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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베드로후서 강론

제1과 구원의 은혜와 성도의 덕행 (벧후 1:1~11) 57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형상 (벧후 1:3~9) 60 바로가기

설교보충 2.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벧후 1:10~11) 62 바로가기

제2과 말씀과 신앙에 관한 권면 (벧후 1:12~21) 64 바로가기

제3과 하나님의 심판 (벧후 2:1~11) 66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심판과 구원 (벧후 2:4~11) 68 바로가기

설교보충 4. 홍수를 내리심 (벧후 2:5) 70 바로가기

제4과 유혹하는 자들의 형편 (벧후 2:12~22) 73 바로가기

설교보충 5. 거짓 선지자 발람 (벧후 2:1~3, 15~16) 75 바로가기

설교보충 6. 발람의 길을 경계할 것 (벧후 2:15~19) 77 바로가기

제5과 일깨워 생각하게 함 (벧후 3:1~9) 80 바로가기

제6과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 (벧후 3:10~18) 82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어떤 사람이 될까 ? (벧후 3:8~13) 84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주의 날을 사모하라 (벧후 3:10~14) 87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심 (벧후 3:17~18) 89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신앙 생활의 지식 (벧후 3:17~18) 92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인격 성장의 방도 (벧후 3:17~18) 94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베드로전후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집으로 출판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강론집은 필자가 목회할 당시에 이미 설교한 것을 모은 것입니다. 본래 이 강론집을 공동 서신 전체에 합본하려고 하였으나 분량이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서문을 또 쓰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고(빌2:16), 자세히 설명하며(눅24:27),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20)는 말씀에 입각하여 말씀 증언에 충실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이와 같은 강론집 몇 권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기성 교회 목회를 30년 하였지만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많이 양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목회적 능력에 한계가 있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끌리게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밝히고, 몇 권이라도 글로 남기는 것이 성직을 맡은 사명에 더 유익할 것으로 믿고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과, 평범한 성도가 보실 수 있도록 평범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읽으실 때는 필자가 한 글자라도 뺄 수 없어서 기록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셔서 주밀하게 읽으시고, 주밀하게 묵상하시면 상당한 은혜를 받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강론문을 기록한 다음 평소에 설교한 내용들이 있어서, 베드로 전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 10편과, 베드로 후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 11편을 첨부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집필된 강론집은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디모데 전서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탈고되었는데, 다른 교육 재료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강론집을 남겨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8. 3. 26.


저자 지 영 근


베드로후서 강론

제 1 과 구원의 은혜와 성도의 덕행 (벧후 1:1-11) 목록으로


베드로 후서에 대한 개론은 <기독교 신앙백과> 256번을 참고하십시오. 본문 1-2절은 “서신 초두의 문안의 말씀”이요, 3-4절은 “구원의 은혜에 관한 말씀”이며, 5-9절은 “성도의 덕행”이요, 10-11절은 “피선택적 확신”의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로 대지를 종합하여 “구원의 은혜와 성도의 덕행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문안 말씀에 대하여(1-2).

1) 이 편지의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종의 성격은 복종과 섬김이요, 사도의 성격은 모범자, 전권대사의 뜻이 있습니다.

2) 베드로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성도요 또 베드로 전서를 받은 성도들에게 후서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음”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책의 면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인정받아 심판에 이르지 않음을 의미하며(롬8:33,요5:24),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믿음의 은혜가 유대인들과 동일하다는 뜻이며(행11:17,18), 믿음 또한 영생의 복처럼 보배로운 것입니다.

3) 베드로는 이 편지의 서두에서 수신자들에게 축복하였습니다(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복을 대신 전달하는 축복의 말씀이요, 이 축복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은혜” 즉,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믿음과 성경 지식입니다. 믿음은 영적 연합의 관계, 신뢰의 관계, 친교의 관계를 의미하고, 지식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복을 받는데는 이 두 가지가 꼭 필요하며, “은혜”는 거저 받는 복이고, “평강”은 영육간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구원의 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3-4).

1) 하나님은 자기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3). “신기한 능력”은 성령님의 역사요, “생명”은 거듭난 생명과 영생을 뜻하고, “경건에 속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 생활하는 방법과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신 과정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았다” 하셨으니, 은혜를 주신 동기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덕이요, 은혜가 유효하게 전달되는 방법은 부르신 하나님을 알도록 심령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으로 진리의 말씀을 영접할 때 부르신 하나님을 알고, 믿게되는 것입니다.

3)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니(4), 이 약속은 “신령한 구원의 복”이며, 이 약속을 받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살게되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구원의 복을 받은 성도는 썩어질 육체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갈5:17-21,24), 신의 성품인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의와 선과 거룩을 닮아 살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3. 성도의 덕행에 관한 말씀입니다(5-9).

이 덕행은 곧 신의 성품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1) 5-7절에서 성도의 덕행 여덟 가지를 말씀하셨으니,

①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결합입니다. 이 믿음의 본질은 같으나 각종 은사에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귀한 믿음(마8:10), 큰 믿음(마15:28), 온전한 믿음(히10:22) 등이 있고, 분량의 차이도 있습니다(롬1:17,12:3,엡4:13). 따라서 성숙한 믿음의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② 덕입니다. 덕이란 이웃에게 선을 행하여 유익을 주고, 칭찬 받도록 사는 것이요,

③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호4:6,6:6), 이 지식은 성경과 신앙의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요5:39,10:38). 믿음과 지식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④ 절제입니다. 절제는 분수에 알맞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분수에 알맞도록 처신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말과 행동과 생활이 다 그러합니다(고전6:12).

⑤ 인내입니다. 인내는 사랑의 열매이며(고전13:4), 덕을 세우고 소망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⑥ 경건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성경대로 사는 생활입니다.

⑦ 형제 우애입니다. 속담처럼 통하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사는 생활이요,

⑧ 사랑입니다. 사랑은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신앙의 필수 결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고전13:4-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 이상의 여덟 가지 덕행이 흡족할 때 “주 예수님을 알기에 게을러지지 않고 영광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셨습니다(8).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신앙의 시작이요, “영광의 열매”는 신앙의 결과인데, 이 두 가지 성취는 믿음과 말씀과 덕행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만 있고 말씀은 없거나, 말씀만 있고 덕행이 없거나, 덕행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구원과 영광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말씀, 덕행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깨닫지 못하며 원시치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죄사함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4. 피선택적 확신에 대하여(10-11).

1) 피선택적 확신이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매 거듭남의 은혜와 복음의 말씀으로 자신을 부르셨고, 하나님의 선택에는 후회가 없으시므로(롬11:29) 확실한 구원의 대상이요, 천국의 시민이란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선택자에게는 궁극적 구원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사41:8-10).

2) 선택의 확신을 갖고 믿음 생활을 할 때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으니, 확신과 결속은 상당한 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선택적 확신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11절,고후1:10,빌1:6).

이 말씀에서 강조하신 교훈은,

① 하나님을 아는 은혜와,

②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③ 거듭남의 확신이 환난 중에서 믿음을 견지시키는 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보충 1. 신의 성품과 하나님의 형상 (벧후 1:3-9) 목록으로


본문 4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1. “신의 성품”이란 어떤 것일까요 ?

1) 신의 성품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사55:8에 “하나님의 생각”이란 말씀이 있고, 시40:5에는 “주의 마음”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고 하셨습니다(사55:9). 창조자와 피조물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2) “신의 성품”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정신적 요소요, 또 정신적 요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입니다.

① 거룩은 순결한 것으로, 인간은 다 순결치 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롬3:23)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점도 흠도 없으시며(벧전1:18),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5:21).

② 의의 성품은 올바른 삶의 표준입니다. 하나님께만 올바른 생활 원리의 표준이 있습니다. 이 의로써 죄를 물리치시기도 또 십자가의 의로써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롬1:17).

③ 선한 성품입니다. 선한 성품은 곧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거룩과 의와 사랑을 구별하여 말씀드린다면, 거룩은 순결이요, 의는 생활의 표준적 규범이며, 선은 사랑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성품을 조화롭게 나타내어 합리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1) 원문상의 해석으로는 “하나님 본성의 한 몫이 되게 하려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거룩과 의와 선입니다.

2) 따라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인 거룩과 의와 선을 닮는 것입니다(롬8:29).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은 성화(聖化)를 뜻하는 것입니다(벧후1:16).

3.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

1)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신기한 능력을 힘입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1:3에 있습니다.

2) 부르신 자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곧 성경 지식입니다. 신기한 능력을 의지하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힘입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 공부로 성취하기 때문에 딤전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하셨습니다.

3)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야 합니다(4). 이 말씀이 곧 세속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요일2:15).

4)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 등 여덟 가지 덕을 시행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곧 성경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여기까지 잘하면 성자(聖者)란 칭호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다음 마지막으로 육체의 장막(벧후1:13,고후5:1)을 벗으므로 신의 성품을 닮는 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욥19:26,마5:8). 그 이유는 성도가 육체의 장막을 벗으므로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에 응하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벧후 1:10-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셨고,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않으며....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은혜 베푸실 대상을 미리 선택하셨습니다.

1) 엡1:11에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 하셨고, 시33:1에서는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시므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중보자 예수님의 사역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계획과 목적으로 예정을 하신 분이고, 그 예정 속에서 구원의 대상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2) 또 신4:37에서는 “하나님이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을 택하셨다”(7:6-8,호13:5) 하셨고, 신18:5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셔서 섬기게 하셨다” 하셨으며, 엡1:4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 요절 중 첫째는,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뜻이고, 둘째는 직분자를 선택하셨다는 뜻이며, 셋째는 구원받을 개인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 본문에서 말씀한 선택은 개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택의 시기와 방법이 어떠하셨습니까 ?

1) 선택의 시기는 “만물 창조 이전이라” 하셨고(엡1:4),

2) 선택의 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의지로 선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주권은 선택의 권세를 의미하고(롬9:13,16,21), 자유 의지란 타의 간섭을 받지 않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마20:14,15).

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대상을 선택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다” 하셨으니(엡1:4), 이는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과 함께 구속 사역에 대한 중보자 되실 것을 합의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

1) 선택이 있으므로 인류 전체적인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행13:48,살후3:2),

2) 선택된 백성이 버림당한 백성보다 적다는 사실입니다(마7:13,22:14,눅13:24).

3) 이 “적다”는 뜻은 상당히 적다는 예측을 하게 하십니다. 인류 창조 이후 노아 홍수까지 약 1,000년 역사이며, 당시의 인류는 830여세의 장수를 하였은즉 인구 수가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만 구원받게된 상황이었으며, 출애굽 당시에도 하나님이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은 상태에서(고전10:5) 여호수아와 갈렙 등 적은 수를 구원하셨고, 또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셨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계22:11).

4) 이렇게 적은 수에 선택되도록 택하여 주신 은혜와 구원의 복은 받은 자 입장에서 볼 때 큰 행운이요 큰 은혜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이 선택의 은혜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

본문에서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근거에 의하여 확신할 것입니까 ?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경을 진리로 믿는 마음과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는 마음의 경향을 자신이 감지하므로 확신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과 신앙은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것이며, 믿음은 마음가짐의 변화입니다(약1:21).

2)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을 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례 의식은 거듭나서 생활을 하는 것을 인치는 의식이므로 확신의 도움을 줍니다(히10:22).

3) 자신의 삶의 방법이 진리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자신은 택한 백성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실 때 “굳게 한다”는 ‘포이에이스다이’(ποιείσθαι)가 중간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확신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거듭남으로 시작되지만 믿음의 확신과 성장을 위한 일에 노력이 제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5. 성도가 택하심을 입은 사실을 굳게 믿으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

1)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11). 선택 교리를 믿는 신앙은 피를 받은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처럼 진실하고 힘이 있기 때문에 역경 중에서도 선민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요15:16) 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은 것과 같아서 든든하고 안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궁극적 구원을 보장하시는 것입니다(롬11:29,벧후1:11).

3) 선택받은 것을 확신하고, 구원의 보장받은 것을 굳게 할 때 용기와 희망이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굳게 하는 신앙으로, 확실하고 굳센 생활을 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2 과 말씀과 신앙에 관한 권면 (벧후 1:12-21) 목록으로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항상 말씀으로 일깨우는 생활”과(12-15),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영광에 관한 말씀”과(16-18), “예언의 말씀을 바로 취급할 일”(19-21)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중요한 교훈은 “말씀과 신앙에 관한 권면”입니다.

1. 항상 말씀으로 일깨워 살 것(12-15).

1)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생존한 동안에 성도를 일깨워 줌이 옳은 줄로 알았다”(13) 하셨으니, 이것은 사도의 목양적 사명과 진리 증언의 사명을 다하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이란 말씀은, 육체를 장막에 비유하셨고, 장막 같은 육체 생활이 속히 끝날 것을 예측하셨습니다. 또 1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장막 벗을 날이 임박한 사실에 대하여 주님의 지시를 받았다” 하셨는데, 이 사실은 요21:19에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킴이라” 하신 말씀에서 베드로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진리를 밝히고(빌2:16), 진리를 다 증언하며(행5:20), 성도의 신앙을 일깨워 줄 사명(13)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12), 생각하게 하는 일(13)을 권장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이것을 알았다”는 것은 앞에 있는 10-11절의 말씀인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 실족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진리를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미 진리에 섰다”는 것은 문자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믿고 있음을 뜻하며, “항상 너희로 생각나게 하려 하신 것”은 베드로가 세상 떠난 후라도 신앙적 교훈이 필요할 때는 기록으로 보낸 말씀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15절의 말씀은 편지를 보내신 목적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목적은 “성경을 살피므로 믿음에 경성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진리에 굳게 서고 항상 진리를 묵상하는 생활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영광에 관한 말씀(16-18).

1) 1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성도들에게 알게 하셨음”에 대하여, “능력”은 부활하신 사실이고, “강림”은 재림에 관한 교훈(3:10)입니다. 이 교훈은 베드로가 공교히 만든 이야기(불확실한 것을 조작한 말)가 아니요 실제로 본 사실이기 때문에 그대로 증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4:20).

2)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강림을 증언하면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예표적인 계시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이 바로 변화의 계시(마17:5,막9:7,눅9:35)를 증언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의 계시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과 먼저 간 성도들과의 만남과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로 가장 존귀하신 분이며, 성도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므로(마17:5) 하나님의 뜻을 따름이 되는 것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 계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도들에게 일시에 보여 주셨고, 거룩한 산에서(18) 환상적 계시로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변화산(변화산의 사건을 나타내신 뜻)을 “거룩하다” 하신 것은 거룩한 도성에 포함되기 때문이며(시2:6), 거룩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예수님)의 접촉으로 분별되는 것입니다(출3:5,19:23).

3. 예언의 말씀을 바로 취급할 일에 대하여(19-21).

1)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절의 “경의 모든 예언”이라 하신 것도 역시 성경을 뜻합니다. “예언”이란 말이 명사로 쓰여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동사로 쓰여질 때는(고전14:31,32) 설교 또는 증언을 뜻합니다.

2) 19절의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하심은 구약 성경이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의 확실함은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더 확실함의 비교 대상은 16-18절에서 소개한 변화산의 체험 사건을 의미합니다. 체험으로 보고, 들은 것은 문자로 기록된 계시만큼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3) 더 확실한 성경 말씀(구약)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음”은 죄악 세상을 밝게 하여 주시는 진리란 뜻입니다. 복음은 어두운 세계를 비추는 정의의 빛이요, 속죄의 유일한 방편입니다. 이 말씀을 연구하는 성도들은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성경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으시므로 예언의 말씀이 다 성취되기까지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날이 샌다” 함은 내세 천국 실현의 아침이 온다는 뜻이고, “샛별이 떠오름”은 “빛을 가져오는 자”란 의미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이 사사롭게 풀리지 않음”(20)은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아니면 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20-21).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믿음과 지혜의 은사로 말씀을 해석할 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1:7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란 말씀이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은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충분한 기도와 연구로 성경 전체의 사상에 모순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하며, 바른 해석의 표준은 성경 전체의 사상에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 단어의 뜻을 이해할 때도 그 단어가 설명하는 대상이 다를 수 있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이란 용어도 영적 구원(요3:16) 또는 육적 구원(행27:44)에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제 3 과 하나님의 심판 (벧후 2:1-1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한 이유는 전체의 내용이 거의 다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은 “거짓 선지자의 출현과 그들의 멸망”에 관한 말씀이고, 4-10절은 “심판 받을 자들과 그들의 범죄”에 대한 말씀이요, 11절은 “심판에 대하여 월권하지 않는 천사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1.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멸망(1-3).

1) 거짓 선지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공백 없이 출현한다고 하셨습니다(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 하셨으니, 이는 과거 시대에도 있었다는 뜻이요, 또 그 증거들은 민25:1-4,신13:1-3과 대하18:10-24에서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베드로 시대에도 있었고(마7:15), 말세에도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24:4,11,계16:13,20:10). 현 시대에 가짜가 많이 나타나는 것처럼 진리와 신앙에 대한 교훈도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므로(1)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것입니다(2). “자기들을 사신 주”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를 구속하신 분으로 알았었다”는 뜻인데,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을 받아 이 사실을 다시 부인한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도”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곧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것으로 멸망케 할 이단의 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1절 하반과 2,3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그릇된 행위들을 지적하셨으니,

① 이단 사상을 가만히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자들이 진리와 신앙을 감독하는 사역자들의 시선을 피하여 행동함을 뜻하고,

② 호색을 좇고, 탐심을 가지며,

③ 거짓말(지은 말)로 성도를 해롭게 하고, 이로써 자기의 이익을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감사 헌금을 전제로 병기도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질병이나 환난에 처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감사는 은혜를 깨닫는 성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하도록 지도함이 합당할 것입니다. 진리 부정, 호색, 탐심, 거짓, 이기주의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색입니다.

4)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이며,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요(1), 그들이 받을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않고 또 잠자지 않으며 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정이 조급한 상태에서 경고와 진행을 쉬지 않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 심판 받을 자들과 그들의 범죄에 대한 말씀입니다(4-10).

1)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4). 범죄한 천사가 어떻게 범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한 부분이라도 용서받는 긍휼이 없으며, 천사가 범죄함으로써 사단이 된 것은 “지옥과 어두운 구덩이”가 곧 사단의 심판받는 처소이기 때문입니다(계19:20,20:2,3,10).

2) “범죄한 천사들(사단)을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심”은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동안 사단의 일부 역사를 통제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실이 계20:1-3에 나타나 있습니다. 계20:2의 “천년간 결박하심”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기간(신약 시대)이고, “그 후에 잠시 놓이는 것”은 마지막 환난 때에 쓰시기 위함이며,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심”은 가두어 놓은 마귀에 대하여 천사가 파수한다는 의미요, 또 마지막에 최종 심판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신 분입니다(5). 그 실례로 노아 당시의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경건치 않은 자들로 심판을 받았으나 경건한 성도인 노아의 여덟 식구와 의로운 롯의 가족은 보존하시고 건져 주셨습니다(6-7).

“경건치 않음”이란 하나님을 불신, 불경하고, 인간적 오만성을 나타내며, 도덕적으로도 패괴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노아 당시의 심판은 홍수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불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후세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을 삼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후세인들에게 교훈을 주시고 또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6).

4) 노아는 패괴한 세계 속에서 의를 전파하였고(5), 롯은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7). 범죄 행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상하고 괴로웠던 것입니다(8). 자신이나 이웃들이 범죄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의인의 자세요 심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범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 그런 범죄들 때문에 탄식하며 가슴쳐야 할 것이요,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를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를 반드시 형벌 아래 두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9).

5) 경건치 않은 자들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심판의 경고를 받아도 여전히 범죄에 담대하고 고집하며 떨지 않고 영광의 하나님을 훼방한다고 하였습니다(10).

3. 심판에 대하여 월권하지 않는 천사들(11).

“사단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란 마귀와 악인들이 천사들에게 직접 대항하는 일이 있어도 이것을 주님 앞에서 직접 보복하거나 징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유9). 이 말씀은 사단보다 능력있는 천사라도(계12:9) 예수님의 심판권을 추호도 넘겨다 보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처분에 맡기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그만큼 믿을만 하고 위엄 있는 권세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경건치 않은 자는 천사와 인간을 막론하고 심판하시며, 경건한 의인은 멸망의 환경 속에서도 빠짐없이 구원해 주심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3. 심판과 구원 (벧후 2:4-11) 목록으로


본문에는 노아 당시의 홍수 심판과 노아의 여덟 식구에 대한 구원,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 소돔과 고모라 도성에 대한 불 심판과 롯의 네 가족을 구원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제목을 “심판과 구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 천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은 사실과 노아 당시의 죄악상과 또 소돔 성의 죄악 세계에서 롯이 경건을 지키기 위하여 애쓴 사실, 그리고 11절에서는 “능력 있는 천사라도 자기를 거스리고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악한 마귀들에 대하여 보복하는 송사를 하나님께 제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겼다”는 사실과,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처리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깨달으셔야 할 교훈은,

1.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으셔야 합니다(롬14:10,요9:39,창18:25).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성도는 범죄를 가장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두려워 할 일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라”(롬6:23),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시7:12),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눅12:59),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고 주께서 그 백성을 심판하시리니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0-31)....이런 말씀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렵게 생각하고 떠는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천사들의 죄는 용서치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시며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천사에 대하여는 구원의 계획도 없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 구속의 제물이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한 분뿐이신 구속자를 인간을 위해 주셨으므로 천사에게 줄 대속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도 인간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하여는 그의 천사까지라도 속죄하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속죄의 은혜를 주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옛 세상도 용서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옛 세상을 용서치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긍휼과 인내가 부족하여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고 오래 참으시며 다 회개하기를 원하셨으나(벧후3:9) 죄인들이 끝내 회개치 않으므로 심판을 행한 것입니다.

1) 노아 당시 사람들의 경건치 않은 죄를 120년이나 기다려 주셨고(창6:3),

2) 또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은 경건치 않은 죄와 무법자처럼 행한 것과 음란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이 멸망시킬 것을 작정하시고 처치하여 그 후시대인들에게 심판의 본을 삼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 “후세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고 하셨으니 후시대에 사는 저희들은 과거의 심판을 더욱 거울 삼아서 모든 불경건이나 죄를 더욱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죄에 담대하며 떨지 않고 고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을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4. 심판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심판자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침해할 수 없습니다. “너 벌받아야 한다” 하든지, “그 사람 벌 받아서 그렇다” 하든지, “내가 판단하는 것만 바르다” 하든지, “하나님의 판단, 교회의 징계가 공평치 않다” 하든지 하는 생각이나 태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교훈으로서 본문 11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이 사단의 역사와 합작하여 능력 있는 천사들을 훼방하였지만 그 능력 있는 천사들도 하나님께 송사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저 악령들이 나를 괴롭히는데 저 놈들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대로 하시도록 의지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심판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억울한 일이나 희생을 당하였어도 평안한 마음과 감사와 희망을 갖게될 것이요 또 그같은 신앙에 따라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무법과 음란과 폭행이 많은 소돔 성에 사는 롯이 그들의 불경건 때문에 날마다 그 마음을 상하였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그 죄악 세계에서도 자신이 정결을 지키며 죄를 인하여 탄식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사명을 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보존해 주셨고, 7절에서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면서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죄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②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③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인간에게만 주신 것을 감사하셔야 하겠습니다.

④ 하나님의 심판권을 추호도 침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⑤ 우리는 노아와 같이 또 롯과 같이 죄악 세계에서 경건을 지키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4. 홍수를 내리심 (벧후 2: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세상에 물로 벌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노아 당시에 하나님이 홍수 심판을 예고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창8:21), 이 말씀은 “물로 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출15:5,시144:7).

1. 근대에 우리나라의 홍수 피해 상황을 살피면, 1925년에 한강 수위 12m 26Cm를 기록하였고, 1972년에도 홍수가 나서 411명 사망에 420억의 피해를 보았으며, 1984년에는 105명 사망에 910억의 피해를 보았고, 1990년에도 또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런 재해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느끼게 되는 것이 있으니,

1) 인간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란 것입니다.

2) 인간이 자연의 위력을 체험하면서도 자연의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퍽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3) 우리나라에 대홍수가 있은 후 47년만에 또 있었는데, 그 다음에는 12년만에 있었고, 또 그 다음에는 12년의 절반인 6년만에 있었으니, 6년을 반으로 줄이면 3년이고, 또 ⅓로 줄이면 2년인데, 하나님이 이같은 방법으로 홍수를 계속 주신다면 2,3년 내에 또 그런 홍수가 없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 얼마나 두렵고 초조한 일이겠습니까 ?

4) 분명히 홍수를 내리신 1925년이나 72년이나 84년 그리고 90년도에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만한 문제가 세상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에도 경건치 않은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시는 성경을 살펴 보면,

1) 창7:12에서 노아 홍수 때에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늘의 창을 여시고 40주 40야를 계획적으로 비를 내리셔서 1년 10일 동안 마른 땅을 밟지 못하게 하신 사실이 있었지요. 창세기 7장과 8장을 보시면 노아 때에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신 역사가 나오는데, 저희들은 지금까지 그 말씀을 성경이니까 사실로 믿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이틀동안 계속 온 큰 비가 큰 범람을 가져온 것을 보니까 40일 큰 비가 온다면 산까지 물이 찰 것이라는 짐작이 가고도 남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성경을 더 잘 믿으셔야 하고, 하나님이 물과 불로도 심판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시104:3을 보시면, “하나님은 구름 수레를 타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과 화염을 자기의 사자(使者)로 삼으신다”고 하셨고,

3) 왕상17:14에서 “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시는데.....(사30:23), 그 비를 복으로 주실 때는 적당하게 주시고(레26:4), 때를 따라 주시며(신28:12), 흡족하게 주시고(시68:9), 이른비 늦은비도 주시며(레5:24), 복된 장마비로도 주신다(렘34:26)고 하셨습니다.

4) 그런데 또 하나님이 그 비를 화되게 주실 때는 홍수로도 주시고(창7:12), 비를 얼려 우박으로도 주시며(시105:32), 비대신 티끌과 모래로도 주시고(신28:24), 물없는 구름 즉, 가뭄으로도(렘12:4)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따라서 모든 수재의 피해는 구름 수레를 타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홍수 때에 좌정하시는 하나님이(시29:10) 우리나라를 징계하신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지도자도 나서서 “민족의 죄로 하나님이 징계하셨다” 하고 회개를 촉구한 일이 있었습니까 ? 그저 자연의 위력으로만 알 따름이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죄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을까요 ? 옛날 노아 홍수 때에 백성들이 범한 죄는,

1) 음행의 죄와(창6:2),

2) 생각과 계획이 항상 패역한 죄와(창6:5),

3) 피리 불고 춤추는 향락죄와(창4:21),

4) 폭력이 난무하는 죄였습니다(창4:22).

그런데 홍수 심판을 받은 다음에 노아의 후손들이 또 바벨탑을 쌓으면서 큰 도성을 만들고 인간을 과시하려 하며,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그 때는 구언(口言)이 달라져서 흩어지는 징계를 받았지요. 그 후 약 300년 후에 또 노아 때와 비슷한 죄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심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음행, 연락, 불신, 패괴, 폭력, 물질주의 등 사회적 죄악, 종교적 죄악 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 국회의원들의 여야(與野) 합의나 화목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 이런 일에 앞서야 할 종교 단체는 잘합니까 ? 대부분 이권에 얽매어 사랑 실천을 못하지 않습니까 ?

우리나라가 과거보다 윤택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다 사람의 노력의 결과이겠습니까 ?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까 ? 88올림픽 이후 서울 자랑, 인구 자랑, 자동차 자랑, 빌딩과 경기장 자랑을 하였고, 이북 총리가 왔을 때도 풍년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값비싼 강남 땅을 홍수로 치신 것입니다. 사3:1에 보시면, “하나님이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물과 용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모사와 공교한 장인들을 그리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의지하지는 않고 “물샘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용사, 선지자, 모사가 우리에게 있으니까....” 하다가 결국 빼앗김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의 인간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낭비, 모든 거짓과 폭력과 퇴폐한 죄악을 회개케 하시려고 홍수를 주셨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러면 결론적으로 누가 회개해야 합니까(욜1:2-4,2:15-17)?

홍수 피해본 사람들이 해야 합니까 ? 그들은 연대적인 죄책으로 먼저 매를 맞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편히 잠잘 수 있습니다. 매를 안 맞은 사람들이 회개를 해야지요. 바로 우리들이요.....

눅13:48을 보시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그 망대가 왜 무너졌을까요 ? 비가 많이 왔으니까 무너졌겠지요. 그 일로 18명이 압사했어요.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저들이 무슨 죄가 더 많아서 죽었습니까 ?” 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저들이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죄가 있어서 죽은줄 아느냐 ?”라고 하셨습니다(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죽었을까요 ? 죄에 대한 연대적인 책임 때문에 그들이 먼저 매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 하시므로, 단체적인 징계는 단체적으로 회개해야 할 것을 강조해 주셨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마실 것과, 모든 죄악에 대한 회개를 힘쓰실 것과, 재앙을 볼 때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4 과 유혹하는 자들의 형편 (벧후 2:12-2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앞 부분(2:1-11)의 말씀과 연계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심판 받을 대상이, 거짓 선지자들과 그 유혹에 넘어간 자들임을 계속 말씀하신 것이고, 다음에는 12절의 “그러나”란 접속사가 앞 절의 “천사들이 악한 대적자를 송사하지 않아도 그들은 심판받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들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에는 “유혹하는 자들의 형편”을 말씀하셨으니, 거짓 선지자로 유혹하는 자들의 형편은,

1.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하셨습니다(12). 짐승은 이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성 즉, 잡아 먹고, 잡혀 먹히고, 새끼를 관리하는 것 이상은 없으니까 깊고 오묘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유혹자들도 진리와 하나님의 뜻과 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데는 짐승처럼 어둡고, 짐승이 자기의 본능 충족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처럼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10) 그것이 죄인줄도 모르고 거리낌도 없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누”라는 짐승은 소같이 큰 짐승이지만 자기는 풀을 뜯어 먹고 사자에게 잡혀 먹히지 않습니까 ?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악한 자들은 성도나 천사가 심판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희 멸망 가운데 멸망당한다”는 말씀이 역시 계획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영적 사리에 대한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성경을 바로 해석하면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렇다(눅23:34)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을 훼방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유혹자들이 진리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의한 일을 행한 값으로 자신도 정당한 길에 들어서지 못함을 뜻합니다. 한 번 불의를 행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더 깊은 불의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4. 또 거짓 선지자들은 연락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놀기를 좋아하고, 낮에도 일하지 않고 방탕하며, 비중 없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란 유혹의 대상인 성도들과 함께 유혹자들이 연회를 하는 것입니다. 유혹자들은 연회와 향락을 유혹의 기회로 삼으므로 그런 연락 초청에 응하지 않음이 상책입니다. “저희의 간사한 가운데 연락함”은 유혹을 위한 거짓과 작태로서,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갖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으며, 믿음이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들은 탐욕이 연단된 자들로서 점과 흠(정품을 못쓰게 하는 결정적 과오)이 아닐 수 없으며, 저주의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믿음과 표준적 지식의 확신을 갖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14).

5. 거짓 선지자들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15-16). 발람은 구약 시대 즉, 출애굽 말기 당시에 나타난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욕되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민22:-25:9).

1) 15-16절은 구약에 나타난 발람의 역사를 다시 언급하여 이단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저희)은 모세가 지도하는 바른 길을 떠나 발람의 꾀임에 미혹되었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라는 자가 왕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축복 받은 백성을 저주하려한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이요(민22:5-20), 이때에 그의 불법한 행실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나귀로 말하게 하여 그의 미친 것을 금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16,민22:25-30). 곧 뇌물에 이끌려 정치에 유착되는 것은 선지자의 미친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2) 그들은 또 허탄한 자랑을 하며 현실적으로 미혹하였지만 그 미혹을 겨우 피하여 믿음으로 돌아온 성도들을 다시 육체의 정욕으로 유혹하여 음행에 빠지도록 한 것입니다(18). 이 사실은 발람 때에도 있었습니다. 발람이 이방적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추는 여인들을 보고 음욕을 참지 못하여 범죄한 사실이 그것입니다(민25:1-3). 음행성 있는 유혹은 반드시 피하여야 합니다(고전6:18).

3) 18절에서 거짓 스승들이 “자유를 준다”고 유혹한 것은 복음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진리를 역이용 하여 “율법을 범하고 음행을 하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용서(자유)를 전제로 범죄를 부추기는 행동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사함 받았으니까 성도는 죄없는 의인이요, 실제로 범죄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사단의 역사일 뿐이라”는 그릇된 주장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전제한 범죄는 자유보다 범죄가 앞서는 것이므로 결국 마귀의 유혹에 패배한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9).

4) 유혹자와 유혹 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

① 17절에서 발람의 길을 가는 자들(유혹자들)은, 물없는 샘과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며 “오직 캄캄하고 어두운 지옥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을 뿐이라” 하셨고,

②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여 살다가라도 다시 현실에 유혹되고 거짓 교리에 이끌리면 그 나중 형편이 더 나빠지는 것이요(20), 결국 의의 도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린 죄를 가중시키는 것인즉, 차라리 진리를 몰랐었던 것만 못한 것입니다(21). 이 사실은 마치 속담에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은 몸으로 다시 구렁에 눕는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22). 가룟 유다가 그러하였습니다(막14:21).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거든 하물며 진리를 따르다가 타락하는 일이겠습니까 ? 이 경우에 타락하는 신자는 그 본래의 믿음에 확고하지 못한 미비한 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자기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고후13:5,벧후1:10).


설교보충 5. 거짓 선지자 발람 (벧후 2:1-3, 15-16) 목록으로


1.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무렵에 모압족이 살고 있는 ‘메소보다미아’ 지역에서 선지자의 일을 한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참 선지자도 되고 거짓 선지자도 되는 것입니다.

1) 발람 선지자는 신앙적 정통성의 근거가 없습니다. 민22:5에서 발람은 메소보다미아 강변 브돌에 사는 “브올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그의 신앙적, 선지자적 근거를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사역자든지 하나님과 직결되거나 또는 건전한 교파에 예속되고 또 그 교파의 사역과 직결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발람 선지자의 평가에 대하여, 모세는 “거역하고 패역하였다”(민22:29-32) 하셨고, 베드로는 본문 12절에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한 자요, 저주의 자식이요, 불법한 자요, 미친 행위라” 하였으며, 유다는 “어그러진 길을 간 자”라 하였고(유11), 사도 요한은 “백성들에게 올무를 놓아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를 범하게 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3) 이 발람과 발람의 유혹에 빠진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

① 유혹에 빠져 음행을 하고 현장에서 잡힌 자들은 배를 꿰뚫어 죽였고(민25:8),

② 우상 숭배와 음행에 유혹된 백성들은 염병(染病)이 들어 24,000명이 죽었으며,

③ 맨 마지막에 발람은 미디안과의 전쟁 중에서 죽임을 당하므로(민31:8) 하나님께서는 유혹된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유혹자에 이르기까지 강한 응징을 하셨던 것입니다.

2. 본문에 나타난 발람의 거짓 선지자적 행위가 무엇입니까 ?

1) 뇌물(물질과 명예)에 이끌려 정치가와 타협을 한 것입니다(민22:7). 본문 15절에 보시면,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셨는데, 이 불의의 삯이란 뇌물을 뜻하는 것이고, 그 뇌물은 좋은 보화와 나라의 존귀였습니다. 모압 왕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면 상급과 나라의 존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임의로 저주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민22:12). 이 때에 발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다른 방법으로 저주받게 하려는 시도를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막지 않으셨고(민22:13,20), 따라서 발람은 하나님의 본 뜻을 어기고, 계속 뇌물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2) 사술(邪術) 행위를 행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생활에서 사술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24:1에 보시면, 발람이 1차, 2차에 따라가서 사술의 방법으로라도 목적을(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 성취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성령님의 역사로 제지당하였습니다. 어떤 사이비 교역자는 교인들을 감동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랑이나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가 하면, 공갈을 쳐서 회개심을 자아 내고, 감언이설로 헌금을 하게 하고, 심지어는 손전등으로 불을 켜고 성령의 불이라고 외친 일도 있다 하니, 이것은 사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최면술, 기합술, 강신술 등을 쓰면서 성령의 역사라고 위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한 일이나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사술이나 속임수가 아닌지를 더 예민하게 관찰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지조 없이 이방 풍속을 용납하거나 모방하는 것입니다. 발람의 모압 왕을 따라가서 “산당에 제사를 드릴 때 자기는 그 뒤에서 계시를 받겠다”(민23:1-4)고 하였는데, 이때에 그들이 쌓은 제단은 모세의 율법적 제사가 아니고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적 제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곱 제단에 일곱 수 송아지를 번제로 드리고 많은 여인들을 동원하여 나체 춤을 추게한 것입니다(민25:1-2). 하나님의 선지자나 성도가 이런 것을 용납할 수 있겠으며, 그 곳에 가까이 갈 수가 있겠습니까(고후6:14-18)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그것을 용납할 뿐 아니라 이방 왕에게 종용하였고(민23:1), 또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기를 기다렸으니 참으로 혼잡한 선지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사역자는 이방 색채를 띠지 않음은 물론 허위 과장을 피하여야 합니다.

4) 음행성 있는 일에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발람이 이방적 제사를 드린 것은 이방 풍속이며, 그 제사 풍속 속에 음란 행위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성 있는 범행을 하나님의 백성들 면전에서 서슴지 않고 행하므로 백성들을 범죄하게 만든 것입니다. 선지자가 범죄의 덫을 백성들 앞에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속의 문화 중에 범죄의 덫이 얼마나 많습니까 ?

5) 강퍅하여 잘 돌이키지 않는 것이 또 그 특징인 것입니다. 민22:28-에 보시면, 발람의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나귀의 입으로 권면을 하셨고, 또 천사가 칼을 들고 그 길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돌이키지 않을 만큼 강퍅하고 교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진리 아닌 행동으로 거역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의 증언에 틀린 것이 없는데 왜 틀리다고 하느냐 ?”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단자의 이단성은 백 마디 중 한 마디로 숨겨지는 예가 많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행동한 것이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는 의도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역한 것입니다. 저주하는 말을 하려 하였지만 성령님이 막으셔서 못하였고(신23:5,느13:2), 증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시는 말씀대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으므로 주를 격노케 하였고(시106:28), 또 바알 우상에게 몸을 드려 가증하게도 하였으며(호9:10), 백성들에게 올무를 놓아 우상 숭배와 음행을 하게 하였는데계2:15), 증거는 하나님이 감동하신 내용대로 나타내므로, 미친 선지자의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2:15). 증언은 바로 했으나 행동은 반대로 나타내는 것이 곧 미친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증언자의 말만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의 일치를 대조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고전4:19). 흔히 잘못 가르치는 자에게 은혜를 많이 받고, 나중에 잘못된 교훈을 깨닫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그 반대로 사랑스러운 태도에 유혹되어 이끌린 후 이단적 신앙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교보충 6. 발람의 길을 경계할 것 (벧후 2:15-19) 목록으로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을 전달 받을 성도들이 “발람의 길을 좇아서는 안될 것”을 교훈하실 목적으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발람의 길”이란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이방인 거짓 선지자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발람 선지자에 관한 역사적 기사는 민22:-25:에 기록되었고, 그의 잘못된 일들에 대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베드로 사도는 15절 말씀에서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 세계에 “발람의 길을 좇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발람의 길”이란 다음에 설명 드리겠지만, “잘못된 신앙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건전치 않은 것”이면 절대 삼가야 할 것입니다.

2) 본문에서 발람은 ‘브올’의 아들로서,

① 불의의 삯(적당치 않은 수입)을 사랑하였고,

② 불법을 행하였으며,

③ 미친 선지자로 규정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엉뚱한 일, 안해야 할 일을 을 행하면 “너 미쳤냐 ?”고 합니다. 발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 발람이 미친 자의 행동처럼 나타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여 말 못하는 짐승인 나귀의 입으로 말소리를 내게 하여 발람의 가는 길을 막은 일이 있었습니다.

4) 거짓 선지자가 어떤 능한 것으로 사람을 미혹한다 하여도 그는 성도들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풀 수 없는 물 없는 샘 같은 존재요, 가뭄에도 비를 줄 수 없는 “광풍에 밀리는 안개” 같을 뿐이요, 또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두움 같은 심판이 예비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5) 그리고 18절에서는 베드로 사도 당시의 거짓 선지자의 동태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그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자랑, 현세적 자랑, 십자가 아닌 자랑은 다 허탄한 것입니다. 특히 거짓 선지자는 자기 자랑을 많이 하여 인기를 차지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② “음란으로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고 하였습니다. 발람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행하도록 올무를 놓아 유혹하였습니다. 음행은 피하여야 하고(고전6:18),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에(마5:28) 유혹성 있는 남녀의 접근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 성경적인 생활입니다. 따라서 오해받을 만한 이성 교제를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③ 거짓 선지자는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고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의미하며, 이 자유는 복음의 은혜로만 성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들이 “자유를 준다”는 뜻은 음행죄를 고무하면서 “복음으로 자유로워지니까 괜찮다”는 식으로 유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무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복음이 죄를 해결하니까 일시 죄를 져도 괜찮다” 하면서 범죄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④ 그래서 겨우 이방인이 전도를 받고 이방적 생활과 불신앙을 피하여 신앙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을 또 그런 방법으로 유혹하여 어그러진 길로 가게 만드니 멸망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유혹한 자나 유혹당한 자가 다 마귀의 유혹에 패하였으므로 사단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⑤ TV 방송에서 ‘주부 탐사반’이 뗏목을 타고 태백산의 물 근원에서부터 낙동강 700리를 내려 갔습니다. 태백산에서 처음 떠날 때는 강물 위에서 그 강물로 밥을 해 먹었는데, 점점 내려갈수록 그 물이 더러워지기 시작하더니 밀양 앞 낙동강에서는 발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그들이 낙동강 물 위에 떠 있지만 물은 딴 곳에서 갔다 써야 할 형편입니다. 기독교가 2,000년전 사도 시대에는 퍽 맑았지요. 2,0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진리는 변하지 않았으나 잘못된 증언과 잘못된 생활 때문에 역시 순수한 신앙 생활에 오염이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거짓 선지자도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마7:15,24:11,24,행24:5,딤후3:1-8,딤10,요일2:22).

2. 이런 때에 모든 성도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

1) 모든 것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바로 교육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교역자의 지도를 잘 받으므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유명한 신앙의 지도자들이 실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①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 기도에 00목사의 기도에서 “그도 천국가게 해 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천주교 교리로는 가능하지만 개신교 교리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② 또 중국에서 독립 운동한 분들의 유해(遺骸)를 이장하는 장례식 기도에서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모르나 어떤 이단파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안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교파의 교주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③ 어떤 기독교 신문에서 건전하지 못한 성직자의 좋은 점을 선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건전하지 못한 점을 감추고 좋은 점만 나타내었은즉 결국 그 사역자를 전부 긍정하게 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신학적 입장의 상이점을 확실히 나타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④ 방송 기자가 “사이비 종파에서 병자에게 안수하는 기적이 사실상 하나님의 능력이냐 ?”고 물었을 때 “기독교에 기적이 있다”는 말만 하고, 사도적 기적과 교회 시대의 기적에 대하여 구별하는 답변을 하지 않으므로 사이비한 안수 기도를 무조건 긍정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으로 1910년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죽였는데, 그 당시 천주교에서는 그의 살인이 반신앙적이고 반교회적이라 하여 사형 집행 직전에 시행하는 종유 의식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93.8.22 경향 신문에서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종교적 단죄를 풀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인들은 “정의를 위한 살인은 해도 좋다”는 인식을 갖게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드리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 태백산 강물에 떠 있는 사람이 아니고 밀양 앞 낙동강 물에 떠 있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래서 깨끗한 물을 다른 곳에서 가져다가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 깨끗한 물을 성경으로 받고, 초대 교회 생활에서 찾아서 그런 생활을 표준으로 하여야만 현실의 오염을 얼마간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문화와 시대의 흐름이 다 성경과 부합되는 줄 알고 무조건 따라가는 성도가 되지 마시고, 신앙이나 도덕적 생활 면에서 “성경에 위반이 없다”고 하는 것만 따라가는 저희들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사상과 생활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많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아무쪼록 분별을 잘 하시고, 깨끗하고 고상한 믿음 생활을 잘 하시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5 과 일깨워 생각하게 함 (벧후 3:1-9)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1절에서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일깨워 생각하게 할 내용으로 베드로 전후서를 주셨으며(1-2), 말세를 대비함에 대한 교훈으로 “말세에 나타날 일들”(3-7)과 “말세를 대비하는 자세”(8-9)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베드로 사도는 영감된 말씀을 주시므로 성도를 일깨우게 하셨습니다(1-2).

1)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둘째 편지는 베드로 후서(본서)요, “이 둘”이란 베드로 전후서이며, “신실한 마음”은 순결한 마음 즉,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는 깨끗한 마음입니다. “일깨워 생각하게 함”은 신앙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적인 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음이요, 허탄한 마음 없이 깨끗하고 신령한 마음을 보존함을 뜻합니다. 성도가 신령한 은혜에 잠기며, 하나님의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심이 곧 일깨워 생각함이 되는 것입니다.

2) 2절에서도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1절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일깨우는 방법이 곧 거룩한 선지자의 말씀(구약 성경)과 주님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신약 성경)을 살피고 깨달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 속에 기억되는 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경성하는 생활입니다.

2. 말세에 나타날 일들에 대하여(3-7).

1) “말세에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유혹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온다” 하셨으니, “기롱한다”는 뜻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농락하듯 유혹함을 뜻합니다. 현세적 향락을 좋아하는 성도들에게 유혹하는 상품이 얼마나 많습니까(계18:12-13) ? 의식주 문제, 관광, 이성 교제, 명예욕 등으로 유혹하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기롱하는 자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니, 이는 그리스도 사람의 반대 행위요(갈5:24), “자기 정욕을 좇아 행함”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구를 앞세우는 것입니다(3).

3) 또 기롱하는 자들은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무시한다고 하였습니다(4). 그들은 말하기를 조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만물은 창조 당시와 변함없이 그냥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만물이므로 미래에도 여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4).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까지 부인하려는 의도로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과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솟아 나와 성립된 사실을 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과 처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5).

4)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을 믿지 않고 패역하는 일(이로 말미암아;5) 때문에 물 심판으로 멸망당하였고(6),

5) 만물이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은 심판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하시는 것이며, 때가 되면 경건치 않은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실 때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7).

3. 말세를 대비하는 자세에 대하여(8-9).

1) 말세를 기다리는 자의 마음이 지루한 생각을 가지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8). 그 이유는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시간의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 하심은 천년도 하나님께는 지루한 시간이 아니며, 하루에도 천년간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말세를 기다릴 때 조급한 심정으로 기다리며 근면하고 경성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어떤 이는 주님의 재림의 때가 너무 더딘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그 기간을 회개치 않는 자를 위하여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9).

3)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회개하지 못한 자들이 다 회개하기까지 기다리시는 섭리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본 절에서 “너희를 대하여”란 뜻은 그 당시의 성도들 중에도 신앙적 문제에 대하여 바르게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성도가 조급한 심정으로 말세를 대비할 것과,

② 항상 경성하는 자세로 성경 말씀에 붙들려 있어야 할 것과,

③ 말세의 기간이 미루어질수록 회개하여야 할 죄상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 6 과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 (벧후 3:10-18) 목록으로


본문 10절과 12-13절은 “말세의 형편을 깨달음”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그 이외의 말씀들(11,14-18)은 다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로 정하였습니다.

1. 말세의 형편을 깨달음에 대하여(10,12-13).

1) 말세의 형편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하셨습니다(10). 여기의 “주의 날”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고, “도적같이 온다”는 뜻은 예측하지 못한 때에 말세가 임함을 의미합니다. “온다”는 내용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니요, 때가 이름에 관계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하게 오시지 않습니다(살전4:16). 예수님이 오실 때 예측하지 못한 사람들이 “밭에서 김을 매고, 집 안에서 매를 갈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마24:40,4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은 한 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항시 도적을 경계하시는 것처럼 마지막 때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2) 그 때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져서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10,12).

① 작은 물체가 떨어져도 소리가 나는데 하물며 하늘과 땅의 변화에 큰 소리가 없겠습니까 ?

② “하늘이 떠나간다”는 뜻은 우주 또는 천계에 변화가 생김을 뜻하고,

③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짐”은 땅 또는 별들의 모형과 위치에 변화가 생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만물이 없어지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12).

④ 이때에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은 선악간에 감취었던 일들이 다 드러남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드러난다”는 용어가 “불타리라”는 용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땅에 있는 모든 것들, 특히 악한 종류들이 다 불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는 물질적으로나 인격적(마음과 언행까지)으로 숨기지 못하는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때에 의에 거하는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으로, 사65:17,66:22에서도 예언하셨고, 사도 요한도 그 세계를 실제로 보고 계2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계는 거듭난 백성들이 들어갈 곳이요, 악인의 영들도 그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눅16:23).

2.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11,14-18).

말세를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하셨습니다(11).

1) 거룩한 생활과 경건함을 유지할 것(11).

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할 것(11).

3)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 쓸 것(14). “점도 없고 흠도 없음”은 순결(거룩함)을 뜻하고,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씀”은 평안한 세월, 좋은 환경에서 준비하다가 맞이하게 되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마24:20).

4) 재림이 더딘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심이요,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이 구원의 복이 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5). 이와 같은 교훈은 “바울 사도도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와 같은 취지의 교훈이 롬2:4,3:25,9:22에 기록되었습니다.

5) 성경을 실수없이 해석하고, 오류에 빠지지 말 것.

16절의 “그 모든 편지”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비롯한 모든 영감의 글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직감적으로 알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때에 신앙의 지식이 없거나 말씀 보존에 굳세지 못한 사람들이 다른 성경 말씀들과 함께 잘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서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6).

“억지로 푼다”는 뜻은 “교묘하게 푼다”는 뜻도 있습니다. 성경은 교묘하게 푸는 것보다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또 전체적 사리에 맞도록 풀어야 합니다. 이단자들이 멸망에 빠지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6) 무법한 자들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삼가야 할 것입니다(17).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하심은 보수적인 신앙을 늦춰지지 않게 하라는 뜻이요,

7)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믿음이 성장할 것입니다(18).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성경 지식을 공급받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8) 항상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어떤 사본에는 ‘아멘’이 있다고 합니다) 하심은 편지의 결론이자 축복이며 성도의 생활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 기원이므로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7. 어떤 사람이 될까 ? (벧후 3:8-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세상의 끝 날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지는 때에 성도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는가 ?”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 11절에 나타내신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하신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 본문에서 주신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지금도 “말세가 어느 때일까 ?” 하고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혹 저희들의 기다림이 지루하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에도 “때가 가깝다, 속히 오신다”(계1:3,2:16,22:20) 하셨는데 아직까지 안 오시니까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말세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인간들처럼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시간의 주도 되시기 때문에 하루를 천년처럼 늘려 쓰실 수도 있고, 천년을 하루처럼 단축하여 지루함이 없이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신데, 그 예수님이 말세의 시기를 더딘 것처럼 늦추시는 것은 “오직 성도를 대하사 오래 참으시고 다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아무도 멸망치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24:14에서 말씀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고, 따라서 선민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충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저희들 개인의 말세는 하나님이 저희 각 사람을 부르시는 순간인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 순간을 알지 못하지만 늘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가 많으니까 몇 년 안에 부르실 것이다” 또는 “사람의 생명에는 기약이 없으니까 언제 부르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맞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느니라”(요7:6)고 하셨습니다. 청도군 이서면 대곡 교회 박 장로님은 아주 경건한 분입니다. 사람들이 아는대로의 그 분의 경건성은 착하고 겸손합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에게라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만 신고, 예배당에서 기도하실 때는 꼭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시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 분이 자기의 돌아갈 때를 예측하셨습니다. 그래서 잘 안 다니던 친척에 다 찾아가서 인사하고, 동네 어른들을 모셔다가 대접하고, 물질 거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자기 무덤에 올라가는 길의 나무와 풀을 베어 길을 닦아 놓고, 목욕하고, 옷 입고, 자녀들을 불러 오게 한 다음 누워서 주무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온 동네가 그 장로님을 성자라고 칭송합니다. 저희들은 말세에 앞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까 ?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 하신 말씀은 누구에게나 기약 없이 종말이 찾아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되지 않으시면 “건강한 운동 선수가 병들었다”는 소식이나, “어떤 사람이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서 잘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

1) 이 세상이 떠나간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하시므로 보이는 현상 세계가 없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산 앞의 견고하게 지은 외인 아파트도 다이너마이트의 힘으로 없어지는 것을 보셨지요. 땅 속에 뜨거운 불이 있는 것도 아시지요. 이렇게 하늘이 떠나가고 땅이 녹아지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인간의 잘잘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끝 날에는 선악 간에 주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3. 이렇게 될 때에 성도는,

① 거룩한 행실,

② 경건함,

③ 하나님의 날(즉, 재림의 때)이 임할 것을 간절히 사모함,

④ 의에 거함,

⑤ 하나님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본다고 하셨으니, 이 다섯 가지를 둘로 나누면 “신분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과 “내세의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분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과 “내세 천국을 사모하는 일”이 중요한 것임을 다시금 인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이 두 가지 준비를 잘 실천하시려면,

1) 우선 이 시간부터 준비에 착수하셔야 합니다.

2) 그리고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있는 것이 하늘과 땅입니다. 인간은 베틀채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석양처럼 빨리 가며 또 안개같이 쓰러지고 경점같이 지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 있는 하늘과 땅도 세상 끝 날에는 “다 떠나가고 풀어진다”고 하셨으니 거기에 미련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 그래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므로 돌아볼 것이 못된다”고 바울 사도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고후4:18). 따라서 주님의 재림과 내세의 천국만큼은 빈틈 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3) 확고한 믿음을 갖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히3:14에 보시면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벧후1:10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 자인지 세속에 얽매인 자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실하게 믿는 성도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찾아 보기가 어렵고(시2:11),

② 착하고 충성된 종(마25:21), 바나바처럼 착한 사람(행11:24), 양같이 순한 사람도(마11:29) 많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떨면서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처럼 물질에 욕심 없이 재물을 양보하거나, 예수님처럼 섬기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행하는 사람(막10:45)도 역시 많지 않은 것입니다.

④ 계22:11에 보시면,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확고한 믿음, 뚜렷하게 나타나는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4) 특히 말세에는 시간이 촉박한 때이니 만큼 시간과 약속을 잘 지키고 세월을 아끼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삼하20:4-10에 보시면 의병을 모집하러간 아마샤가 정한 시간에 오지 않으므로 반역자의 의심을 받고 요압에게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에 시간이 곧 생명인 것처럼 말세를 사는 성도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름 준비 하러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문이 닫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마25:10) ? 시간과 기회를 선용하라는 교훈입니다.

아무쪼록 시급히 준비에 착수하시고, 세상의 미련의 버리며, 확고한 믿음을 점검하시고, 촉박하게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주의 날을 사모하라 (벧후 3:10-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의 날을 사모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2절과 13절에 보시면 “바라 보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사모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14절에서는 “힘쓰라”는 말씀이 있고, 17절에서는 “삼가라”, 18절에서는 “자라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간추리면, 바라 보고, 사모하며, 힘쓰고, 삼가고, 자라가야 할 일들이 저희들에게 주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제가 이 말씀을 드리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말세의 때를 임박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성도들의 신앙의 경성을 나태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크고 작은 사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또 사고 중에 큰 사고는 범죄 사고였습니다. 육신은 병들면 죽게 되어 있고, 인간이나 사회나 죄가 많으면 망하는 것이 마치 사과가 썩으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지진을 저희들이 강건너 불처럼 보고 지나갈 것이 아니요, 또 우리나라에 예년에 없던 가뭄이라든지, 잘사는 나라 일본이나 독일이나 화란 같은 나라에도 재앙이 미쳐서 어려움을 당한 것을 볼 때 “왜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우냐 ?”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 이변도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엘리뇨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구약에서 이스라엘 선민국을 망하게 한 나라가 바벨론인데, 하나님은 그 나라를 드셔서 선민국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계14:8에서 “바벨론은 음행으로 인한 백성을 진노의 포도주로 먹인 나라라” 하셨고, 계16:19에서는 현실주의로 사는 나라를 바벨론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사는 지구촌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음행이 가득차 있으며 또 세상주의가 강성한 중에 기독교가 세상주의를 따라가면서 “부흥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형편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저명한 인사들이 발표하는 기독교계 신문을 보면, 현실 기독교의 칭찬은 거의 없고 거의가 “문제가 많다”는 내용만 실려져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가 많지 않다”, “한국 교회는 누가 망쳤다”는 등으로 문제를 많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가 다같이 병들었다는 뜻인데, 말세의 심판을 상징하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던 것처럼 가장 순결을 많이 지켜야 할 기독교 세계에 문제가 많으면 결국 말세와 심판 외에는 찾아 올 것이 없기 때문에 각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본문 10절에 보시면, 먼저 땅의 체질이 녹는 자연계의 변화가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땅의 체질이 변하는 것은, 일본 같은 나라에서 지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기후 변동과 자연의 훼손 등으로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옛날의 삼월 달은 눈도 많이 오고 몹시 추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덜 춥고, 작년 같은 더위는 평생 처음 체험한 것입니다. 마24:29,30에서는 “환난과 모든 족속의 통곡이 인자의 오실 징조라” 하셨고, 눅10:11에서는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발에 묻은 먼지를 떨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하시므로, 전도가 잘 안되는 상태로 주님의 재림을 가까이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비할 때 지금은 전도가 잘 안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을 것이 많고 답답한 것이 적어졌으며, 기독교 세계가 점차 그 본질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뜻합니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온다”는 뜻은 예수님이 몰래 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일본 사람들이 지진 일어날 것을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처럼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팔 소리를 앞세우면서 오시는 분이요, 절대로 숨어 다니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도적 같이 온다”는 뜻은 교회와 성도가 감을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회개 안하고, 기도를 게을리 하며, 성경을 멀리 하는 성도이면 당연히 예수님이 오시는 문제와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모하고 천성을 바라 보는 성도는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높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4. 따라서 저희들은 또다시 경성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부터 재림 날자를 감추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항상 그 때를 대비하여 사모하고, 준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으로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까 ? 본문에 보시면,

1) 11절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서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힘쓰라”고 하셨습니다(학생들에게 교회가 가르칠 것은 세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신앙 고백이요, 다음은 성경 내용이요, 셋째는 기독교 신앙 생활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 안짓고 사는 생활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바라 보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12). 천성을 바라 보고 예수님 만나기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3)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하셨습니다(17). 전도, 기도, 봉사, 열심, 진리 탐구 등 경건 생활의 굳센데서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요,

4)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18). 은혜는 받고, 저를 아는 지식은 배워서 신앙이 자란 상태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심 (벧후 3:1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심”이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 보시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2,000년 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키울 때 잘 키우기 위하여 노력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성도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키워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 문화는 이 성경이 기록되던 2,000년 전에 비할 때 많이 발전하였고, 또 종말이 가까우면서 인간의 지식과 문화는 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사회적 생활의 물결에 도취해 버렸습니다. 어떤 때는 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나서 하던 말을 전화로 하고, 우체부가 전달하던 편지를 FAX로 전합니다. 돈도 서로 주고 받던 것을 은행을 통하여 순식간에 처리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빨리 몰아갑니다. 또 그 빨리 가는 차를 운전하면서 전화하는 것을 보면 더 빨리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은 속도에 취하고 경쟁에 취하여 눈코 뜰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일에 눈코 뜰 사이가 없다는 것이 신앙 생활에 적신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어야 성경을 보고, 정신적 육체적 휴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묵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런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생활은 세속에 물들어 가고, 신앙은 변질되어 가며, 믿음이 약해지는 것조차 모르면서 살아가는 형편이 되어져 있다고 진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세속적 물결이 빠르지 않았던 2,000년 전에도 주님께서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셨거든 세속화 바람이 강한 이 시대에 더욱 믿음 성장이 요구되지 않는가 ? 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너희가 이것을 알았은즉”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것”이란 “성경을 잘못 풀다가 멸망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법자들은 잘못 해석하는 교훈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 미혹에 빠지면 믿음이 굳센데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성장해야 될 믿음이 떨어지면 더욱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교훈에 미혹 당하지 말고 예수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즉, 성경의 바른 지식) 안에서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 좋은 성도가 많아질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하나님은 이제나 저제나 영원한 날까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고(마17:17), 눅24:25에서도 부활 신앙이 없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말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저희들을 보시고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하시겠습니까 ? 아니면 “언제까지 연약한 믿음 상태에 있겠느냐 ? 라고 하시겠는가”를 스스로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이 성장할 수 없는 경우는 어떤 것일까요 ?

1)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셨고(갈5:25), 시기와 분쟁을 버리지 못한 상태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정욕과 욕심을 빼버리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 성숙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회개 없는 신앙은 성숙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명 얻는 회개(행11:18)라 하셨고, 회개했을 때 새 출발이 가능하며, 회개하였을 때 성령의 충만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행2:38). 회개 없이 믿음이 자랄 것을 기대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돌이킴과 새출발을 하십시오.

3) 진리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신앙이 성숙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셨고, 또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에 빠져 들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히5:14에 보시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깨달은 지식으로 선악을 분변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각이 부족하면 역시 듣는 것도 둔하게 됩니다(히5:11,13).

4)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갖지 않으면 신앙 성장이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 중심의 신앙이 아닌 것은 전통 중심이나 체험 중심의 신앙과 같은 것인데, 체험이 성경만큼 확실하지도 않거니와 체험의 방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표준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부동산 계약을 하는데 그 물권자가 ‘홍길동’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홍길동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민등록증을 내어 놓으셔야 합니다” 하니까 주민등록증을 안가져 왔다고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데려다가 자기가 홍길동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증명보다는 주민등록증 한 장이 더 효력 있게 증명하는 것처럼 말씀 중심의 신앙은 체험 중심의 신앙보다 더 확실하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요1:50,20:27).

5) 각종 생활의 미덕과 은사를 겸비하지 못하면 신앙 성장을 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각종 생활이란,

① 일반적 생활로 덕을 세우는 것과,

② 신앙적 은사를 겸비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도 잘 알고, 기도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며, 교회도 잘 섬기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은사만 있고 다른 은사가 너무 부족하면 신앙의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은사를 많이 갖추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벧후1:5-7)

6) 연단이 없으면 성숙에 미흡합니다. 환난이 신앙에 발전을 주고, 시험과 고난이 정금보다 더 값진 믿음을 키워 준다고 하셨습니다(롬5:3,벧전1:7). 따라서 고난을 연단의 섭리로 믿으십시오.

4. 성경 여러 곳에서 신앙 생활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막4:28에서는 신앙 성장을 싹이 나고 줄기가 나며, 이삭이 나온 후 결실하는 것으로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는 “육신에 속한 자에서 신령한 자로 성장하라” 하셨으며(고전2:15,3:3),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 하셨고(엡4:13), 신앙의 후퇴는 금물이요(히10:38-39), 너희의 진보를 사람 앞에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하셨으며, 또 “어린이를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게 하라(고전3:1,히5:12) 하시므로 여러 모로 성장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성장하는 믿음은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가 할 때,

1)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요8:32). 어떤 환경에서나 적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 매사를 성경에 근거하여 시행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시119:105). 다시 말하면 성경을 연구하여 풍성한 지식을 갖고(골3:15) 사랑 실천을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약2:22).

3) 환난을 연단과 소망으로 알게됩니다. 바울 사도나 베드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지셨습니다. “환난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하셨고,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도 귀한 것이니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롬5:3,벧전1:1-7).

4) 성장한 믿음은 의에 담대하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며(엡5:15),

5)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고귀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롬5:3,8:28,살전5:18). 섭리가 무엇입니까 ?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았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장사군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 생활 중에 겁탈죄를 씌움 받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살이 2년을 했을 때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7년 풍년기가 지나고 또 7년 흉년기가 되었을 때 가나안 땅에 사는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오므로 자기를 팔아 먹은 형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 총리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때에 요셉은 말하기를 “형님들이 나를 애굽으로 보낸 것이 약 20년 전인데 형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현재 당하는 흉년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나를 이곳에 미리 보낸 것이오니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아버지의 가족들을 먹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판 것이 아니요(겉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살리시기 위하여 미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창45:4-8). 장성한 자의 신앙이 아니면 그런 것을 이해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쪼록 믿음 성장을 위하여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신앙 생활의 지식 (벧후 3:17-18) 목록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 생활의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1)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할 것과 굳센 신앙을 견지할 것을 교훈하셨고(15,17),

2) “믿음의 성장을 이루라” 하시므로 신앙의 성장을 촉구하셨으며,

3) 영광을 주께 돌려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2. 성도가 신앙의 성장을 이룩하려면,

1)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즉,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를 아는 지식은 곧 예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요5:39). 또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각종 은사와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신앙 성장의 요소인 만큼 성경 공부와 기도와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신앙 생활의 지식으로는 인생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피조물인 인생, 유한한 인생, 타락한 인생, 구원받아야 할 인생,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 인생의 길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시31:15), 인생이 존귀하여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는 사실(시49:12,20), 삶의 표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들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자기의 죄인됨을 몰랐다가 예수님의 고기잡는 기적을 본 후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을 하였고(눅5:8), 이사야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는 불결한 백성이므로 망하게 되었다”(사6:5)고 자기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자기를 앎으로 합당한 생활을 하며, 자기 인생을 잃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바른 목적에서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20대 청년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살다가 30년을 살고 50세에 감형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후 진범이 드러났습니다. 이때에 그 출옥한 사람이 자기의 “청춘을 보상하라”고 하였습니다. 재산은 보상할 수 있지만 청춘을 어떻게 보상합니까 ? 인생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면 역시 그와 같을 것입니다.

4) 중요한 신앙 생활의 지식은 자기의 행사와 길을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것입니다. 시31:15을 보시면,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 하셨고, 사58:11에서는 “하나님은 그 성도를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의 인생과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시37:5에서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셨고, 잠16:3에서는 “너희 모든 행사를 주께 맡기라” 하셨으며, 벧전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5) 자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은 항상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으며, 자기 앞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마치 물결에 딸려 내려가는 뗏목처럼 자기의 길과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을 때는 그 상태에서 충성하시고,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인도하시는 섭리를 체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자기의 길을 주님께 맡기는 성도는,

① 죄를 멀리하는 문제,

②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문제,

③ 자기의 맡은 직임에 충성하는 일을 잘 감당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고(사26:3)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신다”(시40:2)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① 성경으로 예수님을 잘 앎으로 이단에 끌리지 않는 지식,

② 인생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

③ 인생의 목적을 바로 지향하는 생활,

④ 자신의 행사와 길을 주님께 맡기는 법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지식을 근거로 믿음의 성장을 이룩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11. 인격 성장의 방도 (벧후 3:17-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인의 인격 성장의 방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신앙인의 인격 성장”이란 바로 예수님의 인품을 닮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 속에 아직도 성화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모든 이에게 격려와 희망을 줄지언정 불편과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세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1) 무법자의 미혹에 이끌려 굳건한 말씀 신앙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것이요,

2)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아는 성경 지식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룩하라는 것이요,

3) 이제와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은혜 있는 것처럼 나타내지만 성경과 예배 모범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열광적인 휴거주의자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성경 중심을 탈피하여 감정이나 체험을 앞세우며 자기 중심 본위로 믿음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잘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본문 말씀에서 “그런 미혹에 빠져 말씀 중심에서 이탈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고, 또 성도의 신앙 인격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예수님을 아는 지식(즉, 성경 지식)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2. 한 나무를 가꾼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1) 나무를 심을 때는 좋은 위치를 선택해야 하겠지요. 수분이 있고 햇빛이 있는 곳, 또 많은 사람들이 보아 주고 이용해 줄 수 있는 곳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위치 선정이 중요합니다.

2) 좋은 흙에 심어야 할 것입니다. 자갈도 아니고 모래도 아닌 그 나무 성질에 맞는 옥토에 심어야 할 것이요,

3) 또 뿌리를 깊이 주어야 합니다.

4) 자연적으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 사람의 관리가 있을수록 그 나무 성장에는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의 인격 성장도 역시 이런 조건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5) 이런 조건들을 신앙 인격 성장에 결부를 시키면, 우선 “나무 위치를 정한다”는 것은 신앙 노선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노선이란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같은 교파라도 목회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 노선의 바른 선택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칭을 가졌다 할지라도 교파와 목회자에 따라서 다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합동측 교단은 보수적인 교단이기 때문에 아무 교파나 무분별하게 교류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파들이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예배 모범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고, 교역자가 그것을 이해시키려면 다른 성도들의 문제를 지적하여야 하고, 독선주의란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크게 지적하지 않기 때문에 교인들의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바른 신앙의 성장은 “바른 노선, 바른 교파, 바른 지도자를 만나는데 있다”는 것을 꼭 아셔서 초교파주의를 조심 또는 탈피하시고 소속에 대한 애착을 가지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2. 나무가 옥토에 심겨져야 한다는 뜻은 바로 성도의 신앙이 온유, 겸손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에 진리가 간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흙이어야만 물을 잘 흡수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에 비료나 물을 주려면 먼저 흙을 파고 고른 다음에 주지 않습니까 ? 이와 같이 성도의 마음은 옥토 같은 마음이어야만 진리의 말씀을 잘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진실과 온유,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선 은혜를 받고, 신앙 인격의 성장을 바라는 성도는 자신이 겸손한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벧전5:5,약4:6,고전10:12,갈6:3).

3. 뿌리를 깊이 주어야 한다는 뜻은,

1) 말씀 신앙에 확고하게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영접하고(요6:69), 배우므로 확신하며(딤후3:14), 또 경험을 통하여 확신하는 것입니다(요14:11). 이 확신이라는 것은 성경에 꼭 붙잡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며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부합되면 긍정하지만 부합되지 않을 때는 신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 말씀의 권위와 진실성을 믿는 신앙이 사람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또 뿌리를 깊이 준다는 것은 흙과 접촉을 많이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도로 말하면 성경 지식이 풍성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선 뿌리를 깊이 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수분 공급을 잘 받으므로 잘 자라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도 말씀 신앙이 확고하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마4:4).

4. 인간의 관리를 통해서 나무가 잘 자란다는 것은 성도 자신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성경을 통하여 많이 배우셔야 하겠지요.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여준 말씀이니까 성경으로 예수님을 아셔야 하고,

2) 그 예수님의 마음과 언어와 생활을 힘써 본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으시려면,

① 예수님처럼 모든 욕심에서 떠나야 하고,

② 잘 산다는 현실욕도 없어져야 하며,

③ 명예적인 일도 등져야 하고,

④ 흙 속에 묻혀서 썩는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엡4:13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최후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나의 나된 모양이 과연 예수님이 쓰실만한 합당한 그릇이 되어 있으며, 합당한 재목이 되어 있습니까 ? 나무가 기둥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① 적어도 수십 년을 자라야 하고,

② 곧게 자란 나무이어야 하며,

③ 견고한 나무이어야 하고,

④ 베어져야 하며,

⑤ 껍질과 공이를 깍아 내어야 하고,

⑥ 말라야 하며,

⑦ 그리고도 용도에 알맞도록 제재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 인격도 목표에 도달되도록 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인격 성장을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를 가꾸듯이 신앙 인격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