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먼저 드리는 글 3

목 차 4


제1과 서론과 위로의 말씀 (고후 1:1~11) 6 바로가기

제2과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1:12~24) 9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7) 1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바울의 위험한 생애 (고후 1:8~11, 11:23~28) 14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약속의 진실성 (고후 1:12~24) 1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예하고 아멘하는 신앙 (고후 1:17~20) 18 바로가기

제3과 문제에 대한 수습책 (고후 2:1~17) 20 바로가기

     설교보충 5. 교회의 정황과 사도의 처방 (고후 2:1~11) 23 바로가기

     설교보충 6.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 (고후 2:12~17) 25 바로가기

제4과 복음적 직분의 영광 (고후 3:1~18) 28 바로가기

     설교보충 7.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5) 31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영적 직분과 의문의 직분 (고후 3:1~11) 33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수건을 쓴 것과 벗는 것 (고후 3:12~18) 35 바로가기

제5과 복음사역과 관련된 말씀들 (고후 4:1~18) 37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바울의 천거와 전파 성격 (고후 4:1~6) 40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7) 42 바로가기

제6과 영원한 집을 사모하자 (고후 5:1~10) 44 바로가기

제7과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1~21) 46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담대히 원함 (고후 5:1~10) 49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사도적인 생활 (고후 5:11~16) 51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21) 53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7~21) 54 바로가기

제8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8) 57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은혜받는 기회 (고후 6:1~2) 60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은혜를 받자 (고후 6:1~3) 63 바로가기

     설교보충 18.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65 바로가기

     설교보충 19. 교회가 생산할 것 (고후 6:1~10) 67 바로가기

     설교보충 20.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69 바로가기

     설교보충 21. 성별된 생활 (고후 6:14~18) 72 바로가기

제9과 사역자의 시련과 위로 (고후 7:1~7) 75 바로가기

제10과 회개의 과정 (고후 7:8~16) 77 바로가기

     설교보충 22. 신앙적 생활 (고후 7:1~4) 79 바로가기

     설교보충 23. 후회할 것 없는 생활 (고후 7:8~10) 81 바로가기

     설교보충 24. 위로하시는 방법 (고후 7:6~8) 84 바로가기

제11과 연보를 권장하심 (고후 8:1~15) 85 바로가기

제12과 연보 취급자를 파송하심 (고후 8:16~24) 88 바로가기

     설교보충 25. 헌금하는 정신 (고후 8:1~12) 90 바로가기

     설교보충 26. 헌금에 대하여 (고후 8:1~15) 92 바로가기

제13과 성도를 섬기는 일 (고후 9:1~15) 94 바로가기

     설교보충 27. 많이 심는 자 (고후 9:1~15) 97 바로가기

제14과 사역자의 합당한 처세를 밝히심 (고후 10:1~18) 100 바로가기

     설교보충 28. 바울의 태도 변호 (고후 10:1~11) 105 바로가기

     설교보충 29. 주님께 복종시킴 (고후 10:3~6) 108 바로가기

제15과 바울의 자기 소개 (고후 11:1~33) 110 바로가기

     설교보충 30. 바울의 자랑 (고후 11:29~33) 115 바로가기

제16과 바울의 두 가지 체험 (고후 12:1~10) 118 바로가기

제17과 바울의 변론과 두려움 (고후 12:11~21)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31. 무익한 체험 (고후 12:1~6) 123 바로가기

     설교보충 32.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 12:5~6) 125 바로가기

     설교보충 33. 은혜로 주신 가시 (고후 12:7~10) 127 바로가기

     설교보충 34. 사도의 증표 (고후 12:12) 130 바로가기

     설교보충 35. 바울이 두려워한 것 (고후 12:20~21) 131 바로가기

제18과 완악한 자들에 대한 처리 계획 (고후 13:1~5) 133 바로가기

제19과 사역자들의 바람과 결론 (고후 13:6~13) 135 바로가기

     설교보충 36. 믿음의 진단 (고후 13:5) 137 바로가기

     설교보충 37. 나는 참된 신자인가? (고후 13:5) 139 바로가기

     설교보충 38. 축도 (고후 13:13) 142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고린도전후서 및 갈라디아서의 강론집을 정리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밝히는 사명(빌 2:16)과 건강과 시간을 주시지 않았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성경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깊고 오묘한 뜻을 넉넉하게 밝히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평신도보다 나은 지식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록하는데 역점을 두었을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목회의 잔유물로써 내가 증거한 것을 남겼다”는데 만족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 강론집이 다른 문서들과 함께 출판 또는 홈페이지를 통하여 널리 보급되고 읽혀져서 많은 성도들에게 성경의 지식 승화에 도움을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행운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0. 10. 25.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서론과 위로의 말씀 (고후 1:1-11)목록으로


서론 ;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를 보내신지 1-2년 후에 다시 보내신 서신입니다.(9:2) 바울사도는 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 가셔서 1년 반을 계시면서 선교를 하셨는데(행 18:11) 세 번째로 또 가실 것을 예고하신 것으로 보아(13:1) 중간에 또 한 번 가신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5-17) 바울사도는 세 번째 고린도에 가실 기회를 기다리시면서 에베소에 계실 때 고린도전서를 보내셨고, 그 당시에 고린도교회에는 “디도” 사역자가 일을 하고 있었으며(7:6) 또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내어 교회를 살피게 한 후 소식을 갖고 에베소로 오도록 지도한 상태였습니다.(고전 16:8-11) 따라서 그 후에 디모데와 디도가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그 소식에는 성실한 성도들이 (핍박자들로 인하여)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과 바울을 오해하여 궤계를 행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자들(12:16)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바울이 유화정책으로 권면하여 관용할 뜻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10:1)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들이 많이 진정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4:21에서 매(강경책)와 사랑(온유한 마음) 중 하나를 택일할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후에 상황이 많이 호전되어 관용과 위로로 대할 것을 이 서신으로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서신을 주후 55년 경에 마게도냐에서 보내셨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가셔서 그 곳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7:5-8) 그 곳에서 고린도에 가실 기회를 기다리시면서 이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8:1, 9:4)

이 본문 말씀은 3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편지의 서문이고(1-2절) ② 위로의 말씀이며(3-6절) ③ 소망의 견고함(7-11절)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편지의 서문에 대하여(1-2절)

1)1,2절의 서문은 고린도전서 1:1-2에 나타난 내용과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쓰실 때는 형제 “소스데네”와 함께 쓰셨으나 본서에서는 형제 “디모데”와 함께 쓰셨고, 함께 보내셨습니다. “함께 보냈다”는 뜻은 바울사도의 서신에 디모데가 안부하는 인물로 동참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사도가 디모데를 “형제”라 하신 것은 연령과 사명 연조의 차이가 있지만 동역자의 입지를 세워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2)“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시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으로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은 후 2차 전도 여행 때에 다시 만나서 바울을 따라 선교에 동행하였는데 그 후에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아(딤전 4:14) 목사직을 처음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명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목회 서신으로 디모데전후서를 쓰실 만큼 관심의 대상이 된 사역자입니다.(성경 인명 지명 사전을 준비하여 읽으시면 더 자세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3)“아가야”는 헬라의 남반부 지역으로 로마 통치 시대에 고린도를 수도로 하는 도(道)명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신다”하시므로 문안 축복을 하셨습니다.

2. 위로의 말씀에 대하여(3-6절)

1)3절에서 바울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시고 자비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찬송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각별함을 강조하신 뜻이고, 또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므로 교회적 환난에 처한 성도들을 크게 위로하실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은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분이시고, 또 환난 중에 위로받은 성도들이 또 다른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받는 방법과 남을 위로하는 방법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와 전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명 때문에 핍박을 받으므로 고난이 넘쳤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그 위로가 넘친 이유는 자신들의 환난받는 일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주기 때문이고, 또 전도자 자신들이 위로 받는 것이 성도의 위로로 전달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6절) 따라서 이 위로의 은혜가 성도의 마음에 역사하시면 성도들도 복음 사역자들이 받는 것 같은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16절)

3. 소망의 견고함에 대하여(7-11절)

1)7절에서 바울사도는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 일행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소망을 꾸준히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만큼 위로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신앙의 뿌리가 깊어졌다는 뜻이요, 따라서 위로받는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그 다음 8-9절에서는 바울사도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의 경험을 설명하시므로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경하게 평가하고 잘 견디기를 바라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란 행 19:23-41에 나타난 사건 등으로 어려움 당한 일을 회고하신 것인데 그 때에 힘에 지나도록 고생을 하셨고,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8절)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아셨다”고 하였습니다.(9절) 그러나 그 당시에 하나님이 바울을 그런 고난에 방림하신 이유는 “성도가 환난 중에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인간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연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3)그러나 11절에서 하나님은 “이같이 큰 사망(즉 인간의 생각으로 살 소망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에서도 건져주셨으니 계속 되는 어려움에서도 또 건지실 것이고, 또 후에라도 건져 주실 것임을 의지하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법치국가에서도 물질적 생존권에 위협이 있으면 데모를 하고 데모가 과격해지면 무법 천지의 상태가 됩니다. 하물며 외국인이 타국에서 핍박받는 일이겠습니까? 바울의 전도로 우상제조업자들이 종교와 물질의 위협을 받고 소동을 할 때 바울의 생명은 풍전등화 같았지만 한 서기장이 지혜로운 말을 하여 무리들을 안돈시킬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행 19:35) 하나님이 그런 방도로 핍박자들을 진압시키시고 바울의 생명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성도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건지시는 분”임을 입증하신 것입니다.(시 40:2)

4)10절의 말씀을 구원의 서정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건지셨음”은 과거에 받은 구원으로 거듭남을 뜻하고, “건지시리라”는 현재 받고 있는 구원의 과정인 성화의 은혜를 의미하며 “이 후에라도 건지심”은 앞으로 받을 은혜 즉 성화의 완성과 영화의 은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일시에 다 성취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단계로 성취하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5)11절에서 바울은 성도의 기도 협조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의 기도로 얻는 은사가 있으니 피차에 이 은사를 힘입어 환란을 견딜 때에 “많은 성도가 서로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고난 중에서도 소망이 견고함은 ① 성도의 믿음이 성숙하여져서 고난에 참여하는 인내가 있기 때문이요, ② 이 경우에 연단과 위로를 받기 때문이며 ③ 바울사도가 큰 환난 중에서 구원받은 사례가 있고, ④ 또 기도협력으로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2 과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1:12-24)목록으로


본문 12절에서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하셨으므로 본문의 제목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① 12-14절에서 바울의 자랑이 기록되었고, ② 15-24절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는 일을 더디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자랑(12-14절)

1)이 자랑은 복음사역자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함을 자기들의 언행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순결함이고, 진실은 참된 언행입니다. 교역자의 순결과 진실은 교역자 사역의 생명과 같습니다. 여기에 실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과오 아닌 이유들로 약간의 불신을 당한 일도 있었으나(고후 7:2, 6:17, 10:10, 11:1,6,8, 12:12,20,21, 13:1,2 등) 개의치 않고 지혜롭게 행한 것입니다.

2)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인간적인 명예나 실력이나 수단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주신 은사에 순리적으로 복종하며 합당하게만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불법이나 허탄한 목적이나 세상적 방법은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양심적으로 진실하게 증언하였습니다.

3)성경 말씀만 증언한 것입니다. 13절의 “너희가 읽고 아는 것”이란 구약 성경과 사도들이 보낸 서신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것(성경 아닌 것)을 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교육 중심의 전도와 목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리하는 주부가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고 순 자연 식품만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4)복음사역자와 성도가 함께 예수님을 닮음으로 좋은 신앙인격을 갖추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신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14절에서 주 예수의 날에(세상 끝날, 주 재림시) “성도는 복음사역자의 자랑이 되고 복음사역자는 성도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사역자와 성도가 서로 보람됨이 없으면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그 “보람됨”이란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그의 뜻대로 산 생활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은 사역자와 성도 간에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역자는 잘 살았으나 성도가 본받지 않았다면 사역자의 의미는 상실함이 될 것입니다.

2.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는 것을 더디하신 이유(15-24절)

1)바울이 이 편지를 “마게도냐”에서 쓰시면서 고린도에 가신다는 약속을 속히 이행하시지 않은 이유는 ① 마게도냐에서 볼 일을 보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노정에 맞추어 고린도로 가셔서 그 곳 사역을 끝내신 후 직접 떠나시기 위함이었고,(16절) ②고린도교회의 문제스러운 일들(파쟁, 성도간의 갈등)이 진정된 후에 가셔서 성도의 기쁨을 돕고(24절) 그들의 신앙적 신분을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23절) 만일 어려움이 있을 때 미리 가시면 책망이나 징계를 하셔야 하므로 고린도전서를 보내신 말씀의 효력이 나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2)15-16절에서 바울의 여정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좋은 자랑이 되게 하시는 확신)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두 번째 갔다가(서론 참조) 다시 마게도냐에서 사역을 하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구제의연금을 모금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 줄 기회에 맞추어 고린도에 갈 계획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런 계획을 하실 때 경홀히 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심사 숙고하시고 기도로 결정하신 듯 합니다. 사도가 이런 경영을 할 때 “육체를 좇아 사람의 정욕과 현실적 타산으로 한 것이 아님은 물론 진실을 위반하여 ‘예’하고 쉽게 그 약속을 뒤집은 처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신즉(진실하심) 사역자들의 말도 ‘예’하고 ‘아니라’하는 식의 거짓은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8절) 또 바울과 실누아노와 디모데가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말씀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시며(19절) 하나님의 약속도 진실하여(‘예’만 됨)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20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처럼 사역자들도 진실하게 행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는 일을 지체하시는 것은 결코 고의적이거나 약속을 위반함이 아니며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시면서 성도를 아끼는 뜻이 있으니 오직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1-24절) 21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또 그 일을 위하여 성령을 마음 속에 인치듯 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으로 인치신 뜻을 “기름부으심”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인침받은 바울의 영혼이 하나님을 증거자로 모신 상태에서 말씀하신 것이 참말이란 뜻이고, 그 참말의 내용은 “사역자들이 성도의 믿음을 명령적으로 주관하지 않고 성도들이 스스로 깨달아 서로 서로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 믿음에 서게 하기 위함이라”(23-24절)고 하신 것입니다. 24절의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뜻은 사도들이 강권적으로 명하거나 권징으로 강압하지 않고 진리를 통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기회를 주셔서 서로의 기쁨을 돕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설교보충 1.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7)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하는 것을 소개하면서 특히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3-7절 사이에 “위로”란 용어가 열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실 당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셨는데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가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교회적 수난이 있었습니다. 성도의 단체에 사랑이 깨지거나 핍박이나 이단과 불법에 말려들면 교회라도 큰 수난을 겪게 됩니다. 또 성도의 일반적 생활에서도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소개하신 말씀에서

1)“찬송하리로다”하시므로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분이고, 성도는 찬송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셨고,

2)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그 분의 하나님이라 하셨으니까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3)“자비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얼마큼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는가?하면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죽음에 내어 주신 분입니다. 그 분이 모든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4)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위로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로 받을 일이 많은 만큼 위로의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위로받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의 생활이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세계에 위로 받을 길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마치 그 인간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을 것이고, 또 반대로 자기를 위로해 주는 대상이 있어서 늘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면 마치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을 걸어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전 4:1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여지는 모든 학대를 보니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하셨고, 시 69:20에서는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고 근심이 충만하여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찾으나 없도다”라고 하시므로써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세계가 그만큼 적막하고 슬픈 것임을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없는 세계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특별한 경우를 지적하신 것 뿐이고, 하나님은 그 풍성한 은혜로 모든 일에 “위로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쳤던 것 같이 위로도 넘치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본문 외에도 롬 15:5에서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시라” 하셨고, 또 사 51:12에서는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희는 어떤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 중 두려워하느냐” 하시므로써 하나님만이 홀로 안위자 되심을 강조해 주셨던 것입니다.

2.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성격을 생각해보셔야 하겠습니다. 이 성격은 위로의 대상과 시기와 정도와 방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위로의 대상은 본문 4절에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하셨으므로 환난 당한 성도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7:4에서도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였다” 하셨고, 살전 3:7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난이 있거나 속상하고 억울하면 위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어느 시기에 위로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방 하실 수도 있고, 천국에서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순교자가 고난을 만회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이 크다”는 말씀(마 5:12)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 주신다”(계 21:4)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현세적 위로요 또 즉시 주시는 위로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애 3:19에 보시면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즘으로 고난 당하는 성도가 그것을 생각할 때 일시 낙심이 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생각하면 오히려 소망이 있는데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워진다” 하였고, 사 41:17에서는 “가련하고 궁핍한 자가 물이 없어 갈증으로 혀가 마를 때.....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시며....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례는 또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할 때 예수님이 가셔서 같이 울어 주시고 그를 살려 주신 것은 현실적 위로이고(요 11:11)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죽었으나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은 것은 내세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눅 16:23)

3)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할 때 약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5절에 보시면 “우리의 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하셨고, 고후 7:4에서도 “환난 가운데서 위로가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이 위로가 넘치면 자기가 위로를 받은 후에 능히 다른 사람들까지 위로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4절)

3. 하나님이 성도를 어떤 방법으로 위로해 주십니까?

1)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슥 1:13에 보시면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하셨고, 욥 16:5에서는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위로의 말씀도 높은 사람이 할수록 위로가 더 되는 법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할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는 것이라”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죽었지만 “잠깐 후에는 부활하여 다시 만날 것이라”하시면 이것은 큰 위로가 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 환난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이웃 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보고 말로 위로하면 위로가 되는데 하나님의 소망스런 말씀의 위로야 더욱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의인의 고난을 표본으로 보여 주시면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 하셨고, 6절에서는 바울사도 일행이 환난 받는 것은 위로받을 자에게 위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죄가 있는 우리는 고난을 당해 마땅하고, 예수님은 평안하셔야 마땅한데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가 그 앞에서 무슨 불평을 하겠습니까? 또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은 우리보다 믿음 있고, 의로운 사람들인데 그들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그러나 그들도 인생 찌꺼기 같이 고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신 것을 볼 때 죄인들이 받는 고난은 의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눅 23:41에서 “강도 죄로 고난을 받던 자가 의로우신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고 회개를 하면서 그 고난을 견딘 사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고난은 환난당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축복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복의 근원자이신 것입니다. 신 30:19에서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주관하신다” 하셨고, 사 45:7에서는 “빛도 창조하시고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안과 환난도 창조하신다” 하셨고, 시 112:4과 사 5:20에서는 “흑암 중에도 빛을 일으켜 광명을 삼으신다”고 하셨으므로 성도가 어떤 환난스런 일이 생겼을지라도 위로의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다시 흑암을 광명으로 바꾸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로 받을 성도의 위로의 대가를 전화위복되게 하실 수도 있고, 후손이 받게도 하시며 내세의 영화로도 갚아주실 수 있습니다.

4. 위로를 받은 성도의 신앙에 어떤 유익을 줍니까?

1)“고난을 잘 견디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들으면 견디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2)다른 사람까지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4절에 보시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좋은 연단을 받게 됩니다. 그 연단이란 사형 선고를 받은 입장에서라도 자기를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의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주님은 그를 지켜보고 계셨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외롭게 있을 때도 역시 주님이 그 곁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행 7:55, 딤후 4:17)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외롭거나 슬퍼하거나 탄식할 이유가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바울의 위험한 생애 (고후 1:8-11, 11:23-28) 목록으로


“바울의 위험한 생애”를 살피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열심있는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의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다가 개종한 후 이어 선교의 사명자가 되었고,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으로 3차 전도 여행을 한 뒤 다시 예루살렘에 오셔서 반대자들의 송사를 받고 로마로 호송되었다가 로마에서 전도하시고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떨어진 머리가 세 번을 튀어 굴러가면서 “예수 예수 예수”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장소에 가 본 일이 있었는데 유난히도 그 장소에 찬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습니다.

1. 그러면 바울의 위험한 생애가 어떠하였습니까?

1)본문 8절에 보시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큰 환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졌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핍박이 아니라도 교통상의 위험이나 전염병 등의 위험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행 19:22-41)

2)고후 11:23-28을 보시면 ① 넘치는 수고를 하셨고 ② 감옥 생활도 하셨으며 ③ 수없이 매를 맞아 여러 번 죽을 뻔 하셨고 ④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셨으며 ⑤ 태장으로 세 번 ⑥ 돌에 맞은 일 한 번 ⑦ 파선당한 일 세 번(그 중 한 번은 1주간을 깊음에서 지냈음) ⑧ 강의 위험 ⑨ 강도의 위험 ⑩ 동족의 위험 ⑪ 이방인의 위험 ⑫ 시내의 위험 ⑬ 광야의 위험 ⑭ 거짓 형제의 위험 ⑮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헐벗음 ⑯ 그러고도 또 성도의 연약성을 인한 염려로 살았음을 말씀하셨습니다.

3)성경에 나타난대로 바울사도의 위험당한 사실을 살피면 ① 바울은 처음에 유대주의자였다가 개종하고 예수님을 전파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미움을 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다메섹왕 아레다의 힘을 빌어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 음모가 바울에게 알려져서 성문 옆 높은 집 창문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문 밖으로 도망한 사실이 있으므로(행 9:23-25, 고후 11:30) ② 다메섹에서 도망하여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의심하고 가까이 하지 않을 때 바나바가 바울의 확실한 개종을 입증해주므로 제자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나 거기서도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또 고향 “다소” 지역으로 도피를 시킨 일이 있었으며(행 9:28-30) ③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교사가 부족하게 되자 바나바가 “다소”에 도피한 바울을 권면하여 같이 안디옥에 와서 1년간 동사교역을 했을 때 역시 큰 부흥이 일어나고(행 11:26) 그 곳에서 선교 사역이 시작되어(행 13:1-3)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를 나가게 되었는데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변박과 비방이 가득하였으나(행 13:45) 바울이 여전히 담대히 증언하니까(행 13:46) 핍박자들은 그 지역의 귀부인들과 유력한 자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핍박하여 쫓아냄을 당하였고(행 13:49-51) 이고니온 지방으로 와서 전도를 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여기서도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하고 파쟁을 조성하며(행 14:4) 심지어는 능욕하고 돌로 치려 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루가오니아”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④ 루가오니아의 루스드라 성내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능력있게 전도를 하는데 유대인들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쫓아와서 무리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돌로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쳤으나(행 14:8,19-20)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 1차 전도를 무사히 마친 사실이 있었습니다. ⑤ 그 다음 2차 전도 여행 때는(행 16:19-26)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성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면서 전도하셨지만 여전히 핍박을 받아 옷 벗김을 당하고 매 맞고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을 받고 간수에게 전도하신 일이 있었고, 그 후 “데살로니가”에서도 또 핍박을 받았습니다.(행 17:1-9) ⑥ 행 19:19-를 보시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실 때 마술사가 회개하고 자신의 마술책을 불 사르는 바람에 우상을 파는 상인들이 소득이 적어지게 되자 그들이 바울과 그 추종자들을 송사했지만 한 서기관의 만류로 모면한 일이 있었고 ⑦ 바울이 전도를 다 마치고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이 또 무리를 충동하고 바울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고 음모하는 것이 천부장에게 알려져서(행 21:27,30-36) 다행스럽게도 보호를 받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덕분으로 결박을 모면한 사실이 있었으며(행 22:25) 또 이 때에 유대인들은 40명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하면서 바울이 재판정으로 호송될 때 매복한 상태에서 기습하여 죽이려고 음모를 하였다가 이 사실이 바울의 생질을 통하여 알게 되므로 가이사랴 총독 벨릭스에게 진정을 하여 호송하는 군사의 도움으로 화를 면한 일이 있었고 ⑧ 결국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에까지 가게 되므로 유대인의 궤계에서 벗어났고, 로마에까지 가서 재판받는 기회에 전도하시게 되었는데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길이 지중해 횡단 해로 8000리를 배를 타고 가시는 중 유라굴로란 풍랑을 만나서 살 소망이 없어졌지만 하나님이 바울을 살려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섭리하신 일이기 때문에 함께 탄 276명을 풍랑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행 27:22-26) ⑨ 그 후 로마에 가셔서 전도하신 후 재판을 받으시고 주후 68년경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순교를 하셨다 하니 바울사도의 이런 험난한 생애를 보면서 저희들이 무슨 교훈을 받으셔야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이런 고난의 생애를 알 때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1)우리는 평안한 중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믿음의 연단이 부족함을 알게 되고

2)혹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하여도 바울사도에 비할 때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며

3)바울은 자기의 생명과 생애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맡긴 상태에서 헌신을 하였는데(롬 14:7,8) 하나님은 바울을 쓰시기 위하여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알 수 있으며

4)성도가 어떤 위험에서라도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을 갖게 하시고

5)마귀의 역사가 그치지 않는 한 복음의 훼방과 핍박은 계속 있을 것이며 사명자나 진실한 성도는 항상 핍박과 고독을 각오해야 할 것과(행 14:22)

6)하나님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고 피할 길을 주시며(고전 10:13)

7)주님을 인하여 고난 당한 성도가 하늘의 상급이 있음을 믿고(마 5:12) 핍박과 고독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빌 1:21) 고도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약속의 진실성 (고후 1:12-24)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요지는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시려던 계획의 시기를 늦추시므로 바울을 불평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신실치 못한 자”라고 논함에 대하여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증하시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자가 “간다”하고 안가던지 “한다”하고 못하면 성직자의 진실성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그것을 지적하였으나 바울은 그렇게 지적받을 잘못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나타내주신 순서대로 교훈을 살피면

1.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는 특별한 상대자로 대하여야 함을 교훈하셨습니다.

1)성도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 특별한 대상으로 대하는 것처럼 성도를 대할 때도 특별한 관계로 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교훈의 근거는 12절을 보세요. “우리가(즉 바울을 중심한 복음의 사역자들)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고린도교회 성도들)....”하시므로 복음 사역자와 성도 간에 또는 성도와 성도 간에 특별히 대하는 교제의 방법을 쓰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특별하게 상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2)왜 교역자가 성도를 특별히 상대해야 하나?하면 ① 본문 14절에서 “성도는 우리의 자랑이라, 교역자의 사랑의 대상이고, 사모하는 자요 기쁨이고 면류관이라” 하셨기 때문에 교역자는 그 생애와 직책의 희망을 누구보다도 성도들에게 두기 때문이요 ② 또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이며 권속이고 영광의 기업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3)그러면 바울사도는 성도를 대할 때 어떻게 특별하게 대하셨을까요? 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대하였으니 속되지 않고 신실하게 대하셨다는 뜻이요 ② 진실하게 대하셨으니 추호도 거짓성이 없는 상태로 대하셨다는 것이요 ③ 육체의 지혜로 대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인간적 지식을 내세워 자기 자랑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④ 하나님의 은혜로 대하셨으니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내세우고 그것을 기원하는 태도로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는 것이고, 자신은 또 그같은 생활을 자기의 자랑거리로 알고 행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도 이 말씀에서 성도간의 특별 교제를 하실 때 항상 거룩과 진실과 은혜로 성도간의 교제를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2. “바울사도가 전하는 말씀의 지식을 끝까지 알라”고 하셨습니다.

1)13절을 보시면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이나 바울사도가 편지로 보내는 표준 계시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바울사도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쓰지 않는다”하시므로 아무리 영감이 풍성하고 신령한 체험이 많아도 종이에 써서 읽고 알도록 하신 표준 계시 외에도 다른 것을 쓰시거나 나타내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2)너희가 “그것만 끝까지 알도록 바란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을 경계하고 꼭 사도의 말만 신임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써서 전달하는 편지는 영감에 한한 표준 계시인 만큼 그것만 끝까지 알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4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바울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강(일부) 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이 바울사도를 비난하는 유혹에 끌려 가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의 재림날에는 바울사도의 증언 만을 믿고 따른 자들만이 구원의 영광을 얻어서 서로 자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특별하게 대하셨고, 또 ② 그들이 유혹자들의 선전을 피하여 자기의 교훈만을 추종해 주기를 바라셨으므로 ③ 그렇게 될 때에 장차 영광을 얻고 자랑이 될 것이란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이 왜 이런 변명을 말씀하셔야만 했는가?할 때에

1)바울사도가 고린도를 세 번째 가실 것을 약속하신 후 속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역자”라는 반대자들의 비난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3차 방문을 늦추셨을까요? 이것은 결코 계획과 경영을 소홀히 하여 그렇게 된 것이거나 거짓성을 띄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3차 방문 전에 고린도교회의 문제성이 많이 해결되어서 그들이 믿음에 섣기 때문에 (24절 끝,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섣음이라) 문책하러 갈 필요가 없어졌고, 기쁨을 도울지언정 바로 선 자의 믿음을 강권적으로 주관할 필요가 없게 되어서 취소된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4절) 그리고 이 사실은 23절에서 “내 영혼이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할 만큼 사실이라”고 역설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모략을 받게 되면 사실도 핑계라고 주장하는 수가 있어서 그만큼 역설하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만큼 복음 사역자의 약속 불이행이나 행동 변화에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는 것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마지막으로 성도는 진실하고 순종적이어야 할 것을 설명하셨는데 ① 바울사도는 무슨 일이나 경영을 할 때에 육체를 좇아(인간 생각대로) 경영하거나 예하고 아니라 하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② 하나님께는 미쁘신 속성(진실)만 있어서 예하고 아니라 하시는 법이 없으며 ③ 또 바울과 디모데와 실누아노로 말미암아 전파되신 예수님도 역시 예하고 아니라 하시는 분이 아니며 오직 “예”(진실)만 되시는 분이시고 ④ 하나님의 약속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기 때문에(진실하게 실천되기 때문에) 성도는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면 “아멘”하여(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는 신앙으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⑤ 이렇게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견고케 하신 분이고, 기름부음의 은혜(성령)를 주신 분이시며 또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증으로 주심으로써 인을 쳐주신 분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그 말씀과 함께 동요될 수가 없은즉 너희도 그렇게 믿고 순종하여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① 성도간에는 매사에 특별 대우를 하고 ② 모든 일을 신중히 경영해야 하며 ③ 명분 없는 변동은 삼가야 하고 ④ 의심적은 일은 납득되도록 설명하고 ⑤ 표준 계시에만 얽매이며 ⑥ 진실하여 예 하고 아니라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4. 예하고 아멘하는 신앙 (고후 1:17-20) 목록으로


본문에서 “예”하는 말씀과 “아멘”이란 말씀이 나오고, 17절에서 바울사도는 “예”하고 “아니라”하는 일이 없다 하셨으니 이것은 진실하여 약속을 잘 지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도 “예”하고 약속한 것은 꼭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에 “예하고 “아니라”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시니까요.(롬 3:4)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역시 예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도 예가 되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멘으로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용의 뜻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아멘) “예”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세 번째 고린도에 가실 것을 약속하신 후 교회에 문제가 생기므로 바울이 서신으로 문제를 안돈시킨 후에 가시는 것이 좋기 때문에 기회를 미루시다보니 바울을 불신하고 배척하며 바울을 두고 갈등하는 성도들이(고후 7:2, 6:17, 10:10, 11:1,6,8, 12:12,20-21, 13:1-2등) 바울을 “예”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그런 중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진실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진실하게 행한 것을 이해시키는 내용으로 기인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하고 아멘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 “예”의 뜻은 긍정, 복종, 약속 실천을 의미합니다. 긍정은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고, 복종은 진리에 따르는 것이며 약속은 진실성의 책임과 이행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나 지도자 앞에서 “예”하는 입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율법을 다 지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도 다 지켜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에 의하여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지요.

2. “아멘”에 대한 것입니다.

1)“아멘”이란 말씀은 “진실합니다. 사실입니다. 믿습니다.”란 뜻으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분은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칭하는 말로도 사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아멘이시오 참된 증인이라”하셨지요.(계 3:14) 왕상 1:36에서 “아멘 내 주 하나님 여호와”라 할 때도 하나님을 호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요 1:5, 3:11)하실 때 원문은 “아멘”으로 표기되었고, 그 외에도 “아멘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하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멘”은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고, 진실의 뜻이 있으며 확실한 성취를 구할 때 “믿습니다. 바랍니다.”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롬 1:25)

2)서양 속담에 “거짓말하는 자의 마음 터에는 변소도 짓지 못하며 거짓말은 100년 가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의 마음과 교회 안에 거짓이 있으면 안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진실이란 기독도가 허화시 허황 전람회에 쇼핑을 갔는데 허황 전람회니까 진실한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는 줄 알지만 혹시나 하고 갔는데 참으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많더란 것입니다. 좋은 땅, 좋은 집, 좋은 직업, 좋은 관직, 오락 기구, 창녀, 금은 보석, 만반 진수, 화려한 의복, 좋은 구경 거리, 생명, 건강, 보약 등.... 그 때 종업원이 “무엇을 찾습니까?”하면서 “여기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하여 “나는 진리를 사려고 왔는데요”하니까 한참 둘러보더니 “당신은 왜 하필 없는 것을 찾습니까? 진리만은 여기에 없습니다.”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분이시고, 아멘이십니다. 요즈음 교회에 가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당연히 세상 것들은 없고, 진리만 있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진리는 깊은 속에 숨어서 잘 나타나지 않고 허영주의, 물량주의, 돈 앞세우는 일, 이기주의, 직분 권위주의, 사회주의, 세속주의 그런 것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진리시오 참이며 아멘입니다. 우리는 가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는 노회에서 면직받고도 여전히 목사 노릇을 하다가 아는 사람 만나니 몸을 피한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이는 목사되는 과정을 밟은 일이 없는데 목사 노릇을 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어떤 장로는 예수 믿는 목적을 다른데 두고 교회를 출석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도 가짜나 외식에 얽매어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멘”을 실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요 우리의 일임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수님 중심, 성경 중심, 사도 중심을 벗어나면 가짜대열에 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허탄한데 뜻을 두거나 인간 중심으로 나가거나 사랑의 의무는 안 느끼고 사랑과 인정 못 받는 것을 불평하거나 의식과 제도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역시 진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아멘하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1)“아멘”이 예수님의 인격을 대신한 만큼 아멘하는 신앙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2)“아멘”이 진실을 뜻하는 만큼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요

3)“아멘”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확신하는 내용”인 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노력하셔야 할 것이며

4)“아멘”이 “예”하는 뜻과 같으니 진리에 대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5)반대로 참이 아니면 “아멘”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의심스러운 일이면 아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멘” 하였으면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무책임하게 “아멘”하고 즉시 아멘을 실천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음을 극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 과 문제에 대한 수습책 (고후 2:1-17)목록으로


이 본문에는 여러 가지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전체의 제목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으나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파악하고, 바울사도가 속히 그 곳에 가시지 않은 이유와 본문에 나타난 권면의 내용을 살피면 결국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한 수습책으로 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 제목을 위와 같이 정한 것입니다. 본문을 분류하면 ① 근심으로 가려 하지 않으심(1-3절) ② 애통함과 눈물로 편지를 보내심(4-6절) ③ 용서, 위로, 사랑, 순종을 권하심(7-11절) ④ 마게도냐로 가신 이유(12-13절) ⑤ 승리를 감사함(14-16절) ⑥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라(17절)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이상의 여섯 대지의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하면 어려운 교회라도 좋은 교회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1. 근심으로 가려 하지 않으심(1-3절)

1)이 말씀은 어려운 교회에 즉시 가시면 바울이나 성도가 다 근심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즉시 가시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1절)

2)만일 어떤 사람들(고린도교회 성도 일부)의 요구에 따라 혼난 중에 있는 고린도교회에 가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징계를 가한다면 징계를 받은 자들이나 일반 성도들까지 함께 근심하게 될 것이므로 근심없이 바울을 기쁘게 할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2절)

3)그래서 “기쁨으로 바울을 맞이 할 성도가 근심으로 맞이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먼저 편지와 디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또 ”사역자의 기쁨은 곧 성도의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어려운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방문하는 사역자가 사랑과 화해를 갖고 갈 때는 서로의 기쁨이 되지만 징계와 책망을 갖고 갈 때는 서로의 근심이 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애통함과 눈물로 편지를 보내심(4-6절)

1)4절에서 바울은 “큰 환난과 애통하는 마음과 눈물로 편지를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후서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애통을 말씀하신 것은 “받는 자들로 근심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고, 그들에 대한 사도의 사랑의 심정을 전하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4절) 아주 완악한 사람들은 사도의 슬픈 심정에도 공감하지 않겠지만 사랑의 심정을 가진 성도들은 사도의 눈물에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2)5절에서 문제의 원인자들은 사도와 성도들을 다 근심하게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과오가 “자신을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하시므로 직접 피해자가 아님을 나타내셨으니 이는 근심케 한 자들과의 혐의적 관계가 없음을 알려 친교에 유익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과오의 정도를 “어느 정도”로 과소 평가하신 것은 심하게 책망할 뜻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오의 원인에서 책망하려 하시지 않고 회개한 후 결과에서 권계하실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그리고 6절에서 “이런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다”하심은 과소 평가된 과오를 인하여 벌받는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과오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미 교회 안에 성도간의 파벌과 교역자에 대한 편벽된 의식이 있었고, 그 외에도 음행, 우상 숭배, 송사 문제, 분쟁과 시기 등 미숙함이 있었은즉 성도 간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사도는 거의 수습된 상황에서 가볍게 권계하시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 방도가 7-11절의 말씀입니다.

3. 용서, 위로, 사랑, 순종을 권하심(7-11절)

1)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한다”고 하심은 문제의 인물들을 배격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용서와 위로로 싸매어 포용할 것을 권하신 것이요, 또 8절에서는 “사랑을 베풀어 심한 근심에 잠기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그리고 9절에서 범사에 순종할 것을 권하셨으니 “이는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저 한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10-11절에서 바울은 용서에 대한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고, “서로 용서하는 것이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간에 용서를 잘 하면 바울사도도 성도에 대하여 용서할 것인즉 사도의 용서는 눈가림을 위한 외식이 아니요,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정신으로 진실하게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10절) 성도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한다”고 하셨습니다.(갈 5:15) 사탄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훼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탄의 궤계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11절)

4. 마게도냐로 가신 이유(12-13절)

12-13절에서 “바울이 드로아에 계실 때 문이 열렸다”는 뜻은 그 지역에서 전도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았다(교회적 환영이나 핍박이 없는 것)는 뜻이요,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갖고 올 “디도”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때에 “바울의 심령이 편치 않았다”하셨으니 이것은 어려운 교회에 파송받은 “디도”가 속히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지 않으므로 더욱 근심을 가지신 것이고, 또 전도의 문이 열린 드로아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향한 것은 고린도에 간 디도를 마중 나가서 만나시려는 뜻과 또 바울이 고린도에 가실 길로 가까이 나가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드로아”는 소아시아 서북쪽 항구이고, 거기서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 지역을 거쳐 육로 또는 해로로 고린도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결국 얼마 후에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셨습니다.(7:5-6)

5. 승리를 감사함(14-16절)

1)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 사역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셨고, 또 전도자 일행이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신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예수님의 인격을 전도자들의 생활 모범으로 나타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적 감화를 풍기지 못했다면 그 생활과 사명은 승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낸 생활과 승리의 공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2)15-16절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사명이 구원받을 자들(선택자)에게도 있고, 또 멸망할 자들(비택자)에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고,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고,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는 뜻과 논리가 같습니다. 향기라도 망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효험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라비아 지방의 어떤 향기는 비둘기에게는 활기를 주고, 돼지에게는 죽음을 준다고 합니다.(박윤선 목사님 주석 297P) 그런데 망하는 자들에게 왜 향기가 필요하다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구원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멸망도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6.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으심(17절)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권위 그대로, 또 하나님이 증언하시는 권위 그대로, 내용상의 의미 그대로, 인간적 지식을 가미하지 않은 그대로, 또 확실한 뜻대로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18)는 뜻을 다수 생산으로 해석하면 확실하고 혼잡하지 않으나 “번성”의 뜻을 인간의 문화적 발달 등으로 해석한다면 혼잡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순전함 그대로(인간의 사상을 가미하지 않은 것)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또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언하심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설교보충 5. 교회의 정황과 사도의 처방 (고후 2: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교회의 정황과 사도의 처방”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여기의 교회는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사도가 주후 50년경 2차 전도 여행 때 개척을 하였고, 고린도전서를 쓰신 것이 주후 53년경이므로 5년 미만의 짧은 역사를 가진 중 초대교회 당시에 역사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컸기 때문에 빠르게 부흥이 되었으며 따라서 사탄의 역사도 많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성경을 많이 배우고, 도덕성에 전진이 있어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조리있게 단계적으로 학습하지 못하면 신앙적 생활적 부조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고린도교회의 정황에 문제가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살피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사역자 세 사람을 놓고 파당이 있었다” 하셨고, 3장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신앙으로 시기와 분쟁이 있었다” 하셨으며 5장에서는 “음행과 우상 숭배가 있었다” 하셨고, 7장에서는 “혼인 문제의 갈등”이 있었으며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로 타인의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 있었고, 9장에서는 “사도의 자격 문제와 생활비 주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으며 11장에서는 “남녀의 지위 문제와 성찬에 대한 부조리”가 있었고, 12장에는 “은사 문제”, 13장에서는 “사랑 실천의 문제”, 14장에서는 “방언으로 인한 무질서” 등의 교훈이 있는 것을 보아서 교회가 평안치 못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런 일에 대하여 사도직을 가진 바울이 어떻게 조처하였습니까?

1)문제의 인물들에 대하여 징계를 하셨습니다. 고후 1:15에 보시면 바울이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에 가신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징계를 하셨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징계도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징계는 범죄자를 깨우쳐 회개시키는 것이고, 또 징계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교회를 평안케 하기 때문에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차 징계를 조치하셨다는 근거는 고전 5:3-5에서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셨다”는 말씀과 또 9절의 “그들을 사귀지 말라”하신 것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병을 초기에 발견하고 치료하여야 하는 것처럼 생활의 문제도 빨리 시정하여야 합니다.(고전 5:6) 바울사도는 시벌을 할 때에 꼭 사랑을 따라 행하셨습니다.(고전 14:1) 그리고 성도들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셨습니다.(고후 2:5)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가 안정된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화해하면 안정되어야 하지만 그 은혜를 쉽게 소화시키지 못하는 연약 때문에 바울의 처리를 불평하고 속히 다시 와서 재수습을 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2)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징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 공의에 위반되는 일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성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반성하고 그 이웃이 용서하면 징계를 안 하는 것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이 회개와 사랑과 영광에 있기 때문입니다.

3)사랑을 나타내도록 권장하셨습니다. 8절에 보시면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하셨고, 그 사랑의 방법이 용서하고 위로하여 근심을 덜어 주는 것이라(7,10절)고 하셨습니다. 아주 완악하면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새출발의 뜻을 보일 때는 용서와 위로를 베풀어서 새출발의 용기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4)순종을 권면하셨습니다. 9절에 보시면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저 하여....이것을 너희에게 썼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먼저 서신을 보내시면서 그 서신에 나타난 권면을 받고 “순종하는 여부를 먼저 알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권면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통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며 어떤 봉사나 충성을 요구할 때도 순종을 잘 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성경에 순종하고 복음사역자의 지도에도 순종하여야 합니다. 복음 사역자의 지도가 교리나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다 순종해야 합니다. 특히 성도가 정책면에 순종하지 않으면 복음사역자의 일할 의욕을 꺾는 것이 되기 때문에 더욱 호흡을 맞춰주어야 합니다.

5)급히 서두르지 말고 반성과 화해의 기회를 주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에베소에 계신 바울이 빨리 와서 문제를 수습해 주기를 바랐는데 바울은 “가신다” 해 놓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편지의 권면으로 효력을 보셔야 하고, 또 “디도”를 통하여 보고도 받아야 하며 “마게도냐” 쪽으로 순행하셔야 할 일도 있으니까 모든 사역에 맞추어 일정을 정하시다 보니 바울이 “예”하고 “아니라”하는 사람처럼 되어 비난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문제가 극심할 때 가서 법으로 처리하는 것보다 반성과 화해의 기회를 준 다음에 가셔서 심하지 않게 권면하시는 것이 더 유익할 줄로 아신 것입니다.

3. 사탄은 교회를 어지럽게 하기 위하여 항상 궤계를 씁니다.(11절)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떠들고 수근거리며 범죄자가 생기면 좋아하고 비난하며 미워하고 벌해야 마땅하다는 등 질서를 어지럽게 합니다.

따라서 이상의 다섯 가지 방법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곧 사탄의 궤계에 말려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 (고후 2:12-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의 선교 과정에서 일어난 ① 여정과 ② 고린도교회 문제 등으로 인하여 느끼는 감정 ③ 그리고 자신의 승리적 생활(즉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말씀의 순전함을 지키는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1. 복음을 위하여 바쁘게 활동하시는 입장을 볼 수 있습니다.

1)본문 12절 초두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가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기록하여 고린도교회로 전달하시고,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파송한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드로아의 식구들은 바울사도를 영접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주안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2)그러나 바울사도는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그것은 디도의 사정으로 만남의 시기를 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드로아로 가신 것은 드로아에서 전도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 쪽에서 오는 디도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그 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한 것인데 적시에 만나지 못하므로 고린도교회에 1차로 보낸 고린도전서를 전달받은 결과를 알지 못하여 그 심령이 불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전도의 길도 열리고 환영을 받았지만 고린도교회의 문제 해결에 관한 소식과 또 그 곳에서 바울사도를 비난하는 자들의 모함같은 문제들 때문에 드로아에 머무실 입장이 못 되었고, 고린도와 상간을 더 가깝게 하는 마게도냐 지방으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① 여기에서 바울은 오직 복음의 유익을 위하여 “거처와 생활을 이동하셨다”는 점과 ② 드로아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고린도교회 문제와 관계되는 일들 때문에 그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빨리 접하기 위하여) 마게도냐로 옮기신 사실을 볼 때 항상 바쁘게 활동하셨고,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분별하셨던 것입니다.

2. 승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다”고 하셨고, 고전 15:27에서는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셨으며 요일 5:4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능력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귀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을 전폭 의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마귀의 역사로 항상 싸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1)마귀는 항상 성도의 믿음을 뺏으려 하니까 믿음을 보존하는 것이 승리이고,

2)마귀는 항상 성도를 완악하게 맞들려 하니까 성도가 완악을 제거하는 것이 승리이며

3)마귀는 항상 성도에게 욕심을 갖게 하여 유혹의 구렁텅이로 유도하니까 성도는 모든 욕심을 피하고 세상적 향락을 멀리 할 때에 이길 수 있으며

4)마귀는 항상 성도들 나태에 머물게 하도록 유혹을 하니까 근면 성실해야 이길 수 있는데 이런 모든 승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역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냄새를 나타내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사역자들이나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를 많이 발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그러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면 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야 하고 ② 진리의 말씀이 풍성하여야 하며 ③ 사랑과 빛된 생활이 충만하여야만 그리스도의 냄새를 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그런데 이 향기를 하나님과 구원 얻을 자에게만 발할 것이 아니고, 망하는 자들(불신앙이나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꼭같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빛과 소금 역할이 되겠지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① 망해야 될 비택자들에게는(그들이 하나님과 진리와 사랑을 배척하는 죄를 범하므로) 멸망의 근거가 되고 ② 구원을 얻을 자에게는 그 향기 자체가 그리스도요, 복음이므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반석으로 비유했을 때 그 반석에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그 반석을 떠나는 자는 그 반석이 떨어질 때 눌려 죽는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마 21:44, 눅 20:18)

3)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의 냄새는 언, 행, 심사로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먼저 닮고 그 인격을 나타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고 순전하게 보존하며 전파하는 것이 승리하는 방법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보시면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1)“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는 뜻은 ① 성경의 본질을 흐리게 하거나(권위 삭감) ② 성경을 가감하거나 ③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깨 기름에 콩기름을 섞으면 순 깨기름이 안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말을 섞으면 순전한 말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일관성 없는 해석도 역시 혼잡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와 성경 증거자들은 성경의 순전함이 보존되고 증거되도록 최대한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를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성경을 어떻게 대하여야 최대한 그 순전성을 살리는 것인가?하면 ① 성경 보존을 잘 하고(현재 있는 사본 원본)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잘 하여야 합니다. 지금 있는 번역문 중에는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개역 성경이 가장 원문적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의역적인 번역(공동 번역)도 나왔습니다만 원문적 성경 본문을 중시하셔야 하고 ②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힘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의 표현이다”하여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일보도 후퇴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책이다”, “영감으로 깨달을 때만 권위를 발한다”는 식의 소극적 표현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금방 직접 받은 말씀 같이 전파하고 ④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대언 하는 것 같이 증거하며 또 그렇게 받아야 하고 ⑤ 그리스도 안에서(예수님의 말씀인 줄 믿고) 전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증언자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인간적 생각을 가감시키거나 하여 말씀 본질을 흐리게 하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배우려 하지 않고 간증을 들으려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간증 체험보다는 성경 본문 그대로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본문대로 전파되지 않았을 때 중세대에 천주교가 타락하였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헬라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공급하므로 종교개혁의 승리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들을 만큼 강해하는데 “부흥사처럼 간증 설교나 해 주십시요”한다면 아직 성경 공부의 진미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쪼록 성경 본문 공부를 잘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사도가 권장한 승리의 생활은 ① 부지런히 활동하는 생활 ②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생활 ③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일 ④, 말씀의 혼잡을 피하고 성경에 성실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 4 과 복음적 직분의 영광 (고후 3:1-18)목록으로


이 본문을 읽으셨을 때 총 제목을 어떻게 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전체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부분 내용의 제목을 정하고, 그 부분 제목들이 함축된 종합 제목을 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전체를 읽고 분석하면 ① 1-5절을 “바울의 신분 증명”으로 ② 6-11절을 “복음적 직분의 영광”으로 ③ 12-18절은 “모세와 예수님의 영광 비교”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대지를 종합할 때 “복음적 직분의 영광”이라고 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물론 조금 다른 표현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 속에는 천거서 내용, 돌비와 심비, 정죄의 직분, 의의 직분, 주의 영과 자유 등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연구하는 성도의 주안점에 따라 제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본문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드리는 것이 강해의 목적입니다.

1. 바울의 신분 증명(1-5절)

1)1절에서 바울과 전도자 일행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천(스스로 자신을 증명함)하거나 다른 이들처럼 누구의 천거서를 보내서 자신들의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일행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산파 역할을 한 전도자들인데 어떤 불순한 세력들(혹 유대주의 핍박자들일 가능성이 많음;행 17:13-15)이 바울 일행의 정통성과 신분에 의혹성을 선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불신임하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분 증명에 대한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증명은 “스스로 옳다”할 수도 없는 것이고, 진실한 증명자는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천거서를 받는다 하여도 역시 신빙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처럼 타인의 천거서를 부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2)바울 일행이 자신들의 참된 신분을 입증한다면 자신들의 생활과 전도로 탄생한 고린도교회 성도들 자신이 그 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누구의 추천서보다는 자신의 생활로 신용을 얻도록 함이 더 좋을 것입니다. 2절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천거서)라”하신 말씀이 그 뜻이요, “우리 마음에 썼다”하신 것은 서로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요,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하심도 여러 사람들이 그들(사역자와 성도)의 사랑과 진실성을 다 알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편지나 문서로 관계 맺는 일을 불필요한 외식으로 보셨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일이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3)3절에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음을 가진 자들(우리로 말미암아)로서 곧 그리스도의 편지 역할을 할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역할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이지만 3절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먹으로 쓰지 않은 것은 인간이 자기 증명을 생활로 나타내야 함을 뜻하고, 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는 것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신 사역을 뜻하며 “오직 육의 심비에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종이 아닌 심령에 뿌리 박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돌비에 주신 일이 있었지만(출 32:15) 신약 시대에 복음을 믿는 신앙은 육의 심비 즉 성도의 마음에 심겨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약 1:21)

4)4-5절에서 사역자(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갖고(4절) 또 무슨 일에든지 만족을 갖는 것도 자신들(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 일행의 신분 증명은 은혜받고 성도된 사람들 자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모세와 예수님의 (직분상의) 영광을 비교한 말씀입니다.(12-18절)

유대인들 세계에서는 모세 이상 더 큰 영웅은 없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히 1:5-14에 보시면 예수님과 천사를 비교하여 말씀하셨고, 또 3:5-6에서는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 설명하실 때 “모세는 집주인의 사환 같고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셨다”고 하셨습니다.

1)6절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새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다”하셨으니 여기의 “새언약의 일군”은 새언약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 언약이기 때문에 복음 사명자를 뜻하고, “일군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음”은 직분 주신 방법이 율법의 의문으로 주시지 않고 성령의 감화와 확신으로 주신 것을 만족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 세습하였는데 이것은 율법과 의문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복음사역자는 그런 방법으로 받아진 것이 아니고, 믿음과 사명의 감동, 즉 성령님의 역사로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의문은 율법적 내용으로 정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되고, 영은 성령님이신바 거듭나게 하시고(요 3:3) 변화시키시는 역할(엡 4:24)을 하시기 때문에 살리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그런데 7절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얼굴(이는 육체의 얼굴인즉 없어질 것임)의 영광을 인하여 주목하지 못한 것”은 모세가 십계명판을 받아들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발한 것을 의미합니다.(출 34:32-35) 그렇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복음의 직분)이야 더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하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정죄의 직분(율법적 직분)도 영광이 있었거든 하물며 의의 직분(복음으로 의를 힘 입히는)이겠습니까? 더욱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9절)

3)영광되었던 것(모세의 율법적 직분)이 더 큰 영광(새언약, 복음의 은혜직)을 인하여 영광될 것이 없지만(10절) 그런 것도(없어질 것) 영광으로 말미암아 나타났거든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길이 있을 것”이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직분은 율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는 직분이고, 그리스도의 직분은 의롭다 하시고 살리는 직분인 만큼 모세와 그리스도와의 직분의 차이는 극상 극하요, 사환과 주인의 아들 격으로 비유하심이 마땅한 것입니다.(히 3:5-6)

3. 모세와 예수님과의 영광의 차이(12-18절)

1)12절에서 “이같이 큰 소망이 있어 담대히 말한다”하심은 영광의 직분이 살리는 것이고, 복음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에 대하여 담대하라는 말씀이고,

2)13절은 (구약시대에) 모세가 율법을 들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있는 것을 직시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건을 써서 주목하지 못하도록 가리운 일이 있었으나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출 34:32-35)

3)그러면 모세의 얼굴에 광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수건으로 가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죄인들이 가까이 직시하다가 죽을까 하여 그것을 방지하려고 조심한 것이었습니다.(출 3:6, 33:20-23) 그러나 이 뜻은 가리웠으므로 밝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절의 “없어질 것의 영광”이란 곧 율법을 들고 나오는 모세의 얼굴입니다. 모세는 장차 죽어 없어질 사람이요.그가 증거한 율법도 정죄하는것입니다. . 그러나 그 영광이 중하여 수건을 쓰고 직시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 가까이 하기를 그만큼 두려워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바울사도는 “율법의 결국이 없어질것임에 대한 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가리운것이라”고 해석을 한것입니다. “율법의 결국이 없어질것”이란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구속과 사랑의 완성)로 그 의미가 퇴색당할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다음 설교문을 참고 하십쇼)

4)그러면 14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하신 것은 잘 깨닫지 못하는 둔한 마음이란 뜻이고,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음”은 수건 쓴 얼굴을 잘 보지 못하는 것처럼 구약의 의미를 잘 살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야를 약속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메시야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수건 쓴 것처럼 완고하여 그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하심은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를 알게 될 때에 수건을 벗은 것처럼 밝히 알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 시대에도 유대주의자들은 그런 수건으로 마음을 덮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15절) 그러나 언제든지 주님을 깨닫고 돌아올 때는 그 수건이 벗겨져서 구약의 의미를 옳게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16절)

5)17절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절대자시오 율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 때는 율법의 제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얽매일 필요가 없는 전통에 얽매여 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당연히 얽매여야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보다도 더 크신 분이고, 또 안식일(율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성전 제도와 안식일 규례라 할지라도 입법자 주님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에서 구약의 제사 제도와 안식일 제도도 폐지된 것입니다.(요 8:32, 히 10:9)

6)18절에서 복음적 성도들은 다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를 받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영화될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영(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믿음으로 복음과 예수님을 밝히 알고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밝히 알고 구원의 은혜를 받아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7.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5) 목록으로


본문에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편지 역할을 할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또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어 전도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직분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사람들의 추천서를 내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추천서나 추천 받은 자가 진실하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격과 진실됨이 마음을 떠난 종이에 쓰여질 것이 아니라 심비와 육비에 새겨지듯 마음과 피부로 느낄 만큼 실제적으로 나타난 생활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생활은 어떤 제도와 형식에서 인정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로 확신을 갖고 은혜로 본을 보이는 생활이 다 믿음의 확신으로 성취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5절) 성경이 편지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나타내 주시는 것처럼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편지로 자기의 사상과 생활을 담아 보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편지”인 만큼 성도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를 언행으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 역할을 잘 하려면

1. 그리스도의 내용을 풍부하게 소유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내용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보내주신 단 한 통의 편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의 내용이며 뜻인 것입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이 문학적 식견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것처럼 성도가 그리스도의 내용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내용을 많이 아셔야 할 것이고

2. 그 내용을 전달함에 있어서 ① 행실로 전달하고 ② 문서로 전달하며 ③ 말로도 전달해야 합니다. 행동과 문서와 말은 전달 수단에 절대 필요한 것인데 말보다는 글이 앞서야 하고, 글보다는 행동이 앞서서 내용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보다 글이 앞섰고, 글보다도 실천이 앞섰습니다. 마 5:16에 보시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되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으니 먼저 성도가 “그리스도의 빛을 보유한 다음에 그 빛을 착한 행실로 나타내어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은 작아도 나타납니다. 만일 성도의 행위가 착하지 않거나 진실하지 않으면 엉뚱하게도 마귀를 전하는 편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언행 심사가 일단 선하고 진실하며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3. 편지의 내용에 명확성을 띄어야 하는 것입니다. 명확성이란 것은 상대방이 알기 쉽고 바르게 납득할 수 있도록 나타내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말을 어렵게 하거나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내려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바르고 쉽게 전달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른 다음 어떤 유식한 친구에게 그 소식을 알려야 되겠는데 글은 짧고 유식한 체면은 세워야 할 입장이라 적당히 문자를 맞추어 글을 보냈는데 어떻게 보냈느냐 하면 부친주(父親主) 통통불사(痛痛不死)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보냈습니다. 보낸 뜻은 부친이 아프고 아프다 못해 죽었는데 버들 버들 하다가 꽃꽃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자를 아는 친구는 그 편지를 받고 부친이 아팠다가 죽지 않고 버들 꽃처럼 피어 건강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니 결국은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또 쉽게 전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전달하기 쉽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그런데 성도들이 누구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를 보내야 합니까? 바로 그 마귀의 자손인 어두움의 세계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전부 편지를 받을 때 긍정과 신뢰로 받지 않고 대부분 비판으로 받으니까 조금이라도 흠 잡히지 않는 행실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편지를 보낼 때는 글을 명확하게 쓰고 규격 봉투에 넣은 다음 반드시 우편 번호를 기록하고 우표를 바른 자리에 붙여서 넣어야 할 것입니다. 편지 무게와 요금도 일치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편지 역할을 해야 할 성도들의 생활도 그만큼 규모를 갖추어 생활하므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확실한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혹이라도 성도라고 하면서 마귀를 보여주는 실수가 있으실까 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다 예수님의 지체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셔야 할 사명을 갖고 있으니 이것이 곧 거룩한 생활과 전도의 사명입니다. 편지로 발신자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성도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은 온유, 겸손하고 조용하시며 들레지 않으십니다. 또 예수님은 의롭고 진실하시며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그 분은 죽기까지 참으셨고 죽음으로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평화의 사자이십니다. 그런고로 성도들이 나타내야 할 편지의 내용도 예수님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8. 영의 직분과 의문의 직분 (고후 3: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의 직분과 의문의 직분”에 대하여 살피겠습니다. 본문 8절에 보시면 “영의 직분”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의의 직분”이란 말씀이 있는데 영의 직분과 의의 직분은 같은 뜻이고, 또 9절에 보시면 “정죄의 직분”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 직분은 의의 직분에 반대되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7절에는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 있으니 이것은 정죄의 직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영의 직분과 의문 직분, 또는 의의 직분과 정죄의 직분을 대조하면서 그 성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영의 직분은 성령님이 직접 주시고, 마음에 확신으로 주시는 직분입니다. 반대로 의문의 직분은 돌에 써서 새긴 의문 즉 율법에 의하여 받는 직분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 의하여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 되고, 레위 지파가 성전 봉사자가 되는 것이요, 사람의 추천서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받는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의 직분으로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바울사도는 영감으로 직분을 받고 확실하게 사명 생활을 잘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적 직분자들은 영적 은혜를 근거로 하여 의식 절차를 거쳐 직분을 받습니다. 여기에 의식만 있고, 영적 감화가 없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영의 직분이란 성령님의 감화로서 성도의 마음 속에 느끼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신을 갖고 이행하는 직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문의 직분은 성령님의 감화와 상관 없이 법대로 받고 사람의 추천을 효력시 하는 직임을 뜻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직임 형태를 구약 시대에만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에 적용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성령의 감화를 앞 세우고 의문의 절차는 간략한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임직식이 장황스러웠으나 신약 시대에 직분 주시는 방법은 임명으로 끝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의 직분은 살리는 직입니다. 6절에서 “영은 살리는 것이라” 하셨고, 3절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살리는 역할을 하십니다. 거듭나는 은혜, 부활시키는 능력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신약 시대에 주신 복음 사역의 직분이 곧 영의 직분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직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으로 곧 죽이는 직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직분입니다. 모세가 유명하였지만 그가 받은 직분은 율법적 직분이었고, 죽이는 직분이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밝힙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전하는 직분은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3. 영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보다 영광이 더욱 넘치는 직분입니다. 9절에서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죄의 직분, 율법의 직분, 의문의 직분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또 그 직분에도 목적이 있기 때문에 영광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직분, 의의 직분, 살리는 직분은 더욱 영광이 넘치는 것입니다. 영의 직분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확신케하는 복음적 직분이고, 의의 직분은 십자가의 은혜로 의의 은총을 전하는 직분이며 “살리는 직분”은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의미로 쓰신 용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문의 직분은 복음이 임했을 때 끝난 것이고, 영의 직분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되는 직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영의 직분, 의의 직분, 살리는 직분이 같고, 이 직분은 신약 시대에 받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며 의문에 의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로 인한 확신으로 받는 직분입니다. 반대로 정죄의 직분, 의문의 직분, 율법적 직분이 같고, 이 직분은 율법에 의하여 받으며 복음이 올 때까지 주신 직분으로 구약 시대의 직분입니다. 율법의 직분은 정죄하고 심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소망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직분은 그 소망을 성취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영의 직분의 대표자는 예수님과 사도들과 오늘의 목사이며 의문의 직분은 모세와 제사장들로서 구약 시대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보충 9. 수건을 쓴 것과 벗는 것 (고후 3:12-18) 목록으로


본문 강론에서 요약된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시 몇 말씀 드립니다.

1. 본문 12절에서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같은 소망”이란 율법을 의지하지 않고 복음을 믿음으로 영광스러워지는 소망이 확고하다는 뜻입니다. 구원과 영광의 소망이 확고하지 않으면 담대한 증거를 할수 없을것입니다,따라서 모든 전도자나 복음 사역자들은 구원과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한 소망이 확고하여야 할것입니다,

2. 13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과거에 모세가 율법을 받아 전달할 때 대중 앞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것 처럼 하지 않는다”고 하셨읍니다.(출34:29-35).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볼것과 알 것을 확실하게 다 파악하지 못하도록 감추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무었을 감추었을까요? “장차 없어질것의 결국”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율법을 시한부로 주셨고,(마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 까지라 하심) 또 율법의 성취자가 오실때(마5:18) 율법의 권위(용도에 대한것)가 없어질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일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의 마지막 결국을 감춘 뜻”이라고 해석을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을 감춘 것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얼굴의 광채를 덮은 것이지만, 이것은 계시를 감추는 상징적 의미로 취하신 것이고, 실제 의미는 “율법의 결구이 쇠할것”을 나타내지 않은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이 율법의 결국을 미리 알면 율법을 미리부터 존중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신 듯 합니다. 따라서 율법이 내용적으로 계시한(외부적으로 계시한 것은 사랑) 메시야 구원언약도 모르고, 율법의 권위도 존중하지 않으면 방자한 태도를 취할까 하여, 율법의 시한부를 나타내지 않은것입니다. 이것이 혹 모세의 실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것인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 일단 수건을 쓰고 보는 것은 피상적 깨달음만 주는것인데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수건을 벗은자처럼 확실하고 밝게 증거한다는것입니다.

3. 14절에서 “그러나 저희(유대주의 자들)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때에 그 수건이 버서지지 않고 있으며(율법의 표면만 본다는 뜻)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버서질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 유대인들이 있어서 핍박과 훼방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율법에 나타난 제사제도는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예언 하신것이고 그 이외의 계명은 다 사랑에 관한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가지 계명을 다 성취하신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자이시고 사랑의 모범자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밝은 빛으로 율법을 가리운바 된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여전히 수건을 쓰고 율법을 보는자가 되므로 율법에 감추인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의 완성자이신 예수남을 발견하지 못한것입니다. 따라서 “수건을 썼다”는 것은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수건이 없어질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성도가 예수남을 믿게 되면 이해하게 될것이라는 뜻으로, “믿어야 한다”(요6:69)는 말씀처럼, 믿음이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거듭나는 은혜로 받게되며(요3:3,롬10:17), 또 먼저 믿음을 가진 다음이라야 율법과 율법주신 목적을 알게 된다는것입니다. 15절과 16절은 14절과 같은 뜻을 또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즉 유대주의자들은 아직도 수건을 쓰고 보는 상태인지라 깨닫지 못하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왔을때는 알게 될것이라”는것입니다.

4. 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뜻은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요,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는 주님이 율법의 성취자요 주 이신만큼 주안에서 율법의 절차등에 얽매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뜻과 생활을 본받아 살면 되는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율법에 속박되지 않는것입니다.

5. 18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다 메시야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건을 쓰고 구약을 보는 사람처럼 의식이나 상징에 얽매이지 않고 수건을 벗은얼굴(직시한다는뜻)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거울이 흐린점도 있으나, 여기서는 밝히 봄을 뜻함) 주님의 영광을 본다“ 하셨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본 것을 나타낸 말씀이며 또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름“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님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율법의 복음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건쓰고 보는 것“으로 표현하신점을 아시고, 신약의 성도들은 그런 절차 없이 성경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직접 본 받으며 또 직접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율법이 아주 필요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권위가 적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5 과 복음 사역과 관련된 말씀들 (고후 4:1-18)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종합적 제목을 정하는데 고심하였습니다. 우선 복음 사역의 방도(1-2절), 복음 전파와 관련된 사항(3-7절), 복음 사역자들의 긍지와 용기(8-12절), 부활로 인한 소망(13-18절) 등으로 요약해 보았으나 종합적 제목을 정하기 어려웠는데 문득 “우리”란 용어가 20회 기록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의 “우리”는 바울사도 일행 즉 복음 사역자들을 뜻하므로 본문 내용들과 관련하여 “복음 사역과 관련된 말씀들”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1. 복음 사역의 방도에 대하여(1-2절)

1)1절의 “이러하므로”의 뜻은 구약에 감추인 복음의 은혜로 모든 성도가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역자들도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므로

2)직분을 받고 복음 사역에 충성할 때

3)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을 힘입은 만큼 핍박이나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4)숨은 부끄러움 즉 감취인 범죄나 잘못된 구습을 버리고

5)궤휼(거짓이나 옳지 못한 이기주의) 가운데 행하지 않으며

6)하나님의 말씀을 혼잡(2:17에서 설명되었음)하게 하지 않으며

7)오직 진리를 나타내고(성경적 증언에 힘씀)

8)하나님 앞이나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서도 스스로(자신들을) 천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나님 앞이나 각 사람의 양심”이란 밝고 깨끗한 세계를 뜻하며 사명을 행하는 성도들이 그런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자신들을 나타냄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복음 전파와 관련된 사항들에 대하여(3-7절)

1)3절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다”는 뜻은 복음이 상대방에게 소개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이는 “망하는 자들” 즉 구원받지 못할 비택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택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길이 막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시대에 복음을 소개받지 못한 조상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으로 시행하시는 일인 만큼 누구도 의문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롬 9:21-24)

2)4절에서 “복음이 가리워지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로 전달되지 않음이고, 또 한 경우는 전달되었어도 마귀의 역사와 훼방으로 가리워지는 경우입니다. 본문의 ”그 중에“란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 중에란 뜻이요, ”이 세상 신“은 마귀인데(눅 4:16) 그 마귀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는 역사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광채가 불신앙의 마음을 비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에서 사역자들은 “자기들이나 인간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이 만유의 주시오, 구원의 주되신 사실과(계 17:4, 히 2:10) 또 사역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너희)의 종(섬기는 자)된 것을 전파한다”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가 성도의 종이 되었다”는 뜻은 권위상으로 종된 것이 아니고, 봉사하는 종임을 뜻합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6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당시 어두운 세계에 빛을 나타내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3) 그 빛은 태양을 만드시기 이전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빛을 성도의 마음에도 비추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4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란 말씀이 있고, 본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깨닫는 지혜를 뜻하며 그 지혜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는 뜻은 주님께서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주시므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힘, 즉 거듭남의 은혜(요 3:3) 또는 신령한 지혜(엡 1:17-18)를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의 마음에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5)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보배”란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혜(거듭난 심령)입니다. 이 지혜가 있으므로서 믿음이 발생하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인간과 육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진리 아는 능력을 질그릇같은 인간에게 주셨음은 “인간의 힘으로 생명이 유지되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됨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여야 하며 또 질그릇은 멀지 않아 깨질 것이므로 영원한 영적 축복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3. 복음 사역자들의 긍지와 용기에 대하여(8-12절)

1)8절 초두에서 “우리가”란 용어가 바울사도와 그 일행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는 핍박을 받아도 그 핍박 자체가 진리 안에서는 신앙의 연단 과제이기 때문에 손해될 일이 아니며 따라서 답답함을 당하여도 낙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성도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의 감찰 하심과 상급받을 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대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며 거꾸러뜨림(심한 핍박)을 당하여도 역시 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그런 확신과 용기를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3)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졌다”하심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와 방불한 고난을 감심으로 짊어지듯 감당하였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성도가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된 만큼 주님을 위한 고난과 함께 주님의 생명이 성도에게 전달될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뜻은 주님과 연합할 때 주님을 위한 고난과도 연합을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부활 생명이 성도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4)11절에서 “산 자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기 운다”하심은 살아 있는 성도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순교당하게 됨을 뜻하고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한다”하심은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살아 있으나 죽을 육체를 갖고 있음)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과 순교를 예상하는 사망은 사역자들 안에서 역사하고 진리 전달로 구원받는 생명은 성도들(너희)에게서 역사한다고 하셨습니다.(12절)

4. 부활로 인한 소망에 대하여(13-18절)

1)13절에서 구약 시대의 다윗이 “믿는고로 말한다”(시 116:10)한 것처럼 바울 자신도 “믿는고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지식이고, 지식은 말하게 합니다. 믿음 곧 확신이 없으면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바울은 믿음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다 믿는 고로 말하는 것이고,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2)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안다”하셨으니 “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다 살리시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그 사역자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가 주 재림시에 부활과 영화를 거쳐 예수님 앞에서 함께 만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 부활에 대한 능력은 성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 아니요, 삼위의 하나님이 다 갖고 계신 것입니다.(요 11:25, 3:5-6)

3)15절의 말씀은 “복음 사역자들이 성도들의 은혜받는 일을 위하여 노력하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은 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넘치면 그 만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명자들의 충성은 성도를 위한 충성 같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입니다.

4)16-18절에서 바울사도는 마지막으로 부활과 영원한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시므로 복음 사역자들이 고난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을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① “겉 사람이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육신이고, “후패한 것”은 늙고 쇠하며 병드는 것입니다. 육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정도에 따라 늙고 쇠하며 병들고 죽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병 없이 쇠하여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창 49:33) 그러나 “속이 새롭다”는 것은 마음에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령이 믿음과 소망으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옛 집이 헐리면 새 집에 가서 살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천국에서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잠시 고난을 받았으나 천국에서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으로 상급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고난의 분량보다 고난의 대가를 상으로 받는 분량이 더 큰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③ 현세에서 보이지 않는 천국은 영원한 세계이기 때문에 잠깐 사는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더 사모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적 고난을 당하고 만일 영원한 세계에서 그 만한 상급과 보상이 없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칭찬과 상급과 귀중한 보상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으로 고난을 견디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바울의 천거와 전파 성격 (고후 4:1-6) 목록으로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천거서를 제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천거서란 바울과 그 일행들이 하나님의 참된 사역자라는 사실을 더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증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이상 더 참된 것이 없고, 또 사람의 증명이나 천거서를 받는 것이 자신의 실제적 생활보다 더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거서 제출을 사양하고 실제적 생활을 제시한 것입니다.

1. 바울 자신의 천거는

1)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주님으로부터 직접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탐하였거나 원하여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분을 받은 후에도 “자신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하셨고, 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괴수 죄인”이란 말까지 하셨습니다.(고전 15:9, 딤전 1:15) 여하튼 사람이 세워 사도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천거서를 제출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될 때 인간적 절차가 없은 것은 아니나(행 9:17) 일단 하나님이 베푸신 영적 감화를 우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2)그가 직분 사역에 큰 고난이 따르지만 낙심하지 않고 행하는 것을 그 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사도직을 인간적으로 경홀하게 받았다면 고난이 있을 때 쉽게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영광의 직분”이라 하셨고,(고후 3:8) 또 “영광의 소망이 있다”(고후 3:12)하셨으며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않는다”(1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거나 확신이 크면 낙심하지 않을 것이요, 확신 없는 상태에서 인간적으로 받은 직분은 희생적 충성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숨은 부끄러운 일까지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보고 지적하는 부정만 시정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일, 즉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까지 스스로 결백하게 살기를 노력하는 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성도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 전에 언제 어디서나 혼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4)궤휼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궤휼이란 거짓으로 이웃을 헐뜯거나 이기주의를 도모하는 일로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면 그런 일이 추호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진리를 혼잡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혼잡이란 “섞인 것”을 뜻합니다. 즉 사람의 말이나 “인간의 전통, 의식” 등을 가미한 것입니다. 진리가 혼잡하지 않으려면 오직 성경만 전하고, 오직 예수님만 나타내야 할 것이요, 그 외에 다른 것을 나타내면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사도는 자신을 천거할 때 직분받은 성격의 겸손과 고난, 인내, 순결, 정직, 진리의 바른 증거 사실로 입증하셨습니다.

2. 복음 전파의 성격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복음은 가리워질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운다고 하셨습니다.(3절) 전도자가 복음을 아무리 땅끝까지 전한다 할지라도 전파 안 되는 곳도 있고, 전파되어도 안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00년 전의 한국의 조상들은 복음을 못 받았고, 아직도 세계에는 못 받은 곳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섭리로 망하는 자들(즉 비택자)에게는 가리워질 수 있지만 그 외의 택자들에게는 다 전파되는 것입니다.(마 24:14)

2)복음이 전파됐지만 듣고도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신(즉 마귀)이 믿지 않는자(비택자)의 마음을 혼미(어둡게)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4절)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 계시가 말씀으로도 나타났는데 비택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복음을 받아도 그 심령이 열려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자는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복음을 받고 성령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그리고 이 복음을 전파할 때 참된 사역자는 결코 자신들의 인간적인 것을 전파하지 않고 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의 주 되신 것만 전파하며 ②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의 종(너희의 종)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 사명을 가진 성도나 사역자는 인간적인 것을 내세우지 않아야 할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할 것과 또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의 종될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4)그리고 마지막 6절에서는 “복음을 깨닫는 능력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고 강조를 하셨습니다. ①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창조 당시부터 빛과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이신데 ②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1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그 택하신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조명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복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역사와 전도자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망할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기도 하며 택자는 복음을 들을 때 성령님의 조명으로 깨달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님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되시되 겸손과 인내와 정결과 진실과 말씀의 충성으로 참 신자답고 참 사역자다운 증거를 보여야 할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든 인류들에게 예수님의 주되신 것과 구세주 되신 것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보배를 담은 질그릇 (고후 4:7) 목록으로


본문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를 질그릇으로, 예수님을 보배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질그릇 같은 인생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질그릇이 보배가 되려면 반드시 보화를 간직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1. 인생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1)질그릇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뜻합니다.(롬 9:21)

2)질그릇은 값싼 그릇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을 티끌이라 하셨고, “욥”은 구더기라고 하였습니다.(요 25:6) 왜 이렇게 비천할까요? 범죄하였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존귀하여도 생명 떠나면 시체에 불과하듯이 인간도 정결할 때 값이 있는 것입니다.

3)질그릇은 깨지기 쉬우므로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을 비유합니다. 인생이 연약한 것과 깨지지 쉽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있다가 죽고 없어지는 것을 안개로(약 4:14), 풀로(벧전 1:24), 나그네로(벧전 2:11)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2. 성도들은 질그릇에 보화를 간직한 백성입니다. 바울사도 일행은 말씀하시기를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진리되신 예수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만왕의 왕을 모시고 산다면 무슨 부족이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요 1:12과 계 3:20에서 나타내주셨습니다. “보배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물질 만능의 세상에서는 돈만 있어도 상당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영생과 만물의 주를 모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이 질그릇을 어떻게 취급하십니까?

1)보호해 주십니다. 보화를 담지 않은 질그릇(불신자)도 보호하시거든 하물며 보화를 담은 성도이겠습니까? 사 41:10에 보시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습니다. 연약한 인생이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쉽지만 그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이 만드신 뜻대로 적당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렘 18:4에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하셨고, 렘 18:6에서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니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필요에 따라 쓰시고 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릇이 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릇으로 쓰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 모세, 바울 등등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를 받고 쓰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자신이 질그릇 같은 존재란 사실을 아셔서 더욱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중에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쉬임없이 자신에게 머무실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인간의 극히 약한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시고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안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신것입니다,.

 

 

제 6 과 영원한 집을 사모하자 (고후 5:1-10)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취지는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질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대책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은즉 그 곳에 갈 것을 사모하고 준비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집을 사모하라”는 제목을 정한 후 ① 덧입기를 사모함(1-5절) ② 주와 함께 거함(6-10절)이란 두 대지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덧입기를 사모함.(1-5절)

1)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하셨는데 여기의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란 육체와 현실을 뜻합니다. 인간의 육체와 현실은 임시로 조립한 장막집과 같아서 용도가 끝나면 걷어 없앨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필연적인 일인데 왜 “만일”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을까요? 육체적 현실이 말세가 되면 필경 끝나고 없어질 것이지만 혹 오늘 내일이라도 사람이 죽는다면 육체적 개인의 장막집이 무너진 것이 되기 때문에 개인 육체의 시간적 한정을 예측하지 못하는 뜻으로 “만일”이란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는 말씀은 내세의 천국을 의미하신 것으로 이 집은 하나님이 건설하여 준비하신 집이고, 천국(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이며 구원받을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집입니다. 여기의 “집”이란 뜻은 “있을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탁식하며”하신 뜻은 인간이 현세적 장막집에 살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현실 생활에 괴롭고 아쉬운 일들이 많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내세의 천국 생활을 지상에서 맛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덧입는다”는 뜻은 속옷(현세적 믿음 생활의 즐거움)과 겉옷(내세적 생활의 즐거움)을 다 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지상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곧 내세적 천국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로부터 지상에 도래하였습니다.(막 1:15) 따라서 성도는 내세 천국을 사모하면서 이 세상에서도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주님과 더불어 맛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3)3절에서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가 현세와 내세의 천국 생활을 아울러 누림으로써 벗은 자 즉 내세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잠시라도 소망 없는 자처럼 되지 말고 항상 천국을 누리는 생활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현실을 사는 성도)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이는 2절에 현실적 고난을 아쉽게 여기는 일이라 하였음. 또 그 이상의 육체적 고난도 있었을 것임.)이 “벗고저 함이 아니요 덧입고저 함이라”함은 현실적 고난을 모면하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천국의 생활과 안위를 힘입어 삶의 낙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 것(육체적 삶)이 생명에게(부활과 영생) 삼킨바 되게 하기 위함이라”(4절)하셨으니 이는 성도의 현실적 생활이 영원한 천국 생활에 포함되고 연속됨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모신 때부터 영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4)5절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셨다”함은 인간의 공로없이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에 계시면서 감동하여 하나님의 뜻(진리)을 믿게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요 3:3, 고전 12:9) 따라서 진리와 부활과 영생을 믿게 되는 사실이 곧 성령님을 보증으로 보내주신 증거요, 역사하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주와 함께 거함.(6-10절)

1)6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하신 말씀은 성도가 육신적으로 세상에 거할 때 성령님과 함께 거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따로 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항상 주님의 영(성령님)과 함께 있고, 또 주님을 만나 함께 있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에 항상 담대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7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말씀을 따라 행한다는 뜻이요,(롬 14:23) 좁은 뜻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국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보는 것으로 하지 않음”은 현세적 목적이나 현세적 증거에만 의존하여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자들은 내세의 실체가 현세적으로 증거된 것이 아니지만 “차라리 몸을 떠나 천국에 계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한다”(8절)하시므로 믿음으로 행하는 증거를 보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내세를 사모한 나머지 속히 세상 떠나는 일을 담대히 원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천국의 안식을 사모하는 성도들이면 마땅히 그러하여야 할 것입니다.

3)9절에서 사명자들은 “이 세상에 거하든지 또는 세상을 떠나든지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서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도록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도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들이 행한대로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0절) 7절 말씀에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않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소망을 두고 그 세계에서 받을 상급을 위하여 현실을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활의 결실은 천국에서 받게 됩니다.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이란 현실 생활의 옳고 그름을 뜻합니다. “몸”이란 뜻은 정신을 배재한 것이 아닌 몸을 갖고 산 생활이란 뜻입니다. 사도들의 정신은 오로지 내세와 내세의 상급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제 7 과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1-21)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① 11-15절에서 “사역자들에 대한 신뢰를 호소하신 말씀”이 있고, ② 16-17절은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임을 강조하신 말씀”과 ③ 18-21절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부탁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20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제목을 정하고 3 대지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1. 사역자들에 대한 신뢰를 호소함.(11-15절)

1)11절에서 복음 사역자들(우리)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역자들이 예수님을 두렵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사람을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권면이나 교훈이 쉬운 것 같아도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주님을 의식할 때 더욱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다”하신 것은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인정을 받고 있음을 피력한 말씀이요,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란다”하심은 하나님이 바울사도 일행의 신분과 사역을 아시는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알려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여기에 “양심에 알려짐을 원하신 것”은 사역자들의 신분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인식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오해는 많은 문제를 가져올 것인즉 하물며 믿음의 사역자들을 오해하면 되겠습니까?

2)12절에서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라”하심은 이미 3:1-3에서도 천거서 대신 실제적 생활과 열매로 신분 증명을 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또 그와 같은 천거를 위한 천거를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역자 자신들이 그들 양심에 알려지기를 원한 것은 거짓 사역자들의 헐뜯는 궤휼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준다”하심은 사역자들의 참된 신분을 믿고 거짓 사역자들의 헐뜯는 내용들을 항변하므로 사역자들의 바른 입장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거짓 사역자들은 자기들의 신분을 내세울 때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인데 바울을 이해하는 성도들이 그들에게 바울의 진실성을 알리므로 대항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으로 하지 않음”은 양심에 입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외모로 자랑함”은 자랑할 여건이 없는 상태에서 거짓으로 자화자찬함을 뜻합니다.

3)13절에서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함은 비난하는 자들이 전도자들이나 성도들을 볼 때 미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경우에 대하여 변명하신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은 과격하지 않아도 미친 취급을 받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의 죄책을 짊어지신 죽음이다, 그 분은 부활하셨다, 우리도 부활한다”고 하였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또 그런 믿음 안에서 교회 생활에만 열심히 한다고 할 때 미친 자의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성경에도 나타나 있습니다.(행 26:22-24, 삼상 1:12-16, 행 2:13) 그러나 미치지 않았는데 미친 취급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만큼 문제될 것이 없고,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사역자들은 온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14절에서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과격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믿음 생활에 이끌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택한 백성)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사실이며 그것이 바로 사명자 자신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시기 때문에 그 사실이 사명자와 성도들의 마음을 강박(강권)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이같은 사랑에 대하여 강권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뜨거운 사랑의 몇 갑절의 강권함과 충격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뜻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죽지 않았은즉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인권이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롬 7:9, 6:4, 6:10, 고전 15:31) 성도는 주님 앞에서 인권 없는 자(종)처럼 복종하고 섬기는 자세만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5)15절에서 “예수님이 모든 (택한)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성도)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성도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택한 자)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 곧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죽지 않은 대신 주님의 완전한 종이 된 것을 믿어야 할 것이요, 또 인권없는 종노릇을 기쁨과 감사로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뜻”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임을 강조하심.(16-17절)

1)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한다”고 하셨습니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함은 성도(아무 사람)를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육체와 외모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지요. 또는 외모와 단장이 허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체의 내용은 영원한 존재요(5:1,10) 또 새로운 피조물(17절)인 만큼 외모로 성도의 가치를 평가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마 22:16, 삼상 16:7) “비록 우리가 (과거에 믿지 않을 때는)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사람의 아들로만) 알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니까요.

2)17절에서 성도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정도가 아니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가 거듭나는 영을 받았고,(요 3:3, 엡 2:1, 요일 3:9) 옛 사람은 죽었으며(롬 6:6)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을 받고(요 1:12)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은즉(요 17:3)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것”(옛 사람)은 지나갔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도는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인식하고 오로지 신앙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새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과의 화목을 부탁하심.(18-21절)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뜻은 하나님과 거리끼는 관계를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친교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그 윗단계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이유가 많지만

1)본문 18절에서 “모든 것(만물)이 하나님께로서 나왔고(롬 11:3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중보자가 되시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롬 5:10) 화목하게 해 주셨으며 또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요 14:11) 세상을 (택한 백성들; 요 3:16)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그리스도의 중보를 인하여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셨으며 또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셨습니다.(19절)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사명으로 행하라는 뜻이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은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면하라는 뜻입니다. 욥 22:21-28에서도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말씀하셨은즉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20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권면하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사하는 사신들로써 곧 하나님이 자신들을 쓰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처럼 성도를 권면하고 또 간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에 각별히 유의하셔야 할 것이요, 화목하는 방법은 믿음 안에서 회개하고 순결을 지키는 일입니다.(욥 22:21-28, 암 3:3, 잠 8:20)

3)21절에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택한 백성)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으니 여기의 “예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심”은 전지하시지 않다는 뜻이 아니요, 죄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심리적으로나 행위상으로 죄가 없으심을 역설하신 것이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음”은 우리가 죄인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죄인이 되어주셨다는 뜻이며 “저의 안에서”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는 믿음 안에서란 뜻이요,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은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용서 또는 간과하시고(시 32:1) 심판받지 않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으로 죄책을 면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롬 3:21-26,28,30)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을 가장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담대히 원함 (고후 5:1-10)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내용은 바울사도께서 인생의 무상함과 천국의 영원한 축복을 대조하시면서 “나는 차라리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에 섰다면 영원한 천국에 가기를 담대히 원한다”는 결론을 내린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천국 가기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떠나는 것을 서글프게 여기거나 그것을 욕으로 받는 경향이 있고, 너무 현세만 소망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 말씀에서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살펴 보셔야 하겠습니다.

1. 바울사도가 알고 믿는 신앙의 지식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15절 끝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안다”는 것은 확신을 뜻하고, 또 7절의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하신 말씀도 역시 “아는 지식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서 행동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지식에 근거하고 행동은 지식 따라 나타나는 것인데 바울사도 일행이 무슨 지식을 가지셨는가?하면

1)“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여기의 “장막집”이란 육체를 뜻합니다. 장막집은 양옥집에 비할 때 허술하고 속히 무너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이나 육신적 생애는 속히 무너지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실 때 보이는 것을 모두 유한하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만일 무너진다”고 하시므로 “안 무너질 수도 있다”는 여유를 보이셨느냐?하면 육체가 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만일 오늘이라도 무너지면”하는 뜻입니다. 살전 4:17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즉시 부름을 받던지 혹 자기 생애 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하는 뜻으로 “만일”을 말씀하신 것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의 육체가 늙고 병들고 죽게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2)(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천국)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죽으면 천당가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인데 이것은 사람이 세상의 집을 짓듯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령하게 지으신 신령한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이 세상이나 육신의 장막 같은 집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과 부활체 그리고 천사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3)그러니까 성도는 현세에서 육체생활이나 죄악과의 싸움 때문에 짐진 자처럼 고생하고 탄식하지만 그 곳은 그런 고통이 없는 즐거운 곳이므로 “그 곳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탄식하는 곳입니다. 생활고나 질병이나 죄로 인한 싸움 때문입니다. 저는 생활고의 어려움은 맛보지 않았으나 죄와 불법과의 싸움이 어찌도 많고 크고 괴로운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 처소는 그런 곳이 아닌 화평하고 안락한 곳이니까 그 곳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 “덧입는다”는 말씀은 입은 옷 위에 하나를 더 입는 것처럼 현세에서 느끼는 즐거움 위에 천국적인 즐거움을 교회 생활을 통하여 함께 누리라는 뜻입니다.(막 1:15)

4)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탄식스러운 고통을 옷 벗듯이 벗으려 하지는 말고 (즉 염세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지는 말고) “천국을 사모하면서 세상에 있는 동안 적극성있게 노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저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저 함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벗고저 함이 아니라”는 말씀이 바로 탄식스러운 세상이라 하여 고의적으로 벗어나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내세를 생각하고 사모하면서 탄식스러운 세상을 이겨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4절의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한다”는 말씀도 역시 유한성 있는 현세가 영원성 있는 천국 세계로 돌입하기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세의 은혜는 헌옷을 벗고 새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좋은 일이요, 사모할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5)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생천국을 주실 증표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생의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이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셨으니 성령님은 성도에게 오셔서 중생의 은혜로 믿음으로 또 말씀으로 구원의 영혼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확실한 영생의 소망을 갖고 항상 담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현세에 거하는 것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요, 내세의 천국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인데 “이 사실을 아는 것도 믿음으로 알 뿐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은 믿음으로 알고 그 믿음에 입각하여 행동하며 보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바울사도의 천국관은 믿음으로 알고 사모하는 세계이지 보는 것, 체험하는 것으로 알고 사모하는 세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6)바울사도가 알고 있는 천국 지식에 입각한 결론은 만일 그가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에 섰다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내세를 택하되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담대히 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현세에 더 있고, 덜 있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는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세상에 더 살던지 떠나든지 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인도에 따라 순종할 따름이되 탄식스러운 현세보다는 내세가 훨씬 소망스럽기 때문에 그 세계를 사모하고 간절히 바라신 것입니다.

7)또 한 가지 내세를 사모해야 될 이유는 천국에 가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현세에서 몸으로 행한 선악간의 행위를 따라 상 받을 일이 있기 때문에 더욱 사모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천국은 ① 육체의 장막을 벗고 탄식 세계를 떠나 ②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거하며 ③ 상급을 받으며 평화와 영생을 누리는 곳이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최대의 소망처인즉 성도들은 더욱 담대히 그 세계를 사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13. 사도적인 생활 (고후 5:11-16)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뜻은 “사도들의 생활이 어떠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적인 생활을 살피심으로써 많은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도적인 생활

1. 주님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한 것입니다. 11절에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으로 사람을 권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또 시 7:11-에 보시면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라 매일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칼을 갈으시고 화살을 시위에 먹이시며 죽일 기계까지 만드신다”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입니까? 그런 분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도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을 때에도 물론 벌을 주시지만 사명에 꾀를 부리거나 전도하지 않아도 화가 미칠 것을 예측하여(고전 9:16) 더욱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현세에서 벌하지 않으시면 후에 그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대로 심판하신다(고후 5:10)고 하셨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시 2:11)

2. 사역자의 정당한 입장을 인정받기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1절의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직분을 받은 것이나 가르침과 생활면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알리워지고 인정받을 만큼 정당한 입장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불법과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바울은 정당치 않다”고 하니까 판단력 없는 교인들이 그들의 유혹을 받아 바울을 배척하는 상황이 있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믿어달라”고 자처한 것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호소하신 것이 아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바른 신앙을 위하여 호소하신 것이며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즉 거짓교사를 따르는 자들이 혈통이나 할례 같은 것으로 자랑하는 것)을 대항하고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바른 자랑을 하기 위하여 바울의 전파를 믿어 줄 것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사역자가 어떤 궤휼에 빠지지 않고 진실 그대로를 인정받는 다는 것은 퍽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를 위하여 미친 자의 취급도 받으셨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미치신 일이 없었고, 예수님도 미치신 일이 없었지만 행 26:22-24에서 불신자 베스도로부터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는 인정을 받으신 일이 있었고, 예수님도 요 10:20에서 “미쳤다”는 취급을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또 오순절 당시에 성령받은 제자들이나 사무엘 시대에 간절히 기도하던 한나도 “술취했다”는 취급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행 2:13, 삼상 1:12-16) 이것은 다 진정 미친 행동을 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이 전혀 이해 못하는 주장과 행동을 취하기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은 것 뿐이었습니다. 바울사도가 비정상인의 취급을 받으신 것은 ① 복음 사명에 집중하였기 때문이고 ②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교훈과 생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보이지 않는 천국에 “낙원이 있다”는 주장이나 매를 맞고도 기뻐서 찬송을 하는 생활은 그런 취급을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만큼 지나친 태도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면(요이:9) 은혜를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4.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하시는 것을 깊히 느끼면서 사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뼛속까지 느끼는 충격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컨데 한 분 예수님이 모든 사람(성도)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대신하여 죽으셨은즉 다시 사는 것이 아니냐”하시겠지만 경북을 대신하여 출전한 선수가 지면 경북이 지는 것과 같은 것을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인간적으로 돌아가셨으니까 우리도 인간적으로 죽고 또 예수님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니까 우리도 신령면으로 산 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찌 그 사랑의 강권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성찬 예식이 바로 그런 은혜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강권을 느끼는 성도는 늘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성도이고, 이것을 깨닫는 성도는 자기의 육신과 정욕이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위하여 다시 산 자와 같이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15절에 있습니다. 즉 “주님과 육으로 같이 죽고 신령한 자로 다시 살았으니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중국 소설에 어떤 나라의 처녀 공주가 전쟁으로 쫓길 때 한 병사가 죽어 가는 공주를 업어다가 간호하여 살렸는데 나중에 혼사 말이 있을 때 훌륭한 사람들을 다 제쳐놓고 자기를 살린 병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주님의 사랑의 강권을 받는 성도는 언제나 자기의 육정을 죽이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 되기만을 결심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아무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본래는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일 뿐인데 왜 예수를 앞세워 소란을 떠느냐?”하고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육체적인 예수님은 가난하고 문벌없는 촌사람,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지 않고 보니 그 분은 하나님이시오, 구세주였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는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현세적으로 펑가를 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반대로 얼마나 순결하며 신령한 은총을 많이 받았는가?를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사람이라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적 표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평가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 가시면 현세적 생활을 어렵게 살았을 지라도 믿음 생활과 사명 생활에 충실한 성도들이 크게 칭찬받을 것이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도 사도적 생활을 본받아서 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충성할 것과 ② 교역자와 성도간에 신뢰가 있어야 할 것과 ③ 미친 자의 취급을 받을지라도 믿음 생활에 몰두하셔야 할 것과 ④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을 깨달아 주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여야 하며 ⑤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21) 목록으로


본문 중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은혜가 나타나 있는데 17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은혜”가 있고, 18-20절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은혜”가 있으며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세 가지 중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누구던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즉 믿기 이전의 불행한 형편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1.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그 영적 상태가 죽어 있었고,(엡 2:1) 또 타락한 상태에 있었으며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는 원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로써 엡 2:1에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하셨고, 골 1:21에서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멀리 있었을 때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다”하셨으며 엡 2:3에서는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것은 이러한 영적 죽음이나 타락으로 인한 진노의 불행한 상태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하여 없어지고 지나갔는가?할 때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목욕을 하고 새옷만 입어도 좋지 않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것”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중생(거듭남)의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것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영혼이 다시 사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요 3:3)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중생의 은혜를 힘입으면 그 당사자는 새로운 피조물(새사람)이 되고 새사람됨과 동시에 과거의 죄로 인한 불행한 상태가 전부 해소되기 때문에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재창조를 의미하며 영적인 면에서 완전한 본질적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모양이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없었던 영적 생명이 창조되었으며 없었던 믿음의 인격이 조성되었다는 뜻입니다.

4.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 된 성도는 참으로 변화된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의복만 갈아입어도 조심을 하고 하나님 없던 자가 하나님을 모셨고, 진노 아래 있던 자가 죄사함과 영생을 얻었으며 마귀의 자식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은즉 마땅히 새사람답게 살아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감사와 의와 희망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5.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7-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 화목하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①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이요 ② 성도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의의 공로로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셨고, ③ 하나님과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1)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재창조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재창조의 의미는 “허물과 죄로 죽어 없어진 영”을 중생의 은혜로 다시 창조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따라서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 생명이 없었고,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도 없이 죄악과 영멸의 상태에서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는데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는 영적 생명을 받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모셨으며 죄와 진노에서 건짐을 받았고, 하나님 품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 정도가 아닌 새롭게 창조받은 것임을 아셔서 천국 백성의 긍지를 크게 가지시고 정말로 새로워진 피로물처럼 새로운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런 변화의 은총을 주셨는가?할 때 이 계획이

1)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2)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나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을 삼으셨으며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3)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안에서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과 죄사함과 의를 힘입은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푸신 목적이 무엇일까?할 때 이는 하나님이 성도와 화목하시기 위함이요, 또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화목하는 직책과 화목하는 말씀을 성도에게 주셔서 부탁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1)화목이란 서로 좋지 못한 사이가 좋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타락 시초부터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 사업을 이루시고 그 공로를 믿는 성도에게 진노를 푸셔서 화목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죄를 짓고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그 화목 상태가 또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회개와 순종으로 화목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2)“세상과 화목케 하려 하신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불화한 상황에 있지만 성도가 그들에게 전도하여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세상과의 화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화목하는 직책과 말씀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 세상의 화목을 위하여서도 노력할 사명이 있고, 이것을 성취하게 하신 말씀이 바로 복음의 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도 사도들처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의 복음을 전파하는 역군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20절)

4. 이 말씀에서 두 가지 화목을 더 첨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세상과의 화목에 관련이 있는 화목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1)자신의 화목, 즉 마음의 평안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내 속에서 싸우면 마음이 평안치 않기 때문에 자신의 화목이 깨집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불안하고 신앙생활에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고(롬 7:9) 거듭난 새사람은 예수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의 욕심과 생활 습관을 확실하게 떠나서 주님 뜻 안에서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바울사도도 옛사람, 새사람의 싸움이 자기 속에 있으므로 곤고를 느낀다고 하셨습니다.(롬 7:22-24) 그러니까 저희들의 마음과 생활에서도 옛사람에 속한 것을 성령의 힘으로 누르고 죽여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여야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추석인가? 주일인가?할 때 주일로만 생각하고 행하면 갈등이 없겠지요. “이북의 라디오는 남한 방송을 못 듣도록 조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희들도 옛사람의 것은 나타나지 않도록 강하게 죽이는 은혜를 받고 주 안에서 새사람의 생활만 할 때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더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2)사람과의 화목입니다. 요일 4:20에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셨으니 분명히 하나님 사랑은 사람 사랑의 절차를 밟아서 성취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하신 기도의 내용이 있지요. 거기에 보시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내 죄의 용서가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조건으로 성취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하거나 “하나님과 화목했다”고 하는 성도는 먼저 이웃과도 화목되어 있는 상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전 7:15에 보시면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거듭나고 새사람되어 새생활을 시작할 당시에 하나님과 모든 이웃간의 환경에서 자유하는 상태로 시작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가 믿기를 시작할 때는 이웃과 갈등의 상태에서 시작하면 안되고, 깨끗이 정리된 상태에서 새출발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입장인 것입니다.(마 9:50, 살전 5:12)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갖고 나가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먼저 사화하라”는 말씀(마 5:24)이나 “불화의 상태를 결코 오래 끌지 말고 급히 사화하라”(마 5:25)는 말씀도 역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교포가 빚지고 죽은 아버지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 신문 광고까지 내고 채권자를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 5:26)

3)이웃과의 화목을 성취하려면 ①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과 나와는 서로 같지 않은 성격, 취미, 지식, 환경, 목표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② 항상 자기 표준을 떠나서 양보나 평균 표준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③ 말과 행동에 주의하면서 고의성 없이 나타나는 실수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④ 결코 선입견으로 넘겨짚는 마음으로 의심하지 마시고 상대방을 믿어주고 ⑤ 결코 미워하거나 “어디 좀 보자”하는 식의 마음을 추호라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 화목하고 모든 이웃과도 화목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 8 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8)목록으로


이 본문은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10절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요, 11-13절은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이며 14-18절은 “성도의 구별된 생활”입니다. 이 중의 첫 번째 대지로 총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1-10절)

1)1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은사와 책임을 주셨고, 또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구원사역에 임하고 있은즉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구원사역의 주역은 주님이 하십니다. 사역자들은 주님의 일을 할지라도 보조역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고전 15:10)

2)사역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로써 성령님의 지도에 힘입어 성도들을 권면하였으니 곧 “너희를 권하노니”하신 말씀입니다. 권면하신 내용은 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성도들은 이미 받은 은혜도 많고, 또 더 받을 은혜도 있는데 이것을 “헛되히 받지 말라”는 뜻은 쉽게 말하면 “은혜의 값을 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값을 할 수 있을까요? 은혜의 정도에 따라 보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혜의 보답은 먼저 은혜의 성격과 분량을 아는 것이고, 다음에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 은혜를 주신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는 은혜는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마 25:29) ② “지금이 은혜받을 때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2절의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하신 말씀은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가 은혜를 더 받을 만한 때이고, 또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란 말씀은 구약시대에 비할 때 신약시대가 은혜를 더 많이 주시는 때이므로 은혜받는 노력을 많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에게도 때를 정하고 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전 3:1, 단 9: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49:8)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입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었고, 또 메시야 시대에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메시야의 구원사역을 도우신 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가 구약 시대에 비하여 더욱 은혜받을 만한 때인 것은 계시(성경)의 분량으로 보나 구원사역의 성취(십자가와 부활)로 보나 또 성령님의 상주 사역과 이방에까지 복음 전파의 문이 열린 것으로 볼 때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설교문 참조)

3)3-10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바울과 그 일행)들이 맡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모범입니다. ① 직책의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어떤 대상에게나 거리끼는 일을 하면 직책의 훼방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는 무슨 잘못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느냐?”하는 식으로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역자는 모든 일에 최대한의 순결을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3절) ②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였으니(4절) 여기의 “자천”은 신분 자천이 아니고, 사역 감당하는 일에 솔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모든 일, 특히 어려운 일에도 솔선 봉사, 헌신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그리고 많은 고난을 견딘 것입니다. 즉 환난, 궁핍, 곤난과(4절)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폭력, 폭언 등의 훼방)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등입니다.(5절) 이것은 복음 사역을 위한 여러 가지 고난을 잘 감수하고 견딘 것입니다. ④ 6절에서 그런 중에서도 사역자들은 “깨끗함과 지식과 인내와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을 간직하셨다” 하셨고, ⑤ 7절에서 또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 병기로 좌우하였다” 하셨으니 이것은 복음 사역의 무기를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과 의의 담대함을 내세워 마귀와 대항한 것을 의미합니다. ⑥ 8-10절에서 사명자의 승리를 위하여 고난을 개의치 않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믿음과 사명을 위하여 고난과 욕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마땅히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을 당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며 악한 이름으로 비난을 받으나 역시 아름다운 명예를 인정받는 일이고, 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십자가와 부활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속이는 것 같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며 죽는 자 같으나 영생을 살고 있는 자요, 징계를 받는 자처럼 고난에 방치되었으나 실상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영생할 자이며 남 보기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속으로는 항상 기뻐하고 물질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케 하며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하나님을 모셨으니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은 여기의 “말미암음”이란 원문 “디아”(διά)가 “원인을 주다” 또는 “무엇 때문에”란 뜻입니다. 따라서 영광 때문에 욕을 당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 위하여 악한 이름으로 비난 받는 것을 감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고, 또 초라하고 없는 것 같고 약해 보이며 불쌍해 보여도 실상은 속으로 강하고 부요하며 영광 가운데 거하는 것이 참된 사역자들의 생활임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사실 그러함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참된 사역자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주시고 모든 것을 알아주시니(계 2:2-3) 큰 보람과 감사와 소망을 갖는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그 당사자만 아는 비밀일 것입니다.

2. 마음을 넓힘에 대하여(11-13절)

1)11절에서 복음 사역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축복하며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입이 열려 있고(준비됨의 뜻) 또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할 마음이 준비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넓지 못하면 갈등하는 상대를 포용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인즉 모든 성도들도 우선 전도의 입, 기도, 찬송, 감사의 입이 열리고(은사에 의함) 마음도 넓혀야 할 것입니다.

2)12절에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는 뜻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바울에 대하여 의심하는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일행(우리) 때문에 좁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의 오해감 때문에 좁은 마음을 넓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성도는 마음을 크게 넓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13절에서 “바울은 자녀에게 말하듯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그럽게 사랑으로 대한다”는 뜻이요, 거기에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하신 것은 바울이 자녀를 대하는 부모처럼 성도를 대할 것이니 성도들도 부모의 말씀을 듣는 자녀처럼 마음을 넓히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교인 측의 오해와 대립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성도의 구별된 생활에 대하여(14-18절)

1)14절에서 성도로 하여금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한다”는 뜻은 불신자들에게 이끌리거나 합세하여 신앙 생활에 거리끼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에 거리끼지 않는 일반적 생활을 함께 할 것이 많으나 함께 하면서 거리끼는 일도 많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종류와 정도를 잘 분별하여 유익하고 덕되게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의나 불법을 혼돈할 수 없고 또 빛과 어두움도 혼돈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14절)

2)15절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마귀의 이름임)이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상관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뜻이 서로 상관할 수 없은즉 마귀의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를 잘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16절)

3)16절에서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고전 6:19에서 설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개인 중심에도 계시고 저희(단체) 가운데도 계시면서 두루 행하신다” 하셨고, 또 “저희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 26:12과 출 29:45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저희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또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뜻입니다.

4)17-18절 말씀은 사 52:11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마귀에게 예속된 자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신앙 생활에 어긋나는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부정한 것”은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을 염두에 두신 듯 합니다. 그것들을 “만지지도 말라”하신 것은 가까이 접근하는 일도 멀리 하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는 큰 베드로 동상이 있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축복을 받는다는 낭설 때문에 베드로 동상의 엄지발가락에 손을 대거나 입을 맞추는데 그것이 우상숭배적이라면 구테여 가까이 가거나 만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살전 5:22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그런 성도를 영접하여(17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성도는 그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14) 이 말씀은 “순결한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라”하신 것은 말씀의 신적 권위를 또 한 번 강조하신 것으로 창 17:1과 겔 10:5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6. 은혜받는 기회 (고후 6: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혜받는 기회”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히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복으로 거저 주시는 모든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신 은혜는 구속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고후 5:20-21에서 “성도가 십자가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헛되히 받지 말아야 할 근거도 십자가의 은혜가 크고, 중하며 또 성도가 죄사함받고 하나님과 화목되어 영생하게 되는 은혜가 크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하고 거기에 준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2절에서 “은혜 베푸실 때”가 있고, “구원의 날”이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 때와 시기를 잘 선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고, 또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전 3:1, 행 1:7, 히 4:16) 따라서 성도들은 때와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그렇다면 “지금이 은혜 받을 때”란 무슨 뜻일까요? 여기의 “지금”은 구약 시대에 비할 때 신약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에 비할 때 구약의 모형적 계시가 십자가로 성취되었고,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셨으며 오순절 이후 성령님이 계속 상주하시고, 말씀 계시가 완성되었고, 또 구원 대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므로 큰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2)여기에서 저희들은 “지금”이란 용어를 신약 시대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현재 순간이란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을 모르는 만큼 현재만 자기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청년의 때를 놓치지 말라” 하셨고,(전 12:1) “조지 뮬러”는 70세에 순회 전도를 시작하여 17년을 더 일하였으며 그 사이에 여덟 번이나 세계를 일주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병이 있어서 군대도 못 갔지만 보는 이들이 다 “일찍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재를 선용하는 바람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크래머”란 사람은 60세에 진리를 깨닫고 늙어서 믿은 후 진리를 위하여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젊은이나 노인이나 아무 차별없이 현재가 기회라는 것을 꼭 아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 것입니까? 무슨 징조가 있을 수 있습니까?

1)고난이 있거나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은혜의 필요를 느낄 때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은혜가 있었으면”하고 느낄 때입니다. 그 때는 꼭 기도를 힘쓰십시오. 빌 2: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에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갖게 하시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고 주린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107:9, 애 3:25) 이 경우에도 말씀과 기도로 사모할 수 있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접근해 올 때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나 고넬료 가족이나 루디아의 집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지요. 성경 말씀이 곧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도가 예배당 강단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은 그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이 은혜로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는 강단을 바라 볼 필요가 없겠지요.

4)회개하는 마음을 주실 때입니다. 시 34:18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살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의 심정 갖는 것이 곧 은혜받는 기회입니다.

5)자기 앞에 헌신적 일감이 생길 때 하나님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으로 맡기시는 기회”인 줄로 아시고 순종, 봉사하는 것입니다.(눅 16:10) 하나님은 성도를 쓰시려 할 때 은혜를 주시고 쓰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출 7:1) 베드로도 그러하였지요.(행 3:6)

6)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속히 은혜주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호 6:1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신다” 하셨고, 또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며....이틀 후에 살리고 3일 후에 일으키신다”하신 것은 징계로 치셧으니까 속히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7)자신을 비울 때인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 뜻입니다. 자기 부정, 자기의 생명, 자기의 육체, 자기의 삶, 자기의 계획과 취미까지 전부 하나님께 드리고, 자기라는 텅 빈 집을 만들었을 때 주님이 그 빈 집에 찾아오셔서 주인 역할을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속에 자기와 다른 것들(세속적)이 가득 차 있으면 은혜의 길이 멀어지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약 4:4)

4. 은혜 받으려는 자세가 어떠하여야 합니까?

1)뱃사공이 바람 불 때 돛을 달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시종 겸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5)

2)순종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명적 은혜가 임하였을 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셨고, 히 3:7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거역하다가 풍파를 만났으며 모세와 베드로, 바울도 주님이 사명을 주실 때 순종하여 큰 일을 하였습니다.

3)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고 하나님은 자기를 향하여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믿음으로 구하는 일과(약 1:16) 읽는 것과 전하는 일에 착념하는 것과(딤전 4:13) 충성하는 자세를 늦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상당한 준비와 노력이 있을 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개인이 은혜를 받는 것도 그렇고 교회가 은혜를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가 되면 저절로 힘이 주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은혜주실 때가 되면 부흥이 될 수 있습니다. 증경 총회장이신 선배 최기채 목사님이 그의 시무하시는 동명교회가 부흥될 때 자신은 그만한 기대를 못하였는데 감당 못할 정도로 교인이 들어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본문 2절 말씀처럼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도왔다”하신 말씀의 증거입니다. 이런 증거가 있을 때 노력을 멈추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은혜를 받는 기회에 대한 것과 은혜받을 자의 자세에 대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7. 은혜를 받자 (고후 6:1-3) 목록으로


1. 성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받은 은혜도 많지만 부족한 것도 많기 때문에 은혜를 더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은혜를 받으라” 하셨지만 히 4:16과 12:15에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혜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복입니다.(요 1:14) 이 복에는 신령한 복도 있고, 일반적인 복도 있으며 또 받은 복, 누리는 복, 받을 복이 있으니 잘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1)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이고, 영원히 누리는 복입니다. 믿음, 독생자, 성령님, 성경, 속죄, 양자, 부활, 천국, 상급, 성령 충만, 교회로부터 받는 신령한 은혜 등인데 여기에서 이미 받은 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성령, 말씀, 속죄, 양자, 또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등이고, 더 받아야 할 은혜는 성령 충만과 성화됨과 충성된 생활 등이라 할 것입니다.

2)일반적인 복은 만물을 주신 은혜, 물질 공급, 건강, 사회적 축복 및 현실 생활에 수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현재까지 살아온 것이 다 일반적 은총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더 받아야 할 것은 이웃까지 함께 누리는 풍족한 생활과 성도 인격의 도덕적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중에 예수님을 많이 닮고 예수님의 향기를 많이 발하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도 인간 냄새와 현실성이 강하면 은혜를 더 받아야 할 자라고 판단하여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3)또 본문에서는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말라”하셨으니까 마땅히 은혜를 받고 또 은혜받은 값을 헛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무슨 은혜를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성도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1)우선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과의 관계로 믿는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말씀에 사로 잡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은혜 생활이라고 아셔야 합니다.(행 17:11)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외출 중에 있을 때도 “빨리 집에 가서 성경을 상고해야지”하는 마음 때문에 조급하고 또 뉴스 시간에 뉴스를 들을 계획을 가졌으나 말씀 상고에 몰두하다 보면 두 번, 세 번 씩 뉴스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장 취미롭게 여기는 상태요, 말씀을 꿀처럼 사모하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119:97,103)

2)하나님을 항상 의식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갖는 은혜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갖는 것이 곧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살전 5:17) 기도에 끌리고 기도에 간절함을 나타내는 심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단 9:3,23) 말씀과 기도는 은혜받는 방법의 기본 요소입니다.

3)도덕적 결함을 보충하는 은혜입니다. 조급한 성격, 말의 실수, 욕심, 교만, 명예욕, 현세욕, 자기 고집 등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인간 정욕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없애고 예수님의 인격을 가까이 닮는 것이 도덕성 회복입니다.

4)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봉사성을 키우는 은혜입니다. 봉사성이 많은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아쉽게도 부족하거나 봉사하는 방법을 모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 여집사는 구역 예배 때 교인을 수송할 목적으로 차를 산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충실하지 않은 선물을 골라서 교역자를 섬기는 이도 있습니다. 따라서 알맞는 봉사를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성도 간의 친교와 화해를 잘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의 세계는 자유로운 친교와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 5:18에 보시면 성도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세계가 혼인 잔칫집 같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을 만큼(시 133:1) 이루어져야 하는데 여기에는 친교와 화목을 잘 이루는 은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악한 것이 없어도 말을 너무 안 하거나 친교를 잘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잘 동화되는 것도 은혜에 속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시간에는 “은혜를 받자”는 제목 아래 은혜의 성격과 받아야 할 은혜 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은혜, 도덕적 결함을 보충하는 은혜,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봉사력을 키우는 은혜, 또 성도와의 친교, 화해를 이루는 은혜받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은혜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이 방법은 성경의 사례도 많습니다. 행 8:1-40, 9:1-18) 필자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1)우선 은혜받을 필요를 느끼고 방법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필자는 청년 시절에 믿음 생활을 좀 더 뜨겁게 할 필요를 느끼고 기도하는 전도사님께 은혜받는 방법을 물었더니 “새벽기도 출석과 성경 읽는 일에 힘쓰라”하여 그 일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 것을 잘 시행할 것을 서원하듯 기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다른 성도보다 먼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제일 늦게 나온 후 또 집에 오면 성경 읽기에 몰두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밥상이 들어오면 늘 읽던 성경을 끝가지 읽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2)약 2개월 후에 찬송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슬픈 마음이 생기고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상태가 약 1개월 계속 되었고, 죄에 대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고 무슨 일이나 적은 실수만 생겨도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였습니다.

3)그 후부터 하나님의 인도가 따르는 것을 체험하였고, 그 인도에 따라 군 생활과 신학 공부를 하고 교회의 일도 맡았으며 목사가 되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라면 30여년 목사 생활을 겨우 하면서 그 동안의 경험과 신앙 양식에 대한 메시지를 요약하는 일인데 필자는 이것이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큰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주신다”하신 말씀이나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7:3, 11:12)하신 말씀이 다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노력 없이는 은혜의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각자 형편에 알맞는대로 노력하여 더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18.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목록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받은 은혜가 많았으면서도 교회에 문제들을 많이 일으키므로 은혜가 헛되어진 것을 지적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전 12장에 보시면 많은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이 있고, 일반 은총에 대하여도 풍족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역시 문제가 많아서 복음사역자들을 퍽 괴롭게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먼저 받은 은혜와 못 받은 은혜를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먼저 일반 은총과 신령한 은혜에 대하여 받은 것을 아시고, 꼭 받아야 할 은혜가 무엇인지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은사가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헛되듯이 무엇이 없으면 은혜가 헛된 것인지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여도 예수 닮은 것이 부족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우리 교회 나이가 지난 주일이 26세 되는 날이었습니다.) 26세 된 사람이 철이 안 들었다면 그가 교육 받은 효력이 헛것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오래 된 교회에 예수님 닮은 사람이 많지 않다면 그 동안 받은 은혜에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 닮은 성도가 많아지는데는 바로 “나 개인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롬 8:29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것은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고, 갈 4:19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만족과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즉 부족함이 없다”(시 23:1)는 확신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수넴 여인은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므로 장관에게 구할 것이 없다”하였고,(왕하 4:13) 바울사도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롬 5:3-4) 또 요 8:32에서는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은혜가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과 비천의 염려에서 해방되고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며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 비천, 고통, 죽음을 다 당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해방시키고, 부활은 죽음에서 해방시키며 상급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해방시키고, 윗사람을 섬기고 복종해야 하는 속박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종의 형상이 해방시켜 주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상전의 유세가 아니꼬와서 회사에 취직을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엡 6:5에 보시면 “육체의 상전을 그리스도 받들 듯 하라”하셨고, 딛 2:9에서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하는 찬송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닙니까?

3. 사랑의 실천입니다. “은혜를 받았다”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 실천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최고의 은사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죽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심취되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지 않으면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실천에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금방 형제를 위하여 내 목숨 버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랑을 실천하시려면 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셔야 하고 ②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죽이는 연습을 하셔야 하며 ③ 다른 사람을 간섭하기 전에 먼저 내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고 ④ 남에게 손해 안 주는 일부터 하고 ⑤ 남에게 조금씩 덕을 베푸는 일을 하다가 ⑥ 나중에 진정한 사랑의 궤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의 형상을 닮고 만족을 느끼며 자유를 누리시고 사랑 실천자가 되어서 큰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9. 교회가 생산할 것 (고후 6:1-10) 목록으로


본문 1절에 보시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사업체에서 동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체는 교회이고, 따라서 교회를 기업체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를 기업체로 생각한 것은 결코 세속의 의미를 나타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의 선민(교회)을 기업이라고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다”(신 4:20), “나의 산업, 나의 기업, 나의 낙토, 포도원이라”라고 하셨습니다.(삼하 20:19, 시 79:1, 94:5, 렘 12:7,8,10) 기업체는 어떤 종류이든지 제품을 생산하여 돈을 버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기업체인 교회도 좋은 제품을 생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중요한 제품이 말씀 생산입니다. 성경을 더 기록한다는 뜻이 아니고, 주신 성경을 풀어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말씀 생산은 곧 원료 생산입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믿을 근거이며 구원의 지혜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시고, 나가서는 실천의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히 4:12) 교회가 말씀을 생산하는 기업체라면 우리 교회야말로 말씀 생산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저는 한 주간에 약 20편의 설교, 강해문을 씁니다. 성경을 잘 풀어 설명하고 공급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가르치는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생산하는 기업체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생산하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항상 기도하라” 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개인과 단체가 기도를 많이 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 121:7에 보시면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면해 주실까요? 우선 성경에서 계 12:14-17을 보시면 “사탄을 상징하는 용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를 핍박하는데 용이 여자를 죽이기 위하여 입으로 물을 토하여 강을 만들면 틀림없이 그 여자가 그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라하여 많은 물을 토해냈는데 땅이 입을 벌려 그 물을 먹어주므로 강물이 창일해지지 않아서 헛탕을 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성도를 사망의 위기에서 보호해 주시는 섭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삼상 23:28에 보시면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군사로 다윗을 수색하게 하였고 다윗에게 접근하는 중인데 별안간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와서 다윗 쫓기를 그치니 비로소 다윗이 도망할 기회를 얻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보호의 섭리는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구 신천교회 박무순 권사가 마산에 사는 며느리의 해산관을 해 주고 세 살짜리 손자를 데리고 대구로 오게 되었습니다. 삼랑진에서 대구로 오는 특급 기차를 타고 오는데 별안간 손자가 보채면서 우니까 그 아이를 업고 차 안에서 산책을 나왔습니다. 7호차 중간 좌석에서 6호차로 온 것입니다. 6호차로 오자 청도역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고, 좌석이 비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잠시 앉았는데 그 차가 경산 대구 사이에서 큰 충돌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에 죽지 않고 나와서 자기가 앉았던 7호차를 본즉 완전히 대파되어 많은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기도 생산이 없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성도를 보호하시는 은혜가 특별한 것을 꼭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교회 기업체는 사랑을 생산하여야 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의 값이 제일 클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성도의 주인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의 피로 값을 주시고 교회를 사셨다”(행 20:28) 하셨고, 또 성도들도 자기의 희생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사랑 생산에 소극적일 뿐 아니라 너무 이기주의가 심한 것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부흥되는 것을 싫어하면서 자기 교회의 부흥만 욕심내는 성도와 교역자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모든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특히 교회의 이기주의를 떠나는 일에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교회가 되고 말씀 전파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많이 생산하는 산업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0.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마음을 넓히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사도와 그 동료자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입이 열려져 있고 마음도 넓혀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① “입이 열려져 있다”는 뜻은 “무엇이나 가리울 것 없이 말하고 의논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고, ② “마음이 넓혀 있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아량있게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느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사도를 불신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안에 파쟁이 일어난 중에 거짓 선지자들(유대주의자들)이 바울사도를 비난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입이 열려 있고, 또 포용할 수 있는 마음도 열려 있으니 성도들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같이 “마음을 넓히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12절에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령에서 좁아진 것이라”는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 닫힘이 (넓지 못한 마음을 가진 원인이) 바울사도 측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심령(마음)에서 좁게 가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누구를 대하든지 열린 입과 넓은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1. 복음 사역자들이 “열린 입”을 가졌다는 점에 대하여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신령한 입도 가졌다”는 뜻입니다. 롬 10:15에서는 “전도하는 자의 발도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입이야 더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롬 11:16 제사하는 첫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그 떡도 거룩함) 여러분들에게도 이 신령한 입이 열려져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성령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 6:6을 보시면 “이사야의 입을 성령의 숯불로 지져주셨다” 하셨고, 사 50:4에서는 “하나님이 학자의 혀를 주셔야만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줄 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찬송의 입, 기도의 입, 감사의 입, 전도의 입, 안위의 말을 전하는 입이 활짝 열려지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열리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도 몇 가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① “학자와 같은 지식을 소유함이 좋다”고 사 50:4에서 말씀하셨고, ② “항상 말할 것을 준비하라”고 벧전 3:15에서 말씀하셨으며 ③ 참된 말만 하되(엡 4:2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하셨고, ④ 함부로 입을 열거나(전 5:2) 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고 듣기는 속히 할지라도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고 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신령하고 덕스러운 입이 크게 열려져야 하겠습니다.

2.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넓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연구해보나 마나 “사랑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성격”을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사랑의 마음은 욕심, 투기, 자랑이 없고, 교만, 무례, 성냄이 없으며 악함이 없고 불의를 기뻐함도 없으니 참으로 순결한 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또 무엇이 있느냐?하면 인내, 온유가 있고, 믿어주는 것이 있으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욕심은 없으니까 자동적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는 덕스러운 일만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사랑의 최고봉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최고로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넓은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2)성도가 이 마음을 가지면 사랑의 표현만 나타낼 것입니다. 사랑의 색깔은 빨갛다고 비유할 때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다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없는 마음의 색깔을 검은 색으로 비유할 때 검은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검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매사가 감사하고 희망의 마음을 가지면 매사를 희망있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 부대의 구호가 “되게 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것도 성취시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다면 거의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노력이나 투자나 모험을 할 체를 하지 않고 안일한 입장에서 “안된다. 못한다”하면서 부정적 마음을 갖는다면 매사가 다 어렵게만 여겨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사랑의 넓은 마음을 가지면 우리 앞에 많은 부조리가 나타나도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여겨주게 되고 참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게 되며 희망을 가져주는 마음으로 믿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혔을 때 사랑의 넓은 마음을 가진 성도가 그것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할 때 ①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저 사람의 탓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징계하심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삼하 16:10에 근거한 것입니다. ② 상대방이 나를 해롭게 하고 내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범죄하는 사람을 증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죄인을 미워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미워하는 악”을 범하는 죄인이 되기 때문에 피해는 당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는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고 요 5:22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③ 악한 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상태로 생각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도적질을 했을까? 어쩌다 순간적으로 실수했겠지. 급하게 말을 하다가 실수했겠지. 고의적으로 그래 본 것이겠지. 전달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겠지. 나도 자주 넘어지는데”하는 식으로 자기의 연약을 생각하면서 이해를 하면 마음에 안정이 오고 분한 생각이 많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④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방을 믿어주고 바라주는 것입니다.(소망) 저는 제 자식이 “잘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 인생 경험이 적으니까 저렇지 철들면 좀 나아지겠지 저래도 나중에야 잘 되겠지 내가 교육을 소홀히 해서 그렇지 하고 믿어주고 바라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 모든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그같이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⑤ 사랑의 마음은 포용의 마음입니다. 마치 바닷물이 강물을 삼켜도 표를 내지 않는 것 같고 큰 배가 풍랑에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넓은 마음은 그만큼 포용성이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⑥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내면 대인 관계는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19 자녀를 키운 어머니로 한 번도 혈기 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기 자녀 하나가 무엇을 알기 위하여 20번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 어머니는 꼭 같은 질문에 꼭 같은 대답을 20번을 했다는 것입니다. 곁에서 보던 자가 너무 지루해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하니까 “중간에 대답을 피하면 그 전에 대답한 것이 헛되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은 예수님과 바울사도의 심정을 본받아서 ① 신령한 입이 열리고 ② 사랑의 마음이 넓어지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이고, 포용하는 마음이며 참는 마음이고, 희망을 갖게 하고 믿어주는 마음입니다.

 

설교보충 21. 성별된 생활 (고후 6:14-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별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란 본래 “구별됨을 받은 자”란 뜻으로 죄와 마귀와 세속에 거한 죄 많은 인생을 하나님이 선택 구별하심으로 특수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상태에서 특수해졌다는 내용은 ①마귀의 노예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고, ② 불결이 성결로 바뀌였으며 ③ 유한한 세속에서 신령하고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만큼 구별된 생활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지금 읽은 본문 말씀은 성도가 “특별히 구별된 생활”을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졸업을 하는 가족들은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배우는 목적”이 “성도의 구별된 생활을 하게 하는데 있음”을 꼭 깨달으셔서 더욱 성별된 생활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물론하고 불신앙의 사람들 사이에서 신자의 생활이 샛별같이 두드러지게 빛날 수 있어야 되고, 또 특수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14절을 보시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믿지 않는 자의 형편과 믿는 자의 형편을 대조적으로 설명하셨는데 믿는 자의 형편은 신앙이요, 의와 빛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불신자의 형편은 불신앙이요, 불법과 어두움이며 벨리알이요, 우상의 전당이니 이 두 가지 상황은 완전히 서로 일치할 수가 없는 것인 만큼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멍에를 같이 하지도 말고 함께 하거나 사귀거나 조화, 상관시키지도 말며 만일 이들을 상관하다가 혼돈과 범죄의 위험이 올 때는 차라리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들을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믿는 성도가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불신앙의 세계와 조화, 상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질상으로 악에 동화되지 말며 또 건덕에 손해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를 가르쳐서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빛은 어둠을 상대하는 것이고, 빛이 어둠을 상대하여 어두움을 물리칠지언정 어둠에 먹히는 일이 없고, 또 소금이 마땅히 부패성있는 물질을 상대로 하되 소금의 짠 성분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나 성도의 본질을 잃지 말고, 건덕에까지 손해됨이 없도록 처신할 것을 교훈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이 말씀을 악을 떠난 은둔 생활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 죄악 세상에 오신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성도는 악으로 뛰어들어가서 의의 역군으로 싸우는 군병이요, 악에 대한 도피자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미디안에서 연단을 받고 고난 당하는 백성들의 세계로 들어간 것과 배드로가 변화산에서 즐거운 광경을 맛본 후에 (그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된 것처럼 성도는 언제나 악의 세계에서 의의 사자로 일해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배가 물을 접촉하나 그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지 않고 물과 기름이 함께 있을 수는 있으나 그 성분상으로 혼동되지 않는 것 같으며 또 닭과 오리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 수는 있으나 닭이 오리를 닮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죄악 세상에 오셔서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신 것처럼 죄악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가 불의한 세계에 동참했다가 빛과 소금처럼 영광스런 사명을 잘 하면 좋지만 만일에라도 성질상으로 악에 동화하게 될 때는 차라리 나와서 따로 있고, 그 세계에 가까이 접촉하지 않음이 더욱 현명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어떤 면에 특별한 구별이 있어야 할까요?할 때 대략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신앙성에 대하여 성도다운 바른 신앙의 입장을 확고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조건 불신앙적인 것은 다 배격하여야 되는데 문제는 같은 성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지라도 그 해석과 교훈에 따라 정통 신학도 나오고 불건전한 신학도 나오며 이단도 나오고 교파도 나오는 것이니 만큼 성도는 여기에 대한 바른 신앙의 확신을 가져서 어떤 경우에서라도 내가 가진 바른 신앙이 불신앙과 불건전한 신앙에서 뚜렷이 구별되도록 신앙성의 성별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이요

2)행위성에 대하여서도 성도다운 바른 입장을 확고히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의와 불법이 또 빛과 어둠이 사귀지 못한다”하셨으니까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나 의와 정도에 확고하게 서는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그 행동표준이 자기 자율에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명예나 현세적 실리 타산에 따라 무조건 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행동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라도 진리대로만 하고 신앙적으로만 한다는 뚜렷한 원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많은 사람이 불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죄되는 것이면 못한다”하고 혼자라도 행위의 정당성으로 구별된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교제성에 대한 성도다운 바른 입장을 확고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은 인격자와 마귀를 닮은 사람 사이에 분별있는 교제를 가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은 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과 마귀를 닮으려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선적 교제가 필요한 것이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은 교제의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여러 사람들을 교제할 때 전도를 위한 교제라든지 또는 공동체적 책임을 위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교제하다보면 혼돈의 위험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속히 교제를 멀리함이 좋은 것입니다. 만일 교제를 위한 교제를 장시간했다고 하면 그만큼 성도에게는 영적 손실이 오기 때문이고, 또 도덕적 손실도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이방 혼인을 금한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친교를 혼인할 만큼 가까이 했다고 할 때에 따라오는 영적 손실이 큰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딛 3:9, 요2 10)

4)장소성에 대한 구별도 확실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될 수 없다”하셨는데 성전만큼 거룩한 곳이 없고, 우상의 제단 만큼 역겨운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나 행사의 모임에 가서 유익할 것이 있고, 무익할 것이 있으며 때로는 부덕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의 제단 앞에 제사 행위자들과 함께 동참했다”하면 무익한 일이요, 큰 문제로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옳은 장소 옳은 모임에만 참석하도록 장소성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신앙성, 행위성, 교제성, 장소성에 각별한 구별이 있도록 힘쓰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9 과 사역자의 시련과 위로 (고후 7:1-7)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1절을 제외한 2-7절 말씀은 “사역자의 시련과 위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1절은 “육과 영의 거룩을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1. “육과 영의 거룩을 힘쓰라”하심.(1절)

1)1절의 “이 약속”이란 6:18의 “하나님이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보다도 더 각별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5:17), 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자”(5:10)이므로 더욱 거룩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을 섬기며 떨면서 즐거워하라”(시 2:11)고 하셨습니다. 또 “거룩을 온전히 이루라”하심은 “철저하게 순결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질이나 명예나 이성을 상대로 태도를 취한다면 마음의 탐심조차도 갖지 않도록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의 완성은 인간의 힘으로 다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깨끗게 하시고(요 13:10, 행 10:15)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하시며(딤전 4:5) 사탄의 유혹의 영역(현세)을 떠날 때 완성됩니다.(눅 4:5-6, 23:43)

3)“육과 영의 거룩을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육은 몸이고, 영은 정신이므로 인격 전체를 의미합니다. 육이 더러울 수 있을까요? 육은 정신적 지배에 의하여 범죄의 도구가 될 뿐이지요. 필자가 군생활을 할 때 어떤 이발사가 가위로 자기의 아내를 상해하여 살해한 일이 있어서 그 가위를 증거물로 군 수사계에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필자는 그 가위를 퍽 흉하고 무서운 기구로 느꼈습니다. 사람이 뱀을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고 할 때 그 막대기가 깨끗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육체도 범죄 도구가 되면 깨끗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과 영이 다 깨끗하여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욕한 자가 자주 발을 씻으면 깨끗한 것처럼 회개하고 범죄를 삼간다면 역시 깨끗해질 것입니다.

2. 사역자의 시련과 위로에 대하여(2-7절)

복음 사역자의 시련은 세 가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핍박을 받을 때요, 두 번째는 전체 성도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또는 환영을 받지 못할 때며 셋째는 열매가 속히 나타나지 않을 때입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사도가 자신이 신뢰받는 문제를 피력하신 것을 보면 다소간의 오해와 환영받지 못한 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을 긍정적으로 소개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우리를 마음으로 영접하라”하셨으니 겉으로만 친절하게 대하는척 하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믿고 마음으로 깊히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았고, 또 해롭게 한 일도 없으며 누구의 것을 속여 뺏은 일도 없은즉 미워하거나 경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이 이 말씀(2절)을 하시는 것은 바울을 부정하고 경계하는 자들을 정죄하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 전에도 말씀한 것처럼(고전 2:4, 3:3, 4:12, 6:11-13)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말씀하셨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서신으로 권면한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요,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씀은 한 가족과 같은 신뢰와 일치를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는 완전한 신뢰와 이해로 친교하여야 합니다. 혹 속으로 의심과 유감을 품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상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의 유대가 강해질 수 없고, 그만큼 은혜를 받는 분량도 약해집니다.

3)4절에서 바울은 성도를 향하여 말을 담대하게 한 것도 많고, 또 성도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았으며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쳤다고 하셨습니다. ①“말을 담대하게 하신 것”은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는 중에서 기탄없이 할 말을 하셨다는 뜻이요, ② “자랑한 것이 많은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셨다는 뜻이며 ③ “환난 가운데서 위로와 기쁨이 넘친 것”은 성도들의 신앙적 입지가 호전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 위로와 기쁨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4)5-7절에서는 바울 사도 일행이 고난에 직면하였던 일과 위로받은 일을 증거한 말씀입니다. 5절에서 바울 사도 일행이 “마게도냐”에 이른 것은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갖고 오는 “디도”를 기다리다가 올 만한 시기에 오지 않으므로 그를 중간에서 만나기 위하여 “마게도냐” 지역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2:12,13) 그 때에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였음”은 사역자들 일행이 핍박자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여 육체적 생활의 안정을 기하지 못하였음이고, 그런 핍박이 “사방으로부터 환난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밖으로 다툼”이란 외적 핍박에 대한 대항이고, “안으로 두려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은혜롭지 못한 상태를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하셨으니 여기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자신들을 스스로 비천한 자들로 여기신 것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로하시는 분으로서 그 위로의 방법은 “디도”로 하여금 좋은 소식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기다리던 자를 만나니 반가운 일이며 두려워하였던 일에 대한 소식이 기쁨의 소식으로 바꾸어지므로 큰 위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위로야 말로 신령한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자에게도 큰 것과 작은 것 등으로 위로를 주셨습니다. 작은 것은 먹을 음식이나 생활 필수품을 주시는 일이었고, 큰 것은 말씀 연구에 이끌려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 강해문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이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이것을 가장 큰 은혜로 믿습니다.(마 6:33) 7절에서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는 “디도가 온 것 뿐 아니라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고린도교회의 좋은 소식)”로 위로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고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와 달라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사모의 대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자신들의 깨닫지 못한 것이나 과오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또 “바울을 위하여 열심있게 도우려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역자는 성도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것 이상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제 10 과 회개의 과정 (고후 7:8-16)목록으로


본문의 8-11절까지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개의 과정”을 말씀하신 것이고, 12-16절의 말씀은 “사역자들이 받는 위로와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1. 회개의 과정.(8-11절)

1)8절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보내실 때 범죄를 지적하신 일과 책망하신 일을 어느 정도 과격하게 하셨음을 인하여(고전 4:19-5:3) 후회하셨으나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나타내게 되어 후회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지도자의 책망이 과하면 그 책망을 받는 자가 일시적으로 괴로움(근심)을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회개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영감의 서신을 보내시고, “후회하셨다”함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 같으나 영감이라도 성령님께서 유기적 영감(성경을 기록하는 자의 생각)을 허용하신 만큼 바울사도가 편지를 보내신 후 자기 생각에 “너무 심하게 쓴 것이 아닌가?”할 정도로 후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9-11절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한 과정과 결과를 듣고 소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①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보내신 뜻은 근심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며 또 사도들로부터 더 이상의 책망이나 권징적 피해를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성도들이 그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회개하기 위하여) 근심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에 이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②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죄를 탄식하며 죄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란 구원을 받게 하는 회개란 뜻이 아니고, 구원을 받는 과정을 통과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회개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또 “세상 근심이 사망을 이룬다”는 뜻은 회개하지 않는 세상 근심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영적 사망은 물론 육체적 사망에도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잠 4:21-23) 따라서 성도는 세상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벧전 5:7)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11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성령님의 인도로 회개하기 위한 근심)은 성도로 하여금 회개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고 또 범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뜻으로 변명도 하게 되며 범죄 행위 그 자체를 분하게 여기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도 가지며 복음 사역자(바울사도)가 속히 오기를 사모하게 되었고, 잘 해 보려는 열심과 자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시인하고 벌받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성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그들 자신이 깨끗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 있으므로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마 6:12, 18:21-35)

2. 사역자들이 받는 위로와 기쁨.(12-16절)

교역자가 느끼는 위로와 기쁨은 성도의 믿음이 평안 중에 성숙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하고 안정된 생활에 들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1)12절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너희에게 쓴 것)의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서신의 내용은 고린도전서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와 관련된 책망의 말씀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고전 4:19-5:3의 말씀과 같은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그런 말씀을 보낸 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편들어 주거나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공의롭게 행하려면 불의를 행한 자를 편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의 불의 당한 자는 바울 자신일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바울 사도의 편지 목적이 싸움하는 성도들(가해자와 피해자)과의 문제 해결에 집중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 사역자들(바울 일행)을 이해하고 환영하여 고린도에 가서 영접받고 기쁘게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도들의 간절한 소망이 속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바울을 이해하고 환영하는 식구들도 있었으나 성도 전체의 환영이 있어야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3절에서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음”은 “디도”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져온 일에 대하여 두 가지 기쁜 소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모든 성도가 바울을 사모할 만큼 이해하고,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디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환영과 대접을 잘 받았음을 인하여 안심하게 된 일입니다. 디도가 무흠한 사역자라도 “바울이 보낸 자”란 입장에서 바울을 배척하는 교인들은 디도를 영접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위의 두 가지 점에서 건설적인 소식을 듣고 위로와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3)그리하여 바울은 14절에서 바울 자신과 디도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삼각 관계에서 자랑한 것이 참된 것으로 입증 받은 결과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디도에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좋은 점을 말하였고, 또 디도를 추천하면서 좋은 사역자라고 전하였으며 또 바울 일행도 신뢰받아 마땅함을 피력하였는데 결과가 좋아지므로 이 세 가지 자랑이 다 참되고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15-16절에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디도”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영접하고, 그를 존경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고 그로 인하여 좋은 결과가 나타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디도를 존경하는 뜻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를 영접하였고, 또 순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디도”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심정이 깊어졌다(각별한 유대 관계) 하였고,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신뢰하게 되므로 범사에 담대함과 기쁨을 갖고 그들을 대하게 되었음을 피력하셨습니다. 교역자가 담대함과 기쁨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존경과 신뢰로 좋은 목회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책임을 다같이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2. 신앙적 생활 (고후 7:1-4) 목록으로


이 시간은 “신앙적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신앙적 생활이란 제목이 나온 이유는 1절에서 “사랑의 유대관계를 갖는 생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생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 거룩함을 이루어 영육간에 성결해지는 생활”을 말씀하셨고, 2절에서는 불의를 행하였거나 누구를 해롭게 하였거나 속여 뺏은 일이 없는 무흠한 사역자들이므로(바울 일행) 영접하라“고 하셨으며 3절에서는 교역자가 성도를 사랑하되 늘 마음에 기억하며 생사를 같이 하려는 각오를 말씀하시므로 뜨거운 사랑의 실상을 말씀하셨고, 4절에서는 사랑하는 성도와의 담대한 언어의 전달과 성도의 신앙적 생활로 말미암아 교역자가 위로와 기쁨을 얻는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심으로써 본문 전체의 내용 속에 신앙적 생활이 가득 담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내용의 취지를 알고 계셔야 할 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모략으로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불신임을 당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결백성을 변호하고, 또 성도 사랑에 대한 뜨거운 심정을 고백하므로 신임과 영접을 받기 위한 말씀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1. 바울사도와 그 일행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얼마큼 뜨겁게 사랑하셨는가?하면 1절에서 그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호칭하셨고, 2절에서는 일체 그들을 해롭게 하지 않으셨으며 3절에서는 그들에게 무슨 과오가 있어도 정죄하려 하시지 않았고, 그들을 항상 마음 속에 기억하시면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생활을 하려 하셨고, 4절에서는 “그들과 사랑하는 관계인고로 무슨 담대한 말이나 자랑꺼리도 기탄없이 말하며 언어에 숨김이 없을 만큼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상대방을 마음에 기억하는 사랑, 정죄하지 않는 사랑, 덕은 줄지언정 해를 주지 않는 사랑,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랑, 무슨 말이나 기탄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베푸셨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나타내시는 후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말씀의 취지는 바울 일행의 의로운 정체를 파악하고, 오해를 풀며 영접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이고,

2. 성도들의 거룩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은사 활동을 많이 하였어도 바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바울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룩을 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온전히 거룩함을 이룬다”는 것이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는 말씀은 같은 뜻인 것입니다. 여기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란 뜻은 자기의 인격이 범하는 모든 죄를 뜻합니다. 또 영적, 육적 범죄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범죄는 신앙적, 정신적으로 짓는 죄를 의미하고, 육적 범죄는 몸의 행동으로 나타내는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성결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1절, 고후 6:18) 하나님의 자녀된 약속을 받은 자들이므로 더욱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생활하는 가운데서 회개하며 성결을 유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생활의 결백성을 호소하신 것입니다. 이 결백성은 바울사도처럼 풍성한 은혜를 받은 분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1)사도적 입장에서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시지 않은 것이요, 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신 일도 없는 것이요, 또 물질이 필요하다 하여 누구를 속이고 뺏은 일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적 생활은 그만큼 결백하셨습니다. 이같은 자신의 결백을 말씀하신 것은 그 상대방 성도들의 결백하지 못함을 정죄하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3절) 다만 바울을 의심하는 자들의 오해를 풀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사랑의 결백성을 말씀하시므로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한 것을 3-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는 앞 대지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롭게 안 하고 정죄 안하며 늘 마음에 기억하고 기탄없이 말하며 생사를 같이 하려는 것이 온전한 사랑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4. 교역자들이 위로와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4절 끝에 보시면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하신 것은 바울사도가 전도의 여정상 괴로움이 많지만 그런 중에서도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오는 좋은 소식, 즉 “바울의 권면을 잘 이해하고 믿음 생활을 바로 한다”는 소식을 들으므로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불신임하고 멀리 하였지만 이는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일부분뿐이었고, 많은 성도가 바울의 교훈을 잘 순종하면서 믿음 위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성도 자신의 복 받을 만한 신앙 생활을 인하여 사역자들에게 안위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받는 위로와 기쁨, 보람이 없으면 목회가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이 때에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복을 받으면 큰 안위를 받고 용기를 북돋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신앙적 생활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① 성도 간의 사랑의 유대 관계 ② 거룩을 이루어가는 문제 ③ 생활의 결백성 ④ 성도의 신앙적 성숙으로 느끼는 사역자들의 만족과 기쁨이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에 가 보면 외아들이나 외딸이 공부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참으로 제 마음이 만족한 것입니다. 자녀 하나 키우는데 공부 잘 해야 될 것 아닌가? 그 때마다 “내 자식은 공부 못해도 교인들의 자녀는 잘 해야지”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굉장히 오래 믿으면서도 참된 신앙이 정착하지 못하는 성도를 볼 때는 꼭 병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 같고, 반대로 어떤 성도는 “그만하면 복 받아야 하는데”하는 만족과 축복의 갈망으로 안타까워지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좋은 소식으로 위로와 기쁨을 얻으셨듯이 저에게도 목회상 기쁨과 만족이 있도록 많이 협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삼형제 분이 교회를 나오다가 두 형제가 도중 하차를 했으나 그 남은 형제도 도중 하차하리라 했는데 “나는 이랬다 저랬다 안 하고 끝까지 한 길로만 갈 것입니다.”했다는 말을 제가 들을 때 만족감과 기대감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보충 23. 후회할 것 없는 생활 (고후 7:8-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후회할 것 없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매사를 자신의 기쁘신 주권대로 통치하시므로 후회하시지 않으십니다. 민 23:19에서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 하셨고, 롬 11:29에서 “하나님이(그 백성을) 부르심에도 후회가 없으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선택한 백성은 싫여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사 41:9) 그런데 삼상 15:11에서 “하나님이 사울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어긋난 것을 후회하신 것이 아니고, 사울의 범죄로 백성들에게 미쳐진 고난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사람은 한 번 실수로 큰 후회꺼리를 만드는 수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이 진단을 잘못하고 약을 잘못 써서 몸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서 목적지를 멀리 돌아가야 하는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경우는 판단을 잘못하여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떨어지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두 세 번 사는 것 같으면 한 번 쯤 연습해 보고 두 번째 인생을 잘 해 볼 수 있지만 인생은 단 한 번 뿐이요, 연습 기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생활도 바로 우리의 실제적인 인생이고 지나간 인생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의 적은 일까지라도 후회없고 실수없이 사는 것이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③ 이 본문 말씀에서는 바울사도가 후회없게 행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감사하시면서 후회할 뻔한 내용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후회할 일이 생길 때 그것이 자기에게만 손해를 주는 일 같으면 자기 손해로 끝나고 자기만 불행해지지만 하나님과 이웃에게 손해를 줄 때는 상당하게 회개하고 배상해야 하는 범죄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더욱 두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후회할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1. 다른 사람을 근심시키는 일은 자신이 후회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근심시키면 그 근심을 시킨 자가 후회해야 할 것이라고 본문 8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지금은 후회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 편지를 보고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별별 문제가 다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음행 문제를 비롯해서 우상 문제, 파당 문제, 은사 문제, 송사 문제 등 불규칙한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런 일들을 해결하는데 해산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도 하셨습니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 때문에 바울이 근심한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은 남을 근심시키는 일이 없습니까? 혹 여러분들이 저 때문에 근심하시지는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근심을 드리는 잘못이 있다면 속히 회개하고 교정할 것이니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남을 근심시키지 않아야 자신도 후회할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이 말씀에서 교훈하셨습니다.

2. 여러 가지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으면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다가 지옥에 갈 것이니 후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고린도전서의 권면을 받고 회개하지 않았으면 크게 후회하실 뻔하였는데 다행히도 그들이 “고린도전서”의 권면을 받고 상당한 기간 근심을 하다가 결국은 그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어져서 회개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지 않고 세상 근심만 하였더라면 소망이 없을 뻔 하였습니다. 세상 근심은 현실적인 생활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망을 가져올 뿐 구원을 이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10절)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므로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후회할 일이 없기 위하여 ① 남을 근심시키는 일과 ② 완악에 머무는 일을 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3. 본문을 떠나서 또 후회할만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1)예수를 바로 잘 믿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님 설교에서 “천국은 감사, 기쁨, 사랑, 소망이 넘치는 곳이고, 지옥은 후회, 원망, 고통이 그치지 않는 곳인데 누구든지 지옥엘 가면 체증 걸린 사람처럼 껄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으면 좋았을 껄, 회개했으면 좋았을 껄, 착한 일 많이 했더라면 좋았을 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바로 믿으시면야 후회하지 않지요. 마 7:21에서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하셨으니 성도가 “믿는 생활을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니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는 사람은 눈을 뜨고 성경을 배우셔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눈을 감고 기도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엡 3:2을 보시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너희가 이것을 읽으면 내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하시므로써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5절에서는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알리신 것으로 끝내셨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은 성경 뿐인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믿고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함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는 후회할 수 밖에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급히 회개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마 5:25에 “급히 사화하라”하셨고, 호 2:13에서는 “범죄한 시일을 따라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을 오래 방치하면 더 커지고 탈영병이 일찍 귀대하지 않을수록 벌이 가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와 기간을 두시고, 통치하십니다. 사울이나 가룟유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이스라엘의 징계 기간을 애굽 400년, 바벨론 70년으로 정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거리끼는 것은 속히 해결해야만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질병을 방치하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세월을 아끼지 않으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엡 5:16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나태하고 시간을 잘 안 지키면 그는 세월을 버리는 사람이고, 그 세월 속에서 축복받을 기회도 버리는 사람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몸이 편찮으시다가 나중에 더해지니까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내 몸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시면서 몸 돌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신 모습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의 가정에 가니까 담배 냄새가 나는데 그 성도는 담배로 자기의 질병을 악화시키면서 병 낫기를 기도하는 성도인 것을 볼 때 퍽 마음이 아팠습니다. 담배가 병을 더하게 할 줄 몰랐어 하시지 말고 몸이 약한 분들이나 건강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전부 담배를 끊으시기 바랍니다. 나태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면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처럼 후회가 뒤따라온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

4)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시면 미구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하셨습니다.(고후 4:18) 또 “세상과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에 소망 두었다가 후회한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청년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중에 좋은 여자를 만나 짝사랑을 하다가 청혼을 하니까 그 여성이 박사 남편, 억대 부자가 아니면 승낙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가 됐는데 억대 부자될 가망이 없던 중 억대 부자인 삼촌의 양자만 되면 목적이 성취되겠는데 삼촌이 양자 입적을 안 시켜줘서 애를 태우다가 병이 났고 결국 집안에서 노력하여 양자 입적이 됐는데 그 소식을 받은지 10분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것이 곧 보이는 소망을 가지려다가 크게 후회하는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셔야만 후회됨이 없을 줄 알아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24. 위로하시는 방법 (고후 7:6-8) 목록으로


고후 1:3-6에 보시면 “하나님은 위로를 잘 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살다보면 위로받을 일이 많습니다. 성도들도 즐겁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역시 위로가 필요합니다. 바울사도의 생활에도 위로가 필요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전도, 드로아 전도(1:8, 2:12)에서도 환난을 당하였고, 고린도에서도 역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행 18:11-17) 그런데 또 “마게도냐”지역에 가셔서도 “육체가 편치 못하셨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하실 정도로 괴로움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바울을 어떻게 위로하셨을까요?

1. 좋은 사람, 반가운 사람,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게 하여 위로를 하셨습니다. 우울할 때 반가운 사람이 오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나기를 고대한 사람은 고린도교회 소식을 가져올 “디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반가운 사람들이 있으셨겠지만 “디도”가 옴으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반가운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내시면 반가운 사람이 올 수 없습니다.

2. 좋은 소식을 보내어 위로하십니다. 바울에게 좋은 소식은 성도가 믿음이 성숙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바울이 1년 반이나 시무하셨던 고린도교회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에 분쟁도 있고, 파당도 있었으며 불륜적 범죄와 송사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중에 유대주의자들의 음모로 바울을 불신하는 교인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속히 가시려고 하여도 전체적 환영을 받지 못하여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고린도교회의 많은 성도가 회개하고 바울 만나기를 고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잘 되고 자신이 환영받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일을 성취되게 하여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3. 근심됐던 일을 해결해주시므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편지를 보내실 때 엄한 책망과 과격한 논조로 말씀을 전한 후 후회하고 근심하셨습니다.(고전 4:20-5:5,8) 그런데 그 과격한 책망이 오히려 유익한 권고가 되어 고린도교회 성도를 잠시 근심케 하였으나 그들의 근심함이 회개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근심하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을 오해하던 교인들도 그 오해를 바로 잡으므로 근심을 덜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① 좋은 사람, ② 목적 성취, ③ 장애물 제거 등으로 위로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장 큰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은 ④ 모든 사정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과 ⑤ 하늘에서 귀한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제 11 과 연보를 권장하심 (고후 8:1-15)목록으로


본문 8장부터 9장까지는 전부 연보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우선 8장 말씀을 4 대지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① 1-5절까지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연보 모범”이요, ② 6-9절은 “연보를 잘 하도록 권면하심”이며 ③ 10-12절은 “연보의 방법”이요, ④ 13-15절은 “연보의 목적”입니다.

1. “마게도냐 교회들의 연보 모범”을 말씀하심.(1-5절)

1)1절에서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알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① 바울이 이 사실을 고린도교회에 알리시는 이유는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연보한 모범을 본받아 행하게 하시려 함이고, ② “마게도냐” 교회들이란 헬라 북쪽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 즉 데살로니가교회, 빌립보교회, 베뢰아교회 등을 의미합니다. 헬라의 남쪽 지역은 “아가야”라고 합니다. ③ “하나님께서......주신 은혜”란 연보할 수 있는 믿음의 실천 능력을 의미합니다. 행 11:28-30에 보시면 유다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구제 연보로 도운 일이 있었고, 롬 15:26과 고전 16:-24에도 구제 연보를 모아 전달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제 연보가 이웃 사랑에 속한 일이고, 이것을 실천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입니다.

2)2-3절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이 구제 연보를 할 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속에서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고, 또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참여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이란 핍박과 가난, 또는 여러 가지 부조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신앙 생활을 한 것이고, 또 “극한 가난”이란 그들 자신도 흉년든 백성들 보다는 낫지만 역시 가난한 환경이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있어서 넘치는 기쁨과 풍성한 연보를 하였으니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보실 때에 “힘대로 적당히 한 것이 아니고 자원하여 힘에 지나도록 풍성하게 한 것”으로 평가하셨으니 이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3절)

3)4-5절에서는 “이 은혜(하나님이 연보를 잘 할 수 있도록 힘주신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가난한 성도를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사역자들에게 잘 실천해 주도록 간절하게 구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뜻은 교역자의 기대한 것보다 더 솔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5절에서는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시행한 구제 연보를) 사역자들에게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역자들이 예산하고 기대한 것 이상 많은 연보가 나온 것을 알 수 있는 중 더 중요한 것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것”입니다. 자신을 주께 드린 것은 물질 헌납보다 더 중요한 헌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적 봉사는 몸을 헌신하는 충성만큼 귀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자신은 곧 생명이며 육체요, 지혜이고, 시간이기 때문에 물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렸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연보를 잘 하도록 권면하심.(6-19절)

1)6절에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하셨음은 바울사도가 “디도” 사역자로 하여금 고린도교회에 가서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처럼(이 은혜) 시행하도록 부탁하셨다는 뜻이요

2)7절에서는 “성도들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충성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또 사역자들을 사랑하는 일에도 풍성한 것처럼 이 은혜(연보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서 이같이 연보하는 일을 “명령으로 주신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간절함을 본받아 자신들도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헌금을 명령으로 나타내지 않고 다른 성도의 모범을 말한 후 자신들도 뜻이 있으면 믿음에 수반하는 사랑의 실상을 증명하는 기회를 삼으라”는 뜻입니다.

3)성도가 구제 연보를 잘 해야 할 근거는 “예수님의 모범에 있다”고 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님 자신이 부요하시나 (천지의 주재이심) 성도(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이는 그가 가난함을 인하여 성도(너희)를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령한 복은 무한하지만 현실의 복은 다 유한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적게 가져야 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런 중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으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일을 먼저 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빌 2:4, 마 5:40-42) 물질을 갖지 않으신 만큼 인간들이 그 은혜에 힘입어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은혜를 깨닫는다면 어려운 이웃을 상당하게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를 잘 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여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본받아 자원하여 행하되 사랑의 실상을 증명한다는 취지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연보의 방법에 대하여.(10-12절)

1)지도자는 명령이 아닌(8절) 뜻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10절)

2)연보는 “시행하는 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너희에게 유익함이라”하시고, 그 곳 성도들이 1년 전에도 시작하였고, 또 원하였은즉 이제 성취하되 “있는대로만 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2)연보하는 마음이 중요하고(12절) 또 하나님은 “있는대로 받으시는 분이시며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물질이 없어서 헌납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연보는 명령이 아닌 뜻만 보여 시행케 할 것과 있는대로만 자원하여 시행할 것과 없어서 못내는 것을 염려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4. 연보의 목적에 대하여.(13-15절)

연보의 목적은 “성도 또는 인류 간에 서로 평균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연보(捐補)란 한문의 뜻도 “덜어서 보충한다”는 뜻입니다.

1)13절에서 연보의 목적은 “주는 자를 곤고케 하여 받는 자를 평안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평균케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뺏어서 없는 자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자원함과 기쁨과 사명으로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스스로 돕게 하는 것입니다.

2)14절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의 유여한 것(넉넉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또 저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물질 뿐 아니라 지식이나 문화 등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3)15절의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하심은 출 16:17-24에 나타난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만나를 받아먹을 때 규정 분량보다 더 거둔 자라 하여 남지 않았고(남은 것이 부패하였으므로) 또 규정 분량보다 적게 거두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모자람이 없이 사용하였은즉 있는 자의 것으로 없는 자를 구제하여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부족함이 없이 고루 평균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6:38)

 

제 12 과 연보 취급자를 파송하심 (고후 8:16-24)목록으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직접 가실 기회가 없어서 시급하게 필요한 구제 헌금을 취급하는 일에 동역하지 못하는 대신 믿을 만한 사역자들을 우선 파송합니다. 마침 “디도”가 자원하여 가겠다 하므로 그와 함께 또 다른 두 사역자를 함께 보내시면서 천거하시고, 믿고 협력할 것을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역은 에게해와 지중해를 중간에 두고 위험한 여행을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또 거액의 금전을 안전하게 옮겨야 하는 일인즉 주의를 요하게 된 것입니다.

1. 16절에서 이상의 사명을 두고 “디도”가 그 일을 감당하려는 간절함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욕적으로 덕을 보기 위하여 금전을 취급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위험을 감당해 보려는 용기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기독교 단체에서 “회계”를 맡으려는 사람도 반드시 사명으로만 간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디도”는 바울사도로부터 이 사역에 대한 권한을 받았을 때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자원하였으니 이 순종은 자기를 위한 순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대한 헌신적 순종이었습니다.(17절)

2. 18-19절에서 바울은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함께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디도”는 자기 혼자 가는 것 보다 자신과 같이 갈 수 있는 동행자를 천거한즉 바울이 승인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디도”의 측근인바 “복음으로 모든 교회에서 칭찬받는 자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구제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사도 일행과 함께 동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19절 중의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었음”은 교회 연합회에서 선택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은 전도와 구제 사업입니다. 혹 그 사람은 “누가”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았은즉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취급자의 신분을 신중히 하는 것은 거액의 연보를 취급하는 일이기 때문에 혹이라도 어떤 훼방이 있을까 염려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20절) 따라서 선한 일이라도 조심하여 시행함이 마땅합니다.(21절)

3. 22절에서 바울은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디도의 측근자라면 여기에 천거된 사람은 바울의 측근입니다. 바울의 측근이라 할 때 “두기고”를 떠올리기도 합니다.(행 20:4, 엡 6:21, 딤후 4:12, 딛 3:12) 공금을 취급할 때 각 계파의 몇 사람이 함께 취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바울이 천거한 사람도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한 자로서 그가 고린도교회 성도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다”(22절)하셨으니 믿을만한 사역자는 여러 차례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 믿을 만한 증거를 시행하므로 신용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23절에서 대표자로 파송받은 “디도”는 바울의 친구(동무)요, 성도(너희)를 위한 동역자이며 그와 동행하는 형제들도 “여러 교회의 사자들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역자들이라”고 추천하셨고, 24절에서는 “여러 교회 앞에서 칭찬한 증거를 보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바울이 여러 교회들 앞에서 고린도교회에 대한 사랑 실천의 기대를 갖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자랑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을 다해 줄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25. 헌금하는 정신 (고후 8: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배당 건축 헌금”을 앞두고 “헌금하는 정신”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유다 지역의 궁핍한 성도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성실하게 할 것을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헌금은 용도상 차이가 있지만 신앙적으로 하는 것인 만큼 헌금 정신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전 지은 기사가 네 번 나옵니다. 하나는 모세의 성막이고,(출 25:1-9) 두 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이며(왕상 5:5-11) 세 번째는 스룹바벨의 성전이고,(학 1:1-12, 2:15-19) 네 번째는 헤롯의 성전입니다.(요 2:20)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경우를 보면 학개서 1장에서 “성도가 황폐한 성전을 재건하지 않고 자신만 좋은 집에서 살면 되느냐? 자신들의 소위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소득을 얻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즉 너희가 성심을 다하여 성전을 재건한다면 그 기초를 놓을 때부터 축복을 받아 그 소득이 더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학 1:1-12, 2:15-19)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예배당을 건축한 기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 당시 큰 건물이 필요하기 전에 성경 기록이 끝난 이유도 있고, 또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어떤 헌금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시행할 때

1.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물질 바치는 것을 은혜(복)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4,6,7절에서 “연보하는 일을 은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연보가 은혜되는 이유는 믿음의 열매이고, 또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재물이 있어도 헌금하기 어렵고, 믿음이 있으면 적은 중에서라도 헌금할 수 있습니다. 또 9:6-12에 보시면 “헌금과 봉사의 소득은 씨뿌린 만큼 받게 되고 모든 것이 넉넉하며 착한 일까지 넘치게 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상대로 주는 것도 넘치는 보상을 받는다 하셨거든 하물며 주님께 드리는 것이겠습니까?(눅 6:38) 그래서 “연보”란 말을 축복(ευλογια;고후 9:5)이란 용어로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2.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주님의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학 2:8에 보시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하셨고, 대상 29:14에서는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내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것”이나 “자기 공로”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가난하고 환난이 있다 하여 적게 하고 부자라 하여 많이 한다”는 원칙은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2절에서 “환난의 시련과 극한 가난에 넘치는 연보를 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과 재물이 많으면 많이 할 수 있겠지만 그 성의와 금액이 믿음있고 가난한 성도의 정성만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4. 헌금은 금액의 다소만으로 그 정성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막 12:41-44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연보하는 것을 보시고 부자가 많이 넣었으나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은 것은 자기의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므로 더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헌금이 금액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적은 금액이라도 그 성질에 따라 가치가 있고 많은 금액이라도 성질이 온전하지 않을 때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5. 모범자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범자는 예수님과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나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마게도냐 성도들은 많은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는 연보를 하였습니다. 모범을 잘 보이면 다른 성도에게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남교회를 시무할 때 교회 부지용 땅을 1000평 쯤 사게 되었는데 그 대금이 3억 이상이었습니다. 150 세대가 20만원 씩 한다면 족할 것이지만 교회마다 그렇지 못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희영 목사님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시게 하고 목사, 장로 순위로 헌금을 작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목사가 먼저 모범을 보이는 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500만원을 예정하였으나 그 예정이 부족할 듯 하여 발표하는 순간에 1000만원으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헌금한 후 2-3일 내에 예금 통장을 점검한 즉 500만원 짜리 예금 통장이 하나 더 발견된 것을 알았을 때 그 헌금을 길에서 얻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고, 무난히 그 땅을 산 일이 있었습니다. 헌금의 모범은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습니다.

6. 소원으로 하고 기쁨으로 하며 또 준비하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씀은 10-11절에서 “1년 전부터 소원하였은즉........원하던 것 같이 성취하라” 하셨고, 또 9:7에서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씀이 증언하신 것입니다. 헌금을 소원하는 마음이 있으려면 신앙이 상당하게 커야 할 것입니다. 헌금을 억지되지 않기 위하여 “뜻만 보이신다”고도 하셨습니다. 헌금은 결코 억지로 하거나 성의없이 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없는 것을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시니까 예수님이 헌금하실 재산이 없으셨으나 떳떳하셨던 것처럼 재물이 없을 때는 헌금을 못하거나 적게 하여도 아무 거리낄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 8: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헌금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이 후히 갚아 주시고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여.......모든 것이 넉넉하여지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고후 9:8) 이것은 “보상 심리로 헌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헌금한 자에게 후히 갚아주시는 뜻이 있음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선한 일에 헌금의 성의를 보이고 책임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26. 헌금에 대하여 (고후 8:1-15) 목록으로


1. 성경에는 헌금에 관한 말씀들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헌금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물질을 드리는 것은 다 헌금으로 포괄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게 구분한다면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주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신앙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제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받들어 가난한 자를 주는 것이고, 예배당 건축 헌금도 역시 성도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인 만큼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헌금은 그 사용 권리가 주님, 즉 주님의 사역자와 교회에 있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 목적으로 헌납하는 것을 다 헌금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헌금하는 신앙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헌금의 종류를 살피면 제사를 위한 예물,(신약 시대의 감사 헌금;출 23:15, 눅 21:1) 십일조 헌금,(민 18:21, 말 3:8, 마 23:23) 감사 헌금,(출 23:16) 구제 헌금,(고후 8장, 9장) 전도 헌금,(빌 4:16-18) 성전 건축 헌금,(느 12:44, 대상 29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마 6:19)하셨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마 6:21)하시며 헌금하는 일을 직접 지켜보시고, 평가하시기도 하였습니다.(막 12:41-44, 눅 21:1-4)

3. 헌금의 어원을 살피면 종류가 많습니다. 헌금으로 번역한 성구는 단 한 절(눅 21:1) 뿐이고,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연보로 번역하였습니다.

1)고전 16:1,2에서 “성도를 위한 연보”라 할 때, “로게이아”(λογεία)라 하였는데 이 뜻은 “모금, 수금, 모집”이란 뜻이 있어서 권장하고 힘쓰게 하는 의미가 있는 듯 하며

2)고후 8:20의 “거액의 연보”라 할 때는 “하드로테스”(ἁδρότης)를 쓰셨는데 이 뜻은 “두텁고 성숙하며 풍성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의 없이 적게 하는 것은 연보의 의미를 갖추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3)고후 8:2, 9:11의 “후한 연보”라 하실 때는 “하프로테스”(ἁπλότης)인데 이 용어는 엡 6:5과 골 3:22의 “성실하다”는 뜻과 병용되었고, “단순, 순진, 성실”의 뜻이 있어서 “단순한 뜻으로 헌금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주의로 헌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고후 9:5의 “약속한 연보”라 하실 때는 “율로기아”(νἐλογια)라 하여 고전 10:16이나 히 6:7과 함께 “축복”이란 의미로 사용이 되었고, 또 계 5:12과 7:12에서는 “찬송”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연보”란 어원적 의미는 모금, 풍성함, 성실함, 축복, 찬송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연보의 성격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연보를 잘 하는 것은 은혜와 축복을 받음이요,(고후 8:1, 9:5) 또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 하셨으며(8:4) 연보에 앞서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 순서이며(8:5) “주의 뜻을 따라 드리는 것”(8:5)이고, 더 나가서는 “사랑의 실상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5. 성도가 교회의 생활을 할 때 자주 헌금하여야 하는 책임에 봉착할 때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헌금과 같은 봉사를 하여야 할 때가 있으나 여유가 없다든지 물질 헌납에 대하여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후한 연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지요. 이럴 때마다 많은 연단과 경건(연보)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딤전 4:7) 헌금도 연습하여 숙달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송아지 때부터 소를 들어 본 사람이 나중에 황소를 들었다”는 말처럼 적은 헌금에서부터 차차 많은 헌금으로 숙달을 한다면 나중에는 큰 헌금도 부담없이 할 수 있게 됨을 믿으십시오. 그 이유는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고후 8:1) “주는 자에게 많이 받게 하신다”는 말씀,(눅 6:3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행 20:35) 또는 가난을 복으로 아는 믿음(마 19:23)을 갖는 것도 물질 봉사에 유익을 줄 것입니다.

6. 연보를 잘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고후 9:6-15에 근거할 때

1)“심는대로 거두게 하신다” 하셨습니다. 고후 9:6에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셨기 때문에 연보 성의에 따라 대가를 받는 것이요

2)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니......7절에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자기 섬기는 자를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3)“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고 모든 것이 넉넉하여 착한 일도 넘치게 하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8절)

4)결코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니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씨를 주신 하나님이 먹을 것도 주신다”는 것이요

5)“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의 사모하는 대상이 된다”(14절)고 하신 것입니다.

연보의 의미를 잘 아시고 성실하게 물질 봉사를 잘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13 과 성도를 섬기는 일 (고후 9:1-15)목록으로


본문은 8장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1절 말씀에 제목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 섬기는 일”이 바로 제목입니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지만 우선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것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갈 6:10) 본문 말씀은 4 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1-4절은 “연보를 하게 되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이요, ② 5-7절은 “연보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으며 ③ 8-10절은 “하나님의 보상 섭리”를 말씀하셨고, ④ 11-15절은 “연보의 성격과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제목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적절한 뜻도 있습니다.

1. 연보를 하게 되는 과정을 말씀하심.(1-4절)

1)1절에서 바울사도는 구제 연보하는 일을 “성도 섬기는 일”이라 하셨고, 이 일에 대하여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하심은 이 연보의 취지와 노력에 대하여 더 첨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1년 전부터 그 필요성을 알게 하여(너희의 원함을 앎)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이 사실을 마게도냐 교회들에게도 자랑 삼아 알렸더니 그들이 큰 감동(격동)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아가야(아덴과 고린도를 포함하는 헬라의 남부 지역)에서는 1년 전부터 예비하였다”고 자랑하신 것은 모범을 말씀하신 의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성도 섬기는 열심이 마게도냐 지역 성도들의 마음을 격동케 하여 좋은 성과를 얻은 것처럼 성도가 좋은 모범을 보일 때 다른 성도들에게 덕을 세워 선의 충동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디도를 비롯한 세 형제들을 고린도교회에 보낸 것은 구제 연보를 미리 준비하여 성의를 다 하므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란 바울이 다른 곳에 다니시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구제 의욕과 성의에 대한 것을 자랑하신 것입니다.

3)4절 말씀은 “마게도냐”에 머무신 바울이 그 곳 성도들과 함께 고린도에 가신다고 할 때 만일 그 곳 성도들이 연보를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이미 믿고 자랑하였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과 실제는 항상 일치하여야 하며 그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연보하는 방법을 말씀하심.(5-7절)

1)“연보는 먼저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5절에서 바울이 이 형제들(디도외 2인)을 보내는 것은 “전에 약속한(1년 전부터 예고한 것,2절)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일”까지 맡긴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참 연보답고 억지로 하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헌금의 책임을 느꼈을 때 시일이 없으면 준비없는 헌금을 억지로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충분하면 적당히 예산하여 알맞게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금은 억지로 할 필요가 없고 당연히 할 수 있고, 또 기쁨과 만족으로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6절의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라”는 뜻은 “심는대로 거둔다”는 사실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바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갈 6:7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하신 것처럼 이것(성도 섬기는 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은 사랑과 봉사이므로 그 일에 대한 축복을 받을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눅 6:38) 이 말씀의 “적게”란 “페이도메노스”는 “인색하게”란 뜻이요, “많이”라는 “율로기아이스”는 “축복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색하게 심으면 인색하게 거두고 축복의 원칙으로 심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박윤선 주석) 그런고로 성도가 선한 봉사를 할 때 씨 뿌리는 자가 소득을 바라고 씨를 인색함 없이 뿌리는 것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3)따라서 헌금은 “각각 그 마음에 (합당하게)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7절)

3. 보상섭리에 대하여(8-10절)

하나님께서는 “많이 심는 자에게 많이 주시는 보상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하셨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지게 하신다” 하셨으며 “모든 착한 일도 넘치게 할 수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9절에서는 시 112:9에 기록된 것처럼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가 영원토록 있다”는 뜻은 “영원히 누릴 상급의 근거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흥왕하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시 37:25-26)

3)10절에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 선한 일하는 성도에게도 심을 것을 주셔서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도 더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자원(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사는 성도에게는 현실적 생활이나 선행(의의 열매)에 대하여 더 발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연보의 성격과 은혜에 대한 말씀.(11-15절)

11-15절에서는 연보의 성격이 실천으로 나타날 때 신앙적 감사로 이어지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1)11절에서 연보할 수 있는 자는 “모든 일에 부요한 생각을 가지고 너그럽게 연보한다”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과 상태”는 마음의 부요에서 비롯되고 그 행동은 너그럽게(쉽게 또는 자연적으로) 나타내게 되는데 이런 일에 대하여 사역자들은 “큰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선행이 그들의 변화를 이룸과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2)12절에서는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물질)만 보충할 뿐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도 넘치게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 보충은 구제이지만 이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을 승화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3)13절에서는 “이 직무(성도 섬기는 일)로 (좋은)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일이 상당할 때 진실성과 믿음의 증거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선한 일에 성심껏 동참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것과(사랑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에 인정을 받게 되고, 또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후한 연보를 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4)14절에서는 구제(사랑)를 받은 사람들이 (저희) 구제한 성도들(너희)을 위하여 기도로 간구하게 되며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극히 큰 은혜 주신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더욱 존경하여 사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연보와 관련된 하나님의 은사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알게 되며 아울러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15절)

 

설교보충 27. 많이 심는 자 (고후 9:1-15)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성도를 섬기는 구제 헌금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헌금의 성질과 ② 복되게 헌금하는 방법, ③ 헌금을 잘 하므로 말미암아 받는 축복에 대하여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1. 헌금의 성질을 살펴보시면

1)1절에서 “구제 헌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제 헌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일반 헌금도 역시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사람에게 소용되고, 성도를 위하여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에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하심 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보이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므로 헌금은 곧 “성도를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이요,

2)3절에서 “헌금은 신앙적 자랑의 증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하심 같이 성도의 물질적 봉사는 정신적 충성의 증표도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사리 사욕을 위하여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다만 순수한 동기에서 물질적 봉사가 후하면 충성됨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한다” 하셨고, 8:24에서는 “우리 자랑의 증거를 (헌금으로) 보이라”고 하시므로 헌금 실적이 신앙적 열심과 자랑의 증거가 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헌금은 “축복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하시므로 이 씨앗을 “많이 뿌리면 그만큼 축복의 소산을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6절에서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바로 헌금이 축복의 씨를 뿌리는 농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씨 뿌리고 수고한대로 거두며 천천히 거두게 되고 또 씨보다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가 진실한 직업인 만큼 헌금에 뒤따르는 축복도 그와 같은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4)헌금은 12절에서 “봉사의 직무를 이행하는 일이고, 성도의 부족을 보충하는 일이며 또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넘치게 드리는 일이라”하시므로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13절) 또 말할 수 없이 큰 은사에 속하는 일(14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5절의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라는 것은 ① 하나님이 헌금을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실 때 헌금을 잘 할 수 있으며 ② 또 이 은사는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이란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잘 할 때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하고, 또 설교를 잘 할 때 “설교의 은사를 받았다”하지만 헌금이야말로 설교나 기도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하는 일은 큰 은사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2. 헌금을 잘 하도록 지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할 때

1)헌금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헌금이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는 것은 헌금의 성질이나 그 필요성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보시면 “헌금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더 이상의 글을) 쓸 필요가 없을 만큼 또 (2절에서) 그들은 헌금의 소원을 갖고 있었다”하시므로 헌금을 잘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필요성의 인식이 있은 후에

2)미리 예비하는 노력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절 중간에 보시면 “아가야에서는 1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하셨고, 5절에서는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할 필요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하여야 참된 연보답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1년 전부터 준비를 하였습니다. 고전 1:2에서 “매주일 첫 날에 헌금을 드려 저축했다가 내가 갈 때에 헌금하지 않게 하라”고 하신 명령을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무슨 헌금이나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3)헌금을 일깨움에 있어서 “무조건 하라”고 명하는 것보다는 헌금 잘 하는 사람들의 모범과 축복을 보이므로써 스스로 열심이 나도록 격동시키는 것을 권장하신 것입니다. 2절 하반에 보시면 “과연 너희의 열심이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열심”이란 그 지역 성도들이 1년 전부터 준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는 것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 가셔서 아가야 지역 성도의 헌금 열심을 소개하시므로 큰 감화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4)“너무 무성의 하게 하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라”고 4절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액수가 너무 적으면 인색함이 되는 것이고,(7절) 그렇게 되면 헌금을 지도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크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모범도 살피고, 자기의 형편을 대조하여 성의껏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결코 타의에 따르거나 억지로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연보의 결과로 어떤 축복을 받는가?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심는대로 거두되 많이 심으면 많은 축복, 적게 심으면 적은 축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헌금의 결과가 그 분량따라 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량이란 것은 꼭 금액의 분량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과부의 적은 헌금을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다고 평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의 양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대한 부요한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헌금을 많이 못해서 아쉬워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2)헌금을 잘 한 성도에게는 8절에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되.....① 항상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시고 또 ② 착한 일도 넘치게 하게 하시며 ③ 9절에서는 의가(선행) 영원토록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무엇을 풍성하게 못하시겠습니까? 10절 말씀과 같이 “심을 것도 풍성하게 주실 수 있고, 의의 열매(상급 은혜)도 더하여 주셔서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3)이렇게 풍성하게 축복받는 결과로 감사와(11절 끝, 15절 끝) 영광이(13절 끝) 하나님께 돌려지고 또 구제받은 성도로부터 기도(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있다고 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연보에 대한 많은 말씀을 통해서 연보에 특별한 은사를 받는 성도님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시대는 기도, 설교, 병고침, 권면, 목사, 장로, 집사 등 신령한 은사와 직분은 많지만 헌금의 은사받는 성도가 적어서 아직도 주위에 가난한 성도가 많고, 여러 곳에 증거되는 복음 활동도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 잘 하는 은사는 곧 축복을 많이 심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제 14 과 사역자의 합당한 처세를 밝히심 (고후 10:1-18)목록으로


곡식이 자라는 밭에 마귀가 가라지를 뿌려 곡식과 가라지가 한 농장에서 자라는 것처럼(마 13:24-26) 교회 안에도 거짓 교사, 부정적 대상, 외식자, 비판자, 훼방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사도의 씨뿌림으로 성도가 생산되었지만 이어서 나타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나 외식자, 훼방자들은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바울을 훼방하고 비판하려고 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바울사도는 자신의 신분적 명예 실추보다도 성도들과의 신앙적 유대와 순결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기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 장에 나타난 내용은 “사도의 자기 변호” 또는 “성도를 대하는 사도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성도나 거짓 교사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진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의 합당한 처세를 밝힘”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 장을 분류하면 ① 바울을 겁약한 자라고 평함에 대한 해명(1-6절) ② 사람을 외모로 판단함에 대한 지적(7-11절) ③ 비교할 수 없는 상대(12-13절) ④ 사명 범위의 한계를 설명함(14-18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바울을 겁약한 자라고 평함에 대한 해명(1-6절)

1)1절에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고린도교회 성도)를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있으면 담대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시인하였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비난한 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비난하는 목적으로 말하기를 “바울은 서로 대면하면 겸비(겁약)하면서 (나약하여 꼼짝 못한다는 뜻) 떠나있으면 편지로만 큰소리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권위가 없는 사역자”라고 과소 평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대적자들이 그렇게 느낀 것을 사실로 인정하였으니 이는 성도들을 대면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권하기 위함”이었고, 또 편지를 보내실 때 강한 책망을 하신 것은 사실이나 이는 회개를 지도한 것 뿐이며 일반 성도나 범죄한 성도에 이르기까지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는 포용성을 나타내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이란 바울을 비난하는 무리들이 바울을 “육체적 감정이나 폭력을 쓰는 나쁜 사람”으로 선전한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하여 담대하게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고린도교회 성도)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그같은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성도에게 나약해 보였다 하여 거짓자들에게까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며 거짓 교사들에게는 담대하게 대항할지라도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게 되도록 유화된 관계에 있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3)3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는 싸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육정이 있고, 육체적 현실에서 살지만 “감정이나 폭력, 또는 현실적 대항으로는 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롬 12:21) 4절에서 “성도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대적은 인간이 아닌 마귀이며 마귀와 싸우는 병기(무기)는 육체적 힘이나 사회적 권세를 쓰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마귀의 역사(견고한 진)를 파하는 강력한 무기로써 말씀의 무기와 사랑의 무기만 쓰신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사랑의 무기가 아니면 마귀의 진을 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4)5절에서는 성도가 “능력을 힘입어 파하여야 할 과제”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곧 “불신앙의 이론”을 파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업신여기며 교만한 자들의 오만함을 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말씀과 사랑의 무기를 가지고 세 가지 대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데 하나는 불신앙의 이론이고, 다음은 믿음을 멸시하는 교만한 자들의 사상적 세력이며 또 그 다음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인간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현실적, 육체적 싸움꾼이 아니고, 신령한 투사임을 밝힌 것입니다.

5)6절에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사도적 권위(교훈 및 권징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때를 의미하며 그렇게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자들을 벌하려고 예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수의 교인들이 치리회의 권징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권징의 필요한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신령한 권위를 거스리는 것도 마귀의 역사에 속하므로 먼저 그것과 싸워 질서를 잡은 후에 복종치 않는 자들을 벌하려고 예비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벌하는 것도 역시 신령한 싸움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비난하는 자들의 말처럼 나약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전쟁을 담대하고 지혜롭게 시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사람을 외모로 판단함에 대한 지적(7-11절)

1)7절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외모만 본다는 뜻은 사람의 가치와 자격을 평가할 때 겉모양만 본다는 뜻도 있고, 보이는 의식이나 포장을 더 중요시함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을 신임하지 않고 비난하는 거짓 교사들의 소행을 지적하신 것으로 그들은 끈질기게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등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까지도 부정하면서 바울을 괴롭힌 것입니다. 동질 세계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있으면 비난을 받게 되고 대세에 동화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때 바울이 비난받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혹 평가가 필요할 때는 당사자의 실력과 경력과 사상과 생활을 통하여 나타난 실적대로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는다면 그와 같이 바울사도 일행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하신 것은 자기의 신앙적 진실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신앙적 신실도 이해하고 인정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회에서 임직받은 일이 없고, 천거서를 제출한 일도 없은즉(고후 3:1) 비난하는 자들이 그런 것을 약점으로 잡아 유포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8절에서 “주께서 주신 권세”란 하나님이 바울사도에게 주신 사도적 권세, 즉 권징을 포함하는 교회 지도권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그 권세를 주신 목적은 인간이나 신앙을 파하는데 있지 않고, 세우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너희(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를 파하려 하신 것이 아니고 세우려(권면, 지도)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진실함과 사도권을 지나치게 자랑하였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3)9-11절의 말씀은 “대면하는 바울이나 편지 보내는 바울이 같은 사람이요 일관된 뜻을 나타내는 것”임을 해명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범죄한 성도들이나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경계하시는 뜻으로 강도 높은 편지(엄하게 책망하는 서신 ; 고전 4:18-5:5)를 보내신 사실이 있음을 인하여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10절)고 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중하게(엄하게) 한 것은 두려워하고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9절)고 하셨습니다. 다만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함이요, 편지의 뜻과 대면하는 처신이 다르지 않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떠나있을 때 편지를 보낸 바울이나 함께 있을 때의 바울이 같은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1절) 이것은 바울이 대면할 때는 겁약하고 떠나서 편지할 때는 담대하게 하는 이중적 처세를 한다는 비난에 대한 해명입니다. 또 바울사도가 “말이 시원치 않다”함은 대면할 때 유순한 표현 때문이기도 하지만(1절) 스스로 “말이 졸하다”는 고백을 하셨으므로(고후 11:6) 언변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이들은 설교의 웅변적 역량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뜻의 표현은 언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관성있는 태도가 항상 중요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 비교할 수 없는 상대(12-13절)

이 말씀은 바울사도 일행(우리, 2절)과 바울을 대적하는 무리(너희, 6,7절)와는 우열 정도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다른 상대이므로 비교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여기에서 바울의 일행은 그 성질을 살필 때 육체대로 행하지 않는 자요,(2,3절)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인데(4절) 반하여 그 상대자들은 외모만 보는 자요(7절) 자기를 칭찬하는 자며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자들이었으니(12절)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12절에서 “우리가 어떤 (지적하지 않은 대상)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 하셨으니 자기를 칭찬하는 자화자찬은 교만이며 자랑이요, 덜된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또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는 것도 역시 지혜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거울을 볼 때 자기가 비취는 것처럼 표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자기를 비교하지 않으면 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그러나 13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분량으로 나눠주신......한계를 따라 자랑한다” 하셨고, 그 분량대로의 자랑이 성도들에게까지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이 자랑은 예수님이나 십자가 자랑이 아닌 사도직의 자랑, 또는 사역자들의 생활 모범에 대한 자랑, 혹은 은혜받은 자랑과 같은 것입니다. 비난하는 자들에게 변명하거나 불신(의심)하는 자들에게 신용을 얻기 위하여 해명할 때 자랑같은 말을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확실한 목적의 명분 하에서 과장없는 진실과 실제적 생활 분량에 맞도록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 교계에서도 외모, 의식, 물량주의를 선호하는 경우와 외모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신앙의 질적 수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와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4. 사명 범위 안에서의 한계를 설명함(14-18절)

1)14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은 바울이 선교사역상 무례하게 다른 사람의 관할권이나 기득권을 침해하여 지나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란 땅 끝까지 복음 전할 사명 때문에 고린도에 갔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복음 선교의 초기부터 거짓 교사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인하여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을 월권자로 또는 무례하게 남의 터 위에 집을 짖는 자로 선전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례하게 월권하거나 남의 수고한 일 터에 가서 간섭하실 분이 아닙니다.

2)그래서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셨고, 오직 “성도의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15절) ① 바울은 자랑할 필요에 의하여 자랑할지라도 분량 이상 과장하여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② 바울은 은혜로운 사역자이지만 성도들의 믿음이 연약하여 바울의 신분의 고상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③ 그래서 성도들의 믿음이 더 좋아질수록 은혜로운 한계를 따라(과하게 평가받지 않는 범위에서) 더욱 위대하게 여겨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에 잠긴 사역자의 고상한 가치를 알아주는 성도가 많지 않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3)16절에서 바울은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맺은 열매를 마치 자기의 수고의 결과인양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한다”하셨으니 이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 아니라 그 지경을 초월하여 로마에까지 가서 전도할 계획을 가지셨음을 피력하신 것입니다.(행 19:21)

4)17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뜻”은 자랑의 내용과 목적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자랑의 내용으로서는 예수님과 십자가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등이요, 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자랑할 때 자신 또는 타인이 은혜받은 것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그 자랑의 성격이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득불 자신이 신령한 경지에 들어갔던 사실을 자랑한 일이 있었습니다.(12:1-5)

5)18절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칭찬과 만족은 판단이나 행위에 있어서 바르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칭찬해 주셔야 그것이 바른 것인데 주님의 칭찬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척도(표준)에 자기를 비교해 보면 알 것입니다. 고후 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 하셨고, 또 고전 4:6에서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하셨으니 자기의 믿음 생활과 성경 말씀을 잘 대조해 보시면 주님의 칭찬이 있으실 것인지를 충분히 가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영광을 가로채거나 월권하거나 의미없는 자랑을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교보충 28. 바울의 태도 변호 (고후 10: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태도 변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시면 어려운 말씀도 아닌 것 같으나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이 말씀의 내력을 알아보셔야 하겠습니다. 이는 거짓 스승들의 바울을 비난하는 여론에 교인들이 현혹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거짓 교사들의 비난하는 내용이 참되지 않은 것임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런 자기 변호를 하셔야만 하는가?할 때에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도의 직분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므로 사실 아닌 거짓으로 훼손을 당하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또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거짓 교사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의당히 자신의 정당함을 변호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의 권위 회복과 유혹을 방지하는 것과 또 진실을 밝히는 사명 때문에 자기 태도에 대한 변호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결코 이기심에서 자기 변호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1. 그러면 온당치 못한 자들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았는가?할 때에

1)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고 선전을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본래부터 여러 종류의 계파가 있었으니까 바울파가 아닌 사람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고 과장된 비난과 비평을 하였을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댄(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바울 일행도) 그런 줄을 자기 속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바울은 그 대적들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은 바울을 비난하는 그 대적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라”고 과격하게 대항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이 자기를 그렇게 믿는 것처럼 타인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여유있게 표현을 하시고는 그들의 거짓 선전을 계속 대항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도직의 권위를 자랑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시면 “주께서 주신 권세는(즉 사도의 권세는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음) 그 직책과 권세로 너희를 파하려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하신 것이라”고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사도의 직분을 주신 목적이 성도의 신앙을 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세워 일으키는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이 직분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을 하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0절에서 저희의 말이 (비난하는 자들의 말)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편지의 내용으로 써서 보낼 때는 엄격하게 말하여 잘못한 자를 당장 없앨 것 같이 힘이 있어 보이지만 직접 몸으로 대하여 만날 때는 연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으므로 글과 행동이 다르고, 또 엄격한 주장은 하지만 실제는 약한 존재요 구변도 없는 사람이라고 바울을 헐뜯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어떻게 답변을 하셨습니까? ① 7절에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하시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바울은 외모적 풍채가 없는 사람이라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돔”은 바울사도가 4척 단구이지만 “하늘에 닿은 듯 큰 사람이라” 하였고, 1세기 당시의 수리아 문헌에는 “바울이 보통키요, 두 발이 적고 다리는 앵기 다리며 두 눈썹은 가깝고 코는 컸는데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여 얼른 보면 천사같았다”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의 이런 외모를 얼마든지 헐뜯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편지로는 큰소리치나 만나면 꼼짝 못하는 약한 인물이요, 말이 졸하여 구변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말고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두텁고 가까운가?에 따라서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11절에서 “이런 사람은(바울을 오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우리가 떠나있을 때 편지로 말하는 자가 어떤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역시 그와 같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므로 바울은 편지와 실제를 다르게 취하는 이중인격자가 아니요, 표현과 행동을 꼭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편지로 엄격하게 말한 것처럼 만날 때에 그렇게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먼저 권면한 후에 회개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4:18 이하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에 대하여 엄한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자 마자 죄인들을 매로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상당기간 먼저 온유와 관용으로 참고 기다린 다음에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렇게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상 죄인들을 징계하는 담대한 일을 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되도록 회개시켜서 평정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9절에서 “편지로 놀라게 하려는 것처럼 생각지 않게 한다” 하셨고, 2절에서는 “역시 육체대로 행한다는 자들에게 담대히 행하려는 것 같이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한다”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는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을 정죄함에 대하여 속히 단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2절의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과 7절의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믿는 것 같이 내게 대하여도 그렇게 믿어줘야 한다”는 말씀, 또 6절에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복종하고 회개하는 자는 그냥 두고)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한다”는 말씀을 보아 일단 회개의 기회를 주시면서 온유, 겸비, 관용을 취하고 담대한 행동(징계)은 최후까지 회개치 않는 자에게만 시행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는 바울의 죄인을 대하는 태도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의 “육체대로 행하는 자들”이란 뜻은 부패성을 따라 죄 짖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3절에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혈기나 감정이나 포악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나 성도들이 싸우는 대상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사탄의 역사이며 무기는 진리와 사랑의 무기를 갖고 ㉠ 악한 자의 이론(복음을 대적하는 이론)을 파하고 ㉡ 하나님 아는 것, 즉 신앙을 대적하여 높아지거나 교만해지는 것을 파하며 ㉢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도록 싸우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과 행동이 약하면 불의의 자식들이 잘 굴복하지도 않거니와 하나님이 강권으로 역사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견고한 믿음과 풍성한 지식을 갖고, 또 완벽한 생활을 나타내면서 모든 악의 역사를 대항한다면 불신앙의 이론도 힘있게 파할 수 있고, 불신앙의 교만도 꺾을 수 있으며 불순종의 행사도 막을 수 있어서 모든 사람의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께로 복종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① 바울사도의 자기 변호의 타당성을 이해하시고 신앙의 좋은 병기와 함께 ② 신앙의 좋은 병기인 믿음, 지식, 기도를 가지고 불신앙과 악의 세력을 대적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복종시킬 수 있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9. 주님께 복종시킴 (고후 10:3-6) 목록으로


본문 5절에 근거하여 “주님께 복종시킴”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의 기본적 설명은 강해문과 “바울의 태도 변명”이란 설교문에 발표되었습니다. 성도가 주님께 자기를 복종시키려면 자기의 부패성을 생활의 병기로 삼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병기를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 이 세상에는 자기를 죄의 종으로 내어 맡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 8:34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셨고, 롬 6:16에서는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됨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끌리는 사람은 곧 죄악의 원인자인 마귀에게 순종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택한 자라도 미혹한다”고 하셨으니까(막 13:22, 계 12:12) 지금도 마귀는 온갖 유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죄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온갖 불신앙과 의심과 방탕과 미신과 우상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에 끌리는 사람, 담배, 아편에 끌리는 사람, 돈에 끌리는 사람, 오락에 끌리는 사람, 여자에게 끌리는 사람, 심지어는 놀음에 끌리고, 골프에 끌리고, 야구에 끌리며 TV와 관광에 끌려서 별 볼일 없는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 믿는 성도들도 세속적 욕심이 가득한 상태에서 불신자와 비슷하게 분별없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약 1:14에서 “성도가 욕심에 끌려 미혹되면 죄와 사망을 가져온다” 하셨고, 딤후 3:6에서도 “성도가 욕심에 끌리면 항상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일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성도가 그렇게 끌리면 신령한 소망이 없어지니까 애를 서서라도 그런 끌림에서 헤어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어떻게 이 강한 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1)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 강력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능력에 근거하여 모든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믿음의 힘을 갖고 대항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40:2에 보시면 “그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러올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함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죄와 세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지금도 이쪽 저쪽 사이에서 서로 싸우는 심령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죄로 끌리게 되고, 죄로 끌리려다 보면 또 가책이 되어서 신앙 양심쪽으로 당기려고 하여 늘 싸우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바울사도에게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롬 7:14에 보시면 하나님의 율법은 꼭 성도가 지켜야 할 신령한 말씀인데 바울 자신에게도 부패성이 있어서 그 율법을 못 지키고 죄에 팔려오는 자처럼 끌린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본의 아니게 죄에 끌렸다”하여 자기 아닌 마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마귀는 인간의 방심을 통하여 유혹한 것이니까 그 책임을 자신이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인격의 한 부분인 부패성(죄성)이 죄를 짓는 것이므로 그 책임을 지는 성도가 곤고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바울사도께서는 자기 속의 중생한 생명의 부분을 “속사람”(롬 7:22), “마음의 법”(롬 7:23)이라 하였고, 부패성의 부분을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20) 또는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롬 7:23)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법은 바울의 인격과 격리되는 것이 아니고, 한 인격 속에 포함이 되는 법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 속에 있는 마귀의 법과 싸우는 것이요, 여기에 패배를 할 때는 자기가 자기의 부패성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자기가 책임을 지고 회개해야 하며 또 승리했을 때는 믿음의 강력으로 부패성을 제어한 것이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를 옳게 다스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도가 이런 고충을 겪을지라도 롬 8:1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은총에 의해서) 정죄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죄와 싸우기만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2:21, 요일 5:4)

3. 성도는 자기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곧 예수님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의 생활은 돈벌이나 관광이나 친구 모임이나 연속극이나 야구 중계 등 세속에 취하지 않고, 오직 성경, 기도, 예배, 전도, 봉사에 이끌려 있는 상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롬 8:8,13에 보시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므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영의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고 하셨고, 따라서 바울사도는 날마다 자기의(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성령에 끌리고(마 4:1, 행 20:22-23), 말씀에 끌린다(행 8:5)고 하셨습니다. 마치 모든 식물이 태양광선에 끌리듯이 성도의 마음과 생활 전체도 예수님께로 끌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에게 끌렸을 때 죽음의 돌 세례를 받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같이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찬송가 410장의 가사에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강력하신 사랑의 강권으로(고후 5:14) 주님께 끌려가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께로 끌려가시려면 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힘의 능력을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② 한 쪽으로 끌리기 위하여 붙잡았던 세속의 애착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③ 무조건 진리의 말씀대로 복종하시면서 육체의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셔야 할 것입니다.

 

제 15 과 바울의 자기 소개 (고후 11:1-33)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의 형식은 바울의 사명적 입장을 알림과 동시에 자기 변호와 자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변호하고 또 안 하여야 좋을 자랑을 한 이유는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헐뜯고 비난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 받던 신임이 떨어지고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도전적 언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1,16절은 “이해를 구하는 부탁의 말씀”이요, 2절은 “바울의 사명 목표를 말씀하신 내용”이며 3-15절은 “거짓 사역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고, 17-33절은 “바울의 자랑에 관한 내용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이해를 구하는 부탁의 말씀(1,16절)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 하셨고, 16절에서는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바울이 어떤 실수를 한 어리석음이 아니고, “자랑하는 말을 하게된 어리석음”을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진실치 않게 헐뜯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랑을 할 만큼 어리석은 자도 아닌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사도들(4,13절)의 궤계와 이단 전파의 기회를 끊고 복음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하여 자신을 자랑 삼아 나타내는 것을 용납(이해)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16절의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는 말씀이 역시 “약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로 알아도 좋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자랑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자랑이 아니고, 궤휼의 역군(13절)들의 거짓 선전을 뒤집고 바울의 입장을 진실 그대로 나타내는 자랑임을 이해시키는 말씀입니다.

2. 바울의 사명 목표를 말씀하심(2절)

1)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하셨습니다. 열심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열심내시는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2)“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믿음의 성도 되게 함을 처녀(성도)가 총각(그리스도)과 결혼하는 것으로 비유 설명하신 것입니다. 혼사에 중매인의 역할이 있는 것처럼 전도자인 자신을 그리스도와의 영적 혼인의 중매자로 비유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사명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3. 거짓 사역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3-15절)

이 부분에서는 거짓 사역자들의 유혹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 내용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되도록 중매함에 대한 훼방을 물리치시려는 목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1)13절에서 거짓 사역자들을 거짓 사도, 궤휼의 역군, 또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하셨고, 15절에서는 사단의 일꾼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 명칭들은 그들의 행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2)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시므로 3절에서 “인류의 시조 이와(하와)가 뱀의 간계에 미혹된 것”을 실예로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 것을 두려워 하셨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진실과 정결함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유혹을 받게 되고 따라서 자신을 더럽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하와”를 “이와”로 기록한 것은 히브리 문자(하와 또는 카와)를 영문으로 표기한 발음(이와 또는 이브)입니다.

3)복음적 신앙에 확고히 서지 못한 성도들은 거짓 사역자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 잘 용납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도들이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사도적 전파에 근거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엡 2:20, 고전 3:11) 다른 사역자들의 거짓된 증언을 쉽게 수용하거나 그것을 더 오묘한 진리처럼 여겨 따라가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런 일은 현실교회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다른 예수”란 예수님의 신분을 왜곡 선전하거나 다른 구원자를 소개하는 일이고, “다른 영”은 성령님이 아닌 잡신(귀신)의 역사를 뜻하며 “다른 복음”은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지 않는 방법으로 구원(물론 구원의 의미도 다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인격이나 증거를 신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4)바울이 거짓 사역자들의 거짓성을 드러내는 의미(13절)로 자신의 입장을 자랑하셨습니다. 5절에서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큰 사도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일컫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부터 특별히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마 17:1, 막 14:33) 그러나 거짓 사역자들은 자기들을 큰 자라고 자칭하며 자랑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없음은 역사적으로 중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 하셨고, 이런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사실대로 나타낸 것이라(6절)고 하셨습니다. “말이 졸하다”는 뜻은 웅변력이 약하다는 뜻일 뿐 말을 잘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행 17:18) 그러나 지식이 넉넉하면 복음 사역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요즈음은 지식도 많고 설교도 유창하게 하는 사역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시대에서 눈으로 보고 더 많은 분량을 터득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유창한 설교나 설교자에만 의존하여 진리를 배우려고 하지 마시고, 문서와 정보를 통하여 터득함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5)7-15절 말씀은 역시 “거짓 사역자들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그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자기 변호를 하시는 말씀입니다. 거짓 사역자들은 바울을 두 가지로 비난하였습니다. “하나는 고린도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것이요,(요즈음도 무급사역자는 든든한 교회 배경이 없음과 같아서 잘 알아주지 않음) 또 한 가지는 어느 교회에서 얼마를 도왔는지는 모르나 다른 여러 교회에서 선교비용으로 보내온 돈을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지적하여 바울에 대한 신용을 떨어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존귀한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고 또 자신을 낮추는 의미로 보수를 포기하고 사역한 것은 죄가 되지 않음이라” 하셨고,(7절) 또 “다른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은 고린도교회를 섬기기 위한 선교비이므로 탈취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셨습니다.(8절) 또 9절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하실 때 용도(쓸 돈)가 부족하였지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모든 일에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계속 조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개척 당시의 고린도교회의 재정 실력이 미약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10절에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므로 만족하고 완전할 수 있습니다.(요 8:32, 14:32)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않는다”는 뜻은 “십자가 중심의 자급 전도 사역을 계속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지를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고후 13:5) 11절에서 바울을 의심하고 멀리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하는 뜻으로 “어떤 연고뇨” 하셨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았음이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줄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7)12절에서 바울은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은 바울의 자급 전도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는다”는 것은 바울이 무보수 사역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 기회가 올 때 직무 개입에 임하려는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바울이 무급사역을 계속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하여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라”하셨으니 “그 자랑하는 일”이란 거짓 사역자들도 무보수 사역을 한다고 자랑하였으나 그것이 바울사도의 무보수 사역처럼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8)13-15절에서 거짓 사역자들의 위장술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바울 사도를 부정하면 곧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들로써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상할 만큼 드문 일이 아니며 “사단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나 또 15절에서 “사단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받을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함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자들이 인기 대상에 오른다는 뜻이며 “사단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함”은 역시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사람 앞에는 좋은 일을 하는 자들로 부각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양으로 나타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가 천사의 역사처럼 나타날 수 있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바울의 자랑에 관한 내용들(17-33절)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짓 사역자들의 비방등에 대하여 자신의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사도직을 부각시키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1)17절에서 “내가 말하는 것(즉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자랑하시거나 부각시키려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 11:29, 12:19) 따라서 바울의 자기 자랑은 “오직 어리석은 자처럼 기탄없이 (사리를 분별하지 않고) 자랑하는 것”이며 또 18절에서 “여러 사람(거짓 사역자들)이 육체를 따라(인간 및 현실적 입장) 자랑하므로 바울도 그렇게 자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9-20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무분별한 태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로운 자(상당한 식견이 있음)이면서도 어리석은 자들(거짓 교사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거짓 사역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들이 폭언이나 감언 이설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인권유린) 사로잡거나(속박) 자고하다 하거나(책망) 뺨을 칠 지라도 무조건 용납하고 따라가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사이비한 사역자가 권위를 주장하면서 성도를 상대로 폭언, 공갈을 쳐도 “주여 주여”하면서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사리를 분별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무리들이 예전이나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3)21절에서 “우리가 약한 것 같이”란 10:1에서 바울이 반대자들로부터 “겁약한 자”라는 취급을 받은 일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요, “내가 욕되게 말한다”는 뜻은 분별없이 자랑하고 교만한 자들의 행위를 답습하는 것을 욕된 것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하여) “누가(거짓 사역자들) 무슨 일(자기들 자랑)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바울도(자기 자랑에) 담대할 것이라”하시고, 자랑하는 언사를 나타내셨습니다.

4)22-33절까지는 바울 자신에 대한 자랑의 내용입니다. ① “저희가 히브리인 되고, 이스라엘 족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것처럼 바울도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22절)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서 “유프라데강을 건너 온 민족”(창 14:13)이란 뜻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자들이란 뜻이며 “이스라엘”인은 야곱 조상을 근거한 말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정통적 후손됨을 자랑거리로 여겼으나 바울도 이스라엘의 막내 아들 베냐민의 후손이기 때문에(롬 11:1) 역시 정통 이스라엘인이라고 자랑한 것이요 ② 23,27절에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자칭하며)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바울은(진실한 일꾼으로) 더욱 그러하니 이는 수고를 넘치게 하였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였으며 수없이 매를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번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24절) 태장으로 세 번 맞고 돌로 한 번 맞고 세 번 파선으로 인하여 일주야를 깊은 물에서 지냈으며(25절) 여러 번 여행할 때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유대주의자들의 핍박)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도성)의 위험과 광야(사막)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고,(26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잠에 주리고 목마르며 굶고 춥고 헐벗었다(27절)”고 하셨으니 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일할 때 여행상의 위험, 기후상의 위험, 음식의 핍절, 헐멋음, 피로, 핍박자의 위험 및 광야 생활의 위험 등을 당하면서 충성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4절의 “40에 하나 감한 매”란 신 25:1-3에 근거한 것으로 태형을 40대 이상 때리지 않도록 율법이 제한하였습니다. 따라서 형리가 40대 이상을 때리면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그 예방책으로 39대를 때린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고난을 많이 당한 전도자였습니다. ③ 29-29절에서는 주님의 사역을 인하여 마음 고생한 것을 자랑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 외에도 “날마다 여러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신 일로 마음에 눌림을 당한 것”이요, 또 성도들의 연약과 실족함을 볼 때 자신도 연약한 입장에서 공감하며 애타는 염려를 함께 하셨으니 이것은 믿음의 한 권속을 위하여 봉사자의 입장을 취해 준 정신적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30-33절에서는 자신의 연약한 것까지 자랑하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연약한 점까지 자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진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고, 또 바울도 인간인 점을 나타내어 부족함에 대한 이웃의 이해와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에게 이런 점이 없다면 진실성에 문제가 있음은 물론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란 취급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서는 “부득불 자랑할진댄 나의 약한 것도 자랑한다” 하셨고, 31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짓말 아니 함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연약은 바로 “핍박과 죽음을 겁내어 도망한 것”을 그 사례로 말씀하셨습니다 29절에서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겠느냐?”하신 말씀처럼 타인의 연약함이 자기에게도 있음을 시인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연약하였던 일은 32절에서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때 자신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도망하므로) 그 손에서 벗어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행 9:24-25에 나타난 역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처음 개종할 당시에 유대인들이 바울의 배신을 증오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뜻을 같이 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 성을 도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바울의 신앙 초기였습니다. 그 후에는 많이 담대해지셨습니다.(행 20:23-24, 롬 14:7-8) 이상과 같이 바울은 자신의 충성됨과 진실함을 증언하므로 거짓 교사들의 위중을 뒤집고 자신의 사도됨과 사도적 사역의 진실함을 나타내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30. 바울의 자랑 (고후 11:29-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자랑”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부덕한 일이고, 예수님도 금하신 일이었습니다.(17절) 그러나 바울은 부득불 자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자랑” 그 자체가 부덕한 것인줄 알지만 부득불 말하는 것에 대한 양해를 부탁하였습니다.(17,30, 12:1) 그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선동을 억제하고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 성경은 자랑하지 말 것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인생은 잠시 뿐인즉(욥 20:5)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고(롬 3:27, 4:2, 고전 3:21, 13:4) 사람의 지혜나(렘 9:23) 용맹이나(왕상 20:11) 율법의 행위나(롬 2:23) 전도를 잘한 것이나(고전 9:16) 심지어는 미래의 일까지도(잠 25:14)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자랑은 악한 것이며(롬 1:30) 사랑을 해치는 것이고(고전 13:4, 약 3:14) 벌받을 일이라(사 10: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다 자랑하실 만한 것이라도 “늘 겸손하셨고 자기를 들레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 12:19)

2. 그런데 또 자랑할 것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랑하고(시 34:2, 빌 3:3) 십자가를 자랑하며(갈 6:14) 모든 일을 주 안에서만 자랑하고(고전 1:31)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라(대상 16:10, 시 105:3)고 하셨습니다. 부득이 자랑을 하고 싶을 때는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고후 12:9, 약 1:10) 자기의 잘난 것을 자랑하면 교만과 시기를 낳게 되지만 연약을 자랑하면 사랑과 동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러면 바울사도는 무엇을 자랑하였습니까? 바울사도의 자랑은 부득이한 자기 자랑이었는데 바울이 자기를 자랑하게 된 이유는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헐뜯고 바울을 신임받는 인물이 못되게 하여 놓고 자신들이 고린도 지역을 이단 전파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계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내가 참 사도요 저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이니 그들을 신용하지 말고 나를 믿으시요”하는 뜻으로 자신의 신분과 자랑꺼리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1)거짓 선지들이 자기들은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신분의 뿌리를 자랑하니까 바울도 “나도 그렇소”하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 가진 것과 할례받은 것과 바리새인으로 율법 교육을 받고 철저하게 지킨 것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행 22:3, 빌 3:5)

2)거짓 선지자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이 충성하는 듯이 자랑을 하면서 바울을 헐뜯으니까 바울도 자기의 충성, 헌신에 대하여 자랑하시니 “나도 수고를 넘치게 하였고 옥에 갇힌 일도 많았으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았으며(행 14:15-19) 세 번을 파선당하였는데 1주야를 깊은 물에서 지낸 일도 있었으며 전도 여행 중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행 9:23,29) 이방인의 위험,(행 14:5) 시내의 위험,(행 21:31)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그 외에도 주림과 헐벗음과 잠 못자는 피곤, 목마름 등을 당하였으며 또 교회들을 염려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눌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수고와 고난에 대하여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님을 위하여 박해 받은 흔적을 가졌다”(갈 6:17)고 하셨습니다. 이런 고난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세상에서는 감당(보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히 11:36)

3)거짓 선지자들은 결코 자신의 연약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연약을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자기 신분의 인기가 떨어질까 염려하였겠지요.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장점만 말하고 약점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을 속여서 덕을 보려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치 못한 사람입니다.(딸기를 파는 사람이 굵은 딸기를 보이게 하고 작은 딸기 값의 갑절을 써 붙였습니다. 그래서 굵은 딸기를 비싼 값으로 사는데 굵은 딸기 밑에는 전부 작은 딸기를 놓고 그것을 섞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장사꾼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만 자랑하는 것은 결국 남을 속여 인기의 덕을 보려는 사람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성도는 부득이 장점을 말할 때는 약점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말하는 자를 미련한 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잘못 판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장점과 약점을 다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4)그러면 바울이 자랑한 자기 연약이 무엇입니까? ①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믿음의 연단이 부족하였을 때 핍박과 죽음이 두려워 높은 집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한 자였다고 한 것입니다. 과거의 연약을 고백한 것입니다.(32-33절) 얼마 전에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2000. 4월 하순) 그 분이 어떤 공로상을 받을 때 “나는 과거에 신사 참배를 하였던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일입니다. 나는 회고록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어느 시기에 총회 총대로 가고 싶어서 투표할 때 내 이름을 써낸 적이 3,4회 있었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고 쓴 것입니다. 그것이 곧 명예욕이고, 허탄한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아니면 안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② 그 외에도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 예수님을 핍박한 자이므로 괴수 죄인의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하셨고,(딤후 1:15) ③ 또 “약한 것을 자랑한다”하시면서 육체의 가시로 고난받은 사실과(고후 12:5-9) 확실성 없는 신비한 체험을 말씀하였습니다.(고후 12:1-3) ④ 또 바울의 약점이 “자기의 육체에 있다”고 고백하시면서 성도들의 이해를 감사히 여긴다는 말씀을 하셨고,(갈 4:12-14) 갈 4:15에 보시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자기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을 줄 수 있었으면”한 사실로 볼 때 눈이 좋지 않았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⑤ 고후 11:6에서는 “자신의 말이 졸하다”고 스스로 인정하셨고, ⑥ 엡 6:19에서는 “자기에게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해달라”하셨으며 ⑦ 고후 12:13에서는 “나의 공평치 못함을 용납해달라”하셨고, ⑧ 고후 11:1에서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추호도 자기의 약점을 은폐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시인하고 성도들의 양해를 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들도 꼭 필요할 때는 자랑할 수 있겠지만 명분없이는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과 자랑을 할진대 예수님을 자랑하고 자신의 연약한 면을 더 많이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을 모릅니다, 나는 이런 것을 못합니다, 나는 이런 은혜가 부족합니다, 나는 몸이 허약하고 무슨 질병이 있습니다” 등 자기의 연약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마 5:7)

 

제 16 과 바울의 두 가지 체험 (고후 12:1-10)목록으로


본문에는 바울사도의 두 가지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셋째 하늘에 끌려간 체험”이고,(1-6절) 또 한 가지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기 위한 기도의 체험”(7-10절)입니다.

1. 셋째 하늘에 끌려간 체험(1-6절)

1)1절에서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랑한다”하신 것은 자랑하는 것과 자랑의 내용 그 자체는 무익한 것이지만 부득불 자랑하시는 이유는 11장에 나타난 말씀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 사역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면서 바울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여 사도적 권위를 훼손시킴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자랑의 내용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주신 환상과 계시로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체험은 주님이 주셔서 받은 영적 체험입니다.

3)2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하신 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은폐한 말씀입니다. 자신을 은폐하기 위하여 계속 3인칭으로 표현하셨고, 3절에서는 “내가 이런 사람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4)이렇게 자기가 체험한 일을 제 3자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답이 5,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① 5절에서 “나(자신)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으려 하심”과 ② 6절에서 “누가 바울 자신에 대하여 보고 듣는 바에서 지나치게 생각할 것을 두려워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5절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한다”는 뜻은 제 3자를 자랑하는데는 거리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6절에서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은 참말을 함이라” 하셨으니 누가 다른 사람의 일을 자랑할 때 거짓되이 자랑하면 잘못하는 것이지만 “사실대로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5)자랑의 내용은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입니다. “14년 전”이란 바울사도가 과거의 체험을 회고한 것인데 그 사건을 14년 동안 나타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신앙의 어떤 표준이나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낼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의 체험도 어떤 표준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역설하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6)2,3절에서 “그가(심령)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하신 것은 환상과 계시를 받은 자신이 몸까지 셋째 하늘에 갔던 것인지 아니면 심령만 간 것인지는 주님만 아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체험자가 일정한 장소에 있다가 흔연히 없어진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입증을 한다면 “그가”(그의 심령) 몸까지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 8:32)

7)그러면 2절의 “셋째 하늘”은 어떤 곳일까요? 이 곳은 4절에서 “낙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도 “낙원(천국)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눅 23:43) 또 그 곳에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천국의 언어일 것이며 세상의 지식과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14년 전에 그런 체험을 하였지만 진리의 지식이 정립되기 전에 느낀 체험이므로 나타낼 가치가 없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부각시키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에 표준 계시 아닌 체험이 무익한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 육체의 가시를 없애기 위한 기도의 체험(7-10절)

1)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바울)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① 하나님은 바울에게 여러 계시를 주신 분입니다. 셋째 하늘에 간 것도 계시이지만 특히 성경 영감의 계시를 많이 주셨습니다. ② 계시를 주신 다음에 계시 받은 성도를 교만(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약간 치시고 고난을 주시는 분입니다. 고난은 성도를 겸손하게 붙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③ 그 고난의 성격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하셨으니 이는 사단의 역할을 통하여(욥 1:12) 육체의 가시 같은 고난을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욥”에게도 사단을 통하여 고난을 주셨습니다. ④ “육체의 가시”가 무엇일까?에 대하여는 그의 육체의 질병일 것이요, 바울은 체질상 취약점이 있었던 분이고, 특히 눈이 좋지 않았음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갈 4:15, 6:11)

2)바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필요하여 주신 것임을 모르고 그것을 떠나게 해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8절) 그런데 주님이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인즉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라)”는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라는 고난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신 것이고, 바울이 받은 은혜는 받은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미처 몰랐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자고하지 않게 하시고 받은 은혜를 족한 줄 알게 하시며 또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연약과 겸손에 머물러 계시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3)그 결과로 바울은 9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되었고,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시기 위하여 그 상태에 그대로 있음을 행복으로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 “자신이 약할 때 곧 강해지는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용받는 일과 핍박과 곤란까지도 기뻐하며 감수하게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기도로 속히 해결되지 않는 연약함이나 고난이 있으면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오히려 감사하며 더 큰 은혜로 발전해 나가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7 과 바울의 변론과 두려움 (고후 12:11-21)목록으로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누어 “바울의 자기 변론”(11-19절)과 “바울이 두려워하신 것”(20-21절)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또 바울사도가 변론하신 것은 ① 사도직을 부정함에 대한 변론과(11-13절) ② 폐를 끼치지 않음에 대한 변론과(14-15절) ③ 이기주의자가 아님에 대한 변론(16-19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자기 변론(11-19절)

1)사도직을 부정함에 대한 변론(11-13절)

거짓 사역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가짜 사도인양 끈질기게 유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① 11절에서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하신 것은 이미 자랑한 일도 있지만 또 자랑을 더 하여야 하기 때문이요,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씀은 바울을 신뢰하고 따르는 성도들이 바울의 신분 증명을 위하여 자랑할 것을 권면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의 요구에 응한 것인 만큼 성도들로부터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인간 피조물은 아무 것도 아님)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하셨으니 여기의 “지극히 큰 사도들”이란 11:5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거짓 사역자들이 자칭하는 뜻일 수도 있고, 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처럼 존경받던(갈 2:9)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 바울이 부족하지 않다”하셨더라도 이는 교만이나 과장일 수 없고, 사실 그대로임이 그의 사역을 통하여 입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② 12절에서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도의 표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성직을 받거나 증명서를 제시하는 것보다도 실제 사역으로 증명하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누구의 천거서를 제시하지 않았고,(고후 3:1) 자신의 사도된 증거는 바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라(고후 3:2)고 말씀하셨으며 “누구의 말보다도 그들의 능력을 보신다”(고전 4:19)고 하였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모든 참음(인내를 잘하는 능력)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이라” 하셨는데 “모든 참음”이 사도의 표란 뜻은 필자도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적 초자연적 사역을 뜻하는 것입니다.(히 2:4, 막 16:20) 하나님께서는 사도의 사역이 신적이고, 기독교적임을 증명하실 목적으로 비상한 권능을 주신 것이었으며 기독교의 기초인 성경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적 능력(이적)은 항시 있을 수 있으나 사도직을 증명할 만한 이적은 사도적 사명이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타내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③ 1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대접을 받으려 하시거나 누를 끼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도 일은 부족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을 사랑하는 교인들에게는 오히려 섭섭함이 될 것이지만 “바울이 이기주의적 탐심을 갖고 일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변호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평치 못한 것”이란 바울사도가 다른 교회에서는 폐를 끼쳤으나 (사례를 받은 뜻) 고린도교회에서는 폐를 끼치지 않음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공평치 못함에 대하여”서도 용서를 구할 만큼 덕을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폐를 끼치지 않음에 대한 변론(14-15절)

① 14절에서 바울은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에 가실 것을 예비하시면서 역시 교회에(물질적)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최초에 가신 것은 전도 초기요, 그 당시에 1년 6개월을 계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행 18:1-11) 그 후 아볼로를 그 곳에서 사역하게 하시고, 2차 선교 여행을 마치신 후(행 18:22-23) 3차 여행 때 에베소 및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으로 가셨을 때(행 19:1,21) 2차 방문하신 것으로 사료되며 3차 방문은 본문대로 계획 중이셨습니다. 그 때 가셔서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은 역시 거짓 사역자들의 비난의 입을 막기 위함이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심을 증명하심일 것입니다.(행 20:35) ②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하셨으니 바울은 사례나 물질을 바라고 일하신 분이 아니요 오직 “너희” 즉 믿음이 성숙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성도를 양육하는 것이 그의 사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는 것”처럼 바울도 부모의 입장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물질로 폐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③ 1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혼(믿음의 인격)을 위하여 수고하고 그것을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과 그 자신까지 허비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교회를 위한 전적 헌신을 의미합니다.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는 질문은 사랑의 대가가 사랑으로 환원되어야 할 것을 질문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이기주의자가 아님에 대한 변론(16-19절)

① 16-1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아무런 짐을 지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바울을 헐뜯는 무리들)은 바울이 공교한 자(교묘히 기회를 타는 자)가 되어 궤계를 써서 성도들을 취하였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그런 이기주의 행사를 하신 일이 없는 만큼 “혹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서 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만일 바울이 보낸 자가 이득을 취하였다면 그 책임을 바울이 져야 할 것입니다. ②18절에서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역자를 파송할 때 잘 권면하였습니다. “너희의 이를 취한다”는 뜻은 사역자가 성도에게 무리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요, “동일한 성령으로 행함”은 같은 원리, 동일한 보조 또는 바울과 같은 사상과 방법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19절에서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한다”는 뜻은 변명 자체가 사람 앞에서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신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변론의 목적이 변론하는 사역자의 명예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신앙 지도를 위한 것이며 또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함이란 뜻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사소한 일에도 큰 오해를 받고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20-21절)

바울은 얼마 후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교회가 은혜로 변화된 모습을 보지 못할까 하여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복음 사역자의 두려워하는 일이고, 또 변화가 클 때에 큰 기쁨과 보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본래 원치 않았던 일들이 그대로 잔존한 상태에서 성도 간의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 모략과 수군 수군 하는 것과 거만함과 무질서(어지러운 일)한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 하셨고,(20절) 또 “하나님이 바울을 성도 앞에서 낮추실 일”(분쟁하는 교회에 가면 사역자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음)을 두려워하였으며 또 과거에 범행한 사람들이 아무런 변화없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근심거리가 될 것을 크게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더러움”이란 정의를 따르지 않는 무질서한 행위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다툼이나 시기, 분냄, 당짓는 일, 의심, 중상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 무질서와 불의와 음행 같은 호색도 없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두려워하신 일은 곧 우리가 두려워할 일임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1. 무익한 체험 (고후 12:1-6) 목록으로


1. 이 시간에는 바울사도가 14년 전에 체험한 신비한 사건을 말씀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성경 아닌 체험은 대중에게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과 오직 표준 계시인 성경에 입각하여 믿음 생활 할 것을 교훈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전 12장에는 각종은사에 대한 말씀이 있고, 또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하신 말씀과 함께 현재에 지식과 은사가 커 보이는 것 같으나 천국에 가서 온전하게 알 것에 비하면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셨고, 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며 고전 14장에서 “방언과 은사 활용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을 볼 때 신령한 체험을 하는 성도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표준 계시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받은 개인적인 체험을 자랑하면서 각자의 이상한 체험들이 전체 성도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 듯이 선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체험은 바울도 14년 전에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일 뿐이고, 표준계시가 아니므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낼 내용이 못될 뿐 아니라 오히려 무익하기 때문에 침묵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표준계시인 진리를 사모하지 않고 자기의 체험에 따라가는 개인주의 성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서 가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이상한 체험을 했다”하면 그것을 소위 “간증거리”라 하여 교인들 앞에 내세워 간증을 하게 하고 또 “그가 천국 구경을 여하히 하고 왔다”하면 아멘으로 화답을 하며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실정이 우리 주위에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 말씀대로 무익한 일이고, 하나님의 표준계시인 진리 밖으로 탈선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있는 곳은 은혜가 없고, 체험과 간증이 있는 곳은 은혜가 많다”는 잘못된 견해를 시급히 고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런 식으로 말씀을 무시하고 체험 본위의 생활을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고전 4:6에서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하셨고, 고전 7:19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 하셨으며 고후 13:8에서는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하시므로서 꼭 진리 안에서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4. 그러면 표준계시는 무엇이고, 표준계시 아닌 것은 무엇이냐? 하시겠지요.

1)오늘날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성경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이런 계시도 없고, 저런 계시도 없지만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여러 사람들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바울도 받았고, 베드로도 받았고, 요한도 받았으며 행 21:9을 보면 빌립 집사의 딸도 예언을 하였습니다. 행 11:28에 보면 “아가보”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록된 말씀은 그 받은 계시 전부가 아니고 제한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 21:25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란 계시의 모범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낱낱이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말씀 전부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제한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표준계시는 계시를 주시던 시대에 많은 계시 중에 전체 성도를 위하여 성경으로 기록된 것이 표준계시이고, 기록에 오르지 않은 것은 표준계시가 아닌 것입니다. 이 표준계시가 아닌 것은 다른 성도에게 무익한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5. 혹 어떤 성도는 개인의 체험을 타인에게 권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하여 방언을 연습시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① 은사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주시는 것이고,(고전 12:11) ② 또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을 보아서 주시기 때문이며 ③ 바울사도 자신도 신비한 체험이 있었으나 그것이 표준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14년간까지 말하지 않은 점과 ④ 표준계시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⑤ 또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원칙에서 볼 때 자기의 체험을 타인에게 권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권장을 하려면 표준계시인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러면 바울이 14년 전에 체험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4절은 바울의 14년 전의 체험담을 말씀하신 것인데 거기서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자기를 3인칭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체험의 소극적 입장을 알 수 있습니다. ① 그는 신비한 경지에서 3층천을 갔습니다.(셋째 하늘) 이 셋째 하늘을 4절에서 낙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낙원은 죽은 자의 영이 들어가는 천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층천의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고, 운천, 신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영계의 장소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② 바울은 그 곳에 가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그 곳을 갈 때 성령에 이끌려 갔지만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두 번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영혼만 간 것인지 몸까지 간 것인지 신비한 지경에서 된 것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7. 그리고 또 바울사도는 “자기의 약한 것들만 자랑한다”고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자기의 장점을 자랑하려는데 급급하지만 바울은 자랑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고, 또 사실보다 지나친 평가를 받을까 염려되어 자랑을 삼가신 반면에 자기의 약점은 오히려 자랑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약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졸하고 신체가 약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게 되면 ① 진실성을 인정받고 ② 서로 보살핌을 받게 되며 ③ 깨우침을 받아 시정할 수도 있고, ④ 나아가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돌아가면 벌써 약점을 감추어 명예를 얻으려는 진실치 못한 허영심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말씀 더 드릴 것은 “입신이란 성경에 있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바울이 3층천에 간 것을 입신이라고 하면서 “입신해야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이 연구하신 말씀에 의하면 그런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32.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 12:5-6) 목록으로


본문 5절에서 바울사도는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하시므로 자기를 위하여 자신의 연약성을 자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바울사도는 훌륭한 분이지만 약한 것도 많았습니다.

1)그는 신앙이 잘못된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바리새파 이단자였고, 열심으로는 그리스도의 원수였으며(행 9:5) 과거에 성도를 잔해하였고,(갈 1:13, 행 26:10-11) 따라서 자신을 괴수 죄인(딤전 1:15)이라고 하였습니다.

2)복음사역자로서의 약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어리석음과 공평치 못함을 자인하신 일이 있고,(고후 11:1, 12:13) 말이 졸하였으며(고후 11:6) 육체의 가시(약점, 질병)를 갖고 계셨고,(고후 12:7, 갈 4:15) 개종 초기에는 죽음을 겁내는 겁쟁이 이기도 하였습니다.(고후 11:32-33) 몸이 왜소한 것은 복음사역의 약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세비어스의 역사에서 바울은 피부가 검고 등이 굽었으며 앵기 다리였다고 합니다.

2. 그런데 이런 약점을 가진 분이 왜 그것을 자랑하려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1)진실성의 인정을 받고,

2)겸손과 낮은 것을 좋게 여기셨으며

3)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나 과한 대우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4)약점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뜻이었습니다.

5)또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한 부분에 머무시기 때문에(고후 12:9, 벧전 5:5-6) 연약 그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3. 반대로 바울에게는 좋은 점이 더 많았습니다. 유대인 족보, 로마 시민권, 최고의 학벌, 어학의 능통함,(히브리어, 행 22:2, 헬라어, 행 21:37, 로마어, 행 22:25, 28:3, 방언, 고전 14:18) 또 문필가였습니다.

4. 그런데 왜 이런 유력한 점들을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1)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할 만큼 겸손하셨고,(고전 15:8)

2)과거의 죄를 생각하시면서 자신을 괴수 죄인이라 하셨으며(딤전 1:15)

3)따라서 하나님이 은혜로 사도직을 주셨지만(딤전 1:12) 자신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하시면서 겸손하셨습니다.(고전 15:9)

4)그 외에도 자랑은 사랑에 위배되고(고전 13:4) 자기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고전 15:10) 과대 평가받을 위험을 방지하려고 노력을 하신 것입니다.(6절)

5. 저희들도 자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취약점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부족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자, 겸손한 자, 진실한 자에게 나타나 주실 것입니다.(고후 12:9) 모세가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하니까 하나님이 아론을 보내주셨습니다. 저희들의 약점은 무엇일까요? 노력 안 하는 나태, 욕심, 현실 정욕, 무지, 원망, 불평, 낙심, 성경에 집착하지 못하는 것, 사랑과 봉사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교만, 고집, 이기주의, 외식 등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루 일과를 돈 버는데 쓰시지 말고 자신의 약점 찾는데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의 연약을 지적할 때 겸손하게 시인하고 도움을 청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3. 은혜로 주신 가시 (고후 12:7-10) 목록으로


이 시간은 “은혜로 주신 가시”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1)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는 바울사도를 끈질기게 괴롭히며 떠나지 않는 “육체적, 현세적 고통꺼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육체적 고통꺼리란 “만성 안염”이라 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사단의 사자를 통하여 바울에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어떤 연구가들은 ① 그의 독신 생활로 인한 고충일 것이다 ② 또는 바울의 복음적 신앙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송사일 것이다 ③ 또는 해산하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성직자의 사명의 난관일 것이다 ④ 또는 “육체의 가시”란 말이 “스코로프 테 살키”(σκόλοφ τή σαρκί)로써 “부패성의 날카로운 막대기”란 뜻이기 때문에 “바울사도의 마음속에서 동하는 죄성의 발동을 의미한다”고 하는 이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성의 유혹은 바울사도도 그것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은 하셨지만 롬 7:25에서 “속죄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셨고, 또 죄의 유혹이나 부패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만의 가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독신으로 오는 고통은 고전 7:5에서 “절제의 은사를 받았고, 수종드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브리스길라 부부) 문제의 가시”가 될 수 없으며 또 바울이 핍박과 환난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롬 5:3에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소망을 갖고 연단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의 가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따라서 사단의 사자를 통하여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는 “눈병으로 주신 육체의 질병”이라고 믿는 해석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① 바울은 다메섹 노상에서 빛가운데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볼 때에 그 눈에 비늘같은 것이 덮여서 앞을 보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그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된 사실이 있었습니다.(행 9:8,18) ② 그 후에 전도 여행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특수한 의복을 입은 대제사장을 일반인과 구별하지 못한 사실을 볼 때 그의 시력이 대단히 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행 23:1-5) ③ 또 노년기에 이르러 각 처에 편지를 쓰실 때에 갈 6:11을 보시면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하시므로 “큰 글자”로 써야만 글씨가 보이는 형편을 말씀하셨고, ④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바울의 “그 답답하고 침침한 눈” 때문에 염려한 나머지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다”는 말씀을 보면(갈 4:13-15) 항상 침침하고 답답하며 또 자주 가시로 찌르는 듯 따끔따끔한 병증을 가진 눈병으로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석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가시의 괴로움 때문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1)본문 8절을 보시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을 간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1차 간구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2차, 3차까지 기도하셨는데도 여전히 가시를 빼어주시는 허락은 안 하시고, 다른 교훈으로 응답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고통은 없애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시는 다른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2)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와 능력을 받은 때로부터 이 고통의 가시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병을 간직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행 13:6에서 “바에수”라는 소경의 눈을 뜨게 했고, 행 14:8에서는 앉은뱅이도 일으켰으며 행 16:14-에서는 사귀를 쫓았고, 행 20:9에서는 죽은 자를 살렸으며 행 28:8에서는 열병과 이질을 고쳤고, 행 28:3에서는 독의 해를 받지 않는 기적을 나타냈지만

3)그 다음 감옥에 들어가신 후에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서 빌 2:27에서는 제자 에바브로 디도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존할 뿐 기적을 나타내지 않았고, 또 딤후 4:20에서도 역시 제자 “드로비모”가 밀레도에서 병이 듦으로 동행을 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더니 본문에서도 자기 몸에 붙은 질병의 가시를 없애기 위하여 3 차례의 간절한 기도를 했으나 병 고침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사단의 사자, 곧 질병 주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므로 바울로 하여금 오히려 더 큰 신앙을 갖도록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3. 그러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질병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1)바울이 받은 은혜로 교만할 것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습니다. 핍박하던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 핍박자를 변화케 하여 사도로 삼으신 은혜, 영감을 주셔서 신약 중 13권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은혜 등이었습니다. 잘 나가는 자동차처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어 장치가 있어야 안전한 것처럼 교만할 수 있는 위험을 겸손으로 붙드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2)하나님께로 받은 은혜가 족함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부족하오니 더 주십시요”하는 것보다는 “받은 것으로 족합니다.”하는 신앙이 더 귀한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미처 몰랐던 진리를 깨달았을 때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 없으리로다”하는 신앙을 갖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3)“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역사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약점이 없고, 교만해 지면 자기 힘으로만 할려고 할 것이고, 또 “모든 것을 다 자기 힘으로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연약하기 때문에 부모가 살펴주듯이 하나님은 “내가 부족합니다”할 때만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고, 10절에서는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약할 때에 곧 강해지는 은혜를 주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4.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진리를 아는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고난은 겸손의 약이고, 겸손은 은혜받는 방법이며 자족하는 신앙에 연단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머물게 하시거나 더 큰 역사를 나타내게 하시는 방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셨습니다. 고난을 견디면서 은혜로운 사역을 한 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성자 어거스틴이나 장로교회의 창시자 칼빈 선생이나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가, 죽을 때까지 결핵으로 허약한 체질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다 큰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또 신앙의 시를 쓴 영국의 시인 밀톤은 소경이었고, 신앙의 음악가 베토벤은 간질병자에 귀머거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큰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고난 중에 은혜를 깨달았고, 고난을 극복하면서 은혜를 받아 큰 사역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건강체가 못되는 것은 은혜의 모자람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을 때는 우선 인내의 은사를 키우면서 고난을 주신 섭리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 고난을 은혜받는 기회로 선용하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4. 사도의 증표 (고후 12:12) 목록으로


본문에서 사도의 증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의 증표는

1. 많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참음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평범한 성도의 미덕이고, 자세인 것입니다. 사도쯤 되고 지도자쯤 되고 은혜받은 자쯤 되면 어려움을 잘 참아 넘기는 것이 기본증표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인내가 있으니까 인내도 못하면서 “사도다, 은혜받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잘 참는 것이 자격있는 사도의 증표라 하셨고,

2.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표적이란 초자연 이적을 의미하고, 기사란 불가사의한 활동(비상한 일)을 의미하며 능력이란 지도적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 10:1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실 때 그런 능력을 주어 보내셨습니다.(눅 10:1,19에서 70제자 파송하실 경우에도) 그래서 그들이 자기 주머니에 있는 권능을 내주듯이(행 3:6) 역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사도적인 권능과 역사는 특수한 사역인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도적인 증표는

3. 예수님의 직접 부르심을 받고(롬 1:1, 막 3:14, 고전 1:1, 행 9:4, 마 10:1)

4.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하며(고전 9:1, 눅 1:2, 행 1:22)

5. 성령이 충만하여(요 20:22, 행 2:1-4, 9:17) 계시를 받고(고전 2:13)

6. 말씀 전하는 사명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행 6:4, 20:27)

특히 사도의 자격으로써 계시적 영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고전 2:10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며......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계시와 분별은 사도들의 독특한 은혜 사역이었기 때문에 계시 사역이 끝난 이 시대에는 사도적 특수한 은사를 더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의 증표 여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보충 35. 바울이 두려워한 것 (고후 12:20-2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이 두려워한 것”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하신 것은 저희들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바울사도가 두려워하신 것 다섯 가지가 기록되었습니다.

1. 교회 안에 변화가 없을까 하여 두려워하셨습니다. 20절에서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원치 않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로 분쟁과 부도덕과 무질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또 디모데와 디도를 통하여 잘 수습되고 변화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 골수를 찔러 병을 낫게 하는 약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과 심령으로 받을 때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고 말씀을 은혜로 받지 않을 때는 효력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변화없을 것을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2. 도덕적 변화가 없을까 하여 두려워하셨습니다. 도덕적 변화의 과제는 다툼, 시기, 분냄, 당짓는 일, 중상, 수군수군 하는 것, 거만함, 어지러움 등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결함이고, 신앙 인격의 암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닮는다면 이상의 문제는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런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것을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세계에는 오해, 다툼, 시기, 분냄, 당짓는 일 등 화목에 위배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잘 살피고 급하게 처방하지 말며 사리를 따져 잘 처리하여야 합니다. 무슨 송사가 있어도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듣고 판단하여야 합니다.(잠 18:17) 그래서 다툼, 시기, 욕심, 분냄 등 도덕적 결함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3. 어지러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셨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지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단체든지 상식이 통할 만한 법이 있고, 특히 교파가 있는 교회는 뚜렷한 교회 헌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성도이면 누구나 이 법을 존중하여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을 집행하는 사역자들이 공의롭게만 한다면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무질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를 굽게 하거나 월권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때는 어지러운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이런 어지러운 일이 생기도록 역사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성경과 교회 헌법을 존중하여 질서가 확립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복음사역자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21절에 보시면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거나 분쟁이 있으면 파쟁이 생기고 그것을 수습하려는 사역자가 큰 봉변을 당하여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사역자의 권위가 떨어지는 이유는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고, 또 그 원인이 교인이나 치리회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역자의 권위가 떨어지면 성도가 은혜를 못 받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다른 이단이나 불법 단체가 판을 치고 승리하는 결과가 오기 때문에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회개하지 않는 완악이 계속 될까 두려워하셨습니다. 21절 끝에 보시면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완악 이상 불행을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 죄와 불법을 시인하지 않는 것,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깨우쳐 준 자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 등은 사실상 성도이기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의 지적을 받아도 흔쾌히 시인하고 회개하면 용서받는 것인데도 여전히 완악한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두려워할 일이 저희들과 저희들 주위에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하며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8 과 완악한 자들에 대한 처리 계획 (고후 13:1-5)목록으로


이 말씀의 1-4절은 “끝까지 완악한 자들에 대한 처리 계획”을 말씀하셨고, 5절에서는 “성도 자신들이 자기의 믿음을 확증하도록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1. 완악한 자들에 대한 처리 계획(1-4절)

1)1절의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하신 것은 끝가지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두 세 증인으로 그 범행을 확실하게 규정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세 번째 가실 계획에 대하여는 고후 1:15-17과 12:14에서 설명드렸고, 두 세 증인을 세워 사실을 확증하는 것은 신 19:15과 민 35:30에서 율법으로 명시하셨습니다.

2)2절에서는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교회 문제 수습차로 가셨을 때(고후 1:15) 범죄자들을 엄책한 일이 있음과 같이 세 번째 가셨을 때까지 권면의 서신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고 완악을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이란 고린도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범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될 것입니다.

3)3절에서는 바울이 범죄자(완악한 자)에 대하여 엄책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완악한 자들(너희)을 향하여 약하지 않고(간과하시지 않음) 도리어....강하게(진노하심)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3절 하반) 주님께서는 바울의 심령에 말씀을 주셨고,(영감의 뜻)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주님이 주시는 계시의 증거를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주님이 진노하시는 뜻에 따라 엄책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4)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인간적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은즉 항상 능력자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나 복음사역자들(우리)도 예수님의 현세적 생애로 볼 때는 약하나 완고한 자들을 책망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처럼 권위있게 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사역자들이 완고한 자들에게 겸손을 취하면 더 밟히게 될 것이므로 믿음 안에서 완고한 자들에게 강함을 나타낼 때 불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도록 권면하심(5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심받기 좋을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성경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신앙 밖에 있는 교인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 입장에서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확증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안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입장에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자신의 정과 욕을 못박고 오직 성경 말씀이 자기의 생각이 되고 계획이 되며 자기 전부를 속박하는 능력이 될 때 참 성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겠지요? 필자는 성도됨의 확증이나 신앙의 본질 면에 대한 설교를 많이 증언하였습니다.

 

제 19 과 사역자들의 바람과 결론 (고후 13:6-13)목록으로


이 말씀의 6-10절은 “사역자의 입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라는 사항”이고, 11-13절은 “결론”입니다.

1. 사역자들의 바라는 사항(6-10절)

1)6절에서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않은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의 순진하고 겸손함이 마치 강포한 자들 앞에 버리워진 자들 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잡히운 별같은 존재임을 알기를 바란 것이요

2)7절에서 사역자들의 희생 정신과 성도를 위하는 노력이 어떠 함을 알기를 바랐으니 희생 정신이란 “사역자들이 (명예를 위하여) 스스로 옳은 자임을 나타내려 하지 않은 것”이요, 성도를 위한 봉사적 노력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선을 행하기를 바라서 기도로 구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믿음이 성숙한 만큼 명예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성도들의 순결과 선행을 이루는데만 목표하고 있음을 인식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3)8절에서는 사역자들의 일관된 생활 원칙을 말씀하시므로 항상 진리 중심에 선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님(요 14:6)과 성경입니다.(요 17:17) 성도가 “성경에 위배되는 일은 일체 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의 의미와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4)9절에서 사역자들은 핍박을 받으므로 약한 입장에 있었지만 “성도의 강한 것과 온전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여 하나님께 구하였음”을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강함”이란 “믿음의 확고함과 담대함”을 뜻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은 7절의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됨”과 같은 뜻으로 최대한의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10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범법자들을 처리할 때 “문제의 사람들을 파하려(파면이나 출교) 하지 않고 세우려(회개한 자를 잘 포용함)함과 또 주님께로부터 받은 권세(권징권)를 엄하게 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즉 어려운 문제를 공의보다 사랑을 앞세워 처리하려는 것이 본 뜻임을 알린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사역자들은 진리 중심, 사랑 중심, 희생 봉사, 그리고 성도의 순결을 위하여 사역한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2. 결론(11-13절)

결론의 말씀은 권면과 문안과 축복입니다.

1)권면은 11절의 “기뻐하라, 온전케 되라, 위로를 받으라, 마음을 같이 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것이고,

2)문안은 12절의 “모든 성도(마게도냐 또는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문안을 전하는 것이며

3)축복은 11절의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하신 것과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축도의 원본입니다. 이 축도는 사도 또는 복음사역자가 주님이 베푸신 복을 대신 전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기도와 뜻이 다릅니다. 이 축복의 근원은 성부, 성자,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성자 예수님을 앞세운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축도 문구는 일정한 서열이나 규칙이 없습니다. 롬 16:27, 고전 15:23-24, 갈 6:18, 엡 6:23-24, 히 13:20-21, 벧후 3:18, 유 25를 참고하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 안에서 진리와 사랑과 기쁨과 평강과 축복이 넘쳐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6. 믿음의 진단 (고후 1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진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신앙 진단을 잘 하여 확실하고 건전하며 구원과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가지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돈을 헤아려 받듯이 믿음도 잘 헤아려 보셔야 할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점검을 잘 해야 되겠지요. 비행기 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축복받는 “믿음을 진단한다”는 것이 늦은 감은 있습니다만 또 한 번 믿음 점검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마 7:21을 보시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하고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였어도 (그 믿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신 일이 있었고, 마 13:24에서는 “한 농장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하시므로 성도가 교회 생활을 꼭 같이 하여도 그 믿음의 진가에 따라서 알곡이 있고, 쭉정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진짜 믿음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 지를 진단하셔야 되는데 그 진단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1. 성경 말씀 전체를 진리로(하나님의 말씀)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신다면 다른 것은 다 성경 속에 있으니까요. 요 5:39을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하셨고, 또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나는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과 함께 그의 말씀도 진리인 줄로 믿어지는 신앙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행 13:48을 보시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셨고, 살후 1:10에서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곧 “믿어지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믿으라 믿으라”하신 말씀이 수없이 나오는데 그 뜻이 무엇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 뜻은 성경 전체를 진리로 믿는 신앙 안에서 내용을 잘 배우고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천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십자가를 구원의 방도로 믿으며 성경을 진리로 믿는 신앙은 믿어지는 신앙이어야만 그 믿음이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2. 실천력있는 믿음인지 또는 흐름에 떠내려가는 믿음인지를 살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좋은 믿음은 실천력있는 믿음이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약 2:17) 어떤 사람이 “믿는다”하고 성경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인정되겠습니까? 약 2:14에서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또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구원하지 못한다), “스스로 경건하다 하면서 자기 혀를 자갈 먹이지 못하며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도 헛것이라”(약 1:26) 그러므로 “믿음은 그의 행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하셨으니 “이 행함이란 자체”가 곧 예수님이 마음 속에 계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하셨지요.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마음 속에 생각한다”는 뜻이고, 그 말씀에 속박을 받으며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바로 그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놋이나 바울사도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활하셨듯이(창 12:4, 행 18:5) 저희들도 성경 말씀에 이끌리며 실천력을 가질 때 참 믿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실천의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라도 참 믿음의 증명은 실천으로 확인케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참 믿음은 진실한 마음에 간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씨앗이라고 간주할 때 옥토에 뿌려진 씨앗만 열매를 맺였다”는 것은 다 아시는 일이지요.(마 13:18-) 그리고 약 1:22에서 “너희의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하셨으니 여기의 옥토와 온유한 심령은 진실한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 1:5이나 19절, 3:9에도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피스티스”는(πιστίς) 진실이란 뜻이 있기 때문에 진실하고 착한 양심 즉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서만 자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도가 “믿음이 있다”해도 그 마음이 깨끗하고 진실하며 착한 마음이 아니면 구원의 최종 결실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진실성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요, 또 착한 양심에 심겨진 믿음이 아니면 결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다는 것 자체”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에 신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마음과 믿음은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하면서 사랑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거나 사랑 실천력이 없으면 그것은 마치 행함 없는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 실천 못하는 믿음”은 고전 13:2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더 확실한 말씀으로는 요일 3:10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으니 마치 아벨을 미워한 가인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과 같고”(12절), 또 요일 4:20에서는 “보는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은즉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갈 5:6) 따라서 사랑실천에 힘이 없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란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확증은 ① 성경을 믿는 형편이 믿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함과 ② 실천력이 있어야 하는 점, 그리고 ③ 진실한 마음과 ④ 사랑할 수 있는 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7. 나는 참된 신자인가? (고후 13:5) 목록으로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후서 마지막 장에서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지금 읽으신 말씀으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시므로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할 것과 그 확인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살아계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분쟁하는 자도 있고, 파벌을 조성하는 사람도 있으며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런 부덕을 끼치는가?를 분별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 제가 이 말씀을 구상하는 기간에 아르헨티나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가 “당신은 진정 신자입니까?”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저도 “나는 참된 신자인가?”를 연구하는 중인데 그런 책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제 설교를 도와주시는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과 다른 책들을 잠시 살피는 중에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까를로스 목사가 시무하는 아르헨티나 기독교인들도 답답하고 위선적인 교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주장 몇 가지를 소개드린다면

1)교인 중에 관념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듣고 옳다고만 하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할 것입니다.

2)젖만 먹으면서 보채는 신자가 많고 고기 먹으려는 신자도 적으며 특히 십자가의 군병같은 신자가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젖만 먹고 보채는 어떤 이는 부모를 붙잡고 매달리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항상 교역자나 다른 신자의 사랑과 인정에 끌려 따라 다니는 신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기쁨 대상은 되지만 성장하기 전에는 유익을 주지 못하고, 또 자립하는 힘이 없어서 혼자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3)악한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다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야 하는데 늘 어린아이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십자가의 군병된 성도가 몇 분이나 계십니까? 군인은 걷기도 잘하고 뛰기도 잘 하며 산도 잘 오르고 맨손으로 무엇을 만들기도 잘 합니다. 더워도 옷을 벗지 않으며 식사도 스스로 먹고 사치하거나 휴식할 시간도 없이 모든 난관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적군과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저희들의 신앙이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4)그리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를 결혼한 처녀로 비유하여 설명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시집 갈 처녀는 자기 집에 살아도 신랑을 사모하고 시집살이를 구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신랑을 만나서 결혼하면 친정 식구들의 인정도 다 끊고 심지어는 호적까지 파가지고 신랑과 연합하여 시집 식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랑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높은 자의 사모님이 되고, 신랑이 재산이 많으면 그 재산을 같이 누리면서 신랑과 꼭같은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생활도 예수님과 결혼하고 세상의 인정을 멀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만 생각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한국 교계에도 꼭 맞는 교훈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에게 “당신이 참 신자입니까?”하고 물으면 화를 내실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장사꾼들이 그런 심리를 이용하여 비싼 물건을 팔지 않습니까? (어떤 농촌 부자가 백화점에 갔는데 점원보고 “아주 좋은 물건을 내놓으라”하니까 “좋은 물건은 있기는 있지만 값이 비싸서 손님은 사시기 어려울 것입니다”하고 슬쩍 건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금방 기분이 나빠져서 “내가 농촌 부자라 몇 백만원짜리 전자제품도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얼마나 비싸길래 그러느냐?”하면서 500만원 상당의 물건을 결국 그 장사꾼의 상술에 걸려 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까? 증표를 내놓아 보십시오”했을 때 진짜 신자인 증표를 무엇으로 내놓으실 것입니까? 하는 것이 이 시간 설교 주제입니다.

2. 무엇이 진짜 신자되는 증표입니까?

1)우선 아닌 것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교회 출석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니지요. 이단자들도 그렇게 하니까요. ② 찬송, 기도 잘 하면 되겠습니까? 한남 교회 골목길을 지나보면 목사가 가는 줄 알고 찬송 부르는 아가씨들이 있어요. 야유하는 찬송이지요. 그러니까 찬송도 표준이 못되고, 기도도 역시 그렇지요. “나더라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가는 것 아니라”(마 7:21)하셨으니까 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까를로스” 목사가 쓴 책 가운데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 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됩니다.”란 책이 있습니다. 기도는 안 하고 중언 부언을 하도 많이 하니까 그런 책을 쓴 모양이지요. 따라서 찬송, 기도도 표준이 되지 못합니다. ③ 사랑과 봉사와 헌금을 잘 하면 참신자이겠는가? 요즈음 가뭄 대책을 위해서 봉사하는 헌금을 보면 거의가 불신자들이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 봉사, 헌금은 이방 종교인들이 더 잘 합니다. 따라서 헌금, 봉사도 믿음의 표준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2)그렇다면 어떻게 확증해야 할 것입니까? 내가 참 예수 믿는 자인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자기 자신입니다. 본문에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진실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외에는 알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참신자 된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객관성 있는 증명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증명을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신임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레 13장에 보시면 문둥병 진단법이 있습니다. “환처의 털이 희여지고 피부가 우묵하게 들어갔으면 문둥병이라, 피부의 색점이 희고 피부가 우묵하지 않으면 경과를 보아서 판단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의사도 아닌데 왜 피부병 진단을 제사장 보고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아마 성도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는 성직자의 모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신자 되는 증거 ① 핵심적 교리를 고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 16:16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고, 롬 10:9에서도 “입으로....시인한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②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자로 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신앙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 인격이 자기 속에 살아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그 뜻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 예수님 사상이 자기를 지배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육정은 죽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노력도 안 하면서 기도만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력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⑥ 잘못을 시인하며 돌이킬 줄 아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가 자기를 참신자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신앙”은 사람 수나 재물이나 문화적 시절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자기와의 신앙적 관계, 또는 사람이 인정할 만한 객관적 증명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물질 문명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신앙의 표준 인물은 2000년 전의 사도들이고, 4000년 전의 아브라함이란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핵심적 교리, 성경 신앙, 예수님의 인격,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실천노력, 과오를 시인하는 회개로써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8. 축도 (고후 13: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축도의 기본형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1. 이 말씀은 축도의 내용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으로 기본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축도의 내용은 일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1)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축도한 말씀도 있고(롬 16:27, 고전 16:24, 갈 6:18, 빌 4:23, 몬 25, 벧전 5:14, 살전 5:28, 살후 3:18)

2)하나님을 앞세우고 예수님을 다음에 세워 축도한 말씀도 있으며(엡 6:23)

3)또 복의 근원이신 삼위의 하나님을 생략한채 축복한 말씀도 있고(골 4:18, 딛 3:15, 딤전 6:21, 딤후 4:22)

4)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축도하되 내용을 특별하게 첨부한 경우도 있습니다.(히 13:20,21, 유 25)

3. 따라서 축도는 복의 근원자이신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는 사역자가 성도에게(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성도 : 벧전 5:14) 복된 내용을 선포, 전달하는 것입니다.

1)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시고, 성부, 성자, 성령님이십니다. 축도할 때 삼위의 이름을 다 거론하면 명확하고, 거론하지 않거나 삼위 하나님 중 일위의 이름만 거론하여도 믿음으로 알고 받을 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2)이 축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행하는 사역자가 선포할 수 있으니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시행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교회 시대에는 사도가 없지만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례를 베풀 수 있는 사역자이면 시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 선포는 주님의 사역이라도 증언할 수 있는 성도가 많지만 교회를 대표하는 당회장과 성례는 목사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헌법은 목사의 고유직으로 축도와 당회권을 맡게 하였습니다.(정치 4장 3조 1항) 따라서 그리스도 사역의 대행권을 가진 직분자(목사)만 축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3)이 축도의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벧전 5:14) 혹 축도를 할 때 모든 대상을 포괄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스도의 중보 역할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특별하게 전달되는 복을 일반인에게 까지 전달하여서는 안되며 또 선포하여도 믿음으로 받지 않을 것이므로 효력이 없습니다.

4. 축도는 축복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1)축도란 말은 “기도로 빈다”는 뜻이 있지만 실제 의미는 기도의 성격을 떠나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어의 의미보다 실제적 의미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간다”(고전 4:12)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2)축복이란 복을 빌되 “기도로 빈다”는 뜻입니다. 복을 비는 성도의 경건성, 또는 하나님과의 친교 정도에 따라 축복의 효력이 더하고 덜할 수는 있겠지만(민 6:23-27) 하나님께서도 모든 성도가 축복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특권을 주셨습니다.(딤전 2:8, 창 24:60) 성경에는 제사장이 축복한 사례(창 14:19, 삼상 1:17)와 선지자가 축복한 사례(창 27:33, 48:9)와 왕도 선지자 입장에 있을 때 축복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왕상 8:55) 또 예수님은 복의 근원자로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을 위하여 축복하라”(마 10:12-1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믿음으로 받을 때 효력이 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 효력이 축복자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도로 복을 비는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도는 복을 전달하는 것이고, 축복은 기도로 비는 것임을 구별할 수 있으면 됩니다.

5. 그런데 축도를 손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할 때 이것은 축도의 외형적 표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기도할 때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8:22)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높은 보좌에서 내려 주시니까 그 복을 구하는 의미로 손을 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도하는 방법과 자세가 되어(다 그런 것은 아님) 이사야 선지자도 기도로 구하는 것을 “손을 편다”(사 1:15)고 하였습니다. 또 신약에서 딤전 2:8을 보시면 “각 처에서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손은 “거룩한 손”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결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손을 든다”는 것은 간절함을 나타내는 기도의 자세(표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도도 한 손 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두 손을 다 들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손을 안 들고 말로만 선포하였다 하여 효력이 없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결론적으로 축도할 때는 복의 근원자와 복의 내용과 복받는 대상을 확실하게 할 것과 기도로 비는 뜻보다 선포, 전달의 의미를 앞세울 것과 “축원한다”는 용어보다 “있을지어다”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또 “계실지어다”란 용어보다 “있을지어다”가 더 합리적입니다. 그 이유는 “축원”이란 기도로 비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계셔야 하되 하나님의 은혜는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