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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누가와 서론 (눅 1:1~4) 6 바로가기

제2과 요한을 잉태케 하심 (눅 1:5~25) 9 바로가기

제3과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 (눅 1:26~56) 12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8) 15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말씀의 전능성 (눅 1:37) 17 바로가기

제4과 요한의 출생 (눅 1:57~80) 19 바로가기

제5과 예수님 탄생 때에 있은 일 (눅 2:1~20) 21 바로가기

제6과 할례와 결례 (눅 2:21~40) 24 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 12세 때의 있은 일 (눅 2:41~52) 27 바로가기

제8과 요한의 출현과 사역 (눅 3:1~22) 29 바로가기

제9과 예수님 족보에 대한 연구 (눅 3:23~38, 마 1:1~16) 32 바로가기

     표 1. 예수님의 족보 34 바로가기

제10과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심 (눅 4:1~13) 36 바로가기

제11과 나사렛에서 하신 일 (눅 4:14~30) 38 바로가기

제12과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 (눅 4:31~44) 40 바로가기

제13과 게네사렛 호수에서 있은 일 (눅 5:1~11) 42 바로가기

제14과 두 병자를 고치심 (눅 5:12~26) 44 바로가기

제15과 레위 집에서 있은 일 (눅 5:27~39) 46 바로가기

제16과 안식일에 할 일 (눅 6:1~19) 48 바로가기

제17과 평지 보훈 (눅 6:20~49)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3. 네 가지 도덕률 (눅 6:37~38) 53 바로가기

제18과 두 가지 이적 사건 (눅 7:1~17) 55 바로가기

     설교보충 4. 백부장의 덕과 신앙 (눅 7:1~10) 57 바로가기

제19과 바리새인들의 완악을 책망하심 (눅 7:18~35) 59 바로가기

제20과 죄 있는 여인의 봉사 (눅 7:36~50) 60 바로가기

제21과 전도에 합력한 사람들 (눅 8:1~25) 62 바로가기

제22과 세 가지 큰 사건 (눅 8:26~56) 65 바로가기

제23과 전도 사역을 명하심 (눅 9:1~17) 68 바로가기

제24과 신앙고백과 사명적 교훈 (눅 9:18~27) 70 바로가기

제25과 변화의 계시와 간질병을 고치심 (눅 9:28~45) 72 바로가기

제26과 제자들의 취할 태도 (눅 9:46~62) 74 바로가기

제27과 전도대 파송에 관한 말씀 (눅 10:1~20) 77 바로가기

제28과 전도 사역 중 있었던 일 (눅 10:21~42) 79 바로가기

제29과 기도를 가르치심 (눅 11:1~26) 81 바로가기

제30과 여러 가지 교훈 (눅 11:27~41) 85 바로가기

제31과 화 있을진져 (눅 11:42~54) 87 바로가기

제32과 어리석은 부자 (눅 12:1~31) 89 바로가기

제33과 지혜로운 사명자가 되라 (눅 12:32~59) 92 바로가기

제34과 참변에 대한 문답 (눅 13:1~18) 95 바로가기

제35과 여러 가지 말씀 (눅 13:19~35) 98 바로가기

제36과 초청에 대한 예절 (눅 14:1~14) 100 바로가기

제37과 떡 먹는 자의 복 (눅 14:15~35) 102 바로가기

제38과 잃은 자 회복의 교훈 (눅 15:1~32) 104 바로가기

제39과 불의한 청지기 (눅 16:1~13) 107 바로가기

제40과 바리새인에게 교훈하심 (눅 16:14~18) 109 바로가기

제41과 부자와 나사로 비유 말씀 (눅 16:19~31) 110 바로가기

제42과 충성된 종 (눅 17:1~19) 112 바로가기

제43과 인자의 날의 상황 (눅 17:20~37) 114 바로가기

제44과 기도에 대한 말씀 (눅 18:1~18) 116 바로가기

제45과 관원의 부족을 지적하심 (눅 18:18~43) 118 바로가기

제46과 삭개오와 므나 비유 (눅 19:1~27) 121 바로가기

제47과 예루살렘에 들어오심 (눅 19:28~48) 125 바로가기

제48과 포도원을 세로 준 비유 (눅 20:1~26) 127 바로가기

제49과 부활에 대한 질문 (눅 20:27~47) 129 바로가기

제50과 예루살렘 멸망 예언 (눅 21:1~24) 131 바로가기

제51과 재림의 징조와 준비 (눅 21:25~38) 134 바로가기

제52과 예수님의 유월절 (눅 22:1~27) 136 바로가기

제53과 마지막 부탁과 기도 (눅 22:28~46) 139 바로가기

제54과 종교재판을 받으심 (눅 22:47~71) 142 바로가기

제55과 일반재판을 받으심 (눅 23:1~25) 144 바로가기

제56과 돌아가심과 관계된 일들 (눅 23:26~56) 146 바로가기

제57과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눅 24:1~35) 149 바로가기

제58과 축복과 승천 (눅 24:36~53) 151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먼저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끌리게 하신 것과 여유 있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건강을 붙들어 주심으로 성경 말씀을 밝히는(빌 2:16) 사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 66권을 다 쓰려는 마음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건강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 누가복음 강론을 기록하기 전에 이사야서와 호세아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강론을 끝내놓고 교정할 틈도 없이 누가복음 강론을 또 쓰게 되었고, 인물 중심 성경 공부도 집필을 중단한 상태이며, 7분 설교 8집을 작성하는 일과 다른 설교문을 편집하는 일과 또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 등 바쁜 작업을 하면서 이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한번은 저희 목회를 돕는 이성광 목사님이 눅 5:1-9의 본문으로 설교하신 일이 있었는데, 저도 그 본문으로 설교 한편을 정리할 생각으로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문철을 뒤지다가 그 분량이 상당히 많아서 급기야 그것을 정리할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잘 끝나게 된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필자의 성경 강론은 학자적 연구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고 평신도가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 나는 부분들을 점검하고 좌우를 살피는 정도의 글을 쓴 것입니다. 그 정도의 수준으로 성경 66권을 다 살핀다 하여도 상당한 세월을 요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글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외면하는 줄 압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별로 희망이 없는 일을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믿기 때문에 필자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이 일에 집착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혹 후배 교역자님들이라도 필자의 말씀에 대한 집중력의 반만의 노력만 갖고라도 이 강론문을 섭렵하여 읽고 본문이 나타내주시는 교훈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큰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2003. 6. 8.


필자 지 영 근 드림

 

 

 

제 1 과 누가와 서론 (눅 1:1-4) 목록으로


누가복음을 살핌에 있어서 먼저 누가란 인물을 살피고 서론을 공부하겠습니다.

1. ‘누가’란 이름의 뜻은 ‘빛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빛 되기를 사모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헬라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이 증명하고 있고, 또 헬라인 귀족 ‘데오빌로’(“하나님의 친구”란 뜻)를 잘 알고 있었으며, 아람어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쓴 흔적이 있고(달리다굼; 막 5:4, 일어나라; 눅 8:54, 호산나; 막 11:9, 영광; 눅 19:38), 또 바울 사도가 헬라 전도를 하실 때 동행한 사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행 16:10, 17). 또 골 4:14에서 ‘의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책에는 의학 용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중한 열병”(4:38),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5:12), “열매로 나무를 안다”(8:44),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행 3:7),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행 5:5), “다비다의 시체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행 9:40),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3)는 용어들입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누가가 의술을 발휘하여 병자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육체의 병 고치는 사업을 버리고 영생하는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누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의원 누가”라 하셨고(골 4:14), ‘동역자’라 하셨으며(몬 24절), 바울이 마지막으로 로마 감옥에 계실 때 “누가만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딤후 4:11). 누가가 언제부터 믿음 생활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 궁금한데, 이 내용은 초대교회의 교부 ‘테툴리안’(160-240년)이 증언하기를 “누가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2.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주후 60년경으로 추측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21:20에서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전이 되는 것이고, 또 사도행전 기록과 연계할 때 행 1:1-2에서 “먼저 살핀 일이 있다” 하였으므로 사도행전 기록보다 앞 순서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은 인물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행적을 알았을까? 하지만 본래 영감이란 모르는 미래도 계시하는 것이니까 문제될 것이 없지만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이나 문헌을 통해서 연구하고 들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예루살렘에 온 사도들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가이사랴’에 갇혀 있을 때나(행 24:1-27) 바울 사도와 함께 이방 전도를 하였을 때 예수님의 사건을 잘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에는 마태, 마가복음에 비할 때 특별한 내용들이 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탄생 이전의 역사”(눅 1:5-80), “예수님 탄생 당시의 자세한 기록”(2:1-38), 소년 시절의 기록(2:41-52), “나사렛에서 가르치시고 배척받은 사실”(4:16-30), “빚진 자에 대한 교훈”(7:36-43),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와 현명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11:37-12:48), “70인을 파송하신 사건”(10:1-16), 사마리아에서 배척당하신 일(9:51-56), 열 문둥이를 고치신 일(17:11-19),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마리아와 마르다와 밤중에 찾아온 친구 이야기(10:25-42, 11:5-13)와 70인의 보고(10:17-24)와, 그 외 13장에서 18:14까지의 내용들입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적 기사를 꼽는다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강조한 점(3:21, 5:16, 6:12)과 죄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점(7:36-50, 15:1-24, 11:32)과 여인의 기사(7:36-47, 8:1-3, 10:38-42)와 예수님의 인류애를 강조한 말씀(10:30-37, 41:1-6) 등이 있는 것입니다.

3. 본문을 살피면

1) 1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과 복음 사역, 즉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재료를 수집하여 기록하려는 사람이 많았다”(2절) 하였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이적을 행하신 것 등)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인 만큼 그 역사를 탐구하여 기록에 남기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성경이 아닌 단편 문서들도 나왔고, 또 영감을 받아 기록한 복음서도 나오게 된 것이요, 유세비오(4세기 당시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이며 역사가)의 역사도 그 후시대의 산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 중에 누가도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기록한 글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로 알았으니, 그 목적은 진리를 배우는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라”(3-4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① 예수님의 행적이 역사적 사건이란 점

② 예수님은 곧 말씀이란 점(요 1:1), 따라서 “말씀의 목격자”는 예수님을 직접 본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의 증언을 의미하는 것이고

④ “저술”을 하여 전달한 뜻은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고, 또 문서로 선교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 2,000년 전의 누가의 저술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⑤ “배운 바의 확실함”이란 말씀에서 진리를 배워 확신한다는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딤후 3:14).

4. 결론적으로 누가의 신앙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1) 누가는 의술을 던지고 복음을 택한 사람입니다. 누가의 행적에 “의술로 병 고쳐주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만 전한 모양입니다. 좋은 기술, 좋은 직장, 평안한 생활을 버리고 복음을 택한 자는 참으로 진리의 맛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빌 3:7-8).

2) 진리의 연구가요 저술가입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는 말씀에서 누가는 진리의 세심한 연구가임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저술하여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면 높은 귀인의 믿음에 확신을 줄 뿐 아니라 진리 보존 확장에도 큰 유익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구하는 자에게 영감도 주십니다.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누가는 겸손한 사명자였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도 자기의 이름을 밝힌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란 복수명사 속에 포함한 것입니다(눅 1:1, 행 27:1, 28:1, “우리가” 속에 포함). 선교를 다니면서 의술의 혜택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나타내지 않은 것입니다. 골 4:14에서 바울 사도가 누가를 가리켜 “사랑 받는 동역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가 겸손하게 복종을 잘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고난에 동참한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마가’가 도중하차한 사실을 거론하신데 반하여(행 13:13) 누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 노정인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동행하였고(행 16:10-17), 또 3차 여행 중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 그것도 핍박이 많을 때 동행하였으며(행 20:5-21:18),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도 같이 갔고(행 27:1-28:16), 바울의 최후 순교 직전에도 “바울 곁에 함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딤후 4:11). 딤후 4:9을 보시면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5) 전설에 의할 때 그는 100년경까지 전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많은 은혜를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누가’에게 돋보이는 것은 ① 의원직을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과 ② 진리를 자세히 살피다가 영감을 받고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점과 ③ 끝까지 고난에 동참하는 사명자의 역할을 다한 점이라 할 것입니다.

 

제 2 과 요한을 잉태케 하심 (눅 1:5-2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전체적 제목은 “요한을 잉태케 하심”입니다. ① 5-7절은 “요한의 잉태 시기와 그의 부모에 대한 말씀”이고, ② 8-13절은 “사가랴가 요한 출생에 대한 계시를 받는 내용”이며, ③ 14-17절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이고, ④ 18-20절은 “증표를 주신 사실”이며, ⑤ 22-25절은 “백성들과 엘리사벳의 반응”을 말씀하셨습니다.

1. 요한의 잉태 시기와 그 부모에 대한 말씀(5-7절)

1) 요한의 잉태 시기는 “유대 왕 헤롯 때이고, 아비야 반열이 제사장으로 섬기던 시기”(5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롯’ 왕은 예수님 탄생 당시에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왕으로(마 2:16),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눅 23:6-7)와 그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행 12:23)와 또 그의 증손자(헤롯 아그립바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6:1-23)가 있기 때문에 처음 헤롯을 대 헤롯이라고 합니다. 그는 포악한 왕으로 알려졌고, 가이사랴 성과 사마리아 성,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다고 합니다(요 2:20). 37년을 재위하고 예수님이 출생한 다음 해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인 ‘누가’처럼 성경을 자세히 미루어 살피신다면 반드시 「성경인명사전」을 펼치셔서 헤롯 등 모든 인물들에 대하여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또 요한의 잉태 시기는 제사장 아비야 반열에 속한 ‘사가랴’가 자기의 제사적 봉직을 마치고 집으로 간 후였습니다(8-14, 23-24절). 이 말씀의 “아비야 반열”이란 다윗왕 말기에 제사장들을 24조로 나누어 한 주간씩 제사장직을 맡아 교대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대상 24:10에 보시면 ‘아비야’ 반열이 8번에 해당합니다. 그 후 제사장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해당 반열에서 몇 사람씩 제비를 뽑아 당첨되는 사람만 봉직하게 된 것입니다(8-9절, 출 6:23, 대상 24:7-19). ‘탈무드’(70-200년 사이에 제작한 유대인 랍비들의 교육서)에 기록되기를 아비야 반열이 70년 8월 4일에 성전 봉직을 하였다 하니 24x7x70으로 소급하면 그 시기를 측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2) 요한의 부모에 관한 말씀입니다. 5절에서 ‘사가랴’(“여호와의 기억하시는 자”란 뜻)는 아론과 아비야의 후손이고, 그의 부인 ‘엘리사벳’(“하나님의 언약”의 뜻)도 아론의 후손인데,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욥이나 요셉이나 시므온, 고넬료 등을 의인으로 일컬은 일이 있는데,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의의 성격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것”입니다(6절). 그렇다고 하여 율법적 완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갈 3:10-11). 하나님은 지금도 이 같은 의인을 요구하십니다(빌 2:15, 엡 1:4). 두 사람은 의인이지만 그때까지 무자하였고 나이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7절).

2. 사가랴가 “요한 출생에 대한 계시를 받은 말씀”입니다(8-13절).

1) 사가랴가 자기의 반열을 따라 성전에서 봉직할 때(8절)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직임은 바깥 제단에서 하는 일도 있고, 성소에 들어가서 하는 일도 있는데, 9절에서 제비를 뽑은 것은 “성소에 들어와서 분향할 자”를 뽑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제물을 갖고 온 백성들은 성전 마당(제단 주위)에서 기도하게 됩니다(10절).

2) 그 때에 주의 사자가 향단 우편에 나타났으니(11절), 이것은 ‘사가랴’가 이상 중에 본 계시였습니다(22절).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주의 사자(천사)가 문득 나타났으니 무서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2절). 이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너의 간구가 응답되어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줄 것인즉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늙었지만 아들 낳기를 기도한 줄 압니다. 하나님은 말 4:5-6에서 요한의 출생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므로 그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경건한 부부에게 그런 소원을 주시고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빌 2:13).

3) 이름까지 지어주신 뜻이 무엇일까요? ‘요한’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할 것과 그의 경건한 생활을 아시고 거기에 합당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에 복종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요 14:21-23).

3. 요한의 “맡은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14-17절).

1) 우선 요한이 출생하면 “그 부모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4절). 늙어서 아들을 낳았고, 또 예언의 성취와 천사의 계시를 따라 큰 일을 감당할 아들을 낳았으니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것은 당연합니다.

2) 15절에서는 요한의 성장 모습을 예언하였는데

① “주 앞에 큰 자가 된다” 하셨으니, 여기에 대한 성취는 예수님이 마 11: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요한이 위대한 의미에 대하여는 「기독교신앙백과」 708, 710페이지를 참조하십시오).

②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 하신 것은 요한이 경건하고 성별되게 성장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세속적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③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복중에서부터 성령님의 권고가 있을 것을 의미하며

④ “이스라엘 자손을 주 앞으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 하신 것은 그가 유대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선포하고(마 3:1) 전도자의 사명을 다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고, 이 사실이 응한 것을 요 1:29, 35-3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⑤ 17절에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일할 것”을 예언하였으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란 엘리야와 같은 사상과 사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메시지 능력만 나타내고 이적은 행하지 않았습니다(마 3:1-6, 요 10:41).

⑥ 요한이 사역을 할 때 “주 앞에 앞서 감”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는 뜻이고(막 1:7-8),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함”은 거스리는 자식을 용서하고 가정을 화합하게 하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는 뜻이요,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함”은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를 회개하게 하여 지혜를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⑦ 그리하여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주님께 영광 돌릴 믿음의 백성들을 주 앞으로 인도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요 1:29-30, 3:30).

4. 증표를 주심에 대한 말씀(18-20절)

1) 18절을 보시면 ‘사가랴’가 천사의 예언을 듣고 “이것을 어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는 나이가 많은 데요”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이 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신이 안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실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2) 그 때에 천사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 받은 ‘가브리엘’이라고 하면서(19절) “네가 믿지 않음을 인하여 이 일이 이룰 때까지 너는 벙어리가 될 것이요 때가 되면 내 말은 이루어질 것이라”(20절)고 하였습니다.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는 일이 요한을 탄생시키는데 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 대적자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침묵을 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소식을 의심하면 하나님이 때리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행 27:25에 보시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한 바울 사도의 고백과 대조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가랴가 행동은 의로웠어도 믿음은 약할 수 있었고, 바울 사도는 한 때 예수님을 핍박했지만 개종한 후 그의 믿음만은 확실하였던 것입니다.

5. 백성들과 엘리사벳의 반응(22-25절)

1) ‘사가랴’가 성소에서 더디 나와서 말을 못하는 것을 본 백성들은 “그가 성소에서 이상을 본 줄로 알았다” 하였고, 사가랴는 그 상태에서 “직무의 날이 다 되었을 때 집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벙어리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 시한부로 주신만큼(20절)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직무의 날”이란 한 주간의 기간일 것입니다.

2) 그 후에 ‘엘리사벳’은 잉태하였고 5개월 동안 숨어있었으니, 이는 능력으로 잉태된 일에 대하여 잉태의 진전이 있기까지 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애주시려고 이렇게 하셨다” 하였으니 ① 하나님은 “특정인을 권고하시는 때”가 있음과 ② 자식 없는 부끄러움은 인간에게 당하는 일일 뿐임을 말하였고 ③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하여 사람 앞에 당하는 부끄러움을 면케 하시는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예언대로 그의 선구자를 보내셨고, 그가 세상에 출현하는 과정상의 모든 일까지 세밀하게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으며, 또 사가랴와 같은 경건한 성도의 가정이 쓰임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3 과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 (눅 1:26-56) 목록으로


본문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계시 받은 사실”이고(26-38절), 또 한 대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일”(39-56절)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로 정하였습니다.

1. 마리아가 계시를 받은 사실(26-38절)

1)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한 지 여섯 달 되었을 때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26-27절).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 동리에 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26절에 ‘가서’란 말씀과, 27절의 ‘이르니’ 하신 것과, 28절에 “그에게 들어가” 하신 것을 보면 천사가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 18:2).

2)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축복하니 마리아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큰 축복이므로 놀라고 두려워한즉(29절) 천사는 다시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0-31절)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와 비슷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뜻은 마 1:21에서 설명되었고, 이 사실을 “수태고지”라 하여, 수태고지 기념교회가 나사렛에 있습니다.

3) 천사는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① 저가 큰 자가 되고 ②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 ③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요셉의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④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고 ⑤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32-33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신다”는 뜻은 다윗을 메시야 왕의 모형 인물로 나타내신 뜻을 인용하신 것이고(시 22:1), “야곱의 집”이란 택자의 대명사로써(창 28:14) 구원받은 성도를 뜻하며, “그 나라가 무궁함”은 성도로 건설된 천국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4) 마리아가 정혼만 한 상태이므로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은즉,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인즉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34-35절) 하였으니, 이 말씀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되므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할 것을 의미하고(35절), 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수태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수태하여 여섯 달이 되었으니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36-37절).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하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신 예수님의 신분이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만 믿지 마시고, 반드시 말씀대로 일을 성취시키시고 감동하시는 능력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였고 천사는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계집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겸손을 뜻할 뿐만 아니라 비천한 인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1:48). 마리아가 하나님의 쓰신 대상이 되었다 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출생시킴에 있어서 쓰임이 되었을지언정 부정모혈(父精母血) 없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공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함으로 사가랴의 믿음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1:18).

2.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39-56절)

1) 마리아가 계시를 받은 후에 유대 땅의 한 동리인 산 중에 사는 사가랴의 집에 방문하여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습니다(39-40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족이라고 하였는데(36절), 친족이란 “수게니스”(συγγενὶs)가 친척으로도 번역되었으므로(막 6:4, 눅 14:12, 롬 9:3) 적당히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씨족의 4촌, 6촌일 수도 있고, 이종간, 고종간 또는 숙질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었을 때 아이(요한)가 복중에서 뛰놀았고, 그 때 엘리사벳이 성령에 충만하여 큰 소리로 예언하기를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니 네 태 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하므로 그 시기에 마리아도 잉태하였음을 나타냈습니다(41-42절). 또 계속 예언하기를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43-4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들이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일컬어 “내 주의 모친”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인륜적 의미일 뿐 신령한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하여 “어머니”라고 호칭하신 일이 없었습니다(요 2:4, 19:26, 27).

3) 엘리사벳의 예언에 뒤이어 마리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하였으니(46-55절)

① 곧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메시야를 잉태한 것을 확신하였고, 또 자신같이 비천한 여인을 하나님이 써주신 일에 대하여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혼(프스케; ψυχξ)이 찬양하고 마음(프뉴마; πνεὺμὰ)이 기뻐하였음에 대한 말씀”은 영적 실체의 이분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 실체의 이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과 혼, 즉 프뉴마와 프스케를 나눈다고 합니다. 그들은 프뉴마(영)가 아닌 프스케(혼)를 영적 탁월한 실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프스케는 찬양할 수 있는 탁월한 실체였습니다. 따라서 영과 혼과 마음은 같은 영적 실체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뿐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교리 설교문 “인간의 구성 요소”에 게재 됨).

②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성령으로 잉태케 하심)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능력의 상징)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함),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치셨으며(악한 권세에 대한 심판), 비천한 자를 높이 드셨고(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먼저 전파된 일; 마 4:15-16, 11:4-5),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막 8:1-9),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마 19:21-22).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요 13:1)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실 것이라” 하시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 언약을 메시야가 오셔서 확실하게 이루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③ 이 예언을 마친 후 마리아는 석 달쯤 후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56절). 이상의 말씀은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의 신앙과 메시야의 사역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믿음과 감사와 찬양과 예언으로 받은 은혜를 보답하였습니다.

 

설교보충 1.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8) 목록으로


“은혜를 받은 자여”란 제목으로 은혜와 관련한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은혜를 받은 자는 다윗 지파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였습니다. 성경에 마리아의 신분을 설명하시는 말씀이 없습니다. 엘리사벳의 친족이란 말씀만 있는데(눅 1:36), 친족이란 “수게니스”(συγγενὶs)가 친척으로도 번역되니까(눅 14:12, 21:16), 꼭 레위 지파란 확증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48).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특수한 은혜라는 점입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은혜를 받지만,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하는 특수한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은혜가 바로 메시야를 출생시키는데 몸으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② 마리아가 이런 특수한 은혜를 받았을 때 그의 인간적 배경이 좋았거나 자기의 신분이 존귀하거나 또는 조상이나 자기의 공로에 의하여 받아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희들도 어떤 공로나 유력한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이 “그의 비천함을 돌아보셔서 은혜를 주셨다”고 한만큼 저희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때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할 때도 역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었다”고 하였습니다(눅 1:58).

2. 은혜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저희들이 믿음을 갖고, 생존하며 살아가는 은혜는 다 성도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를 못 받는다는 원칙이 없으니까 “주여, 저에게도 긍휼을 베푸사 특별한 은혜를 주십쇼” 하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받은 은혜를 살피면,

1) 믿음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남자를 몰라도 잉태할 것이라” 하였을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믿음을 안 엘리사벳이 눅 1:45에서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은혜를 받은 자여” 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은 은혜”를 받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메시야를 성령으로 잉태하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혜이지요.

3) 상당한 수모를 견디는 은혜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의 섭리로 알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니까 많은 의심과 수모를 당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견딘 것입니다. “견디는 것이 은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고후 1:6, 6:4, 골 1:11). 인내가 성령의 열매인 것처럼.

4) 예수님을 낳고 양육한 은혜입니다.

5) 성경에는 마리아의 행적이 일곱 번 나옵니다. ① 탄생 기사에서 나오고(눅 1:30-38), ② 애굽으로 피난 간 사실이며(마 2:14-21), ③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킨 기사가 있고(눅 2:44-45), ④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한 기사가 있으며(요 2:3-5), ⑤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만나러 온 기사가 있고(마 12:46-50), ⑥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참석한 기사가 있으며(요 19:25-27), ⑦ 오순절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한 사실이 있습니다(행 1:14). 이렇게 마리아는 특별한 은혜를 받고 사명자적인 생활을 잘 한 줄로 압니다.

3. 성경에는 마리아처럼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창 6:8). 홍수의 멸망을 면하고, 인류 중 자기의 가족만 사는 은혜를 받았고, 아브라함은 택한 자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받았으며(창 18:3, 롬 4:11), 야곱의 후손들은 출애굽의 은혜를 받았고(출 15:13), 다윗은 왕이 되고 메시야의 모형이 되는 은혜를 받았으며(대하 1:8, 행 7:48), 스데반은 성령 충만과 함께 순교하는 은혜를 받았고, 바울은 핍박자로써 변화되고 사도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행 6:8, 고전 15:10). 이분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해보면 모두가 자기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래서 저희들도 특별한 은혜를 사모하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은혜 받은 사실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구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살피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주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 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고, 다윗도 왕 되기를 구한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면 겸손하게 가만히 있어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믿음과 사명에 관한 것을 구하는데 주시지 않겠습니까? 안 구해도 주실 것을 구한다면 더 잘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합당한 것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은혜, 성경을 상고하여 깨닫는 은혜,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은혜, 사랑을 실천하는 은혜, 자랑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은혜,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은혜를 구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속히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 다하지 않는,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도 구하세요. 하나님은 비천한 자라도 긍휼히 여기셔서 아주 큰 은혜를 주시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따라 노아, 아브라함, 요셉, 다윗, 마리아 같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말씀의 전능성 (눅 1:37) 목록으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셨으므로 “말씀의 전능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아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성경 66권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뜻을 가지신 분이시고, 또 많은 뜻을 말씀으로 나타내셨지만 인간(성도)들이 응용하도록 주신 말씀은 성경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간접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구전으로 전달되면 순결, 보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란 “기록된 성경”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 21:25에 보시면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시지 않았다” 하셨고(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고전 4:6에서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성경 66권 전체란 것을 확실하게 다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하나님의 말씀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뜻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1) 말씀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이(요 1:1)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 있고, 2) 또 한 가지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이 다 성취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란 사실은 모든 성도가 다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꼭 같은 성질의 것인데, 이것을 모르는 성도들은 환상이나 계시 중에 접한 말씀을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큰 잘못입니다. 자신이 체험으로 받은 어떤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감적으로, 역사적으로 인정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성도가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내게 직접 주신 말씀”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셨을 때, 자기 아내가 늙은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18절) 하다가 벙어리 되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부족하게 믿는 자는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오히려 영광을 가리울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입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반대였습니다. 같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남자 없이 성령으로 아들을 낳을 것이라. 네 친족 ‘엘리사벳’이 늙은 상태에서 아이를 밴 것처럼 당신은 남편 없는 상태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을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말씀의 전능성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일이라도 약속하셨으면 그대로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롬 4:17).

3. 하나님의 말씀이 전능성을 갖추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인격이 동반하는 것이고(행 20:32), 또 하나는 말씀이 순결하여야 하며(시 19:7-9), 또 영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시 19:9, 벧전 1:24). 따라서 성경의 전능성을 믿는 성도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함께, 성경의 인격성과 완전성과 영원성도 함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인격성이 동반하는 것은 요 1:1과 행 20:32, 요 15:7에서 증명하셨고(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께 부탁함,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함), 또 말씀이 순결한 것은 시 19:7-9과 계 22:18-19에서(순결, 완전, 가감 못함) 말씀하셨으며, 말씀이 영원한 것은 마 24:35과 벧전 1:24과 시 19:9(일점일획도 없애지 못함, 세세토록 있고 영원까지 이름)에서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을 믿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격을 가지신 것과 진실하심과 영원하심을 동시에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성경 말씀이 성도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눌 수 없는 관계가 있지요. 그러나 그 관계를 잘 모르는 성도가 계실 것입니다. 말씀과 성도와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1) 하나님은 말씀으로 성도에게 임재하셨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엡 3:17, 요 15:7).

2) 말씀으로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요 4:32, 6:55)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골고루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영적 양식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도(교양적) 온전케 하시고, 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침서도 된다고 하셨습니다(딤후 3:15-17).

4)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모든 생명체까지 포괄하여 통치하시는 것입니다(히 1:3, 시 33:6, 사 45:12).

5.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시되, 간식처럼 잡수려 하지 마시고 주식으로 여기시라는 것입니다. 밥맛은 좋고 성경 맛이 적으면 분명 잘못된 것으로 아시고 그 상태가 변화되셔야 한다는 점이요(마 7:7, 시 130:6, 고전 10:3, 만나가 주식이었음),

2) 성경으로 주신 말씀을 자신이 기도하다가 직접 받은 계시처럼 믿으셔야 하고(살전 3:13, 행 27:25), 그 말씀 뜻대로 소원을 가지며 기도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어, 기다리는 생활을 꾸준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히 4:12-13, 빌 2:13).

 

제 4 과 요한의 출생 (눅 1:57-8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전체가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57-66절까지는 “요한의 출생으로 인한 동정”이고, ② 67-79절은 “사가랴의 찬송과 에언”이며, ③ 80절은 “요한의 성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1. 요한의 출생으로 인한 동정(57-66절)

1)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에 아들을 낳으니(57절) 이웃과 친족이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즐거움은 1:14의 성취요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58절).

2) 출생 8일에 할례를 베풀기 위하여 친족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 할례는 선민임을 인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창 17:12, 레 123). 그때에 친족들은 족보에 따라 ‘사가랴’로 이름을 지으려 하였으나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요한’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 벙어리 된 ‘사가랴’도 서필로 같은 이름을 기록하므로 친족들이 기이히 여기고 그대로 시행하였으며(59-63절),

3) 그때에 비로소 “곧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찬송하니 근처의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고, 이 모든 말이 유대 온 산중에 두루 퍼졌으며, 듣는 사람들마다 이 말을 마음에 두었고,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아서 그 아이의 장차 될 일에 대하여 유의하더라”고 하였습니다(64-66절).

2. 사가랴의 찬송과 예언입니다(67-79절)

1)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찬송하고 예언하였습니다(67절).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택한 백성)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 보사 구원의 뿔(뿔은 권위를 뜻한즉 구세주를 의미함)을 그 종 다윗의 집(다윗의 후손; 마 1:1)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사 11:1-5, 9:6-7, 7:14) 우리의 원수(마귀, 대적자)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하므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하였고(67-71절),

2) 또 78-79절에서도 같은 예언을 하였으니 “이로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돋는 해”는 빛의 근원자이신 예수님을 뜻하고, “어두움과 그늘에 앉은 자”란 죄와 고난에 처한 백성들이며,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 안에서 복되게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메시야의 사역을 통하여 받게 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시는 이유를 예언하였으니(72-75절), ① 곧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맹세하신(창 22:16-17) 그 거룩한 언약(창 17:7-8)을 기억”하셨으며, ③ 우리 원수의 손(죄와 마귀)에서 건지심을 입고, ④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75절의 말씀은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곧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심”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성결과 의와 담대한 믿음(두려움 없이)과 종신토록”입니다. 이 내용은 성도가 누구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믿음과 의를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 6:28-29).

4) ‘사가랴’는 또 요한의 사명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76-77절). “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 받을 것이요, ②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예비할 것이며, ③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들은 다 세례 요한의 행적에서 나타난 사실입니다.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 받는 일”은 마 11:9과 요 5:35에서 성취된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예비함”은 마 3:1-3과 요 1:26-27에서 입증되었으며,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한 것”은 요 1:29-34에서 입증되었으니, 세례 요한의 사역은 메시야를 가장 접근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예언하고, 직접 그에게로 인도한 사역을 한 것입니다. 오늘의 사역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고 연구하며 실천 모범과 교훈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3. 요한의 성장에 관한 말씀(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었다” 하셨으니, “아이가 자람”은 건강을 뜻하고, “심령이 강하여 짐”은 믿음과 지혜와 도덕성이 투철하고 강함을 뜻하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음”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할 때(이 때는 눅 3:1에서 설명할 것임)까지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 뜻은 광야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연단을 받으며 생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3:4). 도시의 문화권에서 살지 않은 것이 결코 믿음과 사명에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제 5 과 예수님 탄생 때에 있은 일 (눅 2:1-2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읽고 “예수님 탄생 때에 있은 일”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6절은 “예수님 탄생의 때와 장소”를 말씀하신 내용이고, ② 7절은 “예수님의 출생과 보살핌”에 대한 말씀이며, ③ 8-14절은 “천사들의 증언과 찬송”이고, ④ 15-20절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방문한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의 때와 장소에 대하여(1-6절)

1) 1절의 “이때에”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출생하신 때요, 또 세례 요한이 출생한 지 여섯 달째 되었을 때입니다(눅 1:36-37, 42-45). 또 그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이 내렸을 때였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본래 이름이 가이사 “옥타비누스”인데 그의 증조부 “가이사 율리우스”(주전 44년 집권)로부터 주전 31년에 황제를 계승받아 주후 14년까지 집권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 호적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하시므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세기의 역사가요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인 “유세비오”의 글에 의하면 “구레뇨”는 주전 12년에 집정관이 되어 주전 6년으로 주전 4년까지 수리아의 총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시대의 역사가들이 원년을 예수님 탄생 년도로 사용하던 것을 착오를 인정하고 주전 4년으로 시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갈릴리와 유다의 분봉 왕은 헤롯이었습니다(마 2:1). 그리고 탄생일자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눅 2:8에서 “목자들이 야숙한 시기”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의 생일을 기록에 남기시지 않은 것입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주후 354년에 서방교회에서 “데오빌라스”의 수기 등을 참작하여 그렇게 정하였다고 합니다.

2) 그때에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는데, 여기의 “천하”는 로마 황제의 통치 구역인 지중해 전역을 뜻하고, “호적”은 인구 조사(주민 등록)를 의미하며, 그 가정의 조상의 본적지에 가서 신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1-3절).

3) 4절에서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라” 하셨는데, 성경에 나타난 대로 계산하면 요셉은 다윗의 32대손입니다(제9과 예수님의 족보 연구 참조). 그리고 요셉의 고향이 ‘베들레헴’인 것은 다윗의 고향이 베들레헴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룻 1:22, 4:22, 삼하 23:15).

4)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현주소인 갈릴리(道) 나사렛(동리)에서 본적지인 유다(道)의 베들레헴 동네로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3-4절).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지점이고, 나사렛(갈릴리 호수와 가멜 산 사이)으로부터는 약 120km가 됩니다.

5) 5절의 ‘정혼’이란 뜻은 법적으로 한 가족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혼하고도 동거하지 않는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 ‘요셉’은 정혼자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앎으로 해산하기까지 동침하지 않았고(마 1:25),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간 것”은 정혼 그 자체로 한 가족이 된 것과, 또 ‘베들레헴’이 가장 고원 지대인 예루살렘의 인접지이므로 “올라간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출생과 보살핌에 대한 말씀입니다(7절).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이르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여인숙)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6-7절).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도록 하나님은 호적령과 함께 때를 맞추어 섭리하셨으니, 그 이유는 미가 선지자로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미 5:2). 그리고 출생하신 예수님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이신 것은 호적 신고를 인하여 그 동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관계로 여인숙의 방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출생 때부터 물질적으로 각박한 환경에 처하셨던 것입니다. 주택이 불편한 분들은 자신의 누운 처소가 말구유보다 못한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시기와 장소를 맞추심에 있어서, 관련된 모든 일에 하나님이 두루 섭리하신 것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증언과 찬송(8-14절)

1) 그 지경(장소적 개념)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는데(8절) 주의 사자(천사, 10절)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광채일 듯)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9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 하더니(10-12절),

2) 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하고, 떠나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13-15절 초). 여기에서 목자들은 대단히 신비하고 장렬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밤중에 천사(사람 모습으로 나타났을 듯함; 창 18:2)가 나타나고, 영광이 비췬즉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천사는 그 두려워함까지 알고 “무서워 말라” 함으로 인간이 느끼는 공포까지 안돈시킨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그만큼 살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살아가는 서민 목자들이었고, 또 미리 알게 된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마 2:1-12). 이 두 부류 중 누가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확인하였을까요? 필자의 생각으로는 목자들이 한 발 앞섰다고 여겨집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날 밤에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와서 서기관과 헤롯을 만난 다음 베들레헴까지 10km를 온 사람들이고, 목자들은 베들레헴 지경에서 직접 천사의 계시를 받고 찾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성도이고(마 2:5-6),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성도라 할 것입니다(마 11:25). 에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은 그 사건이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주께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표적임”은 천사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란 뜻입니다. 이어서 또 “허다한 천군 천사의 찬송”이 있었습니다. 천군과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으로(히 1:14) 천군은 무사의 역할(great power)을 하고 천사는 그 이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면 됩니다. 천군 천사의 나타남은 예수님의 탄생을 하늘의 천사들이 축하한 것입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시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천국)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선택 받은 자 또는 믿는 자)들에게 평화라” 하셨으니, 이 평화는 구원의 은혜로 받는 영적 평화이고, 또 사랑의 열매로 누리는 평화입니다.

4. 목자들이 예수님을 방문한 내용(15-20절)

1)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간 후에(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올라갔을 것임; 행 1:9) 목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것이 표적이라” 하셨으니까요(12절).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베들레헴 동리에 들어가 그 부모와 함께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확인한 후, 천사들로부터 증거 받은 사실과 있었던 일들을 고하니 마리아도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다 기이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15-18절).

2) 요셉과 마리아는 목자들로부터 전하여 받은 사실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또 “찬송하며 돌아갔다” 하였으니, 여기의 돌아간 뜻은 애굽으로 피한 것을 의미합니다(마 2:14). 천군 천사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 증언하는 사명을 이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보호하는 사명도 계속하는 것입니다(마 18:10).

 

제 6 과 할례와 결례 (눅 2:21-40) 목록으로


본문 21절은 “할례에 관한 말씀”이고, 22-40절은 “결례와 관련된 말씀”인데, 마리아가 결례 차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경건한 성도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송과 예언을 한 사실을 25-40절에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제목을 “할례와 결례”로 정한 것입니다.

1. 할례에 대한 말씀(21절)

1) 할례에 대한 말씀은 창 17:9-11과 출 4:25에 나타나 있지만, 율법으로 명하신 말씀은 레 12:3에 나타나 있습니다. 할례는 선민의 아들이 출생하였을 때 양피(생식기의 꺼풀)를 베어,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민인 표식을 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예수님은 세례로 대치하게 하셨습니다(마 3:13-17, 28:20).

2)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출생 8일 만에 그 부모가 율법에 따라 시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1절에서 “할례 할 8일이 되매… 천사의 일컬은 바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으니, 여기에 “할례를 시행하였다”는 말씀은 없으나 “8일이 되면 할례를 시행하고 이름을 짓는 것”이 유대인들의 관행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하였으니까요(눅 1:59-60).

2. 결례에 관한 말씀입니다(22-40절).

여기에서 “결례에 관한 말씀”(22-24절)과 “결례의 기간이 지난 후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송, 예언한 사실”(25-40절)을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1) 결례에 대한 말씀은 레 12장에 나타나 있으니,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33일을, 딸을 낳으면 66일을 지나야 산혈이 멎고 정결해지므로 성전에 나갈 수 있으며, 또 처음 난 남자이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드려야 하고(출 13:2-16), 직접 몸(맏아들)을 드리지 않을 때는 대속물(레 12:6-8)로 드리는 규례”를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재물이 있는 가정은 1년 된 어린양을 대속물로 드릴 수 있으나, 가난한 형편일 때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로 제물을 삼아 드릴 수 있는데, 이때에 예수님은 후자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반구’란 산비둘기 새끼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낳자 애굽으로 피난을 갔었으므로, 피난 중 33일이 지난 후에 또 예루살렘에 왔었으니, 어려운 여건에서 결례를 이행하는데 큰 고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갔다가, 헤롯이 예수님 출생 다음 해에 죽었으므로 예수님의 나이 2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나사렛으로 귀향하시게 된 것입니다(마 2:19-20, 헤롯은 37년 재위하였음).

3) 이상의 말씀으로 예비지식을 갖추신 다음에 22-24절을 읽으시면 더 이상 의문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레위기 12장을 읽으시면, 본문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3. 시므온과 안나의 찬송과 예언이 있었으니(25-40절),

1) 먼저 시므온이 한 일을 살피면,

① 시므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함은 “경건함으로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뜻이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심”은 성령의 감동 하에 있음을 뜻합니다(25절). 오늘의 성도들도 그런 입장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성령님의 감화로써 “주의 그리스도(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성전에 들어갔다가(26절) 예수님이 그 부모의 품에 안겨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찬송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도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안 것입니다(25-27절).

② “주재여(예수님을 主로 믿음)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절). “말씀하신 대로 놓아 주신다”는 뜻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민을 위로하실 일에 대하여 약속하신 대로(사 40:1), 메시야 보내주신 것을 보았은즉,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요(29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구원의 시작을 본 것임)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며(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30-32절)고 한 것입니다. “만민 앞에 예비하셨음”은 만민 전체를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하신 것처럼 구원의 대상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될 것을 의미합니다(롬 11:25).

③ 예수님의 부모는 시므온의 예언을 기이히 여겼고(33절), 시므온은 저희에게 축복한 후(제사장인 듯함)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 하였으니(34절), 이 뜻은 예수님이 인간의 승패의 기초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21:44, 고전 1:18).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35절) 하셨으니, 전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하여 충격 받을 것을 예언함이고, 후자 즉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심”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시고 드러내실 분이라는 뜻입니다(마 9:4, 살전 2:4).

2) 안나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실입니다(36-40절).

① 아셀지파 비누엘의 딸, 늙은 선지자 안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출가하여 7년간 남편과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 된 분이므로, 결혼의 연령을 20세로 잡는다면 그의 나이는 111세가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36-37절).

② 그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메시야 보내신 것과 자신이 뵙게 된 것을)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선민의 범죄와 황폐에서 위로 받고 구원받음)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으니(38절) 그 내용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③ 결례 차 예루살렘에 가셨던 예수님과 그의 부모는 모든 일을 필하고 본 동리인 나사렛으로 귀향하였습니다(39절).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하셨습니다(40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건강하고, 지혜롭게 성장하셨다는 뜻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어려운 세대에서 경건한 믿음을 가짐으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 아래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만나게 되는 은혜까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사랑하십니다(요 9:31, 벧후 2:9). 시므온과 안나의 경건한 생활을 연구하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 7 과 예수님 12세 때의 있은 일 (눅 2:41-5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12세 때에 그 부모님을 따라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오셨다가 일어난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하게 깨달으셔야 할 교훈은,

1. 유월절의 구약적 의미와 신약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41-42절).

1) 유월절이란 “선민들이 출애굽 할 무렵에 하나님이 애굽의 초태생을 다 죽이시면서,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선민의 집 장자들을 죽이시지 않고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출 12:1-6과 레 23:5과 민 9:3에서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족도 계명을 따라 전례대로 1년에 한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2)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 없는 딱딱한 떡과 쓴 나물을 먹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함이었으며, 양의 피를 바른 집의 초태생은 살고 그것이 없는 집의 초태생이 죽은 것은 역시 십자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과 그것이 없음으로 멸망 받는 것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유월절은 그 당시에 양의 피로 장자가 죽지 않은 일과 후일에 있을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고 구원 받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3)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예표적이고 모형적인 행사가 성취된 이후인 만큼, 모형적 행사가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율법의 의식과 함께 폐지된 것인데(마 11:13, 롬 10:4, 고전 13:10, 히 10:9) 예수님께서 신약의 성도들이 새로운 의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새기도록 성만찬 의식을 제정해 주셨습니다(고전 5:7-8, 11:28-31, 마 26:19).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유월절 의식 대신 예수님의 희생하신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만찬의 의식으로 대치하게 하신 것입니다.

2.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귀향하는 중에 예수님을 잃어버려 근심하다가 3일 후에 다시 성전에 와서 예수님을 찾게 된 사실입니다(43-46절).

1)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이 귀향하는 행렬에 따라오시려니”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짐작”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짐작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확신 없는 신앙이고 방심이며 게으른 것입니다. 무엇이나 모르시면 속히 대책을 세워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룻길을 가도록 방심하다가 동행중에 계시지 않은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면서 찾은즉 3일 만에 성전에 머물러 계신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항상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가까이 모시며, 주님이 멀리 계시지 않도록 붙잡는 자세를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기쁘게 모시지 않으면 주님은 가까이 계시지 않으려 하실 것입니다(계 3:20, 요 14:23).

3.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성전)에 계셨다는 사실입니다(46-50절).

1)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부모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신즉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으니, 결국 예수님이 성전에 상당 기간 머무셔야 할 것을 부모가 모른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성전에 자주 오는 형편이 못되므로 상당 시간 머물다가 가시는 것이 잘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2) 그때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으며 듣는 자가 다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하였으니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도 귀하지만, 12세 된 예수님이 성경을 배우고 토론하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신 점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마 21:13).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성전이란 의미는 예수님 자신으로 바꾸어졌고(요 2;19-20), 물질적 성전의 의미는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집”은 교회라는 기관임을 아셔야 합니다(딤전 3:15).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기관(진리의 기둥과 터)이란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양친은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5절).

4. 예수님의 자라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51-52절).

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가셔서 순종하여 받드셨으니”, 이는 효도를 뜻하고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일)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51절). “이 모든 말(일)”이란 “예수님의 지혜가 탁월하시고 성경에 능하시며, 또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신 일 등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원만한 성숙을 뜻하면서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대인관계에서도 탁월한 친교를 나타내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분석한다면, 지혜는 믿음의 부분이고, 키는 건강을 뜻하며, 하나님과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뜻하고, 사람 앞에 사랑스러워짐은 대인관계의 원만한 교제를 뜻할 것입니다.

 

제 8 과 요한의 출현과 사역 (눅 3:1-22) 목록으로


본문의 종합적 제목은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입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2절은 “요한의 출현 시기와 사역지에 대한 말씀”이요, ② 3-6, 21-22절은 “요한의 사역과 그에 대한 예언”이며, ③ 7-14절은 “악인들을 책망한 메시지”요, ④ 15-18절은 “자신과 비교한 메시야 증언”이며, ⑤ 19-20절은 “요한의 옥에 갇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요한의 출현 시기와 사역지(1-2절)

1) 요한의 출현 시기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 15년이라” 하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는 주후 14-37년까지 통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주후 29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30세쯤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말씀과 대조하면(23절) 예수님의 공생애 1년 전쯤이 됩니다(어떤 사학자는 “디베료 가이사가 그 선왕 가이사 아구스도와 더불어 2년간 공동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2년을 소급 계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유다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고, 갈릴리의 분봉 왕(지역을 나누어 통치구역을 준 것)은 헤롯(대 헤롯의 아들 헤롯 안디바임, AD 21-39년)이었으며, 이두매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은 빌립(안디바의 동생)이요, 아빌레네의 분봉 왕은 ‘루사니아’(이 사람의 신분은 알기 어려우나 요세푸스의 기록과 발견된 비문에 의하여 확실하다 함)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지리 공부를 한다면 “유다, 갈릴리, 이두매, 드라고닛, 아빌레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중심한 지역이고, ‘갈릴리’는 갈릴리 바다 서쪽지역이며, ‘이두매’는 유다의 남방지역이고, ‘드리고닛’은 갈릴리 바다 동북편 60㎞ 쯤의 지역으로 현재 시리아 땅이며, ‘아빌레네’ 역시 현재 시리아 땅으로 다메섹 서북쪽 25㎞ 지점의 ‘아빌라’를 뜻한다고 합니다. 또 그 당시의 대제사장은 은퇴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재임할 때였습니다.

2) 그때에 요한은 빈 들(유다 광야)과 요단강 부근 각처에서 사역하였다고 하셨습니다(2-3절). 이 뜻은 “도성에 들어온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닐 것이요, 다만 그의 생활이 원시적인 만큼 지방과 광야 중심으로 사역한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마 3:1-5). 이상의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당시에 특권자들이 복음을 대적한 자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요한의 사역과 요한에 대한 예언입니다(3-6, 21-22절).

1) 3절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란 요한이 회개하고 메시야를 영접하는 뜻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3절).

2) 요한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살피면(4-5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 즉 사 40:3-5에서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을 예언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 말씀이 요한과 예수님께 성취된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본문 4-6절의 말씀을 사 40:3-5 말씀에 대조하면 그 의미가 같음을 아실 것입니다. 문구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구약은 히브리 원문에서, 신약은 헬라 원문에서 번역한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요한의 출현과 사역에 대하여 주전 750년경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다 … 너희(유대인들)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외칠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의 “주의 길”이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입하는 믿음과 회개의 자세를 의미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심은 불신앙과 비도덕적 심성을 첩경(거친 땅)으로 비유하여 그것을 평탄케 하라 하시므로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골짜기나 산이나 굽은 길이나 험한 길”은 첩경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으로 마음의 완고함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평탄케 함”은 역시 그 시대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온유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요한이 깨우칠 것이란 뜻입니다.

4) 그리고 6절에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하신 것은 육체로 오신 메시야를 현실적으로 만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5)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시행한 사역은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21-22절). 이 말씀은 마 3:13-17에서 더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요한으로부터) 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하셨고, 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마 3:13-17의 강론을 읽으심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3. 악인들을 책망한 메시지입니다(7-14절).

1) 회개하지 않으면서 세례만 받으려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7절). 회개하지 않으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것은 장차 받을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독사는 독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먹을 것을 깨물지 않고 삼키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무리들이 덕을 세우지 않고 악을 행하며 회개하지 않고 구원 받으려는 잘못된 행위를 독사에 비유한 줄 압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회개하고 메시야를 영접하는 자입니다(롬 4:11).

2)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 하셨으니(8절), 이 뜻은 하나님께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과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타락하고 메시야 영접을 안 하여도 하나님은 돌 같은 심령을 가진 이방인들을 변화시켜 믿음의 백성을 삼으실 수 있음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그런 원리로 복음의 대적자, 돌 같은 사울도 구원을 받았고,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행 11:12-18).

3) 9절 말씀은 마 3:10의 강론을 참고하십쇼. 예수님이 심판주로 이미 이 세상에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요 5:27).

4) 요한이 무리들의 질문에 대답하였으니 무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 하시므로,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그런 것임을 말씀하였고(10-11절), 또 세리들이 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에 “정한 세 외에 늑징하지 말라”(과징이나 토색하지 말라는 뜻) 하였으며, 군병들의 질문에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없는 사실을 꾸며 제소하는 것) 하지 말고 받는 료(봉급)를 족한 줄 알라” 하므로 군인들의 강포함과 무고함과 불평함이 마땅치 않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인들이 봉급을 적다 한 것은 공무원의 임금이 적다는 뜻과 같은데, 그것을 “불평하지 말라”는 뜻은 백성으로서 나라에 충성함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민들도 나라를 상대로 하는 이기주의 운동은 마땅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사관계는 국가 상대가 아니므로 불균형을 항의할 수 있겠지요. 또 국가가 많은 단체와 개인을 상대할 때 불균형한 것은 항의할 수 있지만, 백성이 나라를 짐 지우기 위한 지나친 불평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 봉사에 반대되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자신과 비교한 메시야 증언입니다(15-18절).

1)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그리스도인가?”에 대하여 심중에 의논하고 듣기를 청하였을 때,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자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15-16절) 하였으니, 이 뜻은 요한의 인간적 사역과 신분의 비천함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인간적 사역이란 요한이 회개한 상태의 증표로 물세례의 형식을 취한 자일 뿐 은혜와 성령을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님을 증언한 것이고, 또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함은 예수님에 대한 최대의 겸손을 나타낸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사역자라도 자신은 은혜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고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그는 성령과 물로 세례 주시는 분이라” 하였으니, 이 뜻은 하나님과의 영적관계와 속죄와 믿음과 변화의 생활을 성령님의 역사로 직접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이고(16절), 17절 말씀은 예수님이 곧 심판자이심을 곡식 타작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3:12, 13:30). 또 18절에서 요한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봉 왕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19-20절).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둔 이유는 “자신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일을 요한이 책망함에 대한 반감과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 하였으니, 여기의 “한 가지 악”이란 무고에 해당할 것입니다. 악인은 의인을 핍박하니까요(마 5:11). 요한이 투옥됨과 순교 당함은 마 3:13-17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문제는 21절에서 요한이 옥에 들어갔는데 22절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사건이 나오니, 순서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는 “차례대로 기록한다”고 하였는데…(눅 1:3). 아마 세례 요한은 몇 차례쯤 투옥 당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투옥되었다가 나온 후에 세례 베푸는 일을 행하고, 또 투옥된 다음에 순교하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9 과 예수님 족보에 대한 연구 (눅 3:23-38, 마 1:1-16) 목록으로


1.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마태와 누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1)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그의 후손으로 메시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심에 대한 성취의 증거입니다(창 12:7, 17:4-5, 7, 26:4, 사 11:1-5, 대상 17:24, 26-27). 2)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겸한 신비한 분으로 만일 족보가 없다면 인간으로서 의심받을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완전한 사람 또는 요셉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눅 3:23)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계보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3) 특히 “구원자가 유대인에게서 날 것이라”(창 49:10, 히 7:14) 하신 말씀의 입증을 위한 것입니다.

2. 마태복음에 나타난 족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혈통 본위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피를 받지 않으셨지만 여인의 몸에서 출생하신 만큼 혈통적 족보(낳고, 낳고의 뜻)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가 기록한 족보는 대를 잇는데 목적을 두었고 명확한 대수를 생략 없이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내용 중에서 5대 건너뛴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곧 ‘가이난’,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입니다(다음의 표를 보시고 확인하십쇼).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에 더 많은 대수가 생략된 줄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까지 60대로 기록되었습니다.

3. 그러면 누가복음의 족보는 무엇이며, 왜 그 내용이 다르냐고 하시겠지요. 주밀한 연구 끝에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내력에 대하여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눅 1:3)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족보를 소급하여 거의 생략 없이 기록하므로 예수님의 족보상의 조상이 76대 아담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였기 때문에 마태가 기록한 것보다 16대를 더 보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기록이 다르냐? 하시겠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혈통적 계열에 있다가 정혼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직전에 아들 없는 친족 가문으로 양자(창 15:2, 롬 8:23) 또는 계대결혼법(창 38:7-8, 신 25:5-6, 룻 4:1-12)에 의하여 호적을 옮겼습니다. 그 다른 가문은 35대 ‘나단’의 계열인데, 이 나단은 솔로몬의 형입니다(삼하 5:14). 그러니까 그 계보도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되는 데는 동일한 것입니다(마 1:1).

4. 그러면 요셉이 양자 또는 계대결혼법에 의하여 ‘나단’의 가문으로 호적 옮긴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시겠지요. 우선 누가복음의 계보에 요셉의 이름이 예수님과 함께 나단 계열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가는 이 족보를 기록할 때 “혈통이라거나 낳았다”는 용어를 쓰지 않고 “그 이상은 누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언질이 분명 혈통 아닌 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증거는 누가가 쓴 족보 55대 ‘스알디엘’과 56대 ‘스룹바벨’이 마태가 기록한 족보 48대, 49대에도 있는 것입니다. 왜 같은 이름 두 사람이 양쪽 족보에 다 있을까요? 그것은 요셉과 예수님이 양쪽 족보에 다 있는 것과 같은 이유로써, 54대 ‘네리’ 조상이 후사가 없음을 인하여 솔로몬 계열의 48대 ‘스알디엘’을 자기 집안으로 계대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스알디엘이 양가를 계승한 후에 직계아들이 아닌 조카 스룹바벹로(대상3;17-19) 나단의 가문을 계대하여 ‘아비훗’과 ‘레사’ 두 아들을 낳으므로 양쪽 가문을 다 계승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려 하였을 때 요셉의 양자된 집안의 계보를 따라 기록한 것입니다. 당연히 혈통보다 계보를 더 중요시한 것입니다.

5. 누가의 족보 13대 ‘가이난’이 왜 마태의 족보에는 없느냐 하시겠지만, 그것은 마태가 기록할 때 생략하였기 때문이고, 또 4대 게난과 가이난, 12대 아르박삿과 아박삿은 발음상 차이일 뿐이요, 13대 셀라를 누가는 살라로, 14대 에벨을 누가는 헤버로, 26대 람을 누가는 ‘아니’로 표현한 것은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한 연고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이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야김, 엘리야김이 한 사람이고(왕하 23:30-34), 여고냐, 여호야긴(왕하 24:6, 대상 3:16), 여호수아, 호세아(민 13:8), 요람, 여호람(왕하 6:30-37), 솔로몬, 여디디야(삼하 12:25) 등 많습니다. 마 1:17의 14대에 대한 분간도 헤아려 보시면 꼭 맞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포로 이전 요시야까지 14대, 포로 된 여고냐(대하 36:10)부터 예수님까지 14대가 됩니다. 성경은 영감으로 주신 말씀인 만큼 한 점도 틀림이 없음을 연구할수록 더 확신하게 됩니다.

 

 

표 1. 예수님의 족보 (마태는 혈통으로, 누가는 계대 족보로 기록됨) 목록으로

아담→데라(창세기 근거)

눅 3:23-38

1

아담 창2:6-7,5:4

1

2

셋 4:25-26

2

3

에노스 5:6

3

4

게난 5:12-13

4

가이난(동명)

5

마하랄렐 5:15-16

5

6

야렛 5:17

6

7

에녹 5:18-20

7

8

므두셀라 5:21-24

8

9

라멕 5:25-27

9

10

노아 5:28-31

10

11

셈 5:32

11

12

아르박삿 11:10

12

아박삿(동명)

① 가이난 (눅3:37)

13

가이난(추가된 이름)

13

셀라 11:12, 11:24

14

살라(동명)

14

에벨 10:24

15

헤버(동명)

15

벨렉 10:25, 11:16

16

16

르우 11:18

17

17

스룩 11:20

18

18

나홀 11:22

19

19

데라 11:24, 32

20

20

아브라함 11:25-27(마 1:2)

21

21

이삭 17:29-22(마 1:2)

22

22

야곱 25:24-26(마 1:2)

23

23

유다 46:12(마 1:2)

24

24

베레스 38:30(마 1:3)

25

25

헤스론 46:12(마 1:3)

26

26

람 룻 4:18(마 1:3)

27

아니(동명)

27

아미나답 룻 4:18-22(마 1:4)

28

28

나손 마 1:4-6

29

29

살몬 마 1:4-6

30

30

보아스 마 1:4-6

31

31

오벳 마 1:4-6

32

32

이새 마 1:4-6

33

33

다윗 마 1:4-6

34

34

솔로몬 마 1:6-7

35

나단(삼하 5:14)

35

르호보암(아비얌) 왕상 14:31, 대하 12:16

36

맛다다

36

아비야 마 1:7-11

37

멘나

37

아사 대하 14:1

38

멜데아

마 1:1-16

눅 3:23-38

38

여호사밧 대하 17:1

39

엘리아김

39

요람(여호람) 대하 21:1

40

요남

아하시야 대하22:1, 말자(末子)

41

요셉

요아스 대하 22:11

42

유다

아마샤 대하 24:27

43

시므온

40

웃시야(아사랴) 왕하 15:1

44

레위

41

요담 대하 26:21

45

맛닷

42

아하스 대하 27:9

46

요림

43

히스기야 대하 28:27

47

엘리에서

44

므낫세 대하32:33

48

예수

45

아몬 대하33:20

49

에르

46

요시야 대하 33:25

50

엘마담

子 여호아하스(아하시야) 대하 22:1,왕하 23:30-34,

대하 36:1

兄弟 엘리야김(여호야김) 대하 36:4

51

고삼

47

여고냐(=여호야긴, 대상 3:16), (엘리야김 子, 36:10)

52

앗디

48

스알디엘

53

멜기

49

스룹바벨 (스알디엘의 조카임,대상3:17-19)

54

네리

50

아비훗

55

스알디엘(계대)

51

엘리야김

56

스룹바벨(계대)

52

아소르

57

레사

53

사독

58

요아난

54

아킴

59

요다

55

엘리웃

60

요섹

56

엘르아살

61

서머인

57

맛단

62

맛다디아

58

야곱

63

마앗

59

요셉

64

낙개

60

예수님, 마리아에게서 낳음(마 1:16)

65

에슬리

(5대 가이난,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66

나훔

가 생략되었음)

67

아모스

68

맛다디아

69

요셉

70

얀나

71

멜기

72

레위

73

맛닷

74

헬리

75

요셉(계대)

76

예수님

 

제 10 과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심 (눅 4:1-13) 목록으로


이 말씀은 마 4:1-11에서 상고한 바가 있기 때문에 간단히 살피겠습니다.

1. 1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곳, 마 3:13-17)에서 광야로 오셔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들어서실 때,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 통과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라에서 인재를 쓸 때 시험하여 뽑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신 만큼 연단을 받고 시작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히 2:18, 4:15). 그래서 “성령에게 이끌리신 것”은 건설적 의미로 하나님이 섭리․인도하심을 뜻하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은 마귀가 정욕적인 죄성으로 유혹한다는 뜻이며, “광야에서의 40일”이란 적당한 연단의 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연단 목적을 인하여 광야(고난의 장소)에서 40일간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2. 이때에 마귀는 시장하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예를 과시하여(그것도 의심하는 표현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한 것입니다(2-4절). 예수님은 기적의 양식을 만들어 잡수실 수 있지만 마귀의 뜻이 개입되었을 때는 아무리 시장하셔도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예수님은 “떡 문제의 해결보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신 신 8:3을 생각하시고(구약성경을 인정하신 뜻)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성도들도 물질의 유혹이나 배고픈 유혹을 말씀에 따라 단호히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3. 5-8절에서는 세상 정욕에 관한 시험을 받으신 것인데, 마 4:8-10에서는 이 시험이 마지막에 기록되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 마 4: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였다” 하였으니, 이 뜻은 인간이 현실을 사랑하고 세상과 짝하여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의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은 순식간에 구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습니다(롬 12:2, 요일 2:15). 그런 중에 마귀는 성도의 마음에 거짓된 말로 유혹을 합니다. 6절에서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줄까요? “부당한 방법으로 줄 수 있으니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취하여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또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인즉 나의 원하는 자에게 준다” 하였으니, “만국의 영광을 하나님이 마귀에게 넘겨주셨다”고 마귀가 말하는 것은 자기를 과대 선전하는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마귀에게 “특정한 영역을 허용하셨다” 하여(욥 1:7, 12, 엡 2:2, 계 20:1-3) “만국의 영광을 넘겨받았다”고 하는 것은 과장된 거짓이란 뜻입니다. 사기꾼들은 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포장하지 않습니까? 또 “마귀인 자기에게 절만하면 다 네 것이 된다”는 것은 부정한 방법을 쓸 때 많은 것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되므로(마귀의 뜻을 따를 수 없음)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라” 하신 신 6:13의 말씀으로 대응하신 것입니다(8절).

4. 8-12절의 말씀은 마 4:5-7에서 이미 상고한 내용으로, 성도의 명예욕에 관한 시험입니다. 성도가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뜻은 거기에서 못 박히시고 온갖 수모를 당하시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곧 명예를 못 박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모든 시험(그 당시 계획된 시험)을 다한 후 얼마동안 떠났다” 하였은즉, 때가 되면 또 시험할 것이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1 과 나사렛에서 하신 일 (눅 4:14-30) 목록으로


본문 전체는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 14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과 연단을 끝내시고 고향인 갈릴리로 가셨는데, 여기의 갈릴리는 도(道)와 같은 넓은 지역을 의미하고 그 지역 안에 고향인 나사렛 동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란 뜻은 성령 충만의 뜻과 가르치는 분으로서의 권위, 또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갖고 계셨음을 의미하며, “그 소문이 사방에 퍼진 것”은 가버나움(제2의 고향, 마 4:13)에서 능력을 나타내신 일들이 소문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이 가르치신 장소는 본래 유대인들이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공회당이었을 뿐, 특별하게 시설한 예배당이 아니었음과 그의 교훈이 큰 감화를 받게 하므로 칭송을 받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소나 시설에 비중을 두시지 않고 교훈의 내용과 효력에 비중을 두신 것입니다.

2. 16절에서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에서 회당에 자주 모였고, 모이면 습관적(자기 규례)으로 성경을 배웠습니다. 성경책이 희귀하였기 때문에 회당에서만 보존․관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 때에 사 61:1-2의 말씀을 읽으셨으니 그 내용은 “메시야가 출현하여 하실 일을 예언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예언이 자기에게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21절). 그 내용을 그대로 읽으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주 여호와의 신”이라 한 것을 누가는 성령으로, “아름다운 소식”이라 한 것은 복음으로,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심”은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으로, “갇힌 자에게 놓임을” 하신 것은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함으로, 그리고 “기름 부었다는 말씀과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내용은 같은 표현으로 나타냈는데, 결국은 같은 뜻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8-19절).

3. 20절에서 “책을 덮어 맡은 자(회당장)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다 주목하여 보는 중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21절) 하시므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곧 그 예언의 성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들은자들이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다 그를 증거하였다”고 하셨습니다(22절).

4.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실 것과 그곳에서 배척당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23-24절).

1)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이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쓰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능력을 나타내되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처럼 하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절).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교훈하신 일과(마 4:13-17) 백부장 하인의 병을 말씀으로 고치신 사실이 있었는데(마 8:5-13), 그 일들은 예수님이 나사렛에 가시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로 미리 소문이 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속담을 말하면서 고향에서 능력 나타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2)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죽이기로 음모한 사실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28-29절에서 그런 결과를 드러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고향에서 배척 받으실 것을 아시고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24절) 하셨으니, 그 사실은 예레미야의 과거를 생각하시고 인용하신 듯합니다(렘 1:1, 11:21). 그리고 예수님은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하나는 엘리야가 사역할 때 3년 6월 동안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기근에 처하였지만 그때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사렙다(시돈과 두로 사이에 있는 해변 동리)에 사는 과부 한 사람뿐이었고(26절, 왕상 17:1-24), 또 엘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 본국에도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은혜를 받은 자는 오직 수리아 사람 ‘나만’ 뿐이었던 것처럼(27절, 왕하 5:1-24) 은혜는 아무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리 고향 사람이라 하여도 예수님은 원칙을 떠나서 불합리한 상태로, 또는 인정에 치우쳐서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출 33:19에서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으니까요.

3)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예수님을 밀쳐 던지려 하였는데 예수님은 그 무리들 가운데로 지나가시므로 화를 피하신 된 것입니다(28-30절).

은혜는 겸손한 자, 사모하는 자, 또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삼상 10:22, 벧전 5:5, 시 107:9). 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살인 음모를 아시고도 적당히 피하신 것은 그만큼 대항을 안하셨다는 뜻입니다.

 

제 12 과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 (눅 4:31-44)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갈릴리의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11시 방향에 자리한 작은 도성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사셨다는 말씀이 있어서(마 4:13)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합니다. 그곳에는 시몬의 집도 있었습니다(마 8:14). ① 31-32절은 “가르치신 사역”이고, ② 33-41절은 “병을 고치신 사역”이며, ③ 42-44절은 “기도 전도 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가르치신 사역(31-32절)

1) 나사렛 동리는 낭떠러지가 있는 높은 지역이 있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변이므로 그곳으로 “내려오셨다”고 하셨습니다(31절).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서(35절) 가르치셨습니다. 들은 자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으니 “그 말씀에 권세가 있음이라”고 하셨습니다(32절).

2) 예수님이 증언하신 말씀이 권세 있는 이유는 말씀의 지혜와 능력과 실천이 동반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일보다 말씀 교육을 우선하셨습니다.

2. 병을 고치신 사역(22-44절)

1) 회당 안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꾸짖고 “잠잠하라” 하신 후 귀신을 명하여 “나오라” 하신즉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는데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에 대하여 크게 놀랬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하였습니다(33-37절).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멸하지 않기를 사정한 것인데, 귀신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 하였을 때, 귀신도 그 사실을 아는가? 하는 점과, 또 예수님이 왜 꾸짖으시고 “잠잠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약 2:19). 그리고 그의 증거를 꾸짖으신 이유는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의 증거를 인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 거짓말을 하거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가 복음을 외쳤다면 누가 그것을 건전하다 하겠습니까? 이 사역은 예수님이 귀신도 지배하시는 능력자임을 나타내신 사실입니다.

2)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실입니다(38-39절).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나중에 주셨습니다(마 16:18). ‘시몬’에게 장모가 있은 것은 그가 기혼자임을 뜻하지요(고전 9:5). 시몬의 장모는 병 고침 받기를 예수님께 구하였고, 예수님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즉 병이 떠나고 곧 일어나 예수님께 수종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적의 특징은 신속하고 완전하게 나타난 점입니다. 예수님은 귀신과 병을 꾸짖어 쫓으실 수 있는 절대자임을 나타내신 사역입니다.

3) 각색병을 앓는 자들과 또 다른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사실입니다(40-41절). 이 사역은 해가 진 뒤에 하셨습니다. 각색병으로 앓는 자들에게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쳐주셨습니다. 각색병은 병의 종류를 가리시지 않음이요, 손을 얹으신 것은 친근감 또는 위로의 의미가 있을 뿐, 그 손이 능력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니까요(마 8:8-9). 41절의 내용은 33-35절의 내용과 같은 형편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3. 기도와 전도 사역입니다(42-44절).

1) 42절에서 “날이 밝자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을 보면 밤새도록 병자들과 시달리신 듯 합니다. 한적한 곳에서 휴식하시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곳의 거민들이 떠나시지 않기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은 전도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다른 동리에 가서도 전도하여야 한다” 하시고, 그 지역을 떠나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습니다(43-44절). 예수님의 행적을 눈으로 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제 13 과 게네사렛 호수에서 있은 일 (눅 5:1-11)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게네사렛 호수에서 있었던 일이 여섯 가지가 기록되었습니다. ① 말씀을 가르치신 일(1, 3절), ② 그물을 던지도록 명하신 일(4절), ③ 베드로가 순종한 일(5절), ④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일(6-7절), ⑤ 베드로가 깨닫고 변화 받은 일(8절), ⑥ 시몬을 소명하신 일(10-11절) 입니다.

1.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가셨을 때 무리가 옹위하여 말씀을 들었고, 또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듣는 자가 예수님을 옹위하여 말씀을 듣는 모습이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자세이며, 또 예수님은 배와 해변을 말씀 증거의 장소로 이용하신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화려한 장소가 아니란 뜻입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요, 갈릴리 바다, 또는 디베랴 바다라고도 합니다(마 4:18, 마 8:24, 요 21:1). 이 호수가 바다처럼 넓기 때문에(직경 30리, 50리쯤 됨) 바다로도 호칭하고, 서남 편에 디베랴 도시가 있고, 서북쪽에 긴네렛(게네사렛)이란 동리가 있기 때문에 그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였으며(요 6:1, 신 3:17), 또 호수가 갈릴리 행정구역이어서 갈릴리 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무리가 옹위하여 따르면서 말씀을 들은 것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열심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2.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때는 밤이 맞도록 고기 잡는 일을 하고, 날이 밝은 때이어서 더 이상 고기를 잡기 어려우므로 작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면 이유를 묻지 말고 순종하셔야 하겠지요.

3. 과연 베드로는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고기는 밤에 불을 밝히고 잡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밝은 새벽에 불도 없이 그물을 내리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지혜롭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씀이므로 그물을 내린다” 하였으니, 이 뜻은 고기 잡을 욕망으로 내린 것이 아니고 순종에만 목적을 두었던 것입니다.

4.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아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고,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곁에 있는 배의 동료들(시몬의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까지 오게 하여 두 배에 잠길 만큼 많이 잡았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과(학 2:7-8, 사 45:3) 또 한 가지는 순종하는 자에게 상상하는 것 이상의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베드로처럼 인간적 타산을 떠나서 무조건 또는 모험적으로 순종할 줄 아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믿어 순종한다고 하셨으니까요(롬 1:5).

5. 이 일을 체험한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님으로만 알았던 지식을 “천지의 주 하나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기자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불신앙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엎드려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신앙인이 될 때는 다 이 같은 전환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지식,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의식,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줄 알고 겸손하며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6. 그 때에 예수님은 소명을 주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므로 예수님 따르는 사명자 될 것을 예언하신즉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피곤에 지친 몸으로, 또 허탈감에 빠져 그물을 씻던 자들이 금방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낮은 자를 높이기도 하시고,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도 하시는 분입니다(삼상 2:7-8). 절대자를 만난 베드로가 무엇들을 버렸습니까? 우선 고향을 버렸고, 가족과 직업을 버렸으며, 두 배에 가득 담은 고기와 배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과 친해지며,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빌 3:7-9)

따라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있은 일은 ① 예수님의 교육 사역(장소를 불문한), ② 따라다니며 말씀 사모하는 무리들의 열심, ③ 인간의 지혜를 배제한 무조건적인 순종(말씀에 의지하는 순종), ④ 회개하고 겸손해지는 변화, ⑤ 모든 것을 버리고 사명에 헌신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시고, 본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을 심도 있는 신앙으로 교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의 깊은 뜻을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인간의 지혜를 파할 뿐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변화의 전환점을 맞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4 과 두 병자를 고치심 (눅 5:12-26)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2-16절은 문둥병자를, ② 18-26절까지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말씀이므로 전체의 제목을 “두 병자를 고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문둥병자를 고치심(12-16절)

이 사건의 내용은 3대지로 구분됩니다. 12-13절은 “병을 고치신 사실”이고, 14절은 “경계하신 말씀”이며, 15-17절은 “병자들이 오는 것을 보시고 물러가신 사실”입니다.

1) 12절의 한 동네는 팔복산에서 가버나움으로 오시는 중의 한 동리입니다(마 8:1-5 참조).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은 그 증상이 심한 사람인데,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해주실 수 있다” 하면서 고침 받기를 구하였습니다. 이 병자는 자기의 소원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주권을 앞세워 부탁한 것이 좋은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소원을 무조건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자신의 목적과 의지로 일하시는 분임을 알고 그렇게 부탁한 것입니다(엡 1:5, 빌 2:13, 눅 22:42). 이때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즉 곧 병이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손을 내밀어 대신 것”을 ‘안수’라고 합니다. 이 뜻은 위로이고 은혜 전달의 표시입니다. 일반 성도는 즉시 고쳐지는 은혜의 전달이 안 되는 상태에서 안수하다가 병자를 실망시킬 우려가 있은즉 조심함이 좋습니다. 주님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것이고, 본문에서도 중한 문둥병이 곧 떠났으니, 예수님이 나타내신 신유의 능력은 놀라운 이적을 동반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14절) 하셨으니, 이는 병 고침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다 고쳐주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모든 병자의 병을 다 고쳐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엘리야 때에 이적을 힘입은 사람은 사렙다의 과부 한 사람뿐이었고, 엘리사 때에는 수리아의 장군 ‘나아만’뿐이 아니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눅 4:25-27)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이 전체의 병자를 고치시는데 있지 않고(마 12:39) 예수님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데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히 2:3-4). 따라서 이적은 부수적 행사로써 어디까지나 주님이 원하실 때 섭리적으로만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4절 하반에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도록 명하신 것”은 레 14:1-32에 나타난 율법을 이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마 8:4에서 설명하였습니다.

3) 16-17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소문(병 고침의 이적)에 의하여 많은 무리들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 받으려고 몰려왔으나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으니”, 이는 병 고침의 역사를 정도 이상 시행하시지 않고 휴식과 기도를 필요로 하신 때문입니다. 병을 다 고쳐주신 때도 있었습니다(마 12:15).

2.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말씀(17-26절)

이 말씀은 마 9:2-8에서 강론하였고, 막 2:2-12에도 기록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17절 말씀만 설명 드리면, 이 장소가 ‘가버나움’(마 9:1, 본 동네) 회당이고, 그 장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있었으며, 그때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 종교단체 이름이고, 교법사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자이며, “주의 능력이 함께 함”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이적을 행사하는 중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본문 2절의 “의논을 아시고”를 마 9:4에서는 “그 생각을 아시고”라 하였으니, 이는 바리새인들이 놀라고 수근대며 항의하려는 모의를 예수님이 아셨다는 뜻입니다.

 

제 15 과 레위 집에서 있은 일 (눅 5:27-39) 목록으로


본문 27-28절은 “예수님이 레위를 소명하신 일”이고, 그 이외의 말씀은 다 “레위의 집에서 있은 일”입니다. 레위의 집에서 있은 일, 첫째는 “죄인과 함께 먹는 일에 대한 문답”이요(28-32절), 다음에는 “금식 기도에 대한 문답”이며(33-35절), 셋째는 “신앙의 개혁을 비유로 말씀하신 일”입니다(36-39절).

1. 레위를 소명하심(27-28절)

1) 27-28절에서 예수님은 “그 후에 나가사”(가버나움에서 나오셨다는 뜻, 눅 5:17-26)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레위’란 이름이 본문 외에도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곱의 셋째 아들(성전 봉사를 맡은 지파의 이름)이고, 또 두 사람은 예수님 족보에 나타난 44대, 72대 조상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레위는 히브리어로 “친하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하나님의 선물의 뜻)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고, 마태복음의 저자입니다.

2)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그의 믿음과 변화와 사명에 대하여 책임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믿음과 사명과 변화의 주관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히 12:2, 행 9:4-9, 딤전 1:12). 이때에 ‘레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니 사명자 된 확신을 보여준 일이라 할 것입니다. 본래 사명자는 주위를 살피기 전에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서야 합니다. 베드로가 소명 받은 때와 공통점이 많습니다(눅 5:10-11).

2. 레위의 집에서 있은 일(29-39절)

1) “죄인과 함께 먹는 일에 대한 문답”(28-32절)은 레위가 소명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므로 그 자리에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함께 앉아있었는데(29절) 이 광경을 밖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한 것입니다(30절). 유대인들은 로마의 관원 된 세리를 매국노로 생각하였고, 또 토색하는 죄인으로 여겨 상종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긴 것입니다. 시 1:1에서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한 것도 있겠지만, 유대인들이 “선민이란 우월감” 때문에 죄인들을 멀리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사랑 없는 자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 데 있음 같이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1-32절) 하시므로 의원이 병자를 가까이 함이 마땅함과 또 주님이 죄, 병을 고치시는 의원(구세주)임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구원 받을 대상(죄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가까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금식 기도에 대한 문답(33-35절)과

3) 신앙의 개혁을 비유로 하신 말씀(36-39절)은 마태복음 9:14-17의 강론을 참고하십쇼. 이 말씀 중의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에 대한 말씀을 보충하면, 여기의 새 것, 새 포도주는 신약의 복음을, 낡은 것은 구약시대의 율법제도를 비유합니다. 구약의 율법제도나 율법제도에 근거한 전통(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 같은 것)이 십자가 복음 이후에는 그 방법이 새로워져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율법제도는 페하여졌은즉 신령한 예배로 바꾸어져야 합니다(마 11:13, 요 4:21-22, 롬 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율법주의자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묵은 포도주가 좋다”는 사례를 주장하면서(요 2:10) 옛 것만 선호하므로 새 것(복음 신앙)은 새 것으로서 출발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새 조각과 헌 조각을 합하는 것은 합리성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새 술도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산화력이 크기 때문에 부대를 더 상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복음 신앙으로 개혁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16 과 안식일에 할 일 (눅 6:1-19)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1. 본문의 1-5절의 말씀은 마 12:1-8에도 기록되었고, 취지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먹은 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입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와 누가가 보고 수집한 관점에서 기록한 내용이므로 약간의 표현의 차이가 있으니, 마태는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다” 하였고, 누가는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 하였으며, 또 마태는 12:5에서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는 말씀을 더 첨부하였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제자로 동행하면서 보고 느낀 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며, 누가는 12제자를 부르시던 초기에 나타난 인물이 아니므로 공관복음에 기록된 내용은 마태의 기록보다 더 자세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수고하는 것과 관련된 말씀이요, 절도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선민들이 수확을 할 때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모퉁이의 곡식을 남기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레 19:9). 구약의 안식일이라 하여도 제사와 관련된 일은 할 수 있었고(마 12:5), 식생활과 관련된 최소의 노력은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는 않아도(출 16:27-29) 요리는 할 수 있었으니까요(출 16:23). 따라서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말라”(출 35:3) 하신 것은 번거롭게 노력을 많이 하는 식생활을 억제하신 것입니다. 사도시대에 와서는 5리 정도의 여행은 하였습니다(행 1:12). 지금은 은혜 시대라 율법의 세부 조항을 따지지 않고 주님의 생활을 모범하게 된 것을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6-10절의 말씀은 마 12:9-13에도 기록되었고, 이 대목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를 거론한 것”입니다. 우선 마태복음과 대조할 때, 누가복음의 “손 마른 사람”을 마태는 “한 편 손 마른 사람”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사람들”로,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다”는 것을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하고 물은 점, “손 마른 자를 가운데 세우신 것”을 생략한 점, “안식일에 선행하는 것과 악행하는 것, 또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신 것을 마태는 “구덩이에 빠진 양을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귀하지 않느냐”로, 또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처치하려 한 것”을 “죽이려는 의논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니, 역시 한 사건을 저자가 보고 들은 대로 유기적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이건 주일이건, 선을 행하는 것과 약한 자,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살피는 것은 힘써 할 일이란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12-16절의 말씀은 “12제자로 임명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도 마 10:2-4에 나타나 있으나 누가는 12절에서 “예수님이 미리 기도하신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에(손 마른 자를 고치신 후) 예수께서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은 날에 12제자를 불러 사도란 명칭을 주셨다”(13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제자는 사도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10:1, 눅 6:13). 마 10:1에서는 “12제자들에게 능력 주신 사실”을 기록한 반면, 눅 6:12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 임명하신 점”이 각각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4. 17-19절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으로 “평지에서 있은 일”입니다. 이 평지는 팔복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기슭에 넓은 평원이 지금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말씀(6:20-49)을 증거하셨고, “제자의 허다한 무리들이 말씀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북쪽 지중해 변에 있는 두로와 시돈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으며(17절), 그때에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즉(18절)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을 썼으니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타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19절)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이 산과 동리로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나타내신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제 17 과 평지 보훈 (눅 6:20-49) 목록으로


이 말씀을 읽으신 성도님들은 먼저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보훈을 다시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문과 같거나 비슷한 산상보훈과 대조해 보았습니다. 우선 이 말씀의 때와 장소를 보면, 본문은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17절) 하였고, 마 5:1에서는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하셨으며, 20절에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하셨는데, 마 5:2에서는 “입을 열어 가라사대” 하시므로, 시간과 장소와 증거하신 자세가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성지순례 때 팔복산에 올라가 보았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넓은 평지를 본 일이 있는데 안내자는 그 장소를 눅 6:17의 평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안 쓰는 말이지만 본문 전체를 “평지 보훈”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산상보훈의 요약문일까요? 의미가 같은 것은 용어와 표현이 약간 달라도 요약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의미가 같지 않은 것도 있고, 또 고유한 말씀도 있으므로 요약문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누가가 영감을 받은 특수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1. 우선 산상보훈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20절을 보시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라” 하셨는데, 마 5:3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으므로 가난과 심령 가난은 차이가 있고, 너희와 저희도 차이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같은 뜻입니다. 가난을 심령 가난으로 해석할 수 없고, 너희와 저희를 같은 대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교훈으로 받는 것이 좋습니다. 심령 가난은 “겸손과 자기 포기이며 또 진리를 갈망하는 심정이라” 할 것이나 ‘가난’은 물질 가난입니다. 물질 가난이 복이 있고 천국을 받게 되는 이유는 주님이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이며,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려움에 대하여 반대되기 때문입니다(마 19:24).

2) 21절에서 “주린 자는 복이 있다” 하셨는데 마 5:6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하셨고, “배부르다” 하실 때도 너희와 저희가 다릅니다. 그러나 “배부르다”는 결과는 같으니 이것은 음식을 주렸거나 의에 주렸거나 주님이 만족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하신 것과 마 5:4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서 “웃는다”는 표현과 “위로를 받는다”는 표현은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3) 23절에서 “인자를 인하여”를, 마 5:11에서는 “나를 인하여”라 하셨으므로 성경의 “인자”는 예수님을 뜻하고 “인자를 인하여… 너희를 멀리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를 마태는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로 표현하였으며,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와 대조되니, 이 내용들은 “누가”가 예수님의 교훈을 의미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4) 27-28절을 보시면 “듣는 자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는데, 마 5:44에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신 것과 대조하면 누가는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로 마태가 기록한 핍박의 의미를 설명하였고, 또 한 가지 특징은 “듣는 자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주신 것이고, 또 듣는 자에게(알려고 하는 자) 주신 말씀임을 나타내셨습니다.

5) 29절에서 “이 뺨을 치면 저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뺏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하셨는데 마 5:39에서는 “이 뺨, 저 뺨을 오른뺨, 왼뺨”으로, “겉옷과 속옷”을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자 할 때 겉옷까지 주라”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여러 차례 설교를 반복하실 때 다양한 표현을 하신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6) 30절에서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달라 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 마 5:42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되 꾸고저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셨고, 31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신 말씀 외에, 마 7:12에서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씀을 첨부하셨습니다.

7) 32절에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한 것을 , 마 5:46에서는 ‘칭찬’을 ‘상’으로 표현하였고, 33절에서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하신 것을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시므로 죄인은 세리를 일컫는 것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8) 37절에서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아야 자신도 비판․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해야 용서받으며”, 38절에서는 “헤아림으로 헤아림 받을 것이라” 하셨는데, 마 7:1-2에서는 “비판에 대한 말씀”만 하셨고,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특별한 교훈입니다(행 20:35 참조).

9) 39절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은 마 15:14의 말씀과 같고, 40절의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하신 말씀은 마 10:24-25에 있는데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다”는 뜻을 “제자가 그 선생 같으면 족하다”로 표현하셨습니다. “제자가 선생 같다”는 것은 제자가 스승을 닮고 계승하는 것을 뜻합니다.

10) 41-42에 나타난 “눈의 들보와 티를 빼라”는 말씀은 마 7:3-5에 나타난 말씀이고, 43절의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므로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하신 말씀은 마 12:33-34에 나타나 있는데, 표현이 약간 다른,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라” 하였고, 또 43-44절에서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 한다” 하신 것을 마 7:16에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11) 45절에서 “선한 사람이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도 그러하며…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신 말씀은 마 12:34-35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46절에서 “너희는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은 행치 않느냐?” 하신 말씀은 마 7:21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치 않는다”라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12) 47-49절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는 마 7:24-27에 나타난 말씀입니다. 마태는 반석이나 모래 위에 집 짓고, 비와 창수에 견디는 여부로 말씀하셨는데, 누가는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는다” 하였고, “바람과 창수”를 “큰 물과 탁류”로 표현하였으며, 모래 위에 지은 집을 흙 위에 지은 것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파괴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누가와 마태의 기록의 대조는 예수님이 여러 차례 설교하신 내용을 직접 듣고 깨달은 대로, 또는 듣고 전달한 자의 말대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20-26절과 34-36절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1) 20-26절은 “화를 선포하신 말씀”인데,

① 부요한 자가 화 받은 이유는 그들이 이미 (부요한 것으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요(눅 16:25),

② “배부른 자가 주리고 웃는 자가 애통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불법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며(마 8:12),

③ “사람의 칭찬을 받은 자가 화를 받게 됨”은 그가 인본주의로 살고, 인본주의적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갈 1:10).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므로(요 5:27) 공의로운 섭리에 따라 현세와(시 1:6) 말세에 심판의 차원에서 화를 내리시는 것입니다(계 19:2).

2) 34-36절의 말씀입니다.

① 34절에서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빌리면(빌려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의수히 받으려고 빌려주느니라”(‘의수히’는 의례히, 당연한 듯의 뜻임).

② 35절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인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이 말씀은 마 5:45-47에 포함된 의미임).

③ 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우라” 하신 것은 마 5:48의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어투와 같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있는 것으로 없는 자를 돕되 없는 자로부터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 되는 자격”은 사랑 실천의 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의 정도는 이웃과 평준화되기까지 하여야 하겠지만 성도가 사랑의 계명을 완전히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상당한 의지로써 정성을 나타내는 일로 족하다 할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목적을 세우고 꾸준히 뜻을 펴나가는 성도가 되셔야만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네 가지 도덕률 (눅 6:37-3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네 가지 도덕률”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네 가지 도덕률은 모두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누구를 비판․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신도 비판이나 정죄를 받지 않게 되며, 용서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남을 해쳐야 자기가 덕을 볼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인간이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가장 베풀기 어려운 대상이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 사랑에 대한 것을 먼저 말씀하셨고(눅 6:27-35),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아 시행할 것을 교훈하시고(36절) 아울러 네 가지 도덕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이 무엇입니까? 크리노(κρίνω)인데 판단하는 것입니다. 본문 끝에도 보시면 “헤아린다”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도 비판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 줄 압니다. 상대방의 나쁜 점만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 비판이나 헤아림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에 덕이 안 되는 것입니다. 비판이나 헤아림이 사랑에 위반되기 때문에 못하게 하신 것이지요. 선거철에 상대방 후보를 비판하는 것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상대방 인격에 손해를 가하고 자신이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수단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정당한 것입니다. 비판은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복당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가 인사문제에 개입되어 상대방을 비판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직무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판 성격이 다르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랑과 친교를 해치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비판하는 습관을 자제하려면 말을 조심하여야 하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적게 쓰고, 그 사람을 사랑하며, 또 자기의 부족을 먼저 헤아리고(마 7:4), 자기 일에 분주하게 몰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말 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의 차이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비판은 특정한 인물을 상대로 하여 사랑에 어긋나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점에서 물건을 보고 사지도 않을 때는 “비싸다”는 말을 안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판을 삼가려면 원망 들을 말이나(마 5:23-24) 수군수군하는 말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롬 1:29).

2.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보복 원리에 의해서 자신도 고소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회가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말씀하는 정죄의 의미는 자신이 공의로운 재판관처럼 자처하여 다른 사람의 죄를 거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주님뿐이십니다(창 18:25, 계 20:4). 또 직책상으로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개인이 연고자 아닌 개인을 상대로 “죄가 있다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역시 사랑의 계율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분입니다. 음행한 여인을 돌로 치는 자를 보셨을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시고, 그 여인을 타일러 보내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요 8:11). 하물며 허물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죄나 약점을 헤아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여 정죄한다면 참으로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교계 안에 많은 불법이 용납되는데, 이것을 시정하려면 개인과 개인이 싸우려 하지 말고,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앞세워 사랑과 덕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깨우치고 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마 18:15-17).

3.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원수가 될지언정 사랑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1). 그리고 기도를 할 때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준 것처럼 자신의 죄도 용서받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남의 죄를 용서 안하면 자기의 죄도 용서받기 어렵다는 뜻이지요(마 18:23-35). 아무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 실천 중에 가장 비싼 대가를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4.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주고, 인정도 주고, 물질도 베풀고, 모든 일에 덕을 베푸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하늘에 상급이 쌓이는 것처럼(마 6:20) 성도가 이웃에게 덕을 쌓으면 더 많은 덕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도 그런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십일조에 대한 약속처럼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행 20:35에 보시면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이 말씀을 꼭 기억하셔서 받을 것은 잊어버리고, 주는 것만 생각하는 성도가 되실 때, 하나님이 의외로 더 많이 주시는 것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비판․정죄를 삼가고, 용서하고, 주는 것을 생활화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두 가지 이적 사건 (눅 7:1-17)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10절에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주신 사건”이고, 또 한 가지는 11-17절에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두 가지 이적 사건”으로 제목을 정합니다.

1. 백부장의 종의 병을 고쳐주신 사실에 대하여(1-10절)

1) 우선 1절에서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셨다” 하셨으니, 여기의 모든 말씀이란 그동안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말씀인데, 특히 산상보훈(마 5-7장)과 평지보훈(눅 6:17-38)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신 것”은 팔복산에서 교훈하시고 내려오시는 과정에서 평지에 모여 또 말씀하신 후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인(마 4:13) 가버나움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지리의 형태가 그렇습니다.

2) 본문을 읽으면 우선 마 8:5-13에 나타난 말씀과 한 사건임을 알 수 있고, 약간의 표현 차이가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 차이는 마태와 누가가 느낀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태는 간단하면서 백부장의 신앙에만 중점을 두었고, 누가는 좀 더 자세하면서 백부장의 도덕성까지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몇 가지 차이를 든다면

①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누가는 백부장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보낸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였고,

② 또 마태는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워 괴로워한다” 하였는데, 누가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③ 마태는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신 후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는데, 누가는 그 선포를 생략하고 “집으로 돌아간즉 종이 이미 건강하더라”고 하였습니다.

3) “백부장”이란 직위는 로마국이 식민지를 통치할 때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세운 군부대의 중대장쯤 되는 직위입니다. 출 18:21에 보시면 선민들이 재판을 담당케 하기 위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운 일이 있었는데, 로마의 군부대에서도 거기에 착안하여 명령체제를 만든 듯 합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인이었고(3, 5절) 치안 담당의 책임자입니다.

4) 9, 10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신 후 “믿음대로 되라”는 선포가 생략되었지만(마 8;13), “집에 가본즉 병은 고쳐졌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는 성도가 형편상 마태복음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할 때 “주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또 그의 소원이 하인의 병을 고침 받는 것으로 아셨다면, 명령이 없어도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명령을 대행하여 역사할 수 있다”고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에 능력이 동반하는데 마태복음에 의하여 누가복음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1점 1획까지 독립적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백부장의 인물됨입니다.

① 그는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을 사랑하였고, 봉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②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겸손과 이방인으로서 유다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음을 거리낀 탓이요, 또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을 때 예수님을 뵙기 어렵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눅 5:8).

③ 그래서 예수님을 존경하는 태도로 유대인 장로들과 자기의 하인이 아닌 벗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존귀한 분에 대한 예우를 뜻합니다.

④ 백부장은 본래부터 상급자와 하급자 간의 명령계통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절대자이신 예수님께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만으로 고쳐주실 줄 믿었는데 장로들이 “오셔서 고쳐 달라”(3절) 하므로, 예수님은 백부장을 칭찬하는 장로들의 청탁을 승낙하여 오신 것이었으나 중간에 또 벗을 보내어 만류한 것이었습니다.

⑤ 중요한 것은 겸손과 봉사와 예절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수고를 만류, 거절하고 “말씀의 능력이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나타낸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2.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에 대하여(11-17절)

1) 예수님이 가버나움 전도를 마치신 후에 나인성에 가까이 가시게 되었는데, 그때 그곳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관을 내가는 장례행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인성은 나사렛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동리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른 허다한 무리도 있었고, 또 장례행렬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는데(11-12절),

2) 예수님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 하신 후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신즉 멘 자들이 섰다고 하였습니다(관은 “소로스”(δορός)란 말로 뚜껑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않고 말도 하므로 그 어미에게 주신즉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13-16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으로 두루 퍼진 것입니다(17절).

3) 이 사건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이런 이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① 여기의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시려고 하신 것입니다(히 2:4). 물론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점도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탁받지 않으셨으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세 번 있으니, 본문의 사건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과(눅 8:54) 나사로를 살리신 일입니다(요 11:43). 그리고 자신도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 되심과 생명의 주 되심과 능히 인류를 부활시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주 되심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죽음의 상태에서도 위로와 소망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적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그런 이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히 2:4).

 

설교보충 4. 백부장의 덕과 신앙 (눅 7:1-10) 목록으로


“백부장의 덕과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예수님 당시에 지역의 치안을 담당한 군인들이 있었는데,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를 백부장이라고 합니다(이 사람 외에도 예수님을 못 박은 백부장, 고넬료, 바울이 송사 받을 때 보호한 사람, 또 바울을 로마로 호송한 백부장이 있음, 막 15:39, 눅 23:47, 행 10:1, 22:26, 27:43). 그리고 그는 이방인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의 도덕적 생활을 보면,

1)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고쳐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으니 아랫사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고,

2)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부탁을 드리게 한 것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예수님의 뜻을 받드는 정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방인이고 유대를 침략한 적국의 장교이니까 예수님을 정면으로 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두 번째 보낸 사람도 그의 벗들이었으니 역시 교양 있는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외의 뜻을 나타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 장로들이 예수님께 고하기를 “그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인즉, 그 하인의 병을 고쳐주실 만하다” 하였으니,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하인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예절을 갖출 줄 알고, 이웃 봉사를 잘 하여 칭찬을 들었으니 이것이 그의 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이방인과 적국에 대한 경계도 상당히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의 신앙을 살펴보면,

1)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뿐 직접 설교를 들은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소문은 그의 교훈이 지혜롭고 능력을 타나내신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비를 힘입어 하인의 병을 고쳐보려고 부탁한 것인데 존귀하신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 다른 벗을 보내어 부탁을 한 것입니다.

2) 그 부탁의 내용은 미천한 자신과 자신의 종을 인하여 존귀하신 분이 직접 수고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미천한 자가 예수님을 모시는 일을 감당할 수 없사온즉 말씀만 하여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 아래에도 군병들이 있어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며, 또 종들에게 무엇을 하라 하면 하오니,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도 그런 방법으로 능력을 전달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능력자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을 뜻하는 것입니다. 작은 권세를 가진 인간이라도 명령만 하면 아랫사람들이 다 하기 때문에, 직접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적용한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로 추대 받는 예수님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믿음을 이방인 중에서 발견하시고 크게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이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말을 들으셨지만 그것은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일 “집 한 채를 드릴 터이니 내 하인의 병을 고쳐주십쇼” 하였다면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살 줄 알았느냐?”(행 8:20) 하시고 오히려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런 지식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연구하여 깨달은 것이지요. 하나님께는 얽매임이란 없습니다(딤후 2:9). 다시 말하면 “무슨 조건이 나빠서 하실 수 없다”는 부정은 없는 것입니다. 마 8:13에서는 “네 믿음대로 되라”고 명령하셨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칭찬으로 끝났는데,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3)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공간을 초월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은 받드는 사람도 없이 즉시 독립적으로 역사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는 돕는 사람이 없어도 잘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사람이 돕지 않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백부장은 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인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을 도우며,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기로서는 예수님께 직접 나갈 수 없는 입장인데, 유대인 장로들과 친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 청을 할 수 있었고, 또 예수님이 유대인 장로들의 간청에 의하여 동하신 것이 사실인즉, 덕으로 받은 혜택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이 전능자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 전능자의 말씀은 그가 직접 수고하지 않아도 장애물에 구애 없이 독자적으로 역사된다는 것을 연구하여 깨달은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 백부장과 같은 덕과 신앙을 갖추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9 과 바리새인들의 완악을 책망하심 (눅 7:18-35) 목록으로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는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 내용”(18-28절)이고, 다음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는 내용”(29-35절)입니다. 여기에서 전자의 내용은 마 11:2-6에서 설명한 것이므로 후자를 제목으로 선택하였습니다.

1.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 내용(18-28절)

마 11:2에서는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답을 받아오게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고한 것”만 기록하였습니다(18절). 그리고 질문과 대답은 같습니다. 누가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한다”는 말을(25절) 마태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라고만 표현하였고(마 11:8), 눅 7:28절에서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한 것을 마태는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마 11:11) 하였으며, 누가가 “하나님 나라”로 표현한 것을 마태는 “천국”으로 표현하였으니(눅 7:28, 마 11:11), 두 복음서에 나타난 내용에 차이가 없은즉 마태복음 11:2-6의 강론을 참고하십쇼.

2. 바리새인들의 완악을 책망하심에 대하여(29-35절)

1) 백성들과 세리들은 요한의 증거를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며 세례를 받았으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를 받지 않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완악을 범한 것입니다(29-30절). 여기의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한 것입니다(요 1:29, 눅 11:5). 그러나 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요한의 증거를 믿지 않음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자라야 하나님을 본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요 3:3). 그들이 거듭남이 없은즉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사실(진리)을 사실대로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잘못 믿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은 하나인데, 그 참을 불신하는 것은 결국 모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그들이 동하지 않는 상태”를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이 내용은 마 11:15-17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는다” 한 것을 마태는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눅 7:32, 마 11:17)로 표현하였고, 또 36절에서 누가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한 것을 마태는 11:19에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하였으니 “모든 자녀로 인하여”란 말과 “그 행한 일로 인하여”란 말로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의 “자녀로 인함”이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로 인하여 증거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 행한 일”이란 진리(지혜)에 실천이 동반하는 것으로 증명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자는 십자가의 사랑 실천을 예고하신 것이고, 전자는 그 사건이 복음이 되어 후시대에 증거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훈과 환경에도 민감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하여 비난하는 데만 열중하였으니, 금식을 하면 “귀신들렸다” 하고, 금식을 안 하면 “먹기를 탐하는 자요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크게 관심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훗날에 다 증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5절).

 

제 20 과 죄 있는 여인의 봉사 (눅 7:36-50) 목록으로


본문은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집에 식사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봉사를 베풀고 은혜를 받은 사실”의 내용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예수님의 사역 말기에도 또 한 번 있었으니, 그것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시행한 일입니다(마 26:6, 막 14:3, 요 12:3).

1.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초청한 것은 그가 다른 바리새인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감행할 만큼 예수님께 대한 관심을 가졌음이니, 그것은 믿음이 싹트는 결과였을 것입니다(36절).그런데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하는 설교를 들은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명예를 욕보여 드리기 위하여, 귀한분으로 대접해야할 절차(발씻는 물을 드리고,발에 기름을 바른후 입맞추는 것)를 고의로 생략 하였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그것을 회복시킬 목적으로 한 여인이 적극적 헌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각자의 소신대로 한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2. 그때에 그 동네(가버나움을 떠나시지 않은 상태임, 눅 7:1)의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그곳에 계신 것을 알고, 향유 옥합을 갖고 방문하였으니, 여기의 “죄인인 한 여자”는 음행한 여인으로 짐작이 되나 단정할 수는 없고 사회적으로 지탄과 멸시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37절).

3. 그는 예수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38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행위일까요? 또 그가 서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예수님이 높은 의자에 앉으셔서 발을 높이 올리신 상태임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의 이 행위를 예수님은 “자기를 많이 사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47절). 그 행동은 곧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고 죄인이 구세주를 사랑하는 표현이니, 이는 여기에 나타난 사랑의 용어를 아가페(ἀϒαπε)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린 것은 회개와 자비의 은총을 구하는 마음의 표현이요, 그 이외의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봉사적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4.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인데(44절), 그는 이 광경을 보고 마음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렇게 죄 많은 여인이 가까이 온 것을 미리 아시고 경계하셔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였는데(39절), 이때에 예수님이 시몬에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고(40절)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5. “빚진 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500데나리온(1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 마 20:2)의 빚을, 또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의 빚을 졌으나, 주인이 두 사람 다 탕감해 주었으니 누가 주인의 사랑을 더 받은 자냐?”라고 물으셨을 때 시몬은 서슴지 않고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41-43절). 이때에 예수님은 “그 말이 옳다” 하시고 계속 이르시기를,

6. “이 여자를 보아라” 하셨으니, 이는 이 여자의 한 일과 네가 한 일을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위하여 식사만 제공하였을 뿐, 발 씻을 물을 준 일도 없고, 눈물로 발을 적신 일도 없으며, 머리털로 씻어드린 일도 없고, 발에 입 맞춘 일이나 머리에 감람유를 부은 일도 없은즉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44-46절).

7.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주께 대한) 사랑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47절).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마 9:6).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은 근거가 주님께 대한 사랑뿐이었는가? 할 때, 50절을 보시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신 말씀을 보면 그 여인에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믿음에 근거하였고, 믿음에 근거한 사랑은 진실한 믿음을 입증함이 되는 것입니다(약 2:14).

8. 48절에서 “네 죄사함 받았느니라” 하시고 선포하신 것은 함께 앉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49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사함의 근원자로 믿고 그를 사랑할 때 구원과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여기는 그 자체는 죄사함 받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 있는 성도는 자신의 믿음만큼 주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죄 많은 여인은 회개의 눈물과 마음, 머리털의 헌신, 향유 옥합을 드린 헌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죄를 많이 짓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충성을 더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전도에 합력한 사람들 (눅 8:1-25)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다섯 가지 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1-3절은 “전도에 협력한 사람들”이고, ② 4-15절은 “씨 뿌리는 비유 말씀”이며, ③ 16-18절은 “빛과 진실에 대한 말씀”이고, ④ 19-21절은 “예수님의 가족관”이요, ⑤ 22-25절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입니다. 이 말씀 중 1대지만 누가복음의 고유 기록이기 때문에 제목을 1대지 내용으로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전도에 협력한 사람들(1-3절)

1)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 하셨으니(8절),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심”은 복음을 받지 않은 곳이면 “땅끝까지 전파하라”(행 1:8, 마 24:14)는 교훈의 모범적 실천이요,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세계(현실 교회와 영계)를 뜻하고, “전파하신 복음”이란 “예수님이 구세주 중보자로서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방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복음을 모범적으로 전파하신 것이지요.

2)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8절). “함께 하였다”는 뜻은 예수님의 전도사역에 사도들이 동역한 것입니다. 전도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전파의 효력을 더 크게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외식자 가룟 유다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나 이것은 완전하지 못한 지상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3:26-30).

3) 12사도 외에 또 함께 따른 여인들이 있었으니 “막달라 여인 ‘마리아’와 헤롯(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2-3절). 그 중의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상태에서 고침 받은 여인이고, 또 요안나와 수산나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 받은 여인들입니다. 그 외에 여러 여자들도 다 은혜를 받고 예수 믿는 일을 권장하기 위하여 전도의 대열에 나선 것입니다. 전도에는 남녀가 따로 없습니다.

4) 중요한 것은 이 여인들이 “전도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은 여인들이 전도의 사명을 느끼고, 예수님 및 사도들을 따르면서 물질적 봉사를 한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여비, 식비, 구제, 선물 등으로 비용을 쓰게 되는데 은혜를 받은 여성도들이 그 비용을 감당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전도회나 권사님 또는 여집사님들이 교역자의 심방과 전도를 그런 방법으로 지원하는 섬김이 있어야 하며, 또 그렇게 섬긴 여성도들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2. 씨 뿌리는 비유 말씀(4-15절)

이 말씀은 마 13:18-23(막 4:3-20)에서 강론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구원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깨달음을 주시고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가리우시는 뜻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허락된 자”란 십자가의 복음과 죄사함과 영생을 믿는 자들인데, 이들은 은혜(말씀)를 받는 과정에 대하여 본문의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신령한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감추실 필요까지 있으실까? 하시겠지요. 이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마 7:6)는 말씀으로 이해하심이 좋고, 또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이 반대자들에게는 핍박의 빌미를 주는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눅 5:21).

2) 선택자에게는 진리가 전달되지만 비택자에게는 진리를 가리우시는 섭리도 있는 것입니다. “비택자에게 진리가 가리운다”는 말씀은 고후 4:3에 기록되었고, 택한 백성이라도 징계를 하실 때는 진리를 가리우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10절, 사 6:10). 이럴 경우에 설교자가 누구를 깨우치려는 설교를 준비하였어도 그가 징계의 대상이면 그 설교를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들어도 완악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8절), 이 귀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입니다(사 50:4-5, 잠 20:12).

3) 비유의 내용은 진리의 말씀을 접하는 형편을 네 가지로 교훈하여 결론을 주신 것입니다. 11-15절의 설명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씨를 수용하는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① 길가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받았어도 밟힘을 당하여 믿음과 구원에 이르지 못 한다” 하셨으니 이것은 복음을 진리로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전도를 받고도 귀 밖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그 실 예입니다. ② 반석에 떨어진 것은 흙이 얇고 속이 반석이란 뜻입니다. 복음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았지만 마음속에 인간적 반석이 깔려서 진리가 마음으로 수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뿌리가 얕으면 가뭄, 바람 등을 못 견디고 쓰러지겠지요. 이와 같이 확신 없는 신앙은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③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은 일단 말씀을 수용하였지만 신앙생활의 환경을 옳게 갖지 못한 상태에서 온갖 우수, 사려로 훼방을 받고 자승자박 당하므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 등산객처럼 영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오늘날 많은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사랑하거나 예수님이 당하신 3대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마 6:24, 4:1-11) 신앙의 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땅 짚고 헤엄치는 격으로 끝나겠지요. ④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잘 맺습니다. 이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이며, 또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경우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이 씨를 받는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고 깨달으며 인내로 실천한즉 참 믿음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가와 바위에 떨어진 것은 불신자의 입장이고, 가시떨기와 옥토는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 중 가시떨기는 현실주의에 얽매어 부끄러운 구원에 그치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3. 빛과 진실에 대한 말씀인데(16-18절)

1) 16절의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은 마 5:15에 기록된 말씀으로, 빛은 드러나야 하고 빛이 드러남으로 밝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함이라” 하심은 어두운 방을 등불로 비취었을 때 밝음을 보게 하고, 그 밝음이 빛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빛과 어둠을 연상케 합니다. 빛은 예수님(요 1:5), 진리(참), 정의 또는 성도의 사명(마 5:14)으로 착한 행실을 뜻하고(마 5:16), 어두움은 그 반대의 환경을 뜻합니다.

2) 17절에서 “숨은 것과 감추인 것이 장차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음”은 마 10:20과 막 4:22에도 기록된 말씀으로, 빛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사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 뜻은 예수님이 참이시고 진실을 드러내시는 심판주이심을 나타내주신 말씀입니다.

3) 18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진실하여야 할 것을 전제로 하여 “반성하라”는 말씀이고,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뺏기리라” 하심은 마 13:12, 25:29, 막 4:25, 눅 19:26에도 나타난 말씀으로, 하나님이 진실한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시고 외식자에게 속지 않으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가족관입니다(19-21절). 이 말씀은 마 12:46-50과 막 3:31-35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은 일반적 가족이지만 주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참된 성도를 한 가족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요 14:23에서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5.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입니다(22-25절). 이 말씀은 마 8:24-27(막 4:35-41)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가다라 쪽으로 배를 타시고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마 8:5, 28). 그래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가시는 중에 “예수님은 잠드셨고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 차므로 위태해졌는데”(23절), 마태의 기록에는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님은 주무셨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은 풍랑 중에도 주무실만한 입장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연의 지배자임을 몰랐으니까 풍랑과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마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므로 창조자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마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였음)고 책망하셨으니, 여기에서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①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믿을 것과, ② 예수님을 모신 믿음 안에서 환난(풍랑)을 두려워하지 말 것과, ③ 항상 예수님을 모신 상태에서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폭이 넓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2 과 세 가지 큰 사건 (눅 8:26-56) 목록으로


본문은 “세 가지 큰 사건”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내용”이고(26-39절), ② “여인의 혈루증을 고쳐주신 내용”이며(40-47절), ③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내용”(48-56절)입니다.

1.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내용에 대하여(26-39절)

1) 이 사건은 마 8:28-34과 막 5:1-20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미 강론 하였고, 마가복음의 기록은 더 자세한 중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한 설교문(세 가지 간구와 응답)이 있습니다.

2)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거라사”는 “가다라”를 의미하는데(마 8:30) 마가도 “거라사”라고 하였습니다(막 5:1). 그 장소는 갈릴리 호수 동남편 고원지대에 있기 때문에 맞은편이란 기점은 가버나움입니다(눅 7:1, 8:1, 26, 30, 9:1, 마 10:1-2).

3) 27절에서 “거라사”는 도시라 하셨고 그곳에 사는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오랫동안 옷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으며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29절 중에 보시면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면(그가 발광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가) 그를 쇠고랑으로 매어 지켰지만 그것을 끊고 광야로 나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태는 소위 “미쳤다”는 사람들 중에서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런데 그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보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29절에서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 명령부분을 생략하였고, 마가는 “저에게 명하셨다”(막 5:8) 하므로 저자와 귀신들린 자와의 접근 관계를 나타냈으니, 누가는 “이 사람이라” 할 정도로 그 고침 받은 자의 곁에 있었음을 나타냈습니다.

5) 나타난 변화는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28절)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나가라”는 명령과 함께 귀신이 압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도 “예수님이 누구인 줄을 아는가?” 할 때에, 본문과 약 2:19에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알지만 믿을 능력이 없으니 믿는 것과 아는 것이 귀신에게는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엡 4:13). 귀신이 사람 안에 거처를 정하며 최고의 안식처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쫓겨나야 할 능력에 접하였은즉 괴로움을 당하였고, 따라서 예수님께 청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6) 본문에 보시면 귀신은 예수님께 몇 가지 청원을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기도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는 기도이고, 마귀의 기도는 그 반대입니다(시 107:11, 요일 3:8). 마귀의 청원은 ① “괴롭게 마옵소서” 하였고(29절), ②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기를 구하였으며(31절), ③ “돼지(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32절). 이때에 예수님은 세 번째 간청을 허락하셨는데 결국 돼지 떼들이 물에 들어가 죽었으니만큼 마귀의 청원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7) “귀신의 이름은 군대이며 수가 많다” 하였고(30절) 돼지가 몰사된 것은 귀신이 들어가므로 돼지를 괴롭게 하여 물로 들어갔으니 돼지 떼 주인들은 알 수 없는 재앙을 만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8) 이 일로 인하여 돼지를 치던 자들과 그 동리 사람들은 돼지 떼가 몰사한 일과 귀신병자가 완전해진 상태를 보고 크게 놀란 후 두려워 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떠나시도록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동리에서 물러나셨으며(34-37절), 또 고침 받은 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36-37절). 거절하신 이유는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자신(네게)에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온 성내에 고하라 하신즉 그렇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다른 동리에 가서 증언을 할 때 큰 효력이 없을 것이므로 자기의 동리에 가서 전파하도록 그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2.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내용(40-42, 49-56절)

1) 이 말씀에 대하여 마태복음의 내용(9:18-26)과 마가복음의 내용(5:35-43)을 대조해 본즉, 누가와 마가의 기록이 자세하고 마가는 “바닷가에서” 야이로의 청을 받은 것으로, 또 “일어나라”를 아람어 “달리다굼”으로 기록한 차이가 있고, 마태의 기록은 “중간에 종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을 생략하였고, 비교적 간단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혈루증을 고치시는 기록에서는 혈루증 든 여인이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진 점을 나타냈고, “울며 통곡한다”는 내용을 “피리 불며 훤화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사건도 마태복음 강론에서 증언한 것이지만 약간 다른 내용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2) 40절에서 “예수님이 돌아오신 것”은 “가다라”에서 출발지인 가버나움(바닷가)으로 오신 것입니다(1대지 2)항 참조). 그때에 무리들이 기다리다가 환영하였는데,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12세된 외동딸이 병으로 죽게 된 상황이어서 예수님을 초청하므로 옹위하는 무리들과 함께 가시게 된 것입니다(43-48절은 가시는 노중에서 혈루증 앓는 여인의 병을 고쳐주신 사실로 3대지에서 설명함).

3) 혈루증 든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는 말씀을 하실 때에 회당장 집에서 다른 사람이 또 와서 “딸이 죽었으니 예수 선생님을 괴롭게(수고롭게) 하지 마시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고쳐보려고 하다가 죽은 후에는 고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상식입니다(49절).

4) 예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으니(50절), 이 뜻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주신 소문이 났는고로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행 3:15).

5) “집에 이르러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죽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시신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신즉 저희들은 죽은 것을 앎으로 비웃더라”고 하였습니다(51-53절).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같이 들어가지 않은 자들이 비웃었을까요? 아니면 “죽은 자를 잔다”고 하신 말씀을 방안에서 들은 사도들과 아이의 부모가 비웃었을까요? 그 비웃음이 부정한 태도라면 예수님은 역사를 안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창 18:10-15에 나타난 사라의 태도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입니다. 또 “죽은 자를 잔다” 하신 것은 영생과 부활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마 9:24, 살전 4:13, 요 11:11).

6) 이때에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 하신즉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고, 또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즉 그 부모가 크게 놀라더라고 하셨습니다(54-56절). 죽음은 육에서 영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이신즉(히 12:9), 죽은 자의 영을 다시 보내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부활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7) 그런데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병자나 모든 불행한 자를 다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메시야 증거를 위하여 특별하게 보여주신 것인즉(히 2:4)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고, 또 그 사건을 인하여 핍박자들의 악행의 빌미를 나타내시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제자와 부모만 입회시키신 줄 압니다. 또 예수님은 필요에 응할 만큼만 역사하신 것입니다(요 7:6, 고전 14:40).

3.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신 내용(40-47절)

마태는 혈루증 여인이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것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나, 누가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합니다. 43절을 보시면 12년간 고생하고도 고치지 못한 점과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고침을 받은 사실과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신 예수님이 손댄 자를 찾으신 일과 그 여인이 숨기지 못할 줄 알고 고백한 사실과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말씀으로 선포하신 사실을 자세히 표현하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이 방법으로 이런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하는 믿음은, 참으로 사람이 만들거나 구상하여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 마음과 행동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런 믿음이 빌 2:13에 근거한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자 합니다.

 

제 23 과 전도 사역을 명하심 (눅 9:1-17) 목록으로


본문을 일고 “전도 사역을 명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6절은 “12제자를 불러 파송하신 말씀”이고, ② 7-9절은 전도 사역을 “헤롯왕이 듣고 나타낸 반응”이며, ③ 10-17절은 전도 보고를 받으시고 “5병2어로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1. 전도 사역을 명하심(1-6절)

1) 1절의 “12제자를 모으사 능력을 주셨다”는 말씀은 마 10:1과 막 6:7에도 기록되었고, 여기에서 마가는 “두 사람씩 나누어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12제자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능력을 나타낸 사례도 있었고(막 6:13, 눅 10:17) 능히 나타내지 못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막 9:18). 이때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는 믿음과 기도의 부족 때문이라 하셨으니(마 9:19, 29) 주신 능력이 사용자의 믿음에 따라 제한을 받았고, 또 사도들에 한하여 주셨으며(마 10:1, 막 16:14-17), 시기상으로도 사도시대 말기에는 크게 역사하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빌 2:26-27, 딤후 4:20).

2) 2절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셨다” 하셨으니, “하나님 나라”란 천국 건설과 관계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먼저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 고치는 일을 그 다음에 말씀하신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이요, 제자들은 “그 순서대로 시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6절).

3) 3-5절에서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내용은 마 10:5-14에서 더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① 우선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 등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복음 사역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만큼(마 6:8, 32) 섭리적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시무자는 이런 체험을 많이 합니다만 무전여행으로 전도하면서 꼭 체험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②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고 거기서 떠나라”(4절)는 뜻은 마 10:11-13에 비추어 볼 때 “전도자를 영접하는 집에서 유하고 평안을 빌며 억지로 신세를 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③ “어떤 도성에서 영접하지 않고 배척할 때에는 전도자의 발길이 있었다는 증거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고 나오라”(5절)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강요나 수단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헤롯왕이 듣고 나타낸 반응(7-9절)

예수님과 제자들의 전도 사역이 두루 퍼지므로 분봉 왕 헤롯이 듣고 당황하였으니, 이 헤롯은 대 헤롯(예수님 출생 시의 왕)의 넷째 처인 “말다스”의 소생으로 “헤롯 안디바”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 죽은 요한이 살아났거나 구약의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거나 다른 선지자가 다시 살아난 모양이라”(8절) 하면서 요한을 자신이 목 베어 죽였는데(마 14:3-11) 이런 일이 들리니 더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9절). 요즈음도 그런 일이 있으면 많은 여론이 있을 것입니다.

3. 전도 보고와 오병이어의 기적(10-17절)

1) 10-11절을 보시면 “전도 나갔던 사도들이 돌아와 행한 것을 보고한즉 예수님이 데리시고 ‘벳세다’ 고을(가버나움에서 동쪽으로 해안 4km 지점,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 요 1:44)로 가신즉 무리들이 알고 따라왔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셨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하신 후 병도 고쳐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14:13-14) 이 부분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예수님이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후 배를 타시고 떠나 빈 들로 가셨으며 이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 사람들이 걸어서 좇아갔으며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병인을 고쳐주셨다” 하셨고, 막 6:30-34에서는 더 자세히 표현하셨는데, 이는 다 저자의 관점과 표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 날이 저물었을 때 열 두 사도가 “여기는 빈 들인즉 무리를 마을에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12절) 하였는데, 마태는 같은 표현을 하였으나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마 14:15) 하였고, 마가는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와야 할 것이라”(막 6:37) 하였으니, 군중의 식사문제를 토론한 내용의 한 부분씩 기록한 줄 압니다.

3) 1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가져오라는 뜻)” 하셨는데, 마태는 14:16절에서 “갈 것 없다”는 말씀을 앞에 첨부하였고, 마가는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막 6:38)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5병2어 뿐인즉 모든 이를 위하여 사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하였는데, 여기의 “물고기”는 “옵사리아”(όφάρα)로써 멸치 정도의 작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마태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4) 14-15절에서는 남자만 5,000명 되는 수를(마 14:20,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수라고 하였음) “50명씩 떼 지어 앉히라” 하였고, 마태는 “친히 잔디 위에 앉히셨다” 하였으며, 마가는 “100명씩 혹은 50명씩 앉혔다”(막 6:40)고 하였습니다.

5) 16절에서 “예수님은 5병2어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제자들 앞에 놓게 하셨다” 하였고, 마태는 “5병2어를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눠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서드리 절차에 약간의 다른 표현이 있는 것은 저자의 관점에 따른 차이이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그리고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둔 것입니다. 요 6:12절에서는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음식 찌꺼기 버리는 분이 계십니까? 꼭 이 말씀을 명심하십쇼.

7) 문제는 기적과 기적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① 기적은 예수님의 창조적 능력에 근거한 것이고, 절차에 있어서 작은 것의 솔선봉사와 감사로 받는 축사가 있은 것입니다. 섬김의 붐이 일어나면 넉넉하게 채움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봉사하고 서로 돕는 세계에 풍성함을 주십니다(행 4:34).

② 이 기적의 의미는 피곤하고 시장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의미가 있고(마 14:14), 일용할 양식을 섭리적으로 주시는 의미가 있으며(마 6:25), 또 핍절을 느끼거나 풍요함이 있거나,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며 항상 질서 있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곤함과 질병과 배고픔과 무질서까지 다 유익하게 지도하시고 해결하신 것입니다(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참고하십쇼).

 

제 24 과 신앙고백과 사명적 교훈 (눅 9:18-27)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으신 사실”(18-21절)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명적 교훈”을 주신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22-27절).

1. 신앙고백을 받으신 사실(18-21절)

1) 이 말씀은 마 16:13-18에도 기록되었고, 막 8:27-9:1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8절에서는 “따로 기도하실 때”라고 하셨으나 마태는 그 장소가 “가이사랴 빌립보”라 하였고(마 16:13), 마가는 “그곳의 노중에서 말씀하셨다”(마 8:27) 하였으며,

2) 또 20절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마태와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누가의 기록이 간단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22절에서 예수님이 직접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일에 대하여 마태는 “비로소… 가르치셨다”(마 16:21) 하였고, 그때 “베드로가 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4) 이상의 말씀에서 주신 중요한 교훈은 ①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아야 하는 문제와 ② 또 그 사실을 엄히 경계하신 문제(21절)와 ③ 십자가와 부활을 예언하신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위 ①항은 “신앙고백이 바르고 확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②항은 “때를 맞추어 역사하시는 섭리”를 교훈하셨으며(요 7:6), ③항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거기에 상응하는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믿음으로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2. 사명적 교훈(22-27절)

1) 본문 22절 중의 “날마다”란 말씀이 마태, 마가의 기록에는 생략되었습니다. 그리고 26절과 27절은 마태, 마가의 기록(마 16:27-28, 막 8:38-9:1)에 비할 때 의미상으로만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저자가 다른 만큼 표현의 차이가 있음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 23절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은 사명자가 복음의 일선에 서려면 자기중심을 완전히 떠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자기를 죽이는 일; 고전 15:31, 자기를 헌신하므로 당하는 고난을 감당하는 일; 마 19:29)를 져야 한다는 뜻이니, 이는 사명의 일선에 섰다 하여 현실적 우수, 사려를 다 없애주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24절 말씀은 “이기주의의 최종 목표인 자기의 생명까지, 주님의 뜻에 따르기 위하여, 버릴 각오를 할 때 주님의 권고가 따를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성도의 믿음과 정의의 목적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 때 주님이 더 힘 있게 권고하신다는 뜻입니다.

4) 25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뺏기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셨는데, 여기의 “자기 또는 자기 생명(목숨; 마 16:26)”은 거듭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지옥 갈 생명이라면, 그것이 천하보다 귀할까요? 하나님이 염두에 두시는 생명은 자기 백성, 즉 영원한 생명입니다.

5) 26절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누가”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마태는 16:27에서 “아버지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였고, 마가는 8:38에서 “누구든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믿음을 비난하거나 우습게 보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그런 세계에서 믿음을 활개 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일이겠지요. 소극적 생활은 소극적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신앙은 연약한 것이지만,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보아 구원은 받는 것입니다. 누가가 “주님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마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라 하였으니, 역시 믿음 행위의 정도에 따라 상급을 주신다는 뜻인데, 상급을 받게 될 때는 서로 기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서로 부끄럽고 민망함이 있는 것입니다.

6) 27절에서 “참으로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그 당시에 예수님 따른 무리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 하셨는데, 이 부분에서 마태는 “왕권을 갖고 온다”(마 16:28) 하셨으며, 마가는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막 9:1) 하셨으니, 이 의미를 종합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변화의 광경(28-36절, 마 17:1-9, 막 9:2-10)을 천국의 한 부분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들 중 일부(베드로, 야고보, 요한)가 죽기 전에 본 것이고, 그 세계는 먼저 간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자리인 만큼 천국이요 지상의 유혹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이므로 주님이 왕 노릇하시는 세계인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주신 사명적 교훈은 사명자가 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확신하는 것이고(21-22절), ②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23절), ③ 주님의 뜻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고(24절), ④ 사악한 세대에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담대한 신앙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26절).

 

제 25 과 변화의 계시와 간질병을 고치심 (눅 9:28-45)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변화의 계시” 말씀과(28-36절) “간질병을 고쳐주신 일”(37-45절)이 기록되었습니다. 또 이 두 가지 기록은 마 17:1-9(막 9:2-10)과 17:14-21(막 9:14-2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변화의 계시에 대하여(28-36절)

1) 먼저 이 말씀을 마태의 기록과 대조하여 고유한 내용만 살피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본문 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후”는 그 앞에서 말씀한 9:18-27의 교훈에 이어진 뜻이고, 그 후 “8일쯤”이란 날수의 대략적 계산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는 정확하게 “엿새 후”라 하였으니, 이것은 만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마 17:1에서 “세 사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란 말씀에서 누가는 “기도하러 가셨다”는 등산의 목적을 첨부하였고, 29절에서 “기도하실 때(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는 표현을, 마태는 “저희 앞에 변형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 하므로 표현의 목적이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변화의 형태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미리 변화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또 죽은 모세가 부활하여 나타난 형태나 죽음을 당하지 않은 채 변화된 엘리야가 한 자리에 모인 형체들도 다 같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쓴 것 같은 외형적 변화가 아니고 본질적 변화로써 원문 “메테몰포데”(μετεμορφὼθη)의 뜻(마 17:2)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눅 9:31-32과 33절의 끝부분인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 하더라” 한 말씀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 앞에서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과(31절), 또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과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는 말씀이 있고, 33절에서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 초막 이야기를 제언하였으나 “자기의 말하는 것을 자기도 알지 못 하더라” 하였으니, 이 뜻은 막 9:6과 비교할 때 “잠이 깨어 황홀한 정황에 놀란 나머지 주관적 판단 없이 헛소리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막 9:6에서는 “심히 무서워 무슨 말을 할런지 알지 못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면서 피곤하였고, 그 피곤에 못 이겨 졸다가 깬즉 눈앞에 변화의 광경이 나타난 것을 본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짓자”는 제의에 대하여 마태는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17:4)이란 단서를 붙였습니다. 또 35절에서 “곧 택함 받은 자니”를, 마태는 17:5에서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고, 36절에 대한 설명을 마 17:6-9에서는 더 자세히 표현하였습니다.

2) 예수님이 이 광경을 보여주신 이유는 9:27의 말씀(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을 성취하시고 제자들에게 부활과 내세가 있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가고 예수님만 홀로 남으셨으며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4-35절) 하신 것은 구약시대가 지나갔은즉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보다 예수님이 가장 밝은 계시를 나타내신 말씀의 주(主)요, 모범자이심을 깨우쳐주신 것이었습니다(“변화 계시의 의미”란 설교문을 꼭 참조하십쇼).

2. 귀신병을 고쳐주신 일(37-45절)

이 말씀도 마 17:14-21(막 9:14-29)에 나타나 있습니다.

1) 37절에서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심”은 변화의 광경을 보여주신 산에서 다음날 내려오신 것이고 그 마을이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2) 38-39절에서 무리들의 영접을 받으셨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선생님, 청컨대 내 외아들을 돌보아주소서.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흘리게 하고 심히 상하게 한 후 떠나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는 “그 병이 간질병인 것과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넘어진다” 하므로 간질병자의 다른 증상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기록이 더 간략합니다.

3) 마 17:15에서 “간질병”이라 하셨고, 본문 39절에서 “귀신이 저를 잡아” 하셨은즉, 그 아이의 병은 귀신의 역사로 나타난 증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 뇌의 이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질병을 거론한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그 아이를 귀신의 역사로 다스리신 만큼, 그 아이의 병은 귀신병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4) 40-41절에서 제자들이 먼저 그 부탁을 받고도 고치지 못한 사실은 마 17:16-20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제자들이 은사를 받았어도 믿음과 노력에 의하여 활용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신 대목입니다.

5) 예수님은 그 귀신병자의 아버지의 청을 들으시고 “아이를 데려오라”(41절) 하셨고, 그 아이가 예수님께로 가까이 올 때, 귀신이 그 아이 속에서 요동하므로 “아이가 거꾸러지고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42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반항적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은 나가고 아이는 낫게 되어 그 아비에게 돌려주신 것입니다.

6) 사람들이 그 위엄에 놀라고, 그 행사를 기이히 여긴 것은 족히 짐작되는 일이요(43절), 그때에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사람의 손에 넘기워질 것”(십자가 예언, 마 20:17-19)을 예고하시고 “귀담아두라” 하셨으니, 그 일에 대한 신앙적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7)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됨이라” 하셨고, 또 “저희가 이 말에 대하여 묻기도 두려워 한 것”(45절)은 “사람의 손에 넘기우는 일”이 불길한 일이면서 의미를 밝히 이해하지 못한즉 깊이 따져 묻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예언이 숨김이 됨이라”는 뜻은 결과만 알리시고 소상한 절차를 적당히 감추심으로, 그 일에 대한 소란을 방지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신앙적 대비가 필요할 뿐, 이 일에 반대하는 행사가 나타나서 유익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26 과 제자들의 취할 태도 (눅 9:46-62) 목록으로


본문에는 “제자들이 취할 태도”에 대한 말씀이 네 가지 대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겸손하여 크게 인정을 받으라”는 내용이고(46-48절), ② “개인 활동자를 포용하라”는 교훈이며(49-50절), ③ “배척을 받아도 대항하지 말라”는 교훈(51-56절)과 또 ④ “과감한 헌신을 시도하라”는 교훈입니다(57-62절). 이 네 가지 교훈은 사역자들이 꼭 취할 태도인 것입니다.

1. “겸손하여 크게 인정받으라”는 말씀(46-48절)

1) “제자 중에 누가 크냐”고 변론한 일에 대하여 마태는 “가버나움” 노중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8:1). 누가의 기록처럼 제자들이 노중에서 자기들끼리 서열문제로 변론을 하다가 예수님께 질문하였고, 예수님은 “저들의 변론하는 마음(명예 의욕)을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은밀한 세계의 것도 아시는 분입니다(눅 6:8, 마 17:27). 서열의 궁금증은 일종의 명예욕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고, 또… 나를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연계되는 뜻으로 마태는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마 18:2-3).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란 자신을 최고로 작게 여기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그런 상태를 대변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3) 여기의 “어린아이”는 바로 자기를 최대한 작게 여기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가장 크게 보시는 대상”인 만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자를 영접하면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을 영접함과 같고, 또 예수님 자신을 영접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의 취할 태도는 자신을 작게 여길뿐더러(고전 15:8, 31) 스스로 겸손한 자를 영접함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자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실정임을 아시고 성도만큼은 거기에 도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개인 활동자를 포용하라”는 교훈(49-50절)

1) 요한이 여쭙기를 “어떤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았으나 우리를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 하시므로, 그를 금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와 소속이 다르거나 한 단체에 있지 않다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기도를 못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권사가 다른 사람들 중에서 건전하지 못한 방법이나 성경적 근거를 떠난 방법으로 신유의 은사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따를 필요가 없지만 그가 토론의 대상이 아니면 권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귀신 쫓는 일을 한다면 교파가 다르더라도 용납하고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셨으니 아무 반대나 핍박이 없으면 긍정하고 협력하는 뜻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 9:38에서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즈음도 정부시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데모하는 것을 봅니다만, 데모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은 정부의 하는 일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성원하는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만 애국자는 아닌 것입니다. 삶의 철학이 다르니까요.

3. “배척을 받아도 대항하지 말라” 하심(51-56절)

이 말씀은 본문에만 기록되었습니다.

1) 예수님의 승천 기약이 차갈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다”고 하였습니다(51절). 이때가 예수님의 마지막 상경이었습니다(눅 2:22, 2:42, 요 2:13, 5:1, 7:9-10; 5회 상경). 여기의 결심을 하셔야 할 이유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은 결심하고 행할 때 감당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2) 그때에 사마리아 촌을 통과하셔야 하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미리 예비하도록 사자들을 보내셨습니다(52절). 여기의 “예비한다”는 뜻은 영접과 말씀을 듣게 할 준비를 뜻합니다.

3)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유대인 계통임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53절), 이는 정통파라는 선민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여겨 멸시하였기 때문에 서로 적대시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도 복음을 받고 주 안에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입니다.

4) 이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리는 불(창 19:24, 계 13:13)을 명하여 저희를 멸하심이 어떠합니까?” 한즉 예수님이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으니(54절) 일단 배척을 받았으면 “순순히 나오라”는 뜻이고, 또 배척을 받았다 하여 만용을 부리거나 하나님의 보복을 구하는 것은 합당치 않으므로 꾸짖으신 것입니다. 대항하고 싸우면서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을 것이지만 영접하지 않으니까 그들에게는 “복음이 가리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고후 4:3).

4. “과감한 헌신을 시도하라”는 교훈(57-62절)

1) 61-62절을 제외한 이 부분의 말씀은 마 8:19-21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57절의 인물이 마태는 한 서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마 8:19). 그가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따르겠다” 하였을 때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임을 알고 따르라” 하셨으니, 이는 현실적 이기주의의 목적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요,

2) 또 다른 사람이 “부친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 하였을 때에도 죽은 자의 시체 처리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음을 깨우치셨으며,

3) 또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따르겠다”는 자에 대하여서는 인정을 초월할 것을 교훈하셨으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시므로 가정과 인정에 너무 치우치면 하나님의 쓰심(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쟁기를 잡아보셨습니까? 잠시라도 뒤를 보면 쟁기가 바로 가지 않습니다). 빈 그릇이어야만 쓰실 만 하다는 뜻입니다. 개인과 가정의 일에 편중하여 사명에 쓰임 받지 못하는 사역자들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 27 과 전도대 파송에 관한 말씀 (눅 10:1-2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전체의 제목을 “전도대 파송에 관한 말씀”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① 1-9절은 “전도자들에게 주신 훈시”이고, ② 10-16절은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요, ③ 17-20절은 “전도 보고에 따른 교훈”입니다.

1. 전도대 파송에 관한 말씀(1-9절)

본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마 10:5-15의 말씀과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한 가지 사건을 두 저자가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사건이 다른 것인가? 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사는 전도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교훈하셨고,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70인을 둘씩 짝 지워 보내신 일인 만큼 다른 사건입니다. 특히 1절에서 “이후에 주께서 달리 70인을 세우사” 하셨으므로 9장의 사건 다음 일을 뜻합니다. 따라서 전도자에게 주시는 훈시는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9:1-6이 마 10:5-15에 상통함).

1) 1-2절에서 “예수님은 전도자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지역으로 둘씩 짝지어 앞서 보내셨고, 또 추수할 것(구원으로 인도할 백성)은 많으나 일군(전도자)이 적은즉 추수하시는 주인(성부 하나님)께 일군들(전도자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70인은 더 필요로 하는 수보다 적은 수인즉 숫자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은 전도 행보와 사역에 적당한 편성이고, 하나님은 일군의 수를 더하시는데 섭리적으로 역사하신즉 하나님께 기도로 아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3-4절에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양; 마 10:16)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다” 하셨으니 세상은 악하고 전도자는 순진함을 비유로 경계하신 말씀이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가 있을 것을 암시하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지혜로워야 합니다(마 10:16). “전대, 주머니, 신을 가지지 말 것”은 하나님이 적당한 방법으로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신 뜻이며(마 6:8, 32),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하신 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서 불필요한 친교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직 전도에만 전력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말씀한 ”눅 9:60-62의 교훈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3) 5-6절에서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그 집은 복음을 영접한 만큼) 평안을 선포하라”(평안할지어다, 축도의 성격임, 고후 13:13, 엡 6:22-23)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 평안을 받을만한 사람(믿음으로 받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빈 평안(선포를 뜻함)이 그 집에 임할 것이요(머물 것임), 그렇지 않으면(믿음으로 받을 사람이 없으면) 평안을 선포한 공력이 자신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4) 7-8절에서는 “복음을 받은 집에서 영접을 받고 대접을 받으며 그것으로 수고의 삯을 받아도 마땅하다” 하셨으니, 이는 복음의 값이 크기 때문이고(고전 9:11), 또 사역자에게 수고의 값을 주시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9).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옳기지 말라” 하신 뜻도 “대접받는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옮기는 일을 쉽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접대할 때 축복하고 받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5) 9절에서는 복음을 받는 세계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신 세계를 뜻합니다(막 1:15). 천국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판도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면, 어디든지 천국입니다.

2.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10-16절)

1) 10-11절에서 “너희를 영접한다”는 뜻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복음)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거리로 나와서 “너희 동리에서 우리(전도자들)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셨으니, 여기의 “먼지를 떠는” 뜻은 전도의 사명이 그들에게는 끝났은즉,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상징적 행위요, 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한 것은 전도를 재차 강조한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12-15절에 보시면 “저 날에(심판 때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지 않은 고을이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돔은 한 번 심판을 받았고(창 19;24), 또 그들의 죄는 도덕성(음란, 패괴)에 관한 죄였지만 복음을 배척하는 죄는 하나님을 멸시함이기 때문에 그 형벌이 더 큰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두로와 시돈에 비할 때 더 완고하였고, “가버나움”도 하늘에까지 높아질 만큼 교만하였습니다. 벳세다와 가버나움에서는 예수님이 큰 이적을 나타내신 곳임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진다” 하심은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비천한 촌락을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곳은 발전되어 있지 않습니다(12-15절, 막 7:30-45, 마 8:5-17).

3) 16절에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자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며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림이라” 하신 것은 제자들과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일체된 관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전도 보고에 따른 교훈”(17-20절)

1) 70인이 기뻐 돌아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한 사례를 보고하였습니다(17절).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역사의 보고가 없음이 유감입니다. 이적의 타나남보다 더 중요한 것이 회개와 믿음의 역사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시므로 사탄의 강한 출동이 있는 것을 주님은 영안으로 보신 것입니다(18절). 그러나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만큼 너희를 해할 자가 결코 없다”고 하셨으니, 이는 제자들에게 주신 능력이 사탄의 역사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전도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사탄의 어떤 역사라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의 항복은 현세에서 시행하는 성령님의 역사에 속하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은 성도 자신의 영원한 소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 28 과 전도 사역 중 있었던 일 (눅 10:21-4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시려면 네 대목으로 나누어 살피심이 적당합니다. ① 21-24절은 “전도의 효력”(또는 전도 보고를 받으심)에 대한 말씀이고, ② 25-28절은 “율법사와의 대화”요, ③ 29-37절은 “이웃 사랑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며, ④ “마르다의 집에서 있은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여러 대목에서 종합적 제목을 찾기는 어렵지만 “전도 사역 중에 있었던 일”로 정하면 모든 내용을 다 포괄할 수 있습니다.

1. 전도 보고를 받고 만족하신 일입니다(21-24절).

1) 앞부분 1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기뻐 돌아와… 귀신이 항복한 사실을 고하였으니”, 이는 전도의 효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1절에서 “성령으로 기뻐하셨고, 또 어린이들에게 복음이 전달된 것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기뻐하신 뜻”은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시므로 기쁨을 누리셨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은 세속의 반대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것들로 인하여 기쁨을 맛보려 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곧 성령 충만, 전도의 효력, 말씀의 깨달음, 말씀 실천의 만족, 영생의 소망 등)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성령으로 기뻐하신 말씀”을 제외한 이 부분의 말씀은 마 11:25-27과 13:16-17, 23-24에도 나타나 있고, 필자는 그 부분에서 강론하였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세에서 복음을 받게 하셨고,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셨으며, 또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서 전개되는 계시가 일치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한 율법사와의 대화 내용입니다(25-28절).

1) 이 부분의 말씀도 마 19:16-22과 22:35-37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율법사(율법주의자, 율법 선생)는 무엇을(선한 일, 마 19:16) 하여야 영생(구원)을 얻는 줄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천에 미흡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이 이를 지적하셨고, 또 실천에 성의를 다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28절에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신 말씀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선행을 내세운 만큼(29절) 그가 시행하는 선행의 정도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당당하게 선행의 대상인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선행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미흡하다면 율법 실천의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면 살리라” 하신 말씀은 모든 인간들이나 율법사의 미흡한 선행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사실은 부정적 뜻을 내포한 것입니다(갈 3:11). 따라서 율법사와의 대화 부분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율법사가 율법 시행(이웃 사랑 또는 선행)을 완전하게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실천하는 줄로 착각한 것을 깨우쳐 주시는 일과, ② 선행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③ 사랑 실천을 성실하게 하여야 할 것과, ④ 사랑 실천이 미흡한 율법사는 사랑을 성실하게 시행한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도 못한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3. “이웃 사랑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29-37절).

1) 이 말씀은 누가만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요, 사랑의 본을 보인 사람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2) 요단강 동편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낭떠러지의 언덕길인즉 옛날에는 퍽 음산하고 위험하였을 것입니다.

3) 그곳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의복까지 벗김을 당하고 몸이 상하여 죽게 된 입장인데, 소위 제사장(하나님을 일선에서 섬기는 자)이란 사람과 레위 사람(성전 봉사자)이 각각 이를 피하여 지나갔으니 그들은 사랑을 역행한 사람들이요,

4) 그 다음에 지나간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를 불쌍히 여겼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해 주고, 또 자기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인도한 후, 하룻밤을 보살펴 주었고, 이튿날 떠날 때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2일의 인건비)을 주면서 남은 일을 부탁을 한 후 부비(expense)가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33-35절) 하였으니,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은 거의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5) “네 의견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하셨을 때 그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와 같이 사랑을 실천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이란 개념과 사랑 실천의 실제적 방법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을 알고 가르치면서 실천에 미흡한 사람보다 율법 규정을 잘 몰라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더 귀한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4.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있은 일”입니다(38-42절).

1) 이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이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형제이므로 이 집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집임을 짐작하게 합니다(요 11:1). 예수님이 그 집의 영접을 받으셨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분주하였으므로 “말씀 교훈을 중지하시고 마리아를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2) 이때에 예수님은 “많은 일(음식 차리는 일, 또는 세속에 관한 일)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믿음 위주로 단순하게 살라는 뜻이요, 또 “몇 가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다” 하신 것은 단순한 식단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며(롬 14:17, 고전 8:8),

3) 또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셨으니, 이는 매사에 신령한 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선택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두는 성도는 간단히 잡숫고 신령한 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도 단순하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하며,

4) 손님 대접도 상대방의 필요에 응하여 접대하되 부담을 갖지 않도록 단순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 29 과 기도를 가르치심 (눅 11:1-26) 목록으로


이 본문은 두 대목입니다. ① 기도를 가르치심(1-13절), ② 귀신을 쫓으신 후 변론하심(14-26절)입니다.

1. 기도를 가르치심에 대하여(1-13절)

1) 1-4절은 주기도문의 일부인데, 이 말씀이 마 6:8-13에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한 번 말씀하신 같은 내용을 마태, 누가가 기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가르치신 내용이고, 본문의 기록은 전도 후기에 70전도인의 보고를 받으신 후(눅 10:1) 제자의 요구에 의하여 재설하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마 6:8-13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내용을 기도의 교리처럼 믿고 “원문대로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기도의 골격 또는 주안점을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의 주기도문과 누가의 주기도문이 취지는 같으나 누가의 기록이 더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도 꼭 같은 문장으로만 기도하셨거나 가르치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2) 제자 중 한 사람이 “요한(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때는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라고 하였습니다(1절). 이때에 예수님은 과거에 가르치셨던 내용의 취지를 떠올려 다섯 가지 대목을 가르치셨는데, 그 대목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되 “다섯 가지 간구 내용에 중점을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간구 내용 이외에 생략한 것이 있다면 감사와 자복의 내용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생략된 것입니다.

3) 다섯 가지 간구 내용은 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도록, ②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지도록, ③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④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듯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⑤ 시험에 들지 않게 되기를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강론에서도 설명 드린 바가 있지만, 한 번 더 유의하는 뜻으로 말씀드린다면, 첫째 간구에서는 성도 자신이 “모든 일을 거룩하게 도모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 받도록” 해야 할 것과, 두 번째 간구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순하게 실현되기 위하여 마귀와 싸워 이기고, 또 하나님의 뜻을 힘 있게 복종하는 성도가 되도록 힘쓰면서 기도할 일이며, 셋째 간구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였은즉 그 당시의 무리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였음이 틀림없고, 또 하나님께서도 그 당시에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처럼 일일 양식을 먹을 수 있도록 섭리하신 줄로 알며, 넷째 간구에서는 자신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타인의 죄를 용서함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마 18:21-35). 따라서 “용서”는 죄사함 받는 믿음에 포함되는 신앙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4절의 “죄지은 모든 사람”은 “빚을 진 모든 사람”(빚진 자; οφείλω; 오페일로, 마 18:28의 빚진 동관)으로도 번역된다고 합니다. 빚은 죄를 설명하는 적당한 비유 표현입니다. 다섯째 간구에서는, “죄의 유혹을 피하며 죄를 짓게 되지 않도록 은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4) 5-8절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가능한 실 예”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시는 대목입니다. 이 비유 내용에서 응답 여건이 약간 어려운 점은, 자식이 아버지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에게 구하는 것인 만큼 아비의 자식에 대한 배려보다 약하다는 점과, 또 한 가지는 밤중 너무 늦은 시간, 즉 가족이 다 잠들었을 때이므로 거동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줄 자가 핑계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간청자의 구하는 내용이 너무 타당하여 어려운 중에서라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청자는 응답을 받았으니 그 간청의 내용인즉,

① 떡 세 개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적은 것을 의미합니다. 물욕이 아니고, 다른 욕심도 없으며, 당장 또 순간적으로 필요하여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될 것이라”고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② 거저 달라는 것이 아니고 “빌리라”는 것이니, 최대한 노력하고 최소한의 것을 구한 것이므로 줄 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더 적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것을 구해야 합니다.

③ 그 용도가 “밤중에 벗이 여행 중에 왔는데 식사 대접할 음식이 없어서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라” 하신 하나님의 뜻(롬 12:13)을 실천하기 위함인즉 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이유가 타당한 것입니다. 어느 이론으로도 “그런 손님을 대접 안 해도 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④ 그런데다가 시급한 점이 또 있습니다. 여행 중에 온 벗은 시장기를 느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속히 먹지 않으면 기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막 8:1-3에 보시면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 “먼 데서 온 자가 있는데, 그대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이라” 하시고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급한 것을 아십니다.

⑤ 그런 중에 구하는 자는 또 강청을 하였으니 어찌 응답이 안되리요. 결국 요청의 타당성이 있고, 강청하므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너무 큰 것을 구하면, 욕심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안 주십니다. 그러니까 작은 것, 그리고 꼭 필요한 것, 또 시급한 것을 구하되 빌리는 식(감사의 보답을 전제함)으로 구한다면, 하나님은 벗보다도 더 가까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유쾌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힘쓰라”는 의미로 9-10절(마 7:7-10)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5) 11-13절에서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은혜주시는 목표가 성령 충만에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자식이 생선을 구했을 때 뱀을 줄 아버지가 없고, 알을 구했을 때 전갈을 줄 아비가 없으며, 악한 자식일지라도 오히려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사랑을 갖고 성도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좋은 것(마 7:11, 본문은 성령)의 최종 목표는 성령 충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 아닌 것을 구하였는데 그것이 응답되지 않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의 응답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귀신을 쫓으신 후 변론하심(14-26절)

1) 이 말씀은 마 12:22-30, 43-45에도 기록되었고, 약간 다른 표현을 소개한다면, 14절에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으셨다” 하신 것을 마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려왔는데 예수님이 고쳐주신즉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어 무리가 놀라고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마 12:22-23)라고 하였고, 15절에서 “무리 중 더러가 말하기를 저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 하였는데, 마태는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마 12:24) 거의 같은 내용이요, 17절에서 “스스로 분쟁하는 집이 무너진다” 한 것을 마태는 “동리마다 서지 못 한다” 하였고(마 12:25), 20절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다” 한 것을 마태는 “성령을 힘입어”라 하였으며(마 12:28), 21절에서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집을 지키면 그 소유가 안전하다” 한 것을 마태는 “사람이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라야 늑탈하리라”고 하였으니(마 12:29) 역시 같은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따라서 이 말씀을 마태복음 강론에서 설명 드린 만큼 본문에서는 취지만 살펴보겠습니다.

① “눈멀고 벙어리 된 것이 귀신의 역사로 되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시므로 그것이 회복되었은즉 “인간의 질병 중 마귀의 역사로 나타나는 질병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14절).

②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과 하나 된 사역으로 믿지 않으나, 능력의 역사는 인정해야 하므로 그 능력의 근거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고(15절), 또 일부는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했다” 하였으니, 이 내용은 마 12:38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반대자들이 부정적 논리로 비난하면서, 또 일부는 그 신비성을 더 알아본 후 비판하려고 표적을 구한 것인즉 옳지 않은 것인데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셨다”고 하셨습니다(17절, 마 12:25).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속까지 헤아리시는 분이니까 마음가짐을 각별히 주의하시고(대상 28:9) 나쁜 마음을 갖거나 나쁜 마음을 구상하였을 때는 즉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③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동리나(마 12:25) 집은 망한다” 하셨으니까 크게 두려워하셔야 할 것이요,

④ “바알세불이 귀신을 쫓았다면 이는 스스로 분쟁한 것인즉 그들은 망하고 없어졌어야 하지만 귀신의 세계가 여전히 있는 만큼 그들끼리의 싸움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하셨고, “또 너희는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 하시므로 바리새인 세계에서도 귀신 쫓는 일을 하였는데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하나님을 힘입어 한다”고 할 것이요,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진실을 밝혀 재판을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바리새인의 역사에 성령님이 동하셨을 리가 없으므로 역으로 해석되어야 함). 하나님은 무서운 재판관이심을 일깨우셨습니다(히 10:28-31).

⑤ “예수님이 성령으로(마 12:28) 귀신을 쫓은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하셨으니(20절), 하나님 나라는 귀신이 패하고 하나님(예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⑥ 귀신이 나간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능력이 그를 압박한 것이요(마 12:29), 이렇게 마귀의 역사를 제외할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22절).

⑦ 23절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라” 하신 것은 마귀처럼 적대 사상을 갖고 반대하는 자를 경계, 배척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눅 9:50에 기록된 포용 원리와 다른 것은, 본문의 “해치는 자”는 사상과 행동의 이질성을 뜻하고, “포용 원리”는 성질과 행동이 같으나 단체 예속만 따로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⑧ 24-26절의 말씀은 마 12:43-45의 말씀과 같습니다. “더러운 귀신”이란 죄를 낙으로 삼는 영물의 불쾌함을 뜻하고, 그것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한다” 함은 귀신이 평안히 정착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다는 뜻인데, 사람은 물 있는 곳이 살만한 곳이지만 귀신은 물 없는 곳(황폐한 죄악 세상)을 안식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온 내 집”(먼저 있던 사람의 마음 속)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그곳(황폐한 마음)만 평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애완동물 작은 개를 키워보십쇼. 그 놈은 주인 곁에 있는 것만 가장 좋아합니다. 귀신도 영물인지라 타락한 영적 존재와의 교제를 가장 편히 여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뜻은 잡귀를 용납하지 않기 위하여 경성함을 뜻한즉, 더 강한 대립으로 경성의 자물쇠를 부셔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귀신이 자기 세력을 7배로 늘려 침입을 한즉, 결국은 귀신 들렸던 자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이 쫓겨났을 때 성령 충만으로 자기를 더욱 든든히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제 30 과 여러 가지 교훈 (눅 11:27-41)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27-28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을 말씀하셨고, ② 29-32절에서는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으며, ③ 33-36절에서는 “마음의 빛을 밝히라” 하셨고, ④ 37-41절에서는 “겉보다 속을 깨끗이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총 제목은 “여러 가지 교훈”이라 함이 좋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29-32절)

1) “이 말씀을 하실 때”란 앞의 문장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무리 중의 한 여자가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생각을 설복시키시는 예수님을 높이 흠모한 나머지 저런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얼마나 복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리아의 공로를 인정하는 뜻도 있겠지만, 그의 태교와 양육이 훌륭하였음을 복 있게 여긴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으니, 이런 말씀은 계 1:3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말씀을 듣고(연구, 터득)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받는 복이 마리아의 그리스도 잉태와 양육의 복됨보다 더 큰 것을 말씀하시므로, 마리아의 공로를 앞세워 평가하시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심(29-32절)

1) 이 말씀의 29-31절은 마 12:38-43에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당시의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악한 세대라고 지적하신 핵심은 예수님, 곧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표적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한 뜻은 예수님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표적은 육체나 현실에 속한 변화를 줄 뿐, 영적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의 표적”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예표로 나타내신 것인데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2) 남방 여왕은 솔로몬을 찾아와 진리를 배웠고,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은즉, 심판 때에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심판석에 앉아서(배석의 의미만 있음, 고전 6:2-3) 회개하지 않은 무리들과 천사들을 정죄(심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그 당시의 사람들이 솔로몬이나 요나를 위대한 인물로 여기지만, “예수님이 그들보다 더 큰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셨으니, 이는 절대자를 단계적으로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3. “마음의 빛을 밝히라” 하심(33-36절)

1) 이 말씀의 33절은 마 5:15에, 34절은 마 6:22에 기록되었습니다. 33절의 “등불을 등경 위에 둠”은 빛을 비취게 함이 목적이란 뜻입니다(“움 속이나 말 아래”란 뜻은 영어로는 “그릇 밑에 놓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로 되어 있음).

2) “몸의 등불이 눈이므로 그 눈이 성할 때 온 몸을 밝히 볼 수 있으나, 눈이 나쁘면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의 몸도 볼 수 없는 것처럼(34절) 네 속에 있는 빛(마음의 빛)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마음의 빛이 밝은 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35절).

3) 35절의 “네 속에 있는 빛”은 몸의 눈에 반대되는 심령의 눈, 또는 마음눈으로써 거듭난 심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심령이 밝을 때 진리를 볼 수 있고, 영적 관계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3:3). “등불의 광선이(등경 위에 있어) 빛의 구실을 다 할 때 온 몸이 밝은 것처럼 마음눈이 밝을 때 영적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36절). 따라서 이 말씀은 심령이 어두운 백성들을 일깨우신 말씀입니다.

3. 겉보다 속을 깨끗이 함에 대하여(37-41절)

1) 이 말씀의 37절은 마 15:1-2에, 39절은 마 23: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대화의 대상이 “한 바리새인”이지만, 마 15:1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종단용어를 썼고, 마태는 직책용어를 겸한 것입니다.

2) 37-38절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에 초청한즉,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셔서 잡수시게 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의 관행대로 손을 씻지 않으셨으므로,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신체적 위생에는 관련이 있으나 율법과는 관련이 없고, 전통으로 습관화된즉 율법처럼 인식되어진 것입니다. 요즈음 주일 낮 11시 예배가 공예배 표준이 되어 11시 아닌 예배는 예배다운 예배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생겼고, 그 이외의 수요기도회나 금요 밤 기도회도 역시 안 하면 신앙생활을 떠나는 사람처럼 여기게 된 것도 같은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되는 문화가 전통을 깬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은 위생에 지장이 없는 한 자연스런 태도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통으로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자유를 속박하지 않아야 할 줄 압니다.

3) 39-40절에서는 손 씻는 문제와 관련하여 겉보다 속이 깨끗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은즉 속도 깨끗이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마음에 탐욕이 있으면, 이는 욕심에 기인한 것인즉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약 1:15), 욕심을 이루기 위한 마음이 곧 악독입니다.

4) 41절의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의 “그 안에 있는 것”이란 35절의 “속에 있는 빛”, 즉 거듭난 심령입니다. 거듭난 심령으로 탐욕을 버리고, 오히려 그것으로(탐욕을 바꾸어) 이웃을 구제할 때에 너희의 속도 깨끗해진다는 뜻입니다. 겉을 깔끔하게 하는 사람보다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더 귀한 것입니다.

 

제 31 과 화 있을진져 (눅 11:42-54) 목록으로


이 제목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므로 이 말씀에 나타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벌이 임할 것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중에 누가의 고유 기록은 45절과 53-54절 뿐이고, 42절은 마 23:23에, 43절은 마 23:6-7에, 44절은 마 23:27에(약간 표현이 다름), 46절은 마 23:4에, 47-48절은 마 23:29-32에(표현이 더 자세함), 49-51절은 마 23:34-36에, 52절은 마 23:13에 기록되었습니다. 본문 설명에서 미흡한 점을 마태복음 강론에서 보충하시라는 뜻입니다.

1. 공의와 사랑을 저버린 자가 화를 받아야 함(42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를 잘 드렸으나 공의(하나님의 뜻)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공의와 사랑(이것)을 잘 실천하여야 합니다.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함”은 율법적 근거를 계속 강조하신 뜻이 아니고, 물적 봉사를 계속, 성실하게 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마 11:13).

2. 교만한 자들이 화를 받아야 함(43절)

빌 2:3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고, 예수님도 “겸손하여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는데(마 11:29, 18:1-4),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에만 앉으려 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였으니 늘 교만한 위치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3. 자기의 죄나 약점을 감추는 자들이 화를 받아야 함(44절)

요즘도 생활전선에서 자신의 명예적 이득을 위하여 자기의 약점을 은폐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남을 속여 명예를 도적하는 것입니다. “시체를 묻고 평토장을 하였음”이 곧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4. 잘못을 지적 받고 듣기 싫어하면 화를 받아야 함(45절)

죄를 깨우쳐 주는 것은 자기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욥”은 그런 자를 “면류관처럼 높이고 존경한다” 하였지만(욥 31:36),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지적을 받았을 때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5. 봉사나 어려운 일에 솔선하지 않는 자가 화를 받아야 함(46절)

사사기 5장에 보시면 가나안 전쟁에 협력하지 않은 무리들에 대하여 드보라 선지자가 저주를 선포한 말씀이 있는 것처럼(삿 5:23) 율법사라는 명예를 앞세워 어려운 짐을 지는데 솔선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지운 후 자기는 한 손가락도 대지 않는 태도는 화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6. 의인을 핍박하면서 의인을 위하는 척 하는 외식자도 화를 받아야 함(47-48절)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은 그들의 조상의 핍박으로 순교당한 선지자를 존경하는 표시이나, 그 선지자를 죽인 자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란 점과, 또 자신들이 의인(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음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면서 의인을 위하는 척 함은 위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조상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연속되는 말씀으로 49-51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49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계시로 주신 말씀)가 일렀으되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낼 것이나 저희가 더러는 죽이고 핍박할 것이라” 하시므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이 핍박당할 것을 예고하셨고, “창세 이후 선지자나 하나님의 사역자를 핍박한 죄들을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라” 하심은 마 23:35-36에서 강론한 것처럼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으로 화를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7. 복음의 발전을 훼방하는 자들이 화를 받아야 함(52절)

어떤 성직자가 교회를 효율적으로 섬기지 못하면서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일을 더디게 한 훼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늙었거나 부족을 느끼면 반드시 유력한 자에게 맡겨서 하나님의 일을 더 잘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율법사가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 함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지도층에 있은즉 진리를 잘 깨달아서 자신들도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을 받도록 하여야 하는데, 자신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복음을 배척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단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손해가 얼마나 큽니까?

8. 진리를 겸손하게 수납하지 않는 자들은 화를 받아야 함(53-54절)

“거기서 나오실 때”란 바리새인의 집에서 점심을 잡수시고 나오신 것인데(37절), 예수님은 그의 집에서 상당한 책망과 변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들은 “끈질긴 자세로 달라붙어 힐문하였고 예수님의 말씀(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책잡으려고 목(말의 꼬투리)을 지켰다” 하였으니, 이처럼 예수님과 진리를 믿음으로 수납하지 않고 비판하려는 자들은 화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판할 자격과 능력이 없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32 과 어리석은 부자 (눅 12:1-31) 목록으로


본문 내용은 네 가지 대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3절은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말씀”이고, ② 4-12절은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며, ③ 13-21절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이고, ④ 22-31절은 “식생활에 대한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내용들 중 3대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고유 내용이고, 그 이외의 기록은 마태복음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어리석은 부자”로 정한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말씀(1-3절)

1) “그 동안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밟힐 만큼 되었으니”(1절), 이렇게 많이 모인 이유는 전도의 효력도 있었겠지만 기적이나 떡 먹는 이적(요 6:26) 등,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과 기분으로 따르는 외식자들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32절에서 “적은 무리”로 축소된 것을 볼 때 현실적 이해관계 없이 생명을 걸고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만 진실한 성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 무리들에게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 하셨으니, 여기에서 “누룩”을 “그들의 외식”이라고 설명하셨지만 마 16:6, 12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잘못된 사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누룩을 복음으로 비유한 뜻도 있고(마 13:33, 눅 13:21) 거짓 사상 또는 부패 원료로 비유한 경우도 있습니다(고전 5:6-8, 갈 5:8-9).

3) 2절에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숨겨진 것이 알려진다”는 뜻은 복음이 밝은 세계로 나타나서 전파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절 말씀도 일시 핍박이 있을 때는 어두운 데서 전파하였지만 곧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하시므로 복음 전파의 길이 넓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핍박자를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심(4-12절)

1) 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요 15:13에서도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친구 되는 조건이 순종에 있은즉 유의하여 주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4절 하반부터 9절까지 기록된 말씀은 마 10:28-34에 기록되었습니다.

2) 성도가 두려워할 존재는 핍박하는 사람이 아니고 “죽이기도 하시고 지옥에까지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입니다(삼상 2:6, 행 17:25). 참으로 하나님만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참새 다섯 마리가(사람의 손에 잡히는 것과) 그것이 두 앗사리온(2센트)에 팔리는 것도 섭리하시며 성도의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리시는 만큼(세심한 관리를 뜻함) 성도가 참새보다 귀한 것을 깨닫고 더욱 의지하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5-7절).

4) 8-9절 말씀은 성도가 “핍박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권면하신 말씀입니다(마 10:32-34). 만일 성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예수님도 성도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부리시는 사자들(천사 또는 그의 역할의 대상들) 앞에서 모르신다 하실 것이니 결국 은혜를 힘입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5) 10절은 마 12:31-32에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의 “인자를 거역해도 사하심을 받음”은 예수님 곧 사람을 거역한 죄는 그리스도(또는 성령)의 중보로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훼방)한 것은 하나님 곧 구원의 주를 거역한 것이기 때문에 중보자가 없으므로 사함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6) 11절 말씀도 마 10;18-20에 기록되었습니다. “정사 잡은 이”란 권세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핍박 차 끌고 가서 고문할 때 변명할 답변을 연구하지 않아도, 그때 성령님께서 담력과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표준계시를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위급할 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감동하시고 담력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핍박자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갖고 끌려갈 수 있고, 답변의 담대함은 물론 순교도 두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13-21절)

1) 무리 중 한 사람이 부모의 재산을 홀로 점유한 형으로부터 그 재산을 나누어 받기 위하여 형에게 명령을 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였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물건 나눠주는 사람이나 재판관이 아니라 하시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13-15절). 물건을 나누는 일은 민사소송에 관한 것으로 재판관이 할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공사를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 나누어 받기를 청원한 그 동생이 가난한 자가 아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형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 받기를 원한 것은 자신의 가진 것이 너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더 갖고자 하는 탐심 때문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2) 그 예는 비유컨대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해지자 곡간을 증축하고 재물을 쌓은 후 스스로 생각하기를(내 영혼에게 이르되)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것이라”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하니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인즉 네가 예비한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탐심으로는 부를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목적을 두지 않는 생활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재물로는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마 6:24, 막 10:23, 히 11:6, 26). 또 이 뜻은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고 탐심에만 얽매인 자를 하나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하실 수도 있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4. 식생활에 대한 문제입니다(22-31절).

1) 이 말씀은 대부분 마 6:21-34에도 기록된 말씀입니다. 다만 26절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하신 말씀만 고유 기록입니다. “목숨을 위함”은 양식을 뜻하고, “몸을 위함”은 의복을 뜻함인데, 목숨과 몸은 음식이나 의복보다 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새 중의 하나인 까마귀도 키우십니다. 그렇다면 새보다 귀한 인생을 키우시지 않겠는가? 하시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들의 백합화도 보라”고 하셨습니다. 까마귀는 양식 주시는 것으로, 백합화는 아름다운 의복 주시는 것으로(솔로몬이 입은 의복의 화려함보다 더 아름답다 하심) 비유하신 것입니다. 또 그보다 더 작은 들풀도 하나님이 키우신다고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인간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창조된 목적이 있듯이 인간도 목적을 두시고 창조하신 만큼 그 목적에 응할 때 그의 생활을 보장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마 6:21-34을 참고하십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들에게는 하나님이 동물이나 식물을 키우시는 방법처럼 필요한 은혜를 직접, 간접으로 공급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제 33 과 지혜로운 사명자가 되라 (눅 12:32-59)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지혜로운 사역자가 되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32-40절은 “깨어 준비하라”는 내용이고, ② 41-48절은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라”는 말씀이며, ③ 49-53절은 “은혜와 세속과의 갈등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며, ④ 54-59절은 “시대를 분변하라”는 말씀인데, 여기의 경성함이나 분별력, 그리고 갈등 극복이 다 지혜로운 사역자가 감당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표제와 같이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깨어 준비하라(32-40절).

1) 32절에서 “하나님은 적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적은 무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마 7:13-14). 택한 백성은 전체 인류에 비할 때 적은 수라는 것을 아셔야 하며, 또 제한적 구원을 하시는 뜻도 아셔야 합니다. 만일 인류가 다 구원 받는다면 천국과 행복의 강도가 희석될 것입니다. 12:1의 수만 명이 본 절에서 적은 무리로 변한 이유와 적은 무리의 비중에 대하여 핵심설교 94과에서 증거하였습니다.

2) 33절에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라” 하심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함이 보물을 하늘에 상급으로 쌓음과 같다는 뜻입니다. 지상의 재물은 없어질 수 있지만 하늘에 쌓은 보물은 훼손될 수 없고, 또 보물이 하늘에 쌓이는 만큼 마음도 그 세계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마 6:20-21).

3) 35-38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함”은 주인이 늦은 밤 어느 시간에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35절). 유대인 부잣집은 대문이 여러 겹으로 있고 따라서 거실과 멀리 있다고 합니다. 도적을 지키는 종처럼 깨어있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38-39절).

4) 39-40절은 마 24:43-44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실 것인즉 예비하라” 하시므로, 예수님의 재림에 항상 대비할 것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종이 깨어있다”는 뜻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창 5:22).

2. 지혜 있는 청지지가 되라(41-48절).

1) 이 말씀의 47-48절을 제하고는 마 24-45-51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깨어있는 종이 되라”는 비유 말씀(앞부분)을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즉 모든 이에게 하신 것인가? 제자들에게 하신 것인가?). 이때에 예수님은 44절에서 “너희에게(제자들) 한 것이라”고 답하셨은즉 복음 사역자들은 반드시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종은 복이 있으니 “주인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길 것이라”(41-44절)고 하셨습니다. 『사명설교집』 25과를 참고하십쇼.

2) 45-48절에서는 “벌 받을 종”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역자가 옳은 사역을 못 하였다 하여 지옥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46절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한다”는 말씀이나, 48절의 “적게 맞고 많이 맞는다”는 말씀은 지옥의 형벌 아닌 것, 즉 현세적으로 적당하게 보응하신다는 뜻입니다. 45절에서는 주인의 뜻을 어기는 종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는 이기주의와 향락에 취하는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이고, 47절에서는 “주인의 뜻(성경의 의미)을 알고도 정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종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사역자들이 교회나 성도를 자신의 명예나 생활 발판으로 여겨 교회를 어둡게 하면서 성직의 이기주의에만 몰두하는 잘못을 반성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오직 자신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대상만을 상대로 하여 목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은혜와 세속과의 갈등을 예고하심(49-53절)

1) 본문 49-50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이고, 51절은 마 11:34에도 기록이 있으며, 52-53절은 마 10:21과 11:35에 간단히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49절) 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 보내실 일을 함께 염원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없이 승천하실 수 없고, 승천 없이 성령을 보내실 수 없은즉(요 16:7)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소원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은 세례”는 곧 십자가의 수난입니다. 예수님은 그 수난을 생각하신 답답함 때문에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셨습니다(마 26:36-46).

2) 51절에서 “화평 아닌 분쟁을 주려 하심”이란 분쟁을 원하심이 아니고,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믿음의 강한 역사가 생길 것인즉 그것을 반대하는 사탄과의 대립이 불가피함을 말씀하신 것이요,

3) 그런 일이 있게 될 때 믿음의 은혜를 받은 자와 이것을 반대하는 세속 세계와의 갈등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것이 한 가정, 즉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 딸 사이에서도 신•불신간의 갈등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가족이 다 믿게 되는 은혜는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52절). 마 10:21에서는 가족간에 “죽는 데 내어주는 일도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영생은 가장 강한 은혜의 특권이기 때문에 가정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초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4. “시대를 분변하라”는 교훈(54-59절)

1) 5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구름이 서에서 일어나면… 소나기가 올 것이라” 하니 이는 맞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으로 마 16:1에서는 “저녁 하늘이 붉으면 소나기가 오고 날씨가 갠다” 하셨는데, 이 두 가지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입니다. 구름이 서에서 일어나면 서쪽 하늘이 붉어짐을 뜻하고, 소나기가 오는 것은 곧 날이 갤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 그 반대로 55절에서 “남풍이 불면 더우리라” 하셨는데, 마 16:3에서는 “아침 하늘이 붉으면 날이 궂을 것이라” 한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날씨가 더우면 하루나 이틀 후에 반드시 비가 옵니다. 따라서 남풍과 더위와 아침 구름과 비는 서로 관련이 있은즉 의미가 통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두 저자의 표현이 다를 뿐이지요.

3) 56절에서 예수님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분변하지 못하느냐?”(57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시대 분변이란 메시야 사역을 인한 종교 변화(율법의 성취로 복음 시대가 이른 것)와 거기에 근거한 생활 문화의 변화를 뜻하고, “옳은 것을 분변치 못함”은 율법주의와 율법 성취로 발생된 복음주의 중에 복음주의가 옳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외식자들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4) 58-59절은 마 5:25-26에도 기록된 말씀으로, 성도 간에 또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갈등이 있다면 속히 화해하여야 할 것을 독촉하신 말씀입니다. 죄사함 받는 믿음은 십자가의 신앙이면서 또한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믿음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마 6:12, 18:23-35, 눅 11:4). 따라서 내가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내 허물을 기억하시고 없는 것처럼 여기시지 않을 것임을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4 과 참변에 대한 문답 (눅 13:1-18) 목록으로


본문 1-5절은 “참변에 대한 문답”이고, 6-9절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 섭리”이며, 10-18절의 말씀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가?”하는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도 되는가? 에 대한 말씀이 마 12:9-13에도 기록되었지만, 사건이 다른 내용입니다. 따라서 본문 전체는 누가의 고유 기록이고, 제목은 대표 격으로 “참변에 대한 문답”으로 정하였습니다.

1. 참변에 대한 문답(1-5절)

1) 1절에 보시면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님께 고하였다” 하셨으니, 이 의미를 순서대로 살피면,

① “그때”란 예수님이 갈릴리 전도를 마치시고(눅 8:26) 사마리아를 거쳐(눅 9:51, 53)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를 통과하시고(눅 10:38)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눅 13:22).

② 질문한 “두어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온 사람은 아닌 듯하고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과 관련할 때, 그들이 바로 갈릴리(도)에 사는 선민으로서 예루살렘에 먼저 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자기들의 제물(피 그릇)에 동족의 피를 섞임 당한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③ 이들이 갈릴리에서 와서 제물을 드렸고, 또 참변을 당한 사람들도 갈릴리 사람들이었음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 “저희의 제물”, 그리고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라는 말씀이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④ 그러니까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 다수가 예루살렘에 와서 일부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일부는 빌라도의 로마 병정에 의하여 제단 곁에서 참변을 당하는 바람에 그들의 피가 제사 드리는 자의 제물의 피에 섞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섞이게 된 과정은 피살자의 피가 튀어서 섞일 수도 있겠으나, “섞은 일”이라 하셨은즉 병정들이 제사를 모독하기 위하여 사람의 피를 고의로 섞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갈릴리에 사는 유다족들이 로마군의 탄압에 의하여 한 유월절 제사 때에 3000명이, 또 다른 유월절에는 2만 명이 학살을 당하여 성전 뜰에 피가 가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선민들은 하나님의 제단 곁에서 살인을 하면 안 됩니다(왕상 1:50, 민 35:6).

⑤ 그러면 빌라도는 왜 그들을 성전 제단 옆에서 죽이도록 명하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본래 선민들은 민족성과 애국심이 강하기 때문에 로마의 통치에 잘 순종하지 않고, 자주 항거하였습니다. 역사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의 급수시설 공사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과한 세금과 어려운 부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정에 항의하거나 불복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군인들이 마구 죽이니까 살기 위하여 성전 제단 곁으로 들어왔지만(민 35:9-15) 빌라도의 군인들은 이를 개의치 않고 무참하게 죽인 것입니다.

⑥ 그런데 여기의 “고했다”는 의미는 “과거에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고 보고한 형식일 뿐, 빌라도의 죄를 거론하였거나 살육당한 자들의 죽음의 원인을 질문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건에 대하여 질문자들의 심중을 헤아리시고 대답을 해주셨으니 예수님의 대답을 참고하면, 고한 자들이 갈릴리에서 같이 온 죽은 사람들의 죽게 된 죄상을 자기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더 큰 죄를 알고자(심판적 의미로 참살 당한 것입니까?) 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2) 2절에서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참살 당한 사람들)이, 이 같은 해를 받음으로써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고 하셨습니다(3절).

① 그러면 그들의 죽음의 원인은 꼭 같은 갈릴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정부에 항거하다가 악당들에게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② 그렇다면 그들이 죽음에 이를 만한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인가? 할 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절) 하신 말씀을 보아 회개했어야 할 원천적 죄가 없지 않음을 말씀하셨고, 또 살아있는 자들도 그들의 참상을 볼 때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자들이 희생을 당한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견지에서 볼 때는 죄 값으로 죽은 것인즉 그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민족 또는 개인의 죄에 대한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4-5절에 보시면 그와 꼭 같은 사례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도 죽음의 과정은 다르지만 목격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같은 뜻이 있으니 “역시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6-9절에서도 나타납니다만 이 말씀은 선민들의 죄 값으로 로마 병정의 칼날에 죽고, 건물(망대)이 무너져 죽는 등, 많이 죽음, 즉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을 것을 빗대어 교훈하신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도는 이웃의 참상이 있을 때 죽음이 죄 값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회개할지언정 죽은 자의 죄가 자기보다 더 많아서 죽는 것처럼 여기는 심판적 자세는 결코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섭리에 대한 말씀입니다(6-9절).

1)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개인을 심판하시든지 또는 나라를 심판하실 때에 반드시 회개하거나 갱생할 기회를 주시고 상당 기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그 기회를 선용하지 않을 때 심판하시는 섭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벧전 3:20).

2)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며 과원지기에게 맡겼는데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음을 보고 “찍어버리라” 한즉 과원지기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의미로 “거름을 주고 한 번 더 노력해 보아서 안 되면 찍어 내소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써 포도원은 선민의 단체이고(호 9:10),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종교 영역이며, 과원지기는 신앙의 지도자들인데, 하나님이 사명 있는 지도자들의 역할과 기도를 들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회개가 성취되지 않을 때는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신 뜻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신 뜻도 있을 것입니다(마 23:37).

3)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있음은 보호 관리를 잘 받았고, 열매 맺기에 합당한 은혜를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요즈음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와 말씀의 은혜와 물질과 문화의 혜택 등을 많이 받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눅 19:26). 3년이 된 것은 열매를 맺을 만큼의 은혜를 공급 받은 시기를 뜻하고, “1년 더 가꾸어본다”는 것은 특별히 권면하여 열매를 맺도록 성실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찍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충성의 열매가 없으면 직분은 물론 은사와 생명까지 뺏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 25:28-29).

3.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10-18절).

1) 10-13절에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내용인데,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고, 등이 꼬부라진 한 여인을 보시고 안수하시며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신즉, 여자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긍휼과 능력을 베풀어 일시에 또 완전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2) 그런데 회당장은 그 사실을 보고 분을 내면서 “안식일 아닌 6일 동안에만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는 고침 받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14절).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안식일에 소와 나귀도 끌고 가서 물을 먹이면서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선민)을 안식일에 사탄의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 하시므로 그 사역의 정당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3)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회당장과 다른 사람들은 “짐승을 사람보다 귀히 여겨 안식일에 짐승은 물을 먹여도, 사람은 사탄에서 풀어줄 수 없고, 또 병도 고칠 수 없다” 하므로 큰 모순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 안식일 제도는 율법의 규례로써(출 20:8-11)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효한 것이고(마 11:13, 롬 10:4), 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므로(마 12:8) 신약시대에는 예수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마 17:5). 안식일이 성수 주일에 참고 될 수 있는 부분은 “세속을 멀리하는 일”일뿐입니다(사 58:13-14).

4) 18절에서 예수님이 이상의 말씀을 하신즉 회당장의 뜻에 일치하여 예수님을 반대했던 자들이 부끄러워하였고, 온 무리가 “예수님의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제 35 과 여러 가지 말씀 (눅 13:19-35) 목록으로


본문에는 여러 가지 말씀이 있고, 특정 제목을 정할 수 없어서 “여러 가지 말씀”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9-21절까지의 “천국 실현의 비유 말씀”은 마 13:31-33에도 기록되었고, ② 22-24절의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은 마 7:13-14에, ③ 25-30절까지의 말씀은 “외식자에 대한 말씀”으로 마 25:31-46의 말씀과 약간 다르나 상통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었고, ④ 31-33절만 “예수님과 헤롯에 대한 말씀”으로 누가의 고유 기록이며, ⑤ 34-35절은 “예루살렘을 인한 탄식”으로 마 23:37-39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천국 실현의 비유 말씀(19-21절)

1) 1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으며… 무엇으로 비할꼬?” 하시고, “마치 사람이 자기의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나니라”(19절) 하신 것은 천국 실현이 서서히 또는 작은 데서부터 크게 확대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작은 싹에서 시작하여 크게 자라고, 교회도 작은 단체에서 큰 단체로 성장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믿음 세계는 크게 성숙될 때 그 이웃에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는 “겨자 나무가 자라야 공중의 새가 깃드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2) 21절에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음”은 신앙 인격 성장(천국 실현)이 누룩의 역할처럼, 내적 변화를 일으켜 꾸준히 퍼져나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천국은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2. 좁은 문에 대한 말씀입니다(22-24절).

1) 22-23절에서 예수님은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혹자로부터 “구원을 얻을 자가 적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2) 24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길이란 협착한즉 통행하기 어렵고 찾는 이가 적은 길인만큼(마 7:13-14) 구원받을 자의 수는 버려진 자들보다 적으며, 따라서 고난이 제외되거나(행 14:22) 수가 많은 것을 기준으로 진리노선을 택할 수 없음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수의 다수를 선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문을 두드리나 구원받지 못할 외식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25-30절)

1) 25절에서 “집주인이 문을 닫친 것”은 합당치 않은 자의 통과를 막기 위함이며, “때늦은 후에 밖에서 문을 두드린 자”는 외식하는 믿음을 갖고 구원을 기대한 자들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주인이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한 것은 주님과 외식하는 사람들 간에 영적 친교가 없었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성령님과 관계없이 믿음생활의 외적형태는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2) 26절에서 외식자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외식자들의 일방적 앎일 뿐 주님이 친교 상으로 알아주신 뜻은 없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은 외식자들에 대하여 “행악자라” 하시고, “나를 떠나라” 하셨으니, 외식자들은 변명의 여지없이 외면당한 것입니다.

3) 28절에서 외식자들의 결과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가 있는 곳”은 내세의 천국입니다(눅 16:23). 외식자들은 그때에 안(천국)과 밖(지옥)을 확인하고 “슬피하며 탄식한다” 하셨으니, 비택자는 천국을 소원하면서도 진리에는 눈이 어두워 들어가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28절). 따라서 이 말씀은 정통성 없는 신앙인이 천국에 가고 싶어도 안 되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29절은 “이방인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구원에 참예할 것을 예언”하셨고, 30절에서는 “나중 된 자(늦게 믿은 이방인들)가 먼저 믿은 유대인들보다 믿음에 성숙할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런 사실은 롬 11:25에서도 말씀하셨고,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도 기독교의 정통성을 유대인 아닌 사람들이 붙잡고 있지 않습니까?

4. 예수님과 헤롯에 대한 말씀(31-33절)

1)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롯왕의 음모를 말하면서 그 지역을 떠나시도록”(31절) 권유하였을 때, 예수님은 32절에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고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헤롯의 음모를 알린 사람들은 종교는 다르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원치 않은 줄로 압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헤롯’을 ‘여우’라 하신 것은 비유이므로, 여우의 소행과 헤롯의 악한 소행에 일치하는 점이 있는지를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우’라는 ‘알로페크’(άλώπηξ)는 암 여우를 뜻한다고 합니다. 헤롯이 여인 계수(동생의 처) ‘헤로디아’에게 빠져서 세례 요한을 죽이는 등, 간교한 행위를 하였으므로 그 명칭이 그에게 합당한 것이요, 헤롯의 음모는 바리새인들의 뜻에 동조하고 병정을 동원해 준 일일 것입니다.

2) 그러면 33절의 “오늘과 내일까지 일하시고 3일에 완전하여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할 일을 하시고,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하심은 과거의 선지자들이 다 예루살렘 안에서 죽었고, 또 밖에서 죽을 것을 예언하신 바가 없으며, 또 예수님은 옛날 도성 밖에서(히 13:11) 돌아가셨지만 예루살렘 안에 있는 자들의 선동으로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5.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탄식하신 말씀(34-35절)

이 말씀은 마 23:37-39에도 기록되었고, 그곳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사랑하여 모성애 같은 마음을 가지시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으므로 주후 70년에 멸망이 올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며,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35절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주님이 떠나시면 전체적인 재회로서는 “재림 때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 36 과 초청에 대한 예절 (눅 14:1-14) 목록으로


이 14장의 말씀은 모두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1-14절에 나타난 내용을 3대지로 세분하면, ① 1-6절은 “안식일에 고창병을 고쳐주신 일”이고, ② 7-11절은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교훈이며, ③ 12-14절은 초청할 일이 있을 때 “갚음 받지 못할 대상을 초청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내용들을 다 포괄하는 제목은 “초청에 대한 예절”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의 대상은 주로 바리새인들을 상대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규모와 예절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안식일에 고창병 든 자를 고치심(1-6절)

1) 1절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으로 떡을 잡숫기 위하여 들어가셨습니다. 바리새인 두령이 간단한 접대를 위하여 초청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은 이단자이지만 예수님은 교제를 단절하시지 않았습니다(딛 3:10). 그런데 그 초청의 성격이 성실한 접대에 있지 않음이 엿보입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의 초청의 관습은 음식을 많이 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찬의 초청이 아니고 떡을 잡숫기 위함이었으며, 그때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엿본 자들이 있었음을 보아서 고의로 고창병자를 데려다 놓고 예수님의 태도를 시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떡 대접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2) “고창병”은 헬라어로는 “후드로피코스”(ὕδρωπιχος)로 표기되었고, 영어로는 “dropsy”입니다. “dropsy”는 수종증이라고 하며, 간이나 신장 또는 소화액의 이상으로 배가 붓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 환자를 보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신 것을 흠잡으려고 엿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 12:11에서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고 12년 혈루증 든 여인의 병을 고쳐주신 일이 있었고, 눅 13;15에서는 “나귀나 소를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셨는데, 본문 5절에서는 “아들이나 소를…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므로 사람이나 짐승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동일한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은 고창병자를 데려다가 고쳐주셨습니다. 자비로운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안식일에 하여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식일 규례는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으니, 예수님의 시대에 폐지되었고(마 11:13, 롬 10:4), 사도시대에는 폄론 자체도 무의미한 일로 여긴 것입니다(골 2:16).

2. “낮은 자리에 앉으라” 하심(7-11절)

1) 7절에 보시면 떡을 잡숫기 위하여 들어오신 그 집에 다른 사람들도 청함을 받아 왔는데 “그들이 상좌에 앉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연회 식탁이나 상좌를 구별하려면 잘 살펴야 합니다. ① 음식을 특별히 차려놓은 장소, ② 대중의 시야가 열린 장소, ③ 어른(또는 직책 맡은 자)이 앉는 장소의 옆자리가 상좌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일단 그런 자리를 피하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은 그 이유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7-9절). 만일 상좌에 앉았다가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혀야 한다 할 경우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말석에 앉으면 청한 자가 와서 “당신의 자리가 여기입니다” 하고 “상석에 앉으라” 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성도는 어느 곳, 어느 환경에서나 “자기를 높이려 하면 낮아지게 되고, 자기를 낮추려 하면 높아지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11절), 겸손에 겸손을 더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갚음 받지 못할 대상을 초청하라”(12-14절)

1) 예수님은 자기를 청한 바리새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갚음이 될까 하라”(12절) 하시므로, 봉사적 접대는 오로지 가난한 무연고자에게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은 잘 아는 관계로 갚음의 기회를 갖게 되는 대상들이기 때문에 삼가야 합니다. 대접을 받는 경우에도 “내가 대접을 받았으면 나도 그를 대접하여 갚아야 한즉”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접을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대접이 잘 베푸는 대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을 청하라”(13절)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대접을 받으면 그는 갚을 것이 없으므로 대접한 자에게 복이 되고, 이는 의인들(상 받을 자)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14절)고 하셨습니다. 부활 시에 갚음 받는 것은 주님의 상급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가족적으로나 또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무연고자에게 형편대로 돕는 일을 시행하여 기독교가 사회의 어려운 짐을 지는 종교임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제 37 과 떡 먹는 자의 복 (눅 14:15-35) 목록으로


본문 15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 하셨기 때문에 우선 앞 절의 내용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말씀이 있으니, ① 15-24절에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을 자와 응할 자에 대한 말씀”이 있고, ② 25-33절에서 “제자로 쓰시는 대상”을 말씀하셨으며, ③ 34-35절(마 5:13, 막 9:50)은 “소금의 요긴함이 짠 맛에 있다”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을 자와 응할 자(15-24절)

1) 이 말씀은 앞 절의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떡을 잡수시면서 “갚을 힘이 없는 자들을 접대하면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는다”고 하셨을 때에(13-14절) 함께 먹는 자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 하였으니,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천국에서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때 상급(떡)이 많을 것을 연상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떡 먹는 의미”를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어느 곳에서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세계를 말합니다(막 1:15). 그러니까 ① 바리새인의 집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떡을 먹었다면 그것도 복된 일이고, ② 성도의 가족이 자기 집에서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여도 역시 복된 일이며(계 3:20), ③ 교회에서 성찬을 나누는 것은 물론(행 2:46), ④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셨으니까(마 4:4) 설교를 들음으로 은혜를 받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이며, ⑤ 마지막으로는 내세 천국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이 가장 큰 잔치에 참여함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떡을 먹으면서 그것을 상급의 행복으로 여긴 듯합니다. 저희들은 이런 떡을 많이 잡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문제는 그 잔치에 아무나 다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16-24절).

①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먼저 청한 대상이 있었는데, 그들이 구구한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먼저 선민을 초청하신 뜻이지요. 유대인 선민들이 다 일치하게 사양을 하는데 “부동산 계약이다, 소를 시험해야 한다, 장가들었다”는 핑계로 잔치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자기의 일이 더 중하다는 뜻인즉, 천국 가는 것보다 세속의 알뜰함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먼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세속을 더 사랑하므로 신령한 복을 외면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외면하였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 세속의 일을 핑계로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으나 거절할 때는 억지로 권하시지 않습니다.

② 그래서 그 다음에 빈 좌석을 채우기 위하여 먼저 거리와 골목(가까운 곳)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을 데려오라 하셨는데, 이들은 소도 없고, 밭도 없으며, 결혼할 기회도 없는 자들인 만큼 잔치에 응할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려왔지만 또 자리가 남은즉, 산울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하였으니, 이것은 “먼 곳의 이방인을 상대로 전도하여 구원받을 백성의 수를 채우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세속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롬 12:2, 약 1:27, 요일 2:15). 사람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면, 신령한 떡 먹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2. 제자로 쓰시는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25-33절).

1) 이 제목이 본문의 핵심이 되는 이유는 27절과 33절에서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제자”란 뜻은 보편적 의미로 믿는 자를 총괄할 수도 있습니다(마 28:19). 그 이유는 성도로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문제(26-27절)와 모든 소유를 버리더라도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확실한 각오(28-33절)는 사명자가 아니라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 지는 문제(마 16:24),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문제(갈 5;24), 또 날마다 죽는 문제(고전 15:31) 등이 다 성도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2) 제자 될 수 없는 첫째 조항은 가족적 인정에 치우치는 일입니다.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시기에 핍박자가 핍박받는 자의 자녀를 그의 앞에서 죽이는 위협을 가하면서 개종을 요구한 순교사화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이때에 만일 가족의 인정에 치우친다면 믿음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입니다. 여기의 자기의 십자가는 개인의 생존 조건이나 가족,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모든 일반적 책임을 다 벗으려 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역자가 교회의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교회의 일에 몰두하게 하기 위함이요, 교회가 사명자의 생활비를 줄 입장이 못 되어도 자기 생활을 자립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다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셋째는 “각오를 든든히 하고 모든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자가 비용을 예산하는 것”(28-30절)은 당연한 일로, 계획하는 건축이 끝나야 목적 달성이 되고, 또 전쟁은 이겨야 목적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31절). 지는 것은 협상만 못합니다(32절). 따라서 하나님의 일도 목적 성취가 되도록 하려면 든든한 각오가 있어야 하는데, 때로는 자기의 모든 소유(재물, 가족, 명예, 생명 등)를 버릴 때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시도록 써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공자들을 보면 하나님이 쓰실만한 현실적 노력이 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정에 치우치거나,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약하거나, 헌신성이 부족하면 주님이 제자로 유력하게 쓰시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소금의 요긴함은 짠 맛에 있다”고 하셨습니다(34-35절).

소금은 짠 맛 없으면 쓸 데가 없습니다. 성도는 무엇이 없으면 쓸 데가 없을까요? “믿음의 진실성”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성도로서의 본분에 관계되는 요소는 믿음의 진실성이고, 사명에 관계되는 요소는 자기부정과 정의성(正義性)과 헌신 노력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짠 맛 없는 소금처럼 되어 하나님이 쓰시지 않을 것을 비유로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성과 자기부정(욕심), 정의성 결여, 헌신 부족 등으로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있음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8 과 잃은 자 회복의 교훈 (눅 15:1-3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탕자의 비유 장”이라 하여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3대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잃은 양을 찾는 비유이고(1-7절), ②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이며(8-10절), ③ 문제 있는 두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13-35절). 이 셋째 대지를 탕자의 비유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자들을 찾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리고,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 잃은 양을 찾는 비유(1-7절)

1) 1-2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온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회동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니, 세리는 로마의 주구(走狗)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 죄인은 전과자들이기 때문에 죄인을 멀리하는 의미에서(시 1:1-2) 상종하지 않은 것이 전통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구약의 결론이 복음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율법주의 이단에 빠져 있으면서 의인인 체 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곁길로 나간 자(잃은 양), 버려진 자(잃은 드라크마), 타락자(방탕하는 아들들)를 찾으시고 회개시키러 오신 것을 알리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마 9:12-13, 요 8:4, 눅 23:43).

2) 3-6절에 보시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100마리 양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지 않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비유된 목자는 예수님을(요 10:11), 길 잃은 양은 우둔하여 무리를 떠난 어리석고 무지한 성도를 뜻합니다. 양은 목자의 지도를 받아야 할 만큼 우둔하고 약한 동물이기 때문에 곁길로 나갈 위험이 있으나, 목자의 음성만큼은 분별하여 듣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어리석은 교인이 고의가 아닌 상태로 곁길로 나가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단자들의 꾐에 모르고 속는 교인이 많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이 경우에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라도 그 한 마리를 찾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일시 낙망하였거나 곁길로 나간 성도를 찾으시고, 또 찾았을 때에는 그 찾은 기쁨이 아흔 아홉 마리의 상존한 기쁨보다 더 크게 느끼신다는 것입니다(7절). 따라서 복음 사역자나 성도는 무지하고 연약하여 주님을 멀리하는 성도를 찾아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8-10절)

1) 앞에서는 100마리 중 하나의 양으로 비유하셨는데, 이 부분에서는 열 드라크마(드라크마; 헬라의 동전으로 1드라크마가 6센트 정도의 가치라 함) 중 한 드라크마를 잃었으니, 그 비중이 1/100보다 10배 큽니다. 양은 자신이 아둔하여 탈선했지만, 드라크마는 주인의 실수로 떨어진 것입니다. 지도자가 잘못하면 교인이 피해를 보거나 낙망하여 떨어질 수 있겠지요.

2) 이 경우에 잃은 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가구를 옮기고라도) 부지런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수를 안 하셨지만 인간 교역자들은 실수할 수 있는 만큼 깊이 반성하고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요, 또 낙심 중에 있거나 예수님과 교회를 멀리하는 성도를 찾아서 믿음의 입지를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열 명 중 한 사람이니 그 비중을 크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곁길로 갔거나 낙망하였거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인의 기쁨이 다른 경우처럼 변함없다고 하셨습니다(10절).

3. 두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11-32절).

둘째 아들은 스스로 방탕의 길을 걷다가 깨닫고 돌아와 아버지의 영접을 받았고(10-24절), 큰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영접하지 않으므로 용서의 사랑이 결핍된 상태를 교훈하신 것입니다(25-32절).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가깝습니까? 가깝다면 맏아들 쪽이겠지요?

1) 먼저 둘째 아들에 대하여 살피겠습니다. 이 말씀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과 문제 있는 성도를 비유합니다. 둘째 아들의 탈선은 자기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한 고의적 탈선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일을 살피면 ①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이 자식으로서의 특권 부분보다 아버지의 특권을 도전한 면에서 불효를 하였고, 이때 아버지는 부모의 심정으로 자식의 뜻을 따라준 것뿐이었습니다(삼상 8:5-9). ② 아들은 돈의 힘을 의존하여 아버지를 떠났고, ③ 감독자가 없은즉 자유를 얻은 듯하나 허랑방탕하여 ④ 재산을 허비한 것이 그의 죄악입니다. 죄악의 결과로 비참해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멀리 한 방탕자가 짐승처럼 비하되었습니다(15-16절, 주염 열매는 오리나무 열매 비슷함).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였고, 아버지께 찾아가서 확실하게 자복하고 품꾼처럼 대우받아 마땅한 줄로 결심하였으니, 그의 큰 결심이 돌이키는 힘이 되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회개의 근본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지만(슥 12:10, 행 11:18, 딤후 2:23) 인간적 어려운 환경에 부딪힐 때 자극을 받게 됩니다(시 119:7). 탕자는 그런 형편과 과정 속에서 완전한 돌이킴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나를 아들이라 하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대하소서”(19, 21절) 한 것은 철저한 뉘우침과 겸손과 부끄러움을 감수한 것이니, 회개하는 자는 반드시 이런 태도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렵에 그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항상 기다리다가 영접한 후 “내 아들을 잃었다가 찾았고 죽었다가 살았으니 즐거워함이 마땅하다”(32절) 하고 큰 잔치를 열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회개한 자를 복 주시는 것과 그 일로 크게 영광 받으시는 것을 비유로 나타낸 것입니다(23-24절).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둘째 아들의 잘못과 회개한 경위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 받은 상급과 영광 돌림에 대하여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큰아들에 대하여는(25-32절) 둘째 아들의 탈선 성격과 비교할 때 믿음생활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개인적 인격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큰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다가 자기 집에 잔치가 벌어진 사실과 그 이유를 알았지만 즐거워하지 않았고(25-28절), 그의 아버지가 “함께 즐거워하자”고 권하였으나 “아버지를 섬겨 여러 해 일한 자기를 위하여는 작은 잔치도 베풀지 않았는데… 어찌 방탕하고 재물을 없앤 아들을 위하여 이렇게 하시느냐?”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29-30절). 한 마디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아들이고, 아버지의 권면도 듣지 않은 아들이며, 또 동생을 시기하고 동생의 죄를 용서할 줄 모르며, 자기의 수고한 것과 거기에 따른 대가가 부족한 줄로 아는, 완악을 지닌 형편이었으니,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많이 있을 것을 생각할 때, 교회가 평안치 않을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뜻이 이렇게 다르면 가정도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나가서 방탕하였으나 회개하고 돌아온 자로서의 표본이고, 또 한 사람은 한 집에 있으나 속이 넓지 못한 성도의 표본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9 과 불의한 청지기 (눅 16:1-13) 목록으로


1.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으로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한 일(부정에 지혜롭다는 뜻)을 예로 들어서 제자들로 하여금 내세에 소망을 두고 열심히 준비할 것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불신자들)이 자기 시대에(세상 안에서) 있어서 지혜롭게 행한 것”(8절)을 참고하여 빛의 아들들(성도와 제자들)도 영원한 처소(천국)에서 영광 누릴 것을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을 빗대어 교훈하신 것입니다(9절).

2. 본문의 불의한 청지기의 소행에 대한 내용은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자기의 통장에는 30여만원뿐이라 하면서 호화롭게 사는 이유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한 청지기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임의로 재산을 뽑아 쓴 사실이 탄로되어 주인으로부터 해고될 경고를 받고 직무를 이양하기 전에 상당수의 채무자를 불러 상당량씩 탕감해주는 서류를 꾸며놓고, 자신이 쫓겨나거나 가난해질 때 그 탕감 받은 자들로부터 혜택 입을 계획으로 생활 대책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악한 청지기이지만 미래의 불행을 예견하고 대책을 세우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입니다.

3. 문제는 이 사실을 알고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한 의미(8절)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가 “옳지 않은 자”라고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 일이 지혜롭다” 한 것은 악인들도 “미래를 위한 대책 세우는 일만큼은 철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가는 일을 위하여 힘쓸 때 성도가 불신자의 노력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에게 “세상은 나그네다. 잠깐 산다. 하나님이 의식주의 은혜를 주신다. 주일은 쉬어라. 세상에서 잘 살면 내세의 상급이 적다”는 믿음 때문에 사실상 소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의 생활의 중심이 내세를 위하여 준비하는 일(상급 받도록)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일에 대하여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의 지혜로움”은 부정행위가 아닌 미래에 대한 예비적 태도를 칭찬한 것입니다. 8절 하반에서는 “그일(미래 예비)에 대하여는 이 세대의 아들들(불신자)이 빛의 아들들(성도)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4. 그러면 9절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악한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한 일을 성도가 신앙적인 일로 응용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재물”은 악한 청지기에게 해당하는 용어이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구”는 악한 청지기에게는 부채를 탕감 받은 대상이지만 성도에게는 예수님 친구(요 15:14)의 인정받음이요,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하면 없어질 때(세상을 떠났을 때)에 저희가(예수님과 천국의 가족들) 영원한 처소(내세)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영접의 뜻은 후한 칭찬과 상급으로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5.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 “부뚜막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나무가 나쁘면 실과도 나쁘고, 마음이 착하면 행실도 착하다”는 말씀(마 12:33, 34-35)이 연상됩니다. 따라서 싹(본심)이 선하냐, 악하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과 성령의 씨가 마음에 심겨있기 때문에 마음의 경향이 항상 신앙적으로 선하게 기울어진다는 것을 아시고(요일 3:9, 벧전 1:23) 선악 판단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마음으로 충성하고 순종할 때 더 큰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25:21, 눅 19:17).

6. 11절에서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신 말씀은 9절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것”을 권장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일, 작은 것에 충성하고 큰 칭찬과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작은 일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될 때는 큰 일이 되고,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9절의 해석과 같습니다. 곧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그것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신 이유는 불의한 청지기로 비유된 사건과 연계한 때문이고, 또 현실적 분복이 아무리 커도 잠깐 누리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것으로 충성할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7. 12절에서 “너희가 만일 남의 것(불의한 재물, 악한 청지기의 입장으로 볼 때 주인의 재산임, 그러나 성도는 자기의 분복이 곧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남의 것이 됨)으로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불신자에게는 자기의 것이 있을지 모르나 성도에게는 없음)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셨으니, 이 뜻은 주시는 자는 만유의 주 하나님이신데 성도가 하나님의 것으로 옳게 충성하지 못하면 자기의 것(혹 있다고 가정함)으로는 더 충성할 수 없으므로 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예수님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직원은 그것을 자기 것처럼 여겨 인색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 자신의 소유는 얼마나 인색하게 쓰겠습니까? 그런 뜻에서 성도가 현실에서 누리는 분복은 “하나님이 주신, 잠깐 누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그것으로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8. 13절 “집 하인이(한 사람이; 마 6:24)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섬기지 못할지니; 마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신 말씀은 마 6:24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재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물질로 인한 범죄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셔야 하며, 작은 일에 충성하고,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으며, 자기 생애에 받은 분복으로 내세의 상급을 쌓는 일에 성심껏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0 과 바리새인에게 교훈하심 (눅 16:14-18) 목록으로


1. 14절에서 “바리새인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것은 예수님이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13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고, 또 “불의한 재물로 충성하여야 한다”(11절) 하신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앞에서 한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죄가 지적당했다 하여 비웃는 태도는 회개하지 못할 자의 소행입니다.

2. 15절에서 “사람 앞에 스스로 옳다 하는 자와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이 없이 외모 상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어 사람의 높임만 받으려는 태도는 옳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도록 하여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요,

3. 16절의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의 때 까지라” 하심은 마 11:13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뜻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소개한 세례 요한의 증거(요 1:34)가 있으므로 그 교훈과 계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교훈이 없어도 예수님을 본받으면 넉넉하기 때문이고, 계시의 주인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마 17:5, 11:27). “그 후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는 말씀은 마 11:12에 나타난 말씀으로, 예수님 시대부터 율법 아닌 복음의 전파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침입”이란 강하게 들어오는 상태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4. 17절에서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쉽다”는 말씀은 마 5:18의 말씀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피력하신 것입니다(벧전 1:25). 율법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광채를 잃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즉 영원하고, 또 예수님보다 못한 광채로서의 역할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보다 밝은 광채이신 이유는 예언으로서의 율법의 성취자이시고 또 율법 계율의 실천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 5:17, 완전케 하심은 실천의 뜻임).

5. 18절에서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아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율법 계율(출 20:14) 중 도덕적 계율 하나를 예를 들어 강조하신 것입니다. 10계명 중에는 신앙 계명(하나님께 대한 것; 1-3계명)과 의식 계명(안식일; 4계명)과 도덕 계명(사람에 대한 것; 5-10계명)이 있는데, 안식일 계명은 천국(예수님 모시고 사는 세계)을 모형하는 계시적 계명이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된 것입니다(막 1:15). 그리고 다른 효력 있는 계명을 무시하시지 않는 뜻으로 7계명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결혼한 후 어느 일방이 음행한 연고 없이(마 5:32, 19:9) 다른 데로 장가들면 간음죄를 짓는 것이고, 또 이유 없이 이혼 당한 여인에게 장가드는 남자도 간음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상당한 명분 없이 이혼 당한 여인은 다시 합할 수 있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혼할 때나 초혼 또는 재혼할 때는 확실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 41 과 부자와 나사로 비유 말씀 (눅 16:19-31) 목록으로


이 본문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 말씀”이라고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많은 교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들은 호의호식으로 사치하였을 것임), 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명분으로 구원받을 줄 알면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비유로 나타내셨지만, 필자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아시는 예수님이 예증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19절의 “한 부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나 과거의 인물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24절) 바리새인들을 비유하셨고, 20절의 “나사로”는 역시 과거의 인물로서 고생이 많았던 천민을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과 현실과 영계의 역사를 다 아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이 세상에는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는 잘 사는 자의 대표자로서 좋은 옷(자색 옷, 고운 베옷)을 입고 잘 먹었으며, 날마다 연락(먹고 노는 것)을 한 것으로 표현하셨고, 못 사는 자는 나사로의 생활이 헌 데를 앓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으려 하되 그 집의 개의 훼방을 받고 헌데까지 핥음을 당하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자주 오는 나사로를 일향 자기의 하인처럼 취급을 하였으니, 이는 24절과 27절에서 2회나 “나사로를 보내라”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19-21절). 나사로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거지된 이유는 그가 늦게 복음을 알았거나 몸의 헌 데로 인하여 생활력을 상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는 중 거지 생활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2. 부자나 가난한 자나 때가 되면 다 죽고, 가는 곳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거지가 죽어서 예수님과(요 14:3)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22절) 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부터 안식과 영광을 맛보며 아브라함이 계신 천국으로 갔다는 뜻이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으니 부자나 가난한 자의 시체가 흙으로 돌아갔음은 매일반이라 할 것입니다(22절). 그런데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었고, 그곳에서도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게 된 것”입니다(23절). 여기의 음부는 악인의 영이 심판을 받기까지 대기하는 지옥입니다. 지옥이 평안할 수 없는 만큼 고통을 당하면서 견디는 것입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았다”는 것이나, 또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혀를 서늘케 해 달라”(24절)는 표현은 실체적 육체는 없지만, 영적으로 육체를 가진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두 사람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 것은 부자와 가난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현세에서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았지만 믿음으로 복음을 영접한 때문이고(행 4:12), 부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내세웠지만 율법 실천이나 복음이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족히 무시한 자였습니다.

4. 살아 생전에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위로받을 수 없음을 교훈하셨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라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하였으니 지옥에서라도 천국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뜻이고, 또 지옥에서 천국으로 뜻이 전달될 수 있다는 뜻이며, 지옥에서도 정신작용이 가능하고 육체 없이 혀가 뜨거운 것을 정신으로 느끼며, 살아있을 때 나사로를 하인처럼 부렸던 마음도 그대로 변치 않고 있음을 알게 하셨고, 또 부자는 지옥에서도 나사로를 하인처럼 멸시한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 구원은 십자가의 믿음으로 받지만, 위로와 고난은 현세의 고난과 좋은 것을 누린 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서 아브라함이 말씀하기를 “너는 생시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위로와 고민은 모두 정신적 행복과 고통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상관없이 좋은 것을 혼자 누리면 후시대에 그만큼 갚음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예수님은 당대의 가난한 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천국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고, 지옥에도 형벌의 차이가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천국과 지옥 간에는 대화의 소통은 될지언정 영향력의 소통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대화가 소통된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와 우리 사이(지옥과 천국 사이)는 큰 구렁이 끼어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다”(26절)고 하셨습니다. 구렁이란 왕래 단절의 장벽을 뜻합니다. 또 이 말씀은 “죽은 자가 연옥(임시 처소)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대목입니다. 지옥에는 긍휼의 손길이 닿을 수 없습니다. 특사의 기회도 주어질 수 없음이 현실과 다른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를 복음의 사신으로 살려 보내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7-28절에서 부자는 재차 요청하기를 “죽은 나사로를 세상에 있는 자기의 아버지 집에 보내어 자신의 불행을 말하게 하고 자기의 형제 다섯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증거하게 해 달라”고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율법과 예언서, 즉 구약성경을 의미함) 그에게 들어야 할 것이라” 하시므로 죽은 자 또는 그의 영이 세상에 다시 오는 일이나 증거하는 역할이 있을 수 없고(막 6:14) 오직 문자로 주신 계시의 말씀을 비중 있게 나타내셨습니다.

8.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 하여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30-31절). 30절에서 부자는 또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 하였지만, 31절에서 “모세와 선지자에게(즉 성경의 증언으로)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많은 이적을 행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인 자는 여전히 믿지 않았고, 출애굽 때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적의 양식과 기적의 옷을 입고도 완악하여 죽은 자들이 많음을 상기할 때, 믿음은 결코 외압이나 외부 여건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성경으로 믿고 구원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이는 거듭난 사람에 한하여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제 42 과 충성된 종 (눅 17:1-19) 목록으로


본문에는 다섯 대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1-2절은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② 3-4절은 “회개할 때 용서하라”는 말씀이며, ③ 5-6절은 “겨자씨만한 믿음의 위력”을 말씀하신 내용이고, ④ 7-10절은 “충성된 종에 대한 말씀”이요, ⑤ 11-19절은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1-3대지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대표 제목으로 “충성된 종”을 택하였습니다.

1.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1-2절)

1절 말씀은 마 18:7에, 2절 말씀은 마 18:6에 기록되었고, 마태는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라 하였으며, 2절의 “저가”를 “누구든지”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자신도 실족하면 안 되지만 특히 다른 사람, 그중에도 지극히 작은 소자를 실족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실족은 낙망의 일종으로 범죄에 해당합니다(시 42:5). 예수님은 소자(비천하고 약한 자)를 각별히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10). 따라서 성도가 소자를 무시하거나 소자를 실족시켜 피해를 줄 때는 그 벌이 대단히 클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돌을 매어 바다에 넣고 시체도 찾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중벌을 뜻합니다. 그러나 현세적으로 그렇게 받는 벌이 “마지막 때에 심판을 받는 것 보다는 낫다”고 하셨습니다(2절).

2. “회개할 때 용서하라”는 말씀(3-4절)

3절에서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 6:1을 음미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과 “하루 일곱 번이라도 그렇게 하라”(4절)는 말씀은 마 18:21-22의 의미를 축소하여 표현하신 것입니다. 정죄의 권한이 없는 인간은 다른 이의 죄에 대하여 판단 또는 보복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대속 원리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죄진 자가 회개하면 용서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3. “겨자씨만한 믿음의 위력”에 대하여(5-6절)

5절에서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였으니 믿음은 분량이 있음을 뜻하고(롬 12:3), 사도들은 기도로 귀신을 쫓는 일에 있어서 믿음의 연약을 느낀 줄 압니다(마 17:14-20). 이때에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큰 역사(뽕나무를 바다로 던지게 하는 일)를 명할 수 있고 그것이 순종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마 17;20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생명 있는 신앙, 즉 하나님께 연합된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은 겨자씨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을 연상하므로(마 13:31-32) 이해할 수도 있고, 또 한 생명이 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인물이 되는 것을 연상하십시오. 요즈음은 산이 평지 되는 일쯤은 보통으로 성취되지 않습니까?

4. 충성된 종에 대한 말씀입니다(7-10절).

7-8절 말씀은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는 사실을 설명하신 내용입니다(요 13:16). 따라서 종이 아무리 피곤하여도 주인을 먼저 대접한 후에 자신이 휴식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사명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만큼 충성하여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만큼 충성하였어도 인정은 받을지언정 주인이 사례할 입장은 아닌 것입니다(9절). 그 이유는 주인과 종은 지위와 직책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는 태도를 취함이 마땅하다 하셨으니, 이 뜻은 사명자가 종의 신분을 갖춤에 있어서 최대한의 충성과 최대한의 겸손을 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자가 하나님의 일을 시행하고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교회와의 관계에서 계약된 보수 이상에 대하여 교회에 짐을 지우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수 없이 헌신적으로 시행한 사역자의 상급이 더 많을 것입니다.

5.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11-19절)

1)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셨는데 그들은 멀리 서서(문둥병자는 성한 사람을 접근하지 못함, 레 13:45) 소리를 높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11-13절).

2) 이때에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고쳐주셨다”는 뜻이고, 그들은 제사장들ㄹ에게로 가다가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14절). 예수님의 능력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병 고치는 은사의 역할과 대조하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을 제사장들에게로 가게하신 것은 율법대로(레 13:9-23) 병 나은 진단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는 증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은혜는 열 명 문둥병자의 신앙과 관계없이 긍휼을 베푸시는 뜻으로 다 고쳐주신 것입니다.

3) 15-16절에서 병 고침 받은 것을 알게 된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 사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때, 17-19절에서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아홉은 어디로 가고 너 혼자 왔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나니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이 어떤 동기로 은혜를 주셨든지 받은 자는 먼저 감사하는 일이 중요하며,

②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신 후에 받은 자가 감사하러 오기를 바라신 것과,

③ 이방인(율법을 잘 모르는 자)이 감사한 것을 더 귀하게 여겨 칭찬하신 점과,

④ 이방인 아닌 자, 즉 선민 된 입장에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신 점과,

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심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 것이며,

⑥ 또 그 은혜의 성격이 구원인만큼 죄사함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감사를 강조하는 설교로 많이 활용되는 줄 압니다.

 

제 43 과 인자의 날의 상황 (눅 17:20-37) 목록으로


이 말씀은 전체적으로 “인자의 날의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내용이 상당 부분 마태복음 24장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서 비롯됩니다(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며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20-21절).

1) 바리새인들이 상상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를 설명하셨으니, 우선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심은 지상의 나라가 정권이 바뀌어 유토피아를 이루듯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

2)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함”은 그 나라가 영적이고 신비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지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내세의 천국은 지상과 다른 지역을 뜻하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특정 지역에 있지 않다는 뜻).

3) “그 나라가 너희 안에 있음”은 예수님을 모신 성도의 마음이나 믿음 세계(성도의 단체;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2. 인자의 날의 상황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습니다(22-37절).

1) 22절의 “인자의 날”, 24절의 “자기의 날”, 26절의 “인자의 때”는 다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시고 만유의 주로서 심판하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날’은 재림의 순간이고, ‘때’는 심판의 때일 것입니다.

2) 25절에서 인자의 날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승천,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라는 뜻입니다.

3) “인자의 날”, 즉 재림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23절). “인자의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 한다” 하심은 순간적으로 재림 사건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마 25:1-6)고 하셨습니다.

4) “인자의 날”은 어느 장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23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 말라” 하셨고, 마 24:26-27에서는 “광야나 골방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디일까요? 성도가 깨어있는 바로 그 장소인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재림은 “번개처럼 신속하다”고 하셨습니다(24절). 아마 빛이 임하는 것처럼 신속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붕 위에 있던 자가 세간을 가지러 집안에 내려갈 시간이 없고 밭에 있는 자도 집에 들어올 시간이 없다”(31절)고 하셨습니다. 마 24:40-41에서는 예루살렘 멸망이 닥쳐올 때도 그만큼 시급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주 재림의 영접에는 새 옷을 갈아입고, 신을 신고, 용돈을 들고, 나가는 식의 영접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영화되는 것입니다.

6) 그 때는 노아의 때와 같고(26-27절, 마 24:37-38), 롯의 때와도 같다고 하셨습니다(28-30절). 노아의 때에는 평상시처럼 살다가 멎을 줄 알고 기다렸던 비가 멎지 않으므로 화를 당한 것이고, 롯의 때는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질 줄을 모르고 완악을 계속하다가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그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0절).

7) 33절에서 “무릇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하셨으니, 이는 롯의 처가 그 표본으로써(32절) 전자는 육체적 생명을 구하려는 불신자이고, 후자는 재림주를 바라며 자기를 버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마 10:39, 16:26).

8) 35절의 말씀은 마 24:40-41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다가 믿는 한 여자는 데려감(변화와 휴거)을 당하고, 안 믿는 한 여자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 그때에는 “전도할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버려둠을 당한 자는 지상의 재난으로 죽는 것입니다(마 24:7-10, 22).

9) 31절에서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이오니이까” 하였으니, 이는 제자들이 한 질문입니다. 가라사대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마 24:28) 하시므로, 독수리 떼의 모이는 장소가 죽음이 있는 장소인 것처럼, 죽음이 있는 그 상태로 예수님의 재림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 44 과 기도에 대한 말씀 (눅 18:1-18) 목록으로


본문 ① 1-8절의 말씀은 “낙망하지 말고 기도할 것”에 대한 교훈이고, ② 9-14절은 두 가지 기도의 예이며, ③ 15-17절은 마 19:13-15에도 기록된 말씀으로 “어린이에게 축복하신 일”입니다. 첫째, 둘째 대지가 기도에 관한 말씀이므로 제목을 위와 같이 정하였습니다.

1. 낙망하지 말고 기도할 것(1-8절)

1) 1절에서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 것”을 비유적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여기의 기도는 간청의 의미이고, 그 간청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거나, 또는 기도자의 준비 부족으로 응답이 더디거나 안 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계속 구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간청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거나 구하는 자의 신분에 부족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항상 교정하면서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정과 세속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잠 8:20, 약 1:27). 그리고 또 “죄인의 기도(회개 없는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하셨으므로(사 1:15) 이런 문제는 기도자가 항상 보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2-8절에서 “악한 재판관도 소청자의 소원을 들어주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시고, 기도의 두 가지 예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9-14절). 악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므로 연약한 과부의 원한 송사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하고 자기 편한 대로 연기할 수 있고, 뇌물 받은 사건만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자주 재판관을 찾아가 사정을 하였고(3절), 얼마동안 듣지 않는 중에도(4절) 계속 번거롭게 찾아가니 재판관은 그 번거롭게 찾아오는 것을 귀찮게 여겨 그 사건을 처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5절).

3) 7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셨은즉 기도 응답의 지연은 고의로 연장됨이 아니라 상당한 이유 때문인즉 그 사실을 이해하고 꾸준히 기도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필자의 ≪기도백과≫ 3편 31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진정한 믿음이 희귀해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필자가 이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이 ≪핵심설교집≫ 109과에 수록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두 가지 기도의 예(9-14절)

1) 이 예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 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된 태도로 기도에 임하는 바리새인들을 깨우치시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의롭게 살지도 못하면서 의인인 체하며 세리들을 매국노처럼 취급하여 죄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9절, 15:1-2)

2)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당에서 기도함, 사 1:12)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죄인인 세리와 가까이 서지 않은 것) 먼저 자기의 생각하는 의를 내세웠으니 “다른 사람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또 곁에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은 점”을 감사하였고, 7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과 소득의 십일조 내는 것을 말하였으니, 이것은 자기 자랑에 급급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성소와 멀리 떨어진 성전 마당의 한 모퉁이일 듯하니 겸손의 뜻이 있음)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고개를 숙인 뜻) 가슴을 치며(죄에 대한 탄식으로 자기를 책망하는 뜻)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3) 따라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만과 죄인 멸시와 자기 자랑을 나타낸 것이고, 세리의 기도는 겸손과 자복인데, 14절에서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가 더 의롭다”고 판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살펴 이런 판단을 표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다”고 하셨지요(눅 9:46-48, 마 18:4, 23:11). 겸손한 자가 사람의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귀히 여기신다는 믿음을 갖고 계속 겸손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어린이에게 축복하신 일(15-17절)

1) 15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것”은 병 고침이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일로써 오늘의 성도들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일을 꾸짖은 것은 그들이 어린아이를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진행에 방해되는 일만 생각하여 만류한 것인즉 경솔한 처사였습니다.

2)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또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용납하라” 하신 후,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6절). 여기의 “이런 자”의 뜻은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천국인의 기질이 많다는 뜻입니다. 순결하고, 진실하며, 믿음이 단순하고, 욕심도 없으며, 부모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은 작은 선물에도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른들과 다른 점일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17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자신의 믿음을 보존하고 성숙시키는 일이며, “어린아이를 받든다”는 뜻은 정성을 쏟음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바르게 양육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와 같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 19:13-15에서도 강론하였습니다.

 

제 45 과 관원의 부족을 지적하심 (눅 18:18-43) 목록으로


본문에는 네 가지 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18-27절 말씀은 “청년의 부족을 지적하신 말씀”이고, ② 28-30절은 “헌신자의 받을 축복”이며, ③ 31-34절까지는 “십자가와 부활 예언”이요, ④ 35-43절은 “소경을 보게 하신 일”입니다. 여기의 대표 제목을 “관원의 부족을 지적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관원의 부족을 지적하심(18-27절)

1) 본문 말씀은 마 19:16-30과 막 10:17-27에도 기록되었고, 본문에는 질문자가 관원이요 부자라(18, 23절) 하셨는데, 마 19:20에는 ‘청년’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청년으로 부자이고 관원(국회의원 정도)이면 현세적으로는 일찍 출세하고 인격적 품위를 갖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한 것은 예수님을 도덕적으로 존경한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주로 호칭하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고, 그것이 재산을 처리하지 못하는 일과 함께 부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2)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마 19:16에서는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였으니 영생을 선행(율법 실천)으로 얻는 줄 잘못 알고 질문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데(요 8:26, 롬 3:4, 시 143:10) 네가 어찌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관원이 예수님을 인간으로 알면서 “선하다” 한 것이 잘못이니 인간은 악을 떠나 선에 속할 수 없고, “선하다”는 일반적 표현은 “순간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3) 20-21절에서 예수님은 그 청년이 생각하는 선(즉 율법을 지킨 정도)을 들어보시기 위하여 계명과 함께 대답하게 하신즉 “간음, 살인, 도적질, 거짓 증거, 부모 공경”에 대하여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20절에 열거된 계명은 다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한 가지 부족을 지적하셨습니다. 곧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22절). 십계명에는 이웃 사랑을 소극적으로 표현하셨지만(출 20:14-17), 레 19:18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19:19).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계명 실천이 미흡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그것(사랑)부터 실천하고 나를 좇으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자만을 돌이킨 다음 예수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부자이므로 많은 재산을 일시에 포기하기가 어려운 만큼 심히 근심을 한 것입니다(23절).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 많은 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24절).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는 말씀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려운 점에 대하여 그 확률을 바늘구멍으로 비유하셨습니다(25절).

5) 그러니까 듣는 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겠느냐?” 하였으니(26절) 이런 질문은 당연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 하신 것은 구원이 사람의 힘이나 방도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특별 방법인 독생자의 대속과 믿음으로만 가능한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또 “재산을 팔아 구제하고 나를 좇으라” 하신 것은 그 청년에게 그만한 정성이 있으면 한 가지 부족한 일(즉, 사랑 실천의 부족)을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보충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2. 헌신자의 받을 축복(28-30절)

이 말씀은 마 19;27-30과 막 10:28-30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는 헌신자(베드로와 동료들, 28절의 ‘우리’)가 집과 아내, 형제, 부모, 자녀를 버린 것으로 말씀하셨고, 마 19:29에서는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라 하였으며, 막 10:29에서는 집이나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라 하시므로 그 종류와 순서가 다르지만 이 말씀을 다 통합하면 “모든 것을 버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버린 것 이상으로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버린 것으로 영생을 받는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헌신할 수 있는 신앙에 십자가의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세에서 여러 배 받는 축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할 때, 이 말씀은 현세적 축복을 다 포기한 것이므로 받을 복은 신령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가까이 계셔주시므로 각별한 위로와 기쁨과 힘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계 3:20, 창 5:23).

3. 십자가와 부활 예언(31-34절)

1) 31절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언은 구약에 여러 차례 나타나 있습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실 일”(슥 9:9-10), “십자가 전반에 대한 내용”(사 53:1-12), “은 30에 팔릴 일”(슥 11:12-13), “날이 어두울 일”(암 8:9), “못 박힐 일”(슥 12:10), “의복 제비 뽑을 일”(시 22:16-18) 등입니다.

2) 여기에서 예수님은 희롱, 능욕, 침 뱉음 당할 일, 채찍에 맞을 일, 죽으시고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32-33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깨닫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기우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관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이 아닌 추측처럼 안 것입니다.

3)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34절). “말씀이 감취었다”는 뜻은 성령님께서 청종하게 하시지 않고(행 16:14) 대강 듣도록 역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으면 상당한 불안을 겪을 것을 감안하여 피하게 하신 듯합니다(계 2:17, 사 6:10). 이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4. 소경을 보게 하심(35-43절)

1) 35-38절에서 “예수님이 여리고(예루살렘 동북쪽 약 70리, 요단강 서쪽 20리 지점)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두 사람; 마 20:30)이 구걸을 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물어서 알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즉 앞서 가던 자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 하였으나(예수님의 행보를 더디게 하지 말라는 뜻) 더욱 소리를 내어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2)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데려오라” 하여(40절)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하신즉 “보기를 원한다” 하므로(41절)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절)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가 예수님을 따르니 “백성들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43절).

3) 여기의 “네 믿음”은 ① 진리를 사모하고 탐색한 노력이요, ②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한 뜻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신앙이며, ③ 예수님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는 마음, ④ 만류를 뿌리치고 예수님께 호소한 열심, ⑤ 눈 뜨고 예수님 따르기를 소원한 마음을 그의 믿음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4) 또 소경이 곧 보게 된 것은 이적의 탁월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소경을 보게 하신 것이나 난치병을 고치신 일은 다 같은 성격의 능력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성도는 영혼의 눈이 밝아지도록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6 과 삭개오와 므나 비유 (눅 19:1-27) 목록으로


본문 ① 1-10절은 “삭개오에 대한 말씀”이고, ② 11-27절은 “므나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삭개오에 대한 말씀(1-10절)

1) 1절에서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북쪽 약 70리, 요단강 서쪽 약 20리에 위치한 작은 성읍으로, 여호수아가 이 성을 정복한 내용이 수 6:12-26에 기록되었고, 그때 “그 도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 하였는데, 그 예언이 있은 지 500년 후에 “히엘”이 그 성을 건축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상 16:34). 엘리야 선지자 때는 그곳에 신학교가 있었고(왕하 2:5), 시드기야 왕이 그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잡혔으며(왕하 25:5-6), 포로 이후에 다시 재건하였는데(라 2:34, 느 3:2), 현재는 작은 동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그 성으로 지나가신 것은 마지막 예루살렘 행이었습니다(눅 13:22).

2) 2-4절에서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가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꼭 보고자 하여 나왔지만 사람이 많고 자신은 키가 작은 연고로 잘 볼 수 없게 되자 앞에 있는 뽕나무로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으니…”, 이 삭개오는 선민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9절에서 “잃은 자를 찾았다”는 말씀과 8절에서 “그가 토색한 것을 4배로 갚겠다” 한 것이 율법에 근거하여 자기의 재산 증식된 것을 강도 행위로 부풀려서 회개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이 선민의 증표입니다. 율법에는 토색한 자가 자수하면 토색한 분량에 20%를 가산한 벌금에(레 6:5, 민 5:7), 도적질한 것을 변상할 때는 갑절로(출 22:4, 7), 강도짓으로 탈취한 것은 4배로 변상하게 되어있으니(출 22:1), 이것은 그의 회개의 철저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3) 5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으니, 예수님은 삭개오처럼 “자기를 사모하고 회개하는 마음 가진 자”를 그의 이름과 마음가짐까지 이미 알아보신 것이요, 그가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충족시켜 주시는 뜻으로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신 줄 압니다(시 107:9). 그래서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6절).

4)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7절) 한 것은 선민들이 세리장 삭개오를 가렴주구한 나라의 배신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 하였으니(8절) 토색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증거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회개할 뜻을 강하게 표현한 것은 사실입니다.

5) 9-10절에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시고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이십니다(히 2:10). 또 “생명 얻는 회개”란 말씀도 있습니다(행 11:18).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주신다” 하였으니(요 1:12) 예수님의 구원 선포는 당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육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눅 16:27, 요 8:39) 영적 구원의 자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9:7-8). 영적 구원의 자손은 약속을 받은 자, 즉 “이삭처럼 출생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9:9-13). 또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잘 나타내주셨지요. 이 의미는 타락한 선민을 우선적으로 복음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6) 예수님은 계시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고 모셔야 합니다(요 1:1, 5:39). 삭개오가 예수님을 사모한 값으로 예수님이 그의 집에 유하실 것을 허락하신 것처럼 성도가 주님을 사모하는 만큼 주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습니다(잠 8:17, 계 3:20, 대하 16:9). 삭개오는 예수님을 사모할 때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적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주님이 왜 그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삭개오의 신앙에서 배울 점은 여러 가지입니다. ① 우선 예수님을 사모하고, ② 철저하게 회개하며, ③ 구제와 봉사로 사랑의 실천에 힘쓰고, ④ 물질적으로 범죄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깨끗하여야 합니다.

2. 므나 비유에 대한 말씀(11-27절)

1) 이 말씀을 읽고 나면 마 20:1-16에 나타난 “포도원에 일꾼을 들여보내고 늦게 온 품꾼에게 일당을 준 말씀”과 또 마 25:14-30에 나타난 “달란트 비유 말씀”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의 고유 기록인 본문의 내용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터득하셔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동기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다는 뜻) 저희(제자들)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정권 바뀌듯이, 현세적으로) 임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11절) 천국 실현이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처럼 점차 시일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사이에 성도들이나 제자들의 충성된 노력이 필요함을 깨우치시려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천국이 점차 실현된다는 뜻은 우선 현실적으로는 성도의 성화 과정이 있기 때문이고, 내세적으로는 구원자의 수가 전체적으로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사명 있는 성도들은 전도와 교육과 성화운동에 큰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잘하여 물질적으로 걱정 없이 사는 세계가 그 천국이 아니요, 예수님을 모신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세계가 천국인 것입니다.

2) 12-17절을 보시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에 갈 때 그 종들에게 한 므나씩 주어(16절) 장사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어떤 귀인은 장차 심판자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비유하고, 종들은 복음적 사명자나 성도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에게 1므나씩 준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신 일반은총입니다. 일반은총은 모든 성도가 꼭 같이 받은 혜택을 뜻합니다. 믿음, 성경, 사회적 은혜, 자연계의 은혜처럼 차별 없이 받은 것이지요. 달란트 비유는 은혜의 차등이 있는 만큼 그 성도의 역량과 사명에 따라 더 주고 덜 준 차이가 있으며, 상급도 거기에 준한 것입니다. 또 포도원 일꾼 비유는 일당에 얽매여 시간 때우기로 수고한 자보다 늦게 왔지만 주인의 보상을 흥정 없이 신뢰하고 열심히 일한 공로가 먼저 온 자보다 주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늦게 왔으나 후한 일당을 준 것입니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는 사람 따라 특수, 차별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고, 므나(므나는 헬라의 동전 단위, 700g과 350g이 있음, 1므나는 100 ‘드라크마’에 해당한다 함) 비유는 전체적으로 꼭 같이 받게 한 일반은총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장사하라” 한 것은 합당하게 활용하여 이득(영광)을 남기라는 뜻이었습니다.

3) 그런데 14절에서 “그 백성(이들은 일반은총과 사명을 받은 종들이 아닌 백성들을 비유한 듯)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쫓아 먼 나라로 보내서 그의 왕 됨을 백성이 원치 않는 것을 전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불신하는 무리들의 반대 행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만한 역사적 배경을 기록한 글을 본 일이 있으니, 주전 37-4년(예수님 탄생 해)까지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하던 대 헤롯이 죽자 팔레스틴 전역을 구분하여, 헤롯 안디바스와 헤롯 빌립과 아켈라오스(유다 지역)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아켈라오스”가 유다 영토를 유산으로 받은 것 외에 왕권까지 받기를 원했으나, 이때에 유대인들이 50명의 사절단을 보내어 “안켈라오 왕을 원치 않는다”는 진정을 하였기 때문에 로마 “아구스도” 황제가 그를 왕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왕이 되었다면 그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이 죽임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역사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원치 않는 자들이 어떤 위험에 있을 것인가를 깨우치는 교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 그 귀인(예수님을 비유함)은 왕권을 받아 가지고 온 것입니다.

4) 왕 된 귀인이 종들을 불러 장사한 결과를 보고 받았을 때,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작은 것에 충성한 것을 칭찬하심과 함께 열 고을 권세를, 또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의 권세를 주므로, 충성한 공력대로 상급을 준 것입니다. 여기의 “한 므나”를 작은 것이라고 하신 것에 유의하십쇼. 그리고 성도들은 작은 은사로, 작은 일에도 충성하셔야 합니다(고전 4:2, 고후 6:1). 하나님의 상 주심은 대단히 공평합니다. 일반은총으로 노력한 것과 특별은총을 받은 것으로 노력한 것에 대한 상급의 기준이 각각 다른 것입니다. 또 포도원의 품꾼 비유처럼 일한 분량이 작아도 믿음과 사명의 정신이 올바르면, 그것도 큰 상급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짧게 일하고, 적게 일한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칭찬을 받은 것을 함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마 11:11).

5) 그런데 20-27절에서 “같은 므나를 받은 종이 본전만 보관함으로 오히려 큰 벌을 받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 종은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수건에 싼 채로 그대로 드리면서 장사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핑계하였습니다. 우선 주인이 “장사하라” 하였는데도 안 한 것은, 불순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를 안 하고, 수건에 싸서 보관한 이유는 ① 주인이 엄한 분이라 장사에 실수하면 큰 벌을 줄 것으로 생각한 점과 ② 주인은 일을 안 하고 돈을 버는 사람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돈을 관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두지 않은 것을 취함”은 자기 집에 재물이 없어도 다른 곳에서 가져온다는 뜻이며, “심지 않고 거둠”은 노동(땀 흘리는 것)을 안 하고도 돈을 버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런 주인에게 구태여 돈을 벌어주려고 애를 쓰다가 실수를 하여 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보관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주인의 뜻에 완전히 위배된 것입니다. 주인은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는 사람도 아니었고, 너그럽지 못하고 엄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며, 돈을 벌지 못하여도 종으로 하여금 장사하는(충성) 연단을 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주인이 노력 없이 돈을 버는 자인 줄 알았다면 “그 돈을 은행에라도 넣어서 노력 없이 돈 버는 일이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니냐?”(23절)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6) 그리고 24절에서 “그의 한 므나를 뺏어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 하였으니, 이는 “없는 자(충성 못하는 자)는 뺏기고, 있는 자(충성하는 자)는 더 받게 하시는 상급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26절). 많이 받은 자는 “받은 것으로 족하다” 하였지만 주인은 그에게 더 많이 준 것입니다(25절). 그 다음에 “왕 됨을 원치 않는 백성들을 죽이라”(27절) 하였으니, 이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므나를 받은 종들은 사명자와 성도를,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불신자를 비유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충성하는 대로 더 주시고, 충성을 안 하는 대로 뺏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이요, 또 충성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과 성실함이 중요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47 과 예루살렘에 들어오심 (눅 19:28-48) 목록으로


본문에는 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28-40절)과, ②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하시고 예언하신 일(41-44절)과, ③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45-48절)이 기록되었습니다.

1.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일(28-40절)

1) 1절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19:1-27; 므나 비유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시더라” 하셨으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심은 마지막 길이요, 또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아시면서도 용기 있게 앞서가신 모습을 연상하면서 고난과 희생에 담대하심을 교훈 받게 됩니다. 요 13:1에 보시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신 말씀도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같은 용기를 본받아 어려운 사명에 용기를 내시고 앞장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2)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과정에서 34절을 보시면 “감람원의 벳바게와 베다니(감람원은 예루살렘 동쪽 입구에 있는 200m 높이 정도의 감람나무가 많은 산이고, 벳바게와 베다니는 그 입구에 있는 작은 동리의 이름임)에 가까웠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를 가져오게 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예루살렘 마지막 입성에 관한 말씀”으로 마 21:1-11과 막 11:1-11, 요 12:12-14에도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귀에 손을 댈 때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고 말할 것이라” 하셨고, 마 21:2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이라 하셨으며, 또 마태는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마 21:3-4, 민 9:2, 신 21:3)는 말씀과 “명하신 대로 하였다”는 말씀을(마 21:6)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30절)란 말씀과 “임자들이 어찌하여 푸느냐?” 한 구체적 질문과(33절) “주께서 쓰시겠다”(34절) 한 대답이 있고, 막 11:6에서는 “이에 허락하였다” 하셨으니 세 사람의 저자가 다 한 마디씩 보완적으로 기록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셨다”고만 하였습니다.

3) 35-38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신 것인데, 이는 마태복음의 기록과 같은 내용이며, 39절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찬양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도록 건의한 내용”에 대하여 마태는 “온 성이 소동하였다”(마 21:10)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40절에서 “만일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 하신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인데, 이 뜻은 예수님이 진리 되심을 사람이 증거하지 않으면 무인격적인 사물을 통하여서라도 증거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천사로 증언케 하신 바도 있고, 나귀로 말하게 하신 바도 있었습니다(민 22:28). 그러나 오늘날은 이 뜻을 고고학적 증거의 의미로도 해석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사실입니다.

4) 한 가지 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입성하시던 날이 주일이라는 사실로 알려져서 오늘의 교회들이 그날을 기념하여 부활절 앞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일날 입성하신 근거나 한 주간의 일정을 성경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근거는 요 12:2, 12의 “유월절 6일전”(토요일)이란 말씀과 “그 이튿날(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다”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일정은 마가복음 11장-14장까지의 기록을 살피면, 막 11:12에서 “이튿날”(월) 베다니에서 성전으로 가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11:19에서 “매양 저물매 성밖으로 나가셨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화요일과 수요일도 그 방식대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베다니 쪽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막 11:20에 보시면 저희가 아침에(하루 다음; 화요일) 베다니 길에서 마른 무화과를 확인하였으며, 막 13:3에 보시면 “예수님이 나오셔서 감람원 산에 올라 성전을 마주 보시며 말씀하신 사실”이 있고, 막 14:1에서는 “저물매”란 말씀과 “이틀 후이면 무교절(금요일)”이라 하셨으니, 그 날이 수요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막 14:12에서 “무교절 첫날 양 잡는 날”은 수요일을 뜻하고, 막 14:7에서 “그날이 저물매” 성만찬을 베푸셨으니 그때가 수요일 저녁입니다. 이상의 방법으로 마가복음 11장부터 14장까지 살피시면 마지막 주간의 행사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막 15:1에서 목요일 새벽의 재판과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고, 15:42에서 “이날을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라” 하셨으며(금요일 오후), 16:1-2에서는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주일)에 부활하셨다”고 하셨습니다.

2.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하시고 예언하심(41-44절)

1) 이 말씀은 마 23:37-39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의미이지만 약간의 표현이 다릅니다.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주후 70년에 있을 도성의 멸망을 생각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이고,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으나 지금 네 눈에 숨기웠다”(41절) 하셨으니 “평화에 관한 일”이란 메시야를 거스리지 않는 것이요(시 2:1-4, 10-12), “네 눈에 숨긴 것”은 영적 무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셔도 믿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2) 42-43절에서 “이 날이 이를지라… 권고 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하셨는데, 토성을 쌓고 가둔 일이나 자녀를 메어친 일이나 성전을 헌 일 등이 다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권고 받은 날”이란 “권고하시는 기회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때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45-48절)

1)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입성하셔서 첫날 성전에 오셨다가 답사만 하시고 그대로 나가셨습니다(막 11:11). 그리고 그 이튿날 다시 오셔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하시고 정돈을 하셨습니다(막 11:15-18). 45-46절의 내용은 마 21:12-13(막 11:15-17)과 같고,

2) 47절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은 마지막 주간에 매일(주일, 월, 화, 수까지) 성전에 다녀가신 것을 뜻합니다. “대제사장들(은퇴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인 가야바)과 서기관들은 매일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백성의 두목들(바리새인을 뜻함)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으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48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세력자들도 다수 백성들의 궐기와 단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제 48 과 포도원을 세로 준 비유 (눅 20:1-26) 목록으로


본문에는 세 가지 제목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권세의 근거에 대한 질문과 대답”(1-8절)이고, ② “포도원을 세로 준 비유”(9-19절)이며, ③ “납세에 대한 질문과 대답”(20-26절)입니다. 대표 제목을 “포도원을 세로 줌”으로 정하였습니다.

1. 권세의 근거에 대한 질문과 대답(1-8절)

1) 이 말씀은 마 21:23-27과 막 11:27-33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절에서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눅 19:47). 그 성전은 “예수님의 것”이므로(눅 2:49, 왕상 8:12-66)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으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관리해온 것이므로 예수님을 나그네처럼 취급하였고, 성전 마당에서 허락 없이 설교한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무슨 권세로 이런 일(설교, 복음 전파 등)을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2절).

2) 3-4절에서 예수님은 “나도 너희에게 한 말을 물으리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세례 요한이 설교하고 세례 베푼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한 것이냐?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아 행한 것이냐?”의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시행한 것이었습니다(눅 1:15-17).

3) 5-7절에서 저들은 대답을 주저하였으니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한다면 “그러면 너희가 왜 요한을 따르지 않았느냐?” 하실 것이고, “사람에게서로라” 하면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돌로 칠 것으로 여겨 “모른다”(7절)고 발뺌을 한 것입니다.

4) 그때에 예수님은 8절에서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진실한 대답을 회피하는 자들에게 진리를 증언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는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만 받아야 합니다(마 13:23). 예수님이 시행하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입니다(요 17:7-8, 히 5:5-6).

2. 포도원을 세로 준 비유(9-19절)

1) 이 말씀은 마 21:33-41과 막 12:1-9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다”는 비유는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종교(성전)제도를 만들어 선민과 그 지도자들에게 맡기고 메시야를 통한 구속사역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뜻이요,

2) 10절의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낸즉 종을 때리고 세를 주지 않았다”는 비유는 계명과 종교단체를 통하여 선민들의 믿음이 성숙해지기를 바라시고 충성된 종들을 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으나 의로운 종들을 핍박할 뿐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11절과 12절의 말씀처럼 재차, 3차, 종을 보내도 계속 핍박만 한 것은, 구약의 선민들이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옳게 따르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3) 13-15절에서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어 혹 공경받기를 바랐으나 농부들은 서로 의논하여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유업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은즉 그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신 것은 “하나님이 때가 되시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으나 율법주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성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당연히 심판을 하셔야 하겠지요.

4) 16절에서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 하심은 하나님의 큰 심판(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말세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심과 동시에 신약의 교회(포도원)를 섬기는 특권과 구원의 복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였으니 그들은 심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만 원하지 않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5) 이때에 예수님은 17절에서 사 56:7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버린 돌과 머릿돌이 곧 예수님을 비유한 것으로 말씀하셨으니(17-18절),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마 21:42-44의 해석을 참고하십쇼.

6) 19절에서 대세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비유 말씀이 자기들을 가리킴인 줄로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을 두려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3. 납세에 대한 질문과 대답(20-26절)

1) 본문의 “납세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마 22:15-22과 막 12:13-17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0-21절의 내용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마 22:16에서는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가 첨부되었습니다.

2) 22-26절의 말씀은 마 22:17-22의 강론을 참고하십쇼. 26절에서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더라” 하신 부분에서 마 22:22에서는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확실한 국가관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잘 구별하신 후(요 19:11, 롬 13:1-2) 나라가 가정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임을 아셔서 건설적으로 국가에 대응하는 자세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9 과 부활에 대한 질문 (눅 20:27-47) 목록으로


본문에는 세 대목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27-40절까지는 “사두개인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고, ② 41-44절까지는 “다윗의 자손이란 인식 문제”이며, ③ 45-47절은 “외식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대표 제목으로 “부활에 대한 질문”을 정하였습니다.


1. 부활에 대한 질문(27-40절)

1) 우선 이 말씀의 내용을 마 22:23-33과 막 12:18-27과 대조하면 예수님의 동일한 사건과 교훈을 세 저자가 전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과 마가의 표현이 거의 같고, 마태는 몇 개의 용어를 다르게 표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27절에서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마 22:23, 막 12:18;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28절)”라고 호칭하였으니, 이 “선생님”이란 호칭은 마태, 마가도 공통으로 기록하였고, 마태는 “그날에 예수께 와서”(마 22:23)라고 하였습니다.

3) 28절에서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한 것을 마가도 같이 표현하였으나(막 12:19) 마 22:24에서는 “모세가 일렀으되”로 되어 있으니 “모세가 써주었다”는 뜻은 기록상의 영감을 뜻하므로 증언보다 더 확실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4) 질문의 내용은 29-33절에서 “7형제가 계대결혼법(신 25:5-6)에 의하여 혼인을 하였을 때 아내는 한 사람이고 남편은 일곱인즉,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5) 34-36절에서 “저 세상(천국의 의미)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생명의 부활을 뜻함; 요 5:29, 악인의 부활과 대조됨; 행 24:15)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부활체는 성을 초월한 상태로서 현세적 육신과 차원이 다른 형태입니다.

6) 37-38절에서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마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바, 마가는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이라 하였음, 이 글은 출애굽기를 뜻함, 출 3:6)에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였으니…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살았느니라(누가의 고유 기록 부분)고 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7) 39-40절도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마태는 이 부분에서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33)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 곧 생명의 부활로 나올 사람은 육신이 죽었을지라도 그 영혼이 죽지 않은 것이요, 부활 후에는 이성적 체질이나 결혼 상대를 생각하는 개념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다윗의 자손이란 인식 문제(45-47절)

1) 이 부분의 말씀도 마 22:41-46과 막 12:35-37에 기록되었습니다. 45절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구원자)를 다윗의 아들(인간으로만 믿는 뜻)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계보에 의한 사회적 통념일 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마 16:16), 따라서 다윗의 주가 되시는 신성적 본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시 118:22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4절)고 하셨습니다. “주(성부 하나님)께서 내 주께(예수님에게) 이르시되…” 하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메시야가 십자가로 악을 정복하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으로 믿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외식을 경계하신 말씀(45-47절)

이 말씀은 마태복음 23장 안에 포함되어 있고, 또 막 12:38-40에도 교훈적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적하여 말씀하셨으나(마 23:2), 마가는 대상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누가는 서기관들이라고만 하였습니다. “경계하라” 하신 외식에 대하여 1)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특수한 의복은 문제가 됨), 2)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교만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 3) 사람 모인 장소에서 상좌에 앉는 것, 4)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아주 뺏어 못살게 함), 5)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겉으로는 평범하고 특별한 모양새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소금과 누룩과 빛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에 나타나는 학위 간판, 경력 간판, 행사 간판, 의복 간판, 예배당 건물 간판,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 간판, 물질사업 간판 등은 다 실속(영적 축복)에 비할 때 헛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 50 과 예루살렘 멸망 예언 (눅 21:1-24) 목록으로


이 말씀의 ① 1-3절은 “예수님이 연보를 평가하심”이고, ② 4-24절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심”입니다.

1. 예수님이 연보를 평가하심(1-3절)

1) 이 말씀은 막 12:41-44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마가의 기록이 약간 자세합니다.

2) ‘렙돈’이란 화폐의 이름은 가장 적은 가치의 돈입니다.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라고 하였습니다. 화폐 단위를 설명한 어떤 문서에 ‘달란트’는 화폐로 사용하는 금이나 은의 중량을 말하는데 단위가 큰 것이고, 돈으로 사용하는 것은 ‘세겔’(대상 8:31)로 64센트에 해당하며(반 세겔은 32센트, 마 17:24), ‘데나리온’(마 20:2)은 당시 하루 품값으로 16센트이고, ‘드라크마’는 6센트이며(눅 15:8), ‘앗사리온’은 1센트(마 10:29)이고, ‘고드란트’는 1/4센트(막 12:42)이며, ‘렙돈’은 1/8센트라고 하였습니다.

3)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예수님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시는 점, ② 모든 사람의 재산을 아시는 점, ③ 용도와 관련된 물질 형편을 아시는 점, ④ 풍족한 중에 드린 것과 구차한 중에 드린 것과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에 대하여 비례적으로 평가하시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난한 성도가 적은 헌금을 하였어도 예수님은 만족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심(4-24절)

이 말씀은 마 24:1-14과 막 13:1-13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5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들이(마 24:1,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요 2:20) 예수님은 그 웅장미에 대하여 평가하시지 않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6절). 오늘날도 눈에 보이는 것을 자랑한다면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2) 7절에서 제자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으며, 또 그때에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마 24:3에서는 이 질문을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조용히 와서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3) 이때에 예수님은 8-24절 사이에서 여러 가지 징조와 대책을 말씀하셨으니,

① “이단의 미혹이 있되 자신을 예수(내 이름)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8절) 할 것이나 미혹당하면 안 되고(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이단은 오늘날도 있음),

② “난리 소문(전쟁 소문)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그것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9절). 성도는 전쟁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27:3).

③ “민족과 나라 간에 실제적 전쟁이 있을 것이라”(10절) 하셨으며,

④ “처처에서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으며 또 무서운 일(사람이 많이 죽게 되는 상황일 듯)과 하늘의 큰 징조(자연계의 변화, 기상, 천체의 변동 같은 것)가 있을 것(11절)과,

⑤ “성도들에 대한 핍박”(권세자들이 믿는 성도를 옥에 넘기고 재판하는 뜻)이 있을 것이나(12절),

⑥ 끌려가는 그 상태는 증거의 기회가 될 것인즉(13절) 그때에 성도가 변명할 말을 연구하지 않으면(14절) “성령님께서 구재(언변)와 지혜를 주셔서 대적자가 능히 대항할 수 없도록 말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절). 평안할 때는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 같아도 역사하시는 것이며, 믿음으로 위급한 형편에 있을 때는 현저하게 역사하시므로 강한 마음과 지혜로운 말로 능히 대적하게 하실 것입니다.

⑦ “심지어 가족이나 벗이 성도를 죽음에 내어줄지라도 담대하게 믿음을 붙잡도록 하실 것이고(16절) 또 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인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17절) 하나님의 보호로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8절). 이런 일이 있을 때 성령님도 역사하시지만 성도 자신도 “인내함으로 영혼(생명)을 보존 받게 될 것이라”(19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순교) 살리기도(보호) 하시는 분입니다(삼상 2:6).

⑧ 멸망의 임박함은 예루살렘이 (로마)군대들에게 에워싸임으로 알게 될 것이요(20절), 22절에서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이 기록은 구약적 의미에서 심판의 기록임, 말 4:6, 2:1-3)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며, 그 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니(도망갈 힘이 없은즉 죽게 됨), 이는 큰 환난과 진노가 있겠음이라”(23절)고 하셨습니다. 또 “칼에 죽임을 당하고 이방에 사로잡혀 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 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24절)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때”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하나는 “이방인을 상대한 구원자가 다 확보되기까지(롬 11:12, 25)”란 의미요,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임”은 이방종교 무리들(회회교, 유대교 등)에게 점령당한 뜻이며, 또 한 가지 해석은 이스라엘 영토가 “이방인(로마나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는 때가 끝나기까지”를 뜻할 수 있으니, 이는 이스라엘국이 일반적 국가로 독립한 1948년까지를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를 택하면 그 땅이 아직도 이방인의 종교권 아래 있는 것이고, 후자를 택하면 국가적 독립을 한 것이지만, 그 양자간의 상태에서 말세를 당하게 될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축복은 메시야를 배척한 때부터 멀어졌으니, 그때에 이미 끝난 것이고, 국가적인 일반은총은 바벨론 포로 시에 끝났은즉 민족의 독립국가가 형성될 때까지 이방국의 통치 아래 있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며,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된 상태입니다.

⑨ 이런 환난을 앞두고 살길을 찾는 방법은 21절의 말씀대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이 산으로 도망하라. 성내에 있는 자나 촌에 있는 자들도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이란 인적이 드문 은밀한 곳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다 피해를 보았지만, 로마 군인들이 한적한 산속까지는 다 뒤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가서 이 ‘산’이란 영적 의미로 “하나님께로 피난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셔도 좋을 것입니다(시 91:1-7, 9:9, 18:2).

 

제 51 과 재림의 징조와 준비 (눅 21:25-3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제목을 “재림의 징조와 준비”로 정하였습니다. 제목에 해당하는 말씀은 25-36절이고, 37-38절은 “예수님의 생활 일정”입니다. 마 24:15-42(막 13:14-37)에도 같은 제목의 기록이 있습니다.

1. 재림의 징조와 준비(25-36절)

1) 이 부분의 말씀이 “재림의 징조”가 되는 이유는 27절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1). 오시는 모양은 “올라가실 때의 부활체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마 24:30, 막 14:62, 계 1:7), 어느 장소에 있거나, 의인이나 악인이나(계 1:7, 찌른 자), 일시에(마 24:7, 31, 계 1:7, 눅 17:24)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35절). “능력과 영광으로 오심”은 심판자로 오시되 초자연적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2) 징조에 대한 말씀은 25절에서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일월성신의 징조”는 자연계의 변화이고,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는 26절의 “하늘의 권능의 흔들림”이란 말씀을 참고할 때 천체의 변동이나 지진 등 지각변동의 영향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이런 일들로 인하여 “기절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28절에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정신 차리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라) 너희 구속(구원 완성, 영화)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29-30절에서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온 줄을 아는 것처럼 앞에서 말씀한 징조들이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나라(내세 천국의 실현)가 가까운 줄 알라” 하셨고,

4) 32절에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모든 일”이란 예수님의 구속사업(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과 70년에 있을 예언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후 70년에 나타날 예루살렘 멸망은 악인에 대한 심판의 예표로, 그 일이 곧 말세심판의 예표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의 징조를 연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33절, 마 5:18).

5) 재림을 대비하는 방법으로써 “스스로 조심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방탕이나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에서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 하셨고(34절), 35절에서는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시에 임하시는즉 장차 올 모든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능히 피하고 예수님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36절). 말세에 처한 성도는 “믿음으로 깨어있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잘 아셔서 엄히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신앙생활의 본질 문제와 부르심을 앞두고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2. 예수님의 생활 일정입니다(37-38절).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 주일에 입성하셔서 성전에 다녀 오셨고(19:45, 막 11:19), 수요일 저녁 잡히시는 때까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주무시니(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러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제 52 과 예수님의 유월절 (눅 22:1-27) 목록으로


본문 ① 1-6절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음모에 관한 말씀”(마 26:1-5, 막 14:1-2)이고, ② 7-13절은 “성만찬을 베푸실 장소를 준비하신 일”(마 26:17-20, 막 14:12-18)이며, ③ 14-23절은 “성만찬을 베푸신 내용”(마 26:25-29, 막 14:22-25)이고, ④ 24-27절은 “제자들의 서열 다툼”(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과 음모에 관한 말씀(1-6절)

1) 1절에서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왔다”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설명은 출 12:1-28에 기록되어 있고, 무교절도 출 12:17에 기록되었습니다. 두 용어는 같은 절기를 의미하며 “유월”은 하나님이 선민에게 재앙을 주시지 않고 넘어가게 하셨음을 뜻하고, 무교절은 유월절 기간(1월 14일-21일)에 누룩 없는 떡을 먹게 하신 뜻으로 부른 이름입니다. “가까왔다”는 뜻은 마지막 주간의 수요일을 의미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 26:1에서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하셨습니다.

2) 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죽일 방책을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들을 두려워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자들도 군중을 두려워한 고로 명분(죄)를 만들어가지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한 것입니다. 마 26:3-5에 보시면 “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궤계를 만들어 고발하되 명절에는 말자” 하였으나 뜻대로 못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희생의 양이 되셔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으니(고전 5:7) 사람이 결의를 하여도 하나님의 섭리는 거스리지 못하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3) 3-4절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고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5절에서 저들은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였고, 유다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6절) 하였으니 사람에게 악이 발동함은 사단의 역사에 자기의 마음이 끌린 탓이고,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을 가진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하여(요 12:4-6) 따른 것이 헛될까 함이었을 것이요, 예수님의 정체만 알려주면 돈을 받으니 쉬운 작당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찾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기회가 없는데 유다는 죄를 짓기 위하여 기회를 찾는 불행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2. 성만찬을 베푸실 장소를 준비케 하심(7-13절)

1) 7절에서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음”은 1절에서 무교절 이틀을 앞둔 수요일입니다.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할 유월절에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롬 10:4). 예수님이 지키신(마 26:18) 유월절의 주된 음식은 포도주와 떡이었습니다(구약식 의식이 아니었다는 뜻). 마 26:17에 보시면 제자들이 유월절 지킴에 대하여 예수님께 여쭈었으나 예수님이 먼저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신 내용이 본문에 있으므로 더 자세합니다(8절).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도 본문의 고유 기록입니다. 어떤 이는 요한복음에 성만찬의 기록이 없음을 들어 성만찬의 권위를 약하게 보기도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1회의 기록이나 일점일획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마 5:18).

2) 9절에서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일정한 집회소를 갖고 계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또 성만찬이 중요한 의식이지만 특정 장소에 연연하심이 없이 성도의 주택 부분을 빌려 쓰신 점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은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장소(예배당)나 물질이 크게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요 4:21, 행 3:6).

3) 10-13절에서는 유월절 장소를 예비함에 있어서 “구체적 방법을 나타내셨고 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초월성을 믿게 하고 또 두 제자와 다락방 주인이 순순히 순종한 미덕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함이 상책입니다.

3. 성만찬을 베푸신 내용(14-23절)

1) 이 부분의 내용은 마 26:25-29, 막 14:22-25(고전 11:23-2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성찬식 기록은 같으나 누가의 기록은 더 자세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만찬을 취하시기 전에 유다의 소행을 일깨우신 사실을 기록한데 반하여 누가는 유다에 대한 지적을 나중에 기록하였으니, 이 선후관계는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전 11:28에서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이 떡과 잔을 받으라” 하신 말씀에 근거할 때 마태와 마가의 기록이 교훈상으로 유익할 듯 합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순서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더 자세히 기록하는 데만 뜻을 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14절에서 “때가 이르매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하심에서 ‘때’는 저문 때(마 26:25, 막 14:22)를 뜻하고, 열두 제자만 함께 앉은 문제는 사도들이 성도를 대표한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이방의 평신도들)에서도 시행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고전 11:23).

3) 15절에서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기 전에 유월절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다” 하셨고, 16절과 18절에서 “세상에서의 유월절이 마지막임을 두 번 말씀하신 점”, 또 17절에서 “잔을 받으사 사례하신 후… 너희끼리 나누라” 하신 점, 또 19절에서 “떡을 잔 받은 후에 잡수시고”, 또 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또 잔을 나누신 일”은 다 누가의 고유 기록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성찬예식은 떡과 포도주 받는 순서나 “너희끼리 나누라” 하신 말씀에서, 나누는 자의 신분에 특별한 격식을 두지 않은 채 자유로운 식사를 응용하여 행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떡과 포도주의 의미가 주님의 속죄를 위한 희생이란 점과 그 사건을 기념하고 전파하는 뜻을 담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4) 21-23절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하여 충분히 지적하셨고, 또 회개할 기회를 주신 줄 압니다. 그러나 유다는 멸망에 해당하는 자이므로 회개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22절). 오늘의 작은 단체의 성찬식은 단체적 격식에서 많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4. 제자들의 서열 다툼의 내용(24-27절)

1) 24절에서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다”고 하였으니, 이 교훈과 비슷한 말씀이 마 20:25-28, 막 10:41-45에 기록되었습니다. 성찬예식을 마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므로 성찬예식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상실한 것 같습니다. 성직자들이나 일반 제직들의 마음속에 서열을 생각하지 않을 만큼 겸손해져야만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아지셨으니까요(빌 2:6-7).

2) 25-2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다툼을 깨우치시고 진정시키시는 의미로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주장하는 뜻) 그 집권자들은 은인(공로자)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으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어린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 같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시는 큰 자는 겸손하고 성실한 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지위나 직책, 공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27절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계시기 때문에 앉아서 먹는 자보다 섬기는 자를 크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고로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섬김 받으려는 자세를 포기하고, 반드시 섬기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53 과 마지막 부탁과 기도 (눅 22:28-46)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과 기도”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28-30절은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이요, ② 31-34절은 “베드로의 타락을 예언하심”이며, ③ 35-38절은 “환난에 대비하라”는 부탁이요(이 세 대목은 다 부탁의 성격임), ④ 39-46절은 “겟세마네에서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28-30절)

1) 28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심에 있어서 “모든 시험 중에 항상 함께한 자들에게 맡기심”은 맡을 자의 자격에 관한 말씀으로 “연단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29절에서 “아버지께서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께 맡기신 것처럼 예수님도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신다” 하신 뜻은 예수님이 세상에 안 계실 것을 대비하여 “모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뜻인데, 그 모든 일, 즉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은 복음사역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의 계시를 주셔서 교회의 터를 닦게 하시고(고전 3:10-11, 엡 2:20) 전도하여, 그 터 위에 교회를 세우게 하시며 가르치고 다스리게 하시는 현실의 교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30절의 “너희도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심”은 성도가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며 사는, 신령한 생활의 축복이고(요 10:9, 14:23, 계 3:20),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심”은 제자 된 자들로서 헌신을 잘하였을 때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높은 지위에 오르는 상급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열두 지파란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계 4:4, 10, 7:5-12).

2. 베드로의 타락을 예언하심(31-34절)

1) 마 26:31을 보시면 예수님이 성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일이 있었지요. 이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구약의 슥 13:10의 말씀을 인용(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짐)하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의 결심과 의지만 믿고 장담한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31-32절에서 “사단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흔드는 것을 아셨고, 베드로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은즉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사람의 허황된 마음과 영계의 역사와 베드로가 수난을 당한 후 회개할 것과 다시 불러 쓰실 일과 그의 사명까지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3)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고 “옥이나 죽는 데로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한즉(마 26:33에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라고 하였음) 예수님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33-34절). 예수님은 섭리자요 예언자이신즉 무조건 믿고 은혜를 구함이 바른 태도입니다.

3. “환난에 대비하라”는 말씀(35-38절)

1) 환난이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마 9:15의 “신랑을 뺏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37절에서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하신 말씀(사 53:12)처럼 “그 일(붙잡히시고 돌아가실 일)이 이루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에 들어가고 제자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 환난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35-36절에서 “예수님의 파송으로 전도하러 나갔을 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이 없었어도 부족을 느끼지 않은 것”을 상기시키시고, “전대와 주머니와 검과 겉옷을 준비하라”(36절) 하셨으니, 이 뜻은 “믿음으로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셔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전대(필요한 물질)와 주머니와 검(보호의 은혜)과 겉옷(의복 문제) 등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3) 그런 중에 38절에서 저희가 검 둘을 보이면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하였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검을 영적 의미로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예수님이 “족하다” 하신 것은 검에 대한 영적 의미(마귀를 대항하는 믿음 또는 말씀, 엡 6:17)를 깨우치실 계획으로 그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을 깨우치신 것은,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쳤을 때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신 것입니다(마 26:52). 이 말씀의 물질 문제와 보호 문제는 오늘의 사역자들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자만과 혈기와 타락을 미리 대비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4. 겟세마네에서의 마지막 기도(39-46절)

1) 성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마 26:36). 여기에 대하여 누가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하셨으니,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약 200m 높이의 산인데, 그곳에 감람나무가 많아서 “감람산”이라 하는 것이며, “겟세마네”는 그 산 안에 있는 하나의 골짜기 이름입니다. “겟세마네”의 뜻이 “기름을 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골자기에 기름 짜는 시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습관적으로 가신 것(누가의 고유 기록)은 “매양 저물매 감람산으로(기도하고 주무시러) 가신 것”을 뜻합니다(막 11:19).

2) 예수님은 그 골짜기를 기도의 처소로 삼으시고 우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40절). 45-46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돌 던질 만큼 떨어지셔서(41절) 기도를 다 마치신 후에 제자들을 보신즉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슬픔의 감정은 의지적 기도를 방해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두 번이나 권면하신 것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마 26:39(막 14:36)의 내용과 같습니다. 또 다른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 상황에서 누가의 고유 기록은 또 있습니다. ① 43절에서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운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나 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힘 있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이요(롬 8:26), ② 44절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붉은 빛을 띠어 떨어진 모양을 묘사한 말씀이요, 어려움을 감당하셔야 할 기도이므로 애써 기도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여기에서 기도하실 때 마태는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하였고, 마가는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하셨으나(마 26:37, 막 14:34), 누가는 그런 뜻을 나타내지 않고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만 표현하였습니다. 기도는 믿음안에서 어려운 환경을 의지적으로 극복하는 수단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54 과 종교재판을 받으심 (눅 22:47-71) 목록으로


본문에는 세 가지 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47-53절은 “예수님이 잡히신 과정”의 말씀이고, ② 54-62절은 “베드로의 탈선과 뉘우침”이요, ③ 63-71절은 “예수님이 종교재판을 받으신 내용”입니다. 대표 제목으로 “종교재판을 받으심”으로 정하였습니다. 수요일 저녁과 밤을 기도로 지내신 후 목요일 새벽이었습니다.

1. 예수님이 잡히신 과정의 말씀(47-53절)

1) 이 말씀은 마 26:47-56, 막 14:43-53, 요 18:3-13에도 기록되었으며, 약간의 표현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 내용 중에서 마태가 기록한 내용의 설명은 생략하고,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내용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2) 47절에서 “말씀하실 때에(앞부분의 말씀) 한 무리가 온 것”을 마태는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파송한 큰 무리”라 하였고,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갖고 왔다” 하였으며, 또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지적해주는 군호를 짰다”고 하였습니다(마 26:47-48). 48절에서 유다가 군호를 짠 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 하자 예수님은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신즉 좌우(제자들)가 그 될 일을 보고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49절) 하였고, 예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50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요 18:10에서는 귀를 친 사람은 “베드로”요, 당한 자의 이름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3) 51절에서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으니”, 이것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필자는 청년 때에 “이것까지 참으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많이 참는데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도는 혈기를 부리거나 이웃에 피해주는 일을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4) 52-53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성전의 질서를 담당한 군인들)과 장로들에게 “날마다 성전에 있을 때도 잡지 않은 자들이 강도를 잡는 것처럼 검과 몽치를 갖고 나왔느냐?” 하신 후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라”고 하셨으니, 이 뜻은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도록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보호하시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군사들에게 잡힘을 당하셨습니다.이 때는 수요일 자정을 넘긴 목요일 새벽이었습니다,

2. 베드로의 탈선과 뉘우침(54-62절)

1) 54절에서 군병들은 예수님을 이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생활을 멀찍이 하는 사람은 믿음이 더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 55절에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바깥뜰 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앉은 사람들 가운데 앉았었고, 56-60절에서 “한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 하였을 때,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는데,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당이라” 하였을 때, 역시 “아니라” 하였으며, 한 시쯤(얼마쯤, 잠깐 지난 후)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으니라” 하였을 때 “나는 너의 하는 말을 알지 못 한다”고 세 번 부인하였을 때(마 26:74에서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음), 닭이 곧 울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2) 61-62절에서, 이 때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회개하는 태도이며 예수님의 기도에 힘입어(32절) 성취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종교재판을 받으심(63-71절)

1)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이끌려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신 후(54절) 63-65절에서 “지키는 자들(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으며 눈을 가리우고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선지자 노릇(알아 맞추라는 뜻)을 해 보라’ 하면서 많은 말로 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들에 대한 내용이 마 26:59-68, 막 14:55-65, 요 18:19-24에 나타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목요일 새벽 밝기 전에 끌려가셨습니다. 66절에서 날이 샐 때에 백성의 장로들(재판관들)과 대제사장들(안나스와 가야바)과 서기관(사무관 및 율법 교사)들이 모여 예수님을 공회(재판정)로 끌어들였고,

3) 67-71절에서 심문과 답을 받았으니 심문은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너희에게)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십자가와 부활이 있은 후)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신즉 또 심문자가 묻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였을 때,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고 하셨습니다.

4) 71절에서 저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심문은 종교적 교리에 관한 것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신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라 하여 “저는 사형에 해당한다”(마 26:66)고 선포를 한 것입니다.

종교재판은 사형을 언도할 수는 있으나, 집행권이 행정관서에 있기 때문에, 빌라도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다시 오전 중에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상정하게 된 것입니다(23:1).

 

제 55 과 일반재판을 받으심 (눅 23:1-25) 목록으로


본문의 전체적 제목은 “예수님이 일반재판을 받으심”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마 27:1-2, 11-30, 막 15:1-15, 요 18:28-19:16에 기록되었고, 요한의 기록이 가장 길고 더 자세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신 과정”에 대하여 필자가 쓴 『7분설교 3집』 13과에서 순서대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본문을 분류하면, ① 1-5절은 “빌라도의 1차 심문”이고, ② 6-12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헤롯의 심문”이며, ③ 13-25절은 “빌라도의 2차 심문과 언도”로 되어 있습니다.

1. 빌라도의 1차 심문(1-5절)

1) 종교재판이 끝나자 즉시 예수님을 빌라도(유다 총독, 최고 행정관)에게로 끌고 갔습니다(1절). 끌고 가서, 2절에 보시면, “고소하여 가로되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며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고 세 가지 죄목을 고소한 것입니다. “백성을 미혹한 것”은 종교적으로 “복음을 믿으라” 한 것이고, “가이사에게 세를 내지 말라”는 것은 무고에 해당하며(마 17:24-27, 22:17-22),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한 것은 사실과 같은 것입니다. 3절에서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 한 사실을 확답 받았지만, 이는 국가적 왕이 아닌 종교적 의미의 왕(그리스도)이란 뜻으로 이해하였으므로, 4절에서 “죄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 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더욱 굳세게 말하여 “저가 온 유대와… 갈릴리에서부터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한다”(5절) 하므로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2. 헤롯의 심문(6-12절)

1) 이 부분은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같은 목요일 새벽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게 되자 마침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중에 있었으므로(7절) 그의 관할권을 침해하지 않는 뜻으로 헤롯왕에게로 보내게 되었습니다(7절).

2) 8절에서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적 행하는 것을 보고자 하였는데, 마침 “빌라도의 관할권 배려로 예수님을 보게 되어 심히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9절에서 헤롯이 예수님께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았고(묵비권을 행사하신 뜻) 고소자들은 힘써 고소하였으며(10절),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자 헤롯과 군병들은 업신여기고 희롱하다가 빛난 옷(홍포는 조롱할 때만 입혔음, 마 27:28, 따라서 빛난 옷은 본래 입으신 흰 옷임)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냈습니다(11절).

3) 이는 헤롯이 재판을 포기한 뜻이요, 빌라도에게 전권을 맡긴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이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12절)고 하였습니다. 전에는 서로의 자존심과 관할권 문제로 알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3. 빌라도의 2차 심문과 언도(13-25절)

1)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의 법정으로 오시게 되었고, 빌라도는 13-16절에서 제사장들과 관원(공회원)들과 백성들(제사장들과 함께 고소한 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죽일 죄가 없다” 하고, “때려서 놓겠다”고만 하였습니다(16, 22절).

2) 14-16절에서 빌라도는 말하기를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끌어왔지만 사실(심문)하여 보았으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죄를 찾지 못하였고, 또 헤롯도 저를 (정죄 없이) 도로 보내왔은즉 죽일 일이 없다. 그러므로 때려 놓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정죄 없이 때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때리려 한 것은 무법한 재판관으로서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때리려고 한 것입니다.

3) 그러나 무리들은 18-19절에서 명절에 죄수를 한 사람 사면하는 관례를 들어(마 27:15, 막 15:6) “예수님을 없이 하고 민란과 살인죄로 옥에 갇힌 바라바(유명한 죄수, 마 27:16)를 놓아 달라”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니, 20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였으나 고소자(저희)들은 역시 소리를 지르며 “두 번이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한즉, 22절에서 빌라도는 세 번째 말하기를 “이 사람이 무슨 악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때려 놓으리라” 하였지만, 23절에서 “저희가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기를 재촉하매 결국 저희의 소리(외침과 선동)가 이겼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빌라도가 고소자들의 선동을 설득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따라 주었다”는 뜻입니다.

4) 그리하여 24절에서 저희의 구하는 대로(십자가에 못 박도록) 언도하고,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바라바는 놓아준 후, 예수님을 뜻대로 하도록 무리들(집행하는 병정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인정하였고, 죽이지 않으려고 여러 차례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평안한 정치를 하기 위하여 무죄자를 죽음에 내어주고 유죄자를 놓아준 것은 공의롭지 못한 처사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이나 무법하게 재판하는 자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예언대로 돌아가실 수 없었겠지요. 따라서 의인을 학대한 자는 벌을 받을지언정, 사건이 그렇게 되도록 역사를 섭리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마 20:18-19, 26:53-56). 이때가 목요일 정오였습니다(요 19:14, 유월절 예비일 6시). 예수님이 유월절인 금요일에 돌아가셨으므로 재판을 받으신 후 하룻밤을 옥에서 보내셨습니다.

 

제 56 과 돌아가심과 관계된 일들 (눅 23:26-56) 목록으로


본문을 읽어보시면 다섯 가지 대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26-32절은 “십자가를 지고 가심”이요, ② 33-38절은 “못 박히실 때의 일”이며, ③ 39-43절은 “행악자를 구원하심”이요, ④ 44-49절은 “징조와 운명하심”이며, ⑤ 50-56절은 “장사 지낸 일”입니다. 이 다섯 대지를 종합하여 “돌아가심과 관계된 일들”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십자가를 지고 가심(26-32절)

1) 26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한 사실”이 있으니, 이 내용은 필자가 쓴 마 27:31-33의 강론과 막 15:20-22, 요 19:16-17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2) 27-32절의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27절)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을 향한 동정의 눈물이 “예수님과 자신들의 고통을 덜 수 없다”는 뜻이며, “자신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할 이유”는 장차 있을 환난(예루살렘 멸망)을 대비하여 회개하는 눈물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29절에서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은 환난 시에 자녀(어린이) 없는 사람이 복될 것을 예고하심이요, 30절에서 “그때에 사람이 산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덮으라 하리라” 하심은 그만큼 재난이 무섭고, 피할 방책이 없음에 대한 탄식입니다.

4) 31절에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셨으니,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비유하고 마른 나무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무리들을 비유하여 그들과 그 후손들이 받을 형벌이 큰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2절에서는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갔다”고 하였습니다.

2. 못 박히실 때의 일(33-38절)

1) 이 부분의 말씀은 마 27:35-38, 막 15:25-28, 요 19:18-2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마다 표현의 차이가 있는 만큼, 다 한 번씩 읽어보심이 좋을 것입니다. 33절의 “해골이란 곳에 이르러 예수님을 중앙에 못 박고 다른 두 행악자를 좌우에 못 박았다”고 하였습니다. 해골의 원문은 “골고다”입니다(마 27:33). 이 장소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골고다 산을 갈보리 산이라고도 하는데(찬송가 135장), 그 근거는 KJV 번역서에 ‘Calvory’로 나타난 때문이고, 이 말은 아람어 “굴갈타”(해골의 뜻)의 헬라어 음역이라고 합니다.

2) 34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어 달려진 상태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십자가상의 7언 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눅 23:43, 요 19:26, 마 27:46, 요 19:28, 30, 눅 23:46).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악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한 것인데, 이 기도는 중보자의 입장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다른 죄인들에 대한 사랑의 모범으로 여겨지며, 또 “알지 못하여 짓는 잘못”도 죄가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33-39절까지의 “예수님의 의복을 제비 뽑은 사실과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한 사실” 등의 설명은 마 27:35-38의 강론을 참고하십시오(막 15:25-28, 요 19:18-24).

3. 행악자를 구원하심(39-43절)

1) 39절에서 “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41절에서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죄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절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즉, 43절에서 예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의 기사는 누가의 고유 기록입니다.

2) 이 사실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의인과 악인의 죽음이 같을 수 있고(예수님은 죄 없는 의인이시고 성도는 죄사함 받은 의인임), 죽음의 순간에도 응보원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은 고난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구원사역을 하셨다는 사실과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즉시 낙원(천국)으로 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4. 징조와 운명하심(44-49절)

1) 44-45절에서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휘장이 한 가운데 찢어진 일”은 마 27:51-53(막 15:38)에서 설명하였고, 46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이며, 가상 칠언 마지막 말씀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처럼 모든 성도들도 세상을 떠날 때는 용서의 기도와 아울러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인생에게 정한 이치라고 하셨습니다(히 9:27).

2) 47-49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현장에 있었던 자들의 반응인 바,

① 백부장은 그 된 일(징조와 운명)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였으니,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주도하였으나 나중에 복음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되며,

②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고 예수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서 이 일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인지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5. 장사 지낸 일(50-56절)

1) 50-53절은 마 27:57-61에서 강론하였고, 막 15:42-47과 요 19:31-42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다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은 성도가 옳고 그른 것을 결의할 때 분명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의로운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2) 54-56절은 누가의 고유 기록으로 “이날(금요일)은 예비일이요 안식일(금요일 저녁 해 진 시각부터)이 거의 되었다” 하였고, “갈릴리에서 함께 온 여자들은 요셉이 장사 지내는 장소를 따라가서 무덤과 시신 둔 것을 확인한 후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시체에 바르기 위한 것)를 예비하였으며,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는 쉬더라”고 하였습니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쉰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 즉(롬 10:4), 그 후부터는 안식일 계명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제 57 과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눅 24:1-35) 목록으로


이 본문의 ① 1-12절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일”이요, ② 13-35절은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입니다. 대표 제목을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일(1-12절)

1) 1절의 안식 후 첫날 새벽은 주일이었고, “여자들”은 10절에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함께 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기사를 마 28:1-7에서 강론하였고, 막 16:1-5, 요 20:1에도 기록되었습니다.

2)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무덤 돌은 옮겨져 있었고, 시체는 보이지 않았는데(2절), 문득 찬란한 옷(형상이 번개 같음; 마 28:3, 흰 옷 입은 한 청년; 막 16:5, 흰 옷 입은 두 천사; 요 20:12)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여인들은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3-5절). 여기의 천사가 나타난 기사가 다른 것은 나타날 당시에 본 대로 전달하고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부활을 말씀하신 것, 마 17:22-23)를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사실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한 것입니다(5-7절).

4)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고(8절),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사도들과 다른 이들에게도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돌아오는 중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막 16:9), 이어서 다른 여인들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28:8-9).

2.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13-35절)

1) 11절에서 부활의 주님을 본 여인들이 즉시 사도들에게로 와서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그 말을 “허탄히 여기고 믿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불신앙이란 이만큼 끈질기고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들여다보고 세마포만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12절). 이때 시몬(베드로)만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뒤따라 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요 20:8). 부활하신 첫날에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이 본문 34절과 고전 15:5에 기록되었으나, 그 정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설교가 필자의 『절기설교집』 4부에 편집되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관련된 설교는 43과를 참고하십쇼. 15절의 “그날”은 주일 오후이고(29절), “저희 중 두 사람”은 제자들 중 글로바와(18절) 익명 1인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0시 방향 25리 지점의 촌이요, 그들은 그날 된 일, 즉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14절), 그때에 예수님이 가까이 이르러 동행하시나 “눈이 가리워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15-16절). 막 16:12-13에서는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하셨고, 요 21:4에서도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셨으나 알지 못 하더라” 하셨으니, 부활체는 신비하여 육체의 눈으로는 분별할 수 없음이 사실이고, 또 믿음의 눈(마음의 확신)으로 보지 않을 때 가리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설령 마가의 기록대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주시할 때는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불신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실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3) 17절에서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주고받은 이야기를 물으셨고,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으며, “글로바”가 근일 예루살렘에서 있은 일을 말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을 말한 것입니다(18-24절). “그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인데 우리(유대이란 뜻)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24절까지 사실대로 말을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들의 미련함과 더디 믿음”을 책망하셨고(25절),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셔야 함이 당연함을 말씀하시고(26절), 또 모세와 선지자의 글(구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메시야 예언)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을 가르쳐서 믿음을 지도하는 사역자들이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본받아야 할 내용입니다(27절).

4) 엠마오에 가까이 이르러 예수님은 더 가려 하실 때 저들은 날이 저물어가므로 강권하여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를 사모하고 존경한 태도요, 예수님도 함께 유하러 객관으로 들어가셨고(28-29절), 그곳에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셨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30-31절). 제자들은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았고, 예수님은 축사(떡을 가지사 축사하심은 성찬식과 같은 의미인듯 함)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32절).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보이시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부활체가 신비함을 알려주시는 동시에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신 목적을 다하셨기 때문에 감추신 것입니다.

5) 32절에서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웠다” 하였으니, 오늘의 성도님들도 성경을 연구하면서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셔야 할 것이요, 두 제자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사도와 함께 한 자들을 만났고,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과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33-34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도가 성경을 사랑하고 말씀을 깨달을 때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요 1:1, 마 28:20).

 

제 58 과 축복과 승천 (눅 24:36-53)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예수님의 축복과 승천”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축복은 평강과 확신을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또 성령을 약속하신 일 등입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36-43절은 “모임에 나타나셔서 평강과 확신을 주심”이요, ② 44-48절은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증인 되라” 하심이요, ③ 49-53절은 “성령님의 약속과 승천”입니다.

1. 모임에 나타나셔서 평강과 확신을 주심(36-43절)

1) 36절의 “이 말을 할 때”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와서 부활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중, 그때에 예수님이 가운데 서셔서 평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 임하신 때는 당일 저녁입니다. 따라서 요 20:26의 도마에게 확신을 주실 때의 나타나신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일은 요 20:19과 26절과 21:14(세 번째)을 들 수 있는데, 이 기회는 첫 번에 해당합니다(눅 24:33-36).

2) 37절에서 “제자들은 놀라고 영으로 생각하였다” 하셨고, 38절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하셨으며, 38절에서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하셨으니, 이 사실은 도마가 없을 때 일깨우신 일이며, 여기에서 부활의 확신과 부활체가 영만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셨습니다(37절에서 영으로 오해 함).

3) 41절에서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시고 그 앞에서 잡수셨다”고 하였습니다(41-42절). “너무 기쁜 것”은 감정이 격한 것이요, 감정이 격하면 의지의 판단력이 흐려져서 오히려 믿지 못하는 부정적 태도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막 16:8-11과 요 20:15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나 기쁨과 두려움이 있어도 감정을 조정하여 침착한 태도를 취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증인 되라” 하심(44-48절)

1) 44절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신 후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모세 오경) 선지자의 글(예언서)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씀이 이것이라” 하시므로 구약성경에 “메시야 사역을 예언하신 바가 있음”(필자가 출판한 『기독교신앙백과』 p. 256-259를 참고하십쇼)을 말씀하셨고,

2) 45절에서는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으니”, 이 부분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여시고(45절), 눈을 밝히시며(31절), 청종하게 하시고(행 16:14), 계시의 정신을 주시며(엡 1:17), 마음 눈을 밝히실 때(엡 1:18), 성경(진리 또는 예수님)을 밝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거듭난 성도가(요 3:3) 구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주십니다(마 7:7, 대하 16:9).

3) 46-48절에서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확인하셔야 할 것은 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구약에 기록되었다는 점과(고난은 사 53:1-13에, 부활은 시 49:9과 욘 2:17, 3:10 등), ②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 얻게 하는 회개”의 뜻도 구약성경에 있다는 점과(메시야를 예표하는 대제사장, 희생을 예표하는 제물,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 겔 18:21-24, 신 30:19-20 등), ③ 이 진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사 66:10-11, 겔 47:1-12)도 있다는 사실과, ④ 증인되는 사명을 모든 성도에게 주셨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행 1:8, 마 28:20).

3. 성령님의 약속과 승천입니다(49-53절).

1) 49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님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하셨음, 요 14:26, 15:26)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신 것은 구약의 욜 2:28-29의 예언이, 신약의 행 1:4-5과 2:1-47의 말씀에서 입증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그리고 50-53절에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①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감람산입니다(행 1:12). 감람산은 도성 동북쪽 500m 지점이고, 베다니는 도서의 동쪽 600m 지점쯤 된즉, 이 산이 베다니 지역을 통과하므로 베다니 앞까지 나가신 것이고,

②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다는 말씀은 누가의 고유 기록이며,

③ “하늘로 올리우시니”와 “그에게 경배하였다”는 말씀이 [ ]안에 기록된 것은 그 구절이 없는 사본도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초자연적 상태로 축복하시고 승천하셨으니, 이 사실을 보고 믿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 것입니다(52-53절).

부활을 믿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승리와 부활은 곧 우리에게 주신 승리요 부활이 아닙니까? 마땅히 저희들도 큰 기쁨과 만족과 소망을 갖고 승리의 삶을 살면서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