손의 출생(21~25절).

1) 21~23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불꽃 중에 올라간 후 다시 나타나지 않은즉 그때에야 마노아는 진짜 하나님의 사자를 본 줄로 알고, 22절에서 “내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하면서 두려워한즉 23절에서 그 아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요, 이제 우리에게 하신 말씀도 안 하셨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지혜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상은 구약 시대에 이미 나타난 것이지만(창 32:30, 출 33:22~23, 삿 6:22~23, 사 6:5)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항상 간접적으로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되어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4:9).

2) 24절에서 (때가 되매) “여인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삼손(태양과 같다는 뜻이라 함)이라” 하였고, 그 아이가 자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절에서 “소라와 에스다올(소라의 동북쪽 3㎞쯤)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삼손의 청년기였을 것입니다. 여기의 “마하네단”이란 용어가 공동 번역에서는 “단의 진지”라 하였고, 영어 성경에도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단의 캠프 안에 있을 때 주의 능력이 그를 힘있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하네단”은 18:20에 나타난 용어로 기럇여아림(예루살렘에서 10시 방향 15㎞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음) 뒤에 있는 장소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청년 삼손이 준비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다 신앙인이지만 계시를 받는 민감성은 남편이 아내보다 더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하거나 하나님 지식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제19과 삼손의 1차 복수 (삿 14:1~20) 목록으로


선민이 블레셋족으로 부터 40년간이나 괴로움을 당하는 입장이니 어찌 원심이 없겠습니까? 성령의 감동 받은 하나님이 쓰시려는 삼손이 출현하기는 하였지만 전면전을 치를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삼손이 원수 갚을 구실을 만들어 1차 복수한 사건이기 때문에 “삼손의 1차 복수”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4절은 “삼손의 계략”이요, ② 5~9절은 “딤나에 두 번 방문함”이며 ③ 10~15절은 “혼인 연회와 수수께끼”요, ④ 16~20절은 “수수께끼의 대가”입니다.

1. 삼손의 계략(1~4절).

1) 1~3절을 보시면 “삼손이 딤나(블레셋족의 마을, 이 지역은 유대땅 북서쪽이고, 단 지파의 땅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음, 욥바에서 4시 방향 23㎞쯤이고, 딤나의 남쪽 가까운 곳에 에그론과 가드가 있음)로 가서 블레셋 여인(원문의 ‘아사’로 천한 여인이라 함)을 안 후에 부모에게 청혼하기를 요청한즉 부모는 이방 혼인이라 거리껴서 만류하였지만 삼손의 완강한 요청으로 부모가 고려할 단계에 들어간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고, 여기의 “내려가고 올라온 것”은 지역의 고하의 차이로 비롯된 것인데 항상 예루살렘 쪽이 높게 표현됩니다.

2) 4절에서는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전체적 항거를 할 힘이 없는 뜻) 틈을 타서 (구실이 있을 때마다) 블레셋 사람을 치려한 것이요, 또 이 일이 하나님께로써 나온 줄을 그 부모는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원수 갚을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홀로 틈을 찾은 것이고,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인데 그 부모는 거기까지 짐작하지 못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선민의 연약을 틈타서 선민을 강제로 관할하였은즉 전쟁의 구실이 되는 것이고, 전쟁시에 계략으로 적을 속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그 상태에서 대적 중 한 여인이 이용된 것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딤나에 두 번 방문함(5~9절).

1) 5~7절은 “삼손이 딤나의 한 여인을 부모에게 알리고 혼인에 응하게 하기 위하여 부모와 동행하여 딤나에 가는 중 한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를 만났는데 이때에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그것을 추격하여 찢어 죽인 것”입니다. 이때 부모는 동행을 하였지만 사자를 추격하여 죽이고 온 사실은 알지 못하였고, 또 알리지 않았으며 그때에 1차로 딤나에 가서 친교하는 여인과 대화하고 그를 기뻐한 후 돌아왔으며

2) 8~9절은 삼손이 그 여인을 취하기 위하여 2차로 부모와 함께 또 딤나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를 찾아보았는데 벌들이 그 사자의 몸에 꿀을 모아 놓은 것을 보고(사자의 몸을 독수리나 짐승이 먹고 마른 뼈 속에 꿀벌이 집을 지은 것) 그 꿀을 자신도 먹고 또 부모가 머무른 곳에 갖고 와서 부모에게 드렸으나 그 꿀의 출처가 사자의 몸에서 채취한 것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수수께끼 재료를 연구한 때문에 알리지 않은 줄 압니다.

3. 혼인 연회와 수수께끼(10~15절).

1) 삼손의 부모가(2차로) 딤나에 방문했을 때 혼인 행사를 치르게 되었는데 10~11절을 보시면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서 그 당시의 풍속대로(여인의 집 또는 그 동리에서) 잔치를 베푼즉 그 곳의 무리들이 지역 주민 30명을 연회석의 동무로 삼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2) 12~14절에서 삼손은 그 자리에서 수수께끼 경쟁을 내놓고 “7일 안에 자신이 문제로 낸 수수께끼를 맞추면 자신이 30명에게 겉옷 30벌을 줄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는 그들이 삼손에게 겉옷 30벌을 내야 한다”고 하였을 때 30명의 연회객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30명의 지혜를 모으면 어떤 수수께끼든지 문제없이 답할 수 있고, 겉옷을 받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삼손이 문제를 냈는데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 것이 무엇이냐?”고 한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는 삼손 혼자서만 자기의 체험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확증하려면 죽은 사자가 있는 곳에 가서 확인시킬 수도 있는 것인즉 당당한 문제가 된 것이나 그들은 “3일이 되도록 풀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15절에서 7일이 되었을 때에 그 지역 주민들은 삼손의 아내를 통하여 알려고 하였고, 결국 “네가 알아오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집을 불사르겠다”고 공갈까지 쳤으니 이것이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족을 죽이는데 구실이 된 것입니다. 블레셋족은 여기에서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수수께끼를 맞추는데 부당한 방법을 쓴 것이지요.

4. 수수께끼의 대가(16~20절).

1) 삼손의 아내가 황급해지자 16절에서 “삼손에게 그 대답을 청했으나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라 하여 거절당하였지만 17절에서 7일 기한이 이를 때 여인이 또 울면서 사정하는 강박함에 못 이겨 알려준즉 결국은 18절에서 그것이 30명에게 알려져서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않았다면......능히 풀지 못하였을 것이라”하므로 여인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을 “송아지로 밭 가는 일”로 표현한 것은 그 지역의 특수한 어법일 것입니다.

2) 19절에서 (그때에)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아스글론(욥바와 가사 사이의 항구, 블레셋족의 5대 도시 중 하나라 함, 가사의 북쪽 27㎞쯤 됨)에 가서 그 곳 사람 30명을 죽이고, 노략하여 30명에게 옷을 주고 아비집으로 올라간즉 20절에서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삼손이 “아스글론”에서 30명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그의 아내에게 공갈을 쳐서 알아낸 잘못의 보복으로 보아야 하며 수수께끼 패배에 대한 대가는 정당히 치른 셈이었고, 이상과 같이 삼손이 감정 풀이로 보복을 하고 돌아갔은즉 “그 여인을 미워하여 버릴 것이라”고 오해하여 그 부모가 그 딸을 다른 남자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 여인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15:1).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신의 감동이 인간의 생활 중 평범하게 나타나는 사건에도 관계된다는 점을 아셔서 특수한 능력적 사건이 아니라도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과 인도를 깨달아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삼손은 “힘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었다”고 하였습니다(6, 19절).

 

제20과 삼손의 2차, 3차 보복 (삿 15:1~20) 목록으로


삼손의 1차 보복은 수수께끼 사건으로 아스글론 사람 30명을 죽인 것이었고(14:19), 2차 보복은 본문에 나타난 여우 300으로 곡식에 피해를 준 것이며 3차 보복은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였기 때문에 총 제목을 “삼손의 2차, 3차 보복”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5절은 “곡식 밭에 피해를 줌”이고, ② 6~11절은 “블레셋과 유다의 대결 국면”이며 ③ 12~17절은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임”이요, ④ 18~20절은 “삼손을 20년간 붙드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곡식 밭에 피해를 줌(1~5절).

1) 1~2절에서 삼손은 얼마 후에 염소 새끼를 (선물로) 갖고 딤나의 아내를 찾아 가서 장인에게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려 한다”한즉 장인의 말이 “삼손이 그를 미워하는 줄로 생각하여 다른 동무에게 주었으니 그 대신 그보다 아름다운 동생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장인 자신이 잘못한 것을 느낀 처사였습니다.

2) 이 때에 삼손은 아내를 뺏긴 사실을 보복의 구실을 잡고 블레셋족을 해롭게 하기 위하여 간 것이므로 당연히 그 청구를 거부하고, 3절에서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라”하고, 4~5절에서 “그 지역의 여우 300을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횃불을 달아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 곡식단과 베지 않은 곡식과 감람원을 살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보복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선민의 적이었고, 또 삼손은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어떻게 여우 300을 잡아서 그렇게 이용하였을 것인가?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유대족을 포함하여 단결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사한 것으로 이해하신다면 의문되지 않을 것입니다.

2. 블레셋과 유다의 대결 국면(6~11절).

1) 6절에서 곡식의 큰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들은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그 동무에게 준 일로 그리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여인과 아비를 함께 불살랐다”고 하였습니다. 아비와 딸은 삼손의 적이면서 자기들의 잘못으로 죽은 것이고, 그 주민의 곡식 피해는 자신들의 동족의 잘못으로 인한 당연한 피해로 받아들여 그 여인과 아비를 불사른 것입니다.

2) 7~8절에서 삼손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원수를 갚겠다”한 후 8절에서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에담 바위 틈(에담은 네 곳이 있으나 이 곳은 소라의 동편 산 위에 있는 벤아탑으로 추정함)에 거한즉 9절에서 피해를 입은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로 올라와 진을 치고 레히(소라의 동남쪽 3㎞쯤으로 추정함)에 편만히 모이므로 10절에서 유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은즉 삼손을 결박하여 그의 행한 대로 갚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3) 11절에서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 틈으로 내려가 삼손에게 이르기를 “너는 블레셋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왜 모르느냐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행하였느냐”한즉 삼손은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임(12~17절).

1) 이 때에 유대인들은 12~13절에서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이려 한다” 하였고, 삼손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약조 하에 순순히 결박을 당하니 유대인들은 두 개의 새줄로 삼손을 결박하여 끌어내게 된 것입니다.

2) 14~16절에서는 삼손이 결박된 채로 블레셋 사람의 집결지인 레히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신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여 결박된 줄을 불탄 삼줄처럼 끊고 나귀의 턱뼈를 취한 후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여 두 무더기로 시체를 쌓고 턱뼈를 던진 후 그 곳을 라맛레히(턱뼈의 산)라 이름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4. 삼손을 20년간 붙드심(18~20절).

1) 18절에서 “삼손이 심히 목말라 하나님께 부르짖은즉” 19절에서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와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였다” 하였고, 또 “그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로 이름하였으니 오늘까지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삼손의 건강과 생명을 붙드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삼손은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한즉 그 기도의 응답으로 샘을 터쳐 주신 것입니다.

2) 삼손이 사자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이 힘을 주사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 하게 하셨고, 또 대적을 칠 때도 큰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목말라 죽게 됐을 때에도 샘물을 주셔서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삼손을 “블레셋 사람의 때(항상 위험이 있는 시대)에 사사로 20년을 지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3) 속담에 “일당 100”이란 말이 있는데 삼손은 “일당 1000”이었고, 삼손의 사역의 특징은 아무도 자기의 부모도 모른 채 오직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홀로 나라에 충성한 역군이란 점이 큰 특징입니다. 협조자가 없다 하지 마시고 삼손처럼 홀로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이 본문 삿 15:15~20로 “삼손의 사역의 특징”이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제21과 삼손의 흔들림 (삿 16:1~14) 목록으로


본문을 읽어 보면 삼손이 여인에게 흔들려 빠지고 또 자신의 신앙적 지조에도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을 “삼손의 흔들림”으로 정한 것입니다. 고전 15:58을 보시면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도가 믿음과 사명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믿음을 붙잡는 경건과 사명 의식에서 흔들려 세속에 빠지고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① 1~3절은 “기생의 집에서 위험을 당함”이요, ② 4~14절은 “비밀 누설에 접근함”입니다.

1. 기생의 집에서 위험을 당함(1~3절).

1) 1절을 보시면 “삼손이 가사(지중해변 남쪽 항구 예루살렘 서남방 70㎞쯤 블레셋족의 큰 성)에 가서 한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나실인이며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분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삼손의 그 행위는 위험만 초래하였을 뿐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였은즉 원수 갚기 위한 계획적인 일도 아니었습니다.

2) 그때에 2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정보를 받고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한 후 새벽이 되면 죽이리라”고 계획하였는데

3) 3절에서 “삼손은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포위된 것을 알고)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삼손이 위험한 정보를 알고 일찍 피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는 여전히 힘이 있었고, 가사에서 헤브론 앞산은 헤브론이 가사에서 2시 방향으로 75㎞쯤에 있으므로 상당히 멀리간 것입니다. 삼손은 단 지파이지만 헤브론은 유다 지역입니다.

2. 비밀 누설에 접근함(4~14절).

이 부분의 말씀은 삼손이 소렉 골짜기(딤나 서쪽에 소렉강이 있은즉 그 골짜기를 뜻함, 세일산 서쪽)에 가서 그 곳 여인 들릴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블레셋 방백들이 듣고 그를 통하여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4~9절은 1차 시도함이요, 10~12절은 2차 시도함이며 13~14절은 3차 시도함인데 여기까지 삼손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고 거짓말을 하면서 노력하였습니다.

1) 3절에서 블레셋 방백들은 몇 사람이 왔는지 기록되지 않았으나 비밀을 알려주면 “각각 은 1100개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들릴라는 여기에 탐심을 갖고 자신이 삼손을 직접 상대하여 “그의 힘을 억누를 수 있도록 비밀을 알려달라” 하였으니 삼손에게서 힘이 빠진다 하여도 여인과 대결하는 것인즉 크게 문제될 바는 아니나 블레셋의 침략이나 계교가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삼손은 그 사실을 알고 여인의 간청에 따라 여인을 속이는 장난처럼 시행한 줄 압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돈에 탐심을 갖고 블레셋 사람과 결탁한 것이요, 이 사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실행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삼손은 7절에서 “푸른 칡으로 결박하면 힘이 빠지고 다른 사람과 같을 것이라”하여 푸른 칡을 주문하여 여인이 삼손을 결박하고 자신과 힘겨루기를 해 보려고 하였다가 삼손이 약하지 않으므로 내실에 매복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 채 실패한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그때에 삼손이 쉽게 끊지 못했으면 대기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서 삼손을 아주 결박”하려 하였으나 삼손이 불탄 삼을 끊는 것처럼 쉽게 끊으므로 실패한 것이었고,

2) 10절에서 그 다음 2차 기회에 또 비밀 알기를 청한즉 11절에서 “쓰지 않은 새줄로 결박하면 될 것이라”하여 12절에서 그 방법을 시도하였지만 여전히 실을 끊음처럼 하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출동도 못한 채 실패한 것입니다.

3) 13~14절에서 “머리털 일곱 가닥(땋은 가락을 의미함)을 세로줄로 삼고 그것을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으로 얽어 짜면 될 것이라” 하여 그대로 시행한즉 삼손이 잠이 깨어 직조틀과 바디와 위선을 다 빼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잠든 사이에 모르게 한 것은 아닐 것이요, 삼손이 들릴라와 함께 자신의 힘의 원천에 대하여 2차적으로 그 신비성을 시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삭도를 대지 않은 뜻은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에도 그와 같은 영향이 있는지를 시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22과 삼손의 실수와 마지막 (삿 16:15~31) 목록으로

 

삼손의 실수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주려 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남자나 여인을 사랑하면 그의 청원에 가능한한 접근하려 할 것입니다. 삼손도 그렇게 접근하다가 결국은 중요한 비밀까지 알리게 된 것입니다. 들릴라와 블레셋 사람들은 유혹에 연단이 잘 되었고, 삼손은 점점 긴장을 푸는 상태로 해이해졌습니다. 본문 ① 15~20절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함”이요, ② 21~31절은 “죽음에 따른 마지막 사역”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파함(15~20절).

1) 유혹에 익숙해진 들릴라는 계속 삼손을 흔들었고, 16절에서 삼손은 “재촉을 받으므로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진정을 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진정은 하나님이 삼손의 출생할 때부터 그 부모와 약조하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는 것”(13:5)이었는데 삼손은 번뇌에 못 이겨 “삭도를 대지 않으므로 나실인이 된 사실과 자신의 머리가 깎기우면(밀리면) 힘이 떠나고 약해져서 다른 사람처럼 될 것이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머리를 자르는 일은 당사자가 잠들었을 때에 모르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들릴라가 힘의 출처를 알고저 하였을 때 자신의 긴 머리에 실수로라도 삭도 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알려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으로부터의 자기 보존도 중요하지만 늘 동침하는 들릴라가 실수로 자를 것을 염려하여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나실인적 계율을 깬 것입니다. 나실인임을 알린 것은 상관이 없으나 삭도를 대게 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2) 18~20절에서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과 내통하여 마지막 기회를 만들고 삼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릎을 베고 편안히 잠들게 한 후 삭도로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땋은 머리)을 밀고 괴롭게 해본즉 힘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또 “블레셋 사람이 왔다” 하였을 때 삼손이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떠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전과 같이 힘을 떨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삼손은 그때부터 일반 사람처럼 변하여 버린 것입니다. 나실인적 계율이 삼손을 능력으로 쓰시는 조건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붙드시는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믿고 의지하는 일”을 빈틈없이 지키셔야 합니다. 세상 유혹에 많이 이끌리고 믿음이 해이해지면 그것이 바로 삼손이 자기의 비밀을 토하는 것과 같음을 아셔야 합니다.

2. 죽음에 따른 마지막 사역(21~31절).

1) 21절에서 “삼손은 붙잡혔고 눈 빼임을 당하였으며 놋줄에 매이고 가사로 끌려가서 옥에 갇혀 맷돌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삼손은 크게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그가 옥에 갇힌 동안 “그 머리털은 다시 자라게 된 것”입니다.

2) 23~24절에서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을 결박하게 된 것”을 다곤신의 은혜라 하여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하였고, 백성들도 많은 사람을 죽인 삼손을 “자기들의 신이 붙여주셨다”하고 찬송을 하였는데

3) 25절에서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고 구경을 하기 위하여 감옥에서 끌어내어 연극장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그 연극장은 중앙에 큰 기둥 두 개를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26절에서 눈 빼인 삼손은 자기를 인도하는 소년에게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자신의 몸을 의지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렇게 인도를 받았습니다.

4) 27절에서 그 집에는 블레셋 방백은 물론 남녀 3000명가량이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기 위하여 모여 있었는데 이 때에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28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해 주십시오”하고 29~30절에서 양손으로 기둥을 껴안은 채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한 후 힘을 다 하여 몸을 굽힌즉(두 기둥이 흔들렸거나 또는 뽑혀) 집이 무너지므로 자신도 죽었고,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 많은 적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5) 31절에서 블레셋의 방백들과 많은 백성들이 죽었은즉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내려가서 삼손의 시신을 거두어 그의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였고, 삼손은 죽기 전까지 20년간 사사로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삼손이 하나님 앞에 나실인적 언약을 잘 지키고 또 그의 생활이 경건하였더라면 더 크게 쓰임을 받았을 것입니다. 레 21:14은 “기생이나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라” 하셨고, 롬 13:13에서는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 하셨는데 삼손은 여색을 즐기며 나실인적 계약을 파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쓰임의 대상은 되었으나 크게 쓰시지는 않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또 삼손이 원수를 갚는 계략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로 된 것이고, 반대로 삼손이 피해를 당한 것은 그의 타락의 결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또 머리털로 힘이 된 것은 그 머리털 자체로 힘이 소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인 나실인적 생활을 근거로 하나님이 힘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근거가 없어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떠난 것이고, 그 다음 삼손이 죽을 때 힘을 쓴 것은 “머리털이 자랐기 때문에 다시 힘이 생겼다”하기 보다는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16:28) 응답하셔서 능력을 주신 줄로 이해를 합니다. 그 이유는 머리에 삭도를 댔을 때 “나실인적 신분이 해제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깎아도 다시 자라는 것이므로 21절에서는 그 사실을 말씀하신 줄 압니다.

 

제23과 자율 신당 건립 (삿 17:1~13)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자율 신당 건립”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3절은 “미가가 잘못을 회개함”이요, ② 4~6절은 “자율 신당을 건립함”이며 ③ 7~13절은 “제사장을 임의로 세움”입니다.

1. 미가가 잘못을 회개함(1~3절).

1) 1~2절을 보시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란 사람이 있었는데(그가 그 어미의 돈 은 1100을 훔쳤음) 그 어미가 도적을 상대로 저주를 하자 미가가 그 저주를 들은 후에 가책을 느끼고 두려워하여 그 어머니에게 자복하고 그 은을 돌려드린즉 어머니는 만족하며 다시 축복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돈을 훔쳐도 절도죄는 성립됩니다. 그 어머니는 범죄자를 상대로 저주하였는데 이 저주는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심판권을 침해한 것입니다(전 3:!7, 벧전 2:23). 그리고 어머니의 저주를 듣고 회개한 것은 그의 양심과 종교성에 근거한 바른 행위입니다.

2) 3절에서 그의 어머니는 잃었다 찾은 은 1100을 아들이 복 받는 일을 위하여 쓰기로 한 만큼 “이제 이 은을 네게로 돌린다” 하였으니 이는 아들을 위하여 신당 세울 것을 결심한 내용인데 그 어미가 계획한 복 받는 방법은 “신상을 새기고 부어 만든 후 신당을 세워 아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성소는 실로에 있었지만(18:31) 전쟁이 잦고 성소의 제도가 율법대로 전승되지 못한즉 이방인의 우상 종교를 답습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레위 지파가 제사장을 하였다”는 율법까지 다 잊은 것은 아니었으니 결국 혼돈된 자율 종교를 스스로 만들어 숭상하게 된 것입니다.

2. 자율 신당을 건립함(4~6절).

1) 4절에서 그 어미는 아들로부터 받은 돈 중에 은 200을 은 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또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으니 두 신상을 만든 것이고,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었는데 은 1100중 남은 것으로는 에봇과 드라빔(출 28:6~14, 창 31:19)을 만들었고, 또 신당을 지었으리라고 예측됩니다.

2) 또 5절에서는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다”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미가의 형제인지 알 수 없으나 제단은 미가를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상과 신당은 이방 종교를 도입한 것이고, 에봇은 율법에 근거를 둔 것이며 제사장은 이방 종교인이나 율법에도 제도가 있는 것인데 무조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한 것인즉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율 종교의 신당과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3) 6절에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하였으니 정치 무정부 시대요, 또 종교 무질서 시대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시종일관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종교요, 구약 시대에도 율법에 근거하여야만 되었던 것인데 이런 것을 다 무시하였으니 그 타락이 얼마나 심한지 짐작이 갑니다.

3. 제사장을 임의로 세움(7~13절).

1) 7~8절에서 레위 지파의 한 소년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살다가(그 당시에 종교 제도가 해이해진즉 레위 지파가 살기 어려웠을 것으로 예측됨) 살 곳을 찾아 에브라임 산지로 갔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렀는데 9절에서 미가가 그 소년의 신상과 거할 곳을 찾는 사실을 알고, 10절에서 “나를 위하여 상당한 급료를 받고 아비(이 뜻은 17:10의 뜻과 같이 신앙적 지도자를 의미함)와 제사장이 되라”하자 11절에서 레위 소년이 이를 만족히 여겨 승인한즉 한 가족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우연한 기회에 취직을 잘 한 셈입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회색 옷을 입은 후 점포에 가서 불상을 사서 경치 좋은 산골에 세워 놓으면 사람이 찾아와서 절하고 돈을 놓고 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시대의 종교 실태를 사실대로 나타낸 줄 압니다. 기독교라 하여 그런 의미가 없겠습니까?

2) 13절에서 “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했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 소년으로 하여금 제사장 일만 하게 하였다는 뜻이고,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종교 제도를 만들고 스스로 위로 받는 격입니다. 그에게는 그렇게 한 것이 잘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더라면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신앙적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무질서하였음을 사실대로 나타내신 말씀인 줄 압니다. 몇 가지 교훈을 말씀드린다면 율법을 모르는 자율 신앙, 탐심으로 종교 제도를 만드는 일, 성직을 직업화 하는 일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미가의 집과 단 지파”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제24과 단 지파의 원정 (삿 18:1~31) 목록으로


본문을 읽어 보면 단 지파는 본래 수 19:40~46에서 기업을 받았으나 그 지역이 블레셋족이 강점한 가드, 가사, 아스글론, 욥바 지역으로 단 지파가 그들을 물리치고 쉽게 정착하기 어려운 연고로(삿 1:34) 다른 삶의 터를 찾아 탐색 대원을 보내고 또 멀리 라이스(수 19:47~48에서는 “레센”으로 표기됨)까지 원정을 목적으로 정탐한 후 돌아와서 600명의 군사와 가족을 이끌고 가서 라이스 거민을 척결하고 그 곳에 성읍을 중건한 후 그 지역을 “단”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색 대원 5명이 그 곳을 가다가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미가의 집에 들려 그 집의 형편과 우상의 제단 등을 파악하였는데 라이스 지역을 탐지하고 블레셋 주민이 많은 본 지역으로 돌아와서 의논한 후 600명의 병기를 이끌고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에 탐색 대원 5명이 군사 600명을 미가의 집에 머물게 하고 강도처럼 그 집의 우상 시설들을 탈취하였고, 또 제사장으로 있는 레위 소년도 회유하여 함께 라이스로 데리고 가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단 지파의 원정”입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7절은 “단 지파의 지역 탐색”이요, ② 8~13절은 “원정을 위한 출전”이며 ③ 14~26절은 “미가 집의 우상을 탈취함”이요, ④ 27~31절은 “라이스를 정복하여 거주함”입니다.

1. 단 지파의 지역 탐심(1~7절).

1) 1절의 “그때에 왕이 없었음”은 사사 시대를 의미하고, 그 이전에 사사 입다가 말하기를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300년이라(삿 11:26)” 하였으므로 그 시기는 가나안 입국 300년 후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사무엘 선지자때 사울왕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또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임은 위의 서론에서 말씀드렸고,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은 제비 뽑은 일에서 빠진 것이 아니라(수 19:40~46) 그 땅을 아모리족이 점유하는 바람에(삿 1:34) 가족별로 거할 땅을 갖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리하여 2절에서 “단 자손은 소라와 에스다올(임시 거주지, 블레셋족이 많은 곳, 처음 분배 받은 지역에 속함, 8절)에서 용맹 있는 사람 5인을 지역 탐지자로 보냈고,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17장에 나타남)에 유숙하게 되었으며 3절에서 그 집에 있는 레위 지파 소년(제사장)의 음성을 언어의 특징으로 알아듣고 그가 그 집에 살게 된 경위와 신분을 안 다음(4절)

3) 5절에서 그가 레위족 제사장임을 알고 그에게 “단 지파의 원정의 형통 여부를 하나님께 물어 알게 하라”한즉 그는 6절에서 “너희의 행하는 길이 여호와 앞에 있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상의 자율 제단을 섬기는 자율적 제사장을 하나님이 상대하실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자신이 꾸며낸 말일 것인데도 그 탐지인들은 그 말에 희망을 걸고 갔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헛되이 희망을 걸어도 잘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마치 주식을 사면 잃지 않으면 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신 13:3).

4) 7절에서 그 다섯 사람이 라이스 지역(갈릴리 북변에서 북으로 32㎞쯤)에 가서 살핀즉 “백성이 염려 없이 거하고 시돈 사람처럼(시돈 지역도 살피고 갔을 것임) 한가하고 평안하며 권세 잡은 자가 없어 백성을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도 상거가 멀어(라이스에서 시돈은 10시 방향으로 40㎞쯤 이고, 시돈은 지중해 북쪽 항구임) 그들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 자신들이 그 지역을 쉽게 점령할 수 있는 입장에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2. 원정을 위한 출정(8~13절).

1) 8~10절은 그들이 올라와서 탐지한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였고, “삶에 부족이 없는 넓은 땅이요 하나님이 너희(단 지파) 손에 붙이셨은즉(이 말은 미가집의 레위인 제사장의 말을 옮긴 듯 함. 6절)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2) 그리하여 11~13절에서 “단 지파는 가족 중 600명을 뽑아 병기로 무장을 하고 소라와 에스다올(블레셋 지역임)에서 출발하여 올라가(유다와 예루살렘쪽은 지역이 높음) 유다 기럇여아림(유대 땅과 벤야민 땅 사이에 있고, 예루살렘 서쪽 15㎞쯤)에 진을 쳤으니 그 곳 이름이 마하네단(단의 지경이란 뜻)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13절에서(유대 땅과 벤야민 땅을 지나) 북쪽 에브라임 땅을 거치면서 이전에 탐지인 5인이 들렀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도 가게 된 것입니다.

3. 미가 집의 우상을 탈취함(14~26절).

1) 14~20절에서 전에 라이스 땅을 탐지하러 갔던 용사(2절) 5인은 미가 집의 우상 신당에 탐심을 갖고 함께 간 군인들에게 “그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이 있은즉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하여 그것을 강취할 것을 지시한즉 그들은 병거를 든 채 그 집 문 입구에 서고 다섯 용사는 그 집으로 가서 문안하고 그 집에 있는 우상의 기구들을 갖고 나왔는데 그때 600명 군인들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던 미가의 집 제사장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네 손을 입에 대고 잠잠하라 너는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종교 지도자란 뜻)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집의 제사장 되는 것보다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 되는 것이 낫지 않으냐?”하여 그를 회유한즉 그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스스로 우상을 취한 후 그 백성(600명) 중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종교 시설과 사람을 다 강취한 것입니다.

2) 21~26절은 미가와 미가의 동리 사람들이 단 지파의 행동에 항의하기 위하여 따라 왔으나 “힘으로 대항하여 돌려보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21절에서 단 지파의 행렬에는 “어린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한 것을 보면 병기 가진 600명 외에 그들의 식솔들과 생활 용품들도 함께 갖고 떠난 것을 알 수 있고, 22절에서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났을 때 미가와 이웃 사람들을 모아 따라와서 단 지파의 잘못한 사실을 항의하였으나(24절) 25절에서 단 자손은 “목소리도 내지 말라”는 식으로 위협을 주어 미가가 어찌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세력과 공갈과 위협으로 고스란히 우상 시설을 강취해 갔으니 이것은 신앙의 무질서와 생활의 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믿음 떠나고 하나님의 권고가 없으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라이스를 정복하여 거주함(27~31절).

1) 27~28절에서 “단 자손은 라이스에 가서 그 곳에 평안히 있는 백성들을 칼로 치고 성읍을 사르되 그 성읍이 베드르홉(라이스 지역의 성읍)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다른 거민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척결 당하였고, 단 자손은 그 곳에 성읍을 중건하고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그 성을 조상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2) 30~31절은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강취해 간 우상의 제단을 그 곳에 설립하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 자손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 사람이 곧 미가의 집에서 따라간 레위족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모세의 손자가 아닌 므낫세의 손자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동 번역과 영문 번역도 70인역과 함께 개역처럼 “모세의 손자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원문의 지식이 없지만 글자를 대조해 본즉 모세는 ח󰚆מ로 표기되고, 므낫세는 ה󰚏נ󰘔로 표기 되는데 두 번째 글자인 󰔹(n발음)이 위쪽으로 치우쳐 표기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 נ자가 없어야 할 것인데 있는 것이 사본상의 오류인 듯 합니다.



제25과 한 레위인의 불행 (삿 19:1~30)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한 레위인의 불행”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첫째는 한 레위인이 취첩을 하였으니 불행하고, 또 그 첩이 음행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갔으니 불행하며 또 취첩한 레위인은 음행하고 떠난 여인을 잊지 못하여 취첩 행위를 연속하고저 저를 데리러 갔으니 불행하고, 5일간 첩의 친가에서 대접을 잘 받고 돌아오는 중 벤야민 땅 기브아에 사는 한 노인의 영접을 받고 유숙하려 하다가 그 지역 비류들의 습격을 받으니 자신이 살기 위하여 자신의 첩을 내주게 되었고, 결국 그 첩은 죽게 되었으니 불행하며 그 첩의 시신을 열두 도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12지파에 보내어 벤야민 지파의 악행을 고발하므로 선민 전체의 큰 싸움을 야기하였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여기에서 쉽게 느껴지는 것은 한 사람 레위인(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자로 짐작됨. 18절)의 작은 부덕이 큰 불행으로 확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고, 큰 제방의 무너짐이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바른 생활이 전체의 안전을 지키는데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요약하면 ① 1~3절은 “한 레위인의 취첩”이고, ② 4~9절은 “첩의 집에서 대접을 받음”이며 ③ 10~15절은 “귀가 길에 숙소를 찾음”이고, ④ 16~21절은 “한 노인의 집으로 영접 받음”이며 ⑤ 22~30절은 “첩의 죽음과 각 지파에게 고발함”입니다.

1. 한 레위인의 취첩(1~3절).

1) 1절에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란 18:1의 뜻과 같으나 20:28에서 그때에 “비느하스가 생존했다” 하였은즉 사사 시대 초기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입다의 시기는 훨씬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삿 11:26).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1장을 보시면 각 지파가 레위 지파에게 거처를 분정하였고, 에브라임 지파도 성읍과 산지를 준 사실이 있는 만큼 레위족 사람이 에브라임 산지에 거할 수 있었을 것이요, 본문 18절에서 “그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한 말씀을 보면 에브라임 진영 가까운 곳에 있는 실로의 성소에서 일을 맡아 행하는 자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 경건하게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에브라임 땅 실로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남쪽으로 40㎞쯤 됩니다. 100리 밖에 사는 첩을 데려온 셈이지요.

2) 그런데 2절에서 “그 첩이 타인과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비집에 거하여 넉 달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첩이라도 남편과의 동거 기회가 희박하면 음행의 유혹을 주기 때문에 “부부는 합방하라”는 말씀을 특별히 주신 바도 있지 않습니까?(고전 7:1~5) 따라서 첩의 음행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륜의 죄이지만 남편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런 형편이면 취첩 그 자체가 죄인 만큼(창 2:19) 레위인은 그 기회에 첩과의 관계를 끊었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3절에서 “레위인은 그를 데려오기 위하여 하인과 나귀를 대동하고 100리 길을 걸어 첩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그의 아비로부터 환영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첩의 집에서 대접을 받음(4~9절).

1) 100리를 갔은즉 2~3일 묵어 올 수는 있지만 첩의 아비가 지나칠 만큼 접대를 하는 바람에 3일을 묵었고, 또 하루를 연기하였으며 또 “잘 먹고 기력을 돋은 후에 가라”하여 또 하루를 묵으니 5일째 날이 되었는데 그 날도 “해가 저물어가니 또 유숙하라” 하였으나 다시 밤을 지내지 않을 목적으로 사양하고 5일째 되는 날에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레위인은 4일 후에 떠나려고 하였는데(5절) 장인의 만류로 하루를 더 묵고 5일을 맞이하였고(7~8절), 또 유숙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그 여인의 아비가 조금 지나치게 한 것 같으나 그것을 흠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요, 레위 사람은 성소의 책임자인 만큼 유흥에 빠진 것이 단 하루라도 잘 한 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쁘게 사셔야 합니다. 전철이나 시내 버스를 타실 때 바삐 가지 않으면 앞서 가는 차를 놓치게 되는 것처럼 인생은 바쁘게 살아야 하고 특히 성직자가 지나치게 유흥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다 화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세월을 아끼는 자가 복이 있고, 노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엡 5:16, 살후 3:10, 롬 12:11).

3. 귀가 길에 숙소를 찾음(10~15절).

1) 10절에서 레위인이 첩과 동행자를 데리고 5일 되던 날에 출발하여 여부스에 왔으니 이 여부스는 예루살렘을 뜻하며 벤야민 땅이고, 베들레헴에서 15㎞쯤 됩니다. 이때에 11절에서 종이 “여부스 성읍에서 유숙하자” 하였지만 11~14절에서 레위 사람은 여부스를 외인의 성읍으로 아는 만큼 동족의 성읍으로 가자 하여 벤야민 지파가 거주하는 “기브아라마”까지 갔으니 여부스에서부티 기브아라마까지는 10리쯤 더 북향하게 된 것이고, 거기서 날이 저문 것입니다.

2) 15절에서 “기브아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셨으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는다”는 말씀에 따라(신 28:6) 속히 형통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그런 은총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히 지키시리로다”(시 121:8) 하셨고, 또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신다”(시 139:9~10)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런 체험을 하시기 위하여 많이 기도하셔야 하는데 지금 주인공인 레위 사림은 그 행보가 떳떳하지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첩을 데려오는 것은 본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안 좋은 일이니까요. 계속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4. 한 노인의 집으로 영접 받음(16~21절).

1) 16절에서 날이 저물었을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면서 그 레위인을 보았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사람(레위인과 같은 지역)으로 벤야민 사람들이 거주하는 기브아에 와서 사는 사람입니다. 지파별로 땅이 분정되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거처가 바뀔 수 있습니다. 17~19절에서 그 노인이 거리에 있는 행인의 연고를 물은즉 “에브라임 산지(노인이 살던 곳)로 가는 사람이고, 베들레헴에 갔다가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중(레위인을 뜻함)인데 영접하는 자가 없다 하면서 모든 식량을 갖고 있다”한즉

2) 21절에서 노인이 말하기를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나의 책임인즉 거리에서 자지 말고 자기 집으로 들어 갑시다”하여 그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도 먹이를 주고 자신들도 발을 씻고 음식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대단히 친절한 분을 만났고, 그 노인은 손님 대접을 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출 22:21, 23:9).

5. 첩의 죽음과 각 지파에게 고발함(22~30절).

1) 22절에서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 그 성읍의 비류들이 와서 네 집에 온 사람(레위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하였으니 여기의 “상관한다”는 뜻은 창 19:5과 롬 1:27의 뜻처럼 남색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집 주인 된 노인은 그들의 악을 만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24절에서 “자신의 처녀딸과 나그네(레위인)의 첩을 내줄 것이니 마음대로 욕을 보이고 레위인에게는 망녕된 행위를 하지 말라” 하였으나 여전히 듣지 않았는데 25절에서 그 레위인이 “자기의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낸즉 그들이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에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2) 그들의 처음 목적은 레위인을 혼내주려는 남색이었는데 노인(집주인)은 레위인을 성직자로 여겨 보호한 듯 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처녀딸까지 희생시키려 한즉 레위인은 그의 처녀딸을 보호해주기 위하여 먼저 자기의 첩을 끌어내고 자기는 적당히 숨긴 것 같습니다. “그의 첩을 끌어냈다”는 것은 그를 억지로 희생 시킨 일인즉 역시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인집의 처녀딸을 희생시킨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적의 침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큰 환난인데 결국 피해를 본 사람은 그의 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섭리로 보셔야 하겠지요. 이때 레위인도 큰 위험을 당할 뻔 하였으나 겨우 보호 받은바 되었고, 그의 종은 남자라도 남색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징계가 불륜 당사자 두 사람에게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26절에서 그의 첩이 밤새도록 욕보임을 당하고 동틀 때에 그 노인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누운 것을 보면 그 집 대문이 자기들의 신분 보호를 위하여 잠겨 있은 듯 하고, 결국 27~28절에서 “그 여인이 죽은 것을 확인” 하였습니다.

4) 29절에서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산지인 자기 곳에 돌아와 그 시신을 열 두 도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하나씩 보냈으니 에브라임 지파를 제외한 12지파에게 보냈을 것이요, 30절에서 그것을 보는 자가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한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 하였고 본 일도 없다”하고 의논하여 조치하자 하므로 더 큰 사건으로 비화된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성도들은 “레위인의 타락과 외식”, 벤야민 지파의 패괴성, 타락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섭리 등을 유의하여 항상 정당한 일, 정당한 목적의 행보를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26과 하나님 백성의 총회 (삿 20:1~17) 목록으로


본문 2절을 보시면 “하나님 백성의 총회”란 말씀이 있습니다. 전체의 내용을 대표할만한 용어라고 사료되어 제목을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분량이 많으므로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핍니다. 본문의 대지를 나눈다면 ① 1~2절은 “미스바에서 총회를 모임”이요, ② 3~7절은 “사건의 진상을 확인함”이며 ③ 8~17절은 “범죄 척결을 위한 큰 대립”입니다.

1. 미스바에서 총회를 모임(1~2절).

1) 각 지파가 여인의 시체 도막을 받았은즉 다 놀랐을 것이고, 이것을 의논하기 위하여 미스바에서 총회를 모였습니다. 1절의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란 선민의 전체적 범위를 뜻하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란 선민이 차지한 땅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을 말하는 것이며 또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는 것은 요단 동편 지역에서도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서쪽은 지중해이므로 범위를 말씀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고 하였습니다(처음에는 다 모인 줄 알았음). 여기의 “그 회중”은 선민의 각 지파를 대표하여 선민 전체의 뜻을 모을 수 있는 회원 다시 말하면 각 지파의 족장들과 장로들을 의미하고 이 사람들을 제사장 “비느하스”가 통솔하였을 것입니다. 신약 교회의 총회는 행 15:6, 딤전 4:14 등에 근거를 둡니다. 20:28에서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모셨다”하신 만큼 그 시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 시대 초기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입다의 시기는 사사 시대 300년 후인즉(삼 11:26) 훨씬 후가 됩니다. 그런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미스바의 위치 파악과 여호와 앞에 모인 뜻을 연구하셔야 합니다. ① 우선 이 “미스바”란 용어는 미스바(창 31:49, 삿 10:17, 20:1, 21:1, 삼상 22:3)와 미스베(수 15:38)로 나누어 표기되었는데 옛날 영문 성경은 mistspah(창 31:49)와 mitspeh(수 15:38)로 표기 되었다가 근대 영문 성경에서는 다 mizpah로 통일 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이름이 같아도 다른 장소일 수도 있겠지요. 창 31:49에서는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가족을 데리고 내려오다가 얍복강 북쪽 길르앗 지역인 미스바에서 돌무더기를 쌓고 라반과 작별한 곳이고, 삿 10:17에 나타난 “미스바”도 길르앗 전쟁터인 만큼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상 22:3의 미스베는 “모압 미스베”라 하였은즉 그 곳은 모압에 있는 것이며 수 15:38의 “미스베”는 15:20에 근거하여 유다 땅에 있는 지역이고, 본문과 삿 21:1에 나타난 “미스바”가 싸움터인 벤야민 땅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길르앗이나 유다 땅에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1절)는 말씀을 참고할 때 길르앗쪽 즉 창 31:49과 삿 10:17의 지역일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지도를 찾아보면 유다의 미스베(수 15:38)도 예루살렘 북쪽 14㎞쯤에 있는데(그 땅은 유다에게 분배되었지만 실제는 벤야민 지파가 거주함) 3절에서 “그 곳으로 올라간 것”(예루살렘 쪽이 높음)과 또 그 올라간 사실을 “벤야민 자손이 들었다”는 것을 참고할 때 수 15:38에 나타난 유다 지역(벤야민이 점유한 곳)의 미스바로 여겨집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마음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② 그러면 왜 미스바에 모인 것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 될까요? 그 곳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실로”가 아닌(수 18:1~10) “벧엘”에 있었습니다(삿 20:26, 삼상 10:3). 그리고 그 후 시대에 사무엘 선지자는 “길갈과 미스바와 벧엘을 순회하면서 백성을 다스렸다”고 하였습니다(삼상 7:6, 16). 그리고 미스바는 벧엘의 7시 방향 5㎞쯤에 있으니까 “벧엘의 언약궤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앞에 모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이 때에 2절에서 “모든 지파의 어른들이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이 40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내용의 전말을 자세히 알기 전에 무슨 전쟁의 피해가 있는 줄 알고 전쟁할 것을 각오하고 출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사건의 진상을 확인함(3~7절).

1) 3절에서 벤야민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선민의 총회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았고, 이스라엘 총회에서는 당사자로 하여금 “그 악한 일의 정형을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2) 4~6절에서 레위인은 “자신이 당한 사실”을 그대로 고했으며 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내라” 하였으니 이것은 악한 죄를 어떻게 응징하여 방지하느냐?하는 것을 연구하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에도 가장 큰 문제가 죄의 성행입니다. 모든 국민들과 기관들이 나서서 범죄의 척결과 방지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토론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범죄 척결을 위한 큰 대립(8~17절).

총회의 선민 쪽에서는 범죄 척결을 위하여 일제히 칼을 들었고, 벤야민 사람들은 추호도 회개의 정황을 나타내지 않은 채 대립을 획책하였으니 큰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 8~9절에서 선민은 “일제히 일어나 우리가 한 사람도 돌아가지 말고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여인을 도막낸 것처럼) 행하리니 제비를 뽑아서(공격의 순서와 대상을 분정하는 뜻) 그들을 치자” 하였고,

2) 또 10절에서는 선민측의 군인 수를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자” 하였으니 각 지파에서 장정의 1/10씩의 병력을 모집하자는 것이고, 식량(군비)은 각 지파에서 자담한 후 기브아에 가서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응징하자“는 결정을 하였는데 11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단결이 잘 되었다는 뜻이지요.

3) 12절에서는 선민들이 벤야민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너희 중에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하고 죄를 질타한 사실과(회개를 촉구한 뜻) 13절에서는 “그 비류들을 총회 군사에게 내어 주어 그들을 죽이므로 악을 제하자(비류들만 죽이자는 뜻)” 하였으나 완악하여 듣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4) 13~16절에서 그들은 도리어 각 성읍에서(사람들을 모아) 기브아에 모이고(기브아와 미스바는 남북 8㎞쯤 상거임) 싸울 결심만 하였으니 그때에 벤야민 자손의 칼을 빼는 자는 26,000명, 또 기브아 성읍에서 나온 군인이 700명, 도합 26,700명인데 그 중의 800명은 왼손잡이로 돌 던지는 명수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17절에서 “선민 총회의 군사는 전사 40만명이라” 하였으니 군사의 수로 비교되지 않으며 싸움만 커지게 된 것입니다. 죄가 있고 완악이 있으며 회개가 없으면 싸움만 커진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권면을 받지만 완악하고 교만한 자는 죽어도 싸우는 것이 악의 근성인 것입니다.

 


제27과 벤야민 군사를 진멸함 (삿 20:18~48) 목록으로


이스라엘 총회 군사 40만 명이 미스바에 모였고(1~2절), 벤댜민 군사 26,700명이 기브아에 모였으니(14절) 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브아와 미스바는 남북 10㎞쯤 상간이요, 기브아가 예루살렘쪽으로 4㎞쯤 상간에 있으므로 “올라가서 싸운다”(18절)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볼 때 “범죄와의 전쟁”입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8~21절은 “총회 군사의 1차 패배”요, ② 22~25절은 “총회 군사의 2차 패배”이며 ③ 26~28절은 “선민 총회가 하나님의 뜻을 여쭘”이고, ④ 29~35절은 “총회 군사의 승리”이며 ⑤ 36~42절은 “승리한 전쟁의 재설”이요, ⑥ 43~48절은 “벤야민의 남은 군사를 척결함”입니다.

1. 총회 군사의 1차 패배(18~20절).

1) 18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총회 원로들)이 벧엘(성소 마당)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벤야민 자손과 싸울까요?”한즉 하나님이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작전 지시를 받는 뜻이고, 그 당시에 비느하스 제사장이 생존한 만큼(28절) 그가 계시를 받았든지 아니면 우림이나 두밈으로 제비를 뽑아(9절)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유다 지파의 군사가 먼저 나가 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시면 “유다가 먼저 나가 싸웠다”는 말씀이 없고, “이스라엘 자손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다가 22,000명이 죽음으로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2) 19~2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쳤고, 또 나가서 항오(적을 대항하는 행렬, 편대)를 벌이고 싸우려고 하였는데 벤야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이스라엘 사람 22,000명을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은혜를 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2. 총회 군사의 2차 패배(22~25절).

1) 2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역시 유다 지파의 군사가 아님, 18절)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처럼 진 치는 항오를 벌였고” 또 23절에서 하나님 앞(벧엘 성소)에 나가서 저물도록 울면서 “우리가 형제 벤야민 자손과 싸우리잇가”한즉 여호와께서 역시 “올라가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어느 지파가 먼저 나가라”는 말씀이 없었으나 “유다 지파가 먼저 나가라”는 18절의 지시가 취소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유다 지파가 선봉하였어야 할 것인데

2) 24절에서 그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이 벤야민을 치러 나갔고” 25절에서는 벤야민도 같은 날(그 이튿날) 치러 나와서 싸운즉 또 칼을 빼는 총회 군사 18,000명이 죽은 것입니다. 혹 여기의 “하나님이 올라가서 치라”(23절)하신 뜻이 유다 지파가 아닌 총회 군사라면 이는 하나님이 총회 군사 18,000명을 죽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하셨고(삼상 2:6), 또 “칼은 이 사람도 치고 저 사람도 친다”(삼하 11:25) 하셨은즉 사람이 죽고 살거나 전쟁이 이기고 지는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선민 총회가 하나님의 뜻을 여쭘(26~28절).

1) 26~27절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가 있는 벧엘 성소에 올라가서 날이 저물도록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레 1:1~17, 3:1~17)를 드리고,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벤야민 자손과 싸우리잇가 말리잇가” 하였는데 28절에서 그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모시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뜻으로 드린 것이고, 앞에서 2차 패배한 이유를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총회의 백성들이 금식하고 울며 회개한 정황을 보신 만큼 승리의 은총을 주시기로 말씀하신 줄 압니다.

4. 총회 군사의 승리(29~35절).

1) 승리의 약속을 받은 총회의 군사들은 적진인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한 후(29절) 제 3일에 전과 같이 기브아를 대하여 항오를 벌였는데(30절) 벤야민 자손은 마주 나와 싸움에 임하는 바람에 자기들의 성읍을 떠났고, 그들이 벧엘과 기브아로 가는 갈림길에서 이스라엘 사람 30명을 죽이기 시작하면서(31절) “또 총회 군사가 패한다 하였으나 실은 총회의 군사들이 패하는 척 하면서 벤야민 사람들을 큰 길로 유인한 것이요(32절), 총회 군사들이 그 유인한 처소에서 일어나 바알다말(기브아 근처인데 확인하기 어려움)에서 항오를 벌이고, 복병 10,000명이 기브아 초장에서 나와서(33절) 벤야민 사람들을 치매 싸움이 맹열한 중 벤야민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화가 미친 줄을 몰랐으나(34절) 하나님이 벤야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당일에 칼을 잘 쓰는 벤야민 사람 25,100명을 죽였다(35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글을 읽으니 쉬운 것 같으나 25,100명의 죽음이 작은 일입니까?

5. 승리한 전쟁의 재설(36~40절).

1) 36절에서 벤야민 사람들은 자신들이 패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복한 군사를 믿고 벤야민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그들 앞을 피한 것이었으며(그들이 성을 나왔을 때) 37절에서 복병이 돌입하여 칼날로 온 성읍을 친 것이고,

2) 38절에서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상약하기를 큰 연기 나는 것을 군호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9절은 31절의 재설로서 벤야민 군사가 총회 군사를 30명 죽이면서 승리한 줄로 착각했을 때 40~41절에서 “연기 기둥이 하늘에 닿았고 그때에 화가 미친 것을 벤야민 사람들이 알았다” 하였으며

3) 42절에서 전황의 패배를 안 벤야민 사람들이 “몸을 돌이켜 광야길로 향하였으나 총회 군사들이 급히 추격하여 각 성읍에서 나온 자들을 진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6. 벤야민의 남은 군사를 척결함(43~48절).

1) 43절에서 “총회 군사들이 벤야민 사람을 에워싸되 기브아 동쪽까지 쫓아가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아 용사 18,000명을 죽였으며 또 45절에서는 광야로 도망한 자들을 림몬 바위(삿 19:25)로 가는 큰 길에서 5,000명을 이삭 줍듯 하였고, 또 기돔(지도에 나타나지 않음, Gidom, 황폐함의 뜻)까지 따라가서 2,000명을 죽였으므로 모두 25,000명의 용사를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35절에서 25,100명은 다른 살생을 포함한 것입니다. 본래 벤야민 군사가 26,700명인즉 700명만 흩어진 셈인데 47절에서 그 중의 600명이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 있는 곳에서 넉 달을 지냈은즉 100명만 행방불명된 것입니다.

2) 48절에서 총회 군사들은 그 기회에 다시 벤야민 자손에게로 돌아와 온 성읍과 가축을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불살라 진멸하므로 장정 없는 벤야민 지파가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한 것입니다. 악을 응징하시고 무질서한 선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셔야 할 줄 압니다. 범죄는 작은데서부터 커지고 멸망과 자멸을 초래합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아군도 희생되지만 결국 악인의 길이 망하는 것을 보여주셨고(시 1:6), 문제가 있을 때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민감하셔야 할 것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제28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함 (삿 21:1~25) 목록으로


저는 이 본문을 읽고 “전쟁 후의 후속 조치”로 총 제목을 정하려 하다가 “범죄 척결과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 것이고, “패배자를 싸매어 준 것”은 사랑에 속한 것임이 느껴졌으며 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총회의 사역에 참여치 않은 것을 응징한 것”은 공의에 입각한 일이요, “거기에서 남은 여성(처녀들)을 벤야민 남성에게 아내로 준 것”은 사랑을 베푼 일로 여겨져서 제목을 “공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4절은 “맹세와 평가”이고, ② 5, 8~12절은 “불참자에 대한 응징”이며 ③ 6~7, 13~15절은 “평화의 공포와 돌아온 자를 위로함”이고, ④ 16~23절은 “부녀자 보충”이며 ⑤ 24~25절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감”입니다.

1. 맹세와 평가(1~4절).

1) 1절은 벤야민 지파를 척결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를 하였으니 이는 “누구든지 딸을 벤야민 사람에게 주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18절)”고 한 것입니다. 이 맹세는 하나님 앞에 한 것이므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맹세를 한 이유는 “증오가 가시지 않은 때문이고 또 벤야민족의 단절을 바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세와 목적은 지나친 증오에서 나온 것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미움에서 나타난 결정이나 또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과 지나친 감정에서 정하는 일은 크게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2~3절에서 또 백성들은 벧엘(성소 있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대성통곡 하였으니 그 통곡한 이유는 선민 중 한 지파가 이지러진 사실을(뉘우치고) 슬프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21:28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하신 것을 원망한 일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승인 하셨고, 자기들도 원하여 한 일인 만큼 이미 시행된 일을 근원적으로 후회하거나 탄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을 감사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의 응징이 끝났으므로 일단락 된 것인즉 다음에는 사랑의 입장에서 마음을 쓰다보니 형제 중 한 지파가 이지러졌고, 자신들 파에서도 22,000명과 18,000명과 30명(21:21, 25, 31) 도합 40,030명이 죽었은즉 상당한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울 때 맹세했고 냉정해졌을 때 평가한즉 후회스러워서 탄식을 한 것입니다.

3) 4절은 이상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니”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 회개, 용서, 화목 등으로 원만한 입장을 정리한 뜻”이라 할 것입니다.

2. 불참자에 대한 응징(5, 8~12절).

1) 5절에서는 “이스라엘 온 지파 중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미스바에)에 올라오지 않은 자가 있는지를 살피기로 하고 (만일 있다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으니 범죄를 척결하고 큰 희생을 치르는 전쟁이요, 또 총회적 행사에 무슨 이유로든 불참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므로 여기에도 공의의 철퇴를 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펴본즉 “야베스 길르앗(이 지역은 요단 동쪽 므낫세 지파의 한 부족임)에서는 온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알고(8~9절)

2) 10~12절에서 “큰 용사 12,000명을 보내어 그 곳 거민과 부녀(혼인한 여자)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하였으니 이는 11절에서 “모든 남자와 남자와 동침한 여인을 죽이라”는 뜻이었으므로 이를 시행한즉 12절에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젊은 처녀 400명만 남아서 그 400인을 얻어 가나안땅 실로 진으로 끌어 왔다” 하였으니 이는 요단강 동편 “아베스 길르앗”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 땅 “실로”로 데려왔다는 뜻입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역의 종교 중심지였습니다(수 18:1~10, 삼상 1:9).

3. 평화의 공포와 돌아온 자를 위로함(6~7, 13~15절).

1) 6~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벤야민 한 지파가 (거의) 끊어진 것을 뉘우쳤고 그들 (남은 자들)에게 아내가 없음도 문제 삼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1절). 맹세는 “증오하고 깊이 살피지 않은 상태에서 범죄한 완악한 족속과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면 퍽 안 됐지만 맹세는 변할 수 없으므로 방도를 찾은 것이 곧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처녀만 살려 그들을 벤야민의 남아 있는 남자들에게 주어 종족의 세를 남기려 한 것입니다.

2) 13절에서 “림몬 바위에서 4개월을 머물렀던 벤야민 군사 600인에게(20:47) 평화를 공포하여 돌아오게 한 후 14~15절에서 그들에게 여인 400인을 주었으나 오히려 200명의 여인이 부족함을 느끼고 또 이 일로 인하여 한 지파가 크게 궐(빠져, 이지러진 것)이 난 것을 뉘우쳤다”고 하였습니다.

4. 부녀자 보충(16~23절).

림몬 바위에 숨었다가 돌아온 벤야민 장정이 600명인즉 400명의 처녀를 주었다 하여도 200명이 부족하므로 그 문제의 해결을 연구하여 시행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16~17절에서 회중의 장로들은 벤야민족의 남은 자들에게 반드시 짝을 지어 주므로 기업을 잇게 할 필요를 느꼈으나 18절에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맹세하기를 그들에게 아내를 주는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땅을 줄 수 없음을 확인한 다음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기를 “너희가 실로의 포도원 곁에 숨어 있다가 매년 실로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절기에 무도하러 가는 실로의 여자들을 붙들어서 기업을 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도적하는 죄가 하나님께 한 맹세를 어기는 것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2) 19~20절에서 이 무도회가 열리는 “실로”는 벧엘 북편이고, 르보나 남편인즉 그 중간을 뜻하고, 또 “벧엘에서 세겜(르보나와 같은 쪽)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도상으로는 르보나가 세겜의 남쪽 16㎞쯤, 또 벧엘의 북쪽 17㎞쯤에 있고, “실로”는 르보나에서 4시 방향 6㎞쯤에 있습니다. 이 “실로”는 수 18:1~10에 나타난 성소가 있었던 곳인데 여기에서 그 지명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여인을 취하지 못한 200명이 그 곳을 잘 찾아가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3) 여인을 필요로 하는 벤야민 사람들이 실로의 여인을 붙들어 올 때 22절에서 그 아비나 형제가 쟁론(항의)하면 우리(선민 대표자들)가 그에게 말하기를 “이는 너희가 가만히 있으므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자의로 맹세를 어겨 딸을 준 것이 아닌즉 죄가 없으니 괜찮다”하면 잘 될 것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23절에서 “그대로 행하여(여인을 데리고) 자기들 기업지에 돌아와서 성읍을 중건하고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맹세는 지키고 긍휼은 베푼 셈인데 지금도 어떤 나라는 남자가 여인을 보쌈하듯 붙들어 가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을 TV에서 들었습니다. 이 경우에 시집갈 처녀는 좋은 남자에게 보쌈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도 그런 풍조가 어느 정도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5. 자기 기업으로 돌아감(24~25절).

24절은 “선민 총회의 군사들이 모든 임무를 끝내고 각각 자기 지파로 돌아갔다”는 내용이고, 25절은 “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17:6, 18:1, 19:1) 하였으니 이는 그 시대가 죄악이 관영된 시대로 하나님의 권고가 희소한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 제도가 틀을 잡던지 선지자의 출현이 자주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적극 권고하시지 않고 명맥만 잇게 하신 것이 마치 말라기 선지자 이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까지의 악흑기와 비슷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복된 시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개인이나 사회에 가장 밝히 나타나는 때라 할 것입니다(21:1~7을 본문으로 한 “레위인의 고발과 결과”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설교 보충 제1과 가나안 땅을 주시는 섭리 (삿 1:27~36, 신 7:1~5) 목록으로


이 시간에 두 곳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신 7:1~5 말씀은 “선민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곳 거민들과 우상 숭배의 잔재들을 인정사정없이 척결하라”는 말씀이고, 삿 1:27~36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각 지파들이 자기들이 제비 뽑은 땅에 들어갔으나 본토족을 다 없애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1.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왜 가나안족을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진멸하라”고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말씀드리면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섭리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노아 때에 홍수로 멸절당한 것이나 소돔 고무라가 유황불로 진멸된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선민도 잘못하면 심판하시는데(바벨론에 붙이심,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것) 이방족인들 심판을 안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죄 값으로 당할 심판을 선민과의 전쟁 패배로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심판이 홍수나 유황불이나 땅이 갈라져 죽는 것처럼 그렇게 엄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도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선민들도 멀리 쫓아가면서 전멸시키지 않았고, 대항자들만 진멸을 시켰으니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왜 그들과의 언약이나 혼인 등 상종하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이것은 선민이 자기의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방 종교의 유혹을 받을까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도 잘못된 신학교에 가면 잘못된 신학을 배워오는 것처럼 이방 종교인들과 동화되면 역시 순결한 신앙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성도의 거룩을 권장하셨습니다(요 17:17). 거룩의 뜻은 순결하게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고 확실하며 바른 지식에 서 있는 것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이나 불건전한 세계나 세속을 멀리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선민들이 약속된 가나안 땅을 다 점령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그 경위와 하나님의 섭리를 살피는 것입니다.

1) 우선 경위를 살피면 여호수아 때는 선민 전체의 군사로 싸웠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12지파가 다 자기들의 제비 뽑은 땅으로 돌아갔고, 각 지파별로 자기 영지에 남아 있는 본토족을 물리쳐야 하는데 군사가 1/12로 줄었으니까 쉽게 전쟁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또 적은 군사로 한 성읍을 상대하려면 강한 저항도 예측되고 따라서 승리의 확신도 적어져서 싸움을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연약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태만입니다. 그런 중에서 쫓아내지 못하니까 그 힘의 기울기에 따라서 사역을 하기도 하고(1:30, 33, 35), 사역을 시키기도 하였던 것입니다(1:28). 힘이 비슷하면 가나안족이 왜 나가겠습니까? 그런 경우에 본토족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한 것이고(28절), 선민은 힘이 강해졌을 때 또 그들을 일 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경위는 선민이 약해진 때문이고,

2) 그 다음 강성해졌을 때는 종으로 부리기 위한 타산 때문에 가만히 둔 것입니다. 선민 세계에 가나안족이 공존하는 것은 거리끼는 일입니다. 마치 곡식 밭에 가라지 있는 것 같고 성도가 외식자와 동화되는 것 같은 것이지요.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유익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것은 출 23:29~30, 신 9:22에서 본토족을 천천히 쫓아내시므로 그 지역에 “짐승의 번성을 막는다” 하셨고, 또 삿 3:1~2에서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후시대인들로 전쟁을 가르치는 대상을 삼으신다”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전화위복되게 하시는 섭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이 있지요(사 9:29). 안 된 일 같으나 더 좋은 은혜가 있을 줄 믿고 바라면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식욕 억제를 못하고 체중이 늘어서 고민을 했는데 느닷없이 체증에 걸려 고생을 하고 체중이 6㎏이나 줄고 지금도 음식을 조금씩 밖에 못 먹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활 속에도 그런 부분이 많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가드로 망명을 했는데 블레셋과 가드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치자 하면서 다윗이 협력할 것을 제의해 왔지요(삼상 27:8~12). 그때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블레셋 군인들이 “다윗과 합류하면 배신할 수 있다”고 의심을 하여 가드왕이 다윗의 출전을 취소하고 다윗의 본거지인 시글락으로 보냈는데 그때 마침 시글락 거민들이 아말렉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끌려가는 중이어서 다윗이 그들을 추격하여 가족과 동민을 구출한 일이 있었습니다(삼상 9:2~5). 하나님이 역경도 헤어나게 하셨고, 동족을 구출하는 기회도 주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4) 모세와 여호수아의 예언의 성취가 됩니다(신 31:15~21, 27~29, 수 23:8, 12~13). 선민이 타락할 것을 예언하였으니까요.

5) 스스로의 완전 성화가 불가능함(롬 3:10, 갈 2:16, 3:11)을 상징적으로 예언하심인 줄 아는 것입니다. 가나안족을 인간 내심의 악으로 또는 천국 건설의 장애물로 묘사하는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 되고 못 되는 일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2과 사사기의 일관된 교훈 (삿 3:1~11) 목록으로


사사기는 선민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왕이 세워지기까지 약 450년간의 역사로 사사 13명의 역할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가장 적절한 서론이 본문인데 이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일, 선민이 타락하는 일, 하나님이 때리시는 일, 아프니까 회개하고 부르짖는 일, 회개하며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는 일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관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 경종을 울려 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성도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회사 사장인데 사장의 임무는 사원들에게 “지시하고 감시하며 보고 받는 일”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도 지시하셨으니까 감시하시고 좋은 보고 받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신 7:2~5에 보시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곳의 사람들을 진멸할 것이요 언약이나 통혼하지 말고 특히 그들의 종교를 부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수차 다짐하고 맹세시켰으며 “후손에게까지 가르치라”(신 6:7) 하셨으니까 실천하나 안 하나를 시험하실 것이고, 전쟁을 모르는 후시대 자손들이 그것을 지키게 하시기 위하여 상당한 열국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나 안 지키나 또는 죄를 짓나 안 짓나를 지켜보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를 짓느냐 하면

1) 물리쳐야 할 본토족을(전쟁 의욕 상질로) 가만히 둡니다. 천국은 침노하여 뺏고 확장하는 것인데(마 11:12) 본토족을 미워하지도 않고 쫓아내지도 않았으니 이것은 마치 성도가 죄를 미워하지 않고 걷어차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들과 동화되어 살며 힘이 있을 때는 일도 시킵니다. 이것은 불법을 행할 때 순간적으로 덕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러다가 혼인 대상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통혼을 하고,

4) 그들과 친교하면서 조상의 하나님을 서서히 잊어갑니다. 하나님을 멀리할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도 잊어버립니다.

5) 그리고 “본토족이 섬기는 우상을 타파하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니까 보이는 신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상주의로 넘어가니까 완전히 이방인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선민이 이렇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방족과 동화되었기 때문이고, 다음에는 율법 교육이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성도가 이것을 방지하려면 세속을 멀리하면서 말씀에 몰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을 멀리하는 방법이 곧 교회 생활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속화되면 안 되는 것이구요.

3.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민족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민족적으로 때리셔야 하니까 전쟁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우리나라에 전쟁의 위험이 있고 전쟁의 억제를 힘쓰고 있지 않습니까? 메소포타미아는 바벨론 지역(지금 이라크)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퍽 먼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시지 않습니다. 그 곳의 왕이 가나안 땅의 재물을 탐내어 침략할 마음을 갖고 원정 침략을 해오는데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이고, 그 대신 선민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하시니까 8년이나 고역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민은 그런 압제와 고난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줄을 모르고 8년을 견디다가 죽게 될 입장이고 우상신의 효력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4. 고난과 징계 중의 치료 대책은 회개와 기도뿐입니다. 넉넉하고 평안하면 회개를 잘 못합니다. 죽을 지경이면 회개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이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생명의 다함을 받으면서도 생명의 주 하나님을(행 3:15, 17:25~26) 부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고난에 처할 때 꼭 깨달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완악을 깨우치시고 게으름을 깨우치시며 탈선을 깨우치시고 고난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주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셨구나”하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선민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18년 만에 또는 20년 만에 부르짖었으니 그 동안 받은 고난이 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대처 방법은 회개뿐인데

5. 하나님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1) 하나님이 지도자(사사)를 세우십니다.

2) 그리고 그 지도자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3) 지도자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아 단결하게 하십니다.

4) 그리고 또 작전도 깨우쳐 주십니다.

5) 그 다음에는 대적의 사기를 꺾으시고 그들을 선민 군사의 손에 붙이십니다.

6) 이 때에 하나님이 기상의 조건 등 초자연적 능력도 나타내 주셔서 결국 이기게 하시므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6. 이상의 사실에서 저희들이 깨달으셔야 할 것은

1) 선민의 역사가 “하나님의 시험과 타락과 징계의 고난과 회개와 구원의 순서로 이어왔다는 사실”을 아시고, 또 이런 역사적 테마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접목되고 있다는 것을 아셔서 적절히 대응하셔야 한다는 점이고,

2) 잘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발동하고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공부를 잘 해도 그것이 그 아이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기도하는 부모가 있고, 또 그 배후에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아셔야 하고, 또 “고난스러운 일이 있다”할 때도(물론 거리낄 일이 없을 경우도 있겠지만) 직, 간접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을 부요케 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조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만큼 화의 근원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출 20:5~6). 그리고 또 조상의 죄를 회개한 사례도 있습니다(스 9장). 그러니까 항상 회개를 힘쓰면서 순결하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3과 기드온의 역사와 교훈 (삿 6:11~15) 목록으로


사사기 6, 7, 8장은 “기드온의 역사”가 기록된 말씀이고, 기드온이 40년을 통치하였으며(8:28) 9장은 기드온의 자녀들이 요담을 제하고 70명(69+아비멜렉)이 죽어 몰락하는 기록입니다. 이런 역사를 읽고 몇가지 교훈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1. 기드온은 농부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6:11)고 하였습니다. 무술로 전쟁할 준비가 없어도 하나님이 보시고 쓰실만 하시면 금방 용사로 쓰실 수 있고, 그만한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나 다윗은 상당기간 연단해서 쓰셨지만 기드온은 짧은 기간에 의병을 모으고 준비하여 쓰셨습니다. 그리고 적은 군사로 기습 작전을 써서 싸움이 아닌 혼난 전법을 썼는데 적군끼리 서로 치게 하여 자멸에 이르게 하셨으니 거의 다 하나님이 전쟁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6:15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보낸 것인즉 네가 백성을 구원하리라” 하셨을 때 기드온이 “나는 므낫세 지파에서 극히 약하고 내 아비 집에서도 제일 작은 자입니다”한 것을 보면 자기의 연약을 알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겸손할 줄 아는 농부를 쓰셔서 용사의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벧전 5:5에 보시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 기드온에게는 주도면밀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자기와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신가?하는 확인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되신 표징을 보여 달라”하여 제물을 태우는 것을 확인하였는데(6:17~21) 그 다음에 의병을 모집해 놓고도 양털에 이슬이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을 증표로 구하였고(6:36~40), 또 적은 군사로 기습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부라를 데리고 적진 정탐을 하게 하셨고, 거기서 적군의 꿈 이야기를 듣게 하시므로(7:9~14) 또 한 번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전쟁을 앞두고 주도면밀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 확인과 능력 확인과 적군의 사기 떨어진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 안 해도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KS 마크로 찍기 위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여 증명하고 주셨습니다(히 1:1, 2:4, 유 3).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을 점검할 필요 없이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슬이 있고 없는 기적”을 구한 것은 기드온의 요청이었는데 그 뜻을 생각하면 기드온이 작전 계획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7:1~8에서 300명 선별할 때 짐작한 줄 압니다. 기습 작전이나 자중지멸이 아니고서야 300명만 택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적진에는 캄캄함을 주시고 자기들 영역은 그렇지 않은 것을 주셔야 하니까 부분적으로 어두운 것을 이슬로 점검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으나 적진에 횃불을 드러내고 나팔을 불었을 때 그 지역만큼은 짖은 안개로 칠흑같이 어두웠을 것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는 주도면밀함이 기드온에게 있었고,

3. “한 번 하면 한다”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순종의 용기, 거사의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셨을 때 명하시기를 “네 아비 집의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 집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또 그 옆에 있는 아세라상을 찍어 그것으로 장작을 삼은 후 이 견고한 성 위에 하나님의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거기에 그 둘째 수소를 그 장작으로 불태워 번제를 드려라” 하셨는데 이것을 밤에 종 열명을 데리고 가서 다 강행해 버린 것입니다. 용기가 대단한 것입니다(6:22~27). “한 번 하면 한다”하고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배우셔야 할 것은 과감한 계명 실천입니다. 믿음의 용기도 있어야 하고, 과감한 실천의 용기도 있어야 하며 특히 변화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아비 집에 있는 우상을 훼파했으니까 그 용기가 더 돋보인 것입니다.

4. 그런데 좋은 일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1) 처음 승리했을 때도 퍽 겸손했습니다. 기드온이 처음 의병을 모집했을 때는 에브라임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가 나중에 적이 흩어지니까 에브라임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도망자를 추격시켰는데(7:24) 싸움이 끝난 다음에 그들이 “왜 처음부터 안 불렀느냐?”고 불평을 하니까 “너희들의 공로가 더 크다”고 칭찬해 주므로(8:1~3) 무마시켰고, 또 그 다음에는 “왕이 되라” 했을 때도 “하나님이 다스리셔야지 내가 다스리면 안 된다”고 사양을 했으니(8:22~23)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는 왕같이 살았으니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왕을 안 하고도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고, 40년이나 태평 세대를 주셨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2) 이 기회에 기드온은 70아들을 낳았으니 딸인들 없었겠으며 본처급 여인도 수십 명 되었겠지요. 그리고도 부족해서 세겜에 첩을 두고 또 아비멜렉을 낳은 것입니다. 아부하는 백성들이 젊은 여인들만 바치니까 주는대로 수용을 하였겠지요. 도덕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을 사양하는 대신에 패물을 달라고 하여 금 1700세겔로 “에봇(대제사장 의복)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우상의 올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므낫세 지파이기 때문에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없지만 제사장직에 탐심이 생겨서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의 신앙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 문란, 신앙 문란을 초래하여 그가 죽은 다음에 아들들이 다 죽고 3년 후에 첩의 아들 아비멜렉까지 망하였으니 사람은 항상 좋은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더 조심하고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주신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4과 삼손의 행보 (삿 14:1~9) 목록으로


“삼손의 행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은 삼손이 사사로써 사역을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앞 절(13:25)을 보시면 “마하네단에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감동하셨다” 하셨은즉 삼손의 행보는 성령에 감동된 자로서의 행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대가 되시지요. 성령에 감동된 삼손이 어떻게 행보하였을까요?

1. 그는 사명의 뜻을 갖고 행보하였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으로 자란 것이 민족 구원의 사명인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시대에 블레셋 족이 동족의 원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블레셋 딤나에 가서 블레셋 여인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 행보가 목적과 뜻을 갖고 행한 것입니다. 목적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음이고, 뜻은 자기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부응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때는 보행을 합니다. 볼 일도 있고 하여 걷는 것인데 혹 어떤 이가 “차가 없으십니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보행이 건강에 좋다 하여 걷습니다”라고 대답한 후에 내게 건강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연구 집필을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적 있고 뜻있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성령 감동의 사람 삼손의 행보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손의 뜻은 본문 4절에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한 것”입니다. 왜 블레셋 사람을 쳐야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었습니다. 노아 당시에 홍수로 죽었거나 아브라함 당시에 소돔 고무라 도성이 불탄 것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멸망된 것처럼 가나안 족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선민의 칼날을 통해서 심판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여호수아 시대에 다 멸절시키지 못하였고, 그 후시대에도 그렇게 못하여 사사 시대까지 내려왔고, 그들 때문에 선민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17:16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선민을 괴롭히는 이방족과 싸우신다”는 뜻이요, 영적으로는 마귀와의 전쟁이 세상 끝날까지 연속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삼손의 행보의 목적이 블레셋 응징에 있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마귀와의 전쟁과 승리를 목적에 두고 사랑을 실천하셔야 하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3. 5절을 보시면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여기의 어린 사자는 민첩하고 날쌘 사자를 의미합니다. 포도원은 사람 사는 곳이고, 조용한 곳인데 거기서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깊은 산에서 사자를 만나는 것은 예사이겠지만 포도원에서 만난 것은 마치 산돼지가 도시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의외로 위험을 당한 것이고, 또 조용한 세계에서 풍파가 일어난 것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포도원을 선민의 세계 또는 교회로 비유한 예도 있습니다(사 5:7, 마 21:33, 2:15). 요나가 욥바에서 다시스로 떠날 때 여건이 좋았는데 별안간 풍랑을 만난 것처럼(욘 1:3~4) 성도들의 생활 중에도 그런 위기가 있을 수 있겠지요. 이때 삼손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처럼 찢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오늘날 성도들이 위험을 극복함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까? 위험은 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은 없는데 있는 것은 성령의 감동뿐입니다. 성령의 감동만 있으면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사자를 찢어 이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감동은 또 무엇입니까? 어떤 상태를 성령의 감동으로 보셔야 할까요? 마 4:1~11을 보시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요.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고, 도와 줄 사람도 없는 곳입니다. 거기서 40일 금식까지 하셨으니 육체도 약해지셨을 것인데 4:1을 보시면 “성령에 이끌려” 가셨습니다. 그때 마귀는 물욕과 명예욕과 세상의 향략욕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의 유혹은 성경에 위배된다”하시고 대항하셨더니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깨우쳐 주시는 성령의 감동은 성령의 검(엡 6:17)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있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어디 가야 감동을 받나?”하고 우왕좌왕하실 것이 아니라 말씀 원리에 붙잡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와서 마귀를 쫓고 수종드는 것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자유를 얻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시골 어린이가 구슬을 넘겨서 목에 걸렸는데 큰일났습니다. 눈이 넘어가려고 합니다. 병원 두 곳을 다녔으나 뺄 수 없으니 큰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하였습니다. 위기지요. 그런데 그 부모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가상해보십시오. 병원에 가는 도중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연필 끝으로 구슬을 쳐서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구슬이 제일 좁은 곳에 막힌 것이니까 집어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해결의 경험이 있었다고 친구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말씀에 붙잡혀 바로서는 것이 성령님의 감동이고, 그렇게도 해결된다는 것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4. 성도가 시험을 극복하면 언제나 좋은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나 바울 사도는 “시험이 연단을 준다” 하였지요(롬 5:3~4, 시 119:71). 또 마라 다음에 엘림이 나타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출 15:22~27). 그러면 삼손은 그 사자를 죽이고 무슨 유익이 있었습니까? 첫째는 꿀을 먹었고, 다음에는 수수께끼 문제를 만들었으며 또 그 다음에는 원수 보복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것입니다. 교훈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묵상하는 정신을 키우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5과 사사된 삼손의 특징 (삿 15:15~20) 목록으로


성경에는 13명 이상의 사사의 역사가 나오는데 그 중 “삼손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삼손의 내용은 삿 14, 15, 16장에 기록되었는데

1. 삼손은 출생 전부터 예비된 사사였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다 쓰임 받을 때 하나님이 불려 쓰셨지만 삼손은 잉태 전부터 그 부모에게 계시를 주셨고, 부모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출생한 것이 마치 세례 요한의 형편과 같았습니다.

2. 삼손은 자랄 때부터 하나님이 구별하여 나실인이 되게 하셨고, 그가 커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포도주나 독주를 금한 것은 잉태한 어미에게 경고한 것이고, 삼손이 자랄 때는 머리에 삭도 대는 것만 금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자라는 동안 또 그가 사역을 하는 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중요한 계율이었습니다. 다른 사사들에게는 그런 절차가 없었습니다.

3. 삼손을 쓰실 때는 다른 사사들처럼 용병을 모집하여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로서 전쟁에 나가게 하신 것이 아니고 홀로 역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이 사자를 쫓을 때 그 부모도 도운 일이 없고, 또 삼손이 딤나에 가서 어떤 여인과 혼인하겠다 하였을 때도 그 부모가 삼손의 계략을 알지 못할 만큼 비협조적이었는가 하면 한 발 더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에담 바위틈에 거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레히”에 와서 “삼손을 내놓으라” 하였을 때 유다 사람이 3000명이나 모였지만 삼손을 보호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줄 만큼 삼손을 돕지 않았으나 삼손은 그런 입장에서도 오직 홀로 적과 싸우는 용맹을 보인 것입니다. 큰 특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명분 있는 전면전에서 싸우지 않고 사소한 문제에 싸움의 명분을 걸어서 적에게 타격을 준 것입니다. 입다 같은 사사는 적과 외교로 협상해 보다가 안 되어 전면전으로 싸웠습니다. 그럴 때는 자기측 군사들도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혼자 싸웠으니까 자기 백성들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린 일이 없고, 오직 사소한 시비로만 문제를 걸어서 적에게 타격을 준 것입니다. 성도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이라 하여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없는 줄 알면 안 됩니다. 수수께끼의 일이나 블레셋 거민이 딤나 여인에게 공갈을 친 일이나 또 자기가 버리듯이 두어 두고 온 여인을 그 장인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일 같은 것은 적은 일에 속하고, 또 평범한 생활 속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다 하여 그런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없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고 삼손은 그런 일을 구실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5. 삼손은 대단히 경오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수수께끼에 졌을 때 겉옷 30벌을 주었고, 그 대신 블레셋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을 써서 알아낸 일을 구실 삼아 같은 블레셋 거민인 아스글론 사라을 죽였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딤나의 여인을 임의로 타인에게 준 것 때문에 그것을 구실로 곡식밭에 불을 질렀고(15:1~5), 그리고 또 “자기에게는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5:11을 보시면 3000명의 유다 사람들이 “왜 블레셋에게 항거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했을 뿐이라”한 것을 보면 항상 명분 있게 행하고, 경오 바르게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경오 바른 생활을 잘 하셔야 합니다.

6. 삼손은 타락을 하면서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삼손의 타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일 먼저 딤나 여인을 사랑한 것입니까? 이방 결혼? 그러나 그것은 적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으니까 타락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 다음에 가사에 가서 기생을 보았고(16:1), 또 소렉 골짜기에 가서 들릴라를 보았으니 이 두 여인과 향락에 빠진 것은 윤리적 타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두 여인을 본 것이 계략이 되어 적을 무찔렀다면 그것을 타락 아닌 계략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거기에서 실패를 했으니까 타락이고, 또 한가지 타락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하나님과의 비밀(이것은 일종의 약조임)을 누설한 것입니다. 그 비밀이 성령이나 능력 받는 비밀이라면 누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비밀은 하나님이 삼손을 쓰셔서 원수를 갚는데 쓰는 비밀이고, 또 나라를 구원하는데 쓰는 비밀이기 때문에 누설하면 안 되는 것인데 여인의 간청에 넘어가서 자기의 종말을 모르고 누설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 잡는 비밀은 마귀에게 누설하지 마십시오. 그런데도 하나님은 타락한 삼손을 쓰셨는데

7. 삼손의 마지막 특징은 죽을 때까지 쓰셨고, 죽으면서 죽인 자가 살아서 죽인 자보다 더 많게 하신 것입니다(16:30).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도가 은혜를 받아도 순간적으로 타락의 유혹을 받습니다. 삼손이 그 때에 경성하지 못하고 여인에게 빠졌을 뿐 아니라 마귀 이기는 무기를 마귀에게 누설하는 실수를 범하여 비참한 꼴을 당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래도 삼손이 준비된 사사인 만큼 20년간 붙들어 주셨고, 그의 죽음까지도 헛되지 않도록 섭리하신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6과 삼손의 바른 정신 (삿 16:28~31) 목록으로


삼손이 어떤 정신을 갖고 사명에 임하였는가?하는 것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은 “삼손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삼손의 마지막 기사가 퍽 안 된 내용으로 끝나지만 삼손의 생애와 사역을 보면 그가 “바른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구국 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나실인으로 구별하실 때 목적을 구국에 두셨고, 13:5에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구국을 마음에 두고 자랐고, 늘 기회를 보았지만 의병 모집의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혼자 나서서 블레셋을 응징한 것입니다. 40년간 블레셋의 지배를 받다가 삼손의 때에 와서 20년간 독립을 한 것은 삼손의 구국 정신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 삼손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나실인 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으니까 나실인 규례를 지켰을 것입니다(민 6:1~20). 그는 자신이 나실인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언제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대하여 늘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실인 정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헌신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독립 정신입니다. 삼손은 자기 이전에 여러 사사가 일어난 사실이 있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사사는 다 의병을 모집하여 대장 노릇을 하면서 구국을 하였는데 삼손에게는 의병 모집의 기회나 계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구국을 해도 혼자 할 수 밖에 없었지요. 나라의 원수 갚는 일을 혼자 한다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감당을 한 것입니다. 삼손의 구국 정신은 그 부모도 낌새를 채지 못하였고(14:4), 3천명의 유대인 단체도 그를 돕기는커녕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내줄 정도였으니까요(15:11~12). 그래도 삼손은 혼자서 구국과 관계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4. 희생정신입니다. 여우 300으로 블레셋 농장을 훼파하였을 때 블레셋 사람이 떼로 몰려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유다를 위협했습니다. 유다의 장로들이 이유를 물은즉 “삼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그 사실을 에담 바위틈에 있는 삼손에게 알린즉 삼손이 자기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나타날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요나도 그런 일을 했지요. 요나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 풍랑이 일어나니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는 희생정신을 발동한 것인데 삼손은 백성의 원수를 갚은 것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한 후에 역경에 처하자 동족의 평안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것이기 때문에 더 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삼손이 큰 충신이 되어 보상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희생만 있었습니다.

5. 명분에 의하여 행동하는 정신입니다. 명분 없이 적국을 침략하면 그는 침략자의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삼손은 왜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것은 가나안 입국 당시부터 “그들을 없애라”는 하나님의 명을 실천한 것이고, 또 이방인이 선민을 40년이나 지배를 했으니 거기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 순리인 것입니다. 삼손은 그 명분으로 블레셋에 보복을 한 것입니다. 딤나의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기 아내에게 공갈을 쳐서 답을 빼냈기 때문에 아스글론 사람 30을 죽인 것이고, 수수께끼의 답을 맞추면 “의복 30벌을 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켰으며 또 장인이 자기 처를 임의로 누구에게 주었기 때문에 곡식밭에 불을 지른 것처럼 꼭 명분을 내세워서만 활동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도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의 눈을 빼고 구경거리를 삼았으니까 기둥을 뽑고 사람을 죽인 것 아닙니까? 성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활도 뚜렷한 명분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압니다.

6. 선민의 우월정신을 가졌습니다. 성도들도 반드시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거룩한 백성이다”하는 우월정신과 긍지를 갖는 것입니다.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였을 때 목말라 죽을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15:18을 보시면 “하나님의 선민이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려니와 하나님께도 영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민들은 대부분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죽음 당하는 것을 수모로 생각하였습니다(사울, 삼상 31:4). 삼손도 선민적 긍지가 있었으니 이런 긍지는 선한 용기를 갖게 할 것입니다.

7.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정신입니다. 삼손이 평소에도 기도하였겠지만 성경에는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번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한 번은 1000명을 죽이고,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할례 없는 자들 손에 죽으면 되겠습니까?”하고 기도한즉(15:18) 하나님이 우묵한 곳에 물을 내tu서 먹게 하신 사실이 있고, 또 한 번은 눈을 빼인 채 연극장에 끌려가서 할례 없는 자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수모를 겪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겠다 하여 자살을 기도할 때 16:28에 보시면 “하나님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 번에 갚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둥을 뽑았으니 그 기도가 응답되었고, 죽을 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삼손은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실패한 사사가 아닌 훌륭한 사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구국정신, 나실인 정신, 독립정신, 희생정신, 명분 정신, 선민적 긍지 정신, 기도 정신을 갖고 산 것을 아셔서 저희들도 그 정신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 보충 제7과 미가의 집과 단 지파 (삿 17:1~5, 18:1~2) 목록으로


사사기 17장은 “미가집에 있은 일”이고, 18장은 “단 지파에게 있은 일”인데 여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미가의 집에 있은 일입니다.미가의 어머니가 은 천백을 잊어버리고 그 도둑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주를 하였습니다. 그 돈 1100중에 200으로 우상을 새겨 만들고, 또 부어 만들 수 있는 금액이니까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적이나 원수를 향하여 마구 저주해도 되는가?할 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도는 깨달아야 하고(원수 갚는 것과 심판이 주께 있음. 롬 12:19, 요 5:27), 또 중요한 것은 도적이 자기의 아들이었는데 만일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저주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상황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며 또 사람이 저주한다고 하여 효력이 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해야 할 것을 했으니까 효력이 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축복은 많이 하라”(롬 14:19, 히 10:24, 창 27:29, 롬 12:14) 하셨으니까 축복은 한 자나 받을 자가 다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가는 자기 어머니의 저주를 두렵게 여겼고, 또 가책을 받아 회개하였으니 어떤 동기로 회개하였든지 잘 한 일입니다.

2. 잃어버린 돈을 받은 어머니는 그 돈으로 자율 종교 시설을 만들어 그것으로 그 아들이 복 받기를 사모하였습니다. 복 받기를 사모하는 것이 종교성이기는 하지만 복을 주실만한 절대자에게 복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받고 새겨준 우상과 돈을 받고 부어 만든 우상이 무슨 복을 준다고 그것을 숭상합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돼지 머리를 상 위에 얹어 놓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절하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가 집도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허망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옛 조상으로부터 “제사장은 레위 지파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러자 레위 지파 사람이 왔다하니까 그의 족보도 살피지 않고 제사장에 취직을 시켰습니다. 레위 지파의 분명성을 확인하여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레위인은 유대 땅에서 받은 레위 족 거주지에서 산 모양인데 율법적 종교가 해이해지니까 누가 십일조를 줍니까 그러니까 레위 족은 살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사장 직무를 행한다면 하나님의 성소에 가서 순번대로 하고 십일조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제도가 바로 시행되지 못하니까 이리 저리 떠돌다가 제사장 명목으로 취직을 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직을 이용한 돈벌이 같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 집의 종교 시설 중 신당과 드라빔과 우상은 이방족에서 따왔고, 에봇과 제사장은 율법에서 따온 혼합 종교였습니다. 요즈음도 그런 종교가 많은 줄 압니다. 왕이 없고, 표준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한 것이니 이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그 신당은 단 지파에게 강취당하고 말았지요.

3. 단 지파에 대한 내용입니다. 창 49:17을 보시면 야곱이 단 지파의 후일을 예언할 때 “단은 길의 뱀이고 첩경의 독사라 말굽을 물어 그 탄 자를 떨어지게 하리라” 하셨고, 신 33:22에서는 모세가 예언하기를 “단은 바산에서(바산은 목축지임, 바산의 암소란 말이 있음. 암 4:1) 뛰어나오는 사자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독사나 사자는 다 남을 물어 죽이는 것인데 이 지파가 미가 집의 우상을 갈취하였고, 또 라이스의 거민을 치고 그 자리를 뺏어서 정착한 것이 다 예언대로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이 지파도 제비를 뽑아서 땅 분배를 받았습니다(수 19:40~46). 그런데 그 지역이 아모리 족과 블레셋 족 등 강족이 있는 곳이다 보니 전쟁으로 척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모리 족에게 쫓겨 깊은 산골에서 내려오지도 못했습니다(삿 1:34). 이것은 자기 밥을 못 찾아 먹는 연약입니다. 하나님이 다 받을만한 은혜를 주셨는데도 연약하고 무지하여 자기 받을 것을 못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힘드니까 원정을 꿈꾼 것인데 어디 가야 살만하고 또 원주민을 이기기 좋은지를 알기 위하여 다섯 사람에게 탐지하게 하니까 그들이 그 임무로 여행을 하다가 미가 집에 들어가서 우상 제단을 보았고, 또 라이스에 가서 그 곳 거민이 고립되어 사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상 제단을 보아도 탐이 나고 라이스 지역을 보아도 탐이 나니까 600명의 병정을 모집해 가지고 그 가족들과 함께 원정을 떠난 것입니다. 가는 도중에 먼저 미가 집에 들려서 우상을 다 강취하여 뺏고, 레위인이란 제사장까지도 회유하여 “잘 대우하겠다” 하니까 스스로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라이스에 가서 지역민들을 척결하고 그 곳에 우상 제단을 세우고 살 성읍을 만들어 그 지역을 “단”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뱀이 말굽을 물은 것 같고, 사자가 암 송아지를 잡은 것과 같은 것인즉 예언대로 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뺏고, 돈을 주어 제사장을 세울 만큼 종교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오늘의 성도로 말하면 복 받기를 사모한 것이지요. 그런데 도적질 하여 우상을 세워 놓고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미가의 집은 망쳐 놓고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이런 어리석은 일들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남을 손해 보이고 뺏어 먹는 것은 복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가장 늦게 기록된 말씀이고, 그 시대로부터 1150년쯤 후에 기록되었는데 계 7:5~8에서 인 맞은 자 12,000명이란 말씀(144,000)속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왜 없는지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그 지파가 “중간에 다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겠나?”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된 것은 이런 교훈을 주시기 위함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설교 보충 제8과 레위인의 고발과 결과 (삿 21:1~7) 목록으로


“레위인의 고발과 결과”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핍니다. 삿 19, 20, 21장은 한 레위인의 잘못된 행보에서 시작하여 큰 싸움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65,130명의 선민 장정이 죽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1. 19:1을 보시면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섬기는 직분을 가진 레위인이 첩을 두었는데 그 첩이 다른 이와 음행을 하고 도망했으면 그것으로 자신의 취첩 행위를 회개하고 끝냈어야 하겠지요. 요즈음도 성직자가 첩을 두고 산다는 소문이 없지 않지만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성직자의 부패는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는 물론 직분자나 성도까지 계명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첩이 도망갔을 때 그대로 떨어져야 합니다.

2. 그런데 100리쯤 떨어진 벧엘까지 가서 그 첩을 데리고 오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 같이 간 종이 “여브스”에서 유숙하자 하니까 그 동리는 이방인 지역인즉 가지 말고 동족의 동리로 가자 하여 10리쯤 더 가서 벤야민 족이 사는 기브아에서 숙소를 기다리는데 벤야민 족은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같은 고향인 에브라임에서 벤야민 땅으로 옮겨 농사짓는 노인이 그들을 영접하여 친절히 대접을 하였는데 그날 밤에 벤야민 족 비류들이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레위인이 자기의 첩을 내주므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레위인의 생각은 종이 “여부스에서 유숙하자”는 의견만도 못한 일을 했고, 또 벤야민 족이란 선민이 이방족보다도 나을 것이 없을 만큼 타락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기브아의 노인은 나그네 대접을 잘 한 사람입니다. 레위인이 성소의 봉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봉변을 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주겠다” 하였는데 그 제의가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레위인을 위하여는 선한 일이 되지만 딸이나 레위인의 첩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생각이지만 그 시대에 자녀는 부모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이의 첩을 자기 마음대로 내주려 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일이 이쯤 되자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비류들에게로 끌어내고 자기의 몸을 사렸으니 전혀 희생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새벽에 그의 첩이 그 노인의 집 문전에서 죽은 것은 그 집 대문을 잠갔기 때문이었으니 얼마나 이기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그 후에 그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와서 열 두 토막을 내어 선민 각 지파로 보냈으니 자기가 첩 얻은 죄와 자신이 첩을 보호하지 않은 죄는 덮어 놓고 벤야민 족의 폭력만 고발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사실을 진술할 때 자신의 반성은 없었고 벤야민의 완악만 말을 했습니다(20:3~6). 여기에서 성도가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장점과 단점을 또는 죄와 의를 항상 동시에 나타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잘한 것만 내놓고 잘못한 것을 내놓지 않으면 그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마 5:37).

5. 20:1에 보시면 선민 총회가 모였습니다. 선민 총회도 사람이 모인 단체입니다. 총회나 노회를 하나님과 꼭 같이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성경과만 일치하시는데 구약 시대에는 특별한 방법(히 1:1)으로 가끔 계시를 주셨습니다. 우선 각 지파에서 1/10 숫자로 모여 온 군사가 40만명이었는데 그들은 벤야민 지파를 몹시 증오했습니다. 왜냐하면 잔인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죄를 증오할 때 그렇게 하셔야 하겠지요. 그때 벤야민 사람들에게 “비류들만 끌어내라” 하였는데 그들은 완악하여 듣지 않고 전면전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라 할 때 더 완악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의 자세는 언제나 죄와 부족을 깨우칠 때 겸손해지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벤야민 사람들은 교만과 자존심만 있었고 싸움을 좋아하다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26,700으로 40만을 상대하였으니 얼마나 교만합니까?

6. 그때 총회 군사들이 “유다 지파가 먼저 나가라”는 계시(20:18)를 무시하였다가 두 차례 패배로 4만명이 죽었지요. 이것은 크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게 하시는 대목인 줄로 압니다(20:18~25).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회개하고 기도한 후 비로소 “대적을 붙여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싸워서 벤야민 장정 25,100명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장정은 1,600명 뿐인데 그 중에 600명은 림몬 바위에 숨었다가 나중에 평안을 선언하였을 때 돌아왔고(21:13~14), 나머지 1,000명은 죽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을 것인데 여하튼 전체 군사의 6%쯤 남았으니까 한 지파가 이지러진 것이지요. 그것도 그들만 남고 가족은 다 죽었기 때문에 그 지파가 살아나려면 우선 여인이 있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7. 그래서 다 망한 지파를 마지막에 가서 긍휼히 여겼으나 그들에게 “딸을 주지 않는다”고 미리 맹세를 했기 때문에(21:1, 7) 그 전쟁에 참석 안 한 길르앗 여부스 거민을 죽이고 거기서 처녀 400명을 데려다 주고 모자라는 것은 “실로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자를 보쌈해 가라”(21:19~21)고 방책을 세워주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의 작은 실수가 동족 65,130명을 죽게 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성직자의 잘이 요인이 된 것과 죄를 척결하는 운동이 필요한 것과 감정이나 성급한 것은 피해야 하는 문제, 맹세는 함부로 하지 말되 한 것은 지켜야 하는 것, 공의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한 점, 어려운 때일수록 말씀에 민감하고 하나님의 섭리 파악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