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빌립보서

빌립보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바로가기


제1과 서론과 기도 (빌 1:1~11) 5 바로가기

제2과 핍박과 전도 (빌 1:12~18) 8 바로가기

제3과 바울의 신념과 소망 (빌 1:19~26) 10 바로가기

제4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12 바로가기

     설교보충 1. 복음에 합당한 생활(1) (빌 1:27~28) 14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복음에 합당한 생활(2) (빌 1:27~28) 16 바로가기

제5과 영광을 돌리는 생활 (빌 2:1~11) 18 바로가기

제6과 믿음 생활에 관한 교훈 등 (빌 2:12~18) 20 바로가기

제7과 두 사역자의 소식 (빌 2:19~30) 22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예수님의 마음 (빌 2:3~8) 25 바로가기

제8과 주안에서 기뻐하라 (빌 3:1~9) 27 바로가기

제9과 바울의 궁극적 소망 (빌 3:10~21) 30 바로가기

     설교보충 4. 바울이 알려고 한 것 (빌 3:10~12) 32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삶의 목표 (빌 3:12~14) 34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빌 3:13~14) 36 바로가기

제10과 주 안에서 할 일 (빌 4:1~9) 38 바로가기

제11과 섬김의 교훈과 결론 (빌 4:10~23) 41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바울 사도의 기쁨 (빌 4:1~10) 43 바로가기

     설교보충 8. 기뻐할 내용들 (빌 4:4) 45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염려하지 말라 (빌 4:6~7) 47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모든 쓸 것을 채우심 (빌 4:19) 49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목록으로


2004년 1월 1일 아침에 이 글을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힘들게 집필을 끝냈습니다. 평신도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도록 기록한 것인데도 자주 피로를 느끼다 보니 힘이 든 것입니다. 이제는 골로새서와 로마서까지 쓰므로 신약성경 강론 전부를 마치려고 합니다. 금년 4월 안에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계획을 해 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성도님들께 은혜가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에 깊이 이끌리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은혜 사모하시는 성도님이면 반드시 글을 읽으실 때 글을 쓴 자의 심정을 헤아리시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실 때 은혜를 함께 나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은혜는 성도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홈페이지 www.ncbc.or.kr을 꼭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 말씀사역이 원만하게 끝맺음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4. 1. 1.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서론과 기도 (빌 1:1-11) 목록으로


본론을 상고하기에 앞서 우선 필자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에 수록된 빌립보서 개론(638p)을 참고하십시오. 빌립보는 옛날 마게도니아 영지였고, 현재 헬라의 북부 네압볼리, 항구와 인접한 지역인데 주전 358년경 마게도니아왕 빌립 2세가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마게도니아 수도였지만, 주전 148년부터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주후476년까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후395년에 동로마,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476년에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동로마를 정복하므로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지역이 돌기둥만 있는 폐허로 남아있고 바울과 실라가 갇혔었다는 감옥을 유적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행16:11-40을 보시면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차 그곳에 가신 역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아시아 즉 터키 서쪽 항구인“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 섬을 지나 에게해를 건드리면 “네압볼리” 항에 도착하고 거기서 서쪽으로 약 40km떨어진 지역입니다.

바울사도가 그곳에 가시기 전에 유태인들이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1:15-18) 그러나 바울의 전도로 루디아의 가정이 믿음의 열매가 되었고, 또 정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고친 일과 지진의 이적으로 출옥한 사실 등으로 변화의 기회를 맞아 교회가 생긴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아가야 지방으로 가셨다가 에베소 쪽으로 귀환하시는 중에 또 한 번 빌립보에 가신일이 있었고(행20:6), 그 다음에 바울은 로마로 가셔서 로마옥에서 기록하셨다는 말씀은 엡4:1, 6:20, 빌1:7, 13, 14, 골4:18, 몬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행적을 궁금하게 여기다가 로마 감옥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위문하게 할 때 바울을 돕는 선물과 교회의 소식을 갖고 가서 전한 것입니다.

교회의 소식 중에는 교회가 부흥된 소식과(빌1:5, 4:10,14-18) 잘못된 신앙사상의 소식이 있었으며(빌3:2-3) 또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성도가 뜻을 같이하지 못한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빌4:2) 그 때에 ‘에바부로디도’가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그 병이 낫게 되었을 때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하여 보내게 된 것입니다.(빌 2:24-30) 이 편지의 특징은 성도와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준다는 것과 선물을 겸한 위문에 대한 감사의 뜻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덕을 강조한 점과 주안에서의 기쁨을 강조한 점이라 할 것입니다.

기쁨을 뜻하는 “카라”가 5회 “카리온”이 11회 기록된 것입니다. (1:4,25, 2:12,27, 4:1,1:8, 2:17,18,28, 3:1,4, 4:4,10)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살피면서 상고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의 1-2절은 인사말이고, 3-8절은 감사이며, 9-11절은 기도입니다.

1. 인사말.(1-2절)

1)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 하셨으니 이는 발신자의 신분을 말씀 하신 것이요, 발신자, 바울과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점과 선배사도인 바울이 후배사역자 디모데를 동격위치로 대한 점을 알 수 있고, 또 영감을 받은 일과 서신의 주인공은 바울이지만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있는 자로서 바울과 함께 편지한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계셨으나 디모데외 다른 사람(딤후4:10-11)은 밖에서 면회할 수 있었습니다.

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오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 하셨으니 이는 수신자들을 지적한 말씀으로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빌리보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뜻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성도와 평신도 감독들(장로를 뜻함, 딤전3:1-7)과 집사들(봉사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교역자가 빠진 것을 보아 바로 위문의 전달자 “에바브로디도”가 그 교회의 교역자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본 서신)은 신실한 성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3)2절은 축복의 말씀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셨으니 만복의 근원자는 성부 성자이시고(성령님은 영감주시는 역사에 동참하셨음) 복의 내용은 은혜(거저 주시는 복을 총괄함)와 평강(은혜의 가장 요긴한 분야)이며 “있을지어다” 하신 것은 사도적 권위와 영감 받은 진리를 직접 전달하는 권위로 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곧 복입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의 축도하는 권위도 복된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에 병합된 특권입니다.

2. 감사.(3-8)

1)1절에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의)의 하나님께 감사 한다” 하셨으니, 바울이 그들을 축복하는 일과 “에바브로디도”가 전달한 내용 속에 감사할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셨습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그들을 위한 간구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동시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간구 한다”고 하셨습니다(2절). 감사의 내용은 5-8절에 기록되었고, 간구의 내용은 9-11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2)감사의 내용 ① 5절에서 “복음을 받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교제하게 된 사실”과 ② 6절에서 “너희 속에서 착한 일(복음 영접)을 시작하신 이(성령님)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재림)까지 이루실줄 확신하며 또 그렇게 이루어 주시는 것”을 감사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이룬다”는 것은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은 실패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궁극적구원의 근거가 되고 따라서 거듭난 자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③ 7절에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구원에 대하여 확신 가짐이 마땅함은 항상 그들이 바울사도의 마음에 있고, 또 그들의 믿음 자세가 확고함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확고한 증거는 그들이 “바울의 매인 사실과 복음을 변명하였고, 또 확정(확실한 태도)한 일에도 바울과 함께 은혜에 참여하므로 일치하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3)그래서 바울사도는 8절에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자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통하는 세계는 사랑은 물론 서로 사모함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행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증거 하신다고 한 것이고 감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감사는 믿음의 일치함과 보존됨과 사랑의 유대관계가 든든하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3. 기도.(9-11절)

1)4절에서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를 위하여 “기쁨으로 간구하신다” 하셨고, 9절에서는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함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셨으니 성도는 사랑의 도덕성뿐 만아니라 성경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또 총명함으로 이 지식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랑과 성경의 지식과 총명을 구하신 것입니다.

2)10절에서는 지식과 총명함을 구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바람”에서 였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은 가치관의 분별이고 진실을 지키면서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예수님의 재림사상은 그 시대에도 초급하였음, 살전4:15-17, 계1:3-20,22)까지 보존되기 위함 이었습니다. 여기의 그리스도의 날은 재림과 심판 때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받는 유혹은 육신을 갖고 마귀의 활동이 있는 동안에 한하지만, 예수님 재림 전에 부름 받는 성도는 천국에서 심판 때까지 기다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3)또 1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는 의의 열매”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고자 하는 성실성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변화가 있고, 믿음이 성숙될수록 건설적인 열매가 있게 되는데 바울사도는 이런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신 것입니다.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는 사실도 깨우쳐 주셨습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지식과 총명을 인하여 믿음이 성숙되고 의의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간구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 2 과 핍박과 전도 (빌 1:12-18) 목록으로


본문 12-14절은 “핍박으로 얻는 유익”이고, 15-18절은 전도의 유형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핍박과 전도”로 정한 것입니다.

1. 핍박으로 얻는 유익.(12-14절)

1)12절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당한 핍박이 복음의 진보를 나타냈음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란 복음 전파를 인하여 모함을 받고 피소되어 로마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랴, 유다, 갈릴리 등 팔레스틴 지역이 로마의 통치 구역이므로 그 경내에서 피소된 자가 재판을 받을 때 로마의 시민권이 있으면(행22:28) 가장 높은 황제(가이사)에게 상소할 권한이 있습니다(행26:32). 그 당시에 평민이 팔레스틴에서 로마까지 여행하기란 힘드는 일이고 또 로마의 높은 관리(또는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란 만남조차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피소자가 되고 핍박을 받게 된 관계로 전도의 귀한 기회를 만난 것인즉 복음의 진보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13절에서는 “이러므로 나이 매임(감옥생활)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왕을 호위하는 군대)안과 기타 모든 사람 (죄수 또는 형리들)에게도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복음을 전하므로 죄수 된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어떤 죄수냐” 하였을 때 복음신앙을 전도한 죄수라고 알려진다면 그 알려진 사실이 곧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3)14절에서 “바울이 핍박과 죽음을 무릅쓰고 믿음을 갖는 일에 대하여 믿음의 형제들 다수가 더 큰 신뢰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진리를 인하여 핍박 받음에 대한 감화의 유익입니다. 핍박자들은 바울이 고난을 받으면 즐거움을 느끼겠지만 한 믿음을 가진 형제들은 더 큰 신뢰와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으로 얻은 유익은 전도의 길을 열었고 또 전도의 큰 대상을 접했으며 같은 성도들에게는 더 큰 신뢰와 용기를 주게 된 것입니다.

2. 전도의 유형.(15-18절)

1)전도의 유형은 “불순한 유형이 있고, 선한동기와 방법으로 시행하는 유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는 불순한 유형을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순한 유형으로 진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고, 전도의 불순한 유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전도로 복음을 받는 자도 있으니 결국 복음이 전파된 것과 그 전파로 믿게 된 일에 대하여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전도자의 동기와 방법이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그 소행대로 심판하실 것이면 성도는 전도를 할 때도 합당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2)잘못된 방법으로서의 전도에 대하여, 15절을 보시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하셨고, 투기와 분쟁으로 전도함은 17절에서 바울의 매임(핍박으로 갇힌 일)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그리스로를 전파한 것입니다. 또 18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런 전도방법을 “외모로 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외모와 불순한 동기로 투기 분쟁을 일삼아 시행하였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더 괴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5절). 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을 더 하였을까요? 이것은 교세 확보 같은 비열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서론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바울의 최초전도 이전이나 비슷한 시기에 바울이 증언한 것과 같은 복음을 그 지역에서 전파한 경우가 있다고 할 때 교세확장의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바울과 바울계통의 성도를 투기하는 뜻으로 또는 바울의 영향력을 훼방하려는 불순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나타나는 정적에 대한 적대시 경향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하심(15절)은 16절에서 바울을 사랑하는 전도자들이 바울의 전도하는 방법(복음을 변명함)대로 시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투기와 분쟁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16절의 “이들은 합당하게 전도하는 자들이고, 17절의 저들은 그릇된 전도형태를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거나 전도하는 목적과 방법을 세움에 있어서 사랑으로 하는지 아니면 투기와 분쟁과 외모로 순전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4)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뇨” 하셨으니 이는 앞에서 시행된 두 유형의 전파에 대하여 바울의 견해를 피력하신 것입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외모로 하고 순전치 못하게 투기와 분쟁으로 전파하여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30절에서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교훈에서 순전치 못함에 대한 것을 한뜻과 협력으로 바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7절).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 하심은 불순한 전도로 바울의 명예에 손상이 있다 할지라도 전파 그 자체가 자신의 신상문제보다 귀한 것이므로,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참된 전도자나 사역자는 항상 자신의 신분 문제보다 복음이 전파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큰 기쁨과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제 3 과 바울의 신념과 소망 (빌 1:19-26) 목록으로


이 말씀의 19-21절은 “바울사도의 신념에 관한 말씀”이고, 22-26절은 “바울의 소망을 피력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을 “바울의 신념과 소망”으로 정하였습니다.

1. 바울 사도의 신념.(19-21절)

1)바울은 자신이 속박된 몸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확신하셨으니 이것이 곧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어떤 근거로 석방될 것을 믿었을까요? 그것은 19절의 “성도들(너희)의 간구와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줄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이것”이란 바울의 핍박을 받는 시련입니다. 그 시련에 대하여 성도들의 기도가 있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은 즉 잘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내 구원에 이름은 영적구원이 아닌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초기 전도 때 감옥에서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구조 받은 일도 있었으니까요(행16:26).

2)두 번째로 바울의 신념은 자신이 가진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존귀 하게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 또한 성취할 줄로 확신하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그리스도를 존귀한 분으로 나타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뜻이고, 바울의 궁극적 소망은 그리스도를 존귀히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과 오직 전과 같이 (과거를 회상하는 뜻) 이제도 (항상 꾸준하게) 온전히 담대하게 살 수 있도록 살든지 죽든지(생사를 초월하여) 힘 쓰는 것입니다. 꾸준한 신앙, 꾸준한 정의, 꾸준한 담력, 꾸준한 노력이 아니고는 그리스도의 존귀를 변함없이 나타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극단적인 노력을 불사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도 힘쓰는 자를 도우십니다.(대하 16:9) 성도가 “부끄럽지 않게 사는 방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함에 있을 것이요, “온전히 담대함”은 믿음과 정의와 사명에 대하여 담대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부끄럽지 않게 사느 문제)가 부족하면 그리스도의 존귀를 나타냄에도 부족이 따를 것입니다.

3)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신 것은 앞 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하시므로 생사를 초월한 이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생명의 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거두시는 것인즉 인간이 자기 것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에 있거나 천국에 가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또 세상에 있으면 세상에서의 보람을 찾고, 천국에 가면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인즉 더 보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양쪽 다 유익하지만 자신을 위하여서라면 천국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사모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과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는 판단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다음 절에서 그 말씀이 계속 됩니다.

2. 바울의 소망.(22-26절)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앞 대지에서 말씀드렸고, 이 본문의 소망은 바울의 생사문제의 견해입니다. 23절에서 “내가 그 두 사이(생사문제)에 끼였으니 (정신적 사고로서의 선택적 압박)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 하신 말씀에서 욕망의 뜻을 소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2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생사문제와 관련한 이해관계를 생각하면서 망설임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그가 피소되고 옥살이를 하는 상태에서 풀려나올 신념은 가졌으나 생명의 위험이 계속 따르고 있는 만큼 죽는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느 편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과 천국에서 사는것의 가치는 주님이 아실뿐 사람은 판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2)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것” 이 자신을 위하여는 더욱 좋은 일이지만, 24절에서 “그러나 너희(빌리보교회 성도들)을 위하여는 자신이 육신에 거하는 것(더 사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더 계시면 성도들에게 유익하고 세상을 떠나시면 바울 자신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3)그런 중에서 바울은 25절에서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죽지 않고) 살 것과,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을 확실히 아신다.(신념을 갖는 뜻, 19절) 하셨고, 그 일이 성취될 때, 26절에서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보람(자랑거리)이 바울의 가르침을 인하여 더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역자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하여 믿음생활의 지혜를 배울 때 믿는 보람을 더 느끼면서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생사문제는 주님께 있지만 성도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여는 세상에 더 머무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4 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목록으로


본문 27-28절에서 바울사도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 대하여 교훈하시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런 생활을 잘한다는 소식듣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은 대적자들을 멸망(영적패배)되게 하는 근거(빙거)가 되고 성도자신들에게는 구원(영적승리)을 받게 하는 은혜의 방도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승리의 방도는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29-30절에서는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목적과 바울이 나타낸 모범과 교훈대로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의 두 대목을 뜻에 따라 제목을 정한다면 27-28절은 “바울의 바람”이고, 29-30절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바람.(27-28절)

이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모든 성도들)에게 바라신 바를 요약하면

1)모든 성도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셨습니다.(27)절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다음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2)성도의 자립적 신앙생활을 원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잘하라”(27절)는 말씀은 교역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고 교역자들로부터 기초 지식과 생활을 배운 다음에 어른처럼 자립적으로 잘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교역자의 지도가 없으면 하나님을 멀리할 성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우려가 없을 만큼 스스로 서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성도간의 일심 협력을 원하셨습니다. 엡4:3에서도 말씀하신바와 같이 믿음이 하나이고 목표가 하나이면 한뜻으로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표준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신의 정욕에 목적을 둔다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는 자신부터 부정하고 주님의 뜻에 따를 때 성도가 다 하나 되고, 하나 되면 협력과 사랑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4)또 바울사도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복음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신앙은 예수님중심이고 성경중심이며 신령한 복을 위하는 일이고, 또 십자가 중심이며 현세가 안닌 내세중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5:19, 17:14) 따라서 복음적 신앙은 현실중심에서 내세중심으로 지향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

5)28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대적하는 자는 신앙을 핍박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대적은 많습니다. 무엇들이 성도의 대적입니까? 다시 말하면 성도가 두려워하고 의식하는 것이 무엇들입니까? 가난, 질병, 죽음, 사회적 위험도 있겠지요. 이 경우에 주님의 보호를 믿고 안심하며 담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죽음도 공포의 대상이라면 대적의 일종이 되겠지만 바울사도는 그것도 담대히 대처하셨습니다. 21절에서 “죽는 것은 유익하다”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성도가 자신의 정당한 처신을 하면서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한다면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체통 깍기는 일을 두려워하고 바른 일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저는 어제 어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남은 음식을 버리려면 꾸려주시오 나는 음식 버리는 것을 용납 못합니다” 하였더니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과 무얼 그렇게 하느냐고 하는 사람으로 나뉘더군요.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시행 하니까요. 그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어 엘리야가 그 음식을 먹을 때 엘리야가 불쾌하게 여겼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 까마귀가 냉장고에 보관된 음식을 가져왔을까요? 아니면 밖에 노출된 음식을 물어 왔을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왕상 17:2-9, 18:13 왕하4:8을 읽어보시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여려가지 방도를 이해하십시오. 정당한 일을 행하면서도 인간을 의식 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연약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인간을 의식하지 말고 정당한 일을 감행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바로 “아무 일에든지…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생활을 두려워하면 멸망의 빙거(멸망초래의 증거란 뜻)가 되고, 반대로 정의에 담대하면 구원의 빙거가 되는데 이는 (담대함)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8절) 딤후1:17에서 “주께서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목적.(29-30절)

1)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되 잘 이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29절, 마5:10-12) 소중한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거니와 주님은 자기로 인하여 고난 받는 자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14:22절) 따라서 은혜를 받고 고난에 담대하여져야 할 것이요,

2)바울을 본 받아 영적싸움에 의연히 대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30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인즉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 하신 것은 바울과 같은 방법으로 대적들과 영적 싸움에 임할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일종의 영적 무기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믿음 생활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하며 진리위에 굳게 서서 진리를 거스리는 대적들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복음에 합당한 생활(1) (빌 1:27-28) 목록으로


1. 바울사도께서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셨읍니다. 이 말씀이 네 개의 단어로 합쳐져 있습니다. “너희, 복음, 합당함 생활”입니다. 성경을 연구 묵상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기 때문에 이 제목의 네 개의 단어를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성도가 성경을 배우실 때 먼저 단어의뜻을 아시고 다음에 문맥의 뜻을 아시며 그 다음에 그 교훈에 내포된 깊은 의미들을 이해하신다면 만족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너희는 빌립보 교회 성도를 의미하지만 성경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또 빌립보교회 성도들이나 오늘의 성도들이나 하나님의 백성됨에 다를 바가 없으므로 너희란 바로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백성” 이란 뜻인즉 참으로 숭고한 명칭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복음이란 복된 소식이고 가장 복된 소식은 구원의 소식이며 구원의 소식은 바로 요3:16절인즉 그 의미를 설명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합당함의 뜻입니다. “합당함”이란 모순이 없고 어울리는 것을 뜻합니다. 양심과 법에 어긋나면 합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나 사랑에 어긋나도 그렇습니다. 음식도 궁합이 있고 색상도 어울리는 것이 있듯이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으며 또 부끄럽지 않고 흠 잡힐 일 없이 행동한다면 합당함이 될 것입니다.

4)생활이 중요합니다. 이 생활이란 몸의 활동만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의 활동이 있으려면 마음의 지도가 있어야 한즉, 생활은 내용의 발산입니다. 성도의 생활로 영향을 받는 대상은 하나님과 자신과 모든 이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되고 자신에게 유익하며 모든 이웃에게 덕을 세우도록 생활한다면 그것이 믿음에 부합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교훈도 생각하시면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 몇 가지를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1)성도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시려면 먼저 성경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글이고, 구원의 도리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가 성경의 의미를 잘 모른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엡4:13). 하나님을 잘 모르거나 믿는 교리가 바르지 않으면 합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잘 만나셔야 합니다. 갈1:8 에 보시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는 저주를 받아야한다” 하셨고, 딤후 3:14절에서는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우리 주위에 잘못 가르치는 교사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 가르치는 것을 바른 교훈들 인줄 알고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현실적으로 나타내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크게 형통해도, 그것이 진리가 아닐 수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신본주의는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야 하기 때문에 표준을 하나님의 뜻에만 두는 것입니다.

2)서로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시면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의 협력입니다. 목표가 예수님이면 예수님은 한분이시고 변하지 않으시니까? 일치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욕심이 있거나 이기주의가 있으면, 방법에 일치가 안 되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백성을 위하여 희생하신 분인데 성도나 사역자들이 그런 정신을 떠나서 이기주의에만 뜻을 둔다면 일심도 안 되려니와 함께 서서 협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부족할 때 협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개인적 명예를 위하여 욕심으로 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기독교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기성교회에서 목회할 때 누가 설교를 잘하여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단을 개방하였고 또 다른 사역자가 능력 있게 일을 잘 할 수만 있다면, 9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를 제쳐놓고 교회를 넘겨줄 마음을 갖고 일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은사에 이끌려서 58세에 일반목회를 사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장로는 저를 보고 “헌신예배 설교를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하더군요. 목사를 성자처럼 보지 않으면 자신이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흥하시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신 세례요한의 정신에 따라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나 교역자에게 이기주의가 꿈틀거리면 일심 협력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대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28절에서 “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전도자를 각별히 취급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본래부터 순수하셨던 세례요한을 죽도록 버려 두셨고, 바울은 원수처럼 행하는 자를 불러 쓰시고 옥문을 열어 구원해 주셨으며, 베드로는 여러 차레 연단을 거쳐 쓰셨습니다. 모세도 쓸 만큼 쓰시고 물리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모든 성도에게 “갈 길과 할 일을 지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담대하게 자기의 할일만 하고 핍박자들 앞에서도 늠름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대적 앞에서 몸을 사린다하여 그것이 사는 길이거나 유익해 지는 일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에 합당하고 대적 앞에 담대히 행하는 일에도 합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복음에 합당한 생활(2) (빌 1:27-28) 목록으로


이 제목에 대한 말씀은 강론문과 앞에 있는 설교문등에도 수록되었지만 이해와 교훈을 넓히는 의미로 또 상고하려고 합니다.

1.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우선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이 아닌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배격합니다. 구약의 언약이 성취되었는데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지 않으므로 구약적인 신앙생활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구약 시대의 제사 드리는 제도가 메시야의 속죄사역을 모형함인 줄도 모르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모형에 대한 실제적 성취라는 점도 모르면서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도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 형편에서 예수님과 복음도 배격합니다. 바울사도시대에 그런 자들이 바울을 송사하여 수난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언의 성취로 믿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구약적 신앙생활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달라진다는 것은 율법중심생활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 생활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서 약속 이행의 이전과 이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율법적 생활을 몽학선생아래 있는 자, 또는 종의자녀로 비유하셨습니다.(갈3:24, 4:22-28), 그러나 복음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자유자라 하셨으니(갈 3:26.4:31) 어찌 그 생활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율법주의를 시원스럽게 벗어나서 그리스도중심 즉,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따라 자유롭게 사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큰 자유를 누리십니까? 요8:32절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이 성도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는 자기 마음의 해방입니다. 교회의 과격한 제도라도 선한 뜻으로 이해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도 억지로 또는 강요를 받아 행하게 되면 자율롭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적 생활을 종으로 비유한다면 복음적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활인즉 그만한 특권과 여유를 갖고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믿음이란 올바른 성경관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성경관이 합당한 생활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무엇이라고 믿습니까? 만일 성경을 진리(주 하나님 말씀)가 아니라고 한다든지, 성경에 사람의 말도 섞였다고 한다는지, 또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한다면 그 믿음의 성격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본질과의 내용을 바로 이해할 때 복음에 합당한 믿음이 성립될 수 있고, 이 믿음이 성립되므로 거기에 근거한 생활도 바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관을 바르게 가지시려면 신학을 배운 목사님들로부터 잘 배우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라” 하셨고, 또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면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딤후3:14, 갈1:8). 또 어떤 사역자는 왜 오늘날은 계시가 없으며, 큰 이적이 없다고 하느냐? 하면서 사도적 이적과 계시를 여전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무쪼록 잘 배우시고 바로 배워서 “바른 성경관, 바른 믿음”을 확립하셔야 합당한 믿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4. 도덕성의 부합입니다. 도덕성이란 뜻은 나타나는 실천이지요. 초대교회 당시에 무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복음주의는 율법실천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니까 그러면 “율법을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죄를 져도 걱정할 것 없지 않느냐” 하면서 율법의 교훈을 무시하는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성이나 실천이나 사랑은 무너질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행함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곧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는 것입니다. 겸손, 예절, 절제, 진실, 근면, 봉사 등 사랑 중심의 생활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5.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교회생활이 원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이라 하셨고 또 천국의 모형인 만큼 (새 예루살렘 히12:22, 계21:10) 교회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진리, 보존, 교육) 지상의 낙원입니다. 사랑의 친교도 있고 때로는 교육과 연단의 도장도 됩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교회중심생활을 잘하면서 본이 되고 덕이 되며 합당하게 적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6.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내세지향적 생활입니다. 현세를 나그네로 여기고 내세를 사모하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즉 영원을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히11:16, 빌1:22, 요18:36), 세속을 적당히 외면하고 현실적 향락욕에서 벗어나려면 상당한 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립입니다. 성경만 있으면 무인도에 가서도 만족하고 보람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글을 쓰는 시간에 1948년에 세상 떠난 캐나다의 작가 “몽고메리”에 대한 역사를 tv에서 방영했는데 그가 남긴 “빨강 머리 앤”이란 소설이 세계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쓴 이 글도 후시대에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5 과 영광을 돌리는 생활 (빌 2:1-11) 목록으로


본문1-4절의 말씀은 “성도의 유덕한 생활”이고, 5-8절까지는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이며, 9-11절은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본 받아 행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교훈입니다. 4절에서 성도의 유덕한 생활은 복음사역자인 바울에게 기쁨이 되고, 유덕한 생활은 5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갖일 때 가능하며 성도가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예수님처럼 높임을 받게 되고(9절) 따라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읍니다.(11절끝) 따라서 총 제목을 정한다면 “영광을 돌리는 생활”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성도의 유덕한 생활.(1-4절)

1)성도가 연합적 생활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으니 그것이 곧 이웃형제에 대한 권면, 위로 성령의 무슨 교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1절의 “그리스도안에서”란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생활의 원칙이란 뜻입니다. 그 원칙 안에서 권면, 위로, 긍휼, 자비가 있고, “성령의 무슨 교재” 란 말씀과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하여 교훈하고 토론하므로 피차 은혜를 받는 영적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있으므로 개인적 영감을 중요시하였을 것입니다.(고전14:29-31, 현재는 필자가 목사님 몇 분과 함께 한달에 두 번씩 성경연구의 기회를 갖는 것과 같음) 긍휼과 자비의 다른 점은 긍휼이 자비의 근본정신이고 자비는 실제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2)2-3절에서는 이상의 다섯 가지를 시행함에 있어서 일곱 가지 방법을 열거하셨으니 ① “마음을 같이 하는 것” 즉 단결을 잘 하라는 뜻이요, ② 같은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에도 대상과 분량상의 목표가 있을 것인즉 그 목표에 일치하라는 뜻이요, ③ 뜻을 합함은 방법의 일치를 기하라는 것이고, ④ “한마음을 품음” 5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 중심으로 한마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⑤ “아무 일에나 다툼과 허영(분수를 넘쳐 사치 하는 것)으로 하지 말라” 하셨으니 좋은 일을 하면서 부조리 한 일이 나타나면 안 되며 ⑥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이것은 화합하는 지혜임) ⑦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분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유익이 되도록 돌아보라”(4절)고하셨습니다. 4절 끝에서 “나의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은 성도의 연합적 생활이 원만하고 모든 성도가 다 유익한 은혜를 받을 때 바울사도가 복음사역자로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유덕한 생활을 성공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5-8절)

이 말씀은 앞부분에서 강조하신 유덕한 생활의 방법으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모범 중 첫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5절)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지도 하에서 예수님의 입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귀하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할까요?” 하고 여쭈었을 때, 주님이 어떻게 대답하실 것인가?를 성경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을까요? 하였다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롬12:19) 하실 것이요, 음식점에 가서 무슨 음식을 드실까요? 하였다면 두 세 가지 또는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눅10:42) 거기에 알맞은 것을 먹자고 하실 것입니다. 또 남은 음식을 버릴까요? 하였다면 “남은 것은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6:12)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렇게 헤아리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마음임을 실제의 생활로 설명하셨습니다. 6절에서 그는 근본하나님의 본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 이라는 뜻입니다.(요14:9) 삼위의 하나님을 말할 때 성부, 성자, 성령님으로 일컬지만 권위상으로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시지 않으셨고(6절)오히려 자기를 비어(비하 하신 뜻)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7-8절)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에 근거하여, 죄 많은 세상에 또 비천한 인간으로 도성 인신하여 오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도 자기를 낮추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것이 곧 십자가에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의 극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8절) 과연 예수님은 모든 실천의 모범자이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셨습니까?

3.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9-11절)

1)9절에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셨으니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시고(벧전5:6) 또 선지자의 상을 주신는 분인 만큼(마10:39,41) 예수님을 높여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무엇일까요? 그 이름은 만유를 복종케 하시는 “만유의 주” 이신 것입니다.(대상29:11, 엡4:6, 히1:2, 딤전6:15, 계17:14, 19:16)

2)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 (구원받은 성도와 천사들)과 땅에 있는 자들 (모든 인간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심판을 받아야 할 죽은 영혼들과 마귀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10-11절) 이 뜻은 예수님께 가장 큰 존귀와 영광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겸손과 복종은, 이만큼 상급을 받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권을 다 아들에게 주신 것도 (요5:22)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으로 인한 상급에 기인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은 성도의 유덕한 생활과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처럼 살되 겸손과 복종을 최대한 힘쓰는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제 6 과 믿음 생활에 관한 교훈들 (빌 2:12-18) 목록으로


이 본문은 일곱 절이지만 매절마다 한 가지 이상의 뜻으로 교훈을 하셨기 때문에 “믿음생활에 관한교훈”으로 총 제목을 정하고 절 별로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 12절에서 “자립적 구원 성취”를 교훈하셨습니다. 자립적이란 교역자를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교역자를 의식하여 시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 신앙으로 태도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이 곧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처럼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말씀에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표준적 지도자인 바울이 옥중생활을 하므로 자주 지도의 힘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자립적으로 신앙을 확립하여 일어서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중에서도 교역자나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나 성도는 항상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자세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구원 성취에 관한 말씀”으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두렵게 여기면서(“두려워 할 때”란 제목의 설교가 7분 설교 9집에 있음) 조심하여 생활할 것과 구원을 이루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이 본문을 근거로 한 “3단계 구원” 즉 과거에 받은 구원, 현재 받고 있는 구원, 앞으로 성취할 구원이란 뜻으로 중생과 성화와 영화의 단계로 설명한 글이 있은즉, 꼭 찾아서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를 인간의 노력에만 비중을 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이루어주시지만(시3:8,히2:10) 사람은 그것을 받고 누리는 과정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경성하여야 합니다.

2. 13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고(엡3:17) 성도의 마음을 감동하시며 지키십니다.(빌1:9-10, 4:7)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고, 자기의 소원을 그 뜻에 맞추어 성취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소원을 두고 행한다” 하심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자기의 소원도 됨)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을 자기의 소원(정욕)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땅 끝 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행1:8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인즉 성도가 이국땅에 선교하고 싶은 소원을 갖고 기도하며 노력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와 노력을 보시고 응답의 기회를 주셔서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겔36:37 에 보시면 “하나님이 주시려고 한 것이라도 성도의 기도소원을 통하여 허락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이 일본을 이기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런 뜻은 성경으로 말씀하신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보다 남을 돌아보라”(빌 2:4)는 말씀이 있는 줄 압니다. 따라서 소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져야 하며 기도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14-15절에서는 “본 성도가 불신세계에서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불신세계에서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는 대체로 다툼이나 무질서에서 나타납니다. 국회에서 다툼과 무질서가 나타나면 국민들이 비웃고 탄식하지요. 국가의 엘리트에 속한 분들이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더욱 존귀한 신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여야합니다. 성도들끼리 무슨 일을 할 때 원만한 합의와 일치를 못 이루고, 원망과 시비꺼리를 삼는다면 흠 없고 순전한 단체(인격)라 할 수 없은즉 많은 사람을 실망 시키고 다른 이에게 모범을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부조리한 죄악세상)중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부각되도록 빛을 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을 성취하려면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자신의 욕심을 버린 후 겸손과 복종을 힘쓸 때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4. 16절에서 “말씀을 밝히는 사명”을 교훈 하셨습니다.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성경입니다. 성경 없이 하나님과 십자가의 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또 바울사도께서는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밝힌다는 뜻은 자세히 풀어 설명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눅1:3, 24:27, 행18:5.25) 필자는 말씀을 증거함 사명자로서 이 말씀 때문에(말씀을 밝히라는 명령) 말씀 집필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집필하기 위하여 목회를 중단하는 고난도 겪었습니다. 현재 8000여 제목, 13000여 쪽에 달하는 글을 써서 홈페이지에 올리는 중입니다. “밝히라”는 말씀 때문에 생애의 환경이 변하여진 것입니다. 성도에게 말씀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바로 될 수 없고 따라서 구원과 영광에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않고 수고도 헛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옳게 정립된 신앙이라야만 보람이 있고 그리스도 앞에서 당당히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말씀 따라 살며 말씀과 일치선상에 있을 때에라야만 칭찬의 값진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출 29-7)

5. 17절은 바울의 헌신 소견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제물”이란 앞에서 말씀한 말씀중심의 좋은 신앙입니다. 또 봉사는 그들의 선행입니다. 바울은 그것들 위에 (첨부하는 뜻) “자신을 관제(포도주나 기름을 드릴 때 쓰는 용어이므로 딤후4-6, 이는 바울이 피 흘려 헌신하는 순교를 뜻함)로 드린다 할지라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기뻐할 것이며 또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여야 할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봉사와 순교를 기쁨의 제사로 드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성취될 때 18절에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자(기뻐하라, 기뻐하느니라로 번역)”고 하신 것입니다. 좋은 믿음과 봉사와 순교는 다 신앙 활동의 좋은 열매들이므로 성도나 사명자들이 그런 열매를 맺게 될 때 크게 기뻐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7 과 두 사역자의 소식 (빌 2:19-3)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두 사역자의 소식”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디모데”이고, 또 한사람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① 19-24절까지는 “디모데에 대한 소식”이고, ② 25-30절까지는 “에바브로디도”대한 소식입니다. 우선 인물에 대하여 공부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면 필자가 쓴 강론문중 행16:1과 딤전1:2부분, 그리고 앞으로 계속 집필할 인물공부에서 참고하실 수 있으며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성경인물사전이나 성경사전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공부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한 자, 한 마디를 꼼꼼히 살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노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슬쩍 읽고 지나가는 글이 아니란 점을 아셔야 합니다.

1. 디모데에 대한 소식.(19-24절)

1)19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거주하면서 바울을 섬기고 선교하는 제자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에 보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주 안에서 바란다” 하심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섭리를 의지한 뜻입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 여행하는 일이 비용상으로나 여행의 안전 문제 등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도섭리를 의지한 것이고, 또 디모데를 보내기를 원하신 이유는 “빌립보교회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에바브로디도”가 위문자 바울에게 와서 소식을 전한바가 있었는데(빌1:3-6)무슨 소식을 더 알고저 하셨을까? 하시겠지만 연단 받은 디모데가 관찰하는 형편이 “에바브로디도의 형편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진실확인이 아닌 신학적 사상과 교역자의 인사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교역자라면 그에 대한 신임 관계를 알아보는 일은 다른 사역자가 중재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그 뜻은 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없음이라”하신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21절에서 “저희가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여기의 “저희”란 교역자일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교역자가 이기주의적으로 교회의 사역을 하려고 하거나 교인들이 인정에 치우쳐서 교역자를 모시려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일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도나 교역자가 참 사명을 시행한다면 세례요한의 정신처럼(요3:30) 자신은 쇠하고 유익이 없어도 교회를 잘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한다면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의 교역자인 듯하고 그 교역자에 대한초빙문제로 디모데가 파송 받아 가야하는 형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충성된 종이지만 로마에 와서 병을 앓으므로 죽을 뻔한 경력이 있은 즉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27절)

3)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성실한 종임을 천거합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 쉽지 않고 천거할만한 사람도 흔하지 않은 실정입니다. 디모데를 신임하게 하기위하여 천거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어떻게 연단을 받았는가 하면)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기 때문에” 바울의 사상과 사명을 잘 계승 받은자 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뜻을 자식이 이어 받는 것처럼 디모데가 바울을 본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 사도의 후계자요,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사역자로서 본이 된 사람입니다.

4)23-24절은 “그러므로 내가 내일(송사문제)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재판진행을 좀더 지켜본 후에) 곧 이사람(디모데)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재판에서풀려나면)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섭리적 인도로)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2.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소식.(25-30절)

1)“에바브로디도”는 빌2:25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그를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 안다” 하였으니, 여기 “필요하다”는 뜻은 시무교역자로 사역하게 함을 의미한 듯 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신앙의 동지란 뜻) 함께 수고하고(복음사역에 동참한 뜻) 함께 군사된 자요(군사는 자기 일에 얽매임 없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도 받고 생명을 바친 자란 뜻, 딤후2:3-4)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립보교회에서 그를 통하여 바울 사도에게 소용되는 비용을 전달한 뜻)고 하였습니다.

2)26절에서 불행하게도 그가 로마에 머문 동안 병을 앓게 된 사실을 말씀하셨으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오랜 기간 병으로 빌립보에 가지 못한 듯함) 자기의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다” 한 것을 보면 그는 자기의 일로 타인을 근심시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27절에서 “저가 병들어 죽에 되었으나 (몹시 앓았다는 뜻)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상황을 살피면 “에바브로디도”의 병은 오래 앓고 사경에 이를 뻔한 상태였으나 회생하였은즉 하나님이 저와 바울을 아울러 사랑하여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위문하기 위하여 빌립보교회의 사자로 로마에 왔다가 병들어 죽는다면 난감할 일이 많겠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기도의 응답으로 회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사도가 감옥에 계셨던 말년부터 특별한 기적의 은사를 나타내지 못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딤후4:20) 그런 의미에서 사도적은사와 능력은 교회시대에 까지 계속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적 기적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사역의 방편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 증거와 특별 계시가 끝나므로, 특수한 은사도 중지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행3:6-16.히2:4) “근심 위에 근심”은 교회를 염려하는 근심과(고후11:28) 병든 자를 위한 근심이요 “근심을 면케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입각한 기도의 응답이니 이런 응답을 위하여 우리도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4)28절에서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나았으므로 더욱 급히 저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를 보게 될 때 기뻐하게 될것이며 근심을 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9절에서도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성실한 사역자들) 존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5)마지막으로 30절에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함이라”하시므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기 위하여 빌립보교회 성도들로부터 파송 받아 온 사명을 성실하게 이행하였음을 나타내신 말씀이요, 그 증거로는 그가 로마에서 병들어 죽는다 하여도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하나님께 헌신한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이며 그런 훌륭한 사역자를 “존경하고 영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혹 건강문제를 내세워 시무 사역자로서의 영입을 주저하여서는 안 되겠기로 각별히 천거하신 듯 합니다.

 

 

설교보충 3. 예수님의 마음 (빌 2:3-8)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였을까요? 성경에서 찾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1. 빈 마음입니다.

“바울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5:3) 이 가난한 마음이 곧 빈 마음이고, 빈 마음은 속에 돼지나 구렁이나 여우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욕심이나 이기주의 같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을 뜻합니다. (고전15:5) 본문 7절에서도 “자기를 비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려고 해도, 자기를 위해서는 힘쓰려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를 없는 것처럼 여기시며 모든 욕심을 빼버리신 마음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2. 온유한 마음입니다.(마11:29)

온유란 성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성질입니다(고전13:4). 성격이 온유한 사람은 아무리 격동스런 일을 당해도 성내지 않습니다. 말로 풀고 법으로 풀며 그래도 안 되면 당하고 속을지언정 성내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는 것입니다. 마12:5에서 “다투지 않는다” 하셨는데 온유한 사람은 절대로 다투지 않습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오래 참기도 하겠지만(고전13:14) 조급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당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3. 겸손입니다.(마11:29)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겸손의 극치를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가 있으신데, 성부 하나님 앞에서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비어 종의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니(빌2:6-7) 겸손치고는 가장 높은 지위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비하 하신 것입니다. 마12:19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들레지 않으신다”하셨고, 사람이 되어 오셨으되 종의형태로 오신분이 무엇을 들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 세계가 곧 천국일 것입니다.

4.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복종과 순종이 다르다고 설명하더군요. 순종은 단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복종은 “자기 뜻에 안 맞아도 힘들여 시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셨읍니다.(빌2:8) 거역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어려운 고난이 따르거나 자기 생각과 달라도 힘들여서 순종하는 것이 복종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종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가 복종하셔야 할 규범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후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따름이라”고 하셨습니다.

5.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히12:2에서 “십자가를 찾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상태에서 여섯시간을 견디신 분이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때가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요 7:6,8,20)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마20:19), 30년을 비천하게 사셨으며(사53:2), 3년 동안 핍박을 견디면서 사셨습니다. 인내는 성령님의 열매요 사랑의 방도입니다.(갈5:12, 고전13:47) 따라서 인내는 신앙성숙의 증표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6. 진실한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중에 진실한 성품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강조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그 이름이 진리요 참이십니다.(요14:6) “진실 그 자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고, 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셨읍니다.(딤후2:13, 히6:18)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정책상 또는 어떤 실리를 위하여 사실을 숨기거나 나타내는 일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5:37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이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은 도덕성이나 명예에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자기를 나타내는데는 진실해야 하고 비밀이 없을수록 좋습니다. 요지음 사회에는 자기를 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화번호를 자주 바꾸거나 위장전입을 하거나 피해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채무관계나 떳떳지 못한 일로 은신하는 경우가 많은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행정관청에서 나타내 주지 않는 것은 역시 진실을 숨기는 일이요, 범죄를 은폐 또는 조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교육적인 차원에서 심리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단점을 감추고장점만 말하거나 장점은 말하지 않고 단점만 지적하는 경우도 역시 진실표현이 아닐 것이고 특히 역사왜곡이나 은페는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대로 나타내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진실과 사실발표를 주저하면 진실한 삶이 아닌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면 그는 그 약점을 숨겨 사실을 속이고, 덕을 보려는 것인 즉 더욱 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성품은 사랑과 공의에 기초한 마음입니다. 성도가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우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요3:3) 거듭난다는 것은 새 마음의 창조이고(시51:1)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거듭날 때 새 창조를 받고, 회개할 때 변화를 받으며(겔36:26) 진리를 배워 깨달을 때에도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시119:67). 변화 받지 못한 마음은 옛 마음이요(롬1:28-31), 변화 받은 마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영접한 마음으로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또 이 마음은 사랑과 공의와 양심이며(딤전1:5), 성령의 열매를 맺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 8 과 주안에서 기뻐하라 (빌 3:1-9) 목록으로


이 본문을 살피면 1절에서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말씀하셨고, 2절에서는 “삼가야 할 대상”을 말씀하셨으며, 3절에서는 “할례당으로서의 바른생활”을 말씀하셨고, 4-6절은 “바울의 현실적 자랑꺼리들”이요, 7-9절은 “바울이 현실적 자랑꺼리들을 해롭게 여기고 버리게 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대표 될만한 제목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전체적 내용이 “삼가야 할 것을 멀리하고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우선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신 말씀을 살피겠습니다.(1절)

“종말로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로”의 뜻은 편지의 결론적 의미, 또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편지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함은 기독교인의 생활목표로서 광범위한 뜻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으며 항상 주님과 함께 산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요,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기쁨이나 주님의 의를 힘입어 구원 받은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만족하고 예수님과의 친교와 동행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쁨의 표현을 찬송한 것이 많지요, “구주예수 의지함이”(340장), “나의기쁨 나의소망(82장)”, “날 구원하신 예수를”(196장), “내가 매일 기쁘게”(427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511장), “내진정 사모하는”(88장), “선한목자 되신 우리주”(140장), “신랑되신 예수께서”(162장), “어저께나오늘이나”(133장), “예수가 거느리시니”(444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359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93장), “예수님은 누구신가”(94장), “예수따라가며”(377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506장), “예수 앞에 나오면”(205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31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53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487장), “주님 찾아 오셨네”(324장), “주 사랑 안에 살면”(454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주 없이 살수 없네”(415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208장), “주 예수 내 죄 속하니”(99장), “주 예수 넓은 사랑”(274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102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456장), “주 음성 외에는”(500장), “주의 곁에 있을 때”(457장),, “험한 시험 물속에서”(463장)등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예수님을 기뻐하는 찬송이 있었는데 그 후렴만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 내주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 하옵나이다” 하는 찬송입니다. 문제는 현실을 초월하여 주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2:17,18, 4:4,10) 수로롭지 않고 오히려 너희에게 안전하다” 하심은 기쁨의 강조를 많이 할지라도 무리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개들과 행악자들과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하셨읍니다.(2절)

1)개들은 귀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배불리는데만 집중합니다. 따라서 삯군이나 거짓선지자들을 의미 합니다. 마 7:6에서, 예수님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을 개에게 비유하셨지만 가혹한 뜻은 아닙니다.(시49:12절, 눅12:32)

2)행악자들은 불법과 폭력을 일삼으며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이요,

3)“손 할레당”은 할레로 몸에 상처준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의 후손들에게 할례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에 (창17:10-14, 레12:2-3) 율법에 근거한 할레를 하였으나 신약시대에 와서, 의식적 율법이 폐하여진 것과(마11:13, 롬10:4) 십자가의 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할례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무리들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3. 할례당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3절)

2절에서 말씀한 손(損)할례당은 율법주의적 할례당으로 할례의식 그 자체를 자랑꺼리로 여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께서는 손할례당(카타도메, 훼손당이라함)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의미로 참할례당(폐리도메)의 바른 활동을 말씀하신 것으로 “참 할례당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할례를 세례 받은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할례로 인을 쳤고, 신약시대에는 세례로 인을 쳤기 때문입니다.(마28:19),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함”에 대하여 연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우선 성령님은 진리의영(요14:16)이시므로 외식 없이 참되이 봉사함을 뜻하고,

2)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달하시므로(고전2:10)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봉사함을 뜻하며

3)성령님은 능력의 신이므로(슥4:6) 권능을 주시기도 하시고(행1:8)능력으로 약한 자를 도우시며(고전2:4, 롬8:26), 힘을 주시기 때문에(사40:31) 힘 있게 섬기는 것을 뜻하고

4)작종은사에 따라(고전12:11) 유익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고(고전12:7),

5)갈5:22-23 근거하여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도록 봉사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빌2:2). 또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함”은 인간은 다 부족한 죄인들이므로 자랑할 분이 예수님 외에는 없는줄로 알기 때문이며(롬 3:27),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함은 현실적인 것들을 멀리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마 6:24)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도 현실적인 것들을 멀리할 때 가능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손할례당은 육체(현실적인 것들)를 신뢰하며 자랑하였으니, 그것이 곧 할례(상처낸 몸)를 내세운 것입니다.

4. 4-9절에서 바울이 육체를 신뢰하지 않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바울은 육체 (현실적인 것들, 율법주의자들이 자랑하는 것들)를 신뢰할 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4절에서 “다른 사람들이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울은 더욱 그런 것이 많음”을 나타내셨으니 이는 헛되이 자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8일만에 할례 받은 사실”(정통적 선민임을 뜻함, 레12:2-3)과 “이스라엘 족속임”과 그 구체적 증거로 “베냐민 지파인것과 히브리인중 히브리인”(이 용어는 아브라함이 유프레데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온 민족임을 표현하는 말로서 다른 지파와 혼돈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뜻임)임과 율법으로는 바리새인(그 당시 바리새당파만큼 율법을 잘 지킨 단체가 없었음)인 것과 열심으로는(율법주의를 옹호하는 열심) 교회를 핍박한 사실이 있음과(행7:57-58, 9:1-2, 22:5, 딤전1:13)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하신 뜻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였으므로 사람으로부터 지적받은바가 없다는 뜻이요, 완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다 현실적으로 자랑할만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5-6절)

2)그러나 7절에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셨으니(8절)…” 여기의 “유익하던것들”은 5-6절의 현세적 자랑꺼리들이고, 8절의 “모든 것”이란 기타의 현실적 좋은 여건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하시므로 그것들을 신뢰 또는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해롭게 여기셨고(7절,8절), 또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부정하고 거부하며 멀리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요일2:15) 하셨은즉 그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3)그렇다면 육체적(현실적, 3절) 자랑꺼리들을 배설물처럼 아깝지 않게 버려야할 뚜렷한 명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타나있습니다. ① 7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즉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②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하셨으니 가장 고상한 것을 알게 된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무엇이든지 현실적으로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중요시하지 않게 되는 것이요, ③ 8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 또는 성령님을 충만하게 모신다는 뜻입니다. “육체적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기 때문에”(갈5:17) 육체적 현세욕을 제어할 때 신령한 은혜의 역사가 더 크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④ 9절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니 이는 예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면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욥22:25-27에서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릴 때…하나님께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있으며…그는 들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⑤ 9절에서 “내가 가진 의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에서 의를 확보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한 할례를 중요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칭의이므로 육체적 자랑거리들이 완전한 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목적이 중요함을 아는 성도이면 현실적 육체적 향락과 특권을 충분히 외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다”는 말씀(시 24:4)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처럼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마7:7, 잠8:17) 따라서 이 말씀은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생활”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9 과 바울의 궁극적 소망 (빌 3:10-9) 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고 총제목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내용별로 필기를 한 다음 조목조목을 살핀 결과 “바울의 궁극적 소망”이란 제목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깨닫고 영감을 받았으며 또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감수하고 전도에 헌신하셨지만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맛보거나 부활을 체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경지에까지 체험 해보고저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가 목표로 삼고 정진할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영적 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고후11:23-12:4). 본문10절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해보고 싶은 소원을 말씀하신 것이고, 21절은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완성에 드러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고 그것을 소망의 목표로 정하신 것입니다.

1.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려면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10-12절)

1)10절은 정진의 과제와 방법을 말씀하셨으니 그 과제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저 함이요, 그것을 아는 방법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맛본다 하여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성격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체험을 한다면 또한 부활의 체험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부활은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그래서 “그 앞에 있는 과제를 향하여 정진한다”고 한 것입니다(12절). “부활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 (부활과 최종목표)을 좇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생활과 사명생활은 성령님의 능력에 잡혀서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도 붙잡히고(행18:5) 고난도 감수하며(롬5:3) 주님의 사랑에도 끌려서(롬8:35, 고후5:14) 죽음과 부활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끌리고 붙잡혀가고 또 좇아가므로 정진하여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목표를 정하셨으니(13)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것에 까지 목표를 둔 것입니다.

1)그래서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다” 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의 과제가 남아있다는 뜻이요(2:22),

2)“오직한일 즉 뒤에 있는 것(과거에 성취한 것들)을 잊어버리라”하셨으니 이는 과거의 일들에 얽매여 미래 지향에 지장을 받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3)“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한다”함은 미래의 목표를 뚜렷이 가짐이요,

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상급)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십니다. 그리스도가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요5:22, 약5:9)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바울사도가 내세의 상급을 쌓기 위하여 “얼마나 주밀하고 계획성 있게 하셨는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3. 15-17절에서는 “사도의 모범에 의존하여 시행할 것”을 교훈 하셨읍니다.

1)15절의 “우린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신앙의 정상수준에 오른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바울사도가 알고 있는 지식수준을 뜻합니다. “이렇게 생각할지니” 하심은 바울의 뜻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한다” 함은 바울이 받은 계시나 교훈 이외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하시므로, 그 당시는 계시가 전개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로 말씀을 또 주실 줄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2)16절에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함은 그 당시에 전개된 계시와 사도의 모범에 따라 인도받은 범위까지 그대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교리나 행정상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시에는 그 때에 가서 합당한 교훈을 주실 것을 예고 하신 것이고(15절), 17절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하시므로 사도들의 생활모범과 교훈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엡2:20)

4. 주위에 십자가의 원수가 있음을 경계하셨습니다.(18-19)

1)18절에서 바울사도가 십자가의 원수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다는 것은 빌1:28과 3:2에서 “개들과 행악자들과 손할례당을 삼가라”는 말씀에서 이미 교훈 하신바가 있었습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심”은 바울이 진리 역행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시는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세상을 슬프게 여기는 것 입니다.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하였으니 이들이 곧 복음을 핍박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소행이고 교회를 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19절에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고 저희의 신은 배요(먹자주의 이기주의를 뜻함)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죄짓는 일을 즐거움으로 여김) 땅의 일 (현세적 영리목적)을 생각하는 자라” 하시므로 복음에 역행하는 자들의 비복음적 행위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궁극적 소망이 내세에 있음을 강조하셨으니(20-21절)

1)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하심은 천국을 본향과 낙원으로 믿고 바란다는 뜻이고,

2)“거기로서 구원하는 자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한다는 뜻이며

3)“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곧 예수님, 2:9-10)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살아있는 육체를 뜻함)을 자기 영광의 몸 (주님의 부활체)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11절 말씀(죽은 자의 부활)과 대조적으로 산자의 변화(살전4:17)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원의 완성단계인 영화를 소망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사도의 궁극적 소망은 오직 재림주를 만나는 것과 내세와 내세의 상급(14절)에 있었고 이를 위하여 고난에 참여함과(10절), 현세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는 목표를 향하여(7절) 달음질하는 것이었습니다.(14절)

 

 

설교보충 4. 바울이 알려고 한 것 (빌 3:10-12) 목록으로


사람에게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알려고 하는데 가장 중대한 것을 알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기본지식을 알아야하고 성인들은 사회적 전문적 지식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 중에서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잘 아셔야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호 6:3,6). 만일 사람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와서 죽은 날을 기다린다면 무엇을 알려고 할까요? 대부분 배우는 것을 체념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감옥에서 인생 마지막을 예견하시면서도 몹시 알려고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을 더 알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보시면“그리스도를 알려한다” 하셨고, 8절에서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내가 그를 알려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였으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을까요? 바울사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 알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신격과 뜻을 많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1)믿음으로 알고(요6-69),

2)성경을 배워서 알며(딤후3-14절)

3)친교로 아는 것입니다.(요1-39) 친교로 안다는 뜻은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을 편지 왕래나 친교적 거래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과 영으로 교제할줄 알아야 신앙생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을 믿음과지식과 친교로 교제하여 많이 아셔야 합니다.

2.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권능을 안다”는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자신도 그런 권능을 체험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로서는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밖에는 더 체험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유두고를 살릴 때 죽은 자 살리는 능력을 체험했으니까 남은 것은 자신이 사는 체험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권능 뿐입니다. 요지음 성도님들 중에 죽음이후에 있을 부활을 체험해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현실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현실을 떠나서 신령한 은혜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아는 것과 천국 가는 과정에 대하여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세상 떠날 것을 기다리는 환경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부르심(죽음)을 향해 가고 있읍니다. 그러니까 저희들도 그 부활의 권능을 알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고난”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을 아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인격과 생활을 아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것인데 부활의 권능을 알려면 먼저 고난에 참여하는 것부터 아는 것이 그 순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다음에 영광의 부활을 하셨으니까 바울 자신도 그 고난의 성격을 알고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활이 아무리 좋아도 십자가는 질 수 없다” 할 사람도 있겠지만 영광의 부활을 맞기 위하여 고난을 체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입장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히12:2에 보시면 “온전케 하시는 이인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세속을 멀리하는 심정,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각오하는 심정, 극한 고난을 감수하는 심정 같은 것은 보통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른의 심정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 성숙이 아이의 입장에 있읍니까? 어른의 입장의 있읍니까? 바울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입장을 알고저 원한 것은 그 고난과 영광이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알고저 한 것이고 또 그의 신앙이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그의 죽음심을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죽고 싶어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주님의 뒤를 따르고, 믿음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순교의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으심을 본 받는다” 함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빌2:17절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위에 내가 나를 관계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바울사도가 뜻있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영광만을 생각하셨다는 점과 그것이 곧 예수님을 알고 그의 고난과 그의 부활을 알며 또 체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희들이 깨닫고 시행하셔야 할 것은 현실에 적당한 제동을 걸고 내세의 문턱에 머물면서 항상 갚진 죽음과 영광의 부활을 힘입도록 사모하고 노력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삶의 목표 (빌 3:12-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의 신앙생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고백의 시기가 할 일을 다 하고 죽음에 가까이 왔을 때 고백을 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란 것”은 바울이 한일이 많지만 미완성으로 생각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됐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들도 반드시 예수님과 그 뜻에 잡힌바 되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과거는 경험만 참고할 뿐 공로에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뜻) 앞엣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푯대란 뜻이 삶의 목표를 뜻하는 것입니다. 2003년 다 사셨으니 만큼 새해에 삶의 목표를 두셔야 하겠기로 “삶의 목표”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목표입니다. 시 73:23을 보시면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실 만큼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라고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앞세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보호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시 121:1-8) 중국 소설 수호지를 보면 송나라 철종 때에 “고구”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왕족이기는 하지만 방탕꾼이어서 감옥살이를 많이 하다가 특사로 풀려 나왔는데 씨름이나 무술 같은 운동에만 취미를 두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왕실의 친족이 황제의 아우인 “단왕”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단왕의 집 곁으로 지나다가 단왕의 집에서 밖으로 넘어온 공을 안으로 걷어 차 준 것이 동기가 되어 단왕의 공차는 친구가 되었는데 마침 철종이 자녀가 없자 단왕이 왕이 되면서 고구가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성공도 비슷한 과정으로 된 것 아닙니까? 롬 4:17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붙드심의 대상만 된다면 성공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만남에 유의하시고, 만남의 성격을 유익하도록 승화시킬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푯대는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8절에도 보시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란 말씀이 있고, 예수님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하셨습니다.(요 6:32, 40, 마 27:46) 시 22:1에 보시면 다윗도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되라”(마 9:29)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얼마나 풍성하게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 성도의 아버지 역할을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과 기도에 집착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묵상은 가만히 앉아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일을 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자신과 멀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고후 8:12). “산을 옮겨라, 별을 따 와라” 하시지 않습니다. 달란트를 주신 후에 일을 시키시고 은사를 주신 후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의 상태에서 순종만 잘 하고 뜻만 거역하지 않으면 개인이 독점한 하나님처럼 대해 주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3:1, 4:4) 다 같이 한 번 반성하십시다. 내가 하나님을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고 만족하는가? 찬송가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내용들입니다.(주 사랑 안에 살면-45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415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208장, 주 예수 넓은 품에-476장,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102장 등) 그런데 저희들은 얼마나 예수님으로 만족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느 8:10에서 “하나님을 기뻐함이 너희의 힘이라” 하셨고, 사 40:31에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신다” 하셨으며 시 37:4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할 때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하나님 외에 사모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시 73:25).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을 때 그리스도를 더 많이 모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값진 대상으로 알며 그 일 때문에 현실을 중요시 하지 않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기에만 집착하면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가? 하시겠지만 하나님으로 만족한다고 하여 놀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나라와 그 의를 열심히 구할 때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에(마 6:33) 염려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정하실 때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 그것이 곧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면 그것이 곧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뻐하고 예수님으로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힘을 얻는 방법이 되어 미래의 생활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빌 3:13-14) 목록으로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앞에 있는 것은 미래를 뜻하는데 이 미래가 영원한 미래이어야 합니다. 현실적 미래는 뜻을 성취한다 하여도 잠시 뿐이기 때문에 영원한 미래에 있는 것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1.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은 현실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신앙적으로 볼 때 성숙된 분이고, 또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13절을 보시면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또는 사명적으로 성취한 것이 많지만 무궁한 미래에 비할 때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유한하고 미래는 영원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현실적 성취를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지식도 짧고, 건강도 부족하고, 돈도 적고, 집도 없고, 자녀 출세도 못한 경우이지요. 이런 사람은 현실적으로 뛰어 보았자 한계에 부딪힐 것이니까 차라리 천국 미래에 소망을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 미래는 항상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욕심도 한이 없구요. 어떤 전기에 있는 내용인데 프랑스의 “이반젤린”이란 처녀가 “가브리엘”이란 청년과 약혼을 하였는데 결혼 하루 전날 영국군의 침략을 받아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서로 만날 때를 기다리는 중 가망이 없자 그 처녀는 자선 사업에 마음을 쏟기 위해서 간호부가 되었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환자들이 병원에 왔는데 그 중에 남편 “가브리엘”이 전염병 환자로 왔더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이 너무 중하여 “가브리엘”하고 이름만 한 번 불러보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많은 일들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세적으로 꿈을 꾸어야 하겠지요. 어떤 친구 목사님은 현실적으로 성공한 분도 있습니다. 아들 딸 가정 이루어 잘 살고, 자기는 원로 목사 되어 평생 생활비가 나오니 현실 성취 잘한 것이지요. 그러나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놓은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잘 양육한 교인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만일 그것이 없다면 역시 미완성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세계에 무엇을 향할 것인가? 할 때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칭찬 받고 상급 받을 일을 바라보고 힘쓰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내세에 상급이 쌓일까요? 연구하고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2003년 12월 24일 저녁에 TV에서 두 세대가 어린이를 양육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많은 격려 전화가 쇄도 했다고 합니다. 40대 부부가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33명의 고아를 가족처럼 돌보는데 그 남자 가장의 발뒤꿈치가 밭고랑처럼 터져 있었고, 그 부인의 손은 농사꾼의 손처럼 터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시청자들의 마음이 크게 감동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정은 60 넘은 노부부가 시골에 살면서 의지할데 없는 어린 딸 넷을 양육하는데 꼭 자기의 손녀딸처럼 정을 들여 키우는 것입니다. 안산의 어떤 교회는 그 목사님이 지도를 하여 13 세대가 양자녀 영입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한 가지씩 남을 돕고 사랑 실천하는 일을 힘쓰자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앞에 있는 것을 향하기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푯대를 향하여…좇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뒤에 있는 것, 잊어버릴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입장으로 보면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첫째는 그가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겨 버렸으니까요.(7절)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19:27)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오직 선교에 자기 생애를 바친 것입니다. 그것은 큰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고 또 바울 서신(히브리서까지 포함) 14권을 기록하여 후시대 성도들에게 믿음의 지침을 남겨 주었으니 얼마나 큰일을 하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을 더 잡으려고…, 바울은 그 믿음이 성숙인에 이르렀고,(15절) 고상한 은사도 많이 체험하였지만(고후 13:1-4) 그런 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경지를 체험하려고 노력을 하신 것입니다.(10-11절) 미래를 지향하는 성도이면 반드시 잊을 것을 잊어야 합니다. 우선 자기의 공로를 잊어야 하고, 자만을 잊어야 하며 오직 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는 이런 공로가 있는데 왜 안 알아주나?” 한다면 그는 자기의 미래를 그만큼 더디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공로는 사명으로 끝내라”(나의 할 일을 한 것 뿐, 눅 17:9-10) 하셨고,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라”(히 12:1) 하셨으며 “뒤돌아보지 말라”(창 19:17, 눅 9:62) 하셨고, “앞에 있는 푯대에만 향하여 달음질하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적인 모든 욕망은 미완성으로 끝날 것입니다. 성도의 목표는 천국 본향에 있고, 오직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만 “영원히 누릴 복”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주 안에서 할 일 (빌 4:1-9)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주 안에서 할 일”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 끝에 “주 안에 서라”(예수님 기초 위에 확립된 신앙) 하셨고, 그 다음에는 화합과 협력과 기쁨과 관용과 기도와 참된 생활과 사도의 본을 받는 일까지 일곱 가지를 말씀하셨으므로 “주 안에서 할 일”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화합하는 일입니다.(1-2절)

1)1절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다같이 천국 시민이 된 동질감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감정 표현일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 함은 믿음을 가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 실적의 증표로서 상급과 칭찬의 대상이 됨을 기뻐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고”한 것은 바울이 그들을 사랑함이고, “사랑하는 자들”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끼리 사랑함입니다. 교역자와 성도들간의 사랑과 친교, 그리고 상대적으로 만족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2)“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하심은 “사랑의 결속 위에서 믿음 위에 든든히 서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믿음(주 안에서 하는 일)이 결속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심은 한 교회 안에서 두 여성도가 뜻을 합하지 않으므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 권면하신 내용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짐”은 모든 이와 화합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원수도 사랑하여야 할 것인즉(마 5:43-44) 성도간에 뜻이 맞지 않는 것은 다투어 양보하거나(빌 1:3) 남을 낫게 여겨주므로(빌 2:3) 화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서로 협력하는 일입니다.(3절)

1)“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하셨는데 여기의 “너”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빌립보서를 받아 개봉하여 읽어야 할 대상이므로 그 교회의 대표자라 할 것입니다. 그는 바울 사도와 함께 복음 사역을 위하여 멍에를 같이 한(함께 수고함)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으므로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2)“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유오디아와 순두게)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바울과 함께 일한 사역자들, 디모데, 디도, 누가, 두기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라스도, 드로비모 등)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유급자이든 무급자이든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는 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은 봉사하고 서로 돕는 중에 능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3)“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 하심은 그들의 믿음이 구원의 확신 가진 믿음으로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행 14:9) “하나님은 구원받을 백성들을 미리 정하여 생명책에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출 32:32-33, 눅 10:20, 계 3:5) 협력이 잘 되는 교회는 부흥도 잘 됩니다.

3. 기뻐하는 일입니다.(4절)

어떤 학자는 빌립보서 전체의 제목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간하배 선교사)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만족과 기쁨이 없다면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인식하지 못하였거나 기독교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큰 만족과 기쁨을 주는 종교인즉 환난과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롬 5:3, 빌 1:21, 시 116:15) 그런고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강조하신 뜻) 기뻐하라” 하셨고, 3:1과 4:10에서도 기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기뻐할 내용들”이란 설교문 참조.)

4. 관용하는 일입니다.(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 중에 용서를 잘 못하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믿음 성숙이 덜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마 6:12)과 부채 탕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보시고(마 18:21-35) 무조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심판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이며(요 5:27) 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을 두려워하여야 하며 자신의 관용성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성숙이 부족할 때는 범죄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단이 있을수록 범죄자에 대한 사랑과 이해도 넓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관용은 좋은 미덕이고 사랑의 열매이며 또 화합하고 협력하는 방법도 되고, 기도 응답의 방편도 될 것입니다.(마 5:24)

5.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6-7절)

1)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대소사간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지만 염려 자체가 해결 방법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의 과제로 삼고 연구하며 기도로 하나님께 의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어려운 문제를 인하여 기도한 후 해결된 경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성도가 살아감에 있어서 당면하는 모든 일들로서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라”는 뜻이고, 간구는 어려운 일을 부탁하는 입장에서 드리는 기도이며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뢸 것”은 무슨 일이나 하나님을 원망할 일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실수로 저질러진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구할 때는 감사와 간구가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한 후 24시간 내에 해결되는 것이 많은 줄 압니다. 여하튼 기도의 응답을 체험해 보십시오.

2)7절에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각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이 뜻은 모든 사정의 원인과 상태를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9절, 사 9:6, 요 14:27, 롬 16:20, 살전 5:23)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는 방법 중 하나는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 커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고, 어떤 때는 적은 환난을 인하여서도 불안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면 견고한 마음을 갖게 되어(사 26:3) 무슨 일이나 용기있게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참된 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8절)

“종말로(결론적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바르고 진실함) 무엇에든지 경건하며(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시행하는 뜻) 무엇에든지 옳으며(법을 지키며 명분 있게 시행할 것) 무엇에든지 정결하며(부정이 없어야 하는 뜻)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사랑 실천의 목적과 방법을 시행함)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상식적 공감대를 유지할 것) 무슨 덕(베푸는 일)이 있든지 무슨 기림(보람된 일을 하는 것)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이란 곧 “정의와 경건과 순결과 사랑과 칭찬의 대상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는 일거수 일투족과 말 한 마디까지 조심하여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7. 사도의 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는 기독교의 기초이자 모범입니다. 고전 3:10-11과 엡 2:20을 꼭 읽어 보십시오. 또 고전 11:1에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자기의 모범을 전승시켜 주셨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배우거나 듣거나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성경을 배우고 모범을 따를 때 인본주의 방식을 떠나서 반드시 사도적 교훈과 전통을(고전 11:2)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 하셨으니 참 평안은 성경과 일맥 상통하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어긋난 상태에서는 평안한 것 같아도 참 평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두려운 일이겠지요.(시 73:1-19)

 

 

제 11 과 섬김의 교훈과 결론 (빌 4:10-23)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교회나 개인이 복음 사역자를 돕는 일에 대하여 복된 교훈을 주심과 동시에(10-19절) 결론적으로 문안과 축복으로(20-23절) 서신을 마금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교훈과 결론”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섬김의 교훈들.(10-19절)

1)10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교류가 끊겼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친교와 협력의 뜻이 나타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기뻐하는 일이나 기뻐하는 목적도 주님 중심이란 뜻)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15절, 복음 사역 초기에 바울의 선교를 도운 일)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그동안 소식 두절로 중단되었으나 소식을 알고 다시 시작한 뜻)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복음 사역자에 대한 연민과 돕고저 하는 사명감이 늘 있었겠지만 소식을 몰라서 못한 것을 이해하신다는 뜻)”고 하셨습니다.

2)11-13절은 바울의 믿음에 근거한 자립성과 자족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협력을 기뻐하신 이유가 상부 상조에 뜻이 있음을 강조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자립 자족할 수 있지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셨으니 바울은 로마 현지에서 돕는 성도들도 있었고, 또 하나님의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로(21절, 히 4:16, 마 6:31-32)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궁핍에 처하지 않은 이유 중 또 하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셨기 때문”입니다.(11절) 그것이 곧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핌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셨기 때문”입니다.(12절) 바울은 비천과 가난과 풍부와 존귀를 다 체험하시면서 그 환경에서 믿음으로 적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덕을 세우는 방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성도는 가난할 때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해결하는 체험을 하셔야 하고 또 풍족을 이룰 수도 있으며 그 풍족한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는 체험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도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성도가 주 안에서 살면서 누구에게 구차한 사정을 하게 된다면 영광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3)14절에서 “복음 사역자를 돕는 것은 곧 그의 괴로움에 참여하는 일로 잘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고난당하는 사역자를 돕는 일은 바로 자신이 그 일에 참여함이 됩니다. 그래서 상급도 같은 성질의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0:40-41)

4)15-16절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선물(봉사)을 준 일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셨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처음 그 곳에서 전도하실 때, 행 16:11-40)에 마게도냐(빌립보를 포함한 헬라의 북쪽 지역을 뜻함)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각주에는 교제한) 교회가 너희 뿐이었고, 데살로니가(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 110㎞ 지점의 항구 도시)에 있을 때도 너희가 한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물 봉사에 대한 과거의 협조를 감사 치하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주고받는 일”이란 바울이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쳤고,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물질적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경우에 진리의 가치는 신령한 복에 해당하고 물질적 봉사는 육체의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고전 9:11)

5)17-19절에서는 선교에 협력하고 복음 사역자를 돕는 일이 여러 가지로 복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축복 받는 열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봉사 받는 자의 유익보다 봉사하는 자에게 더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딤전 6:8, 마 10:9-10, 6:31-33, 히 4:16, 빌 4:11, 19절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하신 것처럼 받기도 하고 마음으로 풍족하게 누린 뜻)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재물의 다소에 연연함 없이 항상 마음으로도 풍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복음 사역자를 섬기는 일의 성격을 요약하면 ① 사역자의 괴로움에 참여하는 일이요,(14절) ②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는 일이며,(17절) ③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18절) ④ 그 풍성한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움 받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19절)

6)바울 사도는 “자기의 섬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섬기는 자들에게)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으로 확신” 하셨습니다.(19절) 성도와 복음 사역자간의 사랑과 협력은 곧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일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기 때문에 풍성한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결론.(20-23절)

1)20절에서 모든 교훈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롬 11:36)” 하셨고,

2)21-22절에서는 서로의 문안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진실한 믿음의 성도)에게 각각(개인 상대로)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로마에 있는 동역자들로 디모데, 디도, 에바브로디도, 누가 등)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하셨으니 이는 가이사 왕족들 중에서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와 로마는 먼 이국입니다. 양 지역의 성도들 중에는 대부분 서로 모르는 사이이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가족의 연민과 사랑이 얼마나 각별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교회의 이기주의를 떠나서 세계의 성도를 한 가족으로 대하는 사랑의 폭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회를 통한 현세적 이권을 초월하는 신앙과 제도로 개혁하여야 할 것입니다.

3)23절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하신 사도의 축복으로 이 서신의 끝을 맺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성도의 심령에 역사하시므로 은혜와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7. 바울 사도의 기쁨 (빌 4:1, 10) 목록으로


기쁨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눅 10:21) 바울 사도는 무엇으로 기뻐하셨을까요?

1. 바울의 전도로 믿게 된 성도들을 기뻐하셨습니다. 1절에 보시면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사 49:5, 고전 4:10) 그런 존귀한 대상이 바울의 전도로 열매를 맺고 믿음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믿음 없는 자식을 가진 것보다 믿음 있는 성도를 측근에 교제하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기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고후 1:14에도 보시면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된다” 하셨고, 고후 3:1-3에서는 “바울이 누구의 천거서가 필요하지 않고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하신 말씀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야 할 대상이 바로 성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곧 기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2.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갖고 사는 일”에 대하여 기뻐하신 일이 있고, 또 빌 2:17을 보시면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믿음 자라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고 복음 사역자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심방을 갔을 때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으면 만족합니다. 이 만족이 좋은 음식을 대접받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눅 10:40-42)

3. 성도들이 봉사하는 정성을 나타낼 때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본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많이 도왔습니다.(빌 4:15) 그러다가 중간에 바울 사도의 소식을 모르면서 중단되었는데 다시 알게 되어 “에바브로디도”를 로마에까지 보내어 바울을 위문하고 생활 경비를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교인이 복음 사역자를 섬기는데 누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만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뻐한 것은 물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풍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물질이 있는 곳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마 6:21) 그것이 또한 그의 믿음 성숙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봉사 활동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4. 자족의 기쁨입니다. 바울은 자족을 배웠습니다.(빌 4:12) 남이 볼 때는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자신은 넉넉하게 여기고 만족하는 기쁨을 갖는 것입니다. 고후 6:9-10에 보시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자 같으나…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 당하지 아니하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보고 느끼는 관점이 다르다는 뜻도 있고, 믿음 안에서는 없어도 넉넉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높은 지위만 있으면 집주고, 돈 주며 자동차 주고, 운전사 보내주고, 호위하는 것처럼 성도가 주님께 잡힌바 될 때 모든 풍성한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고 자족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 보이는 땅이 다 내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 그 마음의 넉넉함이 생길 것입니다. “자족”의 뜻을 이해하시라는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공자의 사례를 들어 보면 적은 돈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지요. 그것이 곧 5병 2어의 기적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일제시의 교과서에 “1전(연필 한 자루 값)으로 온 방을 채울 물건을 사오라”한즉 한 어린이가 양초 1개를 사서 방 가운데 세우고 불을 켠즉 온 방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는 내용처럼 적은 것을 크게 여기고 자족하는 기쁨이 성도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적게 가진 것이 가난이 아니고 더 가지려는 마음이 가난이라”는 것처럼 만유의 주 예수님을 모신 마음으로 풍요의 기쁨을 누리고 또 필요한 것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중요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두려워하겠지만 바울 사도는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고, 또 예수님을 인하여 피해를 입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하셨는데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롬 5:3에 보시면 “환난에도 즐거워하라” 하였고, 행 20:24에서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서라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기뻐하신 최상급의 내용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저 소원하신 말씀”이 빌 3:10-11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 받고 죽는 것을 기쁘게 여긴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야 말로 성령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기쁨의 소재 다섯 가지가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기뻐할 내용들 (빌 4:4) 목록으로


“항상 기뻐하라” 하셨고, 또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셨는데(살전 5:16) 기뻐할 내용들이 있어야 기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예수님은 무엇을 기뻐하셨는가?를 살피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고,(눅 10:21) 다음에는 성도가 회개할 때 크게 기뻐하셨습니다.(눅 15:7, 32) 우리도 성령 충만을 받으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성도의 회개를 기뻐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과 회개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은 어떤 경우에 기뻐하였는가? 하면 예수님의 능한 일을 보고 기뻐하였고,(눅 19l37)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의 기쁨도 충만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아무 것이나 다 기뻐하지 말고 꼭 기뻐할 것을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절대로 허탄하고 유한한 것은 기뻐하면 안 됩니다. 만일 재물이나 명예를 기뻐한다면 곧 거두어 가실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기뻐할 일

1. 내가 하나님의 선택 받은 것을 기뻐하셔야 합니다.(엡 1:4) 만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다면 하나님도 모르고 인생의 가치도 모르며 짐승처럼 살 뻔 한 것입니다. 인류가 한 편은 그늘에서 살고 한 편은 햇빛에서 삽니다. 하나님이 많은 인류 중에 나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햇빛에서 살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셔야 할 것입니다. 눅 10:20에 보시면 “귀신이 나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곧 선택 받고 구원 받게 된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보화를 간직하였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2.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신 것을 기뻐하셔야 합니다. 창 28:15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셨고, 예수님도 마 28:20에서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집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얼마나 즐겁고 든든하겠습니까?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 나와 함께 계셔 주시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기뻐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내 형편을 익히 아시는 것입니다.(시 139:1-4, 계 2:1-3) 만일 여러분들이 잘 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속상할 것입니다. 또 억울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더 속상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편을 다 보고하지 않아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든든하고 안심되며 기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실이 숨겨지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비빌을 대낮처럼 다 아십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기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보호를 기뻐하셔야 합니다. 시 73:24에 보시면 “오른손을 붙드신다” 하셨고, 신 32:10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하셨으며 시 121:6에서는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상치 않도록 주야 영원토록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지켜주심 때문에 건재한 것입니다. 이란에는 지진이 나서 7만명 정도의 사상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일이 있었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죽은 것은 아니라” 하시면서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도 저희들은 이렇게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기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인도하심입니다.(잠 16:9, 시 139:10) 성경에 “인도 하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너희 길을 주께 맡기라”(시 37:5)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인도 하시는 은혜를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앞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십시오. 맡기고 사는 것이 여러분의 앞 일을 더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인간이 방향을 틀다가 광풍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을 기뻐하셔야 할 것입니다.

6. 신령한 복을 주신 은혜입니다. 독생자, 성경, 믿음 주신 은혜, 죄사함, 하늘의 시민권, 양자된 은혜, 영생 천국 주신 은혜가 대단히 큰 것인즉 매일 기뻐하셔야 할 것이요,

7.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은혜입니다.(히 4:16, 마 6:8, 32) 필요할 때 적당한 것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 놀라운 은혜입니다. 만물을 받고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고, 땅 한 평 없어도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없으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도로 받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 중에는 기도 응답을 받는 은혜가 포함됩니다. 그때그때 공급 받는 은혜를 기뻐하셔야 하고,

8. 마지막으로는 상급 주시고 심판 하시는 은혜를 기뻐하셔야 합니다. 마 5:12에서 “하늘에 상급 쌓는 것을 기뻐하라” 하셨지요. 하나님이 공평하게 심판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요 5:30에서 “내 심판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참으로 기뻐할 일이 많습니다.

이상과 같은 신령한 복으로 기뻐할 때 그 기쁨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또 고전 13:6에 보시면 “진리(성경)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119:103)

 

 

설교보충 9. 염려하지 말자 (빌 4:6-7) 목록으로


2004년 새벽에 설교 두 편을 기록합니다. 하나는 “주려는 마음을 갖고 살자”는 제목이고, 또 하나는 “염려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린이나 철들지 않은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이 40이 되어도 염려하지 않으며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되는대로 목표 없이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은 염려를 안 하지만 그것은 인생의 가치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할 일을 다 하려면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책임과 할 일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방법이 없거나 힘이 없으면 염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의 뜻은 “목표는 있으나 방법을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방법을 모르면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인즉 염려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염려를 안 하려면 방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헬라 말로 “염려”는 “메림나오”(μεριμνα̑ω)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갈리진다”는 “매리조”와 “마음”이란 “누스”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갈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것이지요(약 1:8). 즉 한 쪽으로 일치하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니 이는 곧 근심과 같은 것입니다. 염려, 근심은 곧 마음의 짜증에 해당하고, 현대어로 스트레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트레스를 안 받도록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자수성가 한 청년이 학벌 있는 아내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염려를 하다가 정신 분열증이 생겼고 결국 분신자살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또 어떤 검사는 아내가 죽은 다음에 따라 자살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다 염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 보건 위원장이 발표하기를 “미국에는 염려 때문에 정신병자가 늘어나는데 그 결과로 심장 마비가 온다” 하였고, 2차 대전 때 죽은 자가 35만 명인데 그 해에 심장병으로 죽은 자는 100만 명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죽은 수보다 충격으로 죽은 수가 3배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에드워드 포스톨키”가 쓴 “염려를 그치고 건강을 회복하라”는 책에서 감기, 고혈압, 신장염, 관절염, 두통, 위장병, 시력 장애, 암 등이 전부 염려에서 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매카니즐”이란 치의학 박사는 말하기를 근심과 염려가 신체의 칼슘 량을 저해시켜서 치아에 손상을 준다. 어떤이가 건강한 이를 가졌는데 그의 아내가 병들자 3주 내에 9개의 이에 구멍이 뚫렸다는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사가 성경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하므로 내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 하신 말씀과, 잠 17:22의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바르게 한다”, 또 잠 18:14을 인용하여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하였으니, 이는 육체 질병의 승패가 그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질병과 가난과 인심이 경색된 사회에서 염려를 안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염려 안 하는 방법을 터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 7절을 보시지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강론문에 있습니다. 다만 염려의 반대는 평강인데 그 평강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방법은 감사와 기도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염려 안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길을 몰라서 서 있는 것이 염려라면 길을 알았을 때는 그 길로 가야 하니까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감사와 기도로 염려의 정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벧전 5:7에서도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도 역시 기도로 부탁하라는 뜻입니다.(시 37:5)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시 116:1) 성경에는 기도로 해결한 사례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민족도 살리시고 개인도 살리십니다. “기가 막힐 수렁에서도 건지시고(시 41:2)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시 51:15) 이 말씀에 확신을 갖고 용기를 내어 기도하는 결단이 있어야 염려의 사슬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염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은 변화의 마음을 주십니다.(겔 36:35) 지혜와 총명과 모략을 주실 수 있고(왕상 3:12, 삼하 17:14) 마음에 찾아오시며(고후 1:22) 믿음을 주시고(히 12:2, 약 1:21) 하나님과 같은 소원을 주시며(빌 2:13)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빌 4:7) 마음에 깨달음과 변화가 있을 때 염려를 떨칠 수 있습니다. (다른 설교문에 염려하게 되는 내용과 그것에 대한 성경적 처방을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보다 소중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모신 성도는 자기의 삶에 관한 문제나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롬 14:7-8) 하셨으니 이런 믿음을 가지셔야만 염려를 떨칠 수 있는 것입니다. 평강을 기원합니다.

 

 

설교보충 10. 모든 쓸 것을 채우심 (빌 4:19) 목록으로


오늘은 2003년 12월 31일 아침입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아온 것을 감사드리고, 또 어렵게 쓰고 있는 빌립보서 강론도 이 설교문으로 끝내게 되었습니다. 명년 초부터 골로새서 강론을 쓰고 늦어도 4월 안에 로마서 강론을 써서 신약 강론을 마치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신 이 말씀이 의식주 정도를 해결해 주시는 일이라면 저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쓸 것”이란 의식주 뿐 아니라 음식 종류와 약 종류에 까지 해당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에 주시고 나의 체질을 나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셔서 나를 관리해 주신다는데 까지 체험을 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가난하여 의식주 염려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사는데는 돈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건강, 지혜, 명예, 이웃의 인심, 만족, 희망, 기쁨도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노인이 되어 심심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할 일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떤 시간, 어떤 공간, 어떤 환경에서도 충분히 할 일이 많고 바쁘게 살아야 하며 또 적응할 수 있는 만사 적응의 종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우선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 극복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난 극복의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창 1:1, 요 1:1, 롬 4:!7, 8:32) 또 불신자도 잘 살게 하십니다. 또 동물과 식물과 미생물도 다 키우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성도(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마 6:30) 그리고 땀 흘려 일하십시오. 일해야 먹을 것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창 3:17) 일하기 싫거나 게으르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가난이 강도처럼 임한다고 하셨습니다.(살후 3:10, 잠 6:11) 이 말씀으로도 부족하면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역사 하시는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역을 옮겨 흉년을 피한 일이 있었고,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하여(왕상 17:6), 출애굽한 광야의 백성들이나 선지자 생도의 집에는 이적으로도 먹이셨습니다.(출 16:12, 왕하 4:1-7) 또 양식에 대한 이적은 예수님도 포도주 이적 외 오병이어, 칠병이어로도 역사해 주셨습니다.(요 2:10) 본문의 쓸 것을 채워주시는 축복은 복음 사역자나 선교 사역에 봉사를 잘 하면 하나님이 그의 모든 쓸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성도들 중에 봉사를 잘 하는 분들이 여유 있게 사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는 신령한 복에 진력할 때 현실의 것을 더 잘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 1:3에서 “복 있는 자가 율법을 즐거워하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는 말씀, 또 마 6:8, 33에서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 또 요삼 2절에서 “영혼이 잘 되는 자에게 범사에 잘 됨과 강건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다 주시는 분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받는 자의 입장은 어떠하여야 할까요? 시 23:1에 보시면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자가 부족함이 없다” 하였고, 바울 사도는 빌 4:11, 18에서 “자족하고 풍족하다”고 하셨는데, 이 풍족함이 “만물을 쌓아 놓았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딤전 6:8) 하나님의 나라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두지 않았으며(롬 14:17) 또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기 위하여 세속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셨기 때문에(빌 3:8) “풍족하다는 뜻”은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 이상을 구하라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마 6:11) 제가 핵심 설교집 중에 “놀라운 충격”이란 제목의 간증문에 하나님이 그때그때 주시는 은혜의 체험 기록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은혜가 지금도 계속 연장되는데 놀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기가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비린 생선 조림이 먹고 싶은 때 바로 그것을,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심지어는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내 체질에 맞는 약을 제공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생일을 차려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생일 잔치만한 음식 대접을 받게 됩니다. 나는 30대 목회시에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설교를 하면서 성직자가 집을 소유하는 것을 덜 좋게 여겨 지금까지(66세) 소유된 집이 없지만, 앞으로도 집 때문에 염려할 것 같지 않은 확신을 갖습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음식이요,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장소이면 집이며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설이면 자동차로 여깁니다. 이 마음은 억지로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속적인 것들이 싫어집니다. 누가 음식 대접을 한다고 할 때 5000원짜리 국밥을 대접받으면 만족하지만 비싼 음식은 앉아서 기다리고 먹는 시간조차 불편하고 지루하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좋은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의복이나 구두가 새 것이 있어도 거기에 손도 대기 싫습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하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 이상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현실적인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신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쓸 것을 어떻게 치우시는지를 꼭 체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