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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갈라디아서 강론 서론 4 바로가기


제1과 사도직의 출처와 책망 (갈 1:1~10) 6 바로가기

제2과 복음의 출처와 바울의 거취 (갈 1:11~24) 8 바로가기

     설교보충 1. 구원의 뜻 (갈 1:1~5) 10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복음을 변하려 함 (갈 1:6~10) 13 바로가기

     설교보충 3. 다른 복음의 역사 (갈 1:6~10) 17 바로가기

제3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갈 2:1~10) 19 바로가기

제4과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하심 (갈 2:11~14) 22 바로가기

제5과 의롭게 되는 법 (갈 2:15~21) 24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율법과 복음 생활 (갈 2:20) 28 바로가기

제6과 책망과 깨우치심 (갈 3:1~14) 31 바로가기

제7과 약속과 율법 (갈 3:15~29) 34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율법의 역할과 복음적 특권 (갈 3:23~29) 37 바로가기

제8과 두 가지 신앙에 대한 비유 (갈 4:1~11) 39 바로가기

제9과 신뢰 회복을 역설함 (갈 4:12~20) 42 바로가기

제10과 두 아들 비유 (갈 4:21~31) 44 바로가기

제11과 율법주의 신앙의 잘못됨 (갈 5:1~12) 47 바로가기

제12과 자유 얻은 자의 사명 (갈 5:13~26)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6. 믿음의 종류 (갈 5:5~6, 롬 1:17) 54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신․불신간의 생활 차이 (갈 5:13~26) 57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성경을 좇아 행함 (갈 5:16~26) 59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천국 백성의 생활 (갈 5:16~26) 62 바로가기

제13과 형제의 범죄와 자신 (갈 6:1~5) 64 바로가기

제14과 착한 일을 함에 대하여 (갈 6:6~10) 66 바로가기

제15과 결론의 말씀 (갈 6:11~18) 68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사람을 보는 표준 (갈 6:1~5) 71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자기를 살피라 (갈 6:1~5) 73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1~5) 76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세 가지 교훈 (갈 6:6~8) 79 바로가기

 

 

갈라디아서 강론 서론 목록으로


이 강론을 읽으시기 전에 필자가 집필한 갈라디아서 개론(기독교신앙백과 634p에 수록됨)을 읽으시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갈라디아서”는 바울사도께서 주후 500년 경에 갈라디아 지역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영감의 서신입니다.(고후 16:1, 갈 1:2)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으므로(딤후 3:16)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이 말씀이 바울사도의 기록인 이유는 본문 1절에서 바울사도를 저자로 밝히셨고, 바울사도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할 때 문체가 같으며 초대교회 교부들도 그렇게 믿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라면 서머나교회의 감독 “이레네오”(주후 115년-119년)와 폴리갑(주후 100년경, 사도요한의 직계제자임.)을 들 수 있습니다.

3. “갈라디아” 지역은 소아시아의 동쪽 지역으로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 동쪽 나타톨리아 고원에 해당합니다. 그 지역이 광범위하여 북갈라디아와 남갈라디아로 구분하여 호칭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 바울사도가 이 서신을 보내신 지역은 남쪽 갈라디아에 해당합니다. 그 이유는 행 18:23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차례로 다니셨다” 하였고, 그 차례에 해당하는 지역이 “비시디아”(행 13:51), “이고니온”(행 14:6), “루스드라”(행 14:6)인바 그 지역들이 다 남쪽 갈라디아와 인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행 16:6)

4. 학자들 중에는 “북갈라디아로 보내셨다”고 주장한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 서신을 주후 54년 경에 에베소에서 기록하셨을 것이라 하지만(행 18:19) 남쪽 갈라디아로 보내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며 이를 주장하는 분들은 주후 50년경 “드로아”에서 기록하여 보내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나 모두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5.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바울사도가 1,2,3차 전도 여행을 모두 그 곳으로 거치신 근거가 있음을 볼 때(행 14:1, 16:6, 18:23) 그 기회에 전도하여 열매를 얻으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요

6.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목적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여 보내셨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전도 초기에 큰 신임을 받다가(갈 4:13-15) 유대주의자들의 반대와 핍박적인 책동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본래 유대주의자요, 바리새인이었는데 반역을 하였다, 그는 율법을 무시하고 다른 것(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또는 정식 사도도 아닌데 자칭 사도 노릇을 한다”고 선전을 하면서 바울의 복음 증거를 받은 성도들을 율법주의 이단 세계로 다시 끌어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그릇된 선전에 현혹되지 않고 끝까지 복음적 신앙을 수호하게 할 목적으로 이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7. 성경 연구가들이 이 갈리디아서를 읽고 문학적으로 평한 글을 보면 이 편지에는 바울의 필사적인 노력과 정열이 나타나 있고, 다른 편지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시작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웠으며 분노에 찬 언어와 과격한 말씀(견책, 갈 3:1, 3:3, 1:9, 5:12)이 많고, 또 의리와 책임성이 있으며 충실한 인간성이 나타났고, 이신득의 신학 사상의 교리가 강하게 담겨 있어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자료가 되었다고 소감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제 1 과 사도직의 출처와 책망 (갈 1:1-10)목록으로


이 말씀을 4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절은 “바울의 사도직의 출처”요, 2-5절은 “인사말씀”이며 6-9절은 “신앙의 변질을 책망하심”이요, 10절은 “바울의 성직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피력하셨습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사도직의 출처와 책망”으로 정하였습니다.

1. 바울의 사도직의 출처.(1절)

1절에서 바울의 사도됨의 출처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며(사람의 계획과 근거에 의함이 아니란 뜻)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사람의 노력의 결과로 된 것도 아니란 뜻)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하시므로 바울이 사도직을 받은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행 9:1-22을 살필 때 바울이 사도되는 계획과 절차와 노력에 있어서 인간적 관계가 완전히 배제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된 다음부터 능률있는 사역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고전 15:58) 바울이 이 사실을 서두부터 언급하신 이유는 바울을 비난하는 대적자들이 “바울은 사도직을 자칭하는 거짓 사역자라”는 식으로 훼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2. 인사말씀.(2-5절)

본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갖춘 것이므로 편지 서두에 문안과 축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1)편지와 문안을 보내는 측은 바울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이며

2)받을 대상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성도들)”입니다. 문안은 함께 하였을지라도 영감의 서신은 바울사도가 보낸 것입니다.

3)축복의 내용은 3절에서 “성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 하였습니다. 은혜는 받는 복이고, 평강은 누림을 뜻합니다.

4)또 5절에서 “영광이 저(그리스도)에게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계에서 선민(우리)을 건지시려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은즉(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심) 영광을 홀로 받으심이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의 “자기의 몸”이란 “하우톤”(ἑαυτον)은 전인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몸만 희생하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주이신 예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3. 신앙의 변질을 책망하심.(6-9절)

이 신앙의 변질은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며 유대주의적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빠진 자들이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1)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부르심으로 성립됩니다.(롬 8:30) 그런데 그 부르심의 은혜를 속히 떠난 것은 복음적 신앙에 확고히 서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싹은 났으나 뿌리를 깊히 주지 못한 연고로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를 배제한 다른 말일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행 4:12) “이상히 여긴다”는 뜻은 많은 성도가 잘 믿는 척 하고, 또 믿음이 있는 듯 하여 안심하였으나 실제로 든든하지 않은 경우를 볼 때 외식의 실상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2)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거나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것이 아니면 복음일 수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진리가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한다” 하셨으니 “요란케 한다”는 것은 어지럽게 선동한다는 뜻이요, “복음을 변하려 한다”는 뜻은 교리의 부분 또는 전체를 사실대로 믿지 않고 가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의미나 또는 성경의 해석을 조금씩 변질되게 전하기 때문에 전파의 성질과 신앙의 사상을 잘 파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자들도 천사처럼 나타나고 정통적으로 증언하는 것 같이 합니다. 그래서 상당 기간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나 내심적 사상이 왜곡되게 흘러가는 사실을 상당 기간 후에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복음적 신앙과 정통적 신학 사상 위에 든든히 서야 하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다른 복음을 증오한 입장에서 역설적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사역자들) 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전할 까닭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가상할 때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9절에서도 같은 뜻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다”하심은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하실 때도 이단 경계에 대한 교훈을 하셨다는 뜻이요, 8,9절에서 두 번 강조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4. 바울사도의 성직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10절)

10절에서 성직자는 막연하게 사람들을 좋게 하거나 사람들로부터 기쁨을 구하는 직임이 아닙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할 것을 알라는 말씀이요, 또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하심도 역시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만일 성직자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인간들에게 아부하거나 구걸하는 직임이 아님을 뜻하고, 또 인간들로부터 사례를 받거나 칭찬 또는 기쁨을 얻는 맛에 일하는 직임도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목적으로 일할 뿐이며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기쁨도 중요하지만 더 큰 기쁨과 더 큰 만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성직의 정통성 ② 이단 경계와 정통적 교리의 확고함, ③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는 사역의 성실함을 교훈받아야 합니다.

 

제 2 과 복음의 출처와 바울의 거취 (갈 1:11-24) 목록으로


이 본문에서는 “복음의 출처와 바울의 개종 전후의 거취”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1-12절은 “복음의 출처를 말씀하심”이고, 13-14절은 “바울의 개종 전후의 거취”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바울사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선 복음을 강조하신 다음 자신이 변화된 것이나 사도의 직임을 받게 된 것이 사람(또는 사도들)으로 말미암지 않았고, 또 사도들이 자신의 사도된 것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한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복음의 출처를 말씀하심.(11-12절)

1)11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구원의 도리”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증언하는 내용이 아니며 또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복음이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2)12절에서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란 뜻”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일뿐 복음의 도리를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지식이 아니란 뜻) “오직 예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 하였으니 이 말씀의 뜻은 바울이 복음(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도리)을 믿을 때 사람으로부터 배워서 안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계시)과 증언으로 직접 알게 된 것을 피력하신 것입니다.(행 9:4-18)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도 다른 사도들과 다르게 특수한 방법으로 받았습니다. 특수하다는 뜻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받은 복음과 사도직은 천래적이고, 신적이므로 정당한 것입니다.

2. 바울의 개종 전후의 거취(去就).(13-24절)

바울 자신의 과거 역사 중 개종하기 전의 상태와(13-14절) 개종한 경위와(15-16절) 개종 직후의 거취(17-24절)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개종(改宗)이란 유대주의적 종교에서 예수님을 믿는 복음적 종교로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1)바울은 개종하기 전에 유대주의 종교를 신봉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주의 종교란 구약 성경을 왜곡하여 율법주의를 따르고 예수님과 복음적 기독교를 배척 핍박하는 종교입니다. 또 바리새인이란 유대주의 교리를 신봉하는 자들의 단체로서 교권주의에 능숙한 자들이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예수님을 배척한 거십니다. 바울은 그런 단체의 열심 당원으로 있으면서 교회와 성도를 잔해하고 핍박하였습니다.(행 9:21)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개종할 능력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변화되고 사도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행 9:3-5)

2)바울이 개종된 경위와 목적은 15절에서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택정하셨다가 때가 되매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부르신 목적은 그 아들 예수님을 이방에 전하기 위함이라”(16절)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의 대상을 “창세전에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엡 1:4) 그런고로 “모태로부터 택정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된 때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택하신 것과 부르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고, 부르신 목적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야곱의 자손 이외의 족속을 의미하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뜻은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행 9:1-18) 따라서 구원과 성직은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으로 주신 것이며 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계시하시고 깨닫게 하신 은혜로 받은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직분은 인간적으로 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3)17-24절에서는 바울이 변화되고 사도직을 맡은 직후에 어떻게 하셨는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자기의 행적을 자세히 설명하신 이유는 사도직을 받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은 일이 없음을 증명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변화됨과 사도직을 받은 것은 주님이 직접 지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시로 “아나니아” 선지자의 안수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행 9:17) ①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16절에서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다른 사람들)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 하셨으니 이는 오직 주님의 뜻에 무조건 복종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복종할 뿐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② 17절에서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은 것은 사도들의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며 아라비아와 다메섹으로 가신 것은 자신의 사명 이행을 위하여 특별한 은혜를 축적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 ③ 18절에서 “그 후 3년 만에 게바(베드로)를 심방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저(베드로)와 함께 15일을 유하셨으나 그 때에 주의 형제 야고보만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사도로써 선배 사도인 베드로를 심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때에 성직자간의 친교와 사명적 교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써(마 13:55) 예루살렘 교회의 중직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갈 2:9) 이 사실은 바울의 경력을 사실대로 증언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진실이라”(20절) 하였으니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사도됨이 다른 사도들로 말미암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④ 21-24절은 바울이 개종한 이후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거쳐 고향인 길리기아(다소) 지역에 가셔서 전도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지방으로 전도하러 가셨을 때 그 소문이 유대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22절에서 “유대에 있는 복음적 교회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얼굴로 알지 못하나(직접 사람을 보고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 과거에 핍박하던 자가 변하여 전도를 한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듣고(23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4절)고 하였습니다. 23절에서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복음적 신앙)을 지금 전한다”함을 듣고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전격적 변화와 사명 수행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설교보충 1. 구원의 뜻 (갈 1: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원의 뜻”이란 제목 아래 구원의 내용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더 소망있게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하시므로 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 것과 ② 악한 세대에서 건지신 것과 ③ 또 죄에서(죄의 심판에서) 건지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눅 10장에 보시면 불한당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 구출해 주었는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 구출해 준 사실을 “돌보아주었다”(34절), “자비를 베푼 자라”(37절) 하시고, 구원이란 말씀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구원이란 용어 “쏘테리아”(σωτηρία)를 “물에 빠진 자를 건지거나 불난 집에 들어가 생명을 살려낼 때에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또 기독교에서는 “영생”과 관련된 일에만 사용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를 단계적으로 말씀드리면

1. 우선 “영적으로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창 2:17에서 “인생은 범죄하면 죽을 것이라” 하셨고, 창 3:6에서 “인류의 시조가 범죄하였을 때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다”(창 3:7) 하신 것은 세상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숨었다”하였으니(창 3:8)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는 태도가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의 실상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고,(요 3:3) 같은 뜻으로 엡 2:1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는 세상 눈이 밝지만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요 3:3) 하시므로 그 영혼이 어두움에서 밝아지는 것, 또는 영적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시는 것을 1단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실 택한 백성만 거듭나게 하시고, 한 번 거듭난 자는 구원의 복을 완성받게 되기 때문에(살후 3:3,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중생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특별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특별 창구, 특별 출입구, 1등실, 2등실이 있듯이 일단 거듭난 백성이 되면 하나님이 특별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도란 뜻이 거룩한 백성으로 특별 취급받는다는 뜻입니다. 정치가들도 선거전을 벌일 때는 일반인과 같으나 선택을 받으면 특별 대우를 받는 것처럼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그것이 거듭난 증거요, 선택받은 증거이기 때문에 특별 대접을 받는데 얼마큼 특별한가 하면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 취급하는 것 같고, 세상의 사람과 하나님 나라 사람을 구별 취급하는 것 같으며 일반인의 아들과 왕자를 구별 취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특별 취급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 취급을 하실 때 나타내는 결과는

1)우선 명분이 달라집니다. 버린 자와 택한 자, 죽을 자와 살 자,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영광의 상속자)로 명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2)지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들이 되는 것이요,(요 1:12)

3)이렇게 명분과 지위가 달라진 다음에는 그 생활 역시 구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고후 5:17)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살며 하늘 나라에 속한 자처럼 살고,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요 2장에 보시면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이 나타났을 때 물 그대로 있을 때는 돌항아리에 담겨 있었지만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을 때는 연회장의 손님을 기쁘게 했던 것처럼 그런 변화의 생활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그대로 있을 때는 쓸모가 없지만 그것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을 때는 좋은 감람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신앙의 싹이 돋은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 취급을 받음과 동시에 그 명분과 지위와 생활까지 달라져서 새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새생활의 표준은 예수님과 사도들이요, 내용은 말씀이며 실천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 취급 받는 그 자체가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곁에 계셔서 성도를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혹이라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특별 간섭하시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면 이 시간에 꼭 깨달으셔서 자신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통치하시는 사실을 꼭 믿으시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한 가지 주의하실 것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합당하신 뜻에 의하여 통치하신다”고 믿으셔서 모든 일을 주님 뜻에 맡기며 복종하는 성도가 되셔야만 거기에 평강이 있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아담 때부터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거짓으로 믿게 하고 자기의 거짓 말을 참으로 믿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이 때에 인류는 마귀에게 정복당한 것입니다. 롬 6:16에 보시면 “죄를 짖는 자는 죄의 종이라”하셨고, 복음을 순종하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바로 마귀를 이기시고, 성도를 그 속박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마치 일본이 망했을 때 한국 사람이 그들에게 굽실 댈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무조건 마귀와 죄는 박차고 대적해도 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귀신을 섬겨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 죄와 거짓을 일삼는 모든 잡것들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무조건 물리치고 대적하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4. 죄책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값으로 멸망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바쳐 대신 벌받아 주시므로 우리를 심판받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값으로 오는 것인데 예수님이 그 죄책을 담당해 주시므로 그 죄책과 심판에서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사형 집행을 받을 자가 특별 사면을 받으면 평안과 자유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속죄로 인한 구원도 역시 그런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안을 성도에게 주셨다”(요 14:27)하셨고, 또 “누리게 하신다”(요 16:33)하셨으며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나”(사 57:21) “의로움을 힘입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롬 5:1, 골 3:15)고 하셨습니다.

5. 마지막으로 구원의 복은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건짐 받은 것이 곧 지옥을 면하는 구원입니다. 영생 아닌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영생은 천국의 영화를 뜻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그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영생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 하시다가 부활 승천하셨고,(요 18:36) 바울사도도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 뿐이면 불쌍한 자일 뿐이라”(고전 15:19) 하셨으며 베드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의 기업을 주신다”(벧전 1:4)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생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영생의 소망을 확신하였습니다. “윌리암뿌스”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 하였고, “무디”는 “속세는 멀어지고 천국은 가까워진다”하였으며 “스필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하였고, “핫지”는 “죽음은 이별이 아니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하므로 영생을 더욱 일깨워주셨습니다. 반드시 영생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복은 ① 거듭나는 것이요 ② 하나님의 특별 통치를 받는 것이며 ③ 마귀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④ 죄책에서 면제받는 것이며 ⑤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성도는 크게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구원의 복에 근거하여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복음을 변하려 함 (갈 1:6-10) 목록으로


이 시간은 “복음을 변하려 함”이란 제목 아래 좌경화 되어 가는 신학사조의 산물로 출판된(새신앙 고백서 비판) “새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장로 교회의 기본 신앙 고백서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도계요서”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교계요서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후부터(1517년) 약 100년 동안 개혁 교리를 정비해오다가 1642년 7월에 영국의 개혁파 총회가 웨스트 민스터 수도원에 모여 7년 동안의 작업으로(42. 7.-49. 2. 22.) 만들어진 고백서입니다. 그 때에 이 책임을 맡은 학식있는 종들은 매일 ① 하루씩 금식하고 ② 성경에 위반이 없기를 서약한 후 ③ 사도신경을 중심하여 그것을 해설하는 방향으로 정리하였는데 최초에(49. 8.) 영국의 스코틀랜드 개혁 장로교회가 이 고백서를 채택을 하였고, 그 다음에 세계의 모든 장로 교회가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여년의 정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1967년 5월에 한국의 일부 장로교회와 큰 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의 연합장로회란 협의체에서 “새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이미 세계 교회에 반포하게 된 것입니다.(우리 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되었음.)

1)새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할 때 ① 이미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딱딱하여 “쉬운 말로 해설해달라”는 연합 장로교단 산하, 한노회(amarielo)의 요청에 의하여 총회가 결정하였다 하나 ② 이 작업을 맡은 신학자들이 전부 현대주의 신학자들이였기 때문에 이들이 그 요청을 받아서 자기들의 신학 사상을 펼치고 세계교회의 연합주의에 이용하려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고백서를 “쉽게 해설한다”는 결정이 작성자들에 의하여 새롭고 이질적인 새신앙고백서로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이 고백서를 만들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56년에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소요리 문답을 쉬운 말로(현대 용어) 고쳐달라”는 제안이 있자 연합 총회는 이 사실을 긍정하고 Arthur A adams 위원장을 중심한 특별위원회로 하여금 1년간 연구케 하였는데 연구 발표문에는 ① 소요리 문답의 내용 이해를 위한 서론만 붙이고 ② 성경 참조 내용을 개정한 후 ③ 간단한 신앙 성명서를 작성하고 교단 헌법에 첨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것을 1958년 총회가 그대로 받아 Edward A Doway 위원장을 중심한 작성위원회에 맡겼는데 이것을 맡은 위원들이 전부 보수 신학자가 아닌 현대주의 신학자이다 보니 “이왕 어려운 작업을 하는데 헌집 뜯어고치는 것 같은 일을 하지 말고 아예 새집을 짓자”하여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보다 넓은 기초를 이룩하고 여러 고백서를 종합한 후 세계 교회를 통합하기 위하여 서로 틀리는 고백은 빼고 공통점만 수록하므로 초교파적이고, 포용성 있는 고백서를 만들었다” 하였고, 이 고백서가 1967년 5월 총회에 상정되자 결국 미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할 만한 큰 교단에서 채택을 한 것입니다.

3)이 고백서가 발표되었을 때 한국 교계에서는 보충설로 변호하는 파와 무관설로 묵과하는 파와 신학 사상의 좌경화 산물로 반대하는 표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① 보충설이라 하는 것은 기존 고백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기존 고백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새신앙고백서에서 보충해 쓰면 된다는 지지파의 말입니다. 그러나 새신앙고백서가 신학적으로 볼 때 먼저 것과 같으냐 다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먼젓 것도 그대로 쓰고 없는 것만 새고백서에서 쓰자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신앙고백서가 기존 것에 없는 것만 작성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현대주의 신학 사상을 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무관설은 불문에 붙이자는 것으로 그 새고백서는 미국에서 통용되는 것이니까 우리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교회는 미국 교회와 큰 상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도 미국을 통하여 받았고, 지금도 미국에 가서 신학을 배워 학위를 얻어 와야 알아주며 또 미국 연합 장로 교회는 w. c. c.(세계 기독교 협의회)의 모체 교단으로 지금도 우리 나라에 있는 w. c. c. 교단들에게 많은 선교비와 신학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책으로 출판이 된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따라서 미국의 신학이 새신앙고백에 물들면 우리 나라에도 큰 영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③ 보수 교단에서는 이 고백서의 채택을 불건전한 신학 사상으로 규탄을 하였습니다.

3. 왜 이 고백서를 반대하여야 했는가?하면

1)그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 정통 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신정통주의와 사회복음주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신정통주의는 칼바르트가 제창한 신학이고, 사회복음주의는 “본회퍼”의 사상으로 복음적 사회주의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구원보다 사회 개혁과 정치에 앞장 서는 신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정통주의나 사회복음주의는 정통 신학에서 볼 때 대단히 이질감이 많고, 경계하는 신학입니다. 신학의 전체 조류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① 정통신학과 ② 비정통신학과 ③ 현대주의 신학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① 정통신학은 보수주의에서 채택한 것으로 칼빈주의, 근본주의, 복음주의 등을 들 수 있고, ② 비정통주의는 정통주의와 지엽적인 차이를 갖는 신학으로 알미니안주의, 신비주의, 세대주의, 무교회주의 같은 것이 있으며 ③ 현대주의는 비정통보다도 더 거리가 먼 신신학,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사회복음주의, 상항윤리, 세속화, 세계교회주의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신앙고백서가 신정통주의에 입각했다는 것은 그 고백서 내용 중에 성경관이나 교회관이 그렇게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작성한 신학자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2)비판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드린다면 ① 기독교를 계시 종교로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고백서 2부 1장 3항에 보면 “기독교는 셈 민족의 문화 형식에 따라 구약의 종교가 되었고, 헬라인의 문화 형식에 따라 신약의 종교가 되었다”고 하므로 기독교를 일반적 자연 종교처럼 표현하고, 하나님의 계시는 감추었으며 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들과 자신의 종교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하여 개방된 마음과 존경심을 갖고 모든 종교에 접근하여야 한다”하므로 범종교 통합에 역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10장 4조와 11장 1조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를 자연 종교와 범종교 중의 하나로 보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요, ② 성경관에 있어서는 1부 3장 2항에서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 주어졌지만 역시 사람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 시대의 언어, 사상, 문화 형태의 지배를 받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하므로 “성경은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란 명확한 뜻을 피하였고, 또 성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수락되고 복종을 받으며 이 지시를 지체없이 받아들이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교회에 주어진다”고 하므로 빨트의 위기 신학적 개념을 담은 것입니다. ③ 이 내용의 뜻을 비판한 것을 더 옮기면 ㉠ 성경 자체가 진리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수락하고, 복종하는 중에 진리됨을 발견한다는 것이고, ㉡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실을 선지자와 사도가 증거한 것이라하여 증거를 강조했흐며 ㉢ 영감보다 약한 인도란 용어를 썼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의 말”이라 하여 영감을 약화시켰으며 ㉣ 문화 형태와 그 시대의 지식 수준(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에 따랐다 하므로 더 발전함이 타당하다는 여지를 보였고, ㉤ 성실하게 복종하고 받는 곳에 주어진다 하므로 칼 빨트의 성경관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④ 삼위일체 교리를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1부 1장 1항에서 예수님을 설명할 때 신성보다 인성을 많이 설명하였고, “사람과 같이 있는 하나님”(jesus christ in God with man)이란 표현만 있을 뿐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⑤ 구속 사역에 대하여는 1부 1장 1항과 2부 1장 1항에서 “속죄”라는 말 대신 화해라는 말을 써서 십자가의 구속을 나타내지 않았고, “십자가는 신비한 일인데 어린 양의 희생, 목자의 버린 생명, 노예를 위한 속전 같은 것이다”하므로 십자가 대속의 설명을 전부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이 벌받는 것을 알게 하는 경고로 보이신 것이라” 하므로 속죄의 뚜렷한 목적을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⑥ 교회관에 있어서는 교회는 국내외간의 사회 개선에 치중하는 내용을 담음으로 예수님의 제자 삼는 목적(전도)을 멀리 하였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5:4) 새고백서 2부 1장에서 “보편적 교회로서의 공동체는 화목에 관한 사신을 위임 맡았고, 인류 불화를 고치는데 동역한다” 하였고, 또 2부 4장 2항에서는 “교회는 원수를 용서하고, 국제적 협력과 평화를 모색하여야 하며 서로 관계를 수립하고 싸우는 영역을 좁히고 이해를 넓히며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국가 자체의 안전성까지도 모험하여야 한다. 또 한 국각의 주권이나 한 가지 생활 방법만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할 때는 이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고, 부르심을 배반하는 것이다”하므로 국가 정치 체제의 모험을 하면서라도 국제, 국내의 화해에 힘써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란 것입니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를 용납하여야 한다는 용공주의의 근거를 준다할 것입니다. ⑦ 중직자 임직 문답에서 ㉠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를 “신구약 성경을 전 교회에서 그리스도께 향한 규범적 증거”로 또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줄로 믿느뇨?”로 하였으니 이것은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으로 변경시킨 고백이고, ㉡ “신도계요서(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요리 문답을 성경이 가르친 교리 체계로 알고 믿느뇨?”하는 것을 “이 교회의 신앙고백들(새신앙고백집 다수)의 지도 아래 성직의 의무를 이행하겠느뇨?”하므로 새신앙고백서와 교파가 채택한 모든 고백집을 받도록 서약문을 만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967년 직후는 한국 교계 특히 보수 진영이 퍽 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불건전한 신학 사조와 싸우던 때입니다. 필자는 그 당시에 목회 초년생으로 신학 사상에 민감한 나머지 여러 학자들의 발표문을 정독하면서 좌경신학의 혼란과 유혹을 막는 사명을 감당하려고 이 글을 요약하여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혁명 당시는 국내와 세계가 공산주의와 가장 극열하게 대치하던 시대요, 우리 나라도 5.16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좌경화 되는 기독교가 공산주의의 장벽을 헐려고 하는 운동을 나타내므로 이것을 우려하는 교계도 한층 더 긴장하고 대립하였던 것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며 정리한 시기는 2000년 초입니다. 소련 연방이 무너진지 오래고, 공산주의가 명분을 잃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순화된 것처럼 신학의 정통, 비정통의 대립도 많이 순화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교리는 교리대로 성경적이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복음 사상에 민감히 대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2000년 9월 장로교 합동측 총회에서는 그동안 통체였던 강단 교류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단체로 완화하였으나 이는 신학적 대립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 다른 복음의 역사 (갈 1:6-10) 목록으로


다른 복음의 역사를 몇 가지로 살피겠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다른 복음외에도 우리 나라에 알려진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선 다른 복음에 대한 세계적 역사의 사건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1. 초대 교회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 그리고 스토아 학문파의 철학(골 2:8), 천사를 숭배하는 신비주의(골 1:18) 등이 있었고,

2. 그 다음 초대 교회 이후 시대에는

1)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다른 견해(아리우스, 아다나시우스의 견해)와

2)삼위일체 교리의 이견

3)성직자의 권위 문제

4)속죄 방법론 등에 대한 이견이 계속되는 중, 그 중에서 정통적인 교리가 수호된 것입니다.

3. 정통적 교리가 정립된 것은 16세기에 종교개혁에 의하여 개신교가 분리되고 칼빈주의 신학이 정립되므로 정통 신학이 정착 단계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4. 그런데 또 18세기에 들어와서 현대주의 신학이란 것이 다른 복음의 양상을 띠고 나타난 것입니다.

1)예를 들면 1750년 경에 독일의 Reimerus란 사람이 “사도들은 예수님의 뜻을 잘못 파악하고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의 뜻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지상에서 왕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시다가 십자가에 죽게 되시니 너무 안타까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왕권을 주시지 않고 버리셨습니까?”하고 절규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들도 예수님의 왕권 계획이 무너지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은닉하고 “부활하여 영적 메시야가 되셨다”고 거짓 주장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신학입니다.

2)또 독일의 paulus(1792-1860)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이적을 부인하였는데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 아니다 혼수 상태에 빠진 분을 제자들이 죽은 줄 알고 무덤(굴)에 넣었는데 다시 깨어난 것을 부활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였고,

3)또 독일의 F. C. Baur(1792-?)는 성경의 고유 불변성을 부인하였는데 그는 자기의 스승인 헤겔(독일, 1770-1831)의 정반합이란 논리로 성경의 진실성을 부인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지식의 논리는 다 정(正), 반(反), 합(合)의 논리로 발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존 논리가 정이면 거기에 대응하거나 비판하는 반이 있고, 이 정과 반을 원만하게 종합한 것이 합이 되는 것으로 합당한 논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합은 또 반을 만나고, 또 합을 이루어 발전하는 것이 현실의 논리란 것입니다 그런데 헤겔의 제자 바우어의 이 논법을 이용하여 성경의 순수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로 말하면 유대주의 사상이 정이고, 거기에 새로운 복음을 나타낸 것이 반인데 이것을 종합한 합이 사도행전이란 것입니다. 행 15:19에서 “이방인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하신 말씀이 곧 율법과 복음의 합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변하여 가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합이 오래 되면 그것이 또 정이 되고 반이 나오며 또 합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고유적 성경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성경 같은 진리도 변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4)1804-1874년에는 이상에서 소개한 바우어의 제자 Strauss(독일의 튜빙켄 신학교 교수)가 출간한 “예수님의 생애”란 책(27세때 씀)에서 “예수님은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 인물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가상적 인물을 신화로 꾸민 내용이고, 바울이 보았다는 예수님도 실제적인 부활체 예수님이 아니고, 환상을 보았을 뿐이라”하여 성경과 예수님의 역사와 부활과 초자연적 이적을 한꺼번에 부인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그 후에 그 사람은 독일에서 추방되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함)

5)또 그 후에 1851-1930년 사람 Harnack이란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부활과 신앙은 별개의 문제다. 부활이란 있을 수 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조건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은 나쁘지 않다. 가상 세계에서 상벌이 있다고 하여 선행을 독려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하므로 부활과 내세를 현세의 선행을 행하게 하기 위한 가상적 방편으로 믿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하여 실제적 부활과 내세와 심판을 믿지 않는 주장을 하므로 그가 곧 신신학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6)슈바이처(1875-1965)는 독일의 신학자, 철학자, 의사이며 또 음악가로 유명하고 아프리카 의료 선교에 공헌한 사람인데 그의 신학 사상에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저술한 신학 서적 중 “역사적인 예수님에 대한 문제점”이란 책 서론에서 말하기를 “세계의 신학이 다 없어져도 독일의 신학은 금자탑을 쌓을 것이요, 내가 깨달은 예수가 가장 옳은 견해인데 역사적인 인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신성을 지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므로 예수님의 역사적 인물로써의 신성을 정면적으로 부인하였고, 또 그가 저술한 책 “항구적인 종말론”이란 책에서는 “예수님은 생애 당시에 종말론에 대하여 착각하였으니 곧 예수님 당시에 말세가 오는 줄로 잘못 알고 온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온다”고 하였다는 것이요, 그 후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 않으니까 “종말”이란 “영원히 오고 있는 것이라”(언제나 종말처럼 알라는 뜻)고 주장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구속 정신이 아닌 도덕적인 박애 정신에 입각하여서만 선교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은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으며 쉬지 않고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빵이, 질병이 있을 때는 치료가 복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 현실적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다른 복음은 신령한 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일시적 잘못된 주장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므로 항상 조심하며 관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8세기, 19세기에 나타난 세계적 다른 복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제 3 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갈 2:1-10) 목록으로


본문 1절에서 바울사도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하셨고,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셨습니다. ① 1-2절은 “유명한 자들에게 복음을 제출하심”이요 ② 3-5절은 “할례 행사를 억제하심”이며 ③ “다른 사도들과의 교제”에 관한 말씀입니다.(6-10절)

1. 유명한 자들에게 복음을 제출하심.(1-2절)

1)1절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때는 “14년 후”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14년 후일까요? 갈 1:18에 보시면 “그 후 3년 만에.....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15일을 유하신 일이 있었다”하셨으므로 그때부터 14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종 후 3년 까지의 거취는 갈 1:17-18 강론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방문은 3차에 해당합니다. 1차는 길리기아 다소(고향)로 가신 것이고, 2차는 다소에 계시면서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3년 간 다녀오신 후 가신 것이며 3차는 그 후 14년 만에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14년 기간을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바울의 역사를 발췌한다면 안디옥(수리아)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소아시아 및 구라파 지경의 선교사로 파송함에 따라 1차 선교 여행 기간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행 13:4-14:28) 그리고 행 11:25-26에 나타난 1년 간의 안디옥 교회의 사역은 개종 직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다녀오신 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1차 선교를 마치시고 안디옥에 오셨을 때 할례 문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사도회에 문의차 올라가신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행 14:27-15:1-22) 안디옥은 두 곳에 있습니다. 먼저 선교사를 파송한 시리아의 안디옥이 있고,(행 11:26, 13:1) 또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에 임한 “비시디아” 안디옥이 있습니다.(행 13:14) 또 다메섹은 갈릴리 바다 동북쪽 약 200리 지역에 위치하고 시리아의 안디옥은 다메섹에서 지중해 북쪽으로 약 700리 지점임을 지도로 확인하십시오.

2)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①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지파 사람으로 복음의 초창기에 자신의 전토를 팔아 구제한 후 전도인으로 나선 사람으로(행 4:36-37) 바울의 개종 초기에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 앞에서 그의 개종 사실을 알리므로 신임을 받게 하였고,(행 9:26-28) 그 후 안디옥 교회에 파송을 받아 일을 할 때 다소에 있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1년 간 사역하다가(행 11:20-26) 바울과 함께 선교사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행 13:2) 그리고 1차 선교 사역을 끝낸 후 안디옥에 왔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행 15:14) ② “디도”는 헬라인으로 바울의 전도를 받고 복음사역자가 되어(딛 1:5) 바울과 함께 사역한 제자입니다.(고후 2:13, 12:18)

3)2절에서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는 뜻은 “계시를 받고 가셨다”는 뜻이 아니고, “계시를 받아 전파한 복음의 내용을 사도들의 증거한 내용과 대조, 확인하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하신 말씀이 곧 바울이 이방에서 전파한 진리를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적 내용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하였다” 하셨으니 이것은 공식적으로 결의하는 성격이 아닌 상태에서 서로의 입장(전파한 내용)을 확인하였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자들”이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뜻하는 것입니다.(갈 2:9, 행 15:6-21)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하심은 하나의 진리, 하나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도간에 서로 다르게 전파된다면 헛된 사역이 될 것이므로 이를 대조, 확인함이 필요하였다는 뜻입니다.

2. 할례 행사를 억제하심.(3-5절)

1)3절에서 바울사도는 그 당시에 이방인 수종자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셨는데 그 때에 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남자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창 17:12) 또 이방인이 선민 세계로 귀속을 할 때도 역시 개종한 표로써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창 17:13, 출 12:44, 창 34:14) 따라서 “디도”도 헬라인이므로 바울을 따르고 복음 사역을 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었지만 바울은 엄히 이 행사를 억제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할례가 구약적 행사이고, 또 이 의식의 의미가 신약의 세례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율법주의가 복음의 출현으로 더 확실해진 것을 알리고, 또 복음적 행사를 신앙적으로 굽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여론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 때까지도 복음적 의미를 바르게 수용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2)4절에서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인데 이들이 복음적 단체에 가만히 들어와서 은근히 복음을 부정하고, 율법주의를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적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설득하여) 종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율법주의에서 해방된 성도들입니다. 즉 날과 달이나 절기, 안식일, 제사 의식, 할례 등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런 일들이 다 율법에서의 자유입니다.(갈 5:1)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내용들을 다 실천하는 것이 구원 얻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므로 대립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5절에서 “일시라도 (그런 취지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항상 성도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하시므로 성도의 신앙이 순결하여야 하며 잘못된 사상이 마음에 들어오면 진리의 역사가 그 심령에 있지 않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갈 1:6-7) 또 성도는 이단이나 이단적 사역이나 불건전한 듯한 행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다른 사도들과의 교제.(6-10절)

이 말씀은 바울사도의 성직과 복음 지식이 다른 사도들로 말미암아 배웠거나 받은 것이 아님을 나타내심과 동시에 서로의 직분과 사역을 인정하고 교제의 악수와 협력을 확인한 말씀입니다.

1)6절의 “유명하다는 이들”이란 일반인들 또는 복음의 대적자들이 그들을 유명한 자들로 인정한다는 말씀이요,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은” 9절에 나타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도의 선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사도들도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 하셨으니 이는 성직으로나 진리의 지식으로나 영적 감화 등으로 바울에게 더하여 보충해 준 일이 없다는 뜻으로 오직 바울의 신앙과 성직과 능력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안의 내용에서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음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바울의 신앙과 성직이 어떤 이들과 관계된 바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 만큼 바울이 성직자로서 어떤 외식(聖衣나 경건한 작태)을 나타내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성직자의 거룩함과 존엄성을 의복이나 언사로 특별하게 나타내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아무런 경건의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2)7절에서 “바울이 무할례자들(이방인)에게 복음 전할 것을 맡은 것이(행 9:15)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에게 맡은 것과 같음”을 보고 확인하였으며 8절에서는 “베드로에게 역사하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이 또한 바울에도 역사하여 그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음”을 확신한 후, 9절에서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이 바울,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함으로 바울 일행은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도록(합의)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유다 지경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사역을 부탁하였으니 바울도 그 일을 힘써 행한다”고 하셨습니다.(10절) 이 말씀들은 바울의 성직과 사역을 인정함과 동시에 선교 대상을 분정하고, 아울러 구제 사역까지 힘써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는 복음의 확실성, 선교의 분업, 교제의 악수, 이단 경계에 대한 교훈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 4 과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하심 (갈 2:11-14) 목록으로


바울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신 본문 말씀에 “자신이 베드로를 면책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막연하게 베드로의 신분을 헐뜯기 위한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베드로가 면책받을 만한 일을 행하였으므로 면책을 하신 것이므로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이고, 여기에 따라서 베드로의 신분을 우상시 하려는 과격한 성도들에게 자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 자신의 실수를 주의시키고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헐뜯는 수단으로 베드로와 바울을 대조하게 하고 바울사도를 헐뜯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베드로가 무흠하지 않았던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증명합니다.(마 26:33,41,51-52, 요 18:25-27)

1. 11절에서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할 일이 있기로....저를 면책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면책(面責)이란 “대면하여 책망하셨다”는 뜻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수차 방문한 후였을 것이요,(행 9:26, 18:22, 21:16) 또 바울은 안디옥에 자주 가신 일이 있은 만큼(행 11:26, 14:26-28, 18:22) 그 사이에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도 순행 방문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2. 문책의 원인은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안디옥에 계셨을 때 베드로가 그 곳에 와서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그 지역 사람들과 음식을 드신 것은 죄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도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금하신 일이 없었고,(출 18:3) 그들의 우상 숭배나 음행이나 술취함이나 탐람하는 일을 본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지요.(시 1:1, 고전 5:10) 그러나 이방인의 불신앙적 풍조가 선민 세계로 계속 들어오니까 느헤미야 시대에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절교를 명한 일이 있었습니다.(느 9:2) 그 후 유대인들은 선민이란 우월감을 가지면서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멀리하다 보니 그것이 전통과 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처음에는 이방인 상종을 안 하였으나 행 10:9-28에서 주님의 지시를 받고 로마 사람 “고넬료”를 상종한 다음부터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없이 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도 이방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에 야고보에게 예속된 유대인 성도들(할례받은 유대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는 세 사람입니다. ① 세베대의 아들이요, 사도 요한의 형제인 대야고보가 있는데 이 사람은 처음에 사도로 임명을 받았다가 헤롯의 핍박으로 순교당하였고,(행 12:1-2) ②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가 있으며 ③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인데(갈 1:19) 이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부터 믿음 생활을 잘 하여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보다도 그 이름이 앞설 만큼 유명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야고보에게서 온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까?”하고 지적받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정당한 일을 행하고도 확신이 약했던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옛날 유대인 그래로 있는 줄로 오해한 것이며 나가서는 자기 행위에 대한 대안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비난을 두려워하여 확신없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3. 13절에서 그 일로 인하여 같이 음식 먹던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도 그 외식에 유혹을 당하여 동화된 것입니다. 아마 바울사도만 그대로 의연히 앉아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외식자가 되고, 외식의 선동자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느 환경에서나 꼭 같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있을 때는 이방인과 같이 앉지 못하고 그들이 없을 때는 앉고”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그리고 큰 지도자가 그런 행동을 취한즉 그 후배들까지 무조건 따라가는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면책한 바울은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켰을 것입니다.

4. 그래서 바울은 “저희가 복음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음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이방인의 외식을 좇음,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는 헛것을 섬기는 것이므로 외식임) 유대인답게(참 신앙인)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하고 면책을 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확신과 진실함과 행위의 모범이 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는 베드로의 신앙과 바울의 신앙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거나 지도자적 자격에 우열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며 또 이 문책의 방식이 사랑이나 규모를 떠난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고전 4:4) 다만 바울의 사도된 자격이 베드로보다 못하거나(고후 12:12) 베드로에게 의존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고, 또 지도자로서 모범이 되어 후배들에게 유혹거리를 만들지 말 것과 진실과 확신 위에 굳게 서서 매사를 표준 진리에 따라 확실하게 취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5 과 의롭게 되는 법 (갈 2:15-21) 목록으로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법”을 말씀하셨고,(15-18절) 또 19절 이하에서는 이 법을 깨달은 성도의 생활이 어떠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목을 “의롭게 되는 법”이라 정하고, “의롭게 되는 법”과 “이 도리를 믿는 성도의 생활” 두 대목으로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1. 죄인이 의롭게 되는 법.(15-18절)

1)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편지를 쓰실 당시에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유대인이란 것인데 이 “유대인”이란 뜻은 좁은 의미로 유다 지파란 뜻이나 넓은 의미로는 북방 이스라엘이 분국된 후 정통 이스라엘(남방 유다국) 민족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 통치의 백성이란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방 죄인”이 아니란 뜻은 이방인만 죄가 있고, 유대인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요, 다 죄인이지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하나님 없는 죄인들로 취급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5:27, 빌 3:2, 행 2:23) 이방인이나 선민을 막론하고 죄없는 인생은 없음을 전제하여 의롭게 되는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2)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하셨으니 여기의 “의롭게 된다”는 뜻은 죄인으로 정죄받지 않게 됨을 의미하고, 따라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심판의 대상이 된다면 적은 죄로도 사망 즉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 사회법에도 죄가 있으나 돈을 많이 내고(보석금) 벌은 안 받는 경우가 있고, 죄는 되지만 고발 시효가 넘었을 때 유죄로 인정되지 않거나 또 어떤 죄는 정치적 사유로 인하여 재판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서 정죄, 또는 시벌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도 다 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속죄 방법에 의하여 정죄, 또는 심판 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의롭게 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함은 율법을 잘 지킨 행위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하셨고,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하는 뜻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의 방법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 방도로 구원하시기 때문이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3)17절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한다”함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는 인정(롬 8:30)을 받으며 (이 결과로 심판에 이르지 않음 : 요 5:24) 죄를 짓지 않으려 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으로 나타나면 (즉 죄를 안 지을 수 없고 죄를 계속 짓게 된다는 뜻)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즉 죄를 짓게 하는 책임이 주님께 있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는 주님을 믿음과 주님의 대속으로 심판을 면하는 것이고, 죄를 짓지 않는 문제는 요일 3:3의 말씀처럼 자기를 깨끗케 함(성화 또는 거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죄를 방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의롭다 함”을 받고도 성도가 연약하여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이는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는 것입니다.(마 18:21-27, 요 13:10) 또 율법주의 신앙을 탈피하는 과정에서 속죄 사역을 모형으로 하는 의식적 제도를 구약 시대처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히 7:12-25)

4)18절에서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율법주의를 숭상하던 과오에서 깨닫고 돌이켜 복음적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 하거나 율법이 명한 할례의 필요성을 다시 주장하게 되거나 이방인과의 교제의 담을 쌓는다면 그것은 헐었던 율법주의를 다시 세우는 범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적 신앙을 변질시키는 죄라는 것입니다.

2. 십자가 신앙인의 생활.(19-21절)

십자가 신앙은 곧 의롭게 되는 복음적 신앙 갖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신앙인의 생활은

1)19절에서 “내가 (바울 자신을 모든 성도의 대표자로 설명하신 것임) 율법으로 말미암아(정죄하는 율법에 의하여 : 갈 3:10-13)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뜻은 정죄하는 율법에 속박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롬 6:23) 율법은 정죄 심판하는데 능력이 있을 뿐 구원할 능력은 없으므로 그 율법을 향하여 죽은 자된 것처럼 소망을 걸 것이 없으며 오직 구원의 소망을 십자가의 복음에 두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뜻은 자기를 정죄한 율법에 충성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거룩하지만(마 5:17-18) 율법을 주신 목적이 정죄와 함께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갈 3:24) 따라서 하나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하심은 그리스도가 율법에 의하여 돌아가셨은즉 율법에 대한 더 이상의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중죄의 인정을 받고 사형을 당하였으면 죽은 자가 사회적 형법에 대하여 더 이상 제재를 받을 것이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결과가 되었고, 따라서 성도 자신도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은 자 속에 주님이 영적 새생명을 주시므로 거듭나게 하셨고, 그 속에 예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육신적 현세를 사신다는 뜻)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가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가 주님의 생명과 인격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3)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특히 구원의 은혜)를 폐하는 자가 아니요, 세우는 자입니다.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구속에 대한 은혜를 더욱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율법을 실천한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성을 폐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고, 십자가의 공로로 받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전적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만일 성도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헛된 죽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헛된 죽음에 버려두실 분이 아닙니다.

3. 이상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사람이 의롭게 되어 심판을 면하게 됨은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오직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신 사랑의 완성자로서(롬 13:10) 심판받을 일이 없으시지만 모함에 의하여 죄없이 죽으신 것은 오직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사 53:5)

3)예수님이 죄가 없으시지만 율법의 정죄에 의하여 돌아가셨은즉 예수님은 자신을 죽게 한 율법에 대하여 지킬 사명이 없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율법과 상관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과 연합한 성도들도 그와 같은 입장이 된 것입니다. 즉 율법에 대하여 자유로워진 것입니다.(갈 5:1)

4)그 대신 예수님의 생명과 인격으로 사는 삶이 되었으므로 율법의 내용보다 더 명확한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과 그 생활의 모범을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고전 11:1) 따라서 율법의 의식적 계율은 십자가로 폐하여졌고,(고전 13:10) 다른 도덕적 계율은 사랑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 모범으로 더 온전한 계율이 되었으며(마 5:17) 곧 새계명이 되어(롬 13:8,10, 요일 2:7)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새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더 완전케 하는 것입니다. 마 17:5에서 예수님과 모세(율법의 대표자)와 엘이야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음과 생활의 절대 표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율법의 지혜나 구속력이 예수님 안에서 상실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5)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의 도덕성과 헌신에 다 포함됩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성취되었고, 구약의 구속 사역의 제사적 예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으며 구약의 도덕적 규례와 헌신은 예수님의 생활로 지나치리 만큼 성취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이 곧 율법의 계율을 지키고 성취함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고, 삼위 일체적 견지에서 보면 율법의 주인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오시니 율법은 폐하게 된 것이고,(고전 13:10, 히 8:13) 마 5:17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뜻은 예수님이 율법의 성취자요, 모범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강령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롬 13:10)

6)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과 모범대로만 살면 구약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충분하게 이룰 수 있는 것이며 또 이것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새 계명에 입각한 생활입니다. 성수 주일이나 십일조나 어떤 절기의 목적도 다 충분히 그 생활 속에서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율법과 복음 생활 (갈 2: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율법과 복음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은 구약과 신약을 꼭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율법 부분에서 많은 내용을 구약 시대의 성도들처럼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무엇이며 또 율법의 내용 중 지키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현재 저희들이 생활하는 복음적 생활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 짐작으로는 많은 성도가 “왜 당신은 구약 성경의 율법에 따라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을 때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율법에 관한 것과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와 또 복음적 생활이 어떠 하여야 할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모든 계명입니다. 구약을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로 나누지만 그 속에는 성도가 지켜야 할 계명적 율법과 하나님의 통치 역사와 메시야 등 여러 가지 예언의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중요하고, 또 하나님이 인간들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도 중요하며 예수님의 구속 사업과 미래의 심판을 예고하신 내용들도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계명을 많이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 제도도 없고, 성전도 없으며 제사 드리는 일도 없고, 결례식도 없고, 유월절, 월삭, 안식일 제도 등 여러 가지를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식교에서는 안식일 시간 지키는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24시의 때가 동서간 같지 않음) 천주교에서는 물뿌리는 결례식 같은 것만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율법적 의식의 의미만 교훈받을 뿐 모방하는 것이나 지키는 것이 거의 없고, 대부분 예수님과 사도들의 생활을 따라 시행하고 있습니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주의를 떠나서 복음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율법주의를 떠났다는 뜻은 ① 구원 문제를 율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② 또 율법의 계명도 구원받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2)복음 생활이란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믿으며 율법대신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받아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이 부족하나마 그런 방법으로 복음 생활을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구약의 율법을 내세워 지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약의 율법을 시한부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 11:1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 및 율법의 예언이 (세례) 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란 뜻입니다. 이런 말씀이 갈 3:1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율법은...약속하신 자손(메시야)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선지자 및 율법의 예언”은 구약의 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구약의 계명은 (세례)요한까지인가?할 때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고, 요한 다음에 출현하신 예수님이 신약의 첫 인물이며 구약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을 소개한 글인데 하나님이 사람되어 세상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비유컨데 구약은 예수님의 사진이나 편지 같은 것이고, 예수님은 실제 인물입니다 실제 인물이 오셨는데 편지나 사진을 더 중요시 한다면 옳지 않을 것입니다.

2)그래서 성경은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폐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3:10)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하여 긴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사람되어 나타나 주셨으니까 더 설명할 필요가 없고, 또 구약의 계명이 “사랑을 실천하라”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 사랑의 실천을 본보여 주셨으니까 그 보다 더 자세한 교훈이 있을 수 없으며 또 구약 성경이 모형적 제사를 명하셨는데 실제적 인물인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으니까 역시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없을 때는 등불도 밝았지만 태양이 뜨니까 밝았던 등불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요 낡아지고 쇠하여진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히 8:13)

3)우리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요 15:7) 마치 잉태한 아이가 그 어머니와 한 몸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같이 죽고 예수님이 부활 승리하시면 우리도 같이 부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하셨고, 19절에서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하셨으며 또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 하셨고, 20절에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롬 7: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의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율법으로 죽으심 당한 예수님이 율법을 지킬 사명이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죽었으니까 끝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율법을 향하여 죽었기 때문에 역시 율법 지킬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살았고, 부활하신 주님이 성도의 속에 계셔서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의 지도대로 살면 되도록 된 것입니다.

3. 그러면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냐? 온전케 된 것이냐?에 대하여 확실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내가 선지자나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롬 3:31) 그러나 또 고전 13:8이나 히 7:18, 10:9에서는 “폐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뜻은 무엇이며 또 “폐한 것이 아니고 완전케 되었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1)“율법을 폐한다”는 뜻은 “태양이 떠올랐으니까 등불은 안 써도 된다”는 뜻입니다. 더 밝은 계시가 예수님으로 나타났으므로 예수님만큼 밝지 않은 문서 계시는 실제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구약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룩하고 영원하다는 사실은 믿어야 하고, 새 기구가 생겼어도 옛날 것을 써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그 만큼 구약 성경에서도 배울 교훈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폐한다”는 뜻은 “아주 없앤다”는 뜻이 아니고, “밝은 계시(예수님)의 뒤로 돌려 놓는다”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뜻은 “율법의 목적을 다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루시는가?하면 ① 율법이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예언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성취하셨고, ② 율법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율을 주셨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계율만 주신 것이 아니라 실천까지 보여 주셨으니까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가 예수님을 따라 살면 자동적으로 율법의 내용과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 17:5에 보시면 변화산의 기록이 나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인데 그 곳에 그 두 사람과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희는 나의 기뻐하는 자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도가 예수님의 뜻만 따르면 그 속에 율법이나 다른 예언의 교훈이 다 포함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새계명”이란 용어로 주셨습니다.(요 13:34, 요일 2:8) 옛계명은 구약의 율법입니다.(요일 2:7) 새계명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이 등불이라면 예수님은 태양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깊이 연구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깊이 연구하고(히 3:1) 예수님의 뜻과 모범대로만 살면 구약의 의미를 충분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 분입니다.(고후 8:5) 몸을 드린 예수님 앞에서 십일조의 10배를 드린들 예수님의 충성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주도 되시고, 계명의 완성자도 되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율법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요 8:32, 갈 5:)

 

 

제 6 과 책망과 깨우치심 (갈 3:1-14) 목록으로


이 말씀의 1-4절은 책망의 말씀이고, 5-14절은 깨우침의 말씀입니다.

1. 책망의 말씀.(1-4절)

누가 무엇을 책망하신 것일까요? 복음 사역자인 바울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전체는 아닐 것임)이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아 복음적 신앙을 의심하거나 변하려는 흔들림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초두에서부터 문안이나 감사와 칭찬으로 시작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두 번이나 “어리석다”고 하셨으니 민망함을 주시는 책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운 것을 깨닫지 못할 때는 어리석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고도 확실한 것을 깨닫지 못할 때는 어리석은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어리석음”은 복음적 신앙을 밝히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에 굳게 서지 못한채 율법주의 이단자들의 유혹을 옳게 비판하지 못하였으니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1)그래서 바울사도는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십자가가 그들의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뜻은 그 사건이 너무도 명확하게 전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만 전파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포함하여 확실하게 전파되었고, 또 오순절 당시의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난 사실도 밝히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적인 사건을 진실한 사역자들로부터 듣고도 의심을 한다면 미련한 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바울사도는 2절에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도 그 믿음을 의심하는데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믿던 초기에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 체험은 율법 실천을 하다가 받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복음의 은혜를 사모하다가 받은 것입니다. 오순절 당시의 성령 체험도 역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사도들이 있는 곳에 왔다가 복음 증거를 받으면서 율법 실천이 이행되기 전에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 체험이 행위 아닌 믿음으로 받았다면 구원의 역사도 역시 믿음으로 성취되는 줄로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3)3절에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하신 것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자들이 육체적 행동으로 복음을 떠나겠느냐?”는 뜻입니다. “육체적 행동”이란 율법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거저 주는 선물을 마다하고 가능성 없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겠다는 것과 같은즉 역시 어리석은 일입니다.

4)4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복음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많은 핍박을 견디면서 고생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받은 괴로움들을 다 헛된 것으로 버리겠느냐?는 뜻입니다. “과연 헛되냐”고 물으실 때 “복음적 신앙을 떠나면 헛되고 그것을 확고하게 지키면 어떤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깨우침의 말씀들.(5-14절)

이 말씀에서는 율법주의의 부당함을 여러 가지 예로써 설명해 주셨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듣고 믿은데 근거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율법의 행위를 보시고 성령을 주셨느냐? 아니면 듣고 믿음을 가졌을 때 주셨느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거듭남과 충만)는 믿음의 초기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도 그러하였고, 고넬료 집의 집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행 2:1-2, 10:44) 성령의 충만은 믿고 회개하고 사모할 때 먼저 받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후에 실천을 잘 하면 그 잘 하는 근거가 성령 충만에 있는 것이고, 그 행위에 따라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계 22:12, 신 28:1)

2)6,7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로움을 받은 것도 믿음으로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창 15:6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믿음으로 의로워짐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영적) 아들(즉 믿음의 후손들)이 되는 것”입니다.(7절, 롬 4:11)

3)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아브라함이 예언하셨다”고 하셨습니다.(8-9절) 8절에서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신다”는 것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작정하신 것이고, “성경이 미리 알고”란 성경과 하나님을 같은 분으로 표현하신 것이요(요 1:1) 그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믿게 하여 구원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창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이방이 너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하셨는데 이 말씀이 곧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창 15:6)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뜻”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하셨으니 이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축복의 성격이 아브라함과 꼭 같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또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할 이유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신 27:26에서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갓 일(모든 세부적 계명의 실천을 의미함)을 행치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10절) 여기의 “온갓 일을 행한다”는 뜻은 원문의 “에메네이 파신”(Ἐμέννει πἆσιν)으로 “자기 전부를 율법에 넣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행동은 물론 생각조차도 율법 밖으로 나와서는 안된다는 뜻이므로 엄격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예수님을 제하고는)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요, 따라서 의로움을 받으려면 믿음(복음 신앙)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11절) 또 “저주”란 뜻은 “카타라”(κατάρα;히 6:8, 벧후 2:14, 약 3:10)로서 “격리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권고에서 격리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자 예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셨는데 이 뜻이 하나님과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또 롬 9:3과 고전 12:3, 갈 1:8 등에 나타난 “저주”는 “아나데마”(ἀνάθεμα)로서 “큰 진노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12절에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법에는 인정이나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은 내용과 실천에 있을 뿐 믿음이나 사랑 같은 것과는 본질상 다른 것이기 때문에 율법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행하는 자라야만 그 가운데서(율법의 보호 안에서) 살 수 있다”고 하셨으니(레 18:5) 이것이 가능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6)그런데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면서 율법에 의하여 나무(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죄없이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13절) “속량”이란 뜻은 얽매인 종을 값을 주고 해방시켜 주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권세와 형벌 아래 얽매인 죄인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권속을 삼고 심판을 면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신 21:23에 보시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셨고, 또 죄없이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죄없는 주님이 대속의 사명을 갖고 율법에 의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7)14절에서 “성령의 약속도 믿음으로 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시고”하신 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성도들은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 미래에 오실 메시야 사역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며 “그 복이 이방인에게 미침”은 이방인들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신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성령님(오순절에 역사하신 은혜)을 믿음으로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을 받은 것은 율법적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으로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행 10:44, 13:52)

이런 이유들로서 율법주의적 선전이 옳지 않음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제 7 과 약속과 율법 (갈 3:15-29) 목록으로


이 말씀은 앞의 말씀에서 계속 되는 내용으로 율법주의 신앙이 옳지 않음을 입증하신 말씀입니다. 내용의 큰 뜻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 언약은 믿음으로 받게 하신 언약이며 율법을 주시기 전 430년에 주신 것인바 언약 이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을 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① 15-18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말씀”이요 ② 19-24절은 “율법에 대한 말씀”이며 ③ 25-29절은 “복음적 신앙에 관한 말씀”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말씀.(15-18절)

본래 언약이란 사람과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지 못합니다. 언약을 위반하면 사기죄에 해당하고 또 벌칙이 따르기 때문에 함부로 계약(약속)을 파기하지 않는 것입니다.(15절)

1)16절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경의 사람입니다.(율법을 전달한 모세는 주전 1500년 경의 사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심지어는 독자 이삭까지 제물로 드리는 복종을 잘 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히 생각하셔서 산업에도 복을 주시고, 100세에 아들도 주셨으며 축복의 근원자가 되게 하셨고(창 12:2) 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멸망지경에 있는 조카를 구출해 주시는 등(창 19:29) 여러 가지로 은혜를 베푸신 중에 ② 그의 신앙 생활도 많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삭개오:눅 19:9)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셨고, 천국에 간 자를(거지 나사로:눅 16:23)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자”라 하셨으며 신앙생활을 옳게 못하는 자를 책망하실 때도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바리새인들:요 8:39)하시므로 그를 표준인물로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에게 주신 또 한 가지의 특이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사람이 의로워지고 영생얻는 방법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그의 자손을 통하여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 모든 구원의 대상자들에게 같이 주신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16절에서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씨)에게 하셨다” 하셨고,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눅 19:9에서 삭개오가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선포를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혈육의 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구원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은 16절 하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구원을 얻게 하신다)하셨으니 “그 네 자손이란 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약속의 내용이 “네 자손 곧 그리스도라”하는 말씀으로 요약되었지만 창세기의 여러 곳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한 약속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 12:7에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 세계를 만드시겠다는 뜻이요, 창 13:14에서도 “동서남북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어 영원히 이르게 할 것이라”하시므로 “네 자손인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원 세계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요, 창 15:18과 창 17:1-8에서도 언약을 세우시되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심히 번성하는 나라와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날 것이라”(창 18:18-19, 22:7,15-18, 24:7)하셨는데 이 언약의 말씀이 어떻게 보면 육신의 혈육에게 하신 것 같고, 가나안 땅을 주시는 언약 같으며 열왕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국가적 언약 같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형으로 나타내주시면서 더욱 분명한 것은 “네 자손인 한 사람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보면 복음적 은혜(메시야를 통하여 은혜로 구원하시겠다는 것)를 약속하신 것이 틀림없고, 하나님은 그 언약대로 2000년 만에 구원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 계통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7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없이 하거나(폐기)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로부터 430년 전에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월과 관계없이 영원한 약속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18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된 것이기 때문에 율법 시행이 구원의 유업과 관계가 없고, 또 인간의 공로가 아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유업”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통한 구원”(16절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으로 성취된다면 하나님은 미리 은혜의 약속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율법에 대한 말씀.(19-24절)

이 말씀에서는 율법을 주신 과정과 용도와 율법의 용도시한을 말씀하셨습니다.

1)율법을 주신 과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 모세의 손을 빌어 베풀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19절) 따라서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인간에게 전달한 중보자입니다. 중보자는 쌍방을 다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출 7:1) 20절에서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 하셨기 때문에 중보자는 쌍방의 뜻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율법의 중보자는 모세요, 구원의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라”하심은 약속과 율법을 주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일과 계명을 실천하도록 율법주신 일이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0-21절)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율법 실천으로 구원얻게 하셨다면) 인간의 의도 믿음이 아닌 “율법 실천으로 이룬다”고 하셨습니다.(21절)

2)율법을 주신 용도는 ①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입니다.(19절) 백성들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를 통제하시기 위하여 주신 계명이란 뜻입니다. “더하셨다”는 뜻은 은혜 약속과 함께 또 주신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선한 법을 지키지 않을 때 형법을 더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인간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22절) 율법은 “정죄의 법”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롬 3:20, 4:15, 7:7-13) 따라서 “의인은 없다”고 하신 말씀도 역시 율법의 정죄의 결과로 주신 말씀입니다.(시 14:1-3, 롬 3:10)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하심이라”(22절)고 하셨습니다. 즉 율법은 정죄와 상관이 있을 뿐 구원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하셨습니다.(24절) 이 뜻은 율법이 구원의 방도를 지향하게 하는 초보적 안내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즉 범죄한 자신이 정죄 상태임을 알고 믿음과 메시야 중보의 방도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끝내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이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었습니다.

3)율법의 용도시한은 “약속하신 자손 곧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입니다. “계시될 믿음의 때”가 곧 완전한 계시로 예수님이 오시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1:1)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율법과 복음생활”(갈 2:20)이란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3. 복음적 신앙에 관한 말씀.(25-29절)

이 말씀에서는 율법주신 의미를 깨달은 복음적 성도의 신앙적 태도가 어떠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복음적 신앙을 가진 성도는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않아야 합니다.(25절) 이 뜻은 율법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을 본받는 더 나은 발전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계시보다 예수님이 더 밝은 최종 계시이기 때문입니다.(히 1:1) 요즈음도 어떤 성도는 지나칠 정도로 율법적 의식(절기 의식, 안식일 개념에서 주일을 지키려고 시간을 따지는 일, 또는 십일조 헌금을 세밀하게 계산하는 일 등)에 얽매이는 경우를 봅니다만 이 경우에 복음적 성도는 걸어가던 자가 날개를 단 것처럼 높이 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26-27절에서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요 1:12) 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은즉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을 믿고(영적으로 연합되었음) 그것을 확증하는 의식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함”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만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주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이 자기 속에 살아 계셔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 예수님의 빛과 향기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롬 7:9,25, 빌 1:21, 갈 2:20) 성도는 누가 보든지 주님을 닮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3)28절에서 모든 인류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종족이나 지위나 성(남녀)을 초월하여 하나(하나님과의 관계가 꼭 같음)란 사실을 알고 행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선민과 이방인을 대표한 말씀이고, “종이나 자유자”는 사회적 인권상의 우열을 표현한 것이오, “남자와 여자”도 역시 차별 대우를 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권상의 차별이 철폐된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특권을 향유하는 만큼 인간적, 사회적, 또는 사람이 만든 우열 문제는 내세우거나 효력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구원받은 자:눅 14:9)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16절에서 설명됨)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유업”이란 천국의 복락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광의 특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율법의 역할과 복음적 특권 (갈 3:23-29) 목록으로


본문 23-24절을 보시면 “죄 아래 갇힌 자, 매인 자, 몽학 선생, 믿음이 오기까지”란 말씀이 있고, 25-29절에서는 “율법에서의 해방, 그리고 그리스도로 옷입듯 함”이란 말씀이 있어서 이런 내용 등을 종합하여 “율법의 역할과 복음적 특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율법의 역할은

1)죄를 깨우치는 역할(롬 3:20, 4:15, 7:7,13)

2)율법 자체에 매이게 하는 역할(갈 3:23)

3)죄를 적게 짓도록 경고하는 역할(갈 3:19)

4)인간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갈 3:22,23, 시 14:1-3, 롬 3:10)

5)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갈 3:24) 몽학선생은 “파이다고로스”(παιδαγωλός) 초급교사를 뜻하므로 인간이 율법으로 정죄받고 스스로 헤어날 길이 없다는 것과 다른 방도(복음의 소식)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6)율법의 내용은 대부분 계율로서 신앙적 계율, 제사 제도 계율, 사회 생활 계율로 나눌 수 있고, 할 것과 말 것을 말씀하셨으며 실천을 잘 하면 복을 받고, 실천을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신 28:1-68) 이 말씀의 계명 실천은 현실의 복받는 것으로 족할 뿐 의와 영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7)그리고 율법의 역할 시기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라고 하셨습니다.(갈 3:19) 이런 말씀은 마 11:13, 고전 13:10, 히 8:7-8,13 등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의 역할이 사용되는 시기는 23절에서 “믿음이 오기 전까지 즉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만 해당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23절의 “믿음이 오기 전과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때부터 그 율법이 지향하는 복음이 성취되는 때 즉 예수님이 오시는 시기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는 마 11:13에서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구약의 성취자인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32-33) 또 누구에게 주실 것인가?할 때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선민들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지킬 사명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따라서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아서 메시야를 바라보고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이 인도하는 메시야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2. 복음적 특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적 특권이란 율법의 의미를 알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받는 특권입니다.

1)율법에 속박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5절에서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하는 지도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유치원에서 배우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유치원 선생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고, 초등학교 선생님(예수님)의 지도를 받으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26과 28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율법인데 마 12:8에서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하신 말씀따라 율법의 최고 주인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 1:17에서 “그 율법을 모세로 말미암아 주셨다”고 하셨으니까 율법의 주인은 “모세”인 줄로 알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인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율법의 종노릇하던 자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정죄하던 자를 떠나서 구원해 준 은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이 바로 그런 뜻이요, 27절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3)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24절 끝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셨고, 2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세례=인침의 표시)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하셨으니 이 말씀이 다 “의롭게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죄 씻음 받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옷 입듯 하였으니 그를 정죄할 자가 없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의로워진 성도를 감싸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4)26절 하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특권은 29절의 “아브라함의 자손”(구원받은 백성, 눅 19:9)이란 뜻과 같은 것입니다. 요 1:12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양자요, 예수님의 형제되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또

5)29절 하반에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유업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어주는 영광의 복으로 영생과 천국의 상급을 상속받는 것처럼 받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으로 율법의 역할과 복음적 신앙의 특권을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 8 과 두 가지 신앙에 대한 비유 (갈 4:1-11)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신앙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신앙이라 하여 “본질상 다르다”는 뜻이 아니고, 율법 시대(구약)의 신앙과 복음 시대의 신앙을 대조하여 비유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구약 시대 성도들의 신앙과 복음 아래 있는 신약 시대 성도들의 신앙을 대조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 있으면서 율법에서 계시된 (제사 제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율법적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고,(이 신앙은 구약이 밝힌 계시이지만 많은 선민들이 계명만 보고 그 계명 속에 계시된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십자가를 모르는 유대주의 종교로 형식화되었음)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나 구약이 예언한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도 받고 또 율법의 해설자요, 실천자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생활을 본받으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미(구속의 진리와 사랑 실천)를 더 충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1-3절과 8,10절은 ① “율법 아래 있는 신앙의 형편”을 말씀하신 것이고, 4-7절과 9,11절은 ② 복음 신앙의 과정과 결과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신앙.(1-3,8,10절)

1)5절에 보시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하고,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국민이 그 나라의 헌법 아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그런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신앙을 “나이 어린 주인”으로 비유하셨습니다. 1-2절에서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고 하셨습니다. “유업을 잇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종이 아닌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물정을 모르니까 자신이 주인인 것도 모르고 그 집 청지기나 후견인 밑에서 보호를 받으며 종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율법주의 신앙의 미숙함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신앙도 미숙하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율법을 안다 하면서도 율법 속에 감취어진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면 역시 어린아이 신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숙한 신앙은 “어린아이 같고 또 종노릇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유업을 이을 주인이지만 미숙한 탓으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은혜를 향유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2)“초등 학문에 머문 자와 같다”(3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신앙 지식이 미숙함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율법의) 종노릇을 하였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바울 사도나 그 일행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였을 때의 미숙한 형편을 인정한 것입니다.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초등 학문에 머문 것입니다.

3)3절에서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다”하셨고, 또 8절에서도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종처럼 지킨 것을 의미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서 율법의 목적도 모르면서 지키는 방법의 전통을 만든 사람들(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의 말을 무조건 따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이나 절기의 의미도 모르면서 무조건 제도와 의식만 따르고 지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성수 주일이나 십일조를 “율법의 종노릇하듯 엄격하게 지키고 또 그렇게 지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발전하여 주일과 십일조의 의미를 잘 알게 하고, 그 의미를 살리는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필요할 줄 압니다.

4)그런 의미에서 율법적 신앙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年, 희년같은 것)를 삼가 지키니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10-11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의미와 목적에 맞추지 못한채 제도에만 열심하는 것이 율법적 신앙이고, 초등 학문에 머문 신앙입니다. 율법주의 자들은 율법의 제도는 엄격하게 지키려 하였지만 율법을 주신 참 목적을 몰랐으니 그들의 제도적 생활이 또한 외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복음 신앙의 과정과 결과에 대하여(4-7,9,11절)

1)복음 신앙의 과정에서 4절을 보시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이 매사를 때를 정하시고 하시는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전 3:1, 요 7:6,8, 행 7:17) ② “그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은 메시야가 인간을 대표할 사람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이며 ③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함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입장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2)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심”은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을 그 율법 제도에서 해방하여 그 율법의 통치를 받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려면 사망을 맛본 후 부활하셔야 하는 것처럼(히 2:9,14) 자기 백성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려면 율법을 지킨 후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넘치게 지키신 분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킨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 무죄한 죽음과 고난을 대속의 제물로 쓰셨고,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신 승리자로써 부활하시므로 자기의 백성들을 율법의 속박(종된 입장)에서 해방(속량;자유케하는 것)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자요, 율법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 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율법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에서 율법의 의도를 더 잘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3)“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다”하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율법의 정죄와 마귀의 지배로부터 속량하신 후 하나님의 아들(자녀되는 권세, 요 1:12)을 삼아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6절에서 택하신 자에게 “하나님이 그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의 영을 마음 가운데 보내심”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이 내주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엡 3:17, 요 15:4,7) 그렇게 되면 성도는 자기의 마음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빌 2:5, 요일 3:9) “아바”란 말은 “아버지”란 아람어로써 강조하는 의미로 거듭 말씀한 것입니다. 성도가 거듭날 때부터 주신(요 3:3, 요일 3:9, 고전 12:3)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하나님을 거침없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써 7절에서 성도는 마귀의 종도 아니고, 율법의 종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양자;롬 8:15)이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을 잇는 것”입니다. 이 “유업”이란 아버지의 유산과 가문의 전통을 아들이 잇듯이 하나님이 받으실 천국의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5)9절에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고, 또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하셨으니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은 복음을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 지식을 갖게 되었음이고, “하나님의 아신바 됨”은 하나님이 아들로 인정하여 친교적 관심을 가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체험적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쌍방적 유대관계란 것을 반드시 아시고, 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6)따라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된 성도는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9절) 율법적 신앙에 머문 것은 깨달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미숙한 초등 학문적 신앙이고, 약한 신앙입니다. 율법을 알되 복음을 모르는 초등 학문적 신앙은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무익하고 약한 것입니다. “천한 초등 학문”이란 학문 자체가 고급 실력에 비할 때 천한 것처럼 신앙도 율법만 알고 복음을 모르는 신앙은 천한 것이므로 마땅히 고상한 신앙으로 발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계명의 의미를 모르면서 제도에만 얽매인다면 유치원생 같은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발전하지 않으면 복음 사역자의 수고가 헛되어질 것을 바울사도는 우려하신 것입니다.(11절)

따라서 이 말씀은 율법주의 신앙의 형편과 복음 신앙의 형편을 말씀하시므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복음 신앙으로 시작한 후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빠져 율법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제 9 과 신뢰 회복을 역설함 (갈 4:12-20) 목록으로


본문의 내용은 바울사도가 처음에 복음을 전파할 때처럼 성도들이 자신을 믿고 협력해 줄 것을 구하는 말씀입니다. 신뢰 회복을 구하게 된 이유는 거짓 교사들이 이단 교리를 증거하면서 바울의 신뢰성을 훼방하였기 때문입니다. ① 12-14절은 “최초에 바울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② 15-20절은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최초에 바울과 성도들과의 관계.(12-14절)

1)12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봉사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하심은 바울이 선민으로서 이방인처럼 되어 선민적 특권을 버리고 갈라디아 지역의 문화권에서 그 곳의 주민들과 함께 산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봉사와 희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하셨으니 이는 인권이나 지역의 문화를 초월하여 바울사도처럼 신앙생활 할 것을 권유하신 것이요,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하심은 복음의 초창기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신뢰하고 잘 순종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13절에서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하심은 바울이 연약한 육체를 보존하면서 갈라디아에 머물며 어렵게 전도하신 것을 의미하고

3)14절에서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었다”하심은 바울의 육체적 허약이나 또는 신체적 결함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로부터 소외당할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초빙하려는 교역자가 몸이 허약하거나 질병 또는 육체의 결함을 가졌다면 사랑으로 영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영접하여 그 육체의 결함을 나누어 질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이 될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육체적 약점을 가진 상태였으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업신 여기지도 않았고, 버리지(배척)도 않았으며 오직 바울 사도를 천사처럼 또는 예수님처럼 영접하였다”하셨으니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이전에 원만하였던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대한 말씀.(15-20절)

1)15절에서 그런데 “너희의 복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와 성도간의 사랑의 관계를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쓰실 당시에는 좋은 상태에 있지 않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하셨으니 이는 과거에 성도들이 바울에게 자기의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사랑의 강도가 컸음을 나타낸 말씀이요, 또 바울사도의 육체의 약점이 시력에서도 나타났음을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의 시력이 약한 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갈 6:11)

2)16절에서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하신 것은 바울이 진리와 진실만을 전하고(봉사적 입장만 취하였으므로) 누구의 미움을 받거나 원수로 여김받을 과오를 범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원수처럼 여김받게 된 원인이 훼방자들과 오해하는 성도들에게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3)17절에서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라”하심은 거짓 선지자들이 열심과 사랑으로 성도들을 접근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단 교리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므로 좋은 뜻이 아니라 하신 것이고,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는 뜻은 거짓 교사들이 거짓말로 성도를 유혹하여 자기들의 교리를 믿고 자기들을 따르게 하기 위하여 열심내는 것이므로 역시 좋은 뜻이 아닌 것입니다. 또 “이간을 붙인다”는 말씀은 성도들과 바울사도 사이를 불신감에 쌓이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런 열심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4)18절에서 바울사도는 “좋은 일을 하므로 사모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단 전파와 거짓과 이간을 시행하여 그것으로 사모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바울사도는 좋은 일(즉 복음전파)만으로 사모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5)19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이란 호칭을 쓰셨습니다.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딤전 1:2)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간에 어울리는 사랑과 인정을 쏟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성도의 성화를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과정 중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8:19) 이 말씀은 “말씀과 기도로 성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순결하신 인격을 닮는 것이며 최고의 착한 성도를 만들어 가는 것인데 바울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한 인격을 변화시키는 교육은 여인의 해산하는 수고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현실 교회 사역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심적 고충을 일반 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중직자가 20년 이상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교만과 현세욕과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였다면 그런 성도와 함께 일하는 복음 사역자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짐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런 고충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당하신 것입니다.

6)20절에서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하신 것은 이단 유혹에 기울어지고 바울에 대한 신뢰감에 아직도 문제가 없지 않음을 인하여 강한 책망의 어조(음성을 변함)를 나타내야 할 입장이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으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들과의 유대관계에서 이단자들의 이간 술책으로 불신 관계에 있는 것을 회복시키려고 힘써 노력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10 과 두 아들 비유 (갈 4:21-31) 목록으로


이 본문의 총 제목을 “두 아들 비유”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아브라함의 서자요,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로, 복음 아래 있는 성도들을 아브라함의 적자(약속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로 비유하여 약속을 받은 적자에게 유업(구원적 은총)이 있고, 서자에게 있지 않음을 율법주의 자들과 복음주의 성도에게 비유로 적용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바울사도가 구약 성경을 연구하실 때 이 사실을 구원사적 역사와 계시로 깊히 이해하신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도 그런 안목으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① 두 아들에 대한 소개(21-23절) ② 두 아들에 대한 비유적 설명(24-26절) ③ 유업과 관련한 두 아들의 결과(27-31절)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두 아들에 대한 소개(21-23절)

1)21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고저 하는 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내게 말하라”하셨으니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역사가 기록된 창세기를 율법으로 호칭하셨고, 또 신앙적 교리를 말하는 자들이 마땅히 성경을 잘 알아야 할 것도 강조하셨습니다.

2)22절에서 “기록된 바(창 16:15에 기록됨)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인 본처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이라고 하셨습니다.

3)23절에서 이 두 아들은 서로 크게 다른 점이 있으니 “계집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난 것이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약속받은 아들을 낳기 전에 약속받지 않은 아들을 여종의 몸을 통하여 먼저 생산하였으나(창 15:1-14)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창 21:9-10)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다”는 뜻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낳은 것을 뜻하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것”은 여종이 아닌 주인(본처) 즉 사라에게서 약속을 받은대로 이삭을 낳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아들 낳을 것을 약속하셨고, 또 그 후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창 17:15-22) 이렇게 구원사적 역사에도 두 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 후시대에도 율법주의적 백성들과 복음 신앙의 백성들이 있음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2. 두 아들에 대한 비유적 설명(24-26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늙도록 자식이 없자 본처 사라의 뜻에 따라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적자가 아닌 종의 소생이어서 결국 쫓겨났습니다.(창 16:1-4, 21:9-12)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로 적자 이삭을 주셨고,(창 18:10, 21:1-2,12) 이삭의 후손을 약속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7:19, 22:17-18) 이런 두 계열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율법주의 자들을 “이스마엘”에, 복음적 성도들을 이삭에게 비유하여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씨는 다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종을 배출하였고(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음.) 또 하나는 본처의 몸에서 적자, 아들(후계자)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언약에 의하여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도 후사가 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킨다 하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적자요, 언약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역시 율법을 다 못 지켰어도 은혜로 구원을 받으니 여기에 해당하는 성도가 곧 복음적 신앙을 가진 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갈”로 발음된 것이(창 21:9,17) 본문에서는 “하가”로 기록되었는데(24,25절) 이것은 히브리어 발음이 헬라어로 바꾸어지면서 표기와 발음상 변화된 것으로 보셔야 할 것입니다.

1)24절의 “비유”란 뜻은 비유(비슷한 형편)를 들어 교훈과 이해를 더할 수 있다는 뜻이요, “이 여자들이 두 언약이라”하신 것은 ① 하갈은 율법을 중심한 구약에 해당하고 ② 사라는 은혜를 중심한 신약에 해당한다는 뜻이며 또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라”하셨으니 여기의 “시내산”이란 율법의 근거지로서 그 당시의 지역적 호칭으로 아라비아에 있는 산이며 또 지상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25절) 시내산과 예루살렘은 율법의 근거지로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25절)

2)26절에서 그러나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하신 것은 복음이 시내산이나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유자”란 복음적 성도를 일컫는 말씀으로 자유하는 여인의 아들인 이삭에 비유되고, 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된 신약의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어머니”란 성도를 이삭에 비유하고, 성도의 어머니를 약속받은 사라에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라의 아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서 오늘날 은혜의 약속을 받고 복음을 믿는 성도를 일컫는 말씀입니다.(28절)

3)28절에서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을 것이므로(어떤 이유에서든 자녀 생산을 못한 사람들이라도) 즐거워하며 소망을 가지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사 54:1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육체적 후손들보다 영적 후손(천국 백성)을 갖는 것이 의미있는 있는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민족의 수난을 예언하시면서 전쟁 등으로 생산 못하는 여인들을 위로하신 말씀으로 사라가 젊었을 때 생산하지 못하여 애를 태운 형편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라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구원의 백성이 된 것처럼 신약 시대의 천국 운동도 육체의 자녀가 아닌 신령한 백성들로 확장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유업과 관련한 두 아들의 결과(27-31절)

1)29절에서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은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약속과 기적으로 출생한 이삭을 핍박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고,(창 21:9) “지금도 그러하다”는 뜻은 바울사도 당시에 율법주의 백성들이 복음 신앙 가진 성도들을 핍박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2)30-31절에서 “계집종의 아들은 유업을 받지 못하였으나 우리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인 만큼 율법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율법에서 해방되고 주 안에서 자유하는 복음 신앙의 백성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래 도표를 참고하십시오.


※ 두 언약의 설명

비유 대상

이스마엘

성경

이삭

성경

아버지

아브라함

창 16:1-4

아브라함

창 17:15-16

어머니

하갈

창 16:1-4

사라

창 17:15-16

어미 신분

여종, 애굽여인(창 21:9)

창 16:1-4

본처, 자유인

갈 4:22

약속 여부

없음.

있음.

창 17:15,16,19

출생 형편

육체를 따라 낳음.

갈 4:23

약속과 이적으로 낳음.

창 21:1-3

출생시킨 장소의 근거

시내산, 율법을 주신 곳, 율법을 시행한 예루살렘

갈 4:25

하늘의 예루살렘(하나님의 보좌)

갈 4:26

믿음 생활의 성격

율법의 종노릇 함.

갈 4:25

주 안에서 자유함.

갈 4:26

구원과의 관계

유업없이 쫓겨남.

창 21:10

유업을 받음.

창 21:12

두 언약의 대상

율법주의 신자들

갈 3:1-3

복음적 성도들

갈 4:26

과거와 현재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함 같이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신자들을 핍박함.

갈 4:29,

행 21:27-28

유대인들이 복음적 성도를 핍박함.

행 14:19-22

두 언약을 믿는 차이

율법행위로 구원받는다함.

갈 3:2,10

은혜의 복음을 믿어 구원 받음.

갈 3:7,11



제 11 과 율법주의 신앙의 잘못됨 (갈 5:1-12) 목록으로


이 말씀은 율법주의 신앙의 잘못됨을 지적하시고, 그 잘못된 신앙 사상이 누룩과 같아서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부패를 확장시키기 때문에 극히 경계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① 1절은 “자유의 소중함”이요 ② 2-4절은 “율법은 계명일 뿐 은혜를 주지 못한다”는 말씀이며 ③ 5-6절은 “의의 소망이 믿음에 있음”이요 ④ 7-12절은 “율법주의를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율법주의 신앙의 잘못됨”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율법주의”란 율법 즉 구약의 계명 실천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뜻합니다.

1. 자유의 소중함.(1절)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하신 말씀도 있고, “진리는 매이지 않는다”(딤후 2:9)고도 하셨으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도 하셨습니다.(고후 3:17) 바울사도는 “자유자요 또 모든 사람에게도 자유하다”(고전 9:1,1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종류의 자유를 성도들에게 주셨고, 인간들에게는 꼭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권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같은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자유는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강요하는 속박과 정죄 심판의 속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은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대부분 그런 속박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되 자원함과 자유롭게 지키도록 하셨고, 또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의의 은총을 주시므로 율법의 정죄에서 이미 해방시켜 주셨습니다.(요 5:24, 롬 8:34)

2)“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굳게 선다”는 뜻은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뜻이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하신 것은 ① 율법의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② 또 율법이 강요하는 속박에 부자유하게 이끌리지 말며 ③ 율법이 정죄하는 공포에서도 완전히 해방되라는 뜻입니다.

2. 율법은 계명일 뿐 은혜를 주지 못함.(2-4절)

1)2절에서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할례를 받는 뜻은 율법의 멍에 아래 그대로 있으면서 할례 의식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뜻입니다. 할례의 제도는 율법으로 주신 계명이며(창 17:10, 출 12:44,48)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치는 의식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할례의 의미를 세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마 28:19) 따라서 할례나 세례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할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이 된다”는 뜻은 할례받는 자들이 율법주의를 신봉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2)3절에서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며 또 어느 한 계명도 제외될 부분이 없이 다 지킬 것을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법의 성격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일반 관청에서도 어느 법이나 한 가지만 저촉되어도 허락되지 않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면 결국 범범자의 입장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3)따라서 4절을 보시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 안에서”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의 소망을 갖는 것이요,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 성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없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였다”는 결과에 도달하므로(갈 3:11) 구원받을 소망이 없어지는 것이고, 또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며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와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는 복음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3. 의의 소망이 믿음에 있음.(5-6절)

1)5절에 보시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우리”는 바울과 복음적 신앙의 성도들을 의미하고 “성령으로 믿음을 좇는다”는 뜻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요 3:3) 믿게 하시는 감동과(고전 12:3) 성령님의 감동으로 전달해 주신 말씀 사역으로(벧후 1:21)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뜻은 하나님이 복음적 신앙을 가진 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히셔서 의의 은총(정죄하시지 않는 것, 또는 심판받지 않게 하시는 것)을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믿음과 함께 즉시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의인된 확신을 갖고 감사와 희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성취되는 것은(세상 끝날에)_예수님의 심판이 있을 때 면제받는 사실을 체험하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할례를 받은 것과 또 복음적인 성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무할례)이 구원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자가 할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그의 신앙이나 할례받은 것을 인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율법주의를 떠난 자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할례를 받지 않는 것만을 내세운다면 그것도 역시 칭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 이 믿음은 복음적 신앙이요, 복음적 신앙은 사랑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적 신앙은 율법의 도덕적 계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잘 실천함으로써 율법의 강령인 사랑을 더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4. 율법주의를 경계하신 말씀.(7-12절)

1)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하신 것은 바울의 하소연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때에 좋은 믿음으로 발전하였는데 누가(어느 율법주의자들이) “너희의 믿는 복음적 신앙을 가로막고 복음적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고 질타하신 것이요,

2)8절에서 “그 권면(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9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말씀은 잘못된 신앙 사상을 누룩에 비유하셨고, 비단 그 사상의 분량이 적다 할지라도 경계하여야 할 것은 그 사상이 적은 누룩처럼 연속적으로 퍼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은 분량의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를 발효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4)10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권면을 유익하게 받는 성도들이 “다른 마음(이단 사상)을 품지 않을 것을 주 안에서(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복음적 신앙을 흔드는 율법주의자들)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단자들의 심판에 대하여는 계 20:7-10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5)11절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과거처럼 율법주의자로 있으면서 할례를 전한다면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요, “십자가의 거치는 것(십자가의 복음이 핍박의 근거란 뜻)도 없을 것(그쳤음)이라” 하셨고,

6)12절에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율법주의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자들이면 “스스로 할례를 받아 아픔을 체험해 보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는 풍자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율법주의 이단 뿐 아니라 다른 잘못된 신앙 사상이나 잘못되어 가는 모든 전통과 제도에서도 마땅히 개혁의 의지를 갖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2 과 자유 얻은 자의 사명 (갈 5:13-26) 목록으로


이 본문의 총 제목을 “자유 얻은 자의 사명”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주님이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셨고, 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셨으며 19절에서는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 것”과 22절 이하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① 13-15절에서 “자유를 선용할 것” ② 16-18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할 것” ③ 19-21절에서 “육체의 일을 경계할 것” ④ 22-26절에서 “성령의 열매 맺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자유를 선용하라” 하심.(13-15절)

1)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당연히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하셨으니 “육체의 기회”란 “자기의 정욕대로 살거나 범죄하는데 이용하지 말라”는 뜻이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심은 모든 성도가 “주님을 왕으로 모신 상태에서 고하의 지위를 막론하고 서로 종된 자처럼 서로 섬기는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사령관쯤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일날 군인 교회에 출석하여 사병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신발을 정리해 주었다면 그 일로 인한 사랑과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2)14절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는 뜻은 율법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의 강령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마 22:39,40)하신 말씀을 바울사도가 인용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랑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것을 율법대로 실천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히 4:15) “한 말씀에 이루었다”는 뜻은 예수님의 사랑 실천으로 율법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15절 말씀처럼 “만일 서로 물고 먹는다면” 이는 율법을 역행하는 것인 만큼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물고 먹는다”는 것은 서로 율법을 역행하여 사랑 실천을 안 하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 싸우는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명을 갖고 잘못된 교리나 불법을 대항하여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교리와 불법을 떠나서 도덕적 싸움의 대상으로 말려들 때는 가급적 그런 환경을 떠나서 직접 부딪히지 않는 것이 좋고, 교회와 법적 논쟁은 사랑안에서 이론과 법으로 계몽함이 좋을 것입니다.

2.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16-18절)

1)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써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더욱 중요한 말씀이고, 모든 성도가 체험하셔야 할 말씀입니다. 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뜻”은 성령님이 감동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따라 행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4:17)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요 17:17) 또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을 통하여 성경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벧후 1:21)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의 감동이나 체험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성경따라 치우침 없이 정도로 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성도가 성령님의 뜻을 따라 말씀 중심으로 이끌려 간다면 육체의 욕심은 멀리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고기로 배를 채웠을 때 다른 것을 먹을 뜻이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또 보화를 구하는 성도가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이란 세속적인 모든 좋은 것들입니다. 현실 소욕, 물질, 명예, 향락 등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하고도 이상한 것은 신령한 은혜에 집중할 때 현실적으로 좋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작아보일 뿐 아니라 싫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반드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생활과 그 결과로 육체의 소욕이 멀어지는 두 가지 체험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울사도가 현실 정욕을 해로 여겨 버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빌 3:7-8)

2)17절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는 상극 상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세욕이 강하면 신령한 은혜가 멀어지고 신령한데 집중하면 현세욕이 멀어지는데 이런 문제를 두고 성령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도 서로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모시면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5:3)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면 주님이 은금이 되어 주신다”고도 하셨지요.(욥 22:24-25)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마귀가 멀어지고 육체의 소욕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멀어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하여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서로 “훼방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에 성도가 마귀보다 강한 하나님의 뜻(성령, 말씀의 뜻)을 힘있게 따를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않을 것이라” 하셨으니 “율법 아래 있다”는 뜻은 성령님과 복음적 신앙이 일치하기 때문에 성령님은 잘못된 신앙이므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3. 육체의 일을 경계하심.(19-21절)

1)19-20절의 “육체의 일”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뜻합니다.(17절) 그 육체의 일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짖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이성 관계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일이요, 한동안 고위층 인사들이 “여인과 적절하지 못한 관계를 가졌다”는 표현을 한 일이 있었지요. 그 적절하지 못한 관계가 바로 떳떳하게 행하지 못할 일을 의미한즉 음행, 더러운 것, 호색도 그런 상태의 죄악을 뜻하고, 우상 숭배는 어떤 형상에 절 하거나(출 20:4) 지나친 현세적 탐심을 갖거나(골 3:5) 하나님보다 더 섬기고 의지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런 것이 곧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마 10:37) “술수”는 사기의 일종이고, “원수 맺는 것”은 용서 또는 화해하지 않고 보복하려는 심사를 갖는 것이요, “분쟁”은 다툼을 축소하지 않고 확대시켜 싸우는 것이요, “시기”는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미워함이요, “분냄”은 혈기 내는 것이며 “당 짖는 것”은 나쁜 뜻으로 결속하는 것이며 “분리”는 화목과 합력을 깨는 것이요, “이단”은 근본적 교리의 어긋남이며 “투기”는 시기하며 욕심내는 행동이고, “술취함”은 경건한 인격성을 망각함이요, “방탕”은 시간을 유효하게 쓰지 않음이요,(엡 5:16) “또 그와 같은 것들”은 이와 유사한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셨다”(21절)함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우나 바울사도께서 과거 어느 때에 같은 교훈을 하신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3)“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범죄자가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범죄자가 예수 믿으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복음적 성도가 그런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이 구원받을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이요, 또 복음적 성도이면 그런 죄악에 자신을 방림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신앙을 가졌다”하면서 그런 죄악에 머물러 있다면 그의 믿음은 옳은 믿음이 아니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4.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하심.(22-26절)

1)22절에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이상과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27절)는 뜻은 이 계명이 불변한 진리의 열매로써의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계율이란 뜻입니다. 유월절 의식은 성찬식으로, 할례의식은 세례식으로 변했지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변하는 계명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따라 살면 ①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② 항상 기쁨과 만족을 가지며 ③ 이웃과 화평을 도모할 수 있고, ④ 인내하는 사람이 되며(마 5:9) ⑤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⑥ 어질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며 ⑦ 하나님께 충성하고 ⑧ 온유한 사람이 되며 ⑨ 적당하게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2)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셨으니 성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소욕을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못박았은즉 자기 몸으로 여기지 말 것이요(고전 6:19-20) “정”은 자기의 생각이고, “욕심”은 현세욕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중심과 현세욕을 없애야 한다는 뜻입니다. 귀하는 얼마나 없앴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많지는 않습니까?

3)25절에서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에 계시고(요 14:17) 오직 진리 가운데로만 인도하십니다.(요 16:13) “성령으로 삶”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음이요, “성령으로 행함”은 성령님의 뜻대로 인도받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로 인도 받을 때 인간의 지식이나 의지와 감정이 상당 부분 잠재될 수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청년 시절에 성령에 이끌려 산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기도에 미친 듯이 이끌렸습니다. 그 때에 설교도 여러 차례 하였고, 그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무엇을 증거하고 은혜를 끼쳤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기억을 되살릴 수 없으니 이런 상태가 성령으로 행하여진 일이 아닌가?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가 잘한 것이면 “내가 무엇을 또는 무슨 좋은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거를 잊은 상태에 있고, 과거의 역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어찌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4)26절에서 정과 욕심을 그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 24:4에서도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는....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허탄한 것은 본문의 “헛된 영광”과 같은 뜻입니다. “헛된 영광”은 곧 현세적 영광입니다. 그런 무상한 영광을 인하여 서로 격동하거나(다투어 얻으려 함)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가 명예로운 일을 사양할 줄 알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겨 앞세워 줄줄 아는 겸손한 미덕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도 성령님을 따라 행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6. 믿음의 종류 (갈 5:5-6, 롬 1: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종류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믿음이 소개되었습니다. 하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이므로 앞의 믿음과 다음의 믿음에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 믿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1)“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하셨으니(요 3:16) 믿음은 구원의 방편입니다.

2)또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하시므로 믿음은 영광의 유일한 방편입니다.

3)“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하시므로 믿음은 능력의 방편이 되고

4)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알며(히 11:3) 또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다”(요 6:69)하시므로 믿음은 진리를 아는 방편이 된 것입니다.

2. 믿음에도 종류가 있는가?할 때 엡 4:5을 보시면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 뿐이라” 하시므로 “믿음은 그 본질적 요소”로 볼 때 하나라는 것을 우선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또 다른 곳을 보시면 믿음에 대한 표현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에도 상당한 구별이 있는 듯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1)롬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하셨으니 이 말씀의 앞에 있는 믿음은 거듭난 믿음 즉 시작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음에 나타난 믿음은 장성한 믿음, 또는 능력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믿음을 구별하되 ① 중생한 기본 신앙과 ② 성숙한 믿음으로 구별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2)또 다른 곳에 보시면 유 20에서 거룩한 믿음, 갈 5:6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벧전 1:7에서 불로 연단한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 마 15:28에서 큰 믿음, 히 10:22에서 온전한 믿음이란 말씀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린 아이같은 신앙, 장성한 자의 신앙, 육신에 속한 자, 신령한 자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믿음의 종류란 뜻은 본질적인 기본 신앙은 하나이지만 그 성도의 은혜받는 취향에 따라서 역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성도의 은혜의 분량과 역사하는 정도 즉 은사에 따라 구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님들이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다양한 은사를 다 구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약성을 드러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 대한 상식”을 조금 알아 놓으시면 “내가 이 환경에서는 어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서 지혜롭게 처방할 수 있는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목수가 나무를 자를 때는 대패를 쓰지 말고 톱을 써야 하며 나무 껍질을 벗기려면 또 톱을 쓰지 말고 낫을 써야 편리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용도에 따른 믿음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1)구원을 받을 때는 거듭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요 3:3과 딛 3:5, 그리고 롬 1:17의 앞에 나타난 믿음이 그 근거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눅 23:39에서 한 강도가 사형 직전에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받은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거듭난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2)핍박을 이기는 믿음은 불로 연단한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벧전 1:7에 보시면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하시므로 시련받은 믿음의 귀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날선 칼이 아니면 무기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연단 받은 믿음으로 핍박이나 환란을 이기는 것입니다. 욥이나 바울사도가 바로 그런 믿음을 갖고 시련을 이긴 것입니다.(욥 1:20, 23:10, 롬 8:35)

3)예수님을 닮게 하는 믿음이 있으니 그것이 곧 거룩한 믿음입니다.(벧전 1:15) 유 20절을 보시면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거룩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거룩을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벧전 1:15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딤전 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나니라”, 롬 8:29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하셨고, 바울사도는 갈 4:19에서 “성도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하여 해산하는 고통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있습니까? 이 인격 형상을 닮는 신앙이 곧 거룩한 믿음인 것입니다.

4)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으니 그것이 곧 본문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성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서로 돕고 봉사하는 은사를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떠나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만큼 천국에서 받을 상급은 사랑 실천의 결과로 받게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5)소원을 성취할 때 필요한 큰 믿음이 있습니다.(마 15:28)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 간청하여 이루어야 할 일이 생기는데 예를 들면 질병의 어려움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기도 응답으로 헤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믿음이 큰 믿음인데 이 말씀은 마 15:28에서 “딸의 귀신병을 고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고 하시므로 그의 큰 믿음에 근거하여 소원을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소원 성취를 원하는 분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큰 믿음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희망을 갖고 기도로 꾸준히 매달려 성취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①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유대인)과 거리감이 있었고, ② 딸의 흉악한 귀신병을 고쳐달라는 어려운 청원을 하였는데 ③ 이 청원을 받으신 예수님은 세 차례나 거절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하셨고,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거절을 하셨으며 또 그 다음에는 “여자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비유로 거절을 하셨는데도 그 여인은 여전히 간청을 하므로 큰 믿음 가진 자란 칭찬과 함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6)믿음의 지도자가 되려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히 10:22에 나타난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모든 은사를 다양하게 구비한 신앙입니다. 벧후 1:5-6에 보시면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고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갖추라”고 하셨는데 성도가 온전한 믿음을 갖추려면 ① 교리 지식이 있어야 하고 ② 성경적 사상이 옳아야 하며 ③ 생활이 성경에 부합되어야 하고 ④ 다방면의 은사를 갖추어야 하며 ⑤ 경험과 연단이 많아야 하고 ⑥ 교회법을 알아야 하며 ⑦ 표준 생활을 해야 되고 ⑧ 규모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등 어디에 접하든지 표준 원리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딤후 2:5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에 따라 은혜와 지식과 규모를 구비하여 행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기본 신앙과 성장한 신앙으로 나눌 수 있고 ① 구원받는 믿음(중생한 믿음), ② 핍박을 이기는 믿음(금보다 귀한 신앙), ③ 거룩해지는 믿음(거룩한 신앙), ④ 상급받는 믿음(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⑤ 소원 성취하는 믿음(큰 믿음), ⑥ 지도자의 자격을 구비하는 믿음(온전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셔서 다방면으로 믿음의 본질과 요소를 갖추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7. 신․불신간의 생활 차이 (갈 5:13-26) 목록으로


성경에는 신자와 불신자간에 생활 차이를 말씀하신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의 신자는 성령 충만한 성도를 뜻하고, 불신자는 인간의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신앙과 불신앙의 극을 달리는 경우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따라 사는 자와 육체를 따라 사는 경우입니다. 본문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맺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하셨고,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 등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성도의 생활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성령의 소욕을 갖는 것이고, 헛된 영광에 격동하지 않으며 새사람을 힘입어 의와 빛을 발하는 생활이라(빌 4:22) 하셨고, 불신자의 생활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고 육체의 욕심을 가지며 헛된 영광을 구하여 투기, 격동하고 옛사람대로 살며 어두움과 불법을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신자와 불신자간에 현저한 구별이 없다면 구태여 성도들로 하여금 “빛된 생활을 하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 되리요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15)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의 확실한 특징을 일반인들에게 나타내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확실하게 나타내야 합니다.(창 28:15) 여기에 반하여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고, 피조물들끼리만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생활은 고아가 훌륭한 부모를 만난 것보다 더 행복하고 든든한 일입니다. 성도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느끼지 못하거나 실제적으로 도움을 얻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모시고 사는 생활을 확실하게 시행하고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는 성경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사람의 지식과 자신의 정욕과 유행과 전통을 따라 살지만 성도는 결코 사람따라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고 오직 성경만을 믿음과 본문의 절대표준으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성경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따라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리고 그렇게 생활하는 차이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3. 성도는 영원을 사는 자임을 확실하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큰 배를 탄 사람은 웬만한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좋은 집을 마련해놓은 사람은 자기의 집이 비가 샌다하여 크게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는 현실과 천국을 연결하여 영원을 살고 있는 만큼 그만한 생활의 특징을 나타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을 영원에 연속시켜 여유있게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현실보다 내세를 더 사모하는 것이요, 생과 별세를 꼭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4.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내세나 내세의 심판을 믿지 않습니다. “좋고 나쁜 것이 다 세상 안에서 끝난다”고 믿겠지요.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상받을 대책이 있고, 좋은 일을 하고 희생을 하여도 보상받을 대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선악간에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성도와 그것을 모르는 불신자들과의 생활 차이는 엄청난 격차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와 불신자와의 생활 차이는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과 안 가는 것의 차이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문제는 격차가 미미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밝은 빛을 드러내려면 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생활을 ②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시행하는 생활을 ③ 내세와 연계하여 살고 있는 생활을 ④ 또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생활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성령을 좇아 행함 (갈 5:16-2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령을 좇아 행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하셨고, 또 25절에서도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 하시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곧 성령으로 사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성령으로 살기만 하면 전도를 아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술로 사는 사람도 있고, 도박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아편이나 여색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로 사는 사람은 술에 끌리고, 도박으로 사는 사람은 역시 거기에 끌려서 죄를 짓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의 감화에 끌려 사는 사람인데 성령의 감화와 인도는 어떤 것이며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할 때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역사를 판단할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저희들 스스로가 성령이 충만한 것인지 또는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1)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4:17) 성경을 감동하심으로 기록하게 하신 영이시기 때문에(벧후 1:21) 성경대로 사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뜻이 다른 행사를 따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은 단번에 주신 도리로 충분하여 더 주시지 않는다”하셨기 때문에 성령님도 성경을 가감하거나 성경에 위반되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절대로 성경 이외의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2)성령님은 “성경을 가르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14:26에서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심은 성령님이 성경을 가르침과 배움에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가르치고 있고, 여러분들은 듣고 배우는 중에 계시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3)성령님은 증언하는 역할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 15:26을 보시면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예수님, 진리를) 증거할 것이요” 하셨고, 행 1:8에서도 “성령으로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4)어떤 성도가 “기도를 하신다”고 할 때 기도하는 것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인가?하면 역시 그것도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롬 8:26에서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빌 바를 모르는 성도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해 주신다”하셨으니 기도 못하는 성도를 위하여 대신 기도도 하시는데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도우시지 않겠습니까? 연약을 도우신다는 뜻은 곧 “기도의 연약을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성령을 따르는 일입니다.

5)또 성령님은 성도가 죄를 범하면 근심하시고(엡 4:30) “책망하신다”(요 16: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자신의 연약과 죄 때문에 근심하고 회개한다면 그것이 또한 성령님을 따르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6)성령님은 전도자에게 용기를 주어 파송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빌립에게 광야로 갈 것도 지시하셨고,(행 8:29) 바울사도에게 “비두니아로 가지 말고 마게도니아로 가라”는 지시도 하셨습니다.(행 16:6-7) 그러니까 누가 어디로 전도를 나갔다든지 누가 어느 곳으로 전도를 하러 왔다든지 한 것이 성령님의 지도가 아닐 수 없으며 전도자가 전도의 용기를 갖고 나가는 것은 더욱 성령을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7)그 외에도 성령님은 안위, 보호, 인도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시지만 이 시간에 그것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2. 본문을 통하여 저희들이 알고 싶은 것은 “내가 만일 성령으로 행한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1)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하시므로 육체의 욕심을 안 갖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한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상극이 되어서 성도가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멀리하게 되지만 반대로 육체의 소욕을 부추기면 성령 따라 사는 소욕이 약해진다”고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실적 욕구가 강하거나 육체의 욕심이 많으면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으로 뜨거운 것이 아니고 생활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따름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24절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이 무엇입니까? ① 사람의 육체는 식욕과 정욕과 현실욕을 갖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전혀 불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 생활보다 앞세우거나 삶의 큰 낙으로 알거나 그것을 위하여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 ② 육체의 소욕이란 현실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절 이하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 불결,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을 짓는 것, 분리하는 것,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등이라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무지와 악한 성품으로 죄짓기를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육체와 현실욕이 강하고 범죄에 대한 경계심이 부족하면 역시 성령님의 역사와 거리가 먼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 인도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하지 않는 것이요, 자기와 세상을 작게 보는 것이며 또 모든 정욕적인 죄악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2)성령을 좇아 살면 바른 신앙을 갖게 됩니다. 바른 신앙이 무엇입니까? 성경적으로 믿는 신앙, 신학적으로 말하면 칼빈주의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하셨는데 그 당시에 잘못된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 율법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에 따라 가지 않는 것입니다. 전체와 어느 부분이라도 “저것은 바르지 않다”할 때는 결코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음식 중에 해로운 것은 먹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영이시니까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성령을 좇아 살면 결코 헛된 영광을 구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거나 투기하지 말지니라”하신 것이 그 말씀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이란 자기의 명예와 현실의 영광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격동, 투기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나 꼭 필요한 것은 하되 이것이 내 명예를 위한 일이다”할 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문을 다 배우고 학위를 받으라 할 때 학위는 받지 말아야 하며 혹 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표시내는 의복을 입고 사람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 명예를 내는 것이다”할 때는 즉시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의 사무실이 장관의 사무실 같고 목사가 고급차를 타며 호텔에 드나들어야 권위있는 목사라고 생각하는 기독교계의 병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치하는 낭비를 전도비와 구제비로 돌릴지언정 개인이나 단체가 헛된 영광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여서는 안 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 아홉 가지가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요,

5)마지막으로 성령을 따라 살면 결국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 닮은 사람”, “예수님 생활을 닮은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였느냐?”하는 것은 성경대로 실천하였느냐?하는 뜻이요, 그 결과를 보아서 알 수 있는데 성령을 좇아 행한 자의 결과는 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며 ② 바른 신앙을 소유하며 ③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④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며 ⑤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닮은 자로 나타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9. 천국 백성의 생활 (갈 5:16-26) 목록으로


신앙 고백을 확실하게 하고 세례를 받고 성경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다 성도요, 천국 백성입니다. 여러분들 보고 천국 백성 아닐 수도 있다 한다면 “내가 예수 믿고 교회 생활한 지가 언젠데 그럴 수 있느냐?”하고 노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문제는 천국 백성의 생활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 성경에 성도를 천국 백성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이 많습니다.

1)요 1:12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셨고,

2)요 5:24에서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하셨으며

3)빌 3:20에서 “성도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하셨고,

4)벧전 2:9에서 “오직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하셨고, 또 벧전 2:10까지 계속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시므로써 성도가 천국 시민이 된 것과 또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갔다는 말씀으로 천국 생활을 하고 있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히 6:5)

5)그리고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 전까지는 현실의 육체대로 살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완전한 천국 백성으로 몸까지 변화될 것을 약속하시고(고전 15:51) 그 증표와 방책으로 예수님이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천국 백성과 현실 백성 사이에 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백성 사이에 현저한 생활의 차이가 있어야 할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천국 생활을 잘 하기 위하여 방법을 썼는데 그 방법이 “여기는 천국이다”라는 표어를 벽에 붙여 놓고 천국의 속성이 아닌 것은 없애고 천국에 있는 속성만 행하려고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기쁨, 감사, 찬송은 하되 미움, 방탕, 죄, 싸움은 안 하는 식으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생활 무대를 천국이라고 생각했을 때 천국 백성다운 생활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일본의 어떤 사람은 어떤 유명한 보험 회사에 취직을 하고 싶어서 제일 말단직인 경비원 채용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보험회사에 입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여 그 회사원이 아니면서도 그 회사를 사랑하고, 매일 그 회사의 문전 거리를 청소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장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직원으로 채용하여 정식 사원이 되어 보험 사업에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글에서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회사원은 아니지만 회사원을 사모하고, 회사를 위하여 일하니까 결국은 좋은 사원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위치에서 노력을 잘 하면 더 좋은 천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천국 시민의 생활을 잘 할 것입니까?

1)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소욕을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①성경대로 순종하고 ② 신령한 복을(성령)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육체적 욕심은 멀리 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육체적 욕심이 많으면 아직도 성령의 소욕이 약한 때문으로 아셔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신령한 복을 사모하면 육체적 욕망이 멀어진다는 것을 실감하셔야 합니다. 육체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 상태를 이루기 때문에 신령한 소욕이 강해져야만 육체의 소욕을 누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 마음에 지금 무엇이 가득차 있습니까? 세상과 짝하는 육체 소욕입니까? 아니면 천국 생활에 있는 성령의 소욕입니까? 마땅히 성령의 소욕이 강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강한 자는 육체의 일(천국에 없는 것)을 누르고 이길 수 있으니 육체의 소욕이란 곧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내는 것, 당 짓는 것, 분리하는 것,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천국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의 천국 생활에서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고, 만일 그런 일이 회개로써 근절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라”(21절)고 하신 것입니다. 딤후 3:1-5에 보시면 천국 백성 아닌 속성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와 돈을 사랑하고 자긍, 교만, 훼방하며 부모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무정하고 원통한 감정 풀지 않으며 참소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반하고 팔며(가룟유다를 연상함) 조급하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으니 이같은데서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서는 사람이 천국시민의 생활을 하는 자란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먼저 천국 속성 아닌 것을 없애는데 앞장 서야 할 것이요,

2)천국에 있는 것들만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것은 롬 14:17에서 “성령 안에서의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하셨고, 갈 5:22에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 하셨으니 천국 백성들에게는 이런 속성들로만 가득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육체 ‘살카’는 부패성을 뜻함)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하시므로 육체와 현실의 욕심이 쏙 빠진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행할지언정 헛된 영광(유한한 것, 인간적인 것)을 구하거나 그것을 인하여 격동,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저희들은 천국 백성이란 확신과 긍지를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② 천국 백성은 명분에 있지 않고 생활에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 정욕에 속한 생활을 성령의 인도로 누지르고 천국의 속성되는 생활만 나타내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③ 또 천국에 없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도 다 제해 버리시고 천국에 있는 것만 장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증언한 것입니다.

 

 

제 13 과 형제의 범죄와 자신 (갈 6:1-5) 목록으로


이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형제의 범죄와 자신”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범죄하였을 때 성도된 이웃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성도가 처신하여야 할 일을 순서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절의 “무슨 범죄한 일”일이란 “파랍토마”(παράπτωμα)로서 상습적 또는 고의적 범죄가 아닌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신령한 성도는(너희)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성도”란 하나님의 자녀 또는 천국 백성임을 뜻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는다”함은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심령으로 범죄한 성도를 대하며 그의 잘못을 깨우쳐 그런 범죄가 재연되지 않도록 “은혜롭게 권면하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범죄자를 권면할 때 먼저 자신이 덕을 세우는 입장이 되어야 하고, 또 온유한 심령과 사랑을 쏟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면 권면 받는 성도가 혹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는 권면의 효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약은 먹어줄 때 효력이 나는 것처럼 권면도 받아줄 때 유효하므로 온유한 심령과 사랑과 기도의 준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권면자 자신)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든지 시험을 받지 않을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도 시험을 받았으니까요.(마 4:4, 눅 22:31-32) 이때 예수님은 시험을 이겼으나 베드로는 이기지 못하였습니다.(눅 22:57,60) 따라서 성도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볼 때 자신도 그런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고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2)2절에서 “너희의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짐을 서로 진다”는 뜻은 형제의 연약이나 범죄에 무책임한 자처럼 취하지 말고, 연대적 책임감을 느끼며 형제의 어려움에 동참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의 “짐”이란 말은 “발레”(βάρη)로서 “죄로 인한 압박감”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럴 때에 이웃 성도가 연대적 책임감을 가져준다면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빌 2:4에서도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필자가 광주군 퇴촌면에서 어떤 가정이 상수도 수리하는 일을 하는데 그 이웃 주민 두 사람이 교대로 그 곳에 와서 염려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것을 보고 시골의 흐뭇한 인심을 오래간만에 느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보기 좋은지 속으로 감탄하였습니다.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형제의 범죄에 대하여서도 그와 같은 염려와 봉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하셨으니 이 법은 곧 사랑입니다. 요 13:34, 고전 12:31과 13장과 14:1을 읽고 확인하십시오.

3)3절에서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하신 것은 성도가 항상 자기를 낮추어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는 뜻이요, “된 줄로 생각함”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미치지 못하면서 혹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교만을 갖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스스로 속임”이 되는데 다음 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잘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임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항상 겸손할 뿐 아니라 자기 분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에서 사는 것이 안전한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4)4절에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스스로 속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무지 무능과 연약 등을 살핀다면 “남에게 자랑할 것이 없게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것은 스스로 자만해 볼 수 있지만 그것도 교만의 일종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스스로 교만한 자는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 12:7-9, 벧전 5:5, 삼상 15:23)

5)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하셨으니 이 “짐”은 “폴티온”(φορτίον)으로 “책임”을 뜻한다고 합니다. 모든 성도는 각각 자기가 책임자로써 실천하며 감당해야 할 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발생되는 부조리가 많고 때로는 엄청나게 확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법(자기 책임의 짐을 지지 못하는 것)이 성하면 사랑이 식고(마 25:12) 사랑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볼 때 세상의 황폐를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4 과 착한 일을 함에 대하여 (갈 6:6-1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착한 일을 권장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① 6절에서는 “교역자를 잘 섬기라”하셨고, ② 7-8절은 “값있는 투자(씨뿌림)를 하여 영원한 가치의 것을 소득하라”는 말씀이요, ③ 9-10절은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힘쓸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교역자를 섬김에 대하여(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양육하기 위하여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 또는 교역자를 잘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란 물질적 봉사를 의미하지만 그 보다도 교역자에게 사랑과 격려와 기도와 협력과 유쾌함을 제공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복음사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레위지파에게 생활비를 주라(민 18:24,8) 하셨고, 신약에서는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11),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전 5:17-18, 딤후 2:6)는 말씀과 마 10:11에 보시면 “전도자가 무전여행을 할 때 합당한 집에 가서 머물러 신세를 져도 된다”는 말씀들은 다 복음사역자의 생활 대책을 성도나 교회가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은 특별히 복음사역자를 애착있게 염려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음식이 생겨서 가족들과 나누어 먹으려할 때 복음사역자도 생각하여 같이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또 믿음의 부모를 섬기는 태도인 것입니다. 요즈음 복음사역자들이(특히 도시 교회 목사들) 대우를 잘 받아 호화롭게 산다는 비난을 어떤 이단자의 글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안식교의 “나를 따르라”는 전도지. 남은교회 재림 전도대 발행) 이런 경우에 사역자들이 지나친 사치를 삼가야 하겠지만 바울사도는 고전 9:11에서 “복음사역자들이 신령한 것으로 뿌렸은즉 육신적인 것으로 거둠이 과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적 신령한 은혜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무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덕있는 성도가 되려면 교역자 섬기는 비용에 인색함을 나타내지 말아야 합니다.(왕상 17:8-16)

2. 값진 것을 심으라 하심.(7-8절)

1)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이치는 잘 아는 사실입니다. 누가 부정한 방법으로 소득을 거둔다 하여도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시며 속아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현세와 내세를 연결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처리하시는 분입니다.

2)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뜻은 육신의 안일이나 현세의 영달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 당연히 현실적 소득을 거두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 것이기 때문에 썩어질 육체처럼 속히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란 성령을 따라 산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갈 5:16,18) 그렇게 살면 영생도 얻고 하늘의 상급도 받을 것이니 성령을 다라 살았은즉 성령으로부터 받는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자신이 영원의 소득을 위하여 심고 노력하는지 아니면 육체적 열매를 위하여 심고 노력하는지를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어야만 영원의 소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선을 행함에 대하여(9-10절)

1)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선”은 착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의 “선”은 두 가지 의미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믿음을 지켜야 하고, 또 율법주의와 싸워야 하는 신앙적 선이고, 또 한 가지는 이웃에 사랑을 베푸는 선입니다.(빌 1:6, 행 10:38)

2)이 선을 행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때가 되면 그 수고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성취의 때는 멀고 피곤함이 있을지라도 인내와 기도로 잘 극복하면 결국 때가 되어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몽고를 통일한 원나라의 태조 징기스칸(성길사한)의 후손 “다마엔”이 전쟁에 패전하여 웅덩이에 빠졌을 때 거의 죽게 되었지만 같은 웅덩이에 있는 개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3)“선을 행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가족은 형제요, 하나님의 권속이므로 선행과 봉사의 우선적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15 과 결론의 말씀 (갈 6:11-18) 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갈라디아서의 결론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1절에서는 “바울사도 자신의 서명을 보라”하셨고, ② 12-13절에서는 “외식자들의 유혹을 피하라” 하셨으며 ③ 14절에서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심”이요, ④ 15절에서는 “의식보다 변화가 중요함”을 말씀하셨고, ⑤ 17절에서는 “바울을 괴롭게 하지 말라” 하셨으며 ⑥ 16절과 18절은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서명을 보라”하심.(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1)이 말씀은 바울이 연로하셨기 때문에 제자로 하여금 대필하게 하시고, 편지 말미에 친히 큰 글자로 서명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내용은 빌레몬서와 베드로전서에도 나타나 있습니다.(몬 19, 벧전 5:12)

2)큰 글자로 쓰신 것은 대게 눈이 어두운 분들이 잘 보일 수 있는 상태에서 쓰시기 때문에 큰 길씨로 기록하실 수 있습니다.

3)또 바울의 친필이 중요한 것은 바울사도가 보낸 서신이어야만 영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2:10, 엡 3:3)

2. “외식자들의 유혹을 피하라”하심.(12-13절)

1)12절의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는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로서 신앙의 타협자들입니다. 갈 5:6이나 6:15에 보시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할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협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일단 할례를 받으면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이 할례받은 자를 유대주의자로 착각하여 핍박을 안 한다면 이를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식으로 핍박을 면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신사참배의 핍박이 있을 때 속으로는 반대하나 겉으로는 핍박이 심하니까 따라 주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를 핍박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성화(사진)에 침을 뱉으라”할 때 그 성화(사진)가 진짜 사진이 아니라 하여 침을 뱉는 자도 있을 것이고, 정신적으로 굽히지 않기 위하여 침을 뱉지 않고 핍박을 받는 신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참 신자이겠지요.

2)또 13절에서는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지도 못하면서 할례를 받았다”는 율법의 작은 순종을 내세우면서 자기들이 선민적 유대인이 된 듯이 자랑하기 위하여 할례를 권장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이것은 다 합당치 않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외식적으로 부당한 육체의 외식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미 할례받은 육체의 흔적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려는 것은 다 옳은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진실하여야 하고 옳은 것이면 따르고 그른 것이면 깨끗이 반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심”에 대하여(14절)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①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뜻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이상 더 큰 것이 없고, 또 그 사건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②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성도)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뜻에는 세상이 성도에 대하여 죽고 없어진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세상과 결별하신 것처럼 성도에게도 이 세상은 없어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을 없는 것으로 여길 만큼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반대로 “성도들도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 하셨으니 이는 성도에게 세상이 죽어 없어짐 같이 성도들도 세상이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별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 설명을 드린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주인이라도 그리스도께서 그 죄악 세상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셨고, 또 예수님이 세상 권세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는 세상을 대하여 같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 일을 갖고 자랑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새생명을 누리는 것만 중요한 것이므로 그 십자가의 공로와 그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 받은 것(변화된 자기) 만을 자랑할 따름이란 것입니다.(15절 하반) 따라서 할례를 받고 안 받은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고, 또 자기가 세상에서 누리던 어떤 부귀, 권세, 명예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못되며 오직 자기를 구속하신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4. 의식보다 변화가 중요함을 말씀하심.(15절)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구약 시대에 계명을 순종할 때 필요하였고, 무할례는 복음을 믿는 성도가 율법주의를 따르지 않을 때 필요하였지만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이유는 의식이 실제에 비할 때 그림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받아 변화된 인격 즉 복음적 신앙을 소유한 인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적 신앙을 소유한 성도는 말씀과 기도를 더 정진하여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닮는데까지 변화를 이룩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바울을 괴롭게 하지 말라”하심.(17절)

17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영접함과 그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무수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그 사실의 일부분이 고후 11:23-29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셨다”는 것은 핍박으로 인하여 매맞은 상처와 고문 당한 흔적일 것입니다. 핍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사역자에게 참 사도가 아니라는 등, 거짓말을 한다는 등, 겁약하다는 등의 비난은 가혹한 것이었으니 그 이상의 괴로움을 받지 않아야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핍박의 분량으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6. “축복”입니다.(16,18절)

1)“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교리적 신앙에 바로 선 상태에서 선을 행하는 성도를 뜻하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또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선민이 아닌, 거듭난 성도, 복음적 신앙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실한 성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축복하신 것이요,

2)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절)하신 것은 은혜의 주가 예수님이시며 은혜를 받을 대상은 형제들 즉 믿음의 권속들이고, 은혜받을 부분은 각 성도의 심령(육체 또는 현실과 대조됨)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입니다. 이 복이 사도의 선포로 전달될 것을 믿고 선포하신 것이며 꼭 그렇게 되기를 확신하시는 뜻으로 “아멘”하셨습니다. 결국 이 축복은 기도가 아닌 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보충 10. 사람을 보는 표준 (갈 6:1-5) 목록으로


삼상 16:7을 보시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는 표준”에서 본문 내용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하실 것입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사람의 됨됨이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웃의 형제가 어떤 잘못을 하였을 때 어떻게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사람됨을 나타낸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 잘못을 했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는 사람, 또 그의 잘못을 잘 타일러 바로 잡아 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도 그런 시험에 들까하여 조심하는 사람, 또 두려워하는 사람, 짐을 서로 지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성취하는 사람, 자신이 된 척하고 나서지 않는 사람, 자기를 살피며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당하게 성숙한 성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엡 4:13에 보시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여지도록 하라”하셨고, 벧후 1:6에서는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와 경건을, 또 거기에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흡족하여야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고 평가한다”는 생각을 떠나서 하나님이 나 자신을 보시거나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내가 무엇을 보여야 점수를 얻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자집에서 일군을 선택하려면 무조건 밥을 한상 차려준다고 합니다. 밥을 많이 먹는 일군이 힘을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당을 쓸라고 시켜본다고 합니다. 마당을 얼마나 시원스럽게 또 깨끗이 쓰느냐에 따라서 일을 잘 하는 것과 분명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말 잘 타는 기술은 계곡을 잘 타야 하고, 뱃사공의 기술은 풍랑을 잘 적응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중심을 보십니다. 또 믿음의 분량도 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사람보는 표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1. 진실성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점은 숨기려 하고 장점은 나타내려고 한다면 벌써 진실에 금이 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언행일치에도 힘을 써야 하고 자신의 부끄러운 점에 대하여서도 속히 시인할 줄 아는 진실성까지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진실과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진실이 부족하면 하나님께 대한 진실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믿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엡 5:9에서 “너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진실함에 있다” 하셨고, 벧후 3:1에서는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라”하셨으며 계 17:14에서는 “진실한 자들이 승리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보실 때 마음의 진실성부터 보실 것입니다.

2. 믿음의 분량을 보실 것입니다. 믿음에 분량이 있습니다. 롬 12:3과 마 15:28과 마 16:8을 보십시오. “믿음의 분량이 많다 적다”하셨습니다. 믿음이 많은 자는 칭찬을 하셨고, 믿음이 적은 자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믿음의 분량을 어떻게 산출합니까? 재산은 동산, 부동산, 거기에 매월 수입을 합하면 되겠지요? 믿음은 성경 지식, 성경 실천, 예수님 닮은 인격, 거기에 헌신과 충성을 합하면 분량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인물과 키, 학벌과 재산, 직장과 가문을 보지만 하나님은 제일 먼저 진실성과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3. 성격을 보실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나쁘면 생활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잠 24:12에서도 하나님은 “마음을 저울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대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옛날에 며느리를 구할 때 “3씨가 있어야 좋다”고 하였습니다. 맵시, 마음씨, 솜씨입니다. 거기에 말씨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지만 옛날 며느리들은 3년 벙어리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말씨까지는 크게 따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마음씨 성격이 좋아야 합니다. 벧전 1:4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하셨고, 마 11:29에서 “온유와 겸손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만, 투기, 훼방, 욕심, 포악, 조급, 고집”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외모를 가꾸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가꾸고 마음의 변화를 이룩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성격은 진리 실천의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그것이 없으면 외식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말씀 실천하는 생활을 보실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성격과 정신만 좋으면 생활도 잘 할 것입니다. 삼상 2:3에서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행동에는 계명 실천, 덕을 세우는 말(약 2:2,6,8, 전 5:2) 규모있는 생활(롬 2:19, 살전 5:14, 고전 13:5, 14:40) 그리고 근면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규모있는 생활 속에는 예절과 준법과 절제와 질서가 포함되고 근면성에는 시간을 아끼는 성실함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것이나 경건한 성도가 성도를 보는 표준은 거의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성과 믿음 분량과 성격과 말씀 실천하는 생활에 합격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자기를 살피라 (갈 6: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사람의 범죄가 나타났을 때 “자신을 돌아보라” 하셨고, 또 “스스로 되지 못하고 된 척 하지는 않는지”, 또 4-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고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11:28에서는 “성만찬을 대할 때도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히 10:22) 또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빌 1:27)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있는지(벧전 5:3)”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고후 13:5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심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이 없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교인들은 교역자 평가를 잘 합니다. 칭찬하는 경우와 좋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표준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역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과의 인간적 관계를 표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관계만 좋으면 제일로 아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고,(갈 1:10)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하시고(요 13:13) 제자들이 그 선생같으면 족할 것이라(마 10:25)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예수님을 닮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반성하고 살펴야 하겠습니까? 반성은 회개의 기초입니다.

1. 믿음생활의 목적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1)세례요한은 외치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하셨습니다. 광야에 나간 사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가면 안 될 것입니다. 당연히 선지자를 보려고 나가야 하는데 세례요한 보다 세례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려하지 않고 떡을 보고 병고침을 보며 그의 이적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는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나오실 때도 사람을 보고 사람의 방법을 모방하러 나오지 마시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히러 나오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자신의 영광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그리고 구원은 약속대로 주시고 상급은 공의롭게 정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표와 포부를 내세우지 마시고, 환경주시는대로 성실하게 자기의 맡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맡은 일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주신 일과 개인적 은사로 주신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신앙생활을 염려하지 않고 교회 부흥이나 교회의 재정이나 교역자의 문제를 더 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염려할 수 있는 성도이면 자신이 교회 부흥에 앞장 서든지 재정을 충당하든지 더 나가서는 교역자가 되든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일에 속수 무책이면서 어찌 다른 사람의 일을 문제시 하겠습니까? 성도의 생활은 누구를 판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 생활(자기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에 힘쓰며 순종하고 받드는데 목적을 두셔야 할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지식을 아는 문제입니다. 어떤 성도는 “은혜를 받았다”하면서 금방 성숙한 신앙인이 된 줄 아는 경우가 있고, 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의 지위에 오르면 역시 성숙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성숙했다”는 체험을 열 번 스무 번 거듭해야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저도 20대부터 교역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남보다 잘한다”는 평가를 스스로 하면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30세에 목사가 된 후 교회의 정치가 어렵고 설교가 어려우며 대인 관계 등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년 만에 “목회가 어렵다는 것” 한 가지를 알았으니 성경 66권을 언제 배웁니까? 30대에 미련함을 후회했고, 50대에는 40대의 미련함을 탄식하였는데 이제 일반 목회를 중지하고 60대에 들어서서는 목회의 기회는 떠나 버리고, “신앙생활을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하는구나”하는 것을 눈뜨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성 교회의 목회를 다 끝내고 나서야 새로운 틀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틀은 간단히 요약하면 진리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은 사랑과 자 와 봉사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와 행정을 간소화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성도나 직분자의 자격으로 권위 행사를 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이기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성경 지식과 신앙 생활의 지식을 잘 조화시켜서 많이 알고 있는 지를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신앙생활의 표준을 성경에 두지 않고, 이적이나 체험이나 사람의 수나 현세적 기복에 두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의 노선을 사람 수에 둔다면 항상 적은 수를 택하여야 합니다.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6세기에 장로교회의 창시자 칼빈 선생님은 엄격한 목회를 하셨기 때문에 대중 목회가 아닌 형편에서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택한 백성에게만 복음이 수용된다”고 전하니까 전도에 지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성경과 생활 실천 문제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평범한 계명은 잘 지킵니다. 도적질, 간음, 탐심 같은 계명은 많이 시행합니다. 그런데 효도 계명은 칭찬할 만큼 지키지 못합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고 약속을 하셨어도 성도 중에 그 계명을 코웃음치며 부모를 원망하거나 부모가 속히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성도들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십일조 계명은 많이 지킵니다. “십분의 일을 내면 더 많이 주신다”하셨으므로 타산에 맞으니까 잘 내는 모양입니다. 만원 밑천을 들여서 밑천의 몇 배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은 잘 안 지킵니다. 자식 키우는 고생을 하기 싫으니까 그렇겠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천부께서 아시나니라....너희는 들풀보다 귀하지 않으냐”하셨는데도 역시 안 믿으니까 시행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고 되로 주면 말로 받게 하실 것이라”(행 20:35, 눅 6:38)하셨는데도 주기를 좋아하지 못하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랑 실천이 가장 어렵고 사랑이 계명 실천의 완성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반드시 실천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점건하시고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4. 교회 생활에 대한 반성입니다.

1)교회는 주님의 몸이니까 성도의 단체를 주님 사랑하듯 하셔야 할 것입니다. 격려와 칭찬과 사랑과 친교도 하여야 하지만 좋은 믿음을 갖도록 교육하고 연단을 주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2)교회에 드리는 물질은 헌금이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은 헌신인데 이 헌금과 헌신을 사명적으로 힘쓰셔야 합니다. 교회는 잡종 헌금이 많기 때문에 10의 2조를 떼어서 10의 1은 십일조로 바치고, 10의 1은 다른 봉사 헌금으로 사용하는 습관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물질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이 물질 봉사는 사랑과 친교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쓰는 헌금이 진정 주님께 바치는 것이고, 자신이 쓰는 헌금(건축 헌금 같은 것)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3)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역자와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교역자는 “교회 부흥시키라고 생활비 주면서 데려 왔는데 왜 교회를 부흥시키지 않나”하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느 교인도 자기 돈으로 교역자 생활비 준 사람이 없고, 또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40일 금식기도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려 하다가 죽은 최OO 목사님도 계십니다. 또 “교역자는 예배 인도하라고 모셨는데 왜 예배를 자주 안 드리고 또 간단히 드리지”하는 생각을 하셔도 안됩니다. 예배는 혼자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또 긴 예배만 드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를 길게 하면 예배 시간도 길어지겠지요. 반대로 긴 예배를 싫어 하기도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교역자의 특권이 아닙니다. 성도 스스로 말씀 연구하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회에 목사를 모신 가장 큰 이유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생활의 방도를 지도하는데 있다는 것”을 꼭 아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교회의 생활이 꼭 자신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며 또 교회 생활에 이끌려야 하고, 기쁨과 만족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직접 받아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 생활에 재미를 붙이려면 적응력도 잘 키워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네 가지 반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목적 반성 ② 지식 반성 ③ 실천 반성 ④ 교회 생활의 만족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설교보충 1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요 13:34) 그 사랑 실천의 방도로써 “짐을 서로 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이 “짐”이란 말은 “발레”(βάρη)란 말로써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짐이 아니고, 고달프게 져야 하는 무거운 짐인데 이런 짐을 “서로 지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옛날 사람들은 시골 장날이 되면 20,30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다녔습니다. 한 사람은 깨를 팔아서 소금을 사와야 하고, 한 사람은 쌀을 팔아서 옷감을 사와야 합니다. 소금과 쌀은 무겁고 깨와 옷감은 가볍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갈 때 무겁고 한 사람은 올 때 무겁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데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쌀을 지고 가는 사람에게 “당신 쉬는 시간에 내가 져 줄 터이니 가면서 쉬자”고 하였습니다. 짐지던 사람은 짐만 벗으면 걸어가도 충분히 휴식이 됩니다. 장에 가서 각각 물건을 교환하고, 생활이 조금 나은 사람이 점심을 샀습니다. 점심 값을 내는 것이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이제 올 때는 소금 산 사람이 무거운 짐을 가졌기 때문에 역시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 미덕이 오늘 날에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혹 두메 산골 마을에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세계, 즉 “짐을 서로 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는 세계를 사모하고 꼭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이렇게 짐을 서로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인데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서로 돕는 “사랑의 법”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하신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인데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되는 것인줄 알면서도 성취하는데는 힘있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눅 10:30 이하에 보시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와서 영생 얻는 진리를 묻고, 계명의 강령이 사랑인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실천으로 영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랑의 대상을 물었고, 사랑의 대상은 그의 이웃인데 바로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난 이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사장도 보고만 지나갔고,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하시므로 그 당시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람들이 이방인 만도 못한 것을 지적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두 가지 반성할 소재를 파악하게 되는데 하나는 사랑의 대상인 우리의 이웃을 발견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사랑을 지식과 구호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취하는 시행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야고보 선생님도 지적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약 2:16-17)

2. 짐을 지는 문제와 관련된 말씀은 서로 져 주어야 할 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죄짐을 서로 져야 한다”하시고,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본문 1절에 보시면 “사람에게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 “사람”이란 성도를 밝힌 말씀이 아닌 일반적 대상을 말씀하신 것이요, ② “범죄”란 말씀이 “파랍토마”(παράπτωμα)로써 상습적 고의적 범죄가 아닌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식하고 연약하여 범하는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도 그들이 알지 못하여 범한 것이라”(눅 23:34)하시고, 예수님이 용서를 빈 사실이 있는데 “파랍토마”란 성격의 죄가 부족하고 몰라서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용서 받아 마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런 죄를 자주 범할 것입니다.

2)이런 범죄가 나타났을 때 “그의 짐”을 서로 지는 방법에 대하여 본문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παράπτωμα적인 죄가 드러났을 때 신령한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① 온유한 심령으로.....자기 마음에 온유한 심령을 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하고 얼굴을 붉히거나 분을 낼 것이 아니라 아주 차분한 마음을 가wu야 할 것이요, ② “그를 바로 잡아 주라”고 하셨습니다. 범죄를 축소시키고 나가서는 근절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여 잘 권면하고 인도해주므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도 자기 할 말을 다하면 화해하려던 것이 이혼으로 달려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형제의 잘못을 지도함에 있어서 불을 끈다고 하다가 더 붙게 하는 것처럼 범죄나 싸움을 더 확대시키는 것을 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③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요, ④ 그리고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짐도 서로 지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이 바르게 행하지 못하면 그 부모가 교육의 불실을 반성하면서 고충을 당하는 것처럼 이웃의 잘못도 역시 그런 뜻으로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들은 흉악범이면서 그 책임을 사회에 돌렸습니다. 그 사건을 처음 알았을 때 엄벌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사회에서 맛보지 못하던 인간의 친절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뉘우치고 “죽을 때 자기의 눈과 장기를 기증한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선대하고 죄짐을 나누어 져 줄 때 감동과 변화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입니다. 삼하 19:6에 보시면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나이다”란 말씀이 있지요.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은 미운 죄인을 사랑하여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또 롬 5:8에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셨고, 요일 4:10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짐을 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짐을 근본적으로 져주신 것이고, 우리는 사랑과 도덕적 차원에서 죄짐을 서로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3-5절에서 항상 겸손하고 자기의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입장을 흐트러뜨리면서(자기 앞을 못 꾸리면서) 이웃 사랑의 법만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본문 3,4절은 겸손을 교훈하셨습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하셨고, 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면 자기가 잘한 것이라도 남에게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하시므로 겸손을 교훈하셨고,

2)“각각 자기 짐을 지라”하셨는데 이 짐의 뜻은 “폴리온”(φορτίον)이란 말로써 (남이 주는 짐이 아니고) 자기 책임상의 짐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짐을 지고 묵묵히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법을 알면서도 성취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짐을 서로 지는 것이고 특히 형제의 죄짐을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하며 겸손과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세 가지 교훈 (갈 6:6-8)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세 가지를 교훈하셨습니다. ① 교역자를 섬기라는 교훈이요,(6절) ②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요,(7절) ③ 성령을 위하여 심으라는 말씀입니다.(7-8절)

1. 교역자를 섬김에 대하여(6절)

교역자는 믿음의 교사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위한 부모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존경하고 잘 섬겨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역자를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교역자도 자기를 섬기는 교인들이나 자기의 설교를 듣고 “아멘”하는 성도들을 자기의 가족처럼 생각하여 살피고 기도할 것입니다. 성도가 교역자를 잘 섬기면 마치 목동의 살핌을 받은 양이 목동에게 젖을 많이 생산해 주는 것과 같이 은혜를 더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사랑의 관계, 신뢰의 관계, 존경과 사모의 대상을 삼아 은혜를 받는다면 큰 복을 받을 줄로 믿는 것입니다.

2.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7절)

이 말씀은 성도가 잘못을 알면서도 욕심과 교만에 끌려 자기의 양심을 덮어 누를 때 범하는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자기의 양심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속임수가 많은 세상에서 자신에게까지 속이고 속는다면 크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갈 6:3에서는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것”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약 1:23에서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요, 또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30만 되면 성인이고 아는 것이 많지만 40대에 30대를 비교해보고, 50대에 40대를 비교하면 그 때 그 시절에 너무 몰랐고, 부끄러운 과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깨달으려면 오래 살아봐야 합니다. 따라서 “항상 섰다”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죽하면 바울사도께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고백을 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하면 이 사람은 바른 길을 두고 딴 길로 가는 사람과 같은 것이니 그의 어리석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자신을 된 줄로 착각하거나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자”가 되어 스스로 속이는 불행에 빠지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육체를 위하여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 영생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7-8절)

1)하나님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심고 가꾸어 거둔 분도 계시겠고, 또 거둘 분도 계시겠지만 일단 하나님은 공력대로 주시고, 종류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뿌리면 뿌린 씨의 종류대로 싹이 나고 열매가 맺지요. 또 씨의 분량이 많으면 많이 뿌린 증거가 되겠지요.(고후 9:6) 좋은 씨에는 좋은 열매, 가라지에는 가라지 열매, 가시 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는 것처럼(마 7:16) 사람도 선한 마음에서 선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고(마 12:35) 또 농부의 공력에 따라 100배, 60배, 30배 씩 거두는 것도 사실입니다.(마 13:23) 이른 곡식은 일찍 거두지만 값이 싸고, 인삼은 6,7년 만에 거두는 대신 그 값이 비싼 것도 역시 종류와 공력따라 대가를 주시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때(1919) 학살에 쫓기던 유대인이 독일의 공군 병사를 찾아가서 살 길을 애원하자 그를 비행기에 태워 국경 밖으로 넘겨 준 일이 있었는데 10여 년 후에(1937) 2차 대전이 일어나서 그 비행사가 영국 군에게 포로된 후 부상을 입고 영국 병원에 가서 대 수술을 받았는데 그의 생명을 살려 준 의사가 바로 그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주는 예는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한국전쟁 전에 어떤 가난한 여인이 중한 병에 걸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즉 중한 병이라 많은 치료비가 필요하였는데 그 때 그 의사가 아이의 생명을 불쌍히 여겨서 무료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 후 동란이 나서 그 의사가 공산당에게 잡혀 꼭 죽어야 할 현장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의사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을 해 주어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증언해 준 사람을 알아보니 자기가 얼마 전에 무료로 치료해 준 어린이의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선을 심어 선을 거두고 덕을 심어 덕을 거두며 의와 사랑과 친절을 심어 역시 그런 것을 거두고 용서를 심어 용서를 받는 원리를 교훈해 주는 예인 것입니다.

2)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의 수단에 넘어 가는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감찰하여 부정이나 속임수를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으며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은밀한 죄를 범했다”고 가상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르실 것처럼 생각하고 회개를 늦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업신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히 4:13을 보시면 “만물이 그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속이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퍽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고후 5:10을 보시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셨고, 또 시 139:1에서도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결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시 138:6)

3)따라서 무엇을 심고 거두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땅히 생산성 있고 영원한 것을 심고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육체적인 것을 심어 썩어질 것을 거두는 자와 신령한 것을 심어 영생(신령한 것)을 거두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육체와 현실을 위하여 노력하면 역시 현실적인 것들을 거둘 것이나 그것은 얼마 후에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을 위하여 즉 성령 충만한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신령하고 영원한 것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자기 보다 못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늘 아내를 멸시하다가 내쫓고 아주 공부 많이 한 여자한테 다시 장가를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평안히 살면서 자식을 여럿 낳았는데 그만 그 남자가 결핵에 걸려서 시름 시름 앓게 되었고, 치료비 등으로 재산을 다 없애자 공부 많이 한 처가 도망을 감으로 행복이 끝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육신과 세상만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면 평생의 그 생활은 썩어질 육체와 세상 살이를 위하여 염려만 하다가 무가치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고로 성도는 육체와 현실을 위하여 썩을 것에만 공력을 들이지 말고 마땅히 영원히 있을 것과 영원히 누릴 것을 위하여 공력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