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바로가기

제1과 서론 (딤전 1:1~2) 바로가기

제2과 가르침의 목표 (딤전 1:3~7) 바로가기

제3과 율법을 선용하라 (딤전 1:8~11) 바로가기

제4과 바울의 감사와 기원 (딤전 1:12~17) 바로가기

제5과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1:18~20)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5) 바로가기

     설교보충 2. 경계로 주신 말씀 (딤전 1:18~20) 바로가기

제6과 기도와 증언에 대한 권면 (딤전 2:1~7) 바로가기

제7과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책임 (딤전 2:8~15) 바로가기

제8과 감독을 세움에 대하여 (딤전 3:1~7) 바로가기

제9과 집사의 자격과 상급 (딤전 3:8~13) 바로가기

제10과 두 가지 비밀 (딤전 3:14~16) 바로가기

     설교보충 3. 하나님의 집 (딤전 3:14~15) 바로가기

제11과 미혹을 경계하고 거룩을 힘쓸 것 (딤전 4:1~5) 바로가기

제12과 선한 일군의 할 일 (딤전 4:6~1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 4:7)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본이 되라 (딤전 4:12~13)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진보를 나타냅시다 (딤전 4:15~16)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바울의 전심전력 (딤전 4:15) 바로가기

제13과 교회가 도울 대상 (딤전 5:1~16) 바로가기

제14과 목회상 유의할 점들(1) (딤전 5:17~25) 바로가기

제15과 목회상 유의할 점들(2) (딤전 6:1~10) 바로가기

제16과 하나님의 사람의 할 일 (딤전 6:11~21) 바로가기

제17과 죄를 경계하는 법 (딤전 6:3~12) 바로가기

제18과 복음 사역자의 유의할 일 (딤전 6:3~12) 바로가기

     설교보충 8. 하나님의 사람 (딤전 6:11~14) 바로가기

     설교보충 9. 바울 사도의 성직관 (딤전 6:11~16)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목록으로


필자가 <성경강론>을 글로 남기는 일은 모자라는 실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과분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상태에서도 목회를 하면서 성경 강론을 수차 증언한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는 자신이 묵상하고 증언한 바를 글로 남기는 것이 역사 보존과 후시대 성도들을 위하여 평범한 목회보다 더 보람이 있을 것으로 여겨 기독교 교육 서적 및 강론 등을 집필하기 위하여 목회 일선에서 후퇴하는 결단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제가 출판한 책들이 많이 수급되지는 않지만 목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결과의 산물입니다.

이 성경 강론문은 필자의 특징을 많이 반영하였습니다. 그 특징이라면, ① 본문 중심으로 묵상하고, ② 다른 내용을 별로 가미하지 않으며, ③ 쉽고 적당하게 기록하여, ④ 평신도가 보기 쉽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깊고 광범위한 다른 내용들을 참고하여 첨부하기를 가급적 피한 것입니다. ⑤ 또 내용의 순서는 본문을 단위별로 구분하여 총괄적 제목을 정하고, 대소지를 정한 후에 내용들을 해석하고, 교훈으로 결론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학습하거나 강단에서 공과용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에게 큰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1998. 2. .

제 1 과 서론 (딤전 1:1-2) 목록으로

지금부터 “디모데전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강론을 읽으시기 전에 <기독교 신앙백과>에 수록된 디모데 전서 개론(249번 p.646)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3 대지로 나누어 상고할 수 있습니다.

① 발신자에 대한 설명이요(1절),

② 수신자에 대한 표현이요(2절),

③ 발신자의 축복입니다(2절).

1. 발신자에 대한 설명에서, 발신자는 사도 바울이요, 바울은 “구주 하나님과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자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내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

① 성령님께서 바울의 사도직을 이용하여 디모데에게 성직을 전달하셨기 때문이요,

② 사도의 직분이 목회와 성도의 생활에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모범을 예수님이 나타내셨지만(요10:11,4),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아 목회 사역을 행하였고(고전11:1,행 20:26-35) 또 범사에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행20:35).

③ 사도들의 생활을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으로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엡2:20).

따라서 사도직의 권위가 아니면 성직과 목회직분에 대하여 권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사도직을 받게 된 경위와 성격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 사도직을 받은 경위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였으니, 이 사실은 행9:15-19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변화되었고, 아나니아의 안수로 건강과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후 3년간의 연단 기간을 거쳐(갈1:15-18) 사명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자요, 예수님과 성도에 대한 핍박자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계획과 힘으로는 변화될 수도 없고 사도가 될 수도 없는 것인데, 예수님의 명령과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사도된 출처를 설명하신 것이고,

② 사도의 뜻은 “전권 대사” 또는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며(행9:15,10:20), 그 성격에 대하여는 <사도행전 강론>과 <기독교 신앙백과> 167번을 참고하십시오.

③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란 말씀으로, 예수님께 종속된 직분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님의 것”인 것처럼 사도의 직분자인 바울도 역시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뜻이나 자기를 위하여 살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뜻과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직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롬 14:7-8).

3) 바울에게 사도직을 명하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셨고, 또 “우리 구주 하나님과 함께 명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① 바울 사도를 명하신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이신 것은 삼위일체의 사역을 나타내신 것이요,

② 하나님을 “우리 구주”라 하신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과 독생자로 허락하셨기 때문에(엡1:3-4,요3:16) 구주가 되실 수 있으며, “우리”라는 복수는 이 서신을 기록하신 바울 자신과 받을 대상인 디모데를 함께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적인 이름이고 예수는 인성적인 이름인데, 신성과 인성을 갖추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그 신인성을 보유하신 채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신 이유는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형제간이 되시며(히2:11), 친구 되시고(요 15:5) 또 한 가족인 중에(마12:48-50) 예수님은 영원하시고(히7:24) 전능하시며(마26:53,사9:6)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요1:14). 예수님에게 은혜와 전능하심이 없으시거나 우리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의 소망이라” 하셨고, 또 소망 성취의 능력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예수님께 반드시 큰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요, 또 때때로 소망 있게 하시는 은총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수신자에 대한 표현으로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한다”(2절)고 하셨습니다.

1)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됨”이란 신앙적, 사명적 동기로 한 권속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처럼 가까워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명적 동기로 양아들을 삼았다”는 뜻이 아닐 것이요, 신앙적 사명적 친교의 관계가 친 부자간처럼 결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복음 전도로 믿게된 성도를 “복음으로 낳은 자”라고 하셨습니다(고전4:15). 이와 같이 디모데를 복음적 신앙으로 또는 사명의 직분자로 인도하셨고, 또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것처럼 사명의 후계자가 되게 한 것도 부자간의 의미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딤전1:18-20,4:12-15,딤후 2:1-4).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아들로 호칭한 말씀은 딤후2:1에도 나타나 있지만 디모데 자신은 젊은 사역자로서(딤전4:12)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효도함으로 복음을 위하여 섬겼다”고 하였으니(빌2:22), 이런 일들이 다 참 아들된 입장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직자의 선후배 관계가 이와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2) 편지로 말씀을 전하신 사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교훈이 글로 전달됨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설교 만능의 시대입니다. 설교의 사역이 성경에 없는 것은 아니나(눅24:27), 이것이 습관화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읽고 깨닫는 생활이(엡3:3,4) 아주 도태된 상황임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글로 전달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계1:3).

3. 발신자 사도 바울의 축복입니다(3절).

1) 이 축복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복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란 뜻입니다. 성도들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께 복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신30:15,19-20).

2) 축복의 내용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니, 은혜는 거저 주시는 복이 많은 것을 전달함이요, 긍휼은 부족한 대상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많은 것을 전달함이요, 평강은 마음과 육신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평강을 주시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마음이란 염려와 두려움을 모르며, 깨끗한 양심을 지키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평강은 건강을 의미합니다.

3) 또 부언할 것은 이 축복이 기도의 성격으로 하신 것인가 ? 아니면 사도적 권위로 그리스도의 복을 전달하신 것인가 ? 할 때 후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신다” 하지 않고 축도의 형식으로(고후13:13)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

① 소망의 하나님을 모심과

② 사도직의 권위와

③ 성직자 선후배 간의 사랑의 유대와

④ 서신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⑤ 축복의 방법에 대하여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2 과 가르침의 목표 (딤전 1:3-7)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의 전체의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목회상 교훈의 목표를 지적해 주신 말씀이기로 총 제목을 “가르침의 목표”라고 정하였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가르침의 목표가 있어야 할 것이요, 그 목표에 어긋나는 교훈이나 유익 없는 교훈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또 어린아이 같은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교훈에 이끌릴 수 있으므로 그런 것도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3 대지로 나누어 살피실 수 있습니다.

① 금지시켜야 할 잘못된 교훈에 관한 것이요(3-4절),

② 교훈의 목표에 대한 말씀이요(5절),

③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훈의 실례를 지적하신 말씀(6-7절)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금지하여야 할 잘못된 교훈들에 대하여(3-4절).

1) 바울 사도께서 소 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시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시면서 동행자인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물러 사역을 하도록 지도하신 이유는 그 지역에 다른 교훈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평온하고 교훈이 순결할 때는 잠시 지도자가 없어도 무방하겠지만 불순한 교훈이 떠돌 때는 마치 전염병이 도는 형편과 같아서 신앙의 지도자를 더욱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사역하게 하신 것은 이단 경계와 바른 교훈으로 성도의 신앙을 지도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하여 “다른 교훈하는 자들의 가르침을 금지하도록 명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다른 교훈”이란 성경 말씀이 아닌, 또는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교훈이나 사도들이 나타내지 않은 교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을 “이단”(행24:14) 또는 “다른 복음”(갈 1:6,7)이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어떤 증언자의 교훈을 들어보면 성경과 무관한 내용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실제적 체험이거나 신비한 계시라 할지라도 성경에 부합되지 않으면 다른 교훈에 해당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② 그 다른 교훈을 하는 “어떤 사람들”이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왜곡하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선교 시기에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고(행14:2,15:1), 또 본문에서는 “율법을 잘못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기 때문입니다.(6-7절). 그들의 신분을 다 파악할 수 없으므로 “어떤 사람들”이란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③ 디모데가 그들의 이단적 교훈을 중지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에 근거한 것으로(시62:11), 이 권세가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된 것입니다(몬1:8). 특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단적 사조에 대하여 복음 사역자는 이를 금지시킬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3) 그 어떤 이들이 펼치는 다른 복음의 내용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여 증거하는 것”으로서 이는 믿음의 발전에 유익이 없고 오히려 불필요한 변론을 야기시키는 일이므로 금지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① “신화”란 성경적 또는 역사적 과학적 근거가 없는 전설을 뜻하고,

② “끝없는 족보”란 역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불확실한 족보를 추적하거나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유익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화와 족보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특권 있는 자로 자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사실상 유익하게 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족보상으로 증명하여 특권층의 대우를 받으려고 하였을 것이지만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변론만 일으키는 것”으로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족보상의 근거가 없고, 또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신약 시대에 지목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혈통의 자손이 아닌 믿음의 계승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요8:39-41,롬2:28-29).

4) 성도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드릴 사명이 있는데, 무익한 변론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뿐인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통치 섭리(계획)를 뜻합니다.

② 하나님의 통치라 하면 일반적 통치를 포괄하기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구별한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 실현되는 구원 사역에 대하여 기도나 전도나 믿음의 발전 등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드릴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유익이 없는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2. 가르침의 목표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5절).

말씀을 증언하고 신앙을 지도하는 사역자는 증언하는 내용과 함께 증언의 목표를 성취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핵심 없는 증언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부탁하시기를 경계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타나는 사랑을 성취하는 데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경계의 목적”이란 설교하는 목적 또는 부탁하는 목적을 뜻하고, 그 목적은 말씀 듣는 자들로 하여금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진실된 믿음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성도의 기본 자세를 갖게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1)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필요하고(마5:8),

2) 선한 양심은 회개하는데 필요하며(벧전3:21),

3) 거짓 없는 믿음은 믿음의 효력을 나타내는데 필요하고(고후13:5),

4) 사랑은 계명 성취에 필요한 것입니다(마22:37-40).

따라서 이상의 네 가지의 결실이 없는 교훈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3. 잘못된 교사들의 실례를 말씀하셨습니다(5-6절).

1)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있다” 하심은 거짓 교사들이 위의 5절에서 말씀한 네 가지 목적 성취에서 벗어나 헛된 말 즉, 의미 없는 교훈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핵심이 없고 실속이 없는 교훈만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사역자는 그런 무의미한 교훈을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2) 헛된 말에 빠져 있는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어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확증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셨으니, 이는 율법을 잘못 깨닫고 잘못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잘못 깨닫고 잘못 가르쳤을까요 ?

①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잘못 믿고,

② 또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키는 줄로 알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다 지킬 수 없고(갈3:10-11),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갈3:11). 율법을 다 지키지도 못하였으면서도 지킨 체 하고 또 ”구원할 수 없는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였으니 헛된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그러면 율법을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고(롬6:20,7:7-9) 정죄를 당하게 하므로(롬6:23, 7:9), “정죄에서 벗어날 복음을 바라 보라”(요1:29,36)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와 복음을 소개하는 몽학 선생(갈3:24)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은 그 진리가 가리어져서 깨닫지 못하고 또 바로 가르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헛된 말에 빠진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면서도(자기의 확증함) 깨닫지 못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

① 헛된 변론이나 증언을 삼가야 할 것과,

② 증언의 목적을 진리의 깨달음, 회개, 믿음, 사랑의 성취에 두어야 할 것과,

③ 잘못된 율법 교훈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제 3 과 율법을 선용하라 (딤전 1:8-11)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보시면,

① 8절에서 “율법은 선한 것인즉 법 있게 쓰라” 하셨고,

② 9-10절에서는 “율법은 범죄자를 위하여 세웠다” 하시고, 그 범죄의 양상들을 열거하셨습니다. 그리고,

③ 11절에서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주신 율법이 바울의 증언하는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 하시므로 전체의 제목을 “율법을 선용하라”고 정하였습니다. 율법을 선용하려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율법은 선한 것인즉 법 있게 쓰라 하심에 대하여(8절).

1) “율법”이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된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전체(마5:18,눅16:17) 또는 시편을 지칭한 때도 있고, 또 축소된 뜻으로 볼 때는 십계명이나(마22:36) 선지서를 제외한 구약 성경(마5:17)을 말할 때도 있지만, 본문에 관련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당시에 주신 계명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12:5,요1:45).

이 율법들 중에 십자가의 제사를 모형하는 의문의 법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폐지되었고, 다른 윤리와 헌신적 계명은 그 효력이 여전하며 의미상으로도 신약의 교훈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2) “율법이 선하다”는 뜻은 롬7:12에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선하고,

② 또 선을 지향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율법을 무시하는 자라”(행16:13,14)고 오해받은 일이 있었으니, 이는 율법의 용법에 대하여 그들과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롬 10:4,갈3:24,4:4,5).

3) “율법을 법 있게 쓰라”는 뜻은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적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 날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는 뜻은 완전 무노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안식일 날 일을 하였습니다(마12:1-8).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타작하는 일이요, 바늘을 머리에 꽂고 다니면 짐 운반하는 것이라”는 등으로 잘못 해석하여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다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이런 말들도 법을 법 제정한 의도에 따라 쓰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적당하게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언하고 바로 적용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우치고 선을 지향하게 하며 정죄받은 인간으로서 메시야를 찾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거나(많이 지킬수록 유익하지만), 율법이 구원의 방편이 되는 것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런 행위들이 모두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함이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은 범죄자를 위하여 세웠다” 하심에 대하여(9-10절).

1) 이 말씀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말씀하신 것으로, 범죄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선을 지향하게 하며, 정죄된 상태에서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2) 우리 나라 속담에 “누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착한 사람들끼리 살면 법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착하지 않은 사람을 통제하려니까 법이 필요하였다는 뜻입니다. 서로 양보하고 사랑하면서 살면 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은 이해 관계에서부터 갈등과 시비가 있게 되고 또 법으로 일깨우지 않으면 죄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법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선민들이 이방 나라인 애굽에서 살 때에 이방 문화에 혼돈되어 죄를 지은 일들이 더욱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법으로 무엇을 따져서 해결하기 전에 스스로 양보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며 사랑한다면 법을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재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죄를 깨우쳐 주는 목적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하셨은즉 우리 자신들이 “다 옳게 행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 “오직 불법한 자”가 아닌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지켜야 할 법은 세 가지입니다.

ㄱ) 하나님의 계율이고,

ㄴ) 인간 상호 간의 약속이나 계율(일반적 법률)이며,

ㄷ) 양심의 법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한 자는 불법한 자에 해당할 것입니다.

ⓑ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이는 지켜야 할 법을 고의로 지키지 않음이니 정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 “경건치 아니한 자”이니,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의식하여 존중함을 나타내지 않는 자이며,

ⓓ “죄인”은 시1:1의 말씀처럼 죄를 짓고 죄인인 줄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 “거룩하지 아니한 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이며,

ⓕ “망령된 자”는 하나님의 권위와 법을 무시하거나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있는 자이며,

ⓖ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는 5계명을 범하는 자이며,

ⓗ “살인하는 자”는 6계명을 범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자이며(마5:21-22),

ⓘ “음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는 7계명을 범하는 자이며,

ⓙ ”사람을 탈취하는 자“는 인신 매매를 뜻하며(출21:16),

ⓚ ”거짓말 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는 약속을 위반하여 사기하는 자이며,

ⓛ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림”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율법을 가르쳐서 죄를 깨우쳐 주고 엄히 책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은 범죄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한 절차임에 대하여(11절).

11절에서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쫓음이라” 하셨으니,

① “이 교훈”이란 율법의 목적을 설명하신 9-10절의 말씀을 뜻하며,

② “내게 맡기신 것”은 바울과 사도들에게 부탁하신 복음의 멧세지를 의미하고,

③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란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복음을 영광스러운 일로 수식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으로서 하나님에게나 예수님에게나 모든 성도들에게 다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④ “쫓음이라”는 뜻은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깨달아 믿게 하시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저희들은 이상의 말씀에서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는 문제와, 율법을 주신 의도에 따라 법대로 적용하는 문제와, 율법의 목적이 정죄받은 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찾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란 점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로 하여금 율법주의의 잘못된 사상을 바로 잡는데 힘쓰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제 4 과 바울의 감사와 기원 (딤전 1:12-17) 목록으로


본문을 살펴 보면,

① 12-1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또는 “바울의 감사한 내용”이 나타나 있고,

② 15절에서는 “모든 사람의 받을 만한 복음의 소식을 자랑”하셨으며,

③ 16절에서는 “바울이 긍휼을 힘입은 까닭”을 말씀하셨고,

④ 17절에서는 “바울의 기원”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바울의 감사와 기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하신 일은 곧 바울이 감사한 내용이었습니다(12-16절). 성도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는 일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셨다”(12절)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이 크게 변화된 것(행9:4,고전9:1,15:8)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실로부터 거듭나고 믿음을 가진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존귀한 사도직을 받아 믿음 생활과 사명 생활을 힘 있게 하게 된 것이 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대하여 하신 일임을 알고 감사한 것입니다. 빌4:13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고, 고전15:10에서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능하게 하셨습니까 ? 즉, 저희들이 받은 능력이 무엇입니까 ? 저희들은 우선 믿음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다음에는 계명 실천의 능력과 사명 실천의 능력을 더 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사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 내용에는 바울의 겸손이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직분(사도직)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벧전5:5).

①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다” 함은 바울이 자신의 충성과 노력을 스스로 과소 평가한 말씀으로 겸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노력한 것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15:10). 또 예수님은 직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직접 간접으로 주십니다. 바울에게 직접 주신 것은 영적으로 주신 감화와 변화와 계시로 주셨고(행9:3,22:10), 간접적으로 주신 것은 아나니아를 통하여 전달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행9:17-18,22:12-15).

② 저희들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 주셔서 직분을 주셨음을 믿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직분을 받는 것은 그 절차로 볼 때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갈 1:1,빌2:13)

3)그리스도를 대적한 자에게 오히려 긍휼을 힘입혀 주신 것입니다(13절).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교훈의 실천적 모범이기도 합니다(마5:44). 바울은 개종되기 전에 복음의 훼방자였고, 성도들에게는 핍박자요 포행자(행7:58-59, 9:1-4, 26:10-11)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로 예수님을 대적하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대적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다 긍휼히 여기심을 받으므로 구원을 받게 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긍휼을 힘 입은 내용들은,

① 바울이 복음을 대적한 것이 모르고 행한 것이었으므로 간과(문제 삼지 않았다는 뜻)해 주셨다는 점이요(13절),

② 훼방자요 핍박자를 사랑하시되 믿음과 사랑을 넘치도록 주신 점이요(14절),

③ 바울이 핍박하고 거역하는 동안 “하나님이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벌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6절). 이런 말씀은 롬 2:4;3:25;벧후3:9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까지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알지 못하여 범한 죄를 간과하시고, 훼방자요 핍박자에게 넘치는 믿음과 사랑을 베푸셨으며 또 거역하는 자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신 긍휼을 감사한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복음의 소식을 자랑하신 것입니다(15절).

1)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여기의 “미쁘다”는 말씀은 “아름답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복된 소식은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자랑거리요 놀라운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신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2) 자랑할만한 복음의 소식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요, “바울처럼 그리스도에 대하여 괴수된 자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자기의 과거의 죄를 생각하면서 겸손하기를 힘썼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바울은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괴수 죄인이라 한 것은 겸손한 처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어떤 이단 교파에 속한 자가 “자신은 죄사함 받은 의인이라“ 하며 과거의 죄를 불문하고 의인인체 하며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태도와 같지 않은 것입니다(롬7:21-24).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복음의 사건을 널리 자랑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려 하심” 때문이었습니다(16절).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사도로 믿음 생활의 모범을 삼으신 사실과(엡2:20), 자신에게도 그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전11:1에서 “내가 주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된 분은 예수님과(요13:14-15) 사도들 뿐입니다(빌3:17,딤후1:13). 다른 전통이나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을 본 받으면서 주님과 사도들을 본 받아 행한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바울의 기원하신 말씀입니다(17절).

바울은 17절에서 존귀와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지기를 기원하였고, 또 영광받으실 하나님에 대하여 네가지 수식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만세의 왕이시요, 썩지 아니하시는 분이요, 보이지 않고 또 홀로 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만세의 왕이란 영원한 절대자란 뜻이요,

② 썩지 아니하심은 부활의 주님으로서의 영원하심을 나타낸 것이요,

③ 보이지 않음은 현실 세계에 있는 동안 그러하며(고전13:12),

④ 홀로 하나이신 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유일성을 뜻하며, 그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3) “존귀와 영광”이란 하나님께만 즐거움이 있고, 하나님의 명성이 모든 피조물 세계에 높여짐을 뜻하는 것입니다(마6:9,출20;7).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주신 내용들은,

①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음으로 사역자가 되었다는 점과,

② 받은 은혜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여야 할 것과,

③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임하셨음과,

④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여야 할 것과,

⑤ 하나님이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시는 긍휼이 크신 것과,

⑥ 사도들의 신앙 생활이 후시대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과(고전3:10,엡2:20),

⑦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도록 사역하여야 함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5 과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1:18-20)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18절). 선한 싸움을 싸우려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하고, 이것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거나 복음적 신앙을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엄히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로 호칭하였으니(18절), 이는 복음으로 양육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전4:15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선배가 후배를 사랑함에 있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고 또 후배는 선배를 부모처럼 섬기는 정신으로 일해야 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로서 명하시되 “과거에 지도한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셨습니다(18절).

1)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은 사역상의 책임과 권한으로 한 것이며,

2) “이 경계로서”란 계속되는 권면의 내용을 뜻하고,

3) “너를 지도한 예언”은 바울이 디모데를 교육시킬 때 가르친 교육 내용들을 의미합니다. “예언”은 설교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고전13:9,14:1,29).

3. 성도들도 선한 싸움에 동참하여야 하지만 특히 복음 사역자들은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부끄러울 것이 없을 만큼 그 일을 감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빌1:20,딤후4:7).

1) 선한 싸움이란 정의를 위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정의 구현이 아닌 것이나 사랑에 위배되거나 사리 사욕을 위한 싸움은 결코 선한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2) 대체로 이 선한 싸움은,

① 교리를 바로 펼침에 대하여 이단과 싸우는 문제,

②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불법과 싸우는 문제,

③ 사랑에 위배되는 일을 통제하기 위하여 비도덕적인 일들과 대결하는 문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위하여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싸움은 기도와 진리와 사랑과 합법성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요 곧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롬12:21).

악한 자는 성도가 아무리 선하고 합법적인 태도를 취하여도 옳고 그른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함이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4.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데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19절).

1) 여기의 믿음은 초보적인 신앙이나 구원 받음에 필요한 믿음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성숙한 믿음, 또는 연단된 믿음, 온전한 믿음(히5:13-14,벧전1:7,히10:22)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에서 칼을 사용하는 사람과 전쟁에 나가서 칼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이 다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곧 불법과의 싸움이요,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엡6:10-12).

2) 착한 양심이란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깨끗한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5:3의 “가난한 마음”, 마5:8의 “청결한 마음”, 마13:23의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시24:4의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마음”, 마18:4의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진실, 겸손, 온유, 정의, 사랑 실천의 마음이 없으면 “착한 양심이 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부분이요, 착한 양심은 인간을 상대하는 도덕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믿음과 착한 양심이 없으면 선한 싸움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가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환경에서나 건설적 방법으로 생활하는 힘을 주고, 착한 양심은 마귀의 유혹을 피하는 데 유익하며 또 이기적 현실적 목적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 실현과 순결함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마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한 싸움 이면에는 이기적인 목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런 것은 선한 싸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생존 경쟁이라 함이 좋을 것입니다.

5. 착한 양심을 저버린 자들에 대한 징계를 실례로 말씀하셨습니다(19-20절).

1) 성도라 하면서도 어떤 이들은“이 양심(착한 양심)을 버렸다”고 하셨으니, 성도라는 외모를 갖추어 교회에 출입은 하지만 착한 양심이 없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 실천의 의지가 약하거나 현실적 이기주의를 목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입니다. 무엇이나 이기주의에 위반되는 것은 지적하고 대항하며 화평을 깨치는 자들이요,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2) 이들은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을 배로 비유하셨습니다. 배는 세가지 필요 조건이 있습니다.

① 물이 들어오면 안되는 것으로, 이 물은 세상 정욕 또는 이기주의에 사로 잡힘을 뜻하고,

② 암초에 부딛치면 안되니, 이는 잘못된 신앙 사상이나 이단에 걸려 드는 것을 의미하며,

③ 목적지에 대한 방향 설정이 확실해야 하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는 건전한 신앙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양심이 없을 때는 마치 옥토 아닌 흙에 심겨진 나무처럼 잘 자라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므로 그 신앙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이 파선이란 신앙의 위기를 뜻합니다.

3) 그런 인물로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어서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는 징계를 하여 “순결한 신앙 생활을 훼방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20절).

① “후메내오”는 딤후2:16-18 말씀을 참고할 때 “그의 말이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처럼 망령되고 경건치 않은 행위를 드러낸 자”이고, “알렉산더”는 딤후4:14에서 “구리장색으로 바울을 몹시 괴롭게 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다 진리를 대적한 자들입니다. 진리를 따르는척 하면서도 진리의 뜻을 역행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마23:14). 복음 사역자나 다른 이웃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②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는 징계를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디모데에게 하신 목적은 “교회와 신앙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을 경계하고 엄히 징계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현실 교회도 권징을 엄히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현실 교회가 권징을 엄하게 못하는 이유는 권징 사역을 두려워 하는 경향도 있지만 사람의 수를 확보하여 유형 교회의 형태를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또 권징을 은혜로 받아 순종하고 회개하려는 교인도 찾아 보기 힘든 형편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권징을 복종하지 않고 도망하는 성직자와 교인이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③ 그러면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이것은 권징으로 “지옥에 보냈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적 관리와 성도의 교제를 통한 보호 대상에서 제하였다는 뜻”으로 “출교”와 같은 것입니다(요9:22,마18:17). 마치 목장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 양의 신세처럼 되게한 것이므로 위험한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고전5:5에서 “육신은 멸하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시려고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 하셨고, “욥”도 사단에게 내어 주실 때 육체의 타격만 허락하신 것처럼(욥2:6) 영적 구원까지 제외한 것은 아닙니다. 징계란 심판의 뜻과 같아서 공적 유익을 위하여 또는 문제 있는 성도의 교훈과 연단을 위하여 베푸는 채찍인 것입니다(히12:8). 징계를 받을 때 택한 백성이면 회개할 기회를 얻고 합당한 생활로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복음 사역자는,

①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할 것과,

② 이를 위하여 성숙된 믿음과 착한 양심을 무기로 가져야 할 것과,

③ 교회의 순결과 공익을 위하고, 당사자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엄히 권징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④ 또 신앙의 몰락을 파선에 비유하시므로, 배에 물이 들어오는 문제와 암초에 부딪힐 위험과 방향 설정이 확실해야 할 것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설교보충 1.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목록으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도라는 존귀한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고백이 합당한 고백이기 때문에 하셨고, 성령님께서도 성경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바울 사도가 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셔야만 하였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이 고백은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시인하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 못하시는 것처럼(딤후2:13) 누구나 자기의 역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자기의 역사를 부인하거나 감추고 산다면, 그는 진실한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 가면을 쓰고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주의 이단자로 있을 때 복음을 훼방하고, 성도를 잔해, 포행, 잔멸한 자이었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크게 핍박한 괴수 죄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행7:58,8:1,3,9:1,딤전1:12-15). 따라서 이 고백은 그의 과거를 그대로 시인한 고백입니다. 성도들도 자신의 과거를 시인하는 진심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너무 큰 것을 자랑하며 감사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같은 큰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여 사도로 세워 주신 것을 자랑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보통 죄인을 구원하셔도 큰 은혜이거든 하물며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원수로 대한 괴수 죄인까지 구원하셨으니 그 은총이 얼마나 큽니까 ? 바울은 그것을 자랑하며 감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눅7:43에서 “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가 주인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자라”는 말씀과 관련할 때 바울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자랑하고 감사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3. 항상 괴수 죄인처럼 겸손하게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죄인시하거나 벌하는 것은 속죄의 은혜를 모르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얼마만큼 큰 효력을 주시는 지에 대하여 다 알고 계셨습니다(롬8:34,고전1:18). 그러나 회개하는 차원에서 “자신을 벌하신다” 하셨고(고후7:11), “날마다 죽는다” 하셨으며(고전15:31),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15:9,엡3:8)라 하시고, 또 “자신의 연약을 자랑한다”(고후11:30,12:9)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죄인처럼 겸손하면,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도 큰 덕을 세울 것입니다.

4. 바울이 핍박받으면서 겪은 고난이 괴수 죄인의 형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고전4:13에서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 하셨고, 고전15:32에서는 “에베소에서 범인처럼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 하셨으며, 고후1:8,9에서는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여겼다” 하셨으니 핍박을 받으실 때마다 괴수 죄인같은 취급을 받으신 것입니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도 그러하였고(행23:12,13), 결국 괴수 죄인의 취급을 받고 순교하셨으니, 괴수 죄인의 취급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런 취급을 받아 순교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5.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살피며, 약점을 깨달아 회개하고, 죄인이란 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이 죄인이란 의식을 가지고 늘 자기를 살피면서(고전11:28) 조심하며 사신 것처럼(엡5:15) 성도들도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죄악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완전 성화에 이르지 못한채 범죄의 유혹 아래 있음이 사실이므로, 자신도 모르게 “범죄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자신을 “괴수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① 자신의 과거 역사가 그러하였고,

② 괴수 죄인에 대한 구원의 은총을 자랑하며 감사하기 위함이었으며,

③ 겸손하게 회개하면서 살기 위함이요,

④ 사명으로 인한 핍박으로 그런 취급을 몸소 받으셨고,

⑤ 또 모든 성도들이 “범죄하며 살고 있다는 의식” 속에서 주의하도록 교훈하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 경계로 주신 말씀 (딤전 1:18-20) 목록으로


선배 사역자인 바울 사도가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경계로 주신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1.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성경대로 배웠어도 실제로 사역할 때는 자기의 감정이나 취미대로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모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 가지 말라”(고전4:6)는 말씀이 있고, 또 “사도들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짓되 조심하여 세우라”(고전3:10)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도들이 닦아 놓은 기초(모범) 외에 다른 기초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과 사도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인본주의와 인간적 실리주의에 빠져서 표준을 상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기의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말씀은 디모데를 사역자로 임직할 때 바울 사도가 권면하신 교훈입니다(딤전4:14). 누구나 성경과 사도의 권면을 무시하여 이탈하면 안될 것입니다.

2.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이요, 죄와 유혹을 대항하는 싸움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요8:44) 항상 진리를 대적하며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죄와 불법으로 유혹해 올 때에 성도는 오직 믿음과 사랑과 선으로(롬12:21) 그 유혹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목적이 옳고 방법도 선하여야 합니다. 자칫하면 중대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목적을 위하여 과잉 충성과 낭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을 얻기 위하여 사랑을 잃고, 제도를 지키기 위하여 신령함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교파와의 갈등이나 교회 안에서의 파벌 대립이 그런 것입니다. 또 이단과 싸워도 역시 선한 방법으로만 대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합법과 불법에 대한 시비도 사랑 안에서 대화와 교육으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 모르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상회에 문의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오히려 모르는 수치를 은폐하기 위하여 묻지 않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3.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1) 믿음은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고, 착한 양심은 행실의 기초입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좋은 토양에 좋은 나무가 배양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가 옥토같은 마음 밭에 떨어져야 결실한다”는 말씀을 상상하시기 바라며(마13:23,약1:21), 또 성도나 복음 사역자에게 착한 양심이 떠나면 그 믿음이 “파선하는 배와 같다” 하신 것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양심의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크게 훼손되었으나 불신자들은 도덕적 교육으로, 성도들은 거듭난 심령과 말씀의 교육으로 그 타락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의 신앙적 양심이 불신자보다 더 깨끗한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 양심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3) 이 양심은 믿음의 바탕이고(약1:21), 성경 다음 가는 생활의 표준이며(롬1:20,2:15), 눈이 몸의 등불인 것처럼(마6:22)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3:21). 그런데 이 양심이 더러워지면(딛1:15) 진리를 버리는 마음이 되고, 하나님도 멀리 떠나시게 되며(롬1:28), 화인 맞은 양심(딤전4:2), 곧 소경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거나 죄에 대한 가책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에 나타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또 왕상13:11의 “한 늙은 선지자”가 거기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양심보다 더 밝은 것은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4. 성도의 양심 생활을 항해로 비유하셨고, 양심의 타락을 배에 물이 들어와서 파선하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1) 배에 물이 들어오면 안되듯이 성도들의 양심도 흐려지면 안됩니다. 배에 물이 잠입하면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양심도 흐려지면 믿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의 어떤 신학자의 강의를 듣다가 “예수님도 바리새파와 대등한 종파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강의 도중에 청취를 취소한 일이 있었습니다. “적은 누룩을 피하라”는 말씀처럼(고전5:6) 잘못된 사상의 침투는 꼭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과 같고, 이런 것들이 신앙 양심을 흐리게 하다가 결국은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성도의 신앙 생활을 항해로 비유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여야 안전 항해(즉, 바른 신앙 유지)를 할 수 있을까요 ? 파선의 원인은 물의 잠입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① 우선 큰 배를 타야 합니다. 큰 배는 작은 배보다 파선할 위험이 적습니다. 여기의 큰 배란 신학이 확립되고, 교육의 질이 좋으며, 권징의 힘이 강한 교파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면에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② 배에 구멍이 없어야 합니다. 엡4:27에서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잘못이나 작은 잘못된 교훈에서부터 잘 교정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는 생활을 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③ 배에는 짐을 균형있게 실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신앙 생활을 표준성 있게 해야 할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과 주의에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경만을 표준으로 지와 정과 의를 겸전한 균형있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암초를 탐지하여 잘 피해야 합니다. 교리를 깨치는 암초, 사랑을 파괴하는 암초,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암초의 요인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배는 추진력이 있으므로 침몰의 위험을 막는 것입니다. 외항선을 타본 사람이 말하기를, 배가 풍랑을 이기는 것은 배의 추진력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앙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자전거는 전진하므로 서고, 머물면 쓰러지는 것처럼, 신앙도 열심을 내면 발전하고, 게으르면 침체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경계로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셔서,

① 사도들이 지도한 예언의 말씀을 따르고,

② 선한 싸움을 잘 싸우며,

③ 항상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④ 물을 용납하지 않는 배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순결지키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6 과 기도와 증언에 대한 권면 (딤전 2:1-7) 목록으로


위의 말씀을 구분하면,

① 기도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과(1-3절),

② 증언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4-7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기도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에서, 사역의 절차상 순서와 기도의 종류와, 간구의 대상과 목적, 그리고 기도의 성격을 말씀하셨고, 증언의 사명을 주신 말씀에서는 증언자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과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증언의 필요성을 느끼고 사명적 긍지를 가진 후 지정하신 대상에게 증언의 사명을 다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1. 기도의 사명을 주심에 대하여(1-3절).

어느 복음 사역자나 다 기도의 사명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기 위하여 기도를 힘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1) “그러므로”란 앞에서 말씀한(1:18-20) 문제성을 대처하는 방안으로 기도할 필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문제와, 양심을 지켜 믿음을 파손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2절 하반에서 말씀한 기도의 목적 설명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과 사명을 옳게 지켜 나가기 위한 필수적 무기이기 때문입니다(빌4:6-7).

2) “첫째로 권하노니”란 말씀에서 복음 사역자가 기도를 우선적으로 시행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연구하기 전에 기도하고, 증언하기 전에 기도하며, 다스리기 전에 기도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섭리하시는 출발점에서부터 은혜를 받는 방법이기 때문에 우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을 위하되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1절의 “모든 사람”이나 2절의 “모든 사람”이 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모든 사람”이란 뜻이 고위층을 지칭하였다 하여도, 구속의 대상이 고위층에 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4절) 기도의 대상을 정할 때는, 먼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다음에 고위층(정치가들)을 위하여 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자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딤전4:10). 디모데에게 있어 기도의 대상을 지적하신 것은 정치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기도의 목적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특히 고위층을 위하여 기도할 이유는 그들이 의로운 정치를 잘 함으로 신앙과 생활의 안정을 향유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경건”이란 신앙 생활의 충족을 의미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사회 생활의 질서와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인간의 사회적 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의 기관이며, 고위층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롬13:1-7)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5) 또 기도의 종류에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① “간구”는 특별한 청원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는 정성을 부각시킨 말씀입니다. 원문은 δεήσεις(데에세이스)로 “간절하게 구함”이란 뜻이 있다고 하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6:18), 또 간절함의 표현으로 주야로 금식(눅2:37) 또는 자주 금식 기도(눅5:33)하라는 말씀에 사용되었습니다. 눅11:5-8에 보시면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양식이 없자 그 이웃 친구에게 가서 떡 세덩이를 빌려달라고 간청하는 사실에서 부탁 받은 친구는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않을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소용대로 주리라” 하셨으니 이렇게 불가피한 소원을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가 간구인 것입니다. 이 간구는 응답의 확률이 높습니다.

② “기도”는 광범위한 기도의 의미를 포함하는 기도입니다. 원문은 προσευχή(프로슈케)로서 “드린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자가 마땅히 마음과 정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간구”가 청원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마음의 준비와 정성에 집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자는 정성과 마음의 가다듬이 없이 중언부언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프로슈케”란 용어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막11:17),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눅6:12), 또는 “기도를 전혀 힘썼다”(행2:42)는 말씀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광범위한 대화를 정성 드려 아뢰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③ “도고”는 원문의 ἔντευξις(엔튜키스)로서 “탄원” 또는 “진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도고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호소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눅18:7에서 “억울함을 당한 과부가 법관에게 찾아가 날마다 호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탄원을 받으실 수 있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문맥에 따른 해석으로 “타인을 위한 대신 기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④ “감사”는 원문의 εὐχαριστία(유카리스티아)로, 감사의 뜻 외에 맹세와 서약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창28:20에 나타난 야곱의 서원 기도를 연상하게 합니다.

6) 기도의 성격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처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 한 것”(3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계5:8에서도 하셨습니다. 기도는 “금 대접에 담은 향기”로서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예물과 같은 것이므로 성도는 더욱 기도의 가치를 깨닫고 기도하기를 힘 쓰셔야 할 것입니다.

2. 증언의 사명을 주시면서 권면하신 말씀입니다(4-7절)

1)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9:7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구원의 열망을 말씀하신 것인 만큼 복음 사역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고 진리를 알도록 가르칠 사명을 피력하신 말씀이요,

②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원하신다”는 뜻은 택한 백성에 한하여 한 사람도 남김이 없이 다 구원받게 하신다는 뜻입니다(엡1:4,요17:9,12).

③ “구원을 받음”에는 전도가 필요하고, “진리를 아는데”는 교육이 필요하므로 복음 사역자는 모든 인류를 상대로 전도하고, 성도의 신앙 육성을 위하여 진리 교육에 힘쓰도록 주신 말씀입니다(요16:13).

④ 여기의 “모든 사람”을 세상의 인류 전체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세상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으나 자기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택한 백성들에게만 구원의 손 길을 펴시고 그 이상은 멈추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에 한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고전10:5,살후3:2).

2) “중보 사역에 대한 증언을 중요시 하라”고 하셨습니다(5-6절).

이 말씀은 바울이 십자가만 알고(고전2:2) “십자가만 전한다”(고전1:23)는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증언이 빠지면 설교의 핵심을 잃는다”는 교육이 보편화되었습니다. 5-6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사명”을 강조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신데, 그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중보자란 하나님과 구원받을 죄인들을 화목시키는 역할자요, 중보자 예수님은 그 역할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고 또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신 것입니다(5-6절). 즉,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뜻입니다. “속전”이란 종이나 죄인이 지불할 돈을 대신 갚아 주고 해방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② 그 분은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셨으니, 여기의 “사람”이란 뜻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상태에서도 신성과 인성을 겸전하여 계신 것이고, 다만 죄 있는 인간을 대표하여 죄 없는 사람인 예수님이 십자가로 속전을 드리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갚아야 할 속전이기 때문에 사람되신 예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대표하여 이를 감당하셨다는 뜻입니다.

③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 여기의 기약이란 “때와 기회를 만나면”이란 뜻입니다. 증거의 내용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에 속한 “십자가로서의 구원”이며, 이는 곧 복음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 때에도 증거되었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전도자들도 증언하였지만 하나님이 계속 기회를 주심에 따라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증거자는 반드시 복음의 핵심(십자가와 중보 사역)을 중요시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사도직의 진실성과 전도의 내용 및 대상에 대하여 확신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7절).

① “이를 위하여”란 말씀이 복음의 핵심 즉,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증거할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고,

② “전파자가 사도로 세움을 입는 것이 참이라”는 뜻은, 그 당시에 바울을 핍박하는 무리들이 바울의 사도된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핍박하고 배척한 사례가 있었습니다(고전9:1-3).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직분의 진실성을 피력한 것입니다(갈1:1). 이런 사실이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을 믿음과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쉽게 성직을 받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자기가 자기를 안수하여 성직자로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③ “말씀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 하심은, 이방인들을 전도와 교육의 대상으로 하되, 믿음과 진리 안에서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 생활과 진리 증언을 위하여 이방인의 스승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 선교 시작부터 복음 전파의 대상을 이방인들로 분정하여 받았습니다(행9:15).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로서 유익한 점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과(행22:25-26,갈2:7,8), 헬라어에 능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행21:37-38).

이상과 같이 복음 사역자는 기도와 증언에 충실하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은 일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복음의 확실한 증언을 하며, 또 포교의 대상을 분정받은 대로 사역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7 과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책임 (딤전 2:8-15) 목록으로


이 말씀을 살피면,

① 8절에서 남자들에게 기도할 책임을 말씀하셨고,

② 9-14절에서는 여자들의 덕행을 말씀하셨으며,

③ 15절에서는 여자들의 구원받는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해석상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의 공적 행사와 관련하여 남녀의 구별 및 질서 유지를 위한 교훈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 남자들에게 기도할 책임을 주심에 대하여(8절).

1) 8절의 “그러므로”는 1-2절에서 말씀한 “성도들의 기도할 책임을 실천함”에 대하여 방법을 설명하신 것과 관련된 접속사이고,

2) “각처에서”란 여러 곳에 설립된 교회와 장소에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므로 기도의 처소가 특정되어 있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3) “남자들이.....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하시므로 기도의 책임을 남자들에게 허락하신 것은,

① 우선 여자들이 기도할 자격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행1:12-14),

② 생활의 질서나 도덕성에 비추어 남자를 신령한 사역에 앞 세웠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질서란, 남자는 활동적 직임에 종사하고, 여자는 가사를 돌아 보게 함이 유익함을 뜻하며, 도덕성에 비춘다는 뜻은 14절의 말씀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의지가 약하여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더함을 인류 시조 하와의 실례로 입증하기 때문에 한층 더 주의를 요하는 점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이유로 대중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문제를 남자들로 하도록 지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또 이 말씀은 “남자보다 더 유력한 여자가 없다”는 뜻도 아닌 것입니다. 만일 유력한 남자가 없을 때 “여자에게는 대표 기도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공적 기도를 할 때는 남자들로 그 책임을 맡게 하라는 뜻입니다. 현실 교회의 실정은 남자보다 여자의 기도가 더 많은 형편입니다. 여기에는 남자의 신앙과 기도의 책임이 뒤떨어지고 있음을 이 말씀에 의지하여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분노와 다툼이 없이” 하신 말씀은, 기도자의 도덕성이 순결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거룩할수록 좋습니다. “거룩한 손을 든다”는 뜻도 순결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5:24에 보시면, 예물을 드릴 때에 “형제와 화목한 후에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기도자의 마음은 감사가 앞서야 합니다(빌4:6). 만일 기도자의 마음에 분노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과 희망과 화평의 정신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불의와 억울함과 절망에 대한 해결자시요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만한 마음이나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손”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결한 생활, 깨끗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요(손을 들고 기도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백과> 60번을 참고하십시오), “손을 들었다”는 뜻이 항복의 표현이 되기도 하고(애2:19,3:41), 또 왕이나 선지자가 시행할 때는 축복의 의미가 되며(출17:11,눅4:50), 성도들이 기도할 때는 은혜를 갈망하는 표현이 됩니다(느8:6,시28:2). 초대 교회 당시에 손 들고 기도한 사례도 있었으나 다 그렇게 한 것은 아니며(눅18:13), 그 방법과 형식이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기 때문에 공예배 질서 유지에 유익하도록 삼가야 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또 상징이나 제스츄어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2. 여자들의 덕행을 교훈하심에 대하여(9-14절)

1) “여자들이 아담한 옷을 입어야 함”은 사치를 배제한 상태에서 단정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자들의 의복 맵씨가 도덕성을 상실하여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석 장식(금이나 진주)이나 값진 옷을 피하여야 하며, 땋은 머리를 피할 것은 서민의 생활이 아닌 귀족의 생활을 본 받는 것이 되었고, 화장할 때 많은 시간이 소모되므로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접하는 성도는 우선 패물 장식이나 비싼 옷을 탈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 하심은 외모보다 인격의 질을 높일 것과 분수와 예절, 부정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생활이 있어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하신 말씀도 역시 염치와 정절에 포함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성도는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도덕성이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3) 여인들은 교회 안에서 “남자들의 지도에 순종하고 종용히 배우는 자세를 취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동양적이고 남존여비의 사상에 가까운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교훈을 하셨을까요 ? 그 이유를 12-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는 결코 여자의 인권을 비하시켜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직 창조 질서에 부응하고, 공적 교회에서의 덕을 세움에 필요하여 주신 교훈입니다.

①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게 한 사실이나,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게 하신 사실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2절). 이 사실은 인류 창조 당시에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창3:16) 하신 후 그것을 변경하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② 또 남자가 여자를(남편이 아내를) 다스리게 하신 이유는 창조 순서상 아담이 먼저요 이와가 그 후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13절). 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담의 필요에 응하도록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창2:18). 구약에서 “하와”라 한 것이(창3:20;4:1) 신약에서 “이와”로 변한 것은(고후11:3) 헬라어로 표기된 발음상의 차이로 비롯된 것입니다.

③ 여자가 먼저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진 사실 때문이란 것입니다(14절). 남자의 범죄도 적지 않지만, 꾀임에 빠지는 의지적 결함과 유혹에 이끌린 허술함이 여자에게서 먼저 발생하였고, 또 그 통로로 죄가 들어 왔기 때문에 여자로 하여금 조심하게 하기 위하여 나서지 않게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이나 개인의 사생활은 상관하지 않을지라도(엡5:22-23), 교회의 공적 생활에서는 남편 또는 남자들을 앞세워 가르치게 하고 부인들은 조용하게 배우며 봉사하게 함이 덕을 세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3. 여자들이 구원받음에 대하여 주신 말씀입니다(15절).

15절 말씀은 여자들이 구원받는 일에 대하여 하와의 타락한 책임을 염두에 두시고 그 취약점을 보충하는데 노력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그러나”란 접속사는 여자가 최초의 범죄자로서 범죄상 취약점을 가졌음을 나타낸 것이요,

2) “만일”이란 말씀은 “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일반적 또는 상대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해산한 수고가 구원 받는 공로가 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힘 입음에 필요한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3) 여자들이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것”은 구원받음에 필요한 자세입니다. “믿음”은 구원받음에 관련된 복음적 신앙이고, “사랑”은 복음적 신앙을 입증하는 계명의 실천이요, “거룩”은 계명 실천과 함께 예수님을 닮는 성도의 마땅한 인격이므로, 이 세 가지를 정절로(순결과 지조) 지키는 것은 여자들의 취약점을 보완함이 되고, 또 거기에 해산함의 수고까지 첨부되면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힘입어 구원을 성취하는데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4) 혹 “그 해산함”이란 뜻을, “여인이 그리스도를 해산함”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최초의 여인이 최초의 타락을 가져온 것만큼 한 여인(마리아)이 메시야를 출생시킨 수고와 그 메시야의 사역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타락의 징벌로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으므로(창3:16)(모든 여인들이 다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나) 보편적 견지에서 유혹의 취약점을 가진 여자들의 구원 문제를 보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아야 할 것은,

① 남자와 여자의 책임 분담을 실제적으로 이행할 것과,

② 교회 안에서 남자의 활동을 선호할 것과,

③ 여자들이 조용하게 생활하고 배우며 봉사함으로써 덕을 세울 것과,

④ 여자들이 유혹에 민감한 타락성을 만회하기 위하여 더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8 과 감독을 세움에 대하여 (딤전 3: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① 감독의 개인적 자격 조건과(1-5절),

② 감독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므로(6-7절), 전체의 제목을 “감독을 세움에 대하여”라고 정하였습니다.

1. 감독의 개인적 자격 조건(1-5절).

1) 1절에서 “감독이 되려면 선한 일을 사모하여야 하는데, 이는 진실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란 진실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은 πιστὀς ὁ λὀγος(피스토스 호 로고스)로서, “피스토스”는 믿음, 진실, 충성의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성도가 교회의 감독이 되기를 열망한다면 우선 선한 일을 사모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착한 일에 으뜸되지 않으면 감독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착한 일”은 신앙 생활과 도덕적 인격이 뛰어날 만큼 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감독”이란 어떤 직분을 뜻하는가 ? 에 대하여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감독”이란 말은 ἐπισκοπἠ(에피스코페)이고, 감독직은 “에피스코펜”인데(행1:20), 사도로 있었던 가룟 유다의 직분을 감독자라 하였고(행1:20), 또 사도직을 가진 베드로를 장로라 하였으며(벧전5:1), 행11:29-30에서 신약의 교회가 최초로 장로를 세웠고, 그후에 그 세워진 장로를 감독자라고 하였습니다(행20:17,28). 또 벧전5:2에서 베드로가 목회자를 권면하면서 “장로들에게 권면한다”고 하였습니다. 그후에 디모데(목회자)를 장로의 회에서 안수하였고(딤전4:14), 또 장로 중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가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딤전5:17). 따라서 본문에 말씀한 감독은 사도 후 시대에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와 치리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에 목회자와 치리 장로가 있는 것이 바로 이상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감독의 책임은 목회자일 경우에 목회상의 모든 일을 잘할 것이요, 치리 장로일 경우에는 범사에 모범을 보이며, 교회 단체를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목회, 모범, 감독, 치리, 권징이 감독에게 주어진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3) 감독의 개인적 자격으로서 열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크게 나타나는 죄나 부덕이 있어서는 안됨을 뜻합니다. 비난을 받을 일이 없고, 흠잡힐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홀아비는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별한 경우에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마19:11,12,고전7:40). “한 아내의 남편”이란 소실을 두지 않은 남자, 남녀 간의 윤리가 깨끗한 자를 의미합니다.

ⓒ “절제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절제란 분수에 알맞는 처신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 “근신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근신은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항상 말과 행실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야” 합니다. 나그네를 예수님처럼 섬기고 대접하며(마25:35,40), 남을 섬기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 “아담함”은 검소하면서 단정하고 예절바를 것을 뜻합니다.

ⓖ “가르치기를 잘 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지식과 교수력과 통솔력이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 “구타하지 않음”은 온유, 겸손하며 폭력성이 전혀 없음을 뜻하고,

ⓘ “관용함”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줄 알고, 약자에 대한 포용력이 있음을 뜻하며,

ⓙ “다투지 않음”은 대립이나 갈등이나 불화나 싸우기를 원치 않고 화평을 도모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하며,

ⓚ “돈을 사랑하지 않음”은 불의한 소득을 취하거나 헌금과 봉사에 인색하지 않고, 물질의 소득 때문에 계명을 어길만큼 연약하지 않으며, 현실에 애착을 두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교회는 큰 집과 같기 때문에(딤후2:20) 자기의 작은 집을 다스리지 못하면 교회를 잘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부부 간의 화목은 물론 복종하는 자녀를 두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관을 따르지 않고 세속에 가까이 물들어 사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 원인은 철저한 교육의 부족에 있다 할 것입니다.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이 부모의 신앙 생활을 흠모하며, 복종하는 자녀를 둔 성도라야 감독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감독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하여(6-7절).

1) “새로 입교한 자를 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하여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연단이 부족한 사람은 감독의 지위에 오를 때 교만하여 지기 쉽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교만하다가 마귀처럼 정죄되면 더 불행하여 질 것입니다. 마귀가 정죄를 피할 수 없는 기정적 범죄자인 것처럼, 또 돌이킬 수 없는 범죄자인 것처럼 연단 없이 높이 올라 갔다가 실수하여 떨어지면 치명적 위험이 더 큰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또 선택의 범위를 정할 때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외인”은 믿지 않는 이웃을 뜻합니다.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처럼(행10:22), 감독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란 선한 증거를 받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문서로 확인받지 않아도 평판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여야 할 이유는 감독을 세운 후에 외인들의 비방을 받게 되면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됨이 곧 마귀의 올무에 빠진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3) 새로 입교한 자가 아닌 것을 정하기 위하여 교회 헌법상으로 입교 5년 이상을 정한 사례가 있고(어떤 교파는 같은 교파 안에서의 5년으로 하였음), 또 외인의 칭찬 여부는 교인들의 투표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입니다.

4) 어떤 교회에서는 이상의 열 두 가지 자격을 구비한 성도가 없다 하여 장로(감독자) 세우기를 미루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공화 정치를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면 장로 교회의 헌법 정신에는 위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독(장로)을 세울 수 있도록 감독 후보자의 교육을 잘 시켜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감독 즉, 그리스도와 사도의 모범을 닮은 지도자가 나오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며, 교회가 유익하고 성도에게 큰 기쁨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교회와 신앙 생활의 목적까지 상실하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 9 과 집사의 자격과 상급 (딤전 3:8-13) 목록으로


이 본문,

① 8-9절, 11-12절은 집사의 자격에 대한 말씀이요,

② 10절은 “자격자를 시험하라” 하셨고,

③ 13절에서는 충성된 집사의 상급을 말씀하셨습니다.

1. 집사의 자격에 대한 말씀(8-9,11-12절).

1) “단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단정함”이란 3:2의 “아담함”과 같은 뜻입니다.

2) “일구이언 하지 않음”은 말에 진실하고 덕을 세움에 관한 말씀이요,

3) “술에 인 박이지 않음”은 술을 과용하여 부덕이나 실수를 나타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생활 관습으로 포도주(술)가 음료수로 대용된 만큼 술 마시는 것을 우리 나라처럼 질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절제할 수 있는 체질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함”은 물질 소득에 대하여 결백한 직업이나 거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정한 직업, 성수 주일을 못하는 부덕, 노력 없이 많이 취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주는 거래 등을 피하여야 할 것이요,

5)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함”은 “정직한 마음에 확실한 신앙을 가져야 함”을 뜻합니다. “깨끗한 양심”은 착하고 진실한 마음이요, “믿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대한 확신을 뜻하므로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진실한 믿음의 보유자”란 뜻입니다.

6)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함”은 감독의 경우와 같고(3:2,4),

7) 여자들을 세우게 될 때는 “단정함과 참소하지 않음과 절제함과 모든 일에 충성됨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의 “단정함”은 2:9과 3:2의 “아담함”과 같은 뜻으로, 사치하지 않으면서 깨끗함과 예절 갖춤을 의미하고,

② “참소하지 않음”은 언어 전달에 수다스럽지 않고, 부덕한 말을 옮기지 않으며, 무언자일수록 좋은 것입니다.

③ “절제”는 분수에 맞는 언행을 취함이요,

④ “모든 일에 충성함”은 어려운 일에도 피하지 않는 성실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상의 자격자를 시험함에 대하여(10절).

감독자들이 평소에 오랫동안 살피고 또 시취를 하여 확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감독과 집사의 직임 구분에 대하여는 필자가 출판한 <교회 헌법 연구>를 참고 하십시오. 다만 집사의 직임은 신앙 생활의 모범을 보이면서 교회의 재정과 봉사에 관한 인력적, 재정적 봉사를 하는 것이 그 직임의 사명입니다.

* 여기에서 보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장립 집사에 해당합니다. 여기의 “장립”이란 행6:1-6에 근거하여 남자들에게 안수하여 세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집사직을 준 근거는 본문 11절에서 자격을 말씀하신 점과 롬16:1의 “겐그레아” 교회의 여 성도 “뵈뵈”를 “일군”이라 한 말씀이 “집사”의 뜻을 가진 “디아코노스”로, 본문의 집사와 같은 어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여자에게는 안수를 하지 않는가 ? 하시겠지요. 그것은 성경에 여자에게 안수하여 세운 의식적 모범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준하여 남자들에게도 장립 집사에 못 미치는 1년직 서리 집사를 임시로 세워 충성하게 한 것입니다.

3. 충성된 집사의 상급에 대하여(13절)

1) 우선 상급을 받으려면 집사의 직분을 잘 이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되고, 교회에 덕을 세우며 유익하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2)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지위를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됨을 뜻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음”은 신앙의 월등한 발전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초신자가 대표 기도할 힘이 없다가 대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면 믿음의 큰 발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성경을 깨닫지 못하다가 깨달으면 역시 믿음의 큰 발전을 체험합니다. 이와 같이 집사의 직분을 받고 충성을 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믿음 생활의 큰 담력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는 영적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격있는 집사가 되시고 충성을 잘하여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두 가지 비밀 (딤전 3:14-16) 목록으로


이 말씀은,

① 하나님의 집의 비밀(14-15절)과,

② 경건의 비밀(16절)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두 가지 비밀”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본 제목을 설명드리기 전에 14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보내시는 동기의 일면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마게도냐” 지역에서 쓰셔서 에베소에 체류한 디모데에게 보내시면서 “속히 가기를 바라나.....만일 지체될 것을 우려하여 미리 보낸다” 하셨으니, 이 사실에서,

① 편지는 당사자의 지도와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점과,

② 지체할 수 없이 속히 깨달아야 할 내용인 점과,

③ 바울의 선교 일정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문서의 권위를 증언보다 귀히 여겨야 할 것이요, 또 무슨 일이나 자기 뜻대로 행사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섭리로 알면서 쉽게 되는 여건(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에 따라 시행하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15절 상반).

1. 하나님의 집의 비밀에 대하여(15절).

1)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뜻합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란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① 교회란 부름받은 성도의 단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예배당 건물을 교회처럼 인식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는 성도 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또는 주님을 모시고 은혜와 평강 중에 있을 때 교회의 성격을 완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말씀하신 엡1:1-2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행하는 복음 사역자를 뜻함)과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과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으므로 교회의 성격이 완비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행하는 사역자가 없거나 말씀으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교회의 성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②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신령한 단체입니다(행20:28). 아무도 교회를 자기의 소유처럼 알거나 자기가 교회의 으뜸이요, 주장자인 줄로 알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

바울 사도는 딤후2:20에서도 “교회”를 큰 살림 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교회를 “집”이라 하신 이유는,

① 살아계신 하나님이 상주하시는 세계란 뜻이요,

② 영적 세계의 안식처란 뜻이요,

③ 가족적인 사랑의 친교로 유지되는 단체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④ 또 지상의 작은 천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눅17:21).

저희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각별한 의식과 “집이라” 하신 의미를 잘 알고 개인적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을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셨습니다.

① 진리는 참이란 뜻이요, 곧 예수님이시며(요14:6), 성경 말씀이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② “기둥과 터”는 집을 형성하는 기초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됨은 기독교 생활의 근거지란 뜻입니다. 이것은 양을 치는 목장으로 비유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수납하고, 보존하며, 해석하고, 전파하며, 구원 사역을 전담하고, 사도적 신앙 생활을 계승시키며, 천국을 모형하고, 성도의 천국 생활의 근거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16절)

“비밀”이란 감추인 내용을 뜻하지만, 나타난 바도 있으나 계속 추적해야 할 내용이 무궁하게 있는 것입니다. 또 “경건”은 신령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경건의 비밀”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이며, 이 비밀은 광대하고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다“고 감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중에 이미 밝혀진 것이 많습니다.

1) “육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심은 예수님의 초림 생활 33년을 의미하고,

2)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심”은 주님의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롬8:10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도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되, 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심판 받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므로 그 자신이 의로우심을 증명하셨고, 또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심”은 “예수님이 죄 없으심을 스스로 증명하시기 위하여”란 뜻입니다.

3)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천사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마28:5;요20:12).

4)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이는 사도행전의 기사에서 전파됨을 입증한 것이며,

5)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세계의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고,

6) “영광 가운데 올리워 가신 것”은 행1:9에서 승천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교회를 “집”이라 하신 뜻과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신 뜻대로, 잘 이행하셔야 하며,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비밀 외에도 더 많은 경건의 비밀을 배우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하나님의 집 (딤전 3:14-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가정의 특수성을 살피고, 교회 생활을 꼭 가정의 생활처럼 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신앙 생활의 근거지를 어떤 장소로 나타내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나(창6:14), 가나안 땅의 도피성(민35:6),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신 말씀에서의 목장(시23:1-2,요10:1-3),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농장(마13:25),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마9:13,8:16) 등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우선 “하나님의 집”이라 하셨으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계3:20에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교회 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는 가정 생활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요14:23)

2. 사람이 집 없이는 살 수 없고, 양이나 짐승들도 집이 있듯이 성도는 반드시 좋은 교회를 근거지로 삼아 영혼의 안식처와 양육처가 되게 하고, 교회 중심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집 떠난 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 오면 크게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교회 생활도 그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본 자세가 잘못되었거나 혹 교회가 바른 위치에 있지 않으면 영적 안위는커녕 투기의 장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가정은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한가족 이상 더 사랑스러운 단체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신 것처럼, 교인들과의 사랑의 친교도 꼭 그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듯이, 혹 성도 간에 불화가 있었다 하여도 즉시 화해하고 없었던 일처럼 친교하는 세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4. 가정을 이루어 놓고 고정된 소득 즉, 생산성이 없다면 그 가정은 침체되고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교회 생활도 열심히 은혜 받고 봉사하여야 하며, 기도와 교육을 통하여 말씀과 사랑이 활성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그리고 가정은 다양한 식구들이 함께 살아야 더 큰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조카, 아들, 손자, 며느리 등 여러 사람이 살아야 좋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는 남녀노소의 분별 없이 서로 이해하고 한 가족처럼 친교하는 세계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렇다고 하여 질서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지도하며 사랑하고, 아랫 사람들은 윗 사람들을 부모처럼 섬기며 효도하고, 근면하게 자기들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있으며 사랑이 있고,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세계가 가정입니다. 불화가 없고, 비협조도 없으며, 투기, 욕심도 없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가정의 특수성을 잘 살려서 신령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11 과 미혹을 경계하고 거룩을 힘쓸 것 (딤전 4:1-5) 목록으로

이 말씀은,

① 1-4절에는 “미혹하는 자들의 출현과, 거짓된 교훈 및 바른 처신”에 대한 말씀이고,

② 5절 말씀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잘못된 교훈에 주의하고 거룩을 위하여 힘쓸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미혹을 경계하고 거룩을 힘 쓸 것”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미혹을 경계함에 대하여.

1) 1절 초두에 “그러나” 하신 말씀은 3:16에 연결됩니다. 즉,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서 올리워 가셨지만” 그대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함께 계시게 하셨고(요14:16), 또 예수님이 하실 말씀을 대신 증언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요16:13)이란 뜻입니다.

2) 따라서 성령님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이는 바울 사도가 받은 계시를 그대로 전달하신 것입니다.

① 성령님은 밝히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영감으로 말씀을 주시는 중(벧전1:21) 바울 사도에게도 알리신 것입니다(고후12:7).

② 그 내용은 이단의 출현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이며, 그 이단의 성격은,

ㄱ) 믿음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성도와 함께 믿음 세계에 있다가 유혹을 받거나 인본주의에 기울어져 이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그렇습니다.

ㄴ) 그들은 성경을 배우다가 잘못 가르치는 세계로 끌려 갑니다. 그것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입니다. 미혹케 하는 영이나 귀신은 같은 마귀로서, 미혹하는 역할과 가르침의 사역을 분리하여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귀도 미혹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그의 생각과 판단을 흐리게 하여 거짓에 이끌리게 하는 것입니다(왕상22:22). 그런고로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세계로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에 정통적 신앙의 길로 가느냐, 이단의 세계로 가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요18:9-12,롬1:24,28). 이방 종교에서는 귀신의 계시로 점을 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ㄷ) 그들은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외식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인즉(요8:44) 진리를 거스려 말할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 형태도 외식으로 나타납니다. 요일2:22에서 “거짓말하는 자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단(異端)이란 “끝이 다르다”는 뜻인 것처럼 말과 생활도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므로 외식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양심이 화인맞았기 때문”이니, 이 뜻은 심령의 눈이 어두워진 상태가 마치 불로 지져 놓은 것 같아서 밝히 볼 수 없고 바로 깨달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미혹하는 자들의 잘못된 주장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주장인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을 경건으로 여겼고, 특히 초대 교회 당시에는 “엣세네”파(종교 단체)에서 독신주의를 주장하고 혼인을 부정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금욕주의는 특별한 금욕적 은사를 받은 자 외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므로(마19:11-12,고전7:7-9) 주장할 바가 못되며 오히려 혼인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요(히13:4), “식물을 폐하라”는 것도 역시 육체와 물질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상에서 온 것으로 금식을 자주하며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주의를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이 범죄의 유혹을 받게 함은 사실이나(갈5:16-19) 육체를 학대(금식)하여 죄를 방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거룩은 말씀과 기도로 성취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5절).

“식물을 폐하라”는 뜻은 레11:1-23에 근거한 식물의 분별이 아니고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금식 등 육체 학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육체는 “성령님의 전이라” 하셨으므로 잘 보호,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고전6:19,20).

4) “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1:29-30에서 모든 식물(食物)을, 또 타락 이후에 창9:3에서 무릇 산 동물을 식물로 주셨은즉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창조와 식물(食物)을 공급하여 주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율법에 금지된 식물을 가리거나 특별한 목적(고전7:5,마9:15) 이상 금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레11:1-23)에서 불결하고 포악한 동물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위생법으로 주신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의 부정한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적 목적에서 주신 규례인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선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아 버릴 것이 없도록 응용하여야 할 것입니다(4절). 하나님의 창조는 다 선한 것입니다(창1:31). “불결은 먹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불결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마15:11).

2.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에 대하여(5절).

금욕주의자들의 금욕하는 목적은 죄를 없애거나 물리쳐 보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3일을 굶었다고 하여 죄의 성향이 없어집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더러운 물로 아무리 씻어도 깨끗할 수 없는 것처럼, 죄와 부정은 사람의 수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셨습니다.

1) 우선 “거룩하여 진다”는 뜻은 자기의 부패성(죄의 요소)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거룩은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벧전1:16,요17:19,롬8:29).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최대한 의롭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거룩(순결)해진 것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은혜는 모든 죄에 대한 정죄와 심판에서 면제 받고 영생하게 되는 은혜를 뜻하며, “거룩하여 짐”이란 자신의 범죄 근성, 또는 부패성을 씻어 깨끗게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행함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시119:9에서도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하셨고, 시51:10에서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셨으니, 전자는 말씀으로, 후자는 기도로 거룩하여 질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따라서 “말씀으로 거룩하여 짐”은 성도가 성경 말씀대로 깨닫고 지키는 것이요, “기도로 거룩하여짐”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의 변화를 가짐으로 선하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한 성도가 현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량이 많고 자신도 더 많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의 완성은 영육의 분리(죽음)로 성취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죽음으로 그 영혼이 마귀없는 천국으로 가게 되며, 온갖 범죄의 요소가 되었던 육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는 범죄의 요소와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 사역자가 이단이나 불건전한 교훈을 경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정성에 합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잘못된 교훈에 유혹받지 않으며 항상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성화의 발전이 있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12 과 선한 일군의 할 일 (딤전 4:6-16)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한 일군이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16절 끝에서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으로 사역의 결과를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의 할 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선한 일군의 할 일

1. 형제를 잘 깨우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된다” 하셨고, 11절에서도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6절의 “이것”이란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성도로 하여금 양육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또 11절의 “이것들”은 11절 이하의 내용들입니다. 형제를 깨우치는 방법으로,

1) 믿음의 말씀 즉,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이고,

2) “네가 좇은 선한 교육” 즉, 자신이 실천한 모범으로 교육 방법을 삼아 성도로 하여금 믿음의 양육을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역자가 성경을 많이 읽고 또 아는만큼 실천 모범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5:19에서 실천 없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하셨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경건하게 살아야 하고 특히 복음 사역자는 경건 생활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절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이 생활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연습을 하여서라도 숙달되게 하여야 합니다. 예배 참석, 찬송, 기도, 설교 청취, 헌금, 성수 주일 등이 다 미숙달에서 연습을 통하여 숙달되는 것입니다.

1) 경건을 연습하는 성도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7절). “망령되다”는 뜻은 절대자 하나님의 명예와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요, “허탄함”은 아무 유익이 없이 맹목적으로 끝나는 상태입니다. 신화를 말하거나 신화를 진리에 견주는 일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신화의 내용은 진실하지도 않으려니와 그 내용상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내용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성도가 신화를 말한다면 미신 행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2) 경건 생활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서도 상급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이 있음”은 건강상 유익하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이요, “경건이 범사에 유익함”은 경건 생활에 영육간의 복과 금생 내생의 복이 다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나(마6:33), “솔로몬 왕이 지혜(경건에 속함)를 구하고 모든 영광을 받은 것이나”(왕상3:11,12),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길이 형통한다”는 말씀(시1:2,3)이 다 경건의 유익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또 “경건의 상급은 금생 뿐 아니라 내생에서도 주신다”는 약속이 있은즉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맡겨진 사명에 수고하고 진력함이 있어야 합니다(9-10절).

1) 9절의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 받을만 하다”는 말씀은 3:1의 뜻과 같으면서, 본절의 “이 말”은 10절의 뜻인 “살아 계신 하나님,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내용이요, 그 멧세지는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큰 소망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의 “모든 사람”은 소망의 복음을 받아야 할 전도의 대상 전체를 지적한 말씀이요, “특히 믿는 자의 구주되심”은 택한 백성에 한하여 구원하시는 메시야 사역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전도는 모든 이를 상대로 하되 구원은 택함받은 자가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구원의 멧세지(이를 위하여)를 전하되 열심히 수고하고 진력하며 충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서도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발전되도록 충성하고 사역하라는 말씀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실지라도 전심 전력하는 노력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명하고 가르치는 일을 잘 하여야 합니다.

1) 11절에서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명령을 하는 것은 지도자적 위치에서 특권을 가지고 하는 것이나, 신앙 세계에서는 현저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명령자가 연소할 때(디모데) 업신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또 업신 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명령을 받는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2절). “정절”은 믿음과 실천의 굳은 지조를 뜻합니다.

2) 명하고 가르치려면 자신도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13절에 보시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고”, 또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라” 하셨으니, “내가 이를 때까지”란 바울 사도가 직접 대면하여 지도하기까지 복습하며 유용한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요, “또 성경을 읽어 습득하고 권면하며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 하셨은즉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이 말씀을 유의하여 지켜야 할 것입니다.

3) 14절의 “네 속에 있는 은사”란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아 임직할 당시에 권면받은 말씀을 간직할 것을 의미하며, 그때 예언(설교, 권면)으로 받은 교훈을 조심없이 여길 것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여 사명에 응용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디모데”는 장로의 회(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에서 안수받았은즉 마지막 사도인 바울 사도 이후에 처음으로 세워진 성직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모든 일”이란 목회자의 사명으로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들, 그리고 안수받을 때에 받은 교훈대로 시행하는 일, 읽고 권하며 가르치는 일 등입니다.

② “전심 전력”은 혼신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마22:37,눅10:27). 복음 사역자가 현실적 연락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정신이 사명적 관심에서 떠나면 안될 것입니다.

③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냄”은 자신의 신앙적, 사명적 발전을 현저하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자의 발전이 곧 성도와 교회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이 되려면,

① 형제를 잘 깨우치며,

②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며,

③ 오직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특히 믿는 자의 구주이심을 인식하면서 사명에 몰두, 진력하며,

④ 명하고 가르치기를 잘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5. 마지막으로 16절에서는, 이상의 사명 생활을 계속할 때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하시므로 사역자 자신도 은혜를 받게 되고, 듣는 성도들에게도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열매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도 인내로 꾸준히 사역하면 보이지 않는 사이에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점차로 신앙의 성장이 있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경건을 연습하라 (딤전 4:7)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사역자인 “디모데”에게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경건이 무엇인지 아시며, 또 경건에 이르기 위하여 연습을 하십니까 ? 8절에 보시면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연습이란 건강 관리나 운동 경기에 대비한 연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 연습이 필수적인 것처럼 경건에 대한 연습도 필수적이며 큰 유익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1) 경건은 성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요, 따라서 신앙 생활에 관계되는 모든 행위요, 또 하나님께 대한 예절이요, 성경대로 사는 생활이요, 쉽게 말하면 교회적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또는 성경과 관련하지 않는 행위는 경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경건이고, 성경대로 실천하는 생활도 경건에 속하는 것입니다.

2) 국어 사전에서는 경건을 설명하기를 “존경하는 대상 앞에서 삼가며 조심하는 태도라” 하였고,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헌신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3) 원문적 의미와 성경에 나타난 용법을 살피면, 경건이란 “유세베스”(εὐσεβής)로서, 이는 “잘한다”(well)는 뜻의 “유”와 “경배한다”는 뜻의 “세보마이”(σέβομαι)가 합성된 용어로 “잘 경배한다”는 뜻이라 하고, 이 용어가 하나님을 잘 경외한 시므온(눅2:25)과 고넬료(행10:2)와 바울과 디모데(딤전2:2)에게 사용되었으며, 또 회개한 사람(요9:31), 순종을 잘하는 사람(행10:7), 순교자를 동정한 성도들(행8:2), 칭찬받도록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행13:43,50,17:4,17)들을 평가할 때 “경건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을 받지 않는 자들이나(벧후2:5), 외식하는 자들과(딤후3:5), 세속에 물든 자들(약1:26-27), 자기 정욕대로 사는 자들(유15), 이단자(유15), 악한 죄인들(딤후2:16)을 경건치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딤전3:16에서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시므로 경건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이 큰 비밀에 속하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 경건도 연습하여야 하는가 ? 할 때, “연습하라” 하셨으니까 당연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성숙된 신앙은 노력을 겸하여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데는 교육과 노력이 필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미숙한 신앙인이 있고 성숙한 신앙인이 있습니다.미숙한 신앙인은 초급 신자로서 어린아이 같고, 성숙한 신앙인은 연단을 잘받은 성도로 어른다운 신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른다운 신자가 되기 위하여 경건을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려운 문제를 혼자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자립할 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성숙한 신자가 되어 어디서나 성경만 있으면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3. 경건에 대하여 어떤 것들을 연습하셔야 하겠습니까 ?

이것을 마음 가짐에 관한 것과 예배에 관한 것과 생활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1) 마음 가짐에 대하여.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마음(마28:20).

ⓑ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시2:11,벧전2:17).

ⓒ 감사하는 마음(살전5:18).

ⓓ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11:29). 박윤선 목사님은 84세된 6월 30일에 별세하셨는데, 그 분이 강의하실 때 학생들 보고 자기가 집필하신 “요한복음 주석을 가져 오라”고 하시니까 한 학생이 “그 책에서 무슨 참고할 내용이 있습니까 ?” 하고 면박스러운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박 목사님은 마음을 가다 듬고 하시는 말씀이 “학생이 볼 것이 없으면 안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에 참고할 것이 있어서 가져 오라 한 것이니까 이해를 하시오” 하고 그 강의를 계속한 일이 있었습니다. 말도 주의하여야 하고, 박 목사님의 온유, 겸손한 태도를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 회개하는 마음(고후7:10).

ⓕ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마16:24).

ⓖ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느8:10).

ⓗ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시107:9).

ⓘ 넓은 마음(고후6:11,13).

ⓙ 용서하는 마음(마18:12).

ⓚ 긍휼히 여기는 마음(마5:7).

ⓛ 인내하는 마음(고전13:4,벧후3:9).

ⓜ 무조건 복종하는 마음(요2:5,빌2:8).

ⓝ 상고하는 마음(행17:11,벧전1:10-12).

ⓞ 의심하지 않는 마음(롬4:20,약1:6).

ⓟ 믿음, 소망, 사랑을 갖는 마음(고전13:13).

ⓠ 화평한 마음(마5:9,갈5:22).

ⓡ 충성하는 마음(갈5:22,히3:5).

ⓢ 진실한 마음(딤후2:13,히6:8) 등을 갖도록 목표하고 항상 연습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롬8:27,살전2:4,잠16:2,히4:12)고 하셨습니다.

2) 예배를 위한 연습에 대하여.

ⓐ 주일 지키는 연습.

ⓑ 예배 시간 지키는 연습.

ⓒ 앞 자리에 앉는 연습.

ⓓ 졸지 않는 연습.

ⓔ 찬송 잘 부르는 연습.

ⓕ 기도 잘 하는 연습.

ⓖ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는 연습.

ⓗ 지루한 시간을 잘 참는 연습.

ⓘ 예배의 분위기가 소란해도 잘 견디는 연습.

ⓙ 헌금 잘 하는 연습(특히 십일조와 절기 감사 헌금).

ⓚ 예배 마친 후에 성도들과 친교를 나누는 연습.

ⓛ 새벽 기도를 위하여 정한 시간에 잘 일어나는 연습 등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 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삼상2:3).

3) 생활에 관한 연습에 대하여.

ⓐ 놀지 않고 무엇이나 하는 연습(롬12:11).

ⓑ 쉬지 않고 기도하는 연습(살전5:17).

ⓒ 성경적이면 동하고, 성경적이 아니면 정하는 연습(고전4:6,고후13:10).

ⓓ 사랑이면 행하고, 사랑이 아니면 안하는 연습(고전14:1).

ⓔ 법이면 행하고, 불법이면 안하는 연습(요일3:4).

ⓕ 주는 것은 행하고, 받는 것은 꺼려하는 연습(행20:35).

ⓖ 유익한 말만 하는 연습(딤전4:12;전5:2).

ⓗ 자기의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연습(전12:13,마16:24).

ⓘ 약속과 언질을 확실하게 지키는 연습(고후1:19-20).

ⓙ 항상 자기를 반성하는 연습(고전11:31,갈6: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고전10:31), 이웃에게 유익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손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서 유익하게 할지언정 손해를 주는 생활이 되지 않도록 살피는 연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큰 나무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저희들도 시일을 두고 매일 매일 연습하여 성숙한 신앙인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셨고(딤후3:13), 깨닫지 못하며 시기와 분쟁이 있으면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이요(고전3:2-3), 말씀을 깨달아 선악을 분변할 줄 알면 장성한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히5:13-14).

설교보충 5. 본이 되라 (딤전 4:12-13) 목록으로


본문에서 “본이 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성도는 모든 이웃에게도 본이 되어야 하지만(마5:16), 특히 “믿는 자에게 본을 보이라(12절)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나 성도가 본을 보이지 않으면 이웃에게 실족함을 주게 되고, 나아가 영광의 열매를 짓밟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장로 장립식에 가서 임직 받는 장로에게 “뽄대를 보이는 장로가 되라”고 한 마디만 말하고 내려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뽄대를 보이는 것이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본을 보이라” 하신 교훈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발 씻기는 교훈을 하실 때도 말씀하셨고(요13:15), 사도들도 많이 강조하셨으며(고전11:1,14:16,살전1:6,7,빌3:17,롬6:17,히6:12,벧전2:12,약5:10,요삼11), 그리고 본을 보이려면 먼저 본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를 본 받으라”(고전11:1)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선배의 믿음을 본 받으라”(히13:7) 하셨으며, 잠22:25에서는 “행위를 본 받으라”, 약5:10에서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받으라”고도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1. 말에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말은 자기의 의사와 지식과 인격을 전달하는 것이어서 듣는 자에게 자기를 소개함이 되고, 자기와 듣는 자 사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약3:4에 보시면 “말은 배의 키와 같고 작은 불과 같아서 배의 방향을 정하고 큰 것도 불 사를 수 있게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말에 본이 될 수 있는가 할 때,

① 말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전5:2에서 “말을 적게 하라” 하셨고, 약1:19에서는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을 많이 하게 되는 선생이 말의 실수를 하면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에(약3:1) 적게 하여야 위험이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 많은 사람보다 말 적은 사람이 더 큰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② 급하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5:2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과격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우선 감정을 안정시키고 생각을 한 다음에 꼭 할 말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③ 덕을 세우는 말만 분별하여 하여야 합니다. 고전14:3에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엡5:4에 보시면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않으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덕을 세우는 말은 토양에 따라서 종자를 선택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이해의 폭을 어느 정도라도 살펴서 적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상대방의 흠을 지적하고 책망할 때는 사랑으로 행하여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도록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행실에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1) 행실은 믿음의 열매로서(마7:18,20),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태도인 것입니다(고후8:8). 말에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의 믿음도 외식일 가능성이 있고,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어 친교적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2) 처음에는 사랑으로 교제하고 실천을 잘 하다가 얼마 안가서 실천을 계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속이고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는 말과 행실의 일치로 본을 보임으로써 신앙인의 진실함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1) 사랑을 실천하려 할 때 반드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힘 입었는가를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요일4:9-11). 하나님이 사랑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실천 방법은 고전13:4-7 말씀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최고 목표는 죄인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롬5:8,마5:44).

4) 사랑의 본을 보일 자는 사랑 받을 체는 하지 말고 사랑하는 일만 자신의 책임인 줄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5) 사랑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 성도로서 가장 보람 있고 내세의 상급을 많이 예비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고 고난을 당하며 희생하며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1) “믿음의 본”은 “믿음 생활의 본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신앙 고백을 바로 하고, 기도 생활에 힘쓰며, 교회 생활을 충성되게 잘하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신앙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근거는 성경이니까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하고, 믿음의 증거는 실천이니까 성경대로 살아야 하며, 믿음의 뜻은 진실과 충성의 뜻이 있으니까 진실되고 충성된 생활을 본이 되도록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정절의 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1) “정절”이란 뜻은 “하그네이아”(ἁγνεία)로서 “순결”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순결과 생활의 순결을 의미하고, 믿음의 지조와 생활의 불변을 뜻합니다. 엡6:24에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정절”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변함없이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 열심, 충성이 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열심을 내다가 중지하는 신앙을 가리켜서 “물거품 같다”, “”쟁개비 신앙이다“, ”소낙비 오듯 한다“고 합니다. ”정절“ 있는 신앙이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과 생활과 충성의 꾸준한 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이 시간에 정절에 대한 교훈 몇 가지를 더 드리겠습니다.

①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숭배한 일이나 바알 신, 아세라 신을 섬긴 것처럼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숭상하는 것이 정절 위반입니다. 북 이스라엘국이 주전 726년에 14대 왕 스가랴가 즉위하였는데 그후 50년 동안 6명의 왕이 경질되다가 주전 675년에 앗수르에게 망하였습니다. 그 당시 호세아 선지자는 그 민족이 “정절없는 아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호12:2,13:1). 또 어린 양의 보좌에 둘러 선 14,400명은 “여자로부터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시집간 여인이 맵씨나 솜씨가 없어도 아들 딸을 낳으면 쫓겨나지 않는 것처럼 성도들도 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믿음의 지조만 지키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해방 후에 우리 나라 1호 박사인 서재필씨가 이승만 박사와 대등한 대통령 후보자였는데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적의 정절을 못지킨 것입니다.

서양의 선교사가 중국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어떤 집에 가니까 공자, 석가, 예수님의 화상을 다 붙여 놓고 숭배하더랍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까 “世上이 험난한데 한 분만 모셨다가 빗나가면 어떻게 하느냐! 세 분을 다 모셔야 그 중에 한 분만이라도 효험을 볼 것이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그럴듯한 생각같지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하나님만 유일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3). 여러 가지 신이나 의지의 대상을 믿고 사는 신앙이 바로 “종교 혼합주의”란 것인데, 그런 운동이 지금도 펼쳐지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각 종교의 장점만 따서 하나로 묶어 종교를 통일해 보자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사람이 만든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② 바른 사상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바른 사상이란 성경에 입각한 정신과 생활 방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상황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성경적 윤리는 변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실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의당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윤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존엄성도 모르고, 근검 절약도 모르며, 예절도 모르고 자유롭게만 살려 하며, 성경 말씀이나 성경적 윤리에 속박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육 번성이나 원수 사랑이나 현실을 나그네처럼 사는 생활은 이 시대에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성경보다 자기 사상과 방법을 자유롭게 앞 세웁니다. 천국보다 현세 영달주의에 사로 잡혀 있고, 성경적 계시보다 현실주의를 앞 세우고 있으니 이런 것들이 다 사상의 흔들림인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믿음과 생활의 정절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상과 심장 폐부를 시험하시는 분이라”(신31:21,렘17:10)고 하셨습니다.

③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렘3:25에서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셨고, 또 3:38에서는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 의지의 대상으로 모시라”는 뜻입니다(잠16:20).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 의지의 상대를 제하신다”(사3:1) 하셨고, 또 시49:6에 보시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한다” 하시므로 물질을 의지하므로 자긍심을 가질 때 영적 구원과는 관계가 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시146:3-5에 보시면 “방백들이나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며.....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인간이나 물질보다 못하게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정절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④ 말씀의 정절입니다.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가감하지 않으며, 성경이 아닌 것은 믿지 아니하고, 성경만 믿음과 행위의 근본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 정절과 함께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본이 되도록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진보를 나타냅시다 (딤전 4:15-16) 목록으로


벌써 1년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개인적 신앙 생활과 교회적 책임 수행을 위하여 노력하신 것을 치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하셨기 때문에 연속되는 새 해를 맞이하면서 중단없는 전진을 하셔야 하겠기로 “진보를 나타냅시다”란 제목으로 증언하겠습니다. 한 해를 살아올 때 힘쓴 면도 많고 열매도 있었겠습니다만 취약점이나 나태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의 발전을 기하려면 우선 모임에 충성하고 시간에 충성하며 겸손하고 말씀을 잘 배우며 복종과 인내와 사랑과 봉사에 힘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교훈하신대로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지 않으면 발전을 이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10:37에 보시면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에 진보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까 ?

1. 규모 있는 생활에 진보를 나타내셔야 하겠습니다.

고전14:40과 살전3:6,7에서 질서와 규모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규모 있는 생활이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규모 있는 생활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면, 규칙적인 신앙 생활과 도덕적 예절과 각종 규칙이나 약속을 지키는 질서를 들 수 있습니다.

1) 규칙적인 신앙 생활이라면 성수 주일을 할 수 있도록 생활 계획을 짜고, 말씀 연구와 기도에 대한 계획과 봉사에 대한 계획을 짜서 일반적 생활과 조화있게 하는 것입니다. 형편대로 행하는 것 보다 목표를 정하고 힘쓰는 것이 발전을 도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도덕적 예절도 규모에 속하는 일입니다. 담배 꽁초를 길에 버린다거나, 불쾌한 행동을 이웃 사람에게 나타내거나, 말이 공손하지 못하거나, 인사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역시 규모 없는 사람입니다.

3) 각종 규칙이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시간 약속을 적당히 무시하는 사람은 다른 약속이나 규범에도 성의가 없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대상과는 진실한 약속을 하기 어렵고 “진실성이 확실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때 그 인생의 비중은 내려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단정하고 규모 있으며, 성실하게 사는 성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시115:1-2).

2. 신앙의 질을 높이는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1) “신앙의 질”이란 교회로 말할 때는 물량주의에 반대되는, 성도들 자신의 성숙된 신앙을 뜻하고, 개인적으로 말할 때는 기본적 신앙에서 탈피된 신앙으로 발전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본적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받는 것이기 때문에(마16:17,요3:3,고전12:3) 신앙적 노력보다 앞세울 것은 아닙니다. 씨앗으로 볼 때 싹이 나고 자라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고전3:6). 그러나 질적 신앙은 성숙되고 연단된 신앙이기 때문에 성도의 노력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히10:22에 보시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 하셨고, 엡4:13에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 고 하셨습니다.

2) 신앙의 질을 높인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

① 우선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요,

② 성경을 많이 실천하는 사람이요,

③ 예수님의 인격을 많이 닮은 사람이요,

④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서 교제하는 사람이요,

⑤ 어떤 환경에서나 믿음으로 잘 적응하는 사람이요,

⑥ 자기를 희생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⑦ 세속에 물들지 않고,

⑧ 사랑의 승리자가 되며,

⑨ 죄의 유혹을 박차고 승리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런 면에 진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명적인 활동에 진보를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교회 생활의 발전을 이룩하셔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충실하게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미숙한 성도들은 아직도 성수 주일, 예배 참여, 성경 읽기, 기도 생활, 헌금 생활 등에 익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생활에 습관이 되도록 발전하셔야 할 것이요,

2) 전도 생활에도 발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도가 일종의 은사이기는 합니다만 모든 성도는 빛과 소금 역할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역할만 잘 하셔도 좋은 전도가 될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미루지 마시고 자기집의 대문 앞 청소만 잘 하여도 빛을 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권면하는 것입니다(히3:12). 전도의 대상을 정하고, 기도하며, 사랑하고 전도하면 더 좋은 전도가 되어 열매를 맺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헌금만 많이 하면 헌신과 충성을 잘 하는 것인 줄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헌신입니다. 고후8:5에 보시면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물질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물질은 봉사심만 있으면 드릴 수 있지만, 헌신은 먼저 자기 부정이 있고 자신을 주께 드리는 종의 사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권과 계획과 목적과 취미를 주님을 위하여 포기하지 않으면 자신을 주께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중 죄를 빼고는 다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바로 헌신의 자세입니다.

4. 절제 생활에 변화와 발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성도는 개혁적인 생활에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시간과 물질을 아껴 쓰고 과소비적인 생활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고후8:9), 음식 잡수실 겨를도 없이 사셨으며(막6:31), 기적의 양식도 절약하셨습니다(마14:20,15:37).

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월을 아끼며(엡5:16) 열심히 살아야 할 사람들이 비건설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소비성 많은 생활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끼니를 잘 먹기 위하여 차를 타고 두 세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행사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교육을 목적하여 두 세 시간의 신앙 강좌를 하면서 2,3일의 여행과 관광을 겸하여 하나님의 돈을 낭비하는 경우를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의 성도가 현실의 강한 애착을 끊지 않으면서 신령한 은혜를 추구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태도인 것입니다(마6:24). 반드시 현세주의와 향락주의에서 떠나 신령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에 진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신년을 새출발 하시면서,

① 규모 있는 생활의 변화,

② 신앙의 질을 높이는 발전,

③ 사명적인 활동의 진보,

④ 절제 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7. 바울의 전심 전력 (딤전 4: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후배 사역자 디모데에게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한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본을 보이셨다”는 말씀은 고전4:6,16,11:1,빌3:17,살전1:6,살후3:9 등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명자가 어떤 목적을 성취하려고 할 때 전심 전력하고 몰두해야만 성공하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합당한 말씀으로 대하16:9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고, 또 요이9절에 보시면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도가 은혜를 받으려 할 때나 또 하나님께 헌신할 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을만큼 집중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미쳤다”는 말을 들으셨고(행26:24), 자신도 미친 취급 받는 것을 아시면서(고후5:13) 미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행26:25).

1. 바울 사도가 전심 전력한 사실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

1) 롬14:7을 보시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전부가 주님의 것이며, 사는 문제나 죽는 문제와 상관없이 주님을 위하는 일에만 전심 전력한다는 뜻입니다.

2) 행20:23-24에 보시면 “성령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전도 사역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저는 책 출판하는 일을 생계 유지하는 일보다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일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일은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3) 고전10:31에 보시면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자신이 먹고 마시며 무엇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요, 따라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셨다”는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자신의 의식주 생활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고전8:8,13). 바울 사도는 자기의 생계 유지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그르치신 일이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독신 생활을 하신 것도 역시 전심 전력하여 주님의 일을 하시려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고전7:7,26,9:5).

4) 고전15:31에 보시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셨고, 갈5:24에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셨으며, 빌1:20-21에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 한다” 하시고, 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생사(生死) 문제에 관계없이 일사각오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명을 앞세운다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을 것이고 또 영광을 돌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5) 빌3:7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적으로 유익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겨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것들이 무엇입니까 ? 재물, 명예, 가문, 전통, 지식, 권세, 학위, 가정, 현실적 향락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에 유익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성도들에게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라” 하면 “지금은 시대가 그렇지 않다”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 잘 사는데 왜 못살라고 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유의 주로서 또 부요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고후8:9), 바울 사도도 베냐민 지파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요, 최고 학벌을 가지신 분으로 현세적 출세나 재물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빌4:12)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십자가의 역군이 되신 것을 생각하여 저희들도 높은 데 처하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롬12:16). 성도가 현실적인 일에 바쁘면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에 전심 전력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고후1:8에서 바울 사도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하셨고, 고후11:23-28에서는 “넘치는 수고와 옥에 갇히는 일, 수없는 매맞음, 여러번 죽을뻔 한 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으셨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하여 1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잠 못잠과 주림, 춥고 헐벗음 그리고도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마음의 눌림을 날마다 갖고 사셨다 하셨으니 그 생애의 고난이 어떠 하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4:8-9).

7) 마지막으로 딤후4:7-8에 보시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전심 전력의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대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계22:12). 또 “열매(결과)대로 상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25:14-23). 또 “사랑의 실적대로 상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25:31-46). “고난의 분량대로 상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5:11-12,눅16:25).

8)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 8세(윈저 공)가 “심프슨”이란 미국 여성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여 왕위를 버리고 프랑스에서 그 여인과 살다가 72.5.28에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36년에 부왕인 죠지 5세가 세상을 떠나자 황태자인 에드워드 8세에게 “네가 왕위에 오르려면 그 미국 여자와 결혼하여 살면 안된다. 그 여인은 국적도 다르고, 두 번이나 이혼 경력이 있으니 어찌 일국의 왕비가 될 수 있겠느냐 ?” 하였을 때 에드워드 황태자는 “그 여인에게 귀족의 작호도 주지 말고 그 몸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황태자도 주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해 달라”고 제의했으나 왕실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불란서로 망명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한 여인과의 사랑이 왕위를 버릴만큼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애굽의 왕궁에서 누리는 영화보다 더 귀하게 여겨 애굽을 탈출한 것입니다(히11:26).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

① 먼저 우리 주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셔야 하겟습니다.

②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마6:24) 전심 전력하여 하나님만사랑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그런 뜻이고(마22:37), 렘29:13에서는 “전심으로 주를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④ 바울 사도의 전심 전력한 생애를 깊이 간직하시면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고전15:58).

제 13 과 교회가 도울 대상 (딤전 5:1-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가 공적으로 도와 줄 대상을 분명히 할 것에 대하여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공적으로 짐을 지기 전에 먼저 성도들 개인이 자기의 부모나(4절) 가족이나(8절) 친척(16절) 및 어려운 이웃들을 살필 책임이 있습니다(마22:39). 그러나 개인적 도움이 부족하여 교회가 짐을 져야 할 경우에, 아무나 도와 주지 말고 가장 어려운 대상, 또 과거에 좋은 경력을 가졌던 대상, 현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상을 도와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장학금을 도와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칠 줄 모르고 게으름을 피는 악한 자들을 도와 주면 오히려 영광을 더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구분하면,

① 1-2절은 “교회 안에서의 남녀노소에 대한 교제”요,

② 4절, 8절, 16절은 “개인이 섬겨야 할 이웃들”이요,

③ 3절, 5절, 9절, 10절은 “교회가 도와야 할 참 과부에 대한 말씀”이요,

④ 6-7절과 11-15절은 교회의 도움 대상에서 제외할 “젊은 과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1. 교회 안에서의 남녀노소에 대한 교제(1-2절)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연세가 높아지면 판단력과 활동력이 떨어져서 분수를 차리지 못하거나 이웃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 분들은 교회의 사랑과 도움을 받기 위하여 교회를 의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젊은 성도들은 노인들을 잘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기의 친 부모처럼 살펴 드리라는 것입니다.

2) 또 “젊은이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들에게는 어미에게 하듯 하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한 가족이 사는 집처럼 여기라는 뜻입니다(딤전3:15).

3) 또 “젊은 여자를 일체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하신 것은 남녀 교제에 대한 정신적 자세와 교제하는 태도가 순수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대상을 가족이나 친족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남녀 교제에 있어서는 빈축을 살만한 일이나 의심받을 일을 삼가야 합니다.

2. 개인이 섬겨야 할 이웃들입니다(4절, 8절, 16절).

1) 과부라 할지라도 자녀나 손자들이 있을 때는 우선 그들에게 효도의 책임을 다하게 하여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4절) 하셨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 되는 이유는, 부모 섬기는 계율을 10계명 중 하나로 주셨고, 또 “자식은 부모의 기업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시127:3).

2) “누구든지 자기의 친족이나 가족을 돌아 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고 하셨습니다(8절). 가족은 신령한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허락하신 책임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사명이 귀하다 하더라도 가족의 생계나 환경을 어렵게 만들면 안됩니다. 사58:7에 보시면 금식 기도에 버금 가는 경건은 “이웃을 구제하고 또 자신의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사명이 귀한 것을 알 때는 먼저 가족들의 생활 대책을 최소한 세워 놓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을 외면하는 것이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일이 됨은 불신자들도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잘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3) 혹 “믿는 여성에게 과부 친척이 있으면 교회로 짐지게 하지 말고 그 자신이 도와 주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로 짐지게 하기 전에 먼저 그 친척들이 책임을 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적 연고자가 전무할 때 짐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믿는 여성에게 책임을 지운 것”은 여성이 가계주(家計主) 역할을 하였음과 동시에 여성이 여성을 섬기는 일에 공감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요, 남자를 배제한 말씀이 아닙니다.

3. 교회가 도와야 할 참 과부에 대하여(3,5,9-10절).

1) 우선 교회가 도와야 할 참 과부를 “존경하는 뜻으로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3절). 이는 참 과부가 교회의 대접 받는 일이 구제를 받는 뜻 보다 보상을 받는 뜻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잘하였으므로 홀로 되어 늙었을 때 교회의 부양을 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신 것입니다(3절).

2) 교회가 도와 줄 참 과부는 늙었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기도와 간구를 하므로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꾸준히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은 현세욕에 사로 잡히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5절).

3) “그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어야 하고, 결혼한 경력이 있어야 하며, 성도로서의 책임에 충성하였던 자로 참 과부 명부에 올리라”고 하셨습니다(9-10절). 이 말씀에서,

① “참 과부”란 구제 대상이 아닌 교회의 부양 책임 대상임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② 60세 이상이란 활동력의 저하를 뜻하고,

③ 결혼한 경력은 부양 가족 때문에 고생한 경력을 뜻하며,

④ 성도로서의 책임에 충실한 것은 10절에 나타난대로 “선한 행실, 자녀 양육, 나그네 접대, 성도에 대한 봉사(발 씻김), 환난 당한자들을 구제함, 모든 선한 일을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참 과부는 그의 경력으로 볼 때 공적 교회의 부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인 것입니다.

4. 교회적 책임에서 제외할 과부의 여건을 말씀하셨습니다(6-7,11-15절).

1) 우선 11절에서 “젊은 과부”라 하시므로 활동력이 있으면 안됩니다.

2) 또 놀기를 좋아 하며, 헛된 시간을 보내는 자도 안됩니다(6절). 일에 꾀를 부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요, 그 게으른 생활을 책망하여 “지도자로서 책망받을 것이 없게 하라”(7절) 하셨으니 게으른 과부를 지도하지 않는 책임이 사역자에게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3) 젊은 과부는 탈선할 확율이 많으므로 도와준 후에도 보람되지 못할 경우가 많음을 우려하셨으니 이는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도 있도다”(15절) 하시므로 그런 실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에게 돌아 갔다”는 뜻은 믿음의 경건성을 저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건성을 저버리고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정욕 중심으로 빠졌으니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결국 지옥으로 가게될 것입니다.

① “젊은 과부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시집가려 하므로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는다” 하셨으니(11-12절), 여기의 “저버렸다”는 뜻은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15절)를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집가려 함”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자기 정욕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혼 그 자체가 죄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저버리고 정욕대로 살기 위하여 시집가는 행위”를 정죄한 것입니다(14절).

② 또 젊은 과부들은(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며 폄론하여 일을 만들며 안하여야 좋을 말을 하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13절).

③ 따라서 젊은 여인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므로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절). 이 말씀은 죄의 유혹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바쁘게 살면 유혹이 적습니다. 여인들도 가정에 얽매여 바쁘게 살면 인간적 정욕을 많이 억제할 수 있고 또 유혹의 기회를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성도가 그 이웃을 성실하게 살필 것과,

② 교회는 합당한 대상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것과,

③ 교회가 책임져야 할 참 과부와 그렇지 않은 과부의 구별을 알게 하시며,

④ 인간 정욕에 치우치는 유혹을 피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14 과 목회상 유의할 점들(1) (딤전 5:17-25)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다섯 가지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교회 지도자를 존경하는 일이요(17절),

② 전임(專任) 사역자에 대한 생활비를 지급함이요(18절),

③ 범죄자에 대한 처리 문제요(19-21,24-25절),

④ 임직 또는 안수에 대한 문제요(22절),

⑤ 자신의 건강에 유의할 것(23절)을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총괄적 제목을 “목회상 유의할 점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함에 대하여(17절).

본문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 전자는 현실 교회의 장로들처럼 성경 교육에 전문하지 않고 치리에 전문하는 장로들이요, 후자는 현실 교회의 목사처럼 교훈과 치리를 아울러 전문하는 장로(목사도 장로의 일종임)를 의미합니다.

2)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교인들을 대표하여 모범에 앞선 자로 선출하여 장로로 세운만큼 평신도 보다 더 모범되어야 하고 따라서 더(갑절의 뜻) 존경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말씀과 수고하는 사역자들에게 더하라”는 뜻은 말씀 교육의 사역자를 치리 장로보다 더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3) 이것은 인권상의 우열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치리하는 직임과 신령한 말씀을 선포하는 직임과의 우열을 나타낸 것입니다. 치리는 교인을 대표하는 민주적 행사이고, 말씀 선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전권대사적 사역이기 때문에 더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전임 사역자에 대한 생활비 지급에 대하여(18절).

18절에서 교회의 일을 전담하는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지급받는 것이 정당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생활비 조달을 위하여 일반적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가 있고, 일반적 직업이 없이 교회의 사역에만 전무하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이때에 교회는 전무하는 사역자에게 그 생활비를 먼저 지급함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에 대하여 신25:4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소를 부릴 때 먼저 먹인 후 일하게 하는 것처럼, 교회의 사역자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자는 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는 사역자의 생활비를 먼저 지급하되 생활에 구애가 없도록 할 것이요, 혹 부족하더라도 사역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딤후5:8).

3. 범죄자에 대한 처리에 대하여(19-21,24-25절).

1) 19절에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 하셨으니, 여기의 “송사”란 교회적 소송(마16:19,18:15-17)을 제기함이요, “두 세 증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범죄 사실의 확실성이 없는 것을 함부로 송사하여 그의 존귀한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신도의 송사도 역시 신중하게 하여야 합니다.

2) 20절에서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 하게 할 것”은 송사에 해당되지 않는 보편적 범죄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으므로 범죄자 자신들과 또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다른 성도들에게까지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일깨우는 것입니다. 영광의 훼손을 막기 위해 범죄 성질에 따라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도 있고(마1:19) 여러 사람에게 알려질 때 덕이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범하는 범죄에 대하여 신앙의 지도자는 꾸짖어야 할 것과 또 신앙의 지도자로부터 여러 사람들 앞에서 꾸짖음을 당하는 일을 당연한 일로 받아 들이는 신앙이 있어야 할 것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송사를 처리하거나 범죄자를 책망할 때 편견없고 편벽되지 않게 처리하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택함받은 천사들 앞에서 인정받도록 하라”(21절)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를 일삼으라”는 뜻입니다(시15:2). “편견”은 공정하게 살피지 않는 것이고, “편벽”은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범죄 사실을 처리할 때 회개하는 일이 정상 참작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는 일과(출32:25-29), 인정에 치우치지 않고 처리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 이 말씀은 바울 사도의 이 명령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명령을 내리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계4:2-11). 하나님이 쓰시는 천사들도 사역상 구분이 있으니 보좌에 근위하는 천사(계4:6), 사단과 싸우는 천사(계12:7),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시키는 천사 등이 있습니다(계7:2-3). 송사와 범죄 사건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에 거역됨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범죄 사건과 선행의 실적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숨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입니다. 24-25절에서 어떤 사람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죄도 역시 그 뒤를 좇아 심판의 대열에 오르게 되며, 선행도 역시 밝히 드러나서 칭찬을 받는가 하면 은밀하게 행한 선행도 숨겨지지 않고 다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죄는 스스로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도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눅19:8).

4. 임직 및 안수에 대한 문제(22절).

22절에서는 세 가지 교훈을 하셨습니다.

1)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안수는 임직 안수를 뜻합니다. 직분자를 세울 때, 그 자격 심사를 엄하게 하여 세우라는 뜻입니다(딤후2:2). 안수 받은 목사, 장로, 집사가 잘못하여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다면, 그도 역시 안수를 잘못한 것입니다. 세례를 베풀 때에도 확실한 신자에게 세례 안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병자에게도 안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8) 하셨고, 안수하여 병을 못고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권능을 받았을 경우에 병자를 위하여 안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병고침의 은사를 나타내어 고쳐 주실 것인지 안 고쳐 주실 것인지를 시험해 보는 안수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마4:7).

2)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책임 소관 이외의 송사 사건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처리하는 책임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우선 과제는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순결을 지키고 그 다음에 사역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디모데의 건강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23절).

1)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자주 병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아시고 디모데의 건강 문제에 대하여 마음을 쓰셨습니다. 디모데는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인하여 포도주를 끊고 물만 마셨습니다. 포도주를 음료수 주식으로 마시던 사람이 그것을 아주 끊으면 체질상의 불안과 건강에 불유익이 있을 수있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하여 포도주를 약용으로 조금씩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포도주는 혈액 순환에 좋고 피곤을 푸는데 유익하다” 하여 취침시에 조금씩 먹는 성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의 위반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바울 사도 말년에는 병 고침의 은사가 중단되어, 바울 자신도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생하셨고(고후13:7), 사역자인 “에바브로디도”와 “드로비모”가 병 듦으로 염려하신 사실도 있었습니다(빌2:26;딤후4:20). 이것은 병 고치는 특별한 은사가 바울 사도 말년에는 역사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교회 사역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사역자대로 자기에 대한 교훈을 지켜야 할 것이요,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책임과 교회의 성질을 잘 아셔서 거기에 합당한 복종과 책임을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목회상 유의할 점들(2) (딤전 6:1-10)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 교훈하신 세 가지 내용이 다 목회자의 유의할 사항들입니다.

①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를 권면하신 내용이고(1-2절),

② 다른 교훈을 경계함에 대한 말씀이요(3-6절),

③ 사역자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7-10절).

1.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에게 주신 말씀(1-2절).

1) 종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요셉”이 그러하였고, 신약 시대의 “오네시모”가 그러하였습니다(몬16).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란 말씀이 바로 그런 신분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종의 신분을 인정하셨습니다. 종은 물질에 의하는 경우도 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권을 빼앗김으로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에 종은 자기의 상전을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 는 자신의 신분이 주인의 종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뜻은 종의 신분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함인즉(삼상2:7)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이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그 책임에 성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을 훼방함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신분이 종이 아니라도 “종처럼 남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20:27-28,눅22:27).

2) 또 자기의 상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할지라도 “경히 여기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세계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주 안에서의 형제입니다. 형제라 하여 신분과 직위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형제인 만큼 더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종이 믿는 상전을 잘 섬기면 형제를 유익하게 함이 되고, 또 믿는 상전도 믿는 종을 사랑하면 역시 형제를 유익하게 함이 되는 것이므로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더욱 잘하라는 것입니다.

2. 다른 교훈을 경계함에 대한 말씀(3-6절).

1) 3절에 보시면 복음 사역자나 성도들이 “바른 말(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경이요, “경건에 관한 교훈”은 “성경의 뜻과 실천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성도들은 여기에만 착념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교훈이나 세속된 일들에 대한 관심을 피하기 위함이고, 또 진리에 대하여만 달음질 하기 위함입니다(살후3:1).

2) “다른 교훈”은 이단 교리나 세속에 관한 교훈, 또는 믿음 생활을 해치는 모든 이론들입니다.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가 아닐 경우 멀리하면 됩니다. 진리를 연구할 기회도 없는데 어찌 이단까지 연구하겠습니까 ? 어떤 이단이 많이 횡행하여도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무조건 멀리하면 됩니다. 그들의 끈질긴 유혹을 배격하여야 합니다(딛3:10).

3) 성도가 바른 말(진리)에 착념하지 않으면 그는 바른 말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자이며 그것이 곧 교만한 것이고, 진리에 착념하지 않으므로 무지한 것이며(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로서 투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이 나게 되고, 이로써 마음까지 부패하여져서 진리를 잃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착념하지 않으면 진리가 그를 붙잡아 주지 않기 때문에(행20:32) 마귀 편으로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변론으로 시험에 들면, 경건(신앙의 방도)을 이익(자신의 정욕과 현세욕)의 재료로 생각하여, 다툼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4-6절).

4)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된다” 하셨으니, 여기의 “지족”(αὐτάρκεια)이란, 빌4:11의 “자족”과 같은 원문이므로 “넉넉한 줄로 여기는 마음 가짐”입니다. 시23:1에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 하셨은즉 물욕이나 명예욕 등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빌4:6,살전5:18).

3. 사역자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교훈입니다(7-10절).

1) 8절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역자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먹고 입는 범위는 가족의 생계를 영위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성경은 가족을 돌아 보는 책임과(5:8),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책임(마16:24)을 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처럼 단신일 경우에는 물질의 필요를 더욱 느끼지 않을 것이요, 혹 가족이 있다 하여도 그 가족들에 대한 의식주 문제만 해결되면 족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질 문제를 초월할수록 경건에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 사역자가 물질의 욕심이나 풍요를 원치 말고, 최소한의 생활로 족하게 여길 이유를 7,9,10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① 모든 인생이 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며(7절),

② 부하려는 자들의 타락상을 볼 때 그러하고(9절),

③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하려는 자”들은 재물에 소망을 둔 자들이요, 재물을 많이 또 쉽게, 속히 취득하려니까 시험에 들어 부정한 재물 취득의 올무에 걸리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을 떠나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도, 돈을 사랑하고 돈에 끌리다 보니 부정의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며, 더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것을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한보 사건은 곧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 자기들을 근심으로 찌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97년 3월). 성직자는 반드시 그런 유혹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할 것이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는 원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어떤 직임을 맡든지 종의 자세로 섬기기를 좋아할 것과, 잘못된 교훈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변론을 하지 말 것이요, 물질 생활에 만족하며 재물에 욕심내지 말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물질의 핍절로 어려움 당하지 말고, 있으면 있는대로 쓰고, 없으면 쓰지 않으며, 믿음 생활을 성경에만 근거하여 할 수 있도록 생활 환경을 개혁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생활은 예수를 잘 믿고, 예수님의 생활을 본 받도록 힘 쓸 것이요, 교회를 사회적 사업체처럼 여기게 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은 적고, 물량주의만 활발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굿간에 태어나셔서 평생을 가난하게 사신 의미를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하나님의 사람의 할 일 (딤전 6:11-21) 목록으로


이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시고(11,20절), 목회상 시행할 일들에 대하여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선임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명령도 하셨고(13절) 또 부탁도 하셨습니다(20절). 이 말씀에는 복음 사역자가 시행할 것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타나 있으니, 예를 들면 “피할 것, 좇을 것(11절), 싸울 것, 취할 것, 증거할 것(12절), 지킬 것, 기다릴 것, 돌릴 것(14-16절), 명할 것, 바랄 것(17절) 등”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이란 의미(11절).

1) 이는 바울이 디모데를 일컫는 말씀으로, 복음 사역 또는 성직에 전념하는 자를 뜻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고(갈1:1),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이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며 인도하는 자입니다(계2:1).

3) 하나님의 사람된 자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처신하여야 할 것이 많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복음 사역자)이 할 일.

1) 우선 피할 것이 있습니다. 11절에서 “오직.....이것들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은 진리 아닌 학설이요,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은 진리를 설명하거나 증거함에 유익이 없고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변론들“입니다.진리를 연구하며 성경에 끌리는 사역자는 진리 아닌 학설이나 헛된 변론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11절의 ”이것들“이란 6:3-10에 나타난 말씀에서 ”피할 것“을 의미하므로 3절의 ”다른 교훈“, 4-5절의 ”교만, 변론, 언쟁, 투기, 분쟁, 훼방, 악한 생각(마음의 부패), 진리 상실, 경건을 현세욕의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다툼“, 10절의 ”돈을 사랑함“ 같은 것들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반드시 이 말씀에 비추어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좇을 것이 있습니다. 11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행동을 나타냄에 대한 목표를 뜻합니다.

① 의롭게 행함은 법적으로 죄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요,

② 경건하게 행함은 하나님 앞에 실례되지 않게 행함이요,

③ 믿음으로 행함은 진리를 의심하여 주저함 같이 행하지 말 것이요(롬14:23),

④ 사랑을 좇음은 사랑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행하라는 뜻이요(고전14:1),

⑤ 인내를 좇음은 참는 편을 택하라는 것이요,

⑥ 온유를 좇음은 신경질이나 혈기를 나타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설명은 소극적으로 하였으나 행동은 적극적으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사단, 곧 사단의 역사와 싸우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는 불법, 불의, 진리 대적, 선에 대한 훼방 등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셨다” 하셨으므로(딤후4:7) 그의 복음적 생애가 곧 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대항하여 혈과 육으로 싸우지 말고 오직 불법, 불의와만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하심과 함께 “네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하시므로 복음 사역자의 소망과 보람은 영생에 있고, 부르심의 목적은 오직 마귀와의 투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마귀에게 패배한 조상의 후손이므로 함께 패배를 당한 자이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셨으므로(히2:14-15) 모든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의와 승리에 힘입어 마귀의 역사를 능히 대적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요16:33).

4) 선한 증거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의 내용은 복음이요, 증거의 방법은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 앞에서도 선하게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자는 사람을 상대하지만 그 증거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진실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12절의 “많은 증인 앞에서 증거한다”는 말씀은 곧 13절의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는 것”이고, 또 여러 사람이 들을 때 “많은 사람 앞”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증거하실 때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증거(선한 태도)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절대적 의인이 가장 악한 자에게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증언자는 상대적 의인으로 상대적 악인에게 증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항상 겸손한 자세와 자신을 깨우치는 태도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명령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란 말씀은 바울이 그 시대에도 주님의 재림을 초급하게 대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타나실 때까지”란 세상 끝 날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세상 떠나는 날까지로 적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필자는 3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실수나 부주의로 매를 맞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말씀대로 살되 큰 책망 받을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일에 가능성을 일깨워 드리는 말입니다. 따라서 14절은 최대한의 순결을 도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이란 앞에서 말씀한 모든 권면의 내용들입니다.

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15-16절).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만왕의 왕(만주의 주)이시며, 복되신 분(복의 주인)이고, 기약(말세의 때)이 이르면 나타내 보이실 분이요(15절),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않음(영생)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영광의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에 가까이 근접하지 못하며, 또 영으로 존재하시므로 그 하나님을 본 자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절대의 신이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존귀와 영원한 능력”이란 하나님께만 있는 존귀와 능력임을 나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피조물과 죄인들은 스스로 영광을 취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오직 겸손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7) “부한 자들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가 부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범하게 살라”고 한다면 감심으로 받을 부자가 몇이나 있을까요 ? 따라서 교회를 부자의 재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기관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예배당과 경상비에 목을 매는 교회가 되면 안됩니다. 교회는 누구의 집 마당이나 방 안에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단체만 형성되고 말씀만 공급되며 성도의 본분만 다하면 되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하시기를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일과 선한 사업에 부하며 나눠 주기를 좋아 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것은 “재물을 의지하여 목에 힘주지 말라”는 뜻이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음”은 재물이 항상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소망은 후히 주시는 하나님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고 하나님이 재물을 후하게 주신 목적을 따라 선한 사업에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17-18절). 그래야 천국에 가서 참된 생명(상급받는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9절). 디모데 당시에는 이 성경이 기록으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부자들은 이 교훈을 성경에서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많이 받아 나누어 주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자신이 소유하시지 않으므로 타인을 부요케 하심이 더 복된 삶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고후8:9).

8) 결론적으로 21절에서는 복음 사역자의 바른 길을 걷지 않고, 삼가야 할 것들(이것을)을 좇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도 있어서 믿음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을 육체의 기회로 삼는 자들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딤전6:5).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마감하시면서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시고 후배 사역자들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반드시 불의와 명예욕과 물욕에서 떠나야 할 것이요, 영원한 상급에 소망을 두고 양보하며 겸손히 증언하되 누구에게나 반드시 증언해야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7 과 죄를 경계하는 법 (딤전 6:3-12)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죄를 경계하는 법 세 가지”를 교훈하셨습니다.

① 경건에 관한 말씀에 착념하는 것(3-5절)이고,

② 물욕을 피하는 것이요(6-10절),

③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11-12절).

성도는 죄로 인한 불행을 항상 민감하게 느껴야 하고 따라서 죄를 경계하는 일에도 성심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경계하는 방법은,

1.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성도의 순결한 생활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표준을 제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히4:12에서는 “운동력이 있다” 하셨고, 살전2:13에서는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 하셨으며, 행20:32에서는 “성도를 든든히 세워 기업이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마4:4에서는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말씀 연구에 집착하지 않으면 결국 “유혹성이 많은 세상을 가까이 한다”는 뜻이 되어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에 착념하는 생활은 마치 바위에 닻을 꽃은 배처럼 풍랑에 대하여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물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물욕은 온갖 현세욕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본문 7-10절 말씀은 전부 재물과 죄와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물욕을 억제할 수 있으면 다른 유혹들도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욕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생명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눅12:15). 재물을 쌓아 놓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눅12:17-2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과(마6:24), 본문 8절의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과, 롬12:16의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는 말씀과 또 ”자족하기를 배우라“(빌4:11)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서민적 생활을 본 받아서 물욕과 현세욕을 피할 수 있어야만 다른 죄를 경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물욕 뿐 아니라 다른 것이라도 범죄의 유혹이 있을듯한 세계를 멀리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6:18에서는 ”음행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음행을 피하는 방법으로 결혼하고(고전7:9) 부부가 분방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고전7:5). 욥은 ”처녀에게 주목하는 일도 피했다“고 하였습니다(욥31:1).

3. 선한 싸움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의 유혹이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난 줄로 알아야 하고, 죄와 불법이 곧 마귀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엡6:11에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라” 하셨고, 본문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에게 타협하려 들지 말고 치명타를 가해야 합니다. 마치 뱀의 꼬리를 건드리지 말고 머리를 쳐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에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고, 용기는 자신이 불의를 강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와의 타협을 피하고 불의를 거절할 때 범죄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 있지만 이때에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강하게 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죄를 거절하는 것이고 그 유혹을 피하였을 때 비로소 승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죄를 경계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① 말씀에 착념하으로 하나님이 유혹에 들지 않도록 섭리하시는 은혜가 있고,

② 물욕과 현세욕을 피함으로 소극적으로 죄를 멀리하는 방법이 있으며,

③ 유혹을 강하게 거절하고 대항하여 이기는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반드시 강하고 담대하게 실천하여 승리를 얻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복음 사역자의 유의할 일 (딤전 6:3-12) 목록으로


이 제목에서 “복음 사역자의 유의할 일”이란, 이 말씀이 목회서신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역자 뿐 아니라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도 함께 유의할 교훈이 됩니다.

1. 피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멀직이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1) 우선 진리 아닌 다른 교훈들을 피하여야 합니다. 다른 교훈에 관심을 두면 진리 착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단의 논리나 세속의 지식들이 다 신령한 은혜를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리의 지식이 있는 사역자라도 다른 교훈이나 이단적 특이한 교훈에 관심을 두면 결국 끌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2) 다툼을 피하여야 합니다. 마12:19에서 “예수님은 다투지 않는 분”이라 하셨고, 본문 24절에서도 “주의 종은 다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변론도 다툼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피하라” 하셨고(20절), 비방하는 말과(약4:11) 서로 물고 먹는 것과(갈5:15) 언쟁, 투기, 훼방, 분쟁, 악한 생각 등(4절)도 역시 다툼의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사랑스럽지 못한 입장이 될 때는 화해하거나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물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므로 족한 줄 알고(8절) 일용할 양식 이상을 탐하지 말며(마6:11,잠30:8), 롯의 처의 죽음이나 가룟 유다의 멸망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요 부하려는 자들이 재물을 인하여 침륜에 빠지는 것들을 볼 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자기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13:15,살전1:6).

4) 고전6:18에서 “음행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남녀 관계의 교제를 각별히 주의하라”는 뜻입니다(마5:28,욥31:1). 남녀간의 교제가 문란하면 큰 죄를 범하지 않아도 궤휼에 빠지게 되고 덕을 상실하여 권위를 잃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5) 명예욕을 떨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중에 “명예욕”을 이기신 사실이 있었고(마4:6), 또 예수님은 “들레지 않는다”(마12:19)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명예적 탐심을 갖는 것도 우상 숭배로 알아야 하며(갈5:24,골3:5), 명예욕을 떨치기 위하여 겸손해지는 연습을 힘쓰셔야 합니다

(대만의 노미천 목사가 총회 신학교 교수인 박희천 목사님 앞에서 자신이 성경을 네 번이나 읽었다고 자랑을 할 때, 박희천 목사님은 성경을 100번 읽었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적은 공력을 알아 달라”고 말했을 때, 주님께서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는데 어찌하려느냐 ?” 하신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박희천 목사님의 강의 내용)

명예욕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6) 현세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욕에 대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마4:8-11). 롬12:2에서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하셨고, 빌3:8-9에서는 “무엇이든지(세상적으로) 내게 유익하던 것을.....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하셨으며, 약4:4에서는 “세상과 벗 됨이 하나님과 원수되게 함이라” 하셨고, 요일2:15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 말씀을 못본척 한다면 그 신앙은 옳지 못할 것입니다.

2. 따르고 취할 것이 있습니다. 3절에서는 “말씀에 착념하라” 하셨고, 11절에서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하셨으며, 12절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경건은 신앙적 입지를 지키는 것이며, 믿음은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고, 사랑은 생활의 목표이며, 인내와 온유는 사랑 실천의 방도입니다. 영생은 최종 목표이며 반드시 상급이 따라야 하고, 복음 사역자의 기본 자세는 항상 말씀 연구에 착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흐트러지면 경건한 생활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에 취하는 생활을 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3.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12절).

신앙 생활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의 정체는 보이지 않으나 죄와 싸우는 것이 곧 마귀를 대결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 합법이 아닌 것, 사랑에 반대되는 것, 성경에 위반되는 것, 영광에 반대되고 건설적이 아닌 것들과 항상 대결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승리자이시기 때문에(요16:33) 우리도 능력 주시는 은혜 아래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빌4:13). 이상의 말씀들을 잘 유의하여 실천하심으로 신앙과 생활에 승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8. 하나님의 사람 (딤전 6:11-14) 목록으로

(92.1.25. 성남 신학원 졸업 설교)


“하나님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지명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의미로는 복음 사역자를 말씀하신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여러분들은 복음 사역의 일선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소유된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군인을 징발하여 쓰는 것처럼 사역자로 쓰실 자를 징발하여 쓰시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자신의 전부도 주님의 것이므로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과 삶의 취미를 갖는 것과 더 살고 덜 사는 것까지 다 하나님께 맡겨져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도 생활의 취미를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만 몰두하고 자기의 생활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요6:29에서 “예수를 믿는 일”이기 때문에, 믿음 생활에 직접 관련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입니다. 진리 연구, 진리 전파와 교육, 예배와 기도, 믿음 생활 지도 등이 예수 믿는일과 관련된 일이요, 혹 교회에서 하는 일 중에 예수 믿는 일과 관련 없는 일을 할 때도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책임적으로 할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한 신분을 지키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1)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피하고 멀리 할 것이 있는데, 교만을 피하고, 변론을 피하며, 언쟁을 피하고, 투기와 훼방을 피하며, 악한 생각을 피하고, 경건을 육체적 이익으로 삼는 것을 피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음에도 그 이상의 욕심 갖는 것을 피하여야 하며, 특히 명예욕을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피하지 못할 때, 비판을 받게 되고 거룩한 권위를 손상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런 유혹들을 어떻게 하여야 잘 피할 수 있을까요 ?

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믿어야 합니다.

② 그리고 경건에 관한 교훈 즉, 성경 연구에 착념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취미에 이끌리지 않으면 세속에 관한 것들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령에 취하는 자가 되어야만 신령한 것과 신령하지 않은 것의 가치관의 차이를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리하여 사명 생활이 끝나는 때까지 흠없는 자로 보존되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엡5:27). 끝까지 신분상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3.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맡은 책임, 개인적 은사를 통하여 받은 책임, 일반 은총에 의한 책임들일 것입니다.

2) 그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다른 사람의 사역과 비교하지 말고(요21:22), 자기에게 속한 일만 충실하게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충성의 모범자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세(히3:5)나 신약의 예수님(히3:6)과 세례 요한(요3:30), 그리고 바울 사도(고전11:1,딤후4:7-8) 같은 분들을 모범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그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모범자가 되며(마5:19), 선한 싸움을 잘 싸우면서 용기있게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합당하게 여김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9. 바울 사도의 성직관 (딤전 6:11-16) 목록으로


이 시간 목사 위임식 및 각종 임직식을 맞이하여 “바울 사도의 성직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초대 교회 마지막 사도이기 때문에 신약 교회의 모범에 가장 근접된 사도입니다.

1. 바울의 성직관

1)바울은 자기의 성직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매사의 뜻을 정하여 일하시고, 사역자를 임명하시며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고전12:11과 갈3:1:1과 계2:1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도 하나님이 주신 직분임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자기를 구원해 주시고 성지까지 주심에 대하여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원수처럼 대항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변화된 후에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5).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가장 존귀한 성직인 사도직을 받았을 때 크게 감사한 것입니다. 딤전1:12에 보시면 “나를 능하게 하신....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음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이 자신에게 넘쳤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딤전1:13-14). 어떤 성도는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또 어떤 성도는 직분 받은 은혜를 감사히 여길줄 모르는 경우가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자기의 성직을 가장 존귀한 직임으로 아셨습니다. 고후6:3에 보시면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든지 거리끼지 않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성직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돈을 적게 받아도 성직은 이행하여야 하고, 명예를 던지고라도 성직은 감당하여야 하며, 모범적 사역자들은 다 가족을 떠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고, 성경은 건강이나 생명을 초월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하셨습니다. 성직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으로 말미암았고, 하나님께 직속된 직분이며, 영광에 으뜸 되고, 상급이 약속된 직분이기 때문에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코 교회가 덕을 보거나 예수님이 덕을 보시기 위하여 떠맡긴 직분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 장립을 받으면서도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맡게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2. 바울은 어떤 방법으로 성직을 수행하였습니까 ?

1)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의로 하셨습니다. 고전11:1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생활 모범을 뜻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품을 본받고 지식을 배우며 주님의 생활과 복종과 희생과 증언의 태도를 본받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딤전6:13).

2) 감사함으로 직분에 임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과 직분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였고(딤전1:14-16), 범사에 감사함은 물론(살전5:18) 기쁨과 자족으로 임하였으며(빌4:4-7,11절), “육체의 가시”란 괴로운 문제가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함을 깨달았습니다(고후12:9). 성직자가 자칫하면 은사 부족이나 대우받는 일을 부족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한줄 알라”는 말씀에 따라 충분히 자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진실(眞實)함으로 성직(聖職)에 임하셨습니다. 진실은 믿음의 터전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진실에 입각한 생업과 말과 실천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고 미쁘신 분이요(고후1:18,시146:6), 예 하시며 아니라 함이 없다”고 하셨고, 엡5:9에서 “빛의 자녀들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시면서, 바울 사도 자신이 그 진실을 지켜 나가실 때, 고후11:31에서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은 자기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신다”고 하였으니 “그의 진실됨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며, 말한대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4) 겸손함으로 성직에 임하셨습니다. 고전15:8-9에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사도의 명칭 받기가 민망하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했다는 것은 곧 주께서 하신 것이다”, “나는 괴수 죄인이다” 하시면서 늘 겸손하셨고, 어떤 때는 겸손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다 쓰시지 않으면서(고전9:4,18;몬1:8,9), 책망할 것은 가르치심으로, 명령할 것은 부탁으로, 동역자들과 협력하셨고, 모든 눈물과 겸손으로(행20:19) 같이 울고 같이 근심하면서 직분을 이행하신 것은 다 겸손으로 성직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책임을 감당하였습니다. 자신이 변화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겠습니까(고전15:10) ? 빌4: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고, 딤후1:12에서는 “나의 의탁한 것을 이루실 줄로 확신한다”고 하시므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 특기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시행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역자들은 항상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6) 말씀 제일주의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하여 신앙의 기초를 닦으셨고(고전3:10), 문서 전달 교육을 힘쓰셨으며(골4:15-18), 십자가를 강조할 것과(고전2:2),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심으로(고전4:6,고후13:8) 말씀 제일주의 사역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의 선교 말기에는 기적을 나타내지 않았고(빌2:26,딤후4:26), 체험을 의도적으로 잠재하셨으며(고후12:1-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살전2:13) 읽으며(엡3:3) 배워서 확신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딤후3:15-16)

7)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고전13:1-9에서 사랑을 강조하셨고 또 14:1에서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 하셨으며,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아야 할 것과(고전8:1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고(고전10:33),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할 것도 말씀하심으로(롬9:3) 사랑의 실천성을 나타내셨습니다.

8) 고난을 받으면서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우신 것입니다. 고후 1:8-9과 4:8-12 그리고 11:23-28에서 바울 사도의 고난 당한 정황을 기록하셨고, 딤후4:7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직자로서 가장 보람된 것은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 승리하시므로 믿음과 사명의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임직을 받으신 모든 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이 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