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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과 디모데에 대한 사랑과 권면 (딤후 1:1~8) 바로가기

제2과 은혜주시는 과정과 권면 (딤후 1:9~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 거짓 신앙과 참 신앙 (딤후 1:3~5) 바로가기

     설교보충 2. 하나님이 주신 마음 (딤후 1:7~8)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사역자를 섬긴 오네시보로 (딤후 1:15~18) 바로가기

제3과 은혜 속에서 강한 생활 (딤후 2:1~13) 바로가기

제4과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 (딤후 2:14~2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성된 사람들 (딤후 2:2)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세 가지 교훈 (딤후 2:1~4)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운동과 신앙 (딤후 2:5)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 (딤후 2:15) 바로가기   

제5과 알고 돌아 서라 (딤후 3:1~9) 바로가기

제6과 두 가지 표준 (딤후 3:10~17) 바로가기

     설교보충 8. 경건의 모양과 능력 (딤후 3:5) 바로가기

     설교보충 9. 경건의 능력을 구하자 (딤후 3:1~5)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속지 말자 (딤후 3:13~15)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3~17)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교육과 졸업의 의미 (딤후 3:13~17) 바로가기

제7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4:1~8) 바로가기

제8과 여러 가지 결론의 말씀 (딤후 4:9~22)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엄하게 명하신 말씀 (딤후 4:1~5)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바울의 회상과 확신 (딤후 4:6~8)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바울의 성공적 삶 (딤후 4:6~8)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바울의 최후 형편 (딤후 4:9~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영광을 기원함 (딤후 4:18) 바로가기

 

 

제 1 과 디모데에 대한 사랑과 권면 (딤후 1:1-8) 목록으로


언제나 처음 내용을 읽으실 때는 먼저 <기독교 신앙백과>에 나타난 디모데 후서의 개론을 읽으십시오. 본문은 바울 사도가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보내신 서신입니다. 딤후4:10-18을 보시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아시아 지역(드로아;4:13)에서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보내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세 가지 대목으로 분류하여 상고할 수 있습니다.

① 1-2절은 서론이요,

② 3-5절은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사랑”이요,

③ 6-8절은 “권면”입니다.

1. 서론에서 당사자 소개와 축복을 하셨습니다(1-2절).

편지를 쓸 때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축복을 하는 것은 통례적인 격식입니다.

1) 발신자는 바울인데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자”라 하셨으니(1절),

① 바울이 사도된 것은 자기로 말미암음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고(갈1:1),

② “사도”란 직임의 전체적 성격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③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란 구원적 영생(생명)과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신 주님께서(4:8) 바울 자신을 사도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행9:15-16).

2) 수신자는 “디모데”입니다(2절).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으니 여기에는,

① 믿음을 지도하여 낳은 아들,

② 직분의 후계자라는 의미로서의 아들,

③ 선배가 후배를 자기의 자식처럼 사랑하는 상태로서의 아들인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 간에 또는 선후배간에 신앙과 사명과 사랑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치 우호 관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은 디모데에게 축복하였습니다(2절).

① 축복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자이시고, 예수님은 구원의 성취자이십니다. 성령님은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은혜에 대하여는 전달자로 사역을 하셨습니다(고후13:13).

② 축복의 내용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니, 은혜는 만가지 필요한 것들을 때를 따라 주심이요, 긍휼은 연약한 대상을 항상 불쌍히 여기심이며, 평강은 영육간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이런 축복이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③ 이 축복은 바울 사도가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는 입장에서 전달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 받을 때 유효한 것입니다(마10:12-13).

2.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사랑의 말씀입니다(3-5절).

1)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위하여 밤낮 간구하셨으니, 이는 사명자를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런 기도를 로마 감옥에서 하셨습니다. 감옥은 불편함도 있지만 괴로울 때마다 기도하기 좋은 입장도 되었을 것입니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청송 교도소에 있는 성도들과의 신앙적 편지가 왕래되었으며, 교도소일지라도 회개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면 그곳이 신앙의 부흥 처소가 됨을 실감케 합니다). “밤낮 간구하신 뜻”은 “항상 기도한다”(눅18:11,살전5:17)는 뜻이요, “항상 기도함”은 쉬지 않고 갖는 바울의 소원이며(시37:4) 매일 시행하는 규칙적인 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교역자를 위한 기도라면 건강, 영적 지혜, 효과적인 사명 수행, 가정의 평안, 현실 정욕에 욕심을 갖지 않은 문제 등일 것입니다.

2) 바울은 디모데를 “쉬지 않고 생각하였다” 하셨으니 이것도 부모가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심정과 염려하는 심정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절에서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이로써)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는 작별할 때의 디모데가 흘린 눈물을 생각하며 사랑의 심정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9에서 “어서 속히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쉬지 않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랑하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벧전1:8).

3)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을 칭찬하심으로 감사의 뜻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①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하셨습니다(3절). ② 또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긴 집안의 아들이라고 하셨고,

③ 또 거짓 없는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셨습니다(5절).

④ “디모데”가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좋은 신앙을 계승받은 사역자임을 확신하여 조상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3,5절). “로이스”와 “유니게”가 유대인이었으므로(행16:1) 바울이 평소에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유전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선택이 있을 때 선조의 신앙이 훈련 상태로 계승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좋은 신앙을 본받고 또 계승시켜야 할 것입니다.

3. 권면의 말씀입니다(6-8절).

1)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6절).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감독자(목사)로 안수 받았을 때 자신이 설교로 일깨워 준 하나님의 말씀(딤전4:14)을 생각하여 “성령님의 은사적 역사를 불일 듯 하게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역자가 간직해야 할 은사를 충만하게 역사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믿음 사역과 관련한 은사를 의미하며, 이 은사가 “불일 듯 함”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뜻합니다.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 교훈한 말씀을 다시 생각할 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불일 듯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에게서 떠나셨다가 다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도와 함께 거하시는 중에서 잠재적으로 머물기도 하시고, 또 불꽃이 피어나듯 크게 역사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범죄함으로 성령님이 근심하실 때는 잠재적 입장을 취하실 것이나(엡4:30) 성도가 회개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여 사명에 임할 때에는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힘있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수(임직)받을 때 권면 받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충만한 입장을 취하여야 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2)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라(7절)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성도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 하셨으니 모든 성도는 물론 특히 복음 사역자는 복음 사역에 관한 일에 대하여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 성도가 두려운 마음을 가질 때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담력으로 바꾸려면 회개하고, 정당한 위치에 서서 사명감을 일깨우며 더욱 기도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27:1-3을 읽으시고 성도가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을 교훈 받으시기 바랍니다.

② 하나님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능력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고(빌4:13), 사랑은 모든 이에 대한 친목의 감정이며, 근신하는 마음은 항상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8절).

① 먼저 소극적 견지에서 복음 사역자는 복음 사역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증거를 부끄러워 하지 말 것”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여겨질지라도 진리로서 또는 구원의 능력으로서 당당한 것입니다. 당당한 진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려면 그만한 확신과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십자가를 외칠 수 있는 담력이 모든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여기에 부응하여 주님을 위한 전도 사역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의 상태를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바울처럼 어렵게 된 상태라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②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음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바울 사도가 그런 형편에 계셨고, 사명자 자신의 은사 발전을 위한 고난, 전도 사역 또는 목회 사역을 통한 직접, 간접의 고난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고난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신의 고난으로 나타나는 영광의 유익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영광이나 변화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자기의 힘만으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도 하나님의 능력 주심에 의하여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고난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빌4:13).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가 젊은 복음 사역자에게 권면하신 말씀은,

① 복음 사역과 관계있는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할 것,

② 안수 받을 때 받은 교훈을 생각할 것,

③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질 것,

④ 복음 증거로 인한 핍박을 부끄러워 하지 말 것,

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받을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제 2 과 은혜주시는 과정과 권면 (딤후 1:9-18)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을 면밀히 살피면, 9절은 “구원의 대상을 부르신 근거에 관한 말씀이고, 10절은 ”부활을 대동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말씀하셨으며, 11절과 12절은 ”복음 사역자의 사역적 태도“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9-12절까지의 말씀을 묶으면 ”하나님의 은혜 주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18절은 권면하신 말씀으로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지킬 것“(13-14절)과 “복음 사역자를 배척한 자와 협력한 자에 대하여 유의할 것”(15-18절)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은혜 주시는 과정과 권면”이라고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과정(9-12절).

1)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을 먼저 정하여 부르셨습니다(9절).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을 정하여 부르신 부르심은 거룩한 소명이고, 그 부르심의 근거는 구원 대상의 행위에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독자적 주권)대로 하신 것이요, 이 뜻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작정하신 은혜대로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부르심과 사역도 거룩한 사역입니다. 또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을 부르신 근거는 그 대상의 행위의 모범에 의하심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뜻대로 하신 것이고(롬9:11) 또 이 사실은 창세전(영원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엡1:4). “그리스도 안에서”란 의미는 성자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필수로 하는 것만큼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 과정을 거쳤다는 뜻입니다(창1:26-27). 이상의 말씀들이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는 사실(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과 ”무조건 선택“이란 칼빈주의 교리를 창출하게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동반하여 복음의 말씀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10절).

① 10절의 “이제는”이란 말씀은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된 때를 강조하신 것이요,

②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복음이 성취되고 전파되었다는 뜻입니다.

③ “사망을 폐하심“은 예수님의 부활로 자신과 모든 성도의 사망(영원한 형벌)을 면케 하셨음이요,

④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심”은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말씀이 복음의 소식으로 전달되어 믿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복음을 사역자를 통하여 전파하게 하셨습니다(11-12절).

① 바울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것이 곧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1절).

반포자란 전도자요,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대행자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역자입니다. 전도자, 목회자, 교육자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명적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분적 은사로 나누어 주시기도 합니다. 부분적이란 뜻은 사도직과 사도직을 위하여 주신 특별 은사를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도 하시고(고전12:11), 또 정한 때에 목적한 사역을 끝내신 후에는 중지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오늘날에는 사도직이 없고, 사도적 사명을 위한 특별한 은사(계시 영감과 기적)도 중지된 것입니다.

② 12절에서는 바울의 사명적인 특수성을 고백하셨습니다. 이 고백은 모든 사역자들이 본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은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워 주심을 인하여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또 자신이 의뢰한 하나님을 알고 또 그의 부탁한 것들을 하나님이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의탁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 사역을 성취하는 일이요, 또 자신의 삶과 죽음의 길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롬14:7-8,빌1:20-24). 또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복음 사역자의 의탁한 바를 능히 지키실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복음 사역자는 주님이 “오른 손에 붙드신 별처럼 여기신다”(계2:1) 하셨으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지켜 주실 것입니다.

2. 권면의 내용입니다(13-18절).

1)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13절).

“바른 말”은 바울 사도에게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계시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나타낸 분이므로 그의 증거가 곧 계시의 말씀이었고, 또 “바른 말”은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므로 그것을 본받아 지킴으로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님은 우리(사역자 및 성도) 안에 거하심을 알 수 있고, 성령님은 복음 사명을 전달하시며(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것),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디모데가 받은 사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아름다운 사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을 아름답다”(롬10:15) 하셨거든 하물며 복음적 사명의 직분이겠습니까 ? 모든 사명자는 이 직분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골4:17).

3) 배척자와 협력자에 대하여 합당하게 대처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15-18절).

① 바울 사도는 모범적이고(고전11:1) 표준적(엡2:20)인 사역자였지만, 예수님도 배척한 무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바울을 배척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역자를 배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목적과 정욕을 따라 주지 않음을 인하여 교역자를 등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고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믿음을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여겨도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 복음 사역자가 이단이나 외식자나 폭력배가 아니면 배척할 이유를 갖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그 주동자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어찌하여 모든 사람의 배척을 받았을까 ? 하시겠지만 이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을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이나 현실주의자들은 바울을 배척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기독교가 보편화된 시대에도 ”교회당으로 쓴다“ 하면 건물을 임대하지 않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마땅히 표현할 수 있는 내용(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시지 않았고 다만 그런 자들을 ”유의하여 대처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② 그러나 “오네시보로의 집에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소원하셨으니,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사랑한 성도로서 “자주 바울을 유쾌하게 하였고 또 바울이 로마 감옥에 계신 것을 알고 부끄럼 없이 자주 면회를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그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딤후4:6). 따라서 믿음과 사명이 약한 성도이면 사형수를 면회하는 일이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의 사명 생활과 순교를 거룩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내용으로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하였는지 모르나 “에베소에서 바울을 섬긴 것을 디모데도 안다“고 하셨으니(18절) 신앙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위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같은 충성된 봉사에 대하여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원컨대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집)을 위한 바울의 축복 기도이며, ”그 날에 긍휼을 얻게 해 달라“ 하심은 주께서 갚아 주시는 날에 오네시보로의 집에 복(긍휼)을 많이 주시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선행에 대하여 일정한 날을 정하시고 상급을 주시는데(전3:1) 최종적인 상급은 하늘에서 주실 것입니다(계22:12). ”오네시보로“와 같은 성도가 되어 사역자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① 하나님이 구원의 경륜을 나타내 주시는 과정을 이해하시고,

② 무조건 선택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③ 복음 사역자의 사명 수행과 훼방받는 어려운 문제들과,

④ 유쾌하게 하는 복된 일들에 대하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거짓 신앙과 참 신앙 (딤후 1:3-5) 목록으로


5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하며 칭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거짓 신앙과 참 신앙”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먼저 거짓 신앙과 참 신앙을 분별할 수 있는가 ? 에 대하여 “상당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마음 속에 뿌리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약1:21) 밝히 알기 어렵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의 동향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고, 나무의 좋고 나쁜 것을 그 열매로 아는 것과 같이(마7:15-18)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경향이 말과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자의 생활을 통하여 상당하게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거짓 신앙을 드러내는 데는 네 가지 특징이 있으니,

1)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마3:10에 보시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란 신앙적, 성경적 행위를 뜻하고, 좋지 않은 열매는 성경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2) 성경의 뜻을 거역하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마3:8). 따라서 성경적 권면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는 거짓 신앙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눅16:30). “회개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고후13:5).

3) 기독교 생활을 모양으로만 나타내고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7:21-23에 보시면 “주여 주여 하는 기도”도 있고, “선지자 노릇하는 증언”도 있으며 “귀신 쫓는 역사”도 있으나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4)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고, 그것을 알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22:12에 보시면 잔치 집에 오기는 하였으나 “예복을 입은 자와 안 입은 자”가 있었고, 마13:24-30에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가 있으며, 또 마25:31-33에는 “양과 염소로 분별하시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다 현실 교회 안에 거짓 신앙의 사람들이 섞여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앙의 특징은 “불법을 행하는 것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

3. 성도의 교회 생활은 신앙 생활의 방법일 뿐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지는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관계 있는 신앙”에 대하여 요14:10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하셨고, 고후 13:5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있는 생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관계를 모르고 교회적 또는 제도적 생활로 신앙 생활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고 또 교회 생활은 교회 사업주의(사람의 기업체)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4. 성경은 외식자들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입술로만 존경하며 마음이 먼 자들(마15:8), 가라지, 예복 안 입은 자, 염소로 비유하신 말씀들, 말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그레데인”들(딛1:10-16), “선지자는 믿으나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싫다”고 한, “아그립바” 총독(행26:28), 가룟 유다처럼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하는 자들(히6:4-6),.....이런 자들은 다 믿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외식자들의 신앙 행위의 가능성과 멸망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4항에 보면 “가령 그들이 종교의 본질과 법의 견지에 따라서 그들의 생을 꾸며 맞추는 데 매우 열심이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며 유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치명적이라”고 하였습니다(행4:12,요14:6,엡2:12,요4:22,17:13,요이9-11,고전16:22,갈1:6-8).

5. 거짓 없는 참 신앙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

1) 참 신앙의 근거는 거듭난 은사를 받음에 있고, 참 신앙의 목적은 구원과 하나님 영광에 있으며, 참 신앙의 표시는 성경대로 실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성도든지 “그가 얼마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애쓰는가?”를 보아서 참 신앙 여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바울 사도는 디모데의 거짓 없는 신앙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

① 바울은 계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계시에 의하여 아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행14:9에 보시면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 하셨고, 행23:11과 27:23에서도 계시로 사실을 고지 받은 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나 본문에서 디모데의 참 신앙을 입증할만한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참 신앙을 입증할만한 근거는,

ⓐ 디모데에게 눈물이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딤후1:4). 이 눈물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바울 사도와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 사명에 따르는 고난을 생각하는 심정 또는 바울 사도와의 친분적 사랑의 뜻 등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디모데의 눈물이 하나님과 바울에 대한 사랑을 느낀 것이므로 그의 신앙의 진실을 표현함이 되는 것입니다.

ⓑ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9)는 권면에 따라 그는 옥토와 같은 착한 마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2:21에 보시면 “디모데는 바울을 섬길 때 자식이 아비에게 하듯 섬기는 연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착한 마음은 거짓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적 교육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본문 5절에서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한다” 하신 말씀은, 전통있는 신앙과 교육에 힘입는 바가 커서, 모범적 신앙에 닮아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눈물 없이 예수 믿는 것은 깊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감격과 눈물을 흘리면서 믿음 생활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또 그의 착한 양심과 전통있는 교육으로 연단 받은 사실로서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신앙의 참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①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증거를 나타내야 할 것이요,

② 그 증거로서의 눈물과,

③ 착한 양심과,

④ 교육의 연단을 확보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하나님이 주신 마음 (딤후 1:7-8)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인즉 그 마음을 가지고 복음의 증거와 복음을 인하여 갇힌 자를 부끄러워 하지 않음과 오히려 고난받는 일에 담대하라”고 권면을 하셨습니다.

1. 그러니까 성도나 전도자들은 우선 복음 증거에 대하여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1)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두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니,

① 불신자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강한 반대와 핍박을 받는 경우요,

② 성도들이 성경적으로 증거된 말씀을 거부하여 증언자를 배척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 것과 또 성도들로부터 호감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어서는 안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대방의 아픈 부분을 지적하거나 기복주의를 억제하거나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나 교만한 태도를 지적할 때 은혜로운 교훈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드러운 방법으로 깨우치다 보면 속히 시정되지 않고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복음 사역자는 자신에게 임할 모든 피해를 두렵게 생각하지 말고 담대히 증언하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일반적으로 두려워 하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가난, 질병, 명예 훼손, 죽음입니다. 가난은 예수님도 겪으신 것이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염려에서 떠나는 연단을 많이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의 염려를 떠나는 연단은 다른 사람의 유행이나 씀씀이를 따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과 죽음은 예수님이 부활로 승리하신 것이니까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의 미련을 갖지 않는 방법으로 연단을 받아야 하며, 명예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와 심판에 의존하여 겸손하게 극복하는 연단을 받아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현실 생활에서 염려를 떨쳐 버린다면 공중을 나는 듯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요8:32).

3) 그러나 염려를 안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고후7:11,11:28-29). 가장 큰 염려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며 주님을 멀리하는 상태”를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마9:15). 그리고 이웃의 어려운 문제나 교회를 위하여서나 자신의 사명을 옳게 감당하기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한 “두려워하지 않음”은 증거의 사명을 이행할 때 핍박에 대하여 담대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능력 있는 마음”입니다. 이 능력 있는 마음은 자신감 또는 담력을 의미하는데, 빌4: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에 따라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을 지켜 주시고(빌4:7),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다우며”(히13:9), 또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키신다”(사26: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능력 있는 마음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평강을 지키는 데 사용할 뿐 아니라 죄와 마귀를 대적하고 진리의 말씀을 시행하는 일에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대항하고 세속을 멀리하며 욕심을 제어하고 사명을 수행할 때도 능력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과감한 시행이나 죄에 대한 과감한 대항을 할 때 확신과 결심과 능력 있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요일4:8), 죄인들과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롬5:10,12:20). 요4:8-11에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사랑의 세계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12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18절)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고전14:1에서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원수를 선대하는 마음이며,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하셨으므로 자기를 평안케 하고, 나가서는 생명을 살리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에게 타락율이 적고, 병아리도 인공 부화된 병아리가 사망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입양된 “바우만”군이 백혈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같은 혈액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나, 그 피를 제공하고 수술을 하여 살린 것은 의술의 힘에 앞서 사랑의 힘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죄와 마귀를 미워하는 것 외에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이 말씀의 원문이 “소프로니스무”(σωφρονισμού)인데, 영어로 “self-control”(절제)로 번역하였고, 칼빈 선생님도 “절제하는 마음”으로 이해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절제”란 자기를 연약하게 생각하여 통제하는 것입니다. 또 항상 자기의 부족과 실수를 염려하여 조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고전10:12의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26:41). 소는 한번 디디고 미끄러진 반석을 다시 밟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능력 있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 근신하는 마음으로는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이웃을 상대하며, 능력 있는 마음으로는 복음과 사명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일에 사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사역자를 섬긴 오네시보로 (딤후 1:15-18) 목록으로


목회자가 목회를 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교인들을 접하게 됩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인사한 후 교역자에게 아무런 부담 주는 일도 없이 조용하게 믿음 생활하는 성도가 있고, 자주 선물이나 음식으로 목회자를 대접하면서 개인 문제, 가정 문제 등으로 목회자의 관심을 받으려 하는 성도가 있고, 또 어떤 교인은 설교나 목회 방법에 대하여 불평을 갖고 잘 협조하지 않는 등 말은 안하지만 실제로 배척하는 자세를 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본문에 나타난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목회자를 사랑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고, 물질과 기도로 협력함으로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경우에 그를 동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을 천사처럼 영접하거나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어 대신 쓰게 할 수만 있다면 드리려고 한 성도들과(갈4:14,15), 로마 교회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고,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이라도 내어줄 각오로 섬긴 사실이 있었습니다(롬16:1-4). 이런 성도들의 협조로 바울의 복음 사역이 능률 있게 진행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오네시보로”는 바울 사도를 자주 유쾌하게 섬긴 일로 바울의 잊을 수 없는 대상이 되었고, 바울은 그의 집을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하셨습니다.

1.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한 일이 무엇일까요 ?

본문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 유쾌히 느끼셨다”는 설명이 없으나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계실 때도 얼마큼 섬겼고 또 사슬에 매인채 로마 감옥에 계실 때에도 부끄럽거나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면회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1) “유쾌하다”는 뜻은 원문의 “아나푸코”(ἀναψύχω)로 “소생시킨다” “회복시킨다” “버팀이 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뜻으로 번역한 것과(He cheered me up) 쓰러지려 할 때 버텨주는 뜻(He braced me up)으로 번역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2)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바울 사도가 옥중 생활로 또 사형수의 입장으로 심히 곤고하고 쓰러지게 되었을 경우에 “오네시보로”의 방문을 통하여 큰 위안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음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동역자들이 다 자기의 갈 곳으로 가고 “누가만 함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딤후4:9-11). 이때에 “오네시보로”는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를 갖게 하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로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한 것입니다.

2. 16절에 보시면 “원컨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하였고, 또 18절에서도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해 달라” 하셨으니 이 뜻이 무엇일까요 ?

1) 분명히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집)을 위한 축복 기도인 것입니다.

2) “그 날”이란 “오네시보로”의 집에 어려움이 있게 되는 날 일 것입니다(이 날을 강론에서는 넓은 의미로 상급주시는 날 또는 갚아 주시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가까이 면회하다가 그 자신도 핍박자들로부터 속박을 당하거나 위험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게될 경우에 “그에게와 그의 가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이렇게 복음 사역자와 생사를 같이 하는 조력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오늘의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 유쾌함을 느낄까요 ?

사도 요한은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 잘하는 것” 만이 복음 사역자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히11:6). 필자가 목회상 경험한대로는,

1) 성도가 기도를 시원스럽게 잘할 때,

2) 목사의 입장을 이해해 줄 때,

3) 성도의 마음에 악의 또는 이기주의가 없음이 나타날 때,

4) 자신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5)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음 같이 선물을 가져올 때,

6) 현실적 타산보다 신앙 중심을 귀히 여길 때,

7)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사상과 생활에 있어서 나를 인정해 줄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제는 가족들도 일치하지 않으므로 나와 같은 사상을 가진 성도나 동료자를 만나기가 어렵고 따라서 고독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 사역자를 유쾌하게 해 드리십니까? 교역자가 자기의 뜻에 협력하지 않는다 하여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개인의 현실적, 교회적 욕구를 떠나서 예수님을 닮는 일에 주력하시고 복음 사역자의 취약한 부분에 함께 서서 도와 드림으로 버텨 주고, 밀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님이 쓰시는 자의 동역자가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3 과 은혜 속에서 강한 생활 (딤후 2:1-13)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내 아들”이라고 호칭하시면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 이하에서 여러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강하여진 다음에 믿음의 강한 생활을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은혜 속에서 강한 생활”로 정하였습니다.

1, 우선 성도나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 강하여져야 합니다(1절).

1) 1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지칭하여 “내 아들”이라 하신 의미는 딤전1:18에서 설명드렸습니다.

2) 성도나 복음 사역자가 강하여져야 하는 부분은 믿음 생활과 사명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님의 은총 아래 있을 때 믿음이 강하여질 수 있고, 유혹을 배격하는 일이나 사명에 헌신하는 일이 강하여질 것입니다. 믿음과 사명 생활에 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강하여지는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로 성취됩니다. 따라서 강하여지려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요14:10-11). 예수님 안에서 사는 생활은 곧 그의 말씀 안에서 살고 계명을 기키는 것을 의미합니다(요14:23). 성도가 진리를 멀리 하거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소리가 크고 볼거리가 많아도 그것은 과장된 표현일 뿐 강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믿음의 강력은 진리의 이해력과 실천력에 있음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은혜로 강하여진 다음에 “복음 증언의 사명을 계승시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절).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디모데는 바울 사도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시대는 구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이 영감 받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전달된 만큼 “바울에게 들은 말씀”이 곧 진리였던 것입니다(살전2:13)

2) 또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복음 사역자(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을 때 바울로부터 진리의 전달과 사역자되는 은사와 사명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딤후1:6). 이 사실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진리되는 입증을 위함이 아닌 사역자된 입증을 위함입니다. 복음 사역자로 인정을 받을 때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임명을 받는 것은 사명자의 진로상 유익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직을 받지 않은 관계로 그의 사도직 신분에 대하여 오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행9:15-18,고전9:1-2).

3) “복음 사역자를 세울 때 충성된 사람들을 세워 전파와 교육을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사람, 전파와 교육을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복음 전파와 진리 교육의 사명을 계승시켜야 할 것입니다.

3. 은혜 속에서 강한 성도는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3절). 본문 3절에서 “군사의 특징”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군사는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전체적 헌신을 뜻하며,

2) “군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여야 함”이니 이는 예수님 제일주의로 살면서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함이요,

3)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하신 말씀에서 복음의 군사된 자는 핍박과 고난을 두려움 없이 감수하여야 하고, 또 그 당시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 계셨으므로 바울처럼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기꺼이 여기도록 권면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사명을 위하여 사역자로 임명을 받은 후 절대 복종, 전적 헌신, 고난 감수, 이 세 가지를 시행함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되는 표준이라 할 것입니다.

4. 복음 사역자나 성도는 마치 마귀와 경주하는 선수와 같으므로 선수가 경기 규례에 따라 행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법대로 생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5절).

1) 운동 규칙이 엄하게 적용되는 것을 올림픽 경기 때 많이 체험합니다. 경기자가 약물을 취하고 경기하거나 규칙을 위반하였을 때 메달을 받고도 취소당하는 것을 봅니다.

2) 이와 같이 성도들도 진리대로(고후13:8) 또는 서약한 규칙대로 생활하여야 하며, 책임 있는 규칙을 범하였을 때는 당연히 그 결과가 무효된다는 것을 이 말씀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 치리회가 교회 헌법을 잘못 활용하고도 정당한 일처럼 인정하는 사례는 역시 이 말씀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5. 복음 사역자를 수고하는 농부로 비유하여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6절).

1) 수고하는 농부가 일에 전념하는 것처럼 복음 사역자들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며,

2)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심은 마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함”(고전9:9)처럼 일하기 위하여 교회로부터 먼저 생활비를 받아야 하며,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3) 또 이 말씀은 수고하는 사역자에게 상당한 상급이 예비되어 있음도 아울러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농부의 수고에 따라 상당한 기간이 지나고 결실기가 되면 좋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7절).

1)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울 사도의 말씀은 진리요 성경입니다. 엡3:2-4과 살전2:13에서 그 사실을 말씀하셨고, 또 성경적 교훈의 말씀을 되새김으로 은혜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딤전4:14,딤후1:6).

2) 성도나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에 습관이 되어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큰 복일 뿐 아니라(시1:2)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범사에 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어느 성도든지 말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면 총명을 얻는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표현력과 문장력이 거의 없었으나 그가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은혜를 받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였는데 총명이 생겨서 훌륭한 설교자가 된 사실이 있습니다.

7. 복음 사역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8절).

1) 8절의 “나의 복음”은 바울이 증언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이고, “다윗의 씨”란 예수님의 인간적, 사회적 신분을 표현한 말씀이며,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고 희생하셨으나 영광의 부활이 있었음을 기억하여 사명자들도 사명 성취를 위하여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라는 교훈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2) 화분에 심겨진 나무에 향기로운 꽃이 피었습니다. 그 꽃과 향기의 출처가 어디로 말미암았을까요 ? 그 꽃의 고운 색깔이 어디로 말미암았을까요 ? 그런데 또, 한 꽃나무에 파란 꽃과 붉은 꽃이 함께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명력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런 사실은 성도에게 부활의 확신을 더욱 갖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면서 그 생활을 본받고 영광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8. 인간은 복음 증언을 인하여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9절).

1)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죄인처럼 옥중 신세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고 또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고난을 그의 교회를 통하여 대신 당하는 것입니다(골1:24). 여기에는 큰 상급이 따릅니다(마5:11-12).

2)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

①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시므로(요14:6) 절대의 권위가 있다는 뜻이요,

②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인하여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며(행1:8),

③ 진리의 말씀이 인간에 의하여 감취어지거나 훼손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벧전1:25).

진실이 밝혀지고 나타나는 것처럼, 진리도 어떤 훼방에나 굴함이 없이 나타나고 증언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로 인간의 죄를 깨우치다가 화 받을 것이 두려워서 증언하지 못한다면 매이지 않는 진리를 인간이 감추는 것이 되며, 세례 요한은 매이지 않는 진리에 충성하다가 순교한 것을 교훈 받아야 할 것입니다(마11:11,14:3-11,눅3:19-20,막6:18).

9. “바울의 인내를 본받아 내세의 영광에 참여하라”고 하셨습니다(10-13절).

1) 은혜 속에서 강한 자는 택한 백성의 믿음 성장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끝까지 복음 사역에 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고, 또 영원한 상급의 영광도 함께 얻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0절).

① 복음 사역자들은 이방인들로 인하여 받는 핍박도 참아야 하지만,

② 택한 백성들의 믿음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함을 인하여 당하는 괴로움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고난이 마치 “해산하는 수고와 같다”고 하셨습니다(갈4:19). 그런 고난을 인내하지 않고 사명에서 떠난다면 성도의 신앙은 더욱 침체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 대한 산파의 역할과, 양육의 수고를 인내로 감당하여, 함께 구원에 이르고 또 영원한 영광의 상급도 얻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③ “복음 사역으로 고난을 받은 자가 영광에 들어간다”는 말씀은(10절) 미쁜 말씀(아름답고 참됨)이니, 마치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었다면 역시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고(11절), 또 인내하였다면 주님과 함께 왕노릇(내세의 영광;계3:21,4:4)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주님을 부인하였다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니(12절), 이것은 구원의 문전에서 내쫓기는 상황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곧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함 받게 될 것입니다(마7:23,24:51,25:12,41).

2) 모든 성도는 은혜 속에서 강하여진 증표로 주님의 일향 미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며 끝까지 의지하여야 할 것입니다(13절).

① 13절에서 “우리는 미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무상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실을 유구히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②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진실하십니다. 바울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딤후1:12)고 하셨습니다.

③ 끝으로 중요한 것은 일향 미쁘신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과 경력 등을 은폐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무흠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 아니요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닮아 사는 성도들은 추호도 자신의 신분이나 경력 또는 비난받을 사항에 이르기까지 은폐하며 살거나 그것으로 덕을 보고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고 자기의 상태 그대로 살고, 자기의 있는 상태대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성도들은 항상 주 안에 살면서 주시는 바 은혜로 믿음이 강하여지고 믿음이 강한 상태에서 합당한 생활과 사명을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 (딤후 2:14-26) 목록으로


본문 15절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 사역자요 후계자인 “디도”에게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다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되는데 필요한 내용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은 “진리를 옳게 분변하는 자”(15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는 자”(15,23절), “귀히 쓰는 그릇 되기 위하여 성결로 자신을 예비하는 자”(20-21절), “다투지 않고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는 자”(24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로 징계하는 자”(25절)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되려면,

1. 진리를 옳게 분변 하라고 하셨습니다(15절).

진리는 성경입니다(요17:17). 성경을 분변함에 있어서,

1)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과,

2) 성경 아닌 것을 진리 아닌 것으로 아는 것과,

3) 성경을 옳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과,

4) 성경의 의미를 성도의 실제 생활에 바로 적용하도록 잘 하라는 뜻입니다.

진리 아닌 것을 진리인 듯이 내세우는 일과 성경의 의미를 잘못 설명하는 사례가, 진리 사역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위험한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것입니다(15절).

이때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쓸모 없는 물건은 선물의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인정받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1) 자신이 부끄러울 것 없는 자가 되는 것이요,

2) 헌신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의 쓰시는 뜻에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에 가장 바치기 어렵고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자신의 목표와 취미 생활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의 목표와 취미 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은혜를 받으려 하거나 헌신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못박지 못하는 헌신은 참된 헌신이 아닐 것입니다. 헌신에는 반드시 몸과 시간이 따르게 됩니다.

3.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는 것”입니다(16절).

1) 망령되고 헛된 말은 경건 생활에 유익이 없고 또 사람을 해치는 말들일 것입니다. 16절에서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간다” 하시므로 헛된 말이 불경건의 발단이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17절에서 “저희의 헛된 말은 독한 창질(썩는 피부병)의 썩어져 감 같으며 그런 죄를 범하는 자 중에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후메네오”는 딤전1:19-20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자라” 하셨고, “빌레도”도 “후메네오”와 함께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자(16절)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말은 썩히는 독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들은 또 진리 분변을 하지 못합니다(18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상태에서는 진리를 바로 수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한 믿음으로 수납하기 때문입니다(약1:6). 18절에서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도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양심이 어두워지면 진리 해석을 왜곡하여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여 순수한 믿음을 무너뜨린다 하였으니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뜻은 이단자들이 “성도가 죽은 후에 육체적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거듭나는 부활(엡2:1,골3:1)이 이미 있었다“는 뜻으로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이미 세워졌다”고 하셨습니다(19절).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부활 교리의 바탕이며 이 바탕은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그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엡2:20-22) 이 증언이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인침이 있었다” 하심은 보증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보증의 내용은 부활과 성령 강림입니다. 성령님께서도 “각종 능력과 말씀으로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히2:3-4).

능력이란 초자연적 섭리로 부활 사실을 입증하신 것이고, 택한 자에 대한 구원의 보증은,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셨으니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구원할 대상)을 아신다”고 민16:5에서 말씀하셨고,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욜2:32에서 하신 말씀이며, “구원 받을 선민이 불의한 세계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씀은 출애굽 사건을 비롯하여 민16:5,24-25 등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기초(터)가 수립된 것을 믿고 진리를 옳게 분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귀히 쓰는 그릇으로 주인의 쓰심에 예비함이 되라”고 하셨습니다(20-21절). 20절의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뜻하고, 여러 종류의 그릇은 각종 은사와 직분에 따른 성도의 직책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는 복종과 성실과 헌신이 있을 뿐 귀천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다만 자신을 성결하게 보존하였을 때 주인이 요긴하게 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 교훈은 설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5. 또 피할 것 몇 가지를 말씀하셨으니(14,22-24절).

1)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4절의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 하심은, 앞 절인 12절의 말씀 즉, “참으면.....왕노릇 할 것이라”는 말씀과, 13절의 “주는 일향 미쁘시다”는 말씀을 기억하여(인내의 유익과 주님의 공의로 생각함) 누구와도 말다툼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14절). 23절의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 다툼의 원인이 됨을 말씀하셨고, 24절에서는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식한 변론”이란 유익하거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변론입니다.

2)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22절). 청년의 정욕이라면 이성욕과 명예욕 그리고 현실적 향락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갈5:24).

6.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22절)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자들”과 동지가 되어 규합하는 생활이 필요하고 의(바른 것)와 믿음(신앙적인 것)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 행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7. 복음 사역자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인내함으로(24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갈5:22).

8. 마지막으로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여,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시기를 기다리고(25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징계로 말미암아 깨달으며, 또 마귀에게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을 기대하라(26절)고 하셨습니다.

거역하는 자는 참으로 악한 자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는 그 일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 권면하여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는 징계하되(마16:19,히12:8) “온유함(사랑)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적과 미움으로 하면 안됩니다. 사랑으로 징계하여도 징계를 믿음으로 받아 유익하게 선용하는 성도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혹”이란 말씀을 하신줄 압니다(25절).

복음 사역자의 과제는 이렇게 다양하고 중요하며 또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을 받음에 대하여서도 꼭 필요한 요소들을 확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충성된 사람들 (딤후 2:2) 목록으로


본문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들은 바”란 바울이 증거한 진리의 말씀이며, “부탁하는 의미”는 진리 사역을 의미합니다. 진리 사역은 바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사명자들은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충성된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충성된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충성”이 성립되려면,

1) 하나님께로부터 목적 있는 직임을 맡아야 하고,

2)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노력하여야 하며,

3) 자기의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맡은 사명이 없거나 사명을 받고 바른 방법을 쓰지 않거나 자기의 희생이 많지 않으면 충성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성경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 중에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 보면

1) “노아”는 충성된 사람입니다. 노아의 맡은 사명은 방주를 제조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신 것은(창6:14) 120년 후에 있을 홍수를 대비케 하신 것이었습니다(창6:3). 노아가 방주를 120년간 지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세월 방주와 더불어 인생을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창6:17-21에 보시면 “하나님이 땅에서 기식하는 모든 생명을 멸절시키리라” 하시고, 그러나 “너와는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가족들과 한 쌍씩의 동물들과 먹을 것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라” 하셨을 때, 창6:22,7:5에서 노아는 이를 “다 준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을 방주로 들어가게 하실 때, 노아의 가족 외에는 다 멸절시킬 것이니 너의 가족만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으로 구원 언약의 명맥을 삼으신 것이고, 노아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방주를 지은 것이 곧 자신의 다른 취미 생활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사명을 받았을까요 ?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롬4:11). “믿음의 조상”이란 믿음의 계승자와 모범자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계승자란 메시야 탄생의 명맥이란 뜻과 신앙의 모범자란 뜻이 있습니다. 창12:2에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창17:19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한다” 하신 말씀으로 나타내셨고, 신앙의 모범에 대한 말씀은 요8:39에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명을 받은 상태에서 고향을 떠나는 순종, 첩과 첩의 자식을 버리는 순종, 독자 이삭까지 제물로 바치는 순종을 하였고 하나님(천사)을 접대하는 충성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큰 모범인데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자기의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 바쳤으므로 충성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모세”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무슨 사명을 맡았습니까 ?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인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출3:7-12). 그래서 그 사명을 감당하였는데, 히3:5에 보시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처럼 충성하였다” 하셨고, 히11:24-25에서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더 좋아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지도자의 입장에 있을 때 백성들이 “양식 달라, 물 달라, 파 마늘을 못 먹는다, 고기 먹고 싶다” 하였고, 아론(형)과 고라당이 반역하였으며, 아말렉의 침략과 염병과 발람의 유혹 등.....얼마나 어려움과 고생이 많았습니까 ? 그러나 왕자의 영광을 버리고 그런 고난을 택하였으면서 사환처럼 충성하였으니 충성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여호수아”도 충성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도 여호수아의 충성을 인정하여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민27:16-20). 여호수아는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모세와 함께 40일을 견딘 사람입니다(출24:12-14,32:15-19). 그때 다른 장로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위치와 명령을 잘 지키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충성에서 또 중요한 것은 수1:7에서 “강하고 담대하며 율법을 다 지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교훈을 하였고, 수24:14-15에서 “너희는 모든 잡신 섬기는 일을 제하고 하나님만 섬겨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다른 신이라도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므로서 “다른 사람이 다 하나님을 떠나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결심을 나타내므로 충성을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사명이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국 사명인데, 투철한 신앙과 큰 용기를 갖고 그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5)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신 사람입니다(마11:1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최초에 증언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요1:29-33). 세례 요한의 충성의 특징은 때묻지 않은 순결을 갖추었고(눅1:15), 의에 담대하였으며(눅3:7-14), 현실적 영광을 등지며 살았고,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으니 충성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기독교 신앙백과> 참고).

6) “예수님”의 충성입니다. 히3:6에서 예수님은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하셨고, 빌2:8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충성됨에 대하여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요,

7) “바울 사도”의 충성입니다. 빌3:8에 보시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였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서민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지만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유족한 사람이요, 모세가 애굽의 왕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것 같이 현세적 욕망대로 살 수도 있는 형편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문벌, 지식, 재산, 가정까지 다 포기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충성한 사람입니다.

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들 수 있습니다. 롬16:3에 보시면, 이 부부 가족은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봉사한 가족입니다. 이들 부부가 바울을 만났을 때 충성할 것을 결심하고 바울 사도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섬겼고, 바울이 핍박을 받아 죽게될 지경이 되면 “자기들이 죽음을 대신하고라도 바울을 살려야 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봉사를 한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들과 충성된 일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설교보충 5. 세 가지 교훈 (딤후 2: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세 가지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것입니다(1절).

1) 무엇이 강해져야 한다는 뜻일까요 ? 건강일까요, 생활력일까요, 세상 권세일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신 강한 것은 마귀의 역사를 대항하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신앙의 힘은 성경 말씀으로 무장할 때,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죄악의 역사를 강하게 물리칠 때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또 강해지는 방법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습니다. 여기의 은혜란 개념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영적 관계가 긴밀해 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관계의 긴밀함은 자기 자신의 신앙의 체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까이 느끼면서 신앙 생활을 할 때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2절). 이 말씀은 “성경 가르치는 사역자를 바로 세우라”는 뜻입니다. “내게 들은 바”는 바울이 전달한 성경과 교훈이요, “충성된 사람”이란 바른 신앙과 사상을 사명적으로 가르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딤전1:12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 하셨는데, 여기의 “충성됨”이란 열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회심과 겸손과 복종과 헌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가르치고 바르게 헌신하는 사역자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인격자,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고전4:1) 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자에게 진리 사역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되어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3절).

1) 하나님은 신앙의 군사를 필요로 하십니다. 이 세상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 사는 일이 다 전쟁 같기도 합니다. 경제 전쟁, 지식 전쟁, 명예 전쟁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 세계도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과의 싸움이라”고 하셨습니다(엡6:12).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하고 해석을 혼잡케 하고 잘못된 사상이 유포되는 등, 여러가지 영적 전쟁을 치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 일선에서 싸우는 성도가 곧 군사인 것입니다.

2)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체력이 있고, 지력이 있으며, 정신 무장이 잘되어 있고 좋은 무기를 가진 군사이어야 할 것입니다.

① 신앙 생활에 있어서나 좋은 군사의 역할을 함에 있어서, 건강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혼이 잘됨 같이.....강건하기를 간구하신다”(요삼2)고 축복하셨습니다.

② 지식과 총명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많이 갖고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③ 사명자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군인 정신은 복종과 일사각오입니다. 성도들도 마귀와 싸울 때 죽는 것을 겁낸다면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인정에 치우치거나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서도 안될 것입니다(딤후2:3-4). 여호수아가 군대를 무장시킬 때 “강하고 담대하라”는 정신 무장을 시켰습니다(수1:5-7).

④ 좋은 군사의 좋은 무기는 방어 무기와 공격 무기입니다. 순결과 인내와 소망과 지식과 연단은 방어 무기이고, 말씀 전파와 기도와 사랑은 공격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와 더불어 훈련이 잘된 성도라야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믿음과 진리 실천력이 강해져야 하겠고, 진리 전파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계승시켜야 하며,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되는 문제를 위하여 힘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성경 지식, 건전한 사상, 사랑의 실천, 고난의 감수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운동과 신앙 (딤후 2:5) 목록으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운동과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운동이 좋은 것이지만 믿음 생활 이상 열광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운동은 체력 단련과 친목 도모와 국제 경기를 할 경우에 국위 선양이 되는 것과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을 키우는 데 좋은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운동 경기 관람 등에 몰두하면서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을 보면 진리 사모하는 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필요할 만큼만 관심을 가짐이 좋을 것입니다.

2. 고전 10:31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운동을 하여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소득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 운동은 자신의 체력 단련에 필요하고, 교회나 국가적 연합 운동은 정신적 건강과 친목에 큰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3. 운동 경기의 성질을 분석하여 이를 신앙 생활에 적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운동에 상대자가 있는 것처럼 성도가 이겨야 할 상대는 마귀의 유혹이요,

2) 운동에 종목이 많은 것처럼 성도의 신앙적, 사명적 과제도 다양합니다.

3) 운동을 훈련과 기술로 연마하는 것처럼 신앙도 연단 받고 숙달되어야 합니다(딤전4:7).

4) 운동은 법대로 시행하여야 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성경대로 하여야 하며(고전7:19,고후13:8),

5) 운동하는 자가 규칙을 위반하면 상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그러합니다(딤후2:5).

6) 전심전력하는 것이 운동인 것처럼 마귀와 대항하는 경주도 그렇습니다(딤전4:15,대하16:9).

7) 운동할 때 구경꾼과 응원자가 있는 것처럼 성도의 생활을 지켜 보는 이들이 많으므로 부끄러운 일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8) 운동 경기에서 이겼을 때 상을 받는 것처럼 신앙의 승리자에게도 상이 있습니다(계22:12).

운동도 잘하고 신앙 생활도 잘하여 큰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7.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 (딤후 2: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자신은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입니까?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빌1:20과 고후9:4에서도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너무 많아서 자주 자주 “주여 주여”하며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1. 첫째로 부끄러운 것은 성경 지식의 부족입니다. 성경 내용의 소재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여 항상 성구 사전을 찾게 됩니다. 성경을 많이 몰라도 부끄럽고, 말씀을 옳게 분변 못해도 부끄러우며, 말씀을 충분하게 또는 고루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성경은 아는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인만큼 지키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2. 말을 잘못하여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말을 잘못해서 다투는 일이 주위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성경에서는 “더러운 말(엡4:29), 농담과 누추한 말(엡5:4), 헛된 말(엡5:6), 거짓말(엡5:6), 아첨하는 말(살전2:5), 다투는 말(딤후2:14)을 하지 말라” 하셨고, 반대로 “위로하는 말(살전4:18), 참된 말(엡5:6), 은혜로운 말(골4:6), 고르게(균형 있게) 하는 말(골4:6)”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대중 앞에서 말을 전하는 것과 서신으로 보내는 것에 영향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말하는 방법의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제가 성남의 박애 치과에 갔다가 좋은 말을 게시한 것을 보고 그것을 기록 보관하였다가 여기에서 또 소개를 합니다). 내용인즉, “말 한 마디”란 제목으로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 마디가 삶을 파괴하고, 쓰디 쓴 말 한 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 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스러운 말 한 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 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하며, 때에 맞는 말 한 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사랑의 말 한 마디가 축복을 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3. 도덕적 생활에서 부끄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도덕적 생활이라면 영적 신앙과 관계없이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사회적으로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문제들일 것입니다. “성도가 싸우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불신자는 술 한잔 먹고 화해할 수 있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교인이 더 따지고 더 까다롭고 더 인색하다, 아무개처럼 하려면 교회에 나갈 필요 없다”는 등의 여론을 들으면서 도덕적 생활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문화에만 앞설 것이 아니라 예절과 사회 책임에도 앞서야 할 것입니다.

4. 신앙 생활에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래 믿었으면서도 신앙의 의미를 잘 모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천국이 안 보인다” 하거나 죽는 것을 탄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많은 성도가 믿음의 참 목적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5. 불법을 행하였을 때 부끄럽습니다. 특히 고위층이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가는 사례를 보면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짓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지요. “모든 죄는 반드시 드러난다”고 생각하여 배격하고, 모든 죄의 유혹은 “마귀의 올무”라고 생각하여 멀리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군 생활 할 때 거짓말을 하고 부끄러움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6. 충성이 부족할 때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달란트 비유와(마25:24-29) 므나 비유(눅19:20-27)에서 책임에 능률을 올리지 못한 종들이 부끄러움을 당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열심히 수고한 사람은 괜찮습니다. 수고 안하고 놀면서 능률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는 어느 때라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게으른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어느 부분에서나 자신이 섬겨야 할 분량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신앙 양심대로 잘 측정하여 부끄럽지 않게 섬겨야 할 것입니다(행23:1,롬13:5). 중직자가 새벽 기도회에 안 나오면 모범이 못되었으므로 부끄러운 일이 되고, “중직자가 절기 헌금을 너무 적게 해도 다른 성도들 앞에 부끄러운 일이니, 적금을 해서라도 더 내라”고 권면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물론 사람 표준에 맞추라는 뜻은 아닙니다. 충성, 봉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요,

7. 하늘의 상급이 없을 때 부끄러울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 나가서 상을 못 받고 돌아오는 선수들을 보면 보는 사람들도 퍽 민망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성경에 “좋은 일을 못하고 겨우 영혼의 구원만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전4:18). “천국에서 상을 못 받는 성도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천국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만일 상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의 차이가 없다면 구태여 ”상 받으라“고 권장할 필요가 없겠지요. 상이 없으면 덜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일에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5 과 알고 돌아 서라 (딤후 3:1-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고 또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 하신 말씀은 그 시대와 현 시대 즉, 말세의 초기와 후기를 포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절 초두에는 “이것을 알라” 하셨고, 5절 끝에서 “돌라 서라” 하셨기 때문에 “알고 돌아 서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5절에서는 “죄로 인한 고통에 대하여”, 6-8절에서는 “범죄 상태의 실례”에 대하여, 9절에서는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죄로 인한 고통에 대하여(1-5절).

1) 바울 사도께서는 말세에 죄로 인한 고통의 때가 이를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말세의 초기나 지금이나 양심있는 성도이면 다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고통의 때에 해당합니다.

2) 죄악의 양상을 18종으로 구별하여 지적하셨습니다.

ⓐ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지 않는 이기주의,

ⓑ 돈을 사랑함으로 물질 소득에 전체의 생활을 집중하는 물질주의,

ⓒ 자긍함으로 자기의 부족이나 취약점은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신감과 우월감에 사로 잡혀서 다른 사람을 존경할 줄 모르는 태도,

ⓓ 교만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앞에 또는 위에 위치하려 하는 태도,

ⓔ 훼방하는 것이니, 이는 이기주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비판하는 행위,

ⓕ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가 팽배하고,

ⓖ 감사의 입장과 표현을 나타낼 줄 모르며,

ⓗ “거룩하지 아니하며” 즉,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지 않으며,

ⓘ 무정하여 인정과 사랑을 베풀려 하지 않으며,

ⓙ 원통함 즉, 적대감을 품고 화해하려 하지 않으며,

ⓚ 참소하여 이간질 하므로(참소란 “디아볼로이”는 마귀를 뜻함) 서로간의 사랑과 화목을 해치려 하며,

ⓛ 절제하지 못하므로 분수를 차리지 못하고,

ⓜ 사납고 포악하며,

ⓝ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 정욕대로 하려 하고,

ⓞ “배반하여 팔며” 하신 것은, 주인이 잘 부려먹은 종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인정없이 취급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랫 사람을 이용만 하고 이롭게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자고함은 자긍과 교만을 합친 뜻이고,

ⓠ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보다 더함은, 현실 향락주의에 빠져 신령한 복의 가치를 느낄줄 모르는 태도요,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함”은 경건 생활(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의식으로만 행하고 실천에 대하여는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양(의식)내는 제도는 잘 순종하지만 개인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거나 모르고 사는 예가 많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3) 성도는 이상 18종의 죄악을 익히 깨닫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상에 열거된 불경건한 행위들이 교인들 중에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범죄 상태의 실례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그 당시에 있었던 도덕적 범죄 사례이고(6-7절), 또 한가지는 모세 때에 있었던 진리 대적의 사례입니다(8절). 이들은 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9절).

1) 도덕적 범죄 사례는 믿음 생활을 한다는 자 중에 어떤 이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한다” 하였으니, 이는 교인들 세계에 불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심이요(고전5:1), 또는 타락한 사역자가 자신을 천사처럼 가장하여 감정에 치우치거나 육정에 끌리는 여성도를 유인하여 음행하는 사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그 유인당한 범죄자는 욕심에 끌린바 되었고, 중한 죄를 짊어진 상태가 되므로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죄를 떠날 때 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1:1-2).

7절의 “항상 배우나 진리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하심은 병자가 병을 고치지 못하면 건강할 수 없음같이 성도가 거리끼는 중한 죄에 얽매여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므로 진리의 지식 곧 믿음 발전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 그런 사람이 사람들 보기에는 똑똑하거나 유력할 수도 있은즉 잘 선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진리 대적의 사례를 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한다”고 하셨습니다.

① “얀네와 얌브레”는 애굽의 바로가 모세를 대항할 때 불러 들인 마술사들인데(출7:11), 그 이름이 출애굽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본문에서 바울에게 계시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② 이 두 사람이 술법으로 모세를 대적한 것은 곧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한 것이므로 진리의 대적자가 된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시행하는 사역자를 거역함은 곧 하나님(진리)을 대적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과 타락자들의 행동은 진리 사역이 아니므로 얼마 못가서 그들의 어리석음은 물론, 거짓됨과 타락성이 드러날 것이며, 일정한 한계 이상은 전진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9절). 이와 같은 사리를 바리새인 “가말리엘”도 밝힌 일이 있었습니다(행5:33-39). 이상의 말씀에서 범죄 행위를 반성하여 돌이킴은 물론 비도덕적 행위와 진리를 대적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극히 삼가고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두 가지 표준 (딤후 3:10-17) 목록으로


이 말씀의 전체적 제목을 “두 가지 표준”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첫째 표준은 바울 사도의 경험과 모범이며(10-12절), 둘째 표준은 성경입니다(13-17절). 이 두 표준은 권위가 꼭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모범 하셨으므로 “자기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고전11:1). 따라서 사도들의 모범과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됩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의 모범이 성경에 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필요한 만큼만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21:25).

1. 바울 사도의 모범과 경험을 본 받으라(10-12절).

1) 본문에서 바울 사도의 모범과 교훈을 일곱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①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성경에 수록된 바울 사도의 서신을 의미하고,

② 행실이니, 이는 바울의 실천 모범입니다. 고전4:6,16,11:1,빌3:17,살후3:9 등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본받아야 할 것을 명하셨고,

③ 의향이니, 이는 신앙과 사명에 대한 사상입니다. 그 사상이 성경에 근거하지만 뚜렷한 표준을 말씀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의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신 바가 있습니다(롬2:15). 이 경우에 바울의 의향을 본받음은 더욱 성경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영감의 풍족함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의향을 나타내신 말씀은 고전7:6-8,25-26에서 “혼인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신 일이 있고, 또 사명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서도 자신의 의향을 말씀하신 내용이 행20:22-24에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의향”은 신앙에 근거한 양심의 자유를 표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 바울의 믿음이니, 이는 바울이 어떻게 믿었는가 ? 함이요,

⑤ 오래 참음이니, 이는 참는 일을 오래 끌며, 무한정 기다리는 것을 뜻하고, “인내”는 잘 참는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건설적 견지에서 참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건설적 발전을 저해하면서 참는 것은 바른 인내가 아닙니다.

⑥ 사랑의 모범입니다. 바울의 사랑의 폭은 넓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롬8:35,엡6:24), 골육 친척에 대한 사랑(롬9:3), 이방인에 대한 사랑(행20:18-24), 핍박자에 대한 관용(딤후1:15,4:14-15) 등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⑦ 핍박과 고난입니다. 핍박은 복음의 대적자로 말미암아 당하는 괴로움이고, 고난은 사명적 활동으로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바울의 안디옥에서 있었던 핍박은 전도자가 당한 유대인들의 핍박이었고(행13:14,45-50), 그 핍박으로 인하여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피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였고(행14:1,2,5), 또 “루스드라”로 가서 발을 쓰지 못하는 자를 뛰어 걷게 하는 능력까지 나타내었으나 그 곳까지 따라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게한 사실이 있었습니다(행14:6,19).

2) 이런 사실을 디모데는 바울과 동행하면서 보고 알았으며, 모든 위험에서 주님이 건져 주셨다고 하셨습니다(11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와 같은 핍박을 당하는 모범도 본받을 것을 말씀하셨고, 이 경우에 주께서 건져 주신 방법은 기적과 일반 은총이었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줄 알고 성 밖으로 내쳤으나 다시 일어난 것은 기적에 의한 은총이며(행14:19-20), 과격한 핍박을 면하려고 도망한 상태에서 보호받은 것은 일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행14:4-6).

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12절).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고(시10:1-18)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마24:12). 불신자와 성도의 사상적, 가치관의 대결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불신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하는 상태에서 대결과 고난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와의 교제에서 다른 성도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완악한 성도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 경우에 정의를 주장하는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여야 하고, 불법을 행한 성도는 자신의 불법한 행위들을 진실하게 자복하고 회개할 때에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될 것입니다.

2. 성경을 표준함에 대하여(13-17절).

13-17절에서는 성경의 필요성과 성경에 대한 관심과 응용함과 성경을 주신 방법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1) 성도는 성경을 배워서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 합니다(14절).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며, 거듭난 심령의 이성(지,정,의)을 상대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저절로 알아지는 기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배워서 확신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사50:4).

하나님은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마28:20), 배워서 확신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확신이란 익숙하게 아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풍성한 지식을 뜻합니다.

2)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14절) 하신 말씀은 성경을 정통적 계승자에게 배워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사상에 입각하여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가 바울 사도에게 배운 것처럼 신학의 정통적 조류가 있고, 신학자도 하나님 사상에 입각하여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교파나 신학교나 선배를 바로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3)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알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15절). 이는 유대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딤후1:5). 성경을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요, 디모데는 좋은 지도자 바울 사도를 만남으로(행16:1) 훌륭한 후계 사역자로 키움을 받았습니다.

4)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란 “성령님의 감동하심”(벧후1:21,왕하2:9)이요, 이는 성령님께서 여러 가지 계시 방편을 통하여(히1:1)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영감으로 사람에게 전달된 말씀입니다.

5)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13,15-16절).

① 우선 속이는 자들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점점 악하여져서 성경 아닌 거짓으로 성도를 속인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 옳지 못한 사상, 잘못된 교회,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주장하는 일 등으로 속입니다. 속지 않을 성도들은 성경 지식의 풍성함과 예민함을 갖고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고전4:6). 지금도 말씀의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잘못된 교훈에 많이 속으면서 은혜 아닌 것을 은혜로,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함이 있을 것입니다.

② 성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지식을 나타내 주십니다(15절). 이 구원의 뜻은 영생이며,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요14:6), 믿음과 구원의 주(히2:10,12:1)이시기 때문에 믿음과 구원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타내 주신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의 도”로서 이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의 방법을 아는 자도 역시 지혜로운 것입니다.

③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16절). 이 말씀은 구원 다음에 바른 인간으로 교육하는 지침서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교육의 지침서로는 성경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인격을 변화시키니까요.

④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심”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뜻하며(요17:17,딤전4:5,시119:9), 거룩의 뜻은 죄사함 받고 부패성을 제거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함을 뜻합니다(롬8:29).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심”은 성경으로 선한 일을 지도받고 말씀의 감동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받음을 뜻하는 것입니다(히4:12).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① 사도들의 신앙과 사명 생활을 본받고,

②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구원의 지식을 가지며,

③ 잘못된 교훈에 유혹되지 않고,

④ 성경 말씀을 구원의 지침서로,

⑤ 인격 교육의 교안으로,

⑥ 또 그리스도를 닮는 표준으로,

⑦ 선한 일을 시행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활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경건의 모양과 능력 (딤후 3:5) 목록으로


경건의 모양과 능력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건이란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는 하나님을 경외함을 표현하는 명사(박윤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상대하여 갖는 모든 작용과, 예배 및 교회 생활 등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 취하는 태도는 예절일 뿐 경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1. 경건의 모양이 무엇입니까 ?

경건의 모양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관계된 모든 의식입니다. 주일 지키는 일, 예배 드리는 일, 전도, 봉사하는 일 등 교회 생활에 합력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사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도 할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진실한 성도는 경건의 모양에서만 끝나지 않고 경건의 능력까지 나타낼 수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할 만큼 모양만 나타내는 자들은 외식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을 포함하는 모양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에게 참된 깨달음과 참회와 믿음의 발전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영광을 나타내도록, 힘있게 모양을 나타내는 경건한 의식도 있습니다.

2) 그러나 이단자, 타락자들의 행위로도 얼마든지 경건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고, 그 모양에 현혹되거나 취하여 분별없이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어떤 이단 교파의 교주가 청중을 모아 놓고 찬송하며 설교하는 장면을 TV로 보셨을 것입니다. 이단자들도 경건의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이단자는 아닐지라도 불건전한 방법으로 사람을 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목사로부터 “욕설을 들어야 좋다” 하면서 그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설교하면서 욕설을 퍼부어도 교인들이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악의 분별없이 맹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3) 1930년-50년대 황해도(북간도) 출신 황국주 목사는 특별 기도를 끝내고,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으므로 예수님 사진처럼 비슷하였는데, 자기가 기도하는 중 “자기의 목이 떨어지고 거기에 예수님의 머리가 붙는 장면”을 보았다 하여 자신을 재림 예수라 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수님처럼 생긴 모양에 끌려서 따라다녔고, 그의 아버지도 아들에게 절을 하였으며, 구변도 좋아서 많은 청중을 임의로 울리고 임의로 웃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부흥회 할 때나 자기 교회에 있을 때 젊은 여자들을 대동하였고, 밤중에 한 방에 거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회를 보던 청년들이 그 현장을 잡고 거짓 사역자임을 폭로하였다고 합니다. 그때에 황국주의 하는 말이 “한국 사람 참 어리석더라. 머리, 수염 기르고 예수 목이 붙었다 하니까 잘 따라 오더라” 하고 성직에서 밀려나 술장사를 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타락하여 큰 요정을 경영하는 것을 본 친구 목사가 찾아가서 “이렇게 타락한 자가 부흥회는 어떻게 인도하였느냐 ?” 하니까, “한 번 해보았을 뿐이라”고 하더랍니다. 부흥회도 연극처럼 “한 번 해볼 수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경건의 모양치고는 대단한 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흔히 떠도는 말로 “영력 있는 목사”란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 증언의 활력과 감화력이 있고,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사역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과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영력 있는 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특별 기도했다”든지 “머리와 수염을 길렀다”든지 목소리가 크거나 음성을 변조하여 말로 제압하는 힘이 있으면 영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으나 경건의 모양은 결코 진실한 영력과 상관되는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

1) 성경을 진리로 믿는 힘입니다. 이 힘은 실천의 원동력이 됩니다. 공사장을 지나다 보면 기둥을 박고, 돌을 깨고, 말뚝을 뽑는 기계를 봅니다. 그것이 공기 압축의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공기 압축의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경을 믿는 믿음의 힘이면 그 이상의 강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37).

2) 진리를 깨닫는 힘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복음의 근거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도 진리의 지식으로 받고, 하나님의 뜻도 진리의 지식으로 압니다. 진리의 깨달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듣는 힘과 깨닫는 마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사50:4,행16:14).

3) 진리를 실천하는 힘입니다. 성도가 진리를 실천하면 성경대로 사는 결과가 나타나고 그래서 죄의 유혹을 피하여 세속을 멀리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만 받고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며(약2:17), 성경의 분별력이 없을 때 신비주의를 따르기 쉽고, 실천 능력 이 없는 경건의 모양은 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경건의 능력(실물)이 있고 그 다음에 경건의 모양(포장)이 있어야 하되 능력보다 모양이 더 커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능력에 일치하는 합당한 모양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경건의 능력을 구하자 (딤후 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경건의 능력을 구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경건”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딤전4:7-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고전4:19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하셨으니 말보다 실천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간구하는 종목이 많습니다. 건강, 사업, 평안, 교회 부흥 등을 구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장이나 경건의 능력을 구하는 성도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빌2:21에 보시면 “성도가 자기의 일만 구하고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 하셨고, 약4:3에서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일”이 있으며, 유대인은 표적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십자가의 은혜는 구할 줄 모르고(고전1:22), 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12:39)고 하셨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곧 믿음의 능력이고, 믿음의 능력으로 깨달음과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의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

1. 진리 듣는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설교할 때 졸음이 오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하셨고,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롬10:14,17) 하시면서 “하나님이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시고 귀를 열어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잠20:12,사50:4). 행16:14에 보시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청종케 하신 일이 있고, 고넬료의 가족들도 열심히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행10:33). 성도 중에 두 가지 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르다”형입니다. 이것은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또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마리아”형이 있으니, 이것은 성경 공부에 흥미를 갖는 성도들입니다(눅10:39-42). 사6:10에 보시면 하나님이 징계 받는 백성들의 귀와 눈을 막으셔서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듣는 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계2:7,13:9)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 듣는 힘을 구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2. 진리를 깨닫는 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하였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었으나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말씀을 “떡”이라고 하셨습니다(말씀의 떡; 마4:4,요6:48,예수님의 떡;요6:57,68). 이 떡은 믿음과 깨달음과 실천으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먹고 잘 깨닫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엡1:17에서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셨고, 또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신령한 소망과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눅24:45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하셨고, 신29:4에서도 “깨닫는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으로 진리 깨닫는 총명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고 기억하는(마음 판에 새기는;신6:6)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은 기억한 것도 자주 잊을 수 있습니다. 유익 없는 것들은 잊을수록 좋지만 진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잊혀지지 않습니다(시1:3). 또 예수님은 요14:26에서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하셨고, 출9: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을 우박의 재앙에 버려 두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간직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 간직하는 은혜를 주사 경건의 힘을 힘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진리 실천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힘이 부족하여 탄식한 일이 있었습니다(롬7:22-24). 계명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요14:23), 계명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고(계1: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칭찬 받은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약2:22). 믿음과 진리의 지식은 실천의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방 여자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원의 주”로 믿었을 때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 보내는 모험적 순종을 하였던 것입니다(히11:31). 성도에게 진리 실천력이 없으면 경건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능력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고 동시에 진리 실천의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기도하신 예인 것입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기도하고 시행하는 선수를 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렇게 기도하고 시행하면 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세속을 멀리하는 힘이 곧 경건을 지키는 힘이므로 세속을 멀리하는 힘을 구허셔야 합니다. 경건한 성도는 세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속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요일1:15).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이나 모세의 광야 생활은 세속에 얽매인 생활이 아니었고(히11:9,13,24-25),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나 바울도 그러하였습니다. 또 약1:27에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정결한 경건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을 멀리하려는 성도는 높은 산에 오른 자처럼 또는 독수리가 높이 솟은 것처럼 신령한 은혜에 잠겨야 합니다(사40:9,31).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자동적으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속을 따돌리지 못하면 하나님과 원수된다”(약4:4)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세속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경건이 성취될 수 있겠습니까 ? 그런 의미에서 세속을 멀리할 수 있는 경건의 힘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힘을 구하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의 중대한 세 가지 유혹을 이기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4:1-11). 본문 3:1-4에서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불효, 감사치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 원통함을 풀지 않음, 참소, 절제 못함, 선하지 않음, 배반, 조급, 자고, 쾌락 사랑” 등 18 종의 유혹을 말씀하셨는데, 경건한 성도들은 이런 것들을 다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순종함과 같은 것으로, 유혹을 피하는 것은 소극적 순종이고, 진리에 충성하는 것은 적극적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한 것처럼 유혹을 이기는 힘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7. 헌신을 잘하는 힘을 구하셔야 합니다. 경건 생활의 최고의 실천은 헌신입니다. 자기의 현실적 유익을 위한 헌신은 “한 알의 밀”이 될 수 없을 것이요(요12:24),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는 헌신(눅17:33,행20:24)이 곧 한 알의 밀이요 죽도록 충성함이 될 것입니다(계2:10). 이기주의적 헌신에서 대가없이 충성하는 헌신으로 바꾸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계명 실천, 헌신”의 삼 단계로 신앙이 발전하여야 하며, 헌신이 경건의 마지막 단계인 만큼 헌신으로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일곱 가지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0. 속지 말자 (딤후 3:13-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속이는 자가 있고 속는 자가 있는데, 성도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 속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만 참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배워 성경대로 사는 것만이 지혜로운 생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속이는 전문가요, 속일 때마다 자기의 것으로 속인다”(요8:44)고 하셨습니다.

1.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즉, 거짓 유혹자들) 속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잘못 깨달아서 스스로 속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단자에게 속고 사기꾼에게 속는 것은 마귀에게 속는 것이지만, 자신이 모르거나 착각하여 속는 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스스로의 속임입니다. “온갖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모른다든지(약1:16,17), 알고도 행하지 않든지(약1:23), 심는대로 거두는 원리를 모르고 행한다든지(갈6:8), 되지 못하고 된척 한다든지(갈6:3),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행위(고전15:33)” 등이 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속으면 기분도 나쁠 뿐 아니라 전진을 많이 후퇴시킵니다. 생활의 발전을 후퇴시킴은 물론 정신적 타격도 크고 특히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잘못 알면 믿음을 뺏기는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속은 일이 없는지를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할 일을 하였는가 ?”, “옳게 하였는가 ?”, “부지런히 하였는가 ?”, “보람있게 되었는가 ?” 등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보람없이 살았다면 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속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속지 않으려면 잘 배우고 항상 주의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성경을 배워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씀은 신앙적인 면에서 거짓 교훈에 속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신13:1-3). 예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만 참이고(요14:6), 그 이외의 것은 믿지도 말고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무슨 일이나 확실치 않으면 확인하고 시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길을 잘 모를 때 “이 길이 그 길이겠지”하고 짐작한 상태에서 간다면 70%는 속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를 적게 속으려면 선배들의 경험을 귀담아 듣고 참고를 하여야 하는데, 청소년들 중에서 경험자의 지도를 외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3)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도 욕심에 끌려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각되지 않으면 요행수로 덕을 보려는 심산이지만 이 세상에서 안 밝혀지는 부정은 거의 없으니까 욕심에 끌리거나(약1:13), 현실 정욕에 끌려서(요일2:15) 불법을 행하면 자신이 금방 올무에 걸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속고 있습니다(엡5:16). 시간이 곧 자기의 생명이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나 허비되는 시간이 자기의 재물과 행복을 허비하는 것인 줄 알아서 시간 소모하는 것을 택시 요금 올라가는 것만큼 마음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시간은 긴 시간으로 필요한데 쓰고, 짧은 시간은 짧은 일에 쓰며 또 이중 행사로서 시간을 겸용하는 습관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토막난 짧은 시간을 어떻게 선용하라는 것이냐 ?” 하시겠지만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 이상 더 보람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짐을 나르는 사람이 조금 무겁게 나르면 능률이 있고 가볍게 나르면 시간이 더 걸립니다. 무슨 일이나 힘써서 감당할 때 능률이 있고 시간이 절약되니까 인생을 쉽게만 살려 하시지 말고 노력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견뎌서 낫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인내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낫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례식을 하는 주일 새벽 기도회에 구토 증상으로 어지러운 몸을 가지고 불편하지만 기어코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 중에 토했습니다. 그 정도가 되도록 인내하며 기도에 힘썼는데 그후 병이 나아서 주일을 잘지킨 경험이 있습니다. 힘들게 짐을 지고 시간을 보낼 때 자기 인생을 속지 않고 사는 것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3. 지나친 물욕으로 인생을 속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면 환장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광주시를 확장할 때 공동묘지를 정리하는 장소에서 여자 해골의 머리칼만 집어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돈에 환장한 것일 뿐 죄는 아닙니다. 해방 전에 청진의 어떤 사람은 만주에 가서 돈을 한 가방 벌어가지고 30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먼저 친구를 만나 부모의 안부를 물으니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갑자기 들어 가면 부모가 놀라서 기절하실 것이니까 나그네의 신분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천천히 알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 가방을 들고 나그네처럼 자기 집에 들어가 자는데 주인 영감이 가방을 열어 본 후 돈이 가득한 것을 알고, 돈에 눈이 뒤집혀서 도끼로 그 나그네를 살해하여 안 마당에 묻고 돈을 챙겼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아들의 친구가 와서 “어른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느냐 ?”고 물었을 때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갔다”고 핑계한 후 아들의 시체임을 확인한 후에 그 부모가 양잿물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감케 하는 것입니다(딤전6:10). 물질지상주의가 자기 인생을 속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많은 사람들이 지식 우상주의에 속고 있습니다(고전1:20-25).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식의 목적을 돈 버는 수단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무시하기 쉽고, 사람은 지식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먹고 삽니다. 지식의 긍정적 면도 있지만 살상 무기를 만드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미국이 인공위성으로 3억 천만 Km에 떨어진 화성을 맞추었고, 소련이 4억 3만 Km 떨어진 금성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축소하면 대구에서 만주 하르빈에 있는 파리의 눈을 총으로 맞추는 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적 가공 식품을 먹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연 식품만 먹어야 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성도는 대학을 못 갔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은 한이 없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이 과학 연구 자료를 교환하였는데, 독일에서 종이 과학 재료를 보내니까 스위스에서 그 기술을 해득했는데 스위스에서 머리칼 과학 재료를 보낸 것을 독일에서 해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머리칼 속에 구멍이 뚤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없는 지식을 따라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것이 상책입니다. 생명도, 지식도, 행복과 구원도 다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고 애쓰다가 죽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살려고 애쓰다가 산 사람 있습니까 ? 없지요 ? 지식 만능주의에 속지 마십시다 !

5. 인물 우상주의에 속지 마셔야 하겠습니다(삼상16:7). “마이클 잭슨이 온다”고 야단하는 세상은 크게 잘못된 세상입니다. 대구의 어떤 여전도사님이 외아들을 가진 과부였는데, 외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전도사 직을 내어 놓고 장사를 하여 그 아들을 대학 졸업까지 시켰는데, 그 아들이 교통 사고로 죽자 “너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통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광주의 어떤 장로님은 “큰 아들만 잘 키우면 그 아들의 힘으로 다른 가족들도 잘 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큰 아들 교육에만 정성을 쏟았으나 그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역시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낭패를 보는 실례라 할 것입니다. 배운 아들이나 돈 있는 딸도 믿지 마시고, 연예인도 기쁨의 대상을 삼지 말며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시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속지 않을 것입니다.

6. 현세적 쾌락이 아무리 좋은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을 좋은 줄 알고 따라가다 는 또 속습니다(약4:4,요일2:15-17). 스포츠가 밥 먹여 줍니까 ? 천당을 보내 줍니까 ? 선수는 돈이나 벌지만 구경꾼들은 마치 신기루를 바라보고 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여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 만국을 다 주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천하 만국의 향락을 다 준다 하여도 “하나님께만 경배할 뿐 다른 것들에게는 절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배격하심으로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것이 곧 세상 향락을 위하여 죄짓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인생은 풀같고 영광은 꽃같다”고 하셨습니다(벧전1:24). 따라서 자기 인생을 영광 목적에만 투자한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영화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추구하지만 누리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까 ?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란 소설은 그런 인생의 허무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세상 영화 일장춘몽”이란 말의 해석이 나온다고 합니다(욥20:5-11). 조신(調信)이란 사람이 세달사(世達寺)란 절에서 경영하는 농장의 관리인이 되어 명주 땅에 가서 사는데, 그 고을 군수 김근공의 딸이 어떻게 예뻤던지 그와 짝사랑을 하면서 그 여인을 자기의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자주 불공을 드렸는데도 그의 딸이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원통하여 부처 앞에 나가 하소연을 하며 밤새워 울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자기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연즉 꿈에도 사모하던 그 여인이 “자기가 조신 도령을 한 번 보는 순간 크게 사모하였는데 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서 시가로 가다가 조신을 잊지 못하여 도망쳐 왔으니 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 그날부터 부부가 되어 재미있게 살기는 하는데 워낙 가난한 형편이라 고생 끝에 다섯 자녀를 낳고 어렵게 사는 중 열다섯살된 큰 아이가 명주군 해현령 고개를 넘다가 영양실조로 기진하여 죽었습니다. 두 부부가 죽은 아이를 안고 실컷 울다가 장사를 지내고, 우곡현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사는데 얼마후 두 부부가 병이 들어서 어찌할 수 없자 열세살된 둘째 딸을 밥 얻어 오라고 내보냈더니 부잣집 개에게 물려서 온 몸이 피 투성이가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이때에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과 내가 좋아서 젊은 시절 재미있는 때도 있었으나 40년을 사는 동안 고생과 불행도 많았고 이제는 더 이상 이겨 나갈 수가 없으니 서로 헤어져서라도 이 고생을 줄여야 하지 않겠소 ? 아이가 넷 있으니까 둘씩 둘씩 맡고 서로 헤어집시다” 하여 그 말을 타당하게 여기고 헤어지려는 순간 서로 떨어진 아이들을 붙잡고 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꿈이었습니다. 40년을 꿈 속에서 살아본 조신은 그제서야 인생 향락 일장춘풍임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7.마지막으로 돈과 명예와 권세도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1) 자식이 부모의 유산을 믿고 방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 그래서 선진국 사람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거 서독에 간 교포가 서독인 친구 집에 가서 “이 집이 네 집이냐 ?” 하니까 “우리 아버지의 집인데 다른 사람보다 집세를 조금 싸게 주어서 아버지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자기 것인 줄로 믿으면 안된다는 뜻이지요.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연필 한 자루를 2전에 산 기억이 납니다. 50년이 지난 오늘은 400원 합니다. 20,000배가 올랐다는 뜻입니다. 1953.2.10에 100원이 1환으로 개혁되었고, 1962.6.10(5.16 직후)에 1,000환이 10원으로 개혁되어 도합 1/10,000으로 줄었습니다. 독일은 전란시에 1억 마르크가 1마르크 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돈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재산이 있으면 이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 할 것이요, 이 재산으로 자기만을 부요하게 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하실 것입니다.

2) 명예와 권세도 그렇습니다.(전5:19). 대통령 되는 분마다 명예로운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5.16 혁명으로 뺏김),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12.12 사태 증언 기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한 사람도 명예롭고 칭찬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인생의 가치관을 물질, 명예, 권세, 세상 향락, 지식, 사람의 칭찬과 인기.....그런데 두면 다 속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속지 않을 진실한 대상은 하나님과 성경 뿐입니다. 자식이 잘 되어서 돈을 벌어 와도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 속지 않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특히 믿음 지식에 대하여 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1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3-17) 목록으로


본문의 중심 교훈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1.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입니까 ? “성경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인데 그 말씀은 배워서 알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고는 저절로 알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열심히 배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뜻은 “넉넉한 지식을 가지고 거기에 근거하여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길을 모를 때 넉넉한 지식이 없으면 물어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넉넉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입장이 못되고 자신의 활동도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배워 확신하고, 확신한 것을 또 생활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넉넉히 알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속이는 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마귀는 천사처럼 가장도 하고(고후11:14), 기적도 행하며(계13:13,출7:11), 바른 말(진리)도 전할 때가 있고(막5:7,행19:15), 선을 행할 때도 있습니다(고후11:4,마2:8). 그러니까 쉽게 분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은 성도 속이는 일을 본업으로 알고 감행하기 때문에 성경 지식이 없으면 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 배우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배우고 누구에게 배워야 할 것을 잘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좋습니다. 반드시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바로 전달하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할 것입니다.

5. 성경의 용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15-17절).

1)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믿음”이란 뜻입니다.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는 이유는 성경 속에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구원의 도리가 다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좋은 교육의 자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훈,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모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교육의 가장 유익한 지침서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뜻은 거룩하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모든 선한 일도 잘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연구하는 사람은 악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이 다 성경을 읽는다면 악한 자들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형무소에서 전과범들이 성경을 읽고 변화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성경이 선한 사람되게 하는 좋은 교육 서적이란 것을 깨닫게 하는 어린이 동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어떤 임금이 나라의 어려움이 많은 중에 세 왕자 중 한 아들에게 양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아들들을 1년간 나가 있게 한 후 돌아올 때 가장 요긴한 것을 가지고 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1년 후에 한 왕자는 아주 신통한 약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약물은 죽은 자의 입에 넣으면 죽은 자가 살아 나는 약입니다. 그때 외적의 침략이 있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많은 군인들이 죽었는데 그 약물만 입에 넣으면 또 살아나니까 또 싸워서 외적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평화가 왔습니다. 참 귀한 약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나라에 기근이 와서 백성들이 굶주려 죽게 된 입장이었는데 마침 또 한 왕자가 이상한 구슬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구슬은 “무엇이나 있어라” 하고 굴리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형편이니까 “먹을 것 나와라” 하니까 부르는대로 다 나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많으니까 마음대로 먹였습니다. 먹고, 놀고, 술 취하고, 싸우고, 음행하고, 마음껏 방탕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전쟁도 해결하고 죽음도 해결하고 먹을 것도 해결했는데 사람사는 세계가 더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그러자 마지막 왕자가 이상한 책을 한 권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 책은 누구나 읽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 책입니다. 그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 방탕하는 백성들에게 그 책을 읽게 하였더니 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선한 사람들이 되어 마지막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는 동화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말씀이란 사실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잘 배우고 잘 활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에 끌리듯, 영적 고갈을 당한 성도는 반드시 성경에 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교육과 졸업의 의미 (딤후 3:14-17) 목록으로


여러분들의 뜻있는 졸업식을 맞이하여 “교육과 졸업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는 교육을 권장하신 말씀으로 교육의 방법과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교육의 방법은 성경을 배우되 어릴 때부터 배우고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을 만나야 하며, 확신을 갖도록 배우고 가르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2.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또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되는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3. 그렇다면 교육을 받는 분들과 교육을 시킨 사역자들이 이 졸업식을 맞이한 자리에서 반성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1) 성경을 잘 가르치고 잘 배웠는가 ?

2) 배움의 지식이 확실하게 마음판에 새겨져 있는가 ?

3) 우리의 배운 지식이 성경적이며 정통적인 지식으로 손색이 없는가 ?

4) 하나님의 사람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움이 없을만큼 좋은 인격으로 변화되었는가 ?

5) 선한 일로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인물들이 되어 있는가 ?를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졸업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까 ?

1) 많이 배웠다기 보다도 “진리나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잠간 배운 것으로 필요한 지식을 다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은 지식을 가지고 항상 더 배우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배움의 과정을 밟은 것은 학문하는 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2) “고등 학문에 더 진학하라”는 뜻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은 중학을 가라는 뜻이요, 중학의 졸업은 고등학교를 가라는 뜻인 것처럼 어떤 과정을 졸업하였든지 “더 배우라”는 독촉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배움은 꼭 교육 기관에서만 터득할 것은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반드시 환경이 우리의 교육 기관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졸업이란 지식에 접근했었다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졸업이 학문 연구를 완성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일정한 과정만 밟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알 것은 더 많고, 배운 것은 미약하기 때문에 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교육에 임한 모든 성도들은,

① 성경이 말씀한 목적에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배워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

②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됨에 모자람이 없어야 할 것이며,

③ 선한 일에 솔선하는 순결한 봉사자들이 되었을 때 비로서 교육과 졸업의 참된 의미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7 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4: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면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1-5절은 “말씀 전파에 대한 권면”이요, 6-8절은 말씀 전파의 사명을 다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회고”입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2절)로 정하였습니다.

1.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1-5절).

1) 바울 사도께서 이 말씀 전파의 사명을 디모데에게 명하실 때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염두에 두시고 엄하게 명하셨습니다(1절).

① 여기의 엄하게 명하신 것은 강조하신 뜻이 있고,

② 바울 사도는 이 명령을 하실 때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은 심판권을 예수님께 맡기신 성부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며(요5:22), 심판은 예수님이 하시되 산 자(살아있는 사람들)와 죽은 자(세상을 떠난 자들)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마지막 때에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영생 천국)를 생각하였으니, 이는 성실한 사명 수행이 내세의 상급과 관련이 있음을 생각하여 엄히 명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사명자들이 복음적 사명을 수행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내세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말씀 전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하셨고,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때를 얻는다”는 뜻은 전도하기 좋은 기회가 있고 따라서 전도의 열매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전도하기 어렵고 열매가 없는 때에라도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막에서도 풀이 나는 경우가 있듯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매 맺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시126:5). 또 전도자가 어려운 여건에서 전도하였을 때 자신의 신앙과 사명 능력에 좋은 연단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란 식물로 말할 때 결실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3) 전도자는 “항상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2절)고 하셨습니다. 전도자가 때를 못얻은 상태에서 항상 힘쓰려면 범사에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참으면서 계속하여야 할 것은 전파 뿐만 아니라 교육(성경과 교회 생활, 사명 생활 등)과 경책(책망) 및 경계(주의를 주는 뜻)와 권면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복음 사역자가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정죄하고 증언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 심령 상태가 어두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4) 때가 되면 교훈받는 성도들의 신앙에 큰 변질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3-4절).

① “때가 이르리니” 하신 말씀에서 이 “때”는 디모데가 사역할 때 뿐 아니라 지금도 그런 때에 이르러 있음을 아셔야 할 것이요,

②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가려운 귀를 긁어 주는 것처럼 자기 사욕과 일치하는 듣기 좋은 교훈을 좋아하여 그런 스승을 두고 따른다”고 하셨습니다(3절). 성경 말씀과 신령한 복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자기 사욕에만 급급하는 성도가 많은 만큼 그들은 현실적 축복을 강조하는 사역자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현실 교회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살피면 상당수의 성도들이 점점 말씀과 신령한 복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통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현세주의적 성공담)를 좇는다”(4절)고 하셨습니다. 현실 욕망을 소극적으로 대하고 신령한 복과 성경 말씀에 비중을 두는 성도가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 스스로를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 사역자는 근신하여 자신을 살피고, 사명 생활로 받는 고난을 극복하며 여전히 전도인의 사명과 맡은 직무를 다하여야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5절).

2. 바울의 마지막 회고담입니다(6-8절).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자신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셨고, 머지 않아 법적 조치로 인한 사형 집행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므로 자기의 사명적 최후를 결산하는 회고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1) 바울은 자신이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었다” 하셨으니, 관제란 피(기름, 포도주 등 액체의 제물)의 제물을 제단에 뿌리는 것으로 자신이 순교하게 될 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고백하신 것이며, “벌써 부음이 되었음”은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실현되도록 이미 작정된 것임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6절).

2)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하심도 순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7절에서는 사명 완수의 회고로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셨습니다.

① 복음 사역자나 성도에게는 마귀를 대항하여 죄악을 이기려고 싸우는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을 회피하면 평안할 수 있고, 이 싸움을 사명적으로 임하면 퍽 고달프게 됩니다. 바울은 그 싸움을 승리적으로 잘 싸우신 것입니다.

②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음”은 사명에 입각한 책임을 완수하셨음이며,

③ “믿음을 지키신 것”은 선한 싸움으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과 사명 상태를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4) 이로 인한 결과로서 후한 상급이 자신에게 예비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8절).

① “이제 후”란 현실적 생애가 끝나고 천국 내세를 바라 본 말씀이요,

②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은 하나님이 바울 사도의 생애를 감찰하시고 거기에 합당한 상급을 예비하셨음을 확신한 말씀으로 그 상급의 이름을 “의의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이긴 자에게 주시는 상급의 명칭이며, 최고의 훈장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③ 이 상급은 “주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것이며, 바울 사도 뿐 아니라 바울처럼 성실하게 생활한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8절). 따라서 모든 성도는 칭찬과 상급을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상급의 기대를 갖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복음적 사명자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하신 말씀을 엄하게 받아 실천할 것과 바울의 최후의 고백이 승리적이며 희망적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사명자들도 후회없고 희망있는 회고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8 과 여러 가지 결론의 말씀 (딤후 4:9-22) 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 가지 내용으로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이 말씀의 각 절에 나타난 내용을 제목으로 표현한다면 9,11,13-15,24절은 “디모데에게 부탁하신 말씀”이고, 10-12절, 20절은 “동역자들의 거취를 알리신 말씀”이요, 16-18절은 “바울의 체험과 구원의 확신”을 말씀하신 것이요, 19,21-22절은 “문안과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부탁하신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9,13-15,24절).

1) 바울 사도는 드로아(또는 그 근방)에서 사역하는 디모데를(13절)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명하셨습니다(19,21절).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였으므로(1:2)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심정이 있으셨을 것이요, 또 소식도 듣고 누가를 제외한 동역자들이 다 바울 곁을 떠난 상태였으므로 잠시라도 함께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2) 디모데가 올 때에 드로아에 사는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13절). 겉옷은 로마 감옥이 추웠기 때문에 필요하였고,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책”은 그 당시에 양피지(羊皮紙)가 활용된 사실을 의미하며, 그 책은 바울 사도의 중요한 메모 수첩이었을 것입니다.

3) 복음의 대적자 구리장색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이 사람이 어디 사는지는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의 직업이 구리장색인 것으로 보아 은장색 “데메드리오” 와 같은(행19:24) 우상 제조업자일 것이요, 행19:33에 나타난 “알렉산더”를 의미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는 바울과 전도자들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고 또 많은 해를 준 자이므로 “그의 핍박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5절). 주께서 그의 행한대로 갚으실 것인즉(14절) 대항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말고 지혜롭게 경계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마가를 함께 데려올 것을 부탁하셨으니(11절),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요 처음에 바울을 수행하다가 돌아선 일이 있었으나 나중에 필요한 인물로 변하였습니다(행12:25,13:13,15:36-40,골4:10).

2. 동역자들의 사명적 자세 등 거취를 말씀하셨습니다(10-12,20절).

1) 10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하셨으니, “데마”가 바울 사도를 따라 로마에까지 왔으나 사명자의 고충을 못 이기고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사명에서 후퇴하여 바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다는 뜻이며,

2)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달마디아”는 마게도냐 서북쪽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동은 데마처럼 사명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임지로 간 것입니다. “디도”는 디도서의 수신자로 그의 사역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었습니다(딛1:5,갈2:1-3,고후7:13-15).

3) 11절에서 “누가만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에 대한 기사는 행16:10,17,20:14,21:17,28:16,골4:14,딤후4:11,몬24,눅1:3,행1:1에 있으며, 누가는 바울 사도를 끝까지 따르고 협력한 사역자입니다.

4) 20절에서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이 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 하셨으니, “에라스도”의 기록은 롬16:23과 행19:22에, “드로비모”의 기록은 행20:4,21:28-29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마지막 전도 사역 기간에 “드로비모”의 병듦을 인하여 그를 “밀레도”에 머물게 한 사실은 그 당시에 병고침의 은사가 특별 섭리에서 일반 섭리로 전환된 상태였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 초기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독사의 피해도 받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나(행20:10,28:3-5, 14:8-10), 전도 사역 말기에는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딤전5:23,빌2:26,27). 이상으로 동역자들의 거취를 말씀하신 후에,

3. 바울의 체험과 구원 확신을 말씀하셨습니다(16-18절).

1) 바울은 고독함을 당하였을 때 주님이 곁에 계셔서 함께 하셨음을 말씀하셨고, 16절의 “처음 변명할 때에 함께 한 자가 없었다” 하심은 로마에서 재판받을 때에 협조자가 없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실 때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처럼(막14:50), 바울의 최후 어려움을 당할 때도 협력하는 자들이 다(누가를 제외하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난 자들을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으니, 이는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할 의무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남의 도움을 바랄 필요가 없고, 혹 도움이 부족하거나 없다 하여도 섭섭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도가 고독해질 때 주님은 더욱 고독한 자의 곁에 가까이 오신다는 것을 믿고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17절,요일2:15).

2)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바울의 건강을 지켜 주셨습니다(17절). 로마의 감옥은 추웠기 때문에 겉옷을 필요로 하였고, 건강상 위험이 있었지만 “주님이 곁에 계시면서 건강을 주셨으며 또 사자의 입에서도 건져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노천 극장에서 죄수를 짐승과 싸움시키는 일이 흔히 있는 일이므로 만일 바울이 사형 집행 대상이 된다면 그런 위험을 당할 수 있으며 또 전도 여행 중에 광야의 위험이 곧 짐승의 위험이 되는 것입니다(고후11:26). 주님께서 바울에게 건강을 주시고, 또 사자의 입에서 건지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동안 “전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며 이방인으로 듣게 하기 위함이라”(17절) 하셨으니, 복음 사역자의 건강이 하나님의 사역 목적을 위한 특별 은혜임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이 누구를 위함이며, 무엇을 위함인지를 확실히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바울은 악에서 건짐 받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붙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18절). 18절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하신 말씀은 궁극적 구원의 은총을 믿는 신앙이며, 또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시므로 모든 영광이 주님께로 돌려져야 할 것을 기원하셨고,

4. 마지막으로 문안과 축복을 하셨습니다(19,21-22절).

1)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하셨으니(19절), 이들의 바울에 대한 충성은 대단하였습니다(롬16:3-4,딤후1:16-18).

2) 또 로마에 있는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디모데”에게 문안을 한다고 전하셨습니다(21절).

3)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디모데 일행에게 축복하였으니, 이 내용은 서신의 결말이며 마지막 축복일 것입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며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축복을 믿음으로 받는 성도들은 다 심령으로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동거 동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심령으로 주님과 함께 하고 바울과 같은 사명의 투지를 가지며 부끄럼 없이 사명에 임함으로 영광이 주님께 돌려지도록 노력하는 사역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엄하게 명하신 말씀 (딤후 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엄하게 명하신 말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목사직을 수행하는 “디모데”와 모든 사역자들에게 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목회서신에서만 “엄한 명령”을 세 번 하셨고(딤전5:21,딤후2:13,본문) 또 엄한 명령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님 앞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하게 명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사들 앞에서 명하신 것”은 “엄한 명령을 하셨고 또 그 명령을 받았다”는 입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혹이라도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라고 핑계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당회에서는 안건을 결정한 다음 회록에 회장, 서기만 날인하지 않고 전 회원이 다 날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함께 참여한 회원 중에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셨지만 든든한 보증자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 앞에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명령 실천을 잘한 자에게 상급주실 것을 약속하신 뜻도 있습니다. 심판자가 보시는 앞에서 명령을 주고 받았으니까 반드시 거기에 대한 대가를 공평하게 주시게 될 것입니다.

2. 엄하게 주신 명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1) 2절에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사명은 참으로 중대합니다. 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때를 얻는다”는 뜻은 말씀 전파의 좋은 여건을 의미합니다. 핍박이 심하든지 들을 자가 없든지, 들어도 깨닫지 못할 때는 때를 못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2) 말씀 전파에서 한 단위 올라서서 “가르치며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하여 허탄한데 빠지지 않도록 하라”(2-4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육적 지도가 말씀 전파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사욕을 만족시키는 스승의 말만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바로 지도하려면 지도자(목회자)가 모든 일에 근신하고 고난을 받으며 어렵게 직무를 감당하여 잘못하는 성도들을 과감하게 가르치고, 권면하며 책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 전파와 교육의 사명을 잘하기 위하여,

① 성경을 배우는 일과,

② 증거할 말씀을 준비하는 일을 열심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딤전4:13에서 “읽는 것에 착념하라” 하셨고, 또 벧전3:15에서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항상 준비에 몰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딤후2:14에 보시면, “너는 저희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의 화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화는 의견 차이와 말다툼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복음 사역자는 그런 불화의 요소를 만들지 말아야 하며, 때로는 복음 사역자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도간에 갈등하거나 불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복음 사역자 자신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교인들 간의 사랑을 해치지 않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증언보다 사랑이 더 귀한 것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고전13:1). 그리고 치리회는 예수님의 입장에 든든히 서서 어느 편에도 편벽됨이 없이 공정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6.25 나던 해 강화읍 감리교회 목사님이 저의 집에 대심방을 오셨는데 저의 할머니가 옥수수와 감자를 대접하기 위하여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잘 정리하시지 않은채 예배를 드리는데 부엌에서 불붙는 소리가 나서 내다본즉 아궁이의 불이 옆에 있는 가랑잎 나무에 붙은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자기의 몸을 불붙는 장소에 던져서 불을 끈 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어떤 교역자는 자기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양분되어 싸우는 입장에 처하여도 화목시키려 하거나 자신이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는 경향을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지도하고, 자신을 희생하여서라도 사랑과 화목을 성취시켜야 할 것입니다.

4) 아무 일에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딤전5:21에서 그것을 엄히 명하셨습니다. 목사는 목회 사역면에서 모든 성도를 공평하게 상대하여야 합니다.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성도는 각별하게 살펴야 하지만 부자를 가까이 하고 가난한 자를 멀리하는 식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되며, 또 치리 행정이나 재판을 함께 취급하는 장로들을 대할 때에도 역시 공평하게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권과 관계가 있다 하여 더 가까이 하거나 뜻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멀리하거나 공정하게 의논하여야 할 것을 특정인과 수근수근 하는 식으로 공모하거나 부분적 집단끼리 가까이 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지방색을 따지거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거나 심복을 두거나 자신에게 유익한 법만 말하고 불리한 법은 가르치지 않거나 자기 고집대로 시행하여 독재를 하는 등의 편벽된 일을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직 사심과 사욕과 이기주의를 떠나 공정하게만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 것을 엄히 명하셨습니다(딤전5:22)

목사가 안수하게 되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즉, 세례식, 임직식, 병자에 대한 안위를 베풀 때입니다. 이 안수의 뜻은 은혜 전달의 표시일 뿐입니다(렘1:9). 경솔한 안수란 신앙고백이 확실치 않은 자에게 세례를 주거나, 자격이 불비한 자에게 직분을 맡기는 장립을 하는 것이요, 또는 병고침의 능력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는데도 전달되는 듯이 과장하여 안수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병자에 대한 안수는 다 고침의 효력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고침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마17:14-20). 안수는 “주는 것의 표현”이므로 확실하게 전달될 때 나타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에는 “손을 얹은즉 낫는 사례”가 없었으므로(막16:18,행4:30) 실제 능력을 전달하는 표시의 안수는 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안수를 받으면 무조건 은혜가 전달되는 줄로 선전하고, 목사가 수백 명의 대중에게 도리깨질하듯이 머리와 어깨를 치면서 지나가는 안수 행위는 교인을 기만하는 종교적 쇼에 불과한 것입니다.

6)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자신의 정결을 지키라”(딤전5:22)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이런 일 저런 일 등, 또 이 사람의 일 저 사람의 일 등을 분별없이 간섭하여 월권함으로 자기 책임과 자신의 정결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정보다 자신의 문제가 더 소중하고, 다른 이의 책임보다 자신의 책임이 더 중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릴 때부터 순결을 지키면서 충성하였고,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 주님을 거역하다가 중간에 회개한 후 충성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생애가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분별없이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과 자신의 순결과 책임에 최선을 다할 것을 엄히 명하신 것입니다.

이상 여섯 가지 엄히 명하신 것을 유의하여 엄히 시행하는 사역자가 되십시다.

 

 

설교보충 14. 바울의 회상과 확신 (딤후 4:6-8)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는 바울 사도의 회상과 확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들도 한 해를 마감할 때든지,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울 때 반드시 회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신이 세상 떠날 때가 임박함을 예상하시고 자신의 생애의 과거를 돌아 보시게 된 것입니다. 특히 보람되게 살아온 생활을 회상하였습니다.

1. 바울의 회상에 대하여.

1) 그 동안 헌신적으로 살아온 것을 회상하시고 끝까지 헌신할 것을 결심하셨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순교의 제물되게 하셨으므로 자신도 관제의 제물처럼 피흘려 생명을 드릴 각오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선을 권하실 때도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라”(고후8:5) 하셨습니다. 그렇게 교훈하신 바울 자신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거나 죽으려 하시지도 않았으며, 오직 살고 죽는 문제를 주님을 위하여 시행하셨고(롬14:7-8), 무엇이나 자신에게 유익하였던 것을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셨으며(빌3:8), 가정도 가지지 않았고(고전9:5),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하여 힘쓰셨으며(고전10:32), 복음 증거를 위하여서라면 생명도 귀히 여기지 않고 충성을 다 하셨던 것입니다(행20:24).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제의 제물될 것도 결심하셨습니다. “관제”란 피흘려 쏟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끝까지 헌신한 생애를 회상하셨습니다.

2)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선한 싸움은 죄를 이기는 싸움입니다. 악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리와 성도를 대적하지만 성도들은 불의와 싸울 때에도 합당한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대로 경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딤후2:5). 상대방이 욕한다고 나도 욕하고, 상대방이 때린다고 나도 때리고, 상대방이 고소한다고 나도 고소하는 식으로 행한다면 자신도 악한 자와 꼭 같을 것입니다. 오기, 반항, 투기, 보복으로 대항하는 것은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과 정의와 법으로 대항하고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성도와 현실 교회가 불법을 자행하였다면 선한 싸움을 하였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리적인 회상을 한 것입니다.

3) 최선을 다하였다고 회상하였습니다. 7절의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전도자의 험한 길, 핍박을 받으며 위험한 길을 가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겠습니까 ?(고후6:5,11:23-28,갈6:17). 하나님은 성도가 자신이 받은 은사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는 회상과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확신은 하늘에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1) 이 확신은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 자만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 상급의 내용은 “의의 면류관”이니, 이는 의롭게 행한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칭찬이요 보람입니다. 시119:56에 보시면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법도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행한 성도는 의롭게 산 것이므로 역시 의의 면류관을 받게될 것입니다.

3) 이 의의 면류관은 바울 사도처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상급을 믿는 신앙을 갖지 않으면 마귀와 용기 있게 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 인생을 마감할 직전에 승리적인 회상과 하늘의 상급을 확신하였습니다. 저희들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매일매일 보람을 느끼며 하늘의 상급을 대망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15. 바울의 성공적 삶 (딤후 4:6-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성공적 삶”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삶이었습니다(딤전1:13). 종교를 잘못 가졌기에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귀의된 다음부터 복음 생활과 사명 생활을 잘 함으로써 성공적 삶을 사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순교 당하기 전에 자신이 참형을 당할 것을 아시고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다” 하시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하늘에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적 삶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 떠날 날이 임박하였다”고 가상하시고,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하여 평가해 본다고 할 때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 만족한 삶이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평안하게 먹고 사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알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눅12:13-21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형이 혼자 가진 재산을 동생인 자기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을 때, “너는 나를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알았느냐” 하시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어 주는 분으로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시요, 인간의 모범자로 알아서 거기에 수반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물질의 탐심을 버리고 물질에 욕심이 없는 자처럼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생명을 연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재물이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많아지자 창고를 늘려 많이 저축한 다음 내가 내 곳간에 내 재물을 많이 쌓았으니 내 영혼아 오래 살며 즐거움을 누리자”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의 영혼을 찾아가시고 “자기를 위하여 부요하고 하나님을 위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자가 그와 같이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살면 안되겠습니다.

1. 바울의 성공적 삶.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이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롬12:21). 우리 주위에는 죄악이 널려 있고,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의 역사가 항상 마음 문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신령한 성도는 마귀가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통하여 마귀가 역사하는 것을 아셨습니다(눅22:3,요13:27). 또 베드로를 마귀가 밀 까부르듯 하는 것도 아셨습니다(눅22:31). 또 바울 사도는 사단이 선교의 길을 막는 것을 아셨습니다(살전2:18). 이렇게 성도는 사단이 어디에서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아셔야 하고, 그런 궤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새 의복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는 것처럼 범죄의 유혹에 조심하고, 어떤 악한 역사가 닥쳐와도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성공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달려갈 길을 마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사명에 부끄러움 없이 충성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기듯이 받은 은혜와 은사에 비례하여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달란트의 이를 남기지 않으므로 큰 벌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달려갈 길”이란 주어진 여건대로,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달란트보다 적게 충성하면 자신의 달려갈 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까 항상 받은 은혜에 부족함이 없도록 충성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3.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이 믿음 지키는 문제를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든든히 모시고 십자가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부족하여 죄를 짓지만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인데, 이 정도의 신앙을 갖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일 것입니다.

2)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죄와 싸우며 충성을 하면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차원에서 믿음을 지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순교하시면서 믿음을 지켰으니까요. 죄와 싸우며 고난 중에 충성하였고, 핍박 중에 순교하면서 믿음을 지킨 것이 귀한 것입니다.

3) 믿음을 지킨다는 뜻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 상태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왕노릇 하시도록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당에 오고 설교를 들을 때는 예수님이 자기 속에서 왕노릇 하시게 하다가도 예배당을 나가고 다른 사람 앞에 서면 예수님은 내쫓고 자기가 왕노릇 하는 생활이 얼마나 많습니까 ?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을 지키는 자는 자기 속에 예수님이 항상 계시게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예수님의 뜻에만 복종하며 항상 예수님의 인격을 유지하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의 인생도 바울 사도처럼,

①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② 달려갈 길을 잘 마치고,

③ 믿음을 지킴으로 성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16. 바울의 최후 형편 (딤후 4:9-18) 목록으로


본문은 바울 사도의 최후 형편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를 마치신 후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유대인들로부터 송사를 받고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호송된 후 로마의 고관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며 전도하셨고, 일시 석방된 상태에서 그대로 로마에 2년간 셋방에 거주하시면서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내용까지는 행28:19-30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는 바울 사도의 일반 서신에서 참고할 수 있고, 최후의 역사는 일반 역사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4세기경의 “가이사랴” 감독이었고 역사가인 “유세비오”가 예수님 때부터 324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는데, 그 문헌에 보면 바울 사도가 감옥에서 나온 후 각처로 다니면서 전도하던 중 주후 64년 7월 18일에 일어난 로마시의 대화재 사건의 공모자로 고발되고 구속되었으나 증언을 잘하여 석방되었는데, 또 로마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킨 반역자로 고발을 당하여 주후 64년에 로마시의 “오스티안”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가 순교하시기 직전에 써 보내신 말씀입니다.

1. 바울의 최후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

1) 퍽 고독한 중에 계셨습니다. 고독하지 않게 생애를 마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녀들이 있고, 교회 배경이 있고 죽은 다음에 많은 조객들이 올 수 있는 여건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있으나 바울은 가족도 없고 참수형 당할 날을 기다리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셨으니 인간적으로의 고독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 바울이 법정에서 변명할 때 변호 증언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즈음도 법정 소송에 증언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바울이 반역자 취급을 받을 때 바울을 동정하면 같은 사람 취급을 받고 또 핍박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② “누가” 한 사람 외에는 다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복음 사역차 떠난 사람도 있고,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마가”가 속히 와서 만나 주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11절).

2) 추위에 시달리셨습니다. 13절에 보시면 “네가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겨울 전에 속히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겉옷은 큰 원형의 융단으로 된 외투로서 머리만 끼면 몸 전체를 치마처럼 덮는 옷이라고 합니다. 요즈음도 그런 옷을 입는 유행이 생기면 좋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감옥이 추웠기 때문에 그 옷이 필요하셨습니다. 바울은 돌아가시기 전에 추위에 어려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3) 자기를 몹시 핍박한 자에 대하여 주의할 것만 부탁하시고 미워하지 말 것에 대하여 당부하셨습니다. 14절에 보시면 “구리장색 알렉산더란 사람이 바울을 심히 대적하고 바울에게 손해를 보였지만 주께서 그의 행한대로 갚으실 것이라” 하신 말씀은 사람이 핍박자를 대항하여 싸우거나 상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알렉산더”는 바울을 유죄 확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4) 말씀을 메모하시려고 “드로아”의 “가보”의 집에 둔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떠나시기 전에 자기의 하시고 싶은 말씀들을 메모해 놓는 것은 요긴한 일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계시적 영감을 받으신 사역자이기 때문에 말씀을 연구하여 기록하시고 또 기록된 말씀을 탐구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 예언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의 15-18절 말씀이 구약에서 십자가를 예언하신 시22:1,21,27,28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① 본문 16절에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는 말씀이 시22:1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듣지 아니하십니까” 하신 말씀과 대조할 때 고독과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상태가 서로 비슷하며,

② 17절에서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하신 말씀은 시22:21의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지소서” 하신 말씀과 상통하고,

③ 또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들도 듣게 하려 함이라” 하신 말씀은 시22:28의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하신 말씀과 상통하고,

④ 또 18절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은 시24:7-10에 나타난 영광송과 상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괴롭고 춥고 고독한 중에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과 부활 영광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셨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이상과 같은 형편에서 어떤 위로를 받으셨습니까 ?

1) “주께서 곁에 계셨다”고 하셨습니다(17절). 주님은 고독한 자와 함께 하셨고 자기를 가까이 사모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계3:20에서는 “영접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요14:23에서는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하셨으며, 창28:15,46:4에서는 기도하는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풍랑 중에서도 함께 계셨고(행27:23), 순교의 제물될 날을 기다리는 중에도 역시 함께 계셨으니 성도는 어떤 어려움에 처하여도 주님이 아시고 주님이 곁에 계시면 그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을 강건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는 사역자로 쓰시기 위하여 계속 건강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하나님이 바울을 쓰시기에 합당하셨기 때문입니다(딤후2:21).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마땅히 쓰임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생명과 건강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자의 입과 모든 악한 일에서도 건져 주셨다고 하였습니다(17-18절). “사자의 입에서 건지셨다”는 뜻은 유죄 및 사형 집행을 면하게 하셨을 수 있고, 죄수를 짐승과 더불어 싸움을 시켜 죽게 하거나 이기면 사면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전도자의 전도 여행 중 광야에서 직접 사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유익하게 쓰시는 동안 건져 주셨던 것입니다. 또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신 것”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함이므로 “믿음을 떠나라는 유혹”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받을 최후의 핍박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사느냐, 예수님을 붙잡고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선택하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형편에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면서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친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영광을 기원함 (딤후 4:18) 목록으로


이 말씀은 바울이 예수님께 돌릴 영광을 기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순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애쓰고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악한 일(죄의 유혹)에서 건져 주시고 또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분이심을 확신하면서 모든 영광이 주님께만 돌려지기를 기원하신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와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후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12,21,31) 하셨고, 또 엡1:5-6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따라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생활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 목표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고전10:31).

어떤 경우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면,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영광을 받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하셨고, 마7:31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하시므로 아버지의 뜻은 기도나 설교나 권능이나 귀신을 쫓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말씀(22절)”하셨습니다. 구속 사업은 하나님의 최고의 뜻이었습니다.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이루시는 일이므로 최고의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헌신하셨고 또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면 기쁜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뜻이 이루어질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을 받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욥”의 가족이 고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인류를 멸절시켜 하나님의 공의를 성취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셨으며, 본문에서도 바울 사도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뜻(이방에 전도하는 일)을 이루어 드렸을 때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2. 성경 말씀대로 순종할 때 영광이 주님에게로 돌려집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하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인격에게도 능력으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사고를 통하여 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 없이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특별 섭리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나아만이 병고침 받은 사례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이나,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이적을 체험한 것이나, 나사로가 살아난 사례들이 전부 무조건 순종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삼상15장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에 “그들을 진멸하고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라”(삼상15:3)고 하셨는데 사울 왕이 사람만 죽이고 짐승들을 취한 후(9절)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라”(15절)고 핑계를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일로 크게 노하셨고,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린다”고 하시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이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이유를 따지지 마시고, 또 “이 말씀을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미래도 따져 보지 마시고 성경은 진리이니까 “무조건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순종함이 귀한 것입니다. 순종 그 자체가 자기에게는 복이고(시19:56)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광신도가 막16:18의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오해하여 독약을 먹고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광신도는 처녀였는데 믿지 않는 자기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선전하다가 언쟁을 하게 되었고 그 아버지가 오기로 말하기를 “독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면 너 한번 먹어 보아라”고 하였는데 사실을 증명할 목적으로 마셨다가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믿고 먹었는데도 죽은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요 ? 이 말씀은 성경 원문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부분인 9-20절까지가 괄호 안에 있는 것은 그 말씀의 기록이 없는 사본들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만큼 “정경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이 말씀은 14절에서 열한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므로 “열한 제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해석이 있으며, 또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사도적 특별 은사와 능력이 사도 시대에 국한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또 독을 먹은 광신도가 독을 먹을 때 언쟁 중에 오기로 먹었는데 그 동기도 순수하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순종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려는 모험에서가 아니고 순수하게 복종하는 계명 실천에 대하여 그러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예수님을 닮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양자로 삼으시고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요1:12,롬8:29). 그리고 성도를 구속하신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롬8:29)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거룩해지는 것(부패성에서 성결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순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중보 기도에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신다” 하셨고, 또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17:15,17).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 곧 예수님을 닮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도되는 것(거룩해지는 것:부패성과 멀어지는 것)이 어떤 과업을 이루는 것보다 더 귀한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의 믿음 성장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히11:6에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셨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요8:39-40). 또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씀 신앙과 가나안 여인의 기도 신앙을 칭찬하셨고(마8:10,15:28), 마리아의 봉사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마26:13).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과 성도를 연합시키는 것이고, 믿음의 발전에 따라서 그 연합성이 더 강하여 집니다(롬1:17,고전3:1-3,히5:11-14). 믿음의 성장은 지식과 실천의 분량을 더하므로 성취되고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 성장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5. 충성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요15:8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 하셨고, 충성된 자에게 칭찬과 상급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마25:21). 마19:27-29에 보시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였을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시므로, 충성자에 대한 상급을 예비하신 것이 바로 충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실 때는 자기의 뜻이 성취되셨기 때문입니다.

6. 자기를 부정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마16:24).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갈5:24). 명예와 향락을 자신이 누리면 누릴수록 주님께 돌릴 영광이 적어집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크게 칭찬하신 이유는(마11:11) 요한이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생활의 영광을 등지고 살면서 자신의 기쁨은 “신랑이 신부를 취할 때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요3:29) 함으로써 예수님의 즐거움을 자기의 영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자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줄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을 돌린다”는 실제적 평가는 자기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평가)에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② 성도가 성경대로 순종할 때,

③ 성도가 예수님을 닮을 때,

④ 성도의 믿음이 성장할 때,

⑤ 성도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때,

⑥ 자기와 자기의 영광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영광이 주님께로 돌려진다는 사실을 믿으셔서 바울 사도처럼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