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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시작하며) 3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끝마치며) 4

이사야서 강론 서론 9 바로가기


제1과 하나님의 탄식 (사 1:1~9) 10 바로가기

(보충설교) 선민의 타락을 감찰하심 (사 1:1~9) 13 바로가기

제2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자 (사 1:10~17) 15 바로가기

(보충설교)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 (사 1:10~17) 17 바로가기

제3과 선민의 죄상과 하나님의 대책 (사 1:18~31) 20 바로가기

설교보충 1. 헛된 제물 (사 1:13) 23 바로가기

설교보충 2.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 (사 1:15) 25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죄에 대한 처리 (사 1:18~19) 27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오라 변론하자 (사 1:18~20) 29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범죄자의 할 일 (사 1:18~20) 31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선민의 타락과 하나님의 경고 (사 1:21~31) 33 바로가기

제4과 복음의 약속과 선민을 버리심 (사 2:1~9) 36 바로가기

제5과 선민의 교만을 심판하심 (사 2:10~22) 39 바로가기

설교보충 7. 교회의 권위 (사 2:1~4) 41 바로가기

제6과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 (사 3:1~12) 43 바로가기

제7과 방백들과 여인들의 죄 (사 3:13~26) 45 바로가기

제8과 그 날에 있을 일 (사 4:1~6) 47 바로가기

제9과 포도원 노래 (사 5:1~7) 50 바로가기

제10과 화 받을 죄악 (사 5:8~17) 52 바로가기

제11과 화있을진져 (사 5:18~30) 55 바로가기

제12과 이사야를 소명하심 (사 6:1~13) 58 바로가기

설교보충 8.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음 (사 6:9~10, 42:18~25) 61 바로가기

제13과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 (1) (사 7:1~9) 63 바로가기

제14과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 (2) (사 7:10~25) 65 바로가기

제15과 앗수르의 침략 예고 (사 8:1~10) 67 바로가기

제16과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신 일 (사 8:11~22) 69 바로가기

설교보충 9. 마헬살랄 하스바스 (사 8:1~4) 72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사 8:5~8) 74 바로가기

(보충설교)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사 8:5~8) 76 바로가기

(보충설교) 은혜를 알자 (사 8:5~8) 78 바로가기

제17과 메시야 왕국의 예언 (사 9:1~7) 80 바로가기

제18과 북왕국에 대한 진노 (사 9:8~21) 82 바로가기

제19과 유다와 앗수르의 죄와 벌 (사 10:1~19) 84 바로가기

제20과 유다의 소망과 앗수르의 절망 (사 10:20~34) 87 바로가기

제21과 메시야의 출현과 그 사역의 결과 (사 11:1~16) 89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메시야의 영적 사역을 예언하심 (사 11:1~9) 92 바로가기

제22과 복음 시대에 있을 일과 할 일 (사 12:1~6) 94 바로가기

제23과 바벨론에 대한 경고 (사 13:1~22) 96 바로가기

제24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 (사 14:1~23) 99 바로가기

제25과 앗수르와 블레셋에 대한 예언 (사 14:24~32) 102 바로가기

제26과 모압에 관한 경고(1) (사 15:1~9) 104 바로가기

제27과 모압에 관한 경고(2) (사 16:1~14) 106 바로가기

제28과 3국 멸망에 관한 경고 (사 17:1~14) 108 바로가기

제29과 애굽에 대한 서론적 경고 (사 18:1~7) 111 바로가기

제30과 애굽에 대한 경고 (사 19:1~25) 113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애굽에 관한 경고 (사 19:1~10) 116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애굽의 참상과 복음의 축복 (사 19:11~18) 118 바로가기

제31과 애굽의 불행을 예언함 (사 20:1~6)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이사야의 행동계시 (사 20:1~6) 122 바로가기

제32과 해변광야에 대한 예언 (사 21:1~10) 124 바로가기

제33과 두마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사 21:11~17) 126 바로가기

제34과 이상골짜기에 대한 경고 (사 22:1~25) 128 바로가기

제35과 두로에 관한 경고 (사 23:1~18) 132 바로가기

제36과 말세에 대한 예언 (사 24:1~23) 135 바로가기

제37과 옛적의 정하신 뜻 (사 25:1~12) 138 바로가기

제38과 이 노래를 부르리라 (사 26:1~21) 141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견고한 마음과 평안 (사 26:3~4) 145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심지가 견고한 자 (사 26:1~4) 148 바로가기

제39과 응징과 은혜 (사 27:1~13) 150 바로가기

제40과 선민의 타락과 멸망 (사 28:1~13) 152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중복교훈의 의미 (사 28:9~13, 민 7:12~83) 154 바로가기

제41과 지도자들의 완악을 일깨우심 (사 28:14~29) 156 바로가기

제42과 예루살렘과 그 적국과 이방에 대한 예언 (사 29:1~24) 159 바로가기

제43과 유다의 어리석음 (사 30:1~17) 163 바로가기

제44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1) (사 30:18~33) 165 바로가기

제45과 선민을 권고하시는 은혜 (사 31:1~9) 168 바로가기

제46과 유다의 죄와 메시야의 통치 (사 32:1~20) 170 바로가기

제47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2) (사 33:1~24) 172 바로가기

제48과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심 (사 34:1~17) 175 바로가기

제49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3) (사 35:1~10) 178 바로가기

제50과 산헤립의 망언 (사 36:1~22) 180 바로가기

제51과 히스기야 왕의 기도 (사 37:1~20) 183 바로가기

제52과 하나님의 응답 (사 37:21~38) 186 바로가기

제53과 히스기야 왕의 질병과 기도 (사 38:1~22) 189 바로가기

제54과 히스기야 왕의 실수 (사 39:1~8) 192 바로가기

제55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194 바로가기

제56과 절대자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12~31) 197 바로가기

설교보충 18. 위로의 교훈 (사 40:1~2) 199 바로가기

설교보충 19. 무엇을 외치리잇까? (사 40:6~8) 204 바로가기

설교보충 20. 시온의 사명 (사 40:9~11) 207 바로가기

설교보충 21.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27~31) 209 바로가기

제57과 희망을 주시는 말씀(1) (사 41:1~16) 212 바로가기

제58과 희망을 주시는 말씀(2) (사 41:17~29) 215 바로가기

제59과 메시야 예언과 초청 (사 42:1~17) 217 바로가기

제60과 선민 세계의 두 가지 불행 (사 42:18~25) 220 바로가기

제61과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 (사 43:1~13) 222 바로가기

제62과 저주와 새 일 (사 43:14~28) 225 바로가기

제63과 네 가지를 깨우치심 (사 44:1~28) 227 바로가기

제64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 45:1~25) 231 바로가기

설교보충 22. 하나님의 통치 섭리 (사 45:1~13) 235 바로가기

제65과 하나님의 의로 구원하심 (사 46:1~13) 238 바로가기

제66과 바벨론의 죄와 멸망 예언 (사 47:1~15) 240 바로가기

제67과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사 48:1~8) 243 바로가기

제68과 선민의 징계를 푸시는 섭리 (사 48:9~22) 245 바로가기

제69과 메시야의 뜻과 구원 사역 (사 49:1~10) 248 바로가기

제70과 선민 귀환과 은혜 (사 49:11~26) 251 바로가기

제71과 선민의 불행과 구원과 멸망 (사 50:1~11) 254 바로가기

설교보충 23. 지식과 신학의 분야 (사 50:4~5) 257 바로가기

제72과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 (사 51:1~11) 259 바로가기

제73과 응답과 위로의 말씀 (사 51:12~23) 262 바로가기

제74과 시온이여 깰지어다 (사 52:1~15) 264 바로가기

제75과 메시야에 대한 예언 (사 53:1~12) 267 바로가기

설교보충 24. 예수님의 고독 (사 53:2~4) 270 바로가기

제76과 선민의 부흥을 예언하심 (사 54:1~17) 272 바로가기

설교보충 25. 장막을 넓히는 생활 (사 54:1~3) 275 바로가기

제77과 은혜의 초청 (사 55:1~13) 277 바로가기

설교보충 26. 하나님께로 나오라 (사 55:6~9) 280 바로가기

제78과 선민 징벌과 이방인 구원 (사 56:1~12) 283 바로가기

설교보충 27. 몰각한 목자들 (사 56:9~12) 286 바로가기

제79과 악인의 결국 (사 57:1~21) 289 바로가기

제80과 세 가지 경건과 축복 (사 58:1~14) 293 바로가기

제81과 죄, 회개, 구원 (사 59:1~21) 296 바로가기

제82과 신약 교회의 영광 (사 60:1~22) 300 바로가기

설교보충 28. 빛을 발하자 (사 60:1~3) 304 바로가기

제83과 메시야의 사역과 은총 (사 61:1~11) 306 바로가기

제84과 메시야 사역의 연속된 말씀 (사 62:1~12) 308 바로가기

제85과 메시야의 영적 승리 (사 63:1~19) 311 바로가기

제86과 계속되는 선지자의 기도 (사 64:1~12) 314 바로가기

제87과 구원과 심판 (사 65:1~16) 316 바로가기

제88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정황 (사 65:17~25) 319 바로가기

제89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말씀하심 (사 66:1~14) 321 바로가기

제90과 유대인 심판과 이방인 구원 (사 66:15~24) 325 바로가기

설교보충 29.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사 66:7~14) 328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시작하며)

이사야서 강론집을 글로 남기게 된 것을 큰 은혜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에 목회를 하면서 새벽 기도회 설교를 위하여 성경 66권을 여러 차례 강론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사야서 강론이 가장 마음에 느낀 바가 컸기로 기회가 있으면 강론집을 만들려고 소원해오다가 먼저 정리할 것과 집필할 것을 거의 진행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2,3권만 더 집필하고 끝내려는 참에 이것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책들은 다 집필을 끝내고 서문을 썼으나 이 책은 우선 서론부터 써놓고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이 강론집의 특징은 우선 본문 설명에 충실할 것과 필자의 구상과 연구를 앞세운 점과 성경을 쉽게 배우려는 성도님들을 상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 점이라 할 것입니다. 필자는 평신도보다 약간 앞선 성경 선생으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적당하게 터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잘못된 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본의 아닌 잘못은 필자의 지식 부족을 의미할 뿐 성경의 뜻을 왜곡시킬 의도가 없는 것임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감동과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2001. 12. .


필자 지 영 근 드림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끝마치며)


집필을 마치고 소감을 쓰게 되니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 주신 은혜를 또한번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이사야서 강론을 쓰게 된 동기는 목회생활중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때 이사야서를 3, 4회 강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큰 재미를 맛보았습니다. 말씀표현의 의미가 퍽 재미있었고 또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애쓰는데도 취미가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이라든지 “기생노래의 뜻”, “홀로 포도즙을 밟았다”는 등의 용어에서도 매력을 느낀적이 있어서 “어차피 강론을 한권쯤 더 쓸바에는 이사야서를 쓰자”는 용기에서 어렵게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속히 끝을 보게 되었습니다.(설교 이외의 “보충내용”이란 따로 있던 원고를수록 한것입니다.

2002년 6월달은 월드컵 행사로 떠들썩하였지만 저는 여기에 몰두하여 가장 많은 분량을 6월중에 쓰고, 월드컵 승리를 기념하는 7월 1일 자정이 넘도록 기록하여 끝낸 것입니다. 이 강론은 평신도 중심의 강론입니다.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하였고 성경을 두세번 읽었으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신도님들을 위하여 뜻의 맥을 트는 목적으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학자들의 주석에는 원문에 대한 해석이 나타나지만, 그 해석이 개역판 성경의 내용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개역성경번역의 원문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영감받은 설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오늘 우리들의 설교처럼 조직만 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들의 실정에 맞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필자는 읽는 분들의 교훈상의 유익을 위하여 전체의 제목과 대지를 설명하려니까 그것이 잘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매절마다 다른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내용 구분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어느정도 구분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당분량을 한 과목으로 정한 것은 한시간분의 강론용이나 읽는 분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필자는 자신의 글을 남기는데 뜻을 두었지만 바라옵기는 이 글이 반포되어 읽으시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반드시 필자가 본문 말씀에 얼마나 집중하였는가를 생각하시면서 면밀히 읽으셔야만 다소나마 은혜를 받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호세아서까지만 강론을 써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2. 7. 1.


필자 지 영 근 드림

 

 

 

이사야서 강론 서론 목록으로


이 시간부터 이사야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려고 할 때 우선 개론적인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연구의 범위가 방대합니다. 예를 들면 역사적 배경으로서 연대를 맞추고 사건을 순서대로 조화시키는 일이라든지 또는 이사야서가 결집된 과정에 관한 것, 또 영감을 어떻게 받았는가?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신학자들이 연구할 문제요, 또 그 분들의 연구 논문을 읽으시므로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신도님들이나 초신자님들은 성경을 진리로 믿는 신앙으로 성경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실제적 신앙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런 취지에 따라 말씀의 의미와 교훈을 받는데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기록한 강론은 본문에 따라 평신도 중심으로 증거한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제 1 과 하나님의 탄식 (사 1:1~9) 목록으로


본문의 1절 말씀은 서론이고, 2~9절 말씀은 “하나님의 탄식”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1절 말씀에서는 이사야의 신분과 사역 시기와 사역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아모스”가 혹 12 소선지자 중 아모스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실 수 있으나 그럴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사야의 부친 “아모스”를 “웃시아왕의 부친 아마샤왕의 형제라”는 랍비의 주장에 따라 왕족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역시 믿을 것은 못 됩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자기의 신분을 감추는 것 보다는 “나는 누구의 아들입니다”하고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진실성을 나타내는 일에 유익하므로 그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2)이사야의 선지자의 사역 시기는 “유다왕 웃시아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왕 때”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성도님들은 이스라엘 정통국인 유다국의 왕조와 르호보암왕 때에 분국된 이스라엘국의 왕조에 대하여 알고 계셔야 합니다. 본래 전체 이스라엘 왕조는 사사 시대가 끝났을 때 전 이스라엘 국민을 상대로 주전 1052년에 최초 왕 사울이 추대된 후 다음 왕인 되어 다윗왕과 솔로몬왕까지 각 40년씩 120년을 통치한 후에 4대 왕인 르호보암왕 4년(BC. 932년)에 에브라임 지파 느밧의 아들 여러보암이 반역을 하여(왕하 11:26) 이스라엘 지파 약 8할의 지지를 받아 북방 이스라엘국을 창설하여 19대 호세아왕 9년까지(주전 675년) 257년간 유지하다가 앗수르에게 멸망되었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파는 정통 국가로서 성전과 제사를 관리하는 레위 지파를 포함하여 적은 영토와 소수의 국민들만으로 23대 시드기야 왕 11년까지 504년 동안 유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유다왕은 북방 이스라엘국이 아닌 남방 유다 정통 국가를 의미합니다. 정통이란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왕조 계열의 정통이란 뜻이고,(북방 이스라엘 왕조는 르호보암왕 때 분열된 것임.)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제도에 대한 계승자란 뜻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자국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이용하기 위하여 절기 때마다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고 하나님의 세우신 종교 성질을 떠나 단과 벧엘에 자율 제단을 세우고 우상을 섬김으로 자율 종교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왕상 12:27~33)

여기에서 유다왕 웃시야는 13대 왕으로 52년을 다스렸고, 연대로는 주전 763년~711년이며 그의 아들 요담은 14대 왕으로 16년을 다스렸으며 연대로는 주전 711년~695년이고, 또 그의 아들 아하스는 15대 왕으로 12년을 다스렸고, 연대로는 주전 695년~683년이며 또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16대 왕으로 29년을 다스렸고, 연대로는 주전 683년~652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시기에 사역을 하셨다니까 그 시대가 주전763년~652년까지 111년에 해당하지만 웃시아왕 말기에서 히스기야왕 초기에 걸쳤다면 여러해를 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예언의 목적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북방 이스라엘을 제외한 국가의 이름이고, 예루살렘은 왕궁과 성전이 있는 수도이니까 “그 나라와 그 왕국 또 그 백성들의 신앙 생활에 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이상”이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형편을 말씀하신 것으로 “본 것”, 또는 “영감을 받은 것”이란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어떤 방법으로 영감을 받으셨든지 거기에 깊이 관여할 바 없이 저희들은 말씀의 뜻만 알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2~9절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나님이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1)하나님도 탄식하실까?할 때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성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람도 자식이 옳지 못한 일을 하면 그 아버지가 탄식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마음으로 탄식하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탄식하시게 하거나 노여워하시게 하거나 또는 근심을 하시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 7:11에 보시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라” 하셨고, 엡 4:30에서는 “성령님을 근심하시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지나치면 징벌로 다가올 것이고, 근심과 탄식이 지나치면 버림당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어떻게 탄식하셨습니까? 유감을 표명하시는 말씀으로 탄식하셨는데 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하신 말씀이 탄식의 서론입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말씀을 듣지 않으니 하늘과 땅을 향하여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뜻밖의 일을 당하면 “길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듣지 않는 것을 자연을 상대로 탄식하셨으니 이 표현은 시적인 의미도 있다 할 것입니다. ② 배신당한 상태를 탄식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자식처럼 양육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것을 탄식하셨으며 ③ 그 거역하는 상태가 임자를 아는 소만도 못하고, 주인의 구유를 아는 나귀만도 못할 만큼 무지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짐승은 주인에게 기대 이상으로 충성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철들지 못한 상태에서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은 탄식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④ 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참상을 슬퍼하셨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며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 하셨고, 또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멀리하고 물러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슬퍼하실까요? 탄식을 하시는 하나님이 왜 슬퍼하시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연민의 정으로 슬퍼하신 것입니다. ⑤ 그 백성들의 죄질을 설명하실 때 “범죄한 나라”란 뜻은 국가적으로 져야 할 죄를 뜻하고, “허물진 백성”이란 백성들이 각각 자기의 죄짐을 무겁게 지고 있음을 뜻하며 “행악의 종자”란 시기를 넘긴 암병처럼 범죄의 깊이를 뜻하고, “행위가 부패함”이란 썩음이 지나쳐서 고치기 어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가볍게 취급하는 뜻) 여기고 멀리 하며 물러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 하나님을 가볍게 인식하시지는 않습니까? 또 하나님과 멀찍이 떨어진 상태는 아닙니까? 또 허물진 백성되고 행악의 종자가 되어 부패한 행위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말씀을 저희들에게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⑥ 권고받지 못할 대상이 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과일이 썩으면 도려내든지 버려야 하는 것처럼 그 백성들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형편에 있음을 탄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범죄 정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권고(그대로 감싸주시는 것)의 손길에서 벗어나 버림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매를 맞으면서라도 속히 자복하고 회개하면 덜 맞을 수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패역하여(회개하지 않음.) 몹시 맞은 상태인데도 여전히 더 맞으려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피곤해졌음은 물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다 터진 상처 뿐인데도 여전히 패역하여 권고와 치료(기름으로 유하게 함.)받을 기회를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⑦ 이 말씀은 그 백성들의 당시의 참상을 매 맞는 육체로 비유하신 것이고, 여기에 대한 실제적 형편은 7~9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요담왕 때에 아람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왕 “베가”가 유다를 쳐들어와서 몹시 괴롭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왕하 15:37~16:9) 그로 인하여 “땅이 황무하고 성읍이 불 탔으며 토지도 상당 부분 삼키움을 당하고 예루살렘과 작은 땅의 부분만 남은 것이 마치 포도원의 망대나 원두밭의 상직막처럼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약간의 부분이 남은 것도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고무라처럼 아주 없어졌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행위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행위가 옳지 못할 때 권고하시고, 듣지 않을 때 탄식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놓칠 때는 크게 진노하시고 버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백성들을 “짐승보다 못한 자라” 하셨고, 치료 받지 못할 백성들을 인하여 크게 슬퍼하시며 탄식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보충설교) 선민의 타락을 감찰하심 (사 1:1~9) 목록으로


본문의 1절은 “서론”을 말씀하신 것이고, 2절 이하는 선민의 타락을 감찰하신 하나님의 소감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감을 피력하신 말씀에서 2~4절은 범죄의 정황을 말씀하시면서 탄식하신 내용이고, 5~9절은 권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국한한 제목은 “선민의 타락을 감찰하심”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서론에서는 이사야서를 기록한 때와 저자와 말씀의 대상과 계시를 전달받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1)이 말씀을 기록한 때는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의 때를 말씀하신 것인데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웃시야는 유다국의 10대 왕입니다. 따라서 10대 왕으로부터 13대 왕이 다스리던 시대란 것입니다. 이 시기는 연대표에 의하여 거의 짐작할 수 있으니 주전 711년경에서 주전 652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북이스라엘국은 10대 예후왕으로부터 14대 스가랴왕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2)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누구의 아들 또는 조상이 누구”라고 기록한 것은 그 인물의 역사성이나 가문을 알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역사성 또는 조상을 숨기려 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아버지가 “아모스”라 하였는데 연대로 보면 소선지서를 기록한 “아모스” 선지자일 수도 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고, 또 랍비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모스”가 웃시야의 선왕 “아마샤”의 형제라 하여 왕족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고 하지만 역시 신빙성이 없으니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왕족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3)이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상대로 주신 말씀입니다. 유다는 주전 932년에 나라가 분국된 후 남방 이스라엘국을 일컫는 명칭이고, 예루살렘은 그 유다국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므로 나라의 고위층 또는 책임자들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또 남방 이스라엘을 유다로 대표하는 이유는 남방국이 차지한 예루살렘 이남의 지역이 유다 지파가 기업을 받아 차지한 땅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지역 안에 베냐민 지파의 땅과 시므온 지파의 땅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토가 유다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유다족 즉 정통적 선민인 남방 유다국 백성들을 상대로 주신 말씀입니다.

4)이 말씀을 계시 받은 방법은 “이상”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란 “카존”이라고 하는데 “영감 중에 본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히 1:1)

2. 선민의 타락을 감찰하신 하나님의 소감을 말씀하셨는데(2~9절) 그 내용을 두 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범죄의 정황과 하나님의 탄식입니다.(2~4절) ① 그 백성들의 범죄는 “깨닫지 못하는 죄악과(3절, 눅 23:34) 또 하나님을 버린 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만홀히 여긴 죄, 하나님을 멀리하는 죄,(4절) 매를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는 죄(5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렇게 합니다.”(눅 23:34)라고 하셨습니다. 선민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죄악과 자기의 형편을 모르면 무지한 것이고, 무지는 죄에 해당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완악한 죄에 대하여 “범죄한 나라요, 허물어진 백성이며 행악의 종자요(조상들도 같은 죄를 범하였다는 뜻) 그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하시고 탄식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의 자녀들이 타락하면 그 부모는 슬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지셨으며 그 심정을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감동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완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권고를 듣지 않고 멀리 떠남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자연계에 호소하신 것입니다.(2절) 그리고 비유적으로 설명하시기를 “사랑으로 양육받은 자식이 그 부모를 거역함과 같으니 이는 임자를 알아보는 소만도 못하며 또 임자의 구유를 알아보는 나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먹을 것 주는 주인을 잘 압니다. 그러나 유다의 백성들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멀리 하였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해 보아도 그 당시 선지자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2)하나님의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5~9절) 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고 하셨습니다.(5절) 이것은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패역하는 시간이 길수록 하나님은 매를 더 때리시는 분입니다. 공과금을 정기에 안 내면 계속 부과금이 붙다가 나중에는 재산 차압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성도가 계속 완악하면 결국 망하게 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벌 주신 시일을 따라 다시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욜 2:25) ② 진단해 주셨습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악의 형편을 만신창이로 상처받은 육체로 비유하신 말씀으로 속히 치료를 받아야 할 입장이란 것입니다. ③ 또 그 입장을 실제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이 곧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탔으며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들에게 삼키웠고 또 황폐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할 때에 그런 일이 그 당시에는 닥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황무하였다, 삼키웠다”라는 과거형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확실하게 있을 일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큰 죄를 지은 자에게 “너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징계는 주전 668년에 있을 앗수르의 침략과 주전 548년에 있을 바벨론의 침략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④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이라도 아주 멸하시지 않고 “포도원의 망대나 원두밭의 상직막이나 에워싸인 성읍처럼 조금은 남겨두실 것이라”하셨으니 이것은 유다 민족에게 메시야의 맥을 잇도록 겨우 남겨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범죄한 분량대로 심판을 하신다면 소돔 고모라 성이 멸절된 것처럼 아주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에 약속하신 메시야 구원 사역을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타락한 백성을 징계하실 지라도 아주 멸하시지 않고 약속하신 메시야 구원 언약을 그대로 베푸시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2 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자 (사 1:10~17) 목록으로


성경을 읽으신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큰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말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원하시지 않는 것을 말씀하셨으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마 7:22)

하나님의 뜻

1. 범죄자를 정밀하게 감찰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관원들과 유다의 백성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으로 비유하신 것은 그만큼 범죄의 성질을 정밀하게 감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범죄가 소돔 고모라의 범죄와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의 범죄는 죄악성도 크려니와 심판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범죄를 감찰하실 때 외식하는 제사 행위와 손에 피가 가득한 살인 행위와 악업을 행하는 일, 악행하는 일, 선행을 배우지 않고 공의를 구하지 않으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고, 고아나 과부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것까지 감찰하셨으니(16~17절) 이 얼마나 주밀한 일입니까? 히 4:12에서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혹이라도 마음으로 잘못된 생각을 구상할 때는 속히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법원에 가셔서 판사의 말을 들으려고 애쓰는 만큼 성경에 귀를 기울이시면 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읽으며 지켜서도 복을 받습니다.(계 1:3) 교역자의 설교를 듣는데 맛을 들여야 하고, 또 사모하고 배우려하는 태도가 있을 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 가지 불행한 상태에서 치료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처방하는데 있음을 아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약으로 알고 공급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외식적인 제사와 행사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인간은 인격체요,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를 지키게 하신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포함하여 시행하셔야 하는데 마치 알맹이 없는 포장만 전달하는 것처럼 믿음과 심령의 간절함과 감사와 정성이 없이 기계적으로 제물만 들고 갔다 왔다 하는 식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와 지식이 없는 제사는 외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적 내용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의식과 제도를 주신 것인데 내용을 모르고 의식만 갖추니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음식을 잡수시지 않는 것만 보아도 “제사가 의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짐승의 기름이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외식하는 제사는 “보이러 오는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마당을 밟는 일에 불과하다” 하시고, “그런 제사와(레 1:~2:) 분향(출 25:6, 30:7)도 헛된 것이니 다시 가져오지 말 것이요, 월삭, 안식일 대회로 모이는 절기(레 23:24~29, 16:31, 민 10:10)를 지키는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의식보다 신앙의 질을, 또는 보이는 행사보다 자신의 신앙의 실속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선민들에게 베푸신 제사 의식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그 믿음을 간직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선행도 따라야 합니다.(약 2:17) 그런데 그것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성회와 아울러 악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의식과 제도에 너무 장황스럽게 얽매이지 마시고 믿음과 지식과 생활을 더 중요시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외식자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처럼 “회개없는 기도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방탕하는 자식이 부모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였을 때 쉽게 허락할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근본이 잘못된 성도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악한 방법으로 무엇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응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고,(렘 12:1) 또 그런 성취는 불행의 씨앗임을 아셔야 하고(시73:1~19) 또 기도자의 필수 요건은 감사와 회개임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빌 4:6~7, 벧전 4:18, 잠 15:29)

5. 하나님은 회개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나 탕자를 영접하신 것이나 삭개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눅 18:13~14, 15:17~24, 19:1:10) 회개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겠습니까?(마 18:21~22) 본문 16~17절에서도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며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하시므로 범죄 행위에 대한 구체적 회개를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피가 가득한 것(살인, 15절)과 악행을 그쳐야 하고, 또 악업을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버려야 합니다. 악업은 불법과 관련이 있는 직업입니다. 또 “선행을 배우고 공의(합당하게 행하는 것)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약한 자(고아, 과부)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의 “스스로 씻고 스스로 깨끗케 한다”는 것은 회개를 뜻하는데 성령님께서 회개하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지만(겔 36:26~27) 자신도 그만한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눅 19:8, 욥 23:3~9)

6. 그리고 13~14절에 보시면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다”는 말씀이 하나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용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에서 나오는 심정을 인간성에 전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지만 연약한 인간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유한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범죄를 정밀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 ②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③ 외식적인 제사와 행사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④ 외식자 또는 죄인(회개치 않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 ⑤ 회개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시는 하나님, ⑥ 인간을 상대로 인간이 이해 하도록, 인간적 용어로 표현하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읍니다.

 

(보충설교)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 (사 1:10~17)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3절에 보시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제사나 신약 시대 성도들의 예배가 구비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마치 변질된 음식처럼 역겹게 되는 것을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① 본문 1절에서는 “들으라” 하셨고, ② 12~13절에서는 “구비 조건이 없는 물질적 제물을 원하시지 않음”에 대한 말씀이며 15~17절은 구비 조건이 없는 외식에 대하여 하나님의 처방을 말씀하셨는데 ③ 15절은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고, ④ 16~17절은 “외식자에 대한 처방”을 말씀하셨습니다.

1. “들으라” 하심.(1절)

1)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소돔의 관원” 또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악한 상태를 소돔 고모라 거민들의 죄악으로 비교하신 말씀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법)을 들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심없이 듣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할 중병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병중에 있는 것조차 모르면서 선지자의 외침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신과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타락의 증상은 그 성질이 같고 또한 여전하다 할 것입니다.

2. “구비 조건이 없는 의식적 제사와 물질적 제물은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1~13절)

1)구비 조건이 없는 물질적 제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백성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드리는 제사와 희생물과 절기 지키는 일들입니다. 11절에 보시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라”하셨고, 그 종류들은 “수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 어린 양, 수염소의 피”라고 하셨는데 이것들은 다 값진 희생의 제물들이며 또 13~14절에서 분향하는 일과 정한 절기로써 월삭, 안식일 대회로 모이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월삭은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것이고(민 28:14, 29:1) 대회는 1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제를 뜻합니다.(레 16:29~34) 분향은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쉬임없이 향을 피워 제사드리는 것이고, “성회”는 제사드리기 위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회에서 드리는 모든 기름진 제물들을 다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형식적 제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2)내용물이 없는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 나는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이 말씀은 물질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말씀임.) “형식적으로 보이러 오는 것을 누가 요구하였느냐? 헛된 제물이다. 가증히 여길 뿐이요 무거운 짐이며 또 견디기 힘들고 곤비하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따라서 제물도 기뻐하지 않고 절기 지키는 것도 싫다”고 하셨습니다.(11,14절) 한 마디로 표현할 때 하나님은 구비 조건 없는 외식적 제사와 경배를 크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3. 구비 조건 없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제사와 제물은 잘 드리는데 구비 조건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1)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제물의 성격을 알며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제사 의식의 구비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도가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하는 경건 행사에도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는 기독교 의식은 역시 헛된 예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10절)고 하신 것입니다. 잠 28:9에서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지 않고 제물만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3)헌신성이 없는 제물은 구비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헌신성”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자기 전부를 드려도 시원치 않은 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보이러만 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사람처럼 고기를 잡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을 갖고 와서 하나님께 구경만 시켜드리고 제사장과 자신이 나누어 먹게 되니까 별 손해가 없다는 타산을 하는 것입니다. “보이러 온다”는 것이 형식적 제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하튼 헌신성과 정성이 없는 형식만 갖추는 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것도 그와 같은 형태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제물 갖고 오는 것을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4)악을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하셨고, 15절에서는 “손에 피가 가득하다” 하셨으니 이것은 이웃에 대한 미움, 시기, 다툼, 살인과 함께 약한 자를 학대하는 폭력과 착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구비 조건 없는 외식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 어떠하셨습니까?(15~16절)

1)“그런 자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무엇을 구하는 기도) 내가 눈을 가리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이 주여 주여.....하면서 무엇을 잘 구합니다. 그러나 구비 조건 없는 기도와 경건 의식은 하나님이 오히려 역겹게 여기시고 응답하시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따라서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은 “회개”라고 하셨습니다. 16절로 17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스스로 씻고 스스로 깨끗케 하며 하나님 목전에서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며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신원:억울한 것과 하소연0 들어주시는 뜻)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종교 의식에 앞서 죄를 멀리하며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공의롭게 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공의”란 것은 의와 불의에 대한 평가를 옳게 하고 잘한 자와 못한 자 사이에 공평한 처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옳게 하지 않으면서 절기와 제사와 제물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줄 알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로 아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구비 조건 없는 의식과 제도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 3 과 선민의 죄상과 하나님의 대책 (사 1:18~31)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우선 하나님이 선민 유다를 상대로 “변론하자”는 말씀이 있고, 하나님께는 죄를 깨끗케 해주시는 방도가 있는데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으나 거절하면 국가적 멸망(칼에 삼키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8~20절) 또 이 말씀을 주실 당시에 그 백성들이 패역함이 극에 달하여 “은이 찌끼 되고 포도주가 물이 될 만큼 위신이 떨어져있는 상태라” 하셨고, 그 일로 인하여 크게 멸망을 당할 것이나(21~23절, 28~31절) 또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정화 운동과 구원 사역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24~27절) 이 여러 가지 의미를 짧은 제목으로 정리한다면 “선민의 죄상과 하나님의 대책”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우선 선민들의 죄상을 어떻게 표현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18절에서 “죄가 주홍같고...진홍같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주홍이나 진홍은 사탄을 상징하는 샐깔인데(계 12:3,9, 붉은 용, 옛뱀, 사탄, 계 17:4, 자주빛 옷 입은 여자) “그 색깔이 진하다”는 것은 그만큼 범죄의 농도가 강하고 익숙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21절에서 “신실을 상실하여 창기같이 되었다” 하심은 속이고 등쳐먹는 사람들 뿐이란 뜻이요, 또 “공평과 의리가 없어지고 살인자들 뿐이라”하시므로 탐욕과 갈취와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한 사회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23절에서 방백들(정치가와 재판관)은 도적과 짝하여 뇌물을 바라고 부정한 혜택을 준 후에 사례물을 구하며 연약한 고아나 과부에게는 뇌물받을 것이 없으므로 외면하고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과 부패성은 오늘날도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을 것입니다.

4)28절에서는 “패역한 자와 죄인, 여호와를 버린 자, 우상의 제단과 함께 상수리나무를 기뻐하는 자라” 하시므로 도덕적으로 패역함과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과 우상을 숭상하는 패역성을 지적하셨습니다.

5)그런 결과로 그 민족의 가치는 은에서 찌끼로 떨어졌고, 순 포도주 가치에서 물 섞인 포도주처럼 “민족의 가치와 위신이 쓸모 없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22절의 “네 은이 찌끼가 되었다”하심은 마치 창녀의 목에 걸린 패물처럼 별 볼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고, “포도주에 물이 섞인 것”도 역시 진짜에서 가짜로 전락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관이 되었을 때는 존귀해 보여도 그가 유죄 판정을 받으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것처럼 범죄한 민족은 하나님 앞에 그 가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이상과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어떤 대책을 세워 주셨습니까?

1)18절에서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변론할 수 있겠는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들과 함께 살게 하신 분이므로 인간들과 1대 1로 충분히 교제하십니다. 그리고 선민들을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대화를 청하신 것입니다. 남북의 갈등도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처럼 하나님도 범죄한 선민과 대화를 통하여 살 길을 열어 주시려고 변론의 대상을 삼으신 것입니다. “변론”이란 원문이 “니와케카”란 말인데 “설복시킨다”는 뜻이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요, 따라서 심판의 위험에 처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주홍빛 같은 죄도 눈처럼 진홍같은 죄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속죄의 은총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고, 또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하시므로 이는 지상의 평화와 생존의 여건을 주신다고 하셨읍니다.(18~19절)

3)그러나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에 삼키울 것이라”(20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국가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삼상 17:47) 24절에 보시면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 “슬프다”는 뜻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패역하므로 벌 받게 된 상태를 하나님이 마음 아프게 여기신 것이고, ② “내 대적에게 보응하심”은 범죄하는 자기 백성들을 대적으로 여기신 것이며 ③ “내 마음을 편케 하심”은 죄인들을 벌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하심을 뜻하고, ④ 또 “내 원수에게 보수할 것이라”는 뜻은 선민에게 몽둥이 역할을 한 이방 국가에게도 벌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민은 범죄할 때 하나님의 일시적 대적이 되었고, 선민에게 징벌을 가한 이방국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다면 “선민을 대적으로 여겨 보응하시는 것”은 주변 국가들의 침략을 뜻하고, “원수에게 보수하시는 것”은 마지막 침략국인 바벨론에게 응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도 거짓이 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4)28~31절에서 결국 회개하지 않는 선민은 “망할 것이라”(28절)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를 인하여(상수리나무로 목상을 세운 뜻) 또 그들의 택한 동산(우상의 제단터)을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요,(29절) 그 장소까지 황폐하여 물없는 동산과 마른 나무처럼 될 것이라”(30절)고 하셨습니다. 설령 완악한 자들이 강한 자처럼 일시 버틸지라도 “결국은 불 앞에 삼오라기 같고 완악한 행위는 불티처럼 더 퍼져서 끌 수 없이 되는 것처럼 망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구원의 대책을 말씀하셔도 백성들이 거역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25~27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크게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① 25절에 보시면 “나의 손을 네게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민에 대한 징계의 손길을 은혜의 손길로 돌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돌리시는가? “너희 찌끼(존귀가 떨어진 것)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린다” 하셨으니 이것은 은을 빛나게 하는 것으로 선민의 존귀가 회복되게 하실 것을 의미하고, 또 “너희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린다”는 말씀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물탄 포도주에서 물을 제하면 순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가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면 천민이 되고 회개하면 귀인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② 어떤 방법으로 그런 일을 성취하실까요? 26절에서 “사사들을 처음 같이 또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판을 굽게 하거나 약자를 멸시하는 악한 방백들이 아닌 정의로운 정치가와 통치자를 보내어 공의의 정치를 펴는 “의의 성읍과 신실한 고을”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③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하면 27절에서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되고.......즉 예루살렘의 부패한 세계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로 다시 회복되고(구속;적국의 통치와 죄에서 벗어나는 뜻) ”그 귀정한 자(포로에서 돌아왔거나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들은 의로 구속되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의로 구속된다“는 뜻은 ”의로운 통치로 억울함에서 해방된다“는 뜻도 있고, 또 선택자이면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그러면 결론적으로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취된 것인가?하는 것을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① 선민(유다와 예루살렘)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생존하였던 요담왕 때에 아람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침략한 일이 있었고,(왕하 15:37) 또 히스기야왕 때에도 앗수르의 침략으로 고난당한 일이 있었으며(왕하 18:9~19:37) 이사야 선지자가 죽은 후에도 요시야왕 때에 애굽왕과의 접전으로 요시야왕이 전사한 일이 있었고,(대하 35:20~25) 그 다음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 때에는 바벨론의 침략을 꾸준히 받다가 결국 시드기야 11년에 나라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대하 36:5~20) ② 선민에게 권고와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한 사실, 그 당시에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타난 사실들이 있었고, 또 신약 시대에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신 일들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의로 구속하신 예언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희망은 국가적 현실적 축복에서 영적 구원의 은혜로 전환되었고, 지금도 메시야의 구속적 은혜를 힘입을 때에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헛된 제물 (사 1:13)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서 “헛된 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은 마 5:24에서도 교훈하셨습니다. 즉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갖고 가는 것은 헛된 예물과 같으니 예물을 그 자리에 놓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헛된 제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드리는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이 성전 제단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데 그것이 의식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상당한 의미를 지녀야만 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인가?하면 ① 그 희생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과 ② 그 희생 제물이 메시야의 속죄 제사를 모형한다는 것과 ③ 계명 실천의 성실한 생활과 ④ 회개하는 자세로 임하여야만 구약적인 제사의 의미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백성들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헛된 제물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2. 그러면 신약 시대의 제물은 어떤 것일까요?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드렸던 모형적 속죄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중보자가 되어 계시기 때문에 구약적인 제사 의식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약 시대의 신령한 예배는 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를 의미하며 ② 감사와 기쁨과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지식 ③ 또 회개하는 자복과 헌신의 태도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를 더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3. 헛된 제물, 헛된 예배란 어떤 것일까요? 의식에 내용이 동반되지 않으면 돈 없는 지갑처럼 헛된 것이 되겠지요.

1)헛된 제사(예배)는 믿음이 결여된 의식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든지 신약 시대의 예배든지 믿음이 없으면 외식이 되고 헛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장황스럽게 치른다 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갖지 못하므로 허황된 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 1:13을 보시면 외식적 종교 행사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이라 하셨고, 렘 12:7에서는 외식적인 제사 의식을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전도 훼파하신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 없는 의식을 크게 질책하신 것입니다.

2)율법 실천이 없는 종교 의식이 헛된 것입니다. 사 1:12에서 선행 실천이 없는 자들의 제사를 가리켜서 “마당만 밟는 것”이라 하셨고, 신약의 약 2:17에서는 실천 없는 자의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선행은 한계가 있고, 그것으로 의를 힘입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이나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경배드리고 기도를 드리는데는 이 계명 실천의 정성이 상당 분량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 실천의 으뜸은 사랑이라고 사 1:17과 고전 13: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3)회개가 없는 자긍하는 태도입니다. 사 1:15~16에 보시면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한즉 많이 기도하여도 듣지 않을 것이니 스스로 씻으며 악행을 그치라” 하셨고, 시 51:17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는다”하셨으며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응답받는 기도의 교훈”(눅 18:13)에서도 “가슴치며 회개한 세리의 기도가 들으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들으심을 받지 못하면 헛된 제사일 수 밖에 없겠지요. 그것이 곧 회개없는 제사, 회개없는 예배인 것입니다.

4)감사와 순종을 전제하지 않고 자기의 공로를 앞세우는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음이요, 또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에 순종이 없으면 제사가 헛되어지는 것입니다.(삼상 15:22) 헛된 예배나 기독교 행사를 하지 않기 위하여 이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설교보충 2.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 (사 1:15) 목록으로


1. 위 본문 말씀에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자가 “사랑의 실천을 못하고 포악과 악독을 회개치 아니하는 상태에서 그의 기도나 간구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함께 선행과 자비가 따라야 할 것을 사 1:16~1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자의 요건은 “선행과 공의와 자비가 있어야 한다”하셨으니 꼭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는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약 4:3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정욕이란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두지 않고 자기 개인을 위한 현실 목적에 두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뜻을 위한 기도가 아니거나 특별한 시험에서 건져지기를 구하는 기도가 아닌 것은 잘 응답하시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기도할 때에 자기의 욕심이나 이기적 목적을 가능한한 탈피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뜻만을 찾아서 구하는 연습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반대로 기도를 잘 들으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1)욥 22:27을 보시면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하셨는데 이렇게 기도를 들어주실 만한 조건을 살펴보면 그 앞 절인 23절 이하에서 “네 장막에서 불의를 버리고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며 전능자를 기뻐할 때 그렇게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기도자에게 성결과 배금주의를 강조하셨으며 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친교를 말씀하심으로 기도 응답의 요건을 교훈하셨습니다.

2)행 2:38을 보시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하셨는데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기도 응답 중 최고의 응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1:13을 보시면 “악한 사람도 그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심으로 응답이 더딘 결과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기도 응답이 크다는 뜻입니다.

3)시 51:17에 보시면 하나님이 많은 제물보다 상한 마음을 더 기쁘게 받으시므로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에 대하여 크게 만족하신 사실을 기록하셨습니다.(눅 15:7) 따라서 기도자는 항상 겸손하고 자복하며 감사하고 순종하며 충성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4. 마지막으로 응답하시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응답받으시는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바로 그런 취지였습니다. 마 26:42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엡 1:11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기의 원대로 행하신다”고 하셨고, 선택을 하시는 것(롬 9:13)이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롬 9:18)이나 또 각종의 은사를 주심에 있어서도 그의 뜻대로 주신다(고전 12:11)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사람의 뜻과 생각보다 하늘, 땅 차이처럼 높다는 것을 생각하여(사 5:9) 무슨 일이나 “주의 뜻을 앞세우고”(약 4:15) 혹 사람의 생각대로 안될 때에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14)하는 맡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가장 고상한 생활은 응답 받을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 뜻에 자기를 맡기며 복종하는 생활이 더 중요한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랑없는 기도가 응답되기 어렵다는 것도 본문을 통하여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죄에 대한 처리 (사 1:18~19) 목록으로


“주홍같고 진홍같은 죄를 눈같고 양털같이 해 주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하게 처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도들은 죄의 성격과 결과와 처리 대책에 대한 지식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1. 죄란 무엇입니까?

1)간단히 설명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인격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되 마음과 언행으로 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도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벧후 2:4)

2)인간이 범죄하게 된 것은 최초의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자유로운 의지로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므로 시작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율은 성경을 주시기 전에는 여러 모양으로(음성, 꿈, 환상, 상징적 의미 등) 전달해 주셨지만 최종적 계시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히1:1-2)

3)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앙적, 도덕적, 양심적 계율에 대하여 마음과 언행으로 어기는 것이고, 또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도 역시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욥 42:4,6, 눅 23:24)

2. 그러면 최초 인간이 범죄하므로 어떤 결과가 임하였습니까? 그 결과가 대단히 장황스럽습니다.

1)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피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2)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롬 1:18, 4:15, 엡 2:3) 이 진노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단절(마 27:46)과 심판(징계)으로 이어집니다.(롬 2:5, 눅 21:23, 계 15:31) 징계는 현세에서 받는 일시적 진노이고, 심판은 최종적 영원한 진노입니다. 따라서 일시적 진노는 회개함에 따라 그칠 수도 있읍니다.

3)그러나 희망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선택자에 한하여 구원해 주시는 계획을 세워 성취하시는 일입니다.

4)그 다음에는 인간 자신들에게도 좋지 않은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① 우선 하나님의 형상이 떠나면서(롬 8:29) 범죄 근성이란 부패성이 침투하였고,(고후 7:1, 엡 2:1, 롬 3:4,11~12) ② 범죄한 죄책이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으며(눅 11:47, 출 20:5) ③ 하나님의 진노가 현실적 징계로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수고와 해산의 고통과 땅에 엉겅퀴가 나는 등 여러 가지 고통과 함께 축복이 감소되었고, ④ 영적 죽음과 함께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었으며 ⑤ 심령적 불안과 두려움도 생기게 되었습니다.(창 3:7~10) ⑥ 또 육체적 죽음과 영원한 심판 아래 처하게 된 것입니다.(창 3:19) 참으로 인간의 범죄는 온갓 불행을 다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3. 이런 범죄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1)죄를 청산해 주시는 범위를 선택한 대상들로 한정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택한 자는 특별 취급을 해 주셨고, 비택자는 일반적으로 취급하셨습니다. 택한 자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비택자는 하나님의 세상 백성쯤 된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은 선택자에 대한 처리 대책으로 대속과 믿음의 방법을 쓰셨습니다. 대속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신 죄책을 짊어지시게 한 것이고, 믿음은 구원 받을 자로 하여금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마 9:5) 그 권세로 어떤 자의 죄를 사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도록 정해주신 대상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를 믿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으니까(렘 13:23) 오직 하나님의 방법에만 의존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3)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면 “의롭다”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은 “심판 받을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셨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유한다면 죄가 있어서 고소를 당했으나 그 죄 값을 대신 받아 준 사람이 있어서 기소가 취소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유화라 함)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따라 화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상은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4)모든 성도는 의의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는 일시적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것은 현실적 징계에서 놓임 받고 복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비유컨데 질병 같고(시 41:4) 빚진 것 같으며(마 18:30, 왕하 4:1~3) 무거운 짐과 같아서(마 11:28)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대책이 곧 회개입니다. 따라서 이런 회개는 구원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서 일시적 징계에서 놓임 받고 복 받는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눈같고 양털 같이 희게 하신다”는 뜻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죄책을 없애 주시고, 그와 관련된 고통과 죽음에서 평안과 영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성도가 될 때에만 모든 불안에서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오라 변론하자 (사 1:18~20) 목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라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라”하신데는 소환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을 오라”고 부를 때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 하나는 초청이고, 또 하나는 호출이며 또 하나는 소환입니다. 초청은 대접할 목적으로 오라는 것이고, 호출은 무슨 책임을 주거나 거두려 할 때 부르는 용어이며 소환은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법률적 용어입니다. 이 본문에서 “오라”는 분은 심판자 하나님이시고, 부름을 받은 대상은 범죄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소환이란 뜻이 적당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들을 소환하셨습니다.

1)이 소환은 소명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소명은 거듭난 심령을 처음 부르셔서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고, 소환은 글자 그대로 문제가 있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2)문제란 범죄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도 주시지 않고 그대로 응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래 오래 참으시면서 깨우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노아 당시에는 120년 까지도 기다려 주신 분입니다.(벧전 3:20)

3)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부르신 것은 변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변론”이란 심판관 앞에서 범죄자를 도와주는 대화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는 은혜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중보자를 세워서 대속하실 것을 예비하시고, “변론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용서받는 방법이 있으니 와서 변론하라”는 것입니다.

3. 성도가 중보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 주홍같고 진홍같은 짙은 죄라도 눈같고 양털같이 희고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강도를 주홍색, 진홍색에 비교하신 것은 그 죄들이 너무 선명하고 깊고 큰 것을 의미하며 또 그 더러움과 흔적을 없애기 어려운 뜻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붉은 색을 죄로 표현한 말씀도 있습니다.(계 12:3, 17:4) 그러나 하나님이 깨끗케 하셔서 눈같고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흰색은 성결을 의미합니다.(시 68:14, 마 17:2, 계 1:14) 따라서 “눈같고 양털같다”는 것은 흠없는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독생자의 공로를 통하여 죄를 씻어 주시는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심판에 대하여 완전하게 면죄하시는 의미가 있고

2)일시적으로 징계하실 수 있는 노여움을 푸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완전히 면죄받는 것은 선택자에게만 해당하는데그것이 곧 의롭다함을 받는 영원한 은혜이며 즉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 징계에서 노여움을 푸시는 것은 사랑과 긍휼에 근거하여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인데 여기에는 택자나 비택자가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의 은총으로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는 것은 택자에게만 해당되지만 범죄로 인하여 현실적 징계를 받거나 그 징계에서 용서를 받는 것은 선택자나 비선택자에게 다같이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욘 1:7)

5. 이 두 가지 중에 본문 말씀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울 것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징계를 뜻하고 또 19절에서는 “즐겨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도 즐거움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즐겨 순종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나라를 평안하게 붙들어 주시므로 아무 피해없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외적의 침략을 받아 칼에 삼키우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외적의 침략이란 앗수르와 바벨론을 충동하여 선민의 나라를 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6. 그리고 이 말씀이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20절)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란 진실하고 엄위하신 말씀임을 믿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헛되어질 수 없습니다.(사 55:11)

이 말씀은 범죄한 선민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방도를 제시하신 사랑의 초청이요, 민족이 칼에 삼키우지 않도록 미리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설교보충 5. 범죄자의 할 일 (사 1:18~20) 목록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진홍같이 붉다하시고, 회개하면 매를 거두시고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와 죄사함 받기 위하여 변론하려는 자의 태도가 어떠 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1. “나는 의인이다” 하지 말고,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요일1:8-9)

1)성도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의의 은총이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징계를 못하시게 되었거나 부패성이 없는 인격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가 성령의 충만에 붙잡혀 있지 않는 한 부패성도 남아 있고, 또 범죄할 가능성도 있으며 심판이 아닌 징계의 차원에서도 회개하고 진노에서 벗어나야 할 문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죄한 성도들이 할 일은 겸손을 차리는 것입니다.

2)바울사도가 자신의 마음은 죄를 멀리하고 싶으나 자신도 모르게 죄로 끌려가는 충동을 느꼈을 때 자신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을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탄식을 하였고,(롬 7:20~24) 더 나가서는 “내가 바로 괴수 죄인이라”는 고백을 한 일까지 있었습니다.(딤전 1:15)

2. 자신의 과오를 찾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고 진홍같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범죄의 성격을 밝히 관찰하여 평가하신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성도들도 자신들의 어떤 죄가 진홍같이 붉은 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1)욥은 자신을 살핀 후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있으랴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랴....하나님의 눈에는 달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인 인생이랴”하므로 인간들에게 많은 불결함이 있음을 말하였고, 다윗도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시 51:3)고 하였습니다.

2)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야 할 입장에서 자신은 무조건 죄가 없는 줄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죄만 살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나 도덕적 규범, 신앙적 규범, 또는 양심적 규범에서 자기를 살필 때 흠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3)성도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방법은 성경 말씀에 자기를 비추는 것입니다. 말씀은 계율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생활과 모양을 거기에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부끄러운 일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3. 회개하여야 합니다. 죄인의 입장을 만회하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1)고후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회개를 이룬다”하셨고, 시 6:2,6에서는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며 탄식하며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신다”고 하였습니다.

2)뼈와 영혼이 떨리는 심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화해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신다”하셨고, 또 탕자의 비유 교훈에서 회개한 자에게 큰 은혜주신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8:17~18, 눅 15:18~24)

3)회개의 중요한 요건은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지만 소는 미끄러진 자리를 다시 디디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성도는 다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음행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이 “다시 죄를 범치 말라”고 부탁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롬 6:12~14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을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며 자기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죽었다가 다시 산 자처럼 하나님께 드리고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만 사용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범죄자의 할 일은 겸손, 죄의 발견, 회개임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선민의 타락과 하나님의 경고 (사 1:21~31) 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선민의 타락과 하나님의 경고”로 정할 수 있습니다. 21~23절은 “유다 민족의 타락상”을 지적하신 말씀이고, 24~31절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관한 말씀에서 24절과 28~31절은 “보응 하시겠다”는 말씀이고, 25~27절은 “보응하신 후에 권고하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먼저 죄상을 지적하시고, 진노하신 후에 권고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유다 민족의 타락상.(21~23절)

이 말씀에 나타난 유다 민족의 타락상은 하나님이 보시고 평가하신 것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유기적 영감으로 감동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신 것이나 선지자가 느낀 것이 같았던 것입니다.

1)“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다윗 같은 선왕의 신앙적 통치가 있었을 때는 모든 국민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왕이나 백성들이 타락하여 “창기의 형태로 변하였다”하였으니 “창기”란 규범을 떠난 인생, 포기한 인생을 뜻하므로 유다 민족들이 하나님의 계율에서 완전히 멀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또 “공평과 의리가 있었으나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공평”은 방백들의 공의로운 정치와 재판을 뜻하고, “의리”는 의롭게 사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다 없어졌은즉 거의 무법 천지가 되어 폭력과 살인을 일삼아도 이를 근절시킬 능력이 없어진 상태를 탄식한 것입니다. 사회가 부패하면 유전 무죄가 되고, 무전 유죄가 된다는 말도 역시 공평치 못한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은은 찌끼가 되었다”하셨으니 은은 값진 보석이지만 그것이 삭고 녹슬어 찌끼처럼 되어 가치를 상실하는 것처럼 유다 민족의 존귀가 그만큼 땅에 떨어졌음을 뜻하며

4)“포도주에 물이 섞인 것”은 역시 물 섞인 술처럼 진짜가 가짜로 변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도덕의 변질성, 그리고 가치의 저하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5)또 “네 백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고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않고, 과부를 위한 송사를 받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방백들의 죄를 지적하신 듯합니다. 재판관이 도적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를 도와주었다면 그는 도적과 짝함일 것이요, 뇌물을 사랑하는 자요, 사건을 봐주고 나중에 대가를 요청하는 것이 사례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공의 상실은 물론 박애 정신도 없고, 인심이 경색해지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않음이나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않음”은 곧 약한 자 즉 뇌물을 제공할 수 없는 자를 외면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재판관이나 공무원이 부패하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5)그 외에도 28절에서 패역한 자(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회개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버린 자, 또 우상 숭배자들이라(29~30절)고 하셨습니다.

2. 경고하신 말씀.(24절, 28~31절)

하나님께서 완악한 백성들에게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 전능자라” 하시면서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고 내 원수에게 보수할 것이라”(24절)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 전능자라”하신 것은 모든 천사들을 지배하시며 전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적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니 패역한 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② 그 하나님이 사랑하였던 백성들에게 보응하실 것을 생각하실 때 슬픈 감정을 느끼셨지만 그 슬픈 감정이 공의의 심사를 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느끼면서도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들을 “대적 또는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긍휼을 베푸시지 않고 보응하실 대상이므로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④ 또 하나님이 보응할 자에게 보응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하여 “마음을 편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의로운 성도는 공의로운 생활에 균형이 깨질 때 만족할 수 없고, 따라서 편하지 않습니다. 오직 공의롭게 시행되었을 때(벌을 받을 때) 인간의 힘으로 버티려하는 “강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에는 삼오리기가 불타는 것 같겠고, 그의 행위(진노를 만회하려는 행위) 역시 불티 같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더 가증시킬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티는 불탄 재로 그것이 튀어 다른 것에 접촉될 때 다른 것을 더 태울 수 있으며 그 확대된 불을 끌 사람이 없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진노의 시기와 방법은 바벨론의 침략을 예상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3. 그러나 진노하신 후에 권고하실 계획도 있다고 하셨습니다.(25~27절)

1)“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로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릴 것이라”하셨으니(25절) 여기의 “손을 돌리신다”함은 진노의 손을 긍휼의 손으로 변화롭게 쓰신다는 것이고, “찌끼와 혼합물”이란 22절에서 말씀한 “은의 찌끼와 물섞인 포도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양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청결하여......제하여 버린다”하심은 선택한 백성에 한하여 성결케 하셔서 구원받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2)21절의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하심은 “여호수아”나 “기드온”같은 좋은 지도자가 나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그 후에 네가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칭함이 되리라”(21절)하심은 좋은 지도를 받는 백성들인 만큼 많이 정화되고 좋은 사회를 이룩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3)27절의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되리라”하셨으니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됨”은 예루살렘 선민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구속 사업이 나타날 것을 예고하신 것이요, “귀정한 자가 의로 구속됨”은 회개하고 돌아온 자 즉 믿음을 갖는 자가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죄사함 받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영적 구원 사역으로 계시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죄악 세계를 애굽으로,(계 11:8) 신앙 생활을 광야 교회로,(행 7:38)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창 13:15) 모형하여 계시하신 것처럼 타락한 백성들을 진노하실 때 바벨론의 몽둥이를 들어 치게 하셨고, 그 백성들을 권고하실 때는 바벨론에서의 해방,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성전 재건 등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 시대의 메시야를 통한 구속 사업도 선민의 사회적 회복처럼, 하나님의 권고의 은총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정한 자가 그 은혜를 받는 자이며 따라서 이 역사는 신약 시대에 구원받을 백성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계시의 방편도 된 것입니다.

 

제 4 과 복음의 약속과 선민을 버리심 (사 2:1~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1절은 서론이고, 2~4절은 “복음의 약속”이요, 5~9절은 “선민을 버리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약속과 선민을 버리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 말씀이 서론인 것은 1장1절의 뜻과 같습니다. 이사야가 증언한 말씀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으로 장차 유다와 예루살렘에는 복음이 임하게 될 것이고, 그 백성들 중에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복음의 약속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2~4절)

1)2절에 보시면 “말 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말 일”은 구약 시대가 끝나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세례요한의 때”입니다. 마 11:13에 보시면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목적이 메시야 출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세례요한이 와서 예수님을 직접 소개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선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존귀해진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원 지대이므로 산이라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 하신 것이며 “그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서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하신 것은 역시 그 곳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만방의 이목이 거기에 집중되고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그 곳으로 모여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도 1차, 2차, 3차에 걸쳐 선민들이 그 곳에 모였었고, 오순절 때도 10여 개국 사람들이 그 곳에 모였었으며 현재도 많은 순례자들이 그 곳에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은 에스겔 36:38에서도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2)문제는 왜 예루살렘이 존귀해지며 세계적인 이목이 거기에 집중되고, 또 3절을 보시면 많은 백성들이 그 곳에 가면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고 하는가?할 때에 그 이유는 ① “그가 그 도로......가르칠 것이기 때문인즉......그 길로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누구며 그 도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입니까? 그는 예수님이시고, 그 “도”는 예수님의 교훈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제적 교훈과 모범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3절 중에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참 선생님은 한 분 뿐이라”고 하셨지요.(마 23:8)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시니, 구원과 교훈의 핵심이 그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이란 “토라”는 교훈으로도 번역됩니다.(각주) 그런데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셨지만 그 율법을 더 밝게 교훈하신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주신 것입니다.(마 23:1~33) ② 4절에서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신다” 하셨으니 이 뜻은 예수님의 교훈이 표준이 되어 그 표준에 따라 열방의 잘잘못을 가름하게 되고, 또 예수님이 만 백성의 심판주가 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③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사 9:6, 눅 2:14, 마 21:5) 예수를 믿는 성도는 싸우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만큼 평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와 나라 간에도 전쟁이 그칠 것이고, 전쟁이 없으면 전쟁 연습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4절) 그런데 이 예언은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 세계가 성도 아닌 자들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거짓 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신 평화와 사랑 실천의 평화가 분명히 있는 것이고,(눅 17:21) 또 이 평화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천국(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눅 19:38,42)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예언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말씀하시게 됩니다.(사 53장)

2. 선민을 버리심에 대한 말씀입니다.(5~9절)

1)5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족속을 버리시는 일을 두렵게 생각하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먼저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 세계로 기울어진데서 돌아와서 하나님의 빛 즉 하나님 앞에 인정 받도록 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귀의 어두운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백성들이 희망을 찾는 길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밝은 세계로 나오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족속(유다와 예루살렘)을 버리셨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버리실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버리실까요? 세 가지로 버리십니다. ① 징계(전쟁, 재앙, 흉년)로 버리시고, ② 국가의 멸망으로 버리시며 ③ 선민적 특별 통치를 해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이 고난에 시달리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없어졌고,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는 메시야 언약을 제외하고는 선민이란 특권을 없애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버리신 것입니다.

3)왜 버리셨을까요? 6~9절에서 그 이유 ① 이방인들과의 혼잡함과 우상 숭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과의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과 같을 바에는 구태여 자기 자식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동방 풍속은 유다의 동편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풍속이란 뜻)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을 한다”하시므로 거룩된 생활을 떠나서 이방인들과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처럼 경건하게 살려하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분별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② 물질과 우상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7~9절에 보시면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또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우상도 가득하므로 자기들 손으로 지은 우상을 공경하되 천한 자도 거기에 절하고 귀한 자도 거기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존귀하다는 사람들이 돼지 머리에 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물질과 군대와 우상을 의지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지 마시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9절)

이 시간에는 선민들이 버림 받은 방법과 이유를 말씀드렸고, 또 그들이 버림 받은 죄악이 무엇인가?를,또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의 생활을 얼마나 주밀하게 감찰하시는지를 배우게 된것입니다.

 

제 5 과 선민의 교만을 심판하심 (사 2:10~22)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앞에 있는 말씀과 연속되는 내용입니다. 앞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선민(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을 버리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들의 죄가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거룩하여야 할 선민이 이방인처럼 구별없이 된 것은 지나친 타락이고,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안 이사야 선지자도 그 뜻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지 마시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2:6~9) 그리고 이어서 심판에 해당하는 죄와 심판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우선 “심판의 날”은 “그 날”(11,17절), 또는 “여호와의 날”(12절)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당할 수난의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수난은 여러 차례 연속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선지자 시대 이후 100년쯤 지나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망한 일도 있었고, 헬라의 통치 시대에도 많은 수난을 당하였으며, 또 주후 70년에는 로마의 침략으로 또 큰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날”은 하나님이 여러 차례 심판하시는 날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선민들의 심판에 해당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본문 11~16절 까지의 말씀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1)11절에서 “눈이 높은 자”가 있고, 12절에는 “교만하고 거만하며 자고한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눈 높고 거만하며 자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학벌이 높거나 돈이 많거나 권세가 있어도 교만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지도 않으면서 고급을 좋아하고 대접받을 위치에 있는 줄 알며 또 무시를 당하면 안 되는 자신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유력한 면이 있어도 교만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다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인간적인 것들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고 교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2)그러면 그 인간적인 의지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13~14절에 보시면 ① 레바논의 높고 높은 백향목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 백향목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습니다.(왕상 5:10~11,18, 6:14~15) 이것은 대원군이 왕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경복궁을 지은 것처럼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과 왕궁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②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를 의지한 것입니다. 상수리나무는 목상(우상)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어떤 불교 국가의 사원에 부처 우상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우상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이 바산에 상수리나무가 무수한 것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③ “모든 높은 산과 솟아 오른 작은 산”은 우상의 제단을 세울 수 있는 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터가 많고 우상의 재료가 많은즉 우상의 덕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④ 15절의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읍”은 수비의 견고함을 뜻하고, ⑤ 16절의 “다시스의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이란 무역과 상품을 뜻하므로 재물의 소득이 풍부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상신과 견고한 성읍과 재물을 의지하여 교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이런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하셨습니까? 앞에 6절에서는 “버리신다”고 하였지요. 하나님의 특별 통치에서 버리시면 대적에게 패망하게 되고, 환난을 당하게 되며 선민적 특권에서 제외되어 나라와 인권이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본문 10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심판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시 29편에 보시면 “파도 소리, 뇌성 병력, 백향목을 꺾는 바람, 홍수” 등을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에 전쟁이나 병충해, 가뭄, 전염병 등도 그 의미에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19절에서 “땅을 진동시키는 일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2)이런 위엄과 영광이 교만한 자들에게 임할 때(16절)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까?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나는데 “교만한 자들은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① 심판을 받는 자들은 낮아지고 굴복되며(11~12,17절)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지되(18절)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은금 우상을 두더지나 박쥐에게 던질 것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우상의 권위가 버려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토굴과 암혈로 들어가서 모든 재앙을 피하려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20절) 그러나 얼마나 피하게 될지는 상상해 볼 일입니다.(욜 1:4~7) ②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11,17절)고 하셨습니다. 악을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때 하나님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주시는 교훈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2절) 그 이유는 인생의 호흡이 코에 있은즉 수에 칠 가치가 없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인생의 호흡이 코에 있다”는 것은 생명이 파리 목숨과 같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테러 사건과(2001. 9. 11.) 관련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쓰레기처럼 버려집니다. 또 그 사이에 비행기 사고, 화재 사고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목숨이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만을 버리고 우상과 현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선민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의지하고 국방력과 물질을 의지하면서 교만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설교보충 7. 교회의 권위 (사 2:1~4) 목록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 경에 신약 시대의 교회가 권위있게 흥왕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1. 본문 말씀은 네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말 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우뚝 솟아 작은 산 위에 뛰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절) 이것은 구원의 종교가 모든 인류 앞에 우뚝 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종교는 기독교 뿐이므로 이 기독교가 말 일(신약 시대)에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의 역사로 만방에 우뚝 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만방이 모여 들며 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또는 교회로 모여올 것을 예언하셨고,(3절)

3)율법과 교훈, 또는 복음의 도가 예루살렘과 교회를 통하여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으며(3절)

4)복음을 받는 자들이 평화를 위하여 힘쓸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4절) 여기에서 교회의 권위는 구원의 도리가 있어야 하고,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며 또 교훈이 있고 평화가 있으므로 만 백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가 초대 교회 당시에 실현되므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2.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권위 아닌 것을 권위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물량주의에 표준을 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고 예배당이 크며 또 사회적인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물량주의입니다.

1)하나님은 예배당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입니다.(사 66:1) 따라서 건물 좋은 것과 교회의 권위는 상관이 없습니다.

2)또 성도들의 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하셨고, 그들의 호흡이 코에 있은즉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시 146:3, 사 2:22) 하나님이 사람 많은 것을 좋아하시면 얼마든지 만들어 내시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경건한 백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말 2:15)

3)교회가 재물을 가지고 사회 사업을 많이 하면 금방 관직의 사람들이 그 교회의 목사를 추켜세워 줍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는 사회 사업을 많이 하여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권위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어떤 선교사가 필리핀에 가서 예배당을 60여개 지었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교회 설립을 60여개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기존 교회의 판자집 예배당을 벽돌로 지어준 것입니다. 구제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전도비를 받아서 외국의 가난한 교회의 예배당을 지으라고 준 것은 구제금 전달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백성을 만들어야 그것이 참된 선교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권위는 물량주의나 사회 사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러면 교회의 권위가 어떤 경우에 세워집니까?

1)진리 사명에 철저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셨습니다.(딤전 3:15) 성경과 예수님 기초에 든든히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에서 나타나는 설교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가상해 보세요. 문제 있는 교회, 또는 불건전한 교회가 되고 말겠지요. 진리의 사명은 성경의 권위와 내용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널리 증거하는 사명입니다. 엡 2:20~22에 보시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그리스도가 모퉁이돌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생활이 사도적이고 선지자를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며 예수님 안에서 지어져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님과 사도들의 일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진리 증거도 역시 예수님과 성령님과 사도적 입장에 연합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사랑 중심에 굳게 서야 합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불이 꺼진다고 하셨습니다.(계 2:4~5) 교회가 진리 증언 다음에는 사랑 실천을 위하여 있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가 이기주의를 버려야 하고 약한 자를 돕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특히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와의 교세 균형을 위하여 양보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정신은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 하였고,(요 3:30) 바울 사도는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돕고 평균케 함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9, 8:14) 또 사랑의 열매는 평화이고 그것이 곧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일입니다.(4절)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얼마나 배려하는지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3)세속에 물들지 않는 교회를 만들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징계하시고 버리신 것은 바로 선민들이 이방인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생활이 구별된 백성 같아야 하는데 이방 풍속을 따르고 그들과 맹약을 하며 구별없이 생활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속에 물든 것이지요.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족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 문화에 눈길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신령한 은혜에 이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2:2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셨고, 사도 요한도 요일 2:15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서 33년 사시고 떠나신 분입니다.

이렇게 권위 있는 교회는 ① 진리 사명에 굳게 서는 교회요, ② 사랑 중심으로 활동하는 교회이며 ③ 세속을 멀리 하는 교회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다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들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 (사 3:1~12) 목록으로


이 본문의 1~3절은 “심판 받을 백성들이 인간적으로 의뢰하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심”이요, 4~7,12절의 말씀은 “심판 받는 방법으로서의 무질서 상황”을 말씀하신 것이며, 8~9절은 “선민들의 죄를 거론하신 말씀”이요, 10~11절은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대지를 종합하여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의 범죄 정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8절에서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언어와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감찰에 거슬림을 당한 것입니다. 죄는 심, 언, 행, 세 가지로 범하는데 여기에서는 언행의 죄만 거론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다”는 뜻은 “하나님의 감찰에 불리한 자극을 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언어의 범죄가 중요한 것을 더욱 깨닫게 하십니다.

2)9절에서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않음이 소돔과 같다” 하셨으니 이것은 범죄자가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범죄를 자랑하며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무지 몽매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를 계획하고 범행한 후 범죄의 성공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겠지만 예루살렘 안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소돔과 같았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에 화를 주시며 멸망을 자취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화”란 정신적 수난, 또는 신령한 복의 통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멸망을 자취함”은 멸망의 원인자가 바로 자신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멸망에 대한 것을 과거형으로 쓰신 것은 확실히 있을 일에 대하여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로 범죄하고 행위로 범행하며 철면피처럼 뉘우치지 않는 죄악이 만행된 것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을 하십니까?

1)먼저 심판의 표준을 세우시는데 그 표준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셨습니다. 10~11절에서 “의인은 복이 있고, 그들은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악인에게는 화가 있고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라”하시므로 의인은 의로운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고 악인은 악인의 범죄대로 보응을 받게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살후1:7) 하나님이 그의 공의에 따라 예루살렘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때

2)우선 악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없애시는 것입니다.(1~3절) 악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간적인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모든 양식, 모든 물, 용사, 전사, 재판관, 선지자, 복술자, 장로, 오십부장, 귀인, 모사, 공교한 장인, 능란한 요술자 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이런 대상들이 많으면 든든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많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멀리 할 위험이 있고, 그런데다가 믿음이 떠나면 더욱 그러하여 질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인간적인 것을 의지할 것이 많을 때 더욱 기도를 힘쓰며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세상 것들을 의지할 때 그것들을 없애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출 20:5).그리고 심판하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떻게 없애실까요? 가뭄으로 물과 양식을 없애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전쟁으로도 없애시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쓸어버리면 군인들이나 귀인들이나 재물이나 양식이나 물까지 다 없앨 수 있습니다.

3)그 다음에는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정부가 없으면 사회에 질서도 없어지고 폭력과 도적 떼만 난무하게 됩니다. 4~7절과 12절에서 그 무정부 상태의 근황을 설명하셨는데 통치자가 없는 세계는 우선 ① “아이들로 방백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면장, 이장, 군수, 유지들이 다 죽거나 끌려갔으니까 동리를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어린 아이라도 방백을 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② “적자들로 다스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사람이 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난리 중에 정치에 나갔다가 큰 위험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방백을 피하려고 하지만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적자라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적자는 군인에도 안 나갈 수 있으나 어쩔 수 없으니까 방백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정치를 옳게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고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6.25 당시에도 남의 집 일꾼 하던 사람이 감투를 쓰고 평소에 어른이었던 사람들을 크게 멸시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③ 6~7절에서는 가난의 형편과 입을 의복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 나가 설 수 없는 형편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있으니 우리의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하면 그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과 의복이 없으니 너희는 나를 관장 삼지 말라”고 할 것이란 것입니다. 싸움하는 교회에는 당회장도 안 하려 합니다. 대접 대신 뺨 맞고 소송에 걸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는 아무도 관직을 안 하려고 합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으며 지성인이나 어른도 없으니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 하여 지도자가 없어서도 안 되지요. 그러니까 지도자를 삼을 때 유력성을 따질 수 없으니까 “너는 입고 나갈 옷 한 벌이 있으니까 지도자가 되라 그리하여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어라”(수하에 둔다는 뜻은 멸망을 진압시켜 보라는 뜻)하면 “나도 고칠 능력이 없고 양식과 의복도 없으니 나를 관장 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④ 12절에서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남자가 없으니까 여자가 하게 된 것임.)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하신 것은 지도자가 없는 사회에서 무능한 자가 다스리니까 옳게 지도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죄악과 멸망의 역사를 상기하시면서 죄와 심판을 두렵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7 과 방백과 여인들의 죄 (사 3:13~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앞에 있는 말씀에 계속 되는 내용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13절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뜻을 변론하신다”는 서론이고, 14~15절은 “장로들과 방백들의 범죄”를 말씀하신 것이요, 16~26절은 “여인들의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13절의 “하나님이 변론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일에 대하여 그 이유와 방도를 알려주심을 뜻하고, “일어서신다”는 것은 기다리시고 감찰하심에서 행동하시기를 시작하신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뜻(말씀)만 나타내시면 그 뜻대로 상황을 변동하실 수 있습니다.(마 8:8)

2. 14~15절에서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심에서 이는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국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왕의 국문은 범죄의 확증을 잡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국문은 범죄를 익히 아시므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장로”들은 백성의 원로급으로 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유족한 자에 속하고, 방백들은 관원에 해당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을 사랑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등쳐서 그들의 재물과 포도원까지 탈취한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학대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죄악입니다.(14절)

2)“그들은 백성을 짓밟고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였다”고 하셨습니다.(15절) 이 말씀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노예 이상으로 학대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악행을 의미합니다. “얼굴에 맷돌질하였음”은 가난한 자가 낯을 들지 못하도록 그의 인권을 억누른 것입니다.

3)하나님은 또 그들을 가리켜서 “포도원을 삼킨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원이 한 가정의 기업이라면 선민과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선민과 교회를 포도원으로 비유하신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있습니다.(요 15:1, 렘 2:21, 사 5:1~12, 마 20:1~16) 포도원이란 애착의 대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라” 하셨으니 이는 백성들이 나라와 교회를 망하도록 죄를 범하였으므로 망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범죄한 백성들은 망하여도 원망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3. 여인들의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6~26절)

1)16절의 “시온의 딸들”은 예루살렘 여인들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도시의 여성들이 사치와 범죄가 더 심합니다. 그들은 교만하였으니 부유하고 평안한 것을 교만의 근거로 삼아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 급급하였습니다. “늘인목”이란 말씀은 고개를 쳐드는 교만한 자의 몸가짐입니다. “정을 통하는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며 다니는 일, 아기죽거리는 걸음으로 하체를 흔들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쟁쟁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 자세를 감찰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언어는 물론 바라보는 시선과 걸음걸이까지 도덕성이 결여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2)18~23절에서는 여인들의 사치를 말씀하셨고, 그런 사치를 못 하도록 “물자와 풍요를 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장식한 발목걸이, 머리에 쓰는 망사, 가슴에 붙이는 반달 장식, 귀걸이, 팔목걸이, 얼굴을 가리우는 면박, 머리에 쓰는 화관, 발목에 거는 사슬, 좋은 허리띠, 향을 담은 향합, 미신적으로 자기를 보호한다는 호신부(드라빔의 일종;창 31:34), 지환(가락지), 코걸이(과거에는 코걸이도 있는가?하였지만 지금은 원시족들의 문화에서 많이 볼 수 있음.),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지갑의 일종), 손거울, 세마포옷, 머리수건과 너울(면박, 쓰게치마같은 것)들이 다 사치한 용품들인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다 역겹게 보시고 그것들을 제하여 없애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한 사치와 교만은 큰 죄이며 또 하나님의 은혜주시는 목적을 모르는 잘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에 상응하는 벌을 주셔서 “그것들을 다 없애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면 사치할 수 없고 몸에 병이 나도 약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는 사치하던 자가 몸 관리를 못하게 되었을 때 부스럼이 나고 치료하지 못하게 됨을 뜻하며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심”은 의복이 없거나 전쟁의 후유증 등으로 여인들의 하체가 노출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24절에서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한다” 하였으니 이는 향수 냄새를 풍기던 자의 몸에서 악취가 남을 뜻하고, 좋은 띠를 띠던 자도 띠가 없으므로 노끈으로 허리를 매게 되며 머리털을 보호하지 못하여 대머리가 되고, 화려한 옷 대신 상복 같은 굵은 베옷(험한 옷)을 입게 되며 곱던 얼굴도 자자한 흔적(문신, 험상한 피부)으로 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원인은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이런 결과가 올까요? 25절에서 “장정이 칼에 죽고 용사가 전란에 망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전쟁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패하면 인권, 생명, 건강, 물질이 일시에 없어지고 가난과 핍박과 죽음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문은 슬퍼하며 곡하게 되고,(성안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성문이 대신 슬퍼할 수 밖에 없다는 뜻) 시온(예루살렘)은 황무하여 다 헐어진즉 땅에 앉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란 성돌만 남아 있으니 이것이 곧 도성이 땅에 앉은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이렇다는 것을 잘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 8 과 그 날에 있을 일 (사 4:1~6) 목록으로


1절과 2절에서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에 있을 일”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 날에 있을 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환난의 날에 남자가 희귀할 것”을 예언하셨고, 또 한 가지는 “구원의 날에 은혜를 베푸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환난날에 남자가 희귀해질 일에 대하여(1절)

1)1절 말씀의 “그 날”은 환난의 날이요, 전쟁의 날이며 유다와 예루살렘이 적군들에게 점령당하는 날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주전 600년경 유다국 말기에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많은 군인들이 죽거나 남자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의 떡을 먹고 우리의 옷을 입을 것이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여 달라”고 사정할 것이란 것입니다. 여기의 일곱 여자는 많은 여인을 뜻합니다. 그 날에 남자가 귀하니까 여러 여자들이 한 남자를 붙들고 “자기를 아내로 거느려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기 때문에 결혼의 의미도 퇴색되어 가고 있지만 옛날에는 남편 없는 여자를 천하게 여겼고, 또 자식을 보아서 인생 말기에 기업을 삼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편의 아내가 되는 것과 남편의 이름으로 기업 잇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남자를 보면 여러 여자들이 그에게 남편되어 줄 것을 사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6.25 이후에 많은 젊은 이들이 월북하는 바람에 동리마다 많은 과부가 생긴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에 패배하는 결과는 많은 고통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날에 은혜 베푸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6절) 그 은혜는 신령한 복과 보호, 인도의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2절에서 “신령한 복의 주체”를 말씀하셨고, 3절에서는 “복을 받을 자”를 말씀하셨으며 4절에서는 “신령한 복의 내용”을 말씀하셨고, 5~6절에서는 “복 받을 자에게 보호와 인도의 은총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예언의 시작은 환난을 말하셨으나 결말은 구원과 은총으로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어법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 매를 치신 다음 때가 되면 다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베푸시는 날이 언제인가?하실 것입니다.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이 초림하시는 복음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부터 예수님의 초림 시기까지 약400년간은 선지자 없는 세월로 징계하셨으니 결국 그 기간후에 은혜의 언약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약 400년이란 기간은 선민의 애굽 생활의 기간과도 비슷한 것입니다.(창 15:13)

1)신령한 복의 주체는 “여호와의 싹”입니다. “여호와의 싹은 영화롭고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호와의 싹”은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을 “여호와의 싹”이라고 하셨을까요? ① 싹이 생명체인 것처럼 예수님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이요,(요 14:6) ② 이 싹이 상당한 잠재 기간을 지난 다음에 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베임을 당한 그루터기에서 오랜 후에 싹이 난 것처럼 400년 동안 민을 징계하신 잠재적 기간이 지난 후에 메시야가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사 6:13) ③ 싹이 처음에는 연한 순처럼 자라지만 큰 나무가 된 다음에는 강하고 요긴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초림이 연약해 보여도 나중에 큰 역사를 이루실 것에 대한 비유로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기사를 보면 초라하게 마구간에서 출생하셨지만 “그 영광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 2:14, 요 1:14) 이렇게 신령한 복의 주체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2)그 복을 받을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2~3절) 그리고 “그 땅의 소산”이란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즉 메시야가 시행한 일이지요. 메시야가 시행하신 일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입니다. 이것이 곧 그 땅의 소산이고, 복음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절에 “피난한 자”란 말씀이 있고, 3절에 보시면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이 임하였을 때 “생존한 자 중 또 녹명된 자”이어야 하니까 택한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쟁 통에 죽음을 당하였거나 이방 나라로 도망하여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희망이 없고 이곳 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라도 복음이 임하였을 때 택한 백성으로 그 복음을 받는 자가 은혜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녹명되지 않은 자는 복음의 기회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고후4:3)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만 구원 받는 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신령한 복의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3~4절) 3절 끝에서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칭의의 은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란 성령님의 역사로 심판을 면케 하시고 죄를 없애 주신다는 뜻이요, “시온의 딸들”이란 복음이 임하였을 때에 유대 땅에 남아 있는 힘없는 백성들을 의미하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심”은 예루살렘과 선민들의 모든 죄악을 폭력과 피 흘린 죄로 묶어서 다 용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보호와 인도의 은총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5~6절) 5~6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짓고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특별 보호와 인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단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처럼 신약 시대의 교회에도 특별한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란 선민이 거하는 곳 즉 교회를 뜻하고, “낮에 구름과 연기 밤에 화염의 빛”은 하나님의 인도의 신호(안내 역할)를 뜻하며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는다”는 뜻은 사막에서 더위와 풍우를 피하게 하시는 은혜로운 대책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는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과 또 적당한 자연의 혜택으로 더위나 풍우의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을 의미하며 또 이와 같은 은혜를 복음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베푸실 것을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 약속을 확실하게 믿고 누리며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포도원 노래 (사 5:1~7) 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은 “포도원 노래”라 함이 가장 적합합니다. 1절에서 “포도원을 노래한다”고 하셨습니다.

1. “누가 누구를 위하여 포도원을 노래하는가?”할 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포도원에 관한 일을 선지자로 하여금 노래로 나타내게 하신 것입니다.

1)자기의 백성들이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요,(1절)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3절)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7절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사람(예루살렘 거민)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족은 선민 전체를 뜻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은 남방 유다국 백성들과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가까이 하는 정통 종교를 계승하는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국한 때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자율 종교를 신봉하므로 삐뚤어진 길에 서기는 하였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왕상 19:18)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종교 제도의 명맥을 붙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더 큰 기대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인이란 단체와 정통 신앙을 지킨다는 사람들 간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 전체가 받은 은혜만큼 보답하여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았으므로 크게 탄식하시며 깨우치시는 뜻을 노래로 나타내게 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을 노래로 나타낸 사실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시편, 잠언, 전도, 아가서가 다 그런 내용이고, 노래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사례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것은 문화의 조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노래에는 기쁨의 노래, 감사의 노래, 탄식의 노래 등이 있지요. 그 중에 이 포도원 노래는 하나님의 탄식의 노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도 그런 종류의 노래인 것입니다.

2. “포도원 노래”의 뜻이 무엇입니까?

1)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기름진 산에 땅을 파고 돌을 제하신 후 극상품 포도를 심고 망대를 세우시고 술 틀을 만드시므로 완전한 포도원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거론한다면 구원의 복음이며 선민 단체의 종교적 제도를 의미합니다. 또 신약 시대로 본다면 교회에 주신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선민 단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2)이 비유를 구체적으로 설명 드린다면 ① “기름진 산”이란 가나안 땅 예루살렘을 뜻하고, ② “땅을 파고 돌을 제하셨음”은 가나안 땅의 이방족을 쫓아내신 사실이며 ③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하심은 그 장소에 선민을 정착시키시고 복음적 신앙과 정통 종교의 제도를 맡기신 것을 의미하며 ④ “망대를 세우셨음”은 파수꾼 역할하는 선지자 같은 지도자를 주셨음이요, ⑤ “술 틀 시설”은 은혜의 방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포도를 은혜로 비유할 때 신약 시대의 교회를 포도원으로 상징한 말씀이 적당한 것입니다.(요 15:1, 마 20:1~16) ⑥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신 것”은 포도원 시설의 목적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공평과 의로써 성도들이 생활할 것을 바라신 것입니다. ⑦ 그런데 “들 포도를 맺었으니” 이는 성도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이 뜻하신 목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고 사도들을 본 받으라” 하셨는데 그대로 하지 않았든지 “계명의 강령은 사랑이라” 하셨는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결국 목적에 빗나간 것이고 참 포도 대신 들 포도를 맺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3.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 들 포도를 맺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심”은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부족함 없이 주셨으나 은혜를 받고도 경성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에게도 “이 은혜가 네게 족한 줄 알라”(고후 12:9)고 하셨습니다.

4.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은 백성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참 포도는 “공평과 의”였는데 그들은 공평과 의 대신 “포악과 부르짖음(불평과 원망)”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또 “들 포도”는 참 포도와 비슷하지만 참 포도가 아닌 것처럼 신앙 생활도 모양이 비슷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세계에도 신앙적인 것 같으나 아닌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5. 이런 포도원을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5~6절)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고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또 황무하게 하여 다시는 포도원 관리(가지 자름, 북돋음)를 할 것이 없게 하시고, 거기에 질려(납가새란 가시풀)와 형극(가시덤불)이 나며 가뭄의 땅을 만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유대땅은 황폐해졌습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되었고, 종교적 시설과 지도자들이 다 없어졌으며 사람 대신 짐승이 사는 곳이 되었고,(사 13:21, 렘 50:39)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대부분 사막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바라신 포도원의 열매는 자기 백성들의 “공평과 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평 대신 포악하였고, 의 대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부르짖음)을 나타냈습니다. 포도원 주신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없애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교회를 주신 목적과 성도 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역시 “공평과 의”입니다. 바르게 믿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 교회와 성도의 생활도 반드시 공평과 의를 확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의는 바로 성경에 계시되었으니 성경은 배워서 알고 깨달아 실천할 것은 사랑 뿐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화 받을 죄악 (사 5:8~1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화 있을진져”란 말씀이 두 번 나오고,(8,10절) “화를 받아 마땅한 죄악”과 “화를 내리실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화 받을 죄악”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화를 받아 마땅한 죄악”을 살펴보겠습니다.(8,11~12절)

1)물욕과 현세욕을 갖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는 잘못”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는 것”은 살고 있는 주택을 더 넓히는 것이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것”도 역시 갖고 있는 토지를 더 넓히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집과 전토를 더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죄악인가? 하시겠지요. 세상 욕심이 지나치면 죄가 되기도 하지만(요일 2:15) 1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셨는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관심치 않고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만큼 물욕을 갖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잠 30:8, 마 6:11) 그러나 필요 이상 더 가지려는 것은 분명 욕심입니다. 그런고로 본문에서 물욕을 지적하신 것은 자기 주위에 가옥이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는 가옥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더 넓히려 하고, 전토도 갖고 있는데 그것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전토를 더 넓혀 자기 것만으로 빈틈이 없도록 하려는 물욕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2)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홀로 거하려는 이기주의를 지적하셨습니다. 8절에 보시면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만 집 있고 나만 전토가 있으면 된다”는 주의로 자기의 터만 넓히려는 이기주의를 하나님은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시간에 KBS 교양 강의가 있었는데 “나눔”이란 제목으로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에 흐름이 있어야 하고,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베풀며 사는 생활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도 “밭 모퉁이의 곡식이나 포도를 다 수확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일부를 남기라”(레 19:9~10, 23: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만물을 주시고 나누어 쓰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가옥과 전토를 더 가지려 하고, 또 홀로 누리려는 욕심을 갖는 것은 벌 받을 죄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향락적인 죄악입니다. 11절에 보시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독주를 먹고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포도주를 갖추어 연회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찍부터 독주를 마시고 취하여 놀고 밤이 깊도록 향락에 머무르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성도는 놀거나 취하거나 향락하는 죄를 범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관심치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향락하는 것은 빈틈 없이 갖추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에 대하여는 관심도 생각도 안 갖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앞서서 생각하고 의지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성도를 눈동자 같이 지키는 것입니다.(신 32:10)

5)무지한 죄악입니다. 13절에 보시면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지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죄악이고, 예수님과 복음을 모르는 것도 죄악이며 모든 일에 지혜가 부족한 것도 죄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관심치 않는다면 이는 곧 알려고 하지 않는 인간 이하의 타락인 것입니다.(시49:20,사1:2-3)

2. 하나님이 범죄하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화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까? 본문에서는“화를 받는 결과”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뺏기고 천해지며 고생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뺏기고 천해지며 고생하고 죽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 대표적 방법이 전쟁과 가뭄과 전염병일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더 읽어가면 화를 내리시는 방법이 전쟁임을 말씀하셨읍니다.(사 13:1~5,26~30)

1)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여지고 가옥이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라”(9절) 하셨고,(6.25때에 잘 지은 빈 집이 많이 있었음.)

2)“밭은 있어도 농사 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10절) 열흘가리 포도원에서 한 바트(24리터), 한 호멜(340리터, 씨앗) 지기에서 간신히 한 에바(42리터)가 난다는 것은 자연 생산으로 내버려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죽었거나 이거하므로 농사 지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3)또 13절에 보시면 “사로 잡힐 것이고 귀한 자가 주릴 것이며 무리가 목마를 것이요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호화로움과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다 거기 빠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부가 입을 크게 벌린 것”은 시체가 수없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연상한 표현입니다. 많이 죽는 판에는 귀한 자도 없고 천한 자도 없는 것입니다. 정권이 무너지면 충신과 역적이 바뀌는 것처럼 나라가 없어져도 역시 상하의 질서가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16~17절)

1)“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으로 높임을 받으신다” 하셨으니 이것은 궁극적 영광이 하나님께 있고, 또 죄인들을 심판하신 일로도 공평함이 드러난다는 뜻 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공평하시지만 선민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심판이나 환난이 없다”하다가 결국 망하게 되니까 “선지자의 말씀이 맞는구나”하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자들의 우둔함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2)“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고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의 “그때”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는 때입니다. “그때에 어린 양들이 자기의 초장에 있는 것처럼 풀을 먹는다”는 것은 가진 자의 밭에서 자기 것을 먹듯이 풀을 먹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향락을 누리던 밭 주인과 부자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찐 자(부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도(주인이 없으니까) 유리하는 자들이 먹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 당시로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서 범죄하는 선민들의 죄악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일로 인하여 주전 600년경에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는 심판이 있으므로 성취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 11 과 화 있을 진져 (사 5:18~30)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화 있을 진져”란 말씀이 네 번 나오고 화 받을 죄악과 화를 내리시는 형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도 내리시고 복도 주시는 분입니다.(신 30:15)

1. 화 받을 죄악이 무엇입니까?

1)거짓을 일삼는 죄악입니다. 18절에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 진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거짓으로 수단을 써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거짓 자체도 죄이지만 거짓으로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 1억을 사기 당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기꾼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여 1억을 가진 자로 가장하고 신용 카드를 재발급 받은 후 그것으로 1억을 빼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것은 거짓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1억을 절취한 것은 죄악의 수레를 끈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악을 수레줄로 함”이란 거짓으로 많은 죄(수레의 큰 짐)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진실을 지킴에 대하여 반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약속도 잘 지켜야 하고 또 외식에 끌리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번 거짓을 행하면 그 거짓을 포장하기 위하여 계속 죄를 지어야 함이 마치 짐 실은 수레를 끄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여 업신여기는 죄입니다. 19절에서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완악한 자들이 선지자의 경고를 믿지 않으면서 “화 있을 것”이라는 그 일을 거룩하시다는 하나님이 속히 임하게 하여 증명해 보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비웃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예언을 100년 쯤 후에 실현하실 것인즉 악한 자들에게 증명하실 이유가 없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자기의 말씀이나 예언자의 말을 그대로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민 12:8, 창 26:5, 살전 2:13, 요 20:29)

3)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뜻을 내세워 역행하는 죄악입니다. 20절에서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고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고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진리의 뜻과 반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믿음과 양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면 사사건건 진리에 위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4)“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21절)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진리를 나타내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 11:25) 이것은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하나님도 인간의 지식을 앞세우지 않는 어린 아이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식을 앞세운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증거한 19~21절의 말씀은 곧 율법을 버리며 거룩한 자의 말씀을 멸시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24절)

5)향락과 방탕입니다. 22절에서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 진져”라고 하셨습니다. 술과 친근한 것은 곧 방탕입니다. 한국 교회가 초창기부터 술과 담재를 멀리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담배가 해롭다”고 홍보를 합니다. 술을 멀리 하라는 홍보를 하려면 또 100년 쯤 걸려야 할 것입니다. 술이 방탕의 근원이 되는 것은 술취함이 일하는 시간을 허비하고 온전한 정신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6)관리들의 부패입니다. 뇌물로 공평을 상실하고 의와 불의를 바꾸는 것입니다. 악한 재판관이 뇌물을 받고 죄 있는 자를 죄 없 게 만며 죄 없는 자는 있게 만들어서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의 의를 뺏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공평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공의를 일삼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시 15:2)

2. 이런 백성들에 대하여 어떻게 화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까?

1)우선 노를 발하시고 강하게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25절에 보시면 “자기 백성들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를 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실 때에 “산들이 진동하고 그들의 시체가 거리 가운데 분토(거름)처럼 흩어지지만 하나님의 노하심이 멎지 않고 그 진노의 손이 계속 펴진다(시행됨)”고 하셨습니다. “시체가 거리에 흩어지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뜻하고, “진노의 손이 계속 펴진다”는 것은 나라 잃은 백성들을 70년 동안 유리하게 만드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이런 진노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나무가 불타고 뿌리까지 썩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5장 초두에 기록된 포도원 나무를 기억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24절에 보시면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킨다” 하셨고, 또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다” 하셨으며 그로 인하여 뿌리가 썩고 꽃이 티끌처럼 날린다고 하셨습니다.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은 진노의 강도가 맹열하게 나타남을 뜻하고, “그루터기를 삼키며 뿌리가 썩는 것”은 민족적으로 소생하기 어렵도록 깊은 부분까지 치명타를 가하시는 것이며 “꽃이 티끌처럼 날림”은 모든 영광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리는 복을 주시지 않으면(전 5:19, 딤전 6:17) 가진 것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광을 티끌처럼 날리시는 일이겠습니까?

3. 하나님이 내리시는 화가 맹열한 전쟁으로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6~30절)

1)26~27절에서 “땅 끝 즉 먼 곳에 있는 나라들(바벨론과 연합된 나라들)이 유다를 침략하도록 하시며 그들이 기(깃발)를 세우고 빨리 달려오되 힘있고 안전하게 달려오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곤 핍한 자와 넘어지는 자와 조는 자가 없음”은 침략군들의 안전을 뜻하며 허리띠와 신들메가 보존됨은 힘주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징계할 이방 나라의 군인들에게도 그런 보존적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도우실 때는 추격하는 애굽 군인들의 병거 바퀴를 벗기셨고 그들 앞에 흑암을 일으키신 사례도 있었습니다.(출 14:25)

2)또 28~29절에서는 침략 자들의 기세가 맹폭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 이미 당겨졌고,(뜻과 명령이 떨어진 것을 뜻함.) 말굽이 부싯돌처럼 번쩍이며 차 바퀴가 회리바람처럼 빠르고 군인들의 맹폭함이 먹이를 찾는 임사자 같으며 먹이를 달라고 소리 지르는 어린 사자 같으니 그들이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과 백성들에게 와서 모든 보물을 다 가져가도 막을 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따라서 그 결과는 “구름이 빛을 가리운 것처럼 흑암과 고난만 있을 뿐 희망은 보이지 않고 오직 침략자들의 포악한 소리만 바다의 물결 소리처럼 선민들에게 부르짖음으로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전 606년에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제 12 과 이사야를 소명하심 (사 6:1~13) 목록으로


이사야 6장은 “이사야를 소명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사명 설교집 1편에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본문을 살피면 ① 1~4절에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소명하실 때에 나타나신 모습”이 기록되었고, ② 5~7절에서는 “이사야의 회개와 성결케 하심”이 기록되었으며 ③ 8절에서는 “이사야의 뜻을 물어 소명하시는 내용”이고, ④ 9~10절까지는 “증언할 내용”이요, ⑤ 11~13절은 “선지자의 질문에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1.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모습.(1~4절)

1)본문 5절에 보시면 이사야가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자기를 나타내주신 계시입니다. 계시록 4장과 5장에도 보시면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24 장로들과 천사들의 찬양 받는 모습을 사도 요한에게 보이신 일이 있었습니다. 출 19:21과 33:20~23에 보시면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본 다음에는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므로 형상이 없으시니까(요 4:24)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는 원리에 의하여(고후6:14)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본다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출33:20)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을 간접 계시로만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뵙는 것이나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과 천사로 변형되어 나타내신 것이 곧 간접 계시인 것입니다.(창 18:1~2)

2)본문에서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입으신 옷자락이 성전(하늘 성전에 계신 모습)에 가득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성전의 주 되심과 위엄이 크신 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천사)들이 있는데 모두가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것)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발은 흙을 딛는 지체이므로 부정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는 뜻) 두 날개로 날아 움직이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의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그 찬미 소리가 웅장함을 인하여 성전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계신 곳의 영화로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연기의 뜻은 구름과 달라서 진노의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계 15:8, 창 19:28)

2. 이 광경을 본 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함을 생각하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뵈었으니(어찌할고)”하고 탄식할 때 스랍 중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숯불을 갖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하는 말이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한 것입니다.(6~7절) 여기에서 인간은 장엄하신 하나님을 볼 때 자신의 죄와 연약을 깨닫게 되고 죄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이 말의 죄이기 때문에 이사야가 입술의 죄를 대표적으로 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제단 숯불을 그 입에 대고 “성결하여졌다”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죄가 사하여진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는 제단이 없겠지만 구약 시대에 성전 제도를 주셨기 때문에 그 모양과 어울려서 계시를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이 다 죄가 많지만 십자가의 대속으로 성결해진 것을 믿고 회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성결하게 하신 다음 이사야의 뜻을 물어 소명하셨습니다.(8절) 먼저 보좌에 앉으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다음에 천사들의 역할과 제단의 숯불로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보이신 다음에 하나님이 이사야를 소명하시되 이사야의 뜻을 물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명의 적임자는 성결하여야 할 것과 자원하는 복종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의 “나”는 성부님이시고, “우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또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 때는 천사가 아닌 사람을 보내시기를 더욱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사야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자원하여 복종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군을 구하십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9:38)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자원하는 사명자를 쓰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증언하도록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9~10절)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 백성들이 상당 기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암울한 상태에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또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이사야로 하여금 “은혜의 단절을 일깨우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되 상당 기간 영적으로 어두움에 있도록 명하시고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시대에 회개의 은혜는 있을 수 없고 완고함만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은 증언자가 축복만 할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갈 1:8) 복음 사역자도 축복 대신 책망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이 때에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11~13절) “어느 때까지 영적 암흑에 두실 것입니까?”한즉 대답하시기를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으며 이 토지가 전폐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 까지라” 하셨으니 이 뜻은 유대땅이 전쟁을 만나 거민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 땅이 황폐된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70년인데 기간이 거의 다 된 때에 다니엘 선지자에게는 그 기간을 계시하셨으나(단 9:2)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미리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3절에서 “황폐하여진 땅(민족)을 아주 없애시지는 않고 거룩한 씨가 탄생하도록 그루터기만은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하실 때 유대땅이 90%쯤 황폐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10%까지도 다 황폐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 계시를 받은 때는 웃시아왕이 죽던 해(1절)라고 하였습니다. 웃시아는 유다 13대왕으로 52년 최장기 집권을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고 문둥병에 걸려 죽은 사람입니다. 연대로 보면 주전 712년인데 이 때는 북방 이스라엘국이 먼저 망하기 36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6년 후에 북방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 나라에 망하면(왕하 18:9~10) 전체 선민의 90%가 황폐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1/10까지 다 삼키운다”는 뜻은 남방 유다국까지 망한다는 것입니다. 남방 유다국은 북방 이스라엘보다 127년을 더 버티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를 주시기 위하여 그루터기를 남기신다”는 뜻은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거의 없어져도 메시야 탄생의 명맥은 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면 아주 없어진 것 같아도 땅 속에 묻힌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오는 것처럼 선민의 나라와 종족이 황폐하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메시야(창 22:18) 탄생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선민에 대한 징계와 메시야 약속을 이행하여 장차 복음으로 희망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깨닫는 은혜를 받자 (사 6:9~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깨닫는 은혜를 받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징계하실 백성들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어둡게 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증언할 사람을 세우시지 않거나(롬 10:15)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영양 공급이 없으면 육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말씀(진리)의 깨달음이 없으면 영적 생명(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마 4:4) 스스로 성경을 읽고 깨달으면 크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가르치는 자의 말을 듣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마음을 둔하게 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지혜를 구하여 명철한 재판관이 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고,(약 1:5) 듣는 귀를 열어주시며(사 50:5)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왕하 6:17) 깨닫는 마음을 주시며(신 29:4) 또 기억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6) 사 50:4을 보시면 “하나님은 성도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 하셨으니 성도님들이 이런 은혜를 사모하고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귀가 말을 분별하지 않느냐 나의 귀가 말씀을 듣고 통달하느니라”(욥 12:11, 13:1) 하였고, 솔로몬은 말하기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의 것이라”(잠 15:31) 하셨으며 예수님은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으니(계 12:29, 3:6,13,22, 마 13:16) 귀 있는 자는(마 13:9,43) 듣고 깨달으라(마 15:10, 막 7:14)”하시므로 진리를 듣는 귀는 아무나 다 가진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읍니다.

2. 옛날에는 듣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법원에서 판사의 선고(논고)를 잘못 들어도 판결문이 나오면 잘 알 수 있지만 옛날에 인쇄술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할 때는 한 번 듣는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들을지 모르기 때문에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말이 “샤마”인데 서기관이 두루마리(율법)를 들고 나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사 1:10 ; 시메우에 데발 하 여호와)하면 이 “들으라”는 말의 권위가 죽고 사는 문제에 관련되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조용하고 긴장한 태도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꼭 그렇게 듣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들 중에는 말씀을 듣는 일에 큰 소득없이 돌아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도가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피면

1)말씀을 간절하게 사모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2)피곤하므로 계속 들으려는 지구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으며

3)듣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놓치고 떨구는 경우가 있고,(신학 용어나 기본 지식이 없을 때 그러함)

4)설교자와 인간적 관계가 안 좋아서 설교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5)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설교에 접하였을 때 습관적으로 조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도 사탄의 시험을 받는 일이라 할것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통감하여 문제를 해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혹 증거자의 권위가 부족해서 잘 못 듣는 것이 아닌가?하시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대 선지자의 증언도 듣지 않은 사례가 있고,(사 42:20, 렘 5:21, 겔 12:2) 심지어는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아서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마 11:15) 예수님의 설교를 잘 들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6)본문 말씀에서는 징계를 받아 듣는 귀가 막혀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평신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사 42:18, 43:8) 증언자 자신들에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 43:19에서 “누가 나의 사자처럼 귀머거리이겠느냐”하시므로 깨달을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반드시 증언할 것을 증언하지 못하는 벙어리 같은 사역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사 56:10) 또 신 29:4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그날까지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수시로 영안을 어둡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어떻게 하여야 깨닫는 은혜를 받겠습니까?

1)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사 50:5에 보시면 “하나님이여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해주십시요”하고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행 7:51에서는 “강퍅한 자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하셨으니 마음과 귀에 할례를 베푸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잠 20:12에서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인즉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사 43: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회개하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2)성도 자신이 사모하고 듣고 배우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마 11:12) 하셨고,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시 107:9)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신다”(잠 8:17)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3)“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후 6:2)고 하셨기 때문에 구약 시대처럼 기간을 정하시고 귀를 막으시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완악과 나태가 자신을 어리석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듣는 귀가 열리며 보는 눈이 밝아지고 심령이 열리는 은혜를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밥 냄새를 알고 식사를 잘 하는 사람처럼 말씀 터득의 은혜를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1) (사 7:1~9) 목록으로


7장 전체의 말씀은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신 후 “아하스” 왕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3~10절) 이 말씀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강론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분류는 1~2절은 “아하스왕 때에 유대 민족이 당하는 수난”이요, 3~9절은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 유다 민족이 당한 수난에 대하여.(1~2절)

1)유다 민족이 당한 수난은 아하스왕 때에 아람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왕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국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하므로 수난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능히 이기지는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하스” 왕은 웃시아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로 남방 유다 15대 왕입니다. “아하스” 왕에 대한 기록은 왕하 16장과 대하 2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왕은 12세에 왕이 되어 16년간 치리하면서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들을 본받아 행하므로 하나님이 아람과 이스라엘로 침략하게 하신 것입니다.(대하 28:5) 그러나 능히 이기지는 못하도록(1절) 붙들어 주셨습니다.(4~7절)

2)2절의 “다윗집”이란 유다 왕실을 의미합니다. 유다 왕실이 다윗의 자손들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람국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과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 하셨으니 이는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방 유다를 침략하므로 유다왕 아하스와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국을 “에브라임”이라고 호칭한 것은 “에브라임”족 여로보암이 분열 개국하였기 때문입니다.(왕상 11:26)

2.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에 대하여.(3~10절)

1)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아하스왕을 만나는 방법까지 알려주셨습니다.(3절) 즉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만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도 선지자직을 가졌을 것으로 사료되며 또 왕을 왕궁에서 만나지 않고 길에서 만나게 하신 것은 왕이 전쟁으로 인하여 피신하는 중이거나 방어 작전을 위하여 거동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의 거취까지 아시고 지도를 하셨습니다.

2)그리고 왕에게 이르기를 “삼가며 종용하고.....두려워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4절) 아하스왕이 삼가고 종용하여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 종교를 도입하였습니다.(왕하 16:10~18)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고 중지하라”는 뜻이고, “종용하라”는 뜻은 “떠들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일수록 떠들고 방종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크게 나타내려 하지 않으며(마 12:19) 형식에 구애되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여 아주 멸망케 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당하게 매만 때리시려는 것입니다.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이스라엘 18대 왕)가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는 그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연기 나는 부지깽이는 점차 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루터기”는 그 부지깽이의 부분이 손잡이만 남은 것을 뜻하므로 이것은 남방 유다를 침략한 아람과 북 이스라엘국이 끝날 때가 가까워 옴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아람과 북방 이스라엘은 남방 유다보다 135년 전에 망하였고, 이 예언이 있은 후 19년 만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것입니다.(왕하 18:9) 이것을 섭리하시고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나라를 붙들어 주실 것을 알려 주시고, 용기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3)유다를 침략한 자들의 꾀는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5~7절) “아람왕 르신과 에브라임왕 즉 이스라엘왕(르말리아의 아들 베가)이 악한 꾀로 아하스왕을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다국을 쳐서 그 백성들을 곤하게 하고 그들의 국익을 위하여 아하스를 폐한 후 다브엘의 아들(알 수 없는 인물임.)로 왕을 삼으려 하지만 그 도모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지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라와 나라의 전쟁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삼상 17:47)

4)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그들의 견고한 도성이나 왕권을 의지하여 교만할지라도 그 이상의 힘은 없으며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8~9절) “대저 아람의 머리가 다메섹이라”함은 견고한 도성 다메섹이 아람의 의지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요, “다메섹의 머리가 르신임”은 다메섹 도성 안에 도성보다 더 높은 왕을 의지한다는 뜻이며 또 “에브라임의 머리가 사마리아임”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도성이 견고함을 뜻하고, “사마리아의 머리가 르말리야의 아들임”은 사마리아 도성에서 통치하는 베가왕의 왕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다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65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분명히 북 이스라엘국(에브라임)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난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언한 시기는 아하스왕 때요, 아하스는 주전 740년에 즉위하였은즉 그 당시로부터 65년 후는 주전 675년으로 므낫세 왕 23년이 됩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호세아왕 9년(주전 721년)에 망하였으므로 이 예언과는 45년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65년 내에 북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예언은 이사야가 45년 전에 계시 받은 내용을 재설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므낫세왕 때에 남방 유다가 앗수르에게 일시 정복 당한 일은 있으나 에브라임의 멸망과는 뜻이 다름. 대하 33:11)

결론적으로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은즉 하나님의 권고와 격려의 말씀을 굳게 믿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제 14 과 아하스왕에게 주신 말씀(2) (사 7:10~25) 목록으로


이 말씀은 7장의 앞부분에서 계속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왕에게 또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징조를 구하라”는 말씀이고,(10~14절) 또 한 가지는 “머지 않아 앗수르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유다를 괴롭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15~25)절

1. “징조를 구하라”하심에 대하여

1)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왕에게 한 징조를 나타내주시려고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왕에게 은총에 관한 계시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하여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섭리가 있습니다.(겔 36:37, 빌 2:13)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하신 말씀은 아하스왕이 대적과 싸우기 위하여 깊은 곳에 몸을 숨겼던지 높은 곳에서 싸울 자세를 취하였던지 어디서나 “징조를 구하는 일을 먼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그런데 아하스왕은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요청과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3절) “아하스”가 징조 구하는 일을 피한 것이 어찌보면 신앙적인 일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징조를 구하는 일이 불신 보충의 방도로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없이 믿으라”고 하셨지만(요 20:29) 아하스왕이 징조를 거절한 것은 불순종과 자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한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왕의 종교적, 정치적 죄악을 감찰하여 아시지만 선민에 대한 언약 실천의 차원에서 징조를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3)그 징조는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처녀”란 용어 “알마”를 여인으로 번역하여 신 신학적 입장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근거로 내세운 일이 있었지만 이 말씀은 마 1:22~23에서 메시야 예언으로 해석하였고, 또 “처녀”란 뜻이 통상화 되었다고 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한다”는 것은 장차 메시야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 인류를 고차원적으로(궁극적으로) 구원하실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국가적인 문제는 일시 형통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큰 소망으로 여길 필요가 없음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영원을 사는 자이기 때문에 이사야 시대로부터 약 700년 후에 성취될 일이라도 자기의 일로 믿고 영원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유다의 적국이 망하고 앗수르가 유다를 괴롭힐 것을 예고하심.(15~25절)

1)15~16절에서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까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 “그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렇다 하여 700년 후에 탄생할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받는 유다 민족을 의미합니다.(사 8:8) 유다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②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란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가 성장하여 잘잘못을 깨달으려면 여러 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미쳐”란 “까지”로도 번역되기 때문에(각주) 짧은 기간 동안 버터와 꿀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③ 유다 민족이 버터와 꿀을 먹은 것은 적국의 침략으로 농산물을 생산 또는 보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겨우 양젖(버터)과 꿀로 연명한 것인데 짧은 기간까지만 그것을 먹게 되고 그 후에는 농산물도 먹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짧습니다. 아하스왕 다음 히스기야왕 때에 앗수르가 또 침략을 하니까요.(대하 32:1~19) 이 예언이 있은 후 9년 후에(아하스왕 시작;주전 731년, 북왕국 멸망;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북왕국이 망하였은즉 9년이란 기간이 어린 아이가 선악을 택하기 전이란 기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그런데 17절에서는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실 것이니 곧 앗수르왕의 오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난다”는 것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아람과 에브라임이 유다 침략을 포기하고 떠날 것을 의미하며 ② “그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그 백성들에게 임하게 하신다”는 것은 앗수르가 더 큰 수난으로 계속하여 유다를 괴롭게 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이 사실은 대하 28:19~21과 사 36장, 37장에 기록되었음.)

3)18절로 25절까지는 유다가 애굽과 앗수르의 침략으로 당할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18~19절에서 애굽의 침략을 “먼 곳에서 날아온 파리떼”로(왕하 23:29~34) 앗수르의 침략을 “벌떼”로 비유하셨고, 그것들이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는다”는 것은 적군의 영향력이 유다 영토에 골고루 미친다는 뜻입니다. ② 20절에서는 앗수르왕의 침략을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로 비유하셨고, 그것으로 유다 백성들의 “머리털과 발털과 수염을 깎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내어 온 삭도”란 일정 기간 쓸 만큼 쓰고 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앗수르왕이 유다를 침략한 기회에 못된 짓을 다할 것이란 뜻이요, “머리털, 발털, 수염까지 깎는 것”은 최대한의 수치를 골고루 가한다는 뜻입니다. ③ 21~22절에서 “그 날에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른다”는 것은 전란이 계속 되기 때문에 많은 분량의 목축을 할 수 없으므로 “몇 마리 가축만 기르게 된다”는 것이요, 그 가축에서 나오는 젖이 많기 때문에 그 곳에 남아있는 자들이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전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적은 가축에서 나는 우유로 살 수 있음을 뜻하며 그들의 사는 형편이 아람의 침략 때와 비슷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④ 23~25절에서는 유다 거민의 영토가 황폐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은 일천개의 가치가 있던 포도나무 천주가 심겨진 밭에 질려와 형극이 나므로 그 곳이 황폐된즉 살과 활을 가지고 그 곳(포도원)으로 사냥하러 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과 또 보습으로 갈던 산(밭)에도 질려와 형극 때문에 농사 지을 엄두를 못 내게 되고, 소나 양을 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앗수르에 의하여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제거되지만 이어서 앗수르가 유다를 괴롭게 할 것에 대하여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제 15 과 앗수르의 침략 예고 (사 8:1~10) 목록으로


본서 8장을 두 번에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이 내용들은 7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재설하시는 것으로 1~3절은 계시 전개의 절차에 대한 말씀이요, 4~10절은 “계시의 내용”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이 앗수르로 하여금 가까운 시일 안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정복하게 하시고,(4절) 또 남방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림을 인하여 앗수르로 하여금 유다를 괴롭게 하실 것인데(5~8절)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므로 멸망 당하게 하시지는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9~10절)

1. 계시 전개의 절차에 대한 말씀.(1~3절)

1)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큰 서판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 하스바스”라고 쓰라고 하셨습니다.(1절) “마헬살랄 하스바스”는 “노략이 속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지 않아 노략을 당할 것”이란 것입니다. 이 의미를 큰 서판에 통용 문자로 쓰게 하신 것은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크게 또는 깊히 인식하여야 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보다는 문서가 더 확실한 것이니까요.

2)그 다음에는 “이 사실을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서 증언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2절) 하나님은 증언자를 불러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증언자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여 “진실한 증인”이라고 하셨은즉 진실한 증인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나타내는 자입니다. “스가랴”의 이름이 성경에 6명 나오지만 여기의 “스가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 대하 24:20~21과 마 23:35절을 참조하십시오.

3)계시에 대한 또 한 가지 절차로써 “이사야가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 하스바스“로 하라고 하셨습니다.(3절) 이것은 앞에서 통용 문자로 쓴 것과 관련하여 새로운 특색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의 뜻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 자기의 아들의 이름을 ”통일“로 지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심에 대하여 얼마나 적극성 있는 역할을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가 아들 낳은 사실“을 실제 역사가 아닌 환상적 계시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하나님이 이사야의 생활 역사를 계시 전달에 이용하셨다고 생각합니다.(8:18)

2. 계시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4~10절)

1)계시의 내용 첫째는 이사야의 아들 “마할살렐 하스바스”가 “내 아빠, 내 엄마”라고 말할 줄 알기 전에 아람국과 북 이스라엘국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아람의 수도 다메섹의 재물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재물이 앗수르 왕국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4절) 여기의 어린 아이가 아빠, 엄마를 말하기 전이라면 1년 이내를 의미할 것이요, 그렇다면 이 예언의 시기도 두 왕국의 멸망 1년 전 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모든 말씀의 예언과 증언을 일시에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시기에 맞추어 또는 때를 따라 주신 것을 나중에 편집한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흥망도 주관하십니다. 북 이스라엘국은 이방 왕국이 아니지만 정통 왕국도 아닌즉 하나님의 간섭이 유다 왕국 만큼 특별하시지는 않았으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읍니다.

2)5~6절에서는 하나님이 유다에 대하여 응징하시는 이유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남방 유다를 응징하실 이유는 그 곳의 백성들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하나님이 유다에 주신 은혜입니다. 예루살렘 같은 고원 지대에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눅 13:4, 요 9:11)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설령 그 물이 천천히 흐른다 하여도 이것은 풍요함과 유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남방 유다가 그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거나 감사할 줄 모르고 또 그런 은혜를 계속 의지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르신(아람왕)과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왕)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 뜻은 유다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을 침략하는 두 왕국과 협상하여 전란을 모면해 보려는 인간적 방법을 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처사를 악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6절) ② 그래서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하시는 것인데 괴롭히는 정도일 뿐 아주 망하게는 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7~8절에서 “앗수르왕과 그의 모든 위력”을 창일하는 물(요단강이 창일함.)로 비유하셨고, 그 물이 흉용하고 창일하게 유다 영토를 덮치되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까지 넘쳐 목에까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큰 홍수를 연상케 합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 곳곳에 안 미치는 곳이 없을 만큼 모든 백성들이 괴로움 당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목에까지 미친다”는 것은 앗수르 군인들이 유다 백성들을 위협함이요,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하신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이 “임마누엘”(함께하심)하시는 뜻으로 그 백성들에게 은총의 날개를 펴서 아주 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결국 그 당시에 유다를 괴롭게 한 두 나라의 도모는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9~10절) 장차 더 큰 나라인 “앗수르”가 침략을 하여도 “임마누엘”의 은혜로 보호하실 터인데 하물며 아람과 북왕국의 침략이 어찌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먼저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9절의 “민족들아 훤화하라(모여서 궐기해 보라는 뜻.) 먼 나라(아람) 백성들아 들으라 너희가 허리를 동여 띠를 띠며 유다를 침략하기 위하여 훤화하지만 필경 폐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9~10절에서 “필경 폐망한다”는 말씀을 네 번 강조하셨습니다.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함께 도모하여 유다를 먹을 듯이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유다 국민(우리)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도모가 시행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 백성을 “임마누엘”이라고 호칭하셨습니다.(10절)

이상의 말씀에서 앗수르에 망할 것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10절에 “함께 도모하라”는 말씀 때문이고 함께 도모한 것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하며 인간적이고 이방적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제 16 과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신 일 (사 8:11~22) 목록으로


본문 11절 중에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알게 하셨다”는 말씀이 있어서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신 일”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신 뜻”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계시를 주실 때 문자로 쓰게 하신 일이나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을 계시의 내용으로 쓰신 것, 또 증거자를 선별하신 일 등으로(1~3절) 성령님이 특별하게 역사하셔서 나타내신 것을 의미합니다.(겔 3:14)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신 내용을 살피면

1. 백성들의 길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11~12절) 12절의 “이 백성의 길”이란 유다 백성들이 전란을 극복함에 있어서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려 하며 사람(침략국 또는 동맹국)과 맹약하는 방법을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의지할 대상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시 146:3~4)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르신과 베가를 기뻐하였고,(6절) 그들과 맹약(협상)을 함이 좋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행치 말고,(11절) 또 “맹약한 자가 있다 하여도 거기에 동감하여 그 일을 내세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12절) 그리고 “그들(맹약을 믿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인간들(침략자)을 너희는(증언자)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만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13~15절)

1)13절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을 두려움과 놀라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믿고 그 분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성도의 생활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두려워 하지만 악인을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의로운 자를 두려워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2)또 하나님은 구원과 심판을 친히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두려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14~15절)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즉 예수님이 구원도 하시고 심판도 하시는 것입니다.(요 3:16,5:27) 14절에서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내실 임마누엘(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이요, 구원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다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 또는 함정과 올무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전 1:18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14절의 “이스라엘의 두 집”이란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국을 의미하고, 또 “돌과 반석”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벧전 2:8) 돌이나 반석이 생명을 얻을 자에게는 요새가 되지만 죽을 자에게는 몽둥이가 됩니다. 그래서 반석으로 비유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거부하면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 21:42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된다” 하셨고, 마 21:44(눅 20:18)에서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하시므로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심과 동시에 구원 받을자와 멸망 받을자의 입장을 각각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도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그 사건이 장애로운 것이 되어 “거치고 넘어지며 부러지고 걸리고 잡힐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6~22절)

1)16절에서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와 다른 사역자(제자)들로 하여금 주신 말씀을 “잘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주신 말씀은 “증거의 말씀과 율법”인데 그 말씀은 이사야 당시에 주신 말씀이고, 율법은 메시야 약속을 포함한 모세오경과 모든 계명을 뜻하는데 그것을 선지자들로 하여금 봉함하게 하신 이유는 분명히 후 시대에 성취될 진리이나 그 당시에 많은 백성들이 선지자의 증거를 신접한 자의 말만큼도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나중을 기약하여 잘 간직하라는 뜻으로 “싸매고 봉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이 말씀을 받은 이사야는 “야곱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바라볼 것이라”고 하였으니(17절) “야곱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셨다”함은 하나님이 선민에 대한 사랑을 일시 징책의 기간으로 삼으신 것이요,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무궁한 신뢰를 갖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자기의 자녀들로(3절, 자녀들 중 한 아들) 징조와 예표까지 된 일이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18절)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앗수르의 침략으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또 자기의 조국인 유다가 수난 당하는 일은 증거한 예언대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시온산에 계시다”는 뜻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하여 임재하심을 뜻하고, “만군의 여호와”란 천사의 역할 등으로 만군을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2)이 말씀을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표준인 만큼 다른 잡신들에게 묻거나 확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9~20절) 진리(하나님의 말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접한자나 점쟁이를 찾아 묻기를 좋아합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 어떤 자들이 선지자들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고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나 마술사에게 물어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진실성을 확인하자”고 한다면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하고 강하게 거절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9절) “죽은 자”란 신접한 자나 마술사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영생의 소망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들이므로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표준이기 때문에 다른 말과 대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20절에 보시면 “마땅히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신접자, 마술사의 말) 이 말씀(율법과 예언)에 맞지 않으면 즉 증거의 말씀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는 뜻은 삶의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3)결국 유다의 미래는 아침 빛을 보지 못하는 형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1~22절) “이 땅(유다와 북왕국)으로 헤메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안절부절하는 태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지자의 증거를 믿지 않는 자들이 안일을 꿈꾸어보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고 앗수르의 침략에 대하여 수난 당하는 형편과 수난 중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와 표준으로 믿고 영원히 기다리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9. 마헬살랄 하스바스 (사 8:1~4) 목록으로


위 본문의 제목을 “마헬살랄 하스바스”로 정하였습니다. 이 “마헬살랄 하스바스”의 뜻은 “노략이 속하다” 즉 “노략이 속히 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1. 본문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는 서판을 취하여 통용되는 문자로 위 제목과 같이 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의 글씨를 쓰게 하신 이유는 입으로만 외쳐서 증언하지 말고, 서판에 쓰여진 글씨(즉, 글씨, 피켓, 현수막 등)를 보이게 하여 증거의 효력을 더욱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진리 증거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활용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또 2절을 보시면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로 하여금 위의 사실을 증거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증거의 사명을 주셨음을 알 수 있고, 또 그들이 증인으로 쓰임을 받은 것은 그들이 진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자로 자기의 진실한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3. 그런데 또 3절에서 그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어떤 이는 그가 아들을 낳은 것이 “계시적 환상 중에서 된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아들을 낳은 다음에 계시가 임하였으므로 환상 중에 아들 낳은 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요.(18절)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 서판에 써놓게 하셨다가 이사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을 쓰라 하시므로 “노략이 임한다”는 경고를 효과적으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호1:2-9의 계시에 대한 의미도 같은 듯함)

4. 또 4절에서 “그 노략 당함의 시기”를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의 “어린 아들이 아빠,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기 전”이라 하셨으니 이 기간은 2년 미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채 2년도 못 되어서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전 721년 경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되었으니까(왕하 18:9) 이사야의 이 예언은 주전 723년 경에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진실성은 영원히 믿어야 할 것이며 선지자가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8:20~22)

5. 4절 말씀에서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의 앞에 옮긴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메섹은 아람국의 수도요, 사마리아는 북방 이스라엘국의 수도입니다. 이 두 나라는 동맹하여 남방 유다국을 괴롭게 하여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사 7:1,2) 이것이 다 앗수르왕의 손으로 들어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1)하나님의 증거하시는 방법이 외침 뿐만 아니라 문자로도 나타내셨다는 점과

2)이사야 한 사람의 외침만이 아닌 진실한 증언자인 우리야와 스가랴로 하여금 중복으로 증거하게 하신 점과

3)“마헬살랄 하스바스”란 글씨로 증언하실 뿐 아니라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으로도 증언하셨으며

4)유다를 괴롭힌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몽둥이로 응징하시는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속히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마헬살랄 하스바스”라고 경고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이나 이방국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결코 완악을 연장시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사 8:5~8) 목록으로


1. 위 본문 말씀의 제목을 사 8:6에 있는 말씀을 따라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로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남방 유다국에게 주신 말씀으로 ① 유다국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② 강대국 왕들이 가진 국권을 부러워하거나 또 그것을 두려워하므로 ③ 하나님께서 더 흉용하고 두려운 하수, 즉 앗수르의 침략으로 큰 위협을 주실 것에 대하여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2.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상징적 용어를 쓰셨으니 ①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권고하여 주시는 풍성하고 은근한 축복을 의미하며 ②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라 하심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에 반대되는, 즉 은혜에 반대되는 큰 징계(환난)를 비유하여 이러한 수난이 남방 유다에도 미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유다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르신(아람왕)의 실권과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왕)의 실권을 기뻐하였으니 이 기뻐함은 부러워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러한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말아야 했겠지요. 여기의 “기뻐하였다”는 “메소쉬”가 “두려워하였다”는 “메소쓰”의 오기라고 하는 주석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들은 능력의 하나님을 망각하고 인간과 현실을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홍수의 범람처럼 유다에도 앗수르의 침략으로 덮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창일한 물이 목에까지 미친다는 것은 “큰 위기를 맞는다”는 뜻이니 이 사실이 아하스왕 다음 히스기야왕 때에 성취되어 큰 위협을 당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면하게 되었습니다.(왕하 19: 참조) 그 당시에 히스기야왕의 간절한 기도와 눈물로 응답을 받아 구조되었습니다.

4. 다음에 두 가지를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1)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실로아물은 예루살렘 남방에 있는 수원이 깊은 샘물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젖줄처럼 요긴한 생명수요, 또 그것이 천천히 흐르는 것은 소리없이 말없이 천천히 임하는 것 같으나 많은 은혜를 주심을 의미하고, 또 그 물줄기가 해자(강물로 방어망을 치는 것, 다윗왕 때에 있었음. 삼하 20:15)를 이루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풍성하신 보호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러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임하는 것이므로 확실하게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8절에서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여 함께 하옵소서”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후자의 뜻이 더 합당하게 보임은 날개로 덮음이 보호의 은혜를 뜻하고,(마 23:37) 또 앗수르의 위협에서 보호를 받았으므로 입증이 된 것입니다.(왕하 19:34)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① 성도 각자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② 세상 권세를 부러워하거나 이방인의 생활을 좋아해서는 안되며 ③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를 응징하신즉 반드시 임마누엘의 날개로 보호받는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보충설교)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사 8:5~8) 목록으로


주전 723년 경이 유다 나라에서는 16대 히스기야왕 4년이었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19대 호세아왕 7년이었습니다. 또 이때는 이사야 선지자가 본문8장을 증언 한 시대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상태는 신앙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으로 선지자의 책망 받을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머지 않아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게 하셨는데 그들이 징계를 받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주시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은혜를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인 이방 나라의 왕(아람왕이나 사마리아왕)을 하나님보다 더 의뢰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외시하고, 인간적이고 이방적이며 세상적인 실권을 의뢰하려고 하니 하나님이 더 큰 나라인 “앗수르”를 들어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같은 은혜를 중지하사고, 반대로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즉 앗수르의 침략 횡포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있은지 3년 만에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호세아왕을 정복하였고, 또 계속 유다왕 히스기야 14년에는 앗수르왕 “산헤립”이 사마리아와 유다를 정복하여 오랫동안 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시간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모든 성도가 실로아물처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다른 세속적인 것들을 의지하지 마셔야 함”을 강조 드리는것입니다.

1. 우선 “실로아물”을 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예루살렘 도성 남동쪽에 위치한 “기혼”이란 샘에서부터 예루살렘 도성으로 흐르는 작은 강물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이런 강물을 이룩할 만한 큰 샘 근원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또 이 샘물은 많은 수량의 정수가 소리없이 천천히 또 꾸준히 흐르므로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물이 아니면 살 수 없을 만큼 요긴한 물 이 되는것입니다. 이 물은 깨끗하고 꾸준히 흐르며 적당한 분량으로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은혜의 강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흉용하고 큰 하수”는 요단 강물을 의미하는 것인데, 마철에 이 물이 범람하면 유대땅에 많은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어서 화가 되는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두 개의 강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앗수르의 횡포를 비유한 징계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2.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의 은혜를 더 살피면

1)“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천천히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천천히 임한다고 결코 조급해하거나 낙망 하여서는 안 됩니다. 눅 18:1에서는 “기도의 응답이 늦다고 낙망하지 말라” 하셨고, 사 41:17에서는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이 없어 갈증하나 그 혀가 마를 때에 응답하신다”하셨으며 애 3:25에서 “기다린 자에게 선한 것으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천천히 받는 것 자체를 은혜로 알고 기다릴 줄 아는셔야 할 것입니다. 인삼은 늦게 거둘지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아셔야 되고, 오래 묵은 나무일수록 좋은 목재의 가치가 있음을 아셔서 늦게 받는 은혜를 귀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소리없이 표없이 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이웃에 은혜를 베풀 때에도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요, 하나님도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말없이 소리없이 은밀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축복받을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란으로 가서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피땀 흘려 일하였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꼭 야곱이 근실하여 발전한 것처럼 보일 뿐 하나님의 도움으로 발전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발전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소리없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기적적이고, 돌발적인 은혜보다 성실한 노력으로 단계적으로 받는 은혜를 사모하시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먹은 기적의 만나보다 가나안 땅에서 먹은 농사 지은 양식이 더 가치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3)천천히 흐르는 물은 풍성하고 꾸준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실로아물은 기혼의 샘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깨끗한 물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니까 이것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아도 실제적으로는 유익만 주는 것이기 때문에 풍성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십니다(요13:1). 또 하나님이 죄인을 징계하신다 하여 햇빛이나 공기를 단절시키신 일이 없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한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물이 빨리 흐르면 여러모로 쓸모가 적은 것입니다. 물살이 빠르니 위험하고 제방을 막아 물을 가두기도 어려우며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위험하지만 천천히 흐르는 물은 오히려 위험을 막고 교통수단에도 안전하며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풍성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같은 은혜를 베푸시므로 실제적으로 유익하게 보호해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디고 적으며 경미하게 임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경홀히 여기고 그 대신 사마리아와 아람을 의지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보다 강대국의 힘을 더 기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이란 말씀에서 평범하고 꾸준한 생활을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이 “실로아물”의 특징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① 소리가 없고, ② 풍성한 물이 ③ 꾸준히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신앙 생활의 은혜”로 비유한다면 평범하고 저력이 있으며 꾸준하게 생활하는 은혜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신앙 생활도 변함없이 흐르는 물처럼 굴곡없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빗물의 영향을 받는 강물은 불었다 줄었다 하겠지요. 그러나 샘물에 의한 흐름은 변동이 있을 수 없것입니다. 마치 큰 배를 탄 사람이 요동없이 대해를 건너가는 것처럼 든든하게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뜨겁다가 차지고, 열심냈다가 머저지며 친하다가 멀어지지도 말고 너무 가까운 사람도 없고, 먼 사람도 없으며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며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낙망하지도 말며 특수한 명절도 없고, 평일도 없으며 모든 것을 적당하게 꾸준히 사는 것이 곧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 같은 생활”이라고 생각되어져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보충설교) 은혜를 알자 (사 8:5~8) 목록으로


본문 6절에 보시면 “유다 백성들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을 버리고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왕 베가를 기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그들을 괴롭게 하신다”(7~8절)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의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예루살렘성 동남쪽에 “실로암”이란 저수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에 “실로암물에 가서 씻으라”하신 곳이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요 9:7) 예루살렘 동북쪽에는 겟세마네산이 있고, 그 산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이 기드론 시냇물이 되어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흘러 실로아(구약시대의 호칭) 못을 형성하였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마지막 사역 시기인 히스기야왕 때에 그 물을 국방을 위한 해자로 사용하였습니다. 왕하 20:20에 보시면 “히스기야왕이 못과 수도를 예루살렘 성 안으로 인도하였다” 하셨고, 사 22:9에서는 “아랫 못의 물을 모았다” 하였으며 또 실로암 주변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하면 “실로암 못의 물을 도성 안으로 끌어드린 성벽과 굴이 있다”하므로 해자 목적으로 사용한 것을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로아물이 국방용으로 사용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대하 31장, 32장 참조.)

2)서울이 한강을 끼고 있는 것처럼 물은 식용, 생활용, 방어용, 공업용, 운수용 등으로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3)물을 영적 은혜로 비유하신 일이 있습니다. 요 7:38에서 “생수의 강”이라 하여 성령을 상징 하셨습니다.(겔 47:1~12)

2.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어찌 보면 아무런 은혜도 아닌 듯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계의 은혜를 보편적으로 주시기 때문이고, 또 천천히 소리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은혜인 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와 물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 요소이지만 그것을 큰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이 귀한 지역에 흐르는 물을 주셨습니다. 또 예루살렘 같은 고원 지대에 주셨습니다. 거기에다가 그 물을 풍성하고 유구하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물이 귀한 지역에 사는 선민들에게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물 뿐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하여서도 그런 방법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리가 없고 기적적으로 나타나 주심이 아니면 은혜인 줄을 모르는 성도들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그 백성들에게 많았습니다. 시 136:을 보시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노래로 시작하여 “모든 신 중에 뛰어나신 하나님,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 지혜로 하늘을 펴시고 땅을 물 위에 펴신 하나님, 큰 빛들을 지어 밤낮을 주관케 하신 하나님, 애굽의 장자를 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 강한 손으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통과케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장사하신 하나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큰 왕들을 치신 하나님, 바산왕을 치시고 그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시고, 대적에게서 건지신 하나님,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예전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다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회개한후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사람과 권세를 의지하려 하거나 그것들을 기뻐 한 것은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 146:3에서 “인생이나 방백들도 의지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은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가장 실수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보다 돈이나 권세나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삶의 방책으로 삼는 잘못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고 인간적인 방책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로 믿는 이차적 은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천천히 흐르는 물”을 버린 자에게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를 보내어 목에까지 오르도록 덮치게 하시겠다”하셨으니 이것이 곧 앗수르가 아람과 북왕국을 점령한 후에(주전 721년, 히스기야 6년, 호세아 9년) 이어서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왕하 18:17~19:37) 남방 유다는 북왕국보다 120년을 더 보호받았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소리없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 즉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② 인간적인 것들을 앞세워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깊히 회개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③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감사하지 않고 인간적인 것을 기뻐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크게 노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조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 17 과 메시야 왕국의 예언 (사 9:1~7) 목록으로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절기 설교 성탄 부분에서 “예수님의 통치”와 “흑암의 빛”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전체의 제목을 “메시야 왕국의 예언”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증거한 시기는 선민들의 앗수르와 애굽의 침략 등으로 수난을 예고 받던 때이고, 또 남방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신 말씀으로 영적 메시야 왕국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지상 세계의 수난은 전쟁, 질병, 가난 등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것이 해결될 때 일시적으로 평안을 맛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시대처럼......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고, 영구적인 평안과 위로는 아닙니다. 영구적인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만 얻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또 작정대로 시행하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메시야 왕국(하나님의 나라;마 4:17, 막 1:14)으로 주시는 은혜와 은혜 베푸시는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메시야 왕국의 은혜”를 살피고, 다음에 그 “은혜 주시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메시야 왕국의 은혜에 대하여.(1~4절)

1)메시야 왕국의 은혜는 “고통을 면케 하시고, 영화를 주시는 은혜”라고 하셨습니다.(1절)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전에 고통하던 자”는 한 동안 멸시를 당하였던 스블론땅과 납달리땅의 거민들입니다. 그들이 같은 선민이라도 멸시와 고통을 받은 이유는 그 지역이 팔레스틴 북방이기 때문에 이방족의 침략을 먼저 받고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민족전체가 졌으나 징계의 매는 그들이 더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멸시를 당한 셈이지요. 그 대신 후에는(복음적 은총을 주시는 때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해변길은 갈릴리 호수를 바다로 여겨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해변은 가버나움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단 저편”은 벳세다와 가다라 쪽이고, “이방의 갈릴리”란 사마리아나 갈릴리 등이 이방족의 침략으로 유다 지역에 비할 때 선민적 입지가 희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매를 더 맞은 자에게 은혜를 먼저 베푸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은혜를 먼저 받도록 특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초 전도로 성취되었습니다.(마 4:12~16) 그리하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인 것”입니다.(2절) 진리 없는 곳은 다 흑암이요, 그리스도만 빛이십니다.(요 1:5, 시 119:105)

2)메시야 왕국이 임하여 복음적 은혜를 받는 기쁨이 대단함을 말씀하셨습니다.(3~4절) 3절 말씀은 즐거움의 정도를, 4절 말씀은 즐거움의 내용을 말씀하셨으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심”은 신약 시대에 성령님의 역사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성도들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므로 성취되는 것인데 이 사실은 오순절 때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만 하나님 나라의 창성함을 느낄 것인데 이것은 물량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심령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되 그 즐거움의 강도가 추수하는 즐거움 같을 것이며 전쟁에 승리한 후 “탈취물을 나누는 것 같은 즐거움”을 만끽한다고 하셨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나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만족과 보람과 희망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무겁게 멘 멍에”(죄와 고난의 짐)와 “그 어깨의 채찍”(약한 자가 당하는 수난)과 “압제자의 막대기”(강대국의 폭행)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처럼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삿 7:19~25) 이 사실은 하나님이 고난 당하던 선민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현실적 방법이 아닌 영적으로 베푸실 은혜를 위하여 악의 세력들을 통제하시고 정복하시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야 왕국을 설립하시는 방법에 대하여.(5~7절)

1)5절에 보시면 “전쟁이나 무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진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요 14:27) 세상에서 주는 평안은 권세와 물질로 줍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의 장비를 쓰시지 않는 뜻으로 불사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2)오직 유일한 방법은 메시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성도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현세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만끽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마 11:12) 6절에서 “한 아기, 한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① “어깨에 정사를 메신 분”이라 하셨으니 이는 “통치하는 사명”을 가지신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는 예수님입니다. ② 그 이름은 기묘자,(대단히 오묘 막측하신 분;신 29:29, 욥 11:7) 모사,(모략이 능하신 분) 전능하신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영원한 근원자 되심;요 1:1, 계 1:8) 평강의 왕(평강을 주관하심;요 14:27)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마 1:23, 계 1:8,3:14)

3)주님이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는 “무궁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절)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함”은 주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통치하는 만큼 그러할 것이며 “다윗의 위에 앉으심”은 선민의 왕통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선민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 사실들은 지금도 주님의 교회를 통하여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또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열심이 계신 만큼 더욱 확실하여 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는 성도들은 개인의 생활이나 교회의 생활이 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것임을 아시고 그 생활 속에서 공평과 정의가 무엇임을 깨달아 하나님 나라 확장에 보탬이 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북왕국에 대한 진노 (사 9:8~21) 목록으로


본문 9절의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하신 말씀이 북이스라엘을 상대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8절에서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하나님의 말씀)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란 호칭은 남북의 두 왕국을 다 상대하신 것입니다.(2:3,5~6, 8:14) 하나님의 계시는 선민 전체에게 주실 수 있고, 또 계시를 주실 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전달하시는 것이 상례입니다. 9~12절에서 “북왕국의 죄악과 1차 진노”를 말씀하셨고, 13~17절에도 “북왕국의 죄악과 2차 진노”를 말씀하셨으며 18~21절은 악행의 성격과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북왕국의 죄악과 1차 진노의 말씀.(9~12절)

1)“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하신 것은 북왕국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눅 23:34)(에브라임은 북왕국 최초왕 여러보암의 계파이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임.)

2)북왕국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을 심으면 된다” 하였으니(10절) 이 말은 “하나님이 전쟁으로 진노하셔도 걱정 없고 재건할 힘이 있다는 뜻”으로 큰 소리친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결국 하나님께서는 대적을 일으켜 그들을 괴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1~12절) 하나님께서는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고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신다”(11절)고 하셨습니다. 아람왕 르신은 유다왕 베가와 연합하여 유다를 친 일이 있었지만(왕하 15:37) 아람국이 정치적 이해 관계나 앗수르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느낄 때는 동맹 관계가 적대 관계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람과 북왕국이 유다를 친 사실도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남방 유다를 포함하여 주신 말씀이 아닌가?하실 수도 있겠으나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하신 말씀에서 지형적 관계를 생각하시던지 또 앗수르가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하신 말씀이 더욱 북왕국을 지적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않고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12절)하신 것은 철저한 회개가 아니면 하나님이 노를 풀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17절과 21절, 10:4에서도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구성은 시적 표현이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연속적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북왕국의 죄악과 2차 진노를 말씀하심.(13~17절)

1)백성들은 여전히 완악하였습니다. “이 백성이(매를 맞으면서도) 자기들을 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않았습니다.(13절)

2)그래서 하나님은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는데 머리는 장로(백성의 원로)와 존귀한 자이고 꼬리는 거짓말하는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전쟁으로 위협을 당할 때는 존귀한 자들이 피신하여 살아남을 수 있지만 정복을 당하였을 때는 하루 사이에 다 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왕 9년에 북왕국이 망할 때 그런 참상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선지자들이 얼마나 찌꺼기 같은 존재이면 “꼬리”로 비유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역으로 설교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3)16절에서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는 두 종류로 한 편은 왕과 방백들(또는 장로)이고, 또 한 편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왕과 방백들은 교만하여 “벽들이 헐리면 다듬은 돌로 쌓는다”하면서 참된 선지자의 말을 코웃음치듯이 들었을 것이고, 거짓 선지자는 “늘 평안하다”고 하였을 것입니다.(대하 18:4~8)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혹하는 자의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한다”(16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자도 멸망을 받고 그 미혹을 받아 따라간 자도 멸망을 받으니 우리들 주위에서 떠도는 옳지 않은 사상과 교훈들을 잘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민 25:5~9)

4)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은 “각기 설만하며(거만하고 무례한 태도) 입으로 망령된 말을 한다”고 하셨고,(17절)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장정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 고아와 과부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는 어렵든지 유족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받는 대상이 되셔야 하며 특히 입으로 표현하는 망령된 말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악행의 성격과 결과에 대하여(18~21절)

1)“악행을 불 태우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18절)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다”하신 말씀은 불이 모든 덤불을 쉽게 태우는 것처럼 악행이 든든한 행복의 기반을 태우는데도 쉽게 한다는 뜻입니다. 19절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불붙듯 임하면 땅도 소화될 것인즉 백성이 불타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요 형제끼리도 서로 아끼지 않고 치게 될 것이라”(19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이 망할 때 원수가 집안 식구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 죽일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마 10:21,36)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서로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서로 먹음”은 동족간의 또는 나라 안의 내란을 뜻하고,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친 것”은 분국 당시에 늘 있었던 일이며(왕상 15:6)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 지라도 배부르지 못함”(20절)은 전쟁과 동족 상잔의 괴로움이 있을 때 피할 길이 없음을 뜻하고,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는다”함은 자기를 보호해준 대상을 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북왕국이 망하게 된 죄의 성격을 아셔야 하고, 또 완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 것도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9 과 유다와 앗수르의 죄와 벌 (사 10:1~19) 목록으로


본문 1~4절은 “유다의 죄와 받을 벌”을, 5~19절은 “앗수르의 죄와 받을 벌”을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 두 대지를 합하여 “유다와 앗수르의 죄와 벌”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유다의 죄와 벌에 대하여(1~4절)

본문 말씀이 남방 유다를 지적한 말씀이란 근거는 9:21절의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하신 말씀에 이어서 유다가 벌 받아야 할 내용을 본문에 연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9장 하반부의 내용은 북왕국에 대한 것이고, 본문은 남왕국에 대한 것입니다.

1)유다의 죄.(1~2절)

① 불의한 법령을 발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일 것이고, 권세자들만의 이권을 위하고 약한 자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내용일 것입니다. 나라와 교회의 헌법도 성경이나 국익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도 불의한 법령이 될 것입니다. ② 불의한 말(내용)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의한 법령을 시행하는 일일 것이요, 또 서기가 법 집행에 관한 것을 기록을 할 때 직권을 남용하여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록하므로 불법을 감행할 수도 있습니다. ③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는 것입니다. 법관들이 뇌물을 받고 뇌물을 전달한 자의 입장을 세워주면 빈핍한 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④ 우상 숭배의 죄악입니다.(10~11절) 예루살렘에 우상이 도입된 사실은 왕상 16:31~33과 왕하 16:10~16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적하신 유다국의 죄는 불의한 법령, 불의한 기록, 불공평한 재판, 약자를 짓누르는 죄악, 그리고 우상 숭배였습니다.

2)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말씀하셨습니다.(3~4절) 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하시는 날을 정하셨고, 그 벌은 멀리서 오는 환난인데 이것이 임하면 속수무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하셨으니 “벌하시는 날”은 더 큰 강대국(바벨론이나 기록은 없음.)의 침략 때를 의미하고, “멀리서 오는 환난”은 곧 바벨론에서 오는 것을 의미하며 “그때는 도망하거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으므로 그동안 누리던 영화를 보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② 또 그 때는 “크게 업신여김을 받고 짓눌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절) 4절 말씀의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림”과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짐”은 포로된 자보다 더 낮아지고 죽은 자보다도 더 못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않고 그 손이 여전히 펴져 있음”은 그 백성들이 철저한 회개를 하지 않는한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철저한 회개를 뜻함.)는 말씀이 있고, 또 “범죄한 분량을 따라 벌하신다”(렘 21:14, 호 8:13, 겔 7:4)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렇게 진노의 종류와 기간은 범죄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은 주전 606년으로부터 70년간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통치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 앗수르의 죄와 벌에 대한 말씀입니다.(5~19절)

1)죄에 대한 것을 살피면(5~15절)

① 하나님의 뜻을 어겨 지나치게 행사하는 죄악입니다.(5~7절)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범죄하였을 때에 이방나라인 앗수르로 하여금 선민국을 괴롭게 하는 몽둥이로 쓰셔서 분을 푸시려고 하셨습니다. 5절에서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범죄자에게 매를 치면 분이 풀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앗수르 몽둥이로 선민을 때려 분을 푸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을 치시는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노를 푸시는데 있을 뿐 유다를 멸망시키려 하신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앗수르 왕에게 유다를 괴롭게 할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유다)을 쳐서 탈취하고 노략하게 하며 길가의 진흙처럼 밟히게 하려 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6절) 하나님은 선민 중심으로 이방국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매를 때리실 때도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런데 앗수르왕이 유다를 치는 기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고 멸절시키려는 전쟁주의자로 변하였으니(7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또 벌을 받아 망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무슨 하나님의 뜻을 찾겠느냐?하시겠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뜻에 빗나가면 하나님이 뜻대로 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② 교만의 죄입니다. 피조물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겸손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왕은 “자기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할 것을 자신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9절의 말씀은 앗수르의 여러 도성이 견고한 것을 자랑삼아 말하였고, 그것을 의존하여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성으로 국력을 과시한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만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렘 9:24) “갈로”와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강 북쪽에 있던 수리아 도성이었고, “하맛”은 팔레스틴 북단에 있는 수리아 도성이었으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요, 다메섹은 아람의 도성이었는데(왕하 16:9) 앗수르가 이 도성들을 전부 점령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국력으로 과시한 것입니다. 교만의 죄는 13~14절에서도 계속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수리아, 아람, 북이스라엘 점령 등)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는데 이것을 행할 때에 보금자리의 알을 취하듯 또 버려진 알을 줍듯이 쉽게 정복하였고, 아무런 반항도 받지 않았은즉 힘이 있다”고 자랑을 한 것입니다.(12절) 피조물이 자기를 자랑하고 권세나 물질로 큰 소리 치는 것은 오만한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그들의 죄악은 우상 숭배가 수준을 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우상 숭배를 말씀하셨습니다.

2)벌에 대한 내용입니다.(10~12, 14~19절) ① “하나님이 앗수르에 대하여 진노하실 것을 뜻하셨다”고 하셨습니다.(10~12절)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다”하신 말씀이 곧 앗수르에 진노하실 것을 뜻하신 말씀이요,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다”하시므로 하나님은 선민(예루살렘과 사마리아)과 이방인의 우상 숭배 수준을 대조하셨고, 선민의 우상 숭배를 진노하신 다음에 앗수르에도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1절) 또 “내가 나의 일(진노하시는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행한 후에 앗수르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하셨으니(12절) 여기의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행하시는 것”은 히스기야왕 때에 앗수르왕 산헤립의 침략을 의미하며(왕하 19:1~36, 사 37:36) 앗수르왕의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는 일은 바벨론에 의한 앗수르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겔 31:17, 나 3:18~19, 습 2:13~15) ②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오만함이 “마치 도끼가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고 톱이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며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고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하는 것과 같다”(15절)하시므로 피조물이 전능자 앞에서 교만한 죄가 얼마나 불합리하며 큰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벌하시되 폐병이나 기근으로(레 26:16) “살찐 자를 파리하게 하시고 그들의 영화에 불을 붙여 태우는 것처럼 맹열하게 진노하실 것이라”고 하셨고,(16절) ③ 그 앗수르를 벌하시는 일을 “형극과 질려를 불 태우는 일(소멸)”로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17~19절) 17절에서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을 빛으로(요 1:9) 또 벌하시는 하나님을 불꽃 또는 “소멸하는 불”로 상징하신 것입니다.(히 12:29, 시 27:1, 84:11, 사 60:19) 불이 빛으로 나타날 때는 은혜를 베푸심이고, 불꽃으로 나타낼 때는 진노를 뜻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됨”은 연속되는 전쟁이 끝나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비중있는 인물들이 죽게 됨을 뜻하고,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됨”은 영광의 근거인 물질주의와 육체가 아울러 타격을 받되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지는 것”처럼 점차로 영광이 줄어들어 “삼림의 나무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그 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멸망이 하루 사이에 끝나지만 그들의 모든 영광과 현실적으로 누리던 복도 점차 없어질 것을 비유적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삼림과 나무는 인가와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선민은 선민대로 특별 통치를 하시지만 이방국도 선민과 관련하여 통치하시고 쓰시며 또 죄를 감찰하시고 폭넓게 징계하시는 섭리를 나타내주셨읍니다.

 

제 20 과 유다의 소망과 앗수르의 절망 (사 10:20~34) 목록으로


본문의 20~23절은 “유다의 소망”에 대한 말씀이고, 24~34절은 “앗수르의 절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살피면 하나님께서 유다국 백성들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환난을 당할지라도 아주 망하지 않고 피난하였거나 숨어서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앗수르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시적으로 유다를 괴롭게 하다가 때가 되면 멸망할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제목을 “유다의 소망과 앗수르의 절망”으로 정하였습니다.

1. 유다의 소망.(20~23절)

1)20절의 “그 날”은 히스기야왕 때로서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하여 앗수르의 군사들을 멸하고 쫓아내는 때요,(왕하 19:32~36)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전란에서 피하므로 남게된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않고 거룩하신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0~21절)는 뜻은 본래 유다의 남은 자들이 전란 때에 앗수르와 협상할 것을 주장하다가(자기를 친 자를 의뢰하는 뜻) 하나님의 능력으로 앗수르 군대가 죽는 것을 보았을 때(왕하 19:35) 크게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지라도(이것은 야곱의 자손 전부를 뜻함.)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신다”하셨는데(22절) 이 “남은 자”를 23절의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는 말씀과 관련을 지으면 선민(선택한 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곱의 후손들이 모래알 같이 많을지라도 앗수르의 수난에서 견디고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구원받을 백성들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따라 선택된 자만 구원 받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넘치는 공의로 앗수르를 훼멸하시기로 작정하셨은즉 온 세계 중에서 끝까지 행하실 것이라”(22~23절)하시므로 한때의 역사적 사실이 장차 있게 될 영적 구원 사역의 계시로 나타내시게 된 것입다. 다시 말하면 “남은 자”는 구원받을 선민을 앗수르는 멸망받을 대상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2. 앗수르의 절망.(24~34절)

1)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앗수르를 멸하실 것인즉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4~27절) 24절의 “시온”은 예루살렘의 별칭이요,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나 몽둥이로 때림”은 애굽이 유다를 괴롭게 한 일처럼(왕하 23:29~33, 대하 35:20~22, 36:4) 앗수르가 그렇게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미구(不久:머지않아)에 하나님께서 유다에게는 분을 그치시고(앗수르가 괴롭게 하는 일을 중지시키시고) 그 노를 앗수르로 옮겨 그들을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5절) 26절 말씀은 하나님이 채찍을 들어 앗수르를 치실 때 마치 기드온 군사가 미디안 군사를 오렙 반석에서 쳐죽인 것처럼(삿 7:19~25)하시고, 또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처럼 하신다”는 것은 일찍이 모세가 지팡이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릴 때 있었던 일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이며(출 4:3~4, 14:16,27) 따라서 앗수르가 멸망을 당할 때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27절에서 유다를 괴롭게 하던 나라가 망하니까 무거운 짐이나 무거운 멍에(괴로움 당하던 고난)가 벗어질 것이요,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하심은 히스기야왕 때에 유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지만 히스기야왕이 기름 부음 받은 왕(기름은 성령님과 은혜를 상징한함)인즉(시 133:2, 약 5:14) 히스기야왕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게 되므로 하나님이 앗수르의 멍에를 쉽게 부러지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히스기야왕도 다윗처럼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시 22:1) 이 말씀은 기름 부음 받으신 그리스도(요 4:25~26)가 선민의 죄의 멍에를 쉽게 벗겨주실 것을 예언함이 되는 것입니다.

2)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는 상항과(28~32절) 그 다음에 앗수르가 하나님의 혁혁한 능력에 의하여 멸망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33~34절) ① 28~32절에 여러 곳의 지명이 나타납니다. 아얏, 미그론, 믹마스, 게바, 라마, 기브아, 갈림, 라이사, 아나돗, 맛메나, 게빔, 놉 입니다. 이 지명들은 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침략할 때 경유한 지역들이니까 지명 사전이나 지도를 보시면서 확인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믹마스에 치중을 머물렀다”함은 군사 장비를 풀고 진을 친 뜻이고, 29절과 31절은 침략자들로 인하여 떨며 도망하는 모습이며 32절의 말씀은 적군이 “놉”에서 쉬고 딸같은 시온산 곧 예루살렘산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깃발을 나부끼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산은 같은 뜻이고, 예루살렘을 딸로 호칭한 것은 그 도성을 귀한 딸처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② 33~34절은 “앗수르”를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하셨는바(겔 31:3) 그 삼림이 찍히고 작벌당할 것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곧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곧 앗수르의 장대한 자(장군들)가 죽게 되고,(찍힘) 높은 자(왕이나 방백들)가 낮아질 것이며(33절) “철(하나님이 앗수르를 응징하시는 수단)로 레바논의 빽빽한 삼림을 베시고 작벌하심”은 역시 그 나라를 멸망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들에서 하나님은 전쟁과 나라의 흥망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메시야의 출현과 그 사역의 결과 (사 11:1~16)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의 1~2절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신 말씀이고, 3~5절에서는 “메시야의 사역”을 말씀하셨으며 6~16절은 “메시야 사역의 결과”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메시야의 출현과 그 사역의 결과”로 정하였습니다.

1.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예언.(1~2절)

1)장차 메시야가 이새의 후손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절)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고, 다윗은 아브라함의 13대손이며 메시야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1:1) 우리 나라 속담에 “뿌리없는 회초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와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왔다”는 뜻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대로(창 22:18, 삼하 7:16, 23:5) 그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탄생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신 상태로 세상에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절) 2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신,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은 곧 성령님이요, 그 성령님이 “그 위에(예수님께) 강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라 하신 것은(마 1:16) 기름 부음을 받으신 뜻이고, 기름은 곧 성령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요 1:14, 눅 1:15, 4:1,18) 또 1절의 “결심한다”는 뜻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2.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3~5절)

1)예수님은 “하나님(여호와)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믿음 생활 잘 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지 않고 그 이외의 일을 낙으로 여기거나 소망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초막에서 살면서 박넝쿨로 받는 그늘을 인하여 기뻐하다가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여 박넝쿨을 씹게 하셨고 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쬐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욘 4:5~8) 성도는 어떤 모양으로 살던지 세상 살이에 낙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막이나 천막 생활을 하여도 주님과의 생활만을 즐겁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이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하시지 않고 귀에 들리는대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3절) 예수님은 죄없이 사신 분이시고, 또 장차 심판자로 재림하실 분입니다.(요 5:22, 약 5:9) 사람은 심성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적인 것 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만 불완전한 판단을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 아시므로(히 4:12) 바른 심판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3)예수님의 심판은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신원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4절) “공의로 빈핍한 자를........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겸손한 자들이 부자나 교만한 자들의 소행으로 고난을 당하거나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이 있을 때는 비로소 그 문제가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공의로 그 허리띠를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시기 때문(5절)”입니다. 메시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때는 모든 억울함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의와 성실로 띠를 삼으신다”는 뜻은 공의와 성실이 아니면 활동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4)메시야는 “말씀으로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4절)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심”은 “말씀의 권위로 세상을 다스리심”이고,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심”은 말씀 권위보다 약한 뜻만 나타내셔도 악인을 죽이는 심판을 이행하실 수 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과 입기운으로도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3. 메시야 사역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6~16절) 메시야 사역의 결과는 “영적 세계에 큰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6~9절) 6절의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은 다 가해자의 입장이고,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어린 아이는 약자의 입장인데 양측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맹수가 어린 아이에게 끌림은 동물들이 다 순해졌다”는 뜻이니 이는 창조 당시나 노아의 때를 연상케 합니다. 7절에서는 “암소나 곰과 사자가 약육 강식을 떠나서 공존한즉 새끼들이 함께 엎드리고(잡아먹힐 염려가 없다는 뜻) 사자가 풀을 먹으며 독사와 어린 아이가 공존하는 것”도 역시 평화를 설명하신 것입니다.(7~8절) 따라서 “해됨이나 상함이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이 상태가 어디든지 다 그런 것이 아니고,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9절)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계에 한하여 그런 것입니다. 또 그 곳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세계가 크게 화평할 것을 예언하신 것인데 이 평화는 성도의 마음과 지상의 교회와 천국에서 실현될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반드시 성령 충만으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9절) 성령이 충만하고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지며 열방의 백성들이 믿음 세계로 돌아오는 일은 오순절 당시부터 시작되었고,(행 2:1~11) 이 시대에도 계속 성취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성도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세계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뜻을 따라 살 때에 비로소 사랑이 충만할 것인즉 해됨이나 상함이 없고, 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하나님 아는 지식을 더하게 하셔서 물로 바다를 덮은 것처럼 평화가 넘친다고 하셨습니다.(9절)

4.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는 절차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11~16절) 비유적이라 함은 신약 시대에 있을 일을 이사야 시대의 주변 정세로 빗대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1)“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돌아오게하신다”(11절)하심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메시야 시대가 오면 다시 긍휼을 베푸셔서 선민들(그 남은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애굽, 바드로스(애굽 상부 지역), 구스(에디오피아), 엘람(티그리스강 동쪽), 시날(바벨론 지역), 하맛(레바논 북쪽), 바다섬들(지중해 지역)에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12절의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심”은 복음이 열방으로 전파될 것을 또 “이스라엘의 쫓긴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심”은 (그들이 국가적 수난으로 흩어진 자들이지만) 세계 중에 흩어진 택한 백성들을 믿음의 길로 이끄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그때에 성도의 세계는 화합한다고 하셨습니다.(13절) 이기적 또는 정욕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화목하기 어렵겠지만 성도다운 성도는 어떤 원수지간이었더라도 쉽게 화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투기(북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를 투기한 것)와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가 없어지고 서로 투기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음”은 성도의 세계에 진정한 화합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성도가 큰 권위로 불신앙과 악의 세력을 힘있게 복종시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4~16절) 14절의 “서쪽의 블레셋 사람, 동방 백성(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적국들, 앗수르, 바벨론 등), 에돔, 모압, 암몬”은 다 적국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어깨에 날아 앉음”은 독수리의 권위를 연상케 하며 상대를 제압하는 뜻이 있고, “노략하고 손을 대며 복종시킴”도 역시 제압을 뜻합니다. 이는 성도가 악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취하므로 시험을 물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 중심으로 힘있게 행동하면 악의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에서 영적 승리의 운동을 “애굽이나 바벨론을 정복하는 일”로 설명하셨습니다. 애굽을 정복할 때는 홍해가 장애이고, 바벨론을 정복할 때는 유프라데 하수가 장애이지만 하나님이 뜨거운 바람으로 애굽의 해고(홍해의 한 부분을 일컫는다 함)와 유프라데 하수를 치시면 그 곳에 물이 말라서 신을 신고도 쉽게 건널 수 있음 같이 성도가 악을 정복할 때 성령님의 능력으로 쉽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은 백성들(11,16절)이 앗수르(불신앙의 형편)에서 나오는(돌아오는)데도 쉽게 나오도록 대로를 열어주시는데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처럼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주시고, 홍해를 갈라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신앙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출애굽”이나 “출앗수르”는 불신앙과 죄악의 사슬을 끊고 믿음으로 돌아오는 상태를 비유하신 것인데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성취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때에 그런 역사가 있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영적 구원의 역사가 강하게 또 세계적으로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메시야의 영적 사역을 예언하심 (사 11:1~9)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에서 1~5절까지는 메시야의 출현과 그의 사역을 예언하심이요, 6~9절까지는 메시야 사역으로 임할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1. 1절 말씀의 “이새의 줄기”란 이새의 족보 계열,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새는 다윗왕의 아버지요, 또 보아스와 룻의 손자입니다. 이 사실은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다음 약 700년 후에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어 신령한 백성의 열매(구원 소득)를 거두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 2~5절의 말씀은 그때에 오실 메시야의 신분과 그의 심판 사역이 공의로울 것을 말씀하셨으니

1)메시야는 성령이 충만하여 오실 것이며 그 성령님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무한한 하나님의 신이요,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이라 하셨고,

2)메시야는 ① 하나님을 경외함을 그의 즐거움으로 삼고, ② 보고 듣는 외모로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롭게 심판하시며 ③ 빈핍한 자, 정직한 자, 겸손한 자를 바르게 판단하시고, ④ 입의 막대기(말씀으로 선포하시는 징계)와 입술의 기운(뜻을 전달하시는 능력)으로 악인과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며 ⑤ 공의와 성실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의와 성실로 그 몸의 허리띠를 삼으면 그의 행동이 힘있게 공의와 성실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메시야의 무궁한 신성을 말씀 하셨음과 동시에 그 예수님의 활동이 크게 성실하고 공의로우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3. 6~9절 말씀에서는 메시야의 복음 사역이 있을 때에 은혜를 받는 성도의 세계가 크게 평화로울 것과 신앙 지식이 충만하여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1)어떤 이는 이 말씀을 천년 왕국의 뜻으로 지상의 낙원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아는 이도 있지만 지상의 천년 왕국을 신약 시대 로 보는 해석(무천년설)이 지배적이므로 전자의 해석은 피하셔야 합니다.

2)따라서 이 말씀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영적 평안을 누리는 복된 세계를 그 당시의 황폐된 자연(바벨론 침략으로 사람 살던 지역이 황무지가 됨)이 회복된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3)따라서 이리 떼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고, 또 그들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됨이 없고 상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평화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적 평안임을 아셔야 합니다.(요 14:27) 땅이 황폐하여 맹수가 거하므로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던 상황을 하나님의 징계의 형편으로 말씀하셨으니 만큼 하나님의 권고와 회복의 날인, 신약 시대에 받는 축복을 그 반대의 형편으로 묘사하심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오직 복음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로 주시는 영적 평안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4)9절 말씀의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은 주님을 모신 모든 세계를 뜻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함은 ① 복음 계시의 발전이 있을 것과 ② 그 복음이 오순절 이후에 세계 만방에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이상과 같은 영적 평안과 신앙 지식의 충만한 은혜를 실제로 받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22 과 복음 시대에 있을 일과 할 일 (사 12: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복음 시대에 있을 일”과 “신약 시대에 은혜를 힘입는 성도의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복음 시대에 있을 일과 할 일”로 정하였습니다.

1. 복음 시대에 있을 일은

1)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선민에게 안위하시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받은 은혜가 많았지만 그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었고, 국가적 수난도 수없이 당하였지만 나라를 잃은 후에도 큰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약 400년이었는데 그 시기가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오시고, 복음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1절의 “그 날”이란 바로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신약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그 시기에 성령님이 오셔서 함께 하여 주시니 그때에 선민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하나님이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복음적 은혜로 안위의 은총을 주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은총주시는 시기에 살면서 안위받게 된 것을 크게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고후 6:2) 복음 시대 이전에는 이방인에게 전도도 되지 않았습니다.

2)복음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뜻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절)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며......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노래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심”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됨이고, “여호와가 나의 힘이심”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큰 힘을 얻게 됨이며 또 “하나님이 나의 노래이심”은 하나님을 알게 되므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신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평안과 자유를 만끽하여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복음 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활성화 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물에서 물을 긷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복음의 활성화 시대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 사역의 예언이 성취되고 실현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사역이 성취된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졌고, 또 실현되는 것은 성령 강림의 역사와 성경의 완성과 선포, 즉 이방의 모든 세계를 상대로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 사역의 은혜를 “우물물”로 비유하셨습니다. 물을 성령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많습니다.(사 55:1, 겔 47:1~12, 요 7:38~39, 4:14) 팔레스틴 땅에서 우물물은 생명을 살리는 양식처럼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우물물을 마음껏 취하는 것처럼 전도자나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활성화(크게 선양됨)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활성화는 성도의 감사와 기도와 전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4~5절에서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셨고, 또 “그 이름을 부를 것이라” 하셨으며 또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면서 그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이 하신 극히 아름다운 일(구원 사역)을 세계에 알릴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감사와 찬송과 기도와 전도를 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복음 시대에 사는 성도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그것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1)“하나님이 이행하신 구원의 은혜가 극히 아름다운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라”는 말씀과 “극히 아름다운 일”이란 말씀에서 그 뜻을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달으셔야 합니다.

2)이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은혜를 크게 감사하셔야 하며(1,4절)

3)하나님을 의뢰하므로 두려움 없는 자유를 누리셔야 하고,(2절)

4)신령한 은혜를 물긷듯이 활성화 시켜야 하는데 성령 충만을 힘입어 기도와 찬송과 말씀 연구와 전파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성을 최고로 높이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라”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명성을 높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혹이라도 은혜가 개방된 이 시대에 은혜의 핍절을 느낀다면 참으로 우물 곁에서 갈증을 느끼는 자와 같고, 또 길에 떨어진 보화를 줍지 않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 은혜의 핍절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드시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큰 만족과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23 과 바벨론에 대한 경고 (사 13:1~22) 목록으로


본문 1절에서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하셨으므로 본문의 제목을 그대로 정하였습니다. 내용을 살피면 4 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2~5절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적국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이요, ② 6~8절은 적국이 일어남과 동시에 “바벨론 국민이 겁약해진다”는 말씀이며 ③ 9~18절은 “바벨론이 당하는 환난의 내용”이요, ④ 19~22절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벨론”이란 “신의 문”이란 뜻으로 “바벨”이란 히브리어를 헬라말로 표기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또 바벨론은 지역의 이름이고, 도성의 이름이며 나라의 이름입니다. 노아 후시대에 인종이 분산하면서 노아의 증손자(함, 구스) “니므롯”이 유프라데강 유역에 있는 “바벨”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고,(창 10:11) 그 다음 아브라함 후시대(BC 1700년 경)에 “하므라비” 왕이 주위의 여러 부족들을 합하여 통치한 후에 앗수르에 속국이 되었었고, 주전 608년에 “나보포나살”이 독립하여 느브갓네살 왕 시대로 전승된 나라입니다. 느브갓네살 왕 시대에 그 나라가 강성하였지만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는 앗수르 속국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전 600년 경에 이 나라를 드셔서 선민을 징계하시고, 또 이 나라를 망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한 나라이며(단 5:1~3) 적 그리스도의 모형이고,(계 17:5) 또 영원한 심판 대상의 모형이 된 것입니다.(계 18:1~10, 사 13:19~22)

1. 하나님은 “바벨론국을 망하게 하실 적국(메데, 파사)을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2~5절)

1)“너희는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로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2절)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적국을 일으켜서 바벨론을 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너희:천사)을 명하여 바벨론의 적국이 될 메데와 파사국의 왕을 감동하시고, 그 군사들로 하여금 자산(나무 없는 붉은 산, 사막 지대의 높은 곳을 일컫는 말) 위에 기호(깃발)을 세우고 소리를 높여 군사들을 규합하신 후에 존귀하다고 뽐내는 바벨론 성으로 들어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에서 “내가 나의 거룩히 구별한 자에게 명하심”은 하나님이 파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모집하게 하시고, 또 그들로 바벨론을 치게 하여 하나님의 노를 풀어드린다는 것입니다.

3)“메데 파사”의 군대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면 “산에서 많은 백성, 많은 무리들의 떠드는 소리가 날 것인즉 이는 하나님께서 열국의 군사들을 모아 싸움을 예비하시는 뜻으로 군사들을 검열하실 것이니”(4절) 이들은 먼 나라 곧 하늘가(바벨론에서 메데 파사를 일컫는 뜻)에서 온 자들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병기로써 온 땅(바벨론 열국)을 멸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5절)

2. 하나님은 전쟁에 패하여야 할 나라의 군인들의 사기를 떨구어 패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6~8절)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이라 그러므로 모든 손이 피곤하며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6~7절)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망할 백성들의 마음에 애곡함과 손이 피곤해짐과 녹는 마음을 주셔서 겁약하게 하시고, 또 “놀래며 괴로워함과 슬픔에 잡히게 하셔서 임산한 여자가 고통하며 놀라고 얼굴을 붉힘(불꽃) 같이 약하게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8절)

3. 바벨론이 당할 환난의 성격을 예언하셨습니다.(9~18절)

1)“하나님은 잔혹하게 분을 내시고 맹렬하게 노하셔서 바벨론의 땅을 황무하게 하시고, 그 중의 죄인들을 멸하신다”(9절) 하셨고, 그렇게 될 때에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 하며(이 뜻은 권세자와 지도자들이 없어짐을 뜻함.) 따라서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라“(10절)고 하셨습니다. 권세자를 해와 달과 별로 비유하신 말씀은 마 24:29에서도 나타내신 말씀이며 또 전쟁에 패하고 나라가 망하면 권세자들이 일시에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2)그때에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시는데(11~12절)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고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시고,(11절)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또는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신다(12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바벨론의 악인들을 다 없애고 쫓아내므로 인종을 희귀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정금이나 오빌의 순금은 진귀한 보석을 의미하는바 인종을 그보다 더 희귀하도록 없애신다는 것입니다.

3)그 날에 하나님의 노가 맹렬히 나타나면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려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나라가 천지 개벽하는 것처럼 망하고 변화될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13절) 그리고 그처럼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전쟁이 있을 때에 “백성들은 쫓기는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떼처럼 각기 자기의 동족이 있는 본향으로 도망하지만(14절) 그 곳에서도 창이나 칼에 찔려 엎드러질 것이요,(15절) 그들의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보는 목전에서 메어침을 입고, 그들의 집은 노략을 당하며 그들의 아내는 욕을 당할 것이라(16절)”고 하셨고

4)하나님이 보내신 “메데” 사람들은 “은금에 뜻을 두지 않고 생명 죽이는 일에만 급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18절) 하나님이 “은을 돌아보지 않고 금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을 격동시키셔서 바벨론을 치게 하신즉(17절) 군사들이 재물에 만족하지 않고 활로 청년을 쏘아 죽이며 태의 열매(어린이)나 아이를 가석히(아깝거나 가엽게) 여기지 않고 죽일 것이라(18절)”고 하셨습니다.

4. 바벨론이 망하고 황폐된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19~22절)

1)“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였던 바벨론이.....소돔 고모라처럼 될 것이라”(19절)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현실 영광의 모형국입니다.(계 18:10~17) 그 영광이 대단하였을 것인즉 그것을 열국의 영광과 자랑하는 노리개처럼 즐거워하였으나 소돔 고모라처럼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갈대아 사람”이란 바벨론 국민의 종족, 또는 기본 국민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2)따라서 “그 곳에는 거처할 자가 대대로 없을 것인즉 아라비아 사람도 그 곳에 장막을 치지 않을 것이며 목자들도 그 곳에 양 떼를 쉬게 하지 않을 것인즉”(20절) 이는 그 장소가 들 짐승 등으로 황폐하며 위험한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아라비아 사람이나 목자들은 최소한의 정착지도 없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그들조차 거하지 않는다는 뜻) 따라서 “들짐승이나 타조나 들양들이 그 장소와 가옥에 깃들일 것이요”(21절), 또 “궁성에는 시랑(승냥이와 이리 떼를 의미함. 들개 또는 재칼과 유사한 것으로 번역함.)이 부르짖고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인데 그 때가 오래지 않아 임할 것이라”(22절) 하셨으니 그 오래지 않은 시기는 이 예언이 있은 때로부터 약 170년 후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시기를 주전 700년 경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된 606년까지 94년과 바벨론 포로 시기 70년을 합한 이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실권자와 군사들을 일으키시고 강국을 들어 악인의 나라를 심판하시며 또 악한 자의 기세를 꺾어 전쟁에 패하게 하셔서 악인과 그 나라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제 24 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 (사 14:1~23)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두 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고,(1~2절) 또 한 대지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말씀”(3~23절)입니다.

1.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에 대하여(1~2절)

1)우선 어떤 상태에서 회복되는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왕 이후 시대에 계속 타락상을 나타냈습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이방인의 생활을 답습하며 하나님 경외하는 종교를 타락시키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벌을 내리셔서 나라와 종교 제도 등을 다 훼파시키셨고, 백성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신 후 70년간 바벨론의 압제를 받게 하시므로 의미없는 생활을 하게 하셨으니 바로 그런 상태에서 회복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현실적으로 성취되기 약 170년 전에 하신 것입니다.

2)어떻게 회복되느냐가 중요합니다. ① 현실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메데사파국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바사왕 고레스왕이 선민들에게 해방령을 내림과 동시에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종교 제도를 복구하게 하므로 상당한 수가 귀환도 하고 복구도 하지만 극히 일부분에 한하여 그런 일이 있을 뿐이고, 선민적 국가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② 2차적 회복은 신약 시대에 복음적 은혜를 성취시켜서 세계에 분포된 많은 선민들에게 신령한 구원의 복을 신약 시대에 복음적 은혜를 성취시켜서 세계에 분포된 많은 선민들에게 신령한 구원의 복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계적, 또는 영적으로 회복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1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의 고토에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선민 즉 야곱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택하여 고토에 두신다”는 것은 징계를 인하여 일시 버려두었던 백성들을 다시 특별 섭리의 대상으로 취급하여 그들의 고토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메데바사왕 고레스의 배려로 주전 536년 경에 외국으로 피난하였거나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 일부가 귀환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라는 말씀과.........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는다”는 말씀(1~2절)은 출애굽 때에 이방 사람들이 선민에게 합류되어 나온 것처럼(출 12:44, 레 25:44~46)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도 끊지 못할 인연을 맺은 이방인들이 함께 와서(인구 통계에 관계없이) 생활에 연합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절에서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을 것이라” 따라서 “전에 자기를 사로잡은 자를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를 주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전쟁에 패하면 패자가 승자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바벨론이 패하고 유대인이 승자의 은혜를 입은즉 역시 패자가 은혜를 입은 자에게 노예가 되어 살 길을 따라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복음적 회복을 생략한 채 현실적 회복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3~23절)

1)바벨론의 멸망은 “선민을 슬픔과 곤고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것이라”하시므로(3절) 바벨론이 이스라엘 선민을 얼마나 괴롭게 하였는가?를 알게 하셨고, 또 하나님은 선민에 대하여 “징계하시는 때와 은혜 베푸시는 때가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2)그때에 선민들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대하여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 바벨론 수도가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4절) 하나님이 그 악한 자들의 몽둥이 짓 하는 것과 패권자의 홀(권세자의 힘)을 꺾으셨도다(5절) 바벨론이 분을 내어 여러 민족 치기를 마지 아니하고 노하여 열방을 쳐도 막을 자가 없었더니(6절)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다는 내용으로 소리질러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절)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신 분들은 이 뜻을 더 실감있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광복절 노래”와 “6.25 노래” 같은 것이 생긴 것 아닙니까?

3)이런 기쁨의 사실은 사람만 느낄 것이 아니요, “향나무나 레바논의 백향목도 느낄 것이라”하셨으니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지만 바벨론 군사들이 점령한 땅(레바논)에 와서 향나무와 백향목을 많이 작벌하였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사람 죽인 일로 비유하신 듯합니다. 오죽하면 “산의 나무가 다 기뻐한다”고 하셨을까요?(8절)

4)산의 나무뿐 아니라 “죽음과 시체를 쓸어모으는 음부도 깜짝 놀라서 소동한다”고 하였습니다. 9,11절의 “음부”는 지옥이나 무덤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씀으로 그 음부가 인격적 표현을 나타낸 것은 역시 시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아래의 음부(지옥 또는 무덤)가 소동하며 죽음의 영들이 오는 것을 영접할 것이고, 바벨론왕의 통치를 받던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동하여 그 보좌에서 일어서서 바벨론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너도 우리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9~10절) “네 영화가 비파 소리와 함께 음부에 떨어졌으니 네 시체 위에는 지렁이가 덮고 아래는 구더기가 깔려 있구나(11절)”하고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5)또 일반인들은 말하기를 “너 아침의 계명성(새벽별처럼 반짝이던 바벨론의 영화를 뜻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하늘을 찌를 듯한 권위) 떨어졌으며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2절) 네가 교만한 마음을 먹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뭇별 위에 보좌를 높이고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고 또 높은 구름 위에 올라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였으니 그 교만의 대가로 네가 음부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게 될 것이라”(12~15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높은 자를 별로 비유하셨고, 또 하나님을 거스려 교만한 것을 하늘에 높이 오르려는 것으로 비유하여 바벨론왕의 교만을 표현하신것입니다. 또 16~17절에서 느브갓네살왕의 말로를 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경동)하고 또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고 사로잡힌 자를 억류하던 자가 아니냐”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6)18~20절 말씀도 역시 “느브갓네살”왕의 영광이 욕된 상태로 바뀐 것을 마땅한 일로 평가하는 말씀입니다. “열방의 왕들은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잠을 자지만(평안을 누린다는 뜻) 느브갓네살왕은 무덤에서도 쫓겨났으니 가중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 구덩이에 묻힌 밟힌 시체와 같다”(18~19절) “자기의 땅을 망하게 하였고 자기의 백성을 죽였으니 안장함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의 후손도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할 것이라”(20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느브갓네살이 무덤에서 쫓겨났다”는 뜻은 그가 죽기 전에 그 아들 “에월므로닥”에게 진노하여 그 태자를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느브갓네살이 죽어 장사되고 바사왕이 그의 아들 “에월므로닥”을 구출하여 왕되게 하려한즉 그가 “아비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왕에 오르지 않겠다”하여 무덤을 판 후 그 시체를 확인시켜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박윤선 목사님 주석에서) 19절 말씀은 전시에 시체를 적당히 처치한 상황을 표현한 내용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7)21~23절은 심판받아야 할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적 명령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21절 말씀은 하나님이 메데, 파사 왕에게 명하여 “바벨론을 도륙하고 그들로 하여금 땅 위에 성읍을 건설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고, 22절은 “바벨론을 쳐서 그 인종들을 멸하라”는 말씀이며 23절은 “인종이 없는 바벨론 영토가 고슴도치의 굴혈이 되도록 인종을 청소하라”는 섭리적 명령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전쟁과 심판을 친히 주관하시는 섭리를 나타내주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벨론이란 역사적 국가를 심판의 대상으로 이스라엘 선민을 구원받을 택자로 비유하여 통치하시는 섭리를 나타내시고 또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 25 과 앗수르와 블레셋에 대한 예언 (사 14:24~32) 목록으로


본문 25절에서 앗수르의 패망을 말씀하셨고, 28~29절에서는 블레셋의 멸망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앗수르와 블레셋에 대한 예언”으로 정하였습니다.

1.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경영은 불가항력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24,27절)

1)24절에서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과 경영하시는 일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맹세하여 말씀하신 것은 강조하신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훼방을 받아 자기의 뜻을 꺾으시겠습니까?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라” 하셨고,(욥 23:12)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사 55:11)고 하셨습니다.

2)2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돌이키겠느냐?”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뜻에 복종하는 것을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온 세계와 앗수르에 대하여 경영하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5~26절)

1)25절에서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선민의 지역)에서 파하고 밟을 것인즉 그때에 그의 멍에(앗수르의 압제)가 떠나고 그의 짐(앗수르가 괴롭히는 요청들)이 그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하신 것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고난 당하던 유다 백성들이(사 10:28~32)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앗수르 군사가 패망을 당할 때(사 36:2, 37:36) 그들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대, 즉 히스기야왕 때에 천사들의 역할로 앗수르왕 산헤립의 군대 185000명이 멸절되므로 성취된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 경영을 하실 때 “앗수르만 경영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경영하신 것이고 열방을 향하여 손을 펴신 것이라”(26절)하시므로 명실공히 선민뿐 아니라 선민을 중심하여 이방인 세계도 함께 경영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통치하시되 선민 중심으로 이방 세계도 통치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아하스왕이 죽던 때에 블레셋에 대한 미래를 예언하신 것입니다.(28~32절)

1)웃시야(13대, 52년), 요담(14대, 16년), 아하스(15대, 16년), 히스기야(17대, 29년)왕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을 하였으니까 아하스왕이 죽던 해는 주전 716년 경으로 이사야가 생존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해당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이 자기들을 대항하던 권세자가 꺾였다 하여 기뻐할 것이 못되며 블레셋을 멸망시킬 더 큰 세력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9~30절) 블레셋은 가나안 본토족으로 사울왕 때부터 계속 적대국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와서 그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는 말씀은 유다왕 아하스가 앗수르왕의 도움을 받아 에돔과 블레셋을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었습니다.(대하 28:16~18) 따라서 아하스왕이 죽은 것을 막대기 부러진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고 그 열매로 나는 불뱀이 될 것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본래 막대기는 뱀을 잡는데 사용되지만 “막대기가 꺾인 다음에 독사가 나오고 그 독사의 열매가 날아가는 불뱀처럼 될 것이라”는 것은 블레셋을 망하게 할 더 큰 대적이 생길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하스왕 이후에 블레셋이 타격을 받은 역사를 살피면 히스기야왕 때에 강적 앗수르를 천사의 역할로 물리친 일이 있었고,(이 때에 블레셋도 힘을 쓰지 못하였을 것임. 대하 32:20~23) 그 다음에 앗수르왕 사르곤이 블레셋(아스돗)을 점령한 일이 있었으므로(사 20:1) “뱀의 뿌리에서 나온 독사”는 히스기야왕을 뜻하고, “그 열매로 나는 불뱀이 나온 것”은 블레셋을 아주 멸망시킨 앗수르왕 사르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뱀이 그 열매로 나타났음에 대하여는 히스기야왕과 관련이 있어야 하므로 메시야를 뜻한다는 해석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민 21:8~9)

3)결국 더 큰 강적을 만나서 블레셋이 망하면 “블레셋족은 뿌리까지 기근과 살육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고, 블레셋과 대적하던 선민 세계에는 먹을 것과 평안이 있을 것이라”(30절)고 하셨습니다. 30절의 “가난한 자의 장자가 먹는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에게 양식 문제가 해결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31절에서 블레셋이 망할 때 “연기가 북방에서 온다”는 것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앗수르 군사의 침략 상태를 표현하신 것이고, “항오를 떨어져 행하는 자가 없음”은 침략군의 행열이 빽빽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블레셋 백성들은 성읍과 성문에서 슬피 울며 부르짖게 될 것이고,(31절) 그런 참상에 대하여 선민들이 협상이나 도움을 청하러 온 블레셋 사신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이 시온을 세우셨은즉(유다를 권고하셨은즉) 권고받은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 안에서 피난할 것이라”(32절)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민에 대한 구원의 피난처란 뜻입니다. 결국 선민의 적국인 블레셋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권고를 받는 백성이 위로와 구원을 받을 것을 실제적 역사를 예표로 하여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제 26 과 모압에 관한 경고(1) (사 15:1~9) 목록으로


1. 본문 말씀은 모압이 황폐하고 망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1절은 제목에 해당하는 말씀인데 “알”이란 모압의 수도 이름이고, “길”은 높은 요새지 이름입니다.(사 22:6에서는 “기르”라 하였음) 이렇게 든든한 도성과 요새지를 가진 모압이라도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황폐한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방 나라인 모압도 주관하시고 모압이 든든한 도성과 높은 요새지를 갖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실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든든한 나라 모압도 망할 것인즉 인생의 삶의 변화란 항상 눈 앞에 있음을 알고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모압에 관한 경고이니까 우선 모압에 대하여 아셔야 하겠지요. 사해 바다 동쪽을 바라보면 그 곳에 붉은 산들이 보이는데 그 곳이 지금은 요르단 서남방의 영토이지만 구약 시대에는 모압족이 그 곳에 작은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소돔, 고모라 멸망 이후에 놋과 그의 큰 딸로 말미암아 생산된 아들 “모압”이 그 족속의 조상이 되어 한 부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창 19:33~38)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서 모압은 충돌없이 통로를 빌려주었고,(민 22:1)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족과 왕래 교류가 있었으며(룻 1:1) 다윗왕 때에 다윗왕국의 속국이 되었다가(삼하 8:2~12, 23:20) 아합왕이 죽자 반역하여 조공을 중단한 후 유다왕 웃시아와 요담 때에 또 유다의 침략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대하 26:7~8, 27:5) 그러니까 이 예언이 있을 당시에도 모압은 유다국의 속국이었을 것으로 예측이 되는 것입니다.(16:1~5)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주변 국가들의 정황이 여러 가지로 선민국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망하게 되는 것은 바벨론(앗수르로 보는 견해도 있음)이 유다를 정복한 후 이어서 모압을 침략하므로 이 예언이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렘 9:26, 12:14~15, 48:36~47)

3. 2~9절 까지의 말씀은 바벨론이 모압을 격파할 때 어떤 참상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모압의 전사들과 귀인들과 백성들, 그리고 선지자의 태도와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모압의 전사는 항전할 기세를 잃고 “크게 부르짖으며 그 혼이 속에서 떨도다”(4절)하시므로 크게 낙담하고 사기를 잃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2)“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며 울고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한 것을 부르짖을 것이라” 하셨으며(5절)

3)백성들은 “바잇과 디본과 산당에 올라가서 그 곳에 안치된 그모스 신상 앞에서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할 것이고, 또 비통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각각 머리털과 수염을 깎을 것이며 거리에는 굵은 베로 몸을 동인 자들이 있을 것이요,(애통함의 뜻) 지붕과 넓은 곳에서도 각기 애통하며 심히 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절) 애굽이나 중동 지역에 가면 굴을 판 집들이 많습니다. 그 지붕은 사람이 건축한 지붕이 아니고 자연의 언덕입니다. 그 밑에 굴을 판 집들이 있기 때문에 그 곳을 지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지붕은 굴 속에 사는 주민 전부가 올라갈 수 있는 언덕을 의미합니다. “헤스본과 엘르알레 거민들도 부르짖으며 그 소리가 야하스까지 들릴 것이라”는 말씀도 역시 살육의 아비규환을 뜻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에서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어 청청함이 없다”하심은 적군들이 모압 땅을 황폐하도록 하기 위하여 토지로 공급되는 샘물을 다른 곳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줄기를 없애므로 식수와 생활수를 끊어 멸망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때에 “재물있는 자들은 그 쌓은 재물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널 것이라”(7절)하셨으니 “버드나무 시내”란 모압과 에돔을 구별하는 경계선의 하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그 대에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려 퍼지고 슬피 부르짖는 소리가 에글라임과 브엘엘림에 미치며 디몬의 강물에는 피가 가득할 것이라”(8~9절)하시므로 살육의 참상이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이 광경을 바라보고 예언하는 선지자의 태도는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다(5절)”하셨으니 이는 도덕적으로 민망함을 나타낸 표현입니다.(겔 3:18, 잗 24:17) 성도가 악인의 멸망을 기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 섭리에는 공감하여야 할 것입니다.

5)이상과 같은 참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시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들을 깨끗이 없애시기 위하여 맹수인 사자를 보내신다”(9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압족을 아주 없애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기인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죄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민망한 일이나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 실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노를 푸시는 일일진대 성도는 그 심판을 마땅하게 여겨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의인이나 악인에 대하여 그 미래를 주밀하게 관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더욱 경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멸망의 정황을 얼마나 자세하게 나타내셨습니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도 그렇게 섭리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시91:1-7,18:32-36)

 

제 27 과 모압에 관한 경고(2) (사 16:1~14) 목록으로


본문의 5,9,11절을 제하고는 다 모압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1. 먼저 5절, 9절, 11절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은 다윗의 왕국이 모압보다 견고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으로 장차 메시야 통치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왕위”란 유다 왕국 및 다윗의 계통으로 오실 메시야를 뜻하고, “인자함으로 굳게 선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권위나 폭력이 아닌 사랑의 통치로 견고해짐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예수님이시고, “충실한 판결과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함”은 예수님의 통치와 심판이 의롭고 공평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렇게 통치하십니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뜻대로만 산다면 의와 공평을 잘 실천 할수 있을것입니다.

2)9절과 11절은 모압의 불행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도덕적 연민의 정으로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혹할지라도 마땅한 섭리이므로 인간이 거절할 수 없지만 성도의 긍휼한 심정의 폭발로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롬 12:15)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하심은 선지자가 십마의 포도원이 훼파됨을 인하여 울되 야셀 사람들이 슬픔을 당하여 운 것처럼 울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그 계시를 받으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하심은 두 지역의 참상을 인하여 선지자가 울어주는 시적 표현이고, “너의 여름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남”은 적군들이 그 지역의 농작물을 거두어 가면서 떠드는 형편을 나타낸 것입니다. 11절의 “수금같이 소리를 발함”은 수금(악기) 소리처럼 구슬픈 울음 소리를 뜻하고,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다”함은 길하레셋의 참상을 인하여 우는 슬픔의 심정이 창자를 자극할 만큼 크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모압에 관한 경고를 살피면

1)모압이 연약하지만 “유다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유다의 피난민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모압이 연약한 표현은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루터에서 떠다니는 새와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대적의 침략이 있을 때 여지없이 잡히고 무너지되 힘 약한 여인들이 우선 그러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떠 다니는 새와 흩어진 새 새끼”는 잡히기 쉬운 대상을 뜻합니다. 또 “유다를 도우라”는 말씀은 1절에서 “모압(너희)이 이 땅 치리자(유다왕)에게 어린 양을 드리라”는 말씀과 3절에서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괴롭힐 때 예루살렘은 여전히 견고하였지만 주위의 거민들이 괴로움을 피하여 모압으로 도피한 백성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보호해 주라는 것입니다. 유다왕 웃시아와 요담 때에 모압이 유다의 속국으로 있었은즉(대하 26:7~8, 27:5) “유다가 잠시 괴로움을 당한다 하여 모압이 반항하지 말고 양떼를 조공으로 바치던 일을 계속 할 것이며(1절) 그 국교 상태를 유지함이 좋으므로 모략을 베풀고 공의로 판결하는 일을 잘 하며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철저한 보호막을 만들라는 뜻) 유다에서 쫓겨난 피난민들을 잘 보호해 주어서(3절) 모압인들과 함께 있게 하여 멸절하는 자(앗수르 군대) 앞에서 피할 길이 되게 하라(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선민과 하나임을 나타내셨고, 선민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는 섭리를 나타내셨습니다. “나의 쫓겨난 자들(4절), 나의 마음(11절)”이 그런 뜻입니다. 전자는 유다 백성들과 하나된 뜻이고, 후자는 선지자와 하나된 뜻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엡 4:3, 3:17, 골 2:19) 그 이유는 유다를 괴롭히는 앗수르가 머지 않아 멸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으며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다”(4절)는 말씀이 곧 앗수르 멸망의 확실함을 과거형으로 강조하여 예언하신 것입니다.

2)모압의 죄는 교만, 분노, 과장이라고 하셨습니다.(6절)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다” 하셨고, “분노도 들었으며 그 과장이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교만, 분노, 과장 이 세 가지는 겸손과 온유와 진실에 반대되는 악으로 하나님이 크게 증오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주 생산 품목인 “길하레셋의 건포도떡과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다 황폐될 것이요, 그것들이 (가지와 싹은 포도 수출품을 뜻함) 야셀과 광야를 거쳐 바다를 건너갈 수출품이었으나 열국의 주권자(앗수르 등 강국들)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듯이 황폐시킬 것”인즉 그 일들로 인하여 통곡과 근심이 있게 될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7~8절)

3)“포도원에서 작업하고 수확하던 즐거움의 소리들도 하나님이 그치게 하시니 포도주를 밟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10절) 반대로 착취하는 자들의 떠드는 소리가 날 것이라(9절)”하시므로 하나님이 모압의 멸망을 섭리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4)이때에 모압인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인 “크모스” 신당에 가서 봉사하며 기도할지라도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절) 우상은 효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사 44:9) 13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같은 의미(모압의 멸망에 관한 것)의 계시를 전에도 받았다는 뜻이며 이제 “품군의 정한 해(2,3년을 뜻함)와 같이 3년 내에 망할 것이요,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도 남은 백성의 수가 적으므로 항거하거나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1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3년이란 “오래지 않은 기간”을 의미할 뿐 여자적 의미는 아니란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후 꼭 3년 만에 모압이 망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도 통치하고 그들의 죄를 감찰하시며 또 이방국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의 봉사자와 피난처 역할을 하게 하셨고, 결국은 심판하여 버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민은 하나님과 연합된 백성임을 잊지 마셔야 하겠습니다.

 

제 28 과 3국 멸망에 관한 경고 (사 17:1~14) 목록으로


1절에의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하신 것은 1~3절뿐이고 전체의 말씀은 다메섹과 북이스라엘과 앗수르의 멸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고”란 원문은 “맛사”로서 “무거운 짐”을 뜻한다고 합니다.(13:1) 따라서 멸망예고의 말씀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음을 뜻할 것입니다. 우선 “다메섹”이 처음 나왔으므로 다메섹에 대한 지식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인데 성경에는 시리아를 수리아로, 다마스커스를 다메섹으로 호칭하였습니다. 이 성은 아브라함때도 있었고(창 14:15~16) 다윗과 솔로문왕이 점령하였다가(삼하 8:5~6, 왕상 11:24~25) 아람의 수도가 되었었고(왕하 16:9) 또 수리아의 수도가 된 것입니다.(사 17:3) 따라서 다메섹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은 곧 수리아가 망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고 수리아는 유다왕 아하스 4년에 앗수르왕 “티글랏빌레셋”에 의하여 훼파되었다고 합니다(왕하 16:9),또 재건하였으나 그후 바벨론에 의하여 또 파멸되었으므로 결국 이사야의 예언이 사실대로 성취되었고(아하스 4년, BC 692) 그후 17년만에(BC 675) 북왕국도 망하게 된 것입니다.(여기의 연대 계산은 본인이 출판한 기독교 신앙백과 272P의 성경연대표를 참조하십시오.) ① 1~2절은 “다메섹의 멸망”을 말씀하신 것이고, ② 3~6절은 북왕국과 다메섹(수리아)의 멸망을 함께 말씀하셨으며, ③ 7~9절은 선민세계에 각성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고, ④ 10~11절은 선민의 죄와 결과이며, ⑤ 12~14절은 앗수르의 멸망 형편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다메섹 성읍은 모양을 이루지 못할만큼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여 양의 서식처가 될 것이라”(2절) 하셨으니 “아로엘”이란 지명이 지도상으로는 사해 동편에 표기되었지만(수 12:2, 민 32:34, 삼상 30:26) 본문의 아로엘은 다메섹과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북왕국과 다메섹의 멸망에 대하여(3~6절)

1)3절의 “에브라임의 요새”란 북왕궁의 요새를 의미합니다.(왕상 13:25) 그것이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백성과 함께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될 것이라”(3절)는 것입니다. “다메섹”나라는 다메섹을 수도로 한 수리아국이고 “아람의 남은 백성”이란 다메섹이 아람의 수도로 있을 때 거기 살던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찐 몸이 파리하리라”하심은 북왕국이 아람 또는 아수르의 침략으로 훼파될 때 양식이 없어 파리해질 것이란 뜻이요(왕하 6:24~30) 그들의 영광이 쇠한 형편을 “거둔 곡식의 이삭을 벤 것”으로, 또 “르바임 골짜기(수 15:8, 삼하 5:18)에서 이삭을 주운 것”(5절)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이 뜻은 남김없이 싹쓸이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남은 것이 없도록 것이란 표현입니다.

3)그런데 6절에 보시면 “오히려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꼭대기에 실과 2, 3개가 남음 같고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4, 5개가 남음 같다”하셨으니 이 뜻이 5절의 뜻과 상반되는 것 같지만 5절은 선민의 현실적 쇠잔을 뜻하고 6절은 영적권고가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사 6:13에서도 반영된 것입니다. 선민국이 현실적으로는 쇠잔해질지라도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먼가지의 남은 실과처럼 존속되고 성취될 것이란 뜻입니다.

3. 선민세계에 각성이 있을 것을 예언하심에 대하여(7~9절)

7절에 보시면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자를 쳐다보고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자를 바라볼 것이라” 또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 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라”(8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북왕국 선민들이 나라의 멸망을 당하고 인간의 연약을 느꼈을 때 자기들의 과오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세운 우상신을 섬겼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악한 죄악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실제로 자행한 적이 많았습니다.(출 32:4, 왕상 11:7, 12:27~33, 18:19) 나라가 망한 다음에 뉘우친들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요. 회개도 기회가 있는 법입니다. 결국 “그들의 견고한 성읍들은 다 황페된다”고 하셨습니다.(9절) “버린바된 수풀속의 처소와 작은 산꼭대기의 처소처럼 황폐된다”하심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집처럼 처량하게 황폐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왕하 17:24, 18:9~12)

4. 그런 결과를 맺게된 것은 선민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10~11절) 선민들의 죄는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이방풍속을 따른 까닭으로 화를 내리셨다”하셨으니(10절) 성도는 항상 구원의 의미를 깨닫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능력의 반석(보호의 은총)이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4시간 기억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었다”하심은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포도를 재배한 것인데 “거기에 이방의 가지를 이종하고 그것을 잘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두르고 너의 씨(그가 심은 농작물, 순포도에 이방퐁속을 가미한 이질적 신앙을 뜻함)로 잘 발육하게 하였으니 결국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그 농작물들이 다 없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11절) 하나님은 이방사상이 가미된 혼잡한 신앙을 가장 증오하시는 것입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신 22:11) 하신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보암왕은 자율성전을 세웠고(왕하 14:27~33) 아합왕은 바알신 섬기는 이방나라 여인을 왕후로 맞이하였으며 유다의 아하스왕은 다메섹의 제단을 모방하는 죄까지 범하였던 것입니다.(왕하 16:10~11)

5.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12~14절) 12절 말씀은 전쟁터에서 치고 죽는 정황을 “소동하고충돌하며 바다의 파도가 뛰노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을 내다본 선지자가 슬픔을 나타냈고 “많은 민족이 소동한 것”(12절)과 “열방이 충돌한 것”(13절)은 강자나 약자가 다 주위의 속국과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인해전술과 백병전의 아비규환을 “파도소리 즉 큰 물의 몰려옴”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여도 주께서 꾸짖으시면 겨가 바람에 흩어짐처럼 또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13절) 14절에서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 전에 그들이 없어진 것”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아수르군 185,000명을 죽게한 사실을 뜻하고(사 37:36)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의 분깃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의 보응이라”하심은 선민을 해롭게 한 보응이 반드시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이후에 북왕국은 물론 앗수르와 유다와 바벨론도 망하였으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히스기야 왕때에 앗수르가 망한 것 외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죄를 살피시고 이방의 강국을 들어 징계하시는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이 사실은 성도 개인을 통치하시는 섭리로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 29 과 애굽에 대한 서론적 경고 (사 18:1~7)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애굽에 대한 서론적 경고”로 제목을 정한 것은 19장에서 “애굽에 관한 경고”가 계속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① 1~3절은 “애굽인들과 세상의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내용이고, ② 4~6절은 “메시지의 내용”이며, ③ 7절은 “애굽에 신앙적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1. “애굽인들과 세상의 거민들에게 말씀을 전하라 하심”에 대하여(1~3절)

1)선지자는 우선 “슬프다”는 감정의 표현을 먼저 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말씀을 영감하신 성령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선지자가 왜 슬픈 감정을 나타냈을까요? 이것은 애굽세계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을 내다본 동정의 슬픔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과의 관계는 나쁜 때도 있었지만 좋은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고(왕상 9:16), 다윗과 솔로몬때는 우방국이었으며(왕상 9:24), 또 이사야 시대에는 애굽과 구스를 의존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사 20:5)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적 섭리를 떠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롬 12:15) 하나님은 후회하실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민23:19, 롬11:29)

2)그러면 “무엇을 인하여 슬퍼한 것일까요?” 1~2절에서는 애굽을 지적하셨고 5절에서는 그들이 받을 화를 말씀하셨으므로 결국 애굽의 전화를 인하여 슬픔을 나타낸 것입니다. 1절의 “구스의 강”은 나일강이고, “그 강 건너편”은 애굽땅이며, “날개치는 소리나는 땅”이란 독수리떼가 많음을 표시하거나(6절), 활력이 넘치는 국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일 것입니다.

3)그 나라 백성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의 교통수단인 갈대배(갈대로 엮어 역청을 발라 만든 배가 숲이 많은 강을 헤쳐 나갈 때 적응력이 있다함)를 나일강에 띄우고 말씀의 사역자(사자)를 수로(水路)로 보내며 “경첩(輕捷:민첩하고 빠른)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지도를 보시면 나일강이 서쪽 지중해 앞에서 나누인 것을 보게됨) 곧 애굽으로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애굽에 대하여 묘사하기를 ①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이 있는 나라요(애굽인은 그 몸체가 장대하고 준수함) ② 시초부터 두려움이 된 나라이며(요셉 이후 선민들을 학대하였고, 이사야 시대보다 약 100년전인 아사왕때에 구스의 세라가 유다를 침략한 사실이 있었음) ③ 또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나라”(애굽의 전성기를 의미함)라고 하였습니다.

4)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증언하는 메시지를 “세상의 모든 거민과 지상에 거하는 너희(3절)” 즉 애굽의 모든 국민들에게 전하게 하셨고, “산들위에 기호를 세우고 나팔을 분다”는 뜻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방법을 뜻합니다.(3절)

2. 메시지의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4~6절) 메시지의 내용은

1)“하나님은 자기의 처소(천국보좌)에서 종용히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선민이나 성도개인이나(시 139:1) 이방국이나 애굽도 항상 감찰하십니다.

2)하나님은 은혜도 베푸시고 화도 내리시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신 30:15) “쪼이는 일광”이 추울 때는 은혜이고 “가을더위의 운무”도 더울 때에 시원한 그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또 이 은혜가 화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쪼이는 일광이 계속될 때 일사병을 유발할 수 있고 “가을더위의 운무”는 바람에 밀려 쉽게 지나가니까 오래가지 않는 것입니다.

3)따라서 “애굽이 현재는 은혜 아래에 있지만 머지 않아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4)나라를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5절) 5절 말씀에서 애굽을 비유하실 때 포도원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익어갈 때에 낫으로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는다”는 뜻은 더 융성해지기 전에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 말씀에서 “산의 독수리들이나 땅의 들짐승들에게 끼쳐 주리니 그들이 그것으로 과하, 과동하리라”는 말씀은 “많은 죽은 시체들이 독수리나 짐승들의 1년 양식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결과로 많은 죽음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애굽이 어떻게 이런 멸망을 당하였습니까? 앗수르가 애굽을 짓밟고 통치한 사실은 사 19:23과 20:3~6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가 주전 650년경이기 때문에 북왕국이 망한지 20년쯤 후이고 그때까지도 유다왕국은 게속 건재하였습니다.(유다국이 바벨론에 망한때는 주전 548년이고, 북왕국은 주전 675년임) 그러나 이 재앙이 애굽 내부의 분란으로 성취된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20:2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석에는 이 사실을 앗수르의 멸망(왕하 29:9~13)으로 해석합니다만 앞뒤 관계로 볼 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3. 애굽에 신앙적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7절) “그때에 그들에게서(2절 말씀 중복됨)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산(예루살렘)에 이르리라”하신 말씀이 곧 그 말씀인데 이 예언은 신약시대에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예루살렘에 보존된 것보다 애굽에 보존된 것이 더 많다고 합니다.(행 8:27~39) 구약성경의 구스는 “검다”는 뜻이요, 이것을 신약에서 “에디오피아”로 번역하였습니다. “애굽”은 헬라말로 “아이굽토”인데 역시 피부가 검은 나라를 지칭합니다. 오늘에는 애굽과 에디오피아 나라가 구별되어 있지만 구약시대에는 구스(에디오피아)족(창 10:7, 대상 1:8)과 애굽인을 구별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사 20:3)

 

제 30 과 애굽에 대한 경고 (사 19:1~25) 목록으로


본문 초두에 “애굽에 관한 경고”라 하셨으므로 제목을 그대로 정하였습니다.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애굽과 유다와(17절) 앗수르(23~24절)에 관한 내용입니다. ① 1~4절은 “애굽에 내란이 일어나고 폭군정치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고 ② 5~10절에서는 “애굽에 물질자원이 고갈될 것”을 예언하셨으며 ③ 11~17절은 “애굽이 방백들의 어리석음으로 쇠퇴할 것이나 유다는 그렇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고 ④ 18~25절은 “애굽과 앗수르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1. 애굽의 내란이 있을 것과 폭군정치에 대하여(1~4절)

1)1절에서 “하나님이 빠른 구름을 타시고 애굽에 임하신다”는 뜻은 하나님이 구름을 움직이시고 또 구름처럼 바람처럼 신속하게 운행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무소부재하시고 또 공간을 초월하여 임재하십니다.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내리는 섭리를 나타내시므로 애굽인들이 섬기는 우상이나 우상을 의지하는 태도는 무익하게 되고(시 16:4) 그들이 당하는 재난으로(그 속에서) 마음이 약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끼리 서로 치게 하신다”하신 것은(2절) 애굽에 정변과 혼란이 있도록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울왕에게 악신을 허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악한 일을 행하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삼상 16:23) “하나님이 애굽인을 치게 하시되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친 것”은 일종의 내란과 정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읍이 성읍을 치고 나라가 나라를 친다”는 것도 역시 정권 찬탈을 위한 계파간의 대립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있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3)3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실 때 “애굽인의 정신을 쇠약하게 하시고 그들의 도모를 파하게 하시며(미련한 수단을 쓴다는 뜻) 따라서 소용없는 일 즉 우상이나 마술사나 신접자나 요술객을 의지하도록 버려두신다”고 하셨습니다.(3절)

4)그리고 그런 내란의 결과로 “하나님이(4절, 그가) 애굽인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붙이셔서 포악한 왕으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절) 이 잔인한 군주(포악한 왕)가 누구일까요? 애굽에는 포악한 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중의 특별하게 포악한 왕은 주전 670년경 애굽을 통일시킨 26왕조 “프싸메티쿠스”와 그의 아들 “느고”(616~597년)입니다. 이들은 스우에스 운하를 만드는 일과 전쟁 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왕하 23:29~33, 대하 35:20~22).

2. 애굽의 물질자원이 고갈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5~10절)

1)물질자원이 고갈되는 원인은 가뭄입니다. 5절의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잦아서 마름”은 비가 오지 않으므로 물이 적어지는 현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문들 바닷물이 마르겠느냐?하실 것이나 여기의 바다는 나일강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갈릴리 호수를 바다로 칭하는 것과 같지요.(마 8:24)

2)6절과 7절 말씀은 물이 고갈되므로 시내가 마르고 악취가 나며 강가에서 자라는 “달과 갈”(파피루스같은 종류의 숲을 뜻함)이 시들게 되고(6절) 언덕의 초장은 물론 나일강 가까운 곳의 곡식밭도 다 말라서 바람에 날아가므로(7절)

3)생산소득도 다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8~10절) 어부들은 고기를 잡고(8절) 세마포 업자들은 백목(파피루스같은 재료로 옷감을 만듦)을 짜는데 물이 고갈되고, 세마포 재료가 말라 버린즉 백성들과 업자들이 탄식하게 되고 따라서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0절말씀에서 “애굽의 기둥이 부숴진다”는 뜻은 애굽의 생활근거 또는 생산시설이 황폐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마포 직조시설이나 그물치는 시설같은 것이 다 없어질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3 .“애굽의 방백들이 어리석게 행하므로 나라가 쇠할 것이나 유다국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17절)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 지혜로운 마음, 미련한 마음 등을 주실 수 있습니다.(빌 4:7, 시 139:2, 단 2:22, 사 19:14)

1)11절의 “소안(현재 카이로 서쪽 위치에 있던 도성)의 방백이 지극히 어리석은 것과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모략이 우둔하여 진 것”은 그들을 응징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함이고 따라서 그들이 어리석은 까닭으로 “그들의 왕인 바로에게 지혜를 나타내거나 왕들의 후예임을 자처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절) 소안의 방백들이 어리석음과 높(역시 애굽의 한 성읍임)의 방백들이 지헤롭지 못함에 미혹되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함인즉(12절) 한때는 그들이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돌(유익한 지도자) 역할을 하였지만(13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사특한 마음을 섞으신즉 결국 매사에 잘못가게 되고, 그 형편이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림 같게 하실 것이므로(14절) “머리나 꼬리나(높은 자나 낮은 자나) 종려나무가지나 갈대나(역시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뜻함)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라”(15절)고 하셨습니다. “아무 할 일이 없다”는 뜻은 재난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인들의 입장이 부녀같을 것이요(겁약을 느낌) 두려움만 느낄 것인데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의 환경을 흔드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16절)

2)그러나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운 대상이 된다”(17절)고 하셨습니다. 북방의 앗수르가 애굽을 점령할 당시까지도(주전 650년경) 그 중간에 위치한 작은 땅인 유다와 예루살렘은 건재하였습니다. 유다는 주전 586년경에 바벨론에게 망할 때까지 나라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애굽(또는 유다)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것이라”(17절)고 하셨습니다.

4. 애굽과 앗수르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8~25절)

1)18절, 19절, 23절, 24절에 “그 날에”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는 복음이 이방나라에 전파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신약의 오순절 이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임”은 가나안 땅(유다 지역)에 살던 복음적 성도들이 전도하기 위하여 애굽에 거주할 것과 전도에 의하여 신앙을 고백하는(맹세하는) 사람들이 다섯 성읍에서 생겨서 복음의 씨가 자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성읍을 장망성(장차 망할 도성)이라고 부르게 될 것”은 그 성읍이 복음과 상반되는 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현실은 복음으로 교화되어도 장망성임이 사실입니다.(벧후 3:10) 그러나 복음을 받고도 사람의 잘못으로 바른 열매를 맺지 못할 때는 영적으로 장망성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계 2:5) 애굽에 복음이 전파되면 그곳에 “제단과 기둥이 있게 될 것”(19절)인데 이는 신약적 신앙생활을 이사야시대의 구약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요, “그 제단과 기둥(신앙생활의 흔적들)이 표적과 증거가 될 것”은 자명한 것이요 또 이것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그 백성들이 압박을 받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자요 보호자 되시는 메시야 예수님(복음)을 보내어 그들을 모든 압박과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20~21절) 필자가 카이로에 가서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초대교회 당시에 애굽에 기독교가 성행한 것을 충분히 확인하였습니다. 압박에서의 자유는 오직 진리의 사역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요 8:32) 22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현실적으로 치실지라도 치신 후에는 복음적으로 고치실 것과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영적으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하셨고

2) 애굽뿐 아니라 앗수르도 그렇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23~25) 22절에 보시면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열려 서로 왕래하게 되고 양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라”하셨고, 또 “그날에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세계중에 복이 된다”(24절)하셨으니 이는 최초에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애굽과 앗수르(안디옥)로 먼저 전파될 것을 복된 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복음이 세계로 전파된 경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백성은 구약시대의 사람이나 신약시대의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은혜받는 성격) 다 같고, 또 이스라엘 선민이나 이방의 선민도 다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25절) 성도는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 하나님의 산업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이방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② 때가 되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시는 일과 ③ 고난중에 부르짖게 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일과 ④ 하나님과 세계의 모든 성도가 하나 라는 사실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12. 애굽에 관한 경고 (사 19:1~10) 목록으로


1. 1절에 보시면, “애굽에 관한 경고”라고 하셨습니다.

1)하나님은 이방인의 나라 “애굽”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통치하십니다. “경고”란 뜻은 “무거운 짐을 의미하므로, 환난을 예고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특히 애굽에 대한 경고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나라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2)애굽은 홍해바다와 인접한 아프리카 북부 지역으로 수난기를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시 105:23) “고가사”족의 “메니스”왕이 창건한 후, 여러 왕조를 거쳐오다가 주전 525년에 파사에, 주전 332년에 헬라에, 주전 30년에 로마에, 주후 640년에 아라비아에, 1517년엔 터키에, 1882년엔 영국에 예속되었다가 2차대전후에 독립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는 요셉이 팔려간 사실, 야곱의 자손들이 400년간 살다가 나온 사실이 있고(창 12:10, 37:~41:), 솔로몬왕이 애굽의 바로 의 딸을 취한 사실(왕상 3:1), 느밧의 아들 여러보암이 솔로몬왕을 반역하다가 애굽으로 망명한 사실(왕상 11:40), 르호보암왕 때에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실(왕상 14:25)등이 있었으나,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징계로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것이 애굽이 망하게 되는 또 한가지 이유가 된 것입니다.(사 20:5, 6)

2.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로 애굽을 치게 하시는 명령자요, 섭리자이십니다. 1절 말씀의 “빠른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이 신속하게 성취됨을 표현한 말씀이며, 2절에서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신다”는 말씀(내란을 뜻함), 또 3절에서 “애굽인의 정신을 쇠약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모두 그런 뜻입니다.

3. 앗수르 군대가 애굽을 칠 때에,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들은 떨게 될 것이고, 애굽인들의 마음도 녹을 것이며, 정신도 쇠약하여져서, 바른 도모를 꾀하지 못한 채 우상, 마술사, 신접자, 요술자들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게 되고 동족간에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애굽인이 애굽인을, 성읍이 성읍을 치고, 형제가 형제를 치는 참극까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3절)

4. 또 대적의 침략과 내분 외에도 잔인한 군주의 다스림으로 민족이 고난 당할 것도 예고하셨으니, 이는 애굽왕이나 외국왕의 학정이 있을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주전 670년경의 “프싸메티쿠스”는 최대의 폭군으로 애굽을 통일시켰고, 그의 아들 느고왕도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5. 5절 이하의 말씀은 애굽인들이 방위책으로 의지하던 강과 바다가 말라서 이방군인들이 쉽게 건너올 뿐 아니라, 또 그들이 자랑하던 모든 물산들도 전쟁의 재난으로 크게 어려워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애굽은 홍해와 나일강이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로 여겼지만, 대적들은 그 물들을 쉽게 건넜습니다. 5절에서 “바닷물이 없어졌다”는 말씀은 쉽게 건널 것을 비유한 말씀일 수도 있으며, 또 애굽인들은 나일강을 바다로 호칭했다고 합니다.(사 18:2, 27:1, 나 3:8) 그렇다면 나일강이 없어지거나 잦아서 마르는 것은 가뭄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징계하시고, 앗수르군대의 길을 여시기 위하여 강물을 말리우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강물이 자자지면 악취가 나고, 작은 시냇물들이 먼저 줄어들었을것이며, 달(시들은 파피루스 갈대나무)처럼 시들고, 강 주변의 모든 곡식들이 말라 없어지며, 고기를 못 잡게된 어부들이 탄식하고, 세마포와 백목(옷감)을 짜던자들도 다 수치를 당하게 되며, 지도층인사(기둥)나 그의 하속들(품군)도 탄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받는 자들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애굽의 참상과 복음의 축복 (사 19:11~18) 목록으로


1. 본문 말씀은 11절부터 17절까지 애굽의 참상을 계속 말씀하셨고, 18절에서는 “복음의 축복이 그 땅에 임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2. 11절의 “소안”이란 지역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름으로(민13:22, 시 78:12, 겔 300:14) 지금은 “산”이란 지역으로 폐허가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애굽의 통치자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의 통치자(방백)들이 나라를 뺏길 만큼 어리석었고, 바로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모략도 어리석은 상태여서 신하들 스스로가 왕족의 후예됨을 나타내기도 부끄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로”란 큰 집이란 뜻으로 왕궁을 뜻하다보니, 결국은 큰 집에 계신 왕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3. 12절의 “그들”은 애굽의 안전을 주장하던 어리석은 통치자들로서, 그들의 지혜는 자랑하지 못하게 되었으며(나라가 멸망하는 상태를 보게된 만큼) 하나님이 애굽에 대하여 그렇게 뜻을 정하신 것을 알 것인즉, 자신들이 그 사실을 백성들에게 고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4. 13절 말씀은 역시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으며(11절), 애굽의 다음 도성인 놉(멤피스도성)의 방백들도 미련함과 불의에 미혹되어 지혜를 상실하였고, 그들은 애굽 지파의 모퉁이돌처럼 요긴한 자들이었지만, 결국은 애굽을 잘못된 길로 가도록 지도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특한 마음(거짓된 마음)을 섞어 갖도록 방림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마치 술 취한 자가 취하고 토하며 비틀거림같이 행하게 하셨으며(14절)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도 속수무책한지라 머리나 꼬리나(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종려나무가지나 갈대나(존귀한 자들이나 천민이나)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15절)

5. 나라가 멸망당하는 즈음에(주전 700년경 앗수르에) 애굽인이 부녀처럼 힘이 없을 것이라, 만군의 하나님이 흔드신즉 앗수르왕 사르곤이 그 흔드는 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힐 때 떨며 두려워하게 될 것이요(16절), 그때에 유다땅은 앗수르 군사가 오는 통로였으므로, 애굽의 두려움이 될 것인즉 이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이루심이요, 그 소문을 듣는 자들이 다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7절)

6. 18절에서는 신령한 은혜가 애굽땅에 임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신령한 은혜는 복음이 애굽에 전파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로의 은총이 현실의 것이 아닌 신령하고 영원한 것으로 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18절의 “그 날”은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앗수르 침략이후에 있을 복음전파는 신약시대와 초대교회당시를 의미합니다. “그때에 애굽땅에 가나안 방언이 있게 된다”는 것은 가나안땅( 대땅)에 사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애굽에 갈 것을 예고하신 것이요,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은 그 다섯 성읍이 복음을 수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의 맹세를 할 것을 예고하심인데, “그 중에 한 성읍이 장망성으로 칭하게 될 것”이란 뜻은 장망성의 원문이 “일하헤레스”로서 “태양성”을 의미하는 바 태양신을 섬기는 도성, 즉 강한 우상숭배에 빠져서 장차 망할 수 밖에 없던 도성이 복을 받고 회개하여 돌아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7.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1)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정하신 뜻대로 시행되어 막을 수 없다는 사실과(12절)

2)심판을 받는 대상은 미련해지고, 약해지며, 두려움을 당하도록 버려진다는 사실과(17절)

3)환난 이후에 하나님이 영적 은혜로 안위와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31 과 애굽의 불행을 예언함 (사 20:1~6) 목록으로


본문의 메시지 전달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애굽이 망하고 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 포로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① 1절은 “예언의 시기”를 말씀하셨고 ② 2~3절은 계시전달의 방법을 말씀하셨으며 ③ 4~5절은 “예언의 내용”이고 ④ 6절은 “예언의 결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이 예언의 시기에 대하여(1절)

1)앗수르왕 사르곤은 주전 711년경에 전왕 살만에셀이 5년간 재위중에 사마리아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의 형제인 “사르곤”이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군대장관을 보내어 아스돗을 취하였는데 이 “아스돗”은 “아소도”(행 8:40) 또는 “아소돗”이라고도 하는(수 15:47) “가사” 근방에 있는 유다 영지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블레셋의 도시였습니다. 사르곤왕이 그 땅을 점령한 때는 그가 왕되던 해(주전 711년, 히스기야 25년)이고 그때는 북왕국이 망한지 10년 후였습니다. 또 그 이듬해에 연차적으로 바벨론과(710년) 구브로와(709년) 길리기아(708년)를 점령하고 쿨루마이족을 토벌하였다고 합니다.(주전 705년~681년) 이런 일이 있을 때 유다국도 크게 위협을 느껴서 애굽과 구스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과의 연합력으로 앗수르를 대항해 보려고 노력하였을 것입니다.(5절)

2. 계시전달의 방법에 행동계시를 첨부하신 것입니다.(2~3절)

1)행동계시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모양새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처럼 말로 듣게 하는 계시보다 눈으로 보게 하는 계시가 전달수단에 더 큰 비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 가본 곳을 말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크게 유익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명도 말보다는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바지를 벗으라는 뜻) 신을 벗은 채 벗은 몸과 벗은 발로(선민들에게) 가서 보이고 전하라”(2절)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을 그렇게 하였다”(3절)고 하였습니다. “벗은 몸과 벗은 발”이란 속바지만 입고 맨발 벗은 상태로 나선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증언의 내용과 효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3)그리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하라”하셨으니 예표란 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벗은 몸, 벗은 발로 포로 될 것을 에언 하신 것이고, 기적이란 인간적 상상을 초월한 상태에서 일어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예언의 내용은(4~5절)

1)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 벗은 몸으로 포로 되어 끌려갈 것을 유대인들에게 알리신 것이고,

2)“그들이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다 벗은 몸, 벗은 발은 물론 볼기까지 드러낸 상태로 갈 것인 만큼 큰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4절) 따라서 “유다 국민이 의지하던 능력있는 나라의 백성들이 그 지경이된즉 유다인들이 크게 놀라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니다.(5절)

4. 예언의 결과로서(6절) “유대인들이 크게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의 목표는 애굽과 구스이지만 예언을 받게 하는 대상은 유대인 선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려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를 의지하고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사 1:18~20)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 의지하는 대상을 없애십니다.(사 3:1) 그런 의미에서 유다가 의지하려한 애굽과 구스를 먼저 없애시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할 것이라”하였으니 이는 선민이 애굽이나 구스를 의지하여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탄식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그 날”은 애굽과 구스가 망하는 날인데 이 사실이 산헤립 다음 왕인 “에살핫돈”(주전 681~668년) 때에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언한지(708년) 27년만에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다국을 “해변거민”이라 한 것은 지중해와 갈릴리바다와 사해바다를 인접한 상태에서 유다국이 바다를 많이 이용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세상여건을 의지하려 하지 마시고 오직 믿음과 정의로 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 하는 전도보다 행동과 생활로 나타내는 전도가 더 효과적임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이사야의 행동계시 (사 20:1~6) 목록으로


1. 사 20:은 구스와 애굽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때 그곳의 귀족들과 또는 그곳으로 피난간 유대인들이 보호를 받지 못한채 벗은 몸과 맨발로 앗수르군에게 끌려 포로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이 계시를 나타내실 때 행동계시로 전파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이사야의 행동계시”로 정하였습니다.

2. 1절 말씀에 앗수르왕 사르곤은 그의 군대장관을 통하여 블레셋의 수도인 아스돗을 점령하게 하였는데 그 시기는 주전 711년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스돗은 유다땅을 거쳐서 지중해 서해안을 따라 애굽 쪽으로 가는 남방길목에 위치한 곳입니다. 앗수르군이 이 지역에 도달한 것은 미구에 애굽 영토를 침략할 위기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허리의 베띠를 끄르고, 신을 벗고, 벗은 몸, 벗은 발로 3년을 다니게 하셨습니다. 여기의 벗은 몸이란 발가벗은 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팬티만 입고 다니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의 명령이 그렇게 주어졌을 때에 수치를 무릅쓰고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1)하나님은 말씀의 외침을 잘 듣지 않을 때에 눈으로 보고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행동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로 증언하여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도 주십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담은 내용입니다. 보던지 듣던지 깨달으면 됩니다. 벙어리처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보아서 깨닫습니다. 혹자는 성경말씀이 어떤 증언자의 웅변을 통해서 크게 나타나야만 성경이 더 권위가 있는 듯 느끼지만(이것을 혹 영력이 있다고도 함) 성경은 인간의 증언하는 힘에 의해서 더 권위가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보고 느끼는 것이나 듣고 느끼는 것이 꼭 같아야 할 줄 압니다. 대개 듣는 귀가 둔한 분들이 웅변적 증언을 요구합니다만(또 그것을 영력 있는 설교라고 합니다만) 성경은 설교에 의해서 권위가 있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셔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2)하나님이 이런 행동계시를 주신 목적은 장차 애굽인들이 그렇게 벗은 몸으로 이끌려 가게 될 것을 예표와 징조로(기적이란 뜻을 징조로 번역함이 옳다함)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비오기 2, 3일전이면 덥고 풍세가 고요한 것이 곧 비가 올 징조인 것처럼 그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것이 둔한 자들을 위하여 “보이는 교훈”으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4. 결국 그들은 주전 708년경 앗수르왕 앗술바니발 때에 정복을 당하여 이끌려갔을 뿐 아니라 그 귀족들이 앗수르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수치까지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5. 결국 유다의 백성들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려 하다가 그 의지하는 대상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놀라게 되고, 또 그 날에 지중해변경에 살던 해변거민(유대인들)들도 역시 애굽을 의지하여 앗수르의 압제를 벗어보려 하다가 애굽이 망한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하면서 탄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받아야 할 교훈은

1)듣는 것이 둔한 자들에게 행동계시를 주시는 점과

2)수치스러운 행동계시에 대하여 순종한 선지자의 복종과

3)말씀 본질의 불변한 권위와

4)인간이 의지하는 것들을 망하게 하시고 없애시므로(사 3:1)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뜻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32 과 해변광야에 대한 예언 (사 21:1~10)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1절에서 “해변광야에 관한 경고”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차 해변광야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하셨다는 뜻입니다. ① 1~2절에서는 “해변광야에 침략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고 ② 3~4절에서는 그 일로 인하여 “선지자에게 고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으며 ③ 5~9절은 “바벨론이 말하는 정황을 알린 내용”이고 ④ 10절은 선지자가 “선민에게 알릴 책임을 다하였다”는 내용입니다.

1. 해변광야에 대적의 침략이 있을 일에 대하여(1~2절)

1)“해변광야”는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땅이 페르시안만과 유프라테강을 끼고 큰 광야로 이루어진 땅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적병”은 메데 파사(엘람)국을 의미하고(2절), 그 적병들이 “광야 두려운 땅에서…왔다”는 뜻은 메데 파사국이 넓은 광야를 가진 큰 나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도를 살피면 현재 이락 쿠웨이트 서편이 바벨론에 해당하고 이란과 그 동편이 메데 파사영토에 해당합니다. 그곳에서 “남방 회리바람처럼 몰려왔다”는 뜻은 졸지에 예고 없이 일어난 전쟁이면서 큰 파괴력을 가진 힘있는 군사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리바람은 별안간 일어나는 것이고 큰 파괴력으로 소용돌이치며 솟구칩니다. 따라서 메데 파사군의 침략을 여기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2)“혹독한 묵시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였다”하셨으니 “혹독한 묵시”란 환난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평화롭고 복된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고 큰 환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바벨론이 다른 백성들을 속였으나 자신들이 속임을 당하게 되고 또 그들이 다른 백성들의 것을 약탈하였으나 그들이 약탈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속이고 약탈한다”는 말씀이 수동형이기 때문에 “당하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석을 보았습니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데여 에워싸라”하신 것은 하나님이 엘람(파사국, 창 10:22)과 메데(파사와 연합한 이란족)로 하여금 바벨론을 치도록 섭리하신 것을 뜻하고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압제로 탄식하던 백성들에게 바벨론을 응징하시므로 자유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국가간의 전쟁이나 이해 관계를 조정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고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된지 70년만에(주전 516년)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2. 이 계시를 받을 때에 선지자가 고통 당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3~4절)

1)“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하는 여인의 고통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듣지 못하고 놀라서 보지 못하였다”(3절) 하였으니 이 말씀은 선지자가 이 계시를 받을 당시에 정신적 충격과 함께(4절) 육체적 고통(요통)이 겹쳐서 계시를 깨닫는데 지장이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요통”은 육체적 고통이고, “놀램”은 정신적 충격입니다. 이런 충격은 듣고 보고 깨닫는데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 하도다”라고 하셨지만 이것이 계시의 명확성을 잠재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2)같은 내용으로 4절에서도 마음의 고통을 피력하셨습니다. “나의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고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떨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마음이 진동하고 두려움을 가진 것”은 바벨론이 참혹함을 당하는 일이므로 마음이 아픈 것을 나타낸 것이고(15:5, 16:11)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떨림이 된 것”은 선지자가 바벨론이 회개할 때를 기다렸는데 그 나라가 회개하지 못하고 망하게 되니까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악한 자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바벨론이 망하는 정황을 알린 내용입니다.(5~9절)

1)바벨론왕 벨사살이 대신들과 연회를 하는 중에 침략을 받아 죽은 사실이 단 5:1~4, 5:30에 기록되었지요. 본문 5절에서도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숫군을 세우고 먹고 마시다가 별안간 “적군이 온다”하니까 “너희 방백들아 (어서)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르고(방비에 쓸 병기를 챙기라는 뜻) 방비에 나서라”하였지만(5절)

2)결국 패전의 보고만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6~9절) 6절 이하를 보시면 파숫군을 세워 전황을 보고하게 하였더니(7절,마병대등 침략병력 보고) 파숫군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밤이 맞도록 망대에서 잘 살폈는데(8절) 적군의 마병대가 쌍쌍이 왔고, 결국 도성이 함락되었으며 바벨론이 섬기는 조각한 신들의 형상들도 다 맥없이 부서졌다”(9절)고 보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너무도 자세합니다. 파숫군의 보고 내용이 어떠할 것까지 지시해 주셨으니까요. 결국 바벨론과 우상은 다 훼파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우상은 “벨”과 “느보” 신이었는데 침략군들이 그것을 마구 훼파하였지만 아무 저항을 나타내지 못하였을 것이 자명합니다. 역사적으로 고레스는 그것들을 파괴하도록 명하지 않았다고 하나 은금우상이 어찌 보존되었겠습니까? 이사야가 이 예언을 주전 711년경에 하였다면(20:1) 주전 516년에 성취되었으니까 195년 후에 될 일을 상세하게 예언하신 것입니다.

4. 선민에게 알릴 책임을 다하였음에 대하여(10절)

10절에 보시면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내가 여호와께 들은대로 고하였다” 하셨으니 “선지자가 선민에게 고할 책임을 다하였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알릴 책임자입니다. 목사도 증거의 책임자입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증거 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비택자나 성도 아닌 자에게는 알릴 책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버리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행11:42,고후4:3,13:48) “내가 들은대로만 고하였다”는 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였음을 뜻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증언자의 사명이 큰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를 “타작한 곡식”으로 비유하셨을까요? “타작”은 알곡과 쭉정이를 선별하는 일이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을 뜻하고 “알곡”은 곡간에 들어갈 것이므로 영생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목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성도된 은혜가 대단히 큰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성도의 대적인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도의 복된 입장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33 과 두마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사 21:11~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제목은 “두마와(11~12절)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13~17절)”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두마와 아라비아에 대한 미래를 예언해 주셨는데 이 예언은 어디까지나 선민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두마와 아라비아에 관한 일이 유대인 선민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 예언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민들이 자기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신앙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회개를 힘쓸 지언정 두마나 아라비아 같은 이웃 나라에 피난 가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1. 두마에 관한 경고에 대하여(11~12절)

1)“두마”가 무엇입니까? 이 “두마”는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아들 이름입니다.(창 25:14) 그러니까 그 백성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일 것이요 “두마”라는 이름이 그 족속의 나라 이름도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위치는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하신 말씀으로 두마의 지역을 알 수 있습니다. “세일”은 에돔에 있는 산으로 야곱의 형 에서가 정착한 곳이고(창 33:16) 또 에서의 별명은 에돔입니다.(창 25:30) 따라서 사해바다 서남쪽 “이두매(에돔)” 지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토는 역사에 따라 아라비아 서쪽으로 이동될 수 있고, 또 부족들도 이스마엘족과 에서족이 합류하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2)1절에 보시면 그 부족들이 선지자를 찾아와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하고 두 번이나 물었으니 두 번 질문한 것은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의미가 있고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한 뜻은 밤같은 고난의 환경이 언제 끝날 것으로 아느냐?고 한 것입니다. 밤은 환난과 절망을 뜻합니다.(암 5:8) 또는 영적흑암(롬 13:12, 아 3:1), 죽음(요 9:4)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마로 하여금 밤같은 환난을 주었을까요? 그것은 앗수르의 침략과 탈취에 의한 고난으로 임한 것입니다. 주전 711년경에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아스돗을 정복한 일이 있다 하니 그 당시에 에돔도 침략하였을 것입니다.

3)그러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밤을 환난으로 비유한 만큼 아침은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사르곤의 다음 왕인 산혜립의 통치 때에 에돔이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유지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신 것은 ① 하나님의 뜻을 파숫군 사명자인 선지자에게 물어서 배워야 할 것임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② 일시적으로 아침(평화)이 올지라도 또 밤이 오는 것처럼 회개하지 않으면(돌아올지니라) 평화가 또 깨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선지자(증언자)의 사명이 곧 파숫군의 사명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는 선지자에게 물어야 하며 환난과 평화가 교체될 수 있으나 궁극적 평화는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에 대하여(13~17절)

1)13절에 보시면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단”은 함의 손자 이름이고(창 10:7) 또 아브라함이 첩에게서 낳은 손자이름이기도 합니다.(대상 1:9, 32) 그러니까 이 두 부족중 한 계열이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였습니다. “드단 대상(隊商)”이란 그 부족들의 장사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약대를 교통수단으로 하여 구스 지역을 상대로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이 아라비아 수풀에 유숙할 것이라”는 뜻은 역시 앗수르의 침략의 영향으로 버젓이 행동하지 못하고 피신하기 위하여 수풀에서 유숙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땅에는 수풀이 거의 없지만 드물게 서 있는 잣나무 숲에 은신함을 뜻할 것입니다.

2)이때에 “데마의 거민들이 그 피난한 자들에게 물과 떡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데마”는 아라비아 땅에 있는 이스마엘족의 거주지입니다.(창 25:15, 대상 10:30, 욥 6:19, 렙 25:23) 같은 족속이 전쟁을 만나 칼과 활을 피하여 왔은즉(15절) 잘 영접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14절)

3)두마와 아라비아가 앗수르의 침략으로 아주 망하게 될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16절에서 “품꾼의 정한 기한처럼 1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할 것이라”하셨으니 “품꾼의 정한 절기”는 짧은 기간인 1년으로 설명을 하셨고 “게달”은 이스마엘의 차자의 이름이므로(창 25:13, 장자는 느바욧) 에서족을 포함한 이스마엘족의 영광이 쇠할 것을 뜻하신 말씀입니다.(16절) 이는 그들의 활가진 용사들이 전쟁에서 거의 죽으므로 그 족속의 권위를 지켜줄 자가 적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17절)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방인의 나라도 통치하시며 자세히 간섭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이방인의 세계를 피난처로 삼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른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의지하여야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시 14:6, 46:1)

 

제 34 과 이상골짜기에 대한 경고 (사 22:1~2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제목을 1절에 나타난대로 “이상골짜기에 대한 경고”로 정하였습니다. 전체의 내용이 이상골짜기와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① 1~3, 5절은 “이상골짜기의 불행에 대한 예언”이고 ② 4절은 “선지자의 비통한 표현”이며 ③ 6~14절은 “이상골짜기가 불행해지는 정황”이고 ④ 15~22절은 “권세자를 교체하시는 섭리”요 ⑤ 23~25절은 “예루살렘의 흥망을 섭리하신는 일”로 나타나 있습니다.

1. 이상골짜기의 불행에 대한 예언에서(1~3, 5절)

1)이상골짜기는 예루살렘 도성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7절의 “아름다운 골짜기”, 9절의 “다윗성”, 10절의 “예루살렘의 가옥”, 11절의 “성벽사이에 저수지를 만든 곳”이라고 설명하셨고, 이상(異常)이란 뜻은 신비한 계시(율법의 말씀 또는 성전과 복음계시)의 뜻인바 예루살롐이 신비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 하신줄 압니다.

2)“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하심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전란을 당하였을 때 산으로 도망하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지만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환난 때 산으로 도망하는 일은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마 24:16) 그리고 절벽에 토굴을 판 집은 그 지붕되는 언덕이 곧 산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됩니다. 절벽에 건설된 토굴집을 상상하시면 이해될 것입니다.

3)2~3절에서 그 도성은 “평소에 훤화(지껄이며 떠듬)하고 즐거워하던 고을이었으나 전화를 당하자 관원들과 백성들이 도망을 하지만 적군을 대항하지 못한 채 발견되어 포로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칼이나 전쟁으로 죽는 것은 피하였지만 결국 포로되고 결박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왕 산헤립이(왕하 19:16~20) 랍사게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위협한 일이 있었고,(왕하 18:28~35) 애굽왕 느고가 들어와서 일시 유다를 장악한 사실도 있었으며,(왕하 23:29~35) 또 여호야긴 왕 때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략한 일도 있었은즉(왕하 24:8~17) 이 세 가지 침략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마지막 침략인 바벨론의 침략이 더 유력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15절 이하에서 유다국의 실권자 ”셉나“를 페하고 여호야김(엘리야김, 왕하 23:34)을 세운 사실이 바벨론 침략시기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4)그 침략으로 인하여 “분요와 밟힘과 혼란이 있고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서 사무치는 부르짖음 소리가 있을 것이라”(4절) 하셨으니 산악에서 사무치는 소리가 난 것은 성이 무너지고 적병이 들어왔을 때 산으로 피난한 백성들의 아우성치는 소리일 것입니다.

2. 선지자의 비통한 표현에 대하여(4절) 이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는 자기의 슬퍼하며 통곡하는 모습 보이는 것을 처절하게 생각하여 “자기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만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비통한 표정을 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 백성들(애정의 대상으로 내 딸이라 하였음)이 패멸 당하기 때문이며,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라” 한 것은 범죄 한 백성들이 선지자를 위로할 자격도 없거니와 선지자 스스로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것이 오히려 아픈 마음을 달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자기의 딸같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패멸되고 포로 되는 상황을 내다보면서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3. 예루살렘이 불행해지는 정황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6~14절)

1)6~7절에 보시면 “엘람 사람들과 기르 사람들이 병거와 방패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골짜기인 예루살렘에 가득히 들어와서 성문에 정렬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전통(화살통)과 병거와 마병과 방패는 다 전쟁무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엘람”과 “기르”가 누구를 의미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엘람”은 셈의 장자로서(창 10:22) 수리아 남방 바사 동쪽에 거주하였고,(스 2:7, 10:26) “기르”는 “길”로도 표기되었는데(왕하 16:9, 암 1:5) 바벨론 영토 남쪽에 있는 지역입니다.(모압 땅에도 “길”이란 지역이 있음, 사 15:1) 그러니까 바벨론이 그 지역의 백성들을 군사로 동원하여 예루살렘 침공의 병력으로 사용한 것입니다.(왕하 24:6~7)

2)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은 상당기간 고전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상당한 병기와 성벽과 저수지 해자등 방비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8절의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겼음”은 적군들이 유다의 방어진지를 드러냈다는 뜻이며 “이날에 네가 수풀곳간의 병기를 바라볼것이라”한 말씀은 유다의 백성들이 자기나라의 군사적 방어시설이 보존된 것을 확인 할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군사들은 방어의 차원에서 다윗성의 상당부분의 무너진 곳을 점검하고(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봄) 아래 못의 물을 모으며(9절)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고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10절)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드는 일들로 방어를 힘쓰게 될 것인데 그 방어수단은 성벽을 쌓거나 보수하는 일과 해자(垓字:벽과 벽 사이에 강을 만들어 방어시설이 되게 하는 것)를 건설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11절)

3)그러나 그 백성들이 이 일, 즉 적군의 침략이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고 또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음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11절) 12절에 보시면 그 날에(선지자의 증언이 있던 때) 만군의 여호와께서 “회개하라” 하셨으나 그들은 연락에만 취하면서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방심, 방탕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절) “통곡하며 애호(哀呼)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입음”은 지은 죄를 뉘우치며 탄식하므로 회개할 것을 명하신 내용입니다. 성도가 죽을 위험을 느낀다면 제일 먼저 회개하는 일부터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그 반대로 행하였습니다.

4)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그들이 죽기까지 사함받지 못할 것이라고 친히 선지자의 귀에 듣도록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4절)

4. 유다의 실권자를 폐하고 그 권세를 타인에게 돌리심(15~22절)

1)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당시에 유다의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15절) ①선지자가 악한 권세자에게 책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마치 모세가 바로왕 앞에 서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는 늘 생명을 내놓고 증거에 충실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셉나”는 히스기야 왕 때에 서기관으로 있던 자인데(왕하 18:18)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국고를 맡고 왕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셉나가 원로대신으로서 앗수르나 애굽의 침략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왕을 명예적으로만 세워놓고 스스로 실권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선지자를 통하여 셉나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은 그의 월권과 자만의 죄 때문이었습니다.(16절) “네가 여기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신 것은 신하로서 왕궁을 차지한 오만에 대한 책망이고,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하신 것은 명예적 상급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그곳에 없는데 어찌하여 셉나 자신을 명예로운자로 여겨 자신의 묘실까지 그곳에 준비하였느냐?는 책망이며,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또 반석에 처소를 쪼았다”는 뜻은 “셉나” 자신이 들어갈 묘실을 호화롭게 준비한 것을 뜻한 것입니다. 셉나가 히스기야왕 말기(BC 726~698)에 서기관으로 있었다면 그가 쫓겨나고 죽는 시기는 “엘리야김(여호야김)”이 왕 될 때였으니(BC 607년) 주전 약790년 후가 됩니다. 그렇다면 셉나는 100세를 넘은 노인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는 “셉나를 낮추고 쫓아내시며 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7~19절) 19절에 보시면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셉나를 관직에서 쫓아내시고 지위를 낮추신다”하셨고, 17~18절에서는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셉나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같이 맹렬히 던지시되 정녕히 공같이 말아 싸서 광막한 지경에 던지시고 그곳에서 죽게 하시며 그의 영광의 수레도 함께 버려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실권을 잃거나 충신이 역적이 되었을 때 당하는 정황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그런데 이 일을 언제 누가 한다는 것입니까? 섭리는 하나님이 하시되 일은 애굽왕 “느고”가 할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20~22절을 보시면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종 엘리야김을 불러 셉나의 옷(네옷, 관복)을 그에게(엘리야김) 입히고 그 관복의 띠도 그에게 띠워 힘이 있게 하고 네 정권(셉나의 정권)을 그에게 맡겨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집의 아비(통치자)가 되게 할 것이요”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또 닫으면 열자가 없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말씀은 왕권이 힘이 있을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석달동안 왕권 유지를 하였습니다.(왕하 23:28~30) 그러나 엘리야김(여호야김)은 11년간 지속되었은즉(BC 568~558년) 그만큼 권세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왕하 23:34~37) 그러면 누구에게 그 권세를 주어 왕을 세웠습니까? 20절에 보시면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은 셉나처럼 히스기야왕 때의 궁내대신이었습니다.(왕하 18:18) 그런데 요시야왕 때에(히스기야왕 다음에 므낫세가 55년 통치하고 아몬이 2년, 그 다음 요시야왕이 32년을 재위하였음)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군을 친다는 구실로 유대땅에 들어와서 요시야왕을 죽이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세웠다가 석 달만에 폐위시키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엘리야김의 뜻:하나님이 세우심, 여호야김의 뜻:하나님이 드심) 유다왕을 삼고 실권을 행사하게 하였습니다.(왕하 23:34~36) 바벨론은 여호야김 3년에 침입하였습니다.(왕하 24:1) 그런데 왕하 23:34에 보시면 “엘리야김”을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왕 때의 궁내대신”이라 하신 말씀(왕하 18:18) 과는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아들이 60년 정도를 소급하여 히스기야왕 때의 신하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엘리야김을 요시야의 아들이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창 26:24) 갈렙이나(민 14:24) 모세를 종이라(수 9:24)하신 것처럼 “엘리야김”이 요시야왕께 아들처럼 충성하였기 때문에 신하를 아들처럼 여기는 뜻에서 그런 용어를 썼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야김도 셉나처럼 늙은 나이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5. 예루살렘의 흥망을 섭리하심에 대하여(23~25절)

1)23절에서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여 그 아비집에 영광의 보좌가 되게 한다”하심은 엘리야김(여호야김)의 왕권이 안정되어 11년간 지속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24절에서 “그 아비집의 모든 영광이 그 못 위에 걸림”은 백성들이 그의 통치로 평안을 누린다는 뜻이요 “그 후손과 족속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자로부터 항아리까지”란 엘리야김 가문의 대소가족을 비유한 것입니다.

2)그러나 그에게도 기한이 있습니다. 25절의 “그날”은 엘리야김의 왕권이 여호야김에게로 넘어가는 날입니다.(대하 24:6) “그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고 떨어져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됨같이 유다의 왕권도 떨어질 날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시드기야왕 9년(주전 548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유다선민 왕국이 완전히 페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민 도성의 흥망과 왕의 생명과 간신을 꺾으시는 일까지 섭리하시고 예언하신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제 35 과 두로에 관한 경고 (사 23:1~18) 목록으로


성령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두로”에 관한 일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목적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두로와 연관된 선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감된 말씀은 이방인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① 1~14절까지는 “두로에 대한 일반적 정황과 멸망에 대한 말씀”이며 ② 15~18절은 “두로가 망한 후에 있을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1. 두로에 대한 일반적 정황과 멸망에 대한 말씀(1~14절)

1)우선 “두로에 관한 경고라”하셨으니까 “두로”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두로”는 지중해변 갈멜산에서 북쪽으로 약 50㎞ 지점의 항구도시입니다. 그곳에서 30㎞ 북쪽에는 “시돈”항구가 있는데 이 지역은 가나안 땅에 속하였고 여호수아 시대에 아셀지파에게 분정하였으나 방비가 견고하여 점령하지 못한채 이방지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수 19:29, 삿 1:31~32).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 시돈과 친교하였고, 두로왕 “히람”이 성전과 왕궁건축 재료로 목재(백향목)와 석재를 보냈으며 또 아합왕은 두로와 공존하는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왕 16:31) 그때에 “이세벨”은 자기 나라의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져오는 악을 범하였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역시 두로와 시돈은 소왕국 그대로 있었고, 그들은 항구 여건을 이용하여 통상으로 치부하였는데 예수님도 그곳에 가셔서 전도하셨지요.(막 3:8, 마 15:21) 예수님 당시에는 “베니게”란 로마의 행정구역이었고 현재는 레바논국에 속하였습니다.

2)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에서 두로가 황무하여 질 것과 그 일로 시돈과(4절) 애굽에도 타격이 있고(5절) “다시스”는 대적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1절에서 “두로는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을 것이므로 다시스의 선척들이 슬피 부르짖게 될 것인데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다시스”는 지중해 서편에 있는 “서바나의 항구”라고 합니다.(지도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움) 두로가 각종 상품들을 통상한 대상은 애굽과 다시스가 그 주요대상이며(1, 3절) 시돈은 두로와 가까운 항구이므로 같은 맥락에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4절) ② 두로가 황무하게 되는 이유는 앗수르의 침략과(13절) 바벨론의 침략때문이고(15절) 다시스의 선척들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통상으로 치부하도록 보장을 준 항구도시가 없어지므로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고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 전파된다”는 뜻은 “깃딤”이 야벳의 손자 이름이고,(창 10:4) 구브로섬의 옛 이름이므로(민 24:24, 겔 27:6, 렘 2:10) 다시스에서 두로로 오던 상선이 깃딤섬을 거치게 되므로 그곳에서 두로의 망한 소식을 미리 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따라서 “두로와 다시스뿐 아니라 해변의 거민들과 애굽과 시돈도 탄식하게 될 것이라” 하셨으니 ① 시돈상고(장사꾼들)들로 말미암아 바다에 왕래하며 부요하게 된 해변의 거민들이 낙담하여 잠잠하게 될 것은(2절) 애굽의 곡식을 배로 수송하여 열국의 시장이 되게 한 “두로”가 망하였기 때문입니다.(3절) “시홀의 곡식 곧 나일강 상류지역의 추수”는 애굽의 생산지와 농산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시돈”도 두로와 인접된 항구이므로 “두로”와 함께 망하게 될 것이므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절) “대저 곧 바다의 보장(바다를 이용한 상업기반)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해산고통)나 생산(출산)을 못하였으며, 청년남자나 처녀들을 생산 양육하지 못하였다”라고 할 것이니 이 뜻은 “두로”가 과거에는 실권을 행사하여 “다시스”같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상고들에게 방백도 되게 하며 무역하는 자들을 세상의 존귀한 자로 추대 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망한 후에는 생산 못하는 과부신세처럼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8절) 여기에 따라서 “두로가 망한 소식이 애굽에 전해지면 그들도 통도(슬퍼함)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③ 6절의 말씀은 “두로 백성들(너희)이 두로에 머물 이유가 없은즉 다시스로 갈 것이요 해변거민(두로와 통상한 섬 나라들)들도 슬퍼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며, 7절의 뜻은 황폐된 두로를 보는 자들이 두로의 참상을 보면서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희락의 도성이며 자기발로 먼 지하는하 가서 유하던 자들(그 백성)의 본향이냐고 의아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4)“이런 일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결과로 다시스는 해방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10절) ① 9절에서 “두로를 망하게 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로의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고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시는 분”이며(9절) 또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고 가나안(두로 지역)에 대하여 명을 내려 그 견고한 성을 훼파하시는 분이라”(11절)고 하셨습니다. ② 그 결과로 “다시스”를 해방되게 하시는데 “딸(연약을 뜻함) 다시스여 나일강이 넘침같이 두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요 다시는 속박 당함이 없을 것이라”(10절)고 하셨습니다. 다시스는 가나안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바벨론의 침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③ “두로의 속국으로 학대를 받던 처녀딸(연약을 뜻함) 시돈도 희락이 없어질 것이요 깃딤으로 건너간다 하여도 거기서도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라”(12절)고 하셨습니다. ④ 그 이유는 “앗수르”의 침략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깃딤은 바벨론의 침략은 받지 않았음) 13절에서 “앗수르는 갈대아 사람의 땅도 정복하여 그 백성들을 없이하셨고, 두로와 깃딤에 대하여도 들짐승이 거하는 곳이 되게 할 것이며,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침략군의 초소) 궁전을 헐어 황무케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미래의 확실성을 강조한데 있습니다. ⑤ 이렇게 두로와 시돈과 깃딤이 황폐된즉 다시스 상고들(선척)은 슬피 부르짖게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거래하던 견고한 성 두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14절)

2. “두로가 망한 후에 있을 일”에 대하여(15~18절)

두로가 1차로 망한 것은 주전 650경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였지만(13절) 앗수르는 또 바벨론에게 패하였기 때문에(주전 600년경) 결국 바벨론 통치에 귀속되었습니다.

1)15절에서 두로의 식민지 통치기간이 70년 간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로가 바벨론 통치에 들어간 날(15절, 그 날)로부터 한 왕의 연한(왕의 장기 집권기간을 예측한 것)같이 70년 동안 해방이나 독립에 대한 꿈을 잊고 있다가 70년 후에 “기생노래의 뜻처럼 된다”하였으니 “기생노래의 뜻”은 가사의 내용만 정감이 있을 뿐 마음을 주지 않는 것처럼 해방과 독립(평화시의 행복)을 꿈꾸지만 성취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70년 후에는 옛날의 유행가가 가시 뜨는 것처럼 실제로 나라의 해방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15절)

2)16절에서 하나님이 두로를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섭리하시는 방도를 “기생노래의 뜻이 다시 생각나도록 하시는 것”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시절에 듣던 기생의 노래가 잊어버린바 되었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이 수금을 갖고 다시 와서 부른즉 옛 일이 기억되는 것처럼 70년 후에 생각지 못한 해방의 기회가 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의 백성들도 의외로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꿈꾸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시 126:1)

3)17절에서 이 일이 하나님의 권고로 이루어지지만 자유를 얻은 백성들은 여전히 세속에 처하게 될 것이요(17절) 또 신령한 은혜를 받을 자들도 있게 될 것이라(18절)고 하셨습니다. ① 70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두로를 권고하셔서 바벨론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데 그때에 백성들은 옛날처럼 다시 상업주의에 빠져 재물의 이득(취리)을 취하고 열방과 음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7절) 이 음란은 탐심과 세속(세상과 벗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골 3:5, 약 4:4) ② 또 후시대에 때가 되면(신약시대를 뜻함) 무역으로 얻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 앞에 거하는 백성들(성도들)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용도에도 쓰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18절) 두로와 시돈은 예수님 시대에 복음의 희망적 고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복음의 열매를 거두신 사실도 있지만(막 3:18) 또 말씀하시기를 “벳세다나 고라신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은 크게 회개하였을 것이라”(마 11:21) 하시므로 그 지역의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두로의 해방은 유대인의 해방처럼 메데 바사의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예언을 주전 750년경에 하신 것이므로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략은 약 50-100년후의 일일지라도 복음전파의 예언은 약 700년 후에 있을 일을 예언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 36 과 말세에 대한 예언 (사 24:1~23)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을 몇 차례 읽고 종합적인 제목을 “말세에 대한 예언”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앞부분에서 예언된 내용처럼 선민과 이방인의 특정지역의 구별이 없는 점이요, 두 번째는 자연계와 사람이 만든 시설들과 인간의 삶의 의미가 다 황폐될 것을 말씀한 점이며, 세 번째는 16절~23절에서 구원과 심판이 있은 다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을 말씀하셨고 이 내용이 신약에서 말씀한 “말세의 예언”과도 크게 상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24:29~31, 벧후 3:10, 계 21:1, 4:4, 5:8,14)

1. 자연계가 황폐될 것을 말씀하신 내용을 살피면(1, 3, 4, 5절)

1)1절에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고 뒤집어엎으시며 그 거민을 흩으신다” 하셨고 또 3절에서도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하셨으며, 4절에서도 “땅이 슬퍼하고 쇠잔해지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해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공허”란 아무쓸모가 없는 빈땅이 된다는 뜻입니다. 땅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빈땅이 되는 것과 같겠지요. “황무”란 뜻도 역시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지구상에 부분적으로 그런 지역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3절) 또 “여호와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신다”(1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끝내실 뜻을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5절에서 “땅이 그 거민 아래 더럽게 되었다”는 것도 역시 거민들이 살기에 합당치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요즈음도 자연계의 이변들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기 때문이라”(5절)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선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계가 황폐하여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고, 그 사이에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후(14~16절 전반) 마지막으로 완전한 심판과 함께 세상을 정리하신다는 것입니다.(16절 하반~23절)

2)“순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땅이 황폐되다가 마지막에는 다 깨져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20, 23절 전반) 18절 하반에서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흔들린다”하셨으니 여기의 “위의 문이 열림”은 노아 당시에 하늘의 창이 열려(창 7:11) 홍수가 쏟아진 것처럼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자연적 재앙이 위에서 내려옴을 뜻하고, “땅의 기초가 흔들림”은 지동(지진)이 심해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19절 말씀처럼 땅이 깨지고 흔들리며 갈라질 것이요, 또 20절 말씀처럼 땅이 취한 자처럼 비틀비틀할 것이요, 침망(공중에 매어 단 그물 침대)처럼 흔들릴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벧후 3:10에 기록된 말씀(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남)과 상통함이고, 또 23절에서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질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마 24:29 말씀(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즉 말세에 있을 자연계의 변혁입니다. (자연계중 천체의 변혁을 권세자의 몰락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음)

2. 인간의 생활과 관련된 시설이 파괴됨에 대하여(6~7, 10, 12절)

1)6절 하반에서 “거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어진다” 하셨고 7절 전반에서는 “새 포도즙이 있으나 환난 초기에 먹을 자가 없게되어 포도즙이 슬퍼하게 되며(詩적표현), 포도농사를 할 사람이 없으므로 포도나무가 쇠잔해질 것이라”고 하셨고, 11절의 “포도주가 없음”은 환난으로 인하여 사람이 없어지고 포도재배를 못한 상황에서 포도주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2)“성읍도 황무해지고 성문도 파괴될 것이라”(10, 12절)고 하셨으니, “약탈당한 성읍이 훼파되고 집집마다 닫히었고 들어가는 자가 없기 때문이요”(10~12절) 또 13절에서는 “세계 중에 이런 일이 있다”는 뜻은 이 재난이 세계적으로 임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지구를 하나의 감람나무로 비유하였을 때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다” 하셨고 또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음 같다” 하셨으니 전자는 흔들어 파괴시키는 재난을 뜻하고 후자는 지상에서 더 거둘 것이 없이 끝을 본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표로 나타내시고 이어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므로 환난과 말세의 상통함이 있음을 상기시킨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24:3~31)

3. 인간의 삶의 의미가 황폐함에 대하여(2, 5~6절)

정죄와 무질서함과 고난과 사망의 소식은 다 인간 삶의 의미를 황폐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말세에 환난이 일고 자연계 등에 이상이 생기면 그 현상이 인간 삶의 영역에 그대로 영향을 줄 것입니다.

1)우선 인간들 세계에 질서가 파괴됩니다. 2절에 보시면 “백성과 제사장이 종과 상전이, 비자(종)와 가모(상전)와 이자를 받던 부자와 이자를 주던 가난한 자가 다 일반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계급사회, 또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권만 바뀌어도 충신이 역적으로, 또는 권세자가 비천한 자로 변하거든 하물며 세상이 황폐하여지는 때에 있고 없음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과 인생의 무상함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인간이 정죄를 받으므로 황폐하여지는 젓입니다. 5절 하반에서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으므로 그 중에 거하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다”(6절)고 하셨습니다. 속죄는 의의 은총을 받지만 정죄는 심판을 받습니다. 선민(이스라엘 자손들)은 영원한 언약(메시야를 통한 구원 언약, 창 26:2~5)을 어겼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3)따라서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실 입장이 못될 것이요, 포도주대신 독주를 마신다하여도 그 독주는 먹는 자에게 쓴맛을 줄 것 뿐이라”하셨으니(9절) 포도주가 없는 입장에서 독주인들 옳게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독주는 쓴맛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세계는 “즐거움이 암흑으로 변하게 되어 땅의 기쁨이 소멸된다”(11절)고 하셨습니다.

4.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14~23절)

구원의 소식은 14절~16절 전반, 그리고 하반에서 말씀하셨고, 심판의 소식은 16절 하반부터 22절까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구원의 소식에 대하여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르되 바다에서부터(넓은 이방세계를 뜻함) 여호와의 위엄을 크게 외칠 것이라”(14절) 하셨고, 또 “동방에서(동양세계) 바다 모든 섬에서(14절의 바다의 뜻과 같음)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요(15절) 또 땅 끝에서부터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16절) 하셨으니 이 말씀들은 곧 신약시대에 세계로 복음이 전파될 것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크게 영광 돌릴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그러나 복음사역에 사탄의 역사가 개입됩니다.(16절 하반) 16절 중간부분에서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선지자가 본대로 말씀하는 것) 쇠잔하고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궤휼자가 궤휼을 행하도다” 하시므로 복음사역을 훼방하는 마귀의 역사, 곧 적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도(교회)에게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 사실은 예수님 탄생초기부터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나타날 핍박과 이단 등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그러나 교회를 핍박하고 궤휼을 행한 악한 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7~22절) 우선 그런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임한다”고 하셨습니다.(17절) 17절의 “땅의 거민아”하신 것은 악인에 대한 심판을 알아야 할 대상을 지칭하신 것이요, 또 “심판자의 두려운 소리(살전 4:16)를 인하여 도망할지라도 함정에 빠질 것이고 함정에서 올라올지라도 또 올무에 걸릴 것이며(18절) 그 위의(일시적으로 받는 고난 외에) 죄악이 중하므로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20절 하반)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 20:2의 “용을 무저갱에 던진다”는 말씀과 10절의 “유황 못에 던진다”는 말씀과 14절의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지운다”는 말씀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1절과 22을 보시면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군대(사탄)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악한 실권자)을 벌하시리니(21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22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옥에 갇히는 것과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는 것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계 20:2~3에 보시면 “용을 천년동안 가두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또 잠깐 놓으신다”하셨고, 마지막에 “유황불에 아주 던지신다”(계 20:10)는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계 20:3의 1000년은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시대에 하나님이 사탄의 역사를 통제하시는 뜻이고 “잠깐 놓으심”은 말세지말에 적그리스도의 운동이 크게 역사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를 하나님이 적절하게 통제하시지만(잠 16:4, 욥 1:12, 2:6) 결국은 “여러 날 후에(때가 이르렀을 때) 완전한 형벌(심판)을 받을 것이라”(22절)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세에 지상낙원은 오지 않습니다. 지극히 합당한 성도만 의를 행할 것이요, 모든 악한자의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계 22:10~12)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시대 또는 후시대에 있을 재난들과 연계하여 말세에 있을 일을 영감으로 내다보시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이 말씀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말세의 예언들과 (예수님의 예언이나 사도요한의 예언) 일맥상통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37 과 옛적의 정하신 뜻 (사 25:1~12) 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1절 중의 말씀인 “옛적의 정하신 뜻”으로 정하였습니다. 이하에 나타난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옛적에 정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① 1절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이사야의 신앙고백”이고, ② 2절~5절은 “포악자와 빈궁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섭리”이며, ③ 6절~9절은 “구원의 은혜와 신령한 복을 펼쳐 주실 말씀”이고, ④ 10절~12절은 “모압의 멸망에 대한 말씀”인데 이 일들이 다 옛적에 정하신 뜻이란 것입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이사야의 신앙고백(1절)

1)이사야는 자기의 섬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고,(마 27:46) 바울사도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행 27:23) 이것은 하나님을 독점하는 의미가 아니고 1대 1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을 개인 상대하시는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9절)도 되십니다. 또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롬 3:29)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면 공동으로 섬겨야 하겠지요. 그러나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면 내가 주를 높이고 내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여야 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나의 집이면 내가 살펴야 하는 것처럼 교회도 나의 교회처럼 섬기는 책임을 다하면 좋을 것입니다.(딤전 3:15)

2)이사야는 하나님의 옛적부터 뜻(모든 계획, 奇事)을 정하시고 그대로 성실하게 행하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욥도 그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욥 23:13~14)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뜻과 작정)를 믿으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므로 큰 유익이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형들을 만났을 때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창 45:7~8) 이 사실에서 성도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뜻대로 이루시옵소서”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행 21:14)

2. 포악자와 빈궁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섭리에 대한 것입니다.(2~5절) 2절에서는 “견고한 성읍과 외인의 궁성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고, 3절에서는 “강한 민족 즉 포악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 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4절에서는 “포악자가 기세를 떨칠 때에 하나님은 빈궁, 빈핍한 자의 보장과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하셨고, 5절에서는 “하나님이 포악한 자의 기세(포악한 자의 오만, 방종하는 노래)를 낮추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면 포악한 자의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고, 그들이 폭풍처럼 기세를 떨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포악을 낮추신 후 빈궁한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시며 또 그 포악한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에서 “포악한 자(4절)의 성읍을 멸하시고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외인의 궁성”이란 포악자 곧 앗수르나 바벨론 도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선민을 괴롭게 하다가 결국 메데 파사족에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2)그 포악자의 폭풍같은 기세를(4절) 하나님이 마른 땅의 폭양을 제하시듯, 또 폭양을 구름으로 가리우시는 것처럼 진압하시고 그 속에서 빈궁한 자의 보장이 되어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강자의 기세를 꺾으신 즉 외인의 훤화(침략자들의 횡포)를 그치게 하셨고 또 포악한 자의 노래(오만 방종한 태도)도 낮추신다” 하셨습니다. 이 지상에서 악한 강자를 누르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메데 파사를 들어 앗수르와 바벨론을 누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빈궁한 자의 보장(保障, 의지의 대상)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시 46:1) 여기의 빈궁한 자는 강자의 밑에서 고난 당하는 약소민족 또는 성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3)도성을 잃게된 강자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에 대한 말.씀은 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나라는 망하여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 그곳의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을 7절에서도 예언하셨습니다.

3. 구원의 은혜와 신령한 복을 펼쳐주심에 대하여(6~9절)

1)6절의 “이 산”은 예루살렘을 뜻하고, “만민을 위하여”란 복음의 세계적 개방을 뜻하며,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는 십자가의 은혜로 주시는 값진 신령한 복을 뜻하고, “연회를 베푸심”은 초청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뜻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공로로 받는 은혜가 지극한 은혜임을 실감하셔야 할 것입니다.

2)7절 말씀의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이란 복음이 아닌 완전한 전통으로, 그것이 벗겨질 때 그들에게도 복음의 비밀이 나타나게 됱것이며,“열방의 그 덮힌 휘장을 제하심”도 역시 복음의 비밀을 이방인들에게까지 개방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오순절 이후에 성취된 것입니다. 아랍계의 여인들은 지금도 면박을 쓴 상태로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면박을 벗길 때 얼굴이 드러나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감취었던 복음이 신약시대에 와서 널리 개방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복음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영생을 주시니까요. 따라서 복음은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것이요, 그 백성의 수치(죄사함 받지 못한 불행)를 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방도”인 것입니다.(8절)

4)그런 일이 있을 때에(9절, 그 날에)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그가 우리를 구원(영생)하실 것이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구원을 사모한 뜻)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9절) 이상의 말씀은 곧 신약시대의 복음과 교회의 사역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 모압의 멸망에 대한 말씀(10~12절)

1)10절의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심”은 하나님이 구원자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보내셔서 십자가로구원사역을 이루게 하시고, 또 그곳에서 부활하여 심판자 되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구원사역과 계시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2)하나님은 모압을 멸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15~16장에서도 예언하셨습니다. “모압의 성벽이 높은 보장(보장은 수비의 기초를 뜻함)을 헐어 땅 아래(12절, 내리시되) 진토가 되게 하실 것인데(12절) 마치 거름 물 속에서 초개를 밟듯 자기 처소(생활거처)에서 밟힐 것이라”(10절)고 하셨습니다.

3)그런 환난이 있을 때 그 거민들이 “헤엄치는 자가 손을 펴는 것처럼 구조 받기를 원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함과 교활함을 누르실 것이라”(11절) 하시므로 하나님이 구조해 주시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모압의 거민들은 교만(불신앙)과 교활함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요, 따라서 모압의 멸망은 모든 악인들의 심판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모압은 앗수르에 정복당한 후 그 역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제 38 과 이 노래를 부르리라 (사 26:1~21) 목록으로


본 장을 읽고 제목을 1절에 근거하여 “이 노래를 부르리라”고 정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역사적 사건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선민들은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후 노래를 불렀고(출 15:1~18), 발람도 노래를 불렀으며(민 23:7~10, 24:3~9), 특히 시편 전체는 노래 가사입니다. 노래에는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으며, 본문처럼 예언의 노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부른 노래가 시 137편에 있고, 또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 부른 노래는 시 126:1~3에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민의 역사를 예언으로 계시하는 노래입니다. 이 가사에는 역사와 명령과 신앙고백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① 역사적 내용은 1, 5, 6, 15, 19, 21절이고 ② 명령은 2, 4, 20절이며 ③ 신앙고백은 3, 7~14, 16~18절에 해당합니다.

1. 우선 역사적인 예언부터 살펴보면(1, 5, 6, 15, 19, 21절)

1)1절에서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견고한 성읍”은 구원으로 성과 곽(外城)을 삼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 받은 성도가 영원히 거할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계 21:10)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의미를 바벨론에서 해방될 일로 이해한다면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재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느헤미야서를 읽어보시면 그 성취된 형편을 아실 수 있습니다.

2)6절에서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민을 괴롭힌 바벨론의 권세자들과 그 도성이 망하여 황폐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은 메데 파사군에게 망하였습니다.(단 5:1~31) 아무리 강한 자라도 전쟁에 패하면 기세가 꺾이게 되고 압제받던 백성들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라” 하신 것은(6절) 압제받던 백성들이 패전한 바벨론 군사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밟는다는 뜻입니다.

3)1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다”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해방되어 예루살렘 건설에 임할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기독교(교회)가 신약시대에 와서 세계적으로 확장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19절에서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하셨으니 이는 성도의 부활을 예언함도 있지만(겔 37:12, 단 12:2, 호 13:14) 바벨론에 망한 선민들의 형편을 죽은 자로 비유한 뜻입니다.(겔 37:1~10)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이 있듯이 희망 없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의하여 재기될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희망 없는 유대인들) 깨어 노래하라” 하셨고, “주의 이슬(소리 없이 나타내신 은혜)은 빛난 이슬(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효력을 준 뜻)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음”은 이슬의 은혜를 받고 땅에서 새싹이 나오는 것처럼 죽은 자와 방불한 선민세계에 생명적 은혜가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5)21절에서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에수님의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심판자 하나님은 그 심판권을 예수님께 이양하셨습니다.(요 5:27) “그 처소에서 나오심”은 하늘보좌를 뜻하고 “땅이 피를 드러내는 것”은 은밀하게 피살된 억울한 죽음도 다 신원함을 받게 되므로(마 23:35) 완전한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 파사의 고레스가 왕 되었을 때 유대인의 성전복구 역사가 있었으나 이것은 일시적일 뿐 상징적 의미가 있고 그 실체는 신약시대의 교회운동을 예언하신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선민(성도)에게 주신 명령의 말씀입니다.(2, 4, 20절)

1)2절에서 “너희는 문을 열고 신(信)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신약시대의 성도를 뜻하고, “신을 지킨다”는 뜻은 원문(쇼멜에무님)상으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계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즉 신약의 복음을 수호하는 교회의 세계로 많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전도하라는 명령이요,

2)4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반석처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영원히 의지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고난을 당하거나 자기의 소원이 속히 성취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영원히 의지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3절)

3)20절에서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날까지 기도하며 인내하라는 뜻입니다. 밀실의 기도는 큰 효력을 받습니다.(마 6:6) 하나님이 분을 발하시는 때와 기한이 있는 만큼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전 3:1, 합 3:2, 호 12:2) 고난의 기간이 잠깐일수 없지만 성도가 맡은 일에 몰두하면 세월이 빨리 갈 것입니다.

3. 선지자가 영감으로 깨달은 신앙고백에 대하여(3, 7~14, 16~18절)

1)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를 의뢰하는 자를 붙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히 의뢰하라”고 하셨지요.(4절) 여러분 다 심지가 견고하십니까? 욥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천국에 가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13)고 하였습니다. 평강은 의뢰하므로 받는것임을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2)7절에서 “의인의 길은 정직한 것이며 정직하신 주님이 의인의 첩경(거친 길)을 평탄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실 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방법이란 뜻입니다. 무슨 일이나 사실대로 거짓없이 행하는 것이 의로운 길이고 평탄해지는 방법입니다.

3)8절에서 “성도는 주님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기념 이름을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주님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공의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시 15:2에서는 “공의를 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념 이름”은 주님의 본성과 사역에 따라 사용하신 여러 이름들(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여호와, 사 9:6, 출 6:2~3)을 뜻할 것이요, “성도의 영혼이 그 이름 가지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또 9절에서는 그 하나님을 밤(은밀한 시간)에 사모하고 중심으로 주를 간절히 구하게 될 것이며, 주님이 땅에서 심판(공의를 구현하시는 뜻)하시는 때에도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울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을 사모하시되 은밀한 중에서 사모하고, 십자가의 의(롬 1:17)를 힘입은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롬 2:13, 겔 18:5~9)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5)10절에서 “악인은 은총을 배울지라도 의를 배우지 않고 정직한 땅(성도의 세계)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은총이고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1:17) 그러나 이 은혜는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행 13:48) 사람의 지혜로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고전 1:21)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백성들은(요 3:3) 은총을 소개하거나 정직한 세계에서 살지라도 진리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계 22:11)

6)따라서 “하나님이 손을 높이 드셔서 바벨론을 응징하셨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나 먼 훗날에 선민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열성을 볼 때는 부끄러워 할 것이라”(11절)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바벨론이 망할 당시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신약시대에는 복음을 받는 무리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또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른다”는 말씀은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계 20:14~15)

7)12절에서는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평강 주심과 선민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선민을 위함이 되도록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사 9:6) 선민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마 7:10, 롬 8:28) 하나님은 선민을 중심으로 이방세계도 다스리십니다.(행 27:24, 신 30:19, 31:28)

8)또 선민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주 외에 다른 주들(바벨론 왕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으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 하므로(13절)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과 성숙이 있을 것을 나타내셨으며, 14절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사망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여 멸하셨은 즉 그 모든 기억도 멸절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9)16절에서 “성도들은 환란 중에 주를 앙모하였고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기도의 모습이 “산기가 임박한 여인의 고통하는 모습 같았다”(17절)고 하였으니 힘들고 뜨거운 기도를 한것입니다.

10)그러나 18절에서 “선민들이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같은 것이니 그것(노력)으로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따라서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도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죄악의 형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안타깝게 부르짖는 기도만으로는 소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다시 말하면, 기도로 구원받을 수 없고 또 기도로 세계의 거민(구원받은 백성)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믿음으로 받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2:10, 12:2)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통치섭리를 깨닫고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영원히 의뢰하셔야 할 것입니다.(4절)

 

설교보충 15. 견고한 마음과 평안 (사 26:3~4) 목록으로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을 맛보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불신자 세계에도 낙천주의자가 있습니다. 넓은 마음과 긍정적 사고방식을 갖고 상당한 고난을 쉽게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도덕적 수양과 연단으로 되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도가 견고한 심지를 가지면 하나님이 평안하도록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 평안이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고 주님이 마음을 평안하도록 다스려 주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마음 속에 계시고(엡 3:17) 그 마음 속에 말씀(진리)을 심어주시며(약 1:21) 마음에 변화도 일으켜주시고 든든히 지켜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빌 4:7, 히 13:9) 따라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어떻게 지켜주시느냐에 따라서 평안도 느끼고 고난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평안하도록 마음을 가지려면

1)우선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를 비우지 않고 자기를 의지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의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56:3에 보시면 “내가 두려워 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할 것이요…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라”하셨고, 시 63:8에서는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 하셨으며, 시 105:3에서는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그 마음이 즐겁다” 하셨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즉 용감히 행할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하신 말씀들(시 108:13, 46:1)이 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평안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를 비우고 부모를 의지하여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평안한 마음을 가지려면 죄에 걸려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벧후 2:8에서 죄가 있으면 매를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죄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도 양심상의 불안을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짓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셨지요? 죄를 왜 짓습니까? “욕심으로 짓는다”고 하셨습니다.(약 1:15) “욕심 중 일만악의 뿌리는 물욕이라”고 하셨습니다.(딤전 1:10)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있어 기도하라”하신 말씀과 “우리를 악에서 건지시옵소서”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바로 성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6:13, 26:41)

3)거리낌이 없을 만큼 자기책임을 이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책임이 있습니다. “맡은 일”(고전 4:2),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말씀(갈 6:5)이 있지요. 부모가 자식을 먹이지 못하였거나 학비를 못 준 상태로 학교에 보냈다면 마음이 편할 수 없겠지요. 명절 때나 길흉사 때에 대접을 받았는데 상대방의 길흉사나 다음 명절 때 인사를 못했다면 항상 마음에 부담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야만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4)경험과 연단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연습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경건의 연습”이란 말씀이 있고(딤전 4:7), “고난으로의 연단”(욥 23:10)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기술이 교육과 연습으로 되는 것처럼 견고한 마음과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도 연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는 연습, 상황을 판단하는 연습, 이해하는 연습, 거부대상을 사랑하는 연습,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필자가 목회를 40년 가까이 해오면서 처음보다 현재가 더 유력해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그 중에 또 한가지 느낀 것은 젊었을 때보다 이해성이 넓어졌고 특히 범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성격이 너그러워졌다는 것인데 이것이 결코 연약해진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이 지혜를 더 비중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에 대처하는 연단을 통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대범하고 의연하게 생각하는 결과에 도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경험을 많이 할수록 어려운 일에 대하여서도 안심과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5)계획적인 삶이 있고 보람이 있을 때 안정과 평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항구를 벗어나고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마다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계획대로 성취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람을 갖는 사람이고 생활이 궤도에 오른 상태에서 안정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이 있지만 그 욕망의 성취가 멀 때에는 마치 무엇을 잃고 못찾는 사람처럼 마음에 공허나 불안을 느낄 것입니다. 욕구불만으로 병을 얻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 성도는 성취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소원을 갖고 그 소원을 이루어가므로 위안과 평안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세상적 소원을 많이 이룬다 하여도 그것이 크게 값진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 소원은 다 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최고로 값진 일이고 또 성취 가능한 일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할 것을 결심한다면 그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자기의 천직으로 삼고 거기에 몰두하여 보람으로 느낀다면 그의 마음과 생활에 안정과 평안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가정에 장애인 자녀가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부모에게는 정신적, 생활적 부담을 받습니다. 무슨 일이나 부담으로 여길 때는 힘이 들고 평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선가가 몇 사람의 장애인을 입양하여 자기 자녀처럼 양육하고 헌신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후에 “남도 장애인을 양육하는데 내가 왜 내 자식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깊이 뉘우치고 자신도 장애인을 위한 자선가처럼 봉사할 것을 결심하고 장애인 자녀를 보살폈을 때 새로운 힘이 생기고 그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평안의 은혜는 성취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성취될 수 있는 일(하나님의 뜻) 중에서 값진 일을 시행하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견고한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고전 15:58) 특히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주십니다.(빌 4:7) 또 상당부분 노력으로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①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② 죄의 유혹을 멀리 피하거나 ③ 자기의 책임을 잘 이행하거나 ④ 연단으로 잘 숙달하거나 ⑤ 계획적으로 보람된 일을 시행할 때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노력과 함께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평강 주시는 은혜를 더욱 체험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요 14:27)

 

설교보충 16. 심지가 견고한 자 (사 26: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심지가 견고한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뜻은 “표준적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고 여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하지 않은 사람은 신앙표준에도 든든히 서 있지 못하고, 자주 변하며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평강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 심지가 견고한 자는 하나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엡 6:24에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하나님의 사랑도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비유하신 말씀(시 18:2, 19:14, 마 7:24, 16:18, 고전 10:4)이 곧 그의 사랑의 불변성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하나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시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영원히 의뢰하는 자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을 의뢰한다”하였고(욥 13:15),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를 잘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 하였으며(렘 12:1), 사도들은 “환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믿음을 굳게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행 14:22, 16:5) 하나님을 영원히 의지하는 자는 환란 때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선민들에게 두 가지를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는 “유다 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받아 큰 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먼 훗날에 하나님의 은총과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 훗날의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영생과 심판을 믿고 영원히 의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무슨 일에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계 2:10)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으며(시 27:1~3) 가난도 두려워하지 말고(합 3:17)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빌 1:21)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시체를 많이 취급한 사람은 시체를 나무개비 움직이 듯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연단이 부족한 사람은 두려움을 갖겠지요. 따라서 모든 일에 연단을 받으면 두려움을 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경험으로 많은 연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심지가 견고한 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 자입니다. 고전 13:13에 나타난 대로 “소망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생애를 보면 그분이 얼마나 심지가 곧으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에게는 자신의 몸에 육체의 가시라는 질병을 갖고 계셨습니다.(고후 12:7) 그러면서도 사명을 위하여 용기 있게 헌신하셨는데 고후 4:8~10에 보시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하셨고, 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빌 1:21) 바울사도가 이런 소망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삶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들의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죽인 것”은 십자가를 뜻합니다.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면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활과 영광으로 바꾸어질 때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 성도들도 그와 같은 영광을 받을 줄로 믿고 소망 중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피할 것이 아니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십자가 중심으로 산 성도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견고한 믿음, 견고한 심지를 가지시고 ① 하나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일과 ② 하나님을 영원히 의뢰하는 일과 ③ 무슨 일에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과 ④ 어떤 일에서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9 과 응징과 은혜 (사 27:1~13)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의 내용을 읽고 두 가지로 뜻을 모았습니다. 하나는 1절과 10절, 11절에서 “선민의 적국을 응징하신 내용”이고, 그 나머지 말씀은 모두 “선민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응징과 은혜”로 정한 것입니다.

1. 적국에 대한 응징(1, 10, 11절)

1)1절의 “그 날”은 선민의 적국을 벌하시는 날이요,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은 적국을 무찌를 메데 파사국의 무력이며, “날랜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리워야단”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뜻하고 “바다에 있는 용”은 애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벌받을 선민의 적국이 그들이기 때문이고 또 선민의 적인 사탄을 뱀으로 비유할 수 있으며(창 3:1, 계 12:9) 또 “바다에 있는 용”을 애굽으로 설명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74:13, 사 51:9) 하나님께서는 주전450년경에 메데 파사국을 들어서 이 세 적국을 다 멸하셨습니다.

2)따라서 “적국들의 성읍은 적막하여 질 것이고 거처가 황무하여 질 것이며 그곳이 광야처럼 될 것인즉 송아지가 먹고 누우므로 그곳의 나뭇가지를 먹어 없앨 것이라”(10절), 또 “가지가 마르면 여인이 와서 땔감으로 찍어 불사르는 것처럼 될 것이라”(11절) 하셨으니 이는 이 나라들의 멸망이 단계적으로 쇠하여 아주 없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꺾이고 불사름 당하는 것”은 멸망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3)그러나 “그 백성들은 지각이 없으므로 깨닫지 못하게 되고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절 하반) 이방의 악한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는 내용은 “창조자와 선민을 학대한 죄 값으로 벌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여 구원하시지만 적국을 사랑하시지 않으므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롬 9:13)

2. 선민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내용입니다.(2~9절, 12~13절)

1)2절에서 “그 날에 선민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인하여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은 선민단체 또는 신약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사 5:1~7의 포도원 노래가 선민국을 뜻하였고, 요 15:1에서는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성도를 그 가지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와 교회가 노래를 부를 시기는 신약시대를 뜻하고 예표적 응답으로는 바벨론 포로 해방 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시 126:1~3)

2)3절에서 “그때에 하나님은 포도원 지기가 되셔서 자신의 몸된 교회(엡 1:23)를 지키시고 육성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포도원에 물을 주고 보호하시며 상해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핍박을 견디며 보존된 것이 바로 그런 은혜 때문입니다.(계 20:1~3)

3)3절에서 한때는 하나님이 포도원에 대하여 노하신 때도 있었습니다.(렘 12:7~13) 그러나 때가 되면 “포도원에 대하여 노하지 않으시고 질려와 형극(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시므로 교회의 대적을 없애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계 14:6~12과 17:13~14, 20:1~3에도 나타나있습니다. 5절 말씀에서 “이 질려와 형극 같은 자들이 밟히고 불사름 당하지 않으려면(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과 더불어(나로 더불어) 화친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일뿐이라는 것입니다.(욥 22:21, 롬 3:21, 엡 2:15~16)

4)또 6절에서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선민적 신앙의 기초가 든든하여 짐)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며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워질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도 교회를 통한 구령운동이 왕성하여 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교회운동을 나무로 비유하신 말씀은 막 4:26~29에도 있습니다.

5)“하나님께서는 한동안 그 백성(선민)을 치셨을지라도 그 백성을 친자들(앗수르나 바벨론)만큼 치시지는 않으시며 하나님의 원수를 살육하신 것처럼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요(7절) 오직 적당하게 견책하실 것이나 반대로 원수들을 쫓으실 때는 강한 동풍과 폭풍 같은 힘으로 그들을 멀리 쫓으실 것이라”(8절)고 하셨으니 성도들은 여유 있게 견책하시고 원수들은 가혹하게 응징하신다는 뜻입니다.

6)그 이유는 “야곱의 불의(선민의 죄)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속함을 얻어 죄 없이함을 받는 결과라”고 하셨습니다.(9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숴진 횟돌 같게 함”은 구약시대의 제사제도가 십자가로 완성되어 폐지됨을 뜻하고 따라서 우상 제단의 훼파를 의미합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받을 때 궁극적 원인은 십자가의 은혜에 기인되지만, 우선 우상의 제단을 부숴진 횟돌 같게 하는 우상타파, 즉 아세라나 태양상 같은 이방적 우상을 제거(다시 서지 못하게 함)하는 회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믿음의 증거입니다.(행 11:18)

7)12~13절 말씀은 선민의 적국이 망한 다음에(10~11절) 선민들이 그 피난지로부터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 날”은 해방의 날이고(라 1:2~4)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시내까지”란 선민들이 포로되었거나(앗수르 또는 바벨론으로) 피난 간 지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선민들을 각처에서 일일이 모으심이 마치 “과실을 떨어 모은 것 같을 것이라”하셨고, 또 그때에 “큰 나팔을 불고 앗수르 땅에서 파멸 당하는 중에 있던 자나 애굽 땅으로 쫓겨갔던 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포로 해방 때도 성취되었지만(겔 36:37~38) 오순절 이후에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으로도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행 2:5~13)

따라서 본 장의 말씀은 ① 선민에게 나타내신 일시적인 징계(7절) ② 선민의 적국에게 내리신 가혹한 심판(8절) ③ 선민에게 일시적인 해방과 함께(13절) 신약시대에 교회를 통하여 주실 신령한 복의 확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6절)

 

제 40 과 선민의 타락과 멸망 (사 28:1~13)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선민(북왕국, 남왕국)의 타락상과 여기에 따른 하나님의 응징”이 예언되었습니다. ① 1~4절은 “북왕국 에브라임의 타락과 멸망”을 예고하셨고, ② 5~6절에서는 “후시대에 선민을 권고하실 것이라” 하셨으며, ③7~10절은 “남방 유다 백성들의 타락상”이요, ④11~13절은 “그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 기록된 것입니다.

1. 북왕국 에브라임의 타락과 멸망을 예고하심에 대하여(1~4절)

1)1절에서 “에브라임”(3절)이란 곧 북이스라엘국을 의미합니다. 북왕국의 건국자 “여러보암” 왕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기 때문에 에브라임으로 북왕국을 대표한 것입니다.(왕상 11:26) 북왕국의 범죄 양상을 “취한 자, 술에 빠진 자, 교만한 면류관”이라 하셨으니 그 백성들이 믿음대신 연락과 방탕에 빠진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권세자들이 영화로운 관(직위)을 교만의 근거로 삼고 거들먹거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그의 도성(사마리아)을 영화로운 관처럼 기름진 땅 골짜기 꼭대기에 세웠다 할지라도 화를 당하여 쇠잔해 가는 꽃처럼 황폐하여 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이 사실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북왕국이 주전 675년(호세아 9년)에 망하는 것으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2절에서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앗수르 강국도 주님의 손에 있다 하셨음)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이것은 앗수르 군사의 강한 파괴력을 뜻함)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호세아왕의 면류관을 뺏고 그 권위를 짓 밟았을 것입니다.(3절)

3)4절에서 “북왕국의 영화는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영화라” 하셨고, 그의 멸망의 양상을 “쇠잔해 가는 꽃, 여름 전에(처음) 익은 무화과(열매) 같아서 그것을 보는 자가 쉽게 따먹는 것처럼 쉽게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 후시대에 선민을 권고하실 일에 대하여(5~6절)

1)5절에 보시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은 고난(압제) 당하던 민족이 자유를 얻는 날인즉 그때까지 남아 있는 백성이라면 바사국의 통치시대나 신약시대에 살게된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면류관이 되시고 화관이 되시려면 신앙의 자유와 은혜의 풍족함이 나타나는 시대일 것인즉 신약시대를 예고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2)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실현되게 하시고 대적과 싸우는 힘을 주셔서 승리하도록 역사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 판결하는 신이 되신다”는 뜻은 하나님의 공의를 존중한다는 뜻이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것”도 역시 불의의 대적과 싸워 승리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 16:33에서 “예수님은 승리자라”하셨고, 계 2:7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는 성도라도 연약하여 미련해지지만 권고하실 때는 심령으로 강하여져서 모든 불의의 대적을 능히 대항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사 6:10, 엡 6:12~13)

3. 남방 유다 백성들의 타락상에 대한 말씀입니다.(7~10절)

1)7절에서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고 제사장, 선지자도 역시 그러하며 이상(계시)을 그릇풀며, 재판을 실수(잘못 판단)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술에 취함”은 도덕적 방종만을 뜻함이 아니고 신앙의 정도에서 비틀거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분국 당시부터 이질적 종교로 흘러갔지만(왕상 12:25~33) 남방 유다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하여 정통성이 있었으나 역시 정도를 걷지 못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계시의 말씀을 잘못해석하고 제사장이 재판을 잘못한 것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 타락의 형편을 “토한 것, 더러운 것”(구역질 날 형편)으로 표현하셨습니다.(8절)

2)따라서 그 백성들은 “선지자의 교훈을 멸시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 하셨으니, 9절에서 “그들(선지자나 제사장)이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떨어진 어린아이에게 하려는가 하면서 지도자들의 교훈을 무시하게 된다” 하셨고, 심지어는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한다(10절) 하면서 비웃고 무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지도자의 교훈은 무시를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비단 타락자가 증거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함이 신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죄는 곧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함과 같은 것입니다.

4.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은(11~13절)

앗수르의 침략, 또는 외국인(바벨론)의 침략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은 왕하 32:9~23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들의 침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상당기간 예루살렘성 밖에서 유다민족을 괴롭게 하였을 것이며 나중에 확실하게 망한 것은 바벨론에 의하였습니다.(대하 35:5~20)

1)11절에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심”은 하나님이 외국인을 들어오게 하셔서 백성들이 알지못하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언어를 듣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당시에 자국어를 못쓰고 일본말을 강요받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2)그들이 화를 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로서 12절에서 말씀한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성수주일이 신앙생활의 근본인 것처럼 구약시대의 안식일 성수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잘 몰랐고, 곤비한 하인들에게도 안식을 주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듣지 아니하였음)

3)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여기저기에서 무시하고 거역한 것처럼 재난도 여기 저기서 조금씩 가져다가 주시므로 넘어지고 부러지며 걸리고 잡히게 하실 것이라”(13절) 하셨으니, 하나님은 범죄의 성격과 양상에 따라 벌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가장 존중하는 신앙을 가지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중복교훈의 의미 (사 28:9~13, 민 7:12~8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중복교훈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중복교훈”이란 성경에 같은 말씀을 여러 차례 기록한 것과 같은 설교를 자주 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1)우선 본문에 보시면 선지자의 증언을 거부하는 자들이 선지자가 같은 내용 반복하는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즉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중복 예언을 멸시하는 자들을 책망하셨고, 큰 보복이 따를 것(앗수르 침략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듣게 하심)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면 같은 말씀이라도 항상 감심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민 7:12~83에 보시면 12지파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날짜와 지파 이름만 다르고 꼭 같은 제사 내용을 12회를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연구해 보십시오.

3)신약의 공관 복음도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중복기재 하신 것인데 거기에도 이유가 있겠지요. 행 13:42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설교를 한 후에 성도들이 말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그 말씀을 전해달라”하였으니 역시 중복교훈을 원한 것이었고, 빌 4:4에서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하셨으며, 요 6:47, 53에서는 “진실로”란 말씀을 중복으로 나타내어 강조하신 바가 있는 것입니다.

4)또 우리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2.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1)성령님께서 필요하여 주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일점일획까지 영감하시고(마 5:18) 진실의 영(요 14:17)이시므로 잘못 기록하실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2)교훈이 중요하니까 강조하시는 의미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세 번 예언하셨습니다.(마 20:19, 23:34, 26:2)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도 두 번 하셨고,(마 10:38, 16:24, 막 8:34 등)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도 마 6:8과 32에서 두 번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다 강조하시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강조하신 만큼 그 교훈을 크게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실천이 미흡하기 때문에 계속 독촉하시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열 번이라도 증거 하여 깨우쳐야 할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때까지 증거 하여야 할 것이며 사랑이 미흡하면 사랑이 실천될 때까지 증거 하여야 할 것입니다. 눅 18:7에 보시면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가난한 과부가 소원이 성취될 때까지 법관을 괴롭힌 것입니다. 이와 같이 메시지 증거도 실천 효력이 날 때까지 증거 하는 것이 증거자의 사명일 것입니다.

4)또 같은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중복적으로 증거 하는 것은 증거자 각 사람에게 역사 하시는 감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 마가, 누가가 꼭 같은 예수님의 생애의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였다고 할 때 증언자의 관점과 감화에 따라 전달되는 느낌이 다른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A가 증언할 때와 B가 증언할 때가 다른 것이 그 예일 것입니다.

5)메시지가 고루 증거 되고 깊이 이해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반복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00명중 90명은 알고 있으나 10명이 처음 듣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듣는 성도들이 널리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이나 성경전체를 수없이 읽고 묵상하는 것처럼 중복설교나 중복되는 말씀도 늘 묵상하는 차원에서 반복하는 일을 기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제 41 과 지도자들의 완악을 일깨우심 (사 28:14~2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을 읽고 “지도자들의 완악을 일깨우심”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여기의 지도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을 치리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입니다.(14절) 유다국의 지도자들인즉 방백들과 종교적 지도자(제사장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경만한 자들”(14, 22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경만하다”는 뜻은 선지자의 경고(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웃고 조롱하며 태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 어떤 성도가 교역자의 설교를 별것이 아닌 듯이 방심하여 듣는다고 하면 그것도 경만의 일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로 오만하였던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만한 지도자들을 깨우치시는 말씀”이고(14~22절), 또 하나는 “다양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23~29절)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1. 경만한 지도자들을 일깨우심(14~22절)

1)경만한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1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으면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사모하며, 경성한 태도로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시 119:117)

2)유다 지도자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환란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5절) 선지자들은 환란을 예고하였으나 유다의 지도자들은 “사망과 음부와 맹약하였다” 하였으니 이 뜻은 “사망과 음부를 환란의 주범으로 비유하여 그들이 환란을 제공하지 않도록 밀약을 받았다”는 풍자적 표현이고, 또 “거짓으로 피난처를 삼았다”는 것과 “허위 아래 숨겼다”는 것은 “피난 갈 일이 거짓이고 숨는 일이 허위란 뜻”이므로 역시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친 것입니다.

3)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의 억측과 오만한 말은 다 맞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22절) ① 우선 그 이유로서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시는(공의롭다는 뜻) 메시야가 시온(예루살렘)에 좌정하여 악을 소탕하실 것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16~17절) 16절에서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곧 메시야 통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돌로 비유한 말씀은 마 21:42~44과 롬 9:32과 벧 2:4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돌이 모퉁이 돌로 쓰일 때는 기초가 되고 반석으로 쓰일 때는 거기에 떨어지는 모든 것들이 다 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한 돌이고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고를 겪으시고도 죄가 없으신 만큼(히 4:15) 검증(시험한 돌)된 의인이시고 따라서 반석처럼 불변, 영원하시므로 공의로운 심판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을(돌로 비유된 메시야) 믿는 자는 급절(불행 또는 당황함) 할 일이 없을 것이요(16절) ② “그분은 공평과 의로 저울질하실 것이므로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고 물이 그 숨은 곳을 넘치게 하여 그들의 거짓된 말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7절) 다시 말하면 “맹약의 대상(사망, 음부)까지 없애신다”는 뜻입니다. 맹약의 대상이 없으면 “그 맹약도 이루지 못할 것인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환란의 소식)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셨습니다.(18절) ③ 19절에서는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앗수르 침략을 인한 난리 소문) 너희를 잡을 것이요 아침과 주야로 유행할 것인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환란을 예고한 선지자의 증언을 믿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 될 것이라” 하셨고, ④ 환란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해보려고 하지만 마치 “침상이 짧아서 몸을 펴지 못하고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하는 것처럼” 어렵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진노는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요 오직 회개로 하나님이 진노하시지 않도록 하는 방법만 있을 뿐입니다.(히 2:3, 호 6:1)

4)하나님은 “강한 힘으로 진노하실 것인즉(유다의 지도자들은)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1~22절) ① “하나님의 비상한 진노는 브라심 산의 전쟁이나 기브온 골짜기의 전쟁처럼 행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1절) 즉 그런 방법으로 유다의 평안을 깨신다는 뜻입니다. 브라심 산의 전쟁은 다윗이 블레셋을 흩으신 일이고(삼하 5:19~21), 기브온 골짜기의 전쟁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을 크게 도륙한 일입니다.(수 10:10~15)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을 이루실 때 “비상한 방법(인간의 생각을 초월함)으로 나타내시므로 그 공(과업)을 이루시니 그 공이 기이할 것이라”(21절)고 하셨습니다. ② 하나님이 “대저 온 땅(팔레스틴과 그 주변 국가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들었은 즉 만일 경만 할 때는 유대민족(너희)의 당하는 결박(앗수르 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한 환란)이 더욱 심해질 것(우심)이라”(22절)고 하셨습니다.

2. 다양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23~29절)

하나님의 통치대상은 선민이요 선민 중에는 남왕국과 북왕국의 구별이 있고, 또 선민을 괴롭힌 나라들도 블레셋이나 아람이나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이 있으나 그들이 다 같은 조건에 있지 않기 때문에 통치나 징계에 대한 방법도 다양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23절에서 “우선 너희는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세히 들으라”는 말씀에서 성경 말씀도 자세히 연구하셔야 합니다.(눅 1:3, 24:27)

2)24절에서 “파종으로 개간하는 농부가 경지 정리만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섭리도 일정하지 않음”을 말씀하셨고, “지면을 평평히 하여 경지 정리가 끝나면 소회향, 대회향 등 약초와 소맥, 대맥, 귀리를 심는 것”처럼 한 단계가 끝나면(선지자의 증언) 다음 단계(진노)가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하나님은 “가르치심에 있어서도 무리의 대상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쓰신다”고 하셨습니다.(26절) 이것은 지혜로운 지도 방법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소회향은 작대기로,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어야 하고, 도리깨나 수레바퀴를 쓰면 안 되는 것”처럼(소회향, 대회향은 약초 이름임.) 하나님은 대상에 따라 통치 섭리를 다르게 또 적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27절)

5)그러나 곡식은 수레바퀴나 말굽으로 밟아 떨어도 알곡을 부수지는 않습니다.(28절) 이것은 하나님이 선민을 괴롭게 징계하셔도 아주 망하게 하시지 않음을 표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요, 그의 모략이 기묘한 것이며 광대한 지혜에 속한 것이라”(29절)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있게 받아야 할 것과 ② 하나님은 종류에 따라 통치 섭리를 다르게 하시는 사실과 ③ 모든 일을 경고하신 후에 성취하시는데 ④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오직 회개 뿐이란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 42 과 예루살렘과 그 적국과 이방에 대한 예언 (사 29:1~24)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예루살렘과 그 적국과 이방에 대한 예언”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뜻을 순서대로 살피면 1~4절은 “예루살렘이 침략 당할 일”이고, 5~8절은 “그 적국이 당할 일”이며, 9~12절은 “하나님이 선민의 지혜를 어둡게 하심”이요, 13~16절은 “선민의 죄악”이고, 17~24절은 “이방에 복음이 전파 될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다섯 대지를 세대지로 나누어서 ①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1~4, 9~16), ② 그 적국에 대한 에언(5~8), ③ 이방에 대한 예언(17~24)으로 나누어 살핌이 좋을 줄 압니다.

1.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1~4, 9~16절)

1)예루살렘은 “당분간 평안할 것이지만 아리엘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2절) 1절의 “다윗의 진친 성읍”은 예루살렘을 뜻하고 “그곳에 연부년 절기가 돌아온다”는 것은 몇 년 동안 평안 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호칭하셨는데, “아리엘”의 뜻은 ‘하나님의 사자“란 뜻입니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므로 예루살렘 왕도를 크게 표현하는 뜻으로 ”아리엘“이라 하셨고, 또 한가지 의미는 하나님이 필경 그를 괴롭게 하시고 슬프게 하여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하시므로 실제인물인 ”아리엘“이 당한 환난을 당할것이라는 뜻 입니다. ”아리엘“은 다윗왕 시대에 다윗의 군사로부터 두 아들을 죽임 당한 모압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존귀하였으나 그 거민들이 아리엘 처럼 슬픔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2)이 사실은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그런 어려움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것입니다, 즉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치게 하면(3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4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교만한 자들이 참패당한 자의 모습으로 비하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신접한 자의 목소리”란 극히 힘없는 넉두리 같은 언어를 의미합니다.

3)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징계를 베푸시되 “놀램과 무지와 무지로 인한 방황함과 진리에 대한 영적 어두움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9~12절) ① 9절의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하신 말씀이 그 백성들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신다는 말씀이고, ② “저들의 취함과 비틀거림이 포도주나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라”는 말씀은 그들이 전쟁의 재난을 당할 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크게 당황할 것을 나타내신 것이요, ③ “소경이 되라”는 말씀과(9절)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 눈을 감기신다”는 말씀은(10절) 지혜와 영적 안목을 어둡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베푸신 영감과 지혜를 거두시면 선지자는 눈감고 머리를 덮임 받은 자가 되어 아무런 지혜나 방책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0절 하반) 선견자는 선지자의 고어입니다.(삼상 9:9)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명철이 없어지는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이한 일로 그 백성들에게 시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14절) 따라서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묵시가 있어도 선지자의 증언이 막히므로 백성들에게는 봉한 책의 말(열어볼 수 없다는 뜻)이 되고, 혹 유식한 자에게 그 책을 주어 읽으라 할지라도 역시 봉하였으므로 읽지 못하겠다 할 것이며(11절) 또 무식한 자들은 “무식하여 알지 못한다”(12절) 할 것이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재앙을 주시는 시기에 깨닫는 지혜자가 없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하나님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이런 재앙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3~16절) ① 13절에서 “외식하는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말(입으로, 또는 입술로)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존경하나 마음은 멀리 떠나 있고, 또 하나님의 계명으로 가르침 받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인본주의적 교훈 또는 유전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크게 접근되어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죄악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자기의 도모(죄)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사람이 안 보는 곳) 행하며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15절) 너희의 패리함(이치에 어긋남)이 심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절) 이것은 마치 토기장이와 진흙을 구별하지 않음 같으니 곧 “피조물이 창조자를 업신여김과 같다”는 것입니다.(16절) 심장 폐부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자기와 자기의 행위를 속이거나 감춘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패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이런 죄악들로 인하여 적국의 침략을 받게 된것입니다.

2. 적국에 대한 예언입니다.(5~8절)

1)유다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괴롭힌 나라는 “앗수르”입니다. 이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상당기간 괴롭게 한 사실이 왕하 18:13~19:37과 대하 32:9~23에 나타나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그들은 일시 강성하였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왕하 19:32, 대하 32:21) 그 사실이 본문 5~8절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① 5절의 “그럴지라도”란 뜻은 “앗수르가 강성하여 예루살렘을 괴롭혔을지라도”의 뜻입니다.(왕하 18:13~16) “그럴지라도 대적(앗수르)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앗수르)의 무리는 불려가는 겨 같을 것이니 그 일(그들의 멸망)이 경각간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앗수르가 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티끌 같고 겨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② 6절에서 하나님은 한 천사를 보내어(대하 32:21)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 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일시에 죽었습니다.(왕하 19:35) ③ 따라서 그들의 목적은 “꿈이나 환상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8절) 7절에서 아리엘을 친 앗수르를 “열방의 무리”라 한 것은 그들의 연합성을 뜻하고, “그 보장을 친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방어요새를 아주 없애려 한 것이지만 그 꿈이 군사의 멸절로 일시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꿈에 먹고 마신 것이 꿈을 깨면 소용없는 것처럼 앗수르의 일시적 도모가 꿈이나 환상처럼 없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는 말씀도 역시 그 뜻입니다.(8절)

3. 이방에 대한 예언입니다.(17~24절)

1)“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과 더 울창한 삼림으로 여김 받을 것이라”(17절) 하셨으니, “미구에”란 “머지 않아”란 뜻입니다. 성경은 “천년도 하루 같다”(벧후 3:8) 하셨고, “기다림”이란 마음가짐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이 잠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또 특정한 일에 몰두하여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천년 후에 될 일도 곧 다가올 자기의 소망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계 1:1, 3, 22:20) 따라서 “미구에”란 레바논에 정치적 평화가 오든지, 또는 먼 훗날에 복음의 길이 열리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에는 레바논이 앗수르의 요새지 역할을 하였으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또 2차 대전 후부터 독립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곳은 지역이 높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기름진 밭이 되고, 또 밭작물이 무성하여 삼림처럼 된다는 것은 변화와 축복이 넘칠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적 안목이 열리고 복음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듣고 어두운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은 복음과 성경을 받아들이는 심령의 지혜가 열리게 됨을 뜻합니다.(18절) 또 19절에서는 “겸손한 자와(벧전 5:5) 빈핍한 자가(마 11:5) 은혜를 더 받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마 19:23, 욥 22:24)

3)그때는 “강포한 자와 경만한 자(교양이 없고 교만한 자)와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다 없어질 것이라”(20절) 하셨으니, 이 뜻은 강포와 부도덕과 권모술수를 일삼는 정치적 대적이 망하는 경우, 또는 도덕적, 신앙적 대적(마귀)이 성령의 역사로 굴복 당할 때 믿음 세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그들을 정치적 압박자로 지목하였습니다.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바른 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뜻) 또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재판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 즉, 불공정한 재판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자들이라”(21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흔히 부패한 정치 세계에서 검찰이나 법관들이 정치적 조정을 받아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22~24절에서는 복음이 증거 되는 시대에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크게 존귀해짐은 물론 자유롭고, 의에 담대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① 이 복음은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야곱족속, 즉 선민에게 말씀을 주시기를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실색 하지 않을 것이요”(22절) ② 그 자손은(복음시대의 성도) 복음(하나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하신 구원 사역)을 믿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이름과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23절), ③ “그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고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위로와 은혜가 신약시대에 복음으로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야곱의 족속은 선택받은 자를 뜻하고(눅 19:9)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실색 하지 않음”은 복음으로 받는 은혜가 모든 불행과 부자유와 연약을 만족과 소망으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함을 뜻하며, “하나님을 거룩하다” 하며 경외할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로 나타난 바이고, “마음이 혼미한 자가 총명해지고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게 됨”은 불신앙적 혼미함이 신앙으로, 도덕적 방종(원망함)이 착한 양심으로 변화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과 구원의 사역은 성도로 하여금 더 좋은 인격을 만들고 큰 보람과 영생을 주시는데 충분한 은혜가 될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제 43 과 유다의 어리석음 (사 30:1~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내용은 “유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본문을 크게 구분하면 ① 1~7절은 “애굽을 의지함이 어리석다”는 내용이고, ② 8~17절은 “패역한 행위들”을 지적하셨습니다.

1. 애굽을 의지함이 어리석음에 대하여(1~7절)

1)1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패역한 자식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패역”이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완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화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백성”이란 남방 유다국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북왕국은 히스기야왕 6년(BC 675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망하였기 때문이고(왕하 18:9~10), 또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 나라가 유다국이기 때문입니다.(왕하 18:21) 유다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의 입에 묻지 않고(선지자에게 물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뜻) 인간 스스로 계교를 베풀어서 애굽의 바로 왕의 세력을 믿고 그의 그늘에 피하려 하는 것은 “패역한 행위요 죄에 죄를 더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적 계교나 인간과 현실의 의지하는 것은 헛된 일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어리석게도 헛된 일을 행하는 자에게 “수치와 수욕을 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3~5절) 3절에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고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됨”은 애굽도 앗수르를 당할 힘이 약하므로 능히 유다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요, 따라서 유다의 방백들이 애굽의 도시인 소안과 하네스에 이르러 애굽을 의지하는 외교활동을 펼친다 하여도(4절) 결국은 애굽이 유다를 유익하게 할 힘이 없으므로 돕지 못할 것인즉 수치와 수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5절)

3)“애굽이 상업지역으로 부강함이 있지만 도움을 받는 데는 헛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6~7절) 6절 말씀은 애굽을 “남방 짐승”으로 비유하시고 그 나라를 의지하는 족속들에게 경고를 주신 말씀입니다. 애굽은 많은 짐승이 모여드는 남쪽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줄 압니다. 유다 및 각 나라의 사신들이 그 재물을 어린 나귀에 싣고, 또 그 보물을 약대 제물 안장(약대 등은 의자처럼 되어 있으므로 이를 제물안장이라고 한 듯 함)에 싣고, 사자들과 독사와 불뱀이 있는 광야(유다 사신들은 선물을 싣고 시나이 반도를 경유하였을 것이고 다른 동방 나라에서는 상품들을 싣고 아라비아 광야를 경유하였을 것임)를 지나 애굽에 왔지만 애굽이 앗수르를 이길 힘이 없으므로 무익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6~7절) 이때에 선지자는 애굽에 대하여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고 일컬었으니 “라합”은 애굽의 별명으로(시 87:4) 가만히 앉아서 “호언장담”만 하고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임을 풍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유다의 패역함에 대하여(8~17절)

1)하나님께서는 “선민의 패역을 책에 기록하여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8절) 선민의 패역을 후시대의 성도들이 알고 경계를 삼아 재연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고전 10:5~11)

2)선민의 패역한 죄상은 여러 가지 였습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하며 인간적 계교를 베푸는 행위(1절) ②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행위(9절) ③ 선지자(선견자)의 증거(설교)를 겸손하게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탓을 잡는 행위(10절) 입니다. 선견자는 선지자의 고어(古語)입니다.(삼상 9:9) 영어로는 seer(환상가)로 번역한 말입니다. 패역한 자들은 선지자가 자기들의 죄를 책망하거나 불길한 예언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불길한 예언을 그대로(정직하게) 하지 말고, 강하게도 하지 말며(부드러운 말을 하라), 차라리 거짓이라도 듣기 좋은 말을 하라(거짓된 것을 보이라) 하였으니(10절), 오늘날 설교자의 설교도 세례요한처럼 강하고 진실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눅 3:7~17)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경향이 있으니 공통점이 있다할 것입니다. ④ 정로를 버리고 첩경(빨리 가는 것)을 떠나 하나님을 멀리하는 행위였습니다.(11절) 성도는 정로로 가야합니다. 첩경은 평탄치 않은 길이나 고생스럽게라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패역한 자는 정로보다 변칙을, 좋아하고 안일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을 일삼는 것입니다.(11절) ⑤ 선지자의 바른 말과 바른 지도를 업신여기고, 압박(거짓자의 꾀임)과 허망(거짓 교훈)을 믿고 그것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같은 것은 더욱 허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사 44:9~20)

3)이상과 같이 패역 하고 허망함을 따르는 행위는 “경각간에 위험을 당하게 되고 마치 토기장이 손에 있는 잘못된 그릇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14절) ① 13절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신다”함은 졸지에 망할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며, ② 14절의 뜻은 토기장이가 잘못된 그릇을 훼파 할 때 작은 흠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파손합니다. 그러면 그 파손된 그릇 조각은 불을 담거나 물을 뜨는 작은 용도에도 해당하지 않도록 파쇄 하는 것처럼 완전히 없애어 망하게 하실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4)또 선민들은 하나님이 권하신 구원의 방도를 거절하므로 받아야 할 수난을 재촉한다고 하셨습니다.(15~17절) ① 하나님이 권하신 구원의 방도는 “돌이켜 안연히 처하는 것”이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15절) “돌이켜 안연히 처하는 것”은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함”은 인간적 방편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시 62:1~2) 그러면 “구원을 얻고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시 18:1) ② 그러나 선민들은 그 권면과 방도를 거절하고, 도망에만 급급하니 하나님이 그들의 완악에 맞추시어 멀리 하시도록 섭리하시고 또 빠른 짐승을 타고 도망하는 만큼 쫓는 자의 빠른 추격을 당할 수 밖에 없으며(16절) ③ 결국은 “다 도망하고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처럼 영위의 기호처럼 될 것이라”(17절)고 하셨습니다. “한사람의 꾸짖음으로 천명이, 또 다섯명의 꾸짖음으로 전부가 도망함”은 그만큼 신속하게 도망한다는 뜻이요, “깃대나 영의 기호처럼 됨”은 겨우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언의 결과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루어진다면 나라가 아주 망하고 없어지는 것을 뜻하겠지만 31~32절에서 말씀한 “앗수르를 치신다”는 의미와 관련할 때 앗수르가 유다를 거의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깨끗이 정복하지 못한채 겨우 남겨 놓은 상태를 망대의 깃대, 영(진영)의 기호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 44 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1) (사 30:18~33) 목록으로


30장 전반부에서는 “선민의 죄악과 그들이 당할 징벌”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에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장차 선민에게 은혜 베푸실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논리는 징계와 책망을 하신 후에 위로와 은혜를 주시는 뜻입니다. ① 18~21절은 “은혜 베푸실 계획”을 말씀하셨고, ② 22~26절은 “은혜의 내용”이며, ③ 27~33절은 “선민의 대적을 쳐서 물리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1. 은혜 베푸실 계획에 대하여(18~21절)

1)하나님은 때를 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18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다리신다” 하셨고, 또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으며, 또 19절 중에 “들으실 때”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 3:1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일을 경영하실 때 “때를 정하여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징계의 때도 기간이 있고 은혜를 주시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고후 6:2~3)

2)“그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공의를 나타내신다” 하셨으니(18절) 전자는 선민에게 후자는 그 대적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3)또 “자기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시므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19절) 성도가 고통중에 기도하였을지라도 응답을 받으면 다시 통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19절)

4)“인도자가 스승을 만나게 하여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20~21절) 20절에서 하나님이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고난을 떡 먹고 물 먹듯 받았다는 뜻)을 일시적으로 주셨으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고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선지자를 없애셨다가 은혜를 주실 때에 다시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 말라기 선지자가 있은 후 약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다가 비로소 신약시대 초에 세례요한이 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대상에게는 바른 사역자의 바른 지도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20절)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성도의 치우쳐가는 길을 그 배후에서(네 뒤에서)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하시므로 일깨워 주시는 것으로 은혜를 전달한다고 하셨습니다.(21절)

2. 은혜의 내용에 대한 말씀입니다.(22~26절)

1)은혜의 첫째 내용은 “불결함을 제거하는 정화운동을 일으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자행하였던 우상숭배(우상에게 은과 금을 입혀 제조하고 섬긴 일)의 죄를 깨닫고 그것들을 불결한 물건으로 여겨 던지며,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불결을 배격하게(나가라 하리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2절) 죄를 배격하고 정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큰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2)“소산의 은혜를 주셔서 풍족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23~24절) “땅에 뿌린 종자에 비를 주셔서 곡식으로 살지고 풍성하게 하시며…가축들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고 좋은 꼴을 육지창(짐승의 먹이를 정돈하는 기구)으로 정리하여 소와 나귀에게 먹일 것이라”(23~24절) 하신 말씀이 곧 풍요를 뜻하는 것으로 이 말씀은 신령한 은헤가 풍족할 것을 예언하신 것 입니다.

3)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방법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엽기적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의 “크게 살육하는 날”이란 앗수르가 강성하여 유다민족을 크게 괴롭힘을 뜻하고, 그때에 “망대가 무너짐”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도성이 위태하여지는 때인데 “그때에 고산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른다” 하셨으니(25절) 이는 상상 이외의 큰 역사가 나타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산 준령에 시냇물이 흐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가뭄이 많은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적인 능력으로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을 보내시면(30절) 가능한 일이고 이로 인하여 졸지에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죽게 하신 것이니(왕하 19:35) 엽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역사로 대적을 물리쳐 주신 즉 이는 “그 백성의 상처와 맞은 자리를 싸매시고 고쳐주시는 일이며, 또 달빛이 햇빛처럼 빛나고 평소의 햇빛이 7배나 더 밝아진 것(일곱 날의 빛)같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26절)

4)하나님이 선민의 대적을 “강한 분노로 치신다”고 하셨습니다.(27~28, 30절) 하나님의 대적이나 성도의 대적을 치시는 것은 곧 성도에게 은혜와 복이 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 온다”는 뜻은, 하나님의 역사가 먼 천국보좌에서 지상으로 임하는 것을 표현하신 뜻도 있고, 또 상당기간 원수들을 멀리 보시다가 가까이 오셔서 심판하시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원수에게 심판을 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정을 “불 보듯하며(27절), 호흡이 가뿐 상태(28절), 또는 장엄한 목소리와 폭풍(30절)”으로도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분노가 찬 입술, 맹렬한 불같은 혀(27절), 호흡(바람의 뜻)이 마치 창일 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28절), 장엄한 목소리(30절)” 등으로 표현 하셨고, 또 “빽빽한 연기와 맹렬한 불”(27절), “멸하는 키로 까부름, 자갈을 입에 먹이심”으로(28절), 또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을 내리시는 것과 그의 팔을 치심”으로 표현하셨으니(30절) 하나님은 대단히 두려우신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그 결과로 대적은 망하게 되고 선민에게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9, 30~33절) 29절에서는 “대적이 망할 때 선민이 즐거워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31~33절에서는 선민의 대적 앗수르가 망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치시기 위한 예정하신 몽둥이(막대기)가 있었으니, 이는 자연적 재앙을 계획하신 것입니다.(32절) 이 재앙을 받을 때(왕하 19:35) 앗수르는 낙담하여 물러나게 될 것이고(31절), 대적의 죽음을 목격하는 선민들은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타므로 즐거워하고(29, 32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3절의 “대저 도벳이 설립되었다”는 뜻은 “도벳”은 요시야왕 이전에 우상숭배자들이 사람을 불태워 몰록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인즉(왕하 23:10) “그런 장소가 예비되었다”는 뜻은 불타 죽을 자들이 많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곳”임은 앗수르왕 산헤립과 그 군사들이 죽을 장소란 뜻이요, “그것이 깊고 넓으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음”은 죽일 게획과 준비가 크게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개천 같아서 이를 살으심”은 하나님의 진노의 숨결을 지진으로 일어난 자연재해의 유황개천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하나님이 선민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알고 ② 그 대적들에게도 공의로우시다는 사실과 ③ 선민이 패역하면 강하게 징계하시고 때가되면 긍휼을 베풀어 대적을 물리쳐 주시며 ④ 후시대에 영적은헤로 위로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45 과 선민을 권고하시는 은혜 (사 31:1~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부분별로 살피면 ① 1~3절은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는 일은 화 받을 일이라”는 말씀이고, ② 4~5절 말씀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직접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요, ③ 6~9절 말씀은 “선민에게 회개의 은총을, 그 대적 앗수르에게는 패배를 섭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체의 제목을 “선민을 권고하시는 은혜”라고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선민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우상숭배의 죄 등으로(7절) 하나님을 멀리하며(6절) 앙모하지 않으면서 어려울 때 인간적 도움만 의지하려는(1절) 모든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앗수르를 들어 일시 징계를 하셨지만 결국은 멸망 전에 은혜를 베푸셔서 멸망을 면케 하신다는 내용”이므로 결국 하나님의 권고를 받은 것입니다.

1.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는 일은 화 받을 일이라” 하심에 대하여(1~3절)

1)1절의 화 받을 대상이 유다임은 “앗수르 침략을 인하여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러 간 나라”로서(왕하 18:21~24) 또 보호받을 대상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5절)

2)“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선민이 애굽을 의지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뜻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란 의미가 있습니다.(30:1)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인간 의존이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7절)

3)선민이 “말이나 병거나 마병의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하나님을 앙모하지 않는 것은을 화 받을 일이 되는 것”(1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이것은 선민과 하나님과의 결속 관계를 뜻합니다. 선민들이 자기의 하나님을 우상과 마병으로 바꾸었으니 어찌 노하시지 않겠습니까? 골리앗이 칼과 단창을 의지함 같고(삼상 17:45),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처럼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 같다”(렘 17:5)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의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4)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구책을 취할 때, “하나님은 인간들보다 지혜로우신즉(풍자적 표현, 고전 1:25) 잔꾀부리는 인간들을 용납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2절) 곧 “재앙을 내려 화받게 하신다는 그 말씀을 변치 아니하시고 악행하는 자의 집(유다)과 행악을 돕는 자(애굽)를 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절)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 선민들에게는 악행이요 선민의 악행을 방조하는 이방인도 역시 죄가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선민이 애굽을 의지하여도 소용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일 뿐 신이 아니며, 또 그들의 말은 육체를 가진 짐승일 뿐 영이 아닌즉 다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손을 드시면(뜻을 나타내시는 뜻) 돕는자(애굽)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유다)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또 “말들이 육체요 영이 아니라” 하심은 짐승에게 영이 없음을 말씀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피조물들이 창조자 앞에 무력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괴롭게 할지라도 유다 선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적 회개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보호하심”에 대하여(4~5절)

1)“선민의 대적은 식물을 움킨 사자와 같아서 여러 목자가 와도 놀라거나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4절의 “큰 사자나 젊은 사자”는 식물을 움키고 놓지 않는 사나운 짐승으로 유다와 애굽을 상대로 싸우는 앗수르를 뜻하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음”은 유다의 지도자나 애굽의 세력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앗수르(그것이)는 그 연합세력의 소리나 떠듦을 인하여 굴복하지 않으므로(이를 물리치고 선민을 보호하시려면) 오직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산과 그 영(嶺, 통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뜻함)에서 싸워 이기시므로(4절)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5절 끝의 “그것을 호위하시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앗수르의 작전과 포위망을 파하시고 하나님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예루살렘을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3. 선민에게 회개의 은총을, 대적에게 패배를 주심에 대하여(6~9절)

1)6,7절은 선민의 회개에 대한 말씀이고, 8, 9절은 앗수르의 패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명령으로 때가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때에(그날에는, 7절) 그들이 만들어 섬김으로 범죄한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각 사람이 던져버릴 것이라” 하셨으니(7절) 이 말씀은 히스기야 왕때에도 있었던 일이며(대하 30:, 31:)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 더욱 확실하게 성취된 것입니다.(행 19:17~20)

2)그러나 “앗수르는 사람의 칼이 아닌 것으로 엎드러지고 삼키울 것이며, 도망할 것이고, 또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8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칼은 살육의 도구 이지만 사람의 칼 아닌 것에 의하여 죽고 도망한 자와 복역자가 생겼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리신 자연재해(지진, 폭풍, 사 37:36, 30:30, 대하 32:21)로 멸망당할 것과 또 그 기회에 칼에 죽은 자들도 있을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앗수르의 장정들이 복역하는 자가 된다”는 뜻은 패배자의 당하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9절의 “그의 반석”이란 적군 앗수르가 의지하는 왕권 또는 군사력과 요새를 의미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갈 것이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승리한 유다군사의 표식)를 인하여 놀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여호와의 불과 풀무(군사들을 죽이는 화염)가 시온 곧 예루살렘에 있다”하심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통치의 보좌 또는 섭리의 중심처를 삼으셔서 그 일을 시행하셨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선민을 불가항력적인 역경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그 대적을 패배하게 하시고, 보호의 은총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역경에서라도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발동하시면 보호와 치료를, 또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46 과 유다의 죄와 메시야의 통치 (사 32:1~20) 목록으로


본분의 9~14절은 “유다의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이고, 1~8절과 13~20절은 “메시야의 통치와 성령 충만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유다의 죄와 메시야의 통치”로 정하였습니다.

1. 유다의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면(9~14절)

1)범죄의 지적을 받은 대상이 유다의 부녀들이었습니다. “부녀”란 뜻을 유다의 부녀로 보아야함은 본 장에서 선민에게 메시야의 통치 언약(1~5절)과 성령 충만의 언약을 주신 것(5절)으로 알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이 유다의 부녀들의 죄를 책망하셨는데 그들을 “안일한 부녀, 염려 없는 딸들”이라 하셨으니(9절) “안일하고 염려 없다”는 뜻은 여인들의 안일주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할 채도 아니하고, 일할 꿈도 꾸지 않으며, 안일과 쾌락만 일삼는(3:16)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돈 벌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여인들은 일을 멀리하고 향락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겠지요.

3)이런 대상(노는 자들)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9절) 그들이 알 것은 “1년 남짓하여(2년 못되어) 포도수확이 없고 또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음을 인하여 당황할 것이라”(10절) 하셨고, 또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이게 될 것이며(11절) 좋은 밭과 열매 많던 포도나무를 위하여(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라(1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머지 않아 앗수르 군대가 침입하여 농장의 열매를 가져가므로 안일과 연락의 밑천이 없어질 것과 놀고 먹던 부녀들이 벗기운 몸으로 묶여 끌려감을 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황무지가 된 좋은 밭과 많은 포도나무를 생각하고 가슴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4)그리고 13~14절에서 “유대 땅(내 백성의 땅)과 희락의 성읍(예루살렘)과 기뻐하는 모든 집과 궁전까지 폐한바되고 적막한 고장이 되며 그곳에 형극과 질려가 나고 짐승의 굴혈이 되며 들나귀나 양떼의 풀 먹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앗수르의 침략이 일시적이었다 하더라도 또 그 다음에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이 황폐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어느 고장이나 인적이 없게되면 들짐승들의 생활 터전이 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므로 70년간 그런 황폐를 당하지 않았습니까?(느 1:1~3) 본문에서는 부녀들의 안일주의 범죄를 지적하셨고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한 수난과 그 다음에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한 나라의 황폐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야의 통치와 성령 충만을 예언하심에 대하여(1~8, 13~20절)

1)1절의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운 통치를 하고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하심은 장차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여 메시야의 의로운 정치가 있고,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평한 정사(다스림)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의롭습니다(렘 12:1), 또 신앙적 통치, 그리스도 중심의 다스림은 공명정대한 것입니다. 이런 통치가 성도의 세계(특히 교회 안에)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2)2절에서 “메시야는 그 백성들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피하는 곳,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분이라”(시 91:2) 하셨으니 이는 메시야가 감사와 만족과 희망을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믿음 안에서 큰 자유를 맛볼 수 있어야 하고(요 8:32) 가난, 질병, 죽음, 또는 비천함과 억울함 등을 당하여도 역시 주예수님을 모신 믿음 안에서 자유롭게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누려야 할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에서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않고,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 질 것”은 메시야가 오셨을 때 메시야의 증언(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 또 4절에서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달음”은 결함을 가진 사람이 바른 인격자가 된다는 뜻이요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함”은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뜻도 있지만 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전도의 담력을 얻어 전도할 수 있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마 9:33, 행 2:4, 4:20)

4)메시야는 지혜로우시므로 고명한 일만 도모하시고(8절) 어리석은 자나(6절) 궤휼한 자(7절)의 도모를 용납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6~8절) 6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고 간사함과 패역함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며 주린 자(가난한 자)의 심령(생명;원문의 ”네패쉬“)을 비게 하고(해를 끼친다는 뜻),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하는 자라” 하셨고, 7절에서 “궤휼한 자는 그 그릇(사람됨)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난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불신앙의 세계에 많지만 참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통치 정신에 따라 공의와 사랑만을 실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또 필경은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천국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15~20절) ① 신약시대는 성령님이 역사 하시는 시대입니다.(마 28:20) 15절에서 “필경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은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님을 지상의 성도들에게 보내주신다는 뜻이고(요 16:7), “광야가 밭이 되고 밭이 삼림으로 변함”은 넘치는 은혜와 변화로 만족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이며, ② “공평이 광야에,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음”(16절)은 공평과 의가 충만하게 나타남을 뜻하고, ③ “의의 공효가 화평이고, 의의 결과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임”은 주님의 의의 통치(그리스도 중심의 생활)가 성도의 세계에 화평과 안전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④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음”(18절)은 천국의 안식을 묘사한 말씀으로 지상의 성도들도 주님을 모신 생활로 심령의 안식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마 11:29) ⑤ 19절의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이 파괴된다” 하심은 지상의 도성이 천재 또는 인재로 피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완악한 백성들이 일시적으로 당하는 징계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징계가 일시적으로 회복될 수도 있지만 위로의 차원에서 신약시대에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은 선민의 후손들에게 하나님 나라(그리스도를 모신 세계)를 영적으로 영원히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⑥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것”은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맛볼 성도들의 복된 생활의 행복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47 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2) (사 33:1~24) 목록으로


본문말씀을 읽고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말씀은 부분별로 제목을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논리적 순서로 구분한다면 ① 7~9절이 “유다가 받는 수난”이고, ② 2절은 “선지자의 기도”이며,③ 5절, 10절은 “하나님이 뜻을 발동하심”이요, ④ 1절, 3절, 11~12절은 “앗수르의 죄와 참패 당함”이며, ⑤ 4절, 6절은 “선민이 받을 위로와 회복”이고, ⑥ 13~24절은 “의인이 받을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6대지로 구분하지만 전체의 제목은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입니다. 선민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고난을 당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되 먼저 앗수르를 능력으로 파하시고 선민에게 평안과 회개와 위로와 의인에 대한 복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구분한 제목 순서대로 살피겠습니다. 필자는 말씀순서를 바꾸어 설명하지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순서에도 뜻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1. 유다가 받는 수난(7~9절)

1)“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곡함”(7절)은 앗수르의 침략에 대하여 유다의 용사들이 방어할 힘이 없고, 또 앗수르와 평화조약을 맺었던 사신들이 그 조약실천이 안되므로 슬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침략을 감행하므로 유다 지역의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고 성읍들을 멸시함은 물론 사람의 인권과 생명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왕하 18:14에 보시면 앗수르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평화조건으로 받고도 여전히 침략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것이 곧 조약을 파한 것입니다.(8절)

2)따라서 유다가 경영하는 영토에 큰 황폐가 나타난 것입니다.(9절) 레바논은 백향목등 건축재료 생산지로 유익을 주었지만 그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론”은 넓은 평야이지만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으며 바산과 갈멜은 목축에 좋은 초원이지만 역시 목옆(나뭇잎)만 떨어질 뿐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그 상태를 “땅이 슬피하고 쇠잔한 것” 또는 “마르고 사막같이 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땅은 비가 오지 않거나 사람의 손이 닫지 않으면 황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군사들이 점령하여 유다 백성들을 죽이려 하니 어찌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2. 선지자의 기도입니다.(2절)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앗수르를 망하게 하실 것을 계시로 알고 있었습니다.(1절) 그래서 더욱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기도로 부탁하여야 하지만 은혜 주실 뜻을 알 때에는 더욱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겔 36:37)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아침마다”란 원문(랍베카림)은 “속히”, 또는 “계속”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를 앙망함”은 의로운 성도의 규합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갈망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뜻을 발동하심에 대하여(5, 10절)

1)“여호와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하나님은 지존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높은데 거하심”은 지존자의 천국보좌를 뜻하고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은 예루살렘을 공평과 의로 충만하게 다스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평과 의를 나타내실 분은 예수님뿐이시므로 이 말씀은 히스기야의 선정을 모형으로 한 메시야 예언으로 믿어도 될것입니다.

2)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때가 되매(이제) 뜻을 발하시고 모든 행사를 다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선민이 흥하고 대적이 쇠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출 32:29)

4. 앗수르의 죄를 지적하시고 화 당할 것을 예언하심(1, 3, 11~12절)

1)1절에서 앗수르의 죄는 “학대를 당하지 않았으나 학대를 한 것이며, 속임을 입지 않았으나 속인 것”입니다. 유다는 앗수르에 대하여 학대하였거나 속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행 하거나 공평치 않게 행하는 개인과 나라에 대하여 응징하십니다.

2)그래서 그들을 흩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절에서 “진동시키는 소리로 인하여 민족들이 도망함”은 하나님이 천재지변의 방법으로(왕하 20:35, 사 27:8, 29:6) 앗수르 군사들을 죽이고 흩으실 것을 뜻한 것이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열방이 흩어짐”은 하나님의 뜻의 발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행 21:14)

3)11절에서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한다”는 것은 부피 상으로 볼 때 앗수르가 유다를 겨만큼 괴롭혔으나 나중에는 겨보다 훨씬 큰 짚만큼의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너희의 호흡이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킴”은 화를 스스로 자초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호흡은 입기운으로 불을 피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불이 그들을 삼킨 것인즉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자신이 빠지는 자승자박을 뜻하는 것입니다.

4)12절의 “민족들이 불에 굽는 횟돌 같음”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함을 뜻합니다. 횟돌을 불에 구으면 다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또 “베어서 불사르는 가시나무 같음”도 역시 흔적이 없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사람들에게 큰 괴로움을 주지만 불타 없어지면 깨끗해지는 것처럼 유다의 대적 앗수르를 그렇게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5. 선민이 받을 위로와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4, 6절)

1)4절의 “황충의 모임같이 사람이…노략물을 모으며, 메뚜기의 뛰어오름같이…그 위로 뛰어오름”은 유대인들이 망하고 도망한 앗수르 진영에 들어가서 노략물을 거두어들이는 장면을 묘사하신 말씀입니다. 강자가 망하면 약자의 승리가 되고 많은 소득이 있는 것입니다.

2)그때에 6절에서 “너희의 시대에(히스기야 왕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앗수르가 물러간즉 그 시대에 평안이 있을 것을, 또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소성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보배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 1:7, 마 13:44)

6. 의인의 받을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13~24절)

1)의인은 하나님의 선민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에 흩어진 구원 받을 백성입니다. 13절에서 “장차 그들에게 좋은 소식(하나님이 권능으로 앗수르를 물리치신 일)이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으니 여기의 “먼 데 있는 자”는 이방인이고, “가까이 있는 자”는 선민을 뜻합니다.

2)선민에게 “깨달음과 회개의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 “시온의 죄인들이(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치 않은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범죄자의 말로)과 함께 거하겠으며…영영히 타는 것(심판)과 함께 거하리요” 하면서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렵게 여기며 회개할 것을 예언하셨고,

3)또 그들이 의인되기를 사모할 것인바 “의인은 의롭게 행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자이며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고 뇌물을 사절하며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않으며 또 악을 목도하지도 않는 자라”고 하였습니다.(15절) 16절에서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높은 곳에 거하게 하시며(존귀를 주시는 뜻) 견고한 바위처럼 보장(보호대책이 되심)이 되어 주시고 양식과 물도 끊임없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4)그때에 선민들이 수난에서 회복된 광경을 볼 것이니 17절에서 “너희 눈은(전쟁에 약한 왕이 아닌) 영광 중의 왕(권위를 회복한 히스기야 왕 또는 메시야)을 보며 또 광활한 땅(9절의 화가 회복된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그때에는 과거의 수난이 한낱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19절) 18절의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리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말하기를 “전쟁 비용을 계산하던 자와 공세를 칭량(전쟁 비용 염출)하던 자와 망대를 계수(망대 지키는 병력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할 것이니 그런 자들이 다 없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18절) 따라서 유다 선민들은(19절, 네가) 강포한 앗수르 백성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어려운 방언을 다시 듣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절)

6)그때에 “예루살렘에 안정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20절의 “안정된 처소 예루살렘이 절기 지키는 시온성이 되고 그 시온성의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않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견고함을 요동치 않는 천막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인데, 이것은 영적 구원이 확고함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7)선민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위엄 중에 선민과 함께 하시는데 이는 해자로 성을 보호함 같다” 하셨으니, 여기의 “해자”란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할 넓은 하수와 강이 들림 같은 것”입니다. 도시가 강에 들려 있음은 산업과 국방에 아울러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21절) 또 22절에서 선민의 보호자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율법을 세우신 자이며 선민의 왕이시고 구원자라”고 하였습니다.

8)유다 선민들이 한때는(앗수르 침략시) 힘을 쓰지 못하였으니 마치 돛을 달지 못한 배와 같았으나(돛대줄이 풀리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음) “때가 되면(앗수르가 패하면) 재물을 탈취하되 저는 자도 그것을 거둘 수 있으리라” 하셨으니 이는 4절 말씀을 재설하신 것이요(23절), 24절에서 “그 거민이 병들지 않을 것은 그들이 죄사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신것은, 죄와 질병이 큰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마 9:2, 5~7, 고전 11:30) 성도는 선민이며 죄사함 받은 의인이므로 이상과 같은 은혜를 모든 성도들에게도 늘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48 과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심 (사 34:1~17)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전체가 에돔의 멸망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심”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절을 보시면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라” 하셨고, ② 8절에서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 하실 때(보수할 날)라” 하시므로 “성도 또는 선민(시온)의 원한(신원)을 갚아주시는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으며, ③ 2절, 5~6절, 16~17절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의 계획을 세우심”이요, ④ 그 이외의 말씀들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록 하시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고(5절), 선민의 신원(억울함을 호소함)을 갚아주시는 분이며, 이런 사실을 널리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별명이고, 야곱의 형의 족속입니다. “시온의 송사”(8절)란 말씀에서 에돔이 성도의 대적임을 알 수 있고, 또 불신앙(비택자)의 죄가 멸망을 받아 마땅할 만큼 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것입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세계에 알려져야 합니다.(1절)

구원과 통치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세상에 알려야 하므로 “열국과 민족들이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과 또 “땅과 땅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라”(1절)고 하셨습니다. “인격 아닌 것들이 들어야 한다” 하심은 시적 표현입니다.

2. 하나님이 에돔을 멸하심은 “시온의 송사를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8절)

8절에서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 하실 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뜻하고, “보수할 날과 신원 하실 해”란 하나님이 심판하신 날을 작정하시고 시행하신다는 뜻이요(행 17:31), “시온의 송사를 신원 하심”은 에돔족이 선민을 괴롭게 한 일에 대하여 선민의 호소를 들으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이 심판은 지상에서의 일시적, 또는 부분적일지라도 이것이 영원한 심판의 예표적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의 계획을 세우심에 대하여(2, 5~6, 16~17절)

1)2절에서 “하나님은 만국(세계적 심판 대상)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높은 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하실 것을 계획하셨다” 하셨고,

2)이 살육계획은 “하나님의 강한 분노에 의하여 에돔에 내릴 것이라” 하셨으니 곧 5~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칼(살육의 계획)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음”은 살육계획을 힘있게 하셨다는 뜻이요, “피 곧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심”도 역시 살육의 칼을 잡은 심판자가 영양가 섭취에 의하여 힘이 있음으로 많이 죽이게 될 것이라는 뜻이며, 또 “여호와께서 보스라(에돔의 큰 도성)에서 희생(죽음)을 내시며 에돔땅에서 큰 살육을 행하심이라” 하심은 그 살육계획이 에돔족에게 힘있게 임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에돔의 땅은 사해동편 세일산 지역인데 거의 사막지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당시에 선민의 통과를 불허하였고(민 20:14~21, 21:4) 다윗왕 때에 이들을 정복한 때가 있었으며(삼하 8:14, 왕하 3:8, 14:7) 이 예언 당시에도 서로 대적관계에 있었을 것입니다.

3)16~17절에서도 역시 에돔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책은 모세의 율법을 두루마리에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시대에도 부분적 구약문서로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그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의 성격으로 보나(마 5:18) 권위로 볼 때 자세히 읽고 자세히 상고함이 마땅한 것입니다.(눅 1:3, 2:51, 24:27, 행 16:13~15, 딤후 3:14, 롬 10:17) 이 본문에서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살피게 한 이유”는 이사야가 예언한 에돔 멸망에 대한 말씀(특히 땅이 황폐하여지므로 짐승들의 서식지가 되는 일)이 사실대로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하고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황폐된 에돔땅에 서식할 동물의 종류들)이 하나도 빠짐이 없고 하나도 그 짝(암수의 짝으로 보존성을 뜻함)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님)이 이것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동물의 보존과 이동을 주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방주에 동물을 수용한 것도 그런 뜻이 있을 것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땅에 줄을 띄워 구획을 정하시고 특정한 동물들을 그곳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획을 정하실 때 “제비를 뽑고 줄을 띄우심”은 공정하게 하시는 의미를 표현하신 것이고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 하심은 동물들도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서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행 17:26)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이상과 같은 심판의 섭리를 나타내실 때에 나타날 결과에 대하여 3~4절, 7절, 9~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에돔땅에 임하면

1)3절에서 “그 살육 당한 자는 내어 던진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그 피에 산들이 녹음”은 많은 생명이 피를 흘리고 죽으므로 땅이 피로 물들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4절에서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가 나뭇잎이 마름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만상”(콜체바)은 별들을 의미하지만 높은 권세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림”은 자연계의 변화 또는 천지개벽을 뜻하는데, 세상 끝날에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벧후 3:10~11, 계 6:12~17) 이것은 폭풍, 화산, 지진 등으로 나타날 현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의 잎이 마름 같음”은 옛 것이 속히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지진이나 화산이 지나간 곳에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3)7절에서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한가지로 도살장에 내려감”은 그 가축들도 다 죽는다는 뜻이요,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함”은 큰 죽음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피로 흙이 취하고 기름지게 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4)9~10절 말씀은 화산이 폭발한 현상을 그대로 설명하셨습니다. “에돔의 시내(물)들은 변하여 역청(아스팔트, 화산의 용액이 흐름)이 되고 그 티끌(먼지)은 유황이 되며(유황성 연기를 뜻함) 그 땅은 불붙은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나갈 자가 영영히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모든 에돔인이 다 없어지고 그 땅이 사람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하여도 귀인이 없고 백성이 없으니(12절) 결국 나라는 없어지고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13절)

5)황폐된 에돔의 땅에는 “짐승의 서식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15절) 11절에서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고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인즉 이는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줄과 추”는 공평한 심판을 뜻하고 “혼란과 공허”는 심판의 결과로 에돔의 땅이 사람 살 곳이 못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3절에서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억새)이 자라서 시랑(승냥이와 이리 종류)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요” 또 14~15절의 말씀은 황폐한 땅에 각종 짐승들이 서식하는 상태를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때로부터 에돔국은 없어졌고 그 땅은 현재 있는 그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폐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시며 이 심판의 정황은 말세 심판의 예표가 될 것입니다.(벧후 3:10~11)

 

제 49 과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3) (사 35:1~10)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베푸실 신령한 은혜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로 정하였습니다. 여기의 선민은 이스라엘 선민 또는 모든 택함 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10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죄사함 받은 성도)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시 126:1~4) 또 전체적 의미로 볼 때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를 받고 크게 기뻐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민이란 구약 시대의 남은 유대인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진리를 떠난 세계의 어려움을 자연계의 황폐와 신체적 장애로 비유 설명하셨고, 또 복음적 은혜의 세계를 지상의 낙원 또는 치료받은 몸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는 복음으로 받는 영적 축복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진리(예수님) 없는 세계를 어떻게 표현 하셨습니까?

1)1절에서는 “광야와 메마른 땅, 또는 사막”으로 표현하셨고, 진리가 있는 세계는 “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한다”는 시적 표현으로 그 변화의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서는 “뜨거운 사막, 메마른 땅, 시랑의 눕던 곳”이라 하신 후, 진리가 있는 세계는 “그곳이 변하여 못이 되고 원천이 되며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라” 하시므로 낙원이 되는 형편을 말씀하셨고,

3)8절에서는 “그곳에 거룩한 길인즉 진리의 도가 나타나서 거룩한 백성만 다니게 될 것이라” 하셨으며 또 그곳은 “사자나 사나운 짐승이 범접하지 못할 것이라”(9절) 하시므로 진리가 없는 세계를 “황막한 땅, 사나운 짐승이 서식하는 곳”으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4)3~5절에 보시면 “약한 손, 떨리는 무릎, 겁내는 자”란 표현으로 진리 없는 백성들의 형편을 설명하셨고, 또 “소경의 눈, 귀머거리의 귀”란 말씀이 있는데 이는 신체적 장애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사 6:9) 따라서 무지와 고난과 두려움과(3절의 떨리는 무릎, 4절의 겁내는 자) 절망과 답답함이 있는 세계가 진리 없는 세계요 망하는 세계입니다.

2. 복음으로 희망을 주시는 세계는 그 반대로 설명하셨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기쁨과 노래와 아름다움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막은 황막한 곳이지만 레바논의 수목과 갈멜산의 삼림과 사론의 평야는 “사람 살기 좋은 낙원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불신앙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를 대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하였으니 이 뜻은 아름다운 자연계시로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2)3~4절 말씀은 사명자(증언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적 구원의 소식을 무지한 자와 약한 자와 겁내는 자에게 전파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굳세게 하시는 분이시고, 보수 보복해 주시는 분이며, 직접 오셔서(그가 오사) 구원해 주실 것인즉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다 실천하신 내용으로 “메시야 사역에 대한 예언”이고, 먼 훗날에 있을 복음사역을 기대하여 소망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죄사함 받고 영생을 받아야 희망이 있겠지요. 따라서 장차 있을 메시야의 구속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므로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그 시대에도 전파한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이 곧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를 굳세게 하여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4절) 또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여 주실 것이라”는 뜻은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5:22)

3)5~6절에서 영적 무지의 형편을 “소경,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로 표현하셨는데 예수님이 이 예언의 성취자란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까지 행하여 보이신 것입니다.(요 5:8, 눅 7:15, 마 11:5, 12:22) 그러나 상징적 의미로 불 때는 신앙의 불구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자, 진리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당시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났을 때 사도들을 통하여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행 2:43~47, 4:29~35, 고전 11:1, 엡 2:20)

4)8~9절에서는 신약시대의 믿음 세계가 화평하고 순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는 곧 지상천국이요 성령 충만의 은혜 아래서만 성취되는 내세천국의 모형이라 할 것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음”은 명확한 진리의 계시로서(예수님을 길이라 하셨음, 요 14:6) 그 길은 거룩한 길이며, “깨끗지 못한 자가 지나가지 못함”은 진리와 불의가 상관할 수 없음을 뜻하고(고후 6:14~16), 오직 “구속함을 입은 성도만 진리와 관계가 있을 것인즉 우매한 행인(비택자)은 그 길을 지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 세계와 평화로움에 대하여 “맹수(사탄의 유혹)가 올라가지 못한다” 하셨으니, 이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평안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8:32, 14:27) 혹 “이 세상이 끝나기 전에 1000년의 왕국이 지상에 전개될 것이라”고 잘못 믿는 사람들은 좋은 세계가 이 땅에 있을 것으로 믿겠지만,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요, 이상의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에게 영적으로 주시는 복음적 구원의 은혜를 예언하신 말씀으로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메시야의 구원을 믿어야 하고 특히 신약시대에 나타날 복음적 사역과 그 은혜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 50 과 산헤립의 망언 (사 36:1~22) 목록으로


이 본문말씀을 읽고 “산헤립의 망언”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의 왕으로 “랍사게” 장군을 앞세워 유다의 많은 땅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성과 왕실만 함락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말을 히스기야 왕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망언인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시면 다른 성경에서도 읽으신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열왕기하 18장과 역대하 32장에도 같은 사건의 내용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는 주전 545년경(바벨론 포로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역대하는 그보다 훨씬 후인 주전 478년경(바벨론 포로 이후)에 에스라 선지자가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 때에 직접 사역을 한 선지자인만큼 그 당시의 역사를 경험한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유기적 영감(저자의 경험을 근거로 영감 받은 기록)의 의미가 더 충실하다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 14년은 주전 668년으로 북왕국이 망한지 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미래의 예언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증언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① 1~3절은 서론이고, ② 4~20절은 “산헤립의 망언”이며, ③ 21~22절은 “유다 방백들의 태도”입니다.

1. 서론(1~3절)

1)1절 말씀은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취하고 예루살렘 도성과 유다의 왕권만 뺏지 못한 상태에서 공갈 및 설득작전을 시도한 내용입니다.(1절)

2)“산헤립”은 앗수르와 사르곤(또는 살만에셀5세, 사 20:1)의 아들이고, “라기스”는 예루살렘 서남쪽 40㎞ 지점에 있으니 유다 전역을 점령한 셈입니다. 그곳에서 “랍사게”가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을 순순히 굴복하게 하기 위하여 앗수르 왕의 말을 전하러 왔고, 유다의 사신들과 만나는 장소는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 못 수도구 곁(이 장소는 예루살렘 성벽 밑으로 빨래터가 있는 만남의 장소를 연상할 수 있음)”이었으며(2절) 마중 나온 유다의 방백은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史官) “요아”가 나가서 그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2. 산헤립의 망언 내용(4~20절)

1)“유다 백성들이 군인들의 모략과 용맹을 의지하나 소용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4~5절) 5절에서 “네가 족히 싸울 모략과 용맹이 있다는 것은 입에 붙은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의 군사들과 방어력을 아주 무시한 것입니다.

2)“애굽을 의지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6절) 앗수르 대적들은 유다가 애굽을 의지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고(사 20:4~5) 그들을 상한 갈대 지팡이처럼 무시하였습니다. 애굽 나일강에는 갈대가 무성하지만 그 갈대를 “상한 갈대 지팡이”로 표현한 것은 애굽을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로 인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사람이 그것(갈대 지팡이)을 의지하면 그것이 가시가 되어 손을 찌르게 되는 것처럼 오히려 피해를 입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맞는 말입니다. 이방인이 오히려 선민을 가르치는 형편이 되었으니 이는 유다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인간적인 것들을 의지하는 댓가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사 3:1~3, 20:4~5)

3)“유다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여도 소용없다”고 하였습니다.(7절) 선민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면 도움을 받지만(호 6:1)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소용이 없지요.(사 23:15, 렘 25:11) 그러나 이 사건과 관련할 때는 히스기야의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이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왕하 19:1~7) “산헤립”은 마귀의 모형자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여도 소용없다”는 말을 임의로 지껄인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정화의 차원에서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예루살렘의 단일 제단에서만 경배하라”한 것을 앗수르 왕은 그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일로 오해한 것같습니다.(7절)

4)앗수르 왕은 유다의 연약을 알고 자기의 승리를 확신하는 상태에서 “내기를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8~9절) “말 200필을 줄터이니 탈 자를 내놓아 보라 유다의 군사가 어찌 앗수르의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겠느냐”고 하였으니 “그럴 수 없는 형편이면 물러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9절) 하면서 유다를 형편없이 무시하는 말을 하였고,

5)또 중요한 것은 “자기가 유다를 삼키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란 것입니다.(10절)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어찌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올라와 그 땅을 쳐서 멸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10절) 거짓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 유혹 당하는 자가 있는 것처럼 산헤립도 종교적 술책으로 유다 국민을 유혹하였습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므로 하나님이 산헤립을 통하여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짐작한 듯도 합니다.(사 1:4~9)

6)이때에 유다의 방백들이 “유다의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만 알아듣도록 아람 방언으로 말하라” 하였으나 랍사게는 “백성들도 들어야 한다” 하면서 유다 방언으로 더 크게 외친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위의 사람들(방비하는 군사)에게도 듣게 하여야 한다” 하였으니(11~13절) 유다 방언을 삼가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랍시게의 공갈로 사기가 저하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고, 또 “소변과 대변을 먹는다”는 뜻은 앗수르 군사들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패배 당한 군사들(성위에 앉은 사람)에게 치욕을 주는 수단으로 인분을 벅일 것을 예고함으로 미리 항복하도록 유도한 말입니다.

7)그는 또 히스기야 왕을 배반하면 자신이 더 좋은 삶의 터전을 줄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14~20절) “히스기야가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 그의 말에 미혹되지 말라”(14절) 하였고, 또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붙임이 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말도 믿지 말 것이며(15절), “앗수르 왕에게 항복만 하면 좋은 지역에 이민시켜서 잘 살게 해줄 것이라” 하였고(16~17절), 또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에게서 건진 자가 있느냐? 수리아의 도성 하맛과 아르밧도 점령당하였고, 메소포타미아 남단에 있는 스발와임도 점령당하였으며, 사마리아도 그러하지 않느냐? 따라서 여호와 신이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18~20절) 하면서 항복을 설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역사는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성도의 믿음을 헤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결과에 대하여(21~22절)

이 말을 들은 유다의 대신들은 잠잠하였으니 이는 왕이 “대답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21절) 왜 대답을 안 하게 하였을까요? 하나님께 회개하고 응답을 받았은즉(왕하 19:6~7)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을 기다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만히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적 방법을 쓰는 것은 오히려 해로워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힘 쓰셔야 할 것입니다.(삼상 7:1~11, 고후 1:9) 22절에서 방백들이 옷을 찢은 것은 원통한 사실을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제 51 과 히스기야 왕의 기도 (사 37:1~20) 목록으로


앞의 말씀이 이사야 36장에서는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히스기야 왕으로 하여금 항복할 것을 강요하는 말을 할 때 스스로 자만하면서 유다를 무시한 언사를 나타낸 내용이고, 본문 37장은 역경 중에서 히스기야 왕이 기도한 사실과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고 다음 과목에서(21~38절)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상고하겠습니다. ① 1~7절은 “히스기야 왕의 대책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내용”이고, ② 8~13절은 “적군의 전세 변화와 앗수르 왕의 2차 위협”이며, ③ 14~20절은 “히스기야 왕의 기도”입니다.

1. 히스기야 왕의 대책과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1~7절)

1)히스기야 왕은 적군의 사신 산헤립의 오만한 말들을 전달받고 자기의 옷을 찢은 후 자기와 궁내 대신들(엘리야김과 셉나)과 제사장 중 어른들로 굵은 베를 입게 하고, 자신은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으며, 또 베를 입은 대신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보냈습니다.(1~2절) 옷을 찢은 것과 굵은 베를 입은 것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이며, 이사야 선지자를 만나게 한 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그 선지자를 통하여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2)대신들은 이사야에게 가서 히스기야 왕의 말을 전할 때 “오늘은 환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과 같다” 하였으니(3절) “환란과 능욕”은 적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고, “책벌”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벌하시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이며, “해산할 힘이 없음”은 대적을 물리칠 힘이 없음을 비유로 나타낸 것입니다.

3)왕의 신하들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랍사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훼방하고 또 유다 왕에게 말한 것을 하나님이 아실 것인즉 혹시 하나님께서 그를 견책하실 뜻이 있는 지 알아보고 유다의 남은 백성(전쟁에 죽지 않은 모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지자는 왕이나 제사장들보다도 계시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과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에 대하여 유력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4)이때에 하나님의 응답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에게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의 회개하는 태도를 보시고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5~9절) 그리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앗수르 왕의 종들이 하나님을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신을 그의(앗수르 왕) 속에 두리니(성령의 역사로 통치하신다는 뜻) 그가 풍성(기후상의 천재지변, 사 30:30)을 듣고 고토로 돌아갈 것이요,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앗수르를 물리치시고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적군의 전세 변화와 앗수르 왕의 2차 위협(8~13절)

1)랍사게가 사신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에 왔을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은 라기스(예루살렘 서남방 50㎞ 지점)를 떠나 예루살렘쪽으로 10㎞쯤 다가온 립나(예루살렘 서남방 40㎞ 지점)를 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랍사게가 그곳에 와서 왕을 만났고(8절) 그때에 구스왕 “다르하가”가 앗수르를 대항하여 싸우러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산헤립은 히스기야 왕에게 2차로 사신을 보냈으니(9절) 이는 빨리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그곳을 요새로 하여 구스 왕을 대항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2)2차로 보내온 사신은 히스기야 왕에게 고하기를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않는다는 말에 속지 말라”(10절) 하였으니 이는 유다 백성들이 단결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지자의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3)또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여러 나라들) 어떻게 멸절 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11절), “나의 열조가 멸한 열방이 고산, 하란, 레셉,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들인데 그 나라의 신들이 그들을 건졌느냐?”(12절), 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13절) 하면서 과거에 승리한 전세로 예루살렘도 쉽게 멸할 수 있은즉 순순히 항복하여 생명을 건지라는 것이었습니다.

12절과 13절에 나타난 지명과 국명들은 다 앗수르가 정복해온 지역과 나라들을 거론한 것인즉 지도상으로 그 지점들을 확인해 보시면 더 좋을 것입니다.

3. 히스기야 왕의 기도입니다.(14~20절)

1)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사신의 서신을 받아본 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하나님께 펴 보이며 기도하기를(14~15절) “그룹사이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주께서 천지를 조정하신 분이신 즉(16절) 귀를 기울여 주시고 눈을 떠 보옵시며 산헤립이 그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17절) 앗수르 왕은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18절) 그들의 신들(우상)을 불태웠으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에 불과한즉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19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20절)”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2)이 기도의 내용에서 히스기야 왕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룹사이에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16절), “주만 여호와이심”(20절)으로 믿었으니 ① “그룹사이에 계신 하나님”은 천사의 옹위를 받는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 뜻으로, 출25:18~22에 보시면 천사를 상징하는 그룹을 조각하여 속죄소 양쪽에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 위에 세운 형상으로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사의 역할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그룹사이에 계신 하나님”은 권위있고 높으신 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② “만군의 여호와”란 천상천하의 모든 군사와 능력을 동원하여 쓰시는 통치자란 뜻이요, “주만 여호와이심”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하나님의 이름)만 만국의 유일신이요, 창조자이시며(16절), 스스로 계신 자요(출 3:14), 선민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분(출 3:15)으로 “여호와”는 하나님의 기념 이름이며(출 3:13~15) 스스로 계신 자로서(출 3:14) 선민과의 언약을 이루시는 의미에서(출 6:3~5) 자기를 나타내실 때에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따라서 유다를 그 대적의 손에서 건지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과 유다의 방백들과 제사장들은 전쟁의 위험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였으니 그 응답은 다음 과목에서 상고하겠습니다.

 

제 52 과 하나님의 응답 (사 37:21~38)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앗수르의 침략을 인하여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의 자세를 취하였을 때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응답하신 말씀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제목적으로 상고하려면 4가지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세가지 섭리요(21~22, 26~27절), ② 앗수르의 죄와 동태를 지적하심이요(23~25, 28절), ③ 기도응답으로서 유다에게 주신 징조요(30~32, 35절), ④ 앗수르의 패망에 대한 말씀입니다.(33~34, 36~38절)

1. 하나님의 세가지 섭리가 무엇입니까?(21~22, 26~27절)

1)“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나 들으시는 분입니다. 시 116:1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략과 랍사게의 오만한 말을 듣고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침상에서 기도한 일도 있었고(왕하 20:2~3), 산헤립의 서신을 성전에 갖고 가서 펼쳐놓고 기도한 사실이 있었는데(37:14), 하나님이 그 기도를 “확실하게 받았다”고 2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이 선민 편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처녀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다”는 말씀은 “딸 같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앗수르를 망하게 하실 줄로 믿고 그들을 조소하며 내쳐야 할 백성으로 알고 증오하였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의 편이 되셔서 앗수르를 대항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처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선민의 대적이 득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시면 사탄도 하나님의 명령범위 안에서만 활동한 것처럼(욥1:12) 앗수르가 강성하여 여러 나라들 앞에서 위세를 드러낸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자들은 그런 섭리를 모르고 자기의 힘으로 된 줄로 작각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시면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하나님)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니라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한 것이라” 그래서 그들(앗수르의 대적)이 힘이 약하여 놀라고 수치를 당한 것이니,“시들은 풀과…자라지 못한 곡초처럼 힘없이 대항을 못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민이 약해지고 대적이 강해진 것이 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2. 앗수르의 죄와 동태를 지적하신 말씀은(23~25, 28절)

1)그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만한 것입니다. 23절에서 “네가 훼방하여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 하시므로 “선민을 훼방한 것이 곧 하나님을 모독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선민은 일체요, 한 권속이기 때문입니다.(사:8-9)

2)24~25절에 보시면 “네가(산헤립) 네 종(랍사게)으로 주를 훼방하여(큰 소리 치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헬몬산 같은 곳)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골짜기)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그 한계 되는 높은 곳(예루살렘)에 들어가며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요,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릴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친 것은 하나님 앞에 자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용맹성을 근거로 “유대 땅은 물론 예루살렘이나 애굽을 치는데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헬몬산 처럼 높은 곳이나 레바논의 골짜기도 점령하였는데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하겠느냐?” 또 유다가 애굽을 의지한다 하지만 나는 물이 귀한 장소에서 우물을 파고 물을 마셨은즉 애굽으로 흐르는 하수를 막는 것은 손이 아닌 발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흐르는 물을 말려 그들을 죽게 하는 것은 우물을 마시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3)28절과 29절 상반에서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하셨고, 또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다”(29절 상반)고 하시므로 하나님은 그 대적이 거처에서 범죄 하는 일과 출입시에 범하는 일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일을 감찰하여 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면밀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 139:1) 인간이 어찌 죄인된 피조물로서 감히 자기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3. 기도의 응답으로 유다에게 주신 징조의 말씀입니다.(30~32, 35절)

1)30절에서 “금년에는(침략군의 훼방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였은즉)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2년(내년)에도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나 제3년에는 심고 거두며…열매를 먹을 것이라” 하시므로, “2년 후에 평화가 올 것을 징조로 나타내 주신다” 하셨고,

2)31절에서는 “그때에 유다 족속 중 피하여 남은 자는 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환란을 피한 남은 백성들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32절에서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루실 것이라” 하심은 전쟁에 죽지 않고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려면 예루살렘이 침략에서 벗어나야 하는데,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남은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뜻이요, 또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선민을 보호하시는 사랑과 열심에 의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3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과(과거에 언약을 주신; 삼하 7:12)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다윗은 천국에 살아 있음) 그 도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탄의 역사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은 영광의 훼방을 받으시거나 패배하실 수는 없으며(사 42:8, 롬 16:27) 천국에 있는 성도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앗수르의 패망에 대한 말씀(33~34, 36~38절)

1)33~34절에서 “앗수르 군사는 예루살렘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쏘지 못하고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성에 오르기 위한 담)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하셨고,

2)그렇게 될 이유는 36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5,000인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37~38절에서는 “산헤립이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며 자기의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고, 결국 그의 다른 아들 에살핫돈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하셨으니, 이 사실은 역사적 사건으로 성취된 다음에 기록된 것입니다.

4)하나님의 사자가 군대를 죽인 것은 앞 과목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재지변을 일으켜 죽음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왕하19:35, 사 30:30) “니스록”은 앗수르 국민이 숭상하는 잡신의 일종이고, “아라랏” 땅은 아르메니아 근처에 있던 고대국가로 바벨론을 응징할 때 소집된 나라로 나타나 있습니다.(렘 51:27)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선민과 그 대적들의 죄를 감찰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작정하신 섭리에 따라 나라와 개인을 약하게도 하시며 강하게도 하시고 보존도 하시며 망하고 죽게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삼상 2:6)

 

제 53 과 히스기야 왕의 질병과 기도 (사 38:1~22)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기도하므로 병이 낫고 15년의 수명을 연장 받는 내용”입니다. 관심있게 살피면 많은 교훈과 연구할 내용이 있습니다. ① 1절은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이며, ② 2~3절은 히스기야 왕의 기도요, ③ 4~8절은 기도의 응답과 징조를 나타내 주심이며, ④ 9~22절은 “병이 나았을 때에 기록한 글”로 되어 있습니다.

1. 히스기야 왕에게 죽음을 예고하심(1절)

1)1절의 “그즈음”은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 침략으로 난리를 겪고 난 직후입니다. 본문 5절에서 15년을 더 살 것을 허락 받았고,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재위하였으므로(왕하 18:1) 더욱 확실합니다.

2)“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뜻은 대부분의 죽음이 질병으로 임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도 죽을 병이 들어서 죽었습니다.(왕하 13:14)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큰 병이 들면 죽을 수도 있고 혹 나을 수도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확률의 정도를 각자가 예측해 보십시오.

3)하나님께서 이사야로 하여금 그 병으로 죽을 것을 예고하시고 “네 집(유다국)에 유언을 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질병은 종처였고(21절) 죽음을 예고하신 것은 생명의 주(행 3:15)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이나 퍽 드문 일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신 일(마 16:21)이나 베드로의 마지막을 예고하신 것(요 21:18) 외에 거의 없습니다.

4)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유언하라”고 하신 이유는 선민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잘 준비할 것을 부탁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다 죽음을 예고 받고 있습니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히 9:27), 내일 일을 모르며(약 4:14) 위험이 많은 세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에게 죽을 날짜를 알리시지 않았을 지라도 항상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히스기야 왕의 기도입니다.(2~3절)

1)히스기야 왕이 종처로 고생하는 중에 죽음의 계시를 받았으니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니 이는 병상에서의 은밀한 기도를 뜻하며(2절)

2)“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고 또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3절) 여기 간구의 내용은 없으나 “병 낫고 구해달라”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믿음을 힘쓰고 정화운동을 편 것은 사실이지만(왕하 18:3~8) 그것을 하나님께 내세울 큰 공로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겸손하여야 하니까요. 그러나 히스기야 왕이 그것을 내세운 것은 검불이라도 붙잡고 의지하자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내세운 것은 통곡과 함께 간절함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만큼(겔 18:9) 기도자에게는 의도 있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과 징조를 주심(4~8절)

1)기도 응답의 내용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하였으니(4절) 이는 선지자를 하나님의 계시 도구로 구별하여 쓰시는 뜻과 계시의 혼란을 막는데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2)“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눈물을 보셨으므로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시고(5절), 또 왕과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어 보호할 것이요(6절) 징조를 주시되(7절)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갔던 해그림자를 뒤로 10도를 물리시겠다” 하시고 그대로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8절) 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뜨거움을 느끼셨습니다.(욜 2:18) 그의 눈물 속에 하나님이 받으심즉한 믿음의 정신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수한에 15년을 더하신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기본 수명도 정하시는 분이시고(행 17:26), 또 특별한 경우에는 그 작정을 변하실 수 있는 주권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 성도님들도 “히스기야” 왕처럼 특별한 경우에 있다면 병낫고 장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징조를 주신 것은 히스기야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신 것이고, “아하스의 일영표”란 아하스 왕때부터 사용한 일종의 해시계이며, “그 그림자가 10도를 물러간 것”은 상당시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변화를 나타낸 이적입니다. 여호수아 때에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수 10:12~14) ④ 5절에 “네 수한”이란 말씀이 있으므로 히스기야의 본래 수한은 왕된 나이 25세와(왕하 18:1) 14년(36:1) 재위년도를 합하여 39세이고, 거기에 15년을 더한 전체수명은 54세입니다.

4.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을 때에 기록한 글입니다.(9~22절)

이 글은 히스기야가 자기의 소감을 피력한 것이지만 역시 영감된 말씀입니다.

1)9절에서 히스기야가 “병이 나을 때에 글을 남긴 것”은 곧 성경을 남긴 것이지만 사람마다 자기의 한평생 살아온 회고록을 남기는 것은 후손들에게 큰 참고가 될 것입니다.

2)10~11절에서 히스기야 왕은 병으로 인하여 “죽음 앞에 있음을 실감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런 경험은 욥에게도 있었습니다.(욥 13:15) “내가 중년(39세)에 음부(무덤)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더 살고 싶은 수명)을 (죽음에게) 뺏기리라 하였도다”(10절), 또 “생존 세계에서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되었고 세상 거민 중에서 한사람도 보지 못하리라”(11절)고 체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3)12절에서 히스기야 왕은 자기의 짧은 인생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였으니 곧 “자기의 거처가 목자의 장막을 걷어 옮김 같다” 하므로 인생이 나그네 같고 쉽게 옮겨지며 또 옮겨가는 내세가 있음을 고백 하였고, 또 자기의 생명수한은 “베틀에서 베를 끊어 말음 같다”고 하였습니다. 베를 걸어 짤 때, 다 짜면 끊어 말게 되는데 그것이 조석 간으로 빨리 끝낼 수도 있은즉 인생의 짧은 생명을 거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4)13~14절에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정황을 표현하였으니 “내가(아픔을 참고) 아침까지 견뎠으나 주께서 사자처럼 나의 모든 뼈를 꺾으셨으니(뼈까지 상하였다는 뜻)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칠 것같다”(13절) 하였고, “나는 제비와 학같이 지저귀며(아픔의 신음소리를 낸 뜻)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앙망하나이다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병과 정치적 문제 등으로) 주께서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14절) 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이요,

5)15~20절까지는 히스기야 왕이 응답을 받은 후에 자기의 소감을 피력한 내용입니다. ① 15절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고…친히 이루셨다”함은 히스기야 왕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다는 뜻이요,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함은 감사의 말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뜻이며,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란 고난 중에 마음으로 괴로웠던 일들을 각성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뜻이요 그 은혜로 “종신토록 하나님 앞에서 각근히(부지런하게 정성껏) 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16절에서 “사람의 사는 것이 이에 있음”은 하나님 앞에 각근히 행하여 영광돌림에 있다는 뜻이요,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 있음”은 각근히 행하여 영광돌려야 할 책임에 포함되는 자신이란 뜻입니다. 그런고로 “나를 치료하여 살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③ 17절에서는 히스기야가 자기의 고난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해하였습니다. 시 119:71에서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하신 것처럼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다” 하였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병을 낫게 해 주셨고, “그 연단으로 인하여 더 큰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18~20절에서 “자신이 죽지 않고 더 살게 되므로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18절 말씀에서 히스기야는 “죽음 이후에 내세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죽지 않으면 생존세계에서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것에 대하여서만 큰 기대를 가진 것입니다. 18절의 “음부와 사망과 구덩이”는 자기의 죽음을 상징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죽으면 생존 세계에서의 감사와 찬양과 주의 신실을 바라는 일을 못할 것인데(18절) 더 살게 되었으므로 이를 시행하게 되었으니(19절)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하여 종신토록 하나님의 전에서 수금으로 노래할 것이라(20절)고 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죽을 고비에서 살 때는 그런 서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6)21~22에서 이사야는 “한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여 낫게 하라” 하였고,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으니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는 7절에 나타난 일영표의 징조가 아닌 “속히 차도 있는 징조”를 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낫게 하신다” 하시고 일영표의 징조를 주셨은즉 “낫는 차도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 따라 무화과를 종처에 붙이게 한 것입니다. 왕하 20:7에서는 “무화과 반죽을 붙이라” 하셨고, “그렇게 하니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사야는 그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것이고, 열왕기하는 후시대에 종합적으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 반죽이 종처에 약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있다는 설과 없다는 설이 있지만 있다는 설을 믿을 때는 의학적 검증이 있어야 하고, 또 “있다”하여도 종기 전체의 특효약이 아닐진대 부분적 약효와 함께 하나님이 고쳐주셨음을 믿어야 할 것이며, 약효가 없는 것을 명하셨다면 히스기야의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크게 나타내 주심을 뜻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귀와 눈에 침을 뱉아 고치신 일이 있으니까요.(막 8:23, 7:33, 요 9:6)

이상의 말씀을 잘 이해하시고 저희들도 자신의 존재와 질병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54 과 히스기야 왕의 실수 (사 39:1~8) 목록으로


이 본문의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소식을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듣고 사신을 보내어 축하의 서신과 예물을 보냈을때(1절) 히스기야 왕은 이를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궁중보물 즉 은금과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는데(2절) 이것을 알게 된 이사야 선지자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3~4절) “날이 이르면 그 모든 보물이 다 바벨론으로 옮기게 될 것이고, 자손 중 몇 사람도 바벨론에 잡혀가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5~7절)한즉 왕이 그 예언에 순종하면서 자기 당대에 환란 주시지 않는 것을 다행히 여겼다(8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는 히스기야 왕의 실수가 핵심적 교훈이기 때문에 제목을 “히스기야 왕의 실수”로 정한 것입니다.

1.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발라단의 아들이고, 그가 히스기야 왕을 예방한 때는 느브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략한 때로부터 120년 전이기 때문에 나라와의 외교가 있었던 때였으며, 바벨론과 애굽과 유다가 합력하여 앗수르의 오만을 꺾으려 한때이므로 바벨론 왕이 글을 보낸 내용도 그런 취지였을 것입니다.(1절)

2.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이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여 바벨론의 사신에게 궁중의 모든 보화와 무기고와 왕실의 모든 소유를 다 보여주었는데(2절) 선지자가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3~4절) “날이 이르면 왕궁의 모든 소유와 열조가 쌓아둔 모든 것이 다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또 왕의 후손 중 몇 사람이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5~7절)”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진노이고 120년 후에 있을 유다민족의 징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 왕의 실수”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1)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입니다. 바벨론의 사신이 축하하러 온 것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치료받은 것을 치하하는데 있었으므로(1절) 왕은 우선 자신의 질병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였음을 증언하고 자랑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랑은 일언반구도 나타내지 않았으니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을만큼 믿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멀리한 처사인 것입니다.

2)그 다음에 왕실의 보화를 보이고 무기고를 보여 준 것은 물질과 무력을 의지하여 자랑한 것입니다. 선왕 다윗도 그런 실수를 하여 인구조사를 하고 벌을 받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삼하 24:10~15) 앞으로 앗수르가 쳐들어 와도 “이만한 재력과 무력이면 족할 것이라”는 의미로 자랑삼아 보여주었으니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멀어져서 재물과 인력을 의지하는 입장을 취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을 없애시는 분이므로(사 3:1) 그것을 바벨론으로 옮기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3)또 그뿐 아니라 보화와 무기고를 보여준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의 나라인 애굽과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대항하려는 의도로 공개한 것인즉 지혜롭지 못한 처사요, 결국 의지의 대상이 침략자로 변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의지의 대상이 오히려 대적이 된 것입니다.

4.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소식을 듣고

1)“여호와의 말씀이 좋다”(8절) 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하나님의 처사가 옳은 것을 인정한 것이요

2)“나의 생전에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라”(8절)하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당대에 진노 하시지 않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겨 감사하였으나 후시대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겨 더욱 회개할수 있었으면 좋을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교훈 받을 것은 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②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을 외면하고 인간적, 물질적 수단에 의존하려는 잘못을 주의하는 것이고, ③ 깨달을 때는 반드시 회개하므로 화를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 55 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2절에서는 “선민을 위로 할 근거”를 말씀하셨고, ② 3~5절에서는 “위로를 받도록 준비하라”는 말씀이요, ③ 6~8절은 “육체적 위로가 아님”을 말씀하셨고, ④ 9~11절은 “위로의 핵심이 메시야 사역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2절 이하에도 역시 위로의 내용이 계속되는 말씀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므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셨으니 전체의 내용이 “위로”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주전 75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유다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앗수르의 침략에서 보존될 것을 예언하셨고, 또 주전 600년경에 유다국이 바벨론에 망하여 70년 동안 포로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23:15) 여기의 70년은 하나님이 선민을 벌하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70년이 지난 후에는 선민에 대한 징벌이 끝나는 때이므로 위로의 은총이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위로의 은총은 육체나 현실적 은혜가 아니고 신령적 은혜, 즉 “메시야 사역의 은혜”를 소개하므로 위로를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위로의 은혜는 “복음시대에 성될 은혜”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선민을 위로할 근거(1~2절)

1)1절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자기 백성을 위로할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하셨으니 이 말씀은 옛날의 선지자와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신 증거의 사명과 같은 것입니다.

2)2절에서는 위로하시는 근거가 “선민의 복역의 시기가 끝나므로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민이 범죄한 연고로 벌을 받았을지라도 바벨론 포로 70년간의 고초로 죄값을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다이…말함”은 위로의 어감을 갖추라는 뜻이요, “외쳐고함”은 선포의 강세를 띠우라는 뜻이요,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음”은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로 선민을 징계하심에 대한 죄값을 배나(충분히) 치른 것이 되었으므로 징계를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로의 근거는 징계의 기간이 끝나므로 은혜주실 때가 된 것입니다.

2. 위로를 받도록 준비하라 하심(3~5절)

1)위로를 받는데 있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만나를 거두기 위하여 그릇을 준비하는 것과 같고, 왕을 영접하기 위하여 길을 닦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로 주시는 성격에 따라 준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3~4절에서 준비하는 방법을 먼저 말씀하셨으니, 즉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광야나 사막”은 험한 세상을 뜻하고,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대로”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로의 방법은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이고, 그 메시야를 영접함에 준비가 필요한 데 그 준비가 바로 믿음입니다. 메시야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사막과 같은 암흑시대를 지나서 세상에 오셨고, 그 사이에 믿음의 심령은 거친 광야처럼 되었습니다. 씨앗이 옥토에 뿌려져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도 옥토 같은 마음이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짜기를 돋우고 산을 낮추며 고르지 않은 곳을 평탄케 하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되게 하라”(4절)고 하셨니 옥토와 같지 않은 마음으로는 메시야를 영접할 수 없은즉 겸손과 믿음과 신뢰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사명으로 세상에 온 것을 아실 것입니다.(마 3:1~3)

2)“위로를 주실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5절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남”은 곧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요1:14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을 나타내신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하나님을 “모든 육체가 함께 본다” 하셨으니 곧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민을 위로하실 메시야를 보내실 것인즉 마음으로 믿음준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메시야의 위로는 “육체적 위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6~8절)

그 이유는 “사람의 육체가 풀과 같고 육체의 아름다움이 꽃처럼 짧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위로는 영원한 영적차원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1)6~7절에서는 “인생이 풀과 같고 육체의 영화가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데 이는 여호와의 기운(생명주시는 능력)이 그 인생(육체) 위에 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분다”는 것은 아담을 생명체 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바람(생기)을 넣어주신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범위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그런 의미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인생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선다”고 하셨습니다.(8절) “말씀이 영영히 선다”는 뜻은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과 능력만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것”(영생복락)만 위로의 방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위로의 핵심이 메시야 사역에 있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9~11절)

1)9절 말씀에서 메시야의 사역은 아름다운 소식이므로 이 소식을 시온(예루살렘)에 전할 자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힘써 소리를 높여 전파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소식인 만큼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고, 이 소식을 시온에 전할 이유는 그 당시 예루살렘 거민들이 구원의 소식을 가장 갈망하였기 때문이며, 또 예루살렘은 선민을 대표하는 용어란 점에서 모든 선택받은 인류가 받아야 할 소식입니다. “높은 산에 오름”은 확성의 효율을 위함이지만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증언자가 높은 산에 오른 것처럼 신령적 은사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을 교훈 하신 면도 있다 할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산의 정상에 오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높은 산은 세상이 멀리 보이는 곳이고, 하늘이 가까운 곳이며, 또 멀리 볼 수 있고, 오염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명자의 신앙도 고상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존하면서 사명적 위험을 각오하여야 하기 때문이고, 증거의 핵심은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적 관계에서 선민(너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 1:18) 세례요한이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지요.(요 1:29) 따라서 이 말씀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기대하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2)10~11절에서는 “메시야 사역의 성격”을 말씀하셨으니 ①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심”은 예수님이 모든 불의의 대적을 이기실 승리의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요 16:33) ②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심”은 예수님의 직접적 통치를 의미하고, ③ “상급과 보응이 그에게 있음”은 심판자 되심을 의미합니다.(요 5:22) ④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심”은 예수님의 통치 방법이 그만큼 유연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젖 먹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심”도 역시 갓난애기를 키우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성실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젖먹이는 암컷”이란 양떼 중에 새끼 딸린 어미 양을 목자가 부드럽게 인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시므로 그의 통치도 부드럽고 유순하여 큰 위안을 주실 것인즉 목회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익히 알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사실을 예언으로 알고 믿고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확실한 위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위로뿐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진리를 앎으로 진정한 자유를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요 8:32)

제 56 과 절대자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12~31) 목록으로


본문말씀은 앞절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선민을 위로함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선민을 위로하는 뜻은 ① 절대자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것과(12~26절) ② 그 하나님을 앙망하므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27~31절) 따라서 “절대자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절대자 하나님을 알라” 하심에 대하여(12~26절)

1)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라고 하셨습니다.(12, 21, 26절) 손바닥으로 바닷물의 분량을 헤아리시고, 뼘으로 하늘을 측량하시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보고, 명칭과 간칭(저울의 한 종류, 잠 16:11)으로 산을 달아보실 분은 하나님뿐이신데(12절) 이 사실을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전하였은즉 선민(너희)이 깨달을 일이요(21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다”(26절)고 하셨습니다. 12절의 측량에 관한 말씀은 “창조자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만 만물의 분량과 성질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2)또 하나님은 “만유를 홀로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13~14절) 아무도 하나님을 지도하거나 그의 모사가 될 수 없고(13절), 하나님 역시 누구와 의논하셨거나 교훈을 받으신 일이 없으며, 공평의 도나 지식이나 통달의 도를 가르침 받으셨거나 보여준 자도 없은즉(14절) 하나님 외에는 절대적 주권자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열방이 아무리 커 보여도 하나님 앞에는 물방울 같이 작을 만큼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15, 17절)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물방울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15절)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처럼 여기신다”(17절) 하시므로 아무리 열방이 강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는 티끌에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

4)“레바논에 많은 짐승들과 빽빽한 삼림이 많다 하여도 그것들이 하나님께는 제물이나 화목에도 충족지 못한즉(16절)” 광대하신 하나님은 분량 많은 물질적인 것으로 만족하게 해드릴 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5)“하나님은 절대자이시라 비길 대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18, 25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18절) 아무도 동등되게 할 대상이 없다” 하셨고,(25절)

6)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지만 우상은 더더욱 무의미한 존재라고 하셨습니다.(19~20절)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힌 후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인데(19절) 가난한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재료로 하며, 공교한 장인(조각가)들이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게 세운 것인즉(20절) 아무것도 아니란 것이요,

7)“하나님은 우주를 포괄하여 계시다” 하셨으니(22절), 곧 “그는 하늘을 차일같이 거할 천막같이 펴신 후 땅 위의 궁창에 앉으신 분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이 우주를 포괄 또는 초월하여 계신즉 거민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음을 말씀하셨고,

8)“인간 권세자들을 초개처럼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23~24절) “귀인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니(23절) 세상의 권세자나 귀인들은 하나님 앞에 겨우 심긴 자 같으니 뿌리를 박아도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바람을 명하신다는 뜻) 부는 회리바람에 날라갈 초개(지푸라기)같을 뿐이라” 하시므로 모든 피조계에는 하나님과 견줄 것이 없을 만큼 하나님은 절대자요, 능력자이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절대자 하나님을 앙망하므로 새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라 하심(27~31절)

1)먼저 선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일깨우셨습니다.(27절) “야곱(이스라엘, 선민)이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 수리(받아드림)함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민감하게 감지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멀리 계셔도 느끼지 못하고 가까이 계셔도 알지 못합니다. 선민들을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가 되어 가까이 계신 것을 성경으로 알았어야 하고 또 느꼈어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 능력주시는 분이심을 알라”고 하셨습니다.(28~30절) “하나님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영원하신 분이며, 사람처럼 피곤(곤비)을 느끼지 않으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28절),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분이라”(29절)고 하셨습니다.

3)따라서 “인간은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30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므로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고(힘있게 소생할 수 있다는 뜻) 뛰거나 걸어도 피곤치 않을 것이라”(31절)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은 절대자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민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곁에 계심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성도님이 혹 연약을 느끼신다면 특히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하나님을 앙망하는 방법은 ① 우선 자기의 연약한 입장을 확인하시고, ② 절대자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을 믿으신 후 ③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거리끼는 문제가 있으면 목사님의 지도를 받아서라도 회개하고 정리하십시오. ④ 그리고 나서 기도와 말씀연구에 힘쓰십시오. 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모하며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힘쓰는 생활입니다. 이것만 시행하시면 건짐 받는 일과 형통하는 일과 인도 받는 일과 새로운 삶의 용기가 생겨질 것인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성령님의 역사로 주시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8. 위로의 교훈 (사 40: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위로의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우선 본문을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1)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선민들에게 민족의 수난을 예고한 후 때가되면 하나님이 복된 은혜를 베푸셔서 위로 받게 하실 것인즉 “너희는 그 사실을 백성들에게 고하여 선민을 위로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2)이스라엘 선민들은 본래부터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수난 속에서 믿음을 옳게 지키지 못하여 또 큰 수난에 들어갈 것이지만 때가 되면 회복의 은혜도 주시고 복음의 은혜도 주실 것인즉 믿고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3)선민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왕정시대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험했습니까? 노예 400년, 광야 40년, 가나안 땅 정복시대(사사시대 약450년)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 왕때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바른 신앙을 확립하지 못하였습니다.

4)그래서 이 예언이 있을 당시(주전 750년경)만 하더라도 앗수르나 애굽등의 침략으로 큰 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수난은 바벨론 포로시대로 이어져서 70년동안 민족의 암흑기를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5)선지자는 그 사실을 먼저 예언한 후에 징계받는 기간(복역의 때; 2절)이 끝날 것과 하나님이 선민의 죄를 용서하시면 선민을 위로하시는 섭리를 베푸셔서 ① 선민을 괴롭힌 적국을 먼저 응징하시고, ② 선민에게 해방의 길을 열어주신 후에 ③ 또 때가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메시야를 보내주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령한 복을 받고 따라서 영원한 위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슥 1: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선한 말씀으로 위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좋은 말, 좋은 소식은 확실하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복 받으라”, “잘 되어가고 있다”하면 위로가 되지요. (이 글을 재정리 할 무렵 엄동원 외교사절이 이북에 갔는데 그때 미국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취소 못한다”는 보도가 있었고, 또 이북에서의 회담이 하루 지연되면서 성사가 불투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절단 숙소에 와서 “긴 시간 화기애애한 회담이 있으므로 잘 되어간다”는 소식을 보도하였을 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결과를 체험하기 전에 소식만 듣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사람이 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잘 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으로 약속하셨을 때 큰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위로를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 성도는 큰 희망과 용기를 갖고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노력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너희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는 말씀이 있고(벧전 5:7) 또 “환란 날에 하나님을 부르라”(시 50:15)는 말씀도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막 8:1-10), 병을 고쳐 주셨으며(마 8:16), 가족이 죽어 슬퍼할 때, 죽은 자를 살리셨고(요 11:43~44), 또 전쟁의 재난에서도 적을 물리쳐 주신 일이 있었으니(대하 32:21) 무슨 일이나 찢기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삼상 2:6, 호 6:1) 기도응답의 체험을 민감하게 느끼는 성도이면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주시는 위로의 은총을 만끽하실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는 해결책으로 위로하실 때, 때와 시일을 정하고 행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은 속히, 또 어떤 일은 늦게, 또 어떤 일은 몇 100년 후로 나타내 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몇 백년 후에 받을 복을 위로 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시겠지만 후손이 잘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부모가 없고, 또 성도는 영원을 사는 자인 만큼(요 11:26) 천국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소망을 갖고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4)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복음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구약시대에는 약속만 되고 감취어 있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실현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수난을 당한 선민들에게 후시대에 가서 복음적 위로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니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모든 은혜인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복음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는 위로와 소망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 방법으로 성도 개인과 성도의 단체에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어떤 근거에 의하여 이 큰 은혜를 주실까요?

1)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11)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되 원수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사랑에 근거하여 죄인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마 5:44, 눅 23:34)

2)하나님은 인애와 긍휼(불쌍히 여기심)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호 6:6, 눅 19:41-42, 시 103:13, 마 14:14, 18:33)

3)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합 3:2, 사 40:2, 호 6:1~3)

4)전능하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창 17:1)

5)위로의 하나님, 위로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3~4)

따라서 성도가 위로를 받되 하나님으로 부터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연약하기 때문에 완전한 위로를 전할 수 없습니다. 이상의 말씀 외에도 위로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후 1:37, 6:7, 시 50:15, 103:10, 145:8, 마 11:28, 12:20 등의 성경말씀을 꼭 찾아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4. 누구에게 하나님의 위로 은총이 나타나야 좋을까요?

1)우선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사 40:1) 여기의 내 백성은 웃시야 왕 죽던 해의 이스라엘 선민을 뜻합니다. 웃시야 왕은 52년간 독재를 한 중에 큰 지진을 당한 일이 있었고(암 1:1) 그가 교만하다가 문둥병으로 죽었으며(대하 26:19~21) 그 다음 왕 요담은 악한 왕으로 16년간 통치하였고, 그 다음 아하스 왕때는 앗수르 왕(살만에셀)에게 굴욕을 당하였고(왕하 16:10~18), 또 마지막 에언할 당시에는 역시 앗수르 왕 산헤립의 지배를 받고 조공을 바쳤으니(사 37:14, 왕하 18:14~16) 그 백성들의 정치적 고충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백성들의 신앙과 도덕성은 실망할 정도였으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주인을 아는 짐승만도 못하다” 하셨고(사 1:3), 또 만신창이 된 신체같으며(사1:5,6) 헛된 제물을 가져오고 마당만 밟는 자들처럼 외식적이었다고 하셨습니다.(사 1:12~13) 그런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면 소망의 소식을 듣는 것인데, 이것이 곧 170년쯤 뒤에 있을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소식과 700년쯤 뒤에 있을 복음의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 위로는 먼 훗날에 주실 복음적 주신것입니다.

2)우리나라 백성들이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내 백성이라” 하셨으니까요, 1970년쯤 전방부대인 21사단을 위문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군부대에 가서 들은 이야기들로 큰 충격을 받고 이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방부대에서는 언제든지 월북할 수 있는 여건이 있는데 지휘관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을 가장 월북 안할 자로 신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목들이 최전방 초소에 있는 사병들을 순회하면서 기도해 주는 것이 큰 위로가 되며, 어떤 사병들은 높은 고지에 물 두통을 운반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란 것입니다. 그곳은 별 계급장을 단 장군도 그늘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얼굴이 검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후방에 있는 사람들이 “일선 장병들을 많이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사실을 필자가 경목활동을 할 때 청도 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알린 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은(2002년 4월) 실향민들이 위로를 받아야 하고, 또 세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테러를 당하는 사람들, 지진을 당한 민족들이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생각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다 위로의 대상들이 되겠지요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위로하실까요?

1)“정답고 희망스러운 말씀으로 위로한다”고 하셨읍니다. 2절에 보시면 “너는 정다히 말하여…외쳐 고하라”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은 “들을만한 말씀, 희망스러운 말씀들”로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슥 1: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신다”는 것은 희망적인 것을 말씀으로 예고하시고, 이어서 그 말씀대로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능력이 있으셔서 언제나 말씀대로 성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2)그러면 위로의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① 징계의 손을 멈추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중에 “복역의 때가 끝났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징계하시므로 어려운 지경에서 살게 하시다가라도 때가 되면 징계의 손을 멈추시고 이미 베푼 징계로서 노여움을 푸시며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위로를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교회적으로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징계의 손을 멈추신 다음에는)

② 또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의 평화는 전쟁이 끝나도 평화가 되고, 고난이 없어져도 평화가 되며, 심리적으로 마음에 갈등이 없어도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치적인 평안이 오려면 나라가 독립을 한 후에 번영해야 될 것이고, 육체적으로 평안하려면 건강과 물질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마음에 평화가 오려면 어디까지나 그 마음이 은혜로 안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평지, 옥토로 비유하셨습니다. 옥토 같지 않은 마음에는 신앙이 커질 수 없습니다. 불신앙, 교만, 무지, 투기, 나태, 욕심, 이런 것들은 다 거친 마음입니다. 광야 같은 마음이요, 사막 같은 마음이며, 또 골짜기 같고(막힌 마음)높은산 같은 마음(교만)들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에는 평안과 신앙이 곁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고르지 못한 마음을 평탄하고 고르게 하셔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시겠다” 하셨으니, 이 말씀들은 완악한 심령들에 변화를 주시어 “여호와의 길” 즉,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골짜기 같이 움푹한 마음은 돋아주시고, 산과 같이 우뚝한 마음은 깎아 주셔서, 그 마음에 평탄과 대로를 닦아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도록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음에 변화를 받을 때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요3:30)“는 세례요한의 마음을 갖는다고 가상해 보시지요. 얼마나 그 마음에 큰 평안이 올 것인지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기 위하여 유다 광야에서 외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마 3:3, 막 1:3)

③ “메시야를 보내어 위로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복음 시대가 펼쳐질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대속자이시며,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 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백성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상 더 위로 될 말씀은 없읍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그 예수님을 육체로도 보았고, 또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직접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성도의 모든 입장을 아십니다.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리시는 상태에서 성도를 위로하시고 권고하시니 이런 은혜를 받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더욱 행복한것입니다.

④ 하나님은 은혜를 늦게 받는 자에게 더 큰 것을 주시므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구약시대부터 나타났지만 신약시대의 성도가 더큰 은혜를 받았고, 아벨이 죽은 대신에 셋을 주시고, 다윗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대신에 솔로몬을 주셨으며, 다윗에게 성전 짓는 특권을 포기하게 하신 대신에 다윗의 혈통으로 메시야를 보내셨고, 욥이 고난을 감수한 때문에 그의 모년에 갑절의 복을 주셨으니 폐일언하고 상급과 축복은 늦게 받는 것이 더 크고 유익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과 마음의 평안과 메시야를 보내심과 나중에 더 큰 은혜를 주시므로 그 백성들을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환란 많은 세대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거절하는 자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마 2:18을 보시면 “라마의 여인들이 어린 자녀를 학살당하였을 때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절하는 자에게 위로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막5:17,18,눅9:52-56), 그래서 위로를 받는 백성은 하나님이 때리시는 매를 감사와 순종으로 순순히 맞으셔야 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셔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불변한 충성으로 끝까지 인내하셔야 한다는 것을 꼭 실천 하시기 바랍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여러 성도님들의 개인의 심령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증거해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9. 무엇을 외치리잇가? (사 40:6~8) 목록으로


본문 6절을 보시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쳐라 무엇을 외치리잇가 모든 육체는 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하다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이 말씀에서 느끼는 것은 외치는 사람보다 외치는 내용을 중요시 한 것입니다. “진리를 외치라”고 명하신 하나님이 증거자를 내세우시지 않고 증거 될 내용에 비중을 두신 것입니다. 증거자는 피조물 인간이고 증거 내용은 진리이므로 그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시대가 올 때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 할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이 말씀을 외치면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요 1:23) 하면서 진리만 나타내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증거의 도구는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민 22:28) 잘못된 사람의 증언이나(민 23:5) 무인격의 돌이 소리를 지른다 하여도(눅 19:40) 내용만 나타내면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사 45:23) 오늘의 성도들도 증거자에 대하여 지나친 기대나 관심을 피함이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뜻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직접적인 육성이 아니라도 책이나 소리로 널리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요 14:17) 은혜를 많이 받은 종이 증거하면 은혜를 적게 받은 종이 증거하는 것보다 효력이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님이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것은 본질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성경 말씀 자체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초기부터 설교자의 증언으로만 은혜를 전달하는 전통이 생겨져서 많은 성도가 설교자를 의존하였고, 더 나가서는 설교를 잘 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역현상을 나타내게 되자 증언자 대부분이 설교의 기교에 신경을 써서 인기를 얻으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뜻만 이해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지도록 증거자 중심에서 말씀 뜻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2. “무엇을 외치라”고 하셨습니까?

1)첫째로 외쳐야 할 것은 “모든 육체가 풀과 같다”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풀”이란 1년초 식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 인생이 오래 못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초도 못되는 풀이(풀=봄→초겨울 서리 올 때까지) 1년 안에 쇠잔해지는데 어느 때 쇠잔해지느냐 하면 서리가 올 때, 쇠잔해지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말씀하기를 시 103:15에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 하셨고, 시 37:2에서도 “악한 자들은 풀같이 속히 베임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모든 육체가 풀 같다”는 것을 외쳐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① 인생이 짧기 때문이고, ② 인생들이 짧은 인생을 긴 인생으로 착각하고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영원한 인생인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한 500년 살 것처럼 바라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야 할텐데 왜 육신이 이렇게 아픈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풀을 키우면서 겨울까지 살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풀 같은 인생인 자기의 육체가 쇠잔하지 않아야 할 것처럼 바라고, 또 그것을 성취해 보려고(즉, 건강하고 장수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런지요. 낙엽이 떨어지고 서리가 오려고 하는데 인간은 쇠잔하여 죽을 것을 예측하지 아니하고 영생, 건강할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증언의 소리를 통하여 “모든 육체는 풀과 같으니 속히 쇠잔 하고 시들어 죽을 것인 줄 알라”고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1년초와 같이 지나가는 인생임을 깊이 명심하셔서 인생 자체를 향락적으로 빛내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의존하는 믿음을 앞세워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둘째로 외칠 것은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들꽃과 같다”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다보면 그 중에도 행복한 시기가 있고 즐거운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마치 들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①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시지, 사람이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순간적인 쾌락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사람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② 들꽃은 집안에 있는 꽃과 달라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며, 사람이 찾아 주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그 꽃을 관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즐거움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또 그 생활을 통한 영광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③ 들꽃은 천연적 기후에 의하여 신속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에게 낙을 주시되 결코 오래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상을 말씀한 솔로몬 왕은 온갖 영광을 다 누려 보았지만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뿐이라”(전 2:11) 하셨고, 또 “이 세상은 새 것이 없을 만큼 낡은 것 뿐이라”고 하셨으니 낡은 것을 새 것인줄 알거나 신속하게 낡아져 가는 것을 오래도록 새롭게 붙잡아 보려는 것은 마치 여름철에 얼음을 보존해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낙은 들의 꽃과 같다”고 다시 한번 일깨워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 받는 것도 들의 꽃이요, 젊은 시절에 자기의 포부를 성취하는 낙도 들의 꽃이며, 결혼생활과 육체적 쾌락도 들의 꽃이요, 육신의 아름다움과 건강도 들의 꽃이니, 쉽게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만족이 있을 때는 그 만족이 끝날 때를 생각하고, 기쁨이 있을 때는 그 기쁨도 멎을 때가 있는 것을 생각하시며, 또 올라갈 때가 있으면 마땅히 내려갈 준비를 갖추는 것이 인생의 지혜로운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이 영광을 누가 떨구는 것입니까? 그것을 궁금하게 여길 것 같아서 성경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이 서리를 내려 또는 바람을 불게 하여 인생의 낙을 떨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떨구실까요? 한 500년 살기를 원하는 인생에게 100년쯤이라도 낙을 누리게 하시면 어떠하겠습니까 마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을 무상하게 창조하셨고, 또 인생은 유한한 존재요, 나그네로서 내세를 포함한 영원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난을 당할 때는 지옥의 고난을 두려워하면서 천국의 안식을 동경해야 할 것이고, 또 인생에게 순간적 즐거움이 있을 때는 그 순간적 즐거움을 영원한 천국에 연결시켜 “영원한 즐거움을 동경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외쳐야 할 것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주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알리라 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영원히 계신 것은 주님의 말씀 뿐이요,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뿐 입니다. 그 하나님은 낡아지지도, 변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항상 새것으로 변함 없이 영원히 살아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실하게 이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그 말씀에 든든히 붙잡혀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의 약속만 믿고 변함 없는 실행과 함께 거기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생, 변하는 인생, 또 없어지는 인생과 육체에 희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인생은 풀 같고, 영광은 꽃 같으니 가히 기대할 바가 못된다” 고 생각하여 적당히 바라보고, 적당하게 관심을 두시며, 오직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한 세계에만 큰 관심을 두시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이제라도 저와 여러분들이 높은 산에 오른 자처럼 세상을 멀리보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가까이 사모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안위와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또 풀 같은 육체와 꽃 같은 즐거움이 떠나기 전에 속히 주님과의 교제로 값진 신령한 보화를 꼭 소유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20. 시온의 사명 (사 40:9~11) 목록으로


본문말씀에 근거하여 “시온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시온에 사는 백성들의 사명”이란 뜻입니다.

1. 9절에 보시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1)아름다운 소식은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입니다. 따라서 이 소식은 복음을 뜻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이 많아도 복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류의 영원한 불행(사망)에서 영원한 행복을 갖게 하는 소식으로 오직 예수님의 구원 사역만 뜻하는 것입니다.

2)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선지자나 복음 사역자를 뜻하고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애칭하는 명칭입니다. 예루살렘 도성의 서남방에 아름다운 시온산이 있어서 그 산의 아름다움을 예루살렘에 부각시키는 뜻으로 시온이라 한 것이고, 예루살렘은 평화란 뜻으로 유다국의 수도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다윗왕 이전에는 “여부스”(평강의 집, 창 10:16, 삿 1:21, 삼하 5:6~7) 였는데 다윗왕이 정복하여 도읍하였고, 솔로몬 왕이 그곳에 성전을 지으면서 거룩한 도성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온”은 선민의 중심지이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시온의 선민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난을 많이 당한 백성들(선민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여 희망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3)또 2번, 3번 각주에 보시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 하시므로 시온의 거민이 복음을 받을 자가 아닌 전하는 자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선민들은 복음을 받기도 하고 전하기도 해야 할 사명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예레미야 선지자는 선민을 가르쳐서 “시온의 딸, 처녀시온”(렘 6:2, 14:17, 18:13) 이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역시 선민과 예루살렘을 애칭하는 뜻입니다. 처녀란 신부를 뜻하고, 신랑을 예수님으로 비유할 때 성도와 교회는 그의 신부가 되므로 그런 애칭이 주어진 것입니다.(히 12:22, 계 14:1, 갈 4:26)

5)시온은 곧 성도의 단체인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시온을 교회로 보는 이유는 ① 우선 그곳에 선민이 살고 있고, ②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며, ③ 구원사역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사역이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다음 복음적 계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복음적 계시와 함께 구원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이 시온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1)시온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입니다. ①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셨으니(딤전 3:15) 우선 진리가 충만하여야 합니다. ② 교회는 예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벧전 1:16) 순결하여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어야 한다”(엡 5:27)고 하셨습니다. ③ 교회는 사랑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4:7에서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사명은 진리사명, 순결사명, 사랑사명이 있고, ④ 교회의 사명은 “높은 산에 오르라”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도 높은 산에 오른 자가 되어야 하고, 교회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높은 산은 정상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과 생활이 수준급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르면 세상이 멀리 보이므로 세속을 멀리 하여야 하고(롬 12:2, 약 1:27),또 높은 산은 하늘이 가깝고 맑은 공기가 있음 같이 신령하고 순결하여야 하며, 높은 산에 오르면 동서남북을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멀리 보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높은 산에 오른 것 처럼 신앙 생활을 한다면, 큰 권위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높은 산은 옛날에는 확성전파의 수단도 되었습니다.(삿 9:7) 그런 의미에서 전파의 사명이 있다 할 것입니다. 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곧 예수님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닮고 교회는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 시대의 선민들에게 “하나님을 보라”한 것은 “하나님을 알라”(호 6:3)는 뜻과 “장차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선지자의 증언으로 메시야를 보지만(사 53:) 신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복음서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본받아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 위치에 서시지 않고 낮은 곳에 오셔서 인간고를 겪으신 분입니다. 현실경쟁에 서시지 않았고, 온유 겸손하셨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고, 죄없이 사시다가 희생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온의 사명은 성도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사명, 거룩의 사명,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 진리의 사명은 성경보존, 성경해석, 성경증거의 사명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반드시높은 산에 오를 사명이 있으니 곧 수준급 신앙이요, 권위 있는 신앙, 멀리 보는 신앙, 세속을 멀리하고 신령한 은혜를 가까이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보여 줄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처럼 이렇게 말씀하시고 행하신 분입니다.”하고 모범을 보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1. 하나님을 앙망하라 (사 40:27~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이 말씀을 증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나라 13대 왕인 웃시아 왕이 죽던 해(주전 711년)부터 16대 히스기야 왕이 재위할 당시까지(36:1의 히스기야 14년은 주전 668년)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2)이사야가 이 말씀을 증언하기 8년전(히스기야 6년, 675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오세아 9년에 앗수르에게 망한 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민족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3)그러면 남방 유다는 벌받을 죄가 없어서 존속하였는가? 할 때, 그렇지 않고 역시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13대 웃시아 왕은 52년간 장기집권을 하다가 문둥병의 징계를 받아 세상을 떠났고(대하 26:16~23), 다음 왕 “요담”은 우상숭배자로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아람의 침략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대하 28:5), 또 그 다음 왕 “아하스”도 역시 망녕되이 행하여 하나님이 “유다를 낮추셨다”(대하 28:1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왕 히스기야는 상당하게 선정을 베풀었지만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의 침략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친 때가 있었습니다.(왕하 18:9~16) 그런 연고로 유다 나라 백성들은 퍽 피곤하였습니다.

4)유다 백성들이 이만큼 피곤해진데는 신앙적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만 참고하더라도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하셨고(2절), “무지하여 깨닫지 못하였다”(3절) 하셨으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고(4절)”,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라”(4절)고 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로 인한 참상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상처투성이의 몸이요 치료받지 못한 상태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특단의 조치가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2.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였는지는 모르나 평안을 추구하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 수리함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40:27)고 하였으니, 그들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살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자가 죄를 회개하지 않거나 정욕적인 기도를 하거나 하나님의 징계의 때가 끝나지 않으면 응답이 안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경우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었고(사 1:15), 신앙을 위하여 분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도 개인적인 생활에 많은 피로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문에 국가체제의 위기를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위기의 내용은 “조선족 중에 적화통일을 위한 간첩이 5만이 넘고 또 우리나라에 친북세력이 450만명이나 되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니 만일 좌경사상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큰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2002. 4. 28 김O도) 성도들은 자기의 신앙의 위기를 느낄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9:15) 또 문제가 있는 성도들은 주님께로 나오셔야 합니다. 성경에는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로 오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꼭 성경을 찾아 읽으시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사 1:18~19, 시 50:15, 호 6:1~2, 본문말씀, 그리고 마 11:29 등입니다.

3. 혹 개인적으로 느끼는 피로가 있습니까?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어떤 부인이 가정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교회 예배에 결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드릴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 시어머니, 자녀들, 경제문제 네 가지로 스트레스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이 나가는 교회는 교인이 많지 않았으니 그것도 불만을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하면 해결되는 길이 있겠습니까? 제가 권하고 싶은 내용은 반드시 신앙적으로 분발하고 어려운 사실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며 힘 닿는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일을 두고 한가지 한가지 해결되는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성실한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피로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면

1)사람은 죄와 실수로 받는 피로가 많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렇게 믿으시고 사람에 대한 실수를 속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2)자기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욕심으로 피로가 옵니다. 이것도 겸손과 근검한 생활로 만회하셔야 합니다.(롬 12:16, 딤전 6:8) 성도는 자기의 정욕을 못 박고 주님의 뜻과 인도대로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파도를 타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뜻을 거스리면 행복을 깨는 것처럼 성도들의 삶의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복종할 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잠 19:21, 욥 23:13, 마 26:42)

3)고독에서 느끼는 피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지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시 146:3~10을 읽어보십시오. 자기 주위에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를 복되게 하신다” 하셨으므로(눅 6:38, 행 20:35) 인간의지를 더 외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경쟁대열에 서면 피곤합니다. 세상의 것은 다 유한합니다. 명예도 그렇고 대통령 자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유한한 것을 사모하지 마시고 영원 무한한 것만 사모해보세요.(고후 4:18) 피로가 없어질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앙망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1)우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도 있으시고 방법도 있으시며 섭리도 있으신 분입니다.

2)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할 결심을 가진 후에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는 교역자에게 묻고 상담을 하십시오.

3)그러면 가장 선한 방법과 노력할 일과 기도 할 것을 지도해 드릴 것입니다. “앙망”은 “바라보고 의지하며 기다린다”는 뜻입니다.(시 27:4, “카자”, 사 45:22, “파나”, 본문은 “코웨”) 소경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찾고(막 10:47), “삭개오”처럼 바라보며(눅 19:1~4), 회개하고(눅 19:8), 바른 생활을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한 후에는 찾아야 하니까요.(마 7:7)

그런 생활이 상당기간 지속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한가지 한가지 해결의 길이 열리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과 의지대로 통치하시는 섭리도 있으니까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욥 23:12~14) 하나님을 앙망하시므로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57 과 희망을 주시는 말씀(1) (사 41:1~16)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두 과목으로 나누어 상고하되 전체적 내용이 선민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희망을 주시는 말씀”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절 말씀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 친교하라”는 말씀이요, ② 2~4절은 “큰 일을 행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말씀이며, ③ “대적들이 의의 왕을 이기지 못하게 하심”이요(5~7절), ④ 8~14절은 “선민에 대한 보호와 은혜를 약속하심”이요, ⑤ 15~16절은 “의의 왕을 강하게 하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은혜를 주실 하나님과 친교하라” 하심(1절)

1)하나님과 친교 할 대상은 “섬들”과 “민족들”입니다. 이들은 대적의 침략으로 수난을 당하여 먼 곳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선민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장차 위로를 받아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지중해와 구브로 섬뿐이요, 많은 섬들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사이인 에게해에 있습니다. 따라서 잠적한 유대인과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사 45:22, 행 1:8)

2)선민들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합니다. 특히 국가적, 개인적으로 수난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시 50:15, 사 1:18)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하나님과 친교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으니, ① 하나님 앞에 잠잠함이요(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처분을 기다리는 뜻, 출 14:13), ② 힘을 새롭게 함이며(새로운 용기를 내는 것), ③ 하나님께 가까이 나옴이요(믿음으로 의지하는 것), ④ 말하는 것이며(기도하는 것), ⑤ 서로 변론하는 것(원고와 피고가 재판장 앞에서 판결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앙망하는 태도”에 속하는 것입니다.(40:31)

2. 큰 일을 행할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2~4절)

바울사도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롬 4:17) 홍해를 가르실 분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엽기적인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1)“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는 일”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70년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동방에서 “고레스” 왕을 일으키신 것을 의미하고(44:28),

2)“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심”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로 의로운 일을 위하여 큰 왕을 불러 쓰시는 분이란 뜻이요,

3)“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시는 일”(바벨론과 그의 식민지들을 점령하게 하시는 일)

4)“왕들을 치리하게 하시는 일”(바벨론의 식민지를 해방시켜 그 땅에 왕을 세운다는 뜻)

5)“전쟁을 주도하시는 일”(이길 자에게 힘을 주시고 패할 자들은 티끌과 초개처럼 약하게 하심, 삼상 17:47)

6)“이길 자가 정복의 대상을 따라 무사히 원정하게 하시는 일”(3절, 메데 파사에서 중동 애굽까지 가는 노정을 의미함)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란 뜻입니다.

4절에 보시면 “이 일을 누가 행하고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영원한 미래 역사)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원문은 태초전이라 함)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끝날에 통치 받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하시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큰 일을 명정(섭리대로 명하심)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3. 대적들이 의의 왕을 이기지 못하도록 섭리하심(5~7, 11~14절)

여기의 대적들은 바벨론의 연합군이고 의의 왕은 고레스의 군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5~6절에서 의의 군사가 나타났을 때 섬들(1절의 해석과 같음며 바벨론의 식민지임)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함께 모여와서 각기 이웃을 도우며 담대할 것을 권할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5절) 그들이 의지하던 우상숭배의 신앙을 정립할지라도 역시 소용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6절)

2)7절의 말씀은 “우상을 잘 보수하거나 제작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킨다”는 뜻인데 이는 이방인들이 우상신앙을 정립하여 미신적 보호받기를 원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4. 선민에 대한 보호와 은혜를 약속하심(8~14절)

1)8절에서 하나님은 선민을 “나의 종, 나의 택한 자, 나의 벗, 약속을 주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명칭이요,

2)또 9절에서는 “땅 끝(먼 곳)에 거할지라도 그곳에서, 또 땅 모퉁이(숨겨진 곳)에 거할지라도 너를 부르고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이나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는 애착을 느껴도 필요하지 않거나 훼손될 때는 아깝게 여기지 않고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택함 받은 자들이 쓸모 없을 만큼 부적격할지라도 싫어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니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하심과 모든 일을 후회 없이 경영하시는 완전함과 사랑의 무한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민 23:19, 요 13:1, 시 23:6) “땅 끝과 땅 모퉁이에서 부르신다”는 뜻은 전쟁의 수난에서 건져주시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어느 곳에 있던지 부르신다는 뜻입니다.(마 24:14)

3)10절에서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마 9:15)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놀랄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성도를 “굳세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으니, 이와같은 보호의 은총을 체험하면서 든든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11~12절에서 “선민에게 노하던 자들(앗수르, 바벨론, 복음의 핍박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선민)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멸망할 것이며 너와 싸우던 자들을 찾아도 마나지 못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의 대적(앗수르, 바벨론)을 물리쳐 주심과 동시에 영적 대적에 대하여서도 궁극적 승리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요 16:33, 계 20:10)

5)13~14절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을 권고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고, 그 믿음 따라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너의 하나님”, “네 오른손을 붙드심”, 또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시고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선민을 “지렁이 같다”하심은 “욥”이 인생을 구더기로 비유한 것처럼(욥 25:6) 성도는 존귀하나(시 16:3) 범죄하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연약한 백성을 그 연약과 수난에 상응하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네 구속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그 분의 순결 엄위하심을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5. 의의 왕을 강하게 하심에 대하여(15~16절)

1)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원수인 바벨론을 응징하시기 위하여 메데 파사의 고레스 왕을 일으켜 쓰실 때에 “그로 하여금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아(강하게 하시는 뜻) 그로 하여금(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고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메데 파사를 강하게 하여 선민의 대적 국가를 멸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큰산(큰 국가)이 무너지면 작은 산이 될 것이고, 작은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되는 것처럼 적국이 망하여 가루처럼 부서져 없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단 5:31) “티끌이 바람과 함께 까불릴 때 날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쉽게 망하게 하실 때 성도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자랑하게 될 것이라”(16절)고 하셨습니다. 시 126:1~4, 에스라 1장 을 읽어보십시오.

제 58 과 희망을 주시는 말씀(2) (사 41:17~2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본 장 전반부에 기록된 말씀에 이어서 “희망을 주시는 말씀”으로 상고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징계로 매를 맞고 고난 당할 선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선민이 징계를 받게 됨은 “바벨론 포로 됨”을 의미하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은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바벨론을 죄악 세계로 고레스왕을 구세주로 비유하여 신령적 구원의 교훈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① 17절은 “위로의 은총을 주시는 때”를 말씀하셨고, ② 18-20절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심”이며 ③ 그 나타내신 일은 “고레스왕을 일으키심”인데(25절) ④ 이 사실은 “하나님만 아시고 행하신 일”이며 ⑤ “우상은 헛것이므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공허할 뿐이라”(21-24, 29절)고 하셨습니다.

1. “위로의 은총을 주시는 때”에 대하여(17절)

이 때는 징계를 받는 선민이 “상당한 고난을 받고 그 고난의 분량이 찼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버리지 않을 것이라”하심은 징계의 분량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범죄의 분량과 시일을 따라 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렘 29:10, 겔 4:5)

2.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18-20절)

슥 4:6과 눅 1:37에서 “하나님은 능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인 일을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심은 물론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십니다.(롬 4:17)

1)“자산(나무가 없는 붉은 산)에 강을 여시고 골짜기에 샘이 나게 하시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시고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하여(18절) 광야에 백향목과 싯딤 나무(아카시아 또는 조각목, 출 25:10)와 화석류(느 8:15)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나무의 일종, 도장 나무)을 재배할 수 있게 하신다(19절)”함은 한 마디로 “사막을 농장되게 하시는 이적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땅을 살리는 일은 곧 생명을 부활시키는 능력과 같은 것입니다.

2)이런 일이 있을 때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 과연 “여호와의 손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것인 줄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0절)

3.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타내신 일은 고레스왕을 일으켜 쓰신 것임.(25절)

1)“내가 한 사람(고레스왕. 44:28, 45:1)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대적의) 방백들을 회삼물(벽에 바르는 흙 재료)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 같이 할 것이라”(25절)고 하셨습니다.

2)메데 파사의 초대왕 고레스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입니다.(스 1:2-4) “그가 북방에서 온 것”은 바벨론 북쪽에 있는 “메디아”를 먼저 정복하였기 때문이요, 또 해 돋는 곳(동방. 2절)에서 온 것은 메데 파사국이 바벨론의 동방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군대이므로 그 대적을 “쉽고도 힘있게 밟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이 일은 하나님만 아시고 행하신 일입니다.(26-28절)

1)25절에서도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일으키셨다”한 것처럼 26절에서도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우리에게 알게 하였느뇨 누가 이전부터 우리에게 고하여 이가(이 사람 고레스)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뇨 능히 고하는 자나 보이는 자도 없을 뿐 아니라 너희의 말(선지자의 증언)을 듣는 자도 없다” 하셨고, 오로지 “하나님이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하시므로(27절) 하나님만 아시는 일을 “선지자를 통하여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과 경영을 알 자는 사람이나 우상 등 아무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28절)

5. “우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헛것”이라고 하심.(21-24, 29절)

1)우상 주의자들은 자기의 우상신을 인정받게 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고 변론을 한다 하여도 “장래사를 모르기 때문에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유일신이심을 만물과 이적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우상도 그런 증거를 보여 보라”하신 것은 우상의 존재가 무익한 것임을 풍자적으로 표현하신 것이고,(21절)

2)우상은 장래사를 예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하셨습니다.(22-24절) 우상은 “장차 당할 일(후래사도 같은 뜻)과 있을 일을 알면 고하여 보라”하여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22절)

3)또 “복과 화를 내릴 수 있어야 우상의 신적 존재를 알고 놀랄 것이지만 그것 역시 할 수 없으므로(23절)

4)“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들의 일은 허망하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가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4절)

성도들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물질 우상, 문화 우상, 인간 우상, 지식, 권세, 명예 우상, 현실 영달의 우상을 떠나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구원의 반석이요, 의지의 대상으로 모시고 믿음 생활을 굳혀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시62:1-2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하셨고,62:-12에서도 같은 교훈을 하셨읍니다.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 59 과 메시야 예언과 초청 (사 42:1~17) 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고 “메시야 예언과 초청”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4절은 “메시야에 대한 소개의 말씀”이고, ② 5-8절은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며 ③ 9-17절은 “메시야의 사역과 관련된 초청”의 말씀입니다.

1. 메시야에 대한 소개의 말씀.(1-4절)

1)1절에서 “메시야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며 또 하나님이 자기의 신을 그에게 주셨으므로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시지만(마 17:5) 종의 신분처럼 충성하신 분이요,(마 12:18, 빌 2:7) 하나님이 그를 중보자로 택하여 세우셨습니다.(히 5:5-6) 그리고 “그에게 신을 주신 것”은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 것이요,(요 3:34)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푼다 하심”은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통치가(시 15:2) 이스라엘 선민 세계에서 이방인 세계에까지 확장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행 1:8) 신약 시대에는 이미 이방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복음을 받은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정신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온유 겸손하다”고 하셨지요.(마 11:29) 곧 “목소리를 높여 외치지 아니하셨고,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신다”하신 것은 그 만큼 겸손하게 일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선전이나 인기주의를 나타내시지 않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에서 예수님은 “약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며 긍휼하시다 하여 공의를 경홀히 하시는 분도 아니시라”고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연약한 자)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죽음에 직면한 자)를 끄지 않으심”이 곧 주님의 긍휼을 나타내심이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심”은 주님이 “공의로운 진리 자신이라”(요 14:6)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의냐?”할 때 진리대로(진리는 예수님과 성경임.) 시행하는 것이 공의가 되는 것입니다.

4)4절에서 “메시야는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는다고”고 하셨습니다.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분이고, 현실적 고난을 영원한 영광으로 바꾸신 분인즉 쇠하거나 낙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그리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시니 먼 곳에서 사는 섬사람들까지(온 세상을 뜻함.) 주님의 교훈을 앙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기독교는 세계로 퍼진 종교입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생활과 심판의 원리라고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2.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5-절)

1)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은 5절에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셨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고,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분이며 또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神)을 주신다”는 뜻은 땅 위의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주신다는 뜻입니다.(행 1:4-5, 요 14:16)

2)6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여호와)이 의로운 일을 위하여 메시야(너)를 불렀은즉 그의 손을 잡아 보호하여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으로 고난 많은 세상에 오셔서 죄와 상관없이 사셨은즉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마땅하고 “백성과의 언약이 됨”은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메시야 보내실 약속을 하신 사실에 대하여 그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빛도 되셨습니다.

3)7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間)에서 나오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진리를 깨닫게 하여 자유를 얻고 빛을 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간(間)”이란 장소와 입장이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소경과 육체적으로 감금된 자를 직접 해결해 주신 사실도 있으나(요 11:37, 행 12:5-12) 그보다 더 큰 뜻은 어두움(절망과 무지)에 처한 자를 가르쳐서 진리의 빛으로 나오게 하시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듣고 깨달으라”하시고 많이 가르치셨습니다.(마 15:10)

4)그리고 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출 3:15)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홀로 받으셔야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이 영광 받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오로지 영광을 하나님게만 돌리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자기나 인간에게 돌아가는 영광을 크게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메시야 사역과 관련된 초청의 말씀입니다.(9-17절) 이 말씀이 메시야 사역과 관련된 이유는 앞 부분에서 메시야 사역을 말씀하셨고, 또 9절에서 “새 일”을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요,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크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룬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의 예언대로 “앗수르가 패한 것” 같은 것입니다. 열왕 시대에 선지자의 예언이 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새 일이 있을 것을 시작 전에 예고하시는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10절의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이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하심은 먼 곳의 거민들이 복음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 “만물과 섬들이 찬송함”은 시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3)11-12절도 10절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이스마엘의 아들, 창 25:13)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도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하셨으니 구약 시대의 비선민인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에돔의 후손들도 신약 시대에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셀라”는 에돔 족이 살던 곳인바(왕하 14:7) 아마샤왕이 정복하였지만 그 곳에 사는 비선민 에돔족도 복음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섬”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41:1) 땅 끝 또는 먼 곳을 의미합니다.

4)13-14절 말씀은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전개시키실 때 마귀에 대하여 강한 분노로 역사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용사처럼 나가시고 전사처럼 분발하시며 크게 부르시고 그 대적(마귀, 복음의 원수)을 크게 치실 것이요,(13절) 오랫동안 고요하고 잠잠히 참았으나 이제는(구속 사역을 전개하시는 시기) 해산하는 여인의 부르짖음처럼 헐떡이는 모습으로 분발하실 것이라”(14절)

5)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자(15,17절)와 광명을 볼 자들(17절)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치를 당한다”는 말씀은 15절의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고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라 하시므로 좋은 것을 파멸멸 하시므로 악이 패할것을 뜻하고 17절은 “우상 숭배자들이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우상은 많은 패배와 저항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광명을 볼 것”에 대하여는 16절에서 “내가 소경을(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감취어졌던 복음의 길)과 첩경(지름길, 빠른 길)으로 인도하여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고 굽은데(장애를 주는 일들)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구원 사역)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하시므로 어느 곳을 막론하고 흑암에 처한 많은 인류들에게 광명의 복음이 전파될 것과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바로 이 복음이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크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0 과 선민 세계의 두 가지 불행 (사 42:18~25)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선민 세계의 두 가지 불행”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한 가지 불행은 “위선적 사역자들의 잘못됨”이요,(18-20절) 또 한 가지 불행은 “바벨론에게 점령당할 일”(21-25절)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 위선적 사역자들의 잘못.(18-20절)

성직자의 부패는 사사 시대부터 있었습니다.(삿 2:12-17) 열왕 시대의 한 늙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를 잘못 지도하여 그를 죽게 한 일이 있었고,(왕상 13:11-30) 그 외에도 거짓 예언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왕상 22:5-28) 그 비례가 400:1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예언자 400명이 있는데 그 중에 바른 말을 한 선지자는 “미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방 종교의 선지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도 않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가리켜서 “귀머거리요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않고 눈으로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메시지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신앙 생활에 참고될 사실을 보아도 유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종으로 세우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무지하고 또 깨닫는 지혜가 없으며 탈선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도 제사장이면서 탈선한 것처럼 이 시대에도 성직자로서 탈선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28세부터 교역자 노릇을 하였는데 이 글을 쓰는 65세 때에 과거를 생각한즉 성경의 의미도 잘 모르고 설교한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설교를 하였을까?”하면서 모험 같기도 하고, 또 성령님이 “마른 막대기를 쓰신 것”같은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들으라 보라”하신 것은 “바른 말과 바른 생활을 터득하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지 않고 현실적 추세에 끌려가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줄로 알거나 가르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인즉 유의하고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누가 나의 보내는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하시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과 친한 자, 하나님의 종된 자 치고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미련하고 더 위선적 이라고 말씀 하셨읍니다. 다시 말하면 더 지혜롭고 더 빛나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오히려 더 못한 입장에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3)그런즉 “잘 듣고 보라”고 하셨습니다.(18절) 따라서 하나님의 종된 사역자들은 자기의 유력성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무지한 것과 불의한 것과 실천하지 못하는 것 등의 취약점을 깨달아 보완하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진리의 말씀대로 증언하지 못하는 상태를 “벙어리 개”와 같다고 하셨습니다.(56:10) 복음 사역자로서 자신도 모범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교인의 무지와 욕심과 교만과 위선과 잘못된 현세욕에 대하여 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을 것인즉 반드시 그 이유를 분석하여 성도의 잘못을 바로 지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바벨론에게 점령당할 일을 예언하심.(21-25절)

본문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21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렘 12:1) 그 의로우신 뜻대로 선민을 존귀케 하시기 위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존귀해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존귀를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교훈을 크게 하신다”함은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 차례 깨우치시고 알린 것을 의미합니다.

2)그러나 “그 백성들은 그 길(하나님의 뜻)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않았고,(24절 하반) 하나님이 예언하신 이 일(장래사, 23절, 바벨론에게 점령당할 일)에 대하여서도 삼가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어리석음을 나타냈다”고 하셨습니다.(23절)

3)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되 구할 자가 없게 하신다(22절)”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일으켜 시행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24절)고 하셨습니다. “고레스를 일으키시고(사 41:2) 정복자는 강하게 하시며(41:15-16) 망할 자는 약하게 하여(41:28-29) 자기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4)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셔서 그 사방으로 불붙듯 하나(맹렬한 진격을 뜻함) 깨닫지 못하고 몸이 타나(비참한 죽음을 뜻함) 역시 마음에 두지 않는다”(25절)고 하셨습니다. 벌받을 자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약 100년 후에 있을 화를 예언하였지만 완악한 백성들은 믿지도 않고 회개할 체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 61 과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 (사 43:1~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소개와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많고, 또 “하나님이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와 요구사항”, 그리고 “우상주의의 무능성”을 지적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대표적인 제목을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로 정하였습니다.

1.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소개.(1,3,11-13절)

1)1절에서 “선민을 창조 또는 조성하신 하나님”, “선민을 구속하셨고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 또 “너는 내 것이라 하시며 선민을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하나님을 창조자요, 구원자이시며 선민을 특별 통치(내 것)하시고, (성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것은 특별 통치의 대상임을 나타내신 것이고, “구속”이란 상당한 대가를 치러 공의를 만족시키신 후에 죄를 용서하신 뜻입니다. 또 하나님은 선민을 “지명하여 부르신 분”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다 지명 받는 것이 아닌즉 지명을 받고 부름을 받은 성도는 남이 받지 못하는 큰 은혜를 받은 줄로 아셔야 합니다.

2)3절에서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라”하셨으니 여기의 “너”란 뜻은 선민을 지칭하는 복수 대명사의 뜻이지만 성도 개개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창 28:13,15) 따라서 성도는 단체(교인들)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보다 자기 개인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민감하게 느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말씀하신 뜻은 성도로 하여금 그의 거룩을 흠모하고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3절에서 “네 구원자임이라”하시고,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너의 속량물로 대신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스와 스바”는 같은 애굽 민족입니다.(창 10:67) 따라서 “애굽을 속량물로 주신 뜻”은 이스라엘 선민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실 때 상당수의 애굽인을 죽게 하시고 선민을 구원하셨으니 이때에 애굽인들이 열 가지 재앙과 홍해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다른 백성을 제거 하시고 구원하셨으니 이것은 애굽인 뿐 아니라 가나안 본토민들 에게도 해당되고, 또 영적 구원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에 대한 예표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를 선택한 즉 다른 것을 버려야 하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3)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소개는 11-13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11절)는 말씀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고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13절)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12절에서 “고하고 구원하며 보이는 분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구원과 통치도 하나님이 홀로 하신즉 성도는 그 일에 대한 증인이 될 뿐이라”하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절대성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창조자, 구원자, 통치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이 일을 막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를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1,2,4,7절)

1)1절에서 “창조, 구속, 선택, 소유를 삼으신 뜻”이 있고, 2절에서는 보호자 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며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고,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도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라”하셨으니 물 가운데로 지난 것은 선민이 홍해를 건널 때 보여주신 것이고, 불 가운데서 보호할 것은 다니엘에게 성취될 일이지만(출 14:21, 단 3:19-28) 여기의 물과 불은 환난을 의미하며 환난 중에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시 50:15, 롬 5:3-4)

2)4절에서 “선민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의 자녀를 귀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지명하여 부르신 후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를 삼으셨은즉 보배롭고 귀히 여기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른 생명들(애굽인들)을 대신 죽이시고 자기 백성을 살리신 것이라”(4절 하반)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존귀히 여기시는 만큼 존귀함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3)“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7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것은 성도와 하나님이 연합된 상태를 말씀한 것입니다. 아들을 말할 때 그의 부모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성립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란 명분과 영광 목적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선민에게 베푸실 은혜의 계획에 대하여.(5,6,8절)

1)우선 “함께 하심”(2,5절)에 대하여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시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 포로 기간중 동서로 멀리 흩어진 선민을 포로 해방 시기에 모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신다는 뜻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복음이 신약 시대에 동서양으로 멀리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동서 뿐 아니라 북방과 남방도 해당되므로 이는 온 세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선민들과 택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이끌어 내실 때는 누구도 선민을 구류하지 못하도록 섭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믿음의 길로 나올 때 구류하지 못하게 하시는 일과(6절) 이끌어내는 일(8절)에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으로 관여하시는 것입니다.

2)그렇게 될 때에 소경이나 귀머거리처럼 정보를 탐지하지 못하는 자들이라도 “일깨어 이끌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8절의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아무런 상식이나 정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의 소망을 갖지 않았던 백성들에게까지 해방 또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4. 우상은 헛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9-10절)

1)“열방(우상의 나라들)이 모이고 민족들이 회집할지라도 이 일(구원 계획)을 고할 자가 없고, 이전 일(과거에 예언하고 성취된 일)도 보일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로 증인을 세워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로 하여금 옳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보라” 하셨으니 이는 불가능한 일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절대자요, 역사의 섭리자는 하나님 뿐이란 뜻입니다.

2)10절 하반에서도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다른 잡신은 신이 아닌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요구하신 사항.(1,5,10절)

1)“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1,5절에서 두 번 강조하셨습니다.

2)10절에서 성도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은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어떤 환란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하나님을 알고 믿고 깨달아서 확실한 증인이 되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2 과 저주와 새 일 (사 43:14~28) 목록으로


본문 19절을 보시면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하시고, 새 일에 대한 말씀을 14-20,25절에서 말씀하셨고, 28절에 보시면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신다” 하시고, 선민이 일시적으로 저주받게 된 “타락상”을 21-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저주와 새 일”로 정한 것입니다. 역사적 순서에 따라 다음 대지부터 상고하겠습니다.

1. 저주에 관한 말씀.(21-24,26-28절)

1)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선민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 즉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2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선민되게 하신 것은 그의 주권에 의한 일이지만 선택과 부르심과 희생을 제공한 속죄와 보호 인도 공급 등 큰 은혜를 베푸시므로 선민을 구별하셨고, 그 목적은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었으니 선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믿음 생활”을 잘 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2)그러나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 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괴롭게 여겼으며(22절,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음.) 따라서 번제의 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 하였고, 자신의 제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다”(23절)고 하셨습니다. 혹 선민들이 절기나 특별한 경우에 제물을 드렸다 하더라도 믿음과 정성으로 드리지 않았다면 헛된 제물로 인정하실 것이니 역시 드리지 않음과 같을 것입니다.(사 1:13) 신앙 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3)하나님은 선민을 사랑하여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선민이 예물이 없어서 수고하여야 하거나 유향을 준비하기 위하여 괴로움을 당할 일이 없었지만”(23절)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않았고, 희생의 기름(짐승의 기름을 드리는 것, 레 3:25)으로..... 흡족하게 해 드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죄짐으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24절)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받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성이 없었고, 죄짐(회개하지 않고 누적되는 죄)과 죄악(사악한 범죄)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죄를 범할 때 괴로움을 받으십니다. 마치 자식이 범죄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과 같은 것입니다.

4)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선민들의 의가 없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요구하신 의는 “선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민이 그렇게 노력한 것을 기억할 수 없다”(26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로 기억나게 하고 변론하여서라도 의가 있으면 나타내보라”(26절) 하셨으니 이는 믿음과 정성과 노력이 없는 선민의 죄를 역설적 또는 풍자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5)27절에서는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서기관급)이 나를 배역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제사장급)로 욕을 보게 하시고 야곱(이스라엘 선민)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 거리가 되게 할 것이라”(28절)고 하셨습니다. 이 일은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한 후 약 100년 후에 있을 “바벨론에 의한 국가적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2. 새 일에 대한 말씀.(14-20,25절)

여기의 “새 일”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민족(선민)이 다시 빛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국을 멸망시키신 후 70년 만에(주전 548-478) 바벨론을 망하게 하시고 선민들에게 믿음의 회복과 큰 자유를 주셨습니다.

1)이 자유의 복은 “하나님의 속죄에 근거한다”고 하셨습니다. 멸망은 죄에 대한 벌로 주셨지만 자유와 회복은 그 죄를 용서받으므로 시작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않는다”(25절)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다 죄를 지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을 때는 복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시 32:1)

2)14절에서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선민(너희)을 위하여(메데 파사왕 고레스를) 바벨론에 보내신즉 모든 갈대아 사람(바벨론족)이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고레스왕이 침략할 당시에 바벨론왕과 방백들은 연회 중에 있었고,(단 5:29-30) 황급히 도망할 때 그들이 연회용으로 사용하는 강물에 띄어진 배를 타고 유프라데 강물을 따라 아라비아 쪽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이며 그들의 왕이라“(15절)고 하셨습니다. 국가는 망하여도 성도의 왕국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막 1:15, 눅 17:21, 막 9:1, 시 145:13)

3)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은 “출애굽 역사(役事)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역사는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거친 길)을 낸 것”이었고,(16절) “애굽의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 가는 등불 같게 하신 일”(17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전 일(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하셨으니 이는 바벨론의 멸망이 그보다 큰 일이기 때문에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하나님이 새 일을 정녕히 나타내실 때에 그것을 알게 될 것인즉 이는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흐름” 같은 큰 일이요,(19절) 광야와 사막에 물이 조성되면 그 곳의 들짐승들이 삶의 기회를 만나 기뻐할 것처럼 하나님의 새 일로 인하여 선민이 해방을 받고 영적 은혜가 풍성해질 때에 성도가 누릴 은혜가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이 생기는 일” 같고, “들짐승 곧 시랑과 타조도 하나님을 존경할 것”은 선민의 기쁨을 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요, “광야의 물들을.......택한 자가 마시게 될 것이라(20절)”하신 것은 하나님의 복음적 은혜 또는 성령의 충만을 의미합니다.(55:1, 요 4:14, 7:37-39)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에게 유감스러운 일이 있을 때 징계하실 수 있고, 또 특별한 은혜를 베푸실 때는 엽기적인 새 일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63 과 네 가지를 깨우치심 (사 44:1~28)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 말씀을 읽고 “네 가지를 깨우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9-20절(우상의 허망함)을 제외한 다른 말씀들에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 선민에게 주신 명령의 내용이 각 절 속에 나타나 있고, 본문을 부분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이상의 네 가지 제목에 따라 살피기로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

1)1,6,24절에서 “말하노라”하시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을 말로 상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로 자기를 계시하셨고,(엡 3:3-5, 히 1:1-2) 성경으로 그 뜻을 나타내주셨습니다.

2)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홀로 하늘을 펴셨고 땅을 베푸셨다”하셨으니(24절) 곧 창조자이십니다.

3)땅에 비를 내리시므로 갈한 자에게 물을 주시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시는 분이며(3절)

4)자기의 신(나의 신:성령)을 선민(네)의 자손에게 또 그의 복을 선민의 후손에게 주시는 분이시고,(3절)

5)왕이시며(만왕의 왕, 만주의 주. 딤전 6:15) 구속자이시고(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워 구속하셨음) 만군의 여호와시며(모든 능력을 주관하심)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계 1:8, 만유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심)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6절)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만한 반석도 없다고 하셨습니다.(8절)

6)하나님은 옛날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로 선민을 세우신 후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는데 “하나님처럼 외치고 고하며 진술하신 자가 없은즉 만일 있다면 후에 될 일과 올 일을 고하여 보라”(7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분이고, 또 선지자를 통하여 외치고 고하며 진술하게 하신 분입니다. “옛날부터 들리지(말씀으로 듣게 하심) 않았느냐 고하지 않았느냐”하시므로 하나님이 이전부터 뜻을 선포하신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내셨습니다.(8절)

7)하나님은 선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증인을 세우신 분이고, 또 “선민으로 하여금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셨다”고 하셨습니다.(23절) 이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두 가지 사명을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증언하여 나타내는 사명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사명이니 이러한 사명은 성도(선민)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지 않은 자와 하나님의 자녀 아닌 자가 어찌 증인이 되며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성도는 증거하는 일과 영광 돌리는 일을 이방 세계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독자적이어야 하고 영적 사명도 이방인의 도움 없이 교회와 성도가 독자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8)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거짓 선지자가 미혹하는 역사)를 폐하시는 분이시고, 점치는 자를 미치게도 하시며 지혜로운 자들(인간의 지혜만 자랑하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지식을 어리석게 하시는 분이라” 하셨고,(25절)

9)또 “모든 역사를 말씀(뜻)을 나타내어 응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26-28절)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의 창조 사역과(창 1:3)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마 8:8-10) 하나님이 명하시면 천사들의 역할과 천지의 진동으로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시고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살리라”하시면 그렇게 응하고, “유다 성읍이 중건되고 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라”하시면 역시 그대로 될 것이요,(26절) “깊음들과 강물들이 마르라”하시면 역시 그렇게 되고,(27절) “고레스는 나의 목자(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가 되어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하시면 그렇게 되고, 또 “예루살렘이 중건되고 성전에 기초가 세워져라”하시면 그대로 될 것인즉(28절) 이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창조사역 처럼 말씀으로 이루시는 분임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10)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선민들에게 은혜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4-5절) 곧 “풀 가운데서 솟아나게 하시되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4절) 하셨으니 “풀 가운데서 솟아남”은 선민의 자취가 보이지 않을 만큼 쇠하여진 상태에서 새싹이 나듯 자취를 드러냄을 뜻하고, “시냇가의 버들같이 됨”은 버들의 순이 속히 자라는 것처럼 선민의 위세가 신속하게 나타날 것을 뜻합니다. 그때에 선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고 자랑하게 될 것이며(5절)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야곱이 그들의 조상됨을 스스로 자랑)할 것이며 또 자신들이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간판처럼 내세우고 족보같은 책에 남기는 것)하고, 이스라엘 이름(야곱의 이름과 같음)으로 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현저한즉 그 하나님께 자기를 예속시키고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에 대하여.

1)하나님은 선민을 “종이라” 하셨고, “택한 이스라엘, 택한 여수룬”이라 하셨으며(1-2,21절) “지으셨고,(2,21절) 모태에서 조성하셨으며(2,24절) 도와줄 대상이요,(2절) 잊지 않으실 것이고,(21절) 죄를 도말하여(22절) 구속하셨다(22-24절)”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의 비서가 종이라도 존귀한 것처럼 하나님의 종된 것은 존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세와 예수님처럼(히 3:1-5, 빌 2:6-8) 충성된 종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모태에서 조성하신 만큼 잘 아시는 분이시고 도와주실 분이며 실수없이 택하셨은즉 잊으실 수 없고, 그 백성을 “이스라엘, 여수룬”이라 칭하신 것은 사랑의 대상으로 칭하신 뜻입니다.

3)죄를 한 번 용서하시면 이는 완전히 도말 하심이 되어 다시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사 43:25) 하나님이 선민의 죄를 구속하실 대 독생자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죄를 도말(깨끗이 용서하시는 뜻)하시기 때문에 구속이란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또 “야곱을 구속하셨다”(22-24절)는 뜻은 택한 백성만 구속하여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4)성도는 종의 사명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는 점과 모든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란 점을 더욱 유의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히 의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신 명령은 “돌아오라”(22절), “들으라”(1절), “두려워말고 겁내지 말라”(2,8절), “이 일을 기억하라”(21절), “감사하고 찬양하라”(23절)는 것입니다.

1)“돌아올 것”은 탈선된 생활에서 회개함이요,

2)“들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배울 것이고

3)“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 것”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하고 마음에 안정과 소망과 용기를 갖는 것이요,

4)“이 일을 기억할 것”은 출애굽한 선민을 인도하신 일을 기억하고, 또 그 보다 더 큰 새 일(42:19, 바벨론에서의 해방과 복음적 축복)을 약속하신 일에 대하여 기억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삼림의 나무들이 노래하여야 할 것”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큰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을 역설적 또는 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4. 우상의 허망함에 대하여.(9-20절)

우상이 허망하고 무익한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1)우선 그것의 증인들이 “미래를 보거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2)또 허망하고 무익한 것을 의지하였은즉 그것을 만들거나 기뻐한 자나 그와 뜻을 같이한 동류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을수 없으니(9절) 우상은 연약한 인간이 무지함으로 만든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3)또 그것을 만든 자는 장색(철공)이고, 목수(목공)인데(11,13절) 이들은 존귀한 사람도 아닙니다. 장색이 철로 우상을 만들 때 철을 숯불에 불리고,(달굼)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릴 때(불길을 높이는 작업) 잘 먹지 못하거나 마시지 못하여 기력이 진하고 곤비해지는 것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만드는 자의 연약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물며 그가 만든 우상이 강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상의 허망함을 상상해보라는 것입니다.(12절) 목수도 나무로 우상을 만들 때 줄로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민 후 정규(正規)로 그어(모양을 본뜨는 것)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는 것이 곧 우상이란 것입니다.(13절)

4)나무 우상의 재료는 화목으로 먼저 쓰고 남은 것으로 만드니 역시 버려진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나무는 사람이 심고 재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향목이나 디르사 나무(실삼 나무 또는 70인역에서 상록 상수리 나무라 하였음.)나 상수리 나무를 우상의 재료로 취할 수 있는데 나무를 선택하여 심고 자라게도 하지만(14절) 본래 나무의 용도는 “땔감으로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사람이 그것으로 불을 피워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떡을 굽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니 가당치 않은 일”이란 것입니다.(15절) 16-17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또 하셨습니다. “한 가지 나무를 화목용과 우상 제조용으로 사용하고, 그 우상에게 부복 경배, 기도하며 너는 나의 신인즉 나를 구원하라”하니 어리석은 자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일이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눈과 마음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누구나 거듭나지 못하였거나 하나님이 총명을 막으시면 어리석음과 무지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요 3:3, 엡 2:1, 사 6:10)

5)나무는 인격이 아닌즉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그 나무의 얼마를 불살라 떡과 고기를 구워 먹은 다음 그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들었다 하여도 “어찌 그 나머지 나무로 가증한 물건(우상)을 만들 수 있으며 또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할 수 있느냐”고 말하지 않으니(19절) 이 어찌 무익함이 아니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6)“그는 재를 먹고 답답한 상태를 비유한 말씀, 재를 먹으면 침이 마르고 입안이 답답함.)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깨닫지 못하는 자가 마귀의 올무에 걸린 상태를 의미함.) 스스로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고도 말하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를 만큼 심하다 할것입니다.(20절) 우상은 장난감이나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음을 확실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64 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 45:1~25)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가장 많습니다. “누구의 하나님, 어떻게 하신 하나님, 또 어떤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증언자의 목적도 하나님을 알리는데 있습니다. 3절에도 보시면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셨고, 호세아 선지자도 “하나님을 힘써 알라”(호 6:6)하셨으며 성경이 곧 하나님을 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5:39) 성도가 하나님을 잘 알면 구원을 받음은 물론 은혜를 받는데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호 4:6) 하나님은 일반 은총에 대하여 만유의 하나님이시고 특별 은총에 대하여는 이스라엘 또는 성도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제목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선민(성도)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특별 은총을 선택자에 한하여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 또는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입니다.(롬 9:19-21, 엡 1:5) 본문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3절),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지명하여 부르시고....칭호를 주신 하나님”(4절), 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11,15절),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11절)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선택하실 때 일방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라”(5절)고 하신 것입니다. “띠를 동인다”는 뜻은 꼭 붙들어 힘있게 하시고 쓰신다는 뜻입니다. “지명하여 부르신 것”은 선민, 개인을 구체적으로 알고 목적을 두고 부르신 것이며 “칭호를 주신 것”(44:5)은 하나님과의 명분있는 관계를 맺어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절대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고 다른 신이 없다”(5절) 하셨고, 또 “해 뜨는 곳이나 해 지는 곳에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들로 알게 하여야 한다”(6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14,18,21,22절에서도 강조하신 것을 보면 유일신을 섬기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은 바로 창조자이시고 섭리자 이심을 1-3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3.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과 환난도 창조하며 모든 일을 행하는 분이라”(7절), 9-10절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셨고, 인생을 질그릇 조각중 한 조각 같다”하셨으니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다툼을 표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이 마치 자식이 부모를 거역할 수 없는 이치로도 설명하셨습니다. 12절의 말씀도 “만상을 명하여 창조하신 뜻”을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견고하며 헛됨이 없으며 사람이 거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18절) 하셨으니 만물을 하나님의 영과(창 1:31)과 인간 위주로 만드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평안과 환란(빛과 어두움)의 창조자이신즉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함은 물론(마 26:41) 평안의 복도 받도록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대상 4:10)

4. 하나님은 “강한 자를 일으켜 그 대적을 무찌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서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하나님이 왕 되게 하셨다는 뜻)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신다”하시므로 하나님이 고레스를 강하게 하시고 바벨론과 연합된 열국을 고레스 왕에게 항복하게 하시며 그 열왕의 무장을 해제하여 힘을 빼시고 열린 성문(항복의 의미)을 닫지 못하도록 섭리하여 고레스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2)또 고레스로 하여금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갖게 하여 그(너를;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르신 분이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3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적국에 숨겨진 많은 보화를 획득하게 하시고, 또 그의 마음을 감동하사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은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 개인에게도 숨겨진 보화를 발견케 하여 재물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창28:20-22)

3)13절에서 하나님이 고레스를 일으키신 것은 “의로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11절) 그의 하시는 일과 방법도 다 의롭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하는 모든 길을 곧게(형통하게) 하시고 나의 성읍(예루살렘)을 건축할 것이며 바벨론에 사로잡힌 자들도 값없이 놓게(해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잘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를 영적으로 마귀의 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4)바벨론이 고레스에게 망하고 유다 백성이 존귀하여지자 바벨론에게 정복 당한 상태에 있던 애굽과 구스와 스바도 승리자 고레스에게 예속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14절) 그런 의미에서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고레스에게로 돌아와 그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슬에 매여 건너왔음”은 바벨론에서 속박한 체형을 풀지 못한채 승리자에게로 돌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5.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신 분이시고,(15절)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이즐루:부어 내림의 뜻) 하시며 부어 내리시는 분이라”(8절) 하시므로 의의 역사가 충만하신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구원을 땅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땅이 열려) 의도 움돋게 하신다”(8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공의 실현과 구원 사역 등)가 움돋듯 시작하여 크게 성행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비 같이 듣게 하심”은 소낙비 쏟아지듯 크게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 8절에서 “이 일을 창조하셨음”은 하나님이 물질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관한 것도 수시로 창조하시기 때문에 고레스로 하여금 선민을 해방하게 하시는 일과 전쟁의 승패 문제, 또 권세자가 오르고 내리는 문제, 나가서는 신약 시대에 나타날 메시야의 구속 사역과 교회의 역사 등 신령한 일들에 대한 것도 창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롬 4:17)

6. “하나님은 장래의 일을 주관하신즉 묻기도 하고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장래사를 아시고 미래를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리신 장래사가 구약에서 많이 약속된 것은 축복과 저주를 받는 문제와 신약에서 성취된 복음 사역에 대한 약속이었고, 그 이외에 미래의 될 일을 알려주신 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장래사를 잘 참고하셔야 하고, 특히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사람이 할 수 없는 일)과 자녀들(선민)에 관한 문제를 하나님께 부탁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계시가 성경으로 끝난 시대에는 이미 주신 성경 계시 이상 새로운 것을 또 주시지 않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엡 3:5, 히 1:1-2)

7.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고”(15절) 말씀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을 헛되이 찾지 말라” 하셨고,(19절) “선민에게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21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즉(요 4:24) 보이지 않으므로 숨어 계시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안 계신 곳이 없지요.(시 139:5-10) 또 말씀을 나타내실 때 “고하고 진술하며 상의하게도 하시고”(요 5:39, 벧전 1:11) 음성이나 문자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가지 문화의 방도로 전파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헛되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44:26-28, 55:11) 23절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이 나가면 효력을 발하는데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맹약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말씀 권위에 복종할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장차 쓰일데가 있을 줄로 믿고 쓰는 것입니다.(2002, 6 . 8. 새벽) 또 하나님은 “의와 정직을 고하시는 분이므로 한 말씀도 은밀히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9절) 이 사실은 예수님도 그리 하셨습니다.(요 18:20) 진리는 매이지 않으므로(딤후 2:9) 핍박 세계라 할지라도 신앙에 관한 일은 사실대로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적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8. 또 하나님은 “우상을 만드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함께(숭배자들까지) 수욕(수치와 욕)을 당하게 되고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영적 선민)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셨으니(17-18절) 이는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헛되이 찾지 않음”에 대하여 필자가 “헛된 경건을 삼가자”는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해당 성구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즉 약 2:17, 1:6-8,22-27, 4:3, 시 24:3-4, 고후 6:14, 요일 3:10, 4:20, 마 6:12, 암 5:21-24, 사 59:2-3, 1:13, 렘 11:14, 겔 8:18, 골 3:5, 마 5:23-24, 7:21-22, 요 16:23, 고후 8:6-7, 히 10:22, 마 22:37, 15:8-9, 22:37, 시 100:4, 롬 10:2-3, 고전 13:3, 호 3:11, 마 11:13-14 등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절에서도 우상에게 기도하는 자들의 무지함을 꾸짖으셨습니다.

9. 하나님은 “선민을 열방에서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20절) 이는 열방으로 피난차 흩어진 백성들이 바벨론 멸망 후에 돌아올 자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뜻도 있지만 신약 시대에 많은 택한 백성들이 기독교에 귀도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의 모든 백성아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하셨읍니다(22절). 여기의 “땅 끝의 모든 백성”은 세계에 흩어진 택한 백성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요, 초청인 것입니다.

10. “의와 힘이 하나님께만 있고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4-25절) 24절의 “어떤 자의 말”은 어떤 성도가 증언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성도를 “어떤 성도”라 하신 만큼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와 힘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시므로 하나님만의 구원 능력과 전능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무릇 그를 노하는 자”(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대항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심판을 받는다는 뜻) 이스라엘 자손(선택받은 자를 뜻함)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구원받은 보람을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여호와의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2. 하나님의 통치 섭리 (사 45:1~13) 목록으로


이사야 45장에는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많이 알면 그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1.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메데, 파사국이 연합을 하고, 고레스를 왕 되게 하여 그에게 “목자”라는 칭호를 주시고,(44:28) 그를 강한 권세자로 만들어서(허리에 띠를 동임, 5절) 하나님의 적대 국가를 치게 하시고, 또 이기게 하시며 그들이 괴롭히던 선민을 해방하게 하시고 도와주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신 것이나 사사 또는 선지자와 왕을 쓰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러 사람을 쓰십니다. 또 하나님의 쓰시는 자가 전쟁을 할 때 대적 국가의 힘을 빼어 굴복 당하게 하시고,(삼상 17:47) 그 나라의 숨겨진 모든 보화를 취하게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45:1-3) 사람을 쓰시며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시고, 또 재물을 주시며 그의 선민에게는 해방의 은혜와 귀환의 은혜와 신앙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과 평안과 환란을 창조하시는 분이라”(7절)고 하셨습니다. 빛은 평안이고 어두움은 환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복과 화를 임의로 주장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신 30:15) 성도는 화복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 때 각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희비가 엇갈리는 상태를 보셨을 것입니다. 축구에 이기고 지는 것은 명분에 불과할 뿐 그것이 큰 국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그 명분을 취하기 위하여 응원을 하는데 그것이 기쁨도 되었다가 낙심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도 주관하십니다.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쓰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욥1:12,시119:67)

3. 하나님은 인생이 피조물로서의 본분 지키는 것을 좋아하십니다.(9-10절)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인생을 질그릇으로 비유하신 말씀은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자요, 주권자이시며 목적에 의하여 창조하신 뜻을 나타내셨고, 다음에 질그릇은 인생이 피조물임과 동시에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요, 또 그릇이 주인에 의하여 쓰여지는 것처럼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 9:20에 보시면 “자기는 인생 뿐임을 알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인생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입김으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은 인생을 의지할 수도 없고,(시 146:3) 자기 뜻대로 할 것도 없으며 “오직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할 것입니다.”(약 4:15)하고, 겸손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장래의 일을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지배자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래 일을 물으라”고 하신 줄 압니다. 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경영하시는 일을 완성하시도록 책임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특히 선민을 보호하시는 일과 구속 사역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또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서도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제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하신 말씀에 대하여 더 설명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점쟁이처럼 여기시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일을 다 주관하시고 아시지만 계시를 주시던 시대에 특별한 일에 대하여 장래 일을 말씀하셨으나(메시야 보내실 일, 선민의 장래 문제, 사울이 왕되고 나귀를 찾는 문제, 삼상 10:1-3, 물고기 입에서 돈을 얻는 문제 등, 마 17:27) 성경으로 표준 계시를 끝내신 다음에는 성도로 하여금 성경 중심으로만 살게 하시려고 계시를 더 이상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요 21:15, 엡 3:3-4, 히 1:1-2, 계 22:18-19을 확인하시고 성경 중심으로만 생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딤후 3:16-17)

5. 마지막으로 환란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그 환란을 무엇에 쓰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의 특별 계획에 쓰십니다. 구속 사역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셨고,(53:5)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어떤 이를 나면서부터 소경되게 하신 일이 있었으며(요 9: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사로가 죽었고,(요 11:4) 사탄과의 변론에서 욥의 신앙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욥에게 고난을 주셨으나(욥 1:8-12) 이런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마 5:11-12)

2)징계의 목적으로 쓰십니다. 질병(신 28:27, 고전 11:30, 약 5:15), 전쟁(삿 10:6-9, 사 43:22-28), 가뭄(흉년, 신 28:15-19), 병충해(욜 1:4, 시 78:46), 풍랑(욘 1:4), 죽음(자식, 삼하 12:18)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시 7:12에 보시면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여 예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깨달음과 연단의 목적으로 쓰십니다. “욥”은 고난으로 연단을 받고 “자기의 믿음이 정금 같이 될 것이라” 하였고,(욥 23:10) 시편 기자도 “고난을 받으므로 깨달음과 진리 실천을 하게 되었다”(시 119:67,71) 하셨으며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도 역시 “겸손의 연단과 깨닫게 하시는 목적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고후 12:9)

4)심판의 도구로 쓰십니다. 심판의 도구란 아주 없애시거나 지옥의 불로 영원히 고난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옥은 평안의 반대되는 곳이니까요.

결론적으로 성도는 어떤 고난에 직면하였을 때 먼저 원인 분석을 잘 하신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애 3:33) 하나님은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사 49:13, 합 3:2) 따라서 고난을 믿음과 지혜로 잘 극복하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이 연단과 소망을 주기 때문에 즐거워한다” 하셨고,(롬 5:3-4) 야고보 선생님도 “시험을 참고 견딜 때 복이 있다” 하셨으며(약 1:12)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기를 “애매한 고난이라도 주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아름답고, 또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하므로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벧전 2:19, 3:17) 그 외에도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교훈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약 1:12, 롬 8:17, 딤후 1:8, 2:3, 살후 1:7 등) 주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은 큰 상급이 약속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고 또 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잘 깨달으셔서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제 65 과 하나님의 의로 구원하심 (사 46:1~13) 목록으로


본문 1-2,5-7절은 “우상의 무능함”을, 3-4절은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8-11절은 “구원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모략”을, 12-13절은 “의로 구원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의로 구원하심”을 제목으로 택하였습니다.

1. 우상의 무능함을 말씀하심.(1-2,5-7절)

1)“바벨론이 섬기는 벨과 느보(우상신, 애굽의 바로, 로마의 쥬피터 같음)가 훼파되어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워간다”(1절)는 것입니다. 벨과 느보는 바벨론의 절대적 우상신입니다. 그 신상을 금으로 60규빗 높이와 6규빗 넓이(90자×9자)로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운 후 나팔을 불 때 모든 국민이 절하게 한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단 3:1-12) 그러나 그 신상도 물질에 불과한즉 파사의 침략에 의하여 엎드러지고 구부러진 상태로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실려가게 되니 짐승만 피곤하게 만드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1절) 그 신상은 우상의 권위가 꺾일 뿐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며 다만 금붙이의 가치를 이용하기 위하여 끌려가는 것이니 무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상이 힘이 있다면 끌려가는 상태에서 스스로 구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2절)

2)하나님을 우상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들을 일깨우실 목적으로 “자신의 절대자 되심을 믿으라”고 하십니다.(5절)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사람이 주머니에서 금이나 은을 쏟아내어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어 만들게 하고, 그것을 어깨로 메어다가 자기의 처소에 두면 그 곳에 서 있을 뿐 움직이지도 못하며 그에게 경배하거나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못하고 구해내지도 못하는 물건에 불과하니”(6-7절) 우상 숭배는 더욱 가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택한 자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심.(3-4절)

1)“야곱 집,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는 바벨론 포로 시기가 끝날 무렵까지 생존한 선민을 뜻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징계의 기간이었으므로 버려진 상태에 있었지만 선민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시는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나를 들을지어다)고 하셨습니다.(1절)

2)그 선민들을 말씀하실 때 “어미와 자식과의 관계”로 표현하셨으니 곧 “배에서 남으로부터 하나님께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자라”(1절 하반)고 하셨습니다.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은 모정의 사랑으로 복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3)따라서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일”을,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며 구하여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일반적 창조와 거듭남의 창조(엡 2:1)의 구속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구원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모략.(8-11절)

1)“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8절)고 하셨습니다. “패역한 자들”은 선민 중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거역하는 자들이요, “이 일을 기억하고.......다시 생각하라”하심은 앞에서 말씀하신 “우상의 무능을 깨달아 우상적 신앙에서 탈피하라”는 뜻이며 “장부가 되라”는 말씀은 장부다운 태도로 우상을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상 그 자체를 배격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인데 많은 이웃이 우상을 숭배하는 환경에서 자신만이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기드온처럼 장부다운 기백을 발휘하지 않으면 힘들 것입니다.(삿 6:25-32) 그래서 “장부가 되라”고 하신 줄 압니다.

2)9절에서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심은 하나님이 과거 조상들의 역사를 지켜오시면서 시행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신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역사하신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3)10절에서 “하나님은 종말(뒤에 될 일)을 처음부터(미리) 고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장래사를 섭리하시고 예언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이것은 바벨론에서의 해방과 메시야 구원 사역을 뜻함)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모략을 세워 하나님의 모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따라서 모략은 하나님이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인데 1차는 고레스요, 2차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11절) “동방에서(바벨론의 동쪽 나라인 메데 파사) 독수리(힘있는 왕 고레스를 뜻함)를 부르며 먼 나라(메데, 파사)에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불러 정녕 이루시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고레스를 “그리스도”로 예표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 못할 모략을 세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메데, 파사로 바벨론을 무찌르시고 선민에게 해방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선민을 영원히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모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의로 구원하심.(12-13절)

1)“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너희는 나를 들으라”고 하셨습니다.(12절) 지금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는 성도는 이 말씀을 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2)“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않을 것이라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않을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13절)하셨으니 여기의 “나의 의”는 고레스에게는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일이고, 구원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일을 단계적으로 시행하심에 있어서 지체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 멸망은 이 예언 당시로부터 약 100년 후의 일이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약 700년 후의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속히 될 일”로 말씀하셨으니 영원 세계에서의 시간은 한 경점같고, 또 천 날도 하루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시 90:4, 벧후 3:8) 또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이란 뜻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뜻이고, “구원을 시온에 베푸심”은 예루살렘의 일시적 재건 또는 메시야 구원 사역이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성취되고 전개될 사실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 66 과 바벨론의 죄와 멸망 예언 (사 47:1~15) 목록으로


이 말씀을 읽어보면 두 가지 제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6-8,10절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신 말씀”이고, 그 이외의 말씀은 전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벨론의 죄와 멸망 예언”으로 정하였습니다.

1. 먼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신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6-8,10절)

1)하나님의 백성을 지나치게 학대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입니다. 6절에서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하므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민의 범죄를 인하여 일시 진노하시고 그들을 징계하실 때에 바벨론을 이용하여 응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6절 초두에 “전에”란 뜻은 이 예언의 시기를 결과의 시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가 주전 700년경에 하셨고, 선민을 바벨론에 붙이신 것은 주전 600년 경이며 바벨론을 멸하신 것은 그 후 70년 후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주전 530년 경에 최종적으로 있을 일과 그 이전의 죄악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선민의 몽둥이로 적당하게 쓰시고저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고로 약간만 때리려고 하신 것인데 바벨론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 이상으로 가혹하게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6절 하반에서 “네가 그들(하나님의 선민)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 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웠다”는 것입니다.

2)또 교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것은 7절에서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하면서 “이 일(하나님이 자기들로 일시적 몽둥이 역할만 하게 하신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 종말(자기들도 벌받게 될 일)을 생각지 않았던것”입니다. 비선민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도 죄인이면서 선민에게 가혹한 태도를 취한 것은 하나님의 큰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선민의 노인을 학대하고(무겁게 멍에를 메운 것),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면서 자기들의 권세가 영원히 지속될 줄 알고, 선민들을 하녀처럼 대하고 교만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받을 죄가 되는 것입니다.

3)사치하며 오만하였습니다. 8절에서 “바벨론 사람들은 사치하고 평안히(안일주의)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10절 하반) 하였으니 이렇게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는 하나님과 그 이웃에 대하여 죄를 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계속 자만하였습니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를 것이라” 하였으니(8절) 이것은 자기 나라가 든든하기 때문에 전쟁에 패하여 남편이 죽거나 자녀가 죽을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4)악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입니다. 10절에서 “악을 의지함”은 이치와 순리를 떠난 자기의 힘만 의지하는 죄악이고, “스스로 나를 보는 자가 없다”함은 하나님의 감찰을 무시하는 태도이니 결국 그의 무법한 지혜와 지식이 그 자신을 죄악으로 유혹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선민 국가의 죄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계 16:19)

2.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심.(1-5,9,11-15절)

1)바벨론이 비천하여지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5절) 1절의 “처녀 딸 바벨론......딸 갈대아” 하셨는데 여기의 딸은 애칭이 아닌(시 9:14, 48:11) 사치와 안일을 일삼는 것을 비유한 말씀이며 바벨론은 갈대아족으로 구성된 나라로 이해하십시오. “그들은 보좌(편안한 거주지)가 없어지므로 땅(집 없는 곳)과 티끌(먼지 있는 곳)에 앉게 될 것이니 다시는 곱게 단장하여 여인들의 아리따움을 칭찬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 하셨고, 2-3절에서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고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존귀한 주모 또는 사치하던 딸이 학대받는 하인처럼 신분이 바뀐 상태로 변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하체)도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보수(원수 갚음)하시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3절 하반)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선민을 아끼지 않고 지나치게 학대하였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은 이사야가 “선민의 입장에서 선민의 구속을 내다보고 구속자 하나님을 나타낸 말씀”이요, 이런 일들로 인하여 “딸 갈대아는 잠잠히 앉게 되고 흑암(소망없는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며 다시는 열국의 주모(열국을 하인처럼 지배한 것을 비유한 말씀)라 칭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5절)고 하셨습니다.

2)8절에서 “과부되거나 자녀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하였지만 9절에서는 그 반대로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하셨고, 또 바벨론 국민들이 “무수한 사술(미신을 의지하는 것)과 많은 진언(점쟁이가 주문을 외우는 것)을 베풀지라도 이 일(전쟁으로 일시에 망하고 많은 국민과 가족이 죽는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11절에서는 “바벨론에 재앙이 임하나 그 국민들이 그 근본을 알지 못하며 손해가 이르나 물리칠 능력이 없고 또 파멸이 홀연히 임하나 그(이유)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여기의 “재앙”은 메데 파사군에 멸망당함이요, “근본”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것이고 “파멸이 홀연히 임한 것”은 연락 중에 기습을 받게 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단 5:1-5,30)

4)바벨론이 환란을 당하였을 때 “그들의 각종 미신 행위는 무익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12-13절)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이는 소용없다는 뜻임) 네가 많은 모략(미신 행위)을 인하여 피곤케 될 것이라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천문과 점성술)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월초에 점치는 행위)로 네게 임할 그 일(고레스에 의한 멸망)에서 너를 구원하여 보라.(구원할 수 없다는 뜻임)”

5)오히려 “불꽃의 초개처럼 타 없어질 것이고, 공든 탑은 무너질 것이며 함께 동업하던 자들도 유리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14절의 말씀은 바벨론의 멸망을 불꽃 앞에 초개(티끌)로 비유하시므로 쉽게 망할 것과 구원치 못할 것을 예언하셨고, “그 불은 더웁게 하는 불(앉을 만한 불)이 아닌 아주 태워 없애는 불”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너의 근로하던 것들(바벨론에 충성한 일)이 다 이같이 되리니(타 없어지듯 허무해지는 것) 너 어려서부터 (바벨론 백성들이 오래전부터)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사업의 동역자들)이 각각 소향(자기 갈 곳)대로 유리하게 될 것이요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바벨론이 망하게 되는 상태를 자세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67 과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사 48:1~8) 목록으로


이사야 48장을 읽고 두 번에 나누어 상고하기로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선민을 명예롭게 칭하신 내용”이고, 다음에는 “그들의 완악을 지적하신 말씀”이며 셋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깨우치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총 제목은 1절 하반의 말씀 따라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로 정하였습니다.

1. “너희”는 하나님이 명예롭게 호칭하신 이스라엘 선민입니다.(1절 전반)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명예롭게 호칭하신 내용을 들어야 합니다.

1)“야곱집이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 곧 야곱의 후손 즉 가족처럼 생각하신 말씀이요,(엡 2:19, 마 12:48-50, 딤전 3:15)

2)“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은 자”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의 뜻,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응답을 약속하신 뜻)로 호칭하신 뜻을 그 후손(선민)에게도 관련지어 통치하신다는 뜻이며

3)“유다의 근원에서 나온 자”라 하심은 유다족이 북왕국에 비할 때 정통 종교의 맥을 이었다는 사실과 또 메시야를 약속 받은 계열이란 점에서(창 49:8) 신령한 은혜의 약속을 받은 자란 뜻이요,

4)“거룩한 성 백성이라” 하셨으니 “거룩한 성”은 성전을 중심한 예루살렘, 또는 천국을 약속받은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계 21:2, 마 27:53)

이상의 말씀 외에도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란 아주 큰 명분이 또 있는 것입니다.(시 100:3, 요 1: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성도를 어떻게 취급하시며 사랑하시는가를 그의 호칭에서 듣고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명분(호칭)과 상위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1절 하반, 4절)

1)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않았고,(1절 하반)

2)“의로움이 없이(의를 행하거나 죄사함 받을 자세를 취함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불렀다“ 하였으니 이는 믿음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상태에서 이기주의적 목적 성취에만 몰두한 뜻이며

3)또 그들은 완악하였고,(회개하지 않는 뜻)

4)“목의 힘줄은 무쇠요(고개를 숙일 줄 모름) 이마는 놋이라(죄인이면서도 뻔뻔하다는 뜻)”하시므로(4절) 그들의 완악과 교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완악하고 교만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3.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깨우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3,5-8절)

1)3절에서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으며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47:3을 다시 강조하신 것입니다.

2)5절에서 “내가 이 일을 옛적부터 네게 고하였고 성사되기 전에 보였다” 하셨는데 여기의 “이 일”이란 미래사를 예언하신 것으로 “바벨론에게 멸망될 일과 메데 파사국을 통하여 구원받게 될 일 등”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외에도 메시야 사역 등 많은 미래사를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특히 고레스의 역할로 해방될 일)을 미리 고하신 것은 우상 숭배자들이 “자기 신이 행한 바요 자기들의 신상과 부어 만든 우상들이 명한 바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우상에게 주시지 않습니다.(42:8)

3)6절에서 “혹 선민들이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믿는다면 선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의 은혜를 알 때 전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것(5절의 이 일)을 다 보라(알라는 뜻) 이제부터 내가 새 일(42:9, 43:19)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비밀처럼 감취어 있던 것)한 일을 네게 보이노니(6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즉 미리 알았다면) 이미 알았노라고 하였을 것인데(7절) 듣지도 알지도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8절 전반)

4)7절에서 “새 일을 행하실 일이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는 뜻은 역사적으로 그만한 일이 없었던 것을 전격적으로 나타내신다는 뜻이요, “네가 듣지 못하였다”는 말씀과(7절) “은비한 일”(6절)이란 예언을 안 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중대한 일을 반드시 예고하셨지만(암 3:7) 완악에 빠져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즉 8절에서 “그 백성들이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은 그들의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고, 궤휼이 넘치며(궤휼하고 궤휼함)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시 51:5)이기 때문이요, 하나님도 그 사실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궤휼한 자는 귀가 열릴 수 없으니 진리는 옥토같은 마음에만 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13:18-23) 따라서 이 말씀에서는 선민을 사랑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호칭과 그들의 성실치 못함과 여러모로 그들을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 68 과 선민의 징계를 푸시는 섭리 (사 48:9~22) 목록으로


이 말씀 전체의 내용 중심은 “하나님이 선민의 징계를 푸시는 섭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무슨 일이나 죄를 제하고는 다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셨고,(12,17,20-22절) 선민들이 하나님의 말씀(뜻)을 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셨으며(12,14,16절) 선민에 대한 소감과 함께(18-19절) 선민의 징계를 푸시는 목적과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므로(9,11,14-15절) “선민의 징계를 푸시는 섭리”로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제목별로 빠짐없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선민들이 불순종하므로 축복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말씀이 있습니다.(18-19절) 18,19절을 보시면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으니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란 뜻은 하나님이 회개하고 순종하는 백성의 의(옳은 행실)를 인정하시고 크게 여겨주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의 선행은 외식일 뿐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순탄한 발전과 행복을 영위할 수 있지만 거역하고 배반하면 형통할 수 없고 쇠하여지다가 없어질 것입니다.(시1:6,73:18-19)

2,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12,14,16절) 12절에서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하셨고, 14절에서도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하셨으며 16절에서도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와 이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행하여 복받는 일에 소망을 두어야 하고,(계 1:3) “성경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기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즐거워하는 일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시1:2), “모여서 들어야 할 것”은 회집한 장소에서 선지자나 서기관이 말씀을 전달하기 때문이고, “내게 가까이 나와 이 말을 들으라”하심은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을 진리로 믿고 가까이 와서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증언자가 없어도 성경으로 진리를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믿음과 겸손과 회개함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받는 일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선민에 대한 징계를 푸시는 이유와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1)12절에서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하시므로 시작과 종말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을 말씀하셨고, “땅의 기초를 놓고 하늘을 펴신 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손으로 하신 일이며 또 “하나님이 부르시면(명령하시면) 천지가 일제히 선다”하신 것은 모든 자연계가 창조자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13절) 이 사실은 인간이 상상 못할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2)그런 하나님이 선민에게 내리신 징계를 거두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9,10,11절) ① 9절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를 위함이라” 하셨고, ② 10절에서는 “선민에 대한 연단을 주실 만큼 주셨기 때문”이며 ③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고,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민이 징계를 지나치게 받으면 선민과 하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을 무능한 신으로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선민을 더욱 멸시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일로 자신의 영예가 떨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④ 선민이 받는 연단이나 학대도 적당한 분량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시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은 풀무불에 들어가야 모양을 변하겠지만 선민은 두드리는 정도로만 연단과 징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이 택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합 3:2)

3)선민의 징계를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푸신다는 것입니까? ① 우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9절) 은처럼 연단하지 않으시며(10절) 참으시고 멸절하지 않기로 하시며(9절) 고난의 풀부에서 택하여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10절) 여기의 고난의 풀무란 선민이 바벨론에 포로되고 멸망되어 70년간 고난 당하는 정황을 마음에 두신 것입니다. ② 그 방법은 14,15절에서 말씀하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고레스왕에게 자기의 뜻(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선민을 해방하게 하는 것)을 행하도록 명하실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의 팔(고레스의 무력)이 갈대아인(바벨론)에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14절) “그들 중에 누가 이 사실을 예언하였느뇨”(14절)하신 것은 하나님만 아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증거하게 하셨을 뿐 고레스나 이방인들은 미리 알지 못한 일이란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그 사실을 계획하실 당시) 그것을 비밀히 감추지 않았고,(유대인들에게 다 알렸으며) 그 말(바벨론 멸망 예언)이 있을 때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그 곳에 있었으니 이사야는 처음부터 증언한 자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을 이사야가 처음부터 한 것은 이사야 32장, 33장에서도 증언된 것인데 “이제는 주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증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셨으므로 또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③ 그 증거의 내용이 20절의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宣播)하여 들리며 땅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야곱(선민)을 구속(죄사함)하셨으므로 징계를 끝내시고 바벨론에서 해방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선민들에게 복음인 만큼 십자가의 복음은 더욱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또 하나님께서는 선민과 관계된 말씀을 하셨는데(17,20-22절)

1)17절에서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선민(성도)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타내실 때 “구속자, 거룩하신 자, 여호와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선민에 대한 언약의 불변성을 강조하심이요,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뜻은 그 가르침의 교훈인 성경이 진리임을 나타내신 것이며,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심”도 성도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이 큰 복인즉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도이며 또 어떤 것이 자행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생산적(유익하도록)인 활동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것인즉 성도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명분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2)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조상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신 사실”을 기억하게 하셨으니(21절) 이는 약 700년 이전의 일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그 하나님으로서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 없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배워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그리고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평강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엄위하시기 때문입니다.(시 1:6, 계 20:12) 악인이 현실에서 공의로운 보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은 최종 심판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이 현실에서 받는 분복은 공평치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시 1:1-6, 73:1-19, 렘 12:1-4)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 또는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심에 있어서 섭리하시는 뜻을 깨닫고 특히 성도인 자신에게 어떻게 간섭, 통치하시는지를 민감하게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69 과 메시야의 뜻과 구원 사역 (사 49:1~10) 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선민 해방과 영적 구원의 소식”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5절은 “메시야의 뜻을 대언하심”이요, 6-10절은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두 대지의 뜻을 합한 “메시야의 뜻과 구원 사역”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메시야의 뜻을 대언하심.(1-5절)

1-5절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자기 시대에 될 일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1)1절에서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 먼 곳까지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며 이 사실은 행 1:8에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 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46:3과 49:5에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동정녀 탄생으로 출현시키신 사실과 예수님 출생 당시에 그 이름을 “예수 또는 임마누엘”로 지어주신 사실로 마 1:18-25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근거가 성부 하나님께 있으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메시야 및 진리의 사역자로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메시야를 종으로 쓰실 때(49:5, 빌 2:7-8) 말씀의 능력자로 쓰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고 햇빛의 그늘처럼 보호,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입을 날카로운 칼로 만드심”은 말씀의 능력 주신 것을 뜻하고,(막 1:22, 히 4:12) “그 손 그늘에 숨기심”은 보호를 뜻하며(마 2:7-8,13:15)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심”은 말씀의 역사를 가슴 찌르는 화살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내용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마귀의 뜻을 꺾기에 충분할 만큼 능력있게 역사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마 4:1-11, 23:1-36) 또 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하나님의 종이요 택함 받은 자(이스라엘)라” 하셨고, 또 그렇게 성취하셨습니다.(요 17:4-5)

3)그러나 4절에서 “메시야 사역에 고난이 있을 것과 그 고난에 대한 신원(갚음)이 있을 것”도 예언하셨으니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 하였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영광을 받지 못하고 고난에 임하는 것을 보고 불신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신 것입니다.(마 27:27-44)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는 53장에서도 예언하셨고,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수고가 헛되지 않으니 이는 신원과 보응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그의 고난을 구속의 대가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건축자의 버린 돌로 모퉁이 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처럼 요긴하게 하신 것입니다.(마 21:42, 눅 24:26)

4)5절에 “메시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실 종으로서 존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고난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충성된 종이요, 유일한 구속자이시므로(요 14:6) 존귀하지 않을 수 없고,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적 입장에서 구속 사업을 이루실 때 예수님이 기도하셨으며(히 5:7-10, 마 26:36-40)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스라엘, 선택받은 자)을 하나님께로 오도록 구원하실 종(중보자)을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히 5:1-10)

2.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대한 말씀을 또 주셨습니다.(6-10절)

1)우선은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시고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하시겠지만 나중에는 이 은혜가 먼 이방 땅 끝까지 나타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6절의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함”(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게 하시는 일)은 경한 일(작은 일)이요, 그보다 더 큰 것은 “메시야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의 택한 백성까지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6절 하반) 이 사실은 오순절 이후부터 지금까지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2)“구원의 대상을 비천한 자로부터 존귀한 자의 순서로 인도하신다”(7절)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비천한 자를 먼저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메시야가 오셔서 비천한 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신다는 뜻입니다.(마 4:12-17) 7절에 보시면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된 자가 존귀해질 것”이 그런 뜻이며 7절 하반에서 “너(비천한 선민, 포로되고 흩어진 선민)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할 것이라” 하셨고, 또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강한 열왕과 방백들을 일으켜 비천한 선민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흠모(경배)할 만큼 존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비천한 백성은 바벨론의 학대로 고난 당하는 백성을 구원하실 때 “메데, 파사의 열국을 일으켜 쓰신다는 뜻”이며 또 신약 시대에 불신앙의 늪에 빠져 고난 당하는 이방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

3)그때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인데 이때에 더 많은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게 되며 또 성도(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시고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때를 정하고 하십니다.(전 3:1) 바벨론에서 해방을 주시는 때가 있고,(단 9:2) “메시야를 보내실 때와 은혜 주실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막 1:15, 갈 4:4, 고후 6:2) “백성의 언약을 삼으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맺으심이요,(시 100:3, 창 28:15, 마 28:20) “나라를 일으키심”은 교회의 단체를 뜻하고,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심”은 바벨론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귀향할 수 있게 하심과 천국의 영원한 기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의 갈 곳이 바로 주님의 영원한 나라인 것입니다.(요 8:23)

4)“은혜의 때에 하나님이 선민을 해방하여 풍요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10절) “잡혀있는 자에 나오라 하시고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하심은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뜻이요, 이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잡혀있고,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구하실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길에서 먹을 것이고 모든 자산(높은 산, 나무 없는 붉은 산)에도 풀밭이 있을 것인즉(안전과 풍요를 뜻함)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고,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않을 것이며(시 121:5-6)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실 것이라”(9-10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주신다는 뜻”과 함께 “영원한 구원의 복과 평강과 풍요의 은혜를 선민들로 하여금 영적(믿음으로 누리는 은혜)으로 누리게 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 70 과 선민 귀환과 은혜 (사 49:11~26)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선민을 해방하여 귀환하게 하시는 은혜”이고,(11-12,17-19,22-26절) 또 한 가지는 “귀환한 선민의 소감을 말한 내용”이며(20-21절) 셋째는 “선민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13-16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선민의 귀환과 은혜”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선민을 해방하여 귀환하게 하시는 은혜.(11-12,17-19,22-26절)

1)11-12절에서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도를 돋우리니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땅에서 오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벨론이 망하고 고레스왕이 선민에게 해방과 귀환령을 내렸을 때에(라 1:1-3) 원근 각처에 흩어진 선민들을 쉽게 귀환할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모든 산”은 모든 자연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시는 뜻이고, “산을 길로 삼고 대도를 돋움은 거친 길을 닦는 것이므로 어려운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북한을 가는 길이 어렵지만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쉽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님땅”은 남방 애굽의 “스에네”를 뜻하는 듯 하다고 합니다. 동방은 바벨론쪽이요, 북방, 서방은 12절에서 말씀 하셨으므로 원방은 남방이 아닐런지요.

2)그때에 “선민을 괴롭히던 백성들은 그 곳을 떠나게 되고 선민의 자녀들(후손들)은 돌아올 것이라” 하셨으며, 또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이 너를 떠나가리라”한 말씀은 하나님이 고레스왕을 통하여 선민을 존귀케 하시고 선민을 괴롭히던 적국 백성들을 응징하므로 예루살렘을 점유하였던 이방족들이 물러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느 4:15)

3)18절의 “사방에서 선민들이 네게로(예루살렘, 선민 단체)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요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하신 말씀에서 여기의 “선민들이 사방에서 온다”는 것은 각처에 흩어진 선민들이 귀환하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신약 시대에 있게될 영적 구원 즉 교회 발전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두고 맹세하심”은 하나님 존재의 불변성을 언약의 불변성의 보증으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하신 것이고, “모든 무리(성도와 교회)로 장식을 삼아 단장을 한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영적 신앙)를 화려하게 단장한 신부로 표현하신 뜻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같은 영화로운 단체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1:2, 엡 5:29, 계 21:2,9)

4)선민 단체가 돌아올 때 “황폐하고 적막하며 파멸을 당하였던 땅(예루살렘)이 이제는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라”(19절)하신 것은 선민의 귀환 복구를 뜻하며 역적으로는 불신앙 세계를 타파하여 신앙 세계를 건설하는 복음 사역이 활성화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뜻이 우리나라에서만큼 잘 성취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를 세울 장소가 없을 만큼 좁아지지 않았습니까?

5)22절에서는 “하나님이 열방을 향하여 손을 드시고 민족들을 향하여 기호를 세울 것인즉(旗號;복음의 깃발을 날리는 뜻) 그때에 많은 선민들이 그들의 아들, 딸들과 함께 하나님께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포로 귀환시에도 성취되었고, 신약 시대에도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6)23절에서 “열왕이 양부가 되고 왕비가 유모가 되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며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며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떤 교회는 현역 장군이 주일 날 안내를 하고 믿는 대통령이 성직자를 더 높은 사람으로 존경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연약한 성도의 목자가 되신 것처럼 왕과 왕비라도 성도를 섬기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이나 발의 티끌을 핥는 것”은 그들의 겸손과 봉사를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 씻기시는 일을 몸소 하시지 않았습니까? 왕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성도의 권위 아래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권세보다 더 높은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7)24-25절에서 “용사(마귀, 불신앙 세력)가 뺏는 것을 도로 뺏거나 승리자(불신앙 세계의 마귀)가 사로잡은 자를 사람이 건져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능히 하실 수 있다” 하셨고, 또 “하나님이 선민의 대적의 대적이 되셔서 선민의 자녀를 구원해주신다”고 하신 것은 느브갓네살왕이나 마귀나 불신앙의 세력이 강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슥 4:6)

8)그리하여 “선민을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하게 하시므로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구원자요 구속자이시며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26절) 하셨으니 선민을 학대하는 자가 “자기의 고기를 먹음”은 나라의 내분으로 주인이 자기의 짐승을 잡는 것처럼 자학하는 혁명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신 것이고(9:20, 왕하 19:35-37, 단 5:18-31) 여기에 대하여 pulpit 주석은 바벨론이 고레스와 전쟁할 때 바벨론족들이 침략자에 가담하여 조국을 대항하여 싸운 일이 있는 역사를 증거로 잘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새 술에 취하게 하심”은 혼미한 정신으로 바른 판단을 못하는 자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새 술이 묵은 술만큼 좋지는 못하나 취하게 하는 효력은 더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면 화도 복으로 바꾸실 수 있지만 하나님이 버리실 때는 복이 화로 변할 수 있습니다.(신 30:15)

2. 귀환한 선민의 소감.(20-21절)

1)20절에서 “민족적 수난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은 선민들이(고난 중에 낳은 자녀) 후일(해방되었을 때)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 곳이 우리에게 좁으니 넓혀서 거하게 하라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귀환된 도성이 사람의 떼로 복잡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겔 36:33-38을 참고하십시오. 예루살렘이 복구될 때 선민의 모임으로 성황을 이룰 것은 사실인데 왜 이 일을 네(선민을 대표한 용어) 귀에 말하였을까요? 이것은 비밀로 말한다는 뜻이 아니고 확실하게 뜻을 전달할 것이라는 의미 입니다.

2)21절에서는 “그때에 모여진 많은 무리들을 누가 낳아서....양육하였는고” 하고 감탄할 것이라 하셨으니 본래 선민은 사람이 생산 양육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알게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 많은 이방인들로 채워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45:22) 이런 사실을 잘 몰랐던 유대인들은 “우리 자손들이 아닌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선민이 왔는고”하고 족보를 따지며 이방인의 귀도를 비난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심중에 말하였다”는 뜻은 유대인들끼리(신약의 바리새인들) 수근거릴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행 21:17-26, 갈 2:11-14)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육체로 생산하거나 육체적 생활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후에 말씀으로 양육하는 만큼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누가 낳아서 양육하였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더 명확한 설명은 54:1에 나타나 있습니다. “남편있는 여인의 자식보다 남편없는 여인의 자식이 더 많을 것이라” 하셨으니 남편있는 여인의 자식은 육체적 유대인을 뜻하고, 남편 없는 여인의 자식은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모신 교회가 성도를 생산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선민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13-16절)

1)13절에서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 하셨은즉 그 고난 당한 자(포로된 자 또는 죄에 거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하셨고, “이 일은 하늘과 땅도 기뻐하여 노래할 것이라” 하셨으니 성도가 어찌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받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2)14-15절에서 선민들이 고난을 당하는 시기에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였지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은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키우는 정성보다 더 큰 정성으로 선민을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과 관심에 대하여 뜨거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3)16절에서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 하셨으니 “너를 손바닥에 새기심”은 그만큼 기억하시고 주시하신다는 뜻이요,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음”은 성도를 보호하는 도성의 성벽을 하나님이 대신하여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시 127:1에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성벽을 의지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를 위하여 그 성벽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해방과 신약 시대에 있을 복음적 신앙의 확장을 연계하여 생각하실 것과 그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각별한 느낌을 교회의 확장 운동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71 과 선민의 불행과 구원과 멸망 (사 50:1~11) 목록으로


이 말씀을 분석하면 ① 1,3절에서 “선민의 불행”을 말씀하셨고, ② 2,4-10절에서 “능력자 메시야의 구원 사역적 고백”이 기록되었으며 ③ 11절에서는 “악인의 멸망”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제목을 종합하여 “선민의 불행과 구원과 멸망”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선민의 불행에 대한 말씀.(1,3절)

1)1절에서 “선민의 불행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어미를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의 가정을 이유없이 파괴시킨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선민들 가정이 파탄될 때 정식 합의 이혼이나 채주에게 팔려 간 것이 아니고, 전쟁으로 그런 결과를 만난 것인데 이는 그들이 전쟁에 패하는 재앙을 만나 당한 일로 “그 자신들(너희)이 팔리고 그 어미가 보냄(쫓김)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악과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는 곧 불행을 가져오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사망(심판)을 초래합니다.(롬 6:23)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의 불행도 그들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2)“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불행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는다”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흑암의 재앙을 주시고 슬픈 일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욥 1:12-19) “굵은 베로 덮음”은 큰 슬픔과 불행을 겪는 상태를 뜻합니다.

2. 능력자 메시야의 구원 사역적 고백에 대하여(2,4-10절) 범죄로 불행하여진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사죄 받지 못하면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1)그러나 선민들은 완악하여 선지자의 증언을 믿지 않고 핍박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2절에서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하신 말씀이 바로 메시야 구원의 소식을 많은 선민들이 외면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10절 초반에서도 말씀하셨고, 시 2:1-3과 사 53:1에서도 예언하신 것입니다.

2)이렇게 복음을 외면하고 선민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을때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하여 구원을 못 이루실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2절 중반부터 보시면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홍해를 가르신 일) 하수에 물이 말라 어족이 죽어 악취를 발하고 그 하수가 광야가 된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연계 통치 사역으로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고 사탄이 강하게 반항한다 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못 이루시지 않는 것입니다.

3)4-10절에서는 능력의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어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셨는데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은혜를 주셔서 능히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①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학자의 혀(풍부한 지식으로 잘 증언하는 지혜)를 주셔서 우둔하고 죄로 곤핍한 중에 있는 백성들을 잘 돕게 하신다” 하셨고, 또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예수님의 귀)를 깨우치셔서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큰 지혜를 주셔서 인간적으로 복음 사역을 하실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② 5절에서 “메시야의 귀를 여실뿐 만 아니라 거역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게 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교육을 받고 자라지만 그 자식이 부모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이때에 부모의 뜻을 순종한다면 교육보다는 순종하는 공이 더 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할 아들을 메시야로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가 순종에 거역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빌 2:8) ③ 6-7절에서는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실 당시에 있을 일을 예언하셨으니 곧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시지 않을 것이고,(6절) 또 주 여호와께서 도우심으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결심하시고 수모를 참으시는 의지의 표현)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것이라”(7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은 53장에서도 나타나있고, 실제 상황을 복음서에도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어떻게 감당하셨는가”에 대하여 이 말씀으로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하심은 메시야가 인내와 죽음으로 잘 순종하셨은즉 하나님이 받으시고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4-9절은 “메시야의 입장에서 나타내신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④ 8-9절에는 예수님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시면서 많은 대적자들의 비난과 정죄와 죽음을 당하셨지만 결국은 죄를 지신 일이 없으므로(히4:15) 승리자 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게 하였을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정죄할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올지어다”(8절) 하셨고, 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9절)라고 하시므로 죄에 대하여 승리하시고 또 핍박자들과 사명 수행에 대하여 승리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승리하셨습니다.(요16:33) ⑤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구속에 힘입어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10절)하시므로 흑암에 처한 죄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4:16)

3. 악인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9절 하반과 11절)

1)9절 하반에서 “그들(메시야를 영접하지 않는 자)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망하는 일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잠재적으로 보이지 않게 망하는 상태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지옥가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소리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11절에서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악인들이(메시야를 거역한 자들, 시 2:4-9)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슬픔 중에 눕게 되겠지요.(영벌 받음) 그런데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띤 자가 그 불꽃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악인이 의인을 태우려고 전쟁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불꽃이 결국은 자기들들을 벌하는 지옥불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목 매어달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자신이 그 나무에 달려 죽은 결과처럼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더 7:9-10) 여기의 불꽃은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전쟁이나 화형 무기로 이해함이 좋을 것입니다.(시 1:6)

설교보충 23. 지식과 신학의 분야 (사 50:4~5) 목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믿음의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지식이 필요함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메시야 예수님께 학자의 혀를 주셔서 곤핍한 자를 말로 돕게 하시고, 또 아침마다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인성을 갖고 일하심에 있어서 학문적 지식을 충분히 터득하시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잘 깨닫고 잘 깨닫게 하셨음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요즈음은 학문이 보편화되었지만 약 40년 전만 하여도 지식이 보편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혹 어떤 증언자는 지식을 신앙과 무관한 것처럼 증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신령함으로 분별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고전 2:13) “지식이 부족하여도 영감적 지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고 증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지각 작용을 통하여(히 5:14) 배우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딤후 3:14, 딤전 4:13) 성경에는 “상고하라, 연구하라, 배우라, 자세히 살피라”(욥 8:8, 신 4:10, 벧전 1:10, 요 5:39, 눅 1:3) 하셨는데 만일 학문을 도외시하고 기도의 응답 만으로 깨닫는 것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할 것입니다.

2. 모세가 애굽의 학문을 터득한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율법을 받게 하신 것이나 바울 사도가 헬라의 고등 학문을 배움으로써 복음 사역에 유익하도록 사역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을 종합적 또는 전체적으로 연구하려면 학문적 지식이 불가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어학적 지식으로 성경의 원문을 번역하여 세계적으로 펼치는 일이 중요할 것이요, 그 다음에 성경을 분석, 연구하는 분야가 필요합니다. 그 연구하는 분야는 여러 종류로 나누는 방법이 있지만 정통 신학에서 연구하는 분야를 소개하면 다섯 가지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1)주경 신학입니다.(Exegetical Theology) 이것은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를 해석하는 것으로 주석이나 강론이 그 학문의 산물입니다. 문자적으로 문맥적으로 뜻을 파악하여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어학과 교리와 역사 지식을 아울러 필요로 합니다.

2)성경 신학입니다.(Biblical Theology) 이것은 성경 자체를 전체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시대에 따라 바르게 전개시키며 또 한 권의 단위로 나타낸 교훈을 드러내어 역사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라 합니다.개론적 연구도 이에 속합니다.

3)조직 신학입니다.(Systematic Theology) 이 분야에 교리학, 변증학, 윤리학이 있습니다. 먼저 주경 신학으로 본문을 알고 성경 신학으로 역사적 전개 과정을 안 다음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할 것을 요약하는 작업”이 조직 신학입니다. 여기에서 믿을 것을 “교리”라 하고, 행할 것을 “윤리”라고 합니다. 이 조직 신학의 분야에 변증학(Apologeties)이 있는데 이것은 윤리학이 행동 윤리를 설명하는 것처럼 믿어야 할 내용에 대하여 타당성 있는 증거를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나 “성경의 무오함을 믿어야 할 이유”를 설명한다면 변증학의 분야에서 연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산아 제한 문제나 안락사 문제가 대두된다면 그것은 윤리학의 분야에서 답변하여야 하겠지요. 따라서 조직 신학에는 세 분과가 있는데 하나는 믿어야 할 교리학이고, 다음에는 증명해야 할 변증학이며 또 한 가지는 실천에 관한 윤리학이 있는 것입니다. 이 조직 신학의 시초는 3세기의 교부 “오리겐”이 저술한 “교리학의 기본 원리”(περιαρχών, 패리알콘)란 책으로 시작하여 5세기의 사람 어거스틴의 신학촬요(Enchiridion)를 거쳐서 1535년 8월에 발행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고 합니다.(물론 그 어간에 토마스 아퀴나스(13세기)의 “Summa”라는 천주교 교리서도 있었고, 루터나 쥥글리(15세기)의 책도 있었음.) 근대에 와서 장로교 정통 신학에 공헌한 학자는 B. B. Worfield(20C, 미국)와 Abram Kuyper(20C, 화란), A. A. Hadge(19C, 미국) 세 사람을 칼빈주의 3대 신학자라 하여 이분들이 조직 신학 서적을 출판하므로 장로교 신학의 기초를 다졌다고 합니다. 또 이분들의 신학을 근거로 하여 우리나라의 박형룡, 박윤선 두 분의 학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4)역사 신학입니다.(Historical Theology) 이것은 교회의 역사와 교리의 발전사, 고고학, 선교 발전사 및 사회 문화 등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고고학은 기독교 역사의 유품을 연구하여 성경의 역사적사실성을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5)실천 신학입니다.(Prectical Theology) 이것은 예배와 교회의 통치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할 것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여기에는 예배학(예배 모범), 종교 교육, 교회 정치, 설교학, 개인 전도학, 목회학, 사회 봉사학 등이 그 분야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려면 이상의 다섯 가지 학문을 기본적으로 터득하고, 그 이외에도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야 함은 물론 많은 학문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쪼록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늘 기도하시면서 여러 방면으로 성경의 의미를 많이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72 과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 (사 51:1~11) 목록으로


본 장을 두 번에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선민에게 명하신 구호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들을지어다, 생각하여 보라, 내게 주의하라”같은 말씀입니다.(1,2,4절) 그리고 9-11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들은 “선지자의 기도”이고, 그 이외의 말씀은 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말씀”이어서 제목을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으로 정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1)1절에서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다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마 11:15, 막 4:9) 또 귀가 있어도 하나님이 어둡게 하시면 역시 듣지 못합니다.(마 13:14) 그러니까 귀가 열린 자, 즉 의를 좇으며(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자, 시 1:1) 하나님을 찾아 구하는 자(마 7:7)라야 그 귀가 열린 자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듣는 귀가 잘 열려서 지각 있게 말씀을 깨닫는 성도는 그 믿음이 속히 자랄 수 있습니다.

2)“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민을 구별하실 때 “어떤 은혜와 능력으로 구별하셨는지를 역사에 근거하여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선민을 반석에서 떠낸 자, 또는 우묵한 깊은 구덩이에서 파낸 자 같다”는 비유 말씀은 어렵게 또 힘들여서 쪼겨내고 뽑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믿음을 갖고 성도된 것 같아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뽑아내실 때 많은 공로가 있으신 것입니다. 성도가 그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깨달을 것입니다. 깊은 구덩이는 요셉을 생각할 수 있고, 요셉이 출세하여 선민을 구원한 사실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임을 기억하셔야 할것입니다.

3)또 2절에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창 37:28)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갈대아우르에서부터 뽑아내신 사람이고, 사라는 그 나이 90세로 생산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생산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혈혈단신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셨다”(2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선민된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4)4절에서 “내 백성이여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하셨고, 6절에서도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셨으니 이는 율법(성도가 지켜야 할 도리)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발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공의(미쉬파트:참된 종교의 진리, 표준 도리)를 만민(세계를 뜻함)의 빛으로 세울 것인즉 그것을 주의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요,(4절) “하늘과 땅을 살필 이유”는 “장차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자연 공해) 거기에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영히 있고 나의 의(구원 사역)는 폐하여지지 않을 것”(8절도 같은 뜻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장차 세상이 심판을 받아 없어지고(계 21:1, 벧후 3:10-13) 지상의 사람과 생명체들도 죽을 것이며 오직 구원 받은 영혼만 하늘 나라에 영영히 있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3,5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5)7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들(구원의 도리를 믿는 자)들과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자(말씀을 성실하게 믿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어떤 핍박이나 환란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시 27:1-3)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말씀해주셨습니다.(3,5절)

2.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말씀.(3,5,8절)

1)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시온(예루살렘 또는 선민)을 위로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3절) 3절에서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같게 하였나니(과거형은 미래의 확실성을 강조하심) 그 가운데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 때문에 황폐된 팔레스틴(가나안땅)을 옛날의 에덴 동산처럼 복구시켜서 살기 좋은 땅을 만드시겠다는 예언입니다. 바벨론이 망하였을 때 그 예언이 상당하게 응하였지만 이는 또 영적인 면에서 신약 시대의 믿음 세계가 성령님의 은혜로 크게 영화로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이 시대에도 신령한 은혜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쁨과 찬송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 “내 의가 가깝고(메시야 구원의 때가 임박해온다는 뜻) 내 구원이 나갔은즉(구원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는 뜻)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하나님의 심판 계획) 섬들(먼 곳의 거민들까지)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팔로 다스림”은 능력으로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시 2:9, 계 2:27, 19:15) 또 “만민”이란 “이방의 백성들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3)8절에서 “그들은(선민의 대적, 복음을 외면하는 자)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50:9 참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 먹힐 것이로되(은밀히 망한다는 뜻) 나의 의(구원의 효력)는 영원히 있겠고,(6절,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않음) 하나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선지자의 기도.(9-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