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히브리서

히브리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먼저 드리는 글 3

 

제1과 예수님과 계시 (히 1:1~3) 7 바로가기

제2과 예수님과 천사의 비교 (히 1:4~14) 10 바로가기

제3과 복음의 확실성 (히 2:1~4) 12 바로가기

제4과 존귀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 2:5~10) 14 바로가기

제5과 도성인신의 증거와 그 이유들 (히 2:11~18) 16 바로가기

제6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18 바로가기

제7과 예수님과 모세의 비교 (히 3:2~6) 20 바로가기

제8과 타락하면 안될 이유 (히 3:7~11, 시 95:8~11) 22 바로가기

제9과 믿음을 견고히 잡으라 (히 3:12~19) 24 바로가기

     설교보충 1. 확실한 신앙 생활 (히 3:12~13) 27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매일 피차 권면하라 (히 3:13) 29 바로가기

     설교보충 3. 확신과 결과 (히 3:14) 30 바로가기

제10과 우리가 두려워 할 일 (히 4:1~3) 31 바로가기

제11과 천국을 사모하라 (히 4:4~11) 33 바로가기

제12과 말씀의 본질과 역할 (히 4:12~13) 3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하나님의 말씀과 나 (히 4:12~13) 39 바로가기

제13과 은혜를 사모하라 (히 4:14~16) 41 바로가기

     설교보충 5.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4:14~16) 43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은혜의 보좌 앞에서 (히 4:14~16) 45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은혜 받는 방법 (히 4:16) 47 바로가기

제14과 대제사장을 세우심 (히 5:1~10)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중보자의 조건 (히 5:5~10) 53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순종을 배움 (히 5:7~10) 55 바로가기

제15과 믿음의 성장을 원하심 (히 5:11~14) 57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믿음의 성장을 촉구하심 (히 5:11~14) 59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말씀을 깨닫는 은혜 (히 5:11~14) 61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신앙 생활의 단계 (히 5:11~14) 63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 (히 5:12~14) 65 바로가기

제16과 완전함에 나아감 (히 6:1~8) 68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은사를 맛보고 타락함 (히 6:4~6) 72 바로가기

제17과 미래의 풍성한 소망 (히 6:9~20) 74 바로가기

제18과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 (히 7:1~10) 77 바로가기

제19과 별다른 제사장 (히 7:11~19) 80 바로가기

제20과 합당한 대제사장 (히 7:20~28) 83 바로가기

제21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 8:1~6) 86 바로가기

제22과 새 언약을 실현시키신 이유 (히 8:7~13) 89 바로가기

제23과 구약의 성전제도의 의미 (히 9:1~10) 92 바로가기

제24과 보혈의 공로 (히 9:11~22) 95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헌제와 효력 (히 9:11~22) 97 바로가기

제25과 제물과 열납과 중보와 재림 (히 9:23~28) 100 바로가기

제26과 영원한 속죄와 구원 (히 10:1~14) 103 바로가기

제27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감 (히 10:15~22) 106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온전한 믿음 (히 10:22) 109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 (히 10:22) 113 바로가기

제28과 믿음의 확실한 생활 (히 10:23~39) 115 바로가기

     설교보충 18. 모이기를 힘쓰자 (히 10:23~25) 1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9. 신앙 생활의 방법 (히 10:24~25)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20. 믿음의 전진 (히 10:32~39) 121 바로가기

제29과 믿음으로 받는 은혜 (히 11:1~6) 123 바로가기

     설교보충 21. 믿음에 대하여 (히 11:1~3) 126 바로가기

     설교보충 22. 세 가지 교훈 (히 11:6) 129 바로가기

제30과 믿음의 본이 된 사람들(1) (히 11:7~16) 131 바로가기

제31과 믿음의 모범자들(2) (히 11:17~23) 134 바로가기

     설교보충 23. 칭찬 받은 아브라함 (히 11:17) 137 바로가기

     설교보충 24.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 (히 11:8~10, 17~19) 139 바로가기

     설교보충 25. 시험에 대한 신앙 (히 11:17~19) 142 바로가기

제32과 믿음의 모범자들(3) (히 11:24~31) 144 바로가기

     설교보충 26. 천국 가는 신앙 생활 (히 11:22~31) 147 바로가기

     설교보충 27. 상주심을 바라봄 (히 11:24~26) 150 바로가기

제33과 믿음의 모범자들(4) (히 11:32~40) 153 바로가기

제34과 신앙 생활 잘하는 법 (히 12:1~13) 156 바로가기

     설교보충 28. 신앙의 운동 경기 (히 12:1~2) 160 바로가기

     설교보충 29. 경주자의 필수 원칙 (히 12:1~3) 164 바로가기

     설교보충 30. 예수님을 바라 보자 (히 12:1~3) 166 바로가기

제35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히 12:14~29) 170 바로가기

     설교보충 31. 신앙의 보호 대책 (히 12:4~13) 174 바로가기

     설교보충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히 12:14~17) 178 바로가기

제36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 (히 13:1~9) 181 바로가기

     설교보충 33. 저희의 믿음을 본 받으라 (히 13:7~8) 184 바로가기

제37과 히브리서의 마지막 말씀 (히 13:10~25) 186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히브리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집으로 출판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강론집은 필자가 목회할 당시에 이미 설교한 것을 모은 것입니다. 본래 이 강론집을 공동 서신 전체에 합본하려고 하였으나 분량이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서문을 또 쓰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고(빌2:16), 자세히 설명하며(눅24:27),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20)는 말씀에 입각하여 말씀 증언에 충실해 보려고 노력한 것이 이와 같은 강론집 몇 권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기성 교회 목회를 30년 하였지만 예수님 닮은 성도를 많이 양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목회적 능력에 한계가 있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끌리게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밝히고, 몇 권이라도 글로 남기는 것이 성직을 맡은 사명에 더 유익할 것으로 믿고 출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과, 평범한 성도가 보실 수 있도록 평범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읽으실 때는 필자가 한 글자라도 뺄 수 없어서 기록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셔서 주밀하게 읽으시고, 주밀하게 묵상하시면 상당한 은혜를 받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강론문을 기록한 다음 평소에 설교한 내용들이 있어서 히브리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 33편을 첨부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집필된 강론집은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디모데 전서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탈고되었는데, 다른 교육 재료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강론집을 남겨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8. 3. 26.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예수님과 계시 (히 1:1-3)목록으로


1. 히브리서는 이미 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기독교 신앙백과, 654p.) 바울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말씀입니다. 히브리인이란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정통적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14:13,39:14,고후11:22,빌3:5). 이 유대인들은 초대교회 당시에 팔레스틴 지역뿐 아니라(행9:22) 수리아의 안디옥(갈2:11-13), 이고니온(행 14:1), 헬라(행 17:13), 로마(행 28:17)에까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유일신 종교의 계승자들이었지만 진리를 잘못 이해하므로 천사와 예수님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였고(히1:5,14), 구원의 방편도 믿음이 아닌 제사 의식과 율법 행위에 있는 줄 알았으며 예수님의 탁월한 권위와 복음의 의미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 저자는

1)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계시를 소개하였고

2)구약의 의식적 율법을 복음적으로 해석해 주었으며

3)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절대자이심을 소개하였고

4)그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구원의 주가 되심을 나나낸 것입니다.

2.따라서 히브리서는 구원의 방법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복음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강조하신, 로마서와 갈라디아의 취지와 상통함이 있고, 또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의 규례를 영적으로 밝혀주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예수님이 절대자 되심”을 역설(力說)하신 말씀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율법은 이해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잘 알지도 못하고 믿으려하지 않는 잘못된 사상(유대주의적 사상)을 일깨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3.이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과 계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약계시의 방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구약계시의 방도로서,

① 구약 성경을 주신 시기는 옛적 구약시대였고,

② 구약 성경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③ 그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에게 주셨고,

④ 선지자들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계시를 받았으니 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란 다양한 계시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자연계시란 만물과 자연법칙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나타내 주심을 의미하고, 초자연 계시로서는 꿈이나 음성이나 환상이나 다른 모형적 의식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분과 뜻을 알리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초자연 계시가 집결된 것이 바로 특별 계시인 성경인데 구약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내용을 이상과 같은 영감(초자연적 방법)에 의하여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2절에서는 “계시의 마지막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시의 마지막 방법”이란 “모든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입니다.

① 여기의 “모든 날 마지막”이란 “계시를 주시던 시기중의 최후”(ἐν ἐσχάτου τών ἡμερών τοὐτων)란 뜻으로 이를 “선지자의 종말관적 술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날 마지막”이란 말씀이, 계시를 받는 “선지자 사역의 최후를 고하는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 시기에 끝내신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그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신 것과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요 또 최후의 계시란 뜻입니다. 물론 세상 끝 날에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는 있지만 성경 같은 특별계시를 주시는 일에 대하여는, 예수님의 계시가 마지막이고 또 이 계시를 전달한 사람들이 신약시대의 사도들이었으며, 그 전달된 계시가 바로 신약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감의 의미는 같지만 구약의 선지자를 통한 간접계시에서 예수님을 통한 직접계시로 끝내주셨음을 확신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③ 이리하여 구약의 말씀은 신약의 말씀으로 더 밝혀졌고 또 절정에 이른 것이며 예수님의 직접 계시가 구약 시대의 간접계시보다 더 탁월함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여기의 “예수님의 신약적 계시가 더 탁월하다”는 것은 말씀의 권위의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해석하는 면에서 더 으뜸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님의 계시가 절대적인가? 할 때 본문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후사이시며 창조자로서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시며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시며 또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본질이 같고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②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는 것은 만유를 지배하시는 목적이 아드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이양하신 것입니다(마 28:18).

③ 또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요1:2,3)

④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사 보존하시는 분이며

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십자가 구속) 하나님과 본질이 같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시고 형상이신 것이며,

⑥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절대자이심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을 주시는 것은

1)예수님의 신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절대자라는 확신과

2)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에게 모든 영광과 권위를 이양해 주셨음과,

3)예수님 자신의 계시가 하나님 본체를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가장 절정에 이른 것이며 최후 완결적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① 신약의 계시로 구약을 밝히게 되고,

② 예수님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③ 신약을 완성시켜 주신 날이 계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특별계시와 같은 성경은 후 시대에 더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 2 과 예수님과 천사의 비교 (히 1:4-14)목록으로


1.이 말씀은 예수님의 탁월하심을 천사에 비교하여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절대자이심을 저희들은 잘 알지만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천사를 하나님만큼이나 숭배하는 잘못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욥 1:6과 38:7에 보시면 천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호칭한 사실이 있습니다만,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가족을 의미할 뿐 친자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도 천사숭배를 경계하신 말씀이 있음같이(골 2:18) 많은 유대인들이 천사숭배와 관련된 신비주의에 도취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2.그런데 이 본문 말씀은 국문학적으로 어색한 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원문에 가깝도록 번역을 시도한데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한 “현대인 성경”을 보시면 알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하여는 탁월한 신분과 특권을 말씀하신 바가 있지만 천사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3.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천사에 대한 증언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예수님에 대한 증언.

① 예수님은 천사에 비할 때 아주 뛰어나실 만큼 “위대한 분이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이 바로 4절의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나시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얼마큼”이란 과소 평가의 뜻이 아니요 상상을 초월하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피조물인 천사와 창조자 예수님과는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②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다(4절)”하시고 그 “아름다운 이름의 기업”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하셨거나 또 하나님이 천사에게 “아버지가 되어줄 것이니 너는 내 아들이 되라”하신 일이 있었느냐? 는 것입니다. 시 2:7과 89:26에서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는데, 그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신 것일뿐 천사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란 것입니다(5절). 또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님 재림시에 자기의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경배하라”고 명령하셨으니(살전 4:16, 살후 1:7) 천사는 예수님을 경배해야 할 입장이란 것입니다. 6절의 “맏아들”이란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되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된 상태(롬 8:29, 마 12:49)를 의미하고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란 말씀은 초림이 아닌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8절에서는 “예수님의 왕권 통치의 보좌가 영영하시니 이는 예수님의 통치하시는 권위(홀)가 공평하시고 정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즐거운 뜻으로 예수님에게 은혜를 베풀어(기름을 부으심;마 28:18) 그의 동류들보다 월등하게(승하게) 하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기의 “동류들”이란 천국에 있는 존귀한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아무리 존귀해도 예수님이나 성도의 동류에 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10-13절에서 예수님은 창조자시요(10절) 변함없이 여전하여 영존하실 분이며(12절) 하나님이 자기의 원수들로 발등상 되게 하시기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신 분(시 110:1)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과 함께 다 의복처럼 낡아지다가 또 의복을 갈아입는 것처럼 없어지고 변하여 질 것이라(11,12절)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존귀를,

① 하나님의 맏아들,

②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

③ 왕권의 보좌가 영영한 분,

④ 공평하고 의롭고 동류들보다 승한 분,

⑤ 창조자이시며,

⑥ 영존자이시며,

⑦ 원수를 디디신 분이며,

⑧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라 하시므로 절대자 되심을 밝히셨습니다.

2)그런데 천사에 대하여는 어떤 입장을 취하셨습니까?

① 예수님에게 주신 것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주신 일이 없으며,

② 7절에서 주님이 바람처럼 불꽃처럼 자기의 사역자로 쓰시는 대상이며(시 104:4),

③ 14절에서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 즉 성도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존재일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천사를 숭배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거니와 천사를 성도의 권위보다 높여서도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쓰시고 성도를 위하여 수종드는 영인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지만 천사는 그 동생들이 되지 못하며 오직 구원받은 성도만 그의 동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을 잘하는 성도가 예수님 다음으로 존귀한 것임을 아셔서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의 보좌가 영영함은 그의 공평한 의 때문이요 모든 피조물은 의복처럼 낡아지다가 갈아입는 날이 올 것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도 말씀하셨은즉 저희들은 더욱 예수님의 권위를 의지하며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복음의 확실성 (히 2:1-4)목록으로


이 말씀은,

①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님으로부터 주신 말씀이 확실한 복음이다.

② 따라서 그것을 경홀히 여기면 피할 길이 없다고 하시면서,

③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1.“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고하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1)1절의 “모든 들은 것”이란 “신약의 복음과 사도들의 증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② 계시의 주인이시며,

③ 구원자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이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여 깨닫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간다”는 용어는 소극적 용어가 아닌 “충분한 주의를 요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복음적 신앙을 힘있게 간직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3)그 이유는 복음의 훼방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의 훼방자는 율법주의적 이단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았고 바울 사도의 선교사역에도 큰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음적 신앙을 든든히 갖지 않으면 믿음을 뺏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강한 어투로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4)“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한다”는 말씀은 정박된 배가 닻을 든든히 주지 않았을 때에 힘있는 파도에 밀려 가는 것처럼 될 것을 연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배가 풍랑에 움직이지 않기 위하여 닻을 든든히 거는 것처럼 진리를 배워 확신하고(딤후 3:14) 성령님의 붙드심의 은혜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눅 22:32).

2.천사가 증언한 말씀을 거역하고도 응당한 벌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의 복음을 등한히 한 자들은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2,3절).

1)“천사들의 하신 말씀”이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모세에게 주셨기 때문에(신 33:2, 시 68:17, 행 7:53, 갈 3:19) 천사가 간접으로 증언한 말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성취하시고, 증언하신 것이기 때문에 전달상으로 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히 1:2).

2)2절에서 이것이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요

3)이것을 거역한 자들이 “공번된 보응을 받았다”는 것은(공번=공변의 옛말) 천사가 증언한 모세의 율법을 거역했을 때도 공평한 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4)그런즉 “이같이 큰 구원(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십자가로 성취하신 복음)”을 등한히 여기고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눅 20:9-16에 보시면 “포도원을 농부에게 맡기고 타국에 간 주인이 소출을 구하기 위하여 종을 보냈을 때 농부들이 종을 학대하여 쫓았습니다. 주인은 그 다음에 ”아들을 보내면 공경할 것이라“ 하고 보냈더니, 아들은 주인의 상속자이니까 그를 아주 없애고 유산을 뺏자하여 아들을 죽였으니 나중에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어찌 하겠느냐?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천사가 전달한 율법을 거역하여도 벌을 받거든, 하물며 예수님의 복음을 거역하면 더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일” 즉, “기독교만 구원의 종교”란 것을 입증하셨는데, 그 입증하신 방법이 3절에서,

1)처음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2)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였으니 이는 사도들의 증언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 4:20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고, 계 1:2에서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거와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에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저희와 함께(사도들의 증언과 함께) 증거하셨다” 하였으니 여기의,

① “표적들”이란 복음과정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이나 별의 징조나 부활 등을 의미하고,

② “기사들”이란 영적 감화를 주시는 교훈과 전도 역사를 뜻하며,

③ “여러 가지 능력”이란 예수님과 사도들이 시행한 각종 기적들을 의미하고,

④ “성령의 나눠 주신 것”이란 초대교회 당시에 주셨던 영적 은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은사에 대한 말씀이 고전 12:4-11에 나타나 있는데 이 영적 은사를 주신 목적 중에는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하시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마 11:2-5).

결론적으로 복음의 확실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도들의 증언 그리고 표적, 기사, 능력, 은사들로 입증해 주셨기 떄문에 이미 증명된 것을 믿는 것이므로 전혀 의심할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주시는 교훈은

1)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이 확실함을 믿고

2)결코 배반하지 말아야 하며

3)성경에 나타난 표적, 기사, 능력, 은사들이 바로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하여 오늘의 성도가 기적이나 능력보다 믿음을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 삼가다;프로세코(προσέχω),마 7:5, 눅 20:49, 행 20:28-주의를 요하는 뜻.

공변되다;엔디코스(ἔνδικος),사사로움이 없다, 공평하다는 뜻.


제 4 과 존귀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 2:5-10)목록으로


본문 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하셨고, 9절에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존귀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1.하나님은 영광의 관을 천사들에게 주시지 않고 예수님께 주셨습니다(5-7).

1)5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이 증언한(히 1:6) 장차 오는 세상 즉 천지의 통치권을 천사들에게는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2)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습니다. 본문의 6-8절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구약 성경의 다윗의 예언인 시 8:4-6을 인용하여 증언하신 것입니다.

①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였다”하심은 인용 성구의 출처를 생략한 것이요,

② “사람이 무엇이관대” 또 “인자가 무엇이관대...주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권고하시나이까?”하신 말씀은 타락한 인생을 은혜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③ 또 하나님은 이렇게 미천한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인간적 고난을 당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오래 살아도 잠깐일 뿐입니다(시 90:9). ④ 그리고 그 고난 당하신 구속 사업의 대가로 예수님에게 영광과 존귀를 넘겨 주셨으니(마 28:18) 이는 바로 만물을 발아래 복종케 하신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7-8절).

2.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의 통치는 아직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미구에 실현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8절,계9:19, 20:10, 롬 8:19-20).

1)8절 중반에서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지금 우리는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하시므로 전후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전자는 “만물이 섭리적으로 예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뜻이고, 후자는 “말세의 심판과 신천지의 통치가 아직 전개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그러나 10절 말씀에서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미래에 있을 영광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3.예수님이 받으신 존귀는 하나님의 뜻을 복종한 고난으로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9절).

1)이 서신을 보낸 저자들은 성도를 대표한 자들로서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에 오르신 예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당하신 것이 나중에 영광으로 이어진 것처럼 성도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감수하면 분명히 미래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2)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하셨습니다.

①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요(요17:9),

② “죽음을 맛보심”은 “인간의 고난을 마지막까지 체험하시고 한번만 죽으심이요 생명까지 주신 것을 뜻하고(히 9:27),

③ 인간고를 체험하심은 인간을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히 4:15).

4.예수님의 십자가만 구원의 방편이 되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10).

1)10절의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란 창조자요 보존자인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2)“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심”은 성도들을 양자로 삼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3)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때에 예수님을 “구원의 주” 즉 중보자로 세우셨는데

4)그 중보자 예수님을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셨다”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서 온전한 중보자와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5)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사로서 대단히 합당한 일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하셔야 하느냐?”하는 질문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중보자는 예수님 뿐이시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속죄제물을 삼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살후 1:6-7).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1) 특권없는 천사들,

2)존귀를 힘입으신 예수님

3)순종과 고난으로 영광의 관을 쓰신 예수님

4)예수님의 십자가만 구원의 방편이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신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 과 도성인신의 증거와 그 이유들 (히 2:11-18)목록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증거와 이유들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구세주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증거”를 말씀한 것은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11-13).

1)우선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과 거룩함을 받아야 하는 성도가 다 하나에서 낳았다”하시므로 이는 꼭 같은 아담을 한 조상으로 두었다는 것입니다. 마 1:1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도 아담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2)같은 11절에서 예수님은 성도를 상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았다”하시므로 형제라는 “동격의 호칭”이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증명하신 것이요(마 12:49-50)

3)또 이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도 예언되었음을 소개하셨는데,

① 시 22:22을 인용하여 입증하셨습니다. 시 22:22은 “다윗이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한다”는 뜻은, 다윗이 예수님의 모형적 인물이 되어 “그 형제들에게 주(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한다” 또 “교회 중(회중;형제들)에서 찬송할 것이라”하시므로 “인간들과 동화되시는 예수님”을 예언하셨고,

② 또 사 8:17을 인용하여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하셨으니 여기의 “나”는 예수님이고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심은 예수님이 인간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이요,

③ 또 사 8:18을 인용하여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하셨으니 이 말씀의 구약적인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을 받아 많이 죽을 것이지만 이사야 선지자(나)와 상당한 백성들을 남겨 주실 것”을 예언한 것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예수님(나)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녀, 즉 성도들과 동류된 뜻”으로 인용을 한 것입니다.

4)14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혈육에 속한 것처럼 그도 또한(즉 예수님도) 혈육에 속한 분이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되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2.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만 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14-18). 17절을 보시면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마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14절 중에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애시기 위함이라”하셨으니,

① “사망으로 말미암아”란 뜻은 인간이 타락하여 사망의 벌을 받게 되었음이요(엡 2:1),

② “사망의 세력을 마귀가 잡았다”는 뜻은 마귀가 사망의 원인이 되는 범죄에 역사함이요,

③ “그 마귀를 없앤다”는 뜻은 마귀가 행사하는 “죽음 세력을 무능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도구인 죽음 세력(범죄 유혹)을 헛되이 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죽음의 입장까지 가셔야 하므로, 인간이 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15절에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을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하셨으니 이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란 뜻이요

3)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는 천사를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즉 성도를 영구히 붙들어 주시기 위함이니 이는 성도를 위한 구원과 원한 중보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님이 인간을 대표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친히 속죄의 대가를 치르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한다(신 19:21)”는 말씀처럼 인간의 범죄도 인간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하시고저 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는 충성된 대제사장(중보자)이 되시려니까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요

5)연약한 인간을 도우시기 위하여 인간의 연약인 시험을 당해보시고(마 4:1-11) 연약하여 시험 당하는 인간을 능히 도와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해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이 말씀에서 주시는 특별한 교훈들을 요약하면

1)구약의 예언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 22:22의 “나”라는 대명사가 다윗이지만 예수님을 대신한 용어로 또 사 8:17의 “나”라는 대명사가 이사야 선지자이지만 역시 예수님을 대신한 용어로 해석된 점과

2)“하나에서 낳았다”는 말씀과 “형제”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교훈으로 해석한 점이요

3)예수님이 성도를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음은 그의 최대한의 비하와 성도의 최고 존귀를 의미하므로, 성도는 이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 있어야 할 것이며

4)예수님이 사망의 세력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도는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생함을 즐거워해야 할 것이며(14-15절)

5)예수님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친히 연약한 인간의 모든 것을 체험하시고 승리하셨은즉, 성도의 연약한 사정을 익히 이해하시고 도와 주실 수 있음을 아셔서, 우리의 연약과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탁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고와 죽으심의 고난은 속죄제일 뿐만 아니라 자비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한 방법도 되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는 성도의 신분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성도의 신분에 대하여

1)성도를 가리켜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 하셨습니다. 여기의 “함께”한 뜻은 “제자들과 함께”한 뜻보다 “예수님과 함께”한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말씀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에녹, 노아와 동행하신 하나님(창 5:24, 6:9)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창 28:15) “야곱과 함께 애급으로 가신 하나님(창 46:4), 어디든지 함께 계시는 하나님(시 139:7)”이란 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2)주님과 함께 하늘의 부름을 받은 신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천국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히 1:13)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렇고, 휴거할 때도 그렇습니다(요 14:3, 살전 4:16-17). 성도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는 영광을 주었습니다(삼하 9:10).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함께 천국의 초청을 받은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알아야 하고 벅찬 감정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성도를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거룩한 존재”라는 뜻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거룩이란 용어가 세속에서 신령한 백성으로 구별됨을 뜻하고,

②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됨을 의미하며,

③ 예수님의 인격적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분이 거룩하다는 것은 무한한 존귀일 뿐만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된 생활을 일깨워 주심입니다. 봉황새가 좁쌀을 먹지 않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높이 나는 것처럼 성도는 성도로서의 신분에 알맞는 경건하고 정직한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형제들”이란 “우리의”란 말씀과 관련하여 성도간의 유대관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2.예수님의 신분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고 또 하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여기의 “우리”란 뜻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도직과 대제사장직은 성도(택한 자)를 위한 직임이기 때문입니다.

1)믿는 도리의 사도란 무엇입니까? 믿는 도리는 일치된 의견(신앙의 도리)으로 믿음의 내용이요, 대상이며, 모범이란 뜻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예수님은 믿음의 주(히 12:2)이시고 모든 일의 모범자이십니다(요 13:14).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본받았고 “내가 주를 본받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적 생활을 본받는 것이 성도의 신앙 생활입니다. 또 믿는 도리의 사도란 믿음의 대상이요, 내용이며, 모범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는 이 대상과 내용과 모범이 오직 성경에만 집결되었기 때문에 성경만을 믿음과 본분의 유일 법칙으로 교리화 된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2)대제사장은 중보자를 뜻합니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뿐이십니다. 중보자란 하나님 앞에 용납 받을 수 없는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께 천거하고 하나님 앞에 용납과 사랑과 은혜를 힘입도록 중계하는 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르쳐서 “대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은 구약의 멜기세덱(최초의 제사장)이나 율법시대의 대제사장이 바로 구원자 예수님의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3.성도들은 진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진리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성경을 깊이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깊고 부요합니다(롬 11:33). 그래서 자세히 연구하고 살펴야 합니다(눅 1:3, 벧전 1:10). 사물을 살필 때도 멀리 보는 방법과 가까이 보는 방법이 있는데 하물며 깊고 심오한 진리를 살피는 일이겠습니까?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므로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므로 큰 은혜를 받으라는 비유적인 교훈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눅 5:4-6). 따라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거기에 도취되는 신앙은 참으로 은혜로운 생활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은

1)예수님의 존귀하심입니다. 존재와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하셔야 하고

2)그 예수님이 인간으로 낮아지심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죄악 세상에 오시고 약소민족, 비천한 가문, 종의 형상으로 태어나셔서 가장 비천하게 사신 점을 깊이 생각하셔야 하고

3)고난 당하신 형편입니다. 죄없이 대속을 위하여 극단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신 것을 생각하셔야 하며

4) 또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영광에 오르신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그의 생애와 십자가와 그의 영광을 깊이 생각하면, 구원의 은총은 물론 자신에게 큰 인격적 변화가 올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제 7 과 예수님과 모세의 비교 (히 3:2-6)목록으로


히브리서 1장 중에서 예수님과 천사를 비교하여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면서 천사를 존귀한 존재로 숭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은 또 모세를 영웅시 하였습니다. 신 34:10-12과 민 12:1-7에 보시면 “모세 이후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와 직접 대화를 하셨으며 또 기사와 권능을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위대하게 만드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모세와의 신분상 격차와 충성의 격차를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1.신분상 격차를 살펴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격으로 충성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로 충성한 격이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을 주인의 아들로 모세를 그 집의 사환으로 비유하심으로써 신분의 격차를 말씀하셨으니 이는 창조자와 피조물 또는 주인과 객,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관계로 무한한 차이를 나타내신 것입니다(5,6절).

2.충성의 격차에 대하여

1)3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만하다”하시므로 예수님의 충성이 월등한 것을 평가하셨습니다.

2)예수님과 모세가 충성한 성격을 보면 같은 점도 있습니다. ①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한 점이 같은 것입니다(2절). 예수님과 모세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셨습니다. 이 “세우신 이”란 말씀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중보자로 임명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직임을 주신 하나님께 충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하셨다(2절)”하시므로 충성의 장소가 같은 것입니다. 충성의 장소가 “하나님의 온 집”이란 것은 하나님의 권속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민의 세계” “교회의 세계” “진리 운동의 세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란 말씀이 바로 “메시야의 복음 증거”를 뜻하므로 예수님의 사역과 성격이 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그러면 충성한 성격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할 때,

① 예수님은 모세보다 존귀한 신분으로 충성하셨고,

② 또 모세보다 영광을 더 많이 받으실 만큼 비중 있게 충성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는 사환격의 위치에서 간접계시로 메시야를 증언했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시니까 주인의 위치에서 직접 증언하신 것이고 또 모세는 이스라엘 선민의 인도자였지만 예수님은 구원자요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사역의 비중으로 보나 고난과 희생으로 볼 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것입니다.

4)따라서 이 격차에 대한 결론으로 “모세를 집(건물)”으로 비유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건축한 주인 같고(3절) 또 집마다 지은이가 있듯이 “모세가 지음 받은 피조물”이면 “예수님은 그의 창조자가 되신다”고 4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5)또 모세가 사환처럼 겸손하게 충성한 것도 사실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1)모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하신 분입니다.

2)신분으로 보나 충성으로 볼 때도 그렇습니다.

3)예수님이나 모세가 다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 성도들도,

① 이런 소망에 담대하고,

② 구원받는 은혜를 자랑하며,

③ 복음적 신앙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하신 영광스런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소망을 갖는 성도, 구원을 자랑하는 성도, 구원의 진리를 견고하게 붙잡는 성도가 되어 영광의 집을 충만하게 소유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8 과 타락하면 안 될 이유 (히 3:7-11, 시 95:8-11)목록으로

 

이 말씀은 신앙의 변질과 타락을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타락을 삼간다”는 뜻에서 이는 인간의 노력을 최대한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며 칼빈주의 교리에 근거한 궁극적 구원도 예수님의 중보 사역으로 성취됨이 사실입니다(요 17:9-12). 그러나 믿음을 시작한 자가 그 믿음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는 말씀은 성도의 인간적 책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만일 이 책임이 이행되지 않으므로 타락이 계속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본문 말씀은 전부 구약의 시편 95:8-11말씀을 인용하여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인용문은 구약의 문자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서는 의미상으로 인용한 것도 있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시 95장을 기록한 다윗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면서 출애굽 당시의 선민들의 타락상과 그 결과를 예증으로 들어 교훈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기자도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위하여 이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3.본문 말씀을 순서대로 살피면

1)7절의 “그러므로”란 뜻은 “내세의 영광이 충성에 비례된다”는 말씀(3:1-6)과 연결하신 것이요, “성령의 이르신 바”는 다윗이 예언한 구약 성경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음을 입증하신 것이며, 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하신 것은 다윗이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계시의 말씀)이 임할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2)8-9절 말씀은 출애굽 당시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였고(거역하면 그러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도 여전히 또 시험하였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행사를 시험하고 경험하였으면서도 그렇게 거역하였으니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3)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하셨으니,

① 그 시대를 노하여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도록 미혹에 버려 두셨음이요(10절;이 말씀은 다윗이 구약의 역사를 보충한 설명임),

② 그들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안식이란 가나안 땅 입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입국을 천국의 모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믿음이 중도에 타락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③ 애굽에서 나온 자들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저희(11절)”란 대상은 어떤 사람일까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여러 종류였을 것입니다. 우선 노약자들이 죽었을 것이요, 벌을 받아 죽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아론과 모세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다 지옥에 갔다는 뜻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죽은 멸망의 대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용서받지 못한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의 백성들의 타락과 멸망을 실례로 들어서 성도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다윗 시대에도 교훈하셨고 또 다윗 시대에 교훈하신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다시 인용하여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는 힘써 노력하여 믿음을 견지하여야 합니다. 이 노력은 인간의 책임에 속하는 일이며 믿음을 견지하는 방법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습니다(12-19절).


제 9 과 믿음을 견고히 잡으라 (히 3:12-19)목록으로


이 말씀의 전체적 의미는 “믿음을 견고히 잡으라”는 교훈입니다. 14절 말씀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하신 말씀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하여 12절과 13절은 “믿음 지키는 방법”을, 15-19절은 “믿음 지켜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믿음지킬 이유부터 상고하겠습니다.

1.성도가 믿음을 지켜야 할 이유(15-19절)

1)믿음을 견고히 잡지 못했을 경우에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①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말씀(14절)을 역설적으로 해석할 때 “구원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요,

②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의 실례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실례는 보편적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2)15-19절 말씀은 앞에 있는 8-11절 말씀을 재설하신 것입니다.

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과 가나안 입국은 성도의 영적 구원의 과정을 비유(예표)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것”은 성도의 신앙의 과정 중 입교와 세례에 해당되고(고전 10:6,11, 벧전 3:20-21) “광야의 생활”은 신앙을 성숙, 연단시키는 교회적 생활이며(행 7:38) “가나안 땅에 입국”하는 것은 천국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3:18,4:3).

②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선민들이 광야의 여정 중에 신앙을 지키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은 것은 바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실을 입증하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이 비유적 사실과 믿음을 견지한다는 교훈에서 저희들은 몇 가지 지식을 더 보충하셔야 하는데,

① 비유란 것은 여러 가지 중에 몇 가지 공통되는 점만으로도 인용할 수 있다는 점과,

② 선민이란 뜻은 넓은 의미에서 신정 통치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개인적 구원의 대상으로 선민(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택한 백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③ 출애굽한 백성들이 믿음을 시작한 백성들로 비유될 수는 있으나 그 개개인 전부가 확실한 신앙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므로 상당수가 외식적 신앙에 끌려 다닌 상태였음을 그들의 타락과 멸망을 통해서 알 수 있음과,

④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비유함에는 합당하지만 그들이 다 지옥간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아론도 실수한 바는 있지만 용서를 받고 광야에서 죽었으며 또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⑤ “믿음을 견지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생각할 때는 궁극적 구원이 확실하지만 그 섭리가 인간에게 실현될 때는 성도의 노력과 현실적 상태에서의 신앙 보존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 지키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⑥ 따라서 중도에 타락하고 돌아 오지 않는 자는 그 이전의 신앙의 외형적 생활이 외식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구를 거쳐 부산가는 차를 탄 사람이 처음에는 “부산을 간다”하고 차를 탄 후 대구에 내려서 다시 그 차를 타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실상 부산갈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구 가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고 또 그것의 성취로 만족하였기 때문에 대구에 내린 것입니다. 현실 목적을 위하여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천국과 신령한 은혜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4)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불순종과 강퍅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15-16절) 하나님은 40년 동안 그들에게 진노하여 광야에서 거의 죽게 하셨으며(17절)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맹세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하셨으니(18절) 이는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입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식(구원)에 들어오지 못할 자는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요(18절) 그들은 바로 “믿지 않은 자들이라(19절)”하셨으니 믿음과 순종과 구원 이 3가지는 서로 결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지키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2.믿음을 지키는 방법에 대하여(12-14절)

1)“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멀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12절). 천지가 개벽을 해도 하나님만 곁에 계시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요, 기업이시요,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필요가 없으나 신랑을 뺏길 때는 금식해야 한다(눅 5:34,35)”는 말씀에서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항상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을, 마치 성냥이 귀하던 시대에 불씨를 간수하듯이 삼가 보존하여야 할 것입니다(12절).

2)믿지 않는 악심(惡心)을 경계해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이 어데 있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 믿어 봤자 더 잘 되는 것도 없는데....” 하면서 단순하게 비판하고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악심은 경계하셔야 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매일 피차 권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 성도와 성도사이는 피차 경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흉과 허물이 없이 서로 권면할 수 있으며 또 권면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료에게 “충성을 더 잘하고 더 큰 책임자가 되라”하였더니 “당신이나 잘하고 남의 일에 간섭 말라”는 반박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불충성을 권면하였다가 오히려 무안을 당한 것입니다. 성도간의 친교가 그 정도라면 이것은 화목이 아니고 사랑이 멀리 떠난 대단히 피곤한 세계일 것입니다. 서로 서로의 권면을 사랑과 이해로 받지 못하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② 13절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이란 말씀은 “현재 시간을 소유한 동안”이란 뜻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보장을 못하기 때문에 “성도에게 주어진 기회는 현재 뿐이라”고 생각하여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느 때이고 연습이 없습니다. 지금의 때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또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이란 말씀은 시간의 촉박감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영적 질병은 권면할 마음이 생겼을 때 즉시 해야 효력이 있고 지연되면 더 굳어지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 권면의 신속함을 구조선 출동과 소방차 출동으로 비교한 글도 본 일이 있습니다.

③ 특히 자기를 과신하거나 교만할 때 겸손할 것과(갈 6:3) 강퍅한 마음이 있을 때 회개하고 부드러운 마음 가질 것과 영혼의 목장인 교회를 멀리하는 것을 권면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면 자연적으로 세상을 가까이 하게되고 거기에서 받는 유혹과 손해는 물적, 심적, 시간적, 육신적으로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세상을 피하고 말씀과 기도 중심의 은밀한 생활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을 든든히 지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영광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1. 확실한 신앙 생활 (히 3:12-13) 목록으로


본문 14절을 보시면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하면,

① 믿음 생활은 시작이 확실하여야 한다는 것이요,

② 확실한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어야 하며,

③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믿음 생활의 시작이 확실함에 대하여.

1)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발상이 확실하여야 합니다.

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세상에는 허탄한 것들도 많고(시24:4) 거짓된 것들과(롬3:2) 유한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이런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고후4:18). 따라서 그런 것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마시고, 분명히 진실하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지속되는 천국, 신령한 복, 하나님의 말씀(성경)만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② 믿음의 발상은 거듭난 은혜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요3:3,마16:17,고전12:3). 거듭난 은혜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믿음은 다 외식이요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2) 확실한 믿음 대상을 믿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께서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 구원자 그리고 심판자가 되심,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 십자가의 은혜와 영혼의 불멸, 부활, 천국과 지옥 등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② 이렇게 확실한 것을 믿으면 반드시 그 믿음에 따른 생활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씨를 심으면 그 종류에 따라 싹이 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으면 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구원자 하나님을 믿으면 그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어야 하며,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함이 있어야 하고, 섭리자 하나님을 믿으면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충성이 있어야 하고 십자가의 은총을 믿으면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확실하게 믿는지 안 믿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③ 베드로는 확실치 않게 시작하였다가 예수님이 물고기를 잡게 하시는 이적을 체험한 후 확실해졌지만(눅5:11) 또 시험에 들어 넘어졌다가 다시 회개하였고(마26:75,눅22:32),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잘못 시작하였다가 결국은 자기의 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불확실한 생활은 큰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2. 확실한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닻이라”고 하셨습니다(히6:19). 닻줄이 끊기면 떠내려 가는 것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멀어지면 희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견고히 잡을 수 있을까요 ?

1)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호4:6). 성경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수록 그 하나님께로 이끌려 가게될 것입니다.

2) 두 마리의 토끼를 좇을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과 재물 또는 하나님과 현실을 균등하게 잡으려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현실을 미워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6:24,요일2:15,갈5:24,약4:4).

어떤 성도의 가정에 가보면 예배드릴 분위기가 되어있지 않고, 성경을 읽고 증언을 하여도 마음에 접촉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부처의 화상이나 부적을 버리지 못한채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모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믿음과 생활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는 세 가지 주의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악심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악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악심과 이웃을 해롭게 하는 증오의 악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심은 믿음과 사랑(행위)의 진전을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심하지 마시고 사랑의 인색함을 피하여야 할 것이요,

②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마귀가 틈을 타고 불행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가장 큰 환난이라고 하셨습니다(마9:14,15).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은 기도와 진리 묵상, 깨끗한 마음가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교회 생활입니다.

③ 죄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의 취약점이 있는 틈을 이용하여 유혹합니다. 따라서 성경 지식의 빈약은 유혹의 가장 큰 취약점이요, 교만하거나 현세욕이 강하거나 욕심이 많은 것도 역시 마귀가 유혹하기 좋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만하다가 넘어졌고(마26:35,70), 바울 사도는 “섰다 하면 넘어질 것을 조심하라”(고전10:12)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이 유혹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현세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고, 내세에서도 역시 주님의 자리에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1) 현실에서 주님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과 연합된 생활을 뜻하고(요15:4), 항상 주님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계3:20). 이 경우에 성도는 주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늘 섬기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마16:24,눅5:8,고전15:31,눅15:19).

2) 내세에서 주님의 영광 자리에 함께 앉고, 주님이 누리시는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서도 겸손과 영광 돌리는 자세로 누리는 것입니다(롬6:5-11,8:15-17,딤후2:11,12,살전4:17,계3:21-22).

주님께서는 이렇게 확실한 믿음과 생활과 결실을 맺을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진리 위에 든든히 서서 용기 있게 실천하시고 금생과 내생에 변함없는 주님과의 동행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2. 매일 피차 권면하라 (히 3:13) 목록으로


성도는 믿음의 경성을 위하여 매일 피차 권면하는 일을 당연히 여기셔야 합니다. 피차 권면이란 서로의 권면과 감사를 뜻합니다. 또 매일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인간이 또는 성도가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할 이유는,

1)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혜로운 면이 있어도 한계가 있고 피조물이요 타락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연약한 존재인 줄 아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은 인생을 말할 때 “고난을 위하여 났다”고 하였고(욥5:7), 시편 기자는 “인생은 보잘 것 없는 존재요 그 호흡이 코에 있다”(시144:3,146:3)고 하셨습니다. 즉, 홀로 서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 유혹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① 마귀는 초신자들을 유혹하기 때문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하신 것이요,

② 또 마귀는 열심 있는 자를 유혹하기 때문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혜를 좇는 것이 아니라”(롬10:2)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의를 요하셨으며,

③ 환난을 당하면 넘어질 것을 예상하여 마귀가 욥에게 “환난을 주어 보시라고” 하나님께 간한 일이 있었고(욥1,9,10),

④ “믿음이 있다” 하는 베드로를 유혹하였으며,

⑤ 죄없는 아담과 예수님도 유혹하였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마귀의 유혹에 제외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3)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엡5:16). 시대가 악하다는 것은 말세에 마귀의 역사가 더 극성을 부린다는 뜻입니다. 벧전5:8에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 하셨고, 또 “마귀는 휴식을 한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경성하고 매일 피차 권면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떻게 권면하여야 서로 유익함이 있을까요 ?

1)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성경을 토론하고 또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2) “나는 다른 이의 권면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라고 할만큼 자존심이 채워져 있으면 안됩니다. 누구나 권면을 받을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3) 상대방이 뜻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권면을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떨 때는 권면의 기회를 늦추어야 할 때가 있고, 떠 어떤 경우에는 지나가는 말처럼 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 또 합당한 경우이면 직설적으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상대방이 오해나 불쾌감을 갖지 않고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빗대어 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권면으로 적용하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4) 모든 일에 기도와 사랑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오직 권면받는 자를 위하여 권면하는 것임을 알고 감사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5) 서로 주의하고, 서로 경계하며, 나태를 줄이고 또 신령한 은혜에 잠기도록 함께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전4:9-12).

 

설교보충 3. 확신과 결과 (히 3:14) 목록으로


본문에서 “확실한 것을 견고히 잡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 확실한 것은 진리(성경) 뿐입니다. “견고히 잡는다”는 뜻은 진리를 강하게 믿는 확신입니다.

1) 확신이란 말 ‘페이도스’(πείθως)는 “설복된다”, “믿는다”는 뜻으로 진리의 지식이 풍부하고 믿음이 넉넉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롬4:3),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행16:30) 믿음을 넉넉하게 갖는 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2) 확신은 믿을 것(참)을 믿는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이나 거짓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3) 진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듭남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과학적 이론이나 설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적 이론과 설득은 거듭났을 때 믿음을 가속시키는데 유익할 뿐입니다. 믿음의 싹에서 성장한 믿음으로 육성될 때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지식과 경험이 큰 유익을 주게 되며 따라서 진리의 풍성함이 곧 확신이요, 확신과 실천의 풍성함으로 신앙의 성장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2. 확신과 결과를 말씀드린다면,

1) 확신의 분량만큼 실천이 가능해집니다(마9:29). 말씀과 실천과의 관계는 뿌리와 나무 같고, 또 나무와 열매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실천이 부족할 때는 그만큼 확신이 약한 줄로 아셔서 믿음의 확신과 함께 성장을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확신의 분량만큼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신 믿음이 있을 때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을 때 용기와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확신은 뿌리깊은 나무가 가뭄과 폭풍을 이길 수 있음 같이 확신 있는 믿음은 어떤 유혹이나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어려운 고난도 잘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확신과 함께 실천과 용기와 소망과 견인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 10 과 우리가 두려워 할 일 (히 4:1-3)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성도가 두려워해야 할 것”에 대하여,

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②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함에 대하여, 또

③ 말씀을 듣고 마음에 화합하지 않음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1.“성도 전체가 천국에 다 들어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정, 한 교회에서 같이 믿음 생활을 했는데 누구는 가고 누구는 못 가면 안되겠지요?

1)1절의 “우리는 두려워 할지니”하신 말씀에서 “우리”라는 복수는 이 말씀을 받는 성도의 단체를 의미하며 그 단체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낙오자가 생길 것을 두려워 하신 말씀입니다.

2)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약속이란 “천국(그의 안식)을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요 14:3)을 의미하지만, 이 내세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믿는 자에게 하신 것입니다.

3)따라서 천국의 약속은 받았을지라도 자신의 믿음이 미치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을 약속 받고 애굽에서 나왔지만 중도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죽은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서도 내세의 소망을 갖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의 약속을 믿고 소망했으나 올바른 믿음에 미치지 못하여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므로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② 이런 사실은 복음서에서도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는 말씀, “다섯 처녀는 신랑을 영접하여 들어갔으나 다른 다섯 처녀는 문이 닫혀 못 들어 갔다(마 25:1-13)”는 말씀, “두 여자가 매를 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받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마 24:41)”는 말씀이 바로 믿음에 접근은 하였지만 깨여 있지 못하여(마 25:13 탈선, 불확신)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그런고로 교회는 모든 성도가 믿음의 확신을 갖도록 지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2.“들은바 말씀이 유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시면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파를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그 당시의 본문 말씀을 받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 두 대상이 “다 복음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즉 “믿기를 시작(믿음 세계에 들어옴)했다”는 말씀이지만, “들은 말씀”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유익하게 받지 못하면, 역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전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모든 말씀을 유익하게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일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을 다 유익하게 받아야 할 이유는 그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만일 복음은 받고 그 이후에 주시는 말씀을 유익하게 받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므로(일부를 멸시한다는 뜻) 결국 진리 배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감하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계 22:18-19).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복음이 좋아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을 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다른 진리의 말씀을 배척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든 말씀(성경 66권)을 다 진리로 받아서 자기에게 유익한 양식으로 삼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희도 복음 전파를 받았다”하심은 구약의 선민들도 간접적 계시(율법이나 제사의식에서 예수님을 소개한 것)로 십자가의 복음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3.“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않음에 대하여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1)“믿음을 화합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과 화합하는 것으로,

① 성경을 진리로 확신하는 신앙과,

② 순종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나무와 열매처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마 12:33, 약 2:17). 여기의 행함이란 완전 시행을 뜻함이 아니고 최대한의 성향과 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갈3:11).

2)“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간다”하였으니 이 말씀은 그 당시의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내세 소망의 확신을 주신 말씀이며

3)이 확신은 “어떤 진노의 대상이 구원에서 제외된다”하여도 동요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①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맹세하여 안식의 복을 제하셨다”하여도, 이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그것이 해당되지 않은 것처럼, 바른 믿음을 가진 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그 일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룬 것이라”하심은 하나님이 창조직후 7일에 안식을 하셨는데(창 2:2) 그 안식이 바로 성도에게 주실 천국의 안식을 하나님이 먼저 취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구원받는 신앙을 확실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② 한사람도 낙오자가 없기를 위하여 모든 성도가 다 바른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③ 믿음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 믿음이 위태한 상황에서 흔들리거나 떨어지면 소망이 없음을 아셔야 하고,

④ 듣는바 모든 말씀이 부분적 불신앙으로 인하여 화합하지 않을 때 유익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야 하며,

⑤ 따라서 “주여 내 믿음을 굳게 잡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눅22:32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제 11 과 천국을 사모하라 (히 4:4-11)목록으로


이 말씀은 “무엇을 교훈하시는 것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석을 읽고도 어떻게 가닥을 잡아서 설명드려야 할 지 연구 정리를 많이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논리적으로 어렵게 된 이유는

1)배경 설명을 생략하였기 때문이고

2)원문에 대한 번역을 직설적으로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영원한 안식이 아니고, 다만 천국 안식의 모형일 뿐이며 천국 안식이 따로 있으니 그 세계를 사모하고 들어가기 위하여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힘쓰라”는 교훈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많은 히브리인들이 내세 안식에 대한 신앙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주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천국은 믿으나 내세 안식을 사모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1.내세 안식이 창조 당시부터 계시되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4절에 “하나님은 제 7일에 그 모든 일을 쉬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창 2:2을 인용한 말씀으로 거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레되는 날에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출 20:11에서 또 한번 언급을 하였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엿새동안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레되는 날 쉬셨으므로...그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태초에 안식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 세계(즉, 천국)가 그 당시부터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시대의 “안식일”이란 바로 천국안식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2.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이 영원한 안식인 것처럼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은 영원한 안식처럼 여길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민족들이 약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였고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도 영토 없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으니까 그들이 가나안 입국을 영원한 천국인 양 생각하고 다른 내세를 사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세천국은 가나안 땅이 아닌 다른 세계란 것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은 내세에 빨리 들어가는 것을 오히려 염려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2)모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다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다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 때에 애굽에서 나온 자 중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고 모세와 아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다 죽고 광야에서 출생한 후손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민 14:23에서 나타냈는데, 히브리서 기자도 그 말씀을 인용하여 출애굽한 백성들이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3)그 때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이유는 그들의 완악과 불순종 때문이었고 또 이 불순종은 믿음을 갖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광야에서 죽게된 것과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실제적으로 천국에 들어간 것과 못 들어간 것을 비유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못 받은 것이라면 “모세와 아론과 또 신앙을 갖고 죽은 자들도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영원한 안식이라면 그 땅에 재난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가나안 입국은 내세의 모형일 뿐(모형 속에 실제적 안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님) 그들의 안식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4)6절에 보시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셨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었다”함이 무슨 뜻인가?할 때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죽을 것을 예고하였으나 이는 다 죽을 것을 예고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받고 순종치 않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들어갈 자들이 그 당시에도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약의 선민들도 “복음 전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희생의 제물로 계시된 제사 의식을 통하여 메시야의 구속을 깨우침 받았다는 뜻이요, 또 “순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공로로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고 믿음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순종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구원 받으라”하셨는데 세례를 안 받으면 순종을 안 하는 것이고 따라서 믿음에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례 받는 행위가 공로일 수 없는 것처럼 구원받는 순종도 복종을 뜻하는 것일 뿐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공로가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천국은 가나안 정착이 아닌 다른 신령한 세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약 500년경의 사람인 다윗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강퍅하지 말고 순종하여 구원받을 것을 교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왕국을 성립하고 잘 살고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 95:11에서 모세 시대의 백성들이 강퍅하여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을 연상하면서 “오늘날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하였으니 만일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완전한 안식이라면 다윗이 왜 가나안 땅에 잘 살고있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복음)을 듣거든 옛날 사람들처럼 강퍅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씀을 하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 외에 다른 내세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일(천국)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9절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4.천국은 안식하는 세계라고 하셨습니다. 10절에서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들도 자기 일을 쉰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천국이 쉬는 곳임을 강조하신 것을 보면 이 세상은 일하는 곳이요 고달픈 곳임을 알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쉴려면 천국가서 쉬어라”하여야 할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천국은 순종을 힘쓰므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종”이란 믿음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요 행위의 공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그런 잘못된 일에 빠지지 말고 믿음과 순종을 나타내어 영원한 천국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1)안식 천국은 창조 직후부터 계시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하나님은 그 때에도 안식하셨습니다(창2:2).

3)모세 이전의 사람들도 그 곳에 들어가 안식하였습니다.

4)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은 내세안식의 모형입니다. 가나안이 영원한 안식 세계였다면 다윗이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모세 때 백성들처럼 강퍅하지 말라”고 교훈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성도에게는 미래에 들어가야 할 영원한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5)그 곳은 믿음과 순종으로 갑니다. 순종은 믿음에 결부되는 결과일 뿐 행위의 공로는 아닙니다.

6)“천국을 안식세계라”하신 것은 그 곳이 낙원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은 고달픈 곳임을 의미합니다.

7)그런고로 성도는 내세의 안식을 믿고 사모하면서 이 세상을 부지런하게 살고 복음을 순종하므로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 12 과 말씀의 본질과 역할 (히 4:12-13)목록으로


이 말씀을 분석하면,

① 하나님의 말씀이 주제이고,

② 그 말씀의 본질(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요소를 갖추었느냐?)에 관한 것이요,

③ 말씀의 역할을 설명하셨습니다.

1.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신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2)그런데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 한동안은 그의 선지자(사도)들을 통하여 수시로 말씀을 주시다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초대교회를 세우시고 최종적으로 성경 계시를 주셔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3)그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국회는 법을 만드는 기관이고 대통령은 그 법대로 다스리면 되듯이 하나님은 성경 66권을 기독교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그 말씀을 따라 믿고 생활하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4)여기에서 사람이 만든 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주 수정할 필요가 생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영원 불변하여 수정하거나 보완할 필요가 없는 영원 불변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말씀을 주실 때에 필요할 만큼 주셨고 정확무오하게 주시고 끝내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씀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더 주시지도 않는다 하셨고 오직 기록된 말씀 66권만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요21:25,계22:18,19).

5)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우리처럼 갖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오늘날도 말씀을 주시고 아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체험이나 감정에 느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된 신앙입니다.

②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지상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가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니요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다”는 증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본이 아니고 복사품이란 뜻입니다. 복사품은 어디서나 원본처럼 사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이 아니지요.

③ 또 어떤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라도 그 말씀이 감동 있게 증언되고 또 감동 있게 받아들여질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문자로 쓰여진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성경을 그렇게 믿으시면 안됩니다. 성경은 “문자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1점 1획에까지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성경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아주 예리하다는 것입니다.

1)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는 뜻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끔 무엇이 죽었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죽었다, 나무가 죽었다, 물이 죽었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활동도 못하고 썩어지기만 할 것이요 물도 죽으면 더러운 냄새만 날 것입니다. 살아있는 몸은 썩지 않고 죽지 않은 물을 생수라고 합니다. 따라서 “살았다”는 뜻은,

① 깨끗하다는 뜻이고,

②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③ 생명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신 것처럼 그 말씀도 변하지 않는 것이고(벧전 1:25), 시 12:6에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도가니에 일곱번 연단한 은 같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살았다”는 뜻은 “정결하며 변하지 않고 항상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마 5:18), 또 생명력이 있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 11:43-44).

2)“운동력이 있다”는 뜻은,

① 쉬지 않고 활동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현대인 성경에서는 “활동력이 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항상 역사하여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사 55:11에서 “내 입에서 나간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이 시간에 이 말씀을 증언하는 것도 “증언하고 들으라”는 말씀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항상 교훈하시고 감동하시며 실천케 하는 역사를 하시는 것이요,

② 운동력이 있다는 뜻은 내용과 문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요 1:1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상 없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하시고 말씀만 주셨으며(출 3:5-6) 시내산에서도 그렇게 하였습니다(출 19:17-19).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큼의 능력이 동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매이지도 않고(딤후 2:9) 능치 못함도 없다(눅 1:37)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그 능력을 꼭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어떻게 체험할까요?

① 믿음으로 체험하고,

② 복종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하여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믿는 자의 신앙에 따라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경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려 들지 말고 자신이 성경 말씀에 굴복 당하는 것을 체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창 12:4) 비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예수님을 전한 것처럼(행 18:5) 저희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끌리고 복종당하는 체험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에 복종당하면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오직 진리를 위하게만 될 것입니다(고후 13:8)”.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창조 사역을 통해서나 또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또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보다 더 예리하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경이 심령 속에 깊이 들어와서 세심하게 역사 하시고 지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날선 검으로 비유하신 것은 수술하는 칼을 연상한 것입니다. 예리한 칼로 관절과 골수를 수술하는 것처럼, 성경이 성도의 혼과 영을 수술할 수 있으니, 이 “혼과 영”이란 바로 마음의 생각과 뜻(깊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혼과 영”을 삼위설(사람=영+혼+몸)로 아셔서는 안됩니다. 혼과 영이란 별개의 영체가 아니고 단일한 영적 실체(영혼 또는 마음)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깊이 감찰하신다”함은 바로 성도의 양심 깊은 부분까지 감찰하시고 지도하신다는 뜻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은 만유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은 숨길 수 없습니다. 검보다도 예리한 말씀을 가지시고 만유를 정밀하게 심판하실때 그 앞에서 숨길 자가 없기 때문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3절). 또 법관이 법으로 재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의 표준이 되어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척도가 됨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성경 말씀으로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②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으며 날카롭게 역사하시며 영원히 변치 않으심과,

③ 말씀이 신앙과 본분에 척도가 되고 구원의 방편이 됨 같이 마지막 때에도 심판의 척도가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하나님의 말씀과 나 (히 4:12-13) 목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계시고 능력이 있으며, 혼과 영과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계약서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계약이나 이행할 때에 효력이 있고, 계약을 위반하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성경과 나와의 관계도 그렇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또 어느 사람이나 계약을 할 때에 내용을 모르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서로 알고 지키는 것이 계약 관계인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1)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말씀과의 관계보다 목사와의 관계에서 복을 받으려는 성도가 많습니다. 병을 고치고, 자녀가 잘되며, 사업이 잘되는 것까지 목사에게 의뢰하고, 기도만 부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기만한 경우가 있고,

2) 찬송과 기도는 경건 행위에 속합니다. 어떤 성도는 찬송과 기도를 보통 이상으로 열심 있게 하지만 성경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적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경건한 의식(찬송과 기도의 의식)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양 착각할 정도입니다. 성경과의 관계가 믿음과 지식과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신앙 생활은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약2:17).

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 하셨으므로, 이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성도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영적인 생명이 연합성을 띠게 됩니다. 벧전1:23에서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경을 진리로 믿게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믿어졌다: 하신 것은 역시 말씀과 상통하기 때문입니다(살후1:10).

3. 운동력이 있는 말씀은 성도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

하나님은 운동력(능력)이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보존, 통치)하십니다(창1:3,6,9,히1:3,마8:8). 그런데 성도에 대하여는 어떤 역사를 하실까요 ?

1)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벧전1:23). 말씀으로 영적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2) 진리 실천의 능력을 주십니다. 믿음에 실천이 따르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기적을 행한 일은 없지만 자기에게 알게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았을 때 크게 순종하였습니다(롬1:5,16:26).

3) 구원의 도리를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셨습니다(고전1:18). 구원받은 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도리를 알고 믿습니다.

4) 성도의 죄를 깨우쳐 돌이키게 하시고 성화(聖化)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딤전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말씀은 성도의 인격을 상대로 역사하여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므로 심령을 정결케 하십니다(엡5:26).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인격을 상대로 예리하게 역사하십니다. 두꺼운 마음 속도 뚫고 들어갑니다. 유체의 활동에도 역사하십니다. 고후7:18을 보시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을 칼로 비유하신 것은 칼이 육체와 물건을 파헤치는 것처럼 말씀이 성도의 심령과 생활을 파헤쳐서 모든 잘못된 마음을 정화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접할 때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마음과 지체의 활동은 통제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5) 능력으로 전달하십니다. 시107:20에 보시면,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말씀 선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창1:3,마8:8).

6) 장차 하나님의 말씀은 만유를 심판하시는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본문 12-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행위 뿐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고 지은 것이 하나라도 그(말씀)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며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말씀이 심판의 눈이 되고 저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은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성도에게 주신 계약서입니다. 또 말씀은 구원의 도리와 실천력을 제공하고 성화를 이루며 능력을 전달하시고 심판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좇아가는 성도가 되고(창12:4), 바울처럼 말씀에 붙잡혀 살며(행18:5),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날마다 상고하고(행17:11), 사랑하며 성경과 연합된 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 13 과 은혜를 사모하라 (히 4:14-16)목록으로


이 말씀을 살피면 여러 가지 제목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큰 대제사장”, “승천하신 예수님”,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라고 할 수 있고, 15절에서는 “대제사장되신 과정”, “시험을 받되 죄는 없으심”이라 할 수 있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은혜의 보좌”, “담대히 은혜를 사모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 중에서 “담대히 은혜를 사모하라”는 말씀이 결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은혜를 사모하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우선 이 말씀의 초두에 “그러므로”란 접속사가 있으므로 이 말씀이 어떤 내용과 관련된 것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1)이 말씀은 앞에 있는 히 4:12-13 말씀과 관련이 있고 그 관련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쪼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만물을 심판하시는 척도로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2)따라서 그 말씀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정죄와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본문 14절대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또 은혜를 받아야 한다”(16절)고 하시므로 “은혜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2.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을 세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1)큰 대제사장이란 일반적 대제사장(예수님 아닌 대제사장)과 구별하기 위함이요 대제사장은 중보자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2)창 14:18에서 아브라함 때에 “멜기세덱”이란 제사장이 있었고 그 후에 출애굽 때에 와서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세워 제사드리는 직임을 봉행케 하셨습니다(출 28:1-3,40:12-16). 제사장은 아론과 그 후손들로 세습하게 하셨고,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통솔하는 대표 제사장을 뜻합니다. 초대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레 8:7-9,21:10) 마지막(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 은퇴한 상태)였습니다. 구약에서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호칭은 없으나 그 임직식이 증명해 줍니다(레21:10,40:12-16).

3)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로 중보 역할을 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모형하므로 제사장 역시 중보자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대한 내용은 짐승의 제물과 제사의식이 장엄할지라도 이는 십자가 제사의 모형일 뿐이며 실제 구속의 은혜는 그 제사의식에서 내포하는 장차 이루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4)그리고 그 큰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세워주신 분”이라 하심으로 이 중보자 사역이 모든 이를 다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선민에 한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7:9).

5)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괄하여 단번에 드려진 완성적인 제사이므로 십자가와 부활이후에는 인간 제사장으로 속죄제의 모형을 삼을 필요가 없게 되어 그 직분의 사역이 끝나게 된 것입니다.

6)“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뜻은 예수님이 속죄사역을 끝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큰 대제사장이신 중보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그 분은 하나님과 일체(一體) 관계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2)신인 양성을 겸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3)인간으로 오신 상태에서 인간과 꼭 같은 시험(고난 등)을 받으셨으며

4)죄를 짓지 않으신 분입니다(15절).

5)중보자는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께 천거해야 하므로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라야 하고, 또 인간의 연약을 체휼한 상태에서 죄가 없어야 하므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6)하나님은 이런 중보자를 세우셔서 속죄와 중보로 구원받게 하셨으니만큼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14절).

4.그리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사모해야 합니다.

1)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십니다. 긍휼은 약한 자, 문제 있는 자를 살펴주심에 있어 사랑이란 광범위한 뜻과 차이가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요 불충한 만큼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2)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사정과 만물의 사정까지 아시고 미래의 일까지 아시므로 때를 따라 필요하고 적절한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여름에 채소와 과일을 주어 더위를 이기게 하시고 겨울에 묵은 곡식을 먹게 하여 추위를 이기게 하시는 것도 그런 은혜가 아닙니까?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같은 은혜에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그래서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은혜와 보좌는 예배당이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장소도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과 연합한 영감에서 말씀을 깨닫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증언자의 설교를 들어도 듣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은 수 없기 때문에 이 은혜의 보좌란 어떤 장소를 의미하기 보다는 말씀으로 은혜받을 만한 합당한 입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중보자(큰대제사장)로 계신 것과,

②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주시기를 원하시는 것과,

③ 중보자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연약을 체휼하신 점을 깨달아서,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은혜의 보좌에 부끄러움이 없이 또 주저할 것없이 담대히 나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4:14-16) 목록으로


본문 16절의 말씀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1) 꼭 필요할 때 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노력을 다하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큰 어려움과 함께 영광이 가리워질 위기 직전의 은혜를 뜻합니다. 모세를 살리시기 위하여 바로의 딸을 그곳에 보내어 모세를 건지신 경우, 홍해가 갈라져서 백성들이 애굽군을 피하여 나간 경우, 요셉이 구덩이에 던지워졌을 때 미디안의 상고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요셉을 구출한 경우 등과 같은 것입니다.

2) 형편에 알맞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나타내어 인도하신 일과, 먹을 것이 없을 때 꼭 필요한 만나 양식과 메추라기와 물을 내어 먹게 하신 일 등입니다.

3) 적당한 때를 맞추어 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비를 주시는 일(신28:12), 바로가 꿈을 꿀 때까지 요셉을 감옥에 있게 하시는 일 등 적당하게 때를 맞추어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때를 따라”란 말씀의 “때”란 단어가 ‘유카이로스’(εὔκαιρος)로서, 이 말씀은 딤후4:2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할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때”란 단어는 “환경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따라 합당한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때”라는 용어로 ‘카이로스’(καιρὀς), ‘호라’(ὥρα), 헤메라‘(ὴμἐρα) 그리고 ’크로노스‘(χρὀνος)도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사건 개념이 아닌 시간 개념에 속하는 말씀이요(막1:15,고전7:29), ’호라‘도 역시 그런 뜻이며(요2:4,마26:45) 또 ’헤메라‘와 ’크로노스‘는 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마2:1,눅17:26,마2:7,막9:21). 하나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방책을 베푸시는 분이시고(삼하14:14), 기회를 따라 행하시는 분이시며(삿9:33), 환경에 따라 시험을 감당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10:13,11:34,눅21:14).

사람은 의복을 만들어 입지만 짐승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데 여름에는 털이 빠진 옷을 입히시고 겨울에는 털이 많은 옷을 입히시니, 그것도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깨달을 때 성도는 어떤 환경에 처하여도 문제없다는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이 시대에 받아야 할 은혜가 무엇일까요 ?

1) 긍휼하신 은총을 구하셔야 하고 또 말세를 극복하는 은혜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으므로(눅18:9) 믿음을 구하셔야 하며(눅17:5), 이 믿음은 신앙의 성숙함입니다.

3) “말세에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는다”(마24:12) 하셨으므로 합법한 생활과 사랑 실천의 능력을 구하여야 하고,

4) “거짓 선지자가 많을 것이라” 하셨으므로 성경의 바른 지식을 구하며(마24:11),

5) “방탕과 술취함과 쾌락이 있을 것이라” 하셨으므로 경건 한 생활을 구하고(눅21:34,딤후3:4),

6) “경건의 모양만 있을 것이라” 하셨은즉 경건의 능력을 구하시며(딤후3:5),

7) 또 “축적이 많고”(약5:1), “미신 행위가 많으며”(딤전4:1), “교회가 잠잘 것이라”(마25:25) 하셨은즉 물욕과 이방 풍속을 떠나며 항상 경성할 것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은혜의 보좌는 어디입니까 ?

1) 은혜의 보좌는 은혜의 방편이 있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따라서 말씀 강론이 있고 성례가 있는 장소이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배당이나 어느 곳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성장의 은혜는 자신의 노력으로 받습니다. 구하고, 사모하며, 힘쓰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마7:7,시107:9,마11:12).

3)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하며 회개를 힘쓰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그때그때 적절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하루씩 하루씩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미래의 앞 길을 다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한 발작 한 발작의 앞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면서 길을 열어주시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은혜의 보좌 앞에서 (히 4:14-16)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어떤 곳이며, 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 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은혜의 보좌란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에서 영적으로 접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곳”이라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믿음 관계, 무흠(無欠) 상태, 친교 관계, 사명적 관계가 원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처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통 생각하기를 은혜의 보좌는 예배 드리는 장소, 말씀 듣는 장소 또는 기도의 처소가 아닌가 ?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은혜의 보좌는 성전의 마당, 제단 앞과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계셔서 합당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는 장소 아닌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간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1) 이 뜻은 주저 없이 또는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용기 있게, 부지런히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자기가 예금한 돈을 찾으러 나가는 사람처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어려울 터인데 왜 이렇게 담력을 갖게 하시는가 ? 할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과 성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이기 때문이요,

② 성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③ 중보자 예수님이 연약한 인생의 고난을 두루 체험하셨기 때문에 성도가 부끄럽고 연약한 입장에 있어도 충분히 이해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독을 맛보셨고 연약은 물론 억울함과 죽음까지 맛보셨습니다(16)

3.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

1) 은혜의 보좌에 나온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이니까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선 은혜 받을 자로서의 합당한 점이 있어야 하니까요(행13:21). 그래서,

① 감사로 영광을 돌려야 하고(눅17:18),

② 찬송으로 영광을 돌려야 하며,

③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찬송은 성도가 마땅히 할 것이로되 반드시 믿음과 기쁨과 감사와 음악의 요소가 있어야만 합니다(삼상16:23,시33:1,35:28,71:6,96:4,롬9:5,히2:12,13:15). 또 느11:17을 보시면 “미가의 아들 맛다냐는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시므로 구약 시대에 감사 기도의 전문가를 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귀한 것입니다.

2) 회개하는 자세입니다. 의원은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마9:12), 죄악을 품은 자의 기도는 듣지 않는다는 말씀(시66:18), 마음이 상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시34:18,51:17),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고(마18:21),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을 베푸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행2:38).

3) 겸손은 은혜를 받는 귀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잠3:34,시10:17,욥22:29). 성도는 겸손함이 눈에 나타나도록 행동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본문에서 “긍휼을 구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은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이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으로 주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① 갈망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하는 영혼(시107:9), 주린 영혼(시119:40), 갓난 애기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사모하고(벧전2:2), 세상의 정금보다 신령한 은혜를 더 사모한다(시19:10)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주시기로 작정된 은혜라 할지라도 받을 자의 기도를 통하여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겔36:37).

② 갈망함이란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모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시73:28).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시73:23). 은혜의 보좌에서 성경 말씀을 사모함이 없다면 그것은 은혜 받을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③ 은혜를 구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믿음과(눅17:5), 말씀 공급과(마4:4), 말씀을 깨닫는 총명과(엡1:17), 말씀 실천의 힘과(시119:56), 그 나라와 그의 의(마6:33)를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갈5:26). 그러나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④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전3:1,애3:25).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마25:1), 강도 떼가 행인을 기다리듯(호6:9),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시130:6), 갓난 애기가 젖을 기다리듯(벧전2:2), 병자가 베데스다 물가에서 물의 동함을 기다리는 것처럼(요5:5)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과연 시40:1에 보시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합당한 자세로 은혜를 많이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7. 은혜 받는 방법 (히 4: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를 받는 방법”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 하면 “예배로 영광 돌리기 위하여” 나오셨다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고 또 “은혜받기 위하여” 나오셨다고 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두 가지 다 맞는 대답이지만 순서상으로 볼 때는 먼저 은혜를 받아야 다음에 영광을 많이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방법이 바로 복받는 방법이고, 또 영광 돌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려드리는 것은 참으로 큰 보화를 드리는 것 이상으로 귀한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법, 복받는 법”, 참 좋은 교훈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을 보시면 네 가지 대목의 말씀이 있습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불쌍히 여김을 받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요,

2) 하나님은 때를 따라(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회 따라, 형편 따라 합당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3)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가 있으니 그곳에서 은혜를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가 어디인가 ? 성전인가 ? 강단을 말하는가 ? 할 때 이 “보좌”는 “합심하여 모이는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보좌란 뜻은 구약 시대에 “성전 마당”을 뜻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절기 때나 안식일에 일제히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고, 그 곳에서 기도 하고 제사장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은혜의 보좌”가 따로 없습니다. 물론 예배당에서도 은혜를 많이 주시지만 골방이나 초막이나 궁궐에서도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신약의 보좌”는 특정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 전달이 가능한 조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처소, 말씀 듣는 처소, 합심하여 사모하는 처소, 말씀이 흥왕한 세계, 회개와 경건한 예배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4) 그리고 은혜를 받아야 할 성도는 그런 처소에 담대히 나가서 은혜받는 일을 주저하거나 미안하게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겨 놓은 물건을 달라”고 하듯이 담대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구할 수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①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계획을 하셨고,

② 예수님의 십자가로 은혜의 보고를 넉넉히 열어 놓으셨으며,

③ 은혜 베푸실 때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과자를 사다 놓고 손자가 와서 재롱을 떨며 과자를 달라고 손 벌리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2. 은혜란 무엇입니까 ?

1) 은혜 받기를 소원하는 성도가 은혜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 좋은 설교를 들은 후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경우의 받은 은혜는 진리의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깨달음의 은혜를 받은 후에 그 깨달은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깨달음의 은혜가 또 상실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진정 받은 은혜”는 실천의 열매를 맺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아멘, 아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깨달은대로 용기 있게 실천하는 생활로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은혜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만가지 좋은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① 좋은 것을,

② 좋은 목적으로,

③ 또 좋은 방법으로,

④ 거저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것을 나쁜 방법으로 받아도 은혜가 아니며 또 싸게 준다면서 대가를 받아도 은혜가 아니요 오직 “좋은 것을 좋은 목적과 좋은 방법으로 거저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은혜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 할 때,

① 일반 은총이 있으니, 이것은 세상과 물질계의 모든 것들입니다.

② 특별 은총이 있으니, 이것은 성도에게만 주시는 신령한 복을 의미합니다.

③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중에 어느 것이 더 크냐고 할 때 이것은 영원과 유한의 차이가 있으니까 특별 은총이 더 큰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④ 특별 은총 중에 더 귀한 은혜가 무엇이냐고 할 때는 성령 충만(말씀 충만)이 최고의 은혜라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 최고의 은혜인 것입니다. 마28:20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님으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창12:4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 갔다” 하셨고, 마4:1에서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과 성령님에게 이끌리는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노아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⑤ 성경에 이끌림은 성경을 깨닫고 실천함이요, 성령님에게 이끌림은 성령님이 “진리의 영”(요14:17)이시기 때문에 성경에 끌리도록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은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이 은혜를 누가 주시며 또 어떻게 주십니까 ?

1) 은혜는 은혜의 주이시고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2) 하시므로,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은혜를 사람이 주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목사를 가리켜 “은혜의 종”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 자신이 은혜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진리를 증언하는 자로서 진리 증언을 잘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숭배하면 우상 숭배처럼 되어버립니다. 은혜가 있는 종이란 은혜의 방편인 진리를 잘 전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은 이 은혜를 주실 때, 은혜를 베푸셔야 할 대상 즉, 합당한 자에게 주시며(출33:19), 그 합당한 자의 신앙적 역할(기도, 순종, 사명)을 통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주십니다(마7:7,출4:12,17). 복음 사역자의 축복 또는 이웃을 통하여 받게 하시는 것이 간접 전달입니다(삼상2:20,고후13:13).

본문에서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라”는 것은 “직접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출14:12과 벧전4:5에서도 “직고(直告)하라”는 말씀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폐지되고, 성전과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긴 것은, 하나님이 은혜의 통로를 여시고 은혜를 직접 주시기 위한 계시입니다. 다만 목사는 성도들이 그런 은혜를 받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3)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방법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어떤 학자는 기도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로 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직접적인 방편은 아니요 “은혜를 받은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방편은 말씀 사역이 가장 큽니다. 따라서 성경이 곧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언약하셨으며, 모든 은혜를 말씀으로 선포하여 주셨고 또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곧 복음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4) 성도가 성경 말씀(또는 성례)을 통하여 은혜를 사모할 때 노력하셔야 할 것은 겸손과 사모함과 회개와 깨달음과 순종과 충성입니다.

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5:5). 자신의 현실적인 것들을 다 부정하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마5:3).

② 또 사모하는 자(시1079), 갈망하는 자(시42:2), 기다리는 자(애3:25), 앙망하는 자(사40:31), 탐구하는 자(행8:30), 듣는 자(행10:44)에게 은혜를 주셨고,

③ 탕자나(눅15:18-24) 세리는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았으며(눅18:13-14),

④ 신명기 28장에 보시면 순종이 은혜 받는 비결이었고,

⑤ 또 마25:21에서는 충성된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선 예수님을 더 많이 닮게 되고, 예수님의 뜻대로 생활하므로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 14 과 대제사장을 세우심 (히 5:1-10)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대제사장을 세우심에 있어서 인간 대제사장과 예수님 대제사장을 세우심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특히 예수님이 대제사장되신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1.대제사장은 제사장을 대표하는 직임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직임자입니다(1절). 아브라함 때에 최초로 멜기세덱이란 제사장이 출현하였고(창 14:17-20) 그 후 모세때에 율법으로 제사장의 제도를 확립하셨습니다. 그 당시 최초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고 아론의 자손들로 예수님 때까지 세습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 이유는 예수님의 희생과 중보 사역의 모형적 제도로 세워 주셨다가 예수님이 영원하시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는 모형적 제도가 실상으로 완성되었으므로 구약적인 대제사장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본문 1-4절까지는 인간 대제사장을 세우심에 관한 말씀이고, 5-10절까지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1)여기에서 “대제사장은 누구든지 사람가운데서 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절). 따라서 “멜기세덱”이나 아론이나 예수님도 다 사람 중에서 취해진 것입니다(10절). 이 중보자가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를 인간 편에서 대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 9:22에서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하신 말씀은 역시 피를 가진 인간이 속죄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예물과 속죄의 제물을 드린다”고 하였습니다(1절). 여기의 “예물”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을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고 속죄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3)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다음의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모형적 제사가 실제의 제사로 성취되었으므로 다시 그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인간 제사장이나 제사제도도 폐지되었으며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중보 사역을 하시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감사와 영광을 목적으로 예배와 헌신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2.인간 대제사장을 세우심에 대하여(1-3절)

1)인간 대제사장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3절;레 16:6,15).

2)그러나 인간 대제사장이 연약하므로 유익한 면도 있으니 이는 무식하고 미혹당하는 연약한 성도의 입장을 이해하여 용납해 줄 수 있음입니다(현대인의 성경에서 “미혹한 자”를 잘못에 빠진 자로 번역하였음).

3)여기에서 하나님의 연약한 자에 대한 긍휼을 깨달을 수 있고 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나 지도를 할 때에는 이 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연약을 살펴 회개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갈6:1).

4)연약한 인간 중에서 세움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직임은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취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불러 세워 주실 때에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4절). 이것은 죄없는 예수님을 세워 주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5)따라서 인간 대제사장은,

① 연약을 가진 자요,

② 하나님이 세우신 자요,

③ 존귀한 직임이요,

④ 연약한 인간을 상대로 중보의 제사를 드려주는 직임자입니다.

3.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에 대하여(4-10절)

1)대제사장마다 사람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예수님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2)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특별하신 것은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데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① 완전한 사람,

② 죄없는 사람,

③ 하나님의 아들,

④ 인간의 모든 연약과 고난을 맛보심(2:9,18,4:15),

⑤ 만족할만한 순종(5:8)이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다섯가지 조건을 다 구비하셨을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세워 주신 것입니다.

4)예수님은 인간의 입장에서 연약과 고난을 몸소 체험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 들으심을 얻었다(7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십자가 등 모든 고난을 감당하시기 위한 기도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으로 받는 별다른 특혜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① 연약과 고난을 체험하시고,

②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것이 영원한 제사장의 자격을 얻으시는 일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죄를 짓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그 자격을 얻으신 것입니다.

5)이 자격을 얻으심은 곧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임명하셨음입니다(5-6절). 아론도 하나님의 임명으로 된 것처럼(민 16:16-18) 예수님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한신 것이 아니요 성부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요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으므로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임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시 2:7과 시 110:4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여기에 “오늘날”이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드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심에는 신분상의 자격(무죄성, 하나님 아들)과 연단의 자격(고난, 완전 순종)과 하나님의 임명이 있음으로 된 것임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또 중요한 것은,

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9절)”이므로 성도가 주님의 넘치는 중보의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넘치는 순종생활을 힘써야 할 것과,

②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힘쓰셨다는 뜻)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시므로 우리의 구세주, 곧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중보자의 조건 (히 5:5-10)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 하셨고 또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로서 내가 너를 낳았으며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대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 중 제일 높은 직위로서 예수님의 중보자적 사역을 대행하는 직임자를 뜻하며, “너를 낳았다” 하심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도록 인도하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죄인들을 징벌하셔야 하지만(살후1:7)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사 구원하셔야 하므로(요3:16) 그의 공의와 사랑을 다 만족케 하실 중보자를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대신 벌을 받을 자, 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구원하실 자를 세워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화해케 하시되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깊고 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충족되고 사람을 대표함은 예수님이 무죄하신 완전한 인간인 점으로 충족되며, 대속의 사역은 십자가로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1. 이 시간에 읽으신 말씀이 바로 중보자(中保者) 되는 몇 가지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본문 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이(즉, 중보자 되심이) 스스로 원하여 영광스러운 직분을 취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① 너는 내 아들인즉,

②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낼 것이요(너를 낳았다는 말씀),

③ 네가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계승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라”고 명령하셔서 중보자가 되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읽으신 5절과 6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영원한 중보자 곧 대제사장이 되게 하신.....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보내심이 없으면 스스로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2) 본문 7-10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중보자되는 사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갖추시고 세상에 계실 때에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타락한 것처럼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여 완전하셔야 하므로(롬5:12,15-19) 그 완전하신 생활의 성취를 위하여,

① 낮은 인간으로 죄없이 사시는 본을 보이셨고,

② 죽음을 맛보셨으며,

③ 죽음에 앞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④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으며,

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순종심이 부족하여 배우신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고난을 배우는 자처럼 체험하시고 복종하셨다는 뜻).

⑥ 이상과 같은 고난 중에서 온전하게 순종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승리자이신 예수님을 대속자와 중보자로 세워 구원의 주(히2:10)를 삼으셔서 대제사장의 직임을 이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3) 따라서 이 직분을 예수님이 스스로 취하신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뜻과 명하심에 의하여 순종하시되 고난으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순종하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시고 중보자의 직책을 임명받으신 것입니다(6). 예수님이 중보자의 자격을 취하신 데는 인간고를 다 겪으시고(4:15)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인간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이상의 말씀을 근거로 중보자의 조건을 정리해 보면,

1)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의 아들만 가지셨습니다. 6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친자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중보자의 직임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히4:6).

3) 무죄한 분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물이 아니면 더러운 것을 씻어낼 수 없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행7:52,히9:12-14,벧전1:19).

4)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범죄하였으므로 인간 편에서 대속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4:15을 보시면 중보자는 인간의 연약을 체휼하여야 하고 한결같은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인간적 생활 조건을 다 체험하시고 고난 중에서 통곡과 기도로 완전한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5)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성격은 영적인 고난, 육적인 고난, 생활의 고난을 뜻하며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원하여야 합니다(요10:18).

① 영적 고난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느끼시는 고난(사53:11,마27:46,갈3:13)과 자기의 백성들을 책임지시는 입장에서 받는 마음의 고통을 뜻하며,

② 육적 고난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고난이고(히2:9-10,9:12,21),

③ 생활적 고난은 인간고를 체험하심에 따른 모든 어려움들입니다(히3:1-3,4:15,5:7).

결론적으로 중보자의 조건은, 중보자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생명, 순결의 소유자이어야 하고, 또 임명받는 과정에서 완전한 순종과 자원함, 그리고 하나님의 임명이 있어야 합니다. 중보자가 받는 고난에 대하여는 영적, 육적, 생활적 고난을 체휼하시되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시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9. 순종을 배움 (히 5:7-10)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배우셨다”는 뜻은 배워야될만큼 불완전한 예수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연약한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셨음을 본 보이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그 실례입니다. 예수님이라 하여 저절로 순종되어지거나 초능력으로 계명을 실천하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순종을 배워서 실천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나으며(삼상15:22) 순종이 곧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고(약2:26) 또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된다”(9)고 하셨습니다. 순종을 배움에 있어서 순종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말씀의 권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성도가 어찌 순종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권위와 그의 말씀의 권위는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10:17)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율법사가 두루마리를 펼치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하면 모든 군중이 숙연해지며 감격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순종할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말씀을 읽었으면 복받기 위하여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하셨으면 복받기 위하여 악인의 꾀에 말려들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이 온유, 겸손하시다” 하신 말씀을 읽었으면 실제로 온유와 겸손을 시행하여야 하는데, 그런 교훈을 깨닫지 못하면서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실 때 꼭 순종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갈5:24). 성도가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취미 그리고 자기의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것과(마16:24), “종이 상전의 분부를 복종하는 것처럼 하라”(요13:16)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경험이나 인간적 생각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하심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고전1:5)는 진리를 터득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고 나를 좇으라” 하셨을 때, 물질의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순종을 못하였으나(마19:21-22), 반대로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 반을 털어 구제를 하는 등 순종과 실천의 본을 보였습니다(눅19:8,9).

4. 쉬운 것부터 순종하기를 배우고, 순종에 복이 따름을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장이 약한 사람은 처음에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므로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행하기 쉬운 것부터 힘드는 것으로 차차 발전시키면 나중에는 더 큰 것을 이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착한 마음을 갖는 일, 사랑하는 일, 봉사하는 일, 헌금하는 일 등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생을 각오하고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헌금할 줄 아는 것이 다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쉬운 것부터 순종하여 복되는 체험을 많이 하면 순종이 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마11:30). 그것이 곧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시34:8)입니다.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사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면 더욱 순종을 잘하게 될 것입니다.

5.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며 증거하고(시119:14-17), 근실하게 지키며(시119:4), 그 말씀 지키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는다(시119:56)고 하셨습니다. 또 꿀과 같이 여긴다고도 하셨습니다(시119:103). 말씀이 꿀 같으면 자주 먹게 되겠지요. 이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면 더 잘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6. 의지와 결심을 다져야 합니다. 시119:56에 보시면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하셨고, 고후13:8에서는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성도는 순종을 잘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7.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삼상15:22에서 “순종은 제사보다 낫지만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하셨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 송곳 끝을 발로 찼을 때 평안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믿음의 성장을 원하심 (히 5:11-14)목록으로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성도들의 믿음 성장이 부진한 것을 지적해 주신 말씀입니다. 믿음 성장이 부족하여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증언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조가 짧으면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신앙의 때가 오래되어 마땅히 선생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오히려 말씀의 초보적 지식을 배워야 할 형편이니 그래서 되겠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지식이 부족한 사람과 신앙이 성장한 성도의 형편을 대조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멜게세덱”에 관하여 할 말이 많으나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11절)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1)성경의 기초 지식이 있어야 모든 말씀을 증언하기 쉽다는 것이요

2)또 듣고 깨닫는 지각이 둔하지 않아야 성장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이 저자가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을 증언하려니까 듣는 것이 둔하여 해석하지 못할 형편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14과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때에 최초로 나타난 제사장이었음을 증언하였습니다(창 14:17-20). 모든 제사장이 다 중보자 예수님의 모형이지만 특히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자로서 공통점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히 7:1-3).

① “멜기세덱”이란 이름이 의의 왕이란 뜻으로 예수님과 공통되고(히 7:2),

② 아브라함 당시의 “멜기세덱”은 여러 임금을 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명실공히 지존하신 예수님을 모형적으로 예시한 것이요(히 7:1),

③ 또 살렘 왕, 평강의 왕(히 7:2)이란 명칭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공통되고(마 27:11, 요 12:15, 사 9:6),

④ 부모와 족보가 없고 시작한 날과 그 생명의 끝을 말씀하지 않으므로 그 형편이 예수님과 방불하여 영원한 제사장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고 히 7:3에서 소개를 하셨습니다.

⑤ 또 그가 한 번 나타나고 종적을 감춘 것은 예수님의 단번의 제사가 모든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본문 12절에서 신앙 생활을 오래 하였으면서도 성장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무엇을 성장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까?

1)때가 오래되므로(오래 믿었으므로) 말씀의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말씀의 초보를 배워야 할 입장이나 “어느 때에 단단한 식물을 먹겠느냐?”하시므로 신앙 성숙의 척도를, 깨닫는 능력에 두셨고 심오한 말씀을 단단한 식물로 비유하셨습니다.

2)행 11:26에서 1년을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말씀을 보면, 1년은 평신도의 교육 기간이고, 3년은 복음 사역자의 성경 교육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년이 복음 사역자의 교육기간이 된 이유는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간 가르치셨고 바울 사도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의 연단을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갈 1:18).

3.13-14절에서 신앙의 성숙과 미성숙의 형편을 젖먹는 어린이와 단단한 식물 먹는 어른으로 비교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어린이는 젖을 먹습니다. 깨무는 이가 없으니까 단단한 것은 먹지를 못합니다. 음식은 깨물어 먹는 것이 맛이 있습니다.

① 그대로 넘기는 것은 쉬운 말씀으로 깨달음과 실천에 부담이 없이 주는 것을 의미하고,

② 깨물어 먹는 것은 심오한 말씀까지 자기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듣기 어려운 책망도 단단한 식물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히 젖먹는 신앙에서 음식 먹는 신앙으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렇게 어렵고 딱딱한 것인 줄로 착각하여 덮어두려 하지 마시고 꼭 눈을 뜨셔야 할 것입니다.

2)젖먹는 어린 신앙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경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알고 배우지만 “그 말씀의 참맛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시 119:103에 보시면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 더 하니이다”하셨는데 이것이 의의 말씀을 경험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성경은 다 의로운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얼마나 의롭게, 또 심오하게, 능력있게 받느냐?하는 것인데 초보적 신앙에서는 이런 경험을 잘 할 수가 없지만, 계속 노력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고 연단을 받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성한 신앙 수준에 자리하였으면서도 아주 쉬운 상식적인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실의 정욕에 눈이 가리워지면 선악 판단에 초점을 잃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① 단단한 식물이란 신앙의 원리나 심오한 해석을 의미하고,

② 장성한 자의 세 가지 조건은,

㈀지각을 사용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과,

㈁많은 연단을 받는 것과,

㈂성경의 원리에 따라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성한 신앙은,

1)말씀 터득력이 강해야 하고,

2)실천의 폭이 넓어야 하며,

3)적응력이 원만해야 하고,

4)선악 분별에 민감할 줄 아는 것입니다.

신학이 혼잡하고 불건전한 운동이 난무하며 현실의 유혹이 아주 강한 이 때에 장성한 신앙이 아니면 바로 믿고 바로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아셔서 믿음 성장에 크게 노력하여야 할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믿음의 성장을 촉구하심 (히 5:11-14) 목록으로


믿음에도 성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곡식의 자람과 결실로 믿음의 성장을 교훈 하셨습니다(막4:26-29). 바울 사도께서도 고전3:1-3에서 어린이 같은 미숙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1. 듣는 것이 둔함을 지적하셨습니다.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하셨고, 롬10:14에서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느냐” 하셨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양식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탐구하여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닫는 것이 둔하지 않으려면 사모하고, 열심히 배우며, 성경의 기초적인 지식을 알고 이해를 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고 못 듣는 차이를 점검하셔서 누구나 말씀을 깨닫는데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2. 믿은 때가 오래되지만 성경의 선생이 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말씀의 초보가 무엇이지를 누구에게 배워야 할 형편이라” 하시므로 신앙의 성장이 부진함을 지적하셨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1년간 가르치시므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행11:26).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믿음이 쉽게 자라지만 잘못 배우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오래 믿어도 신앙의 틀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이 있고 봉사를 잘하는 분도 있지만 교회적으로나 기독교 사상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대구 대봉제일교회의 어떤 연로하신 권사님이 봉사에 덕을 세움은 물론 교리적, 사상적 지식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3. 또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어린 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지식이 없고 듣는 것이 둔합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젖만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젖먹는 식의 설교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성도들에게 항상 젖먹이는 설교만 하다 보니까 성경과는 점점 멀어지고 재미있는 세상적인 이야기만 듣기 좋아하는 형편으로 믿음이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속히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장성한 자의 신앙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4. 장성한 신앙은 어떤 것입니다 ?

1) 이것은 말씀을 깨닫는 힘이 있어서 잘 듣고 성경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과 권위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심령에 지혜의 은사가 나타날 때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장성한 신앙은 깨달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실천력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장성한 여부를 살필 수 있습니다(마7:24).

3) 장성한 신앙은 연단을 많이 받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환난을 받으면서 믿음과 사명을 지킨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경험이 많으므로 장성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무리 총명하여도 역사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른일 수 없듯이 장성한 신앙도 경험과 연단을 쌓으므로 이루어집니다.

4) 장성한 신앙은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이때에 옳고 그른 것을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하고 바른 처신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을 많이 아시고 더 많이 실천하며 역경에 대비하기 위한 연단을 많이 받으시므로 장성한 신앙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11. 말씀을 깨닫는 은혜 (히 5:11-14) 목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말씀에서 “멜기세덱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고 싶지만 성도들의 듣는 것(깨닫는 것)이 둔하여 해석하기 어렵다” 하시고, 신앙의 연조가 오랠수록 마땅히 성경의 선생이 되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성경의 초보를 더 배워야 할 입장이니 어린아이의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시면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지 말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어른처럼 성경을 깨닫고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깨달으며 연단을 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1. 말씀을 깨닫는 신앙은 곧 자기의 신앙을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계1:3에서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고, 전5:1에서는 “조용히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 하셨으며, 삼상15:22에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을 드림 보다 낫다” 하시므로 진리를 듣거나 배우는 것이 신앙적 의식보다 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14:16-17)이시기 때문에 진리 중심으로 성취되는 감동과 행동에 역사하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마15:10,막7:14,롬10:10,14,17). “듣는다”는 뜻은 글로 전달하는 수단이 적었을 때 뜻을 전달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며, 전달 수단이 발달한 이 시대에는 듣고 보면서 배우고 경험하므로 진리를 터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당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실(행2:14,37,10:44,11:15), 말씀이 흥왕할 때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 완고한 자들의 회개가 있었으며(행6:7), 스데반의 설교와 빌립의 설교를 들을 때도 은혜의 역사가 나타났었고(행7:54-55,8:6-8), 베뢰아 교인들과 아덴의 성도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도 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행17:11,21,18:8). 또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므로(마4:4) 영혼을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

1) 하나님께서 듣는 귀를 열어주셔야 합니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15,계13:9) 하셨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행7:51)고도 하셨습니다.

사6:9에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니....이는 하나님이 둔하게 하고 막히게 하며 감기게 하신 것이라 즉, 징계 받는 기간이 차기도 전에 보고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하여 하나님이 막히게 하신 것이라” 하셨으니 이렇게 벌을 받는 백성에게는 그 징계의 기간이 차기까지 말씀 듣는 귀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령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혹 벌을 받고 있는 기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회개가 제일 좋은 약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야 합니다. 옛날에는 선지자가 없고, 말씀이 희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없는 암흑한 때가 있었습니다. 암8:11-12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요 사람이 바다 저 끝 동서남북으로 왕래하며 말씀을 듣고자 하여도 얻지 못할 것이니 그 날에 말씀이 크게 갈하여 피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부터 시작하여 세례 요한의 출현까지 약 400년 동안 선지자와 말씀이 없는 암흑 시기가 옴으로써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또 사56:9-11에 보시면 “선지자가 무지한 벙어리 개처럼 되어 바른 진리를 나타내지 못한다” 하셨고, 이런 일들로 인하여 바울 사도는 엡6:19에서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즉, 말씀을 깨달으려면 진리의 바른 증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5:8) 하셨고 또 옥토에 뿌려진 씨가 되어야 하며(마13:23),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딤전3:9,약1:21)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깨끗한 마음에서만 진리가 수용되는 것입니다.

4) 사모해야 합니다. 시107:9에서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하셨고 또 20절에서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셨으며, 살전2:13에서는 “너희가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듣고 배우기를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말씀을 깨닫는 취미에 끌리지 않으면, 은혜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말씀과 함께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느끼지 않으면, 현실적인 정욕을 물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최고의 은혜인 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신앙 생활의 단계 (히 5:11-14) 목록으로


본문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가 어린아이 같은 입장에 머물지 말고 속히 장성한 자처럼 발전해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어른이 되는데 거기에는 성장 과정이 있습니다. 교육 과정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 생활도 성장 단계가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우선은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이 신앙 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에 성경을 알아야 신앙 생활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움의 범위는 우선 기초 상식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의 틀이 잡힙니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에 항상 살펴야 하지만 우선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성도는 기초 상식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2.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의 강령은 사랑이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집사되고, 장로되며 구역장 되는 것은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계명은 믿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요14:21에 보시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고, 요14:26에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와 거처(居處)를 함께 하리라”고 하심으로써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주님을 발견하는 방법이요 주님의 사랑을 받고 거처를 함께 하는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과 사람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하고 사모하며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며 감사와 기쁨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에 대하여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의 계명, 이웃에 덕을 세우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 오신 인간의 표준형입니다(롬5:14). 성경에는 거룩을 강조하신 말씀이 많고(고후7:1,벧전1:16)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라”(롬8:29) 하셨는데, 그 말씀들이 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엡4:13) 하셨고, 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신다(갈4:1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다 성도가 완전한 예수님은 못되어도 성자(聖者)처럼은 되라는 뜻입니다. 성도란 곧 성자(聖者)를 뜻하는 것입니다. 항상 진실하고 의롭고 선하며 누구에게나 부담감을 주지 않는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봉사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화되지 못하였으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 관한 문제를 책임지고 다음에 남을 위하여 일하거나 다른 사람의 앞에 서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성장 단계는,

① 말씀을 배우는 단계,

② 계명을 지키는 단계,

③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성화되는 단계,

④ 봉사, 헌신하는 단계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 (히 5:12-14)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신앙의 성장이 더딘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우리의 신앙이 왜 성숙하게 자라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는,

1. 노력하지 않는데서 얻어지는 자연 현상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소득의 근거가 성실에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창3:17,19에서 “육체의 양식도 수고하고 땀흘려야 얻는다” 하셨고, 시37:3과 127:2에서는 “성실하게 수고하여 떡을 먹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신령한 은혜에 대해서도 마11:12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하셨습니다. 돈을 버는 일만큼만 노력하면 충분하게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마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살아야 한다” 하신 것도 역시 떡을 먹기 위한 정성보다 은혜 받기 위한 정성이 앞 설 때에 믿음의 성장을 이룩할 수가 있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출세를 위한 노력보다 앞세워 보십시오. 반드시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2. 말씀 터득의 지능이 둔함으로 신앙 성장을 저해하게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이고 믿음의 근거이며 생활의 표준이요 능력이니만큼 성경 공급을 얼마나 잘 받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성장하니까 “성경을 배우고 안다”는 것이 신앙 성장의 가장 큰 지름길인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셨고, 12절에서는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에 젖먹는 아이처럼 초보적인 것이나 가르쳐야 할 뿐 단단한 식물과 같은 교리나 책망은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잘 먹어야 건강해지는 것처럼 말씀 섭취를 잘 하여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기초 지식을 배우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에 유력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더디 믿는 것이 신앙 성장의 장애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심치 않고 신뢰한다는 뜻이고, “더디 믿는다”는 것은 믿을 때까지 의심한다는 것이니까 그 신앙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성경을 읽다가 어떤 것은 믿기 어렵다고 항의를 하는 예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1:1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라 하셨고, 히11:3에서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고 하셨으므로 성도들은 이대로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창조설을 성경에 의하여 믿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교과서에도 진화론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 출신 지역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개인적 동의를 받아 가지고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빼든지 창조설과 병용하여 가르치든지 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했다가 창조설이란 학문이 아닌 신앙이라는 이유로 목적 달성을 못한 실례가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학문의 명확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학문으로 못하는 “우주기원설” 같은 것은 성경에 의하여 신앙으로 믿는 것이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디 믿거나 안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디 믿는다”는 말씀은 눅24:25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자신이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여인들이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고하니까 그들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고, 또 도마에게 말하니까 그는 “예수님의 부활체의 손발의 못자국을 만져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예수님을 따랐던 두 청년이 엠마오로 갈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면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날이 저물어 음식점에까지 같이 가면서도 예수님을 몰라 뵙고 한결같이 부활을 의심하는 대화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말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았으면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부활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책망조로 말씀하시고 음식상을 놓고 축사하시니 그때에야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더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의심하면 보는 눈도 막혀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성장은 확실한 성경 지식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생활의 변혁을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분이 하나님을 모신 자로, 성경을 모르던 분이 진리를 아는 자로, 생활의 표준을 자기에게 두었던 사람이 성경에로, 불의에 방심하던 사람이 의로운 생활로, 세상 따라 살던 사람이 교회 따라 사는 생활로, 세상에만 소망을 두었던 사람이 영생에 소망을 두는 자로 변화를 하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 사실을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들어가 변화되는 과정”이나(마13:33) 또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 되는 과정”(요2:1-)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엡4:23에서 “너희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마음가짐과 생활의 바른 목적과 방법에 변화가 없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호7:8에 보시면 “뒤집지 않은 전병”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생활을 뒤집지 않으면 전병처럼 타버리고 망합니다. 전병을 뒤집어 익혀야 하는 것처럼 확실한 변화의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과감한 생활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5. 신앙 생활의 환경을 변하거나 동요하는 생활 때문입니다. “환경이 변한다”는 것은 인간적 사정에 따라 교회를 옮기는 것이고, 동요하는 생활은 꾸준하지 못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런 경우에도 믿음 성장의 저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개인의 기업체에 취직을 하여도 평생 있을 직장으로 간주하여 들어가고 소득의 타산으로도 옮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 주인이 생활 보장 대책을 세워준다고 합니다. 세상 일도 그렇거든 하물며 신앙 생활이겠습니까 ? 나가다가 안 나가다가, 열심 있다가 없다가, 봉사하다가 안하다가, 죄안짓다가 짓다가 하는 식으로 동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동요를 비유로 설명하면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을 앓는 것 같고, 나무를 자주 옮기는 것 같으며, 배가 풍랑을 만난 격이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동요가 많으면 발전에 큰 후퇴를 가져옵니다. 베드로의 생애는 동요가 많았습니다. 고기 잡는 이적을 체험하고 주님을 따른 후에 물 위를 걷는 능력까지 체험하였다가 금방 바람을 무서워하여 빠지게 되었고 연약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가 또 버리고 저주하였습니다. 사명 생활도 포기하고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다시 재기하였습니다. 불꺼진 장작을 다시 피우려면 힘들고 더딘 것처럼 신앙의 동요는 발전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신앙의 성장이 더딘 이유를 잘 파악하여 하나님을 충만하게 모시는 믿음의 발전을 이룩하도록 최대한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완전함에 나아감 (히 6:1-8)목록으로


이 말씀을 구분하면,

①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완전하데 나아가라(1-3절)”하셨고,

② “여러 가지 신령한 은혜를 맛본 자도 타락할 수 있다(4-5절)”,

③ 신령한 은혜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의 그 타락 행위는 마치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행위와 같아서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6절)”하셨고,

④ 타락자의 형편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으로 비유하여 저주에 이를 것(7-8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4가지의 대지를 종합하여 “완전함에 나아감”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라”하심에 대하여

1)초두의 “그러므로”란 신앙 성장의 타당성을(히 5:11-14) 연결하시는 말씀입니다.

2)그리고 “도의 초보”란 뜻은 기초 신앙, 또는 상식적인 신앙의 지식과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3)그 상식적인 지식과 생활을 열거하면,

①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죽은 행실이란 소망없는 잘못된 생활 즉, 죄되는 것을 깨달아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 생활은 회개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행실에 머문 상태가 곧 초보적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막 1:15).

②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리 신학으로 말하면 신론, 삼위일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초보 지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세례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세례의 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세례의 근거와 방법과 목적과 은혜와 결과를 아는 것은 초보적 신앙의 지식입니다.

④ 안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안수에 대한 내용을 <기독교 신앙백과> 174페이지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안수는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에게 주셨던 특수한 은혜로 안수를 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행 8:17). 그러나 예수님이 12사도를 세울 때는 안수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안수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국한되었었고 또 세례나 임직식이 있을 때도 시행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안수로 능력을 나타내 주신 것은 사도시대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식이나 임직으로 나타내실 때는 임직식을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국한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아 성령을 힘입는 것 역시, 초보적 신자들에게 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마 8:8, 왕하 5:14, 행 19:6).

⑤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성도의 부활, 악인의 부활에 대하여 믿는 것은 사도신경에도 나타난 것으로 초보적 교리에 속하는 것이요,

⑥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은 그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다 이 심판을 믿습니다. 문제는 심판을 믿는 자처럼, 두렵게 생활하여야 할 것이며 또 이것을 믿는 신앙도 초보에 속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그리고 본문 2절 하반에서는 (이런)“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가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초보적인 신앙 생활에 터를 닦듯이 정착하지 말고, 더 나은 신앙과 더 완전한 신앙으로 전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더욱 큰 은사(고전 12:31), 더욱 큰 은혜(약 4:6), 더욱 큰 믿음(눅 17:5, 마 15:28)으로 더욱 큰 영광(고후 3:10)을 돌려야 하겠지요.

5)그러면 그 더욱 크고 “완전한데 나간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① 중생의 확신을 갖고,

② 진리의 지식들을 더 풍성하게 가지며,

③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④ 사명 생활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또 “나간다”는 뜻은 “나타난다”는 뜻(프로세코마이)이 아니고 “돌진하다”는 뜻(페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후퇴없는 전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데 나간다”는 뜻은 전적무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최고 성숙을 위하여 노력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분량도 더욱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6)이렇게 성장해야 하는 은혜도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성취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3절). 저희들은 이런 허락이 있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2.믿음 생활을 하면서 상당한 은혜를 맛본 성도도 타락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상당한 은혜를 맛본 성도”라도 타락을 방지 할만한 보장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이렇게 은혜를 맛본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이유는 맛보는 그 자체가 먹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 영양을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맛본다”라는 ‘게우오’(γεύω)는 “먹었다”라는 ‘에스디오’(ἐσθίω)가 아닙니다. 따라서 맛보는 은혜는 체험을 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 믿음을 지켜나가는 능력을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맛만 보고 미친듯이 날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맛을 보는 은혜에서 먹는 은혜로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요 6:51,53).

2)맛보는 은혜에 대하여 4-5절에 말씀하시기를,

① 한번 비췸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단 복음을 받고 믿기를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②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리신 복음 즉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믿어 보는 것입니다. 또 전도자도 될 수 있습니다.

③ 성령에 참여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에 참여하면 “주를 주시라”고 할 수 있다 하셨으니(고전 12:3) 일단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고

④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설교를 듣고,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므로 교회 생활을 통하여 천국 생활을 체험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은혜와 생활은 참된 성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여질 것입니다.

3)그런데도 “타락할 수 있다(6절)”하셨으니 우선 타락할 자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하는 점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①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 주위에도 세례 받고 집사 직분까지 행하다가 타락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권사님은 죽을 때에 “천국갈 소망을 가지시라”하니까 “천국도 예수님도 아무 소용없다”하고 죽은 이도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목사는 부흥사 노릇까지 하다가 타락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평소에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고 또 은혜의 체험을 한후 충성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례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들이 상당부분 외식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외식에 끌렸다”는 것은 중생의 확신없이 유익의 타산을 따라서 일시적으로 해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병낫기 위하여 똥물도 먹어 보듯이 무엇이나 다 해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②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맛보지 못하게 하셔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겠지만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다(마 15:27)”고 하신 것처럼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가 상당 부분 성도 아닌 자에게도 지식적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도 다 성령의 감동과 지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타락하였습니다. 또 바울 사도를 살리기 위하여 같이 탄 사람 276명을 다 살려 주신 것이나(행 27:24,37) 지상의 교회를 비유하는 농장에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서 곡식이 먹어야 할 영양을 가라지가 나누어 먹고 있는 것처럼(마 13:29,30)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도 성도에게 주실 은혜를 상당 부분 나타내 주시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마 6:45).

4)그러면 이들이 성령의 은혜를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는가?할 때에 선택을 받거나 거듭난 상태에서 받은 은혜가 아닌 것은 성령의 인침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구원의 보장이 없고 따라서 타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가 성경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나 느브갓네살 왕도 있고, 신약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웠지만 타락하였으며(마 10:4,27:5),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은혜를 받고 재물까지 헌납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타락하였으며(행 5:1,9), “시몬”이란 마술사도 세례까지 받았으나 타락하였으며(행 8:13,19,21-23), 베드로는 일시 타락하였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고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고 타락한 사람들은 비택자, 비중생의 상태에서 은혜를 맛만 보는 정도에 있었던 것이고 베드로는 선택된 자였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 실족하지 않는다(벧후 1:10)”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택함을 받은 “성도는 타락하지 않는다”고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눅 22:3, 요 6:39,40, 10:28,29, 17:2,6, 롬 8:30,11:29, 빌 1:6, 살전 5:23, 벧전 1:4, 요일 3:9).

3.이렇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6절). 왜 그럴까요? 6절에서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기 때문입니다.

1)이 배교자들의 죄악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범죄와 죄질이 같은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못박히실때 그 편에 있었는데 외식적으로 믿고 또 배신 하였으니까 두 번 못박은 것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믿어야 권고의 은총을 받을 것인데 반복적으로 십자가 신앙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권고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4.따라서 이런 자들의 결국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7-8절).

1)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농부가 바라는 소출(채소)을 냈을 때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영광의 열매를 나타낸 것이지만

2)은혜를 받은 땅이 농부가 원치 않는 가시와 엉겅퀴를 냈을 때는 그 밭이 불사름을 당해야 마땅한 것처럼, 헛되이 은혜를 받고 타락한 자들은 결국 저주를 받게 되어, 두 번 못박은 자를 하나님은 버리시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중생의 인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해도 타락할 여지가 있으니, 모든 성도는,

① 반드시 택하심과 거듭남을 확신하고,

② 초보적 신앙에서 완전한 신앙으로 전진하여 타락의 여지가 없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은사를 맛보고 타락함 (히 6:4-6) 목록으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상고하여야 합니다.

① 은혜를 체험한 사실에 대한 설명(4-5),

② 타락의 성격(6),

③ 다시 새롭게 되도록 회개케 하지 못하는 이유,

④ 선택 및 중생의 은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1. 은혜를 체험한 사실에 대한 설명.

1) 한 번 비췸을 얻었음은 복음 전파를 받은 것이며,

2) 하늘의 은사를 맛봄은 신령한 복에 대하여 깨닫고 참여한 생활이요,

3) 성령에 참여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지식을 갖거나 체험을 한 것이며,

4)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봄은 성경을 배워 상당한 지식을 가졌음이요,

5) 내세의 능력을 맛봄은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보았거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 같은 생명의 역사를 체험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의 은혜의 체험은 믿음 생활이 성숙한 성도가 체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2. 타락의 성격은 어떤 것입니까 ?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하셨으니 십자가를 등지는 행위로 가룟 유다의 소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교훈과 능력을 체험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는 일에 협력할 만큼 타락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 완전한 신자 같았으나 나중에 보니 확실하게 타락한 것입니다.

3. 다시 새롭게 되도록 회개케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 회개시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요 구원 계획(선택)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마3:9).

2) “회개”란 십자가를 믿는 신앙 안에서 탈선한 것을 돌이킬 때 사용한 용어로 이해하여야 하며 십자가 밖에서는 회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새롭게 된다”는 뜻은 돌이킴과 동시에 씻음과 의로움을 받는 것인데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히시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회개케 하지 못한다 하신 것이요,

4) 이는 선택밖에 있는 불신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① 비택자가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비택자가 신령한 은혜를 전적으로는 받을 수 없지만 선택자(성도)의 생활에 참여하면서 상당 부분을 맛볼 수는 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은 사실(창21:17), 느부갓네살 왕이 능력을 체험하고 예언한 사실(단3:28), 믿음 없는 자의 병을 고쳐 주신 일(마2:15,눅17:14,17), 가룟 유다에게 진리 사역을 나타내신 일, 아비멜렉이나(창20:3) 애굽의 관원들이나(창40:5) 바로나(창41:1) 미디안 군사들(삿7:13)에게도 계시 사역이 나타난 것처럼 성령님의 역사는 비택자들에게도 역사하셨습니다. 또 이 역사의 목적은 택한 백성의 유익을 위함이었고 또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맛보이신 것입니다.

② 선택받고 거듭난 성도는 연약으로 인하여 일시 타락하여도 믿음(십자가)을 떠나지 않다가(요6:39,40,10:28,17:2) 회개할 기회를 힘입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지만 선택과 거듭남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상당한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외식적 생활일 뿐이요 결국은 십자가의 은혜를 외식적으로 믿다가 십자가 밖으로 완전히 나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한국 기독교 초기에 황 00 목사는 일시 부흥사로 많은 사람을 울리고 웃겼지만 결국 타락하여 요정업을 하게 되었고, 동료 목사가 찾아가서 “당신이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한즉 “부흥사 노릇은 한 때 해본 것 뿐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은혜받은 자 같은 외식자가 있음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외식자들이 은혜를 맛볼 수는 있지만 구원에 이를만큼 회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17 과 미래의 풍성한 소망 (히 6:9-20)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이 말씀의 저자가 말씀을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9-10절)과,

②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11-15절)이요,

③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풍성한 소망을 가져야 할 것(16-20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제목을 “미래의 풍성한 소망”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격려의 말씀에 대하여(9-10절)

1)9절 초두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하심은 바로 앞에서 권면하신 히 6:4-8말씀을 연결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는 “성도가 신령한 은혜들을 맛보았을지라도 비택자일 경우에는 타락하여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 당시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2)왜냐하면 그들은 초보에 머물러 있는 신앙 상태(히 6:1-2)보다 더 나은 것이 있고, 또 “구원에 가까운 증거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3)그리고 그 “더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확신의 근거”를 10절에서 설명하셨는데, 첫째는 “그들의 일반적 행위”요 다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실천, 즉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성도의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증거가 되고(마 7:16, 약 2:17,22),

② 행함의 증거는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마 22:36-40). 그 당시에 이 말씀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즉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 사랑을 실천하되 과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성도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10절). 만일 성도가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여 사랑을 실천함이 없다면 진실한 성도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은(당시의) 성도들은 이상과 같은 진실된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 나은 행위요 구원을 확신할만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4)따라서 불의함이 없는 하나님이 그런 행실들을 감찰하시고 잊지 않으시며 “그만한 상급을 주실 것을 확신하라”고 하셨습니다(계 22:12).

2.저자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11-15절). 이 권면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1)각 사람이 동일한 근면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11절). 11절에서는 “각 사람의 동일함”을 강조하셨고, 12절 초에서 “게으르지 말 것”을 첨부하였으므로 전체 성도의 근면을 바라신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성도가 다 신앙 생활에 근면하면 갑절의 모임으로 갑절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근면의 결함이 교회마다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소망의 풍성함을 끝까지 또 영원히 간직하려면,

① 확고한 믿음과 근면한 생활과 꾸준한 인내가 필요하고(12절),

② 또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선배들의 신앙도 본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③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선배의 모범을 다음 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3.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6-20절).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해야 할 이유

1)하나님의 약속이 확고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② 또 보통 약속보다 더 강하고 의심없이 받을 만한 최후 확정인 맹세로 주셨으며,

③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높은 대상을 보증으로 하여 맹세하지만(16절)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높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맹세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④ 이 맹세의 내용은 창 22:16-18에 기록된 것을 의미상을 요약하여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14절)”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자손의 번성”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는다(창 22:18)”는 메시야 구원 언약도 포함이 된 것입니다. “복주고 복준다, 번성케 하고 또 번성케 한다”는 말씀이 영육간의 복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처음에 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중에 받았다(15절)”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창대할 것에 대한 약속을 그 나이 75세 때에 받았습니다(창 12:2,4). 이것이 성취된 것은 100세 때였으므로(창 17:1,19) 25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 약속을 기다릴 때 일시적으로 피곤함을 느꼈지만(창 16:3,17:18) 결국은 인내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받은 것입니다(창 21:3). 이와 같이 성도는 아브라함의 인내와 소망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의 맹세는 변치 않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17-18절).

① 하나님은 기업을 받을 선민들에게 그 뜻(약속)의 변치 않음을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고,

② 또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확실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두 가지 확실한 것이란,

㉠ 하나님이 불의하시지 않은 사실과(10절),

㉡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사실(18절)입니다(어떤 이는 이 두 가지란 약속과 맹세로 또는 구원과 상급이라고도 함). 불의하지 않은 하나님 또 거짓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근거에 의해서 믿음을 확고하게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4)그래서 하나님은 앞에 있는 소망(미래의 천국)을 향하여 멸망을 피하여 가는 성도들에게 큰 안위를 주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일에 안위와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는,

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예수님이 이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의 보좌인 휘장 안의 지성소에 들어가 영원토록 중보 역할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0절;벧전 2:9).

② 이 휘장 안의 지성소란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일컫는 것입니다. 또 이 소망은 떠내려가는 배처럼 유동적일 수가 없고 오직 영혼의 닻처럼 튼튼하고 견고하여 요동 없이 영생의 천국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이삭의 출생을 25년 후에 또 자손들의 번성을 약 500년 후에 또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약 2000년 후에 될 일로 믿으면서 소망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소망도 영원한 판도에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미래에 주시는 내세와 상급에 풍성한 소망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제 18 과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 (히 7:1-10)목록으로


이 말씀은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직”을 소개하신 말씀입니다.

1.저자가 히브리인들에게 “멜기세덱”을 소개하신 이유는,

1)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아브라함 때에 출현한 멜기세덱이 어떤 인물인지, 또 그가 왜 출현하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2)멜기세덱은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계시하기 위한 모형적 인물로 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그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으신 것입니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레위족 제사장과 그들이 드리는 제사 의식만 중히 여기고 참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4)율법에 의한 제사장이나 제사직은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계시하는 책임을 다한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를 성취하시면 직임을 끝내고 제사드리던 일이 폐지될 뿐 아니라 제사장직도 없어지게 되며 신앙 생활도 복음적 신앙으로 개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8:13,9:10).

5)그리고 죄사함 받는 것과 구원의 효력도 구약의 제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효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히브리인들 중에서는 레위 지파 제사장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기면서 예수님과 멜기세덱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본서를 기록한 저자는,

① 멜기세덱이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임과,

② 아브라함보다도 높은 인물이며,

③ 또 레위족 제사장보다 높은 인물임과,

④ 예수님이 레위 지파 제사장의 반차를 이은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믿게 하려는데 이 말씀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멜기세덱의 신분 소개에 대하여(1-3절)

1)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① “멜기세덱”의 뜻은 “의의 왕”이요, “살렘”이란 지역이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에(시 76:2,현재 예루살렘의 옛날 이름) “멜기세덱”이 그 성을 다스리는 왕이었다는 뜻입니다.

② 멜기세덱이 메시야 모형적 인물로서 제사장의 직과 “왕직을 가진 것은 예수님의 3대 직임(선지자, 제사장, 왕)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당시에 그에게 제사장직을 주셔서 봉직하게 하셨고 또 메시야를 계시하셨습니다.

2)“그는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하셨으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인물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①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굉장히 숭상한 모양입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세력있는 군주적 지위에 있어서 이웃나라들을 그들의 대적으로부터 구출해 주는 역할까지 하였습니다(창 14:1-20). 우방국을 구출하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그 군인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대접하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것입니다.

② 여기에서 떡과 포도주를 대접한 것은 군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혹 이 “떡과 포도주를 대접함”이 예수님의 성찬만의 의미를 계시하신 것인지는 스스로 상상에 맡길 일입니다.

③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준 것이 아닌 복을 빈 것은 그가 신이 아닌 사람이란 뜻이며, 또 7절에서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로부터 복 빔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복을 빈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인물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6절의 “약속 얻은 자”란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되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3)2절에서 “아브라함이(전리품 중) 일체의 1/10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셨는데,

① 이 뜻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십일조의 사례를 받을 만큼 높은 인물이란 뜻입니다.

② 여기의 1/10은 축복 받은 감사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레위 지파가 받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레위 지파를 권위있게 여긴 것은 역시 다른 지파의 십일조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이 받는 십일조는 멜기세덱이 받은 것과 성격상 같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1/10은 축복 사례로 드렸지만 레위인들이 받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서로 나누어 살게 하기 위하여 의무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레위족을 십일조 받는 문제로 권위있게 여길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 또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그것을 받는 레위족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롬 4:15) “죽을 자들에게 준 것이라”하셨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다(8절)”하셨으니 여기의 “산다고 증거를 얻은 분”은 예수님과 멜기세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 110:4에서 다윗이 메시야를 예언할 때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의 의미를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분”이면 산다는 대상임이 틀림없고 또 그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으셨은즉 “멜기세덱”도 죽지 않는 존재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존귀한 인간이지만 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같은 인물이 아닌가?하고 상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4)3절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과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하셨으니 이는 멜기세덱이 유명한 사람으로 출현하였으면서도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을 어떤 기록에도 남기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영원적 신성을 방불하게 계시하는 일로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 “그가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하심은, 제사장의 직임이 예수님으로 이어질 때까지 영적 상태에서 그 직임을 이행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그가 아브라함보다도 높고 레위족 제사장보다도 높다는 사실은 이미 십일조의 성격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1)한가지 부언할 것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릴 때 약 500년 후에 탄생할 레위족은 그 생명의 요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음인즉 조상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례에 동참함이 되었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레위족 제사장들로부터도 십일조를 받은 것이 되므로 그들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5,9-10절).

결론은,

① 아브라함이나 레위 지파 제사장은 실제적 중보자가 아닌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예수님을 영원한 중보자로 모시라는 것이요,

② 모세 때로부터 약 1500년 동안 율법적 제사의식에 의존해 온 신앙적 전통을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복음적 신앙 생활로 바꾸려니까 완고한 히브리인들에게 이런 권면과 설득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적 은혜를 옳게 이해하고 생활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19 과 별다른 제사장 (히 7:11-19)목록으로


본문에서는,

① 레위 지파가 아닌 별다른 제사장을 소개하셨고,

② 그 별다른 제사장이 세상에 오셔야 할 이유와,

③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말씀을 증언한 이유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님이 영원한 중보자이신 것을 믿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1500년 동안 내려오는 레위 지파 제사장만이 영원히 존속되는 제사장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1.본문에 보시면 별다른 제사장을 소개하셨습니다. 11절의 “별다른 제사장”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는 별다른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구약적인 증언으로 소개를 하신 것입니다. 구약적인 증언이란 멜기세덱으로 계시하신 말씀과 율법의 제도가 무익함으로 별다른 제사장이 오셔야만 한다고 증언을 하신 것입니다.

1)11절 하반에서 “별다른 제사장은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신 분이라”하였고

2)12절에서는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았던 다른 지파에 속한 분이라”하시므로 예수님이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를 따라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게는 모세가 제사장 문제로 일체 언급한 바가 없었습니다(14절).

3)16절에서 그 별다른 제사장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 즉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명령한 계명적인 법(율법)”에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 즉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명령으로 되셨다”는 것입니다.

4)그 명령이 곧 17절에 나타난 말씀으로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게 하시기 위하여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명하신 사실이며 이 말씀은 시 110:4에 이미 기록된 말씀입니다. 율법은 “메시야를 영접하여 생명을 얻으라”고 명령은 하지만 직접 그 생명을 전달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시 2:7-12). 그래서 율법과 상관 없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유다 지파요, 영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요, 영원한 제사장직의 계승으로는 멜기세덱을 이어 오신 별다른 제사장이신 것입니다.

2.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별다른 제사장이 왜 오셔야 하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1)레위 지파의 제사직분으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직분이란 율법 준행과 제사의식 전부를 의미하는데 레위인들은 성전의 일을 하면서 율법을 가르쳤고 그 지파의 제사장들은 그 율법에 의하여 친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계명은 다 지킬 수 없는 것이었고 또 그들이 드린 제사는 십자가의 모형일 뿐 실제적인 속죄나 구원적 생명을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갈 3:10-11). 그것이 바로 본문의 “온전함을 얻지 못하였음”인 것입니다. 여기에 “온전함”이란 뜻은 “목표에 도달함”을 뜻하는데 율법은 이것을 성취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짐승의 희생이 어떻게 사람의 죄책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다”는 말씀은 “모든 선민이 다 레위 지파를 통하여 율법 지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2)18절에서 “전의 계명은 연약하여 무익함으로 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전의 계명”이란 메시야를 예언한 “의식적 율법”을 뜻하는 것이고,

② 그것이 “연약하다”함은 율법이 명령만 줄 뿐 능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요,

③ “무익하다”는 것은 구원의 목표를 성취시켜주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그래서 “폐하여진다”는 뜻은 명령적 권위를 상실케 된다는 것입니다. 성취되지 않는 명령은 결국 무익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서도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고 또 한번 강조를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권위를 세우고 율법제도가 아무리 위엄스러워 보여도 구원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는 연약하고 무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연약한 율법의 제도를 왜 주셨나? 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무익하여 폐하여질 것을 왜 주셨을까요?

㈀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롬 3:20).

㈁ 율법으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6:23, 갈 3:13).

㈂ 율법의 의식적 제도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히 8:5-6). 다시 말하면 구원의 필요를 느끼게 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안내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갈 3:24).

3)(별다른 제사장이 오셔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율법이 계시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배우고 지킨 사람들은 당연히 율법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해야 하는데 많은 히브리인들이 율법 권위에만 얽매여서 신령한 눈을 뜨지 못하니까 이런 말씀을 더 상세히 주시게 된 것입니다.

3.이런 별다른 중보자가 오심으로써 어떤 결과가 오는가?하면

1)12절에서 제사직분과 율법이 변역된다고 하셨습니다.

① 제사직분이 변역되는 것은 구약적 제사가 폐지되고 신령한 예배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적 제사가 폐지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사업을 위한 제사를 단번에 다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제사를 다시 재연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으로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② “율법이 변역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메시야를 계시하는 제사제도 같은 율법의 기능이 폐하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2)19절 말씀에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나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겼다”하셨으니 이 소망을 주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 예수님의 속죄와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이 못하는 구원을 능력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사를 통하여 하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주시는 교훈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율법과 예수님의 역할을 비유로 설명 드린다면,

①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에게 굵은 밧줄을 내려 주어야 하는데 굵은 밧줄이 손에 닿지를 않습니다. 이 때에는 가는 줄을 던져서 그 굵은 줄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가는 줄은 약하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줄이 굵은 줄을 붙잡는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가는 줄은 율법의 기능에 해당되고 굵은 줄은 바로 생명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성도와 마귀가 릴레이 운동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가 마귀에게 지면 구원과 상급을 못 받는 것입니다. 성도 편에는 모세, 아론, 레위 제사장, 그리고 많은 성도가 있습니다. 마귀 편에는 느부갓네살 왕도 있고 헤롯 왕도 있으며 귀신들린 자도 있고 유능한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편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다 못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바퀴에 와서 이기기는 틀렸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데 마지막 주자로 예수님이 오셔서 단번에 몇 바퀴 떨어진 것을 다 회복하고 결국 마귀 편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율법 행위로 안되는 것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아셔서 큰 감사와 영광은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제 20 과 합당한 대제사장 (히 7:20-2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합당한 대제사장”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제사장 되실 때에 하나님께 맹세하시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되셨다는 대목이고(20-21절),

② 예수님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적 견해보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자란 대목이며(22절),

③ 레위인 제사장이 예수님 제사장으로 바뀌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심에서 두 신분의 장단점을 비교하여 설명하신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23-28절). 따라서 예수님만이 합당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맹세와 임명으로 되셨다”고 하셨습니다(20-21절).

1)레위인 제사장은 율법제도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세습이 되지만

2)예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은 강한 약속과 서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명을 확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맹세를 받으신 다음에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임명하여 선포를 해 주셨습니다. 21절에서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하신 말씀은, 구약 시 110:4에서 이미 예언된 말씀인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 말씀대로 성취된 것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세나 약속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맹세와 임명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대통령 취임식이나 대법원장 취임식이 있을 때 서약하고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의식이 필요한 이유는 맡겨진 업무를 모든 국민들 앞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도록 하는 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구속사업을 성취하시는데도 예수님의 희생적 대속 사명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히 하시기 위하여 맹세를 받고 임명을 하신 것입니다.

4)그런데 이렇게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는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왜 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하셔야 될 사명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니고 극단적 고난의 죽음으로 희생이 되셔야 하시기 때문에 보통사람 같으면 그런 맹세를 해 놓고 뉘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고난을 이미 아시고 맹세하셨고 또 맹세 언약을 실천하시는 진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큰 고난을 생각하시면서도 “뉘우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자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22절).

1)여기의 “더 좋은 언약”이란 말씀이 있기 때문에 덜 좋은 언약과 더 좋은 언약을 설명드려야 하겠습니다.

① 덜 좋은 언약은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현세적 축복입니다. 또 하나님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난 제사 의식을 통하여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열심히 드리면, 그것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방법인 줄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요(갈5:4). 율법을 잘 실천하면 현세의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 곧 덜 좋은 언약입니다(신28:1-6).

② 더 좋은 언약은 인간이 행위로 의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 즉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언약은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그러면 또 “그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적 언약의 실천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셨으나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신다면 그 언약은 실천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너에게 생명을 주겠다”한 사람이 죽고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 약속의 실천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므로 그 부활이 언약 실천의 보증이 된 것이고 또 구원의 능력적 근거를 잘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3.레위인 제사장이 왜 예수님으로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레위인 제사장의 단점과 예수님의 장점을 들어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23-28절).

1)레위인 제사장의 단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28절에서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① 죄있는 사람을 제사장(중보자)으로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신 일이 있습니다(사 1:15). 따라서 죄있는 인간 제사장은 중보 기도에도 그만한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② 그래서 제사드릴 때마다 먼저 자기를 위한 제사부터 드리고 그 다음에 성도를 위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7절).

③ 또 인간 제사장은 늙으면 죽어야 하고 병들면 교체해야 합니다. 게다가 절기 때는 물론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고(27절) 또 개별적 제사가 많을 때는 성도 한 사람에 제사장 한 사람씩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번거롭고 불편한 것입니다.

④ 또 레위인 제사장이 드리는 율법적 제사는 모형적 제사일 뿐 완전한 제사가 아닌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를 모형한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이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2)그러나 예수님이 제사장 되신데는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① 우선 그 신분이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며 죄에서 떠난 분입니다(26절). 이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으로 존귀가 대단하신 분입니다. “하늘보다 높이 되셨다”는 뜻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높지만 또 하나님의 뜻대로 구속사업을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만유의 심판권”까지 예수님께 주셨습니다(요 5:27). 중보자는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③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적 제사는 단번의 제사로 그 가치가 충분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희생하셨기 때문에 여러 번 드리지 않아도 충분한 대속적 제물이 된 것입니다(27절).

④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토록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 제사장처럼 교대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⑤ 그런데다가 또 맹세하시고 하나님의 임명으로 받으셨으니까 우리 앞에 가장 완전하시고 하나님 앞에 가장 합당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28절).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중보자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감사를 느끼며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성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히 8:1-6)목록으로


① 성경을 잘 모르시는 성도가 이 말씀을 읽으셨다고 할 때에 몇 번을 읽으셔도 예비지식을 갖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상고하실 때는 항상 예비지식이 필요합니다. 먼저 예비지식을 갖추신 다음에 어려운 말씀을 여러 차례 읽으시고 단어 해석과 부분적 의미를 이해하신 다음에 전체의 뜻을 논리적으로 전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연구의 전문가가 아닌 성도님들은 까다로운 말씀의 핵심만 이해하셔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골고루 살피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마4:4).

② 이 말씀을 연구함에 있어서 예비지식을 갖는다면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세우신 레위 지파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 레위 지파 제사장은 아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손 남자들이 세습적으로 계승하여 예수님 시대까지 제사임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부터는 레위 지파 제사장과 그들이 드리던 제사제도를 사도들이 폐지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 1500년 내려오던 종교적 제사 전통을 폐지시키니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전통 고수자들)이 큰 의아심과 불평과 반발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폐지시킨 복음주의 신앙자들(사도들과 그 성도들)과 율법주의 신앙자들(제사장들과 그 추종자들)간에 큰 대립이 생긴 것입니다.

③ 저희들은 복음 신앙의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들도 왜 그렇게 폐지되었는지를 알고 따라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말씀이나 히브리서의 중심 교훈은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④ 제가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드린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를 근절시키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아 경계시키려고 주신 것이요(롬 7:7-9,13), 또 정죄(롬6:22) 시벌의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신22:22).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소망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정죄를 받게 된 것인데 그 율법의 말씀과 제도 속에 구원의 방도가 계시된 것입니다. 그 계시가 바로 제사의식을 통한 구속의 은혜를 계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한 제사장과 제사제도가 구원의 방도가 된 것이 아니고 그 계시로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실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가 있을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히 8:5). 그러다가 때가되어 예표의 실상인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의 예표적 예언을 십자가로 성취하셨으니까 모형적 제사장인 레위인 제사장은 예수님으로 교체된 것이고 모형적 제사는 십자가로 완성된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성취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것과 그의 십자가의 공로가 완전한 속죄제가 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서 레위 지파 제사장 직무가 미완성적인 직무임을 알리고 또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그보다 우월하며 또 완전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1)“이제 한 말”이란 앞에서 말씀한 내용(예수님의 속죄 사업)이고 우리는 중보자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다(“있는 것”을 존칭어로 번역하였어야 함)는 사실을 귀한 은혜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위엄있는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부활 승천하실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우편보좌”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3)이런 중보자가 계신 것이 중요한 이유는,

①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시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구원을 이루실 수 없고,

② 따라서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③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허락하여 주셨고,

④ 예수님이 그 책임을 사명으로 여겨 감당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므로 그런 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을 “중요한 줄로 여겨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영원하신 아들이 예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은 “그 예수님이 중보자의 자격으로 하늘 성소에서 일하게 하셨다(2-4절)”고 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성소”는 하늘 성소를 뜻하고 참 장막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던 모형적 장막 성전이 계시한 참 장막이란 뜻이므로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장막 성전이 바로 참 장막인 천국을 모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그 하늘 장막은 주님이 베푸신 것으로 사람이 건설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장막을 베푸신 자가 바로 성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3)예수님은 그 곳에서 성부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드릴 사명을 가지신 것입니다. 예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표요, 제물은 속죄의 희생 양을 뜻합니다(3절). 땅에 있는 레위 제사장들은 항상 그것을 모형적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한다” 하심 같이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한 자신을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드리신 것이고, 또 그 곁에서 계속 헌신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단번에 드려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셨고(히 7:27) 예물은 자신의 헌신으로 계속 드리심이 되는 것입니다.

4)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유는 바로 하늘 성소에서 이와 같은 영원한 제사와 중보를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4절). 만일 예수님이 이 세상에만 계신다면 세상에는 율법을 좇아 예물 드리는 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제사장 되실 필요가 없고, 오직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선민에 대한 중보를 하시려니까 부활 승천하신 분이 제사장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3.레위 지파에게 허락하셨던 성전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 즉 천국의 모형과 그림자란 것입니다. 즉 땅에 있는 성전 제도는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모형적 행사로 베풀어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그 장막을 지으려할 때 마음대로 지은 것이 아니고(5절) 하나님이 엄격하게 계시하신 본대로 짓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출 25:40). 따라서 레위 지파 제사장이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한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서 영원히 섬길 것에 대한 것을 예표로 나타내 주신 것이므로 그 예표를 참되게 시행하실 예수님만이 그 일을 담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4.그리고 모형을 참되게 행사하실 예수님은 더 좋은 약속을 세우신 더 아름다운 직분의 중보자라고 하셨습니다(6절).

1) 6절에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더 아름다운 직분이란 것입니다.

2)그 이유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이란 율법적 언약보다 복음적 언약이 더 좋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① 율법적 언약은 레위 지파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받는 언약으로 모형적 성전제도로 하늘 성소인 천국을 알게 하고 희생의 제사로 십자가를 알게 하며 율법의 계명을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할 것을 알아서 메시야를 대망하게 하는 언약입니다.

② 그러나 복음의 언약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죄를 사하시고 영생 구원을 주시는 언약입니다.

③ 그러니까 구약의 성취란 점과 완전한 구원을 주신다는 점에서 더 좋은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④ 따라서 완전한 구원을 실현시켜 주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의 직분이 더 아름다운 직분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1)구원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2)그 예수님은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토록 중보 역할을 해 주시며

3)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예물과 제물을 드린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헌신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분이요

4)하늘 성소에서 그 일을 하실 분은 인간의 입장에서 죽음을 맛보시고 또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부활 숭천을 하신 분이어야 하므로 그런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며,

5)예수님은 구약적 언약에 비할 때 더 좋은 언약을 실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 22 과 새 언약을 실현시키신 이유 (히 8:7-13)목록으로


이 말씀은 “새 언약을 실현시키신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① 첫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기 때문이고(7,13절),

② 구약 성경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며(렘 31:31-34),

③ 선민의 타락과 언약파기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성실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시 100:5).

1.첫 언약이란 무엇입니까?(7,13절)

1)7절과 13절에 “첫 언약, 첫 것”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첫 언약”이란 구약 또는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며

2)구약의 의미는,

① “메시야를 보내어 구원운동을 전개하시겠다”는 것과,

② “선민들이 율법을 잘 지킬 때 복을 주신다”는 언약과,

③ 또 이 율법 속에 새 언약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이 이런 언약을 하실 때 구약 시대의 여러 인물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하셨는데,

① 최초 인간인 아담에게 원시 복음으로 하신 일이 있었고(창 3:15,21),

② 아브라함에게도 하셨으며(창 17:1-13,22:15-18),

③ 이삭과(창 26:3-5) 야곱에게도 하셨으며(창 28:15),

④이스라엘 족속을 대표한 모세와도 하셨고(신 11:26-32),

⑤ 그 후에 다윗과(시 22:1, 대상 22:10) 선지자들에게도 하셨습니다(사 9:6-7, 렘 31:31-34). 이 모든 대상은 다 그의 후손들과 백성들을 대표하여 쌍방적으로 하신 것이며 또 복종과 행위를 조건으로 하셨고 그 조건적 축복에는 현실의 복과 영생의 복이 아울러 약속이 된 것입니다(신 28:, 대상 22:10).

4)그리고 백성들 편에서 이 약속을 체결하는 표시로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는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 중에서 끊쳐진다고 하셨습니다(창 17:12-14).

5)따라서 구약의 첫 언약은,

① 쌍방이 한 것이고,

②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한 것이며,

③ 이것을 수락하는 표시로 할례를 한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능력은 없으나(갈 3:11) 상당하게 지킬 힘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 준수도 그런 범위에서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고 또 인간이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2.그런데 왜 이 언약이 파기되었을까요?

1)그 첫째 이유는 언약에 참여한 백성들이 율법 준수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파기된 것입니다. 본래 쌍방계약은 일방이 지키지 않으면 파기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 “저희는 내 언약에 머물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하신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스스로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2)그래서 첫 언약은 “무흠하지 않다”하셨고 또 “낡아졌다”고 표현을 하셨습니다(7,13절). 여기의 “무흠하지 않고 낡아졌다”는 뜻은 구약의 말씀의 권위가 실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언약이 성취되지 못하므로 은혜에 이르지 못한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3)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 통치 입장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벨론 포로 당시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은 영적 축복에 관한 구원운동을 새 언약을 통하여 여전히 수행하셨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에 의함인 것입니다.

3.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8-12절).

1)“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하심은 장차 신약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심이요

2)“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운다”하심은 남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 전체의 백성들과 새 언약을 세우신다는 뜻인데 여기의 전체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을 뜻합니다.

3)그리고 “새 언약”이란 메시야를 통한 구원 운동을 의미하며,

4)그 새 언약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할 당시에 그들의 대표자인 모세와 율법적으로 언약한 것과 같지 않다”는 말씀은 첫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으로 첫 언약은 쌍방적으로 하셨고 율법 행위를 조건으로 하셨으며 이를 수락하는 표시를 할례로 하였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것이고(요 3:16) 행위 조건이 없으며 믿음으로 수락하는 표시를 세례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은 파기될 수 없고 믿음으로 받는 일은 구원 받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5)그리고 10절에서는 새 언약이 전개되는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특징은,

① 하나님의 법(복음진리)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는 것인데 이것은 거듭난 영혼이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행동실천으로 받아드리는 것의 반대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렇게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또 자기의 백성을 삼아 주신다는 것이요,

③ 또 11절에서 “내 주인과 이웃 형제들에게 주를 알라 하지 않아도 그들이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하신 것은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의 역사와 전달 수단을 통하여 복음이 상상외로 크게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④ 또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심”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속죄사업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거듭나는 은혜가 있었고(시 23:3,51:10) 복음의 계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또 주신 것은 신약 시대에 영적 은혜가 본격적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성경 말씀이 완성되며 이 말씀들이 문화의 바람을 타고 전도되어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처음 언약은 선민들이 파기하였고 또 그 언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요, 새 언약을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역할뿐이므로 예언과 구원의 경륜에 따라 새 언약을 주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어야만 하고, 하나님은 선민이 첫 언약을 파기하였을지라도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새 언약을 주신 후에, 이를 성취하시게 된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23 과 구약의 성전제도의 의미 (히 9:1-10)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약의 성전제도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구약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만들게 한 성소의 시설을 말씀하셨고(1-5절),

② 그 성소의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셨고(6-7절),

③ 이러한 성전제도가 폐지되어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8-10절). 따라서 “구약의 성전 제도를 주신 의미”를 본문에 따라 상고할 것입니다.

1.1-5절에서 구약의 성소의 시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1)여기에서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성소”란 명칭에 관한 것입니다. 성소, 성막, 하나님의 장막 또는 성전이란 말이 있는데 “성전”이란 용어는 다윗 왕 때부터 사용되었고(시 138:2), 또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소를 잘 건축한 때부터 “성전”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천막 종류로 성전을 임시 건립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소, 성막, 또는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성소란 의미가 두 가지로 사용되는데,

① 하나님의 성막 전체를 가리켜서 “성소”라 하기도 하고,

② 또 지성소와 구별하여 말할 때는 지성소 아닌 부분을 가리켜서 “성소”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2)본문 1절을 보시면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 첫 언약이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었다”는 것은 구약의 성전제도나 다른 계명들이 하나님 섬기는 예법을 나타내 주신 것이고, “세상에 속한 성소”란 것은 하늘 성소의 모형으로서 지상에 시설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예배와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제사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고 또 계명을 지킴으로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에서 제사로 하나님 섬기는 예법을 보면 우선 희생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이나 지성소에 뿌려야 하고 향과 식물을 제물로 바치게 하셨으며, 이런 것을 매일 조석 제사와 안식일 제사와 초하루(월삭)제사와 유월절, 초막절, 대속죄절 등의 절기에도 드렸는데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법들을 시행하게 하여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모형으로 나타내 주셨고, 이런 제사들이 세상에 속한 구약의 성소와 그 제도인 것입니다.

3)2,3절을 보시면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또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첫 장막은 지성소를 제외한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번제단과 뜰을 포함하는 전체 면적은 약 300평 직사각형이고 그 안에 30평 정도의 성막이 있으며 그 성막 1/3쯤을 나누어 휘장을 친 북쪽의 작은 방을 지성소라 하고 그 반대편의 큰방을 성소라고 하는 것입니다(출 25:,26:).

① 지성소 안에는 금 향료와 4면을 정금으로 싼 언약궤(법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 담긴 항아리와(출 16:33-34)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임을 증명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민 17:1-10)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 즉, 언약의 비석들(2개)이 담겨 있고(출 25:16-40:20, 신 10:1-5) 그 언약궤 위에 덮개처럼 설치된 속죄소(시은소;출 25:17)가 있는데 이 속죄소 위에는 날개 달린 천사 모양의 그룹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 향로가 위치한 곳은 법궤 앞 휘장 밖에 있지만(출 30:1-10) 그 향로의 소속은 지성소에 속하는 것입니다. 또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나 향단이나 속죄소나 그룹들은 전부 하나님이 계신 천상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요,

㉡ 향단은 성도의 영광을 하나님이 흠향하시게 하는 뜻이요,

㉢ 만나는 은혜의 양식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의미요,

㉣ 돌비는 하나님이 말씀의 계율을 주시는 의미이며,

㉤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성직을 베푸시는 의미요,

㉥ 속죄소는 하나님이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의미요,

㉦ 그룹 성령의 역사와 능력의 천사들을 부리시는 의미요,

㉧ 언약궤 뿔에 피를 바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를 열납하시게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② 그리고 성소 안에는 왼쪽에 등대가 있고 오른쪽에는 떡상 곧 진설병이 있습니다. 이 성소의 의미는 지성소를 하늘 보좌로 상징한 것처럼 성소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성소의 등대처럼 진리의 빛을 발하고 떡을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이 성소의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할 때

1)일반 제사장들은 항상 첫 장막인 성소에만 들어가서 섬기는 예를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섬기는 예는,

① 향을 피우고,

② 등불을 밝히며,

③ 떡을 진설하는 것입니다. 이 성소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상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성도가 현실에서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고 봉사, 헌신으로 하나님 섬길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2)둘째 장막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대표로 1년에 한 번씩 들어가되 피의 제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자기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자기의 피의 제물을 가지고 부활 승천하여 속죄제를 하나님께 열납시킬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첫 장막의 봉사는 지상교회 성도들의 봉사, 헌신을 뜻하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일은 예수님의 속죄제가 있을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3.이런 성전제도를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할 때에 이것은 구약의 성전제도가 복음 성취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될 것을 설명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1)율법의 첫 장막이 있을 동안에는 예수님의 구원작업 성취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지 않았으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이 있은 다음에는 그 길이 열려져서 일반 성도라도 예수님의 중보에 의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 27:51). 또 그 길이 열리기 전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피의 제물을 가지고 들어간 것은 바로 예수님이 단번의 십자가 제사로 속죄제를 열납시킬 것을 예표로 계시한 것입니다.

2)율법에 따른 상징적인 제사는 실제적인 제사가 아니고 계시를 목적으로 하는 모형적 제사이기 때문에 그 제사로서 백성들의 죄를 본질적으로 없애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9절의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바로 육체의 때를 벗기는 것처럼 심령의 죄를 그렇게 없애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때는 물이나 잿물로 씻을 수 있지만 심령의 죄는 양이나 소의 피로도 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신 공로로 하나님이 씻어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따라서 율법에 “먹고 마시며 씻는 규례가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보이는 형태로서의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계시를 목적으로 하여 시한부로 두어오다가 실제적 제사의 성취가 있을 때에는 개혁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두어두게 된 것이란 것입니다.

① 레 10:9,11:1-23등에서 율법에 “먹는 식품을 통제하신 말씀이 있고,

② 출 32:20과 민 6:13등에서는 ”포도주나 독주 마시는 것을 통제하셨으며,

③ 또 출 12:22, 레 11:25,14:4-9, 민 19:7들에는 씻어서 정결케 하는 결례의식이 있는데 이런 것이 다 육체적 예법일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속죄제사가 나타날 때까지만 상징적 교훈의 방편으로 맡겨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약의 율법적 제도”는 하늘 성소와 지상교회의 생활, 또 예수 님의 십자가 제사와 부활 승천을 계시하는 목적이 있는 것므로 예수님이 이를 성취하신 다음에는 그 제도가 필요 없게 된 것임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아무런 제사도 드릴 것이 없게 되었고 또 찬송이나 기도를 제사 드리는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되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예배와 감사와 복종과 찬미와 헌신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사명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 24 과 보혈의 공로 (히 9:11-22)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보혈의 공로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보혈의 공로로 죄씻음 받는 은혜”를 강조하신 말씀으로 “피”란 말씀이 아홉 번 나옵니다. 짐승의 피와 예수님의 피가 다 죄씻는 은혜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1.11-12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업 성취를 구약의 제사장 직임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하신 말씀은 구약 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신약 시대를 내다 보시면서 “장래”란 용어를 사용하신 것이고, 또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은 속죄사업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속죄를 통한 구원사업이고 대제사장은 구원과 동시에 중보자 역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이 신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모형하는 직임이란 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입니다.

2)모형적 제사장의 실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손으로 짓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손으로 지은 성소나 성전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드린 것이 아니고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인 자기 자신의 몸(요 2:21)을 직접 헌신의 제물로 사용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구약의 제도와 비교하여 설명드리면 구약의 대제사장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짐승의 피로 제물을 삼아 1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참제사의 모형으로 시행하였지만 신약의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성전 삼고 자기의 피를 제물로 삼아 단번에 드리시고 단번에 열납하여 영원한 제사를 실제로 드려 완성하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2.13-14절에서는 예수님의 보혈은 구약제물인 상징적인 피의 실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구약의 속죄법에는 염소나 황소의 피로 제사드리는 방법이 있었고(레 16:·14-16) 또 부정한 육체(시체만진 몸)를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결례식이 있었습니다. 이 결례식은 관유라는 결례수를 만들어(민 19:1-10) 우슬초로 찍어 뿌리는 예식인데(시 51:7,9:19) 그 관유를 만들 때 암송아지를 불사른 재를 섞어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에 “암송아지의 재를 뿌린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이것은 죄사함 즉 정결해 지는 은혜를 상징적으로 의식화한 것입니다.

2)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상징적 결례의식이 실제적인 정결을 주는 것인가?할 때에 역시 상징의 결과를 나타낼 뿐이요 실제적 은혜는 실제적 속죄제의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면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체를 만진 손을 비눗물로 씻어야 함이 더 합리적인 만큼 관유를 몸에 뿌려 정결케 하는 것은 역시 죄씻음의 상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실제적인 제사는 실제적 속죄 효력을 줄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영원하신 영을 가지시고 흠이 없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양심상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14절). 이 말씀은 영원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는 그 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에 외부적인 육체의 정결 뿐만 아니라 내부적 심령으로 범죄한 양심상의 모든 죄악까지(죽은 행실 즉, 심판 받아 마땅한 행실) 다 깨끗이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성도가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나가서 섬기게 하는 특권가지 아울러 이루어 주신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3.15-17절에서 예수님이 보혈의 공로로 속죄와 섬김의 은혜를 주신 것은 첫 언약의 성취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동산을 계약할 때 중계인은 그 계약의 성립부터 완료시까지 책임을 지는 것처럼 예수 님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보자로서 자신이 이를 성취하시고 또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기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15절의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한다”는 뜻은, 첫 언약을 주실 당시에 범한 죄란 뜻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선민들의 모든 죄를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서도 중보자를 보내셨다는 뜻이요, 16절에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마치 유언(언약을 뜻함)이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새 언약의 실천도 역시 그가 돌아가시므로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4.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피로 언약을 세우시고 속죄제를 받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18-20절).

1)인간이 확실한 맹세를 할 때 혈서를 쓰는 경우처럼 하나님도 첫 언약을 세울 때에 피로 세우셨으니(18절) 이것이 곧 짐승의 피로 제사드리는 구약의 제사법이요(출 24:6-8) 모든 성전의 기구가 다 피로서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21-22절).

2)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반포할 때도 역시 짐승의 피를 기구와 언약서에 뿌렸는데(19절) 이 사실이,

① 언약의 확실성을 피로써 보증하는 의미와,

② 장차 있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예표로 계시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그 당시에 그 피를 언약서와 모든 장막(성소)과 장막 안의 모든 그릇에까지 뿌리면서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다른 속죄법이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20-22절).

결론적으로,

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있고,

② 구약의 피뿌림의 의식이 언약의 확실성과 보혈의 속죄제를 예시하신 것이며,

③ 예수님은 이 언약을 십자가로 성취하신 증보자요,

④ 속죄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일까지 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분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5. 헌제와 효력 (히 9:11-22) 목록으로


예수님께서 드리신 십자가의 제사가 어떤 효력을 나타내 주시는가 ? 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헌제(獻祭)에 대하여.

1) “헌제”란 제사를 드린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직과 대제사장의 직과 왕의 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선지자의 직임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계시 또는 증언하시는 것이고, 대제사장의 직은 예수님이 범죄한 인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하시므로 관계를 맺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림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인도하시는 직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구속 사업과 중보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수행하시는 직임입니다(히7:17,24-25).

그런데 1967년에 미국의 연합장로교회의 주관으로 “새신앙고백서”가 나왔는데, 거기에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서의 영원한 중보”를 그 목적과 함께 선명하게 나타내지 않고 그 고백서 1부 1장에서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 사실은 하나의 신비로서 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데, 어린 양의 희생, 양을 위해 바친 목자의 생명, 제사장에 의한 속죄라고 부른다” 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속 사실을 신비라 하여 그 실제성을 약화시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의 목적을 은폐한 상태에서 “이는 인간에 대한 잔인성의 결과를 교회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므로 불완전한 면을 나타내었습니다. 또 인간적 화해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받들고 십자가를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어린 양의 희생이란 도덕적 힌트만 주고 속죄나 기적을 믿지 않는 현대주의자들에게는 신비란 용어를 사용하므로 명실공히 범종교의 일치 운동에 쓰기 위한 산물이라고 평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1967년 당시에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를 수록한 것이며 후일의 성도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2) 속죄의 제사(헌제)를 드릴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

① 사람이어야 합니다. 히5:1에서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라” 하셨고, 히9:12,22에서는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하셨으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어야 하며 또 인간이 지은 죄의 보상을 인간 편에서 지불해야 하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②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시51:19에서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를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빚진 자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은 죄인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피와 상관없이 오신 것은 무죄 상태를 보존하심 때문입니다.

③ 성품이나 생활 체험이 사람과 동일하여야 합니다. 히2:14에서 “사람과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 하셨고, 17절에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함께 되셨다” 하셨으며, 히415에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한 분이요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다 인간성과 생활과 인간고의 성질이 동일할 것을 나나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주(히12:2), 생명의 주(행3:15), 구원의 주(히2:10)라고 합니다. 여기의 “主”란 뜻이 왕을 뜻하는 ‘큐리오스’(κὐριος)가 아니고 ‘아르케고스’( ἀρχηγὀς)입니다. ‘아르케고스’는 앞에서(아르케) 인도한다(고스)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정황을(성품, 생활, 고난, 죽음, 부활) 먼저 경험하시고 그가 경험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중보자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의 성질이 동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히2:11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낳았다”고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오, 거룩함을 입어야 할 자는 성도들인데 이들이 다 하나에서 낳음을 받은 것은 곧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요3:16,히5:5) 하나님과 영적 관계가 동일하십니다. 그런 분이어야만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외에는 합당한 중보자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명과 당사자의 수락으로 되는 것입니다. 임명에 관한 말씀은 히5:5과 7:28에서 “너는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고, 수락에 관한 말씀은 히7:20에서 “예수님이 그 직임을 맹세로 수락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속죄와 중보 사역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계약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엡1:4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말씀에도 그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4) 어떻게 드려져야 합니까 ? 구약의 제사 의식 절차에는 제물 검사와(레22:17-25) 죄를 전가시키는 뜻의 안수와(레1:4) 희생의 피를 흘리게 함과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리는 열납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헌제에 대한 것도 몇 가지 드리는 방법이 있으니,

① 자원하는 절대 순종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억지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원권을 가지신 예수님이(요10:18)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히10:9) 죽기까지 복종하셔야만(히5:8,빌2:8)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② 제사의 목적과 지식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사53:11절에 보시면 “메시야가 자기의 지식으로 의롭게 한다” 하셨고, 롬5:16에서는 “은사는 많은 범죄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고난과 희생으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인 많은 백성들의 죄를 아시고 그 아시는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요17:9) 지식과 목적을 가지시고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③ 헌제는 십자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십자가의 제사를 열납하신 후(히4:14) 영원토록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 역할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히1:3,13,8:24,25).

2. 헌제로 인하여 어떤 효력을 받습니까 ?

헌제의 효력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대속, 유화, 화목, 속량의 효력을 주십니다.

1) 대속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을 인정해 주심이요(사53:5,6,11),

2) 유화란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한 진노의 감정을 푸시는 것이요(롬3:25),

3) 화목은 하나님이 죄인에 대하여 가지셨던 적대감을 풀고 가까이 해주심이요(롬5:10),

4) 속량은 죄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는 일체의 책임을 면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은혜 아래 있게 하신 것이나 정죄의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의 반열에 있게된 것이나 죄와 사단의 지배에서 해방되게 하신 것(골2:13-15)이 다 속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헌제의 효력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승리의 생활을 하다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큰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5 과 제물과 열납과 중보와 재림 (히 9:23-28)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제물과 열납과 중보와 재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23절에 “더 좋은 제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시고”하신 말씀이 있고, 또 28절 끝부분에서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 첫째는 제물에 관한 말씀이며, 두 번째는 열납에 관한 말씀이고, 세 번째 말씀은 중보에 대한 것이고, 넷째가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 내용이 본문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물과 열납과 중보와 재림”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더 좋은 제물이어야 된다”는 말씀에 대하여

1)23절을 보시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하셨는데, 이 모형이란 지상의 “성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성소는 하늘 성소의 모형이란 뜻입니다.

2)그런데 이런 모형을 정결케 하는데는 “이런 것들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하셨는데 여기에 이런 것들이란 “짐승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짐승의 피 역시 예수님의 보혈의 모형이기 때문에 모형을 모형으로 정결하게 하셨으니까 그 정결해진 결과도 역시 모형에서 그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그렇다면 이런 모형적인 의식이 왜 필요하였느냐?고 하시겠지요. 그것은 모형이 나타내는 실상을 신앙적으로 깨닫고 실상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로 제물을 드렸어도 짐승의 피는 모형일 뿐 그것이 죄를 사하는 값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그래서 제물 모형의 실상인 예수님이 오셔서 더 좋은 제물 즉 속죄제가 될만한 값진 제물을 드리셨는데 그 제물이 바로 자신의 생명과 피인 것입니다.

5)예수님의 생명과 피는 영원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한번의 제사와 한번의 열납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지상의 대제사장처럼 자주 제사드리고 자주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지상의 인간 제사장처럼 하셔야 된다면 창조후 여러 차례 고난을 받으셔야 할 것이지만 워낙 제물의 가치가 충분하시기 때문에 세상 끝 날에 오셔서 단번에 드리시므로 속죄의 제사를 끝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26절에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① “죄를 없게 하신다”는 뜻은 칭의를 성취하시기 위한 대속을 뜻하는 것이고,

②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초림 시기를 말세의 시작으로 보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는 말세에 속하는 시작시기인 것입니다. 죄를 없게 하셨으니까 믿음으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냐?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하여 세상 끝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하였는데 저희들은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지금도 죄가 있는 줄로 알고 회개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죄를 없게 하셨다”는 뜻은 장차 심판을 받지 않도록 의를 힘입혀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빚은 갚았으나 또 돈이 필요한 것과 같고 목욕을 하였으나 또 발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속죄는 지옥가는 심판을 면케 하시는 것이고 성도가 죄를 떠나서 바로 살기 위하여는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를 힘쓰며 자기를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믿음은 의와 관계가 있고 회개는 거룩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은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면제하시기에 충분하고, 성도의 인격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로 인한 죄책의 면죄와 함께 말씀과 기도로 성취되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열납에 관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2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전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님이 십자가의 제물을 열납시키기 위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제사장이 피의 제물을 가지고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이렇게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일과 열납하는 일로 끝나게 되고 다음에는 중보 사역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물드리는 일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일이고 열납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앞에 가시는 것이며 중보 사역은 하나님 우편에 영원히 계시면서 구원받은 백성들과의 관계를 계속이어 주시는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는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27-28절).

1)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로 인간이 육신의 죽음을 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2)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가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제외된 것이고 모세나 예수님도 예외 없이 다 죽음을 당하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2:17에서 “범죄하면 정녕 죽으리라”하신 선포대로 된 것이요, 영적 죽음, 육적 죽음, 법적 죽음 중에 육적 죽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만은 인간이시기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자기 죄값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돌아가셨습니다.

4)그러나 택한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다시 나타나시리라”(28절) 하셨으니,

① 여기의 “두 번째 나타나심”은 재림을 뜻하고,

② 재림의 목적은 택한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며,

③ 예수님이 재림하여 마지막 단계로 구원하시는 과정은 영화를 의미하고(영화란 부활과 변화 승천을 의미함),

④ 그들은 죄와 상관없이 주님의 재림을 바란다고 하셨으니 여기의 “죄와 상관없다”는 것은 칭의로 인하여 죄책을 받음에 상관이 없고 또 성화로 인하여 부패에 상관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단계에서는 지상에 남아있던 성도까지라도 완전히 성화된 상태에서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예수님의 값있는 속죄 제물,

② 또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한 열납,

③ 하나님 우편에서의 계속 중보,

④ 재림으로 인한 구원의 완성이란 지식을 가지시고,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며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6 과 영원한 속죄와 구원 (히 10:1-14)목록으로


이 말씀 12절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하셨고, 또 14절에서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말씀을 제목에 포함하여 “영원한 속죄와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은 앞에서 말씀한 내용을 상당부분 재설하신 것으로 취지는 구약의 율법적 제사가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예시하신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구구절절의 의미를 이해하시므로 더 폭넓은 성경 공부를 하셔야 하겠습니다.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1절).

1)여기의 “율법”은 이미 시행이 폐지된 제사 의식과 관련한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이란 뜻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면 구약 전부(모세 오경, 시편, 예언서등;출 24:44, 요 1:17,16:25)를 의미하기도 하고, 협의로 적용한다면 출애굽 때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율을 의미할 수 있으나, 위에 나타난 율법의 범위는 본문의 취지와 관련된 말씀이므로 제사의식의 규범을 뚯하는 것입니다.

2)“장차 오는 일”이란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내다 본 말씀으로 구약이 예언한 시점에서 볼 때 장차 있을 일(오는 일)이 되는 것이요

3)“그림자와 참 형상이 아니라”하심은 모형적으로 계시하셨을 뿐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림자가 실상의 모형인 것처럼 구약의 제사 제도가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4)따라서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드리는 대속죄제(레 23:27-32)를, 해마다 거듭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서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들(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입니다(1절 하반). 다시 말씀드리면 모형적 제사로는 속죄와 구원이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온전케 한다”는 뜻은 죄로 인한 불행에서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시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14절). 성도의 실제적 구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속죄의 은혜로서 이는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에 따라 대속의 은혜를 힘입혀 의롭다 하시므로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구원이고,

② 거룩의 은혜로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적용하여 더러운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닮아가고 변화되는 구원이요,

③ 영화된 육체와 함께 내세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로서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루어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모형적 제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 섬기는 자들(제사드리는 자들)은 계속 그 일을 시행하였다는 것입니다(2-4절).

1)만일 그들의 제사로 구원을 성취하였다면 그 제사를 끝내므로 다시 죄를 거론하는 일이 없었어야 할 것이나 그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한 것이 있어서 제사드리는 일을 계속하였은즉

2)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능히 죄를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 16:8,11-22에 보시면 1년 1차 드리는 대속죄제 행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 제사가 아니고 국민을 상대로 하는 대속죄 행사인데 여기에 사용된 제물로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있었습니다.

3.하나님께서는 모형적인 제사와 예물은 속죄제로 원하지 않으셨고 그 일을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으니 그 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5-9절).

1)5-7절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시 40:6-8에 나타난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그 당시에 다윗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하면서, 자신을 메시야의 모형적 인물로 등장시켜서(시 22:1참조) 예언한 점을 유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따라서 5절의 “세상에 임하실 때”란 “예수님이 세상에 임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지만, 모형 인물인 다윗이 먼저 임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율법 제도에 의한 제사)은 원치 아니 하시고(속죄 제물로) 오직 나를 위하여(인간 다윗 자신)한 몸(예수님)을 예비하셨다”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3)여기의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께서 내 귀를 뚫으셨다”는 뜻인데 이것을 70인역 번역자들이 본문처럼 번역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의미는 같은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종을 삼을 때 귀를 뚫는 규례”가 있으므로(출 21:6) “예수님이 귀 뚫림을 받으신다”는 뜻이 구원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종이 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4)6절 말씀의 “전체로 번제함”이란 온 백성을 위한 제사를 뜻하고 “속죄제”란 제사의 목적을 속죄에 두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지 않음은 그것이 속죄제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5)다윗은 자신을 메시야 모형자로 지목한 상태에서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으며 또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① 다윗 시대에 있었던 두루마리(성경)는 모세 5경이었으며 모세 오경에는 “여인의 후손, 가죽 옷, 모리아 산의 이삭, 네 씨로 영원한 백성을 삼으심, 유월절 어린양, 장대에 달린 뱀, 반석의 생수” 등으로 메시야를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② 다윗이 그 예언에 따라 메시야 모형인물로 온 것처럼 예수님은 다윗의 예언에 따라 오신 실상의 인물임을 히브리서 기자가 증명하여 밝힌 것입니다.

③ 7절 말씀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의미합니다.

4.예수님은 구약에 나타난 모형적 계시에 따라 오신 실상의 인물입니다.

1)예수님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예언에 따라 오셔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거룩함을 이루어 주셨습니다(10절). 예수님 자신의 제물의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에 단 1회에 드리신 것으로 속죄제가 충분하고 또 속죄로 의로워진 성도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까지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만드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힘입게 하시는 일로서(롬 8:29) 이는 말씀의 사역으로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요 18:17) 또 말씀 사역에는 성령님의 사역과(요 14:17) 기도의 사역이 포함되며(딤전 4:5) 기도의 응답은 예수님의 중보로 성취됩니다(요 14:13-14).

2)율법적 제사는 매일 서서 섬기고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려도 죄를 없이 하지 못하지만(11절) 예수님이 단번에 드리신 제사는 속죄와 함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이 되었고 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중보해 주시며

3)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시고 계신 것입니다(13절). “자기 발등상 되게 하심”이란 원수를 심판하여 벌주시는 모습을 발로 디디시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4)따라서 14절의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뜻은,

① 속죄로 인한 의와,

② 말씀사역으로 인한 거룩과,

③ 재림으로 인한 영화와 공의로운 심판으로 구원을 완성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제사 의식은 메시야 구속사업의 계시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세주로서 그의 단번에 드리신 희생적 제사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 것이며, 또 예수님은 속죄로 주신 칭의와 말씀으로 이루게 하시는 거룩함과, 재림으로 성취하시는 영화와 심판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시켜 주시는 영원한 구원의 중보자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27 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감 (히 10:15-22)목록으로


본문 22절에 보시면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는 말씀이 있어서 제목을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감”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말씀에는 여러 가지 제목의 교훈이 기록되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구별하면 3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15절-16절은 “새 언약의 성격”을 말씀하셨고,

② 17-18절은 “새 언약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말씀하셨으며,

③ 19-22절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중보자의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새 언약의 성격을 말씀하심에 대하여(15-16절)

1)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되는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구약의 말씀과 제사의식으로 계시되었다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므로 성취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이전의 성도는 구약으로 새 언약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이고 십자가 이후의 성도는 성취된 새 언약을 그대로 믿게 된 것입니다.

2)본문 15절에서는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을 하였습니다.

①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 렘 31:33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셨다”하셨으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 구약 성경도 성령님이 기록하셨다는 뜻과,

㈁ “우리에게 증거하셨다”는 말씀에서, 구약이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주신 말씀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신약 성경으로만 족하지 구약은 필요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요, 본문 말씀과 고전 10:6의 말씀에서도 분명히 구약 성경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주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예레미야의 예언은 16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하시므로 구약의 말씀도 주 예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감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③ 그리고 “그 날 후로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 언약이 성취된 이후의 성도들은 그 새 언약을 그대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그 새 언약의 특징을 말씀하실 때 16절에서,

① “하나님의 법(말씀)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둔다”하신 것은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구원의 도리를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의 도리를 마음으로 믿을 때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신약의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 언약(복음)을 구약 시대와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 구약 시대는 선민에게만 언약을 주셨으나 신약 시대에는 그 선민적 은혜가 세계인을 상대로 보편화되었고,

㈁ 구약 시대에는 그 계시가 상징적으로 주어졌지만 신약 시대에는 확실하게 성취되었으며,

㈂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시행하는 의식과 행위를 나타낼 것을 요구하시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무능을 깨닫고 새 언약을 믿게 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처음부터 타락한 인생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마 19:17) 직접 구원의 도리를 믿게 하신 것이 다른 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새 언약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17-18절)

1)17절에서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않으리라”하시므로 새 언약을 믿을 때 실제적으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말씀하셨고

2)18절에서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① 이것은 예수님의 한번의 십자가로 속죄제가 족하다는 뜻도 있고,

② 또 성도가 “믿음을 갖는 것” 자체로 죄사함 받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믿음을 갖는 순간에 전체의 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실 것입니다(잘못가는 구원파가 여기에서 혼돈을 일으킴). 여기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할 문제는, 믿음 자체로 일시에 해결되니까 염려 안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믿음 안에서 계명을 불순종하는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는 관계없으나 징계와 불결에 관계가 있으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3.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방법이 어떤 것인가?하는 것입니다(19-22절).

1)19절에서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뜻하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의 피를 힘입었다”는 것은 주님이 자신의 몸을 찢어 영원한 생명의 피로 속죄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가 죄사함 받았음을 뜻하는 것이요,

②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다”는 말씀에서, 이 “성소”는 구약의 성전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지성소를 뜻하는 것인데, 이 지성소나 성소에는 일반 백성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피의 제물을 가지고 1년에 한번씩 들어 갔으니 이곳은 하나님을 교제하는 장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다”하였으니 이는 모든 성도가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으면 누구나 예수님의 중보로 천국에도 가고, 하나님을 직접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이와 같은 의미의 또 하나의 상징적 계시는 마 27:51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 개통이 된 것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새롭고 산 길”은 희망과 생명을 주는 길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휘장은 하나님의 영역을 가리운 역할도 하고, 또 찢어져서 길을 열어 주신 역할도 한 것입니다.

㈀ 가리운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출 19:21)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여 하나님을 반사 광선처럼 나타내 주신 것이요,

㈁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시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하나님의 집(천국)을 다스리시는 큰 제사장 즉 예수님이 계셔서 중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21절). 중보자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이루실 때,

① 성도의 마음에 뿌림을 받게 하셨고,

②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셨고,

③ 몸을 맑은 물로 씻어 주셨으므로,

④ 참마음과,

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나가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이, 마음에 뿌림을 받는 일, 양심의 악을 깨닫는 일, 몸을 맑은 물로 씻는 일, 참마음을 갖게 하는 일,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는 일로서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 마음에 뿌림을 받게 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거듭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를 마음에 받는 것은 거듭남의 결과인 것입니다. 거듭나야 말씀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 양심의 악을 깨달음이 무엇인가? 이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불신앙하던 일이 죄라는 사실을 거듭난 후 말씀을 받으므로 깨달아져서 크게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은 확실한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 의식을 통하여 구원을 인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몸을 씻음은 성결의 상징으로 나타낸 의식입니다. 또 성결의 은혜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고후 7:1). 육의 성결이란 마지막에 있을 부활(영화)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 참마음이란 양심과 진실을 지키면서 자신의 부정함을 시인하고 믿음 안에서 항상 회개하는 마음이며(요일 1:8),

㈄ 온전한 믿음은 진리의 깨달음과 실천과 변함이 없는 확신을 갖춘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같은 중보적 절차를 통하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가 진리를 잘 깨닫고 진리에 입각한 참된 생활과 함께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는 만큼 저희들도 그런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을 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6. 온전한 믿음 (히 10:22)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고 계십니까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하셨습니다.

1. 온전한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

1) 무흠 완벽한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갈3:11).

2) 따라서 온전함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인정하는 만큼의 성실한 믿음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고 하셨고(민14:24,신1:6,수14:8,왕상11:6), 또 “이사야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였다”(사15:17)는 말씀도 있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롯같은 사람, 또 욥이나 신약의 요셉(마1:19)과 고넬료(행10:22)같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성도가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1) “온전함”이란 신앙 생활의 구비된 조건을 뜻하고, 이것은 “거룩하여짐”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벧전1:16).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되게 하실 것”을 나타내셨고(요17:23), 고후7:1에서 “너희의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2) 많은 성도들이 양적 발전을 추구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현실의 복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한된 수만 구원하시고 “성도를 향하여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17:9,살후3:2,약4:4,요일2:15-1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양보다 질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16 혁명 이후 산아제한을 권장할 시기에 “아들 딸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생산을 제한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이 온전한 믿음, 질적 신앙으로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성숙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믿음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온전한 믿음은 그 믿음의 발생 동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짜 신앙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히12:2).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의 선택하신 자에 한하여(엡1:4) 거듭나게 하시고(요3:3), 성령으로 역사하셔서(마16:17,고전12:3) 발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롬12:3,엡2:8,6:23,빌1:29). 이런 믿음은 믿어지는 신앙이 되고(살후1:10) 외식이 있을 수 없는 참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2) 온전한 믿음은 진실성을 갖춘 믿음입니다. 이 뜻은 성도 자신에게 거짓성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성도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의 신앙고백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믿음 생활에도 외식과 거짓을 내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참”이란 뜻입니다. 이 참된 진리는 거짓된 마음의 그릇에 담겨질 수도 없고 역사되지도 않는 것입니다(갈6:7). 그런고로 온전한 믿음은 성도의 진실된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믿음은 도덕성의 바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이 충실하여야 합니다. 도덕성의 바탕이란 성품이 착하고, 지식과 경험이 있고, 욕심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덕을 힘입히기 위하여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의 바탕이 없으면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덕성의 바탕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온유, 겸손을 본 받으라” 하셨고 또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11:29,16:24,갈5:24).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인격성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온전한 믿음은 성경 지식 또는 신앙 지식이 유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온전한 믿음의 전체 근거요 양식입니다. 바로 믿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성경 말씀의 계시대로 잘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적 신앙이 상당한 궤도에 올라서 이단은 물론 불건전한 신학 사조나 불건전한 경건 행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한 신앙은 속이 덜 채워진 믿음이니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교회 헌법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5) 실천력이 강한 믿음입니다. 많이 실천하지 못하면서 가르치는 자는 하늘에서도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마5:19). 실천의 의지가 없는 자는 믿는 자라 할 수 없고(약2:17), 실천이 약한 자를 온전한 믿음의 성도로 볼 수 없으므로 실천력이 강한 자,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실천 의지가 강한 자가 온전한 신앙의 소유자일 것입니다(막9:23).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강하게 실천할 결심이 되어 있습니까 ?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내 소유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킨 것 뿐이니이다”(시119:56)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

6) 온전한 믿음은 연단을 많이 받은 믿음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연단, 현실 정욕을 멀리하는 연단, 악한 자의 죄를 용서하는 연단, 고난을 참고 억울함을 참는 연단, 어떤 환경에서든지 믿음으로 대처하는 연단을 가진 신앙이 정금같은 신앙이고(욥23:10)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 소망을 갖고(롬5:3) 믿음의 처신을 잘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히11:17).

7) 온전한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많이 닮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셨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든지, 예수님은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셨는데(요18:36) 나는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생활을 적게 닮은 믿음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어떤 결과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

1) 흠과 약점을 최대한 잠재시킬 수 있습니다. 마귀는 성도를 해치려고 밤낮없이 우는 사자처럼 틈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벧전5:8). 이때에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려면(엡4:27) 틈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성격이 포악하거나 현세욕이 강하거나 명예욕에 허덕이거나 진실함이 부족하거나 성경 지식 등이 부족할 때도 역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취약점을 최대한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잘 틈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경 중심으로 살려고 힘쓰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오직 성경 한 곳에 있습니다. 만일 성경 아닌 다른 것을 믿고 따른다면 그것은 곧 마귀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심이란 성경을 절대 유일의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다른 인간의 말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며 성경만 믿고, 성경대로만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에 끌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3) 회개를 동반합니다. 온전한 믿음이라 하여 모든 생활이 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부족이나 실수를 깨달을 때마다 지체없이 회개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자기의 믿음과 완벽주의를 내세우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바른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항상 조심하고, 항상 회개를 일삼는 생활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4)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높은 산에 오른 사람처럼(사40:9) 현실 세계를 멀리 보고 하나님 세계를 가까이 하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수록 하나님께로, 성경으로, 내세로 마음이 끌리고 현실에 대하여는 적당하게만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너무 세상사에 밝거나 현실욕이 강하면 그는 현세욕이 끌릴만큼 신령한 은혜를 멀리했다는 뜻이므로 그만큼 믿음이 성숙되지 못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5) 헌신적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섬기게 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영화를 보는 중에 평양 노회가 신사 참배를 국가 의식이라 하여 결의를 하고, 주기철 목사님이 그것을 순종 안한다 하여 면직시킨 어용 종교인이 된 목사들도 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一死覺悟)로 못 판 위로 걸어가니까 그때에 수사관들이 경찰서장실에서 어용 목사들에게 “주기철이 섬기는 하나님과 당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다르지 않고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고 감탄하는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란 그 본질에 따라서 주님을 위하여 죽고저 하는 신앙과 자기를 위하여 살고저 하는 신앙으로 나누이게 되는데, 온전한 믿음은 주님을 위하여 죽고저 하는 신앙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 본문에서 그 절차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마음에 뿌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 성장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이요 또 살아 역사하시는 능력입니다. 말씀의 풍성함은 성령의 충만함과 같습니다.

2) 양심의 악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힘쓰며 거룩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3) “몸을 맑은 물로 씻음”은 죄사함의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요13: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몸을 맑은 물로 씻은 것은 목욕했다는 뜻이고 죄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의 복을 세례 의식으로 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받고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성도는 말씀을 더 배우고 실천하여 온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신앙 생활에 자신감을 가지시면 그만큼 능력과 자유를 힘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 (히 10:22) 목록으로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 나가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자” 하셨고, 또 히11:6에서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셨으며, 시24:3-4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아야 한다” 하셨고 또 미6:6에서는 하나님이 제물이나 맏아들을 원하시지 않고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하여 성도가 하나님께 나가는 자세를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히10:22).

1) 참마음은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이요,

2) 온전한 믿음은 진실하고 성숙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교인들 중에는 성숙한 믿음을 갖기 전에 신앙 태도를 거짓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남편이 척추암으로 죽게 되자 믿음의 결심과 표현을 나타냈고 성도들은 임종시까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주며 험한 시체에 옷을 입혔는데 장례차 친척들이 와서 교회 의식을 반대하는 바람에 믿음 생활을 중단하였으면 장례 후에는 다시 믿음 생활을 계속하여야 하는데 결국 중지하였으니 이런 상태에서 그의 처음 믿음의 표현은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하여 주는 줄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6:6에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기를 아는 것을 원하신다” 하셨고, 시91:14에서도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 안에서 성경의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3.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시100:2,4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갈지어다” 하셨고 또 “감사하므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하므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고 그 이름을 송축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있을 때 온전한 믿음의 표현이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태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겸손과 복종심과 섬기는 마음도 아울러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상을 주시는 하나님은 벌도 주십니다(고후7:11). 시2:11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섬기고 떨면서 즐거워하라” 하셨고 그 외에도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잠잠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전5:2,합2:20).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묵상을 많이 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상고함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특히 예배당 안에서 떠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욥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떨어야 하는 것입니다(욥23:15,단10:11).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진실과 믿음과 지식과 감사와 기쁨과 두려움과 겸손과 충성됨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28 과 믿음의 확실한 생활 (히 10:23-39)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확실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이 길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만 잘 읽어 보시고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요점을 발췌해 보면 다섯 가지 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①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이요(23절),

② “서로 돌아 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씀이요(24절),

③ “모이기를 힘써 믿음 생활의 합력을 도모하라”는 말씀이요(25절),

④ 26-31절까지 말씀이 “짐짓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요,

⑤ 32-39절까지 “믿음의 담대한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제목을 합하면 “믿음의 확실한 생활 또는 건설적인 신앙 생활”이 됩니다. 따라서 이 5대지에 따라 간단한 설명을 더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에 대하여(23),

1)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① 믿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고전 13:13),

②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약속하신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다”는 뜻은 “아름답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2)히 3:14에서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하셨고(히 4:14), 마 24:13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시작할 때도 확실하게 하고 끝맺을 때도 확실하게 맺어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 사랑과 선행이 없으면 그것은 확실한 믿음 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도 건전한 종교이면 거의 다 사랑과 정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기독교도 영적 구원의 복과 함께 사랑과 선행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서로 돌아보는 것이 사랑이요 선행을 떠나서는 사랑을 성취할 수 없고 또 사랑 없는 믿음은 행함 없는 믿음과 같아서(약 2:17) 그 믿음이 헛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3:1-2).

2)그러니까 내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진단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가?하는 점이요(고후 13:5) 또 하나는,

② 내가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아는 것입니다.

3)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두 가지 의식이 분명치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이 믿음의 확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1)이 모임은 신앙적 모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 살이가 바쁘고 몸이 피곤해 지면서 점점 모이는 일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믿음을 손해되게 하는 죄악이나 현실적 유혹은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신앙 활동이 더 가속화되지 않으면 세상을 이겨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더 잘 모여야 하는데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된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하신 것을 보면 신앙의 나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일 예배, 수요일 저녁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2)그러면 자주 모여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① 모여서 합심 기도하고, 성경 배우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것입니다(마 18:19, 행 1:14,2:46-47).

② 행 2:46에 나타난 초대 교회 상황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귀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③ 여기에 “날마다 성전에 모인다”는 말씀이 새벽 기도회의 근원이고 “집에서 떡을 떼며”하신 말씀이 “구역 예배”의 근원이란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예배는 새벽기도뿐이고 집에서 함께 모이는 일은 구역 예배 뿐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열심히 시행하는 것이 초대 교회를 닮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당연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지요?

4.“짐짓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26-31절).

1)“짐짓”이란 말은 “고의로, 일부러”란 뜻입니다. 따라서 “짐짓 죄”는 어쩔 수 없이 연약하여서 짓는 죄가 아니고 죄를 피할 수도 있는데, 고의로 짓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시 19:13에 고범죄의 뜻과 같음).

2)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진 성도는 어떤 죄이든 일부러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구원의 도리 즉 십자가 대속의 도리를 깨달은 것을 의미하고, 또 이 경우의 범죄란 경미한 죄를 뜻하는 것이 아닌 영광 가리울 만한 중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성도라도 경미한 죄를 무의식 중에 짓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 이단 추종, 음행, 이혼, 타락, 원수 갚는 것, 악하게 하는 것 등의 큰 죄를 고의로 행하느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된 일이냐?에 따라서 사함받을 대상과 사함받지 못할 대상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3)27절에서 짐짓 죄를 범한 자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한번 속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를 믿다가 고범죄를 짓는 자의 죄까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고범죄를 짓는 자는 그가 진리를 깨닫고 믿는 자의 단체에 들어 왔어도 그 들어온 것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외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그런 자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①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 때문이요(27절),

② 모세의 법(율법)을 폐한 자(안 지킨 자)도 증인을 세워 죽이고 처벌하였거든(28절) 하물며 십자가, 십자가 하다가 고의로 죄를 짓고 거룩한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돌리고 은혜의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자야 더욱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요,

③ 또 하나님은 홀로 원수를 갚고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31절) 오직 심판받을 것을 기다려야 할 것과 진리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남아 있을 뿐이라 하셨으니(27절),

5)이것은 외식으로 믿다가 진리를 거절하고 대적할 자들의 받을 벌이 처음부터 안믿는 자보다 더 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는 신앙의 담대함을 견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32-39절).

1)신앙의 담대함이란 용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① 처음 믿을 때 고난의 큰 싸움에서 참고 견딘 것을 생각해야 하고(32절),

② 믿음 때문에 비방을 받고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동정하며 사귀는 입장이 된 것을 생각하며(33절),

③ 믿음 때문에 갇히고 산업을 뺏긴 자들에게 영구한 산업이 있음을 알리면서 위문한 일들을 생각하여(34절) 용기를 잃지 말 것이요,

2)믿음의 담대함을 견지한 자가 큰 상을 얻을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35절).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믿음의 담대함을 유지하는데는 인내와 전진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36-39절).

① 하나님은 먼저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 후에 약속된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36절),

② 그 분은 지체하지 않고 속히 오실 분이며(37절),

③ 오직 믿음으로 살고 신앙의 전진을 잘한 성도를 기뻐하시는 분이며 신앙의 후퇴를 인하여는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38절),

④ 확실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39절).

결론적으로 산앙의 확실한 생활은,

① 소망을 잃지 않고,

② 사랑 실천에 주력하며,

③ 경건 생활을 위하여 잘 모이고,

④ 고범죄를 짓지 않으며,

⑤ 담대하므로 신앙의 전진만 계속하는 사람인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8. 모이기를 힘쓰자 (히 10:23-25) 목록으로


성도의 모임을 권장하는 말씀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합심 기도나 신앙 교육과 친교 등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사를 돌보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모임에 힘쓰므로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나타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96,11,20에 대법원 판례가 나왔습니다. 아내가 종교 행위에 심취되어 가사를 돌보지 않은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였을 때는 가정을 살필 의무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가정 일도 알뜰하게 살피면서 교회의 모임에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들에게 모임이 필요한 이유는,

1) 서로 권면하고(히3:13), 합심 기도를 하기 위함입니다(마18:19). 연약한 성도에게 매일 피차 권면하는 일과, 두 세 사람이 모여 합심 기도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또 유익한 일입니다.

2) 공예배와 성경 교육을 위해서입니다(행5:21,계1:3). 성경에는 꼭 공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사람이 모여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혼자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혼자 예배드릴 수 있을 만큼 성숙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수 주일과 함께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리적이고 유익하게 된 것입니다.

3) 성례와 친교를 위해서입니다. 행2:46,47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날마다 모임을 가진 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랑의 친교와 모임인 것입니다. 억지로 동원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4)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모임도 필요한 것입니다(욜2:16).

이렇게 성도의 모임은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협력과 권면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2. 모임이 잘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25절에 보시면 “모이기를 폐하려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대로 모이기를 폐하려 한 이유는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핍박 중에 믿음이 더 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4:1-4,19-20). 모임이 잘 안되는 이유는,

1) 신앙이 미온적(微溫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작불을 처음 피울 때 잘 붙지 않는 것처럼 신앙 생활의 초보자나 은혜의 맛을 모를 경우에 나타나는 열심 없는 상태입니다.

2) 세상 일에 얽매이거나 피곤한 경우입니다. 성경에는 “밭을 사고 소를 사서 바쁘고 또 장가들었기 때문에 초청한 잔치에 못간다”(눅14:18-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현실 생활에 너무 바쁘거나 거기에 집착하는 것 때문에 모이지를 못합니다.

3)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와 같은 점도 있지만 믿음 생활을 재미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흥미 위주로 교회 생활을 하려는 경우입니다. 성도가 모임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게 보이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은혜를 받으며 친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은혜를 못 받거나 친교에 따뜻함을 못 느낄 때 흥미를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반드시 모임의 의미가 흥미로움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있음을 터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성도가 말씀 듣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때는 증언자가 알아듣도록 간단하게 또는 내용 있고 감동되게 증언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듣는 성도들도 배우고 깨닫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대인 관계의 불편 때문에 모임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화나 거래 관계로 불편해진 성도가 서로의 만남을 피하기 위하여 교회에 안 나오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한 가족 사이에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장소에 앉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에 비출 때 성도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세계는 항상 충돌을 피하고 이해 관계를 넓히며 적극적인 사랑의 공세로 연령이나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의 친근감을 가지고 교제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모임의 필요성과 문제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3. 어떻게 하여야 잘 모일 수 있을까요 ?

1) 모임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이 복받기 위하여 모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11:12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대하16:9에 보시면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고 자기에게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이는 것”은 은혜 받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모여서 헛된 시간을 보내거나 유익이 없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일, 예배, 교육, 기도 등 반드시 유익한 일만 시행하되 시간을 축소하여 긴 시간에 부담을 갖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은혜도 모임에서(행2:1-3), 고넬료의 집이 은혜를 받은 것도 모임에서(행10:24), 나라가 전쟁에 패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도 모임에서 회개 운동으로 해결한 일이 있고(삼상7:5-11), 회의하는 사무적인 모임도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신31:30,삿20:2,행1:15-26,15:6,딤전4:14).

2) 모든 행사에 시간 낭비를 줄여야 합니다. 목적하는 행사, 필요한 행사만 가급적 간단하게 시행하고 끝내야 하며 또 시작하는 시간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시간지키는 관념이 철저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모임의 목적과 가치와 시간이 서로 부합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연구에 사용한 시간은 아무리 긴 시간을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아깝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시간은 가급적 유력한 사람들에게 맡겨서 시행하게 하고 불평 없이 협력하는 방법을 이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임이 잘 성취되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9. 신앙 생활의 방법 (히 10:24-2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신앙 생활의 방법”을 교훈해 주십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의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하심은 “믿음을 굳게 하라”는 뜻이고,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하신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며, 셋째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잡는 일, 서로 사랑하는 일, 모이기를 힘쓰는 일이 곧 신앙 생활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1. 믿음을 굳게 함에 대하여.

확실하게 믿고 믿음과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하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성경의 진실함을 믿는 신앙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 하셨고, 또 고전15:58에서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소망도 든든히 잡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고, 사랑은 이웃을 상대한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방법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랑 실천을 못하여 신앙 생활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3.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모인다”는 뜻은 성수 주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수 주일을 안하면 모일 수 없습니다. 모여서 예배드리고, 성경 배우며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한 주간의 믿음 생활이 예배와 성경 공부와 사랑 실천의 반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술먹는 사람이 처음에는 친구에 이끌려 먹고 다음에는 자신이 먹으며 조금 취한 후에는 술이 술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처음에는 권면에 이끌려 믿음 생활을 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하게 되며 그 다음에는 말씀에 이끌려 말씀의 감화로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에 붙잡혀 생활할 수 있는 입장이 되도록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말씀 때문에 어떻게 행하였다”는 고백을 많이 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사랑만 실천하시고, 모이기를 힘쓰시므로 믿음의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20. 믿음의 전진 (히 10:32-39) 목록으로


“믿음의 전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자전거 타는 것으로 비유한 말씀이 퍽 적합합니다. 자전거는 타고 가야 쓰러지지 않습니다. 가다가 서면 쓰러지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활동을 중지하거나 나태히 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전진만 하여야 할 것입니다.

39절에서 “구원받을 성도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변함없이)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재림은 지체하지 않으시며(마24:22,계22:20), 하나님의 시간 감각으로 볼 때 잠시 잠깐 후면 오시는 것이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되 후퇴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37-38).

1. 신앙의 전진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

1) 우선 자신의 믿음 활동이 멎어있는지 또는 침체 후퇴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나날이 전진하고 있는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① 만일 죄를 범하는 상태에서 완악을 지닌채 회개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믿음 생활을 후퇴하고 있다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신앙의 후퇴이기 때문입니다.

② 경건 생활 즉, 성수 주일이나 예배 행위(말씀과 기도)가 나태하여졌다면 믿음 생활을 정지하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이요,

③ 주일을 기다리게 되고, 말씀이 사모되며, 하나님을 두렵게 여겨 죄를 멀리하고, 믿음 생활의 열심이 있으면 전진 상태에 있는줄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 때에는 금식할지니라”(마9:15)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중심에서 예수님이 멀어지면 후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고후13:5) 전진하는 상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0년대 반공 교육에서 이북 사람들은 모를 낼 때 앞으로 전진하면서 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키우기 위하여서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전진을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빌1:12,25,딤전4:15). 특히 죄와 싸울 때에 이기느냐 지느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의 전진을 하려면 헛된 영광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①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아야 한다” 하셨고(시24:4,갈5:26),

② “자기를 부정할 줄 알고 자기의 십자가를 질줄 알아야 한다” 하셨으며(마10:38),

③ 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날마다 죽을줄 알아야 한다”(갈5:24,고전15:31)고 하셨습니다.

장애물이 많으면 경기하기 어렵고, 옷을 벗지 않으면 헤엄치기 어려운 것처럼 성도가 현실 정욕에 깊이 빠지면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포츠에 열광하거나 드라마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수탉을 싸움시키고 그것으로 취미를 삼으려고 한다면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 문제에 생사를 걸 듯이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대학 입시가 중요하여도 믿음 생활만큼 또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만큼 중요히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드시 성도는 현실을 적당히 보아 넘기는 습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아니면 신앙의 전진이 없는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사랑이 첫째이기 때문입니다(갈5:22).

① 물질 거래로 사랑을 부도내는 사람이 많습니다(대구의 조00 장로님은 84년도 경에 보증을 선 책임으로 당시 4,000만원 상당의 집을 빼앗기고 노부모님 등 아홉 식구가 지하실 방에서 합숙을 하면서도 보증받은 친구 장로를 원망하지 않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② 어떤 교회는 교인들끼리 단체 싸움을 10년 이상씩 끌고 나간 사례도 있습니다. 결국 다수편은 불법과 함께 예배당을 차지하고, 소수편은 불법을 대항하다가 예배당을 빼앗기고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은 좋지만 예배당을 뺏기 위하여 싸우거나, 복음 사역자가 진실하지 못할 때 복음 사역자를 악한 방법으로 쫓아내기 위하여 싸우는 것은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③ 사랑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힘이 없는 것은 마치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할 힘이 없는 것과 같아서 믿음 생활을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분위기가 아닌 곳이면 오래 머물지 말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적자를 나타내는 인생을 살면 안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큰 복이요(시73:28),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약4:8). 노아 홍수 때나 소돔이 멸망한 때도 하나님을 가까이 한 성도는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의 이끌어 주심을 받아야(시73:23) 전진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복을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신28:1-6).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예배, 말씀, 성경 등 경건 생활에 몰두하시고 사랑 실천을 열심히 하시면서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의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인내하면서 노력하셔야 합니다.

본문 32-34절에 보시면 “과거에 은혜 받고 인내하며 투쟁한 경험을 잘 살려서 더욱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비방과 환난을 당하였었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된 적도 있었으며, 그 때에 성도들을 사귀고 갇힌 자들을 동정해 주다가 산업까지 빼앗기면서도 은혜로 여기고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면서 기쁘게 여긴 것을 생각하며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때가 임박한 것을 초급하게 여기시면서, 오직 신앙의 전진만을 위하여, 달음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9 과 믿음으로 받는 은혜 (히 11:1-6)목록으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음을 설명한 말씀인가?할 때 믿음의 본질을 설명함보다 믿음으로 받는 은혜 또는 믿음의 효능을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많은 선진들이 믿음을 통하여 어떤 은혜를 받고 또 어떤 결과를 나타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필자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를 일곱 가지로 구별하여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1.믿음은 소망을 성취시켜 주십니다(1절). 이 말씀이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입니다.

1)여기의 “믿음”이란 뜻은 믿을 대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① 믿음이란 낱말의 뜻은 “안다, 신용한다. 의지한다. 바란다”는 뜻입니다.

②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무것이나 그렇게 믿고 바랄 수는 없으며 인간도 다 거짓되고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기 때문에(요 14:6, 롬 3:4) 하나님, 예수님, 진리(성경)만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라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바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소망(바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이 바로 영적 소망, 미래 소망, 천국 소망 등이요 또 현실의 복으로도 소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따라 소망해야 하며

3)이 소망들이 그대로 성취될 것인가? 할 때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변함없이 진실한 분이시므로 그 약속대로 성취됨이 확실한 것입니다.

2.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있음을 알고 증거하게 하십니다(1절). 이 말씀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란 말씀입니다.

1)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있다” 하시고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2)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바로 영적 세계요, 하나님, 성령님, 영혼, 천국, 미래의 일들이 아닙니까? 믿음없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분명히 있는 줄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3)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으나 있음을 믿어야 하듯이 인간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실상이 얼마든지 있음을 믿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4)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의 있음을 믿고 하나님과 신령한 것과 내세를 증거함에 담대하여지는 것입니다.

3.믿음은 만물 창조의 지식을 알게 한다고 하셨습니다(3절).

1)만물이 어떻게 생겨졌을까? 하고 연구할 때 믿음을 떠난 상태에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고 또 보이는 것들에게서 출현되지 않았음이 확실한 중,

2)“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믿을때 창조의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창 1:1, 요 1:1-2).

4.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4절).

1)가인과 아벨 형제가 최초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 4:3-5).

2)이렇게 된 이유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요(4절) 그 믿음의 제사가 믿음없는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것으로, 이는 그들이 드린 예물(제물)을 보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3)아벨이 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메시야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믿는 때문이었습니다.

5.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1)이 사실은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것으로 증거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여기의 “의롭다”는 뜻은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칭의로 정죄의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2)또 이 믿음을 가진 성도가 말씀을 순종하며 정의를 시행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거룩함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3)“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는 뜻은 그의 핏소리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한다(창 4:10)는 말씀처럼 영적으로 하나님께 전달됨은 물론 가인과 아벨의 미래의 역사를 보는 모든 인류에게도 그 결과가 명확하게 알려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6.믿음으로 부활과 천국의 은혜를 받습니다(5-6절).

1)“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셨는데(창 5:24) “하나님과 동행함”이란 뜻이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 결속(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결속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믿음입니다.

2)성도가 하나님을 모시되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영적으로 가까이 친교하는 것을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에녹은 그런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채 산채로 변화되어 승천하므로 천국에 갔습니다. 따라서 에녹이 믿음으로 받은 은혜는 생명, 변화(부활), 승천, 천국이었습니다.

7.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6절).

1)우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신앙 고백적 믿음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계획의 성취에서 느끼시는 기쁨일 뿐 그 이상의 기쁨을 드릴 것으로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2)따라서 기쁨을 드리는 믿음은 성숙된 믿음, 충성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일이 있으셨고(마 8:10) 또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의 헌신하는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눅 7:37-47).

3)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믿음”과 “연단받은 믿음”과 “헌신하는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롬 1:17).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① 믿음으로 이상의 일곱 가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②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급주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는 항상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해야 하며 또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을진대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도록 처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1. 믿음에 대하여 (히 1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에 대하여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믿음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1)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요3:16),

2)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막9:23),

3)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를 바다로 옮길 수 있다”(눅17:6),또 “산을 옮길 수도 있다”(마17:20),

4)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5)또 본문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히11:1),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다‘(히11:2)는 말씀들입니다.

또 저희들은 믿음 생활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혹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할 때 대답할 수 있을까요 ? 반드시 믿음의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좋을까요 ?

1) 믿음은 “참”을 아는 것입니다.

① “참”은 “진짜, 진리, 거짓이 아닌 것, 변하지 않는 것, 믿을만한 것”이란 뜻이요, “안다”는 것은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참” 그 자신도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요 믿는 사람도 인격자이기 때문에 안다는 뜻이 지식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친교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참”이란 어떤 대상입니까 ?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참”이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기 때문입니다(롬3:4).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고 하셨습니다(롬3:4). 또 예수님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6). 진리라는 단어 ‘알레데이아’(ἀλἠθεια)는“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렘10:10),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다(시146:6), 하나님의 말씀도 참이라(삼하7:28), 그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1:25)” 하셨으니 참된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의 말씀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참된 분을 아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요17:3에 보시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믿음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또 본문에서의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란 안 보고도 믿을만한 대상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 참이란 사실을 거듭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은 “참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레19:14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믿음을 갖는 것인데, “경외한다”는 뜻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① 존경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요,

②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며(시2:11),

③ 복종하는 것이 두려워하는 것이요,

④ 또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안다”(창22:1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순종이 경외란 뜻입니다. 또 마22:37-40에 보시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그 사랑의 내용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하고 섬기는 것이 곧 경외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이라고 아셔야 합니다.

① 요15:1에 보시면 “예수님을 포도 나무”라 하시고, 가지가 그 나무에 연합되어 있을 때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② 요6:53에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찬 예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 그것이 양식이 되고, 피와 살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과 성도와의 인격적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피가(피는 생명이요 인격임) 자기 몸에 순환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이 연합을 요일3:9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 하셨습니다.

③ 롬11:23과 빌1:21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하셨고, 엡4:13에서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라” 하셨으며, 고후13:5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하시므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속에 성령님과 성경 말씀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고후13:5).

4) 믿음은 하나님을 소망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바란다”는 뜻에는 “의지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바라본 소망이 헛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고(롬15:13) 은혜의 주(요1:17)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란 결과가 성취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5) 믿음은 예수님과의 동거 생활입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어디든지 천국이라”는 말처럼 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은 다 천국이요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계3:20에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예수님과 함께 동거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연합되는 것은 정신적인 연합이고, 동거하는 것은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항상 의식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항상 함께 하심을 의식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피스티스’(πίστις)의 뜻에는 “충성”이란 뜻도 있지만 충성은 경외하는 생활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시91:14-15).

이렇게 믿음이란 “참”에 대한 지식과 경외와 인격적 연합과 소망과 동거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이 믿음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습니까 ?

1) 하나님이 영적 생명과 진리를 공급해 주시므로 가능한 것입니다(엡2:1,벧전1:3). 영적 생명은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믿을 능력이고, 진리는 성경으로 주신 믿을 대상입니다. 마치 불과 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불이 나무를 만났을 때 타는 것처럼 거듭난 생명에 진리가 만나면 믿음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생명 있는 씨앗이 토양의 조건을 만나면 싹이 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믿음은 성장 조건에 따라서 양적 차이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① 믿음에는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의 믿음이나 거듭난 생명과 진리를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큰 역사를 나타낼 수 있다”(마17:20,눅17:6)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본질만 같으면 역사하실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그러나 양적인 차이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마8:10),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마15:28),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믿음”(마16:16), “금보다 더 귀한 믿음”(벧전1:7), “충만한 믿음”(행6:5), “믿음의 분량”(롬12:3)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양적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오직 믿음의 양식인 말씀 공급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말씀은 내용이 다양합니다. 그리고 분량은 일정하지만 깨닫는 감화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창세기만 잘 알고 계시록을 잘 모른다면 그 성도는 창세기에 관한 신앙 생활을 잘할 것이고 반대로 계시록적인 신앙 생활은 잘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사랑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공의를 강조하며 어떤 이는 진실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현실적 문제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5:6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나 히10:22의 “온전한 믿음”이나 유1:20의 “거룩한 믿음” 등으로 각 특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말씀이 강하고 충만하게 드러나면 그만큼 실천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눅1:37에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지식과 말씀의 힘이 실천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돈이라도 1억은 천만원의 10배가 되는 것처럼 큰 믿음의 가치는 적은 믿음의 분량을 능가하여 수백배, 수천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4. 성도는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 방법은 말씀, 실천 그리고 연단입니다.

1) “말씀”은 성경 말씀과 모든 배우는 것을 포함하는 내용이요,

2) “실천”은 오직 순종과 사랑과 봉사를 뜻함이요,

3) “연단”은 어려운 난관을 승리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 경험하므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유를 누리며, 믿음의 분량에 따라 상급을 축적하고 영원한 구원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행27:25에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대로 몇일 후에 풍랑에서 구출되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실천하며 기다리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2. 세 가지 교훈 (히 11:6)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저희들에게 세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이고, 다음에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함”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교훈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인간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들에 대하여는 다른 만물보다도 못한 관계로 여기실 것입니다. 자연이나 동물들은 죄가 없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란 하나님을 알고 확인하는 지식입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때 서로 확인을 못하면 감정이 동하지 않다가 확인이 되었을 때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게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깨달을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자신도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요 확인입니다.

3) 그런데 이 믿음에는 분량이 있습니다. 엡4:13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고 하셨고, 마16:8에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적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본래부터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자라서 커지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성경 지식이 많고 하나님의 뜻대로 시행을 잘하며 사명적인 역경을 잘 견디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인만큼 믿음을 키우는 일을 삶의 큰 목적으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그의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이 말씀을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 계신 것을 안 믿을 성도가 어디 있느냐 ?”고 하실 것입니다. 성도이면 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하셨으니 여기의 “하나님께 나간다”는 뜻은 구약의 성도가 성전을 향하여 나가는 것을 연상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제물을 드리러 성전에 나갔고, 제물을 드린 다음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받았습니다. 성전에 나가지 않으면 그같은 은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성도가 은혜의 보좌에 직접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히12:28) 이 은혜의 보좌는 어느 곳이든지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 자신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심령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성전에 가야만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의 성도 중에도 예배당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강대상 앞에만 계시는 줄 아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따라서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찾아 여기저기 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식하고 말씀에 접근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나가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함에 있어서,

①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요4:24),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약1:17), 빛 가운데 계시고(요1:7), 천지에 충만하시며(행7:49,렘23:23), 음부와 바다 끝에도 계시고(시139:8), 성도의 마음 속에도 계시며(엡3:17), 무소부재하여 누구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히2:3).

② 또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변하지 않으시며 영원히 계시다고 하셨습니다(딤전1:17,히10:31,약1:17,히1:11).

③ 또 그 하나님은 “자기를 숨기신다”고 하셨습니다(사45:15). 안 계신 것 같고, 안 보시는 것 같으며 역사하시지 않는 것처럼 하시지만 다 보신다고 하셨습니다(욥11:11).

④ 하나님은 자기를 형상으로 나타내시지 않지만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요1:1-2,행20:32,히4:12,마28:20,요15:26,16:7-9,슥4:6). 따라서 성경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사랑하며 지킬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상주시는 분으로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 상이란 수고의 대가를 은혜로 더하시는 것입니다.

2) 상을 주시는 시기는 현실과 내세의 복으로 나누어 주십니다. “자손이 잘되고 나중이 잘되는 복”은 현실에서 주시는 것이고(신28:4,욥8:7), 상받을 일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으면 내세에서 주시는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눅16:25,18:30,마19:29).

3) 상 주시는 분량의 기준은,

① 죽도록 충성한 자와 순교자들에게 가장 많이 주시고(계2:10,20:12,마19:29),

②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충성한 자들에게도 많이 주시고(마5:11-12,고후9:6),

③ 수고를 잘한 자들에게도 주시는 것입니다(고전15:58).

④ 열매에 따라 주신다는 말씀도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마25:14-23)

이상의 말씀에서 결론을 맺을 것은,

① 자기의 믿음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고,

②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셔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펴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③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생활하는 것이 중요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30 과 믿음의 본이 된 사람들(1) (히 11:7-16)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본이 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적 모범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분류해 보면,

① 본문 7절은 노아의 믿음을,

② 8-10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③ 11-12절은 사라의 믿음을 말씀하셨고,

④ 13-16절은 이 세 사람의 믿음을 종합적으로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선진들의 믿음을 칭찬스럽게 소개하신 이유는 이 성경을 상고하는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히 13:7).

1.본문 7절에 보시면 노아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1)“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120년 후에 있을 대홍수를 말씀하시고(창 6:3) 방주를 예비하여 생명을 보존하도록 경고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 6:13-21). “미래에 있을 것”이란 120년 후에 될 일, 아담 창조후 1656년 동안 없었던 신화와 같고 천지 개벽과 같은 말씀을 그대로 받고,

2)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① 120년 후에 있을 물심판의 말씀을 믿고,

② 또 자기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믿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③ 방주를 예비하는 순종을 한 것입니다.

3)“요즈음 성도들에게 120년 후에 홍수날 것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노아처럼 시행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노아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을 후시대 성도들에게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4)노아는 본래 생활에도 믿음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노아를 “의인”이라 하신 것과 “당대에 완전한 자”이며 또 “하나님과 동행한 자(창 6:9)”라고 하신 말씀이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당시 패괴한 세상에서 노아를 구원하신 것은 노아의 가족이 상당하게 순결을 보존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창 6:12).

5)이런 믿음을 가진 노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창 6:8),

① 그 집을 구원하였고,

②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은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란 노아가 구원을 받음으로의 뜻이고,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은 의의 후사가 됨”은 노아의 가족만이 악한 세상을 정죄하고 살아남아서 믿음과 의인의 계통을 이은 후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8-10절).

1)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아브라함의 나이 성숙하여 사라와 혼인 중에 있을 때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하란 땅을 거치면서(창 11:31) 그 곳에 얼마쯤 머무른 사이에 그의 부친은 20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창 11:32).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친이 세상 떠난후 그의 나이 75세 때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동을 한 것입니다.

2)문제는 순종입니다. 자식도 없이 75세의 늙은 나이로 고향을 떠나 수천리 타향을 향하여 갈 곳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을 한 것입니다. 8절의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이란 가나안 땅인데 약속만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한채 갔다는 것은 예비답사도 안한채 고향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순종의 성격은 “말씀 본위의 순종”, “무조건 순종”,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순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아브라함이 그 곳(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 때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아들 손자(이삭, 야곱)와 더불어 외방에 있는 것처럼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와 성(내세천국을 뜻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① 이 말씀에서 약속의 땅은 아브라함과 선택한 그의 후손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이고(창 22:17),

② 아브라함이 자손들로 더불어 장막 생활을 한 것은 세상살이를 “외방에 가 있는 나그네”처럼 여겼을 뿐아니라,

③ 하나님이 천국에서 건설하시고 경영하실 견고한 성읍(즉 천국)에 들어 가기를 바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에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성도가 영원한 도성인 천국을 사모하면서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 같다(벧전 2:11)”하셨고, 바울 사도도 세상 육정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을 고전 7:29-31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사라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11-12절).

1)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그는 90세까지 늙어 단산한 상태였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하였으니 이 믿음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미쁘신 분(즉 진실한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창 18:10-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천사의 모양으로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명년 이 때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사라가 그 말씀을 듣고 “부정적인 뜻”을 발표한 것처럼 나타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90세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니까 사라도 그의 말씀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2)그래서 하나님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자와 방불한 자로 아들을 낳게 하여 허다한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생육, 번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출생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4060년 전입니다. 그 때 이삭이 출생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기독교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아들을 생산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세 사람의 종합적 신앙이 어떠하였습니까?

1)13절에 보시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는 것도 믿음 따라 살지만 죽는 것도 믿음을 따라 죽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은,

① 성경대로 내세를 믿고,

② 성경대로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을 믿고,

③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④ 소망을 갖고 부름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꼭 그렇게 믿음 따라 죽어야 할 것입니다.

2)또 이 세 사람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자기들 당대에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후시대에 있을 것을 멀리서 내다 보았다는 뜻이요, 또 천국에 대한 계시도 직접 약속 받은 일이 없지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의미와 부활과 영생을 믿는 신앙 때문에 천국 세계(그것들을)를 멀리서(후시대에 있을 것으로) 사모하고---환영하면서 현세를 “외국인, 나그네”라고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3)이것은 곧 그들의 “본향 찾는 생활”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저희가 나온 고향 즉 “갈대아 우르”를 생각하였다면 수시로 귀향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육체의 고향을 사모하지 않은채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으니 그 세계는 하늘(신령한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실향민 성도들은 이 말씀에서 깨닫고 육신의 고향을 잊으시면서 더 좋은 천국을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4)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 세 사람의 이같은 믿음을 기꺼이 여기시고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위하여 천국(한성;16절)을 예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이 부끄러운 짓을 하면 부모가 부끄러운 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그러하실 수 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저희들의 하나님 아버지가 나 때문에 부끄러워하시지 않도록 선진들의 신앙을 잘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① 노아의 경건한 생활을 나타낸 신앙,

② 120년을 복종하고 인내하며 기다린 신앙,

③ 아브라함이 결단있게 순종한 신앙,

④ 그가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면서 본향을 사모한 신앙,

⑤ 또 사라가 단산하였으나 약속대로 믿고 잉태하는 힘을 얻어 아들을 받은 신앙을 꼭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제 31 과 믿음의 모범자들(2) (히 11:17-23)목록으로


이 시간에 “믿음의 모범자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구약의 인물 다섯 사람을 들어서 그들의 신앙적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 다섯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의 부모였습니다. 이들의 신앙 역사는 전부 창세기에 기록되었고 이들의 신앙이 좋았다는 것은 그들의 행실로 나타난 사실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이 다섯 사람의 신앙을 살피기 전에 먼저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1)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시대의 인물들의 신앙을 칭찬하게 된 것은 그가 구약 성경을 상고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신앙과 교훈의 근거가 되었고 또 신앙의 모범적 인물들이 구약 시대에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4대 혈육입니다. 이렇게 4대 혈육, 자손들에게 칭찬받을 신앙을 계승시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 놀라운 교육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이들의 칭찬받은 신앙은 모두가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입으로 “나는 이렇게 믿는다”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려운 명령, 어려운 환경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하였느냐? 하는 행동에서 그 믿음의 결과가 판정된 것입니다. 저희들의 신앙 생활도 성경에 근거하는 생활과 후손들에게 계승을 시키는 일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다섯 사람의 모범적 신앙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아브라함의 칭찬스러운 신앙이 무엇입니까(17-19절) ?

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창 22:1-10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시험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그의 나이 100세 때에 하나님이 기적으로 주신 아들이고 또 “그 아들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21:12,22:18)”는 약속을 하신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대로라면 그 아들을 죽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하셨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어긋나는 점과 또 아들을 불태워 죽여야 하는 무서운 일을 감행하여야 하는 점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순종하기 위하여 아들을 결박해 놓고 칼로 찌르려고 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만류시켰기 때문에 중지한 것일 뿐 내버려두셨으면 그대로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② 이것을 아는 히브리서 기자가 “비유컨데 죽는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삭의 제사를 받으시고 죽은 아들을 되살려 준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③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런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종하는 믿음도 대단하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실 줄로 믿는 부활 신앙”때문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이렇게 큰 것과 어려운 것도 순종할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2)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믿음입니다(20절). 본문 20절에서 이삭의 칭찬스러운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① 장차에 있을 일을 믿은 것입니다. 즉 자기 후시대에 있을 일을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당대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영원을 사는 성도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인간이 후시대를 내다보지 않는다면 과일 나무를 누가 심겠으며 봉사와 희생을 누가 하겠습니까? 성도는 반드시 후시대와 내세를 바라보면서 봉사하고 예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도 후시대를 내다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② 그래서(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을 한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후시대에 인색하여 자식도 둘 낳을 것을 하나로 줄이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마치 열매 맺을 가지를 다 자르고 한가지만 남겨 잘 되기를 바라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후세대를 위하여 축복을 한 것입니다. 창 27:27-29에 보시면 예언으로 그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경건한 자의 축복을 통하여 작정된 자, 또는 주실만한 자에게 축복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출33:19).

3)야곱의 칭찬받은 신앙입니다(21절). 야곱의 칭찬스러운 신앙도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① 이삭처럼 역시 후세대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21절에 보시면 “야곱이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축복의 내용이 창 48:20에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축복한 것이 아니고(창 48:15) 다른 아들들에게도 분량대로 축복을 하였습니다(창 49:1-28). 축복은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고 복받을 여건을 생각하면서 분량대로(창 49:28) 또는 하나님의 작정대로(창 27:4,41)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창 47:31). 이 말씀은 늙어 몸이 쇠하도록 하나님 경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몸이 쇠하고 늙어도 여전히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한 것처럼 저희들도 하였을 때에 그렇게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4)요셉의 칭찬스런 신앙입니다(22절). 요셉의 칭찬스러운 신앙이 많았겠습니다만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①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장차 애굽을 떠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과 “400년간 애굽의 객이 될 것이라” 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말씀을(창 15:13) 전해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미래의 희망을 가진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에 있는 자기 부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임종시에 유언을 하였고,

② 자기 해골도 함께 가지고 갈 것을 명한 것입니다. 이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이장하는 것이 왜 칭찬스러운 신앙에 속하는가?할 때 만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뼈가 어디에 묻혔거나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또 사실상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면 애굽에서 부활하나 가나안 땅에서 부활하나 별 차이가 없지요 그러나 요셉 당시에는 한곳에서 부활하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을 가졌거나 아니면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후손들이 성묘하기 좋도록 하기 위하여 한 자리에 모으는 것도 괜찮은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자기의 유해 이전을 명한 것은, 그의 부활 신앙과 내세에 대한 신앙 때문이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칭찬한 것입니다.

5)모세의 부모 신앙입니다. 모세 부모는 요셉보다 약 350년 후의 사람이요 모세의 아버지는 레위족,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아므람의 고모되는 여인 요게벳(출 6:20)인데 이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중 이스라엘 족속들이 점차 강성해 지니까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없애기 위하여 처음에는 산파를 시켜서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죽이게 하였는데 산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미리 낳았기 때문에 못 죽였다”고 핑계를 하니까 다음에 이차 명령으로 낳거든 “하수에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에 모세의 부모가 자기 아들 모세를 즉시 하수에 던지지 않고 석달을 숨겨 기르다가 아이 울음 소리가 커지자 발견되면 자기들까지 어려워 질 것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갈대상자에 넣어 하수에 띄운 것입니다(출 1:22).

① 여기에서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행한 것은 바로의 명을 어기고 석달을 버티다가 강물에 그 아이를 던지지 않고, 갈대 상자에 넣어 띄운 것을, 믿음으로 잘 하였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② 애굽의 노예된 백성이 바로의 명을 거역한 것이 어찌 믿음의 행위가 되는가? 할 때, 바로는 아무리 왕이라도 “죄”를 명하였기 때문에 마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왕이라도 죄를 명할 때는 성도가 거역해야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을 피하며 죄를 대항하는 신앙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석달 동안 가족의 생명을 걸고 죄를 대항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석달을 대항하다가 지쳐서(한 생명 살리자고 여럿이 죽을 수는 없으니까) 결국은 직접 죽이지 않고 갈대상자에 넣어 띄운 것입니다. 설령 목적대로 다 시행을 못하였어도 그 정도 버텼으면 그 신앙을 인정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모세가 살게 된 것은 그가 석달을 자라면서 울음소리가 커져서 그 울음소리가 멀리 있는 바로의 딸의 귀에 들렸기 때문에 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은 석달 동안 키운 믿음이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꼭 죄안짓기 위하여 즉 마귀를 대항할 때 생명을 걸고 버티는 신앙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이삭의 축복, 야곱의 경배, 요셉의 유언, 모세 부모의 항거에 대한 다섯 가지 믿음의 본을 교훈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가 될 것을 역사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23. 칭찬 받은 아브라함 (히 11:17) 목록으로

( 년주일학교 설교)

이 시간에는 성경 말씀 히11:17에서 말씀한 “칭찬 받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갈대아 나라의 우르”라는 곳에서 데라의 세 아들 중 큰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갈대아의 우르라는 땅은 지금 “이락”의 영지(領地)에 있고, 데라의 세 아들은 아브라함과 나홀 그리고 하란 삼형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많이 주시면서 그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버지”, 다시 말하면 “여러 나라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니 아브라함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17절 끝에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② 믿음을 가졌습니다.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셨고, 17절에서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③ “시험을 받았을 때 그 독생자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17절).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세 가지 복된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첫째는 축복의 약속을 받아야 하고, 다음에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셋째는 시험을 잘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약속을 받았습니까 ?

창12:7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후에 아브라함아,

①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고,

② 창13:6에서는 “네 자손을 하늘의 별같고 땅의 모래같이 많이 번성시켜 줄 것이라” 하셨으며,

③ 또 “네 자손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땅을 주신다”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잘사는 복을 주신다는 것이고, “자손을 번성시켜 주신다”는 것은 미래를 크게 발전시켜 주신다는 것이며, 창12:2에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메시야)”는 말씀과, “영원히 이른다”는 것은 영생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의 착한 행동을 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조건 선택하시고, 무조건 사랑하셔서 그런 복된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어린이들도 하나님이 똑같은 약속을 주신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꼭 신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니까 그의 말씀이면 꼭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꼭 믿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자주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신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곧 성경)은 꼭 믿어야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꼭 믿으면 자연적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니 너는 네가 살던 곳 하란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땅을 버리고, 집을 버리고, 이웃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무조건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증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든든히 가지고 무조건 말씀에 순종하는 식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에 “독자 이삭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무슨 시험을 하시나 ?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좋은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자주 시험을 치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도 학교에서 시험을 치지요. 시험을 왜 칠까요 ? 공부 잘하게 하기 위하여 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게 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치시는데 그 때에도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치셨습니다.

2)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크게 자라서 장가갈 때가 되었습니다. 본래 아브라함은 100살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네 자손을 많이 번성시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까 “아들을 주시겠지”하고 기다렸는데 정말 하나님이 100살 때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통하여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번제”란 것은 “제물을 불태워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을 어떻게 죽여서 불태워 제사를 드립니까 ? 또 언제는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또 그를 죽여 제사를 드려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 도무지 이상하고 이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보시기 위하여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조건 순종을 하야지....만일 내가 순종하여 아들을 불태워 죽이면 아들만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셔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실천해 주실 것이다”라고 믿고 아들을 죽여 불태우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그만 중지해라. 나는 너를 시험한 하나님이라, 네가 아들도 아끼지 않으면서 내 말을 순종하였으니 너는 과연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자가 될만하다”고 칭찬하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 어린이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갖고 축복을 받는 식구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아브라함과 같이 시험을 잘치는 복된 어린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24.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 (히 11:8-10,17-1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경의 사람이고, 아담의 20대손인데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의 조상”으로 세우셨고(롬4:11), 아브라함의 믿음을 표준으로 내세우셨으며(롬4:15) 또 그의 믿음을 칭찬하실만한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롬4:22). 저희들은 아브라함의 믿음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믿음이 대단하였습니다(롬4:17-22).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다 믿었습니다(창12:1-2). 기업의 땅을 주신다는 말씀(히11:9), 큰 민족을 이루어 창대케 하신다는 약속,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 등을 받고 그 말씀들을 다 의심 없이 믿은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믿음에 위기가 왔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대케 하신다”는 약속도 믿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시련에 봉착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기 위하여 그의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세워 상속케 하려는 마음까지 가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친자식의 후손이 아니면 양자의 후손이라도 주실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은 적자 이삭을 낳게 하셨고 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될 수 없은즉 “하나님은 번제로 드려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서 후손의 번성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으니(히11:19)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만물이 나타난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부활의 능력만 믿으면(롬4:17) 다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순종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순종의 능력은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으며(히4:12), 믿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고(막9:23) 또 믿어 순종케 된다(롬16:26)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특별한만큼 순종도 특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였던 것 세 가지만 실례를 들겠습니다.

1) 고향의 기업을 떠난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기업은 토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 어느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인지에 대하여 본 일도 없이 그대로 믿고 남방으로 떠난 것입니다(창12:1-3,히11:8). 성경을 추리해 보면, 아브라함은 40세 때에 30세된 아내를 맞이하였고, 68세 때에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본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 2,400리 서북쪽인 하란으로 갔으며, 또 7년 후인 75세 때에 약 1,600리 남쪽인 가나안 땅으로 와서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입니다(창12:7). 성도들도 믿음 중심으로 살기 위하여 기업(직업이나 거주)을 옮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첩과 첩의 아들을 내쫓은 것입니다. 첩은 하갈이고, 첩의 아들은 먼저 출생한 장남(서자) “이스마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첩의 소생에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겠다 하여 내쫓게된 것입니다(창21:10).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인정을 초월하여 순종한 것입니다. 그때 15세쯤 된 서자를 아무 기업도 없이 내쫓은 것입니다(창17:24,25).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며, 이를 볼 때 우리 성도도 하나님보다 자기 가족을 더 사랑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마10:36-37).

3)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을 한 것입니다(창22:1). 기업을 초월하고, 인정을 초월하여 순종하였는가 하면 생명을 초월하여서도 순종한 것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의 생명은 자기 생명보다 몇 배 더 소중한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순종할 때 사람의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아무에게도 예고하지 않았고, 또 부활을 믿고 순종하였다고 하셨습니다(히11:19). 놀라운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약2:21,롬4:3). 따라서 구원받을 의를 힘입는 믿음은 반드시 순종도 따르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특징은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히11:9을 보시면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우거하면서....장막에 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1) 장막에 거한 뜻은 세상살이에 깊이 뿌리박지 않고 세상을 쉽게 또는 적당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현실적으로 살찌게 살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며, 현세욕과 향락에 취하며 바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집은 장막에서 살고, 생활은 유리하는 목자의 생활을 한다면 쉽고 여유 있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2)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

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 취미를 대폭 줄이고 대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② 현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고, 영원한 도성은 천국에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살 때 구원받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칭찬이 부족할 것입니다.

나그네 생활이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세상을 소극적 자세로 살면서 신령한 은혜에 집착하고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명하게 하셨고, 강하게도 하셨으며 부자되게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소극적으로 산 것은 장막 생활에서도 나타나지만 조카에게 삶의 조건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창13:9).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 일에 경쟁하지 말고 신령한 생활에 더욱 달음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제사는 신약 시대의 예배와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옮기면서 세겜 땅에 이르러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고 또 벧엘 땅에 이르러서도 제단을 쌓았으며 또 롯과 갈라진 후 세겜 땅 마므레에 다시 와서 또 단을 쌓았고(창12:7,8,13:18,14:18), 창14:18에서는 살렘 왕 멜기세덱과 함께 제사를 드렸으며, 창14:9에서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믿음과 감사와 친교의 표현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사모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5. 아브라함은 전도 봉사를 잘하였습니다. 히11:13에서 “인생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증거하였다 하셨고, 창18:1-8에서 나그네를 성실하게 대접한 사실“이 있었으니 이 두 가지 사실이 전도와 봉사의 사명을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과 현실을 소극적으로 사는 생활과 예배와 사명 생활을 잘한 것입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셨으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창12:1-2), 또 열국의 아비(창17:5), 믿음의 조상(롬4:11), 메시야 약속(창22:18), 가나안 땅의 기업(창13:14-15) 등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의 신앙 생활을 목표하고 좋은 믿음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음은 물론 현실적 생활들도 크게 형통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5. 시험에 대한 신앙 (히 11:17-19) 목록으로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시험에 대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시험의 뜻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1) “시험”이란 용어가 구약에서는 ‘마샤’(신4:34,7:19)이고, 신약에서는 ‘페이라조’(πειρἀζω)라 하는데, 그 뜻은 “시험한다, 타진한다”(try, temptation)의 뜻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순종을 하는지 안하는지, 사랑을 실천하는지 안하는지 등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이 시험한다는 용어는 성경에서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타진한다”(이것이 본문의 내용임), 또 하나는 “시련을 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혹한다”는 뜻입니다.

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순종 여부를 시험한 것이나, 직분을 줄 때 믿음의 정도를 시험해 보고 주라”(창22:1,딤전3:10) 하실 때 타진의 의미로 쓰셨고,

② 히4:15에서 “예수님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과, 눅8:13에서 “시험을 받을 때 배반한다”는 말씀과 욥의 환난(욥23:10) 같은 것은 시련에 해당하는 것이며,

③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마6:13,26:41) 하신 내용들은 다 유혹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타진하는 시험은 정도를 알아 보시기 위함이요, 연단을 위한 시련은 믿음 성장의 목적이 있고, 유혹하는 시험은 마귀가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목적입니다.

2. 이 시험을 누가 주는가 ? 할 때, 하나님도 주시고 마귀도 주며 자신이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욥에게 시험을 주신 것과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여시고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고전10:13,행15:10,히3:9,창22:1,출16:4).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넘어지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연단을 주시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 마귀도 시험을 줍니다. 아담이나 예수님이 그렇게 당하셨습니다.

3) 약1:4에서 “자기 욕심에 끌려 스스로 미혹을 받는 시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은 시험을 받을 때마다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욕심이나 불법, 현세욕에서 오는 시험은 무조건 마귀에게서 온 것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4:6,요일2:16).

3. 성도가 받는 시험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까요 ?

1)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고 받을 때는 무조건 순종하고 잘 견뎌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 순종한 것은 그 시험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욥이 고난을 견딘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당하는 고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욥2:10)고 한 것입니다. 신8:2에서 ”하나님은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아시려고 광야 40년을 걷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시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그것은 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로 주시는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마귀가 주는 유혹은 범죄와 욕심을 앞세운 유혹인만큼 죄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잘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 전부 세상의 욕심을 전제한 일들이었고, 마귀가 아담을 유혹한 것도 거짓말을 앞세운 현세적인 유혹이었습니다(창3:3-5). 따라서 죄를 짓게되는 유혹이나 거짓을 모르고 따라가는 유혹은 다 마귀에게로 온 것이므로,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한 능력으로 성경 말씀에 따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신13:1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알기 위하여 꿈꾸는 자와 이적 기사를 행하는 자를 보내시고, 그의 말과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나타나도 유혹을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유혹 당하는 일을 방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 당하는 것은 결국 마귀가 간접적으로 자기의 욕심을 이용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약1:13,14). 따라서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갈5:24) 항상 유혹을 받게될 것입니다. 욕심에 끌리거나 불의에 끌리는 것은 다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결론적으로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① 무엇이나 성경 말씀만 따르면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② 예수님도 항상 시험을 받으셨고(히4:15),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고 하셨습니다.

③ 기도하며 말씀에 이끌리고,

④ 불의와 불법을 강하게 배격하며,

⑤ 자신을 부정하고 현세욕을 멀리하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제 32 과 믿음의 모범자들(3) (히 11:24-31) 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도 앞에 기록한 내용들처럼 구약의 인물들의 신앙 모범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① 모세의 신앙을 칭찬하셨고(24-29절),

② 여리고를 점령한 군중들의 신앙을 칭찬하셨으며,

③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신앙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의 신앙을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1.모세의 신앙을 칭찬하심에 대하여(24-29절)

1)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우리도 거듭난 백성이요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다 그와 같은 인식을 하여야 합니다.

①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한 것은 그가 어렸을 때에 젖을 먹고 자라면서 그의 유모(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출 2:8-10).

② 모세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았다”는 뜻은 바로 그 조상들에게 주신 선민적 언약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출 3:6).

③ 모세는 어릴 적부터 애굽 왕실에서 자라면서 애굽인의 종교사상에 물들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앙적 호흡을 같이 하였다는 것이 더 귀한 일이요,

④ 더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구별된 처신이 얼마나 과감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구별된 처신을 확실하고 강하게 나타냈기 때문에 그 신앙이 더욱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이방인 세계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이방세계는 애굽의 화려한 왕궁이었고 더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25절의 “잠시 누리는 죄악의 낙”이란 애굽에서의 우상 신앙과 호화로운 생활이며 또 그것은 육신이 산 동안만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3)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복으로 아는 신앙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전 1500년 경의 사람 모세가 “그리스도를 믿는 메시야 신앙”을 가졌음을 성령님으로부터 조명을 받고 기록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에도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있었고 그의 은혜를 믿고 기다리는 중에 선민이란 신분 때문에 어떤 능욕을 당한다 하여도 그것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마 13:44에서 “천국 생활은 보화와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에 고난이 동반한다 하여도 꼭 그것을 보화로 여기는 신앙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4)모세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은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이 내세에서 상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마 5:11-12). 세상의 낙이란 100년을 누려도 잠깐일 뿐이지만 내세의 상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5)모세는 신앙적 선택을 잘하였습니다. 믿음이 좋아야 선택을 잘 합니다. 바로 왕실에서의 영화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들(동족)과 함께 출애굽하는 고난을 겪을 것인가의 기로에서 과감하게 이방적 영화를 버리고 신앙적 고난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을 택할 줄 아는 결단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40세에(행7:23) 자기 동족의 억울함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그것이 탄로나자 미디안으로 도망하여(출 2:11-15) 40년을 지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 역할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출 3:7-12). 그 사명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신앙적 고난을 자초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소극적 신앙으로 안일주의를 택하는 것보다는 적극적 신앙으로 고난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2:19).

6)이방나라 임금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27절). 왕은 죽이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악한 짐승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인데 그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은 오늘의 성도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신앙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그 신앙을 터득한 것은,

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고(출 4:1-9),

② 내세와 상급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26절). 불신앙의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 신앙은 마귀와 죄를 넉넉히 꺽을 수 있는 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7)보이지 않는 자(하나님)를 보는 것같이(믿고)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란 보는 것의 반대입니다. “보는 것”은 “보고 안다”는 뜻이요, 신앙은 안 보이는 것을 본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오직 말씀과 역사로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의 성도는 항상 말씀과 역사로만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이 악한 자에게는 어떻게 하시고 의로운 자에게는 어떻게 하시는가를 체험하면서 더욱 더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40년의 광야고행을 잘 참았습니다.

8)순종을 잘하는 신앙입니다. 28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 피뿌리는 예를 정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멸하는 자로 하여금 건드리지 않게 한 것”입니다. 출 12:1-14에 보시면 하나님이 유월절 지키는 방법을 명하셨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본다면 신화와 같은 이야기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징적 의식에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의 계시가 있고 또 믿음이란 무조건 순종으로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약 2:17) 믿음과 순종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성소를 짓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출 39:42), 만드는 법대로 하였다(출 37:29)”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순종하므로써 애굽의 초태생을 멸하는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지도자의 입장에서 그 일을 시행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역시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재앙이 애굽인들과 차별없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9)그리고 모세의 신앙과 함께 첨부되는 말씀은 29절의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인데, 이것은 모세 개인만이 아니고 그 백성들이 다같이 순종한 것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홍해가 막히고 애굽군의 추격이 있을 때 위기를 당하였지만 모세는 침착한 태도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였을 때에, 애굽에서 나온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던 식구들이 그대로 순종하므로 홍해는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기도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에 모세와 백성들이 신앙적 처신을 잘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인들은 이를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하였으니 여기의 “애굽군인들이 시험하였다”는 뜻은 애굽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홍해로 육지처럼 건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을 해하기 위하여 추격하는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의 기적의 은혜가 동일하게 임할 줄로 기대한 것이 잘못된 일로서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하기 위하여 추격하는 애굽인들의 소행을 모르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에게는 기적의 은혜를 허용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은혜를 베푸시지 않기 때문에(출 33:19) 그들은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2.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군병들과 법궤를 메고 나팔을 든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7일동안 여리고 성을 돈 것입니다(수 6:17,22-25). 이 사실도 역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기적을 힘입은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고 시행하여 능력을 힘입은 것입니다(수 6:14-16,20). 누구나 말씀 순종에 집착하면 하나님의 능력도 힘입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이 그의 대적을 무너지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케 해 주신 것입니다.

3.기생 라합의 신앙입니다(31절).

1)기생 라합은 여리고성 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적적인 사실들을 소문으로 듣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2)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었습니다.

3)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셔서 승리가 그들에게 있을 것을 믿고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주고 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느냐, 불신앙으로 죽느냐하는 문제에서 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때에 자기 나라 파숫군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따돌린 일이 있었으나(수 2:5,6) 성경은 라합의 거짓말한 것까지 칭찬하신 것은 아닙니다. 라합이 신앙을 개종하는 입장에서 양심생활을 완벽하게 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며 그런 연약은 회개로 충분히 사함받을 것이고 다만 생명을 걸고 믿음의 편을 선택하였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 신앙을 칭찬한 것입니다.

4)31절의 “순종치 아니한 자”란 라합의 가족중 1인을 의미하기 보다는 여리고의 백성들을 한 단체로 묶어서 단수로 표현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세의 믿음 여덟 가지, 모세와 그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믿음, 여호수아와 제사장들과 그 군인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믿음, 기생 라합이 소문을 듣고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 편이 된 믿음 등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26. 천국 가는 신앙 생활 (히 11:22-31) 목록으로


22-31절까지의 각 절마다 성도의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의 교훈”이 들어 있어서 천국 가는 신앙 생활 열 가지를 발췌하였습니다.

1.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하여 믿는 성도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2절에서 “요셉이 임종시에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할 것을 예언하고 가나안 땅 본향으로 갈 것인즉 자신의 해골도 가지고 가서 그곳 조상들의 무덤 곁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1) 여기의 고향을 사모한 것은 곧 천국 생활을 사모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을 불신앙 세계로(계11:8),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계21:2,10) 비유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본향을 사모한 것은 곧 천국을 사모한 것이고,

2) “자기의 유골을 가지고 가게 하라”는 뜻은 조상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부활할 것을 사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은 천국과 부활을 아울러 사모하는 것입니다.

2. 죽음이나 세상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모세를 석달이나 집에서 키웠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은 “죄없는 어린이를 죽이라”는 부당한 명령이었으나 그것을 거역하고 발각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세상 떠나는 일과 죽음을 두려워하였다면 왕명(王命)을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천국이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히2:15).

3. 세상의 영화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영화를 거절하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우선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사도들이 그렇게 사셨고, 바울 사도는 세상의 영화를 배설물처럼 버리시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셨습니다(빌3:8,갈5:24). 또 약4:4에서는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됨이라” 하셨고, 사도 요한은 “성도가 세상을 사랑할 때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요일2:15)고 하셨습니다. 현실의 좋은 것들이 싫어져야 믿음 생활의 발전이 있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4절에서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세상의 영화와 권세와 왕위까지 다 거절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여 그렇게 하였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큰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은 세상의 영화를 거절하면서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8: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 천국에서 상급으로 갚아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고....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마5:11-12). 따라서 믿음을 위한 고난이나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나 사명 생활을 위한 고난은 다 값진 것입니다.

본문 25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도 애굽의 보화나 재물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천국 가는 성도는 주 안에서의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늘의 상급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26절의 끝에 보시면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분이시고 또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삼상24:15,히11:6,딤후4:8).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여도 의롭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상급으로 보상하실 것이고, 그 상급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상급은 살아 있을 동안만 누리는 것이지만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영원히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안 받는 것이 좋고 천국에서 받아야 더 값진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상급을 사모하는 생활이 천국 가는 신앙 생활입니다.

6. 잘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인내를 잘하여야 합니다. 인내는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고(고전13:4), 연단을 받는 방법이며(롬5:4), 또 소망의 세계, 심판의 세계, 완전하고 영원한 세계를 기다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에 보시면 출애굽한 백성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 하셨고, 롬2:7에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참으면서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하면서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인내요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할 일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인내를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자기를 위한 인내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인내를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항상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28절에서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뿌리는 예를 정한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나타낸 상징적인 의식으로 신약의 성찬 예식의 모형입니다. 십자가와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며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항상 힘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이 없으면 천국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 가는 성도의 생활은 항상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힘쓰는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 생활은 겸손, 순종, 봉사, 희생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8.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역경을 돌파하는 생활입니다. 29절에 보시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고 하셨습니다. 홍해는 천국 여정의 장애물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정에 홍해가 막힌 것은 절망을 뜻하지만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돌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흑암 중에서 빛을 일으키시고(사9:2),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롬4:17). 또 하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반석 위에 두사....견고하게 하시는 분이라”(시40:2)고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조와 인도를 체험하면서 역경을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것이 천국 가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9. 죄와 싸워 승리하는 생활입니다. 30절에서 “여리고 성 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은 영적으로 죄악 세계를 믿음으로 정복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고 거룩한 생활을 힘쓰는 것은 바로 죄의 유혹을 물리치며 이기는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을 잘할수록 천국 가는 생활이 가속되고 희망이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한정된 시기에 얼마나 죄와 싸워 이기는가 ? 또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많이 실천하는가 ? 이것들이 중요합니다. 천국은 승리자가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죄의 유혹을 벗어나 거룩한 생활만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10. 하나님 편에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31절에 보시면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탐군이 자기 집에 왔습니다. 그 정탐군을 숨겼다가 발견되면 죽게될 것이지만 그 정탐군이 하나님 편에 속한 백성이요 자기도 하나님 편에 속하여야 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정탐군을 도와준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모험을 하여야 될 때가 많습니다. 계명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대하여서도 모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성도는 모험적으로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천국 가는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엡6:24),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을 증명하는 생활에서 생명을 걸고 시행해야 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상 열 절의 말씀에서 천국 가는 성도의 생활 열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성도로서 확실하고 승리적인 생활을 하시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27. 상주심을 바라봄 (히 11:24-26) 목록으로


“상주심을 바라봄”이란 말씀에 근거하여 상받음에 관한 교훈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상주심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자기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상이 크다” 하셨고(마5:12), 선지자나 의인을 위하는 사명을 잘했을 때에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며(마10:41-42), 또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이미 상을 받은 것이고(마6:2) 또 “세상의 영광을 포기하고 순교한 자들에게는 더 큰 상을 주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19:27-30,막10:29-30,마11:11).

2)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가 하나님이 상주시는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하며(히11:6),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받기 위하여 공주의 아들이 되는 신분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하였고,

3) 바울 사도는 “운동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자처럼 상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라”(고전9:24) 하셨고, 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빌3:14) 하셨으며, 사명 생활을 다한 말년에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딤후4:7,8)고 하셨습니다.

4) 사도 요한은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계11:18,22:12)고 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상에 관한 말씀이 많을 것입니다.

2. “상 주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1) “상”이란 말은 ‘미스도스’(μισθός)란 단어로 “보상, 보응, 삯”이란 뜻이요 “수고에 대한 응분의 값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선행과 수고를 의무적으로 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값으로 쳐주시는 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또 하나님은 모든 것에 풍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수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들의 수고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은 역시 그 대가를 다시 돌려 주시므로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서라도 직접 전도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직무를 성도에게 부탁하신 것은 역시 상 주시기 위함입니다(단12:3).

3) 저희들은 상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많은 상을 예비해 놓고 운동 경기를 개최하였다고 할 때에 많은 백성이 참여하고 열심히 뛰어서 자기도 상을 받고 주최한 왕에게 기쁨을 안겨 주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기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자기가 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주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주최자의 의도에 복종하고, 주최자를 기쁘게 한다는 목적이 아울러 성취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상받을 욕심만 갖는 이기주의적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상 받기를 노력하시라는 뜻입니다.

4) 상급을 주시는 근거는 수고와 헌신과 결실에 의합니다. 수고만으로도 상을 받을 수 있고, 수고와 헌신만으로도 받을 수 있으며 또 수고의 결과로 결실이 있었다면 역시 결실에 따라서도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한 것과 하나님이 하신 것을 잘 구별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니까 사람이 수고한 일과 공력에 대하여 상급의 대상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① 계22:12에 보시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결실의 뜻은 없습니다. 농장에 일하러 온 품꾼이 일하고 일당을 받는 것처럼 수확의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마20:8). 따라서 상받을 자는 결실과 상관없이 수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고난이 포함됩니다(히11:36-38).

② 헌신한대로 주십니다. 마19:29에 보시면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여러 배를 받는다” 하셨고, 순교의 제물이 된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마11:11). 세례 요한은 세상 영광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생애를 포기한 헌신과 희생의 모범자인 것입니다.

③ 결실에 의한 상급은 당연한 것이지만 결실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가 기대한 목적 성취가 곧 결실일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을 것이지만 그 목적 성취가 사명의 결실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결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의 분량을 뜻합니다. 그 영광의 분량을 키우는 것은 오직 자신과 성도들의 믿음 본질의 성장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따라서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결실이 반드시 믿음 본질의 성장과 결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롬14:23).

3. 상급은 언제 주시는가를 살피셔야 하겠습니다. 상급은 세 때로 나누어 주시는데, 수고한 자의 당대에, 또는 후 시대에 또는 내세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1)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는 말씀이 있고(시127:3), 전2:10에서는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를 얻은 분복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들은 당대에 주신 상급에 속하고, 마6:2에서 영광과 칭찬을 받은 자들에게 “저희는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시므로 칭찬과 명예를 누리는 것도 현실에서 받는 상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미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은 미리 받은 상은 나중에 받을 상을 제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칭찬과 명예와 축복에 상관없이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출20:6에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출하신 일이나(창19:29), 다윗 왕이 요나단의 선행을 생각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사실(삼하9:9-11) 등은 부모의 공력에 대한 상급을 후손의 시대에 받게 하신 실례입니다.

3) 천국에서 상을 주십니다. 이 “상”은 제일 마지막에 주시는 것입니다. 늦게 받는 상은 최종적이고 종합적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상은 세상 떠날 때 끝나지만 천국에서 받는 상은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영원히 누릴 상을 바라야 합니다. 마5:12의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를 힘쓰시는 성도들은 반드시 내세에서 상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사심없고 욕심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열심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3 과 믿음의 모범자들(4) (히11:32-40)목록으로


위의 본문 말씀까지는 앞에 말씀의 연속으로 “믿음의 모범자들의 신앙적 증거들”을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어느 개인에게 해당된 내용을 연속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의 사람들과 믿음으로 성취된 사건들을 따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믿음의 사람이 나타낸 모범들을 성경에서 찾아봄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방법으로 말씀하시게 된 이유는 설명의 시간과 내용을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32절에 보시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하셨으니 바쁜 시간에 긴 설명을 다 자세히 하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모범이란 한 두 사람의 모범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님의 모범이나 바울 사도의 모범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처음 찍은 당사자의 확인으로 충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한 증언 이외의 다른 증언을 또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불신하는 태도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32절을 말씀한 취지는 “여러 사람의 증거를 개별적으로 더 설명하려면 시간도 부족하고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이 생략하고 간략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1.그러면 간략하게 소개한 신앙적 행사들이란 무엇입니까?

1)전쟁에 이긴 사실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삼상 17:47) 하나님이 믿음 있는 자와 함께 하시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였으니(33절)” 여기의 “저희”란 32절에서 소개한 기드온(삿 6:-8:), 드보라, 바락(삿 4:6-24), 삼손(삿 13:-16:), 입다(삿 11:29-33), 다윗(삼상 17:47-54, 삼하 22:1), 사무엘(삼상 7:7-12)및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사무엘(삼상 7:13-14)과 엘리야(왕하 2:12)와 엘리사(왕하 6:8-19, 왕상 20:22-30)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실이 있었습니다. 여기의 “믿음으로”란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흠하게 유지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의를 행한 사실”입니다. 삼하 8:15에 보시면 다윗은 왕노릇 할 때에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의를 행한 것입니다(시 4:4-5).

3) “믿음으로 약속을 받기도” 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에게 후사를 주어 하늘의 별같이 번성케 하시고 또 가나안 땅을 업으로 주실 것과(창 15:5-7) 그 자손(메시아)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받을 것을 약속 받았으며(창 22:16-18) 다윗도 믿음으로 메시야의 언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이 입증하는 것입니다(대상 22:10, 마 1:1, 시 22:1).

4) “사자들의 입을 막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니엘이 순교적 신앙으로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봉하여 죽지 않게 하신 일을 의미하며(단 6:17-22)

5) “불의 세력을 멸한 일”이 있으니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음을 인하여 평일보다 7배나 뜨거운 불에 던져졌지만 역시 하나님이 불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단 3:19-25). 이때에 세 사람은 “하나님이 기적으로 보호해 주시지 않으므로 죽게 될지라도 인간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단 3:18)”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6)“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다”는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믿음 있는 자를 칼날에서 보호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믿음의 용사로서 사울 왕의 칼날과(삼상 18:11,19:10) 골리앗의 칼에서(삼상 17:45) 보호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또 전쟁에서 죽지 않은 것도 역시 칼을 피하게 하신 것입니다.

7)“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것”은 삼손이 나실인으로 구별된 생활을 잘하자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삿 13:2-7) 그에게 능력을 주신 것을 의미하며(삿 13:25,16:28)

8)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인의 진을 물리친 것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점령과(수 6:1-11) 여러 사사들이 가나안 땅 점령할 때의 일들을(삿 1:1-10) 염두에 둔 것이며

9)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은 사실은 왕상 17:17-23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준 사실이 있었으니 이때에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으로 먹고 가족과 함께 죽으려 하였다가 그 식량으로 먼저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한 특별한 믿음이 있었으며 또 왕하 4:21-34에서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살게 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여기의 수넴 여인의 믿음도 남다른 좋은 믿음을 갖고 있었음으로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요,

10)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순교하고 고난을 감수한 순교자들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35-38절).

①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성도의 믿음은 순교적인 믿음이고 “더 좋은 부활”이란 내세의 상을 소망한 것이며 그들이 받은 악형의 내용들은 성경에는 충분한 기록이 없으므로 성경이 아닌 전설(마카비 6:18-7:42)을 통하여 알게 된 순교사화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②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받았으니 이런 핍박은 예례미야 선지자도 당하였지만(렘 20:7,38:7) 그렇게 당한 성도들은 히브리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③ 돌로 치는 것은 요아스 왕때에 의로운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인 일이 있었고(대하 24:20-21) 신약 시대에 와서는 스데반 집사도 그렇게 죽었습니다(행 7:57-58). 믿음은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게 하십니다.

④ “톱으로 켜서 죽임 당한 사례도 있다”하였으니 성경에는 톱으로 켜서 죽인 기사가 없으나 전설에 근거하여 므낫세 왕때에 이사야 선지가가 톱으로 켜서 순교를 당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⑤ “시험과 칼에 죽음을 당하였다”하셨으니 “시험”이란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인과 참신의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대결한 일이나(왕상 18:18-24,38-40) “엘리야”가 핍박 중에 자기 혼자만 남은 줄 알고 외로움을 느낀것(삼상 19:9-10,18)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주 악한 자의 대적을 받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음을 아셔야 하고 그것이 시험임을 알아서 믿음으로 대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칼에 죽는 일은 여호야김 왕때에 “우리아”란 선지자가 예례미야의 예언처럼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였다가 왕의 칼에 죽임을 당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렘 27:20-23).

⑥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중에 암혈과 토굴로(38절) 유리하며(37절)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비슷한 인물로 다윗이 믿음이 없었더라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해치고 일찍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해하면 죄가 된다(삼상 24:6)”는 신앙 때문에 굴로(삼상 24:3,22:1) 산으로(시 18:2-3) 이방나라로(삼상 21:10) 도망다니고(삼상 20:1) 리하면서(삼상 21:10-15,22:3) 궁핍과(삼상 21:3) 환난과 학대를 받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모범자들은 믿음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의를 시행하는 것으로 약속을 받고 사자와 불의 세력과 칼날에서 보호받으며 연약에서 강하여 이방 나라의 땅을 점령하였으며고 상급있는 부활의 은혜를 믿고 핍박을 극복하며 순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2.38절에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하셨으니 이 뜻은 죄 많은 인간들이 이만한 신앙인들을 모시고 그의 뜻을 본받을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 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나 수용되기에 합당하다는 것이요

3.39절에서 “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뜻은 “고난과 희생을 당하여도 믿음으로 받은 것은 헛되지 않다(고전 15:58)”는 증거를 받았으나, 그것이 그들 세대에서 성취된다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실의 낙을 못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4.40절에서 “이는(구약의 성도들이 그런 믿음의 본을 보인 것) 오늘의 우리를 위하여(후시대의 성도들의 신앙 발전을 위하여) 더 좋은 천국의 상급을 예비하게 하는 일로 나타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이 그들의 모범을 본받지 않는다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란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모범을 현시대 사람들이 본받지 않으면 옛사람의 모범도 보람이 없고 후시대 사람들에게 온전한 것을 이루도록 전해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선배들의 신앙의 본을 성경이 소개 하신대로 현시대 성도들이 그것을 본받고 또 후시대에 전해야만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주여 이런 믿음을 저희들도 꼭 본받게 하옵소서”하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34 과 신앙 생활 잘하는 법 (히 12:1-13)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성도가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권면하셨습니다.

① 신앙 생활을 운동경기처럼 여기라는 말씀이요(1절),

②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라(2-4절)는 말씀이며,

③ 권면과 징계를 유익하게 여기라(5-13절)는 말씀입니다. 이상 세 가지 대목으로 본문 말씀을 설명하면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신앙 생활을 운동경기처럼 여김에 대하여(1절).

이런 말씀은 고전 9:24-27과 딤후 2:5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어떤 준비와 정신으로 경기에 임하는 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는 운동경기자의 자세로 마귀와의 경주에 임하되

1)우선(앞에서 소개한) 신앙의 모범자들의 모범을 거울 삼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이러므로”란 뜻이 바로 “신앙인들의 모범을 보였으므로”크게 참고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2)관중을 의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경기자가 출전하였을 때 많은 관중의 환호와 응원을 의식하여 용기와 책임을 갖는 상태를 연상하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경기자가 관중들의 환호와 응원에 보답할 뿐아니라 경주자의 승리를 기대하는 모든 이들의 성원에 보답할 책임을 가지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경주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주님이 기뻐하시고 성도들이 기뻐하며 천사들도 기뻐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직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승리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응원자들일 수도 있는 반면에 얼마나 잘 싸우는 지에 대한 평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신앙 생활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일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3:3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하신 것처럼 신앙 생활의 대로를 닦으라는 말씀입니다. 산업 발전을 하려면 산업도로를 먼저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죄와 현실적 염려요 “얽매이기 쉬운 죄”는 쉽게 유혹받는 죄들을 의미합니다. 죄는 속죄의 은혜와 회개로 벗고 현실적 염려는 주님께 맡기며(벧전 5:7) “얽매이기 쉬운 죄”로는 자기 정욕이나 나태, 불법, 현세욕 등인데 그런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할 것입니다.

4)인내로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로 경주하되 “우리 앞에 당한 경주”란 개인적 신앙경주도 필요하지만 특히 단체적 신앙 즉 교회적 사명을 잘해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인내가 승리의 첩경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 생활을 잘하는 방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2-4절).

1)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고 성도의 인격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며 십자가 이후의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자기에게 거역하는 죄인들에 대하여 끝까지 참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2절).

2)그런데 십자가를 참으시고 돌아가신 후에는(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으신 후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눅 24:26).

3)그런고로 성도가 믿음 생활이나 사명 생활을 하는 중에 피곤해지고 낙망될 일을 면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3절).

4)또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지만 피흘리기까지 대항해 본 일이 없지 않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을 때는 고난은 물론 피흘리며 생명을 다 하기까지 싸워야 할 것입니다(4절).

3.권면과 징계를 귀히 여겨 그것으로 유익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징계를 무조건 배격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좋은 약으로 알아야 합니다. 잠 12:1에서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하셨습니다.

2)하나님이 성도를 징계하신다는 말씀을은 구약 성경 3:11-12을 인용하여(5절) 말씀하셨습니다.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잠 3:11)”하신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낙심하지 말라”하였고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을 채찍질 하신다는 말씀(6절)도 잠 3:12의 말씀에서 의미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누구의 징계를 받든지 이를 건설적 방법으로 여겨 징계에 희망을 가질 줄 안다면 그의 신앙은 크게 성숙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① 우선 육신의 아버지나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징계가 있고(7절, 살전 2:11),

② 정부에서 죄인을 벌하는 징계가 있으며(롬 13:4),

③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하는 징계가 있고(마 16:9),

④ 자기 스스로 벌하는 징계(근신, 자숙하는 것)가 있으며(고후 7:11),

⑤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5절). 인간이 이런 징계 저런 징계를 피하려고 하다가 맨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면 그 징계가 가장 엄하고, 잘못하였을 때 빨리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먼저 받을 때는 신속한 회개가 참작되기 때문에 제일 가벼워지는 것입니다(히 10:31, 삼하 24:14). 하나님은 이상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징계를 하십니다.

4)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징계의 성질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아버지가 아들을 권하는 것같은(살전 2:11) 사랑의 훈계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면서(5절) 구약 성경 잠 3:11,12의 말씀을 인용하여 강조하셨습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받으시는 아들(즉 자녀된 자)을 징계하시고 채찍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6절). 그러니까 성도가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자기에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7절 말씀에서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믿음 있는 성도가 고난을 참으면서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며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고난이 있을 때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렘 15:15,17).

④ 7-9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성도를 아들같이 대우하시니 어찌 아비의 징계를 받지 않을 자식이 있겠는가? 그런 뜻에서 징계는 성도마다 다 받아야 하는 것이며 만일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징계권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생아 같은 격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아도 여전히 부모를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으면 더욱 하나님을 복종하며 공경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시행하는 단순한 징계와 달라서 많은 유익을 주는 징계라고 하셨습니다(10-11절). 10절에 보시면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를 기록한 집필자들도 사람의 징계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의 징계는 하나님의 징계에 비할 때 단순한 이유와 목적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는 반드시 받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유익이란

㈀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고(10절),

㈁ 믿음의 연단을 주시며(11절),

㈂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1절). “의의 평강한 열매”란 의를 행하여 평안을 유지하게 하시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⑥ 그래서 혹 징계를 받을 때 심리적 부담을 가지므로 일시 기쁨이 없고 슬픈 마음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연달(단련받고 통달함)을 받고 보면 큰 유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5)12-13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① “피곤한 손(봉사하다가 힘들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기도하다가 힘들어지고 약해지는 것)을 일으켜 세우라”하셨으니 이는 다시 용기를 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 35:3의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라”는 말씀에서 의미상으로 인용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② 또 13절 말씀인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신앙 활동의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처럼 길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생활의 장애물을 다 걷어 치우고 신앙 일념의 환경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잠 4:26을 인용한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리(활동이 연약해진 상태)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하셨으니 이는 절름발이 같은 신앙 생활을 반듯하게 세우라는 것입니다.

③ 혹 저희들의 신앙 생활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를 갖고 있는 형편처럼 되어 있다면, 저희는 당연히 책망을 받고 깨달아서 반듯한 생활로 고침을 받고 전진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신앙 생활을 운동경기처럼 하셔야 할 것과,

②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과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우리도 각자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잘 참고 지셔야 할 것과(마10:38),

③ 징계를 귀히 알고 징계를 받으면서 믿음이 성숙하여 용기있는 신앙에 들어가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징계한다”하면 도망할 교인들이 많을 것을 상상하면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설교보충 28. 신앙의 운동 경기 (히 12: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의 운동 경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경에는 성도의 신앙 생활을 운동 경기로 비유하여 교훈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1)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말씀과(고전9:24),

2)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라”는 말씀(빌3:14),

3)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딤후2:5), 그리고

4)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과 또 행20:24, 빌2:16, 살후3:1, 딤후4:7에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2. 신앙 생활과 운동 경기와의 관계되는 교훈을 생각하시기 전에 먼저 세계적으로 권장하는 올림픽이나 스포츠 경기에 대한 상식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 1988년 가을에 우리나라에서 세계의 160여개국이 모여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루었습니다. 국민들에게 건강한 체력을 갖게 하고 또 정신적인 건강, 국민적 단합 또는 세계인들과의 친교를 갖는 좋은 목적들에 대하여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이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반대 주장은 대부분 경제적 손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경제적 흑자를 내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좋은 볼거리가 왜 국익에 손해를 주는가에 대하여 제 의견을 말한다면, 첫째는 많은 국민들의 시간적 손실이 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생산성 있는 볼거리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어야 할 국민들이, 다시 말하면 성경을 보고 기도해야 할 성도들이 또는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스포츠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올림픽 운동이 하나의 종교적 행사처럼 우상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올림픽이란 용어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올림픽”이란 고대 헬라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수호신인 “올림푸스” 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축제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림픽의 효시(嚆矢)요 시작이란 것입니다. 지금은 이 행사에서 종교적 냄새가 없지만, 시작은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언제 한 번 기독교 교역자 연합회에 갔었는데 “2002년 월드컵 행사를 한국이 유치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제목을 첫 번째로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올림픽 우상화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 생활 이상 더 중요한 일은 없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스포츠에서 순수한 면을 발견한다면 과학 문화를 배제하고 육체적 힘만 사용하는 원시적 방법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정복하려는 세상에서 육체의 기량만 나타내는 것이 스포츠인 것입니다. 맨발로 뛰는 일, 공을 던지는 일, 노를 젖는 일, 맨손으로 엎치는 일, 활을 잘 쏘는 일 등 모두가 원시적이고 육체적인 노력입니다. 여기서 스포츠의 순수한 면을 발견하면서 좋아한다면, 성도들은 현실 문화와 교회적인 전통을 떠나서 초대 교회적인 순수한 생활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한 것입니다.

올림픽으로 세계인을 모아 놓고 전도의 기회를 만났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가 비건설적인 일에 참여하는 것은 좋지 않으나 기회를 선용하여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올림픽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다 세계적으로 유명해 졌고 성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따야 할 금메달은 무엇일까요 ? 그 금메달은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생활입니다.

① 고후10:17,18을 보시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 옳다고 인정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 하셨고,

② 딤후2:15에서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또,

③ 딤후4:7,8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사셨으니 이런 말씀들이 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생활이요 금메달 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금메달이라고 칭찬하여도 공정하신 하나님이 은메달이라 하실 수 있고, 사람이 동메달이라 하여도 하나님이 금메달이라고 하실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경주의 대상은 누구이며, 경기의 종목은 무엇일까요 ?

1) 경주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마귀입니다. 성도가 불신자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도 경주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투기하거나 욕심을 부리는 뜻에서 성도를 경주의 상대자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달려 들고, 그림자처럼 필사적으로 따라 붙습니다. 그림자는 빛이 일방적으로 비췰 때 나타납니다. 그러나 광명이 충만하면 그림자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마귀를 이기는 방법도 진리와 성령이 충만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타협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마귀를 완전히 배격하고 대적하는 자세를 취할 때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2) 스포츠에 종목이 많은 것처럼 신앙적 은사에도 종목이 있습니다. 그 종목은 믿음의 지식, 사랑의 실천, 사명 생활의 모범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종목(바른 교리), 사랑의 실천(계명) 그리고 사명 실천(헌신) 등이 다 종목에 속합니다. 이 종목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의 바른 지식, 계명의 실천,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음, 헌신적인 봉사 그리고 희생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활동에서 마귀들을 부끄럽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경기하는 자세가 어떠하여야 합니까 ?

1)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 연단과 적응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실천 등으로 노련미를 갖추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벧전1:7,계3:18).

2) 신앙의 대로를 닦아야 합니다. 무거운 짐, 험한 것들, 현세욕 등을 다 벗어버리고 가난하고 빈 마음을 가진 후에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면서 믿음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옷을 입고 경주에 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성수 주일과 신앙 생활에 구애 없는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엉겅퀴를 제거한 옥토에 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마13:22).

3) 목표를 정하시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범자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33년간의 생애,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 보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4) 인내로써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인내로 십자가를 견디실 때 마귀는 패배를 한 것입니다. 인내의 강한 투지가 아니면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빌2:8,히12:2).

5) 다른 사람을 표준하지 말고 성경과 예수님을 표준하고, 규칙을 위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1등을 하였으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서 금메달을 빼앗긴 일도 있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하신 말씀을 엄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작은 불법이라도 범하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6) 강한 용기와 도전이 필요합니다. 기독교가 회교(回敎, 이슬람교;중국에서는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불림)의 핍박을 받을 당시에 터키의 수도 바그다드를 통치하는 “칼리프”란 자가 핍박 중에 믿음을 지키는 기독교 목사를 찾아가서 “당신도 나와 같이 알라 신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신이 참 신인지를 내게 증명을 해라”, “너희의 가진 성경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 했으니 너는 목사로서 겨자씨 이상의 믿음을 가졌을 것인즉 그것을 시행해 보라, 만일 못한다면 너는 거짓을 선전하는 자니까 내가 너를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목사는 너무 급하고 두려워서 어떻게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고 두 주간 여유를 구한 후에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방책이 생각나지 않던 중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 생활에 용기가 있는 구두수리공 애꾸눈 집사에게 부탁할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구두수리공 애꾸눈 집사는 자기에게 구두 수리를 청탁한 어떤 여인의 노출된 다리를 보고 음심이 생기자 눈으로 보고 죄를 지은 것이 안타까워서 구두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렀기 때문에 애꾸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죄짓고 지옥가는 것보다 소경으로 천국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눈을 찔렀으니 그 신앙의 결단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가 목사의 청탁을 받고 기한 마지막 날에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기도를 하니까, 별안간 지진이 일어나서 그 산이 부서지면서 바다로 떨어져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칼리프”란 핍박자는 기독교인들을 죽이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가 죽어서 그의 시체를 들쳐보니 그의 목에 십자가가 걸려 있더라고 합니다. 그는 그때 속으로 개종(改宗)했으면서도 겉으로는 회교인 노릇을 했기 때문에 회교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민의 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는 책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단력 있게 말씀대로 사는 자의 기도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5. 본문 1절에 보시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하셨는데, 이 증인들은 어떤 대상일까요 ? 이 증인들은 운동 선수들의 팬이요 응원자들입니다. 이들은 성도의 편에서 마귀와의 경주를 이기기를 바라는 팬들입니다. 그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천사들도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보시고 응원할 것입니다. 성도들 주위에서도 많은 백성들이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잘하면 성원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 앞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은 신앙의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금메달 감이 될 때에 주께서 기뻐하시고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경기는 마귀와의 싸움이기에 꼭 이기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9. 경주자의 필수 원칙 (히 12: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성도의 신앙 생활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여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우선 경기자가 훈련이 잘된 상태에서 준비 자세가 좋아야 하고, 다음에는 목표를 향하여 치우침이 없어야 하며, 끝까지 인내로 사력을 다하여 뛰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내용에 따라 경주자의 필수 원칙을 상고하겠습니다.

1. 준비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1절에 보시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근본 뜻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넓게 해석하면 “장애물이 없는 상태에서 달음질 하라”는 뜻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옷을 많이 입고 구두를 신은 상태에서는 잘 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벼운 차림으로 달리는 것처럼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서도 핍박의 세계를 떠나고, 성수 주일이 안되는 생활 조건도 개선하며, 직업도 믿음 생활하기 좋은 직업 즉, 도덕성에 문제가 없고, 시간에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역대 총회록을 참고할 기회가 있어서 보는 중에 1908년 독노회로 있을 때 “중혼자는 원입을 세우지 못할 것”을 결의하였고, 1911년 5회 독노회 때에도 “성수 주일을 못하는 사람은 세례를 주지 말라”고 결의하였습니다. 제가 경북에서 처음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할 때에 김00이라는 젊은 부인이 아들 둘을 낳고 남편과 잘살면서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남편이 본처와 이혼한 상태에 있으나 이혼 당한 부인은 아직도 그 남편을 생각하여 시집을 가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받으려는 부인에게 “그런 사연을 알고 있느냐 ?”고 하였더니 전혀 모르는 사실이고 또 그런 일이 있다면 이혼을 하고라도 세례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가정 풍파를 일으킬 일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여성도는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딸로 거리낌이 없기 위하여서라면 이혼도 불사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고 신앙의 대로에 서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후 교회의 장로님과 함께 그 본처가 사는 동리에 가서 그녀의 출석하는 교회의 교역자에게 그 사정을 의논한즉 “지금도 남편이 원하면 같이 살 뜻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1년전 쯤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서 한 주간 정도 살다가 다시 온 일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혼의 관계가 확실한즉 세례를 받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에 장애가 되는 것이면 과감하게 벗어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인정을 끊는 순종을 하지 않았습니까(창21:10-14) ?

2. 목표와 표준을 바로 정하는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는 한 발자국이라도 단축되는 거리를 뛰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목표를 바라 보아야 하고 또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뛰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 보고 또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또 죄인들의 거역한 일을 참으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목표로 바라보되 그의 선하신 생애와 구속 사업과 그 후의 영광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본 받으라는 뜻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인간이나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행이나 전통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로서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며, 믿음에는 능력이 동반하는 것입니다(막9:23).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믿음을 구하였습니다(눅17:5). 값진 믿음, 구원받는 믿음을 능가하여 영광을 많이 돌리는 믿음을 구하여야 하겠습니다(롬1:17).

2.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뜻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만큼 잘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딤후3:17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도 온전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온전하시고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목표로 바라 보면 자신의 인격과 신앙도 역시 온전하여질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고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라“(유1:20,히10:22)는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승리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나 죄인이 되신 것(죄인으로 여김 받으심)을 참으셨으니까 저희들은 죄인으로서 회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고난을 참으신 것처럼 저희들도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참고 견디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빌2:8에 보시면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달음질하는 자의 목표는 오직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생활 방법과 십자가와 그 결과로 받으신 영광의 승리인 것입니다.

3. 인내로 힘써 뛰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나 권투 선수만큼만 인내하고 뛴다면 신앙 생활에 승리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또 인내하면서 충성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인내 자체는 성령의 열매요, 은사에 속하는 축복입니다. 인내로 은사 받고, 인내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인내로 신앙의 승리를 가져오는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인내에 자신이 있으면 어떤 난관이 닥쳐도 염려하지 않을 것이요 승리를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 사명을 실천할 때도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를 잘 선용할 줄 알면 믿음 생활에 좋은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믿으시고 인내하면서 달음질하셔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얽매이는 것 없이 믿음 생활하실 것과 예수님의 생애와 영광을 바라 보실 것과, 사랑과 사명 실천에 인내하면서 전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보충 30. 예수님을 바라 보자 (히 12:1-3) 목록으로


방금 읽으신 말씀 2절에 보시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은,

① 믿음의 주이시고,

② 온전케 하시는 이시며,

③ 앞에 있는 즐거움(즉, 미래의 기쁨)을 위하는 예수님,

④ 그것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님,

⑤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당하신 예수님,

⑥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영광에 임하시고 영원토록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대로 “예수님을 바라 보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을 왜 바라보아야 하는가 ?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요,

2)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중보자이시니까 마땅히 바라보셔야 하는데,

3)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본받기 위하여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께서 초림(初臨)하신 것은 구원 사역에도 목적이 있지만 인간은 타락하여 변질되었으니까 완전한 인간의 모범과 성도의 생활 모범을 보이시는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마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요13:15에서는 “예수님이 성도의 선생님으로서....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 하셨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하셨으며, 고전11:1에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② 따라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본받기 위하여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성품, 지식 그리고 언행을 의미하며,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인격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신성적(神性的)인 모든 것은 예수님만 가지신 고유한 속성이요,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본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할 때,

1)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33년간의 생활을 성경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5:39에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시므로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방법이 성경 뿐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고 요21:25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복음 외에도 많지만 그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의 행적을 적당하게 제한하여서 감당하기에 알맞도록 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경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어떤 이는 사람이 상상하여 그린 예수님의 화상을 진짜 예수님처럼 착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연 현상의 구름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 비슷한 것을 보고 사진을 찍어 보이면서 “예수님을 보았다” 하기도 하고,또는 눈 녹은 발자국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을 보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계시하시는 분이 아니요 오직 성경으로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만일 저희들이 “예수님과 같이 산다”고 가상한다면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행을 무분별하게 모방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예수님의 모습과 언어와 생활을 모방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 되기 때문에 꼭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장을 하고 나오셨다면 모든 성도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이 머리를 깎고 나오셨다면 모든 성도들도 머리를 깎을 것이고, 예수님이 콧수염만 기르고 나오셨다면 모든 성도들도 콧수염만 기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오신다 해도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따라갔는데 진짜 예수님의 생활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 예수님이 노란 샤스를 입으셨다고 하면 모든 성도가 다 그것을 따를 것이고, 예수님이 금뱃지를 다셨다고 하면 역시 모든 성도가 그것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부자로 사셨다 하면 너도나도 부자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보이셨는가 ?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사53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을 살피면 저희들의 마음이 대단히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① “그는 연한 순같이 자라셨다”고 하셨습니다. 약한 체질로 자라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②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다” 하시므로 살찌지 못하시고 시들하게 자라셨다는 뜻입니다. 가난 중에 사셨으니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③ “간고와 질고를 많이 겪으셨다” 하셨으니 고생을 많이 하신 모습임을 보여 주신 것이요, 결코 살찌고 호강한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④ “사람에게 멸시받기 좋을 만큼 볼 모양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셨고,

⑤ 따라서 “우리도 (많은 사람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⑥ 그러면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 귀히 보여지시기 위하여 수단을 쓰셨는가 ? 할 때, 마12:19에서 “그는 들레지도 아니하셨고 크게 소리내지도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조용하고 잠잠한 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또 (예수님의 어릴 때의 모습으로는)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것과, 12세 때 성전에 제사하러 가셔서 성전에서 말씀 문답을 하셨다는 것 외에는 보여 주신 말씀이 없습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와 성직자의 사명은 곧 예수님을 보여 드릴 사명입니다. 또 저희 모든 성도들은 그의 모습과 생활을 본받을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4) 성년이 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

① 예수님의 외모를 말씀하신 성경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나, 키가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타내시지 않은 것은 다 문제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②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하고 비천한 위치로 오셔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왜 왕자나 귀족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멸시 천대를 받는 입장으로 오셨을까요 ?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 비천한 자를 위로하시기 위함이고,

㉡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이 사셨다”는 말씀에서 보면, 이런 것은 모든 사람이 모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별장에서 사셨다”고 가상하면 별장이 없는 사람이 그 생활을 어떻게 본받을 것입니까 ?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본받기 쉽도록 비천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③ 마11:29에서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시다” 하셨고, 요13:1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으니 원수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심으로써 오래 참으셨고, 투기, 자랑, 교만하지 않으셨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심은 물론 이기적으로 행치도 않으셨고, 성내지 않으셨으며, 악을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하셨습니다. 자기를 파는 가룟 유다에게도 성내지 않으셨으며, 자기를 죽이는 빌라도에게도 선한 말씀으로 나타내셨고(마26:25,딤전6:12), 본문 3절에도 보시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하시므로,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빌2:8에 보시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시므로 겸손과 희생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④ 그 외에도 말씀으로 권위 있게 가르치신 모습(마1:22), 슬퍼하는 자와 같이 우시는 모습(요11:35), 시장하여 무화과 열매를 찾으시는 모습((막11:13), 피곤하여 배 위에서 주무시는 모습(마8:24), 주되시고 선생되신 분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모습(요13:5-),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는 모습(마27:14), 십자가 위에서 강도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모습 등 많은 것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또 “한 알의 밀이 썩어져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17:14) 하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처럼 사시다가 희생하신 일까지 보여주신 것은 바로 저희들이 그 예수님을 바라 보고 본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와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예수님을 본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

①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게될 것입니다. ② 그리고 세상에의 애착(愛着)을 멀리하면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 하게 될 것이요,

③ 그렇게 될 때에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게될 것입니다. 갈5:17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스리는 입장이기 때문에,

④ 예수님을 본받아 육체와 자신과 현실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의 충만을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35 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히 12:14-29)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을 살피면 세 가지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① 14-17절에서 “교회 생활에 대한 말씀”이고,

② 18-24절로 “율법에 비교한 복음의 탁월성”을 말씀하셨으며,

③ 25-29절까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체의 제목을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순서대로 살펴보시면

1.교회 생활에 대한 교훈(14-17절)으로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14절)”는 것입니다.

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하심은 모든 사람과 화목하며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이요,

② “거룩함을 좇으라”하심은 하나님만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예수님을 잘 닮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인격을 잘 알아서 예수님을 닮아 순결을 도모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해지려면 죄사함 받는 믿음을 갖고 깊이 회개하며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③ 14절에서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를 볼 수 없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친교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마 5:8에서 말씀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으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하신 말씀과도 뜻이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친교적 관계는 믿음과 이웃에 대한 화평의 방법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으면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없을 만큼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2)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쓴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면 참 불행한 형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악담이 “은혜 없는 성도 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① 은혜의 방편은 말씀이니까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런 뜻이요,

② 믿음 있는 것이 은혜인데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니까 말씀 실천을 잘하는 것이 은혜에 이르는 것이며,

③ 최고의 은혜는 내세의 상급에 있으니까 충성을 잘하는 것이 “은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이른다”는 것은 말씀을 잘 깨닫고 잘 실행하면서 또 충성을 잘하는 생활인데 성도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쓴 뿌리 같은 존재가 되어 거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필자는 벌초할 때마다 잔디 풀만 있어야 할 장소에 가시나무, 참나무뿌리가 번창하여 어려움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은혜에 이르지 못하면 기쁨과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하는 말만 하면서 협력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성도이면 이웃을 유익하게 못하는 쓴 뿌리 같은 형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가 쓰면 열매도 쓸 것이요, 은혜아닌 것은 은혜아닌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서의 기자는 그런 상태를 두려워하고 그런 자가 없도록 서로 노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16절). 음행은 계명의 위반은 물론 부정의 씨앗까지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중하고 교회의 순결을 해치는 등 죄악의 후유증도 오래가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음행의 씨를 뿌리고(삼하 11:5,27) 그 아이가 죽는 시련을 당하였으며(삼하 12:15-18) 집안에 불상사까지 일어난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삼하 13:22,30). 이렇게 음행은 개인과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죄악이므로 두렵게 여기라고 하신 것이요

4)“에서”처럼 “한 그릇 식물을 인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것처럼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하셨으니(16절) 이 말씀은 현실축복을 타산하여 신령한 복을 포기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팥죽에만 마음이 있고 장자의 명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비택자였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나타냈지만(출 9:13, 창 25:32) 성도에게서 그런 비택자의 행동이 나타나서는 안되겠기로 이런 경계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일의 타산으로 신령한 복을 멀리하는 성도가 이 세대에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런 일을 감행하였을 때 회개할 기회가 반드시 있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교회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이 네 가지 경계의 말씀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복음적 은혜는 율법의 사역에 비할 때 엄청나게 탁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8-24절).

그 탁월한 이유는 율법과 복음이 주어진 상태와 제물의 성격 차이에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율법은 시내 산에서 주셨고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주셨습니다.

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장소는 사람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불붙는 시내 산이었으며 그때에 영광스런 나팔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고(19절) 정죄와 심판을 예표하는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있었으며(출 19:16-19) “짐승이라도 그 곳에 이르면 돌로 친다(출 29:12-13)”는 경고를 하시므로, 모세도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20절)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신 18:16의 의미상 표현인듯 함)”하였으니 율법의 사역은 이렇게 정죄하는 것이기 때문에(롬 3:20,4:15, 갈 3:13) 그 상황도 두렵게 나타난 것입니다.

② 그러나 복음을 주신 것은 시온 산이 있는 “예루살렘”인데 이 곳은 하늘의 예루살렘인 내세 천국을 모형하는 아름다운 장소요(22절) 또 천국을 비유하는 곳으로서 천국에는 천만 천사들(많은 천사;23절)과 하늘 생명록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남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예수님까지 계신 완전하고 영원한 처소”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뜻은 생명록에 기록된 구원받은 백성을 뜻함이요(계 20:12) “장자들의 총회”란 하늘의 특권을 풍성하게 누릴 모범 성도를 칭찬하는 뜻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장자가 갑절의 기업을 받고(신 21:17) 가문의 기둥이 되는 것처럼 하늘 기업을 누림에 있어서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모범 성도들의 단체가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또 그 곳에는 하나님만 인정하시는 즉,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로 구성된 전체적 무형교회가 있고,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까지 영원히 함께 계신 곳입니다.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주실 때 그 상황에서의 격차가 있듯이 율법은 정죄와 심판을 전달한 것이고 복음은 영원한 은혜로서 하늘의 자리에 앉혀 주신 것입니다(엡 2:6). 본문 18절과 22절의 “너희의 이른 곳”이란 말씀이 바로 천국을 모형 하는 예루살렘을 지칭한 것입니다.

2)제물의 차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세 당시에는 짐승의 피로 모형적 제물을 삼았으나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은 아벨의 피보다도 더 나은 자신의 피로 속죄제를 드린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 앞에 호소력을 가졌지만(창 4:10) 그것도 죄인된 인간의 피일 따름이요. 예수님의 피는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생명의 피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무한한 것입니다(24절).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사역보다 복음의 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각각 은혜를 받은 장소와 상태의 차이와 제물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25-29절).

1)그 방법은 28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고 두렵게(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임) 섬겨야 할 이유는,

① 그 하나님이 진동치 않는 영원한 나라를 주셨기 때문이요,

② 장차 보이는 세상을 진동시켜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시절에 모세를 거역한 백성들을 땅을 진동시켜서 심판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민 6:30-35). 그런데 하나님이 또 한번 “하늘도 진동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으니(학 2:6-7,21) 이 “또 한번 하늘이 진동된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진동시켜 변동되어 없어지게 하시고(벧후 3:10-13) 그 대신 진동치 않는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27절).

③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같으시기 때문입니다(29절). 소멸하는 불이란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2)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은 은혜를 받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① 28절에서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없습니다(히 11:6). 또 성도가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터득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만 능력있는 충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방법은 순종이 제일입니다(25절). 제사 의식이나 제물보다 나은 것이 순종이니까요(삼상 15:22). 하나님은 땅에서 경고를 받은 모세에게도 “거역하지 말라”하셨고, 또 그를 거역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거든(민 14:26-35) 하물며 하늘로 좇아(위에서 보내심 받은 뜻) 오셔서 경고하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대인들(우리일까보냐)이 어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25절).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신 말씀에서,

① 율법의 정죄 사역과 복음의 구원 사역에 대한 차이를 아셔야 하고,

② 성경은 이에 대한 차이를 시내 산에서 무서운 표현을 나타내신 것과 예루살렘을 천국 모형으로 나타내신 것으로 알 수 있게 하셨으며,

③ 예수 님의 속죄의 피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④ 진동치 않을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 또 소멸하는 불같으신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과,

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기 위하여서는 모든 성도가 은혜를 받고 오직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순종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①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룩하기 위한 기도,

②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위한 기도,

③ 음행의 유혹이 없기를 위한 기도,

④ 현실욕에 대한 타산으로 신령한 복을 포기하는 잘못이 없기를 위한 기도,

⑤ 복음의 은혜가 율법 선포의 은혜보다 귀한 것을 감사하는 기도,

⑥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

⑦ 믿음의 은혜, 말씀의 은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많이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

⑧ 제사보다 나은 순종을 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

⑨ 은혜를 받지 못하여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 없이 모든 이와 교회 앞에 쓴 뿌리처럼 되는 자가 없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 등입니다.


설교보충 31. 신앙의 보호 대책 (히 12:4-13) 목록으로


지금 읽어드린 본문 말씀에는 “신앙(信仰)의 보호대책(保護對策)” 세 가지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4절 말씀에 근거하여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방식”이고, 둘째는 5-11절까지에 근거하여 “권면과 징계를 받으며 연단하는 것”이며, 셋째는 12-13절에 근거하여 “어그러지지 않은 바탕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의 역사가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마치 전쟁과도 같은 것이고 또 달음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비상한 각오와 보호책(保護策)을 쓰지 않으면 신앙을 사수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보호 대책 중 첫째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하셨으니, 피는 곧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죄와 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결한 신앙을 보존하려면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많은 성도들이 육정과 인정에 끌려서 죄인 줄을 알면서도 따라가고, 때로는 핍박으로 인한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죄와 담대히 싸우지 못하고 연약하게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룻의 동서 오르바가 인정과 생활 염려에 끌려서 신앙을 버렸고,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끌려서 망령된 일을 하였으며, 베드로도 죽음이 무서워서 주님을 부인했었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선교 일선에서 떠난 사실을(딤후4:9)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옳게 보존하려면 자기를 세상에 물들이지 말고 가난과 비천과 고난만 각오하면 어지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런 사실들을 다 종합하여 “피흘릴 각오”, “죽을 각오” 즉, 순교(殉敎)의 정신을 갖고 모든 일을 행한다면 넉넉히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죄와 싸워서 피흘려 죽기까지 싸우신 분이시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고난까지 당하신 것입니다(히2:14-15).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피흘릴 각오를 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 6.25 동란 때도 많은 신자가 정치적인 반동자로 몰려서 끌려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순교도 당했지만 초대 교회 당시의 핍박의 역사나 구한말 당시 천주교에 대한 핍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말씀을 구상하면서 성경과 기독교 역사 안에서 순교한 사실들을 대충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순교자의 역사가 그리 많이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창4:8에서 아벨이 순교의 첫 제물이 되었고, 대하24:20에서 제사장 여호야다(혹,바라갸;마23:35,눅11:51)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사가랴)가 범죄한 요아스 왕에게 이로운 예언을 하지 않았다 하여 성전에서 살해당하니 그가 죽을 때에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해 달라”는 내용으로 호소를 하고 죽은 사실이 있고, 그후에 신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 선두로 순교를 하였고, 그 다음에 스데반과 야고보가 순교를 했으며, 히11:35-에 보면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핍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며, 톱으로 켜고, 칼에 죽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일들은 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일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숱한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다 하늘의 상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 베드로나 바울이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장렬한 순교를 했다고 ‘클레멘트’(알렉산드리아 人)의 글과 ‘유세비어스’의 역사(로마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후 2,3세기 경에 있었던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는 역사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구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 전래와 순교사를 잠시 살펴 보았습니다. 천주교의 역사는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 앞서는데, 1777년에 중국 대륙을 통한 선교 영향으로 처음 한국인 신자의 결실이 몇 사람 있었고,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처음 임직되었으나 그는 이듬해인 1846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사건 때부터(1866) 대동강에서 개신교 목사 토마스가 순교할 때까지 계속 ‘을사박해’(1785),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등의 박해가 수없이 많아서 많은 신자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순교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는 영조 말 정조 대왕 초에 들어와서 순종, 철종 때를 거쳐서 대원군이 치세하던 시대까지 박해가 있었는데, 한국 역사에 보시면 1881-1890년까지 9년동안 대원군이 청나라로 가서 감금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간인 1885년에 장로교 목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가 들어와서 개신교 포교를 시작하였고, 그때에 황해도 장연군 송천면에 송천(松川, 소래) 교회가 최초로 설립이 되어 한일합방(1910,8,22) 시대까지 오는 동안 많은 부흥이 있어 오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에 최초 신교 목사인 한경희 목사가 북만주 선교 도중에 순교를 하였고, 1938년에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많은 신자들이 검속된 중 1944년에 주기철, 최봉석 목사님이 옥중에서 순교를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순교사화집”을 읽어보시면 그 정황을 뼈아프게 느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쟁은 없어야 하겠지만 혹이라도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져서 무신론적 정치가 득세를 한다면 우리 각자가 신앙의 사수를 위하여 피흘려야 된다는 문제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저희들이 인정과 세속에 끌려서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또 어떤 성도는 진정 예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여 실천해 보지도 못하고 한 두 주일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예수 믿어 주었는데 왜 축복이 없느냐 ?” “믿을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말세의 유혹이 많은 이때에 피흘릴 각오를 하고 믿음의 순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권면과 징계를 달게 받으면서 늘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에 심한 책망을 받으면서 연습을 합니다. 권면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모르는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서 “아비가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것을 잊지 말라” 하셨고, 또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할 이유는,

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며,

②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고,

③ 징계가 잠깐은 괴로우나 나중에는 연단을 받아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수도 있고,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수도 있지만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징계를 받는 단계에 오른 것은 권면의 단계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여기에서 일반적 징계를 달게 받으면 좋거니와 만일 계속 완악해지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노여우심이 더 커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징계를 받게 되었다면 회개하는 것이 가장 신앙적이 되는 것입니다.

3. 신앙 생활을 든든히 보호하는 바탕을 잘 구축하는 것입니다. 고속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목사의 목회는 차 운전수와 같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차의 손님은 교회와 교인이고, 운전수는 목사라면 운전수가 안전 운행을 하기 위하여 교통 규칙을 지킴은 물론 피곤함이 없이 운전에 몰두해야 되는 것처럼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도 목회자의 상당한 경성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그리고 곧은 길”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길을 달리는 사람이 어그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신앙 생활을 달리는 것으로 표현하셨는가 하면, 그 위에 12:1에서 “신앙 생활을 운동 경기”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휴식이 없으면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휴식을 취하여 피곤한 손이 안되어야 하고, 또 운동 연습 같은 훈련이 부족하면 연약한 신체, 연약한 무릎이 되니까 역시 오래 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과 훈련으로 무릎에 힘을 쓰게 하고, 또 병적 연고로 “다리가 절면 운동을 못하니까 그 병적 요소도 고쳐야 하는데 역시 길도 좋아야 하기 때문에 곧은 길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동차가 안전하게 가려면,

① 자동차가 좋아야 되고(정비가 잘된 차),

② 운전 기술도 좋아야 하며(숙달된 기술),

③ 길도 좋아야 합니다(곧은 길). 그러면 이것은 신앙을 보호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주시는 교훈인가 할 때,

① ‘곧은 길’은 신앙 생활을 잘하는데 구애가 없을 만큼 좋은 생활 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은길도 닦아서 되는 것처럼 신앙 생활에 구애스러운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자유의 분위기를 갖는 환경을 의미하고,

② 손과 무릎과 다리는 다 자기 몸의 지체이니까 자기의 성품과 생활 태도의 저는 다리 같은 병적 요소를 제거하고, 연약한 무릎처럼 든든하지 못한 부분도 보충하고, 피곤한 손처럼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일들도 다 멀리하여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상하고 어그러지고 무질서한 부분이 없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좋은 신앙의 가정에서 삶으로 길은 좋은데 자기의 신앙 형편이 부족하여 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형편은 퍽 열심 있고 건전한데 환경의 곧은 길이 못되어 바른 생활을 못하는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양면을 다 고르게 보충하셔야만 든든하게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의 보호 대책은,

①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순교적 결심과,

② 권면과 징계를 달게 받으면서 연단을 받는 생활,

③ 그리고 내적, 외적으로 곧은 길을 만드는 일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히 12:14-17)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이 곧 은혜로운 생활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려면 우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거룩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대인 관계에 원만함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이웃 사랑이 대단히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1) 계명의 강령이 이웃 사랑이고(마22:39-40), 이웃과의 화해가 하나님께 나가는 필수적 조건이며(마5:24), 형제의 죄를 용서함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음에 필요하고(마5:14-15),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일4:20).

대인 관계의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볼 때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 하는 것은 마치 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 앞에서 자신의 건강함을 비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얼마나 큰 행복을 느낄까요 ? 상상해 보십시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

① 우선 불화, 대립, 갈등의 대상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하나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해 관계가 없이 싸운 일이 있다면 사과하고, 남을 억울하게 한 일이 있다면 상대방이 이해할만큼 변상하고, 송사 사건이 있으면 속히 끝내되 억울함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갚아 주실 줄을 믿고 맡기는 신앙으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송사는 사람이 손을 뗄 때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시37:5).

② 대인 관계의 불화의 요소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상대방을 의심하거나 미워하거나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외면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고 모든 이를 상대하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많은 것이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 거래가 불화의 원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시고, 자기 책임을 잘하여 모든 이웃과의 화평과 거룩함을 쫓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다” 하셨으니까 대인 관계의 화해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불가피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려면 세 가지 부정한 일을 삼가야 하는데, 하나는 잘못된 사상이고, 또 하나는 음행이며 또 하나는 세속적인 요소입니다.

1) 본문에 보면 “쓴 뿌리가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쓴 뿌리”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된 사상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관이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하나님 중심이 인간 중심으로 뒤집어 집니다. 모든 이단이나 우상주의나 불건전함이 다 이 쓴 뿌리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음행을 경계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의 육체의 정욕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자기의 몸을 더럽히고(고전6:19), 음행의 자손을 번성시켜 인간 사회에 불화를 조성하는 악이요, 자신과 모든 교회에 신령한 분위기를 손상시키는 악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3) 세속적인 욕구에 따라가는 것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에서가 팥죽 먹는 것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사실이 인간의 세속적 욕구로 신령한 복을 멀리한 뜻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셨으니까 육체의 떡보다 신령한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므로 신령한 은혜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① 제가 기성 교회를 목회하다가 사임한 것은 말씀 연구에 이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리에 신경을 쓰고, 심방 등으로 교인 돌아보는 일이 말씀에 집착하는 것보다 못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하는 은사에 끌리는대로 살기 위하여 사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홉 식구 생계 유지의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사임 결정을 끝내고 이삿짐을 꾸리는 기간이 약 10일쯤 있었는데, 그때에 말씀을 정리하는 은사에 끌려서 이삿짐을 꾸리면서 7분 설교 5집을 정리하였습니다.

② 제가 책을 출판하는데는 물질의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히려 천여만원 투자를 하였습니다. 5년쯤 지나면 출판비의 50% 정도 회복될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 소비보다 말씀 기록과 보급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③ 제가 문정동 사거리 코너 3층 상가에 ‘새교회’ 간판을 붙이고 그 건물 벽과 유리창에 전도 성구 세 가지를 게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며, 또 한 구절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입니다. 이 세 성구는 전도 성구로 사거리 대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에도 전도지를 수천장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구를 게시하는 데는 한 달에 집세가 70만원씩 소요됩니다. 70만원이면 작은 한 가족의 생활비입니다. 그런데 제가 부산에 작은 교회의 단체를 맡아 일하게 되면서 물질의 소득이 없는 문정동의 예배 처소를 문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구절로 전도하는 일이 큰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약 1년간 그대로 보존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에서처럼 물질주의에만 사로 잡혀 물질의 감소만 타산하고 영적 은사와 축복에 대한 가치를 모른다면 당연히 물질이 손해나는 일을 중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에서처럼 망령되게 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신령한 은혜나 복음 사역은 감히 물질을 계산할 것이 못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신령한 은혜로 세속의 것으로 바꾼 사람이 롯의 처와 에서였고, 신약에서는 가다라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그런 형편으로 따라갔으며, 또 한 부자 청년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고 나를 좇으라” 하셨을 때 “그에게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여 돌아갔다” 하였으니 그도 역시 그런 인물에 속하였던 것입니다(막5:17,눅9:51-56,마19:21). 이런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잘하려면,

① 사랑의 실천으로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②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부정한 일들을 삼가며,

③ 말씀 연구에 집착하며 묵상하는 일을 잘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 36 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 (히 13:1-9)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크게 나누면,

① 성도의 도덕율(1-4절),

②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5-6,8-9절),

③ 신앙의 지도자를 본받으라는 말씀(7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본문 전체의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말씀하신 교훈도 되기 때문에 제목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로 정하였습니다.

1.성도가 시행할 도덕율에 대한 말씀을 살피면(1-4절)

1)형제 사랑을 계속하는 것입니다(1절). 여기의 “형제”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성도를 의미합니다(마 12:50). 그리고 “사랑을 계속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을 계속하기 어려운 여건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다가 혹 사랑하기 어려운 입장이 되더라도 절대로 형제를 미워하지 마시고 사랑을 계속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손님 대접을 잘하는 것입니다(2절). 이것은 숙식이 어려운 나그네를 부담 없이 접대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에 대한 사정은 옛날과 퍽 달라졌지만 이 말씀의 취지는 “가난한 자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하셨으니 이는 아브라함의 체험을 인용한 말씀 같으며(창 18:2,19:10) 예수님도 “소자를 영접함이 곧 자기를 영접함이라(마 18:5)”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3)“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3절)”고 하셨습니다. 갇힌 자는 죄인일 경우가 많고 학대 받는 자는 비천한 사람일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그런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하신 것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마 19:19)”하신 말씀을 상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4)바른 결혼관을 갖고 음행에 빠져들지 말 것을 권면하셨습니다(4절).

① 바른 결혼관이란 하나님이 혼인하게 하신 방법과 목적을 위하여 지혜롭게 살아가는 부부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고전 7:39) 일남 일녀로(창 2:24, 말 2:15) 혼인하게 하셨고,

③ 혼인을 하게 하신 목적으로는,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창 2:18),

㈁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심과(창 2:18),

㈂ 음행을 방지하게 하시고(고전 7:9),

㈃ 종족 보존 등을 위함이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겨야 함”은 하나님이 지상 최대의 복으로 가정을 주신 까닭이며, “침소를 더럽힘”은 음행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가정 파탄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므로 극히 주의하여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음행은 무법한 성행위를 뜻하고 간음은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이성과의 불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시행할 수 있는 도덕율에 대하여 더욱 모범적이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입니다.

2.하나님을 의지함에 대한 말씀입니다(5-6,8-9절).

1)우선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인간이 가장 의지하기 쉬운 물질을 소극적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5절의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의 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필요이상의 욕심을 내는 것은 결국 그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욥 22:24에서 “너는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이 네게 은금이 되어 주시고 네가 하나님께 얼굴을 들고 기도하게 될 것이라”하셨으니 이것이 곧 물질의존 생활에서 떠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약속하신 말씀 등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며 사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5절에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고(신 31:6, 수 1:5),

② 또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시 118:6)”라고 하였으니 신약의 성도들도 꼭 그런 신앙을 본받아야 하며,

③ 또 이런 약속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8절)”에 그의 약속은 믿고, 의지할 만 한 것입니다. 가끔 보도되는 뉴스에 보면 자식을 버리는 부모나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원이나 역 대합실에서 철석같이 약속하여 기다리게 하고 도망가는 사례가 있지만 그래도 버림당한 부모나 자식은 “꼭 자기를 찾아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되나 하나님의 약속은 꼭 그렇게 믿어야 하며 또 사람은 부모 자식이라도 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사41:9).

④ 따라서 성도는 절대로 다른 교훈에 끌리거나(9절) 다른 것을 의지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것을 제하여 버리신다(사 3:1)”고 하셨습니다. ⑤ 그리고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다우며 식물로서 할 것이 아니라(9절)”고 하셨습니다. 또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9절)”하셨으니,

㈀ “식물로 행한 자”란 바로 “에서”처럼 행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12:16). 성도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물질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의지하거나(히 12:16) 하는 것은 유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눅 12:15,18-20).

㈁ “마음을 은혜로 굳게 하고 식물로 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식물(재물)이 넉넉하니까 든든하다”는 마음을 갖지 말고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나에게 주실 것이니까(히 4:16) 현실적으로 의지할 것이 없어도 든든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물질을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와 인도를 의지한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3.신앙의 지도자를 본받음에 대하여(7절)

1)“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름으로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사도들과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의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성경 말씀에 앞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과 생활이 곧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엡 2:20).

2)그들의 행실의 종말은 신앙적이었고 모범적이었습니다(고전 11:1).

3)그런고로 그들의 교훈과 행실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그 분들의 믿음을 본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4)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의 시대에 모든 교역자나 신앙 선배들을 “무조건 본받고 순종하라”는 것인가? 할 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① 신약 성경이 신앙의 기초로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모범으로 세우신 시기(히브리서 기록 당시)가 있었으나 그 후에는 성경이 유일 표준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며,

② 현대 복음 사역자들은 누구나 사도, 선지자와 같지 않은 형편에서, 다 성경을 표준하여 신앙의 집을 짓는 중에 있고(고전 3:10) 또 실수와 연약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며,

③ 사람은 100가지를 성경적으로 시행하다가라도 혹 한두 가지에서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다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모범을 본받고 자기 믿음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성도는 도덕적 생활에 모범이 되셔야 할 것과,

② 하나님을 의지하는 적극적 신앙으로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추방해야 할 것과,

③ 선지자와 사도의 생활이 모범이 된 것은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적용되었으므로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모든 것의 표준이 성경뿐이기 때문에 현실 복음 사역자들도 평신도처럼 꼭 같이 성경표준에 의거하여 심사를 받아야 하는 점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3. 저희의 믿음을 본 받으라 (히 13:7-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저희의 믿음을 본 받으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히11장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을 칭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인물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다니엘 등의 신앙을 열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나타난 특수한 인물 몇 사람을 뽑아서 그 분들의 신앙의 특징을 살펴 보고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 하셨고, 또 “저희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하셨으며, 또 “저희의 믿음을 본 받으라” 하셨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말씀은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에 어떻게 행복을 누렸는가 ?”를 주의하여 보라는 뜻이 아니고, 종말에 행실을 어떻게 취하였는가 ?를 주의하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믿음으로 산 사람의 종말이 행복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주의하여 보지 말고,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것처럼 믿음과 사명에 대하여 변함없는 행실을 나타낸 것을 주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선진들 몇 사람의 신앙의 특징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아벨입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더 나은 구약적 제사는 예수님이 완성하셨고, 신약의 성도들은 예배와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아벨처럼 더 나은 예배와 헌신을 잘 드리셔야 하겠습니다.

2) 에녹입니다. 에녹은 65세에 하나님을 알고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채로 승천(昇天)하였습니다. 동행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길에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힘쓰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3) 노아입니다. 노아는 순종과 인내와 기다림을 잘한 사람입니다.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들라” 하셨을 때 순종하였고, 비가 처음부터 오지는 않았지만 비를 기다리기를 120년간 기다렸으니 그 인내가 얼마나 큽니까 ?

4)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과 헌신과 소망을 가진 것이 특징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순종, 첩과 아들을 버리는 순종, 적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까지 순종하였으니 이것이 곧 순종과 헌신이고, 나중에는 자기 후손이 500년 후에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을 소망하였고, 또 2,000년 후에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 사역에 임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천국을 사모하고 자기의 인생을 나그네처럼 살았던 사람이니 얼마나 귀중합니까 ?

5) 요셉입니다. 어떤 수모를 당하여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으며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의 할 일만 성실히 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고,

6) 모세입니다. 선민의 본분을 지킨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기 위하여 애굽의 왕자의 영화를 버리고 고난을 택한 사람이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사람입니다.

7) 욥입니다. 환난과 고난이 겹치고, 현실의 복이 다 떠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찬송한 사람이요, 고난으로 정금같은 신앙을 키운 사람입니다.

8) 다윗입니다. 다윗은 찬송에 능하고, 전쟁에 용맹하였으며, 왕의 위치에 있었으나 자기의 잘못을 질책 받았을 때 슬퍼하며 회개한 사람입니다.

9) 수넴의 귀한 여인입니다. 아들이 없어도 부족을 몰랐고, 왕이나 군대 장관에게 청탁을 하라 해도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는 사람이라” 하면서 특권을 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이때 그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10) 하박국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양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송한 사람이요,

11) 다니엘입니다. 어떤 핍박과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킨 사람입니다.

12) 다음으로 신약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약혼녀의 죄를 드러내지 않은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를 하였지만 말없이 조용히 친교를 끊으려고 한 사람입니다.

13) 세례 요한입니다. 겸손하고 신령하며 정의롭고 세욕을 떠난 전도자로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4) 예수님이십니다. 억울한 것을 참고 돌아가신 분이요, 한 평생을 죄없이 사신 인간 생활의 모범자요 타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15) 고넬료입니다. 기도와 구제와 가정의 합심과 교역자를 잘 섬김과 전도를 잘한 사람이며,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입니다.

16) 바울 사도입니다. 지식과 영감과 성경 기록하는 것과 선교와 교육에 뛰어난 분이고, 죽기까지 헌신한 만능의 사역자입니다.

17) 사도 요한입니다. 입을 떼었다 하면 “서로 사랑하라” 하시면서 늘 사랑만 주장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상 17명의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과 사명의 특징을 깨달으셔서 그 분들의 좋은 점을 본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37 과 히브리서의 마지막 말씀 (히 13:10-25)목록으로


히브리서의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① 10-12절은 “구약의 모형적 제사에 대한 예수님의 성취”를 말씀하신 것이요,

② 13-16절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사명에 대한 말씀”이요,

③ 17-19절은 “복음 사역자에 대한 성도의 책임”이요,

④ 20-21절은 “축복의 선포”요,

⑤ 22-25절은 “결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구약의 모형적 제사에 대한 예수님의 성취”에 대하여(10-12절).

이 말의 뜻은 구약 시대에 제사드리던 제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형적으로 계시하신 것이고 또 예언하신 것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그 예언의 목적대로 성취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이 사실은 10절의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는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구약시대의 성전제도를 지켜온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 시대에 와서 그 예언의 성취와 함께 구약의 성전제도를 떠나 개혁적인 복음 신앙을 지켜 온 것입니다.

2)또 10절의 “그 위에 있는 제물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다”는 것은 그 제물 자체가 속죄 제물이기 때문에 다 불태워야 하므로 섬기는 자들에게 먹을 특권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는 그 희생의 고기 일부를 제사장이나 제사드린 자가 나누어 먹을 수 있지만(레 7:15) 속죄의 목적으로 드리는 제물은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을 예표하는 제사이기 때문에 전부 불태워야 하므로 섬기는 자가 먹을 권이 없는 것입니다.

3)그래서 속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을 모형하는 것으로 그 피를 성소안과 제단 뿔에 뿌려야 하고 나머지는 전부 불살라 없애야 하는데 그것도 영문 밖에서 불사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출 29:14, 레 4:3-35). 여기의 “피를 뿌림”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하나님께 열납됨을 상징하는 것이고 “온전히 불사르는 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을 뜻하며 또 “영문 밖에서 불살라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거룩한 성밖인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13-16절).

1)13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하셨으니 이는 성도가 주님의 고난으로 구속함을 받았으니까 아무리 핍박이 심해도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나 핍박의 능욕을 짊어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영문 밖) 또는 “자기를 버려 없애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자기를 희생하셨으니까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한다는 믿음을 각자가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2)14절에서 여기는(현세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니까 오직 장차 올 것을 찾아야 하는데 “장차 올 것”은 내세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성도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기 위함일 뿐, 현세의 소망을 주시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신령한 복과 장차 올 천국의 세계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고)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를 받았으면 당연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찬송은 영적 제사드리는 일이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란 것입니다. 찬송은 입으로 맺는 증언이요 또 영광의 열매입니다. 저희들이 찬송할 때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입으로 맺는 영광의 열매란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있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4)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하시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힘임은 성도는 하나님의 큰 사랑은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도 이웃을 위한 선행과 봉사를 잘 하셔야 할 것이요, 또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선행과 봉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기 때문에 더욱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사명은,

① 십자가 중심의 헌신이요,

② 사랑과 봉사와 찬미를 통한 감사의 생활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신앙의 인도자들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입니다(17-19절).

1)17절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교회의 합법한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2)목회자에게 순복해야 할 이유는 “목회자들은 성도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이 빚진 자인 것처럼(회계할 자) 행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의 영혼을 지키는 사명을 행하되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의무를 이행하는 자처럼 또 자신이 진 빚을 갚을 자인 것처럼 일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3)성도는 목회자를 위하여 순복할 뿐만 아니라 기도로도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복음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셨고, 복음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선을 행하므로 선한 양심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가 선을 행하고 성도들이 그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일 성도의 순복하는 것이나 기도의 협력이 없고,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즐겁게 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근심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성도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복음 사역자를 근심시켜서 유익할 것이 없는 줄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17절에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4)19절에서 “더 속히.....돌아가기 위하여 너희 기도를 더욱 원한다”하신 것은 이 서신을 보낸 저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속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도들을 만날 수 있기를 사모하여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사역자와 성도들 간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어야 하고 사모하는 상대가 되어야 하며 복음 사역자는 선을 행하고 성도는 복음 사역자의 지도에 순복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축복의 선포입니다(20-21절).

1)복음 사역자가 축복을 선포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마 10:12).

2)이 축복 선포에는 삼위의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조합하지 않았습니다(고후 13:13). 따라서 복음 사역자의 축복 선언은 논리적인 격식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간절함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이:3, 벧후 3:18). 즉 삼위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하지 않았어도 신앙적으로 삼위의 역사를 믿고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이 축복의 문구 그대로 장로회 총회 헌법에 수록되어 성찬예식을 마친 후에 집례자가 사용하도록 채택된 것은 이 축복의 말씀이 퍽 은혜롭기 때문입니다.

4)축복 선포의 말씀으로 구성된 내용은,

① 20절에서 복 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셨습니다. 그 사역이 바로,

㈀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고 자기의 영원한 피로 구원의 언약을 이루시고 돌아가신 분이며,

㈁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로 이끌어 내셨고 그 일을 뜻하신 분이시며 또 평강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소원(축복)의 내용으로는,

㈀ 모든 성도가 선한 일에 온전케 되고,

㈁ 하나님의 즐거운 뜻(그 앞의 즐거운 뜻)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도들의 덕을 통하여 이루시며,

㈂ 영광이 세세토록 하나님께 있어지기를 기원하셨고,

㈃ 진실과 확인의 표로서 “아멘”을 한 것입니다(신 27:15, 고전 14:16)(이 부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축복”이란 설교가 7분 설교 4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5.마지막 결론의 말씀을 어떻게 하셨습니까?(22-25절)

1)간단히 쓴 권면의 말씀을 건설적 의미로 받도록 권면하셨고(22절)

2)“디모데”가 갇혔던 상태에서 놓인 소식을 전하였으니(23절) 디모데는 언제 어디서 갇히는 핍박을 받았을까? 에 대하여는 두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당시 바울만 아덴으로 피하고 디모데를 그 지역에 있게 한 사실이 있었으므로(행17:13-15) 그 당시에 갇힘을 당하였거나, 또 한 경우는 바울 사도가 로마로 호송된 후에 로마에 가서 바울의 협력자가 되므로 잠시 감옥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는 그의 석방 소식을 알려 준 것입니다.

3) 이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가 자기에게로 오면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곳에 사는 히브리인들을 만나 볼 계획을 말하였으니 이 편지를 보낸 곳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저자와 디모데가 머물렀던 곳일 것이요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한 말씀은 바울의 어투에도 있는 것입니다(고후 1:1).

4)문안을 하였으니 “너희를 인도하는 자(복음 사역자)와 모든 성도, 그리고 이달리아(로마)에서 온 성도들도 유대인들에게 문안을 한 것이요(24절)

5)마지막으로 또 한번 은혜가 있기를 축복을 하고 마친 것입니다(25절). 이 히브리서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깨달아야 할 교훈들은,

① 구약이 조명한 복음의 은혜를 깨달아 율법주의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져야 할 것과,

② 교회를 섬김에 대한 성도의 바람직한 생활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적 신앙과 생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강론집을 읽으시므로 히브리서를 공부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