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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바로가기

 

로마서 강론 서론 6 바로가기


제1과 말씀의 서론 (롬 1:1~7) 11 바로가기

제2과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 (롬 1:8~15) 13 바로가기

제3과 복음의 성격 (롬 1:16~17) 15 바로가기

제4과 불신앙의 죄와 징벌 선언 (롬 1:18~25) 17 바로가기

제5과 악인을 버려두심 (롬 1:26~32) 20 바로가기

제6과 남을 판단하는 죄 (롬 2:1~5) 22 바로가기

제7과 심판의 공정성 (롬 2:6~16) 25 바로가기

제8과 유대인의 진정한 의미 (롬 2:17~29) 28 바로가기

제9과 십자가를 숨긴 논리 (롬 3:1~8) 31 바로가기

제10과 인류의 죄 (롬 3:9~20) 34 바로가기

제11과 하나님의 의 (롬 3:21~31) 36 바로가기

제12과 아브라함이 받은 의 (롬 4:1~12) 38 바로가기

제13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 (롬 4:13~25) 40 바로가기

제14과 칭의의 근거와 효력 (롬 5:1~11) 43 바로가기

제15과 아담의 범죄와 예수님의 은혜 (롬 5:12~21) 46 바로가기

제16과 범죄하지 말라 (롬 6:1~11) 49 바로가기

제17과 범죄 방지를 위한 유의점 (롬 6:12~23) 52 바로가기

제18과 율법에 대한 지식 (롬 7:1~8) 55 바로가기

제19과 율법이 끼친 영향 (롬 7:9~25) 57 바로가기

제20과 예수님 안에 있으면 (롬 8:1~11) 60 바로가기

제21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은 자 (롬 8:12~27) 63 바로가기

제22과 끊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 (롬 8:28~39) 67 바로가기

제23과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 (롬 9:1~16) 70 바로가기

제24과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 (롬 9:17~33) 73 바로가기

제25과 복음의 필연성 (롬 10:1~10) 76 바로가기

제26과 구원 사역의 전개 과정 (롬 10:11~21) 79 바로가기

제27과 선민의 구원과 완악 (롬 11:1~12) 82 바로가기

제28과 이방인이 겸손할 것을 권면하심 (롬 11:13~24) 84 바로가기

제29과 하나님의 지혜와 절대자의 영광 (롬 11:25~36) 87 바로가기

제30과 변화된 생활 다섯 가지 (롬 12:1~8) 90 바로가기

제31과 성도의 통상적 생활 원리 (롬 12:9~21) 93 바로가기

제32과 권세에 대한 말씀 (롬 13:1~7) 96 바로가기

제33과 사랑과 경성을 촉구하심 (롬 13:8~14) 99 바로가기

제34과 판단을 삼가라 (롬 14:1~11) 101 바로가기

제35과 독립적 신앙을 권장하심 (롬 14:12~23) 104 바로가기

제36과 이웃을 기쁘게 하라 (롬 15:1~13) 108 바로가기

제37과 바울의 사명적 은사와 전도 (롬 15:14~21) 111 바로가기

제38과 바울의 진로에 대한 소망 (롬 15:22~33) 114 바로가기

제39과 뵈뵈를 천거함과 문안 (롬 16:1~16) 116 바로가기

제40과 권면과 결론 (롬 16:17~27) 119 바로가기


설교보충 121

     설교보충 1. 심판받을 죄악 (롬 2:1~16) 12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죄는 영광을 가리움 (롬 3:23) 123 바로가기

     설교보충 3. 구원의 은혜성 (롬 3:23~24, 엡 1:3~6) 125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죄와 구원 (롬 5:15~16) 127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129 바로가기

     설교보충 6. 합당한 예절 (롬 12:1~2) 131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영적 예배 (롬 12:1~2) 133 바로가기

     설교보충 8. 교회의 실제적 사명 (롬 12:1~21) 135 바로가기

     설교보충 9. 경성하자 (롬 13:11~14) 137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사명자의 생활 고백 (롬 14:7~9) 139 바로가기


특별내용 141

특별내용 1. 룻터의 종교개혁사 (롬 4:1~8, 3:28, 갈 3:1~14) 141 바로가기

특별내용 2. 칼빈주의(Calvinism) (롬 11:33~36) 146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목록으로


필자가 2004년 3월 30일에 로마서 강론 집필을 마쳤을 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듯한 휴식감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 강론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기록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연구하고 해설하며 문장을 만드는 데는 미력하기 때문에 피로와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는 일로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로 여겨서 만족하였고, 또 진리 증거 사명을 가장 귀한 일로 여긴 점과 이 글을 남김으로 생의 족적을 남긴 것으로 보람을 느끼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금상첨화 격으로 이 글을 읽으시면서 필자가 느낀 심정에 공감하시고 은혜를 받는 성도가 계시게 된다면 더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남은 일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교회 헌법 이해”란 글을 쓰는 일과 계속 식자, 교정, 홈페이지 정리 등이 완성될 때까지 노력할 것이오며, 아울러 건강 주시기를 기도하려고 합니다.



2004. 4. 14.


저자 지 영 근

 

 

 

로마서 강론 서론 목록으로


로마서를 공부하기 위하여 우선 ① “로마의 일반적 고찰”, ② “로마 교회에 대하여”, ③ “로마서의 개론”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로마의 일반적 고찰

1) 로마는 로마(이탈리아 반도)의 수도 이름입니다. 이 도시는 로마의 국권 확장과 함께 “영원한 도시”라고 별칭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하여 보내실 당시에는 “네로” 황제의 통치 시절로 융성하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까지 자랑거리가 되었고(행 22:28), 콜로세움(AD 72~80 사이에 시설된 원형 극장) 등 토목사가 많았으며, 인구 100만 이상쯤으로 예측되는 세계 중심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2) 주전 40년으로부터 주전 27년까지 “가이사 쥴리어스”(가이사는 쥴리어스의 성으로 “씨자”로도 발음함, καίσαγ= Caesar)가 통치하였고, 주전 27년으로 AD14년까지는 “옥타비아누스”가 집권하였으며, 그 다음은 “티베리우스”(14~37년), 글라우디우스(41~54년), “네로”(54~68), 베스파시안(69~79년), 티도(79~81년) 순위라고 합니다. “네로”는 기독교에 대하여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3) 그 당시 시민들의 도덕성은 많이 부패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도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동방의 음탕한 바벨론”으로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스토익 철학이 성행하였으나 그것으로 백성들의 영혼을 안정시키지 못하였고, 황제 예배를 국가의 시책으로 시행할 만큼 권세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외부 도시 형태에 상응하는 영적, 도덕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2. 로마 교회에 대하여 : 어떤 경위로 로마에 복음이 전래되었을까?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로마 캐톨릭에서는 행 12:17에 근거하여 “베드로가 출옥한 후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한 것이 “로마로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 15:7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에서 발언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다른 곳”이 로마가 아닌 유다 지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역사가 “유세비어스”(263~339년)의 글에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글을 썼으나, 이 글은 마지막 기록일 뿐 초기의 전도 기록이 아니므로 참고 되지 않습니다.

2) 그래서 연구한 것은 “로마에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받아 가지고 가서 전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오순절 당시에 각처에서 와서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 중에 “로마에서 온 자들이 있다”고 하셨으니까요(행 2:10).

3) 유대인들이 일찍이 로마에 가서 살았다는 증거는 주전 63년에 로마 황제 “봄베이우스”가 안스모니안조로 하여금 유다를 정복하게 하여 유대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와서 노예로 부린 일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어디서나 종교적 관습에 따라 단체 생활을 잘하였고, 쥴리어스 황제 때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유롭게 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후 6년에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약 8,000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루살렘 여행이 복음을 전수한 가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행 18:2에 보시면 로마의 글라우디오(AD41~54) 황제 때 유대인을 로마에서 축출한 일이 있었는데, 이 원인을 유대인들의 회당(수나고그) 중심의 단합과 복음 전파에 대한 핍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요, 아니면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주의자들과의 대립 때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전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과의 갈등입니다. 그것은 로마서의 취지가 이신득의를 강조하는 점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5) 롬 1:5, 6, 13, 6:17, 15:16~20 등의 기록으로 볼 때 그 당시 로마에는 이방인 신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사실은 초대교회적 전도 방식에 따라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또 이방인 성도가 이방인 교회를 이루고, 또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는 때였습니다. 주후 64년에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불을 지르고 그 죄를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울 정도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그러면 로마 교회가 유대인 중심이었을까? 아니면 로마인 중심이었을까?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양측을 다 염두에 두시고 권면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상대로 주신 말씀을 살피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함”(1:5), “너희도 그들(이방인) 중에 있어… 부르심을 얻음”(1:6), “너희 중세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함”(1:13),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6:17),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림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15:16~20)라 하시므로 이방인 상대로 말씀하신 것이 있고, 또 유대인을 중심한 말씀도 있으니 “우리는 나으뇨”(3:9), “내가 법 아는 자(율법 아는 유대인)들에게 말하노니”(7:1), 또 9장~11장은 “유대인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니까 어느 한 편에 치우친 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감정 없는 것이 원시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또 복음적 신앙이 아닌 유대교적 신앙으로 나누어진 식구들도 있었을 것이며, 점차 유대인 신자보다 로마인 신자들이 많아지므로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조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15:1).

3. 로마서 개론에 대하여

1) 저자와 연대 및 장소에 대하여(기독교신앙백과의 로마서 개론도 참고하십시오.)

① 저자는 바울로 확증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증명하고(1:1), 다른 편지의 문체와 사상이 같으며, 1~2세기 교부 클레멘트와 익나디오, 폴리갑, 저스틴 마터 등의 설교문에 인용되었고, 이단자 말씨온도 자기 서간에 그렇게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② 연대에 대하여는 바울이 로마에 갇히기 2년 전쯤일 것으로 예측하여 주후 60년 이전으로 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시기를 열망한 말씀이 1:10~15, 15:22~24, 행 19:21에도 있은즉 바울이 에베소 전도를 마칠 때쯤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5:19에서는 “일루리곤”으로 갈 계획과, 또 23절에서는 “서바나”(스페인)로 갈 계획을 세우셨은즉 그 시기에 기록하였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루리곤까지 전도를 하셨으므로 더 활동할 만한 곳이 없었고, 유다 지경에 흉년이 들어서 구제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갖고 가시려 한 때(롬 15:25)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기는 행 20:1~2과 관련하여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는 중간기로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20:3~4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3개월 체류하시고, 빌립보와 드로아를 거쳐 해로(海路)로 예루살렘에 향하였다는 말씀이 롬 15:25과 부합되고,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일에 대하여는 고전 16:1~4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보다 1년 후 쯤으로 로마서 기록의 연대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추론에 따라 주후 56~58년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③ 저술 장소에 대하여는 바울의 저술 시기와 관련하여 행 20:3~4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 고전 16:3, 4에서 구제금을 모을 것과 미구에 그곳에 가서 전달 받을 것을 말씀한 것으로 볼 때, 그때는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일루리곤, 아가야 등 여러 지역의 전도가 마쳐질 무렵으로 이어서 사랑의 선물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때이므로 “아가야 지방 또는 고린도에서 쓰셨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바울 사도는 선교의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셨으니, 그것이 곧 로마를 거쳐 서반아까지 가실 생각이셨던 것입니다(롬 15:24~28). 이때에 바울 사도는 복음의 깊은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하고, 그 본질을 설명함으로 신앙의 근본 문제를 로마의 성도들에게 확실하게 알릴 필요를 가지셨습니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헬라에 이르러 3개월을 체류하는 동안(행 20:2, 3) 기록하셨을 것인즉 그 지역을 고린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2) 본서의 목적입니다.

로마서를 쓰신 목적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가보지 않은 미지의 교회에 긴 서신을 보내야 하는 데는 분명히 명분 있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① 기독교의 교의와 종교개혁을 위하여 쓰셨다고도 하고 루터나 멜랑톤은 자기들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로마서가 있는 것처럼 여겼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의 이신득의 교의를 가르치는데 있는 것입니다. 교회론과 종말론을 논하지 않음을 보아 철저한 교의적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앙의 본질을 교훈함과 복음 진리(이신득의)를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② 혹자는 이 로마서가 논쟁 목적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는 그 지역에 율법주의에 입각한 유대인적 교회가 여기저기 있었을 것이며, 바울이 그들에게 상당한 오해를 받고 있었음이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등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그러한 논쟁을 목적으로 기록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영원의 진리와 그 실천을 염두에 두셨다고 함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서는 이방인 기독자와의 조화를 위하여 또 이신득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복음에 입각한 생활을 강조하기 위하여 율법주의를 지양케 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내용 구성 문제에 있어서

16장이 에베소로 가야 할 것을 잘못 편집하였다는 설에 대하여 ① 롬 15:33에서 문장을 종결하였다는 점, ② 방문하지 않은 로마에 문안 대상이 있을 수 없다는 점(오히려 에베소에는 있을 수 있음), 만일 그들이 로마에 실재하였다면 왜 그 다음에 기록한 옥중서신 등에서는 그들의 안부를 거론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점, ③ 롬 16:3~4에 “브리스길라” 기록에 대한 문안이 있는데, 그 가정을 행 18:18~19에서 에베소에 머물게 하신 일이 있고, 또 고린도에서와(고전 16:19) 로마에서 그의 집이 교회로 사용된 사실이 있은즉(롬 16:5) 그 가정은 그 당시에 로마보다 에베소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며, ④ 롬 16:5의 “에베네도”에 대한 문안이 있는바 그도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이니 만큼 아시아(에베소)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⑤ 롬 16:1에서 바울이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 뵈뵈를 로마 교회에 천거하였는바 잘 아는 에베소 교회에는 천거할 수 있지만, 가보시지 않은 로마 교회에 천거한 것은 부자유하다는 점, ⑥ 롬 16:17, 18에 “교훈을 거스리는 분쟁 사건”이 있는바 로마에는 분쟁 사건이 없었고, 오히려 에베소 교회에는 있었다는 점(엡 4:14, 17, 21) 등을 내세워 에베소로 갈 것이 잘못 편집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⑦ 그러나 이 학설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만일 16장이 전달(편집)에 오류가 없는 것이라면 그 당시에 “브리스길라의 가정과 아시아에 연고를 가진 ‘에베네도’가 로마에 있었다”(롬 16:5)고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내용 분해에 대하여

① 일본의 신학자 흑기행길의 저서에 의하면 1:1~17은 인사, 1:18~30은 죄악론, 3:21~11:36은 구원론인데, 그 중 3:21~8:39은 “개인의 구원”이고, 9:1~11:36은 “전 인류의 구원”이며, 12:1~15:13은 실행론이고, 15:14~16:27은 결론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성서대사전에 수록된 것을 보면 1:1~17은 서론이고, 1:18~11:36은 교리로써, 1:18~5:21은 의롭다 함을 받는 일, 6:15~8:39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생활, 9:1~11:32은 이스라엘(유대인) 문제와 답(11장), 11:33~36은 송영, 12:1~15:13은 실천, 15:14~16:27은 결론으로 구분하였습니다(여기에서 본인이 출판한 기독교신앙백과의 로마서 개론도 참고하십시오).

③ 박윤선 목사님의 내용 분해를 그대로 수록합니다.

서언 1:1~17

제1부 죄악론 1:18~3:20

(1) 이방인의 죄악(1:18~32)

(2) 유대인의 죄(2:1~3:9)

(3) 결론(3:10~20)

제2부 하나님의 의(義) 3:21~8:39

(1) 하나님의 의의 본질(3:21~26)

(2)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만 얻음(3:27~4:25)

(3) 하나님의 의를 얻은 결과(5:1~11)

(4) 죄와 의(義)(5:12~19)

(5)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의 당하는 실제 문제(5:20~7:25)

(6) 구원의 영원성(8:1~39)

제3부 이스라엘 문제, 예정론 9:1~11:36

(1) 하나님의 예정의 여하를 알 수 있을까?(9:1~13)

(2) 난제(難題)(9:14~32)

(3) 예정이 성취되어가는 방식(10:1~11:36)

제4부 기독교의 도덕률 12:1~15:27

(1) 교회 생활(12:1~21)

(2) 국민의 의무(13:1~7)

(3) 사랑의 무한책임성(13:8~10)

(4) 깨어 단정히 행하고 방종하지 말 것(13:11~14)

(5) 심령적 자유를 지혜 있게 자제(自制)하여 덕을 세우도록 힘쓸 것(14:1~15:13)

결언 15:14~16:27

이상의 내용 분류를 소개하였지만 필자는 문장의 부분에 따라 이해되는 대로 제목을 정할 것입니다.

 

 

제 1 과 말씀의 서론 (롬 1:1~7)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말씀의 서론”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절은 “발신자의 소개”요, ② 2~3절은 “복음의 주 예수님을 소개함”이며, ③ 5~6절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요, ④ 7절은 “수신자를 위한 축복”입니다.

1. 발신자의 소개(1절)

1)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 말씀은 갈 1:10, 엡 6:6, 빌 1:1, 골 1:7, 딛 1:1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종의 신분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또 직책으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을 불러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신 말씀은 행 9:15에 기록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회동한 말씀이 행 9:26~30에 기록되었으며, 바울로 개명된 호칭은 행 13:9에서 선교 사역 출발 시부터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이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직”의 특징에 대하여는 사도행전 강론에서 충분히 설명 드린 줄 압니다. 사도는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시던 때에 단회적으로 주신 직분이고, 계시의 영감과 기적의 능력을 주셔서 예수님을 대리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기독교의 모범을 나타내게 하신 직분입니다(고전 11:1).

2) 예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경륜”입니다(행 9:15).

2. 복음의 주 예수님을 소개함(2~3절)

1) 2절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메시야,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에 관한 내용을 <기독교신앙백과>(p. 256~257)에 수록하였습니다.

2) 3절에서 “그 아들(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님)로 말하면 육신(‘살크’, 현실적 또는 사회적 의미)으로는 다윗의 혈통(씨로도 번역됨)에서 나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마 1:1의 내용과 같은 뜻으로 인간적 사회적 족보의 근거를 말씀하신 것이요(사 11:1),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셨습니다. 성결의 영(프뉴마, 하기오쉬네)은 거룩한 영, 곧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기도 합니다(고후 3:17~18, 행 16:7). 성결의 영을 가지신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죽음을 맛보신 후에 능력으로 부활하여(부활의 능력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함; 행 2:24, 3:15; 요 2:19, 11:25; 벧전 3:18)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인정되신 것입니다. 여기 “인정”이란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셨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래의 관계로 회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함은 부활하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성도의 구세주이시란 뜻입니다. 십자가, 부활, 하나님의 아들(성결의 영), 이 세 가지 요소가 구세주 되심의 요건입니다.

3.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5~6절)

1) 5절의 “그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은혜의 주로 나타내신 것이요(요 1:16), “은혜”는 모든 선물(일반적, 신령적 모든 은혜)을 총칭한 뜻이고, 또 받은 것은 “사도의 직분을 받아(갈 1:1) 그 이름을 위하여(예수님의 계시 전파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나타내기 위함)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하시므로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하신 것과 믿음과 순종함의 은혜를 아울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혜는 선택과 계시와 거듭남을 통하여 주신 것이고(히 12:2), 이 은혜를 모든 이방인 중에서도 주신 것이며, “믿어 순종”이란 믿음에 순종이 종속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정도에 따라 순종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2) 6절에서 “너희도 그들(이방인)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예수님이 특별한 은혜로 소유를 삼으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심”이란 구원과 사명으로 인도하시는 절차입니다. 어떻게 부르실까요?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후 계시 전달 또는 감동을 통하여 마음에 변화를 주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롬 8:30, 10:14~15).

4. 수신자에 대한 축복(7절)

1) 수신자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근거이고(요 3:16), “부르심을 받은 것”은 구원의 절차이며, “성도”는 구원 받은 자의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복음으로 부르신 것과 성도로서의 존귀를 항상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축복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축복하는 것은 성도나 복음 사역자의 사랑 실천에 속한 사명입니다. 그 축복은 성부 하나님이 주시고(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이심, 마 6:9), 축복의 내용은 은혜(광범위한 선물)와 평강(영육간의 평안)이며,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하시는 일에 성령님의 사역이 거론되지 않았으나 성령님은 축복하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 축복을 전달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각 위의 역사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 2 과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 (롬 1:8~15)목록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① 바울의 감사기도와(8절), ② 로마 교회 성도를 위한 기도와 또 로마에 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하시는 기도가 있고(9~10절), ③ 로마에 가시려는 이유(11~15절)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종합하면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라고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성도와 교회가 있고, 또 그곳 성도들의 신앙의 질이 율법주의 등으로 위험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더 큰 염려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8절)

“첫째는” 감사하는 일이었으니 성도들의 생활에도 감사로 우선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음”이고, 그 은혜는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즉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과 함께 받은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신 것입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은혜를 받은 것은 로마가 세계의 중심 도시이므로, 그 지리적 여건을 인하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확신하시고 감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감사하신 것은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을 받은 것과 그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이 두 가지를 간구하심(9~10절)

바울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9절). 이 기도의 구체적 내용은 11~13절에 나타나 있지만, 성도들의 평안과 믿음 발전을 위하여 복음 사역자로서 늘 기도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는 뜻)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를 직접 대하고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성도의 입장이고 복음 사역의 사명 때문에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이며,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진실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사실과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뜻은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방법은 심령, 즉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복종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등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물질로 섬기는 것은 다 간접적인 섬김이고, 그것은 인간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 대한 부요한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2)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구하신 것입니다(10절). 세계적 여행이고, 선교의 일정과 비용 등, 효율적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쉽게 가실 수 없은즉 성도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신 것입니다(민 14:3).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나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적절한 시기와 여건으로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구한 것인데, 이 기도가 행 25:23~28:16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들도 “좋은 길로 인도 받기를” 기도하십시오. 시간에 낭비가 없고, 건설적인 목적이 충족하도록 생활하게 되는 것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3. 로마에 가시려는 이유(11~15절)

1)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주므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믿음)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혜가 빈약하였던 것은 바울 같은 사도의 지도를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신령한 은혜는 복음 신앙으로 “로마서”에 나타난 모든 내용들과 함께 바울 사도가 직접 가르칠 수 있는 교훈들입니다. 신령한 은사란 예수님을 바로 깨닫는 일이고, 복음 신앙을 확고히 가짐으로 율법주의에 현혹당하지 않는 깨달음입니다.

2) “견고한 믿음을 가지므로 피차에 안위를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곧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셨으니 “너희와 나의 믿음” 즉 사도적 신앙을 다 함께 가지므로 신앙적 안위를 갖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을 갖고 만족하는 생활이라야 안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정통적 신앙과 사명 정신에 일치하는 동지를 만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3) “신령한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하셨으니, “여러 번 가고자 하신 것을 알리시는 이유”는 그만큼 간절한 교제를 원하신다는 뜻이고, “다른 이방인 중에서 열매를 맺음”은 소아시아나 헬라 지역 등에서 복음이 확장되는 것처럼 로마와 세계에 퍼져나가는 상태를 염두에 두신 것이며,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은 개인적 신앙의 견고성과 교회의 부흥, 그리고 전도의 폭을 넓히는 일 등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길이 막힘”은 좋은 길, 좋은 여행의 여건이 없었음을 뜻합니다(10절).

4)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빚이란 남이 신세진 것을 마땅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의 “빚진 자”는 복음 전파의 빚입니다. 복음 전파가 빚이 된 이유는 전파되어야 할 복음을 자신이 핍박하고 방해하였기 때문입니다(행 7:58~8:3, 딤전 1:13). 물론 구원의 은혜를 감사의 보답으로 갚으려는 뜻도 있겠지만, 과거의 훼방을 대신 전도로 갚는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방인을 대표한 뜻)이나 야만(미개족속)이나 지혜 있는 자(지식인, 문화인)나 어리석은 자(무식한 사람들)에게 내가 다 빚진 자라” 하셨으니, 여기의 전도의 대상은 보편적 세계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빚진 자이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노력을 다함)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하신 일에 대하여 “빚을 갚는 생활”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제 3 과 복음의 성격 (롬 1:16~17)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복음의 성격”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셨고,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하신 말씀이 복음의 성격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1. 복음의 뜻(16절)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셨으므로 “복음의 의미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문제”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복음”은 인류에게 주신 가장 복된 소식이고, 가장 복된 소식은 “죄의 불행에서 건져 영생 얻게 하신 일”이며, 또 그 방법에 속한 소식을 의미합니다. 요 3:16의 말씀을 “복음의 요약”이라고 하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독생자로 죄를 대속하신 후 이 사실을 믿게 하여 죄사함과 영생을 받게 하시는 소식”입니다.

2)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다면, 이 복음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세적 지식만 추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미련하게 보거나(고전 1:20, 2:14), 허황된 일로 여겨서 믿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게 될 때 추호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신자가 믿음의 확고함이 없으면, 믿는 것이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믿음에 굳게 서고, 은혜 받는 체험을 하면 크게 담대하여집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며, 구원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에 성도는 이 사실에 생명을 걸만큼 담대하여지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성격입니다(16~17절).

1) 첫째 성격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음을 성립시키기 어려운 어린아이나, 지각을 가진 성인은 물론 지각에 문제가 있는 성인들까지라도 복음을 거절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죄인을 구원하시는 데는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능력을 하나님이 복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마귀에게서 이끌어내는 힘(인간 정욕, 자율주의를 뜻함), 현실적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힘, 거듭나고 부활시키는 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힘,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특히 “모든 믿는 자”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한 의미가 큰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또한 이방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전파하신다는 뜻입니다.

2) 두 번째 성격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한 대속으로, 구원 받을 자의 죄를 가리워주시고(창 3:21, 롬 3:25) 사하여주시는 것을(행 3:38) 의미하는 것입니다(계 19:8). 죄와 심판을 사함과 의로 바꾸어 심판의 필연성에서 심판을 면하도록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요,

3) 셋째 성격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믿음은 뿌리에 속한 것으로 거듭난 상태, 신앙 고백을 하는 상태로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확보하는 믿음입니다. 다음의 “믿음”은 거듭난 믿음을 근거로 하여 생활과 사명을 이행하는 믿음, 즉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상태요, 또 하늘의 상급을 비축하는 믿음으로 성숙을 뜻하는 것입니다(“믿음으로 믿음에”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다”는 말씀은 합 2:4의 예언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는 도리가 신약시대에 나타난 것을 더욱 확신케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는 입장에 있는 자)라야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의인”은 죄를 안 짓는 의인이 아니고, 심판을 안 받을 의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의인이 아닌, 법적 의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적 의를 힘입은 성도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도덕적 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거룩함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요 17:17).

 

 

제 4 과 불신앙의 죄와 징벌 선언 (롬 1:18~25)목록으로


대부분의 해설집에서 이 부분을 “이방인의 죄와 받을 벌”이라고 제목을 정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불신앙의 죄와 징벌 선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이방인이란 용어가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로마인만 이방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죄”는 피조물 된 인간이 하나님께 범하는 죄요, 징벌 선언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19~20절), 깨닫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권고하시지 않고 외면하시거나 멀리하시는 것입니다. ① 18절은 “범죄와 징벌 선언”이요, ② 19~20절은 “징벌의 필연적 이유”이며, ③ 21~23, 25절은 “죄악의 구체적 설명”이고, ④ 24절은 “징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불신앙의 죄를 깨닫고, 그 불신앙의 불행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며, 또 구원 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 범죄와 징벌 선언(18절)

1) “하나님의 진노가” 하시므로 하나님은 진노(벌주심)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노는 마지막 심판 전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기회 따라 내리시는 벌입니다. 불신자에게도 내리시고(창 2:17, 3:16~19, 22~24; 사 13:11), 선민(창 15:12~13, 삿 3:7~8) 또는 성도에게도 내리십니다(시 7:11~15, 6:1; 삼하 12:7~15).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로 벌 받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시 2:11).

2) 진노의 대상은 완악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범죄자를 쉽게 진노하시지 않습니다(애 3:33). 먼저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 후 오래 참으시다가(벧전 3:20) 완악의 분량이 극도에 달하였을 때 진노하시는 것입니다(마 23:32; 창 6:13, 18:20~21). 진노 받을 죄악의 종류는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과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을 합하면 “불의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입니다. “불의”는 모든 옳지 않은 행위요, “진리를 막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항함이며, “모든 경건치 않음”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경외를 도외시함인즉 불신자들의 모든 불신앙적 죄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뜻은 “피할 수 없이 임한다”는 듯입니다. 비행기나 대포가 없던 시대에 공중 폭격이 있다면, 피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로 절대자의 영역으로 이해하지만 하늘은 광활한 영역을 뜻하는 줄로 아심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2. 징벌의 필연적 이유입니다(19~20절).

1) 19절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에게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계시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을 아는 체도 하지 않고, 고의로 모르는 척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23절). 다시 말하면 “고의적인 하나님 배척, 모르는 척하여 멀리함, 창조자께 돌릴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 죄” 즉 “우상숭배죄”로 진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함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의 형상(영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 즉 지혜와 지각(왕상 3:12, 마 15:10)과 양심을(롬 2:14~15)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 실체(도덕성, 양심, 이성, 영적 식견 등)가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가? 할 때 분명히 영적으로 죽은 부분(구원의 도리를 알 수 있는 부분,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는 부분)이 있고(엡 2:1, 창 2:17), 도덕적 형상에 대하여는 상당히 훼손되었지만 남은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남은 부분은 구원의 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과 식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을 양심 또는 종교성으로 표현하셨습니다(롬 2:14~15, 행 17:22). 따라서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뜻은 타락한 인류의 마음속에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 것을 판단하여 알만한 “종교적 식견”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다” 하심은 20절에서 말씀하신 자연 계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라도 자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20절에서 하나님이 창조로 나타내주신 자연 계시(만물) 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하나님 속에 감추인 능력과 지혜의 부분),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적 요소들)이 그 만드신 만물에 보여 분명히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연을 보고 창조자를 모른다면, 또 우주의 위력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면, 또 미세한 생물의 조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성과 지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하나님의 존재를 몰라서 경외하지 못하였다고) 핑계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한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고, 그 죄가 진노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3. 죄악의 구체적 설명(21~23, 25절)

1)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되(아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영광을 돌리지 않음; 고전 10:31, 롬 11:36) 감사하지도 아니하며(시 50:14, 엡 1:16, 살전 5:18)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바른 생각에서 멀어짐)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허망의 지속 상태로 지혜가 없어짐)”고 하셨습니다.

2) 또 22절에서 “스스로 지혜 있다(인간적 지식으로 철학을 내세우는 뜻) 하나 우둔하게 되어(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의 결과는 극히 미련한 것임)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썩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하시고, 그의 영광(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도 영원하기 때문이며,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이것들은 다 피조물로써 유한한 것들임)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둔해진 자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피조물 우상으로 바꾸어, 그것들을 하나님처럼 알고 경배하는 만행을 자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앙자들의 우상 숭배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25절에서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하나님의 계시를 포괄하는 뜻)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하시므로 불신앙자들의 우상주의 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라. 아멘” 하므로 하나님만 영원히 영광의 대상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징벌의 내용입니다(24절).

24절에서는 패역한 자들에 대한 징벌의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갈 5:24, 부패한 마음)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경향으로 권고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긍휼과 권고가 없으면 내려가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2) 그 결과로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 하셨으니 “몸을 서로 욕되게 함”은 징벌의 결과로써, 육체를 음행과 범죄의 도구로 계속 쓰여지도록 하여 불행을 당하도록 방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육체가 범죄의 도구가 되는 것을 “욕된 것이라” 하셨으니, 그 범죄를 주동하는 마음이야 더욱 욕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불신앙적 죄악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가를 깨우쳐주신 말씀입니다.

 

 

제 5 과 악인을 버려두심 (롬 1:26~32)목록으로


앞 과목(18~25절)의 말씀은 “불신앙 즉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나타나는 허망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징벌”을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이와 연계하여 나타나는 일반적 죄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양심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무슨 죄인들 짓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악한 자(회개하지 않는 자) 또는 버리기로 작정하신 자(롬 9:13, 창 6:7, 왕상 16:3)에 대하여 그가 선택된 자가 아니면 권고의 은총을 끊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1:24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리셨다는 말씀”과 본문 26절, 28절에서 역시 “부끄러운 욕심 또는 상실한 마음에 내어버려두셨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는 부모가 몹시 방탕하는 자녀에 대하여 관심 두지 않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가 떠나면 허망하여지고, 상실한 마음이 되어 어두운 세계에 처할 수밖에 없으므로 죄짓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로 범죄하며, 또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① 26~27절은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신 결과”요, ② 28~31절은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결과”이며, ③ 32절은 “죄악의 적극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신 결과(26~27절)

1) 26절의 “이를 인하여”란 24절의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죄악을 인하여”란 뜻이요, “하나님이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신 말씀”의 “부끄러운 욕심”이란 23절의 “썩어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일”과 25절의 “피조물을 섬겨 복 받으려는 소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대표적 범죄가 음행과 우상 숭배입니다.

2)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하신 것은 음행의 악습이 여인들에게도 만행되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며, 오늘의 시대에 유행되고 있다는 소위 스와핑(부부를 바꾸어 음행하는 것)이란 참람된 행위가 그 시대에도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27절에서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하셨는데 “순리대로 여인을 쓰는 것”은 합당한 혼인에 의하여 성생활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버렸다” 하였으니 타락의 양상으로 부부생활의 질서를 떠났음을 뜻하며, 26절 하반의 “순리를 역리로” 행하는 죄악을 남자도 행하는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말씀하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하신 것은 성생활의 질서를 파괴하는 원인을 말씀하신 것으로 한 구절 앞에 기록되었으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음욕이 불 일 듯 한즉 순리로 여인을 상대하거나 남자를 상대함에 부부된 자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정당한 부부가 아닌 상태나 또는 부부라도 퇴폐한 상황에서 질서를 파괴하되 부부 혼돈 또는 동성연애에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남녀의 균형이 깨지면 혼인 제도를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재앙으로 야기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장정이 없어졌을 때 “열 여인이 한 남자를 붙들고 자기 남편이 되어 달라”(사 4:1)는 말씀을 참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소돔의 멸망 시에도 음행의 무질서가 있었음을 유의하셔야 하는데(창 19:5, 8) 남녀의 균형이 깨져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일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27절에서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이 받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결과(28~31절)

1) 28절은 26절처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실한 마음(하나님을 배척하는 마음)을 그대로 버려두시면 인간은 바른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마귀에게 이끌린즉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29~31절에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21개의 종류로 말씀하셨으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못 받고 양심 흐린 자들이 예사로 행하는 일들입니다. 곧 모든 불의(아키디아, 위법 행위), 추악(포네리아, 부끄럽고 부도덕한 행동), 탐욕(플레온, 족한 줄 모르는 욕심), 악의가 가득한 자(카키아, 패역성만 있는 것), 시기(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함), 살인(미움과 죽임), 분쟁(다툼을 좋아함), 사기(속여 뺏는 것), 악독이 가득한 자요(선한 경향이 전혀 없음), 수근수근(작당 행위)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남을 헐뜯음),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특별 권고에서 제외된 자, 롬 9:13;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함), 능욕(남을 업신여기고 멸시함)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자기를 과시하는 자), 자랑하는 자요(자기의 장점만 말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자요(불의를 계획함),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부모를 거역 또는 불효를 하고도 뉘우칠 줄 모름), 우매한 자요(돌이키거나 건설적 태도를 취하지 못함), 배약하는 자요(선의를 저버리거나 약속을 위반함), 무정한 자요(긍휼한 마음이 없음), 무자비한 자라(무정함을 행동으로 나타냄)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종류들이 성화되지 못한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깨달을 때 회개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하나님의 권고를 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일을 상습적으로 행하면서도 회개할 체를 하지 않는 것이 그 차이입니다.

3. 죄악의 적극성(32절)

32절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범죄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적극성을 띠는 행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29~31절의 범죄)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안다” 함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율법의 증거를 들었다”는 뜻이요(율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있고, 출 35:2, 레 24:21; 또 속죄 받지 못하면 죽음, 롬 6:23), “범죄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은 불신자의 양심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함”은 범죄의 독점 의지 또는 적극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패역함이 크고, 또 “그 일(악행 하는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함”은 범죄자를 격려, 두둔한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범죄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선행도 감찰하시지만 악인의 죄악도 세밀하게 감찰하시는 것을 두렵게 여기셔야 합니다.

 

제 6 과 남을 판단하는 죄 (롬 2:1~5)목록으로


로마에는 유대인(선민)으로서 복음을 믿는 성도들도 있었고, 이방인(로마인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으로서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대인들이 선민이란 우월감을 갖고 이방인 성도들의 잘못된 행위를 판단함으로 자신들과 이방인 성도들과의 관계에 적절치 못한 행위를 나타냄에 대하여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책망 받는 대상이 유대인 성도라는 지적은 없으나, 1절의 “정죄”란 말씀, 2절의 “진리대로 된다”는 말씀, 3절의 “하나님의 판단”이란 말씀, 4절의 “하나님의 인자하심”, 5절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등의 용어가 다 율법적 용어이며, 또 6~16절 부분에서 “선민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같다”는 말씀들을 종합할 때 드러난 내용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현재의 상태와 처신이 중요할 뿐, 과거나 명분은 중요하지 않은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총제 목은 “남을 판단하는 죄”이며, 대지는 ① 1, 3절은 “남을 판단하는 것의 불합리성”이요, ②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한 죄”이며, ③ 2, 5절은 “심판을 경고하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남을 판단하는 것의 불합리성(1, 3절)

1) 1절의 “그러므로”란 접속사는 1장 후반부에서 “하나님을 피조물과 우상으로 바꾸어 경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으심”을 말씀하신 것과 연계한 것입니다(1:18, 24). 하나님의 진노는 특정인의 특정 범죄 뿐 아니라 전체적 죄에 대하여 남김없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마 5:26).

2)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하셨는데, 판단 그 자체는 “옳고 그름을 분변하는 것”인바 좋은 뜻이지만, 문제는 “남의 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경우에 재판관은 그 직책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셨습니다(시 7:11). 또 가족이나 측근에 대한 판단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경쟁 또는 대립되는 대상이 있는데, 그들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요즈음 국회의원 선거를 며칠 앞두고 정당 간에 또는 개인 간에 남을 판단하는 일이 많은 것을 봅니다. 어떤 이에게 판단할 일이 있으면 고발하면 됩니다. 그 사람의 신상에 관한 명예가 이기주의를 목적으로 또는 막연한 뜻으로 대중 앞에 실추되게 하기 위하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의롭지 않기 때문에 자격도 없거니와 판단할 만한 지혜도 부족한 것입니다. 지도자를 뽑을 때 “누구는 자격이 있고, 없다”는 식의 선전도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격자도 범죄할 수 있고, 무자격자라도 큰 과실 없이 감당하는 경우가 있으며, 사람은 앞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잘못이 드러나면 재판에 의하여 일벌백계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익을 위하여 어떤 개인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윤리철학을 광포하는 수단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3) 1절의 “남을 판단한 사람”은 유대인 성도가 이방인 성도를 판단한 듯합니다. 물론 같은 성도끼리도 판단합니다. 두 장로 중 한 장로가 “자기는 십일조 헌금에 결백한데 누구 장로는 십일조를 다 내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득 없는 자가 십일조 헌금의 결백성을 내세워(다른 죄와 연약이 없는 듯이) 남의 한 가지 연약을 물고 늘어진다면 성도 간에 어찌 화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남을 판단한 자는 “자신이 정죄 받음에 있어서 핑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론 누구든지(판단하는 자가 누구든지, 선민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판단 또는 정죄 받을 일)을 행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판단은 범죄를 상대로 하는 것인데 판단자 자신도 범죄를 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 대한 판단도 된다는 것입니다.

4) 3절의 뜻도 같습니다. “이런 일(남을 판단하는 일)을 행하는 자를 (잘못이라고) 판단하고도 같은 일(자신도 남을 판단함)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고(시 7:11), 또 최종 재판자이십니다(전 12:14).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 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신 말씀을 유의하여 판단을 극히 삼가심이 좋을 것입니다. 마 7:1~5의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한 죄(4절)

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선민 성도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깨달음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유예 받은 상태에서 진노를 피하여 건재함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잘못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망설임 없이 진노하시면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을 것이나, 하나님은 범죄하는 성도에게 아버지 같은 사랑을 베푸사 오래 참아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시는 것(벧전 3:20) 때문에 자신이 보존되고 있음을 왜 모르느냐?는 말씀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이 은혜는 모든 범죄자에게 주실 수 있고, 또 용서하실 수 있음, 마 18:21~22)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마 9:12) 하셨고, 또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마 9:13). “용납하심”이란 하나님이 죄를 간과하실 수도 있고(롬 3:25), 사하실 수도 있으며(마 9:6), 때를 정하시고 진노를 연기하실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3:28~30). 하나님은 노아 때에 패괴한 백성들을 방주 지을 동안(120년) 참고 기다리신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길이 참으심”이 곧 그런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3. 심판을 경고하심입니다(2, 5절).

2절에서 “이런 일(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공의로운 심판)이 진리대로(참되게, 요 14:6) 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또 5절에서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고집은 회개치 않는 마음입니다. 남을 판단하고도 뉘우치지 않으며 자기비판과 정죄가 없고, 또 돌이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진노의 날(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있을 때 자기에게 임할 진노의 분량을 계속 쌓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노는 수시로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신 32:16, 21). 회개하지 않는 시일과 진노의 때와 진노의 분량은 유기적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욜 2:25, 호 4:9, 겔 9:10, 딤후 4:14).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의롭다는 자긍심을 가진 것이 있으니, 이것을 없애라는 뜻으로 주신 교훈인 줄 압니다. 그리하여 다음 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통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제 7 과 심판의 공정성 (롬 2:6~16)목록으로


이 본문을 살피면 ① 6~11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공정성”을 말씀하셨고, ② 12~16절은 “율법을 모르던 자와 알던 자에 대한 심판의 공정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총 제목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입니다.

1.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공정성(6~11절)

혹 선민들이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힘입어(또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하였은즉) 많이 보아주실 것이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멀리한 경력이 많으므로 그 심판을 더 엄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대인들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별 있게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검찰이 야당의 정치자금은 발굴하고 여당의 정치자금 발굴은 소극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공의롭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심판을 공의롭게 하시므로 누구를 심판하시든지 과거의 공로나 명예적 사유에 관계없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1) 6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선민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계층을 가릴 것 없이)에게 그 행한 대로(죄질 또는 범죄 소위대로) 보응(심판적 형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심판에는 정의에 대한 심판도 있고, 악에 대한 심판도 있습니다. 7절 말씀은 정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즉 “참고 선을 행하며” 하심은 선을 행하기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것을 의미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 자”라는 뜻은 신령한 복, 다시 말하면 현세적 정욕을 피하면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 받지 못할 자는 그 생활이 현세적 중심으로 사는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또 필연적으로 위엣 것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골 3:1). 선을 행한 자에게 내세의 상급도 주시지만, 여기에서 영생만 언급하신 것은 내세의 상급이 영생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참고 선을 행하는 일”과 “썩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더 연구하여 시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승리의 삶을 살 것이 아닙니까?

3) 그러나 반대로 8절 말씀처럼 “오직 당을 지어(합세하는 뜻)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참된 것, 예수님의 뜻)를 좇지 않는 것은 곧 불의입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도 있지요. “노와 분”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는 격동심입니다. 심판을 나타내시는 방법이 9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4) 곧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란 악인의 정신적 부분에 타격을 받게 하셔서 환난과 곤고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신이 환난을 당하고 곤고해지면 치명적은 아니나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무력 그 자체는 자기를 망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건전한 생각을 못하는 것이야말로 벌 중에 큰 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진노의 반대는 10절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인데, 이것은 내세에서 누리는 것은 그 결과이지만 현세에서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에 따른 심판의 결과를 유대인(선민)이나 헬라인(이방인을 대표함)에게 꼭 같이 적용하신다는 것입니다.

6) 11절의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음”은 유대인이 받은 명분상 외모(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창 17:1~8) 같은 것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언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쌍방적 언약을 “디아데케”(διαθήκη)라 합니다(창 9:9~17). 이 쌍방적 언약은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 무효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언약에 대하여 선민들이 하나님을 성실히 경외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며 권고하시다가 바벨론 포로 시에 아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민국이 없어졌을 때 선민의 명분도 함께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언약은 일방적 언약(하나님이 단독으로 약속하신 것), 즉 “순데케”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 언약을 메시야를 보내어 택한 백성을 구원하실 일에 약속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약속(창 3:15) 또는 단체성이 없는 개인 구원에 대한 약속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인류에 대하여 공평하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에 대하여는 <7분설교 9집>의 “인생의 가치”란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외모나 과거의 전통이나 현세적 명분 따위는 보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TV를 볼 때 아예 볼 가치가 없는 것은 보시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2. 율법을 모르던 자와 알던 자에 대한 심판의 공정성(12~16절)

이 말씀의 중요한 요지는 율법을 모르던 이방인은 율법을 모르는 관계로 죄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은즉(롬 3:20)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는 말씀이란 점입니다.

1) 12절의 “무릇 율법 없이 범한 자”란 율법은 선민들에게 죄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나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 않았으므로 정죄의 말씀을 모르고 죄를 범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없이 망한다”고 하셨으니, 이 뜻은 율법에 의거하여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14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있고 범한 자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음”은 그 당시의 선민들이 율법을 알고도 범죄하였은즉 그만큼 죄가 크고 또 심판을 받을 때 율법(형법)에 근거하여 받게 되는 것이니 곧 사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롬 6:23).

2) 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셨으니, 율법을 듣기만 하라(의식적 행위)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이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심은 “원칙상 그렇다는 뜻이라” 할 수도 있고, 또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거니와(갈 3:10~12),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만큼(갈 2:16), 여기의 “의롭다”는 뜻은 심판을 면하는 칭의의 성격이 아닌 칭찬의 뜻으로 받음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려고(도덕적 계율과 신앙 계율에 한하여) 애쓰는 자를 옳은 자로 여겨주신다는 뜻입니다.

3) 14~15절에서는 율법 없는 자의 행동과 심판의 기준은 본성, 즉 양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성”이란 양심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인류에게 다 주신 것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율법의 성향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사랑 실천)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이방인)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자기 양심)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밝은 자는 그것이 자기 생활의 규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양심에 입각한) 생각들이 서로 혹은(송사를 다하지는 않음의 뜻)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밝은 양심)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법을 모르면 양심만으로 시비를 따진다는 뜻이고, 하나님도 그 방법에 공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받았던지 안 받았던지 그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데는 아무런 혼돈이 없는 것입니다. 양심도 주시고, 법도 주셨는데 범죄하였으면 그만큼 죄의 대가를 더 찾으시는 것이고, 양심만 주셨으면 역시 그 대가만큼 찾으실 것이니, 많이 받고 범죄한 죄가 더 중하므로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4) 16절에서 “심판의 예언”과 심판자와 심판 대상과 그 시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내 복음에 이른바”란 바울이 믿고 증거한 복음 중 심판에 대한 말씀을 앞부분에서(6~8절) 이미 증거하셨다는 뜻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심은 하나님이 심판권을 예수님께 일임하신 것을 뜻하며(요 5:27), “사람들의 은밀한 것”은 심판의 대상으로 제외되는 죄가 없다는 뜻이고, “심판하시는 그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마 25:31, 계 20:11~15)로 궁극적으로는 주 재림 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 8 과 유대인의 진정한 의미 (롬 2:17~29)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7~20절은 “유대인의 우월성”이고, ② 21~24절은 “우월성에 대한 모순된 행위”이며, ③ 25~27절은 “할례와 무할례의 진정한 의미”이고, ④ 28~29절은 “유대인에 대한 결론적 정의”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유대인의 진정한 의미”로 정할 수 있습니다.

27절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라 하셨는데, 여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에 유대인이라 칭하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정통적 신자, 믿음 좋은 자, 또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라는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통적 신자를 유대인이라고 칭하게 된 데는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본래는 야곱의 12지파가 다 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왕 때에 나라가 분열할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다른 열 지파가 북방 이스라엘에 가담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사용 특권을 상실하여 정통 종교에서 이탈하였는데(왕상 12:21~33; 왕하 13:3~4, 16:1~4, 7~9, 18:13), 그 후에 또 유다를 제외한 지역들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혼혈족을 이루게 되므로 유다 땅에 사는 백성들(대부분 유다 지파)은 자기들만 정통 종교를 사수한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하고 다른 족들을 다 이방인으로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적 신앙을 고수하였고,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역시 율법주의 신앙과 할례 받은 특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사상이 복음 전파에 큰 장애가 되었으리라고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유대인의 진정한 의미”를 강하게 증거하신 것은 복음 사상과의 대립을 물리치시려는 목적도 있고, 할례 의식을 막연히 숭상하는 모순을 지적하심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자인가를 알게 하시는데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이라 자칭하는 유대인은 율법주의자들이고, 바울이 말씀하는 이면적 유대인(29절)은 바른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우월성(17~20절)

1) 유대인의 우월성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믿음과 행동지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일찍 지식을 갖고 깨달음을 받는 것이지요. 17절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였다” 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니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게도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모신 우월성”입니다.

2) 그 다음에는 18절에서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으니”, 이는 19절에서 “율법 있는(아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좋은 무기를 갖는 것처럼 율법을 받은 우월성이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는 거기에다가 지도자적 입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알면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율법 지식도 있었고, 교육 의식도 강한 민족입니다(신 6:4~9).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소경은 안주 무지한 자의 뜻) 어두움에 있는 자(무지, 불법의 세계)의 빛(빛의 사명을 가진 자의 뜻)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 스스로 믿는다”(19~20절) 하였으니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르치는 지위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율법으로 배우고, 알며, 스승을 자처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4) 여기에서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은 18절의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는 말씀이 각주의 “능히 같지 아니한 점을 분변하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번역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에 대하여, 원문은 “도키마제이스 타 디아페론타”(approves the things excelling)인데, 영문으로는 “우수한 것들을 승인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각주 번역보다 본문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성도는 성경에 비추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각주에서 “능히 같지 아니한 점”이란 율법에 비추어 일치하지 않는 점, 즉 선하지 않은 점을 뜻하고 “(그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도키마제이스”의 뜻인 “허가하다, 승인하다”를 “분별하다”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하튼 율법을 연구하는 자는 율법으로 선악을 잘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2. 우월성에 대한 모순된 행위(21~24절)

1) 21절에서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 20절) “남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않느냐?” 하셨으니,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허점(부족한 점)도 가르쳐서 바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선생으로만 자처하고 자신은 그 교훈을 행동에 옮기지 않으니까(마 23:1~4), 그것을 바울 사도가 지적하신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고 가르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하셨으니, 그들이 도적질도 한 모양입니다. 나라의 지도자인 ○○의원들이 차떼기, 책떼기 등 편취하여 쓴 것처럼….

2) 22절에서는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퇴폐풍조를 단속하는 경찰이 창녀의 접대를 받은 것처럼….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출 20:1~5)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신사 물건이란 우상의 제단에 시설된 값진 물품입니다. 요즈음은 문화재라 하고, 우상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많은 지성인들도 그것을 탐하지 않습니까?

3) 23절에서는 “율법을 사랑하는 네가 (율법을 사랑하면 잘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하셨으니, 말로만 가르치고 실행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려니와 성도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음은 곧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4) 24절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선민, 유대인)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 하시므로 본이 되지 못하는 설익은 신자들의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들로부터 모독 받는 것을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기록된바”란 사 52:5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선민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이방인의 침략을 허용하십니다(삿 3:1~14).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입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왕하 18:13~35). 이사야는 그 시대의 정황을 보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앗수르)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왕하 18:26~28을 꼭 읽으시고 확인하십시오). 실천 모범이 없는 교훈은 모순이고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마 5:19, 23:1~8).

3. 할례와 무할례의 진정한 의미(25~27절)

1)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것을 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생활로 입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다” 하심은 거듭난 생활로 계명을 잘 지킨즉 할례로 인친 의미와 상통하니까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한즉(즉 거듭난 삶을 시행하지 않은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 즉 외식에 불과한 안 함만 못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반대로 26절에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라는 외부적 인침이 없어도 생활로 할례자의 입장을 나타내는 만큼) 그 무할례를 할례 받은 자처럼 여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할례가 간단한 세례 의식으로 바뀐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을 치는 일”은 유효한 것입니다. 구두 계약보다 서류 계약이 더 완전한 것처럼…. 그러나 인침보다 저 중요한 것은 실천이기 때문에 과장된 외식을 피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간소화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에는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기겠지요. 구약 시대에는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계시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기 위하여 강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혈을 다 흘리신 이상 강한 상징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27절의 “또한 본래 무할례자(이방인으로 믿은 자가 할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을 온전히(잘 지킨다는 뜻, 갈 3:10) 지키면 의문(의식적 예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유대인, 율법주의자)를 판단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므로 실행 없는 의식은 무가치하고, 의식(할례) 없는 실행이 오히려 실행 없는 할례자를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의식 자체보다 실천에 있고, 무할례의 진정한 의미도 실천에 있은즉 의식은 복종의 표(세례)로써 족하다는 뜻입니다.

4. 유대인에 대한 결론적 정의(28~29절)

1) 28절에서 “대저 표면적(겉으로 나타나는 의식적 행위) 유대인이 유대인(진정한 성도)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목적을 만족하는)가 아니라”,

2) 29절에서 “오직 이면적(내실과 목적을 성취하는) 유대인이 유대인(진정한 성도)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의식보다 믿음과 정신이 중요함) 신령(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란 뜻)에 있고 의문(의식적 제도)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할 뿐, 사람에게 나타나는 의식과 제도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의미를 보충하기 위하여 <7분설교 9집>에 있는 “사람의 가치”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 당시에 유대인이란 우월감을 사실대로 나타내려면 의식적 명분이나 종교적 전통을 내세우지 말고, 오직 믿음과 실천으로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가 될 때 참 선민(유대인)의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 9 과 십자가를 숨긴 논리 (롬 3:1~8)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고 총 제목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확신(또는 비중)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른 주석에 보면 “유대인의 죄에 포함”하기도 하였고, 또 “유대인의 우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공평하게 하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박윤선 주석과 흑기행길 주석). 그러나 필자는 “십자가를 숨긴 논리”로 정하였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함”(2~3절)도 나타나 있고, 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나타나있는데(3절) 의의 근거(십자가)를 숨긴 것 때문에 바울이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것(7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숨긴 것은 먼저 율법과의 관계(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다 죄인임)와 율법의 소극적 사명(정죄)을 말씀하심으로 율법주의자들을 돌이키게 한 후에 복음을 말씀(롬 1:17, 3:26~28)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감춘 의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공정성과 악으로 선을 이루는 오해를 갖게 할 수 있으므로 바울은 그것까지 해명하고 깨우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① 1절은 “ 대인의 우월성”이요, ② 2~3절은 “불신앙(죄)과 하나님의 구원”이며(여기서 십자가는 감추시고 하나님의 의만 말씀하심), ③ 4~6절은 “심판의 공의성”이요, ④ 7~8절은 “거짓말로 아는 진실”입니다.

1. 유대인의 우월성(1절)

유대인의 우월성은 2:17~20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이란 전통적 명분만으로 교만하면서 이방인을 차별하려는 폐단을 바울사도는 막으시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구약의 율법과 신약적 계시)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많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권고를 받은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계시)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신앙의 중심이며,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유대인을 높여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계율을 먼저 받고도 믿지 않거나 지키지 않으면 계율을 알지 못하였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2:23~29에서 강한 어조로 나타내셨습니다. 은혜와 특권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사명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불신앙(죄)과 하나님의 구원(2~3절)

1) 2절에 보시면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하셨습니다. 이 서신에는 질문이 많습니다. 독자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마땅하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또 질문하시기를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사랑, 믿음을 가짐, 기대할 수 있음)을 폐하겠느뇨?” 앞의 대답대로라면 “미쁘심을 폐하여야 한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3절에서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와 불신앙이 있어도, 하나님은 사랑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다 죄지은 대로 심판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에 문제되는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되시겠지만, 죄는 죄대로 심판하시고 용서는 용서할 근거(십자가)에 의하여 하시기 때문에 공의에 위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육체도 변하지만 마음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도 어렵고, 또 달면 먹으나 쓰면 뱉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되심”(요 8:26, 14:6)은 본질상 변할 수도 없고, 언약도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구원 언약을 주신 바가 있은즉(창 17:5~7) 아무리 인간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가져도 구원 언약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의 미쁘심을 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그것을 증명하는 예증으로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시 51:4, 말씀하시기를)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순전하다, 시 51:4) 함과 같으니라”(3절) 하신 시 51:4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인용 부분의 말씀은 “다윗의 회개의 시”로서 다윗이 자기의 죄를 충분히 인정한 후 용서를 구한즉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고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뜻은 칭의에 해당하고, “이기려 하심”이란 재판할 때 무죄 승소(순전하다)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정죄를 칭의로 바꾸어주신 것인데, 여기에 “십자가의 중보를 근거로 하여 의롭다 함을 베푼 것이라”고 하는 중보의 내용을 나타내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 시대에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시 22:1~4) 칭의를 힘입어 심판에 승리할 것(이르지 않음, 요 5:24)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는 용서하셨으되 중보 사역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공의롭지 않으신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심판의 공의성(4~6절)

1) 4절에서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하리요?” 하셨으니, 이 말씀은 2절의 “어떤 자들이 믿지 않았으면(불의) 벌을 받아야 마땅한 줄로 생각되지만(범죄자를 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즉, 롬 2:5, 살후 1:6~7), 그 반대로 인간이 범죄하였는데도(우리의 불의) 하나님의 의(십자가로 인한 칭의)를 드러내셨다면 어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하여 심판도 하실 수 있고, 또 자기의 뜻에 따라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베푸실 수도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인즉(롬 9:11~13, 21~23) 피조물은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5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공평치 않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절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범죄자를 구원 하시든, 구원을 안 하시고 진노를 하시든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편협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평치 않은 분으로 폄하하려는 완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혜를 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이방인 사이에서 심판이 공평치 않다 하거나, 또 범죄자를 벌하시지 않는 데서 느끼는 오해로써(증보적 은혜는 모르고) 하나님을 의심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일향 미쁘심, 딤후 3:13).

4. 거짓말로 아는 지식(7~8절)

1) 7절에서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였으니, 바울은 거짓말한 일이 없지만(고후 11:31)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거저 용서하셨다”(시 51:4) 하면서 죄인을 의로운 행위(율법을 지킨 행위) 없이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주장을 유대주의자들이 거짓으로 단정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인즉, 그 거짓말 같은 복음 증거를 인하여 “하나님의 참되심(언약의 불변성)이 더 풍성하여(은혜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하였으니, 거짓말 같은 복음을 믿고라도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영광 받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거짓말한 죄인으로 인정하시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또 어떤 이들(말꼬리를 잡는 복음의 훼방자들)이 “네가 거짓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느냐?” 그러면 선(하나님께 영광)을 이루기 위하여 악(거짓)을 행하자 해도 된다는 뜻이냐? 하면서 말꼬투리를 잡으려 하나 이는 부당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서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죄인을 의롭다 하셨을지라도 그만한 근거(십자가)에 의하여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서 감취어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보 사역을 의의 근거로 삼으신 점”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은 거듭난 자라야만 믿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율법과의 관계를 깨우치기까지 십자가를 숨긴 것입니다(21절에서 나타내셨음). 그런즉 논쟁자들은 바울을 거짓말하는 사도처럼 인정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정죄를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편지는 몇 차례 따로 전달된 것을 모아 편집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 10 과 인류의 죄 (롬 3:9~20)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인류의 죄”로 정한 것은 본문에서 유대인과 인류의 죄를 다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을 정죄한 내용은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 하셨고, 10절의 “기록된 바…” 이하의 말씀도 유대인의 죄를 거론하신 것이며, 20절에서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다”는 말씀이 율법을 받은 선민의 죄를 지적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1절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하신 것과 19절에서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셨다” 하신 말씀은 인류 전체의 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죄”라고 한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의하여 죄가 밝히 드러났고, 이방인은 율법도 모르는 채 살았으니 더 많은 죄를 짓지 않았겠습니까? 따라서 다 타락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은 율법이 없었다 하여도 그 양심이 율법이 되는 만큼(롬 2:14~15)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① 9절은 “인류를 정죄하신 말씀”이고, ② 10~18절은 “유대인의 죄를 거론하신 것”이며, ③ 19~20절은 “율법의 역할”입니다.

1. 인류를 정죄하신 말씀(9절)

9절에서 “그러면 어떠하뇨?” 하신 것은 죄에 대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교해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으뇨?(각주; 저희만 못하뇨?)” 하신 것은 “유대인(우리)이 이방인보다 죄가 적을 것 같으뇨?” 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측정하기 전에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 대표)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율법 가진 선민이) 이미 선언하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 근거로 10~18절 말씀을 증언한 것인데, 이 말씀은 구약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으로 이미 선언하였다는 것입니다.

2. 유대인의 죄를 거론하심(10~18절)

10절의 “기록된바” 하신 것은 구약에서 인용하셨다는 뜻인데, 한두 문장에서 인용하신 것이 아니고 매절마다 인용을 하셨습니다.

10~12절까지는 시 14:1~3을 인용하셨는데, 그 내용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13절의 “저희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 하심은 시 5:9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마음이 썩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 5:9에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의 중심이 악한즉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하신 것은 시 12:2과 시 116:11에서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하셨고, 또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 하심은 시 140:3을 인용하신 것으로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하셨고,

14절에서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가득함”은 시 10:7을 인용한 것이며,

15절의 “그 발이 피 흘리는데 빠르다” 하신 것은 잠 1:16과 사 59:7, 8을 인용한 것이고,

16절의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하신 것은 사 59:7을 인용하신 것이며,

17절의 “평강을 알지 못하였다” 하신 것은 사 48:22을 인용하셨고,

18절의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심은 시 36:1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시 36:1을 보시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는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않는다 함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영감을 받으면서도 구약의 지식이 해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성경은 하나님의 선민이 이상과 같이 타락하여 죄가 많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율법의 역할입니다(19~20절).

율법의 역할은 유대인(선민)과 이방인의 모든 죄를 정죄하여 심판대에 오르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은 선민을 상대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선민)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입”은 선민의 모든 입이지만, 율법 없이 범죄한 이방인들도 같은 죄인들인 만큼 그들의 입도 핑계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입니다(롬 2:15). 결국 율법은 “온 세상(인류 전부)”을 심판 받도록 정죄한 것입니다.

2) 20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킨 생활)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죄 없다) 하심을 받을 육체(인생을 뜻함)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과 율법의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억제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정죄(심판 아래 있게 함)함에 있는 것이고, 율법의 한계는 몽학선생에 불과하며(갈 3:24, 율법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할 것을 알고 복음에 소망을 갖게 함), 따라서 죄를 사하거나 구원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제 11 과 하나님의 의 (롬 3:21~31)목록으로


앞에서 감취었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이 비로소 발표됩니다. 하나님이 이 의에 근거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벌하시는 것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다 공의에 근거하였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그 동기가 사랑에서 시작됐으나(요 3:16), 방법은 공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본문 전체의 뜻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신 것인데 3대지로 나누면 ① 21~24절은 “의의 일반적 성격”이요, ② 25~28절은 “방법상의 성격”이며, ③ 29~31절은 “의로 인한 두 가지 결과”입니다.

1. 의의 일반적 성격(21~24절)

1)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시므로 비로소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합니다. “이제는” 하신 것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다음 약 1,500년 후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의의 근거(십자가)를 이루게 하셨고, 또 때가 되매 바울이 이 복음을 이방의 성도들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의이고, 한 가지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의 방도는 한 가지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받은 것이라”는 뜻은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의 글로 통칭하신 것이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예수님의 중보 사역)를 이미 증거한 것이라는 뜻입니다(구약이 증거한 메시야 예언에 대하여 <기독교신앙백과> p. 256~259를 참고하십시오).

2) 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때, 그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써 받는 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십자가를 중보 사역으로 믿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칭의요(롬 8:30), “차별이 없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에게 보편적(다 같은 죄사함)으로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죄가 많고, 적은 경우가 있지만, 심판을 면하는 의의 결과는 다 같은 것입니다.

3) 23절에서 “모든 사람(인류 전체)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심은 죄의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에 반대되며, 오히려 진노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십자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의 일반적 성격은 “유일성, 구약으로 증거된 것, 메시야와 그 사역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 또 차별 없이 주시는 것,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사함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임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방법상의 성격입니다(25~28절).

1) 하나님이 의를 베푸시는 방법은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하시므로 예수님의 피(십자가의 희생), 그것을 믿는 믿음,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 제물로 받으시고 의를 주신다는 뜻이요,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심은 하나님이 구원 대상에게 의를 전달하실 때 먼저 “죄인에 대한 진노를 길이(오래, 장시간) 참아주시고, 다음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그의 죄를 문제시 하지 않으시므로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주심”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뜻이 있고, 간과의 뜻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이요, 죄를 용서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2) 26절에서 “곧 이때에(죄를 용서 또는 간과하실 때) 자기(하나님)의 의로우심(하나님의 본질적 의가 아니고 죄인을 용서하신 사건, 즉 선행을 뜻함)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본질적 의)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칭의) 하려 하신다(의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3) 27절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하시므로 칭의를 힙입고 구원 받음에 대한 자랑을 인간 자신에게는 돌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정죄하였고, 행위로는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였은즉 의와 상관이 없으며, 오직 믿음의 법 곧 “복음을 믿은 것”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4) 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함이라” 하시므로 이신득의의 신앙을 확인하셨습니다. 따라서 의를 주시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중보(화목 제물)요, 또 당사자의 믿음이며, 여기에 근거하여 간과, 용서를 거쳐 의롭다 함의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의로 인한 두 가지 결과(29~31절)

1) 하나님은 구원의 의를 베푸심에 있어서 모든 이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29절에서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시요…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셨고,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구원 받는 방법도 믿음뿐이란 것입니다. 30절에서 “할례자(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구원을 받되)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율법은 굳게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의를 주지 못하였을 지라도 초등학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권위가 있은즉 “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구약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3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구원을 받았은즉)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굳게 세우는 의미”는 진리로서 영원히 보존되는 의미와(벧전 1:25) 진리의 주이신(요 14:6) 예수님이 계시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에서 충분히 성취하심으로 완전케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5:17).

 

 

제 12 과 아브라함이 받은 의 (롬 4:1~1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역사로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로 정할 수 있습니다. 내용 구분을 한다면 ① 1~2절은 아브라함의 의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고, ② 3~8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며, ③ 9~10절은 “무할례 시에 받은 의”이고, ④ 11~12절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의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1~3절)

1) 1절의 “그런즉”이란 접속사는 앞 장에서 말씀한 이신득의 내용과 연계하여 이 사실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연결한 것입니다. “육신(살카, σάρκα, flesh)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란 혈통적 조상을 일컫는 뜻이고, “아브라함이 얻었다”는 뜻은 “구원 받은 의”를 의미하며, 이신득의를 증명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든 것은 그가 “믿는 자의 조상”(4:11)이고, 또 믿음 가짐의 모범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시므로(요 8:40) 아브라함을 생활 모범자로도 말씀하셨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메시야의 때를 대망한 것”(요 8:56)도 말씀하셨은즉 그의 모범을 표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범적 신앙은 히 11:8~1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또 육신의 후손들이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였을 때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생각하지 말 것과(마 3:9) 바른 자세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게 되었을 때,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눅 19:9) 하셨은즉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가 모든 성도들에게 같은 성격으로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2절에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 하셨으니, 여기의 행위란 율법적 선행을 뜻하고, 이러한 인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선행은 자랑할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3) 3절에서 그 사실을 성경이 증명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하시고, 아브라함의 역사가 기록된 창 15:6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혹 약 2:20~26을 읽으시고, 이상의 말씀이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순종 행위는 대단한 것이 사실입니다(약 2:21). 그러나 믿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이 선행보다 앞섰고, 순종 행위가 그 뒤를 따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창 15:6과 22:10의 선후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고, 또 약 2:23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의가 앞선 다음에 행함이 따라서 동반하는 것입니다(약 2:17).

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4~8절)

1) 4~5절은 “행위 아닌 믿음으로 받는 의”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이고, 6~8절은 그 일에 대한 성경적 증명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품삯)을 은혜로(거저 받는 것) 여기지 않고 빚(즉 일한 대가를 받음)으로 여긴다” 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받은 의도 행위를 나타내기 전에(또는 행위에 대한 고려 없이) 믿음만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행함은 공로가 아니란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일(행위)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죄인)를 의롭다 하시는 이(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하나님께 대한 신뢰)을 의(의를 베푸실 만한 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2) 6~8절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일”에 대하여 다윗의 실 예를 드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 사람은 복이 있다 함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 32:1~2을 인용하신 것으로, “불법을 허물로”, “정죄 당하지 않은 자를 인정치 아니하신 자”로, 용어상 차이는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같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뜻은 “사하심과 죄를 가리우심과 인정치 아니하심이 일한 것(행위 조건) 없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의는 행함 없이 믿음으로 받은 것을 다윗의 예로 입증한 것입니다. 시 51:4(롬 3:4)의 뜻도 같습니다.

3. 무할례 시에 받은 의(9~10절)

1) 9절에서 “그런즉(아브라함의) 이 행복(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하시므로 아브라함은 할례의 계명을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은즉(창 15:6, 17:10) 이 의는 할례(율법적 의식)와 상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2) 10절에서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 시냐?” 하심은 의를 베푸신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자문자답은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였으므로 이방인의 입장과 같을 때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 것이 사실임을 알리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육체의 후손들은 할례 그 자체를 구원 받는 공로로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11~12절)

이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이방인과 선민 모두의 신앙적 조상이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할례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은즉 이방인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고, 다음에 선민으로서 할례의 표를 받았은즉(창 17:10~14, 21:4) 선민의 믿음의 조상도 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11절에서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 하시므로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같은 방법으로)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고,

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으니(선민에 대한 믿음의 조상) 곧 할례 받은 자(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이방인)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하시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은 상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다 모범으로 받을 수 있는 입장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의는 행위나 표식(할례)이 아닌 믿음으로 받은 것이고, 또 아브라함은 “이방인이나 선민의 차별 없이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 13 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 (롬 4:13~25)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총 제목을 정하는데 많이 고심하였습니다. 매절마다 고유한뜻이 있는가 하면, 대․소지 별로도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3절은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15절은 “율법의 영향력”을 말씀하셨으며, 13~16절은 한 대지로 “은혜의 타당성”을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또 전체적 내용 중에서 은혜의 타당성을 말씀하실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 받은 실례를 설명하셨고, 17~22절은 아브라함의 믿음 성격을 말씀하셨으며, 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선민과 비선민 세계를 포괄하는 내용(17~18절, 23~25절) 등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총 제목 정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접하는 종합적 제목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라 함이 포괄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① 13~16절은 “은혜의 내용과 타당성”이고, ② 17~22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이며, ③ 23~25절은 “선민을 초월하는 포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은혜의 내용과 타당성(13~16절)

앞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문 내용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구원 언약)”가 은혜로 받은 것일 뿐, 율법의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목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를 예로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 언약을 받은 말씀은 창 15~1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1) 13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씨)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 하신 언약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창 17:4~6에 있는 내용입니다. 창 17:7에 보시면 “내 언약을 나와 너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는다” 하셨은즉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 혼자와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후손과 함께 하신 것이 사실인데, 그 후손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혈육의 장자, 비 적통)의 후손은 아닌즉(창 21:10) 적자 이삭의 혈통인가? 그렇다면 또 이삭의 장자 에서는 제외되지 않습니까?(롬 9:13) 그러니까 이 후손의 뜻은 혈통적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에도 “세상의 후사”란 말씀이 있고, 창 17:7에서는 “영원한 언약”(영생, 구원의 뜻)이란 말씀이 있으며, 또 열국의 아비(창 17:5), “많은 민족의 조상”(17, 18절)이란 말씀을 보아서 이 언약의 대상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는 모든 인류(선민을 초월한다는 뜻)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뜻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현세와 내세까지 영원히 계승된다는 의미로 후사(κληρονόμος, 크레로노모스; 상속자 또는 후계자의 뜻)란 용어를 쓴 것입니다.

2) 문제는 “언약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이고, 두 번째는 영생 구원의 언약이며, 셋째는 이 영생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의를 베푸시기 위한 중보자 메시야를 보내실 언약입니다. 창 17:7에 보시면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 하였는데, 여기의 “대대 후손”은 혈육의 후손이 아닌 계보상의 후손, 즉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믿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원 언약은 하나님이 구원 대상의 대표인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또 대가 없이 오직 사랑에만 근거하여 무조건 주신 것인 만큼 은혜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은 아브라함이 율법보다 약 500년 앞선 인물이고, 또 하나님이 율법의 행위로 요구하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 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을 믿음으로 받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제가 차를 몰고 지방에 나가면 먼 길을 혼자 걸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정하는 마음으로 태워주고 싶은데 그가 나의 호의를 감사로 받을지 아니면 납치의 수단으로 의심할 지가 문제되어 감히 차를 세우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으로 감사히 받는다면” 그는 은혜를 받는 자가 될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도 그렇게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믿음의 의(믿는 것을 좋게 여기신 것)를 보시고 언약하신 것이 아니고, 먼저 언약을 하신즉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3) 14절에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약 500년 후에 출현한 율법을 받은 선민들, 모세 이후의 야곱의 12지파들)이 후사(13절의 언약 대상)라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언약을 믿음으로 받게 하신 후 다시 변동하여 율법의 행위로 받게 하셨다면, 믿음을 근거한 약속들은 다 폐지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변동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속한 자들(율법을 받은 선민들)이 후사(구원 언약의 대상)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율법 자체의 의무가 뚜렷하기 때문이니, 곧 15절에서 “율법은 진노(심판)를 이루게 하는 것으로 율법이 있는 곳(율법을 받지 않는 대상)에는 범함(정죄)도 없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범함도 없다”는 뜻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범하였어도 정죄할 율법이 없은즉 죄로 인정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안 받은 대상은 그들의 양심이 정죄의 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롬 2:14~15).

4) 16절에서는 “그러므로 후사(영원한 구원 언약을 받을 자)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거저 받은 선물이 되게 하기 위하여 행위 아닌)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구원 언약, 창 17:4~6)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므로 언약의 대상인 모든 후손(선민을 초월한 인류 중)에게 믿음 가질 것을 확고히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조상의 뜻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대상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타당성은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인 점과(13절) 행위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음과(13절) 약속의 불변하심과(14절) 율법이 구원 언약을 주지 못함과(15절) 율법 없는 이방인도 포함됨(16절)을 보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17~22절)

1) 17절에서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 17:15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시면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 하신 뜻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인용하신 것이고, “그의 믿은바…부터 22절까지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실(창 22:1~19)을 예증으로 하여 그의 믿음 성격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부활 능력과 언약의 진실성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의 믿은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라” 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도록 명령 받았을 때 “하나님이 번제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주실 것으로 믿고 시행하였다”는 것을 히 11:17~1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부활 신앙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런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이 뜻은 마지막 때의 부활이나 현세적 기적만 믿고 게을러지라는 뜻이 아니고, 창조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성도의 생각지 못한 일들까지(학 2:6~8) 섭리적으로 동원하여 은혜 되게 하심을 체험하시라는 뜻입니다.

3) 18절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사라는 90세) 때에 아들 주실 것을 약속하신 일에 대하여(창 18:10~15) 믿었다는 뜻입니다(히 11:8~16).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하늘의 별처럼 많으리라, 창 15:5)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열국)의 조상이 되게 하심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내신 뜻은 “아브라함의 이신득의(以信得義) 신앙과 열국 선민의 조상 됨”인 것입니다.

4) 19~22절에서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믿음은 나이에 비례되어야 함)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히 11:6), 약속하신 그것(적자 생산 및 구원 언약)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아브라함의 확신 갖는 믿음)을 저에게 의(믿음 자체 또는 의를 베푸실 만한 근거)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은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하심과 생명 창조 및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확고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절대 순종이 나타난 것입니다(롬 1:5).

3. 선민을 초월하는 포괄성(23~25절)

이 말씀의 취지는 표면적 유대인에게 특권이 있음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믿음 가진 전체 인류)에게 하나님의 의가 임하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1) 23~24절 “저(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창 15:6)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 받은(칭의를 뜻함) 우리(바울과 유대인이나 이방인 성도들)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부활케 하신 하나님)를 믿는 자니라” 하시므로 구원 받는 믿음과 구원 대상의 보편성과 포괄성을 말씀하셨고,

2) 25절에서는 구원자 예수님의 중보자적 사역을 말씀하셨으니 곧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속죄의 희생이 되셨다는 뜻) 내어줌이 되고(십자가에서 형벌 받도록 버리신 것) 또한 우리(선택 받은 백성들)를 의롭다 하심(면죄 받고 심판을 면하게 하신 것)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하셨습니다. 중보자가 아주 희생되고 없어진다면 영원한 중보를 할 수 없겠지요. 반드시 살아나시고 승리하셔야 영원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눅 24:26).

 

 

제 14 과 칭의의 근거와 효력 (롬 5:1~11) 목록으로


본문 1절 전반에서 “그러므로(앞부분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받았다는 의미)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은즉” 하시므로 의롭다 함(칭의)을 받은 것이 이 내용의 전제(前提)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의 ① 1, 6~10은 “칭의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② 1~5, 9~11절은 “칭의의 효력”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전체 제목을 “칭의의 근거와 효력”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칭의의 근거(1, 6~10절)

칭의의 근거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1절 전반)인데, 이것은 칭의를 전달하시는 과정상에서 나타난 표면적 근거일 뿐이고, 실제적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이 구원의 근거가 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6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이 뜻은 인간이 선을 행할 힘이 없을 때란 뜻) 기약대로(이 뜻은 언약의 의미가 아니고 ‘때가 되매’란 뜻이라고 합니다. ‘카타카이론’, κατὰ καιρόν)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자(불신상태의 선택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시므로 불신상태의 대상을 위하여 속죄의 근거인 십자가를 지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8절에서 구원의 대상이 “죄인되었을 때에(범죄의 강도가 불경건보다 더 심함을 뜻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셨고, 또 10절에서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이 뜻은 죄인보다 더 강한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뜻함)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도를 일반적 희생에 비교하여 강조하셨습니다. 즉 “의인(바르게 사는 사람, ‘디카이오스’, δικαίοs)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착한사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아가도스’, άγαθόs)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하신 것은 바울사도가 자신이 보고 느낀 사회적 경험을 피력한 내용입니다(이런 뜻이 유기적 영감설을 믿는 예증임). 다시 말하면 죄짓는 자나 악한 자를 위하여 죽어주는 인간은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경건치 못한 대상, 죄인, 또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위하여 희생하게 하셨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8절 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9절에서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하셨는데, 여기의 “피로 인함”이란 뜻은 십자가와 부활을 포괄하는 뜻으로 아셔야 합니다(롬 4:25).

2. 칭의의 효력(1~5, 9~11절)

1) 칭의의 효력 첫째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영적 은혜 전체를 의미합니다. 칭의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 않게 되므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9절 하반에서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셨고, 10절 하반에서도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셨으니,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로 받는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의 효력은 1절 하반의 말씀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란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셨고, 2절에서도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하셨으며, 9절에서도 “더욱 그로 말미암아” 하셨는데, 이 뜻은 예수님의 중보의 공로도 있었지만 주님의 동참이 필수적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구원이나 영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3:17, 17:5; 요 5:18~20, 27, 14:6, 9). 성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10절 하반에서도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칭의를 받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화평과 화목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난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평안이 되고 복이 된다”고 하셨습니다(욥 22:21). 또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셨는데, 이 뜻은 십자가의 돌아가신 것만으로 속죄, 화목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그것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3) 2절에서 “믿음으로 서있는(신앙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은혜(하나님과의 화평, 1절)에 들어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전체적이라고 생각할 때 믿음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현실 생활 속의 즐거움이요, 만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칭의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화목(화평)도 없고, 따라서 구원 영생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은혜에 들어감”이란 하나님과의 화평뿐 아니라 모든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1:12, 히 4:16).

4) 2절 하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연회에 초청을 받지 못하면 갈 수 없지요. 대통령 취임식에도 꼭 초청대상만 갑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연회(영광의 자리)에 특권으로 참석하여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칭의로 말미암아 양자의 특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 8:29~30). 11절에서도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도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 하셨으니, 이 뜻도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현세적인 것들로 즐거움을 삼고 만족할지 모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가까이 대해주시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쓸 때에 친구 목사님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안부를 묻기로 “내가 로마서 강론을 쓰고 있다는 이 사실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한즉 “참으로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5)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갖는 일입니다. 3~4절에서 “다만 이 뿐 아니라(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 하시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은 성도는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연단과 소망의 열매를 맺어 자기 정진에 힘쓰고, 고난도 십자가처럼 영광의 결과로 승화시키는 것이요,

6)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결과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깨닫도록 우리 마음에 감동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되지 않으면 소망대로 성취되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만하고 또 기뻐하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소망을 갖도록 성령님이 역사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해주시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말씀이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넘치게 주시는 뜻, 욜 2:28) 됨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성도의 믿음을 방편으로 주시고, 칭의를 받으면 구원을 물론 하나님과의 화평과 은혜를 유지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함과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갖게 됨과 성령으로 받은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제 15 과 아담의 범죄와 예수님의 은혜 (롬 5:12~21)목록으로


이 본문을 여러 차례 읽고 문단 별로 뜻을 살핀 결과 ① 12~14절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말씀”이고, ② 15~16절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이며, ③ 17~21절은 매 절마다 “범죄에 대응하는 은혜”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와 예수님의 은혜”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아담의 범죄에 대한 말씀(12~14절)

1) 12절의 “이러므로” 하신 말씀은 앞부분의 말씀과 연계하여 칭의의 근거(하나님의 사랑)를 말씀하신 것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즉 그의 타락적 영향이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것은 당연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하셨으니, 이는 아담이 최초의 인간으로 계율을 받고도 어긴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와가 먼저 범하고 아담을 유혹하였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뜻은 범죄를 경계하여야 할 인간이 처음 죄를 범함으로 죄의 문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음”은 “정녕 죽으리라” 하심 말씀대로(창 2:17) 결과가 도래하였다는 뜻이고, 이 사실은 나중에 율법으로도 선포해주셨습니다(롬 6:23; 요일 3:4, 5:17; 신 30:15).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경위는 창 3:1~6의 강론을 참고하십시오. “이와 같이(한 사람의 범죄가 세상에 죄를 영입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은 아담의 범죄가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죄책을 전가하였고, 또 부패성으로 인한 자범죄의 가능성도 전달하였다는 뜻이며, 따라서 범죄한 결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2) 13절에서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함은 율법이 모세 때에 선포된 것이므로, 그 이전 시대에도 있었음이 사실이나(노아 홍수 및 소돔의 멸망이 그 증거임) “율법이 없을 대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함”은 율법의 잣대가 없었기 때문일 뿐, 양심에 근거할 때(롬 2:15) 여전히 죄는 있었던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율법이 없었던 시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으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없던 시대에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은 죄를 안 짓고 살았다는 뜻이 아니고, 율법의 정죄는 없었으나 죄는 여전히 지었다는 뜻이며, “아담과 같은 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 계약을 범한 죄이고(창 2:16~17), 그 후의 인류들은 양심적으로 옳지 못한 죄를 진 것이므로 구별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원죄와 자범죄가 있은즉 사망이 왕 노릇(엄중한 심판을 받은 뜻, 노아 홍수나 소돔의 멸망이 그 실 예임)하였다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란 뜻이 무엇일까요? 아담은 피조물이란 점에서 예수님과 다릅니다. 그러나 “표상”이란 뜻은 공통점을 내세운 상징을 뜻합니다(투포스, τύπος). 아담과 예수님과의 공통점 은 ① 무죄 인간으로 오신 것과, ② 많은 사람을 대표한 것과, ③ 연대적 책임의 대표자 된 것과, ④ 많은 사람에게 실제적 영향을 미친 점입니다(아담은 죄의 영향을, 예수님은 구원의 영향을 미침). 두 인간이 인간을 대표하여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셨으니, 타락 전의 아담이 곧 장차 보내실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이란 뜻도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요셉과 다윗도 역시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이었습니다(창 22:1~14, 49:22~24; 시 22:1~2).

2.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15~16절)

1) 여기의 은혜의 주인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를 동시에 표현하였습니다. 15절 하반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라” 하시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시에 베푸신 은혜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로 섭리하셨고, 예수님은 중보 사역을 하셔서 이루셨지만, 그 두 분이 베푸신 은혜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15절에서 “그러나(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으로 공통점은 있으나)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다” 하시므로, 같은 15절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말씀이 있는데, 앞부분에서 “은사”란 용어를 쓰신 것이 아무래도 차이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은혜”와 “은사”를 구별할 때, “은혜”는 포괄적이고 전체적 의미에서 베푸시는 선물을 뜻하고, “은사”는 은혜 안에서 각 사람에게 전문적 지혜를 주시는, 즉 “특별한 기술에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은혜(카라스, χάρις)는 모든 은혜로운 행위의 원천을 뜻하고, 은사(카리스마, χάρισμα)는 은혜롭게 행하여진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은사”란 전문성 있는 능력, 또는 어렵게 성취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보셔야 합니다. 즉 아담과 예수님이 공통성 있는 인물이지만, 아담은 범죄할 때 기분 좋게, 또 쉽게 범죄하여 인류에게 불행을 주었지만,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하시므로 아담처럼 그렇게 쉽고, 재미있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선 아담은 유한한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신분이 십자가로 은혜를 베푸셨은즉, 그 범죄와 같지 않음이 사실인 것입니다. “곧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12절과 같은 뜻, 죽었다는 의미는 영적, 육적, 법적 심판의 뜻이 있음, 창 2:17 참조)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하시므로 범죄의 세력이나 심판의 능력보다 은혜의 강도가 더 컸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16절에서는 15절의 “은사가 그 범죄와 같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 선물(구원의 은혜)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 않으니(15절 초의 말씀과 같은 뜻)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15절과 같음) 은사는 많은 범죄(인류 개개인의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범죄와 심판은 아담의 타락으로 쉽게 전가되고, 모든 인류가 연쇄적으로 심판 대상이 되었지만, 구원과 은혜는 타락한 인류 개개인의 범죄 상태에서 속죄하여 칭의를 베푸는 것이므로 범죄가 파괴라면 구원은 복구로 비교할 만큼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또 있습니다. 타락은 인간이 저지른 일이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어주셨고, 또 구원의 최종 목표가 에덴동산의 회복이 아닌, 부활과 내세 천국으로 바꾸어주신 것인즉, 구원의 폭이 넓어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범죄에 대응하는 은혜(17~21절)

본 절에서는 매 절마다 범죄에 대응하는 은혜를 대조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1) 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범죄와 사망이 성취된 뜻은 12절과 같고, “사망이 왕 노릇” 하였음도 14절의 왕 노릇에 대한 설명과 같습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말씀으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범죄에 비할 때 은혜의 역사는 더 큽니다. 그런 뜻에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은혜와 의의 선물(칭의)을 넘치게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라” 하시므로 구원의 공로를 오직 예수님 한 분께만 돌려야 할 것과 구원의 현 상태에서(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듯 영광과 능력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범죄와 은혜가 클수록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을 왕 노릇하듯 성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모든 인류)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렀다” 하시므로 역시 범죄와 그 결과에 은혜의 역사로 대응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죄와 구원의 요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과 순종이라고 다음 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에서 “한 사람(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전 인류)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십자가와 부활)이 택한 백성의 죄를 면케 하는 칭의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3) 20절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모세 때에 선민들에게 주신 뜻)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더한다”는 뜻은 죄의 인식을 더 많이 갖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에 민감하므로 죄를 경계하고, 또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실 목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음”은 하나님이 죄 많은 상태를 아시고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 계획을 수립하셨기 때문입니다(롬 5:6, 8, 9). 죄가 더한 것을 화재의 잔해나 버려진 물로 비유한다면, 구원의 역사는 그 잔해와 버려진 물을 원상회복하는 역사와 같은즉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21절에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죄의 값이 사망(벌 받는 뜻)임을 알면서도 왕 노릇하듯 범죄를 합니다. 참으로 사악한 형편이지요. 여기에 대응하여 은혜주시는 형편도 능력적이었은즉(십자가의 능력을 발동하여, 고전 1:18) 의를 힘입은 성도들도 크게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영원한 중보의 뜻)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범죄 상태보다 구원하는 힘이 강하지 않으면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은혜 아래서 힘 있고, 당당하게 왕 노릇(승리의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범죄하지 말라 (롬 6:1~11)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범죄하지 말라” 또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전체의 내용이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고,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의 영적 생명(인격의 주)이 되셨기 때문에 최대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1~5절은 “세례를 받은 의미”가 그러하고, ② 6~11절은 “주님과의 연합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다는 것입니다.

1. 세례를 받은 의미(1~5절)

이 본문에서 성도가 세례를 받은 뜻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바 그 연합이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뜻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1)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하셨으니, 이는 오해하는 자들의 의도를 가상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본문 서두에 “그런즉” 하신 것은 5:20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을 연계한 것인데, 혹이라도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은즉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인간의 범죄가 행복을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롬 5:20도 그렇고, 또 “인간이 연약하고 죄인 되고 원수 되었을 때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이나(롬 5:6, 9~10),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나(마 9:12), 빚 탕감을 많이 받은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말씀이나(눅 7:42~43), 또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롬 5:16)는 말씀들입니다. 죄는 짓지 않아야 할 것이요, 죄가 은혜를 받도록 만든 방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다 구원하시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한 자문자답으로

2)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하셨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셨으니, 여기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범죄의 유혹과 상관없이 된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주님처럼 (자신의 옛사람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죄와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신 뜻은 범죄하는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3, 4절에서 세례 의식의 의미를 두고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3) 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하셨으니, 성도가 세례를 받는 의미 중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신의 옛(믿기 전) 인격이 연합하여 함께 죽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옛 인격이란 부패성이 발동하는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옛 인격이 주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하신 뜻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완전히 돌아가신 사실과 함께 성도의 옛사람도 완전히 죽은 것으로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은 성도에게 옛사람이란 부패성이 아주 죽어 없어졌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성도라도 부패성이 다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옛사람이 함께 죽었다”는 뜻은 그만큼 강한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죄를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4)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는데 그와 같이 우리(성도들)도 또한 새 생명(거듭난 새 인격, 예수님의 인격)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어 장사된 줄 믿고(갈 5:24), 새사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예수님의 마음, 빌 2:5)으로 사는 성도는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과의 연합의 성격(6~11절)

1) 5절에서 주님과 성도와의 연합 성격은 십자가와 부활에까지 연계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성도들)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하셨으니,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뜻은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고 주님과 하나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심과 성도 자신도 그 십자가의 죽으심에 연합된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십자가에 연합한 것처럼 주님의 부활에도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부활에 연합되는 뜻은 성도의 거듭난 생명과(벧전 1:3) 새 인격으로의 변화와 장차 있을 영광의 부활을 다 함께 받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연합됨은 심판 받음의 연합이고 부활은 영광과 영생에 연합인 것입니다.

2) 6~7절에서 “죄의 몸이 멸하므로 의롭다 하심을 뜻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경험적 지식임, 기노스코, γινώσκω; 천래적 지식은 ‘오이다’ ῏οιδα라 함, 롬 13:11)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하신 말씀에서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은 2절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와 같고, “죄의 몸이 멸하였다”는 뜻은 육체가 죽으므로(죄에 대하여 죽은 몸으로 생각하는 것) 범죄 할 도구가 없어졌으니 무엇으로 죄를 짓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의 “죄의 몸”이란 뜻은 몸을 “성령의 전”으로 표현하신 말씀(고전 6:19)에 위배되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의 몸은 부패성(살크)을 뜻하지 않고, 신체(쏘마)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의 몸이란 범죄의 도구를 의미하는바, 대부분의 범죄가 육신의 정욕으로 말미암는 것을 연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하심은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죄와 타협할 몸이 없은즉 죄에게 종노릇하듯 끌려갈 것이 없는 것처럼 하라는 뜻입니다.

3) 7절에서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하심은 죄의 종노릇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는 죽은 자(믿음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죽인 자)가 죄에서 벗어나(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의롭다(심판을 면한 뜻) 하심을 받았은즉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음이 마땅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술 취한 사람이 전철 노선에 추락한 것을 본 사람이 생명을 그를 걸고 구출해주었다면 당연히 구조 받은 사람은 주의하여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4) 8절 말씀은 5절의 뜻과 같고, 9절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다시 사망하실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연합한 성도들도 주님이 대신 돌아가셨은즉 다시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 줄 앎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할 줄 안다”는 뜻은 두 번 죽을 염려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육체적 죽음도 죄의 결과이지만, 성도의 죄는 주님이 담당하셨으므로 성도의 죽음을 죄 값으로 여기면 안 될 줄 압니다. 다만 구원의 과정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는 말씀으로 표현(요 11:11, 살전 4:13)하신 것이 그런 뜻인 줄 압니다.

5) 10~11절에서 주님과의 연합에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일시에 끝난 것처럼 연합된 성도의 옛사람도 확실하게 죽어야 함) 다시 산 것(거듭난 뜻)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것이라” 하심으로, 죄에 대하여 확실히 죽은 자처럼 죄와 상관없이 살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기 위하여 산 자처럼 생활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무조건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무조건 복종하는 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7 과 범죄 방지를 위한 유의점 (롬 6:12~23)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을 일고 사색한 결과 “범죄 방지를 위한 (다섯 가지) 유의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제목도 정하였습니다. 전체의 취지는 앞부분의 말씀처럼 “죄를 짓지 말라”는 교훈이요, 부탁입니다. 성도에게 부패성이 완전히 정화되기까지는 항상 유혹과 범죄의 위험을 갖고 있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죄의 유혹을 박차는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마 26:41, 롬 8:12, 갈 5:16~21). 본문을 분류하면 ① 12~13절은 “몸의 용도를 분별하라”는 말씀이고, ② 14~15절은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이며, ③ 16~18절은 “주인이 바뀐 종임을 알라”는 말씀이고, ④ 19절은 “목표의 변화를 가지라”는 뜻이요, ⑤ 20~23절은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1. 몸의 용도를 분별하라(12~13절)

1) 12절에서 “그러므로(앞부분의 내용과 연계됨)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죽을 몸”이란 육체와 영육의 분리로 썩어질 것을 생각하여 비하시킨 뜻이고, 그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함”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끌려가지 말라는 뜻이며,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는 말씀도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롬 8:12~13에 보시면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졌은즉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시므로 몸의 사욕과 몸의 행실을 성령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로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이나 몸의 사욕은 성령님의 뜻을 거스려, 자율적이고, 육체적인 정욕에 이끌려, 분별없이 자신을 방임하는 태도를 의미한 것입니다. 입에서 음식이 당긴다 하여 분별없이 과식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고, 이성적 욕구가 당긴다 하여 분별없이 몸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것처럼 몸의 사욕대로 순종하지 말고 자신을 절제 또는 억제하라는 것입니다.

2) 13절에서도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쓰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는 전체적 몸의 활용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13절에서는 지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 지체를… 또는 너희 자신을” 하신 것은 자신의 인격과 몸과(12절) 지체 전부를 뜻하고, 몸과 지체를 병기로 비유하신 뜻은 투쟁적 의지를 나타내신 말씀이며, 병기가 든 자에게 쓰임이 되는 것처럼 성도의 믿음과 의로운 의지로 자기 몸을 다스려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의 속박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구속 또는 속량(값을 주고 뽑아낸 뜻)된 만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처럼(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의 뜻에만 복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정의인지, 아니면 마귀의 뜻이요 불의인지를 분별함이고, 그 다음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뜻과 정의에만 쓰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2. 은혜를 기억하라(14~15절)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하신 말씀은 13절의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저 하는 의지가 강할 때 사탄의 유혹이 마음에서 떠나므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탄이 떠나고 천사가 수종을 든 것”(마 4:3~11)처럼 죄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하시므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방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15절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법아래 있다”는 뜻은 율법의 명령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바 명령과 정죄력은 죄를 안 짓게 하는 감화나 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은혜 아래 있다”는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의의 은총을 주신 것을 믿을 때 큰 은혜를 받은 자가 감사와 감동에 힘입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시험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죄를 대항하고 거절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경계하는 데는 공의의 힘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3. 주인이 바뀐 종임을 알라(16~18절)

1) 16절에서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주종의 원리와 종속되는 결과를 말씀한 것입니다. 주종의 원리는 순종 받은 자가 주이고, 순종한 자가 종이란 뜻이요, 종속되는 결과는 죄에 순종한 것이었으면 사망의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의미상 생략되었음) 순종한 것이면 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실 중보자가 되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의로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17~18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불신앙 때에 하나님을 몰랐으므로 가책 없이 죄에 이끌린 뜻)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믿음과 생활에 대한 사도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하셨으니, 이는 모든 성도가 믿기 전에는 진리에 속박됨 없이 자율적으로 범죄하였으나, 진리를 안 다음부터는 진리의(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종(노예)이 포악한 주인에게 팔려가서 범죄의 노예가 되고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았는데, 그를 불쌍히 여긴 의인이 나타나서 희생적으로 노예의 대가를 치르고 그를 속량(레 25:48, 신 7:8, 갈 4:5;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뜻)하여 그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선한 주인에게 팔았다고 하면, 그때부터 그 노예는 종의 신세는 변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종(주인의 자녀로서 종 노릇 하는 상태; 요 1:12, 롬 8:29)이 된 것인즉, 악한 주인이 범죄를 명하는(성도가 받는 악의 유혹) 속박에서 깨끗이 해방된 것이고, 선한 주인의 의롭고 선한 뜻에만 순종하고 충성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사탄과 죄의 종에서 하나님과 진리의 종이 된 것을 알고, 성경 중심의 생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4. 목표의 변화를 가지라(19절)

이 목표의 변화는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인이 바뀌었으므로 불법의 목표를 거룩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너희 육신이 약하므로” 하신 뜻은 성도에게는 부패성이 남아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한 정욕에 이끌려 범죄의 유혹을 받는 연약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하고 주의하며 노력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 26:41에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살크, 부패성을 뜻함)이 약하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이 당시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핍박자들의 가혹성에 몹시 약해진 상태에 있었으니, 마음은 담대해지기를 원하나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그 연고로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 못하였지요(마 26:56). 또 고전 3:1에서도 “육신에 속한 자”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뜻도 역시 연약하여 유혹(현세욕, 범죄욕 등)을 많이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사람의 종속 또는 변화되는 과정을 사회적 성격으로 설명하신다는 뜻) 전에(믿기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몸)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하나님께) 종으로 드려 거룩함(순결)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이 약하므로 항상 유혹을 받지만, 믿기 전에 부정과 불법을 방치하던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의를 실천하는 용도에만 써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깨달으라(20~23절)

1) 과거에는 20절의 “죄(사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으니(의를 시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본분을 느끼지 못한 뜻)”, 21절에서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아무 유익이 없었다는 뜻)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심판과 심판의 결과인 사망의 두려움을 모르고 어리석게 행하였으나 진리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만큼 변화되었고,

2) 따라서 “사망이 영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 과정 중의 속죄와 칭의와 양자(하나님의 종 됨), 성화, 영화의 과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분은 <기독교신앙백과> p.304의 “구원 받는 과정”을 참고하십시오.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셨으니, 죄의 결과는(속죄 받지 못할 때) 사망(영적 죽음, 엡 2:1; 육체의 죽음, 히 9:27; 심판의 죽음, 계 20:14)을 이룸이 하나님의 공의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중보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롬 6:15~16)란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종임을 확실하게 믿으시고, 죄와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힘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율법에 대한 지식 (롬 7:1~8)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율법에 대한 지식”을 일깨워주십니다. 복음적 성도들도 알아야 하지만, 특히 율법주의적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도들은 더욱 잘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① 1~3절에서는 “율법의 유효 시기와 한계”를 말씀하셨고, ② 4~6절에서는 “율법에서의 해방”을 말씀하셨으며, ③ 7~8절에서는 “율법의 정죄 역할”을 말씀하셨습니다.

1. 율법이 유효 시기와 한계(1~3절)

1)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 아는 자들”이란 법의 내용과 효력을 아는 상식을 뜻하고, “율법”이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계율과 구약의 말씀 전부를 뜻하지만(모세의 율법, 눅 24:44, 요 1:45; 율법이나 선지자, 마 5:17, 7:12; 시편, 요 15:25, 시 35:19), 좁은 의미로는 선민들이 모세로부터 받은 계율을 의미합니다. “그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뜻은 어느 법이든 그 법을 지킬 자가 살아있는 동안만 지키는 것이고, 또 죽으면 지킬 수도 없으며, 죽은 자에게 심판의 효력도 미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모든 법과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 법 아는 자의 상식이란 뜻입니다.

2) 2절에서 비유컨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부부의 도의상)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선민들에게 적용하면 선민(신부)이 율법(신랑)과 혼인하였는데, 율법으로 비유된 남편이 죽었다는 것은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공의 실현을 못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죽이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민 중 한 분이시지만 율법의 불공정한 판단으로 돌아가셨은즉 다시 율법을 지키실 의무가 없어진 것처럼 예수님과 연합하여 함께 죽은 성도들도 역시 율법에서 해방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남편이 죽으면 딴 남편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선민들도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신랑으로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3) 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예수님 오시기 전 율법 시대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율법을 범하면 죄가 됨), 남편이 죽으면(율법의 효력 상실을 뜻함)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뜻) 다른 남자(복음적 신앙, 예수님 영접을 뜻함)에게 갈지라도 음부(죄 되는 일)가 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의 유효 시기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므로 율법의 공의성을 상실한 때요, 또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내용을 사랑으로 일깨우시고 실천 모범을 나타내시므로 율법의 성격을 더 완전하게 하신 때까지인 것입니다(마 5:17, 11:12; 눅 16:16; 고전 13:10). 고전 13:10에 보시면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하셨으니, 여기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입각한 율법 실천이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은 율법의 사랑 계명들입니다. 율법은 사랑의 강령만 나타내고 실천 모범이 없었은즉 부분적 교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예수님 안에서 퇴색 당하여 쓸모없이 되었고, 폐하여진 것입니다(히 8:7, 13).

2. 율법에서의 해방(4~6절)

1) 4절에서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예수님의 희생을 뜻함)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심판으로 돌아가셨을 때 성도들도 함께 심판을 받았다는 뜻)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성도가 율법과는 상관없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귀속되어 하나님께 영광(열매 맺음)을 돌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 5절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깨달음이나 실천이 미흡한 상태, 고전 3:1) 율법으로 말미암는(율법에 의하여 정죄될 만한) 죄의 정욕(부패성)이 우리 지체(자신의 인격의 부패한 부분)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사망의 결과를 초래하도록 범죄하게 되었다는 뜻)”, 6절에서 “이제는(복음을 믿게 된 후) 우리가 얽매었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은 뜻) 율법에서 벗어났으니(해방 또는 자유로워진 뜻)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한 뜻)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율법과 율법적 의식)으로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그대신 예수님께 속박되었다는 뜻입니다.

3. 율법의 정죄 역할(7~8절)

1) 7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상적 질문에 답을 하신 것인데, “율법이 죄냐?”고 질문한 이유는 5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을 초래하는 열매를 맺었다”는 말에 오해가 없기 위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짓게 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요. 또 정죄 심판으로 사망을 선포하는 것이지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출 20:17, 신 5:21 말씀)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하시므로, 율법은 오늘날 사회의 형법과 같아서, 사람 보기에 죄처럼 여겨져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사람은 이를 죄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롬 2:13~15).

2) 8절에서 “그러나 죄(유혹의 역사)가 기회를 타서(사탄이 기회를 타서 유혹한다는 뜻, 예를 들면 배고플 때 도적질할 마음을 갖게 함과 같음) 계명(율법과 같은 뜻)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이 부분의 ‘말미암아’는 죄를 드러나게 하는 뜻임, 즉 탐심은 도적질이 아닌즉 죄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으나 율법이 탐심을 금하였기 때문에 각양 탐심까지 죄의 선상에 올려졌다는 뜻) 이는 법(율법의 규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죄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정죄 역할) 죄가 드러나므로 심판 아래 가두는 역할(죄의 값이 사망에 이르도록, 롬 6:23)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므로 율법을 최대한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잘못되는 것입니다(갈 3:10).

 

 

제 19 과 율법이 끼친 영향 (롬 7:9~25)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율법이 성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 9~14절은 “율법이 성도를 정죄하여 죽게 함”이고, ② 15~24절은 “율법으로 가책을 받아 갈등함”이며, ③ 25절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고 감사함”입니다. 이 말씀에서 율법은 성도에게 가책과 정죄와 심판에 가둠과 율법의 의로는 구원받을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고, 또 의를 행할 힘도 주지 못하나(14절), 결국은 구원의 희망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 율법이 성도를 정죄하여 죽게 함(9~14절)

1) 9절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율법의 의미와 사명을 몰랐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죄의 가책 없이 떳떳하였다는 뜻) 계명이 이르매(율법을 알고 본즉)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즉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죄 값으로 죽어야 할 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하셨으니, 왜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었는가?” 할 때, 신 30:19~20에 보시면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는 말씀이 있으니, 이 뜻은 성도가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면(시 1:2) 진노 받지 않고 현세에서 복되게 생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율법을 지키면 생명에 이르는 줄로 알고 있는 성도가 있었지만, 이 생명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계명이 축복보다 정죄를 앞세웠기 때문에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먼저 정죄한즉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자신이 죄인임을 안즉 사망에 이를 자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3) 11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 하셨으니, 여기의 “기회를 탄” 의미는 8절의 뜻과 같고, “나를 속인 것”은 바울이 율법주의 사상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의 무지로 속은 것을 뜻합니다. 즉 율법이 자신을 구원하는 줄로 잘못 알고 속은 것입니다(빌 3:6, 갈 3:10). 그러나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 사명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심판 받아 죽을 자임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결국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정죄하여 심판의 대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4) 12절에서 “이로 보건데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셨으니, 율법에 대하여는 7:1에서 말씀드렸고, 계명은 율법 안에 있는 것으로 조리 있게 꾸며진 계율입니다. 그것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하나님의 속성(벧전 1:16, 마 19:17, 출 9:27)을 따라 순결하다는 뜻이요(시 19:7~9), “이로 보건데… 선하도다” 하신 것은 계명이 죄를 밝히고,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헌법도 존중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계명이겠습니까?

5) 13절에서 “그런즉(이렇게)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아주 사망으로 끝나게 하는 것이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심판에 이르게 한 것)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율법이 강력하게 죄를 드러내고 인식시킨 다음, 몽학선생의 역할(갈 3:24 참고)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한 후 구세주를 만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심히 죄 되게 느껴야 할 이유는 심판의 두려움을 알고 구속의 은혜를 더욱 크게 사모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충격이 클수록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도 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정죄하여 죽게 하는(심판 아래 두는 것) 이유는 구원의 소망을 율법에 두지 말고 복음에 두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25절).

6)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하신 말씀에서 “율법이 신령함”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요, “육신에 속함”은 연약을 뜻하며(고전 3:1), “죄 아래 팔린 것”은 역시 바울 자신도 결백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2. 율법으로 가책을 받으며 갈등함(15~24절)

1) 15절에서 “나의 행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율법을 시행하는 선행)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거부하려 하는 죄)을 함이라” 하신 말씀에서, 바울이 “자기의 행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은 범죄한 사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도 있고, 자기의 이성이 원하는 선을 시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잘못을 행하게 되는 연약이 어떻게 자신을 지배하였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을 알고 의지적으로 시행하였을 것인데 어떻게 하여 원하는 본심대로 시행하지 않고, 본심이 원하지 않는 것을 시행할 수 있었던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원치 않았던 죄를 짓고, 크게 후회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요, 그 상태가 기계적으로 작동 또는 선택되지 못하는 문제를 고민한 것입니다.

2) 16절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부당한 행위와 마음가짐)을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시므로 자기 속에 두 지배적 역할이 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한 만큼” 자기 속에 다른 지배 세력이 있다는 뜻이요,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함”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이 죄인즉(율법을 못 지킨 것) 율법의 선함을 시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3) 17절에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자기의 본심)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자신의 부패성)니라” 하셨으니,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왜곡하여 “죄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닌 죄가 짓는다”는 주장을 하는 이단파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두 인격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속에 죄를 짓는 다른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성화된 부분과 성화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성화된 부분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고, 성화되지 못한 부분에는 사탄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속에 거하는 죄”란 자기 속에 있는 자신의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14절 참조)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로 아노니(자신의 연약을 인식하는 뜻)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능력)은 없노라” 하시므로 선행의 능력이 자신이나 율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내용만 제시할 뿐 능력은 주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로 선행의 능력을 주시지 않는 한, 19절 말씀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약한 성도는 말씀과 성령님께 붙잡힐 때 선을 행할 수 있고,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5) 19~20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하시므로 바울이 경성하지만 여전히 연약하여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셨고,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 하신 뜻은 17절의 의미와 같고, 범죄의 책임을 사탄에게 돌리는 뜻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사탄은 자신의 부패성에 근거를 두고 유혹하였지만,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은 곧 자신의 부패성에 근거한 자신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6) 2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 하시므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부분은 거듭나고 성화된 인격 부분이고, 악이 함께 함은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부패성이 남아있는 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육체의 장막을 떠날 때 없어질 것입니다(욥 19:26, 갈 5:16). 22~23절에서 “내 속 사람(거듭난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성경을 사모하며 사랑하고 연구하며 지키는 뜻), 내 지체 속에서(자기 안에 있다는 뜻, 속사람에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 한 다른 법(유혹의 역사)이 내 마음의 법(속사람)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하시므로 마음의 법(양심 또는 율법)과 지체의 법(유혹의 역사)과의 갈등, 대립에서 유감스럽게도 패배하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대립과 갈등을 강하게 이겨야 할 것입니다.

7) 그리하여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시고, “이 사망의 몸(죽어 마땅한 자신)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시므로 바울 사도 자신은 건져주실 자 구세주를 대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고 감사함(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구원의 소망이 예수님께만 있고,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믿고 있는 까닭이요, “그런즉 내 자신(거듭난 속사람)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자신의 부패성 부분, 유혹받는 연약, 고전 3:1) 죄의 법을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죄의 법”이란 하나님의 법 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법과 유혹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유혹과 싸우면서 생활하고 자기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엡 6:12, 딤후 4:7).

 

 

제 20 과 예수님 안에 있으면 (롬 8:1~1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되나?)”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셨고, 10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하셨으며, 11절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이란 말씀을 두 번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되나?를 살펴보았습니다. ① 1~2절에서는 “정죄함이 없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하셨고, ② 3~4절은 “정죄와 사망을 폐하신 방법”을 말씀하셨으며, ③ 5~9절에서는 “육신과 영을 따름에 대한 갈등”이 있음과 ④ 10~11절에서는 “죽을 몸도 살리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정죄함이 없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1~2절)

1) 1절의 “그러므로”는 앞의 말씀에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앞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는 탄식이었습니다(7:22~25).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하셨으니, “그러나, 그런데, 혹은 그렇지만”으로 번역하였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원문의 이 접속사는 “알라”(ἄρα)인데, 영어로는 ‘then’으로 번역되었은즉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셨으니, 이 뜻은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 안에 있은즉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죄함이 있으면 심판(지옥 가는 죽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요 5:24) 하셨으니, 이는 곧 무죄 선고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와 원죄까지 합하여 다 면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고통과 죽음을 맛보아야 하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 범죄에 대한 징계일 뿐입니다(히 12:8~9).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죽음도 죄 값으로 죽는 것이 아닌 구원의 절차로 영육이 분리되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신 뜻이 거기에 있는 줄 압니다(요 11:11, 살전 4;13). 필자가 젊었을 때 성도의 죽음 앞에서 “죄 값으로 육체의 죽음을 겪지만 부활할 것이므로 소망을 가지라”는 설교를 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잘못된 표현이었습니다. 요 11:25에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은 성도의 육체적 죽음이 죄 값으로 벌 받아 죽는 것이란 뜻이 아니고, 그 죽음(영육의 분리)은 구원 과정에서 성화와 영화를 이루시기 위한 절차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받는 모든 고통은 일시적 징계의 차원에서 받는 것일 뿐, 죄 값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 값은 예수님이 다 받으셨고,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2절)입니다.

2) 2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사역으로, 복음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구원 사역에 있어서 중생, 소명, 믿음 등에 역사하여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은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율법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정죄하고, 사망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의 요구”는 4절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2. 정죄와 사망을 폐하신 방법(3~4절)

이 말씀은 곧 복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1) 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계명(율법)을 주셨지만(지키라고 주셨음) 인간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잘 지키지 못하므로 결국 정죄 받게 된 것을 하나님이 복음적 사역으로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육신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은 다음 절에 나오는 육신(5, 6, 7, 8, 9절)이란 용어와 함께 신앙의 미숙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 3:1). 따라서 이 육신이란 뜻을 “믿는 자 속에 남아있는 부패성 또는 육체의 정욕과 현세욕 등”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이란 믿는 자의 연약 즉 육신적 행사들 때문에 죄를 안 짓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명한 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성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신 뜻)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예수님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뜻은 죄 없는 예수님이 그의 육신적 생애의 고난으로(보이지 않게는 영적 고난도 있으셨음, 사 53:11, 마 27:46) 택한 백성들이 심판 받아야 할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4절에서 “육신을 좇지 않고(부패성대로 살지 않은 뜻, 12절 참조) 영(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을 좇는다”는 뜻은 자신의 육신적 소욕을 억제하고 말씀 따라 복종하는 생활을 의미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뜻은 사랑 실천이 계명(율법)의 강령이므로(마 22:39~40) 그것을 실천하신다는 뜻입니다. 명령만 나타낸 율법은 그 시행의 감화력과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범과 구속적 사랑은 성도에게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큰 감화와 힘을 주므로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은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와 사망을 폐하시고 사랑의 대열에 나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육신과 영을 따름에 대한 갈등(5~9절)

1) 5절에서 “육신(3절의 육신 참조)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육신처럼 썩어질 허탄한 일들)을, 영(성령님)을 좇는 자는(갈 5:16) 영의 일을 생각한다” 하셨으니, 여기의 육신의 일은 현세적 자율주의이고, 영을 좇는 일은 신령적이고 하나님 중심을 뜻합니다. 즉 생각하는 경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심판)으로 귀결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구원, 영생)과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요 14:27).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참 평안과 자유(요 8:32)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성도가 갓난아기를 생각하시고, 세속을 떠난 상태와 하나님의 보호 인도 섭리를 믿는다면 평안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셨으니, 크게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이요(요일 2:15), 또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 하셨고, 또 8절에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곧 자기 속에서 부패성이 발동함에 따라 거기에 끌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성도의 거듭남과 함께 내주하시며, 또 말씀과 함께 마음에 정주하십니다(엡 3:16~17, 요 14:17).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말씀(엡 1:13)과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말씀(요일 3:9)도 역시 내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성도에게 거하시되 거역으로 그분을 근심하시게 할 수도 있고 순종으로 역사하시게 할 수도 있으나, 일단 성령님이 내주하셔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 21 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은 자 (롬 8:12~27) 목록으로


본문을 구분하면 다섯 대지가 되고, 그 다섯 대지를 종합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은 자”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① 12~13절은 “육신대로 산 빚을 갚으라” 하셨고, ② 14~18절은 “하나님이 후사로 고난도 함께 받으라” 하셨으며, ③ 19~22절은 “피조물의 탄식을 깨달아 후사의 사명을 다하라” 하셨고, ④ 23~25절은 “바울의 소망적 고백”이며, ⑤ 26~27절은 “성령님의 간구와 도우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은 성도는(14절) 이상의 다섯 가지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1. 육신대로 산 빚을 갚으라(12~13절)

1) 12절에서 “그러므로” 하신 뜻은 앞에 있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가 의의 은총과 부활의 은혜를 받게 되므로(8:10~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사명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졌다” 하신 것은 믿음을 가진 후 마땅히 영적으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육신적으로 살았으므로, 육신적 입장에서 영에 대하여 할 도리를 못하였으므로 빚진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닌즉”, 곧 영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뜻”은 앞 과목에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5절) 인간의 부패성 또는 옛사람의 성정을 따라 세상 중심으로 산 것을 뜻하고, “영적 삶”이란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시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빚 갚는 생활은 육신적 삶을 통제하고 영적 삶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설명은 갈 5:16~20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2)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뜻은 성령님 또는 성경 말씀의 뜻에 복종치 않음을 뜻한즉, 이는 고의적 불순종이요 믿음의 실천이 나타나지 않은 만큼 믿음의 효력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막 16:16). 그러나 “영으로(성령님이 도우심으로) 몸의 행실(육신 따라 사는 뜻)을 죽이면(억제한다는 뜻) 살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산다”는 뜻은 곧 구원이요, 또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믿는 자의 표식이며 생활 태도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미숙하였던 과거를 반성하고 육신대로 연약하게 산 빚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곧 성령을 따라 힘 있게 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후사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14~18절)

1)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양자의 뜻이지만, 후사를 의미하고 특권에 있어서 예수님과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뜻은 곧 성경대로 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2) 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아들과의 비유에서 낮은 신분, 또는 율법의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셨으니,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뜻은 성령님의 절차 있는 역사(중생, 소명, 신앙, 회개, 칭의, 양자)를 통하여 양자의 신분이 되었다는 뜻이며, “종의 영을 받지 않았음”은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심과 동시에 내주하신즉 아들의 신분으로 확실하게 변화된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종이란 속박의 대상이므로 무서워해야 할 신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바”란 아람어의 아버지란 뜻으로, 두 언어(아람어, 헬라어)를 병기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축복을 강조한 뜻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3)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성도의 영적 생명, 요 3:3)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하셨으니, 이 증거의 방법은 성도의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것이므로 성도의 마음에 확신주시는 감동을 갖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혹 귀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것을 의심한다면 이는 성령으로 더불어 증거 받지 못한 것이고, 믿는다면 증거를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영광의 계승자란 뜻)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란 적자와 양자 관계 또는 맏아들과 형제 관계로 같은 영광을 누릴 후사란 뜻입니다. 그런 영광의 소망을 가진 자들인 만큼 믿음생활의 과정에서 당하는 핍박이나 연단 정도의 고난은 의당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상급의 방편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눅 16:25).

4) 18절에서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핍박 또는 연단 섭리로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장차 주실 영광이 고난 분량보다 큰 이유는 상급으로 많이 주시는 뜻도 있지만, 시간적으로 영원히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음의 사명을 인하여 받는 고난을 축복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믿음을 육성시켜야 할 것입니다(시 119:67, 마 5:11~12).

3. 피조물의 탄식을 깨달아 후사의 사명을 다하라(19~22절)

1) 19절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피조물”이란 용어(크티시스, κτίσις)가 매 절에 한 번씩 나옵니다. “피조물”이란 뜻은 무인격의 피조물 모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 아닌 것들도 뜻을 나타낸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할 일”이 그만큼 절실함을 강조하시는 의미에서 의인적(疑人的)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뜻”과 그 유익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전자는 성도의 덕이 빛나는 상태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끝나는 것을 뜻하고, 후자의 이유는 이 구속 사역이 끝났을 때 재앙에 이용을 당하였던 만물(창 3;14~18, 9:11)이 징계의 수단으로 쓰임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말세가 되면서 만물이 새로워지는 결과가 있을 것이므로(계 21:50 피조물들도 그 상태를 고대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20절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허무함이란 인간에게 유익이 없도록 나타남을 뜻함)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무인격의 피조물들을 그의 섭리에 따라 다스리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의 통치적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욘 4:6~8; 마 5:36, 10:29).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18절의 고난 감수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주시는 많은 고난들이 피조물을 통하여 받게 되는데, 그 피조물들이 스스로 허무한 일(인간에게 고난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인간 통치 섭리로 하시는 일이란 뜻입니다. 100년만의 3월 폭설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있었고, 또 전투기 두 대가 충돌하는 등 어려운 일들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설이 있을 때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자 3월 12일에 국회의 탄핵 결의가 있어서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명분 있는 일만 해야 합니다.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일을 보면서 인간들은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19절)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허무한데 굴복한 것, 20절)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과(창 1:31) 인류를 위하여(창 1:28) 창조된 것인데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들도 영향을 받았습니다(창 3:17~18). 그 영향 받는 상태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썩어짐의 종노릇이고, 허무한데 굴복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은즉 “다른 피조물들도 인격이 있다면 계속 썩어짐의 종노릇하기를 원하겠느냐?… 그래서 만유 회복의 때를(행 3:21)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 값으로 가뭄이 임하고, 가뭄으로 인하여 생물들이 죽어갈 때(렘 14:1~6) 무인격자인들 어찌 탄식하지 않겠으며, 구속적 은혜와 만유 회복의 때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 하셨고, 이런 사실을 아는 성도(후사)의 사명은 오직 거룩함에 이르도록 힘쓰는 일인 것입니다(벧후 3:10~13).

4. 바울의 소망적 고백(23~25절)

1) 23절에서 “이뿐 아니라(피조물들만 만유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오순절 이후 초기에 은혜 받은 것)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양자 될 것과 몸의 구속”을 같은 뜻으로 묶은 것은 이 두 가지를 질적으로 승화시켜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음에 소망과 목적을 둔다는 말씀입니다. “양자”는 명분상 양자에서 예수님을 닮은 양자가 되어야 하고, 몸의 구속은 육신적 연약을 성화되도록 힘쓰면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야 함을 기대한 것입니다.

2)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심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천국)를 믿었으므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현세에 있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본 것은 보았으므로 바랄 것이 아님).”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내세의 복)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내세의 상급과 영광을 바라는 성도는 모든 고난을 인내하면서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5. 성령님의 간구와 도우심(26~27절)

1) 26절의 “이와 같이” 하신 것은 성도가 미래의 소망을 갖고 인내할 때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실하게 노력할 때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오라”고 하셨습니다(마 11:28).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신다는 뜻이지요. 성령님이 도우시는 방법과 역사가 많으시지만 특히 기도로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수 있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적중하는 기도입니다. 또 성령님도 인격적으로 탄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탄식은 연약한 자를 대신하여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2) 27절에서 “하나님과 성령님의 뜻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성부 하나님)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간구는 참으로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어떻게 할 때 성령님의 기도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그 방법이 곧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노력할 때인 것입니다. 필자는 꿈 중에 간절한 기도와 회개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잠이 깬 후에는 자신이 퍽 간절한 기도를 했다는 느낌을 갖고 만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 꿈은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은 바에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22 과 끊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 (롬 8:28~39) 목록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7대지로 분류됩니다. 28절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고, 29절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이며, 30절은 “구원의 절차”이고, 31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32절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고, 33~34절은 “구원의 보장”이며, 35~39절은 “끊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분량 많은 마지막 대지를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1.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바울과 동료자들이 믿고 체험한 지식)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엡 6:24).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그 은혜의 내용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역사적 사건들을 뜻하고, 하나님은 대소간 또는 선악간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이신바, 하나님은 그것들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유익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요셉과 모세와 다윗의 길을 참고하시면 그 뜻을 확실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생애에 어려움이 많았어도 나중에 믿음 안에서 살피면 전화위복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창 45:7).

2. 29절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이 뜻은 선악을 아시고 참고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존재 즉 세상에 나올 것을 아신 뜻, 롬 9:11)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예수님의 인성을 닮게 하신 뜻) 미리 정하셨으니(구원을 계획하신 뜻) 이는 그(예수님)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사역을 계획하신 데는 택함 받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도 있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외에 양자들을 갖기를 원하셨고, 그 양자들이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은 자 되기를 원하셨으며, 또 모든 자녀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신 것입니다(시 133:1, 행 2:46~47). 성도가 거룩을 성취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벧전 1:16).

3. 30절은 구원의 절차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이란 29절의 말씀을 요약하여 표현하신 것으로 구원 대상에 대한 예정 교리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정은 실제적 선택의 계획입니다. “부르신 것”은 복음을 영접하도록 이끄시는 소명이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신 것”은 믿음과 회개를 확인하신 후 속죄의 확인으로 무죄를 선포하신 뜻이며(칭의를 뜻함),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것”은 칭의 다음에 따르는 양자의 자격을 주심과, 성화되도록 인도하심과 나중에 부활하여 육체가 영화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영화는 육체 부활을 의미하지만 양자와 성화도 영화로운 범주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4. 31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하여 피조물은 이의를 나타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한 성경은 롬 11:33~36, 9:13, 20~2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그 방도)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뜻은 성도에 대한 보호와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훼방을 못하거나 방어하며 하나님의 뜻이 거역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와 만물도 주셨은즉 대적의 훼방에서 성도를 보호 구원하여 궁극적 구원을 이루시는 일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32~34절의 뜻).

5. 32절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선택 받은 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구원의 포괄적 은혜와 만물)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은혜가 성취되도록 모든 특별한 역사를 다하신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특별한 역사”란 의미에서 ‘은사’란 용어를 쓰신 듯합니다.

6. 33~34절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하셨으니, 이 내용은 절대자의 선택에 이의를 달 수 없다는 것과 죄인을 의롭다 함에 있어서 재판하는 형식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판결한 것이면 상소할 수도 있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판단하여 “의롭다” 하신 것이므로 송사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영원한 중보 사역으로 성도의 구원적 신분이 보장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역사에 승리하신 분이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이 ‘우편’이란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가까운 측근에서 힘 있게 수행하시는 뜻)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 하시므로 롬 8:26~27에 기록된 성령님의 기도와 뜻을 같이 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사실을(눅 22:32) 천국에서도 이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기도를 부탁하셔야 할 것입니다.

7. 35~39절에서 “끊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1)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고난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환난’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염두에 둘 수 있고, ‘곤고’는 개인적으로 각박한 환경을 접함이요, ‘핍박’은 강한 자의 신앙적 타격을 줌이고, ‘기근’은 가난이며, ‘적신’은 헐벗음 또는 옷 벗김을 당함이요, ‘위험’과 ‘칼’은 생명을 위협함입니다. 성도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 36절에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다” 하였으니, 이 뜻과 이 뜻이 왜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지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위의 말씀은 시 44:22을 인용하신 것으로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이 큰 핍박을 받았고, 도살할 양처럼 죽음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나, 믿음으로 이긴 사례가 있다는 것입니다(시 44:22~26, 27:1~6, 40:1~3). 따라서 현재의 성도들도 믿음 안에서 은혜를 힘입어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7절에서 “그러나(고난이 있지만) 이 모든 일(35절의 여섯 가지 고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일시 위태하였지만 예수님의 기도에 힘입어 결국 이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38~39절에서 다시 한 번 확신과 선포를 하십니다. 즉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아무 피조물들이라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셨으니, 위의 열 가지 종목들은 다 그것이 핍박의 효력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죽이는 일, 살리는 일, 높이는 일, 낮추는 일, 또는 현재 일과 장래 일에 영향을 주면서 모든 피조물들을 동원하여 영향을 준다 할지라도 믿음에 붙잡힌 성도는 그 확고성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순교적 신앙이라야 흔들림이 없고, 이 믿음을 붙들어주시는 은혜로 궁극적 구원을 확보해주시는 것입니다(요 16:33).

 

 

제 23 과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 (롬 9:1~16) 목록으로


본문을 상고하면 ① 1~5절은 “바울의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이고, ② 6~16절은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2대지를 대표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1. 바울의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1~5절)

1) 1~2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안 한다” 하신 뜻은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가 된 사실로 인하여(행 9:15) 동족(선민)을 버린 자로 비난을 받음에 대한 변명입니다. 바울과 신앙이 맞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신자처럼 모략한즉 바울이 진심을 강조하는 의미로 동족 사랑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한다” 하신 것은 바울이 진실을 증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과 성령님을 보증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양심과 성령님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 고백의 내용은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인즉, 그 고통을 갖게 된 이유는 동족(형제 및 골육 친척)이 대부분 복음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만 생명인데(요 14:6) 동족들이 복음을 핍박한즉 어찌 근심과 고통이 없겠습니까? 바울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동족을 사랑한다 하여도 믿지 않으므로 극단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2) 그 극단의 표현은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스라엘 선민들)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 하셨으니, 이 뜻은 동족이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크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동족 다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저주 받음(지옥 가는 뜻)을 자초할 수 있는가? 하시겠지만, 원문에는 “끊어진다”는 용어가 없고(성경의 작은 글씨 참조), 저주라는 의미를 “극한 고난”으로 해석한다면 지옥을 감수한 뜻이 아닐 것이요, 설령 그렇다면 가상적 의미로 강조하신 어법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면서 타인의 구원만 바란다면 합리적일 수 없습니다. 희생은 유한 범위에서 성립될 뿐 내세 심판을 건너뛰는 영원한 희생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4~5절에서는 복음을 대적하는 선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복음을 믿고 구원 받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므로 선민 사랑의 타당성을 피력하셨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선민이란 뜻)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다” 하셨으니, 선민 중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은혜에 손색이 없다는 뜻이요, “율법을 세우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율법을 선민들에게 주셔서 율법적인 목적(메시야 계시)을 성취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조상들도 너희 것이요(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들의 조상이란 뜻) 육신으로 하면(현실적 혈육 계통)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마 1:1~16, 눅 3:23~38)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 하시므로 그리스도는 만물을 초월하여 계신 영광의 주이신바 그분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멘”의 뜻은 모든 영광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돌려져야 할 것을 믿고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6~16절)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은 일반적 의미(생활을 살펴주시는 문제)에서 부족적, 민족적 의미이고, 특별한 의미(구원)에서는 혈통적이 아닌 주권적 선택 언약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부족적이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이고, 민족적 의미는 야곱의 12지파를 중심한 선민 국가이며, 이들에 대한 언약은 일반적 증거 또는 메시야 언약과 함께 개인적 구원적 선택이 개별적으로(전체는 아님) 약속된 것입니다.

1) 6절에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선민에 대한 축복과 구원 약속)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는 말씀은 선민 국가가 바벨론 침략 때 망하고 계속 회복되지 못한즉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언약(구원적 약속)을 폐하셨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오해는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복 주시는 언약은 선민이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할 때 주신다는 것이었은즉(신 28:1~19)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이고, 메시야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신대로 시행하셨으며, 영적 구원에 대하여서도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 선택(부분의 뜻함)하신 대로 구원하셨으므로 그 언약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혈통적 후손)이 다 이스라엘(영적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선민)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혈통적 후손)가 다 그 자녀(영생할 자녀, 눅 19:9)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 난 자(영적 선택자)라야 네 씨(영생의 대상)라 칭하리라” 하셨고, 또 8절에서 “곧 육신의 자녀(혈통)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이삭처럼 영적 구원의 선택을 받은 자)가 씨(하나님의 후사)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선택은 선민의 혈통을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서 특별 선택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9절에서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것을 근거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 18:10의 인용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100세, 90세로 생산의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능력으로 후사를 주신 것처럼 메시야 언약의 실천이나 영적 구원의 선택도 혈육의 성격을 떠나서 하나님의 능력의 선택으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언약의 성격은 아브라함 부족 대상, 12지파 선민 국가 대상 및 개인적 영적 대상으로 선택하셨고, 개인적 대상에만 영적 언약이 있고, 그 이외의 단체적 대상은 일반적 통치의 언약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10~11절에서는 선택적 언약을 하실 때 부패성 여부는 감안하시지 않았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성취되게) 하려 하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선택의 성격에 당사자의 선악을 참고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무조건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선택의 성격이 죄인들에게 희망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4) 12~13절에서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하셨으니 축복의 성격에서도 당사자의 선악을 고려하시지 않음을 뜻하고, 13절에서 “기록된바(말 1:2 이하 인용)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다” 하시므로 사랑과 선택은 물론 미워하시는 것과 유기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실 특권도 있고 미워하실 특권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5) 14~16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권적 사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이며, 또 죄인은 긍휼을 힙 입어 구원 받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선택의 불공평을 염두에 두신 뜻)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출 33:19에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오직 주권에 의하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사람이 소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님) 달음박질(노력)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선택 그 자체가 인간의 어떤 조건에 기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구원적 은혜는 오직 선택된 자라야만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다음 절에도 계속됩니다.

 

 

제 24 과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 (롬 9:17~33)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을 읽고 구상한 끝에 총 제목을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로 정하였습니다. 본문에는 구원과 관련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택에 관한 것과 악에 대한 방치 및 긍휼에 대한 것, 그리고 때를 따라 구원하시는 문제들을 거론하셨기 때문입니다. ① 17~18절은 “선민 구원과 관련하여 바로를 강퍅케 하심”이고, ② 19~23절은 “피조물이 창조자의 주권에 도전할 수 없음”이며, ③ 24~29절은 “구원 사역의 범위와 완성”이요, ④ 30~33절은 “율법주의가 의에 이르지 못함”입니다. 구원적 섭리란 구원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사전 계획을 의미합니다.

1. 선민 구원과 관련하여 바로를 강퍅케 하심(17~18절)

1) 17절에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이 뜻은 “출 9:16에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인데 “성경”을 주격으로 하여 바로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으로(말씀 전달은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셨음) 나타내신 것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즉 영감 된 말씀(성경)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기신 뜻입니다. 행 20:32에서도 말씀의 인격성(말씀이 부탁을 받고, 말씀이 든든히 세워 거룩케 하신다 하셨음)을 나타내셨고, 요 1:1에서도 말씀을 하나님 자신으로, 창 1:3에서는 창조력의 주인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선민 구원 사역)을 위하여 너(바로 왕에게 하신 말씀, 출 9:13~19)를 세웠은즉 곧 너로 말미암아(바로의 강퍅함에 따라, 출 9:34~35, 10:20, 27, 11:10) 내 능력을 보이고(바로의 강퍅에 따라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심)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의 출애굽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비택자인 바로 왕을 쓰셨고, 또 그를 강퍅하게 하셨으며(이 뜻은 하나님이 강퍅을 조장하신 뜻이 아니고, 그의 강퍅을 방치하신 것임, 요일 1:5, 약 1:17, 고후 5:21) 그 일로 인하여 재앙과 능력이 나타나고 바로가 선민의 출애굽에 협력하니(재산 등을 갖고 나가도록 함, 출 12:38~39) 이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의 행동과 강퍅도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됨을 알 수 있습니다(잠 16:4, 요 19:10~11).

2) 18절에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뜻대로 긍휼 베푸실 자와 강퍅하도록 버려두실 자를 정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배려하시지 않고 권고하시지 않으면 그 대상은 스스로 강퍅하여지고, 그 강퍅(하나님을 거역하는 완악)으로 인하여 징벌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피조물이 창조자의 주권에 도전할 수 없음(19~23절)

1) 19절에서 “혹 네가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하신 뜻은 하나님의 주권을 복종치 않으려는 자들의 이의 제기가 있을 수 있음을 가상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하셨다면(18절 참고) 어찌 그의 죄를 허물로 여기시느냐? 누가 그 뜻(바로의 하는 일)을 대적하느뇨?” 하면서, 바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범죄의 방조자나 책임자가 아님을 17~18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과연 악인의 범죄나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2) 20절 이하에서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피조물 된 입장에서) 하나님을 힐문(흠잡는 질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인간을 비하시킨 비유)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시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의 자유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것 외에도 자신의 존재 형태의 자부심과 고유적 사명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시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22~23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자기의 뜻에 따라)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심판의 위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계 16:1)을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반대로) 영광 받기를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은혜의 보따리)에 대하여 (이것을 원하는 자에게 베푸시므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하시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는 진노를 내리시고, 또 누구에게는 오래 참아주시며, 또 누구에게는 긍휼과 은총을 베푸셨다 하더라도 피조물은 불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주권적 구원 섭리를 믿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구원 사역의 범위와 완성(24~29절)

1)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 중 귀히 쓸 그릇(21절)에 해당하는 자로써 선택 받은 바울 자신 또는 이방인 중에서 선택 받은 로마의 성도들이란 뜻이요, 또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25절(호 2:22)과 26절(호 1:10)에서 구약을 인용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글에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이방인이란 뜻)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하셨고, 또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선민을 책망하시고 징벌하신 곳)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을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신약 시대에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 사역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주전 700년경의 선지자입니다.

2) 27절에서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사 10:22)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 하시므로, 여기의 “남은 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 중 구원이 성취되지 않은 자만 그 후시대에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구원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 섭리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3) 28절에서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 실행과 계획 완성에 변함이 없다는 뜻인즉 구원의 완성은 확고한 것입니다.

4) 29절에서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사 1:9) 만일 만군의 주(영계와 현상계를 망라한 능력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하셨으니, 여기의 “씨를 남기셨다”는 뜻은 미래에 꾸준히 영적 생산을 기약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선민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되었어도, 그 다음 시대에 회복이 있었고, 또 그 다음 시대에 메시야 구원이 나타난 것처럼 역사적으로 미래에 구원하실 대상을 남겨놓으셨기 때문에, 구원 사역이 일시에 소돔 고모라처럼 아주 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끝 날까지 구원 사역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씨는 다음 시대에 생산할 밑천인즉 구원 섭리를 끊임없이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4. 율법주의가 의에 이르지 못함(30~33절)

30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앞에서 말씀한 내용의 결론으로 인간적 노력에 의하여 구원을 바라는 율법주의(유대인의 잘못된 사상)의 부당성(하나님의 구원적 섭리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구원의 도리를 일찍이 알지 못함)이 (복음으로) 의를 얻었으니 곧 (복음을) 믿음에서 난 의(칭의)요 의의 법(율법 행위로 의를 얻는 줄 안 것)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뜻, 갈 3:10~11) 어찌 그러하뇨(물론 법을 다 지키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저희가 믿음(복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결국)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고 하신 것입니다. 운전을 잘못할지라도 장애물이 없는 곳에서는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있으면 운전 미숙이 여실히 드러나고 부딪치는 피해를 볼 것입니다. 따라서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 함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율법 실천의 불미함이 완연히 드러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표준이시니까요(요 14:6, 길; 요 13:15, 모범).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이 표준에 부딪칠 때 자신들이 의롭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사 8:14~15, 28:16, 49:23; 욜 2:26~27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돌과 반석으로 비유하여 시온(예루살렘)에 임하실 것을 예언하셨으니,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신 뜻은 견고성, 불변성, 피난처(삼상 13:6), 심판성(마 21:44, 눅 20:18)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치 않음”은 복음으로 의를 성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보편적 선택과 복음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5 과 복음의 필연성 (롬 10:1~10) 목록으로


본문 ① 1~4절은 “바울의 동족에 대한 사랑”이고, ② 5~10절은 “복음의 필연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복음의 필연성이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이 불가능한 만큼 복음적 은혜를 베푸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동족 사랑에 관한 말씀에서는 선민들이 율법적 의를 떠나 복음적 의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 복음의 필연성 부분에서는 구약에서도 복음적 의를 계시하신 바가 있음을 증거하신 내용입니다.

1. 바울의 동족에 대한 사랑(1~4절)

1) 1절에서 “형제들아(동족을 뜻함)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동족 또는 선민을 뜻함)을 위함이니 곧 너희(선민 또는 유대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율법주의에 얽매인 것을 풀어보려는 노력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고, 전도의 열망적 표현입니다.

2) 2~3절에서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율법주의에 붙잡힌 선민들)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성경의 바른 이해)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복음적)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율법 행위)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율법 실천 행위로 의로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줄로 오해하고, 율법 실천에만 열심을 내고 복음을 외면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적 의란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지 못하고 거기에 끌려간 것입니다(갈 3:10~11). 지식을 좇지 않는 무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요, 불행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3) 4절에서 바울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구원 대상 전부)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대신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자이시고(마 5:17), 율법이 성취하지 못한 의를 자신의 중보 사역으로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등불이라면 예수님은 태양입니다. 율법은 계명만 주고 모범을 주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모범적 실천자이시고, 또 율법을 다 못 지키므로 정죄 받을 자를 복음으로 의를 힘 입혀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 율법을 지켜도 잘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산다면 더욱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메시야 예언의 목적과 도덕적 계율의 목적을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율법적 계율에서 해방되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11:13).

2. 복음의 필연성에 관한 말씀(5~10절)

구약의 계명은 범법을 막기 위하여 주신 것일 뿐(갈 3:19) 다 지키게 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갈 3:10~11). 따라서 정죄와 심판의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롬 3:19~20, 5:13, 6:23, 7:7, 13, 13:8).

1) 5절에서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레 18:5에 기록된 말씀이고, 뜻은 “율법을 다 지키면 심판 받을 일이 없다”는 원리적인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잘 지키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또 잘 지키면 현실적 축복이 있습니다(신 28:1~14). 그러나 완전한 의를 성취할 수는 없으므로 “구원에 이르는 의”는 하나님의 복음적 방도에만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방법이 6절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복음을 믿는다는 뜻이고, 이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도 메시야 예언과 또 다른 의미로도 예언하셨습니다. 그 다른 의미란 죄인들이 구원자 하나님을 하늘에서 모셔 와야 하는 것인데,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신 30:12) 하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늘(하나님 보좌)에 올라갈 수 없은즉 마음도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올라가지도 못하는 인간이 어찌 중보자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꼭 같은 원리로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을 때 그 죽음의 처지인 음부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살려낼 인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7절에 보시면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다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하시므로,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인간 스스로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모셔올 수 있어야 하고, 또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면 그 죽음의 처지(음부)에 가서 예수님을 살려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음부”(스홀, 하데스, 아부소스)는 여러 종류로 사용되었습니다. 저승이란 의미가 많고(창 37:35), 고통의 장소(신 32:22, 시 6:5), 무덤(민 16:30, 잠 1:12), 지옥(계 1:18, 20:13~14)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문의 음부는 “아부소스”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처지와 무덤을 뜻한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인간은 스스로 하늘에 올라갈 수 없고, 또 음부에도 내려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 데 대하여(신 30:12~14) 바울 사도는 그 올라가는 목적과 내려가는 목적을 그리스도(중보자)를 모셔오고, 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살려내는 일로 적용하여, 그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므로 복음의 필연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중보자를 모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그런 중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는(요 1:1)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8절에서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하시므로 믿음의 말씀 즉 복음이 성도의 마음에 있고(마음으로 믿음, 10절, 약 1:21), 또 성도의 입에 있으므로(증거를 뜻함) 말씀과 성도의 연합과 접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신 30:14의 말씀으로 구약 시대에도 말씀과의 접근을 예언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시고,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요 1:1~4).

4)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신즉,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하셨으니, 이 뜻은 복음을 전체적으로 믿는 뜻이고,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신 것은 전체적 믿음을 실행으로 나타나는 믿음과 분리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는 것”은 신앙고백의 확립이고(마 16:16), 이로써 의에 이르고(칭의를 힘입음), “입으로 시인함”은 세례 받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막 16:16에서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하시므로 믿음과 세례가 상관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칭의는 자신의 결심으로 확보되고(구원 받는 믿음, 행 14:9), 구원의 완성은 신앙고백과 생활의 증거(약 2:17, 마 7:17~20, 12:33)로 확립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둘이란 뜻이 아니고(엡 4:5), 믿음과 실천을 겸전한 믿음을 나누어 설명하신 것뿐입니다.

 

 

제 26 과 구원 사역의 전개 과정 (롬 10:11~21) 목록으로


본문 ① 11~13절은 “구원의 방도와 대상”이고, ② 14~17절은 “믿음 발생의 외부적 과정”이며, ③ 18~21절은 “이방인 구원의 경위”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구원 사역의 전개 과정”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방도와 대상(11~13절)

1) 11절에서 “성경에 이르되(즉 구약 성경 사 28:16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저”는 “시온에 두실 기초 돌”로 예수님을 뜻하고(9:32~33에서 설명됨) “믿는다”는 것은 행위가 아닌 마음의 신뢰이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음”은 구원을 뜻합니다. 율법의 행위는 완전 실천에 이르지 못하므로(갈 3:10~11) 구원 성취를 못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복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지 않음을 구약에서 예언하셨다는 뜻입니다. 같은 구원의 방도로써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도 구약의 욜 2:32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즉 믿음 표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예언이면서 또 율법 행위를 부정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대상은 12절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선민(야곱의 12지파)이나 이방인(헬라인은 이방인 전체를 대표하신 뜻)에게 또는 세계인에게 차별 없는 구원의 복을 전파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한 주께서(메시야는 한 분이란 뜻, 엡 4:5)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택한 백성의 주란 뜻, 일반적 의미로는 만왕의 왕이심, 딤전 6:15) 저를 부르는(13절의 뜻)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하시므로 주님은 택함 받은 성도에게 특별히 부요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방도는 믿음이고, 그 대상은 세계인들 중에 선택 받은 자이며, 구원의 은혜에 차별이 없고, 또 성도에게 부요하신 주님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2. 믿음 발생의 외부적 과정(14~17절)

믿음 발생의 보이지 않는 근거는 성도에게 주신 거듭난 심령입니다(요 3:3). 그리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필수 요건은 믿음의 대상 곧 하나님, 예수님, 구원의 도리인 말씀입니다. 비유하자면 거듭난 심령은 불같고, 믿음 대상의 진리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나무가 없으면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믿음 대상을 전도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1) 14절에서 “그런즉 저희(전도자)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믿을 대상을 알리지 않고는 부를 수 없다는 뜻) 듣지도 못한 이(모르는 대상)를 어찌 믿으리요” 하시므로 택한 자를 믿음으로 인도할 때 믿을 대상(하나님, 예수님, 진리, 복음)을 알려야 하므로 전도의 필연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 15절에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하심으로, 전도자의 사역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구약성경 사 52:7에서 예언하셨으니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발걸음)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과 믿음과 전도 사역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구약 시대부터 예언하신 바인즉 복음은 구원의 방도로 율법을 제치고 나타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가 믿음 발생의 외부적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3. 이방인 구원의 경위입니다(18~21절)

선민과 이방인이 구별된 것은 1차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때부터이고, 2차로는 야곱의 12지파를 출애굽시키신 때부터이며, 3차로는 유다 지파 이외의 지파들이 대부분 비정통 종교와 혈통의 혼합을 이루었을 때 선민이란 자존심이 유다 지파에만 있게 되는 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에게 특별 언약(메시야 또는 영적 구원)을 주신 것이 사실이고, 또 선민 국가로 하여금 발전되기를 원하셨으나, 백성들이 거역하고 원치 않으므로 메시야적 영적 언약만 이행하시고, 선민 국가는 바벨론 포로 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오시기 이전까지 이방인을 전혀 구원 안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선민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 기생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 스바 여왕,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 등이 구약 시대의 이방인들이었고, 또 예수님 당시에 믿음의 칭찬을 받은 백부장이나(마 8:5~13), 가나안 여인(마 15:21~28), 또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 여인(요 4:7~26)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취지는 구약 시대에도 특별한 경우에 이방인 구원이 있었다는 것이고, 신약 시대 특히 오순절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 전도의 길을 열어주시므로(행 9:15) 이방인 구원 사역이 전개되었는데, 이 사실도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이고, 본문에서 유대인의 완악이 표면적 구실을 이룸과 동시에 이방인 구원 사역이 전개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16절에서 “그러나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 하였도다” 하셨으니, 이는 예루살렘에서 대부분의 선민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배척한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고, “이사야가 가로되(사 53:1에서)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음”은 이사야 선지자가 복음 배척에 대한 예언을 이미 하신 것을 뜻하며, 17절은 14~15절을 거듭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 하셨은즉 믿을 대상인 성경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셔야 함을 유의하십시오.

2) 18절에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복음을)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않다(전도를 많이 하였고 들었다는 뜻)” 시 19:4에서 예언하신 바처럼 “그 소리(복음)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셨은즉 전파될 만큼 되었고, 또 땅 끝까지 계속 전파될 것이란 것입니다(행 1:8). 19절에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신 32:21에서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서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므로 유대인들이 시기하게 하신 뜻) 미련한 백성(일찍이 율법을 몰랐던 무지한 이방인들)으로서 너희(선민)를 노엽게 하리라” 하시므로 이방인 구원으로 선민(유대인)들이 노여워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라 하셨고,

3) 또 20절에서는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선민의 미움을 받을 예언을 핍박을 각오하고 외침)” 사 65:1의 말씀인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하나님께 기도할 줄 모르는 이방인들)을 찾은바 되고(그들이 복음을 영접한다는 뜻)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시므로 신약 시대에 이방인에 대한 구원 사역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며,

4) 또 21절에서는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사 65:2을 인용하여)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하시므로 하나님이 순종치 않는 선민들에게 상당하게 참으시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종일 내 손을 벌림) 기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완악함을 회개하도록 충분한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방인 구원의 외부적 경위는 선민들의 완악에 이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 27 과 선민의 구원과 완악 (롬 11:1~12) 목록으로


본문 5절에 보시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선민 중 선택 받은 자의 영적 구원이 그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실 예로 베냐민 지파인 바울 자신을 들어 입증하셨고(1절), 7절 끝에 보시면 “그 남은 자들(이들은 5절의 남은 자들을 제외한 남은 자들임)은 완악하여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본문의 핵심이므로 총 제목을 “선민의 구원과 완악”이라고 정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들을 구약의 예언에 근거하여 증언하셨습니다. ① 1~5절은 “선민 중 선택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음”이고, ② 6~12절은 “선민 중 비택자는 완악하여진다”는 말씀입니다.

1. 선민 중 선택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음(1~5절)

1) 1절 말씀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선민이 복음의 대적자가 되었다 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깨끗이, 다)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인 바울 자신이 구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하셨습니다.

2) 2~3절에서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8:29)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시고, 선지가 엘리야의 역사를 증거로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19:10에서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선지자를 핍박하는 선민을 인하여 호소함)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한즉, 4절에서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왕상 19:18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5절에서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시대 즉 핍박이 심하였던 엘리야 시대에도 구원 받아야 할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셨던 것처럼 바울 사도 당시에도 선민 중에 구원 받아야 할 택한 백성은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족 중에 복음을 믿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2. “선민 중 비택자는 완악하여진다” 하심(6~12절)

모든 인간은 타락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권고가 없으면 타락과 완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롬 1:24~25).

1) 6절에서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구원을 거저 받는 것이라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셨으니 은혜는 공로 없이 받는 것이고, 선행 그 자체는 완성하지 못하는 노력이고 공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칭의와 구원)을 얻지 못하고(율법 행위로는 물론 복음을 배척하므로 얻지 못함)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다”고 하셨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는 거듭나서 복음을 수용하지만,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권고가 없으므로 완악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완악하여질 일”에 대하여 구약 성경이 예언하신 것을 소개하셨습니다. 이 과목에서 인용된 구약의 말씀은 왕상 19:10; 18, 사 29:4, 10; 시 69:22인데, 이 사실을 참고하면 메시야 예언이나 신약 시대의 나타날 예언이 구약 성경 전체 속에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하시므로 신약 시대에 선민의 심령이 어두워질 것을 사 29:4, 10에서 예언하셨으며, 9~10절에서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식탁에서 모의하는 상태)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을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을 항상 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으니, 이 뜻은 다윗 시대에 대적의 패망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신약 시대의 복음의 대적자들이 완악할 것을 예언한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3) 1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유대인 선민)가 넘어지기까지(아주 끝내는 뜻) 실족(계속 범죄하고 희망을 잃는 것)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언에 따라 완악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완악으로 다 끝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저희의 넘어짐(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완악)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계획과 절차는 다 하나님의 섭리와 예언대로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현실적으로 관찰하는 상태로는 “유대인의 넘어짐(완악)으로 복음적 구원이 이방인 세계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한다”는 뜻은 구원의 가치를 아는 선민들이 그 구원의 복을 자기 동족이 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4) 12절에서 “저희의 넘어짐(11절의 뜻과 같음)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이 뜻은 나타난 상태로 볼 때 선민이 복음을 거절함에 따라 구원의 복음이 이방 세계로 향하게 된 사실을 뜻함, 행 8:1)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은혜를 받음, 행 2:4)이리요?” 하셨으니, 유대인의 완악을 기회로 하여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 축복이 전달되었거든 그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면 그들 자신과 이방인들에게 더 큰 은혜가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구원도 선택 섭리에 따라 완수하시고, 또 그들의 완악을 기회로 하여 이방인 구원의 뜻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제 28 과 이방인이 겸손할 것을 권면하심 (롬 11:13~24) 목록으로


이 제목에서 구원 받은 이방인이 겸손할 것은 완악하여진 선민들 앞에서 자긍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구원 받는 일이 귀하고 선민의 완악이 증오의 대상이 되다 보면 구원 받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자긍심을 가질 수도 있는 만큼 그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이방인 성도가 겸손하여야 할 이유로써 ① 13~14절에서 “바울의 사도직의 포괄적 사명” 때문이요, ② 15~16절에서는 “선민이 복음의 성취와 시작을 이행한 때문”이며, ③ 17~22절에서는 “가지를 자르고 접붙임 같기 때문”이고, ④ 23~24절은 “완악해진 선민들도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의 사도직의 포괄적 사명(13~14절)

포괄적 사명이란 뜻은 바울 사도께서 자신의 직책 사명을 이방인 전도뿐 아니라 동족 구원에도 함께 주력하신다는 뜻입니다.

1) 13절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주님이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세우셨다 하셨음, 행 9:15)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하신 것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적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이요,

2) 14절에서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골육 동족에 대한 구원적 사명도 크게 갖고 계신 것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하신 것은 시기 자체를 정당하게 여기신 뜻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믿음을 보고 시기심을 발동하여서라도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나지만 사람이 보는 관점에서는 오기나 시기로 믿는 경우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동기와 영적 능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면 믿음에 입문하는 절차나 환경의 변화 과정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빌 1:5~17절을 참고하십시오.

2. 선민이 복음의 성취와 시작을 이행한 때문(15~16절)

1) 15절에서 “저희를 버리는 것(선민이 복음을 거절하므로 버리워짐)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이방인이 복음 전파할 기회를 얻어 이방인들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룸) 그 받아들이는 것(이방인이 복음을 믿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즉 이방인이 복음을 믿는 것은 영적 죽음에서 재생하는 것이므로(엡 2:1) 죽은 가운데서 산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신앙은 죽음이고(롬 6:23) 신앙은 생명인즉(요 3:16, 5:24) 유대인의 불신앙으로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은즉 선민을 버리신 대신 이방인을 얻으신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 16절에서 “제사 드리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 하심은 제물 드리는 원리와 식물(植物)의 원리로 선민의 존귀성을 입증한 말씀입니다. 민 15:20에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어 거제를 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제물로서의 충실함을 뜻하고, 그 가루로 만든 떡은 역시 충실한 떡으로 거룩하게 구별이 됩니다. 또 나무도 뿌리가 좋으면 가지와 열매도 충실하겠지요(마 7:17). 그런 의미에서 선민이란 신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그 가문으로 메시야를 보내셨으며, 복음의 성취와 시작을 이룬 만큼, 그 입장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가지를 자르고 접붙임 같기 때문(17~22절)

1) 17절에서 “또한(참감람나무 가지인 선민) 얼마가 꺾여졌는데(구원 대상에서 제외된 뜻, 섭리적으로는 비택자요 자신들의 상태로는 완악함임, 이 대상은 야곱 이후 신약의 오순절 시기까지 축적되었을 것임) 네(이방인)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택함 받은 선민에 합하는 뜻)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신령한 구원과 은혜의 특권)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 하셨은즉 선민의 타락이 구원 받는 이방인에게 유익을 주는 결과가 되었음은 물론 복음 자체도 선민을 통하여 전달된 것을 알아야 하며, 진액 그 자체는 선민이 받는 은혜와 꼭 같은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민을 이해하는 개념은 상황 따라 다릅니다. ① 신정 통치의 선민은 출애굽부터 바벨론 포로 시까지를 의미하고, ② 구약 시대에 구원을 받고 메시야 계열을 이은 영적 선민이 있습니다. ③ 본서에서 이해할 선민은 복음을 받지 않는 완악한 선민과 선민 중에서 복음을 받은 자로 분류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감람나무의 뿌리 또는 둥치로 비유된 대상은 영적 구원과 관계있는 선민이고, 꺾기운 선민은 완악하여 구원에서 제외된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접붙임” 그 자체는 구원 대상인 선민과 이방인 간의 연합과 차별 없는 은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18절에서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라” 하심은 구원 받은 이방인들이 완악하여진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상대로 자긍하지 말 것은 복음의 역사가 선민 세계에서 이어져 왔고, 또 성취되었으며, 신앙생활의 기초(성경 계시와 모범)도 선지자와 사도들의 세운 것인 만큼(고전 3:11, 엡 2:20), 그들이 은혜 전달의 당사자들이란 점에서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19~20절에서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기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함으로 꺾기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셨으니, 선민의 타락이 이방인 구원 조건에 공로가 되었음이 사실인즉 더 겸손하여야 할 것이고, 유대인 멸시하기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4) 21절에서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것은 선민이 탈선할 때 징벌 받은 것처럼 이방인 성도들도 잘못하면 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긍휼을 힘입은 상태)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인자를 힘입지 못하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범죄자에 대한 징계로 엄위를 나타내시고, 긍휼을 베푸실 대상에게는 인자하심으로 대하시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도록 하나님과 뜻을 맞출지언정 거역함으로 엄위(진노의 모습)에 있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도 그러하였은즉 이방인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21절). 19절과 20절의 “꺾기움”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뜻이고, 22절 끝의 “찍히는바 됨”은 타락한 유대인처럼 꺾기우거나 징계의 의미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완악해진 선민들도 회개할 수 있기 때문(23~24절)

1) 23절에서 “저희(완악한 유대인들)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않으면(회개하고 믿으면) 접붙임(복음에 연합)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요(마 3:9, 19:25~26; 슥 4:6; 겔 36:26),

2) 24절에서 “네(이방인)가 원 돌감람나무(불신앙 상태)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불신앙을 회개함) 좋은 감람나무(복음적 신앙)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완악한 유대인)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유대인이 전파한 복음적 신앙)에 접붙임을 얻으랴” 하시므로 완악한 선민들도 이방인들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방인 성도는 항상 겸손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29 과 하나님의 지혜와 절대자의 영광 (롬 11:25~36)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5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 마지막 대지인 33~36절의 말씀이 가장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제목을 전체의 대표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25절은 “이방인 구원과 선민의 타락이 연계되었다는 말씀”이고, ② 26~27절은 “온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이며, ③ 28~29절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의 확실함”이고, ④ 30~31절은 “선민과 이방인에 대한 긍휼의 섭리”이며, ⑤ 33~36절은 “하나님의 지혜와 절대자의 영광”입니다.

1. 이방인 구원과 선민 타락의 연계성(25절)

25절에서 “형제들아(로마에 있는 이방인 성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하신 것은 추호라도 자신들의 지혜로 복음을 선택한 줄로 알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다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역사의 순서에 따라 사물을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중간에 변동된 것처럼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또한 깊고도 오묘한 비밀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구원 대상을 미리 택정하셨습니다(엡 1:4). 그리고 그 택정과 부르심은 확고하여 후회하시지 않고 시행하십니다(29절). 선택자는 선민 중에도 있고 이방인 중에도 있었는데, 이 사실에 대하여 선민 선택은 앞세워 표현하셨고, 이방인 선택은 잠재하셨다가 나중에 나타내셨으며, 어떤 때는 선민의 타락을 기회로 이방인 구원을 시도하신 것으로(행 13:46; 롬 11:11, 20) 말씀하셨고, 또 어떤 때는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민을 타락에 방치하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11:8, 15, 20). 여기서 저희들이 이해할 것은 완악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사실과 유대인의 타락으로 이방인 구원이 중간에 변동된 것이 아니란 점이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28~29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만세 전에 아시고 섭리하셨지만 역사와 현실 세계에서 나타난 과정으로 볼 때 선민의 완악하여진 수만큼 이방인에게서 보충하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자의 수는 확고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그 수를 확보함에 그치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대상의 수는 12지파의 번성한 수와 같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두 가지 사명이 있으니, 하나는 영적 구원적 믿음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사랑과 현실적 사명입니다.

2. 온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26~27절)

26절에서 “그리하여(선민 타락을 방치하여) 온 이스라엘(구원 대상, 천국 시민 전체를 뜻함)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 말씀은 사 59:20의 인용으로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오셔서 구원 사역(십자가, 부활, 성령 강림, 전도)을 하실 때 많은 선민(유대인, 야곱에게서) 중 경건치 않은 자들을 불신앙에서 복음을 믿도록 역사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은 오순절을 기하여 성취되었고, 또 계속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서는 사 27:9을 인용하여 증거하시기를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죄를 없이 하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자기의 권세로 죄를 용서하심인바(마 9:6, 행 2:38) 신약 시대에 회개의 역사를 이루심을 뜻하고,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하심은 이방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이 그 언약의 실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의 확실함(28~29절)

1) 28절에서 “복음으로 하면 저희(유대주의자들)가 너희(로마인 성도)를 인하여 (핍박하는) 원수이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즉 유대인 율법주의자라 할지라도 그 조상 때부터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2) 29절에서 (그러나 유대인이 타락하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사(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동기)와 부르심(유효적 소명, 마 22:14)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시므로 하나님은 후회 없이 선택하시고, 은혜 줄 자에게 확실하게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출 33:19). 이방인 구원이 부수적 행사가 아니요, 확실하게 계획된 일이란 뜻입니다.

4. 선민과 이방인에 대한 긍휼의 섭리(30~32절)

1) 30절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섭리를 말씀하셨으니, 곧 “너희(이방인 성도)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그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율법주의와 타락)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다” 하셨으니, 이 긍휼은 이방인들이 복음 신앙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뜻이요,

2) 31절은 유대인 선민들에게도 긍휼을 힘 입혀 주실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와 같이 이 사람들(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나, 이는 너희(로마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유대주의자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3)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전체 인류 중 믿지 않는 사람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불신앙에 방치하심)은 모든 사람(이방인까지)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본래 선택적으로 주시는 은혜는 그 반대로 선택받지 못한 대상과 비교할 때, 불균형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으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은즉”(롬 9:13) 한편에만 은혜를 베푸시고 권고하신즉 그 반대편에는 권고의 손길을 쓰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 기인한 것입니다(롬 9:21~23).

5. 하나님의 지혜와 절대자의 영광(33~36절)

필자는 이 말씀을 요절로 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칼빈주의 교리에 관한 내용을 증언한 줄 압니다(특별내용 2. 칼빈주의 참조, 135P).

1) 33절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셨으니, 이는 절대자의 지혜의 무한성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섭리적인 문제들)은 찾지 못할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유한하고 타락한 인간이 따르지 못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자, 영원자이시고 과거와 미래의 역사를 한눈으로 보시며, 인간은 유한하고 타락한 존재인즉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타내신 뜻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요 21:25). 34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으냐” 하셨으니, 하나님과 인간의 뜻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고(사 55:8~9), 인간은 하나님과 의논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욥 40:3~5), 하나님의 미련하심이 인간의 지혜보다 나은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고전 1:25).

2) 35절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뇨”, 인간은 칼빈 선생의 말씀대로 죄밖에 없으므로 자기의 것으로 무엇을 베풀거나 갚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3)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창 1:1~31, 요 1:1~3), 주로 말미암고(통치, 히 1:3),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말세에 만물을 처분하심, 벧후 3:10~11).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시므로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만물의 주되시고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신 주님뿐이시므로 그에게 영광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제 30 과 변화된 생활 다섯 가지 (롬 12:1~8) 목록으로


12장부터 15:13까지는 도덕률 또는 실천적 생활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본문도 그런 취지의 교훈입니다. ① 1절은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라” 하셨고, ② 2절은 “세속주의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 하셨으며, ③ 3절은 “균형적 생활”을 교훈하셨고, ④ 4~5절은 “성도의 상호 협력”이며, ⑤ 6~8절은 “은사에 따라 실천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라(1절)

“그러므로” 하신 뜻은 앞 절에 연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을 받았은즉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실천할 교훈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함”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의 근거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은데 있다는 것이요, “너희 몸(육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셨으니, 몸이란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실체인 만큼 바른 생활을 잘 나타내어 성도로서의 빛의 사명을 다하라는 교훈입니다. 그 생활은 “거룩한 산제사”로 표현하신 이유는 깨끗하고 순결한(거룩) 생활로 제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몸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예수님이 그 제사의 실체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린 만큼 성도들은 그런 제사를 재연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활 제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산제사”는 원문에 “두시안(희생) 조산(a living)”인바 몸으로 나타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 하였는데, 원문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으로 사리에 맞는(분별 있는 또는 합리적) 서비스(봉사, 대응하는 뜻)란 뜻이요, 따라서 “영적 예배”를 어떤 신비한 의식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다만 성도는 그 생활의 본이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세속주의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입니까? 진리의 모범이 아닌 것입니다. 또 인본주의요, 세속주의입니다. 고후13:8에서 “성도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신 만큼 진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다 이 세대에 속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2:15에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병폐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현실 교회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불신 문화를 따라가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가 왜 예수님의 생활을 따르려 하지 않고 유행이나 전통 풍속이나 사람의 이목을 따라 행하려고 합니까? 특히 외면치레로 사람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며 살지는 않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성도는 세상의 이목에 영향 받지 말고 오직 자기의 본분에만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새로운 깨달음과 결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경의 교훈을 살피셔야 하고 “예수님도 이렇게 하시겠나?” 하며 반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균형적 생활을 교훈하심(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사도 또는 교사된 은혜)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교훈은 개인적으로 받고 개인적으로 반응을 나타내야 함)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분수에 맞게 또는 균형 감각을 갖고 생활하라는 뜻)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활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겉모습이 다른 것처럼 그 인격도 다르고, 또 하나님이 각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베푸신 은사도 다르며 개인별로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란 성도 개인이 은혜 받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믿음 분량(성경 지식, 은사, 생활)에 따라 생각하고 실천하여 균형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입니다. 외식이 없고 자연스럽게, 또 형편에 알맞게, 허영이나 명예욕을 떠나서, 겸손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4. 성도의 상호 협력(4~5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은즉”, 성도 각자가 믿음 세계 안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협력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고전 12:14~27을 참고하십시오. 이 경우에 누가 받은 은사이든 존중하고 필요 적절히 여기도록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이 이 대목에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5. 은사 따라 실천할 것(6~8절)

은사는 같은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나눠주시되(고전 12:11) 어떤 이에게는 이러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저러한즉(고전 7:7, 12:8~10) 각자가 받은 대로 감사하고, 받은 대로 충성하여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포괄적 의미의 선물)대로 받은 은사가 다르니(고전 7:7, 12:8~21, 은사란 ‘카리스마타’는 개별적으로 받는 재질에 해당함)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 하셨는데, 여기의 “예언”은 미래의 일을 계시로 받아 대언함의 뜻이 크고(그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므로 특별 계시의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었음) 직접 계시를 받지 않고 이미 알려진 계시의 말씀을 대언할 때는 오늘의 설교의 성격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분수대로 (증거)하라”는 뜻은 증거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므로, 그 말씀을 받는 성도들의 이해와 실천 수준에 적응하도록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분수 즉 신앙적 입지에 알맞도록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7절에서 “혹 섬기는 일(봉사의 직무)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성경과 생활 등 교훈하는 지도자) 가르치는 일로”, 8절에서 “혹 권위(권면, 위로)하는 자이면 권위하는 일로(행 4:36),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여기의 ‘성실함’이란 원문은 ‘하프로테스’로 단순함의 뜻이라고 함), 다스리는 자(이 ‘다스리는 자’의 원문은 ‘프로이스타메노스’로 친절히 구하는 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형편이 많고, 또 그 수요를 공급할만한 각자의 은사도 있은즉 적재적소에, 또 적당하게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가 겸손하고 진실하며, 순진한 자세로,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자신은 늘 자기를 반성, 점검하여 필요에 따라 보충을 받고, 또 자기가 받은 은사로는 다른 이의 취약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1 과 성도의 통상적 생활 원리 (롬 12:9~21)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성도의 통상적 생활 원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절의 “기도를 힘쓰라”는 말씀만 예외로 한다면 도덕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① 9~10절은 “사랑 실천의 원리”이고, ② 11절은 “자기의 일에 열심하는 것”이며, ③ 12절은 “기쁨을 갖고 인내하라”는 것이고, ④ 13절은 “구제와 봉사를 하라”는 것이며, ⑤ 15절은 “대인적 관계에 화합”하는 것이고, ⑥ 16절은 “겸손”이며, ⑦ 14절과 17~21절은 “원한 관계에 대한 처신”입니다. ⑧ 12절의 “기도에 항상 힘쓰는 일”까지 8항목으로 상고하겠습니다.

1.사랑 실천의 원리(9~10절)

“사랑엔(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거짓이 없으니(외식이 없고 진실하여야 함)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세계에서 거짓을 나타내거나 투기, 교만, 욕심을 나타내면 안 됩니다. 특히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 세계에서 그러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세례 요한과 같은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좋은 것을 다투어 양보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또 형제가 양보하여 자신이 특권을 누렸으면 속히 그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하여야 합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이기주의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멀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는 무슨 감투 의욕이나 현실주의 이권에 사로잡힌 성도나 지도자들이 많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시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 실천의 원리는 진실과 악을 미워함과 선에 속함과 양보로 형제 우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일에 열심하는 것(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셨으니 건설적 목적으로 생활하는 자기의 일에 몰두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이유로라도 게으르면 안 됩니다. 반드시 시간에 쫓길 수 있는 일거리를 만들거나 맡으십시오(필자가 늙어 쓰러지기 전에 목표하는 메시지를 정리하는 문제로 오늘처럼 따뜻한 봄 날씨에 30분쯤 산책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이 글을 씁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일”이란 무엇이나 주님이 기뻐하실 일(2절)을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3. 기쁨을 갖고 인내하는 것(12절)

소망이 없으면 기뻐할 일과 인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영원히 생존합니다. 또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미래에 상급을 주시고, 마지막 때에 재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소망 중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에 자기의 욕구를 하나도 성취 못한 채 미래로 연기되는 일이 있더라도 미래의 소망을 믿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참고 견뎌야 할 것입니다.

4. 구제와 봉사를 하라(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은 구제이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은 봉사입니다. 필자가 30대 목회를 할 때 지방교회를 순회하면 장로, 집사 가족이 돌아가면서 식사 접대를 하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도시 교회에서 그런 미덕이 다 없어진 줄 압니다. 도시 교회는 대부분 교회의 돈으로 접대를 하니까요. 성도나 교회가 먼저 근검절약하고 적당하게 먹고 사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하며, 가난한(굶어죽는)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자선제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5. 대인적 관계의 화합입니다(15절)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로 함께 울라” 하신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미도 있지만(고전 9:19~23) 대인적 관계에서 죄가 아닌 것이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며, 화합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죄 아닌 일에 있어서 물에 기름처럼 구별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즐거움이나 슬픔에 동화하라는 것입니다. 정의에 위배되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인륜적 현실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필요한 것입니다. 마 11:16~17에서 예수님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냉정한 세대를 책망하신 것”처럼 이웃과의 관계를 어색하거나 냉정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계층을 포괄하는 화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6. 겸손입니다(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하셨으니, 이 교훈은 한 마디로 겸손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겸손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 할 수 없을 것이요, 만일 자기의 마음이 교만하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마음을 같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 세계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는 현실” 때문에 믿음 있는 자와 믿음의 외식자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겸손하기 위하여 사치를 멀리하고 미천한 백성처럼 살려고 하는데,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는 여전히 세상 정욕에 얽매여 이 세대를 본받고 인본주의로 나가려한다면 융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큰 일을 하였다 하여도 주님이 하신 것일 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못할 것이요(고전 15:10), 오로지 쓰임 받은 사실만 감사하고 더 겸손하여지며 낮은 위치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는 것이 바른 처신인 줄 압니다. 필자는 60세가 넘으면서 “낮은 위치에 처하는 것”은 마음과 생활로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남은 여생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시행한즉 자유롭고 또 체질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좋은 음식이나 좋은 의복이나 좋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덜 된 문제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하신 말씀이 실천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의 신앙, 나의 신학, 나의 성경 지식, 나의 사고방식이 지혜로운 일 같아서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가를 볼 때 큰 가책을 받지만, 신앙 그 자체로는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있으니, 그것도 겸손해져야 할 최후의 과제일 것입니다.

7. 원한 관계에 대한 처신입니다(14, 17~21절)

14절은 마 5:44의 말씀과 같고, 17절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신 말씀은 마 5:44, 막 9:50, 눅 6:27~28에 근거한 교훈입니다. 성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핍박자나 피해를 주는 대상이 있다면, 19절에 근거하여 “원수 갚는 것이 주께 있어 주님이 갚으신다” 하셨은즉(신 32:35) 주님께(주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19절).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 후에,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필요하면 구제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음”은 그의 마음을 그만큼 뜨겁게 하는 방법이란 뜻입니다(잠 25:21~22). 그런 의미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21절)

8.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12절)

기도하는 목적은 많지만 기도를 항상 힘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주님과의 동행과(마 9:15) 기도 응답과(눅 18:1~8)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서인 것입니다(마 26:41).

 

 

제 32 과 권세에 대한 말씀 (롬 13:1~7) 목록으로


본문은 일반적(국가) 권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반적 권세란 선민 국가가 아닌 이방 나라의 권세란 뜻인데, 성경은 신정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자세히 말씀하셨고, 일반 국가의 통치는 그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실과 그 통치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지배됨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1~2절은 “권세의 출처”요, ② 3절은 “관원의 사명”이며, ③ 4~5절에서 “백성 된 자의 태도”요, ④ 6~7절은 “납세의 의무”입니다.

1. 권세의 출처(1~2절)

1)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출신지별로 분류된 각 사람인데, 원문에는 “파사 푸스케”로 각 영혼들이란 뜻입니다. 영혼은 깊은 심정인즉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라는 뜻인 듯합니다. “권세가 위에 있음”은 하나님의 높으신 주권을 뜻하고, “권세들”이란 여러 사람에게 연계되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일정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어느 나라, 민족이든 로마에서는 그 지역 권세자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2:7에서 “하나님은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하셨고, 요셉을 높인 사실과 모세를 지도자 되게 하신 사실과 사울과 다윗 등을 왕 되게 하시고, 또 왕을 폐하신 사실들이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선민국의 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이나 파사의 고레스 왕이 망하고 흥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권세”는 선민국이나 이방인국의 모든 권세를 의미합니다. 요 19:11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의 권세도 하나님이 위에서 주신 것이라” 하셨은즉 그리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권세의 성질에 대하여 생각해 보실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권세의 성격입니다. 이 권세는 불복자에게 응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어떤 절차로 취하였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쿠데타도 일으킬 능력이 있을 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응징할 능력이 없거나 강제로 예속시키는 능력이 없는 직권은 권세라 할 수 없으며, 응징력 없는 직권은 반드시 합법성에 의하여 또는 대의명분에 의하여 받아져야 합니다.

3) 2절에서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하시므로, 어떤 출처의 권세이든 복종하지 않을 때 받는 피해는 하나님의 응보에 속한 것이 되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선민이 타락하였을 때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하셨고, “그 지배를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복종하라”고 하셨은즉(렘 43:8~44:10, 45:4~5, 38:17~21) 국권을 뺏기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땅과 인류는 하나님이 내셨고, 인류 권세의 편향에 따라 영토가 달라진 것이 역사인 만큼 앞으로도 고유 국가나 고유 영토는 어떤 세력자가 나타나서 무력으로 뺏는다면 보존되지 못할 것이요, 그 대신 세계적으로 평화운동이 일어나서 약자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역할이 나타나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적 결과라 할 것입니다.

4) 한일합방은 강국에 의한 치욕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범죄하는 민족에 대한 응징입니다. 하나님의 응징에는 기간이 있으므로(창 15:13, 렘 25:11, 단 9:2) 때가 되면 어떤 방도를 일으키셔서 회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일제 치하 중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그 회복되게 하는 방법에 속하고, 또 2차 대전 후 강대국의 협의로 한국을 독립시킨 것도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섭리에 해당하지만, 지금까지의 분단 상황은 미완성의 독립 그대로의 실정입니다. 문제는 친일파에 대한 정죄 의식입니다. 일본 천황의 명에 끌려갔거나 복종한 것을 친일파로 정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지적으로 권세를 휘둘러 동족에게 피해를 준 사람만 친일파로 분류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권세가 바뀌었을 때 살기 위하여 복종 안 할 백성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만일 약소국의 백성들이 다 동족을 해한 강국 상대로 항거한다면 그 민족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기 위한 복종은 조국 배신이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반민족, 반국가주의는 자기의 독자적 의지로 동족을 해한 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친일파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국가의 방위는 생명을 걸고 든든히 하되 패하면 군림한 권세를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종교를 핍박하는 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기독교적 불행이 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벨론 70년이 그 역사였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 메시야가 오시기까지도 그런 역사에 속하며, 일제 36년 기간이 그러하였지만, 진리는 현실 핍박으로 망하거나 없어지지 않음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권세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2. 관원의 사명(3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선행을 권장하신 뜻)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관원들도 악을 행할 때는 응징을 받아야 한다는 뜻)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그렇다면)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하시므로 선행자를 벌하는 권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권세는 반드시 악을 응징하고 선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관원의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법과 합법을 공의롭게 다스리는 사명입니다.

3. 백성 된 자의 태도(4~5절)

통치자(권세자)의 지배가 미치는 땅에서 사는 사람은 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 4절에서 “그(관원)는 하나님의 사자(보내신 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공의를 실현한다는 뜻).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공권력, 사법권)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라” 하시므로 국가의 응징을 하나님의 벌로 여겨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5절에서 “그러므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벌이 두려워서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진심과 자원함으로) 할 것이라” 하시므로 성실한 복종과 충성을 하라는 뜻입니다.

4. 납세의 의무입니다(6~7절)

1) 6절에서 “너희(로마에 있는 성도들)가 공세(공세는 ‘인구세’라 하고 국세는 ‘행정비’라 하나 어떤 명목으로 징수하든 모두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세금임)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하시므로 권세자의 바른 통치를 위하여 세금을 낸다는 뜻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하시므로 관원들의 선한 노고를 인정하고, 성도들은 국민의 입장에서 세금 내는 일에 성실하셔야 할 것입니다.

2) 7절에서 “모든 자(받아야 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주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권세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위에는 존경해야 할 사람도 많은 줄 압니다. 명예, 지식, 재물 등, 현실적 조건이 없는 분들 중에서도 믿음, 도덕, 봉사 등으로 존경 받을 분들이 많음을 아셔야 하고 자신도 그런 대열에 합류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3) 필자가 이 본문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국가에 덕을 세울지언정 피해를 주거나 국가의 덕을 보려 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나라의 법을 솔선하여 지키고, 부조리한 법은 합법적으로 건의하며, 세금을 공제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솔선하여 잘 내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교회(신령한 단체)가 아니고 물질인즉 그 물질에 대한 세금을 내는 일에 인색하거나 자선기관 임을 빙자하여(자 도 많이 못하면서) 세금만 공제 받으려 한다면 교회의 미덕을 해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 33 과 사랑과 경성을 촉구하심 (롬 13:8~14) 목록으로


본문의 ① 8~10절은 “사랑을 권장하신 말씀”이고, ② 11~14절은 “믿음과 도덕성의 경성을 촉구하심”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경성을 촉구하심”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사랑을 권장하신 말씀(8~10절)

1)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적자인생을 살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열심히 노력하고 축적하여 물질로나, 예절로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사람에게는 빚을 갚을 과제를 갖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하셨은즉 주기를 원하는 사명을 느끼시되 사랑 이외에 빚으로 줄 것은 없어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율법의 강령이 사랑이라” 하신 말씀(마 22:37~40, 레 19:18)에 근거하여 사랑 실천을 완성하였으면 율법을 다 지킨 자로서 율법을 완성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중 사랑을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애 전체에서 사랑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마 5:17).

2) 9절의 “간음, 살인,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신 계명은 출 20:13과 신 5:17에 기록된 말씀이고,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 하시므로 모든 계명이 사랑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10절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신 것은 고전 13:4~5 말씀과 본문 8절과 마 5:17과 요 15:13과 12:24을 참고하여 예수님이 사랑의 실천자요 모범자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과 도덕성의 경성을 촉구하심(11~14절)

1) 11절에서 “또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여기의 ‘시기’는 ‘톤 카이론’으로 정관사를 대동한 특정 시기, 즉 종말의 시기를 뜻함)” 하신 것은 말세가 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말세는 시대적 종말도 되지만 자신의 인생 종말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하심은 믿음의 경성과 도덕성의 경성이 믿음 시작 때부터 있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깨는 것”일까요? 회개하고, 순결을 지키며, 부지런히 사명에 임하는 것이겠지요(벧후 3:10~13).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은 모든 성도마다 생애의 종말이 기약 없이 다가오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12절에서 “밤이 깊고(경성하지 못한 시기가 많았다는 뜻) 낮이 가까웠으니(변화의 때가 앞에 있음)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모든 불의와 죄를 회개하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셨습니다. “빛의 갑옷”이란 빛 되신 예수님으로(요 1:5) 옷 입듯 하되, 마귀와 싸우는 용사처럼 갑옷(믿음, 승리의 무기, 말씀, 기도, 하나님의 뜻 순종)을 입고 경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3~14절에서는 도덕적 경성을 말씀하셨으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셨으니, “낮에와 같이 단정함”은 떳떳한 생활, 부끄럽지 않게 사는 일이고, 방탕은 방종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요, “음란, 호색”은 성적 문란이며, “쟁투, 시기”는 사랑에 위배되는 행위이고, “그리스도로 옷 입음”은 예수님의 인격으로 충만함이요, “정욕을 위한 육신의 일”은 인간적 부패성에 따라가는 죄악을 의미하는바 성령 충만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충만하게 힘입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억제하고 금지하는 생활로 경성하라는 교훈입니다.

 

 

제 34 과 판단을 삼가가 (롬 14:1~11)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대의는 “판단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본문 1절의 비판이란 용어와 마 7:1의 비판이란 용어와 3절, 4절의 판단이란 용어와 요 3:17의 “심판”이란 용어가 다 ‘크리노’(κρίνω)를 어근으로 한 번역입니다. 따라서 “남을 재판하는 자세를 삼가라”는 뜻입니다. 재판자는 오직 주님뿐이신즉(요 5:22~27) 사람은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되고, 또 상대방을 비판하는 일은 명분에 부합할 때보다 맞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비판자도 문제가 많기 때문이고, 또 비판을 받는 대상도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193명이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옳지 않다는 국민이 더 많은 것을 생각할 때 비판이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고, 또 남에 대한 비판으로 신속하게 비판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① 1~3절은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② 4절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③ 5~6절은 “하나님을 위한 생활 방법을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요, ④ 8~9절은 “사명자들의 삶의 고백”이고, ⑤ 10~11절은 “판단을 삼가 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1~3절)

1) 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초신자는 여러모로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과 연단이 부족한 것이 마치 어린아이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심하는바”란 진리나 생활 상태를 옳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인데, 전통 습관으로 잘못된 것을 개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속히 모든 연약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자의 입장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어린애를 탓하는 어른이 없는 것처럼 연약한 자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2절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 하셨으니, “모든 것을 먹음”은 채소 아닌 고기도 먹는다는 뜻이요, “연약한 자가 채소만 먹음”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서 금한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요, 우상을 깊이 증오하는 사람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장로님은 우상을 설치한 절에 가서 왜 마당인들 밟느냐?는 분도 있습니다. 또 요즈음은 몸보신을 위하여(그 몸을 정욕에 쓰기 위하여) 맹수의 고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으나,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믿음 확립에 따라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금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성결과 불결을 교훈하는 데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율법보다 더 밝은 계시로 아는 만큼 예수님 중심에서 해방될 수 있고, 또 그것이 위생의 개념이라면 오늘날 발달한 과학이 충분히 감쌀 수 있은즉 먹어도 상관이 없겠지요. 또 구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 만큼 십자가로 그 상징의 실상이 나타난 이상 동물의 피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 어떤 고기가 귀신이나 우상의 제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귀신과 우상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고전 8:47) 그 식물이 깨끗한 줄로 믿을 때는(딤전 4:3~4) 가책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이해를 못할 때는(고전 8:7)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먹지 않는 것인즉 비판하지 말고 차차 가르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3절에서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간에 서로 판단하지 말라” 하셨고,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믿는 자의 믿음 형편대로 하나님이 아시고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1930년대쯤에는 예배당의 남녀 좌석 사이에 포장이 쳐있었다가, 1960년대에는 남녀유별 석으로만 구분하였고, 1990년대쯤부터는 남녀석이 가족석 등으로 혼합되었습니다. 머리의 형태도 이조시대에는 상투를 틀었다가, 일제시대에는 깎았고, 해방이 된즉 ‘하이칼라’라 하여 기름을 바르고 하였지요. 요즈음은 머리가 엉성해도 말하는 사람이 없고, 노란색으로 물을 들여도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시대에 따라 사람의 생각이 변하고, 또 문화의 바람을 타는 것이데, 성도는 성경에 근거하여서만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세속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지요(요일 2:15). 그 생활 변화가 문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2. 남의 하인을 판단하지 말라(4절)

이 말씀은 자기의 소관 아닌 일에 대하여 월권하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시간이 많고(게으른 사람) 말 많은 사람은 다른 이의 일에도 간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종이 일을 잘하거나 못할 때, 그것을 주인 아닌 자가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하인을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잘하고 잘못하는 다스림의 책임)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그 주인으로부터)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께 있다”는 뜻은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으므로(롬 13:1) 그의 하인 된 것은 주님이 그의 상전을 통하여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업무와 책임과 권한의 범위를 잘 알고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위한 생활 방법을 간섭하지 말라(5~6절)

1) 신약 시대에 예수님은 “어느 날을 잘 지켜라” 하시고 날을 구별하신 일이 없었으나, 사도들은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 하여 구별하였습니다. 행 20:7, 고전 16:2, 행 2:1(오순절의 근본이 77절이므로 레 23:15~21, 주일에 해당함).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사도의 모범에 의하여 성수주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모범이 예수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1:1, 엡 2:20). 그런데 그 이후에 많은 날과 기념일이 생긴 것입니다. 4대 절기와 성령강림절이 그것이고, 금요일이 그런 뜻이며, 이제는 주일 11시 예배가 아닌 것은 권위가 없는 예배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요즈음에 와서는 개신교까지 천주교를 본받아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금식일을 정하거나 기도 시간을 정하고, 그 때를 중히 여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5절에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마음에 확정할지라” 하시므로 날과 달을, 또는 특정 시간을 중히 여기는 개념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하에 갇혔던 사람이 16일 만에 구출된 후 한 일주일쯤 된 것 같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요. 이것은 날짜의 개념을 무시해도 되는 실제적 사례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7~9절 말씀에 따라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6절에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의식을 중요시함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금식만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아니라, 먹고 건강하게 일하는 것도 영광이 된다는 뜻)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으로 금식을 하든, 또 먹고 일을 하든, 다 그 성도의 자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금식과 금식을 금하는 일을 서로 비판하거나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 사명자들의 삶의 고백(7~9절)

1) 7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하신 것은 앞에 있는 말씀과 관련하여 바울 사도나 그 동료자들은 날을 지키는 것과 먹고 안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중심으로만 사는 것”을 힘쓴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도 않으며(영광 돌릴 목적으로 목숨을 버린다는 뜻)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며 사나 죽으나 자신의 생명과 생애가 주님의 것임을 확신하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어느 후배 목사님이 위암으로 사경에 있을 때, 이 말씀으로 위로한즉 그 사모님이 크게 위안을 받고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9절에서 “이를 위하여(7~8절처럼 살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자)와 산 자(그리스도를 위하여 생활하는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사는 자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5. 판단을 삼가 할 이유(10~11절)

1) 10절에서 “네가 어찌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당연히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판단을 하였다면 왜 주님이 하실 판단권을 침해하였느냐? 하실 것이요, 판단을 바르게 하였다면 왜 네가 형제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느냐? 하실 것이며, 잘못 판단하였다면 더 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판단을 하기 전에 사랑으로 인도하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 간에 판단의 유효로 갈등하며,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바른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11절에서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뜻)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신 것은 사 45:23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의 최종 심판이 있을 것과 그때에 공의로운 현실이 드러날 것을 예언하셨다는 뜻입니다. “자백”이란 “엑소몰로게오”는 “시인한다, 인정한다”의 뜻인즉 주님 앞에 서는 자는 누구도 거짓을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형제의 잘못을 말하게 될 때 미움과 정죄를 앞세우지 말고, 사랑과 긍휼과 화합을 앞세워 지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5 과 독립적 신앙을 권장하심 (롬 14:12~23) 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독립적 신앙을 권장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12절에서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라”는 말씀과 14절의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한다” 하신 말씀과, 22절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도는 비판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의 눈치나 간섭을 받지 않을 만큼 자기의 지식과 신앙에 확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일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배우고 연단을 받으시면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그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① 12절은 “하나님께 직고할 것을 권장하심”이고, ② 13절은 “형제 앞에 거칠 것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요, ③ 13~16절은 “만물을 신선하게 여기라”는 교훈이고, ④ 17~21절은 “먹는 문제로 불화하지 말라”는 말씀이며, ⑤ 22~23절은 “자기 확신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1. 하나님께 직고하라(12절)

“이러므로” 하신 뜻은 앞 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심판주이시므로”의 뜻이고, “우리 각인”이란 개인적으로란 뜻입니다. 단체적으로 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믿음확립에 더 실효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각자의 영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함”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뜻입니다. 중개인을 의지하거나, 간접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과 직접 대하고 문제를 직접 고하여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한국 교인들만큼 교역자를 의지하는 교인들이 다른 나라에 또 있을까요? 이제는 점차 자립하고 독립하셔야 합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주석을 읽으며 믿음생활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심하고 용기를 내시면 금방 주님이 그의 손을 끌어당겨 주실 것입니다. 독자적 신앙생활을 꼭 체험하십시오. 필자는 지금 67세요, 목회 경력이 40년쯤 되었습니다. 목사 선배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은퇴하셨기 때문에 필자가 선배 위치에 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하여 스스로 확립한 위치에 있을 뿐 누구에게 의존하거나 자문을 받을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스스로 깨달은 대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의 이런 환경과 신앙생활이 모든 성도들에게 꼭 같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말씀드립니다. 성도 자신이 독립적 신앙을 가지고 “나 홀로 있고 하나님만 계시다”는 생각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이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고, 그 마음을 뜨겁게 하시며, 그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시 73:23). 천주교회에서는 교회나 신부님을 중보로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벧전 4:5).

2. 형제 앞에 거칠 것을 두지 말라(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여기의 ‘주의하라’는 원문이 판단을 뜻하는 ‘크리노’입니다). “부딪힐 것과 거칠 것”이란 형제의 신앙에 장애를 주는 것으로, 판단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형제를 판단하여 그의 신앙에 유익이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열 마디 말하려는 자가 생각을 많이 하면 한 마디쯤 하든지 못하든지 하게 됩니다. 어떤 초신자에게 맵시내는 방법을 말하였다가 그 성도가 교회 출석을 중단할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성도에게 헌금이나 봉사나 성수주일을 강조하여 역시 믿음생활을 중단한 사실이 있는데, 만일 그들에게 신앙의 부조리한 면을 비판한다면 더 심한 결과를 나타낼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에게 신적 권위 같은 인정을 받기 전에는 거칠 것을 주의하셔야 하고, 반드시 성도의 믿음 수준에 따라 잘못을 지적하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믿는 성도가 신앙의 선배를 자처하면서 믿음 약한 성도에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거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마 18:6~7).

3. 만물을 신선하게 여기라(14~16절)

1) 14절에서 “내가 주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바울 사도의 바른 지식입니다. 그것은 곧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속되다”는 개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피조물은 만드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더라”(창 1:31) 하셨고, 바울 사도는 딤전 4:4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의 제물을 보면서 속되거나 부정하게 보는 시선과 어서 저 음식을 먹었으면 하는 시선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관점에서 우상의 제물인즉 더럽게 여길 수도 있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즉 정결한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후자의 신앙은 만물을 신선하게 보는 것입니다. 문화의 발달로 시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하였지만, 아직도 시체를 무섭고 더럽게 보는 사람과 애정적인 시각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성도들은 모든 만물을 애정적 시각으로 취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15절에서 “만일 식물을 인하여(2~3절 참조)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비판을 하였다는 뜻)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행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이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되지 않습니다(13절). 그래서 반드시 “사랑으로 행하라”는 뜻이고, 그렇게 하여야만 할 이유는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로 구속의 은혜도 베푸셨는데, 성도가 사랑을 베풀지 않고 판단을 하거나 거칠 것을 놓아 그를 실족케 한다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식물(자신의 음식 먹는 규정)로 망하게(상대방의 양심에 타격을 주는 뜻)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3)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믿음 약한 자를 지도하는 차원에서 비판한 뜻)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하신 것은 목적이 선해도, 방법이 사랑에 입각하지 않으면 효력을 낼 수 없고, 따라서 일을 잘하고도 비방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국회의원 193명은 애국심의 명분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대통령의 그만한 사유가 탄핵사건이 되지 않는다” 하므로 헌법 적용보다 도덕성을 앞세운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법률 해석보다 도덕성과 순결성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누구의 작은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후덕하지 못한 정치가들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먹는 문제로 불화하지 말라(17~21절)

교회의 단체 행사에는 먹는 일이 많습니다. 이 “먹는 일”이 왜 불화를 가져올까요? 매주일 식사 당번을 하는 집사님이 예배에 은혜를 못 받는다는 불평을 한 일이 있고, 식사 재료를 구매할 때 두 봉사위원의 뜻이 맞지 않는다는 불평을 들은 일이 있으며, 성탄절 친목회 준비로 물건을 구매하러 가다가 은퇴 목사님의 부인과 시무 목사님의 부인 간에 의견 차이가 싸움으로 번져 젊은 목사가 쫓겨난 일이 있으며, 또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 매식을 금하는 문제로 불화를 일으킨 일과, 또 커피 자판기를 예배당에 두고 돈을 넣고 먹게 한 것이 매매냐? 구제냐? 하면서 갈등하여, 그 자판기를 없앤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상 제물, 사치한 음식, 낭비성까지 감안하면 먹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자의 신앙적 결단은 “자신이 먹는 것은 자신이 도시락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시행할 능력자가 필자 외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1)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의롭게 행하는 것)와 평강(화평을 이루는 것)과 희락(기쁨)이라” 하셨으니, 교회에서 먹는 것도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성취하는 여건에서 시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굶게 되어도 믿음생활을 잘하고(합 3:17~18), 대접을 안 받아도 도시락을 갖고 와서 먹고 교회의 일에 충성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18절에서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로써”란 교회나 개인 생활에서 “식물보다 의와 화평과 희락을 앞세우는 일”입니다.

3) 19절에서 “이로써 우리가 화평의 일(화평을 힘쓰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상대방에 유익을 주는 일)을 힘쓰나니”, 20절에서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성도 개인의 믿음 발전)이 식물로 무너질 수 있는가? 하시겠지요. 의심과 거리낌의 행동은 믿음 발전을 막는 것이므로 무너질 수 있고, 또 그 거리낌이 식물 문제로 대두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퇴직금 다소를 놓고 교회가 갈라진 예도 있으니까요. 예배당 문전에 “커피 자판기를 놓아도 된다, 놓으면 안 된다” 하여 합심을 깨칠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끗한 만물을 놓고도 자기의 마음의 거리낌으로 행할 때는 그 마음에 악을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4) 21절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정당한 일이라도 타인의 양심에 거리낌을 줄 수 있는 일이면 삼가라는 뜻입니다. 다분히 주위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면서 화합이 깨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 씨가 초선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서 인사할 때, 캐주얼 옷차림으로 나왔다가 책망을 받았고, 심지어는 뒷자리에서 그런 인사를 안 받는다고 퇴장하는 의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중을 거리끼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복 차림에 죄 될 일이 없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정장 그 자체를 예절로 보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문율을 타파하거나 인식을 시킨 후에 의복의 간소화를 시행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고기를 먹을 때 거리낌 받는 형제가 있으면 가급적 피하여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도 거리끼는 사람이 있으면 피하여 먹을 수 있되, 하나님 앞에서도 정당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기나 포도주가 거리낌의 식물이 되는 것은 고전 8:13과 엡 5:18의 강론을 찾아보십시오.

5. 자기 확신을 가지라(22~23절)

1) 22절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하심은 자신의 신앙 확립을 뜻하고,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심은 그 확립된 지식과 신앙이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경의 잣대로 그것을 대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23절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은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나 의심이 있으면 실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의심의 반대이므로 불완전을 완전케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대상은 진리뿐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은 진리에 입각한 실천이 아닌즉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셨는데, 진리를 거스리는 것은 미확신, 즉 의심을 하는 일이기 때문에 복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선물을 미확인 대상(의심하는 것)에게 줄 자가 없겠지요. 따라서 성도는 진리에 근거한 확신을 갖고 생활하셔야 합니다. 누구의 확신을 빌려오지 마시고, 스스로 확신을 가지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 36 과 이웃을 기쁘게 하라 (롬 15:1~13) 목록으로


본문 2절에 보시면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라” 하셨고, 다른 말씀들은 대부분 이웃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1, 3절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하셨고, ② 2절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하셨으며, ③ 4절은 “인내와 안위로 소망을 갖게 하라” 하셨고, ④ 5~6절은 “예수님을 본받아 뜻을 같이 하라” 하셨으며, ⑤ 7~13절은 “서로 포용하고 열방인들과 융화하라”고 하셨습니다.

1.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1, 3절)

1) 성도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자기의 기쁨을 양보하여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기주의에 얽매인 자는 약한 자의 약점도 자신의 흥미로움에 이용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강한 자(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하여진 자)는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자신의 빚으로 담당할지언정 그것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데 이용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웃 중에는 약한 자들이 많은즉 그들에게 기쁨을 줄지언정 그들을 기쁨거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마땅히”로 번역된 “오페이로멘”의 뜻이 “빚진다” 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약한 자의 약점에 대하여 빚 갚을 사명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2)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그리스도는 완전하시므로 강하신 분임)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 69:9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로부터 훼방 받은 사실을 고백한 말씀인데,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영감에 의하여 메시야가 비방 받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비방을 받으시면서까지 타인의 기쁨을 위하여 노력하셨다는 것입니다.

2.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2절)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그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각 사람의 실천이 중요함)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 하셨으니 선은 좋은 일을 힘쓰라는 뜻이요, 덕은 유익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웃에게 본이 되지 못하면 선과 덕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3. 인내와 안위로 소망을 갖게 하라(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구약을 지목하신 뜻)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고전 10:6 참고)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원문 번역대로는 ‘성경의 인내와 안위로’임)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구약 성경을 교훈의 지침으로 소개하셨고, 성경에 기록된 인내와 안위는 욥의 인내를 대표로 들 수 있으며(약 5:11), 위로에 대한 말씀은 욥 15:11과 사 88:11, 40:1 등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많이 참아주는 일과 위로하는 일을 힘써서 이웃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록된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고전 4:6).

4. 예수님을 본받아 뜻을 같이 하라(5~6절)

5절에서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성경의 인내와 안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임, 4절)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심, 빌 2:5) 한 마음(주님의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인내와 안위의 은총을 힘입고, 예수님을 본받아 뜻을 같이 하며, 또 그 뜻을 한 입(일치한 증거)으로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인내와 안위”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입으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5. 서로 포용하고 열방인들과 융화하라(7~13절)

1) 7절에서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인 또는 원수 되었던 자들)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심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신 것은 죄인을 용서하고 포용하며 융화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즉 주님이 죄인을 포용하신 것처럼(마 9:12~13) 성도들도 약한 자나 문제 있는 자들을 포용하여야 한다는 뜻이요,

2) 8절에서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때 진실이 증명됨) 할례의 수종자자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들(구원의 언약)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례의 수종자 되심”은 구원 언약(할례로 구원 언약을 인친 것임)을 성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과 전도 사역으로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어, 그 진실함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이 구원 언약은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성취되었으므로 이방인들과도 융화할 것을 다음 절에서 교훈하셨습니다.

3) 9절에서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므로 궁휼을 힘입은 이방인들이 구원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또 구약의 예언으로 입증하셨으니,

① 9절의 “이러므로 내가 열방(이방 세계를 뜻함)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라” 하신 것은 시 18:49에 기록된 다윗의 예언으로 열방인들이 장차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요, 또 가로되

② 10절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신 것은 모세가 신 32:43에 기록한 말씀으로 역시 열방들이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백성들(선민)과 융화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며,

③ 11절의 “모든 열방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세계인들) 저를 찬송하라” 하셨음도 시 117:1의 인용으로 선지자가 예언으로 기록한 말씀이고,

④ 12절에서 “또 아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 뿌리는 근원을 뜻함)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이는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뜻)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사 11:10에서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민과 열방은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마지막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시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주시므로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응하여지기를 기도합니다.

 

제 37 과 바울의 사명적 은사와 전도 (롬 15:14~21)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① 14절은 “믿음의 성숙을 격려함”이고, ② 15~16절은 “바울의 사명에 관한 말씀”이며, ③ 17~18절은 “사명 성취를 위하여 받은 은사”이고, ④ 19~21절은 “전도의 역사와 계획”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바울의 사명적 은사와 전도”로 정하였습니다.

1. 믿음 성숙을 격려함(14절)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말하고 협력을 구하는 차원에서 먼저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거짓된 칭찬은 좋지 않으나 로마 교회 성도들은 그 시기에 상당한 믿음 성장을 이룩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곧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스스로 솔선하여 선행을 하려고 애쓴다는 뜻) 모든 지식이 차서(신앙 지식과 일반 지식이 상당하다는 뜻)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마다 독자적 선행과 지식이 있으면 능히 서로 권하고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입장에 있었으니, 이것은 신앙의 상당한 수준으로 성숙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책망이 별로 없는 것을 보아서도 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사명에 관한 말씀(15~16절)

1)15절에서 “그러나(믿음 성숙이 상당하지만)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하셨습니다. 실천이 미흡한 것은 여러 번 교훈하여도 중복이라 할 수 없고, 또 바울의 이 서신은 보통 서신이 아닌 영감의 글이므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을 길게 쓸 여건은 넉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강 쓰는 것, 즉 “요점적으로 뜻을 전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함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 21:25).

2) 16절에서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므로 바울의 사명에 관한 말씀을 여섯 가지 대목으로 표현하셨으니,

①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이방인 전도를 위하여 세워주신 것을 은혜의 선물로 소개한 점이며,

②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꾼 되게 하신 사명임을 자각하는 점이요,

③ 그 직무 성격이 복음의 제사장(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방인 사이를 중보하는 직) 직임임을 나타낸 점이며,

④ 같은 직무 성격으로 이방인을 믿음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물 되게 함이고,

⑤ 기쁘게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려면 성령 안에서(성령님의 역사로) 거룩(순결)하게 하여야 하는바, 이는 말씀과 기도와 회개를 통하여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딤전 4:5, 행 2:38).

⑥ 그리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하도록 성도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히 5:13~14).

바울은 이상의 내용을 따라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계속 촉구하신 것입니다.

3. 사명 성취를 위하여 받은 은사(17~18절)

하나님은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니시고, 반드시 그 일을 성취하게 할 만한 도구도 주십니다. 그 도구가 곧 특별한 은사이고, 일을 성취시키는 목적은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다” 하셨으니, 자기 자랑은 할 것이 없겠으나 “예수님 안에서 시행하는 하나님의 일(복음 사역에 관한 일)”은 자랑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 자랑할 만한 은사의 목적은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사를 통하여)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시는 것”이고, 은사의 내용은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감히 말하지 않노라” 하시므로 기타의 은사도 많지만 말(증거의 은사)과 일(복음 사역의 지혜), 표적과 기사의 능력(특별 섭리로 주시는 이적), 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말씀 영감과 기타의 은사)을 소개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상과 같은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아는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에 더 잘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고전 14:37~38).

4. 전도의 역사(歷史)와 계획(19~21절)

1) 19절에서 “이 일(복음 제사장의 직무, 16절)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복음의 제사장으로 이방인을 위하여 수고한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일루리곤’이란 지역이 마게도냐 서북부 현재 “알바니아” 영지에 있는 지역이라고 합니다(이 지역을 어떤 지도에서도 확인하지 못하였음)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노정이 나타나 있지만(1차 노정, 13:13부터; 2차 노정은 15:30~41부터, 3차 노정은 18:22~23) “일루리곤”에 가셨던 기사는 없습니다. 따라서 추론하건대 행 2:1~3의 노정 중 “수리아로 가고저 할 때 유대인들이…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시고 그 길로 ‘일루리곤’까지 다녀오신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을 피한 노정이므로 사도행전 역사에 빠진 듯합니다.

2) 20절에서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다른 사람이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곳) 위에 건축(교회 설립)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한 교파 안에서 교회의 간격을 정하는 규례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 거리가 200m로 좁혀졌지만, 그것도 지켜지지 않는 줄 압니다. 전도자는 가급적 교회 없는 지역에 전도함이 좋고, 이미 세워진 교회는 다른 전도자가 이웃 지역에 교회를 세워도 그것을 배격하는 자세를 취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자는 누구든지 현실적 사업 목적을 피하여야 하며, 상대방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정신으로 성도 간, 교회 간에 친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도 40대 목회 때는 가까운 곳에 교회 있는 것을 덜 좋게 생각하다가 그 후에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가까운 곳에 교회를 세운 사람이 자기 동생이라고 가상해 본 것이고, 또 하나님의 구령 사역이 이기주의 목적이 아니면 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인의 명예적 근거나 물질적 생활의 기업으로 여기는 일은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돈으로 정치하러 나가는 시대, 무급으로 복음 전파나 목회를 하여야 하는 시대가 온다면 정치가나 성직자가 다 순결하다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사회나 종교계가 물질 중심으로 병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3)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다” 하신 말씀은 복음 전파가 없었던 곳에 전도자의 발이 미칠 것을 사 52:15에서 예언하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예언을 성취하는 자에 해당된 것입니다.

 

 

제 38 과 바울의 진로에 대한 소망 (롬 15:22~33) 목록으로


본문 ① 22~24, 28~29절은 “로마와 서반아에 가시기를 소원함”이고, ② 25~27절은 “서신을 보내실 당시의 일”이며, ③ 30~33절은 “기도 부탁과 축복’이므로 전체의 제목을 “바울의 진로에 대한 소망”으로 정하였습니다.

1. 로마와 서반아에 가시기를 소원함(22~24, 28~29절)

1) 22절에서 “그러므로(이방 전도의 사명으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하신 것은 바울이 소아시아와 헬라 전역을 순회하신 후에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실 수 있기를 바랐지만, 여러 번 길이 막힌 것은 핍박 문제, 비용 문제, 여행 문제, 건강 문제 등으로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 않은 때문입니다(히 6:3, 고전 16:7).

2) 23~24절에서 “이제는(3차 전도여행을 마칠 당시, 행 20:1~3) 이 지방(헬라 지역)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서신으로만 교제하여 알게 되었은즉 만나면 만족할 것임)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하셨으니, 서바나는 로마를 거쳐 갈 수 있는 지중해 서쪽 스페인 국이므로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로마에 먼저 가서 권속들을 만나고, 로마 교회 성도들이 주선해주는 배려로 서바나 선교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는 뜻은 바울이 1, 2, 3차 전도한 지역에 일단 복음의 씨를 던져 싹이 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28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바울은 헬라 지역 성도들의 구제금을 모아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백성들을 구제한 후에; 행 11:28; 고후 8:20, 9:12)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구제금을 잘 전달하고, 그 결과를 구제한 백성들에게 명확하게 보고한다는 뜻) 너희(로마 교회)에게로 지나 서바나로 갈 것이라” 하셨으나 로마까지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셨지만(행 25:25, 26:32~28:15) 서바나까지 가게 하시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설적인 목적과 사명이라도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의하여서만 성취됨을 알 수 있습니다.

4) 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 안다” 하셨으니, 바울은 영감의 사역자요(고전 14:36~38) 말씀이 은혜의 방편인 만큼 바울의 성경 지식과 영적 체험의 성숙함이 처음 만나는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전달할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바나까지 갈 것을 예상한 것은 인간의 생각뿐이었습니다.

2. 서신을 보내실 당시의 일(25~27절)

1) 25~26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고후 8:4, 19~23)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헬라의 북부 지역), 아가야(헬라의 남부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고후 8:20, 9:7, 13) 하시므로 고린도 또는 아가야 지역에서 이 서신을 쓰시고 이어서 예루살렘에 가실 것을 예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바울 사도가 3차 전도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실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27절에서는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구제는 기쁨으로 하여야 함, 고후 9:7) 또한 저희(이방인 성도)는 그들(유대인 성도들)에게 (복음의)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복음적 은혜)을 나눠 가졌다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빚을 진 문제는 롬 1:14에서도 설명하셨고, “신령한 것으로 받았은즉 육신의 것으로 섬겨야 함”은 고전 9:11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선민을 통하여 신령한 복음을 받았은즉 이를 빚으로 여겨 구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3. 기도 부탁과 축복(30~33절)

1) 30절에서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하면서 자신이 사역자 된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았다” 하시고, 서로 기도에 협력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모든 신령한 복과 사명은 다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입니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함”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특히 바울 자신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자는 뜻입니다. 성도와 복음 사역자가 합력하는 기도는 효력이 더욱 클 것입니다.

2) 기도의 목적은 30절에서 “바울을 위하여 하나님께 빌되”, 31절에서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않는 자들(유대인으로서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구원(보호와 지키심)을 받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예루살렘을 복음의 근원지와 출발처로 나타내신 뜻)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성도들이 복음을 기쁨으로 받게 하는 뜻)”, 또 32절에서는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로마에 가서)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하시므로 핍박에서 보호 받고, 복음 사역이 잘되어 기쁘게 은혜를 받고, 또 초청을 받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달라는 뜻입니다. 과연 바울은 이 기도대로 로마 감옥에 가셔서 휴식을 잘 취하신 줄로 압니다.

3)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하시고 축복을 하셨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서(요 14:27) 모든 성도와 함께 하시면 평강이 있게 될 것이요, 이 축복은 사도적 권위로 선포한 것입니다(고후 13:13). 축복의 성격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지만 이 경우는 축복의 근원자를 마음에 모시고 표현에는 나타내지 않은 것뿐입니다. (축복을 하셨은즉 편지 내용이 끝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6장은 고린도나 아가야 지역으로 보낸 것이 잘못 편집되었다는 학설이 설 수도 있겠지요.)

 

 

제 39 과 뵈뵈를 천거함과 문안 (롬 16:1~16) 목록으로


※ 로마서 16장을 연구함에 있어서 서론 부분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서신이 고린도 교회에 따로 보내신 것을 나중에 편집하는 사람들이 로마서 끝에 잘못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1. 로마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롬 15:33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끝맺은 느낌을 주는 문제와 또 바울 사도가 일찍이 가보지 않은 곳에 사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알며 문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요, 셋째는 문안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로마식 이름이 아니라 하므로 그렇게 짐작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이 16장 서신이 고린도로 가야 할 이유는 서신 전달자 뵈뵈가 고린도 근방인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즉, 바울이 에베소에서 뵈뵈가 고향 쪽으로 가는 편에 고린도 교회로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브리스길라 내외가 고린도 교회 설립자(네 집에 있는 교회, 고전 16:19)인 만큼 4절의 “저희 교회”란 로마 교회가 아닌 고린도 교회를 의미할 수 있음과 또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이 1년 반이나 교역을 하신 곳인 만큼(행 18:11) 문안 대상을 잘 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린도에 보낸 것”이라고 하여도 주장 할 수 있겠지요.

3. 그런데 본서대로 로마서가 맞는다면 바울이 잘 아는 문안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22~23절에 나타난 많은 문안자들과 인적교류를 통하여 알게 된 관계이거나, 또는 그 당시에 로마 여행을 선호한 시대이므로 아시아 지역에서 로마로 이민 또는 여행 중에 정착한 성도들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 1~2절은 “뵈뵈를 천거하신 말씀”이고, ② 3~16절은 “여러 사람들에게 문안하심”입니다.

1. 뵈뵈를 천거하심(1~2절)

1) 1절에서 “내가 겐그레아(고린도에서 동쪽으로 100km 쯤 떨어진 항구로 바울이 그곳에서 서원을 한 일이 있음, 행 18:18) 일꾼(디아콘, ‘집사’로도 번역함)으로 있는 뵈뵈(여자의 이름이고, 순결의 뜻이라고 함)를 너희에게 천거한다” 하셨으니, 이 여인이 천거를 받은 이유는 2절의 말씀처럼 성실한 면도 있지만, 이 여성도가 로마서를 전달하는 사신의 역할로 로마에 가게 된 때문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말씀한 분은 바울이고(롬 1:1~7), 기록한 자는 “더디오”(16:22)이며, 전달자는 “뵈뵈”입니다.

2) 2절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에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를 섬기면서 바울의 보호자가 될 만큼 바울을 섬긴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로마에 갈 개인적 사유가 있었는지 모르나, 그를 로마서 전달의 사신으로 보내신 만큼 로마 교회에서 그를 사역자처럼 도와줄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복음 사역자의 보호자가 되고 있는지 반성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2. 여러 사람들에게 문안하심(3~16절)

1) 3~4절은 “브리스가[바울은 “브리스가”라 하였고(고전 16:19, 딤후 4:19), 누가는 “브리스길라”라 하였는데( 18:22) 이런 차이는 발음상 있을 수 있음. 예를 들면 여호아, 야외, 여호수아, 예수, 예수아 등으로 호칭하는 것과 같음]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기록된 곳마다 연속됩니다(행 18:2, 18, 26; 고전 16:19; 딤후 4:19). 따라서 부부로 보아야 하고, 부인 된 브리스가가 아굴라 앞에 호칭 되는 이유는 그가 더 능동적인 인물인 듯합니다. 이 부부가 고린도로 추방되어 왔는데(행 18:2), 또 로마에 가서 사역한 것이 의문스럽지만 그대로 알고 지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니까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행 18:2) 이 부부를 만나 계속 동역을 한 터이라 잘 알게 되었는데, 4절에서 “저는 내 목숨을 위하여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한다” 하시므로 그 부부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한 점과 여러 이방 교회가 알만큼 활동한 부부 사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신으로 사역하는 바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5절 초에서는 “저희 교회에도 문안하라” 하셨는데, 고전 16:19에 보시면 “그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편지가 로마로 가야 할 것이면 이들이 로마에서 교회를 섬긴 것이고, 고린도로 갈 것이면 고전 16:19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어느 곳이든 교회를 주동으로 섬긴 가정이었습니다.

2) 5절에서 “에베네도”에게 문안하셨습니다. “에베네도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 지역으로 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어느 지역에서 처음으로 믿음 열매가 되어준 성도인즉 잊을 수 없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3) 6절에서는 “너희(그 지역 성도들)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하셨으니, 이 마리아는 로마에 있는 성도이고, 그곳 교회에서 성도에 대한 봉사를 많이 한 것을 인정받은 성도입니다.

4) 6~7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또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하셨으니,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진 삶들입니다.

① 바울의 친척이란 점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받은 사실과 결부할 때(행 22:2) 바울의 출생 시부터 로마에 그 친족이 살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그 집안과 관련된 친척일 수 있고,

② “나와 함께 갇혔다”는 사실은 바울이 “여러 번 갇힌 일이 있었다”(고후 11:23)고 하셨은즉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내시기 전에 어떤 장소에서 위의 두 사람과 함께 갇힌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건대 16장은 다른 내용과 함께 일시에 보내진 것이 아니고 후에 보내진 서신으로 생각한다면 “함께 갇혔다”는 문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은 것인데, 이는 바울과 함께 갇힐 정도로 복음 전파에 협력하였으므로 그런 인정을 받은 것이요,

④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그들이 바울의 개종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와서(행 2:10) 복음을 받아간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로마 교회의 신앙의 선도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5) 8절에서는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9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르바노”가 동역자인 것은 그가 복음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의 개인적 신상이 자세히 기록된 바가 없기 때문에 더 알 수 없습니다.

6)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또 아리스도볼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하셨으니, “아벨레”가 그리스도 안에서(교회 안에서란 뜻과 같음) 인정받은 사실을 나타내신 점이 특이하고,

7) 11절에서는 “내 친척(7절)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니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하셨고,

8) 12절에서는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로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하셨으니 성도의 사랑과 봉사가 그를 기억되게 하는 근거가 된 듯합니다.

9) 13절에서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는 곧 내 어머니라” 하셨으니, 이 루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입니다(막 15:21). 따라서 루포의 어머니는 바로 십자가를 대신 졌던 시몬의 부인이고, “그를 내 어머니라” 한 것은 바울이 존경하는 의미에서 어머니처럼 생각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10) 14~15절에서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롬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하시므로 기억하시는 성도 전부를 문안 대상에 올린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문안 대상에 누락되는 이름이 있어서 그 형제를 섭섭하게 하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11) 16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한다” 하시므로 “거룩하게 서로 입맞춤”이란 순수한 신앙적 사랑의 확인을 하라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문안함”은 여러 처소로 다니시는 책임자이므로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안부하신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를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사랑하며, 안부를 전하신 것처럼 목회자가 성도를 그렇게 알고 관심 갖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요 10:3~5).

 

 

제 40 과 권면과 결론 (롬 16:17~27) 목록으로


바울 사도는 결론 부분에서 ① 17~20절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하셨고, ② “문안하는 성도의 명단”과(21~23절), ③ “복음의 성격과 영광 기원”으로(25~27절) 끝을 맺으셨습니다.

1.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경계하라(17~20절)

오늘날도 여기저기에 분쟁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리, 신학, 또는 사상, 은사의 취향 등이 맞지 않아서 싸우다가 분리하는 경향은 거의 줄어들었습니다. 대부분 교역자에 대한 인사 문제와 배척, 또는 정치적 갈등에서 빚어지는 싸움들입니다. 일단 싸움을 하게 되면 시험에 든 줄로 아셔야 합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싸움이면 바른 성도 편에서 나오면 되고, 가급적 재산은 포기해도 되나, 합의가 안 되면 수효 비례로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그까짓 물질이 무엇이 중요하여 오래 버티고 싸우겠습니까? 또 교역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또 교역자를 배척하는 성도의 수가 적으면 그 교회에 오래 머물면서 교역자를 더 어렵게 하시지 말고 따로 나와서 좋은 교역자를 모시고 새 출발을 하세요. 좋은 교역자를 만나는 일은 여인이 남편을 만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즉 천리타국이라도 교역자 좋은 교회로 따라가서 신앙생활 잘 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숙된 신앙인은 성경과 예수님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교역자의 유명세나 서툰 면은 문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조건 화평하고 사랑스러운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1) 17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단체일 뿐 인간의 명예적 또는 기타의 이기주의를 채워주는 기관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또 사람으로부터 덕을 보려는 기관이 아니고 오직 성도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2) 18절에서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이기주의)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하셨습니다. 순진한 성도가 기독교의 진정한 목적을 안다면 잘못된 유혹에 빠져 싸움에 가세하지 않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신앙의 목적을 곡해하고 인간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 정의나 명분이나 신앙보다 자기의 배만 섬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경계하고 합리적으로 치료하셔야 할 것입니다. 안 되면 멀리 하십시오.

3) 19절에서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는지라(15:14 참조).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악은 서툴고 선에는 능숙하라는 말씀이요,

4)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시므로 성도가 악을 억제하고 선을 힘쓸 때 하나님이 사탄의 역사를 패배하도록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눅 22:31). 사탄의 패배와 성도의 승리하는 생활을 위하여 은혜가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2. 문안하는 성도의 명단(21~23절)

편지 말미에 문안하는 성도의 명단을 기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 21절에서 “나의 동역자 디모데(행 16:1~3, 딤전 강론 참조)와 나의 친척 누기오(7절, 바울은 친척을 많이 복음으로 인도한 듯함)와 야손(행 17:5~9)과 소시바더(행 20:4)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절에서 “이 편지를 대서하는(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 갈 6:11)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의 “나”는 “더디오”가 직접 글을 쓰면서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의 안부를 전한 것입니다.

2) 23절에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식사 담당 책임자)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행정관청의 재무 직책)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한다” 하셨으니, 이분들은 다 성도의 교제상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성도간의 친교와 관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 복음의 성격과 영광 기원(25~27절)

25~26절은 복음의 성격을 말씀하셨고, 27절에서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기원하시므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1) “나의 복음” 즉 바울 사도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인데, 영원 전부터 감취었다가(하나님만 아시고 계시다가 나타내신 것) 이제는(이방인들에게)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하나님이 계시를 섭리하심) 선지자의 글(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심, 벧후 1:21, 출 34:27)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세계, 땅 끝까지, 행 1:8)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믿음과 순종은 하나임, 믿음과 세례도 하나임, 막 16:16)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감취었다가 나타난 뜻)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확실한 구원과 승리를 주신다는 뜻입니다(히 5:9, 10:14).

2) 끝으로 27절에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구원의 경륜을 나타내신 지혜)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영광을 돌리도록 계속 사역하실 분은 중보자 예수님이시며, 영광의 시기는 세세무궁토록이라 하셨으니, 구원 받은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세세무궁토록 살면서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본문에 “24절은 없다” 하였고, 하단 각주에는 어떤 사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였는데, 이 문장은 고대 사본에는 없고, 근대 사본에만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Revised Version(개역으로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 문장을 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대 원문이 권위가 있고, 최근 사본은 기록자가 20절을 중복 기록한 실수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신약 강론 완료.) 2004. 3. 30. 밤 12시 15분

 

 

설교보충 1. 심판받을 죄악 (롬 2:1~16) 목록으로


본문에는 두 가지 강조점이 특징입니다. 하나는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이고, 또 한 가지는 “심판받을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심판받을 죄악”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먼저 심판을 강조하신 말씀을 보면 “네가 핑계치 못한다”(1절),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데…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 아느냐?”(2~3절), “진노의 날에… 임할 진로를 네게 쌓는다”(5절), 또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절), “노와 분으로 하신다”(8절),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9절), “율법 없이 범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12절),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16절)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16절에 보시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 하셨고, 또 2, 3절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고 피할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죄도 숨길 수 없고, 심판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본문에서 말씀하신 심판받을 죄는

1) 남을 판단하는 죄입니다. “판단”이라고 하는 원문 크리노(κρίνω)는 “비판한다, 심판한다, 재판한다”는 뜻이고, 마 7:1의 “비판하지 말라” 하실 때도 역시 같은 원문입니다. “비판, 심판,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할 때, 꼭 안해야 되는가? 또는 그 행동 범위와 대상이 누군가? 하는 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비판이나 연고자의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남을 판단, 비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남의 일이 자기와 관계가 있다면 할 수 있겠지만 관련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요즈음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소송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런 것들이 다 대상을 잘못 정한 것입니다. 인간은 비판하기 어려운 조건이 많습니다. 첫째는 자신도 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같은 죄를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며, 다음에는 내막을 모르기 때문이고, 넷째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 비판하면 그 보응이 당장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재판관이 아니라도 비판할 경우가 있다면 결백 상태에서 측근에 대하여 사랑을 목적으로, 또 내용을 잘 알고 하는 것 외에는 삼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것은 더 큰 심판의 대상이라”고 지적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판단하는 죄도 핑계할 수 없거니와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 곧 자신을 정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회개하지 않는 완악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을 멸시하는 죄도 되는 것입니다(4절). 5절을 보시면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따라…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를 못하는 것은 완고한 마음 때문이고, 완고한 마음 그 자체는 자신의 고집이요, 자존심입니다. 죄 있는 사람이 자존심으로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를 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고 오래 참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참아주실 때 회개하면 무한정 용서하시나(마 18:21~22) 그때를 넘기면 벌하시되 범죄한 행위의 시일에 따라 벌하십니다(시 90:15; 단 4:15, 23; 욜 2:25; 겔 4:4~5).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완악은 크게 불행한 것입니다.

3) 8절에서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죄”입니다. 그런 자에게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을 짓는 것은 단체 조직입니다. 단체 조직을 할 때는 반드시 좋은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좋은 목적만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단체가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다면, 그것은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정당은 정치를 잘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입니다. 그런데 정치를 잘하기도 전에 정권쟁탈욕에 급급하거나, 부정한 돈을 수집하여 정치자금을 썼다면, 그 단체는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교회도 단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노회와 총회는 교회에서 뽑힌 대표자가 모여 결성한 단체인 만큼 더욱 예수님을 잘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단체에서 불의한 운동을 한다면 그것이 곧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는 것이지요. 참으로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범죄입니다. 9절에 보시면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이란 개인별 죄악과 개인별 심판입니다. 민족은 민족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그 죄를 책망하시되 어느 형편에서나 개인의 범죄는 개인의 범죄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의 죄는 생각하는 잘못과 말과 행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맞지 않는 것은 대체로 신앙과 사랑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음”은 신앙생활에 타격을 주심입니다.

3. 심판하시는 방법이 어떠하실까요?

1) 핑계치 못한다 하셨으니까(1절) 변론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2절)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에는 불확실이나 착오나 불공평이 없다는 뜻이고,

3) 5절에서 “진노의 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벌하실 것이냐? 하는 것인데 생전 어느 때나, 아니면 주 재림 때에 하시는데 그 날이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4) 그 외에도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6절), 각 사람의 영에게 곤고를 주시며(9절), 유대인, 이방인 등 전체를 공평하게 하시고(9~10절), 외모는 감안하지 않으시며(11절), 양심이나 율법에 비추어 하시고(12절), 특히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16절). 결론은 사람이 자기를 숨길 수 없으므로 어디서나 부끄럽지 않고 정의롭게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 죄는 영광을 가리움 (롬 3:23) 목록으로


“죄는 영광을 가리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큰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엡 1:6, 롬 11:36).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였을 때 “천국 가기 위함이라”고 하셔도 되지만, 천국(天國)은 노력 없이 믿음으로 가게 되는 것이고, 성도가 노력할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의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요 15:8과 빌 1: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의의 열매(계명 순종,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를 많이 맺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불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소극적 방법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삼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까” 죄를 삼가면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주 결백하여야 된다”는 뜻이 아니고, 최대한의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삼가고 순결을 지키면 예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예수님을 가까이 닮는 것(거룩한 형상)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성도가 범죄를 자주 하면 마귀를 닮을 것인즉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고, 결백을 힘쓰면 예수님을 닮은 것 때문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분량이 더 많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좋은 일 많이 하는 것이 죄 안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예수님이 잠깐 살다간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일과(마 11:11) 잠깐 일한 품꾼에게 하루 종일 일한 품삯으로 꼭 같이 준 사례를 생각하신다면(마 20:8~16)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안 짓고 가만히 있는 것도 중요한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잘못하여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일한 것보다 부정에 개입한 것이 국민을 더 괴롭게 하는 것처럼 의의 열매보다도 자기 순결에 힘쓰는 일을 더 중요시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에는 죄에 대한 것과 죄 안 짓고 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죄가 무엇인지 아셔야 하겠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목표입니다. 그래서 죄를 뜻하는 “하말티아”가 목표에 빗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2. 그러면 그 목표가 어디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경과 인간의 양심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 13:8, 롬 2:14). 고후 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셨으니까 진리 연구를 철저히 하셔야 하고, 또 바울 사도가 행 23:1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하셨으니까 진리와 양심이 죄를 깨우치는 규범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왜 죄를 짓게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타락한 인간에게는 부패성이 남아있고, 마귀는 배후에서 유혹하며, 세상 정욕은 관심을 끌게 하여 마음을 혼미하게 한즉 선악 분별을 못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습기가 있으면 곰팡이가 끼는 것처럼 성도에게 부패성이 남아있는 한 마귀의 유혹과 범죄 위험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성을 없애도록 노력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거룩해지는 것 또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고, 이것을 성취하려면 말씀과 기도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딤전 4:5). 성경을 가까이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고, 기도를 힘쓰면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죄의 유혹을 떨치려면 자기 정욕을 부정하여야 합니다.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현실 부정을 의미하되, “자신을 낮출 줄 알고 현실적 욕심을 버리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눅 4:6에 보시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은 마귀가 받은 것으로 자기에게 절만 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정한 방법으로 현세욕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형편에서 성도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5~16, 창 3:6)을 멀리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말씀 확신에 흔들리고 세상 정욕을 거부하지 못하여 범죄하였지요(창 3:1~6). 그러나 인간 모범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것을 이기셨습니다(마 4:1~11). 그래서 죄를 힘 있게 대항하려면 성경 말씀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것과 세상적 욕심(명예, 물질, 향락)에 끌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약 1:14).

3) 그리고 마귀의 유혹이 올 때는 아주 결백한 자인 듯이 강하게 대항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 번 다시 유혹이 오지 않습니다. 죄는 무지, 연약, 고의적으로 짓는 경우가 있고(눅 23:34, 마 26:41, 히 10:26), 불신앙(요 16:9, 롬 14:23), 불법(요일 3:4, 5:17), 부덕(벧후 1:6), 비양심(롬 1:15), 믿음 나태(삼상 12:23)가 다 죄요,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마 12:32; 행 7:51; 히 6:46, 10:26; 요일 5:16).

 

 

설교보충 3. 구원의 은혜성 (롬 3:23~24, 엡 1:3~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원의 은혜성”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은혜성”이란 인간의 공로나 노력 없이 거저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은혜성”을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 하셨고, 또 엡 1:6에서도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엡 2:1에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하셨으니 구원 받기 전에 영적으로 죽은 자는 노력이나 공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시종일관 구원 받도록 하셨기 때문에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4:4~8에서도 “일하고 삯을 받는 것은 빚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한 것 없이 믿음으로 받는 것은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구원의 은혜성”에 대하여 글을 써오라 하여서 쓴 일이 있는데, 지금 정리한 이 내용은 그때 쓴 것에 비하면 잘 된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 큰 은혜이고, 은혜성은 노력 없이 거저 받은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이 큰 구원을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거저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죄사함과 천국 영생과 관계되는 것인데,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 하여도 피조물로서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을 영적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죽은 자가 아무 것도 못하듯이 인간은 구원에 대하여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영적 성격과 인간의 타락성으로 볼 때 은혜로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2. 구원의 절대 요소가 중보자입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중보자, 죄 없는 자, 또 영원자이어야 합니다. 사람 중에는 그런 자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셔야 하고, 그분이 죄를 대신 짊어지셔야 하며, 그분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원을 청탁하여야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는 그런 중보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 계획을 만드시되 독생자를 죄 없는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어 중보자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일에 참여할 수도 없은즉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독생자의 구속과 중보 사역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셨으면, 그 계획이 당사자(구원 받을 인간)에게 와 닿아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타락자를 떠내려가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119 구조대로 비유했을 때, 구조대가 밧줄을 갖고 와서 붙들어 매거나 건져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떠내려가는 시체는 스스로 구명줄 잡을 힘이 없습니다.(엡 2:1, 고전 2:14, 렘 13:23). 그래서 성령님이 죽은 영을 살리시고(요 3:3) 밧줄을 붙잡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또는 성령님 또는 예수님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살후 1:10, 히 12:1, 마 16:17, 고전 12:3). 알미니안 신학에서는 “인간에게 약간의 자유의지(영적으로 덜 죽은 부분)가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믿은즉 믿음에 보탬을 주고 성령님께 의존한다”고 하지만 칼빈주의 전적 타락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또 천주교에서는 죄를 대속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마리아나 성자의 공로도 보탬이 된다고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교리입니다. 중보자는 예수님뿐이니까요. 그래서 구원의 범위와 구원 계획과 중보자와 믿음까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니까 은혜로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을 끝까지 붙잡는 것입니다. 히 3:14을 보시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하셨는데, 이 믿음을 끝까지 잡는 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마 10:22에 보시면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중간에 끊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믿을 자가 믿어야 하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으며, 또 견인하지 않으면 중도 하차하여 구원 받지 못 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라. 깨어라” 하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믿음을 주어 이끄시다가 사람이 타락한다고 내던지신다면 구원 받을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거부로 좌절되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고전 1:8에서 “모든 은혜에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히 하리라” 하셨고, 고후 1:10에서도 “이같이 큰 사망에서도 건지시고 또 건지실 것이라” 하셨으며, 딤후 1:11에서는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범위로 보나, 계획으로 보나 또 중보자의 사역과 타락자가 영적으로 죽은 사실과 믿음을 갖는 동기와 믿음을 붙드시는 데 이르기까지 은혜가 아니면 성취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유지하는 과정에 있어서 9집의 “믿음을 붙드심”이란 제목의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눅 22:31~32).

 

 

설교보충 4. 죄와 구원 (롬 5:15~16)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 하셨으며, 또 “이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아니하여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죄, 구원, 그리고 은사가 범죄와 같지 않다”는 점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죄는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안 지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외에는 하나님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시지만 세계의 인류와 성도들도 한 손 안에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 믿음, 나의 섬기는 교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성도와 교회를 다 보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이 나의 이기주의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원문 상의 의미로써의 죄는 “하말티아”(ἅμαρτία)로써 화실이 과녁을 빗나가는 것, 즉 목표에 적중하지 못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경계하는 성도들은 항상 목표와 적중성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5항에서 “죄는 인간의 부패성에 의한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패성 그 자체는 예수님의 형상에 반하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난 것을 의미하는데, 타락한 인간에게 그런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장로교회 헌법 권징 조례 3조에서는 “교인이나 직원이나 치리회를 불문하고 교훈과 심술과 행위가 성경에 위반되거나 혹 사정이 악하지 않을지라도 타인을 범죄케 하거나 덕을 세움에 방해된 것”이라고 비교적 자세하게 정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인류는 다 죄인입니다.

2. 그러면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는 한 마디로 불행인데, 시작과 종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의 범죄는 죄의 문을 연 것과 같아서, 마음의 등불을 끄고 어두움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훼손한 부패성입니다. 그 부패성이 하나님을 피하게 하였고, 자기 수단으로 몸을 가리며,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자연계를 통하여(창 3:17~18) 또는 잉태의 고통으로, 수고의 땀 흘림을 허락하셨고,

3)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되어(롬 5:12) 자신이 지은 죄와 함께 심판을 받게 되니 그 형벌이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히 9:27, 고전 15:26, 롬 6:23).

3.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1) 하나님은 만세 전에(엡 1:4)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세우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생자의 희생이 따라야 하고, 또 구원 사역이 일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전제함) 구원의 대상과 구원의 방도와 절차를 계획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심에 있어서 동기는 죄인에 대한 사랑이며(요 3:16; 마 9:12; 롬 5:6, 8, 10) 독생자의 희생을 통해서라야만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는 공의의 속성 때문인 것입니다(살후 1:7). 그리고 “왜 다 구원하시지 않고 일부만 선택하여 구원하시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린 것입니다(엡 1:5, 롬 9:21~23).

3) 구원의 절차는 타락의 결과를 회복하고 더 나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리기를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않다” 하셨는데, 여기에서 먼저 이 뜻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은사가 범죄와 같지 않은 뜻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가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인류에게 전가된 상태는 거의 자연적이었지만, 구원은 범죄한 개개인의 죄와 죄책에서 구원하는 것이므로 그 공력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범죄가 엎질러진 물이라면 구원은 그것을 주워 담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인류가 타락한 것을 하나님이 아들의 역할로 구원하신 점이며, 셋째로 범죄와 같지 않음은 타락 전의 에덴동산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과 내세의 천국으로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폭이 타락의 전의 형편보다 더 커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중생(요 3:3), 소명(롬 8:30, 10:14), 믿음(롬 10:10), 회개(요 13:10, 막 1:15), 칭의(롬 8:30), 양자(요 1:12, 롬 8:29), 성화(요 17:17, 롬 8:29, 딤전 4:5), 견인(롬 8:35~39), 영화(살전 4:16~18)의 순서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적 죽음(엡 2:1)은 거듭남(중생)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은 소명으로, 심판과 진노 아래 있는 것은 칭의로, 예수님의 형상을 훼손당한 것은 성화로, 육체의 죽음은 부활로 회복시켜 주시는데, 여기에 덧붙여주신 것이 양자 되는 권세와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체와 에덴동산 대신에 내세의 천국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현실적, 육체적 불행을 주었지만, 구원은 신령적 축복과 내세의 천국으로 바꾸어주신 점에서 더 크고 중요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목록으로


어떤 사람이 “짐승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는데, 며칠 전에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인가까지 번져서 송두리째 주택을 태운 집이 있었는데, 털을 반이나 불에 거슬린 그 집의 개가 며칠을 굶은 상태에서도, 탄식하며 울고 있는 주인 곁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무슨 손해를 보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다면 크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바울 사도가 느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유대주의, 율법주의적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성도를 많이 핍박하고 죽였으며, 예수님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행 7:57~8:3, 22:4; 딤전 1:13; 롬 5:10). 그러다가 예수님이 만나 주셨고, 복음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또 복음 전파의 사명과 존귀한 사도의 직책 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동기와 사랑이 같지만, 바울이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특별한 것은 그가 성도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원수로 여긴 점과 구원을 받되 존귀한 사도직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특별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도 사랑하시고 존귀한 직분을 주실 만큼 원수를 사랑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행 9:5, 딤전 1:12~15).

2. 이것 외에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 받은 은혜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사랑과(롬 5:10) 의를 참고하시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것과(롬 9:11, 요 15:16) 특히 독생자와 만물을 주신 것과(롬 8:32) 독생자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롬 8:34), 또 의롭다 해주신 후(롬 8:30),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기도해주시며(롬 8:34), 말씀과 성령으로 늘 함께 해주시고(마 28:20),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요 13:1) 은혜를 생각할 때 그의 가슴이 뜨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하면서 그의 사랑에 감격하고, 끌리며, 더 사랑하게 되고, 또 충성하되 죽음을 불사하고 충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어떻게 충성하려고 하였습니까?

1) 우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 사역에 임한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앞길에 환난과 핍박이 기다린다 하여도… 사명을 마치기 위하여는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행 21:13, 22:27) 하셨고, 또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롬 14:7~8)고 하셨습니다.

2) 또 그는 변화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롬 6:3, 엡 4:23, 빌 3:8) 새사람으로 옷 입었다 하셨으며(골 3:12), 육신과 현세의 정욕을 멀리 하셨고(롬 8:7, 갈 5:16), 예수님의 존귀와(빌 3:3, 1:26) 십자가만 자랑하는 생활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고전 2:2).

3) 변화의 생활을 하는 중에도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수고도 넘치도록” 하셨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 태장과 돌로도 맞았고, 일주야를 깊은 물에서 지내셨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바다의 위험, 주림과 목마름 등 수없이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순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4) 그러면서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로도 끊을 수 없고, 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도 절대불변의 사랑이요(요 13:1), 성도의 편에서 볼 때도 절대불변의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저희들도 가지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 이런 신앙은 바로 순교적 신앙입니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 등이 순교하신 것처럼 많은 성도들이 순교한 역사를 기억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후 100년경 도미시안 황제의 핍박 때도 수십만의 성도가 순교 당하였고, 주후 115년에 폴리갑 교부가 화형으로 순교 당할 때 “내가 80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해롭게 한 적이 없거늘 내가 어찌 그의 사랑을 끊겠느냐?” 하였다 하며, 크리소스돔(주후 346~407)도 그런 정신으로 순교하였고, 로마의 비립사덕이란 과부는 일곱 아들을 순서대로 죽이면서 믿음을 포기하라 하였지만 끝내 순교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말에 어떤 여성도는 남편의 핍박으로 32군데 단근질을 받고도 결국 굽히지 않고 남편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5. 문제는 저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모로 깨달을 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을 원수시한 사람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셨고, 독생자의 희생은 고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은 자를 양자로 삼으셨고, 늘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며, 마귀의 역사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와 함께 만물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만큼, 저희들은 신령한 은혜는 물론 물질적 은혜에 대한 것도 소상히 느낄 줄 알아야 하고, 항상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귀중하게 깨달으시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합당한 예절 (롬 12:1~2) 목록으로


성도 여러분, 성도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예절이 더욱 민감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보내는 공적 서신(영감의 서신을 전달하는 여성도) 뵈뵈에게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예절”입니다. 또 예절은 “무례히 행하지 말라”(고전 13:5) 하신 말씀과 관련할 때 사랑 실천에 속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0) 는 말씀에 근거할 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예절은 함께 생각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인사성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심이 퇴보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습니까?

1. 예절과 관련되는 말씀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타난 용어로 인사(눅 1:29), 문안(고전 16:21), 단정(롬 13:13; 딤전 2:2, 3:4), 분수(롬 12:6), 존경(롬 12:10, 13:7), 교제의 악수(갈 2:9), 규모(살후 3:7), 덕(롬 14:19), 그리고 “자세히 주의하여 행하라”(엡 5:15)는 말씀이 다 예절과 관련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속담도 있듯이, 그만큼 도덕성과 예절은 중요한 것입니다.

2. 여러분, 부모님이나 어른에 대한 예절은 잘 지킵니까? 일어났을 때와 누울 때 인사하고, 식사예절도 있으며,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하셔야 하겠지요. 밖에서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고 정중하게 인사하십니까? 항상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른에 대한 예절에는 언어와 태도가 중요합니다. 식사란 용어보다 진지란 용어를 쓰셔야 하고, 평안이란 용어 대신 안녕이란 용어를 써야 하며, 윗사람에게 먼저 악수 청하는 무례가 없어야 하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도 큰 실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와 의논하지 않거나 부모의 뜻에 거역하는 것은 무례와 불효를 함께 범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자녀들의 어른에 대한 경어가 거의 사라졌지요. 자유방만한 시대가 된 것은 그만큼 바쁘고 만나서 교육할 시간이 없는데도 문제가 있다 할 것입니다. 두 집사가 목사님 사택에 와서 도배를 하는데, 목사가 음료수를 대접하면서 젊은 집사에게 먼저 권한 것이 불평스러워 석 달 동안 목사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절에 그만큼 민감한 경우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단체 식사가 있을 때 반드시 상좌에 앉지 않는 것도 유의하셔야 합니다(마 23:6). 성도나 이웃의 가정에 길흉사가 있으면 거기에 합당한 인사도 하셔야 하겠지요. 여기에 대하여 어려운 상대에게 인사를 겸한 물질적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길흉사에 대한 예절(부조금)에 많은 개혁이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절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에도 필요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요 4:23),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예절은 24시간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특히 예배드릴 때, 찬송을 힘 있게 부르시고, 기도할 때 정신 차려 마음을 집중하시며, 설교를 청취할 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아는 말씀을 증언할 때는 다른 성도에게 필요하여 중언하는 것임을 아시고, 그 성도가 깨닫고 실천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설교를 듣는 것이 힘들 경우가 있음을 감안하여, 간단히 하는 것과 필요한 말만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 듣는 성도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설교나 연구하는 자세로 들으면 지루하지 않다는 사실도 체험하십시오. 예배를 마치신 다음에는 반드시 교역자님들과 인사하시고, 또 성도들과도 친교를 나누는 것이 중요함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가 축도하고 급히 문 앞에 나가도, 벌써 나가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큰 무례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가난한 성도가 많습니다. 단체 합동식사가 있을 때 가난한 성도가 더 많은 음식을 잡수실 수 있도록 여유 있는 성도가 배려하셔야 하고, 남은 음식을 처분할 때도 책임자가 가난한 성도에게 배려하여 주는 것을 미덕으로 아셔야 합니다. 양식 걱정을 안 할 정도로 사는 성도는 절대로 음식에 욕심을 부리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처럼 성도가 신앙의 선배 또는 교역자를 섬기는 것은 미덕이요, 예절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갈 3:10).

4. 성도 여러분, 예절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에 두 가지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 성도간의 사랑입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돈을 꾸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면 반드시 사랑에 금이 갑니다. 따라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만 여기셔야 합니다.

2) 교인이 교역자를 배척할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진실하고 겸손하며, 욕심 없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적 책임만 다한다면 배척할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교역자를 의존하는 경향이나 자기 성격에 맞춰주기를 바라는 경향을 떠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은혜를 받는 자세로 돌이키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절 바른 성도가 되시도록 노력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설교보충 7. 영적 예배 (롬 12: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적 예배”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절에 보시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시고,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예배는 성도가 몸으로 생활하는 제사란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생활을 강조하신 이유는 율법주의 제사적 제도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목적과 또 성도의 도덕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신령한 예배에 대하여는 예수님도 요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령은 영이란 뜻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라”는 뜻이고, 진정은 진리(성경)와 참을 뜻하는 만큼 진실 되게 말씀 중심으로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배”란 용어를 쓰실 때 “프로스쿠네오”라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가까이(프로스) 입 맞추라(쿠네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배는 “성도가 참마음을 갖고 진리를 따름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하나님과 입 맞출 만큼 가까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말씀한 “영적 예배”란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영적이라 하실 때 푸뉴마 대신 “로기켄”을 쓰셨고, 프로스쿠네오 대신 “라트레이안”을 쓰셨습니다. “로기켄”은 이성, 지식 또는 “로고스”란 말씀을 뜻하고, “라트레이안”은 “섬긴다,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뜻을 종합하면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는 아는 대상을 예배한다”(요 4:22) 하셨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호 4:6, 6:3). 영적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아서 거기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실을 좋아하시니까 “진정으로 드리라” 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시니까 “말씀으로 지식을 가지라” 하신 것이며, 회개하고 화목하는 것을 좋아하시니까 번제를 먼저 드리게 하신 것이고, 찬송과 섬김을 좋아하시니까 화목제를 그 다음에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 중에 번제를 먼저 드려야 하는데, 그 제사는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드리는 화목제는 감사를 뜻하는데,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진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뜻 순종, 회개, 감사, 기쁨, 찬송 등이 영적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취미대로 살다가 주일 11시에 교회에 나와 예배만 드리면, 그것이 영적 예배라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이 세대를 좋아하거나 본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무엇입니까? 인간 표준, 자기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 자기는 죽었고(롬 6:4), 예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야 하니까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여 속이 답답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못살아서 속이 답답하십니까? 이 세대란 인간 정욕, 인간 전통, 인간 취미를 멀리 하시고,


2.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누스”라고 하는데 판단력과 이해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한다”는 것은 표면적 변화를 뜻하는 “네오스(new)”가 아니고 “카이노스”인데, 이 뜻은 근본적 변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카이노스”가 “새사람 됐다”(엡 4:24),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새 하늘과 새 땅이다”(계 21:2) 할 때도 사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생각하는 방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는 누구와 대화할 때 반드시 세상을 등지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나라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변화를 받는다”는 말씀이 새롭다는 뜻과 비슷하지만 원문에 “몰푸스데”인데, 이 말의 앞부분인 “몰페”는 잘 변하지 않는 고질적인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 변하는 것은“스케마”란 말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다”는 “몰푸스데”는 헬라어법상 중간태이기 때문에 수동과 능동을 겸하는 의미가 있어서, 성도가 고질적인 옛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려면 수동적으로 은혜도 받고, 능동적 노력도 함으로 성취할 수 있음을 나타내신 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골 1:29 참조).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과 뜻이 안 맞으면 서로 간격을 두고 살면 됩니다. 또 서로 뜻을 맞추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 즉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하니까 성경으로 그 뜻을 살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셔야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셨나, 무엇을 하셨나, 무엇을 좋아하셨고, 무엇을 책망하셨으며, 무엇을 소유하셨으며,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깊이 연구하여, 그 모범에 가까이 나가는 생활이 곧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교회의 실제적 사명 (롬 12:1~21) 목록으로


로마서 12장을 읽으면 한 마디도 소홀히 여기고 넘어갈 것이 없을 만큼 필요한 말씀만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의 상세한 해석을 강론문에 기록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실제적 사명”이란 제목으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1. 교회의 실제적 사명 첫째는 예배입니다(1절에 영적 예배가 있음). 일단 모이면 예배부터 드려야 하니까요. 예배의 의미는 생활을 포함하지만 교회에서는 우선 의식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문안 예절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 예배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태도입니다. “프레스쿠네오”(요 4:23, 예배)가 입 맞추는 뜻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찬송이나 기도나 설교를 드릴 때 정신을 차려야 하고, 감사와 회개와 복종과 사모함과 기쁨과 헌신의 마음을 갖고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사 드리다가 솔개를 쫓을 만큼 졸았다가, 그 후손이 400년 노예 되는 벌을 받았는데(창 15:11~12), 이것이 예배의 경건을 교훈하시는 줄 압니다. 그래서 인도자는 경성하도록 인도하고, 참석자는 미리 피곤을 풀고 나오는 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는 것입니다(7절에 가르친다는 말씀이 있음). 성경을 가르치고, 믿을 것과 어떻게 생활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니까, 그 교훈의 범위가 방대합니다. 교회의 사명 중 진리 사명이 가장 큽니다. 성경을 보존하고 분변하며 가르치고 전도하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성경의 개론도 여러 번 읽고, 역사도 꿰뚫고, 교리와 이적에 대한 설명이나 난제 해석이나 생활 적응에 대한 것까지 가르치고 배울 내용이 너무 많고, 또 잘못 깨달으면 향방이 달라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됩니다. 필자가 40년쯤 목회를 하면서 성경 연구하는 쪽으로 힘을 썼는데, 이제야 무엇을 알듯 한 것입니다. 그러니 배움의 연조 없이 신앙생활의 선생님 노릇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교육의 자신감을 갖는 교사가 양성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하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무엇보다도(어떤 외형적 모양새 갖추는 일보다도) 성경의 지식인과 생활의 모범 실천자가 양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사랑의 친교입니다(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라 하심). 가족이 한 핏줄로 구성된 것처럼 교인은 예수님 중심으로 모여진 단체이고, 같은 천국의 권속인즉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랑하지 않고 투기, 배척, 분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깊이 살피면 개인적인 이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상대로 자기의 이권을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물물을 여러 사람이 이용하려면 줄을 서야 하고, 사용 분량이 적당해야 하며, 또 그 우물을 공동 관리하여야 합니다. 그런 절차에서 욕심과 이권이 공평치 않으므로 말썽이 생기는 것입니다. 넓은 바닷물을 퍼 쓴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서로 경쟁할 필요 없이 자유롭기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며, 사람에게는 서로 존경과(10절) 덕을 세우는 데만 힘써 보십시오.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원리를 모르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사랑과 화합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4. 다스리는 일입니다(8절에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 하심). 다스리는 데 무슨 부지런함이 있는가? 하시겠지만 감독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교인들의 단체생활을 보면, 안했으면 좋은 일들도 많이 합니다. 교회라는 단체에서 할 일은 세속을 멀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만 하여야 하는 것인데, 세속에 관한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영광 돌릴 일은 적게 하니까 감독자가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지도를 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신령한 단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교회를 사회적 단체처럼 생각하여 금융 사업을 하고, 스포츠 사업을 하며, 심지어는 유통 사업까지 하니까 신령한 이미지가 없어지는 것이고, 또 그것을 신령한 은혜로 만회하려 하지 않고 이벤트 사업이나 목청 높이는 소리로 권위를 찾으려고 하는 잘못까지 범하지 않습니까?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5. 봉사사업입니다. 전도, 구제, 정의 실현 모범입니다. 성도가 이 사명을 잘하시려면 많이 봉사하고 희생을 하셔야 합니다. 11절에서 “주를 섬기라” 하셨는데, 주님이 하실 전도를 성도가 하는 것도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 13절에서는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구제 봉사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빈민을 보고 와서, 그 인생관이 달라졌다는 말을 한 것처럼, 오늘 성도의 주위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16절 참조).

6. 본문 15~21절에 보시면 “융화하고, 겸손하며, 낮은데 처하고, 선을 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교회적 생활이나 개인적 생활에서 실제적 사명과 생활이 잘 실천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9. 경성하자 (롬 13:11~14)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경성하자”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1절에서 “시기를 알라. 깰 때가 벌써 되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보다 가까워졌다” 하셨고, 12절에서는 “밤은 깊고 낮은 가까우니 어둠의 일을 벗으라” 하셨으며, 13절에서는 “어둠의 일을 벗어야 낮처럼 단정할 수 있다” 하셨고, 14절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듯 하여 정욕과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셨으니, 총 제목은 “경성하라”는 교훈입니다.

1. 경성이란 성도의 바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바르지 못하였는가? 하시겠지요. 그 당시의 성도들이나 자금 우리나 다 미완성의 약점을 갖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 6:2을 보시면 “완전한 데 나갈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40년 목회자입니다. 경력으로 따지면 거의 완전해야 하지만, 요즈음에 와서 깨달아지는 것도 많고, 신앙지식에 대하여 미궁에 얽매이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성도들도 미완성의 과제가 많을 것이고, 따라서 경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신앙 세계는 잘못된 보수주의도 있고, 기독교 정신에 배치되는 것을 전통주의에 입각하여 합리화시키는 것도 있습니다. 전문가로서 더 연구해야 할 분야도 많습니다. 따라서 더 연구하고, 확신을 가지며, 개혁하도록 경성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입니다.

2. 경성하는 첫 순서가 시기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의 “시기”란 “카이로스”는 시간적 개념으로 촉박함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인생을 서둘러야 할 입장이란 뜻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종말도 가까웠고, 예수님의 재림도 가까워졌으며, 구원의 날도 가까워졌고, 또 하나님이 오래 참아주신 바가 있다면 징계의 때는 임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들이 벌써부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밤은 깊고 낮이 가까워진다”(12절)고 하셨습니다. “밤이 깊다”는 뜻은 죄악이 심히 관영되고 있음을 뜻하고, “낮이 가까워짐”은 속히 밝은 세계, 즉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의 때가 오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이란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그리고 정욕을 위하여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일들인데, 경성하는 자는 그런 일들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혹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 하실지 모르나, 잘 살피면 거리끼는 일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속히 어두움의 일(나타나지 않는 거리낌, 예사로 여기는 불법 등)을 벗고, 낮에와 같이 단정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함”은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입장에 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항상 경성을 계속하려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듯 해야 합니다. 술 먹는 사람이 술독에 빠진다는 말처럼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야 경성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속히 깨닫고, 속히 회개하며, 속히 경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지금 읽은 말씀은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A.D. 354~430)이 방탕 중에 어떤 소녀의 노래를 통하여 “가서 읽어보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성경밖에 읽을 것이 없어서 펼쳐본 내용이 본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회개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 서있는 차에 접촉사고를 내고 그대로 가버렸다면, 그는 어두움의 일을 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포가 서독에서 차를 세워놓고 10분쯤 음식점에 다녀온즉 자기 차에 상처가 있고, 거기에 글씨가 붙어있는데, “○○회사 ○○호 차가 사고를 냈으니 찾아오시오” 하고 연락처를 기록해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생활이며, 경성하는 생활”이란 뜻입니다. 낮의 생활, 단정한 생활의 모범을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 번연은 성경 다음 가는 책 <천로역정>의 저자이지요. 그는 17세기의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습니다. 그가 설교를 할 때 영국 정부의 시취 인가를 거쳐 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개신교적 설교를 한다는 뜻) 1672년에 투옥당하여 1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그 어간에 부인이 죽었으나 신앙적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또 자녀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굽히지 않았으며, 감방 규칙을 잘 지키면서 <천로역정>이란 책을 쓴 것입니다. 간수가 그를 존경하여 보호해주는 차원에서 규칙을 어기고 “햇빛을 쏘이라”고 배려를 했으나, 불법으로 문 밖 출입을 한 사실을 알고 다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국왕이 보낸 사신이 감시를 나왔지만 이미 들어간 뒤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요한 번연이 간수의 호의를 좋게 여겨 잠시라도 햇빛을 쏘였다면 감시원에게 들켰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간수와 자신이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간수가 요한 번연을 더욱 크게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첫째는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짧습니다. 그러니까 속히 깨닫고 경성하셔야 하겠습니다. 절대로 나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어두움의 일을 벗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두움의 일이냐 하는 것을 방금 말씀 드렸습니다. 밝은 데서 살고,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 차원에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경성하게 되고, 또 말씀에 붙잡혀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항상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생활이 경성의 대표적 행위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설교보충 10. 사명자의 생활 고백 (롬 14:7~9)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사명 일선에 선 바울 사도와 그 동료자들의 생활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명자의 생활 고백”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본문에 “우리가” 하신 것은 바울이 복음 일선에서 사역할 때 함께 일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동역자”란 이름으로 기록된 사람들을 살피면 롬 16:3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고, 9절에서 “우르바노”와 21절에서 “디모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서신에 보면 디도(고후 8:23), 빌레몬(몬 1:1), 마가, 아리스다고, 에바브라, 데마, 누가가 있고(몬 1:24), 또 유오디아, 순두게(빌 4:20), 글레멘도(빌 4:3)가 잇습니다.

2. 이들이 복음의 일선에 서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군대로 징발된 사람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최초에 베드로가 그런 모습으로 주님을 따랐는데(눅 5:11, 마 19:27), 그 후에 바울과 그 동역자들도 역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모습으로 헌신을 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 가족을 위하고, 자기의 명예를 나타내며, 자기의 현실적 취미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을 때는 꼭 단신으로 군대에 나가서 군율에 복종하는 사람처럼 오직 복음 사역에만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외에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그러면 해야지”,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인즉 말아야지” 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경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3.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하셨으니, 곧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는 것”은 활동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것은 사는 것의 끝마무리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비입니다. 어찌 보면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 같은 인생의 활동 같지만 죽는 것은 생명을 바치는 일이니까 더 어렵게, 더 완전하게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인생 전부를 뜻합니다. 그 전부를 오직 주님의 기뻐하시는 목적을 위하여 드리고, 자기 개인이나 현실적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도 누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완전 헌신을 교훈하신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을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마 10:37), “목숨을 잃고자 하여야 한다”(마 10:39), “쟁기를 잡고 뒤를 보면 안 된다”(눅 9:62), “죽은 자로 부친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 9:60),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마 19:21)는 말씀 등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실천하셨고, 사도들도 그렇게 실천하셨는데, 오늘날 사명 일선에 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귀영화만 적게 누려도 덜 부끄러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공로로 교인이 많아진 줄 알고, 많아진 교인의 헌금으로 교역자가 생활을 한즉 당연한 줄 알며, 오히려 교역자는 문화의 선도자이기 때문에 잘사는 일(과소비)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하면서 고급적인 생활에 빠져있는 경향이 있으니, 이것이 각박한 인생을 사신 예수님(고후 8:9) 앞에 합당한 태도이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소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유 개념의 신앙입니다. 창조적, 보호적 의미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성도나 사명자는 구속적, 종속적(주종 관계) 의미에서 주님의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보호해주시며, 필요할 때 쓰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혹 복음 사역이나 교회의 일을 하면, 칭찬이나 대가를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3, 40대 목회를 할 때는 연말 예산을 세울 때마다 생활비가 인상되기를 기대한 적이 있었는데, 5, 60대에는 그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58세부터 교회가 주는 생활비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즉, 이 위치가 목회자의 떳떳한 위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가 사역자에게 대우를 하는 것은 성경이 명하신 일이지만(고전 9:9), 사명자 자신은 항상 주님의 것이라는 원칙 하에서 헌신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적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많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죽을 자가 적고, 주님을 위하여 죽으려는 자가 많다면 얼마나 영광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에게 귀속된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사 41:8~10). 하물며 자기를 부정하고, 전폭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붙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헌신은 많이 하시고, 누리는 것은 적어지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 내용 1. 룻터의 종교개혁사 (롬 4:1~8, 3:28, 갈 3:1~14) 목록으로


위의 본문이 마르틴 룻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필자가 신학생 때 미국의 칼빈신학교 교장 크로밍가 박사로부터 종교개혁사에 대하여 몇 시간 강의 받은 것을 요약하여 남깁니다.)

1. 마르틴 룻터의 출생과 당시의 천주교 상황

룻터는 1483. 11. 10.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이므로 룻터도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교회에 나가고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의 천주교 교리로써는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이 죄인을 벌주시지만 성도가 천주교회에 나와서 예전(예배 의식)에 참석하고, 선행 공덕을 쌓으면 면죄 받고 의로워진다”고 가르쳤으며, 룻터도 그렇게 배웠다고 합니다. 또 천주교의 특징은 신부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받는 것과 마리아 동상에 참배하고 기도하는 일을 의당히 하였으므로, 룻터도 그렇게 행사하였다고 합니다.

2. 룻터의 수학(修學)

룻터가 소년 시절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인간의 공덕과 예배 의식으로 죄를 사하시는가?” 하는 회의를 느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천주교의 제도 비판이나 의심을 나타낼 수 없는 교권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1501년 그의 나이 18세 때에 독일의 월폿 대학에서 공부하여, 20세 때 문학사가 되고, 22세 때에 문학문사가 되었는데, 그때에 부모는 룻터를 법학 전공에 입문시키려 하였으나, 룻터는 신학의 길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친한 벗이 갑자기 죽었고, 룻터 자신도 벼락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인생의 무상함과 영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신학교로는 크게 발전한 대학 같은 것이 아니고, 수도원 정도의 학원이 여럿 있었는데, 룻터는 그 수도원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문하였다고 합니다. 이 수도원은 4세기 사람 어거스틴(354~430년)이 창설한 수도원으로 바울 사도의 사상을 가장 바르게 전승시켰다 하며, 룻터가 입문하였을 당시에 “스타우빗치”란 수도원장이 있었고, 그는 천주교의 교육이 이신득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을 이미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또 그 수도원장은 독일의 웻덴벅 대학의 교수를 겸임한 중에서 룻터로 하여금 그 대학에서 논리학과 문리학을 가르치도록 기회를 준 일이 있었으며, 또 1511년에는 로마의 교황청을 순회할 기회도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룻터의 학문적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합니다. 룻터가 로마를 다녀온 후 1512년(27세 때)에 신학박사와 아울러 신부가 되었고, 또 윗덴벅 대학의 정식 교수가 되어 로마서를 강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를 강의하는 중 4:5 말씀인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이 부분은 강론을 참고하십시오) 하신 말씀에서 이신득의 교리를 확신하였고, 또 그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천주교에 반항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지적한즉 많은 학생들도 그의 비판적 강의를 좋게 여겼다고 합니다.

3. 개혁 전의 개혁 사건

룻터의 종교개혁을 살피기 전에 개혁 전의 개혁운동이 두 번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번은 1320~1384년의 사람이요,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의 교장이며 궁정 목사인 “위클립”이 천주교의 부패를 지적하였다가 교수직 파면을 당하고 외면당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지 30년 후인 1414년에 교회가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그 시체를 파서 화형에 처한 일이 있었다 하며, 또 한 번의 사건은 그 이듬해인 1415년에 독일의 뿌라학 대학의 교수인 요한 훗스와 그의 동료인 제롬이 역시 천주교의 부패를 지적한 죄로 화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독일의 훌륭한 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독일의 황제인 “뽀헤미야”가 그들을 죽지 않게 하려고 “도미니코” 수도원에 은닉시킨 후, “천주교의 미움을 받지 말라”고 권하였지만 듣지 않으므로, 교황청 재판국이 “이 두 사람의 영혼을 마귀에게 넘긴다” 하고 화형에 처한즉, 그 두 사람을 존경하던 독일의 귀족 452명이 “훗스단”이란 개혁 단체를 조직하여 종교 사상의 유감을 품은 채 약 100년간 빛을 보지 못한 상태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4. 룻터의 종교개혁의 동기

13세기부터 구라파에 문예부흥이 일어나서 종교나 사회가 현대화 바람을 일으키던 중, 천주교의 부패 상황도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아 사치 향락은 물론 예배당 사치에 급급하였고, 교권주의와 교리적 부패는 물론 성직 매매 실태까지 나타나서 크게 부패하였는데, 1513년에 레오 10세가 218대 교황이 되면서 베드로 성당 지을 것을 계획하고 건축금을 모금함에 있어서 구라파에 흩어진 모든 감독들과 신부들에게 “속죄권을 팔아 돈을 모아오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처의 감독들은 그 배당액을 예하 신부들에게 배정하였고, 신부들은 “속죄권을 사서 자신과 앞서 간 조상들의 죄를 사함 받으라”는 식으로 선전 모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독일의 감독 “알브렉드”는 10만 덕케트라는 거금을 교황에게 일시에 주고, 8년 동안 속죄권을 팔아 수익을 보는 특권을 받았다 하며, 그 사실을 도미니카 수도원장인 “덧셀”에게 위탁한즉, 덧셀은 능숙한 말 수단으로 독일의 웻덴벅 시의 4거리에서 돈궤와 속죄권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선전하기를 “여러분, 죄는 불행(不幸)한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황께서 죄사함 받는 속죄권을 발행해 주셨습니다. 거액의 속죄권을 사가지고 가시면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 가족들의 죄까지 평생(平生)의 죄를 사(赦)함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죽은 조상의 영혼을 연옥에서 천당(天堂)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들의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슬피 울고 있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이 속죄권을 사시면 여러분의 돈이 돈궤에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갇혔던 조상의 영혼이 쨍그랑 하며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룻터가 충격을 받고 그 동안 쌓인 개혁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천주교의 그릇된 제도 95개 조항을 1917년 10월 31일에 그가 시무하는 웻덴벅 교회의 정문에 게시하였으니, 이것이 개혁의 시작이요, 천주교의 교권에 생명을 걸고 도전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속죄권 판매뿐 아니라 돈만 주면 성직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5. 개혁의 전개

그 당시에 종교계에 문제가 생기면 상당한 토론을 거치고 또 비판과 제소를 하여 허물이 있을 때는 파면이나 화형을 받는다고 합니다.

룻터가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하자 문예부흥의 결과로 발달한 인쇄술의 영향을 받아 2주 내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3주 안에 로마교황청까지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로마교황청에서 이 사실을 알고, 독일 감독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사하라” 하였는데, 독일 감독은 자기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축소 은폐할 목적으로 “한 술주정꾼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보고하였고, 또 교황청에서는 문예부흥운동에 열중하는 터라 적당히 보고만 받고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독일에서 크게 여론화된즉 1519년 6월 27~7월 16일까지 독일의 러입식에서 이 주제를 놓고 학자간의 토론회를 가졌는데, 당시에 룻터의 친구인 “엑크”가 룻터의 사상을 반대하여 말하기를 “그런 주장은 100년 전에 있었던 일이나 이미 정죄되고 화형 당한 일을 왜 다시 주장하느냐?” 하였고, 룻터는 “성경을 해석했을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감독들은 이 토론의 상황을 로마교황청에 그대로 보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다음 해인 1520년 6월 15일에 교황청으로부터 명령문서가 오기를 “60일 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한다”고 한 것입니다(파문은 면직과 구원을 제하는 것임). 그리고 그 결과 보고를 8월 15일가지 하도록 한 것입니다.

6. 경고장을 받은 룻터의 태도

룻터는 교황의 경고장을 받고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성경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그 해 8월에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서신>이란 책을 써서 “교황이나 주교, 감독들이 성경을 위반하여 월권하면 평신도들이라도 일어나서 개혁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글을 반포하였고, 또 그 해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책을 써서 “그 당시의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 잡힌 것처럼 거짓된 교리와 제도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반포하였으며, 또 그 해 11월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써서 “이신득의” 진리를 반포하였던 것입니다.

로마의 교황청에서는 기한 안에 룻터의 답장이 오지 않으므로 파문장을 보냈는데, 룻터는 교황의 그 파문장을 받고 “(교황이) 성경을 바로 해석한 신부를 파문할 수 없다”는 반박문을 써서 발표함과 동시에, 같은 해인 12월 10일에 웻덴벅 대학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나는 교황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 파문장과 천주교의 교령집을 불살라 버리니, 이때부터 교황권에 대한 노골적인 반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교권에 반대되는 교리를 주장하면 누구나 이단으로 재판을 받아 화형 당해야 함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룻터에 대한 처리 경위

1921년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는 “알렉산더”라는 성사를 독일에 파송하여 “룻터를 신속하게 재판,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으나, 그 당시에 독일의 황제 “챨스 5세”는 교황 명으로 부임은 하였지만, 언어의 장벽과 함께 나라의 정세 파악에 익숙하지 못하였는데다가 동쪽의 토이기 군대의 침략과 서쪽의 불란서 군대의 위협 등, 나라의 어려운 일들로 인하여 친정을 하지 못하고 국무총리 같은 “프레드릭 색선” 공작에게 정치를 거의 일임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황의 명령이 지엄하니까 이듬해인 1521년 4월 17일에 독일국회를 “웜스” 시에 열고, 룻터의 반항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출두를 시킨 것입니다. 그때에 Rome의 성사(교황 사절) “알렉산더”는 그를 죽이려는 결정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룻터가 국회의원들과 Rome 사절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룻터의 친구들이 “당신이 거기에 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인즉 도망을 하라” 하였지만, 룻터는 말하기를 “마귀가 웜스 시의 기왓장같이 많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붙드실 것이라” 말하면서 늠름하게 가니, 룻터를 염려하는 많은 군중들이 그 뒤를 따랐기 때문에 그 행렬이 마치 왕의 행차와 같았다는 것입니다(이 시기에 룻터는 그 위험한 때를 기도로 극복하면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 384장을 제작하였음).

8. 독일국회에서의 재판과 납치

국회에서는 회수된 책 75부를 제시하면서 “이 책을 모두 네가 쓴 것이냐?” 하여 시인을 한즉, “이 내용들을 취소할 의사가 없느냐?” 하였을 때, “24시간의 유예를 달라”고 한 후, 다음날 다시 나가서 말하기를 “혹 나의 사견에 잘못이 있다면 성서에 기준하여 해명해 주기 전에는 취소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주장하고,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하고 기도를 하고 나오니, 그 국회를 주관한 황제가 즉시 칙령을 내려 “룻터는 제국의 죄인이니 그의 저서를 읽는 자나 그를 만나는 자는 투옥을 시킨다”고 선언을 하였고, 룻터 역시 정죄 받은 죄인으로서 호위를 받으며 돌아오는데, 별안간 기마병의 습격을 받아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때에 룻터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이 자기의 생명을 해하기 위하여 꾸민 음모로 알았는데, “와릇북”이라는 산촌에 들어와서 보호를 받고 보니, 황제 밑에 있는 권리 대행자 색선 공작이 룻터를 살리기 위하여, “룻터를 반대하는 민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고, 그 생명을 보호해 준 것입니다.

산중에서 보호를 받은 룻터는 열심히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1년 만인 1522년 9월에 출판을 하였고, 또 12년 후인 1534년에는 히브리어 또는 라틴어로 된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여 독일 국민들에게 성경을 펼친즉, 그 성경이 독일어 문법책으로도 활용되었고, 이로 인하여 개혁운동이 국민들과 함께 더 활발하여지게 된 것입니다(본래는 교령집만 있었고, 평신도들에게 성경 해설권이 없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9. 성경 번역 이후의 종교 개혁

성경이 번역 출판된 지 2년 후인 1524년에 “문저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룻터의 개혁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서남부의 농민들이 문저(munzer)를 중심으로 뭉쳐, 흉기를 들고 개혁 지지자들(귀족들)과 싸운 것인데, 이로 인하여 양측 인원이 약 15만 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룻터는 42세인 1524년에 수녀와 결혼하므로 천주교 제도를 또 반항하였고, “와릇북”에서 “말북”으로 피신하여, 개혁의 동조자들과 합력하여 “신앙고백서”를 작정하였는데, 그때 개혁의 동조자인 쥥글리와 의견 차이가 생겼습니다.

성찬 예식에 있어서 룻터는 천주교의 화체설을 반대하여 공재설(하나님의 은혜가 그 성찬에 영적으로 접하신다는 뜻)을 주장하였는데, 쥥글리는 상징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룻터가 사회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피신한 지 9년 후인 1530년 6월 25일에 독일국회가 또 열렸는데, 그때에 독일 황제 챨스 5세는 구교파와 개혁파간에 조화점을 찾고 민심을 수습하여 전쟁에 임하여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개혁파로 하여금 국회에 항의문을 제출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룻터가 연구한 “신앙고백서”가 통과된다면 개혁이 성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룻터는 멜랑톤과 함께 “아욱스북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때에 룻터는 개혁의 강경파였지만, 멜랑톤은 온건파인지라, 구교와의 큰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고백서 내용에 교황의 절대적 권위 문제와 화체설 문제를 제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룻터는 나타나지 못한 상태였고, 멜랑톤과 색선 공작과 여러 군주들이 그 고백서에 날인하였는데, 쥥글리파는 성찬론의 의견 차이 때문에 동조하지 않고 “특별 고백문”을 따로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이 항의문 고백서가 1530년 6월 25일에 국회에 접수되어 이듬해인 1531년 4월 15일까지 유예 상태로 끌어오다가, 결국 반대파의 세력에 의하여 부결 되어버리니, 그때에 개혁을 동조한 제후들과 군주들이 국회에서 항의를 선언하고 퇴장을 함으로써, 개신교가 항의파라는 뜻으로 “Protestant”의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항의파 국회의원 수가 적어서 부결이 되었지만, 개혁의 국민들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제지할 수 없었고, 국회는 파 갈림으로 대립 양상을 띤 상태였는데, 1534년에 “클레멘 7세”가 새 교황이 되고, 독일은 전쟁으로 황제가 공석 중에 있었으며, 쥥글리가 전사하므로 그 제자들이 룻터파에 예속하니, 항의파 세력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황제나 국회가 이를 힘으로 제지하지 못하므로 개혁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 개혁사상이 독일에서 스위스, 불란서, 덴막, 스웨덴, 화란, 스코틀랜드, 영국 등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개혁의 성취는 성령님께서 이루신 것으로 룻터의 믿음의 확신과 사명, 그리고 개혁의 동조자들의 노력, 문예부흥에 따른 인쇄술, 성경 번역, 정치권 상황, 전쟁의 환경까지 상응하여,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 내용 2. 칼빈주의(Calvinism) (롬 11:33~36) 목록으로


칼빈주의는 칼빈 선생님이 확립한 성경의 원리로써 장로교회에서 신봉하는 신학이기 때문에 장로교 성도들은 물론 알아야 하고, 타 교파 성도들도 아시는 것이 좋습니다.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기독교신앙백과> 156, 157과(p. 434~437)에서 간단히 수록한 바 있지만, 로마서 강론에 몇 말씀 더 첨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위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칼빈주의의 기본 성구입니다. 장로교회 교인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성경에 가장 가까운 조명으로 믿고 있습니다.

1. 칼빈은 1509. 7. 10. 프랑스 노욘에서 출생, 15~20세까지 신학을 전공하고, 23세 때(1531년) “올리안스버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그의 나이 25세 때 이미 진행되고 있는 룻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지지의 뜻을 보냈고, 법학도로 있을 때 “세네카의 주해서”(관용론)를 집필하여 학자의 기질을 드러냈으며, 19~24세 당시에 집약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집필하여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 후 칼빈의 신학운동이 종교개혁의 영향을 함께 받았고, 룻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 출판된 지 2년 후(1535년)에 <기독교강요>가 나왔기 때문에 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2. 칼빈이 신학 체계를 발표한 근거로써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1) 주관적 철저한 회심이요, 2) 객관적 자료로써 성경이며, 3)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바로 아는 문제요, 4) 교리의 특징(5대 교리)과 신학적 배경이고, 5) 인생의 모든 문제를 포괄성 있게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참된 회개는 거듭남의 증거인즉, 거듭난 심령만 진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오직 성경의 가르치신 것”(고전 2:13)만 표준 계시인즉 성경에만 근거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는 칼빈주의의 정점을 예정설로 오해하지만, 실은 만물의 절대 지배자로서의 주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교리의 강조 내용이 교파마다 특징이 있는데, 감리교는 만인구원을, 침례교는 중생의 신비를, 룻터교는 이신득구를, 희랍정교는 성령님의 신비를, 천주교는 교회의 보편성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일로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중심에서(또는 필요에 의하여)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앞세워, 하나님이 당연히 차지하셔야 할 권리를 차지하시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롬 11:36). 말로 표현한다면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믿는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때문에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3. 칼빈주의는 신학적 배경이 있으니, 곧 4세기의 사람 어거스틴(354. 11. 13~430. 3. 28)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어거스틴은 바울의 사상을 받았고,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은 것입니다(고전 11:1, 딤후 3:14). 초대교회부터 정통과 비정통의 조류는 계속되었습니다. 복음 사상과 바리새주의, 바울 사상과 유대주의가 있었듯이, 어거스틴 대 페라기우스(4C, 영국의 수도사) 사상이 대립되어 있었고, 도미니코 대 프랜시스, 13세기에는 도마아킴프스 대 돈스스코티스, 15세기에는 룻터와 천주교, 16세기에는 칼빈과 알미니우스(화란 신학자)의 대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칼빈주의에 대항한 알미니안주의는 1618. 11. 13.부터 이듬해 5월까지 개최된 화란의 돌트 종교회의에서 심사한 결과 “알미니안주의가 부당하다”는 결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굽히지 않았고, 18세기 이후까지 정통 신학과 비정통 신학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는 미국인 “핫지”와 “워필드”였고, 화란인 “아브람 카이퍼”가 있었으며, 근대 신학자로는 벨코프, 코넬리우스 반 틸, 헬리미터 박사이며, 우리나라의 학자로는 이미 별세하신 박형룡, 박윤선 두 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워필드” 박사는 말하기를 “누가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성도냐? 누구든지 하나님을 서슴지 않고 믿는 자, 또는 사상, 감정, 의지에 있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엄밀한 논리의 힘과 필연성에 의하여 칼빈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살후 1:10).

4. 칼빈주의의 내용 범위는 방대하다고 합니다. 필자는 깊이 연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중요한 연구는 학자들의 몫일 뿐, 평범한 목회자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열거하면 삼위일체 교리, 기독론, 성찬론, 인식론, 성서론, 창조와 섭리론, 중보론, 신앙론, 회개, 칭의, 예정론, 종말론, 정부와의 관계, 전쟁론, 국제법,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백성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크게 부각된 것이 5대 교리입니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와 대결한 관계로 더 잘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하여 구원론에 관련된 칼빈주의 5대 교리만 간략하게 증거하겠습니다.

5.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있으니 전적 타락, 무조건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사, 궁극적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이 교리를 전적 부인합니다.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1) 전적 타락에 대하여

이 뜻은 인간의 타락으로 믿을 능력이 전혀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을 때는(창 1:26) 예수님을 닮은 인격, 즉 영적 형상(믿음 발동의 힘)과 도덕적 능인(믿음 발동의 힘은 없으나 도덕적 선의 힘은 있는 것이 있었지만(이 두 가지 모두를 선에 대한 자유의지라고도 함), 타락으로 인하여 정녕 죽은 상태에서는(창 2:17, 엡 2:1) 영적 형상은 죽었고, 도덕적 능인은 많이 훼손되었는데, 성도에 한하여는 거듭남(요 3:3)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망이 회복되어 믿음을 갖게 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이 선택하여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엡 1:6, 고전 12:3).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선의 의지가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믿음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타락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창 3:8, 요 3:19, 5:40, 롬 8:7, 10, 욥 14:4, 15:6 등에 있고, 표범이나 검은 피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색깔을 변할 수 없는 상태(렘 13:23), 강도 만난 자가 스스로 구원의 길로 나설 수 없는 상태(눅 10:30)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란에 대하여 각 파의 견해를 살피면,

① 알미니안(페라기안)파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영적 능인과 도덕적 능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것이 타락으로 훼손되었지만(아주 없어진 것은 아님) 진리를 접했을 때 인간의 자유의지로 진리를 믿어(선택) 구원 받는다 하며,

② 룻터파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능인과 도덕적 능인이 있는데, 영적 능인만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고, 그것이 타락으로 없어졌으나 진리를 받을 때 도덕적 능인의 힘으로 받아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영적 형상을 회복한다고 하며,

③ 로마 카톨릭에서는 영적 능인이나 도덕적 능인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인간은 범죄 가능하도록 창조됨), 하나님의 형상을 닮거나 구원을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이상 세 교파의 논리는 정통신학자의 강의에 근거한 것이나 문서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은즉 연구 확증하십시오). 다만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설명할 때 인간이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의와 선과 거룩을 뜻하고, 그 기능에 있어서 영적 기능과 도덕적 선의 기능이 있는데, 타락으로 인하여 전자는 죽었고, 후자는 훼손되었으며, 전자의 회복은 중생으로, 후자의 회복은 성화로 성취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 못한 자는 도덕적 기능(양심)에만 머물러 생활하는 것입니다.

2) 무조건 선택의 뜻은 하나님이 구원 대상을 선발하실 때, 믿는 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무조건 선택하신 후에 믿게 하셨다는 뜻인데, 인간이 자유의지를 내세우는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인간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즉 이 교리를 반대합니다. 성경에 선택의 말씀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롬 8:29, 엡 1:4, 마 22:14), 또 선택의 주체는 예수님이라고 하신 말씀도 있고(막 13:20, 요 134:18~19), 또 인간의 의를 감안할 수 없는 말씀으로 “미련한 자들을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27~28).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이 있고, 또 마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에(마 19:26; 엡 1:4~5, 11) 구원 대상의 형편을 고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 3:9과 행 9:1~9을 보시면 완악한 자도 일방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무슨 선을 행하기 전에, 복중에서부터 구별하신 것이 그 예입니다(롬 9:11~13).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선행을 근거로 선택하신다면 주권과 전적 은혜와 질서에 모순될 것입니다.

3) 제한적 속죄의 뜻은 예수님이 택한 자 즉 구원 대상의 죄만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죄 짐을 지셨는데, 인간이 믿지 않으므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인을 다 구원하시는가? 할 때 그렇지 않고 그런 듯한 성경 구절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온 세상, 모든 사람, 모든 족속”이란 용어입니다(요 3:16, 4:12, 12:9, 32; 고후 5:4; 딤전 2:4; 벧후 3:9; 마 29:19; 사 45:22; 요일 1:29, 2:2 등). 그러나 여기의 보편적 용어는 구원 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 의지를 나타내신 것과 세상 만민을 상대로 전도하면 그 중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 믿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제한 속죄를 말씀하신 것이 더 많으니 선택(엡 1:4, 요 15:16), 예수의 뜻(마 1:21), 양의 목자(요 10:11), 세상이 아닌 네게 주신 자(요 17:9),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행 20:28, 엡 5:25), 택한 자 송사 못함(롬 8:33), 제사장의 직무(대속의 뜻)가 제물 갖고 온 자의 죄를 용서함, 하나님의 완전성 등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 하여, 그것을 무조건 구원의 뜻으로 아시면 안 됩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만민을 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 구원 대상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으니 ① 보편적 사랑으로 일반적인 은혜를 공평하게 주시는 것과(마 5:45), ② 보편적 구원적 사랑이니, 이는 선민의 통치적 관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사 45:22; 마 11:28, 28:19과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를 구원하신 것과 같은 것, 욘 4:2). ③ 특수적 구원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구원하시도록 특별히 맡기신 대상에 한하는 것입니다(요 17:9). 따라서 딤전 2:4, 벧후 3:9의 뜻은 하나님의 소원(θελει, 딜레이)을 피력하신 말씀일 뿐, 작정은 아니며, 이런 뜻은 마 27:43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딜레이) 구원하실 지라” 하셨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시지만 십자가를 모면시키지는 않은 것처럼 세상을 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작정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은 지역과 인종의 초월을 뜻하는 내용으로 아셔야 하며, 선택의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 행사이므로 피조물이 불공평을 논할 자격이 없고(롬 9:19), 전도는 보편적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행 1:8).

4) 불가항력적 은사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구원 대상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부르시면 인간이 완악할지라도 항거를 못하고, 그 부르심에 복종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새 영적 생명을 품부하사, 거듭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소명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소명에는 항거를 못하기 때문에, 이 불가항력적 은사를 “유효적 소명”이라고도 합니다(신학지남 29권 1호 p. 30).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에 대한 포기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부르셔도 자신이 안 믿고 거절할 수 있으며, 또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을 안 하려면 자신이 은혜를 힘입으면서 정진을 잘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하여 칼빈주의에서 중생을 새 생명의 창조로 알고, 구원의 순서를 논할 때 먼저 거듭남(중생)의 은혜를 받고, 다음에 거듭난 대상을 부르시며(소명), 거듭난 자가 부르심을 받으면 믿게 되고, 믿은 다음에 회개하여 성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중생을 새 생명 창조로 여기지 않고, 인격 변화 즉 성화로 여깁니다. 이 뜻은 성결교의 교리도 그렇다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순서를 정할 때 먼저 복음으로 소명을 받으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믿고(혹은 안 믿을 수도 있음), 믿은 후에 회개함으로 인격의 변화가 되는데, 그것을 중생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중생의 의미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중생을 성화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일반적 소명(청함 받은 자, 마 22:14; 그물에 잡힌 고기, 마 13:47)을 받는 대상이 있고, 유효적 소명(택함 받은 자, 그릇에 담는 고기)이 있는데, 이 유효적 사명을 항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굴복한 것처럼(행 9:1~8)….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면(요 3:8) 새 마음을 갖게 되고, 믿음의 싹이 납니다(겔 11:19, 막 4:28). 그리고 진리에 복종하게 되며(겔 36:27), 구원의 뜻의 비밀을 알게 되고(엡 1:9), 진리로 이끌려(요 6:44), 믿게 되는 것입니다(행 13:48). 롬 8:30에 보시면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를 부르시고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롬 11:29). 그리하여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살후 1:10).

5) 성도의 견인입니다. 이것은 “궁극적 구원”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인 만큼 하나님이 중도에 버리시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에게 궁극적 타락을 안 하도록 붙드시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은즉 그러하고(롬 11:29), 하나님의 예정이 빗나갈 수 없으며, 또 인간이나 마귀의 작당으로 실패하실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마 21:42, 마귀가 이긴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이기심). 요 10:28~29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저희를 내 손에서 뺏을 자가 없다” 하셨고, 또 롬 8:33에서는 “누가 택하신 자를 송사… 정죄하리요” 하셨으며, 빌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 하셨고, 또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으며”(벧후 1:10),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벧전 1:5, 9). 예수님이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성도와 함께 계시고, 또 믿음을 지켜주시기 위함이며(요 14:16), 이런 사역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일 2:27),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살후 3:3). 혹 어떤 분은 믿다가 타락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봅니다만 성경에는 외식자가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음을 말씀하셨고(마 7:22, 13:20, 21; 히 6:4~5), 그들이 타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가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일 2:19). 우리가 믿는 믿음이 진실일진대 하나님은 자기에게 연합된 자를 반드시 다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요 17:12).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선택 받은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