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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여호수아의 사역 시작 (수 1:1~18) 6 바로가기

제2과 두 정탐과 라합 (수 2:1~24) 8 바로가기

제3과 요단강을 건넘 (수 3:1~17) 11 바로가기

제4과 도강 및 두 기념석 (수 4:1~24) 14 바로가기

제5과 할례를 시행함 (수 5:1~15) 17 바로가기

제6과 여리고성을 취함 (수 6:1~27) 20 바로가기

제7과 아간의 부정과 결과 (수 7:1~26) 23 바로가기

제8과 아이성을 정복함 (수 8:1~35) 27 바로가기

제9과 기브온족과의 약조 (수 9:1~27) 30 바로가기

제10과 기브온족과 연계된 승리 (수 10:1~43) 33 바로가기

제11과 2차 저항 세력을 멸함 (수 11:1~23) 37 바로가기

제12과 점령한 왕국과 그 지역 (수 12:1~24) 40 바로가기

제13과 기업에 대한 재설명 (수 13:1~33) 43 바로가기

제14과 갈렙의 청원 (수 14:1~15) 46 바로가기

제15과 유다 지파의 분깃 (수 15:1~63) 48 바로가기

제16과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 (수 16:1~10) 51 바로가기

제17과 므낫세 지파의 분깃 (수 17:1~18) 53 바로가기

제18과 벤야민 지파의 기업 (수 18:1~28) 57 바로가기

제19과 기업 분배의 완료 (수 19:1~51) 59 바로가기

제20과 도피성을 설치함 (수 20:1~9) 64 바로가기

제21과 레위 지파에게 준 성읍들 (수 21:1~45) 65 바로가기

제22과 증거의 단 (수 22:1~34) 68 바로가기

제23과 여호수아의 유언 (수 23:1~16) 70 바로가기

제24과 여호수아의 마지막 당부 (수 24:1~33) 72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과 가나안 입국 준비 (수 1:6~9) 76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2과 군사에게 주신 말씀 (수 1:7~9, 딤후 2:3~4) 78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3과 라합의 구원 (수 2:8~21) 80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4과 도강시의 교훈 (수 3:1~7) 82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5과 하나님이 크게 하심 (수 3:7, 4:14) 84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6과 가나안 땅의 열매 (수 5:10~12) 86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7과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뜻 (수 6:1~5) 88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8과 아이성 정복의 교훈 (수 8:1~11) 90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9과 기브온족과 관계된 일 (수 9:3~15) 92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0과 태양아 머무르라 (수 10:12~14) 94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1과 가나안 정복의 섭리 (수 11:19~23) 96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2과 바른 선택 (수 24:14~18) 98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3과 다짐의 효력 (수 24:26~31) 100 바로가기

     설교보충 제14과 복 주시는 섭리 (수 21:43~45) 102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여호수아강론을 마치게 된 것을 하나님께 크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호수아강론을 쓰게 된 것은 나의 목회 초반 때에 강론 설교를 하였던 원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사용한 설교 원고와 강론문을 상당 부분 요약 정리하므로 초벌 원고를 집필 내용으로 변화되도록 정리를 하였고, 남은 것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그리고 시편 설교 원고뿐이었는데 저는 길에 떨어진 이면지 종이 한 장도 버려지도록 외면하는 성격이 아닌즉 어찌 목회 초기에 사용한 설교 원고를 그대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일 그것을 정리해 놓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다면 그 초라한 문서들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휴지나 쓰레기로 버려질 것인즉 그런 일들이 저의 양심을 편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어코 그 초벌 원고를 정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2005년도 여름은 덥기도 하였지만 육체의 가시처럼 고난당하는 어깨 통증이 재발되어 더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육체 건강의 이상이 올 때마다 남은 글을 다 쓰기까지는 ‘하나님이 건강을 주셔야 하는데’ 하고 늘 기도하면서 버텨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다른 성경과 달라서 신앙적 교훈을 연구하는 것보다 지명 찾는 일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수아 장명에 따른 지도책이 있다면 참 좋을 것이지만 저에게는 그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영문으로 표기된 지도를 찾아 확인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시력의 한계가 있어서 돋보기까지 동원을 하였으니까요. 16장을 쓰다가 계속 나가지 못하고, 휴식에 들어가면서 시편 설교 120과를 기록한 다음 다시 계속하여 쓰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16장은 특별한 연구 내용도 없지만 저는 그것을 쓰다가 2개월 정도 휴식을 하면서 시편 설교집을 쓰고 다시 계속 한 것입니다. 오늘 24장까지 강론을 끝내고 이 서문을 쓰게 되니 참으로 감격과 감사가 교체되며 계속해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를 쓰고 강론 집필의 계획된 필을 놓으려고 합니다.

제가 작년 이맘 때 출애굽기 강론의 서론을 쓸 때 하나님이 “좋은 믿음의 자부를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였는데 어제는 그 자부가 10월 10일에 아들을 생산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말씀에 얽매인 나에게 큰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내년 이맘 때도 또 기대해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성도님들이 본문 한 장을 읽으신 후 이 강론을 읽으신다면 마음에 정리되는 부분이 있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성경 공부는 그런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신문을 읽는 자세만큼의 관심을 성경 강론이나 설교문 읽으시는데 기울이신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크게 가까워짐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2005. 10. 1.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여호수아의 사역 시작 (수 1:1~18) 목록으로


(여호수아서에 대한 개론은 기독교 신앙 백과에 수록된 것을 참고하십시오.)

여호수아 1장에서는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므로 제목을 “여호수아의 사역 시작”으로 정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실제적으로 요약하면 “명령과 시행”이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자세히 구분하면 ① 1~9절까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요, ② 10~18절은 “명령 전달과 복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1~9절).

1)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명령)을 주셨습니다(1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서 이 요단을 건너......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2절) 하셨으니 이 명령은 선민의 여정 중 결과에 연속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라”하심은 단결과 합력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단체적 전진은 합력에 있습니다(행 1:13~14).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뜻을 일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의 뜻도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1,000여명의 교인이 목회자와 뜻을 맞추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2) 3~4절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신 1:36, 11:24)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다 너희에게 주시되 그 지경은 광야와(예루살렘 남쪽 유대 광야) 이 레바논(지중해변 북쪽)부터 큰 하수 유프라데(강)에 이르는 헷족속(창 10:15)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저편 지중해까지라” 하셨으니 이 영토의 범위는 신 11:24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팔레스틴이라고 하는 가나안 일경보다 북쪽으로 훨씬 넓게 주신 땅입니다. 문제는 “발바닥으로 밟는 뜻”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선민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진격하는 범위까지 하나님이 승리의 은혜를 주셔서 얻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힘쓰는 대로 주십니다(마 11:12).

3) 5절에서는 여호수아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말씀을 하셨으니 곧 “너의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다” 하시므로 여호수아에게는 그 대적에 대한 승리만 있을 것과 모세에게처럼 함께 계셔 주실 것과 떠나지 아니하실 것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런 약속을 믿는 성도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며 용기가 솟구칠 것입니다. 6~7절에서는 이 약속에 근거하여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되 극히 담대히 하고....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조상에게 맹세로 주리라 하신 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로 맹세하신 땅이라도 그 후손들의 믿음과 담력과 실천의 노력을 통해서 주시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큰 일을 이루는 노력은 강한 확신과 담력이 있을 때 성령님께서 힘을 주사 이루게 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 8~9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 생활 방법을 말씀하셨으니 곧 “율법책(그 당시에 파피루스 같은 종이 대용품이 있어서 돌판에 새겨진 글들을 옮겨 적은 책이 있다고 여겨짐)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평탄함과 형통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계명)에 복종하는 자를 좋아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능숙하게 기억하기 위하여 말씀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책(성경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읽고 익히는 것) 또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평탄과 형통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앞에서 말씀하신 취지를 다시 재설하여 강조하셨습니다. 믿고 용기를 내어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2. 명령 전달과 복종(10~18절).

1) 10~11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명령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백성의 유사(사무관)들에게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받은 명령(1~9절 말씀)을 전달케 하였습니다. 이 때에 여호수아는 “3일 안에 요단을 건너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갈 것인즉 양식을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3일 안”이란 정탐의 기간을 계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나가 그친 것은 수 5:12에 기록되었은즉 그때까지는 정탐의 기간과(2:1) 도강 및 여리고성 점령시까지 상당한 기간이 남아 있은즉 매일 받는 만나 양식을 준비하라는 뜻은 “가족들끼리 나누어 먹던 만나를 전쟁이나 진격하는 군대의 양식으로 쓸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주석에는 준비의 뜻이 “사냥한 고기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있었겠는지요?

2) 12~15절에서 요단강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받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모세와 약속한 바를 시행할 것을 명하였으니 그 약속의 내용은 민 32:17~32과 신 29:7~9에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요단 동편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3절)” 하였고, 14절에서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동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특혜를 받은 만큼 솔선하고 앞장 설 것을 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15절에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세 지파의 가족이 먼저 요단 동편에 쉬게 된 뜻) 그들(다른 지파들)도......주시는 땅을 얻게 되면 너희(전쟁에 참여한 세 지파의 군사들)가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 그것을 차지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받아야 할 교훈은 “약속 이행, 특혜 받은 책임 이행, 전체적 행복에 대한 균형 성취”라 할 것입니다.

3) 16~18절은 세 지파의 복종과 결단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답하기를 “우리는 명하시는 대로 다 행할 것이요.......보내시는 곳에 갈 것이며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처럼 청종할 것인즉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하였고, 또 18절에서는 “누구든지 당신의 명을 거역하거나 청종치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인즉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시라” 하므로 복종의 뜻과 거역자에 대한 응징의 뜻을 전하고, 또 지도자 여호수아가 극히 담대하여야 할 것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뜻으로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사들과 지도자 간에 신뢰와 단결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정병의 큰 요소라 할 것입니다.

 

제 2 과 두 정탐과 라합 (수 2:1~24) 목록으로


본 장 전체의 내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 및 여리고성에 두 정탐을 파송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총 제목으로 “두 정탐과 라합”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절은 “두 정탐을 파송함”이고, ② 2~7절은 “라합이 정탐을 숨긴 일”이며 ③ 8~11절은 “라합이 정탐을 숨긴 이유”요, ④ 12~21절은 “라합과 정탐과의 약조”이며 ⑤ 22~24절은 “정탐의 보고”입니다.

1. 두 정탐을 파송함(1절).

여호수아는 깃딤에서 가나안땅으로 두 사람의 정탐을 보냈습니다. 정탐의 목적과 방법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진격을 위한 자세한 지리와 그 곳 거민들의 세력 분포 및 인심을 알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깃딤”은 사해바다와 인접한 요단강 하류 동편 모압땅으로 여행의 마지막 진을 친 곳이고(민 33:48~49, 아벨싯딤), 또 발람의 사건이 있었던 곳입니다(민 22:1). 여호수아는 자신이 그 땅을 정탐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필요하여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였고, “그들은 가서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짐작컨대 정탐을 마칠 무렵에 정보 수집을 위하여 라합의 집에 갔을 것입니다.

2. 라합이 정탐을 숨긴 일(2~7절).

1) 라합은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늘 오는 손님과 언어와 모습이 다른 사람을 왜 분별 못 하겠습니까? 또 그들이 40년 전에 애굽에서 나온 광야의 백성임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고, 따라서 정탐인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4, 6절을 보시면 “라합이 두 사람을 지붕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벌여 놓은 삼대에 숨긴 것”을 보면 벌써 당국에 고발되어 잡으러 오는 군사들이 있을 것을 짐작하였던 것입니다.

2) 라합의 짐작은 적중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수비는 삼엄하였고, 이상한 사람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본 자들이 왕에게 고발한즉(2절) 왕은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라합에게 군사를 보냈으며 군사들은 “그들이 온 땅의 정탐인즉 끌어내라”고 다그쳤습니다(3절). 그러나 라합은 “그 사람들이 내 집에 왔었으나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였고, 성문을 닫을 때쯤 (해 지는 시간) 나갔은즉 어디로 간 것은 모르나 급히 따라 가면 그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4~5절). 그리하여 군사들은 성문 밖 요단길로 나루턱까지 나갔고, 그 후에 성문은 닫게 된 것입니다(7절).

3) 여기에서 라합은 정탐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성 있게 거짓말을 하였으니 “우선 숨긴 사실을 은폐한 점,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다는 점, 성문을 닫을 때쯤 나갔다는 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면 접근하게 될 것이라”는 네 가지 내용을 거짓 진술하므로 완벽하게 관군을 따돌린 것입니다. 이것은 기생 라합의 살고자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전쟁에 질 바에는 화친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눅 14:31~32). 기생 라합은 전쟁을 앞두고 죽음에서 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합리화 될 수 없으나 기생 라합은 그만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3. 라합이 정탐을 숨긴 이유(8~11절).

1) 8~9절에서 라합은 숨어 있는 정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선민들에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하여 그가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진 속에 그런 백성을 예비해 두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라합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를 알며 또 가나안 복지를 그 백성들에게 주신 것까지 아는 것”은 인간적 지식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또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는다” 하였으니 이는 그 지역 백성들의 정신적 상태가 공허함을 알린 것인즉 좋은 정보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그 자체는 이미 패배를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2) 10~11절에서 라합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선민의 출애굽 과정에 있었던 홍해를 마르게 한 사건(홍해가 갈라졌지만 라합은 소문을 듣고 마른 것으로 앎)과 또 아모리왕과 바산왕을 전멸시킨 사실을 듣고 알았으며 그 연고로 그 곳 사람들이 정신을 잃었으니 과연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심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라합은 선민의 우월성과 여호와신의 절대성을 소문을 듣고 알았으며 아울러 들은 것이 믿음의 씨가 된 것입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마 15:10, 롬 10:17)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진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요 18:37).

4. 라합과 정탐과의 약조(12~21절).

1) 12절과 13절이 한데 붙은 것은 번역상 문장을 합했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2) 이 말씀에서 라합은 “두 정탐을 선대하였은즉(숨겨준 일)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의 모든 자(부모, 형제 및 함께 있는 모든 자)를 죽음에서 건져 주기로 여호와로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 하였고, 그들(두 정탐)은 말하기를 “네가 이 일을 누설하지 않으면 그리하되 우리의 생명으로라도 대신 할 것이요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 인자와 진실로 대우 하겠다” 하였고, 라합은 두 정탐을 성벽 위에서 줄로 달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였으며(15절) 또 두 정탐은 자기들을 달아 내리운 붉은 줄을 자신들을 달아 내린 창문에 매어 놓고 그 집안에 모든 가족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17~18절). 따라서 “진실한 표”는 그 붉은 줄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이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단 것은 유월절 때에 선민의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른 일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라합의 가족이 그 집 밖에 있으므로 죽임을 당한다면 이는 정탐들에게 허물이 없고, 만일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댔을 때는(죽임의 뜻) 그 피가 우리의 머리로 돌아올 것이라(19절) 하였으니 “그 피가 우리의 머리로 돌아 온다”는 뜻은 피를 살인의 뜻으로 이해하여 목 베임을 받아 마땅함을 의미합니다. 또 20절에서는 “이 사실을 라합이 누설하였을 때는 역시 그렇게 할 책임이 없다”고 다짐하였고, 21절에서 라합은 이러한 약조의 뜻으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다”고 하였습니다.

3) 16절에서 라합은 떠나는 두 정탐에게 “관군을 만날 위험이 있은즉 산으로 가서 3일 동안 숨었다가 가라”는 안전책까지 자문한 후 떠나게 하였습니다. 이 약조는 확실하였고, 이 약조가 변질된다면 서로의 생명이 위태한 것입니다. 라합이 변질하면 정탐에게 위험이 있고, 정탐이 지키지 않으면 라합의 집이 죽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약조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믿음의 결속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입니다. 붉은 줄로 표를 삼은 것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베푸신 세례의 증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5. 정탐의 보고(22~24절).

1) 22~23절에서 “두 정탐은 라합의 권면대로 3일간 산에 유하였으므로 따르는 자들이 두루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산을 내려오고 강을 건너 여호수아에게 와서 사실대로 보고하였다”고 하였으며

2) 또 24절에서는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떤다는 뜻)”라고 하였으니 이 보고는 진격하는 여호수아의 군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나안 거민의 마음을 꺾으신 후에 두 정탐과 라합을 이용하셔서 방책과 용기를 주시므로 뜻을 성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 3 과 요단강을 건넘 (수 3:1~17)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요단강을 건넘”입니다. 17절 끝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앞에 있는 말씀들은 다 요단강을 건넌 절차에 해당합니다. ① 1절은 “싯딤을 떠나 요단에 머뭄”이고, ② 2~5절은 “유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명함”이며 ③ 6~8절은 “여호수아가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명함”이요, ④ 9~13절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훈시함”이며 ⑤ 14~17절은 “요단강을 건넘”입니다.

1. 싯딤을 떠나 요단에 이름(1절).

“싯딤”은 여호수아가 두 정탐을 파송하였던 곳이고, 선민이 마지막으로 진을 친 장소였습니다(2:1).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백성들과 더불어 요단에 이르러 3일을 유숙하였으니(2절)” 이는 백성들의 여행 준비와 도강 준비 등으로 3일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대단히 긴장된 시기였습니다.

2. 유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명함(2~5절).

1) 여호수아가 유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명을 전달케 한 것입니다. 즉 2절에서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하므로 “출발 신호에 대한 것”과 반드시 “그 뒤를 좇을 것”을 알려주었고,

2) 4절에서는 “너희와 그 사이의 상거를 2,000규빗 쯤(약 1㎞) 되게 하여 그것(법궤)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 제사장들과 법궤와의 거리를 1㎞쯤 두게 하였을까요? 이것은 ①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과의 구별을 나타내는 뜻과 ② 법궤에 대한 거룩을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과 ③ 긴 단체 행렬이 전체적으로 제사장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혹이라도 어떤 백성이 망령되게 행하여 법궤에 가까이 오다가 화를 당할 우려도 없다 할 수 없을 것인즉 이상의 직무상 구별과 법궤의 거룩 보존과 명령적 신호를 전체가 목격할 수 있게 하는 뜻일 것입니다. 4절에서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제사장의 뒤를 따라야 함. 2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인도자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뜻을 설명하셨습니다. 성도의 가는 길도 역시 지나 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3) 5절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하였으니 도강시에 하나님의 기사(이적)가 있을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예고는 13절에서 제사장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나타날 때 백성들이 경성하고 자신을 성결케 함은 마땅한 준비 자세일 것입니다. 자기를 성결케 하는 것이 능력을 힘입는 자세이며 이 방법은 회개를 근거로 한 결례식으로 시행하는 것입니다(출 19:14, 22).

3. 여호수아가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명함(6~8절).

여호수아가 명할 것을 유사들을 시켜서 할 수도 있지만(2절) 가급적이면 지도자가 직접 말하는 것이 더 권위가 있을 것입니다.

1) 6절은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기를 “언약궤를 메고(고핫 자손이 메던 것을 직접 멘 것임. 8절) 백성 앞에서 건너라”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도자들로 하여금 솔선하고 모범을 보이며 또 인도자가 되게 하신 뜻입니다.

2) 7절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르시기를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는 것을 백성들로 알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세로 통하여 능력이 나타났고,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처럼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또 8절에서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요단 물가에 이르면 요단에 들어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강물에 무조건 발을 넣으라”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 위로 걸으라”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마 14:28~29).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멈추고 끊어지며 쌓이리라”는 말씀을 제사장들에게는 나타내시지 않았으나 9, 13절에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알려주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도자들이 무조건 모험적 순종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훈시함(9~13절).

1) 9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이리 와서(2절에서 유사들은 두루 다니며 증거 하였고, 여호수아의 훈시는 한 자리에 와서 듣게 하였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한 후 10절에서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7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일 일로 너희가 알리라”하시고, 11~13절에서 요단 강물이 끊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되는 것인 만큼 그 능력에 기인하여 가나안족들을 쫓아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11~12절에서는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언약궤는 하나이므로 세계를 포괄함)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12명을 택하라” 하셨으니 이 12명은 다음 장에서 지시하시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대표로 선정한 것입니다.

3) 또 13절에서는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물)을 밟고 멈추면 곧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설 것이라”고 하셨으니 홍해가 갈라진 역사를 들은 후손들이 큰 기대를 걸고 지켜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물을 밟고 멈춘 뜻”은 믿음의 모험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요단강을 건넘(14~17절).

1) 14절에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강을 향하여) 앞에 행하였고, 백성들도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에서 출발하였는데 15절에서 그 당시에 모맥(밀과 보리) 거두는 시기라 요단물이 항상 언덕에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왜 모맥 거둘 때는 강물이 많을까요? 이것은 농사용으로 쓸 물을 안 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런데 “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에 이르러 그들의 발이 잠기자 16절에서 위에서 흐르던 물이 그치고 다른 곳으로 흐르고 쌓였다” 하셨으니 이 다른 곳은 “사르단 가까운 아담읍 변방이라” 하셨고, 물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요단강 바닥에는 온전히 끊어져서 아라바의 바다 곧 염해(사해 바다)로 흐르는 물이 없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사르단, 아담읍 변방”이란 여리고의 북쪽 20㎞ 위의 “가룬살라베”란 평원이라고 합니다. 이 때에 흐르는 물이 그치고 쌓이게 된 것과 상류에서 물이 다른 곳으로 범람한 것은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역사하신 기적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을 지진이나 다른 현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4:18에서 목적이 끝난 다음 원상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3) 17절에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의 마른땅 바닥에 굳게 섰고, 온 백성은 마른 땅을 딛고 행하여 요단을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요단”이라고만 하시고 “강”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선민들이 마른 땅을 딛고 건넌 때문인 듯하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안심하고 건너가게 하기 위하여 끝까지 요단 가운데 머문 것을 보면 지도자들이 약자를 보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홍해를 건널 때 있었던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우선 인구수를 살피면 출애굽 당시에 계수한 603,550명(민 1:46, 장정 남자)과 비슷한 수인 601,730명(민 26:51, 발람 사건 후에 종족대로 계수함)인즉 많은 차이가 없으며 ② 홍해는 넓은 바다이지만 요단강은 크게 넓은 곳이 아니며 ③ 출애굽 때는 애굽의 추격군이 있었는데 요단을 건널 때는 대적 여리고성이 앞에 있었고, ④ 홍해는 강한 동풍으로 물을 갈라지게 하였으나 요단강의 경우는 흐르던 물이 쌓이고 또 다른 곳으로 넘치도록 역류시키셨으며 ⑤ 홍해 바다는 모세의 기도로 갈라진 후에 건넜고, 요단강은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제사장들이 순종으로 강물에 발을 딛자 물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⑥ 그러면 흐르던 요단 강물이 어떻게 정지되었을까요? 3:16을 보시면 “물이 변방에 쌓였다” 하셨고,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겼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1267. 12. 7.에 지진으로 10시간 흐름의 중단이 있었고, 1927년에도 21시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지진으로 지층이 변하여 물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면 원상 복귀가 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도강이 끝난 다음에 “요단물이 본 곳으로 여전히 흘렀다”(4:18) 하셨으니 지진의 역사보다는 바람의 힘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동풍을 일으켜 홍해도 가르신 일이 있었으니까요(출 14:21).

이 시대에 여호수아와 같은 사역을 할 자는 복음 사명 일선에 선 사역자들이고, 제사장과 같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교회의 중직자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지도력과 제사장들의 모험적 순종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자연을 다스리셔서 은혜도 베푸시고 재앙도 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도강 및 두 기념석 (수 4:1~24)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도강 및 두 기념석”으로 총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에 요단강 건넌 일이 기록되었고, 그 다음의 말씀은 전부 두 기념석을 세운 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① 1~8절은 “도강 및 열두 개의 돌을 취함”이요, ② 9~13절은 “요단강 바닥에 열두 돌을 세움”이며 ③ 14~18절은 “제사장들이 올라오고 강물이 다시 흐름”이요, ④ 19~24절은 “준비한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움”입니다.

1. 도강 및 열두 개의 돌을 취함(1~8절).

1) 1절에서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쳤다”하신 것은 18절의 제사장들까지 다 나온 것을 총괄한 말씀이고,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2~3절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12인을 택하여(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에 다시 내려가서) 제사장들이 섰던 그 곳의 돌 열둘을 취하여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곳에 두라” 하셔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명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은 제사장들이 그 장소에서 “요동치 않고 굳게 섰다”는 의미와 “그 장소의 의미”를 아울러 강조하신 뜻이 있다 할 것입니다. 요단강의 물이 다른 곳으로 흐른 면도 있지만 또 가까운 곳에는 쌓이기도 한 만큼 위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믿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정신으로 백성들이 다 건너고 또 명령이 있기 까지 그 장소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에 취한 돌은 한 사람이 운반하기에 가능한 정도로 몹시 큰 돌이 아닌 듯 여겨집니다. 또 이 12지파란 기업을 받은 12지파가 아닌 레위 지파와 요셉 지파를 포함하는 12지파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2) 4절 말씀은 “12인이 지파수 대로 각기 돌 하나씩 어깨에 메라” 하셨고, 6~7절에서는(그 돌을 길갈에 세운 후) 그 자손들이 그 돌을 세운 의미를 물을 때 “요단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진 사실을 입증하는 표징으로서 영영한 기념이 되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 일을 참고할진댄 기념도 중요하고 언약궤 자체의 권위를 믿게 하는 증표도 되며 또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발을 요단물에 디딘 사실도 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8절은 “명대로 시행하여 유숙하는 곳에 돌을 옮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기까지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멘 채 강바닥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2. 요단강 바닥에 열두 돌을 세움(9~13절).

1) 9절에서 여호수아는 또 열두 사람에게 명하여 요단강 바닥 즉 제사장들이 선 곳에 다시 내려가서 “돌 열두 개를 세우라” 하였고, 그대로 시행하니 그 돌이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오늘까지”란 요단 강물이 다시 흐른 후 여호수아가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를 의미하지만 이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만큼 오늘(이 시대)까지도 강 속에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바닥에 기념석을 세운 의미도 역시 길갈에 세운 뜻과 같을 것입니다. 현 시대에 그 유적이 발굴되면 성경의 역사적 확실성을 더욱 명확하게 입증함이 될 것입니다.

2) 10절 말씀은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도강이 끝나고 또 기념석 운반과 세우는 일이 끝나기 까지 요단 가운데 섰었고, 이 때에 백성들은 속히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기적이나 비상조치는 오래 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13절에서 (마지막으로)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나왔는데 거기에 앞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의 군사들 40,000명이 무장을 하고 다른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싸움에 대비하였다” 하시므로 그 군사들은 민 32:16~19과 신 3:18의 약속을 이행한 것입니다. 13절중에 “여호와 앞에서 건너갔다”는 뜻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은 뜻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식할 때는 역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하에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3. 제사장들이 올라오고 강물이 다시 흐름(14~18절).

1) 14절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시니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한 것처럼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성취하려 하실 때 사역자를 쓰시고 또 그 사역자를 크게 하시는 일이 있으니 이는 모세나 여호수아나 사사들과 사도들의 역사에서 나타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역자를 크게 하시면 그와 상대하는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큰 인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맡은 사역을 쉽게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지금이 과거보다 가장 세련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자를 두렵게 느끼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세련되지 못하였던 시절에 많은 성도들이 저를 “두렵게 여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저를 쓰시려니까 그렇게 인정받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세련됐다고는 하지만 과거 30대~50대처럼 다시 목회할 자신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무능한 자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는 크게 하여 쓰시는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2) 15~16절에서는 비로소 마지막으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을 요단에서 올라오도록” 하나님이 명하셨고, 그들은 요단에서 올라왔으며(17절) 18절에서는 “그들이 발바닥으로 육지(강 아닌 곳)를 밟는 동시에 요단물이 본 곳으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올라올 때 백성의 목전에서 올라왔은즉(11절) 그들이 육지를 밟는 것과 강물이 본래대로 흐르는 장관을 백성들이 다 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물이 원상 복귀된 것을 보아 이 능력의 성격이 지각 변동이 아닌 바람 같은 능력으로 물을 헤쳐 소급시킨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4. 준비한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움(19~24절).

1) 19절은 요단강을 건넌 후 첫 번 진을 친 일자와 장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1월 10일인즉 이 날은 출애굽 당시 유월절 행사를 시작한 날입니다(출 12:2~6). 그리고 광야 생활 40년으로 맞추어 인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친 장소는 여리고 동편 3㎞ 지점인 지경 “길갈”입니다. 이 길갈 이름의 뜻은 5:9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2) 20절에서 “준비한 열두 돌을 그 곳에 세우라”하여 세웠고, 그 돌을 세운 의미는 6~7절의 의미와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22절에서 너희 조상들이 “마른 땅을 밟고 요단을 건넌 표징”이란 것입니다. 23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홍해를 말리시고 건너게 하심과 같았다” 하시므로 요단강물의 갈라진 성격이 홍해의 경우처럼 바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홍해는 물이 갈라졌으나 요단강은 흐르는 물인즉 사해 쪽으로는 육지가 되었던 것입니다(3:16).

3) 24절에서는 하나님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또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으시는 성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으셔야 하겠고, 또 영원토록 빈틈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5 과 할례를 시행함 (수 5:1~15) 목록으로


본문 ① 1~9절은 “할례에 관한 말씀”이고, ② 10절은 “유월을 지킨 말씀”이며 ③ 11~12절은 “만나의 은혜가 그침”이고, ④ 13~15절은 “천사의 나타남”입니다. 대표적 제목으로 “할례를 시행함”으로 정하였습니다.

1. 할례를 시행함(1~9절).

1) 1절 말씀은 선민들이 요단강을 말린 이적에 의하여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듣고 “마음이 녹았으며 정실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주위 사람들은 “요단 서편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이고, 또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라”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쫓겨나고 전멸되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들이 “정신을 잃고 마음이 녹았다”는 것은 대항할 의욕을 상실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상태가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 바도 있고(3:7, 4:14), 또 13~15절에서 천사가 나타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역 백성들을 이렇게 나약하게 하신 이유는 그 땅을 선민들에게 주시려는 뜻도 있지만 이어 시행되는 할례시에 상처가 아물 수 있는 조용한 기회를 주시는데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시행되는 신앙적 행사인즉 하나님은 여기에도 안전의 은혜를 주시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이어서 2절에 보시면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다시 할례를 시행하라” 하셨고, 3절에서는 “할례산에서 그렇게 시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할례산”은 할례한 장소를 그렇게 부른 것이고, “다시 시행한 것”은 한 사람이 두 번하는 뜻이 아니고, 출 12:44에서 합류된 외인을 할례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또 하라는 뜻입니다. 선민의 아들들은 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합니다(창 17:10~12). 그리고 할례를 다시 시행해야 할 이유를 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한 장정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고, 새로이 출생한 남자들이 광야 생활 중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3) 6절에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므로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세한 땅을 볼 수 없게(주시지 않음) 하시기 위하여 그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 가지 40년을 광야에서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때(시간)와 역사를 관련하여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1:7). 또 7절에서는 “길에서(여행 중) 할례를 행하지 못한 사실과 멸절된 자들의 대를 잇게 하신 자손들이므로 할례를 시행한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자손들에게 까지 미치는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출 3:15, 시 100:5).

4) 8절에서는 “각 처소에서 할례 상처의 낫기를 기다릴 때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셔서 그 곳 이름을 “굴러 간다”는 뜻을 가진 “길갈”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란 “이방 종교의 잔재와 모든 죄악”입니다. 이것을 굴러가게 하신 것은 용서하셨다는 뜻이고, 그 근거는 할례를 시행함인즉 할례를 받는 뜻은 믿음과 회개와 새출발을 결심하는 증표로서 신약 시대의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깨끗한 방에 발을 씻고 들어가는 것처럼 할례로 가나안 땅에서의 새출발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2. 유월절을 지킨 말씀(10절).

선민들이 할례를 시행하고 또 길갈에 진을 친 다음 그 달 14일 저녁에 여리고 평지 곧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출 12:18~20에 나타난 40년 전 1월 14일에 시행한 것과 같은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장정들 대부분은 그 행사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는 신약 시대의 성찬 예식에서 잘 설명해 주십니다. 할례가 믿음의 증표라면 유월절 의식에 참여함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결심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의 새출발을 할례(세례)와 유월절 의식(성찬)으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3. 만나의 은혜가 그침(11~12절).

1) 11절에서 “유월절 이튿날(1월 15일)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그 땅의 산물로 준비한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만나 식물을 주신 것은 꼭 그것만 먹으라는 뜻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곡식을 구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만나를 이용한 줄 압니다.

2) 12절에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땅의 열매를 먹었다” 하시므로 만나가 전격적으로 또 전폭적으로 그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초자연 섭리가 분명하고, 또 하나님은 충분한 기회를 두고 대체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따라서 비상적 은혜는 언제나 일반 은총이 대체될 때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고전 13:10에서 무엇이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완전치 않은 것 또는 임시적 은혜)이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상 은혜(특별 섭리)는 일반 은총 만큼 안정적이거나 영구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4. 천사의 나타남(13~15절).

1) 13~14절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 자기 앞에 칼을 빼어든 사람을 보고 “너는 우리를 위하는 자냐 아니면 대적이냐?”한즉 “나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 장관 역할을 맡은 천사란 뜻입니다. 이 때에 여호수아는 땅에 엎드려 절하고 “주여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십니까?” 하였으니 여기의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 장관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이지만 하나님의 사자이므로 여호수아는 “주”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2) 이 때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 하셔서 그대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군대 장관을 보내신 것은 선민을 도와 싸우게 하시려는 뜻도 있고, 또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전달하게 하시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이 거룩한 것과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게 하신 것”은 출 3:5의 의미와 같다 할 것입니다. 출 3:5에 보시면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모신 처소는 다 거룩한 줄로 아셔야 하고, 또 하나님을 모신 성도는 항상 발의 신을 벗듯 자신의 성결을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님의 전이라”하신 말씀도 함께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6:19).

 

제 6 과 여리고성을 취함 (수 6:1~27) 목록으로


본문 6장의 말씀은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함락한 후에 라합의 가족을 구원하고, 은금동철의 기구를 구별한 다음 모든 사람과 우양과 나귀를 멸한 사실이 기록되었기로 총 제목을 “여리고성을 취함”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2절은 “굳게 닫힌 여리고성”이고, ② 3~16절은 “여리고성을 취하는 방법”이며 ③ 17~27절은 “성이 무너졌을 때 시행한 일”입니다.

1. 굳게 닫힌 여리고성(1~2절).

1)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을 불신앙의 생활로(계 11:8), 광야를 현실적 교회 생활로(행 7:38), 가나안 입국을 천국의 모형으로 비유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가나안 입국을 천국의 모형으로 비유하는 것은 선민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불신앙의 악조건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정착하기 때문입니다(수 1:13, 히 4:16). 이와 비슷한 예로 여리고성이 굳게 닫힌 것은 현실적 상태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인간 내심의 완악을 비유합니다. 출입하는 자가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열 수 있겠습니까? 또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그 성이 굳게 닫혔다” 하였으니 이는 인간 내심의 완악이 진리를 거부하는 현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피하고 숨는 현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 하시므로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함락할 수 있는 능력을 여호수아와 그 군사들에게 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 내심의 완악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성령님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가능함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지만 라합의 집에는 특별한 경우로 문이 열렸고, 구원의 진리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2. 여리고성을 취하는 방법(3~16절).

1) 여리고성을 취하는 방법에서 먼저 시행하게 하신 것은 백성들을 4군으로 분류하여 행렬을 지었으니 그 4군이란 군인들과 일곱 양각 나팔수 제사장들과 법궤를 멘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인데 군인들은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어 전체 백성들의 앞과 뒤를 방비하게 하였고, 전군 다음에 일곱 나팔수 제사장들이 서고 그 다음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섰으니까 일반 백성들은 법궤 뒤 즉 후군 앞에 행렬을 자리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노인들과 어린이들도 동참하였겠는가?하는 문제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예측 됩니다.

2) 여리고성을 돈 행진 방법은 첫날부터 6일 동안 침묵과 함께 매일 한 바퀴씩만 돌았고, 다음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연속으로 돌게 한 후 제사장들이 나팔을 붐과 동시에 외쳤을 때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10절에 보시면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치라” 하셨고, 20절에 보시면 “백성들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셔야 합니까? 첨부된 설교문(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뜻)에서 일부 말씀드렸지만 이 방법이 성 무너지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여러 바퀴를 돈 것이나 함성의 압력으로 성이 무너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밟는 땅을 주신다”하신 예언의 성취를 생각할 수도 있고(창 13:17, 신 1:36, 11:24), 또 하나님은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과 인내의 노력을 보셨고, 결국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성을 무너지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지진을 일으키실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하나님이 선민의 현실 생활을 안정시키시기 위하여 베푸신 이적인 동시에 영적 은혜를 힘입게 하시는 방법을 계시하신 뜻도 있다고 봅니다.

3)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11:12)는 말씀처럼 선민이 여리고성을 돈 것은 위협적 침노 행위임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성은 무너졌고 선민(성도)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이 대구 비산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집회소와 인접된 땅을 교회용 부지로 수용하기 위하여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친 후에 그 땅의 골목길을 돌았다고 합니다. 몇 년 후에 그 땅을 매입하여 세운 교회가 북비산 제일교회이고, 그 분은 김기준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여리고성을 전도 대상 또는 인간의 불신앙적 악심으로 비유하였을 때 이를 계몽하거나 감동을 주어 변화되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매일 노력하는 일이 그와 같아야 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① 그들은 6일 동안 침묵하였습니다.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많은 증거자들이 말은 많이 하고 실천은 뒤떨어집니다. 증언할 때는 예수님을 증언하였는데 자기의 생활은 예수님답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이 뜻은 전도를 입으로 하기 전에 생활로 하라는 뜻이지요. ② 그리고 결정적인 기회에 외치는 것입니다. 무엇을 외치게 하셨는지를 말씀하시지 않아서 퍽 궁금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 조상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인즉 너희는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구원하시면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 쓰신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요 8:6~8) 이 때에 외친 구호도 적당하게 상상해 보십시오. ③ 60만 넘는 군중이 6일 동안이나 그 성을 돌았다는 사실과 7일째에 일곱 바퀴를 돈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큰 인내와 노력과 단결이 아닐 수 없지요. 목회 사역자님들 중 이만한 노력을 하신 분들은 다 성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인내와 소망의 순종, 생활의 본과 질서 그리고 결정적 기회에 증거한 것(외침) 등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힘입는 관건이 된 것입니다.

3. 성이 무너졌을 때 시행한 일(17~27절).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시행한 일은 ① 기생 라합의 가족을 살리는 일이었고(17, 22~23절), ② 은금동철 기구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곳간에 드린 일이며(18~19, 24절) ③ 멸하는 일이요(21절), ④ 재건을 엄금한 일(26절)입니다.

1) 17절에 보시면 “라합의 집에 동거하는 자를 살렸으니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기 때문이라”하셨고, 또 22절에 보시면 “정탐한 두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게 하였으며 따라서 부모, 형제, 친척이 다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언약의 실천이요, 믿음 실천의 대가이며 그 집에 동거하는 자까지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 드릴 물건은 금은동철 기구뿐이요, 그것을 개인이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할까 두렵다”(18절)고 하셨습니다. 왜 금은동철만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은 그것을 취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혹 첫 성의 물질인즉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시기를 원하셨거나 또는 백성들의 물욕을 방지하시는 뜻일 것이요, 또 만일 금은동철을 개인이 취한다면 화평과 안보에 장애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멸하는 일로서 “남녀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고 하였습니다(21절). 하나님은 특정인들을 멸하실 때 반드시 심판의 섭리에 의하여 시행하셨습니다. 노아 홍수나 소돔의 멸망이 그 실례입니다(창 6:5~7, 18:20~21). 전체적 멸절은 그들이 7일 동안이나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은 완악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26절에서 여호수아는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말하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고 문을 세울 때 계자(季子:막내아들)를 잃으리라” 하였으니 여리고성은 영원한 저주의 성임을 알 수 있는 중 여호수아의 이 경고가 있은지 500년 후쯤인 아합왕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그 성을 건축하다가 예언대로 장자 “아비람”과 말자 “스굽”을 잃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니(왕상 16:34)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즉 그의 명성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능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명성도 나타나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 정복에는 많은 신비한 교훈이 있음을 아셔서 더욱 깊이 연구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 7 과 아간의 부정과 결과 (수 7:1~26)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아간의 부정과 결과”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절은 “아이성 전투 참패의 원인”이고, ② 2~5절은 “아이성 전투 참패의 내용”이며 ③ 6~9절은 “여호수아의 기도”요, ④ 10~15절은 “하나님의 응답”이고, ⑤ 16~23절은 “범인 색출과 아간의 자복”이며 ⑥ 24~26절은 “징벌과 그 결과”입니다.

1. 아이성 전투 참패의 원인(1절).

1) 아이성 전투 참패의 원인은 성물에 대한 부정 때문이었습니다. 수 6:18~19, 24절에서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반드시 “은금동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병사가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여 그 물건을 취하므로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자손들에게 진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범인은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엄중하고 성물은 구별되어야 하며 범죄의 정황을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는 사실과 또 하나님은 개인의 범죄를 연대적으로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2) 왜 개인의 범죄를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을까요? 선민 전체를 하나로 보시는 뜻도 있지만 백성들이 서로 감시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실수나 범죄에 대하여 연대적으로 책임을 묻고 징벌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정화에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이웃에 대한 책임이고, 또 사랑의 실천입니다.

2. 아이성 전투 참패의 내용(2~5절).

1) 2절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 있으면서 벧엘 동편 벧아원 곁에 있는 아이(성)를 정탐케 하였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하부에서 서쪽 12㎞쯤에 있고, 그 지역이 사해 북부에서는 서북쪽 15㎞쯤이며 여리고에서 벧엘은 10시 방향 20㎞쯤에 있습니다. 따라서 벧엘 동편 벧아원은 지도를 살필 때 벧엘의 5시 방향 7㎞쯤에 있으나(믹마스와 인접됨) 이는 동편 곁에 있는 것이 아닌즉 다른 곳 즉 벧엘 동편 가까운 곳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벧엘”의 뜻이 “하나님의 집”임에 반하여 “벧아원”은 “사악한 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보암왕 때 벧엘과 단에 우상신을 두면서(왕상 12:28~13:5) 그 이웃의 벧아원까지 영향을 준 결과라고도 합니다. 아이성은 벧아원 곁이고, 벧엘의 동남쪽 3㎞지점이므로 여리고에서는 10시 방향 9㎞쯤 됩니다.

2) 정탐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백성들이 다 올라가지 말고 2, 3천명만 올라가서 치면 될 만큼 소수 민족이란 것”입니다(3절). 그래서 넉넉한 수로 3천명쯤의 군사를 보낸 결과 그들 앞에서 도망하였고(4절), 아이(성)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군사를 36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이 지역은 아이성에서 여리고쪽으로 오는 도중에 있는 장소로 이해하셔야 함)까지 쫓아와서 백성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절 끝에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됨”은 얼음처럼 굳고 긴장된 마음이 의욕을 상실한 마음으로 풀어진 상태를 얼음이 녹은 것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쟁의 상황은 칼과 창(무기)에만 있는 것이 아닌즉(삼상 17:45~47)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호수아의 기도(6~9절).

1) 여호수아는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첫째의 방도(해결의 열쇠)로 알았습니다. 어려운 일이란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신다” 하셨고(수 1:3), 평탄하고 형통할 말씀도 주셨으며(수 1:8) 또 여리고성과 달라서 “3,000명쯤의 군사로 정복할 만 하다” 하였는데 그 반대의 결과를 나타냈고, 36명쯤의 군사까지 잃었으니 비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모세도 그러하였음. 민 11:10~18). 성도들도 그와 같은 방법을 모방하셔야 합니다. 기도로 해결의 맛을 알면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어떤 교회에서 가시처럼 괴롭히는 OO의 실권을 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기도를 한 다음에 그 담임 목사님이 그의 후퇴를 권고한즉 쉽게 응하더란 것입니다. “절대로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응했다”하면서 기도의 도움을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2)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비통한 자세를 취하였으니 곧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었으니”(6절) 이것은 통분한 표현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으로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머리를 풀고 구겨진 흰옷을 입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잡는 것처럼 그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몸에 뿌린 것입니다.

3) 기도의 내용으로는 7~9절에서 “주 여호와여 슬픈 지경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신 후 아모리인의 손에 붙여 멸망하게 하시렵니까? 차라리 요단 저편에서 살았다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이제 선민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형편을 안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끊으려 하면 어찌 하시렵니까?”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는 아무런 가식이 없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 가식 없이 사실대로 또 자기 생각대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경주자가 한 번 쓰러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것처럼 성도들도 한 번 실수하면 자기는 일어서기 힘들고 마귀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응답(10~15절).

1)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절) 하시고, 11절에서 전쟁에 패한 이유를 말씀하셨으니 곧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니 곧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개인의 범죄라도 이스라엘 단체의 범죄로 간주하신 것과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이란 수 1:7~9에 나타난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치우침 없이 다 지켜 행함과 동시에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고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의 군사 중에 이 명령을 위반한 자가 있었으므로 전체의 위반으로 간주하여 언약대로 평탄함을 거두신 것입니다.

2) 가나안땅의 정복은 이스라엘 한 사람의 일이 아니고 민족적 거사인 만큼 전체적으로 단결하고 순종하였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강 후에 정화 및 순결의 증표로 할례를 행하고(수 5:7), 유월절을 지킨 후(수 5:10)에 진격한 것인데 그 중에 범죄가 있었으니 어찌 유감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민족적 거사 앞에 개인의 부정은 전체에 화를 가져옴이 마땅한 것입니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은 하나님의 창고에서 훔쳤다는 뜻이고, “사기한 것”은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댄 뜻이며 “자기 기구 가운데 둔 것”은 자기 물건에 포함시켰다는 뜻입니다(11절). 12절에서는 그런 이유로 대적에게 패하고 돌아섰으니(도망하여 후퇴함)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함은 “자기들도 바친 것이 된” 복수형이고, 저주 받은 백성들과 물질에 연계된 자들도 같이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주의 대상을 “아간” 개인이 아닌 단체로 표시하신 것은 선민이 함께 벌 받은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3) 1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회개하는 자세) 내일을 기다리라” 하셨고, 또 “너희 중에 바친 물건(저주 대상으로 구별된 것)이 있나니 그 물건을 너희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고 하셨으므로 성도는 저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까이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14~15절에서는 범인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부분별 제비를 뽑게 하셨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큰 섭리가 발동된 것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일의 작정은 하나님이 하신다”(잠 16:33)는 말씀대로 이루어주신 것이고, 또 “그 범인과 그 모든 소유(물질)를 불살라 하나님께 언약을 어긴 망령된 일을 응징하라”고 하셨습니다. 공의의 발동과 응징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일입니다(출 32:29).

5. 범인 색출과 아간의 자복(16~23절).

1) 범인 색출의 과정은 14절에서 명하신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제비를 뽑되 부분별로 시행하여 축소한 것입니다. 먼저 지파별로 한 지파를 뽑고 그 다음 그 지파(족속)의 세대별로 한 세대를 뽑고, 그 한 세대 중 남자 중에서 한 사람을 뽑은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의 세라 족속, 삽디의 집 아간이 뽑혔으니 그는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이고, 갈미의 아들이었습니다(16~18절).

2) 19절에서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자복할 것을 명하였고, 20~21절에서는 아간의 자복이 있었습니다. 아간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노략한 물건 중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하였다”하고 그 감춘 것을 드러내어 보였습니다. 확실하게 자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날산 외투는 바벨론 제품을 뜻하는 말로(창 10:10) 좋은 것이지만 금지하신 은금동철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6:19). 문제는 은과 금을 훔친데 있었습니다.

3) 21~23절에서 “여호수아는 아간이 취한 물품을 인수하여 하나님 앞에 놓았다”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일을 확실하게 규명한 뜻입니다. 회개의 분명함을 나타낼 것을 교훈하심 인줄 압니다.

6. 징벌과 그 결과(24~26절).

1) 하나님의 징벌은 일벌백계였습니다. “아간과 그 자녀들과 그의 본래 소유인 소, 나귀, 양들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과 문제의 장물인 외투와 은금까지 다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온 이스라엘이 돌로 치고 불살라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다”고 하였습니다(24~25절). 가족은 물론 짐승과 물건까지 없앤 것입니다.

2) 25절에서 여호수아가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하신 말씀을 유의하면 성도가 성도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성도가 성도를 괴롭게 한 죄가 있다면 크게 벌 받을 일임을 알게 하시는 줄 압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시면서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아간과 아나니아 사건)의 특징은 회개할 기회 없이 응징하신 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데(벧후 3:9). 과도기이므로 그렇게 하신 듯 합니다. 선민의 가나안 정복의 시작이나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시는 시작은 다 중요한 과도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아골”이란 명칭은 “괴로움”의 뜻이라고 합니다(호 2:15). 죽는 자도 괴롭고 그 자녀까지 죽으니 더욱 그러하며 또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 위치는 여리고성 근방입니다.

4) 26절에서 “그 돌무더기가 오늘까지 있음”은 이 사건이 있은 후 상당 기간 뒤에 이 글이 기록된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한 결과 “하나님께서 극렬한 분노를 그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징벌은 하나님의 분노를 푸시게 하는 결과가 오며 또 성도들에게는 큰 경성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때는 순결과 부정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8 과 아이성을 정복함 (수 8:1~35) 목록으로


본문은 아이성 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7장에서 아간의 부정을 척결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아이성을 쳐서 정복하도록 허락하셨고, 복병 작전을 쓰는 일까지 알려주셨습니다.   ① 1~2, 18절은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이고, ② 3~8절은 “여호수아의 작전 명령”이며 ③ 9~23절은 “전쟁과 승리”이고, ④ 24~29절은 “대적을 처단함”이며 ⑤ 30~35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함”입니다.

1.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1~2, 8절).

1)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1절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며 아이왕과 그 백성을 다 네 손에 주었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라”는 것이었고, 2절에서는 “복병 작전을 쓸 것과 여리고왕에게 행한 것처럼(6:21) 처단할 것과 탈취한 물건과 가축을 스스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스스로 취하는 뜻”은 하나님의 곳간에 드리는 것(6:19)과 반대되는 뜻으로 “전쟁한 군인들의 몫으로 돌리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은 여호수아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할 때 복병 작전에 알맞도록 적당한 기회에 돌격할 것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복병이 숨어 있고 전군이 후퇴를 가장 할 때 18절에서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하셔서 그 신호를 계기로 복병은 일어나고 후퇴하던 전군은 돌이켜 대항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에 복병이 급히 일어나서 성읍에 들어가 점령하고 불을 놓았으니 이 때에 하나님은 결정적 기회를 이용하게 하시는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2. 여호수아의 작전 명령(3~8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에 의한 작전을 시행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지휘 하였으니

1) 3~4절에서는 1차적으로 “용사 3만 명을 뽑아서 아이 성읍 뒤로 가서 매복하되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예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성읍 뒤”라는 방향은 나타내 보이는 진격군의 반대 방향을 뜻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성읍 북편에 온 군대가 있었다” 하였은즉(출발은 동편에서 하였음. 13절) 3만의 복병은 그 반대(뒤) 방향인 서편 쪽에 매복시킨 것이요(9절), “멀리 하지 말 것”은 성읍 진입이 빨라야 하기 때문이고, “다 스스로 예비하라”함은 군인들이 다 자기의 장비를 스스로 해결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군사인 만큼 누구나 자기의 할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2) 5~7절에서는 2차적으로 “여호수아를 따르는 모든 백성(좇는 군사, 11절)은 다 (동편에서)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리하면 적군들이 처음처럼(7:4) 추격할 것이라 그때 우리(전군)가 도망하면 적들은 우리의 유인을 받아 성읍을 멀리 떠날 것인즉 그때에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고 한 것입니다.

3) 8절에서는 “그 성읍을 취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사르라” 하시므로 2절의 “여리고성의 경우와 같이 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3. 전쟁과 승리(9~23절).

1) 9절 말씀 “3만 명의 군사를 명령대로 아이 서편 즉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시키고 여호수아는 그의 군사와 함께 하룻밤을 잤은즉” 매복은 진격 전날 밤에 이룬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그 다음 10~11절에서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백성을 점고(일일이 확인하는 뜻)하고,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 앞에서 아이로 올라가고 그 뒤를 따른 군사들도 다 올라가서 아이 북편에 진을 쳤으니 군사들과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이 동편에서 출발하여 북편 쪽으로 올라갔다고 보아야 합니다(13절). 이 작전은 낮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3) 12~13절에서 여호수아는 “또 5,000명가량의 군사를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9절과 같은 방향)에 매복시키므로 이중으로 복병을 두고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아이를 향하여)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4) 14절에서 아이왕은 여호수아의 전면 군사들만 보고 싸우기 위하여 그 성읍 백성과 함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렀고(아라바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사해 주변 골짜기를 뜻함), 15~17절에서 “여호수아 군사들이 거짓 패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적군들은 그들을 따라오므로 성을 멀리 떠났으니 성문을 열어 놓은 채 이스라엘을 따르지 않은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5) 이 때에 하나님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단창을 들게 하여 복병을 일으켰고, 전군도 돌이켜 싸우게 하는 지시를 주셨습니다(18절). 이로 인하여 전군과 5,000의 복병은 적군을 무찌르고 3만의 매복군은 성읍에 들어가서 점령한 후 불을 놓게 된 것입니다(19절). 20~23절에서 아이성 사람들이 자기들 성읍에 연기 오르는 것을 보고 점령당한 것을 알았으나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였고, 돌이킨 군사들의 돌격과 성을 불태운 복병들의 추격으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으며 아이왕을 사로잡으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4. 대적을 처단함(24~29절).

1) 24~26절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광야로 추격해 온 적군들을 들에서 칼날로 다 진멸하였고, 아이에 들어와서도 다 죽이니 그 날 아이 사람의 죽은 남녀의 수가 12,000명이라” 하였고, 여호수아는 “아이의 거민을 다 진멸하기까지 단창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2) 27절에서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물은 다 백성의 몫으로 취하였고”(2절), 28절에서 “불사름 당한 그 지역은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어 오늘날까지(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까지 계속) 황폐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영원한 무더기”란 시체를 불태운 자리들을 계속 방치한 뜻입니다.

3) 29절에서 “아이왕은 칼로 죽여(24절) 저녁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율법대로(신 21:22~23) 해질 때에 그 시체를 성문 어귀에 던져 돌무더기를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명대로 진멸하고 심판받게 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함(30~35절).

이 부분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한 내용”인데 이는 감사의 뜻과 계몽의 뜻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 27:4~8에 나타난 모세의 명령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자 기념돌을 세운 것(수 4:19~20)도 역시 신 27:1~3에서 모세가 명한 것을 지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 행사는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더 원만하게 만드는 행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는 회개와 예배와 말씀 연구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1) 30절에서 여호수아는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에발산은 세겜 지역에 있는 920m 높이의 산으로 아이 지역에서 11시 방향으로 40㎞쯤에 있는 산입니다. 그 사이에 대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31~32절의 말씀은 신 27:4~8 말씀을 그대로 시행하였다는 뜻이요, 번제는 희생의 제물 드림을 뜻하고,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뜻이며 돌비석에 율법을 기록함은 백성들과 자손들에게 기념하고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33절에서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가나안족 중 귀순한 사람들) 뿐 아니라 이방인(여행 중에 합류한 사람들)까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반은 그리심산 앞에 반은 에발산 앞에 세우고(여호수아가 축복하였으니) 이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명한대로 함이라”고 하셨습니다(신 27:4~7). 34절에서 “그 후에 율법책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한 것”은 신명기 28장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3) 35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않은 말씀이 하나도 없도록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을 받은 것과 또 율법 전달에 충실하였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충성은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인도하는데도 충실하였고, 또 선임자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도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9 과 기브온족과의 약조 (수 9:1~2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총 제목은 “기브온족과의 약조”로 정할 수 있습니다. ① 1~2절은 “가나안 지역 왕들의 결성”이요, ② 3~13절은 “기브온족의 약조 청원”이며 ③ 14~21, 26~27절은 “약조와 실행”이고, ④ 22~25절은 “기브온족이 거짓으로 약조한 이유”입니다.

1. 가나안 지역 왕들의 결성(1~2절).

1) 여호수아의 군사(이스라엘 민족)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하고, 가나안땅 전체를 점령할 기세를 보였은즉 그 지역의 왕들의 불안은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별 왕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선민들을 대항하여 싸울 것을 다짐하였으니 여기의 가나안땅 전체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고, 그 땅에 분포된 헷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은 각 족속들로서 소왕국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출 3:8, 민 13:29, 신 7:1 등에서도 살피실 수 있습니다.

2)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은 가나안땅 전체를 지목한 것으로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말합니다(민 34:1~12). 블레셋이란 용어가 팔레스틴으로 와전되어 그 용어를 이스라엘의 전체 영토로 일컫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선민에게 허락하실 때 “그 곳의 여러 족속들과 아무 조약도 맺지 말라”고 명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출 23:32, 34:12, 민 33:35, 신 7:2).

2. 기브온족의 약조 청원(3~13절).

1) 그런데 기브온 거민들(이 거민은 히위족에 해당함. 7절)이 꾀(속임수)를 내어 가나안 일경이 아닌 먼 땅에서 온 사신들처럼 위장한 상태에서 여호수아에게 찾아와 약조를 청원한 것입니다(3~6절). 그들이 먼 땅에서 온 나그네 족처럼 위장한 이유는 선민이 가나안 일경을 점령할 땅으로 정한 것을 알기 때문이요, 또 나그네 족처럼 위장하려니까 사신(使臣, 보냄 받은 여행자)의 모양처럼 해어진 전대, 짧은 가죽 포도주 부대, 낡은 신, 낡은 옷, 마르고 곰팡난 떡을 예비하여 길갈 진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보이고 청원한 것입니다.

2) 여호수아는 처음 “그들을 히위 사람으로 알고 약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7절) 그들은 가나안 사람이 아니요, 먼 지방에서 여호와 하나님 및 선민의 명성을 듣고 종이 되기 위하여 찾아왔은즉 “여호수아는 우리를 살리고 우리는 선민의 종이 되는 것으로 약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7~13절). 여기에서 기브온족은 그들이 히위족이 아니요, 가나안 거민도 아닌 것을 물증으로 증거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그들이 히위족이고 가나안 거민임을 확증할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3. 약조와 실행(14~21, 26~27절).

1) 그리하여 14절에서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와 족장들의 실수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잘못 약조하고 하나님께 맹세한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18절). 확신이 없을 때는 언제나 묻고, 연구하여 시행하셔야 합니다. 그 때에 선민들은 “기브온족이 갖고 온 양식을 취했다” 하였으니 그 양식을 받으면서 그 덫에 걸려 호의를 표하려 한 것이 사실이고, 상대방의 물증을 확인할 자료가 없으면 반드시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행하지 않은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화친하고 살리기로 언약을 맺은 후(그들은 선민의 종이 됨) 회중 족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맹세를 한 것입니다(18절).

2) 15절에 보시면 “화친, 언약, 맹세”란 말이 나오고, 18절에서는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다” 하였으니 변할 수 없는 약조를 한 것인데 16절에 보시면 “3일 후에 그들이 근린(근처)에 거주하는 자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3일 후에 그들의 성읍인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엣롯과 기럇여아림에 간 것입니다(16~17절). 이상의 지역들은 다 3일 길에 해당하는 가까운 지역으로 기브온족의 연고지란 뜻입니다.

3) 18절에서 선민들은 거짓에 속은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이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성도의 명성도 같다 할 것입니다. 시 15:4에 보시면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서원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약조인데 이것도 변할 수 없거던 하물며 하나님과 자신들과 상대방과의 약조이겠습니까? 성도는 실천 가능한 것과 확실한 것에 대하여 약조하고, 또 약조한 것은 약조대로 실행하는 진실성을 보여야 합니다.

4) 18절 하반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회중은 다 족장들을 원망하였고, 19~21절과 26~27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맹세한 만큼 여길 수 없음을 설득하여 그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곳 즉 제사 드리는 곳에서 장작을 패며 물 긷는 일을 맡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우리가......여호와로 맹세하였은즉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하였고, 20절에서는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잘못한 맹세) 진노가 임할까 하노니 맹약대로 그들을 살리고”, 21절에서는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종을 삼기로 말한 것)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수로 맹약한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약속은 지키되 회중을 위한 제사 준비를 돕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4. 기브온족이 거짓으로 약조한 이유(22~25절).

1) 22~23절에서는 여호수아가 기브온족에게 “왜 우리 가운데(가까운 곳) 거주하면서 심히 멀다(먼 곳에 산다)고 속였느냐? 그 속임을 인하여 저주를 받으니 영영 종이 되고 하나님의 집에서 하인 역을 하게 되리라” 하였으니 이 질문과 선포는 그들의 속임 행위와 아울러 영원히 종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말이요,

2) 24~25절에서 그들은 대답하기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알았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멸하게 하신 것도 알려졌기 때문에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그리 하였으니 이제는 당신들 손에 있은즉 옳은 대로 처리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는 뜻이지만 그들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불확실한 것은 확신을 기하도록 하여야 하고, 약조는 주관적, 객관적 진실성 입증에 의거하여야 하며 또 반드시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 때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후 사울왕 때에 사울왕의 군사들이 다윗을 추격하기 위하여 다윗을 선대한 제사장 밑에서 종노릇 하던 기브온족의 후손들을 죽인 일로 하나님이 다윗왕의 치세에 큰 화를 내리셨고, 아간을 처치하듯 사울왕의 자손을 처치하여 그 진노를 푸신 사실이 있었으니 여기에 대하여 삼하 21:1~9을 본문으로 한 설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 10 과 기브온족과 연계된 승리 (수 10:1~4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면 ① 1~5절 말씀이 “가나안 5왕의 결성”이고, ② 6~15절은 “승리한 전쟁사”이며 ③ 16~27절은 “가나안 5왕을 처치함”이고, ④ 28~43절은 “여러 왕국을 쟁취함”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가나안 5왕을 정복한 경위가 기브온족을 구하기 위함이었은즉 전체의 제목을 “기브온족과 연계된 승리”로 정하였습니다.

1. 가나안 5왕의 결성(1~5절).

1) 가나안 5왕은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과 헤브론왕 호함과 야르뭇왕 비람과 라기스왕 야비아와 에글론왕 드빌인데 그들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취하고 또 큰 왕도와 성읍을 가진 기브온족이 선민과 화친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한 중에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이 주동하여 다른 4왕들과 합의하여 “선민과 화친한 기브온족을 치자”고 결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군을 모아 기브온성에 대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선민을 대하여 싸우려하지 않고 먼저 기브온을 취하려고 한 것은 같은 가나안 본토족으로서의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 여호수아의 군대와는 함부로 대항할 성질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먼저 기브온을 점령한 후 2차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2) 기브온족이 먼저 선민과 화친한 것은 불신앙의 본토족을 배신하는 뜻도 있지만 선한 일에 솔선하여 결단하고 개혁을 시도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거짓 수단을 써서 여호수아를 속이고 약속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선민의 종노릇을 할지라도 “살아남아서 선민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이것은 마치 믿음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따돌림 당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3) 가나안 5왕이 위치한 장소를 지도에서 확인하신 후 성경을 상고하시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0장의 연구를 위하여 그려 놓은 지도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을 대략 이해하신다면 가나안땅의 전체 넓이는 우리나라 강원도나 경상도만 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왕도는 군 단위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여부스”로 일컬은 “예루살렘”이(창 15:2, 수 3:10, 삿 19:10) 가나안땅의 대표 도성인즉 우선 사해 북부에서 9시 방향 25㎞쯤이 예루살렘임을 확인하신 후 그 곳을 중심하여 다른 지역의 위치를 살피시면 헤브론은 7시 방향 30㎞쯤에 있고, 야르뭇은 8시 방향 20㎞쯤에 있으며 라기스는 역시 7, 8시 중간 방향 45㎞지점이고, “에글론”은 라기스에서 서쪽으로 10㎞쯤에 있다고 기억하십시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11시 방향 10㎞쯤에 있습니다. 길갈은 사해 북변에서 11시 방향으로 12㎞쯤에 있고, 길갈의 서남방 2㎞쯤이 여리고성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5왕국은 전부 길갈 서남방 100리 어간에 있는 지역입니다.

2. 승리한 전쟁사(6~15절).

1) 6절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족 5왕의 군사들이 자기 성읍을 에워쌈을 보고 여호수아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니 다른데 의지할 만한 곳이 없었을 터이요, 살기 위하여서는 선민 군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기들도 힘써 싸워야 할 것입니다.

2) 이 때에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용사들로 더불어 기브온으로 올라갔으니 기브온을 사수하는 것이 곧 가나안땅을 점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셨고(8절),

3) 9~11절에서는 여호수아의 군사들이 길갈에서 8시 방향 25㎞쯤 되는 기브온으로 밤새도록 올라가서 갑자기 이른즉 하나님이 적군들을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이 도망할 때 벧호른 비탈로 올라가며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추격하였는데 11절에서 “벧호론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리시므로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벧호론은 게셀과 같은 지역으로(대하 8:15, 수 16:3, 5) 기브온에서 10시 방향으로 10㎞쯤에 있는데 약 3㎞를 상간하여 윗벧호론(동쪽의 언덕), 아래 벧호론(서쪽의 낮은 곳)으로 나뉘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 10절은 올라가는 벧호론에서 추격을 하였고, 11절에서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는 큰 우박으로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벧호론 사이는 3㎞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아세가”는 예루살렘에서 8시 방향으로 30㎞쯤에 있고, “막게다”는 같은 방향 32㎞쯤에 있습니다.

4) 하나님이 선민의 전쟁을 이기게 하실 때 기후 조건을 섭리하셔서 적군에게 타격을 주신 사실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 소돔의 유황불, 바로에게 나타내신 뇌성과 우박(출 9:23~24), 홍해 앞에서의 흑암 등이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삼상 12:17). 하나님은 자연계로 은혜를 베푸시지만 노하실 때는 그 대적에게 재앙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5) 12~15절에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실 때에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키셨으니 곧 태양과 달이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가나안 5왕)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목전에서 하나님께 고하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였으니 이는 백성 앞에서 드린 기도로서 “태양빛이 기브온에 더 오래 비취고 달도 아얄론 골짜기를 오래 비취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런즉 13절에서 “태양이 머물렀고 달이 그치기를(멈춤을 뜻함)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5왕이 선민의 원수가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므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일 수도 있고, 또 선민과 화해한 기브온족을 해하려 하였은즉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왜 태양빛과 달빛을 필요로 하였을까요? 그것은 이미 승전한 상태에서 쫓기는 적군들을 다 도륙해야 하는데 해가 지거나 달빛이 구름에 가리면 어둠을 인하여 적을 다 무찌르기 어려우므로 그렇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으로 “태양이 머물고 달도 그쳤다”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 지구의 자전이 상당 기간 멈춘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이 쉬지 않고는 해와 달이 정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상태를 구름이 가리지 않으므로 계속 밝음을 유지시킨 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이 선민에게는 좋은 조건을 대적에게는 안 좋은 조건을 주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적으로 “햇빛과 달빛을 연장시켜 주신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성경 본문에 부합하는 줄 압니다. 이런 사실은 사 38:8과 왕하 20:9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시 18:12과 욥 37장~38장을 참고해 보십시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시적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설명을 드리면 “종일 싸워야 할 것을 일찍 끝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간을 남게 해 주신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요, 또 어떤 이는 “태양이 머물렀다”는 뜻을 태양은 본래 머물러 있는 것인즉 “그 광선이 구름으로 인하여 비취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기도 하고(이 경우에 어두움을 인하여 적군이 도망하지 못하였을 것임), 또 어떤 이는 “해는 서산에 넘어 갔으나 반사적 굴절 광선이 오래 지속된 것이라”고 한다지만 14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무후무하였다” 하셨은즉 사실대로 믿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적 사건으로 증거한 문헌을 소개하면 주간 종교 6호 4면에서 본 내용인데 “미국의 메릴랜드 우주 연구소에서 태양계와 위성의 동태를 살피는 중 24시간이 흘렀으나 위성의 움직인 흔적이 없어서 고심하던 차 성경의 내용을 알게 된 후에 수 10:13에서 23시 20분, 왕하 20:10에서 40분(해 그림자 10°후퇴) 도합 24시간이 위성의 움직임 없이 지나간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6) 13절의 “야살의 책”이란 야살의 뜻이 “의로운 자”이므로 이를 “선민의 시집”이라고 합니다. 그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하니 실제적 사건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전쟁을 끝내고 길갈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15절).

3. 가나안 5왕을 처치함(16~27절).

이 부분에서 도망간 5왕이 막게다(소왕국, 28절, 야르뭇 서쪽 약 10㎞, 립나 북쪽 약 10㎞, 예루살렘 서쪽 약 30㎞ 지점임) 굴에 숨었다는 정보를 받고 군사들로 하여금 돌을 막게 하여 가둔 다음 하나님이 그들을 붙이셨으므로 그들의 성을 거의 진멸시켰고, 그 다음 “왕들을 끌어내어 죽인 다음 그 시체들을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지기 전에 그 굴에 넣고 돌을 막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시체를 나무에 단 것은 형벌과 경계의 뜻이 있고, 또 해 지기 전에 시체를 내린 것은 신 21:22~23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5왕은 선민과 맹약한 기브온족을 미워하다가 먼저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4. 여러 왕국을 쟁취함(28~43절).

이 부분 또는 이외의 여러 지역을 점령한 성경을 상고하실 때 우선 유의하셔야 할 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그때 그때 도우시는 역사, 그리고 군사들의 성실한 노력, 또 하나님이 그 지역 거민을 완악하게 하사 멸망 받도록 붙여 주시는 섭리가 있음을(수 11:19~20) 유의하신 후 어느 지역인지를 점검하시는 뜻으로 지도에 표기된 부분을 확인하심이 좋을 줄 압니다(출애굽 여정과 가나안 입국 또는 열왕 시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큰 지도가 있으면 성경 공부에 큰 도움을 줄 터인즉 그런 지도를 구입하여 공부하십시오.).

1) 28절에서 막게다왕은 가나안 5왕에게 숨을 곳을 제공한 때문에 우선적으로 멸망을 받았고,

2) 29~30절에서는 박게다 남쪽 10㎞쯤에 있는 “립나”가 정복되었으며

3) 31~32절에서는 5왕 중 하나인 라기스(10:3에서 설명됨)와 싸워 2일 만에 정복하였고,

4) 33절에서는 게셀왕 호람(게셀은 막게다에서 1시 방향 15㎞쯤)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하다가 역시 멸망당하였으며

5) 34~35절은 에글론(10:3에서 설명됨)을 점령하였고,

6) 36~37절은 헤브론(예루살렘에서 7시 방향 30㎞쯤)을 점령하였으며

7) 38~39절은 드빌(막게다 남쪽 약 30㎞ 지점, 헤브론에서 7시 방향 약 20㎞ 지점)을 정복하여 전과 같은 방법으로 처치하였습니다.

8) 40절에서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의 모든 왕을 진멸하였는데 여기에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에 대한 설명은 랑게 주석에 자세히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산지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뻗은 유다의 산을 뜻하고, 남방은 유다의 남방을 형성하는 평원이며(시 126:4) 평지는 욥바에서 가사까지 바다를 따라 펼쳐진 남 팔레스타인의 긴 땅이고, 경사지는 샘의 원천으로(민 21:15) 유다의 산이 낮아지는 지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9) 41~42절에서는 “가데스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쳤는바 하나님이 싸워주신 고로 그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고 길갈 진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43절). 여기의 고센땅은 가나안 남방의 한 지역으로 애굽의 고센땅은 아닙니다(창 45:10, 46:28). 이런 전과는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그 약속에 따라 협조하셨으며 군사들의 용맹한 싸움으로 승전하게 된 것입니다.

 

제 11 과 2차 저항 세력을 멸함 (수 11:1~23) 목록으로


1차 저항 세력은 10장에 나타난 5왕이었는데 이어서 2차 저항 세력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솔왕 야빈이 주동한 마돈왕 요밥과 시므론왕과 악삽왕과 및 북방 산지와 긴네롯 남편 아라바와 서방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동서편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산지의 여부스 사람과 미스바땅 헤르몬산 아래 히위 사람들의 결성이었습니다(1~3절). 그들이 군대와 민중을 해변의 수다한 모래처럼 또 많은 말과 병거를 이끌고 메롬 물가에 진을 쳤다고 하였습니다(4~5절). 이 역경을 돌파하고 승리한 것이 본 장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제 2차 저항 세력을 멸함”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5절은 “저항 세력의 집결”이고, ② 6~9절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승리함”이요, ③ 10~18절은 “진멸과 쟁취에 대한 말씀”이며 ④ 19~23절은 “진멸 섭리와 기업 확보”입니다.

1. 저항 세력의 집결(1~5절).

1) 여기에서 저항한 조속들의 근본을 연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살던 지역을 지도에서 점검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도록 하셔야 합니다. 어느 지역 거민들과 싸웠고, 또 그 점령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지도에서 “하솔”은 갈릴리 바다 북변에서 11시 방향 12㎞쯤에 있고, “마돈”은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메롬”을 뜻한다고 합니다. 메롬은 하솔에서 10시 방향 12㎞쯤이며 “악삽”은 가멜산 꼭지에서 4시 방향 10㎞쯤이며 시므론은 악삽에서 4시 방향 10㎞쯤에 있습니다. “북방 산지”란 납달리의 산(납달리는 갈릴리 바다에서 11시 방향 앞 쪽에 있음)을 뜻하고, “긴네렛 남편 아라바”는 “긴네렛”이 게네사렛(갈릴리 해변 11시 방향, 막 14:34)이므로 그 남편은 곧 갈릴리 호수 남편을 의미하며 “돌의 높은 곳”은 갈멜산에서 남쪽 해변 7㎞쯤에 있는바 그 곳에 높은 암석이 있다고 합니다. “동서편 가나안 사람”은 하솔왕이 자기 사는 고장에서의 동서를 말함이며 가나안, 아모리, 헷, 히위, 브리스 사람은 종족의 구별이고, “산지의 여부스 사람”은 2절의 북방 산지이거나 또 여부스가 옛날 예루살렘을 뜻하므로(창 15:21, 수 3:10) 북방 산지로 짐작됩니다. 또 “미스바땅 헬몬산 아래 히위 사람들”은 표현 그대로 헬몬산 아래 사는 미스바땅의 히위족이란 뜻입니다. 미스바는 성경에 다섯 곳이 있습니다(창 31:48~49, 본문, 수 15:38, 18:26, 감상 22:3). 결론적으로 이 저항 세력은 팔레스틴땅 북쪽 거민을 의미합니다.

2) 그들의 연합군이 메롬 물가에 온 것은 곧 마돈 지역이며 여기의 물이란 헬몬산에서 메롬쪽으로 흐르는 물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항 세력이 나타났으니 그들은 가나안 5왕의 멸망을 듣고도 여전히 대항한 것입니다. 악은 죽어도 저항을 택하는 완악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20절).

2.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승리함(6~9절).

1) 6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일 이 맘 때에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 시킬 것인즉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 병거를 사르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은 붙여주시는 시간과 방법(기습)과 결과까지 지시하셨습니다. 말과 병거는 필요할 듯도 하지만 하나님은 다 없애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선민이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신 것입니다(호 1:7, 시 33:17, 147:10, 사 31:1).

2) 7~9절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때를 기다렸다가(내일 이 맘 때, 6절) 급습하여 적군을 격파하였고, 큰 시돈과 미스브롯 마임 까지 또 동편으로는 미스바 골짜기 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태웠다”고 하였습니다. “큰 시돈”은 지중해변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인구가 많았음을 의미하고(19:18), “미스브롯 마임”은 두로와 악고의 중간에 있으며 그 지역의 좌표는 메롬에서 11시 방향 25㎞쯤 됩니다. 또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았다” 하셨는데 이 동편은 “미스브롯 마임”에서 동편 20㎞쯤이고, 메롬(마돈)에서는 1시 방향 25㎞쯤 됩니다. 말의 힘줄을 끊은 것과 병거를 불사른 것은 명령대로 시행한 것이며 적군의 중요한 병거를 쓰지 못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 20:1에서 “말과 병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은즉 그런 것들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3. 진멸과 쟁취에 대한 말씀(10~18절).

1) 10~14절에서 “하솔(야빈왕국)은 모든 나라의 머리(주동자요, 가장 큰 나라임)로서 모든 다른 왕들과 함께 칼로 쳐 죽인 후 주동자 하솔왕(야빈)만 그 시체를 불살랐고, 11절, 14절에서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죽였으며 건축된 성읍들은 불태우지 않았고(13절),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15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통과 그 이행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모세에게 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였는데.....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계시를 받았지만 이들이 다 특정인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하시므로 계시의 기초 사역을 말씀하셨고(엡 2:20), 또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라”(딤후 3:14) 하시므로 하나님이 쓰시는 자로부터 듣고 배워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본래부터 충성된 자이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성실하게 계명을 지켰던 것입니다(민 27:18, 수 24:15).

3) 16~18절에서 여호수아는 여러 날 동안 싸워 모든 왕을 쳐 죽이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니 그 지역은 “그 온 땅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전체적 범위를 말한다면)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 부터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 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범위를 살피면 할락산은 사해 남단에서 7시 방향 20~60㎞ 범위의 언덕을 뜻하고, “세일로 올라감”은 세일산 쪽으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세일산은 사해 남쪽에 있은즉 이는 점령한 땅의 남쪽 범위를 일컬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헤르몬산은 갈릴리 바다 북쪽 50㎞쯤 이고,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은 북서쪽의 경계를 일컫는 말로 헬몬산과 레바논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을 “바알갓”이라 한 것은 바알신을 숭배한 지역임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16절에 나타난 지역들은 다 그 경내에 있는 장소로서 10:40~41에 나타난 지명을 재론한 것입니다.

4. 진멸 섭리와 기업 확보(19~23절).

1) 19절에서 “화친한 성읍은 기브온족 외에 하나도 없었으므로 다 쟁취한 땅이라” 하셨고,

2) 20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함에 버려 두신즉(롬 1:24)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선민을 대항하므로 저주 받을 자가 되어 은혜를 힘입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하시므로 강퍅과 멸망과 승리와 축복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저주”의 뜻은 각주란에서 “바친 자”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들이 멸망함에는 예언 성취의 의미도 있으니 곧 신 20:16~17에서 “모세가 예언하고 명령한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21절에서 이 때에 진멸된 지역은 “산지(북방 산지일 듯, 11:2)와 헤브론(수 10:3, 5, 23)과 드빌(여리고 남방, 10:36)과 아납(드빌의 남쪽 6㎞쯤)과 유다 온 산지(예루살렘 남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예루살렘 북부의 산지들)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하고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아낙 사람에 대한 것은 건장한 사람들로서 민 13:22, 33에서 설명하였습니다.

4) 따라서 2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없었고, 다만 (미점령지인)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이 곳은 팔레스틴 서남방 지중해쪽 블레셋 지역임)에만 약간 남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 전역을 다 점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점령 지역은 장차 올무 될 연고를 남긴 것이라 할 것입니다(출 23:33, 신 7:16).

5) 23절에서 “이와 같이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신 20:16~17) 온 땅(블레셋 지역은 제외)을 취하여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을 주니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가나안 점유는 일단락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파별의 구별을 따라 기업을 준 내용”은 12장~19장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제 12 과 점령한 왕국과 그 지역 (수 12:1~24)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선민이 점령한 왕국과 그 지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① 1~6절은 “요단 동방 왕국과 그 지역”이고, ② 7~24절은 “요단 서편 왕국과 그 지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님들은 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우선 그 지역이 지도상으로 어느 지점인가를 점검하시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이 말씀이 기록됨으로 성도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요단 동방 왕국과 그 지역(1~6절).

1) 본문 6절을 보시면 2~5절에서 말씀한 지역들은 “모세 생존시에 그 땅을 쳐서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준 것이라” 하셨은즉 이 사실은 민 21:23~32, 32:33~42, 신 29:7~9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이라 하신 것을 보면 이 글을 요단 서편에서 기록한 것임이 나타나고, 그 저편 지역은 제목에도 나타난 것처럼 아르논 골짜기인데 요단 동편 땅, 남쪽 경계로 사해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수원을 둔 강의 골짜기를 뜻합니다. 그 지역부터 북쪽 헬몬산(갈릴리 바다 북쪽 약 50㎞, 다메섹에서 8시 방향 약 45㎞ 지점)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요단강 동편 두 왕들이 통치한 지역을 일컬음)를 짐령 하였는바 그 지역의 왕들은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이라고 하셨습니다.

3) 2~3절은 시혼의 땅을 그리고 4~5절은 옥의 땅을 재차 설명하셨으니 이는 요단 동편 땅을 남북으로 나누어 그 경계를 말씀하시되 남쪽은 시혼의 땅을 북쪽은 옥의 땅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아모리왕 시혼은 헤스본(사해 북단에서 2시 방향 20㎞쯤)에 거한 아모리족(이 족속의 근거는 알기 어려움)이며 그의 국경은 남쪽 아로엘(아르논 골짜기가에 있음)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성읍과 길르앗(갈릴리 바다 남단과 사해 북단 중간쯤에서 오른쪽 넓은 지역이 다 길르앗임) 땅의 남북으로 절반쯤까지인데 그 지역에 암몬 자손이 거주하였고(창 19:38, 수도는 랍바임. 삼상 11:1), 얍복강도 같은 경계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3절의 “또 동방 아라바 긴네롯 바다까지”란 뜻은 요단 동방 지역을 설명하므로 동방이란 용어가 쓰인 것이고, “아라바 긴네롯”은 아라바(사해와 아카바만 사이의 광야)의 한 편 지역을 의미한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동방 아라바의 바다 곧 염해의 벧여시못(사해 북단 2시 방향 약 5㎞)으로 통한 길까지”란 시혼의 영토의 북서쪽 경계를 지적한 말씀이며 “남편으로 비스가 산록까지”란 벳여시못에서 20㎞쯤 동남쪽인 산록을 의미합니다. 이 지역은 대략 짐작하실 때 사해 바다 동남부에 속합니다.

4) 4~5절은 “바산왕 옥”의 영토를 말씀하신 것으로 바산왕 옥은 르바족(르바족은 아모리족처럼 역사는 있으나 원조는 기록된 것이 없음)이며 아스다롯(갈릴리 바다 오른쪽 30㎞쯤)과 에드레이(갈릴리 바다에서 4시 방향 40㎞쯤)에 도읍하였고, 그의 영토는 “헬몬산과 살르가와 온 바산과 및 그술 사람과 마아가 사람의 지경까지 길르앗 땅 절반으로 시혼왕의 지경과 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헬몬산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갈릴리 바다 북쪽 60㎞쯤 이고, “살레가”는 갈릴리 바다에서 4시 방향 100㎞쯤이며 온(전체) 바산은 갈릴리 바다 동북쪽 넓은 지역이요, 그술은 갈릴릴 바다 동남쪽 근지이고, “마아가”는 갈릴리 바다 북쪽 25㎞쯤(하솔과 라이스 사이)인즉 이 지역들은 다 바산 지역의 동북쪽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르앗 절반이란 바산의 남편 경계로서 시혼왕과의 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길르앗땅은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에 요단강을 염두에 두시고, 그 동편 전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이상은 선민이 점유한 요단 동편의 지역을 의미합니다.

2. 요단 서편 왕국과 그 지역(7~24절).

1) 7~8절에서는 요단 서편에서 점령한 땅 전체의 경계와 그 지형을 말씀하셨습니다. 북쪽 경계는 요단 이편 곧 서편(글쓴이가 서편에 있었음을 뜻함)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11:17, 시돈과 헬몬산 사이에 있음)부터 세일(지도상에 세일산은 사해 북단과 서쪽 지중해 바다 중간쯤 있는데 이 곳은 예루살렘 서쪽 약 14㎞ 지점에 해당되나 본문의 세일은 할락산과 관련이 있으므로 이 지역은 사해 남단 남쪽 약 70㎞ 지점을 뜻함)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사해 남단에서 7시 방향으로 25㎞쯤임)까지인즉 이 지역은 서방 지역의 맨 남쪽 경계를 의미합니다.

2) 또 8절 말씀에서 “그 땅에는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사해 남쪽, 홍해 동북쪽의 아카바만에 이르는 함몰 지대, 낮은 곳)와 경사지와 광야와(여기까지는 10:40에서 설명하였음) 남방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이라” 하셨으니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은 9:1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여기에는 6 족속만 말씀하셨고, 31왕국에 대한 말씀은 다음 대지에 열거하셨습니다. 신 7:1과 수 3:10에서는 “기르가스”족속을 언급하셨지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작은 족속이어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 24:11에서는 8족을 기록하셨고, 창 15:21에서는 10족을 또 창 10:16과 대상 1:13~16에서는 11족을 기록하셨습니다.

3) 9~24절에서는 이상 소개된 점령지에서 소왕국을 이루고 있는 31왕을 소개하였은즉 가능한한 지역의 위치를 확인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1) 여리고는 수 6:12~25에서 설명 드렸고, (2) 아이왕 역시 7:2과 8:1~2에서 설명 드렸으며 (3) 예루살렘은 사해 북단에서 서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는 높은 언덕의 성읍으로 삿 19:10~11에서는 “여브스”, 겔 23:4에서는 “오홀리바”, 삼하 5:7에서는 시온성, 삼하 5:9과 눅 2:11에서는 다윗성이라고도 호칭하였습니다. (4) 헤브론은 아낙 자손이 살던 곳으로(민 13:22) 기략아르바 라고도 하며(수 15:13, 삿 1:10) 이 고장에 막벨라 굴이 있고(창 23:9, 50:13), 다윗의 첫 번 도읍지(삼하 2:11)로 예루살렘에서 7시 방향 28㎞쯤 됩니다. (5) 야르뭇 (6) 라기스 (7) 에글론은 앞에 있는 예루살렘, 헤브론왕과 함께 10:1~3에서 설명 드렸고, (8) 게셀은 10:33에서 (9) 드빌은 10:38에서 설명 하였으며 (10) 게델은 그랄과 같은 지역으로(창 20:1) 에글론에서 7시 방향으로 20㎞쯤 이고, (11) 호르마와 (12) 아랏은 민 21:1~3에서 설명한 것으로 헤브론에서 7시 방향 35㎞쯤에 두 지역이 동서로 자리 잡고 있으며 (13) 립나 역시 수 10:29에서 말씀드렸고, (14) 아둘람은 야르뭇 남쪽 10㎞쯤에 있으니 막게다, 야르뭇, 립나의 동남쪽에 있으며 창 38:1, 삼상 22:1~2, 23:14~17 등에도 기록되었고, (15) 막게다는 욥바 남쪽 23㎞쯤 이라 하는데 지도상으로는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수 10:10~28). (16)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쯤에 있고(창 28:19, 35:6, 수 16:2), (17) 답부아는 세겜에서 7시 방향 15㎞쯤이며 (18) 헤벨은 지중해변 가멜산 밑 돌에서 남쪽 25㎞쯤 이고, (19) 아벡은 욥바에서 2시 방향 15㎞쯤이며 (20) 랏사론은 알기 어렵고, (21) 마돈은 메롬과 같은 뜻으로 게데스에서 7시 방향 10㎞쯤, 하솔에서 10시 방향 10㎞쯤에 있으며 (22) 하솔은 마돈을 지적할 때 설명하였지만 갈릴리 바다 북쪽 20㎞쯤에 있고, (23) 시므론은 갈멜산에서 4시 방향 25㎞쯤이며 (24) 악삽은 갈멜산에서 4시 방향 15㎞쯤이고, (25) 다아낙은 갈멜산에서 5시 방향 32㎞쯤에 있으며 (26) 므것도는 갈멜산에서 5시 방향 25㎞쯤에 있고, (27) 게데스는 갈멜산에서 1시 방향 40㎞쯤이며 (28) 갈멜의 욕느암은 갈멜산에서 5시 방향 15㎞쯤에 있고, (29) 돌은 갈멜산 남쪽 해변 18㎞쯤에 있으며 (30) 고임은 앗수르 동방 고원 지대라 하나(창 14:1, 9)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없고, (31) 디르사는 갈멜산과 사해 북단을 선으로 그었을 때 그 중간쯤으로 사마리아 오른쪽 15㎞쯤에 위치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31왕국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짚어 보았습니다. 그 지역의 범위는 7~8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4) 문제는 저희들이 이 말씀을 읽으시면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할까 하는 점입니다. ① 하나님의 약속과 모세의 예언(신 3:21~22)대로 성취되었음과 ②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실한 투쟁으로 기업을 얻게 된 점과 ③ 많이 성취했지만 완전히 다 점령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11:22, 13:1~6) 계속 노력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는 사실이며 ④ 이 사실을 영적으로 비유할 때 가나안 정복을 성도의 옛사람 정복으로 비유하여 교훈을 받기도 합니다. 성도의 옛사람은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고전 15:31). ⑤ 18절에 보시면 산지, 평지(11:16), 경사지, 광야(10:40)가 있습니다. 성도는 산지와 경사지를 평지 되게 하여야 하고, 광야도 옥토가 되도록 마음의 인격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마 3:3, 13:19~23). ⑥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면서 감사하시고 보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기업에 대한 재설명 (수 13:1~33)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기업에 대한 재설명”이라고 총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나타난 지역들을 지도상으로 확인하는 일에 부담을 갖고 상당 기간 지연하다가 앞의 말씀들에서 지역에 대한 좌표를 여러 차례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는 적당히 잠작만 하시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본문 말씀을 분류하면 ① 1~7절은 “요단 서편의 남은 땅에 대한 말씀”이고, ② 8~13절은 “동편 기업과 남은 땅에 대한 말씀”이며 ③ 14, 32~33절은 “레위 지파의 기업에 대한 말씀”이고, ④ 15~31절은 “요단 동편 땅의 기업을 재설명하신 말씀”입니다.

1. 요단 서편의 남은 땅에 대한 말씀(1~7절).

1) 1절에서 여호수아와 그 군사들이 많은 지역을 점령한 것을 이미 말씀드렸지만 “여호수아는 늙었고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하여 여호수아에게 능력을 주셨지만(수 1:9, 3:7) 여호수아가 늙어 쇠약해지는 것까지 붙들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은 늙는 것이 순리이고(고후 4:16), 그 직임도 한계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 92:14을 보시면 “늙어도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여......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낸다”고 하셨은즉 사람이 젊었을 때는 그 젊음에 알맞은 일을 하고, 늙었을 때는 늙음에 알맞은 합당한 일을 하면서 인생 마지막의 일들을 잘 정리하고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많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인 줄 압니다.

2) 2~6절은 요단 동편 땅 중의 남은 땅을 말씀하신 것으로 “블레셋 사람의 온 지경과 그술 사람의 전경(곧 애굽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의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다섯 방백의 땅(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과 또 남방 아위 사람의 땅과 가나안 사람의 온 땅과 시돈 사람에게 속한 므아라와 아모리 사람의 지경 아벡까지와 그빌 사람의 땅과 동편 온 레바논(곧 헤르몬산 아래 바알갓에서부터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과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 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점령한 땅과 점령하지 못한 땅을 색깔로 구별한 지도가 있으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가나안땅을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은혜로 이해할 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는 말씀(마 11:12)이 기억나며 성도의 인격이 주님의 형상을 닮음에 있어서(롬 8:29) 영적으로 교훈을 받는다면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3) 6절 하반과 7절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그 남은 땅을 점령하게 할 것인즉 그것을 아홉 지파 반(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갓, 레위 지파를 제외한 아홉 지파)에게 분배하도록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늙었은즉 젊은 후배들에게 알릴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6절에서 “내가(하나님)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하셨은즉 선민이 계속 침노하여 점령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 구하는 것도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하셨거든 하물며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등한시 하면 안 될 것입니다.

2. 동편 기업과 남은 땅에 대한 말씀(8~13절).

1) 8~12절의 말씀은 선민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요단 동편 지경을 점령하여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먼저 분배한 땅입니다. 이 사실이 민수기 32장과 신 3:12~17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두 지파 반에게 주신 기업의 지경을 재설하신 이유는 다른 지파 특히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받은 지파 간에 영토 분쟁을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 13절에서는 동편 점령지 중 쫓아내지 못한 지역을 말씀하셨으니 곧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거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뿌리채 뽑지 않으면 항상 그 중에 남아 있음과 같은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뜻도 있고(민 32:33~42), 순결에 지장을 주는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 속에 세속적 요소가 개입되면 그만큼 성화에 지장을 준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약 4:7, 요일 2:17).

3. 레위 지파의 기업에 대한 말씀(14, 32~33절).

1) 14절에서 “레위 지파에게는......기업을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민 18:20)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뽑아 제사장 및 성전 봉사자를 삼으신 만큼(민 3:1~13) 그들로 일반 직업을 갖지 않게 하셨으므로 선민의 십일조(민 18:21)로 생활하게 하셨고, 또 제사장의 업무를 수종 드는 일로 인하여 화제물(제사 드리고 물려 낸 음식, 출 29:18, 30:20, 레 1:9, 13, 17)을 받아먹고 살도록 기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14절의 말씀은 요단 서편 땅을 분배할 때도 레위 지파의 몫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2) 32~33절에서는 요단 동편 땅을 분배하였을 때도 역시 레위 지파에게는 몫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민 3:1~13)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신다”하신 뜻은 하나님께 드린 것 즉 하나님의 거룩한 분깃으로 성전 봉사자의 생활비를 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제도는 성전의 제사 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시행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성전 제도의 계시적 의미가 끝났고, 성전인 예수님은 파괴되었으며(요 2:21) 따라서 성전과 관련된 제도도 끝난 것입니다(마 11:13, 롬 10:4). 그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십일조 제도는 교회 운영비를 위한 모금의 방법일 뿐이고, 성직자의 생활비를 레위 지파와 같은 것으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사명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좇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6:24).

4. 요단 동편 땅의 기업을 재설명하심(15~31절).

1) 이 부분에서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정된 기업을 민 32:1~5, 28~29, 33:42, 34:13~14 부분의 말씀보다 더 상세히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재설한 이유는 세 지파가 각각 자기의 영토 경계를 확인하고 지파 간에 분쟁하지 말며 받은 기업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15~23절은 르우벤 지파가 받은 기업을 말씀하신 것이고, 24~28절은 갓 지파의 기업을, 29~31절은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2) 여기에서 므낫세의 반 지파가 왜 요단 동편과 서편에 나누어 분깃을 받았는가?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인데 요셉이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가 되는 바람에(대상 5:1) 갑절의 기업을 받게 되므로(신 21:17)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기업씩 차지하게 된 것인데 므낫세에게는 본처의 소생 아스리엘과 슬로브핫이 있었고(그 외에도 또 있음. 수 17:1~2), 또 첩의 아들로서 “마길”이 있는데(대상 7:14~16) 이 마길이 무사적 용맹이 있었는지 요단 동편에서 모세의 허락을 받아 길르앗 지역을 점령하여 자기 아들 야일과 노바에게 그 땅을 준즉(민 32:39~42) 남은 아들들은 자동적으로 요단 서편에 가서 기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수 17:1~18).

3)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기업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형제간에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받은 기업을 잘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이 말씀을 재설한 줄로 압니다. 하나님이 성도 개인에게 주신 은혜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제 14 과 갈렙의 청원 (수 14:1~15) 목록으로


본문 1~5절은 “기업 분배에 대한 말씀”이고, 6~12절은 “갈렙의 청원”이며 13~15절은 “청원을 허락받음”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갈렙의 청원”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기업 분배에 대한 말씀(1~5절).

1) 1절에서는 선민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 그 분배하는 책임자가 있었으니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각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레위 지파의 족장은 제사장 외에 뽑은 일이 없고(민 1:3~16), 그들이 분깃을 받지 않으므로 족장 대열에 들지 않았다고 봅니다.

2) 2~3절에서는 기업 분배 책임자들이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 반에게 주었다” 하였는데 이는 민 26:52~56에 근거하여 다음에 말씀하는 기업 분배 사역의 서론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주었기 때문에(민수기 32장) 그 남은 지파가 9지파 반이 된 것이고, 또 레위 지파가 빠진 대신에 요셉 지파가 장자의 두 몫 기업을 받아(창 49:22, 대상 5:1, 신 21:17) 장자 므낫세와 차자 에브라임 자파로 나뉘어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3) 4절에서 레위 지파에게는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수용할 들만 주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대로라” 하시므로 기업 분배 책임자와 분배 받은 대상과 레위 지파에 대한 대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 중의 “레위 지파의 가축과 재물”이란 십일조와 예물로 드리는 짐승들과 곡물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을 관리하면서 성전 봉사와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2. 갈렙의 청원(13~15절).

1) 6절에서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왔는데 그 사람은 (유다 자손이면서)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때”란 것은 11~12장에서 가나안땅의 저항 세력과 그 주변 세력을 평정하고 남은 땅들을 차지해야 하는 시점이고, 9지파 반의 기업을 위하여 제비뽑기 전이었습니다. 수 13:1~5을 보시면 “남은 땅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길갈”에 있은 것은 이 “길갈”이 요단강을 건넌 지역으로부터 여리고성까지의 중간 지역인데 이 지역이 가나안땅 점령을 위한 최초 전초기지였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길갈에 사령부를 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수 4:19~22, 5:10, 10:7~9, 15, 43). 또 갈렙이 유다 자손으로서 “그니스(Kenites)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지역을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창 15:19에 근거하여 가나안의 어느 지역입니다. 따라서 그의 조상이 450년 전에 살던 곳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갈렙이 그 지역에 정착한 후 여호수아 문건이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갈렙과 여호수아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그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그 두 사람 뿐이었고, 또 출애굽 초기에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같은 뜻으로 성실한 보고를 한 이도 그 두 사람 뿐이며 따라서 그 당시에 모세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도 그 두 사람 뿐인데(민 14:1~10, 24, 30) 그 중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고, 갈렙은 그에게 복종하는 백성이 된 것인데 여기에서 “갈렙”은 충성된 백성으로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킨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셨습니다(잠 15:33, 18:12, 벧전 5:5).

3)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청원한 내용은 민 14:24, 신 1:36에 근거한 내용으로서 45년 전의 일을 회고하면서 모세의 약속 이행을 이루도록 청원한 것입니다. 즉 출애굽 초기에 “가데스바네아”에서 12 정탐을 보냈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성실한 보고를 하였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에(7~8절) 9~12절에서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네가 싸워 차지하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셨는데 현재 나의 나이 85세라도 건강하여 충분히 싸워 감당할 수 있은즉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산지(헤브론땅, 13절)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여호수아는 그 사실의 증인인즉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씀 한 마디라도 효력을 발하며 영원히 참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대로 승낙을 하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이 유다 지파에게 주는 것인가?할 때 9, 14절을 보시면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라”하신 것을 보아서 갈렙과 그 후손에게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유다 지파의 분깃에서 또 기업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6~14절).

4) 12절에 보시면 갈렙이 밟기를 원한 땅은 “산지이고 아낙 사람(건장한 사람, 민 13:22, 33)이 있으며 또 성읍은 크고 견고하다” 하였으므로 갈렙의 청원은 이기주의 발상이 아닌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 13절에서도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아르바요 아르바에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고, “그 땅에 전쟁이 없었다”하심은 선민을 대항하여 싸우려는 자들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배울 교훈은 ① 갈렙이 그의 성실성(정탐 보고)과 신앙성(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성의)으로 축복을 받은 사실이요, ② 그 축복의 성과가 45년 후에 나타난 점과 ③ 또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에게 건강을 주신 것과 ④ 축복도 싸워서 얻어야 하는 점과(마 11:12) ⑤ 갈렙의 요청이 이기주의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 실천에 더 비중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제 15 과 유다 지파의 분깃 (수 15:1~63) 목록으로


본문 전체를 살핀즉 ① 1~12절은 “유다 지파 분깃의 경계”요, ② 13~19절은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함”이며 ③ 20~62절은 “유다 분깃의 성읍별 통계”이고, ④ 63절은 “쫓아내지 못한 거민”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이 “유다 지파의 분깃”입니다.

1. 유다 지파 분깃의 경계(1~12절).

1) 이 부분에서 우선 생각할 것은 12지파의 분깃을 설명, 기록함에 있어서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 지파부터 설명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유다 지파의 특수성을 살펴야 합니다. 우선 창 49:8~12에 나타난 야곱의 예언에서 유다 지파가 강성할 것을 예언하셨고, 10절에서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치리자의 지팡이도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시므로 메시야 예언은 물론 (홀)지도자 입지에 있게 될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이며 그 다음에는 민 26:19~23에서 광야 생활 끝날 무렵에 각 지파의 인구를 계수하였을 때 유다 지파가 가장 많은 76,500명이었은즉 가장 강성한 지파이며 거기에다가 또 14장에서 유다 지파인 갈렙이 모세의 예언에 따라 헤브론땅을 받았기 때문에 그 기업과 함께 유다 지파의 기업을 먼저 설명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을 보면 “메시야 지파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만 그것이 특수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매번 유다 지파를 앞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2) 15장 전체에 나타난 모든 지명과 성읍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가?할 때 향방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만 지도상으로 점을 찍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헤브론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동쪽 경계는 사해 바다요, 서쪽 경계는 지중해이며 남쪽으로는 시나이반도 상단 부분을 많이 차지하였고, 북쪽은 예루살렘 남쪽과 사해 상단에서 서쪽 지중해로 연결되는 넒은 지역이고, 또 광야 황무지를 많이 포함하는 땅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12 지파의 분깃을 표기한 지도를 보시고 짐작하시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3) 1절의 “유다 자손의 지파”란 유다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의 자손을 의미합니다. 본처의 소생인 에르와 오난은 가나안땅에서 죽었고, “셀라”만 남았으나 그 다음에 자부 다말과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출생하였기 때문에(창 38:3~10, 30, 대상 2:3~5) 그 3형제의 후손이 많이 번성하였습니다(대상 2:3~7).

4) 본문 1절은 극남단 경계이고, 2~4절은 남단 경계이며 5절은 동편 경계이고, 5~11절은 북편 경계이며 12절은 서편 경계입니다. 동편은 염해, 서편은 대해(지중해)라 하였으니 이해하기 쉬우나 극남단은 에돔 지경과 신광야라 하셨고, 남편 경계는 시나이반도 북쪽을 의미하지만 그곳에서 시므온 지파의 기업도 주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수 19:1~9) 그리고 북단 경계는 사해(염해)와 인접한 요단 끝에서 서편 여러 지역을 거쳐 지중해에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2.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함(13~19절).

1) 헤브론(기럇아르바) 지역은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고(창 13:18), 모세와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준 땅인데(신 1:36, 수 14:13~15) 본문에서 갈렙이 그 땅을 점령할 때 최선을 다하여 싸운 모습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2) 그 지역에는 장대한 아낙의 소생(세새, 아히만, 달매, 14절)이 있었는데 갈렙은 자기의 군사들이 용기있게 싸우게 하기 위하여 그 지역 중 견고한 성읍인 “기럇세벨을 취하는 장수에게 자기의 딸 악사를 주어 사위를 삼겠다”고 까지 하였더니(15~16절) 갈렙의 아우 옷니엘이 이를 성취하였으므로 그 약속을 실천하였다고 하였습니다(17절). 그러니까 딸을 제수되게 한 셈이지요. 이런 근친 혼인은 그 시대에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가 그러하였지요.

3) 19절에서 “악사”는 삼촌 옷니엘에게로 시집을 가면서 “자신을 남방땅으로 보내시니(그 곳은 샘이 귀했던 모양임) 샘물도 주소서”하여 갈렙의 분깃에 있는 윗샘과 아래샘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 옷니엘(삿 1:12, 3:8~11)과 같은 사람인가?할 때 같은 사람임을 삿 3: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옷니엘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3. 유다 분깃의 성읍별 통계(20~62절).

1) 이 부분에서 20절은 서론이며 21~32절에서는 “남쪽(성읍)이라 하여 29 성읍과 그 촌락이라” 하였고, 33~47절에서는 평지(성읍)라 하여 39성읍을 기록하였으며 48~60절에서는 산지(성읍)이라 하여 34성읍을, 또 61~62절에서는 광야(성읍)이라 하여 6성읍과 그 촌락을 기록하였습니다.

2) 그런데 21~32절 부분에서는 29성읍이라 하였으나 헤아려 본즉 37성읍이고, 33~36절 부분에서는 14성읍이라 하였으나 헤아려 본즉 15성읍이며 45~47절에서는 에그론과 아스돗을 중심으로 한 모든 촌락이 수에 들지 않았으며 그 외에는 성읍과 수가 같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수의 차이가 있는 것은 두 이름 가진 한 성읍이 여럿인데 기록상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촌락은 가까운 성읍에 포함된 것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쫓아내지 못한 거민(63절).

63절에서 “예루살렘 거민이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하셨는데 여기의 “여부스”는 가나안족의 이름입니다(창 15:21). 그들이 나중에 이름 붙여진 예루살렘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지역이 본래 높은 지역으로 요새이다 보니 꾸준히 싸워 끝내지 못한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태만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부스왕 “아도니세덱”을 죽이고(수 3:10) 점령을 못하였으나 나중에 다윗이 점령하여 왕도를 삼았습니다(삼하 5:4~5, 대상 11: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으셔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땅을 받되 역사적 과정 안에서 투쟁하고 노력하게 하셨다는 점과 메시야 약속을 받은 유다 지파가 야곱의 예언대로 번성한 점과 갈렙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이어 큰 용기를 낸 점을 유의하실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려 할 때 눅 3:4~5에서 “그 첩경을 평탄케 하되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며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 질 것이라” 하였는데 그때 세례요한은 유다 광야를 의식한 듯 합니다.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이 그렇게 평지, 산지, 광야, 골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땅이 험준한 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선민의 심령과 환경이 험준할 것을 예언하신 뜻이 있는 듯 하고, 따라서 이 땅이 평지가 되고 대로가 되어야 할 것은 메시야의 사역으로 구원받은 심령이 정지(평평함)되어야 할 것을 계시하신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제 16 과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 (수 16:1~10) 목록으로


본문은 짧은 내용이지만 10절을 제외하고는 1절 초두의 말씀처럼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기업 경계의 내용”입니다. 요셉 자손은 알려진 대로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이고(창 41:51~52), 제비를 뽑은 것은 가나안땅을 9지파 반에게 분배하기 위하여 적당하게 지역을 분정한 다음(18:6, 지도를 그림) 통상적 방법으로 추첨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의 9지파 반이란 뜻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미리 기업을 받은 만큼 그 남은 지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① 1~4절은 “요셉 자손의(남은 지파의) 경계”이고, ② 5~9절은 “에브라임 자손”의 경계이며 ③ 10절은 “쫓아내지 않은 이방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므낫세 반 지파의 서쪽 경계는 17장에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1. 요셉 자손의(남은 지파의) 경계(1~4절).

1) 1~2절에서 “요셉 자손”은 4절에서 “므낫세(반 지파를 뜻함)와 에브라임이 기업을 얻었다” 하셨으므로 그 대상을 의미하고, 경계 설명의 시발지를 알리는 장소로 여리고(요단강 하류 서쪽, 사해 북단에서 11시 방향으로 약 15㎞ 지점), 요단, 곧 여리고 물(여리고에는 “에스슐탄”이란 큰 샘이 흐름), 동편(요단강 서쪽임) 광야로부터 서쪽으로 여리고 산지(구릉 등 지형이 험함)를 지나 벧엘(여리고에서 10시 방향, 약 20㎞ 지점)에 이르고, 그 곳에서 룻스(luz, 지역을 확인하기 어려움)에 이르고(창 28:19, 벧엘의 본 이름), 또 아렉 사람(근거를 알기 어려움)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 “아다롯”은 5절에 나타난 아다롯앗달(ataroth addar)과 같은 지역이나 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므로 그 다음 지역인 벧호론(3절)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짐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2) 3절에서는 지역 미상한 “아다롯에서 서쪽 야블렛(japhletites, 지역 미상) 사람의 경계에 이르러 아래 벧호론 곧 게셀에 미친다” 하였으니 야블렛도 아다롯처럼 벧엘과 벧호론 사이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게셀”은 벧호론과 가까운 지역으로 여리고 서쪽 45㎞쯤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아래 벧호론”이라 한 것은 윗 벧호론도 있다는 뜻이며 윗 벧호론과 아래 벧호론의 위치는 서로 2㎞쯤 떨어져 있는데 동쪽 높은 지역이 윗 벧호론이고, 서쪽이 아래 벧호론입니다. 이 지역은 벧엘에서 7시 방향으로 12㎞쯤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끝은 바다라” 하였으니 이는 그 경계선이 벧호론에서 서쪽 지중해까지 약 30㎞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이상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유전선이 동서로 연결된 것처럼 여리고 동편 광야에서 서쪽 지중해까지의 남쪽 경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머지 경계는 다음 절에 계속 됩니다.

2. 에브라임 자손의 경계(5~9절).

1) 5~7절에서 에브라임 자손의 경계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요셉 자손의 경계 중에서 먼저 말씀하신 것으로 “그 경계는 동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호론에 이르고 (윗 벧호론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북편 믹므다에 이르고(믹므다는 세겜 남족 5㎞쯤, 벧엘에서는 북으로 25㎞쯤) 동편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다아낫은 믹므다의 동쪽 8㎞쯤, 실로는 다아낙에서 7시 방향으로 15㎞쯤) 야노아 동편을 지나고(야노아는 다아낙에서 7시 방향 5㎞쯤) 야노아에서 아다롯과 나아라로 내려가서 여리고와 요단으로 나가고(나아라, naarah, 미확인)

2) 또 8절에서는 “답부아 (믹므다에서 7시 방향 10㎞쯤)에서 서편으로 지나 가나 시내에 미치나니 그 끝은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가나 시내”는 요 2:1의 가나(cana)가 아니고 kanah 시내(河水)로써 “답부아”(실로에서 10시 방향 10㎞쯤)에서 서쪽 지중해로 흐르는 강(brrok stream)을 의미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상의 부분을 기업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지명을 지도상으로 찾아 보았으나 금을 긋고 경계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명시해 놓은 지도를 보시고 짐작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3) 9절에서는 “(에브라임의 기업이 적은 듯 하므로) 므낫세 자손의 기업(17장에서 설명됨)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별한 모든 성읍과 촌락도 있었다” 하셨으니 여기에서 나누어 준 명목의 말씀은 없으나 형제 우애의 본을 보인 것이 확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쫓아내지 않은 이방족(10절).

10절에서 “그들(요셉 자손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족을 쫓아내지 아니 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게셀”은 3절의 “벧호론 곧 게셀”이란 말씀에서 설명 드렸고, 그 곳의 가나안족을 쫓아내지 않음은 하나님의 뜻을 거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이방인들의 습관과 우상을 따르지 못하게 하시고(출 23:24, 신 7:25, 레 18:26~27), 그들은 저주 받은 종족인즉(창 9:25~26) “무자비하게 멸하라”(신 7:2, 2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전쟁의 부담과 그들로 종을 삼기 위한 목적으로 방심한 줄 압니다. 그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보암왕 때는 우상적 자율 제단을 쌓은 일까지 있었으니까요(왕상 12:25~33, 13:1). 또 출 23:33, 34:12, 신 7:16, 수 23:13 말씀도 읽어보십시오.

이상의 내용에서 유의하실 것은 창 48:19~20에 근거 “므낫세 자손보다 에브라임 자손이 더 큰 자가 되고.....여러 민족을 이루리라”하신 예언에 따라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할 수 있으며 “더 큰 자가 되고....여러 민족을 이룸”은 북방 왕국의 원조 여러보암왕을 두고 예언하신 줄 압니다(왕상 12:20). 르호보암왕 때에 분리된 북이스라엘이 비정통국가로 탄생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앗수르에 멸망당하는 때까지 특별 통치를 해 주셨고(왕하 18:9~12), 또 “그들이 여러 민족을 이룬다”하심은 먼저 정복당한 북왕국의 백성들이 각국에 흩어져 아랍 계열 국가에 분산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또 르우벤 지파가 므낫세 지파의 기업 중에서 성읍을 더 얻어야 할 이유는 제비를 뽑아 지역을 선택하되 “명수대로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게 하라”(미 26:53)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비례로 볼 때 므낫세 지파보다 땅이 좁으므로 그렇게 한 줄 압니다.

 

제 17 과 므낫세 지파의 분깃 (수 17:1~18) 목록으로


여호수아 16장은 요셉의 차자 에브라임 지파의 분깃을 말씀하신 것이고, 본 장은 요셉의 장자 므낫세의 분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 4에서 “요셉의 자손”이란 말씀이 두 번 나오고, 17:14, 16절에서도 “요셉의 자손”이란 말씀이 두 번 나오는데 이는 두 지파의 기업을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16:4, 17:14~15). ① 1~6절은 “므낫세 지파에게 분깃을 준 과정”이고, ② 7~11절은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경계”이며 ③ 12~13절은 “쫓아내지 못한 부분”이요, ④ 14~18절은 “두 지파의 합동 청원”입니다.

1. 므낫세 지파에게 분깃을 준 과정(1~6절).

1) 1절 말씀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먼저 기업을 받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요, “므낫세를 위하여 제비 뽑았다”는 것은 12 지파 중에서 제비를 뽑은 뜻이 아니고,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요단 동편 땅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그 남은 반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를 포함하여 뽑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요셉 지파에게 한 제비, 한 분깃만 주셨다”는 뜻은 16:1에서 제비뽑은 것으로 두 지파를 합한 제비를 뜻합니다. 이는 므낫세 반 지파가 미리 분깃을 받는 바람에 남은 반 지파의 제비 뽑는 몫이 없어진 것을 뜻하고, 따라서 두 지파 통합 제비(요셉 지파로)를 뽑은 다음 그 지역을 에브라임 지파와 남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주게 된 것입니다. “마길이 므낫세의 장자요 무사로서 요단 동편의 땅 길르앗(므낫세의 손자도 길르앗임. 1절)과 바산 지역을 얻었다”는 말씀은 민 32:1~42과 수 1:12~18, 4:12~13에서 이미 설명한 것입니다.

2) 2절에서 “므낫세의 남은 자손”이라 하셨는데 이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받지 않은 므낫세 반 지파를 의미합니다. 요단 동편 땅은 므낫세의 첩의 소생 “마길”이 무사이기 때문에 그 지역을 먼저 점령한 것인데 그의 형제 “야일”과 “노바”도 함께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민 32:39~42). 그리고 남은 자손에 대하여는 아비에셀 자손, 헬렉 자손, 아스리엘 자손, 세겜 자손, 헤벨 자손, 스미다 자손을 말씀하셨는데 이 중 “아스리엘”이 처의 소생이라 하였은즉(대상 7:14) 짐작컨대 요단 동편 반 지파는 첩의 자손들이 먼저 차지한 듯 하고, 남은 반 지파는 처의 자손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대상 7:14~19에 나타난 므낫세의 계보를 참고 하면 므낫세의 처첩들 중에서 낳은 자녀들이 많은 듯 하고, 또 딸만 낳은 “슬로브핫”은 므낫세의 현손(4대손)이라 하였는데(3절) 대상 7:15에서는 슬로브핫을 므낫세의 둘째 아들이라 하므로 상당 부분 건너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3절에서는 “슬로브핫”의 계보가 므낫세→마길→길르앗→헤벨→슬로브핫으로 나타났는데 2절의 “헤벨”이 므낫세의 아들 아스리엘과 나란히 거론된 것을 보면(대상 7:14~15) 같은 계열의 아들인 듯도 하고, 또 몇 대를 건너뛴 후손들과 구별 없이 기록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슬로브핫의 다섯 딸의 기업은 민 26:33에도 기록되었습니다.

4) 4~6절에 나타난 내용은 요단 서편 므낫세의 기업 중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분깃 준 것을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민 26:29~32). 4절의 “아비 형제 중에서 주었다”는 뜻은 삼촌의 명의로 다섯 딸의 분깃을 주었다는 뜻이요, 5절의 “동편 길르앗과 바산 외에....열 분깃이 돌아갔다”는 뜻은 요단 서편 땅의 나누인 구획, 열 지역을 주었다는 뜻이며 여기에 슬로브핫의 다섯 딸의 분깃이 포함된 것을 말씀하셨고(6절), 또 6절의 “길르앗땅(마길이 먼저 점령한 요단 동편 땅)이 므낫세의 남은 자손에게 속하였다”는 뜻은 길르앗땅이 므낫세의 첩의 소생 마길이 점령한 땅이지만(그 지역이 넓으므로) 므낫세의 남은 자손(2절, 마길 이외의 형제 자손들)들도 그 땅에서 기업을 받았다는 뜻이요, “그 남은 자손 중에서 기업을 얻은 까닭”이란 뜻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서편에 속한 므낫세 반 지파의 땅에서 기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명의는 삼촌 명의로, 4절).

2.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경계(7~11절).

1) 7절에서 “므낫세(서쪽 반 지파)의 경계는(르우벤 지파의 경계 북쪽으로) 아셀(asher, 가멜산 북동쪽 넓은 지역)에서부터 세겜(사마리아에서 5시 방향 12㎞쯤) 앞 믹므다(세겜의 남쪽 6㎞쯤)에 미치고 우편으로 가서 엔답부아(entappuah, 확인할 수 없음) 거민의 땅에 이른다” 하셨고, 8~9절에서는 “답부아땅(이 tappuah는 벧엘 북쪽 18㎞쯤에 있음)은 므낫세에게 속하였으되 므낫세 경계에 있는 답부아 읍은 에브라임 자손에게 속하였으며(16:9) 또 경계가 가나 시내(16:8)로 내려가서 그 시내 남편에 이르나니 므낫세의 성읍 중에 이 성읍들(16:9)은 에브라임에 속하였으며 므낫세의 경계는 그 시내(16:8) 북편이요, 그 끝은 바다며 또 10절에서 그 남편은 에브라임에 속하였고 북편은 므낫세에 속하였으며 바다가 그 경계가 되었고 그들의 땅의 북은 아셀에 미쳤고 동은 잇사갈에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므낫세 지파의 땅 북쪽의 경계를 말씀하신 것으로 북서쪽은 아셀 지파의 땅에(중간은 스블론 지파의 땅에) 또 동북쪽은 잇사갈 지파의 땅에 접한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서 짐작하는 상태로 이해하셔야 할 줄 압니다.

2) 11절에서는 “잇사갈 지파의 땅과 아셀 지파의 땅에도 므낫세 소유가 있음”을 말씀하신 내용으로 벧스안(bwthsheam)과 그 향리(주위에 있는 동리) 외에 이블르암(Ibleam)과 돌(Dor), 또 엔돌(Endor), 다아낙(Taanach), 므깃도(Megido)와 각 그 향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섯 성읍 중 어느 것이 잇사갈 지역에 있고, 어느 것이 아셀 지역에 있는지도 지도를 살펴보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벧스안”은 갈릴리 남단에서 7시 방향 25㎞쯤에 있고, “이블르암”은 므깃도에서 5시 방향 20㎞쯤에 있으며 “돌”은 갈멜산 남쪽 24㎞쯤 이고, “엔돌”은 갈릴리변에서 8시 방향 20㎞쯤(므깃도에서는 2시 방향 20㎞쯤)에 있으며 “다아낙”은 므깃도에서 5시 방향 8㎞쯤이고, “므깃도”는 갈멘산에서 5시 방향 35㎞쯤에 있은즉 이 성읍들을 지도상으로 확인하면 이 지역들이 전부 므낫세 지역 안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잇사갈과 아셀도 므낫세 소유가 있다”는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연구하셔야 하고, 또 11절 끝 부분에서 “세 높은 곳이라” 하셨는데 주석에 보면 “이 세 높은 곳”은 엔돌과 다아낙과 므깃도를 의미한다고 하나 영문 번역에는 “세 높은 곳이라”는 의미가 나타나지 않았고,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므낫세가 잇사갈과 아셀 땅에서 소유한 지역으로) “그리고 네벳의 ⅓이다”로 번역하므로 한 부분이 더 있는 것을 표기하였은즉 역시 연구가 더 필요한 줄 압니다.

3. 쫓아내지 못한 부분(12~13절).

12~13절에서 “므낫세 자손들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본토 주민)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다 쫓아내지 못한 원인에 대하여는 16:10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선민이 강성한 후에.....사역을 시켰다”는 말씀에서 이 말씀이 상당 기간(강성할 때까지) 후에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보다 강해야 상대를 어거할 수 있습니다(마 12:29, 눅 11:21~22).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마귀보다 강한 무장을 하셔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엡 6:10~11, 요 16:33).

4. 두 지파의 합동 청원(14~18절).

1) 14절에서 요셉 지파(므낫세, 에브라임)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큰 민족 된 것을 말하고, 한 제비, 한 분깃 뽑은 것을 여호수아에게 이의 신청을 한 것입니다. “큰 민족이 되었다”는 뜻은 인구가 85,200명(므낫세 52,700명, 에브라임 32,500명, 민 26:34, 37)으로 유다 지파의 인구(76,500명, 민 26:22)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고, “한 제비, 한 분깃”이란 것은 16:1에서 요셉 자손 명의로 한 번 뽑은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17:1에서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뽑은 것”은 그 자손들끼리 뽑은 것입니다(17:1~3). 이렇게 된 이유는 므낫세 반 지파(마길의 후손)가 요단 동편에서 제비 뽑는 절차 없이 먼저 기업을 차지한 연고로 남은 반 지파에게 제비 뽑을 특권 주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두 지파를 통합하여 한 번 뽑게 하고, 그 뽑은 지역 안에서 분배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2) 15~18절에서 여호수아는 그 이의 신청에 대하여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가 좁으면 큰 민족된 명분으로 솔선 모범하여 “브리스, 르바임 땅과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구에 비할 때 초원이나 농토가 적은 것을 문제 삼은 듯 합니다(16절). 그리고 가나안 사람 중 벧스안(11절)에 거하는 자들과 이스르엘(영어 표기는 Jezeel, 헬라어로는 에스드라엘론이라 하며 수넴에서 남쪽 6㎞쯤 므깃도에서는 4시 방향 15㎞쯤 됨)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어서(점령하여 개척하기) 어렵다 한즉 여호수아가 다시 말하기를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가나안족 브리스, 르바임족이 점유한 지역)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면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브리스, 르바임족은 가나안에 사는 족속으로(창 13:7, 14:5) 그 뿌리를 알기 어렵고 “한 분깃만 가지라”한 것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먼저 기업을 받은 연고를 참작한 듯하며 그대신 강한 족속은 강한 힘을 발휘하여 미점령 지역을 스스로 점령하여 개척할 것을 명하였으니 이는 창 49:22에서 야곱이 예언한대로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 하였고, 또 24절에서는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다”하신 예언대로 성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한 힘을 받은 자는 그 강한 힘을 활용하여 자기의 기업을 넓힐 것을 명한 것입니다. 마귀가 비록 철병거를 가졌다 할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히 할 수 있다”(빌 4:13)는 믿음으로 용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벤야민 지파의 기업 (수 18:1~2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요단 서편에서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와 거기에 앞서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포함하여 다섯 지파에게 기업을 준 다음 남은 일곱 지파(2절, 벤야민, 시므온, 스블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에게 기업을 분정함에 있어서 ① 1~10절은 “7지파 기업 분정에 대한 서론”이고, ② 11~28절은 “벤야민 지파의 기업”을 먼저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1. 7지파 기업 분정에 대한 서론(1~10절).

1) 1~2절에서 다섯 지파의 기업 분정을 끝낸 다음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된 만큼 하나님의 성소를 세우고 법궤와 제단을 안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로”는 벧엘에서 동북 15㎞쯤에 위치한 곳으로 그 곳에 379m 높이의 언덕이 있고, 현재는 그 지역을 “세이룬”으로 호칭한다 하니 그 언덕 위에 간이 성소를 세웠을 것으로 이해되고, 그 성소가 여호수아 때부터 사무엘 선지자 시대까지 존속하였습니다(삼상 3:21~4:11). 여호수아는 이 회막 앞에서 제비 뽑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6절).

2) 여호수아는 3절에서 남은 지파의 기업 분배를 위하여 지체하지 않도록 명하되 4, 6절에서 매 지파에 3인씩 뽑아 도합 21명을 남은 땅에 파송하여 일곱 각 지파에 분정할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습니다. 5, 7절은 “레위 지파(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분깃임. 7절)를 비롯하여 이미 기업을 받은 지파를 재확인하는 내용”이고, 8~10절은 “지도를 그려온 다음 실로의 성소에서 제비를 뽑아 분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분배의 1차적 방법이고, 그 분배된 지역이 혹 인구 비례와 맞지 않을 때는 재고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런 사례가 16:9, 17:15에 나타나 있습니다.

2. 벤야민 지파의 기업(11~28절).

1) 11절에서 벤야민 지파의 기업은 유다 자손과 요셉(에브라임) 자손의 중간 지역인바 12~14절은 북방 경계(에브라임 기업에 접한 곳)요, 15~19절은 남방 경계(유다 기업에 접한 곳)요, 20절은 동방 경계로서 요단강임을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서편 경계가 없는 이유는 서쪽 끝 지역인 기럇여아림(14절)에 남북의 경계가 뾰족한 모양으로 맞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북쪽 경계와 남쪽 경계의 지역을 살피면 되고, 21~28절 까지는 그 지파가 받은 14 성읍의 명칭을 말씀하셨습니다.

2) 북방 경계는 “요단에서부터 여리고 북편으로 올라가서 서편 쪽으로 산지를 넘어 벧아원(벧엘에서 5시 방향으로 7㎞쯤, 믹마스에서 8시 방향 1㎞쯤에 위치함) 황무지에 이르고 또 그 곳에서부터 룻스(곧 벧엘이라 함, 12절)를 지나 남편으로 내려가서 아래 벧호론(16:5) 남편 산 곁을 지나고 또 서방으로 돌아 남편으로 향하여 유다 자손의 성읍 기럇바알(바알신을 섬기는 성읍, 수 15:60) 곧 기럇여아림(삼림의 성읍이라고도 함, 이 곳은 예루살렘에서 10시 방향 14㎞쯤에 또 윗 벧호론에서 남으로 10㎞쯤에 위치함)에 이르러 서방 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3) 남방 경계는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서편으로 나아가 넵도아(예루살렘에서 10시 방향 6㎞쯤, 현재 ‘라후다’라 함) 물 근원(샘이 있다 함)에 이르고 르바임 골짜기(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 방향으로 있는 넓은 고지 평원) 힌놈의 아들로 골짜기 앞 산 끝으로 내려가서 여부스(예루살렘의 옛 이름) 남편에 이르러 엔로겔(예루살렘 남쪽 기드론 시내 옆)로 내려가고 또 북향하여 엔세메스(예루살렘 동쪽 4㎞쯤)로 나가서 아둠빔(엔세메스 옆) 비탈 맞은 편 글릴롯으로 나가서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까지 내려가고(이 곳들은 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성읍들임) 또 북으로 아라바 맞은 편을 지나 아라바(사해 남방의 긴 골짜기)로 내려가고 또 북으로 벧호글라(사해 북단 11시 방향 5㎞쯤, 여리고에서 5시 방향 8㎞쯤) 곁을 지나서 요단 남단에 당한 염해의 북편 해만이 그 경계의 끝이라”고 하였습니다. 16절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란 뜻은 영어 성경에는 “아들”이란 용어를 나타내지 않았고, 공동 번역은 그 지역을 원문대로 “벧힌놈(벤은 아들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수 15:8에서 설명 드린 줄 압니다. 유대왕 아하스는 이 장소에서 자녀를 불살라 몰록에게 제사를 드렸다 하며(대하 28:3) 요시야왕은 이것을 금지시켰습니다(왕하 23:10). 나중에 그 곳은 사형 집행장이 되었다고 합니다(렘 7:31~32). 벤야민 지파의 기업은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넓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4) 벤야민 지파가 차지한 성읍들은 여리고와 벧호글라와 에멕그시스와 벧아라바와 스마라임과 벧엘과 아윔과 바라와 오브라와 그발암모니와 오브니와 게바까지 12성읍과 그 촌락이고(21~24절), 또 기브온과 라마와 브에롯과 미스베와 그비라와 모사와 레겜과 이르브엘과 다랄라와 셀라와 엘렙과 여부스(곧 예루살렘)와 기부앗과 기럇까지 14성읍과 그 촌락으로 도합 26성읍과 그 촌락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지명들은 다 벤야민 지파의 기업 안에 있을 것인즉 자세히 표기된 지도가 있으면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기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 17:26, 창 13:14~17). 그리고 한 가지 더 특기할 것은 신 33:12에서 모세가 벤야민 지파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라” 하셨는데 여기의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심”이 바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는 곳에 거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성전(교회)을 가까이 함은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9 과 기업 분배의 완료 (수 19:1~51)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시므온 외 다섯 지파에게 기업 분배를 완료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9절은 “시므온의 기업”이고, ② 10~16절은 “스블론의 기업”이며 ③ 17~23절은 “잇사갈의 기업”이고, ④ 24~31절은 “아셀의 기업”이며 ⑤ 32~39절은 “납달리의 기업”이고, ⑥ 40~48절은 “단의 기업”이며 ⑦ 끝으로 49~51절은 “여호수아가 받은 기업”입니다.

1. 시므온의 기업(1~9절).

1) 1, 9절을 보시면 시므온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음을 알고(스스로 양보하여) 시므온 지파로 하여금 기업을 얻게 한 다음 그 가족대로(1절)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이 제비를 뽑은 의미는 정당한 분깃을 놓고 제비 뽑은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가 양보한 분깃 안에서 자손별로 어느 성읍을 가질 것인가?를 제비로 뽑은 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 지파는 왜 고유 분깃을 못 받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에 대하여 칼빈 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시므온 지파는 살육죄를 범한 일이 있고(창 34:25), 창 49:5에서 야곱이 아들들의 후일을 예언할 때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 하였고, 또 신명기 33장에서 모세가 12지파를 축복할 때는 시므온 지파가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에 의하여(갈 6:7, 고후 9:6) 잔해를 심었은즉 기업도 허술하게 받은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2) 유다 지파가 자기들 분깃을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넓은 지역을 받은 이유도 있지만 그 지역은 광야가 많기 때문에 인구 밀도를 필요로 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이 지파의 분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경계선을 말씀하시지 않고 성읍들과 그 촌락들만 말씀하신 것은(다른 지파도 그런 곳이 있음) 역시 황무지가 많은 탓으로 경계와 넓이를 중요시 하지 않은 줄로 사료됩니다.

3) 그리고 받은 기업의 성읍들은 “브엘세바 곧 세바(헤브론에서 7시 방향 40㎞쯤)와 몰라다(브엘세바에서 동쪽 8㎞쯤), 하살수알과 발라와 에셈, 엘돌랏, 브둘, 벧말가인데 이 지역을 확인하기 어렵고 호르마(헤브론에서 7시 방향 40㎞쯤)와 시글락(헤브론에서 7시 방향 30㎞쯤, 브엘세바에서는 1시 방향 20㎞쯤)과 벧말가봇과 하살수사와 벧르바옷과 사루헨 13성읍과 그 촌락이며 또 아인(브엘세바 동북 14㎞쯤 현 움엔루마밈)과 림몬(헤브론 서남 29㎞쯤 현 움엔라마민), 에델(ethel), 아산(ashan) 네 성읍이고, 또 남방 라마 곧 바알랏 브엘(홍해 남단에서 8시 방향 40㎞쯤)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설명 드리지 않은 지역은 확인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라마”란 곳이 같은 영문 글자(Ramah)로 예루살렘 북쪽 9㎞쯤에 있지만 그 지역은 시므온 지파 기업 성읍에 해당되는 곳이 아닙니다. 여하튼 시므온 지파의 기업은 유다 지파 기업에서 18성읍을 차지하였으되 유다 기업의 남방 지역으로 아시면 될 것입니다.

2. 스블론의 기업(10~16절).

1) 스블론 지파의 땅은 갈멜산과 갈릴리 바다 중간에 위치하면서 남쪽으로는 므낫세의 경계에 서쪽으로는 아셀의 경계에 동북쪽으로는 납달리 경계에 접하여 있습니다. 10절의 “사릿”은 경계 설명의 시발지로 가멜산만에서 5시 방향 28㎞쯤 갈릴리 바다에서는 8시 방향 32㎞쯤에 위치합니다. 11~13절에서는 “그 곳으로부터 서편으로 6㎞쯤 올라가서 마랄라가 있고, 또 10시 방향 2㎞쯤에 답베셋이 있으며 거기서 서쪽으로 4㎞쯤에 욕느암이 있고 또 사릿에서 동편으로 2시 방향 10㎞쯤에 기슬롯다볼이 있고 또 동북 8㎞쯤에 다브랏이 있으며 아비야는 사릿에서 1시 방향 6㎞쯤에 있습니다. 또 아비야에서 1시 방향 8㎞쯤에 가드헤벨이 있고, 림몬은 가드헤벨에서 북으로 8㎞쯤이며 가시와 네아는 그 사이에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14절에서는 “북으로 돌아 한나돈(림몬 서쪽 7㎞쯤)에 이르고 입다엘 골짜기(한나돈의 서남방)에 이르러 끝이 된다” 하셨고, 또 15절에서는 갓달, 나할랄, 이달라가 그 주위에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시므론(답베셋에서 2시 방향 6㎞쯤)과 베들레헴(예수님 탄생지가 아니고 시므론에서 11시 방향 5㎞쯤)이 있다 하셨으니 그 지역들을 지도에서 쉽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 13절에서 이 성읍들은 12개라 하셨은즉 소개된 18개 지역 중 6처는 성읍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창 49:13에서 야곱이 예언하기를 “스블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라” 하셨는데 여기에 명시된 지역은 서편에 아셀 지파의 땅이 지중해 시돈항 쪽을 막고 있은즉 예언대로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그 지역은 아셀 지파의 기업임) 직업적인 면에서 지중해 쪽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잇사갈의 기업(17~23절).

잇사갈 지파의 기업은 “갈릴리 바다 남쪽 요단 서편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납달리, 서북쪽에 스블론, 동남쪽으로는 므낫세 지파의 땅에 인접되어 있고, 16성읍이며 이스르엘은 갈릴리 남단에서 7시 방향 30㎞쯤에, 수넴은 이스르엘 북쪽 10㎞쯤에 하바라임은 수넴 동쪽 10㎞쯤에 기시온은 다볼산 남쪽 2㎞쯤에, 언간님은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서쪽 9㎞쯤에 엔핫다는 벳세메스에서 서쪽으로 3㎞쯤에 벳세메스는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7시 방향 6㎞쯤에 다볼은 언간님에서 8시 방향 12㎞쯤에 사하수미는 벳세메스에서 7시 방향 8㎞쯤에 있고, 끝은 요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지명 중 그술롯(chesulloth)과 시온(shion)과 아나하랏(anaharath), 랍빗(rabbith), 에베스(ebez), 레멧(remeth), 벧바세스(bethpazzez)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대략 범위를 안즉 그 안에 있겠지요. 그들이 갈릴리 바다 남쪽의 비옥한 땅을 차지한 것은 창 49:14~15에서 야곱이 예언한바 대로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서 꿇어 앉은 긴장한 나귀 같으며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길 것이요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길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아셀의 기업(24~31절).

1) 아셀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갈멜산 남쪽 30㎞쯤의 지점부터 갈멜산 북쪽 약 50㎞ 지점까지의 동편 땅으로 현재 레바논의 영지와 비슷한 경계를 갖는다고 생각하십시오. 본문에는 26처의 성읍 또는 지역 이름이 나옵니다. 아셀은 지파 이름이고, 르홉이 두 번(28, 30절) 거론되며 “22성읍이라” 하셨은즉 네 지명은 성읍이 아닌데 26절의 갈멜과 스블론(지파 이름)과 입다엘 골짜기 외 한 지역일 것입니다. 여러 지역을 다 지도상으로 확인하였으나 에브론(28절, ebron)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영문 표기로 다르게 나타난 에브론(epbrain)이 각각 다른 곳으로 두 곳이 있음을 유의하십시오(대하 13:19, 수 15:9). 그러나 본문의 “에브론”은 전후에 거론된 지역에 인접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2) 순서대로 지역을 확인한다면 “헬갓”은 갈멜산만에서 5시 방향 18㎞쯤 이고, 할리는 동장소에서 4시 방향 12㎞쯤이며 베덴은 동장소에서 5시 방향 10㎞쯤이고, 악삽은 베덴에서 7시 방향 3㎞쯤이며 알람멜렉(allam melech)과 아맛(amad);과 벧다곤(bethdagon)은 근방에 있을 것이나 움마(ummach)와 함께 확인하지 못하였고, 미살은 갈멜산만에서 2시 방향 10㎞쯤이며 갈멜은 지중해변에 호미곳처럼 뾰족하게 나온 부분이고, 시훌림낫은 갈멜산만에서 5시 방향으로 뻗어간 강줄기를 뜻하며 스블론은 지파의 이름이고, 입다엘 골짜기는 할리에서 4시 방향 7㎞쯤 되며 벧에멕은 갈멜산만에서 1시 방향 20㎞쯤으로 그 곳에서 서남 해변에 악고가 7㎞쯤 되고, 또 5시 방향 6㎞쯤에는 르홉이 있습니다. 느이엘은 르홉에서 4시 방향 5㎞쯤이고, 가불은 느이엘 남쪽 4㎞쯤이며 에브론(ebron)은 알기 어려운 중 성경에는 다른 에브론(epbrain)이 두 곳 또 있습니다(대하 13:19, 수 15:9). 르홉은 갈멜산만에서 1시 방향 12㎞쯤이고, 함몬은 지중해변의 악고와 두로 중간 쯤에 있으며 “가나”는 요 2:1의 가나(cana)가 아닌 kanah로서 함몬에서 2시 방향 15㎞쯤이고, 큰 시돈은 갈멜산만에서 북쪽 해변으로 70㎞쯤(시돈에서 두로는 30㎞쯤)이며 라마는 갈릴리 바다 서북변에서 10시 방향 15㎞쯤이고, 두로는 갈멜산만에서 50㎞쯤 됩니다. 호사는 두로의 남족 4㎞쯤에 있고, 악십은 갈멜산만과 두로의 중간쯤의 해변 항구이며 아벡은 갈멜산만에서 2시 방향 10㎞쯤에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다 지도에서 지명을 찾아 보시라는 뜻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3) 창 49:20에서 야곱이 예언하기를 “아셀은 자기에게서 생산한 기름진 식물로 왕을 공궤할 것이라” 하셨고, 신 33:24에서 모세는 “그의 발걸음이 기름짐에 다닐 것이라” 하셨는데 그 예언과 축복대로 좋은 바다, 좋은 땅을 받게 된 것입니다.

5. 납달리의 기업(32~39절).

1) 납달리 지파가 받은 기업의 동쪽은 갈릴리 바다 하부에서부터 갈릴리 바다의 북쪽 수원을 따라 라이스(19:47)까지 약 40㎞쯤 되고, 라이스에서 서쪽 아셀 지파의 경계까지 약 20㎞쯤 되며 또 그곳에서 남쪽 스블론 경계까지 약 40㎞쯤 되고, 그 남편 경계는 스블론 땅을 돌아서 갈릴리 바다 남단으로 이어집니다. 이 땅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 33:23에서 모세가 축복하기를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읍들은 모두 “19성읍이라”고 하였은즉 본문에 나타난 성읍 아닌 지역을 꼽는다면 요단(33절), 스블론, 아셀, 유다(34절, 지파 이름) 외에 또 네 지역이 성읍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우선 본문에 나타난 지명 중 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락굼(32절, lakkum), 훅곡(34절, hukkok), 싯딤(35절, ziddim, 이 싯딤은 영문 표기가 다른 siddim이 또 있음. 민 33:49, 창 14:3, 수 2:1), 세르(zer), 에드레이(37절, edrei, 같은 지명으로 민 21:33에도 있으나 다른 곳임), 엔하솔(enhazor), 믹다렐(38절, migdalel), 호렘(horem)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다 아는 지역의 주변 성읍으로 예측하시면 됩니다.

3)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읍들을 말씀드리면 헬렙은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서쪽으로 15㎞쯤에 “사아난님(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은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7시 방향으로 5㎞쯤에 아다미네겝은 동장소에서 10시 방향으로 13㎞쯤에 얍느엘은 동장소에서 서쪽으로 17㎞쯤에 아스놋다볼은 동장소에서 서쪽 20㎞쯤에 스블론, 아셀, 유다는 각 지파의 영토 경계와 인접한 것을 뜻하며 함맛은 갈릴리 바다 8시 방향 해변에 있고, 락갓은 갈릴리 바다 9시 방향 해변이며 긴네렛(게네사렛)도 갈릴리 바다 10시 방향 해변이요, 아다마는 락갓에서 서쪽 8㎞쯤에 있고, 라마는 긴네렛에서 10시 방향 16㎞쯤에 있으며 하솔은 갈릴리 바다 북변에서 북으로 15㎞쯤에 있고, 게데스는 하솔에서 11시 방향 12㎞에, 이론은 긴네렛 북쪽 55㎞쯤이고, 하솔에서는 북으로 45㎞쯤에 있으며 벧아낫은 시돈에서 2시 방향 20㎞쯤, 게데스에서는 11시 방향 10㎞쯤에 있고, 벳세메스는 지중해변 시돈에서 5시 방향 18㎞쯤 같은 지중해변 악십에서는 동으로 18㎞쯤에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지도를 펴 놓고 공부하시면 더 좋습니다.

6. 단 지파의 기업(40~48절).

1) 단 지파의 기업은 서쪽 지중해변 욥바 주위로부터 동쪽으로 벤야민 경계에 접하고, 또 북동쪽은 에브라임 경계에, 북서쪽은 므낫세의 경계에, 남쪽은 유다의 경계에 접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파의 장정들이 북쪽 레센(갈릴리 바다 북변에서 북쪽으로 약 40㎞ 올라감) 지역을 점령하여 그 곳에 거하므로 두 지역을 점유하였습니다. 단 지파에 대한 야곱의 예언을 보면 창 49:17에서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이니 말굽을 물어 그 탄자를 떨어지게 하리라” 하셨고, 모세는 신 33:22에서 “단은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라” 하셨는데 이 예언이 레센 지역을 뺏는데 적중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므낫세 지파가 전쟁으로 자기 지역을 확보한 것처럼 단 지파도 그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2) 본문에는 레센 지역을 제하고 18성읍을 말씀하셨으니 그 위치를 지도상으로 확인하십시오. 소라는 예루살렘에서 서쪽 22㎞쯤 이고, 게셀에서는 5시 방향 11㎞쯤에 있고, 에스다올은 소라에서 1시 방향 4㎞쯤이며 이르세메스는 소라 남방 4㎞쯤에 있는 벳세메스 근처로 추측되고, 사알랍빈은 게셀 동쪽 6㎞쯤이며 아얄론은 사할랍빈에서 4시 방향 6㎞쯤 이고, 이들라와 엘론은 게셀, 아얄론, 에스다올 중간으로 추측되며 딤나는 소라에서 10시 방향 7㎞쯤 이고, 에그론은 게셀에서 7시 방향 15㎞쯤, 또는 욥바에서 5시 방향 20㎞쯤이며 엘드게는 욥바 남쪽 26㎞쯤 이고, 깁브돈은 게셀에서 서쪽 6㎞쯤이며 바알랏은 깁브돈에서 8시 방향 9㎞쯤 이고, 여훗은 욥바에서 4시 방향 13㎞쯤이며 브네브락은 욥바에서 4시 방향 8㎞쯤 이고, 가드림몬은 욥바에서 2시 방향 8㎞쯤이며 메얄곤은 욥바 북쪽 5㎞쯤부터 동쪽으로 뻗는 강이고, 락곤(rakkon)은 확인할 수 없었으며 46절에서 “욥바 맞은 편 경계까지라” 하였는데 욥바는 지중해변 항구로 갈멜산(호미곳)에서 남쪽으로 45㎞쯤에 위치합니다. 꼭 지도를 찾아보시면서 성경 공부를 하시라는 뜻으로 이렇게 명시해 드린 것입니다.

7. 여호수아가 받은 기업(49~51절).

1) 49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땅 나누기를 마친 다음 자기들 중에서(이미 받은 기업 중)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다” 하셨고, 50절에서는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구한 성읍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여호와의 명령대로”란 “가족대로 나누어주라”하신 명을 뜻하는 것입니다(40, 48절, 민 26:52~55).

2) 이때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를 구하여 받고 그 곳에 성읍을 중건한 후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입니다(민 13:8). 따라서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중에서 받았으니까 이중으로 받지 않은 것이고, 그 위치는 벧엘 서북쪽 16㎞ 지점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 곳에 장사되었습니다(수 24:50). 다른 사람의 기업을 먼저 나누어 주고 자기는 맨 마지막에 받았으니 덕 있는 일이고, 또 성읍이 없는 곳을 얻어 스스로 개척, 중건하였으니 그것도 욕심 떠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51절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도자 여호수아가 “기업 나누어 주는 일”을 잘 끝냈다는 결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업을 자기 뜻에 따라 성도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주실 수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은 성도는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살아야 하겠지요. 또 토지가 아닌 다른 것(여러 가지 은사의 선물들)으로도 기업을 받은 성도가 많으실 것입니다. 그 다른 기업이 무엇인지를 잘 발견하셔서 최대한 활용하여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마 25:14~23).

 

제 20 과 도피성을 설치함 (수 20:1~9) 목록으로


1. 본 장에서 주신 말씀은 “도피성 설치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민 35:11~24과 신 4:41~43에서도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가 먼저 한 말씀은 예고적 명령이지만 여기서 주신 말씀은 실천 내용입니다. 3절을 보시면 “부지 중 오살한 자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로부터 피할 곳을 제공하라”는 뜻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으로 민 35:11에서 “그릇 살인한 자를 피신시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을 말씀하셨고, 신 4:41~43에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으며 신 19:3~6에서는 그런 실례로 “벌목하는 자가 도끼의 부실함으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신자는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있게 되고(민 35:12, 24, 본문 6절), 또 그 당시에 집무하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였으니 여기에는 고의 아닌 실수로 범한 것을 정상으로 참작한 것과 또 제사장이 죽었은즉 상당 기간 재판이 연장되는 문제와 그리고 대제사장을 중보자 그리스도로 비유하였을 때 그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한 것으로 간주하여 속죄의 의미를 나타낸 계시의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4~6절의 의미는 도피성을 이용하는 절차로서 “도피자가 도피성 문어귀(들어가기 전)에 서서 그 도피성을 관리하는 장로에게 사고를 고하면 장로는 그 성읍의 한 곳을 주어 거하게 할 것이요, 그 뒤에 피의 보수자(피살자의 연고자)가 보복하려고 따라왔을지라도 그에게 살인자를 내어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정당한 재판 절차를 밟거나 그 당시의 대제사장(히 4:14, 그리스도를 모형함)이 죽었을 때만 자유한 몸이 되게 한 것입니다.

3. 그리하여 7~8절에서 요단 서편에 세 곳과 동편에 세 곳을 지정하게 된 것입니다. 서편의 세 곳은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갈릴리 북단에서 북으로 28㎞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예루살렘에서 북쪽 50㎞쯤, 벧엘에서는 북쪽 32㎞쯤)과 유다 산지의 기럇아르바(곧 헤브론; 사해 중간 쯤에서 서쪽 29㎞쯤)를 택하였고, 요단 동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의 평지 광야의 베셀(사해 북단에서 동쪽 30㎞쯤)과 갓 지파의 땅 중에서 길르앗라못(갈릴리 남단에서 5시 방향 50㎞쯤)과 므낫세 지파의 땅인 바산 골란(갈릴리 바다 중간쯤에서 동으로 30㎞쯤)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4. 9절에 보시면 이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거하는 객을 위해서도 쓰임이 된다” 하셨으며 또 민 35:6에서는 그 성읍을 “레위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대상 56:66~67에도 보시면 아론 자손들에게 도피성을 주셨고, 도피성과 함께 13성읍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시 91:2에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요새라”고 하셨습니다. 실수범으로 하여금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는 처방도 되고, 또 제사장의 분깃도 되며 나그네의 유숙소가 되는 동시에 중보자 예수님의 사역과 속죄와 공의를 나타내시는 계시의 의미까지 있는 줄 압니다.

 

제 21 과 레위 지파에게 준 성읍들 (수 21:1~4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기업이 아닌 생활 거처를 기업을 받은 지파에서 나누어 준 기록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 봉사직을 하게 하셨고, 그들의 생활비는 다른 지파의 십일조 헌납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모든 기업 분배가 끝난 다음에 레위 지파 자손들에게 생활 거처를 제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레위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가 게르손이고, 둘째가 고핫(본문에 그핫이라고도 함), 셋째가 므라리입니다(민 3:17). 그리고 이 삼형제 중 둘째 고핫의 아들이 암으람이고, 암으람의 아들이 아론과 모세입니다(민 3:27). 여기에서 고핫의 후손들에게 거처를 줄 때 두 파로 나누어 주었으니 하나는 제사장파 곧 아론의 후손이고, 또 한 파는 아론의 후손이 아닌 고핫의 자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먼저 아론의 후손들, 다음에 고핫의 자손들, 그 다음에 게르손 자손, 므라라 자손 순으로 나누어 주게 된 것입니다. 내용을 분류하면 ① 1~3절은 “서론”이고, ② 4~8절은 “지파별 분담”이요, ③ 9~19절은 “아론의 후손들이 받은 성읍”이고, ④ 20~26절은 “그핫(고핫) 자손들이 받은 성읍”이며 ⑤ 27~33절은 “게르손 자손들의 성읍”이고, ⑥ 34~40절은 “므라리 자손이 받은 성읍”이며 ⑦ 41~45절은 “결론의 말씀”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서론(1~3절).

서론 말씀에서는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성소가 있는 실로(18:1)에 와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자기들의 거할 성읍과 가축 먹일 들을 달라”고 청원한 것입니다. 제사장족들이 생산적 기업은 받지 않을지라도 거처할 곳과 짐승 관리할 들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명을 따라 자기들의 기업에서 주었다” 하였는데 하나님의 명은 민 35:2에 나타나 있고, 자기들의 기업은 “11지파가 받은 기업 중에서 주었다”는 뜻입니다.

2. 지파별 분담(4~8절).

1) 이 부분에서는 레위 지파를 네 부분으로 나누고, 그 네 부분에 대한 책임을 열 세 지파가 나누어 분담키로 하고, 그 분담에 관한 것을 제비뽑게 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네 부분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핫(고핫) 자손 중 아론의 자손(제사장 계열)을 한 단체로 하였고, 또 고핫의 남은 자손들을 두 번째 단체로 하였으며 세 번째는 게르손 자손이고, 네 번째는 므라리 자손으로 나눈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네 단체에 대한 책임 분담으로 ① 제사장족에게는 유다. 시므온, 벤야민 세 지파가 13성읍과 그 들을 담당하였고, ② 남은 고핫 자손들에게는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 지파(요단 서쪽)가 10성읍과 그 들을 담당하였으며 ③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잇사갈, 아셀, 납달리, 므낫세 반 지파(요단 동편)가 13성읍과 그 들을, ④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르우벤, 갓, 스블론 지파가 12성읍과 그 들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도합 48성읍과 주위의 그 들입니다(들은 양을 먹일 수 있는 토지를 뜻함).

3. 아론의 후손들이 받은 성읍들(9~19절).

아론의 후손들에게 성읍을 준 지파는 유다, 시므온, 벤야민인데 그 중 유다와 시므온은 기업을 받을 때 경계를 정하지 않고, 유다의 기업에서 시므온의 기업을 받은 것처럼(19:1, 9) 아론의 자손들에게 줄 때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 성읍들 중 하나는 도피성 헤브론인데(수 20:7)이 헤브론에 대하여 11절에서 설명하기를 “이는 아낙의 아비 아르바의 성읍이었고(민 13:22), 기럇(성읍이란 뜻)아르바가 옛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수 14:15). 그리고 또 12절에서는 “오직 그 성읍(헤브론)의 밭과 촌락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기 때문에(수 14:13~14) 도피성으로 구별된 성읍만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 유다 지파가 합동으로 준 성읍과 들은 립나, 얏달, 에스드모, 홀론, 드빌, 아인, 윳다, 벤세메스까지 9성읍이요, 벤야민 지파가 따론 준 것은 기브온, 게바, 아나돗, 알몬, 네 성읍으로 도합 13성읍을 준 것입니다.

4. 남은 그핫(고핫) 자손들이 받은 성읍(20~26절).

이 성읍은 모두 12개 성읍과 그 들로서 에브라임이 도피성 세겜과 게셀, 깁사임, 벧호론 네 성읍을, 단 지파가 엘드게, 깁브돈, 아얄론, 가드 림몬 네 성읍을, 므낫세 서쪽의 반 지파가 다아낙과 가드림몬 두 성읍을 준 것이요,

5. 게르손 자손들이 받은 성읍(27~33절).

이 성읍은 13성읍과 그 들로서 잇사갈 지파가 가시온, 다브랏, 야르믓, 언간님 네 성읍을(28~29절), 아셀 지파가 미살, 압돈, 헬갓, 로홉 네 성읍을(30~31절), 납달리 지파가 도피성인 갈릴리의 게데스와 함못과 가르단 세 성읍을(32절), 바산(요단 서쪽)의 므낫세 반 지파가 바산골란과 브에스드라 두 성읍을 주었습니다(27절).

6. 므라리 자손들이 받은 성읍(34~40절).

므라리 자손에게는 르우벤, 갓, 스블론 지파가 각 네 성읍씩 모두 12성읍을 주었으니 르우벤 지파가 베셀, 야하스, 그데못, 므바앗을(36~37절), 갓 지파가 도피성 길르앗 라못과 마하나임과 헤스본과 야셀을(38~39절), 스블론 지파가 욕느암, 가르다, 딤나, 나할랄을(34~35절) 각각 주었습니다. 여기의 지명들은 그들이 받고 준 기업의 땅들에서 지도상으로 찾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이렇게 전국에 분산된 지역에서 흩어져 살아야 할 이유는 예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 49:5~7에서 야곱이 예언하기를 “레위는 세겜 사람을 살육하였기 때문에(창 34:30)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 성직을 이행하도록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함일 것입니다(합 3:2). 성직을 전문으로 시행하는 성도에게 그의 생활비를 주는 것이 정당함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시행하는 바이지만(고전 9:7~11, 딤전 5:18, 갈 6:6) 이것으로 인한 부작용(성직자의 직업화 또는 성도와의 알력)은 반드시 나타나지 않도록 제도화 하여야 할 것입니다.

7. 결론(41~45절).

결론에서는 레위 지파에게 준 성읍이 48성읍과 그 들임을 말씀하셨고(41~42절), 이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서(약속)하신 것을 시행하신 것이며(43절, 민 18:20, 35:2) 4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말씀을 시행한 선민 전체)에게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수 1:6~8, 13) 이행하고, 따라서 안식을 주셨으며 그들을 당할 대적이 없게 하셨고, 또 있다 하여도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므로 선민에게 약속하신 선한 일(기업 주시는 일과 보호, 인도, 공급하시는 것)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45절).

 

제 22 과 증거의 단 (수 22:1~34) 목록으로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9절에서 “요단 동편에 속한 군인들을 귀가시킴”이고, ② 10~34절에서 “증거의 단을 쌓은 일”입니다.

1. 요단 동편에 속한 군인들을 귀가시킴(1~9절).

분배가 끝나고 평안의 은혜를 힘입었은즉 그동안 함께 싸워준 요단 동편 지파(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군인들을 귀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또 약속된 일입니다(민 32:16~32).

1)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그 세 지파의 군인들을 불러서 그들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 형제를 떠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다 한 것을 치하하고(1~3절), 이제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은즉 각자 요단 동편 땅의 집으로 돌아가라(4절) 하였고,

2) 5~7절에서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것에 대한 교훈을 말하고 축복하여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돌려보낼 때 그동안 전쟁 중에서 얻은 전리품인 “많은 재산 즉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까지 나누어 준 것입니다(8절). 그리하여 그들은 가나안땅 실로에서 요단 동편 기업 받은 땅 곧 가족들이 있는 길르앗 땅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2. 증거의 단(10~34절).

1) 이 “증거의 단”이란 동편 지역의 군인들이 귀가하면서 요단가 언덕(서편 쪽)에 큰 단을 쌓아놓고 돌아간 것입니다(10~11절). 이 사실이 서편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싸울 태세를 하였으니(12절) 이는 요단 동편 군인들과 백성들의 오해로 비롯된 종교적 탈선과 자율주의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2) 그러자 방법을 돌려서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각 지파에서 두령급 대표자 1인씩을 뽑아 열 방백으로 하여금 직접 그들을 찾아가서 사실을 알아보고 처리하게 한 것입니다(13~14절).

3) 그래서 그 열 방백들이 요단 동편에 가서 그들이 자율 제단 쌓은 일은 “하나님을 거역함이요 범죄함이다 브올(발람)이 그런 일을 행하여 큰 재앙을 받았고(민 25:1~9),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거늘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 만일 너희 소유지가 깨끗지 않으면(우상 섬기던 장소를 불결하게 여긴 것)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지역으로 올 수도 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 세라의 아들 아간도 범죄하여 진노를 받은즉 그 피해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지 않느냐?”하고 질책한 즉

4) 그들이 대답하기를(21~29절)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뜻을 어기거나 또 제사 드릴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후시대에 요단 서편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성소를 사용할 특권이 자기들에게만 있고 요단 동편 백성들에게는 없다 할까 하여 그렇지 않음을 증거하려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도 이런 제단을 쌓지 않았느냐?하므로 다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임을 증거하기 위함일 뿐 결코 패역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을 때

5) 모든 오해를 풀고 오히려 즐겁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30~34절). 30절에서는 “그 일을 좋게 여겼다” 하셨고, 31절에서는 “죄를 범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다” 하였으며 32절에서는 “그들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회보하였다” 하였고, 33~34절에서는 “다시는 싸우고 멸하자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단이 여호와가 하나님 되시는 증거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가깝도록 의미를 설명 드렸습니다. 성도는 믿음도 잘 지켜야 하지만 서로 오해 받을 만한 일도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나 지혜롭게 처리하는 성도가 되실 것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제 23 과 여호수아의 유언 (수 23:1~16) 목록으로


1. 본문을 읽고 “여호수아의 유언”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선민의 대적을 멸하시고 안식을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하셨고, 또 14절에서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하므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상태에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제목을 위와 같이 정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당부”란 제목으로 24장에 이어집니다.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만인의 공도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세상 떠날 때를 예측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하느냐, 못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필자도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실 때가 오래 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고 지난 밤 1시와 4시에 두 번이나 일어나서 21과, 22과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남은 과제는 기존 원고에 근거하여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까지 강론서를 정리하고 성경 인물 공부 집필 중단 한 것을 끝낸 후 목회 회고록과 일반 회고록까지 마칠 생각이고, 공교회 은퇴 후에 가족 교회를 목회하면서 “개혁 교회 헌법 초안”을 기록할 생각이며 하나님이 또 건강을 주시면 교역자들이 자주 인용할 수 있는 성구만 발췌하여 성구 사전을 만들고 싶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할 일은 많은데 지금도 피로와 어깨 통증과 시력의 한계, 혈압, 소화 기능 허약이 나타나고 있으니 얼마나 조급합니까?) 여호수아는 살만큼 살고 할 일을 다 한 후 세상 떠날 때를 기다리면서 백성들에게 할 말을 다 하고 가신 줄로 사료됩니다.

2. 유언의 말씀에 대하여

1) 1~2절에서 “하나님은 대적을 멸하시고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 하셨고, 2절에서 여호수아는 “선민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사무관)들을 불러 자신이 늙었음을 고하고(살 날이 멀지 않음을 나타낸 뜻) 중요한 유언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2) 3절에서 “하나님이 선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다 보았은즉 하나님이 선민을 위하여 싸우신 분임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증거는 “그 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선민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요(4절), 앞으로도 “대적들을 멀리 떠나게 하셔서 말씀하신 대로(창 13:14~17, 출 3:8, 17)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약 400년 후에 다윗과 솔로몬왕 때에 성취되었습니다(왕상 5:4).

3) 6절을 보시면 “크게 힘써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다 지키려면 다 연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음”은 사랑과 공의에 어김없이 행하라는 뜻입니다.

4) 7~8절에서는 “남아있는 이방족에게 가지 말고 그 신들의 이름도 부르지 말며 그 신들을 가리켜 맹세하거나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것은 타종교 또는 세속적 행위를 엄금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면 분별없이 아무런 행위나 본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미개한 국가의 토속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이비한 종교의 유혹을 멀리 또는 외면하시기 바랍니다.

5) 9~11절에서는 “하나님을 친근히 하기를 오늘처럼 하고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분초라도 쉼 없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셔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끌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떤 통치와 섭리를 베푸시는지를 살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말씀(성경)을 사랑하면서 계명을 지키시되 특히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 14:23).

6) 12~16절에서는 만일 하나님의 뜻(여호수아의 유언적 교훈)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12~13절에서 “만일 (신앙에서 퇴보하여 이방족에게 친근하거나 혼인하거나 왕래하여 빠지면 정녕 알라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요(그들이 남아 있으므로)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옆구리의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되어(이 부분의 말씀은 다 화근의 원인을 준다는 뜻임) 필경은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게 하실 것이라” 하셨고, 14~15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선한 일을 응하게 하심 같이(21:44~45) 불길한 일도 임하게 하신다” 하셨으며 16절에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다른 신을 섬겨 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있은지 약 700년 후에 선민의 나라는 완전히 멸망되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왕하 25:1~7).

3.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유의하셔야 할 것은

1) 성도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를 때 “하나님은 그의 대적을 멸하사 안식을 주신다” 하셨고(1절),

2) “하나님은 성도의 편에 계셔서 싸워주시는 분이라” 하셨으며(10절)

3) 9절에서는 “하나님이 강한 나라를 쫓아내시고 1인이 천인을 쫓게 하신다” 하셨고,

4) 15절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일을 다 응하게 하시는 분”이며

5) 16절에서는 “선민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는 선한 일이 임한 것의 반대로 불길한 일도 임하게 하시고 진노하여 멸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은 곧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빈틈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이 필요할 줄 압니다.

위의 말씀에서 “이방인들을 멀리하라”는 뜻은 사회적 친교에 반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순결한 신앙을 지킴에 있어서 불순하게 만드는 위험에 접근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교훈을 받으실 때 성도는 신앙의 질적 본질과 거룩을 보존함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24 과 여호수아의 마지막 당부 (수 24:1~33)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당부”와 “세상을 떠난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유언이나 마지막 당부, 그리고 교훈의 의미로 볼 때는 23장의 연속이라 할 수 있지만 시간과 장소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23:2을 보시면 선민의 대표자(장로, 두령, 재판장, 유사들)들을 불러 말씀을 전하였으나 본문 1절에서는 그들을 “세겜”으로 불렀고, 또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였다”한 것을 보면 세겜에 있는 간이 성소에서 마지막 당부를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에 실로에 성소가 있었지만(수 18:10) 세겜에도 간이 성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수 8:30~35). 세겜은 실로의 북쪽 20㎞쯤에 또 사마리아에서 5시 방향 15㎞쯤에 있고, 고대 “아비멜렉”의 성읍으로 아브라함과 야곱이 방문하였으며(창 12:6, 33:18) 므낫세 지파에게 분깃으로 주었으나 또 그 곳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레위 자손들에게 주게 되었고(수 21:21), 후에 여러보암이 왕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왕상 12:25, 수 9:1). ① 1~13절에서는 “하나님이 선민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 시킴”이고, ② 14~28절은 “세 번에 걸친 약조 다짐”이요, ③ 29~33절은 “죽음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1. 선민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 시킴(1~13절).

여호수아가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 시킨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깨닫고 그 하나님 경외하는 일에서 추호도 탈선하지 않도록 지도하고 다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선민들에게 일깨운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하면

1) 2절에서 “일찌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갈대아 우르(고대 바벨론의 도시이고, 페르시안 만에서 10시 방향 250㎞쯤에 있고, 하란에서는 5시 방향으로 920㎞쯤에 위치함)에서 그가 다른 신을 섬기던 중에 부르셨다” 하셨고(창 11:26~32),

2) 3절에서는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고(창 11:29~12:3), 그에게 적자 이삭 주실 것을 약속하신 후 시행하셨으며(창 17:1~8)

3) 4절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므로 에서를 세일산으로 보내셨다” 하셨고(창 25:21~26, 33:16~17), 또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셨다가(창 45:21~28) 5절에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고,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출 5장~10장) 애굽을 나오게 하셨으며(출 13장)

4) 6절에서는 “홍해를 육지같이 갈라 건너게 하실 때(출 14장~15장) 7절에서 애굽군에게는 흑암을 주시고 선민의 앞길에는 광명 주셨다” 하셨고(출 14:15~25),

5) 8절에서는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아모리인들을 선민의 손에 붙이시고, 그 지역을 점령한 후 멸절 당하게 하셨다” 하셨으며(민 21:21~32)

6) 9~10절에서는 “발람의 사건에서 축복하여 건져내셨고(민 22장~24장, 25:6~13),

7) 11절에서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 7족과 싸워 이기게 하셨으며(수 9:1~2, 10장~12장) 또 아모리족과 싸울 때는 왕벌을 보내어 두 왕(시혼과 옥)을 쫓으셨고(출 23:28, 신 7:20, 민 21:21~35),

8) 13절에서는 “수고도 하지 않았으나 땅과 성읍을 주셨고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게 하셨다(수 14장~20장)” 하시므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능력을 학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2절의 “왕벌을 보내셨다”는 뜻은 상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출 23:28절에서는 “하나님이 왕벌을 보내사 아모리족(히위, 가나안, 헷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리라” 하셨고, 신 7:20에서는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리니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라” 하시므로 왕벌떼가 숨은 자를 쏘아 쫓거나 죽게 한 뜻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 내용이 광야에서 능력으로 보호하신 일들을 다 상세히 거론하지 않았으나 선민이 받은 은혜를 역사적으로 요약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는 자녀가 탈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또 넓게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2. 세 번에 걸친 약조 다짐(14~28절).

1) 첫 번째 약조 다짐은 14~18절 말씀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섬기되 다른 신은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라”(14절) 하였고, 또 “여호와 섬기는 것이 좋지 않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데라가 유프라데강 저편에서 섬기던 바벨론신 같은 것) 혹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신이든지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15절) 하므로 신앙은 자유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함과 또 여호수아 자신이 본을 보인 다음에 약조를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제언에 대하여 백성들은 궐기하여 대답하기를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버리거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16절) 하였고, “오직 열조와 우리를 인도하여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큰 이적으로 보호, 인도하셨으며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인들을 쫓아내신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 여호와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17~18절)” 하였으니 1차의 약조 서약이 잘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또 재차 다짐하였습니다.

2) 두 번째 약조와 다짐은 19~25절에 나타난 말씀으로 19~20절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 섬길 것을 쉽게 다짐한 사실(16~18절)에 대하여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임을 역설하는 내용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며 허물과 죄를 사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다면 복을 내리신 후라도 화를 내려 멸망케 하실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하였으니 여기의 “섬기지 못할 것”이란 말씀이 글자의 뜻대로는 예언이나 공동 번역에서는 “여러분이 감히 그를 섬기겠소?”하는 의문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번역은 'you may not be all to serve the Lord' 하므로 역시 개역 성경처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다” 하므로 부정적 의미로서의 예언으로 깨닫게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래도 “잘 섬기겠느냐?” 하였을 때, 21~25절에서 백성들은 역시 긍정적으로 대답하였으니 두 번째 다짐도 잘 받은 셈입니다. 백성들이 “정녕 여호와를 잘 섬기겠습니다(21절)”한즉 22절에서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섬긴다 하였은즉 너희가 스스로 증인이 된 것이라”한즉 역시 “그렇다”고 시인하였습니다. 23절에서 여호수아가 또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하나님께로 향하라” 하였고, 24절에서 백성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목소리를 청종하겠다” 하였을 때, 25절에서 “여호수아는 그 백성들과 더불어 언약(하나님과 지도자와 백성들 사이의 서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모세로부터 받은 모든 계율)를 베풀었다(증거)”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다짐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우상주의를 철저하게 경계한 것은 그 시대에 우상 숭배가 그만큼 심하였기 때문입니다(레 17:7, 겔 20:7, 골 3:5).

3) 세 번째 다짐은 기록과 기념석으로 세운 것입니다(26~28절). 26~27절을 보시면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위하여......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워”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돌로 증거를 삼은 것은 기록된 문서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더욱 증거가 변하지 않고 오래 보존될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모든 말씀을 이 돌들이 들었다”는 뜻은 “돌을 불변의 인격으로 비유한 것”이요, 백성들은(그 돌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배반치 않도록 하여 그 돌이 효력 있는 증거가 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을 다짐하고 백성들을 각기 기업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28절).

3. 죽음과 관련된 말씀(29~33절).

1) 29~30절에서 “여호수아는 110세에 세상을 떠나 자신의 기업지인 에브라임산지 가아스산 북쪽 딤낫세라에 장사되었고”, 31절에서 “여호수아가 산 동안 그리고 그 시대의 역사를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딤낫세라”는 벧엘에서 서북쪽 16㎞쯤에 있고, 현재도 여호수아의 무덤이란 것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강력한 지도자가 살아 있고 또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자들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지도자의 비중과 역사 의식이 크게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32절에서는 애굽에서 요셉의 유언을 따라 갖고 나온 요셉의 유골(창 50:25, 출 13:19)을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 매장지는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사서 제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한 장소이고, 또 야곱이 집을 떠날 때 하나님께 드린 서원(창 28:20~23)을 이행한 장소입니다(창 33:19~20). 그리고 이 지역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준 땅이므로 요셉은 자기 아들 에브라임의 기업의 땅에 묻힌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2절에서는 “금 일백개로 그 땅을 샀다” 하였는데 창 33:19에서는 “은 일백개”로 되어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셔야 할까요? 영어 성경은 양쪽 다 은으로 번역하였고, 공동 번역에서는 창 33:19을 “은 백냥”으로 또 본문에서는(은금 표시 없이) “백냥”으로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창세기의 은이 왜 여호수아에서 금으로 변했을까요? 그것은 약 500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화폐의 재료(또는 가치의 근거)가 은에서 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또 “은”을 뜻하는 “케셉”이 창 17:21에서는 돈으로, 창 20:16에서는 은으로 번역한 것처럼 우리 말로 번역할 때도 “금을 돈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해설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3) 33절에서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대제사장)도 죽으매 무리가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로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 가족이 받은 성읍과 들은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 벤야민 지파에서 주었는데(수 21:4, 9~19) 그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한 것”은 아론의 자손이 아닌 고핫 자손이 에브라임 지파로부터 받은 땅이 있었는데(수 21:5, 20~22) 그 땅에 장사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이 사용하는 땅이 아닌 레위인이 사용하는 땅을 매장지로 이용한 것입니다. 근족이라도 소유권이 없으면 무덤을 쓰도록 배려하지 않는 인심을 보았는데 본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설교보충 1. 가나안 입국 준비 (수 1:6~9) 목록으로


선민이 40년간 광야 여행을 한 것은 연단도 필요하였지만 더 큰 목적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과 광야 여행을 지도한 책임자였고, 모세가 죽은 다음에는 가나안 입국의 책임자로 여호수아가 등장하였습니다. 선민의 가나안 입국은 출애굽의 목적 성취이기도 하지만 요단강과 여리고성의 견고함 등 큰 정쟁을 치러야 하는 과제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네 가지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 개인(너)에게 주신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이 명령은 모든 성도 개개인이 다 자기의 과제나 난관을 타개할 때 필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명령

1. “마음을 강하게 하되 극히 담대히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사 26:3에서는 “심지가 견고하여야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강하면 확신도 강하고 마음이 담대하면 모험적 실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히 담대한 마음이란 “확신과 결심이고 여러 사람의 확신과 결심이 합치면 큰 힘을 나타낼 것이요, 따라서 어떤 대적이나 위험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에는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 인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 십자가를 대속의 방도로 믿는 것, 천국, 지옥, 이적, 심판 등 다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또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전쟁을 치러야 하고, 생사의 기로에 서야 하며 또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여야 하니까 그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2. 8절에서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가까이 모시는 뜻이 있고, 또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뜻이 있으며 성경을 배워 마음 속에 새기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묵상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의 필수적 요소인 것입니다. 기도가 대문 밖에서 두드리는 것이라면 성경 묵상은 그 집 안방에 들어가서 주인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하다가 식사를 하게 된즉 입으로는 음식을 먹고 마음으로는 말씀의 끈을 잡고 있는데 밥상 앞에 있는 TV에서 “뚱뚱한 여인이 모델에 당선됐다”는 방영이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먹는 것과 TV가 말씀 묵상에 큰 훼방거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또 생각하기를 중요한 일을 먼저 시행하고 그 이외의 것은 공백 기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또 “말씀 묵상은 항상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인즉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7~8절에 두 번 강조되었습니다. 요 14:23에 보시면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예수님은 그런 자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말씀 묵상하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셨으니까(약 2:17) 당연히 지켜야 하지요. 그런데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다 지키라”는 뜻은 완벽을 기하라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갈 3:10에서 “인간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만큼 다 지키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 지키라”는 뜻은 타산적으로 지키거나 쉬운 것만 지키려 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지키되 성실히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자칫하면 법을 따지면서 사랑에는 구멍이 뚫리기 쉽고 약대는 삼키고 깔따구는 걸러내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 실천에 전체성과 주밀성이 없기 때문에 “다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명하게 살아온 추기경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한즉 자신은 사랑을 주장했으면서도 “장애인 소자를 찾아가서 섬기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소자의 발 씻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쉬움이 없도록 다 지키는 정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4.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심에 든든히 서라”는 뜻이지요. 신앙 중심에, 말씀 중심에 또는 십자가 중심에, 사랑 중심에, 사명 중심에 든든히 서야 할 것입니다. 신앙 중심에 든든히 서려면 세속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뿌리를 깊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중심에 든든히 서려면 여러 종류들의 불건전한 요소들을 비판하고 싸워야 합니다. 또 자기 희생 없이는 십자가 중심에 설 수 없을 것이요, 또 사랑 중심에 서려면 이기주의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은 헌신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신이 지고, 주님께는 헌신을 하여야 하겠지요. 사명자들이 하나님의 일(믿음에 관한 일, 요 6:29)을 하면서 명예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받는 보수가 적을 때 사명적 헌신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은 “자기를 부정하라”(마 16:24), “날마다 자신을 죽이라”(고전 15:31)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네 가지 준비를 잘 하였을 때 “약속한 땅을 얻게 하시고(6절) 또 길을 평탄하게(어려움 없게) 하시며(7절)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8절)”고 하신 것입니다. 도강을 놓고 “배 만들라” 하시지 않았고,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창과 칼을 갈라” 하시지 않은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주시는 분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입국 준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2. 군사들에게 주신 말씀 (수 1:7~9, 딤후 2:3~4) 목록으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군사들에게 주신 말씀”을 참고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신앙생활이 곧 전쟁과 같기 때문입니다. 죄악과의 전쟁이고,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지금 사회는 경제 전쟁, 안보 전쟁, 부패 척결 전쟁을 하고 있고, 그 외에도 정치, 외교상으로 전쟁에 버금가는 노력을 하는 줄 압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셔야 하고, 오직 세상과 마귀를 이겨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사는 전쟁에 이기는 군사가 좋은 군사입니다. 먼저 읽으신 본문은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주신 말씀이고, 두 번째 읽으신 것은 바울 사도가 복음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군인 정신으로 믿음 생활을 하실 때 좋은 결과를 얻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1. 여호수아 군대에게 주신 말씀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처음 이해할 때 “전쟁에 나갈 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보시면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율법을 다 지키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공부에 담대하고 말씀 준수에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담대히 행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전달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쟁을 할 때도 용맹있게 하여야 하지만 그 전에 담대할 것은 “성경 연구에 담대하고(읽고 묵상함) 기도에도 담대하며 다(분량 전체) 지키는 일에 담대하고 또 지킬 때는 치우침 없이 세심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심하고 용기있게 시행한 성도는 다 은혜를 받고 성공한 줄 압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은 말씀 순종으로 강물에 발을 넣었고,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는 진격을 안 하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 방법으로 승리하고 점령하였으니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군사들은 순종과 말씀 묵상에만 담대하였던 것입니다. 성도의 사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꼭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이 OO을 하시면 좋겠는데 제가 부탁할까요?”하기로 “절대로 부탁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는 것도 바쁘려니와 인위적 부탁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면 나서서 일을 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군사들에게 주신 말씀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도록 말씀연구와 복종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2.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은 어떠하였습니까? 이것은 전쟁하는 군사가 아니고 복음의 일선에서 목회하는 군사입니다 .우선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야구나 농구, 축구 감독 얼굴 보셨지요. 잘 싸우면 펄펄 뛰고, 못 싸우면 얼굴이 찌그러집니다. 예수님도 군사를 모집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이기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군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자가 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군사일까요?

1) 군사로 모집한 자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군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 분이 왜 나를 군사로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왜 나를 목사로 부르셨을까? “복음 전하고 주님의 본을 보이라”고 부르셨겠지요. 또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현세욕을 챙기라고 부르시지 않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신 뜻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원하는 헌신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군대 가고 억지로 십자가지지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것처럼 기쁨과 자원으로 출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사역을 만족과 감사로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훈련과 연단을 잘 받아야 합니다. 훈련 부족한 군인을 오합지졸이라고 합니다. 복음 사역자가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교인들의 신앙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좁히도록 끌고 가지 않고 자신이 중보자라고 하면서 인기와 물질과 현실주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조숙한 사역자도 있겠지만 신학교의 훈련은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불과합니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하면서 배우고 연단을 받아야 하는데 총명이 부족하면 30년쯤 연단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단적인 표현으로 성경의 의미가 통해야 합니다.

4) 좋은 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곧 은사입니다. 은사 중에는 말씀의 은사가 제일입니다. 군대에 가면 소총 부대, 기갑 부대, 공군, 해군, 병참, 의무부가 있듯이 은사를 받고 자기의 받은 은사대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완전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이나 교회에 짐 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딤후 2:4에도 보시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합당치 않다”(눅 9:62)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가족이 있는 우리는 목회 2선에 선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는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라”고 하셨습니다. 고난도 각오하고 생명도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우선 나라가 생명보다 소중하지요(열사). 예수님이 내 생명보다 소중하구요(순교). 또 자유가 생명보다 소중하고(생명을 걸고 탈출), 또 진실이 생명보다 귀합니다(죽어도 바른 말 하고 죽어야 함). 그 다음에 자식이 자기 생명보다 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군사가 생명 바치기를 주저한다면 하나님이 그의 전쟁에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출 33:19)는 것을 기억하셔서 좋은 군사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평신도들도 군사답게 사셔야 합니다. 승리하셔야 하니까요.

 

설교보충 3. 라합의 구원 (수 2:8~21) 목록으로


성경에 이름을 나타낸 이방으로 처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합류된 이방인으로 구원의 대열에 선 사람들도 있었지만(출 12:44) 이름과 구원 과정이 기록된 최초의 인물은 라합입니다.

1. 이 라합은 이방인이고 토속 종교인일 것이며 또 신분이 좋지 않은 기생이고, 선민들이 우선적으로 점령해야 할 적진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구원과 거리가 먼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고, 그 가족까지 받았으며 성경에 라합을 칭찬한 말씀이 약 2:25에도 있고, 히 11:31에도 있으며 또 라합은 29대 예수님의 조상 살몬의 처가 되어 룻의 남편 “보아스”를 낳았으니 보아스는 33대 다윗의 증조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은 다윗의 고조모입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기자나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이 믿음으로 정탐을 숨긴 일”을 믿음의 큰 증표라고 칭찬을 한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을 걸고 믿을 때 값이 있습니다. 전쟁의 분위기가 감도는 시기에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의 정탐을 숨겨준 것은 생명을 건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음에 모험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약 2:14~26)는 뜻도 있지만 이 시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과 무관하였고 구원의 요소가 희박하였던 라합이 어떤 절차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1)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애굽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나라마다 종교적 특성이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신다더라”,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애굽왕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주어서 바로가 꼼짝 못하고 노예를 해방시켰다더라”, “또 그 여호와신이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였고 만나와 물을 먹였으며 아말렉과 싸워 이기게 하였고, 또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도 멸망시켰는데 그들의 목적지가 바로 가나안땅이라고 한다더라”하는 소문을 평소에 듣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의 복음입니다. 선민의 출애굽 사건이 구원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계신한 것 아닙니까? 잘 의역하면 요 3:16같은 복음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마 15:10에 보시면 “듣고 깨달으라” 하셨고, 롬 10:14에서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하셨는데 라합은 이 사실을 소문으로 들은 것입니다. 전도자의 전도 설교로 들은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의 입소문으로 들었습니다.

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들은 자가 믿음이 일어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 설교를 많이 듣고도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데 라합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신데 그 분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다(수 1:11), 그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그 민족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하고 이 땅은 망한다(2:9)”하는 지식을 가졌으니 이 지식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무나 다 생깁니까? 다 생기지 않습니다. 혹 신의 존재는 믿을 수 있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십자가가 대속의 원리인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믿게 해 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믿음의 주(히 12:2)이신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나는 은혜를 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요 3:3, 엡 2:1). 믿음은 그렇게 생겨지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은혜만 받으면 소문만 들어도 믿고 따라오는데 왜 인위적 수단을 지나치게 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열심히 하시되 십자가의 도리만 전하고 인간의 지나친 수단을 쓸 필요가 없으며 안 믿게 되는 책임을 전도자의 지혜 부족으로 여기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을 자는 소문만 들어도 믿으니까요(전도 받기를 기다리다가 믿는 이도 있음).

3) 라합에게 믿음의 결단과 실천을 보일 때가 온 것입니다. 라합이 평소에는 마음으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탐이 자기 집에 왔고, 전쟁이 임박하였으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선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속히 구원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선민 편에 붙을 것이냐? 아니면 정탐을 고발하고 세속에 빠질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실천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겠다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귀들과 현세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배신했다 하여 미워하겠지요. 그러나 라합은 자기와 가족들의 구원과 삶의 길을 열기 위하여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며 당신들을 보호해 줄 것인즉 서로 약조하고 표를 내라” 하였으니 이것이 영적으로는 믿음과 구원의 언약이고, 교회의 의식적으로는 신앙고백과 세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고, 라합의 편에서는 계명 순종하며 정탐을 선대하기로 약속하고 세례와 같은 구원의 증표로 붉은 줄을 창문에 내리게 된 것입니다.

4)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약속한 대로 구원을 받았는데 큰 축복까지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깨달으셔야 할 것은 ① 기생 라합의 구원이 성도의 영적 구원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란 점과 ②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면 믿음이 쉽게 생긴다는 점과 ③ 믿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계명 실천이나 사랑 실천으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극단적 환경에 임할 때는 반드시 생명을 걸고 실천해야 하며 그런 실천을 하였을 때 받는 축복이 크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도강시의 교훈 (수 3:1~17) 목록으로


선민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40년 동안 여행한 목적 성취로서의 대사에 해당합니다. 또 이것은 영적 의미로 이해할 때 성도가 현실 생활을 끝내고 천국에 들어가는 죽음의 과정으로도 비유됩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찬송의 의미도 그런 뜻입니다(291장). 따라서 선민의 도강은 현실적으로는 기업을 얻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신령한 세계(천국처럼 믿음생활이 정착되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인즉 의미가 큰 것입니다. 이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1. 오래 기다리고 준비하였습니다. 오래 기다린 것은 40년 여행 중 연단을 받으면서 기다려 온 것이고, 준비한 것은 요단강에 임하여 3일을 유한 것입니다(1~2절). 그들은 3일 동안 휴식도 취하면서 가나안 입국을 준비하였습니다. 은혜는 당장 주시지 않습니다. 기다리고(시 37:7, 애 3:25) 준비한 자(고전 9:24~25, 마 25:9~10, 왕하 4:3~4)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사 짓는 사람이 오래도록 공력을 들여 좋은 소득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지도자의 모범이 있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나서 백성들과 더불어 출발하였고, 또 유사들을 시켜 말씀을 전달하게 하였으며(2절) 또 9절에서는 백성들을 모이게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말씀 전파에 부지런 하였던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이 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크게 하신 방법은 간단한 것이니 그가 증거한 말대로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도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험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 메던 법궤를 “직접 메라” 하였을 때 순종하였고, “백성에 앞서 가라”할 때도 순종하였으며 “강물에 발을 넣으라” 하였을 때도 순종하였으니 곧 순종에 본을 보인 것입니다. 그때 요단강은 깊고 창일한 물이었으며(15절) 백성들은 제사장의 발이 물에 닿을 때 물이 멈출 것을 알았지만(5, 13절) 제사장들은 유사들로부터 “강물에 들어서라”는 전달을 받을 때 강물에 변화가 있을 것에 대하여 경고 받지 않았습니다(6절). 그러나 순종의 모범을 보였고, 또 17절에 보시면 요단강에 물이 말랐을 때 백성이 다 건너기까지 마른 땅에 굳게 서 있으므로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하므로 지도자의 본을 보인 것입니다. 순종에 솔선하고 근면과 봉사로도 본을 보인 것입니다.

3. 백성들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렸는데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과(5절) “제사장의 뒤를 좇으라”는 것과(3절) “2000규빗의 간격을 두라”(4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이적을 체험하기에 앞서 성도들이 성결을 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가 천국갈 때도 성결해야 하는 것처럼 은혜와 능력도 깨끗한 그릇에 받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스스로 성결케 하라” 하셨으니까 스스로 회개하도록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회개하라”고 깨우쳐주고 충동할 수는 있지만 회개는 반드시 자신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셔야 하고, 하나님이 기꺼이 죄를 용서하실 만큼 스스로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뒤를 좇아야 할 것은 지도자의 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성도의 입장이고, 또 현실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로를 모르니까 제사장들이 디딘 곳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은 것처럼(고전 11:1) 성도가 지도자를 본받고 따를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2000규빗(1㎞쯤) 간격을 두어야 할 것은 강론에서도 밝혔지만 제사장과 백성들과의 신분상 구별도 있고, 망령된 자가 함부로 법궤에 다가오는 무례를 방지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길게 뻗은 군중에게 제사장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모범자와 모범을 따르는 일이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1절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더불어 움직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권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한 것을 뜻하며 또 지도자와 백성들이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를 시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선봉에 서지 않고 교인들만 하게 한다든지 또는 전체 교인이 대부분 모이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면 좋은 일이 못될 것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5분을 지각하기 때문에 서론의 중요한 대목을 말할 수 없어서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 듣고 알아야 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더불어 행동하였다”는 말씀에서 성직자의 권위주의가 없어져야 하고 전체 성도와 동화되는 일이 중요함을 교훈하신 것이요,

5. 11절에서 “온 땅의 주”란 말씀이 있고, 7절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크게 하신 일과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함께 하심과 또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일이 중요하고,

6. 그 다음에는 이적이 나타난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물을 밟고 멈추면......흐르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래로 흐르는 물이 쌓여 서는 것은 비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흐르던 물이 그쳐서 멀리 사르단 변방에 쌓였다” 하셨는데 물이 없던 장소로 흐르는 것은 “쌓인다”할 수 있지만 갈라지는 장소에 쌓이는 것은 큰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진으로 인하여 물골이 다른 곳으로 열렸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발이 물에 잠기는 때부터 흐르던 물이 한쪽으로 쌓여 역류하게 된 것은 기적이고, 또 사르단 변방 딴 곳으로 흐른 것은 바람에 의하여 물줄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된 줄로 아는 것입니다. 나중에 원상 복귀 되었으니까요(4:18).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실 때 이와 같은 방법도 이용하신다는 것을 저희들로 하여금 믿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 하나님이 크게 하심 (수 3:7, 4:14) 목록으로


“하나님은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 또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 2:6~7). 생사귀천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높이시고 크게 하실 때 때를 정하고 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하시는 기한이 있고 대상이 있으며 또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크게 하신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대적을 치고 민을 가나안땅에 정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크게 하신즉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고 또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셔서 특별히 보호,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만 하도록 은혜 중에 거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2005. 4. 20.) 새 교황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미 선종한 바오로 2세에 대한 명예도 대단하였는데 또 새로 선출된 265대 교황 베네딕도 16세도 위대한 분이라고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그 분의 본명은 “요셉 라칭거”인데 교황이 되면 앞서간 훌륭한 분의 뜻이나 업적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그 분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호칭을 한다고 합니다. 259대 독일인 베네딕도 15세가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같은 국적의 선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강대국의 대통령들이 빠지지 않고 축하할 정도인즉 큰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은 천주교 교인 11억의 대표적 지도자입니다. 개인의 위대함도 있겠지만 나라마다 카톨릭 신자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칭송하는 바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의 세계 평화나 자선 사역 외에는 크게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이나 그 분 같은 중보자가 없어도 섬기는 하나님을 모시는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황의 사회적 사역은 인정해도 중보의 사역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265대 후계자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모든 성도를 가리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왕 같은 제사장이 특별하게 출현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주교의 최고 통치자라는 점은 이해하지만 “천국의 열쇠를 가진 그리스도 대행자”라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인격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신앙고백 또는 그의 말씀 진리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바로 그것이 천국 열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마 16:15~16). 그런 의미에서 교황이 크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구원의 중재자로서 큰 것이 아니고 그 이외의 정치적 사역으로 큰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요즈음 또 기독교계에 대단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 협회란 단체에서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으고 회개 운동의 집회를 하면서 강원용, 김창인, 조용기 세 분 원로 목사님들에게 “개인적으로 회개할 것을 고백하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목사일수록 회개는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 세 분의 목사님들은 초교파적으로 기독교의 별들입니다. 다 존경과 사모의 대상인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과거에 김수환 추기경도 “소외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하지 못한 자신의 생활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할 때에 반대파와 대화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였고, “교회 밖의 기관들과 일치 운동하는 만큼 교회 안에서의 연합 운동을 힘쓰지 못하여 아쉽다 하면서 현실 교회가 상당 부분 성경 중심, 생명 중심보다 인간 중심의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자연 만물에까지 관심을 써야 하고, 한국 교회가 100년이 된 지금에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창인 목사님은 “독선에 치우쳐 교만하였고, 재건파와 고신파에 갔다가 또 한동안 자기 마음에 드는 후임자의 계승을 총회가 허락지 않은데 대하여 총회를 무시하고 행정 보류한 일과 평생 교만하며 입술로 저주한 죄를 회개한다” 하였고,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처럼 취급한 죄와 새사람 변화를 강조하는 것보다 개인적 은혜만 강조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자연계 질서와 사회악에 침묵하였으니 70여생 모두 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이렇게 죄가 많으니 그 이하의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참으로 회개할 것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언론계에서는 “핵심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 문제, 기업 문제, 나라의 세금 문제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조건 높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죄 지으라고 높이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꼭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높이신 자는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순결함(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별 같은 지도자들이 회개할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순결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또 100년의 역사를 가진 현실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력을 잃고 위기에 처하였으니 어찌 목적인들 감당하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있는 대상들이 크게 부각된 것은 하나님이 높이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높인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크게 하신 여호수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크게 하신 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는 사실을 보아야 할 것이요, 무조건 사람이 따르고 사람이 칭찬한다 하여 하나님이 크게 하신 사역자인 줄로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자는 부정과 치우침 없이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전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가나안땅의 열매 (수 5:10~12) 목록으로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때에 가나안땅의 열매를 먹었더라”고 하셨습니다.

1.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의 열매를 먹은 것은 농산물 양식을 뜻하고, 농산물 양식은 만나와 달라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일반 은총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40년 동안 만나만 먹다가 농산물을 먹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천국에 드러간 것 같은 기쁨과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등잔불을 치우고 전기 켜는 체험을 하신 분들이 계시지요. 그 기쁨도 대단하였겠지만 40년을 한 가지 양식만 먹다가 땅의 소산인 곡식과 채소를 먹게 되었을 때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2. 그러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나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지요. 비상식량이면서 기적으로 주신 양식이니까 결코 부족할 수 없으나 기적의 양식이라도 땅에서 난 농산물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더 좋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양식을 먹다가 만나를 보았을 때 처음 보았고, 또 만나만 40년 먹다가 가나안땅의 양식을 먹었을 때 처음 느낀 것처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새롭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 12:31).

3.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을 때에 얼마나 다른 것이 먹고 싶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실 수 있습니다. 소는 겨우내 여물 소죽만 먹고 돼지는 늘 뚜물에 겨만 먹여도 잘 컸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과일도 먹어야 하고 당분이나 염분도 보충해야 하며 채소도 먹어야 하는데 계속 밀가루 같은 만나만 먹었으니 “생존하는 것은 감사하나 다른 음식을 못 먹는데 대한 연단이 대단하였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입니다.

4. 저희들은 이 만나 주신 일을 생각하면서 몇 가지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1) 비상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함이고,

2) 40년을 고정 음식만 먹이셨은즉 먹고 마시는 일에 낙을 들 수는 없었다는 점이요,

3) 그것도 적당 분량만 주셨기 때문에 탐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는데

4) 막상 때가 되니까 좋은 은혜, 좋은 양식을 주시더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현실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하신 바울 사도의 교훈을 생각나게 하시는 점이 있고,

5) 또 많은 성도가 기적을 좋아하지만 기적은 비상 대책일 뿐이고, 정착된 은혜가 일반 은총이란 점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기적을 체험하였다는 자랑보다 일반 은총을 힘입으면서 꾸준히 말씀 따라 사는 생활이 안정된 생활인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만나가 비상 양식이고 농산물이 완전한 양식인데 이 양식을 언제 주셨습니까?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기념비를 세운 후에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을 지키면서 그 땅의 소산인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만나는 그쳤고, 다시 주시지(얻지) 않았으니 중요한 것은 신앙적 초기에 기적의 양식이 있다가 완전한 양식을 먹게 되자 그친 것은 신앙의 초보에 가까울수록 하나님이 기적의 은사를 배려하시고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일반 은총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광야에서 40년이나 연단을 받았고, 또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십자가의 신앙이 확고한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로 말하면 말씀 중심에 서지 못한 성도를 초급자로 비유할 수 있고, 말씀 중심에 확고히 선 성도를 성숙한 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성도나 교역자는 기적 체험을 별로 안 합니다. 그래도 신앙생활은 말씀 중심으로만 가기 때문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옳게 이해 못한 성도나 지도자들은 기적도 많이 체험하면서 표준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여하튼 기적 체험이 없어도 말씀 중심에 서는 신앙이 크게 성숙된 신앙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적당한 은혜로 양육하시는 분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적당한 은혜로 양육하시는 것은

1) 비상시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을 때 만나를, 물이 없을 때 물을 그리고 꼭 고기를 먹어야 할 때 메추라기를 주신 것이요,

2) 그것도 모자라지 않고 또 남지 않게 주셨으며 안식일 계명을 지켜도 손해 볼 일 없도록 그 전날에만 2일분을 주셨으니 얼마나 적당합니까? 여기에서 성도들에게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하시고(딤전 6:8), “일용할 양식이 없을 때는 구하라”(마 6:1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생활이 극히 검소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너무 많이 가진 성도는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히 갖고 부하지도 않으며 가난하지도 않은 성도는 그 환경을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때를 맞추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정착지에 오자마자 그 곳 양식을 먹게 되면서 만나는 그치는 것, 그것이 곧 때를 맞추어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영적으로, 생활적으로 또는 환경적으로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늘 부탁드려야 할 것입니다(잠 16:4, 고전 14:40, 행 14:23, 15:40).

 

설교보충 7.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뜻 (수 6:1~5) 목록으로


여리고성을 점령하여 선민들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면 백성들이 들어가서 “남녀, 노유, 우양, 나귀를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20~21절). 그래서 그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보면 군사를 둘로 나누어 전군 후군으로 배치하고 전군 다음에 일곱 나팔수 제사장이 서고, 그 다음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고, 그 다음에 백성들이 자리하였을 것이요(성경에 명시는 없음), 그 다음에 후군이 따르도록 한 후 첫날부터 6일까지는 각 한 바퀴씩만 돌되 외치지 않고 침묵하게 하다가 마지막 7일에는 연속 일곱 바퀴를 돈 다음에 나팔 소리와 함께 크게 외쳤는데 무슨 말로 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성경 연구상 이 상태에 대하여 상상할 점이 많습니다. 후군 앞에 있는 백성들 중 노인과 아이들도 돌았겠는가? 그들은 한 장소에 머물게 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령이 엄하니까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을 것이요, 7일째 되는 날은 연속 일곱 바퀴를 돌았으니까 하루 종일 걸었을 것이며 그 행렬이 여리고성 사방을 포위한 형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이 무너진 것은 몇 군데나 무너졌을까?하고 상상해 보지만 선민이 들어가는데 지장 없도록 무너졌을 것입니다. 지진에 의하여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것입니다. 어떤 학설적인 해설로 “고함 소리와 함께 공기의 압력으로 힘을 가했다”는 기록을 본 듯 합니다만 그런 물리학적 기능으로 성벽이 무너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방법이 여리고성을 허는데 물리적이거나 작전상의 뜻이 있었겠는가?할 때 선민의 위력을 과시하는 뜻이라면 여리고 성민들이 7일 안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고, 또 한 가지는 성민을 지치게 만든 수단일까?를 상상해 보아도 지치는데는 수비자나 공격자가 다같은 입장으로 피곤하니까 거기에서도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7일 동안 성을 돌게 한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과만 관계가 있을 뿐 성이 헐리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질 때 백성들이 힘쓴 일이 없었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밟은 것이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는 직접적 방법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리고성을 돈 것도 오직 하나님의 명령과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민들이 이 명령을 수행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슨 뜻이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적을 행하실 때 자신의 뜻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의 믿음에 근거를 두시고 행하셨습니다. 포도주 이적을 나타내실 때나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그러하셨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리고성이 헐리는 일과 무관한 일로 그 성을 돌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믿음의 증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증표는 순종이고 실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증표를 나타내게 하실 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이삭을 바쳤을 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창 22:12). 명령의 종목이 다를 뿐 모든 백성 전부가 순종하는 여부를 아시려면 전체가 행동할 명령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성을 도는 것과 침공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데 왜 백성들의 힘 빼는 일을 하느냐?”고 묻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리고성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증표가 순종에 인내를 겸했습니다. 나만이 일곱 번 씻고 병 고친 사례를 아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일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돈 것이 바로 순종과 인내의 표징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견디고 버티는 것입니다 .하루 돌고 잠자고, 다음 날 또 돌고, 또 그 다음날 돌고.....불평과 반항이 나올 법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섯 번을 돈 다음 날은 연속 일곱 바퀴를 돌게 하였으니 제가 볼 때는 “죽기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라”는 명령을 하였을 것 같고, “끝을 보기까지 행동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지킨 것입니다. 김금주 선교 강사가 제품 판매왕을 하다가 전도자가 되었는데 제품 판매를 한 대상에게 끊임없이 권하다가 18번째 권하니까 “신경질을 부리면서 물건을 거기 놓고 가시오” 하더랍니다. 요즈음 전도를 그런 방식으로 접목시키라는 교육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백성들이 7일 동안 열세바퀴를 돈 것은 순종과 인내가 극치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이적 체험할 자격이 있습니다.

3.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할 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살아온 과거를 보면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밖에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망 성취하는 방법은 계속 복종하다가 끝을 보는 것입니다. 시 31:24에 보시면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기차 사고가 나서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100명쯤 죽었지요.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까? 노인만 죽었습니까? 가난한 자만 죽었습니까? 지식인이라 하여 안 죽고 권세 있는 자라 하여 피했습니까? 분별없이 죽을 자는 죽고 산 자는 살았지요. 오늘 우리가 그런 기차를 타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으니까 하나님만 바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바라보려니까 끝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며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무슨 역사를 하시겠지”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을 돌았을 것입니다. 홍해 갈라진 것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며칠 전에 요단강 건넌 것을 체험했으니까 “또 무슨 수가 생기겠지”하고 기다리면서 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시 37:7, 40:1, 애 3:25).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의미는 순종과 인내와 백성들의 단결과 질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희망과 기다림의 간절한 믿음의 증표를 보시고 이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여리고성을 도는 것인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아이성 정복의 교훈 (수 8:1~11) 목록으로


1. 수 6:19~24에 보시면 선민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실 때 “싸움도 하지 않고 돌게만 하시다가 마지막날 외침과 동시에 기적으로 무너지게 하셨고, 그 곳의 은금동철을 다 구별하여 하나님의 곳간에 드리게 하셨으며 그 곳의 생명은 남녀 노유는 물론 우양과 나귀까지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입국의 첫 성을 정복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할 때 “최초에 받는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단강도 기적으로 건넜고, 여리고성도 쉽게 차지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실 때 거듭나는 은혜와 함께 처음에 주시는 감화가 큰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든지 처음 믿을 때 큰 감동의 은혜를 받습니다. 천국 생활의 시작에 은혜를 받는 것이지요.

2. 그런데 그 다음 아이성에서 패배 하였습니다. 정탐도 하였고, “2~3천명의 군사로 될 듯하다” 하였는데 패한 것입니다. 선민의 가나안 정복을 계시적 의미로 보면 천국생활을 쟁취하는 것이고(마 11:12), 실제적으로 보면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과 싸우는 것을 결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쫓겨난 마귀가 입곱 귀신을 데리고 와서 버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12:45).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성도가 신앙의 영적 전쟁에 이기면 반드시 마귀의 대항도 커져서 또 어려움에 접할 우려가 있으니까 늘 경성함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싸우지 않고 점령하였다 하여 아이성도 쉽게 이긴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3. 어려운 문제가 생긴 만큼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하겠지요. 7:6~9을 보시면 여호수아의 간곡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성도는 모든 일에 연약합니다. 몸이 늙어지니까 앉고 일어서며 물건을 들 때도 위험이 따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시험들까 염려되고, 특히 자녀들이 실수할 까 염려되어 기도를 하게 되는데 전쟁에 패배하고 사람이 많이 죽은 상태에서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는 영적 문제와 일반적 문제에 있어서 작은 일까지 하나님께 고하고 은혜를 구하는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피할 길도 주시고 해결되는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4. 여호수아가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수 6:19~24을 어긴 도적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지파에서, 가족에서, 남자에서, 결국 아간이 뽑히고 자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죄인을 찍어주시지 않아도 어떤 방도로든지 범죄자는 드러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십니다. 범죄가 드러나도록. 마 10:26을 보시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종 심판시에는 모든 은밀한 일까지 선악간에 다 심판하시겠지만(전 12:14) 그 전이라도 드러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절차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적하신 일은 회개하지 않으면 형통이 없습니다.

5. 그래서 아간과 그 가족을 척결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잘 형통하지 않을 때는 항상 자기 반성에 몰두하고 하나님이 노여움을 푸실 만큼 회개하는 자세를 스스로 취할 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 무슨 죄 회개하라”고 지적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하고 스스로 벌하는 것이 상책입니다(고후 7:11). 범죄자를 책망할 때 만족하게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징계나 심판을 만족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의 속성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느 9:33, 살후 1:5, 벧전 2:23). 성도의 신앙이 바로 되고 교회가 개혁되면 “벌을 스스로 받겠다”고 자처할 것이고, 교회의 징계를 달게 받으면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실 것을 적게 맞고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빨리 회개하는 자에게 아량을 베풀기 때문입니다.

6. 본문 2~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복병 작전을 써서 여리고를 점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작전 명령은 성도에게 주시는 지혜를 뜻하고, 아이성 정복을 전쟁으로 이기게 하신 것은 인간의 노력을 필수 요건으로 하신다는 뜻입니다(욥 8:5~7). 여리고성의 경우처럼 기적을 힘입은 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편적 경우는 노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은혜는 기적을 나타내실 하나님이 그 절차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이 그 방법을 만드는 줄 알고 기적, 기적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노력과 보편적 은혜를 원칙으로 알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땀 흘려 식물을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창 3:19). 또 “복병 작전을 쓰라”하신 것은 악을 정복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성도마다 죄와 유혹을 이기는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할 줄 알고 세속을 멀리 할 줄 아는 노하우, 또는 성령 충만해지는 방법을 개발하십시오.

7. 3절에서 “탈취한 물건은 스스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의 경우와 정반대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곳간에 먼저 채워놓고, 다음에 나오는 물질을 주시려고 한 것인데 아간이 그것을 모르고 먼저 탐심을 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물질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성도는 물질을 탐심으로 얻으려 하지 마시고, 인도해 주시는 섭리에 따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8. 여호수아의 지도자적 솔선입니다.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났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오고(수 1:2, 6:12), 군사와 함께 행한 일(8:3), 다 싸울 때까지 창을 거두지 않은 일(8:26), 또 감사의 제사를 드린 일(8:30~32) 마지막에 기업을 받은 일(수 19:49~51)등을 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모범적 사례들을 성도가 반드시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기브온족과 관계된 일 (수 9:3~15) 목록으로


“기브온족과 관계된 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여호수아의 군사들이 아이성을 점령하고 에발산에서 하나님께 제단 쌓은 일이 있은 후에(8:30~35)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약조를 청원하였습니다. 여기의 기브온 거민은 히위족이라고 합니다(7절). 이 히위족은 가나안 7족속 중 하나이고, 에발산이 있는 세겜땅에 거주하는 족속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찾아왔을 때 먼데서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주변 성읍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때 여호수아가 세겜땅(에발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진격을 한다면 먼저 화를 당할 차례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두려워서 협상을 시도한 것입니다. 눅 14:32에서 “전쟁에 질 바에는 화친하는 것이 옳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으니까 화친의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목적은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2. 그 기부온족이 먼 곳의 부족이라 할 때 여호수아와 장로들이(11절) 속은 실수를 범하였는데 역사적으로 성경을 살피면 선민이 보복을 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약 500년 전이 됩니다. 기브온족의 조상들이 세겜에 살고 있을 때 히위족 하몰의 아들 세겜(추장)이 야곱의 딸을 연연하여 혼인을 청하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협상하기를 “할례를 받아야 혼인시키겠다”하고 그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하는 시간에 도륙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창 34:1~31) 약 500년만에 그 반대로 보복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500년도 길지 않습니다(벧 3:8).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세월을 길다 하지 않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재건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였는데(수 6:26) 그때로부터 약 450년 후에(아합왕 때) 히엘이 그 성을 건축하다가 죽었고, 또 기브온에 대한 약속을 사울왕이 위반한 것 때문에 약 400년 후 다윗왕 초기에 그 보복을 받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삼하 21:1~9, 왕하 16:34). 성도가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상벌이 더디다 하여 외면할 수 없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공의가 두려운 것을 믿고 누구를 속이거나 억울함을 주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여호수아나 장로들이 속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하였는데 속았고, 협상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하나님이 “본토족과 맹약하지 말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 하셨기 때문입니다(출 23:32, 34:12, 민 33:35, 신 7:2). 그런데 왜 맹약을 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살피면

1)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마음에 두었더라면(가나안 거민이 아닌 줄 알고 속았지만) 깊이 숙고하셨을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말씀에 숙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2) 동정으로 살펴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고,

3) 사람 죽이는 수고와 전쟁의 노고를 줄여 보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며

4) 또 노비로 쓰는 타산도 하였을 것인데

5) 더 결정적인 원인은 확인 없이 시행한 것입니다. 나그네 행색만 보고 또 일방적 말만 듣고 먼 곳 사람으로 인정한 것은 확인이 잘못된 것입니다.

6) 그럴 때 하나님께 여쭈어야 하는데 그것을 깜빡 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잊은 것이지요. 사람에게 속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적으로 속거나 어떤 약속을 이행하는 일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안 속으려면 가장 값싼 쌀을 사 잡수시고, 참기름 아닌 가짜 기름을 사 잡수시며 소고기도 가장 싼 것을 사서 잘 끊여 먹으면 가짜니까 비만도 없고 돈도 절약하면서 속았다는 불쾌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활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진리,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속지 않고 성실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사실이 탄로 났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분하게 되었고, 기브온족들은 9:25에서 “우리가 당신 손에 있는즉 의향에 좋고 옳은대로 하소서”하고 목을 내밀었지만 하나님 앞에 맹세를 했은즉(9:18) 어찌 돌이킬 수 있습니까? 왕명은 권위상 취소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려고 날짜를 정하여 어명을 받아 놓았는데 하만이 왕의 권위를 침범하려 하다가 죽게 되었지요(더 3:1~11). 그러나 유대인 죽이는 명령을 취소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유대인을 죽이려고 예비하는 자들을 유대인들이 미리 척결하여 살 길을 열어준 사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더 8:9~9:16).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지키는 것은 목적보다 명분을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기브온족이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명분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목적에만 치중하여 위반된 수단을 쓰면서 명분(하나님과 성도의 명예)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본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을 이용하려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딤전 6:5). 여호수아는 명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거짓에 속았지만 꾹 참고 맹세를 지킨 것입니다.

5. 그런데 또 가나안 5왕이 기브온족을 미워하여 멸하려고 전쟁을 일으켰고, 그들은 또 도움을 청해 온 것입니다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주었는데 또 보따리 달라는 격이 되었습니다. 종으로 쓰기로 약조한 부족이니 어찌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브온족을 살리기 위하여 가나안 5왕과 싸우는데 하나님이 우박과 태양이 머무는 기적까지 주셔서 큰 승리를 하였고, 그 뒤끝이 더 좋아져서 가나안 5왕 외에도 막게다. 립나, 게셀, 드빌, 또 가데스바네아에서 가사까지 넓은 땅을 점령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맹세를 지키고, 기브온족을 도운 것이 더 큰 소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분 있게 행하는 성도를 붙드시고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태양아 머무르라 (수 10:12~14) 목록으로


본문을 읽으신 성도가 상고하셔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싸움의 성격과 전황이요, ② 여호수아가 기도한 목적이며 ③ 여호수아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믿음의 성격에 관한 것이요, ④ 응답의 상황이며 ⑤ 오늘도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하는 점을 연구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싸움의 성격과 전황에 대하여 여호수아 군사의 싸움은 크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가나안 정복의 싸움이고, 동기상으로는 기브온족을 구출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명분이 뚜렷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브온족을 살렸고, 종으로 쓰기로 하였으며 그들이 선민과 맹약한 것 때문에 가나안 5왕이 그를 대적한 것인즉 하나님의 명예와 맹약의 의리를 위해서도 싸워야 하고, 또 가나안 땅 정복 차원에서도 필요한 전쟁인 만큼 하나님도 허락하셨고, 대적도 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전쟁 상황은 쉽게 승리의 기수를 잡았고, 도망하는 대적을 쫓는 일만 남았던 것입니다.

2. 여호수아가 태양의 정지를 기도한 이유는 해가 지고 밤이 되거나 달빛이 없어 너무 어두우면 대적이 도망하여 숨을 것인즉 다 전멸시키기에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는 밝은 시간이 계속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추수를 끝내야 하는데 날이 저물어 일을 끝내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빛(밝음)의 연장을 구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여호수아가 이런 엄청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믿음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자로서 자연계와 기상도 주관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과 요단강에서도 큰 기적들을 많이 체험하였고, 또 그 전쟁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체험도 한 만큼(11절) 거기에서 믿음의 소재를 얻어 태양의 정지를 구하는데 무리나 억지가 없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태양을 기브온 위에 머물라”한 것은 그 당시 전쟁터가 기브온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하라”는 기도에서 몇 가지 살필 일이 있습니다. “아얄론”은 기브온 지역에서 볼 때 먼 서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태양의 정지를 위한 기도는 지구 자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대에서 통속적 표현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간은 해가 저물려는 시간이었겠지요. 그러면 달이 서쪽 아얄론 골짜기에 있으려면 그 시간은 새벽이어야 할 것이고, 또 태양이 중천에서 정지되었다면 달까지 정지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이 기도는 해와 달의 태양계를 한데 묶어서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태양이 저녁 시간 중천에 그대로 있을 때 달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태양이 정지되면 사실상 달빛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의 정지를 거론한 것은 태양의 정지를 구한 뜻에 달의 형편도 그와 같으라”는 뜻으로 구한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는 이 기도를 “이스라엘 목전에 구했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지도자의 위신에 큰 타격을 입을 뻔 하였습니다. 어려운 기도를 대중 앞에서 하는 것은 모험입니다. 예를 들면 곧 죽어가는 사람을 놓고 “주여 살려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하는 식의 기도입니다. 저는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 곁에서 같이 기도하고 확신을 제외한 상태에서 “아멘”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런 것을 몰랐을까요? 구하는 정도가 아닌 태양에 대한 명령인 것을 볼 때 분명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기도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4. 응답의 상황입니다. 응답의 상황을 보면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원수를 갚도록 하였다” 하셨으니 상당 시간 지구의 자전이 멈춘 것이 사실이고, 또 야살의 책(의로운 자의 시집)에도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않았다” 하셨고,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하셨은즉 기도의 목적대로 실제로 응답된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의 “후에도 없었다”는 말씀이 왕하 20:9~10(사 38:8)과 맞지 않는듯 하지만 여기의 “후”란 뜻을 여호수아 시대로 국한하거나 이적의 차이로 본다면 별 모순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살의 책에는 태양의 정지만 기록한 것이고, 13절에서 실제의 응답은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쳤다” 하셨는데 이것은 지구의 자전이 중지되었을 때 태양과 달의 가시적 움직임이 없을 것이 사실인즉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5. 오늘의 성도들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할 때

1) 천기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기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니까요. “예루살렘이 멸망 당할 때 안식일에 도망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라”고도 하셨으니까요(마 24:20).

2) 그런데 조심하셔야 할 것은 천기에 관한 일이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지역에만 관계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내가 나를 위하여 비 오지 않기를 구한 것이 비가 와야 할 그 지역의 농사꾼에게는 손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뚜렷할 때 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파악하기란 퍽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경우는 곧 하나님의 경우였고, “하나님이 그렇게 감동하셔서 그런 명령(태양아 머물라)을 토하게 하셨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러지와 동풍도 섭리하시고(욘 4:7~8) 삿 6:36~39을 보시면 “이슬이 한 부분에만 내릴 수도 있고 안 내릴 수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엄청 큰 일을 구하실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그만한 여건과 그만한 믿음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쓰여질 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11. 가나안 정복의 섭리 (수 11:19~23) 목록으로


“가나안 정복의 섭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가나안 정복을 끝내고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 500년 전에 아브라함과(창 12:5, 15:7, 18, 24:7) 이삭과(창 26:2~5, 22, 24) 야곱에게(창 28:14~15, 26:15) 약속하셨고, 또 40년 전에는 모세에게(출 3:8, 17) 또 들어올 당시에는 여호수아에게(수 3:7~10)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원망, 반역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그것도 민 14:30에서 정탐 보고가 있었을 때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신 1:44~45, 히 3:18). 하나님은 불신앙하며 원망하는 자들이 “광야에서 죽기까지 40년을 유리한다” 하셨고(민 14:33), 여러 가지 재앙으로 다 죽게 하셨습니다(출 15:24, 16:7, 민 16:35, 41). 따라서 선민의 가나안 입국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섭리대로 된 것입니다.

2. 또 여기에는 멸망당해야 할 자들에게 심판하시는 일과 복 받을 백성들이 승리해야 하는 일을 아울러 섭리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백성들이 멸망당해야 하는 일은 노아 홍수나 소돔 심판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먼저 대적하여 멸망을 선택하게 하셨고, 이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담대한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길갈에 있었을 때 가나안 5왕이 대항하다가 멸망당했고, 또 그런 멸망을 알고도 하솔왕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또 대항하다가 멸망하였으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시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수 1:6~7, 11:6). 본문 20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망할 자들에게 강퍅함을 주셔서 대항하게 하셨고 그들은 은혜를 힘입지 못했다” 하셨으며 선민 군대들에게는 용기와 힘을 주신 것입니다. 민 14:9에서 긍정적 보고를 한 사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면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또 사람의 생각으로 어찌 “태양아 머무르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은혜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 27:3~4을 보시면 다윗도 전쟁을 할 때에 “군대가 일어나 진을 칠지라도......오히려 안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대적을 이길 때는 언제나 마음에 담력과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4세기 사람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2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는데 “온 세상이 나를 대적하는가? 나도 온 세상을 대적하리라”하면서 교리의 싸움을 하여 승리하였고, 마르틴 루터도 종교 개혁을 할 때 “대적 마귀가 윔스 도성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면서 결국 개혁에 승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런 담력을 주시는 분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대적의 강퍅과 하나님의 외면, 성도의 담력과 도우심,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서 하나님과 선민의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백성들의 숙원과 투쟁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잠 20:21에서 “속히 잡은 산업은 복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옛날이야기에 가난한 형제가 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다가 동생이 금덩어리를 줍는 바람에 네것 내것 하는 마음이 생겨서 서로 불화하게 되어 그 금덩이를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복권이나 주식이나 땅 투기가 그런 종류인 줄 압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값지고 유익하며 오래 보존되는 줄 믿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선민은 400년 동안 자기 땅과 자유를 사모하였고, 40년 동안 여행의 고역을 겪었으며 가나안에 와서도 전쟁으로 정복하였은즉 값진 소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창 3:19에서 “땀 흘려야 식물을 먹는다”는 말씀은 원시시대부터 주신 생활 복음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호사다마란 말이 있습니다. 기후에도 삼한 사온이 있듯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은 항상 연속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진노 중에 긍휼을 구한 일”이 있고(합 3:2),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넘친다”(롬 5:20)하신 말씀처럼 선민의 가나안 정복 역사에도 그런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출애굽이 있으니까 홍해가 막혔고, 홍해를 건너니까 마라의 쓴 물이 있었으며 쓴 물이 있은즉 엘림의 단물을 주셨고, 여리고를 점령한즉 또 아이성의 난관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5왕의 대적과 북방왕들의 대적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들을 다 멸절시켰지만 그래도 블레셋 지역은 점령을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은 성도의 생활에 마귀의 역사가 그칠 날이 없은즉 계속 경계하고 경성해야 할 것을 실제적 상황으로 나타내 주신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행 14:22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셨고, 친히 육체의 가시와 싸우면서 사명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행 14:22, 고후 12:7~9). 이런 일들은 가나안 입국 과정이 성도의 영적 생활의 모형인 점을 예시해 주시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기적으로 승리했어도 대적은 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은혜를 받았거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하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화합한 상태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않겠습니까?

2)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붙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면 어떤 역경에서라도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내 뜻이면 여러 차례 점검하셔서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게 하셔야 하고,

3)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를 저어 바람을 거스르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봄비 때에 비를 구하는 것처럼(슥 10:1) 하나님의 바람을 받으면서 바람 따라 노를 저어가는 뱃사공처럼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바른 선택 (수 24:14~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잘 경외할 것”을 다짐하는 최후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길 것과 열조(아브라함)가 강 저편(유프라데 강 저편)에서 또 애굽에서 이방신 섬기던 것을 제하고 하나님만 섬기라” 하였고, 또 “하나님과 이방신 중에 섬길자를 택하라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한즉 백성들은 “그들이 체험한 능력의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1. 여기에 나타난 핵심은 선택입니다. 선민의 조상이 강 건너에서 섬기던 신은 바벨론의 “아누니툼”여신일 수 있고(역사 문헌), 애굽에서 섬기던 신은 “바알”인데 이것은 다 인간 자율주의에서 나타난 우상신들입니다. 어찌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여호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을 바로 하는 사람이면 피조된 신을 택하지 않고 창조자 능력의 하나님을 섬길 자로 선택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 드릴 제목은 “바른 선택”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선택과 거듭남에서 시작한다”는 교리가 있습니다(엡 1:4, 요 3:3). 그런데 이 선택과 중생은 인간의 영역 밖에서 하나님이 해 주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역사를 느낄 수 없고, 오직 그 결과에서부터 믿음의 활동이 나타나는 것인데 본문에서 “선택을 바로 하라”는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힘입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길 자로 택하고 다른 이방신을 제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왕상 18:21). “하나님 외에 더 큰 신은 없고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에 보여 분명히 알게 된다”(시 83:18, 롬 1:20) 하셨으니까 하나님을 섬길 자로 모시는 일은 가능할 것인데 아직도 그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류가 많은 것을 보면 인류의 타락이 얼마나 짙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성도가 유혹 받는 다른 신은 “재물과 세속과 문화와 전통과 유행의 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탐심 우상 숭배. 골 3:5).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다른 신의 역사요, 곧 마귀의 역사인데 성도들이 거기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곧 인본주의, 세속주의에서 나타나는 문화 전통의 유행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지요(히 11:6). 믿음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영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비밀스러운 교제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성도와의 개인적 영적 관계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숫자와 물질입니다. 숫자와 물질이 부흥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의 노하우가 전부 숫자와 물질 확보하는데 치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 교회의 비극이고,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마 7:13) 적은 무리에게 복을 주시며(눅 12:32)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전 10:5)” 하셨고, “물질도 기뻐하시지 않는다”(미 6:7) 하셨는데도 교회는 물량주의로만 나가고 있으니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본주의로 바꾼 것이지요. 또 성경을 자율주의로 바꾸었구요. 또 경건을 문화 전통주의로 바꾸었습니다. 정신 차려서 바른 선택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또 어떤 면에서 선택을 바로 하셔야 할까요?

1)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나의 정욕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택하셔야 하겠지요. 마 7:11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하셨으니까요. 여기에서 성도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면 먼저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마 16:24, 갈 5:24). 갈 5:24, 26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것을 못 박은 자이고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현세적 생존 경쟁에서 적당하게 물러서야 하는 것입니다.

2) 죄와 의 중에서 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1분 1초를 살아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 죄와 의가 대립됩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에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여기에서 의를 선택할 이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고(요 8:11), 또 “거룩하라”(요 17:1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3일 굶을 때까지 또는 죽음을 각오하고 죄 안 짓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의를 구별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고전 14:1에 근거하여 “사랑을 따라 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하시므로 또 세 가지 선택을 잘 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모든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따라 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되기를 축복하고, 나는 양보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양보한 자에게 또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을 주면 하나님은 더 큰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눅 6:38). 교회적 이기주의에서 멀리 떠나야 합니다(요 3:30). 그리고 신령한 은혜를 선택하기 위하여 세속의 달음질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쁜 중에서라도 기도를 그보다 더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특히 “예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기도, 봉사, 직분보다 성경 중심과 말씀 지식이 더 중요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선택하셨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과 의와 사랑과 말씀을 우선적으로 꼭 선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다짐의 효력 (수 24:26~31) 목록으로


여호수아의 평생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후계자로서 가나안 정복의 책임과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서 그의 책임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을 보시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울 무렵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세 번을 다짐하였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설명하고, “자신과 그의 집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즉 백성들도 선택을 잘 하라”하여 그들이 다짐하는 뜻으로 “하나님을 경외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24:1~18). 그러나 여호수아는 세속의 바람과 우상주의가 강한 것을 알기 때문에 또 다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신즉 잘못하면 멸망 당한다”(24:19~21)하고 더욱 각성할 것을 권고하여 그때도 “잘 하겠다”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두 번의 다짐을 받고도 그 다짐 받은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그 기념으로 돌기둥을 세워 증거를 삼게 하였으니 말로 약속한 것보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증거가 더욱 확실한 것이고, 또 기념돌을 세운 것도 하나님과 여호수아와 백성들 사이에서의 언약을 그 후시대까지 상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다짐하고 권고하는 바람에 여호수아가 산 동안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산 동안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시대부터 신앙의 긴장은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삿 2:17~20, 3:6 등에 보시면 “그들이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고 혼돈한 생활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다짐을 잘 하고 결심을 자주 하며 증거를 세워 놓으면 그런대로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시간에 “다짐의 효력”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다짐하셔야 할까요?

1. 하나님만 의지의 대상임을 다짐하십시오. 시 146:3~5에 보시면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야곱의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 재물, 권세는 다 인간을 통해서 혜택을 보는 것인데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 도모도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든든한 부모가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당한 의지의 대상이 되겠지만 부모도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시면 목사를 사모하고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도 실수할 수 있고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의지의 대상이 안 됩니다. 자신의 건강도 그렇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셔서 사람과 친교하며 의지하고 어떤 조직적인 틀 안에서의 생활 제도를 의지하고 그것으로 위안을 받으시면 안 되는데.....하고 염려를 해 봅니다. 인간이나 인간의 단체는 결코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만 홀로 자립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만 홀로 자립하시면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없어도 아무런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큰 만족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영원 불변의 동반자는 하나님 뿐이시니까요.

2. 삶의 목적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사는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셨으니까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보내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세상에 나게 하신 데는 다 목적이 있으신데 특별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목적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할 것이라”(약 4:15) 하셨고, 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전 10:3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이것이 영광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살피시면서 오직 영광 성취에 일치하는 생활만 하시도록 다짐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영광 돌리는 방법에 다짐을 하셔야 하겠지요. 영광 돌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크게 나누면 믿음 좋아지고(히 11:6) 사랑 실천을 잘 하면 되지요. 사랑은 계명의 강령이고(마 22:37~40) 하나님의 본질적 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 4:16). 그런데 이 믿음과 사랑을 하나로 합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롬 8:29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뜻을 베푸신 목적은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만들어 양자를 삼아 예수님으로 하여금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계시하여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으라”하신 것이고, 교회를 주신 것도 “예수님의 모범을 가르쳐서 예수님을 닮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런 취지로서 저희들은 삶의 목적과 오직 하나님 영광에 다짐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 말씀만 따르는 다짐을 하셔야 합니다. 현실 교회에 나타나는 모양새가 성경의 본질과 권위에 안 맞는 것이 많습니다. 제도나 전통이나 문화는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틀을 깨지 못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것이 많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의 자유를 교회가 “이렇게만 해야 한다”하고 사로잡는 것들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가 다 주일 11시에 예배드리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이가 11시 아닌 시간에 골방에서 두 사람 이상이 예배를 드렸다면 그것을 공예배로 인정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헌금도 십일조란 이름을 안 쓰고 걷는다면 금방 이단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짐을 잘 하시되 믿음의 대상과 목적과 영광 돌리는 표준과 방법에 대하여서도 확실하게 깨닫고 성경만 표준으로 삼는 다짐을 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복 주시는 섭리 (수 21:43~4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선한 일을 다 주셨고 안식도 주셨으며 그들의 대적을 다 그들의 손에 붙이셨으므로 하나도 남음이 없이 응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땅을 다 주셨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 때에 많은 시간과 절차를 통하여 주신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가나안땅 주신 것을 축복의 내용으로 믿고, 그 축복을 어떻게 주셨는가를 알아보심으로써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복 주시는 섭리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저희들은 가나안땅의 의미부터 아셔야 합니다. 가나안은 노아의 아들 함의 넷째 아들 이름인데 그 후손들이 다른 족속들과 함께 그 지경에 흩어져 살면서 그 땅을 가나안땅이라 일컫게 된 것입니다(창 10:15~18). 그리고 가나안의 지경은 창 10:19에서 “지중해변 북쪽의 시돈부터 남쪽 가사까지와 소돔 고무라......그리고 라사(소돔 근처)까지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서남 경계만 말씀하신 것이고, 실제 경계는 여호수아 때와 그 이후에까지 점령한 땅으로 현재 역사에서 “팔레스틴”이라고 말하는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셨고(신 6:3), 또 거기에서 “안식을 주셨으며(수 23:1) 또 그 땅의 족속들을 없애신 것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 일이고(신 12:29, 19:1), 또 그 땅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도를 세워 주신 것은 신령한 복과 함께 천국의 모형으로 주신 계시로서(출 15:17~18) 영적, 현실적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영적 은혜와 현실의 복을 아울러 많이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이 선민에게 복 주신 섭리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에 의하여 주셨습니다. 창 11:31, 수 24:2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이방신 섬기는 입장에서 부르셔서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셨고, 그 아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 되는 선택의 은혜와 가나안땅 주실 것을 약속하시므로 시작하셨습니다(창 12:2~7, 13:15~18). 그리고 그 아들 이삭과 야곱에게도 약속을 하셨으니(창 26:3, 28:13) 이것은 하나님이 저희들을 선택하여 복 주신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시 107:9을 보시면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하셨는데 애굽에서의 400년간 노예 생활과 광야에서의 40년간 유리하는 생활 속에서 그 민족들이 정착과 안식과 주권과 영토를 얼마나 사모하였겠습니까? 충분히 상상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출 3:7). 하나님은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마 7:7, 겔 36:37).

3)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주셨지요. 민수기 13장에서 모세가 열 두 정탐을 보냈을 때 10대 2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과 순종파이고, 나머지는 불신앙과 원망, 거역파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땅에 들어 간다” 하셨고(민 14:30), 그대로 성취되었으니 축복은 믿음과 순종으로 받는 것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벧전 2:8).

4) 노력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1:12). 유다 지파인 갈렙이 기럇세벨을 쳐서 얻은 것이나(수 15:15~19) 므낫세 지파가 길르앗과 바산땅을 얻은 것이나(수 17:1~2) 에브라임 지파에게 개척을 명한 것이나(수 17:18) 단 지파가 북쪽 땅인 레센을 쳐서 얻은 것은(수 19:47) 다 노력과 전쟁으로 더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력 따라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5) 조상의 잘못으로 뺏기고 조상의 은덕으로 받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음행의 연고로 장자의 특권(갑절 받는 것. 신 21:17)을 상실하여 두 배를 못 받았고, 요셉은 가족을 먹여 살린 공로로 두 배를 받았으니(므낫세, 에브라임) 이것이 곧 조상의 잘잘못의 영향인 것입니다(대상 5:1).

6) 축복의 영향도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폭력 살인 때문에 야곱의 저주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창 49:7) 레위 지파는 기업을 못 받았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어 받으므로(수 19:9) 본래의 분깃에서 제외되었고, 아셀 지파는 모세의 축복대로(신 33:24) 기름진 땅을 받았으니 조상이나 지도자의 축복이나 저주가 그대로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7) 생업의 환경 따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목축을 인하여 요단강 동편 땅을 먼저 얻은 것이요,

8) 인구수대로 참작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가족대로 제비뽑았다”(수 18:11, 19:1)는 말씀이 매 지파마다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탄생 시킨 생명에게 책임을 져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게 하신 뜻입니다. 저희들이 복을 받는데 있어서도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정황이 참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하고, 그 중에서 성도가 특별히 깨달아야 할 것은 믿음과 순종과 노력으로 복 받는 문제를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출 23:29~30을 보시면 천천히 받는 복이 유익한 경우도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