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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목 차 3


제1과 유다서의 개론 (유 1:1~2) 4 바로가기

제2과 유다서를 쓰신 동기 (유 1:3~4) 7 바로가기

제3과 범죄자에 대한 형벌의 실례 (유 1:5~7) 10 바로가기

제4과 거짓 스승들의 죄악 (유 1:8~10) 13 바로가기

제5과 거짓 스승들의 범죄의 성격 (유 1:11) 16 바로가기

제6과 거짓 스승들에 대한 비유 (유 1:12~13) 20 바로가기

제7과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심 (유 1:14~16) 22 바로가기

제8과 부탁과 결론 (유 1:17~25) 25 바로가기

 

 

제 1 과 유다서의 서론 (유 1:1-2)목록으로


먼저 유다서의 개론을 공부하시려면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 259번 “유다서 개론”을 참고하십시오.

“유다서”란 유다가 기록하여 보낸 서신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서’(書)자는 ‘글 서, 책 서, 편지 서’란 뜻으로, 여기서는 편지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받은 사역자들이 그 말씀을 글로 써서 편지의 형식으로 보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와 같은 편지의 말씀이 21권입니다. 바울이 쓰신 것 13권과, 사도 요한이 쓰신 것 3권과 베드로 전후서 2권과 야고보서 1권과 히브리서와 유다서가 있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은 3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보낸 자(1절 전반)와,

② 받아야 할 자들과(1절 후반),

③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3절과 함께 유다서의 서론 또는 “인사와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서신을 보낼 때는 이상과 같은 문투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일 것입니다.

1. 이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구입니까 ?

1절 앞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하셨습니다.

1) 신약 성경에서 ‘유다’란 이름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①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있었으며(마13:55),

② 사도 시대에 사역한 ‘바사바’라고도 하는 ‘유다’가 있었고(행15:22),

③ 그 외에도 본문 저자와 관계없는 다른 ‘유다’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행9:11,눅3:30).

어떤 책에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중에(마10:3,막3:18) 다대오가 ‘유다’라고 기록된 곳도 있지만(오인명 저,인명지명사전),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2) 따라서 예수님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는 곧 예수님의 동생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가 있었으니까(마10:3) 무조건 다대오는 ‘유다’란 별명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여 사도인 ‘유다’(요14:22)를 지적하지만, 야고보를 형제로 가진 다대오는 ‘유다’란 근거가 없고, 야고보의 아들인 사도 유다는 야고보를 형제로 가졌다는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② 따라서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야고보, 요셉, 시몬의 형제가 있고(마13:55,막6:3), 예수님의 동생 중 야고보가 유명한 제자였음을 감안할 때(행12:17,15:13,21:18,갈1:19,2:9,12), 그의 동생 ‘유다’도 예수님을 따랐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본문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하고 ‘사도’란 명칭을 붙이지 않은 것을 보면 ‘사도 유다’는 아니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또 17절에서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하시므로 사도들의 교훈을 부각시킨 것을 보면 저자 자신이 사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그의 형 야고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적극성 있는 예수님의 제자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3) 이 유다서를 쓰신 시기는 유다서의 내용과 그때의 형편을 대조해 봄으로써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의 내용은 “이단과 거짓을 일삼는 불경건한 생활을 경계하신 것”이므로, 베드로 후서 2장의 말씀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후서와 비슷한 시기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는 주후 66년 경에 쓰셨고, 유다서는 그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4) 본문을 설명드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란 자기의 신분을 밝힌 것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인정을 초월한 신령한 은혜와 사명의 관계에서 자기를 밝힌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이 형님이시지만, 공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는 자신이 종이요, 노예란 사실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요,

② “야고보의 형제”란 자기의 형님인 ‘야고보’가 그 당시에 유력하게 활약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대 사도였지만(마4:20) 그는 일찍 순교하였고(행12:1-2), 그 다음에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는(마10:3,막15:40)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말씀한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장(행15:13)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였으며(갈2:9), 또 야고보서도 기록하였습니다. 이 ‘야고보’는 전설에 의하면 주후 69년 경에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다가 왜 자기를 ‘예수님의 동생’이라 하지 않고 ‘야고보의 형제’라고 하였을까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인간적 관계로 호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리아에게 ‘어머니’라고 호칭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쌍둥이라도 먼저 나온 아이에게 형의 특권을 주지만, 유대인들은 출생의 전후보다 각자의 인격과 실력에 따라 존경하기 때문에 ‘형제’란 용어를 많이 쓴다고 합니다.

2. 이 편지를 받아야 할 자들에 대하여(1절 후반).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은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1) 부르심 입은 자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는 성도 뿐입니다. 왜 성도라 하시지 않고, 이상의 세 가지 수식어를 쓰셨을까요 ?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효력을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초청하신 유효적 소명(召命)입니다. 롬8:30을 보시면, “하나님은 택한 자를 부르신다” 하셨고, 롬10:14에서는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부름이란 특별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인 만큼 초청의 의미가 있으며,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입학 시험이나 취직 시험을 쳤는데 나중에 부르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할까요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은 인류 중에 적은 부분만을 선택하여 불러 주신 중에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꿈같은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힘입은 자들입니다. 사랑이라 하여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얻은 사랑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적이요 천래적(天來的)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문상 더 합당한 번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을 얻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받은 사랑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받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선택적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하신 구속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아가페’(ἀγάπε)의 사랑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은총에 감격하지 못하는 성도는 믿음을 더 키워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더 잘 번역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키심을 입은 자”라고 함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사랑을 힘입힌 자들이니 만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영적 생명을 수호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6:39에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1편에서 “하나님은 성도를 지켜주시되 영혼과 육신과 생활과 현재와 미래를 지키신다” 하셨고, 신32:10에서는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하심과 지키심을 받는 백성임을 꼭 명심하셔서 늘 감사와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3.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2).

‘유다’는 이 말씀을 받는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1) 이 말씀은 축복의 선포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축복권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유다도 예수님의 종이란 신분으로 시행한 것입니다(마10:12,엡6:24).

2) 긍휼은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겨 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며 느끼는 영적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뜻하고, 사랑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넓고 높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저희들이 이 말씀을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자신들에게도 임하여 주실 것입니다.

 

 

제 2 과 유다서를 쓰신 동기 (유 1:3-4)목록으로


이 말씀은 저자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하려 하였는데, 거기에 앞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단체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적 신분을 숨긴 상태에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훼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①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관한 내용과,

②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문제와,

③ 가만히 들어온 이단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무엇입니까(3) ?

1) 일반적으로 얻은 구원은 보편적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 또는 모든 성도가 다 차별없이 받게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차별없이 받는 구원일까요 ?

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은혜,

②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

③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

④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는 다 일반적으로 받게되는 은혜입니다.

2) 그러면 일반적으로 받지 않는 은혜도 있어야 하겠지요. 특수한 은혜, 특별하게 주시는 은혜가 있으니, 이것은 은사에 관한 것과, 하늘에서 받을 상급에 관한 것들입니다. 은사와 상급은 다 같은 분량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고전12:11) 각종 은사와 능력과 직분과 축복의 종류가 다 같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은혜의 관점에서 유다는 일반적으로 받는 구원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2.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문제입니다(3).

1)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완성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완성된 성경 66권을 갖고 있으니까 큰 문제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신약 27권이 구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권위있게 말씀한(즉, 정경이 되어야 하는 말씀) 표준 계시만을 든든히 붙잡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17절에 보시면, 그 표준 계시는 바로 “사도들이 미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사도적 사역자들)이 말씀한 표준 계시는 단 한 번에 주신 계시로 영원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에 단회적으로 계시를 주시고는 끝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단번’이란 의미의 ‘하팍스’(ἅπαξ)란 단어가 “한 번 주어 끝내고, 영원한 효력을 내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느낌이나 체험을 하나님으로부터 별도의 계시로 받은 것처럼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계시관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계시를 받는다면 질서가 없어지겠지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실 표준 계시를 다 주시고 끝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체험한 계시가 사실대로 맞아도 그것을 상시 주시는 계시처럼 믿거나 기대하시면 안됩니다. 만일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가감하는 죄가 되고 또 이미 주신 성경 계시의 권위를 무시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운다”는 뜻은 바로 성경 66권의 내용과 권위에 대하여 보존하고 간직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사람이 “권위가 있다” 하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믿느냐 안믿느냐에 따라 성경 권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계시를 주시던 시대에 한하여 단번에 주셨고(히1:1), 그 권위가 영원하기 때문에 변동하거나 보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은 임의로 예언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였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갈1:8에 보시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것은 성경을 내용상으로, 권위상으로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3. 가만히 들어온 이단자들의 부분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4).

1) 거짓된 자들은 가만히 들어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추천서를 갖고 와서 자기의 과거에 다니던 교회와 믿음 생활의 성분을 말하지만, 불순한 자들은 자신의 신앙의 성분이나 과거의 진실을 숨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진실에 위배되면 누구나 의심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때로는 천사처럼 선하게 가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고후11:14). 4절에 “몇 사람”이란 뜻이 적은 수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독초와 같고 누룩과 같아서 죽게도 하고, 많이 퍼지게도 하여 교회의 순수함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기록된 자라” 하셨으니, 이는 마7:15이나 벧후2:1 등에 기록된 심판의 경고가 바로 그들을 대상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3) 그들은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태도입니다. 이단자들은 그 말의 뜻과 같이 처음과 끝이 다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태도가 미흡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 하였으니,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구원의 도리를 구실 삼아서 행실의 경건성을 무시하고 방탕 생활을 일삼은 행동입니다. 이것을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라고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니까 행위는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하니, 구원의 원리는 같으나 그것으로 경건을 피하는 구실을 삼아 율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색욕(色慾)으로 바꾸는 악한 태도인 것입니다. 성도는 신령한 은혜를 귀한줄로 여겨야 하며, 이로 인하여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이 싫어져야 할 것입니다.

5) 유일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홀로 하나이신 주재 예수 그리스도라” 하셨으니, 예수님만 우리의 구속 사업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예수님 혼자 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하셨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 어떤 이단자들은 “예수가 구속 사업을 하다가 십자가에 죽는 바람에 실패했고, 다른 구세주가 와서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의 승천일을 지키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도와준 분으로 그 분이 무덤에 계실 수 없어서 부활하고 승천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구속 사업 동참을 참배하는 천주교인들이 있으니 우리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였더니, 성경 66권이 아닌 다른 전통적 전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과 유전 숭상은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마15:6).

이상의 말씀에서,

①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으로 받는 구원과 특수 은사가 있다는 사실,

②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성경 66권 뿐이요, 더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

③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하여 표준 계시를 사수해야 함과,

④ 가만히 들어온 이단자들은 경건치 못함과 세속의 영달에 취함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자들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3 과 범죄자에 대한 형벌과 실례 (유 1:5-7)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다시 생각나게 하신다” 하시고, 5절에서 “선민의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 6절에서 “천사의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 7절에서 “이방인들의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범사를 알았음과 다시 생각나게 하심에 대하여(5).

1) 여기의 “범사를 알았음”은 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알고 있다는 뜻이며, 또 3절에 나타난 말씀대로 “일반적으로 얻은 구원”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며, 또 ‘본래’란 원문 ‘하팍스’(ἅπαξ)는 ‘한 번만’이란 뜻이며, ‘범사’란 말은 ‘복음의 요점’ 또는 ‘구속의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 번만 알았던 복음의 요점”은 하나님이 계시를 단번에 알리셨고 또 단번에 알리신 것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깨달았던 것을 다시 실감나게 하므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변동하거나 새로운 것을 첨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잘 알면 항상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구원받으며,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범사를 알아도 그 진리를 마음 판에 새겨야 하며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그때 기억되는 말씀이 자신의 생활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도리는 확신을 가져야 하며, 생활의 규례는 지켜야 하고 또 인류가 벌받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므로 거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2. 인류의 벌받는 역사에 대하여(5-7).

하나님은 선민이나 천사나 이방인들을 다 벌하시고 멸하시는 분입니다.

1) 선민을 벌하심에 대하여.

5절에 보시면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사랑을 받은 자라 하여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선민 백성이 되었다 하여 역시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고, 사랑을 받은 선민이라도 죄를 범하면 형벌을 받으며, 또 믿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선택하여 특별한 통치를 하셨습니다. 그 중에 출애굽 사건이 그 실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가나안 땅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 실현의 방법으로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며, 또 그 선민들에게 영적 구원의 축복을 우선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전체의 생명에게 하신 것은 아니요 만세 전에 택하신 자에 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이 출애굽의 은혜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섭리와 능력과 사랑을 믿고 의지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방적 종교와 우상을 숭상하기까지 하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멸하셨다”는 뜻은 구원의 소망없이 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땅이 갈라져서 죽었고(민16:32), 염병에도 죽었으며(민 16:46,25:9), 전쟁에도 죽고, 다른 방법으로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여호수아나 갈렙만 천국에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멸망당하지 않고 죽은 선민 중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다수가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고전10:5). 롬9:6에 보시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가 영적 구원의 선민이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선민은 사랑과 특별 통치의 대상을 의미하며, 그들을 선민국으로 통치하신 것은 성도에 대한 특별 사랑을 나타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중에 선민의 죄에 대하여서도 징벌하셨거든 하물며 악인들이겠습니까 ? 하나님은 천사와 이방인들도 벌하시는 분입니다.

2) 천사를 벌하심에 대하여(6).

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천사들도 잘못하면 벌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6절에 보시면, “천사들이라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났을 때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 큰 날의 심판까지 이르게 하셨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천사라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나면 벌을 받았습니다.

천사의 죄는 두 가지로, 하나는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처소를 떠난 것입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인격과 지혜와 능력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있었습니다. 천사가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것은 본분을 떠난 것이고, 또 처소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사명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들도 지위가 있고 처소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상태요, 인격적 존재 즉, 거룩한 성도의 본분을 의미하고, 처소란 인간의 사명, 성도의 사명, 각종 책임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지위와 처소를 떠난 사실을 타락이라고 보아야 하며,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도 반성할 점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답고 성도답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② 범죄한 천사를 어떻게 벌하셨습니까 ?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하셨습니다. “큰 날의 심판”은 최종 심판 때까지를 뜻하고, “영원한 결박”은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을 통제하여 하나님의 섭리적 허락의 한도에서만 활동하게 하셨음이요, “흑암에 가두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서 죄악이 용납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악이 용납되는 현실 세계는 타락한 천사들의 감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칼빈 선생님은 해석하기를 “천사가 하늘에서 쫓겨난 비참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인즉 그가 갇힌 장소가 어디인지를 상상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벌받고 쫓겨난 타락한 천사가 곧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겔28:15-17,사14:12-14,유6,눅10:18). 하나님은 세 천사장으로 미가엘과 가브리엘과 루시펠을 창조하셨는데, 그 중에 ‘루시펠’이 타락하여 어두움의 세계로 쫓겨나므로 이 놈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려는 유혹의 주관자 즉, 마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이방인들의 범죄와 형벌입니다(7).

① “소돔,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은 아브라함 때에 죄의 관영으로 심판을 받은 도시들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소돔,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때에 소돔과 고모라는 그 이웃 도시들의 대표 도시였고, 이 도시들과 함께 멸망된 다른 이웃 도시들도 있었는데 그 도성들이 곧 “아드마”, “스보임”(창10:19,신29:23)입니다.

② 그들의 죄악은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고 또 다른 색을 따라간 것입니다. 여기의 “저희와 같은 모양”이란, 4절의 가만히 들어온 자, 거짓 선지자를 지칭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저희”를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6)라고 하지만, 저희란 대명사가 ‘투토이스’(τούτοις;이들)이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를 의미하며, 여기에서 천사의 음행을 창6:1에 근거하려 하지만 천사가 사람과 간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간음과 다른 색을 따랐음”은 순리적으로 성생활을 하지 않고 비윤리적으로 추한 행동을 하며, 그것을 일삼아 행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롬1:26-27). 음행의 추악한 행동은 성도들에게 금지되었습니다(레18:22-25). 창19:5,14에서 음행의 흉악한 행위를 하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돔의 죄악을 “야만”이라 하였고(사1:10,3:9), 에스겔 선지자는 “교만과 욕심”이라고 하였습니다(겔16:49).

③ 그들이 받은 벌은 영원한 불의 형벌입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져 온 도성을 뒤엎고 결국 소금 땅이 된 것입니다. 역사적 증언자들은 현재의 사해 바다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도성이 멸망된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돔의 심판은 영원한 지옥의 상징적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계19:20,20:10).

이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의 범죄의 특징을 살피면, 거짓 선지자들은 배교의 죄악이요, 천사들은 불충의 죄악이며, 이방인들은 불신앙과 부도덕의 죄악임을 알 수 있고, 그들은 다같은 성질의 영원한 심판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④ 결론적으로 이 사실들이 “거울이 되었다” 하심은 자신들의 형편을 그것들과 대조해 보고, 결코 그같은 망령된 죄에 빠지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4 과 거짓 스승들의 죄악 (유 1:8-10)목록으로


위의 말씀은 “거짓 스승들의 죄악”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11절에서는 “거짓 스승들의 죄악의 성질”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거짓 스승들의 죄악”을 세 가지로 지적하여,

① 꿈꾸는 사람들로,

②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로,

③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훼방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9-10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를 훼방하지 않음에 대한 실례와 육체를 더럽힘에 대한 인간의 근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1. 꿈으로 거짓 계시를 말하는 죄.

거짓 교사들은 꿈을 꾸어 미래의 계시를 받은 듯이 말하는데 이러한 허망한 자들을 경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주시는 참된 계시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계시를 주신 것처럼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으셨는데도, 거짓자들은 신비한 꿈을 꾸어 그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인 듯이 나타내어 자기들이 하나님께 붙잡힌 참 사역자인 것처럼 인정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제자들에게만 영감을 주셔서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 외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것이요, 또 표준 계시가 완성된 오늘날에는 더욱더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는 주시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엡3:5,히1:1,유3). 그러면 요즈음 저희들이 꾸는 꿈은 어떻게 취급해야 될까요 ? 여기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백과> 79번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성도가 꿈으로 좋은 느낌이 있을 때는 유쾌하게 여기시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꿈이 있을 때는 더욱 자기를 살피면서 회개하고 주의하는 기회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꿈으로 어떤 지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인정하지 마셔야 합니다. 욥7:14과 33:15에 “꿈으로 지시하신다” 하셨지만, 그 말씀은 표준 계시가 완성되기 전에 필요에 따라 주셨던 것입니다(히1:1,계22:18,19). 이방인들도 거짓된 주술(呪術)이나 계시를 받아 사람을 미혹하는 사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 본 글에 의하면, 이조 광해군 때에 송강 정철의 소실이, 송강이 죽은 후, 절에서 중으로 살고 있을 때 조정에서 송강의 제자인 권필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였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힘을 쓰는 ‘가희’라는 상궁이 그 일에 합세하던 중 불공차 절에 가서 송강의 소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강의 소실은 부군의 제자인 권필을 살리기 위하여 거짓 계시를 상궁에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가희라는 상궁이 갸륵한 일을 많이 하였으나 지금 문창성(文昌星;학자 권필을 비유한 말)을 떨구려 하니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치리라고 하셨다고 하자, 가희가 즉시 왕에게 말하여 권필을 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같은 시대에 ‘성지’라는 중은 “인왕산 밑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말을 하여 그 장소에 경덕궁을 짓게 하고, 왕의 조카인 능창군을 역적으로 몰아 강화의 교동섬으로 귀양을 보내어 죽게한 사실도 있었다고 합니다.

잘못된 계시로 역사를 뒤집는 일까지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가 성경이 아닌 다른 계시에 따른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역적과 같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색욕을 따라 육체를 더럽히는 죄에 대하여.

1) 8절에 “이 사람들은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힌다” 하셨는데, 여기 “그와 같이”란 말씀은 7절에 나타난 소돔, 고모라 백성의 “음란한 행위”를 염두에 둔 말씀이요,

2) “육체를 더럽힘”은 음행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 단체는 구원과 사랑과 현실적 향락을 선전하면서 결국은 음행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봅니다. 수년 전에 장로교 통합측 총회에서는,

① 교단이 인정하지 않는 기도원 출입,

② 비성서적인 예언과 방언, 안찰, 투시, 영서, 입신 등의 방법으로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

③ 이성을 데리고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하였고, 이 규정을 범하는 교역자를 노회가 시벌하게 하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남녀가 함께 기도처에 가는 일, 병고침을 구실로 몸을 안찰하는 일, 여성도로 하여금 부흥강사의 팔 다리를 주무르게 하는 일들은 음행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3) 고전6:19을 보시면 “육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요, 성령님의 전이며, 값으로 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이며 또 영광의 전이요 대속하여 받은 몸이므로 순결하게 보존하고,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음행은 “금수와 같은 본능으로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0절 하반에서 “저희는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짐승의 특성은 이성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체면도 없으며, 감사도 없습니다. 오직 몸의 정욕을 채우는 것만 그의 생활의 목적입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이란 범죄자들이 본능으로 발동하는 정욕만을 짐승처럼 채우려 하다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훼방함에 대하여(9-10).

1) 8절에서 “그들이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훼방하며, 자기의 주관적 행사만을 내세우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① ‘유다’가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반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은혜로 받았으니까 율법은 안지켜도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복음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것은 율법을 안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아는 자는 율법을 더 열심히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자들은 육체의 정욕을 임의로 누리기 위하여 성경의 바른 뜻과 권위를 무시하였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충성된 교사는 교훈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자신의 주관적 의사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는 성경보다 자신의 체험이나 주관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도 하나님의 권위를 훼방함이 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은 물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권을 침해하는 망령된 행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결코 심판하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자기가 하나님인 듯이 자처하는가 하면, 또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독차지하여 천사같은 존귀와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③ 그래서 “권위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실례로 들어 교훈하신 것이 천사장 미가엘의 태도인 것입니다. 천사장 루시펠은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다가 쫓겨나는 심판을 당하였고, 노아 당시의 인간들도 자기의 지위를 떠나 하나님처럼 높아져 보려고 바벨탑을 쌓은 것이 심판의 원인이 되었으며, 아담도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은 하나님 다음 가는 권세자요 능력있는 천사였지만 그가 마귀를 판결하는 권세를 쓰지 않고 하나님께 일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감추어졌습니다(신3:6). 만일 이런 위인의 무덤이 남아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우상으로 숭배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미가엘 천사를 통하여 그 시체와 무덤을 은폐하셨는데, 마귀가 그것을 나타내려 하니까 천사와 마귀의 대립이 생긴 모양입니다. 이때에 미가엘 천사가 마귀를 꾸짖고 싶었지만 마귀에 대한 심판권과 꾸짖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슥3:2) 자기가 감히 꾸짖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 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았는데, 거짓 스승들은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행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며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마귀를 심판하고 꾸짖을 권한이 없다는 것은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 영역을 침해하지 말라는 교훈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거짓 스승들이 마구 훼방하는 것은 그들에게 성령님의 감화가 없기 때문이요(19),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아들이 죽고, 가정에 큰 화가 미친다”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를 흉내내거나 남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계2:22,23). 거짓 예언, 왜곡된 설교, 음행성, 도덕적 부덕, 신적 권위의 훼방과 월권 등이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제 5 과 거짓 스승들의 범죄의 성격 (유 1:11)목록으로


이 말씀은 “거짓 스승들의 범죄 성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그 비유를 가인의 길과 발람의 행위와 고라의 패역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인의 길과 발람의 행위와 고라의 패역한 작당에 포함되어 있거나 동조하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런 행위를 엄중히 경계하고 피하겠지만, 거짓 스승들이나 외식자들은 그런 행위들을 일과 사명으로 알면서 거침없이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화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이 사람들이여” 하신 말씀에서 그런 수가 적지 않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떤 것이 가인의 길이며, 발람의 행위인가, 또 고라의 패역한 행위인가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가인의 길에 행한 자들.

창4:1-17에 보시면 가인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우에 처음으로 낳은 아들이요, 따라서 세 번째 출현한 인류의 한 사람입니다. 그후 또 그의 동생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을 하였는데, 가인이 농사를 짓는 일이나 아벨이 목축업을 하는 일은 직업상으로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표현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지은 소산물인 곡식으로,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비택자로서 외식적인 제사를 드린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은 형식보다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가인의 심정과 외식의 형편을 다 아셨을 것입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하였다”, “십자가를 의미하는 피의 제사가 아니었다”, “제물도 인색하게 드렸다”는 말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원시인들에게 제사법을 가르치시고 명하신 일이 있었는가에 대하여도 연구해 볼 문제입니다. 창2:17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선포하신 것과, 아담과 하와가 수치감을 느꼈을 때 양을 잡아 가죽 옷을 입혀 주시므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워 주신 행동 계시가 전부였습니다(창3:21). 이때 아담과 하와는 양이 죽어 희생되므로 자기들의 수치가 가리워졌고 하나님께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양의 희생과 제물은 속죄제의 예표가 된 것이고, 귀한 제물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아벨은 양의 제물이 속죄제를 예표한 제물임을 알고 믿음으로 드렸지만, 가인은 그런 믿음이 없었으므로 형식적인 경외와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위하여 드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형식적인 믿음 생활이나 현실적인 욕구에 대하여 이웃 형제들과 경쟁하고 더 나가서 욕구 충족이 안될 때는 가인처럼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행위가 바로 가인의 길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외식은 가장 악한 것이고 또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랑 아닌 행위가 곧 가인의 길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가인은 하나님의 문책을 받았을 때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사실을 숨기기도 하였으니(창4:9) 옳지 못한 예배와 외식과 시기와 미움과 폭력과 살인과 책임 회피와 거짓과 회개치 않는 완악이 있는 곳에는 가인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5:22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살인자요, 욕하는 자도 그 죄질이 지옥에 갈만큼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회개하는 자를 늘 용서하면서(막11:25,눅17:3,4), 서로 사랑할 것을 당부하셨고(요일4:11),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의 세계에 함께 하여 주시며(요일4:12), “화평케 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다”(마5:9) 하셨으니, 교회는 이렇게 순수한 사랑의 단체로서 또 이해와 협력의 단체로서 주님을 모신 가운데 애찬을 먹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감에 대하여(11).

이 말씀은 거짓 스승들의 행위가 곧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 발람의 기사는 구약 민22장-24에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그 말씀만 가지고는 발람의 죄악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도 발람의 죄악에 대한 기사가 있으므로 그 말씀들을 종합하여 범죄 사실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1) 발람은 메소보다미아의 ‘브돌’에 사는 이방 종교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어떻게 예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 한 모압 나라의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의탁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받도록 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자 범죄의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발람이 청탁과 뇌물에 끌려 발락 왕의 청탁을 시행하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저주하지는 못하였으나 결국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고, 또 우상의 제단에서 춤추는 여인들과 음행을 하도록 유혹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좋은 일만 하여야 할 선지자가 세상 임금의 청탁에 빠져 세속된 일에 이용을 당한 것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나라를 해롭게 할 것으로 의심하여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람 선지자의 저주의 신통력을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의 축복으로 강성해진 사실을 듣고 발람의 종교적 신통력을 이용하여 저주로 대항한 것입니다. 이때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축복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락의 청탁에 이끌려 노력하되 저주할 수 없는 대신 죄를 짓도록 올무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3) 뇌물(물질과 명예)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선지자였습니다. 신23:4에 보면 “발람이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다” 하였으니, 그는 분명히 물질에 이끌려 이방 왕의 청탁에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벧후2:15에서도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나귀로 책망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정경유착도 불쾌감을 주는데 하물며 성직자들이 정치가들과 세속된 일에 타협하여 종교적 도리를 이탈한다면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보다도 자기의 욕심에 끌려 행한 것입니다. 발람은 일차 행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하지 말 것을 지시받았으면 깨끗이 포기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또 행동하려 하였고, 이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발람의 자유 의사를 방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발람을 상대하셨고, 발람의 2차 청탁을 허락하신 것은 방임하신 것일 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아니었습니다(롬1:28). 결국 자기의 불법으로 간 것이요(벧후2:15), 이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기의 욕심에 끌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거짓 스승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것을 계시처럼 나타내는 사술(邪術)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민24:1에 보시면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함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였다” 하심에서 발람은 계시가 아닌 사술을 쓴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13:22에서도 발람을 술사(術士)라 하였고, 벧후2:15에서는 발람이 “미친 선지자와 같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셨다”고 하였습니다.

6) 백성을 죄짓게 하여 망하게 하는 선지자입니다 민13:16에서 “이스라엘이 발람의 꾀에 빠져 범죄하였다” 하셨고, 또 계2:14에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발람이 뇌물을 받고 그 값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하여야 하므로 결국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치실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올무에 걸려 우상 숭배와 음행을 저지르고, 24,000명이 죽는 화를 당한 것입니다(민25:9).

7) 거짓 선지자 발람은 증언과 행동이 같지 않았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 대신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축복 아닌 죄를 짓게한 것입니다. 말로는 진리를 증언하고, 행동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도 그렇게 하면 적다 일컬음을 받거든(마5:19) 하물며 거짓 선지자이겠습니까 ? 발람은 결국 전쟁에서 죽었고(민31:8), 그의 마지막 심판은 영원한 멸망만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10).

3. 고라의 패역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1) 민16장에 보시면 고라와 그의 반역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고라는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나온 모세의 종형(從兄)이었는데, 그는 명예심과 반역심과 작당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만 지도자로 세워 주신 것을 불평하다가 모세가 시내산으로 율법을 받으러 들어간 사이에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작당하여 모세를 반역하고 “모세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높이며 반역을 하였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징벌로 땅이 갈라져서 250명이 함께 죽는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2) 고라의 패역 사건은 거짓 선지자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①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는 지도자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모세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라가 모세를 반역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이요,

② 자기의 위치와 직무에 만족하지 않고 불평하는 사역자를 의미합니다. 민16:9에서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가 레위 자손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고, 회중을 대신하며,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은 것만도 큰 일이거든 그것을 작게 여기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받은바 은혜에 족한 줄을 모르고 지위 투쟁에 급급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무엇에 쓰시든지 감사로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평신도나 일반 성도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들에 대하여 경홀히 여기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면 안될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성직자의 권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직자의 권위는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신 점과 대언하는 자라는 점과 축복자라는 면에서 권위가 있음을 믿고 잘 순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고라당의 무리들이 모세를 반역한 것은 성속(聖俗)의 구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한 처사인 것입니다. 성(聖)이란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전체를 구별하여 섬기는 직책이요, 속(俗)이란 것은 세상에 관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직무입니다. 구약에 레위 지파나 제사장은 성(聖)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기업이 없이 성도의 십일조의 헌납으로 살면서 성전에 대한 봉사의 직무만 맡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사장과 성전 봉사에 수종드는 레위인의 직분과는 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령한 직분의 성별됨을 인정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하26:19에서 웃시야 왕은 제사장의 직분을 겁없이 월권하여 수행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직분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은 마치 고라당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⑤ 사람들을 선동하여 악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반역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악을 선동하는 단체를 작당하여 만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땅이 갈라져서 고라를 중심한 주모자 ‘다단’과 ‘아비람’이 그 가족들과 함께 땅이 갈라져 산채로 매장을 당하였고, 거기에 속한 250인도 함께 죽을 것을 겁내어 도망하다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250인이 모두 소멸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이틑날 다른 이스라엘 회중이 또 모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인 영도자들을 죽였다”고 원망을 하니, 하나님께서 또 다시 염병을 내려 14,700명을 한꺼번에 죽게 하는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민16:1-50). 이와 같은 성질의 범죄가 거짓 스승들에게서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가인의 행위, 발람의 망령된 일, 고라의 패역 같은 일을 주의하여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거짓 스승들에 대한 비유 (유 1:12-13)목록으로


위 본문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입장과 생활과 영향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1. “저희는 기탄없이 함께 먹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1) 신앙의 사상과 목표와 생활이 다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기탄없이 성도들과 동질인양 함께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간첩이 정당한 백성처럼 함께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수 없지만, 가라지가 자기의 설자리를 확보하고 자라는 것처럼 외식자들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2) 또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성찬에 참석하는 것을 예사로 안다는 것입니다. 거리낌과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는 것입니다.

2. “너희 애찬의 암초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너’는 교회의 단체를 하나로 묶어 단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애찬의 암초”란 거짓 스승들이 순수한 성도들의 애찬(성찬)에 분별없이 참여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깨끗함과 불결함을 구별하여 깨끗한 것을 따로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결한 외식자들이 함께 하는 것은 곧 거룩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서는 그런 자들을 엄격히 색출하여 쫓아낸 일도 있었습니다(계2:2).

3) 또 ‘애찬’이란 것은 순수한 신자들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거룩하게 갖는 연회입니다. 이런 연회가 초대 교회 당시에 자주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믿는 성도가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써 음식을 나누는 일이 있다면 애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애찬의 뜻은 필요에 따라 성찬 또는 성도의 순결한 애연의 두 가지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찬은 미리 준비하고, 회개한 마음을 갖고 참여함이 원칙입니다(고전11:27). 그러나 양심을 버린 자들은(딛1:19) 그런 것을(자신의 거리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연하게 법을 어기고도 담대히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4) ‘암초’란 ‘스피라스’(σπιλάς)로, 바다 속에 감취어진 바위입니다. 항해하는 배가 암초에 부딪히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의 순수한 신앙에도 이단의 바람이 불면 치명적인 상처로 자신과 교회를 위태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기의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1) 교회의 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교회의 유익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이익에만 급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생활 유지를 위한 직업의 일종으로 받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직자는 자기의 성직으로 인하여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을 줄지언정 피해는 주지 않도록 크게 조심하여야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깨닫지 못하는 “자기 몸만 기르는 이기주의자인 성직자”는 교회가 성직자를 위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교회가 피해를 입어도 도무지 양보나 희생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또 자기의 몸만 기르는 목자는 식도락(食道樂)에 빠져 항상 먹기를 좋아합니다. 교회가 어떤 어려움에 있든지 또 성도가 어떻게 어렵게 살든지, “잘 먹는 일”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겔34:3-4에서,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들을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4.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같다고 하셨습니다.

1) “바람에 불린다”는 것은 확실한 말씀의 기반 위에 굳게 서지 못하고, 교훈과 신앙과 행위가 정황에 따라 늘 요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과 유행에도 크게 민감하고 흔들릴 것입니다.

2) “물없는 구름”이란 가물 때에 비를 줄 듯이 구름이 몰려오기는 하나 농부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는 성경 진리의 핵심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도 역시 물없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5.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1) 가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인즉, 나무로서의 큰 목적이 상실되었고,

2) 뿌리까지 뽑혔은즉 미래의 희망도 가질 수 없으며,

3) 죽고 또 죽었으므로 다시 살릴 소망조차 없다는 뜻이므로 이는 거짓 스승들의 무용함과 손해됨과 희망이 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6.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바닷가의 거품을 뿜는 물결은 더러운 오물을 밀어 내기도 하고, 힘을 과시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이상을 넘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파도 소리가 크지만 땅을 넘치지 못하는 것처럼 거짓 스승들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진리와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7.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리하는 별들은 유성이나 혜성과 같이 일정한 궤도에 서지 못하고 향방없이 유리하므로 지구상에 일정한 빛과 좌표를 나타낼 수 없는 별들인즉 결국 우주의 영원한 흑암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별이 궤도에 떠 있으면 항해자들이 그것을 보고 시간과 방향을 측정하여 배를 적당히 운행할 수 있지만 궤도를 벗어나서 유리하는 별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므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단자들의 무익하고 표준성 없는 교훈과 태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거짓 스승이나 이단자들은 성도나 교회의 영적 유익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이 없으며, 바다에 감추인 암초처럼 교회를 뒤엎을 장애물이요, 자기의 몸만 기르는 이기주의자요, 물없는 구름이나 열매없는 가을 나무나 바다의 거친 물결이나 흑암에 유리하는 별들처럼 무슨 유익을 줄 것처럼 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 7 과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심 (유 1:14-16)목록으로


위의 말씀 14절은 “에녹의 예언을 소개하신 말씀”이요, 15절은 “에녹이 예언한 심판에 관한 말씀”이요, 16절은 “심판받을 자의 범죄 성격”을 말씀하셨습니다. 총제목은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심”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에녹의 예언을 소개하심에 대하여(14).

1) 에녹은 아담의 7세손이요, 그의 역사적 기록은 창5:22-24에 나타나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그의 예언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외경 외에 구약의 외경으로 “에녹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에녹서1:9에 본문에 말씀한 내용과 비슷한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그가 그의 수만의 천사들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리니 이는 뭇 사람들을 심판하사 경건치 않은 자들을 멸하시고 모든 육체를 정죄하시되 경건치 않은 죄인들이 그를 거스려 경건치 않게 행한 일들에 관하여 행하시리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2세기 경에 유대인들이 에녹서를 정경에서 제외시켰고, 3세기 말엽에 기독교회에서도 역시 제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서는 구전에 불과한 이야기 책이란 뜻입니다.

또 에녹서의 예언과 유다가 인용한 본문을 대조해 보면, “수만의 거룩한 자”를 “수만의 천사들”로, 거스림에 대한 내용을 “강퍅한 말”로 표현하였고, “정죄하심”을 “(심판을)행하시리라” 하였으니 의미상으로는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신야에서 구약을 인용했을 때에도 취지상의 내용으로 인용한 경우가 많습니다(행2:17-21,욜2:28-32).

2) 여기에서 이 인용한 내용이 확실하게 에녹서에서 인용한 것이라면 에녹서가 정경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서가 제외된 것을 보면 유다가 이 내용을 구전으로 받았든지, 아니면 계시의 영감으로 받아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에녹은 그 당시에 본문과 같은 내용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또 에녹은 노아의 증조 할아버지이므로 같은 시대인 노아 때에 심판받을 것을 예고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에 유다는 그 심판의 내용을 말세 심판의 내용으로 또 한 번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에녹이 예언한 심판에 관한 말씀에 대하여.

①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이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심판 보좌에 앉아 만유를 심판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고전6:2,계20:4). 성도는 예수님의 심판 보좌에 배석할 수 있고, 또 “임하셨다”는 과거형은 미래사의 확연성을 나나낸 것입니다(렘13:18,애5:16). 또 여기의 “수만”이란 많은 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히12:12,계1:7,5:11).

② “뭇 사람을 심판하시되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치 않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불경죄를 의미합니다. 이 불경죄를 방법상으로 표현할 때 “경건치 않게 행한 것”이 되고, 사건으로 표현할 때는 “경건치 않은 일”이 되며, 보편적으로 가장 많은 불경죄를 거론한다면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는 강퍅한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의 모든 죄에 대하여 자세히 아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건치 못하다”는 사실을 4번이나 역설하시므로 불경건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지적해 주셨고, 또 경건치 못한 사실은 행동과 사건과 언어와 강퍅한 마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경건치 못한 행동을 주의하셔야 하겠고 또 경건치 못한 일에 가담치 마셔야 하며 또 언사를 주의하여야 하고, 회개치 않는 강퍅도 역시 불경건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12:36-37에서는 “경건치 못한 말에 대하여 심판받을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3. 심판받을 자의 범죄 성격에 대하여(16).

1) “원망하는 자”라 하셨으니, 성도가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약5:9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원망은 자신이 받는 고난이나 손해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받을 때 “하나님이 그를 시켜 나를 저주하게 하심이라”(삼하16:5-10)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자기의 실수로 오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결코 누구도 원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고난은 연단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롬5:3-4).

2) “불만을 토하는자”라고 하셨습니다. 불만은 만족의 반대요,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뜻합니다. 시23:1에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매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지 않을 때는 자신의 욕구 불만을 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만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완벽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역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려 하다가 불만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족하는 신앙을 갖고, 교역자에게는 성경의 가르침만 받아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관계가 될 것입니다.

3)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소원을 무시하고 자기 소원대로만 하려는 욕심 행위입니다. 이런 인간 정욕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상황 윤리’(狀況倫理)란 신학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상황 윤리란 상황에 따라 유익하게 처신함이 옳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를 미워하면서 함께 사는 것은 죄악이니 이혼하여 사랑하는 자와 함께 사는 것이 정당하다”라고 한다든지, 또는 “정신 이상자나 불구자를 낳아서 민폐를 끼칠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하는 이론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욕구 충족이나 안일을 위주하는 것들이 곧 정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4)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라” 하셨고(롬3:27), “자랑할 때는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후10:17)고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자랑은 교만의 앞잡이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나타내는 일을 소극적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이를 위하여 아첨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첨’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비위를 맞춰 주며 알랑거리는 태도라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죄를 짓는 일이요 역시 심판받을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을 과장하거나 위장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덕을 힘입기 위하여 그 상대방의 잘못을 묵인하여도 역시 아첨이 될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의 사례가 외식자들에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들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성도들도 특별히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제 8 과 부탁과 결론 (유 1:17-25)목록으로


이 말씀의 17-23절에는 “성도에 대한 부탁의 말씀”이요, 24-25절은 결론의 말씀입니다. 성도에 대한 부탁의 말씀은,

① 사도들의 미리 말한 것을 기억할 것과(17),

② 경건치 않은 자들을 경계할 것과(18-19),

③ 거록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할 것과,

④ 성령으로 기도할 것과(20),

⑤ 자기를 지킬 것과,

⑥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릴 것과(21),

⑦ 믿음이 위태한 자를 인도하여 긍휼히 여길 것(22-23)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부분에서는 송영으로 말씀을 마쳤습니다(24-25).

1. 사도들의 미리 말한 것을 기억함에 대하여(17).

사랑하는 자 즉, 성도를 권면하시는 말씀에서 “사도들의 미리 말씀한 교훈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1) “여기의 사도들의 미리 말씀하신 것”은 유다서가 기록되기 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서신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베드로의 서신들을 의미합니다. 즉,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들입니다. 사도들이 말씀한 말세의 교훈과 거짓 스승에 대한 말씀들은 마24:10-14과 딤후3:1-8,벧후3:3-7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사도들의 교훈을 신앙의 기초로 알아야 할 것을 행20:31과 엡2:20에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짓 교사의 유혹을 받을 우려가 있는 성도들은 사도들이 교훈한 말씀을 기억하고 경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말씀은 영감받은 진리의 말씀이요, 또 말세에 나타날 거짓 교사의 형편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들의 말씀은 신앙 생활 전체의 표준이 됩니다(고전3:10,업2:20).

2) 기억해야 할 사도들의 미리 말씀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①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한다”는 뜻은 15절(7과)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객관적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의 주관을 따라 상황 윤리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② “기롱하는 자들”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세의 예언에 대하여 비웃고 조롱하며 코웃음 치는 악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거짓 스승들의 유혹을 피하려는 성도들은 사도들의 말세에 대한 예언을 잘 알아서 경계하셔야 합니다.

2. 경건치 않은 자들을 경계할 것(18-19).

경건치 않은 자들의 경건치 않은 사실은 “당을 짓고 육에 속하며 성령이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 모든 사람을 고루 사랑해야 할 성도가 특정인들끼리 모의하고 합세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는 당을 짓는 일로서 잘못하는 일이며,

2) “육에 속하였다”는 뜻은 성령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성령이 없는 세속의 상태를 의미하며, 육신에 속한 자는 연약에 싸인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2:14,3:1). 육에 속한 자는 성령님과 상관이 없으므로 하나님과 신앙적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 즉, 당을 짓는 자들과 육에 속한 자(성령 없는 자)를 항상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하셨습니다(20).

1)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뿐이시며(요17:21,벧전1:16), 순결한 것은 진리의 말씀 뿐입니다(시19:8-9,요14:6). 따라서,

① 거룩한 믿음은 순결한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다른 것을 섞어 믿는 믿음은 순결하지 않습니다. 진짜냐 가짜냐를 말할 때 다른 것이 섞이면 안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본받는 사랑 실천의 행위가 부합되어야 합니다. 행함은 곧 사랑이요, 사랑이 없는 믿음은 옳게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22:38-39,약2:17). 말씀에 기초하고 말씀만 믿는 신앙, 십자가로 죄사함 받은 신앙,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이 있습니까 ? 그것만이 거룩한 믿음일 것입니다.

② 이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을 집 짓는 것처럼 쌓아가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신앙을 건축에 비유하신 말씀들이 있지요(마7:24,고전4:10,엡2:20,벧전2:5 등). 좋은 집을 지을 때 기초와 재료와 기술을 투자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믿음의 집을 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4.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20).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지도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기도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기도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성취해 드리기 위하여 성경적 의도대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기도를 할 때에 인간의 뜻과 자기의 정욕 중심으로 잘못할 때가 혹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성령님의 지도에 의한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요14:17) 우리의 신앙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또 성경적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지도로 하는 기도는 추호도 성경의 교훈에서 이탈할 수가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21).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였으면 건축한 집을 보존하는 것처럼 순결한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면서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타인에 관한 것이지만 자기의 순결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퇴폐와 신학의 혼탁함과 생활의 생존 경쟁 속에서 거룩한 믿음을 힘있게 지켜나갈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6.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21).

인간은 항상 연약합니다. 무지와 실수가 없을 수 없고 때로는 연약하여 범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신 예수님께서 항상 불쌍히 여겨 주실 때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7. 믿음이 위태한 자를 긍휼히 여김에 대하여(22-23).

22절의 “의심하는 자”는 믿음의 회의를 갖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시련에 지칠 때 믿음을 저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권면과 협력을 잘하여 깨달음과 용기를 준다면 믿음을 붙들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 가운데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과 같으며, 믿음의 성도는 시험에 든 자를 긍휼히 여겨 붙들어 주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뜻은 믿음있는 성도가 연약하여 범죄하는 성도를 긍휼히 여기며 지도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만 그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엄히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라” 함이 범죄와 관련된 간접적 요소까지라도 싫어하여 경계하라는 뜻이니, 결국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철저히 미워하되 전염병 걸린 자의 병만 아니라 그의 의복까지 미워하는 것처럼 경계하고, 반대로 죄인은 깊이 사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를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꼭 성취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8. 결론과 송영입니다(24-25).

1) 송영의 대상은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동등한 영광의 대상으로 말씀해 주셨고, 영광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요, 영광돌리는 중보자가 예수님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영광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능히 성도를 보호해 주시고, 거침이 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흠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요, 영광의 중보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이 성도를 보호해 주심”은 원칙적으로 영광의 보좌 앞에 흠없이 서도록 믿음을 보호해 주시는 것이고, 또 모든 생활의 평강을 지켜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시121:1-8).

② “거침이 없게 하심”은 영적 신앙의 장애를 제거하여 무사히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셔서 의로움과 상급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절차를 순탄하게 진행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시는 것”도 앞의 말씀처럼 거침이 없도록 모든 장애를 제거해 주시므로 구원을 완성시키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영광의 중보자란 25절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전달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광될 일을 만드는 일도 예수님의 은혜로, 또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 받으실 수 있게 하는 것도 예수님의 중보를 통하여서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이 바로 그런 사역을 위함입니다.

3) 하나님은 홀로 유일하신 분으로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그에게만 있을 것을 송영의 내용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영광은 기쁨의 근거요, 위엄은 하나님의 존귀이며, 권력은 ‘크라토스’(κράτος)로 능력을 나타내는 힘이요, 권세는 ‘에쿠시아’(ἐξουσία)로 지배하는 힘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를 기원하며 송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영광의 중보 사역을 하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빌2:6).

여기에서 송영에 대한 내용을 더 첨부하겠습니다.

① ‘송영’(頌榮)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24-25절은 역시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송영인데, 이와 같은 성격의 말씀이 성경에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롬16:25-27의 “복음으로 능히 너희를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한 것이나, 엡3:20-21에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한 것 등입니다. 찬송가에도 보면, 찬송 중에도 “송영”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 있으니, 1장, 2장, 645장, 665장 등이 그런 것입니다.

② 그러면 이 송영이 찬송과는 어떻게 다른가 할 때, 찬송은 범위가 넓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을 가진 찬송 또는 전도의 내용을 가진 찬송, 혹은 체험 내용을 가진 찬송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송영은 “어떤 인간과 관계되는 내용을 넣지 않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그 본성을 높이 찬양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만을 위하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이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 기도와 전도와 간증 등의 내용을 가지고 찬양하는 것이라면, 송영은 오직 하나님의 본성을 찬미하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마치 축도와 기도가 다른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는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중보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입니다.

③ 그러면 축도와 송영이 어떻게 다를까요 ? 축도는 성도를 대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전달하는 것이고, 송영은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의 기복을 위한 기도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나 소원을 갖는다면 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말세의 혼탁한 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본서에 기록된 권면을 잘 시행한다면 유혹을 이기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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