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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과 서론 (엡 1:1~2) 4 바로가기

제2과 신령한 복에 대한 말씀 (엡 1:3~14) 6 바로가기

제3과 바울의 기도와 증언 (엡 1:15~23) 9 바로가기

     설교보충 1. 교회의 3요소 (엡 1:1~2) 1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바울의 감사와 기도 (엡 1:15~19) 14 바로가기

제4과 신령한 복의 원리 (엡 2:1~10) 16 바로가기

제5과 구원과 연합 (엡 2:11~22) 18 바로가기

제6과 이방인 구원 섭리 (엡 3:1~13) 21 바로가기

제7과 바울의 소원과 기도 (엡 3:14~21) 24 바로가기

제8과 연합을 권하심 (엡 4:1~6) 26 바로가기

제9과 그리스도의 선물 (엡 4:7~16) 28 바로가기

제10과 새 사람 되는 변화 (엡 4:17~32) 31 바로가기

     설교보충 3. 하나 되는 뜻 (엡 4:1~6) 34 바로가기

     설교보충 4. 개척정신 (엡 4:11~12) 36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신앙의 성숙인 (엡 4:13~15) 38 바로가기

     설교보충 6. 변화된 생활 (엡 4:21~32) 40 바로가기

제11과 사랑을 알고 행할 것 (엡 5:1~9) 42 바로가기

제12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21) 44 바로가기

제13과 두 결합의 공통점 (엡 5:22~33) 46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지혜로운 생활 (엡 5:15~18) 48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세월을 아낍시다 (엡 5:16)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9. (감사설교)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엡 5:18~21) 52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신령한 노래 (엡 5:19~20) 54 바로가기

제14과 혈육관계와 주종관계 (엡 6:1~9) 56 바로가기

제15과 권면과 결론 (엡 6:10~24) 58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영적 투사가 됩시다 (엡 6:10~20) 61 바로가기

 

 

제 1 과 서론 (엡 1:1~2) 목록으로


에베소서를 공부하실 때 먼저 <기독교신앙백과> p.636에 소개된 개론을 읽으신 후 <성경백과>(아가페 출판)에 수록된 에베소에 대한 글을 읽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옥중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여 두기고로 하여금 에베소 교회에 전달한 근거는 엡 6:20~22에 나타나 있습니다. 서신의 격식 상 서문 초두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1절) 복을 전달한 것(2절)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① 발신자는 바울이고, ②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며, ③ 복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1. 발신자(1절 전반)

1)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자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도 보시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이라” 하셨고, 9절에서도 “그 기쁘심을 따라… 예정하셨다” 하신 것처럼 바울을 사도로 삼으신 것도 인간의 소원이나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과 방법에 의하였음을 말씀하신 것이요,

2)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란 종속관계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사도의 직분 및 모든 것이 주 예수님께 속한 것이란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맡겨진 생명이고 사명인 것입니다(롬 14:7~8, 빌 1:21~22).

2. 수신자(1절 하반)

1)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신다” 하셨으니 “성도들”이란 보편적 호칭이고,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은 믿음의 요소를 확실하게 소유한 신분을 지칭한 것입니다. 두 종류가 다 성도임에는 틀림없으나 후자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에서 더 큰 사명을 요구하신 뜻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딤후 3:16)이 서신으로 전달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두로만 전달 수단을 삼지 말고 서신, 문서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은혜와 평강의 전달(2절)

1) 은혜와 평강의 근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성령님도 해당되지만 성령님은 뜻을 정하신 하나님과 방도를 제공하신 예수님에 비할 때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시는데 그 역할을 성령님 안에서 바울이 대신하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은 줄 압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 얼마나 장엄하고 친밀한 의미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란 뜻도 왕이란 개념과 인간으로 다가오신 친밀성과 구원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나타내주신 줄 압니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받는 줄 아셔야 합니다.

2) “은혜와 평강”이란 복의 의미를 나타낸 말씀으로 은혜는 선물이란 점과 구원을 포함한 광범위한 뜻으로 일컫고 평강은 영육간의 자유를 함축한 의미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이 귀한 복을 멀리 로마 감옥에 계신 바울 사도가 계신 그 자리에서 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축복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저희 성도들에게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축복은 기도의 형식이 아닌 전달 선포의 형식인데 여기에 대한 것은 고후 13:13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중보를 힘입은 기도가 아닌 축도(전달, 선포)가 된 것은 주님이 사도를 자기의 사람으로 직접 쓰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예수의 사도, 1절; 마 10:12~13). 오늘의 목사님들의 축도는 복음(축복) 전달자의 입장에서 선포하는 것으로 사도의 권위와 꼭 같다고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2 과 신령한 복에 대한 말씀 (엡 1:3~14) 목록으로


본문의 대의는 3절 중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이 신령한 복의 근원과 성질과 가치에 대하여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깨우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전체 내용이 12개 절인데 매 절마다 신령한 복의 의미를 한 마디씩 설명하셨고, 3절에서 신령한 복을 주시는 주체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전제한 다음 신령한 복을 주시는 동기와 대상과 방편과 목적을 말씀하신 후 성도가 해야 할 사명이 감사와 찬송이라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필자는 각 절에 나타난 내용을 6대목으로 나누어 대목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령한 복의 주체(3절)

“찬송하리로다(결론에 속하는 말씀을 서두에 강조하여 선포하신 뜻).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 하시므로 하나님이 신령한 복을 주신 주체이심을 나타내셨고, 그분은 우리(성도를 총칭한 뜻)의 주 예수님의 아버지도 되시고 곧 성도의 아버지도 되시는 것입니다(요 1:12).

2. 신령한 복을 주신 동기입니다(5, 7, 9, 11절).

11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분이라” 하셨고, 5, 9절에서는 “기쁘신 뜻대로 뜻을 세워 예정(계획)하시는 분이라” 하셨으며, 7절에서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하시므로 피조물들에게 베푸실 은혜가 (무한히) 풍성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신령한 복)를 비롯하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의 주이시고, 그것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속성 때문임을 말씀하셨습니다(사1:2,요3:16). 따라서 신령한 복을 주신 동기는 은혜의 풍성함과 사랑의 속성과 원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것입니다.

3. 이 복을 주시는 대상입니다(4절).

이 대상은 4절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시므로 하나님이 만물 창조 이전에 성자 예수님과 뜻을 합하여 장차 세상에 태어날 자들 중의 일부를 선택해 놓으셨다가 때가 된즉(9절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란 모든 택한 백성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구원하실 시기를 정하시고 그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처럼(전 3:1~2, 행 17:26) 구원의 대상과 시기도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 신령한 복의 의미를 매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 이 신령한 복은 3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입니다. 그런고로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복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요 4:24). 이 의미는 “프뉴마”로써 육체적 현실을 초월하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령하다”는 말은 “프뉴마티코스”로 “영적 또는 신령적” 의미를 가지므로, 신령한 복이란 육체를 초월하여 누리는 복, 심령으로 누리는 복, 천국에 있는 복, 영원히 누리는 복을 뜻합니다. 성도가 현실을 떠나면 신령한 복만 누리는 세계로 들어가겠지만 현실에 살고 있어도 주님과 함께 하거나 영원히 존속되는 복을 누리는 것은 다 신령한 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복,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영적 평강의 복들이 다 신령한 복에 속하는 것입니다.

2)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4절). ‘거룩’이란 부패의 때를 씻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죄의 성격을 갖고는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계 21:27). 계 19:8에 “깨끗한 세마포를 입는다”는 말씀도 역시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죄책을 면하는 의도 필요하고, 또 말씀과 기도로 깨끗케 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딤전 4:5). 인간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사랑 불실천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시면 “우리로 사랑 안에서(사랑을 실천함으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신 것이며, 이 거룩을 이루시는 것은 신령 복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 5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시는 은혜요,

4) 7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의 은혜”이며

5) 8절에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지혜와 총명은 하나님 아는 지식을 뜻함)이며,

6) 9절에서는 “그의 뜻의 비밀(구원 경륜)을 알리시는 것”이니, 이는 지혜 총명과 같은 것입니다.

7) 10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인데, 이 뜻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땅에 있는 것은 성도나 교회를 뜻하고, 하늘에 있는 것은 천국과 천국의 백성들을 의미하는데, 땅에 있는 인간이 신령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늘의 것들과 한 권속이 될 수 없겠지만 신령한 은혜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는 천국의 모든 식구들과 한 가지로 취급되고 연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미국 백성과 하나가 되려면 미국 시민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땅에 있는 성도가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가있는 백성들과 꼭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 11절에서 “그 안에서 기업이 되는 은혜”인데, 이 뜻은 “예수님 안에서” 또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으뜸 되는 목적의 대상(기업의 뜻)이 되는 은혜요,

9) 13~14절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을 쳐서 구속의 은혜와 기업에 보증이 되시는 은혜”입니다. 13절은 “예수님 안에서(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음 가진 사실을 확신케 하시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성령”은 예수님이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가 오순절 때에 강림하신 성령님이란 뜻이고(행 1:5, 2:1~2), “인을 치셨다”는 뜻은 마음에 확신이 생기도록 감동하신 은혜입니다. 14절의 “이는(13절의 인치심) 우리의 기업(성도가 누릴 천국의 복)에 보증이 되어주신 것이라”는 뜻은 믿음의 인치심이 곧 천국 기업의 확신을 증명해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지명 받은 택자에 한하여 구속하셨다는 뜻입니다(요 17:9, 12).

이상과 같이 신령한 은혜를 구원의 복에 근거한 여러 가지 은혜로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5. 이런 은혜를 주시는 방편(절차)에 관한 것입니다.

1) 6절에 보시면 “사랑하시는 자(예수님) 안에서 거저주시는 방법으로 허락하신다” 하셨고,

2)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 라는 뜻) 주신다”는 말씀을 5, 7, 9, 12, 13절에서 말씀하셨으며,

3) “미리 예정하신 뜻(때가 찬 경륜)을 힘입게 하셨다”는 말씀을 9, 12절에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혜의 방편은 예정과 선택과 십자가의 중보입니다.

6. 마지막으로 이런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3절과 6절과 12절과 14절에서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이라” 하시므로 하나님은 구원 받은 백성들의 감사의 뜻과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일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신즉 영광받으실 일외에 다른 필요를 느끼시지 않습니다(롬11:35). 그래서 감사와 찬양만으로 족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제 3 과 바울의 기도와 증언 (엡 1:15~23) 목록으로


본문 15~19절은 “바울의 기도”이고, 20~23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바울의 기도와 증언”으로 정하였습니다.

1. 바울의 기도(15~19절)

1) 15절에서 “이를 인하여”라 하심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으로 신령한 복을 주신 일이요,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실이며,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들음”은 성도들의 전체적 사랑 실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신령한 복을 받고 모든 성도가 사랑 실천으로 화목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2) 그리하여 16절 초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였고”, 또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심”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은혜를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3) 17~19절에서는 에베소 교회 성도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17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도 되시고 또 영광을 받으실 아버지도 되심)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성경을 깨닫거나 신령한 은혜를 깨닫는 총명)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을 간구하였고, 18절에서는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이 뜻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과 같은 뜻임) 그의 부르심의 소망(구원의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고 바라는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성도와 함께 받는) 그 기업(14절)의 영광의 풍성(신령한 복의 영광이 풍성한 것을 아는 지식)이 무엇이며, 19절에서는 “그의 힘의 강력(성령님의 능력 있는 역사)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믿음을 갖게 됨이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능력으로 성취된 뜻)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안을 주셔서 하나님과 신령한 복의 가치성과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깨닫고 체험하며 믿음이 크게 성숙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복을 떠나서 신령한 은혜의 증폭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함(20~23절)

그리스도의 영광 증언은 부활과 승천과 권세와 교회의 머리되심과 만물을 충만케 하신 자 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과 만물의 중심이 되신 분입니다.

1) 20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그 능력이(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돌아가신 예수님께 역사하신 뜻)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부활의 뜻) 하늘에서(승천하신 후) 자기의 오른편(보좌의 권위가 하나님과 같다는 뜻)에 앉히셨다” 하셨으며,

2) 21절은 권위와 명성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가지신 뜻으로 절대자임을 말씀하셨으니 곧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영계와 현상계의 모든 권세자를 뜻함)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현세와 미래의 권세자)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셨으니, 이 뜻은 권위와 명예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3) 22절에서는 만물과 교회의 주관자로 세우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만물이 맨 아래요, 교회가 그 위이며, 또 예수님이 교회보다 높은 주관자이신 것입니다.

4) 23절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하신 뜻은 교회를 세우실 때 교회는 성도의 단체인바 자신의 피의 공로로 구속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을 뜻하며(행 20:28), 또 그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시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하심은 교회가 타락한 만물로 인한 결함을 다 보충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만족하셨지만(창 1:31)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흠을 이루고 만물 충만(만물로 인한 만족)의 결함이 생긴 것을 주님이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만물의 충만을 맛보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만 잘 되면 예수님은 큰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되는 뜻은 숫자에 있음이 아니라 성도가 예수님을 닮는 본질적 변화에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교회의 3요소 (엡 1:1~2) 목록으로


에베소서 전체의 의미를 “교회와 생활”로 요약하기도 합니다. 1장~3장은 “교회론”이고, 4장~6장은 “생활론(도덕론)”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1~2절에 나타난 바울과 신실한 성도들과 은혜와 평강은 교회의 3요소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바울 사도는 교회의 요소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교회의 기초적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와 주인은 예수님이시지만(마 16:16, 고전 3:11) 예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세워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게 하시므로 기독교의 터를 닦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엡 2:20에서 “너희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계시 또는 모범의 방편으로 쓰시고 은혜의 전달자로 쓰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일단 교회는 표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표준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모범을 나타낸 것이 사도들의 행적입니다.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신 것이 그런 뜻입니다.

3)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의 시대에는 사도가 없고 교회의 최고 직분자인 목사(목자, 교역자)가 있는데, 이 직분이 사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은사의 차이와 직무의 차이가 있는데, 은사의 차이는 계시를 받거나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증거할 만한 능력을 받은 사실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고(히 2:4) 직분의 차이는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 사역과 그 기초 위에 교회만 세우는 사역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여 설명하신 말씀이 고전 4:11의 “터를 닦는 것과 집만 짓는 것”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후시대의 목사는 사도의 고유 직분과 고유 은사 이외의 직임을 수행하는데,

4) 그것이 곧 전도, 교육과 모범의 사명이고 주님께서 실행하신 모범을 솔선 지도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하고 신앙고백을 받아 교인을 만들며(유형교회) 성도에 걸맞은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행하여 교회의 대표가 되고 성례와 축복도 베풀지만 이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모범을 시행하도록 성도의 단체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능숙한 자에게 교회의 사명를 이루기 위하여 성도의 단체(총회)에서 준 특권일 뿐 성경에 근거한 고유 권한은 아닙니다.

5) 목사가 교회의 전문 사역자가 된 것은 평신도보다 더 배웠기 때문이지만 평신도라 하여 그 지식을 못 따를 이유가 없고, 또 목사 라 하여 모든 것이 다 으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다”(마 19:30) 하신 말씀은 뒤에 있는 서열자라도 더 능숙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모범자라 하여 앞에 선다 하더라도 결함이 많으면 뒤에 있는 신실한 성도만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성직자를 탄핵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줄 압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교회의 제일 요소인데 그가 참신한 사명자일수록 교회는 빛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교회 헌법은 담임목사 없는 교회를 허위교회라고 합니다, 정치 17장 1조.)

2. 신실한 성도입니다.

1) 유형교회는 교역자(목사)가 세례를 베풀 때 생산되므로 목사가 제일 요소가 됩니다. 예를 들면 선민의 단체를 교회로 일컬을 때(행 7:38) 그들을 모세가 애굽(세상)에서 인도해 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중에 교회는 성도의 단체를 의미하므로 성도는 제2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란 진실된 신자를 의미합니다. 곡식밭에 가라지가 용납될 수는 있지만(마 13:29) 가라지(외식자)까지 교회의 요소가 될 수는 없으므로(마 13:30) 신실한 성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신실한 성도는 거듭남의 확신을 갖고 성경을 진리로 믿으며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를 의미하고 성도의 단체(교회=그리스도의 몸, 엡 1:23)를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가운데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의미를 정의한 교회 헌법 2장 4조가 있는데, 이 조문은 행 2:47을 근거하여 만든 줄 압니다. 즉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그 원대로 합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성결하게 생활하고 예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성경에 교훈한 모범대로 연합하여 교회 헌법을 복종하며 시간을 정하여 공동 예배로 회집하면 이를 지교회라 한다” 하므로 믿음의 공언적 고백, 그 자녀들 포함, 일정한 장소에 회집, 자유로운 합심,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공동 예배, 성결한 생활, 전도 사명, 헌법 준수 등의 사명적 요소를 포함한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신실한 성도가 모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교회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3. 은혜와 평강입니다.

1) 교회는 은혜를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전달될 때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은혜를 전달하여야 할 교회가 은혜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교회를 세워주신 목적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되 말씀을 방편으로 나타내시고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 지도자가 가장 은혜 있는 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 중에도 진리를 가르치시는 사역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요 15:26, 16:13, 14:26)

2) 교회에서 전달하는 은혜의 방편은 세 가지입니다.

① 목사의 축도를 비중 있게 생각하는 성도가 많지만, 이 축도는 받는 자의 믿음 준비와 생활 등의 제한이 있는 만큼 만능적 은혜가 될 수 없고,

② 성례로 전달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 성례의 의미를 얼마나 실감 있게 받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십자가의 은혜를 성례를 통해서만 느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③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말씀 방편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무궁합니다. 성경은 꼭 같은 말씀이라도 묵상하고 연구할수록 새로운 교훈을 깨닫게 합니다.

3)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받고 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우선 교회에 나오셔서 성경을 많이 배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②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가까운 친교 관계로 좁히셔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세주, 중보자로, 성령님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든든히 모시고 그 하나님이 성도에게 참된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줄로 믿으세요.

④ 고난은 연단으로 믿고 영광을 못 누리는 것은 상급의 축적으로 믿으며, 하나님은 만사를 복되고 영광스럽게 인도하시는 분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과 깨달음 속에서 큰 은혜와 평강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⑤ 욕심이나 세상 정욕과 이기주의가 은혜를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철저히 차단할 때 주님은 더 가까이 오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은혜와 평강이 교회를 통해서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도 받을 수 있지요. 천주교에서는 “구원의 은혜가 교회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교회가 기독교 모범의 특권을 가진 점에서 과장하는 표현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은혜와 평강을 공급 받지 못하면 혼자서 깨닫고 누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와 성도와 은혜와 평강이 교회의 3요소가 된다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바울의 감사와 기도 (엡 1:15~19) 목록으로


바울 사도의 감사와 기도에 대하여 교훈 받겠습니다. 이 감사와 기도는 바울이 개척하고(행 18:19, 19:1~20) 3년간 섬겼던(행 20:17~31)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 대한 감사이고, 또 그들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1. 무엇을 감사하셨는가? 하면

1) 15절에서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 가진 것”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이란 믿음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뿐이시니까(요 14:6) 예수님을 떠나거나 예수님 밖에서는 믿음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알고 확신하셔야 할 것은 예수님, 하나님 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은즉 다른 대상을 믿거나 의지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의지하려 하지만 돈이 없어지거나 몸이 병들면 소용이 없고, 건강과 기술을 의지하여도 늙으면 소용이 없으며, 자식을 의지하여도 떠나면 그뿐이고, 부모를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를 의지하지만 그것도 정세 따라 변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도 영원한 동반자이심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요 5:39에 근거하여 성경으로 알고 믿으시면 됩니다. 성경은 주님의 말씀이요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인 만큼(히 2:2, 4:12, 6:2) 말씀을 굳게 믿고 성실하게 깨달으며 그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4:6). 또 주 안에서의 믿음이란 만물과 성경으로 계시를 주신 내용에 따라 특히 계시의 말씀 중심으로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2)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웃은 다 사랑의 대상이고 믿는 권속들은 사랑의 우선적 대상입니다(갈 6:10). 특히 교회 안에서의 사랑은 모든 이를 상대하여야 합니다. 앞서가는 성도는 존경함으로 사랑하고, 못 따라오는 성도는 연약한 자로 여겨 사랑하며, 문제와 거침돌이 되는 대상은 자신의 연단과 기도의 대상으로 여겨(정화의 대상)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뜻으로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교회의 기본 요소입니다. 믿음은 성경 중심이란 뜻이고, 사랑은 계명 실천이란 뜻이므로 그러한 것입니다.

2. 기도의 내용입니다.

1)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셨습니다. 지혜는 믿음으로 아는 지식이고 계시의 정신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는 총명입니다. 히 11:2에 보시면 “믿음으로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라” 하셨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만물의 근원을 모릅니다. 성도들에게 계시의 정신이 밝아져야 성경 연구하는 맛을 알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약 1:5에서도 “지혜를 구하라” 하셨고, 솔로몬 왕도 지혜를 구하여 받은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왕상 3:9) 며칠 전에 어떤 교회 사모님이 성경의 맛을 알고 성경 연구에 끌리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체험(시 119:113)을 하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평안과 기복이 급선무이고 신령한 은혜는 구할 줄도 모르는 경향이 있으니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더 큰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셨던 것이요,

2)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계시의 정신이 밝아지면 하나님을 아는데 유익하고 마음 눈이 밝아지면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안다 하셨으니, 이 뜻은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계시의 정신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가까이 하며, 마음 눈으로는 하나님이 베푸신 신령한 복(믿음으로 받는 혜택)의 가치를 알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하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것처럼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된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하늘을 날 듯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황새가 좁쌀을 먹지 않는 것처럼 세속에 대한 집념이 그만큼 떠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잠깐 쓰고 내버릴 땅엣 것들을 멀리하지 못하고, 또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지 못한다면 반드시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신…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이 뜻은 성령님의 크게 역사하신 힘을 체험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면 인격 변화가 올 수 없겠지요. 바울이 예수님을 배척하다가 구세주로 모시고 또 그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자로 변화될 때 보통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병 고침의 능력을 사모하시겠지만 바울이 체험한 능력은 생명을 걸고 예수님께로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겠느냐? 기근이나 적신이겠느냐? 위험이나 칼이겠느냐?… 다른 아무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 39) 하였으니 바울은 이 같은 강한 능력이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내용과 기도의 내용이 성취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신령한 복의 원리 (엡 2:1~10)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을 읽고 “신령한 복의 원리”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신령한 복의 의미와 신령한 복을 주신 동기와 목적, 그리고 은혜를 주신 과정(방법)과 믿기 전의 상태 등을 말씀하시므로 포괄적 제목을 정하려면 “신령한 복의 원리”란 뜻이 가장 적합한 줄 압니다.

1. 신령한 복의 성격을 말씀하셨습니다(1, 5~6절).

1) 신령한 복의 성격은 “거듭나게 하신 은혜”입니다(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하신 말씀이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요 3:3). 허물은 “파랍토마”인데 영어의 trespasses로 번역되었고, 법률적 위법을 뜻하는 듯하며, “죄”는 “하말티아”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허물과 죄로 죽은 뜻”은 영적 생명이 죽었다는 뜻으로 “정녕 죽으리라” 하신 창 2:17의 성취요, 이것을 또 “살리셨다”는 뜻은 요 3:3의 말씀 따라 영적 생명을 다시 품부하여 살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적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골 3:1). 이 거듭나게 하신 역사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고, 구원 과정이 첫 번째 역사요 은혜인 것입니다.

2) 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다” 하셨는데, 이 뜻은 그리스도의 부활처럼(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부활임) 또 그 같은 능력에 근거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과거의 성도와 현재의 성도가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모든 성도가 연합되고 그 능력에 의하여 거듭나게 된 것(또는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벧전 1:3에도 기록되었습니다.

3)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시므로 거저 주신 은혜성을 강조하셨으니, 이 말씀은 8절에서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믿음도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뜻, 히 12:2)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남과 믿음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힘입게 된 것인즉 모두가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9절) 하나님이 만드시고… 지으신 바라(10절)”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고후 5:17).

4)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을 죽은 영을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신 후 또 하나님 보좌 곁에 앉히시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만히 있으면 산 의미가 없겠지요.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또 목적지에 가서 정착하여야 하는 것처럼 신령한 복(구원)도 거듭났으면 거듭난 자로서의 활동(일으키신 것)을 하여야 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야 하는데 여기의 “앉는다”는 뜻은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 주님과 같이 천국 세계의 일원이 된 것이요, 또 먼저 간 성도는 이미 그곳에 있음을 뜻하고 현재 있는 성도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존귀를 누리다가 장차 그곳에 갈 것을 일괄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심”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말씀하신 것에도 해당됩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로써 같은 은혜의 특권을 누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은혜 주시는 동기와 목적입니다(4, 7, 9~10절).

1) 은혜를 베푸시는 동기는 4절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함이라” 하셨고, 또 7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택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과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돈이 많고 사랑이 많으면 자선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긍휼이 많으면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가지신 것이 무한하시고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베푸시는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주 재림 시까지)에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요,

2) 9~10절에서는 신령한 복을 받은 자로 하여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즉, 9, 10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고후 5:17) 지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는 아무리 존귀한 입장에 있고 복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교만하거나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요, 오직 주님 뜻 안에서 살고 주님 뜻 안에서 선한 일만 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목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10절에서 “이 일(신령한 복을 주시는 구원 사역)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1:4) 우리로(구원 받은 자들) 그 안에서(주님 뜻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신령한 복을 주신 동기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긍휼 베푸심에 있는 것이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받으심과 성도로 영광 돌리게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3. 은혜 받기 전의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2~3절).

2~3절에서는 은혜 받기 전의 형편을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서 “그때(거듭나기 전)에 너희(에베소 교회 성도들)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았다는 뜻) 이 세상 풍속을 좇고(불신자들의 인본주의적 생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마귀, 눅 4:6)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과거에 마귀의 뜻에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바울과 전도자들도 믿기 전에 마귀의 뜻에 따라)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자율주의로 사는 것을 죄라고 하셨습니다(롬 8:12~13, 갈 5:24, 약 4:15).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된 자를 구원하셨으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확실한 심판의 대상으로 마귀와 현실에 접착된 부패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 5 과 구원과 연합 (엡 2:11~22)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대·소지를 구별한 후 “구원과 연합”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1~13절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말씀”이고, ② 14~18절은 “구원 받은 자의 연합”이며, ③ 19~22절은 “성도의 지위와 교회의 확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이방인 구원에 대한 말씀(11~13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스라엘 선민이 아니므로 우리들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선민이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그 부패한 성격이 이방인과 같습니다.

1) 11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하신 것은 앞에서 말씀한 “거듭남과 일으키심과 하늘에 앉히신 일 등(2:1~10)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 관계가 먼 상태를 말씀하셨으니 곧 “너희는 그때에(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이방인(선민의 반대되는 뜻)이요, 할례(손으로 남자아이의 생식기 끝을 베는 것) 받은 것을 특권처럼 내세우는 유대인들로부터 무할례당(할례 받지 않은 것을 멸시하는 말)이라고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그만큼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2) 따라서 무할례자의 상태는 12절에서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또 약속들에 대하여서도 외인이고(구원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 하셨기 때문, 창 17:21) 세상에서 소망이 없으며(영생이 없은즉) 하나님도 없는 자로 비천하였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3) 그러나 13절에서 “이제는(복음을 받은 후)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예수님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로(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그리스도의 피”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의 피를 흘려 돌아가심으로 죄를 대속하신 것을 뜻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졌음”은 화해의 성격으로 연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구원 받은 자의 연합(14~18절)

1)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구원 받은 자 사이에 화평(또는 화목, 16절)을 이루어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진 상태이며(창 3:18)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에 대하여 진노하실 입장이셨으나(롬 1:18, 6:23) 이 원수 된 관계를 예수님이 중보하여 화해, 화목, 화평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심”은 불신앙자를 구원 받게 하여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므로 연합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연합의 의미는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것”은 죄의 장벽을 허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의로 용서를 받게 하시므로 진노 받아야 할 것을 없애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죄의 담이 없어지거나(심판의 의미에서) 그 담이 얕을 때(의로운 생활로) 관계가 통하는 것입니다.

2) 15절에서는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 하신 것은 14절의 말씀을 재설하신 것으로 “원수된 것”은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상태를 뜻하고, “의문에 속한 계명”은 모세의 율법인데 이것을 “의문에 속한 것”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 율법이 (실천 모범은 없고) 문자로만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자기 육체로 파하셨다” 하셨으니 이는 율법의 정죄하는 효력(갈 3:13, 19, 고후 3:9, 롬 7:7, 13, 20)을 없애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돌아가셨고(율법을 잘못 적용한 뜻,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오판한 것) 의연하게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율법과 상관없이 되셨고, 따라서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들도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이나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이용하여 죽였지만 예수님은 율법과 상관없이 부활하셨으되 신령한 몸(거듭난 신분)으로 부활하여 율법의 정죄 효력을 폐하신 것입니다. “이는 둘로 자기의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둘”은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자인만큼 유대인과 이방인을 뜻합니다. “자기의 안에서”란 “자기 안에서”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새번역). 엔 아우토(êν αύτώ)가 여격대명사인데, 왜 소유격으로 하였는지 연구할 일이나 “자기의 안에서” 즉 예수님의 중보사역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거듭난 것”은 변화가 아닌 재창조로 아셔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셨다”는 뜻은 유대인의 우월감으로 이방인을 멸시하였던 불화가 없어진 것을 뜻합니다.

3) 16절은 주 안에서 한 몸처럼 화합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십자가의 은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의롭게 하시는 방편이고,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니 구원 받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고, 또 그들이 함께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므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도 소멸된 것입니다.

4) 17절의 “또 오셔서(성령으로 오신 뜻) 먼 데 있는 너희(이방인)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또 가까운 데 있는 자들(유대인)에게도 평안을 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평안을 전하신 뜻”은 복음을 믿으므로 누릴 영적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이는(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구원 사역) 저(예수님)로 말미암아 우리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3. 성도의 지위와 교회 확장에 대한 말씀(19~22절)

19절은 구원 받은 자의 지위요, 20절은 예속된 입장이며, 21~22절은 교회의 확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1)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하늘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가족임을 명백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족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주님과 동거 동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시 73:23).

2) 20절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계시의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터”란 그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과 생활 모범을 의미하고, “그 위에 세우심을 입은 뜻”은 그 기초(터)에 의지하여 그 기초(말씀과 모범)를 떠나지 말고 집을 세우라(믿음 생활을 뜻함)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의 기초 위에서만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기초는 닦을 자가 없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고전 3:11, 계 22:18~19). 따라서 이 말씀은 성경에 위반되는 다른 종교가 있어도 그것은 정통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함은 예수님이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를 양 손에 붙잡으시고 하나의 집(성경에 기초한 믿음 생활)을 건립하신다는 뜻입니다(마 21:42의 모퉁이 돌은 예수님이 버려진 돌 같았으나 구속자로 요긴하게 쓰셨다는 뜻이요, 본문의 모퉁이 돌은 양쪽을 하나 되도록 붙잡으셨다는 뜻입니다).

3) 21절의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하심은 믿음 세계가 확장되어 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초로 믿음 세계를 건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 건물이 확장되어 성전이 되어감”은 구약 성전을 일컫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즉 천국과 연결된 세계(교회를 뜻함)를 이루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22절에서 “너희(이방인 성도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믿음 심령 또는 믿음 단체인 교회, 눅 17:20~21, 고전 6:19)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서”란 주님의 뜻과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발전을 이루어 감을 뜻하고, “지어져 감”은 성령님의 역사를 주체로 하여,믿음세계가 확장 되어감을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거듭남과 은혜 받는 일과 사명 실천하는 일이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므로 믿음의 발전을 이룬 것도 그 역사에 힘입어 성취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 6 과 이방인 구원 섭리 (엡 3:1~13) 목록으로


이 부분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섭리로 이방인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목도 “이방인 구원 섭리”로 정하였습니다. ① 1~6절은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계시를 주심”이고, ② 7~11절은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바울을 쓰심”이며, ③ 12~13절은 “이방인의 취할 태도”입니다.

1.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계시를 주심(1~6절)

1) 1절의 “이러므로” 하신 것은 앞 장 내용에 이어 말씀을 계속하시는 접속사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구원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의 송사로 피소되어 로마에까지 오시게 되었고(행 21:27~40), 또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에 와서 정사와 권세(10절, 높은 황제나 재판관 같은 권세)자들에게 복음을 알리시기 위하여 그 방법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행 27:24).

2)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경륜)인 바, 이 사실을 바울에게 계시로 알려주셨다는 뜻입니다(행 9:15~16). “그 은혜의 경륜(이방인 구원 계획)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하심은 바울이 2차, 3차 선교여행 중에 증거한 사실이 있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행 18:19~20, 20:16~38).

3) 3절에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다” 하셨으니 하나님이 이방인 구원에 대한 경륜을 구약 시대에 상당 기간 비밀에 두셨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바울에게 계시로 알려주셨다는 뜻이고, “이미 대강 기록하였다” 함은 바울이 서신을 통하여 전달한 내용 중에 그 뜻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엡 1:9~10, 2:13~18에도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따라서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고 하셨으니(4절),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방인 구원 계획 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모든 비밀을 뜻하며, “내가 깨달은 것”은 바울 사도가 계시로 깨달은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셨으므로 그것(바울 서신에 의한 성경)을 읽으므로(연구함, 딤후 3:14) 같은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을 연구한 자의 설교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성경을 직접 연구하여 알게 하신 것입니다.

5) 5절에서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다” 하심에 대하여,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한 자로써 신약(사도)과 구약(선지자) 시대의 사람을 대표로 지칭하신 것이고,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은 계시 사역이며, “다른 세대”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실천에 대하여 사도들이 직접 알리지 않은 시대에는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신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가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사도나 선지자가 아닌 사람들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었던 대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나 선지자가 없는 이 시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시는 더욱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6) 6절은 이방인을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이는 “이방인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예수님을 믿게 하여) 함께 후사가 되고(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뜻) 함께 지체가 되며(예수님과 연합된 자로 인정하심) 함께 약속(영원한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하시므로 모든 은혜를 예수님과 함께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중 복음을 받은 자나 이방인 중 복음을 받은 자의 은혜가 같고, 또 예수님이 누리는 영광도 다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2.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바울을 쓰심(7~11절)

1) 7절은 바울 사도가 복음의 일꾼 된 경위를 말씀하셨습니다. 곧 “이 복음을 위하여(전파 사명)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명은 복음 전파이고, 일꾼 된 방법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허락하신 선물이란 것입니다. 일꾼 되는데 무슨 능력이 필요하냐고 하시겠지만 믿음과 인격 변화와 사명 수행을 하게 하실 때는 큰 능력이 임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못 받아서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능력으로 일꾼 된 것은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1절). 하나님은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눅 14:28).

2)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복음의 일꾼 되게 하신 방법과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우선 방법에 있어서 8절에 보시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알고 크게 겸손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작은 자 중 더 작은 자로 여기신 이유는 자신이 믿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많이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딤전 1:12~14에서 그 뜻을 말씀하셨고, 고전 15:8~10에서도 그런 뜻으로 겸손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주신 뜻”은 곧 일꾼 되게 하신 것을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일꾼 되는 은혜를 주신 것은 봉사의 기회를 주시고 충성하게 하시므로 더 큰 은혜와 상급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이 일꾼 되어 깨달은 사명은 ①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구원 은혜)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신 것과(8절, 행 9:15), ② 영원부터(영원이나 영원 전은 같은 뜻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2절)을 드러내게 하신 것과(9절), ③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교회 즉 성도 연합체의 힘으로) 하늘에서(하나님의 통치를 힘입어) 정사와 권세들(지상의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하나님의 경륜 들)를 알리는 일이라”(10절)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도리와 하나님의 지혜 등을 널리 또는 권세자들에게까지 알리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3. 이방인의 취할 태도입니다(12~13절).

1) 구원 받은 성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취할 태도가 같습니다. 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다” 하시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인즉 담대함으로 당당히 나가야 할 것과

2) 또 13절에서 성도가 바울의 고난(갇힌 뜻)을 보고 낙심하지 말며 믿음의 담대함을 갖는 것이 성도 자신의 축복이므로 이를 기도로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적 경륜은 큰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라도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자가 핍박과 고난 받는 일을 보거나 자신이 그런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희생하여 주신 것이므로 성도는 이 은혜를 잠시 고난당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은혜로 여기셔야 할것입니다.

 

 

제 7 과 바울의 소원과 기도 (엡 3:14~21) 목록으로


본문에는 바울의 소원과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과 은혜를 베푸시는 근거를 말씀한 후,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고 하였고, 성도를 위하여 무엇을 간구하셨는 지와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원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 기도의 대상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14~15절)께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모범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뜻은 모든 성도(천국과 지상에 있는 자들)를 총괄하여 특별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개개인을 자기의 손바닥에 새기신 듯이 감찰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49:16). 또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창 17:5, 15; 마 16:18). 과거에는 많은 교인들이 입교할 때 신앙적 이름을 지어준 예가 있었습니다. “땅에 있는 각 족속”이란 뜻은 이방인도 구원 대상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행 1:8).

2. 그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또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근거를 말씀하셨는데

1) 우선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시며 만유(천상천하)를 통치하시는 분이라 하셨고(14절),

2) 영광이 풍성하시며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시는 분이며(16, 20절),

3)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모든 충만한 것”을 확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9절). 하나님의 은혜 풍성하심과 무궁한 사랑이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3. 기도의 자세로써 “무릎을 꿇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사실이 많습니다(왕상 8:54, 대하 6:13, 시 95:6, 단 6:10, 눅 22:41, 행 7:60, 9:40, 20:36, 21:5). 의자가 없는 환경인만큼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자세로 말하면 편히 앉는 것보다 꿇는 것이 더 겸손과 간절함을 표현함이 될 것입니다. 같은 값이면 꿇도록 노력합시다.

4. 기도의 목적은 성도를 위한 것과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 성도를 위한 기도로써 ①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는 것인데(16절) 이것은 믿는 마음을 굳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행 11:23에 보시면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하신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담대한 신앙, 깊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②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17절). 이 뜻은 성도가 항상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대화하며 주님의 뜻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하고,

③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17절)은 교회가 사랑으로 넘치고 모든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며 연단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④ 모든 성도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18절). 예수님은 지식이 넘치신 분입니다(눅 2:52). 따라서 모든 성도가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하여 크게 인식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넓고(광범위한 사랑) 길며(영원한 사랑) 높고(숭고한 사랑) 깊은(심오한 사랑) 사랑입니다. 성도가 이런 사랑을 깨달으려면 성령님의 크신 감동과 많은 교제와 지식과 연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느냐?”고…(롬 8:35).

⑤ 모든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19절, 엡 5:18).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겔 36:24~37, 행 1:14, 2:1, 8:14~19).

2)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위하여, 20절에서 은혜주실 하나님은 “성도 중에 역사하시고 성도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 믿으면서, 21절에 “교회 안에서와(성도의 단체 생활 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예수님을 모신 개인 생활 중) 영광이(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소원을 가진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 중심으로 생활하게 될 것이며(고전 10:31)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소원하는 자에게 능히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요 9:31, 막 11:24).

 

 

제 8 과 연합을 권하심 (엡 4:1~6)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연합을 권하심”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절의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나(바울)에 대한 설명은 3:1에서 말씀드렸고,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셨는데, 여기의 “부르심을 입은 부름의 목적”이 3절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이므로 성도와 연합을 목적하신 것이고, 2절은 연합하는 방법이며, 4~6절은 연합의 당위성과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부르심의 목적과 연합” 또는 “연합을 권하심”으로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부르심의 목적(1, 3절)

1) 1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시므로 부르심의 목적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를(엡 1:4) 구원하시려는 때가 되었을 때(전 3:1) 거듭나게 하심과(엡 2:1) 전도로 부르신 것입니다(딛 1:3). 그 이유는 부름 받은 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여 구원하시고 또 구원 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절).

3) 3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란 성령님이 하나 되도록 거듭나게 하심을 뜻하고, “하나 됨의 뜻”은 주님과 하나 되고 또 성도와 하나 됨을 뜻하지만, 본문에는 성도간의 연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는 믿음으로 연합하고(요 15:47) 성도와는 사랑으로 연합하여(롬 6:5, 골 2:2)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따라서 성령님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를 아울러 시행하십니다. 따라서 “힘써 지키라”는 뜻은 성령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 되게 하실 때 성도는 그 믿음과 사랑에 금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5) 그러면 “평안의 매는 줄”이란 무슨 뜻입니까? 줄은 함께 얽어매는 끈입니다. 따라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이 성도에게 평안을 주셔서(요 14:17) 주님과 연합한 성도가 평안하면 그 평안을 누리는 성도는 또 다른 성도를 평안의 은혜로 이끌어 들여서 주님과 자신과 성도가 함께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각관계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영적 연합의 의미도 있지만 같은 표준 영역 안에서 공생 공영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둘을 하나로 묶으면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연합의 방법입니다(2절).

1) 이 연합의 방법은 “모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함이라” 하셨으니, 이 방법은 성도 간에 연합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방법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한 권속이 되고(요 1:12, 엡 2:19)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과 동행할 때(마 12:48~50, 요 15:4) 주님과의 연합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면 동행할 수 없은즉(암 3:3) 주님의 뜻에 절대 순종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엡 4:13에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라”는 말씀도 그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모든 이웃이나 성도를 대할 때 모든 겸손과 온유로 대하고 오래 참아주며 형제의 부족이나 실수를 사랑으로 서로 용납할 때 화평과 연합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대인 관계는 반드시 이 말씀을 따라 시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교만과 혈기와 조급함이 있거나 아량이 부족하면 이웃과의 화평과 연합은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를 때는 다른 이의 개성을 존중해주고 자기의 뜻은 개인적으로 시행하면서 이웃과의 친교적 관계만 잘 유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3. 연합의 당위성(4~6절)

6절 말씀이 연합의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이고, 4~5절은 “연합(하나 됨)의 성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6절 중에서 연합의 당위성은 “만유를 통일하신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연합)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단체가 합하면 한 단체가 되고, 두 나라도 통일하면 한 나라가 되듯 하나님은 만유의 통일자이십니다. 마귀의 반역을 예수님은 부활의 승리로 꺾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이심은 만유의 주이신 뜻과 같고(대상 29:11) “만 위에 계시고 만유 가운데 계심”은 한 분의 절대적 통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한 분의 통치에 근거하여 하나되는 연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4~5절 중에서는 연합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는 연합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몸과 성령과 부르심의 한 소망과 주님과 믿음, 세례와 하나님이 한 분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정리하면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성도와 예수님과의 연합, 또 성도간의 연합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고, 몸이 하나란 뜻은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서로 융합하여 한 몸이 된 것처럼(고전 12:14~27) 연합의 성격도 그렇다는 뜻이며, “부르심의 한 소망”은 모든 성도를 부르신 목적이 같은즉(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음, 롬 8:30) 목적과 생활이 하나될 수 있고(고전 10:31~33) 세례를 받은 목적과 은혜도 역시 같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다 연합의 성격을 성취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연합의 당위성과 성격과 방법을 잘 깨달아 시행함으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성도간의 연합을 잘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그리스도의 선물 (엡 4:7~16) 목록으로


본문 7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선물”이란 말씀이 있고, 뒤에 기록된 말씀들이 다 선물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제목을 “그리스도의 선물”로 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그리스도 자신과 만물입니다(롬 8:32).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선물”은 주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선물을 뜻하고, 그 선물들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데(10절) 필요한 직분과 은사를 뜻하는 것입니다(11절). 내용을 분류하면 ① 7절은 “선물을 주시는 주권자 예수님”이요, ② 8~10절은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게 된 근거”이고, ③ 11절은 “선물의 내용”이며, ④ 12~16절은 “선물 받은 자의 사명과 책임”입니다.

1. 선물을 주시는 주권자 예수님(7절)

“우리 각 사람(사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하셨으니 “우리 각 사람”은 복음 일선에 선 사명자들이고, 선물과 은혜는 같은 뜻이며, 은혜는 그리스도가 주시는데(요 1:14, 16)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량에 대한 말씀은 마 25:14~15과 고전 12:4~11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은혜는 주님이 자기의 뜻대로 주십니다(갈 1:1).

2.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게 된 근거(8~10절)

1) 8절에서 “그러므로 (구약성경 68:18에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시 68:18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시 68:18을 옮기면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 왕이 전쟁에 승리를 거둔 후 자기의 역사의 한 토막을 예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심”은 승리자 예수님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실 것을 예언함에 있어서 다윗 왕 자신이 대적을 무찌르고 또 귀순병을 이끌고 높은 곳 예루살렘 궁궐에 올라가서 귀순한 대적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사실을 모형으로 하여 예수님의 승리와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귀순병(패배한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은 왕이 그 귀순병들을 살려준 은혜에 근거한 것이므로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선물 주실 주권을 가지신 이유는 첫째, 예언에 의함이고(시 68:18을 선물 주실 예언으로 해석함), 둘째는 마귀의 세력을 꺾으신 승리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곧 만유의 주 되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 9절에서 (다윗이 예언하기를 메시야가) “올라가셨다(승천) 하셨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하므로 예수님의 초림과 승천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20년 전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메시야 사건이 역사적 예언으로 보아 증명되는 실제적 사건임을 입증하여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 말씀입니다.

3) 10절에서 (올라가셨다 하셨은즉, 9절) “내리셨던 그가(예수님의 초림)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즉 예수님의 승천을 확신하게 하신 말씀)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는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인데 두 가지 의문을 푸셔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하늘”에 대한 뜻이고, 또 한 가지는 “만물 충만의 뜻”입니다.

① 본래 하늘은 넓기 때문에 장엄 복수를 써서 “사마임”이라고도 하지만(창 1:1) 지상에도 하늘이 있는 것처럼 천상에도 하늘이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상 8:27에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란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하늘의 광범위함을 알 수 있고, 또 “모든 하늘”이란 용어를 사용한 뜻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만물 충만의 뜻입니다. 집이 헐어졌으면 수리를 끝내고 모든 살림을 차려놓아야 집의 성격이 완성되는 것처럼 만물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자연까지 퇴락하였은즉(창 3:8, 17) 그것이 곧 충만하지 못한 뜻인데 구원사역을 끝내셨을 때 그것이 바로 만유를 회복하는 것이므로(행 3:21) 만유 회복이 곧 만유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지금도 구원 사역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선물의 내용(11절)

1) 선물의 내용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11절의 “혹”이란 용어를 각각 쓰신 것은 모든 이에게 다 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대상에게 주님의 뜻대로 세우시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고전 12:29~30),

2) 사도와 선지자는 초대교회 당시까지 있었던 직분자로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 사역을 이행하였고(고전 3:10~11, 엡 2:20) 사도 후 시대에는 신령한 직임으로써 목사(목자), 교사, 복음 전하는 자만 있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주신 직분에는 그 직분을 시행할만한 은사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마 25:15에서는 “각각 그 재능대로 주셨다” 하셨고, 빌 4:13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셨으며, 딤전 1:12에서는 “나로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직분의 종류와 은사를 아울러 주시는 것이 선물의 내용입니다.

4. 선물 받은 자의 사명과 책임(12~16절)

12절은 “직분을 주신 목적”이고, 13, 15절은 “온전한 사람(성도) 되는 방법”이며, 14절은 “믿음이 성숙해야 할 이유”이고, 16절은 “교회의 육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직분을 주신 목적(사명과 책임)은 세 가지로써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성숙된 믿음의 사람)과 봉사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교회; 엡 1:22~23, 골 1:24)을 세워 육성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성도의 믿음이 온전해질 때 교회도 육성됩니다. 13절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방법으로 “우리가 다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인데 전자는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갖는 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아울러 풍성하게 갖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많이 닮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이고 지식은 내용입니다. 따라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예수님을 친교적으로 잘 아는 믿음을 뜻합니다.

3) 13절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름”은 곧 온전한 사람됨이요 신앙의 성숙(어른 같은 상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의 성숙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지 않을 때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모든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도 밀려 요동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옳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교훈과 궤술이 주위에 많다는 사실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4) 믿음이 성숙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인 지식 외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예수님)에게까지 (닮아가고) 자라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5절).

5) 15절에서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심은 예수님이 성도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머리는 “주관자”란 뜻인즉 사명자가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요, 16절에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 하심은 성도와 교회의 육성됨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바 예수님을 육체의 머리로, 성도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몸이 머리의 통제로 도움을 입고 연락되며 상합하여 지체가 자라는 것처럼 예수님의 은혜와 사명자의 역할로 말미암아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고 아울러 교회가 육성되는 사실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제 10 과 새 사람 되는 변화 (엡 4:17~32)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17~20절은 “새 사람 아닌 때의 형편”이고, ② 21~24절은 “새 사람 된 과정과 입지”이며, ③ 25~32절은 “새 사람 된 자의 도덕성”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새 사람 되는 변화”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새 사람 아닌 때의 형편(17~20절)

1)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란 믿음의 범주 안에서 또는 예수님의 뜻 안에서란 뜻입니다. 증거자의 자세와 내용이 중요함을 뜻합니다. “이제부터는(새 사람 된 후) 이방인(믿음 없을 때의 인격)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허망한 것”은 불신자의 마음이고 인간적, 현세적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합니다. 시 24:4 말씀처럼 “허탄한 데 뜻을 두는 것”입니다. 현세적 이상의 영원하고 신령한 가치를 모르니까 허망한 것을 최고로 알고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2) 18~19절에서는 새 사람 되기 이전의 형편을 말씀하셨으니, 곧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진리를 깨닫지 못함)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총명 없는 결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진리 깨닫는 마음이 닫힌 것으로 진리 영접의 문을 열지 못함)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적) 생명에서 떠나있는 상태”이고, 따라서 “저희는 감각(선악에 대한 분별력)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하였으니, 여기의 “모든 더러운 것”은 우상 숭배나 불법적인 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불신앙과 비양심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3) 20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다” 하셨으니 바울은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하였다는 뜻입니다(고전 11:1). 따라서 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로 드러내고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즈음 예수님을 바로 본받아 모범을 보이는 성도가 많지 않은 줄 압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생활을 보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하고 박애적이며 검소한 생활입니다.

2. 새 사람 된 과정과 입지(21~24절)

1) 21절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 하심은 예수님이 곧 진리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요 14:6). 진리는 생명의 근원이고 진실 그 자체이며 절대 원칙을 뜻합니다. 필자가 기록한 <핵심설교집>의 “진리를 알지니”란 설교문을 꼭 참고하십시오.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심은 바울의 증거와 교훈이 곧 예수님에게 근거한 것을 뜻합니다. 고전 11:1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하신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모방이지만 실제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모방이 아닌 실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새 사람 된 과정은 거듭남(엡 2:1)과 교육입니다.

2) 그리스도를 바로 배운 사람(새 사람)이면 22절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입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의 성격은 18~19절에서 설명하신 것으로 인간이 완전 성화되기 전에는 끈질길 정도로 구습의 유혹을 받는 것을 아셔서 이를 말씀과 기도로 극복하고 이겨야 할 것입니다(마 4:1~11, 딤전 4:5). 바울 사도도 자신의 옛 사람의 충동으로 고민한 것을 롬 7:18~2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3) 새 사람 된 자는 23절에서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는 방법은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 새 사람됨에 대하여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에서 변화된 결과이지만 완전히 성화된 것은 아니고 변화의 시동이 걸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새 생명의 창조를 받아 거듭나면(엡 2:1, 요 3:3) 진리(성경과 예수님)를 수납할 자세로 변하는 것이고, 여기에 말씀과 기도가 가세될 때 변화의 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됨”은 마음의 변화 또는 진리의 깨달음을 뜻하고,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하심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함이란 뜻이며,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란 새 사람을 성숙시키는 방법으로, 의롭게 살고 진리대로 행하여 거룩(더 순결해짐)하여짐으로써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 사람 된 정도는 단계에 따라 표현할 수 있으니 ① 거듭난 새 사람, ② 진리를 수납한 새 사람, ③ 말씀과 기도로 거룩이 진전된 새 사람, ④ 완전히 성화된 새 사람(이 새 사람은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 성취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어느 정도 거룩이 진전되었느냐? 에 따라서 은혜 받은 정도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습을 많이 떠나고 예수님의 모범을 많이 따름이 거룩의 진전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새 사람 된 자의 도덕성(25~32절)

1) 25절에서 “거짓을 버리고(진실하라는 뜻)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서로 지체가 된다” 하셨으니, 이는 성도의 연합성을 뜻합니다. 이웃이 아니라도 참되게 행하여야 합니다.

2)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명분을 세워 분을 낼 수 있다는 뜻) 해가 지도록(오래)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자의 친구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오전에 부부 싸움을 하였으나 해질 무렵에 서로 화해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함부로 분을 내거나 분을 오래 품으면 안 됩니다. 분을 오래 품는 것은 마귀로 틈타게 할만한 유혹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27절).

3) 28절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셨으니 성도는 이웃의 것이나 나라의 것을 도적하면 안 될 것이요(나라의 법을 유익하게 적용할 수는 있음),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재물을 얻고(재물 얻는 방법으로써의 원리임, 창 3:19) 오히려 빈궁한 자를 구제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4) 29절에서는 지혜 있게 말하라는 뜻으로 “더러운 말(욕설, 음담패설, 지나친 농담, 거짓 등)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덕)를 끼치게 하라” 하셨으며,

5)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말라(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잘못하면 근심도 하심)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인 치심”은 보증자 역할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그 보증하신 역할을 체험(하나님의 역사)으로 확신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근심하실 형편이면 그 성도에 대하여 건설적인 역사를 하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6) 31절에서는 “모든 악독(죄 되는 것), 노함(온유의 반대 되고 보복의 수단)과 분(악의로 내는 것)냄과 떠드는 것(소요죄)과 훼방(시기하여 방해함)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하며,

7) 32절에서 오직 “서로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며(긍휼)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원수 된 자를(롬 5:10) 아주 큰 죄에서(마 18:24~35, 롬 6:23) 영원히 용서하신 것(마 18:21~22)을 기억하여 본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마 6:12).

 

 

설교보충 3. 하나 되는 뜻 (엡 4:1~6) 목록으로


본문의 핵심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1. 우선 성령님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셨는가? 하는 것부터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본래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또 선민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즉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였으며, 또 선민과 이방인은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 동리에 많은 사람이 살아도 남남처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떻게 일으키셨는가? 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택한 백성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 뜻은 영적으로 새 사람을 만드셨다는 뜻입니다(엡 4:24). 꼭 같은 차가 생산됐다면 그 차의 성능이나 가격이 꼭 같은 것처럼, 새로 지음 받은 자는 성과 이름은 다르지만 순수한 면에서 볼 때 하나 된 것입니다. 또 성도의 자격으로 볼 때도 하나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소망으로 부름 받았고, 같은 믿음을 가져 같은 뜻으로 세례를 받았으니까, 성도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서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또 성도끼리도 예수님과 연합된 자란 점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신분과 삶의 목적과 생활방법이 다 예수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잘 유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성도들이 함께 화목하고 질서 있게 사는 분위기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잘 살던 집이 풍비박산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모습을 변하시지 않았는데도, 가장이 첩을 얻었다고 가상해 봅시다. 그러면 부부의 금슬이 깨지고, 부모와 자녀간의 친교도 깨지며, 예수님과도 멀어질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노선도 잘못된 일이 개입되면 그와 같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순수한 신앙과 질서 있는 생활만 보존한다면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어느 한 사람이 엉뚱한 잘못을 범하고 판단력 없는 사람들이 그 잘못에 동조한다면,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노선은 하나 됨을 상실할 것입니다.

1) 우선 개인이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성도의 단체(단체는 교회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유지하는 파가 있는데, 어느 한 파가 다른 길에 유혹을 받았다면 성도의 하나 된 것은 깨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편이 있고, 안 닮은 편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편을 정통이라 할 수 있고,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닮지 않은 편은 이단이 되는 것인데, 정통과 이단은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 되어 서로 합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에게서 따로 있어야 한다”(고후 6:14~18)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 하나 된 것을 해친 쪽이 어느 쪽입니까? 그 쪽은 바로 예수님(성경)과 일치하지 않은 쪽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나 교역자는 정신을 차려서 말씀 중심에 붙잡혀있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많은 편이 정통 같고 적은 편이 이단 같지만 그것은 바른 잣대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정통의 길이 좁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통과 이단은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입니다.

3. 하나 됨을 깨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으로 딴 길로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는 같지만 도덕적으로 격차를 이루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중에 이적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배척을 하여야 하겠지요. 이것은 이단을 격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 애국자라 하면서 “자기가 정치해야만 잘 한다”고 하는 개인이나 정당은 인격적으로 미숙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런 것은 마치 예수는 믿되 적게 닮은 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까지 하나 되는 대열에서 떼어버린다면 예수님을 많이 닮은 성도는 몇 사람 고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보시면 그런 대상을 향하여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둔하라는 뜻이 아니고 포용하여 정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 되는 뜻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면 ① 예수님과 자신이 힘 있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생활하며 예수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하나 되고 영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② 성도끼리 하나 되는 것인데 같은 신앙을 가졌으면 예수님 닮은 생활이 미흡해도 이해하고 포용하여 잘 가르치고 사랑으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고전 1:12). ③ 그러나 어떤 교파나 그 교파에 속한 성도의 신앙의 질이 정통과 같지 않으면 그들과는 신앙적으로 하나 될 수 없은즉 도덕적 친교 이상으로 하나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④ 그러나 도덕적 생활은 미흡해도 신앙 고백이 같으면 그 대상과 신앙적 합동행사를 하고, 도덕적 정화에 힘을 쓰면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된 것을 깨친 자는 바로 이단자들과 불법자들에게 있음을 인지하시고 성도는 성도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 개척정신 (엡 4:11~12) 목록으로


교역자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참으로 값진 일이고, 또 어려운 일이며, 특별한 은혜와 사명감을 맛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약 20년 전에는 지방의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개척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고, 어느 곳에나 십자가를 세워놓으면 교인이 모여와서 큰 교회 되는 기초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은 줄 압니다. 교인이 너무 적어서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 집세를 감당 못하여 문을 닫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셋집을 얻지 말고 교역자나 성도의 주택이나 아니면 작은 방 한 칸을 이용하였다면 집세 때문에 문 닫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개척 교회를 시작할 때 예배당을 주선하는 이유는 시설을 보고 나오는 교인과 깨끗한 시설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예배가 드려지는 줄로 잘못 아는 의식 때문입니다. 마치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으면 사람들 모인 곳에 갈 수 없다는 생각, 또 자신이 가난하거나 출세를 못하였으면 남 앞에 나타내기 싫다는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 하는데도 적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나 재정 취급이나 장황스런 예배의식을 나타내려고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셨지요(신 16:19, 삼상 16:7). 그러니까 개척을 하려면 과거의 낡은 정신부터 탈피하여 오직 믿음 중심으로만 시작하여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외모나 물량주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이나 시설이 좋아도 과거처럼 교인들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차피 한 생명을 건지기 어려울 바에는 믿음 중심, 말씀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1. 본문 11절은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이 혹 누구에게 사도나 선지자 또는 전도자, 목사(목회자), 교사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사도,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를 세울 때 사역하게 하셨고, 교회의 기초가 끝난 다음에는 전도자, 목사, 교사의 직임만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냐? 하면 완성된 성경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성경에 담아 믿음의 지식과 교회와 성도의 생활을 성경으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사도와 선지자 직분은 안 주시고, 교회를 통해서 전도자, 목회자, 교사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은 다 성경으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직임인 것입니다.

2. 이 직임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전도자 은사를 받아 전도하여야 하고, 목회자 은사를 받아 좋은 교인으로 양육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는 데는 잘 가르치는 교사적 특성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봉사하는 교인을 만들라” 하셨고 이로서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성도를 온전케 하는 뜻”은 예수님 닮은 교인을 만들라는 것이고, “봉사하는 교인”이란 사랑을 실천하고 덕을 세우는 교인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하는 것은 예수님 닮은 성도의 단체를 확장시키라는 뜻입니다. 이 뜻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인격을 육성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선교 방법은 예배당 건물을 지어주고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건물은 돈으로 짓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령은 돈과 상관이 없습니다(행 3:6, 8:17~24). 그런데 어떻게 건물을 지어주고 교회를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의 발표를 기독 신문도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당과 교회는 구분하라”고 전화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옳게 고백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3. 그런 단체를 일컬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라고 하셨습니다. 개척하시는 사역자 여러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개척하려고 하십니까? 예수님 닮은 교인, 그리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지요. 예배당이나 시설이나 물질은 다 거품입니다. 왜 거품이냐 하면 보이는 시설은 낡아지기 때문이고, 물질은 몸을 위한 것일 뿐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역자들이 보이는 것에 치중하거나 그것들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습니까? “큰 예배당을 지었다거나, 많은 재정을 예산했다는 등….” 성도의 신앙이 온전해지려면 믿음 지식이 충만하고 자기를 낮추어 봉사에만 힘쓰며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면서 허탄한 것들을 배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긴밀한 것을 가장 중요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는 성도는 허탄한 것에 뜻을 두지 않습니다. 교역자에게 부담을 주는 교인은 믿음에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교역자는 그것을 반드시 치료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개척자의 정신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하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마 16:24), 또 하나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 실패의 관건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교인이나 교회에 지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사명적인 일 외에 다른 것은 계획에 두거나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서 사명에 실패한 사역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개척자가 하나님의 사역만 성실히 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1~33, 10:8~12; 고전 9:9, 11; 히 4:16).

 

 

설교보충 5. 신앙의 성숙인 (엡 4:13~15)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하셨고,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 하셨으며, 또 15절 끝에서는 “그에게까지(예수님 모범에 이르기까지)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로 묶으면 “신앙의 성숙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인이 되는 데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어린아이의 미련하고 연약한 부분을 떠나야 하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목적과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통에 위험이 따른 것처럼, 성도의 신앙생활도 신앙의 성숙인이 아니면 바른 처신을 하기가 퍽 어려운 시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는 혼자 집을 지키기도 어렵고, 혼자 밖으로 내보내기도 어렵습니다. 신앙도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도 신앙이 성숙해야 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도 성숙인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우선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뜻에 대하여 이 ‘온전’이란 뜻이 완벽함을 의미하는가? 할 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인이 되었어도 완벽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만 참 되시고, 그 외에는 다 부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회에 내보냈을 때에 믿음직할만큼 성숙하라는 뜻입니다. 약 3:2에 보시면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 하셨는데, 이 뜻은 말만 잘해도 성숙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또 골 1:28에 보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하셨지요. 여기의 ‘완전’이란 ‘테레이오스’로 ‘온전’으로 번역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완전이나 온전도 같은 뜻입니다. 마 5:48에 보시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는데(벧전 1:15~16) 이 뜻도 역시 예수님을 많이 닮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얼마큼 예수님을 닮으셨으며, 얼마큼 신앙의 성숙인이 되셨습니까?

2. 이 설교를 기록할 무렵에 안병욱 교수님의 인격교양 방송이 나왔습니다. 강의인즉 “사람은 세 종류가 있다. 그것이 곧 미숙인, 반숙인(반쯤 성숙한 사람), 성숙인이다. 미숙인은 철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자요, 반숙인은 미숙인과 성숙인의 중간 상태로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으며, 때로는 비판도 하고, 예절도 지킬 줄 아는데 여전히 혈기, 교만, 욕심, 투기, 허영 등을 빼버리지 못하여 무사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요, 성숙인은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으며, 예절도 있고, 인내와 겸손과 양보도 있고, 화평과 정의도 있어서 잘 융합하고 건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러한 성숙인이 되고 거기에 예수님의 인격을 첨부한다면 참으로 그 보람이 대단하리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신앙단계를 싹과 줄기와 열매로 비유하신 것처럼(막 4:28), 바울 사도는 고전 3:1에서 “어린아이 형편과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로 비유”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신앙이 신령한자에 속할 때 주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앙의 성숙인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 지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되 지식을 겸하여 믿고, 그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의미에는 본질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교의 강도가 커야 하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뜨거운 친분이 아니면 신앙 성숙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2)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룬다”는 말씀이 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룰 것인가? 말씀 실천과 기도로 이루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결을 뜻하기 때문에 온전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룩해진다”는 성경이 시 119:9, 요 17:17에 있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말씀은 딤전 4:5에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말씀 따라 생활할 때에 온전해질 수 있고,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인적 예수님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3) 15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모든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신앙인으로 성숙한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란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목적으로만 상대하고 무엇이나 참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온전해지는 것과 성숙인이 되는 데는 사랑과 진실이 그 방도인 것입니다. 성숙해지는 방법은 ① 믿는 것과 아는 것이고, ②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이며, ③ 사랑과 진실로 이루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15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인데 자라려면 세월이 필요하고 세월을 견디는 동안 많은 연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어른 된 것은 오랜 연륜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별난 일, 별난 경험을 다 해보면서 견디는 법, 신앙적으로 처신하는 법 등, 많은 경험을 통해서 지혜도 자라고 담력도 커지면서 성숙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세대에서 어디에 처해도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신앙의 성숙인이 되시기를 바라고, 일반 사회인들도 민주정치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성숙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변화된 생활 (엡 4:21~32)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변화된 생활”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21~24절은 “변화된 사람”을 말씀하셨고, 25~32절은 “변화된 생활”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화돼야 변화된 생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끼리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너 변한 것 없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늙지 않았다는 뜻이요, 겉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육체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사람됨에 있어서 큰 변화를 받은 것이므로 변화된 생활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 변화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21절을 보시면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유일하며, 영원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배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을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배운 자처럼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2) 그래서 22절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불신자 같은 사람, 욕심으로 세상의 유혹을 받는 사람, 또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불신자는 영원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욕심만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것과 같은 것들로 유혹을 받는데, 그 유혹을 욕심으로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유혹이 무엇입니까? 바로 세상 욕심입니다. 물욕, 명예욕, 현세적 향락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썩어져 가는 구습(불신자 때 선호하던 일)인즉 벗어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면 새사람 된 실감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3) 23~24절은 새사람 된 과정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았다” 하시고, 또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목욕시켰으니까 새 옷은 너희가 갈아입어라”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새사람 되게 해주셨으니까 새 출발을 해라” 하시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이 성도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영적 중생을 주셨습니다. 이 영적 중생은 새로 탄생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과거는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모든 죄를 심판 안 받도록 용서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의와 진리와 거룩을 따를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속이 깨끗해졌은즉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모습은 변한 것이 아닌데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해있더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변화된 생활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1) 거짓을 떠나는 것입니다(25절). 예수님의 속성이 참(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짓을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히 6:18). 그러니까 성도의 변화된 생활은 진실에 대하여 인정받을 만큼 표현에 신중하고 약속을 지키는 일을 철저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언어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25절에 보시면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말을 하라” 하셨는데, 이 뜻은 진실한 말을 의미하고, 29절에서는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을 하며 선한 말로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시므로 언어에 변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 유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야 하고(마 11:29), 또 본문에서도 26절과 31절을 보시면 “분내는 것, 분을 오래 품는 것, 악독과 노함과 떠드는 것, 모든 훼방하는 것을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품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자세로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거센 사람에서 온유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4) 물욕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려 하거나, 재물을 의지하려 하거나,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런 자세라면 부정한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새사람 된 자는 물욕과 현세욕을 (은혜로) 멀리하는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시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식이 바르게 행하지 않을 때 부모가 근심하는 것처럼 성도가 성도답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구원의 보증자라고 하셨습니다. 보증 받은 자가 잘못하거나 부도를 내면 보증자도 손해를 보기 때문에 같이 염려하게 되는 것처럼 성령님도 그러하고 성령님이 근심하시면 역사해주시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따라서 만사를 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6) 긍휼과 용서와 포용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적게 받을수록 관대한 면이 적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서 구원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변화가 나타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은혜로 새사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배웠습니다. 따라서 나타나야 할 것은 예수님을 닮은 생활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 11 과 사랑을 알고 행할 것 (엡 5:1~9) 목록으로


본문 1절 중에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셨고, 2절 중에서는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들은 다 실천 강령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성도답게 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1, 2절 중)

1)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자식 사랑보다 우월합니다. 한국인들의 자식 사랑이 대단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생명까지 희생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많이 입은 자녀일수록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큽니다. 반대로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거나 적게 받은 사람에게 도의적 정서가 부족한 경우를 아실 것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음) 그래서 “사랑을 입은 자녀처럼 생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음”은 예수님의 직접 희생을 의미하고, 또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요 3:16).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곧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고, 예수님의 희생적 고난을 당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믿음으로 받을 때에만 큰 감화와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뜻은 구약 시대에 드렸던 제물대신 예수님이 실제적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헌제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히 9:12~14).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충족할만한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사랑을 깨달은 자의 생활(1~9절)

1)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는 것입니다(1절). 이 뜻은 하나님을 나타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1:18, 14:9).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 하신만큼(롬 8:29) 예수님의 품성과 언사와 모든 생활을 그의 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요 13:15, 행 20:35).

2)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무조건 사랑, 희생적 사랑, 영원한 사랑; 롬 5:10, 요 15:13, 13:1) 성도들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활의 목적과 방법을 사랑에 두어야 합니다.

3) 3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부정과 관련된 것) 탐욕(이기주의)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하시므로 마음의 자세가 오직 경건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누추함(아이스크로테스, 부끄러움)과 어리석은 말(지혜롭지 못한 말)과 희롱의 말(모욕적 언사)도 마땅치 않다”(4절)고 하셨으니 오직 말에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4)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4절)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범사(좋은 일과 고난스러운 일)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살전 5:18) 따라서 모든 일을 감사의 견지로 표현하여야 합니다.

5) 7절에서 (거룩하지 못한 생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시고, 5~6절에서 몇 가지 거룩하지 못한 생활을 열거해 주셨습니다. 5절에서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골 3:5)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 한다”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유의하실 것은 ① 부정한 생활을 돌이키지 못하면(이것은 믿음의 결격사유에 해당함, 약 2:17) 구원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② 본문에 거론된 죄악은 악인들의 상습적 죄악을 열거하신 것이며, ③ 현세욕에 대한 탐심 그 자체가 우상 숭배란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6) 6절에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하셨으니 헛된 말 즉 진리 아닌 교훈에 속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오직 진리의 확신으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헛된 말”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하셨은즉 죄를 져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다 헛된 말입니다. 성도는 그런 잘못된 교훈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유혹자들을 대표하신 말씀)에게 나타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19:20, 21:8).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는 하나님의 권속이요 천국 시민인 만큼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제 12 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21) 목록으로


본문의 주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엡 2:2~3)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셨으므로(요 1:5)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엡 4:3, 요 15:4)들도 빛 가운데 있은즉 빛의 자녀들처럼 생활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1. 9절에서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상상해 보십시오. 빛이 비추이면 우선 따뜻하고(착함을 뜻함) 곧게 비치며(의로움을 뜻함) 어두움을 밝히지 않습니까?(진실, 사실대로 나타남) 그래서 빛의 열매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착한 사람으로 죄와 불의를 멀리하는 사람으로, 또 자신에게 해로움이 임해도 진실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10~14절). 10절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시험한다”는 뜻은 “도키마죤티스”로 시험하다, 경험하다, 검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주밀하게 힘쓰고, 또 자기의 노력한 결과가 실제로 영광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이 기뻐하실 줄 알고 행하였어도 그것이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는 것들이 많을 것인즉 반드시 예수님의 생활 잣대로 자신들의 생활을 재보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제로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1) 우선 11절에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그런 생활을 스스로)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열매, 그 자체는 영광 돌리는 생활의 결과인데 그것이 없으면 결국 주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 없이 어두움의 풍습을 따라 옛 사람처럼 살았다는 뜻이 되므로 스스로를 책망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신을 정죄하고 책망하지 못한다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고후 7:10~11).

2) 12절에서 “은밀히 행하는 비양심적인 일들을 부끄럽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마 28:20, 창 46:4, 시 139:1~4). 그러니까 항상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비양심적인 생각과 행실을 나타낼 수 있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밀히 행하는 것”이 곧 어두움에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말하기도 부끄러움”은 그만큼 죄악이 누추한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즉 은밀한 생활을 할 때 더 잘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암 3:3). 13절에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난다” 하심은 불의에 대한 책망으로 빛의 열매(9절)를 나타내게 된다는 말씀이며, 그렇게 될 때에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라”는 뜻은 어두움의 일이 책망(스스로의 반성)을 인하여 빛 된 생활로 돌이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14절에서 “잠자는 자 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잠자는 자”는 나태한 성도를 뜻하고, “죽은 자들”은 불신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성도들이 나태와 불신앙적 생활에서 일깨어 일어날 때(각성과 변화의 생활을 뜻함) 그리스도께서도 “네게 비취시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눅 1:67~79의 예언 중 78~79절을 인용한 뜻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주님이 그 심령에 임재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마 5:8, 잠 8:17).

3. 지혜 있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15~21절).

1) 우선 실수하지 않고 보람된 생활에만 임하기 위하여 주의가 요구됩니다. 15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죄 안 되게 살고, 생산성 있게 살며, 그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자세히 주의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주의함”은 작은 일도 큰일처럼 살피라는 뜻입니다.

2)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필자의 설교문에 “세월을 아끼라”는 제목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홈페이지에 제목이 나열되면 참고하십시오.) 세월은 곧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때가 악하므로 건설적인 시간을 이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3) 17절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뜻”, 이것은 성경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활과 사상과 교훈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4) 18~21절은 “성령 충만을 힘입어 찬송과 감사와 복종의 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하심은 술 취함 자체가 방탕하는 죄에 속하기 때문이지만 본문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힘입으라”는 말씀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성령 충만에 역행하는 상태를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또 술 취한 자의 술에 끌린 태도를 상상하면서 성령님의 감동에 이끌린 자의 형편도 생각하게 하시는 교훈인 줄 압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교훈은 필자가 집필한 “성령님에 대한 설교”를 참조하십시오. 성도가 성령에 충만한 감화를 받을 때 19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수 있다” 하셨고, 20절에서는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며”, 21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므로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을 때 기쁨과(19절) 감사와(20절) 피차의 복종(21절)이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문학적 표현이고,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같은 뜻이며, “서로의 화답함”은 찬양의 예술적 조화를 뜻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함”은 심중에서 나오는 뜨거운 마음으로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또 감사를 말씀하실 때 20절에서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감사의 내용은 범사이며, 감사가 전달되는 통로는 오직 예수님의 중보를 통하여서만 상달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함”은 성령 충만을 힘입은 성도가 믿음 생활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성도간의 사랑과 사랑에 입각한 복종이 당연히 나타나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 13 과 두 결합의 공통점 (엡 5:22~33) 목록으로


이 말씀은 부부의 생활원리와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을 말씀하시므로 부부생활의 도덕적 질서와 성도의 교회 섬기는 생활을 아울러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부부의 생활 원리를 살피면

1. 22절에서 우선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부에 대한 교훈이 골 3:18~19과 벧전 3:1~7에도 기록되었는데, 본문과 함께 세 곳 다 아내에게 먼저 교훈하신 것을 보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에 따라 절대 복종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훈인 만큼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이 그 부부생활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라 하면서 아내 된 자가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남편 위에 군림하거나 자기 주장을 펴서 복종하지 않으면 파산된 가정이나 다름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의 파산이란 일단 주님의 뜻대로 시행하지 않는 가정이란 뜻입니다. 남편의 뜻에 복종할 마음이 없는 신부는 아예 혼인하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이유로써 23절에서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요… 그가 친히 몸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몸의 구주”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해당합니다. 왜 하나님이 남편을 아내의 머리(주관자의 뜻)로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인류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는데(창 2:18) 여자가 먼저 타락한 연후에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3:18).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생활을 의미함이 아니고 부부생활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더 똑똑하여 남편을 지배한다면 그리스도를 표상한(고전 11:3) 남편의 위신이 떨어져서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그 부부의 생활도 아름답지 못한 형편이 됩니다. 설령 남편에게 부족함이 많아도 의논적으로 존경하고 자신이 복종하는 아내가 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친히 몸의 구주”란 뜻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심 같이 남편이 자기의 아내를 보호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요, 이 의미를 28~30절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24절에서도 “교회(성도의 단체)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라” 하셨으니, 범사란 뜻과 재차 강조하신 의미를 아내들은 유의하셔야 합니다. 남편이 부족하여도 의논하여 하세요. 남편이 스스로 부족을 자인하고 아내에게 맡기면 자유롭게 하여도 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의지를 꺾는 것은 복종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2.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피 흘려 구속하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행 20:28). 이 말씀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자기의 몸과 생명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8절에서 같은 설명을 하셨으니 곧 “이와 같이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사랑받는 방법이고,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복종하는 아내를 남편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아내가 남편에게 잘하니까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9~30절에서도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몸의 지체임”은 부부일신 됨을 뜻하면서 또 성도가 예수님의 교회의 회원임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성도)는 순결하여야 합니다. 어느 남편이나 자기 아내의 순결을 원하는 것처럼 주님도 교회의 순결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셨고(25절), 26~27절에서 순결(거룩) 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로 씻어(세례 의식을 뜻함, 신앙 성숙의 단계를 거치는 뜻)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성경적 생활을 하게 하여 순결을 도모하는 뜻)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아내의 순결로 교회의 순결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자기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화장을 하고 단장을 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교훈이나 제도나 생활에 있어서 티나 주름잡힌 흠이 없게 될 때에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31~33절에서 “이 비밀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31절에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 지라” 하심은 남녀가 그 부모를 떠나 한 육체가 될 때 그만한 인생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큰 비밀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비밀”이란 “무스테리온”으로 감추인 오묘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더 연구할 소지가 많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부의 대의와 교회 생활의 신비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체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3절은 결론적으로 부부의 대의를 거듭 강조한 말씀입니다. “너희로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경외”란 용어는 절대자에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창 22:12, 벧전 3:6).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교회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으로 생활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7. 지혜로운 생활 (엡 5:15~1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는 자처럼 하고 세월을 아끼며 주의 뜻을 이해하고 방탕하지 말며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지혜로운 생활은 생각할수록 방대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요약하면 좋을까요?

1. 우선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짐승 생활과 같다 하셨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우선하여야 할 것입니다(시 49:20, 전 12:13).

2. 그 다음에는 믿음의 알맹이를 여물게 하기 위하여 크게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열매도 선 것이 있고 익은 것이 있듯이 믿음도 그렇습니다. 연약한 어린아이 믿음 같은 것이 있고 성숙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하셨으니까 믿음 가꾸는 노력을 잘 하셔야 하겠지요. 믿음 가꾸는 노력은 영혼이 잘 되는 것이고(요삼 2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며(마 6:33)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고(요 6:63) 세상과 정욕을 멀리하면서(요일 2:15~17) 성령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벧전 1:25, 갈 5:16). 자신과 육정과 현실을 앞세우면 믿음이 성숙하지 않고 오직 말씀과 기도와 경건 생활에 힘을 쓰셔야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경계합니다. 만 가지 불행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국법을 어기거나 나라를 손해 보이거나 이웃에 덕을 주지 않은 것은 다 죄에 해당하고, 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니까 마음가짐과 행위가 아울러 죄 되지 않도록 사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떤 영향이 옵니까? 거리낌이 옵니다. 그것은 마음의 불안을 주고, 사람 앞에 죄를 지으면 사람이 대적하고, 나라에 죄를 지으면 나라가 대적을 합니다. 또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이 대적자가 되신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성도는 죄라면 억을 주어도 거들떠보지 않고 배격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지혜로운 생활은 예비를 잘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비해야 합니까?

1) 우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고 주의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주변에는 악과 위험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예방하는 데는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 필요하고 사람도 주의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인간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성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산불로 큰 피해를 보았는데 또 그 자리에 비와 우박이 쏟아져서 큰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비가 왔으면 좋을 뻔하였으나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늘 깨어 기도합시다. 결코 자만하지 말고, 자신을 믿지 맙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법입니다.

2) 필요한 것을 미리 예비하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그때 그때 주시기를 바라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신앙에 관한 문제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믿음으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필요한 내용들로서는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로서, 가족의 생활 문제, 자녀의 교육비 문제, 주택 문제, 의료 문제 등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고, 모든 인간이 꼭 겪어야 하는 죽음 문제에 대한 대비도 항상 있어야 하겠지요. 이것은 다 자기의 인생을 값지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책임에 따른 대비가 있습니까?

5.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과 생명은 같은 뜻이지요? 세월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는 뜻이니까요. 세월을 아끼려면 우선 가치 판단부터 잘 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값진 일인가?를 판단하여 그 일에 근면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남의 시간도 다 소중히 여겨 주어야 합니다. 시간을 절약할 줄 아는 사람은 시간만 자원이 아닌 만큼 다른 것도 절약합니다. 예를 들면 물질과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부족하여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 하셨을까요? 그 흔한 물과 그 흔한 공기가 고갈되어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6. 또 지혜로운 것은 인간 중심의 표준을 떠나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도 표준은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인정하셔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노릇을 하지 않는다”(갈 1:10)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만든 전통은 진리가 아니고, 또 사람의 평가도 바른 판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셔서 메뉴를 선택할 때 “비싼 음식을 청할까요? 적당한 음식을 청할까요?” 하고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께 여쭈어 보세요. 예수님이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눅 10:41~42). 함께 모신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람의 의견이나 욕심을 따라 행한다면 지혜롭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항상 겸손한 것이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올라가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이 되셨고 죽기까지 낮아지셨으니까요(빌 2:7~8). 낮아지면 넘어질 염려 없고(고전 10:12) 겸손하면 은혜를 주시고(벧전 5:5) 때가 되면 높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6). 겸손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섬기게 되고, 양보하게 되며, 화목하게 되고, 또 사람의 사랑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복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혜로운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을 키우며, 죄를 삼가고, 환난과 미래를 예비하며, 예수님 표준으로 살고, 항상 겸손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보충 8. 세월을 아낍시다 (엡 5:16) 목록으로


이 제목으로 설교문을 쓴 것이 여러 편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쓰는 것은 세월 아낌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보면 노는 사람들이 많지요. 공원이나 구경하는 장소, 또 장난삼아 화투치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할 일이 없으면 동사무소에 가서 쓰레기봉투를 달라 하여 길 청소라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세월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세월을 아낄 때 발전할 수 있고 세월을 무가치하게 보냄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뚜렷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글을 밤 1시에 쓰고 있습니다. 약간의 피로는 있으나 가을 모기 한 마리가 잠을 못 자게 하여 그 기회를 이용합니다. 나는 현재 10개월째 식생활을 혼자 해결합니다. 친구 서동길 목사님(82세)이 늘 이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년 시절 은혜 받을 당시의 기도원 생활을 재현해보려는 뜻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시간 절약입니다. 150m 떨어진 곳에 집이 있지만 그곳에 가고 오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서재에서 식사를 직접 해결하면 TV 뉴스를 들으면서 원고를 정리하거나 말씀 묵상을 하면서 식사도 준비하니까 1석3조가 됩니다. 또 이로써 아내의 수고를 크게 덜어주는 일도 됩니다. 그리고 나는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합니다. 시간은 은혜인데 시간을 낭비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음이 되고(고후 6:2) 짧은 인생에 내일 일을 모르니 초급하며(시 90:9~10, 약 4:14) 인생의 성공, 실패가 시간에 달려있지 않습니까?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어떤 관리와 만남을 약속하였는데 그 관리가 5분을 늦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망하기를 “5분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아느냐? 전쟁의 승패가 5분에 달린 것이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또 만남의 약속이 있었는데 그 관리는 먼저 5분 어긴 것을 마음에 두고 5분을 일찍 와서 기다린즉 웰링턴 장군이 정시에 오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잘 지키려고 기필코 5분전에 왔습니다” 한즉 “자네는 5분을 낭비한 사람이야. 나는 정시에 오지 않았는가?” 하여 또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월은 악하고 잘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필자가 대구 남일교회를 시무할 때 전이석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평북 선천이 고향인데 그 부친 장로님이 교회 충성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주일날 교인들이 다 그 장로님 집에서 식사를 하였고, 예배당을 짓고 기와를 올리다가 기와가 모자란즉 자기 집 기와를 벗겨 채우고 그 자리에 이엉을 엮어 두르게 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다고 합니다. 30대에 월남하여 40대, 50대까지 교회 생활을 하지 않다가 60대가 된즉 고향의 부모님 생각이 나면서 회개하고 교회에 출석하셨는데 부모님께 효도하는 뜻으로 장로직이라도 계승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충성하여 마침내 70전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고시 하고 장립할 무렵에 신장염, 전립선 비대 외에 교통사고 등으로 어렵게 장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세월과 기회가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구나 하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세월과 기회는 어렵게 주어지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체국에 갔었는데 나이 많은 여직원이 컴퓨터 사용을 익숙하게 못하여 그 옆 직원을 괴롭게 하면서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을 보고 안됐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컴퓨터 사용법 터득이 늦은즉 큰 손해를 보더란 것입니다. 부지런히 살면서 꼭 알 것은 알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월을 아끼라” 하실 때 “아끼라”는 원문 “에카고라조메노이”는 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세월이 악한 때에 자기가 쓸 시간을 밑천을 들여 만들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특히 60대 이상 되신 여러분, 세월을 최대한 아껴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정된 생활비를 여러 가지 종목에 나누어 쓴 것처럼 하루 24시간도 적재적소에 나누어 보람 있게 스셔야 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장 칭찬하시고 영광 받으실 일을 첫째 목표로 삼으시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목표는 첫번 목표만큼 중요하지 않으니까 휴식시간이나 다른 여가를 이용하여 하십시오. 삶의 능률을 올릴 때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많은 것을 축적하셔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도 “땀을 흘려야 한다” 하셨거든(창 3:19) 하물며 상 받을 일이겠습니까? “6일 동안 힘써 일하라”(출 20:9) 하신 말씀, 야곱이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살았고(창 31:40), 예수님도 피곤하게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오(막 4:38). 식단이 많으면 그만큼 준비하는 시간이 소모됩니다. 무슨 행사를 하실 때 격식 절차를 줄이십시오. 제가 어떤 교회에 집사 임직식에 갔는데 절차준비 상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 것을 보고 “개혁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임직 날짜 정하고, 그 시간에 서약하고 공포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면 누구를 청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십시오. 길흉사가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청하면 상대방의 시간과 물질을 뺏는 결과가 될 수도 있으니 그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에게 복 주신다” 하셨고(눅 6:38) 바울 사도도 이 말씀에 부언하여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행 20:35)고 하셨습니다. 될 수 있으면 상대방의 시간을 뺏으려 하지 마셔야 하고, 자기의 인생을 값지게 살기 위하여 세월을 아낌에 총력을 기울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기가 잠을 못 자게 하여 이 글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보충 9. (감사 설교)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엡 5:18~21) 목록으로


본문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시고 세 가지 시행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기쁨의 찬송이고, 다음에는 감사이며, 세 번째는 피차의 복종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도가 성령에 충만하면 기쁨의 찬송과 범사에 감사와 피차의 복종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술 취하면 주정하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신령한 노래 곧 찬미를 하게 됩니다. 찬미는 기쁨의 발로입니다. 두 번째는 범사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릴 주제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겸손하게 되고, 남을 섬기게 됩니다. 섬기려고 하는데 상대방도 같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섬기려 하니까 서로 복종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 좋은 미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0절 말씀 속에 범사라는 용어와 항상이란 용어가 감사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의 근거는 범사이고, 감사의 시기는 항상인즉 감사의 생활이 중단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성도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우선 적은 일에 대하여 감사하셔야 합니다. 적은 일, 적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형무소 그늘 속에서 빛을 못보고 사는 사람이 어쩌다가 쥐구멍을 통하여 빛을 보면 그렇게 반갑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천리 길이 한 걸음부터 시작되고, 티끌을 모아 태산이 된다는 속담을 믿는다면 저희들은 한 걸음 걸을 수 있는 것과 티끌 같은 작은 은혜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는 철사 한 뼘이 없어서 아쉬울 때도 있지 않습니까? 마 15:36과 요 6:11에 보시면 5병2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시면 어린아이가 지참한 도시락이고, 보리떡 다섯 개도 적은 가치의 떡이지만, 물고기 두 마리도 작은 고기를 뜻하는 “옵사리온”입니다(요 6:9). 그러니까 그 분량과 가치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에 불과한 것인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수를 제하고 5,00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놓고 축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축사로 번역된 원문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로기아”입니다(눅 24:30). 이 뜻은 축복에 가까운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5병2어 기적을 나타내실 때는 “유카리스티오”를 쓰셨는데(마 15:35, 요 6:11, 고전 11:24) 이 뜻은 감사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뜻은 아주 작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셨고 그것으로 큰 축복을 받은 결과가 온 것입니다.

2.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니까 하나님 뜻대로 된 것을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 11:25에 보시면 “복음의 말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힘께나 쓰는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고, 또 노력하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어린이는 영접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아버지 뜻대로 된 것을 감사하셨고, 또 십자가를 지셔야 할 입장에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교회 당회가 장로 후보 열 명을 세워놓고 공동의회에서 2/3의 투표가 안 나오는 것 때문에 고민한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 열 명이란 수도 인간의 뜻을 앞세운 것입니다. 투표 잘 나오는 수가 하나님의 뜻인즉 그 뜻을 복종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비 오는 날 장례식에 가서 “10분 안에 비가 멎으면 기도 응답으로 믿겠습니다” 했는데 한 시간 후에 비가 멎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10분을 잡은 것이 사람의 뜻이다. 차라리 ‘적당한 때에 멎게 해 주십시오’ 하였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은 0.1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뜻에 감사하셔야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만물과 구원의 은혜는 의당 감사할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 은혜(롬 7:23~25)와 말씀의 은사(살전 2:13, 고후 9:15)와 직분의 은사(딤전 1:12)와 교인들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며 열심을 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까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롬 6:17, 고전 1:4, 고후 8:16, 살후 1:3). 좋은 것들도 헤아려보면 수없이 많습니다.

4. 그 중에서 기도 응답하시는 은혜를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 살리는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1:41).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잘 들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응답에 대하여 덤덤한 분들이 계시겠지요. 자신이 기도를 잘 안 하거나 자기중심으로 무엇을 구하거나 응답을 민감하게 기다리지 않으면 응답을 못 받거나 받고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경성하는 기도를 하시고 응답을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시 116:1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5. 실패와 고난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환난 중에도 감사하셨는데, 그 이유는 “환난이 연단과 소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롬 5:3~4).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롬 15:15). 어떤 형편에서도 유익하고 복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다 성령에 충만하시고, 기쁨과 서로 복종하는 일과 항상 감사하는 일을 하셔야 하는데 성도가 항상 감사하려면 적은 일에, 또 주님의 뜻에, 신령한 은혜에, 기도 응답에, 실패와 고난에도 감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교균 목사님이 목에 난 암을 수술하고 아픔을 없애달라고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더니 “아픈 것도 감사합니다” 했더니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감사는 자족하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빌 4:11, 히 13:15, 딤전 6:8).

 

 

설교보충 10. 신령한 노래 (엡 5:19~20)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저희들이 찬송이 미흡한 줄 압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은혜를 사모할 때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213장) 하는 찬송을 스무 번쯤 연속 부른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힘들고 지루하여 중지하고 함께 찬송한 선배님께 “힘들다”고 하였더니 자기 아는 전도사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불렀다는 말씀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찬송을 그렇게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본문의 “시”는 구약의 시편 가사를 뜻하고, 찬미는 박윤선 목사님 주석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노래”라 하셨으며, “신령한 노래”는 시와 찬미를 병용한 것인 듯하다고 하셨습니다. “화답”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성도가 교대하는 뜻이고, 또 마음으로도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찬송할 때가 많은 줄 압니다. 찬송 잘하는 사람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따라할 때도 있으니까요. 며칠 전에 어떤 큰 교회를 간즉 찬양석을 강당 정면으로 지정하여 대원들이 그곳에 나가서 청중을 향하여 찬양하도록 시설한 것을 보았는데, 찬양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닌 사람에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액세서리 같은 문화이겠지만 여하튼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영적 제사인 것입니다. 저는 찬양을 잘못하지만 연구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찬양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우선 찬미, 찬송, 찬양이 같은가? 다른가? 를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다르지 않고 신령한 노래도 같은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찬미로 번역된 원어가 신약에서만 네 종류 단어가 나옵니다. 아이노스(마 21:16), 에파이노스(엡 1:6, 14), 흄노스(골 3:16), 프살로(고전 14:15, 엡 5:19)입니다. 그런데 “아이노스”는 찬양으로도 번역하였고(눅 18:43, 롬 15:11), “흄노스”를 찬송으로(히 12:12), “프살로”도 찬송으로도 번역한 것을 보았으며(롬 15:9, 약 5:13), 또 찬송이란 원어에 “독사조”(행 13:48), 율로게오(마 21:9)가 있고, 찬양으로 번역한 원문으로는 “아도”(골 3:16)와 “메갈루노” 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눅 1:46). 결론은 이 여러 가지 용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구별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노래”는 찬미를 수식한 말입니다. “성도를 구원하심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엡 1:6) 하신 말씀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라”(시 33:1) 하시고, “새 노래로 노래하라”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찬미 받으시는 것을 좋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성도는 “종일 찬송하고 평생 찬송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시 35:28, 104:33). 찬송은 천국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계 5:9~12, 7:12, 15:3). 계 15:2에는 “하나님의 거문고”란 말씀이 있으니, 이 뜻은 하나님도 악기를 소유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악기가 다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창 4:20에 보면 9대 조상 유발이 수금, 퉁소를 만들었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기록은 없고, 민 10:10에서 모세 때의 은나팔을 만들었지만 그것 역시 통솔용이었을 뿐 찬양한 기록은 없습니다. 찬양은 모세가 홍해를 건넜을 때 처음 하였고(출 15:1~18), 그 후 시대에 다윗이 시편을 중심 하여 찬양을 많이 올렸으며(삼 16:23), 찬양을 할 때 사울에게서 악신이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때 찬양대의 전문 조직과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400명의 찬양대가 있었고(대상 23:5) 악기로는 비파와 수금과 제금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새 노래를 부르고 공교히 연주하라”고 하였습니다(시 33:3, 96:1~2).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찬송은 더 활성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무렵에 마리아의 찬양과(눅 1:46~55) 사가랴의 찬양과(눅 6:67~79) 시므온의 찬양이 있었고(눅 2:28), 성만찬을 잡수시고 헤어지시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찬미가 있었으며(막 14:16), 초대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서 찬송이 있었고(행 2:47), 바울 사도의 옥중 찬송에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행 16:25).

결론적으로 신령한 노래(찬미)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믿음의 노래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요소가 다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하나님 아는 지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모함, 감사, 그리고 사명적 순종과 충성, 음악적 요소까지 구비됨이 있을 때 그 찬송이 좋은 찬송이 될 것입니다. 믿음과 가사는 성경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곡조는 어떤 곡이어야 하는가? 할 때 세속적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속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12:2, 약 1:27, 요일 2:15). 그런고로 성도의 찬송은 세속에서 쓰는 곡을 모방하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개발하되 자주 새 노래가 되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가페출판사에서 발행한 성경사전의 “찬송”란을 보시면 참고하실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믿음의 요소와 음악의 자질을 갖추어 좋은 찬송을 많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제 14 과 혈육관계와 주종관계 (엡 6:1~9) 목록으로


이 본문의 1~4절은 “혈육관계 즉 부모와 자녀들 관계”요, 5~9절은 “주인(상전)과 종과의 관계”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혈육관계와 주종관계”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혈육관계의 교훈(1~4절)

1) 1절에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란 예수님의 뜻 안에서 또는 “믿음을 전제한 범위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기독교를 신봉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그것도 순종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 뜻이 바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전제한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순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 관계는 주님 뜻을, 현실 관계는 무조건 부모님 뜻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2절에서 “부모를 공경함이 약속 있는 첫 계명임”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약속을 첨부하여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하셨으니, 그 약속은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 효도 계명이 첫 계명임은 인륜계명(5계명~10계명)으로서 첫 계명이란 뜻이요, 바울 사도는 3절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신 약속을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해설한 것입니다. 장수하는 데는 잘 되는 일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3) 4절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아비들”은 부모를 대표한 것이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아야 함”은 책망을 금하라는 뜻이 아니요, 부모의 자녀에 대한 책임 부족을 인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부모는 그 자녀에 대하여 양육과 교육 등 일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자녀들이 노여움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책임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심은 예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예수님의 교훈에 입각하여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양육은 신앙과 교육과 건강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2. 주인과 종의 관계(5~9절)

1) 5절에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하셨으니, 우선 이 말씀에서 “종과 육체의 상전(고용주 또는 높은 지위)이 인정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가정에도 위계질서가 있듯이 사회와 단체, 기업체 등에도 위계질서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존경 받는 상전도 있고, 법률적 또는 계약조건으로 상전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지식, 경험이나 업무나 기술 상으로 상전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튼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을 의식할 때 상전과 하인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 파악을 잘 하여야 합니다. 이때에 겸손을 취하는 태도는 언제나 적절합니다(빌 2:3). 자신이 종이나 낮은 자로 판단되었을 때는 그 윗사람에 대하여 섬기며 복종하는 자세를 취함이 마땅한데, 그 방법으로 “두려워하고 떨며(실수를 조심하라는 뜻)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하셨으니, 여기의 “그리스도께 하듯 함”이 중요합니다. 이 뜻은 절대 복종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김이 마땅한 것처럼 자신이 종의 신분 된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뜻으로 육체의 상전을 섬길 때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필자가 3년쯤 군 생활을 하면서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성실하게 한 일이 있는데 그 생활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겸손과 복종과 섬김은 자신이 받을 복을 쌓는 일로 믿어,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어 섬기러 오신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빌 2:8).

2) 앞에서 드린 말씀을 6~8절에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기회를 보아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꾀를 부리는 경향이 있음)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하셨고, 또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종들이 상전을 섬기는 자세는 복종도 하려니와 모든 업무를 자기의 일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상전)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종이 섬기는 봉사를 잘하였다면 주님이 그 상을 주시고 상전 역시 종을 학대하지 않고 사랑하였다면 주님이 그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일반이며, 대접을 받는 자와 섬기는 것도 일반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교역자 생활 40년 가까이 교인들로부터 대접 받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제는 낮아져서 성직자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섬기는 본을 보여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또 그런 환경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 합니다. 섬기는 위치가 대접 받는 위치보다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눅 22:27).

3) 9절에서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예수님)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는 뜻은 6절의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상전들이 하인을 멸시하여 공갈을 친다면 이는 인권 침해요, 또 자신의 상전됨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된 것임을 인식하지 않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주 안에서 상전 된 자는 자신이 상전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하고, 또 예수님이 소자(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뜻을 깨달아서(마 10:42, 18:6, 10) 공갈대신 종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는 종과 상전의 상전이 다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삼상 16:7) 주인이 종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학대를 함에 있어서 확실한 평가를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권면과 결론 (엡 6:10~24) 목록으로


10절의 “종말로”란 서신의 결말이란 뜻이요, 전체의 내용은 권면(10~20절)과 결론(21~23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권면의 내용은 마귀와의 싸움을 위하여 무장하고 기도하며 대항하여 싸울 것을 부탁하셨고, 결론 부분에서는 편지 전달자의 소개와(21~22절) 축복으로(23~24절) 끝을 맺었습니다.

1. 권면(10~20절)

1) 10절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강력으로 강건하여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적으로 강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강력”이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강건하라는 뜻인데, 여기에 “강건”이란 용어를 쓰신 이유는 성도를 무사(군인)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2) 11절에서는 강건하여야 할 이유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함”이요, 무장 그 자체는 무사가 전신갑주를 입는 것처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무사의 전신갑주는 곧 성도의 신앙적 싸움 준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3) 12절에서 성도의 대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으니 곧 “우리의 씨름(무사의 싸우는 모습)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이 뜻은 신앙의 싸움이 인간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혈육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세상에 나타난 권세 있는 불법자들을 뜻함)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 엡 2:2; 이 공중은 마귀의 활동 무대를 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대적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4) 13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셨고, 이 전신갑주에 대한 설명은 14~17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또 “이는 악한 날에(마귀가 크게 발동하는 시기, 딤후 3:1, 계 12:12, 살전 2:7~8)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하시므로 명실 공히 핍박을 이기고 사명도 이행한 후 신앙적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5) 14~17절은 전신갑주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사의 갑주를 염두에 두시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전신갑주는 몸에 붙이는 장비로써 기본 장비와 특별 장비가 있는 바 ① 기본 장비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는 것”(기본 진리의 지식, 허리띠는 의복을 간추리는 기본 장비임)과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영적 평안을 누리는 복음적 신앙, 요 8:32, 14:27; 신도의 기본 장비에 해당함)입니다. ② 특별 장비는 방패 장비로써 의의 흉배(14절, 정의에 입각하여 싸우는 것)와 믿음의 방패(16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와 구원의 투구(17절, 영적 구원적 신앙)이고, 공격 무기로서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과 말씀을 핍박자나 이단자들에게 공격 무기로 쓰려면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정도(기본 지식)보다 훨씬 능가하는 전문적 성경 지식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싸우는 자의 활동입니다. 그 활동은 ① 14절의 “서서”란 말씀에 따라 항상 경성함이 필요하고, ② 16절의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하신 것처럼 악에 대한 완전 승리의 싸움을 하여야 하며, ③ 18절에서 기도를 특수 무기로 소개해 주신 것입니다.

7)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딤전 2:1에서 설명됨)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성도는 기도에 대하여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초월하여야 함) 이를 위하여(마귀와의 싸움을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으니 모든 성도가 다 함께 시험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해줄 필요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8) 그 중에서 19~20절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 사도를 위하여서도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복음 사역자들에게는 증거할 말씀이 항상 성령의 역사로 마음에 떠올라야 함) 나로 입을 벌려(증거의 담력을 뜻함) 복음의 비밀(구원의 도리가 오순절 이전까지 이방인들이나 율법주의자들에게 감추인 상태에 있었음)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하라 하였으니 핍박하는 대상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순교적 각오를 하여야 하므로 그만한 담력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에게는 항상 증거의 내용과 증거의 기회와 증거하는 담력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의 교역자나 모든 전도자들을 위하여 쉬임 없는 기도를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 일(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므로 19절의 기도를 부탁하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2. 결론(21~24절)

바울 사도는 결론 부분에서 이 편지의 전달자로 “두기고를 보내게 된 사연”을 말씀하시고(21~22절) “축복”을 하심으로(23~24절) 끝을 맺으신 것입니다.

1) 두기고를 보내신 사연은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신 것을 보면 제자 “두기고”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기고”는 디모데와 함께 아시아 사람으로(행 20:4) 바울과 마게도냐 지역의 선교를 함께 하였고(행 20:1~4) 골로새서와(골 4:7) 디모데후서도 전달하였으며(딤후 4:12) “그레데”에서 디도를 대리하여 사역을 한 일도 있었던 사람입니다(딛 3:12). 바울은 두기고에 대하여 소개하시기를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며 바울의 사정을 잘 알릴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21~22절). 특별히 그를 보내신 것은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라”(22절) 하셨으니 그만한 영적 권위가 있었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두기고를 인정하시듯 모든 성도는 교역자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축복입니다(23~24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하시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셨으니, 이 축복의 특징은 복 주시는 구원자 성령님을 잠재하여 나타내지 않은 점과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온전한 믿음)으로 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점이며, 또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란 말씀으로 복 받을 대상과 조건을 붙인 것입니다. 복의 근원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복 받을 대상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복의 내용은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임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축복은 영감된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일반 성도와는 달리 그만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2003. 11. 15.)

 

 

설교보충 11. 영적 투사가 됩시다 (엡 6:10~20) 목록으로


“영적 투사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1절에 보시면 “마귀의 궤계를 대적해야 한다” 하셨고, 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이 있다”고 하셨는데 성경에 마귀와의 싸움을 경주하는 일로 비유하시기도 하였지만(고전 9:24~25, 히 12:1), 그것은 “이겨야 한다”는 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이고 실제적으로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본문의 “씨름”이라 번역한 것도 사실은 “투쟁 충돌”로 번역함이 옳습니다. 그 원문이 “팔레”인데 영어로는 conflict(투쟁, 충돌)로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시자마자 마귀의 대항을 받으셨고, 마귀의 대항은 헤롯 왕의 핍박으로 나타났으며 예수님은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셨읍니다. 또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오실 무렵에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지요. 당연히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때 마귀는 주춤하고 떠났다가, 또 종교적으로 대항하기 위하여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핍박한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도 끈질기게 대항하고 훼방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혹하고 베드로도 밀 까부르듯 한 마귀가 성도인들 가만 두겠습니까?(눅 22:31) 성경에 보시면 마귀의 정체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우선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 하셨으니(엡 6:20) 이는 세상의 왕권을 가지고(롬 13:1, 요 14:30) 세상을 어둡게 주관하고(엡 6:12) 세상의 영광으로 만인을 유혹하며(마 4:8) 교묘한 수단으로 성도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91:3에서는 마귀를 사냥꾼으로 비유하셨고, 아 2:15에서는 여우로 비유하셨으며, 예수님도 헤롯 왕을 여우 또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3:32, 요 10:12). 사도 요한은 마귀를 “거짓의 원조요 거짓말하는 무기를 가졌다”(요 8:44) 하셨고, 베드로는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하셨으며, 또 사도 요한은 뱀과 용으로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계 12:9, 20:2). 마귀는 위장을 잘 합니다. 자기를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하고(고후 11:14) 허술한 틈을 노리며(엡 4:27) 거짓의 무기로 성도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거짓으로 성도를 유혹하는 증거는 아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고 부정함으로 유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하면서 의문을 붙였고, 결국은 “그렇지 않다. 너희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뜻을 왜곡시키는데 성공하고, 결국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목적은 진리의 도전이고, 마귀의 무기는 거짓 유혹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불이 떨어지는 이적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계 16:14, 13:13). 성경에 확고하게 잡혀있지 않은 사람들이 거짓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신비적 체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꿈이나 비몽사몽간에 천국이란 곳을 구경하고 “죽었다가 살았다” 하면서 “천국이 어떠하더라” 하면 무조건 믿고 추종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다 참된 말씀인 성경에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만 신앙과 본분의 유일 법칙으로 믿고 “다른 계시는 주시지 않는다”는 신학을 정립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 말엽에 영천에 사는 방학중이란 사람이 많은 해학을 남긴 사람인데 빚쟁이가 늘 와서 빚 독촉을 하니까 자리를 죽은 자로 위장을 하고 병풍을 치게 한 다음 부인으로 하여금 곡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동리가 다 그가 죽은 줄 알았는데 하루 지난 후에 “다시 살았다” 하고, 저승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는 중 “자신이 저승에 간즉 채권자 아무개의 어머니가 거지처럼 길거리에 앉아서 떡 장사를 하기로 그를 동정하여 재물을 보태주었다” 한즉 채권자가 그 빚을 받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 세계에도 이런 식의 사기가 많다는 것을 아셔서 마귀를 대항하는 영적 투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성경의 무식을 이용합니다. 성경에 확신 없는 자가 이단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멀리하시지만(요 8:23,17:4.18:36) 마귀는 세상이 자기의 무대인만큼(눅4:6) 성도를 세상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하 영광을 버리시지 않았습니까? 바울 사도는 세상의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 4:18, 5:1; 빌 3:8). 성도가 마귀를 이기려면 마귀의 정체를 잘 아셔야 하고, 마귀의 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눅 14:31). 마귀가 거짓을 무기로 쓰지만 가장 큰 무기가 사망의 세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세력으로 욥의 자녀들을 몰살시켰고, 많은 선지자를 죽였으며, 심지어는 예수님까지 죽였지만 사실은 죽이는 권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사망의 특권도 무력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말씀의 교훈만 붙잡고 요지부동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마귀와 타협하여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