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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과 4가지 문제와 방법 (약 1: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지혜를 구하자 (약 1:5~8) 9  바로가기

제2과 믿음에 부요한 자 (약 1:9~18) 1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두 가지 시험 (약 1:12~15) 14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은혜 주시는 하나님 (약 1:16~17) 17  바로가기

제3과 성도의 정결한 생활 (약 1:19~27) 20  바로가기

     설교보충 4.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 (약 1:22~25) 24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참된 경건 (약 1:26~27) 26  바로가기

제4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29  바로가기

     설교보충 6. 가난한 자의 신령한 복 (약 2:1~9) 32  바로가기

제5과 행함 없는 믿음 (약 2:14~26) 36  바로가기

     설교보충 7. 믿음과 행위 (약 2:14~26) 39  바로가기

제6과 말조심 합시다 (약 3:1~12) 43  바로가기

제7과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약 3:13~18) 47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지혜에 대한 지식 (약 3:13~18)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9. 화평케 하는 자들 (약 3:18) 52  바로가기

제8과 여러 가지 교훈 (약 4:1~7) 54  바로가기

제9과 성도의 여덟 가지 시행할 일 (약 4:7~10) 58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바로 사는 생활 다섯 가지 (약 4:1~10) 61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애통하며 울지어다 (약 4:8~10) 63  바로가기

제10과 다섯 가지 죄를 경계하심 (약 4:11~17) 65 바로가기

제11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심 (약 5:1~11) 69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부자들에게 경고하심 (약 5:1~6) 72 바로가기

제12과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 (약 5:12~20) 74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고난 중의 기도 (약 5:13~18) 78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야고보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집으로 출판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강론집은 필자가 목회할 당시에 이미 설교한 것을 모은 것입니다. 본래 이 강론집을 공동 서신 전체에 합본하려고 하였으나 분량이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서문을 또 쓰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고(빌2:16), 자세히 설명하며(눅24:27),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20)는 말씀에 입각하여 말씀 증언에 충실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이와 같은 강론집 몇 권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기성 교회 목회를 30년 하였지만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많이 양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목회적 능력에 한계가 있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끌리게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밝히고, 몇 권이라도 글로 남기는 것이 성직을 맡은 사명에 더 유익할 것으로 믿고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과, 평범한 성도가 보실 수 있도록 평범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읽으실 때는 필자가 한 글자라도 뺄 수 없어서 기록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셔서 주밀하게 읽으시고, 주밀하게 묵상하시면 상당한 은혜를 받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강론문을 기록한 다음 평소에 설교한 내용들이 있어서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 13편을 첨부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집필된 강론집은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디모데 전서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탈고되었는데, 다른 교육 재료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강론집을 남겨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8. 3. 26.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4가지 문제와 방법 (약 1:1-8) 목록으로


1.야고보서란 “야고보”란 종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신약 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이 여섯명 나오는데, 세 분만 소개한다면,

① 세베대의 아들이요 사도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있고(마 10:2),

② 알패오의 아들로 사도된 다른 야고보가 있으며(마 10:3),

③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또 있습니다(마 13:55). 이 세 사람 중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중간에 순교를 당하였고(행 12: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그의 행적이 기록에 없으며 다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나중에 개종을 하여(고전 15:7) 여러모로 복음 사역에 활동한 기사(행 1:14, 고전 9:5, 행 15:13-29, 갈 2:9)가 나타나 있음을 보아서, 그가 이 말씀의 저자일 것으로 예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 전에 기록하였을 수도 있으니, 이는 그가 변화산에서 “영광의 주”를 보았기 때문에(마 17:2) 약2:1의 “영광의 주”란 용어를 썼고, 또 제자들끼리 서로 시기하는 형편을 보았기 때문에(마 18:1) 약 3:14,16에서 “시기와 다툼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하여, 사도 야고보의 글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저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연구의 소재는 될 수 있으나 누가 기록하였던지간에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감춘 것으로 아시고 본문 중심으로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기독교 신앙백과> 656p.의 개론을 참고하십시오).

2.본문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된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보낸 서신이며 문안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묶어서 설명한 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 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곧 하나님이란 사실을 주지시키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입장에 계신 것을 아울러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2)그리고 야고보 자신은 자기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야고보가 항상 종된 사명을 잊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요

3)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는 이 서신을 받은 대상으로서 이스라엘 선민을 상대로 보낸 편지란 뜻입니다. 로마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이 되는 것은 모두가 성도이기 때문인 것처럼 이 야고보서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보낸 것이지만 역시 성도를 상대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저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4)이 말씀에서 야고보가 문안을 한 것은 이 문안이 성도 교제의 미덕이며 또 편지 작성의 격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3.본문 말씀에서는 “네 가지 문제에 대한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①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2절),

②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일이요(4절),

③ 지혜가 부족할 때(5절),

④ 믿음으로 구하는 문제(6절)가 되는 것입니다.

1)성도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2절).

① “시험을 만났는데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하셨으니 이것은 “미워해도 시원치 않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인 만큼 어려운 명령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원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믿음 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에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겠느냐?”하시겠지만, 여인이 임신을 하면 입덧에서부터, 열달 동안 고생을 하게 되고, 해산할 때는 큰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이유는 고난보다 더 귀한 새 생명을 얻기 위함인 것처럼 성도가 어떤 시험을 당하여도 “이 시험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고 이기면 더 좋은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온전한 기쁨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학습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희망의 기회인 것처럼 성도는 시험이 있을 때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을 과제로 간직하고 지혜롭게 적응하는 체험의 기회를 갖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② “시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러 가지 종류란 하나님의 시험(창 22:1), 마귀의 시험(마 4:1), 밖에서 오는 시험(욥 1:13-19, 약 1:12),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삼하 12:18,13:14,33,15:10, 약 1:13), 타인으로 말미암는 시험(마 15:11), 자기로 말미암는 시험(약 1:14,15, 벧전 2:20), 영적 시험(단 3:11), 육신적 시험(삼상 12:15), 교회적인 시험(행 12:5), 사회적인 시험(창 18:20,26:1, 삼상 17:47)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③ 따라서 저희들은 어떤 시험이든지 믿음으로 처리하면 유익이 있는 줄로 믿으시고 시험에 희망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문제입니다(4절).

① 본문 말씀에서 “인내”의 결과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내를 잘하는 사람은 온전하고 구비된 사람이며 부족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니까 당연히 구비하는 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그러면 “인내”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조급하지 않으며 아픔과 억울함을 잘 참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 할 때 고전 13:4,7에 보시면 “모든 것을 참고 오래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백인당”이란 글씨를 써 붙이고 인내를 가르쳤는데 요즈음은 그것이 많이 소홀해졌습니다(고전 13:4,7). 사람을 구할 때 의도적으로 인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해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③ 인내는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것처럼 시험이 없으면 인내연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환난이 인내를 이루어 주기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하신다(롬 5:3)고 하셨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문제에 대하여 인내의 뜻과 인내하는 방법과 그 결과를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지혜가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5절).

① 저희들은 우선 무지하고 죄성이 있기 때문에 지혜도 부족한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지식이 학문과 관련이 있다면 지혜는 천부적 소질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면 우선 겸손하면서 어른들의 자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 119:100에 보시면 “노인이 지혜로우나 말씀을 깨달으면 더 명철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워지기 위하여 열심히 성경을 배우셔야 하는데,

② 본문에서는 기도로 구하는 법을 또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지혜를 구할 때 모든 이에게 다 후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사는 모든 이에게 다 후히 주시지 않습니다. “은사는 성령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주시는 데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또 얼마든지 주신다” 하셨으니 지혜를 많이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받은 대표적 사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왕상 3:4-12).

4)믿음으로 구하는 문제입니다(6-8절).

① 우선 믿음으로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당한 것을 응답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영광돌릴 것(지혜, 믿음)과 자기의 뜻을 이루어 성취하는 것(전도, 봉사)과 형제를 사랑하고 덕을 세우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시고 또 다른 것들은 형편과 처지에 따라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4:16).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하는 자는 꼭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입니다.

②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고(민 23:19) 자기의 뜻을 확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이면 성취 안 될 까닭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간구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을 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자가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꼭 성취된다는 뜻이지요, 이 성취는 사람의 뜻대로 다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것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③ 그러면 의심하는 기도는 무엇이며 또 의심하는 기도가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의심하는 기도”란 성도가 믿음이 부족하여,

㈀ 기도 자체(기도하면 받는다는 믿음)를 의심하는 경우와,

㈁ 소원건에 대하여 타당성이 결여되는 것을 무조건 구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처럼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지만 모자라는 실력을 가지고 “합격되게 해 달라”는 것은 타당성과 가능성이 다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런 것을 구하였다면 마음 속으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 구한 것이니까 결국 의심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 하셨으니 바닷물이 바람에 밀려올 때 소리는 굉장하지만 뚝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의심하는 기도는 소리를 높여해도 응답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④ 그래서 의심하는 기도를 하려면 차라리 얻을 것을 생각지 않음이 마땅하고 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하셨으니 여기에 “두 마음”이란 자기의 마음이 기도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서로 갈라지는 것을 뜻하며,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는 뜻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않고 자기의 계획과 목표로 하나님의 뜻과 대립을 시키니까 정함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깨닫고 기도하셔야 할 것은

1)시험을 만났을 때 희망을 갖는 성도가 되셔야 하는 것과,

2)인내의 시련을 받아 인격의 온전함을 이루어야 할 것이요

3)항상 기도하면서 말씀을 연구하여 지혜를 구하셔야 할 것과,

4)믿음으로만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응답될 것을 구하는 기도의 지혜를 나타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 지혜를 구하자 (약 1:5-8) 목록으로


“지혜를 구하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우선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셔야 하겠습니다.

1) 지혜를 풍족하게 갖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풍족하지 않으면 어떻게 “후히 주신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 (신34:9,사9:6).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십니다.

2) 지혜 주시기를 좋아 하시고,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지혜를 달라”고 자주 구하여도 역시 꾸짖지 않으시고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4) 의심하며 구하는 자에게는 주시지 않고,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혜가 무엇입니까 ? 지혜와 지식을 구별하실 수 있습니까 ?

지식은 배워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분량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다스리는 일과 재판하는 일에 쓰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지혜와 현세의 영광까지 주셨습니다(왕상3:13). 또 욥28:28과 잠9:10,15:33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라” 하셨고, 잠3:18에서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1) 지혜의 주인은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요,

2) 지혜의 용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선악을 분별함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밑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3. 지혜를 어떻게 구하여야 할까요 ?

1) 지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지혜는 하늘과 땅에서 최고의 가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진리 그 자체를 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2) 지혜를 구하는 용도가 합당하여야 합니다. 현실의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지혜를 구하는 목적을 자기의 정욕이나 현실의 발전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요일2:15).

3) 지혜를 대단히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시42:2), 사모하며(시107:9), 앙망하고(사40:31), 찾고(마7:7), 기다리는 자에게(애3:25)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사모하는 마음, 성경을 배우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런 은혜를 사모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고(시42:1), 파수꾼이 밝기를 기다리며, 갓난아기가 젖을 찾는 것처럼(벧전2:2) 사모하고 또 보화와 진주를 찾는 자처럼 하라(마13:44-46)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4) 기도로 구하셔야 합니다. “구하라”는 말씀의 첫째 뜻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로 약속한 것도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겔36:37) 하셨고, 또 “기도할 마음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대상17:25). 기도할 마음이 안 생기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기도는 “은혜를 받는 손”이요, “하나님을 일깨우는 새벽 종”이라고 말한 분이 계셨습니다. 또 “기도는 소리나는 기계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여, 주여 나는 부족합니다. 은혜를 주시옵소서” 할 때는 무슨 일이나 소리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는 꼭 믿으시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에서 두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자는 의심하는 자로서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두 마음”이란 이쪽 저쪽을 다 목표하는 것으로 마음이 갈라진 것이기 때문에 전심이 못되는 것입니다(대하16:9). 바다 물결은 바람에 의하여 아무리 흉용할지라도 땅을 덮치지 못하는 것처럼 두 마음을 가진 소원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마6:24). 지혜도 많이 구하고 현실 정욕도 많이 구하면 둘 다 성취가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만 구하여야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는 곧 예수님을 풍성하게 모시는 믿음을 뜻하기 때문에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지혜만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마6:33)


제 2 과 믿음에 부요한 자 (약 1:9-18) 목록으로


이상의 본문을 살펴보면 “믿음의 부요한 형편”을 말씀해주셨습니다.

① 9-10절 말씀에서 “믿음의 부요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자라”하셨고, 11절에서는 인생이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의 영화가 풀의 꽃처럼 속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12-13절 말씀에서 “시험을 잘 견디는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시험을 잘 견디는 성도는 믿음에 부요한 자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③ 그리고 14-15절 말씀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고 죄를 멀리하는 신앙”을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시험을 따돌리거나 죄를 멀리하는 신앙”도 부요한 신앙에 속하는 것입니다.

④ 16-18절에서는 “속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옳게 이해하는 성도”가 믿음의 부요한 신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만큼 믿음의 부요한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라도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자찬하시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는 견해는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한 자요 가난하고 눈먼 자요 벌거벗은 자라고 하셨습니다(계 3:17). 왜 이런 견해 차이가 생겼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가치관의 표준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부요함에서 가치관을 가졌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신앙 면에서 가치관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 가난하고 곤고한 것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하셨는데 이 “연단한 금”이란 “연단받은 믿음”을 뜻하는 것이고,

㈁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하신 것은 죄를 밥먹듯 하면서도 죄짓는 줄을 모르고, 태연하게 살고 있는 상태에서 회개와 성결한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이요,

㈂ “안약을 사서 보아야 한다”하심은 진리를 깨닫는 영적 식견이 무지함을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요,

㈃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하셨는데 이것은 신앙 생활의 태도가 극히 미온적임(계 3:15)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혹이라도 저희들이 이런 착각에 빠지면 안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믿음에 부요한 자의 형편”을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믿음이 부요한 성도는 겸손을 일삼는 성도입니다(9-11절). 시 15:2에 보시면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가 공의를 일삼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본문 9절에서는 “믿음의 부요한 자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하셨으니 여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일”이 바로 겸손을 일삼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높음이나 유력성을 자랑하는 성도는 예수님이 보실 때 낮은 형제이고 겸손해지기 위하여 자기의 낮아짐이나 약점을 자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실 때 믿음의 부요한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자가 인생의 무상함을 바로 깨닫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재물이나 권세를 가지고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영화는 풀의 꽃처럼 잠시 후에 시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이 그것으로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며칠을 못가는 것처럼 인생의 현실적 부나 영화도 일시적일 뿐이요, 그 행한 일이 아무리 위대하여도 때가 되면 쇠잔하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자신의 부족과 약점을 자랑하면서 겸손이 철철 넘치도록 나타내어 믿음의 부요를 지키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시험을 잘 견디는 자”가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12-13절).

1)“시험”이란 “고난과 유혹”을 의미합니다.

2)그리고 “이 시험을 잘 견딘다”는 것은 그 시험이 떠나지 않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떠나지 않는 시험을 잘 견딜 때 믿음이 부요한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난과 시험을 물리쳐 주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쳐 주신 것이나,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신 것이나 범죄를 하도록 꾀이는 가 멀리 떠나는 것 같은 것입니다(마 4:11).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에 의하여 시험을 연장시켜 주실 때가 있습니다(욥 2:6, 고후 12:7-9). 이럴 경우에 이것을 잘 참는 자는 복이 있고 또 잘 참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을 받게 되며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3)여기의 “생명의 면류관”은 하늘의 상급으로서 시험을 잘 견딘 자에게 주시는 칭찬의 복입니다. 만일 고난이나 시험이 연속되지 않았다면 이런 상급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시험을 당하였을 때 크게 기뻐한 일이 있었는데(고후 11:9) 그 경우에는 시험과 더불어 유익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4)시험을 잘 견디는 자는 인내하는 자요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며 또 연단이기 때문에 그의 믿음이 부요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3.시험에 들지 않고 죄를 멀리하는 성도가 믿음이 부요한 것입니다(14-15절).

1)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잘 견뎌야 하지만, 자기의 욕심으로 시험을 끌어 드리거나 욕심을 잉태(더 키움)시켜서 죄를 지으면 안 될 것입니다.

2)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는다”하셨고, 또 “친히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마귀처럼 죄로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어떤 유혹을 받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유혹으로 알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서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하고 또 이런 욕심이 범죄의 요인이 되며, 범죄의 결과인 사망으로 직결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부요한 자는 죄를 멀리하는 자요, 죄를 멀리하기 위하여서는 자기 욕심에서 떠나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개인적 이기적 욕심이 없어질 때까지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4.속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성도가 믿음에 부요한 것입니다(16-18절).

1)16절에 보시면 “속지 말라”하셨습니다. 무엇을 속지 말아야 합니까?

①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지 않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은사”란 “도시스”(δόσις)”란 말로, 주시는 행동이 선함을 의미하고, “선물”은 좋은 축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다 빛들의 아버지인 빛을 만드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② 빛들의 아버지(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그에게 추호의 어두움도 용납되지 않으므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시니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성결하심을 나타낸 말씀이며,

③ 그 하나님이 피조물 중 선택한 백성들을 그의 아들과 같은 첫 열매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를 낳으셨다”(18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구원의 경륜을 설명하신 것으로,

㈀ 구원의 경륜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고(자기 뜻),

㈁ 구원의 경륜은 택한 백성들을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과 같은 백성들을 만드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18절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첫 열매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요긴한 제물이기 때문에(출 22:2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구원의 백성이 되게 하시다는 뜻입니다.

2)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은사와 구원의 축복에 대하여 바로 이해할 줄 아는 성도가 속지 않는 자요 믿음이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에 부요한 자는,

① 자기의 연약을 자랑하며 겸손할 줄 아는 자,

② 여러 가지 시험을 잘 견디는 자,

③ 시험에 들지 않도록 욕심을 멀리하며(깨어 기도하는 자;마 26:41),

④ 거짓에 속지 않고,

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의 경륜을 잘 깨닫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두 가지 시험 (약 1:12-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두 가지 시험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12절에 말씀하신 시험은 고난의 성격을 가진 시험이고, 13절과 14절에서 말씀하신 시험은 유혹의 성격을 가진 시험입니다. 이 두 가지 시험에 대하여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고난으로 오는 시험입니다(12).

1) 12절에 보시면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아서 이길 수 있는 시험은 고난 뿐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욥5:7에서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낫다” 하셨고, 행14:22에서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죄악 세상에 몸을 담고 살기 때문입니다.

2) 고난은 일반적으로 당하는 경우와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① 일반적으로 당하는 경우는 사춘기 과정을 겪는 청소년들처럼 신체적 변화가 올 때에 정신적으로 갈등하는 고난(반항심, 의혹심, 비애심 같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시기를 가르쳐서 종교 심리학자 플레트는 “폭풍우의 시대”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청소년의 시기를 인내로 지킬 수 있다면 성공할 확률이 큰 것입니다. 그 외에도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거나 어떤 재난이 있을 때 인생은 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당하는 고난은 욥이 받은 고난을 비롯하여 요나가 물에 빠지는 시험을 당한 것이나, 예수님이 당한 고난이나,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 또는 이 민족이 고난에 처하는 것까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애3:33,요11:4).

3) 이렇게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한 것도 있고, 막연하게 죄값으로 받는 고난이 있는데, 성도가 고난 받는 이유를 알 때는 그 이유에 해당하는 처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기 어려운 고난은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고, 시험을 잘 참는 자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면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사랑하시고 또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영원히 누리는 칭찬)을 받게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아무쪼록 인내를 잘하여 성령님의 열매도 맺고, 시험도 이기고, 하늘의 상급도 예비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유혹의 성격으로 오는 시험입니다(13-15).

1) “유혹”이란 뜻은 죄짓게 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베푸시고, 성도가 그것을 잘지키나 못지키나를 시험하실 뿐 죄를 짖게 하는 유혹은 하시지를 않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마귀가 아담을 죄짓게 하려고 유혹하였고,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건설적인 목적으로 시험하신 예가 있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시험에는 하나님도, 마귀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2) 다만 인간 스스로가 자기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욕심에 끌릴까요 ? 타락의 잔존물인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성을 제거하는 것이 곧 거룩(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 말씀과 기도가 부족하다면 그것이 쉽게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여지고(요17:17),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인데(딤전4:5) 그것이 부족하니까 욕심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는 목적은 욕심을 빼내는데 있고, 은혜를 받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를 풍족하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자기를 앞세웠거나 자기의 이기적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 문제가 일어난 책임이 욕심을 가진 자에게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4:1-11에서 마귀의 시험을 직접 받으셨지만 욕심에 끌린 사실이 없으시니까 쉽게 이길 수 있었고, 또 말씀에 붙잡힌 능력으로 이기신 것입니다.

3.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까요 ?

1) 우선 자기로 말미암아 받는 시험을 방지하려면 말씀과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① 마26:41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셨으니까 기도가 필요하고,

② 말씀과 기도가 자기를 성화시켜서 부패성인 욕심을 빼내는 방법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딤전4:5).

③ 마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같은 세상의 것으로 유혹합니다(요일2:15-16).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셔서 받는 것은 복이 되지만 인간이 유혹에 빠져서 받으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뱀의 독이 입으로 들어가면 약이 되지만, 피부로 들어가면 독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 축복은 주시는대로 받도록 하나님의 처분에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신령한 은혜에 이끌리면 현세적 의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자기 부정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고(마16:24),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성도들 중에나 신앙의 지도자들 중에 자기 부정을 못하고 명예, 체통, 물욕, 권세욕 등에 얽매여 허탄한 것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셨는데, 그런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 성도가 자기 부정을 못한 상태라면 항상 시험의 구덩이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시련으로 받는 시험에 대하여는 반드시 믿음과 감사와 소망과 인내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① 믿음으로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받는 시련임을 믿는다는 것이고,

② 감사해야 한다는 뜻은 시련을 받는 중이라도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징계하여 더 좋은 연단을 주시는 줄로 알기 때문이며(히12:8,9,고전10:13),

③ 소망으로 감당하여야 할 것은 후일을 좋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롬8:28,빌1:21,롬4:17,사45:7).

④ 인내하셔야 할 것은 하나님이 건져 주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방법이 사람의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더 복된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대하35:20 이하를 보시면, 요시야 왕은 8세에 왕이 되어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대하34:1-35:19). 또 31년간 왕노릇을 하면서 성전 정화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느고 왕이 쳐들어와서 변장을 하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요시야의 선정(善政)에 비할 때 그 나라가 전쟁을 당하고 왕이 죽는 것은 퍽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왕이 된지 석 달만에 완전히 애굽에 정복되어 국치의 욕을 당하였으니 이 때에 요시야의 죽음은 나라의 화액 전에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로 피신시킨 축복이라(사57:1)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셔서, 해결의 방도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피하고, 잘 이기며 극복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3. 은혜 주시는 하나님 (약 1:16-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① 은혜에 대한 말씀과,

②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 그리고

③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은혜에 대한 말씀으로,

1) 은혜(χἀρις;눅1:30), 은사(χἀρισμα;롬12:6,고전12:4,δόσις,약1:17), 선물(δώρημα;약1:17)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용어가 다 “거저 주시는 복”을 의미하지만, 거저 주시는 복 중에 보편적인 복과 신령하면서도 특수한 복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보편적인 복을 은혜라 일컫고 신령한 복이면서 특수하게 주시는 것을 은사라는 용어로 거의 표현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자연계의 은혜는 신, 불신간에 다 주셨고, 또 구원의 은혜도 택한 백성들에게는 차별 없이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중에 어떤 분은 성직을, 어떤 분은 말씀의 은사를, 어떤 분은 기도의 은사를 각각 특수하게 받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전자를 은혜라 하고, 후자를 은사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와 선물과 은사가 다 비슷한 뜻이지만 은혜는 거저 주시는 뜻이 강하고, 은사와 선물은 특별하게 주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은혜를 말씀하실 때 “각양 좋은 은사” 또는 “온전한 선물”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은사의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고전12:4) 불완전한 것 또는 불필요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등외품이거나 부덕과 관계 있는 불완전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이 선물들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인간이 이 사실을 모르고 인간의 노력으로 받은 줄 알거나 막연한 자연 법칙에 의하여 받은 줄 안다면 그는 속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은사를 자신의 노력이 첨부되어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만물과 생명과 건강과 지혜를 통하여 받았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2. 이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 할 때, 그 분은 위에 계시고, 빛들의 아버지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는 것은 만물을 포괄하여 존재하시는 존귀한 분이라는 뜻이고,

2) “빛들의 아버지”란 어두움에 반대되는 의의 주재자(본체)란 뜻입니다.

3) “변함이 없으심”은 존재와 본질과 언약과 사랑의 섭리에 변함이 없으신 것이며,

4)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심”은 하나님이 영으로, 말씀으로만 존재하시는지라 모양이 없으실 뿐 아니라 자신을 형상을 나타내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존귀하시고, 영원불변하시며, 자신의 사역과 은혜 주심을 보이지 않게 나타내시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복주시는 은혜를 많이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십니다. 주권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받는 자와 의논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나,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나(롬9:13,11:7), 열 두 제자를 택하신 것이나, 바울을 사도로 쓰신 것이나(마10:1,갈1:1), 각종의 종류에 따라 임의로 주시는 것이 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고전12:11). 따라서 구원의 은혜나 은사를 받게된 것이 받은 자의 소원으로 성취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은혜를 받는 손일 뿐이요, 은혜를 받는 공로는 아닌 것입니다. 기도가 공로가 된다면 은혜는 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로 나누어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① 특별 은혜는 신령한 복을 주심과 동시에 특별히 취급하시는 것이고,

② 보통 은혜는 모든 인간들에게 고루 주시는 일반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 은혜 주실 대상을 택하신 성도에게 한하여 적당하게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 은혜의 대상임을 아시고 그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을 특별하게 섬기며 사랑하는 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 네 가지 방법으로 주십니다.

① 주셔서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은 꼭 주실만한 자에게 감당할만큼만 주시는 것입니다. 창49:28에서 “각인의 분량대로 주시고” 또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출33:19)고 하셨습니다. 사6:9에서 “징계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말씀을 감추신다” 하셨고, 모세는 40년간을 광야에서 고생하였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주시고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② 받은 은혜를 보존케 하십니다. 어떤 성도는 은혜를 받았는데 그 다음날 은혜 받은 흔적도 없습니다. 받은 은혜를 보존 못하고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붙드시고,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도 허사라”고 하셨습니다(시127:1). 하나님은 만물과(히1:3) 생명도(시54:4), 말씀과(빌2:16) 천사도(히2:16), 나라와(겔30:6) 능력도(시12:7,79:11) 붙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은혜를 보존케 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신 후에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10:13). 성령을 소멸치 말며,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살전5:19,23,고후6:1) 믿음을 지키라(히3: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보존하는 방법은 겸손과(고후12:9) 활용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39). 바울 사도에게 가시를 주어 겸손케 하셨고 능력을 보존시켜 주셨으며, 달란트 이익을 많이 남긴 종에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주신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존케 하시지 않으시면 속히 없어집니다. 저축도 광주리에 복을 주셔야 하고(신28:5), 곳간에 채우게 하셔야 이룩된다(잠8:21)고 하셨습니다.

③ 누리게 하시므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시고도 누리게 안하시면 보관만 하다가 세상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5:19에서 “하나님은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는데....어떤 사람은 모든 소유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존귀를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누리니 이것도 헛되다”(전6:2)고 하셨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이 자유당 시절에 몇 번 낙선하고 민주당 시절에 겨우 당선이 되었는데 두 세달 만에 5.16군사 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누리지 못한 일도 있고, 또 어떤 신혼부부는 결혼한 첫날 교통사고로 또는 3일만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였지만 그 배운 바를 적재적소에 활용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고, 작은 은혜를 크게 누리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신28:5), 커피 한 잔에 만족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은혜입니다.

④ 안 주시거나 없애심으로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십니다(욥1:21,삼상2:6). 자동차에 제동 장치가 있는 것은 그 차를 유익하게 하는 것처럼 때로는 잊어버리는 것과 없어지는 것이 유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 아픈 생각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가진 것이 적을 때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고, 자유 시간이 있어야 진리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서 하나님은 안 주시거나 거두어 가시므로 은혜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혜주시는 방법을 잘 깨달으셔서 받은 은혜와 은사에 대하여 감사하시고 잘 보존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3 과 성도의 정결한 생활 (약 1:19-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정결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4대지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대지는 19-20절 말씀으로 “속히 할 것과 더디 할 것”에 대한 말씀이고, 2대지는 21절 말씀으로 “버릴 것과 받을 것”에 대한 말씀이며, 3대지는 22-25절 말씀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되라”는 것이요, 4대지는 26-27절 말씀으로 “깨끗한 경건”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대지를 하나로 종합하면 “성도의 정결한 생활”이라고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속히 할 것과 더디 할 것에 대한 말씀을 살피면(19-20절)

1)“진리를 터득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란 말씀이, 바로 “진리의 말씀을 속히 터득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은 말씀의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힘있게 달음질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살후 3:1). 진리의 터득은 배움과(딤후 3:14) 연단과(빌 2:22) 기도로(약 1:5)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2)“말하는 것을 더디하라”고 하셨습니다. 말하는 것을 더디 해야 할 이유는,

① 말에는 실수할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도 보시면 “자기 혀를 재갈 먹이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하셨고, 약 3:2에서는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온전한 사람은 희귀하며(창 6:9, 히 6:2)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의 실수를 하기 때문에 “더디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② 말을 더디하다 보면 그만큼 생각할 여유를 갖기 때문에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③ 따라서 “더디하라”는 뜻은 “그만큼 주의하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④ 여기에 첨부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신이 말의 실수를 하였다고 생각될 때는 충분히 회개하는 증표를 나타내도록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3)“성내는 것을 더디하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오래 참으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은 인내와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의(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정받는 정당한 행위)를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20절) 자신의 인격을 저하시키는 것입니다. 성을 내본 사람은 다 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란 일시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손해와 나쁜 환경이 오고 점차로 자신의 인격에 대하여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오는 것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또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은 “상당하게 참다가 성을 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말을 참음으로 실수없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혹 오래 참다가 필요에 의하여 분을 낸다 하여도 악한 생각을 버리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엡 4:26).

2.“버릴 것과 받을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21절).

1)“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더러운 것”이란 오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부정이 개입된 것”을 의미하며 “넘치는 악”이란 그 당시 사회에 팽배되어 있는 죄악 상태를 표현한 말씀으로 성도가 악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부정한 것이나 비열한 것이나 건강한 상태에서 구걸하는 것이나 죄를 감행하는 세계에서 격리되어야 할 것입니다(고후 6:17).

2)받을 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① “도”는 진리의 말씀이고,

② 도의 역할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③ 도의 말씀은 거듭난 성도의 온유한 마음에 심겨지고,

④ 심겨지는 방법은 믿음과 깨달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뿌려지는 씨처럼 성도의 마음이 회개한 심령이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도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영혼을 구원한다”는 뜻은 성경 말씀이 믿음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받을 때마다 항상 겸손하고 회개한 심령(온유한 심령)으로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과 안한 사람, 강퍅한 마음 가진 자와 온유한 자를 다 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상태를 모릅니다. 성도의 단체에도 회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이 있고 분명히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사람이 증언하는 말씀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증언으로 받지 않을 때는, 꼭 자기를 책망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회개하고 잘하였기 때문에 책망 받을 일이 없는데 왜 나를 책망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책망받을 것이 없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생각할 때는 그 하나님이 다른 대상을 책망하신 것임을 알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의 증언은 전체 교인을 두루 깨우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시는 바 안에서 증언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며 항상 온유한 심령으로 받을 때에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가 있는 중에서 책망을 받으면 더 겸손하게 받고 그 책망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3.“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22-25절).

1)실천을 강조한 것이 야고보서의 중심사상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22절). 그리고 성도가 실천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는,

① 믿음의 근거인 성경 말씀이 실천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며(히 4:12),

② 믿음과 행함은 마치 좋은 나무에 그 열매와 같아서 서로 일치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마 7:17, 약 1:17,25).

2)말씀대로 시행하지 않는 자가 바로 “자신을 속이는 자”란 뜻은 열매없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열매있는 신앙을 갖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뜻은 성경대로 생활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자율적 생활을 앞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있다 하면서 성경 말씀에 속박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신앙은 사실상 열매없는 신앙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가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자와 같다”는 뜻은 바로 그의 믿음이 확실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큼 확실치 않은가?할 때,

① 거울을 보는 것만큼 확실치 않으니 옛날의 거울은 희미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요(고전 13:12),

② 또 자신의 얼굴은 거울을 통하여만 보게 되는데 그 희미한 영상이 반대로 비취기 때문에 더욱 확실치 않은 것이며,

③ 거울로 희미하게 자신의 얼굴을 본 다음에는 그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확실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4)그러나 복음을 믿는 자는 진리를 듣고 간직하고 실천하는 자로서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25절).

25절의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복음을 뜻하는 것으로 복음이 죄에서, 또는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를 주기 때문이요(요 8:32, 갈 5:1) “그 율법(복음)을 들여다 본다”는 뜻은 “믿음으로 받아 연구하는 것”이며, 성도가 말씀을 간직하고 실천할 때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는 그 행함에 따르는 현실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있는 자의 믿음과 행함이 복을 받고, 행함이 없는 자의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축복에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실하게 믿고 행하는 것만이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4.깨끗한 경건에 대한 말씀입니다(26-27절).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을만한 깨끗한 경건을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으니 하나님은 성도의 경건(하나님 앞에서의 존절한 태도)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시 4:3, 요 9:31, 벧후 3:11). 본문 26절에서는 “헛된 경건”을 말씀하셨고 27절에서는 “깨끗한 바른 경건”을 말씀하셨습니다.

1) 헛된 경건은,

① 말로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와,

② 실천성 없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자기 혀를 자갈 먹이려 하지 않으면 말의 실수로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요 또 실천이 없으면 믿음이 성립될 수 없는 만큼 믿음없는 경건은 헛것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 오래 믿은 성도가 스스로 믿음이 있고 경건한 줄로 아시겠지만 만일 그가 말에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말씀의 실천력이 없다면 자기의 경건이 헛것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만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27절),

① 고아나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므로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알고,

②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자신의 영과 육을 거룩한 생활권에 보존하면서 거룩하지 않은 세속에 이끌려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성경적인 생활이나 사도들과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는 것이고 세속적인 것은 죄가 아니라도 세상 인간들의 풍조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알면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지도하시는 말씀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 거룩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이런 생활을 대단히 보람있게 느끼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① 속히 할 것과,

② 더디 할 것(또는 삼갈 것),

③ 버릴 것과,

④ 받을 것,

⑤ 말씀을 듣고 행할 것과,

⑥ 반드시 인정받을 만한 경건을 유지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 (약 1:22-2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대의는 “진리의 실천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기를 속이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속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데, 인간들에게 그런 어리석음이 많은 것입니다. 갈6:3에 보시면 “사람이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는 것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요일1:8에서는 “자기에게 죄가 없는 줄 아는 것”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인간이 스스로 지혜로운 줄 아는 것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전3:8)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진리를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이것은 죽은 믿음을 뜻하고(약2:22), 마치 생명 없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결과가 뻔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실천 없이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진 줄로 안다면 자기를 속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진리는 믿기만 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진리 실천을 성실하게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모습조차 옳게 알지 못하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옛날의 거울은 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얼굴을 희미하게 보는 것입니다. 희미하게 보았기 때문에 거울을 떠나면 또 잊어버려집니다(고전13:12). 거울은 주전 2,800년경에 애굽에서부터 발명이 되었는데, 바울 사도 시대인 주후 50년경에도 희미한 상태로 보다가 17세기에 유리 공법이 생겼고, 19세기에 수은을 바르는 도금법이 생겨서 자기의 얼굴을 보았지만 밝히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울이 희미할 때 자기 얼굴을 보았지만 밝히 기억을 못하는 것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잊어버리고 실천을 못하는 형편이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고전10:6에 보시면 성경을 거울로 비유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얼굴은 거울로 보고 마음은 행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수은이 깎여진 거울을 보면 자기는 안보이고 다른 사람만 보여서 누가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하면 자기 잘못은 모르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말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 자신이 도를 잘 행하는 자 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마7:3,빌2:4).

3. 거울 보는 사람은 자기 모습의 삐뚤어짐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자신의 부족을 깨달아서 고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밝은 인격을 보여 주셨습니다. 엡5:14,고후4:6에서 “그리스도는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고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거울 속에 자기가 환히 보이는 것처럼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환히 보고 거기에 대조되는 자신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을 때(불꽃 중에)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웠으며,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입술의 부정한 죄와 함께 탄식하였고, 베드로가 이적으로 고기 잡게 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한 것처럼 저희들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초라한 형편 즉, 연약함과 죄인됨과 온갖 누추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거울을 멀찍이 보면 퍽 잘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흉하기도 하고 흠과 티가 많습니다. 사람도 멀리서 볼 때는 맵시가 있는 것 같았으나 가까이 보면 미인이 못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성경을 가까이 볼수록 “나는 부족하구나”, “퍽 부끄러운 인생이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눅5:8).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들은 다 인간을 과소평가 하였습니다. 욥은 자기를 구더기로 표현하였고(욥25:6), 아브라함은 티끌로 표현하였으며(창18:27), 솔로몬은 인생을 헛되다 하였고, 베드로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고, 바울 사도는 “나는 괴수 죄인이라” 하였고,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도다” 하였고,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라 하였고, 파사국의 한 학자는 파사 왕 “나부상”이 인생에 대하여 물었을 때 “인생은 북극의 곰이 얼음장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밝히 아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4. “진리를 실천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1) 25절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을 뜻하고, “그 복음을 들여다 본다”는 뜻은 복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 하시므로 믿음과 행위가 결탁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그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그 복이란 무엇일까요 ?

① 믿음의 진실함을 확증하는 복이요,

② 성도의 윤리성을 나타내는 복이요,

③ 계명 실천으로 받는 칭찬과 상급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진리의 실천자가 되어서 믿음 생활에 속지 않고 성도의 덕을 세우는 승리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참된 경건 (약 1:26-27)  목록으로


본문 26절에서는 “헛된 경건”을 말씀하셨고, 27절에서는 “참된 경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참된 경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취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취하는 태도는 도덕이나 윤리 예절에 속하는 것이고, 경건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취하는 태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나 하나님이 보시도록 행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예배에 관한 문제, 믿음 생활에 관한 문제 등도 역시 경건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경건의 용어를 설명 드리면,

1) ‘드레스케이아’(θρησκεία)인데, 이 원문이 본문에서는 경건으로, 행26:5에서는 종교로, 골2:18에서는 숭배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숭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신이 아닌 것에 대하여도 사용될 것입니다.

2)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란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를 나타낼 때 경건이란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딤전2:2,딤후3:5,벧후1:3).

3) 그 외에도 ‘유라베스’(εὐλαβής;눅2:25), ‘셈노스’(σεμνός;빌4:8)란 용어가 “두려워 함”, “위엄 있고 고상함”의 뜻으로 사용된 일이 있고,

4)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AD37-100)는 경건이란 뜻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배하는 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2. 헛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태도입니다. 본문 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하며 자기의 혀를 재갈먹이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우선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경건은 스스로 판단할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판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헛된 경건은,

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혀를 재갈먹이지 않고 되는대로 말하는 것이요,

② 자기 마음을 속이는 비양심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경건을 힘쓰는 성도는 양심적 마음가짐이 크게 중요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 즉, 함부로 기도하지 않을 것을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전5:2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3.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경건,

1) 그것은 첫째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본문 27절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돌아 본다”는 단어 ‘에피스켚토마이’(ἐπισκεπτομαι)는 감독이라는 단어 ‘에피스코포스’(ἐπίσκοπος)에서 변화된 동사이기 때문에 감독하는 행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성 있는 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키토우’라는 수도에 대성당이 있는데, 미국의 복음교회 소속 교인들이 그곳에 관광을 갔다가 보석으로 굉장히 잘 꾸민 그 성당 앞에 기아 상태에 처한 어린아이가 가죽만 남은채 죽어가는 것을 보고 관광객 한 사람이 그 성당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안내자에게 “성당은 아름다운데 왜 아이가 여기에서 굶주려야 하느냐 ?” 하고 물은즉 아무 말도 못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호텔에 피곤해 보이는 외판원이 방을 구하러 왔다가 방이 없어 망설이는 것을 그 호텔에 투숙한 한 신사가 보고 자기 방으로 인도하여 잠을 자게 하였습니다. 그 신사는 잠들기 전에 혼자 기도하였고, 그 이틑날 외판원에게 청하여 같이 기도하자고 하였을 때 그 외판원은 신세를 진 관계로 거절을 못하였습니다. 그가 나라와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그 외판원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한 후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권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호텔을 나가면서 “다음에 또 만나자” 하면서 명함을 주었는데, 그의 이름이 ‘윌리엄 제닝스 부라연’으로 그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잠21:13에 보시면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자기의 부르짖음이 있을 때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코스모스’(κόσμος)로 세상을 뜻하고,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아스피로스’(ἄσπιλος)로, 오염 또는 얼룩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모범 외에 현실에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드는 것은 성경이나 사도들의 모범, 또는 경건한 성도들의 생활을 모방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성도로서의 구별된 생활을 다분히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에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나그네로 취급하고 천국을 본향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잘하시면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을 가지고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혹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려 하거나 그들을 의식하여 이방 풍속을 묵인하며 따라가는 것을 예사로 알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지도 말고, 사람들의 풍물에 따르려 하지도 말며 오직 신앙적 생활 안에서 자기를 지킬 때 하나님은 깨끗하고 경건한 성도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세속에 물들어 가는 생활에서 자신을 지키셨습니까 ?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인정을 받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세속”이란 뜻은 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이란 거룩 즉, 신앙적으로 구별된 생활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생활 방식에 머물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으로 이끌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끌릴 때 계명을 위반하면서 또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멀리하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로 이끌려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주의, 물질주의를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 밖에는 모르니까요.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 신령한 복, 내세의 소망을 현실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세속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6일 동안의 세속을 피하는 목적이 있고, 또 하루의 성수 주일로 6일 동안의 세속 생활을 이기려는 데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경건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는가 ? 하는 것입니다. 있으니까 “경건하라”고 하셨겠지요.

1)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막9:29,마8:13,21:22) 하셨으니까 철저한 믿음으로 성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은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는 것입니다. 참된 자, 진리되신 분(롬3:4,요14:6)을 아는 것입니다.

3) 알고 난 다음에 고백하고(마16:16), 고백하고 난 다음에 뜨겁게 사랑하면(눅7:47) 결국 하나님께 끌리고 세속의 헛됨을 알게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경건에 이르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4 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살피고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① 1-4절과 9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② 5-8절 말씀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③ 10-13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시므로 성도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종합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하여(1-4,9절)

1)“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뜻은, 믿음 아닌 것을 가지고 저울질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영광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우리는 흔히 “외모”란 뜻을 인물이나 몸단장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회당(우리들의 교회)에서도 옷을 잘 입고 금가락지로 단장한 사람이 오면 좋은 자리로 인도하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거기 앉든지”(즉 좋은 자리로 안내하지 않았다는 뜻이요)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한다고 하였으니 이 “발등상 아래”란 낮은 좌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자와 가난이란 물질적 외모로 사람을 차별대우한 것입니다.

3) 사람들은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는 인격과 건강을 따지지요, 다음에는 지식과 명예를 따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재물을 볼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중요한 것으로 꼽은 다음에 “믿음”은 잘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하신 말씀에서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사람을 저울질하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이라고 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4)그러면 사람을 외모로 취한 것이 왜 죄가 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① 믿음으로 저울질 하는 것이 하나님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는 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안하였으니까 죄가 되는 것이고,

② 4절에서 “서로 구별하여”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표준을 무시하고, 사람들 생각으로 서로 구별(판단)한 것이니까, 이렇게 사람의 표준으로 평가한 것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요,

③ 9절 말씀에서, 율법이 이를 범법자로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레 19:5에서 율법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편들지 말 것”을 교훈하셨고 신 16:19에서도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잘 나고 못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혹 자기와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판단을 해야 할 경우에는 믿음이 많고 적은 여부로 판단할 것이요 결코 다른 것으로 판단하여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예를 들어서 며느리나 사위를 고를 때 믿음이 좋고 안 좋은 것만 보면 충분하다는 내용입니다).

2.“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5-8절).

1)본문 6절에 보시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하시므로 그 당시 성도들이(1절;형제들아)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가난한 자를 괄시한 사실을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어떻게 괄시하였습니까?

① 3절에서 (찾아 온 사람에게) “거기 앉든지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식으로 괄시하였고,

② 6절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괄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하시므로 접대의 차별과 법률의 제재로 괄시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여기에서 성도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행위는 “죄가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우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될까요?

① 하나님이 가난한 자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여 구원의 복을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는 마 4:12-25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난한 자의 편에 계신데 성도가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 되어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② 괄시받는 가난한 자들이 괄시하는 성도들에게 “저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저러느냐?”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7절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않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빛된 생활과 사랑을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에 훼방이 되기 때문에 영광을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③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의 율법을(레 19:18) 거역함이 되어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웃”이란 용어가 거의 가난한 이웃을 의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전문적으로 찾아야 하는 실정이 된 것은 큰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IMF 전에).

3.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할 이유를 특별한 내용으로 또 강조해 주셨습니다(10-13절).

1)특별하지 않은 내용은 “가난한 자를 괄시한 것이 왜 죄가 되느냐?에 대하여 앞에서 설명을 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①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② 괄시받은 자들이 성도를 비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 때문이며,

③ 이웃사랑을 못하는 것이 율법을 거역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에서 강조하신 말씀은 “누구든지(즉 가난하지 않은 자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시므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으려면 긍휼을 많이 베푼 자가 되어야 할 것을 특별한 비유로 교훈하셨습니다.

① 10-11절에서 “모든 인간은 다 범법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법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혹 우리는 “간음 살인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나 마 5:21-22에서 “살인은 미움으로 범하고” 마 5:27-28에서 “간음은 마음으로 범한다”하셨으니 여기에 안 걸릴 자가 어디 있겠으며, 또 “다른 율법을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② 따라서 믿음의 성도들은 12절의 말씀대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은 복음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정죄와 저주의 율법이지만 복음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하신 것은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신분으로 계명을 지키되 자원하여 지키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은, 자유의 율법이 복음인 만큼 복음을 믿고 안믿은 상황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요, 이때에 긍휼을 행하지 않은 자는 역시 심판받을 때 긍휼을 힘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재료는 사랑(긍휼) 실천 여부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는 믿음 밖에 있는 자일 것이요, 믿음 안에서 긍휼이 부족하였다면 속히 회개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판을 지상에서도 하시고 마지막 심판 때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서 심판하시는 방법은 성도를 직접 징계하시는 것이고 또 최종 심판 때는 하늘의 상급을 적게 주실 것입니다(마5:19).

③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뜻은 긍휼을 베푼 공로로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아 복이 되므로, 긍휼 베푼 사실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받으실 것은

1)믿음 중심으로 사람을 보고 외모(다른 것)로 판단하지 마셔야 할 것과

2)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괄시대신 긍휼을 베푸셔야 할 것과

3) 자신도 죄없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아야 하는데 만일 긍휼이 부족하였으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가난한 자의 신령한 복 (약 2: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가난한 자의 신령한 복”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은,

1)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옷 잘입은 사람(부자를 의미함)이라 하여 귀하게 여겨 주고, 헐벗은 자(가난한 사람)라 하여 천하게 여기거나 괄시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2)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악한 죄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①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② 또 가난이란 여건이 신령한 복을 받기에 유익한 조건을 갖기 때문입니다.

③ 반대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며, 송사하여 괴롭히는 일까지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이런 말씀들을 참고하실 때 가난한 성도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으로 알면서 긍지와 희망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8.15 해방 직후에 가난하게 살면서 짚신을 신고 학교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짚신 신고 온 학생이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퍽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도시락을 담을 때마다 어머니 곁에 서서 보리밥을 걷고 쌀밥만 퍼 달라고 했습니다. 보리밥을 가지고 가는 것이 퍽 부끄러웠습니다. “믿음을 가진 지금은 그런 입장에 처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즈음 교회마다 교회 재정으로 점심을 먹습니다. 예수님의 대접을 받는 격이 되었고, 또 수고하시는 분들의 노력이 큽니다. 식사비는 자치회비에서 쓰면 좋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해져서 주일날 자기의 식사를 갖고 와서 나누어 먹고, 예배 잘 드리고, 성경 공부와 친교를 나누고 돌아가는 때가 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아무 부끄러움을 모르는 채 집에서 먹는 음식 그대로 갖고 와서 먹을 것입니다. 요즈음 성도들이 잘 먹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지도자들도 밥 한끼 먹기 위해서 한 시간 이상 가고 오는 곳으로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잘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는 “가난에 처하여 자족하기를 배웠다”(빌4:11) 하셨고, 고전8:8에 보시면 “식물은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잘 먹었다 하여 은혜가 더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롬14:17에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세계에서는 “먹자주의” 풍조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부자 못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고, 잘먹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3. 성경은 부자의 불행한 여건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1) 딤전6:9을 보시면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하셨고,

2) 눅12장에서는 어떤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매 그것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고 재물의 힘으로 생명을 연장하며 행복해 보려 하였지만 그날 밤에 죽었다는 말씀이 있고,

3) 계3:17에서 “부자가 자기의 부요를 믿고 영혼의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며 회개하지 않는다” 하셨고,

4) 마19:22에서 “예수님을 모처럼 만나서 대화를 가졌던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것 때문에 신앙을 못가진채 근심하며 갔다”는 말씀이 있고,

5) 눅16:25에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지옥간 부자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는다” 하시므로 부자가 지옥가는 화근에 보탬이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 부자는 천국 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차라리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마19:24)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자는 신령한 은혜를 받는데 취약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7) 예수님은 “부요한 자(만유의 주)이시나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고후8:9).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하게 사신 것이, 신앙을 위한 좋은 방법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하나님을 모시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 “기적의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이고 또 신약에서 예수님이 5병2어나 7병2어로 양식의 기적을 나타내신 것도 역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성실하게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막8:1-10을 보시면 “삼일 동안 굶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 하셨고, 또 그들을 거저 돌려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수도 있기 때문에 먹여야 한다 하시고 5병2어의 기적을 나타내어 양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만한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하루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마6:11,34).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재물을 많이 쌓아놓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 드리려는 것입니다.

8) 부자가 믿음에 손해를 보는 이유는,

① 하나님보다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게 되고,

② 그것 때문에 교만할 우려가 있으며,

③ 명예욕에 사로잡힐 우려도 있고,

④ 욕심에 빠져서 재물을 선한 용도에 쓰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거나,

⑤ 심지어는 부정 축재의 우려까지 있기에 신앙의 취약점이 많은 것입니다.

4. 반대로 가난함이 신령한 복을 받음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를 살펴 보겠습니다.

1) 마5:3에서 “마음이 가난하면 천국을 얻게 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마음의 가난”은 진리의 핍절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뜻합니다(눅6:20). 그런데 물질이 가난할수록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기 때문에 마음의 가난도 신령한 복에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2) 마11:5에서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스불론, 납달리, 요단강 해변 갈릴리 등에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고, 부유층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마11:15).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3) 눅11:5-8에 보시면, 양식을 꾸러간 자에게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꾸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간구를 들으실 것을 말씀하셨고,

4) 고전1:27에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하고 비천한 자(가난한 자)를 택하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사명자로 쓰신다“ 하셨으며, 본문 5절에서도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을 부요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 교훈에서도 잘 입증되는 것입니다(눅16:19-25).

5) 엘리야는 먹을 것이 없을 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이적을 체험하였고(왕상17:6),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하였으며(합3:17), 바울 사도는 가난을 은혜 체험의 기회로 삼으며 자족함을 배웠던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죄처럼 알지 마시고 가난을 이용하여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요즈음은 풍요로운 시대이기 때문에 가난을 실감 못하는 청년들이 많고, 옛날의 가난한 역사를 듣기조차 싫어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옛날의 역사가 전래되기 위하여 선배님들의 가난한 생활을 말하겠습니다.

양화석 목사님은 대전 중앙교회를 시작하실 때 교인들을 근심시키지 않기 위하여 아침에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어서 연기를 올렸다 하며, 성경 박사 오종덕 목사님은 신학생 시절 때 기차 안에서 버려진 남은 도시락을 거두어 드셨으며, 60년대에 신학교에서 엿장사를 한 친구들이 있었고, 회색 양복 한 벌로 사계절을 다 입은 사례를 말하였더니 저보다 10년 선배인 이00 목사님은 와이샤스가 귀하여 에리와 손목만 잘라서 양복에 붙여 입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목사된지 10년 후에 까운을 입었는데, 요즈음은 신학교 졸업 때부터 까운을 달라고 교회로 의뢰해 오는 것을 봅니다. 가난을 체험하신 분들이 그런 연단 속에서 좋은 목사가 되고 좋은 목회를 하였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를 하면서 “예수를 잘 못 믿으니 가난하고, 그 모양 그 꼴로 살지...잘 믿어 봐요, 부자 안되나 ? 10년 20년 믿었으면 뭘해요, 그 따위로 믿으니까 늘 그 모양 그 꼴이지”라고 하였답니다. 그 설교를 들은 가난한 장로님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 가난하면 다 예수 못 믿은 것입니까 ? 부자가 되었어야 다 잘 믿은 것입니까 ? 20년 믿었으면 뭣하느냐고 하니 우리가 재산을 모으려고 예수 믿는 것입니까 ?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 판단해 주십시오”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고, 잠30:9에서는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부자 되어 하나님 모른다 할까 두렵고, 가난하여 영광 가리울까 두렵다”고 한 것이 성도의 물질 생활에 맞는 교훈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부자되기를 구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어떤 여전도사님이 차 한 잔 얻어 자시면서 “부자되게 해 주시요”라는 기도를 하길래 제가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기도 안해도,

① 손님 대접 잘하고, 조카에게 좋은 살길을 양보하는 아브라함에게나(창28:20),

② 십일조 잘 내고 형과 화해하기 위하여 재산의 반을 양보하는 야곱이나(창32:20),

③ 재산이 있어도 교만할 줄 모르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은 욥에게나(욥31:24,32),

④ 경건 생활과 구제 생활을 잘한 고넬료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넉넉한 재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난은 죄의 결과일 경우가 있으나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니요, 오히려 믿음의 선진들의 생활을 본받는 일이요, 겸손하게 하시며, 신앙 생활의 연단을 받는 조건이요, 영적 은혜와 사명을 주시는 여건이라는 점에서 결코 과소 평가할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 5 과 행함 없는 믿음 (약 2:14-26) 목록으로

 


1.지금 읽으신 말씀은 믿는 성도들에게 행함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믿음과 행함은 서로 나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 7:17과 눅 6:43에 보시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하셨고, 요일 3:9에서는 거듭나는 은혜를 “하나님의 씨(말씀;벧전 1:23)가 성도의 심령에 심겨지는 것이라”(약 1:21)고 하시므로 믿음은 당연히 믿음 생활의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7:19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우는데...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고...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는 행함이 나타나야 하고 그 행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 열매가 없는 자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하시므로, 구원을 받는 것과 못받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냐 아니냐로 판별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믿음이 행함과 일치해야 함을 말씀드린 것인데 성경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믿음과 행함 중에 믿음을 강조한 말씀이고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 중에 행함을 강조한 말씀인 줄로 아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시면 전체의 결론이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17,26절). 죽은 씨앗은 싹을 낼 수 없으니까 구원을 뜻하는 열매는 더욱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행한다는 의미와 정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2.먼저 본문 14절을 보시면 “믿음이 있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무엇입니까?

1)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성경으로 배워서 알게 되고 신앙고백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성경 지식을 믿음으로 가지면 산 믿음이 되고 믿지는 않으면서 지식으로만 갖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지식도 있는데 이 지식은 “귀신들도 알고 떤다(19절)”하시므로 진리의 지식 상당부분을 마귀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진리지식을 갖고 있는 내용은 막 1:24에서 “예수님이 마귀 자신을 멸할 수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또 막 5:7에서는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과 또 마귀가 예수님께 사정하면 자기를 돼지 떼에게로 들여보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행 16:17,19:15, 막 5:7). 마귀가 이렇게 진리의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 없기 때문이요 따라서 행함을 동반하는 믿음이 아니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2)“행함이 없으면”하셨는데 이 행함이 무엇을 행하라는 것입니까?

① 마땅히 계명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사명이 있습니다. 계명은 십계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세 가지 종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상 숭배하지 말아라”하는 것이요(1-3계명), 다음에는 “안식일을 지키라(4계명)”는 것이요, 마지막에는 “이웃을 사랑하라(5-10계명)”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첫째는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것이 우상 숭배이고 다음에 지켜야 하는 계명은 하나님의 명예와(3계명) 성도의 명예와 주일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요 셋째는 “위로 하나님을,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강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계명을 시행해야 한다”고 예수님도 강조를 하신 것입니다(요 14:23).

② 그런데 문제는 얼마큼 지켜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계명을 다 지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 3:11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말씀은 예수님 외에는 율법을 다 지킬 자가 없다는 뜻이요 또 갈 2:16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성도라도 율법을 완전하게 못 지킨다는 뜻입니다(롬 3:11,12).

㈁ 그러면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할 때에 본문 15-16절에서 한가지 실례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같은 믿음의 형제나 자매가 헐벗었거나 일용할 양식이 없는 것을 보고,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고 아무것도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하시므로 최소한의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가 “집을 사는데 도와 주시요 하거나 자녀 교육비를 도와 주시요” 할 때에 돕는 것은 형편에 따라 할 수 있는 봉사에 속하는 것이고, 당장 이웃이 굶고 헐벗은 상태를 돕는 것은 미약한 사랑의 실천 같으나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란 것입니다.

㈂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수준 높은 사랑의 실천(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와 의식주를 나누는 정도의 사랑을 실례로 드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서 실례를 든다면 한 사람은 10일 양식이 있고 한 사람은 양식이 다 떨어졌다면 10일 살고 죽을 성도가 양식 없는 자와 나누어 먹고 다같이 5일만 살고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계명 실천의 정도는 복종하려는 성향이 나타나야 되고 그 실천의 정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적당한 표준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역을 밥먹듯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태도는 실천하지 않는 믿음으로 여겨야 할 것이요 성도는 행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인 만큼 실천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실천의 노력으로 믿음을 입증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18절).

3.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반드시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롬 4:3, 갈 3:6,11) 본문 20-25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라합의 실례를 들어서 마치 그들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행함으로 구원받은 실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믿음에 근거하여 그런 행위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면서 행함의 복이 현실적으로 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된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1)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활로 되돌려 주실 것을 믿고 드렸으며(히 11:19) 라합이 정탐을 숨겨준 것도 역시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승리를 믿었기 때문에(수 2:9)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함은 잠재적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믿음이 구원받을 근거가 된 것입니다.

2)그런데 본문 20절에 보시면 “행함이 없는 믿음도 헛 것은 아니라” 하시고, 또 행함없는 믿음을 헛것으로 알면 “허탄한 사람”에 속한다 하시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도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함에도 큰 축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안에서 벌써 성취되었습니다. 창 15:6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그 뜻이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순종이 있기 전의 일이었습니다(22절). 그런데 21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하셨으니 “의롭다 하심”이란 뜻이 면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칭찬과 축복을 뜻하는 것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22절에서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히 11:17) 행하므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은 믿음과 행함을 일치시키는 말씀으로 아시면 됩니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형편에서 증명이 됩니다. 창 15:6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하셨고 그 후 이삭을 바쳤을 때는 “네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안다(창 22:12)”하시고 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씨로 성하게 하고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면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하시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받은 것이며 행함으로 복을 더 받은 것은 후손의 번성과 메시야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축복을 허탄히 여길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뜻은 자신이 구원받는 것 외에 큰 칭찬과 축복을 더하신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칭찬과 축복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과 같이 대하신다(23절)”는 것입니다(대하 20:7, 사 41:8). 이 얼마나 귀한 복입니까?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알아야 할 일과 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드리면

1)알아야 할 것은,

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② 구원받은 믿음은 실천이 따른다.

③ 실천의 과제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④ 계명 실천의 정도는 마음 자세의 순종과 회개와 그리고 최대한의 사랑 실천이요,

⑤ 계명 이행의 표준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 실천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⑥ 또 의와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행함의 복은 현실의 복과 내세의 상급으로 받는 것이요

2)성도가 실천해야 할 것은,

①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② 하나님과 성도의 명예를 높이고,

③ 주일을 잘 지키며,

④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7. 믿음과 행위 (약 2:14-26) 목록으로


1. 지금 읽으신 본문의 뜻을 요약하면,

1) 실천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이익이 없으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14)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말로만 “잘 입어라, 잘 먹어라, 평안하라” 한 것은 그 가난한 자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15-16), 따라서 행함(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죽은 씨앗)이라는 것입니다(17).

2) 믿음은 말로 나타내 보았자(신앙고백) 그 진실을 증명할 수 없고, 오직 행함으로만 믿음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18). 성경에 보면 귀신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면서 믿고 떤 사실이 있습니다(마8:29,막1:24,행16:17,19:15). 그러나 귀신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9).

3)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시고(롬4:11),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있지만(창15:6,롬4:9), 이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20-21).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군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행위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에 기인한 것입니다(25).

4)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으며, 벗으로 대하셨으니(대하20:7),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는 것이고, 고백적인 믿음은 실천적 생활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22-24).

5) 따라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것(26)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대의는 믿음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서 구원받을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우선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설명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예수님 또는 진리)을 아는 것입니다. 요8:32과 6:69에서 설명되었습니다.

②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눅7:47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죄사함 받은 일이 있습니다.

③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엡6:24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④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입니다. 요15:1-5에서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⑤ 믿음은 신앙고백이고 거기에 따르는 실천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 22절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대상은 참되신 하나님, 삼위의 하나님이요, 그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2) 얼마만큼 믿어야 되느냐 ? 고 물으신다면, 여기에서는 믿음의 분량과 한계를 설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① 믿음의 분량이라 하면 하나님과 성경을 다 알면 좋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또는 성경을 많이 알고 적게 아는데 따라서 믿음이 크고 적을 수 있는 것이요, 여기에서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의 지식은(행14:9) 사도신경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이 믿음의 분량에서 설명드려야 할 것은 지식적인 믿음만 가져서는 안되고 반드시 신뢰적이고 친교적(영적 연합)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 지식을 많이 갖고 하나님과의 친교성를 잘 가지며 계명의 실천성이 많을수록 믿음 좋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믿음의 한계는 지속성을 의미하는데, 영원토록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3:13과 히3:14에서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확인해 보십시오.

3) 믿음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할 때,

① 허물과 죄로 죽은 심령은 생명 없는 씨앗과 같아서 믿음의 싹을 낼 수 없습니다(엡2:1).

② 그래서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요3:3,딛3:5,벧전1:23,요일3:9).

③ 하나님은 택하신 자에 한하여 그의 작정한 시기에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엡1:4,전3:1-2).

④ 그 거듭난 심령이 믿어야 할 시기에 복음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데 이 때에 거듭난 심령은 불꽃과 같고, 복음의 말씀은 연료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⑤ 따라서 전도는 복음의 말씀을 공급하는 것으로 믿음을 가지게 하는 절차일 뿐 수단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믿음의 주(히12:2)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성장도 있는가 할 때 성령 충만의 분량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로 비유하면 옥토에 심겨진 나무처럼 잘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있고, 모든 조건이 나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도 말씀, 기도, 실천, 헌신을 많이 힘쓰면 달음질하는 믿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연약에 머무는 것입니다. 롬1:17에 보시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하셨는데, 여기의 전자(前者)는 구원받을 믿음이고, 후자(後者)는 상급 받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휼륭하게 큰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처럼 믿음이 크고 작은 것도(마15:28,17:20,눅17:5) 그런 방법으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받는 유익이 무엇인가 할 때,

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고,

② 죄사함을 받으며,

③ 영생을 얻고,

④ 실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사 의식이나 율법을 실천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가 있으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믿는 것이 복음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눅23:43과 롬9:30 그리고 갈2:16에서도 입증이 되고, 강조된 것입니다. 의심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믿을 때는 실천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은 믿음으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3. 행위(실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행위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또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18).

2)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실천의 한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완전한 실천을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계명을 완전하게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갈2:16,갈3:11). 사람마다 요구하시는 표준이 다르다는 것은 어른과 아이의 경우가 다를 수 있고, 은혜를 많이 받은 자와 적게 받은 자 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기 때문에(고후8:12)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형편에 따라서 요구하시는 표준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이익을 남긴 분량이 다르지만, 달란트 밑천을 받은대로 이익을 남겼기 때문에, 주인의 칭찬이 꼭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행위의 표준이 무엇인가 ? 할 때, 성도 각인의 순종 의지와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같은 성도, 또 세례 요한이나 요셉이나 고넬료 같은 성도의 순종과 생활을 만족하게 여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생활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거나, 계명 실천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외식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4) 행위 실천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 할 때,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어려운 명령들을 다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드렸다”(히11:17)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순교도 하였다”(히11:36-38)고 하였습니다. 막9:23에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도 역시 실천의 근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처럼(마12:33), 행위로 믿음의 진가(眞價)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5) 행위로 받는 것이 무엇인가 ? 할 때,

① 행위가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② 성도의 미덕을 드러내며,

③ 전도의 수단도 되고,

④ 현실과 내세의 상급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계20:12).

4. 마지막으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 할 때, 이 두 가지는 뿌리와 나무처럼 서로 결탁되어 있는 줄로 아시면 됩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은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진리”만을 배우고 행함은 구원받는 일에 관계없는 것처럼 아셨다가 나중에 야고보서를 읽어보니 반대로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22)고 할 뿐만 아니라, 24절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로워진다”고 하신 것을 볼 때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인 대답은 본문 22절 말씀에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 하시므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는 뿌리와 나무, 또는 나무와 열매 같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실천의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시고, 실천을 동반하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말조심 합시다 (약 3:1-12)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서 제목을 정하려니까 “말조심 합시다”란 제목밖에는 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으니까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하셨는데 이 말씀에 따라서 다 선생이 안되려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선생이 되지 말라”는 제목을 정할 수가 없었고, 2절에 보시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하셨는데 말의 실수 없이 온전한 사람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말의 실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 특히 설교자 중에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 되자”는 제목도 정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길들이기 어려운 입” 또는 “말의 위력”이란 제목을 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말을 할 때 조심하여 실수 없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결심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사는 세계에서는 실수된 말이 아니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물며 말의 실수로 돌아오는 책망이나 괴로움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상상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구에서 화장품 장사를 하시던 진실한 권사님이 화장품 거래하는 구역의 어떤 집에 가셨는데 그 이웃집에 젊은 여인이 돈 백만원을 꾸러 그 집에 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꾸러 온 여자도 역시 권사님과 화장품을 거래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때 그 주인 여자는 돈을 꾸어주는 문제로 망설이고 있다가 권사님을 보고 꾸어 주어도 괜찮겠느냐?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신용있게 거래하는 사람이라고 대답만 하였을 뿐인데 그 말을 듣고 백만원을 빌려 준 것입니다. 얼마 후에 돈 꾸어간 여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 집안이 몰락하여 흩어진 상태가 되어서 돈을 받을 형편도 못되자 돈을 준 사람이 권사님을 붙잡고 “당신이 주어도 된다” 하여 주었으니까 “물어내라”고 하여,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고 백만원을 물어 준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애매한 실수로 어려움을 당하는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말의 실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본문 1절에서 “성도가 선생이 된다”는 일을 퍽 어려운 일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1)1절 말씀의 “선생된 우리”란 복음 사역자들을 의미하는데 설교자들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만큼 선생된 것이 퍽 안전하고 유익한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2)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①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을 바르게 살도록 가르친 다음에 자기가 실수를 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요,

② 지도자이니까 말에도 실수없이 잘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3)그러니까 선생된 자는 “어려운 직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셔야 할 것이고 선생의 지도를 받는 사람은 선생님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선생되는 일을 쉬운 일로 아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4)따라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뜻도 바로 그런 취지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보시면 사람마다 실수가 많은데 실수없이 사는 사람이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1)성경에 “온전한 사람”이라고 칭찬한 사례가 있습니다.

①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민 14:24)”하셨고,

② “다윗도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였다(삼상 9:4)”하셨으며,

③ “욥도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욥 1:8)”하셨고,

④ 또 성경에 의인이란 호칭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라(창 6:9)”,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 신약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눅 1:6)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의인이라(마 1:19)”, “고넬료도 의인이라(사람들이 인정한;행 10:22)”란 말씀이 있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여기의 “온전하다”하는 것은 완전히 결백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하게 순수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런데 사람이 다 잘하다가도 말의 실수로 온전함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실수가 많은 중에 말에 실수만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양식 걱정을 하는 환경에서 자주 외가에 갔습니다. 외가에는 두 노인만 농사를 짓고 사셨기 때문에 외손자가 가면 퍽 반가워 하시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퍽 덕이 많으신 분이라 어깨를 툭툭치시면서 많이 먹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나락멍석에서 흩어진 벼 알갱이를 다 주워서 멍석 안으로 던지신 다음 방에 들어 오셔서 제가 밥먹는 것을 보시고는 “이 밥 한 그릇, 쌀 한 톨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알고 먹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이라도 밥을 먹다가 굉장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쁜 말씀은 아니지만 밥맛을 떨어지게 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립니까? 말의 실수란 것이 그런 중에서도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리려는 것입니다. 꼭 적당한 말도 적당한 환경에서 해야 되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적당한 표현이 어렵고 적당한 기회를 못 가져서 하고 싶었던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퍽 많겠지요. 그럴 때는 그런 이유로 말을 적게 하게 되는 것이 유익한 줄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3)또 같은 2절에서 말의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자요, 능히 온몸을 굴레씌울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① 말의 실수를 안하므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실수가 말에서 실격되기 때문이요,

② 또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신 것은 말조심하는 인격이면 대단히 고상하고 능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넉넉히 자기의 육체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굴레 씌운다”는 말씀이 바로 혈기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③ 그러니까 저희들은 “내가 이 말을 안하고도 그냥 지나갈 수 없다”하는 일이 있을 때, 또 한번 생각하고 참을 수 있는 습관을 기르셔야 할 것입니다(고등학생들 중 담배 하나 못 끊는 사람들은 다 공부도 열심히 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결단이 약한 아이들이란 뜻입니다. 저희들도 술, 담배끊는 결단보다 말조심하는 결단이 더 쉬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사람의 혀는 영향력이 크면서도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8절).

1)사람의 혀가 영향력이 큰 것은 마치 배의 키와 같고 작은 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작은 키로 방향을 조정하여 동으로 갈 것을 서로 가게 하는가 하면 불꽃도 아무리 작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태웁니까? 불이 물건을 태울 때 절제합니까? 만일 혀로서 나오는 말이 불같은 악이라면 그 작은 지체가 온몸을 더럽히며 “생의 바퀴(옳게 살아야 할 인생의 바퀴)를 불사른다”하셨으니 이것은 자기 인생을 망친다는 뜻이요 그 사르는 불, 즉 실수되는 말이 지옥불에 연결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5-6절). 이는 말 한마디라도 악한 것은 마귀의 역사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6.25당시에 말 한마디로 죽고 산 예가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2)7절 말씀에서 사람의 혀는 다른 사람이 길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자기 입에 있는 혀이고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마음속을 다른 사람이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재갈을 먹이면 온 몸을 어거할 수 있고 짐승이나 새나 벌레나 해물들도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7절). 그러나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으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혀가 악이 되고 독이 되는 것은 악한 말을 할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고,

② 사람이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통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자신이 주의해야 하고 자신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므로 말의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③ 최고의 방책으로 성령이 충만하면 말의 실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말하는 방언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9절 이하에 보시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만큼 악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9-12절).

1)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합니까? 혀는 말하는데 쓰고 음식 먹는데도 씁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가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할 때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간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샘도 한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내지 않고 무화과 나무도 감람 열매를 맺지 않으며,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않는데 사람이 한입으로 목적이나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말을 하여서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2)또 본문 마지막 절에 보시면 “짠물도 단물을 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짠물을 내는 악한 자의 입에서 좋은 말이 안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인(고전 5:17) 성도의 입에서는 더욱 악한 말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들을 다 종합해 볼 때

1)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엇이나 새롭고 의로운 점이 있어야 합니다.

2)성도가 온전을 기하는 최고의 목표가 말에 있는데 많은 성도가 이 말에서 실격이 되어 온전한 인격과 거룩목표에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3)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과 자신의 말을 잘 통제하여 분명히 진실을 말하고 원리를 말하며 덕을 세우는 말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4)모든 성도는 진실과 원리와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는 반드시 타당성이 있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진실 속에서 자기의 잘못이 드러났거나 원리 속에서 자기의 비리가 드러났거나 덕을 세움에 있어서 자신의 허물이 드러날 때에는 그 말을 언짢게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를 말해도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을 시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족이 지적되어도 공익을 위한 말이면 달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이기주의를 떠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원리를 사랑하는 사람, 공익을 위하고 사랑과 부합되는 대화만 할 수 있는 성도가 된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신 말씀이 저희들의 잘못된 말을 통제하는 중요한 교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7 과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약 3:13-18)  목록으로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읽고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을 3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① 13절에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를 분별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② 14-16절에서는 “참된 지혜가 아닌 것과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이요,

③ 17-18절은 “참된 지혜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를 분별함에 대하여(13절) 본문 13절을 보시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하시므로 지혜있고 총명있는 자를 가려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란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고, 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선행과 온유로 그 행함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온유”는 지혜의 온유라 하셨으니 이 뜻은 “지혜로움에 속하는 온유”란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과 온유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지혜있는 자임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1)이 말씀에서 지혜있고 총명있는 자는 선행과 온유로 행동을 나타내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온유한 마음을 변하지 않고 선행만 나타내는 사람이면 그는 지혜있고 총명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온유한 마음이 혈기로 변하거나 선행이 아닌 것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여기에서 또 한가지 살펴야 할 것은 지혜와 총명을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① 국어사전에 보면 지혜는 슬기인데 “사리를 밝히고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라 하였고 “총명”은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할, 천부장, 백부장을 뽑을 때 “지혜와 지식이 있어 유명한 자를 택하라(신 1:13,15)”하셨고, 단 5:12에 보시면 “다니엘”이 그런 인물에 해당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③ 또 성경에 보면 “지혜”란 말이 “비나”(ה󰗺י󰔱)인데 이 말을 대상 22:12에서는 지혜로, 신 4:6에서는 지식으로, 대하 2:12과 욥 34:16에서는 “총명”으로 번역을 하였고, 헬라어로 지혜는 “쏘피아”(σόφια)라고 하지만, “총명”으로 번역한 원문은 본문의 “에피스테몬”(ἐπιστήμων)외에도, “두네시스”(δύνεσις;골 1:9),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엡 4:18)가 있고 또 “마음”이란 의미를 갖는 “누스”(νούς;계 13:18)도 총명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④ 이런 사실로 볼 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확실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슷하게 구별을 한다면,

㈀ 지혜는 하나님이 인간들과 동물에게까지 주시는 것으로 그 지혜를 받은 인간이 자기 앞에 당면한 일을 선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하고,

㈁ 총명은 기억력이 좋은 것을 의미하므로 혹 동물들에게도 있을 수가 있으며,

㈂ 지식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으로 지혜와 총명으로 연구하고 배워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와 총명을 나타내려면 모든 사건들을 대할 때 온유와 선행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2.참된 지혜 아닌 것과 그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14-16절).

1)참된 지혜가 아닌 것은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을 경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시기가 있고 대항성(다툼)이 있으면 그가 아무리 지혜로운 척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지혜자가 아닌 “수단가”에 불과하고 따라서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시기와 다툼을 갖고 있으면서 지혜자인 척 한다면 이것은 진리를 거스리는 일이요 스스로 거짓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14절).

2)사람들은 두 가지 지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지혜가 있는데 그것이 곧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① 세상사람들이 적당하게 수단부리는 지혜,

② 정욕적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지혜,

③ 마귀의 뜻에 순종하여 죄짓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지혜있는 듯이 주장을 하면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목적에 끌리거나 그 범주 안에서 행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시행한다면 퍽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은 지혜를 다시 가다듬어서 결코 마귀적이고 정욕적이며 세상적인 목적에 이끌리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시기와 다툼이 있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가 나타날 때는 요란한 일과 모든 악한 일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가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 잘못된 지혜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목적에 사로잡혀 시기와 다툼이 깔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툼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결국 바른 지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3.참된 지혜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7-18절).

1)참된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위에서 난 지혜)입니다.

2)참된 지혜는 “성결(죄성이 없는 것)”을 원칙으로 꼽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위에서 난 지혜는 첫째도 성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의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것입니다.

3)이렇게 성결이 있은 후에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공평(편벽이 없음), 진실(거짓이 없음)함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성결은 죄 안됨을 뜻하고,

② 화평은 불화를 만들지 않고 친교를 선호하는 것이며,

③ 관용은 뉘우치는 자를 포용하는 것이고,

④ 양순은 어질고 순한 것이며,

⑤ 긍휼은 어려운 자를 동정하는 것이요,

⑥ 선한 열매란 덕을 세우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⑦ 편벽이 없음은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음이요,

⑧ 거짓이 없음은 진실만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1)우선 시기와 다툼과 교만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14절).

2)그리고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일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15절).

3)다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되 먼저 성결의 은혜를 받고 다음에 사랑과 선과 공평과 진실을 실천해야 하며

4)오직 화평을 심어 (화평한 방법으로) 의의 열매(정의 실현)를 맺을 때 비로서 지혜있고 총명한 자가 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지혜에 대한 지식 (약 3:13-18)  목록으로


약1:5에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고, 본문 13절에서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하셨으며, 또 14-16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지 않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의 역사는 “진리를 거스림과 시기와 다툼과 거짓을 나타내어 요란함과 모든 악한 일이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1. 지혜가 무엇인가 ? 하는 것을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지혜는 자기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막연하게 “재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2) 이 지혜는 여러 가지에 쓰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도 쓰여지고 도덕적인 의로운 생활에도 쓰여지며 또 범죄하는 사탄의 역사에도 쓰여집니다. 골1:9에서 “신령한 지혜”란 말씀이 있고, 시111:10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하시므로 지혜가 믿음에 쓰여짐을 뜻하였으며, 고전1:19,27에서는 “십자가를 배반하는 자들의 인간적 사고 방식”을 지혜있다고 표현하셨고, 눅16:8에서는 “악한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떼먹는 범죄 수단”을 지혜롭게 행한 일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지혜란 용어가 선악 간의 여러 방도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 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 ? 할 때, 잠3:18에서는 “이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하였고, 잠8:11에서는 “지혜가 진주보다 나으며”, 욥28:18에서는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고” 또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귀하다”(잠16:16)고 하셨습니다. 지혜의 가치를 생명나무로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지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가치는 물질보다 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재물에 앞서 지혜를 귀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4) 지혜와 지식을 구별할 수 있는가 ? 할 때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한부선 선교사님은 “지식 있는 학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 의견 일치가 안되어 서로 대립만 하는 중에 많이 배우지 못한 회원이 겸손과 덕으로 말을 잘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곧 지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학문 그대로의 소재를 파악한 것이고, 지혜는 목적에 부응하도록 인도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꿰는 수단인 것입니다.

2. 이 지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 할 때에, 위에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또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1) 17절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으며...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 하셨고,

2) 14-16절에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가 있으니, 이는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과 자랑과 진리를 거스림과 거짓과 모든 악한 일을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믿음과 선행에 쓰여지고, 마귀로부터 받는 지혜는 범죄에 쓰여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 말씀은 성도들이 지혜롭게 하는 자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앙, 순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 공평, 진실, 의를 행한 것이면 지혜롭게 한 것이고, 반대로 시기, 다툼, 요란함, 자랑, 거짓, 악한 일 그리고 진리를 거스린 것이면 죄악에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죄악 세계에서는 마귀의 지혜가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를 의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범죄를 의도하는 자에게 분별없이 지혜를 줍니다. 이때에 목적과 방법을 옳게 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4) 어떤 때는 동물들도 퍽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고 뱀같이 지혜로우라”(잠6:6,마10:16)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 적당한 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3. 마지막으로 이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 할 때,

1)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니까 “구하기를 힘쓰라”고 약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반드시 좋은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시119:97-100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묵상하므로 원수나 노인들보다 명철하여질 수 있다” 하셨고, 또 “지혜를 가르치라”는 말씀을 골1:28에서도 하셨으니까 지혜의 은총은 진리의 말씀을 터득함에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경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잠32:7과 욥12: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해가 오랜 자 또는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자에게 명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구하고진리를 배우며 많이 경험하고 또 많은 경험자에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9. 화평케 하는 자들 (약 3:18)  목록으로


본문에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5:9에도 같은 뜻이 있는데, 원문의 뜻을 종합하면 “화평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마5:9,είρηνοποιοὶ:peace maker,약3:18,ποιουσιν ειρηνην:making peace).

1. 왜 이 시대에 화평치 못한 일이 많을까요 ?

1) 예언이 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세에 검을 주러 오셨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도가 영적 전쟁을 잘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고, 실제적 예언은 마24:12에서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 하셨고, 딤후3:1-5에서도 말세에는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거역, 원망, 부정, 참소, 배반, 쾌락 등으로 싸움이 많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2) 싸움의 실제적 원인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약4:1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의 살인은 시기 때문에, 다윗의 음행과 살인은 육체의 정욕 때문에,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은 명예욕 때문에....모든 불화의 원인들이 다 욕심과 이기주의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삼국풍류>란 책을 보면 신라 47대 헌안 왕이 두 딸만 있고 왕자가 없자 옹렴이란 장군으로 큰 사위를 삼아 48대 경문 왕으로 계승시켰는데 왕비된 영화 공주가 동생 성화 공주만큼 인물이 못나서 왕이 그 처제를 둘째 왕비로 삼고 왕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본 왕비인 언니가 시기가 나서 동생을 미워하고 동생의 방에 뱀을 넣어 왕과 함께 봉변을 당하게 하고 그 사이에서 난 왕자를 음흉한 방법으로 죽이고 핍박을 하니까 동생이 왕후를 포기하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2년 후에 왕실에 벼락이 떨어져서 큰 왕비의 집이 파괴되고 큰 왕비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절에 있는 왕후를 데려오려 하니까 중이 되었기 때문에 속세로 못 내려 왔다는 역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형제간에도 통제가 안되는 모양입니다. 또 이방 종교에 귀의한 사람도 세상 정욕을 단절하기까지 하는데, 성도가 욕심에 사로잡히면 어찌되겠는가 ? 하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3) 성경에는 무지가 싸움의 발단이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무지무각한 자가 흑암에서 행한다”(시82:5), “우준하고 무지한 자가 지껄이고 오만하며 자긍한다”(시14:4,94:4),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호4: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알지 못한 탓이라”(눅23:34)고 하셨습니다.

‘퀸시 라이트’란 사람이 전쟁사를 연구하였는데, 인류 역사 4,000년 중에 평화로운 시대는 300년 뿐이었고, 1480-1940년까지 460년 동안에 전쟁이 영국에서 78회, 불란서에서 71회, 서반아에서 64회, 러시아에서 41회, 독일에서 23회, 중국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미국에서 13회였는데, 도합 310회의 전쟁 중에 110회가 인디안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기 때문에 무지가 인류 불화의 원인이었음을 증명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무지가 사람을 잡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

2. 어떻게 하여 화평을 만들 것입니까 ?

1) 성도가 화평의 사명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고후5:18에서 성도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간에 싸우는 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지친 백성들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추구하였으면 그들의 수도 이름이 “예루살렘”이고, 인사말이 “샬롬”(평화)이겠습니까 ? “예루살렘”의 “예루”는 “여호와 이레”의 “이레”입니다(창22:14). 그래서 “이레살렘”의 뜻이 “평화를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성도들이 평화 유지의 선구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정치가 “코부렌”(1804-1865)은 귀족을 거절하고 평민이 된 사람인데, 그의 명성이 높았을 때 그를 명예롭게 해주는 방법으로 죽은 후에 열왕이 묻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해 주겠다고 하였을 때 “나는 전쟁한 왕들의 무덤 곁으로 가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2) 전쟁이 평화의 수단이 아님을 알아서 전쟁 방지에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현실 세계는 전쟁이 평화 유지의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 보면 전쟁이 평화의 대적이 되고, 연속적인 갈등의 원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200년을 끌어온 십자가 전쟁(11-13세기)도 평화 정착을 못시켰고, 전쟁으로 정치 야욕을 꿈꾸던 히틀러도 1945년 3월 19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패전의 소식을 들으면서 방공호에서 자살하였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도 그들의 침략 때문에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 따라서 인류는 항상 전쟁 억제를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먼저 자신의 생활에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키고 성도 자신이 평화 운동에 산파 역할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라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화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리고 이웃과도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을 때 우선 자기 마음에 평화를 얻을 것이고(엡2:14), 만물과 성도 사이에도 화평을 이룩할 것이며(골1:20), 화목하는 직책의 사명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고후5:8,19).

② 화목하는 직책의 사명을 느끼면서 평화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국 박물관에 “개통”이란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 통신줄이 끊어져서 많은 군인들의 생명이 위기에 처하였는데, 한 통신병이 끊어진 통신줄을 잊는 장면으로서 연장이 없는 형편에서 손톱과 이빨로 줄을 깍아 접선을 시키는 그림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림 이름이 “개통”이란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를 만들어야 할 성도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힘쓰고, 불화의 대상들이 있으면 그들과 자주 만나고, 공통점을 찾고 양보하면서 화해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화평으로 심어야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위에서 주시는 지혜를 힘입어 성결, 관용, 양순, 긍휼, 진실, 공평을 내세워 화평의 일선에 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약3:17).


 

제 8 과 여러 가지 교훈 (약 4:1-7) 목록으로


이 말씀 1절을 보시면 “싸움(다툼)의 원인이 인간 지체 속에 있는 싸우는 정욕 때문”이라고 하셨고, 2-3절을 보시면 성도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만 얻지 못하게 되는 원인 세 가지가 있는데,

① 욕심, 살인, 시기, 다툼 등 악으로 행하기 때문이요,

②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③ 구하여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하셨고, 4절에서는 “성도가 간음하는 여인처럼 세상과 벗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극히 불행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깨달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으며, 6절은 “더욱 큰 은혜를 받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요, 7절은 “마귀를 따돌리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도덕적 생활에 관한 것과 신앙 생활에 관한 것을 다 말씀하셨고 제목이 여섯이나 되기 때문에 통합된 제목을 정하기가 퍽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교훈”이란 제목으로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싸움의 원인데 대하여(1절)

1)본문의 싸움이나 다툼은 같은 뜻입니다. 싸움이 무엇이냐?하면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싸움은 서로 안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편이 이기던지 한 편이 지면 싸움은 끝나는 것이고 싸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대처하든지 싸움은 서로 안 지려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며 퍽 불행한 것입니다. 싸움이란 형제 사랑(롬 12:10), 원수 사랑(마 5:44)에 반대되는 일로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범하는 것이고 또 마 5:23-24에 보시면 “이웃에게 원망들을 일을 행하였거나 화목을 못하였을 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막힌다”는 말씀을 보면, 싸움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 협력 세계에서 큰 불행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예수님은 어떻게 싸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셨지요. 마 4:에서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실 때 진리로 대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과는 다투지 않았다”고 마 12:1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해롭게 하는 바리새인들과 다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신 일도 없고 자기를 도와 줄 단체를 만드신 일도 없으며, 사람의 도움을 구하신 일도 없고 그대로 진자가 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를 대항하는 자에 대하여 이기는 방법은 곧 양보하는 것이고, 지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그러면 싸움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① 싸우는 사람보고 “너 왜 싸우냐?”고 물으면 반드시 상대방이 잘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잘못하였어도 못본척하고 안 싸우면 싸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싸움의 원인이 “자신의 지체중의 싸우는 정욕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② 우리는 지체를 생각할 때 손, 발, 이목구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 발, 이목구비는 싸움의 도구는 될지언정 싸움의 정신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싸우는 지체”는 정신적인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부패성을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롬 7:21에 보시면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름 법이 내 마음의 법(신앙 양심)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하시므로 한 인격 안에 신앙 양심과 부패성(성화되지 못한 부분)이 함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지체 중의 싸우는 정욕”이란 곧 자신의 인격의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따라서 저희들은 우리의 마음속의 싸우는 정욕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소멸시키도록(딤전 4:5, 히 12:29)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2.성도가 무엇을 얻으려 하지만 얻지 못하게 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2-3절). 사람은 누구나 소원이 있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성취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1)깨닫지 못하는 악인들은 욕심 내고 남을 시기하여 누르며 때로는 죽이고 다투어서 얻을 수 있는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강도가 돈에 욕심을 내어 사람을 죽이고 “돈을 가질 수 있었다”하여 그것이 소원을 성취하는 일이 되는가?할 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욕심, 살인, 시기, 다툼”은 절대로 좋은 것을 얻는 방법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망하게 만드는 방법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성도가 얻지 못하는 이유 두 가지가 있는데,

① 기도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② 또 하나는 기도를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주시려고 작정한 것도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서 주신다”고 빌 2:13과 겔 36:37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마 7:7에서도 “구하여야 주신다” 하셨으니까 반드시 기도로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힘쓰지 않으면서 좋은 것 갖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으나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한만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 중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정욕중심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실 때는 꼭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나도 원하는 것만 구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려는 기도는 잘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3.세상과 벗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으로 퍽 불행한 것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1)예수 믿는 성도가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깨우칠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마땅히 복음 사역자가 일깨워 드려야 할 것입니다.

2)“세상과 벗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드립니다. 어떤 것이 “세상과 벗되는 것”일까요, 술에 끌리고 담배에 끌리며 도박에 끌리는 것은 분명히 세상과 벗하는 것이겠지요, 또 노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에 끌리며 사치와 색욕에 이끌리는 것도 역시 세상과 벗하는 것이겠지요?

①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② 또 세상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숭배하고 그것들을 의지하며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③ 세상은 성경을 표준으로 따르지 않고 사람의 취미대로 시행하는 세계입니다. 성경은 게으르지 말고 세월을 아끼며 참되고 의롭고 유익한 일만 하라고 하셨는데, 유익하지 않은 일로 헛된 세월 보내기를 좋아한다면 그것도 세상과 벗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④ 또 이 세상을 성도의 전체의 소망인 양으로 생각하여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역시 그것도 세상과 벗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사실들을 다시 요약하면, 성경을 뒤세우고 세상 사람 하는대로 따라가는 것이요, 참되고 의롭고 유익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며, 이 세상이 소망의 전체인 양 생각하여 하나님보다 세상살이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3)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 성도를 월수 같이 대하실 것이니까, 징계의 매 밖에는 맞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시 1:2)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생활만을 잘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요 14:23).

4)여기의 “음행하는 여인들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이들을 실제적 인물로 볼 수도 있으나 더 유익한 해석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음행하는 여인은 다른 남자와 음행하고 본 남편 앞에서 아닌 척하는 여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성도들이 세상과 단짝이 되어 음행을 하듯 재미를 보고 하나님 앞에 와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4.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깨달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내용은 “독생자로 구속해 주신 사랑”이지요

2)그런데 본문 5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너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 20:5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기까지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왜 예사로 알고 있느냐?하시는 것입니다.

3)여기에 “하나님의 질투”란 악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투”는 상대적 경쟁에서 성립되는 것이요 절대자 하나님에게는 질투여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질투(시기)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남편을 강하게 사랑하다가 배반당한 아내가 남편을 고소하여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고 이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을 모른다면 참으로 은혜를 배반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5.더욱 큰 은혜받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6절). 시기하시기까지 성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더 큰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후 6:2)”하셨고 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것이라(히 4:16)”고 하셨습니다. 어떤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까?

1)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그리고 또 10절에 보시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저희를 높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는 겸손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하는 것이 겸손인지를) 잘아셔야 할 것이고 또 더욱 큰 은혜는 “받아 본 자이어야만 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적으면 좋은 것을 좋은 줄 모릅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입니다.

3)여러분들이 저를 보실 때 “제가 건강하고 교회가 부흥되며 자녀들이 잘 되면 큰 복을 받았다”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고 또 받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겸손하게 살다가 죽는 것도 더욱 큰 은혜의 일종일 것입니다.

6.마귀를 따돌리는 방법입니다.

1)마귀의 역사는 누구에게든지 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고 베드로도 밀 까부르듯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이 마귀를 어떻게 물리칠 것입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①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②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한다고 하였습니다. “수풀에서 잠을 잘 때 뱀을 물리치려면 담배 꽁초를 뿌려서 냄새를 풍긴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성도가 마귀를 물리치려면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복종하면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계명을 순종하면 이는 하나님께 붙잡힌 것이요 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어 주심을 확신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귀의 대적이란, 바로 죄의 유혹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고, 죄의 유혹을 물리칠 때 따라오는 불이익이나 핍박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의 이상의 두 가지를 확인하면 절대로 근접을 못하고 멀리 도망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기도하셔야 할 제목은,

① 주여 말씀의 은혜로 정욕을 물리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웃과 다투는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②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소원을 이루게 하옵소서,

③ 세상과 벗되므로 하나님과 원수되지 않게 하옵소서,

④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⑤ 겸손할 줄 알게 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힘입혀 주시옵소서,

⑥ 말씀에 순복하여 마귀를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성도의 여덟 가지 시행할 일 (약 4:7-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여덟 가지 시행할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성도의 신앙 생활에 부합되는 “여덟 가지 생활”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하나님께 순복할 것이요,

② 마귀를 대적할 것이요,

③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이요,

④ 손을 깨끗이 할 것이요,

⑤ 마음을 성결케 할 것이요,

⑥ 웃음을 애통으로 바꿀 것이요,

⑦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 것이요,

⑧ 주 앞에서 낮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천적 생활을 강조하신 야고보 선생님의 교훈답기도 합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하시고 또 실천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순복은 곧 겸손의 표현입니다. 7절의 “그런즉”이란 말씀이 앞 절 말씀과 연관을 시켜 줍니다. 그 앞 절 말씀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런즉 하나님께 순복하라”하셨으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상대에 대하여 자기를 낮출 때에만 순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할 때 없겠지요, 성도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섬기니까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을 잘 하셔야 합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현이고 또 겸손의 증거이며 복받는 비결입니다. 또 하나님은 순종을 근거로 기적을 나타내기도 하셨습니다(요2:4-9). 기적의 성격을 사람이 설명할 수 없듯이 순종에는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2.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 대적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마귀가 눈에 보여야 대적을 하지?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귀신병 들린 자를 가두고 때리며 협박하는 것입니까? 귀신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폭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일까요?

1)죄 안짓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곳에는 파리가 오지 않습니다. 파리를 쫓으려면 청소를 잘해야 하는 것처럼 마귀를 멀리하려면 자신이 순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멀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히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마 4:1-11에서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실 때도 그런 방법을 쓰셨습니다. 마귀가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하였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응수 하셨습니다. 또 마귀가 “천하를 줄 터이니 자신에게 절을 하라”하였을 때에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 하시므로 말씀에 굳게 서신 것입니다. 마귀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물러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과 성경을 신뢰하고 순종하므로 말씀 위에 든든히 섰을 때 하나님이 마귀를 쫓아 주시는 것입니다.

3)마귀의 무기를 무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귀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마귀는 거짓과 현실정욕을 무기로 갖고 있습니다. 요 8:44에서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거짓을 제것으로 여긴다”하셨고, 또 마 4:8에서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유혹”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과 현실정욕이 그의 무기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진리 아닌 거짓을 배격하고 현실적인 영광을 별것이 아닌 것으로만 여긴다면 마귀는 자신의 무기가 쓸데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대적을 못해오는 것입니다.

4)막 9:29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질적인 악한 마귀를 쫓을 때 “특별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니까 마귀를 대적하는 최종적인 방법이 기도인 줄 아시면 될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방법으로 반드시 마귀를 대적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진리만 알고 현세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유혹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3.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창 5:24, 6:9) 그들은 다 큰 복을 받았습니다. 시 119:28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하셨고, 또 시 119:23에서는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1)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인 줄로 아셔야 하고

2)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3)성경과 부합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경과 부합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끌리며 살고 복음사명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이 가장 많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그렇게 까지는 못할지라도 노력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4.손을 깨끗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손은 행동을 나타내는 대표적 도구입니다. 따라서 행실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생활하는 중에 부덕이나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항상 합당하게만 시행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분별없이 급하게 하다가는 실수하게 됩니다. “손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손에 먼지하나 묻지 않도록 “깨끗하게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성도님들 중에 생활에 거리끼는 일이 있으면 이런 말씀에서 교훈을 받고 깨끗하게 정당한 생활만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성결케 하려면 착하고 정의로운 마음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거짓된 마음, 이기적인 마음, 궤휼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보복하는 마음, 투기하는 마음, 현실정욕에 사로 잡히는 마음, 현실 우상에 끌리는 마음, 다투고 대항하는 마음, 조급한 마음 등 모든 불결한 마음이 없어져야만 성결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마음이고 어린 아이같은 마음일 것입니다(빌 2:5, 마 18:4). 혹 저희들에게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과 그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시면서 회개하기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6.“웃음은 애통으로 바꾸라”고 하셨습니다(7분 설교 4집에 있음).

7.“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하셨는데 고전 7:30에 보시면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 때가 될 때 심판받을 자들로 인하여 기쁘지 않은 일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할 이유는

1)즐거움 그 자체가 일시적인 마음의 위로뿐이고

2)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값진 회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7:10). 따라서 이 말씀의 “근심”은 세상살이의 근심이 아니고 회개를 못하여 고민하는 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보면 웃을 일도 많지만 한편으로 저희들의 부족한 생활이나 문제있는 세계들을 볼 때는 근심이상 울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 울어야 할 일들을 깨달을 수 있는 성도라야만 심령이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8.“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을 성도가 없을 것 같으나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도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는 커녕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도가 어떤 사람일까요?

1)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지 않는 사람

2)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엄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3)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4)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높아질 수도 없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부작용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는 누구 한 사람도 그를 존경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마음 바탕에 새기시면서,

① 하나님께 순복하는 일,

② 마귀를 대적하는 일,

③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

④ 생활(손)을 깨끗이 하는 일,

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

⑥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는 일,

⑦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는 일,

⑧ 하나님 앞에 겸손하셔야 할 일을 위하여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10. 바로 사는 생활 다섯 가지 (약 4:1-10)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 설명은 강론을 참고하십시오. 이 시간에는 본문에 근거하여 “성도의 바로 사는 생활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기를 표준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표준으로 살아야 바로 사는 것입니다. 1절에서 “인간의 싸움과 다툼이 자기의 정욕으로 좇아 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표준이란 곧 자기의 정욕이고,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이 자기 정욕을 따라 행한 것이 범죄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성도가 유혹을 피하려면 자기의 생각이나 남의 꾀임을 받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기억하고 행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2:20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갈5:16에서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하셨으니, “성령을 좇아 행한다”(성령 감화)는 뜻은 성경에 붙잡혀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밖았다”고 하신 것입니다(갈5:24). 나의 계획, 나의 취미를 떠나서 주님의 인도하시는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 사도가 다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2. 세상의 욕심을 멀리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나만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한다”는 욕심도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 경쟁이 곧 “자기들만 은혜로워지겠다”는 추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은혜는 다같이 받아야 서로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5에서도 “서로 돌아 보아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은혜도 욕심을 내지 말고 함께 받아야 하거든 하물며 세상의 것들이겠습니까 ? 약1:15에서 “욕심은 죄와 사망을 가져 오고”, 본문 2절에서 “욕심은 기도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셨으니 욕심을 못버린채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퍽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욕심이 무엇입니까 ? 욕심은 허락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가지려는 충동이고, 또 분수에 지나치게 가지려는 것이며, 허영에 들뜨는 것이고 공평성에 지나치는 것입니다.

2) 욕심의 결과는 시기, 다툼, 살인 결국은 죄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돼지는 욕심을 내어도 한 끼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한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 타면 경마잡이를 두고 싶다”는 옛속담처럼 자가용 가지고 세계 관광하는 사람들이 달나라, 별나라까지 다니려고 할 것이니 그 욕심이 한정 없을 것이나 자기의 욕심만 차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않은 것은 바른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3.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5절에 보시면 “세상과 벗되지 말라” 하셨고, 세상과 벗이 되는 자는 마치 간음하는 여인과 같으니 곧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벗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렇게 되면 결국 본 남편과 원수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도 원수가 되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님이 시기하기가지 주를 사랑하고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약4:5).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하는 것처럼 하고, 세상 사랑은 이웃집 남자를 대하는 것처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깊이 빠져 사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 인생이 무상한 것만큼 세상도 무상한 줄 아시고 세상을 멀리 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본문 6-8절에 보시면 성도의 다섯 가지 생활 원리를 말씀하셨는데, 곧 겸손, 순복, 마귀 대적, 하나님을 가까이 함,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시1:2에서도 “복있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성도가 가장 복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창5:22,6:9).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영적 접근을 하고,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으며 말씀과 기도로 대화를 갖는 것이 동행이며 하나님을 교제함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면 하나님이 다른 것을 탓하실 문제는 하나도 없게되는 것입니다.

5. 근심하며 울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기뻐하고 염려하지 말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과는 정반대입니다. 왜 그럴까요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을 생각할 때는 기뻐하며 염려할 것이 없지만, 인간의 죄를 생각할 때는 근심하고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고후7:11). 소돔 성에 살던 롯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벧후2:8에 보시면 “소돔에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는데, 이는 의로운 롯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엎드릴 때마다 자신과 이웃과 사회의 죄악을 인하여 근심하며 울어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며, 죄악의 방지책을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① 하나님 표준으로 살고,

② 욕심을 떠난 생활을 하며,

③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④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⑤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애통하며 울지어다 (약 4:8-10)  목록으로


본문 9절에 보시면 “웃음을 애통으로,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고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성도가 왜 울어야 하며, 또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우셨는지를 살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성도가 울어야 할 이유는 세상을 살다 보면 울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플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낙망될 때, 감격할 때, 뉘우칠 때, 누구를 불쌍히 여길 때, 두려운 일이 있을 때 등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울음은 효력이 있는 것이 있고, 또 어떤 것은 울어보았자 아무 효력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플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낙심될 때, 두려울 때는 울어도 그 울음이 어떤 위로나 건설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감격의 눈물은 자신과 이웃에게 고마움의 느낌을 전달하게 되고, 회개의 눈물은 용서받는 일에 효력을 얻을 수 있으며, 불쌍히 여기는 눈물은 그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충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울라” 하신 것은 건설적인 목적을 위하여 성도들의 애통이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신 분입니다(계7:17,욥16:20,왕하13:14,눅7:44).

2.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우셨습니까 ?

1)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습니다(요11:35).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실 것을 아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울음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신 것”입니다(롬12:15). 인간이 죽으면 섭섭함과 슬픔이 있음을 사실대로 공감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사로처럼 다시 살 것은 아니니까 인생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함께 맛보신 후에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슬퍼하다가 소망이 생기니 기쁨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또 전7:3에 보시면 “슬픔과 근심은 사람의 마음을 좋게(부드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 많은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 보시면서 그 참상을 생각하시고 우셨습니다(눅19:41). 메시야를 죽이고, 온갖 죄악을 범한 조상들의 죄값으로 어린아이들을 메어치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등 전쟁 참패의 참상을 생각하실 때 울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현실에서도 이렇게 나타나거늘 하물며 지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 그래서 눅23:28에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고 예수님 자신도 같은 동족의 참화를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함께 죄를 탄식하신 울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애통이었습니다. 마26:37에서는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하였으나, 히5:7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을 앞에 두시고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감당하시고저 은혜를 구하시는 간절한 기도의 애통이었던 것입니다.

3. 저희들의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 가장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회개의 애통은 죄를 깨달음과 함께 돌이킴의 의지를 가지고 죄를 미워하며 박차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생활에서의 무지와 후회가 북받쳐서 애통의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애통은 돌이키는 감정의 표현이며, 애통이 있음으로써 그만큼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결심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 애통의 눈물을 흘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되어지지 않았는데, 은혜 받기 위한 새벽 기도를 2개월쯤 한 초겨울 새벽에 “내 영혼이 은총 입어...”하는 찬송을 부를 때 저절로 눈물이 나면서 약 3개월쯤 눈물 기도에 빠져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에게로 많이 가까워진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후에 군에 입대하여 1년 4개월만에 휴가를 얻었는데, 그 시기에 용문산 41기 수련회가 있어서 집에도 가지 않고 용문산 기도원에 가서 회개 기도를 하려고 결심도 하였습니다. 회개할 죄는 군인 생활을 하면서 부정한 돈을 먹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군부대의 부패 제도에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통회 자복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고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죄를 돌이킬 의지와 결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이 약하여 안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군부대에서 전출을 당하거나 상관에게 두들겨 맞아도 “그것은 죄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결심이 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은혜의 효력 없이 집에도 못 가고 휴가를 끝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도 합당한 조건에서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겔36:26에 보시면 “내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욕심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 하셨고, 행2:27에서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우리가 어찌할꼬” 하였으니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셔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갈망하는 자에게 그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개인적인 회개, 단체적인 회개, 민족적인 회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통회한 것이나, 다윗이 음행하고 통회한 것은 개인적인 회개인데, 이들은 선지자의 경고를 듣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중에 통회가 나왔고,

② 단체적인 회개로는 행10장에서 고넬료의 권속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다가 큰 감동을 받았으며,

③ 민족적인 회개는 느헤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느8:8), 니느웨 백성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도 선지자의 말을 듣는 중에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통회하기를 원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시고 기도를 힘쓰실 때 하나님이 통회의 감동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시34:18에도 보시면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고”(사57:15), “마음이 겸손한 자와 통회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돌이킴의 결심과 함께 통회하는 체험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10 과 다섯 가지 죄를 경계하심 (약 4:11-1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을 면밀하게 살피면 몇 가지 떠오르는 제목이 있습니다.

①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며 주의 뜻을 망각하지 말고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며 선행을 할 줄 알면서 고의적으로 피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섯 가지 죄를 경계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②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입법자시요, 재판하시는 분이며 능히 구원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며 또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고,

③ 인간이 미래의 일을 설계할 때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또 그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하라”하시므로 성도가 “믿음으로 미래를 계획할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상의 세 대목을 설명드리면 본문의 내용을 다 말씀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1.다섯 가지 죄를 경계하심에 대하여,

11절에서는 “비방하는 일과 판단하는 일을 금지하라”고 하셨고, 13-15절에서는 “주의 뜻을 망각하는 잘못”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16절에서는 “허탄한 자랑을 말라”하셨고, 17절에서는 “알고도 행하지 않는 고의적 범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저희들은 피차 비방하지 말며 또 형제를 비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11절). 갑이 을을 미워하여 그의 잘못을 발설하고 또 을이 갑을 미워하여 그의 잘못을 발설하므로 서로 불행하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만 의로운 위치에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자기의 의를 선전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는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욥”처럼 잘 산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욥은 상당하게 의롭게 살았으면서도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하였고 또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욥 25:6)”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인생이 하나님 앞에 대답을 못할 형편이 된 것은 인생이 그만큼 무지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이며 또 인생을 “벌레나 구더기에 비유한 것”은 인생이 더러운 죄악 속에 묻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을 구더기에 비유하셨는데 이 구더기가 어디서 삽니까? 구더기를 생각하면 벌써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이 죄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기를 의로운 위치에 올려 보았댔자 역시 죄가운데 사는 것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 사람이 서로 서로를 자랑해도 칭찬받을 위치에 오르기가 어려운데 서로 비방하면 그 비방하는 죄부터 죄의 분량이 더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비방한 상태에서는 결코 자신이 의로운 인정을 받는데 유익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절의 “형제비방”이란 역시 성도비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비방은 “누워서 침뱉기”란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비방도 역시 그와 같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부가 가족이듯이 성도들도 한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간에는 사랑으로 권면할 수는 있어도 비방하지는 마셔야 할 것입니다. 비방이란 “수근수근 하는 죄(롬 1:29)”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본래 비방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다 듣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자기와 뜻이 통하는 사람에게만 수근수근하는 말로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비방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알아도 괜찮은 말과 신실한 사실만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2)형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① 여기의 형제도 역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제아닌 불신자들은 판단할 수 있는가 할 때 한 가지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불신자이니까 하나님의 영광 밖에 있다”는 판단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히 11:6과 요 3:16에 이미 발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발표가 없으면 그것도 삼가야 하겠지요.

② 그러면 “판단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잘못에 대하여(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상태에서) 재판관 노릇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재판할 수 있는 권세나 직임 하에서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도 아닌 상태에서 성도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③ 성도가 성도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신 율법에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민 12:18, 창 16:5, 레 19:18) 그 율법을 위반하고 비방과 판단을 하였으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짓밟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 하나님이 재판자요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12절). 사람은 율법의 준행자일 뿐 재판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직책에 관한 것을 월권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④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을 푸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네가 누구관데 이웃을 판단하느냐?”하셨는데 이 말씀은 “재판관이 아니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재판관(교회적 재판관, 사회적 재판관)만 정죄의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장점과 단점도 평가할 수 없느냐? 할 때, 자기와 관계있는 상대자의 장점과 단점을 평가하는 것은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재판자의 입장에서 정죄 심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신입사원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여러 사람 후보 중에 시장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후보 인물들을 평가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판단하는 일과 필요에 의하여 평가하는 것은 “서로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성도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거나 앞세우지 않는 잘못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성도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을 송두리채 뒤 엎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이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55: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는 무슨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채 자기 생각대로만 시행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성경에 위반이 없는가? 또는 기도하고 시작하는가?하는 것입니다.

② 어떤 성도가 농촌에 사는데 “오늘이나 내일 중에 어떤 도시로 이사가서 1년만 살면서 장사하여 돈을 벌어야 하겠다”하였으면,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고 성경에 위반되거나 가책되는 것이 없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요, 또 자기 생각대로 안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모저모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를 판단하여 시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 가서 1년을 못있을 수도 있고 또 돈을 못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는 지장이 없다”고 확신한다면, 그런 일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경영하는 성도가 계획의 목적과 방법을 하나님의 뜻에 두지 않거나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은채 기도의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한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4)허탄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허탄한 자랑이란 “나도 도시에 가서 장사하면 1년 안에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결국은 “부자될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① 이것이 왜 허탄합니까?

㈀ 사실은 도시에 가서 1년을 살게 될지 그 안에 죽을 지를 모르는 상태입니다.

㈁ 장사하여 꼭 이익이 남을지 안 남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 그리고 돈은 의식주에 필요할 뿐 영혼도 구원 못하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 49:6, 딤후 6:10). 삼풍 사장의 최후를 상상해 보십시오. 따지고 보면 재물만 허탄한 것이 아니라 영구성이 없는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이나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허탄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② 따라서 인생이나 세상의 것은 다 허탄한 것이니까 자랑이 못되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인생도 지식도 젊음도 기술도, 돈과 직장도 다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5)“선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안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나 바르게 행하는 일에 대하여 깨달았으면 시행하셔야 할 것이요, “선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의 다른 정욕에 이끌려서 고의로 시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허탄한 것이다, 악이다, 죄다”라고 지적해 주실 때는, 그만큼 강조하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입법자요 재판자라 하셨고, 15절에서 하나님은 “뜻을 나타내신 분이요 구원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1)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타협없이 복종하셔야 하고

2)하나님만 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 의탁하셔야 하며

3)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성경으로 나타내 주셨음을 아셔서 모든 일을 성경 안에서 깨달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그리고 성도들이 미래의 일을 계획할 때는 언제나

1)하나님의 통치 섭리를 앞세우고

2)인간의 무상함을 참고하셔야 하며

3)반드시 영광돌릴 목적과 영광돌리는 방법으로만 모든 것을 계획하셔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주여 바르게 사는 지혜와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힘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있으셔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제 11 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심 (약 5:1-11)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1-6절 말씀으로 “부자에 대한 경고”이고 또 한 대목은 7-11절 말씀으로 “매사에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읽는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니라(9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제목으로 정한 것입니다.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은 주님의 심판이 “멀지 않다” 또는 “곧 시행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세와 재림 때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 밖에 서 계시다”하는 것은 집안에서 일을 끝내고 나가자 마자 심판자를 만날 수 있고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저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재물에 부요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은 부자라 하여 무조건 심판하시는 분인 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1)재물은 하나님이 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신 28:2-8). 창 26:12에 보시면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여....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귀한 일인 것입니다.

2)그런데 왜 부자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할 때 이는 부자가 재물과 관련하여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범하였을까요?

① 3절 끝에 보시면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까? 이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도 말세였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주후 47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나타난 “말세”의 의미는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 재림 때의 말세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마 23:37-38에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을 것을(약 40년 후에) 예고하시면서 슬퍼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부자들은 이런 예고가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신앙보다 물질을 중히 여겨서 재물 쌓는 일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심판받을 죄건이 된 것입니다. 혹 “40년 후에 말세가 된다”하였다면 있는 자들이 크게 각성하여 상당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미리 나누어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재물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② 그들은 재물을 쌓을 때 정당한 축복으로 재물을 쌓은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여 그 재물을 늘린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큰 기업체에서 사원들의 봉급을 하루만 늦게 주어도 거기에서 떨어지는 상당한 이자를 착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인건비를 늦게 지불하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면 그것이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착취로 늘린 재산은 심판 때에 아무런 가치를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3절에 보시면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은과 금은 녹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재물이 아무런 힘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망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무너지고 자식을 메어치고 아이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판에 부자들이 모아놓은 재산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삼풍이 심판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나 삼풍처럼 무너질 때 그의 재산은 녹슨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의 재산이 불처럼 그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③ 재물을 옳게 쓰지 않고 “사치, 연락하며 마음만 살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생하는데 부자가 사치, 연락을 한다면 보기 좋은 일이 아니겠지요, 또 “도살할 날에 마음을 살지게 한다”는 것은 심판자에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도살”이란 것은 “짐승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판 때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을 잡을 때는 살진 고기를 보고 잡는 것인데 육체의 살은 안찌고 반대로 마음의 살만 쪘으니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살찜”이란 교만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항상 가난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데(마 5:3) 오히려 마음이 살쪄있는 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이렇게 재물을 사치, 연락에 소비하고 재물의 힘으로 마음을 살지게 한 것이 심판 받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④ 다음 마지막 부자의 죄는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인 것입니다. 돈의 힘으로 의인을 정죄하여 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의인은 아무리 대항하려고 해도 힘이 없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부자를 상대로 재판을 하는데 속히 종결이 안되고 오래 끕니다. 분명하게 이길 수 있는 사건인데도 오래 끄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검사는 소환하고, 판사는 연기하여 소송자들에게 괴로움을 준다고 합니다. 부패한 관청에서는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 사실일 정도로, 그런 실례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 가난한 자는 죄가 없어도 억울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잠17:23)

3)하나님은 이런 잘못된 부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시고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애통하라”하셨으니(1절) 여기의 “울고 애통해야 하는 심판”이 마지막 때의 심판을 의미하는가? 할 때에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 적은 물질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시는 교훈과 동떨어진 면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물질은 잘못 취득하거나 잘못 소비하거나 물질로 인하여 신앙에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매사에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라(7-11절)”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인간들의 부정수법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의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마지막 심판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그래서 “주님의 강림하시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① 잘 기다리려면 마음을 굳게 하고 잘 참아야 합니다(8절).

② 참는 자는 서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않아야 심판을 면한다”고 하셨습니다(9절). 남을 원망하는 것은 죄를 가중시킬 뿐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또 심판주를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해야 합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하셨고 또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신 것을 보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조급합니까? “흙더미에 묻혔던 사람이 17일이 지났는데 5일쯤 된 줄 알았다”하였으니 그가 날짜를 짧게 잡은 것이 잘 견디는 힘이 된 것처럼 심판자가 눈 앞에 보이는 듯이 생각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인내하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④ 또 농부가 씨를 심고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결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으며 참은 것을 본받고(마 5:12,23:34,37, 행 7:52, 히 11:33) 또 인내자체가 복된 것과(마 5:11, 갈 5:22), 욥의 인내와 욥에게 주신 결말을 생각하시면서(욥 42:12-17) 주님의 심판 때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11절) 연약한 성도의 괴로운 일과 억울함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부자들에게 경고하심 (약 5:1-6) 목록으로


1. 본문 1절에 보시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부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부자에 해당되는가 ? 할 때에 그 표준을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히 “부자”라는 표준은 가난한 자를 상대한 용어이기 때문에 재물을 적게 가진 자보다 더 가진 자를 의미하고, 재물의 평균 소유보다 더 가진 자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평균 이상의 재물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들에게 장차 임할 고통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 장차 고통이 임할 것이니 미리 울고 통곡하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통곡하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아 가진 재물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그 재물과 관련한 죄악으로 인한 보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돈이면 다인 줄 알고 애써 모아 놓은 재물이 왜 무용지물이 되겠습니까 ? “재물이 썩고 옷이 좀먹으며 , 은금이 녹슬고, 그것이 불같이 살을 먹는다”(2-3) 하셨으니, 이 말씀은 모아 놓은 재물이 소용없는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심판의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가 독 안에 돈을 넣어 놓고 화폐 개혁이 된지 몇 년만에 꺼내니 아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려 손해를 보신 일이 있었습니다. 또 누가 큰 집에서 살면서 많은 가구를 진열하였다가 가세가 기울어져 작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니까 가구마다 불편한 물건이 되는 것을 본 일도 있었습니다. 애써 모은 재산이 왜 무용지물이 될까요 ?

① 전쟁으로 나라를 잃어도 무용지물이 되고,

② 자신의 육신이 병들어 쓸 수 없게 되어도 그러하며,

③ 사기를 당하거나 자녀들이 탕진을 하여도 그렇고,

④ 최종적으로 내세에서는 돈이나 물건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만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책임자도 물질을 필요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는 “내가 왜 재물을 모았나 ? 내가 왜 재물을 좋은 것으로 잘못 알았을까 ?” 하고 후회하게 될 것인데,

⑤ 또 그 재물로 인한 범죄 때문에 지옥의 고통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에 더 탄식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재물로 범죄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받고 구원은 받겠지만 자기가 생각하였던 상급들은 거의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눅16:25).

2) 재물과 관련한 범죄는 무엇일까요 ?

① 우선 돈을 버는데 힘을 쏟은 것이 “돈이면 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신앙적이 아님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는 반드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큰 기업의 주인들도 그가 성도이면 그의 많은 재산을 사회나 공유의 주식으로 돌리고 자신은 적당한 재산과 운영권만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하게 사신 취지가 그런데 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고후8:9). 그런데 어떤 설교자는 가난을 믿음 약한 죄로 책망하면서 성도가 사치하면서 잘 사는 것이 큰 복이요, 마땅한 일로 선전하는 사례가 있으니 이것은 진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만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더 섬겼더라면 부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마6:24).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은 받아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부자가 돈을 벌 때 부정하게 번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품꾼의 인건비를 적게 주거나, 늦게 주거나, 떼어 먹으면서 재산을 모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인건비를 적게 받아도 그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된 것이며, 따라서 있는 자만 더 부자되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노사 관계의 미묘한 문제까지도 지적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나 기업주는 부정한 보수에 대한 원성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부자는 재산을 잘못 사용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딤전6:9-10). 예를 들면 반드시 도와야 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사치와 연락으로 인생과 돈을 낭비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돈의 힘으로 옳은 자를 정죄하며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정죄받고 죽은 자는 대항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부자가 재력으로 의인을 정죄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아셔야 할 것이고, 그 대신 재력에 눌린 의인은 정죄와 죽임을 당하였으면서도 대항하지 않은 사실과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선으로 악을 상대하고, 손해되는 일들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심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이상의 죄악들로 인하여, 범죄한 부자는 불로 살을 태우는 것 같은 고통의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3절,눅16:23-24).

3. 결론적으로 성도는 부자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셔야 할까요 ?

1) 부자를 부정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 어렵다” 하셨고(마19:23),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딤전6:10) 하셨으며, “부자는 고통하고 애통한다”(1절) 하셨으니 어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2) 적게 갖고 부자 못된 것을 큰 은혜로 여겨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①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셨고(고후8:9),

②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가까이 해 주셨으며(막8:1-3),

③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안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요(잠30:8),

④ 빈천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체험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 안하게 되는 체험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빌4:11,마6:25).

⑤ 또 재물이 적으면 자동적으로 재물을 의지할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가까이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부자들을 경고하신 말씀에서 적게 가진 성도들이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며(딤전6:8,히13:5), 물질의 가치보다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교제하는 복을 귀하게 여기셔서 날마다 하나님의 간섭과 관심 속으로 이끌려 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2 과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 (약 5:12-20) 목록으로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절 말씀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교훈이고, 둘째는 13-18절 말씀으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에 대한 말씀이요, 셋째는 19-20절 말씀으로 “미혹을 당하여 진리 떠난 자를 돌이키게 하는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 중에 본문을 많이 차지한 두 번째 대지의 말씀인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를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1.성도가 맹세하지 말 것을 강조하셨습니다(12절). 우선 이 말씀의 자세한 교훈은 본인이 집필한 마 5:33-37의 강론문을 참고 하실 수 있습니다.

1)“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하심은 맹세를 강하게 금지시킨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2)“맹세”란 미래의 실천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3)왜 하나님이 미래의 실천 약속을 금지 시켰을까요? 그 이유는,

① 미래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② 맹세 그 자체가 진실치 못한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③ 또 미래가 자신에게 허용되는 한, 맹세를 지킬 수도 있지만 그 기회와 능력이 무한히 연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④ 따라서 평상시부터 진실함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요 맹세하고 지키지 못하면 결국 거짓말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4)그러면 왜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①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다른 아무것도 자기의 것이나 자기의 관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보증물을 내세우며 맹세하는 풍속이 옛날부터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맹세자들은 자기의 소유나 자기 관할에 있는 불변한 것을 보증물로 내세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것을 임의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맹세의 확고성을 증명할 만한 보증물은 변하지 않는 자기의 것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5)그래서 현재의 상태를 사실대로 시인하는 것만이 최선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하나 현실이 어떠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므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는 말씀이 바로 현실적 상태를 사실대로 말하므로 진실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추측을 사실처럼 말하거나 미래의 미지한 일을 기정사실처럼 나타낸다면 거짓말을 자행하는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병자를 위한 기도와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에 대하여(13-18절)

1)고난이 있을 때 기도하고 즐거움이 있을 때 찬송함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어야 하고(욥 1:21) 즐거운 일이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시 100:1,4)

2)“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병든 자는 어려운 병, 쉽게 이기기 어려운 병을 뜻하고,

② 교회의 장로란 그 당시에 새롭게 세운 신약 교회의 장로들로서 사도들과(벧전 5:1) 다른 장로들(행 15:4,6,23)을 의미하며,

③ “장로들을 청하라”는 뜻은 명령이기 보다 권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이런 진리를 몰라서 시행을 못하는 경우가 이고 또 어떤 성도는 알면서도 목사(목사도 장로의 일종임;교회 헌법3장 2조)장로를 초빙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은혜를 받으려고 초빙을 한 경우이면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병고침의 기도를 위하여 초빙받은 장로들은 기도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기도하고, 또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저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② “기름을 바른다”는 뜻은,

㈀ 기름이 상처에 바르는 약용이었기 때문에(사 1:6, 눅 10:34) 약 처방을 병행하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 여기의 “기름”을 성령님의 상징으로 생각하여(고후 1:21-22, 요일 2:20,27) “기름바르는 뜻”을 성령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 또 병자에게 기름바르는 전통을 그대로 인정하여 7세기 이후에 천주교에서는 종유식(죽어가는 자에게 사죄의 표시로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방인의 습관이나 전통을 답습하지 않음을 생각할 때 후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마 15:3, 왕하 16:3).

4)병자를 위한 기도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으나(13절) 교회 장로들의 기도를 권장하시는 이유는,

① 신앙의 연조 있는 장로들이 믿음의 기도를 잘할 수 있고,

② 장로들은 교인들의 감독자이므로 교인을 살필 책임이 있기 때문이며(행 20:35),

③ 또 하나님께서 장로들의 기도를 받게 하실 때는 그만한 은사를 나타내 주실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10:12-13).

5)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일까요? 믿음의 기도는,

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요,

② 반성과 회개와 깨달음과 충성을 나타내는 기도요,

③ 병고침 자체와 모든 생활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에는 불신앙적인 것과 잘못 깨달은 지식과 완고함과 사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의 뜻에 합당하면 주께서 저를 일으켜 주실 것이요 또 죄로 인한 징계로 질병을 주신 것이었으면(고전 11:30, 신 28:27-28, 삼하 12:15, 계 2:22) 죄사함의 은혜와 함께 병도 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막 2:9). 따라서 성도는 병 낫기 위한 기도를 서로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서로 서로의 연악과 죄를 말하고 합심 협력하는 기도를 통하여 은혜받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15절의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뜻은 그 병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이므로 구원의 의미가 병고침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6)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습니다(16절 끝). ① 이 말씀의 의인은 의롭다함을 받은(롬 8:30) 모든 신앙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순결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욥 1:8).

② “간구”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요,

③ “역사하는 힘이 많음”은 의인의 기도 즉 깨끗함을 인정받은 성도의 기도일수록 응답을 잘 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④ 본문에서는 의인의 기도의 실례로서 엘리야의 기도를 소개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왕상 17:1-18:1, 18:42,25에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인간성)이 꼭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구하지 않았을 때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 것이라(왕상 17:1)”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비오지 않은 기간이 3년 6개월인 것은 본문에서 나타내 주신 것이요, 엘리야 당시에 바알 선지자 등을 죽인 후 다시 기도하였을 때 비를 주신 것입니다(왕상 18:42-45).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은즉 땅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18절). 이런 사례를 말씀하신 것은 의인의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과 순결은 기도 응답의 열쇠입니다. 사도나 사도적 사역자가 없는 이 시대에 병고침을 위한 기도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힘쓰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후 시대에는 사도적 이적이 나타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3.미혹을 당하여 진리 떠난 자를 돌이키게 하는 사역에 대하여(19-20절)

1)이 말씀의 “진리 떠난 자”란 육신의 병에 반대되는 영적 신앙의 병자를 뜻합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미혹을 받아 그릇된 신앙으로 기울어져서 이단의 노선으로 가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에 성도들은(내 형제들아;19절) 그 진리 떠난 자를 잘 권면하여 돌이키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2)이 때에 권면을 잘하여 미혹된 성도를 건졌으면 그 영혼을 사망의 길에서 구원한 것인 만큼, 그의 허다한 죄도 함께 덮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신자가 예수를 믿으면 그의 불신앙 때의 죄를 함께 용서해 주는 것처럼(요13:10), 진리 떠난 상태에서의 죄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죄를 모르고 범한 자가 무슨 죄는 범하지 않겠으며 또 하나님을 중심한 진리를 떠난 자가 역시 무슨 죄는 범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사망에 이르는 죄에서 돌이켰으면, 사망에 이르는 상태에서 범죄한 도덕적 죄악은 그보다 적은 죄이므로 역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야고보서는 다른 서신처럼 끝을 서신의 격식으로 논술하지 않은 것이 특색입니다. 시작할 때 문안으로 시작하였으므로(약 1:1) 끝에서는 생략하였다고 볼 수 있고 또 이 서신 자체를 교훈집으로 전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성도가 맹세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진실한 세계를 추구하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서약이나 임직 서약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것은 맹세의 성격보다 교훈을 일깨워 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를 위한 기도의 지식과 이단 신앙에 미혹된 자를 돌아오게 하였을 때, 다른 모든 죄에 대한 용서의 긍휼까지 베풀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은 사망에서의 구원이며 사망은 불신앙의 죄를 전제하는 만큼 사망의 죄를 용서받는 사랑 속에는 도덕적인 죄도 함께 용서받는 긍휼이 포함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실천 행위를 강조한 만큼 그 실천의 목표는 사랑이며, 사랑의 최고 실천은 용서임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설교보충 13. 고난 중의 기도 (약 5:13-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 중의 기도”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성도가 고난 당하는 일이 있으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평소에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어떤 고난이 있을 때는 더욱 기도하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권고로 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고난은 여러 가지로 받을 수 있을 것이나, 크게 나누면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이나 억울함, 경제적인 빈곤이 정신적 고통을 일으킬 수 있고, 질병이나 경제적인 빈곤이 육체적 고난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 고난이 신앙적 고난이나 사랑 실천의 고난일 경우에는 큰 가치가 있고, 혹 범죄로 인한 고난일 때는 회개하기 전에는 어떤 유익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범죄로 인한 고난 외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하튼 정신적, 육체적 고난이 있을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차원에서 기도를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시50:15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셨고, 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자기 앞으로 초청하셨기 때문”입니다(마11:28). 그러니까 성도는 괴로움이 있을 때 반드시 기도하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기다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13).

1) 즐거운 일이 무엇일까요 ? 즐거운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과,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을 받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 받은 일, 기도 응답을 받은 일,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한 일 등이 있을 때 그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뜻으로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찬송은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 경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3. 병든 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 하셨고, 질병도 고난이므로 그들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되 기름을 바르며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14). 이 말씀에서는 세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장로를 청하는 이유이고, 또 한 가지는 기름을 바르는 의미가 무엇인가 ? 하는 점이며, 셋째는 믿음의 기도의 성격입니다.

1) “장로들을 청하라”는 뜻은 교회의 감독자들 또는 지도자들을 청하라는 뜻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로 본다면 “목사와 장로들을 청하라”는 뜻입니다. 목사도 장로의 일종입니다. 병으로 고난 당하는 성도가 스스로 이길 힘이 부족할 때 교회의 목사나 장로를 청하여 기도를 받는 것은 성경이 권장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 감독자들은 성경이 명하신 사역이므로 적극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지도자들의 기도를 더 가까이 응답하실 뜻으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2)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신 뜻은 성령님의 역사를 상징함과 동시에 약을 쓰는 처방을 병행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유를 식용, 약용, 등불용, 제물 또는 성령님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였습니다.

① 성령님에 대한 상징은 구약 시대에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감람유를 머리에 부으므로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였고(출29:29,단9:25),

② 등불과 제물에 관한 말씀은 출27:20과 레2:1 등에 기록되었으며,

③ 약용으로 쓰인 말씀은 눅10:34에서 “불한당을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또 막6:13에서 “사도들이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할 때 실제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약용이 아닌 상징적 의미로 사용할 때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목적 이상의 뜻은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인가 ? 에 대하여,

① 성경 지식을 동반하는 기도(엡4:13),

②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는 기도(빌4:6),

③ 행실을 동반하는 기도(잠28:9),

④ 회개를 동반하는 기도(시66:18,눅18:14),

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마7:21,요일5:14),

⑥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막11:24),

⑦ 꾸준한 기도(눅18:1)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방법을 잘 기억하셔서 항상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4. 믿음의 기도가 응답될 때 “주께서 저를 일으키사 병자를 구원하신다” 하셨습니다(15). 기도는 성도가 하고, 일으키시는 것은 주께서 하십니다. “일으키신다” 함은 병을 낫게 하심이요, 구원의 의미는 병고침과 영혼의 구원을 아울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사하심으로(15) 구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바울의 경우처럼 죄와 상관없이 질병이 임하는 경우도 혹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죄의 징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기도를 할 때, 죄를 서로 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16). 많은 성도가 병상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나 거론하는 것을 꺼리면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태도입니다. 괴로움이 있을 때는 무조건 죄를 생각하고 거룩하여야 합니다.

5. 의인의 간구가 얼마나 크게 역사하셨는가를 엘리야의 기도 응답을 실례로 설명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그는 의인으로서 믿음의 기도를 드림으로 죽은 자를 살린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 영향을 주는 역사까지 응답을 받았으니 저희들도 기도 응답의 무한성을 믿고 고난 중에 합당한 기도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의 합당한 기도는 반드시 유익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