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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목 차 3


데살로니가전서 강론

제1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미덕 (살전 1:1~10) 5 바로가기

제2과 사도들의 사역 원리 (살전 2:1~12) 8 바로가기

제3과 자랑의 면류관 (살전 2:13~20) 11 바로가기

제4과 환난 중에 교회를 살핌 (살전 3:1~13) 13 바로가기

제5과 더욱 많이 힘쓰라 (살전 4:1~12) 15 바로가기

제6과 죽음에 대한 지식 (살전 4:13~18) 17 바로가기

제7과 재림 대비와 성도의 화목 (살전 5:1~15) 19 바로가기

제8과 성도의 7대 덕목 (살전 5:16~22) 22 바로가기

제9과 부탁과 축복 (살전 5:23~28) 24 바로가기



데살로니가전서 강론

제 1 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미덕 (살전 1:1-10) 목록으로


지금 저희들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읽으셨습니다. 언제나 성경 1장을 읽으실 때에는 그 성경의 개론을 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의 개론은 제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 247번(P. 642)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교회에 보낸 영감의 서신입니다. 또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감사와 칭찬과 확신과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총 제목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미덕”으로 정한 것입니다. 1절은 편지의 서론이고, 2-3절과 6-7절은 감사하고 칭찬하신 내용이며, 4-5절과 9-10절은 확신의 내용이고, 8절은 “좋은 일에 대한 결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서론에서(1절)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이 편지를 보낸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보낸 분은 세 사람이지만 영감을 받아 이 글을 나타낸 분은 바울 사도입니다. 2:18에 보시면 “나 바울”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먼데 있는 사람에게 한 사람이 대표로 글을 발표하고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동명의로 보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마지막에 부름 받은 사람이고(행 13:47, 롬 11:13), ‘실루아노’는 실라와 같은 사람으로(행 15:22) 예루살렘 교회의 중직자인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동행한 사람이요, ‘디모데’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만나 사명에 합세한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님들이 성경의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배우셔야 하는데 그런 것은 성경인명사전을 찾아보시면 더 자세히 아실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긴 설명을 생략합니다.

3) 이 세 분은 2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신다” 하셨으니, 그 대상은 확실한 성도를 뜻하고, 영감의 말씀을 편지(글)로 전하신 것입니다. 왜 “확실한 성도인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안에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법 안에서 사는 사람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란 교회가 “데살로니가인의 것”이란 뜻이 아니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출석하는 교회의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인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원”이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에게도 주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4)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이 글로 전달된 것을 믿으셔야 하는데,

5) 축복의 내용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이 영감된 말씀의 축복 내용을 그대로 믿으시고 “아멘” 하신다면 오늘날 목사님의 축도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중보로 하지 않는 축복은 다 예수님이 사도나 복음 사역자들에게 특권으로 주신 은혜를 이행하는 것입니다(마 10:12; 저주도 그러함, 고전 16:22).

2. 감사와 칭찬의 내용들입니다(2-3, 6-7절).

1) 2절에서 전도자 일행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늘 성도를 위한(특히 데살로니가의 성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감사드리는 일을 안 할 수 없었으니, 이는 그들에게 칭찬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덕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많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그 감사한 일들과 칭찬할 일들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예를 들면 술․담배도 끊고, 성품도 착해지는 등, 예수 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게 변화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과 함께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고 향상되는 것입니다.

② 사랑의 수고입니다. 사랑은 이웃을 위한 것인즉 그 이웃을 위하여 수고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입니다.

③ 소망의 인내입니다. 예수님이 미래에 복 주실 것과 재림하셔서(10절) 공의롭게 갚아주실 것을 믿고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때 유대인들의 핍박 중에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이웃 도시인 베뢰아로 쫓긴 일까지 있었으니(행 17:1-4, 16:3, 12, 17:10-18) 처음 믿음생활을 하면서 상당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핍박의 고난, 삶의 고난 등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고 인내한 것입니다. 전도자 일행이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겨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실들을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도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④ 그 성도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은 것입니다(6절). 마치 핍박 중에 교회에 나가는 성도가 집에 있을 때는 이웃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교회에 가서는 은혜로운 설교를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이란 성령님의 은혜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눅 10:2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해 주셔야 기쁨을 갖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기쁘게 받은 것입니다.

⑤ 믿음의 사역자들과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6절의 ‘우리’는 사역자들이고 ‘주’는 예수님입니다. 성도들이 먼저 사역자들을 본받았는데 나중에 주님까지 본받은 것을 보면 사역자들이 예수님을 잘 나타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증거와 언행으로 예수님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⑥ 그래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7절).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헬라 전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므로 바울 사도 일행이 크게 칭찬하시며 감사한 것입니다.

3. 확신의 내용입니다(4-5, 9-10절).

바울 사도가 무엇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까?

1)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확신한다” 하셨고,

2)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안다” 하셨으며(4절),

3) “믿음이 말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 확인되었다” 하셨고,

4) “전도자들이 변화되어 모범을 보인 것도 같은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으면 선택받을 수 없고, 선택을 받지 않았으면 그만한 신앙의 효력을 나타낼 수 없으며,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기쁨으로 말씀 받기 어렵고, 변화가 없으면 본을 보일 수 없는 것인데, 전도자들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그런 은혜가 있었음이 확실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5절) 하신 것은 사역자들이 같은 성령의 은혜로 본을 보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5) “보고자들이 전달한 내용”도 확실하다고 하셨습니다(9-10절),

9절에 ‘저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한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때 바울까지 세 사람이 있었다가 핍박을 피하여 바울이 먼저 그곳을 떠나서 고린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2:17) 늦게 돌아온 실라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보내어 소식을 가져오게 하였고(행 17:1-16, 18:5) 그 다음에 이 편지를 쓰신 것입니다(1:1, 3:6).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했다”는 말씀은 실라와 디모데가 “전도자들의 사역한 내용”을 스스로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전도자들이 어떤 경위로 데살로니가에 가게 된 사실과 또 데살노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실”을 스스로 말하였다는 것이고 또 그곳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믿고 있다”(9-10절)는 사실에 대하여서도 보고를 받았는데 과연 그대로 “예수님은 장래 노하심(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이상과 같은 좋은 일의 결과는(8절)

1) 주의 말씀이 온 헬라 전역(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리고, 너희 믿음의 소문도 각처에 퍼지게 되므로 행동과 생활로 전도가 잘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사역자들의 입장에서 “더 말할 것이 없다” 하신 것은 전도사역에 대하여 큰 만족을 표한 말씀입니다.

제 2 과 사도들의 사역 원리 (살전 2:1-12) 목록으로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2절은 “복음전파의 과정”을 말씀하신 것이고, 3-12절은 “사도들의 사역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제목을 “목회자의 목회 원리”로 정하지 않은 이유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장기간 머무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라” 하신 말씀을 따라 바울 사도의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사도는 아니지만 바울 사도와 동역한 분들이므로 사도 사역에 포함할 수 있고, 또 전도사역과 목회사역도 다 사도사역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1. 복음 전파의 과정(1-2절)

1) 1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는 바라” 하셨으니 이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큰 유익과 놀라운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의 양상은 1장에서 설명하셨습니다.

2) 2절에서 바울 사도 일행이 전도하게된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 하셨는데 이 사실은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점하는 귀신을 쫓은 일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옥에 들어갔으며, 또 옥문이 열려 나온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데살로니가로 가셨습니다(행 17:1). 그때에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핍박 중에 도피함)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는 속담처럼 핍박을 피하면서 전쟁하듯 전도하는 것도 보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씨앗은 전쟁이 일어나도 수분만 있으면 싹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1:4) 핍박 중에라도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도들의 사역 원리(3-12절)

12절은 사역의 목적을 말씀하셨고, 3-11절은 사도들의 사역 원리로써 삼가한 일과 시행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1) 사역의 목적은 12절에서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선택자를 (복음으로) 부르시는 분이시고, 자기의 나라(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시며, 또 자기의 뜻에 따라 합당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에 이르게 하심”은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이요, 성도는 합당하게 행하기 위하여 사도들의 모범을 잘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들의 사역 모범이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3:10, 엡 2:20, 빌 3:16, 고전 11:1, 살전 1:6).

2) 사역의 원리 중 금기 사항은

① “권면을 할 때 간사함이나 부정함이나 궤계가 있을 수 없다”(3절) 하셨으니 이는 사역자들이 설교 또는 생활 방법을 나타내어 지도할 때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사’는 거짓, 과장, 편벽됨과 관계가 있는 태도이고, ‘부정’은 불법과 불의와 관련이 있으며, ‘궤계'는 음모 또는 이기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사도들이 이런 부정을 하지 않았음은 오직 정의와 진실에만 입각하여 언행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4절에서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자인만큼 부정을 피하는 것은(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라” 하시므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복음 사역에 쓰임 받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또 하나님은 인간 중심으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또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인간 중심이란 복음 사역자가 사람을 기쁘고 편케 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을 감추고 사람에게 아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5절 말씀에서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목회자는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명예와 물질을 얻기 위하여 탐심을 가져서는 안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영적 구원 사역은 사람에게 아첨할 일이 아닙니다. 물질이나 명예에 탐심을 갖고 사람에게 아첨할 사역자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아시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④ 6절에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하셨으니 교역자의 인기주의도 금지사항에 속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것이라”는 뜻은 사도의 직임이 존귀한 것이므로 존경받을 수 있다는 뜻이요, 또 ‘존중’이란 뜻은 각주에 “폐를 끼칠 수 있음”이라고도 번역을 하였으니, 사도나 복음 사역자들은 그 직분의 권위로 존경도 받을 수 있고, 또 믿음 있는 성도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 있는 성도는 복음 사역자 돕는 일을 사명으로 아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사도는 성도의 재산을 “어떻게 쓰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몬 1:8). 그러나 9절에 보시면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 하셨으니 이는 전도 초기에 그만큼 조심하였다는 뜻입니다.

3) 그 다음 시행하신 일은

① 유순한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는 것처럼(7절), 또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는 것처럼(11절) 성도에게 권면, 위로, 경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모나 부모가 그 자식에게 하듯 사랑으로 훈계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부드러운 사역자가 많은 성도를 영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② 생활비가 없고 돈이 필요하였을 때 “수고하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9절) 하시므로 궁핍할 때 누구에게 의존하려 하시지 않고 과감하게 일을 하시고(행 18:3) 돈을 벌어서 쓰신 것입니다.

③ “성도를 사랑하고 사모하여 복음만 주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하였다”(8절)고 하셨으니 그 희생적 정신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순교적 정신으로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행 20:23-24).

④ “거룩하고 옳으며 흠 없이 행하였으니 여기에 대하여 성도들과 하나님이 증거하신다”(10절)고 하셨습니다. 이 강론을 쓰는 시간에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자격 있고 흠 없는 지도자가 누구일까요? 사회에서는 그런 인격자를 찾기 어려워도 성도의 세계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은 양심의 법, 신앙의 법, 목회의 법, 교회의 법, 국가의 법 등을 잘 준수하므로 흠 없는 칭찬의 대상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 방법을 이 표준에 비추어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자랑의 면류관 (살전 2:13-20) 목록으로


이 말씀을 살피면 13절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성경관”이요, 14-16절은 “핍박받은 정황”이며, 17-18절은 “방문하지 못함에 대한 위로와 변명”이고, 19-20절은 “사역자들의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이 말씀의 대표 제목으로 “자랑의 면류관”을 선택하였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성경관(13절)

1)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올바른 성경관을 가졌음에 대하여 쉬지 않고 감사하셨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도의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이 옳은 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로서 신앙의 기초를 닦게 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3:10-11, 엡 4:20). “사도들의 증언을 진리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은 고전 14:37과 엡 3:3-4에도 있습니다. 고전 14:37에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하는 자니라” 하셨고, 또 엡 4:20에서는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이 같은 성경관을 갖고 사도들의 증언을 진리로 믿은 것은 잘한 일이요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성경말씀을 대할 때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처럼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 하심은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동반하여(요 1:1, 행 20:32, 히 4:12) 믿는 자의 심령과 생활을 지배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능력이기 때문에 성도가 그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핍박받은 정황입니다(14-16절).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복음적 교회)을 본받는 자 되었는데 유대의 복음적 성도들이 유대의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핍박)을 받은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도 그 지역의 불신자들(너희 나라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핍박을 받았다”(14절) 하심은 신앙생활에 핍박이 있음을 의당히 여기고 위로를 받으며 더 잘 견딜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복음 사역자들(우리)을 쫓아내므로(행 8:1-7, 9:22-25, 17:5, 13, 18:6)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였고, 또 모든 사람(복음을 받아야 할 대상들)에게도 대적이 되었으며(15절), 또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저희가 금하므로 자기 죄를 항상 채운즉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다”(16절) 하셨으니 이는 전도훼방죄를 지적하신 말씀이고, 그 죄의 분량이 찰 때(마 23:32)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비참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뜻이라 할 것입니다(마 23:37-38).

3. 방문하지 못함에 대한 위로와 변명(17-18절)

1)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이 아니라” 하셨고, “또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고 하셨습니다(17절). 바울은 핍박을 피하여 잠시 고린도에 와 계셨습니다(행 17:13-15). 복음 사역의 주동자가 핍박을 피하여 먼저 떠나니까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전도의 더 큰 미래를 위하여 피한 일이지만, 그것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애정의 결핍이 아님을 역설하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떠나지 않았음”은 위로의 말씀이고,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원한 것”은 핍박의 정도를 살펴 가실 기회를 찾았음을 뜻합니다.

2) “한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막았다”(18절) 하신 말씀이 17절의 뜻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막은” 뜻은 핍박자들의 추적이 그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환경 중에서 독자적으로 믿음이 자랐던 것입니다.

4. 사역자들의 자랑의 면류관에 대한 말씀입니다(18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은 복음 사역자의 보람을 뜻하고, 그 ‘보람’은 “주님 앞에 칭찬 받을 성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열매 거두기를 바라고 수고하며, 광부가 금 캐기를 바라서 투자하는 것처럼 교역자는 주님 앞에서 칭찬 받을 성도를 양육 또는 생산하는 것이 보람입니다. 칭찬 받을 성도가 많을 때 사역자들의 수고가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하신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만족한 점이 많았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예수님 닮은 성도를 생산하는 것이 교역자 사역의 목적이요 영광입니다. 예배당을 짓거나 사회사업을 많이 하는 것은 물질적 사업일 뿐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 인격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배당 건축은 자기사치에 불과하고 물질적 구제는 영적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역자와 성도는 주님이 재림하여 심사하실 때 칭찬 받을 입장에 있는지를 자신을 포함하여 반성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교역자의 지도한 결과로 예수님 닮은 성도가 없거나 많지 않다면 교역자 자신은 목회상으로 하나님께 큰 누를 끼친 존재가 될 것이니 참으로 답답하고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제 4 과 환난 중에 교회를 살핌 (살전 3:1-13)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1-5절 부분이 바울이 아덴에 계시면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신 내용”이고, 6-9절은 디모데로부터 “교회 상황을 듣고 감사하신 내용”이며, 10-13절은 바울 사도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하여 “환난 중에 교회를 살핌”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디모데를 파송하신 내용(1-5절)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겼다”(1절) 하심은 바울 사도와 실라와 디모데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를 하는 중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여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오실 때, 흩어진 상태로 바울만 먼저 오셨고, 다른 두 사람은 나중에 왔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은즉 핍박 중에 믿은 성도들이 믿음을 잘 지키면서 교역자가 와주기를 고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6절 내용). “참다 못하여”란 세 사람이 다 데살로니가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이 잘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핍박자들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므로 그들만 잡으려고 찾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아덴에 은신하고 핍박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디모데를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2) 2절에서 “디모데는 우리 형제요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추천하므로 바울과의 동질성을 나타내셨고, 디모데를 파송하는 목적은 “너희를 굳게 하고(믿음과 단체의 결속에 대하여) 너희 믿음에 대하여(핍박과 고난 중에 믿는 것) 위로를 받게 하고”, 또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디모데를 교역자로 파송하는 목적이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고 또 위로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하신 말씀은 바울 사도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이 맺어주신 섭리”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바울의 일행이 잠시 데살로니가에 머물렀을 때, “장차 받을 환난(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한 것처럼(행 14:22)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음을 너희가 아는 바라(4절)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1절 의미와 같음)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었으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라(5절)” 하시므로 교역자의 역할을 통하여 성도들이 환난 중에 믿음을 지키고 위로를 받게 하며, 또 시험하는 자들(이단자들의 유혹)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함으로 전도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2. 교회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심(6-9절)

1) 6절 말씀은 디모데가 와서 “믿음과 사랑(1:3)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또 전도자 일행이 그곳의 성도들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전도자 일행을 생각하며 보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2) 그리하여 전도자 일행이 궁핍과 환난 중에 있었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생각할 때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7절). 교역자들도 믿음 있는 성도로 인하여 위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절) 하셨으니, 여기의 ‘산다’는 뜻은 안심하고 다른 전도사역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요,

4) 9절의 말씀은 성도들의 기대에 넘치는 신앙생활의 미덕으로, 사역자들이 큰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잘하여야 할 지 고민할 정도라 하시므로 만족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3.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내용(10-13절)

1) 10절에서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데살로니가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구함)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핍박과 위험이 중지되기를 구함과 동시에 그곳에 가시면 방대한 믿음의 지식을 더 전달할 소원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11절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핍박하는 무리들을 없애주시므로 “데살로니가에 주저 없이 직행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고,

3) 12절에서는 “사역자들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간에도 피차간에 사랑이 더욱 넘칠 것”을 기도하셨으며,

4) 13절에서는 “성도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마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성도(먼저 천국 간 성도들)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셨으니 이 기도는 믿음을 굳게 지킬 것과 흠 없이 거룩한 신분을 잘 보존할 것을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재림주 앞에 흠 없는 신분으로 나타나려면 세상에 있을 때 거룩한 신분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혹이라도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죽기 전에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죽기 전에 회개할 것을 다하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 경우 등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못 다한 회개 때문에 죄사함을 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 앞에 나타날 때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남게 되면 거기에 대한 지적을 당하게 되므로 크게 영광되지 못할 것입니다(마 5:19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못 박힌 흔적이 있는 것처럼 죄사함은 받았을지라도 회개를 철저하게 못하여 거룩하지 못한 부분의 흔적은 천국에서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세마포를 입는다”는 뜻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계 19:8). 따라서 성도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의를 행하고 또 잘못하였으면 회개하여(특히 대인관계에 있어서) 항상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상태로 부름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7분설교 7권의 “바울의 기도(3:10-13)”, “거룩함에 흠이 없음(3:13)”이란 제목의 두 설교문을 참조하십시오.)

제 5 과 더욱 많이 힘쓰라 (살전 4:1-12) 목록으로


본 장 1절의 ‘종말로’라는 말씀은 앞부분의 내용에서 “칭찬과 감사와 위로와 격려”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만 4장부터는 “권면과 교훈”을 하시겠다는 뜻으로 항목을 바꾼 후편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1-2절은 “행하는 바를 더욱 힘쓰라” 하셨고, 3-8절에서는 “거룩한 생활에 대한 말씀”이며, 9-12절은 “형제 사랑과 자립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3대지를 종합하여 “더욱 많이 힘쓰라”(1절)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행하는 바를 더욱 힘쓰라(1-2절)

1)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한다” 하시므로 사역자들이 권위로 명령하는 어투를 쓰지 않고, 친교적(형제들아), 신앙적(주 안에서), 또는 의탁하는(구하고 권면함) 용어를 쓰심으로 겸손을 나타내셨으니, 이는 주 안에서 성도 되고 건설적 생활에 변화를 갖는 성도들을 존귀하게 여겨 우의를 다짐하는 시도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의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1절) 하시므로 이미 잘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거듭 확인하시고 더욱 힘쓸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권면한다”는 뜻은 믿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권면한다는 뜻입니다. 잘하는 일이 있을 때는 자만할 것이 아니라 속력을 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고전 15:58).

2) 2절에서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을 준 것은 너희가 아느니라” 하셨는데 이런 말씀은 6절에서도 “미리 말하고 증거하였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명령을 주신 것”은 살전 2:3-13에서 교훈하신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내용일 것이요, “명령하셨다”는 뜻은 일찍이 사도의 권위로 명하신 바는 없지만 유순한 입장에서 부탁한 것이 곧 명령한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살전 2:6-8).

2. 거룩한 생활에 대한 말씀(3-8절)

1)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셨고, 7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거룩의 반대 의미)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죄를 멀리하는 순결입니다.

2) 4절 이하에서 “거룩한 생활의 방법”을 설명하셨으니

①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하는 것”(3-4절)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생활의 첫째는 음란성 있는 사람이 되지 말 것과 아내와 함께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생활의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색욕 쫓는 것을 예사로 알지만 성도는 거룩의 차원에서 한 부부 이상의 색욕을 취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고전 7:1-5).

② 6절에서는 거룩한 생활의 또 한 가지 방법으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란 형제를 해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일입니다. 형제간에 억울함이 있다 하여 분수에 넘도록 형제를 해롭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모든 일(억울함)에 대하여 주께서 신원(원한을 풀어주심)하여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3) 8절에서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버림’은 거룩한 생활을 저버림이요, 이 뜻은 하나님의 뜻일 뿐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행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성도가 거룩함에 대한 목적과 의지를 저버린다면, 곧 하나님과 성령님을 저버림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게 살려고 애쓰지 않는 자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자요 불신자와 같을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거룩한 생활에 있음을 또 한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큰 사역보다 자기 생활의 순결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3. 형제 사랑과 자립에 관한 말씀(9-12절)

1) 9절에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니… 쓸 것이 없다” 하시므로 사랑 실천에 만족하심을 다시 나타내셨고,

2) “너희가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사랑 실천)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라”(10절) 하시므로 사랑의 범위가 넓어진 것과 더 힘쓸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3) 11-12절에서는 성도의 물질적 기본 생활에 대하여 자립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명한 것”이란 2:9에서 “바울이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며 밤낮으로 일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종용하여 자기 일을 힘쓰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다보면 물질적 기본생활을 등한시 할 수 있습니다. 또 잘못된 말세의 강박관념에서도 일손을 놓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변동 없이 종용하게(평상시대로) 자기의 일에 힘쓰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 끝날까지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를 힘쓰지 않는 성도는 잘못된 생활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2절에서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함”은 성도가 일하지 않고 방종하는 태도를 ale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내면 안 된다는 뜻이요,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은 성도가 생활 자립을 못하면 덕이 안 되므로 생활 자립을 위하여 근면함이 성도의 기본의무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사랑과 거룩과 근면에 변함없이 더욱 힘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 6 과 죽음에 대한 지식 (살전 4:13-18)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의 죽음에 대한 지식”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개인종말론”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가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죽음을 소망스럽게 여기게 될 뿐 아니라 성도 중 누가 세상을 떠나든지 슬퍼하지 않게 되며 서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이 “소망 없는 다른 자들(불신자)처럼 슬퍼하지 않고(13절) 서로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라”(18절)고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도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일들을 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는 신앙으로 성도가 죽음을 대한다면 오히려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이 “자는 자들에 대하여 알지 못함을 원치 않으신다”(13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지식을 확실하게 아셔야 할 것입니다. 13절은 “죽음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미 설명을 드렸고, 14절에서는 “죽은 성도를 장차 주님이 데리고 오실 것이라” 하셨으며, 15절에서는 “강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서”를 말씀하셨고, 16절은 “재림의 광경”이요, 17절 말씀은 “공중 휴거와 영원한 동거”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역사적 순서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자는 자”로 표현하셨습니다(13, 14, 15절). 1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 하셨으니, 곧 성도의 죽음을 뜻합니다. 성도의 죽음을 왜 “자는 자”라 하셨을까요?

1) 성도의 임종 때가 되면 주님의 큰 은혜를 힘입어(요 14:1-3) 잠자듯이 영혼이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 임종시의 고통을 받는 것은 육체의 아픔일 것이고, 영혼이 떠나는 것만큼은 잠자듯 떠나야 할 것입니다.

2) 잠자는 동안은 휴식과 같아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57:2).

3) 잠자는 동안의 시간의 길고 짧은 것을 모르는 것처럼 성도가 영육이 분리된 다음 다시 부활한 몸을 영입하기까지 시간개념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이요,

4) 잠든 자는 깰 때가 있는 것처럼 죽은 육체의 부활할 때가 있음과 상통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신 줄 압니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은 것을 “잠든 자”라 하시며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요 11:11).

2. “주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16절). 예수님이 언제 강림하시느냐 하는 문제는 일반적 종말론의 말세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1) 16절에서 (때가 되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강림은 재림과 같은 뜻이고 “호령과 …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심”은 재림의 광경을 설명하신 말씀으로 우주를 떠들썩하게 알리는 하나님의 장엄한 신호 소리와 함께 부활의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처럼(행 1:11) 강림하시는데, 이 때에 특정 지역으로만 오신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재림주는 세계에 흩어진 모든 성도를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때에 혼자 오시지 않고 나팔부는 천사들과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을 부활케 하여 재림하시는 주님과 함께 공중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으면 영은 천국으로(눅 23:43, 요 14:3) 갑니다. 그러면 육체를 떠난 영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므로 땅에 있는 몸이 부활할 때까지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는가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 57:2에서는 “평안에 들어갔다” 하셨고, 눅 16:23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하셨으며, 요 14:3에서는 “예수님 계신 곳에 거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안식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수면 이상 좋은 안식은 없습니다. 필자가 개인종말에 관한 교리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였으나 일단 천국 간 성도의 영혼은 부활체와 연합이 있기까지 “시간을 초월한 휴식에 임한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계속 무감각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눅 16:25, 31).

3) 14절에서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다”는 뜻은 부활신앙이 필수적임을 말씀하신 것이고, 부활신앙을 가진 자에 한하여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대표로 나타내신 말씀이고,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심”은 예수님의 주 재림 전까지 죽은 모든 성도들을(부활체와 천국에서 안식한 영이 연합한 상태) 데리고 지상 가까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먼저 영접하는 일은 죽은 성도의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지상에 살아남은 성도의 변화와 휴거와 주 영접과 모든 천사들과 먼저 세상 떠난 성도들의 만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17절에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 하셨고, 15절에서는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한다” 하시므로 살아있는 성도의 휴거가 이차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몸이 휴거되려면 부활체처럼 변화되어야 하겠지요. 시체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보여주셨고, 산 자의 변화(부활체와 같이 되는 것)는 에녹, 엘리야, 그리고 변화산의 광경(마 17:1-3)에서 보여주셨습니다.

2) 변화(변형; 눅 17:1)는 살아있는 육체가 부활체처럼 되는 것이고, 휴거는 예수님의 승천처럼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며, 공중에서 주님과 천사들과 앞서 간 성도들을 영접한 후에(17절)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천국의 생활이 완성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의 장소를 공중(구름 속)이상 표현하시지 않은 것은 그곳이 위치 있는 영적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는 공간을 초월할 것입니다.

제 7 과 재림 대비와 성도의 화목 (살전 5:1-15)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재림 대비와 성도의 화목”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11절은 “재림에 대한 대비책”을 말씀하셨고, 12-15절은 “성도의 화목”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 재림에 대한 대비책(1-11절)

옛날에도 말세에 대한 관심과 세상 끝날에 주님이 재림하실 일에 대하여 교훈이 있었습니다(4:13-18).

1) 1-2절에서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가 앎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때와 시기”란 예수님이 재림하실 시간 또는 그 시간에 접근하는 시기를 뜻합니다. ‘때’라는 말 ‘크로노스’(χρόνος)는 시간(time)을 의미하고, ‘시기’라는 ‘카이로스’(καιρός)는 ‘때’라는 뜻으로도 쓰고 범위를 넓힌 시기, 절기로도 쓴다고 합니다. 추석이 8월 15일이라 하면 때로 말한 것이고, “가을철의 한 날이라”고 하였다면 시기로 설명한 것처럼 시기는 때보다 범위를 넓게 말씀한 뜻입니다.

2) 그런데 거기에 대하여 “쓸 것이 없다” 하신 이유는 우선 그 날을 모르기 때문이고(마 24:26), 또 한 가지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것을 성도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교훈은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그 당시에 신약성경이 문자화되지 않았다 하여도 사도들을 통하여 많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3) 3절에서는 주 재림 시에 믿음으로 깨어있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도 말씀하신 것인데(마 24:37-41) 성도가 깨어있지 않음이 아니라 멸망 받을 자 즉 믿지 않는 자가 그대로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믿음을 가진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은 자라” 하셨고, 그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하셨으며, 또 5절에서 “이들(성도)은 다 빛의 아들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밤과 잠자는 것은 믿음으로 깨어있지 않음을 비유하신 것이고 낮과 잠자지 않음은 믿음 안에서 경성함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4) 7절에서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하신 것은 사탄의 세계(밤)에서 사는 자와 진리(낮)에 사는 성도를 구별하신 말씀이고, 8절에서 “우리(성도)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하셨습니다. “낮에 속하였다”는 뜻은 빛(진리) 가운데 산다는 뜻입니다. 빛은 예수님을 비유합니다(요 1:5). ‘근신’은 조심하고 살피는 뜻이요,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임”은 믿음과 사랑으로 마귀가 침략할 때 방패로 삼으란 뜻입니다. 마귀는 믿음을 흔들고 믿음의 허점을 노리며, 또 사랑을 미흡하게 만들고 사랑의 공백을 틈타 어지럽게 하는 놈입니다. 따라서 확고한 믿음과 넘치는 사랑으로 방패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소망의 투구”란 성도가 소망을 갖고 끝까지 인내, 분투함으로 마귀를 이기란 뜻입니다. 소망이 없을 때 성도가 낙망하면 마귀에게 목을 빼앗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소망의 투구를 써야할 것입니다. 근신, 믿음, 사랑, 소망, 이 네 가지가 재림주를 기다리는 성도의 필수요건입니다.

5) 9-11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필연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또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심은 노하심(진노 또는 심판)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선택자들)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믿음 안에서 경성을 하였든지 혹 나태하였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와 함께 살게(영생 구원을 뜻함) 하려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자에 대한 필수적 구원 또는 궁극적 구원을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으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경성’이란 취침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뜻하기 때문에, 혹 주 재림 시에 잠을 자고 있었다 하더라도 성도는 주님이 일깨워 변화와 휴거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는 일을 너희가 하는 것같이 계속 하라”(11절)고 하셨습니다.

2. 성도의 화목에 대하여(12-15절)

성도의 화목에 대하여는 성도와 교역자와의 관계(12-13절), 일반 성도와 문제 있는 성도들과의 관계(14절), 또 성도와 불신자들과의 관계(15절)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화목할 것을 교훈하셨으니

1) 성도와 교역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들은 교역자를 뜻함)을 너희가 알고(구별되게 세운 지도자임을 알라는 뜻)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교역자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교역자가 말씀을 잘 가르치면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교역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때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먼저 발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2) “너희끼리 화목하라”(13절) 하신 말씀과 함께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4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 중에 규모 없이(법질서를 무시함) 행하는 자가 있으면 성도의 이름으로 권계(책망의 일종)하여야 하고, 약한 자를 도와주며, 성숙되지 못한 모든 성도를 지도하거나 교제함에 있어 인내로 덕을 세우며, 그들과 간격없이 화목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웃에 함께 있는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은 다 지도의 대상이고, 자신을 경성하게 하는 연단의 대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악을 행하는 불신자들에 대하여도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부당한 방법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뜻) 오직 (악한 자들과) 당사자끼리 대하든지 모든 (악한) 사람들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15절) 하셨습니다. 불신앙은 곧 악입니다. 따라서 불신앙을 근거로 성도와 대립되는 상황도 악입니다. 성도가 부조리한 상황에 처하였다면 최대한 믿음과 양심과 국법의 순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항상 선을 좇으므로, 악한 자들과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곧 전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 8 과 성도의 7대 덕목 (살전 5:16-22)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성도의 7대 덕목”을 말씀하셨습니다. 7대 덕목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항상 기뻐할 것, 쉬지 말고 기도할 것, 범사에 감사할 것, 성령을 소멸치 말 것, 예언을 멸시치 말 것, 범사에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할 것,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기쁨, 기도, 범사에 감사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롬 12:2, 엡 5:17, 살전 4:3).

1. 첫째 덕목은 성도의 “기쁨의 생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하신 말씀은 일상생활을 낙관적, 소망적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보화를 소유하였기 때문인데, 그 보화는 예수님이고, 예수님과의 동거동락(同居同樂)입니다(마 13:44, 마 1:23, 요 14:23, 계 3:20). 성도는 이 기쁨과 소망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또 생활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때 덕이 됩니다. 따라서 이 생활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3:13).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7분설교󰡕 7권의 “항상 기도하는 문제”의 설교문을 참조하십시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도 󰡔절기설교집󰡕의 감사 항목에서 많이 나타낸 줄 압니다. 성도는 건설적이 못되는 일에 대하여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실패하였거나 누가 죽은 경우라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교훈도 되고, 연단도 되며(롬 5:3), 하나님이 하신 뜻이고(사 48:17), 또 전화위복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시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8:28). 고아된 자가 외국인에게 입양되어 더 훌륭하게 양육 받는 일이 있고, 성경의 요셉이 총리 된 경우를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어떤 일에나 소망 중에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말씀)의 영”이시고 또 “예수님의 영”입니다(요 14:17, 행 16:7). 성령님의 역사를 “불일 듯 함”으로 표현하신 일이 있습니다(딤후 1:6). 이 “영이 소멸된다”는 뜻은 성령님이 성도에 대하여 접근과 역사를 멀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접근하시고 역사하십니까?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하시는데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로 이끄시고, 말씀의 지혜를 주시며, 신령한 복을 사모하게 만드시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꾸준한 경건이 필요합니다. 또 정의와 진실을 지켜야 하고, 세속을 경계하면서 온유한 마음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매일 한번씩 예배당의 서재에서 주택으로 갑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직전에 무슨 일로 아내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가 있는데, 그 일이 있은 다음에는 함께 앉아서 기도하는 일이 어색하거나, 아니면 기도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도록 역사하신 성령님이 일시에 소멸되는 느낌을 확실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꾸준한 경건(말씀 묵상과 기도 및 교회생활)이 있어야만 성령님의 역사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예언을 멸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의미가 컸고, 바울 사도 시대의 예언은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계시 완성이 거의 끝난 시기였기 때문에 계시 전달 의미보다 설교(강론)의 의미가 더 컸습니다. 따라서 설교를 비중 있게 듣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설교시간에 졸거나 성경을 외국어 번역하듯이 꼼꼼히 살피지 않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영감의 성격이 크고 주밀하게 이해하셔야 한다는 것을 아셔서 두렵게 대하고 살피셔야 합니다.

6. “범사에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2:31에서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릴까? 친구 초청에 응할까?’ 할 때 더 좋은 것을 취하셔야 되겠지요. 성도의 생활은 하루 종일 선택적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무엇이나 유익하고 영광 되는 일만 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성공의 비결이 옳은 판단과 옳은 선택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치보다는 검소함이 낫고, 과소비보다는 근검이 나으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고(행 20:35), 혈기보다 온유가, 자존심보다 겸손이, 또 연회석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전 7:1-3) 반드시 좋은 것을 헤아려 취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그것을 잘못하면 칭찬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7.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불신앙 및 범죄 유혹의 위험을 최대한 피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금연운동만 할 뿐 담배를 아편처럼 물리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담배가 만병의 원인이라면 그것은 악한 물건입니다. 담배가 일종의 약이라면 병원에서만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악을 멀리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담배 생산과 수입을 금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에서도 악의 유혹을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형제나 아는 사람끼리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그것도 화목을 깨치는 위험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나온 말입니다. 교회 안에도 악의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잘 살펴서 처음부터 싹트지 못하도록 예방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부탁과 축복 (살전 5:23-2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이 편지의 결론으로 “부탁의 말씀”(25-27절)과 “축복”(23-24, 28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부탁의 말씀(25-27절)

1)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절) 하시므로 복음 사역자들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전도의 초기요, 또 핍박이 따른 과도기 전도이므로 성도들의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2)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하신 것은 바울 사도의 서신을 모든 성도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감사와 기쁨과 화목의 표시로 친교하라는 뜻이며,

3)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는 것입니다. “주를 힘입어 명한다”는 뜻은 영감의 서신을 전달하는 일이 주님의 명령이란 뜻이요, “읽어 들려야 할 것”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필수적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 서신으로 전달되는 것을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서신을 받아 읽는 것보다 전도자의 육성 녹음 테이프로 들려주거나 비디오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혹 녹화 테이프나 녹음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만 사용한다고 할 때(지금도 큰 교회에서는 녹화설교를 듣게 함) 설교자가 청중에게 직접 전하지 않음에 대한 인격적 교감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결함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없을 때 차선책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의 인격을 떠나서 성경을 읽어 은혜 받는 것처럼, 내용으로만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축복입니다(23-24, 28절)

서신의 결론 부분에서 축복으로 끝을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 2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하셨으니 이 말씀과 28절의 말씀은 중보 기도가 아닌 축복 전달(축도)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 축복 전달에 대한 말씀은 고후 13:13의 강론에서 설명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요 20:21, 사 33:24).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신즉 친히 하시는 일이요, 또 온전히 거룩되기를 늘 원하신 것입니다(요 17:17, 벧전 1:16). “온전히 거룩함”에 대한 말씀을 󰡔7분설교󰡕 7집 “거룩함의 흠이 없음”이란 제목에서 자세히 설명드렸습니다. 그런데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란 말씀에서 인간의 요소를 3부분으로 나눈 것은 영과 혼이 같은 뜻이지만 강조하는 의미로 나타내신 말씀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교리설교 “인간의 구성 요소”란 제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된다” 하심은 최대한의 순결을 보존할 것을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순결 보존이 다른 사역의 공로보다 훨씬 더 칭찬의 대상이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24절에서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실 것이라” 하셨고, 28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함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과 하시는 일에 착오가 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