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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마가복음 서론 (막 1:1) 6 바로가기

제2과 사역전의 준비 (막 1:2~13) 9 바로가기

제3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시작 (막 1:14~28) 12 바로가기

제4과 기도, 전도, 병 고치심 (막 1:29~43) 16 바로가기

제5과 여러 종류의 사역 (막 2:1~28) 18 바로가기

제6과 연속적 사역 (막 3:1~35) 21 바로가기

제7과 비유교훈과 풍랑 (막 4:1~41) 25 바로가기

제8과 세 가지 이적 (막 5:1~43) 28 바로가기

제9과 세례요한의 순교사 (막 6:1~29) 32 바로가기

제10과 두 가지 큰 이적 (막 6:30~56) 35 바로가기

제11과 잘못된 유전 (막 7:1~23) 38 바로가기

제12과 두 병자를 고치심 (막 7:24~37) 41 바로가기

제13과 7병 2어와 누룩 (막 8:1~21) 43 바로가기

     설교보충 1. 7병 2어의 은혜 (막 8:1~10) 45 바로가기

제14과 소경을 눈뜨게 하심 (막 8:22~38) 47 바로가기

제15과 하나님 나라의 계시 (막 9:1~29) 50 바로가기

제16과 여러 가지 교훈 (1) (막 9:30~50) 53 바로가기

제17과 가정문제와 재물 (막 10:1~27) 56 바로가기

제18과 비중 있는 헌신 (막 10:28~52) 58 바로가기

제19과 마지막 입성 (막 11:1~33) 61 바로가기

제20과 농부비유와 질문들 (막 12:1~27) 64 바로가기

제21과 여러 가지 교훈 (2) (막 12:28~44) 67 바로가기

제22과 예루살렘 멸망 예언 (막 13:1~20) 70 바로가기

제23과 말세의 징조와 대비책 (막 13:21~37) 73 바로가기

제24과 향유부음과 성찬 (막 14:1~26) 75 바로가기

제25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 (막 14:27~52) 78 바로가기

제26과 대제사장의 재판과 학대 (막 14:53~72) 81 바로가기

제27과 빌라도의 재판과 골고다 (막 15:1~22) 83 바로가기

제28과 운명과 장사 (막 15:23~47) 85 바로가기

제29과 부활의 주일 새벽 (막 16:1~8) 89 바로가기

제30과 만남과 분부와 승천 (막 16:9~20) 91 바로가기

      4복음서 비교표 94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2006. 5. 10은 저에게 의미있는 날이었습니다. 그 의미란 제가 목사 된 후부터 40년간 사용하였던 메시지 문서(설교원고 및 강론문)를 전부 출판용 집필문서로 바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운 강론과 설교문도 많이 작성하였습니다. 제가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그동안 건강치 못한 체질관계로 힘들게 견뎌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음서 강론을 쓸 때 마가복음의 대부분의 내용이 공관복음에 있기 때문에 두 복음서 강론을 쓰면서 마가복음의 내용을 상당부분 인용하였으므로 신약강론 중 마가복음은 따로 기록하지 않으려고 하였었는데 막상 1단계 집필(기존원고 정리)을 마치고 보니 신약강론 중 마가복음만 제외된 것이 서운하여 또 쓰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복설명을 제하려 하였고, 공관복음에 대조 할 구절만 표기하면서 전체적으로 주시는 교훈에만 착안하여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 서의 강론은 주밀하게 해석하지 않은 점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목회 정년 시기가 18개월 남았는데, 그동안 할 일은 집필한 문서 전체를 짜임새 있게 홈페이지에 입력하고, CD롬을 만들어 보급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보급하는 방법은 홈페이지 열람, e-메일 송부, CD롬집으로 보급하고, 또 출판물로도 보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한 쓰다가 중지한 인물공부를 완필하는 것과 소선지서 부분에서 못쓴 부분을 형편대로 보충하려고 합니다. 또 그 사이에 설교한 것은 7분설교 13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나의 성직 마지막 시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개혁교회의 모범을 시도해 보고 그 생활과 정치규범을 남기는 일입니다. 개혁의 주안점은 ① 성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확립, ② 교회 생활의 단순화, ③ 교회 생활에서 물량주의, 개교회주의, 인기주의, 사치주의, 허영주의, 의식주의, 사업주의, 세속주의 등을 배제하고, ④ 성경만 배우고 예수님만 닮게 하며 친목하고 선교만 하는 교회를 시도해 보고, ⑤ 그 절차를 법규로 남기는 것입니다. 후일에 그 내용과 모범을 본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다행으로 여길 것입니다.

저의 건강상태로 보면 오래 살 것 같지 않으나 하나님이 저의 사역계획에 공감하시면 기회를 주시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사모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때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2006. 7. 7.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마가복음 서론 (막 1:1) 목록으로


마가복음을 배우시기로 작성하신 성도님들이면 우선 본문을 살피시기 전에 세 가지 서론적 의미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① 마가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과, ② 마가가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고 믿는 근거에 대한 것과, ③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전하기 위한 말씀인가에 대하여 아셔야 합니다.

1. 성경에서 마가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행 12:12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는 복음전파 초기로 헤롯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핍박할 때였는데 하나님이 베드로를 이적으로 출옥시키셔서 찾아간 집이 마가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 여러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마가란 이름은 요한이라고도 불렀다” 하셨으니까 마가도 여러 사람이 있고(요 21:15, 행 4:6), 요한도 여러 사람(세례요한, 사도요한)이 있으니까 반드시 요한이란 별명을 가진 마가,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 또 예루살렘에 집을 갖고 있으면서 모임의 처소를 제공한 집의 아들로 분별하고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 행 12:25을 보시면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는 중에 유다 지역에 기근이 들어서 두 사람이 구제금을 갖고 예루살렘에 갔다가(행 11:22~30)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마가는 청년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행 13:5, 13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이 있을 때 선발된 선교사는 바울과 바나바였는데, 마가가 이 두 선교사의 수종자가 되어 떠났다가 두어 지역을 거쳐 “버가”까지 가서는 계속 동행을 안 하고 예루살렘 자기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인내심이 부족하였던 모양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가 끝나고 2차 선교를 출발하려고 할 때, 행 15:37, 39을 보시면 바나바가 바울에게 마가를 동행시키자 한즉 바울이 “1차 전도 때 중도하차한 사람을 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반대를 하니까 바나바 혼자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선교하러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 쪽으로 떠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기록한 골 4:10을 보시면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라” 하였고, 바울이 로마에 갇혔을 때 마가도 함께 갇힌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또 몬 1:24을 보시면 바울이 마가를 “동역자”라 하였고, 또 딤후 4:11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에 기록한 말씀인데 그때에 소아세아(에베소일 듯, 딤후 1:15~18)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시면서 “로마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으니 마가를 데리고 와야 유익이 있다” 하신 것을 보면 마가도 바나바나 바울과 함께 선교를 다니다가 로마에서 감옥생활도 하였고, 또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나와서 소아시아 지방으로 다니며 선교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가가 왜 예수님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또 12제자에도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소년으로 나이가 어렸기 때문입니다. 막 14:51을 보시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무리에게 잡힌즉 베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 당사자가 바로 마가일 것으로 예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예측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행 12:12에서 베드로가 출옥했을 때 “제자들이 마가의 집에 모여 기도하였다”고 한 번 말씀하신 것 때문에 성찬예식도 그 집에서 하셨고, 또 “오순절 때 120명이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것도 그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막 14:13~16, 행 1:13, 2:1~2). 다락방이나 집회소 가진 집이 흔하지는 않았겠지만 짐작이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또 “마가”란 이름의 뜻은 “말콘”으로 “비취다”는 뜻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여호와의 사랑”을 뜻한다고 합니다.

2. 이 사람이 어떻게 마가복음을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무렵에 홑이불을 두르고 쫓아다닌 소년이라면 보고 듣는 기억은 얼마든지 있지만 나이가 어리니까 예수님 때는 제자 될 입장이 못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외삼촌이 바나바사도이니까(행 14:14) 청년이 되었을 때 충분한 지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와도 함께 있었고, 또 벧전 5:13을 보시면 베드로가 마가를 보고 “내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도 로마에 계셨고, 베드로는 로마를 “바벨론(죄악의 도성이란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소년 시절에 예수님의 행적을 보았고, 장성한 후에 바나바의 인도로 선교사역을 하면서 바나바와 베드로와 바울의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며, 따라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마가의 기록이란 말씀이 없고 제목에만 “카타 말콘”이라고 쓰여진 것입니다. 카타(κατα)는 원인제공을 뜻하는 전치사입니다. 이 제목은 본문이 전래될 당시부터 기록된 것이고, 최초의 교부들이 그대로 신뢰하여 마가의 기록물로 전파하였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가 “마가를 아들이라” 한 사실을 보면 로마에 함께 있으면서 “베드로가 한 말을 마가가 받아 쓴 것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는 것입니다(알렉산더의 클레멘트). 또 마가복음을 내용별(사건)로 제목을 정한다면 84제목쯤 되는데, 이 내용이 4복음에 다 있는 것은 17제목, 공관복음에 다 있는 것은 58제목, 마태복음에만 있는 것은 18제목,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은 5제목,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은 3제목 뿐인데, 약간씩 표현이 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것은 막 4:26~29, 9:1, 13:34~37, 16:1 뿐인데, 이것은 마가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지 않은 증거로서 공관복음 중 먼저 기록된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3. 이 복음서의 목적과 특징이 무엇입니까?

베드로, 바울, 마가가 로마에 있으면서 기록한 것으로 믿게 된즉 로마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요(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상대한 것) 예수님의 사역중심으로 이적과 능력을 중요시하여 기록하였고, 설교와 비유가 많지 않으므로 간단한 특징이 있으나 사건의 설명은 비교적 자세하고 구약의 인용이 없는 점이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여기에 대하여 본인이 쓴 기독교신앙백과의 마가복음 개론을 참고하십시오).

4. 1절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셔야 할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의 시작(말씀)”으로 이해 하십시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일한 적자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은 양자관계를 의미합니다(요 1:12, 롬 8:15).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친자관계는 신비의 경지로 이해하셔야 하고, 또 유기적 관계에서 인간적 부자의 의미와 공통되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적 부자관계에 의미가 있듯이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도 그런 것이 있고, 또 신비한 유기적 관계도 있는데 이것은 삼위일체의 동질성과 신비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대속자, 중보자, 심판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구원의 도리, 즉 복음사역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을 처음부터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의 뜻은 마 1:21에서, “그리스도”의 뜻은 눅 4:18과 요 1:1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은혜와 능력의 근원자”로 보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예수님이 주셔야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히 2:10).

3) “시작이란 뜻”은 구약에서 예언한(이 예언에 대하여 기독교신앙백과 256p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란 제목을 참고하십시오) 메시야 사역이 때가 되매 전개되기를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계속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제 2 과 사역전의 준비 (막 1:2~13) 목록으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즉 메시야 사역 전에 나타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① 2~8절에 “세례요한의 출현”이고, ② 9~11절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이요, ③ 12~13절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이 공생애 전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1. 세례요한의 출현(2~8절)

1)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이 먼저 나와 예비사역을 하였는데, 이 사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며, 또 요한이 예수님 오실 길을 예비한 방법이 어떠하였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2절을 보시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져서 세례요한이 출현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사야서 어디에 기록된 것인가? 를 찾아보셔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는 없고, 말 3:1에 있으며 사 40:3을 보시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절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보다 100년쯤 후의 선지자인 말라기가 예언한 말씀이라도 그 내용과 상통한 취지를 이사야 선지자가 먼저 말씀한 것이므로 “그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 말씀 3절은 사 40:3~4 말씀과 일치하니까 전체의 내용면에 있어서 이사야의 예언이 더 많은 셈입니다. 사 40: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여호와의 길(마가는 예수님의 길로 표현하였음)을 예비할 것이요”, 또 “사막에서 대로를 평탄케 한다”는 말씀과 “고르지 않은 땅을 평탄케 하고…험한 곳을 평지되게 한다”는 말씀이 곧 막 1:3의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거친땅)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앞에 사자(세례요한)를 보내서 너의 갈 길을 평탄케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평탄케 하는 것”을 길 닦는 일로 설명하셨지만 그 진의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완악한 심령을 누그러뜨려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중대한 일을 하실 때 미리 예고하시고(암 3:7) 또 준비 작업까지 해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뜻만 실천하신다면 준비 작업하는 일까지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런 예언의 결과로 세례요한이 오셨다면 요한은 어떤 사람이며, 또 그 준비 작업을 어떻게 하였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2) 6절에서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마 3:4, 약대털옷)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하였습니다. 사 40:3에서 “광야에서 외칠 것이라” 하셨으니까 광야에서 살아야 했고, 광야생활에 적응하려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광야라는 의미는 선민의 광야 여행처럼 험난한 세상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기와집을 짓고 비단 옷을 입으며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되는 형편대로 살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대털을 입고 석청을 먹는 일 아니겠습니까? 세례요한은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실 길을 평탄케 하는 방법으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나보다 능력 많으신 분이 내 뒤에 오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4절의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란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니 그동안의 완악을 접고 회개한 증표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벌주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회개하였으면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벌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용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마 18:21~22). 또 완악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라야 싹이 나듯이 진리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약 1:21) 회개할 것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한즉 5절에서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광야로) 나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사람이 없는 벌판에 나가서 천막치고 세례요한처럼 외쳐서 서울 사람, 성남 사람들이 다 지방으로 나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파트 옆에 예배당을 세워도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이 잘못된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복음의 초기인즉 성령님께서 크게 역사하셨겠지요. 여기에서 세례는 회개한 증표로 베푼 것이고, 세례의식은 세례요한이 최초에 하나님의 계시로(요 1:33, 마 21:25) 시행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고(9절), 친히 세례를 베푸셨으며(요 3:22), 또 세례를 주라(마 28:19) 하셨으니까 세례 주는 제도는 정당한 것인데 꼭 침례를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기독교신앙백과, 472p 참조).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인즉 그것이 곧 주의 오실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3) 7~8절에서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예수님)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라” 하므로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은 깊이 낮추었으며, “나는 너희에게 (회개한 증표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세례의 의미는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가 성도의 심령과 생활에 함께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실이 가견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있었으니 곧 오순절 성령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행 2:1~4 ).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을 알았고(요 1:31~34) 예수님을 증거하였으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므로 예수님의 오실 길을 닦았는데, 그것이 그가 세상에 오게된 이유요 사명이었습니다(마 3:1~12, 눅 3:1~18 참조).

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9~11절)

9~10절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요단강 상류까지는 28㎞쯤 됩니다. 또 그곳은 경치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회개의 세례가 아니고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세 가지 이적이 나타났으니, 하나는 하늘이 갈라진 것이요(구름 사이로 빛이 비췬 것으로 이해함), 다음에는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를 나타내 보이면서 예수님께로 다가 오신 것이요, 셋째는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세례를 받을 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연합적으로 확인시켜 주신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로 인쳐 주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함께 하시는 뜻입니다(마 3:13~17, 눅 1:9~11, 요 1:29 ~34).

3.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12~13절)

예수님의 시험 받으신 기사를 마가는 간단히 기록하였습니다(마 4:1~11, 눅 4:1~ 13). 12절에서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뜻”은 예수님이 성령의 감화로 마음 속에 광야에 가셔서 연단 받으실 필요를 느끼시고 가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정당하고 필요한 것을 하는 것을 성령님의 감동이요 역사로 믿으십시오. 13절에서 “40일 동안 계셨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하였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광야의 어려운 여건에서 연단을 받으시되 “부정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악령의 유혹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에게 굴복하고 평안하라” 하는 식으로 유혹을 받으셨으나 넉넉히 이기셨으니 이때에 천사들이 수종 든 것을 보면 그 시험을 이기신 것이 분명하지요. 또 그때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하였는데, 이것은 마가의 고유기록으로 들짐승과 함께 계셨으나 짐승들이 예수님을 해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때에 천사들이 수종 들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3 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시작 (막 1:14~28) 목록으로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준비차원에서 세례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과 시험을 통과하신 일을 간단히 기록한 후에(막 1:2~13) 직접 공생애에 들어오셔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신 것부터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것과(마 1:1~17, 눅 3:23~38) 세례요한의 출생과정과 자세한 사역(눅 1:5~ 25, 57~80, 요 1:15~34)과 예수님의 탄생 당시의 일(마 1:24~25, 2:1~12, 눅 2:1~ 20)과 예수님의 어릴 때의 일(피난, 할례, 유년시절)들은 생략하였습니다(마 2:13~23, 눅 2:21~52). 본문의 전체적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시작”입니다. 대지를 나누면 ① 14~15절은 “사역의 시작”이고, ② 16~20절은 “제자들을 영입하심”이며, ③ 21~22절은 “가르치심과 권위”요, ④ 23~28절은 “더러운 귀신을 쫓으심”입니다.

1. 사역의 시작(14~15절)

1) 14절에서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최초의 사역으로서 마 4:12~17, 눅 4:14~115, 요 4:43~45에도 같은 역사가 기록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세례요한이 잡힌 다음부터”이므로(마 4:12)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은 요한의 사역이 끝나자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15절에서 예수님이 처음 외치신 복음의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말씀인데, 이는 다른 복음서에 비할 때 독특한 외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의 “때가 찼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① “때가 찼다”는 뜻은 기한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말세는 많이 가까웠음) 꽉 찬 것을 의미하므로 메시야 약속실현의 때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때는 중대한 시대적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도래했다”, “율법시대가 끝나고 복음시대가 도래했다”, “메시야 오실 때를 기다렸는데 그때가 되었다”, “선지자가 없던 400년 세월이 끝났다”, “하나님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고 은혜 주실 때가 되었다(고후 6:2)”, “복음사역을 시작하는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의 하나님 나라는 내세의 천국이 아닌 예수님과 연합하는 성도의 세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천국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세계는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사는 세계는 내세천국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생활을 맛보셔야 할 것이니, 곧 주님을 모시고 만족하며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내세천국까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③ “회개하고” 하신 뜻은 세례요한이 이미 회개의 역사를 많이 이룬 것처럼 이방적 신앙과 율법주의 신앙, 또는 불신앙, 메시야를 바라지 못한 무지 등에서 깨어나고 돌이킨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먼저 심령 속에서 중생의 역사(요 3:3)가 일어나야 하지만 그것은 신비한 일이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행위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돌이키는 태도를 나타내라”고 한 것입니다. 먼저 거듭나야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을 갖는 동시에 회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 교리적 순서이지만 가견적 태도로 볼 때는 회개를 먼저 해야 신앙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④ “복음을 믿으라” 하셨는데, 이 복음이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과 그의 구원의 방도가 십자가와 부활이란 사실”을 믿고,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2. 제자들을 영입하심(16~20절)

본문 16~18절은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베드로)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내용”인데, 이 말씀이 마 4:18~20에 기록되었고, 또 누가는 눅 5:1~11에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경위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성구 목록을 보시면 마 1:14~15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네 편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그 다음 19~20절은 역시 같은 장소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영입한 말씀인데, 이 말씀도 마 4:21~22에 기록되어 이미 강론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먼저 전도사역에 나서신 후 같이 동역할 제자들을 영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증거된 이유는 성도들도 전도자가 되셔야 하고, 또 전도와 교육과 모범의 동료자들을 규합하여 협력함이 필요하며, 또 전도의 방법으로서 두 가지를 교훈하셨는데 하나는 모든 것(재물, 직업, 가족, 자신의 개인적 목적 등)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과 전도에 몰두하는 일과 다음에는 고기를 낚는 것처럼 적절한 방법을 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고전 2:1에서 “십자가를 전할 때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말라”는 뜻은 “인간의 잔꾀나 수단으로 현혹하지 말라”는 뜻이요, 본문의 “낚는다”는 뜻과 “뱀처럼 지혜로우라”(마 10:16)는 뜻은 전도자가 흠 잡힘 없이 행하고 전도의 대상을 접근함에 있어서 상당한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방법은 예비적 접근에 있어서 원만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미련한 방법이란 성령님의 역사로 믿음이 발생하는 만큼 수단을 쓰지 말고 진실하게 십자가의 도리를 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가르치심과 권위(21~22절)

1) 21절에서 “저희가(이때는 제자들이 동행한 때임) 가버나움(갈릴리 바다 해변, 11시 방향에 자리잡은 성읍, 또는 어촌임)에 들어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주의적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에 이스라엘 선민들이 휴식하면서 자기들이 사용하는 회당에 모이는 관행이 있으므로 그 모임에 가셔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도록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에 대하여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복음, 즉 자신의 신분에 대한 것과 구원의 도리,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내용, 또는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등의 교훈을 하셨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설교는 우선 필요한 내용부터 증언해야 하는 것이 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2) 이때에 22절에서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7분설교 8집, 42과 “권세있는 가르침” 참고). 예수님의 교훈이 권세 있게 나타난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① 우선 듣는 자들이 처음 듣는 것이고, ② 말씀의 내용이 충실하였으며, ③ 신분상 의로운 권위가 있었을 것이고, ④ 결정적 요소로는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갖는다면 누구의 설교나 다 권위있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을까요? 서기관들도 율법을 가르쳤을 것이지만 그 율법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임을 깨우치지 않았거나 자신들의 실천력이 부족하였다면 듣는 자들이 권위있게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 증거자는 반드시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나타내고 정화된 신분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4. 더러운 귀신을 쫓으심(23~28절)

이 말씀은 눅 4:31~37의 말씀과 같습니다.

1) 23~24절에서 “마침 저희 회당(가버나움)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24절에서 그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단체 귀신의 입장으로 말한 뜻)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여기서는 개인 입장으로 말함)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인격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영으로 말한 줄 압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마 8:29과 눅 8:28에도 나타났으니 사건과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라도 “귀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고 한 사실에 대하여 이는 믿음으로 진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안다는 뜻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으로 아무 효력이 없는 지껄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한 것은 그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능력과 위압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말한 것인즉 “성령님의 역사에 기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이때에 25절에서 “예수님이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신즉, 26절에서 “더러운 귀신(귀신의 속성이 죄악됨을 뜻함)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육체적, 정신적 타격을 준 뜻)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하였으니, 이 큰 소리는 귀신들린 자가 귀신의 역사로 인한 괴로움을 발산한 신음소리입니다. 악한 자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행패를 부리고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시를 뽑을 때 아픔을 주는 것처럼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을 명령으로 쫓으실 분은 예수님(성령님)뿐인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3) 이런 사건이 나타났은즉 그 반응이 어떠하였겠습니까? 27절에서 “다 서로 놀라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라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였으며, 28절에서 “이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구세주로 오셔서 자신의 신분의 권위와 사역을 나타내신 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귀신을 쫓는 일은 주님만 하실 수 있은즉 귀신들린 사람이 있으면(강한 자는 철창에 가두어 놓고라도) 반드시 기도로 부탁하셔야 할 것이요(막 9:29), 또 한 가지는 성도나 교회가 깜짝 놀랄 일을 하면 금방 주위에 알려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깜짝 놀랄 일, 극히 선한 일을 많이 시행하셔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본문을 요절로 한 설교문 : 핵심설교 51과, 52과, 7분설교 2집 후 16과, 7분설교 8집 42과, 74과).

 

제 4 과 기도, 전도, 병 고치심 (막 1:29~43) 목록으로


본문에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으로 “기도, 전도, 병고치심”의 내용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기도를 먼저 설명드리는 이유는 25절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일어나사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하셨기 때문이요, 그 다음에 전도하신 일을 두 번째로 설명하는 이유는 38절에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활동목적이 전도에 있으나 전도보다 먼저 하신 일이 기도이므로 새벽에 조용한 환경을 이용하여 혼자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전도를 하시는 중에 병자들을 접하게 되셨으므로 그들에게 사랑도 베푸시고 또 자신이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메시야 신분(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1. 먼저 35~39절은 “기도와 전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35절에서 기도시간을 새벽으로 정하신 것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과의 대화로부터 출발하시려는 목적과 또 한 가지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합심하므로 의미가 있고(마 18:19, 행 1:14, 12:5) 개인기도는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인즉 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마 6:6). 기도의 시간은 새벽(밝기 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시작하기 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 먼저 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혜와 능력을 구하시려고 기도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 의논이 더 중요하지요. 저희들은 대화도 중요하고 부탁도 하셔야 하니까 기도의 우선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2. 36~37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간 것”은 말씀을 듣던지 혹은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38절에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여야 할 것이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절에서 “온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도 내어 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에 제자들(우리)과 함께 다른 가까운 마을(가버나움이 아닌 곳)로 가셔서 전도를 하신 것입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은 그 당시 갈릴리 호수 주변 마을을 의미하지만 문제는 전도하지 않은 가까운 곳부터 먼 곳으로 향하면서(행 1:8,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 복음을 받지 않은 곳을 따라 나가시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29~31절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일”인데 이 부분의 말씀이 마 8:14~15, 눅 4:38~3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셔서(21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 전, 또 여러 제자를 부르신 후)과 안드레(베드로의 형제)의 집에 가신즉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즉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병고침 받은 베드로의 장모) 저희에게 수종을 든 것”입니다. 감기, 몸살 같은 병이 열이 떨어지면 쉽게 회복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으로 쉽게 고침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4. 32~34절, 39절에서는 “모든 병과 귀신을 쫓아내신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낮에는 전도하셨음)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일 듯) 모이니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셨고 많은 귀신도 내어쫓으셨는데 귀신이 자기(예수님)를 앎으로(23~24절)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마 8:16~17, 눅 4:40~41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각색 모든 병과 귀신들린 것을 다 깨끗이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예수님을 안다”(23~24절)고 한 것은 신앙과 관련없는 지식으로서 그런 자의 증언(옳은 증거라도)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진리는 허락된 신앙인이 증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5. 40~44절에서 “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인데, 이 사건의 기록이 마 8:2~4, 눅 5:12~16에도 기록되었습니다. 40절에서 문둥병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낫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레 14:3). 그때에 그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초인간적 능력자인 사실을 믿고,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간청할 때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므로 주님의 주권을 전제하여 간청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즉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곧 떠나고 깨끗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간구자가 주님의 주권을 앞세워 간구한 점과, 주님의 능력을 믿은 점과, 주님이 민망히 여기신 긍휼, 곧 낫게 해 주시고 싶은 소원의 일치와, 능력으로 곧 전달되는 말씀의 선포와, 손을 내밀어 전달하시는 안위적 자세의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그리고 43~44절에서는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말고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너의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레 14:10~13)을 드려 저희(백성들)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고침 받은 것을 제사장에게 보여 확인을 받고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 백성들에게 알려 차별없는 교제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엄히 경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이적을 자랑삼아 인기 방편으로 쓰시지 않는 점과 모든 병자라 하여 다 고쳐주실 계획이 없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은 “병자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도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병자들이 고침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의 병을 다 고쳐줄 것이니 많이 선전하여 다 오게 하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7. 45절에서 (예수님이 엄히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으므로 예수님이 다시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피하신 뜻)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고치시는 일을 전적으로 하시려고 하셨다면 일정한 장소에 시간따라 모이게 하고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의 병을 다 고쳐주시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 아니시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불가항력적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병고침 받은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명대로 조용히 있었으면 예수님도 편히 쉬실 수 있고, 또 병고치러 갔던 사람들도 헛걸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엄히 경계하셨으면 반드시 순종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본문을 요절로한 설교문 : 7분설교 5집 13과, 8집 45과, 사명전도설교 71과).

 

제 5 과 여러 종류의 사역 (막 2:1~28)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여러 종류의 사역”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2장 전체를 두 과목으로 나누어 정리하려 하다가 본문을 근거로 한 강론이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있고, 또 본문을 근거로 한 설교문도 있기 때문에 단축하기로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다섯 제목의 말씀이 기록되었으므로 총 제목을 “여러 종류의 사역”으로 정한 것입니다. ① 1~12절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인데 이 본문에 따른 설교가 7분설교 8집 70과에 있고, 또 마 9:1~8을 근거로 한 설교도 7분설교 6집 98과, 99과에 있은즉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② 13~17절은 “레위(마태)를 제자로 부르심”인데 이 내용은 마 9:9~11을 근거로 한 설교가 마태복음 설교 43과에 있으며, 또 이와 같은 내용이 마 9:9~13과 눅 5:27~32에도 있어서 이미 강론을 한 것이요, ③ 18~20절은 “금식에 대한 질문”인데 이 내용도 마 9:14~17과 눅 5:33~39에서 강론하였고, ④ 21~22절은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에 대한 말씀”인데 이 부분은 마 9:16~17에 기록되었으며, ⑤ 23~28절은 “안식일 논쟁”으로 마 12:1~8과 눅 6:1~5에도 기록되었고, 마태복음 설교 58과에서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이란 설교와 또 7분설교 7집 67과에서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답”의 설교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이 성경을 주신 목적에 착안하여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중풍병자를 고치심(1~12절)

예수님이 원하시면 중풍병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난치병을 고쳐주신즉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인데 예수님은 복음전도를 우선하신 것을 알 수 있고, 고침받은 중풍병자가 네 사람의 배려와 봉사에 의하여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으며, 그 네 사람은 지붕을 뚫어 환자를 내릴 만큼 적극성 있게 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 즉 협력자들의 적극성 있는 태도를 보시고 그의 죄사함을 선포하시니 그 환자는 “곧 상(자기 침상)을 들고 나갔다(12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셨고, 그 환자의 병은 죄와 관계가 있었으며, 또 그 환자는 이웃의 관심과 사랑의 협력에 의하여 주님 앞에 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당시에 서기관들(유대주의적 제사장들을 돕는 사무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거나 믿지 않았은즉 이상하게 여긴 것이 사실입니다. 능력보다 죄사함의 선포에 더 놀란 듯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죄를 사하시되 짐승으로 속죄제물의 피를 드려야 하는 줄로만 알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동안 제단에서 드린 모형적 제사를 자신의 희생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인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신앙의 중풍병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레위(마태)를 제자로 부르심(13~17절)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설교와 전도의 무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12제자를 단계적으로 영입하셨지요. 먼저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 요한 형제를 부르셨고(막 1:16~20), 다음에 레위를 부르셨는데 레위가 마태인 것은 마태복음 9:9에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요, 마가와 누가(눅 5:27)는 레위라 하였은즉 레위가 히브리식 본명이라고 합니다. 레위는 알패오의 아들인데 예수님의 다른 제자 중 야고보와 다대오도 알패오의 아들인즉(마 10:3)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이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예수님이 부르셨고,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면서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하였는데(마 9:9~10) 그때에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와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때에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죄로 여겨 항의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레위와 그 동류(세리들)들을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레위가 히브리식 이름을 가진 것을 보면 그가 히브리인(선민)으로서 로마의 관리로 임명되어 동족의 세금 과징하는 것을 큰 죄로 여겼기 때문이요, 또 그 잔치에는 같은 직종에 있는 친구들까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 1:1~2에서 “복 있는 자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를 멀리하라”는 말씀이 있지요.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율법으로 죄사함 받은 의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자와 율법을 모르는 모든 이방인들까지 다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요 4:7~9).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 독선에 빠져 있었고, 세리나 이방인들은 무조건 상종 못할 자로 여겼으니,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가 죄인을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죄에 함께 빠지지 말라”는 뜻일 뿐 상종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도하려면 죄 짓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독선에 빠지지 마시고 범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들은 접근하여 많이 계몽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금식에 대한 질문(18~20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규칙적인 금식을 한 줄 압니다(눅 18:12). 사 57:1~9을 보시면 금식의 참된 의미와 외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자기의 경건성, 또는 신령성을 알리기 위한 금식이나 자신의 이기주의 목적을 위한 금식은 옳지 않습니다. 비밀리에 한다 하여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금식할 때 명분과 방법을 잘 연구하여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처럼 금식하도록 지도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금식은 제도적으로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절대자이신즉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하셨고, “신랑(예수님)을 뺏길 형편(믿음이 떨어지고 시험에 드는 것을 뜻함)이 될 때는 (박력있는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하여) 금식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크게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 영광에 목적을 두고 기도에 힘을 싣는 뜻으로 적당히 금식기도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금식기도는 큰 결단과 고뇌를 감수하는 것이므로 그 합당성에 대하여서도 건전하게 하십시오.

4.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에 대한 말씀(21~22절)

이 말씀은 변화를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기존의 것을 뜯어 고치는 것보다 새로 시작함이 좋은 것을 교훈하시는 줄 압니다. 특히 율법주의적 사고방식과 생활을 예수님 또는 복음주의로 바꾸어 새로 시작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의 개혁을 꿈꾸고 있습니다. 개인적 신앙생활의 개혁은 많이 힘쓰는 편입니다. 저의 신앙생활을 누가 감독하거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생활하는데 교회단체를 어떻게 이끌어 가며 어떻게 섬겨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통과 교회헌법을 많이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기성교회 단체 안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하나에서부터 예수님을 모시고 성경에 근거하여 새로 시작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전통과 교회헌법, 그리고 목회자의 관행, 교회의 이미지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 있어서의 개혁은 혼자 따로 새 출발 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부조리한 일들을 발 붙일 수 없게 하려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5. 안식일 논쟁(23~28절)

이 말씀도 마 12:1~8, 눅 6:1~5에서 강론하였고, 마태복음 설교 58과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 7분설교 7집 67과에서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답”이란 설교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출 20:8~11)을 율법적으로 지키려면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거기에 기준을 정하고 지킨다 해도 어려울 것입니다(행 1:12).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사실의 불가능성을 선포하셨고(갈 3:10~11),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일깨우시면서 율법은 복음을 믿게 하는 안내서라고 하신 것입니다(갈 3:24).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밀 이삭 비빈 것”을 안식일 위반으로 지적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구약의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으로서 예수님이 오시자(막 1:15) 폐지된 것인즉(롬 10:4) 폄론하시지 않아도 됩니다(골 2:16). 다만 주일은 주님의 날인즉(계1:10) 세속을 성실하게 삼가시고 영광돌리는 일에 힘쓰십시오. 26절에 기록된 “아비아달”은 그 당시(삼상 21:1, 삼하 8:17)에 시무하던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놉에 있는 성소에 갔다가 너무 시장하여 제사장들만 먹도록 구별한 거룩한 떡(레 24:8~9)을 제사장 아닌 배고픈 자에게 먹였어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은 사실을 들어 안식일 규범을 잘못 해석한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주의에서 떠나고 또 율법 자체보다 예수님의 모범을 본 받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이해하십시오.

 

제 6 과 연속적 사역 (막 3:1~35) 목록으로


본 장에 중요한 제목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① 1~6절은 “손 마른 자를 고치심”이고, ② 7~12절은 “무리들을 적당히 피하심”이며, ③ 13~19절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심”이요, ④ 20~30절은 “능력의 역사에 대한 논쟁”이며, ⑤ 31~35절은 “주님의 가족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 다섯 가지 내용을 한 제목으로 포괄하려면 “연속적 사역”이라고 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이 많은 분량을 한 과목 안에서 설명드리는 것은 이 본문이 마태복음, 누가복음과 또 여기에 따른 설교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손 마른 자를 고치심(1~6절)

이 부분의 기록은 마 12:9~14과 눅 6:6~11에서 강론하였고, 또 7분설교 8집 63과에서 “네 손을 내밀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은즉 참고하십시오.

1) 1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신 것”은 가버나움 회당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사료되지만(막 1:21, 29) 막 1:38에서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하셨은즉 그 지역에 있는 회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 지역은 갈릴리도를 벗어나지 않은 이웃 지역들입니다. “그 회당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하였으니, 이 “손 마른 병”은 뇌졸중의 현상일 것이고, 그가 회당에 온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받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눅 6:6에서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하셨고, 또 밀밭 사이로 지나시다가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이 있은 후였을 것인즉(막 2:23~28)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고의로 있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과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송사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와 교훈이 중요하니까요. 3절에서 “사람들이(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임, 눅 6:7) 예수님을 송사하려고…엿보았다”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치시면 출 20:8~11에 기록된 안식일 규범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예수님을 종교재판부에 송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 목적을 다 아셨습니다(막 2:8).

2) 그래서 예수님은 질문형식으로 그들의 잠재의식을 깨우치신 것이니 곧 “안식일에 악행이나 죽이는 일은 할 수 없으되 선행이나 생명을 구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4절). 그리고 5절에서 저희의 마음의 완악(무지와 송사심리, 의인을 미워하는 것)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둘러보시고 그 손 마른 자의 뜻과 상관없이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절에서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작당하여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였으니 신앙의 대적은 능력으로도 설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기적으로 믿을 자를 다 끌어들일 수 없는 것이고, 다만 믿을 자가 혹 기적의 감동을 받고 나올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2. 무리들을 적당히 피하심(7~12절)

이 말씀은 마 12:15~16의 말씀과 부분적으로 상통하지만 그 다음의 내용은 같지 않습니다.

1) 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신 것”은 배를 타시고 다른 곳으로 가시기 위함이었고(9절), 또 배를 타시고 그곳을 떠나려 하신 이유는 “갈릴리 뿐 아니라(7절) 유다(예루살렘을 중심한 지역)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유대 남쪽, 사해 동남방)와 요단강 건너편(동편, 베뢰아 지역과 데가볼리 지역)과 두로와 시돈(갈멜산 북쪽 지중해변이고 당시에는 그 지역을 베니게라 하였음)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왔으며, 또 9절에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고 있고, 여러 곳에 병자들이 많은즉 소문은 빨리 전해졌을 것이요, 병고침을 바라는 사람들과 관심있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온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인데(10절) 이때에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이런 기적의 역사가 오늘날 어떤 사역자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전문적으로 병고침의 능력과 은혜를 전달하기 위하여 “전도 목적이라” 하면서 집회를 계속 하겠지요? 병만 고치면 사역자의 인기도 올라가고 감사헌금 정도는 강조 안 해도 상당히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과거와 현재에도 많이 시행합니다. 소위 은사집회라는 명목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처럼 확실한 기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선전에 비할 때 결과는 희소한 줄 압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큰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그 큰 무리들을 피하셨습니다. 9절을 보시면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게 하신 것입니다. 10절에서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핍근(여유없이 좁게 다가오는 상태)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11~12절을 보시면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님을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면서 엎드렸고,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려 하신 뜻은 마 12:17~21의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나타내신다 하여 들레시지 않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피하셨을까요?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들므로 예수님이 감당하시기에 피곤하셨기 때문이요(예수님도 피곤과 시장함을 느끼셨음, 마 8:24, 21:18, 막 4:38), ② 예수님이 몰려오는 모든 사람의 병을 다 고쳐주실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막 1:44~45에서 설명드렸음). 예수님은 인류의 육체의 병을 다 고쳐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적의 한계는 복음전파와 관련하여 필요한 만큼만 나타내시는 것이 그의 뜻이었습니다.

3. 열 두 제자를 세우심(13~18절)

1) 이 본문은 사도임명에 관한 말씀인데 눅 6:12~16에 나타난 말씀보다 더 자세합니다. 눅 12:13~14을 보시면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신 후 밝으매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신 점”이 특징이고, 15절에서는 셀롯(열심 당원의 뜻)이라 하는 시몬을 말씀하신 것을 본문에는 가나안인(각주:열심 당원) 시몬으로 기록한 것과, 16절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룟유다 아님)라 한 사람이 본문에는 다대오(마 10:3)로 기록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제자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하신 것이 있으니 곧 (산에서 기도하신 다음에) 원하는 자들을 불러 12명을 세우셨고(사도로 임명하신 것, 눅 6:12~13), 사명으로는 “함께 있고 또 보내사 전도하게 하심이라”(14~15절) 하셨으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15절).

2) 이때에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으니, 이 시기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도 함께 받으신 줄 압니다(마 16:18). 그 다음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세우시며 이 두 형제에게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란 뜻)란 이름을 더해 주셨고, 또 안드레(베드로의 형제)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레위)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과 예수님을 판 가룟(lscariot, 예루살렘 남쫄 28㎞쯤) 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적 행사가 끝난 다음에 기록된 것이므로 가룟유다가 저지른 일까지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에는 사도란 용어가 없은즉 제자로 여길 수 있으나 눅 12:13에서는 “사도”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후계자이지만 기독교를 전승시킨 책임은 사도에게 있으므로(엡 2:20, 고전 3:10~11) 사도의 의미는 더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사도 시대에서 사도 후시대로 무엇을 인계하였는지를 유의하셔야 합니다(7분설교 13집 중 “디모데와 교훈” 행 16:1~5 참조).

4. 능력의 역사에 대한 논쟁(20~30절)

) 20~21절은 본문의 고유기록입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전도하시고 제자들을 세우신 후 “집에 들어오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이 없으셨으니…” 예수님의 일정이 그만큼 바쁘셨던 것을 알 수 있고, 또 나가시나 집에 들어오시나 무리들과 병자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의 친속(형제 또는 연고자들, 마 13:55)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러 나왔다” 하였으니, 바울사도도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행 26:25)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이나 귀신을 쫓는 과정에서 미친 사람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6절)의 유언비어로 나타났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2) 그리고 22절에서 “예수님이 바알세불(귀신의 왕 이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하는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 하셨는데, 마 12:22을 보시면 그 당시에 예수님은 “귀신들려 벙어리 되고 눈먼 자를 고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23~27절에서 말씀하신 취지는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은 것이 아닌 증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귀신이 서로 싸우면 그 집이 망할 것인즉 서기관들의 논리는 잘못된 것이고 더 강한 자(성령님)가 약한 자를 어거(결박)하였기 때문에 귀신이 쫓겨난 것임”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3) 28~29절은 마 12:31~32과 같은 내용으로 “사람끼리의 범죄와 훼방은 성령님과 예수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은 동역자이시므로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함 받는 입장에 인도받지 못한즉 사함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한 것”은 곧 예수님과 성령님을 아울러 비난하고 거부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5. 주님의 가족에 대한 정의(31~35절)

이 말씀은 마 12:46~50과 눅 8:19~21에 기록되었고, 절기(의식)설교 62과에 “행복한 가정”, 7분설교 3집 전 19과에 “예수님의 가족”, 7분설교 5집 4과에 “예수님의 가족 개념”, 7분설교 5집 95과에 “행복한 가정”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부분의 말씀은 21절과도 관련이 있는 줄 압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족개념은 혈연관계를 초월하고 또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초월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을 망라하여 가족으로 인정하신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 된 세계의 모든 성도들은 다 한 가족이란 범주에 넣어서 가족처럼 친교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지역, 교파, 계급, 혈색, 또는 국적 등이 다르다 하여 가족처럼 대하지 못하는 경향을 통절하게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거기에 앞서서 진정한 성도로 인정받는 생활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7 과 비유교훈과 풍랑 (막 4:1~41) 목록으로


이 말씀 ① 1~20절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마 13:1~53 중에 포함되어 있고, ② 21~29절은 “특별한 말씀”으로 마 5:15(등불 비유)과 마 7:2(헤아림을 삼감)에도 기록된 바가 있지만 26~29절은 고유기록이라 할 수 있고, ③ 30~32절은 “겨자씨 비유”로 마 13:31~32에도 기록된 것이며, ④ 33~34절은 “비유교훈의 목적”으로 그 취지상의 말씀이 마 13:34에 기록되어 있고, ⑤ 35~41절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로서 마 8:23~27, 눅 8:22~25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다섯 가지 제목에 대하여 취지와 교훈만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피시기를 원하시는 성도님은 제가 기록한 문서를 살피시되 “성경구절별 설교목록”을 찾아보십시오. 마태복음 13장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가 18편이나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1~20절)

1) 1절에서 받는 교훈은 예수님은 예배당도 없이 바닷가나 배 위에서 또는 산에서 형편이 좋을 때 회당에서 가르치셨은즉 장소에 대하여 초월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또 무리들이 잘 모여 준 특징도 있습니다. 또 3, 9, 23절에서 “귀 있는 자가 들으라” 하신 말씀은 성도가 신령한 귀를 갖고 깨닫기도 하여야 하지만 들어야 할 자에게만 깨우치시는 분별도 있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11절에서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여 감추시는 면도 있으셨다”는 사실입니다. 11~12절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2) 그리고 14절에서 “씨를 뿌리는 것은 곧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셨은즉 이 말씀은 인간의 마음에 뿌립니다. 약 1:21에 “마음에 심긴 도”란 말씀이 있고, 딤전 3:9에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갖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딤전 1:5, 벧전 3:16, 21). 본문은 그 마음을 옥토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길가에 떨어지는 씨는 말씀을 충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인즉 말씀이 그 심령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요, 돌짝밭은 씨를 받을 때 소리내며 받지만 깊이 뿌리를 주고 간직하지 못하니 길가에 뿌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며, 가시덤불에 뿌려진 것은 적응력이 없는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덤불 때문에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으로 크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잘 받는 자요 간직하고 지키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에 따라서 격차(30배, 60배, 100배)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꼼꼼히 받아 들이십시오. 일점일획도 거저 넘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믿음의 충실한 씨를 심으십시오. 그래야만 은혜의 결실이 나타납니다.

2. 특별한 말씀(21~29절)

이 부분을 특별한 말씀이라 한 것은 공관복음에 같은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1절의 “등불비유”나, 24절의 “헤아림을 경계하신 말씀”, 그리고 25절의 “있는 자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뺏긴다는 말씀”이 각각 마 5:15, 7:2, 25:29에 기록이 있으나 교훈이 부분적으로 같은 말씀일 뿐 사건을 중복으로 기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28~29절의 “씨의 자람에 대한 말씀”은 고유기록입니다.

1) 21절에서 “등불을 말(가리운 것이 있는 곳)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은 진리를 나타내야 할 것을 교훈하심이고(사람이 들레서는 안 되지만 나타내야 할 진리는 빛처럼 비취어야 한다는 뜻), 22절에서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다”는 뜻은 공동번역에서 “감춘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라고 번역하였으므로 “않고, 없다”는 두 개의 부정적 언사가 합하면 긍정이 되므로 결국 “진리는 감추려 해도 드러난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24절에서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심은 “타인이 자기를 비판하는(헤아리는) 목소리에 유의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타인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좋지 못한 일로 마 7:2에서도 금하신 일인데, 인간이 그 계율을 위반하면 헤아림(비판)을 받은 자가 그 상대자를 더 비판하고 비난하게 되므로 엄히 삼가게 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시장,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정당 간에 또는 후보자 간에 서로 헐뜯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헤아린 자가 더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25절에서 “있는 자(정당하게 행한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남을 헤아리고 잘못 행한 자)는 그 있는 것(유익하고 복된 상태)까지 뺏길 것이라” 하셨으니, 각별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28:29).

3) 30~32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은 마가복음의 고유기록으로 성도의 신앙성숙을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으로 비유하셨고, 또 신앙성숙을 말씀씨앗의 성숙과 결실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되 시간경과(때를 두고 일하심)에 따라 단계적으로 주시는 것과 신앙이 성숙하였을 때(열매가 익은 뜻)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요절로 “신앙생활의 순서”(핵심설교 35과), “신앙의 3단계”(7분설교 1집 전 26과), “믿음생활의 순서”(7분설교 5집 14과), “성장의 은혜”(7분설교 8집 50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정”(7분설교 8집 56과)이란 설교문으로 수록하였습니다.

3. 겨자씨 비유(30~32절)

이 말씀은 마 13:31~32에서 강론하였고, 마태복음의 말씀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마태복음 설교 62과(좋은 씨를 뿌린 천국), 63과(겨자씨 비유), 7분설교 6집 52과(천국의 확장)에 있은즉 참고하십시오(욥 8:7).

4. 비유교훈의 목적(33~34절)

본문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하여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시는 목적으로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마 13:34~35에도 기록되었으나, 마 13:10~16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에 “감추시는 의미”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교훈에는 이해시키는 목적과 감추시는 목적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활짝 열려야 하지만 핍박자들이나 비택자들에게는 알려서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감추시는 것입니다(사 6:9~10, 마 7:6). 마 7:6도 참고하시고 또 예수님이 핍박의 때를 면하시면서 때를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 섭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요 5:13, 7:6).

5.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35~41절)

이 말씀은 마 8:23~27과 눅 8:22~25에서도 강론하였습니다. 또 7분설교 8집 94과(풍랑과 대책)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본문에 기록된 내용의 특징은 35절에서 “그날 저물 때”란 말씀과 36절에서 “예수님이 배의 고물(뒷쪽)에 베게를 베시고 주무신 일”을 특이하게 기록한 점입니다. 예수님이 만유와 자연의 주이시고 자연을 지배하신즉 저희들은 기후와 관련한 일에 대하여 특별한 손해가 있다고 우려될 때는 하나님께 부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모든 인류, 또는 모든 이웃에게 섭리적(징계와 축복) 또는 보편적 의미가 있음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욘 1:4, 8)와 바울사도의 경우(행 37:22~26)를 감안할 때 개인 성도라도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기상관계에 대한 기도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수 10:12, 마 24:20).

 

제 8 과 세 가지 이적 (막 5:1~43) 목록으로


본문에는 “세 가지 이적”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20절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이고, ② 25~34절은 “혈루증을 고쳐주심”이며, ③ 21~24절, 35~43절은 “죽은 소녀를 살리심”입니다.

1.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1~20절)

이 말씀은 마 8:28~34과 눅 8:26~39에서 강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요절로 한 설교문이 일반설교 48과(하는 것과 못하는 것), 7분설교 2집 후 31과(마귀가 못하는 것), 7분설교 8집 7과(세가지 간구와 응답)에 기록되었은즉 참고하십시오.

1) 본문 1절과 눅 8:26은 “거라사”라 하셨고, 마 8:28에서는 “가다라”라고 하셨으니, 혼돈이 되지만 본문에 보시면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셨다” 하셨고, 또 마 8:28에서도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다” 하시므로 한 장소를 지적하시지 않고 갈릴리 바다 동남편 지역인 데가볼리 쪽으로 가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도를 보면 갈릴리 바다 남단에서 4시 방향 10㎞쯤에 “가다라”가 있고, 또 “거라사”는 데가볼리 지역 중앙, 즉 마하나임 동쪽 15㎞쯤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 주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아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장소는 2절에서 “배에서 나오시매” 하신 것을 보면 갈릴리 바다 서남편 데가볼리 지역에 인접한 해변 가까운 곳임을 알 수 있고, 그 지역 25리쯤에 거라사 성읍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2~5절은 귀신 들린 자의 생활특징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란 뜻은 귀신의 본질이 성결하지 않음을 뜻하고,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쇠사슬과 고랑을 깨고 자유롭게 활보할 만큼 힘이 있었으며 무덤과 산에서 늘 소리를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은 귀신 들린 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몇십년 전만해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의 말과 행동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6~8절에서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의 태도를 나타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말하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그에게 접합된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을 정복하실 수 있는 힘이 예수님께만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막 9:29의 말씀을 확인하십시오.

3) 9절에서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물으신즉 “군대라 하면서 무리가 많다” 하였으니, 이것은 군대처럼 행동하는 귀신의 무리가 그 사람의 영을 지배한 상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속에서 나와야 할 압박을 받은즉 깃들일 처소가 필요하였고, 따라서 다른 처소에라도 들어가려한 것이 곧 돼지의 무리를 택한 것입니다. 귀신도 동물성 은신처가 필요하였던 모양입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이 그 요청을 허락하신즉 그 주위에 있던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로 들어가 몰사한 것입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은 물이 자기의 집인줄 알고 들어간 모양입니다. 신비한 일이지요. 마 8:32에서도 “바다”라 하였고, 눅 8:33절에서는 “호수”라 하였으니 이곳은 갈릴리 호수를 뜻하는 것입니다. 14~17절에서는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이 돼지들이 바다로 들어가 몰사됨을 보고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와서 그 사실을 알렸고 동리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러 갔으며 돼지 떼는 없어졌고 귀신 들렸던 자가 온전한 상태로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으며”, 16~17절에서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동리에서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고한즉 그들(동리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경을 떠나주시도록 간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귀신병자가 나은 일에 대하여는 축하할 뜻이 없는 채 또 다른 피해가 두려웠는지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 능력의 주(행 3:15, 히 2:10, 고전 1:24)를 떠나시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더 머물지 않으시고 배에 오르셨으니(18절) 예수님은 주민들이 원치 않는 곳에 계시려 하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18절에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에게서 놓임 받는 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니, 또 다른 귀신의 범접을 두려워 한 것인지, 예수님의 능력을 증언코저 한 것인지 알기 어려우나 그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사명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정상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동행을 허락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네게 큰 일을 행한 것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그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신 것이며, 또 그가 고향에 가서 전도함으로 더 유익이 있음을 아시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20절에서 “그는 자기 고향인 데가볼리 지역에 가서 전도하여 모든 사람으로 기이히 여김을 받았다” 하셨은즉 전도의 좋은 효력이 그를 잘 아는 고향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자신의 사명적 간구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해도 결코 손해되지 않고 더 영광될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혈루증을 고쳐주심(25~34절)

이 사건은 21절에서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을 떠나 배를 타시고 “저편으로 가자” 하셔서 바닷가 다른 지역으로 가셨고, 그곳에서도 큰 무리가 모였는데 그 지역은 거라사 지역의 저편인즉 해변가의 다른 지역이 틀림없으나 가버나움일 것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22~23절을 보시면 “그곳에서 회당장 중 한 사람인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와서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죽게 된 어린 딸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오셔서 손을 얹어주실 것을 간청하므로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실 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고 밀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병고치기 위하여 예수님 앞으로 다가서려고 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혈루증 든 여인이 와서 먼저 자기의 병을 고침받게 된 것인데, 이 여인이 병고침 받은 기록은 마 9:19~22과 눅 8:42~48에도 있습니다.

1) 25~26절에서 “12년간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그 병을 고치지 못한 상태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혈루증은 원문에 “하이마토스(αἵματοs)”인데 이것을 영어로는 Bleeding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병명으로 상상한다면 자궁내막염이나 자궁암같은 이상으로 하혈하는 증세인데, 그 당시에는 확실한 병명의 규명이나 의학적으로 고칠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2) 27~28절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병고침의 능력)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구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29절에서 “이로 인하여 병이 고쳐졌고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곧 스스로 아셨다” 하였으니, 이 표현은 예수님의 능력을 그 여인이 주님의 허락없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아시고 그렇게 하신 것인데 나타난 사실대로 표현하다보니 예수님이 모르시고 능력을 주신 것처럼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믿음으로 접근한 것과 능력을 보내어 고쳐주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루증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병든 몸을 이끌고 무리들 중에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저희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으면 지금도 큰 은혜와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에 강한 신념이 와야합니다.

3) 30~31절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옷에 손댄 자를 물으신 것은 그의 고백을 들으시고자 함이요, 32~39절에서 여자는 예수님을 두렵게 여긴 때문에 떨며 사실대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열쇠는 잠겨진 문도 열 수 있다는 뜻이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시행한 일은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교훈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 여인의 심정과 행동을 깊이 상상해 보십시오.

3. 죽은 소녀를 살리심(21~24절, 35~43절)

1) 21~24절은 앞대지에서 말씀드렸고, 이때에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 그의 집으로 가시는 노상에서 혈루증 있는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는데, 35절을 보시면 “아직 말씀하실 때에(혈루증 고친 여인과의 대화)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은즉 예수님을 괴롭게(오시도록)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36절에서 “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곁에서 들으시고 그 회당장에게 이르시기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만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2) 38절에서 그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훤화는 울며 떠들썩한 것). 39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 아이가 잠깨듯이 깨어날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잔다” 하셨고(요 11:11), 바울사도도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고로 “잔다”고 하셨습니다(살전 4:13). 그런즉 40절에서 “저희가 비웃더라”고 하였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관계는 이만큼 거리가 멀고 서로 대립을 취하게 됩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저희(비웃은 자들)를 다 내 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함께한 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셨으니, 이 말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를 그대로 인용하여 쓴 것입니다. 이런 용어가 마가복음에만 5회 나옵니다(막 7:11, 34, 14:36, 15:34). 이는 “마가가 베드로사도로부터 듣고 아는 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라” 하며, 그 말의 뜻은 Talitha와 Koum의 합성어로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신 뜻이라고 합니다. 이때에 소녀가 살아나는 이적을 본 사람은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뿐이었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던 불신앙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목격 또는 체험할 자격이 없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므로(창 1:3, 눅 1:37) 42절에서 “소녀가 일어나 걸으니 열 두 살된 아이라” 하셨는데, 이때에 죽은 자를 살리셨은즉 “사람들이 크게 놀라더라”고 하셨습니다(눅 7:15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이 있고, 본문의 사건은 눅 8:54에 기록되었으므로 두 번째 부활 이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이 차례대로 기록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눅 1:3). 예수님은 생명의 주이신즉(행 3:15)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과 생명의 수한을 정하시는 일과(행 17:25~26, 행 19:6) 자신의 부활까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43절에서 “왜 이 일을 숨기라”고 경계하셨을까요? 이 사실은 막 1:43~44과 막 3:12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병을 다 고쳐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고, 오직 복음전파와 관련하여 필요한 만큼만 긍휼과 이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 9 과 세례요한의 순교사 (막 6:1~29) 목록으로


본문 ① 1~6절은 “고향에서 있은 일”이고, ② 7~13절은 “12제자를 보내심”이며, ③ 14~29절은 “헤롯의 반응과 요한의 순교사”인데 이 세 제목을 한 제목을 병합할 수가 없어서 대표적 제목으로 “세례요한의 순교사”로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이 많을 듯하여 두 과목으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1. 고향에서 있은 일(1~6절)

1) 1절에서 “예수님은 거기(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린 곳, 5장의 사역과 관계된 곳)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신즉 제자들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거기”란 장소는 막 5:21에서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곳인데, 그 저편이 가다라쪽(갈릴리 바다 동남쪽)에서 저편이므로 서쪽 게네사렛이나 막달라쪽으로 예측되고 또 그곳에서 고향으로 가셨은즉 이 고향은 게네사렛 지역에서 서남방25㎞쯤되며, 그곳에 절벽길(낭떠러지, 눅 4:29)이 많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2 고향은 “가버나움”이지만(마 4:13) 3절에서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다”는 말씀과 눅 4:23을 참고할 때 본 고향인 나사렛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시고 낭떠러지 길로 오시다가 봉변당할 뻔한 기사가 눅 4:16~30에 기록되었으므로 이 기록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2) 2절에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하셨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율법주의 실천을 위한 안식일 행사로 보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시기 때문입니다(롬 10:4). 따라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율법을 배우기도 하는 만큼 그 모임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이 놀랬고, 또 “그 말씀의 지혜와 손으로 이루어지는(안수 사역) 권능이 어찜이뇨” 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처음 듣는 설교요, 권능 역시 처음 체험하는 것인즉 놀라운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3절에서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은 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생활과 가족사항을 잘 알고 있었으니 곧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부친 요셉이 목수이신데, 마 13:55, 여기에서는 예수님도 목수라 하였음)가 아니냐 또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였으니,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아는 것이 왜 배척의 요인이 되었을까요? 이는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여겼거나(막 3:21~22, 요 10:20~21) 또는 시기한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을 경우 한 사람이 유명해지면 격려하기 보다는 비웃고 배척하기 쉬운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심리일 것입니다.

3) 3절에서 “형제”란 뜻은 그들끼리의 형제란 뜻이고 사실은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마 12:46~47, 막 3:32, 눅 8:21). 그런데 저의 생각은 이분들이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분들이 아니고 요셉이 자기의 아버지는 야곱이지만(마 1:16) 헬리의 과부된 며느리에게로 계대장가를 들어 낳은 자녀들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 이유는 눅 4:23절에서 “헬리”가 요셉의 족보상 아버지이기 때문이며, 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모친 마리아를 그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신 것이 그만한 거리감을 두고 산 증거로 예측되기 때문입니다(요 19:26~27). 성령으로 예수님을 출생시킨 마리아에게 어찌 가까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가만히 끊고저 하다가(마 1:19)” 멀리하게 된 줄 압니다. 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의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않음이 없다” 하신 것을 공동번역에서는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라도 자기의 고향, 친척, 집 안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훌륭한 사람이라도 잘 아는 세계에서는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나타내신 뜻입니다. 나라의 장관이라도 가족, 친척, 친구들과 사귈 때는 권위를 세우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다른 지역에서처럼 환영을 안 받으셨지만 예사로 여기신 것입니다.

4) 5절에서 “거기서는(존경과 사모함이 없는 곳)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해지신 것이 아니라 사모하지 않은 세계에서 능력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으시므로 크게 역사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 7:6)는 뜻에 부응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소수의 병인에게는 안수하여 고쳐주셨다” 하신 것은 예수님 곁에 있는 병자에 한하여 은혜를 베푸셨고, 그 고향에서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의심과 배척의 무리들이 있음을 인하여 크게 역사하시지 않고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척하면 떠나십니다. 복음사역자도 배척받는 세계에서는 서로 대적하며 버티려하지 말고 환영하는 세계로 나와야 합니다. 6절에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니…”, 이는 고향의 출신자가 능력자로 임하여 은혜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으니 그 완고한 정신이 지나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겸하신 만큼 가끔 인성의 한계를 드러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이상히 여기신 것”이나 무화과가 없음을 모르신 것이나(막 11:13) 십자가의 고난 직전에 고민하고 슬퍼하신 일(마 26:37) 같은 것입니다. 또 “이에 모든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신 것”은 전도의 사명을 이루신 일이고(막 1:38) 또 전도해야 할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2. 12제자를 보내심(7~13절)

1) 이 말씀은 마 10:5~15과 눅 9:1~6에도 기록되었으나 약간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고, 다른 곳에서는 병고치는 능력, 문둥병자,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도 주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0:8). 이 말씀은 목회가 아닌 전도사역에 대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2) 8~9절에서는 우선 제자 된 자를 쓰셨고 두 사람씩 보내셨으며 지팡이와 신 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않게 하셨으니 지팡이는 맹수방어용이나 험악한 길의 보행상 필수용이고, 신발도 걷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걸어가는데 필요한 것만 지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양식과 돈과 두 벌 옷을 금하신 뜻”은 하나님이 전도자들에게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섭리적으로 공급해 주실 것을 약속 하신 뜻이라 할 것입니다.

3) 그래서 10절을 보시면 “뉘 집에 들어가거든(영접하는 집이 있음을 뜻함)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서 유하고”, 또 11절에서 “영접이 없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들이 완악하여 복음을 받지 않은 사실을 확실히 하는 뜻으로 발에 먼지를 떨어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12~13절에 제자들이 말씀대로 나가 전도하면서 회개할 것을 외쳤고 귀신도 쫓아냈으며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감람유를 붓거나 안수를 의미함, 약 5:14) 병을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막 9:18~19을 보시면 귀신을 쫓을 때 명령만으로는 나가지 않아서 쫓지 못한 사례가 있는데,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그런 류가 나갈 수 없다”(막 9:29) 하시므로 예수님이 주신 초자연적 능력이 특별한 기도의 정성 없이는 역사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헤롯의 반응과 요한의 순교사(14~29절)

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셨을 때 세례요한은 이미 옥에 갇혀있었고, 그 무렵부터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전도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마 11:1~2). 예수님이 전도사역을 하실 때 세례요한은 순교하였고(마 14:3~12) 이어서 예수님이 전도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 14~19절은 눅 9:7~9의 말씀과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에 대한 주위의 사람들과 헤롯왕의 반응입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에 대한 것을 듣고 말하기를 “자신이 죽인 세례요한의 영이 그(예수님) 속에서 운동하거나 그가 다시 살아났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추측이 난무하는 것은 무지한 입장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 세례요한의 순교역사를 기록한 곳은 본문과 마 14:3~12 뿐입니다. 마 14:5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였으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겨 두려워하였다” 하였고, 본문 19~20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 하였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보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려 하였고 그의 말을 들을 때 큰 번민을 하면서도 달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의로운 말을 하였기 때문에 헤롯은 어느 정도 거스림을 받았지만 양심적으로 이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하들 앞에서 딸에게 맹세한 것이 빌미가 되어 왕의 권위 보존상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헤롯은 악한 자이고 요한은 순교자의 영광에 들어간 것입니다. 자세한 뜻은 마태복음 14:3~12에서 강론하였고, 세례요한의 위대한 점에 대한 설교가 많이 있습니다(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7분설교 1집 전 36과, 요한의 사명적 자세, 7분설교 8집 73과, 세례요한의 죽음, 7분설교 7집 79과, 가장 큰 사람, 핵심설교 102과 등).

 

제 10 과 두 가지 큰 이적 (막 6:30~5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4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30~34절은 “근면과 휴식”이고, ② 35~46절은 “5병 2어의 이적”이며, ③ 47~52절은 “바다 위를 걸으심”이요, ④ 53~56절은 “게네사렛에서의 사역”입니다. 이 내용 전체의 제목을 함축하여 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큰 이적”으로 정하였습니다. 양식의 이적과 바다를 걸으신 이적이 크기 때문입니다.

1. 근면과 휴식(30~34절)

1) 30절을 보시면 “사도들이 (전도하고 돌아와서)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하였으니 저희들도 무엇을 어떻게 한 일에 대하여 기도로 하나님께 소상히 고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보고를 잘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께 자기에 대한 모든 것을 기도로 아뢰셔야 합니다.

2) 3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잠깐 휴식하라” 하셨으니, 이 휴식은 다음 사역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7분설교 6집 96과에 “휴식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잡수실 겨를이 없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퍽 바쁘게 사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할 일이 밀려있고 바쁘게 일하십니까? 바쁜 일이 없으면 반드시 생산성 있는 일을 만들어 목표를 정하고 매진하십시오.

3) 32절에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으니” 이곳은 벳새다(가버나움 동쪽 5㎞쯤, 갈릴리 해변 북쪽) 쪽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합니다(45절). 33~34절에서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고 또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신 후에 5병 2어의 이적을 베푸시고 벳새다로 가게 하셨은즉”, 혹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중간쯤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낱낱이 고하는 일(30절), 잠깐 쉬게 하신 일(31절),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사신 일(31절),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르치신 일(34절)”에서 교훈하시는 바가 큰 줄 압니다.

2. 5병 2어의 이적(35~46절)

이 말씀이 마 114:13~23과 눅 9:10~17에도 기록되었으나 본문보다는 간단하고 요 6:1~14에서는 같은 내용을 쓰시면서 특별히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말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1) 35~36절에서 “제자들은 그곳 빈들에서 때가 저물어 오자 (무리들의 저녁식사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어 각자 해결(사 먹도록)하도록 명하시라” 한즉, 3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으니, 이 뜻이 제자들에게 대중식사 해결의 책임을 일깨우신 것인지 아니면 이적의 근거로 쓰시기 위하여 갖고 있는 음식을 가져오라는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동리에 가서 사 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다시 여쭙기를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하였는데, 마 14:16과 눅 9:13에 보시면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은즉 “무리 중 갖고 있는 음식을 가져오라”는 뜻인 줄 압니다. 요 6:7에서는 이 기회에 “빌립을 시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빌립이 “200 데나리온어치(200명의 하루 인건비 상당의 음식)를 사와도 부족할 것 같다” 하였고, 또 그 지역에서 짧은 시간에 그만한 음식을 살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부터 “어떻게 하실 것(이적으로 먹이실 일)”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요 6:6).

2) 이 본문에서 유의하실 것은 ① 제자들이 대중식사에 대하여 방법을 연구하였으나 그 지역이 지방인만큼 가능성이 없는 의견을 말한 것뿐이고, ② 예수님은 5병 2어(양식의 근거를 이용하심)를 통하여 이적으로 해결하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으며, ③ 따라서 남은 것으로 축복하시기 위하여 그 있는 양식을 회수해 오라 하셨고, ④ 질서있게 앉아서 은혜의 양식을 먹게 하셨으며, ⑤ 축사를 통하여 창조적 이적을 행하셨고, ⑥ 다 충족하게 하셨으며, ⑦ 남은 것을 거두어 또 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먹은 사람의 수를 말씀할 때 본문 44절에서는 “남자가 5,000명이라” 하였고,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이 먹었다” 하였으며, 눅 9:14에서는 “남자가 한 5,000명이라” 하였고, 요 6:10에서는 “수효가 5,000쯤이라” 하므로 기록한 저자의 표현이 다 특이함을 나타냈습니다. 이 사건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마 14:13~21(5병 2어)을 본문으로 하여 마태복음 설교 69과에, 또 7분설교 8집 5과(양식 주시는 은혜)에도 기록되었습니다.

3) 45~46절은 보시면 예수님이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31절) 분주하게 행하신 일을 나타내셨으니 “곧 5,000명과 거기에 딸린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작별인사를 나누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독촉하여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고, 그 무리들을 작별하신 후 “자신은 산으로(조용한 곳) 기도하러 가셔서 저물 때까지 기도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물 위로 가실 수 있으므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그 시간에 기도를 하신 줄 압니다. 휴식이 끝났은즉(31절) 자신과 제자들이 다 바쁘게 활동하신 것입니다.

3. 바다 위를 걸으심(47~52절)

1) 이 기사가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 14:24~26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을 따라 물 위로 걷다가 빠지게 된 사실”(28~30절)을 특기하였고, 요한복음 6:16~21에서는 “가버나움 쪽으로 가신 것과 10여리쯤 갔을 때에 예수님이 오신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자 가려던 곳에 도착한 사실”을 특기하였습니다. 마 14:22~33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란 제목의 말씀이 7분설교 5집 6과에 있은즉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본문에서는 “배가 바다 가운데(10여리쯤, 요 6:19) 있을 때 바람이 거슬러 노를 저으며 괴로움을 당한 사실, 4경쯤에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 오셔서 지나가려 하신 사실, 유령인 줄 알고 놀랐으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친 사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금 전에 떡 먹던 이적을 잊고 깨닫지 못할 만큼 마음이 둔한 것을 지적하신 사실”을 특기한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적은 바다 위로 걸으신 것 외에 시간과 거리를 단축한 이적으로 바다 가운데까지 오셔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되 보통 사람처럼 걸으셨다면 좇아오실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거리에 상관없이 나타나신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치 행 8:39~40에서 “빌립이 광야에서 아소도에 나타난 것처럼”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2절에서 “저희가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다” 하신 것은 예수님을 전능자로 체험하였으면서도 풍랑을 두려워한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때의 일을 우리의 체험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늘 함께 계신즉 두려워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 게네사렛에서의 사역(53~56절)

이 말씀은 마 14:34~36에도 기록되었으나 본문에서는 “병자를 침상채 데리고 와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그 병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댈 수 있도록 간구하여 다 성함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특수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후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서 있은 일입니다.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하신 곳은(34절) 벳새다의 동쪽으로 예측되고 그곳에서 벳새다로 오셔서 무리를 가버나움으로 먼저 가도록 작별하시고(45절, 요 6:17)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46절) 바다 위로 뒤따라가신 것입니다.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변 동서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육로보다 배를 이용함이 편리한데 성경은 “그 10리쯤 된 곳에서 풍랑이 있었고 또 예수님이 이 배에 오르시자 가려던 땅에 도착하였다”고 하셨습니다(요 6:16~21).

1) 본문 53절에서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른 것은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바다의 서쪽으로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게네사렛을 “긴네렛”이라고 하였습니다(수 13:27). 그 후 신약시대에는 “게네사렛”이라 하였으니(눅 5:1) 이것은 음이 와전된 것이고 게네사렛 지역이 인접한 호수이므로 그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이 넓은 호수는 남북이 80㎞쯤, 동서가 50㎞쯤 되는 둥글고 넓은 호수인지라 갈릴리(둥글다의 뜻) 호수(마 15:29, 막 7:31, 눅 8:33) 또는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라고도 하였습니다(요 6:1). 여기의 디베랴 바다는 요 21:1에 나타난 말씀으로 주후 20년경에 게네사렛 지역에 로마황제 디베료 가이사(눅 3:1)를 기념하는 도시를 건설한 때문에 그 이름을 붙여 디베랴 바다로 명칭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호수는 갈릴리 지역 동쪽에 있은즉 갈릴리 바다, 또는 호수로, 게네사렛과 디베료의 지역, 또는 도성을 연계한 이름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곳에 가셨을 때도 여러 곳에서 소문을 듣고 병자가 몰려 온 것을 상상할 수 있고, 그 병자들을 마을이나 도시나 촌의 시장에 있게 한 후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옆으로 지나가시도록 간구하여 마치 혈루증 든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나음을 받은 것처럼(막 5:25~34) 그렇게 하여 고침 받은 자들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행 19:12에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에게 얹어 병을 떠나게 하신 역사처럼 병고침의 성황을 이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사역이라 할 것입니다.

 

제 11 과 잘못된 유전 (막 7:1~23) 목록으로


이 부분의 말씀이 마 15:1~20에 기록되었고, 마태복음의 말씀이 더 자세합니다. 그 이유는 마 15:12~15 부분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질문한 사실”과 예수님이 대답하실 때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은 것은 다 뽑힌다”는 말씀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말씀은 거의 같습니다. 또 본문을 근거로한 설교가 일반설교 245과(유전을 배격하자)와 핵심설교 124과(헛된 경배)에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1~4절에서 “유전을 지키는 유대인들”이고, ② 5~16절은 “사람의 유전과 관련된 교훈”이며, ③ 17~23절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체의 제목을 “잘못된 유전”으로 정하였습니다.

1. 유전을 지키는 유대인들(1~4절)

1) 1~2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처음) 오신 사실”과 “예수님이 계신 곳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 사람이 함께 모인 사실”과 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을 씻지 않은채 떡을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말씀이 처음 기록되었는데 이에 대한 교훈을 7분설교 8집 100과에서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바리새인에 대한 내용은 어느 설교문이나 강해문에서 설명드린 줄 알지만 소재파악을 할 수 없으므로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바리새인이란 율법주의적 종교단체로서 헬라말 파리사이오스(φαρισαίοs)요, 그 뜻은 “분리된 자들”이라 하며 이 말의 뜻이 히브리어로는 “페루쉼”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가 구약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이 단체가 주전 150년경부터 주후 70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표방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개혁을 시도한 단체로 시작하였는데, 결국은 전통과 인본주의에 빠졌고 따라서 예수님과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단체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율법의 적으로 생각하여 죽이는데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우선 그들의 범죄 사건들이 마 23:1~36에 기록되었고, 부활과 천사를 믿는 공통적 사실도 있으며(행 23:6~9), 율법을 잘 지키려 한 점(빌 3:5)이 있지만 예수님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마 12:1~8, 22:34~40, 막 2:16, 23~27, 7:5)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역할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마 27:62, 요 7:32, 18:3).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체제 안에서 사무를 담당한 자들입니다. 2절에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은채 떡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2) 3절에서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백성의 원로)들의 유전(오래 지켜온 관습)을 지켜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이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위생적 관념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손을 씻었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적 습관이 된 것입니다. 4절에서는 “또 시장(밖의 생활)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으면(여기의 ‘뿌린다’는 원문은 ‘밥티조’로서 ‘뿌린다, 씻는다, 잠근다, 찍는다, 바른다’ 등으로 번역하는 용어임) 먹지 않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지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위생의 철저한 습관을 나타낸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계명처럼 또는 종교적 규례처럼 강조하고 시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을 지적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2. 사람의 유전과 관련된 교훈(5~16절)

1) 5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왜 당신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으므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장로들의 유전”은 7~8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계명이고 사람의 유전인즉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6~7절에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시면서 그들의 유전 지키는 잘못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의 하는 일이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 29:13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입술로 존경하는 뜻”은 사람들 앞에서 말로만 종교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찬송, 기도, 설교, 기독교에 대한 자랑 같은 것이요, 또 “마음이 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유의하지 않거나 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 중심으로만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 7~8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사랑)은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사람의 유전을 지키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시므로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이지요(마 22:37~40).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시행한 손 씻는 일은 위생적 의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만든 위생적 의식이 하나님의 계명만 하겠습니까? 요즈음 성경은 적게 연구하고 교회의 헌법을 더 따지는 경우도 많은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성경대로 못 사는 것은 탓하지 않고, 헌법을 어기면 특권을 제하고 벌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줄 압니다.

3) 9절에서는 “너희가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폐한다” 하시고, 10~13절에서 그 실예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실예는 이렇습니다. 출 20:12, 신 5:16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 또 출 21:17과 레 20:9에서는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말하기를 부모에게 드려 유익(효도)하게 할 것을 (부모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면 다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 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또 그와 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히브리말로 “제물”이란 뜻인데 양을 잡아서 부모를 심기려 하다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면 더 잘한 일로 인정하여 부모는 섬김을 못받게 하고 계명을 폐하여지게 한 것입니다.

4) 1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다시 불러 “듣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5~16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음식)은 그 사람(인격적으로)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자신과 그 이웃)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다음 대지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3. 마음에서 나오는 악(17~23절)

1) 17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으니 이는 예루살렘의 어떤 거처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15~16절 말씀)의 내용을 물은즉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도 깨달음이 없느냐 밖에서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19절에서) 이는 (식물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서 뒤(항문)로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신 것은 “누구나 더러운 식물은 스스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20~23절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니 곧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리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인데 이 모든 것이 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와서 사람(이웃)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이고 가식적인 정결에 마음을 썼고, 그런 목적을 위하여 유전을 실천하였지만 예수님은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면을 중요시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람은 더러운 음식을 잘못 먹어서 악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을 먹는 위생적 의식은 영적 죄악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즉 성도는 악한 정신에서 나오는 악을 극히 경계하셔야 하고, 또 사람의 유전을 앞세워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제도와 헌법이 사랑의 법을 해치는 경우가 있음을 아셔서 많이 연구하시고 개혁하셔야 할 것입니다. 1960년대의 어느 주일 오전 10시경에 외국의 선교사가 부산항에 도착하는데 그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신 박윤선 목사님이 그 선교사를 마중 나간 것이 성수주일의 위반이라 하여 교장직을 사직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수주일의 엄격한 규례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사랑의 법을 해쳤다면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례(엄격한 것이 사랑을 해치는 것)가 아직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 12 과 두 병자를 고치심 (막 7:24~37) 목록으로


이 본문 ① 24~30절은 “여인의 딸의 귀신병을 고치심”이고, ② 31~37절은 “농아병을 고치심”입니다. 두 사건을 합하여 “두 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여인의 딸의 귀신병을 고치심(24~30절)

이 부분의 말씀은 마 15:21~28에 더 자세히 기록되었고, 본문의 특징으로는 귀신병 든 딸을 둔 여인이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란 신분을 자세히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마 15:28에서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것 때문에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신앙”(마태복음 설교 70과), “부스러기의 은혜”(7분설교 9집 38과), “ 부스러기의 교훈”(7분설교 10집 17과), “칭찬받을 신앙”(7분설교 10집 25과)의 제목들입니다.

1) 24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두로”로 가셨으니, 두로는 갈멜산 북쪽 해변으로 55㎞쯤에 있은즉 예루살렘에서는 북쪽 직선으로 175㎞쯤 됩니다. 그곳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자기를 나타내려 하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나타내려 하시거나 병고쳐 주시는 일을 전문으로 하려 하시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런데 25절에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곧 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그만큼 민감하고 민첩한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민감하고 민첩하셔야 합니다. 26절에서 그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으로서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헬라인이란 “헬라에서 왔다”는 뜻이고 “수로보니게”는 수리아 나라가 베니게(페니키아, 두로 지역)를 점령, 합병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역시 두로와 시돈이 있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마 15:22에서 “그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 한 것은 그 지역이 다 선민들이 사는 가나안으로 통하였기 때문입니다.

3) 27~28절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이 이방 여인임을 아시고 비유적인 말씀으로 거절하셨지만 그 여인은 겸손과 믿음과 인내와 간구를 겸하여 간청하므로 오히려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29절을 보시면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 말은 28절의 “주여 옳소이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말로서 예수님의 말씀(그 여인을 개로 비유하신 것)을 신뢰한 것과, “자신이 개 같은 입장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한다는 말”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에게도 큰 겸손과 부스러기 은혜를 귀히 아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2. 농아병을 고치심(31~37절)

1) 31절에서 “예수님은 두로 지경을 떠나 (두로의 북쪽 40㎞쯤인) 시돈으로 가셨다가 다시 갈릴리 바다 남쪽인 데가볼리(지도로 확인하십시오)를 경유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고 하였습니다. 32절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는데”, 33~35절에서 예수님이 특수한 방법을 쓰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 15:29~31에서는 귀먹고 벙어리된 자를 포함한 여러 병자를 고쳐주신 것으로 일괄적 표현을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그 농아병자 고친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시행하신 구체적인 방법은 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무리를 떠나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릴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왕하 4:33). 이것은 믿음없는 자들의 훼방을 피하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만 주시기 위한 뜻입니다(출 33:19). ②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으니, 이는 귀와 혀에 안수 하신 것입니다. 침을 뱉으신 것은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혀를 접촉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안수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안수는 능력 전달의 절대, 또는 필수적 방식은 아닙니다. 따라서 안수나 침을 바르신 것은 환자로 하여금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려는 자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대로 낫게 하시는 것 보다는 과정을 보고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이지요. ③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이 탄식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감정의 표현임)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열리라는 뜻의 아람어) 하셨으니”, 이것은 말씀으로 능력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능력을 나타내셨고 믿음을 갖게 하는 시늉을 하셨으며, 또 말씀으로 능력을 전달하신 것입니다(시 107:20). 이리하여 35절에서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경색된 상태)이 풀려 말이 분명해지므로 치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주이시고 또 능력자이십니다.

3) 36~37절에서 “경계하여 이르지 말라” 하셨으나 경계하셨어도 그는 말을 하게 되었은즉 널리 전파하였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실을 알고) 심히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나타내신 후, 여러 차례 그 사실을 자랑처럼 나타내지 않도록 명하셨습니다(24절, 막 1:43, 5:43, 요 7:6~8, 고전 13:4).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저 하시는 대로 모든 병이나 죽음까지도 다 해결해 주셨으니, 이는 그 개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뜻도 있지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이런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마 11:4~5, 히 2:3~4).

4) 오늘의 성도님들은 이상과 같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대신 신령한 은혜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신령한 문은 마음의 문, 들음의 문, 보는 문, 말하는 문입니다. ① 심령이 가난해지고(마 5:3),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며(눅 19:2), 통회하는 마음이 생기면(시 51:17) 마음 문이 열리는 것이요, ② 들음의 문은 성령님께서 진리를 청종하게 하시고(행 16:14), 귀를 깨우쳐 주시면(사 50:4, 렘 6:10, 행 7:51) 말씀을 잘 듣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③ 보는 문은 신령한 은혜를 분별할 줄 아는 지식입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그 지식이 없을 때 부요한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벌거벗은 수치를 알지 못하니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였습니다(계 3:18). 바울사도는 엡 1:18에서 “저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④ 말하는 문입니다. 입이 열려야 감사의 말이 나오고 찬송과 기도와 전도가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기도, 전도, 찬송, 덕담 잘 하는 것도 하나님이 입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민 22:28, 렘 1:9). “에바다”의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제 13 과 7병 2어와 누룩 (막 8:1~21) 목록으로


본문 ① 1~10절은 “7병 2어의 이적”이고, ② 11~12절은 “표적에 대한 말씀”이며, ③ 13~21절은 “두 경계의 대상”입니다. 이 두 경계의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인데 이들을 “누룩”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7병 2어와 누룩”으로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7병 2어의 이적(1~10절)

이 부분의 말씀은 과목 뒤에 첨부된 “7병 2어의 은혜”란 제목의 설교문으로 강론을 대신합니다. 다만 이 이적을 행하신 장소와 10절에서 “달마누아(마 15:39에는 마가단) 지방으로 가셨다” 하신 장소를 살펴보시는 일입니다. 막 7:31~37을 보시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 농아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고, 마 15:29에서도 같은 장소를 말씀하신 만큼 이 사건의 장소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어느 지역으로 예측할 수 있고, 10절에서 “다시 배에 올라 달마누아 지방으로 가셨다” 하셨는데, 마 16:13에서 그 다음 지역을 말씀한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갈릴리 바다 북변에서 북쪽으로 40㎞쯤) 지역이므로 “달마누아” 지역은 그 주위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리고 “달마누아”를 “마가단”이라 한 사실에 대하여는 같은 방향에 여러 지역이 있으므로 이것을 마태와 마가가 각각 다르게 나타낸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는 마치 도로의 표지판을 볼 때 대전이나 대구가 같은 부산행에 속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표적에 대한 말씀(11~12절)

1) 1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따지며 비난하는 뜻)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이 7병 2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다면 힐난하거나 시험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능력을 지켜본 사람이라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말만 듣고 체험을 못하였은즉 의심을 풀어보려고 “우리 보는데서 다시 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힐난하거나 불신하면서 표적을 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은 12절에서 그들의 완악에 대하여 “마음으로 깊이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하셨으니, 이는 죄많고 음난한 세대(38절)는 표적을 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불신앙의 악한 세계)에게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이미 정죄된 자들이었고(롬 14:23), 또 표적을 보아도 믿지 않을 자들이므로(눅 16:29~31)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시지 않는 원리를 적용하신 것입니다(마 7:6). 이 부분의 말씀은 마가복음의 특수한 기록입니다.

3. 두 경계의 대상(13~21절)

1)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저희(바리새인들, 11절)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벳새다, 22절)으로 가셨는데”, 14절에서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고 배에는 떡 한개 가진 자 밖에 없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제자들이나 따르는 자들이 장시간 예수님께 이끌릴 것을 예상치 않은 방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은 “떡을 얻어먹으려고 따르는 자들도 있다”(요 6: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의 양식을 받아먹었을지라도 기적은 항상 주시는 것이 아닌 만큼 반드시 자기 먹을 것을 자신이 준비하는 정신과 경성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때에 예수님은 그 한 개의 떡이 있는 것을 아시고도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떡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것이 곧 15절에서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삼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누룩은 불순한 세력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불순한 것은 신앙적으로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거니와 그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 13:33을 본문으로 한 “누룩 비유 교훈”의 말씀이 마태복음 설교 64과에 수록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하여 공부하시고 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16~1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떡이 없음을 염려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을 염려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아직도 깨닫지 못하며 마음이 둔하냐?” 하셨고, 또 18절에서는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치 못하느냐?” 하셨으니, 이 말씀이 제자들의 어떤 무지를 일깨우시는 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살펴보시면 예수님의 이 지적과 책망은 “제자들이 떡이 없음에 대한 염려에 관한 것(16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21절에서 “5병 2어와 7병 2어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성도나 제자들이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은 자기의 자립과 책임정신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먹을 것을 인하여 염려하느냐?” 하신 것은 제자들이 양식 이적을 체험하였고, 또 주님을 직접 모신 중에서도 염려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반 전도자들에게도 주신 말씀(막 6:7~10)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으면 풍랑이 일어났어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막 4:37~41) 전도자의 입장에서도 의식주 문제 같은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7병 2어의 은혜 (막 8:1~10) 목록으로


우선 이 본문을 읽으신 성도님들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도 기록되었다는 것을 떠올리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대로 이 말씀은 마 15:32~38에도 기록되었지만 거기에는 예수님이 무리들을 상대로 “특별한 인정을 베푸셨다”는 말씀은 없고 먹은 사람의 수가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라”고 하신 것이고, 또 비슷한 사건의 기사는 5병 2어의 기적 사건으로 이 사건보다 먼저 시행하신 것인데, 그것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된 것입니다(마 14:19, 막 6:41, 눅 9:16, 요 6:10). 그래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음식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는데 대하여 두 번째의 말씀을 접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접할 때 저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이 선민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과 또 하나님이 엘리야를 까마귀로 음식을 전달케 하여 먹게 하신 것이나(왕상 17:1~6) 엘리사가 기름으로 빚을 갚아주고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인 사건(왕하 4:1~7, 42~44),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요 2:7)까지 생각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없는 것을 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신 일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롬 4:17을 보시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4,000년 전의 사람 아브라함도 그렇게 믿었고, 2,000년 전의 사람 바울사도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이 본문을 읽고 믿으셔야 할 것이 많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창조자가 맞구나”하는 것과, 또 “예수님은 양식을 만들어 주실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하지 말라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신 말씀(마 6:25~26)을 생각하면 “아무리 경제적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이 먹을 것은 주시겠지” 하는 안도감을 갖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라서 마가가 기록한 본문에는 특별한 내용이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읽으시면서 활동사진 같은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장소는 갈릴리 호수 주변인데(막 7:31) 마 15:33에서 “광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떡을 먹은 사람이 “여자, 아이 외에 4,000명”이니까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불쌍한 자식이 있고, 덜 불쌍한 자식이 있습니다. 성도가 부모 앞에서는 불쌍하지 않은 입장에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불쌍히 여김을 받도록 낮아져야 하고 또 그런 형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은혜를 받으려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이 왜 불쌍히 여김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3일을 굶으면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다라 다닌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이라” 하신 것을 보면 무리들이 장시간 굶고 따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기 집을 떠나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멀리 광야로 왔는데, 처음에는 잠깐 따르다가 귀가하려고 하였겠지요. 그런데 또 끌리고 또 끌려 3일까지 굶고 따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첫째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따랐겠지요. 또 다음에는 병 고침 받으려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 6:6을 보시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따른 자들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은혜가 다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3일씩이나 굶으면서 광야에서 고생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실 때 “그들이 3일을 굶은 것과 그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있는 것과 허기진 상태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자가 있을 것”까지 아시고 처방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셨는데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하여 일곱 개의 떡을 거두어 그것을 축사하시므로 떼어주게 하셨고, 또 그 다음에 작은 생선도 같은 방식으로 시행하여 큰 무리를 다 먹게 하신 것입니다. 떡 일곱 개를 거둔 것은 곧 작은 것으로 봉사한 뜻이고 예수님이 축사하신 것은 복을 주신 것이며 또 그것을 나누어 준 것도 역시 봉사의 손길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이 먹고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저희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응용하셔야 합니까? 우선 예수님을 창조자, 능력자, 해결자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희들은 3일 굶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을 받드는지를 살피셔야 하겠지요. 저희들이 풍족하기 때문에 3일 굶을 환경이 안될 때는 이 말씀을 가지고 굶어죽는 백성들에게 가서 가르칠 사명을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3일 굶은 사람들 앞에 가면 꼭 이런 이적을 베푸실까요? 이와 꼭 같은 이적을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겠지만 이와 같은 이적이 아니라도 차선책의 은혜는 반드시 주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 차선책의 이적은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그와 꼭 같은 이적을 안 나타내실 수도 있지요. 그러나 7병 2어 같은 작은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날 때는 얼마든지 굶는 자에게 양식을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차선책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가난한 중에서 적은 것으로 봉사하였는데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도록 복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도 합당한 것입니다(요 6:3~15, 5병 2어의 이적, 7분설교 12집 35과 참조).

 

제 14 과 소경을 눈뜨게 하심 (막 8:22~38) 목록으로


본문은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22~26절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인데 이 말씀이 마가복음의 고유기록입니다(다른 복음서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없음). 그래서 대표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② 27~30절은 “신앙고백의 확인”이요, ③ 31~38절은 “부활의 예언과 사명교육”입니다.

1.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22~26절)

예수님이 소경을 보게 하신 일은 이 말씀이 네 번째이고(막 3:22, 7:35, 본문, 마 9:23), 다음에도 또 한 번(막 10:52) 나타납니다. 본문 기사의 특징은 “상징적 처방법”과 “곧 일어섰다”는 말씀에 비할 때(행 3:7~8) 서서히 시행하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1) 22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가버나움 동쪽 5㎞쯤 해변 마을)에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 손대시기를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손을 대시는 의미는 환자를 쓰다듬으시면서 고쳐주신 것인데 이런데서 안수의 관행이 시작된 줄 압니다(막 6:5, 7:32, 10:16). 이 안수하는 의식은 나중에 은혜를 전달하는 상징적 의식이 되었고(행 8:17~18), 또 임직할 때도 은혜를 전달하는 의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행 6:6, 13:3, 딤전 4:14, 5:22).

2) 23~26절은 예수님이 소경으로 하여금 밝히 보게 하시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① 소경이 어떤 방법으로 왔든지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와서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뜻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의미도 있지만 인류의 병을 다 고쳐주실 목적으로 활동하시지 않으신 것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모여드는 장소를 피하신 것인즉 은혜를 감추시고 은혜를 베푸실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능력을 알리기도 하셨지만(마 11:5) 나중에는 그 능력을 앞세워 병고침을 선전하는 식으로 이용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여 고치셨는데”, 요 9:6을 보시면 에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실 때에도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9:1~11 강론 참조). 여기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것”은 의료방법이 아니고 위안을 주시는 방법이요, 능력자이신 예수님이 능력을 전달하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소경은 예수님이 만져주실 때 “자기의 눈을 뜨게 된다”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④ 단계적으로 서서히 고쳐주신 것입니다. 처음에 “무엇이 보이느냐?” 하셨고,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 같다” 하였으니, 이것은 흐리게 보인 것을 뜻하지요. 그 다음에 또 눈에 안수를 하시고(처음에는 그에게 안수하심, 23절) 보게 하신즉 “밝히 보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적으로 효력을 나타내시되 점차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은 시간에 연속된 것이기 때문에 신속한 이적의 역사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30절에서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그 뜻이 26절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이런 이적을 주시는가? 하는 것인데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는 눈 뜬 소경을 아직 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죽었다가 산 자를 본 일도 없습니다. 비상한 기적의 역사는 기독교의 기초를 수립하던 시대에 주셨는데(막 16:17~18) 성령으로 확증하신 다음에는(히 2:3~4) 나타내 주시지 않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뜻은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부정하는 뜻은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과학의 방법으로 더 많은 병을 고쳐주십니다. 따라서 이적은 최후에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기대할 일입니다.

2. 신앙고백의 확인(27~30절)

이 말씀은 눅 9:22~27과 마 16:13~20에서 강론되었고, 또 마 16:13~20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9편이나 있습니다(성구별 목록집 참조). 성도가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30절에서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핍박을 피하는 의미도 있고(마 10“23, 요 7:1~9), 또 진리의 보화를 주실 자에게만 알리시기 위하여 감추시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마 13:11~15, 44).

3. 부활의 예언과 사명교육(31~38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사명자의 각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고난은 말씀하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은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거의 돌아가실 때가 임박하였을 때 마 20:19, 23:34, 26: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과 상통하는 내용이 마 16:21~28과 눅 9:22~27에도 기록되었는데, 그 기록의 특징을 보면 마 16:21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 당하실 것을 비로소 말씀사셨다” 하셨고, 또 23절에서는 베드로의 간함(높은 사람에게 계획을 변동하도록 권하는 것, 이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였음)이 있었을 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눅 9:22~27 중에서는 베드로의 간함과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부분의 말씀은 없고, 23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날마다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특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관복음의 말씀과 대조할 때 본문에는 38절의 “음난한 세대에서”란 말씀 외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할 것입니다. 본문과 뜻이 같은 마 16:21~28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7편이나 있습니다(성경구절별 목록 참조). 따라서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1) 32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고난과 부활에 대한 것)을 드러내 놓고(마 16:21, 비로소) 말씀하셨으니”, 이는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 오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굳게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으니”, 이는 베드로가 주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 생각만 앞세운 큰 실수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행사가 다 진리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고후 13:8).

2) 그리하여 33절에서 예수님은 진리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그가 진리를 거스리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인정에 얽매인 생각)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일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성도의 일을 생각해 주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마 6:6, 31~34에 나타난 말씀입니다.

3) 34~35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이는 일반 평신도도 해당되지만 특별히 헌신하는 사역자를 상대로 하신 말씀임)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신의 주권이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뜻) 자기의 십자가(도덕적, 사회적 책임)를 지고(스스로 책임지며) 좇을 것이라” 하셨고, 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저 하면(예수님의 뜻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더 귀히 여기는 것) 잃을 것이요(주님이 권고하시지 않으면 잃게 됨) 누구든지 나(주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순교의 뜻)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순교하여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헌신할 때 하나님이 거기에 합당한 은혜로 권고하신다는 뜻입니다(마 19:28~29).

4) 36~37절은 “한 생명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권속인 만큼(창 1:26, 롬 8:29, 엡 2:19) 한 사람이라도 다른 모든 생명들 보다 귀하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생명은 더욱 그러함을 아셔야 합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뿐이므로 최초에 하나님은 아담과만 친교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도 생기고 인류가 생긴 것입니다. 38절에서 “누구든지 이 음난하고 죄 많은 세대(본문에만 기록된 말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눅 9:26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은 믿기는 하나 뜨겁게 또는 사랑스럽게 실천하지 못함을 뜻하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워하신다는 뜻”은 주님과의 친교적 관계가 역시 거기에 준한다는 뜻입니다. 월드컵 행사에 열광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과 그 말씀에 대하여 뜨거워져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하나님 나라의 계시 (막 9:1~29) 목록으로


이 말씀은 마 17:1~21과 눅 9:28~43에도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본문 강론을 하였으므로 몇 가지 말씀만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① 1~13절은 “하나님 나라의 계시”이고, ② 14~29절은 “귀신을 쫓지 못한 사건”인데, 대표제목으로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택하였고, 두 과목으로 나누어 9장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계시(1~13절)

1) 1절 말씀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앞장 끝절(마 16:28, 눅 9:27)에 기록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연속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여기 섰는 사람 중(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받으실 때 있었던 제자들)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 대상은 제자들 중 몇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 2절)이요, 시기는 죽기 전이며 방법은 권능으로 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고는 6일 후에 성취되었습니다(2절). 여기에서 계시의 주관자는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고, 이 사실은 마 11:25~15과 요 16:14~15과 계 21:6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를 모든 이에게 다 주시지 않고 제자들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보이시므로 하나님의 보화같은 은혜를(특별한 은혜) 아무에게나 다 주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세계에도 은혜를 더 받고 덜 받는 식구들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 자자들만 따로 높은 산에 데리고 올라가신 것도 조용히 그들에게만 보이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2절). 바울사도도 특별한 중에 체험하였습니다(고후 12:1~4).

2) 2~3절에서는 계시 과정에 있어서 “예수님만 변형된 상태를 보여주셨고 그 변형된 상태는 희고 광채가 나타난 것이었으며”,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그곳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다 변화된 몸임을 알 수 있고, 역사의 차이없이 다 만난 것과 또 무슨 대화를 하셨던지간에 천국은 성도들과 만나는 곳이고 대화하는 곳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5절에서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다” 한 것을 보면 퍽 좋은 세계, 낙원의 감각이 충분한 곳임을 알 수 있고, “세 분을 위하여 초막을 지어드리겠다”한 것은 베드로의 인간적이고 현세적 견지에서 드린 의견으로 그런 집 건축이나 인간적 의견이 천국세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서 “이는(변화의 광경을 본 것과 초막에 관한 말) 저희(세 제자들)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베드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하더라” 하신 것은 세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끼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한 말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공동번역은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변형되셨고 850년 전의 사람 엘리야와 1,500년 전의 사람 모세가 신령한 몸을 갖고 나타났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3) 7절에서 이때에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모든 생활의 지도자이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뜻은 모세가 율법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이지만 최종적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이 사실은 히 1:1에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8절은 원상복귀의 말씀이고, 9절에서는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왜 본 것을 나타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제자들도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다는 뜻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역시 의문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천국계시에 대한 의미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겠지요. 그러니까 증거 할 자격이 없고 증거를 해도 정신없는 자의 말처럼 혼란만 줄 것인즉 나타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므로 그때까지만 말하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입니다.

4) 10~11절에서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면서 예수님께 여쭙기를 “어찌하여 서기관들(막 7:1)이 엘리야가 (메시야보다)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하였으니, 이들은 “구약(왕하 2:11)에서 승천한 엘리야를 다시 보내신다(말 4:5)”는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아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착각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마 16:14). 12절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메시야에 대한 불신앙)을 회복하거니와(이는 회개의 사역이 현재까지 전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진행형으로 표현하신 뜻) 어찌 인자에 대하여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나?” 하셨으니, 이 뜻은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알면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는 왜 알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것은 사 53:1~12에 밝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이들이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엘리야가 왔으되(이미 왔다가 갔다는 뜻) 기록된 바와 같이(막 6:17, 27)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마 17:10~13에서 더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엘리야를 보내신다”는 말씀(말 4:5)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다녀간 세례요한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눅 1:17).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자들이 세례요한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에 대하여서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2. 귀신을 쫓지 못한 사건(14~29절)

이 사건은 마 17:14~21과 눅 9:37~43에도 기록되었지만 본문의 기록이 더 자세합니다. 본문 17절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마 17:14에서는 간질병도 겸한 것으로 말씀하셨고, 눅 9:37에서는 “변화의 계시가 있은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셨다” 하였으며, 마가와 마태가 “믿음 없는 세대여”라 했을 때, 누가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 한 점과 고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실 때 마가는 “기도 외에는 이런 것이 나갈 수 없다” 하셨는데, 마태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라” 하셨고, 누가는 9:43에서 이 사실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의 역사와 간질병이 서로 관계가 있는 듯하고, 기도를 힘쓰지 않는 것과 믿음 없는 것에 공통점이 있으며, 귀신의 역사를 정복하는 만큼 하나님의 위엄이 더해진다는 것을 공관복음의 각 기록을 통해서 살필 수 있었습니다.

1) 14절에서 “큰 무리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변론이 있은 것”을 보면 그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서기관들 보는데서 고치려 하였으나 성취되지 않으니까 서기관들이 “왜 너희들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못 고치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했을 때, 15~16절에서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도착하여 그 사실을 아시게 된 것입니다. 17~18절에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그 아버지가 데려온 사실과 그 아이의 증상(18, 20절)과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요,

2) 19절에서 이 사실을 접하신 예수님이 “믿음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하셨으니,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범과 교훈을 따라 기도와 경견의 방법으로 행사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 아닌 목적과 방법으로 행사하기 쉽고 그렇게 될 때는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20절에서 그 귀신들린 아이가 예수님을 보자 엎드리고 거품을 흘린 것은 이미 예수님이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막 5:8). 21~22절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귀신병 들린 아들의 증세를 말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하였으니, 이 뜻은 신앙적 견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모르는 것과 도와달라는 말로서 자신을 주체로 부각시킨 사실이 잘못된 것이요, “불쌍히 여기사” 한 것은 좋은 뜻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3) 그때에 그 아이의 아버지는 24절에서 “믿사오니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 하였고, 예수님은 25절에서 “벙어리 되고 귀 먹게 한 귀신을 명하여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신즉, 26~27절에서 “귀신이 소리 지르며 최후 발작을 나타내더니 아이는 죽은 것 같았으나 예수님이 일으켜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귀신을 명하실 수 있고, 이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28~29절에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이유를 물었을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한 내용이 6~7편 있은즉 성구별 목록표를 보시고 참고하십시오.

 

제 16 과 여러 가지 교훈 (1) (막 9:30~50) 목록으로


이 부분의 말씀을 읽고 우선 제목을 “여러 가지 교훈”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여러 가지 교훈은 다음과 같으니 ① 30~32절은 “죽으심과 부활의 예고”요, ② 33~37절은 “큰 자와 어린이 영접”이며, ③ 38~41절은 “따르지 않는 자의 능한 일”이고, ④ 42~47절은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이며, ⑤ 48~50절은 “지옥의 고난과 소금”입니다.

1. 죽으심과 부활의 예고(30~33절)

1) 30절에 “그곳을 떠나” 하신 말씀에서 “그곳”은 변화의 모습(천국 계시)을 보이신 산에서 내려오셔서(9:9) 귀신 쫓는 일을 하셨고(9:14~27), 또 집에 들어가셨으니(28절) 이곳은 가버나움의 집으로 보셔야 한즉(마 4:13) 그곳은 가버나움에 있는 예수님의 거처가 됩니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배를 타시고) 지나실 때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아니하셨다” 하신 것은 8:31절에서 말씀하신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내용을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시지 않은 뜻입니다.

2) 3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또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제자들만 알고 간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는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고, 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마 17:22~23과 눅 9:43~45절도 읽어보십시오.

2. 큰 자와 어린이 영접(33~37절)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이 마 18:1~5에 기록된 중 다른 표현이 있는 것은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처럼 되고 자기를 낮추는 자라” 하셨고, 마 18:6~7에서 “어린이를 실족케 할 때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 하셨으며, 또 10절에서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고 하셨습니다. 또 눅 9:48에서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자기를 크게 낮춘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1) 33~34절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오셔서 그곳에 오는 동안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 하며 쟁론한 사실”을 아시고, 35절에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 이르시기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저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겸손이 어떤 것임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것이 겸손이고, 겸손한 자가 큰 자란 사실을 아셔서 실제적으로 그런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2) 36~37절에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선대하는 뜻)하는 것이 곧 나(예수님)를 영접함이요 또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시므로 소자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고아를 한 사람 이상 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부터 노년기에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만 기독교 안에서 반드시 고아를 영접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기독교가 위선자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성도들 마다 생활의 여유를 만들어서 가정마다 고아영입을 의무화하는 성령님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아가 값진 보화로 인정을 받을 때 교회와 성도의 위상이 높아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입니다.

3. 따르지 않는 자의 능한 일(38~41절)

이 말씀의 일부가 눅 9:49~50에 기록되었고, 마태복음에는 이 기록이 없습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한 단체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38절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39~40절에서 “금하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같은 단체생활을 안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사가 개별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지역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필수요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이 진리요, 또 “반대하지 않는 자를 위하는 자로 여기라”는 말씀도 진리를 대적하는 악인들에 비할 때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절은 마 10:42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신앙의 본질이 같은 범위 안에서 교파적 이기주의나 교회적 이기주의가 없어지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42~47절)

이 말씀은 마 18:6~9에도 기록되었고, 눅 17:2에서만 42절과 상통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 18:6~9과 눅 17:2의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막 9:33~50을 본문으로 한 “가버나움에서의 교훈들”이란 제목의 설교가 7분설교 8집 42과에, 또 막 9:37~39을 본문으로 한 “교파에 대하여”란 제목의 설교가 어린이 성경교육자료 76과에, 또 마 18:7~10을 본문으로 한 “범죄 예방”이란 제목의 설교가 마태복음 설교 85과에 있습니다.

5. 지옥의 고난과 소금(48~50절)

이 부분은 마가의 고유기록입니다. 마 5:13에서 “짠맛 없는 소금은…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하셨고, 눅 14:34~35에서는 역시 “짠맛 없는 소금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다”고 하셨습니다.

1) 48절에서 “거기는(지옥을 뜻함)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하시므로 지옥은 죽을 자유가 없고 꺼지지 않는 뜨거운 고난만 있다는 뜻이요, 49절에서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한다”는 뜻은 뜨거운 고난을 고루(음식에 소금을 치면 그 염기가 전체에 미침) 맛본다는 뜻입니다. 지옥의 사자는 정의로운 자만 있어서 뇌물로 벌을 덜 받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해당 성구 있음).

2) 50절의 말씀은 마 5:13과 눅 14:34~35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신 말씀은 본문의 고유기록입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함”은 모든 이와 화목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사상과 종교와 생활목적과 방법이 다 다른사람들 간에 고루 화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폭넓은 사랑과 이해를 할 때는 미움없이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7 과 가정문제와 재물 (막 10:1~27) 목록으로


본문 ① 1~12절은 “이혼에 대한 질문”이고, ② 13~16절은 “어린이 사랑에 대한 말씀”이며, ③ 17~22절은 “부자청년의 질문”이요, ④ 23~27절은 “부자의 구원 문제”입니다. 이 네 가지 제목을 종합하려니까 “가정문제(이혼, 어린이)와 재물(부자와 구원)”이란 제목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1. 이혼에 대한 질문(1~12절)

1) 1절에서 “예수님이 거기(가버나움, 막 9:33)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예수님도 전례대로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마 19:1~2절에 해당하고 “요단강 건너편”은 같은 부분의 기록인 눅 9:51을 참고할 때, 이 노정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고, 사마리아의 통과가 취소되자(눅 9:52~56) 다른 촌으로 떠나신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강 동쪽으로 멀리 가시지는 않은 듯 합니다. 요단강 동쪽 멀리는 데가볼리 지역이 있지만 그보다 가까운 베뢰아로 가셨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2) 2절에서 그 여행 중에 바리새인들이 나와 예수님을 시험하여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 19:3~9의 말씀에서 거의 설명드렸습니다. 마 19:3에서는 “아무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합니까?” 하여 무연고 상태에서 (남편 입장에서) 질문하였고, 또 8절에서는 이 이혼승인에 대하여 “율법에 허락하신 규례가 있으나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3~9절 말씀은 마 19:4~8절 말씀과 배열이 다를 뿐 같은 말씀입니다. 특이한 것은 본문 10~12절에서 “남녀 공히 그 배우자를 떠나 다른 이성에게 시집이나 장가를 가면 다 간음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2. 어린이 사랑에 대한 말씀(13~16절)

이 본문에 근거한 “어린이에 대한 사명”이란 설교가 절기설교집 57과에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3. 부자의 구원문제(23~27절)

이 부분의 말씀이 마 19:16~22과 눅 18:18~23에서 강론되었고,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인간의 3대 욕망 성취”(일반설교 97과),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태복음 설교 89과, 일반설교 53과), “착각에 빠진 교인들”(7분설교 5집 7과)로 4편이 있고, 또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로도 “문제가 많은 사람”(7분설교 4집 9과), “한 가지 부족”(7분설교 8집 20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7분설교 8집 4과)의 3편이 있은즉 참고하십시오.

4. 부자의 구원 문제(23~27절)

이 말씀도 마 19:23~26에서 강론한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은 2절에서 부자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간 것처럼 물질정욕을 끊기 힘들기 때문이며, 이러한 어려움을 바늘귀에 약대가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신 뜻은 힘들고 희귀한 상태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믿게 되는 경우에 “하나님으로서 다 하실 수 있다”는 뜻은 구원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3:9, 16:17, 요 3:3, 고전 1:18, 12:3, 행 9:1~9). 삭개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경위를 보신다면(눅 19:1~9) 부자의 구원 불가를 말씀하신 뜻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제 18 과 비중 있는 헌신 (막 10:28~52) 목록으로


본문을 4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28~31절은 “비중 있는 헌신”으로, ② 32~34절은 “죽으심과 부활 예언”으로, ③ 35~45은 “야고보와 요한의 특청”으로, ④ 46~52절은 “바디매오를 보게 하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중 있는 헌신”은 이것들의 대표적인 제목입니다.

1. 비중 있는 헌신(28~31절)

이 부분은 10장 앞부분의 사건들과 연결된 것이므로 같은 시기에 요단강 건너편(10:1)에서 있었던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또 이 사실은 마 19:27~30과 눅 18:28~30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1) 28절에서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하였을 때, 마태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붙여서 “무엇을 얻으리잇가?” 하고 물었다고 하였습니다(마 9:27).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요, 흠모할 일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얻을 상급을 물은 것”도 필요한 일일 줄 압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29~30절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눅 18:29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서 집, 형제, 자매, 모친(부친은 생략됨),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의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하셨고, 또 31절에서는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여기에 대하여 마태는 상 받는 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고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때”, 즉 세상 끝날 심판 때에 여러 배의 상급과 영생을 상속(후손에게도 구원의 복을 주신다는 뜻) 받는다(마 19:28~29) 하셨고, 누가는 마가가 29절에서 거론하지 않은 “아내”와 또 30절에서 거론하지 않은 “부친”을 보충하여 말씀했으며(눅 18:29), 마가의 기록처럼 “금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는다”(눅 18:30)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버리는 사명자가 미혼의 남자 또는 가장 된 남편을 지목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또 “금세에서도 받되(독신 교역자가 교회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 것)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재산, 물질)를 백배나 받는다”는 뜻은 가족을 버린 자가 성도의 세계에서 성도 가족(마 12:50)을 더 많이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아내도 백배 얻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30절). 이런 실증은 독신 교역자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교인이 다 그의 가족이니까요. 그런데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족을 포기하고 현실정욕을 못 박은 일에 대하여 친족들이 비난하거나 모함하는 일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31절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다”는 뜻은 사명적 헌신을 먼저 했으나 그 헌신에 따른 결과가 순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는 먼저 헌신했는데 20년 후에 큰 일을 나타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후배로서 늦게 시작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큰 역사를 나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의 성격(전도부흥, 교육, 문서교육, 집필 등은 기간이 다름)과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섭리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 죽으심과 부활 예언(32~34절)

1) 이 말씀은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데리시고(요단강이 있는 동쪽에서, 10: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길에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수난 당하실 것을 두 번째 예고하신 것입니다(막 8:31). 이 말씀이 마 20:17~19에도 기록된 중 마태는 이 부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올라가신다” 하시므로 죽으심의 방법을 구체적(십자가를 처음 나타낸 것)으로 말씀하였고, 눅 18:31~34에도 이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누가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되…인자가 이방인의 손에 넘기워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능욕 당하실 일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는 마가와 누가의 기록이 같고 마태는 이를 생략하였습니다.

2) 32절에서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수님이 수난 당하실 예언을 막 8:31에서 처음 하셨는데, 그 당하실 지역으로 가시는 중이므로 놀라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으니, 이는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믿고 수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32~34절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나 십자가의 형틀은 나타내시지 않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는 문제”, 또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종교재판)하여 이방인(빌라도 총독)에게 넘기우는 문제”를 말씀하셨으며, 또 그 이방인(로마병정)은 “예수님을 능욕하며 침 밷고 채찍질하며 죽일 것이나 제 3일에는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만큼 말씀하셨으면 예수님이 악당들에게 붙잡혀 핍박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예측함은 물론 분명히 “3일 만에 살아난다” 하셨으니까 부활도 믿어야 하는데 그들은 부활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유의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의 부활을 믿기 어렵다 해도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나 특히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통해서라도 부활을 힘 있게 믿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눅 7:15, 막 5:41, 요 11:43).

3. 야고보와 요한의 특청(35~45절)

1) 이 말씀은 마 20:20~28에도 기록되었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같고 배열만 약간 다릅니다. 마가는 10:35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여쭈었다” 하였는데, 마태는 마 20:20에서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살로메, 마 27:56, 막 15:40, 요 19:25, 이 여인을 예수님의 이모로 짐작함, 이름을 직접 지적한 말씀은 없으나 회집 배열로 짐작)가 두 아들을 대동한 상태에서 절을 하고 구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두 제자의 기록이 다 같은 것입니다. 두 아들들의 청원과 그 어머니의 청원이 연달아 시행된 중 제자들이 그 중의 한 부분만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2) 본문대로 살피면 35~36절에서 “두 아들들이 무엇을 여쭈었을 때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느뇨?” 하셨고, 그들은 37절에서 “주 영광 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소서” 하였으니, 여기의 “주 영광”이란 예수님이 내세를 목표로 대답하셨는데 질문자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38절에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하신 것을 보면 그 영광의 좌석의 의미가 현세적 특권인지 천국의 상급인지를 가름하지 못한 상태인 것같고, 예수님은 “나의 마시는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고난에 임하시는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눅 18:29) 그만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나(39절) 그것도 나의 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심에 따라 그들이 얻을 것이라(40절) 하셨으니, 이는 상급의 심사와 주권을 하나님께 돌린 뜻입니다.

3) 곁에서 이 사실을 안 “열 제자들은 분히 여겼다”(41절) 하였고, 예수님은 42~45절에서 겸손과 봉사와 희생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42절은 “이방인 집권자들처럼 군림하고 임의주관하며 권세를 부려서는 안 되고”, 43절에서는 “크고저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44절에서 또 강조하시를 “으뜸이 되고저 하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기러 온 것이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만드시 겸손, 봉사, 희생을 표방하셔야 합니다.

4. 바디매오를 보게 하심(46~52절)

1) 이 부분은 마 20:29~34과 눅 18:35~43에도 기록되었고 누가의 기록이 더 자세한 듯 합니다. 본문과 상이하거나 부가된 내용을 살피면 마 20:29에서 “여리고에서 떠나가실 때 큰 무리가 좇았고 소경 두 사람이 주여 또는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외쳤다” 하였으며, 마 20:34에서는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보게 되었다” 하셨고, 눅 18:35에서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 한 소경(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음)이 구걸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사실을 알고 간청하였으며”, 42절에서 “보아라” 하신 명령적 용어가 첨부되었고, 43절에서는 “보게 되자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와 “여리고를 떠날 때에”란 시차에 대하여는 ① 예수님의 도착과 출발시점을 감안하여 적당히 표현할 수 있으며, 또 두 소경(마 20:30)을 그 중 한 사람인 바디매오에게만 관점을 두어 기록한 것은 ② 마가가 한 사람 바디매오에 대한 자료에만 중점을 두어 기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니, 따라서 바디매오는 두 소경의 대표자격이 된 것이고, 이는 숫자보다 과정을 중요시 한 것입니다.

3)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 기회에 은혜를 받으려고 길에서 소리를 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 하였지만 목적 성취를 위하여 예수님의 주목을 받도록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잠하라는 무리들의 질책에 대하여 “안심하라” 하셨고, 요청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은혜는 믿음과 기회와 적극성이 융합될 때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 19 과 마지막 입성 (막 11:1~33) 목록으로


본문에는 5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1~11절은 “마지막 입성 과정”이고, ② 12~14절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이며, ③ 15~19절은 “성전 청결”이요, ④ 20~25절은 “무화과 나무의 마름과 교훈”이며, ⑤ 27~33절은 “성전에서의 문답”입니다. 우선 대표 제목을 “마지막 입성”이라 하고 대지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마지막 입성 과정(1~11절)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일”에 대하여 눅 2:22, 42~47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7분설교 8집 100과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후 6일간의 일정을 보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첫날이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주일(종려주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주일의 계산은 약간 모호한 점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 다음 날 입성하셨다”는 명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거론은 갈릴리 사역 때 여러 번 나타나지만(마 12:1, 막 1:21, 2:24, 눅 3:31, 4:16, 6:2, 6) 마지막 입성 시기에는 말씀하신 바가 없고, 다만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셔야 하는 일과(출 34:25, 고전 5:7) 요 19:31에서 “그 안식일(돌아가신 다음 날)이 큰 날”이란 말씀이 그 기준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일정은 “저물매 또는 이튿날”(막 1:11~12), 또는 “아침에”(막 11:20)란 용어 횟수로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일기장처럼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예비일 6시(유월절 1일전 예비일, 목요일로 아셔야 함)에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요 19:14). 그리고 빌라도의 재판을 받은 시간과 골고다로 가셔서 못 박히신 시간이 다 6시인즉(마 27:45) 십자가에 죽으심이 당일에 된 일로서는 맞지 않기 때문에 저는 입성하신 주간의 수요일 저녁에 성찬을 나누시고, 목요일 새벽에 붙잡히신 후 즉시 제사장의 재판을 받으셨고, 또 아침(오전)부터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셨으며(그날을 감옥에서 보내시고),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에 골고다로 가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이 마 21:1~11과 눅 19:28~38에도 기록되어 이미 강론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상이한 점은 마 21:4~5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실을 예언한 말씀(슥 9:9)을 명기한 점과, 또 10~11절에서는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온 성이 소동하며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요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고, 눅 19:37~38에서도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신 부분이 특기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특이한 말씀은 11절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먼저 성전에 가셨는데 성전을 둘러보시고 이미 때가 저물었기 때문에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그대로 나오셔서 베다니로 가신 사실”을 마태나 누가는 생략한 것입니다.

2.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12~14절)

이 말씀은 마 21:18~19에도 있으나 마태의 기록이 더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강론에서 본문을 인용하여 강론한 줄 압니다(마태복음 설교 97과~100과 참조). 마태의 기록과 본문을 대조하면 “이른 아침 성으로 들어가실 때 시장하심”을, 본문은 “이튿날(월요일)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시장하심”으로, 그 다음에 “길가에 한 무화가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신 것과 저주하신 내용”은 본문과 같고, 마태는 “저주하신즉 곧 말랐다” 한 점이 특이하고, 본문 13절에서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하신 것과 14절에서 마가는 “곧 말랐다”(마 21:19)는 의미를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더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왜 무화과의 때가 아닌 것과 열매 없는 것을 모르셨을까? 하는 점과, 또 무화과의 때가 아니어서 열매 없는 나무를 왜 저주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전자는 예수님의 인성이 보통 사람들과 같이 발동하신 점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창조자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피조물이 심판의 대상임을 알리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과 성도를 깨우치실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 영광 목적에 응하지 않으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과 나무 한 그루가 생존하는 것도 주님의 섭리에 의함이란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아침에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주무신 곳에서 식사를 안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성전 청결(15~19절)

성전 청결의 사건은 1차로 요 2:13~17의 기록이 있고, 본문은 2차 사건이며, 또 이 사건은 마 21:12~13, 눅 19:45~48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가 여러 편있습니다(성구별 목록을 참고하여 찾아보십시오). 본문의 특별한 기록은 18절에서 “이 사건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해할 것을 꾀한 것과 무리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고 두려워한 점”, 또 19절에서 “매양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신 점”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 안에서는 주무신 일이 없는 듯 합니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도 자신이고, 성도의 마음으로 아셔야 합니다(고전 6:19~20, 엡 3:17).

4. 무화과 나무의 마름과 교훈(20~25절)

이 말씀은 마 21:20~22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무화과 나무가 곧 말랐고(마 21:19)”, 다음날 아침(화요일)에 그 나무가 마른 것을 확인하였을 때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습니까?”(20절) 하여 여쭌즉, 21~22절에서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이 산이 들려 바다에 던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약간 더 자세합니다.

1) 20절에서 “아침이라” 하셨은즉 하루 지난 날이요, 20~21절에서 “베드로가 무화과 나무 마른 것”을 예수님께 고하였는데, 이때에 예수님은 22~23절에서 마 21:21~ 22 말씀과 같은 취지로 대답하셨습니다. 즉 “믿음의 기도는 능력 있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어떤 목사님의 TV 설교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처음에는 25평 건물에서 시작하여 다음 5년 후에 120평으로, 또 5년 후에 500평으로, 또 5년 후에 5,000평으로 발전시킬 때 기도와 꿈을 갖고 성취했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기도와 응답에 대한 놀라운 성취는 우리 주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25절에서 “서서 기도할 때(그 당시에 서서 기도한 경우가 많았음, 마 6:5)에 아무에게나 혐의 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래야 하나님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 6:12의 주기도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성도는 남을 미워하는 죄를 예사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 5:21~22을 꼭 읽어보십시오. 상대방이 미운 짓을 했어도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미움은 살인의 준비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에 위험을 당했다면 가장 먼저 남을 미워한 죄부터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미운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곧 자기 죄의 사함을 받고 기도응답의 관건이 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마 5:22, 고전 11:22, 30~34).

5. 성전에서의 문답(27~33절)

이 부분의 말씀은 마 21:23~27과 눅 20:1~8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공관복음의 세 저자의 기록이 시작하는 말만 차이가 있고, 그 다음의 내용은 다 같습니다. 마태는 마 21:23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고 질문자의 세 종류(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중 서기관을 생략”하였으며, 누가는 눅 20:1에서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는 27절에서 “저희가 다시(첫날은 둘러보셨고 다음날은 청결케 하셨음, 11, 15~18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다니실 때”라 하였으니, 저자마다 예수님의 부분의 모습을 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유기적 영감을 설명하는 예증이 됩니다. 28절에서 그들이 권세의 출처를 물은 것은 하루 전(월요일)에 있었던 성전 청결의 권위와 이적의 권위의 출처와 근원을 질문한 것입니다. 본문 설명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충분히 설명드린 줄 압니다.

 

제 20 과 농부비유와 질문들 (막 12:1~27) 목록으로


12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① 1~12절은 “악한 농부 비유”이고, ② 13~17절은 “조세질문”이며, ③ 18~27절은 “부활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3대지를 종합하여 “농부비유와 질문들”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악한 농부 비유(1~12절)

이 말씀은 마 21:33~46과 눅 20:9~19에도 기록되어 있어서 상당부분 강론을 한 것입니다. 본문과 대조할 때 상이한 표현은 본문 2절의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말씀을, 마태는 34절에서 “실과 때가 되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라 하였고, 또 본문에는 “한 종, 다른 종, 또 다른 종 그 외의 많은 종”으로 표현한 것을 마태는 36절에서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낸 것으로” 기록되었고, 또 41절에서는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제때에 실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라” 한 말씀으로 본문 9절보다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또 마 21:43~44(눅 20:18)과 눅 20:16~17절이 본문에는 없는 말씀이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1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깨달을 자에게 이해시키시고 몰라야 할 자들에게는 감추시는 목적이 있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마 13:10~17, 막 4:12, 눅 8:10).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나 비택자는 진리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마 7:6). 그러면 포도원은 무엇을 비유할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완성하여 그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사역을 맡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설명일 것입니다. 포도원 시설이 완비된 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과 계시의 완성과 교회의 탄생을 포함하는 것이고, 농부들은 먼저 맡은 자가 유대인들이고 그들이 목적에 응하지 못하여 목적에 응할 만한 “다른 농부에게 맡긴다”는 뜻은 이방인에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타국에 가면서 세로 주고 간 것”은 상당한 사역시기를 뜻하는데 이는 출애굽 때로부터 예수님시대까지를 뜻하고, 복음이 실제로 이방인들에게 넘겨진 때는 오순절 이후가 되는 것입니다.

2) 2~5절에서 “때가 이르매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으나 오히려 그 종을 핍박한 것”은 구약시대에 선민이 믿음을 지키지 못한 상태에서 선지자(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를 핍박한 것을 의미하고, 마지막에 6~11절에서 “그 아들을 보내어 기대를 걸었으나 그는 주인의 아들이요 상속자인즉 아주 죽였다”는 것은 곧 있게 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구속사업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를 알고 이 말씀을 읽으니까 쉽게 이해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말씀으로 십자가의 의미(구속사업, 건축자의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으시는 뜻, 10절)를 잘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3) 12절에서 “저희(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가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갔다”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도 아니려니와 소수의 대적자들로서는 감행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눅 20:16을 보시면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듣고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였으니,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돌아가실 것을 예고 받았을 때 “결단코 그런 일이 없으리이다”(마 16:21~23) 한 뜻처럼 제자들 중에서 인간적 의견을 피력한 내용입니다.

2. 조세질문(13~17절)

1) 이 말씀은 마 2:15~22과 눅 20:20~26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사건의 발단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아 빌라도 총독의 권세에 붙잡히도록 하려는 계책이 있었지만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국세에 대한 교훈을 받는데 더 큰 목적을 두셔야 할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과 대조하면 13절에서 “저희”는 “바리새인들”이라 하였고(마 22:15), 15절의 “외식함을 아시고” 한 것을 마태는 “악함을 아시고”로(마 22:18), 누가는 “그 간계를 아시고”(눅 20:23)로, 또 마가와 누가가 “화상”(막 12:16, 눅 20:24)이라 한 것을 마태는 “형상”(마 22:20)으로 표현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서 “심히 기이히 여긴 것”을 마태와 누가는 “기이히”로만 표현하였고, 시작하는 말씀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다” 하였는데, 마태는 “바리새인들이…상론하고 제자들과 헤롯당원을 함께 보냈다” 하였고, 누가는 “저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권세아래 붙이려고 정탐을 보내고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체 하게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의 특별한 차이는 없습니다.

2) 13절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자들과 예수님을 가이사의 법에 걸어 핍박하려는 목적에 관한 말씀”이고, 14절은 “예수님의 성실한 대답을 유도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아부하며 질문한 것”이요, 따라서 세금을 내고 안 내는 문제로 국법준수의 여부를 알고저 하였으니, 유대인인 예수님으로서 자기 나라를 침탈 지배하는 권세자에 대하여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혁명심을 가지셨다면 세금 내는 일을 긍정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15~17절에서 예수님은 그 악한 자들의 질문의도를 아셨고, 데나리온(1일 품삯가치의 동전)의 소유자로 하여금 동전에 있는 화상이 누구인지를 물어 답하게 하신 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므로 그의 말씀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잠잠하며 떠났다”고 하였습니다(눅 20:26, 마 22:22). 여기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라”는 뜻은 “나라의 세금도 바치고 충성하라”는 뜻이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깨달아서 그 은혜 주신 목적에 보답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국가적 사명과 신앙적(하나님께 대한) 사명이 있되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롬 13:1). 국가의 권세가 신앙을 해칠 수 없고, 성도가 국가의 혜택이 없어도 하나님께 대한 사명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속박되지 않으니까요(딤후 2:9). 예수님은 핍박하는 정권하에서도 구속사업을 이루셨고,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핍박을 받으면서 여전히 보존되고 전승되어 온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16:18).

3. 부활에 대한 질문(18~27절)

이 말씀은 마 22:23~33과 눅 20:27~40에도 기록되어 있어서 본문 중심의 강론은 다 한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은 본문과 거의 같고,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후에 “무리들이 듣고 그의 가르침을 기이히 여기더라”(마 22:33) 하므로 반응에 대한 사실을 부가한 점입니다. 그런데 질문자에 대하여 마태와 마가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문의한 것”으로 되었으나, 누가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성경을 살피는 주밀성이 중요함을 알리는데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문의한 것이나 사두개인들 중 어떤 이가 한 것이나 이는 한 단체 안에서 대표로 문의한 것인즉 같은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에 대하여는 마 3:7, 16:1, 행 4:1, 23:6 등에도 나타난 것이므로 그 강론에서 설명 드린 줄 압니다. 눅 20:34~40을 꼭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들은 자들의 반응도 더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39~40절). 마가와 마태의 기록은 원론적이고 누가의 기록은 더 쉽게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21 과 여러 가지 교훈 (2) (막 12:28~44) 목록으로


본문에는 4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28~34절은 “큰 계명에 대한 질문”이고, ② 35~37절은 “메시야에 대한 오해 교정”이며, ③ 38~40절은 “서기관들의 죄를 책망하심”이고, ④ 41~44절은 “연보를 지켜보심”입니다. 총 제목을 “여러 가지 교훈”으로 정하였습니다.

1. 큰 계명에 대한 질문(28~34절)

이 말씀이 마 22:34~40에도 있기 때문에 핵심내용의 설명은 다 드린 줄 압니다. 마가와 마태의 기록의 차이를 살피면 마가는 28절에서 “서기관 중 1인이 저희의 변론(13~27절에 나타난 변론)을 듣고 예수님이 대답을 잘 하실 줄 알고 질문하였다” 하였고, 마태는 34절에서 “부활 문제를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이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한 율법사(서기관 직위)를 보내어 묻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저자가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고 느낀대로 또는 들은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사건을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마태는 37절에서 “마음, 목숨, 뜻을 다한다” 하였고, 마가는 30절에서 “힘” 한 가지를 더 부가하였으며, 또 40절에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선포하신 것이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중에 마가의 본문 기록은 질문한 서기관의 태도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1) 28절은 질문의 동기로서 예수님의 대답을 책잡으려 한 의도는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에 끌려가면서 관심을 갖고 질문한 줄 압니다. 29~30절 말씀은 예수님의 대답인데 예수님이 신 6:4~5을 그대로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는 이것이니”(첫째는 이것이니, 29절) 하시므로 첫째와 둘째를 설명하신 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지만 그것은 십계명 전반부(1~5계명)와 후반부(6~10계명)를 요약하신 것 뿐이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도 레 19:18을 인용하시므로 성경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31절에서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다” 하신 말씀은 성도가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랑하는 일을 박력있게 시행하도록 강조하신 뜻입니다.

2) 32~33절에서 서기관은 예수님 말씀에 대하여 감동을 받은 듯 긍정과 찬사(옳소이다)를 나타냈고, 과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은 것이라” 하였으니, 그는 의식이나 제사주의에서 실천주의로 발전한 신앙을 가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4절에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서기관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은즉 예수님과 복음도 이해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물질생활을 위하여 힘쓰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마 6:24).

2. 메시야에 대한 오해 교정(35~37절)

1) 이 말씀은 마 22:41~46과 눅 20:41~44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다 본문 안에도 있습니다. 본문 35절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어찌하여” 하시고 질문하셨는데, 마 22:41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모임에서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고쳐주시려고 질문하신 것”으로 표현되었고, 46절에서는 “저희가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묻는 자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는 37절에서 이 부분을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이 질문 취지는 바리새인들이나 백성들이 예수님을 육체적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면 안 되고 만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야 할 것을 성경으로 증언하신 것입니다. 그 성경이 곧 시 110:1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영감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3:16). 다윗이 영감으로 말씀하기를 “주(성부 하나님)께서 내 주(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으니, 그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란 뜻은 사회적 격식을 따라 오신 것 뿐입니다.

3. 서기관들의 죄를 책망하심(38~40)

1) 본문 39절에서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기 때문에 서기관들로 한정되었다고 봅니다. 이 서기관들은 다 바리새인 부류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눅 20:45~47에도 있는데 지적사항 네 가지는 다 같고, 누가는 45절에서 “모든 백성이 들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하였고, 마가는 “가르치실 때(38절)”라 하였으며, 마태는 23장 전체의 긴 문장을 할애하여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종합적으로 책망하신 중 5, 6, 7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차는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하며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의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받기를 원하는 것”을 다 화 받을 죄에 속하는 것으로 경계하셨습니다. 그런 중 본문 40절에서는 “과부의 가산 삼키는 일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일”까지 포함된 것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2) 지적사항을 살펴보면 ①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인데 성도나 성직자는 의복으로 표시를 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② 시장에서 문안 받으려는 것인데 성도나 성직자는 먼저 인사하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③ 회당(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상좌에 앉는 것인데 저희들은 항상 말석에 앉읍시다(눅 14:9~10). ④ 잔치석의 상석에 앉기를 원하는 것인데 역시 겸손의 표로 말석에 앉읍시다. 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인데 이는 가난한 자에게 도움되게 하여야 하고 고리대금을 빌려주어 비싼 이자를 받든지 하여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요, ⑥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인즉 단체, 대표기도는 간단히 하고 혼자하는 기도를 길게 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랑하는 뜻으로 하지 말고 개인적 실속에만 충실하십시오. 항상 자신의 행동을 이 말씀에 비추어 주밀하게 판단하시고 지적당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4. 연보를 지켜보심(41~44절)

이 말씀은 눅 21:1~4에도 기록되었는데 1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헌금”이 “βάλλονταs(바론타스)”로 표기되었는데, 이 말은 “βάλλω(바로)”에서 변형된 동사이기 때문에 헌금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던지는 것” 즉 “넣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외에 “헌물”이란 말은 “anathema”로 눅 21:5에 한 번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헌금명칭이 전부 “연보”로만 번역된 것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교회에서 쓰는 용어들이 아니란 점입니다. “연보”로 번역된 원문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hadnotes(고후 8:20), haplotes(고후 8:2), eulogia(고후 9:5), logeia(고전 16:1)”이고, “연보궤”는 “gazophulakion(가조플라키온)”입니다. 신약시대의 연보의 의미는 연보(捐補:덜어서 보충함)의 뜻에 함축된 구제헌금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문에 헌금함을 놓고 구제금을 거둔 것으로 사료됩니다(왕하 12:9). 렙돈은 1/8센트, 고드란트는 1/4센트로 가장 적은 금액의 쇠돈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성도의 연보를 지켜보셨고, 가난한 자의 형편에서 얼만큼, 또 부자의 형편에서 얼만큼 낸 것을 살피신 후에 그의 재산과 관련하여 연보의 비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충성과 봉사와 헌신의 비중을 합리적으로 보시고 거기에 따른 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칭찬은 곧 상이니까요.

 

제 22 과 예루살렘 멸망 예언 (막 13:1~20) 목록으로


마가복음 13장에는 “예루살렘 멸망 예언”과 “말세의 징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목의 내용이 마 24:1~42과 눅 21:25~36에도 기록되었는데 내용을 대조해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느끼고 기억한 대로 옮긴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은 어디서 어디까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이고, 또 어느 부분이 말세 징조에 대한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시고(1~20절) 그 사실을 말세 징조의 예고로 연계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21~37절까지는 “말세 징조와 교훈”이지만 19~20절의 “날들을 감하신다” 하신 부분은 예루살렘 멸망 때나 말세 때에 함께 적용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연구자들이 21~37절의 말씀을 예루살렘 멸망시에 성취됨과 동시에 말세에도 그럴 것으로 설교하는 줄 압니다. 본 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상고하기로 하고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① 1~2절은 “성전훼파를 예고하심”이요, ② 3~20절은 “멸망에 있을 징조”입니다.

1. 성전훼파를 예고하심(1~2절)

1) 성전훼파 예고는 곧 예루살렘 멸망을 의미합니다. 이 성전은 헤롯 성전이라 하여 주전 20년경부터 10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화요일 중에 계속된 말씀입니다. 1절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함과 견고함에 대하여 이 돌들과 건축들이 어떠합니까?” 하였으니, 제자들은 그때에도 성전숭배사상에 붙잡혀 있은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하실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하였는데, 마 24:2에서는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하셨으니, 의미가 상반된 것 같으나 마태의 증언은 본문 2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성전의 웅장함을 인정하시면서 훼파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이 때에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37년 후)에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인데 본래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마 24:36, 행 1:7)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시기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이유는 하나님이 선민을 버리시는 섭리와(렘 12:7~10) 또 메시야를 학대한 죄값(막 12:1~9)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 23:35~39, 꼭 본문을 확인하십시오).

2. 멸망의 때에 있을 징조(3~20절)

3~4절은 “예수님이 감람산(예루살렘 동편 해발 830m, 겟세마네 골짜기의 언덕, 감람원도 같은 곳임, 행 1:12)에서 성전을 대하여 앉으셨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마 24:3은 제자들)가 조용히 와서 그 때와 징조를 문의하였다” 하셨으니,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 네 사람에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때에 있을 상황에 대하여 일곱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5~6절에서 “사람의 미혹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미혹은 4절에서 “내가 구세주요 예수님이 보내서 온 자다” 하며 유혹하는 이단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부류들이 여러 차례 지나갔지만 시국이 불안할 때는 언제나 종교적 부조리한 현상이 나타나는 줄 압니다. 성도가 진리에 굳게 서야 이런 유혹을 떨칠 수 있겠지요.

2) 7절에는 난리(전쟁) 소문입니다. 결국 전쟁으로 끝을 본 것이니까 전쟁 소문이 먼저 나올 수 있었을 것이요,

3) 8절에서는 “지진과 기근으로 재난의 시작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지진과 재난은 천재지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깨우치시는 줄 압니다(렘 14:1~9).

4) 9~11절은 “사람의 핍박”입니다. 9절은 “공회에 넘겨 회당에서 매질하는 일”이고, 10절은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한다” 하셨으니, 이 10절은 말세징조에 해당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전에도 “나를 인하여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선다”는 것은 성도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또 심문 중에도 전도할 것을 말씀하신 중(행 23:11) “너희를 넘겨줄 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시에 성령님이 말씀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21:14~15에서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하지 않기로 결심하라 주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런 핍박을 받을 때에 성령님이 마음을 붙드시고 말씀을 주시는 체험을 한다면 더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과 관련하여 마 24:9~14과 눅 21:14~19을 읽어보십시오. 또 5~13절, 19~27절, 34~37절은 예루살렘 멸망의 때와 연계하여 말세를 대비할 자들에게 전형적(典型的)으로 주신 교훈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5) 12~13절에서 “가족들로부터의 핍박과 모든 이들로부터의 미움”입니다. 정치가의 사상과 종교가 다르면 성도는 핍박받게 되어 있고,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과 신앙이 결탁될 때 누가 자기편이 되어 주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지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신앙적, 영적 구원임) 하셨고, 또 눅 21:18에서는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일반적, 육체적 보호임) 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난리 중에도 잘 피하고 보호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6) 14~18절은 “로마군 침략의 실제적 성취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마 24:15~20에서 설명드렸습니다. 그때에 산으로 도망하는 자들이 급히 행동할 것을 말씀하셨고,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 대한 화”는 마태복음에서 피난의 불편으로 해석하였지만 왕하 17:26~30에 나타난 내용처럼 아이를 먹어야 하는 기근으로도 해석한 글을 보았습니다(왕하 15:16, 호 13:16). 이는 환난시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또 이 일이 겨울에(마 24:20, 안식일에도) 나지 않도록 하라(기도하라, 마 24:20)” 하셨으니 성도는 때와 기후와 절기에 관련하여서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7) 19~20절은 “환난의 날에 대한 축소의 말씀”입니다. 전쟁이 오래 끌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속히 중지 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환난의 날을 감하시는 것입니다. 풀빗 주석의 한 부분을 보면 “티도 자신도 관대한 성품을 지녀 요세푸스에 우호적이었다 더욱이 그 자신은 유대인이며 아그립바의 누이동생은 베르니에게 애착을 느꼈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 뜻으로 로마의 티도 장군이 너그럽게 전쟁을 끝낸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난기간 단축에 관한 것은 말세에도 적용될 것으로 해석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내용이 연속되는 것 같지만 다음 절부터는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는 뜻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제 23 과 말세의 징조와 대비책 (막 13:21~37) 목록으로


이 부분의 말씀을 앞에 있는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구별하여 “말세의 징조와 대비책”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21~23절은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이고, ② 24~27절은 “권세의 추락과 재림”이며, ③ 28~31절은 “때를 분별하라는 말씀”이요, ④ 32~37절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1. 거짓선지자들의 미혹(21~23절)

이 말씀은 5~6절 말씀과도 상통함이 있습니다. 거짓예수, 거짓선지자의 유혹이 가장 심각하므로 두 번 강조하신 줄 압니다. 21~22절에서는 말세가 임박할 무렵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진리가 이것이다 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택하신 백성(믿음에 든든히 선 성도)까지 미혹한다” 하였으니, 이는 유혹자들의 본질과 능력이 진리역사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진리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도가 분별을 잘 하려면 확실한 진리표준에 든든히 서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본주의나 사회적 복음주의, 또는 이적의 성격이나 성경관에 민감하지 않으면 유혹을 떨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미리 예고해 주셨은즉” 말세를 만난 성도들은 더욱 경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한 신앙은 마치 철로 위의 기차처럼 치우침이 없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권세의 추락과 재림(24~27절)

24~26절은 마 24:29~30과 눅 21:25~27에서 말씀드렸고, 27절 말씀도 마 24:31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여기의 “하늘에 있는 권능”이란 인간적 권세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천지의 변혁 현상(벧후 3:10~11)이 일어나는데 인간권세가 힘을 쓸 수 없겠지요.

3. 때를 분별하라는 말씀(28~31절)

이 말씀도 마 24:32~34과 눅 21:29~31에 기록되었습니다. 산천이 푸르면 5월이고, 붉으면 늦은 가을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을을 알면 겨울을 대비하는 것처럼 성도는 징조가 있는 것을 보면서 말세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30~31절에서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룬다”는 말씀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마 24:35과 눅 21:32~33에서도 설명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한 그의 말씀 효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4. 깨어 있으라(32~37절)

1) 32절에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는 말씀은 마 24:36과 본문 1~2절에서도 설명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모르신다”는 것은 그의 신성적 전지(全知)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섭리의 영역을 침해하시지 않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때와 시간(죽음의 때를 포함하여)을 모른즉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33절). 모를 때는 주의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2) 33~36절의 말씀은 눅 12:35~40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주인이 혼인잔치 집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경우 또는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 당시의 부자들은 담과 대문을 겹겹이 또 멀리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신수단이 없은즉 가장 먼 바깥문에 나가서 밤새도록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기도와 책임을 다하는 일”로만 경성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말씀과 묵상과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서 자기책임에 근면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세속에 빠지지 마시고 늘 반성과 회개를 힘쓰며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37절에서 “깨어 있으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 하신 말씀은 마가의 고유기록으로 이 말씀을 받을 대상이 특정지역(예루살렘)과 시대에 국한하시지 않으신 것인즉 말세를 내다보는 모든 성도에게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4 과 향유부음과 성찬 (막 14:1~26) 목록으로


14장은 내용이 많기 때문에 세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밤늦은 기도까지(막 14:38쯤까지)”는 수요일 자정까지 시행된 일입니다. ① 1~2절은 “궤계로 죽일 방책”이고, ② 3~9절은 “한 여자의 나드 헌납”이며, ③ 10~11절은 “가룟유다의 궤계”요, ④ 12~16절은 “성만찬 준비”이고, ⑤ 17~26절은 “성만찬 시행”입니다.

1. 궤계로 죽일 방책(1~2절)

1) 이 말씀은 마 26:3~5과 눅 22:1~2에도 기록된 중 눅 22:1에서는 “무교절 곧 유월절이 가까웠다” 하셨고, 본문 1절에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 곧 무교절이라” 하시므로 날짜에 대한 상당한 단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같은 뜻이고(유월은 문지방에 피 발린 집에 장자 치시는 재앙을 건너뛰었다는 뜻이고, 무교절은 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 누룩없는 떡을 먹는 뜻임) 유대력으로 1월 14일부터 21일까지인데, 이 날은 12일로 월요일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무교절은 수요일부터 해당됩니다(12절 참조).

2) 이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죽일 방책을 의논하면서 민요(예수님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의 반란)가 날까하여 명절(유월절)기간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마 26:1~5에 보시면 1~2절에서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팔릴 것을 예고”하셨고, 이어서 3~5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의 아문(관청을 총칭함)에 모여 같은 모의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그런데 왜 그 모의대로 그 기간을 피하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예언의 성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란 예수님이 유월절 희생양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출 12:21, 34:25).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고 또 예수님의 예언(마 26:1~2)이 있었은즉 사람의 계획대로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2. 한 여자의 나드 헌납(3~9절)

1) 이 말씀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은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눅 7:36~39에 기록된 것으로 이 사건은 갈릴리 사역(눅 7:1, 11)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은 마 26:6~13과 요 12:3~8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과 다르게 표현된 것을 살피면 마가는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 한 것을 요한은 “베다니의 나사로 있는 곳에 나사로도 함께 있었다” 하셨고, 마가는 “예수님 머리에 부었다”한 것을 마태는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하였으며, 요한은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함”을 나타냈고, 분내어 말한 사람을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했다” 하였는데, 마태는 “제자들이 보고 분을 냈다” 하였고, 또 요한은 “가룟유다가 그리 하였으며 유다는 도적이라” 하셨고, 마가가 “300 데나리온 이상에” 한 것을 마태는 “많은 값에”라고 한 후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했다”는 칭찬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 3절의 “베다니의 문둥이의 집”은 요 12:1~2의 “베다니 나사로의 있는 곳”이란 말씀과 관련할 때 죽었다가 살아난(요 11:43~44) 나사로가 문둥병자였는데 고침받은 것으로 짐작되고, 또 “한 여자”는 요 11:1~2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자기 집에 모신 만큼 값진 봉사를 기회따라 단번에 하면서 그의 장사(8절, 시체에 미리 바른 뜻)를 준비한 것인데, 그 향유 나드(부탄이나 네팔에서 나는 감송향 뿌리에서 채취한 값비싼 향료) 300 데나리온(값 1일 인건비×300)을 부은 것입니다. 가룟유다나 제자들은 여기에 인간적 타산을 가하여 비판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였다(마 26:10) 저가 힘을 다하여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진실로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8~9절)” 하셨고, 또 6~7절에서는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 하셨으며,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3) 이 말씀에서 교훈 받을 것은 “마리아가 기회를 살피고 선용한 점, 힘을 다하여 섬긴 점, 예수님의 장례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한 점(섭리적으로도 그렇게 된 것임),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음, 또 선을 행한 자가 비판 받는 일, 인간의 선행도 교훈 가치가 있을 때는 기념할 수 있는 점” 등을 교훈으로 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가룟유다의 궤계(10~11절)

이 말씀은 마 26:14~16, 눅 22:3~6, 요 13:2에도 기록되었으며, 또 슥 10:12~13에서도 예언된 것입니다. 마태는 말씀하기를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얼마를 주랴는 식으로 흥정하여 은 30을 달아준즉 그때부터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하였고, 누가는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하였으며, 요한은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 팔 생각을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은 30을 받기로 약속한 후 얼마 있다가 은 30을 받고 그 다음에 결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슥 10:12~13 말씀은 “선민이 메시야를 홀대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헐값으로 흥정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일이 예수님에게 응한 것입니다. 또 유다가 예수님을 돈 받고 넘겨주게 된 것은 십자가 사건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섭리하신 일입니다. 유다가 그 일에 이용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다가 저지른 죄악입니다. 가룟유다의 범죄와 관련하여 요즈음 떠도는 뉴스에 성경과 다른 내용의 사본, 또는 영화를 선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작가가 성경을 마음대로 구상하고 변동하여 만든 작품에 불과한즉 성경 66권만 영감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은 그런 떠도는 작품에 뜻을 두거나 유혹을 당하면 안됩니다.

4. 성만찬 준비(12~16절)

성만찬을 준비하게 하신 날은 무교절 첫날(수요일 낮)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마 26:17~19과 눅 22:7~13에도 기록된 중 막 14:12에서는 “제자들이 어디서 유월절을 예비할까요?” 하고 여쭈어 예수님으로부터 대답을 받았고, 눅 22:8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을 보내셔서 준비하게 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질문을 받으신 후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내에 들어가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서 말할 때 마 26:18에서는 좀 특이하게 말씀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 안에 가서 아무에게 이르되 내 때가 가까왔으니 제자들과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을 내다보시는 분입니다. 물동이를 갖고 가는 사람이 있을 것과 그가 어떻게 할 것까지 다 아시고 지도하셨으니까요. 장래 일을 아시는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사 45:11, 마 17:27). 성찬예식을 할 때 지정된 건물이 없어도 믿음 있는 성도의 집에서 준비하면 된다는 교훈을 주신 줄 압니다.

5. 성만찬 시행(17~26절)

여기에 대한 말씀은 강론이나 성찬설교로 많이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마 26:20 ~30과 눅 22:14~18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17절에서 “저물 때 열 두 제자들과 앉으사 (음식을) 잡수실 때 시행하셨고”, 이때에 누가는 눅 22:15에서 “고난 전에 유월절 잡수실 것을 원하고 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8, 21절에서는 “제자 중 한 사람 곧 함께 먹는 자 그리고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마 26:25에서는 “유다가 내니잇가 한즉 네가 말하였다” 하시므로 가룟(장소이름, lscariot, 예루살렘 남쪽 28㎞쯤, 헤브론과 사해바다 중간 사이쯤 됨)유다의 반역에 대하여 확실히 지적하시면서 그에게는 출생함만도 못한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음에 대하여 세 제자가 다 기록하였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떡과 포도주 순으로, 누가는 포도주와 떡과 또 포도주 순으로 먹게 하신 것을 기록 하였으며, 마가는 떡을 먹을 때 축복(eulogear)하셨다 하였고, 포도주를 주실 때는 사례(eucharister) 하셨으며, 마태도 그렇게 하였는데, 마태의 떡에 대한 축복을 축사(축복과 같은 원문임)로 번역하였고, 누가는 17, 19절에서 두 번 다 사례(eucharister)로 말씀한 것을 보면 축복, 축사, 사례가 다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 말씀의 해석은 마태와 누가의 기록과 성례에 대한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구절별 목록과 제목별 목록을 참고하시면 소재를 아실 수 있습니다. 성찬을 마치신 후 “다시 감람산(겟세마네 골짜기가 있는 산)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제 25 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 (막 14:27~52)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① 27~31절에서 “다 나를 버리리라” 하신 예언과 ② 32~42절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와 ③ 43~52절에서 “예수님의 잡히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대표적 제목으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을 정하였습니다.

1. 다 나를 버리리라(27~31절)

이 말씀은 마 26:31~35의 말씀이 본문과 거의 같고, 눅 22:28~38과 요 18:33, 36~38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마태의 기록을 대조하면 “오늘 밤에…나를 버리리라”(31절) 한 것과 베드로가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34절) 하였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란 마가의 고유기록입니다(30절). 누가의 기록은 시작하는 말씀에서 차이가 납니다. 눅 22:31~33에 보시면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는 것을 내가 네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신즉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 하였고, 34절에서는 “오늘 닭 울기 전에…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으며, 요한의 기록은 이 부분에서 다른 면을 기록하였으니, 33절에서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하였느니라” 하신즉 36~38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였고,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셨으며, 베드로가 또 말하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왜 못 따라 갑니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였을 때 “네가 그리하겠느냐? 진실로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므로 대화의 진지한 면을 더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죽는 일이 힘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주님처럼 살며 주님을 따를 때 무엇이 힘든 것인지를 깨달아서 결심하고 따르는 노력을 하셔야 할 줄 압니다.

2. 겟세마네의 기도(32~42절)

1) 이 부분은 마 26:36~46과 눅 22:40~46에도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18장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기드론 저편”으로 표현하여 기도의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마가와 마태와 누가는 중보기도의 내용은 경청하지 못한 듯하고, 예수님이 처음 기도하실 때 십자가의 고난 문제를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 고민하시며 부탁한 내용과 제자들의 자는 것을 지적하신 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거기에도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 32절의 “나의 기도할 동안”을 마태는 “내가 저기 가서(조금 나가사, 35절) 기도할 동안”이라(36절) 하였고, 누가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41절)로, 또 마가가 33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라” 한 것을 마태는 세베대의 두 아들로(37절), 또 “심히 놀라신 것”을 마태는 “고민하사”로, 마가가 “아버지께는 가능하오니”(36절)를 마태는 “할만하시거든”(39절)으로 기록하였고, 또 누가의 기록은 “땀 흘리신 것과 천사가 와서 힘을 도운 것”까지(43~44절)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2) 33절에서 “예수님이 심히 놀라시고 슬피하신 것”이나 34절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아시는 상황에서 이를 인간적으로 감당(인간의 대표자로 벌을 받으심)하셔야 하기 때문에 사람과 꼭 같은 두려움을 느끼신 것입니다. 열 한 제자들에게 “여기 앉아있으라” 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셔서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 하시고, 또 적당히(눅 22:41) 떨어진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땀 흘리신 것을 보면 분명히 소리 내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1차 기도하신 후에 와서 보시니 저희가 자고 있어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일깨우시고(37절) 다시 가서 기도하시고 오셨을 때도 “저희가 잤다”고 하였습니다(40절). 이때에 사도요한은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기도를 귀담아 듣고 요한복음 18장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41절의 “그만이다”란 용어는 “그만 되었다”의 뜻으로 이해합니다(공동번역 : 그만하면 넉넉하다). “때가 왔으니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하신 것(41절)은 마 26:45과 같고 본문 42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 하신 것은 마가의 고유기록입니다. 본문의 설명과 교훈은 마태, 누가, 요한의 기록에서 말씀드렸습니다.

3. 예수님의 잡히심(43~52절)

1) 예수님은 목요일 새벽(자정을 넘긴 때)에 잡히셨고 이날 새벽과 오전에 종교재판과 국가적 재판, 두 번을 받으셨습니다. 또 본문의 사건은 마 26:47~56, 눅 22:47~54, 그리고 요 18:2~2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마다 특징적 표현을 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특징은 51~52절입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가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것인데 이 사람은 바로 “마가”였을 것으로 집작합니다. 마가복음 서론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 마가는 소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예수님의 모든 행적에 대하여 자신이 체험한 것과 베드로 등 사도들로부터 자문받은 것을 영감에 의하여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2) 마태 기록의 특징은 가룟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 할 때 예수님이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행하라”는 말씀을 하셨고(50절), 또 51~54절에서는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들었을 때 네 검을 도로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고, 56절에서는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 하셨으며,

3) 누가의 기록에는 유다가 왔을 때 48절에서 “네가 입 맞추므로 인자를 파느냐?” 하셨고, 또 49절에서는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우리가 검으로 치리잇가? 한 후 예수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쳤다” 하셨으며, 51절에서는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귀를 만져 낫게 해 주셨다” 하셨으니, 역시 누가의 고유기록이고, 또 54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므로 예수님이 잡히신 일 그 자체를 어두움의 세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요한의 기록은 더 특별합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유다와 권세자들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홰와 병기를 갖고 예수님께 접근했을 때 예수님은 자기의 당할 일을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신 후 “나사렛 예수라” 하였을 때 두 번이나 “내로라”(6, 7절) 하신 후 “나를 찾거든 이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자기의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는다 하신 말씀(요 18:9, 12)을 응하게 하신 것이라” 하셨으며, 또 검으로 친 자가 베드로인 것과 피해자의 이름이 “말고”임을 말씀하였고(10절),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간 사실도 나타냈습니다(12절)

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어린 양으로서의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잡히신 것이고, 예수님을 해롭게 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이 파송한 군병들과 가룟유다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 죄를 지은 자들이며, 제자들이 이런 위기를 만난 상황에서 혈기를 부린 것이나 도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지막 기회에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를 잘 하였더라면(마 26:41)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어렵지 않게 해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고전 10:13).

 

제 26 과 대제사장의 재판과 학대 (막 14:53~72)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두 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53~65절은 “대제사장의 재판과 학대”이고, ② 66~72절은 “베드로의 타락과 회개”입니다. 대표제목으로 “대제사장의 재판과 학대”를 정하였습니다.

1. 대제사장의 재판과 학대(53~65절)

이 부분의 말씀은 마 26:57~68과 눅 22:54~65과 요 18:12~28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제가 이 마가복음 강론을 신약의 마지막으로 기록하면서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설명드린 것은 피하고 마가복음에 있는 고유기록만 설명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같은 사건의 기록을 다 대조하여 특징있는 기록만 찾아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이 수요일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여 대제사장의 아문으로 호송한다고 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미리 모여있었고, 빌라도도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18:28~32). 요 18:12~14을 보시면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실 때 처음에는 안나스(은퇴한 대제사장, 가야바 현직 대제사장의 장인)에게 가셔서 요 18:12~23까지의 말씀대로 심문을 하다가 요 18:24에서 또 현직 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결박된 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와 마태와 누가는 안나스에게서 재판 받은 것은 생략하였고, 마태는 가야바가 심문할 때 63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또 누가는 “베드로가 불 피운 중에 앉았다”(55절) 하였고, 마가는 54절에서 “베드로가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하였는데, 요한은 “그때가 추운즉 불을 쬐더라”(18절) 하였으며, 제사장의 재판이 끝났을 때 마가는 “하속들도 손바닥으로 치더라”(65절) 하였고, 마태는 누가와 함께(64절)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68절) 하였으며, 누가는 “이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65절) 하였고, 요한이 표현한 내용은 더 자세한즉 요한복음의 기사를 따로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안나스의 심문이 끝난 후에 다시 “가야바의 관정으로 보내니 그때가 새벽이라”(28절)고 하였습니다(요 18:28). 본문의 설명은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거의 같으므로 재론하지 않습니다.

2. 베드로의 타락과 회개(66~72절)

저는 이 부분에 대하여서도 4복음 기록을 나열해 놓고 대조해 보았습니다. 그 성경은 마 26:69~75, 눅 22:54~62, 요 18:25~27절입니다. 베드로가 불 쬐인 장소에 대하여 마가는 “뜰 아래”(66절)로, 마태는 “바깥 뜰”(69절)로, 누가는 “대제사장 집”(54절)으로 되었고, 마가(54절), 마태(58절), 누가(55절)는 베드로가 “불 쬐고 앉았다” 하였는데, 요한만은 “서서 불 쬤다”(25절) 하였고, 마가는 하속들이 베드로의 신분을 지적할 때 첫 번째 지적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요(67절), 두 번째가 “이 사람도 그 당이라” 한 것이며(69절), 조금 있다가(누가는 한 시쯤 있다가, 59절) 세 번째로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70절) 하였는데, 마태는 마가의 세 번째 지적을 첫 번째로 증거하였고(69절), 첫 번째가 그 다음, 두 번째를 세 번째로 증언하였으니 이 순서적 증언은 누구 한 사람이 혼돈하였거나 같은 말을 두 번 쓴 사실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마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30, 72절)”로 명시하였고, “베드로가 울었다”(72절) 한 것을 마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것”(75절)으로, 누가 역시 “심히 통곡하였다” 하면서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리 하였다고 하였습니다(61절). 요한은 26절에서 베드로의 신분을 “예수님과 동산에 같이 있던 자라고 말한 사람이 귀 베임을 당한 말고의 일가되는 사람임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특색있는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종교재판의 절차만 끝났고 아직도 목요일 오전에 진행될 빌라도의 재판이 남아 있습니다.

 

제 27 과 빌라도의 재판과 골고다 (막 15:1~22) 목록으로


본 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① 1~15절은 “빌라도의 재판”이고, ② 16~22절은 “골고다로 끌고감”입니다. 총 제목을 “빌라도의 재판과 골고다”로 정하였습니다.

1. 빌라도의 재판(1~15절)

1) 목요일 새벽에 대제사장의 재판으로 “사형에 해당한다”는 선포를 하고 자신들에게 사형집행권이 없으므로(요 18:31) 즉시 그 새벽으로 빌라도 총독에게로 끌고가서 여러 말로(눅 23:2)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신 과정(본문과 상응하는)은 마 27:1~2, 111~26, 눅 23:1~5, 13~25(8~12절은 중간에 헤롯의 재판을 받으신 기록임), 요 18:28~39, 19:1~16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의 기록은 조리있게 요약된 기록으로 4복음에 나타난 기록 중 본문이 가장 간단하고 마태, 누가, 요한의 기록의 순서로 점점 부가된 내용이 더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기록을 기억에 남도록 읽으십시오.

2) 그리고 마태의 기록을 읽으시면 예수님을 총독에게로 넘겼을 때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와서 은 30을 내 놓으며 뉘우치는 내용”이 나오고(3~10절), 또 19절에서는 “빌라도가 재판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꿈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님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전갈”이 있었으며, 또 24~25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은 것과 민란을 우려하여 예수님을 사형에 내 줄 생각을 하면서 물을 가져오라 하여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자신은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한즉 백성들이 그 피(값)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3) 그 다음에 누가의 기록을 살피면 1~2절에서 새벽에 무리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끌고가서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내지 말며 자신이 왕이요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죄목을 들어 고소하는 내용”과 “내가 보니 죄가 없다”는 확실한 선포와(4절), “갈릴리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그 지역이 헤롯왕 관할인데 마침 헤롯왕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 중이라 그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재판을 받게 한 사실과 헤롯도 정죄하지 못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낸 사실”을 기록하였으며(6~12절), “1차(14~16절), 2차(20절), 3차(22절)에 긍하여 심문했어도 죄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4) 요한의 기록을 살피면 “예수님을 죄수로 인정하여 빌라도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정결한 몸으로 유월절을 지킨다 하여 부정한 죄수(예수님) 곁에 가까이 하지 않는 뜻으로 관정까지 들어가지 않은 사실(28절), 그리하여 빌라도가 군중있는 밖으로 나와서 고소내용을 들은 사실(29~30절)”, 또 “너희가 재판하라 한즉 우리는 사형권이 없다” 한 것과(31절) “이는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실 것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뜻이라”고 한 사실(32절), 또 33~38절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하며 예수님과 특별한 대화를 나눈 사실, 또 군병들로 하여금 때리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씌워 조롱하게 한 사실(19:1~5), 빌라도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한 사실(19:8), 빌라도가 예수님께 “놓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고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신 일(19:10~11),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 하였을 때 “가이사의 충신아 아니라”고 반대하자 다시 재판석에 앉아 승인하고 “너희 왕이라” 하며 넘겨준 사실과, “그날은 유월절의 예비일(목요일)이라”고 한 사실은 다 복음서별로 다양하게 기록된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해석상으로 이해하시려면 마태복음의 강론을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2. 골고다로 끌고감(16~22절)

이 말씀은 마 27:27~34과 눅 23:26~32, 요 19:17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마가와 마태의 기록이 거의 같고 누가와 요한의 기록은 간단합니다. 요한은 “저희가 예수를 맡으니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란 곳에 나오셨다” 하므로 객관적 입장을 취한 뜻으로 간단히 말씀하였는데, “골고다”란 해골을 뜻하는 히브리말인데(요 19:17) 눅 23:33의 “해골”이란 말을 KJV번역에서 갈보리(라틴어, 해골의 뜻)로 번역한 일로 갈보리산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소는 그 당시에 사형장으로 썼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누가는 23:27~32에서 특이한 기록을 하였으니,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길가에서 “여인들이 가슴치며 우는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신 사실”과 “다른 두 행악자도 예수님과 함께 끌려간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2) 본문 16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으로 갔다 하셨는데 이 장소는 빌라도가 국사를 돌보는 관청의 뜰 이름입니다. 18절에서 “예(禮)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한 말씀은 마가의 고유적 표현으로 왕 앞에서 예절을 지키듯 하며 예수님을 조롱한 뜻입니다. 또 21절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 한 것과 “그가 시골서 왔다”는 사실도 마가의 고유기록입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변에 있는 항구로 알렉산더의 서쪽 700㎞쯤에 위치합니다. “그가 시골서 왔다”는 뜻은 예루살렘에 처음 온 것을 표현한 듯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루포”란 이름이 행 11:20, 13:1, 롬 16:13에 나타난 것을 볼 때 그 시몬은 그 일로 인하여 개종하고 자기 자녀들까지 믿게 한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인연이란 그런 방법 또는 작은 일을 계기로 하여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요 4:4~7).

3) 앞절 15절을 보시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하고, 16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로 간 것”은 당일에 즉시 계속된 일 같으나 그렇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일단 재판은 목요일 6시경에 끝났습니다(요 19:14). 그러나 골고다로 가신 것은 그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에 출발한 것입니다. 그 근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3시, 6시, 9시이기 때문입니다(막 15:25, 33, 마 27:45~46). 요 19:14의 6시와 마 27:45의 6시는 24시간의 간격이 있음을 뜻합니다.

 

제 28 과 운명과 장사 (막 15:23~47)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23~32절은 “못 박히실 때의 정황”이고, ② 33~41절은 “운명하실때의 정황”이며, ③ 42~47절은 “장사지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체의 제목을 “운명과 장사”로 정했습니다.

1. 못 박히실 때의 정황(23~32절)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4복음서에 나타낸 내용과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 부분(운명직전의 일)의 말씀이 본문과 마 27:34~44, 눅 23:33~39, 요 19:18~27에 나타나 있고, 그 다음 절부터 운명하실 당시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1) 23절에서 “몰약 탄 포도주를 잡숫게 하였으나 잡숫지 않으신 사실”을 마 27:34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라 하였으니, 이 기록은 두 저자가 그 약에 대한 성분을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마취효능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잡숫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고난을 감소없이 온전히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 32:32에 보시면 “쓸개 포도”란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쓰다는 표현을 하기 위하여 몰약을 탓을 것으로 알고 마가는 “몰약을 탔다”, 마태는 쓴 것을 연상하여 “쓸개를 탔다”로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2) 24절에서 예수님을 못 박기 전에 옷을 벗겨 제비 뽑아 나눈 사실에 대하여 마태는 35절, 누가는 34절에서 말씀하였지만 요한의 기록(23~24절)이 더 자세합니다. 겉옷은 네 깃에 나누었고, 속옷은 호지 않은 것이므로 찢지 않은 채 제비를 뽑아 나누었으며, 또 이 사실은 “시 22:18의 예언 성취라” 하였으니 더 자세한 것입니다.

3) 25~26절에서 못 박은 사실과 죄패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가는 3시에 못 박은 사실을 고유적으로 기록하였고, 마태는 35절, 누가는 33절, 요한은 18절에서 표현하였는데 다 좌우편에 두 강도들이 못 박힌 사실을 기록한 중 요한은 18절에서 “예수님은 가운데 있더라” 하였고, 죄패에 대한 내용은 마태(37절)와 누가(38절)의 기록이 같으나 요한은 19~33절에서 더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유대인의 왕”을 “나사렛 유대인의 왕”으로 씀과 동시에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하였으며, 또 제사장 무리들이 그 문구 앞에 “자칭”을 넣으라 한즉 빌라도가 거절한 것까지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25~27절에서 “십자가 곁에 있었던 예수님의 연고자 이름과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기록하였습니다.

4) 27절의 두 강도를 좌우편에 세운 일에 대하여 마태는 38절, 누가는 35절, 요한은 18절에서 말씀하셨는데 특별히 두 행악자와 관계된 내용을 누가는 39~43절에서 기록을 한 것입니다. 28절이 없는 것과 각주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없는 것은 고대 사본에만 있고, 다른 중요한 사본에는 없기 때문이요, 그 내용은 “불법자와 함께 인정을 받았다 한 성경(사 53:9 참조)이 응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본을 옮기는 과정의 착오이겠지만 영감으로 주신 말씀에 불충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5) 29~32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당시에 주위 사람들이 동정을 보내지 않고 비난한 내용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면서 “성전을 3일 안에 짓겠다 한 자여, 또 이스라엘 왕이라 한 자여 자신은 왜 구원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등으로 욕하고 희롱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태는 39~42절에서 같은 말로 기록하였고, 43절에서는 “저가 하나님을 신뢰한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할 것이다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누가도 35절과 37절에서 비난 사실을 간단히 말하였습니다. 또 32절에서 “함께 못 박힌 자들도 욕하더라” 한 말씀에 대하여 마태만 44절에서 기록하였고, 누가는 행악자와의 대화와 한편 강도의 구원에 대하여만 기록하였으며(눅 27:39~43) 요한은 두 강도가 나타낸 사실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2. 운명하실 때의 정황(33~41절)

이 부분의 말씀은 마 27:45~56, 눅 23:44~49, 요 19:28~37에 기록되었습니다.

1) 33절에서 마가는 “6시로 9시까지 어두움이 계속되었다” 하였는데, 마태도 같은 기록을 하였습니다(마 27:45). 여기에 대하여 누가는 “6시쯤”으로 표현하였고, 요한은 그 시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2) 34~35절에서 “9시에 예수님이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곁에 있는 자들이 엘리야를 부르는 뜻이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마 27:46~47과 꼭 같습니다. 그 다음 36절에서 “한 사람이 달려가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그것을 갈대에 꿰어서 예수님의 입에 댄즉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 하였는데, 이 내용은 마태의 기록도 같습니다(마 27:48~49). 이것은 23절의 몰약 탄 포도주를 드렸으나 마시지 않으신 사건과 다른 것입니다. 몰약(쓸개, 마 27:34) 탄 포도주는 못 박기 전에 시행한 것이고, 이 신포도주는 십자가를 세웠을 때 예수님이 “모든 일이 이룬 줄 아시고 성경(시 69:21)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셨을 때 그렇게 한 것인데(요 19:28~30) 이때에는 “예수님이 받으셨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1차, 2차의 포도주 문제를, 요한은 1차의 포도주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3) 37절에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 하셨는데(마 27:50), 이 크게 소리 지르신 내용이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내용과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눅 23:46)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운명하시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신 것과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과 “다 이루었다” 하신 것과 “내 영혼을…부탁하신다”는 말씀만 하셨는가? 할 때 그 앞에서 세 마디를 더 하셨습니다. 맨 처음에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신 말씀과(눅 23:34)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과(눅 23:43)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요 19:26) 하신 말씀이 더 있었던 것입니다.

4) 운명하시자 38절에서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마 27:51도 같음) 누가는 “위로부터 아래로”란 표현이 없이 “성소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눅 23:45) 하였는데, 이것이 운명 전이나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기록된 것이 마태와 마가의 기록의 차이점입니다. 운명은 골고다에서 있은 일이고 성소 휘장은 성 안에서 된 일이니까 그 사건을 동시에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징조에 대한 말씀없이 시체 점검 절차만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자던 성도들이 이러난 것”은 마태의 고유기록입니다(마 27:51~53).

5)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지도한 백부장과 지키던 자들의 반응에 대한 말씀인데 마가는 39절에서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였고, 마태는 “백부장이 지키던 자들과 함께…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며(마 27:54), 누가는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였고, 또 “구경꾼들이 그 된 일을 보고 가슴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눅 23:47~48).

6) 그 다음 39~41절에서는 “멀리서 보고 있던 여자들을 기록하였는데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며 함께 올라온 자들로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마 10:3)와 요세(이는 작은 야고보의 동생)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마 27:56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기록됨, 예수님의 이모인 듯 함, 요 19:25)가 있었다” 하였고, 누가는 49절에서 “예수님 아는 자들로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자들도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목요일 오후 3시경(유대력으로 9시)이었습니다.

7) 요 19:31~37에서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한 사실과 “예수님 시체의 다리를 꺽지 않고 옆구리에 창을 찌른 사실”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본문을 또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정황을 4복음에 따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죄사함의 은총과 관련하여 마음에 뜨거움을 느껴습니다.

3. 장사지냄(42~47절)

1) 42절에서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요 저물 때라” 하였으니, 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신 것과 안식일 전(즉 해지기 전)에 장사지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누가와(눅 23:54) 요한도(요 19:42) 말씀하였고, 43절에서는 “아리마대(예루살렘 북쪽 10㎞쯤 라마가 있는데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이며 같은 장소로 추정한다 함, 삼상 1:19, 납달리 지역인 갈릴리 바다 서북쪽 16㎞쯤에도 라마가 있음, 수 19:36)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시체를 달라” 하였고, 또 그는 “존귀한 자요 공회원이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이 “부자요 예수님의 제자라” 하였고(57절), 누가는 “공회원이요 선하고 의로우며 저희(제사장, 서기관들)의 결의와 행사에 가하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50~51절) 하였으며, 요한은 “그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숨긴 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용감하게 나서서) 시체를 달라 하여 가지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2) 44~45절에서는 빌라도가 “요셉으로부터 시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고 물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 내주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마가의 고유기록입니다. 그리고 본문 46절에서는 “요셉이 시체를 세마포로 싸고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 하였는데, 마태는 같은 기록을 하면서 무덤을 “새무덤”으로(마 27:60), 누가는 “장사 안 지낸 바위에 판 무덤”으로(눅 23:53), 요한은 요 19:39~40에서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을 갖고 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싼 것”을 말하였고, 또 41~42절에서는 “그 못 박힌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사람을 장사 지내지 않은 새 무덤이 있었는데 그곳이 가까워서 거기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3) 다음은 장사 지낸 다음의 상황인데 마가는 본문 47절에서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4절)가 예수님 둔 곳을 보더라” 하였고, 마태는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 26:61) 한 후에 그 다음날(안식일)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유혹자가 3일 만에 살아난다 하였는데 혹 시체를 도적질해 가고 살아났다 하면 어찌합니까? 하니까 빌라도가 파숫군을 세워 인봉하고 힘대로 굳게하라”(마 26:62~66) 하였고, 누가는 눅 26:56에서 “예수님이 장사된 것을 본 여인들이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또) 예비하고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장사 지낸 후의 정황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상과 같이 4복음에 나타난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네 사람의 저자가 다 개성이 있게 증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9 과 부활의 주일 새벽 (막 16:1~8) 목록으로


본 장을 두 과목에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① 1~3절은 “여인들의 무덤 방문”이고, ② 4~8절은 “천사의 만남과 증언”입니다. 총 제목은 “부활의 주일 새벽”으로 정하였습니다.

1. 여인들의 무덤 방문(1~3절)

이 부분에 대하여 마태는 마 28:1~8에서, 누가는 눅 24:1~12에서, 요한은 요 21:1~10에서 각각 그들이 받은 영감대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1) 여인들이 방문한 때에 대하여 본문 1, 2절은 “안식일이 지난…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라” 하였는데, 마태는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이라(1절)” 하였으니, 해 돋은 때와 미명은 차이가 있지만 미명으로 표기한 저자는 출발시간부터 말씀한 것이고, 해 돋은 때로 표기한 저자는 도착 이후의 때를 표기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일(하루)에서 그 다음날로 넘어가는 시간을 보통 해진 다음부터 계산하는 유대인들의 관행이 있지만(눅 23:54, 요 19:31, 엡 4:26) 본문은 해가 돋고 하루의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을 첫날로 말씀한 뜻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밝은 때를 시작으로 표현한 경우는 특별한 것입니다. 누가는 “첫날 새벽”으로(1절), 요한은 “아직 어두울 때”로(5절) 표기하였습니다.

2) 방문한 여인들의 수에 대하여 본문 1절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마 20:21, 막 15:40, 요 19:25, 예수님의 이모로 짐작함)라” 하였고,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만 거론하였으며, 누가는 “이 여자들(1절, 10절, 눅 23:27, 여자의 큰 무리)”로,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1인만 대표로(1절) 기록하였습니다.

3) 방문자들이 “향품을 사두었다가 그것을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려고 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돌을 굴려 주리요(1~3절)” 한 것인데, 여기의 “무덤 돌 옮길 것을 염려한 것”은 마가의 고유기록이고, 향품 이야기는 마가와 누가도 말하였으며(1절), 마태는 “무덤을 보러 왔다”고 하였습니다(1절).

4) 그 다음에는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의 정황입니다. 본문 4~5절에서는 “눈을 들어 본즉 벌써 심히 큰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2절)와 요한(1절)도 그렇게 표현하였는데, 마태는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무덤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었다”(2절)고 하였습니다. 이때 마가가 기록한 천사의 모습은 “무덤에 들어가 본즉(여인들이 들어간 것은 제자들에게 알린 후, 다시 베드로의 뒤를 쫓아가서 함께 들어간 것임, 요 20:11~14) 한 청년이 (시체 놓였던 자리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랐다” 하였고, 마태는 “하늘로서 내려온 천사가 굴려낸 돌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며 그때 수직하던 자가 저를 무서워하여 죽은 자 같이 되었다”(2~3절) 하였으며, 누가는 (그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간즉) “주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댔다”(3~5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인들이 1차로 무덤에 들어가 확인하는 기사”를 요한은 생략하였고, 나중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들어가서 확인 한 후(2~10절) 그 다음에 2차 확인하는 내용만 기록하였습니다(11~13절).

2. 천사의 말씀과 증언(4~8절)

1) 6~7절은 천사의 증언인데 그 천사를 마가는 “흰 옷 입은 한 청년(5절)”으로, 마태는 “번개 같고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2절)”로, 누가는 “찬란한 옷 입은 두 사람(4절)”으로, 요한은 “흰 옷 입은 두 천사(13절, 이 부분은 2차에 나타난 것)”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저자가 보고 들은 대로, 또 상황을 포착한 시점에 따라 주관적 관찰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시면 “청년(천사)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막 14:28)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뵙는다”는 말씀은 약속예언(막 14:28, 마 26:32)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신 것(요 21:1)은 당일이 아닌 후일에 된 일입니다. 이때에 “여자들은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무서워하였으며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 순간에 무서웠던 상태를 마가만 기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마태도 표현한 중 7~8절을 보시면 “빨리 가서…전하라” 하였고,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하였다” 하였는데, 누가는 6~10절 중에서 천사의 증언을 한 마디 더 첨부하였으니, 곧 “갈릴리에서 말씀한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일에 살아나리라(눅 13:33, 마 20:19) 하셨느니라 하고 이 모든 것을 11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라”(7~9절)고 하였습니다.

2) 그 다음에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고하는 내용”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생략되고, 누가복음 10~13절에서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고한즉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 뵈어 믿지 않았는데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여 기이히 여기고 집으로 갔다” 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요한은 요 20:2~10에서 더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사도요한으로 추정함)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고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면서(요 20:9, 눅 13:33, 마 20:19) 자기 집으로 갔다” 하였고, 11~14절에서 그때에 사도들에게 고한 여인들도 베드로의 뒤를 따라 다시 무덤에 와서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 누우셨던 자리의 머리편과 발편에 앉아 있으면서 어찌하여 우느냐? 하였고 내 주를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고 뒤로 돌이킬 때 예수님을 보았으나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으로(9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난 것입니다(요 20:15~18).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저희들에게 주시는 의미를 잘 관철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음 과목을 유의하십시오.

 

제 30 과 만남과 분부와 승천 (막 16:9~20) 목록으로



본문 ① 9~11절은 “부활의 주를 처음 만남”이고, ② 12~13절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심”이며, ③ 14절은 “11제자에게 나타나심”이고, ④ 15~20절은 “분부와 승천”입니다. 전체의 제목을 “만남과 분부와 승천”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유의하실 것은 이 문장 전체가 [ ]로 묶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헬라어 성경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의 내용이 없는 사본도 있기 때문입니다(각주 참고). 그러나 천주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에는 아무 표시도 없이 수록되었습니다.

1. 부활의 주를 처음 만남(9~11절)

1) 9절 말씀은 “예수께서 안실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눅 8:2)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하셨는데, 이 부분의 내용이 요 20:13~18에 기록되었은즉 확인하십시오. 여기의 “먼저 보이셨다”는 말씀이 마가의 고유 기록이고, 이 시기와 장소는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도성으로 오는 도중, 동산에서 먼저 만나주신 것입니다. 마 28:8~9과 요 20:15~16에서 여러 여인들을 만나시기 전에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만한 믿음과 사모의 열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이니까요(마 9:29). 그때에 예수님은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그 동산을 벗어나기 전에 마 28:9을 보시면 “예수님이 저희를 만나 평안하뇨 하였을 때 여러 여자들이 나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 하였은즉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두 번 만나기 전(무덤에서 동산으로 잠깐 걷는 사이)에 하나님께 다녀오신 것으로 아셔야 하며(고전 15:24), 또 “보이셨다는 말씀”은 부활체를 계시하셔야만 볼 수 있고, 또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내실 수 있음(12절)을 알 수 있는데 그 기회에 베드로도 예수님을 뵙게 된 줄 압니다(눅 24:34).

2) 10~11절의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여) 슬피하며 울고 있는 중에 그 사실을 고한즉…듣고도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슬퍼하며 울고 있었으니” 이 내용은 마가의 고유 기록이고 이때는 당일 낮에 있었던 일로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합석하기 전이었고, 이때(오전쯤)에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확인하러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눅 24:10~12, 요 20:1~8).

2.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심(12~13절)

1) 12절의 말씀대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그날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 눅 24:13~32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13절은 “그 두 제자가 당일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와서 모인 제자들에게 자기의 경험사실을 말하였으나 믿지 않았다” 하였는데(눅 24:33~35) 그때는 여인들의 통고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말한 다음이었으니, 곧 주일 저녁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2) 주일 낮에 또 한 가지 있었던 사건은 “여인들이 무덤을 떠난 후에 파숫군 몇 명이 대제사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므로 군병들이 잠잘 때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맞은 것으로 거짓 유포하였다”는 말씀이 마 28:11~15에 나타나 있습니다.

3. 11제자에게 나타나심(14절)

1) 14절에서 “그 후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8:16~17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에서 11제자를 만나신 사건으로 이 본문과는 같은 행사는 아니며, 요 20:26~29의 말씀이 이 내용에 해당하는 줄 압니다. 따라서 부활 당일 저녁에 실내에서 모였을 때 예수님이 처음 나타나신 기사는 눅 24:36~43과 요 20:19~25의 말씀이고, 본문 14절과 같은 사건은 요 20:26~29(8일 후 도마 있을 때)의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11제자의 모임이 도마가 있을 때 다시 나타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2) 눅 24:36~43을 보시면 “이 말을 할 때에(베드로와 엠마오 쪽에서 온 두 사람의 증언) 주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으라 하셨고, 제자들이 놀라며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한즉 왜 두려워하며 의심하느냐?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면서 나의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하신즉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할 때 먹을 것을 구하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린즉 받아 잡수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첫날 저녁의 일입니다. 또 요 20:19~25은 부활의 첫날 저녁이므로 본문과는 상통하지 않고, 26~28절(8일 후) 말씀이 분문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마가는 도마가 없을 때 첫 번 나타나신 일은 생략한 것입니다(제가 이것을 기록하면서 역사 순서에 따른 통합 복음서를 편집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4. 분부와 승천(15~20절)

1)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분부하신 내용은 복음서 저자마다 특징있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는 마 28:18~20에서 “제자를 삼고 세례 주는 일과 전도 교육에 중점을 두어 말씀” 하셨고, 누가는 눅 24:44~49에서 “예언의 성취와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회개 및 전파의 역사가 있을 것”을 분부하셨으며, 요한은 요 20:30~31에서 “성경 기록에 대한 말씀”과 21장 전체에서 “베드로의 재소명에 대한 말씀과 증거의 기록에 대하여” 말씀하고 끝을 맺었습니다.

2) 마가가 말씀한 분부는 15절에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 16절에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라”, 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행 16:11~18) 방언을 말하며(행 2:6) 뱀을 집고(행 28:3)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유세비오의 역사에 전통적으로 나타난 경험이 있다 하나 성경에서 증명된 바는 없음)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행 9:17~19, 28:8)”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초대교회 당시에 성취되고 일단락(기독교가 증명되었으므로, 마 11:5, 히 2:4)된 것입니다.

3) 19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눅 24:50~52에서 예수님이 분부를 끝내신 후 “베다니 앞(감람원을 뜻함, 행 1:12)에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더라” 하셨고, 마태, 요한은 승천기사를 쓰지 않았습니다. 더 자세한 승천기사는 행 1:6~11에 기록되었습니다.

4) 20절에서 “제자들이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하므로 마가는 오순절 이후 또는 사도시대 초기에 나타난 역사의 일부를 수록한 것입니다(공동번역을 보시면 21, 22절도 있는데, 그 기록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2006. 7. 7 마침

 

 

4복음서 내용 비교표 목록으로

마가복음

내 용 제 목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7:31~37

귀먹은자를 고치심

15:29~31

8:1~10

7병2어의 이적

15:32~38

8:11~12

표적을 구하는자들

15:39

8:13~21

두가지 누룩

16:5~12

8:22~26

소경을 보게하심

9:6~12

8:27~30

베드로의 신앙고백

16:13~20

9:19~21

8:31~9:1

십자가와 부활예언

16:21~28

9:22~27

9:2~13

변화의 광경을 보이심

17:1~13

9:28~36

9:14~29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17:14~21

9:37~43

9:30~32

두 번째 고난예언

17:22~23

9:43~45

9:33~50

겸손과 소자에대한 예언

18:1~35

9:45~50

10:1~12

이혼에 대한 교훈

19:3~12

10:13~16

어린이를 축복하심

19:13~16

18:15~17

10:17~31

부자청년을 권고하심

19:16~30

18:18~30

10:32~34

세 번째 고난 예언

20:17~19

18:31~34

10:35~45

두 제자의 요구

20:20~28

10:46~52

소경을 보게하심

20:29~34

18:35~43

11:1~11

예루살렘 입성

21:1~11

19:29~44

12:12~19

11:11

베다니로 나가심

12:36

11:12~14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1:12~14

11:15~18

성전을 청결케 하심

21:12~13

19:45~48

11:19

또 베다니로 오심

21:17

11:20~26

마른 무화과를 확인하심

21:19~22

11:27~33

권위에 대한 질문

21:23~27

20:1~8

12:1~12

농부비유

21:33~46

20:9~19

12:13~17

납세에 대하여

22:15~22

20:20~26

12:18~27

부활에 대한 질문

22:23~33

20:27~40

12:28~34

큰 계명

22:34~40

마가복음

내 용 제 목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12:25~37

메시야에 대한 질문

22:41~46

20:41~44

12:38~40

외식자에 대한 저주

23:13~39

20:45~47

12:41~44

헌금에 대한것

21:1~4

13:1~2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

24:1~2

21:5~6

13:3~33

재림의 징조

24:3~42

21:7~36

13:34~37

깨어 있으라

12:34~40

14:1~2

대적자들의 공모

26:1~5

22:1~2

14:3~9

향유를 부은 사건

26:6~13

12:2~8

14:10~11

유다의 배신 약속

26:14~16

22:3~6

14:12~16

유월절 준비

26:17~19

22:7~13

14:17

최후 만찬 시작

26:20

22:14~18

14:18~21

유다의 이탈

26:21~25

22:21~23

13:18~32

14:22~26

성만찬을 마치심

26:26~29

22:19~20

14:27~31

베드로의 부정 예언

26:31~35

22:28~38

13:33~38

14:32~42

겟세마네의 기도

26:36~46

22:40~46

18:1

14:42~52

예수님이 잡히심

26:47~56

22:47~54

18:2~12

14:53~65

제사장(들)의 재판

26:57~68

22:54~55

18:24

14:66~72

베드로의 부정

26:69~72

22:56~58

18:25~27

15:1

공회에서 재판받으심

27:1

22:66~71

15:2~5

빌라도의 1차재판

27:2

23:1~5

18:26~38

15:6~15

빌라도의 2차재판

27:15~26

23:13~25

18:39~19:7

15:16~19

재판 종결과 희롱

27:27~30

19:8~16

15:20~23

골고다로 가심

27:31~34

23:26~32

15:24~37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27:35~50

23:33~46

19:17~30

15:38~41

백부장의 고백

27:51~56

23:47~49

15:42~47

장사지냄

27:57~61

23:50~56

19:38~42

16:1

부활과 두 여인

28:1

16:2~8

천사의 나타남

28:5~8

24:1~11

16:9~11

마리아(막)에게 나타나심

20:14~18

16:12~13

두 제자를 만나심

24:13~35

마가복음

내 용 제 목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16:14

11제자에게 나타나심

20:16~31

16:15~18

사명을 주심

28:18~20

24:44~49

16:19~20

승천하심

24: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