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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요한일서 강론

제1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일 1:1~5) 5 바로가기

제2과 잘못된 생활과 바른 생활 (요일 1:6~10) 7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실천과 회개 (요일 1:6~10) 9 바로가기

제3과 계명을 지키라 (요일 2:1~11) 11 바로가기

제4과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2~17) 14 바로가기

설교보충 2.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17) 18 바로가기

설교보충 3. 마귀의 세 가지 유혹 (요일 2:15~17) 20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영원히 거하는 생활 (요일 2:15~17) 22 바로가기

제5과 적그리스도와 성도 (요일 2:18~19) 23 바로가기

제6과 하나님의 자녀와 범죄자의 형편 (요일 3:1~9) 25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임 (요일 3:1~3) 27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성도의 네 가지 책임 (요일 3:16) 29 바로가기

제7과 형제 사랑에 관한 교훈 (요일 3:10~24) 32 바로가기

제8과 영을 분별함에 대하여 (요일 4:1~6) 35 바로가기

제9과 사랑과 관련된 교훈들 (요일 4:7~20) 36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요일 4:10~11) 39 바로가기

제10과 거듭난 자의 특징과 증거 사역 (요일 5:1~13) 40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세상을 이기는 자 (요일 5:4~5) 42 바로가기

제11과 기도와 거듭난 자의 지식 (요일 5:14~21) 43 바로가기



요한일서 강론

제 1 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일 1:1-5)목록으로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의 개론을 먼저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그 말씀을 알게된 경위와 그 말씀을 증거하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소개는 1,2,5절에서 나타내셨고, 그 말씀을 알게된 경위는 1-3절에 나타냈으며, 증거하는 목적은 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소개하심(1,2,3,5).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이 말씀은 요1:1-4에 말씀한 내용과 상통함이 있고, 예수님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1절에 “생명”이란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생명의 말씀, 이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생명이시요(요14:6), 모든 피조물들에게 호흡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행3:15), 또 부활의 생명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11:25). 따라서 본문의 “태초”는 피조물의 태초가 아닌 영원하신 분의 태초(시작;계1:17)입니다(요1:1). 또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은 성육신 하시기 전에 말씀으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육체적 형상을 제외한 모든 신령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존재도 있고, 인격도 있으며, 권능도 있음을 뜻합니다.

2) 이 생명은 곧 예수님이시오, “나타나신 바 된 것”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2).

3)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란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심을 말씀하셨고(3),

4) “곧 하나님은 빛이시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5)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며, 어두움이 없는 빛이요 진리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 사도 요한이 그 예수님을 알게된 경위는(1-3) 요1:29-34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1)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셨다는 뜻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져 보았으므로 부활 사실의 증언을 강조한 것입니다.

2) 3절의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함이라” 하신 것은, 역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나 승천하신 후에도 함께 하심을 뜻하며, 5절의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하신 것도, 사도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보고, 깨달은 것을 증언하므로 진리의 순수성을 증명하고 강조하였습니다.

3. 이 말씀의 증거와 목적에 대하여(3-5).

1) 3절에서 사도 요한은 “보고 들은 바를 전하였다” 하였고, 4절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기록하였다” 하시므로 증언의 방법이 구전과 기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는 소식은 곧 하나님은 빛(진리)이시란 것입니다(5).

2) “너희도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라”(3) 하시므로, 증거의 목적이 성도의 교제를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진리의 소개를 받는 자들이고, “우리”는 성도들(사도와 제자들)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가 곧 구원입니다.

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하시므로 성도와 하나님과의 친교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살면, 모든 성도와 하나님이 한 권속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런 세계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기록하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4) 하셨으니, 진리를 기록하는 사도들의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표현하셨습니다. 증언자는 진리를 소유하였으므로 만족하고, 그것을 연구하므로 즐거우며, 더 나가서는 기록하고 예수님을 옳게 증언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일로 알며 큰 만족을 갖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내용은,

①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된 사실과,

②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 것과,

③ 예수님에 대한 것을 주목하고(1), 연구하며, 증언과 기록으로 나타내는 사명을 큰 기쁨으로 여긴 점과,

④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의 교제와 영원한 생명을 강조한 점입니다.


제 2 과 잘못된 생활과 바른 생활 (요일 1:6-10)목록으로


이 말씀 6절에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두움에 행하는 일”에 대하여, 7절에서는 “성도가 빛 가운데 행할 경우”에 대하여, 8절은 “성도가 죄 없다고 할 경우”에 대하여, 9절은 “성도가 자백할 경우”에 대하여, 그리고 10절은 “성도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므로 “잘못된 생활과 바른 생활”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잘못된 생활로 지적하신 것은(6,8,10),

1) 성도들의 생활 중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6).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뜻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성경 지식과 기도와 생활이 원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빛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행치 않는 자라” 하셨으니, “빛 가운데 행하지 않음”은 곧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의 거짓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은, 믿음 생활을 정상적으로 함을 뜻하고, “믿음 생활의 정상적 상태”는 곧 진리를 행하는 것(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향하는 것처럼, 성도는 진리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행위가 같지 않으면 그의 믿음도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향하고, 빛 가운데 행함은 완벽한 계명 준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2) 성도가 “죄없다”고 하는 것입니다(8). 믿음에 들어온 자가 “죄없다”고 할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의 법률에 저촉되지 않은 것으로 무죄성을 주장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칭의의 교리에 의하여 무죄성을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하시므로 불신앙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 사람은 법률적 죄만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양심적, 신앙적, 도덕적 또는 인륜적 책임에 관한 모든 것에 죄를 짓기 때문이요, 칭의 교리로 의로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관계되는 것이요 자신의 본질에 관계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분명히 의로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놓을 “의”입니다. 결코 자기의 신분이나 본질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는다”고 믿을 때에도 자신의 속에는 죄악의 근성이 남아 있음을 감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마9:12), 의로운 자에게는 구세주도 구원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성도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경우입니다(10). 이 말씀은 8절과 비슷하지만, 8절의 “죄없다”는 뜻은 “모든 죄책의 청산”을 의미하고, 본절의 “범죄하지 않았음”은 “회개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현재 생활에 죄지은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결백하게 살았을까요 ? 이것은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선한 일과 영생의 길을 물은 다음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19:16-22). 그러나 그는 사랑 실천의 계명에서 낙오되었습니다. 자신이 가난한 백성들 앞에서 부자로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이웃을 소극적으로 살핀, 사랑의 낙오인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이런 상태를 감지하지 못하면서 죄없는 줄로 아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도 “스스로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하셨으니,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는 뜻은 성경의 깨달음이 없고, 예수님의 영이 가까이 해 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으며 교만한 성도는 주님과의 거리가 먼 것입니다.

2. 바른 생활을 일깨워 주심에 대하여(7,9).

1)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7). 빛은 예수님이요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으로 예수님을 깨달으며, 영적으로 교제하고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빛 가운데 계심”은 예수님이 진리시요 의롭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사귐이 있고, 주님과의 사귐이 있으므로 진정한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속죄의 효력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과 빛 가운데 행함”을 하나로 보셔야 합니다(약2:14,17).

2) 자백하는 생활입니다(9).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또 깨끗케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백”은 회개의 뜻이요, “사함”은 진노를 푸심이며, “깨끗케 하심”은 성화의 발전을 의미합니다. 성화는 회개하는 것만큼 진전이 있습니다.

성도가 생각을 잘못하면 그릇된 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깨닫고, 자신을 옳게 판단하여 회개를 힘쓰고, 빛 가운데 행하므로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실천과 회개 (요일 1:6-1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실천과 회개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6-7절은 실천을, 8-10절은 회개를 말씀하셨습니다.

1. 실천을 강조하심에 대하여.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믿는다”고 고백하거나 기독교 의식에 참여하면서 계명 준수를 외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행한다”는 뜻은 죄를 두려움 없이 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7:22에서 “믿음을 가진 자는 주여, 주여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중요하다” 하셨고, 또 바울 사도는 고전5:19에서 “말보다 실천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어두움에 행하지 않음은 곧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요, 의롭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 안에서 사귐이 있고 십자가의 피로 인한 죄사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8:20에서는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한 길로 행하라” 하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의로운 생활을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2. 회개를 강조하심에 대하여.

성도가 만일 “죄없다”, 회개할 죄가 없다“ 한다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거짓말하신 분으로 불신하는 것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회개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벧전5:5,시34:18,눅18:14). 성경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8)고 하셨습니다.

1) 회개를 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

① 고후7:10에 보시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란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로 구원을 이룬다”는 말씀은 구원의 전체를 이룬다는 뜻이 아니고, 성화의 한 부분을 성취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회개는 구원의 한 과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영생에 들어가며, 회개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② 시7:11에서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칼을 갈으시고 활을 당기려 하시며 또 죽일 기계를 만드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을 때 진노를 계획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욘3:9-10에 보시면 “회개하는 자에게 진노를 그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멈추시게 하는 것입니다.

③ 행2:38에서 “회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힘입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회개를 철저히 하면 성령의 충만함과 함께 믿음의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죄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믿음과 회개 뿐인 것입니다.

2) 회개하는 절차를 말씀드리면,

① 먼저 은혜받기를 위하여 노력하셔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7:7)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은혜받기 위하여 사모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성경을 상고하고,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상당 기간 꾸준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쳤다”고 하여도 괜찮습니다.

② 상당 기간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받도록 기회와 깨달음과 감동을 주십니다. 딤후2:25을 보시면, 하나님이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요6:44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회개하는 감동을 주시는 것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죄짓는 것을 애통하게 되고 또 두렵게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③ 범죄 행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범죄에서 돌이켜 죄를 떠나는 것이 회개란 사실을 겔18:21-22에서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채 무조건 죄를 끊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고, 회개의 결과는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참고로 천주교에서는 회개에 두 가지 방법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통애(痛哀;contrition)요, 또 하나는 고해(告解;confession)입니다. 통애는 경미한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고해는 큰 죄를 신부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의식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죄의 크고 작은 것에 상관없이 또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통회(痛悔)와 돌이킴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실천과 회개를 힘씁니다. 이 두 가지를 꼭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며, 죄에 민감하고, 죄를 박차는, 힘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계명을 지키라 (요일 2:1-11)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1), “계명을 지키면”(3),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5), 또 “새계명을 쓰노니”(7), “빛 가운데 거하여”(10)란 말씀이 핵심적 교훈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을 “계명을 지키라”고 정하였습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1대지를 1-6절에서 “죄를 범하지 말자”로, 2대지를 7-11절로 “새계명을 지키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죄를 범하지 말라(1-6).

1) 사도 요한이 이 성경을 기록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1)고 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말씀을 받는 목적입니다(1).

2) 혹 누가 죄를 범하였을 때는 하나님 앞에 계신 대언자 즉, 예수님의 중보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선민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2-3). 이 말씀에서 더 설명드려야 할 것은,

① “죄를 범한 성격”은 성도의 상습적 범죄가 아닌 연약에서 저질러지는 범죄를 뜻합니다.

② 이런 범죄에 대하여 대언자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미 대속제물이 되셨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용서받는 방법으로 해결하라는 뜻입니다(1:9,마18:21-22).

③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속죄 사역을 이미 끝내신 것이고, 회개에 따른 용서는 징계와 관련된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④ 그리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란 뜻은 유대인 선민이나 그 당시의 백성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역사 세계에 있는 모든 선민을 위함이란 의미입니다.

3) “계명을 지키는 성도라야 예수님을 아는 자로 여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3). 3절의 “우리가”는 사도 요한을 포함한 그 당시의 성도들이고, “저”는 예수님이며, “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 “믿음 있는 증거”는 주관적 확신(벧후1:10)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천에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계명 실천의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그의 신앙은 확신하기 어려운 것입니다(고후13:5,8).

4) 만일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믿는다”는 것은 거짓된 것이요, 진리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4). 믿음과 행위는 나무와 열매 같아서 나누지 못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 하나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여기에서의 “행함”이란 계명 완전 준수가 아니요, 최대한의 실천 의지와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므로(갈6:7) 거짓된 자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으며, “진리가 그 속에 계시지 않다” 하심은 예수님의 구원적 특별 사역과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의식 행위는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마7:21-23).

5)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계명)을 잘 지키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5). “그의 말씀을 지킨다” 함은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계명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 하심은, 믿음의 성도가 하나님의 참되신 사랑을 힘입은 자요, 또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성격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꿩으로 태어나면 높이 날 수 없지만 독수리로 태어났을 때는 그의 성장과 함께 높이 날 수 있음과 같이, 거듭난 성도는 성령님의 사역과 함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명(사랑) 실천이 있을 때 주 안에 있음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6)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바로 주님의 행하심을 본받는 자입니다(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활에 똑같이 따라가야 함이 아니고, 앞서 가고 뒤떨어지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방향으로 나가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앞서 가고 뒤서 가는 차이는 있으나 한 코스로 달리고, 한 목적 지에 오는 것처럼 같은 방향, 같은 성질대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새계명을 지키라(7-11).

1) 요한 사도가 강조하신 계명 실천은 옛날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7). 따라서 새계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계명은 구약 시대의 출애굽 당시부터 주셨고, 또 십계명으로 요약되었으며, 전체의 취지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입니다. 이 계명은 구약 시대부터 강조되어 왔습니다(마22:36-40).

2) 사도 요한은 다시 새계명을 쓰신다 하면서 “저와 너희에게 다 참된 것이요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라”고 하셨습니다(8).

① 사랑의 계명은 항상 있었는데, 사도 요한은 같은 성격의 계명을 강조하면서 “새계명”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사랑을 새계명이라 한 말씀은 요삼5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② 같은 성질의 계명을 새계명으로 이름 지어 강조한 이유는 교훈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므로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본문의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사랑 실천을 근거로 하여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참되다는 것입니다.

③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취었다” 하심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당하실 때를 어두움의 권세라 하셨고(마24:29,눅22:53), 부활하신 주님이 빛을 발하셨는 고로(행9:3) 십자가와 부활이 성취된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칼빈은 “구약 시대가 지나가고 신약의 복음 시대가 도래한 것을 나타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랑(구속)의 방도이며, 부활은 영원한 승리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승리를 내다보는 성도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요, 역시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모른채 방황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9-11).

①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사랑의 반대 행위이므로 진리 아닌 죄악 즉, 어두움에 있는 것이며(9),

② 믿음과 이웃 사랑(그의 형제)을 일치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므로 거리낌이 없은즉(10) 성도는 항상 사랑에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③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어두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함”은 진리의 길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심령이 더욱 암담해 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현실적 취미로 만족을 느끼며 감정이 동하는 것은 영적 은혜에 대한 어두움이요 방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사랑의 가치와,

② 사랑을 새계명으로 주신 뜻과,

③ 믿음과 사랑이 하나되어야 함과,

④ 사랑이 없는 세계는 진리의 빛이 없음과,

⑤ 진리를 모신 빛된 생활 등에 대하여 교훈하셨습니다.

제 4 과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2-17)목록으로


이 말씀의 12-14절은 “계층별 신앙의 확인”이요, 15-17절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계층별 신앙의 확인에 대하여(12-14).

1) 사도 요한은 인간의 성숙 과정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하였으니, 곧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입니다. 그리고 한 계층에게 한 번씩 하는 확인하는 말씀을 두 번 하신 것은 강조하는 뜻으로의 설교의 묘미라 할 것입니다.

2) 확인하는 내용은 자녀들에게 “죄사함의 도리와 하나님 아버지를 앎”에 대하여, 아비들에게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에 대하여, 청년들에게는 “말씀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김”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3) 자녀들은 신앙의 성숙 정도가 지식과 연단의 미숙으로 넉넉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는다”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음”은 속죄의 교리를 단순하게(행10:43) 표현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대속의 공로요,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중보자 되셨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민을 위하여 중보자가 되셨으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②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다” 함은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자요, 아버지이시며 또 예수님의 아버지이심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안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비들에 대하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는 것”(14)을 강조하셨다면, 아비들에게 강조한 앎은 “하나님의 내용”(호6:6)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성경과 체험을 통해서 많이 알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5) 청년들에 대하여는 신앙이 강할 것과, 말씀이 심령 속에 거할 것과, 악한 자를 이길 것에 대하여 확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청년들의 신앙의 비중을 아비들보다 더 크게둔 것은 구 시대의 어른들 보다 신 시대의 청년들에게 더 큰 비중과 기대를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장년 기성층 보다 청년층이 더 지식적이며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청년들에게 확인하며 요청한 것은 그들의 강한 신앙과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것과 진리를 토대로 하여 악한 자 즉, 거짓 선지자들을 따돌린 것입니다. 청년들의 믿음이 강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 그들 심령 속에 거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은 그 말씀을 기초로 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배격하는데 앞장 선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세 계층의 신앙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에 대하여(15-17).

15-17절의 요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15절에서 세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①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요,

②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요,

③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하시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적게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를 아셔서 그런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16절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시지 않고,

①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들과,

②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들과,

③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들을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다 아버지의 뜻으로 좇아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하셨으니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무엇이며, 또 아버지의 뜻이 아니란 말씀과 세상으로 좇아 왔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17절에서는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이 세상이나 그 정욕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은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인정을 받는 일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4) 성도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 세상”은 원문의 ‘코스모스’(κόσμος)란 말로, 우주나 자연계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저버린 세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등지고 인간의 향락만을 앞세우는 타락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돋드’라는 학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릇된 가치관과 거짓 신들을 숭상하는 이교(異敎)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이야 얼마나 좋습니까 ? 따라서 인간이 자연 보호의 차원에서 자연의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가치관을 왜곡하고 또 우상이나 물질을 숭상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속의 세계를 사랑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세계를 보면 같이 동화될 수가 없어서 마음에 불편을 느껴야 하고, 유감을 품어야 하며, 어떻게 하면 그 세계를 정화시킬 것인가 ? 또 정화시킬 수 없는 세계라면 차라리 멀리하는 마음 즉, 부패한 세계를 떠나고 싶은 심정만이 간절해져야 할 것입니다.

4)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계18:12-14) ?

① 그것은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16) 하셨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요,

② “지나가는 것이라” 하셨으니(17), 당연히 현상 세계에만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나 세상의 정욕은 영구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다 이별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③ 이 세상의 것들은 “아버지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하셨으니, 이것은 마치 불법 건축물을 지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의 허락과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 마구 시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통령이 “거북이를 숭상하고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령을 하였겠습니까 ? 그러나 지방 수뇌들이 대통령의 뜻도 파악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사람 좋아하는 대로 미신 행위를 저지르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도 그렇게 시행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본문 16절에서는 그런 것들을 세 가지로 구별을 하셨습니다.

㉠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입니다. 즉, 육체를 기쁘게 하기 위한 욕심들입니다. 몸을 살찌게 하기 위한 “먹자주의”나 음행을 낙으로 삼는 죄악 등일 것이요,

㉡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는대로 취하고 싶어 하는 욕심입니다. 남이 가진 것이면 다 갖고 싶고, 다른 사람이 보러 다니는 것이면 자기도 다 보고 싶고, 눈을 가지고 세상 것을 보아서 흥겨운 것이면 다 보거나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을 뜻하는 것이요,

㉢ 이생의 자랑이란, 세상의 자랑거리 즉, 명예로운 것들을 욕심내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전혀 무시할 수 있는가 ?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도는 적당하게 필요하고 영광되는 일만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정욕인 물욕이나 색욕에 끌리지 말고, 안목의 정욕인 사치나 낭비에 끌리지 말며, 이생의 자랑인 교만이나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을 적당하게 바라보며,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에 끌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깊어지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6) 그러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주 문제에 대한 대책에서 멀어지란 뜻이나 이웃간에 인정없이 살라는 뜻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을 더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사람을 위하여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② 예배에 참여하셔야 할 분들이 세상 일로 못 나오신 분이 계시면 그 분은 칠일 동안에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육일은 세상의 일을 하였을지라도 주일을 지키는 성도는 1/7의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육일은 다 마귀와 세상을 따라간 날인가 ? 할 때에 육일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 성도는 역시 세상을 사랑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의 정욕에만 취하여 세속에 물든 생활을 하였다면 역시 그런 경우에서 세상을 사랑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잘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하셨습니다.

③ 성경에 보시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과 그런 실례가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 요17:14에서, “예수님이나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약혼한 처녀가 친정 집에서 마음이 떨어지는 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 또 마10:36에 보시면, “부모나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서도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하여 가지고 가라” 하였습니다. 그 다섯 가지가 자기 아내∙자식∙부모∙돈∙성경이라고 했을 때 반드시 부모 처자∙돈의 인정을 버리고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의 인정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시험하신 일이 있었고, 욥기에서 ‘엘리바스’는 고난 중의 욥을 권면할 때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고 하므로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 사3:1에 보시면,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마다 현실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 죽으면 못산다”는 식으로 부부애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자식 출세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저금 통장이나 직업을 귀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과 하나님, 이 세상과 신령한 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는 반드시 더 귀한 것을 취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12:31). 이 세상의 것은 다 허탄한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유한한 것으로 또 신령한 복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갈5:17).

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거함”(17)은 구원과 하나님의 뜻 실천이 유관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오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시24:3-6)고 하셨습니다.

설교보충 2.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15절에 보시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이 세상에 있는 것”이란 물질, 지식, 명예, 권세, 향락 등 신령한 복이 아닌 것들을 의미합니다. 본문 16절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음식이나 이성 접촉으로 몸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안목의 정욕은 볼거리를 통하여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생의 자랑은 명예적 성취감을 통하여 마음을 충족시키는 일입니다.

3) “그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전혀 상관없이 멀리하며 살라는 뜻이 아니고, 그것들을 탐하지 말며, 신령한 복을 먼저 추구하고, 현실의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대로 살라는 뜻입니다(마6:33). 따라서 기복주의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4) 이런 것을 “사랑하지 말라” 하셨으므로 성도는 그런 것을 적당량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취하였을 때 탐심을 갖거나 관심있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왜 그런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

1) 세상은 죄악이 많기 때문에 성도가 애착을 가질 일이 못되며,

2) 진리의 세계도 퍽 어지러운 상태에 있어서 평안하지 못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다가 이단으로 기울어지는 사람, 세속의 힘에 눌려서 신앙 생활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다 세상이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을 도피시키려고 미리 데려가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사57:1).

3) 말세의 때가 가까웠고, 말세에 있을 어려운 증상들이 나타나는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렵다는 뜻은 영적으로 보는 안목에서 그런 것입니다. 말세에는 기롱하는 자도 많고(벧후3:3), 적그리스도나 믿음의 배반자도 많아지며(2:19,마24:11,살후2:3,딤전4:1), 재물을 쌓는 일(약5:3) 등으로 신앙적으로 사는 생활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4)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15) “세상과 벗이 되고저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약4:4)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 계시게 하면 되겠습니까 ?

5) 그 외에도 자연 재해(마24:6,7) 등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

1) 17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표준이나 전통 표준으로 살지 마시고 오직 성경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이요,

2) 물질 만능주의, 물질 소비주의, 물질 의존 신앙에서도 멀어져야 할 것이요,

3)철학이나 과학 만능의 지식주의에서도 멀어져야 할 것이요,

4) 인생이 현실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더욱 마음에 떠올려서 미래의 세계와 상급을 귀히 알고 소망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셨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하셨으니, 이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시고 영원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마귀의 세 가지 유혹 (요일 2:15-17) 목록으로


인류의 시조가 타락한 것을 불행하게 여기고, 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불행하여진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성도는 마귀의 변함없는 유혹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에 세상을 적당하게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셨는데, 이 세 가지가 마귀의 유혹의 대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귀가 영혼을 죽이는 독을 넣었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약4:4).

2) 마귀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이 세 가지로 유혹하였습니다. 이때에 아담은 넘어갔고,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창3:6에 보시면,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먹음직 함”은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고, “보암직 함”은 안목의 정욕에 해당하며, “지혜롭게 할만함”은 이생의 자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와와 아담은 그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즉, 자기의 정욕대로 원하는 것을 위하여 마귀의 뜻에 굴복한 것입니다.

마4:1-11에 보시면 예수님이 시험을 받고 이기신 것도 역시 같은 성격으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는 것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안목의 정욕에 해당되며, “산 위에서 만국을 보인 것”은 이생의 자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따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 말씀으로 마귀를 대항할 때, 유혹자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유혹을 이기려는 성도는 마귀의 성질과 유혹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마귀의 성질을 아심에 있어서, 성경에 마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말씀이 많습니다. “용이요 옛 뱀이라”(계12:9), “거짓말쟁이라”(요8:44), “도적처럼 틈을 찾고 구멍을 뚫는 놈이라”(요10:10,마28:13,6:19,살전5:2,엡4:27)고 하셨습니다.

2) 이렇게 교묘한 지혜와 수단으로 성도를 유혹할 때 대체적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다가 사명에서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딤후4:10).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타락하였습니다(요12:6). 베드로는 교만하다가 시험에 들었고(마26:33), 세상의 애착을 떠난 세례 요한은 넉넉히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3) 따라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말씀 위에 굳게 서고 현실을 적당히 바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유혹받는 여건은 진리의 지식 부족과 세상에 대한 애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멀리하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인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마귀의 거짓말을 판단하게 되고, 세상을 멀리 보는 눈이 마귀의 유혹꺼리들을 따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즉, 이 믿음은 진리의 말씀에 끌리는 은혜가 아니고는 간과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영원히 거하는 생활 (요일 2:15-17)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선 이 세상과 그 정욕들은 다 지나가는 것임을 확실히 아셔야 하고, 또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장 귀한 일로 여기셔야 하며, 다음에는 성도가 영원히 거하는 줄 믿고 그렇게 생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도가 영원히 거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꼭같은 성정을 갖고 33년을 인간처럼 사셨지만,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셨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골3:1에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세상의 모든 욕망에 대하여)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과정을 살피면,

1) 우선 거듭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이 다 자기의 것이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도 생명이 있어야 받고 누릴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거듭나는 영적 생명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셔서 새생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엡2:1).

2) 영원한 대상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유한한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과는 관계를 멀리하고(고후4:18,고전7:31), 영원한 대상인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신령한 은혜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고(히7:24), 그의 말씀인 성경도 그러하며(벧전1:25), 내세와 내세의 상급이 영원한 것입니다(벧후1:11,골3:24). 따라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풍성하고도 꾸준한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어느 나라를 가든지 그 민족의 긍지와 고유의 풍속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이겠습니까 ?

3) 영원히 있는 것만 사모하는 생활입니다.

① 자신의 영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합니다(요삼2).

② 하나님의 말씀도 “세세토록 있다”고 하셨으니까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1:25).

③ “믿음 소망 사랑도 항상 있는 것”이라 하셨으므로(고전13:13), 역시 그 세 가지를 위하여 충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없는 것은 나도 이 세상에서 멀리하고(계7:16,21:4,25,27), 천국에 있는 것만(하나님의 보좌, 찬송, 감사와 경배 등;계4:2,8,9) 사모하며 가까이 하는 생활이 곧 “영원히 거하는 생활”입니다.

제 5 과 적그리스도와 성도 (요일 2:18-29)목록으로


이 말씀 18,19,22,26절은 “적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고, 20-21,23-24,27-29절은 성도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적그리스도와 성도”라고 정하였습니다.

1. 적그리스도에 대하여(18,19,22,26).

1)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이르겠다 함과 같이 그 당시에도 일어났기 때문에 마지막 때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18).

① 18절의 “아이들아” 한 것은 사도 요한이 연로하셨기 때문에 모든 성도를 자녀들처럼(28) 여기신 뜻이 있고, 또 신앙이 어린 자들은 구원받을 믿음이 있어도(1) 분별력이 없을 수 있으므로 진리 지식에 미숙한 대상을 지목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②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도 하셨고(마24:11), 베드로와(벧후2:1) 바울 사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딤후3:1-5). 그런데 사도 요한 당시에도 이미 나타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③ 따라서 “마지막 때임을 안다” 하셨으니, 이 “마지막 때”란 신약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1:1에 보시면, 신약 시대를 “모든 날의 마지막 때”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반대 운동과 함께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음”은 성도의 세계에서 유혹을 받아 적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나 종교나 사상과 목표가 다르면 동화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성도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대적자들로서 진리 운동에 동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이단 운동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3) 적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을 하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22). 다시 말하면 구원의 핵심되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4) 적그리스도인들은 성도를 미혹한다고 하였습니다(26). 성도가 거짓 스승들에게 미혹당하지 않으려면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서야 하며, 진리를 통하여 느끼는 만족의 충만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에 대하여(20-21,23-24,27-29).

1)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20).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은혜를 의미하며, 성령님의 은혜로 진리를 알게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진리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마16:17,요3:3,고전12:3). 이 말씀은 27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하심은 성령으로라야 깨닫기 때문이며(고전12:3), 성령님은 참된 것만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27절 하반).

2)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바로 아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앎을 인함이요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라” 하신 말씀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거듭난 자를 상대로 주신 것이란 뜻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과 상관이 없으며, 아무나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성도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삼위의 역사로 은혜를 받습니다(23).

4) 그리고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변함없이 간직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24). 처음에 사도들로부터 증언받은 복음이 진리의 바른 지식입니다. “그 진리를 간직할 때 예수님과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다” 하셨고(24), 영원한 생명(영생의 복)을 주실 약속을 성도들에게 하신 것입니다(25).

5) 사도 요한은 성도를 자녀들이라 하시고, 주 안에 거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28).

① “주 안에 거한다”는 뜻은 24절에서 “복음을 믿는 신앙”임을 말씀하셨고, 6절에서는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지식과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을 모시고, 그 안에 거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② 성도가 주 안에 거하는 생활을 잘하면 장차 주님이 나타나시고 강림하실 때에 큰 담력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되고, 부끄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28). 그러나 성도의 신앙 생활이 성실하지 못했으면 주님 앞에 설 때 떳떳하지 못할 것입니다.

③ 성도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주님의 의로운 생활을 본받아 행할 때 하나님께로서 난 자(거듭난 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29). 이 말씀은 죄를 두렵지 않게 여기는 자가 되지 말고 두렵게 여기며, 진리 실천 의무를 성실하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이 있음으로 믿음있는 자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고후13:5).

따라서 성도는 성도의 위신과 본분을 잘 지켜야 하며, 거짓 사역자들을 분별할 만큼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하나님의 자녀와 범죄자의 형편 (요일 3:1-9)목록으로


본문 말씀 중 1,2절에 “하나님의 자녀”란 말씀이 두 번 기록되었고, 4,6,8절에 “죄를 짓는 자”란 말씀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3절은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말씀”이고, 4-9절은 “범죄자의 형편”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총제목을 “하나님의 자녀와 범죄자의 형편”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말씀(1-3).

1)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랑을 베푸셔서 성도에게 자녀의 특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1). 하나님이 성도를 자녀로 일컬어 주심은 명분만 주신 것이 아니라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요1:12).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고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인성을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죄에서 구원하신 것도 큰 은혜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까지 주셨으니 그 특권의 은혜도 귀하지만 자녀된 특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은혜가 또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하나님께는 양자가 되고, 예수님께는 형제가 되며, 특별한 사랑과 영원한 기업의 영광까지 상속받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2) 성도가 이같이 존귀한 존재란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1절 하). 그러나 성도 자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긍지와 희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2).

3)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래 어떻게 될 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때가 되어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와 같아지고 예수님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라”(2절 하)고 하셨습니다. “장래 어떻게 될 것”이란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있어질 일들이요, “성도가 그와 같아짐”은 부활체 또는 영화로운 몸이 됨이며,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밝히 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13:12). 예수님의 실체의 모습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특권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장차 예수님을 만나야 할 성도는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도 깨끗하여야 한다”(4) 하셨으니, 이는 성화(聖化)를 뜻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신랑을 맞이할 신부이면 그도 깨끗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만큼 성도의 순결은 중요하며 필수적입니다.

2. 범죄자의 형편에 대한 말씀(4-9).

1) 죄를 짓는 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요, 죄는 곧 불법이라고 하셨습니다(4). 불법은 정당한 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법과 나라의 법과 윤리의 법과 양심의 법을 지켜야 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니며, 주님께서도 그런 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7:23).

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우리(선민)의 죄를 없애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니(5), 이는 예수님이 무죄하신 분으로 무죄하게 출현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고, “죄를 없이하시는 뜻”은 범죄자가 받아야 할 영원한 벌을 십자가로 대신 받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로 대속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며, 범죄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거나 알지도 못한 자라고 하셨습니다(6). 이 말씀의 “예수님 안에 거함”은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모신 것을 뜻하고, “범죄하지 않음”이란 범죄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심과 의지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범죄 근절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불신자요,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4) 7절의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하심은 유혹자들의 미혹을 피하여 범죄에 끌리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며,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 하셨으니, 이 말씀의 “의를 행한다”는 뜻은 “의롭게 해 주시는 복음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워짐”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처럼 정죄 받을 일이 없을 만큼 죄에 대하여 속죄되고 청산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5)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요,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범죄의 원조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8). “마귀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특별히 구속 사역을 훼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역사를 대항하여 넉넉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무기는 죽음의 위협이며(마10:28,29,마27:26,히12:4,욥1:12),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마귀의 최종 무기까지 파괴시키셨습니다.

6) 하나님께로서 난자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게 되며, 이는 하나님의 씨인 성령님과 말씀이 그의 인격(심령) 속에 거하여 범죄를 거부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9). 따라서 말씀의 감동 아래 있는 자신도 죄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은 의지적으로 범죄를 거부하게 됨을 뜻합니다. “유혹 자체를 받지 않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경우에 마귀의 유혹을 대항할 힘이 생기는 것이며, 이로써 죄를 피하는 사례는 무수한 성도들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설교문을 참조하십시오).

이 말씀을 읽으시는 성도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범죄에 대한 민감성과 범죄를 박차려는 의지적 경향이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설교보충 5.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임 (요일 3:1-3) 목록으로


본문 1절에서 강조하신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요1:12에서는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고, 롬8:14-15과 고후6:18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된 사실을 실감하는 것은 성도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마6:9).

성도들 중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된 사실 즉, 양자(養子)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 양부모를 잘 만나 큰 복을 받는 사례를 보셨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결성될까요 ?

1)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힘입으므로 이루어집니다. 본문 1절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하셨으니, 쓸모없는 죄인들을 양자로 삼으실 때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거듭나게 하셔서 새롭게 출생시켜 주시므로 됩니다. 롬8:15에 보시면 “양자의 영을 받았다” 하셨고, 본문 9절에서는 “하나님께로 났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다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고(요3:3), 성령님의 역사로 신령한 새생명이 주입되어 영적 새생명으로 탄생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갖게 하시므로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은 시간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믿음의 능력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기 때문에(롬10:17) 거듭난 성도가 진리를 받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요1:12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소개받고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양자의 은혜는 구원의 과정상으로 볼 때 중생, 신앙, 회개, 칭의, 양자의 순서이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다음 회개와 칭의를 거쳐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① 3:10에 보시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요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을 못하는 죄를 돌이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거하면서 회개할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전에 성도의 자격부터 상실함이 될 것입니다(요일3:10,행2:38,39).

②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는 믿음으로 부르신 다음에(롬8:30) 약속의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는 것으로(고후1:22,엡1:13), 회개하고 돌이킨 자에게 성령님이 영적으로 역사해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의롭다 하심의 인치심은 정죄에서 해방되게 하시는 은총이며, 이것이 있은 다음에 양자로서의 특권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1) 화평의 의무입니다. 마5:9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롬14:1과 딤후2:22에서도 “성도는 화평과 덕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 하셨고, 고후5:18,19에서는 “화목하는 직책과 말씀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자녀는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되도록 폭넓게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양보하며, 겸손하고, 오해와 과격을 피하면서 자신이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싸우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수탉은 모이면 싸워도 양은 싸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① 하나님과 나 사이,

② 성도와 성도 사이,

③ 성도와 이웃 사이를 늘 평화하게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이유는 의롭게 행하는 의무입니다. 본문 3,4,7절에서도 의를 행할 것을 강조하셨고, 또 9절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여기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저절로 죄 안지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체면 때문에 죄를 마구 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성직자의 신분이나 성도라는 신분 때문에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또 예수님이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또 청결을 원하시기 때문에 죄를 마구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는데,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다 하셨습니다. 또 요이2:29에서도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안다”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철저히 의롭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3)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13:34에서도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고, 요삼10,14,18,23절에서도 사랑을 강조하셨으며, 또 1절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은즉....서로 사랑해야 한다(2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의무는,

① 평화의 의무,

② 의의 의무,

③ 사랑의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특권이 무엇입니까 ?

1) 부모가 자식을 즐거워 하듯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눅15:22-23).

2) 영원히 누리시는 하나님의 기업의 계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것을 상속받는 것처럼, 양자라는 의미에 법적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피를 나누어 받은 자손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입니다(사41:9).

자녀의 특권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자녀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7 과 형제 사랑에 관한 교훈 (요일 3:10-24) 목록으로


1.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10). 형제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모든 이웃이며, 모든 이웃 중에 성도는 한 권속으로 사랑의 우선 대상이요(갈6:10), 그 다음이 다른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마5:43,44). 이 경우에 사랑하지 않는 자 즉, 사랑 실천의 의지가 없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요(10절 하), 사랑 실천 의지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로 나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10절 상). 따라서 인간의 세계를 둘로 나누어 사랑 실천의 세계(하나님의 자녀들)와 그 반대의 세계(마귀의 자녀들)로 구별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요, 이 명령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임은 계명상으로(출20:12-17) 또는 교훈상으로 이미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3. “가인같이 하지 말라”(12) 하셨으니,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자요, 동생을 죽인 살인자며, 행위가 악한 자로서 동생의 의로운 행위를 시기하고 미워한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이웃 사랑에 실패한 최초의 악인에 속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은 물론 이웃에 대한 욕심, 미움, 시기, 폭력, 살인, 회피 등으로 악인의 근성을 나타내었습니다(창4:5-10).

4.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3). 이 사실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역사가 인류 시초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마5:11) 하셨고, 바울 사도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일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형편인즉 더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5. “성도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14) 하심은 형제를 사랑함이 믿음의 결과로서 영생의 판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결과인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은 역시 믿음이 없는 자이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망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6.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5).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과 같다”는 말씀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마5:21,22). 미움이 사랑으로 전환되지 못하였음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미움을 갖는 자(살인자)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 자로서 영생에 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7. 예수님은 성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은즉 성도는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사랑 실천을 본받아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16).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이나,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무익한 자살이 아니며, 사랑의 특수한 방법입니다.

8. 또 사랑의 저급한 방법은 재물로 가난한 형제를 돕는 것이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음”(17)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한 청년이 부자로 있는 상태에서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지적당한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마19:19-22).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8). 반드시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9. 19-22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크게 복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 “성도가 사랑 실천을 확인하므로(이로써) 자신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주 앞에서 더욱 굳센 마음을 가져야 한다”(19)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속함”은 확실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은총의 팔에 붙잡혀 있음을 체험적으로 확인하고, 아울러 굳센 마음을 갖는 일이 필요하며,

2) 인간은 스스로의 양심 앞에서 혹 자책받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성도를 보실 때 지적하실 일이 없겠느냐 ? 고 하셨습니다(20). 이와 같은 말씀은 욥25:5-6에서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넓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우주를 담을 수 있고, 심지어는 광대무한하신 하나님도 모실 수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큰 마음보다 더 크시니 인간의 깊은 사리를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

3)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양심과 성경에 비추어 자책할 과오가 없다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되고(21), 또 무엇이나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므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22).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성도의 소원은 역시 하나님의 뜻을 구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 뜻이 자기의 뜻과 일치하므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욥22:23-27에서도 “성도가 정의로우면 하나님께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성도가 되고, 당연히 응답받을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0. “계명을 잘 지키므로 주님과 성령님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라”고 하셨습니다(23-24).

1) 계명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설명은 마1:21에서, 또 계명의 요지가 사랑이란 말씀은 마22:37-40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2) “그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도 저 안에 거해 주신다” 하셨고,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몸 안에(고전5:19)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24). 성도는 자신이 주님 안에 거하고, 성령님이 자신 안에 거하심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 안에 거함은 주님을 자신의 주로 모심에서 확인되고, 성령님이 자기 안에 거하심은 그의 말씀인 성경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은 성도에게 있어야 할 필수 요소요, 믿음의 증거가 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설교보충 6. 성도의 네 가지 책임 (요일 3:16) 목록으로


<이 설교는 자유당 정권 때 국회부의장을 지내신 황성수 목사(변호사)님의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황 목사님은 설교의 요절로 요3:16과 요일3:16을 소개하셨습니다. 요3:16은 잘 아시는 복음의 요절이요, 본문 말씀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다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성도의 의무를 다하라”는 교훈입니다. 황성수 목사님은 성도의 신앙 생활을 야구 경기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야구는 공격측에서 타수가 수비망을 뚫고 안타를 쳐줄 때 주자가 일루, 이루, 삼루를 거쳐 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주자가 홈으로 돌아 옴으로 승리의 한 점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야구에서 점수를 얻으려면 안타를 잘치고, 수비를 뚫고, 달리기를 잘하여 네 코스를 뛰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말씀과 기도와 생활을 잘하면서 마귀의 역사를 이기고 네 가지 책임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그 첫째 책임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긴밀성입니다.

육체적 생명 유지에 가장 시급한 것이 호흡인 것처럼 신앙 생활의 첫째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일3:24에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셨고, 엡3:17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중요하게 여기셔야 될 것은 항상 마음 속에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 문제가 확보되지 않으면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는 성도는 마치 구원의 차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크게 위안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 문제나 자기의 소망에 관한 문제나 감사에 대한 문제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일을 위하여 활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입장으로 자신의 신앙적 위치를 확보해야 합니다.

2. 신앙 세계 안에서의 공동체적 관심사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가 만일 이기주의에 얽매이거나 교회가 이기주의에 얽매인다면 이는 사랑을 가장 많이 실천해야 할 개인과 기관이 사랑의 계명을 박차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나 교회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개인적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교회, 연합적인 성도의 신앙 운동 등에 공동체적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4:9-12에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고 삼겹줄은 더욱 끊어지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나,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 하셨으며, 또 고전12:14-27에서 협력에 관한 교훈을 사람의 신체상 구조와 역할로 비유하여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사람의 신앙을 위한 단체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신앙 생활 문제를 공동으로 책임지는 단체이므로(고전10:33) 모든 사람의 신앙 생활이 고루 유익하도록 다스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생활이 형제에게 거치는 일이 되었다면(고전10:33), 그는 마치 야구 경기 중에서 한 코스는 갔으나 두 코스를 가지 못한 자와 같고, 혹 형제를 실족시켰다면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성전 문을 막고 섰는 자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300명이 넘는 교회는 분립을 해야 한다”는 말이 떠돕니다. 왜냐하면 요10:3에 근거해서 “목자가 양을 살필 수 있고 그 이름을 불러 인도할 수 있어야 되는데, 300명이 넘으면 그 보살핌이 허술하기 때문에 목양처와 같은 교회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요, 더 나가서 자기의 교회 발전 운동만 하기 위해서 교인 쟁탈을 하거나 멀리 이사간 교인으로 하여금 교적을 옮기지 못하게 했을 때 만일 그 성도가 교회가 먼 관계로 믿음 생활이 뒤쳐졌다면 그 책임은 교회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교회 운동보다 생명 운동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교회 활동을 살펴 보면 생명 구원 운동이 아닌 교회 사업을 하는 입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과의 접촉보다 활동과 사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믿음 생활로 한 코스를 간 성도가 예배당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갔을 때 그를 가까운 곳의 교회로 이명해 주지 않는다면 결국 한 코스에서 두 코스 가는 문제를 교회가 통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사랑의 차원에서 반드시 이웃에게 유익 주는 일을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나 교파를 옮길 때는 지도를 받아서 건전한 노선을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제 3코스를 뛰는 것으로 성도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교파마다 주장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는 “교회 안에 국가가 있다” 하여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를 주장합니다. 현재 바티칸이란 나라가 그런 체제입니다. 또 16세기 당시의 하이델베르크의 의사인 ‘에라투스’는 “국가 안에 교회가 있다” 하여 천주교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재세례파에서는 “교회와 국가는 별개의 단체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관됨이 없다”고 하므로 혼란을 야기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교회나 국가가 다 신적 기관이지만 각기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국가는 교회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협력하고, 교회는 국가의 선한 통치에 대하여 협력하며, 두 단체가 서로의 목적에 침해가 없도록 상호 공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세례파도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면 교회 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라도 국가를 신성시하여 국가의 법을 지켜 주고, 상호 상충되는 법이 있을 때는 그 법률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자문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명실공히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이웃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만큼, 사회 질서와 국가의 유익을 위하여서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제 3코스를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는, 주자가 홈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생의 구원과 신령한 하늘의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주자가 원점에 돌아와야 득점을 하는 것처럼, 궁극적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받는 종점에 반드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딤후4:18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것이라”고 하시므로 “궁극적 구원에 도달할 때에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영생 구원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야구 선수가 제 3코스로 갔어도 홈-인(Home-In)하지 못하면 점수를 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 “야구 신앙”을 잘 깨달으셔서,

① 하나님과의 관계를 든든히 맺고,

② 공동체적인 일에 상대방을 돕고,

③ 사회와 국가에 유익하도록 충성하며,

④ 자신이 구원을 얻어 영생의 천국과 하늘의 상급에 소망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8 과 영을 분별함에 대하여 (요일 4:1-6)목록으로


본문 2절에 “하나님의 영”, 3절에는 “적그리스도의 영...”, 6절에서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은 예수님의 영이요 성령님이시고, 적그리스도의 영은 미혹의 영이며 따라서 마귀의 영입니다. 천사도 종류가 많은 것처럼 마귀의 영도 종류가 많을 것이나(눅2:13,마12:26,27), 영을 분별함에 있어서는 성령님과 마귀의 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영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는 방법은 성경의 부합성 여부로 판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 어떤 역사(役事)가 나타났을 때 그 역사가 힘이 있는 사건이라 하여 무조건 성령님의 역사인줄로 믿어서는 안되며,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한 역사인가를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귀의 역사로 사역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며(고후11:14), 심지어는 “하늘에서 땅으로 불을 내리게도 한다”(계13:1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는 능력의 큰고 적음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1).

2.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2), 이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이라”(3)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거짓 영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벌써 세상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육체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육체로 오신 사실과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자들의 역사는, 다 마귀의 영에 사로 잡힌 줄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3. 성도는 악령의 역사를 이기므로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고, 성도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세상에서 역사는 마귀보다 크신 것을 알라고 하셨습니다(4). 따라서 성도가 진리의 말씀만 순종하면 “어떤 위험이나 고난스러운 일들 앞에서도 넉넉히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에 붙잡힐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4.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의 말을 듣는다”(5) 하셨으니, 이는 세속에 속한 일과 신령한 복에 속한 일들이 서로 대립하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가 세상에서 만족 얻을 일이 별로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2:15).

5.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사도들의 교훈을 듣고 복종하는 자인즉, 이는 진리의 영에 속한 자들이요,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도들의 교훈을 무시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6). 따라서 성령과 악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그의 말씀인 성경에 부합되는 여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6. 성도의 신분이므로 악령에 사로잡힌 자가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을 갖거나 거짓된 행동을 하였을 때 그 부분에 한하여 악령의 지배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마귀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유혹하여(눅22:31) 거짓을 말하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행5:3).

 

제 9 과 사랑과 관련된 교훈들 (요일 4:7-20)목록으로


이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거의가 “사랑과 관련된 교훈들”로서,

① 성도가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이유(7-13)를 말씀하셨고,

② 사랑의 체험과 증언에 대한 말씀(14-17)이요,

③ 사랑의 결과와 확립에 대한 말씀(18-20)입니다.

1. 성도가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7-11).

1)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7). 성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으면(거듭남),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8).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뜻은 하나님께 사랑의 속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는 사랑을 비롯하여 공의도 있으시고, 본질에 속한 속성들(영원성, 무한성, 광대성)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뜻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지 않은 자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거나 경외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사랑은”이란 뜻은 원문상으로 ‘헤 아가페’(ὴ ἀγάπη)로 “그 사랑” 즉, 독생자를 보내어 죄인들을 구원하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2) 서로 사랑함이 성도간의 사랑의 결속과 교제의 지구력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며(전4:12),

3) 하나님의 큰사랑을 힘입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이요 또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9-10).

① 절대적이란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희생당하게 하시고, 죄인된 자들을 살려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9).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시켜 주시는 사랑 이상 더 큰 것을 베푸실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② 일방적이라는 뜻은 사람 편에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죄인들을 사랑하여 그 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목적으로 먼저 사랑하신 것은 불변하는 성격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요5:16,롬5:8,요일4:19).

5)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세계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2-13).

①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12).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이 계신 줄로 믿고, 사랑하지 않는 세계에는 하나님이 안계신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주신 사랑의 정신과 생활이 성도들 세계에도 나타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강도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의 세계에 함께 계신 것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심령과 생활에(엡1:17,18,고후1:22,13:13)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13).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계시고, 성도는 말씀의 계명(사랑)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으면 계명과 하나님이 동시에 멀어지고, 사랑이 불타면 말씀과 성령님이 가까워지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등으로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10). 교회마다 성도 간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크지 않습니까 ? 항상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랑의 체험과 증언에 대한 말씀(14-17).

1)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을 보고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14).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요한 사도의 체험이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여 알고, 또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하여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체험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사랑 체험과 교통(동거하심)의 체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시인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하셨고, 또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시므로 위의 13절의 뜻을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며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사랑에 거리낌이 없으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17).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룸”은 성도의 세계에서 거리낌이 없을 만큼 사랑을 실천하셨음을 뜻하며, “심판 날에 담대함”이란 사랑 실천의 부족으로 칭찬받지 못할 입장에 있지 않음으로 상급의 소망을 갖게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친 자도 실천이 부족하면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게 되고(마5:19), 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심판에서 사랑 실천의 여부로 판단하신 것을 볼 때(마25:31-46) 성도나 악인이나 사랑 실천이 부족하면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러하니라” 하심은 주님이 사랑의 승리자로 죽음에 담대하셨던 것처럼 성도들도 사랑의 승리자가 되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결과와 확립에 대한 말씀입니다(18-20).

1) 사랑의 결과는 평안과 담력을 줍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오 쫓는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전염병자도 사랑하면 그 곁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죽은 시체도 사랑하면 역시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그러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으니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라”(18)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양심의 거리낌을 입증하고, 본능적으로 심판과 보응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안하고 완벽하게 행하였을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수나 부족이 있을 때는 자신도 편안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은 확립되어야 합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 안에 임한 사실을 알고(19,요15:16,롬5:8),

②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이 결속되어 있음을 알며(20),

③ 만일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을 사랑함도 거짓임을 알고,

④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음을 알며,

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에 따라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앎으로 사랑을 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21).

 

설교보충 7.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요일 4:10-11) 목록으로


<이 말씀은 어린이 성경학교 교육의 총제목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본문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하셨으니까 그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셔야 할 것입니다.

1) 그 사랑은 “사람 편에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5:16,롬5:8).

2) 사랑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십자가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의식(생각)하여야 합니다.

1)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2) 말씀으로 임재하신 하나님,

3) 성령으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4) 비천하게 사신 예수님,

5) 죄없이 사신 예수님,

6)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7)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항상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자신의 생활을 지도하게 될 것입니다.

3. 사랑과 화평을 이룩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먼저 계명을 지키고, 보이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2)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때 먼저 소자(小子)와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함은 성도 간에 화목, 단결하여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을 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고, 사랑 실천의 결과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 간에 평화를 도모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거듭난 자의 특징과 증거 사역 (요일 5:1-13) 목록으로


이 말씀의 1-5절은 거듭난 자의 특징을 말씀하셨고, 6-13절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의 특징과 증거 사역”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거듭난 자의 특징(1-5).

1) 거듭난 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은 믿음의 필수 선행 요소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1).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란 말씀이 그 뜻입니다. “내신 이”는 거듭나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3) 성도를 사랑하게 됩니다(1).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남의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2-3). 2절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요14:23), “그의 계영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심은 마11:39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의 정욕을 멀리하지 못하고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멀리 보며 주님으로 만족하는 세계에서 믿음 생활을 하면 쉽고, 기쁘고, 만족하며, 날이 갈수록 희망이 더한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 거듭난 성도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4). 이것은 생명있는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셨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자가 없다”(5)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이기는 뜻”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의 법(인간의 전통, 습관, 불신앙적 문화 등)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대로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선 죄의 유혹을 이기고, 불신앙의 문화를 외면하고, 자신의 정욕을 이기며(자기를 부정함), 믿음을 지키다가 궁극적 구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증거 사역에 관한 말씀(6-13).

1) 6절에서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에 대하여, 요19:34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피를 흘리시고 또 옆구리의 창자국에서 물이 나온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에서는 “물이 나온 의미”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가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간적 공생애가 끝난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구속 사역을 하신 기간이 세례받으신 때로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란 뜻입니다.

2) 7절에서 “증거하는 이는 성령님이시니 성령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대언의 영이시고(계19:10), 진리의 영(요14:17)이시며, 증거의 사역자(요15:26)이십니다. 성령님은 직접 말씀으로(계14:13) 또는 성경을 기록케 하시므로(벧후1:21)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는 참이요,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령님도 진리이신지라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3) 8절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성령님과 물과 피라” 하신 것은 난제에 해당하지만, “물”은 거듭남(골2:12) 또는 세례(마3:16)를 증거함이고, 피는 “십자가를 증거함”으로 이해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또 “이 셋이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뜻은 증거의 사역과 증거의 내용이 다 일맥상통한다는 뜻입니다. 영적 중생, 신앙 고백을 통한 세례, 십자가의 도, 이 세 가지는 하나도 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만일 성도들이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이며, 하나님의 증거는 곧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이 증거합니다. 이는 사도들이 증거하다가 교회 시대에는 목사들과 교사들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출처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므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하시든지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역사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나(출3:1-6), 세례 요한이 최초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된 것은(요1:31-34) 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언에 의함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 증거하셨습니다(마3:17).

5)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것”(10)이라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믿는 것은 벌써 자신에게 증거함이 되고, 그 증거가 자기 안에서 효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연한 사실을 사실로 믿지 않는 자는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다” 하신 증거를 “아니라”고 불신하기 때문입니다(10).

6) 또 증거하신 내용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있는 생명을 통하여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실 때 그 생명이 있고, 예수님이 안계실 때는 그 생명이 없다는 사실입니다(11-12).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고 또 성도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하시기 위하여 주셨다고 하셨습니다(13). 따라서 예수님을 안 모셨거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바르지 못하면 영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거듭난 자이므로 거듭난 특성을 힘껏 발휘하여야 하며, 아울러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사역에 대하여서도 충실한 증거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고전2:2).

 

설교보충 8. 세상을 이기는 자 (요일 5:4-5) 목록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세상을 이긴다”는 뜻은,

1)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시고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40일 금식 기도한 예수님에게도 마귀는 서슴지 않고 유혹합니다. 사탄은 하늘과 땅 어디든지 다니며 유혹의 대상을 찾고(욥1:6), 신앙의 취약점이 있는 곳에 목표를 두며(엡4:27), 우는 사자처럼 유혹한다고 하셨습니다(벧전5:8). “마귀의 유혹을 이긴다”는 뜻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2)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사는 것입니다. 벧후1:4에 보시면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하셨는데,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세상의 썩어질 것들, 허탄한 것들(갈5:26,시24:4)에서 멀리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롯의 가족들이 소돔 성을 뛰쳐 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19:12).

3)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마16:24). 자기를 부정할 줄 알고, 자신에게 당면한 고난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수하는 것입니다(요12:24).

2. 어떤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할 때,

1) 거듭난 자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4). 거듭남의 교훈은 요3:3,엡2:1,벧전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거듭난 자신임을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확인은 자신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이 자기의 인격 속에 살아 계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요13:13,고후13:5,골2:12).

2)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야 이길 수 있습니다.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하셨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요, ”이것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 뜻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세상을 이기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18). ‘슈바이처’는 유명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3) 사랑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것과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 상통하는 것입니다. 5:1-2에 보시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시므로 거듭남과 사랑이 일치하고, 거듭남과 믿음이 일치하니까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사실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4)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신 것처럼 환난에 대하여 담대함을 갖는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신앙 생활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11 과 기도와 거듭난 자의 지식 (요일 5:14-21)목록으로


본문 14-17절은 “기도에 관한 말씀”이고, 18-21절은 “거듭난 자의 지식”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기도와 거듭난 자의 지식”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기도에 관한 말씀(14-17).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기도의 특권”을 가진다고 하셨습니다(14).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무엇이나 담대하게 구할 수 있고,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거듭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 들어주시는 내용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우입니다(14).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당연히 원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혜롭고 믿음 있는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 알아서 선택하여 기도하고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런 경우에 그 간구는 “얻은 줄로 알라”(15)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무엇을 간구할 때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며 사명과 신령한 복에 관한 것과 사랑 실천에 관한 것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였으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또 받은 것처럼 여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4) 만일 어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할 때는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16). 여기에 기도하는 성도는 믿음의 힘을 가진 형편이고, 기도를 받아야 할 대상은 시험에 든 성도인데 그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뜻은 구원을 박차는 신앙적 범죄가 아닌 도덕적 범죄에 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범죄하는 것이므로 타락자 또는 불신자와 같음을 의미하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음 안에서 범죄하는 도덕적 범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회개하면 사함 받고 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기하는 자체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행11:18). “사망에 이르는 죄”(16)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거스리는 것으로 믿음밖에 있는 범죄이므로 치유를 통한 소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는 다 죄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연약하여 넘어지는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로서 기도와 회개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형제를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거듭난 자가 가질 지식에 대하여(18-21).

본문 18-20절 사이에 “안다”는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이 “안다”는 내용은 거듭난 성도의 입장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거듭난 자가 알아야 할 지식이요, 이 지식을 가지면 믿음이 더욱 확고해질 것입니다.

1) “거듭난 성도는 범죄하지 않는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범죄하지 않음”은 3:9에서 말씀하신 뜻과 같은 내용으로, 죄를 멀리하려는 성도의 의지(意志)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범죄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즉, 예수님이 저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지키시는 방법은 성령님의 역사로 성도의 마음을 말씀으로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의 유혹이 죄를 의지적으로 거절하는 성도에게는 가까이 범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죄를 거부하는 믿음이 강할수록 마귀의 유혹은 멀어집니다(마4:11).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씀은, 죄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죄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성도에게 마귀는 항상 접근합니다.

2) “성도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온 세상은 악한 자의 활동 무대 안에 있음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요18:36) 하셨고, 아브라함도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요 본향은 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히11:16). 눅4:6에서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이 마귀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을 지나갈 뿐이고 천국은 영원히 정착할 곳이며, 지상의 세계는 다 마귀의 활동 무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의 타락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창3:15).

3)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신다”(20)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참된 자는 하나님이요,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엡1:17,신29:4)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바로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백과> 159번 “이성과 신앙”을 참고하십시오.

4) 거듭난 성도는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20).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을 뜻하며, 고후13:5에서도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는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5)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요 영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만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우상으로 여겨 멀리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1).

이상의 사실로 자신이 거듭난 자인가를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