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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예수님의 족 (마 1:1~17) 7 바로가기

제2과 예수그리스도의 나심 (마 1:18~25) 10 바로가기

제3과 성탄과 박사들의 방문 (마 2:1~12) 13 바로가기

제4과 예수님의 피난 (마 2:13~23) 16 바로가기

제5과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 (마 3:1~10) 19 바로가기

제6과 요한의 예수님 소개 (마 3:11~12) 22 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 (마 3:13~17) 24 바로가기

제8과 예수님이 시험에 대비하심 (마 4:13) 27 바로가기

제9과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마 4:4~11) 30 바로가기

제10과 예수님의 전도 시작 (마 4:12~25) 33 바로가기

제11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Ⅰ (마 5:1~4) 36 바로가기

제12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Ⅱ (마 5:5~7) 38 바로가기

제13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Ⅲ (마 5:8~12) 40 바로가기

제14과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42 바로가기

제15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 (마 5:17~20) 44 바로가기

제16과 형제와 화목하라 (마 5:21~26) 46 바로가기

제17과 간음죄와 관련된 교훈 (마 5:27~32) 48 바로가기

제18과 맹세하지 말라 (마 5:33~37) 51 바로가기

제19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마 5:38~48) 54 바로가기

제20과 선행과 기도에 대하여 (마 6:1~8) 57 바로가기

제21과 주기도문 (마 6:9~13) 60 바로가기

제22과 용서와 금식기도 (마 6:14~18) 64 바로가기

제23과 하나님께 헌금하는 신앙 (마 6:19~24) 67 바로가기

제24과 성도가 먼저 구할 것 (마 6:25~34) 70 바로가기

제25과 비판을 삼가고 거룩을 지키라 (마 7:1~6) 73 바로가기

제26과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마 7:7~12) 75 바로가기

제27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77 바로가기

제28과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마 7:15~23) 80 바로가기

제29과 듣고 행하는 자가 되자 (마 7:24~29) 82 바로가기

제30과 문둥병을 고치심 (마 8:1~4) 84 바로가기

제31과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 (마 8:5~13) 87 바로가기

제32과 자연을 지배하심 (마 8:14~27) 89 바로가기

제33과 가다라에서 있었던 일 (마 8:28~34) 92 바로가기

제34과 중풍병을 고치심과 마태를 부르심 (마 9:1~13) 95 바로가기

제35과 금식에 대한 질문 (마 9:14~26) 98 바로가기

제36과 육신과 영혼을 위한 사명 (마 9:27~38) 101 바로가기

제37과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심 (마 10:1~4) 104 바로가기

제38과 전도인들에게 부탁하심 (마 10:5~15) 107 바로가기

제39과 핍박의 대비책 (마 10:16~23) 110 바로가기

제40과 핍박을 감수하라 (마 10:24~33) 112 바로가기

제41과 십자가를 지는 복 (마 10:34~42) 115 바로가기

제42과 메시야 사역과 요한 (마 11:1~10) 118 바로가기

제43과 요한과 관련된 교훈들 (마 11:11~19) 121 바로가기

제44과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주심 (마 11:20~30) 124 바로가기

제45과 안식일의 주인 (마 12:1~8) 128 바로가기

제46과 예수님의 겸손한 활동 (마 12:9~21) 131 바로가기

제47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 (마 12:22~32) 134 바로가기

제48과 예수님이 강조하신 표적 (마 12:33~42) 137 바로가기

제49과 예수님의 세대관과 가족관 (마 12:43~50) 140 바로가기

제50과 씨 뿌리는 비유 (마 13:1~23) 143 바로가기

제51과 세 가지 비유 말씀 (마 13:24~44) 146 바로가기

제52과 천국인의 만족 (마 13:45~58) 149 바로가기

제53과 요한의 죽음과 5병2어 (마 14:1~21) 152 바로가기

제54과 물위로 걸으심 (마 14:22~36) 155 바로가기

제55과 말씀을 폐하지 말라 (마 15:1~20) 159 바로가기

제56과 가나안 여인의 소원성취 (마 15:21~39) 162 바로가기

제57과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 (마 16:1~12) 165 바로가기

제58과 신앙고백을 받으심 (마 16:13~20) 168 바로가기

제59과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심 (마 16:21~28) 171 바로가기

제60과 변형하여 보이심 (마 17:1~13) 174 바로가기

제61과 간질병 귀신을 쫓으심 (마 17:14~27) 177 바로가기

제62과 어린이를 앞세우신 교훈 (마 18:1~11) 181 바로가기

제63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 (마 18:12~35) 184 바로가기

제64과 이혼에 대한 질문 (마 19:1~15) 187 바로가기

제65과 부자와 천국 (마 19:16~30) 191 바로가기

제66과 포도원의 품꾼 비유 (마 20:1~16) 194 바로가기

제67과 마지막 예루살렘행 (마 20:17~34) 197 바로가기

제68과 예루살렘 입성 첫날 (마 21:1~17) 200 바로가기

제69과 세 가지 질문 Ⅰ (마 21:18~32) 204 바로가기

제70과 포도원을 세로 주신 비유 (마 21:33~46) 207 바로가기

제71과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마 22:1~14) 210 바로가기

제72과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마 22:15~22) 214 바로가기

제73과 세 가지 질문 Ⅱ (마 22:23~46) 218 바로가기

제74과 여러 가지를 경계하심 (마 23:1~12) 221 바로가기

제75과 화를 선포하심 (마 23:13~39) 224 바로가기

제76과 예루살렘 멸망예언과 말세교훈 (마 24:1~14) 228 바로가기

제77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 (마 24:15~28) 231 바로가기

제78과 말세에 대한 지식 (마 24:29~51) 234 바로가기

제79과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마 25:1~30) 237 바로가기

제80과 양과 염소를 분별하심 (마 25:31~46) 240 바로가기

제81과 음모와 여인의 봉사 (마 26:1~16) 244 바로가기

제82과 유월절을 지키심 (마 26:17~30) 248 바로가기

제83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 (마 26:31~46) 252 바로가기

제84과 예수님의 잡히심과 종교재판 (마 26:47~75) 255 바로가기

제85과 재판절차와 유다의 후회 (마 27:1~10) 259 바로가기

제86과 빌라도의 재판 (마 27:11~26) 262 바로가기

제87과 십자가에 달리심 (마 27:27~44) 265 바로가기

제88과 운명하심과 장사지냄 (마 27:45~66) 268 바로가기

제89과 예수님 부활 (마 28:1~20) 271 바로가기

 

 마태복음설교(추가 38과목)의 목록바로가기



매 과목을 읽으실 때마다 반드시 본문 말씀을 주지하신 다음에 이 강론을 읽으십시요(마태복음 개론은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에 수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필자 씀.

먼저 드리는 글


이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평신도 중심의 마태복음 강론을 출판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현실적인 생활은 너무 빠르게 변화되고 발전하는 것을 봅니다만 기독교인의 상당한 가족들은 아직도 주일 낮 예배 설교 한 시간으로 영적 생활의 핍절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겨우 연명해 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속히 일깨워서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성경은 물론 성경강론이나 기독교적 문헌들을 통해서 신앙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평신도의 성경공부를 보충하고 또 후배 교역자님들도 바쁜 시간에 본문 강론설교로 참고해 주셨으면 하여 감히 출판한 것입니다. 필자는 학자도 아니요, 평범한 목사이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도 못하였고, 또 해석상 애매한 점도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강론은 성경을 쉽게 이해하기를 원하는 성도님들에게 적당하도록 설명한 점에 유의하시고 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랑으로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특징은 1) 본문 중심으로, 2) 본문 강론을 순서대로, 3) 쉽게 설명하였고, 4) 본문의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설명하므로서 성경을 연구하시는 성도님들의 의문을 깨끗이 풀어드리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5) 강론설교를 듣는 기분으로 읽으실 수 있도록 집필한 것입니다.

본문 강론에 앞서 “신약성경을 배움에 대한 것”과 “공관복음에 대한 것”과 “마태복음 전체에 대한 개론”을 수록하려고 하다가 이 내용은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의 성경개론 목록에 게재되어 있어서 이를 생략하였습니다. 꼭 “기독교 신앙백과”를 구입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집필 현황에 대해서는 표지 안쪽에 소개해두었으니 기회 있으신 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책들이 많은 성도님들에게 알려져서 은혜를 나눌 수 있도록 성원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998. 10. .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예수님의 족보 (마 1:1-7) 목록으로


지금부터 마태복음을 공부하겠습니다.

1. 위 본문의 총 제목은 “예수님의 족보”이며, 1절은 예수님 족보의 서론, 2절-16절은 본론, 17절은 결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론을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셨고 14대씩 3세대로 구분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으니, 그 첫 세대가 족장시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요(약 1000년간), 둘째 시대가 왕정시대로 다윗부터 요시야까지이며(약450년간), 셋째 시대가 왕권의 끝나는 시대인 여고냐로부터 예수님까지(약600년간) 그 대수를 42대로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이 20대 조상이므로 결국 예수님은 아담이후 62대로 세상에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족보 구성상 특이한 사실은 남자들의 이름만으로 구성되는 족보에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그리고 예수님을 출생케 한 마리아가 기록된 것입니다. 인구를 조사할 때도 여자와 아이를 제외시키는 풍속(민1:20,마14:21)에 비할 때 특이한 일입니다.

3.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족보상으로 기록된 인물 42명과 여자 5명, 그리고 부수적인 인물로 베레스의 형제 세라(3절)와 여고냐의 형제(11절)가 있고, 바벨론이란 지명(17절)이 나옵니다. 이 인명과 지명에 대하여는 성경 또는 “인명 지명 사전”(오인명저)을 참고 하시면 쉽게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꼭 인명 지명 사전(값5,000원 미만)을 구입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본문 말씀을 대지별로 상고하면,

1) 1절의 족보 서론에서

① 아브라함 이전의 족보를 생략하신 이유는 그 이전의 족보가 창5장과 11:10-26에 기록되어 있고, 또 신약에서도 눅3:23-38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② 아브라함부터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전의 조상들에게 메시야 언약에 관한 것을 나타내실 때에는 상징 또는 은유적(사물을 적당하게 내포하는 뜻)계시로 나타내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그를 선민 조상으로 택하여 확실한 약속을 주셨고(창12:7,13:15,17:7,22:18),

③ 또 서론에서 다윗을 대표로 거론하신 이유도 역시 같은 계시를 그에게도 주셨기 때문이며(삼하7:12,시89:29,110:1,132:11), 또 다윗을 구약의 이삭처럼(창22:9)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로 등장시켜 계시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시22:1-2).

④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하심에서

㉠ 20대 아브라함과 33대 다윗이 60대(생략된 대수) 예수님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신 것은, 조상이 그의 후손을 가리킨 말씀이므로 당연하며, 설령 “고조부가 고손자를 낳았다”하셨어도 이는 생략어법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란 뜻은 구약의 메시야 언약이 성취되므로서, 메시야 활동의 신약시대가 펼쳐지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며

㉢ “예수”란 이름은 구약의 “예수아”와 비슷한 말로 “구원자”(마1:21)란 뜻이요, 이 말을 헬라어로 표현할 때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고, 또 구원자를 히브리 말로 바꾸면 “메시야”(요1:41)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예수님의 인성을 대표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또 이 사실은 구원자가 유대인(인간)에게서 나오시고(요4:22), 또 기름부으심이 풍성한 신성적 은혜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눅4:18).

⑤ 복음의 시작을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하여

㉠ 이것은 구약의 언약이 예수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뜻하며,

㉡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 유대인으로 오셨음을 증명함이며(요4:22),

㉢ 특히 유대인들은 선민적 족보를 따졌기 때문이며,

㉣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죄인들을 대표하여 고난을 받으시고(히9:22,5:8), 영원한 신성으로 중보자가 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히5:6).

2) 족보를 말씀하신 본문 중에서

① 3세대로 구별하신 것은

㉠ 예수님의 구원 대상이 모든 세대와 역사에 포괄적으로 미칠 뿐만 아니라,

㉡ 파란 만장한 세대속에서도 구원의 언약이 여전히 성취되어 왔고,

㉢ 또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요시야까지 14대, 여고냐부터 예수님까지 14대로 구분하여 기억하기 좋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 또 족장시대의 선조들 중에는 선지자가 많았고, 그 다음시대의 조상들은 전부 왕들이며, 또 그다음 시대에는 사독을 비롯한 제사장들임을 감안할 때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을 예시하신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② 그런데 이 족보 중에 다섯 여인이 기록된 것은 상당한 의미와 교훈을 주십니다.

㉠ 다말은 유다의 자부이지만 시부와의 불륜관계에서 24대사람 베레스를 낳았고(창38:30),

㉡ 라합은 이방인 기생의 신분으로 살몬의 처가 되어 30대사람 보아스를 낳았으며(수6:22),

㉢ 룻은 신앙과 효도가 특출한 이방(모압) 여인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31대 사람 오벳을 낳았고,

㉣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의 후처가 되어 솔로몬을 낳았으며(삼하12:24),

㉤ 마리아는 덕이 있는 평범한 목수의 아내로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것인즉 이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 불륜부정관계, 이방혼인 관계, 살인음행 관계, 덕 있는 여인까지 포함하여 족보에 올린 것은 메시야가 모든 죄인들을 포괄하여 구원하시려는 뜻과, 메시야를 보내시는 언약 성취의 과정과 성경 역사의 진실성을 사실대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또 족보상의 조상은 부정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하셨으므로 인간적 부정과 상관없이 출생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조상이 조상을 낳고”하실 때는 “에게네센”(능동태)이라 하셨으나,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하실 때는 “에게네데”(수동태)를 사용하신 점으로 증명된다고 주석가는 말하였습니다.

③ 이 계보가 족보로서의 완벽을 기하였는가?에 대하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8절의 여호람 다음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왕까지 3대를 뺏고(왕하8:16,25,13:1,14:1,15:1) 웃시아(아사랴;왕하15:1,8)로 직접 연결된 사실과, 또 11절에서 요시야 왕 다음에 여호야김(엘리아김; 왕하23:30-34)을 뺀 여고냐(여호야긴; 왕하24:6, 대상3:16)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족보의 완벽을 기함이 아닌 메시야의 계통을 단축하여 설명한 것으로 족보대수에 상당 부분이 생략되었음을 아셔야 하며, 14대,14대,14대에 대한 설명도 그 중간 세대에서 다윗을 양쪽세대(중복)로 헤아린 것을 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①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이 어려운 역사속에서도 불가항력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② 예수님은 명실공히 완전한 인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과, ③ 예수님의 족보가 구원사역 면에서 역사의 모든 인류를 포괄하신다는 점과, ④ 부정을 감추지 않는 성경의 진실성을 나타내주신 점이라 하겠습니다.

 

제 2 과 예수그리스도의 나심 (마 1:18-2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18절 초두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나심(탄생)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보통 사람과 같지 않으시니, ①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② 본질은 인성과 신성을 겸비하신 분이며 ③ 성결로는 죄가 없으신 즉, 그 탄생의 경위가 특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의 특수한 면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고, 또한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조상의 내력을 말씀드렸습니다.

1.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부모관계에서의 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요, 어머니는 마리아였으나, 이것은 호적상의 사실일뿐 실제적인 혈통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성령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잉태시키시고, 마리아로 하여금 해산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오시게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사실(성령님의 능력으로 부정모혈 없이 잉태케 하신 것)을 입증하는 말씀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만 하였고, 동거(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잉태되었을 뿐아니라, 이미 잉태되었음을 안 후에도 해산하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여기에서 왜 사람의 피를 받지 않아야 할까요?

① 타락한 육체의 생명이 그의 피에 있고(레17:11),

② 모든 인생이 다 타락한 조상의 피를 받아 그 타락성이 전가되었으며(롬5:12)

③ 이로 인하여 영광을 훼손한 상태에서(롬3:23) 예수님은 인간의 부패성과 관계없이 오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고, 또 마리아의 피도 같은 성격(부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령님의 잉태”란 역시 남자와 여자의 부패성 있는 피를 받지 않게 하여, 잉태하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피가 없이 어떻게 사람의 육체가 구성될 수 있겠느냐?”하는 질문은 마치 남자없이 어떻게 자녀를 생산할 수 있겠느냐의 질문과 같은 것이요, 이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성령으로 잉태케 하셨음이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신 신비의 생명적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의미는 예수님이 죄와 상관없이 오셨음을 믿게하는데 있습니다.

2. 요셉의 의로운 처신과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말씀입니다(19-21절).

1) 요셉은 정혼한 마리아가 남자와 상관없이 잉태하였음을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여인의 음행이 드러나면 돌로 쳐서 죽이는 사회에서(요8:3) 약혼자가 자기와 상관없이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이를 의심하고 책망하기 전에 오히려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마리아의 결백한 증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전13:7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인물로서 자신의 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요셉의 의로움에 대한 설명을 더 드린다면, 우선 이 의로움은 성경에서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범죄와의 타협을 끊기 어렵고, 또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정욕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의롭다”는 뜻은 ① 평소에 의를 추구함이요, ②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이웃에 드러내지 않고 선히 해결함이요, ③ 자신과 마리아와의 관계를 가만히 끊으려고 한 것입니다. ④ 또 하나님의 분부라면 무조건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24절). 이러한 의인의 예는 노아(창6:9)나 욥(욥1:1)이나, 고넬료(행10:22)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성도는 요셉처럼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나타나 말씀을 주셨습니다.

1) 20절에서 하나님은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꿈 중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여기의 “이 일”이란 마리아가 잉태한 문제를 신앙적으로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자기 앞에 당면한 일을 신앙적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에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부정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할 때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2) 현몽한 주의 사자는 요셉의 꿈에 나타난 어떤 인격(천사)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① 요셉을 다윗의 자손으로 호칭하였고, ② 마리아에게 잉태된 일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였으며, ③ 그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셨고, ④ 마리아를 데려오라 하셨으며 ⑤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셨고, ⑥ 그 예수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란 뜻은 제1과에서도 설명드린 바가 있지만, 이는 구약성경의 “여호수아”나 “예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심)의 발음을 그 의미와 함께 비슷하게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22절에서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을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하였음을 말씀하셨으니,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임”은 사7:14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에 대하여는 사7:14과 8:8,10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전 800년경의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계시고 또 성도와 함께 계신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저희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5. 24절 이하에서 요셉은 그 꿈을 깬 후에 주님의 사자의 분부대로 그 아내를 데려왔으니, 이는 두려움 없이 그 아내와 결혼하여 데려왔다는 뜻이며 마리아에 대한 순결을 지켜주기 위하여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다가 결국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최초의 인간이 남자였으므로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도 남자로 나신 것이 합리적입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① 예수님의 탄생의 경위를 아는 것이요, ② 예수님이 예언대로 오셨다는 점과, ③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부정과 상관없이 오셨음과, ④ 이렇게 오셔야 할 이유는 택자들을 대표하는 속죄의 사업이 결백한 인간, 또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며(히9:14) ⑤ 요셉의 의로운 생활, ⑥ 예수, 임마누엘의 뜻을 알아 두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성탄과 박사들의 방문 (마 2:1-12) 목록으로


위 본문에는 성탄과 박사들의 방문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초두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하셨고, 그 이하에서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의 순서가 ① 방문자들의 질문, ② 예루살렘의 소동, ③ 헤롯왕의 탐문, ④ 왕의 부탁, ⑤ 박사들의 경배, ⑥ 다른 길로 돌아감의 순서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1. 1절에서 예수님은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역사세계에 오신 것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이 오신 때는 헤롯왕의 통치시절이었습니다. 헤롯왕은 로마황제 줄리안의 아들 “안지베돌”로서 25세 당시인 주전 35년에 갈릴리 감사로 임명되어 왔다가 그 후에 유다(팔레스틴 지역의 행정 구역으로 갈릴리, 사마리아, 유다, 이두매 등으로 구별되어 있음) 지역의 분봉왕이 되어 주후 2년까지 집권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네 사람의 헤롯왕이 등장합니다). ① 본문의 헤롯왕이요, ②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세레요한을 죽인 왕이요(마14:1), ③ 행12:1에 나타난 왕이요, ④ 행25:13,26:1에 나타난 왕입니다). 본문의 헤롯왕은 37년 재임 중에 사마리아, 가이샤라, 예루살렘 도성을 건립 재건하였으나, 제사장 “안데고레스”와 자기의 처 “미리암네”와 그의 아들 “안지베돌”과 그 처부모 형제와 많은 인물들을 죽이고 이는 “자신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슬퍼할 것을 미리 울게함”이라고 하였다 하며 이런 연유로 악한 왕이란 오명을 남기고 주후 2년(62세쯤)에 악성 질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① 예수님의 탄생시일은 확실히 말씀하시지 않음을 보아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왕은 주후 2년에 죽었고, 예수님은 주전 4년에 탄생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애굽 피난 생활은 6년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15).

② “유다”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팔레스틴의 중간지역(사해 서편)을 의미하고, 그 지역 안에 있는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25리 지점으로, 구약시대에 에브랏(창48:7)으로 불리우던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3) 그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탄생한 왕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2. 2절에는 그 박사들의 내방과 왕의 탄생처소를 찾는 질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동방이란 곳은 예루살렘에서의 동방이므로 그 당시로는 메소포다미아지역을 의미하고, 현재로는 “요르단”이나 “이라크”영지가 될 것입니다.

2) 박사란 신분은 “마고스”란 말로 현 시대에 있는 박사가 아니고, 철학이나 자연과학 또는 점성술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 특수한 사람들인데, 성경에는 몇 사람이란 수를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3)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나셨느냐?”고 물었으니,

① 이 질문은 조금도 거리낌이 있거나 망설이는 질문이 아닌 떳떳한 질문이었으므로,

② 유대인들과 특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미 왕이 탄생한 사실을 알고 있을 줄로 짐작하고 질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③ 그러나 불행하게도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 되었으니, 이는 그 당시의 백성들이 종교적 의식에 얽매인 탓으로 성전 가까이 살면서도 영적 식견이 그만큼 어두워져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④ 그들은 “별의 징조를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신 것을 알았고, 또 경배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동방의 박사들이 깨달은 “유대인의 왕”이란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엄연히 헤롯왕이 있는데 주저없이 새 왕을 추대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만왕의 왕(메시야)으로 깨달았고, 또 이 왕의 탄생을 별의 징조로 알게 된 것은 구약성경 민24:17과 말4:2(계22:16)을 이미 참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이 사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소동하였습니다. 이 소동이란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라 큰 괴변으로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1) 그들은 의외의 소식을 들었고,

2) “왕이 있는데 또 무슨 왕이 났느냐?” 하는 의미로 소동한 것이요,

3) 이는 메시야 대망에 대한 바람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만큼 어두워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이러한 어두움에 있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4.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왕은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을 불러서 문의를 했습니다.

1) 모든 대제사장들(마27:1해석 참고)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하였으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통솔하는 지도자이고, 백성의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마22:35, 교법사;눅5:10, 랍비;마23:8)을 의미하며 여기의 “모든”이란 범위는 유력한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다는 것입니다.

2) 헤롯왕은 질문할 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하였으니, 이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만왕의 왕, 또는 그리스도(메시야)의 탄생을 말함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3) 이때에 대답을 한 사람들은 구약 미5:2을 근거로 하여 “유대땅 베들레헴”이라 대답하고 미5:2을 제시하였습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은 유대의 여러 고을들 중에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닌 유명한 곳이 될 것이니, 이는 그곳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성도)의 목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알려준 것입니다.

5. 이 말을 들은 헤롯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1) 그는 은밀하게 박사들을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별의 징조)를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자세히 알아보고 내게도 말하여 나도 가서 경배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① 이는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의 술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2:16에서 헤롯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어린이들을 죽이는 자로 변신했기 때문입니다. ② 이때에 왕을 만나고 나온 박사들은 왕에게 사실대로 보고할 것을 약속하였을 것입니다.

6. 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1) 박사들이 떠날 때에 동방에서 보던 별이 그들의 앞을 인도하여 베들레헴 아기 있는 곳에 머물렀다 하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애를 쓸 때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인 인도를 하실 것입니다. 또 10절 말씀에서 박사들은 그 인도하는 별을 보고도 가장 크게 기뻐하였거든, 예수님을 보는 즐거움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성경은 성도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요14:6).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성경을 배우는 즐거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탄생한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와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아기께 경배한 후 준비해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① 황금은 불변하는 귀한 보석으로 믿음을 상징한다 하며, ② 유향은 향기를 풍기는 값진 것으로 사랑을 상징하며, ③ 몰약은 썩지 않고 변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로서 이는 소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을 위하여 물질선물과 함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선물에 합당하고, 유향은 제사드릴 때 사용하므로 제사장에게 드리는 선물이며, 몰약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영원히 계실 것을 예표하는 뜻이라고도 하므로 예수님의 직분과 사역을 알게 하기도 합니다.

7. 그런데 그들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1) 이 계시는 예수님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2) 그래서 그들은 헤롯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른 곳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 때문에 사람과의 약속을 파기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천재지변으로 되는 일이 사람에게 책임이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는 헤롯을 통하여 역사하였고, 하나님은 이 같은 방법으로 마귀의 역사를 따돌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국가적 수난으로 인하여 멀리 흩어진 백성들 중에도 메시야를 사모한 성도들이 있었음과, ② 그들이 메시야를 사모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만큼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이 함께 하였음과, ③ 성전을 가까이 하는 지도자들이 외식에 빠져 어두운 상태에 있었음과, ④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신 사실과, ⑤ 마귀가 헤롯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신 사실과, ⑥ 박사들의 성탄축하가 의미 있는 일임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4 과 예수님의 피난 (마 2:13-23)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성탄과 관련 있는 말씀으로

내용을 구분하면 ① 예수님의 피난가심(13-15절), ② 어린이 학살(16-18절), ③ 나사렛에 오셔서 사시게 된 사실(19-23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시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1) 그 피난의 시기는 “저희(박사들)가 떠난 후”라 하셨으니 예수님 탄생 후 몇 일이 안된 때였으며,

2) 예수님이 피난을 가셔야만 할 이유는 ①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며, ② 또 이 일이 있을 것에 대하여 구약성경 호11:1에서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호11:1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주전 570년경의 선지자였으므로 그는 약 750년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으로 가시게 될 것”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예수님이 피난하시는 형편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호11:1의 뜻은 “하나님이 430년간 애굽에서 고난스럽게 살던 자기 백성들을 광야와 가나안 땅으로 불러낸 사실이 있었으나, 그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나태히 한다”고 경고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그 “불러내셨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3) 또 13절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요셉에게 명령을 할 때에 “네 아들, 네 아내”라 하지 않고, “아기와 그의 모친”이라 함으로 요셉과의 관계를 멀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 마리아는 그의 몸을 낳았으므로 “아기와 그 모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예대로(눅3:23) 호적상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며, 또 그때까지는 마리아와의 완전한 부부가 되지 않은 상태임을 잘 나타내신 것입니다.

4) 요셉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그 밤으로 떠났으니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의 거리는 약 800리 입니다. 요셉의 이 순종은 계시에 따른 절대순종으로 나사렛에서 호적하려 베들레헴에 왔다가 남기는 소식도 없이 그대로 몸을 감춘 것입니다.

5)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13절) 애굽에 있으라” 하셨으므로 결국 헤롯이 주후 2년에 죽기까지(19절) 약 6년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섭리를 베푸셔서 예수님을 보호하셨으며 이와 같은 보호와 인도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십니다(시121:1-8).

2. 헤롯이 두 살 이하의 많은 어린이를 학살한 사실입니다.

1)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서 왕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기다리던 헤롯왕은 그들이 오지 않자 자신이 속은줄 알고 군사를 풀어 베들레헴과 그 지경(근방)의 두살 미만의 남자 어린이들을 다 죽였으니,

① 이는 왕 될 자를 말살 시기키 위함이요,

② 범위를 두 살 이하로 한 것은 그 당시의 소문에 “별의 징조가 2년 전부터 나타났었다”는 말에 근거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헤롯왕은 자기 가족 외에도 유대인 공회원 300명과 기타 백성 3,000명을 죽인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역사(요세보)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폭군의 살인행위를 보통으로 보아 넘겼거나 또는 베들레헴의 학살사건이 작은 동리이므로 소규모였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모든 사건을 다 포착하지는 못하니까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2) 문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런 희생자들이 생겨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탄생케 하면서 어린이들을 죽게 한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까지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인 만큼 저희들은 여기에서도 깊은 교훈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① 한 식물의 싹이 나면서 한알의 씨앗이 죽어야 하고, 또 한사람이 탄생하려면 산모의 수고가 따르는 것처럼 위대한 메시야의 탄생에도 상당한 희생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② 그 어린아이들이 죄 없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삼하21:1-9). 예수님은 나면서 소경된 자의 이유와(요9:3) 나사로가 병든 이유와(요11:4)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이들에 대한 말씀(눅13:4)도 하셨은즉, 하나님만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③ 성도는 모든 불합한 사건들을 볼 때에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여야 할 것입니다.(고전 13:13)

3) 그런데 또 이 사실은 주전 550년경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미리 예언한 것이 응한 것입니다. 렘31:15에서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레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 하였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① 위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그때로부터 약1,000년 전에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할 때 신고(아픔으로 인한 슬픔)한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예레미야 당시에 국운의 쇠약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라헬 같은 슬픔을 당하지만 머지않아 하나님이 다시 위로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창35:16-20, 렘31:15-17).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약1,000년 전의 라헬의 슬픔이 그 민족에게 온 것을 말하면서 위로하였는데,

② 본문을 기록한 마태 역시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말씀 중 라헬의 슬픔이 약800년 만에 어린이를 학살당한 부모들에게 또 임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에 조상들이 겪은 슬픈 사건은 미래에 있을 슬픈 사건을 예언한 것이며 또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교훈하여 주십니다.(전 3:15)

③ 그 당시에 라헬은 라마에서 슬퍼하였는데(본문) 그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북쪽의 고장이며(창35:16), 그는 그곳에서 죽었고, 그곳에서 45리 남쪽인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는데(창35:19) 마태는 그때의 슬픈 사건의 예언이 응한 것이라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이 피난생활을 마치시고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내용입니다.

1) 19-20절에서 요셉은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은즉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이스라엘 열 두 지파들이 살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올라왔으나,

2) 또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이두매와 유다와 사마리아 땅을 관할하여 그곳에 가기를 두려워하던 차, 하나님의 지시로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본고향;눅2:4)으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3) 이 사실도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리라”하신 것이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구약성경에는 근거가 없으나 어떤 선지자의 예언이나 구전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4) 헤롯은 왕위 37년 만에(62세쯤) 악한 성병으로 죽었고, 그는 죽기 전에 넷째 처의 소생 “아켈라오”에게 이두매와 유다와 사마리아를, 또 그 형제 “안디바”에게 갈릴리와 뵈레아를, 또 다른 아들 “빌립”에게는 요단 동편 땅을 각각 통치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도 “아켈라오”는 더 악한 자였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복음의 초기부터 메시야를 대적하는 마귀의 역사가 강했으나 하나님의 보호 인도섭리로 승리하게 하신 점과(시2:1-6), ② 복음사역 과정에서 어린이 순교자들도 있었음과, ③ 구약의 역사적 사건이 미래의 예언으로 주신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④ 하나님은 모든 일에 그런 방식으로 지금도 우리를 보호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 5 과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 (마 3:1-10) 목록으로


마3:에는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1-3절은 “출현의 상태와 근거”, ② 4절은 “생활 모습”, ③ 4-17절까지는 “말씀선포 사역과 세례베품”에 대하여 기록되었습니다.

1. 유대광야에 출현한 세례요한입니다(1-4절).

1) 요한을 “세례요한”으로 명칭한 것은 ① 사도요한과 구별하기 위함이요,

② 요한이 최초로 세례 베푸는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마21:25,32)

2) 요한이 출현한 시기를 “그때”라 하였는데, 이 시기는 예수님이 나사렛에 오셔서 상당기간 사신 후였고(마2:23), 또 세례요한의 사역이 있던 “이때에”(13절) 예수님이 출현하셨는고로, 예수님의 30세쯤인 공생애시작(눅3:23)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세례요한이 출현할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을 하였습니다(사40:3). 따라서 세례요한은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것이었고, 또 구약의 예언적 사역을 그대로 이행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적 사역이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하심이니, 이 말씀은 ① 요한이 유대광야에서 사역할 것을 말씀하심이며, ② “외치는 자의 소리”란 말씀은 요한이 자신의 인격을 최대한 감추면서 진리되신 예수님만 나타내려는 충정을 뜻하며, ③ “너희가 주의 일을 예비하라” 함은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요, ④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잘 영접하도록 마음의 길(즉 믿음으로 모시는 일)을 안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그 사역을 예언대로 성취하기 위하여 유대광야에서 외쳤고, 그때에 최초의 소리를 발한 것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회개하라”는 의미는 그동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일들과 메시야를 대망하지 않은 나태를 일깨워 돌이키라는 뜻이요, “천국이 가까왔다”는 뜻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야가 가까이 오셨으므로 그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어느 곳이나 하나님(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은 천국이요,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도 역시 천국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눅17:21).

4) 요한의 생활은 약대털옷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으니, 이는 대단히 초라하고 검소한 생활이었음을 알게 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 생활에 대하여 칭찬하셨습니다(마11:7,8). 약대털옷은 추위와 침구를 겸용함이요, 가죽띠는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며 메뚜기와 석청은 자연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식주를 위하여 시간을 쓰지 않고, 그것을 적당하게 해결하면서 현실주의자들과 경쟁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시간과 몸을 하나님께 전폭 헌신하는 생활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사치와 유행과 과소비에 얽매여 살거나, 현실 영달주의에 빠져있는 성도들에게 좋은 교훈의 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요한의 외침에 대한 반응입니다(5-10절).

1)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있다는 소식에 따라,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5절에서 “다 그에게 나왔다”는 뜻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계층의 종류별로 많이 나왔다는 뜻이요, 요한이 예루살렘 도심에서 증언하지 못한 것은 거지행색을 차린 형편이므로 성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2) 이때에 말씀을 들은 자들은 두 가지 상태로 나누어졌습니다. 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② 회개하지 않은채 구원을 받으려고 하다가의 심판을 경고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를 자복했다”는 뜻은 “신앙의 나태를 돌이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는 뜻이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으로 돌아온 것을 인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세례의식의 의미는 오늘날 세례를 베푸는 의식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의식에 관한 내용은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를 참고하십시요).

그런데 7절을 보시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세례를 베푸는 곳에 왔다가 큰 책망과 심판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란 구약시대부터 있어온 종교단체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잘못되게 적용하여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전통의식 아래 구원이 있을 줄로 기대하면서, 독선적이고, 외식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내용을 더 아시려면 성경사전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세례 베푸는데 왔다”는 것은 회개의 증표로 받는 세례를 자신들도 받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명분만을 내세워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책망을 받은 자들의 잘못은 요한의 책망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① 독사의 자식들처럼 회개 자복도 없이 구원의 은혜를 통으로 삼키려 한 것이요, ②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없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는 것이며(여기에 임박한 진노란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의 자손 또는 제사장의 후손이란 명분으로 구원받을 줄로 알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로서(요8:39,40) 천국백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마22:32,마8:11). 따라서 회개없이 구원을 받으려 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요,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회개가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절차가 되기 때문입니다.

3. 요한은 두 가지 경고를 하였습니다(9-10절).

1)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① 구원의 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요, ② 돌같이 완악한 자라도 하나님은 변화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뜻이며(겔36:26) ③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아닌,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전권으로 또 불가항력적으로 광범위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2)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 하였으니 이는 ① 하나님의 심판이 작정되었음을 예고함이며, ② 그 심판의 대상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로서 곧 메시야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백성들에 대한 심판의 예고로서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의미하며, 또 시2:1-4,12의 말씀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면서 즐거워하여야 하겠습니다(시 2:11).

결론적으로 위의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내용은 ① 세례요한이 출현한 경위와 목적과 생활과 그 외침의 내용을 아셔야 할 것과, ② 회개한 자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 상이한 결과에 대한 것과, ③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무엇 때문에 책망을 받았는가 하는 점과 ④ 구원의 전적 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시실과, ⑤ 메시야를 배척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요한의 예수님 소개 (마 3:11-12)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에는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목적과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요한이 세례를 베푼 목적은 “회개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1) 이 말씀을 문구대로 생각하면 세례를 베푸는 의식이 회개를 유도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회개한 상태를 세례로 인치 듯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인치기 위하여(확실하게 점검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입니다.

2) 복음을 받고 돌아오는 것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귀도된 회개이므로 세례로써 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3)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6절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셨다” 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요단강은 물이 있는 곳입니다. 행8:36에서도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함으로 광야에서도 물만 있으면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물이란 깊은 우물을 뜻하므로 물의 분량이 강처럼 흘러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4) 따라서 “물로 세례를 준다”는 뜻은 물을 제물의 피(레16:18,히9:13-14) 또는 결례수(출12:22,레14:4,민19:18)로 상징하여 부정함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주시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관유도 일종의 결례수이지만 이것으로는 성물을 구별하는데 사용하였음;출30:22-29).

2.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1)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이”라 함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어 메시야가 곧 출현할 것을 예언한 것이며,

2)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은 분”이라 하였으니, 이 “많다”는 의미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제한한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적으로 능력을 비교할 때 요한 자신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한이 기적을 행한 적은 없을지라도(요10:41) 교훈상의 권위는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인간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존귀를 비교한다 할지라도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고 다니는 종이 되기에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최고로 높이고, 자신을 최하로 낮추는 겸손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요한이 주님을 높인 태도와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춘 태도를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성령과 불로 세례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세례는 “부어준다” 즉,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과 불을 어떻게 전달하셨을까요? 또 성령과 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② 여기에서 “성령과 불”은 같은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 사6:6-7에서 “제단의 핀 숯불”로 성령님을 상징하셨고, ㉡ 눅12:49에서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함도 역시 성령을 상징한 것이며, ㉢ 행2:3에서도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성령님이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오순절 강림의 상태가 곧 “성령님으로 세례 주신 일이라”할 수 있습니다(행1:5).

③ 그렇다면 이 불이 육체와 현실을 태우는 불일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성경에 나타난 바가 없습니다. 이 불은 곧 마음을 뜨겁게 하는(눅24:32)불이요, 마음은 진리의 말씀으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하였습니다.

④ 성령님은 “진리(말씀)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17).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은 진리의 말씀을 베푸시고, 그 말씀을 심령에 심어 주어(약1:21; 마음에 심긴 도)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벧전1:23에서도 “성도가 거듭나는 것은 썩어질 씨(육체와 현실적인 것)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⑤ 따라서 거듭나는 은혜는 성령님의 말씀사역이 사람의 마음에 주입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 역사가 바로 “성령님의 세례 주시는 일(내적 변화)”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성령님은 말씀을 동반하시고, 말씀은 생명과 내용과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이 말씀이 마음속에 간직되는 그 자체를 성령님의 세례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여기에서 요한은 구원과 심판을 타작하는 일로 비유하였습니다. 농부가 타작을 한 다음에는 바람에 불리거나 키질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선별하기 위함입니다.

② 여기에서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임”은 선민에 대한 구원사역을 뜻하고,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심”은 악인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뜻합니다.

③ 따라서 예수님은 구원도 행하시고, 심판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현실에서 작정된 기한 내에만 하시고, 심판은 현실에서도 필요에 따라 시행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잘잘못에 따라 대응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심판은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④ 따라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성도는 환난으로 키질을 하실 때 밖으로 불려나가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안으로 모여드는 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와, ②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의미와, ③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에 대하여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7 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 (마 3:13-17)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두 대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먼저는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이요(13-15절), 다음은 세례의 절차와 나타난 징조 및 선포의 말씀(16-17절)입니다.

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에 대하여

1) 13절 “이때에”라는 시기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시기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이며

2) 그때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의 갈릴리는 넓은 의미로 갈릴리도 전역을 의미할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고향이 갈릴리도의 나사렛이므로 그곳에서 요한이 사역하는 요단강 쪽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단강 은 어디쯤일까요? 현재 요단강 남쪽 갈릴리 바다 밑에 작은 호수와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곳”이라고 유적지처럼 만들어서 선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성경 마3:1에서 요한의 사역지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광야였으므로 예루살렘 쪽을 가까이 인접한 요단강으로의 하류 쪽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 광야와 인접한 쪽이란 뜻입니다.

3)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세례요한도 의문을 갖고 질문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였습니다.

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므로 회개하고 돌아온 증표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백성임을 구별하여 인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대인이요, 사회인의 한 사람이므로 오신 이상 그 인침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국에 속한 분이지만(요17:16) 유대인으로서의 현실적 조건을 구비하여 사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특정인의 대우받는 것을 좋게 여기시지 않았고, 보통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책임을 다 이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공생애 이전에 구약적으로 지키는 유월절(눅2:41)과 세금내는 책임까지 이행(마22:21)하심과 같은 것입니다.(히 5:8-10)

② 세례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 속에는 ㉠ 세례를 베푸시는 근원이 예수님으로부터 왔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다음 예수님은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마28:19). ㉡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도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세례요한도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였지만(마21:32) 자신도 죄에 속한 인간으로서 구원을 받았으므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본문에서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은 없지만 15절에서 “우리가 이같이 하여”하신 말씀 속에 서로 세례를 주고받았음이 포함되었다고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15절에서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심은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 세례를 주고 받으셨음을 뜻하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일”로서 합당하다 하심은 ㉠ 예수님도 보통 인간으로서의 절차를 밟고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 ㉡ 예수님이 하나님 뜻에 무한한 겸비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점, ㉢ 예수님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천국시민으로서의 인침을 받으시는 일은 필요하신 것이며(유대인 사회에서 볼 때), ㉣ 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나 인간으로서 구원자가 되셔야 하는 자격 조건으로 전적 순종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히 5:9) 이리하여 요한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시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2. 세례의 절차와 하나님의 징조 및 선포에 대하여

1) 16절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하심에 대하여

①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유대인의 한사람으로 인정하였을 것이며,

② 요한의 세례가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선포했다는 말씀이 없으므로 그 격식이 마28:19과 꼭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인치는 효력에는 삼위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와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선지자요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마21:26,32).

③ 혹 어떤 이는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한 세례보다 권위가 못하다”하여 이에 대한 증명으로 행19:4-5을 들어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가 바울로부터 다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입증을 하기도 합니다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뜻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란 의미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그 사건을 알고만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 입증의 근거는 바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오늘 우리들이 받는 세례의 의미와 꼭 같은 것입니다.

2) “물에서 올라 오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① “곧 올라오신 것”은 요단강물에 오래 계시지 않고 간단한 의식에 그쳤음을 나타내신 말씀이며,

② “물에서 올라 오실쌔”란 말씀이 세례의 격식을 대단히 소극적으로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 소극적 암시란 그 격식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물에서”란 뜻은 “아포투 후다토스”로 “from the water”란 뜻이요, 막1:10에서 “에크 투 후다토스”를 사용했지만 그것도 “out of the water”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의미는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물 있는 곳에서) 나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완전침례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베푼 세례는 강물 얕은 곳에 들어가서 몸의 일부를 씻는 의식으로 끝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세례와 의식에 대하여는 기독교 신앙백과 472P를 참고 하십시오).

3)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현상계적 징조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입니다.

① 현상계적 징조로는 “하늘이 열렸다”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광체가 비췬 것을 뜻할 것이며(출34:29,35,행9:3),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심”은 이미 비추어진 광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님 머리 위에 비취어졌음을 말씀한 것입니다(요1:33). 여하튼 밝은 광채와 비둘기 형태의 광체가 예수님 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특정한 교훈과 계시를 위하여 징조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출3:2). 이 징조의 의미는 빛을 진리로 비둘기 형태를 평화와 구원의 상징으로 나타내 주심일 것입니다(요1:5,3:19,창8:10).

② 하나님이 하늘에서 소리를 발하여(삼상3:10,행9:4)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과 기뻐하시는 대상임을 직접 음성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의 세례 받으심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시작부터 예수님을 진리시요, 평화와 구원의 사신이시요,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기뻐하시는 아들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의미와, ② 세례의 의식 관한 것과, ③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사실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제 8 과 예수님이 시험에 대비하심 (마 4:1-3) 목록으로


마 4:1-11에는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으나 이를 물리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 이하에서는 “시험을 받으신 실제적 사실”이 기록되었고,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되 이길 준비를 하시는 금식기도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할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 ① 성령에게 이끌리신 의미 ②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의미 ③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신 의미 ④ 세 부분으로 시험을 받으신 의미 ⑤ 시험을 이기신 방법 등에 대하여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그때에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하였습니다(1절).

1) 여기의 “그때”란 세례를 받으신 후를 의미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먼저 기도 하셨고 시험에 승리를 하셨습니다.

2)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감화되어 이끌리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내용과 역사로만 나타내십니다. 따라서 내용은 진리(성령:하나님의 뜻)이고 역사는 깨닫게 하시는 감화와 실천하게 하시는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경대로(하나님 뜻대로)시행하는 자가 성령님에게 이끌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성령님에게 이끌려 두 가지로 인도를 받으셨으니 ①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시게 함이요 ②유혹을 받되 이기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4)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 모범자로 기도 하셨고 또 인간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약 1:13).

② 예수님은 성도의 모범자이시므로 모든 일에 본이 되어 주셨고

③ 또 중보자사역을 위하여 인간의 연약과 고난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히 2:9 에서 “죽음을 맛보신다” 하셨고, 히 4:15 에서는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셔야 한다” 하셨으며 또 히 2:17-18 에서도 “범사에 형제와 같이 되어...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④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와 시험은 인간으로서의 모범과 연단이며 또 중보자로서의 연약한 인간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2. 성령에게 이끌리심과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하여

1) 성령에게 이끌리심은 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음이요 ②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시험 받는 일이 허용되고 ③ 시험을 받을수도 있는 여건(광야 생활, 배고픔 등)에 봉착됨을 의미하며

2)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도록 마음에 유혹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여 주리셨다”고 하셨습니다.

1) 광야란 세례요한이 전도하던 곳이요(마 3:1) 육신적인 생활 여건으로는 큰 취약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할 인생들은 누구나 이런 광야의 생활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생활을 체험하였고 또 하나님은 그곳에서 함께해 주셨습니다(신 32:10). 따라서 광야는 시험과 연단의 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신 것은 공생애 시작부터 닥쳐올 시험들을 이기시기 위하여 미리 무장하신 일입니다(엡 6:13,18). 마귀와 현실의 유혹을 안받을 수 없는 인간은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로 준비함은 물론자신의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십자가에 못 박을 필요가 있습니다(요일1:15-17). 갈 5:24 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금식기도란 이런 정욕들을 일시에 못 박는 연단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연단이 숙달되었을 때 세상으로부터 받는 유혹들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 교인들의 금식기도가 형식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며 금식 기도한 이후에는 반드시 그의 정과 욕이 십자가에 못 박혀 없어진 자처럼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3) 이런 취지에서 저희들도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미리 기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는 모세의 기도를 연상케 하는 특별한 은사에 따른 기도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모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금식은 모세와 (출 24:18) 여호수아에게도 있었습니다(출 24:13). 사람이 7일 이상 금식하기 어려운데 40일씩 금식한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붙드시듯이 붙들어 주시는 기적에 의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는 보통사람도 그렇게 하라는 모범이 아니고 특별한 선지자만 할 수 있는 은사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특별기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① 모든 성도가 기도로 시험을 이기도록 하라는 것과 ② 예수님은 특별한 선지자로서 마귀를 이기신 승리자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비상한 간섭으로 기도하셨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 성도들의 금식 기도가 반드시 기적을 동반한 은혜로 되는 것처럼 믿고 시행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보통 금식 기도는 극기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마귀는 예수님도 시험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시험하였고 40일간 기도 하셨는데도 시험을 한 것을 보면 마귀의 시험대상에는 성역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도 시험에 이길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베드로도 시험하였습니다.(눅 22:31)

2) 여기에서 “마귀가 시험을 했다”는 것은 그 목적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넘어뜨리려는데 있었고

3) 또 시험한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부당한 마음과 행동을 하시도록 제의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배고픈 사람의 마음속에 “빵을 훔쳐 먹으라는 부당한 방법을 알려 주는 것”과 같고 또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또 불법을 행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유혹 받는 자의 마음에 직접 일어나게도 할 수 있고 또는 사람을 통해서 제의 받게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담 때는 인류가 없었는 고로 뱀을 통해서 유혹을 했으나 지금은 현실 문명이나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배고플 때는 빵으로, 현실욕이 있을 때는 세상영광으로 유혹하는 것이 상례인 만큼 성도는 그런데서 받는 유혹을 항상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마 4:3-11) 목록으로


1. 예수님이 몹시 주리신 상황에서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1) 여기의 “시험하는 자”는 핍박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로 시험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이 40日동안 금식하여 주리신 상태를 알고 그 취약점을 시험에 이용하였습니다.

3) 유혹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이 되게 해보라”하였으니

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면서 가정하는 어법으로 유혹을 하였고,

② 몹시 주리신 상태이니까 “무슨 방법으로라도 먹어야 할 것 아니냐?”하는 뜻과

③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 만드는 기적쯤은 해야 하지 않느냐? 는 복합적인 시험을 한 것입니다.

4) 만일 예수님이 시험하는 자의 말대로 行하셨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① 우선 예수님이 유혹자의 뜻을 따르므로 마귀에게 순종하고 진리에는 불순종함이 될 것이요,

② 어려운 역경(주리신 상태)에서는 진리를 따르지 못하셨다는 뜻도 될 것이며

③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채 물욕을 채우신 결과가 되고

④ 하나님의 아들 됨을 마귀의 뜻에 의하여 기적으로(돌로 떡 되게 하는 것) 증명하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⑤ 그러나 예수님은 유혹자의 요청에 따라 기적을 나타내실 분도 아니며, 유혹자들은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자이므로(눅 16:31) 소용없는 일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보므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3:3, 롬 10:17).

5) 따라서 이 첫 번째 시험의 큰 의미는

① 환난 중에 범죄 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의 작전과

② 부당한 방법으로 물질을 취득하여 육신 보호강구책을 행하게 한 유혹이었습니다.

6)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① “기록되었으되”하시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셨으니, 이 의미는 본문에 인용하신 구약의 말씀(신 8:3)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입증도 되면서 유혹자의 말이 성경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인 만큼 성경이 오로지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하심은 “육신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영혼의 양식보다 더 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뜻이요

③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뜻은 “성경이 하나님 사상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만큼 그 모든 말씀(성경66권)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아야 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시험에 대처함이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신앙적의지가 확고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1) 이 유혹도 역시 마귀가 하였으나 불신앙의 사람들을 통하였을 것이요

2) “그들이 예수님을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5절)함은 예수님을 강제로 유치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유혹자의 말을 순순히 복종 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높은데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기적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역시 “기적으로 하나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뜻과 같습니다.

4) 그러나 이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라”는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유혹자는 시91:11-12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성경에 “하나님이 그 사자를 명하여 손으로(예수님을)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신다”하였으니 “그대로 되나 안 되나 해보라”한 것은 여러 가지 저의가 있는 유혹입니다. ① 하나는 예수님을 떨어지게 하여 죽게 하려는 저의가 있고, ②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게 하려는 유혹이요, ③ 셋째는 하나님의 이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라도 마귀의 말에 따르도록 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성도를 영육간에 죽게하는 유혹(요10:10), 말씀을 시험하게 하는 유혹, 하나님의 기적을 이용하여 마귀의 뜻을 따르게 하는 유혹 등을 감행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적을 믿고 높은데서 떨어지셨는데 상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마귀의 말에 순종한 것이 되고 그로 인하여 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인기에 편승하여 합법 또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하는 마귀의 술책인 것입니다.

5) 그래서 예수님은 신 6:16 말씀을 따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하시므로 “말씀을 시험하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거절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두드려 보고 믿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인기를 위하여 마귀의 요청을 듣고 성경 말씀을 점검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6) 따라서 이 두 번째 유혹은 ① 마귀의 뜻에 순종케 하려는 것과 ② 성경을 불신케 하려는 것과 ③ 부당한 방법으로 명예(인기)를 취하라는 유혹이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도 말씀 표준에서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3.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준다”는 유혹이었습니다.

1) 이것은 마귀의 뜻에 순종하여 천하만국의 영광을 누리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으로 구속사업을 하셔야 할 분인데, 고난을 포기하고 마귀의 뜻을 따르면 세상의 왕도 될 수 있으니 그것을 취하라는 뜻입니다.

2) 이 유혹은 “마귀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에 오르게 하여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유혹하였다”고 하셨는데 이 상태는 사람에 의한 실제적 활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높은 산이 유대 땅에 없고 그곳에서 보일만한 천하만국의 영광도 없으며 또 예수님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시기 위하여 높은 곳에 오르실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마귀가 예수님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마귀에게 절하므로 세상 영광을 얻을 것에 대한 영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악한 것을 생각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본 것입니다.

3)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도록 유혹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단 한번만이라도 마귀의 종이 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허용된 것이기 때문에(눅 4:6) 마귀가 그런 뜻을 제공 할 수 있었습니다.부당한 방법으로 권세와 부귀를 쟁취했다면 그것이 바로 마귀가 주는 세상영화요, 하나님은 그 배후에서 적당하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롬 13:1,삼상 2:7, 잠 16:4).

4) 따라서 세 번째 유혹의 핵심은 “세상영화에 도취되어 부당한 방법으로 이를 취득하라”는 유혹입니다. 성도는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하며(갈 5:23-26) 특히 불법으로 취득하는 영광은 꿈꾸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하시므로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신 6:13, 삼상7:13) 대처하시니 사탄은 더 이상 근접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났으며

6) 그 대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천사들이 수종들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영적 사역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돕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소자들에게도 각자에게 지정된 천사들을 보내어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10).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시험은 ① 모든 인간들이 받기 쉬운 물욕, 명예욕, 현세욕 등의 대표적 시험이었고 ②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기록된 말씀(성경)”에 의지하여 대항하셨으며 ③ 예수님에게 물욕, 명예욕, 현세욕이 없고 말씀 중심에서 떠나지 않음이 확고한 것을 안 사탄은 결국 물러 간 것입니다. ④ 그리고 시험을 이긴 성도에게는 큰 상급이 따르니 이것이 바로 천사가 수종들어 주는 것이요 “시험을 참는 일에 옳다 인정을 받으면 주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약 1:12)는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든 상황에서의 마귀의 유혹을 감지하고 꼭 성경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으므로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예수님의 전도 시작 (마 4:12-25)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전도 시작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이어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시작입니다. 저희들도 세례를 받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며 만 가지 유혹을 물리칠 연단을 터득한 후에 전도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3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처음 전도하심이요(12-17절), ② 네 제자를 부르심이며(18-22절) ③ 갈릴리 지경에서의 사역(23-25절)입니다.

1. 예수님의 처음 전도에 대하여(12-17절)

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유대땅에 계실 때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요한은 정의의 사자라 헤롯왕의 부도덕한 행위를 지적한 연고로 인치구금을 당한 것입니다.(마14:3-4)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그 지경을 떠나 갈릴리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12절).

2) 다시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사셨다 하였으니 여기에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은 옛날의 지역 명칭으로 옛날부터 스블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살던 지역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은 옛날 스블론 지파의 구역이고 그 곳에서 가버나움으로 오시기 위해 납달리 구역을 경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지경으로 오셨다’는 뜻은 ① 천민들이 사는 곳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② 이 사실로 구약의 예언된 말씀(사 9:1)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갈릴리바다 북변)에 가셔서 사셨으므로 그곳을 제 2고향이라고도 합니다.(13절)

3) 15-16절에서 예수님의 전도 초행 지역이 스블론 땅, 납달리 땅,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 땅이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처음 전파되므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사 9:1-2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단강 저편 해변길’이란 요단강 시발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 북쪽 건너편인 가버나움, 벳세다 지역을 일컬음이며 ‘이방의 갈릴리’란 유다지경과 유다지파가 아닌 갈릴리 지경을 사마리아 땅과 함께 이방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진리(예수님과 복음)가 없는 세계는 흑암이요, 사망의 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은 제일 먼저 전도하시는 특혜를 베푸셨습니다.

4) 17절에서 예수님은 그때부터 비로소 전도를 시작하셨고 전도의 제 1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습니다. 이는 고난당하는 백성들에게 천국을 주실 것이니 듣는 자들이 과거의 불신앙과 탈선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영접할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회개는 인간의 공로를 나타냄이 아니고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천국 또한 내세 천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사는 현상천국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눅23:43, 17:21). 따라서 예수님의 전도의 핵심은 회개의 촉구와 천국 실현이었습니다.

5)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나는 점은 예수님이 왜 세례 요한을 능력으로 구출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베드로와 바울사도를 감옥에서 구출하신 사실도 있었습니다(행12:7,16:26).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외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는 자신을 포함하여 핍박당하는 자를 핍박자의 손에서 구출하신 일이 없으셨으니 이는

① 요한의 갈 길이 하나님의 섭리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요 ② 또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함이 그를 큰 사람 되게 할 뿐 아니라 하늘의 상급을 쌓는 좋은 일로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마5:11-12).

2. 예수님은 개인전도에 이어 네 제자를 부르셨습니다(18-22절).

1) 이 네 사람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신앙 고백을 잘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반석)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베드로라고도 합니다(마16:18).

2) 유대인의 세계에서는 형과 아우를 잘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델포스’란 형제 용어를 잘 사용하는데 그들은 연령을 권위시하기 보다 실력을 더 권위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48:1,5) 그러므로 누가 형인지 아우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해변 (가버나움과 벳세다 지경)에 다니시다가 시몬의 형제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며 또 야고보의 형제도 그들의 부친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도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예수님이 전도하시는 일을 고기 잡는 것으로 비유하셨다는 점과 ②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며 또 그물을 깁는 상태에서 부르셨을 때에 그들은 곧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4) 전도자는 확신 있게 주님을 “곧 따르는 용기” 와 배와 부친(직업과 인정)을 버리고 따르는 헌신과 고기 잡는 기술만큼의 전도 실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잡은 고기를 놓치는 뜯어진 그물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명에 응하는 자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작정하신 그릇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와 소명으로 자기 뜻에 추종하는 네 사람의 제자를 확보하셨습니다

3. 갈릴리 지경에서의 사역을 말씀하셨는데(23-25절)

1)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공회당과 같은 집회 처소를 의미하고 가르치신 내용은 천국복음이었습니다. 구원받고 영생하며 하나님을 모시고 천국을 실현해 나가는 교훈이었습니다. 이 천국복음은 현실과 내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령한 복에 대한 교훈입니다.

2)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으니 건강을 위한 기적을 충분히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은 병과 허약을 다 치료하셨음이며‘백성 중에’란 뜻은 예수님을 찾아온 모든 병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타내신 기적은 불가능의 여지가 없는 기적이요, 또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기적입니다(히2:3-4).

3) 기적으로 병을 고치신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따라서 각종 병자들과 간질병자, 귀신들린 자까지 데려와서 고쳐 주시니 이로 인하여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베뢰아 지경)에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25절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모든 사람이 다 확고한 믿음을 갖고 좇은 것은 아닙니다.(눅 12:1, 요 6:66)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예수님의 전도모범과 ② 제자들의 사명적 자세와 ③ 예언의 성취와 ④ 전도를 고기 잡는 비유로 말씀하심에서 고기 잡는 장비와 기술, 고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는 문제 잡은 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한 그물 확보 등이 전도자들로 하여금 완벽한 믿음과 사명과 기술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 11 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Ⅰ (마 5:1-4) 목록으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상보훈이란 산에서 가르치신 귀한 교훈이란 뜻입니다. 5:1에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앉으셨음”은 서늘하고 조용한 교훈의 처소로 적합하였기 때문이며 이 산은 갈릴리 바다 북편에 인접한 “헷틴산”으로 예측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앞장 18절,23절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계셨다는 점과 또 헷틴산이 그 지경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한 장소에 앉으시니 제자들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왔고 2절에서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는데 대하여 유대인들의 표현법이 주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요4:35)는 말씀이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일어섰다”(행3:7)는 표현도 역시 주밀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주밀한 성품과 표현풍속을 나타낸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조용한 곳에 앉아서 가르치신 예수님, ② 들으러 나온 제자들의 모습 ③ 표현의 주밀함을 나타낸 유대인들의 성격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천국의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과 그가 받을 “천국의 복”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은

① 인간적 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질의 부족을 느끼는 가난, 건강의 부족을 느끼는 가난, 지식의 부족을 느끼는 가난도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역량에 비하여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가난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적 부족이란 인생의 본질면에서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지식과 능력과 생명의 유한성, 죄로 인한 타락성, 피조물로서의 비주권성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기 때문에 창조자 앞에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느끼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전능자를 의지하여 절대자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자신의 연약을 느끼는 사람은 전능자를 사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종교성의 정신입니다(행17:22). 예수님은 이런자에게 천국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받을 자가 심령이 가난한자라면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한 자이어야 하므로 자기를 비운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주인이 되시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③ 현실의 욕심이 없는 자입니다.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막 10:14)이란 말씀이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 (갈 5:24)”, 또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요일 2:15)”라는 말씀이 다 천국을 소유할 자의 자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천국의 의미는 ① 예수님이 함께하여 주시는 세계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안 계신 곳은 천국일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된 상태로도 계셨지만 부활하신 상태로도 계셨고 또 말씀과 성령으로도 함께 하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살 때 그 세계가 천국이 될 수 있으며(눅 17:21), ②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도 그 뜻을 복종하지 않으면 그 상태는 천국일 수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할 때 천국을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천국은 사탄과 죄가 없고 고난과 밤이 없으며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내세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천국은 현실 천국과 내세 천국으로 나눌 수 있으니 성도들은 그 세계를 동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성도의 현실 생활에서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믿음생활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 또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며 사는 즐거움 등이 현실 생활의 천국임을 인식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4절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으니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애통이 어떤 것일까요? 사람은 아픔과 슬픔과 회개와 탄식과 후회와 갈망과 절망 등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애통이 다 복되는 것은 아니요, 하나님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는 애통이어야 할 것이니 이는 감사의 눈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눈물, 회개의 눈물, 간절한 기도의 눈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눈물을 흘리는 자를 또한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긍휼의 눈물 (요 11:35)과 심한 통곡으로 간절한 기도의 눈물을 흘리셨고(히 5:7)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는 자의 눈물(왕하20:5),학대 받는 자의 눈물(전4:1), 전도자의 눈물(시126:5)을 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성도는 합당한 애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기도의 응답과 권고의 은총인 것입니다. 애통하는 기도에는 감사와 회개와 간절함이 포함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의 좋은 요소를 나타낸 것이므로 하나님이 속히 들으시고 위로해주시는 방법은 ① 진리의 깨달음과 ② 형통함의 은혜로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깨달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믿음이요, 이 믿음의 폭이 넓어질수록 위로 받는 은혜가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울던 아이도 그 어머니가 선물을 주면 울음을 그치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믿음 안에서 무한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고후 1:3-7).

 

제 12 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Ⅱ (마 5:5-7) 목록으로


1.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중 세 번째는 “온유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입니다. 이 말씀에서

1) “온유한자”란 성품이 유순한 것을 뜻하는데 이 성품은 예수님의 성품이 며(마11:29), 또 성령의 열매(갈5:23)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마음의 기본자세가 겸손이라면(마11:29) 온유는 겸손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고전 13:5). 어떤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어도 결코 성내지 않고 또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낭떠러지에 밀치려는 음모를 아시고도 성내지 않으셨고(눅4:29-30) 가룟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막 14:18) 또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온유한 자세를 지키셨습니다(사 53:7). 온유와 겸손은 성도의 기본자세 입니다.

2)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온유한 자에게 현실적인 발전을 주실 것을 약속하심입니다.

① 온유한 자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어 이웃들과 화목을 이루며 융화와 협력을 잘하여 대인관계로 덕을 세웁니다.

② 대인관계의 덕이란 상부상조의 바탕이 되어 이웃의 사랑과 협조를 힘입게 되므로 발전의 복이 성취될 뿐 아니라

③ 하나님은 그런 성도에게 창성하는 은혜도 주셔서 사업이 확장되게 하십니다. 모세는 온유하므로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민 12:3).

④ 동물도 맹폭한 동물은 멸종되어가고 유순한 동물은 많이 번식하지 않습니까? 만일 성도의 마음이 온유하지 않다면 그는 범죄의 유혹을 더 많이 받을 것이요, 자기를 사랑해주는 대상을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인자 무적”이란 말처럼 자기를 해하는 자가 없게 될 것이므로 그의 동조자는 많아질 것이고 따라서 발전은 더 잘 이룩되는 것입니다.

2.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1) “의”라는 것은 ① 죄사함 받는것(칭의)과 ② 바르게 사는 생활을 의미하는데 전자는 믿음을 따라 받는 것이고, 후자는 성도의 사명을 지키는 성경적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 안 짓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강조하는 “의”는 후자에 속합니다(시 1:1-3,6).

2) “목마른자 같이함” 이란 기갈 당한 자가 물을 갈망하는 것처럼 “의롭게 행하기 위하여 노력함”을 뜻하며 이렇게 “노력하는 의”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롬 3:22)을 받는 속죄의 은혜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3) “배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일에 만족함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의롭게 산다”는 것은 곧 성경(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고후 13:8),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요 사명이기 때문에(시119:56) 그렇게 복종한 일에 대하여 큰 만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으니 이 얼마나 만족한 일입니까(롬14:7-8)?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욕을 내세우고 그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 실망 한다면 이는 기독교 신앙의 목적을 바로 알지 못한 자의 생활입니다.

3. 다섯 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1) 여기의 “긍휼히 여김”은 사랑하는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범위와 방법은 다양하지만 긍휼은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을 살펴주고 선도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봉사하는 일과 선도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불쌍하면 전도를, 가난한 자가 불쌍하면 구제를, 죄를 짓고 쫓기는 자가 불쌍하면 선도를 하므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요 15:13).

2) “긍휼히 여김을 받음”은 긍휼을 심은 만큼 그 수확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선도 헛되지 않게 하신다”(마 10:42)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환경은 세월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긍휼을 받아야 할 입장이 되었을 때 반드시 그 보상을 넘치게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6.25당시에 우익으로 몰려 죽게 된 사람을 잘 변호 증언하므로 살려준 일이 있었는데 3개월 후 우익이 승리 하면서 자기를 살려준 좌익을 역시 죽음의 위기에서 죽지 않게 하므로 보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고대소설 흥부와 놀부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성도는 긍휼을 베풀어야 할 기회에 긍휼을 베푸는 일을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 Ⅲ (마 5:8-12) 목록으로


1. 여섯째 복은 “청결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1) 청결한 마음은 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요, ② 거듭난 마음이며(요3:3) ③ 진리를 믿는 마음이요(요6:29,69), ④ 진실하고 의로운 마음이요(시15:2,51:6,145:18, 잠8:20, 욥22:23,29), ⑤ 겸손하고 사모하는 마음입니다(시107:9, 벧전5:5). 거듭난 심령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은 완악한 자, 교만한 자, 불의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지 않으며, 겸손하고 의롭게 행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또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위와 같이 정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셨으니 곧 계시의 정신(엡1:17), 마음눈(엡1:18), 착한양심(딤전1:5,19, 히13:18, 벧전3:16,21), 청결한 양심(딤후1:3), 깨끗한 양심(딤전3:9), 좋은 땅(마13:23)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깨달음에 민감하지 못하면 이는 지각의 부족과 함께(히5:14) 마음이 청결치 못한 연고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본다”는 뜻은 “믿고 안다”(요6:69,엡4:13)는 뜻입니다. 또 발견만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교제와 복 받음을 의미합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울 때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청결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청결한 마음으로 찬송하고 소원하며 충성할 때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청결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생활을 큰 복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2. 일곱째 복은 “화평케 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받는 복”입니다.

1) “화평케 한다”는 뜻은 하나님과 이웃간에 화평을 만드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① 성경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고(욥22:21) 이웃과도 화목해야 한다(마5:24)고 하셨습니다.

② 하나님과의 화목은 믿음을 통하여 1차적으로 성도와의 구속적 관계를 맺지만 2차적으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거리낌이 없는 화목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화평케 하라”는 뜻은 하나님과 이웃간에 “거리낌이 없도록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이 생활을 바로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징계하시고(히12:8), 화목하지 못한 이웃은 더욱 대적 할 것입니다(마5:25).

③ 화평케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회개하는 길뿐이고 혹 화목하지 못한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그 원인을 살펴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여 회개, 보상 또는 사랑의 자세를 충분히 나타내야 합니다. 성도의 편에서 충분한 화해의 표시를 했으나 상대방이 더 완악하여 화해해주지 않는 것은 책임이 없을 것입니다.

④ 성도는 화평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 분쟁의 위험을 합리적으로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랑의 실천만 잘하면 분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겸손, 합법, 이해, 양보, 봉사, 희생, 언어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이요 화평을 만드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받음”은 “그 호칭을 시행하기에 어색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본래 “자녀 되는 특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받는 특권이고 은혜입니다(요1:12). 이 명분은 성도가 사랑의 공로로 받는 것도 아니며 또 받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화평을 도모하는 사명을 이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란 명분이 어울릴 수 없습니다. 마치 싸우고 있는 성도에게 성도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으로 화평을 도모하는 식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을 때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3. 여덞 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므로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 는 뜻은 죄악과 싸우므로 고난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핍박이 따를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바울, 베드로, 요한도 말씀하셨습니다(행14:22,롬8:18,고후4:17,벧전2:19,5:16,계20:4).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 고 하셨으니 성도는 신앙과 정의와 양심과 사명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롬5:3).

2) “천국이 저희의 것”이란 말씀은 천국에서 구원 이외의 복으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급은 ① 미래에 천국에서 주신다는 뜻이요 ② 영생구원의 복 이외의 것으로 복 주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고난만 당하다가 순교하였거나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내세 천국이 아니면 어디서 그 보상을 받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상급은 꼭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영광의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소유란 뜻입니다.

3)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을 인한 모든 핍박을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하겠고 앞서간 선지자들의 모범을 항상 흠모하여야 할 것입니다(11-12절).

 

제 14 과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목록으로


1. 소금에 대한 교훈.

1) 예수님은 성도를 세상의 소금과 빛(13,14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맛이 있으므로 소금인즉, 만일 짠맛이 없으면 소금 아닌 모래에 불과 할뿐이므로 버리워져 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도가 믿음의 능력(짠맛, 빌 4:13)이 없으면, 참 성도가 아니며 불신자보다 더 천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2) 예수님은 성도의 사회적 사명을 소금역할에 비유하였습니다.

① 소금은 바닷물에 2.8%함유되어있고 광물성으로 땅에도 매장되어 있습니다.

② 인체에는 2.7%가 들어있으며, 사람은 하루에 10-20g의 소금을 필요로 합니다.

③ 소금은 사람의 건강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보화보다 더 중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④ 소금의 특징은 ㉠ 부패하지 않으며 ㉡ 자신을 희생하여 짠맛을 내므로 자체의 불변성과 희생적 봉사를 교훈삼아야 할 것입니다.

⑤ 소금의 용도는 ㉠ 음식의 맛을 내는 일 ㉡ 건강요소를 제공하는 일 ㉢ 신체적 약용 ㉣ 유화제 ㉤ 부제 ㉥ 물리적, 화학적 용품 ㉦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도 사용된 것입니다(레 2:13).

3) 성경에 나타난 소금의 용도를 살펴보면

① 롯의 처를 소금기둥이 되게 하시므로 심판의 도구로 쓰신 일이 있고(창19:26,막 9:49)

② 언약의 불변성을 상징하는 제물로 쓰신 일이 있으며(레 2:13)

③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므로 유연성 역할을 통한 화목의 상징으로 말씀하셨고(막 9:50)

④ “말을‧‧‧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골4:6)하시므로 언사의 지혜를 비유하셨습니다.

⑤ 또 짠맛 있는 것은 소금뿐이므로 다른 것으로는 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3절).

4) 이 소금의 신령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① 부패하지 않음이니...이는 진리(벧전1:23)와 성도의 불변한 믿음을 뜻합니다.

② 소금의 희생으로 짠맛을 나타내니,,,이는 성도의 봉사와 희생적 생활을 뜻하며

③ 짠맛으로서의 유익이 다양한 만큼 소금을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에 접촉하여 범사에 유익하게 역사하는 믿음의 활동을 뜻합니다.

5) 소금은 귀한 일을 하면서도 존귀한 대접은 받지 못합니다.세례요한도 귀한 일을 하였지만 사람들은 임의로 대우하였습니다(막9:13). 성도들도 필히 믿음의 능력을 보유하여 소금처럼 다양하게 유익을 주는 사회의 인물들이 되면서도 늘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빛에 대한 교훈.

1) ① 성도를 “세상의 빛이라”(14절)하시므로 성도의 신분과 사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뜻하므로(사9:2,요1:4) 성도의 신분이 빛 되신 주님과 연합된 존귀함을 말씀하셨고 또 빛의 사명은 “성도의 착한 행실”(16절)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산 위의 동리가 숨기우지 못함” (14절)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은닉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시139:7-10). 옛날에 유대인들이 대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높은 산이나 언덕을 요새화하여 세운 동리라도 빛 앞에는 숨길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이나 골란고원, 맛사다 등의 산위에 세운 동리가 허다하였습니다.

③ 15절에서 “등불을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함”은 성도가 빛을 가리어서는 안 됨을 뜻하며,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비취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④ 16절에서 “빛은 모든 사람을 상대한 성도의 착한 행실로서 성도가 이 사명을 잘 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빛은 세 가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① 어두움을 밝히는 성질로 이는 진실을 뜻하고,

② 곧게 나가는 성질로 이는 정의롭게 행함을 뜻하며

③ 뜨겁게 하는 성질이 있으니 이는 성도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이 말씀에서 주시는 신령한 교훈.

① 성도를 빛에 비유함은 빛 되신 예수님의 대행자라는 점과

② 빛의 사명은 모든 이를 상대한 착한 행실, 즉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며

③ 성도가 결코 빛을 가리 우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될 것이요

④ 빛 된 생활을 나타내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여야 하며

⑤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하며

⑥ 성도는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하여 모든 이에게 감화를 끼치고 전도에 유익을 주며 어두운 세상을 밝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 (마 5:17-20)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 우선 17절에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하셨으니 여기의

1) “율법과 선지지”는 구약성경과 구약에 근거한 종교형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이란 주로 모세 5경을 의미하였고, 그 이외의 성경을 선지자(선지자의 글)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① 성전에서 구약적 제사를 드리신 일이 없었고,

②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요한까지”라 하셨으며(마11:13),

③ 또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12:8), 하나님의 아들(요8:54), 하나님이라(요14:8)하신즉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해하여 구약의 율법과 율법의 제도를 거스리고 폐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이나 의도를 폐하지 않으심은 물론 거스리시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①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이니(갈4:4), 이는 예수님이 율법을 더 자세하게 가르치신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마5:21-22).

② 또 구약성경을 인준하므로 구약의 말씀에 오류가 없었음을 증명하심이 되는 것이요,

③ 구약이 예언한 것과 의도하는 목적을 성취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과 의도는 바로 메시야의 구원사역으로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의 성취자가 되신 것입니다.

2. 18절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1점1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1) 천지는 없어지게 되어 있으나(벧후3:10,전3:1)

2)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 없으며(벧전1:25)

3) 1점 1획까지도 없어질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감이 적은 부분에까지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축자영감이란 신학적 용어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전체적 의미로만 교훈받을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한 글자에 이르기까지 잘 살피고 잘 터득해야 합니다.

4) 또 “다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적 성취의 진실성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3. 19절에서는 “스승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 신앙의 스승은 계명의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① 1점1획까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요, ② 계명 중 작다는 것이 사건의 형편으로 볼 때 덜 중요한 것일 뿐 말씀의 권위가 작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버린다”는 것은 계명 준수를 경홀히 여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작은 계명까지라도 교훈과 실천에 성실을 다하면서 남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신앙스승의 도리입니다.

3) 주밀한 깨달음과 실천과 증언이 일치하는 스승은 “천국에서 크다”는 칭찬(상급)이 있을 것이나, 1점1획의 교훈과 실천을 무시한 채 참신한 교육을 못한 스승은 “천국에서 작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하셨으니 이는 하늘의 상급이 구원 받은자의 성실성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20절에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셨으니,

1) 여기의 “너희의 의”는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은 의” 즉,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신 의”를 의미하고,

2)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는 그들이 율법을 성실하게 지켜서 얻는 행위인바 이것은 낡은 옷과 같고(사64:6), “결백할 수 없는 의”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롬3:20,갈2:16).

3) 따라서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율법주의적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십자가의 의”라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의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들은

1)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으시면서 사셨다는 점과,

2) 예수님 당시에 구약성경은 율법과 선지자란 말로 호칭되었다는 점과,

3) 그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노력하는 율법행위로 의로움을 받는 줄로 착각한 사실과,

4) 예수님은 율법의 반대자나 폐기자가 아니요, 율법의 교훈과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임과,

5) 하나님의 말씀은 1점1획까지라도 영감 되어 사람이 가감할 수 없음은 물론 글자나 획 하나에까지도 영감 된 진리가 있음을 나타내셨음과

6) 예수님의 구약에 대한 거론이 바로 그 당시에 있는 구약전체를 인준해 주셨음과

7)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적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과(약2:10,갈3:10,11)

8) 신앙의 지도자는 진리의 깊은 연구와 실천과 증언에 성실해야 할 것과

9) 천국에서도 상급의 격차가 있고,

10)십자가의 의만이 구원을 줄 수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16 과 형제와 화목하라 (마 5:21-26)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형제 또는 이웃과 화목하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① 21-22절에서는 폭력을 극히 삼가야 할 것과, ② 23-26절에서는 화해를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성도는 폭력을 극히 삼가야 합니다(21-22절).

1)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살인금지에 관한 율법을 받았습니다(출20:13,신16:18,19:21). 그래서 그들은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 즉 살인을 해야만 심판을 받고 살인에 이르지 않는 폭력은 심판을 받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십계명은 계명의 요약문일 뿐 자세하게 다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살인을 해야만 죄가 되어 심판을 받고 계획만 한 것은 죄가 안 되는 줄로 오해하여 살인 아닌 폭력은 심판 받을 일이 없는 듯이 가르쳤으므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시정하여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즉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나(신경질을 부리는 것) 욕하는 것이나(라가=욕설을 뜻함) “미련한 놈”이라고 무시하는 언사도 역시 죄가 되고 이런 행위가 사람을 미워하는 살인행위의 시초이며 또 크게 여기는 죄라야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므로 살인이 아닌 작게 여기는 죄(욕)라도 지옥불에 들어가야 마땅할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더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취지를 더 상세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3)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사함 받지 못한 자가 들어가는 것인바 살인이나 살인계획이 다 죄이므로 사망에 해당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롬6:23,본문26절). 따라서 성도가 형제와 화목한 생활을 하려면 우선 화목을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미운 마음, 노하는 태도, 언어의 폭력부터 삼가야 할 것입니다. 언어의 폭력을 죄 아닌 것처럼 여기는 자가 많으나 그것도 역시 완전한 죄요, 그것 한 가지를 사함 받지 못했다고 가상을 하여도 지옥 가는 조건은 충분한 것입니다

2. 화해를 힘써야 합니다(23-26절).

1) 하나님께 예물(제사)을 드리다가라도 형제로부터 원망 받을 일이 생각나면 즉시 예물 드리는 일(신약시대의 예배나 기도)을 중지하고 먼저 형제 화목을 성취한 다음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① 형제 화목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예배)보다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요, ② 또 형제화목이 제사응답과 결탁되어 있음이요, ③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없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요일4:20)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해와 양보와 희생이 너무 부족한 시대인 만큼 털끝만큼이라도 이웃을 해하면 큰 원망을 듣고 변상을 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여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함은 물론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 불화의 관계는 오래 갈수록 해롭고 급히 화해하여야 마땅합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길에 있을 때에”란 뜻은 법관 앞에 가서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길을 가는 중이라도 스스로를 살펴 잘못을 시인하고 화해를 하는 것이 법관 앞에 가서 하는 것보다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법관은 화해의 중재자가 아니고 잘못한 자를 벌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화해를 더디하므로 재판관에게까지 갔을 때는 여지없이 죄판정을 받아 관예(형리)에게 넘겨져서 벌(옥에 들어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지옥은 유죄심판으로 가게 되고 100가지 율법 중 하나만 범하여도 유죄가 되기 때문에(약2:10)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 입니다(롬3:20,갈3:10,11).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하심은 “완전한 속죄가 아니면 사망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큰 죄를 범해야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작은 죄라도 완전 속죄를 받지 못하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형제간의 불화된 상황에서 작은 것이라도 거리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형제화목에 대하여 원만한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형제사랑에 대한 책임의 거리낌을 없애고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7 과 간음죄와 관련된 교훈 (마 5:27-32)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3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음행죄에 대한 엄밀한 해석이요(27-28절-), ② 범죄방지를 위한 노력을 강조하심이며(29-30절), ③ 이혼의 남용을 피하고 합당한 혼인을 할 것(31-32절)에 대한 것입니다.

1. 음행죄에 대한 엄밀한 해석에 대하여(27-28절).

1)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들은 “간음하지 말라”(출20:14)는 계명을 육체적 범죄로만 생각하고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정신적 간음”도 같은 죄에 해당한다 하셨으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더 깨달아야 할 것은

① 간음(모이케이아)과 음행(포르네이아)의 구별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말의 국어사전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임자 있는 몸들이 각기 다른 대상을 만날 때 간음이라하고, 비윤리적 불륜 관계를 음행이라고 구별 지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 음행죄 외에도 도적이나 살인에 대한 정신적 범죄도 정죄하신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마5:21-22).

② 음행이 만연되는 현실에서 “간음을 정죄하여서는 안된다”는 형법개정이 여론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교훈은 정신적 범죄에서부터 정죄하신 것을 깨달아서 엄하게 경계하고 또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욥31:1-9).

③ 왜 여자의 범죄(음행)를 중심으로 말씀하셨는가에 대하여 이는 남자의 음행을 은폐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행죄는 남녀간의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범죄를 중심으로 나타내신 것은 남자를 가장으로 세운 사회에서 불륜관계로 이혼하게 될 때는 여자가 나가야 함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범죄방지를 위한 노력에 대하여(29-30절).

1) “오른눈, 오른손”은 육체의 한 부분을 대표로 나타내신 말씀이고,

2) “실족한다”는 뜻은 그 육체가 정신 작용에 따라 범죄에 이용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까지 “죄를 짓게 된다”, “시험에 든다”는 뜻입니다.

3) 눈으로 안 보아야 할 것을 보므로 범죄 하는 경우, 또 손으로 범죄 하는 경우에 몸의 지체가 스스로 범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부패한 정신적 지도에 따라 지체까지 범죄의 도구가 된 것이 사실이므로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의 의미는 ① 범죄한대로 공평하게 벌해야 한다는 의미와, ② 육이 없어질 때 범죄의 가능성을 그만큼 배제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음을 기억하십시오(벧전4:1).

4) 범죄로 인한 부패성은 육과 영이 다 갖고 있습니다(고전5:18, 고후7:1, 살전5:23).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 역사하며 몸을 죽게 한다 하셨고(롬7:5),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롬8:10,13)고 하신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떤 지체가 “죄의 도구가 된다”면 그것을 없애야 하는가? 할 때 이 말씀은 “부분적 지체가 없어 불편을 당함이 그 지체가 있음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낫다”는 역설적 강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은 몸을 위하시며 또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고전6:13,15: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6) 눈이나 손이 범죄의 도구가 되었을 때 그것을 찍어 없애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가? 할 때 이 표현도 역시 죄값이 사망이란 전제하에서 죄의 무서움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일 뿐 속죄의 공로를 무효케 하심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빼고, 손목을 자르는 심정으로 엄히 경계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이혼의 남용을 피하고 합당한 혼인을 시도함에 대하여(31-32절).

1)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혼하는 일을 예사로 알고 지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내를 버릴 때는 이혼증서를 써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말씀은 더 상세합니다. 신24:1-4에서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에게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수치 되는 일”은 음행을 뜻합니다.

2) 그러면 어느 한쪽에 수치 되는 일이 있다고 가상할 때 즉시 이혼해야만 하는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회개와 용서가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호1:2,3:1-3에 “호세아로 하여금 창녀 된 아내를 데려오라”하신 말씀과, ② 마18:15-16에서 “무슨 범죄든지 사전에 권면하고 용서하라”(마18:21-22)는 말씀과, ③ 요18:11에서 예수님도 음행한 여인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습이 아닌 범행이면 회개하고 돌이키게 한 후 용서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그만한 아량과 포용이 부족할 때에는 이혼을 하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혹 혼인 예식을 믿는 식으로 하였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또 성도는 수치 되는 일이 아닌 때에는 이혼의 사유가 될 것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질병이나 성격차이, 자녀를 생산 못하는 일, 가정 배경에 수치스러운 일이 있는 것 등도 역시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부당하게 이혼을 강요했을 때 그 이혼 당한 사람에게 음행한 죄가 없으면 그 계율을 어긴 죄가 이혼을 강요한 자에게 있다 하셨고(32절, 고전7:2-4), 부당하게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셨으므로 재혼에 신중을 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혼을 강요 당한 후에 강요한 남편이 다른 여인에게 장가들었을 때는 그 이혼당한 여인은 자유 할 수 있습니다.

4) 성도가 음행을 방지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① 우선 정신적으로 힘쓰고 기도하셔야 하며(욥31:1,9),

② 혼인한 후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하며(고전7:1-5),

③ 이성간의 유혹성 있고 궤설에 오를 듯한 교제를 일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음행의 유혹은 피하므로 물리칠 수 있다(고전5:18)”고 하셨습니다.

5) 오늘날에도 가정의 윤리를 성경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잘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법을 “경건한 자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말2:15). 부부의 불합리한 이혼으로 자녀들이 탈선하는 실례가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6) 불신앙 상태에서 이혼한 것은 그 당사자가 믿지 않았을 때는 거리낌이 없었을지라도 믿은 다음에 깨달았으면(재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결합해야 할 것이요, 이미 재혼을 했으면 그 재혼을 파기하지 않게 함이 이중 이혼을 방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정신적 범죄에서부터 회개해야 할 것과, ② 음행은 물론 모든 불륜관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할 것과, ③ 부부생활의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18 과 맹세하지 말라 (마 5:33-37) 목록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① 맹세에 대한 잘못된 교훈을 지도하시고, ② 맹세를 안 하고 사는 진실한 성도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본문 33절을 보시면 “옛사람에게 헛맹새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랍비(율법교사)들의 교훈이 있습니다.

1) 이 교훈은 레19:12에 근거한 교훈이지만 율법이 말씀한 의도를 그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과 의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이 말씀은 “맹세를 하고 잘 지키라”는 적극성 있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관련하여 거짓맹세, 즉 실현성 없는 맹세를 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2) 율법시대의 백성들이 서로 신용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보증으로 세우고 맹세한 다음 그것을 지키지 않으므로 많은 송사거리를 만들어낸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그와 같은 잘못된 맹세를 하지 말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3) 그들의 맹세가 잘못된 이유는

① 평소에 없는 신용을 맹세로 획득해 보려는 것이 잘못이었고,

② 맹세의 힘이 약한즉, 그것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하여 보증(물)까지 제시한 점이며,

③ 맹세는 미래의 약속인바 미래의 일을 모르면서 맹세한 것인 만큼 잘못된 일이며,

④ 맹세를 위반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만한 보증물을 세운 것 등이 잘못된 일인 것입니다.

4) 그래서 되도록이면 “맹세를 안 하고 사는 진실한 백성들이 되라”는 교훈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같은 맥락으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2. 신용세계에서는 사실상 맹세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지키며, 의심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 약속을 위반하는 사례가 생겼다 해도 신용세계에서는 이를 불가피한 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회는 너무 믿지 못하는 풍조가 많아서 서약서, 계약서, 각서, 보증서, 신원증명서, 심지어는 보증보험까지 제시해야만 하니 이것은 다 불신풍조의 만연함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신세계에서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성도의 세계만은 맹세를 다짐할 필요가 없는 진실하고 신용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또 맹세를 할 때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신의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본래 맹세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맹세의 확고함을 더욱 인정받기 위하여 증거물을 내세우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증거물들은 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으니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로,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도성으로, 머리도 하나님이 검고 희게 하시는 것이어서 만일 맹세를 위반할 경우에는 그 보증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까지 명예훼손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맹세의 보증물 세우는 문제도 마땅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흔히 성도란 명예와 교인이란 명분을 내세워 신용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만, 만일에라도 신용스럽지 못했을 때는 “성도와 교인의 주” 되시는 하나님과 교회의 명예를 여지없이 실추시키게 되므로 역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37절의 “옳다옳다 아니라아니라”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옳다고 생각하여 할만한 것은 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하므로 불확실한 여운을 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1) 즉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판단하는 지혜를 갖고,

2)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또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하여 확실하게 하고,

3) 약속을 할지라도 미래의 세계는 불확실한 것이니까 불확실한 일로 당하는 책임까지 장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니까‧‧‧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약4:14,15)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① 다만 “나의 책임이므로 힘이 닿는 한 노력하겠다”는 정도가 적당하고, ② 또 자기의 힘과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꼭 시행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그리고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난다”하셨으니 이것은 확실한 판단으로 확실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맹세에 관련된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린다면

1) 진실치 못한 사람들과 혼돈하여 사는 세계에서 맹세 같은 것이 전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맹세란 강한 일방적 약속을 뜻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약속이나 계약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성도는 계약을 잘 지켜야 하고, 우려성 있는 계약을 하지 말아야 하며, 또 계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미리 예상하여 그 대책계약까지 합의하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신용세계란 약속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약속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지켜지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수용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라시는 맹세없이 살아도 되는 세계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서원입니다.

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을 서원(레27:2,민30:2,신23:21)이라 하셨고, 또 맹세란 말로도 사용하였습니다(수9:18,전8:2).

② 문제는 하나님께 드린 맹세나 서원은 취소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말라”고 하셨고(시15:4), 또 그런 사례가 여호수아 9장, 10장에 나타나 있으니(수9:3-6,15,18-21,10:6-14) 잘못알고 속임을 당하여 서원한 것이라도 그대로 이행하므로 복을 받은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위반한 것 때문에 화를 받은 사실이 있으니, 바로 사울이 기브온족을 죽인 일입니다(삼하21:1-9,삼상22:18,19). 사람을 상대한 약속이나 맹세는 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변동, 파기, 타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범위에서 간과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권리 밖에서 잘못 맹세하였든지(자식이 부모의 승낙 없이 한 것;민30:2-5) 또는 자유인으로 맹세한 후 부자유인이 되어 그 맹세 실천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하는 경우(예:처녀 때 맹세하여 지키던 중 결혼한 후 남편이 반대하는 경우;민30:6-16)에 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린 맹세는 자신에게 자유와 능력이 있는 한 지켜야 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결국 하나님을 속인 죄가 되 는 것입니다(신23:21). 진실과 이해와 협력이 있는 세상이라면 맹세가 없어도 될 것임을 예수님이 강조하셨으므로 성도들은 최대한 신용 있게 사는 세계를 이루셔야 할 것입니다.

 

제 19 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마 5:38-48) 목록으로


1. 이 말씀의 교훈은 한마디로 표현할 때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1) 성도는 어떤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웃을 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거론되었는데 결론은 “이들을 다 사랑으로 대하라”는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을 크게 나누면 악한 자와 선한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악한 자는 남의 뺨을 치는 자, 송사하여 속옷을 얻으려는 자, 억지로 일을 시키는 자, 원수 맺는 자, 핍박하는 자, 세리, 또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다 불의하고 악한 자에 속하며 선한 자는 의인(45절), 사랑하는 자(46절), 형제(47절)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2) 이 말씀의 ① “의인”이란 죄사함 받은 성도와 성도가 계명을 성실하게 지킬 때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요(롬8:30,마1:19,행10:22), ② 사랑하는 자란 자기의 가족이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고, ③ 형제란 믿음의 권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12:50). 이렇게 우리의 이웃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본받아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악한 자에 대한 처신에서(38-40절)

① 예수님 시대에 율법사들이 율법을 잘못 가르친 사례가 있었으니 그것은 38절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교훈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율법에 있는 말씀으로(출21:24,레24:20,신19:21) 재판관이 범죄자에 대한 시벌을 할 때에 인정에 치우치지 말고 범죄의 분량에 따라 대응하는 벌을 가하여 범죄를 억제하는 목적으로 주신 법의 적용을 바르게 할 것을 가르치셨는데 이것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개인대 개인으로 보복하라”는 뜻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교정하시면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② 그러면 악한 자는 어떤 자들이며 그들을 대적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악한 자는 폭행자로서 이유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주먹부터 쓰는 자입니다.

㉡ 그래서 오른뺨을 맞았는데 또 “왼뺨을 돌려대라”하신 것은 “고의로 매를 더 맞으라는 뜻이 아니고,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마주 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른 뺨을 친자가 당연히 왼뺨도 칠 것이니까 무저항 상태에서 다 맞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기에 무슨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까? 폭력이란 서로 치고 받으면 시비의 우열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둘이 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갈5:15). 그러나 한편이 무저항주의로 맞으면 맞는 편이 송사에서는 승리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법도 지킨 것이 되기 때문에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핍박을 미리 피하는 것을 무조건 비겁하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눅4:30).

㉣ 또 어떤 악인은 아주 경미한 일로 송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옷을 가지려고 송사한다”는 것은 재력이 없는 자에게 겉옷을 벗기기 어려우니까 “속옷”이라도 가지려는 것인데 이것은 송사자의 인색함을 지적한 말씀이며 또 송사를 당한 피고는 잘못이 있는 자인만큼 자기 잘못에 대하여 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속옷까지 벗기려는 송사자는 악한 자인만큼 그렇게 인색해서는 안 되며 범죄 한 피고는 회개하는 뜻으로 후하게 보상하도록 노력할지언정 거기에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레19:18,잠24:29,25:21).

2) 구하는 자에 대한 처신에서(41-42절)

① 어떤 사람이 “억지로 5리를 동행하자”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자기의 짐을 지고 멀리 동행해 주기를 바라는 무리한 요청으로 로마군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구하거나 금전을 꾸고자 하는 경우도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최대한 봉사하는 주의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5리를 가주기를 바랄 때 10리를 가주는 것”이나 “구하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하심은 최대한 협력하고 봉사하는 자세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③ 물론 요청을 받았을 때는 자신의 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줄 것이 없다”든지 “다른 일에 시간이 약속되었다”든지 하여 거절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최선책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갖고 있으면서 인색하여 주지 못하는 것보다는 줄 것을 갖지 않은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성도는 여유가 있을 때 마땅히 봉사하여야 하고, 여유가 없으므로 궁할지라도 자족하는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행3:6).

④ 이와 같은 교훈으로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마10:8, 눅6:38,행20:35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3) 원수(대적자)에 대한 처신에서(43-48절)

① 우선 이 말씀은 어떤 단체나 국가적인 원수에 대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원수된 상대자에 대하여 개인적 권리와 의지로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체나 국가는 통치하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독립된 행동을 취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것은 왕권에 의하여 명령되기 때문입니다(롬13:1).

② 43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교훈이 있었는데 여기의 “원수를 미워하라”는 부분은 율법에 없는 것인데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전승시킨 말입니다(마15:1-6). 레19:17에 보면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범죄자를 경계하고 책선하는 것”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으로 교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분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③ 그 말씀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해롭게 하는 핍박자가 있을 수 있으나 성도는 그를 사랑하여야 하므로 사실상 “원수”라는 단어가 성도에게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혹 원수로 여긴 일이(원수는 보복을 계획할 때 성립됨) 있었다 하더라도 성도는 속히 미움과 보복심을 풀고 오히려 그의 완악을 근심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반적 사랑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지 않고 자연계의 혜택은 물론 현실적인 복을 많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은 이렇게 폭이 넓습니다.

㉡ 하나님은 자기에게 원수 되었던 자들을 특별섭리로 구원해 주셨으니 이 사랑은 더욱 충분한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으니 성도는 이런 모범과 또 죄인 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사실을 생각하여서라도 원수를 미워하거나 보복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④ 성도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아들)된 덕이기 때문입니다.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하신 것은 “광범위한 사랑실천의 공로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 아닌 성도의 당연한 본분을 말씀하신 것이며, “아들”이란 개념은 딸이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엡 2:19)

㉡ 성도의 사랑의 폭이 세리나 이방인보다는 나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리도 착취를 일삼는 죄인이지만 자기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대상은 다 사랑하고,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역시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사랑하는 자만 선택하여 사랑을 한다면 세리나 이방인에 비할 때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랑의 빛이 세리나 이방인보다 밝지 않으면 성도로서의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또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본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온전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는 일은 오직 보편적 사랑을 실천함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사람도 사랑하고, 나쁜 사람도 사랑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상태입니까? 대적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꼭 이것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0 과 선행과 기도에 대하여 (마 6:1-8)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① 덕을 세우는 선행에 관한 말씀(1-4절)이고 ② 기도에 대한 상식(5-8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덕을 세우는 선행에 대하여(1-4절)

1) 선행이란 의를 행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1절의 “의를 행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 을 의미 합니다. “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공로로 속죄함 받는 의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계명을 지키는 의입니다. 본문의 의는 “사람이 행하는 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의”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이 “의”의 표준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표준에 달렸고 성경말씀에 계시된 것입니다.

② 2절 말씀에서 “구제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과 “구제하는 일”을 선행이 아니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이 “선행을 어떻게 실행하느냐”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행의 시행 방법이 옳지 않음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잘못을 범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23:5). 따라서 저희들은 선행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방법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의를 행함에 있어서

①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의”란 것은 그 표준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본다하여 행하고 안 본다하여 안할 성격의 일이 아니며 항상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의가 신령한 예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한다”는 말씀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칭찬을 받아 자기의 입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것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무를 묵묵히 이행하는 사람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할 때에 빛을 발할 것이며 향기가 날것이고 그 들어난 모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주게 될 것입니다. 묵묵히 시행하는 선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감화를 줄 수 있지만 사람에게 보이려는 선행은 덕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도 얻지 못할 것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외식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는다”는 뜻은 구제로 말미암아 칭찬이나 명성 얻기를 바람이고 “외식자”란 남을 위한 자선가가 아니고 자신을 위한 자선가 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선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지켜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자기의 선행을 선전한다는 뜻)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선행하는 일을 사람이 앎으로 칭찬이나 감사나 명성을 얻으면 그것이 이미 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런고로 구제할 때는 가까운 사람도 모르게 즉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은밀한 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 139:1-3) 다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사람이 주는 칭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더 귀한 것을 아셔서 사람에게 보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기도에 대한 상식입니다(5-8절).

기도에 대한 지식이 방대하지만 성도가 개인 기도를 함에 있어서

1) 우선 “골방기도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은밀한 기도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대중과 함께 합석하여 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마 18:19). 다만 ① 사람에게 나타내려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점과 ② 대중기도에 딸려가는 연약한 기도나 대중과 함께 기도하면서 혹 지장을 받는 경우 보다는 개인의 은밀한 기도가 더 효과적이란 말씀입니다.

2)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5-8절).

① “중언부언” 이란 “중복되는 말” 을 뜻하지만 언사를 성의 없이 표현하는 것도 의미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사도도 같은 기도를 세 번씩 한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마 26:44, 고후 12:8). 하나님께 드리는 의사표시는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나타내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고상한 말을 구상해서 사용해야 한다” 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 생각대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되 마음과 말을 다듬어서 나타내는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이 잘못 표현되어 사람이 듣기 민망하면 하나님 듣기에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 23:5에서 “바리새인들이 경문을 넓게 한다”는 말씀이 있지요? 이 말씀은 기도문을 많이 낭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이 많아야 이해하시고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씀이 있는데(출 3:7) 이 말씀은 말을 많이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고통을 호소하는 강한 표현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합리한 상태에서의 말이 많은 것보다 합리적 상태에서의 말이 적은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합리적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한 입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조리 있고 함축성 있게 간단히 해도 되는데 “기도를 많이 한다” 는 사실을 사람 앞에 나타내기 위하여 말을 많이 한다면 그런 기도는 잘못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라” 고 하셨으니 이 말씀도 외식적인 긴 기도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겔36:37,마7:7). 정성 없고 간절함도 없으면서 인기주의로 길게 기도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듯이 하나님도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 문제는 중심이 얼마나 통하느냐? 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선행과 기도를 하실 때에 하나님이 합당하게 여기시며 기뻐하시고 응답하실만하게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주기도문 연구 (마 6:9-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문의 모범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 따라서 기도문은 가르칠 수도 있고 배워서 숙달 할 수도 있습니다(눅11:1-4).

2) 예수님 당시에는 이 기도문이 구전으로 전달되었지만 후시대 사람들에게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성도들은 비단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말씀을 성경에 나타난 글로 전달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글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것임을 믿으셔서 듣는 것보다 보고 확인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듣는 것보다 읽으므로 느끼는 감화가 더 큽니다.

3) 예수님은 이 기도문을 즉흥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흥적이란 뜻은 쉽게 발표하셨고,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논리와 내용을 더 충실하게 나타내셨다면 내용이 더 많았을 것이고, 서민들이 쉽게 배워서 모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4) 기도는 과장이나 작태가 없이 자연적으로 진실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는 학문도 아니요, 웅변도 아니며, 꼭 논리가 맞아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리에 못 미치는 성도라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논리적이면 더 좋지만) 그렇지 못해도 믿음과 진실과 간절함만 있으면 하나님은 합당하게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5)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도문을 교훈하신 동기는 전체적으로 충실한 기도문을 다 가르치시려 한 것이 아니고,

① 우선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시고(마6:5-8),

② 모든 백성들이 가장 쉽게 터득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을 말씀하시려는데 있었으므로 저희들이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만일 이 기도문에 논리와 내용을 더 구비하여 가르치신다면, ① 감사하는 내용과, ② 영적축복을 더 자세히 구하는 내용이 포함되고, ③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단서까지 붙여주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은 내용의 구비조건보다 쉽게 활용하기 좋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이 기도문의 특징을 살피면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비할 때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뜻을 다 포함하였고, 극히 하나님 중심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셨으므로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① 이 말씀은 기도의 대상을 성부하나님으로 호칭하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기도할 때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게 되고(롬8:26),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쳐야 하므로(요16:24) 당연히 그 대상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②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천국보좌를 연상하신 것이요,(계 4:4)

③ 그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과 기도자의 관계가 영적으로 부자관계에 있음을 믿음으로 시인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란 말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앙의 증거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영의 아버지, 만물의 아버지, 양육의 아버지, 구원의 아버지로 믿기 때문에 그런 호칭을 할 수밖에 없고, 또 그 호칭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2) 기도의 내용에서 일곱 가지의 소원이 제시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시면,

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성이 사람들로부터 크게 칭송되기를 바라는 목적의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들로부터만 칭송을 받게 됩니다. 불신자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오직 성도만이 하나님의 명성을 높여 드리려면 ㉠ 우선 성도 자신들이 거룩해져야 하고,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소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함이며 또 말로만 구할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의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원과 의무이행 그리고 목적이 포함되어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빌1:20).

②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마6:33,막1:15). 그 말씀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고”한 것입니다. 이 나라는 세상에 있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인데 여기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대상은 성도뿐이기 때문에 ㉠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잘 순종하게 하옵시고, ㉡ 또 많은 택한 백성들이 신앙에 들어와지기를 소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딤전2:4). 따라서 이 소원도 성도의 계명 실천과 전도사명의 실천을 촉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 순종을 게을리 하거나 전도사명을 게을리 하면 안 될 기도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③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마귀의 역사를 통제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천국에는 마귀가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존재가 없지만 이 세상은 마귀의 역사가 허용된 곳이기 때문에(눅4:6) 마귀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항상 거역하므로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의 뜻이 잘 실현되려면 성도가 마귀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므로 여기에 연약한 성도를 도우사 거역하는 마귀의 역사를 통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욥2:6).

④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질을 구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워진 상태에 있을 때 하루 소용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므로 “이틀이상 먹을 것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물질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었습니다(잠30:8,9). 마6:30-34에 보시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키우신다”하셨고,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하셨으며, 또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할 것이라”하신 말씀과 대조하면 이렇게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것”이 꼭 맞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살면서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하고, 하루하루 생활에 충실 할 수만 있다면 큰 믿음, 큰 평안, 큰 행복을 성취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물에 욕심가진 저희들의 생활을 많이 반성하게 하시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섭취할 영혼의 양식도 우선적으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마4:4).

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줌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소원입니다. 이 용서는 구원받기 위한 전체적 죄책의 용서가 아니고 이미 의의 은총을 받고 사는 성도가 자주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징계아래 있는 상태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이웃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도 역시 사랑의 차원에서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인 죄에 대하여 용서받고 구원을 받은 저희들이니까 당연히 용서의 실천을 하면서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마 18:25-35). 또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월권해서도 안 됩니다(롬12:19). 만일 저희들의 연속되는 범죄가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진다면 저희들은 항상 매만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징계를 간과해 달라”는 사정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빠져서는 안 될 기도의 내용입니다(시103:10,벧후3:9).

⑥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소원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도록 유혹을 이기게 해 달라”는 소원입니다(마26:41).눅22:21-22에 보시면 “사탄이 베드로의 믿음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예수님이 그 믿음을 붙잡도록 기도해 주셨다”는 말씀이 있고, 또 롬8:26에서는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을 도우신다”고 하셨으므로 꼭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계명을 위반해야 될 일이나 위험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더욱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⑦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설령 범죄를 했더라도 그 죄에서 건짐 받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으니까 지금도 저희들이 어떤 거리끼는 문제를 계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더욱 회개하고 돌이켜지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마9:12). 하나님은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이시고(시40:2), 불한당을 만나 거의 죽게 된 상태에서도 건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분(눅10:33-34)이십니다. 그런고로 성도가 혹 범죄 상태에 있더라도 낙망하지 마시고 기도를 계속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 부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한 것은

① 하나님이 모든 나라와 모든 권세와 모든 영광의 주인이시므로

② 오직 하나님이 그 영광을 영원히 누리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 목적으로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극히 하나님 중심”임을 입증하신 말씀입니다.

③ 그런데 이 말씀이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유력한 사본(시내산, 바티칸, 베자사본)에는 없고, 단편사본에만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구가 기록된 것은 내용의 취지가 기도문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본문과의 문맥이 상통하고 또 대상29:11-12의 말씀과 상통하기 때문에 성경에 수록이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기도문은 ① 예수님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라셨다는 점과, ② 중요한 내용들을 간단하게 포괄하신 점과, ③ 극히 하나님 중심이고, 신령한 은혜 중심이란 점과, ④ 성도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곱 가지 의무를 포함하신 내용임을 유의하셔서 한 조목 한 조목 기도하실 때마다 중요한 의미를 심도 있게 다짐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모범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2 과 용서와 금식기도 (마 6:14-18)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① 용서에 관한 말씀(14-15절)과, ② 금식기도에 관한 말씀(16-18절)으로 되어있습니다.

1. 용서에 관한 말씀에서

1) “성도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그 성도의 과실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14절).

2) 이 말씀의 “너희”란 성도를 뜻하고 “사람의 과실”이란 모든 사람의 자기에 대한 잘못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성도와 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는 꼭 “형제”란 용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마5:24).

3) 또 “사람의 과실”이란 막연한 잘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피해를 끼친 과실, 즉 자기와 관계되는 불법이나 잘못을 뜻합니다.

4) 그런 과실에 대하여 성도는 용서를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모든 이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해야 함은

① 기독교가 용서의 종교이기 때문이요,

②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며

③ 인간에게 보복하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요(롬12:19),

④ 하나님께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시7:11),

⑤ 공의롭게 신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살전4:6).

5) 또 이런 용서의 의미는 시벌과 관계되는 사항에서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이나 명예나 신체나 물질에 손해가 가해졌을 경우에 “용서”란 명목으로 모든 것을 다 불문에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정당한 법절차를 따라 손해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마5:25).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공평성과 사랑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시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6) 15절 말씀에서 “만일 성도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과실을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만일 성도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① 그러나 이 말씀의 “성도의 과실”이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요일5:16)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죄는 사망(지옥)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죄는 그 전체의 죄책을 주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이미 처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생활 중에 범하는 과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징계하실 수 있으므로(히12:8), 이런 경우에 그 성도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과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을 일을 면제해 주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② 만일 성도가 다른 이의 과실을 용서해 주지 않는 상태라면 마땅히 자신의 과오에 대한 용서도 받을 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마18:21-35). 따라서 성도는 모든 이와의 화합을 위하여 용서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③ 용서의 뜻은 보복성이나 미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위(잘잘못)를 가리는 것이나 법률적 배상까지도 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법률적 배상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더욱 잘한 일일 것이나 한편으로 악을 통제 하는데는 미흡할 것입니다.

2. 금식기도에 대하여

1) 예수님은 외식으로 금식 기도하는 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① 지적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고 자랑하기 위한 상태를 보였으니 그것이 곧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의 동정을 사고, 관심을 얻고, 금식기도를 하였다는 명분으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그는 하나님의 상을 다 받은 것이 되어서 사람이 알아주는 것 이상 더 은혜 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금식은 하나님 앞까지 상달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모든 기도는 사람에게 나타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효력이 크기 때문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슬픈 기색과 흉한 얼굴을 나타내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서 하는 일도 다 보시고 갚아주시기 때문에 혹 “기도를 많이 안 한다”는 취급을 받더라도 기도를 많이 한다는 인정을 피하기 위하여 은밀한 기도를 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참고로 성경에 나타난 금식기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실례를 살펴보면,

*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했을 때 40일을 금식 하였고(출34:28,신9:18),

* 범죄 한 동족 베냐민지파와 전쟁을 하려 할 때 승리할 목적으로 한 일이 있으며(삿20:26)

* 사울왕의 시체를 장사하고 7일을 금식한 일이 있고(삼상31:13),

* 요나 선지자의 심판선언을 들은 이방족 니느웨 백성들이 금식기도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한 일이 있었으며(요3:5-8)

* 다윗왕이 아들의 병 낫기를 위하여 금식기도를 했으나 그 아들이 죽은 일이 있었고(삼하12:16),

* 아합왕이 나라의 불길한 소식을 듣고 금식한 사실이 있었으며(왕상21:27)

* 여호야김왕 때에 바벨론의 침략이 있으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고로 금식한 일이 있었고(렘36:6-9),

* 이스라엘이 망한 후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민족의 회복을 위하여 금식기도한 일이 있었으며(단9:3)

*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본토로 돌아올 무렵에 무사히 여행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금식한 일이 있었고(스8:21),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황폐소식을 듣고 금식한 일이 있었으며(느1:4)

* 그 후 바사왕국 통치 때 유대인의 멸절 위기를 만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에스더가 금식하여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고(에4:3,16),

* 신약에 와서 안나가 금식하며 하나님을 섬겼다 하였으며(눅2:37)

*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기 위하여 40일을 금식하셨고(마4:2)

* 요한의 제자들이 자주 금식하였으며(마9:14,막2:18)

*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하였고(행13:2-3),

* 선교 도중 핍박을 인하여 각 교회가 금식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행14:23).

2) 이상의 내용에서 ① 금식기도는 주로 어려운 일이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께 힘 있는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시행되었으며, ② 어려운 일은 나라의 위기나 생명의 위기와 핍박 등이었고, ③ 중대한 일은 말씀을 받는 일과, 긴 여행, 그리고 선교사 파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④ 모세와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는 특수한 사례로 여겨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경우로 엘리야도 큰 체험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19:8). ⑤ 또 성경에는 외식적으로 행한 잘못된 금식기도도 있습니다(왕상21:12). 그들은 7일중 2일을 관례적으로 금식하기도 하였습니다(막2:18,눅18:12).

3)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9:14에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슬픈 일이 있을 때 금식할 수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슬픔이 있을 수 없으며 주님과 멀어질 때는 금식을 하여야 한다”고 하시므로 금식의 필요성은 슬픔과 역경의 경우요, 주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평화롭게 사는 생활에서는 금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마9:14-15). 그러므로 저희들은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평강과 기쁨과 감사를 누리면서 생활하셔야 하겠고, 혹 연약하고 나태하여 주님이 심령에서 멀어져 계시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더 가까이 하고 또 어려운 문제들이 잘 해결되게 하기 위하여 금식기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사58:3-7에서는 금식기도의 전제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오락이나 압제하는 일, 다투며, 싸우고 폭행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오직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겸손을 차리며, 회개하며,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금식은 기도의 형식과 정성을 가세하는 최후 수단이므로 기도자가 일반적 요건(신앙적, 도덕적)을 갖춘 다음에 마지막으로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시35:13). 어떤 명예나, 큰 것을 탐하는 것이나, 모방을 목적으로 하지 마시고 꼭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앙적, 도덕적 조건을 갖춘 다음 더욱 간절하고 정성되게 힘들여 기도하는 방법으로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23 과 하나님께 헌금하는 신앙 (마 6:19-24)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전체의 의미를 “하나님께 헌금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고, 3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보물을 하늘에 쌓을 것(19-21절), ② 신령한 눈이 밝아야 할 것(22-23절), ③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할 것(24절)을 교훈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 헌금하는 신앙에 대하여(19-21절).

1) 보물을 땅에 쌍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둠이 곧 자신을 위함인 줄 알아야 합니다(19-20절).

① 이 말씀의 “보물”이란 진귀한 물건 또는 돈, 그리고 축적된 재물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보화나 돈 또는 재물을 가졌다면 이는 자신의 매일 생활에 쓰고 남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과 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마6:11,딤전6:8). 따라서 이 보물은 자기의 불가피한 용도에 쓰고 남은 재물을 뜻합니다.

② 이것이 “하늘에 쌓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그의 몸 된 교회에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의 물질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한다”해도 그 사용의 권리를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헌납되어야 할 것입니다.

③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헌금자 자신을 위함이라”고 두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19-20절). 하나님은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시고 그 비중에 따라 평가하시며(막12:41-43), 거기에 대응하는 복으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향유 한 옥합을 머리에 부은 여인을 예수님은 크게 칭찬하여 이르시기를 “온 천하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7,13)하셨고, 또 교회의 이름으로 전달하는 구제비에 대하여서도 역시 “심은대로 거두게 해 주신다”(고후8:6),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8:7), 또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고후8:10,11)고 하셨습니다. 그 이외에도 십일조 헌금을 인하여 재물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말3:10,마23:23).

④ 여기에서 저희들은 헌금의 두 종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름을 지어 드리는 헌금으로 예배헌금, 감사헌금, 십일조헌금, 기타 봉사 헌금 등이요, 또 하나는 자기의 축적된 재산을 무조건 드리는 헌금입니다. 이런 헌금은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일입니다(행4:34-37).

2)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 즉 헌금의 손길에는 손해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① 거기에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질도 못한다”하셨으니 이는 드려진 물질에 일체 피해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비단은 좀이 먹고, 동전에는 녹이 슬며 귀중품은 도적맞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관하시고 쓰시는 데는 일체 그런 것이 없습니다.

② 만일 사람이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무익할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아진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그 재물을 유익 없게 사용하거나 또 마땅히 사용해야 할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세상에서 자신만 아는 욕심장이가 될 것이요, 이로 인하여 신앙에도 손해가 있고(마19:23), 범죄의 올무가 될 수도 있으며(딤전6:10), 또 자칫하면 재리의 유혹에 끌려 신령한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마13:22).

3) 헌금과 함께 성도의 마음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21절).

① 그 말씀이 바로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물질보다 성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신6:5,미6:6-8,마22:37).

② 사람이 보화를 소유하면 그 보화에 마음을 빼앗기듯이 그 보화를 하나님께 드리면 자연히 그 마음도 하나님께로 끌리게 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는 쪽으로 기울어 질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의 제사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물질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잠23:26,마15:8,히10:22).

2. 신령한 눈이 밝아져야 함에 대하여(22-23절).

1) 육체의 눈은 몸의 등불과 같아서 육신의 활동을 인도하는 것처럼 마음의 지혜는 믿음의 등불로 신앙생활을 지도합니다. 만일 육체의 눈이 나빠서 만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 답답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마음의 지혜(신앙의 지식)가 없으면 그 영육간의 어두움은 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성도가 육체의 눈만 밝고 신령한 눈이 어두우면 현실과 물질의 가치만 알고 신령한 은혜의 가치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성도는 하나님 보는 눈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3)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엡1:17-19).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신령한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헌금의 성실함도 나타낼 수 있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에 대하여(24절).

1)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심은 성도가 참되신 주 하나님만 섬겨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다른 주인을 두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종속이기 때문입니다(요13:13,16).

2) 만일 성도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거나 더 중히 여기는 대상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요(출20:5), 바른 신앙생활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대등하게 섬겨서도 안 되기 때문에 흔히 물질우상주의에 빠지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믿음중심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이루어지지 않은 성도는 아직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음을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마6:11)하셨고, 3일을 굶고 기진한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7병2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막8:1-3). 성도가 물질생활에 상당하게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라도 물질과 현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마10:37).

4) 흔히 물질생활에 여유 있는 성도들이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하여 믿음 생활을 멀리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두 주인(하나님과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얻어지는 소득만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신령한 눈을 더욱 밝혀서 신령한 소망을 바라보시고, 현실적 유혹을 이기며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 24 과 성도가 먼저 구할 것 (마 6:25-34)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① 염려하지 말 것(25-32절)과, ② 성도가 먼저 구할 것(33-34절)을 교훈하셨습니다.

1. 성도가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하여(25-32절)

1) 성도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① 하나님이 성도의 목숨(생명)을 귀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명에 대하여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저희의 연대를 정하셨다”(행17:25-26)하셨으며 또 “참새의 생명도 주관하시고 성도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신다”(마10:29-30)하셨고, 또 시116:15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가 굶어 죽는 것을 모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막8:1-8).

② 하나님은 기적의 양식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양식의 이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나와 물을 주신 이적(출16:13,17:6), 메추라기를 몰아주신 일(출16:13), 과부가 적은 기름으로 빚을 갚은 일(왕하14:1-7), 까마귀와 천사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전한 일(왕상17:4,19:5), 고기를 잡게 하신 이적(눅5:7), 5병2어와 7병2어(마14:19,15:38)의 기적 등은 다 하나님이 양식을 해결하시는 특별 섭리의 방법입니다. 또 문명의 발달이 양식을 더욱 풍족하게 해결하는 것을 체험하였으므로 성도는 양식의 핍절로 인한 생명문제를 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8:3에서 “하나님이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으니 이 말씀 중에는 “성도가 양식문제로 계명을 범하지 말라 하나님은 기적의 양식도 주실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후에도 여러 차례 기적의 양식을 주신 사실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막8:1-8).

③ 공중에 나는 새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활동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생들도 양식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고 땀 흘리는 일을 계속하므로 식생활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창3:19).

2)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① “몸을 위한다”함은 육신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복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하나님은 건강도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동물들이 추운 곳에서 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② 또 이 말씀은 의복을 안 입어도 춥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헐벗어 죽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입혀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감옥에서 겉옷을 필요로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그에게 겉옷과 건강을 주셨습니다(딤후4:13,17).

③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과 건강이 양식이나 의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최소한의 생활필수요소인 양식과 의복을 공급해 주실 책임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물며 너희일까보냐”하신 말씀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④ 사람이 자기의 몸을 위하여 염려한다 해도 스스로 자기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여(신28:60) 자기의 키를 한자(페쿠스:앞팔)도 임의로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건강은 물론 성장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고전3:6).

⑤ 여기에 주택문제를 거론하시지 않은 것은 일기가 춥지 않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천막생활로도 족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그것이 생활문제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이 자연계의 생물들을 스스로 양육하시는 사실을 목도하면 더욱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① 공중의 새를 보고(26절), ② 들의 백합화를 보고(28절), ③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보라(30절)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일체 사람의 관리를 받지 않지만 하나님이 생육시키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는 임의로 잘 번성하며, 들의 백합화는 신비할 정도로 아름답고(들의 백합화:채송화 꽃 같으며 붉은 꽃, 흰 꽃이 있음), 또 무가치해 보이는 들풀도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을 볼 때 성도의 생활문제는 더욱 잘 보살펴 주실 것임이 확실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은 인간이 가공한(제작한) 영광이며, 하나님이 키우신 백합화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솜씨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것들의 비교는 마치 생화와 조화를 보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① 인간이 아닌 하등 동물이나 식물도 키워주시는 것을 볼 때 그러하고, ②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기업인 존귀로 볼 때 그러하고, ③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따라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요, ④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32절). 따라서 신령한 복을 추구하며 또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과 인도를 믿는 성도는 이방인처럼 현실에 집착하거나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하셨습니다(33-34절).

1) 여기에서 성도들은 먼저 할 일에 대하여 확실한 가치관을 가져야 할 것이요,

2) 그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①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앙세계를 뜻하고(주기도문 해설 참조),

② “그의 의”는 십자가 구속을 통한 죄사함의 복을 의미합니다. 이 죄사함의 복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정죄와 심판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 징계의 대상에서 용서 받는 것입니다. 전자는 믿음으로 받고, 후자는 회개로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믿음의 결속을 든든히 갖고 또 생활에 대한 순결을 도모하므로 의인의 인정을 받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욥 1:8). “구한다”는 뜻은 기도로만 성취한다는 뜻이 아니요, 순종도 아울러 시행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 을 더하여 주신다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한 의식주 문제와 현실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말씀은 시1:1-3과 요삼1:2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4) 성도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33절)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32절)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만큼 성도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풍랑 만난 배에서도 주무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당면한 환난을 염려하시지 않은 것입니다(마8:24). ② 또 내일 일은 인간이 알지 못합니다(약4:14). ③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맡기고 한날에 당면한 일에 충실하며 만족하고 감사하며 견디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목숨과 건강과 성장문제, 의식주문제, 내일을 위한 문제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책임에 진력하면서 염려 없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하여 자신이 미래에 책임질 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는 미래의 책임에 대하여 힘이 있는 한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준비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는 더욱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는 물에 떠내려가듯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창 8:4).

 

제 25 과 비판을 삼가고 거룩을 지키라 (마 7:1-6)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비판을 삼가야 할 것 과(1-5절) ②거룩함을 지켜야 할 것(6절)을 교훈하셨습니다.

1. 비판하지 말라(1-5절).

1)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①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판단하고 폄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은 주로 말이 많고 자기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간섭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독선과 교만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에게서도 그런 일이 나타났었습니다(눅 16:15,눅 7:34).

② 이 세상에서 비판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는 말씀은 “비판받기를 원하면 비판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고 비판을 하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③ 여기의 “비판하지 말라” 는 뜻은 자신 또는 자기의 책임 소관에 관한 일로 어떤 사람의 신분을 평가하는 일까지 삼가라는 뜻은 아니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남을 비판하여 그의 명예나 인격과 사건에 손해를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④ 성도는 참으로 말을 조심해야 하고 특히 남의 말은 더욱 주의해서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으며 자기의 바쁜 일에 쫓기지 않고 할일 없이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딤전 5:13).

⑤ 남을 비판 하다가 자신이 비판을 받게 됨은 물론 자칫하면 명예 훼손죄로 큰 손해를 볼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2) 성도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① 사람의 비판에 착오가 있을 수 있고

② 자신도 비판 받는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며

③ 자신에게도 허물이 있으므로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고,

④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는 자신이 비판 대상보다 허물이 더 많을 때도 있을 것이니 허물이 많은 자는 자신보다 결백한자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요

⑤ 또 이 경우에 자신은 외식자(위선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3) 비판 없이 어떻게 진위를 가릴 수 있을까? 함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정당한 표준을 갖고 그것으로 모든 사물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성도는 성경과 양심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이때에 이 판단이 자신의 바른 생활을 위한 목적일 때는 정당한 것이나 자기와 직접상관 없는 다른 이의 잘못에 정죄나 폄론을 가할 때는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은 형제의 잘못이 나타났을 때 그를 비판, 폄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하셨고 (갈 6:1) 그다음에 잘못하는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염려와 기도로 상응하고 그가 깨닫고 교훈이 되도록 지혜롭게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 같은 큰 허물이 있는데 (눈의 들보는 큰 허물을 비유함) 그것은 개의치 않고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티 (이는 적은 허물을 비유함)를 빼라고 한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로서 자신이 외식자임을 자처함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순결을 먼저 힘쓰고 다음에 형제를 지도하라고 하셨습니다(4-5절). 모든 사람이 자기 순결을 먼저 돌아본다면 다른 사람 문제를 상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2. 거룩을 보존함에 대하여 (6절)

1) “거룩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이 거룩하시지만 “것”이란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나 성도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것들로서 진리의 교훈, 성직, 성물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거룩한즉 성별(거룩)되게 취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것은 물질로 비유할 때 진주처럼 귀한 것입니다.

2) 이런 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거나 던져서는 안 됩니다.

① 개나 돼지는 귀한 진가품을 모르고 짓밟는 자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면 그들은 그 귀중함을 모르고 짓밟을 것입니다. 빌3:2 에서 바울사도는 복음을 멸시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개” 로 비유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모르고 핍박하며 짓밟았습니다.

② 또 기독교를 빙자하여 배를 채우는 위선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개는 먹을 것을 뺏을 때 주인도 물려고 덤빕니다. 마치 기독교를 빙자하여 물질과 현실주의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가룟유다처럼 물질이나 명예타산으로 행동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령한 복의 가치를 모르고 마구 비난하거나 건전하지 못한 사명자들을 극히 조심하여 거룩한 것들이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거룩한 것들을 지켜 보존하려면

① 우선 거룩한 은사를 보존할 성도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해져야 하고(벧전 1:16) 또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야(딤전 4:5) 거룩한 것을 보존할 수 있으며

② 탁월한 분별력이 있어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할 줄 알고 또 큰 것과 더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12:31). 전쟁에서 패배할 바에는 화친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처럼(눅 14:31-32) 성도가 무가치한 일에 영적은사나 축복의 손해를 보아서도 안 되고 또 손해롭게 투자를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전도의 대상을 정하거나 불법하고 강팍한 대상과 대립을 하거나 비중이 약한 일에 과중한 도움을 주는 일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자들은 “한두 번 권면한 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딛 3:10) 하셨고 또 “불법한 자들에게서도 나오라”(롬 16:17-18)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비판을 삼가고 자신의 거룩에 힘쓰며 거룩한 것의 가치관을 손실시키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6 과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마 7:7-12) 목록으로


위의 말씀에서는 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하셨고 (9-11절) ② 좋은 것을 주시되 “노력하는 자에게 주신다” 고 하시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방법도 말씀하셨으며 (7-8절) ③좋은 것을 주시는 목적은 사랑실천의 용도로 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12절). 따라서 이 말씀은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시는 방법, 좋은 것을 주시는 목적의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1)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합니다(9-10절). “좋은 것”은 하나님 영광에 부합되는 복을 의미합니다. 또 성도의 편에서 볼 때는 “믿음 발전에 관한 것이나 주의 뜻을 순종하므로 받은 것”이 다 좋은 것입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하였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없으니 이 떡은 자식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 “생선을 달라”하였는데 “뱀을 먹으라”고 줄 아버지도 없으니 이 생선 역시 떡과 함께 먹어야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마14:17)

이 말씀에서 ① 하나님은 성도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② 꼭 필요한 양식은 의당히 주셔야 함같이 ③ 하나님 뜻대로 구하는 것은 꼭 주신다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2) 인생 중에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자라도 자기의 자식들에게 나쁜 것을 주려하지는 않습니다. “하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11절)하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에게 오직 유익하고 좋은 것만 선별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

1)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① 이 “구한다”는 뜻은 기도로 청원한다는 뜻입니다(7-8절). 성도의 생활은 매사에 기도가 앞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청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미리 아시고 주시는 것도 있지만(자연계의 은혜 등) 구하여 성취할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② 그러면 왜 “구하라”하셨을까요?

㉠ 이는 성도의 연약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요,

㉡ 또 하나님은 성도들의 요청에 의한 제공을 기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 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책임을 이행하면서 아들에게 청원의 특권을 부여한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③ 이 “구하라”는 의미는 특별 기도 같은 공력적 기도를 요구하시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하는 이면에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자체의 공력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뿐이고 여기에 수반하는 생활이 기도와 관련한 노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7:20에서 “주여주여” 하는 뜻이 힘 있는 기도를 의미하지만 만일 그 기도자가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서 기도만 열심히 하였다하여 응답될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마 7:21,23). 따라서 “구하라”는 뜻은 하나님 뜻대로 청탁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노력도 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찾는 자에게 주신다” 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기도로 구하는 자는 반드시 그 간청에 따른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일용할 양식을 구한 자가 애써 일하면서 구해야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3:10) 고 하셨기 때문에 일을 안 하면서 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3) 또 하나님은 끝까지 두드리는 자에게 주십니다. “두드린다”는 뜻은 최후의 노력을 뜻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대조할 때, 이는 목적성취의 먼 곳에서 가까워지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으로 “두드린다”는 것은 목적성취의 문전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전에서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니 이는 목적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노력해야 할 것을 나타내신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자기에게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7:9) 고 하셨습니다.

4) 따라서 무엇을 청탁하는 성도는 반드시 좋은 것(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을 구하되 찾는 노력과 두드리는 일도 함께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구하고 찾는 자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시며(8절) 또 좋은 것을 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선별하여 주신다는 것을 기억 하셔야 할 것입니다(11절).

3. 좋은 것을 주시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12절). 12절의 “그러므로”란 말씀이 바로 이 뜻을 연결해 주십니다.

1)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받은 은사(복)를 사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마 22:39-40).

2) 사람은 남의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욕심껏 타인의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이웃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성도는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만 그 실천의 열매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①하나님은 좋은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시며 ② 같은 좋은 것을 구했을 때는 하나님이 선별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므로 구하는 자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시며 ③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은사와 복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에 쓰여 져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27 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을 찾는 이가 적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인고로 그 길을 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좁은 문이나 협착한 길은 일맥상통하는 것이요, 그 반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하셨는데 여기의 “큰문과 넓은 길”도 역시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인생의 길에는 생명 길과 멸망길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생명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1) 이 길은 “구원 받는 유일한 신앙의 길”입니다.

요14:6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유일한 길(헤,호도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는 말씀이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행 4:12)고 하시므로 생명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외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내세워 숭배하거나 따르는 일은 결국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생명의 길이 좁고 협착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1) 생명 얻을 선민의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① 본문에서도 “찾는 이가 적다”하셨고 눅 13:23-24에도 보시면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자가 많으리라”하셨고 또 눅 12:32에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시므로, 구원받을 자의 수가 멸망자의 수에 비할 때 적은 것이 사실이며 또 “찾는 이가 적다”하신만큼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또 구원의 대상은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성도를 뜻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선택된 자가 갈수 있습니다(릅 8:29).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요(눅 12:24),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에 따라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요3:3).

③ 어떤 사람은 만민 구원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만민 구원설”이란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고 모든 인류가 다 믿으면 다 구원 받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택하셨고 (엡 1:4,행 13:48), 적은 수를 택하셨으며(본문) 택자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요17:9). 따라서 전도능력이 미약하여 구원받을 자가 누락되거나 성도의 수가 많지 못한 것을 불행한 일처럼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실을 다하면 되고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1:21,18:11). 하나님은 노아당시에 8명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 사실도 있었습니다(창 9:1-3). 성도는 구원받는 백성이 많은 것을 원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된 백성이 주님 앞으로 나오기를 소원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바른 신앙의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져야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지식을 갖되 최소한 구원 받을 만한 믿음(행 14:9)은 가져야 하며 또 구원받지 못할 요소를 내포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신앙이라면

① 우선 성경관의 바른 신앙과 사도신경을 믿는 것과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진실성이 있어야 할 것이요, 구원받지 못할 신앙은 잘못된 교리를 믿거나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② 바른 신앙의 길이란 한마디로 표현하면 성경적인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성경적인 신앙을 추구하지만 현재 나타나고 있는 성경적 신학은 칼빈주의입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최대한 바른 신학의 노선을 택하여 바르게 배우고 구원을 받으며 칭찬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많은 고기를 에웠으나 좋은 것만 그릇에 담는다”(마 13:47)고 하셨습니다. 필히 바른 신앙 가진 자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3)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생활 입니다. 인본주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명예주의, 안일주의, 적당주의 등 잘못된 생활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넓은 길을 택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이 지고가신 십자가의 길은 현실을 다복하게 하는 길이 아니었으며,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따르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이면서 또 사랑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닌 사랑의 십자가만을 성실하게 져야할 것입니다. 십자가 이면에는 하나님 뜻에 대한 절대순종과 최고의 겸손과 죽기까지의 인내와 희생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핍박을 받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바울사도는“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행 14:22)하셨고 또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중심이란 무조건 어렵게 핍박스럽게 믿는 것이 아니고 ① 현실주의를 떠나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갈 5:24,요일 2:15) ② 사랑을 따라 생활하며 ③ 핍박을 받으면서도 의를 지켜나가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 교회 안에 적당주의와 안일주의와 명예주의와 기복주의로 나가는 성도가 얼마나 되겠으며, 또 십자가 중심으로 나가는 성도는 얼마나 되겠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분명히 십자가 중심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4) 생명의 좁은 길은 예수님과 자기만으로 크게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성도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골방에 있기를 원하고 골방에서 말씀을 상고하며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과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과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최고의 만족을 삼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인간적 고독과 고난이 따르기 때문에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넓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넓은 길은 우선 멸망의 길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없는 ① 불신앙의 생활이며 ② 이방 종교의 길이며 ③ 이단적 신앙의 길을 의미합니다. ④ 성경적으로 적중하지 못하는 불건전한 생활의 길입니다. 다수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성도는 이런 면에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요즈음 신앙세계 안에 얼마나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제도와 생활이 많습니까? 성경과 사도의 모범을 떠나서 현실 문화를 무분별하게 따라가고 많은 교회와 많은 성직자, 선배가 그렇게 하니까 따라 갈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넓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런 생활의 길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무라성에서 의인 열 명을 찾으셨습니다. 저희들이 바로 이 시대에 의인 열 명에 속하는 생활을 하셔야할 장본인임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방 종교나 이단 사상은 물론 다수주의, 적당주의, 편의주의, 안일주의, 기복주의 등을 경계하시고 좁은 길로 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8 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 7:15-23)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갈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 거짓 선지자란 신앙의 외식자, 잘못 교훈하는자, 이단자, 진리의 훼방자 같은 사람들이요, 그들은 진리를 거스리면서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하며 그럴듯한 논리로 성도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② 이런 자들이 왜 생겨날까요? 실상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생겨나는 것처럼 진리 운동이 있으니 거짓의 역사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의 대적자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음이요(요8:44), 하나님은 일정 기간 마귀의 활동을 허용하셨고 (마 4:1,욥 1:12)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이용하시는 경우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③ 잠 16:4에서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하셨다” 하셨고, 여기에 따라서 욥과(욥 2:4-7)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로도 쓰셨으며 (신 13:3) 또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도 쓰셨으니 곧 아담의 타락을 묵과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용하신 일등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하나님이 이용하실 수 있는 악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잠시 용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3:15,계20:10).

④ 사탄에 근거를 둔 거짓선지자는 모세 때에도 있었고(신13:1,민24:1),열왕 시대에도 있었으며(렘 6:14,23:17,겔 13:10,미 3:5) 예수님 때도 있었고(본문) 또 말세에는 더욱 강성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11,벧후2:1).

⑤ 이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거짓 예언을 하되(렘 5:21) 주의 이름으로 하면서(렘 14:14)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렘 23:16,겔 13:2), 자기의 꿈꾼 것을 계시라고도 하며(렘 23:28,32),탐욕이 많고(미 3:11), 진실이 없으며(습 3:4,요 8:44) 교활하게 자기를 위장하여 양처럼 가장하고(마 7:15) 사랑과 봉사는 물론 능력을 행하기도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7:22).

1.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의 정체와 함께 분별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나타나는 열매로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열매란 행동의 결과를 의미하며 결과가 진리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가 아니면 거짓선지자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시나무가 포도를,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음이 확실하고 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처럼 나쁜 열매를 맺은 나무가 나쁜 나무임이 확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선지자가 아무리 자기를 선한 양처럼 위장하여 일시적인 사랑과 진실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결국은 오래 못가서 그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찍혀 불에 던지우는 것처럼(17절) 그들의 정체외 결국은 드러나고 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거짓선지자들도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22절).

① “경건의 모양”이란 “주여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주여주여”함이란 하나님께 부르짖듯 기도를 힘쓰는 일이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함” 이란 예수님이 세운 사역자처럼 자처하면서 진리에 해당하는 말을 증언하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여 은혜로운 사역자같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② “능력을 나타냄”이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나타냄”을 의미합니다. 귀신 쫓는 특기가 있으나 이단자로 인정되고 또 병 고치는 특기가 있으나 정통적 신앙이 못되어 경계를 받는 일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민 22:-25: 에서 발람선지자의 사역 중에 발람이 증언한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나타냈지만(민 22:13,23:7,12) 그는 거짓 선지자였음이 확실하였고(유11) 또 정통적 입장에 있는 성도가 합류할 수 없는 사이비 단체에서 병 고치는 능력을 과시하는 일도 있으니 이런 것들이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능력을 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탄도 천사로 가장하며 불이 땅에 떨어지는 기적을 행한다”고 하셨으므로(고후 11:14,계 13:13) 성도는 어떤 능력과 기적에 무조건 추종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가 받을 심판에 대하여

1) 본문 23절에서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선포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들을 불러 쓰신 바도 없고 능력을 주어 사명을 맡기신바가 없는데 그들은 자신의 불법을 깨닫지 못하면서 오히려 심판 때에 예수님의 인정과 상급이 있기를 바라지만 결국 못된 나무가 찍혀 불에 던져지듯이 (19절) 외면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죄가 무엇입니까?

① 외식입니다; 양의 옷을 입고 사랑과 은혜가 있는 자인 듯이 나타낸 외식, 또 주여주여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듯이 나타낸 외식, 주의 이름으로 증언하며 참 선지자인 듯이 나타낸 외식,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나타낸 외식 등입니다.

②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행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진리 아닌 모든 것이 불법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하지 않음도 역시 불법한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임을 확신하셔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는 오직 성경말씀을 바로 이해하여 그 말씀의 지도대로 복종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성경말씀 따라 사는 바른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하며, 만일 성도의 주변에 이해할 수 없는 불순한 이웃이 있다면 엄히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롬 16:17-18, 고후 6:14-18, 딛 3:10-11).

 

제 29 과 듣고 행하는 자가 되자 (마 7:24-29) 목록으로


이 말씀은 크게 어려운 내용이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위에 집짓는 자로 비유하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셨고 그렇지 못한 자를 그 반대로 설명하시니 듣는 자들이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에 크게 놀랬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제목을 연구한다면 “반석 위에 집짓는 자” 또는 “지혜로운 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권세 있는 가르침” “견고한 집” “무너짐이 심함”등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교훈은 말씀을 듣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듣고 행하는 자가 되자”는 제목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1. 초두의 “그러므로”는 앞에 있는 말씀을 연결하는 것으로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사역과 능력을 나타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으므로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었음”을 상기시킨 말씀이요(마 7:15-23), 따라서 진리와 생활의 일치를 도모하여 지혜로운 성도가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4절에서 “나의 이 말을 듣고”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인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옛날에는 말로 외치고 귀로 듣게 하는 전달 수단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듣고 깨달으라” (마 15:10,막 7:14)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바울사도께서도 “듣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마 13:23,롬 10:14) 고 하셨으나 그 후 초대교회 당시부터 진리의 말씀이 편지로 전달되면서 읽어서 깨닫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계1:3,엡 3:3-4,골 4:16).지금은 여러 방도를 전달수단으로 이용하지만 듣고 글을 읽어 깨닫게 하는 방식이상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봅니다.

2) 그런데 “나의 이 말을 듣고”란 중요한 뜻은 진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는 것입니다. 눅 12:47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 란 말씀과 “그 뜻대로 행치 않는 자가 많이 맞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곧 듣는 것입니다. 마 25:26에서 악한 종은 “주인의 입장과 뜻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므로 큰 책망을 받았으니 저희들도 잘 듣고 잘 배워서 바로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2.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믿음이 행함과 함께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라는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약 2:17,22). 성도가 말씀을 듣고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1) 말씀 순종함이 성도의 의무이고(삼상15:22),

2) 행동실천이 나타날 때 진실한 성도라는 인정을 받게 되며(마 7:16)

3) 계명 순종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명이 되고(요 14:23),

4) 또 복 받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신28:1-6).

3. 예수님께서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위에 집지은자로 비유하셨습니다(24절-27절). 반석위에 세워진 집은 그 기초가 든든하므로 비나 창수나 바람에 잘 견딥니다. “비나 창수나 바람” 은 환난을 비유하므로 성도는 어떤 환난에도 잘 견디는 신앙을 가져야하는데 그것이 곧 기초가 든든한 신앙입니다. 또 이 반석은 그리스도를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창 49:24). 따라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신앙은 ① 예수님과 성경중심의 신앙이요(마16:18,고후 13:8) ② 말씀의 기본지식이 풍부하고 ③ 그 말씀을 잘 실천하며 ④ 또 연단이 넉넉한 성도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는 모래위에 집지은 어리석은 자 같아서 그 집이 비바람에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어리석은 신앙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바르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말씀 지식과 실천으로 무너지지 않는 좋은 집을 지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 있는 자”같았다고 하셨습니다(28절-29절).

1) 예수님은 세상적인 권세를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요 1:39)이란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교훈은 “권세가 있는 자 같았다”하였으니

2) 그런 “교훈의 권위”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그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요

② 풍족하고 심오하였기 때문이며

③ 말씀과 생활이 일치되시고

④ 또 성령이 충만하셨기 때문이며(마 3:26)

⑤ 받는 자의 자세가 그만큼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3) 그때의 그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깜짝 놀란 것은 그렇게 권세 있게 가르치는 사람을 일찍 만나지 못하였었고 또 서기관들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서기관들은 외식자들이 많았기 때문에(마15:1-14) 그들의 가르침도 권위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권세 있는 교훈자가 되려면 진리지식과 생활의 일치와 탁월한 경건과 교수의 재질과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야 할 것입니다.

4) 결국 환난에 잘 견디는 성도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시 49:5에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두려워하랴” 한 것처럼 환난에 두려움 없이 대비하는 든든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27절 하반에서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믿는 성도나 또는 기성교인 중에도 믿음생활의 무너짐이 심한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이 ① 말씀 지식과 실천에 기초하여 성장하지 못하였거나 ② 기복주의 또는 인본주의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거나 ③ 연단이 부족할 때 쉽게 그런 결과를 초래 할 것입니다.

 

제 30 과 문둥병을 고치심 (마 8:1-4) 목록으로


1. 서론

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므로(1절) 산상보훈은 끝났고 이어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팔복산에서 내려오시다가 먼저 문둥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② 예수님이 나타내신 병 고침의 능력의 근원은 그의 신성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겸하셨으므로 신성을 발동하실 때는 초자연적 능력을 베푸실 수 있으므로 세상에 오신 후 “가나” 잔치집에서 처음 능력을 나타내시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시작으로(요2:11) 많은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③ 여기에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기적을 나타내시는 목적과 경위” 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입증하시기 위함이요(요 14:11,히 2:4) 그다음이 어떤 상대에게 영향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 그리고 병을 고쳐주신 경위는 예수님의 일방적 은혜로(눅 17:12-14,요 5:6) 또는 원하는 자의 믿음으로(마15:28) 또는 당사자의 믿음으로 (마 9:20-22) 또는 후견인의 믿음으로(막2:5) 또는 예수님의 의지와 당사자의 믿음으로(마 8:2) 능력을 나타내주셨습니다.

④ 이때에 예수님의 병 고치심의 능력은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2. 본문대로 살펴보면

1)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실 때 허다한 무리가 좇았으니(1절) 이는 산상보훈의 교훈적 영향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한 문둥병자가 절을 하면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해주실 수 있나이다”(2절) 하므로 그 소원하는 병자의 겸손함과 신앙적 간청을 표현 하였습니다.

3) 이 문둥병자의 믿음이 귀한 것 ① 예수님을 전능자로 믿었다는 점과 ②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한 점과 ③ 주님이 원하셔야 된다는 절대자의 주권을 앞세운 점입니다. 자신이 문둥병자가 되고 문둥병자로 있어야 함이 주님의 뜻이라면 자신은 거기에 복종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침을 받는 것도 자신의 욕구를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워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게 하실 수 있다”하였으니 예수님은 자신의 주권을 앞세우는 그의 갸륵한 신앙에 감동하셔서 즉시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모든 일에 주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4) 주님의 말씀에 즉시 깨끗하여진 것입니다(3절). 이것은 예수님의 초능력의 특징입니다. 사도들도 그런 능력을 나타낸 적이 있었습니다(행 2:7).

5)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적 기적의 특징은 ① 즉시 완치되고(마 8:3, 막2:9,요5:9) ② 모든 약한 것까지 회복되며(마 8:15,17) ③ 병 고칠 때 아픔을 주지 않으며 ④ 재발하지 않으며 ⑤ 죽은 자를 살리심까지 못 고친 병이 없음입니다(마 8:16). 이런 역사가 초대교회 후시대에는 나타난 일이 없다고 하니 역사가들의 말을 믿으셔서 “같은 성질의 기적이 이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 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빌 2:26, 딤후 4:20).

6)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이 왜 병 고침을 위한 기도를 하느냐? 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답변은 이렇습니다.

① 예수님이 직접 행하셨던 이적의 한 부분을 구약시대에는 선지자에게 주셨고(왕하 5:10)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과(마 10:1,눅 9:1,막16:14,17) 사도적 사역자들에게(행 8:5-8) 주셔서 역사하게 하셨습니다.

② 이때에 사도들은 주신능력의 분량을 따라 역사한 일도 있었고(눅10:17,행3:6) 또 믿음 부족으로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마17:16-20).

③ 여기에서 확인하셔야 할 것은 능력을 주신 대상이 사도들과 사도적 사역에 동참한 제자들(빌립집사나 아나니아 같은 분)에 한하여 주셨다는 점입니다(막 16:14-18, 마 10:1).

④ 그런데 초대교회의 마지막 사도인 “바울”은 그의 초기 성역때 기적을 행하였다가(행 19:12,20:10-12,28:8) 그의 말기 성역때는 그런 기적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빌 2:26-27,딤후 4:20,고후 12:8.9).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특수한 이적이 기독교 계시완성을 기점으로 중단되었다” 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견해입니다. 기독교 계시의 완성이란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성경으로 완성시킨 것”을 의미합니다(마 16:18,고전 4:10-11,엡 2:20,히 2:4).

⑤ 따라서 교회시대에 주신 병 고침의 능력은 어떤 이에게 은사로 주실 수 있고(고전12:9)이 은사의 일반적인 것은 의술이며 특수한 것은 모든 성도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직접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이의 기도가 더 속히 응답되는 것을 은사적 병 고침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약 5:13-16 에서 더 설명해 주셨으니 이는 성도나 (약 5:13) 성직자가(약 5:14)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믿음의 기도와 회개의 기도를 병행함으로써 병든 자를 구원하고(15절) 낫게 해 주심(16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⑥ 과거에 병을 앓았으나 기도와 치료로 고침을 받은 성도는 다 이 말씀에 입각하여 병 고침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믿으셔야 하고 또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사람이 막을 수 없는 만큼 특수은총을 구하는 것은 자유이나 성경에 근거한 병 고침의 역사가 이상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⑦ 따라서 병 고침의 은혜는 먼저 하나님의 주권이 앞서고 다음이 서로 기도하는 것이며 또 다음이 의학적 치료이며 그 다음이 고침의 차도를 기다리는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약 5:16). 또 여기의 “기다린다”는 뜻이 사도적 이적의 성격과 다른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 고침 받은 자에게 당부하셨습니다(4절).

1)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셨으니 ① 이는 예수님의 겸손에 기인한 점과 ② 사실을 세상에 알리므로 따라오는 문제들에 대하여 감당하실 뜻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2)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하신 것은 문둥병자 취급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레 14:2-32). 대표적인 방법으로서 ① 우선 제사장으로부터 고침 받은 사실을 확인 받아야 하고 ② 또 예물을 드려 감사해야 하며 ③ 건강증명을 받았음을 무리들 앞에서 증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형벌로 문둥병을 주신 사례가 있어서 (민 12:9,10,대하16:19) 흔히 이 병을 죄악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① 성경적 병 고침의 기적관을 확립하시고 ② 병 고침 받을만한 좋은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제 31 과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 (마 8:5-13) 목록으로


1. 이 말씀은 눅 7:1-10에도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 집 장로들을 보내어 간청하게 하였으며 예수님이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그의 보낸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까이 올 때 백부장은 또 다른 종을 마중 내보내어 자기의 뜻을 전하게 하였고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의 선포를 받고 돌아온즉 하인의 병이 이미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간청하는 절차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본문에서는 간청대행자를 생략하므로 백부장이 직접 찾아온 것처럼 기록하였습니다. 모든 일을 백부장이 시켜서 한 일이므로 종들의 행위를 생략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5절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변의 작은 촌입니다. 이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 2고향이며(마 4:13) 복음전파의 시발지이기도 합니다(마4:13-24) 예수님은 그 이전에 팔복산(가칭)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마 8:1).

2) 이때에 예수님은 한 백부장 (백부장의 보낸자) 으로부터 그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인해 괴로움 당하는 소식과 함께 병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요청을 받으셨습니다.

3) 백부장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로마의 군인 장교로서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신분이기 때문에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4) 이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은 가서 고쳐 주시기 위하여 백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셨으니 이는 간청에 대한 후한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신다는 사실을 안 백부장은 오히려 이 사실을 미안스럽게 여겨 또 다른 종을 보내어 자기의 뜻을 전달한 것입니다.

3.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시 전달한 뜻은 (6절-9절)

1)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한 것이니 이는 높으신 주님을 비천한 죄인이 함부로 모시기 어렵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존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아울러 표현한 말이요,

2)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위력을 믿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백부장이 믿은 말씀의 위력이란 “예수님이 뜻하시거나 말씀을 나타내시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적 능력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8:3).

3) 또 백부장은 자신이 말씀의 위력을 믿는 이치를 설명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요, 자신의 믿음의 타당성을 입증함이었습니다. 그 입증의 내용은 “자신도 남(상관)의 수하에 있고 자기 아래도 군사(부하) 가 있으니 상관이 하급인에게 명령만 하면 잘 복종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장 높으신 예수님도 천사나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루실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은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음과 함께 말씀자체의 능력과 그 말씀의 능력이 주님의 뜻에 의하여 직접, 간접으로 역사하실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4. 백부장의 전달한 말을 듣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13절)

1) 기이히 여기셨으니 이런 지식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요

2) 크게 칭찬하셨으니 이는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신 것이며

3) “이방인으로서 이렇게 좋은 믿음을 갖고 구원받게 될 사람이 많다” 고 예고 하셨습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른다”하심은 이방인들이 믿고 돌아올 것을 예고하심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는다”는 것은 그들이 약속의 선민과 똑같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이 이방인인 것을 아시고 그가 복음전파 직전에 복음의 의미를 측면에서 깨달은 것을 더욱 기이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공식적으로 전파된 것은 오순절 후부터였기 때문입니다(행2:7-13).

4) 또 반면에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을 배척한 본 자손들(아브라함의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지옥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유감의 뜻을 표명하셨습니다.

5) 그리고 백부장(보낸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①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하신 것은 그 믿음이 정당하고 또 주님의 뜻에 부합되었음을 뜻하고,

② 그 말씀의 효력은 어떤 천사나 사역자를 통함이 아닌 직접 역사된 것이며

③ 또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하심은 차도 있게 점차 나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특별한 교훈을 주시는 것은 ① 이방인으로서 귀하고 드문 신앙을 가진 일과 ② 그 귀한 신앙이란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이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능력을 믿음이요 ③ 예수님이 그의 신앙을 특별하게 칭찬하시고 기뻐하신 점과 ④ 예수님의 병 고침의 능력이 창조적이고 무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특별하게 칭찬받을 말한 좋은 신앙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2 과 자연을 지배하심 (마 8:14-27) 목록으로


이 본문은 3대지로 내용을 분류 할 수 있습니다. ① 병을 고치신 예수님(14-17절) ② 제자 되려는 자에게 교훈하심(18-22절) ③ 자연을 지배하신 예수님(23-27절)입니다.

1. 병을 고치신 예수님(14-17절)

1)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① “가버나움”에는 베드로 장모의 집이 있었고(마 8:5) 예수님도 그곳에서 사신 일이 있었으나(마 4:13)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일정한 거주를 하시지 않았습니다(20절).

②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는데 이 사실은 ㉠ 베드로가 아내를 취한 사실(천주교에서는 독신을 주장함)과 ㉡ 그 장모의 열병이 심하여 누워서 앓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③ 이 말씀에서 베드로 장모의 신앙적 형편이나 병 고침을 위한 간청이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의 손을 만져서 열병을 떠나게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④ 따라서 이 병 고치심은 “예수님 자신의 뜻”으로 베푸신 것이며 “손을 만져 낫게 하심”은 위로를 나타낸 것일 뿐 병 고침의 능력은 초자연적으로 역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은 손으로 만지는 촉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마 8:8).

⑤ 또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병자가 나음을 받자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든 것은 그 고침의 은사가 신속하고 확실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 많은 귀신 들린 자와 다른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셨습니다.

① 본문에서 귀신 들린 자의 형편을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이는 미친 사람으로 단정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은 세 가지 상태로 역사합니다. ㉠ 귀신에 의하여 정신상태가 미친 사람 ㉡ 귀신에 의하여 진리를 받지 못하고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 귀신과 때때로 타협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예수님은 이런 모든 상황에서 말씀으로 귀신과 병을 물리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능력과 함께 귀신과 병을 물리치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며 능력임을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믿고 그 말씀에 붙잡혀 살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할 것이며 또 말씀을 멀리하므로 당하는 질병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런 능력을 행하실 것에 대하여 구약시대의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것을 인용하셨으니 곧 사53:4 에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4 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셨다” 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그 의미를 “연약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질고와 슬픔이란 바로 죄로 인한 육체의 연약과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죄로 인한 육체의 연약과 질병을 당했다” 고 할 때에 예수님은 그 성도의 죄책을 담당하신 분이므로 그 병을 처분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질병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신 28:60) 하나님은 이를 간과하여 (시 32:1,롬 3:25) 병을 안 주실 수도 있고 또 임의로 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15절). 따라서 병중에 있는 성도가 신앙적으로 할일이란 확실한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할 것 뿐입니다.

2. 제자 되려는 자에게 교훈하심(18-22절)

1) 무리가 에워싼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① 무리가 에워싼 것은 병 고침 등의 은혜를 사모하였기 때문이며

② “가버나움” 건너편은 갈릴리 바다 동남쪽 언덕에 있는 동리를 가리킵니다(8:28).

③ 예수님은 한곳에서 전도하신 후 다른 마을로 가시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막1:38).

2) 이때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19절).

① 서기관이란 글자대로 사무직인바 처음에는 다윗 왕궁에서 서기관을 책봉하므로 시작되어(삼하 8:17) 예수님 당시에는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사무 및 성경을 연구하는 종교적 직임으로 바뀌었습니다(마 2:4,13:52,15:1,16:21).

② 이런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 고 했을 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음을 말씀하셨으니 이 의미는 가난한 예수님을 따를 각오가 있어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할 곳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만한 집도 없고 또 거처도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눅 5:11) 또 물질의 탐심이 없이 가난을 각오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③ 또 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먼저 부친의 장례를 치르도록 기다려 달라” 는 부탁을 했을 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죽은 자들이란 불신자를 뜻함).

㉠ 이것은 “죽은 자 장례식 문제로 생명을 구원하려는 전도의 발걸음을 늦출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이 말씀 속에 “불효해도 된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은 시체를 땅속에 묻는 일”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속히 전도하러 가셔야하고, 또 제자 되겠다는 사람이 그만한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마 10:37).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장례식 절차를 큰 일로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일도 세상 전통을 따르려 하지 말고 자기의 형편에 따라 간소하게 치르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자연을 지배하신 예수님(23-27절).

예수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가다라 쪽을 향하여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셨습니다.

1)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배 뒤에서(막4:38) 주무셨습니다.

① 바다에 바람이 불고 큰 놀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바람 날개로 다니신다”(민11:31,시 104:3)고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지배하신 일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②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 없이 그 배에서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③ 자연의 지배자인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어떤 자연계의 변화나 환난 중에서라도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시 27:1-3).

2) 그러나 함께 탄 제자들은 물결이 배에 덮힘을 인하여 두려워하였고(26절) 결국은 예수님을 깨우며 구원을 호소하였습니다.

① 이것은 자연계로 인한 환난에서 주님을 의지한 태도입니다.

② 주무시는 예수님은 깨웠음은 바로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성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이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하심은 천지의 주재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무서워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며

㉡ “믿음이 적은 자들아”란 뜻은 주님 앞에서 무서움을 갖는 그 자체가 믿음이 적은 연고란 뜻입니다. 누구든지 염려와 무서움이 많으면 이는 믿음이 충실치 못한 자라 할 것입니다.

④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며(요 1:3) 자연의 통치자이심을 단적으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은 것은 자연계가 예수님의 뜻을 불순종했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자연의 지배자이신 위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람이 예수님의 명령을 불복 했을리 없고 또 바람으로 인하여 놀을 일으킨 바다가 꾸짖음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자들을 괴롭힌 자연이 예수님의 지배의 대상임을 알게 하신 것뿐입니다.

이상과 같이 귀신과 질병을 처리하시고 자연을 명하신 주님은 만인들로부터 하나님 곧 절대자의 인정을 받으셔야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자연 앞에서 감사와 극기의 적응을 잘 하셔야 할 것이며 주님을 따르려는 사명이 있는 성도들은 그 사명의 시급함을 깨닫고 헌신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문제들을 최대한으로 제거하여야할 것입니다.

 

제 33 과 가다라에서 있었던 일 (마 8:28-34)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가다라” 지역에서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쫓아내신 사실이 기록되었고 또 이 사실은 막 5:1-20과 눅 8:26-39 에도 기록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 기록된 말씀이 비교적 간단한 편이며 또 “가다라”를 “거라사”로(막 5:1), “귀신들린 자 둘” 이 “귀신들린 자 하나”(눅 8:27)로 다르게 기록된 사실도 있지만 이것은 착오된 말씀이 아니고, 기자의 개성적 관찰에 따른 근거 있는 표현임을 아셔야 합니다. 더 자세한 해설은 그 본문을 강론할 때 부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① 귀신의 역사와 귀신들린 자의 형편 ②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문제 ③ 돼지 떼가 피해를 보는 문제 ④ 시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등에서 상당한 설명과 교훈이 요구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귀신들린 자 둘을 만나심(18절)

1)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자 두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귀신들렸다” 는 것은 쉽게 표현하여 “미친 사람” 을 뜻하며 미친 사람의 행동은 정상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친 사람의 미친 언행은 귀신의 역할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미친 사람은 귀신의 조정에 의하여 자기의 인격을 상실 당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은 ① 매우 사나운 상태였으며 ②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섭게 하였고 ③ 또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나와 자기의 입장을 소원하기도 하였습니다(28절,31절).

2) 건전한 사람이 귀신에 사로잡히면 마치 술 취함에 끌리듯이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그의 모든 언행이 자기 아닌 귀신의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사람이 어떤 사고로 부상을 입어 뇌의 기능이 정상적이 못될 때도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것은 귀신의 역사가 아닌 정신적 기능 불완전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2.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취한 태도(29절,31절)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호칭하였는데 이 지식은 귀신이 알고 있는 바른 지식입니다. 따라서 귀신도 바른 지식을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 19:15에서도 악귀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하였고, 고후 11:14에서는 마귀도 “빛의 사자로 가장한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도 아니며 증언자도 아니고 오히려 거짓으로 꾀이는 자이기 때문에 “한마디 증언이 바르다”하여 그 증언을 의존하거나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였으니 이 말은 “그 당시에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해코저 하지 않았으니 아무런 제제를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요

3)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였는데 여기에 “때가 이르기 전” 이란 “사탄을 심판 하실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에 자기들을 심판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탄에 대한 심판은 1차,2차로 단행하십니다. 1차 심판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요(창 3:15) 2차 심판은 종말 심판인데(계20:10) 사탄은 그때가 되기 전에 자기들을 괴롭힐 것을 퍽 두려워하였습니다.

4) 그러자 그 주위에 많은 돼지 떼(2,000마리;막 5:13) 가 있는 것을 보고 “만일 우리를 (이 사람에게서) 쫓아내실진대 저 돼지 떼들에게로 들여보내 달라” 고 간구하였습니다. 귀신들도 사는 거처가 있어야 했습니다. 주로 사람의 마음속이나(마12:44) 짐승에게나 아니면 두루 돌아다니는 생활 (욥 1:7) 을 하는데 예수님이 자신들을 그 사람의 마음에서 쫓아내려 하시니까 다음 처소인 “돼지 떼에게로 들어 갈 것이니 그것을 용납해 달라”는 뜻으로 “들여보내소서”(31절)한 것입니다. 귀신이 어떤 사람이나 짐승에게 범접할 때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신28:28). 따라서 하나님은 귀신의 고삐를 잡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욥 1:12).

3. 귀신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허락(32절)

1) 귀신이 그런 간청을 하게 된 동기는 예수님이 이미 그 귀신들린 자를 치유해 주시려는 긍휼로서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귀신이 그 압력을 받고 갈 곳을 찾아 간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귀신 병 들린 자가 치유를 받은 것은 오직 예수님의 긍휼에 근거한 일방적 은혜로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환난 당한 자들이 이런 경우로 회복되는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어떤 환난이 있든지 기도로 구할 책임을 주셨습니다(시 50:15, 막 9:29).

2) 귀신의 간구를 예수님이 들어 주실 수 있는가? 에 대하여

① 예수님은 귀신의 지배자이시고 심판자이시므로 그만한 주권이 있음이 사실이고

② 또 이 허락은 공의를 굽히시거나

③ 귀신의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④ 그것이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3) 그 허락의 결과로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닷물에 몰사 하였으니 이는 동편 갈릴리 바다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4) 예수님이 귀신의 간구를 허락 하신 데는

① 귀신을 쫓아내는 동시에 미친 사람을 낫게 해 주시기 위함이고

② 사탄의 간청(자기의 살길을 위한)은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간청했지만 결국은 이루지 못한 것이며

③ 예수님은 귀신과 짐승을 다 다스리시는 분임을 나타내셨고,

④ 시내 사람들의 재산을(돼지 떼 2,000마리)없애려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의 간구가 결국은 용납이 안 된 것과 예수님이 귀신이나 자연이나 모든 생물까지 통치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신 것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을 기회로 타인의 돼지 떼를 죽게 하셨을까에 대하여 상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귀신과 미친 사람과 돼지 떼와 그 주인들을 함께 연결하여 통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 거민의 죄악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관되고 바울사도 개인과 로마행에 동행한 선객들과 로마시민을 연관시켜 통치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물질만 의지하고 생명을 존중시하지 않는 돼지 떼 주인들에게 “생명의 주”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3) 돼지 떼가 바다에 들어가 죽은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신즉(시 50:)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이것은 영적능력으로 나타내신 것일 뿐 육체의 힘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혐의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돼지 떼를 막대기로 몰아넣으셨다면 반드시 변상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5. 돼지 떼를 잃은 시내 사람들의 태도(33절,34절)

1)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이 이 사실을 “가다라”지역의 작은 성읍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래서 온 시내(많은 성읍 사람들) 가 성밖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보고 그곳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으니

2) 이들은 ①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사실과 ② 그와 동시에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을 알았고 ③ 또 예수님의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을 것이지만 여전히 마음 문을 열지 못한채 생명의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3) 그들은 “귀신 병은 고쳐도 돼지 떼가 죽거나 재산의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바로 사람의 생명을 돼지(재산)보다 귀하게 여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생명보다 재산을 귀하게 여길 때 진리는 수납할 수 없습니다(마6:24, 19:22).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①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세와 통치 ② 긍휼과 치유의 은혜 ③ 물질과 관련한 생명의 가치를 깨우치심 ④ 바른 선택을 촉구하시는 전도의 방법 등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34 과 중풍병을 고치심과 마태를 부르심 (마 9:1-13)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이고(1-8절) ②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사실(9-13절) 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마가복음(2:1-17)과 누가복음(5:17-32)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만, 마태복음에는 상세한 표현이 생략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마태에게 영감하여 주신 말씀에 특수성이 있음을 감안하여 본문에 나타난 내용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에 대하여(1-8절)

1) 예수님은 “가다라”지방에서 다시 배를 타시고 본동리인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1절). “본동리”란 예수님이 거쳐하신 곳을 의미합니다(마4:13).예수님이 본래 자라나신 본동리는 나사렛이었습니다(마2:23,눅2:40). 그런고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신 시기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었습니다(막 1:9).

2) 이때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2절).

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의 증상은 사람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것이며 그 처절한 형편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어떤 이는 이 중풍병자를 영적 교훈의 모형자로 해석하여 교훈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는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다” 또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스스로 활동을 못하고 다른 이의 힘에 의하여서만 끌려 다닌다” 하여 성도의 영적신앙의 불구자 상태를 비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은 중풍병자의 육신적 증상으로 성도의 불구자적 신앙을 일깨우시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③ 이 말씀의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사실과 그 병자가 “죄로 말미암은 병”을 앓고 있었음과, 또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낫게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성경에 어떤 기적의 사실이 나타나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 능력의 근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4) 다만 그 병자가 병을 앓게 된 원인과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방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의 병이 “죄 값으로 주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죄 값으로 질병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성경에 많습니다. 신 28:27-28,35,60,고전 11:30,약 5:15-16,계 2:22 등을 읽고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질병이 다 그런 경우라고 짐작하시면 안 됩니다. 욥의 질병이나(욥 2:6,7) 엘리사의 죽을 병이나(왕하 13:14) 나사로의 죽을 병이나(요 11:4) 바울사도의 육체의 가시나(고후 12:7)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딤전 5:23) 등은 죄와 거리가 먼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어떤 병자의 병의 원인을 묻거나 규명하려 하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요(요 9:2,눅13:4) 모든 성도는 누가 당하는 환난이든지 겸손하게 회개하여야 할 연대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눅 13:5).

5) 예수님은 이 중풍병을 고쳐주실 때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저희의 믿음”이란 그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신앙과 사랑과 끈기였습니다(막2:4). ① 예수님을 전능자로 믿은 것 ② 예수님의 긍휼을 믿은 것 ③ 병자를 메고 온 정성과 호의, 그리고 ④ 지붕위에서 달아 내린 끈기가 그들의 주목할만한 믿음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 아닌 제3자의 믿음과 정성을 보시고도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이런 사랑의 정성을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6)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실 때 먼저 “소자야 안심하라”하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므로 고쳐주셨으니 ①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동반한 것과 ② 예수님이 그 병의 원인을 아신 것과 ③ 또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심과 ④ 죄로 인한 병은 죄사함과 동시에 낫게 됨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7)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선포가 떨어지자 어떤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이를 참담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니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생각까지 아셨고 또 그런 생각을 “악하다”하시고(4절) “죄사함 받으라”하는 말(ἀϕίενταί σου ἁι ἁμαρτίαι: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말티하이)이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ἔγειρε ναί περιπάτει:에게이레 카이 페리파테이)보다 쉽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과연 쉬운 것일까요? 원어의 음절상으로 볼 때는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이 오히려 두 음절 짧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음절 긴 말씀으로 표현하시고 “더 쉽다” 하셨으니 이는 병의 원인과 치료의 방법을 아울러 말씀하심에 유익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8)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병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문제보다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자임을 알게 하시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6절). 그리고 서기관들의 의문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므로 명실공히 “병 치료와 죄사함 받음의 의미가 같음”을 입증하셨습니다.

9) 이 말씀이 떨어지자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능력은 말씀과 함께 일시에 성취되었고 또 자기의 침상을 풀고 집으로 돌아갈 만큼 건강해진 것은 예수님의 창조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0)이 일로 인하여 무리들은 두려워하였고 이런 권세를 사람(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자신의 구세주 됨을 힘 있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2. 마태를 제자로 부르심에 관한 말씀입니다(9-13절).

1)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지나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가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9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노방전도와 직장전도를 하셨음을 알 수 있고 마태는 전격적으로 믿고 따랐으니 평소에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사모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마태의 초청을 받아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 곳에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10절).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대인을 학대하는 로마의 직원이기 때문이요, 또 죄인들이란 세리들과 회동하는 무리들이나 잘못을 범하여 소문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런 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를 항의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1:1 말씀을 여자적으로 해석하여 “죄인들과 접촉을 삼가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들으신 즉시 해명하시기를 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음같이‧‧‧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셨고 ②“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하신 말씀(호 6:6,미6:6-8)의 뜻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 의식은 중하게 알면서도 죄인들과 비천한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도외시 하였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사랑을 앞세운 후에 믿음의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는 과정에서 강조하신 교훈은 ① 자신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과 ② 제사나 예배의식보다 사랑이 중요한 것과 ③ 성도가 죄에는 동참을 피하되 그 인간은 가까이 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과 ④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구세주를 영접할 때에만 구원을 받게 됨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제 35 과 금식에 대한 질문 (마 9:14-26)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네 가지 대목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금식에 대한 질문이요(14-15절) ② 새것과 헌것을 혼돈하지 말 것에 대하여 (16-17절) ③ 혈루증을 고쳐주심(20-22절) ④ 직원의 죽은 딸을 살려주심(18,23-26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목을 간단히 종합 시킬 수 없어서 첫 대지 내용으로 정하였습니다. 또 이 말씀은 막 2:18-22과 눅 5:33-39 또 막 5:21-43과 눅 8:40-56 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시간은 마태의 기록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1. 금식에 대한 질문(14-15절)

1)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나오시자(그때에) 요한(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① 그 당시에 유대주의자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였다고 합니다(눅 18:12).

②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는 대 속죄일에만 금식하게 되어있었습니다(레16:29,31,행 27:9). 이 금식은 장차 있을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하는 뜻과 회개하는 뜻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③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목적보다 의식과 제도를 과장하여 시행하므로 전통이 되게 한 것일 뿐 율법이 목적하는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을 명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금식을 명하시지 않은 이유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때는 금식할 것이라” 고 하시므로 자신을 신랑에,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으로, 또 신랑을 빼앗김은 자신의 수난의 시기를 각각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 따라서 의미 없는 의식적 금식은 별 효력이 없고 또 예수님과 가까이 연합된 생활을 할 때에는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되므로(요8:32) 금식할 필요가 없으나 예수님을 뺏기는 경우 즉, 주님을 멀리하게 되는 경우에는 금식을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이때의 금식은 영혼의 소성을 위한 것입니다.

4) 또 금식과 금식기도를 구별하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금식은 자기를 괴롭게 하는 전통적 의식이요, 금식 기도는 금식과 함께 은혜를 힘 있게 간청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새것과 헌것을 혼돈치 말 것에 대하여(16-17절)

1) 생베족각과 낡은 옷,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와 혼합하는 것은 손해로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베조각이 낡은옷을 당겨 해어짐이 더하고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쳐 다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가 끝난 묵은 포도주와 달라서 발효의 힘이 크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를 쉽게 터칠 수 있습니다.

2) 따라서 이 말씀은 “새것과 헌것을 혼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새것과 헌것이 무엇이냐?”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새것은 복음주의이고, 헌것은 구약종교의 낡은 의식들입니다. 히 8:13에서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주가 오셨고 복음이 성취되었으면 이를 예고한 구약의 제도나 의식은 그 목적을 다한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재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복음의 성취자를 믿지 못한 자들과 또 복음을 믿어도 낡은 의식을 탈피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약의 모형적 개혁하시는 과정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저희들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혼돈을 피하되

① 이미 성취된 구약적인 것과 신약적인 것의 혼돈과 ② 성경에 없는 기독교적 사상과 문화(제도)에 대한 혼돈을 정화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오직 성경 제일주의와 개혁적인 차원에서의 일색을 도모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혈루증을 고쳐주심에 대하여(20-22절)

1) 이 일이 있은 후에 로마의 한 직원(공무원)이 와서 “자기의 방금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어 살려 달라” 는 간청을 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18절)

2)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 병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① 혈루증이란 병은 “αἱμορυσα(하이모루사)”란 말로 12년이나 고생한 하혈병이나 그 원인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현대 의학적 병명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② 그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겉옷가를 만진 것은 그렇게 할 때 “구원(병 고침) 을 받을 것이란 믿음”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21절). 이 믿음은 거의 억지가 없는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이런 확신으로 구하는 기도는 다 응답을 받고 성취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 “네 믿음대로 되라”(마9:29)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상황에서 이루어 주실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이때에 예수님은 그를 돌아보시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그시로 구원(고침)을 받았습니다.

4) 여기에 “그시로 구원을 받은 것”은 육체적 병 고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눅17:14,19). 예수님은 그 여인의 질병과 믿음과 태도를 이미 아셨고 또 그에게 고침을 선포하시기 전에 벌써 능력을 전달해 주셨습니다(눅8:46). 따라서 이 능력은 선포전에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 주셨고, 은혜를 받는 성도의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신 이 믿음의 뜻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함이요 그 신뢰의 정도가 “겉옷가만 만져도 예수님이 은혜를 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확신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4. 직원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18,23-26절).

1) 예수님이 그 직원의 집에 가셨을 때에 그 집에는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① 피리는 음악을 동반하여 즐거움(욥 21:12,마 11:17)과 위로(욥30:31)를 줍니다. 따라서 그 집에서 분 피리소리는 위로와 곡성을 대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훤화란 지껄이고 떠드는 소리로 어떤 종교적 의식이나 다른 잡담 등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 소녀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을 예상하시고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은 무리를 내보내신 후 소녀의 방에 들어가셔서“시신의 손을 잡으시매 죽은 자가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25절).

① 여기에서 무리를 내보내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자들이므로 아무런 도움이나 은혜를 힘입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② 손은 만져 일어나게 하심은 무언의 활동에서도 능력이 역사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눅 8:54에서는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 됐으나 마태가 이를 생략한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③ 이로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되심을 입증하셨고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죽은 자를 살렸다”면 큰 뉴스재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에는 그런 이적을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경으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히 2:4).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① 금식의 교훈과 ② 신앙사상의 혼잡을 피할 것과 ③ 혈루증 든 여인의 믿음과 ④ 예수님의 뜻만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임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 36 과 육신과 영혼을 위한 사명 (마 9:27-38) 목록으로


이 말씀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누어서 “육신과 영혼을 위한 사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27-31절),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것(32-34)은 육신 치유에 속하고 전도, 교육과 목자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35-38절)은 영혼의 사명에 속하기 때문에 제목을 위와 같이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연구는 세 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27-31절).

1)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후 그 직원의 집에서 떠나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27절).

①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친 뜻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마 20:30에서 다른 두 소경이 “주여‧‧‧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호칭한 예가 있고 또 성경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사 11:1,10,마 1:1,21:9,15).

②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은 눈뜨기를 간청한 소원이며 이 소원을 예수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간청한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두 소경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었으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신분을 깨달아 접근하게 된 것이므로 예수님의 형상을 보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고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두 소경을 길에서 만나지 아니하시고 어떤 집에 들어가셔서 만나셨습니다. 이렇게 집안에서 맞이하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의 역사를 감추시려는 의도를 보인 것입니다. 30절에서도 “엄히 경계하사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 예수님은 자신을 들레시지 않는 겸손한 분이기 때문이며(마11:29, 12:19)

② 자신의 신분을 꼭 나타낼 대상에게만 알리실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성구를 꼭 읽어보십시오(마 7:6, 눅 8:10, 살후 3:2).

③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실 때 때를 맞추어 사역하시기 때문이며(요7:8)

④ 또 핍박자들의 눈을 피하여 행하신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요5:13).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이 당연히 전파되어야 할일이지만 (마 11:5)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서 은밀히 하셔야 할 때도 있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눈을 뜬 사람들은 너무 벅찬 감격과 함께 그 사실을 “그 온 땅에 전파했다”(31절)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의 엄히 경계하심대로 복종하지 않은 잘못이었습니다. 신앙은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며 때로는 좋은 소식이나 선한일도 은밀함을 지켜야 할 경우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이 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실 때

①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일 할 줄을 믿느냐?”(28절)고 물으셨으니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메시야임을 이미 나타내셨음으로 (마 11:5) 능력을 믿는 신앙과 메시야를 믿는 신앙은 상통하는 것입니다.

② 그들이 “주여 그러하외다” 하므로 예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는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여 밝아지게 하셨습니다.

③ “너희 믿음”(29절)이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실 능력자”임을 믿는 것이고 “눈을 만지심” 은 치료의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의식일 뿐이요 실제적인 능력은 소경들의 믿음을 근거로 하여 직접 주신 것입니다. 소경들이 가진 믿음으로 눈을 뜨고 복을 받은 것처럼 성도들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5)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영적 안목을 갖게 하시는 신령한 은혜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35,눅 10:23,계 3:18).

2. 벙어리를 말하게 하심에 대하여(32-34절)

1) 소경을 보게 하시고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 를 데려 왔으므로 그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벙어리로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2) 귀신들린 자의 여러 가지 상태를 참고하면 귀신이 벙어리 되게 한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실 때 아무런 절차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마음의 뜻” 하나로 역사하셨음을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이 일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므로 기이히 여긴 사람들도 있었지만(33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의 왕(마10:25)을 빙자(힘입어)하여 쫓아낸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① 예수님의 능력을 귀신의 능력이라 한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였습니다.

② 저희들도 어떤 능력을 관찰할 때 성령님의 역사인지 마귀의 역사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이런 것을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에 대조하는 것 뿐이므로 성경과 일치하면 긍정하고 다르면 부정해야 할 것이요 그만한 지혜가 부족할 때는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우리는 벙어리가 말하는 것을 기대하기 전에 영적 벙어리(사56:10)의 상태에서 고침 받는 은혜를 사모하셔야 하겠고(행 2:4,고후 6:11), 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며 진리를 선포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영혼에 대한 사명(35-38절)

이 제목의 말씀에서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으니 ① 전도와 교육이요 ② 일꾼의 모집입니다.

1) 예수님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또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도 고치셨습니다(마8:17참조).

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전도와 교육을 친히 시행하신 것입니다. 전도는 모든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면서 행하셨고

② 교육은 회당에서 하셨습니다. 현실교회가 꼭 이행해야 할 것이 바로 전도와 교육입니다. 교회는 이에 대한 확실한 방법을 갖고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지도자 없는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을 예견하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무리도 목회자의 인도가 없으면 신앙적으로 유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다”하시고 “추수하는 주인 즉 하나님께 간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따라서 저희들은 “일꾼 양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사역에도 여러 일꾼이 필요하고 또 교회를 섬김에도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각자에게 은사주신 분량에 따라 좋은 일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② 추수하는 일꾼이란 특별히 전도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일꾼이면 모든 은사를 구비한자라 할 것입니다. 이 일꾼 양성은 교회 안에서 교육으로 이룩할 수 있으며

③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영혼에 대한 사명의 기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예수님은 이에 대한 시행으로 다음 장에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 37 과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심 (마 10:1-4) 목록으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여 권능을 주시고 전도하도록 파송하시면서 여러 가지 주의할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절에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권능을 주셨다” 는 말씀이요, 2절-4절까지는 열 두 제자의 이름을 소개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1) 1절에서는 열 두 제자라 하셨고 2절에서는 열 두 사도라 하셨으므로 “제자”의 범위가 넓지만 제자들 중에서 사도를 뽑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란 스승을 따르는 자이고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 “전권대사로 가는 자”를 의미하므로 특별한 직책을 맡겼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제자와 사도의 성격을 다시 구분한다면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와 함께 영구히 존재할 수 있으나 사도는 특정사역자로 파송되는 의미와 함께 초대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단회적 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3) 사도의 특정사역이란 계시와 능력을 나타내어 기독교의 기초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고 단회적 직임이란 초대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직을 받은 열 두 제자는 그 시대에만 있었던 특별한 은사의 직임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 바나바와 바울도 사도였습니다(행 14:14).

4) 또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란 명칭을 받지 않은 제자라도 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하신 사실이 있으니 예를 들면 능력을 나타낸 “빌립”집사나 사울을 변화시켜 사명을 준 “아나니아” 같은 경우이고 또 성경을 기록한 마가, 누가의 경우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도적 사역자”로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8:4-7,39,9:12).

5) 이렇게 열 두 사람이 부름을 받았지만 이런 계획은 하나님이 일찍이 “모태로부터 쓰실 자를 선택하신 일”을 시행하신 것입니다(갈 1:15,16). 따라서 어놀의 사역자들이 선택되고 파송되는 것도 사람의 주관으로 우연하게 되는 줄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나 사명자를 세우는 일까지 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자들이 부탁하여 명령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기 전에 먼저 권능을 주셨습니다.

1) 이 권능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① 더러운 귀신을 쫓는 권능이요 ② 모든 병을 고치는 권능이요 ③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이었습니다. 요즈음 전도자들이 이런 권능을 받아가지고 나간다면 “결정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당시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믿음 부족 때문에 그 권능을 나타내지 못한 일이 있었고(마 17:16) 또 나타난 결과로 인하여 크게 신기함을 느낀 일도 있었습니다(눅 10:17).70제자들이 와서 귀신이 강복한 것을 신기한 일로 보고하였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귀신의 강복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므로 기적이 나타난 것과 생명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별개의 것으로 말씀하시면서 기적이 나타난 그 자체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크게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2:39과 눅 16:31을 참고하십시오.

3) 그러면 오늘의 전도자들도 그런 권능을 받아가지고 전도해야 할 것이 아닌가?할 때에 오늘날은 어떤 이에게 병 고치는 은사로서(고전 12:7,약5:14,16) 의술이나 기도의 응답으로 점차 병을 낫게 하여 주시는 것 이상 더 큰 기적은 나타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 시대에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적 권능을 멈추셨는가? 할 때 초대교회 이후 교회 시대에는 사도들의 능력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이 그 능력을 멈추셨다고 믿는 것입니다(빌2:26-27, 딤전5:23,딤후4:20).

4) 그러면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나 사도적 사역자들에게만 특별한 권능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능력으로 이미 증명하셨고, ② 또 예수님의 복음운동이 곧 하나님의 구원 운동임을 입증하셨으며(히2:3,4) ③ 사도들의 믿음생활을 후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으셨기 때문이요(고전 11:1,엡3:20), ④ 성경기록의 완성으로 기독교의 기초가 완전하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엡2:20).

5) 여기에서 병고침의기적은 가장 많이 시행하셨지만 지금은 의술의 발달로 더 많은 병을 고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병 고침을 위한 기도는 어떤 근거에 의하여 해야 되며 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이것은 ① 모든 성도가 고난을 당하였을 때 기도를 통하여 해결하여야 한다는 말씀과(약 5:13) ② 또 어떤 질병이 “죄로 인한 징계로 주어졌다”고 할 때에는 (신11:26,28:60) 그것을 깨우쳐 주면서 같이 회개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노여움을 푸시고 병을 낫게 하시는 섭리가 있으니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약 5:16)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의 창조자이십니다(사 45:7). 어떤 질병이나 사고나 우환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참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되거든 하물며 성도가 당하는 어려움에 예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유가 있어서 문제를 주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이나 야곱이 나그네 신세된 것이나 요나가 풍랑에 던져진 것이나 나사로가 앓다가 죽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흔히 저희들이 당하는 고난은 ① 자신의 부주의 로 ② 자신의 잘못으로 또는 ③ 연단과 교육을 주시는 연고로 ④또는 하나님이 데려가시기 위한 목적으로 질병을 주셨는데 그 목적이 성취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믿습니다” 하며 기도를 한다 하여 다 고쳐 주시겠습니까? 따라서 이유가 있는 질병이나 환난은 그 이유가 해소될 때에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무시한 채 “무조건 믿습니다”하지 마시고 원인을 추적하여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면서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러면 이 시대의 전도자들에게 이런 사도적 권능대신 주신 권능은 무엇일까요

① 완성된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능력이요(눅 1:37)

② 상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요(막 9:29, 요 14:17)

③ 사랑과 봉사의 능력이요(행 1:8)

④ 지식 문화의 발전을 최대한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전도자들은 이러한 능력을 힘입도록 연구와 기도로 노력하여야 하며 영적 능력과 함께 도덕적인 능력으로서 사랑과 봉사의 힘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7) 그리고 환난당한 자나 병자들을 만났을 때는 약 5:14,16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치료하면서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3. 열 두 제자를 소개하셨습니다(2절-4절).

열 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본래 이름은 시몬), 안드레(베드로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세베데의 두아들),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세리),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시몬(가나안인), 유다(예수를 판 가룟인)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이 서열적인 명단인가?할 때 ① 베드로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야고보와 가룟유다만 1번, 5번, 6번, 9번, 12번의 고정위치에 있고 ②그 나머지는 앞뒤 사람과 서로 바뀌어 기록된 일이 있으며(마10:2,3,막3:16-19,눅6:14-16,행1:13) ③ 또 수제자격인 베드로와 문제의 인물로 타락한 가룟유다를 첫 번과 끝번으로 지정하였고 ④ 예수님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마태는 1, 2, 3의 순위로 기록하였지만(마17:1,26:37) ⑤ 나중에 바울사도는 갈 1:9 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아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이라” 하시므로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순위를 바꾸어 기록하기도 한 것입니다.

2) 따라서 이 서열문제는 먼저 부름 받고 나중 부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마19:30,21:31,눅19:26) 누구든지 그의 인물됨과 사역능력을 중심하여 (갈1:9,마11:11) 존경하는 대상을 앞세워 호칭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이 경우에 능력적인 인물의 순위를 사람이 정한다면 민심이 천심이란 말처럼 성도가 존경하는 정도로서 가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사역자의 달란트가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선후배 차이도 있고 은사와 능력과 지혜의 차이도 있어서 바나바가 바울의 선배이고 바울이 실나를 대동한 것처럼 명분에 따라 서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어떤 단체에서는 달란트은사를 무시하고 가입 또는 선후배 순서대로 일을 맡기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은사를 헛되이 여기는 인간의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달란트 은사를 따라서 적당한 직임을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38 과 전도인들에게 부탁하심 (마 10:5-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파송하실 때에 부탁하신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삼가야 할 것과 시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삼가야 할 것.

1)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방인이란 다른 민족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 되는 것을 막으신 이유는

①오순절 이후로 이방인의 때를 정하셨기 때문이요(전 3:1,사49:8)

② 이스라엘 선민에게 복음전파의 특혜를 먼저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15:24).

2)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지역은 본래 므낫세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이였으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종교적 전통이 이질화 되고 또 앗수르의 침략으로 혼혈족이 생기면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요4:9,눅9:52-56). 그러나 예수님이 그곳에 전도를 피하게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명하신 것은 아니고(요4:4,9) 다만 가까운 예루살렘부터 유다와 사마리아 순으로 전도를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행1:8).

3)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銅)을 가지지 말라” (9절) 하셨으니 이것은 생활의 정착기금이 될만한 큰 밑천을 의미하는 것인데 전도자는 어느 고을에 가든지 영구 정착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항상 전도의 대상을 따라서 이동할 준비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정착할 기금이 필요 없고 역시 나그네처럼 일시적으로 유하여야 하므로 임시 거주비 이상을 소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물질을 앞세우거나 물질의 힘으로 전도를 하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4)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10절) 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날그날의 여행을 위한 장비를 필요 이상 준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길을 나선 행인이 보따리가 크면 불편한 점도 있고 또 전도하는 일에도 지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돈 주머니를 갖지 말고 단출한 의복을 입으며 신이나 지팡이를 지참한 것 이상 더 준비하지 않아야 가벼운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전여행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실 때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고(마 21:19) 세금을 내실 때도 자기수중의 돈이 아닌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돈으로 내셨으니까(마17:27) 무전여행을 하신 듯도 하지만 사실은 가룟유다에게 돈궤를 맡기고 필요할 때 쓰셨습니다(요 12:6,마 14:15). 따라서 이 말씀은 무전여행을 의미하지 않으며 필요이상 여유 있는 물질을 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유 있는 준비를 못하게 하신 이유는 ① 만일 필요이상 여유 있는 물질을 준비한다면 우선 그것으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고(눅 3:11) ② 또 “내일 일을 그날 염려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 이며(마 6:34) ③ 전도자에게 주실 은혜를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심은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①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로 생활대책을 이어 가게 하실 것과 ② 또 전도비용(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재정) 으로 그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 9:9,10,딤후 2:6). 전도자는 전도할 때도 그렇거니와 가족을 부양 할 때도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창22:14)로 필요에 공급 하시는 경우가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문제 되는 것은 막 6:9에서 “한 개의 지팡이만 가지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본문 10절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과 다른 것으로 여기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의 지팡이만 가지라” 는 말씀도 여행자가 뱀이나 전갈을 처리하기 위하여 호신용으로 갖는 한 개의 지팡이를 필수품으로 인정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두 벌 옷을 갖지 말라는 의미와 같은 맥락에서 억제하게 하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시행하여야 할 것.

1)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6절)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란 탈선한 선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때가 되기 전에 그 시대의 선민을 먼저 구원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완악한 자들을 위하여 “내가 암탉을 날개아래 모음같이 너희를 모으려 한 것이 몇 번이었느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7) 하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잃은 자(낙심자)에게 전도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란 용어를 쓰신 줄 압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읽은 양 또는 낙심한 자들을 우선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가면서 “천국이 가까왔다”하고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면서 전파한다”는 뜻은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뜻이고 “천국이 가까왔다” 는 것은 ① 신약의 교회의 탄생을 의미하며 ② 또 구원의 복음적 사건 즉,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사건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전하라”는 뜻도 될듯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왕국을 대망하는 백성들에게 그 소원하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은 이 사실을 과거형으로 바꾸어서 “천국의 복음은 이렇게 성취되었다고 또 성취될 것(내세 천국)이라고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병자와 죽은 자와 문둥이와 귀신들린 자들에게 “주신 능력을 나타내어 해결하되 거저주라”(8절)하시므로 능력 있는 예수님을 증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오늘날 저희들이 부족해서 못 받는 능력이 아니고 그 시대의 복음적 기초사역자들에게 특별하게 주신 권능이기 때문에 역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전도자들이 나타내야 할 능력은 진리의 능력과 경건의 능력으로 최대한의 권위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어떤 은혜를 전달하였다 하더라도 대가를 기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4) “어떤 성이나 촌이나 간에 목적지에 가면 합당한자를 찾아 그곳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서 머물라”(11절)하셨는데 이 “합당한자”란 전도자를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곳곳마다 여관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돈을 주고 민박을 할 수도 있고(눅10:35), 자원봉사에 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행16:15).

5)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 (12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전도에 이용되는 그 가정을 위하여 복 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전도자의 축복기도를 통해서 주십니다. 이때에 “그 집이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나 만일 사모하여 받지 않으면 축복한 자에게로 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누구에게든지 성실하게 축복하여 손해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시 107:9).

6) “누구든지 영접도 안하고 복음을 듣지도 않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나와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14절) 하셨습니다. 이 “발에 먼지를 떠는 의미” 는 그 영혼들 이 구원을 받지 못함에 대한 책임이 전도자 측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플 때 티끌을 뒤집어쓰듯이(욥 2:12,행 13:51,삼상 4:12) 책임이 없음과 관계 단절을 표현할 때 사용한 풍속적 의식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① 전도자의 여행에 관한 문제(5-6,11절) ② 사역과 증언에 관한 문제(7-8절) ③ 축복에 관한 문제 (12-13절) ④ 책임완수에 관한 문제(14절)를 말씀하셨고

3. “심판날에 소돔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5절)고 하셨습니다.

1) 예전에 소돔 고모라는 죄악의 관영함과 천사와 의인을 영접지 않으므로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창 19:1-28). 그때에 의로운 롯은 소돔성 백성들의 죄를 인하여 자기 마음을 상하면서 깨우친 일이 있었으나(벧후2:7-8) 심판이 임박했을 때는 사위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창19:14). 그래서 롯과 두 딸만 구원을 받고 다 멸망하였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전도를 받지 않은 자들이 “그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하셨으니 왜 그럴까요?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타락은 심하였어도 종들을 학대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종들도 학대하였고 나중에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눅 20:9-18에 보시면 “포도원 농부 비유”교훈이 나옵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맡기고 왕위를 받으러 타국에 가서 소출을 받기 위하여 먼저 종들을 보냈으니 종들이 매만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아들을 보내면 괄세를 못할 것이라”하여 보냈지만 “아들은 그의 상속자니까 죽여야 한다” 하여 아들까지 죽였으니 주인이 와서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타인에게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죄가 소돔 고모라 백성들의 죄보다 크기 때문에 그들의 받을 심판이 더 중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전도자의 품위를 지키면서 받은 은사에 따라 전도의 사명을 더욱 잘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9 과 핍박의 대비책 (마 10:16-23)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권능을 주시면서 부탁하신 말씀들이 있었지만(마 10:1-15) 이 본문에서는 특별히 “핍박 받을 일에 대비할 말씀” 을 주셨습니다. 전도자들이 완악한 자들과 핍박자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경우에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잘 견디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1.전도자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16절 전반).

1) 이 말씀은 성도와 전도자를 양에, 불신자들과 핍박자들을 이리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신앙의 핍박자들을 사자와 무늬 있는 매로 비유하신 말씀이 있고(렘 12:8,9), 또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마3:7)로도 비유하셨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복음 사역자들을 죽이는 자들을 이리로 비유한 것을 심한 표현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도는 꼭 양과 같아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2) 이 말씀은 전도자에게 “핍박하는 무리들이 항상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심각한 핍박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합니다만 신앙적 핍박을 받아 순교한 사람들이 과거에 많았던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2. 그런고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절 하반)고 하셨습니다.

1) 뱀이 왜 지혜로울까요?

① 아담 당시의 뱀은 사탄의 화신으로 이용되어서 순결한 아담을 꾀이기에 충분하였고

② 현재의 뱀도 멀리서 대적을 살피며

③ 위험이 올 때 머리를 먼저 감추는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뱀의 지혜란 자기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며 치명적 상처를 피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2) 비둘기는 순결한 새입니다. 비둘기는 그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 만큼 유순한 새이며, 또 썩은 것을 먹지 않는 정결한 새이므로 제물에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비둘기는 다른 것에 피해를 주거나 피해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전도자는 최대한의 순결을 보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사람들을 삼가라”(17절 상반)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핍박자들로서 전도자에게 어떤 구실만 있으면 고소하고 공회(재판소) 에 넘기며 채찍질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실에 잡혀 피해를 당하면 영광이 되지 못할 것이요, 순결한 중에서 당하는 핍박은 영광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전도사역을 인하여 총독이나 임금 앞에 끌려가더라도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 되기 위함인즉 기회를 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런 경위로 로마에까지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경위로 전도의 길을 열어 주시는 섭리가 있습니다(행28:1,8,16-20).

4. 전도자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때 “무엇을 말할까” 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19절)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 무슨 말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이 “설교준비를 안 해도 성령님이 계시로 알려 주신다”는 뜻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준비해야 된다”(벧전 3:15)고 하셨으므로 이 말씀은 핍박받는 성도에게 성령님께서 담대한 마음과 대답할 수 있는 지혜를 상황에 따라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20절). 또 이 약속은 믿음으로 순교적 사명을 각오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대하 17:9).

5. 가족간의 갈등과 대립 등 심한 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21절,10:34-36).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의 역사는 가족이라 하여 제외하지 않으며 가족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도 예고 하셨습니다(22절 상반). 이모든 사람이란 주위의 사람 중에서 한사람도 자신을 이해해 주거나 동정하는 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딤후 4:16).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22절 하반)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죽는 시간까지 어떤 상황에서라도 믿음을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요, 구원을 받을 자는 죽는 시간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다하고저 하는 목적과 나중까지 견딜 목적으로 고난을 자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7.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23절)는 말씀의 뜻은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님이 성령으로 대신 오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하실 때까지 그들은 이스라엘 전역에 전도를 마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 과정까지 예견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① 양같이 유순하고 ② 뱀처럼 지혜로우며 ③ 비둘기같이 순결하여야 하고 ④ 모든 사람을 주의하여 상대하여야 하며 ⑤ 사람들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하고 ⑥ 가족들의 핍박도 각오하여야 하며 ⑦ 명분 있게 피신해야 할 것과 ⑧ 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함께 하심을 믿고 부지런히 전도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40 과 핍박을 감수하라 (마 10:24-33) 목록으로


이 말씀의 내용은 의미상으로 구분하면 다섯 가지가 됩니다. ①“예수님도 핍박을 받으시니까 그 제자들도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요(24-25절) ②“지금은 핍박 중에 전도하나 나중에는 자유롭게 전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요(26-27절) ③“하나님은 두려워하되 핍박자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요(28절) ④죽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이요(29-31절) ⑤“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 는 말씀(32-33절)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대지를 종합하면 “핍박을 잘 감수하라”는 제목으로 전체 내용을 포괄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핍박을 받으신즉 제자들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 그 이유는 선생이 제자보다 주인이 종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핍박을 받는데 어찌 아래 사람이 이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도의적으로도 아래 사람은 윗 사람이 받을 핍박을 대신 받으려 해야 할 것이요, 종도 주인만큼 핍박 받을 각오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하다”는 말씀은 “지위상으로 같아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만큼 고난(핍박)받을 각오를 한다면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핍박을 받았다면 제자들이나 성도들도 그만한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한다면 넉넉하다”는 말씀입니다.

3) “집주인을 향하여 ‘바알세불’ 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라”하신 것은 악인들이 주인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여 “마귀의 왕”이라고 비난하였은즉(마9:34,눅 12:24) 하물며 그 집 종들을 핍박하기란 더욱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핍박 받는 일을 예사로운 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당시에는 핍박이 있어도 장차는 핍박 없이 전도할 때가 있을 것을 예고하시므로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씀은 장차 복음이 더 밝혀지고 자유롭게 증언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죽 핍박이 심한 때는 어두운데서 비밀히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자유로운 때가 오면 광명한데서 말하고 높은 곳 (집 위) 에서 전파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사를 살필 때 순간순간 핍박의 시대도 있었지만 또 자유로웠던 시대도 있었고 특히 지금은 광명한 중에서 전파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증언의 사명자는 이 자유로운 시기를 최대한 선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는 핍박자들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28절).

1) 핍박자는 몸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창2:7,엡2:1). 그러면 “몸을 죽이는 일”은 핍박자들이 임의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뿐입니다. 몸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시되 이것을 악한 자들에게 허용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삼하16:10,요19:10,11,롬13:1).

2) 이런 사실에 대한 증명은 ① 욥 1:12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용하여 욥을 괴롭게 하신 경우”, ② 삼하 16:10에서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것도 하나님의 허락에 의함” 이라는 말씀, ③ 요 19:10,11 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거나 놓을 권세를 가진 것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란 말씀, ④ 또 롬13:1에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말씀 등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몸을 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3) 오직 성도는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심;삼상2:6) 이신만큼 하나님만 두렵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야 합니다.

4) 또 육신은 어차피 한번 죽을 것이니까(히9:27) 핍박으로 죽음의 기회가 온다면 이것은 병으로 죽게 되는 경우보다 훨씬 복된 일이므로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이 말씀에는 “몸을 죽이는 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을 든든히 주관하신다고 하셨습니다(29-31절). 이 사실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라온(헬라돈 1/10 드리크마)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서만 된다 하셨고

2) 또 하나님은 성도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고 계신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작은 미물의 생명부터 사람과 성도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틈을 두시지 않고 세심하게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3) 따라서 성도는 참새 같은 미물보다 귀한 존재이므로 핍박이나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힘써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5. 성도는 어떤 핍박과 위험 속에서라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감추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32-33절).

1) 신앙은 진실을 그 터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일향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험에 들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가 다행히 회개하였습니다(마26:69-95).

2) 우리는 미련한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외식적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핑계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외식적으로 주님을 모른다고 핑계했다면 그는 “주님을 모른다” 한 것으로 핍박을 면하고 사탄을 기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이런 신앙은 약한 신앙이요 구원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만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핍박자 앞에서 자기의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의 진실치 못함 자체가 그의 신앙을 입증하지 못함은 물론 행동을 표현하지도 못하였으므로 결국은 죽은 믿음임을 면할 수 없게 되므로(약2:17)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기를 시인하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도 시인하여 중보 하여 주실 것이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르신다”고 부인하시는 것은 바로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마7:23). 부인이란 그 자체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롬10:9).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믿음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핍박을 감수하며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것과 ② 핍박 중에 전도할 때도 있고 전도의 자유를 누릴 때도 있음과 ③ 핍박자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할 것과 ④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생활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의지할 것과 ⑤ 끝까지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41 과 십자가를 지는 복 (마 10:34-42)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34절-38절까지 “십자가를 지는 생활” 에 관한 말씀이고 ② 39절-42절까지는 “십자가를 지는 자가 받을 복과 위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39절은 앞뒤의 말씀을 결속시키는 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이 요절 말씀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의 “자기 목숨을 얻는 자” 란 “예수님을 배척하고 복음을 믿지 않으므로 자기의 육체적 생명을 보존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잃을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2) 또 “자기 목숨을 잃는 자”란 “믿음의 순교자나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사수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얻을 것이라” 하셨으니까 이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성도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고 하셨고(38절), 또 “성도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지 아니하면 주님 앞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1)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성도마다 “믿음생활의 난관”이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종류에 따라 또는 정도에 따라 다른 난관들이 있을 수 있으나 “믿음을 위하여 이런 난관을 감수하는 것”이 곧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에 “자기 죽이는 형틀을 지고 간다” 는 것은 바로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혹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하여 낙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그 정도에 따라 하늘에서 상을 주시기 때문” 입니다(마 5:11-12).

2)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다” 는 것은 “성도가 자기의 책임과 맡겨진 일에 대한 고난을 감수하면서 변함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고

3)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은 “사명자로 쓰심에 있어서 그런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사역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따르는 사명자는 사명을 인하여 죽을 각오를 든든히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만일 사명자에게 그런 각오가 없다면 현실 정욕에 흔들려서 사명생활을 주님의 뜻대로 유지해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십자가적 난관이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대표적인 실례를 말씀하셨습니다.

1) 35절-36절을 보시면 가족간에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웃에 반대하거나 친척이 반대하면 견딜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해져서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 등 가족들이 서로 대립하여 기독교의 원수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총칼을 들고 와서 죽이는 핍박도 있지만 그것은 견디면서 주님을 따를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간의 대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웃과 불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인내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왜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할까요? 3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기 때문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가정싸움을 일으키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마귀와 성도와의 전쟁판도가 가정의 대립으로까지 비화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일단 복음이 전파되면 그것을 받을 자와 안 받을 자 사이에 대립이 있게 되고 이것이 갈등과 싸움으로 비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뜻은 바로 성도와 마귀와의 전쟁이 이웃과 가정을 무대로 일어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이때에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가족에 대한 인정이 있어도 예수님과 구원의 은혜만큼 절대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 누구라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되고 가족을 멀리 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핍박하면 가장 평안하게 예수 믿는 방법은 혼자서 자립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정과 재물의 이권을 버리고 주님만을 홀로 모시고 산다면 더 큰 위로와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또 성도가 믿음 생활의 핍박을 받으면 마치 바람이 불 때 의복을 여미는 것처럼 신앙적으로 더 경성하게 되고 질병이 있을 때 면역력이 생기는 것처럼 신앙이 더 강해지게 되는 것을 익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롬 5:3).

4. 마지막 대지에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복음 사역에 임할 때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위안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1) 구원이 보장됩니다.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마10:22).

2) 하늘의 상급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5:11-12).

3) 지상에서도 위로자와 봉사자가 있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40절-42절의 말씀입니다.

① 40절에서 “제자들(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복음 사역하는 사람들)을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영접함과 같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함과 같다”고 하시므로 제자들을 예수님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영접 받는 위치에 올리시므로 격려를 하셨고, 또 그렇게 할 것을 장려하셨으며

② 41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이나 의인의 이름으로 선지자나 의인을 영접하면 그들이 받을 상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하시므로 자신이 선지자나 의인 같은 사명자가 아니라도 그들의 사명을 돕는 뜻으로 그들을 봉사하면 그들이 받을 상을 나누어 받게 하신다고 하시므로 일선 사명자 아닌 성도가 십자가 지는 일선의 사명자를 적극 도와주므로 격려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③ 또 42절에서는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소자 중 한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다면 그것 역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소자 중 한사람”이란 “불우한 사람”을 의미하는 뜻도 있겠지만 이 말씀이 제자들을 격려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제자 중 지극히 작은 자(연소한 사역자)를 의미하고 “냉수 한 그릇”이란 적은 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은 종에게 적은 봉사를 하여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시므로 자기십자가를 지는 사역자들이 현실에서도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1) 복음 사역자가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일사각오로 주님을 따라야 할 것과

2) 모든 성도가 믿음으로 받는 핍박을 이기기 위하여 이웃이나 가족에 대한 인정도 버릴 수 있어야 할 것과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역자들이 현세에서도 봉사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위안을 받음이 마땅하다하셨으므로 어렵게 일하는 복음사역자를 적극 협력하여 상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2 과 메시야 사역과 요한 (마 11:1-10)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전도사역이 바로 “메시야 그분의 사역”이 확실한가를 자기의 제자들을 통하여 확인하는 내용이 기록된 중에 예수님은 자기의 활동을 요한에게 알게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는 요한에 대한 소개와 칭찬을 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중심은 메시야 사역과 요한을 소개하신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메시야 사역과 요한”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확인함에 대하여

1) 이 사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 동리에서 전도 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1절).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전도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본동리(마9:1)인 가버나움을 떠나시면서(마9:9)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1절을 보시면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기 위하여 또 거기를 떠나셨다”고 하셨으므로 ① 그 지역이 가버나움 근방임을 알 수 있고, ②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다른 동리로 가시려는 뜻과 ③ 그 동리들로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가르치시려는 계획을 가지시고 일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 당시에 요한은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알기를 소원하였습니다.

① 이 요한은 사도요한이 아닌 세례요한입니다. 마14:3-12에 보시면 세례요한이 감옥에 들어간 이유와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② 세례요한이 감옥에 들어간 이유는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대헤롯의 아들 안디바로서 당시 갈릴리와 뵈뢰아 지경을 다스렸다고 함)이 그의 계수를 자기 아내로 뺏어 동거하는 비윤리성을 지적한 일로 미움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마14:3-4).

③ 요한은 옥에 갇혔으나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과연 그분의 사역이 자신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인가”를 확인 하려고 한 것입니다(3절).

④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말씀이 예수님을 초면으로 알아보려는 것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이미 알았고(요1:31-34), 예수님에게 세례까지 베풀었는데 어떻게 이런 생소한 질문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취지는 요한이 감옥에서 들은 어떤 이의 위대한 사역이 바로 자기가 세례를 베푼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인가를 확인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적 사역은 바로 예수님이 나타내시려는 “복음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이 아니라면 다른 이(예수님)의 사역을 기다려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의 성격을 대답해 주셨습니다.

1) “너희는 가서(내게서) 듣고 본 자를 요한에게 고하라”(4절) 하셨으니

① 메시야의 증언하는 말씀을 듣고, ② 활동상황과 능력을 친히 보고 그대로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③ 성도들은 듣는 것(성경말씀), 보는 것(사도들의 모범)으로 확신의 근거를 삼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계1:1).

2) 메시야적 사역의 성격은 두 가지였으니 하나는 “초자연적 능력”이고, 또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① 초자연적 능력으로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들”이요, ② 예언의 성취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는 것”등인데 이 사실은 사61:1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3) 저희들은 여기에서 메시야적 사역의 특수성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런 능력이 아니고야 어떻게 메시야임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그 능력을 보고 믿으라”(요10:38)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사역 성격과도 같은 것입니다(히2:3-4). 이 사역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능력을 모든 성도가 믿음만 있으면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을 범하지 않아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3.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6절)

1)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서 결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아야 하고, 또 그렇게 결심 하셔야 하겠습니다.

2) “실족”이란 뜻은 “미끄러진다. 걸려 넘어진다. 범죄 하게 된다”는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실족으로 번역된 말씀이 3가지가 있습니다.

① “프로스콥토”(προσκόπτω;요11:9,10)인데, 이 말은 “범죄, 실족할 기회, 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프타이오”(πταίω;롬11:11,벧후1:10,약3:2)인데, 이 말은 본문의 “실족”이란 용어인 “스캔달리조(σκανδαλίςω)”와 같은 뜻입니다

3) 따라서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되시던지, 예수님을 믿으므로 어떻게 되든지, 예수님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가질지언정 낙심이나 좌절이나 불신앙은 절대로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추호라도 진리나 교회와 사명을 인하여 실족할 수 없음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내신 후 다른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한 칭찬을 하셨습니다(요한에 대한 말씀은 본인의 저서 “기독교 신앙 백과” 708, 710P를 참고하십시오).

1)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약하고 중심이 없으며 지조 없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씀하셨고,

2) 그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아니라” 하셨으니 이는 사치에서 떠난 사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세상의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왕궁에서 사치하는 무리들의 잘못도 간접적으로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부드러운 옷”은 비싸고 질 좋은 의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요한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다른 선지자보다 나은 이유는 ① 선지자의 사명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했다는 뜻이요, ②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를 밝히 나타낼 때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멀리서 예언한 것이 아니라 직접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요1:29-34). 오늘날도 진리의 말씀을 잘 밝혀 증언하는 사역자가 칭찬 받을 선지자입니다(빌2:16). 우리는 무엇에든지 보다 나은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4) 또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헛된 것들을 보거나 구하러 나가지 말고(갈5:26), 반드시 볼 것을 보고 구할 것을 구하며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찾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5. 마지막으로 10절에서는 세례요한이 출현한 예언이 있었음을 소개 하셨으니 곧 말3:1의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하신 것이 바로 이 사람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의 사자로 요한을 예수님 앞에 보내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과연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한 선구자적 역할을 다한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메시야 사역의 특징과 ② 세례요한의 인물됨과 ③ 예수님이 사람을 정밀하게 보시고 칭찬하신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제 43 과 요한과 관련된 교훈들 (마 11:11-19)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교훈들과 해석해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만 세례요한과 관련지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제목을 “요한과 관련된 교훈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1절은 “요한을 칭찬하신 말씀”이고, 12절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이며, 13절은 “구약의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이 요한까지”라는 말씀이고, 14절은 “엘리야가 오리라고 예언한 말씀이 바로 요한을 의미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5-19절은 “요한 같은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고 비방했음”에 대하여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1. 요한을 칭찬하신 말씀에서(11절)

1)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하시므로 말씀의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셨습니다. 이 “진실로”란 뜻은 “다른 말씀에 진실이 희박했다”는 뜻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15절의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신 말씀과 17절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그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신령한 귀의 문이 열려 있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하셨고, 또 거듭난 심령의 귀로 들어야만 할 것을 강조 하신 것입니다.

2)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① 여자가 낳은 자란 아담과 하와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의미하므로 예수님은 요한을 모든 인류 중에 가장 큰 자로 평가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② 요한의 큰 자 된 근거는 그의 후천적 생활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이 무엇으로 큰 자의 인정을 받았을까요? 성경전체에서 요한의 인격과 생활과 사명에 관한 것을 발췌하여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해답은 “기독교 신앙 백과”의 “예수님께서 가장 칭찬하신 사람”과 “특별한 인물 요한”이란 두 제목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708, 710P)

③ 저희들은 꼭 요한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① 우선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성도의 행실에 따른 상급의 차이로 순위가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행하면서 잘 가르친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게 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가르치는 자는‧‧‧지극히 작다는 일컬음을 받는다”(마5:19)고 하셨습니다. 또 천국에는 상급이 거의 없는 자(눅23:39-43,벧전4:18)도 있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적게 알고 적게 가르치며, 적게 실천하면 칭찬도 적어짐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② 그런데 현생의 위대한 자가 왜 내세의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까요? 그 이유는 ㉠ 현생의 성도가 완전 성화를 성취하지 못한 점과 ㉡ 하나님의 목적인 영원한 천국 건설에 입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나 요한이 완전 성화를 이루고 천국에 들어간 상태에서 비교한다면 역시 요한은 그곳에서도 가장 큰 자의 칭찬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2.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에 대하여(12절)

1) “요한의 때”란 요한이 복음 사명을 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한 때를 의미하며(마3:16,마3:11,요1:29)

2)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뜻은 ① 메시야를 영접하는 자들에 의하여 천국의 문이 확장되고 침체되었던 천국운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활성화되므로 많은 천국 백성이 채워질 것을 예측하신 것입니다. ② 물론 그 이전시대에도 천국 운동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천국운동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 된 것으로 보나 메시야의 구원사역을 지향하여 믿는 소극적 방식으로 보나, 또 게시의 미완성 단계에서 믿음생활을 한 사실로 비추어볼 때 소극적임을 알 수 있고, 더욱이 구약 말기 약400년 간은 침체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의 때부터 다시 활기를 띄게 된 것이므로 새롭게 침노를 당한 것으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는 말씀은

①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을 획득 한다”는 뜻이 아니고

②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은혜 안에서 신앙적 노력을 열심히 하여 자기 심령과 생활 속에 천국을 확장 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 점령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비유하였을 때 그 땅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땅을 점령한 것은 백성들의 침노에 의하여 성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노가 활발할수록 가나안 복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롬 1:18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성장”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④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 나라의 뜻을 넘는 장소적 의미로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천국의 본질적 축복을 영적으로 누림에 있어서 신앙적 노력이 필요함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엑스포 광장을 천국이라고 비유했을 때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입장비 9,000원으로 되지만 들어가서 얼마나 많이 보고 느끼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믿음(은혜의 복음)으로 받되 구원의 행복(천국)을 느끼는 것은 각자의 침노하는 노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바로 진리를 통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따른 성실한 생활입니다.

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13절).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1)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뜻하는 것이고, 구약성경의 예언목표가 메시야 사역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기전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시대까지는 구약의 예언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지만 메시야가 오신 다음에는 그 예언들이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예언의 효력이 요한까지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메시야를 예언하는 모든 율법이나 의식은 예수님 이후 시대에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 격이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2) 구약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예언한 말씀이 말라기서인데 그 마지막절인 말4:5에 보시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응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은 요한의 출현을 예고하시므로 끝내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3) 14절에서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을진대 세례요한이 그 예언의 말씀에 따라 온 엘리야인줄 알라”고 하셨으니 여기의 엘리야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인물로 요한이 그의 성정과 능력을 갖고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눅1:17).

4.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고 비방하는 무리들에 대하여(15-18절)

1) 마치 장터에 앉은 아이들이 그 동무들의 피리 소리에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처럼 요한의 강한 진리의 증언(눅3:7-14)에도 듣는 자들이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완악함을 비유로 지적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성도 자신이 말씀에 민감하지 못한 상태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 또 예수님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요한의 생활을 귀신 들린 자의 생활로 악평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18절).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마3:4). 이런 생활을 원시적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요한의 제자들이 자주 금식했다는 말씀은 있지만(마9:14,눅5:33), “요한이 금식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원시적 생활을 비난하여 “귀신이 들렸다”하였고,

3) 평상인과 같이 잡수시고 마시는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비난 받을 일이 아닌 것을 비난 받는 것은 핍박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19절).

4) 이렇게 복음에 반응이 없는 자들에 대하여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19절) 하셨으니 여기의 ① 지혜란 바른 것을 깨달아 복음(예수님)을 영접함을 뜻하고, ② 그 행한 일이란 믿음의 활동을 뜻하며 ③ 믿음이 없이는 복음을 수용할 수 없고 믿음으로 복음을 영접한 후 신앙적 활동이 있어야만 예수 믿는 일이 지혜로운 일임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요한에 대하여 ②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요한까지 유효함에 대하여 ③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내적확장이 노력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말씀 ④ 복음에 반응이 없고 선지자를 비난하는 무리들의 어리석음과 ⑤ 지혜(믿음)의 가치는 믿음 안에서만 평가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제 44 과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주심 (마 11:20-30)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4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완악한 고을들을 비교하여 책망하신 말씀(20-24절), ②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복음을 나타내심(25-26절), ③ 모든 것과 특히 계시의 특권을 주심(27절), ④ 무거운 짐진자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심(28-30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 제목의 말씀들이 다 중요하므로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1. 완악한 고을들을 비교 책망하심에 대하여

1)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① 고라신은 가버나움에서 서북쪽으로 4Km쯤 되는 곳이고 벳세다는 가버나움에서 동쪽 갈릴리 해변으로 4Km쯤 되는 촌입니다.

② 예수님이 고라신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으나(눅 10:13)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고 벳세다에서 행하신 권능은 5병2어의 기적과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신 사실(마 14:19,막 8:23)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요 21:25).

2) 그러나 그 고을들은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① 여기의 “회개하지 않았다” 는 것은 대단한 불신앙과 완악을 표출했다는 뜻입니다.

② 따라서 믿음과 회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그러하였듯이 외부로 나타나는 권능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거듭난 자에 한하여서만 돌이킴이 있는 것입니다. 행13:48에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되‧‧‧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하신 것처럼 선택된 자라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③ 회개하지 않는 자는 책망과 화를 받아야하며 또 장차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룰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3)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의 완악을 두로와 시돈에 비교하셨습니다.

①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변의 촌락으로 가버나움에서 서북쪽으로 두로는 약 80리, 시돈은 약 130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② 예수님은 이런 고을들의 완악성을 단체적으로 비교하셨은즉 개인적으로도 비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많은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비교, 평가 하신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막12:41-43).

③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셨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거민들은 회개할 수 있을만큼 덜 완악하다는 뜻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음”은 슬픔과 탄식을 표하는 태도로서 구약의 성도들이 회개할 때에 그런 태도를 취하였습니다(단9:3,에 4:1,욘 3:6).

④ 누구나 전도를 해보면 상대방이 얼마나 완악한가를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그런 정도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또 두로와 시돈의 거민들이 복음을 받을 때 회개할 것도 아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까지는 완고한 성읍에서 능력을 베푸시며 전도하셨지만 그다음에 두로와 시돈에도 전도의 손길을 펼치셨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은 권능으로도 회개 시킬 수 있는 고장을 외면 하셨을 리가 없고 또 전도의 대상을 잘못 선택하여 후회하실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⑤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쉽다”하심은 예수님이 친히 심판주로서 표준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4) 22절-24절에서 “가버나움”의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경고 하셨습니다.

① 그들이 “하늘까지 높아진다” 하심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의지하는 태도요, “음부까지 낮아지리라”하심은 높아진 분량대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시행한 능력을 구약시대에 소돔에서 행하셨다면 소돔성 거민들이 회개하고 보존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역시 완악을 대조 평가하신 말씀입니다.

③ “심판날에 소돔땅(옛날에 멸망당한 백성들) 이 견디기 쉬우리라” 하심은 예수님 당시의 가버나움 백성들의 죄악이 옛날 소돔 백성들에 비할 때 더 완악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개인이나 단체의 완악여부를 저울질하시고 장차 거기에 알맞은 영원한 심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나타내심에 대하여

1) 25절-26절은 잠시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영교하시는 순간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말씀에 응하여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2)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셨고, 또 이것을 하나님의 지당하신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여기에 “이것”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②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세상지식을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불신앙적 견지에서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허황된 조작이나 신화로 듣고 넘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1+2=3이라” 할 때 이론적인 것은 믿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으니 이것이 세상지식을 더 앞세우는 타락한 인간의 근성입니다.

③ 그러나 어린아이는 지식도 없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약자가 강자에게 무조건 의지하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란 “νήπιος(네피오스)”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입장에서 복음받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구원의 은혜 주시는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건 복음을 받을 때는 이“네피오스”의 입장에서 받아야 하며 또 그렇게 사는 것을 복되게 여기셨습니다(마 18:1-4).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셨습니다(27절).

1) 이 “모든 것”이란 성부하나님의 고유신 분을 제외한 전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모든 영광의 지위를 다 받으셨으니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만유의 주, 만왕의 왕(딤전 6:15), 산자의 주(롬 14:9), 믿음의 주(히12:2), 구원의 주(히 2:1), 생명의 주(행 3:15), 영광의 주(롬1:25,약 2:1 ,계1:6), 심판의 주(요 5:22)라고 하셨습니다.

2) 그중에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 계시의 유일특권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만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란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영감으로 주신 성경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곧 예수님의 소원대로 주신 계시입니다(요16:13).

② 그런고로 예수님의 창조물인 자연계시와 예수님의 소원대로 주신 성경계시만으로 신앙의 지식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심에 대하여

1)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수고의 짐(창 3:19)과 환난의 짐(살후 1:6)과 사망의 짐(창 2:17,롬 6:23)을 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2) 여기에 “다 내게로 오라”하신 말씀은 전체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는 택자에 한하셨음을 믿으셔야 합니다(마22:9-14,딤전 2:4,살후 3:2). 선민을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참 성도 주위에 외식자가 있음에 대하여 꼭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 성도는 주위에 있는 가라지 같은 대상을 볼 때 큰 귀감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잠16:4,마13:25-29)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장식품이 되려면 잘 깎아서 가공을 해야 하는데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한 금속이 없기 때문에 같은 다이아몬드끼리 갈아서 가공을 한다고 합니다. 이때에 한쪽은 가공품이 되고 한쪽은 상대방의 모양을 만들어 주기위하여 이용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주위에 있는 불순한 대상은 다 성도의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하여 있는 존재들일수도 있습니다.

3) 예수님께로 오는 자를 “쉬게 하신다” 는 뜻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됨을 뜻하며(요 8:32) 그 죄의 결과에서 구원받고 회복되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4)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꼭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는 뜻은 “진리대로 믿고 순종하면 자유를 누리는 마음을 갖게 되므로 쉼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확신 없이 행하거나 분명치 않게 행하면 피곤한 법입니다. 그러나 맨발 벗고 뛰는 자처럼 확신 있고 분명하게 행하면 신앙생활에 부담이 없을 뿐 아니라 큰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6) 또 “내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것은 주님이 이행하지 못할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행할 때 넉넉히 실천할 수 있는 계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친히 모범을 나타내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요 13:5,고전 11:1,히 5:8,벧전 2:12).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하여

① 완악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두렵게 알아야 하고,

② 어린이의 심정으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야 하며

③ 예수님과 그의 소원에 따라 주신 계시로만 믿음생활을 하시고,

④ 온유 겸손한 성품으로 용감하고 확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시므로 큰 휴식과 구원을 성취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5 과 안식일의 주인 (마 12:1-8) 목록으로


① 지금 읽으신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사이로 지나실 때 제자들이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 비벼먹자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안식일법 위반이라고 항의를 한 것입니다 (1-2절). 이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지적사항이 정당치 않은 것을 설명하시고 (3-5절) 안식일 제도의 성격과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6-8절). 그래서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안식일 활동과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독선과 항의), 그리고 안식일의 성격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안식일의 주인(8절)으로 정하였습니다.

② 그런데 이 사건의 말씀은 막 2:23-28과 눅 6:1-5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는 “이삭을 잘랐다” 하였고, “누가”는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었다” 하였으며 “마태”는 본문에서 “잘라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잘라서 비벼먹었다”는 누가의 기록이 더 자세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이란 말씀을 더 하셨고, 마태복음에서는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으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자를 죄로 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위의 말씀까지 종합하여 상고할 것이므로 3복음서의 말씀을 전부 설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 안식일날 밀밭사이로 가시면서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비벼먹음에 대하여(1-2절)

1) “그때” (1절) 란 시기는 복음의 역사를 차례로 기록한 누가복음에 비추어볼 때(눅 1:3,5:27-39)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전도하시던 초기에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다음의 일일 것입니다.

2) 그때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신것은 전도하시려 다니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전도에 주력할 수 있는 날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3) 그런데 그 제자들이 퍽 시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1절). 이것은 전도자가 항상 시장함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시장함이나 생활의 부족함을 느낄지라도 의연히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견디기 어려운 시장기를 방림하시지 않습니다(막8:1-10).그리고 주님 자신도 시장함을 느끼셨습니다(막 11:12).

4)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가면서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밀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법으로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밀이삭 정도를 딴것은 애교로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으로 그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신23:25에서 “이삭을 따는 것은 가하나 낫을 대지는 말라”고 하시므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책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5)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한 것은 곡식 주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뜻이 아닌, 안식일 범한 것을 정죄하고 항의한 것입니다(7절,2절).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고 비비는 것은(눅6:1) 일종의 수확과 타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안식일 규제법을 29조항이나 엄격하게 만들어 지켰다고 합니다.) 과연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 비빈 것이 노동이 되며 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될까요?

2.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살피셔야 하겠습니다(3-5절).

1)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 행동을 변호하셨습니다.

① 그 이유는 다윗이 함께한 자들과 안식일날 시장할 때에 제사장에게 가서 음식을 청한즉 제사장만 먹어야 하는 진설병(떡으로 드린 제물)을 먹게 한 일이 있었고(삼상21:1-6)

② 또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안식일날에도 제물 드리는 수고를 하기 때문입니다(민 28:3-9).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과 제자들이 밀이삭을 비벼먹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시겠지만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전 안에서 행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예수님이 곧 성전이시고(요 2:17, 21), 또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6, 8절).

③ 이상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도 신앙(제사)에 관한일과 또 먹어야 하는 일을 용납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막2:27) 불필요한 규제를 만들어서 속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6절).

1)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성전을 우상시하는 관념을 깨우치시고

2) 예수님이 만물의 주이시므로 당연히 성전보다 크신즉 자신이 곧 성전이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요 2:21).

3) 또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하나님의 집이므로 그 집에 사는 집주인이나 아들은 역시 집보다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성전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당이라는 건물을 예수님보다 더 신성시하여서는 안 됩니다. 성물은 성물답게 취급하고 하나님만 절대자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안식일을 허락하신 취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막 2:27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물론 천국안식을 계시하시는 목적도 있습니다(출20:11,마11:29). 그런고로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과 성도 자신의 믿음에 관한 일과 사랑에 관한 일을 힘쓰고 육체건강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 이 교훈의 증거로서 “하나님이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구약의 말씀(호 6:6,미 6:6)을 인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독선과 비판의 눈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서 종교적 의식을 중히 여겼으므로 예수님은 사랑의 중요성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면 함부로 정죄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의 주인” 이란 뜻은 1) 안식일의 시간적 주인이시며 2) 안식일 제도를 율법으로 주신분이라는 뜻이며 3) 천국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나 주인의 아들은 하인에게 속박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안식일 규례에 속박을 당하실수 없고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주인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안식일을 구약적으로 행사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안식일 제도에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미 해방된 것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4) 그러면 왜 예수님이 율법적 안식일제도를 무시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인이 있을 때 종이 주인 대행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갈 4:21-26,28-31). 따라서 안식일제도는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빛을 잃은 것입니다. 안식일이 수고를 쉬게 하거나 천국의 모형이라면 참 평안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므로 예수님 앞에서 다른 계율이 은혜의 빛을 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오시자 안식일제도는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롬 14:5,골 2:16).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은

1)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의 수고로움을 본받는 일과

2) 바리새인들의 독선과 율법제도의 과장을 경계하는 일이며

3) 사랑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일이며

4) 성전보다 더 크시고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5) 신약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새롭게 주신 계율에 속하는 것입니다(마28:1-10,고전 16:2,계 1:10).

 

제 46 과 예수님의 겸손한 활동 (마 12:9-21)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세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쳐 주신일(9-13절)

②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피하시면서 따르는 자들의 병을 다 고쳐주신 일(14-15절)

③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하시므로 자신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일(16-21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종합하여 “예수님의 겸손한 활동”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손 마른 병을 고쳐주심에 대하여(9-13절)

1) 그 때와 장소는 “거기서 떠나사 회당에 들어가셔서” 시행하셨으므로 (9절) “거기를 떠나신 것”은 앞에서 말씀한 “밀밭사이길” 을 떠나신 것이고 “회당에 들어가신 것”은 밀밭을 지난 다음 동리에 있는 회당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곳곳마다 회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당” 이란 공회당과 같은 공동회의소를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종교적, 사회적 모든 모임의 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2) 그때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병 고침을 위하여 왔는데 여기에 “손 마른 병”은 손으로 통하는 혈관과 신경의 마비 때문에 손이 정상적으로 자라거나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명으로는 뇌졸증으로 나타나는 중풍의 증상과 비슷할 것입니다. 이런 병은 현대의학으로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이 그 병을 고쳐주시기도 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목적으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① 여기의 질문하고 또 송사하려고 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14절)이었습니다. 그들은 밀이삭을 비벼먹은 사건에서부터 예수님의 교훈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실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만일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감행한다면 안식일 위반죄로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하여 질문을 한 것입니다(10절).

③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12절)

4) 그리고는 그 손 마른 자의 “손을 내밀라” 하여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병자가 손을 내미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순종임은 사실이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믿음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병은 예수님이 구하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손 마른 자가 손을 내미는 것이 본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이 예수님과 사도 시대 초기에 나타났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피하심에 대하여(14-15절)

1) 바리새인들은 두 차례나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계획에 실패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비빈 사실과 병을 고치신 사실로 송사꺼리를 만들려 했지만 계획대로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예수를 죽일까?” 하고 의논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의 비방하는 태도와 송사꺼리를 만들려는 태도의 노출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14절).

2) 이때에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①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고,

② 또 그중에 있는 병자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 중에 병 고침을 받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병 고침의 은혜는 병자의 믿음여부와 관련하여 베푸신 것이 아닌 것으로 짐작됩니다. 무조건 다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건 그 병자의 신앙의 성질과 정도에 관계없이 다 고쳐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③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 중에 한사람에게도 실족함을 주시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고 경계하심에 대하여(16-21절)

1)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신 이유는

① 우선 예수님이 온유, 겸손하시기 때문에(마 11:29)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삼가 하셨으며

② 악인들에게 선전되어 핍박이나 훼방을 가중시킬 필요가 없으셨으며

③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7-21절).

2)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활동 모습에 대하여 사42:1-3에서 예언하기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고,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마태가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나의 붙드는 나의 종” 이란 말씀과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을 옮기지 않았고

② 그 대신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하였으며

③ 또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한 것은 “이방에 심판을 알게 하리라”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의 가감이 아니고 의미의 설명으로서 마태가 알고 있는 대로 영감에 의하여 오류 없이 인용한 것입니다.

④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예언의 성취자로서 일치한 태도를 취하셨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말씀하셨으니,

①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위한 하나님의 택한 종이며

②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시는 자이고,

③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이며

④ 성령을 충만하게 주실 대상이고(마 3:16),

⑤ 또 이방에 복음과 심판을 알게 하실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4:4-10).

4) 19-21절에서는 예수님의 활동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① 예수님은 다투지 않으시고,

② 들레지 않으실 것이며(“들렌다” 는 뜻은 자기를 나타내려는 고의적 교만을 의미함)

③ 아무 길에서도 그의 큰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사역을 하실 것이며

④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를 없애지 않으실 것이니 이는 아주 약하고 쓸모없는 인생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신다는 뜻이며

⑤ 이런 사역을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실 것이라”하시므로 주님이 승리자로서 마지막 심판하실 때까지 그렇게 행하시고 지도하신다는 뜻입니다.

5) 따라서 “이방들도 그 이름을 바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성이 유대인에게만 감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사모의 대상이 되어 널리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에 착안하여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노력할 것과

② 예수님의 평화주의를 본 받아야 할 것과

③ 무슨 일이나 예언의 말씀에 맞추어 시행할 일과

④ 예수님이 겸손하며 조용하게 사역을 하시는 일과

⑤ 약한 자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일과

⑥ 이방인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과

⑦ 복음사역을 할 때 겸손의 덕을 세우며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하여야 할 것을 교훈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 47 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 (마 12:22-32) 목록으로


위의 말씀 22절-27절은 “귀신을 쫓으신 능력에 대한 논쟁”이요, 28절-29절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관한 말씀”이요,30절-32절은 “사함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천국의 실현은 사탄을 이기고(22절) 쫓아내며(28절) 예수님과 함께하고(30절) 성령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때(32절) 성취할 수 있다는 말씀이 본문에 나타나 있으므로 제목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귀신을 쫓으신 능력에 대한 논쟁(22절-27절).

1) 22절의 “그때에”란 말씀이 이 사건의 역사적 연결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즉 앞에 있는 사건들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으니

① 이 사람의 눈멀고 벙어리된 것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귀신의 역사로 발생한 것이요

② 또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것은 귀신을 그에게서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③ 귀신은 자기의 능력으로 질병이나 화(禍)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욥2:6-7,막 5:5).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 이상은 시행하지 못함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욥1:12,2:6,민 22:35).

3)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과 함께 눈멀고 벙어리된 것이 고쳐지자 많은 무리들이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하였으니, 이 뜻은 “메시야가 아니냐?”함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대상 22:10,사 11:1-2). 또한 예수님의 이런 능력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마11:3-5, 힌 2:4).

4)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소문으로 듣고 이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바알세불”(마 10:25)이란 “귀신의 왕”이란 뜻으로 구약시대의 블레셋족 “에그론” 사람들이 “바알세붑” 이란 이름으로 섬기던 신을 의미하였던 것인데(왕하 1:2),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 이방신들을 사탄의 대명사로 호칭한 것입니다(막3:22,눅 11:15). 이는 예수님을 귀신의 종으로 인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5) 그러나 예수님은 벌써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①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동리나 집은 서로 대적하는 관계로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25절).

② 만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신 것이 사탄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쫓는 사탄과 쫓기는 사탄이 서로 분쟁한 것인즉 이는 사탄의 세계가 무너짐을 뜻할 것이나, 사탄은 아직도 꼬리에 남은 힘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계 9:10, 19) 그 세력이 그대로 있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26절).

③ 또 예수님의 역사를 사탄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너희 자손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속한 유대인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하시므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는 사례가 있었음을 시사하신 동시에 만일 그들이 귀신의 힘으로 쫓는다면 그들도 귀신의 종이어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④ 한쪽이 다른 한쪽을 쫓으려면 그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자기보다 약한 자를 결박하거나 어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귀신이 쫓겨난 것은 귀신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29절).

⑤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재판관이 되는 것처럼(27절) 그들이 바알세불의 능력을 절대시 한다면 사탄이 그들의 재판관이 된다는 뜻과 같다고 하시므로 강한 자는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관한 말씀입니다(28절-29절).

1)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은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8절).

2)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사탄을 패배, 축출하는 세계를 의미하셨습니다.

3)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사탄은 패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함에서부터 실패하였고,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진리 선포에 패배하였으며 귀신도 쫓기고 패배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 세례요한도 “천국이 가까왔다”(마 3:2) 하였고, 예수님도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막 1:15). 천국은 적극적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이 계신 세계이고, 소극적사고 방식으로는 사탄이 패배하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4) 따라서 저희들에게 천국이 임하려면 저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그 진리와 성령님의 힘으로 사탄의 궤계를 물리칠 때 성취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순간순간의 생활 속에서도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 이길 때에 천국생활이 더욱 풍성하게 유지되며 사탄이 없는 곳이 바로 영원한 천국인 것입니다.

3. 사함받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30절-32절).

1)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예수님은 자기를 반대하고 훼방하는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30절).

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 즉, 사상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자나 예수님 중심으로 모으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자요 예수님과의 화합을 해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성격을 반대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교회는 예수님 중심으로 모이는 단체이고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을 본받는 단체입니다. 만일 이 단체에 합세하지 않거나 예수님 중심을 본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불신자요 반대자인 것입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헤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헤친다”는 뜻은 자신부터 모임에 합력하지 않거나 모임이 방해되도록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사람의 모든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하셨으니 이것은 죄의 성격이 “인간을 상대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예수님을 거역한다”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람으로 알고 거역한 것은 사함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죄는 영원히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므로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미래의 세상)에서도 영구히 사함 받지 못합니다.

4) 그 이유는 하나님(성령님)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복은 하나님과의 화합을 조건으로 성취됩니다. 따라서 죄사함 받은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합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이 화합은 예수님의 구속적 중보 사역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성령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줄로 착각하는 무리들의 죄를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의 역사를 이기고 살아야 할일

②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생활로 천국생활을 영위할일

③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모든 죄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제 48 과 예수님이 강조하신 표적 (마 12:33-42) 목록으로

 

이 말씀을 세대지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① 33절-37절까지는 “악한 자들의 형편”이요 ② 38절-40절까지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표적”이며 ③ 41절-42절까지는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악한 자들의 형편(33절-37절).

1) 예수님이 지적하신 악한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병자를 고치신 것이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 (마 12:24)함으로써 불합리적이고 거짓된 말을 하였기 때문에 본문 34절에서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하신 “너희”란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비유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독사의 독은 피해를 주는 악의 상징이요

② 그 독이 몸속에서 발산되어 나옴 같이 악인의 악행이나 선인의 선행도 역시 각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서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35절).

3) 마음에 쌓인 선이나 악은 먼저 말로 표현되고 다음에 행실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서는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표현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① 악한 말은 진실치 않은 말입니다. “실과로 나무를 아는 것”처럼(눅 7:43-44) “실과가 좋을 때 나무도 좋다” 하든지 실과가 나쁠 때 “나무도 나쁘다”고 말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의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인체 하면서(눅 18:9) 좋은 일로 열매를 맺은 예수님을 정죄하려 하였으니 그들의 무익하고 악한 말이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② 따라서 악한 말은 곧 거짓말로서 거짓된 마음에서 나오며 이웃을 해롭게 하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36절).

4) 예수님께서는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는다”하셨으니 여기의 “말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좋은 말을 한 것 때문에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또 나쁜 말을 한 것 때문에 정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이란 진리를 전하는 말, 진리를 고백하는 말, 유익을 주는 덕담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만 참(진리) 이신 분이므로(요 14:6) 이를 시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롬 10:10). 악인의 형편이 말에서부터 표출되며 마음에 쌓은 악에서 기인한다는 말씀은 저희들을 많이 반성하게 하십니다.

2. 예수님이 강조하신 표적에 대하여(38절-40절).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기를 청하였습니다.

① 서기관은 구약시대에는 학자로서 율법을 기록하고 연구하여 가르친 사람이요(대하 34:13) 제사장을 겸하기도 하였습니다(스 7:6-10). 그 직책은 예수님 때까지 이어져서 신약시대에는 율법사라고도 하였고 (마 22:35,눅 7:30) 그들 중에는 공의회원도 있었는데 (마 6:21) 이들이 제사장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핍박하였습니다(눅 22:2,행4:5,7:12).

② 이들이 표적 보기를 요청한 이유는 병 고치는 기적 이상의 것이나 더 신비한 능력을 보려는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기적을 본 자들도 있었으나(마 12:10-14) 또 듣기만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마 12:24) 더욱 신비한 능력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③ 그들이 믿기 위한 목적으로 기적을 구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어야 할 자였다면 예수님이 어떤 방법을 주셔서라도 믿게 하셨을 것입니다(행 13:48). 또 믿을 자는 기적을 보거나 체험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눅 23:39-43, 살후 1:10). 그러나 믿지 않을 자는 많은 기적을 보아도 여전히 완악함을 돌이키지 못하는 것입니다(출 16:2,7-12).

2) 이 청원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39절)고 하셨습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 란 바로 죄악이 많은 그 시대를 지적하신 것이고 표적을 구하는 그들도 역시 악하고 음난한 세계에 예속된 자들입니다.

㉡ 악은 진리를 대적함이요 음란이란 육신적 음행과 신앙적 범죄를 다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 16:4).

㉢ 그들이 악하고 음란한 죄악의 상태를 돌이키지 않으면서 표적부터 구하는 것은 마치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특권만 향유하려는 것과 같아서 더욱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으니(39절)

㉠ “선지자 요나의 표적” 이란 욘 1:15-17 에 나타난 사건으로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에게 삼키움을 당한 후 죽지 않고 3일 만에 살아난 기적입니다(40절).

㉡ 예수님이 이런 기적을 “다시 보여 주시겠다” 고 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장사된 후 3일 만에 살아나실 기적을 보여 주실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사건과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기적의 예고였던 것입니다.

㉢ 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기적을 믿는 신앙이 바로 구원받는 복음적 신앙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 그리고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는 말씀에는 다른 표적을 체험하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표적 나타내시는 일을 극히 소극적으로 시행하실 것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기적을 최고기적의 정점으로 아시고 다른 기적을 추구하려는 마음에서 떠나 무조건 진리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41절-42절).

1) 우선 지혜로운 자는 회개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전 750년경에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의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욘 3:1-10). 그들이 회개한 결과로 구원을 받게 되었고 장차 심판 때에는 그때에 구원받은 니느웨 성도들이 다른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함께(마19:28,고전 6:3) 회개하지 않는 예수님시대의 사람들을 정죄하는 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재판관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주님의 재판석에 배석 동참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고 돌이킨 초라한 선지자 요나의 외침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완악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암시하셨습니다.

2) 지혜로운 자는 믿음을 갖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남방여왕 즉 스바여왕(왕상 10:1)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스바여왕은 그 당시의 솔로몬왕의 지혜(신앙적 지혜)를 배우려고 땅 끝 먼 곳인 서남 아라비아 지역에서 왔었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통하여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역시 예수님 시대의 불신자들을 정죄하는 심판원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예수님에 비할 바가 못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의 미련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또 지적하셨고 예수님은 선지자나 왕보다도 더 크신 분임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악한 자들의 상태를 경계하셔야 하겠고 ② 성도가 믿어야 할 최고의 표적인 부활 신앙을 갖고 ③ 그 이외의 다른 기적을 진리 이상 더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④ 회개하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49 과 예수님의 세대관과 가족관 (마 12:43-50)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은 크게 두대지로 나누어 상고할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세대관에 대한 말씀이고(43-45절), ② 예수님의 가족관에 대한 말씀입니다(46-50절). 앞부분이 예수님의 세대관이 되는 이유는 45 절 끝에서 “이 악한 세대가 또한 그렇게 되리라”하신 말씀이 그 부분의 결론이고 그 앞의 내용은 악한 세대가 더 악해질 것을 예증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비유적인 설명에서 귀신의 동태와 귀신을 다시 용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다음 대지에서는 예수님의 실제 가족(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께 나온 것을 고했을 때 예수님은 모친과 동생이란 가족개념을 실제 가족에 국한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모든 형제자매 모친”에게 똑같이 적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세대관에 대한 말씀에서(43절-45절)

1) 예수님은 시대의 죄악상이 점점 더 악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5절 하반의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는 것처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이 악한 세대” 란 예수님시대도 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후세대는 더 악해질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얼만큼 더 악해질 것인가에 대하여 한 귀신의 역사가 일곱 귀신의 역사로 늘어날 정도로 7배나 더 악해질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 7배에 대한 말씀은 상당히 악해짐에 대한 비유적 예증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③ 현실천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년왕국 세대를 소망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후시대일수록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허무한 말입니다. 말세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더 악해지게 되어있습니다(마24:6-14,딤후 3:1-5). 말세에는 인간의 지식이 더한 만큼 (단 12:4) 마귀의 역사도 증가되고 (45절), 지식에 따라 질병도 발전하며 범죄의 수법도 점점 발전하여 지식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순결은 감소하게 될 것입니다.

2) 후시대가 악하여지는 이유는 마귀의 역사가 더 심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이며 광야와 같은 물 없는 곳은 쉴 곳이 못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고 인간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야만 그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입니다(43절). 그래서 마귀(귀신)들은 자기들의 안식처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을 상대로 활동의 폭을 점차 늘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5:8,마 24:24,25).

3) 이런 상태에서 성도는 더러운 귀신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이 더럽다”(43절)는 것은 진리의 대적자이기 때문이며 귀신은 인간세계를 떠나서는 안식할 처소가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인간이 진리로 방비되어 있지 않을 때 마귀는 인간심령을 무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성령)의 역사가 성도의 마음속에 접속될 때 사탄은 쫓겨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사탄이 축출된 성도의 마음속에는 즉시 예수님이 좌정하셔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에 예수님이 좌정하신다는 뜻은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붙잡혀 사는 생활을 의미하며 이로써 마귀의 유혹을 틈타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갔던 마귀가 쉴만한 장소가 없자 먼저 있었던 사람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본즉 그 곳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① “마귀가 나갔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나 회개의 역사 또는 말씀의 역사로 일시 쫓겨나감을 뜻하고, ②“비고 소제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속 계시지 않고, 무방비한 상태에서 정욕적인 자기가 다시 좌정한 뜻이며 ③ “수리되었다”는 것은 마귀가 거처하기 좋도록 준비되어 있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인 되시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꾀가 많은 마귀는 전자에서 자신이 약하여 진리역사에 일시적으로 쫓긴 것을 생각하고 다시 쫓기는 일이 없기 위하여 더 강한 마귀 일곱과 합동작전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가 주님 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계속 자기를 든든히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며(잠 4:23) 또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마귀의 역사가 제한 없이 강행될 것이기 때문에 점점 악한 세대로 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가족관에 대한 말씀입니다(46절-50절).

예수님의 모친은 마리아요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마 13:55)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계속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주시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동생들이란 원문의 “아델포스(ἀδελφόs)”로 형제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동생들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를 다 한 가족(형제, 자매, 모친)관계로 상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 가족이라 하여 신앙적관계로 맺은 다른 가족보다 더 특별하게 대하시지 않았고 또 신앙적 관계로 맺어진 다른 가족을 자기 가족보다 소홀하게 상대하시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족을 초월하여 공인적 생활을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기 가족을 고의로 소홀히 하신 것도 아닙니다(딤전 5:8).

2)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할말이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과 또 한사람이 그 사실을 예수님께 알린 일에 대하여는 예수님이 적당한 예우를 하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기독교인의 가족이냐를 알아서 범 가족적인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누가 성도의 가족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이면 예수님의 가족이요 성도의 가족이란 것입니다. 이런 가족은 자기의 속한 교회와 이웃교회와 세계의 모든 교회에 다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자기혈육의 가족이라도 믿음으로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는 한 가족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마 10:35-37).

4) 성도 여러분! 범성도를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이해하며 협력하고 양보하며 이기주의에서 떠난 자처럼 살아볼 생각은 없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가족에 대한 이기주의를 먼저 버려야 하겠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공평한 사랑을 시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실천은 어려워도 정신만이라도 그렇게 가져야 하겠지요. 그리고 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냐? 하는 것을 판단하여 그런 성도끼리 한 가족이 되는 기독교 세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세대관에 믿음으로 대비하시고 주안에서 가족적인 사랑의 친교를 갖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 50 과 씨뿌리는 비유 (마 13:1-23) 목록으로


예수님은 49번의 비유교훈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등불비유(5:15)와 집짓는 비유(7:24), 다음에 이 교훈을 주셨고 또 이 말씀은 막 4:3-20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증언자와 청중의 자세이고(1-2절) ② 비유교훈의 내용이며(3-9절) ③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이고(10-17절) ④ 이 말씀의 해설(18-23절)로 되어있습니다.

1. 증언자와 청중의 자세에서(1-2절).

1) 예수님이 바닷가에 나가 앉으시매 큰 무리가 모였으며

2) 예수님은 배에 올라 앉아서 말씀하셨고 청중들은 바닷가에 서서 들었습니다.

3) 이 사실에서 증언자의 권위와 듣는 자들의 성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비유교훈의 내용(3-9절).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네 가지 종류의 땅에 뿌리게 되는데

1) 길가에 뿌려지는 것이 있으니 길가에 던져진 씨는 흙이 잘 덮이지 못하므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게 되고

2)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진 것은 뿌리를 깊이 주지 못하므로 해가 돋았을 때에 마르게 되며

3)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가시가 기운을 막아 자라지 못하게 하고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3.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하여(10-17절).

예수님이 비유를 통한 교훈을 자주 하시므로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어 본즉 예수님이 여러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1) 천국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는 중 너희(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바리새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락된 자(있는 자)는 더 잘 깨달아서 진리를 풍족하게 하고 그렇지 못한 자(없는 자) 는 점점 진리를 멀리하여 완악하게 될 것이므로 들어야 할 자와 깨닫지 못해야 할 자 간에 열릴 수도 있고 감추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이런 사실이 있을 것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사 6:9-10에서 미리 예언을 하셨고, 마태는 그 말씀을 본문 14절-15절에 인용하신 것입니다.

①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진리를 듣고 예수님을 보아도 그 예수님과 말씀이 진리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요 3:3).

② 또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란 말씀은 하나님이 완악한 백성에게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신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징계 사유에 해당하고 깨닫고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또는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16절).

3)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메시야 만나보기를 대망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 죽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니 얼마나 복되냐고 하셨습니다(17절).

4) 우리는 성경으로 예수님을 깨달아야 하며(요 5:39) 또 거듭난 심령으로 진리를 밝히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이 비유말씀의 해설입니다(18-23절). 이 말씀에서 씨는 천국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경을 의미하며 또 예수님께서는 씨를 받는 토질과 생장조건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씨를 받는 토질과 생장조건은 성도의 마음으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길가요 ② 돌밭이며 ③ 가시떨기요 ④ 좋은 땅입니다.

이 말씀을 살피면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형편이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대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1) 길가에 뿌려진 씨입니다(19절). 길가는 씨가 잘 덮이지 못하므로 싹을 내기도 어렵고 또 관리상 방해를 받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가 성경말씀을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결국은 그 희미한 지식까지 잃어버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성도가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을 악한 자에게 뺏기는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적당하게 받거나 측면적으로 받지 마시고 확실하게 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돌밭에 뿌려진 씨입니다(20절). 표면에는 흙이 있으나 밑에는 돌(반석) 이 있어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를 깊이 간직하지 못하는 상태, 즉 말씀의 확신성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석이 깔려 뿌리를 깊이 주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의심이나 노력부족, 교만 등으로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환난이나 핍박을 이길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깊은 샘이 가뭄을 잘 견디는 것처럼 말씀의 확고한 지식위에서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많은 초신자들이 말씀의 확신을 갖기 전에 믿음의 태도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입니다(22절). 이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진리를 사모하는 힘보다 더 크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자세가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처럼 세상재리의 염려들로 신앙생활을 옳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신앙생활과 교회봉사생활을 위한 정신적, 생활적 여 를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좋은 땅에 뿌리는 씨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실천에 옮기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좋은 땅”은 성도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도가 마음에 심겨지기 때문입니다(약 1:21). 착하고 진실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마음에 진리의 씨가 뿌려지면 잘 깨닫고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 결실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의 결실 그 자체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00배, 60배, 30배는 씨 한 알이 많은 열매를 맺음을 비유하되 농부의 관리 정성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요, “혹” 이란, 사람의 관리정성에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리워졌을지라도 어떤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열매를 맺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욥은 믿음이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볼 때 일시적으로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믿는 성도는 혹 정성에 일치하지 않는 결과가 있어도 상당기간 인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길가에 뿌림” 은 성도의 말씀 받는 자세가 간절하지 못함을 지적하신 말씀이요, ② “돌밭에 뿌림”은 말씀을 깨달아 깊이 간직하지 못함에 대한 말씀이며 ③ “가시떨기에 뿌림”은 성도가 세상적 우수사려에 얽혀서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못함에 대한 교훈이요, ④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위의 세 가지 불비한 여건을 충족한 상태로 건전한 신앙 생활과 함께 많은 영광을 돌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51 과 세 가지 비유 말씀 (마 13:24-44)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비유교훈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34절-35절)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마 13:13-15). 세 가지 비유교훈 ① 가라지 비유(24-30절, 36-43절)이고 ② 겨자씨 비유(31-32절)이며 ③ 누룩비유(33절) 입니다.

1. 먼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하여

1)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마 13:13-15 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본문에서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시78:2의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본문 35절에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옛 비밀을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이라 하셨고 “발표한다”는 말씀을 “드러내리라”고 하시므로 의미상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2)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깨닫지 않아야 할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확실하게 깨달아야 할 자들에게는 더 밝히시기 위함입니다(사 6:9-10). 비택자나 핍박자나 시한부로 징계아래 있는 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깨닫지 않아야 할 대상이고 제자들은 깨달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만 특별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36절). 우리는 진리를 밝히 깨닫는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가라지 비유에 대하여(24-30,36-43절).

1) 24절에서 “천국은...”하셨는데 여기의 “천국”이란 의미는 지상 교회의 성도의 단체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38절에서 밭을 “세상이라”하셨고, 그 밭은 “제 밭”(2절) 즉 예수님의 소유에 해당되며 또 그 밭은 천국의 아들(38절), 즉 성도를 수용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성도)이라 하셨고(38절)

3) 뿌리는 자는 인자, 즉 예수님이라(37절) 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현실 교회 안에 참된 성도를 생산하는 책임이 예수님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씨를 뿌린자”는 집주인(예수님)이요, 종들은 주인의 하시는 일을 돕는 복음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27절). 마 13:3절 이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씨”가 복음으로 비유되고 “밭”이 인간의 마음으로 비유되었지만 본문에서는 씨를 성도로, 밭을 교회로 비유하신 차이가 있습니다.

4) “사람이 잘 때에”란 씨 뿌림의 책임자이신 예수님이 주무시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종들 즉 사명 있는 성도들의 나태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성도나 사명자들의 나태로 인하여 불순한 사상이나 외식하는 교인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힘으로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악인의 역사는 성도가 나태할 때 틈을 타지만 하나님은 이 사실을 섭리적으로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5)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뜻은 마귀의 역사를 지상의 교회가 봉쇄하지 못함에 따라 불신앙적인 외식자가 입교하여 함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또 불법을 자행한다고 하였습니다(41절).

6) 가라지는 처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싹이 나고 결실할 때는 더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외식자도 처음에는 믿음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 하지만 그 시기가 오래되어도 신앙이 자라지 않고 오히려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나타날 때는 외식자의 형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7) 종들이 “이것을 뽑으려 했으나 주인은 가만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만두는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되고 또 가라지는 천사들을 시켜 먼저 거두어 불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종들이 뽑기를 원한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외식성있는 성도를 분별하여 처리하기를 원한 것이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외식성과 진실성을 확실하게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믿음 약한 성도까지 외식자로 오판하여 뽑아낼 위험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② 따라서 그 가라지를 심판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이 곡식에 이익이 있다는 뜻인즉 이것은 사람의 오판 실수를 방지하고 함께 있는 사람의 악한 행실들이 성도에게는 죄를 깨우쳐 주며 그들을 교훈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 바로 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줌으로써 성도의 사명을 다하고 신앙의 연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도 적당한때에 적당히 쓰신다고 하셨습니다(잠 16:4). 이것을 잘하는 성도가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심판 때(추수 때)에 확실하게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때에 천사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자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다 거두어 불에 던지므로 이를 갈게 하신다”하셨으니. 이것이 확실한 최종 심판인 것입니다(39-42절).

④ 또 “그때에 의인들은 하나님 나라(내 곳간;30절)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라”하심은 가라지에 대하여 잘 적응한 성도들을 영광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43절). 따라서 이 말씀은 현실교회 안에 외식하는 교인이 있으므로 성도에게 유익한 것과 이에 대한 적응을 잘 하는 성도가 장차 상급 받을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라지를 북돋아 용납하라는 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3. 겨자씨 비유에 대하여(31-32절).

1) 여기의 “천국”이란 뜻은 성도의 믿음과 성도로 구성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2) “겨자나무”는 우리나라의 개나리 나무와 비슷한 것인데 그 씨는 깨알처럼 작은 것이 특징입니다. 겨자씨알은 작지만 채소 같은 1년 초는 아닙니다. 따라서 그 나무가 자라면 공중의 새가 그 가지에 깃들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비유가 무슨 교훈을 주시는 것일까요? 복음이 작은 단체로부터 시작될지라도 세월이 가면 성장하여 크게 발전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4) 그리고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는 뜻은 많은 생명들이 복음의 혜택을 받을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복음은 12제자를 통하여 세계의 인류에게로 확장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겨자씨 같은 상태에서 큰 교회로 확장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겨자씨와 같은 생명과 믿음의 역사에 큰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4. 누룩비유에 대하여(33절).

1) 이 말씀에서의 천국도 역시 성도의 믿음과 교회를 의미합니다.

2) 생소한 가루가 누룩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듯이 성도의 믿음과 교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로 변화되고 정화되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누룩은 발효시키는 요소일지라도 여기에서는 인격을 변화시키는 좋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을 이단의 요소로 말씀한 곳도 있습니다(마 16:6).

4) 누룩은 은밀한 곳에서 소리 없이 변화의 작용을 일으키며 그 발효의 힘이 무한하여 한 덩어리의 누룩보존으로 가루가 얼마든지 다 발효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누룩은 말씀의 무한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저희들은 누룩을 보유한 성도처럼 은밀한 중에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따라서 자신이 소리 없이 변화를 받도록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가 양적부흥과 전도의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누룩비유는 개인 심령의 변화와 교회의 질적 정화운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룩처럼 소리 없이 이웃을 감동시키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52 과 천국인의 만족 (마 13:44-58) 목록으로


위의 본문에서는 “천국인의 만족”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살펴보면 ① 44절-47절에서 천국비유와 함께 천국인의 만족함을 말씀하셨고 ② 48절-51절에서는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하여 ③ 52절에서는 천국제자들의 사명에 대하여 ④ 53절-58절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천국인의 만족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 “보화를 발견하여 소유한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광맥을 찾는 덕대가 큰 금광을 발견한 다음 그 땅을 자기의 소유로 가졌다면 퍽 만족하고 행복하겠지요. 성도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① 여기의 감추인 보화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의 계시로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기뻐함은 당연하며 “숨겨두고 돌아갔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독차지 한다” 는 뜻이 아니고 자신이 받은 신령한 복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하여 마귀로 틈타지 않게 하며 잘 간직하도록 정성드림을 뜻하며

③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은 성도가 현실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여서라도 가장 값진 보화를 갖는 것이 유익한 줄로 아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빌 3:7-8).

④ 저희들도 보화 있는 밭을 소유한 자처럼 만족을 느끼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구원의 가치를 다시 깨달은 다음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라도 천국 보화를 소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하셨으니 이 말씀도 보화 비유와 같은 의미로 강조하신 교훈입니다.

① 좋은 진주는 곧 보화요 ② 이것을 구하는 장사는 보화를 찾는 자요 ③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것은 역시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기위하여 현실정욕에 관한 것을 포기하면서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갈 5:24,요일 2:15).

3)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말씀의 “그릇에 담을 좋은 물고기” 는 역시 보화와 같은 것으로 이것을 소유한자의 기쁨은 대단할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많은 고기를 잡을 때 큰 기쁨을 갖는다고 합니다.

② 이 말씀에서도 보화와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처럼 고기를 잡는 노력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들의 고기 잡는 노력은 대단한 것이며 여기에 비례하여 천국의 기쁨도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마 11:12).

③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첨부하신 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심판에 관한 말씀이 천국 기쁨에 첨부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 악인이 심판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동시에 성도들의 기쁨도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악인이 심판받는 일을 성도가 목격하지 못한다면 악인으로 인하여 고난 받은 의인들의 만족이 적을 것입니다(시 23:5,91:8).

④ 그물에 각종 물고기가 들어온 것과 그것을 선별한다는 말씀은 곡식 농장에 뿌려진 가라지를 추수 때에 심판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뜻이며(13:29-30), “천사들이 악인을 의인 중에서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지므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하신다”(49-50절) 는 말씀도 역시 최종 심판을 거듭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계20:12-15). 구원받은 천국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더욱 큰 기쁨과 행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2.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의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52절).

1) 그 당시의 서기관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이를 천국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2) 그들은 “옛것과 새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아야 한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진리를 아울러 터득하여 함께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① 옛것은 구약의 율법이고 ② 새것은 신약의 복음입니다. 많은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율법이 조명하는 신약의 복음을 나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성경을 바로 깨닫는 자가 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집 주인이 그의 곳간에 들어 있는 묵은 곡식과 햇곡식을 잘 알고 있고, 약방의 약사가 많은 약품 중에서 처방에 따른 약을 취하여 내는 것처럼 저희들도 구약과 신약의 내용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일치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고향의 반응과 예수님의 활동에 관한 말씀입니다(53절-58절).

1) 예수님이 이상의 교훈을 마치시고 거기를 떠나(53절) 고향으로 가신 것(54절)이 갈릴리 바닷가에서(13:1) 나사렛으로 가신 것인가?(마 2:23), 아니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인가?(마 4:13) 할 때 배척을 받으신 것으로는 나사렛에서도 받으셨고(눅 4:29) 가버나움에서도 받으셨습니다(마11:23). 어떤 책에서 “나사렛으로 가셨다” 고 기록된 것을 보았으나 나사렛은 가버나움에서 약 100 리의 거리가 되고, 또 14:13 에서 “배를 타고 떠나신 사실” 을 보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2)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이 특별한 배움의 과정을 밟지 않으셨기 때문이요(눅2:40,46-47,51) ② 서민적인 가정형편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에 여러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는데 (55-56절), 그들은 다 고향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③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행10:38).

3) 그러나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불신앙과 시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56절에서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심은 그 누이동생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형제 “야고보” 의 신앙적 기사가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것(갈 1:19,약 1:1,행 12:17)을 보면 그 동생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믿은 것을 알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능력과 지혜가 있어도 배척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이때에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그의 자란 모습이 초라함을 인하여 존경받지 못하는 일이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과거를 아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믿음을 배척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고 큰 능력을 보았으면 믿음을 가져야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렇지 못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요 3:3).

5)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고 사모하지 않는 대상에게 은혜 주시는 것과 능력 나타내시는 일을 합당치 않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보화를 가진 자의 만족함 ② 알곡과 가라지의 공존함 ③노력으로 얻는 만족 ④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 ⑤ 구약과 신약의 일치 ⑥ 구세주를 고향에서 배척한 이유 ⑦ 불신앙과 배척은 은혜와 구원을 포기함이란 사실들을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3 과 요한의 죽음과 5병2어 (마 14:1-21)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①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1-12절) ② 5병2어의 기적에 관한기사(13-21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하여(1-12절)

1)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당시에 분봉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의 혼이 살아나서 예수님 속에 들어가 권능 있게 운동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1-2절). 그는 평소부터 세례요한을 두렵게 생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① 여기의 분봉왕이란 예수님 탄생당시에 있었던 헤롯왕(마 2:1)의 세 아들 중 한 사람인 “헤롯안디바”로 그 당시에 갈릴리와 뵈뢰아 지역을 분배 받아 통치한 왕입니다.

② 그는 예수님의 능력 있는 활동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능력 있는 활동은 “죽은 세례요한의 혼이 살아나서 예수님 속에서 운동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 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던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람의 영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산 사람 속에 들어가 어떤 역사를 한다” 는 것은 미신적인 사상입니다. 요즈음도 이런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의 영은 죽으면 가는 곳이 있고 영원히 죽지 않으므로(욥 12:10,행 5:5,10,전 3:21)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며 또 “죽은 자의 영이 산 사람 속에 들어와 그 사람대신 역사한다” 는 주장도 역시 미신적 사고방식입니다(삼상 28:11).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을 떠난 영혼은 다시 올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삼하 12:23,눅 15:26). 따라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특별섭리에 의한 것이고, 또 성경 다른 곳에서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말 3:1,4:5,눅 1:17) 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그의 영혼의 본질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엘리야와 같은 정신과 사명적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영이 현실세계에 다시 온다거나 산 사람을 괴롭게 한다거나 산 사람을 지배한다는 주장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굳게 하며(히 13:9) 성령님의 지키심과 지배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시 121:7,살전 2:13).

2) 마태는 헤롯의 주장에 뒤이어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3절-12절).

①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인 계수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여 살았으므로 왕으로서 본이 되지 못하는 것을 세례요한이 지적한 연고로 헤롯이 요한을 결박하여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민중의 항의가 두려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헤로디아”에게서 낳은 그의 딸이 춤을 추어 자신을 기쁘게 하자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 허락을 하였는데 이것이 헤롯의 단순하고도 큰 실수였습니다. 그때에 “헤로디아”는 기회를 만난 듯이 그의 딸을 시켜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는 요청을 하게 하였고 헤롯은 맹세 이행에 대한 왕의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그대로 명하므로 세례요한은 목 베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②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시체를 장사한 후 이 사실을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3) 이상의 사실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아야 할 것은

① 헤롯왕과 같은 사람이 바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므로 멸망하는 짐승 같은 자”(시 49:12)라고 할 수 있으며

② 세례요한은 정의롭고 담대한 사역자였습니다. 왕의 비행을 지적하는 일은 신분상 위험을 당할 일임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옳지 않다”하였으니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 요한의 위대한 특징이었으며(눅 3:7-14)

③ 요한은 그 일로 인하여 죽었으나 이는 순교의 복이며 또 대단히 경미한 일로 죽은 것 같으나 예수님은 그를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신 것(마 11:11)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5병2어(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기적에 관한 말씀에 대하여(13-21절)

1)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요한의 죽음소식을 들으시고 그곳을 떠나 빈들로 가셨습니다. 여기의 “그곳”은 “가버나움”을 뜻하고 “빈들”은 “벳세다” 지역입니다(눅 9:10). 또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유감도 나타내지 않으셨으니 이는 이미 요한에 대한 칭찬을 하신바가 있고(마 11:11), 또 요한은 순교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이 율법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므로(마 11:13) 복음시대의 시작을 당연하게 여기신 뜻도 있을 듯 합니다.

2) 그때에 큰 무리가 따라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질병도 고쳐주셨으니 여기의 병을 고쳐주심은 자신의 긍휼에 의한 은혜였습니다.

3) 그리고 저녁이 저문 빈들에서 큰 무리가 먹을 것이 없자 제자들은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으니

① 이 말씀의 “갈 것 없다”는 뜻은 주님에게 해결방안이 있다는 암시요

②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신 뜻에 대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능력으로 해결해 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창조적 초능력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을까요? 결국 “먹을 것을 주어라”하신 말씀은 “(예수님자신이 양식을 마련할 것인즉) 너희들은 나누어 주는 일만하라”는 뜻입니다.

4) 이때에 제자들은 나누어 주기위하여 음식을 수집한 결과 5병2어뿐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보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5병2어를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잔디위에 앉히신 후에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또 무리에게 나누어 준즉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이 먹고 남은 열 두 바구니를 거둘 만큼 큰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에서 유의할 점은 ① 예수님은 적은 음식을 놓고 감사하신 것입니다. “축사”라는 “율로게오”(εύλωηοω)는 감사, 찬양 또는 축복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적은 제자들의 순종과 작은 음식의 봉사와 예수님의 감사와 축복기도를 통하여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② 또 예수님은 가난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굶지 않게 하셨고 ③ 질서 있게 잔디위에 앉게 하셨으며 ④ 제자들을 통하여 무리들에게 전달하셨고 ⑤ 또 남은 것을 거두셨으니 이는 절약의 의미도 있거니와 또 이런 기적을 자주 나타내시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 ⑥ 그 당시에 먹은 사람의 수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남자 장정만 헤아린 것이므로 여자, 노인, 아이를 합하면 그 수가 5,000명의 몇 배가 됨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부터 장정만 헤아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민2:26,32). ⑦ 이로서 예수님은 이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그런 이적을 체험한바가 없어도 주님의 긍휼과 능력을 믿는 믿음 안에서 염려 없이 생존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례요한의 사명자적 의미와 모든 생명체의 생존 유지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능력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54 과 물 위로 걸으심 (마 14:22-3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24절-33절까지에서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신 사실”을 기록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물위로 걸으심”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22절-23절까지는 예수님이 바다로 가시기 전에 “벳세다”에서 행하신 일이고, 34절-36절까지는 바다를 건너 가신 후 “게네사렛”에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① 벳세다에서 하신일(22-23절)과 ② 물위로 걸으신 일(24-33절) ③ 게네사렛에서 하신일(34-36절)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벳세다에서 행하신 일(22-23절).

이 “벳세다”는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5병2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속히 배를 타고 건너편 “게네사렛”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즉시” 란 5병2어의 기적으로 식사를 끝낸 다음을 뜻하며 재촉하신 것 그 자체는 바쁘게 일하도록 지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1) 갈릴리바다를 시계의 숫자판으로 연상할 때 벳세다는 1시 방향이고 게네사렛은 11시 방향이며 그 해로의 거리는 약 40리쯤 됩니다.

2)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여 그곳으로 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① 게네사렛 동리에 가서 속히 전도하게 하시고

② 또 그 지방의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며(34-36절)

③ 바다의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더딜 것을 생각하셨고(24절)

④ 또 그 곳으로 뒤따라가실 것까지 예상하셨기 때문입니다(25절).

3)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는 동안” 이란 뜻은 수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보내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떡은 육체의 양식을 준 것이지만 진리의 가르침은 영적양식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 그러시고도 또 시간이 남아서 벳세다의 어떤 산으로 올라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시며 그날이 저물 때까지 혼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로 가시기전에 가르치시는 일과 기도하시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특히 기도하실 때는 산에 올라가셔서 저물 때까지 혼자 계셨으니 여기서 “산”이란 특정 기도장소가 아닌 조용한 곳을 뜻하며, 개인 기도를 장시간 하신 것이었습니다(마 26:39).

2. 물위로 걸으심에 대하여(24-33절).

1) 벳세다의 조용한 산에서 밤늦게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은 밤4경쯤(밤2시경) 되어 바다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2)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가신(25절) 목적은

① 물위를 걸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시고(33절)

② 또 그때에 제자들의 탄 배가 거슬러 부는 바람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그 고난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시며(32절)

③ 자신도 게네사렛 지역으로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으실 때 얼마나 더 빠른 속도로 접근 하셨는가?에 대하여 공간제한을 초월하신 듯 합니다만, 일단 출반시간을 나타내시지 않았고 또 물 위로 걸어서(35절) 오셨다고 하셨으므로 그대로 믿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4) 예수님이 바람을 명하여 그치게 하셨는가? 에 대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 본문에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마 8:27 에서는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이 있었고, 또 본문 32절에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람을 명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그치므로(32절) 예수님을 해롭게 하지 못하였고 제자들도 예수님 모신 배를 타므로 고난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위험을 미리 아시고 구출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벳세다 들판에서도 백성들의 시장함을 아시고 기적의 양식을 베푸신 것처럼 바람과 물결로 고난당하는 것도 아시고 위험할 때 찾아와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무슨 고난을 당하시던지 예수님이 알고계시다”고 생각하시면 그 생각이 맞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놋이 마음 상하는 것을 아시고(벧후 2:8) 찾아가셔서 의인을 구출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창 19:12,18:20).그러니까 저희들이 어떤 위험에 봉착한다 해도 하나님이 아시므로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믿고 의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이 물위로 접근하신 것을 본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으니(26절), 이것은 처음 체험하는 사람들로는 당연한 태도이며 이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기 위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만일 주시여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상당한 거리에서 밤에 목격하는 모습으로는 예수님이 확실함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 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하므로 확인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인 것 같지만 밤인지라 모습을 밝히 볼 수 없으므로 확인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도 그 점을 이해하시고 “오라”(29절) 하신 것이며 베드로는 “빠지는가 안 빠지는가” 를 시험하여 자신이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때 유령이 아닌 것을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이므로 헤엄을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물에 내리자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을 체험하였으니 이 능력은 주님이 전달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물위로 걸은 것은 전적 주님의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전달하신 동기로 볼 때 주님의 증거 하시려는 뜻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러던 순간에 베드로는 바람을 무서워하면서 빠지게 되었고 소리치며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한즉(30절),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31절). 베드로가 빠지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적은 연고였고, 또 “믿음이 적다”는 것은 베드로가 무서움을 가진 점과 의심을 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이 말씀을 믿고 행하였을 때에는 물위로 걷는 것을 붙들어 주셨지만, 다시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태도를 나타냈을 때는 주님이 버려두시므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믿고 행하는 자를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7) 31절에 보시면 “왜 의심하였느냐?”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의심은 믿음이 적은 것이며 또 베드로가 의심한 것은 처음에 예수님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7절)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여 예수님임을 확인하지 못한 점과 또 바다 위를 걸으면서 그 이적의 상태가 그대로 지속될 것인가? 를 의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은 진리이며 또 주님이 “오라”하셔서 가는 것이므로 변함이 없을 줄로 믿어야 할 것인데 베드로는 깨닫는 지혜와 꾸준히 신뢰하는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적 연약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예수님이 전도, 교육, 기도 생활 등으로 바쁘게 사신 것이요,

② 예수님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신 것이요,

③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보호책이 완벽하신 점이요,

④ 주님을 가까이 모시므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음과

⑤ 주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깨달으며

⑥ 지구성 있는 신뢰심을 갖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⑦ 항상 미래를 소망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게네사렛”에서 행하신 일입니다(34-36절).

1) 예수님과 제자들은 밤 시간을 이용하여 바다여행을 하고 그 이튿날 “게네사렛”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게네사렛”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한 동리로 구약시대에는 “긴네렛”이라고도 하였고(수13:27),또 그 동리 이름을 따라 갈릴리 디베랴 바다를(요 6:1) “게네사렛 호수”(눅 5:1) 라고도 하였습니다.

2) 그곳 동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고 그 근방에까지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35절).예수님은 이때에도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3) 문제는 36절에 병자들이 병 고치는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기를 간구하였고 또 (허락을 받아) 손을 댄 자들은 다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려한 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표시이며 나음을 얻은 것은 예수님이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이 마 9:20-21 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그런 방식으로 병을 고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그 소문을 듣고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 사모하는 표시를 어떻게 내듣지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로마의 베드로 성당 안에서 베드로 동상의 엄지발을 만지면서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퍽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손을 대서 나음을 얻었는데 이것은 손을 대는 자의 신앙과 예수님의 은혜가 상합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상합하지 않을 때는 나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성령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 가에 손대는 신앙을 말씀 신뢰의 믿음으로 대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 55 과 말씀을 폐하지 말라 (마 15:1-20) 목록으로


본문 6절에 보시면 “너희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하시므로 잘못된 유전을 지키거나 그것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폐하는 죄라고 지적하셨는데 이 말씀이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핵심적 교훈이기 때문에 제목을 “말씀을 폐하지 말라”고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갈릴리지경(마 14:34)까지 찾아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전통인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항의”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1-2절). 이 항의를 받으신 예수님은 ①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유전을 지키는 것이 큰 잘못임을 지적하셨고(3-6절) ② 그런 유전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 하시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29:13)이 있음을 소개하셨으며(7-9절) ③ 유전의 내용과 관계되는 말씀으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더 문제가 크다는 사실” 을 설명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10-20절).

1. 유전에 대하여 항의한 사실과 예수님의 대답(3-6절).

1) 유전이란 “파라도시스”(παράδοσις)로서 “전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전”이란 뜻에는 부모의 형질이 자식에게 전달되는 생물학적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유전은 어떤 계율처럼 관습에 젖어든 조상들의 생활전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유교적 및 무속적, 풍속적 생활전통이 많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유전의 내용은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행하지 않으므로 죄를 범하였다”고 한 것입니다(2절).

① 장로들의 유전이란 유대인 장로들이 옛날부터 지켜온 관습을 의미하고, 그 관습이 모든 후손들에게 계율처럼 지켜오게 한 것이며

②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게 한 것은 그들이 만든 위생법일 뿐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법이거나 명령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③ 따라서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들은 죄를 범한 것처럼 정죄한 것입니다.

3) 성경에는 합당한 유전을 권장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좋은 전통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사도를 기억하고 바울이 전하여 주신대로 그 유전을 지키는 것을 칭찬하신 일이 있었고(고전11:2), 또 그런 것을 지킬 것을 명하셨으며(살후 2:15),그 유전대로 행치 않는 자들에게서 떠나라(살후 3:6)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사상과 전통은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좋은 유전인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생각으로 유전을 만들어 종교적 계율처럼 권장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적된 인간적 유전은 두 가지였으니,

①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어야 한다는 것이요

②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힘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였으면 그것이 곧 부모를 공경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중 효도의 계명을 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유전을 만들어낸 배경이 혹 “씻어 정결케 하는 결례식(레14:1-20)”에서 모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요2:6,행21:24) 종교적 의미의 의식은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성전 유지를 위한 헌금을 징수 할 때 “나는 부모 공경 할 만큼의 물질만 있다”하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 공경한 것과 같으므로 효도의 계명은 문제되지 않는다” 고 교훈하였을 것으로 예상이 되는 것입니다(요일4:20).따라서 이같은 형식의 유전은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이런 것을 숭상하고 지키는 것이 크게 위험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① 이런 것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라” 하셨고(3절),

② 더 나아가서는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행위”라 하셨으며(6절)

③ 또 외식하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하셨습니다(7절). 성경에 없는 것이나 사람이 만들어 지키는 전통을 종교적 계율처럼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길흉사를 처리할 때 성경에 없는 전통에 얽매이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④ 성경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폐하는 죄가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소개하셨습니다(7-9절).

1) 주전 700년경의 사람 이사야 선지자는 사 29:13에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고, 마태는 그 말씀을 본문 8,9절에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2) 즉 사람의 계명(유전)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은

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요,

②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외식이며

③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리하는 태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성도가 전통에 얽매이면서 말씀을 가볍게 대하는 것은 신앙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개인의 어떤 생활이나 현실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여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법규를 만들 때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규례를 만들어 지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15세 이상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라”는 교회의 헌법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전도회 연합회의 회장이 서리 집사나 권사가 되었을 때 그가 연합회 예배를 사회하기 위하여 강단에 오를 수 있느냐?하는 문제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높은 강단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강단을 높여야 권위가 있다는 말씀이 없지요. 확성기가 없을 때 잘 보이고 잘 들리게 하기 위하여 높여 놓은 강단일 것입니다. 높은 좌석에 올라가야 그 사람의 인격이나 본질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요. 또 성직 수행을 할 때 반드시 가운을 입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도 성경적 근거가 없으면 IMF 시대의 거품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철폐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는 잘못된 전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성경적 행사만 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현실 교회는 영광중의 예수님을 보여주기 전에 나사렛 예수(초라해 보이는 인간)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행 3:6).

3. 유전의 내용과 관계되는 사실로 설명하셨습니다(10-20절).

1)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듣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10절).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깨닫는 방법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듣는다”는 뜻은 그 당시에 진리전달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읽어서 깨달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엡3:4,계1:3). 지금은 인쇄물이나 매스컴의 발달로 진리를 터득하는 방법이 다양해졌습니다.

2)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11절)하셨으니,

① 이 말씀은 위생관념을 무시하는 뜻이 결코 아니며

②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종교적 계율처럼 여기면서 이것을 시행하지 않았다 하여 정죄한 것이 합당치 않음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3) 오히려 더 더러운 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에 대한 설명을 구하였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15-16절)하시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뿐인데 그것은 뒤로 배설되어 농작물을 키우는 인분이 되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더럽게 하지 못하지만(17,20절)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① 악한 생각이 표출되기도 하고 ② 거짓증거와 훼방하는 잘못된 말도 나오게 되며 ③ 또 마음의 생각을 따라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도 하게 되므로 모든 사람에게 죄악의 더러움을 유포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18-19절).

간음은 부부의 선을 이탈하여 성적관계를 갖는 사건을 의미하고 음란은 부부의 규범을 무시한 채 색욕에 빠지는 것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마음의 생각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마 12:34-35).

4)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실족의 뜻)이 된 줄 아십니까?”한 것은 그들이 거리낌을 받아 회개하겠습니까? 하는 뜻이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심은 것마다(심판 때에는 분별을 받을 것이니) 내 천부(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다 뽑힐 것이라”고 하시므로(12-13절), 외식자들에 대한 최종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지적을 받은 바리새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냥 두라”고(14절) 하셨습니다.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며 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서 심판 때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 당연한즉 이것은 성도가 잘못 깨달은 자의 지도를 받으면 역시 가르친 자나 가르침을 받은 자가 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렘 14:14-16을 읽어 보십시오. 거짓은 증언하는 자와 그 증언을 들은 자들이 다 멸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운전사도 길을 모르고 옆에 탄 사람도 길을 모르니 결국 차는 목적지에 갈 수 없게 됨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사람이 만든 교훈이나 유전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문제와 ② 듣고 배워서 바르게 깨닫는 문제와 ③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더럽게 하는 문제와 ④ 잘못된 교사에게 바르게 배우지 못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을 깨달아서 오직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56 과 가나안 여인의 소원성취 (마 15:21-39)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가나안 여인의 소원성취에 대한 말씀이요(21절-27절) ② 여러 병자들의 각종 병을 고쳐주신 일이며(28-31절) ③ 7병 2어 기적에 대한 말씀(32-39절)입니다.

1. 가나안 여인의 소원성취에 대하여(21-27절)

1)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인 “게네사렛”에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다(1절)고 하셨습니다(21절).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지역 지중해변에 있는 항구들로서 게네사렛 지역에서 “두로”는 서북방 약 140 리요 “시돈”은 서북방 약 200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 그때에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역에서 나와서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 간청하였으니,

① 소리를 지른 것은 예수님의 주목을 받기 위함이었고

② 그가 예수님을 호칭할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한 것은(22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그렇게 호칭한 것이며(마 9:27참조)

③ 소원의 내용은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 딸의 흉악한 귀신들린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22절).

④ 본문에서 이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 한 것은 그가 이방 여자인 것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막7:24-25에서는 그를 만난 곳이 “두로” 라 하셨고 또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 당시에는 팔레스틴 지역을 “가나안”이라 하였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두로와 시돈이 있는 뵈니게 지역까지도 가나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사는 여인을 왜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그 여인이 헬라에서 살다가 왔기 때문이며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뵈니게를 합병한 행정구역 이름으로 역시 그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이 여자의 간청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①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여자로 하여금 더 간절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 약한 성도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형식적인 소원을 지나쳐서 간절한 요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② 이 사실을 민망하게 여긴 제자들이 “여자가 뒤에서 소리지르니 응답하여 보내심이 좋다”는 뜻으로 예수님께 아뢰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아브라함 즉 선민족속의 타락한 백성을 뜻하며

㉡ “그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범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눅 1:54-55,72-73). 따라서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 그렇다고 하여 전혀 예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마8:5). 예수님 때까지는 선민족을 상대로 하시고 이방의 전도는 사도 시대부터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2:8-11).

③ 그러나 그 여자는 물러나지 아니하였습니다(25절). 그러니까 예수님은 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재차 거절하셨습니다(26절). 이 말씀은 이방인을 멸시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은혜와 능력을 이스라엘 중 선민에게 먼저 베푸시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먼저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들을 주기위하여 만든 떡을 개들에게 먼저 주는 것과 같은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선민의 조상에게 미리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실천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눅 1:72-73). 선민통치에 대한 언약이(시 100:3) 그들의 거역 때문에 바벨론 포로 당시에 끝났지만(사 1:7) 영적은혜의 언약이나(사 1:9) 개인영혼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는 일은 중단 없이 끝까지 실천하신 것입니다.

④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여자는 조금도 얹잖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을 가지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먼저) 먹는다는 것” 입니다. 만일 개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전혀 먹지 않는다면 이방인인 자기에게 은혜의 분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소망을 갖고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 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여 특별하게 그의 딸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그 여자에게 큰 믿음이 된 이유는

㉠ 주인이 먹다가 버린 것을 개가 먹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완악하여진 수만큼 이방인중에서 구원하실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롬11:25). 그런데 그 여자는 “그것을 미리 달라” 고 간청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요,

㉡ 그의 믿음과 인내와 겸손이 지극하였기 때문이요,

㉢ 또 그 여자는 귀신들린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될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막7:29,마 8:8).

4)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예수님의 전도사역에서 순서를 지키는 생활

② 언약하신 대로 선민을 먼저 구원하시려는 열망과

③ 그 여자의 간청하는 믿음과 겸손히 인내하는 믿음과 또 이방인에 대한 구원섭리를 믿는 믿음과 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 관한 것을 칭찬하신 일과

④ 또 예수님은 큰 믿음 가진 자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점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시 갈릴리 호숫가에 오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28-31절). 이때에도 큰 무리가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여럿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의 고쳐주심으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말을 하였고 불구자가 건전해졌으며 저는 자가 (바로) 걸었고 소경이 보므로 메시야 증거를 위한 능력을 나타내신즉 기적의 첫째 목적이 메시야 증거에 있었던 것입니다(마 11:2-6).

3. 7병2어 기적입니다(32-39절).

1) 이 제목의 뜻은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병2어때와 같은 이적을 베푸셔서 (마14:15-21)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신 사실입니다.

2) 이 사건의 목적과 성질과 절차와 교훈은 “5병2어” 때와 거의 같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① 다만 이런 사건이 5병2어, 7병2어로 성경에 두 번 기록되었음과

② “5병2어”의 기적은 벳세다에서, “7병2어”의 기적은 갈릴리의 어떤 광야에서(29,33절) 시행하신 것입니다.

3)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32절에 나타난 대로

①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점과

② 3일을 따를 때까지 먹을 것이 없었다는 점과

③ 그들을 그대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신 점과

④ 대책을 세워주신 점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막 8:1-9에 더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의 형편과 그가 길에서 기진할 위험이 있는 것까지 아시는 분이며 여기에 방책을 세워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또 마14:20의 바구니의 크기보다 본문 37절의 광주리의 크기가 더 크다는 뜻으로 원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4)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신 다음 그날의 사역이 끝났으므로 무리를 흩어 보내셨습니다(39절). 그들은 쉽게 해산하려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광야에서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으니 그곳은 갈릴리 바다 서편 촌락인 “막달라 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막달라는 마가단의 영문표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57 과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 (마 16:1-12) 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예수님이 막달라(마가단;마 15:39)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표적을 구하였을 때 주신 교훈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알아야 할 것은 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신분, ②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한 점, ③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표적, ④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신 이유, ⑤ 요나의 표적만 보여 주시겠다는 뜻, ⑥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신 이유, ⑦ 두 차례나 기적의 떡을 먹이신 사실을 기억하게 하신 이유, 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에 관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잘못된 교훈을 경계하라”는 누룩 비유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서 제목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함에 대하여(1절)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이단종파 단체였고, 거기에 정치적 단체인 헤롯당을 포함하여 그들이 합작거사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이 세 당파에 대하여는 본인이 집필한 7분설교집(1집) 172쪽 “바리새인” 제목란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2) 그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진 것은 예수님이 새 교훈인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또 ,그의 나타내시는 기적에 대하여 단순한 생각으로 귀신의 역사라고 판단한바가 있었지만(마12:24), 그래도 그 기적이 크게 역사된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비판을 하려는 목적으로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한 행동은 그들의 불신앙을 들어낸 것이고 거짓이 진실을 판단하는 격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2-3절).

1)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천기는 잘 분별하는 자들이 왜 시대의 표적을 분별치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을 때 일기가 좋아지고 아침 하늘이 붉을 때는 날이 궂어지는 것”을 아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는 기상학적 지혜입니다.

2) 그렇다면 그들이 “시대의 표적” 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대의 표적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으니 퍽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시대의 표적이 되심은 ①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고(마 11:5) ② 또 선지자보다도 나은 분이시며(마 11:9) ③ 예언의 성취로 오신분이며(마 12:17-21) ④ 또 인류의 흥망을 가름하는 표적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눅 2:34). 저희들은 역사 변천에 따른 표적이나 사건들을 깨닫고 바르게 음미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악하게 보신점입니다(4절).

1) 4절에 보시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① 예수님이 그 시대인류를 악하게 여기신 것이고 또 ② 표적을 구하는 그 태도가 바른 진리(예수님)에 대한 불신앙이요 도전이기 때문이며 ③ 음행까지 난무하였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기적을 구한 그 당사자들만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 인류의 죄악을 포괄적으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악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봉한다 하면서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것은 신앙적 음행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본래 음행하는 자들은 겉을 잘 꾸미고 속으로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4절에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하시고 그곳을 떠나셨으니 여기의 요나의 표적과 관련된 말씀은 마 12:39에서 이미 말씀드렸고 “그곳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신 것”(4,5절)은 막달라를 떠나 배를 타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또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가버나움에서 약 80리 북쪽이고, 헬몬산 남쪽의 산수가 좋은 곳입니다. 막달라에서 건너가시고 또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으니까 그 중간 지점이 가버나움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4. 이때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5절).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막달라를 떠날 때 떡 준비 못한 것을 무심하게 여겼다가 예수님이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제자들은 떡에 관한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음적은자로 지적을 받은 이유

① 누룩을 말씀하신 의미를 바로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② 떡이 없으므로 염려하였기 문입니다(7절). 염려 자체가 신앙의 미달 현상임을 아셔야 합니다.(마 6:31)

③ 그들이 염려하는 의논을 하지 말았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는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을 체험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마14:19,15:34). 예수님이 본문 9-10절에서 “두 차례나 떡 먹이신 기적”을 말씀하신 것은 “그런 기적으로 늘 먹여 주실 것인데 왜 의논했느냐”는 뜻이 아니고, 다만 그런 기적도 체험한 자들이 왜 교훈의 말씀보다 먹는 문제를 앞세워 염려하느냐는 뜻인 것입니다. 그 이 는 예수님이 계속 기적의 떡으로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 12:39,마 16:4). 우리는 먹는 문제에 신경 쓰기보다는 반드시 교훈을 깨닫는데 더욱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1)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교훈을 비유하신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느냐”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과 제자들이 막달라에 있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음흉한 태도로 접근하며 유혹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단자들에게 유혹당합니다.

3)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의 의미를 처음부터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이 준비하여 먹는 떡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이 “그들의 교훈(누룩)을 삼가라”는 뜻이라고 하셨을 때에 깨달은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두 가지만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① 잘못된 교훈을 누룩으로 비유하신 이유입니다. 누룩은 부패시키는 물질이요, 또 소리 없이 은밀하게 무한정으로 변화(발효) 시키는 물질이기 때문에 잘못된 이단 사상을 경계 시키는데 유익한 용어로 쓰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누룩을 다른 의미로 쓰신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전파의 성격으로 (마 13:33,눅 13:21)도 사용하신 것입니다.

②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들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신앙(율법을 행하여 구원 받는 줄로 아는 것)이 곧 이단 사상이요, 그리고 그들의 교만, 독선, 외식이 두드러진 잘못인데 이에 대한 말씀은 마 23:1-36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남을 시기하며(행 5:17) 부활과 천사와 영이 없다 하여 믿지 않는다고 하였으니(행 23:8) 이것이 바로 신령한 은혜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실주의, 기복주의에 해당하는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6.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성분을 파악하는 문제

②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시험하지 않아야 하는 문제

③ 현실적 지혜나 기상학보다 예수님의 교훈이 더 확실한 점

④ 잘못된 사상과 교훈이 누룩처럼 소리 없이 퍼지는 문제

⑤ 육신의 양식을 먹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점

⑥ 요나의 표적의 의미를 항상 기억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받들어 나가야 하는 것 등입니다.

 

제 58 과 신앙고백을 받으심 (마 16:13-20) 목록으로


이 말씀의 중심은 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일과 ②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과 ③ 천국 열쇠를 주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선 “신앙고백을 받으심”이란 제목 아래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13-16절).

1) 예수님은 막달라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이 행보의 노정은 마 15:39과 16:5과 본문 1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2)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은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이며 그곳에 갈릴리 바다의 4대 수원중 하나인 “바니야스”라는 큰 샘이 있고, 경치가 좋아서 헬라 통치시대에는 “반” 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헤롯이 그곳에 궁을 건축하였었고 그다음 헤롯2세인 분봉왕 필립왕이 로마황제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그곳 지명을 “가이사랴”로 개칭하였다가 또 지중해안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하여 자기이름을 포함한 “가이사랴 빌립보” 라고 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그곳은 인가가 많지 않고 경치 좋은 유원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헬몬산으로 가시면서 그곳을 통과하신 듯 합니다(마 17:1).

3)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으니 ① 이 질문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지식을 알아보시기 위한 것이며 ② 예수님 아는 지식을 고백 받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왜 이런 고백을 받으시려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①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하고(엡4:13), ②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지식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을 친면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신분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 은 처음에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알지 못하였다가 나중에야 바로 알았고(요 1:46,49),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만 알았다가 나중에 주(主)로 알았으며(눅 5:5,8),삭개오도 처음에는 어떤 분인가를 잘 몰랐다가 나중에 주님으로 알고 결심과 고백을 하였습니다(눅 19:3,8). 또 요 1:10-12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면 영접할 수 없으나 “영접하고 그 이름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 는 권세를 받는다” 하셨으니 역시 “예수님의 신분을 아는 것이 구원받음에 상관 된다”는 말씀입니다.

5)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① 세상 사람들 중 더러는 세례요한이라 하므로 죽은 요한의 영이 예수님께 들어간 줄로 아는 헤롯왕의 생각과 같은 것이요(14:2)

② 더러는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엘리야, 예레미야란 세례요한처럼 그의 영이 결합된 줄로 아는 잘못된 생각이고 선지자중 하나란 예언자중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③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므로 제자들의 견해를 물으셨고 제자들의 견해에 대한 대답을 베드로가 대표로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대화하신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신앙고백은 모든 제자들이 공감한 고백으로서 20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실 때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증언하는 이유는 베드로 자신이 다른 사도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것일 뿐 천주교의 잘못된 해석처럼 개인적 특권을 받을만한 이유가 베드로에게 없음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6) 베드로는 동료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16절).

① “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아는 지식 중 핵심적인 지식입니다. “주”는 만왕의 왕이란 뜻이요, “그리스도”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구세주란 뜻이며 또 하나님과의 관계로서는 하나님과 같으신 본질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② 이 고백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지식으로 하나도 뺄 것이 없는 고백입니다.

③ 예수님은 이 고백을 한 요나의 아들(바요나) 시몬(베드로 본래의 이름)에게 “복이 있다” 하시고(17절) 또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17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혈육 즉, 자력으로 알 수 있음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구원 섭리에 따라 주신 은혜로 거듭난 자이어야만 가능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3:3,히12:2).

7) 또 예수님은 시몬이란 이름을 “반석” 의 의미를 가진 “베드로”로 개명해 주셨고, “이 반석위에 내(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며(그렇게 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① 교회는 오순절 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행 2:37-47).

② 그 교회를 “반석위에 세우신다”는 뜻은 당연히 반석 되신 예수님(고전 10:4)의 말씀 기초 위에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③ 예수님이 반석이신데 (반석=견고, 불변함을 상징함) 베드로까지 반석이라 하신 이유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으로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사자로서 예수님의 일을 대행할 것이기 때문이며

④ 이 일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다 같은 사명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엡 2:20,고전 3:10).

⑤ 따라서 반석위에 교회를 세움은 그 근본 뜻이 예수님을 토대로 함이고 예수님의 진리와 모범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⑥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함”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한 믿음은 사탄이 흔들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보장해 주신다는 뜻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적 신앙은 오직 성경에만 나타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8) 19절에서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너” 는 앞에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베드로 개인이 아니고 베드로처럼 신앙 고백을 한 모든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성도의 단체이므로 교회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① 그러나 교회가 천국 열쇠를 갖는다는 뜻은 복음전파의 기관으로서 천국의 안내자임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믿음의 양육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주인과 구원의 주인은 오직 예수입니다(계 3:7,히 2:10). 이 뜻은 교회를 통한 교육과 의식이 구원받는 절대적 방편이 아니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눅23:43).

② 그리고 “땅에서 매고...푼다” 는 뜻은 교회에게 권징권을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치리회에서 수찬정지 이상의 시벌을 받으면 예수님도 그 수벌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문을 닫으시고 또 교회가 회개하도록 지도하고 해벌하면 예수님도 여기에 따라 천국문을 열어 주시므로, 지상교회의 권징이 주님의 뜻과 직결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의 권징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이 말씀을 깨닫고 교회의 권징을 두렵게 여기며 복종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③ 천주교에서는 이 열쇠를 베드로 개인에게 주셨다하고 또 교회와 교회의 예배의식이 구원의 절대 방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9) 마지막 20절에서 예수님은 “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을까하는 점입니다. 당연히 전파해야 될 그리스도를 성경에는 예수님이 자기의 행사를 겸손의 의미로 은폐케 하신 일도 있고(마12:16,19) 또 신분을 나타내신 다음에 이어서 고난을 예고하신 것을 보면 (마16:21 ,막8:31,눅 9:22) 고난 받으실 각오를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또 마 17:9에서도 예수님이 변화의 광경을 보이신 후에 “너희의 본 것을 부활 전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참고해 볼 때 ① 이 말씀은 악한 무리들이라도 예수님의 신성을 알게 될 때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일에 훼방될 일이 없게 하시기 위함과 ②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맞추어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 구속 사업을 이루셨으며(출12:21,고전5:7,전 3:2) 그때를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 7:6,30,13:1,마 26:45,46, 요18:8). ③ 또 하나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주시고(고후6:2), 은혜를 줄자에게만 주시는 섭리가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출 33:19).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구원 받을 믿음, ② 믿음을 갖게 되는 동기, ③ 교회의 성질과 사명, ④ 반석이라는 뜻, 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 ⑥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한다는 뜻, ⑦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뜻, ⑧ 천국문을 열고 닫는다는 뜻, ⑨ 교회의 권징이 주는 의미, ⑩ 자신을 은폐 시킨 의미 등 중요한 뜻이 많이 담겨 있으므로 확실한 의미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제 59 과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심 (마 16:21-28)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에는 네 가지 대목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자신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심이요(21절), ② 이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반응과 예수님의 책망하심이요(22-23절), ③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가 어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심이요(24-26절), ④ 장차 재림주로서의 하실 일에 대하여(27-28절)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대목을 하나로 종합하여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심”이란 제목을 정하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심(21절).

1) 예수님은 자신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이 때로부터”란 말씀과 “비로소”란 말씀이 있는데

① “이 때로부터”란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의 확신을 받으신 다음부터를 뜻하며,

② “비로소 가르치심”은 그 이전에 그 사실을 알리시고 싶었지만 제자들이 바른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는 이해를 잘못하거나 믿음이 흔들릴 우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후 제3일에 살아나실 것이라”하셨으니

①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은 그곳이 높은 고원이므로 그 주위 어디에서나 올라간다는 표현을 하였고(왕하 24:1),

②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대신 받으시기 위함이요,

③ 부활은 영원한 승리자와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롬 4:25).

2. 베드로의 반응과 예수님의 책망에 관한 말씀입니다(22-23절).

1)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과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간하였으니, “간(諫)한다”는 뜻은 “신하가 왕의 잘못을 그치도록 건의 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말은 많은 실수를 내포한 것입니다.

① 절대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이 간한 것도 잘못이며,

② 자신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호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런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역할을 과신하게 한 것이나

③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섭리를 역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으면 항상 그의 뜻을 아멘으로 복종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절대자의 뜻은 무조건 믿고 복종할 따름인 것입니다(고전 7:19).

2)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23절).

① “사단아 물러가라” 하신 것은 베드로의 잘못된 사고(思考)가 사단의 역사에 이끌린 무지임을 일깨우신 말씀이요,

②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방해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약하게 만들려는 소행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③ 그리고 “베드로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일)대로 생각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일)을 방해 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요 사탄의 궤계이며 예수님과 모든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사랑과 동정과 용기가 있어도 믿음에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④ 하나님의 일(23절)은 곧 그의 구속사업을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에 대한 교훈입니다(24-26절).

1) 본문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을 따르되,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은 사명적으로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런 경우에 몇 가지 조건과 결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① 자기를 부인하는 조건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죽은 자처럼 비우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거나”(고전 15:24), “괴수죄인”처럼 겸손하거나(딤전 1:15), “현실적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거나”(갈5:24,빌 3:7,8), “심령이 가난해지는 상태이거나”(마 5:2),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마 18:4)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릇의 조건으로 비유한다면 빈 그릇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 되는 일에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②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란 첫째로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약점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 같은 것입니다(고후 12:7). 그러나 그것은 바울사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갖는 약점에 대한 십자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요, 둘째는 사명적으로 받게 되는 십자가 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려고 하는데도 뒤따르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자나 성도에게도 있고 예수님도 자기의 사명을 위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셋째는 개인 문제, 사명 문제가 아니면서 환경상으로 당하게 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농촌 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살 형편도 못 되고, 농촌에서 사는 형편에도 어려움이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많아서 자신에게 어려운 영향이 미쳤다고 할 때에 이것도 역시 환경상으로 주어지는 자기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십자가를 지려는 자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각오입니다. 이것은 믿음생활을 잘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순교 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음이 무서우면 의로운 생활을 견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믿음을 버리면 영생구원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바로 사는 생활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면 오히려 영생과 상급으로 다시 찾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신 말씀은 천하를 통일한 왕이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목숨이란 말씀이 “혼(푸스케:φυχη)”이란 뜻이지만 “영생할 영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는 이 세상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잠시 누리는 현실의 낙을 인하여 믿음을 져버림으로서 영생을 포기한다면 금을 주고 돌을 바꾸는 격이 될 것입니다.

4. 재림주로서의 하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27-28절).

1) 바른 신앙생활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순교한 자들이 어디서 그 보상을 받을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신 다음에) 영광스럽게도 그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 하셨으니(계22:12) 분명한 상급과 보상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의로운 심판과 상급이 없으면 연약한 성도가 고난을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논공행상을 꼭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삿 5:1-27).

4) 그러면 28절의 “인자가 죽기 전에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여기 섰는 사람 중에 볼 자들도 있다”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부활과 재림의 광경을 미리 보여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마 17:1-8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과 재림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올바른 신앙고백이 십자가와 부활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

② 절대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비판하거나 거역함은 큰 잘못이라는 점

③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사명자들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순교할 각오를 든든히 하여야한다는 점

④ 재림주 예수님은 반드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점을 믿고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0 과 변형하여 보이심 (마 17:1-13) 목록으로


위의 말씀 1절-9절까지는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의 변형한 모습을 보이심”에 관한 말씀이요,10절-13절까지는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다시 오신 사실”에 대한 설명의 말씀입니다. 제목을 “변형하여 보이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변형하여 보이심에 대하여(1-9절)

1) 1절 말씀의 “엿새 후” 란 마 16:28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고 말씀하신후로부터 엿새란 뜻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눅 9:28에서는 “8일쯤 후”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조화는 6일을 만으로 계산한 점과 8일쯤이라고 하신 말씀을 참고하면 착오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으니

① 위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신 것은 특별한 제자들에게 특별한 계시를 보여 주심이요, 마 16:28에서도 모든 제자들에게 다 보이시지 않을 것을 예고하신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나 선지자 외에 아무에게나 계시를 주시지 않으신 것처럼 특별한 계시도 특별한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제자란 믿음의 지혜와 사명력이 더 충실한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별한 제자로 여길 수 있는 근거는 눅 5:10과 마 14:29,갈 2:9,요 21:15,20등을 참고 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이 더 충실하면 성경계시에 관한 말씀도 다른 이보다 더 많이 이 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높은 산은 “가이사랴 빌립보” 에서 북쪽으로 약 250리 거리에 있는 2850m높이의 산입니다. 그 주변에 높은 산은 그곳뿐이므로 헬몬산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 주셨다하여 변화산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6일간의 일정으로 그곳에 가셨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그 산위에서 자신의 변형된 모습과 함께 구약시대에 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광경을 보여 주셨습니다(2-3절).

① 예수님이 변형하신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입으신 옷도 빛과 같이 희어졌다 하였으니 이는 천국백성의 형상으로 깨끗한 상태에서 광채(영광)가 발함을 의미함이요,

② 모세는 죽은 자로 부활하여 오신 것이고(신 34:7),엘리야는 일찍이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변화 승천된 모습(왕하 2:11) 그대로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변화는 살아있는 육신의 변화요(살전 4:17), 모세가 온 것은 예수님처럼 죽은 자의 부활로 온 것이며(살전 4:16) 엘리야가 온 것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변화된 모습 그대로 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따라서 이 사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활되고 변화된 몸들이 공중으로 휴거되어 주님과 앞서간 성도들과 서로 만나게 되는 장면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살전 4:16-17).

④ 그 상태에서 서로의 대화가 가능하였으며(3절) 또 이것을 보여 주신 이유는 부활과 내세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 이 광경을 체험한 세 제자 중 베드로가 그곳에 계속 머물 것을 제의하였으니(4절)

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므로 그 세계는 신비의 세계요, 세상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황홀한 곳이었으므로 그런 제의를 하였을 것입니다.

② 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한 것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3인에게 하나씩 드려 유하시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본래 헬몬산 위는 4계절 내내 눈이 녹을 때가 없을 만큼 춥고 또 초막에 살아도 주님만 계시만 만족하였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나 그 청원(질문)은 거절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잠깐 보여주시는 계시의 목적만으로 나타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시 (그 말을 할 때에)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므로 보이던 광경을 보이지 않게 하시고 또 아주 없어지게 하셨습니다.

④ 그리고 구름 속에서 말씀의 소리가 들렸으니 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고 “저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율법주의에 얽매여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예수님 중심의 복음주의가 실현될 것을 예고하신 뜻도 되는 것입니다.

⑤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할 때에 본래의 예수님이 그들을 붙드시며 두려워 말라 하셨고 또 본래의 형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6-8절). 예수님이 이 사실을 보여주신 목적은 부활과 내세를 잘 깨닫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에 대한 용기를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5) 9절에서 예수님은 여기에서 본 것을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셨으니 만일 이런 사실이 공식적으로 유포된다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는 일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2.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먼저 오리라”는 질문에 대하여(10-13절)

1)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는 뜻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10절).

① 그 당시에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은(마 2:4) 구약 말4:5말씀의 예언에 따라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올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말 4:5에 보시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요한을 엘리야의 환생인줄로(요1:21) 또는 예수님을 엘리야의 환생인줄로(마 16:14) 믿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엘리야의 환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심령(정신과 사상과 사명)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간 세례요한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눅 1:17에서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서서 사역할 것”과 마 11:14에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입증해 주셨습니다.

② 따라서 엘리야가 온 것은 곧 세례요한이 온 것을 의미하며, 세상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령으로 또는 말 4:5의 예언 성취로 오신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를 임의로 대우한 것이었습니다(12절). 요한은 그의 존귀가 은폐되고 임의로 대우를 받은 것 때문에 더 큰 자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마 11:11).

③ 11절에서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하신 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여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신 일(마 3:3,눅 1:17)을 의미하며, 그것이 이미 성취되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를 임의로 대우한 것처럼

④ 악한 자들도 예수님(인자)을 하나님의 보내신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고 그를 핍박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3:34).

⑤ 이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을 때에 제자들은 그분이 바로 얼마 전에 순교한 세례요한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가르치는 교사와 성경강론이 꼭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눅 24:27,행 8:31-36). 성경을 밝히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반드시 가르치는 자의 교육을 통하여 밝히 이해하고 지나가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 61 과 간질병 귀신을 쫓으심 (마 17:14-27) 목록으로


위의 본문에는 세 가지 대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간질병 귀신을 쫓으신 내용이요(14-20절) ② 2차로 수난을 예고하심이며(22-23절) ③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반세겔)를 납부하심(24-27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간질병 귀신을 쫓으심”이란 제목을 정하고 본문전체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간질병 귀신을 쫓으심에 대하여(14-20절)

1) “저희가 무리에게 이름” (14절)은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위에 따로 올라갔다가(17:1) 다른 제자들과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때에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들의 간질병 증상을 말하였고 또 제자들에게 이미 부탁하였으나 능히 고쳐주지 못한 사실까지 말하였습니다(15-16절). 여기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이나 물에도 넘어진다”고 한 것은 간질병자의 일반적 증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간질병자의 불미스러운 발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귀신의 역사인 것도 지적하셨습니다. 요즈음 의학은 뇌수술로 고친다고도 합니다.

3) 예수님은 간질병자를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한 제자들의 연약을 탄식하시며 지적 하셨으니

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셨고

②“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그 믿음 약한 형편을) 참아야 하겠느냐”고 탄식하셨으며

③ 또 20절에서는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마 10:8에서 제자들은 각종 능력의 은사를 받은 사실이 있었고 또 눅10:17-20에 보시면 70인 파송자들이 그런 능력을 시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70인 파송자들이란 사도들과 소그룹을 만들어 보낸 단체일 것이므로 역시 사도들을 중심으로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눅 10:20에 보시면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므로 귀신을 쫓는 능력이 구원받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음에 대하여도 말씀 하셨은즉 잘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어서 능히 이루지 못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4) 그러면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 적은 연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① 믿음이 적은 것은 믿음으로 시행 못하는 패역의 원인임이 사실이요(롬14:23)

② 예수님을 상당기간 따르며 배웠으면서도 주님과의 연합관계가 부족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오늘의 성도들이 믿음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환난에 대처하는 신앙에는 자신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또 “믿음이 없다” 는 책망은 간질병을 못 고친 원인으로 지적하신 것인데(19-20절) 같은 사건이 기록된 막 9:29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므로 그 간질병의 증상이 귀신의 역사로 나타난다는 것(막9:17,25)과 고치는 방법은 “기도뿐이라” 하시고, 친히 귀신을 쫓으시므로 낫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18절, 막 9:29). 결국 제자들의 믿음 없는 뜻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시행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④ 기도 없이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행하는 것처럼 시행하는 것으로 이렇게 인간 권위주의의 형태가 나타날 때는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능력의 주이시므로 귀신을 임의로 굴복시키신 것입니다(18절).

⑥ 본문 중 21절이 없음은 유력한 신약 사본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에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절수를 분간하는 과정에서 착오된 것입니다.

5)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겨자씨만큼의 작은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말씀은 눅17:5,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겨자씨만큼이라도 있기를 바라셨고, 그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기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② 겨자씨는 작은 생명체 씨앗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작은 씨이지만 거기서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을 때는 공중의 새들도 깃들인다고 하시므로(마13:31-32) 생명 있는 천국운동의 역사가 작은 데서부터 커질 것을 말씀하신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겨자씨란 무궁한 잠재력을 가진 생명체를 뜻하므로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은 바로 능력의 주님과 연합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간질병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능력의 주님과 연결되는 믿음과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미 지적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연합된 신앙을 생명 있는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③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 것은 생명의 역사가 미약한 상태에서 시작이 되지만 나중에는 상상외로 커질 수 있는 것처럼 작은 믿음 안에서 큰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겨자씨 같은 믿음은 생명의 주님과 연합된 작은 자의 신앙이요, “산을 들어 옮김”은 아주 위대한 일들을 나타낼 수 있음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작은 요나 선지자의 외침이 니느웨 도성을 굴복시켰고 작은 다락방의 모임이 2000년의 수난의 역사를 견디며 세계적인 기독교가 된 것은 그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자신의 믿음이 진정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지를 확인 하셔야 할 것입니다(고후 13:5).

2.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심에 대하여(22-23절)

1) 1차 예고는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나타내셨고(16:21)

2) 2차 예고는 변형된 모습을 보이신 후 산에서 내려오실 때(17:9)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으며 또 본문에서 예고하신 것은 갈릴리에 모였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3) 예고의 내용은 “사람의 손에 넘기울 것”과 “죽임을 당하실 것”과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넘기우심”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통하여 은30에 팔릴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26:2,57).

4) 이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돌아가실 것에 대한 말씀만 마음에 담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은 관심 밖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함께 생각하였다면 심히 근심하기 전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함께 생각하였을 것이요, 슬픔과 희망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깨닫고 말씀 전체에 해당하는 종합적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성전세를 납부하심에 대하여(24-27절)

1)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반 세겔 받는 자들로부터 반 세겔을 낼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세무자들은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2) “반 세겔”이란 히브리인들의 돈의 중량단위로 1세겔(20게라)의 반액을 뜻합니다(세겔:유대인들의 돈의 중량단위. 드라크마:헬라의 단위. 데나리온:로마의 단위임). 이 돈의 단위는 창 23:15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출 30:11-16 에서는 20세 이상 선민 1인당 1년씩 성전 세금액으로 책정하여 시행하였는데 1세겔은 금속 11.5g정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시대까지 계승되었고 또 로마의 정부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을 그대로 허용하여 인정한 것입니다.

3)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는 세무자들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반 세겔을 납부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였으니 “세상 임금들이 자기 아들들(왕실가족)에게 관세(소유세)와 정세(인구세)를 면제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성전세를 안 내도 되지만, 저희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해”란 하나님의 일에 비협조하는 자로 오해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라의 백성으로서 관세와 정세를 안낸다면 반국가 행위자로 오해 받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면 반종교인 또는 반민족주의자로 오해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죄 되지 않는 일이면 오해를 면하기 위하여 시행하여야 됨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4) 예수님과 베드로가 내야할 성전세 1세겔을 베드로로 하여금 갈릴리 바다에 낚시를 던져 처음 오르는 고기 입에서 취하여 주게 하셨습니다.

① 그 당시에 예수님과 베드로 수중에는 1세겔의 돈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② 그런데 예수님은 고기 입에 1세겔의 돈이 있는 것과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려 올라올 것을 아시고 명하셨으니 이는 예수님께서 신성을 겸전하셨기 때문입니다.

③ 예수님이 돈이 필요하셨을 때 비상수단을 시행하여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시고 또 베드로의 것까지 내주신 일은 이적을 행사하시는 주님으로서 퍽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덕을 세우시기 위하여 낼 때 하나님의 특별간섭이 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 같기도 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주님과 연합한 생명 있는 신앙을 확인하셔야 할 것과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과 또 이웃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가능한 한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을 교훈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62 과 어린이를 앞세우신 교훈 (마 18:1-11) 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① 천국에서 큰 자에 관한 말씀(1-4절) ② 어린이 하나를 영접함에 대한 말씀(5절,10절) ③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함에 대한 말씀(6-7절) ④ 범죄 예방에 대한 말씀(8-9절)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며 위①, ②, ③ 대지의 말씀 속에 어린이와 소자를 칭찬하시고 위하는 말씀이 전부 포함되어 있으므로 제목을 “어린이를 앞세우신 교훈”으로 정하였습니다.

1. 천국에서 큰 자를 말씀하심에 대하여(1-4절)

1) 본문의 “그때에”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반 세겔을 내라고 명하신 때를 의미하며(17:24-27)

2)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4절).

① 여기의 천국이란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내세”를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과 관련하여 저희들이 생각하셔야 할 천국은 내세천국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지상의 신앙세계에서도 같은 의미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자이면 지상의 신앙세계에서도 역시 큰 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② “크다”는 의미는 혹 질문하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지위의 서열을 염두에 두었을 듯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세베데의 아내가 자기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을 드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마20:20-22).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하신대로의 “크다” 는 뜻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칭찬하심과 상급을 많이 받아야 할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혹 칭찬과 상급을 많이 받는 큰 자가 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서 섬기는 자가 크면 하늘에서도 섬기는 자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22:27).

3)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으니(2절) 이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의 모습을 직접 보이시고 생각하게 하심이요, 또 그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불러서 오게 한 것이므로 어머니 품에 있는 아이가 아닌 걸어 다니는 아이인 것입니다.

4) 이렇게 한 아이를 보이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① 예수님의 이 대답 마지막 부분(4절)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기 때문에 질문의 대답을 충분히 하신 것이며 천국은 겸손한 자가 으뜸 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따라서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3절)은 겸손과 봉사성(섬기는 자)을 의미하므로 모든 성도들도 이렇게 돌이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보이시면서 까지 교훈하신 것은 교훈을 크게 강조하신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③ 그런데 또 한 가지 이해하셔야 할 것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므로 꼭 어린아이 같아야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말씀은 천국 가는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어린아이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요소가 바로 진실과 신뢰인 것입니다. 복음을 믿되 어린아이처럼 진실과 신뢰감으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 그 아버지가 밑에서 받겠다하면 무조건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신뢰감이 어린이에게 있고 또 가르치는 대로 믿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진실과 신뢰심을 가지고 믿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④ 또 어린아이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됨은 순결성이 어른들보다 더 많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고 순결하게 산 성도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입니다.

2.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말씀(5,10절)

1) 5절 말씀에서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하셨습니다.

① “내 이름으로”란 “예수 믿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대리하여”의 뜻이 있으므로 선한 일은 자신이 하지만 주님이 시켜서 주님의 뜻으로 하는 것인 만큼 자신이 하는 것 같은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②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함”은 둘 이상의 영접을 부정하심이 아니고, 선한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에서 최소한의 선행을 표명하신 것이고 “영접함”이란 “잘 선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이 말씀 다음절에서 “어린아이”란 용어를 “소자”로 바꾸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 영접”이란 뜻에도 “소자”의 뜻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소자”는 경미하게 여김을 받거나 천시되는 대상이면서 거룩성이 많은 대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④ 그래서 10절에서도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림 당시에 말구유 헛간에 누우셨고,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줄로 안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나 천사의 몸을 빌어 잠시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반드시 어린이나 소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저희를 살피고 돕는 천사를 배정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항상 있게 한다고 하셨습니다(10절).

3.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함에 대한 말씀(6-7절)

1) 이 말씀은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겨 실족 시키면 하나님이 크게 노하실 것을 나타내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를 실족 시켜도 죄가 큰데, 그 이상 실족시키면 더 큰 벌을 받겠지요.

2) “실족”의 뜻이 무엇입니까? “낙심케 한다”, “범죄케 한다”, “해롭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3) 그런데 만일 “소자 하나를 실족 시켰다”고 가상할 때 그 죄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야 하는 벌이 오히려 경할만큼 큰 죄인가? 할 때

① 여기의 “실족시킴”이란 소자에게 치명적 손해를 준 경우이며

② 거기에 대응하는 벌이 상당히 커야함을 비유적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족 시키는 죄책을 일반적, 종교적 법으로 벌 할 수 있으나, “연자 맷돌을 달고 물에 빠뜨리는 형벌”은 일반적, 종교적 법에 명시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리고 “실족케 하는 일(즉 범죄 발단)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다”하심은 아담의 범죄가 인류의 불행을 가져온 것과 같은 뜻이며 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음”은 인간이 연약하여 스스로 완전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주님이 아시는것으로 마치 베드로가 연약할 것을 아신 경우나(마 26:41,눅 22:31-32) 성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시는 것(갈 3:11)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음”은 하나님이 범죄의 조작자가 아니신 이상 어떤 범죄든지 범죄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벌(화)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4. 범죄 예방에 관한 말씀입니다(8-9절).

1) 우선 이 말씀에는 비유적 교훈의 의미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손과 발과 눈이 죄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사실일지라도 범죄의 주동자는 지체가 아닌 인격이며 또 지체는 찍어내고 뽑아 버릴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몸은 귀하게 여겨야 할 “성령님의 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6:15,19-20)

2) 그렇다면 “지체가 범죄 하였을 때 그것을 없애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격이 범죄 방지에 노력하고 또 범죄의 여건인 자신의 욕심을(약1:14) 없애는 노력을 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손이 없다면 도적질을 못하게 되어 불행을 막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리고 이 말씀에는 전부 영생과 지옥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죄를 지어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갖고라도 죄를 짓지 않으므로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다” 하셨으니 죄는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음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가름된다는 뜻입니다. 지체가 적다하여 죄를 안 짓는 것은 아니지만 한 지체라도 그것이 없으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 때 그것을 행복으로 지적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4) 따라서 성도는 죄를 무섭게 여겨 방지하는 노력을 최대한 힘쓸 것이며 설령 “속죄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할지라도 죄는 짓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범죄 여건이 많은 환경에서 살거나 그런 유혹을 받는 세계에 있으면 손을 찍고 눈을 빼는 정신으로 미련 없이 그 환경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11절이 없음은 마17:21과 같음).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주신 교훈들을 종합하면

①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실 것과(마 11:11)

②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진실하며 순결하고 신뢰성이 있을 것과

③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자, 소외된 자를 사랑할 것과

④ 소자를 실족 시키지 말고 범죄 예방에 노력할 것과

예수를 믿되 진실과 신뢰를 동반하는 확실한 신앙을 가질 것을 교훈해 주신 할 것입니다.

 

제 63 과 범죄자에 대한 처리 (마 18:12-35) 목록으로


이 말씀은 네 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길 잃은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