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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시작하며) 3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끝마치며) 4

 

제1과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 (요 1:1~14) 7 바로가기

제2과 세례 요한의 신분과 증언 (요 1:15~28) 10 바로가기

제3과 최초의 전도 (요 1:29~51) 12 바로가기

제4과 처음 표적 (요 2:1~11) 15 바로가기

제5과 처음 표적 (요 2:1~11) 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8) 20 바로가기

제6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3:1~15) 22 바로가기

     설교보충 2. 거듭남의 지식 (요 3:3~8) 25 바로가기

제7과 구원과 심판 (요 3:16~22) 27 바로가기

제8과 두 요한의 사역 (요 3:23~36) 29 바로가기

제9과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 (요 4:1~30) 32 바로가기

제10과 주님의 양식과 두 번째 이적 (요 4:31~54) 36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 (요 4:46~54) 39 바로가기

제11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요 5:1~18) 41 바로가기

     설교보충 4. 베데스다 못의 다른 시각 (요 5:1~10) 44 바로가기

제12과 하나님과 예수님 (요 5:19~30) 46 바로가기

제13과 객관적 증언과 두 입장 (요 5:30~47) 48 바로가기

제14과 5병2어와 해상 보행 (요 6:1~21) 50 바로가기

제15과 예수님의 하시는 일 (요 6:22~40) 53 바로가기

제16과 믿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심 (요 6:41~71) 56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본문에 나타난 교훈들 (요 6:41~51) 59 바로가기

제17과 초막절에 상경하심 (요 7:1~18) 61 바로가기

     설교보충 6. 미룰 수 없는 때 (요 7:5) 64 바로가기

제18과 증언과 반응 (요 7:19~36) 66 바로가기

제19과 명절 끝 날에 있은 일 (요 7:37~53) 68 바로가기

제20과 간음한 여인과 자기 증언 (요 8:1~20) 70 바로가기

제21과 답답한 사람들과의 대화 (요 8:21~40) 73 바로가기

제22과 마귀에게 속한 자 (요 8:41~59) 76 바로가기

제23과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심 (요 9:1~23) 79 바로가기

제24과 눈뜬 자를 2차로 소환함 (요 9:24~40) 82 바로가기

제25과 참 목자의 비유 말씀 (요 10:1~21) 84 바로가기

제26과 수전절에 있은 일 (요 10:22~42) 87 바로가기

제27과 나사로를 살리러 오심 (요 11:1~37) 90 바로가기

제28과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38~57) 93 바로가기

제29과 마리아의 봉사와 마지막 입성 (요 12:1~16) 95 바로가기

제30과 때가 된 것을 예고하심 (요 12:17~33) 97 바로가기

제31과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 (요 12:34~50) 100 바로가기

제32과 발을 씻겨주신 모범 (요 13:1~17) 103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발 씻겨 주심에 대한 교훈 (요 13:1~11) 106 바로가기

제33과 새 계명을 주심 (요 13:18~38) 108 바로가기

제34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 (요 14:1~14) 110 바로가기

     설교보충 8.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113 바로가기

제35과 보혜사와 평안 (요 14:15~31) 115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요 14:27) 118 바로가기

제36과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1~15) 120 바로가기

제37과 선택 받은 자의 사명 (요 15:16~27) 123 바로가기

제38과 미리 알리신 말씀들 (요 16:1~15) 125 바로가기

제39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16:16~33) 127 바로가기

제40과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 17:1~26) 129 바로가기

제41과 예수님이 잡히신 과정 (요 18:1~14) 133 바로가기

제42과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 (요 18:15~27) 135 바로가기

제43과 빌라도의 재판(1) (요 18:28~40) 137 바로가기

제44과 빌라도의 재판(2) (요 19:1~16) 139 바로가기

제45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요 19:17~30) 142 바로가기

제46과 사망 확인과 장례 (요 19:31~42) 144 바로가기

제47과 예수님의 부활 (요 20:1~18) 146 바로가기

제48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 20:19~31) 148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복된 믿음 (요 20:29) 150 바로가기

제49과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심 (요 21:1~14) 152 바로가기

제50과 베드로를 재차 소명하심 (요 21:15~25) 154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 (요 21:1~14) 157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시작하며)


필자가 2003년 6월 24일 오전부터 요한복음 강론을 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구약의 강론서로는 창세기와 이사야서, 호세아서만 기록하였고, 신약에서는 요한복음과 로마서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만 기록하지 못하였는데, 강론서보다 이미 설교한 문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시급하여 요한복음 설교문을 살핀즉 그 분량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강론서를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든 작업이지만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학자들의 저술서를 살피면 요한복음 서론 부분에서 많은 글을 읽게 되지만, 중요한 것은 본문의 내용을 어떻게 쉽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시고 성경 공부를 하시는 평신도님들이 가장 이해하기 쉽도록 강론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방법은 본문을 부분별로 대·소지를 정한 후 그 부분의 해석과 중요한 교훈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교문에 있는 내용이 상당 부분 강론으로 편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론문을 읽으시기 전에 제가 집필한 『기독교신앙백과』에 나타난 요한복음의 개론(237번, 614p)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2003. 6. 24.


필자 지 영 근 드림

먼저 드리는 글 (집필을 끝마치며)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고 쓰임 받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필자는 목사의 사명이 가르침에 있는 것과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빌 2:16의 말씀과 진리를 자세히 설명하신 예수님의 모범(눅 24:27) 등에 감동을 받고 설교문을 요약하는 것보다 강론을 더 기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003년 6월 24일부터 본서의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9월 6일에 완성을 하니, 큰 만족감을 갖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필자도 요한복음을 많이 읽고 설교를 하였지만, 강론문을 쓰면서 깨달은 바가 컸습니다. 그 동안 갖고 있던 고정관념도 한 가지 시정되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금요일 새벽에 재판을 끝낸 것이 아니고 목요일 정오 12시라는 사실을 요 19:14(때는 제 6시라)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나 원문 상으로 연구하지 못한 점은 아쉬우나 평신도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 만큼 평신도님들이 이 강론서를 한번쯤 읽으시면 본문을 3~4회 통독하신 것만큼 깨달음의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을 갖고 보람을 느낍니다. 계속 몇 권 더 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3. 9. 6.


필자 지 영 근 드림

 

 

제 1 과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 (요 1:1~14)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세 가지 제목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님”(1~5절), ② “선구자 역할을 한 세례 요한”(6~8절), ③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9~14절)입니다. 이 세 대지를 종합하여 총 제목을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님(1~5절)

1)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분이라”(1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태초는 ‘엔 알게’(Ἐν ἀρχἦ)로 영어에서는 “시작하는 때”로 번역하였는데, 이 뜻은 영원 전부터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 1:1에 나타난 “태초”처럼 만물 시작의 때가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을 뜻하시므로, 영원자는 사실상 시작과 끝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입니다(히 7:3, 계 1:8). “말씀이 계셨다”는 뜻은 ‘엔 호 로고스’(ἦ ὁ λόγος)로, 영어로는 ‘was the word’로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 “말씀”으로 번역된 내용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 “로고스”로만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그라페’(요 20:9), ‘로기온’(롬 3:2), ‘레마’(마 4:4), ‘에이폰’(마 28:6), ‘에이로’(요 12:5), ‘라레오’(마 9:18)로도 사용되었으므로 ‘로고스’란 용어가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저자 요한이 이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어려운 용어로 알고, 철학의 대상 또는 만물 기원의 원리로 연구의 대상을 삼은 줄 압니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탈굼”(1세기 경에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것)에 하나님을 말씀으로(출 19:17, 31:13), 사 48:13의 하나님을 “이성”으로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또 주전 560년경의 헬라의 “크리투스”는 로고스를 말씀과 이성으로 이해하여, “이는 온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정신이라” 하였으며, 1세기 당시의 스토아 철학자들도 ‘로고스’를 “비인격적인 우주 통치의 막연한 존재”라 하였고, 주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Oholon은 ‘로고스’를 신, 인간의 중간 존재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어떤 존재로 계셨는가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기 이전이므로 몸은 없으나 신분과 내용이 계신즉 “신분은 곧 하나님이시고, 내용은 말씀이며, 또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은 말씀(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님)과 하나님이 삼위일체적 견지에서 한분이라는 뜻입니다(초신자님들은 삼위일체의 뜻을 교리학에서 별도로 배우셔야 합니다. 필자가 쓴 『기독교신앙백과』 112p와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참고하십시오). 1절 끝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는 내용에서 원문은 “하나님은 그 말씀이었다”(Οεός ήν ὁ λογός)로 되었는데, 정관사 ὁ(호)를 하나님 앞에 붙이지 않고 말씀 앞에 붙인 것은 말씀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강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2) 2절에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은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말씀 신분,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빌 2:6)으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는 하나님과 “존재의 기원이 같다”는 뜻입니다.

3)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하심은 예수님이 곧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기사”가 나오지만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창세기 1장에서, 예수님의 창조 기사는 본문에서, 또 성령님의 창조 기사는 사 61:1, 마 10:20, 갈 4:6, 롬 8:2, 욥 33:4, 요 3:5~6에 나타나 있습니다.

4) 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빛으로 묘사된 생명을 강조하셨습니다. 요 14:6에서는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살아있는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포함한 동물이나 식물에 다 해당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빛”으로 묘사한 생명은 “거듭난 인격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를 때는 어두움에 처한 것이나, 진리를 알 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것이므로 거듭난 인격체로써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본문의 생명은 “조에”(Ϛωή)로써 정관사가 없고, 요 14:6의 “생명”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정관사가 없는 것은 일반적 생명을, 있는 것은 특별한 생명(거듭난 인격체)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5) 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영생을 주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으나 어두움(불신 세계)이 깨닫지 못함은 진리를 거스림에 대한 객관적 표현입니다.

2. 선구자 역할을 한 세례 요한(6~8절)

1) 6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한 말씀은, 사도 요한이 자기보다 먼저 사역을 하였던 세례 요한에 대하여 증언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 함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뜻도 있지만(롬 10:15, 갈 1:1) 구약 성경에서 그의 출현을 예언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 말 4:5~6, 3:1).

2) 7절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말씀하였습니다.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자기의 전도 사역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므로, 요한의 사역은 “오직 예수님을 메시야로 나타내고 증거하는 일이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3) 8절에서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위대한 사역자였습니다. 말라기 3장의 예언과 예수님의 칭찬(마 11:11)이 이를 입증하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 증거자일 뿐 메시야가 아님을 성실하게 증거하였음”을 입증한 말씀입니다(요 1:19~27).

3.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9~14절)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고, 사도 요한이 증거한 내용입니다.

1) 9절에서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참 빛”이란 빛의 근원이란 뜻입니다. 마 5:14에서는 “성도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체 역할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한 뜻은 빛이 만물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빛의 역할을 연구해 보십시오. 우선 밝히는 일은 진실을 뜻하고, 곧게 비추는 것은 정의를 뜻하며, 빛의 역할로 모든 생명이 생동한즉 이는 구원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한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요14:6).

2) 9~10절에서 “그 빛이 세상에 와서 계셨고 각 사람에게 비취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이전에도 모든 이웃에게 빛 된 생활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며, 11절에서는 “자기의 땅(창조의 소유자)에 오시매 자기 백성(창조된 만물)이 영접하지 않았다” 하므로 예수님 초림 당시에 사회가 예수님을 냉대한 일을 저자가 회고한 내용입니다. 비택자는 진리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3) 그러나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자기의 왕으로 영접하면서, 그 이름 “예수”의 뜻(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하심, 마 1:21)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권속, 영생 천국의 상속, 보호, 인도, 섭리의 책임 등….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은총의 관계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4) 13절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 된 근거를 설명하심에 있어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 하셨으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거듭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3:3, 요일 3:9)> “거듭남”이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을 창조적으로 다시 살려서 새 인격체가 되게 하시는 일입니다(엡 2:1). 성경을 진리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다 거듭남으로 변화 받은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5) 14절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도성인신, 즉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가지신 것이요,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신 것을 상기한 것이고, 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존귀한 모습을 격찬한 내용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은 “인류에게 베풀어주실 축복과 참 되심이 충만하시다”는 뜻입니다. 이 “충만”이란 용어는 “플레레스”(πλήρησ)인데 “채운다, 성취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도들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은혜의 주, 영광의 주로 감명 있게 믿고 느끼셔야 할 것입니다.

 

제 2 과 세례 요한의 신분과 증언 (요 1:15~28) 목록으로


본문 15~18절은 “세례 요한이 증언한 내용”이고, 19~28절은 “세례 요한의 신분에 대한 대화”입니다. 이 두 대지를 종합하여 “세례 요한의 신분과 증언”으로 정하였습니다.

1. 세례요한이 증언한 내용(15~18절)

1) 15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예수님이 내 뒤에 오셨지만(요한 자신보다 나중에 출현한 것을 뜻함) 나보다 앞선 분이고,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 도성인신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즉 그렇게 증언한 것이요,

2) 16절에서 “우리가(모든 무리들) 다 그의 충만한 중에서(14절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하셨음) 은혜를 받는 것이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 예수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를 힘입어 살고 있은즉 은혜 위에 은혜(충만을 강조한 뜻)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과거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고(요 4:24), 육체가 없으신즉 그림자도 없는 분입니다(약 1:17). 당연히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하나님 안에 감추이듯 계셨다는 뜻) 독생하신(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예수님을 뜻함, 빌 2:5)이 나타내셨다” 하므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으로 증언한 것입니다(요 14:9).

2. 세례 요한의 신분에 대한 대화(19~28절)

1) 19절에서 유대인들은 광야에 출현한(눅 3:4) 세례 요한의 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를 알기 위한 방법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성전에서 일하는 자들, 민 3:5~10)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요한의 신분을 말하게 하였을 때, 20절에서 세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않았다” 하였으니, 진실은 곧 자기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하셨지요(딤후 2:13).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회에서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즉 이는 행위상으로 부정적 요소를 갖고 있음일 것입니다. 개인의 신분 노출을 꺼리는 이유 중 혹 자신의 약점을 감추어 남을 속이고 덕을 보려는 나쁜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자기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20~21절에서 세례 요한은 자기 신분에 대하여 밝히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말 4:5~6에서 “엘리야를 보낸다”는 예언이 있고, 마 11:14에서 세례 요한의 출현이 그 성취라고 하셨음. 그러나 이 뜻은 구약의 엘리야가 그대로 다시 온 것이 아니고 엘리야와 같은 사명을 갖고 왔기 때문에 엘리야가 아니라 한 것임), 또 그 선지자도 아니라” 하였으니, 여기의 “그 선지자냐?”고 물은 것은 신 18:18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냐?”는 뜻인즉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선민들이 기다린 “그 선지자”는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렇게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6:14).

3) 22~23절에서 질문자들이 “그러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였을 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사 40:3)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례 요한의 출현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인 점과 자신의 인격을 부인하고 소리의 내용만 중요하다는 뜻”을 말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인격을 부인할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고,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명만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뜻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닦게 하고(회개를 뜻함) 믿음의 지식(예수님을 알리는 뜻)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24~27절에서 보냄을 받은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인데(24절) 그들이 또 묻기를 “그리스도나 엘리야나 그 선지자(신 18:18)가 아니면 왜 세례를 주느냐?”고 하였을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예수님을 뜻함)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신들메”에 대한 말은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함에 있어서 그 격차가 큰 것을 말한 것이니, 곧 창조자와 피조물의 격차인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뜻은 성령으로 세례 주실 예수님에 비할 때(1:34) 의식에 불과함을 나타낸 것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지적에 문제될 것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선지자요, 일반 선지자보다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마 11:19) 세례를 준 일에 대하여 흠잡을 수 없지만, 바리새인들은 그의 신령한 사명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므로 세례 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오늘의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푸는 것처럼 “회개하고 믿음 가진 증표”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게 하는 의식입니다. 유형 교회에서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마 28:19~20).

5) 28절에서 “이 일은 요한이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3km 지점에 있는 나사로의 고향 이름이지만,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는 다른 장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최초의 전도 (요 1:29~51) 목록으로


본문을 일고 “최초의 전도”란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① 29~39절에서 “예수님을 직접 소개한 세례 요한의 전도”가 기록되었고, ② 40~42절에서는 “안드레의 전도”이며, ③ 43~51절은 “예수님과 빌립의 전도”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을 직접 소개한 세례 요한의 전도(29~39절)

1) 29절에서 이튿날(앞부분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예수께서 자기(세례 요한)에게 나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였으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계시로 알고(1:31~34) 직접 소개한 것이며, “세상 죄를 지고 가심”은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의 죄를 십자가로 대속하시는 뜻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구약시대에 “상징적 제물로 드린 어린양의 실상”이란 뜻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성경으로)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2) 30절은 26절의 말씀을 확인한 것입니다. 26절에서는 예수님을 지목하지 않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시다”고 만 하였는데 다음날 확실하게 지목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3) 31~34절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이유와 메시야 예수님을 알게 된 과정을 말씀하셨는데,

① 물로 세례를 주게 된 것은 33절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이며(계시로 받았다는 뜻), 또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31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의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찬 예식도 기념의 목적과 전파의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고전 11:25~26) 세례의 목적은 회개의 증표로 주는 목적과(마 3:11) 전파의 목적으로 베푼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②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였습니다(31, 33절).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로서 내려 누구에게 머물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인 줄 알라”(33절) 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34절). “성령이 비둘기같이 머물렀다”는 뜻은 어떤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름의 움직임으로 그 같은 형태를 보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출 13:21).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그 분(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18절)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뜻은 물세례처럼 의식이나 상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생명과 변화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요 3:3)가 바로 성령 세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4) 35~39절에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의 두 제자(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요, 40절, 또 한 사람은 익명인데 이 사람이 곧 이 글을 쓴 사도 요한으로 짐작됨, 21:20)를 예수님 따르도록 인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인한 그 이튿날 세례 요한은 자기의 두 제자와 함께 섰다가 예수님이 다니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 36절)라고 증언한즉, 두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39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역자가 성도로 하여금 교역자 중심의 신앙생활보다 예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장하는 의미와 인적 관계에서 신적 관계로 전환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정신이고, 생활이었습니다(요 3:30). 예수님은 그 두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느냐?(무슨 일로 왔느냐?의 뜻)” 하셨고,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거처를 물은 것이며, 주님으로 호칭하지 못한 망설임이 있은 듯함)” 하였고, 예수님은 “와 보라” 하시므로 자신의 거처를 개방하시니, “그날 함께 거한즉 그 때가 10시쯤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소는 예수님의 제2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추측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이며(마 9:1, 4:13, 막 2:1), 또 45절에서 갈릴리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시란 오후 4시를 의미합니다.

2. 안드레의 전도입니다(40~42절).

세례 요한의 전도로 예수님을 따르게 된 “안드레”는 집에 오자 자기의 형제(유대인들은 형과 아우를 중요히 여기지 않고, 통상적으로 형제, ‘아델포스’란 용어를 씀) 시몬(베드로의 본래 이름, 제자 되었을 때 예수님이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로 명명해 주셨고, 아람어로 반석의 뜻은 게바임, 마 4:18, 16:18)에게 찾아가서 메시야 만난 사실을 말하고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즉 예수님이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심으로 베드로가 제자 될 것을 예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전도의 절차는 전도자가 먼저 예수님을 보고(배우고)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전도 대상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과 생활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였을 때 예수님이 “네가 시몬이구나” 하시고 이끌어주신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3. 예수님과 빌립의 전도에 대하여(43~51절)

1) 43~44절은 예수님이 빌립을 전도하신 말씀입니다. “이튿날 예수님이 갈릴리로 내려가시다가(가버나움에서 낮은 지역으로 가신 뜻)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 하셨는데, 빌립은 베드로, 안드레와 한 동네 사람이요, 그 동리는 “벳세다”라고 하였습니다.

2)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빌립이 전도를 받자 즉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새 순에 열매가 맺는 것처럼 초신자가 전도를 잘 합니다. 그 이유는 안 믿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45~51절에는 빌립과 예수님이 함께 “나다나엘”을 전도하신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먼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예언한 그 이를 우리가(한 동리 사람인 베드로, 안드레를 의미하는 뜻)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더라” 한즉 “나사렛(시골 동리라는 뜻)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와 보라” 하여,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자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평하셨으니, 이는 “나다나엘”의 언행이 순박함을 아신 때문이었습니다(46~47절). 48절에서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였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하셨으니, 이 뜻은 예수님이 표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모든 사람을 살피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시 139:1~3, 막 2:8, 히 4:12). 49절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 답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하고 자기의 소신을 밝힌즉, 5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질 때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은 칭찬스럽지 못한 것입니다(요 20:27~29). 성경 말씀으로 믿는 것이 칭찬스러운 것입니다. 빌립은 그렇게 믿었고(45절), 예수님도 그것을 주장하셨습니다. 눅 16:31을 꼭 찾아 확인하십시오.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다른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의미하겠지만, 그 중 한 가지 일을 51절에서 소개하셨습니다. 즉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나다나엘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적 축복의 세계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처음 표적 (요 2:1~11) 목록으로


11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하셨으니, 이 표적은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점과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도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요 4:48). 좋은 현상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긍휼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경우도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키워주시는 목적으로 이적을 행하시기도 한 것입니다(히 2:3~4).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처음으로 이 이적을 체험하였을 때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연구하는 데는 ① 이적을 나타내시게 된 경위(1~6절)와 ② 방법(7~8절)과 ③ 결과(9~12절)를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이적을 나타내시게 된 경위(1~6절)

1) 1절에서 “사흘 되던 날”은 앞부분(요 1:45~51)에서 예수님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신 날로부터 3일 후를 의미하고,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음”에 대하여 “갈릴리”는 도의 이름이고, “가나”는 동리 이름입니다. 이 동리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동북으로 약 40리 지점에 있습니다. 현재는 시골 마을과 같습니다. “그곳에 혼인이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고, 또 예수님과 제자들도 청함을 받아 간 것”(2절)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그 집에 가신 것은 혼인을 귀히 여겨(히 13:4) 축하하시기 위함입니다.

2) 3절에서 “그 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형편이었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다”고 하였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집의 계획의 실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적 나타내실 섭리”를 모르므로 준비를 잘 하고, 손님을 적당하게 초청하였어야 할 것입니다(눅 14:28).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예수님께 알린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3) 그 문제는 4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답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호칭한 것은 이상한 일 같지만, 여자라는 “구나이(γύναι)”가 경어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라 하지 않고 존경하는 여인(woman)이라고 하였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우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어머니로 호칭한 사례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실 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피를 받지 않은 점과 가족을 초월하신 공인임을 나타내신 일이라 할 것입니다(마 12:50, 요 19:27).

4) 이때에 예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마리아가 포도주 모자란 사실을 알린 의도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적을 나타내 보라”는 의미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믿었을 뿐 아니라, 40일 금식하신 일로나,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일 등을 알았으므로 이적을 나타내실 것을 넌지시 청한 것이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신 뜻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구속 사업인즉 마리아가 관계할 일이 아니며, 또 그 시기도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이적은 메시야를 증명하는 표적으로 누구의 뜻에 의존하여 시행할 일이 아니므로 그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5)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으로 충분한 이해를 한 줄 압니다. 그래서 모든 것(표적에 관한 것)을 예수님께 맡긴 후, 5절에서 “그 집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대로 순종하라”고만 당부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6) 그 집에는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었으니(6절), “결례”란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제사의식과 관련된 것이고, 유대인의 집에 물통이 있다는 것은 제사의식에 근거한 행사를 일반적 행사로 변화시켜 전통이 되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라는 뜻이 바로 성경의 결례를 따름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장로의 유전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 15:2). 구약 율법에는 씻는 규례가 많습니다. “씻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정결의 상징입니다. 관유를 만들어 성물에 바르고(출 30:22~32), 피를 찍어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며(레 14:1~32), 잿물로 씻게도 하고(민 19:1~13), 무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손을 씻기도 하며(시 26:6, 73:13, 마 27:24), 위생의 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삿 19:21, 삼하 12:20). 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결례를 따라 물통을 놓은 것”은 율법적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2. 이적을 나타내신 방법(7~8절)

7~8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말씀(명령)을 순종하는 과정에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혼인집에 있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순종하였고, 또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을 때도 순종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은 오직 창조력을 가지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셨는데, 꽃이나 열매가 꼭 같은 토질에서 꼭 같은 영양 공급을 받지만, 꽃의 색과 냄새가 다르고, 열매의 맛도 종류에 따라 다르게 맺으며, 또 바다의 물고기도 꼭 같은 바닷물의 영양을 섭취하지만 물고기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른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비한 창조의 능력이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순종의 절차에 따라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줄로 믿는 것입니다.

3. 이적을 나타내신 결과(9~12절)

1) 9절에서 “연회장은 포도주 생산의 출처를 알지 못하였으나 물 떠온 하인은 알았다” 하였으니, 연회장이 하인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가까이 안 하였은즉 놀라운 일을 알지 못하였음이 당연하고, 하인은 비록 낮은 계급일지라도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을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순종한 까닭으로 놀라운 표적을 가장 먼저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9~10절에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것을 두었다” 하므로, 그 포도주 맛이 처음 것보다 좋은 것임을 입증하였습니다.

3) 11절에서 그 일로 인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더욱) 믿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4) “그일 후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셔서 거기 오래 계시지 않았다”(12절) 하셨으니,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동쪽으로 약 70리쯤 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 고향이나(마 4:13) 전도 사역 한 곳에 오래 머무시지 않은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고향이지만 능력의 역사에 비할 때(마 4:13, 18~22, 9:9) 완악한 면이 더 많았으므로(눅 10:15, 마 12:23) 다른 곳의 전도를 더 시급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 이적의 의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시는 뜻과 예수님이 창조자 및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인류의 생활을 담당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설교문을 참조하십시오).

제 5 과 최초의 성전 청결 (요 2:12~25) 목록으로


본문 ① 13절은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처음 상경하신 일”이고, ② 최초에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이며(14~17절)이며, ③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예고하신 말씀이고(18~22절), ④ 몸을 의탁하지 않으심에 대한 말씀입니다(23~25절). 대표적인 제목으로 “최초의 성전 청결”로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처음 상경하신 일(13절)

13절의 “유대인의 유월절”에 대하여는 출 12:1~20, 마 26:2, 눅 32:41, 22:1의 강론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사전을 구입하여 찾아보시면 더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하여서는, 본문의 내용이 공생애 중 최초의 상경으로 여겨집니다. 본인이 집필한 『7분설교 8집』 중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란 제목의 글 중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2. 최초에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14~17절)

예수님이 두 번째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하신 것입니다(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

1) 14절에 보시면 “성전 안에서(제단이 있는 마당을 뜻함)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이 성전 가까이 와서 제물(소, 양, 비둘기)을 사서 드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장사 행위가 성전 마당까지 점유한 상태였고, 돈을 바꾸는 일도 이방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환전 영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신성한 곳이고, 세속적인 일에서 구별되어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한 것은 세속에 물든 까닭이었습니다.

2) 이것을 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도 (그릇에서)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고, … 비둘기도 내 집에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5~16절). 과격한 듯하나 혈기를 부리신 것은 아닐 것이요, 장사꾼들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분 내어 그렇게 하신 줄 압니다. 구약의 성전은 계시의 기관이고, 구별된 장소로 제사와 기도와 율법 교육을 하는 하나님의 집인즉, 그 이외의 다른 일을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셔야 할까요? 구약의 성전을 예수님의 육체라 하셨고(21절), 신약의 교회도 “주님의 몸이라” 하셨은즉(엡 1:23)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신성시하고, 또 주님의 세우신 목적에 따라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기관, 단체)는 주님의 몸이지만, 예배당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예배당의 소유를 원하신 바가 없으나 예수님의 것으로 구별하였을 때는 주님의 것이 되므로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단체이면 세상은 속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사역 아닌 것이나 물질”이 속된 것이며 그런 사역을 교회라는 기관의 명의나 단체에서 시행하지 않음이 좋은 것입니다. 교회라는 기관을 상대로 물질 사업을 하는 것은 속된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사회적 범주의 대상으로 여겨서 불신자와 함께 사회적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는 식으로 신령한 것은 교회에서, 일반적이고 속된 것은 사회적 범주에서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기관에서 구제금은 모으되 장사하는 일은 교회 밖에서 하십시오. 그리고 생업을 유지하는 문제나 미래 생활의 대책(보험)도 교회 밖에서 하셔야 합니다.

4)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구약 시 69:9의 말씀인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위하는 열성) 나를 삼키리라 한 말씀을 기억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이 “성전을 사모한 열심 때문에 위험 당한 것”을 고백한 말씀이지만, 또 예수님이 성전을 사랑하여 악당들로부터 핍박의 대상이 될 것을 예언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런 뜻으로 구약의 말씀을 기억한 것이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마 26:61).

3.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예고하신 말씀(18~22절)

1)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하였습니다. 즉 성전을 청결케 할 권위가 있으면 그만한 표적을 나타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 하셨으니, 이는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21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2) 그러나 유대인들은 20절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만큼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는데(헤롯 왕이 46년째 짓고 있었으며, 주후 64년에 완공되었다가 다시 70년에 파괴되었다 함. 예수님 탄생 시에 있었던 헤롯 왕이 주전 20년경부터 시작하였다 함) 어떻게 3일 만에 일으킨다고 하는가?” 하고 의미 없는 말처럼 들어 넘겼을 것입니다.

3) 또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말씀을 예견하지 못하였다가 “부활하신 후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22절) 하였으니 이렇게 심령이 민감하지 못하면 그 믿음이 더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눅 24:25).

4. 몸을 의탁하지 않으심에 대한 말씀(23~25절)

1) 23절에서 유월절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신즉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절에서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25절에서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마 9:4). 따라서 외식자나 적대시 하면서 따르는 자도 아셨기 때문에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의탁하시지 않고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유월절 때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셨으나 제사장의 지시에 따라 유월절 제물을 드리는 일에 참여하신 기록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심에 대하여(롬 10:4) 율법 시행을 중지하신 증거이고,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1. 처음 표적 (요 2:1~11) 목록으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행하신 표적이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던 차, 기독교의 본질(기독교의 성격과 생활 등)을 상징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가장 많이 교훈하신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1. 예수님은 혼인을 귀히 여기시고(히 13:4), 혼인을 주관하시며(창 2:22, 마 19:6),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혼인을 귀히 여기시지 않으시면 혼인집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창 2:18). 그런 중에 성도는 기독교 생활이 성도와 예수님이 영적으로 결혼하는 것과 같다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가서의 취지와 엡 5:28, 계 21:2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도가 신부된 자격으로, 신랑 된 예수님과 믿음으로 영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초 이적을 혼인집에서 나타내신 것에 그런 교훈이 있다고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니까 기독교를 혼인 잔칫집 분위기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마 22:2에 보시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말씀”이 있고, 마 25:1에는 “열 처녀가 신랑을 맞는 비유 말씀”이 있는데, 이 혼인 잔칫집 분위기가 바로 기독교 생활의 실태가 되어야 하고, 또 교회의 분위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면 반갑지 않은 사람은 없고, 미워할 대상도 없습니다. 과거에 안 좋았던 사람을 잔칫집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사위의 3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하고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잔칫집만큼만 즐겁고 화목한 세계가 되기를 바라시는 뜻으로 예수님이 혼인집에서 이적을 나타내신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종교입니다. 혼인집에서 예수님을 몰라보았을 때는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겠지만, 알고 난 다음에는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 되시고, 안방 어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제일주의 아닙니까? 잔칫집에서 예수님이 표적을 나타내시니까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제자들의 믿음이 생겼다”(1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예수님을 가장 으뜸 어른으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 생활을 시작하려면 먼저 자신을 부정하다 못해 죽이고, 자기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16:24, 고전 15:31, 엡 3:17, 빌 1:21).

4. 포도주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삿 9: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생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계명의 강령이 그렇다고 마 22:34~40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강령입니다. 사랑을 멀리 하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5.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시키며, 깨끗지 못한 자를 거룩한 자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삼는 것입니다. 맹물이 포도주 될 때 어떤 절차로 변화되었을까요? 첫째는 색이 변하고, 둘째는 맛이 변했으며, 셋째는 용도가 변하고, 넷째는 가치가 변한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를 믿자 소망을 갖게 되니 기쁨의 모습이 되고, 인격의 변화가 오며, 그 생활 목적과 방법도 달라지고, 나아가서는 존귀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변화의 목표는 구습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는 것이며(엡 4:21, 롬 12:2, 8:29), 방법은 변화의 마음을 갖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롬 12:2, 요 17:17, 딤전 4:5). 마음의 변화, 용모의 변화, 생활 목표와 방법의 변화, 존귀의 변화를 주시는 종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기독교는 문제 해결의 종교입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문제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습니다. 이적이 나타나야만 해결의 길이 열리겠지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이적과 특별 섭리 속에서 살고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주의 운행과 생명의 약동이 다 하나님의 이적 속에 보존되고 운행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먼저 필요한 문젯거리를 찾아내시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노력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방법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살피시면 크게 깨닫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롬 4:17).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절차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고(왕하 10:24),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며(눅 5:5),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난 일(요 11:38~41) 등, 순종 없이 이적이 나타난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이 곧 해결책입니다.

7. 기독교는 나중이 더 좋아지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의 일생은 거의가 처음에 좋다가 나중에 쇠하고 죽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포도주 접대도 그렇게 속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잔칫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준 술이 더 좋았던 것처럼 기독교의 은혜는 나중에 받을수록 좋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날로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하였습니다. 가나 혼인집의 처음 표적에서 기독교의 본질적 의미를 교훈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6 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3:1~15) 목록으로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말씀입니다. 이 대화의 내용을 1~15절까지로 정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인자로 나타내시면서 대화를 끝낸 부분이 15절이기 때문입니다. 15절까지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16절부터는 예수님을 3인칭(저를)으로 표기한 것을 보아 요한이 스스로 영감 받은 말씀을 증언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1~2, 4절은 “니고데모의 방문과 고백”이고, ② 3, 5~15절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인데, 11절중에서 “우리”라는 복수가 두 번 나오는 것을 보아 단독 대화가 아닌, 즉 제자들 중에 누가 대동한 상태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우리”라는 용어에 포함된 사람이 이 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 21:20).

1. 니고데모의 방문과 고백(1~2, 4절)

1) 1절에서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의 뜻은 “이긴 백성, 또는 사람들의 승리자”의 뜻이며, 헬라 식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바리새 종교적 당원입니다. “바리새파” 또는 바리새인에 대하여는 마 3:7과 눅 5:17의 강론 부분, 그리고 마 23:1~33에서 그 실체를 살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적 이단파로써 예수님을 핍박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도 예수님을 바로 알기 원한 “니고데모”가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의 관원” 즉 유대인 공의회(산헤드린 회집소)의 한 회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관원쯤 되면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실세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0절에서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시므로 그의 지도자적 신분을 거론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호칭할 때 “랍비여”(2절) 한 것과 예수님이 니고데모의 신분을 “선생”으로 나타내신 “디다스카로스”와는 차이가 있느니, 전자는 저명한 어른을 뜻하고, 후자는 보통 훈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2) 2절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자기의 측근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또 그가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더 확실하게 알기를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은 이런 데서부터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우리가(혼자 오지 않았거나 자기와 뜻이 같은 동료가 있음을 뜻함)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였으니, 그의 예측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3) 3절에서 예수님이 “거듭나는 진리”로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무지한 입장을 드러냈으니, 곧 4절에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재생산) 있습니까? 모태에 두 번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는 “거듭난다”는 의미를 육체적 생산으로 상상하여 불합리한 질문을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선생으로서 그만한 일도 모르느냐?”(10절) 하시는 핀잔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3, 5~15절)

1) 3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강조하는 의미)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① “거듭남”의 원문은 “아노덴”(ἄνωθεν)으로 “위에서 새로이 낳음”입니다. 이 뜻을 바울 사도는 엡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신 일”(창 2:17, 3:8), 또 “새 사람을 입은 일”(엡 2:15, 4:24), 새로운 피조물(고전 5:17), 새 생명을 받음(롬 6:4), 새 마음을 주심(롬 7:6), 마음의 할례(신 30:6, 골 2:11), “영적 부활”(골 6:4~6, 엡 2:5, 골 3:1)이라 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썩지 않은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벧전 1:23), 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전 1:4)으로 표현하였으며,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요일 3:9, 5:1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말씀을 거듭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면, “영적, 인격적,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재창조(다시 살림)이고, 마음으로는 변화된 새 마음입니다(겔 36:26). 겔 36:26에 보시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② 다음에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뜻은 하나님을 믿고 신앙의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와 구원의 의미와 천국과 심판 등을 일체 모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그 세계를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2)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3절을 더 자세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곧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왜 거듭나는 것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물은 씻음의 재료로써 불신앙과 구습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해주시는 은혜를 상징하고(요 13:10), 성령님은 실제적으로 영적 생명과 죄 씻음과 변화를 주시는 역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성결하게 하신 일을 물세례로 확인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내적 사역을 하시고, 물세례는 외적으로 인을 치는 것입니다.

3) 6~7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한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거듭나는 의미를 육체적 생산과 영적 생산을 대조하여 “영적으로 다시 생산하는 은혜”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4) 8절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 하니라” 하시므로 거듭나는 은혜가 하나님의 전권으로 신비하게 성취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고(창 8:1, 민 11:31, 출 10:13, 욘 4:8, 마 8:26), 실체는 보이지 않으나 그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전권 하에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되, 사람이 그 순간을 체험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결과는 뚜렷하게 나타날 것인즉, 곧 믿음의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9~10절에서 “니고데모”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였고, 예수님은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시므로 영적 무지를 깨우치셨습니다.

5) 11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예수님과 제자들)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바리새인들)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아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이고, “본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증거를 나타내신 표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표적들과 예수님의 신분을 믿음으로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12절에서 “내가 땅의 일(예수님이 나타내신 표적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영적 세계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셨고,

6) 13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예수님이 도성인신하여 오신 뜻)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자”란 용어는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 용법의 의미가 다양하지만, 신약 성경에 나타난 인자는 예수님이 직접 자기를 호칭하신 말씀이므로, 그대로 받되 “사람의 아들 즉 인간으로 오신 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 외에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뜻은 먼저 부름 받은 성도의 영혼이 천국에 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깊이 교제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타내실 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뿐이라는 뜻입니다(요 17:21, 24; 마 11:27, 16:15).

7) 14~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민 21:9)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쳐다보게 한 것은, 죽을 자를 믿음으로 살리게 하는 방법이요, 또 그 “구리 뱀”은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뱀에 물려 죽을 자들이 살기 위하여 믿음으로 구리 뱀을 쳐다본 것처럼 바리새인들이나 신약의 백성들도 그렇게 복음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16절에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 “니고데모”에 대한 기록을 살피면, 요한복음에 세 번 나옵니다. 첫째는 본문이고, 다음은 요 7:45~53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시켜 “예수님을 책잡아 잡아오라”고 명하였으나, 하속들이 잡아오지 못한 이유로 “그분의 말씀처럼 교훈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한즉 바래새인들이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하면서 하속들을 책망할 때 니고데모가 나서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도 전에 판결하느냐?” 하므로 바리새인들의 무법함을 지적한 일이 있었고, 그 다음 요 19:38~39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 지내려 한즉, 이때에 니고데모가 나타나서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을 갖고 와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고 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생전에도 은밀하게 믿음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바리새인들의 핍박을 만회하려고 떳떳하지 못하게 마음으로만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더 큰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다음 설교문을 꼭 참고 하십시오.)

 

설교보충 2. 거듭남의 지식 (요 3:3~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셨고, 또 “물과 성령으로 탄생하여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거듭 난다”는 뜻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탄생함”과 같은 뜻이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뜻은 방대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난 다음 천국에 가는 것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시간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박물관을 하나님 나라로 비유했을 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박물관에 들어간 것이 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다 구경하려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도 천국의 주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고(믿음으로 모시는 뜻), 그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믿은 후 성경대로 살려고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고, 또 예수님과 생활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이며, 나아가서는 마귀가 활동하지 못하는(욥 1:6, 계 20:10) 내세의 천국도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또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본다”는 뜻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으며,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 있고, “들어간다”는 뜻은 구원 받은 은혜를 전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문제는 거듭남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1) 거듭남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살펴야 합니다. 겔 35:26에서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신다” 하였고, “거듭남”이란 “아노덴”의 뜻이 “위에서 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일 3:9, 5:1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는 “새 생명을 받는 것”(롬 6:4), 새 마음을 주시는 것(롬 7:6),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고전 5:17), 새 사람을 입는 것(엡 2:15, 4:24)이라 하셨고, 그 외에도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사는 것”이요(엡 2:1), “마음의 할례이며(골 2:11) 영적 부활이라” 하였고(골 3:1, 6:4~6; 엡 2:5), 베드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전 1:4)이며, “썩지 않는 말씀의 씨로 되는 것”(벧전 1:23)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이상의 용어들을 참고할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선 영적 생명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림 받는 것이고, 그 영적 부활의 상태가 마음의 변화로 오며, 또 변화되는 마음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믿음의 씨로 된다” 함은 마음에 “성경이 믿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살후 1:10). 거듭나는 것은 “영적 생명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면 그 생명이 언제 지음 받았고, 언제 죽었는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영적 생명으로 지음 받은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실 때 품부되었고(창 1:26, 2:7), 죽은 것은 아담이 타락하였을 때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창 2:17)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영적 죽음이고, 육체의 죽음과 심판은 다음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창 3:8).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오늘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다 전도자나 교회를 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났다, 위에서 났다, 하나님이 죽은 영을 다시 부활시켜 주신 것”이 곧 거듭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은혜를 감지할 수 있는가? 할 때, 감지하기는 어려우나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이 언제, 어느 순간에 오셔서 영적 생명을 살려주시는 지를 감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자기의 출생한 경험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음을 볼 때 분명히 어머니의 몸에서 분만된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바람이 불면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로도 느끼고, 피부로도 느끼며, 사물의 움직임으로도 느낍니다. 바람은 하나님만 주관하십니다(창 8:1, 민 11:31, 출 10:13, 욘 4:8, 마 8:26). 그와 같이 거듭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결과로 어떤 변화가 옵니까? ① 완악하고 완고한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겔 36:26). 옥토가 아니면 씨앗의 결실을 못 맺으니까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되겠지요. ②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부하려 하지 않습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회심하게 됩니다. ④ 그 다음에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의 반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증표는 자신이 성경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믿고, 그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는가? 아닌가? 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13:5과 벧후 1:10의 말씀을 읽으시고 거듭남의 확신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7 과 구원과 심판 (요 3:16~22)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6~18절 상과 21절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고, ② 18절 하~20절은 심판에 관한 말씀이며, ③ 22절은 “유대 땅에서 세례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구원과 심판”으로 정하였습니다.

1. 구원에 관한 말씀(16~18 상, 21절)

1) 16절 말씀을 복음의 요절이라고 합니다. 이 짧은 말씀에 구원의 주체자와 구원하시는 동기와 구원의 방도와 구원의 적용과 구원의 의미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성부)이란 뜻이요, ② “이 세상(죄악 세상 또는 심판 받을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신 것은 구원의 동기입니다. 여기의 “이처럼”, “이같이”(요일 4:11), 또는 “어떠한 사랑을”(요일 3:1)로 표현하였으니, 그 사랑의 분량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엡 3:18~19). 사람들은 보통 자기와 뜻 맞는 사람을 사랑하고, 죄인일수록 사랑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하고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크게 사랑하셨고, 따라서 만물과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롬 8:32). ③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신 말씀은 구원의 방도로써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죄 값은 사망”이므로(롬 6:23, 창 2:17, 갈 3:10, 신 27:26) 죄를 대속하지 않고는 구원하실 수 없고(살후 1:5~7), 대속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대표하여 속죄 제물이 되셔야만 하기 때문에(롬 5:14, 고전 15:45, 히 9:4~5) 외아들 예수님을 희생의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④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하신 것은 구원의 적용으로써 복음을 믿게 하여 구원하신다는 뜻이며, 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은 구원의 의미 또는 구원의 내용으로써, 죄로 인한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2)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먼저 예수님으로 하여금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고, 심판은 세상 끝 날에 하실 것이므로(마 13:30, 25:31) 예수님의 초림은 구원에만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요,

3) 18절 상반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심판은 “정죄”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십자가의 대속을 적용받기 때문에(요 17:8~11) 영원한 불 못에 던지우는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계 2):15).

4) 21절의 말씀은 “거듭난 백성의 진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진리를 따르게 됩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란 용어는 “알레테이아”로 참이란 뜻입니다. 4 복음서에서는 요한만 사용하였고, 요 14:6에서는 “진리는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 1:4에서는 “예수님을 빛이라” 하였은즉 거듭난 백성은 참된 자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뜻입니다(진리에 대한 설명은 요 14:6을 참조하십시오).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함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심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일이 바르고 떳떳한 일인즉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생활은 의롭고 보람이 있기 때문에 더욱 진리 가운데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2. 심판에 관한 말씀(18절 하~20절)

1) 18절 하반에서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정죄)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음”은 12절의 말씀에 반대로 행한 자를 의미하므로 구원의 반대인 심판(정죄)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심판을 받은 것처럼” 과거형을 쓴 것은 기정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단계적으로 완성되지만, 거듭난 자가 믿음 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완성이 확실하기 때문이지요(벧후 1:10~11).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자는 심판아래 있고, 또 장차 받을 심판이 확실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19절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하심은 심판(정죄) 받게 된 대표적 죄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도덕적인 죄는 거론하시지 않고 신앙적인 죄를 거론하신 중 진리를 영접하지 않은 죄를 대표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 죄가 곧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들이 빛으로 오지 않은 것은 자기들의 가책 받는 죄악이 진리 앞에서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어둠 속에 감추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마귀가 준 질병을 감추고 마귀를 기쁘게 하다가 그 병으로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20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으로 오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앞 절의 의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범죄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는 죄를 떳떳하게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요, 믿지 않는 자는 계속 자기의 죄를 숨기려 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고 어두움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3. 유대 땅에서 세례 주신 말씀(22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지경을 떠나 성밖 유대 땅으로 나가신 뜻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과 유대 땅에 거하시면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직접 세례를 주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례 주신 사실을 기록한 곳은 본문 22절과 26절 뿐입니다. 요 4:2에 보시면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하셨으나 예수님이 모범을 시행하시고 제자들에게 맡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하셨은즉(마 3:11, 눅 3:16)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 3:11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하셨으니 요한의 세례(오늘날 목사가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의 직접 세례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도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님(불은 성령님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의 내적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요한이나 오늘의 목사가 베푸는 세례는 성령님의 사역을 예수님께 의존하여 시행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같은 물세례 의식을 베푸셨을지라도 자기의 성령으로 직접 역사하시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제 8 과 두 요한의 사역 (요 3:23~36) 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두 요한의 사역”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23~30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고, ② 31~36절은 “사도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1. 세례 요한의 사역(23~30절)

1) 23~24절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24, 마 14:1~13)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는데 거기에 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고 하였습니다. “애논”은 예루살렘 동북쪽 25리, 요단강 서쪽 35리쯤 지역입니다. 그곳에 흐르는 물이 많은 고로 세례 베풀기에 적당하였으니 세례수를 강물로 사용한 점과 세례수 사용의 정도(침례와 세례) 문제는 마 3:13~16의 강론을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본문에서 두 가지 설명할 것이 있으니, 하나는 “물들”이란 용어이고, 또 하나는 “살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물”이라 하지 않고 “물들”이라고 하였을까요? 구약 창 1:1의 “하늘”도 “사마임”이란 복수이고, 1:6의 “물”도 “마임”이란 복수입니다. 히브리어 학자들의 증언으로는 히브리인들이 크고, 넓고, 많은 것을 표현할 때, 그 물체가 하나라 할지라도 장언한 것을 복수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 표현의 전통에 따라 많은 물을 복수로 사용한 줄 압니다. 또 “살렘”은 예루살렘의 약칭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예루살렘을 헬라어대로 읽으면 “예로솔루모이스”이고, 본문의 “살렘”을 헬라말로 읽으면 “살림(Ϛαλίμ)”이기 때문에 솔로모이스와 살림은 비슷하지 않습니다. 또 사렘은 애논 가까운 곳인즉 만일 그곳이 예루살렘이라면 25리쯤 떨어진 곳을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창 14:18에 “살렘”이 있고, 시 76:2의 “살렘은 시온에 있다” 하였으니, 그 장소가 후시대에 예루살렘으로 호칭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사도 요한의 시대에 예루살렘을 살렘으로 약칭할 수도 있었겠지요. 필자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성경을 자세히 살피는데 뜻을 둔 것이란 점”을 이해하십시오.

2) 25~26절은 결례에 대한 변론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과 다른 한 유대인이 결례(율법적 결례식이 아니고 물로 씻는 의식으로서의 세례임)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변론이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의 우월성에 대한 변론이었을 것이고(마 21:25~27), 다음에는 26절에 표기된 대로 “사람이 다 예수님 쪽으로 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 변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선생님과 함께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예수님)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라고 보고를 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로서는 약간의 투기심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27~28절에서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하므로 우선 받는 자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받게 됨을 말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란 하나님이 시세자에게 사명도 주셨고, 도 수세자에게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속 말하기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 앞에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너희가 증거하여야 할 것이라” 하므로 자신의 입지와 사명을 분명히 할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4) 29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였고, 세례 요한 자신은 신랑의 친구(들러리)로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신랑 곁에서 신랑의 음성을 들으며 기뻐하는 친구가 있으니 나는 그런 위치에서 기쁨을 충만하게 맛보는 자라” 하므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 자기의 기쁨과 만족을 삼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나 사명자가 느껴야 할 행복의 소지(所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받으실 영광을 뺏으려 할 것이 아니라 영광을 주님께 드리고 자신은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사명자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인 줄로 아십시오.

5) 이런 영광의 사명을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가 잘 된다면 사명자는 희생하여도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모든 사랑의 대상에게 양보와 희생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31~36절)

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0절), “만물 위에 계신 이”(31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34절)라 하셨는데, 이 뜻은 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의 신분을 겸한 상태로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세계를 그대로 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만물을 초월하여 지배하시는 분)임을 두 번 강조하였습니다(31절). 32절에서는 “그가(하나님 세계에서)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다” 하시므로 그의 증거를 받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고, 증거를 받는 것은 특수한 경우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증거를 받는 자가 없으나 혹 있으니까요(32, 33절).

3) 31절에서 “땅에 속한 자들(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땅(현실)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만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로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게 되니”(36절 하), 이 뜻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지옥의 진노만 그들을 기다릴 뿐이란 것입니다.

4) 그러나 33절에서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 되시다 하여 인을 쳤다”고 하셨습니다. “증거를 받는 것은 영접이고, 하나님을 참 되신 분으로 믿는 것”은 신앙과 바른 지식이며, “인을 침”은 마음에 흔들림 없이 확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5) 34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심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 전달 은사가 성령의 최고 충만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은 하나님이시라도 성령 충만의 역사로 같은 뜻을 나타내시고(요 12:49), 또 성령님의 영감의 역사로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벧후 1:21).

6) 35~36절은 “만물의 주권이 예수님께 있으므로 천국의 영생도 주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5절은 “아버지(하나님)께서 아들(예수님)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다” 하셨으니 사랑은 큰 것을 줄 수 있으며, “예수님께 주신 만물”은 현상계와 영계를 포괄하고, “그 손에 주심”은 임으로 사용할 권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는(아들로 말미암아) 영생을 힘입게 되는데 여기의 “믿는 자”의 뜻은 “피스튜온”(현재분사)으로 “믿음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제 9 과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 (요 4:1~30) 목록으로


본문의 ① 1~8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에 가심”이고, ② 9~19절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소개하심”이요, ③ 20~24절은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 하심”이며, ④ 25~30절은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고 전도의 열매를 얻으심”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예수님의 사마리아 전도”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에 가심(1~8절)

1) 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신 것이 세례 요한보다 많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 28:20에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 뜻”은 스승을 닮고 지조 있게 스승을 섬길 것을 약속받는 일인즉 그 당사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신앙고백으로 이 사실을 증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보다 훌륭하시고, 또 요한이 높으신 예수님을 따르도록 권한 중에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가나에서의 포도주 이적) 소문까지 났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요, 소문은 빠르게 전달되며 그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들었고, “그들이 들었다는 사실”도 예수님이 아신 것입니다.

2) 2절에서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하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여 세례를 주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가 요 3:22을 뒤집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의 모범을 보이시면서 받을 자의 수가 많을 때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3) 3~4절에서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행하기로”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 한 유다 도를 떠나신 이유는 예수님이 명절 때 여행하신 점과(45절) 전도하실 목적과 또 소극적 이유로는 바리새인들의 핍박 대상에서 벗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행”은 인종과 계급과 불화의 장벽을 허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팔레스틴 중간 서쪽에 처한 지역으로 예루살렘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성경사전이나 인명지명사전을 보시면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시는 차원에서 그 책을 꼭 구입하여 사마리아도와 사마리아 도성에 대한 역사를 읽으신 후 계속 본문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역시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으로 갈릴리 바다와 함께 팔레스틴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4) 5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도의 ‘수가’란 동네에 이르셨는데 이곳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또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수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중간쯤 되는 지역에 있고, 수가에서 약간 남쪽에 “세겜”이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와 화해한 후 “세겜”에 와서 그 지역 “하몰”의 아들로부터 밭을 산 후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33:18~19), 애굽에서 세상 떠날 무렵에 유언으로 그 땅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창 48:22). 또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 함은 야곱이 그 지역을 목장으로 사용하면서,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었은즉(창 37:12~13) 가축용으로 우물을 파 놓았을 것입니다. 창 48:22에서 야곱이 유언으로 아들들에게 가나안에 있는 땅을 분배할 때 “그 땅을 요셉에게 주었으며 칼과 활로 뺏은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값으로 산 것(창 33:18~19) 외에 더 확보한 것을 뜻하고, 또 야곱이 세겜의 땅을 살 때 은 100개로 산 것을 수 24:32에서는 “금 백 개로 샀다” 하므로 은돈이 금돈으로 기록되었지만, 이것은 야곱 당시에 은돈 쓰던 것을 여호수아 시대에 금돈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5) 6절에서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여행하는 자세로) 앉으셨는데 그때가 6시쯤이라” 하셨으니, 이때는 정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전도 여정에 피곤하신 모습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신 대화는 박력이 있으셨습니다.

6) 7~8절에서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고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으므로 예수님은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으니, 이는 여행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전도의 대화를 여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잡수셨다”는 기록이 없으나, 먼저 물을 길어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예수님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신 것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2.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소개하심(9~19절)

1) 9절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묻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하였으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족보상으로는 유다 지파이지만 갈릴리 나사렛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렬이 유다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도에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 같고, 그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는 그 지역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눅 9:51~55).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가지 않음은 물론 그곳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보암 왕 때부터 국가적 분리와 종교적 분리가 있었고, 그 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혼혈족이 생기면서 선민의 정통성을 종교적, 혈통적으로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마 15:27).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장벽을 초월하여 사마리아 한 여인과 상종하셨으니 이는 희귀한 일이므로 여인으로부터 질문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질문에 상관없이 전도에만 전념하셨습니다. 메시야의 복음은 천민을 우선적으로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하고(마 9:12),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으며(막 14:41), “비천한 자들을 초청하라”는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눅 14:13).

3) 예수님은 10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거저 주시는 은혜)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메시야)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은혜를)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주었으리라” 하셨으니, 이 생수는 “메시야를 영접하고 복음을 믿을 때 심령도 시원케(기쁨과 만족) 하는 은혜를 상징한 용어”입니다. 겔 47:9의 강물은 복음적 은혜를 상징하고, 요 7:38의 생수는 성령의 충만을 상징합니다. 본문의 생수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메시야를 만남으로 받게 되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4) 4절에서 그 여인은 생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관계로 “주여(여자가 남자를 존중하는 뜻일 듯함)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습니까?” 하였으니, 이 말은 예수님이 생수를 취급할 장비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 여인이 생각한 생수는 물이 귀한 고장에서 풍성하게 쓸 수 있는 우물물이었던 것입니다. 12절에서 그 여인이 사용한 우물은 “조상 야곱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야곱의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는데(후손까지)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하였으니 생수(큰 우물)를 해결해줄 분은 위대한 분이어야 할 줄로 안 것입니다.

5) 13~1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한 생수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물(우물물)을 먹으면 다시 목마를 것이나 내가 주는 물(메시야의 복음)을 먹으면(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니(영적 해갈을 뜻함)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는다” 함은 메시야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출현된 것인즉 충만하고 영원한 은혜임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6) 15~19절에서 그 여자가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취하여 다시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달라”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한 샘물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고,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이 “다섯 남편을 둔 일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정식 남편이 아니므로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신즉 그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놀라게 된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그런 식으로 믿음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요 2:47~50)

3.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 하심(20~24절)

1)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게 된 여인은 20절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였으니 여기의 “이 산”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그리심 산을 지칭한 듯하고(신 11:29) 그 여인이 말한 “예배”는 제사 행위를 의미하였을 것인데, 그 여인이 예배란 용어를 쓴 것은 개혁의 용어를 미리 알았거나 사도 요한이 신약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한 것은 신 11:29에서 그 산을 축복의 산으로 말씀하신 데 근거하였을 것이고, “당신들의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뜻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고수한 전통을 그 여인이 알고 말한 것입니다.

2) 21절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믿으라” 하시고, 또 “이 산이나 예루살렘도 말고(장소에 구애 받지 말라는 뜻)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곧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을 예고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행 8:4~8에서 성취되었습니다.

3) 22절에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숭배의 대상에 대하여 알지 못할 만큼 종교제도가 변질되고 이방적 제도에 물든 것을 의미함; 왕상 12:25~33, 18:16~19; 왕하 16:10~18)을 예배하고 우리는(예수님과 제자들) 아는 것(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마 1:1)에게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하여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참되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구약적 제사가 아닌 믿음의 경건과 생활) 진정으로(외식이 없고 확실한 믿음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란 메시야의 출현으로 율법의 시효가 끝난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1:13, 롬 10:4).

4)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이라 하시고 또 그렇게 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은 물질적 제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의 예배, 지식의 예배, 진실한 예배, 그리고 바른 생활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예배의 요소는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회개와 성실한 생활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예배에 대한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4. 메시야이심을 알리시고 전도의 열매를 얻으심(25~30절)

1) 25절에서 여자가 말하기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실 것이라” 하면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한즉 예수님이 26절에서 “네가 말하는 내가 그이라”고 확실하게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고 그 여자의 신앙적 기본 지식을 들으신 후에 나타내신 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교제함에 있어서 그만한 예비지식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그만큼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던 제자들(8절)이 돌아왔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진지한 대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27절), 이상히 여긴 것은 남녀간의 대화를 연애관념 또는 이방인 상종에 대한 유감이었을 것이나 묻지 않은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 28~30절은 전도의 결과로써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실하게 믿게 된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로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남편과 가족생활에 대하여 아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한즉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하시므로 더 많은 전도의 대상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어 성경의 기본 지식을 가르치시고 일깨우시면서 상대자로부터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세를 확인하였을 때 자신을 나타내신 점이 전도 대화의 지혜라 할 것입니다.

 

제 10 과 주님의 양식과 두 번째 이적 (요 4:31~5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다섯 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31~34절은 “주님의 양식에 대한 말씀”이고, ② 35~38절은 “전도에 대한 말씀”이며, ③ 39~42절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신 효력”이고, ④ 43~45절은 “갈릴리에서 영접 받으신 일”이며, ⑤ 46~54절은 “두 번째 이적의 사건”입니다.

1. 주님의 양식에 대한 말씀(31~34절)

1) 예수님이 “수가” 여인에게 전도 대화를 하시는 시간에 동네로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8절)이 돌아와서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하였습니다(31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호칭할 때 “랍비”라 한 것은 존경하는 대상으로 호칭한 보편적 용어로 보아야 합니다. 요 6:25과 9:2, 11:8에서도 그렇게 호칭하였습니다(세례 요한도 그런 호칭을 받았음, 요 3:26). “주여”란 용어를 써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 용어는 개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할 때 많이 사용하였습니다(마 8:2, 9:28, 14:28, 17:15, 눅 5:8). 따라서 “랍비”는 일반적 존칭어로, 특히 무엇을 질문할 때 많이 사용되었고, “주여”는 신앙적 존칭어로, 특히 은혜를 구할 때 많이 사용한 줄로 아십시오. 제자들이 음식을 드렸을 때 “잡수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다음 절에서 “음식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하신 후에 잡수셨을 것입니다.

2) 32절에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먼저 잡수실 것을 드렸는가?” 하고 생각할 때에(33절) 계속 말씀하시기를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먹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함”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이런 실 예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에게서도 나타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창 24:33, 54). 32절에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란 예수님이 홀로 감당하셔야 할 하나님의 일(구속 사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 말씀에서 반드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양식도 주실 것입니다(마 6:8, 31~34).

2. 전도에 관한 말씀(35~38절)

1) 35절에서 “추수(육의 양식) 때는 넉 달이 있어야 하지만 영적 추수(전도 대상)의 대상은 항상 있으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심은 복음의 소득을 거둘 때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전도를 비롯하여 “은혜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고후 6:2, 요 4:23, 사 49:8). 전도의 눈이 감긴 성도는 사람이 많아도 전도 대상이 없고, 전도의 눈이 열린 성도는 모든 사람이 다 전도의 만족한 대상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도 세상 사람들이 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처럼 보여져야 할 것입니다.

2) 36절에서 “거두는 자(전도자)가 이미 삯도 받고(구원받은 은혜, 딤전 1:12~16) 영생에 이르는 열매(전도를 받고 예수님 앞으로 오는 생명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구원의 근거를 베푸신 분)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함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업도 즐거운 일이려니와 생명이 모아지는 것도 즐거운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시 107:2~3). 성도가 진리를 깨달으며 은혜를 받을 때 증거하는 자와 받는 자의 즐거움이 대단히 큰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37절에서 “그런즉 한 사람(구원의 근거를 베푸신 분, 뿌린 자, 36절)이 심고 다른 사람(전도자들)이 거둔다 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속담을 인용하신 듯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뿌린 자와 거두는 자가 달라집니다. 이 경우에 뿌린 자는 손해를 보지만, 전도의 결과는 구원의 근거를 만들어 뿌리신 하나님(예수님)과 그것을 선전하여 생명을 거둔 전도자들이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38절에서 “내가 너희(제자들)로 노력하지 않는 것(구원의 근거를 하나님과 예수님이 베푸심)을 걷으러 보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 노력에 참여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구원의 근거를 베푸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공로를 사람의 노력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3.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신 효력(39~42절)

1) 39절에서 동네에 들어간 여인은 “그가(예수님) 나의 행한 모든 것(18절, 그의 사생활)을 내게 말하였다” 하므로 그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하였고, 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므로, 거기서 이틀을 유하신즉(40절)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41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믿은 자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 증언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42절)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전도하였으나 많은 사람을 얻으신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전도의 역할을 잘 하였습니다. 그 역할은 바로 “예수님을 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사모하여 이틀이나 모시고 교훈을 받은 후에 더 크게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도는 말과 생활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구주”란 말씀이나(42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3:16)는 말씀은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택하신 백성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엡 1:4).

4. 갈릴리에서 영접 받으신 일(43~45절)

1) 43~44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시고 갈릴리 지경으로 가시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사셨던 “가버나움”이 완악할 것과(마 4:13, 11:23)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또 죽임의 음모가 있을 것을(마 13:53~57, 눅 4:16, 29) 예언하신 뜻이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45절에서 의외로 “갈릴리인들이 영접을 하였으니 이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함께 갔던 자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교훈과 이적 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였을지라도, 그 지역에 머문 자들이 여전히 완악하여 예수님을 시기하고 배척하므로 예수님의 예언을 응하게 한 것입니다.

5. 두 번째 이적의 사건(46~54절)

이 말씀이 마 8:5~10(눅 7:1~10)의 사건과 비슷하여 같은 사건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요한의 고유 기록입니다. 전자는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있은 일이고, 본문은 “가나”에서 부탁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1) 46~47절은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 가나에 오셨을 때 왕의 신하가 그 사실을 듣고 예수님께 나가서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곧 죽게 된 아들의 병 고침”을 청하였습니다.

2) 48절에서 “너희는 기사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진리를 받는 자들의 보편적 완악을 지적하심으로 표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말씀대로 믿을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때에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하였으니 역시 믿음의 한계를 드러낸 독촉이었습니다. 자신이 생명의 주님께(행 3:15) 부탁한 줄 알았다면 죽던, 살던 문제시 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롬 4:17). 저희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맡기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롬 14:8, 빌 2:21).

3) 50절에서 예수님은 그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즉 그가 그 말씀을 믿고 가다가, 51절에서 중간에서 마중 오는 종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말이 “아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살았다”는 의미는 혼수상태에서 열기가 떨어져 깨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로 능력이 나타나서 아이를 살리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능력이 동반하는 것을 시 107:19~20을 읽고 확신하십시오.

4) 그리하여 52절에서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7시에 열기가 떨어졌다 하였으니 그때가 곧 예수님이 살았다 하신 때와 같은 것을 알고 온 집이 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성경 진리)에 능력이 함께 동반하는 것을 아울러 믿는 것입니다(히 4:12 확인 요망). 이런 믿음의 교훈이 중요하지만 성도들에게 크게 수용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다음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5) 이 기적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두 번째 표적(이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만 두 번째 행하신 이적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신 일이 있었으나(45절) 본문에는 그 기록들이 생략된 줄 압니다.

 

설교보충 3.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 (요 4:46~54) 목록으로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기의 왕은 대 헤롯의 넷째 처의 소생으로 “헤롯 안디바”라고 하는데, 예수님 시대에 갈릴리와 뵈뢰아를 통치하였고, 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의 신하가 은혜 받은 사실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 신하는 가버나움에 살았고, 자기 아들의 병이 위급하자 “가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부탁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은혜를 받은 경위를 보면

1.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70리 길입니다. 교회가 곁에 있어도 안 나가는 것에 비하면 큰 결단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요? 아들의 생명을 살려보려는 의욕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모든 인간의 형편은 누구의 질병보다도 자신의 구원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재산과 명예가 있어도 영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은 것처럼 예수님께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자요,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 생명의 주이신 것을 믿고 의지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나올 때 큰 기대를 걸고 나와야 합니다. 12년간 혈루증 든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처럼 기도를 할 때도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시 42:2에서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하였고, 또 107:9에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만족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더욱 큰 기대를 갖고 영광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환난을 복 받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이 성경에서 나온 줄 압니다. “화로 복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시 90:15, 91:15, 고후 4:17, 12:7~9, 롬 5:3, 사 26:16). 만일 왕의 신하가 아들의 병이 아니라면 70리 길을 와서 예수님을 뵈었을까요? 그러니까 환난을 은혜 받을 기회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환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요나의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욘 2:2) 성도가 당하는 환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거나, 연단을 주시거나, 아니면 기도 응답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란 것을 아시고 환난이나 연고를 은혜의 기회로 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4.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마 7:7).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내 아들을 살려 주세요. 죽기 전에 내려 오셔서 해결해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하라” 하셨고, 또 기도를 통해서 주신다고도 하셨습니다(겔 36:37, 빌 2:13). 그러니까 기도는 소원 성취에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도 필요하며, 기도가 자기 뜻대로 응답이 안 되도 하나님은 그 이상의 값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처에게서 낳은 아들이 죽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나, 그것이 응답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여디디야)을 주시지 않았습니까?(삼하 12:15~25) 하나님과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5. 기도 다음에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 중에는 배우고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고, 구하는 것만 제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탁을 받으셨을 때 “무조건 고쳐준다” 하시지 않고 중간에 한 말씀을 하셨지요. 48절에서 “너희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표적을 보고 믿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 응답과 관련하여 큰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때 왕의 신하는 “아들이 죽기 전에 와 주십시오” 하므로 또 한 번 믿음 약한 형편을 드러냈지요.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도 고치실 수 있고, 죽은 다음에도 살리실 수 있는데(요 11:25~26) 그만한 믿음이 없었은즉 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즉…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고 다짐을 받으신 후에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6. 예수님이 말씀으로 은혜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적이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말씀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말씀을 믿으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깨우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믿어야 하겠지요? 산 것만 믿을 것이 아니라 말씀이 능력 전달의 역할이란 것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07:20을 읽으시고 확인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은즉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그대로 믿고 집으로 오다가 마중 온 하인들을 만나서 어제 7시에 아이가 깨어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은혜 주셨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이가 깨어난 시간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간이 같은 것을 확인하였으니 말씀이 곧 능력인 것도 확인한 셈입니다. 필자가 쓴 『핵심설교』 중에 “놀라운 충격”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베푸신 시기가 내가 은혜를 필요로 한 시간보다 앞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식성을 먼저 아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이상의 일곱 가지 경위가 있었음을 명심하시고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 11 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요 5:1~18)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1~9절까지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이고, 10~18절은 “그 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므로 총 제목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1~9절)

1) 4장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인데, 5장부터 다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1절에 보시면 그 후에(4장의 사역 후) 명절이 있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니, 이 상경은 요한의 기록으로 두 번째 상경이고, 명절은 어떤 명절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선민들의 명절은 유월절, 초막절, 수전절(요 10:22), 칠칠절(맥추의 초실절, 출 34:22) 등이 있었고, 요 2:13(4:45)과 6:4에서는 유월절에 상경하셨으며, 요 7:2에서는 초막절에 상경하셨다고 하였습니다.

2) 2절에서 “예루살렘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란 뜻)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양문(羊門)”이란 뜻은 예루살렘 성벽 둘레에 있는 문인데, 느 3:1에 보시면 “성별된 문”이라 하였으므로 제사장 전용 출입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여러 종류의 문이 있었으니 양문 외에도 어문(漁門)이 있었고(느 3:3, 대하 33:14), 수문(水門), 마문(馬門)이 있었으며(느 3:26, 대하 23:15), 분문(糞門), 천문(泉門)이 있었고(느 3:6, 15), 그 외에도 함밉갓문(장소 이름, 느 3:31), 에브라임문(느 12:39), 골짜기문(느 2:13, 대하 26:29), 옛문(대하 26:9), 미문(행 3:2)도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1914년에 발견되었고, 현재 성 앤느 교회 안에 있는 못이라 하며, 행각은 정자각을 뜻합니다.

3) 3~5절에서(그 정자각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저는 자,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있었고, 그 중에 38년 된 병자도 있었으며(6절), 그들이 누워있는 이유는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는 천사가 가끔 그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고 물이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풍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의 “물이 동한다”는 뜻은 물이 적재됨을 뜻하는데, 풍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의 역할로 믿었고, 그 물에 처음 들어가는 병자는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풍설(출 23:1, 실상 없이 떠돌아다니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 동하는 물이 비 온 다음에 말랐던 샘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짐작되며, 그 물을 약수처럼 이용한 사람들이 “효험을 보았다”고 하였을 때 나타난 결과였을 것입니다. 전쟁 때는 미신적인 말도 떠돌고 “약하면 검불도 잡는다”는 속설처럼 그 당시의 병자들이 병을 고치려는 의욕으로 무엇이나 믿으려 하였을 것입니다.

4) 5~7절에서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누운 것과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것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신즉 그의 대답이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자에 대한 순서 의식이 없었고, 오래된 병자에 대한 배려도 없었으며, 일어서지 못하는 자가 기어가는 동안 걷는 병자가 앞서가기 때문에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상의 만행된 악습이었습니다(필자가 59년도 4월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부분의 신체검사를 받고 군번을 받은 다음에 군복, 군화를 착용하여야 훈련소를 가는 것인데, 보통 3~4일이면 그 과정이 끝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주거나 수단을 써서 순서를 앞당기려 하는데, 그 영향으로 줄서는 사람은 점점 뒤떨어집니다. 그래도 필자는 수단을 쓰는 일에는 동하지 않았습니다. 7일이 되었을 때 같이 온 친구들은 다 먼저 가버리고 아는 친구 하나 없이 서성대는데, 나를 여러 날 목격한 고참 사병이 “왜 안 넘어갔느냐” 하기로 “아무리 줄을 서도 뒤로만 처진다 하였더니, ”일찍 온 자가 안 넘어가면 자기들이 혼난다" 하면서 군번을 받도록 앞세워주어서 뒤늦게 훈련소로 넘어갔는데, 마침 배치 받은 부대의 막사가 예배당 곁에 있어서 유익하게 된 것을 감사한 일이 있었는데, 38년 된 병자의 형편과 비슷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5)8~9절에서 “예수님이 가라사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동반한다는 것은 4:43~54에서 다 설명 드렸습니다. 이 부분에서 꼭 기억하실 것은 병이 오래 되고, 도울 자 없는 가장 연약한 자를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14절) 고쳐주시니, 말씀 따라 능력이 즉시(곧) 동하고, 38년 된 서지 못하는 병자도 자리(깔판)를 들고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2. 이 일로 인하여 일어난 일(10~18절)

1) 10절에서 유대인들이 그 38년 만에 일어나 걷는 사람을 보고 “(안식일에는 병이 고쳐졌어도) 안식일 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으면 안 되는데 왜 걸었느냐?”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경을 크게 왜곡한 것입니다(느 13:19, 출 35:3). 자기들은 안식일에 걷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였으니, 이 말은 “안식일에는 병 고침 받지 않았어야 한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만큼 왜곡되고, 인정이 없으며, 좋은 일로도 사람을 잡으려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2) 11~13절에서 병 나은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를 낫게 한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여 걸었을 뿐이라” 하니 “그가 누구냐?” 하였고, 그는 “모른다” 하였으며, 그 말이 맞는 이유는 “그곳에 사람들이 많은 중에 예수님이 피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그 병 나은 자의 말처럼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마 17:5). 율법을 잘못 해석하는 일과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뜻(롬 10:4)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아셔야 합니다.

3) 14~15절에서 그 후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셨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것을 보면, 그의 질병이 죄로 말미암은 징계였음을 알 수 있고(약 5:15~16, 고전 11:30), 예수님이 죄 사하시는 권세로(마 9:6) 고쳐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병 고침 받은 자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나타냈다고 하였습니다.

4) 16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로(율법을 어겼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고, 17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매 나도 일한다” 하시므로 하나님이 항상 일하시는 것과 안식일에 선한 일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모범임을 말씀하셨으며, 18절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으니, 예수님께 덮어씌우려는 죄상은 “안식일을 범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하며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그릇되다 하고, 그릇된 것을 바른 줄로 아는 모순은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습니다(다음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설교보충 4. 베데스다 못의 다른 시각 (요 5:1~10) 목록으로


요 5:1~8에 대한 강론은 강론서 11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이란 제목으로 해설하였는데, 이 시간 설교는 그 장면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각으로 보면 그곳에 연못과 행각과 병자가 많은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인데,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시각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요 4:31에서 제자들이 시장하신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드리니까 “나의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 하셔서 누가 잡수실 것을 먼저 드렸는가? 하였는데 “그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하셨고, 또 35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양식을 수확하려면 넉 달을 기다려야 한다” 하였을 때, 예수님은 “아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셨으니 이렇게 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유와 상징이 많습니다. 뱀을 보면 사탄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저희들이 베데스다 못의 정황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셔야 하겠는지요?

1. 베데스다 행각이 양문 곁에 있는데, 그 행각에는 불행한 자들이 많고, 양문은 “거룩한 문”이라 하여(느 3:1) 제사장들만 출입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교회 앞에 거지나 고아들이 많은데 목사와 교인들이 못 본 척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고아 수출 제1국이 되도록 거룩한 백성들이 못 본 척하고 있는 상태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큰 예배당, 십자가 불빛, 오고가는 교회 자동차, 수천 명의 모임과 주위의 어려운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광경입니다.

2. 각색병자들이 있는데, 특히 지적된 병자는 소경, 절뚝발이(저는 자라 함이 좋음), 혈기마른 자(영양실조), 그리고 38년 된 걷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소경은 아주 못 보는 사람이요, 저는 자는 다리의 균형이 없는 사람이며, 혈기마른 자는 못 먹어서 병든 자요, 38년 된 병자는 말은 하지만 일어서서 걷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네 사람의 병자를 보는 시각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소경은 안과 대상이요, 저는 자는 외과 대상이며, 혈기마른 자는 내과 대상이고, 걷지 못하는 자는 물리치료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면, 그것도 현명한 시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영적 시각을 가진 성도는 그 상태를 전부 병든 인간, 즉 문제 있는 인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소경은 아주 못 보니까 불신자 같고, 저는 자는 들락날락하는 교인 같으며, 혈기마른 자는 힘없고 맥 빠진 신자 같고, 38년 된 병자는 크게 회개해야 할 죄인, 또는 말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문제 있는 교인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반성한다면 우리 주위에 아주 눈감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1%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전도할 사명을 느껴야 할 것이요, 두 번째는 나 자신이 흔들리는 신자는 아닌지, 균형 없이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는 부조리한 신앙인은 아닌가?를 반성하셔야 할 것이며, 셋째는 혈기마른 영양실조 된 교인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맛을 느껴야 말씀 공급을 받는 것인데, 대부분의 성도가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면 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형편이니, 성경 실조, 믿음 실조가 안 될 수 없겠지요. “내가 주의 말씀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종일 묵상하나이다. 말씀을 연구한즉 꿀보다 더 답니다” 할 수 있는 분은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손드는 분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다 혈기마른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사모하는 성도가 희귀할 것입니다. 넷째는 38년 병든 자입니다. 성도가 38년 교회에 나갔다면 그 교회 원조 교인입니다. 그동안 입은 불구가 아니니까 말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지 못하고 걷지 못하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를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3. 이 사람은 38년 동안 고생을 하면서 자신의 병든 이유가 죄 값이란 것을 몰랐다가 예수님이 고쳐주실 때에 알았습니다. 그가 병 고침을 받았을 때는 누가 고쳐주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피하셨으니까요).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그 은혜에 깊이 관여하신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가서 알게 된 것처럼 저희들도 은혜를 아셔야 합니다. 제가 수년 전에 부산에서 수요일 기도회를 인도했을 때, 한 집사님은 떡을, 한 집사님은 생선찌개를 가져와서 잘 먹고, 4일 후 부활주일 새벽기도를 인도하면서 요 21:13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주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그 강단에 선 상태에서 “내가 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여 떡과 생선을 주신 것을 몰랐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충격을 받고 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고난이 있을 때는 우선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환자는 다행하게도 찾아오신 예수님이 저를 사해주심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은혜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민망한 미신 행위가 우리 주위에서 없어지도록 많은 계몽을 하셔야 할 것이요, 또 아무도 자기를 붙들어 줄 자가 없을 때 주님이 그의 해결자가 되어주셨다는 사실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2 과 하나님과 예수님 (요 5:19~30) 목록으로


본문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8회나 표기한 점과 내용 거의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록하신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9~20절은 “뜻과 행사가 하나라 하심”이요, ② 21절과 25~26절은 “생명과 살리는 것이 하나라는 말씀”이며, ③ 23~24절에서는 “섬김과 믿음이 하나라는 말씀”이며, ④ 22절과 27~30절은 “심판이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뜻과 모범과 행사와 심판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모순이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보이신 하나님이신즉 보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행사와 권위와 영광)을 그대로 이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 뜻과 행사가 하나라 하심(19~20절)

1)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범을 보시고 그것만 행하시고, 또 그와 같이 행하신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 간에 하시는 행사에 모순이 없다는 뜻입니다.

2) 20절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안식일에 하시는 일도 다 보이심),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그보다 더 큰 일”은 포도주 이적이나 병 고침의 이적보다 더 큰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일과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생명과 살리는 것이 하나라는 말씀(21, 25~26절)

1) 21절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구약에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일이 있음, 왕상 17:19~22, 왕하 4:1~7)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요 17:9)을 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부활하셨지만 죽은 자를 세 번 살리셨습니다(눅 7:15, 마 9:25, 요 11:43).

2) 25절에서는 “거듭나는 생명을 주시는 것”도 함께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시므로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들의 음성인 복음을 들을 때 거듭난 영적 생명을 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2:1, 요 3:3).

3) 26절에서도 “하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예수님)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하셨으니, 이 뜻은 생명(일반 생명, 영적 생명, 영생의 복)의 주가 하나님 곧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3. 섬김과 믿음이 하나라는 말씀(23~24절)

1) 23절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게 한 것처럼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여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라” 하시므로 예수님 공경이 곧 하나님 공경임을 말씀하셨고,

2) 24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하시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데, 영생은 심판을 면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망(심판)에서 생명(영생)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거듭남”으로 시작되는데(엡 2:1), 거듭난 영적 생명은 다시 죽을 수 없으므로 영생이 확보되는 것이요(요일 1:2, 2:25; 요 17:9~11),

② 영생이 확보되려면 심판이 면제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요 3:16, 멸망하지 않고),

③ 따라서 심판이 면제되는 것과 영생 확보된 것이 확실하므로, 이 사실을 과거형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4. 심판이 하나라는 말씀(22, 27~30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심판권을 아들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뜻이 아버지와 같으시므로 예수님이 홀로 심판을 하셔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과 같다는 것입니다.

1) 22절에 보시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 하시고 심판(전권)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 하셨고,

2) 27절에서 성부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신 것은 “인자 됨(예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구속 사업을 이루신 것)을 인함이라”고 하셨으며,

3) 28절에서 세상 끝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고 부활할 것인데(29절, 살전 4:16), 여기의 “무덤 속에 있는 자”란 믿은 자와 불신자를 포괄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성도의 영혼만 천국에 있고, 의인과 악인의 몸은 다 무덤에 있기 때문입니다.

4)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예수님을 믿은 자, 요 6:29)는 생명의 부활로(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부활임) 악한 일을 행한 자(아버지와 아들을 믿지 않은 자, 요 1:5, 시 49:20)는 심판의 부활(지옥 가기 위한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나온다”는 뜻은 영혼과 신령한 육체가 하나 된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부활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지만(고전 15:20), 악인의 부활(행 24:15)하는 모습을 말씀하신 성경은 없습니다.

5) 30절에서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다” 하시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① 스스로 할 수 없고(혼자 하시지 않는다는 뜻), ② 듣는 대로 심판하심(하나님의 명령을)이니,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심판권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만 심판하시니, 그 심판은 하나요, 또 의로우며,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의 뜻이 표현된 것입니다.

이 과목의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하나로 믿게 하는 삼위일체적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 13 과 객관적 증언과 두 입장 (요 5:30~47) 목록으로


앞부분에서 계속되는 말씀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완고한 무리들을 상대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① 31~32, 34절은 “객관적 증언의 필요성”이고, ② 33절과 35~39절까지는 “객관적 증언”이요, ③ 40~47절은 “예수님과 완악한 자들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객관적 증언과 두 입장”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객관적 증언의 필요성(31~32, 34절)

1)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은 설령 참된 자가 증거할지라도 “남이 잘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참된 것이지만, 스스로 증거하는 것은 증거 방법으로써 참되지 않다는 뜻입니다(31절). 그래서 “예수님 아닌 다른 대상이 따로 있은즉 그 증거는 참되다”(32절)하시므로 객관적 증거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34절에서는 예수님은 객관적 증거로써 “사람에게는 취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인간은 다 거짓된 자들로서(롬 3:4) 진리 입증자의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확실한 증거(객관적 하나님의 증거)가 믿음을 주게 되고, 확실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객관적 증언(33, 35~39절)

1) 33절에서 메시야인지를 알아보려는 자들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예수님을 알아보려 한) 것”이 곧 객관적 증명의 필요성을 입증한 것이고, “요한은 진리(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증거”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로 알렸다는 뜻입니다.

2) 35절에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이고, 등은 요한 자신을 말씀하심이며, “켜서 비췄다”는 뜻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고(요 1:32~34) 예수님을 옳게 나타냈다는 뜻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예언으로만 메시야를 증언하였으나 요한은 그 당사자를 직접 나타낸 것이 “켜서 비취는 등불”의 의미일 것입니다. 요한의 증언이 있을 때 “요한의 제자들(너희가) 이 그 빛(예수님)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다” 하신 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35~37).

3) 3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 큰 객관적 증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이 오셔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주신 역사라는 것입니다(히 2:4). 37절에서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다”는 것은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을 의미하며,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 하신 것은 말씀의 영감적 계시를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은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38~39절은 “하나님이 특별한 자(모세, 선지자, 사도 등)에게 영감으로 주신 성경을 믿지 않으면 곧 예수님의 증거도 믿지 않을 자”라고 하셨습니다(눅 16:31). “그 말씀(하나님이 증거하신 구약 성경, 37절)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속에 거하지 않음”은 성경을 믿지 않음이요, 이는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지 않음”과 같다 하셨으니, 성경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너희(제자들)가 성경(구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의 도리를 알아야 영생을 얻습니다. 또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예수님(곧 하나님)을 계시한 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두(예수님과 완악한 자들) 입장(40~47절)

이 말씀에서 41, 43, 45절은 예수님의 입장이고, 그 외의 말씀은 완악한 자들의 입장입니다.

1) 예수님의 입장 표명에서 41절을 보시면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사람의 증거에 의존하여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 뜻이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이 영광을 포기하고 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사람으로부터 받는 영광을 취하지 않으려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43절 상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오셨다”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과 보내심에 의하여 오셨음을 의미하고, 45절에서는 예수님이 완악한 자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셨지만, 고소인이 되시지 않을 것은 그들(율법주의자들)이 바라는 자(소망을 갖는 대상) 모세가 율법으로 이미 고소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율법의 임무는 정죄입니다(롬 5:13; 갈 3:10~11, 22).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사람으로 영광을 취하시지 않는 예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 죄인을 고소하여 정죄하지 않는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완악한 자들에 대한 입장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 형편”(40절)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 속에 없음”(42절),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온다면 영접할 자들이라”(43절 하)는 점과 “서로 영광을 취하고(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영광)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구원의 은혜)은 구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점”(44절), “모세를 바로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오지 못함”(46절)과 “모세의 글(율법과 5경)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함”(47절)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의 아들 예수님도 사랑하게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유감이고, 또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람끼리 서로 칭찬하고 높여주면서 영광 받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참된 영광의 뜻을 알지 못하며, 또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을 증언함인 줄 알면 그 증언에 따라 오신 예수님을 믿을 터인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과 관련하여 역사적 관계의 증인으로 오신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14 과 5병2어와 해상 보행 (요 6:1~2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분류한다면 ① 1~4절은 “예루살렘 및 유다에서 갈릴리로 오신 사실”이고, ② 5~13절은 “5병2어의 기적 사건”이며, ③ 17~21절은 “해상 보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예루살렘 및 유다에서 갈릴리로 오심(1~4절)

1) 1, 3절에서 “그 후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고,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하셨습니다. 5:1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이 있었는데, 본 절에서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갈릴리 지역에 있는 호수란 뜻이요,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 서편에 “디베랴” 촌이 있음을 인하여 그렇게 명칭한 것입니다. “디베랴 바다” 건너편은 맞은편이란 뜻인즉 바다의 동북쪽 벳세다 지역을 의미하고, 거기에서 오르신 산은 어떤 산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5병2어 사건이 한 번 있었는데,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4:19, 막 6:41, 눅 9:16). 눅 9:10에 보시면, 그 지역이 “벳세다 고을”이라 하셨고, 막 6:45에서는 이 기적을 끝내신 후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벳세다로 가게 하셨다” 하시므로 “벳세다”란 장소가 중복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벳세다 고을과 벳세다는 갈릴리 동북쪽 호수를 접한 가까운 곳으로 보셔야 할 것이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곳은 서쪽 “게네사렛”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시계 모양으로 보실 때 디베랴는 8시 방향, 게네사렛(긴네렛)은 10시 방향, 가버나움은 11시 방향, 벳세다는 1시 방향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벳세다 지역은 여러 강줄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벳세다 고을에서 배를 타고 벳세다로 건넜다”(막 6:45)는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의 산을 임시 휴양처로 사용하셨습니다(막 6:30~33, 눅 9:16).

2) 2, 4절에서는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2절에서는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본 까닭이라” 하셨고, 4절에서는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깝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명절이 있으면 며칠 전부터 한가한 시간을 갖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열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가깝다”고 하신 다음에 7:1, 14에서 초막절 행사로 상경하신 일이 있었고, 그 어간에 수전절에도 참여하셨으며(10:22), 예루살렘을 떠나신 후 에브라임 동리에도 계시다가(11:54), 마지막 유월절 6일 전에 상경하셨다고 하였습니다(13:1). 그런 의미에서 4절의 “유월절”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로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5병2어의 기적 사건

이 사건은 마 14:19과 눅 9:16의 강론에서 말씀드렸지만, 본서의 기록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1) 5~6절에서 무리는 많고, 먹을 것은 없는 중 “빌립을 시험코자 방책을 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실 방도를 예비하신 후에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를 들어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신즉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적게 나누어주어도 많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떡값도 태반 부족하고, 또 많은 분량의 떡을 사오기도 어려웠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의 방도로는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2) 8~9절에서, 그때에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5병2어를 갖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준비한 것은 그것뿐인즉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였으니 분명히 그것으로 나누어먹을 계획이 아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예수님께 알린 용기가 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천 명 앞에 5병2어는 내놓지도 말라” 하였어야 하는데, 그것을 말한 것은 용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자기가 가진 적은 것을 부끄럼 없이 주님께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한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겨자씨 같은 것에 소망을 품고 밭에 심은 셈이지요.

3) 10~13절에서는 문제를 해결하신 내용입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실 때는 무조건 순종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앉는다”는 “아나핍토”는 “기대어 앉는 뜻”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휴식을 겸하는 뜻으로 기대어 앉아 음식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잔디(풀)이 많았고, 앉은 자의 수는 5,000명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유카리스테오, 영어 성경은 감사로 번역함)하신 후,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셨고, 고기도 그렇게 하여 원대로 주셨다”(1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5병2어를 근거로 감사하신 후 이적을 나타내어 5,000명 이상을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시장함을 당한 자들에게 주님이 배부르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뜻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따르면서 5병2어 같은 작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적은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실 때 섭리로 나타내 주십니다(막 8:2). 12~13절에서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신즉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하였습니다. 만유의 주요, 이적으로 생산하실 수 있는 분이 이런 권고를 하신 것은 성도나 인류가 물질이 넉넉하여도 절약하고 나누어 사용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남은 것을 재활용하도록 버리지 않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14~15절은 이상의 이적으로 인한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14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다는 뜻이요, 15절에서는 “저희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이적으로 먹을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을 임금 되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임금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므로, 그 세계를 피하신 것입니다(마 14:23). 만일 임금이 되려고 하셨다면 반역의 죄를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3. 해상 보행에 관한 말씀(16~21절)

이 말씀은 마 14:25과 막 6:48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최종) 행선지가 “가버나움”이란 것과 10여리를 떠나서 풍랑을 만났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특징일 뿐, 마 14:22~34의 기록이 더 자세하므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사건을 기록을 보고 기억합니다. 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환난에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뿐인 것처럼, 인간이 속수무책일 때도 오직 의지의 대상은 주님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반드시 행 27:22~44을 읽어보십시오.

 

제 15 과 예수님의 하시는 일 (요 6:22~40) 목록으로


본문의 ① 22~25절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뒤따라온 일”이요, ② 26~29절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한 말씀이며, ③ 30~35절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말씀”이요, ④ 36~40절은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뜻”입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여 “예수님의 하시는 일”로 정하였습니다. 27절과 35절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과 “생명의 떡”이란 말씀도 중요합니다만 30절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 말씀에 비중을 두어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무리들이 예수님을 뒤따라옴(22~25절)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셨고(5:15),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향해(게네사렛에 갔다가 가버나움으로 갔음, 마 14:34) 떠난 것을 본 자들이, 그 이튿날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알고(마침 디베랴에서 배들이 벳세다로 온 것이 있었음) 가버나움으로 와서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질문하였으니, 그들은 예수님이 전날 밤에 해상 보행하여 제자들과 함께 오신 것을 몰랐었습니다.

2. 무리들의 잘못된 추종을 지적하심(26~29절)

1) 2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들의 질문에 따라 대답을 하신다면 “어제 밤에 해상 보행하여 이곳에 왔다”고 하셨어야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이적을 내세우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적을 보고도 안 믿을 자들이고, 떡에만 뜻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 4:48에서는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따른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여기서는 상황이 달라서 표적에 비중을 두기보다 “떡을 먹고 배부른 일”에 비중을 두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기적보다 배부른 것이 더 시급한즉 양식을 먹고 배부른 일에 더 큰 목적을 두고 따른 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양식은 썩는 양식(유한한 양식)일 뿐이었습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은 27절에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이 뜻은 무노동의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양식 해결할 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뜻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한 생수(요 4:14)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는 “생수”로, 떡을 얻기 위해 나온 사람들에게는 “떡”으로 진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인침을 받으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중보자로서 허락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히 5:5~6).

3) 27절에서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하셨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그 의미를 몰라서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할 것입니까?”라고(28절)…. 이때에 예수님은 29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자들은 “일들”(Τά ἔρϒα)로 질문하였고, 예수님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실 때는 단수(Τὸ ἔρϒον)로 대답하신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알았을 것인즉 잘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마음에 생각하시고 자신을 떡(생수)으로 비유하여 “영생주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표적을 보거나 떡을 먹는 일에 앞서 예수님 자신을 믿는 일로 시작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하시는 일(30~35절)

1) 따라온 무리들이 30절에서 “예수님께 묻되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였으니, 이 말은 5병2어의 기적의 의미를 물은 것이고, 또 “하시는 일”이란 “무슨 목적으로 오셔서 그런 일을 하시느냐”는 뜻이니, 적당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적의 양식과 비교하는 뜻으로 “조상들이 먹은 광야의 만나”(출 16:4~15)를 거론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주는 떡을 먹었다 함과 같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즉

2) 32~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린 떡(만나)도 모세가 준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만나는 썩는 양식이었지만, 참 떡은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 하시므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하늘(하나님 보좌)에서 오신 생명의 떡(메시야)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그들은 34절에서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달라” 하였고, 예수님은 35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순서와 꼭 같지 않습니까?(요 4:12~15) 여기에서 “떡을 달라” 한 자들은 그 떡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3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떡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신앙”이란 점에 믿음을 갖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은 곧 생명이시고, 전리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먹는다”는 뜻은 믿음을 뜻하고, “영원히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음”은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음과 함께 자유 누리는 축복”을 의미합니다(요 8:32). 여기에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자신을 생명의 떡(메시야)으로 나타내시는 일”이었습니다.

4.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뜻(36~40절)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뜻은 “택한 자 즉 하나님의 주신 자(36절)에 한하여 예수님이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영생하도록 살리는 일(39절)”이라 하셨으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이란 뜻입니다.

1) 36절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하셨고, 37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선택된 자들 뜻함)는 다 올 것이라” 하셨으며, “예수님께로 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심”은 그들의 믿음을 견인케 하셔서 궁극적으로 구원받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2) 38절에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이라” 하시므로 구원의 계획을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것과 예수님이 순종으로 그 뜻을 이루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 39절과 40절에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하셨으니, 이는 구원의 완성으로 부활(영화)케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40절) 하시므로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믿게 하신 것이고, 그 후 시대에는 사도들의 증언과 성경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제 16 과 믿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심 (요 6:41~7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대지 별로 분류하면 ① 하늘로서 내려온 떡에 대한 의문(41~48절), ② 살과 피를 먹는 의미이며(49~59), ③ 이해 못하는 제자들이요(60~63절), ④ 참 제자를 모으심(62~71절)입니다. 이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믿음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의미를 알리시려고 생수, 하늘로서 내려온 떡(33, 41절), 내 살과 피를 먹는 자(53절)란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끌림 받지 않은 무리들은(44, 65절) 끝내 이해를 못하였고, 제자들 중에서도 많이 물러갔은즉(66절) 결국 믿음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자들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66~68절)

1. 하늘로서 내려온 떡에 대한 의문(41~48절)

1) 41~42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33절) 하심에 대하여 “그가 요셉의 아들이고(눅 3:23) 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로 내려왔다 하느냐?” 하면서 수군거렸으니, 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들의 예언에 응하여 동정녀 탄생의 기적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야임을 알지 못한 상태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 43~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군거리지 말라”(의심의 표현) 하시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 불신앙 상태가 의외의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37절과 44절에서도 말씀하셨고, 또 요 3:3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진리”로도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받을 자는 하나님의 역사로 믿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행 13:48). 그리고 “오는 그를(믿는 자)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40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3) 45~46절에서는 구약의 예언이 응할 것을 말씀하셨으니, 사 54:13에서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복음 시대에 예수님께로 나온 자들에게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는 뜻은 구약을 옳게 이해한 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46절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은 구약을 바로 이해한 것일 뿐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배웠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되겠기로 설명하신 것이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예수님 뿐) 아버지를 보았다” 하시므로 하나님에 대한 유일 계시자가 예수님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47~48절에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41절과 4:14과 5:14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2. 살과 피를 먹는 의미(49~59절)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상징한 떡을 자신의 살과 피로 표현하시므로, 떡이란 의미가 예수님 자신임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생수와 떡을 예수님 자신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무지를 확실하게 깨우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1) 49절에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만나를 기적으로 주신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양식이었고, 육신의 양식은 썩을 양식이므로 때가 되면 육신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2) 50절에서 그러나 “이는(예수님) 하늘로서(즉 하나님의 뜻으로) 내려온 떡(생명주)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믿음으로 연합하게 함) 죽지 않게(영생 구원) 하는 것이라” 하셨고, 51절에서도 자신을 “산 떡”(살아있는 구세주)으로 비유하여 같은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내 살(자신을 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3) 52~59절에서 “살과 피를 먹는 의미”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52절에서는 “살을 먹는 의미를 이해 못한 자들의 논쟁”이 있었고, 53~55절에서는 예수님이 거듭 강조하시면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인즉(55절)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속죄, 영생)이 없고(53절)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으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림(영광의 부활)을 받을 것이라(54절)”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40절과 44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4) 살과 피를 먹는 의미에 대하여 56~57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것이라” 하시므로, 전자는 후자 즉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생수나 떡(예수님)을 먹는다는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 예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세상에 오시고 사시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롬 14:7~9)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5) 58절에서는 예수님이 모세나 율법과 같지 않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때에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먹었으나 다 죽었고(육체의 죽음) 모세가 준 율법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갈 3:10~11) “예수님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자신)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는 뜻은 그것이 영생을 주는 양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연합되어도 육체적 죽음은 의당히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훈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58절).

3. 이해 못한 제자들(60~63절)

1) 60절에서 12제자 아닌 다른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였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시고, 61절에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산 떡)을 만나와 비교할 때 믿음을 거절할 사유로 생각하느냐? 하신 것이며, 그렇다면 62절에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승천하여)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찌 하겠느냐?” 하시므로 부활 승천이 있을 것과 그것이 최후의 이적이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2) 그리고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은 유한하고 또 스스로 살지 못하니 무익합니다. 그러나 육을 살리신 것은 영의 역할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이를 살리실 때 “그 영이 돌아와… 일어났다”는 말씀처럼(눅 8:55) 사람의 두 부분(육체와 영혼) 중에 영만 생명에 속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또 “모든 영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히 12:9).

4. 참 제자를 모으심(62~71절)

1) 64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과 유대인들(41절) 및 제자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는 것과(60절) 특히 가룟 유다가 그러할 뿐 아니라 자기를 팔 것까지 처음부터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외식자를 익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2) 65절에서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올 수 없다” 하신즉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사실은 예수님이 외식으로 따르는 자를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정화하신 것입니다. 아주 깨끗하게 선별하시지는 않았지만(마 13:29) 그렇다 하여 외식자를 방관하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3) 67~71절에서는 12제자들에게도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인 줄 믿고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한 고백만이 주님과의 관계를 든든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 둘 중 하나가 마귀요(마귀의 뜻에 잡힌 자) 그가 곧 예수님을 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잠 16:4을 참고하십시오). 여기서는 가룟 유다를 지목하지는 않으셨으나, 이는 그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마 26:23, 25).

 

설교보충 5. 본문에 나타난 교훈들 (요 6:41~51) 목록으로


1. 본문 41~42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알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란 의미를 모르고 믿지 않은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아는 지식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또 그의 부모까지 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오셨다”는 의미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일반적 지식은 있으나 신앙적 지식은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 지식은 아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수군거리기만 한 것입니다. 지식은 일반적 지식이고 “믿음과 지식이 하나 되는 것”(엡 4:13)은 믿음의 지식(믿음의 지식, 히 11:3, 요 6:69)을 의미합니다. 일반적 지식이 오히려 믿음의 장애가 된 것입니다(요 9:41).

2. 수군수군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43절). 롬 1:29과 고후 12:20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은 죄라”고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이 수군수군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면 말을 그칠 때가 있지요. 그때 반드시 누구를 폄론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거나, 아니면 범죄 모의를 하였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하던 말을 공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말의 실수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일에 크게 주의하여 가급적이면 모든 사람이 다 듣고 다 보아도 괜찮은 말만 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44절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요 15:16) 부르시고 거듭난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을 아시고(요 3:3, 마 16:17, 고전 12:3) 전도에 앞서 반드시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시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하여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4. 44절에서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는 말씀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궁극적 구원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자가 천국을 본다”(요 3:3)는 말씀이나, 믿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47절),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말씀(요 17:6~12)이나, 자녀의 권세의 주신 것과(요 1:12), “영생을 얻었다”(요 5:24)는 말씀이 다 궁극적 구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5. 구약을 이해할 때 메시야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45절에 보시면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은 구약을 인용(사 54:13)한 말씀으로 구약이 메시야를 예언하신만큼 “그 내용을 배운 사람은 주님께로 온다”(45절)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구약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듭난 심령이라도 예비지식이 있으면 믿음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조명한 말씀은 구약 성경 뿐이니까, 그것을 앎으로써 예수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눅 24:25~27).

6. 하나님을 계시할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46절에서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소개할 분이 예수님뿐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7. 48절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말씀은 요 4:10의 생수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생수나 떡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있으면 삽니다. 여기의 “산다”는 뜻은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영생주시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의미에 대하여 56~57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고 자신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처럼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을 요 14:11에서도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두 인격이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롬 13:14, 14:7~8; 엡 4:1, 3).

8. 떡이란 의미를 더 밝혀서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생수에서 떡으로, 떡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용어는 다 구약성경에서 예표하신 것을 알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호렙산의 생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출 17:6).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율법인 모세의 지팡이를 맞고 물이 나온 것은 곧 예수님의 희생적 구속 사업을 예표함이고, 만나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며(계 2:17), 더 나가서 “자신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는 뜻은 구약 제사의 희생물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양이 희생될 때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필자는 성찬 예식을 할 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고, 떡은 그리스도의 살을 찢기신 고난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깨달은 것은 “피와 살”은 하나로써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살에 피가 없으면 그 살이 썩고, 또 살 한 점을 떼려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주님의 살과 피는 주님 자신의 생명의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의미인 것입니다.

 

제 17 과 초막절에 상경하심 (요 7:1~18)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9절은 “형제들과의 대화”요, ② 10~13절은 “초막절에 상경하심”이며, ③ 14~18절은 “명절 중간에 있은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전체의 제목을 “초막절에 상경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형제들과의 대화(1~9절)

1) 1절의 “이후”는 6장의 갈릴리 즉 벳세다와 가버나움의 시역을 의미하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다에서 다니려 아니 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라” 하셨으니,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핍박을 두려워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가 되지 않아서 상경을 미루신 것뿐입니다(6절).

2) 2절에서는 “유대인의 초막절이 가까운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초막절은 선민의 절기의 하나로써(레 23:33~44) 7월 15일부터 8일간 지키게 하셨는데, 목적은 토지 소산을 거둔 일로 추수 감사의 뜻과 또 조상들이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먹으며 초막을 짓고 40년간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습니다. 레 23:35~36에 보시면 “그 기간의 첫날과 끝 날을 중요한 성회라 하셨고 8일 동안을 안식일처럼 보내며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40절). 89년도에 필자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집 마당에 초막을 지어놓은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절기에 제사장들이 성도들과 함께 성가대를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찬송하며(사 12:3)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가 성전 뜰에 뿌리면서 기념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3) 3절에서 “그 형제들이 예수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교훈과 이적)을 (다른) 제자들도 보도록 여기(갈릴리 지역)를 떠나 유다(예루살렘이 있는 지역)로 가소서” 하였으니, “그 형제들”이란 마 12:46~47에도 나타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계속 동생들을 낳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필자가 눅 4:23~38에 나타난 족보를 연구, 해설한 후에 생각을 달리 하였습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성별된 여인으로 인정하여 계속 동침하지 않았을 것 같고(마 1:19, 가만히 끊고), 요셉이 계대결혼법에 의하여 헬리의 자부(눅 3:23 참조)와 혼인한 후 거기에서 낳은 이복형제들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동생들에게 부탁하시지 않고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요 19:27)이 그런 추측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유대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보이도록 유대로 가소서” 한 것은 “예수님의 명성을 드러내라”는 뜻이었으니 곧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숨김) 일하는 자가 없는 것처럼 이 일(메시야로 나타내는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4절)라고 한 것입니다. 5절에서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았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것을 보면(10절) 유대주의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이 때에 예수님은 “내 때(구속 사업을 십자가로 이루시는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늘 준비되어 있는 너희의 때”에 대하여는 다음 설교문(미룰 수 없는 때)을 참고하십시오.

5) 7~9절에서는 “예수님이 초막절 행사를 인하여 일찍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로부터 미움 받는 일을 피하심과 동시에 그의 때가 시급하지 않으므로 일찍 가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함”은 그들(예수님의 형제들)이 세상을 도전하지 않고 세상과 짝하기 때문이요, 그러나 예수님을 미워함은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않노라”고 하셨습니다(8절). 사실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시고 얼마간 지체하신 후에, 뒤에 올라가셨습니다(10절). 8절의 “아직”이란 말씀이 “시일이 남았다”는 뜻일 뿐 “안 올라가신다”는 뜻은 아니므로 진실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때”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시점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형제들과 동행하시지 않으려고 그렇게 하신 듯합니다(19절).

2. 초막절에 상경하심(10~13절)

1) 10절에서 형제들이 상경한 후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신 것”은 미워하는 자들의 눈을 피하시고 때를 맞추어 접근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2:23).

2) 11~13절은 그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폄론한 내용입니다. 11절에서는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으면서(핍박하기 위하여) 어디 있느냐?” 하였고, 또 12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리기를 “혹은 좋은 사람이라 혹은 아니라 미혹하는 자라”고 하였으니, 어느 시대나 판단의 양론은 있게 마련입니다.

3) 14절에서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나게 그를 (좋게) 말하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명절에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3. 명절 중간에 있은 일(14~18절)

1) 14절에서 예수님은 명절 중간(8일 중 중간쯤)에 성전에 올라가(예수님이 3, 4일 지체하신 듯 함)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자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절) 하였으니, 여기의 “배우지 않았음”은 학문 경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때에 예수님은 16절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나타내신 교훈이 곧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이라” 하셨고, 1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이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스스로 말씀하심인지를 알 것이라” 하시므로 진정한 깨달음은 믿음으로 비롯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진정한 믿음의 자세이고, 그런 믿음이 있을 때에만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인지 아니면 인간의 말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3) 18절에서는 “스스로 말하는 자(진리를 나타내지 않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는 참되고 그 속에 불의가 없다” 하시므로 예수님의 증언이 참되심을 증언하심과 동시에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진리를 옳게 나타내지 않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라야 그 말이 참되고 그 속에 불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광을 부추기는 자들이나 그의 교훈은 다 참되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미룰 수 없는 때 (요 7:5)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뜻은 뒤로 미룰 수 없이 즉시 시행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룰 수 없는 때”가 무엇인가?를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때를 정하고 일하신다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다”(전 3:1) 하셨고,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셔야 할 때가 있으며(갈 4:4,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여인의 몸에서 나게 하심), 돌아가실 때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때를 맞추시기 위하여 핍박을 피하신 일도 있었고(요 7:8), 예루살렘 상경을 늦추신 일이 있었습니다(요 7:6, 8:20). 그 외에도 영광의 때, 이방인의 때, 징계의 때, 수명의 때 등이 있습니다(요 12:23, 단 9:2, 눅 21:24, 행 17:26). 기도의 응답은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릴 필요 없이 시급하게 시행하여야 할 일들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성도에게 준비되어 있는 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그 때가 준비된 것입니까?

1.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급히 할수록 좋은 것일 뿐, 적당한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 5:23에서 “일이 커지기 전에 급히 사화하라” 하셨고, 호 3:13에서는 “범죄의 시일을 따라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호 4:9, 12:2). 그러니까 죄는 질병과 같아서 초기에 발견하고 초기에 치료할수록 유익한 것처럼 죄는 회개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 7:12에서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예비하심이어 그 만든 살은 화전이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눅 15:20).

2 은혜 받는 일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때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아야지.… 내가 아무 때 휴가 내고, 부흥회 할 때 은혜를 받아야지…” 하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이 곧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후 6:2)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은혜는 시간을 정하고 앉아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은혜를 받았고, 모세는 양을 치다가 받았으며, 엘리사는 밭 갈다가 은혜를 받았고(왕상 19:19), 사울은 길 가다가 갑자기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행 9:3) 그러니까 은혜를 받는 데는 무슨 때와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은혜를 사모하고 구할 수 있으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호 10:12에도 보시면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의를 비처럼 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후 6:2의 “지금”이란 신약시대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차를 탄 상태에서도 기도하시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십시오.

3. 전도 사역을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넉 달이 있어야 추수한다는 말은 육체의 양식이고, 영혼의 수확은 이미 거둘 때가 되었으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요 4:35). 이 말씀은 전도의 때가 항상 준비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전도의 사명을 가진 자가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 하였을 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1~62) 하셨고, 또 “부친을 장사 지내고 주님을 따르겠다” 하였을 때도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1)고 하셨으며, “빨리 시내의 사거리로 가서 어려움 당한 자들을 초청하라”(눅 14:21) 하신 말씀은 다 전도의 시급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적기를 놓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도의 기회는 앞당길수록 좋을 뿐, 특정의 때가 있는 것이 아닌즉 항상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충성의 때로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 25:16에 보시면 주인이 종들에게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기고 “장사하라” 하였을 때, (주인이 속히 올 줄로 알고) 바로 가서 장사한 사람만 이를 남기고 주인이 왔을 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받은 자가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게으름 피고, 방탕한 자들은 다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24:48, 눅 12:45). 개인적으로 예수 잘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교회생활 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행 20:28, 엡 1:23).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인적으로 사명적인 일(말씀 사역)을 행할 때, 자기의 충성의 시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줄로 믿고 부지런히 앞당겨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 계 2:3, 10에서 “예수님은 사명자의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아신다” 하셨고,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으니까 충성에 몰두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는 것이 큰 행복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에 몰두하려면 사명 사역을 취미로 알고, 거기에 끌려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너희의 때가 준비되어 있다” 하심은 바로 자기의 부름 받을 시기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세상 떠나는 일이 우리 눈앞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부자 되어 향락을 누리려던 어리석은 사람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말씀이 그 사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닐진대 우리의 죽음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을 준비는 시급할 뿐, “천천히 해도 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미룰 수 없고 “준비되어 있는 때”를 확실하게 이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증언과 반응 (요 7:19~36) 목록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초막절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다음에 그 주위에서 나타난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분류해보면 ① “예수님의 교훈”이요(19, 21~24, 28~29절), ② 무리들의 반응이며(20, 25~27, 30~32절), ③ “예수님의 승천 예언”(33~36절)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여 “예수님의 증언과 무리들의 반응”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예수님의 교훈(19, 21~24, 28~29절)

1) 19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이 “율법 지키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시므로 율법의 계율이 사랑인바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것은 계율의 위반이 되는 것입니다.

2) 21~23절에서 예수님은 요 5:2~9에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로 유대인들이 계속 비난하는 일에 대하여 변론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1절에서 “내가 한 가지 일(38년 된 병자 고치신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괴이히(안식일에 고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뜻) 여기는도다”, 22절의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다” 하심은 할례를 시행하는 유대인들이 할례의 규례를 모세가 율법으로 준 줄로 오해하고 시행한다는 뜻이요, ( ) 안에 있는 말씀으로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는 뜻은 모세 율법에 할례 규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창 17:10~12에서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아 시행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적 할례로 알면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시행한다” 하시므로 그들의 모순된 행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으려고(실은 조상으로 받은 규범인데)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일을 (잘못한 일로 여겨) 노여워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할례 받는 자들이 어찌 안식일에 병 고침을 지적하느냐?”는 뜻입니다. 할례는 위생과 건강에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3) 24절에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모순된 판단이고, 공의의 판단은 합리적 판단입니다. 자신도 옳게 행하지 못하면서 사실의 파악조차 부족한 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4) 28~29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성전에서 증거하셨으니 곧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동안 증거한 말씀을 어느 정도 믿으려는 대상에게 주신 말씀입니다(31절 참고). “내가 그에게서 났다”는 뜻은 존재의 선후 의미가 아닌(요 1:1) 말씀이 육신된 것(요 1:14)을 의미합니다.

2. 무리들의 반응(20, 25~ 27, 30~32절)

여기의 무리들은 세 종류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이고(20절의 “우리”, 25절의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27절의 “우리가”, 30절의 “우리가”), 다음은 믿는 자들이요(31절), 또 한 단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32절).

1) 무리들은 20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절) 하신 말씀에,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가?” 하였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취급을 한 것은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등의 말씀으로 알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 때문일 것이요, “죽이려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 중의 음모를 나타낸 말씀인데 그들은 그것을 감추려 한 것입니다(25절). 25~27절에서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사실”에 대하여 증언하였으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신분을 감춘 뜻)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음모자들)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알콘테스, 통치자의 뜻)도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줄 아는가?” 하였고, 27절에서 또 어떤 무리는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 하므로, 그리스도의 내림은 “나사렛 사람이 갈릴리에서 오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역시 불신을 나타낸 말입니다. 30절에서 “저희(앞에 나타난 무리들)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잡히셔야 함에 인간의 심적 발동이 있을지라도 때를 맞추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를 통제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모든 일도 그렇게 섭리하시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대상 29:11, 시 103:19, 눅 12:6).

2) 믿는 자의 태도입니다. 31절에서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 하였으니, 이들은 표적으로 그리스도인지를 확인하려고 한 것입니다. 교훈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표적으로라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요 10:38, 히 2:4). 믿는 자들의 이 말도 드러내어 한 것이 아니라 “수군거리는 말”로 한 것이었습니다(32절).

3)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의 태도입니다. 32절에서 그들은 “믿는 자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승천 예언(33~36절)

1) 3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이 시기가 7월의 초막절인즉 다음 유월절까지는 6개월이 못 남음)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승천을 예언하심), “그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절) 하신즉

2) 35절에서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갈 것이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한다 하는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헬라파 유대인들, 행 6:1)에게 가서 가르치려 하는가?” 하였고, 또 36절에서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였습니다. 부활과 승천과 내세를 관망하지 못하는 자들의 당연한 의문이라 할 것입니다.

 

제 19 과 명절 끝 날에 있은 일 (요 7:37~5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4대지로 나누어 살피실 수 있습니다. ① 명절 큰 날에 주신 말씀(37~39절), ② 무리들의 반응(40~42절), ③ 악당들의 쟁론(43~49절), ④ 니고데모가 말함(50~53절)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로 종합하면 “명절 끝 날에 있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명절 큰 날에 주신 말씀(37~39절)

1) 37절의 “명절 끝 날, 곧 큰 날”은 레 23:36에서 초막절 8일째 되는 날을 “성회 또는 거룩한 대회로 정하여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화제를 드리라는 말씀”에 따라 “큰 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습니다(37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주실 은혜를 생수로 비유하신 것이고(요 4:10), 이 생수는 39절에서 “예수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며,

2) 38절에서 “나를 믿는 자(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성경에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신약 시대에 나타날 성령님의 역사를 물 또는 강수로 비유하여 예언하신 말씀을 뜻하는 바, 그 말씀들은 사 12:3, 44:3, 55:1, 58:11, 겔 47:1~12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신약 시대에 나타나실 성령님의 역사를 “생수의 강”으로, “배에서 … 흘러남”으로 표현하신 것은 충만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3) 또 ( ) 안에 있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음”은 구약 시대로부터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 성령님이 상주(常住)하여 역사하시지 않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셨지만(시 51:10~12, 창 41:38, 민 27:18, 삼상 16:13~18) 특별한 경우에만 역사하신 것이고, 상주하시는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교훈을 하실 당시에도 성령님과 동반하신 상태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주하여 역사하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여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까요(요 16:7).

2. 무리들의 반응(40~42절)

이 말씀에서 40~42절은 “일반인의 반응”이고, 43~49절은 “악당들의 반응”입니다. 일반인의 반응으로 40절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 하며, 또 41절에서 “혹은 그리스도라(메시야로 믿는 뜻)”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41절에서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갈릴리를 비천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무시한 뜻)” 하였고, 또 42절에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사 11:1~5; 대상 17:1, 14) 또 다윗이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으니 다윗의 고향은 베들레헴이고(삼상 16:1),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은 미 5:2에서 예언하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긍정하려는 뜻으로 그 근거를 말한 것입니다.

3. 악당들의 쟁론(43~49절)

1) 43절에서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 쟁론이 되었으니”, 여기의 “무리들”은 바리새인들과 하속들입니다. 32절에서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에게 “예수님을 잡아오도록 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44절에서 “하속들 중에서 예수님을 잡고자 한 자들도 있었으나 손을 댄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46절에서 밝혀집니다.

2) 45절에서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은 채 명한 자들에게 오니 저희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은즉, 46절에서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 하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에 틀린 것이 없고 “으뜸가는 교훈자”이시므로 “그의 죄를 책잡지 못하여 잡아오지 못하였다” 한즉, 바리새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 하였고, 또 48절에서 “당국자들(통치자)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하므로 높은 지위를 신앙과 도덕의 표준으로 여기라는 뜻으로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표준은 독선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참됨”의 표준은 예수님뿐입니다. 성경이 표준이란 뜻이지요(요 14:6).

3) 49절에서 또 말하기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예수님과 제자들)는 저주를 받은 자라” 하였으니, 실제로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이므로 이 말은 자신들을 저주한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4. “니고데모”가 말함(50~53절)

1)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요 2:1~2)가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기를(50절)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였으니, “니고데모”는 같은 바리새인으로 말할 만한 위치에서 바리새인들의 불법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49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범죄의 확증도 없이 저주를 하고 또 잡아오라” 한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처음에 바리새인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일에 비하면 많이 담대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 몰약과 침향을 100근이나 제공한 일도 있었습니다(요 19:39).

2)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파냐?)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하며 거듭 부정을 한 후(41절)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 ]의 의미는 다음 장에서 설명합니다.

 

제 20 과 간음한 여인과 자기 증언 (요 8:1~20) 목록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초막절 시기에 성전에서 가르치시고(7장) 감람산으로 가셨다가 다음날 다시 오셔서 가르치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① 1~11절까지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권면”이고, ② 12~20절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두 제목을 합하여 “간음한 여인과 자기 증언”이라고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요한복음 8장을 세 번에 나누어 살핍니다).

1. 간음한 여인에 대한 권면(1~11절)

1) 7:53부터 8:11까지 [ ] 안에 기록된 것은 신약을 기록한 대표 사본 일곱 개(A′, B, L, T, W, D, E 사본) 중 D 사본과 E 사본에만 본문의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신약성경의 원본은 단편 문헌까지 약 2,000 종이라 함). 그러면 이 말씀을 정경으로 믿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여기에서 학자들의 주장을 살피면, 이 말씀을 정경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자유를 주신 사실(11절)과 8:32의 “진리가 자유를 주신다”는 말씀과 부합되고, 또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가 이 말씀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이 요세보의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점과 3세기 사람 “어거스틴”도 이 말씀으로 설교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정경으로 믿지 않는 학자는 “알포드”, “호스킨스”이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6절) 그런 사실을 만들었다” 하면서 정경성을 부인한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사상(심판하시지 않음, 요 3:17)과 부합되므로 믿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 1~2절에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가심”은 주무시고 기도하러 가신 것이고(막 11:19, 눅 21:37),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온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자들이 다 나온 것과 예수님이 앉아서 가르치신 것을 유의할 수 있습니다.

2) 3~6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과 말씀 듣는) 무리들 가운데 세우고 그 여자가 간음 현장에서 잡힌 것을 증언한 후 모세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였으니,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함께 범한 남자는 도망을 친 모양입니다. 레 10:10과 신 22:23에서 “간음하는 자를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으므로 율법 시대에는 그 형법에 근거하여 재판 절차를 거친 후 그렇게 하여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신즉(롬 7:6, 10:4; 마11:13) “율법대로 하라”고 하실 수 없었고, 제보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하시면, 그것을 고소거리로 잡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라” 하신다면 예수님은 율법의 정죄를 면하게 하시는 구세주 역할을 하시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롬 8:2). 예수님이 대속자로서 죄인에게 은혜도 베푸시고, 고발 대상도 안 되면 좋을 것입니다.

3) 6~8절에서 답변을 주셨으니 6절 하반에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글을) 땅에 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신즉 7절에서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 하였다” 하셨으니, 글을 쓰신 뜻을 몰라서 계속 질문한 것이고, 예수님이 두 번 글을 쓰신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8절). 예수님은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후, 8절에서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는 왜 말씀을 안 하시고 글을 쓰셨는가? 하는 점과 또 한 가지는 무슨 글을 쓰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절과 관련하여 연구하셔야 합니다.

4) 9~11절은 잘 해결된 결과를 말씀하셨으니, 9절에서 고발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나가 버렸다” 하셨고, 10절에서는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만 남은 것을 확인한 말씀”이며, 11절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 쓰신 글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시 14:1~3의 말씀과 “심판자는 하나님뿐이시다”라는 창 49:16이나 욥 8:3의 말씀을 기록하셨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발한 자들이 자신들도 의인이 아님을 깨닫고 심판에 가담하였다가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글로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글을 범죄한 여인이 볼 때에 자책하고 회개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에게 숨기기 위하여 글을 쓰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것은 회개를 철저히 하라는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범죄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가혹하게 벌한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범죄를 차단하고 덕을 세움에 유익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즉 그 여인을 정죄하실 수도 있으나 용서의 덕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거(12~20절)

1) 1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라” 하셨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 1:4에서 설명 드린 것입니다. 빛은 정의와 생명, 어두움은 마귀의 세계 또는 빛의 반대 세계로 이해하십시오. 빛의 반대 세계는 곧 영원한 어두움(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2) 13~14, 17~18절에서는 “증거의 합리성”을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였으니, 이는 17절에 나타난 바처럼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신 17:5~6, 19:5에서 범죄자를 재판정에서 정죄할 때 “두 세 사람의 증인의 입증으로 확정하라”는 뜻일 뿐,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는 말씀은 하신 일이 없지만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증거를 훼방하기 위하여 율법적으로 지적한 말입니다. 증거가 많으면 좋으나 악인의 증거는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예수님)만 참되신즉(요 3:33, 14:6) 예수님의 증거는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요 5:31~32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4절에서 “자신이 참되시므로 스스로 자기를 증거하여도 그것이 참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증거가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당사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알지만 무리들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간다”는 것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와 미래를 모르는 자의 말은 참될 수 없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는 분이므로 참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증거보다 두 사람 이상의 증거가 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뜻으로 18절에서 “나를 위하여 아버지도 증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15~16절은 예수님의 증거 뿐 아니라 “판단도 공정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 5:30). 15절에서는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들의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옳지 않은 이유는 육체를 따라(성령님의 지도 없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은 “육체를 따라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마 22:16, 눅 20:21, 요 8:24). 16절에서는 예수님의 판단이 옳은 이유로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 점도 있거니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4) 19절에서는 무리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셨고, 또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 하셨으니 하나님과 예수님 또는 구약과 신약이 일치 연계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을 옳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바로 알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알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 20절에서는 예수님이 이상의 말씀을 성전의 연보궤 앞에서 가르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그의 때(돌아가실 때)가 이르지 아니함”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가 있음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소리 없이, 표 없이 진행되는 역사 속에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가 빈틈없이 개입되고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답답한 사람들과의 대화 (요 8:21~40)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① 21~24절은 “예수님의 예언과 무리들의 오해”요, ② 25~30절까지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설명”이며, ③ 31~36절은 “참 제자와 자유에 대한 말씀”이요, ④ 37~40절은 “잘못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총 제목을 “답답한 사람들과의 대화”로 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자들도 있지만(30절), 많은 상대자들이 “죄 가운데서 죽을 자들이라” 하셨고(24절), 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몰랐으며(25절), 또 자유의 의미도 몰랐고(33절),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 곳이 없다” 하셨으며(37절), 아브라함의 자손 된 의미도 몰랐으니(39절) 얼마나 답답한 상태입니까? 그래도 많은 사람이 믿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1. 예수님의 예언과 무리들의 오해(21~24절)

1) 21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실 것(가리니, 승천하신다는 뜻)을 예언”하셨고, 또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과 예수님이 가시는 곳(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즉 구원받지 못할 자들의 결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24절에서도 재설하셨습니다.

2) 22절에서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가리라” 하신 말씀과 “자기의 가는 곳에 오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을 “자결하시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23절에서 예수님은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의 소속이 다른 것을 말씀하셨으니, 곧 “예수님은 위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으며, 너희는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났다”는 뜻은 예수님이 천국 소속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목적 수행 차 잠시 세상에 오신 것을 뜻하며, “아래서 났음”은 세상에 속한 자로 마귀의 권세 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위에서 났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요 3:3, 요일 3:9).

4) 24절에서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하시므로 멸망 전에 구원의 방도가 소개되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소속이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소속은 이 세상뿐이고, 성도의 소속은 영원한 천국임을 아셔서 본향 사모하는 중심으로 사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설명(25~30절)

1) 25절에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고 하셨으니 무리들이 예수님을 누구냐 한 것은 예수님이 “위에서 나셨고 하나님이 아버지다” 하신 메시야적 발언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의문이 더 증폭된 것이고, “처음부터 말하여왔다”는 뜻은 구약적 예언의 성취 또는 세례 요한의 증언이 있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26절에서 예수님은 그 질문자들에 대하여 “말씀할 것과 판단하실 것이 많다”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온전하지 않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접근하고 있음(8:6)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요,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씀하신다” 하신 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시는 만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뜻입니다.

3)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깨닫지 모하였고(27절), 28절에서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십자가에 죽인 후) 내가 그(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줄 알고, 또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시지 않으며 오직 아버지의 뜻만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중심으로 행하신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많은 무지가 깨달음으로 변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4) 29~30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시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함께 하시는 것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었다” 하셨으니, 성도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에 머물 때 주님의 은총이 따르고, 또 전도의 열매도 있게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참 제자와 자유에 대한 말씀(31~36절)

1) 이 대목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31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30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거한다”는 뜻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인즉 성경을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대로 시행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 아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교회 생활, 교회 직분을 행하면서) 말씀 사랑, 말씀 연구에 집중할 체를 하지 않고, 허탄한 것들에 취미와 소망을 두고 밖으로 돌며 생활하는 경우가 있으니 경계하셔야 합니다.

2) 32절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고, 앎은 지식적, 친교적으로 알아야 하며, 신뢰로써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유란 뜻은 율법에서의 자유는 물론 고난과 속박에서의 자유와 모든 일에 만족과 감사를 느끼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핵심설교 74과, 75과, 76과, 77과(진리를 알지지, 자유 누리는 생활)와 일반설교1집의 25과(자유를 누립시다)를 꼭 참고하여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3) 33~35절에서는 영적 자유를 깨우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유를 말씀하신즉 유대인들은 자유 없는 종의 신세를 마음에 떠올리면서 33절에서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누구의 종 된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자유케 되리라고 하느냐?” 하였으니, 그들은 노예의 부자유함에서 해방되는 자유만 생각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4~35절에서 “(죄에 끌리고)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주인의 아들과 그 집의 종으로 비교 설명하신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은 자유자요 그 집에 영원히 있을 자이고, 종은 부자유한 자요 때가 되면 나갈 자입니다. 따라서 “무리들이 아들의 자격을 얻고 영적(죄에서 해방), 생활적으로 자유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4) 36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야 사역을 통하여 참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꼭 자유를 알고 누리십시오.

4. 잘못된 아브라함의 자손(37~40절)

예수님과 대화하는 유대인들은 족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잘못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진정한 의미는 구원받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눅 19:9, 롬 4:11).

1) 37절에서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마음에 심겨지는 것인데(약 1:21)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않은즉 있을 곳이 없고, 말씀(성령님)과 관련이 없은즉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2) 38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26절) 너희는 너희 아비(마 13:38)에게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인즉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요 8:44). 39절에서 무리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면서 또 한 번 조상의 명분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인정받으려고 하였으니,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절에서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였다”(56절)고 하였습니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일 뿐, 명분 자체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22 과 마귀에게 속한 자 (요 8:41~59)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내용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형편”입니다. 내용을 분류하면 ① 41~47절 말씀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형편”이고, ② 48~59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멸시하는 내용”입니다.

1.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형편(41~47절)

1) 41절에서 “너희(마귀에게 속한 자들)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아비란 44절의 마귀를 뜻하고, “마귀에게서 났다”는 뜻은 출생이 아니라 예속적 지배를 뜻합니다. 타락한 결과는 오직 마귀로만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인간의 인격적 의지가 동하여 된 것이므로 그 책임이 타락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일단 타락으로 심령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주시지 않는 한(롬 1:21~26) 그 인격은 마귀를 추종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의 행사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무리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음란의 자손이 아니란 뜻)” 함은 그들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모순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4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라면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보내심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다면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알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따라서 43절에서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라” 하셨으니, 들을 줄 모르는 것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일치합니다. 성도님들 중에 설교를 들어도 무엇을 배웠는지 알지 못하거나, 듣고 터득하는 힘이 약하면 깨닫는 것이 어렵고 따라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 믿을 때의 깨달음은 더 중요합니다(잠 20:12).

3) 44절에서 “마귀(너희의 아비)는 욕심쟁이요. …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그 속에 진리가 없어(참을 모르는 뜻) 진리(참됨)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하니 이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자”란 뜻은 미움의 원조란 뜻입니다(마 5:21~22). 따라서 이 말씀은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특징으로 욕심(진리를 대적하는 것)과 거짓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그렇게)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거짓이 특징인즉 이는 진리의 반대이므로, 45절에서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셔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4) 46~47절에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고 믿지 않으며 듣지도 않으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8:5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소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이것은 오만한 일이고, 또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또 “믿지 않음”은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시므로 믿지 않음을 지적하셨고, 47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너희가 듣지 않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이라” 하시므로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마귀에게 속한 자의 특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효자는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나 불효자는 듣지 않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멸시하는 내용(48~59절)

1) 48절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멸시 받아 마땅한 대상, 요 4:9) 또는 귀신 들린 자로 보는 견해가 옳다” 하였으니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거부의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내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무시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큰 무시를 당하시면서도 묵묵히 참으시고 자기를 들레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마 12:19).

2) 그 방법으로 50절에서 “나는 내 영광(예수님이 무시당하시지 않도록 자신을 높이시는 일)을 구하지 않으나 판단하시는 이(하나님)가 계시고”, 또 51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 하시므로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면 영생 구원 받을 것”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음”은 요 11:26에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육체의 죽음은 잠자는 것(요 11:11)처럼 이해하게 하셨고,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 52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51절) 하신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귀신 들린 자의 말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53절에서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55절에서 “내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분이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되는 것이라. 나는 그를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영광을 차리면 그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영광을 자신이 취하시려 하지 않았는데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아들에게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면서 안다는 자의 말은 거짓말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시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시므로 그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입니다.

4)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최고로 존경받아야 할 어른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도 죽고 없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게 하신다”(51절) 하신즉 53절에서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하나님이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시는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보고 기뻐하였음”은 천국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천국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눅 16:23~31, 마 17:1~3). 그러나 아브라함이 생전에 “메시야 구속 계획을 알고 기뻐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사정을 아신다”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50도 못된 사람이 어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하였을 때 58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 하셨으니, 이는 영원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1~2). 이때 “저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하였고,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으신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숨으시므로 범죄자들의 범죄 기회를 없애셨고, 또 자신은 때를 맞추어 일하신 뜻이 되는 것입니다(7:6).

 

제 23 과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심 (요 9:1~23) 목록으로


요한복음 9장 전체는 예수님이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신 사실과 관련된 기록”입니다. 분량 상 두 번에 나누어 상고합니다. 또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이 여섯 번(1회 : 마 12:22, 막 3:22, 눅 11:4; 2회 : 마 9:28; 3회 : 마 15:30, 막 7:35; 4회 : 막 8:23; 5회는 본문; 6회 : 마 20:34, 막 10:52, 눅 18:42)인데, 본문의 사건은 사도 요한의 고유 기록입니다. 대지로 분류하면 ① 1~5절에서 “소경 된 이유를 묻는 대화”요, ② 6~7절은 “고쳐주심”이며, ③ 8~12절은 “눈뜬 자가 이웃에 나타남”이요, ④ 13~17절은 “바리새인들의 비판”이며, ⑤ 18~23절은 “유대인들이 그 부모에게 질문함”입니다.

1. 소경 된 이유를 묻는 대화(1~5절)

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길을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보시게 되었는데(1절), 2절에서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죄 값으로 질병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마 9:5과 요 5:14에서 나타내신 바가 있으셨은즉 제자들은 그의 불구됨이 필시 자신(원죄의 뜻) 또는 부모의 죄 값(출 20:5)이려니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엡 4:6).

2) 3절에서 예수님은 명확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로 소경 되게 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요 11:4의 “나사로가 죽은 것이 (그의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신 것과도 상통합니다. 인간은 다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지만, 그의 소경됨이 “죄 값으로 주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럴만한 큰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모든 피조물을 자유롭게 이용하실 권세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용도에 따라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롬 9:21) 하나님은 미리부터 메시야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를 처음부터 소경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할 때, 성도는 어떤 불행한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을 알고 감사하며 거기에 부응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4절에서는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낮”은 핍박이 본격화되지 않은 시기를 의미합니다. 대개의 불법자들은 밤에 출몰합니다. 정의가 없는 시기를 어두움의 때로, 빛(진리)이 비취는 시기를 낮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이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5절) 하셨으니, 이는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를 뜻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은 불의와 감추인 세계이고, 빛은 정의와 나타난 세계(참)를 뜻합니다.

2. “고쳐 주심”에 대한 말씀(6~7절)

1) 하나님의 하시는 일(예수님을 메시야로 나타내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나면서 소경 된 자를 예비하셨은즉(3절) 예수님은 그 섭리를 이루시는 분이므로 당연히 고쳐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세상의 빛이라” 하신 그 말씀이 소경에게는 “빛을 보게 하실 자”라는 뜻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소경에게 접근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병을 고쳐주시는 방법으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6~7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침과 진흙(그 장소의 흙)은 약이 아닐 것인데 왜 그것을 바르셨을까? 하는 것이 연구의 과제입니다. 또 “실로암 못도 약이 아닐진대 그 물에 씻는 것은 위생적 정결 이상의 뜻은 없을 것입니다. 침은 흙을 바르는 접촉제이고, 흙을 눈에 바르신 것은 물로 씻게 하시기 위함이며, 물은 가까운 곳의 실로암 못을 이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방법을 쓰신 이유는 그 소경이 믿음을 갖고 순종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볼 수 없고 물이 귀한 환경에서 그 소경의 모습은 초라하였을 것인즉 눈을 뜸과 동시에 깨끗이 씻어 변화될 것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시행하여 밝은 눈으로 왔으니,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때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며(“실로아”라고도 함, 사 8:5),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작은 저수지입니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을 저수한 수도시설의 일부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주위에 건물이 있고, 작은 수영장처럼 주위에 돌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소경이 이 물에 눈을 씻고 보게 된 것은, 마치 “나아만”이 요단강 물에 몸을 씻고 문둥병을 고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왕하 5:10).

3. 눈뜬 자가 이웃에 나타남(8~12절)

8절에서 이웃 사람들은 오래된 소경이고 걸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밝은 눈으로 다닌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여 그 사람의 실체에 대한 의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그 사람이라” 하는 이도 있고, “아니라” 하는 이도 있을 때에 당사자는 “내가 그로라” 하였고(9절), 10절에서 그들은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으며, 눈뜬 자는 11절에서 사실대로 말하였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셨으므로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12절). 본 자들이 기이히 여긴 것과 눈뜬 자가 사실을 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4. 바리새인들의 비판(13~17절)

1) 13~14절에서 저희(이웃 사람들)가 그 눈뜬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고,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안식일이었으니 만큼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과 안식일 범한 문제를 관련하여 비판하려고 그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2) 15~16절에서 눈뜬 자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사실대로 말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한 자가 안식일을 범한 것 보면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다.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 어찌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는 자들과 꼭 그렇게 단정하지 않는 자들로 나뉘어져 쟁론을 하게된즉

3) 다시 눈뜬 자에게 “너는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아느냐?” 하였을 때 “선지자로 안다”고 하였습니다(17절)

5. 유대인들이 눈뜬 자의 부모에 질문함(18~23절)

1) 18~21절에는 유대인들이 눈뜬 자의 보게 된 사실을 믿지 못하여 그 부모를 불러 그가 소경으로 난 것과 보게 된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아들이 보게 된 사실에 대하여 경험자가 아니므로 직접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2) 그 부모들이 더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당사자에게 알아보게 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교파 단체에서 쫓아내는 것)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직접 “저에게 물어보시오” 한 것입니다(22~23절). 소경을 눈뜨게 하신 일에 대하여 긍정적 반응과 축하의 뜻이 없이 수사 대상을 삼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 세계에도 서로 뜻이 통하지 않으면 대립적 양상을 띠게 되는데, 여기에서 참된 종교는 교리도 확고하여야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병행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24 과 눈뜬 자를 2차로 소환함 (요 9:24~40) 목록으로


이 본문의 제목을 “눈뜬 자를 2차로 소환함”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24~29절까지는 “소환자들과 눈뜬 자와의 대화”이고, ② 30~34절은 “눈뜬 자의 증언”이며, ③ 35~38절은 “예수님이 눈뜬 자를 믿게 하심”이요, ④ 39~40절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 소환자들과 눈뜬 자와의 대화(24~29절)

1) 24절에서 “저희가 소경되었던 자를 두 번째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희”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권위로 소환한 것인데, 13절에서도 그를 데려오게 하여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른 이유는 눈뜬 자를 예수 믿는 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과,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마귀의 종으로 따돌리지 않으려는 논쟁파가 있었기 때문에(16절) 그들을 설득하려는 의도로 여겨집니다. 그 이 는 바리새인들의 대화가 그렇게 나타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환되어온 눈뜬 자를 보자마자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하였으니, 여기의 “죄인”이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로 소경되었던 자가 복종하였는가?” 할 때 그렇지 않았습니다.

2) 25절에서 그가 대답하되 “나는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었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눈을 뜸으로 삶의 보람을 찾은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3) 26절에서 그들은 또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으며,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하였을 때, 눈뜬 자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한즉(27절), 28절에서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였으니 제자는 그 스승의 말만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율법)은 믿지만 이 사람(예수님)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29절)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증언과 이적의 능력을 믿지 않는 태도를 나타낸 것입니다(요 6:40~42, 9:3).

2. 눈뜬 자의 증언(30~34절)

1) 눈뜬 자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을 답답하게 여긴 듯 합니다. 그리하여 30절에서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하니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 하셨는데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은즉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31~34절)고 한 것입니다.

2)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씀은 시 34:15, 17에 기록되었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시기에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할 것에 대한 말씀”이 사 29:18, 35:5~6에 예언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 사실을 요한에게 보고하였던 것입니다(마 11:5, 눅 7:22). 눈뜬 자가 비록 소경으로 있었을지라도 그만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실이 자기에게 응한 것을 체험한 만큼 사실대로 말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셨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경건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이적을 나타낸 것인즉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24절)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3) 3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그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들의 오판에 대한 것을 반성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자존심 상한 자의 말처럼 “네가 죄 가운데 나서(시 51:5)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쫓아내어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이 눈뜬 자를 믿게 하심(35~38절)

1) 35절에서 예수님은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셨고, 그를 만나셔서 “네가 인자(예수님 자신에 대한 호칭)를 믿느냐?”고 하셨을 때, 35절에서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한즉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하셨을 때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며 고백을 하였으니(38절), 그 눈뜬 자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한 분이 메시야일 줄로 알았지만, 직접 대면하여 확인하지 못한 것뿐인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적 체험은 믿음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확실한 믿음은 예수님을 보고, 또 알고 믿은 것이므로 이적 체험 자체와 믿음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39~40절)

1) 39절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은 아니나 그들에게 잘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하신다”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심판하신다”는 뜻은 마지막 때에 하실 심판을 미리 하신다는 뜻이 아니고(계 22:10~12), 참 믿음을 가진 자와 외식자에 대하여 구분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지 못한다”(마 7:2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하신 말씀(마 23:1~33),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마 22:12), “그물에 잡힌 고기를 선별하시는 일”(마 13:48) 등이 바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잘 믿는 자들 같고, 눈뜬 자는 34절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반대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일을 심판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심”은 바로 소경 같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이요, “보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심”은 바리새인 같은 자들의 독선이 구원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40절에서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 중에 “우리도 소경인가?” 하면서 반성의 여지를 나타내기도 하였을 때, 41절에서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소경 되었더면” 하신 말씀은 차라리 나면서 소경 된 자의 형편이 되었더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형편이라면 정죄, 독선, 교만, 진리 비판 등 이단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본다(잘 안다는 교만)고 하니 오히려 진리를 항거하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뜻에 대한 말씀은 마 11:25~27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제 25 과 참 목자의 비유 말씀 (요 10:1~2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구분하면 ① 1~6절 말씀을 “참 목자의 모범”으로, ② 7~15절을 “삯군과 선한 목자의 분별”로, ③ 16~21절을 “이방인 구원의 말씀과 구원 사역”으로 나눌 수 있고, 전체의 제목을 “참 목자의 비유 말씀”으로 정하였습니다.

1. 참 목자의 모범(1~6절)

1) 1절에서 “양의 무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거짓 목자를 절도, 강도로 비유하여 그 실체의 불법성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절도, 강도의 특징은 정도를 행하지 않는 것과 이기주의의 무법성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불법을 일삼고, 또 불법이나 부도덕을 이용하여 자신이 이기주의 목적을 채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상태를 잘 살펴야 하고, 또 그런 행동의 결과가 외적 부흥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런 일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성직자가 떳떳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때로는 과장하는 경우도 있으니 속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2) 2절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9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 하셨는데, 그 “문”은 천국 가는 문의 뜻이고, 또 7절에서 “예수님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중보자란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도 만나고, 천국도 가며, 은혜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 절의 문은 합법적 통행,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 또는 성도가 정도를 따라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양의 참 목자는 예수님이시지만(11절) 인간 사역자도 목자(목회자)가 될 수 있는데 일단 정도로 성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3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연다”고 하셨습니다. 2절에서 문을 정도라 하였은즉 정도로 가는 자 즉 “진리를 따라 가는 자에게 문을 연다”는 것은 성령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정도)의 영이시라 진리 가운데로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6:13). 성령님을 문지기로 비유할 수 있는가? 하시겠지만, 성령님은 인도하시는 분인 만큼 천사를 통하여서라도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문지기(성령)가 그(사역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참 목자와 성도가 서로 알며, 믿고 따르는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하나인즉 진리 중심으로 나갈 때는 모두가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4~5절에서 “참 목자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이고(앞서 감) 양(성도)은 그의 음성(목자의 교훈)을 아는고로 따라가되 타인(거짓된 자)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 하셨으니, 정도로 가는 성도는 진리만 따를 뿐 다른 교훈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도리어 멀리 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자들은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6절).

2. 삯군과 선한 목자의 분별(7~15절)

삯군에 대한 말씀은 8, 10, 12, 13절에, 참 목자에 대한 말씀은 7, 9, 10, 11, 14, 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8절에서 “나(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율법주의 지도자들)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셨고, 10절에서 “도적(거짓된 종교 지도자)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니, 이는 성도에게 피해만 준다는 뜻이며, 12~13절에서 “삯군(거짓 지도자가 삯을 위하여 일한다는 뜻)은 목자도 아니고 양(성도)도 자기의 양으로 여기지 않은즉 이리(양을 해하는 무리들, 잘못된 신앙으로 대적하는 자들)가 올 때 방어해주지 않고, 자신의 신상의 유익만 보호하기 위하여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양은 이리의 늑탈을 당하게 되니 이는 양의 목자가 아니고 삯군인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어버이처럼 주인 의식이 있지만, 삯군은 품삯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하는 자이므로 주인 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구별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참 사역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시려면 반드시 책임성과 봉사 희생성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과 포악, 그리고 이기주의와 욕심이 엿보인다면 삯군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참 목자에 대한 말씀으로 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9절에서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영생의 복입니다. 꼴은 양에게 필요한 양식인즉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뜻하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천국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장 안에서나 밖에서 목자의 인도를 받아 꼴을 얻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여러 방도로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10절에서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즉 참 목자는 도적이나 이리(삯군) 같지 않고,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생명은 “양의 번성”을 의미하지만, 이는 성도의 영적 부흥을 뜻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 사역자도 목자로 생각합니다. 목자의 원문 “포이멘”은 엡 4:11에서 목사로도 번역하였으니 , 목자나 목사가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 희생을 요구하는 성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막 10:45, 요 15:13). 또 14~15절에서는 “목자와 양이 서로 아는 것(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 같으니 예수님은 양(성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과 성도와의 관계가 극히 연합적인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인간 목회자를 예수님 사역에 너무 가깝게 접근시키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3. 이방인 구원의 말씀과 구속 사역(16~21절)

1) 16절은 이방인 구원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하리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신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 받아야 할 자들을 주님의 권속으로 인도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2) 17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이유는 큰 순종 때문이니, 즉 (구속 사업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이요, 이는 또 “부활로 목숨을 얻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목적이 대속과 부활 영광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아주 큰 고난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3) 18절에서 예수님의 희생은 뺏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뺏으시지 않았고, 예수님도 자기 생명을 지킬 권세와 버리실 수도 있는 권세를 다 갖고 계신 중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제의 본질은 자원하는 순종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빌 2:8, 히 5:8~9).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는 말씀은 “자원하는 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율을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나(삼상 15:22)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신 11:13) “즐겨 순종한다”는 말씀(사 1:19)이 다 하나님이 주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구속 사업을 이루셨습니다.

4) 19~21절에서는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으니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인정하는 자들과 귀신 들린 자가 어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자들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믿을 자는 믿고, 못 믿을 자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행 13:48, 계 22:11).

 

 

제 26 과 수전절에 있은 일 (요 10:22~42) 목록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수전절 때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제목을 “수전절에 있은 일”로 정하였습니다. ① 22~29절까지는 “양과 양 아닌 자와의 관계”요, ② 30~33절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유”이며, ③ 34~39절은 “성경과 사역으로 항변하심”이며, ④ 40~42절은 “요단강 저편으로 가심”입니다.

1. 양과 양 아닌 자와의 관계(22~29절)

1) 22절에서 예수님은 수전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 안의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요 7:14에서 초막절 때에 예루살렘에 상경하여 계속 사역하셨고, 10:40에서 요단강 쪽으로 가셨습니다.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부터이고(양력으로는 9월 10일에 해당함), 수전절은 기슬래월(슥 7:1, 양력 11월 12일에 해당함)이므로 초막절과 수전절의 간격은 한달 정도인즉 예수님이 지방에 내려가실 기회가 없은 듯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수전절과 솔로몬 행각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① 수전절이란 주전 165~164년 사이에 헬라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선민이 가장 모독스럽게 여기는 부정한 방법으로 성전을 더럽힌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대로 드리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기슬래월 25일에 율법이 금하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식으로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더럽혀진 성전을 3년 후에 유대인 지도가 “마카비”가 독립을 시킨 다음 성전의 정화 작업을 기념하는 뜻으로, 그 후 시대에 규례를 만들어 수전절을 지킨 것인데 그 날짜는 부정한 일을 저질렀던 날짜를 기념하여 기슬래월(11, 12월 중, 겨울에 해당, 22절) 25일부터 한 주간을 지켰고, 방법은 초막절을 지키는 방법과 비슷하게 하였는데, 이 기록은 외경에 속한 마카비1서 4:52~59과 마카비2서 10:5~7에 나타나 있습니다.

② “솔로몬 행각”은 성전 구내에 있는 건물로 솔로몬 후시대에 건립하여 솔로몬 행각으로 명칭한 것인데, 교육과 회의 장소로 사용한 듯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문답도 하시고, 가르치기도 하신 것이(눅 2:46, 20:1; 요 7:14) 바로 그 장소일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2) 이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합니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3~24절) 하였으니, 교훈을 듣고 이적을 보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는 갈등을 호소한 것입니다.

① 25~26절에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고 또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것(그리스도)을 증거하는 것일지라도 믿지 않는다” 하시므로 주님의 양으로 구별되지 않는 자들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 하셨고, 반대로

② 27~29절에서는 “내 양(택한 백성, 성도)은 내 음성을 들으며(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함) 나는 저희를 알고 저희는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 또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뺏을 자가 없다” 하시므로 구원의 확실성과 “궁극적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입니다. 이 특권이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믿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유(30~33절)

1) 30~3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라” 하셨고,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하나”란 뜻은 “삼위일체의 의미와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신 근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함께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2) 32~33절에서는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느냐?” 하셨고,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으로서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지만 이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그 말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여겼으니, 안 믿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람을 돌로 치려는 악행까지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3. 성경과 사역으로 항변하심(34~39절)

1) 34~3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30절) 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25절) 하심이 당연한 것임을 성경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율법(시 82:6)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이 말씀의 사역자(계시 증인 또는 재판관)인 모세를 신이라” 하신 내용이요(여기에서 시편도 예수님이 율법으로 호칭하신 것을 유의하실 것), 출 7:1에서도 바로 왕 앞에 세우신 모세를 “신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 어찌 참람한 말이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정함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야로 선택 구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또 “말씀의 사역자를 신이 되게 하셨다” 함은 성령의 붙드심에 의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심은 사실대로이며, 또 사람을 신으로 말씀한 선례가 있음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2) 37~38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아버지의 일은 구속 사업(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즉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보고는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적의 극치는 예수님 자신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유의하지 않고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습니다(39절). 아마 예수님의 몸을 붙잡는 것을 뿌리치시고 그들을 떠나신 듯합니다.

4. 요단강 저편으로 가심(40`42절)

1) 40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저편(요 1:28에서 설명함)에 가셔서 거하셨고,

2) 41~42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표적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소개한 모든 말을 다 참이라 한즉 거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한 사실이 없었지만, 참되신 예수님을 바로 증언한 사실 때문에 전도의 열매를 얻은 것입니다. 이 앞부분에서도 믿지 않는 자들은 이적(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2절에서 믿은 자들은 세례 요한의 증언의 진실함을 알고 믿었으니 전도함에 있어 “참”(진리)을 증언하는 것 이상 더 좋은 특권은 없는 것입니다.

 

제 27 과 나사로를 살리러 오심 (요 11:1~37) 목록으로


전 장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수전절 절기에 즈음하여(요 10:22) 유대인들과 변론을 끝내시고, 요단강 저편으로 가셔서 계셨다(요 10:40) 하였는데, 본 장부터는 예루살렘 성밖 베다니에 사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그를 살리기 위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제자들과 대화하신 내용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접하신 장소는 요단강 저편 “베다니”로써(요 1:28)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이요(요 10:40),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8km 되는 지점입니다. 예루살렘 동쪽 5리 밖인 나사로의 동네도 “베다니”(18절)이고, 또 요한이 세례 주던 곳도 “베다니”임을 기억하십시오. ① 1~6절은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유하신 일”이고, ② 7~16절까지는 “출발하실 때에 제자들과의 대화”이며, ③ 17~37절까지는 “마중 나온 마르다와의 대화”입니다.

1.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유하신 일(1~6절)

1) 1절은 “병든 자 나사로를 소개하신 말씀”이고, 2절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던 자라” 하셨으니, 여기의 “씻기던 자”란 말씀이 요한복음을 사건(향유 부은 사건)이후에 기록한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내용은 12:3에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뒤에 있은 사건을 먼저 소개하신 것입니다.

2) 3절에서 나사로의 병을 인하여 그 누이들이 75리쯤 되는 곳에 계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죽음으로 끝낼 병이 아니라는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과 또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이 사건, 부활시키는 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든 이유와 목적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욥의 고난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나타난 일이고, 예수님은 그 목적에 대응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5절에서 “예수님이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형제, 아델포스) 나사로를 사랑하셨는데, 6절에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그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에수님이 나사로가 병으로 죽도록 기다리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4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혹 우리가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쓰심의 대상이 된다면 병들고, 그 병으로 죽어도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출발하실 때에 제자들과의 대화(7~16절)

1) 7~11절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 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이 설득하신 말씀입니다. 7절의 “그 후에”는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다음이요, “유대로 가자” 하심은 그 당시 계셨던 요단강 건너편이 유다가 아닌 베뢰아 지역(예수님 당시에 요단강 동편은 베뢰아와 데가볼리 구역이 있었음)이므로 유다로 향하신 것이고, 목적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8절에서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여(10:31) 이곳으로 오셨는데 또 가시려 합니까?” 하였을 때, 9~10절에서 “낮이 12시인즉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 하시므로 범행이 어두울 때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고, 또 예수님 자신을 빛으로 이해하게 하시므로 빛의 보호가 있을 것을 암시하신 것이요, 10절은 그 반대로 설명하신 것입니다(마 9:15 참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이 그즈음에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은즉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우리 친구”란 예수님의 혼자만의 친구가 아닌 제자들과도 잘 아는 사이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몇 차례 다니시면서 대접을 받는 사이에 알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곧 부활하지 않아도 장차 부활할 것을 기대하면서 “잔다”는 표현을 하셨거든(살전 4:13) 하물며 4일안에 살릴 자를 “자는 자”로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깨우러(살리려)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2) 12~14절은 오해로 인한 제자들의 질문에 확실하게 답하신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잔다” 하신 말씀을 죽음으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여 잠들었으면 (병도)났겠나이다” 하였을 때 제자들이 오해하는 상태를 아시고(13절), 14절에서 “죽었다”는 말씀으로 밝히 표현하신 것입니다.

3) 15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으니, 이는 너희(제자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만일 예수님이 유다에 계셨다면, 나사로의 누이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거절하시기 어려울 뻔한 것을 멀리 떨어져 계시므로 순조롭게 섭리에 응하시게 된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함이라” 하심은 죽은 자 살리는 일을 세 번째(눅 7:15, 마 9:25) 시행하심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믿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4) 16절에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으니 “도마”라는 제자가(마 10:3) “디두모”란 별명을 가진 것은 본문과 요 20:24에 나타난 내용인데, 쌍둥이란 뜻의 헬라말이라고 합니다. 그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한 것은 제자들의 항의에 대하여(8절) 위험을 각오하자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3. 마중 나온 마르다와의 대화(17~37절)

1) 17~20절에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된 사항으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4일이라” 함은 죽은 지 4일이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무덤 앞에서도 4일이라고 하였으니까요(39절).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죽음 당일 해지기 전에 시체를 무덤에 넣은 관습이 있었고, 예수님도 당일 무덤에 장사되셨기 때문입니다(마 27:57~61).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더 유하실 때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갔고, 또 요단강 저편에서 나사로의 집 쪽으로 38km쯤 오시는 기간도 이틀을 할애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18절은 베다니 동리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5리쯤임을 말씀하셨고, 19~20절에서는 “많은 유대인이 초상집에 위문을 온 것과 마르다가 예수님이 마을에 가까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30절) 마중 나오고, 마리아는 집에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2) 21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일반적 생각일 뿐 사실은 예수님이 그의 죽은 다음에 오시려고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22절에서 예수님의 희망적 조치를 기대하는 말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 하였으니, 이 말에 포함된 마르다의 의도는 당장 부활하는 일이 아닌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영적 위로를 생각한 듯합니다.

3) 23절에서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신즉 마르다는 24절에서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들어갔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가 당장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마지막 부활에 대한 신앙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25~27절에서 미래 부활 신앙만 갖지 말고 현재 부활 신앙도 가질 것을 말씀하셨으니, 곧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생명의 주이시므로 현재의 부활도 가능하다는 뜻)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장차 부활한다는 뜻)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니(이 뜻은 육체의 죽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육체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취급, 또 영적으로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상태를 설명하신 것임)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신즉, 27절에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마르다는 이 고백에서 약간의 회의적 감정을 가졌다 하더라도(39절),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시고 부활의 능력자이심을 항상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 28~30절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들어서시지 않은 상태에서(30절)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오신 것과 마리아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린즉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을 만나러 나갔고(28~30절), 31절에서 위문 온 사람들은 마리아가 집나가는 것을 무덤에 가는 줄로 오해하고 뒤따라왔으니, 이는 예수님이 오시는 행차를 널리 광포하지 않은 것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5) 32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 하므로 마르다와 꼭 같은 아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21절). 예수님은 멀리 계셔도 주께서 원하시면 그 생명을 붙드실 수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마리아와 위문 온 유대인들의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해하셨으며, 눈물도 흘리셨으니(33, 35절) 속으로는 하나님이 섭리를 헤아리셨을지라도 겉으로는 일반적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4절에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하셨을 때 “와서 보옵소서” 하였으니, 그 무덤이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이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신 정황을 말하였고, 또 그 중에(예수님을 경계하는) 어떤 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폄하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제 28 과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38~57)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제목은 “나사로를 살리심”이라 함이 적당합니다. ① 38~44절은 “나사로를 살리심”이요, ② 45~52절은 “이 사건으로 인한 논란”이며, ③ 53~57절은 “죽이려는 음모”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나사로를 살리심(38~44절)

1) 38절에서 예수님은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으로 가셨고, 무덤은 돌로 막은 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굴 안에 시신을 뉘어놓고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이 (따라온 무리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즉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매 벌써 냄새가 난다” 하였으니, 이 말의 뜻은 “살아날 기대를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료됩니다. 여기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인색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 오소서”, “여기 계셨더면”, 또 “냄새가 나나이다” 등은 모두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적으로 믿으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어떤 형편에서든지 불가항력적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롬 4:17).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심은 제자들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고, 아울러 산 자가 나올 문을 여신 것입니다.

2) 40절에서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절)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즉, 41절에서 “돌을 옮겨 놓았다” 하셨고, 이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42~44절). 이 기도에는 기도의 모습과 기도 응답의 감사와 확신, 그리고 기도의 목적을 말씀하신 후에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신 명령은 말씀에 생명력이 동반함을 나타내신 것이고, 이 사실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이루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구별하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3) 44절에서 예수님의 명이 떨어지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얼굴이 수건에 싸이고 수족이 베로 동여진 채 나온즉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으니, 이로써 예수님은 세 번째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성격과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즉 영화로운 부활이 아니고 육체적 생명을 다시 찾은 부활입니다.

2. 이 사건으로 인한 논란(45~52절)

죽은 자를 4일 만에 무덤에서 살리셨으니 놀라운 일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네 가지 반응이 나타났으니,

1) 45절에서 마리아에게 위문하러 와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2) 46절에서 그 중에 어떤 자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린 자가 있었으며,

3) 47~48절은 “바리새인들이 공회(유대인 종교 대표자들)를 모으고 예수의 표적 행하는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 하였으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단결과 종교의 힘이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영토와 민족을 지키는 줄로 알고 있었으므로 만일 자기 파의 사람들이 이적 행하는 예수 파가 된다면 자신들의 집단이 와해되므로 민족성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우려한 말인 것입니다.

4) 50~52절에서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마디 하였는데, 그 말은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켜 민족을 살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만 죽이면 좋게 된다는 악의에 찬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을 예언(예수님에게 응할 일)으로 계시하신 섭리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해서도 나타난 바처럼(단 3:28~29) 악한 대제사장을 통해서도 나타내시는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말하기를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예수님)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함을 생각지 않는도다(생각하고 실천하라는 뜻)” 하였으니, 이 뜻은 예수 한 사람을 죄가 있건 없건 죽여서 큰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51~52절에서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즉 성령의 역사로 한 말이라는 뜻),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민족(선민)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구원 받을 자들)를 모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구원 사역으로)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야바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제언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제언을 “구속 사업의 예언”으로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마 21:42).

3. 죽이려는 음모(53~57절)

1) 53절에서 “이 날(나사로 살린 날)부터 저희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하셨고, 54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유대인들 가운데서 드러나게 다니시지 않으셨으며, 그곳(나사로 고향 베다니)을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간은 수전절과 유월절(1월 14일) 사이이므로 10여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빈 들 가까운 에브라임 동리”는 예루살렘 북쪽 세겜과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2) 55절에서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하셨으니, 여기의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함”이란 유월절 절기에 겸하여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고 죄사함 받기를 바란 것을 의미합니다(출 29:36).

3) 56~57절에서 음모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날 것을 기대하였고,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하였으니, 요즈음으로 말하면 현상수배 대상이 된 것입니다.

 

제 29 과 마리아의 봉사와 마지막 입성 (요 12:1~16) 목록으로


본문의 제목을 “마리와의 봉사와 (예수님의) 마지막 입성”으로 정하였습니다. ① 1~8절 말씀이 “마리아의 봉사”이고, ② 9~11절은 “나사로까지 죽이려 함”이요, ③ 12~16절은 “예수님의 마지막 입성”입니다.

1. 마리아의 봉사(1~8절)

1) 1~2절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6일 전에 에브라임 고장(11:54)에서 다시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오셨는데, 거기서(문둥이 시몬의 집, 마 26:6)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였고, 마르다는 그 집에서 (접대)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기대어 반쯤 누운 자세, 유대인들은 휴식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세임) 자 중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이때에 “마리아”가 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나드’는 ‘나르도스’로 향유 원료인 특수한 식물을 뜻하고, 한 근은 ‘리트란’으로 영어에서는 1 파운드(453g)로 번역하였음)을 갖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에서 마태는 “향유 한 옥합”이라 하였고, 마가는 “그 옥합을 통째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 “마리아”는 6명이 있음을 아십시오[예수님의 모친(눅 1:30~38),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요 19:25, 20:22), 글로바의 처, 야고보 요셉의 어머니(마 27:56, 눅 24:10), 마가의 모친, 바나바의 누이(행 12:12, 골 4:10, 막 14:15), 로마에 가서 봉사한 여인(롬 16:6), 그리고 본문의 나사로의 누이임]. 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으로 갈릴리에서 있은 것(눅 7:36)은 이 사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유월절 6일 전에 나사로의 집에서 있은 일로 마 26:6~13, 막 14:3~9에 기록된 일과 같은 사건입니다. 마리아가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예언으로 보나 핍박자들의 소행으로 보아 예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지 않을 것을 믿고, 마지막 기회를 이용하여 봉사적(향유)이고, 헌신적이며(머리털로 씻음), 또 장사의 절차(시체에 향유 바르는 것)를 목적으로 미리, 또 한꺼번에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3) 4~6절에서는 가룟 유다의 제언인데, “제자 중 하나로써 예수를 잡아줄 유다가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하루 인건비가 1 데나리온임, 마 20:2)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 주지 않고 왜 허비하느냐?” 하였으니(마 26:8, 막 14:4) 그는 예수님께 드리는 일을 허비하는 것으로 알 정도로 경제 타산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속마음을 다 아시므로 “그의 말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아 일하면서 공금 또는 예수님의 돈을 훔쳐가는 것을 아셨으면서도 밝히시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의 완악을 간과하신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롬 1:24). 그러면 또 예수님은 왜 외식자를 아시면서 그를 제자에 용납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다의 소행이 있을 것을 구약에서 예언하신 점과(마 27:9~10, 요 13:18, 시 41:9)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도록 악당들에게 내어주는 역할을 위하여 준비된 자이기 때문입니다(잠 16:4).

4) 7~8절에서는 예수님이 유다의 반론에 대하여 마리아의 봉사를 잘한 일로 해명해 주셨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하셨으니, 이 뜻은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 할 일을 미리 한 것으로 여기라”는 뜻이요, 또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즉 구제할 기회는 많다는 뜻) 나는 항상 있지 아니 하니라” 하시므로, 마리아가 봉사의 기회를 선용한 것을 정당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자녀들은 마리아처럼 섬김의 대상이 살아계실 때 잘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롬 12:1의 “산 제사”란 뜻에 그런 의미도 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마 14:3에서 “옥합을 깨트려 부은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양하실 수 없게 하기 위함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열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장례한 기사(마 27:59, 막 15:46, 눅 23:53)에서 몰약을 사용한 일은 있으나(요 19:3~41) 향품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미리 한 것이 중복되지 않고 응하였습니다. 몰약은 향기가 있지만, 용도로 볼 때 방부제가 되는 것입니다.

2. 나사로까지 죽이려 함(9~11절)

1) 9절에서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여기(베다니)에 계신 줄 알고 예수님과 죽었다가 살림 받은 나사로를 보기 위하여 왔다” 하였고, 10~11절에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종교가 서로 다를지라도 적대시하는 관습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생명의 종교를 영입하지 못하고, 어두운 세력에 잡히면 죽은 자를 살려도 감동 받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시기하여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태도는 악한 종교임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마지막 입성(12~16절)

1) 12~15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정황”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이튿날(베다니에서 하루 머무신 후) 명절(유월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 퍼레이드를 길에 펴고,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의 뜻, 시 118:25)를 찬송으로 외치며,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마 21:6~9에서 강론하였습니다.

2) 16절에서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입성 환영 행사)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부활)을 얻으신 후에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예언으로)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그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께 이같이 한 것인 줄로 생각났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역사적 정황(예수님 입성 행사)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예수님 부활하신 후 차분하게 성경을 연구하여 깨달았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그 시기가 지난 다음 약 60년 후에 기록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과 호산나로 영접한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이 예언의 성취임을 알았으니(슥 9:9, 시 118:26) 깨달음은 어느때나 오직 성경 연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제 30 과 때가 된 것을 예고하심 (요 12:17~3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유월절 6일 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또 그 이튿날을 맞이하셨으므로(12:1, 12) 돌아가실 날을 5일 앞둔 상태에서 “인자의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23절) 하셨으므로, 제목을 “때가 된 것을 예고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내용 분류는 4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무리의 증언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이요(17~19절), ② “헬라인의 면담과 예수님의 대답”이며(20~26절), ③ “민망하신 중에 기도하심”이요(27~30절), ④ “예수님에 대한 세상적 심판 예고”(31~33절)입니다.

1. 무리의 증언과 바리새인들이 반응(17~19절)

1) 17~18절에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실 때 함께 있던 무리가 그 사실을 증거하였는 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자들이 그 표적 행하심을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2)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19절에서 “서로 말하되 너희들(즉 자신들)이 행하는 일(예수님을 반대하여 죽이려는 일)이 쓸 데 없다(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것임) 보라 온 세상(많은 사람들)이 저(예수님)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중에는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할 수 없을 것을 예견한 자들도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예견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적중한 것입니다.

2. 헬라인의 면담과 예수님의 대답(20~26절)

1) 20절에서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명절은 유월절이고, “유월절에 이방인들이 예배하러 온 것”은 이방인도 복음을 받은 것과 그때부터 제사 의식이 예배로 바꾸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제사 의식이 아닌 찬송과 기도와 성경 낭독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는 예수님이 평소에 시행하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마 26:30, 요 11:41~42, 요 10:23~39).

2) 21~22절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저 할 때 벳세다 사람 빌립(마 10:3)에게 청하였고,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한 후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다” 하였으니, 헬라인들이 그런 절차로 예수께로 가까이 온 것은 보안상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22절에서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면담 사유를 여쭈었을 때 허락하신 말씀이 없으나, 23절에서 “구속 사역”으로 대답하신 것을 보면 사사로운 면담이 아니고 진리 전달을 위한 접근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23~27절은 “예수님의 때가 된 사실과 한 알의 밀이 될 것과 예수님을 섬기는 법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이방에서 온 헬라인까지 다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① 23절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에 오르실 때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② 24절에서 “한 알의 밀의 죽음이 없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신 것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많은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을 예언하심과 동시에 희생의 복된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25절에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건설적인 봉사나 희생을 하지 않는 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을 잃게 될 것이요. 이 세상에서 남을 위하고 또 진리를 인하여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그 영혼을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셨으니, 믿음은 곧 자기를 버리고 진리(예수님)를 영접하여 그 진리에 헌신하고 복종하는 것임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③ 26절에서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사람이 예수님(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하셨고, 예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 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복종과 섬김은 주님과의 동행이고, 또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을 받는 방법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민망하신 중에 기도하심(27~30절)

1) 27~28절에서 예수님은 “지금 마음(영혼)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하시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하시고, 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여기의 “마음”이란 원문은 “푸스케”입니다. 마음이란 원문은 “칼디아”로 많이 사용되고(마 5:8, 28), “프뉴마”와 “푸스케”는 영과 혼으로 구별하지만, 확실하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민망한 마음을 푸스케로 표현한 일에 대하여 “칼디아, 프뉴마, 푸스케”간에 구별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민망한 마음도 주님의 순결한 마음이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민망해 하신 이유”는 며칠 후에 감당하셔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셨을 때 느끼신 인간적 두려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민망함(고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성도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는 꼭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니까요(빌 4:7).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뜻은 피하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고, 잘 감당하므로 “그 시기를 넘어가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8절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지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2) 28절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소리의 응답이 있었으니,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타난 것은 세 번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말씀과(마 3:17), 변화산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말씀(마 17:5), 그리고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은 예수님 생애의 순종을 뜻하며,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은 부활 후의 영광과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인한 영광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소리가 나타났을 때 29절에서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였으니, 하나님의 소리는 들을 자에게만 듣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이 믿는 자에게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30절에서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응답은 예수님께 하신 것이지만 그 내용의 목적은 구원의 완성을 약속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세상적 심판 예고(31~33절)

1) 3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세상적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심판(인간의 심판이란 뜻)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참) 임금(예수님)이 쫓겨나리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억울한 심판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 심판은 의인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고, 참 임금이신 예수님을 죄인들이 죽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적 심판은 공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2)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십자가에 못 박히심, 민 21:8~9, 갈 3:13) 모든 사람(택한 백성)을 내게로 이끌 것이라” 하시므로 십자가의 공로로 많은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3) 33절에서 “이는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보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구원하실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31 과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 (요 12:34~50) 목록으로


본문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있기 때문에 종합적 제목을 잡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대지의 제목을 대표로 정하였습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34~36절은 “문의와 권면”이요, ② 37~41절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이며, ③ 42~43절은 “소극적 신앙”이고, ④ 44~46, 49~50절은 “믿는 자의 공통성”이며, ⑤ 47~48절은 “심판의 시기를 말씀하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다 중요한 줄 아시고 깊이 상고하십시오.

1. 문의와 권면(34~36절)

1) 34절에서 유대인 무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땅에서 들리므로 많은 사람을 이끌 것이라”(32절)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 함을 들었거늘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한다 하는가? 인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으니, 이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영원히 계시다”는 지식은 구약을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 시 16:10, 72:5, 89:29; 사 9:7; 단 7:13 등에서 메시야의 영존성을 예언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후에 영원히 계실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2) 3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불신앙 세계를 어두움으로 비유하여 “어두움에 붙잡히지 말 것”을 권하셨으니, 곧 “아직 잠시 동안 (예수님 생존 기간) 빛이 너희에게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뜻) 어두움에 붙잡히지 말라” 하셨고, 또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가는 바”란 인생의 노정, 즉 내세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인생관과 내세관을 뚜렷하게 알고 있지만, 불신자들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까?

3) 36절에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신 말씀은 “가장 밝은 계시인 진리의 실상이 계실 때 깨닫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요 1:12).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라 하여 못 믿을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 밝은 계시(빛의 실상)를 보았을 때 믿는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37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숨으셨으니”, 이는 돌아가실 때를 맞추시기 위하여 피하신 것이었습니다(막 14:12, 고전 5:7).

2.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37~41절)

1) 37절에서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않았다” 하셨으니, 안 믿을 자가 표적을 보았다 하여 믿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을 자가 표적을 보면 믿음 갖는 자극으로 받을 수 있지만(11절), 안 믿을 자는 예수님의 37회의 이적을 보거나 듣고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눅 16:31).

2) 38~41절에서 “믿지 못하는 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전 75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는 계시로 메시야의 영광을 보았고, 그 시대에 있을 일에 대하여 예언하기를(41절) 38~40절에서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구원, 권고의 은총)이 뉘게 나타났나이까(사 53:1 인용)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이는 하나님이 저희의 눈(영안)을 멀게 하시고 저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므로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으로부터 고침 받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사 6:10 인용) 한 예언이 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완악과 불신앙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은 것은 아니며 인간의 완고한 상태를 하나님이 풀어주시지 않으면 열릴 수 없고, 하나님은 선택과 예정의 섭리 안에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나 권고나 인간의 노력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됨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고후 4:3, 8~9).

3. 소극적 신앙에 대하여(42~43절)

1) 42절에서 “관원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으나 바리새인들의 핍박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중에 어떤 이가 믿기는 믿되 바리새인들의 교권적 핍박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사람 앞에 드러내지 않은 것이요, 바리새인들의 출회란 바리새인 단체에서 거역하는 자를 징계로 제명함으로 여러 가지 특권을 제하는 일입니다. 이 경우에 관원쯤 된 사람이 믿음을 가졌다면 믿음의 가치를 더 확실하게 알고, 바리새당을 탈당한 후 믿음의 확실성을 나타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믿음의 성숙 여부는 당사자에 국한한 문제일 것입니다.

2) 43절에서 “저희(소극적으로 믿는 관원들)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믿음이 아닐 수는 없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믿음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벧전 4:18). “부끄러운 믿음”이란 겨우 구원을 받되 칭찬할 사유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5:19). 귀하는 누구의 영광을 더 귀히 여기십니까?

4. 믿는 자의 공통성(44~46, 49~50절)

1) 44~45절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예수님을 본 것과 하나님을 본 것이 같은 것임”을 말씀하셨고,

2) 또 46절에서는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으매 무릇 예수님을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 하셨으니, 전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일체적 관계를 말씀하시므로 믿음과 계시와 섬김과 영광 등의 공통성을 말씀하신 것이요(요 14:9), 46절의 뜻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에게 속한 자를 “빛 된 생활과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35절과 11:9, 10:28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3) 49~50절은 계시의 공통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시는 “하나님이 명령으로 주신 것이라” 하셨고, 예수님은 그의 명령(말씀)이 영생인 줄로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가감 없이) 증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명령이 영생”이란 말씀과 생명이 하나님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요 1:1, 4). 이 뜻은 예수님과 말씀을 동질성 또는 생명으로 여기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5. 심판의 시기를 말씀하심(47~48절)

1) 47절에서 “예수님은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고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닌 만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심판(벌)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계신 동안 예수님이 누구를 벌하신 일이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나 빌라도에게도 벌하신 일이 없었으니까요(막 14:21, 딤전 6;13).

2) 48절에서 “나를 저버리고 나의 말을 받지 않은 자(불신자)를 심판할 이(예수님 자신을 3인칭으로 나타내신 것)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심판을 세상에 계신 동안 안 하신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할 것이라” 하시므로 세상 끝 날에 예수님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은 불신자만 받습니다. 성도는 칭찬 받을 일이 있을 경우에 상급만 받을 뿐입니다(계 20:14~15, 22:12). 예수님이 심판자 되시는 것은 구속 사업을 이루신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요 5:22) 시행하실 것이므로 본 절에서 제3자로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제 32 과 발을 씻겨주신 모범 (요 13:1~17) 목록으로


이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과 동시에 주신 교훈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발을 씻겨주신 모범”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대지를 분류하기 전에 설명 드려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유월절 엿새 전(12:1)이었고, 베다니에서 하루 유하신 이튿날(12:12)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유월절은 목요일 일몰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입성하신 때부터 유월절 저녁(성만찬)을 잡수실 때까지(13:4)의 일정은 성전에서 가르치신 사실과 “매양 저물매 성밖으로 나가시더라”(마 11:19) 하신 말씀을 근거로 추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부터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부터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대지를 분류하면 ① 1~3절에서 “미리 아신 일”이요, ② 4~11절은 “발을 씻기신 모범과 그 취지”이며, ③ 12~17절에서는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미리 아신 일(1~3절)

1) 1절에서 “유월절 전(목요일 저녁이전 이란 뜻)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 하셨으니, 범사에 때를 정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도 아신 것이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구원의 대상, 17:9)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의 환경 따라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환경에 구애 받으심이 없이 불변, 영원한 사랑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아신 것은 2절에서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 팔 결심을 하도록 역사한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역사와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마귀가 물욕 많은 유다를 유혹하였고, 유다 또한 그 유혹에 동조하여 예수님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결심한 것인데, 예수님은 이런 정황을 다 아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유다의 하는 일로 말미암아 악당들에게 잡히실 것도 아셨습니다.

3) 3절에서 “저녁 먹는 중(만찬 식사임)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모든 것은 구속 사업의 책임임) 그 일 후에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영원한 사랑에 감사하며 진실한 자세를 취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발을 씻기신 모범과 그 취지(4~11절)

1) 4~5절에 보시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발 씻김의 완전한 자세와 장비를 취하시고, 순서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베드로의 발까지 씻기시는 중에 베드로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 중요한 것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성만찬 기사를 본문에서 뺀 것입니다. 저녁 식사 중에 성만찬이 앞에 있었는지, 발 씻기시는 일이 앞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요한 사도는 그 사실을 기록에 넣지 않았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도 요한이 가룟 유다의 실상을 드러내는 일에 가담하였는바(23~27절)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의미(구속의 은혜)가 유다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구상해 봅니다(10~11절, 다는 아니니라). 발을 씻기심에 있어서 베드로를 먼저 씻기시지 않은 것은 겸손을 베푸는 대상에 순서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신 듯합니다.

2) 6절에서 “베드로가 사양한 것”은 주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자신의 도덕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7절에서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예수님이 하신 일”은 겸손의 본이었고, “후에는 알리라” 하신 것은 베드로가 그 당시에 겸손에 결함이 있었으므로(마 26:33~35) 그 사실을 깨닫고 더 겸손해 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21:15~19).

3) 8절에서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라” 하였으니, 이 말이 베드로로서는 도덕적 사양을 강조한 것이나 신앙적 견지로서는 “절대자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불순종”임을 깨달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 사양하거나 인간의 의견을 가미하려 하면 안 됩니다. 절대자 앞에 복종만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나니라” 하신즉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의욕에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십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씻김을 받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서 죄 씻음 받는 은혜가 구원의 관건이며,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영적 관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4) 10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요청에 대하여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 몸이 깨끗하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 하셨고, “다 아닌 뜻”은 11절에서 가룟 유다에게 속죄의 은혜가 해당되지 않음을 밝히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뜻은 거듭남으로 전체적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았은즉 정죄함이 없고 심판을 면한 상태를 의미하며(롬 8:1, 요 5:24), “발을 씻는 의미”는 성도가 매일 생활하는 중에 연약으로 인하여 범죄하는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목욕”은 구원과 심판을 받지 않을 일에 해당하는 것이요, “발 씻음”은 회개와 징계를 면하는 사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목욕함으로 온 몸이 깨끗한 것”은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이 확보되는 상태이고, “발 씻음”은 믿음 안에서 잘못하는 일들에 대하여 징계 사유가 나타나기 전에 회개함을 뜻합니다.

5) 11절에서 가룟 유다는 구원 대상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6:24).

3.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12~17절)

1) 12절에서 예수님은 발 씻기신 행사를 끝내시고 다시 옷을 입고 앉으신 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하셨으니, 이는 겸손의 모범이 무엇이며, 속죄 원리가 무엇임을 알아야 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요,

2) 13~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이 진리를 본받아 겸손과 봉사를 시행하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3) 16~17절에서는 상전과 종(절대자와 피조물)의 위계질서를 알고, 본분을 다할 수 있을 때 큰 복이 될 것을 말씀하셨으니, 곧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절대자이시며, 우리의 상전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이 상전 앞에서 복종하고 섬기는 바른 자세를 취할 때 복이 있음을 아시고, 성도의 바른 생활을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7. 발 씻겨 주심에 대한 교훈 (요 13:1~11) 목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겸손과 봉사의 본을 보이신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성경도 여러 차례 읽으셨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나 제가 그 말씀과 그 사건을 깨달으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어떻게 생각하셔야 할까요?

1.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데, 나는 누구의 발을 씻겨준 사실이 있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발 씻겨준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언제인지 TV 화면에서 평생 남편의 발을 씻겨준다는 여인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으로부터 발 씻겨주는 것 이상의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뻣뻣한 자세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이런 봉사와 본을 보이실 때에 좋은 환경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고난당할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신 하루 전이었고, 또 몇 시간 후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아신 상태에서 좋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아마 나쁜 사람 같으면 “내가 내일 죽을 것인데 누구의 발을 씻겨주겠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과 고난에 구애 없이 돌아가시는 시간까지 자기의 할일을 하신 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 1절에도 보시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자기의 환경을 탓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발 씻김의 모범이 맛만 뵈는 정도가 아니고, 아주 적극성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인이 되어 하신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그 식사를 다 끝내지 않은 것)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며,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물까지 닦아주셨으니, 이는 완벽한 하인의 자세이고, 빈틈없는 봉사이며, 겸손의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잠시 하신 일일지라도 연습 삼아 보이기 위한 것처럼 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종처럼 시행하신 것입니다. 겸손과 봉사에 외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의 겸손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신 것이고, 우리는 겸손해 보았자 죄인의 자세에 머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겸손은 낮아진 겸손이지만, 우리의 겸손은 제 자리 지키는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겸손을 차려도 공을 세우는 겸손이 못 됩니다. 죄인이니까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발 씻겨 주심은 하나님이 사람의 발을,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발을, 의인이 악인의 발을,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왕이 백성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것을 아셔서 우리가 허리를 굽히고 봉사하는데 큰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님이 겸손과 봉사를 하실 때 그 대상에게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발을 씻겨줄 것이니 줄 서라” 하신다면 베드로가 맨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발을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하고 사양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순서, 절차 없이 몸 닿는 대로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설마 자기 발까지 씻기시랴” 하였는데, 자기 순서까지 오자 “주여 내 발도 씻기시렵니까?”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겸손하셨고, 가룟 유다나 빌라도에게도 겸손하셨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 26:24, 딤전 6:13).

6.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실 때 겸손과 봉사와 육체의 정결만 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 씻음 받는 은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양하였을 때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상관이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내가 십자가의 피로 네 죄를 사하지 않으면 너와 나는 물론 너와 천국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죄사함의 두 가지 원리를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전체적으로 죄사함 받고 심판을 면한 후 구원을 받게 되는 죄 씻음이고, 또 한 가지는 일시적 범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죄 씻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 앞부분을 목욕으로, 뒷부분을 발 씻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저희들은 구원받는 믿음을 확고히 하셔야 하고, 매일 매일 회개하는 일을 발 씻듯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발은 몸 중에 더러운 부분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 발을 씻겨주신 것은 성도의 큰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실 것을 약속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마 18:21).

7.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기 위하여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죄사함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목욕을 시켜주십니다. 정죄 받지 않고 구원 받도록, 그러나 성도가 일상생활에서 짓는 죄를 징계 차원에서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곧 발 씻는 일이지요. 그리고 또 한 자기 방법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인데(마 6:12, 18:33)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발 씻김의 본을 보이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제 33 과 새 계명을 주심 (요 13:18~38) 목록으로


본문을 분류 상고함에 있어서 20절은 마 10:40과, 31~32절은 12:28과, 33절은 7:34, 8:21과 상통하므로 서두에서 간단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① 18~30절은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이요, ② 34~35절은 “새 계명을 주심”이며, ③ 36~38절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새 계명을 강조하는 뜻으로 총 제목을 “새 계명을 주심”으로 전한 것입니다.

20절 말씀은 “나의 보낸 자(제자들)를 영접한 자는 나(예수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예수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함이라” 하시므로, 마 10:40을 재강조하셨고,

31~32절은 12:28에서도 말씀하신 것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 일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시고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영광을 받으신 것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십자가 사건) 영광을 받으셨으며 자기로 인하여(하나님이 계획하신 일) 그것을 성취한 예수님(저)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속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어려운 일을 성취하심에 대한 성부 성자의 기쁨과 만족이 공통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의 말씀은 그 당시에 “예수님만 부활 승천하실 것”이므로 잠시 계신 것 외에 다른 제자들이 함께 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반 성도는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 영혼만 주님 계신 곳으로 가겠지만, 부활한 육체와 함께 변화의 몸으로 가는 일은 세상 끝 날에 성취될 것입니다(요 14:1~3, 살전 4:14).

1.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18~19, 21~30절)

1) 예수님은 저녁 식사(성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반역적 배신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다는 깨끗지 않다” 하셨으니 거기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나의 택한 자가 누구인지를 안다. 이런 일이 있음에 대하여는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 즉 시 41:9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발꿈치를 드는 것”은 더 높아지는 태도로써 대적 또는 반역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2) 19절에서 “지금부터(유의할 시점) 일(유다의 반역)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함은 일이 이룰 때에(예언의 성취) 내가 그(메시야)인 줄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예언)의 진실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3) 2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 유다의 배신을 민망히 여기시면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신즉 제자들이 서로 보면서 뉘게 대한 말씀인지 의심하게 되었고(22절), 23~25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사도 요한으로 추정함, 21:20)에게 머리 짓을 하여 말씀하신 자(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여쭙게 하자, 그가 예수님께 “주여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젊은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기댈 정도이면 예수님의 평소 모습에 권위적 태도가 없고, 형제적 친교성이 있으셨음을 알 수 있고, 베드로가 그 사실을 직접 여쭙지 않은 것은 동료의 신분에 관한 문제이므로 스스로 나서지 않고 나이 어린 제자에게 떠넘긴 인상을 줍니다. 직접 여쭈어야 할 것입니다.

4)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주는 대상이 그니라” 하시고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찍어주시므로 확실하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떡으로 지목하신 것”도 시 41:9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예언의 결과인 것입니다.

5) 27절에서 유다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는 사단의 1차적 유혹(13:2)이 2차적으로 진전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떡을 주시면서 “너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으니, 유다가 스스로 깨달을 만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제자들은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를 아는 자가 없었고(28절), 29절에서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떡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을 속히 하라”는 뜻으로 오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6) 30절에서 “유다는 떡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난즉 밤이었다”고 하였으니,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찾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의 거처와 신분을 신고할 것을 결심하고 일어선 것입니다.

2. 새 계명을 주심(34~35절)입니다.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이란 용어를 요일 2:7~8과 요이 5절에서도 언급하셨습니다.

34절에서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즉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35절에서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를 내 제자인줄로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은 곧 새 계명이고, 사랑의 실천이 있음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낸다”(증명)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 없는 성도나 성직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사랑이 “새 계명”이 된 이유는 구약의 계명이 옛 계명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실천 모범이 새 계명이란 뜻입니다.

3.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36~38절)

1) 예수님이 “나 있는 곳에 오지 못 한다”는 말씀을 7:34, 8:21, 33절에서 하셨으므로, 36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였으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로 승천할 것을 상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주 재림 때)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2) 또 베드로는 37절에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터인데 왜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까?” 한즉, 38절에서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마 26:33~35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목숨을 버린다고 자기의 목숨 값으로 승천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구원은 자기의 생명 값으로 받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자만심을 버렸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몇 차례 원치 않는 탈선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 34 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 (요 14:1~14)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다섯 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천국으로 인도하심”이요(1~4절), ②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며(5~6절), ③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이고(7~11절), ④ “더욱 큰 일을 함”이요(12절), ⑤ “기도를 중보하심”입니다. 대표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을 제목으로 택하였습니다.

1. 천국으로 인도하심(1~4절)

1)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사실이나 우리나라 어법은 마음을 생략할 수 있지만 유대인의 어법은 퍽 주밀하여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를 만지라.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신다”는 등으로 상세히 표현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근심을 염려하신 것은 예수님이 악당들에게 넘겨질 것과 제자들이 미리 따라오지 못할 길로 가실 것을 예고하셨으므로(요 13:21, 36) 제자들이 위험의 강박감을 가질 것을 아시고, 위로 되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나 고통과 죽음 앞에서는 담력이 약해질 수 있으므로, 그 보완 대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일체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천국)에 거할 곳이 많다” 하심은 성도를 위하여 예비 된 내세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하심은 성도(예수님을 따른 자)에게 내세의 갈 길이 없으면 예수님은 진실하시므로 희망이 없는 것도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마 26:24).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하심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인 십자가와 부활과 열납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므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먼저 승천하신다는 뜻입니다.

3) 3절의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는 뜻은 2절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구속 사업의 완성을 하나님께 열납 드린 후 구원하시는 일의 전권을 예수님이 행사하실 것을 뜻함이요, “내가 다시 와서 저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 하심은 성도의 임종시에 주님이 그 심령에 찾아오셔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유의하는 성도는 반드시 임종시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영혼은 세상에 있지 않은 상태일 것입니다.

4) 4절에서는 “내가 가는 곳(천국)에 그 길(천국 가는 과정)을 너희가 알리라” 하신 것은 성도 각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므로 체험할 때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5~6절)

1) 5절에서 도마는 “주님이 가신 천국 가는 길을 어찌 알겠느냐?” 하였으니 부활과 신령한 은혜와 내세의 천국에 대하여 지식이 없은즉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일시 감취어진 일이지만, 우리는 꿈속에서 상상하듯 그 과정을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2) 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첨부된 설교로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7~11절)

1) 7절에서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하시므로 앎의 대상으로서의 일체성을 말씀하셨고, 또 “이제부터는 너희가 (예수님을 알고 보았으므로) 그(성부 하나님)를 알고 또 보았느니라” 하시므로 보는 대상으로서의 일체성을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은 8~9절에서 다시 강조하신 것입니다.

2) 10절에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 하셨으니, 이는 임재의 일체성을 나타내신 말씀이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심은 말씀 곧 계시의 일체성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심은 사역의 일체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리고 11절에서 “임재의 일체성을 믿지 못하겠으면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다”는 이 신비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으면 행하는 그 일(즉 이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인하여서라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 발생의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스스로 믿어지는 경우, 권면으로 믿는 경우, 기적을 통하여 믿는 경우, 사랑의 감동으로 믿는 경우 등입니다. 어떤 동기로 믿었든지 믿음의 결과는 같습니다.

4. 더욱 큰 일을 함(12절)

12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예수님의 하는 일을 할 것이고 또 그가 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할 것이라” 하셨으니, 여기의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적이 아닌 전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막 1:38에서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셨고, 또 세상 떠나실 때도 전도할 것을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19, 행 1:8). 따라서 “더 큰 것”은 전도의 큰 사역입니다. 이런 사역이 사도 시대와 그 후 시대에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성취된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5. 기도를 중보하심(13~14절)

1) 13절에서 성도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거나 기도할 때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공로를 앞세우는 뜻) 기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만큼 사랑하시고, 예수님에게 중보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2) 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중보자만 되시고 응답의 주가 되시지 못하는 줄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7~11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성을 강조하신 만큼 예수님도 기도를 받으시는 응답의 주이시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나 간구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야 하는데, 14절의 “내 이름”이란 예수님의 중보와 뜻을 앞세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8.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의 뜻과 우리 생활과의 관계를 살피셔야 할 줄로 압니다. 우선 이 말씀은 절대 유일성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이유는 “헤 호도스 헤 알레테이아 헤 조헤”(ἡ ὁδός ἡ άλήθεια ἡ ςωἡ)라는 표현에 정관사 용법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 길 중 하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뿐인 바로 그 길이란 뜻입니다. 원문에는 “곧”이란 말이 없지만, 우리 성경에 있는 것은 그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러면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살피고, 우리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하겠는지를 교훈 받겠습니다.

1. 길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길이란 “호도스”는 영어의 ‘way’로 번역되었고, ‘way’는 “방법, 습관, 도로”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길로 말씀하신 데는 의롭게 사는 방법으로서의 길과 하나님을 아는 방법으로서의 길과 죄사함 받고 천국 가는 구원의 방도로서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 길은 예수님뿐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마 17:5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지요. 이 뜻은 율법을 참고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본받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 되어 본을 보였으니 그 본을 따르라”(요 13:5)고 하셨습니다. 사람 사는 방법이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최고 유일의 방법임을 믿고,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성인, 군자, 열사가 있어도 예수님의 순결하고 봉사적이며 희생적인 삶을 따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접견하려면 비서실장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요 12:20~22에 보시면, 헬라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을 뵙고자 하였을 때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성취된 것처럼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요 1:8에 보시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 되고(요 14:9), 또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6:13, 17:8). 하나님을 아는 계시의 의미도 그렇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중보적 의미로도 그러한 것입니다.

3)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길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죄사함 받고 의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거저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 죄 값은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큰 값입니다. 영원한 생명, 순결한 인격, 하나님의 독생자가 순종과 고난과 죽음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대속자도 될 수 없고, 중보자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구원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시 23:3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셨는데, 이 길이 좁은 길을 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 또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하튼 천하에 많은 종교가 있어도 예수님이 중보하시지 않는 길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행 4:12, 갈 1:8). 기독교인들은 안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사이비한 기독교를 신망한다 하여 역시 증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은 제한되어 있고, 선택되어 있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불신자이든, 일반 종교인이든,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든 같은 범주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택한 백성은 예수님이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만큼(요 17:9~12) 참 성도가 믿음의 정도만 굳게 지키는 일을 중요시하셔야 합니다. 참을 드러내는 그 자체가 이단을 비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만 진리이십니다. 진리란 뜻은 단순합니다.

1) 거짓이 아닌 “참”이란 뜻입니다. 롬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누가 금을 샀는데 오랜 후에 그 색이 변하였다면 그것은 진짜 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진리 되려면 순결하고(진실을 뜻함) 영원(불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 146:6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다”고 하셨습니다.

2) 또 한 가지 진리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라”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도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용어가 음식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믿는다”는 용어는 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참”은 예수님(하나님)과 그의 말씀(성경)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하여 속지 않을 대상은 예수님뿐이심을 아십시오. 분명히 믿었던 가족이나 자녀들도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숨 쉬는 것, 자라는 것,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생명은 곧 힘입니다. 우주도 움직이고, 식물도 자라며, 모든 생물이 숨을 쉽니다. “생명” 하면 영적 생명도 있습니다. 거듭난 생명입니다(요 3:3, 엡 2:1). 이 모든 생명의 주(곧 근원자)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요 1:2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셨고, 또 “생명과 호흡을 주관하시며… 그를 힘입어 기동한다”고 하셨습니다(행 17:25~27). 만물을 생동하게 하시는 예수님,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의 뜻대로만 살기를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만 할 것입니다(마 10:29, 사 55:10, 골 2:19, 고전 3:6, 욘 3:7).

 

제 35 과 보혜사와 평안 (요 14:15~31)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목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보혜사를 보내실 약속”과 27절의 “평안을 주심”에 대한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보혜사와 평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대지를 나눈다면 ① 15, 21절이 “계명을 지킴”, ② 16~18, 26절이 “보혜사를 보내실 약속”, ③ 19~20, 28절은 “예수님의 천국 왕래”에 대한 말씀이요, ④ 22~25절은 “유다와의 대화”이며, ⑤ 27절은 “평안을 주심”이요, ⑥ 29~31절은 “가실 때가 임박함을 예고하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계명을 지킴(15, 21절)

1)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뿐 아니라 큰 헌신과 희생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 12:1~3). “나의 계명”은 곧 율법입니다. 이는 계시의 일체성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같기 때문입니다(10절). 여기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율법주의적 의식 계명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을 뜻합니다(마 22:36~40, 요 15:12).

2) 21절에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 하시므로 주제를 바꾸어 말씀하셨고,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도 그를 사랑하고, 또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타내주신다”는 뜻은 주님이 계명을 지키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그만큼 가까이 해주시고, 자신을 더 잘 알도록 진리 차원에서 깨닫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경을 사랑할수록 더 알게 되고,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2. 보혜사를 보내실 약속(16~18, 26절)

1) 16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하여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어 영원토록 너희(성도)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구하실까요? 부활 승천하여 구하십니다. 따라서 보혜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내주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사이에서 파송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보혜사”란 무슨 뜻입니까? 17절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고 성경입니다(요 14:6, 17:17). 그러니까 보혜사는 예수님이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롬 8:9, 마 10:20, 엡 1:17). 그 성령님을 보혜사(원문의 “파라크레토스”는 옆에 있게 한다는 뜻)라 하신 것은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계셔서 든든한 동반자의 역할을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성령님의 거취가 전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이전에는 성부와 성자의 사역 배후에서 역사하셨으나, 오순절 당시에 세상에 임재하신 후에는 상주하시고 앞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차이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십니다. 특히 성도의 마음속에 계셔서 항상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16:13).

2) 17절에서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심과 성도와 함께 또 성도의 마음에 거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불신자)은 저를(성령님에 대한 것) 보거나 알지 못하지만 성도는 저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본다”는 말씀은 안다는 뜻의 강세형입니다. 영어의 ‘see’는 본다는 뜻과 안다는 뜻을 같이 표현하는 줄 압니다. 불신자는 자기 혼자 살거나 마귀의 역사에 이끌려 살지만, 자신이 마귀의 역사에 이끌리고 있음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령님의 보혜사 사역에 의존되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님의 보호, 인도, 권고하심이 자기에게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알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18절에서 성령님이 보혜사 역할을 해주실 때 “성도는 고아처럼 버림이 되지 않는다”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신 것은 재림 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4) 26절에서는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경위와 오셔서 행하실 중요한 사역을 말씀하셨으니, 전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심(성부, 성자의 뜻으로 보내심)이고, 후자는 “모든 것(신앙생활에 관한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성경으로 집결되었음)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교사의 은사 역할과 성경을 깨닫는 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필자가 쓴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참고하십시오).

3. 예수님의 천국 왕래의 말씀(19~20, 28절)

1)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한다” 하심은 예수님이 다음날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고,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하심은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도 그때에 살아있을 것이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20절에서 “그날에는(부활하신 때)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신 것과 성도와 예수님이 서로 상대방 안에 계셔서 연합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 그 자체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연합임을 이해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도들 관계도 역시 그와 같은 연합의 관계가 있음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3) 28절에서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다” 하신 말씀은 18, 21절에서도 표현하신 것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가셨다가 성도들을 다시 만날 것을 예고하신 것인데, 이것은 부활 직후에 하나님 보좌에 다녀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신 목적은 속죄제의 열납을 위함으로(고전 15:24, 레 1:3) 이 사실이 요 20:17에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하셨는데, 그 다음 8일 후에 20:27에서 도마에게 몸을 만지게 하셨은즉 그 사이에 하나님 보좌에 다녀오신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을 것이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구속 사업을 이루시고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크시다”는 뜻은 본질과 권위가 같으시지만 예수님의 겸손에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빌 2:5~8을 보시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하셨으니, 이는 같은 입장에서 겸손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4. 유다와의 대화(22~25절)

1) 22절의 “가룟인 아닌 유다”가 누구일까요? 눅 6:16에서 12제자를 말씀하신 중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말한 12제자 중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 있는데, 눅 6:15에서 가나안인 시몬을 “셀롯이라 하는 시몬”으로 표현하였으므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에 해당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이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다대오”란 별명을 가진 자로 귀결됩니다. 그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어찌하여 자기(예수님)를 우리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믿지 않는 세계)에는 나타내려 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17절에서 “세상은 능히 성령님을 알지 못한다” 하신 말씀에 기인한 것입니다.

2) 23절에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계명)을 지키게 되고, (따라서)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예수님과 성령님)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셨고, 또 24절에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않을 것인데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혼자 하시는 말씀이 아니란 뜻)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 하시므로 성부, 성자간의 계시의 일체성을 또 강조하신 것입니다(10절).

3) 25절에서는 “예수님이 땅 위에 계신 동안 말씀하신다”는 것과 26절에서는 장차는 “성령님이 말씀을 주시고 가르치실 것”을 예고하셨으니, 이는 성령님의 영감 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벧후 1:21).

5. 평안을 주심(27절)

이 말씀은 첨부된 “평안을 얻는 법”이란 제목의 설교로 해석을 대신합니다.

6. 가실 때가 임박함을 예고하심(29~31절)

1) 29절에서 “일(십자가, 부활, 승천 사건)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를 때에(부활 다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심으로 예언의 진실성으로 믿을 것과 가장 큰 기적인 부활을 보고 믿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30절에서 “이후에 말씀을 많이 하실 수 없음”은 이 세상 임금(빌라도의 권세에 의한 체포)이 오기 때문이며, 그러나 “저(세상 임금)는 내게 관계할 일이 없음”은 예수님이 죄를 지으신 일이 없음과, 예수님이 빌라도의 군사들에게 체포당하심이 피할 힘이 없으신 때문이 아니고(마 26:53, 요 19:11~12)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스스로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당하시는 일인 만큼 섭리적 의미로는 관계할 일이 없으나, 범행 자체로 볼 때는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요 10:18, 마 18:11).

3) 31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일은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시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함이라” 하시고,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장소를 발 씻긴 곳에서 옮기심)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의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하고, 특히 성도들이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목적으로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빌 2:8).

 

설교보충 9.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요 14:27)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곧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런즉 “마음에 근심이나 두려움을 갖지 말라” 하시므로 평안의 약속과 평안의 소재와 평안의 성격과 평안의 결과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려움이 많은 시대에 생수 같은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도들에게 그림의 떡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우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함에 대하여 부활하신 후에도 두 번이나 선포하셨고(요 20:19~21, 눅 24:36),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신 말씀”(마 11:28)에서 잘 나타납니다. 약 1:17에서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 하셨으니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이 평안 주시는 약속을 믿고 바라셔야 할 것입니다.

2. 평안의 소재가 “주님의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누리신 평안이란 뜻이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이 제공하실 평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사시면서 인간적 평안을 누리신 분으로 아셔야 합니다. 모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풍랑 위에서도 주무신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고, 가난과 멸시와 배신과 음모를 당하셨지만 불만을 표현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민망함과 슬픔과(마 26:37) 놀라신 사실이 있으셨지만(요 16:33), 그것은 성도가 당할 고난이 아니며 주님이 성도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약소국의 백성으로, 가난 비천을 겸한 백성으로, 음모, 배신, 억울함으로 돌아가신 분인즉 가장 한 많은 인생으로 33세를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평안을 누리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속 사업은 죄의 심판을 벗겨주실 방도로, 또 택한 백성들에게 사망과 고통을 이기고 평안을 갖게 하실 능력자로 군림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평안을 그의 원하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의 성격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불안과 해결책을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불안과 고통은 성도가 당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가난과 비천의 고통, 억울함의 고통, 정욕대로 살지 못하는 욕구 불만, 권세자로부터 받는 속박 등등일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중 정욕대로 살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제하고는 예수님이 다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정욕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마음의 가난이고, 자기 부정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이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도 병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가난, 억울함, 비천함, 부자유 등등으로 고난당하는 백성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부분일 뿐이고, 극히 현실적 해결에 속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의 생활 모범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일은 없을 것인즉 그 이외의 다른 고난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할 것은 없겠지요. 예수님은 어려운 환경에서 “나의 평안”이라 하실 만큼 평안을 누리신 것을 아셔서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받는 평안입니다.

① 질병이 문제입니까? 죄사함 받고 병 고침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마 9:1~2, 약 5:13~16). 질병이 안 고쳐질 때는 연단을 받으시면서 감심으로 견디는 것입니다(고후 12:8~9). 수고도 감심과 자원으로 할 때는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② 질병이 죽음의 방편으로 올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히 9:27, 계 14:13, 행 17:26, 요 14:1~3, 살전 4:13~18에서 읽고 묵상하시면 죽음을 소망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 1:21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성도들도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으로 느끼시지 마시고,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응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가난, 비천, 욕구 불만에서 평안을 취하는 것인데, 예수님처럼 물질에 소망이나 기쁨을 두지 마시고, 매일 매일의 생활로 만족하시며(마 6:11, 8, 31~32),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자의 자세를 취하고(마 20:28), 욕구 불만은 자기 부정으로 해결하셔야 하는 것입니다(갈 5:24).

④ 마지막으로 평안을 해치는 것이 억울함입니다. 이 경우에 이 세상에서의 공의의 실현은 기대하지 마시고(어느 정도는 해결됨) 마지막 때에 공의롭게, 또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주님께 맡길 때(전 12:14) 큰 위로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빌 4:7).

 

제 36 과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요 15:1~15)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을 3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6절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이것을 대표 제목으로 정함), ② 7~12절은 “예수님과 연합된 생활”이며, ③ 13~15절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으로 나눕니다.

1.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1~6절)

1) 1절에서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아버지 하나님을 그 농부로 비유”하셨습니다.

① 포도 재배는 선민들의 전통적 생활입니다. 노아 시대부터 재배하였고(창 9:20), 율법에 제물로 정하셨으며(출 29:40), 사사시대에도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와 함께 3대 식료품이 되었고(민 22:24, 삿 9:13), 예수님 시대에도 포도원 농장 비유를 말씀하실 만큼(마 20:1~8) 특종 작물로 재배하였습니다.

②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데는 비슷한 특징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포도나무는 넝쿨에 불과할 만큼 나무로서의 겉모양이 없으나, 거기에 비하여 열매는 더 많이 맺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 53:2에서 예수님은 “외모로써 품위가 없는 분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열매로서는 최고의 결실을 하신 분이므로 공통점이 있고, 또 포도는 그 단맛으로 사람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포도주로써도 유용한 식품이 되고, 포도주는 오래 묵을수록 좋은 맛을 내는 것이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과 미래의 소망을 주시는 일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포도주로써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 것은 더욱 뜻있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마 26:27, 29). 그런 의미에서 선민 단체를 포도원으로 비유하시기도 하셨습니다(사 5:7, 렘 12:10, 마 21:33).

③ 그러면 참 포도는 무엇에 대조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 5:2에 나타난 “들 포도”에 대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들 포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할 대상들로써 유대주의 종교나 거기에 이끌린 바리새인들과 외식자들(마 7:22~24, 요 6:26)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다음에는 농부로 비유하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농부는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거두시고자 하신 열매의 뜻은 “구원 사역으로 인한 영광”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천국 건설로써 하나님은 천국 백성을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중보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믿음 사역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2) 2절에서 “무릇 내게(예수님)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외식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 요 6:36)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하셨으니, 외식자들은 은총의 권고가 없으므로 결국 구원의 대열에서 떨어질 것을(마 7:21~23), 참된 신앙은 주님과 연합하여 믿음과 영광의 열매를 맺으므로 더 은혜를 받아 영광의 자리에 나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3:30, 마 13:12). 농부는 농작물이 열매를 안 맺을 때 찍어버림이 마땅하고(마 7:19, 눅 13:6~9), 열매를 잘 맺는 나무를 더 잘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케 하심”은 포도나무 관리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참신한 성도에게 은혜를 더 많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3)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 하심은 요 13:10의 “이미 목욕한 자가 깨끗해졌다”는 뜻을 다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셨고(마 8:3, 9:9), “말씀으로 깨끗케 하신다”는 교훈도 하셨습니다(요 17:17, 엡 5:26).

4)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신 뜻은 성도가 예수님의 영(진리의 영, 요 14:17)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빌 2:5), 예수님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은 말씀으로 나타납니다(요 14:17). 예수님은 이 사실을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연합된 상태로 설명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인즉 이 말씀에서 성도는 예수님과의 신앙적 연합성에 대하여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고후 13:5).

5) 5절에서 “저가 내 안에” 하신 것은 성도가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하며, “내가 저 안에” 하신 것은 예수님을 모신 자의 심령에서 왕 노릇해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이것(연합)이 없으면 열매가 없은즉 열매가 없으면 외식자의 실상이 드러날 것이고, 농부는 그것을 모아 불사를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열매 없는 무리들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마 3:10). 오로지 주님과의 연합이 믿음 생활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연합된 생활(7~12절)

1)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5절에서 설명드린 것이고, 이 경우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신 것은 “무엇이든지”란 말씀이 자율적 소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합당한 간구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중보 또는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연합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에 대하여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2) 8절에서는 “너희(주 안에 있는 성도)가 과실(믿음 성숙으로 영광 돌리는 일)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내 제자”란 사도나 사역자로 쓰신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을 닮아 계승하는 자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제자라는(마 8:20) 뜻에서 충성의 대열에 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 9절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성도를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축복입니다. 성도가 주님과의 연합을 철저하게 하여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음이 믿음의 첨단을 걷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모든 율법과 하나님의 뜻)을 지킨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사랑 실천의 모범)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셨지만, 그와 같은 수준을 성도에게 요구하신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인간의 다른 점이 바로 완전과 불완전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롬 3:4).

4) 11~12절에서는 계명 실천의 결과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계명 실천의 결과는 주님의 기쁨이 계명 실천자에게 전가되어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란 것이며, 그 실천 방법에는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하신 모범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얼마큼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는 주님의 구속 사업에 대한 희생의 뜻과 함께 다음 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추앙 받는 대상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았을 때에도 큰 보람과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3.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13~15절)

1) 13절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 버린 사랑이 큰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평소에도 친구를 사랑하다가, 그 친구가 어려움 당하였을 때 자기 목숨까지 주었은즉 이 사랑의 성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명대로 하는 자(사랑을 실천하는 자)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 친구의 개념은 비밀이 없이 친교하고, 자유가 있으며, 영광을 나눔에 동일한 상태를 뜻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예수님의 뜻(명하는) 대로 살면 주님은 친구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2) 15절에서는 “종이 친구로 변하는 자유 상태”를 말씀하셨고, 친구 간에 비밀이 없음 같이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도에게 친구처럼 접근하시면 그만큼 계시의 정신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엡1:17).

 

제 37 과 선택 받은 자의 사명 (요 15:16~27) 목록으로


본문 전체의 제목을 잡고자 할 때 우선 대지를 분류하면 ① 16~17, 19절 말씀이 “주권적 선택과 목적”이고, ② 18, 20~21절은 “핍박의 연대성”이며, ③ 22~25절은 “핑계할 수 없는 불신앙의 죄”요, ④ 26~27절은 “증거의 사명”입니다. 19절에는 “세속을 멀리할 사명”이 함축되었고, 20절에서는 “핍박을 각오할 것”을, 27절에서는 “증거의 사명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전체의 제목을 “선택 받은 자의 사명”으로 정한 것입니다.

1. 주권적 선택과 목적(16~19절)

1) 선택은 만세(창조) 전에 시행한 것입니다(엡 1:4). 따라서 피택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셨습니다(롬 9:11). 그러니까 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신 것입니다. 택하신 것은 선택의 결정이고, “세우신 것”은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마 16:17). “이는 너희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 나타난 선택의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과 기도를 통하여 은총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14:13~14). 기도 응답으로 은총을 주시려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특별은총의 배려이며, 열매의 총괄적 내용은 “믿음”으로 표현할 수 있고, 믿음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들은 회개의 열매(마 3:8), 의의 열매(빌 1:11),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18~19), 전도의 열매(골 1:6)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이상의 열매들을 항상 맺고(시행) 있어야 합니다(마 21:19).

2) 17절에서 “내가 이것(16절의 과실에 대한 말씀)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하심으로 진정한 믿음 세계의 결과가 서로 사랑함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선택의 가장 큰 목적은 서로의 사랑입니다(마 22:36~40).

3) 19절에서 두 번째 사명은 “세속을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사명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면 세상(불신 세계)이 자기의 것(세상에 속한 자)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나의 택함을 입으므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므로 도리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을 등으로 향하고 사랑하지 않아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일 2:15). 성도는 세상의 재미로운 일들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가질 만큼 신령한 복에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한한 세계의 모든 상품들이 다 흥미 없는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계 18:10~17).

2. 핍박의 연대성(18, 20~21절)

1) 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함을 기억하라(요 13:16).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예수님 뜻에 순종한 것)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기도를 응답하실 것에 대한 약속임)”고 하셨습니다.

2) 21절에서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예수님을 핍박하는 목적으로) 이 모든 일(핍박)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신데,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영접할 것이나 하나님을 바로 모르기 때문에 믿음의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성도의 핍박의 연대성을 말씀하신 것이며, 성도에게 세 번째 주신 사명으로 핍박을 견디게 하신 것입니다(행 14:22).

3. 핑계할 수 없는 불신앙의 죄(22~25절)

1) 22절에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의 차이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예수님의 증언을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의 죄는 면할 수 없습니다(눅 23:34). 그 죄로 사망에 이르니까요(요 16:9, 롬 6:23). 따라서 이 말씀은 불신앙의 더 큰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2) 23절의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하신 말씀은 18절의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말씀하신 뜻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도는 연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3) 2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계시의 특권자이십니다(요 14:6 설교문 참조). 그런 특권자께서 “하나님을 증언하시지 않았다면 저희가 죄 없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요 14:9) 또 미워하였다” 하셨으니, 이런 일이 다 “예언의 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5절에서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시 35:19과 69:4에 보시면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무고히 미움 받는 사실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사실이 있는데, 이 내용이 메시야가 당할 내용을 예언적으로 나타낸 글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무고한 미움을 받으신 것입니다.

4. 증거의 사명(26~27절)

26절은 성령님의 증거 사명을, 27절은 제자들의 증거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1) 26절에서 “하나님이 보내실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이시므로 그가 오실 때에 진리이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성경 기록과 사역자를 세우심과 전파와 가르침과 감동으로 증거하십니다(벧전 1:21, 요 14:26). 따라서 성도는 진리의 밝혀짐과 깨달음이 있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2) 27절에서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하시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배웠음을 뜻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성경으로 예수님을 깨달아 증거하셔야 하는데, 이 사명은 본문에서 네 번째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네 가지 사명을 정리하면 사랑의 사명(17절), 세속을 멀리 할 사명(19절), 핍박을 견딜 사명(18절), 그리고 증거할 사명(27절)입니다.

 

제 38 과 미리 알리신 말씀들 (요 16:1~15)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미리 알리신 말씀들”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하셨고, 4절에서도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하셨으며, 6절에서도 “내가 이 말을 하므로” 하셨고, 7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연구하시는 데는 “미리 알리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첫 대지는 “미리 알리신 말씀”(1~7절), 다음 대지는 “오실 성령님의 사역”(8~15절)입니다.

1. 미리 알리신 말씀(1~7절)

1) 예수님이 앞부분에서 많은 설교와 예언을 하셨는데, 특히 본문에서 “이것을 말씀하셨다” 하신 내용은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신 데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1절 하반에서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2절에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방법)라” 할 것이며, 3절에서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15:21) 하셨고, 또 4절에서는 “그때를 당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란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의 내용”이고, 때가 임박하였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실족하거나 놀라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되는 것인즉 핍박을 받으면서라도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며 믿음 지킬 것을 미리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4절의 “그때를 당한다” 함은 바로 다음날 있을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예고가 성취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는 것을 기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5~7절의 말씀은 “부활, 승천과 성령 보내실 것”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부활 승천의 뜻) 너희 중에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다” 하셨고(5절), “도리어 내가 이 말(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6절)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묻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의 영적 거취에 대한 과정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함”은 예수님 신변의 위험과 “잠시나마 떠나게 된다”는 말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7절에서 “그러나…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요. 가면 너희에게 보내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14:16~17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령님(보혜사)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내신(즉 성부 성자 사이에서 파송하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알리신 말씀은 수난, 승천, 성령 보내실 것과 성령의 사역, 그리고 다시 오심 등의 예언입니다.

2. 오실 성령님의 사역(8~15절)

1) 성령님의 사역 첫째는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범죄하는 자들 세계)을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9~12절에서 책망의 분야를 대표적으로 말씀하셨으니, “죄에 대하여”라 함은 범죄를 책망하실 것인데 그 중에도 예수님(진리)을 믿지 않은 죄를 책망하신다는 것이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함이라”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임을 그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 보내심으로 입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는 예수님을 핍박한 죄를 책망하신다는 것과(마 27:54) 또 의로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하신다는 뜻입니다. “심판에 대하여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은 사탄이 예수님의 부활로 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부정한 세상 권력자입니다(마 4:6, 하나님이 사탄의 활동 무대로 허용하신 뜻). 사탄이 사망의 고통으로 위협하면서 진리를 대적하였지만, 예수님이 사망의 고통을 당하신 후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기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실 것이므로 사탄이 패배자로서 심판 받을 것이 확실함을 완료된 것처럼 나타내신 것입니다(계 20:10). 12절에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하심에 대하여 “이를 것이 많은 것”은 차후에 성경을 주심으로 다 말씀하신 줄 압니다(요 21:24~25).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함”은 십자가 사건에 직면하여 황급한 시기에 믿음 지킬 일이 중요할 뿐, 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교회생활과 함께 믿음을 실천하는 일은 그 시기에 함께 시행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13~15절은 예수님이 보내실 보혜사 즉 성령님의 사역을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① 성령님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모든 진리”란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마 4:4), “진리 가운데로”란 정통성과 실천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연구에 끌리며 깨닫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② 또 성령님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하나님 또는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말씀하시며(삼위 간 계시의 일치성이 있음, 12:49)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셨는데, 이 뜻은 사도들이나 사도 요한을 통하여 미래의 일과 “계시록”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개별적으로 계시를 주시는 줄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요 21:25, 딤후 3:16~17, 엡 3:3~5, 유3, 계 22:18~19, 히 1:1).

③ 14절에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심은 성령님이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사역(진리 사역)을 하신다는 뜻이요,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린다” 하심은 진리가 예수님이신즉(요 14:26) 성령님이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심으로 예수님을 알리신다는 뜻입니다. 15절에서는 예수님이 “내 것”이라 하신 뜻을 설명하셨습니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권자이기도 하시지만(눅 15:31) 예수님 자신이 창조자요, 구속자로서 만유의 주이심을 말씀하신 것이고(마 28:18, 골 3:11, 히 1:2), 또 15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심은 성령님의 말씀 사역이 곧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사역에 통일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상황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9 과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16:16~33) 목록으로


31절에서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돌아가심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분임을 감안할 때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 재림은 비현실적인 일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였다가 예수님의 설명이 계속된 관계로 어느 정도 믿음의 발전이 있음을(30~31절)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① 16~30절까지는 “승천과 관련한 재설”이고, ② 31~33절은 “믿음 가진 자의 누릴 복”입니다.

1. 승천과 관련한 재설(16~30절)

1) 16~18절 말씀은 14:18~19에서 설명 드린 것입니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보게 된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문 사항을 아시고, 20절에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슬픔) 세상은 (승리한 줄 알고) 기뻐할 것이요 너희는 (잠시, 3일간) 근심하겠으니 너희 근심이 (예수님의 부활로)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2) 21~22절에서는 이 사실을 비유로 설명하셨으니, 이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않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적절한 비유입니다.

3) 23절에서 “그날에 너희가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부활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러하리라는 뜻이요, 또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하심은 14:13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구속 사업 완성으로 중보자의 자리에 계시게 되므로 하나님 앞과 성도 사이에서 그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4) 24절에서 “지금까지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은 것”은 주님이 중보자 역할을 하시지 전이기 때문이요, “그러나(곧 성취될 때부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응답을)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기도의 특권은 마치 해결의 열쇠를 맡은 것처럼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는 26절의 “그날”인 바, 곧 속죄 사역을 끝내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실 때를 의미합니다(롬 8:34, 히 1:3).

5) 25절에서 “이것을 비사로 말씀하신 것”은 듣는 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여인의 해산함”(21절)으로 설명하셨지만, “다시 비사로… 이르시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실 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성경으로 밝히 증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26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실제적 기도를 예수님께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직고할 것을 권장하신 말씀입니다(롬 14:12, 벧전 4:5).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구할 수 있는 근거는 27절에서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응답)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7) 28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과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 하신즉, 29절에서 제자들은 그 사실을 비사로(21절처럼) 말씀하시지 않고 밝히 말씀하심을 인하여 깨달았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은 30절에서 “이로서 (주님이)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그들이 믿은 것은 30절 앞부분의 말씀대로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미래와 영계의 상태)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음(사람의 심리를 묻지 않고 헤아리시는 뜻)도 알았으므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은 예수님 사후에 대한 말씀을 무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이해할 때까지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2. 믿음 가진 자의 누릴 복(31~33절)

믿음 가진 자의 누릴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과 평안과 환난에 담대함입니다.

1) 31~32절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다(마 26:31).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마 28:20, 창 28:15). 또 십자가 사건이 가까워질 무렵에 제자들이 흩어질 것도 예언하셨습니다.

2) 33~34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너희로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이요, 또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내(예수니)가 세상을 이긴 사실을 기억하고 담대히 싸워 승리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음을 믿고(시 91:1)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이 환난과 죽음에서도 죄와 싸워 이기신 것처럼 성도들도 개선장군의 능력을 믿고 환난과 죄에 대하여 담대히 대적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용기가 있을 때 영적 싸움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쓸 무렵에 “장수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종교인이 으뜸이라”는 방영이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그만큼 평안을 누린다는 뜻일 것입니다(32~33절을 근거로 “세상을 이기는 생활”이란 설교문을 7분 설교중에서 참고하십시오).

 

제 40 과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 17:1~26) 목록으로


17장 전체의 내용은 예수님이 성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요 13:1~14), 가룟 유다가 자리를 떠났을 때(요 13:30) 계속 교훈하신 후에(요 13:31~14:31) 그 자리를 떠나셨으니(요 14:31) 그 밤으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마 26:30). 감람산의 가끔 모이시는(18:2) 한 장소에서 요한복음 15장과 16장의 교훈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골짜기로 들어가셔서(마 26:36)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기도는 그 장소를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공관복음과 대조할 때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틀림없고, 기도를 끝내신 다음 요 18:1에서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신 것”은 마 26:46의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사도 요한이 어떻게 알고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막 14:33에서 기도하러 가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가까운 장소까지 데리고 가셨으므로 예수님이 소리 내어 기도하셨다면 충분히 기억하고 옮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살피면 ① 1~5절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화를 위한 기도”이고, ② 6~19절가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이며, ③ 20~26절까지는 “일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1.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화를 위한 기도(1~5절)

1) 1절의 “이 말씀”이란 15장, 16장의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하심은 기도의 모습으로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뜻으로 위를 쳐다보시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마음으로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머리를 숙임은 겸손의 표현이고, 눈을 감는 것은 보이는 세상의 잡념을 피하자는 뜻입니다. 기도자가 정신만 하나님께 집중하면 기도의 환경이나 모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기도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필자가 쓰는 기도백과의 17과를 참고하십시오). 기도의 내용은 “때가 이르렀사오니(십자가의 구속 사업의 때)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구속 사업을 완성하시고, 영광의 보좌로 가시는 일)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잘 감당하심으로 구원 사역이 완성됨을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라는 뜻입니다.

2) 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택한 백성, 9절, 요 6:37, 행 13:48, 엡 1:4, 살후 3:2)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만민(인류를 뜻하되 성도는 특별섭리로, 불신자는 일반섭리로 다스리심, 요 15:4, 7:14, 마 5:45)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3절에서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으니, 선택 받은 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알 때, 구원(영생)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말씀하신 것은 계시의 말씀으로 나타내시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을 아는 것입니다.

3) 4~5절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세상)의 생애를 마치시면서 인간의 입장에서 임박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시므로 과거형으로 표현하셨고, 그 후에 있을 영화를 부탁하신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십자가 구속 사역)을 내가 이루어 (순종으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영원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므로, 창세 전의 영광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그 근거는 “이 세상에서 순종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일”입니다. 내세의 영화는 이 세상에서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으로 받게 됨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6~19절)

요즈음 목사님들이 “중보기도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제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유일한 중보자로서 효력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고, 인간 목자의 기도는 권위와 진실성 문제로 볼 때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저희”란 말씀을 14회쯤 나타내셨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따른 모든 무리들을 총칭한 것입니다.

1) 6절에서 “세상 중(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전도를 받은 선민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신분적 명성)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실 대상)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함께 누리는 친교와 영광의 대상)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여기의 “지켰다”는 뜻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교훈에 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8절).

2) 7절에서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증언한 말씀들)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절에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습니다”,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일반 대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선택 받은 자, 특히 함께 있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저희는 다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6절).”

3)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 것과 아버지의 것이 같음”은 성부 성자 간의 공유의지를 뜻하며, 예수님이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심”은 제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 그만큼 예수님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 것을 뜻합니다. 요즈음 교역자들도 자신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큰 위안을 받지 않습니까?

4) 11절에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않으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승천)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신분적 명성)으로 저희를 보전(법률적 용어, 안전하게 보호함)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해 달라” 하심은 궁극적 구원(구원 완성)에 이르기까지 보호 인도해 달라는 부탁의 내용입니다.

5) 12절에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았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가룟 유다)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니이다”(13:8 참조) 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안에서 맡겨주신 자들의 믿음을 책임 있게 붙드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 13절에서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이 세상에서 이 말(제자들에 대한 부탁)을 하옵는 것은 저희(남아있는 제자들)로 내 기쁨(예수님이 영광에 오르시는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입니다” 하시므로 하나님이 제자들을 권고해 주실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7) 14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불신자들과 핍박자들)이 저희를 (예수님과 함께)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처럼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인함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교훈하셨습니다(히 11:9~10).

8) 15절에서 예수님이 보전 부탁을 하셨다 하여 “저희를 세상에서 (아주 안전한 천국으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주시기를 위함입니다”, 성도가 악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권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6:41). 16절은 14절의 재설인즉, 이는 강조하신 뜻이 있음을 아셔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가 세상에 속한 자처럼 사는 모습을 삼가야 할 것이고, 또 하늘에 속한 자가 하늘 백성 아닌 자처럼 사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9) 17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이 말씀은 필자가 많이 강조한 것입니다. 의는 용서를 뜻하고, 거룩은 순결해지는 것을 뜻하는 바, 거룩해지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생활이라”고 시 119:9에서 말씀하셨습니다(이 본문에 첨부한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임은 하나님이 참된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성경)도 참이라는 뜻입니다.

10) 18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저희들(전도의 사명자, 기독교의 기초를 닦을 자로) 세상에 보내었고, 19절에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였다“ 하심은 예수님이 본래 거룩하신 분이지만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3. 일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20~26절)

1) 20~21절에서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제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셨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 되신 것처럼 저희도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고, 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 되는 모범을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로 알려주셨고,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로 믿어야 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셨으니, 믿음이 섭리적 은총이라도 기도의 노력, 응답의 필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7:5).

2) 22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셨다” 함은 주님이 받으실 영광을 주님과 연합한 성도와 함께 누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도 “하나 되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뜻과 방법도 같아야 하지만 영광을 나눌 때, 즉 결과를 다같이 누릴 때 하나 되는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3) 23절에서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하심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하나님이 믿음으로 연합되어 있음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곧”이란 말은 원문에 없지만 번역 상으로 24절의 연합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연합성 안에서 “저희(모든 성도들)로 온전함을 이룬다” 하심은 하나님과의 연합성이 거룩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 되는 연합의 관계를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온전”이란 말을 거룩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거룩”은 진리로 된다(17:17)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온전함”은 거룩을 뜻하는 “하기오스”가 아니고 “테테레오 메노이”란 용어입니다. 따라서 “온전함”에는 본질적 순결도 있고, 결속의 완전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합이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려 함은(23절)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또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성도들(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나 아는 것은 연합의 온전함으로 말미암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 24절에서는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들을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성도들)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셨으니, 이 기도야 말로 믿음 보존과 구원과 영광을 구하는 종합적 중보기도라 할 것입니다.

5) 25절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불신계)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성도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들의 믿음의 진실성에 대하여 입증(보증)자로서 중보하신 기도입니다.

6) 26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명성)을 저희에게 알게 하셨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있으실 때 (저희 안에 있고) 예수님도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강도와 연대성도 하나님과 성도의 연합성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구속 사업의 성취를 위한 내용과(1~2절) 제자들과 모든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시되 보전을 위한 것,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것, 성도들의 믿음의 보증, 구원과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심”에 대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나 예수님의 중보사역이 절대적이고 또 구원 받는 자의 경건한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41 과 예수님이 잡히신 과정 (요 18:1~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시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장소를 옮기신 다음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원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실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① 1~4절은 “군사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심”이요, ② 5~9절은 “군병들과의 대화”이며, ③ 10~11절은 “베드로의 만용”입니다.

1. 군사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심(1~4절)

1) 1절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17장의 기도를 의미하고, 기도를 마치신 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마 26:46). 이때는 목요일 이른 새벽 3~4시경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감람산 계곡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시내로, 감람산을 벗어난 곳은 아니며 “그 건너편 동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셨고 또 그곳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끔 모이신 장소인지라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고 하셨습니다(2절).

2) 3절은 “유다가 군대(로마 병정들)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흥정한 사실과(눅 22:3~6, 막 14:10~11) 예수님 앞에 나타나 예수님께 문안과 입맞춤을 한 사실에 대하여는(마 26:47~49, 눅 22:47~48) 공관복음에서 이미 설명 드렸습니다.

3) 4~5절은 예수님은 그 당한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셨고(4절), “나사렛 예수라” 하므로 “내로라” 하시고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때에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하셨으니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입을 맞춘 일”이 이 순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때가 된즉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군병들과의 대화(5~9절)

1) 6~7절에서는 예수님이 군병들 앞에서 “내로라” 하셨을 때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졌고, 예수님이 (재차) “누구를 찾느냐?” 하신즉 (역시) “나사렛 예수라” 하므로,

2) 8~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함께 있는 제자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셨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기도하신 내용(17:12)을 응(성취)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내로라” 하셨을 때 군병들이 “물러가서 엎드린 일”이 예수님의 권위에 굴복당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 26:53에서 예수님은 자위 능력이 있으심을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버리신 것”이시기 때문에 붙잡혀주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 한 분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보호하시려는 희생심을 나타내신 것이고, 셋째는 “하나도 잃지 않고 다 보전하셨다”(17:12)는 뜻이 영적 보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육체적 신분까지 그 상황에서 지켜주실 것을 의미하셨던 것입니다.


3. 베드로의 만용(10~14절)

1)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마 26:51~52, 눅 22:49~51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는 베드로가 “검으로 치리이까?” 한 후 예수님의 반응이 나타난 사실도 없이 대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는데, 예수님이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하였고, 마태의 기록은 베드로가 귀를 쳤을 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하셨으며, 본문에 나타난 기록의 특징은 그 피해자의 이름이 “말고”란 사실과 그 일이 있었을 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일이 있었을 때 “군대(로마 군인들)와 천부장(대제사장이 보낸 자, 3절)과 유대인의 하속들(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 3절)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으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하였습니다(13절). 13~23절까지는 안나스(원로 은퇴 제사장)의 심문 기사가 있고, 25~27절에서는 가야바의 심문 기사가 나오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안나스의 별도 심문이 가야뱌의 심문에 포함하여 기록된 것입니다(마 26:57, 눅 22:66~71, 막 14:60~65). 따라서 “안나스의 심문”을 구별한 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3) 14절에서 가야바는 “한 사람(예수)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주장을 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마땅한 일로 선전했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50).

 

제 42 과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 (요 18:15~27) 목록으로


본문 ① 15~18절은 “베드로의 1차 부인”이고, ② 19~23절은 “안나스의 심문”이며, ③ 24~27절은 “베드로의 2차, 3차 부인”입니다. 안나스의 심문이 끝나자 24절에서 “가야바”에게로 보냈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야바” 앞으로 끌려가시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한 것입니다.

1. 베드로의 1차 부인(15~18절)

1) 예수님이 안나스의 면전에서 가야바의 법정으로 가실 무렵에 15절에서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대제사장을 알만한 다른 제자가 누구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고 기록한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품에 기댄 자”입니다(13:1, 23, 20:2~3, 21:20).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사도 요한(본서의 저자)으로 짐작합니다.

2) 16절에서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 섰을 때, 대제사장을 아는 제자가 다시 나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제사장을 아는 사람이란 명분으로 부탁한 듯함) 베드로를 데리고 (뜰) 안으로 들어갔는데, 17절에서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한즉, 베드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18절에서 그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쬐는 자리에서 “그도 함께 쬐이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을 지키는 여종이 “제자냐?”고 물었을 때, 선뜻 “아니라”고 대답한 것과, 아니란 것을 사실로 증명하기 위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불을 쬐인 것은 망설임조차 없는 탈선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에 연속적으로 민감하지 않거나 기도로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나 이런 시험에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안나스의 심문(19~23절)

1) 19절에서 “대제사장(안나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교훈에 대하여(무슨 말, 무슨 주장을 하였느냐는 뜻) 물은즉, 20~21절에서 예수님은 ”드러내어 놓고(비밀 없이) 세상에 말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성전과 회당에서 항상 가르쳤은즉 어찌하여 묻는가? 들은 자들이 알고 있은즉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대답을 회피하신 것 같으나 이미 거짓 증언자들을 예비한 상태임을 아시고(마 26:59~60, 막 14:56~57) 형식적인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회피하신 것입니다.

2) 22~23절에서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즉 피하는 대답을 하였다는 뜻)”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할 것이요, 잘 하였으면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대제사장의 재판 중 폭력이 있은 사실은 그 당시 종교의 타락성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 안나스의 심문 사실과 함께 심문 중 폭력을 가한 사실은 요한만 기록을 한 것입니다.

3. 베드로의 2차, 3차 부인(24~27절)

1) “안나스”가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24절). “안나스”는 원로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사위이고, 또 실무적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돕는 뜻으로 관여한 것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의 사역지는 가까운 곳에 인접되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안나스의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그 마당 한쪽에서 계속 불을 쬐고 있었는데, 심문이 끝나고 장소를 이동하는 중에 사람들(핍박하는 유대인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는 질문을 듣고 두 번째로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거짓말을 한 번 하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참말처럼 포장하려면 계속 거짓말로 입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25절).

3) 그때 마침 베드로에게 귀 베임을 당한 자의 일가 되는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이었는데, 그가 베드로를 보고 “네가 그 사람과 함께 있던 것을 내가 보았는데 어째서 아니라 하느냐?” 하였을 때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한 후에 곧 닭이 울므로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응하였던 것입니다(마 26:34, 막 14:30, 요 13:38, 눅 22:57).

4) 요한은 “가야바”의 재판 과정을 생략하였습니다. 가야바가 심문을 한 후 정죄한 기사(사형에 해당함)는 마 26:67, 막 14:64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 단체에는 사형집행권이 없었으므로, 민란죄를 뒤집어씌우고 군중의 힘으로 예수님을 사형 당하게 하기 위하여 당시의 행정 및 재판관인 빌라도에게 넘긴 것이고, 또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하여 미리 모의하였던 것입니다(요 13:53).

 

제 43 과 빌라도의 재판(1) (요 18:28~4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빌라도의 재판 과정 중 일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재판 종결은 19:16까지입니다. ① 28~32절까지는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간 과정”이고, ② 33~37절은 “빌라도의 심문”이며, ③ 38~40절은 “빌라도의 재판 진행”입니다.

1.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감(28~32절)

1) 28절에서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유다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한 말씀은 유대인들이 사형집행권이 없으므로 사형집행권이 있는 총독의 힘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총독은 종교적 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행 25:18) 소요죄로 송사를 한 것입니다(눅 23:5).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하셨으니, 이 뜻이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죄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경계합니다(시 1:1, 마 9:10~11, 요 4:9). 그리고 죄인을 가까이 한 상태에서 유월절 잔치 먹는 것을 부정하게 여겨 사형당할 예수님을 경계하려고 그 법정에 따라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는 외식자의 독선이고 부조리한 태도입니다.

2) 29절에서 “빌라도”는 법정에 피의자만 있고 송사하는 군중들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밖으로 나와서 군중을 향하여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한즉, 30절에서 군중들은 “행악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희들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악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간에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란 신분이 드러났는데, 마침 그때 갈릴리, 베뢰아, 요단강 동남 편을 다스리는 헤롯 왕(마 14:8~12, 눅 13:32)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보내어 심문 받게 한 사실(눅 23:5~12)이 있었는데, 그 절차가 이 부분에서 연결되어야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새벽부터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다가 또 중간에 헤롯에게로 끌려가셔서 오전에 헤롯의 심문을 받고, 다시 빌라도에게 와서(눅 23:11) 재판을 끝낸 것입니다.

3) 31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 왕도 그대로 돌려보낸 터라, 예수님을 방면하려는 뜻으로(눅 23:13~15)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한즉 유대인들은 (예수가 사형에 해당한 죄인이나)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세가 없다” 하였으니,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32절에서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한 예언이 응하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이를 통치하시되 악인들의 악한 행동도 그 계획 성취에 이용되도록 섭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잠 16:4).

2. 빌라도의 심문(33~37절)

1) 헤롯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냈으므로(눅 23:11) 33~34절에서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즉 예수님은 다시 묻기를 “그 질문이 당신의 질문이냐? 아니면 백성들이 한 말을 확인하려고 하는 질문이냐?”고 하셨습니다. 35절에서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아니란 뜻)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죄인이라고)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므로, 36절에서 이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신즉, 37절에서 빌라도가 또 묻기를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였을 때, 대답하시기를 “네 말처럼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이 뜻은 예수님이 구속 사업을 끝내신 후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을 의미함) 곧 진리(예수님과 구원의 도리)를 증거하려 함이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선택 받은 백성)는 내 말을 듣는다” 하신즉, 38절에서 빌라도는 그 말을 듣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증거하려 하신 진리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는 이 말씀을 하나님과 구원의 도리로 믿는 것입니다.

3. 빌라도의 재판 진행(38~40절)

1) 38절에서 빌라도는 심문을 끝내고 유대인들에게 나가서(38절)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무죄의 강변은 눅 23:4, 14, 15절에서도 세 번 강조하였습니다. 누가의 기록에는 빌라도가 “죄를 찾지 못하였다” 하였는데도 군중들이 물러가지 않으므로 “빌라도”는 어느 정도 고소인들의 분을 풀어주고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때려서 놓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였지만(눅 23:16, 22)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2) 그리하여 빌라도는 39절에서 유월절 명절에 죄수 한 사람씩 방면하는 관례를 적용하여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나 40절에서 군중들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방면을 원하는 자는 예수가 아니고 강도 바바라라” 하므로 더 이상 악한 민의를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재판은 19:16까지 진행됩니다. 재판관이 죄없는 자를 방면하고 싶어도(마 27:19) 군중의 지지도를 의식하여야 하는 불합리에 이끌리는 연약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추세라 할 것입니다. 단체라 하여 다 공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공의는 법대로, 진실대로, 양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제 44 과 빌라도의 재판(2) (요 19:1~16) 목록으로


이 말씀은 빌라도의 최종 재판 기록입니다. ① 1~3절은 “채찍질하고 조롱함”이며, ② 4~7절은 “빌라도가 고소인들에 무죄 항변함”이요, ③ 8~12절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심문함”이며, ④ 13~16절은 “빌라도가 박석에서 재판을 끝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채찍질하고 조롱함(1~3절)

빌라도의 방면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소하는 유대 군중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많이 때리면 군중들의 분이 풀려 물러날 줄 알고 “때리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눅 23:16, 22). 1절에서 “예수를 (형장으로 데리고 가서) 채찍질하였고(군병들을 시켜서 하였을 것임)”, 2~3절에서 군병들은 재판관의 지시에 의하여 임의로 폭행하고 조롱하였으니 곧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왕이 입는 붉은 옷처럼 흉내 내서 조롱함; 마 27:28, 막 15:17, 20에는 홍포임) 그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때리고 조롱한 것으로 고소인들의 악심이 없어질까요?

2. 빌라도가 고소인들에게 무죄 항변함(4~7절)

1) 4~5절에서 빌라도는 가시관을 쓰고 폭행을 당한 예수님을 고소한 군중들이 있는 밖으로 데리고 나오게 한 후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로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고 “보라. 이 사람이라” 하면서 홍포를 입고, 매 맞고,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2) 6절에서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고난 중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러 말하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였고,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이 뜻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빌라도의 명령과 로마군에 의한 사형을 받게 하지 말고, 유대인(종교인) 자신들이 정죄하였은즉 스스로 데리고 나가서 죽이면 그 죽인 죄는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만큼 예수님에 대한 정죄와 사형 집행에 가담하는 책임을 면하려고 한 것입니다.

3) 7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라” 하였으니 과연 율법의 형법 중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죽이라는 조문이 있는가? 할 때 그런 것은 없고, 살인자(출 21:12, 레 24:21), 간음자(레 20:10; 신 22:22, 24), 안식일 범한 자(출 31:14~15, 민 15:32~36), 거짓 선지자, 꿈꾸는 자(신 13:5), 복술자, 요술자, 무당은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출 22:18, 신 18:10).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를 죽이라”(레 24:16, 민 15:29~30)는 조문을 예수님께 적용한 것인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잘못이 아니요(요 3:17),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2, 롬 8:14, 갈 4:6).

4) 8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예수님께 “신적 요소(능력)가 없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다시 관정에 들어가 심문함(8~12절)

1) 8~9절에서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로서 왔음”에 대한 설명을 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았으니, 이는 마 27:12~14에서 선지자적 침묵(예수님이 사탄의 사자에게 대답을 해도 소용없을 것을 아신 뜻) 또는 제사장적 침묵(방면이 있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침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10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묵비권 행사를 알고 “자신이 놓을 권세와 죽일 권세가 있은즉 (말하라)”고 하였을 때, 11절에서 “위에서(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을 것이라” 하시므로 빌라도의 이방 국가적 권세나 메시야를 해롭게 하는 권세가 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롬 13:1~2). 사울이나 다윗이 왕된 것은 정당 절차에 따른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요람 왕 때에 님시의 아들 “예후”가 혁명으로 왕된 일이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하였은즉(왕상 19:16~17) 뚜렷한 명분에 의하여 기존 권세를 항거하는 것은 정당한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주시는 섭리는 명분을 뚜렷이 나타내는 줄 알며, 명분 없는 불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즉 동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갖고 재판을 공의롭지 못하게 하므로 그 부분의 죄가 있다는 것이고, 군중들은 아무 권세도 없는 자들이 무죄자를 모함하여 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은즉 그 죄가 더 큰 것입니다.

3) 12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을 썼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한 자는 가이사를 반역한 자라”고 소리쳤으니 예수님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왕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11절, 18:36) 왕을 반역하는 인물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만일 “빌라도가 통치하는 기간에 백성들의 소란이 그치지 않는다” 하면 빌라도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빌라도가 박석에서 재판을 끝냄(13~16절)

1) 13절에서 빌라도는 이 말(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란 말)을 듣고 관정에서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말로 가바다, 높은 곳이란 뜻, 빌라도의 관정 주위에 유색 석으로 포장한 재판석)에 앉아 사형을 승인하였으니 그 시간이 “유월절 예비일 제 6시”라고 하였습니다. 해질 때부터 유월절 금요일의 시작인즉 이 날은 목요일 해지기 전이고, 유월절 예비일은 하루 전날인 목요일을 뜻합니다(안식일에 대한 예비일은 금요일임). 필자는 그 동안 금요일 새벽에 재판 받으신 것으로 알고 그렇게 증언했으나 이번에 다시 깨닫고 교정하는 증언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새벽에 대제사장에게 넘기워졌는데(마 27~1, 막 15:1) 그 새벽이 금요일이 아니고 목요일(유월절 예비일)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유월절 첫날(금요일) 3시에 못 박히신 기록과(막 15:25) 십자가에 달리신 후 6시부터 9시까지 어두움이 임하고, 9시 경에 운명하셨기 때문에(마 27:45~46, 눅 23:44~45) 본문의 6시는 못 박히신 날로부터 24시간 전의 6시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그 동안 예수님의 수난 일정을 연구함에 있어 시간문제의 재조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정리한다면, 수요일 저녁에 성만찬과 겟세마네 기도가 있었고, 목요일 새벽에 잡히심과 대제사장에게 넘김이 있었으며,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재판은 목요일 새벽에 시작하였지만(막15:1-2) 헤롯을 경유하므로 재판은 목요일 오전에 시행되어 당일 6시(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에 사형 허락이 났으며, 그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일찍 골고다로 진행하여, 3시(아침 9시)에 못 박게 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필자가 마태, 누가복음의 강론을 쓸 때 금요일 새벽에 재판 과정을 밟았다는 해석을 여기서 교정하는 바입니다).

2) 14~15절에서 예비일은 유월절 예비일이므로 목요일을 뜻하는데, 빌라도는 그날 오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재판에 임한 후 “보라 너희 왕이로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하고 신중한 태도를 나타냈으나,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으니 그를 없이 하소서. 못 박게 하소서” 하므로, 16절에서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속행으로 재판 받으신 것이 아니고, 목요일 새벽에 잡혀가신 후 당일 6시(정오 12시)까지 재판을 끝내고 다음날 금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3시에 못 박히고 9시에 운명하심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못 박히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신 것) 사형 집행을 한 것입니다.

 

제 45 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요 19:17~3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재판이 끝난 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① 17~22절까지는 “죄패를 붙이고 못 박음”이요, ② 23~24절은 “의복을 제비 뽑음”이며, ③ 25~27절은 “모친을 부탁함”이요, ④ 28~30절은 “돌아가심”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마 27:35~50, 막 15:24~37, 눅 23:33~46에도 기록되었습니다.

1. 죄패를 붙이고 못 박음(17~22절)

1) 17절에서 “저희(로마 병정들)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자신이 못 박힐 형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셨다” 하였으니, 그 과정에 있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와 구경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눅 23:26~31)는 본서에서 생략되었습니다.

2) 18절에서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3) 19~22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글씨(패, 눅 23:38)를 써서 붙였으니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죄패란 용어는 쓰지 않음이 좋음). 패에 기록된 내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3국 방언은 세계에 알리기 편리한 언어임)로 써 붙였으니 이는 성령님이 복음의 대적자를 통하여 예수님을 세계에 알리도록 섭리하신 뜻으로 믿어야 합니다. “골고다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이므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쓴 글은 “예수스 호 나자라이오스 호 바실레우스 톤 유다이온(Ιησους ο ναϚαραιος ο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이니 여기의 앞 자 넷을 모아 “INBI”로 요약하여 십자가 위에 기록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형틀에 돌아가신 이는 나사렛 사람 예수요, 또 유대인의 왕이니 이는 선민의 왕이란 뜻입니다.

4) 21절에서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시오” 하였으나, 22절에서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 하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믿지 않았으나 이방인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증거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는 대적자로서 세계 선교의 역할에 쓰임이 된 것입니다(11:49~52).

2. 의복을 제비 뽑음(23~24절)

예수님을 먼저 못 박고 그 다음에 패를 붙였으며(18~19절), 23절에서도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속옷을 통으로 짠 것은 이음새 없이 지어진 옷을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그 옷을 찢기가 아까웠는데 제비를 뽑아 당첨자에게 주었으니, 이는 시 22:18의 예언(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이 응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까지 벗김 당하시고, 그 몸을 가릴 수 없는 수치와 가난(아무 것도 없음)을 맛보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생명은 물론 속옷까지 주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3. 모친을 부탁함(25~27절)

1) 25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네 여인이 있었으니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눅 24:18)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와 상통하는 내용으로 마 27:56에 보시면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야고보, 요한)의 어머니(막 15:40에서 ‘살로메’라 하였음)도 있더라” 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이모는 곧 ‘살로메’를 뜻합니다. 그들은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2) 26절에서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사도 요한; 13:23, 21:20)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셨으니 여기의 어머니를 여자로 호칭한 사실에 대하여는 요 2:4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어머니”로 호칭한 일이 없으나 본문에서는 “아들이니이다” 하였으니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모자와의 관계를 멀리 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3) 27절에서 또 그 제자(요한)에게 이르시되 “네 어머니라(사실은 이모임) 하신대 요한은 그 뜻을 알아듣고 그때부터 그가 자기 집에 (마리아를) 모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고유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부양책을 준비하시지 않았으나 때가 되매 그의 제자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하게 하였고, 따라서 요한은 와석종신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4. 돌아가심(28~30절)

1) 28~29절에서 이후에 모든 일(생전에 하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담긴 그릇이 있었고 사람들이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물기를 흡수하는 갯솜)을 우슬초(출 12:22, 레 14:4, 민 19:6, 향취 있는 나무라 함; 여기서는 꼬챙이로 사용됨)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댄즉,

2) 30절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곁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28절의 예언이란 시 69:21 말씀으로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다” 한 말씀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기 위하여 신 포도주 담긴 그릇이 그곳에 있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그것을 준비한 자들은 그것으로 고난당하는 죄수를 조롱하거나 괴롭게 할 목적으로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피 흘린 사람이 “목마르다” 하면 물 대신 먹을 수 없는 것을 주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시 69:21 말씀을 기억하시고 “내가 목마르다” 하셨으니, 예수님과 성경 말씀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실 일을 다 이루시고 가신 분입니다. 성도들도 자기 생애에서 주님이 맡기신 뜻을 다 이루고 가실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만 자기의 일을 다 이루시고, 성도들은 자기의 일을 중단하게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제 46 과 사망 확인과 장례 (요 19:31~42) 목록으로


본문의 ① 31~34절은 “사망 확인에 대한 내용”이요, ② 35~37절은 “예언 성취에 대한 말씀”이며, ③ 38~42절은 “장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사망 확인에 대한 말씀(31~34절)

1) 34절에서 “이 날은 에비일이라” 함은 안식일 전날을 의미합니다. 토요일에 안식할 수 있도록 하루 전에 준비하는 날이란 뜻이요,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을 큰 날이라” 함은 1년에 한 번 지키는 유월절의 첫날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출12;16). 또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 한 것”은 신 21:22~23에서 “범죄자를 나무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게 하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였으니 “다리를 꺾음”은 사망 확인을 위함이고, “시체를 치워 달라” 한 것은 “나무에서 내려 없애 달라”는 뜻입니다(기업의 땅의 거룩을 위하여, 신 21:22~23).

2) 그리하여 31~34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와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니, 이는 아주 죽게 한 것이요,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다리를 꺾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보호하시는 뜻으로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36절) 하신 시 34:20의 말씀이 응한 것이라” 하셨고, 34절에서는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피와 물에 대하여 상징적 의미를 말하는 분도 있으나(피는 속죄, 물은 성화) 생명이 떠나므로 몸이 부패하거나 굳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2. 예언 성취에 대한 말씀(35~37절)

1) 35절에서 “이를 본 자(사도 요한)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심은 기록자의 진실함과 예언의 성취로 성경의 진실을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2) 36~37절은 예언의 성취를 입증하였으니(36절은 앞에서 설명 드렸음) “저희가 찌른 자를 보리라” 함은 슥 12:10의 말씀이 응한 것으로 십자가 사건이 있을 때 곁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군병을 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장례에 대한 말씀(38~42절)

1) 38절에서 “아리마대(예루살렘 서북쪽 35km 지점)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예수님의 제자임을 감춘 뜻)하더니 이 일(예수님의 돌아가신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가져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믿음의 담력 생긴 것이 특징이고, 또 예수님이 돌아가셨은즉 핍박의 강도도 완화될 것을 예측하였을 것입니다. 이 부분의 말씀은 마 27:56~61, 막 15:42~47, 눅 23:50~5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시면 요셉의 신분과 태도를 밝히 아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시체를 가져다가 니고데모와 합력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2) 39~40절에서 “니고데모(요 3:1~2)도 몰약(향기 있는 약재료, 창 37:25)과 침향 섞은 것(상록교목으로 향을 피우는 데 씀, 민 24:6, 잠 7:17)을 100근쯤 갖고 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고 하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 장례에 협력한 기사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3) 41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절에서 “이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의) 예비일이요(즉 예비일 해지기 전에 시체를 장례해야 함, 신 21:22~23) 그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마 27:60, 막 15:46, 눅 23:53~54).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 생전에 소극적 믿음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담대해졌다는 점이요, 또 한 가지는 40절의 “유대인의 장례법”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생전에 장례법을 거론하신 일이 없으셨고, 오히려 장례 절차를 문제시하시지 않았습니다(마 8:2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장례나 혼인의 의식에 대하여 건설적 문화를 따르는 것이 주님의 허락하신 바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흉사는 신앙 규례에 적합하기만 하면 죄 안 되고, 절약하며 단순하게 시행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제 47 과 예수님의 부활 (요 20:1~18) 목록으로


예수님의 부활 기사는 마태복음 28장과 마가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되었으나 요한복음의 기록이 더 많습니다. 20장을 두 과목으로 나누어 살피기로 하고 본문의 총 제목을 “예수님의 부활”로 정하였습니다. 내용을 분류하면 ① 1~2절은 “여인들이 무덤에 감”이요, ② 3~10절은 “두 제자의 빈 무덤 확인”이며, ③ 11~14절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함”이요, ④ 15~18절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입니다.

1. 여인들이 무덤에 감(1~2절)

1)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따라서 이 날은 주일 새벽입니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셨다”(마 9:31) 하신 일수는 금요일 해지기 전의 하루와 토요일 해지기까지의 하루와 토요일 저녁 해진 후부터 주일에 해당하는 하루를 합하여 3일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기간은 하루 반 즉 36시간 정도입니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여러 여인들이 갔었음, 막 16:1, 눅 24:10)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절에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요한, 요 13:25, 21:20)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 두 제자의 확인(3~10절)

1) 3~4절은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달음질하여 무덤에 갔다”는 말씀이고, 5~7절에서 “요한이 먼저 도착하여 세마포 놓인 것만 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가, 6절에서 뒤따라온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 본즉 세마포가 놓였고, 7절에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다” 하였으니 살아나신 예수님이나 천사가 그 수건을 정리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 후에 사도 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하였습니다(8절).

2) 9~10절에서 “저희는 성경에(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부활 기록임, 시 49:9)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하였으니 듣고도 알지 못하는 믿음이요, 보고도 깨닫지 못함이며, 또 더디 믿는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사 6:9, 눅 24:25).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눅 24:5~9). 10절에서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 제자들을 만나는 대로 증언하였을 것입니다(눅 24:33~34).

3.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함(11~14절)

1) 11~12절에서 “마리아(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하였고,

2) 13절에서 천사들이 가로되 “어찌하여 우느냐?” 하므로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뒤를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하더라(14절)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나타난 기사는 마 28:27, 막 16:5~8, 눅 24:4~7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도 알지 못한 것은 눅 24:16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형편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4.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15~18절)

1) 15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내가 가져가리이다” 하였을 때, 16절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신즉(이때에 마음 눈을 열어주신 것임, 눅 24:31)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히브리말로 랍오니(선생님)여 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마 28:8~10, 막 16:8~11, 눅 24:5~10을 참고하십시오.

2) 17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 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아버지께 올라갔다 와서 만나신다는 내용)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이란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여기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신다” 함은 승천과 속죄제의 열납을 위하여 가시는 것인데 가시기 전에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가, 그 다음 기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사실을 보면(마 28:9) 그 사이에 하나님 보좌에 다녀오신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몸을 사람이 만지기 전에 하나님께 보이시기 위하여 만지지 못하게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만지게 하셨습니다(요 20:27). 마 28:8~9과 관련하여 어느 순간에 승천, 귀임하셨는지는 영적 신비에 관한 일이므로 충분한 시간을 요하지 않아도 가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을 중점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마 28:8~9에서 막달라 마리아 다음에(막 16:9) 다른 여인들이 주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서도 기록을 하였습니다.

 

제 48 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 20:19~31) 목록으로


본문 ① 19~23절은 “11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요, ② 24~29절은 “도마에게 확신 주신 말씀”이며, ③ 30~31절은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 목적”입니다. 총 제목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정하였습니다.

1. 제자들에게 나타나심(19~23절)

1) 19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오전에는 여인들과 오후에는 엠마오 제자들과 만나셨음)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마가의 집으로 추정함, 눅 22:12~13; 행 12:12, 1:13~15, 2:1)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장애물과 공간을 초월)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강 축복은 20절에서 또 한 번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주이십니다(요 14:27). 여기에 대한 교훈은 <7분설교 9집>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2) 1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입증해주신 것이고, “평강을 선포하신 것”은 승리자 예수님이 만주의 주로서 “복의 근원”이심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3) 20절 하반에서 평강 선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니, 이는 전도의 사명자로 계속 일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의 사명자들에게도 주님의 성령님이 감동하사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22절에서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고, 또 “누구의 죄든지 용서할 때 자신의 죄도 용서 받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죄도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전자의 “숨을 내쉰 뜻”은 필경 호흡이 답답하여서가 아닐 것이므로 성령님이 주님으로부터 파송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듯합니다. 주님의 영이시니까요(고후 3:17, 롬 8:9). 그리고 후자의 의미는 주기도문과 마 18:21~35에 근거한 교훈입니다. 성도는 대속자와 심판자가 예수님이신 만큼 당연히 원수 갚는 일이나 용서를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도마에게 확신주신 말씀(24~29절)

1) 24~25절에서 도마(디두모라고도 함)는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들었지만 자신이 예수님의 못 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2) 26절에서 “8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은 닫혔는데 예수님이 같은 방법(19절)으로 들어오셔서 평강을 선포하시고, 27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하셨으니, 여기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믿음 없는 도마의 취한 태도를 상세히 아시고 계셨다는 점과 예수님의 부활 예언과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임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28절에서 그때에 도마가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부활을 믿은 뜻) 한즉, 29절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경험이나 체험 없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더 귀한 믿음, 복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다음에 첨부된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3.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 목적(30~31절)

1) 3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31절에서 “오직 이것(표준 계시, 성경 계시)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시지 않음에 대하여 요 21:25에서도 말씀하셨으니, 이는 적당하게 주시고 핵심적 내용만 나타내주시는 것이 믿음에 더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2) 만일 많은 기록을 주신다면 인간이 보존하고 해석하는데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성도가 깨달아서 신앙고백을 바로 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중보 역할) 생명(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외에 더 첨부하시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복된 믿음 (요 20:29)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고, 또 제자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니까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사도들은 신앙의 기초 사역자들이니까(엡 2:20) 그의 증언을 믿어야 하는데 둘 다 믿지 않았으니, 결국 믿음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요 20:27). 도마는 그 상태에서 구원도 받지 못할 뻔 하였습니다. 믿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체험하고 믿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도마는 안 믿었으니까 불신의 죄를 졌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는다” 하였으니까 말씀 중심이 아닌 체험 중심의 믿음인데, 체험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기회가 있어야 하니까, 그만큼 더디 믿는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눅 24:25). 그래서 성경으로 깨닫고 ‘아멘’ 하는 신앙이 더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배추 두 포기에 만원 하는 것과 세 포기에 만원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쌉니까? 세 포기 쪽이 더 쌉니다. 그래서 주부들은 다 싼 물건을 살 것입니다. 믿음생활에도 우열을 가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지요(고전 13:13). 은사 중 더 큰 은사도 방언이나 예언이 아니고 사랑이지요(고전 12:31).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회칠 한 무덤 같은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마 23:27).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속 차리는 일부터 하셔야 된다는 뜻입니다. 복된 믿음(본문), 큰 믿음(마 15:28), 예수님을 깜짝 놀라시게 할만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시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백부장의 믿음(말씀 능력이 공간을 초월한다고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다 다녔어도 이만한 믿음을 만난 적이 없다”(마 8:10) 하셨으니, 그 사람은 대단한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더 큰 믿음, 더 복된 믿음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1. 경험하고 믿는 것보다 성경 그대로 믿는 것이 더 복되다 하신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하고,

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는 말씀이 있습니다(히 10:22, 대하 15:17). 마음이 온전하면 그 생활도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정신적 사상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같고 방법이 같으면 충돌 없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처럼 참 마음으로 믿는 것과 외식이나 흔들리는 마음으로 믿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3. 성경 지식이 있고 없음의 차이입니다. 호 4:6에서 “성도가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미숙한 신앙을 어린아이로, 장성한 신앙을 어른으로 비유한 말씀이 히 5:12~14에 기록되었지요.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생각, 언어, 음식, 지식, 판단력, 경험의 차이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의 믿음이 미성숙에 머물지 말고 어른스러워질 때 복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4. 성도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장소나 환경의 제한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장소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요 4:21). 골방이면 더 좋습니다(마 6:6). 거리가 가까워야 은혜를 받거나(마 9:18, 오셔서 고쳐 달라), 손을 얹어야 하거나, “죽은 지 오래고 냄새가 나면 못 살린다” 하거나(요 17:39), 하나님 앞에서 제한을 두는 신앙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 뜻은 “냄새나는 시체도 당장 살려 주신다고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라고 믿은 것”처럼(롬 4:17)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또 그런 식으로 섭리하시는 뜻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5. 또 당연히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보다 일반 섭리로 믿고 노력하는 것이 더 귀한 신앙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만나’는 농사지은 양식만 못한 것입니다(민 11:7, 수 6:12).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기적보다 일반 은총을 믿음으로 그 신앙이 더욱 빛나지 않았습니까?(단 3:16~18)

6. 은혜를 받고 평안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을 받으며 믿음 연단을 받는 것이 더 귀하다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 정금 같은 믿음이 된다”는 말씀이 있고(욥 23:10), “고난이 깨달음의 유익을 준다”(시 119:71) 하셨으며, 자기의 십자가를 잘 감당할 때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7. 믿음은 실천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실천 동반이 믿음의 건전성을 증명하고(약 2:17), 실천이 부족한 교훈은 칭찬이 없다(마 5:19)”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참고하시면서 더 좋은 믿음으로 질을 높여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너무 강하게 노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노출하고 말보다 실천으로 나타내면서 소리 없이 향기를 발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하십시오.

 

제 49 과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심 (요 21:1~14) 목록으로


1절을 보시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 하니라” 하셨고, 14절에서는 ‘이것은…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세 번째란 본문과 함께 요 20:19과 26절(도마 없을 때와 있을 때의 단체 상봉)의 나타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11회 나타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순서대로 기록한다면 ①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고(막 16:9), ② 예루살렘 길에서 여인들에게 보이셨으며(마 28:9), ③ 같은 길에서 베드로에게 보이셨고(눅 24:34, 고전 15:5), ④ 엠마오 촌에서 두 제자(글로바, 누가)에게 보이셨으며, ⑤ 도마가 없을 때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셨고(눅 24:39, 요 20:20), ⑥ 도마가 있을 때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셨으며(막 16:14, 눅 20:26), ⑦ 그 다음에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7사도에게 보이셨고(요 21:2), ⑧ 또 갈릴리에서 11사도에게(마 28:16), ⑨ 500여 형제에게(고전 15:6), ⑩ 야고보에게(고전 15:7), ⑪ 감람산 승천 시 11사도에게(막 16:19)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① 1~6절이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이요, ⑪ 7~14절은 “떡과 생선을 주심”으로 대지를 정할 수 있습니다.

1.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1~6절)

1) 디베랴 바다란 갈릴리 바다의 서쪽 지역의 이름을 딴 명칭이므로 디베랴쪽 해변가를 뜻합니다. 2절에서 그 당시에 있었던 제자들은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 요한)과 또 다른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2) 3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라 (고기 잡는 작업을 하였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단체적으로 세 번 상봉하였지만 직접 사명으로 나서지 못한 상태에서 고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직업이 어부들인즉 고기 잡는 일에 복귀함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3) 고기는 본래 불빛을 비치면서 밤에 작업하는 것이므로, 4절에서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님인줄 알지 못할 때에”, 예수님이 5절에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한즉”, 6절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여 던진즉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처음 변화와 소명을 받을 때에 있었던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눅 5:1~11).

2. 떡과 생선을 주심(7~14절)

1) 7절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가 먼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 하였으니,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급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나타냈습니다.

2) 8절에서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한 50간(1간은 2m) 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상륙해본즉”, 9절에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작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필자가 몇 년 전에 부산 동삼로교회를 출장 시무한 일이 있었는데, 수요일 저녁에 이종금 집사가 떡을 가져왔고, 금요일에 권맹정 집사님이 생선 매운탕을 가져와서 잘 먹었는데, 그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어서 새벽기도회 때 바로 이 본문을 읽고 부활하신 주님이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설명을 하는데 “네가 엊그제 받아먹은 떡과 생선이 사람이 준 것인 줄 아느냐? 부활한 내가 그들에게 감동하여 너를 섬기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설교를 하다가 큰 충격을 받고 눈물을 쏟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의 큰 일과 작은 일을 두루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며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용들에 대하여 필자가 쓴 <핵심설교>의 “놀라운 충격”이란 글을 참고하십시오. 또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보전 은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속히 알아보는 영안이 있어야 하고, 또 베드로처럼 예수님께로 급히 달려가는 열심도 있어야 합니다. 밤새 고기 잡는 일을 한 사람들은 퍽 시장하였을 것입니다. 그 시장함을 순간적으로 메꾸기 위하여 대책을 세워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이 큰 집을 갖고 있어도 양식 구할 돈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고기 153마리는 재산에 해당하고, 구운 생선과 떡은 순간적 시장기를 해결하는 양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아울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셨고, 순종하여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라는 것은 주님이 주신 은혜를 하나, 하나 점검하고 헤아렸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3) 12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예수님)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하셨고, 13절에서 “예수님이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 준비한 음식을 같이 잡수셨습니다(눅 24:42~43). 예수님이 그 떡과 생선을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없지만, 시장한 제자들을 맞이하시는 사랑의 준비로써 얼마든지 있게 하셨거나(마 14:20, 요 2:7~9) 일반적 방법으로도 구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생활을 면밀하게 감찰하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막 8:1~3, 히 4:16).

 

제 50 과 베드로를 재차 소명하심 (요 21:15~25) 목록으로


본문의 총 제목은 “베드로를 재차 소명하심”과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① 15~17절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 받으심”이요, ② 18~19절은 “베드로가 감당할 사명”이며, ③ 20~23절은 “동료의 진로를 알고 싶어 함”이요, ④ 24~25절은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1.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 받으심(15~17절)

1) 15절에서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조반을 잡수신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동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고,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도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을 받으신 후 “내 양을 치라”고 하셨는데, 17절에서 예수님이 또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하신즉 이때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한즉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신 것은 그 고백을 받으신 후에 그 사랑의 정도에 따라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정도에 따라 직분과 사역의 과제를 주시는 줄 압니다(마 25:21~23, 눅 19:17~19).

3)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라신 사랑의 정도는 “이 사람들(베드로의 동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사랑은 아주 큰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 곁에 가족, 고향, 재물, 친구들, 직업이 없고, 함께 부름 받은 동료 사도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 22:37).

4) 그런데 질문의 용어와 베드로의 답변과, 예수님이 명하신 사명적 용어에 일관성이 없는 점을 살피셔야 합니다.

① 질문의 용어에 있어서 1차, 2차는 아가페(숭고한 사랑)로 질문하셨고, 3차에는 필로(친구 간 우정적 사랑)로 질문하셨으며,

② 베드로의 답변은 3차 모두 “필로”로 대답한 중 1차, 2차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자신의 심정을 자신이 아는 것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감추고 주님께 맡긴 대답임) 하였는데, 3차 대답 때는 “근심하며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근심한 이유는 예수님의 3차 강조되는 질문에 과거의 연약과 실수 등을 생각하면서(마 26:33) 좀 더 심각한 입장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예수님이 사명을 주실 때 1차, 3차는 “내 양을 먹이라” 하셨고, 2차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먹이는 것은 양식에 관한 것이고, 치는 것은 관리, 보호 등을 의미하지만 꼭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런 설명에 대하여 필자가 쓴 <핵심설교>의 29과, 30과를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질문 용어에 있어서 예수님은 숭고한 사랑의 용어(아가페)를 쓰셨으나, 베드로는 우정적 용어로만 답변하므로 마지막 질문에서는 예수님도 베드로가 사용한 용어를 따라 쓰셨는데, 베드로가 “아가페”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겸손을 차리기 위함이었을 것이요,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함”에 대하여는 오늘날 교역자들에게도 많은 반성의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 즉 동료자와의 결속에서 부패가 있고, 정화가 안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성도가 주님 뜻대로 살려면 동료의식을 버리고 홀로 주님을 따르는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동료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외톨이가 되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타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역자가 교역자간의 인정에 치우쳐 정화를 망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감당할 사명(18~19절)

1) 예수님은 일단 앞 절에서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에 관한 말씀으로 18절에서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초창기 시절에 자율적 생활이 많았다는 뜻) 늙어서는 (타인이)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어거한다는 뜻) 원치 아니하는 곳(핍박과 죽음)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2) 19절에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킴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으니, 이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베드로가 순교하게 될 것과 또 베드로가 그렇게 되도록 순종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순교도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것입니다.

3. 동료의 진로를 알고 싶어 함(20~23절)

1) 20절에서 베드로는 요한을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은 그 장소에 함께 있었고(세베데의 아들, 21:2)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서(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가까이 하셨음, 마 17:1, 26:37)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눅 22:23)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굽니까? 하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서의 저자로서 베드로에게 가까이 있는 동료자였을 것입니다.

2) 21절에서 베드로는 그를 보고 예수님께 여쭙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사도 요한의 미래에 관한 것을 알고 싶어 한즉, 22절에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즉 재림하실 때까지) 그를 (세상에서 죽지 않도록) 머물게 한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머물게 하신다 함”은 땅 위에서의 영구 안전을 의미하는 바, 순교를 예고 받은 베드로의 형편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피력하시므로 사명자는 안전과 순교의 길 중 하나님이 쓰시는 대로 쓰임 받아야 함을 역설하신 뜻입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말씀은 동료자의 가는 길과 자신의 길을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필자는 목회 초기에 동료자와 교세, 예배당, 받는 급료 등에 대하여 대조해보고 자신보다 열등한 동료자와의 입장은 생각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대우를 잘 받는 동료자를 몹시 부러워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세가 더 나은 교회로 전임하고 싶은 충동을 가진 일이 있었는데, 그런 긴장감이 점차 없어지다가 이제 와서는 완전하게 해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내 서재에서 나 할일(말씀 상고와 정리)만 하는 것으로 큰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는 다른 사람의 길과 은사 활동에 대하여 관계없이 자기의 맡은 일만 성실히 하고 자기의 갈 길과 자신이 누릴 분복이 따로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요한복음의 결론(24~25절)

1) 24절에서 “이 일(예수님 행적)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요한)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하시므로 사도의 증언이 진리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이 진리인 증거는, 내적 증거로는 성령님의 영감이고, 외적 증거는 사도의 경험과 진실입니다. 저자 요한이 자기 이름을 감춘 이유는 겸손의 뜻과 객관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 25절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20:30)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손으로 쥐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일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세상이 이를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량 상으로, 또는 보존 상으로, 또는 해석과 적용 면에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을 적당하게(고전 14:40), 감당할 만큼(벧전 1:19~21), 또 필요한 만큼(딤후 3:15~16) 주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알고 믿는 성도는 성경으로만 만족하고 다른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히 1:1). “할렐루야!”

 

설교보충 11.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 (요 21:1~14) 목록으로


본문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해변)에서 7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셨다”(1절)는 뜻은 공간과 형체를 초월하여 운행하시고(눅 24:310, 또 자신을 계시(현현)하실 목적이 있을 때만 원하는 자들에게 보여주신 줄 압니다(요 12:29).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예수님이 디베랴에 나타나신 의미와 고기 잡는 이적을 베푸신 의미와 떡과 생선을 주신 의미와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의미와 물고가 153마리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라도 목적 없는 일은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1. 왜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 행사에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재소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사명의 길로 인도하셨겠지만, 특별히 베드로를 순교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이하에 보시면 사랑의 다짐을 받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그곳에 오셔서 눅 5:1~11과 방불한 고기 잡는 이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기에도 몇 가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지만 능력이 여전하시고, 또 세상에 계실 때 시행하신 이적도 여전히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고, 또 베드로로 하여금 처음 예수님 따랐을 때의 충격을 다시 한번 맛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재소명을 하시려 오셨으니까요.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데는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 섭리도 있고,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는 섭리도 있으며, 재물을 모으게 하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사 45:3).

3. 떡과 생선을 먹게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여 재물을 주시는 것과 당장 시장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을 구별하여 해결하시는 은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재물이 있어도 배고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억 짜리 집이 있는데 빚을 지고 가난한 생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집이 안 팔리고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집에 가면 음식이 있겠지만 밤새도록 수고하고 집으로 가기까지는 시장함을 느껴야 하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막 8:3을 보시면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하시고 7병2어로 기적을 베풀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작은 은혜, 세심한 배려를 뜻하는 것입니다. 티끌을 모으면 태산이 되겠지만, 그 티끌 하나가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은혜인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작은 은혜, 위급한 것을 해결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4.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의미입니다. 고기가 많이 담겼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보존을 뜻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에 있어서 믿음 보호, 건강 보호, 명예 보호, 재물 보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실 때는 반드시 받는 자의 그릇을 보시고,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심이나 물욕으로 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주시지도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마 6:11, 딤전 6:8) 하신 하나님이 목적 없이 재물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재물을 주시는 방법(노력, 특별 은총), 쌓게 하시는 은혜(잠 8:21), 그리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전 5:19, 딤전 6:17)가 있습니다. 돈은 벌어도 쌓지 못하는 이가 있고, 쌓아놓고도 누리지 못하는 이가 있지요. 하나님은 그런 일들도 적당하게 통치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굉장히 몸이 허약한 데도 잘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은혜인 것입니다.

5. 153마리의 의미입니다. 요즈음 어부들이 그물을 올린 다음 물고기를 헤아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자들은 그것을 헤아렸습니다. 왜 헤아렸을까요? 몇 마리인지를 알기 위하여 헤아렸겠지요. 그러면 그 물고기 숫자를 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짐작을 하시겠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살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식생활은 건강과 직결됩니다. 운동과 수고도 그렇습니다. 정신적 평안도 그렇습니다. 공기나 물 환경도 그렇겠지요. 그래서 먹고, 일하고, 마음 편하고, 환경 좋은 데서 사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교회 환경이 좋은 것은 영적 신앙에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밥맛이 좋으면 은혜인 줄 아셔야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이 부담이 없으면 그것도 은혜인 줄 아시고, 양식 걱정을 안 하면 그것도 은혜인 줄 아시고, 속 썩이는 자식이 없으면 그것도 은혜인 줄 아셔야 합니다. 요즈음 “감기 예방주사 맞으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예방주사를 55년 전에 맞은 기억이 납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식사할 때 반찬을 탓하지 마시고 꼭 “자기 입맛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 28:5에 “떡 반죽 그릇이 복이 있다”는 뜻은 거친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마르면 물 잡숫고, 싱거우면 소금 치듯이, 무엇이나 입에서 당기면, 그 당기는 종류를 적당하게 잡숫고 반드시 음식의 사치를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몇 가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눅 10:42) 반드시 작은 은혜까지도 확실하게 헤아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