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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먼저 드리는 글 3

목 차 4


제1과 고린도전서 서론 (고전 1:1~3) 7 바로가기

제2과 감사와 확신 (고전 1:4~9) 10 바로가기

제3과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할 것 (고전 1:10~17) 13 바로가기

제4과 십자가의 도와 관련된 사항들 (고전 1:18~25) 16 바로가기

제5과 세상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고전 1:26~31) 18 바로가기

      설교보충 1. 주님과의 교제 (고전 1:9) 21 바로가기

      설교보충 2. 분쟁의 원인과 처방 (고전 1:10~13) 24 바로가기

      설교보충 3.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 26 바로가기

      설교보충 4. 자랑할 것과 말 것 (고전 1:28~29) 28 바로가기

제6과 십자가의 증거 (고전 2:1~5) 31 바로가기

제7과 하나님의 지혜의 성격 (고전 2:6~9) 33 바로가기

제8과 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 (고전 2:10~16) 35 바로가기

      설교보충 5. 세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37 바로가기

제9과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9) 39 바로가기

제10과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41 바로가기

제11과 자기를 속이지 말라 (고전 3:16~23) 43 바로가기

      설교보충 6. 세 가지 문제점 (고전 3:1~9) 45 바로가기

      설교보충 7. 사도의 사명과 은사 (고전 3:10~11) 47 바로가기

      설교보충 8.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50 바로가기

      설교보충 9.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6~23) 53 바로가기

제12과 완전한 판단 (고전 4:1~5) 55 바로가기

제13과 교만한 마음을 버릴 것 (고전 4:6~13) 57 바로가기

제14과 사랑의 권면과 책망 (고전 4:18~21) 60 바로가기

      설교보충 10. 판단과 자책 (고전 4:3~5) 62 바로가기

      설교보충 11. 말씀 중심 생활 (고전 4:6) 65 바로가기

제15과 범죄와 징계 (고전 5:1~13) 68 바로가기

      설교보충 12. 징계를 촉구하심 (고전 5:1~13) 71 바로가기

제16과 성도의 일반적 송사 (고전 6:1~8) 74 바로가기

      (참고자료) 성도의 일반적 송사 문제 (마 5:25~26) 76 바로가기

제17과 세 가지 범죄를 경계하심 (고전 6:9~19) 81 바로가기

      설교보충 13. 성도간의 송사 문제 (고전 6:1~11) 84 바로가기

      설교보충 14. 은혜와 절제 (고전 6:12, 10:23~24) 86 바로가기

      설교보충 15. 성도의 육체와 건강 (고전 6:12~20) 88 바로가기

제18과 결혼과 관련된 교훈 (고전 7:1~6) 91 바로가기

제19과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17~40) 94 바로가기

      설교보충 16. 독신주의와 결혼 (고전 7:1~9) 96 바로가기

      설교보충 17. 새 가정의 출발 (고전 7:1~7) 98 바로가기

      설교보충 18. 주께 속한 자유자 (고전 7:18~24) 100 바로가기

      설교보충 19. 바울의 결혼관 (고전 7:25~40) 103 바로가기

      설교보충 20. 단축한 때의 생활 (고전 7:29~31) 105 바로가기

제20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고전 8:1~13) 108 바로가기

제21과 사도된 증거와 특권 (고전 9:1~15) 111 바로가기

제22과 전도자의 승리적 자세 (고전 9:16~17) 114 바로가기

      설교보충 21. 바울의 사명 생활 (고전 9:1~15) 116 바로가기

      설교보충 22. 영적 운동회 (고전 9:24~27) 118 바로가기

      설교보충 23.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27) 120 바로가기

      설교보충 24. 두 가지 상급 (고전 9:25~27) 121 바로가기

제23과 역사의 거울 (고전 10:1~13) 123 바로가기

제24과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33) 126 바로가기

      설교보충 25.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 하심 (고전 10:1~7) 128 바로가기

      설교보충 26. 광야의 역사적 교훈 (고전 10:1~11) 131 바로가기

      설교보충 27.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0:13) 134 바로가기

      설교보충 28. 시험과 위로 (고전 10:13) 137 바로가기

      설교보충 29. 양심의 자유와 절제 (고전 10:23~33) 139 바로가기

      설교보충 30. 이상적 신앙 생활 (고전 10:31~33, 약 1:27) 142 바로가기

      설교보충 31. 영광을 위한 방편 (고전 10:31~33) 145 바로가기

      설교보충 3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고전 10:31) 147 바로가기

제25과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1~16) 150 바로가기

제26과 성찬 예식에 관한 교훈 (고전 11:17~34) 153 바로가기

      설교보충 33. 주님을 본받는 법 (고전 11:1) 155 바로가기

      설교보충 34. 무엇을 본받을까요? (고전 11:1) 157 바로가기

      설교보충 35.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3~16) 161 바로가기

      설교보충 36. 살펴야 할 것들 (고전 11:28~32) 164 바로가기

      설교보충 37. 성찬의 교훈 (고전 11:17~34) 166 바로가기

      설교보충 38. 성도의 친교 생활 (고전 11:17~22) 168 바로가기

      설교보충 39. 자기를 살피라 (고전 11:28~32) 170 바로가기

제27과 신령한 은사 (고전 12:1~11, 28~31) 172 바로가기

제28과 은사의 유기적 관계 (고전 12:12~27) 175 바로가기

      설교보충 40. 은사를 선용하라 (고전 12:4~11) 177 바로가기

      설교보충 41. 몸과 지체 (고전 12:12~27) 179 바로가기

      설교보충 42.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 (고전 12:31) 181 바로가기

      설교보충 43. VIP 신앙 (고전 12:31) 183 바로가기

제29과 사랑의 중요성과 실천 방도 (고전 13:1~7, 13) 186 바로가기

제30과 온전한 것을 추구함 (고전 13:9~12) 188 바로가기

      설교보충 44. 사랑의 가치 (고전 13:1~3, 13) 189 바로가기

      설교보충 45. 사랑과 실천 (고전 13:4~7) 192 바로가기

      설교보충 46. 항상 있을 것 세 가지 (고전 13:13) 195 바로가기

제31과 방언과 관련한 교훈(1) (고전 14:1~19) 198 바로가기

제32과 방언과 관련한 교훈(2) (고전 14:20~40) 200 바로가기

      설교보충 47. 방언에 대한 고찰 (고전 14:26~33, 39~40) 203 바로가기

      설교보충 48. 적당하고 질서있게 (고전 14:13, 40, 살후 3:6) 205 바로가기

제33과 부활의 당위성 (고전 15:1~30) 207 바로가기

제34과 부활의 형태 (고전 15:31~58) 211 바로가기

      설교보충 49. 바울이 전한 복음 (고전 15:1~11) 214 바로가기

      설교보충 50. 되는 것과 하는 것 (고전 15:8~11) 217 바로가기

      설교보충 51. 바울의 겸손 (고전 15:8~11) 220 바로가기

      설교보충 52. 흔들리지 않는 신앙 (고전 15:57~58) 223 바로가기

제35과 연보문제와 교역자 동정 (고전 16:1~12) 225 바로가기

제36과 권면과 결론 (고전 16:13~24) 228 바로가기

      설교보충 53. 바울의 부탁 (고전 16:1~12) 230 바로가기

      설교보충 54. 믿음과 봉사 (고전 16:13~24) 232 바로가기

      설교보충 55. 시원케 하는 성도 (고전 16:15~18) 235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고린도전후서 및 갈라디아서의 강론집을 정리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밝히는 사명(빌 2:16)과 건강과 시간을 주시지 않았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성경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깊고 오묘한 뜻을 넉넉하게 밝히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평신도보다 나은 지식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록하는데 역점을 두었을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목회의 잔유물로써 내가 증거한 것을 남겼다”는데 만족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 강론집이 다른 문서들과 함께 출판 또는 홈페이지를 통하여 널리 보급되고 읽혀져서 많은 성도들에게 성경의 지식 승화에 도움을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행운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1 과 고린도전서의 서론 (고전 1:1-3) 목록으로


지금부터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 241번과 242번(P630-633)에 고린도전․후서의 개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꼭 읽으십시오.

또 신앙의 발전책으로 성경을 믿는 신앙에서 읽고 배우고 연구하며 지키는 신앙으로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세밀하게 살피는 습관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는 헬라 남부의 항구도시로 고대 문화의 발생지이며 외국과의 문화 교류의 발생지였다고 합니다. 또 우상숭배가 심하고(세라피스 신전, 아프로디테 신전 등) 부패와 향락의 도시였다고 합니다.(롬 1:18-32)

행 18장에 보시면 주후 51년경에 바울 사도가 2차 선교 여행시에 핍박에 쫓기며 이 곳에 왔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선교할 때 전도자요, 장막 기술업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거주하였던 유대인들이었는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외국인을 축출하는 바람에 고린도로 좇겨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사역을 돕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였을 것입니다.(롬 16:3-4)

또 같은 시기에 마게도냐 지역에서 사역하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 와서 강한 훼방을 무릅쓰고 합력 선교를 한즉 회당장 “디도유스도”가 자기 집을 집회소로 제공하였고, 또 다른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가족이 믿음에 돌아오면서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1년 6개월을 지난 후에 또 성경학자 “아볼로”가 와서 상당기간 교육활동을 하였습니다.(행 19:1-20)

이런 과정으로 고린도 교회가 설립된 후 바울 사도는 3차 선교여행차 에베소에 계셨는데(행 18:19. 19:1)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11절) 고린도교회 상태에 상응하는 서신을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내용을 구분한다면 ① 편지를 보낸 사람(1절) ② 편지를 받을 대상(2절) ③ 축복을 기원함(3절)으로 나누어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1. 편지를 보낸 사람(1절)

1)편지를 보낸 사람은 “바울과 소스데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소스데네”에 대한 내용은 성경인명 사전을 보시면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소개는 너무 긴 내용이어서 생략하고 “소스데네”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소스데네”는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선교할 당시인 주후 50년 경에 고린도에서 회당장직을 맡았던 사람입니다.(행 18:17) 그 당시에 “그리스보”란 다른 회당장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보”는 바울사도의 전도를 받고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으나(행 18:18, 고전 1:14) 그가 핍박을 받은 기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스데네”는 바울의 전도로 믿음과 사명을 갖고 바울을 따른 이유로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송사를 받았을 때 함께 법정으로 끌려가 매를 맞고 풀려난 사실이 있었습니다.(행 18:17)

2)그런데 과연 이 편지를 “바울과 소스데네”가 함께 쓴 것인가?할 때 내용은 바울사도가 영감을 받아 기록하셨고, “소스데네”는 바울과 함께 있던 사역사로써 송신자의 명단에 오른 것 뿐입니다.

3)송신자 바울과 및 소스데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① 그렇다고 하여 “소스데네”까지 사도가 된 줄로 아시면 안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후 1:1에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디모데”는 사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것을 바울까지란 뜻으로 이해하시고 “소스데네”나 “디모데”는 사역자 된 일에 대하여만 “하나님의 뜻에 의함”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소스데네”나 “디모데”는 사도로 사역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란 직임은 다른 사역자와는 달리 특수한 직임이요, 특수한 은사가 동반된 사실을 사도행전 강해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② 바울사도는 자신의 계획이나 노력으로 사도직을 쟁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받았으니 이 말씀의 원문적 의미는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δία θελήματος θεοω)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따라 받는 과정”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적 노력이 배제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실 때 “인간적 노력을 포함하신다”고 하셨습니다.(빌 2:13)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싶을 때 목표와 소원과 노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도 힘쓰는 자가 뺏는다”(마 11:12)고 하셨으니까요.(천국을 뺏는다 함은 천국 생활의 진미를 노력으로 더 많이 맛보게 된다는 뜻)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받는다”는 뜻은 첫째 부정이나 욕심같은 죄악이 개입되지 않고 그런 결과에 이르도록 주위에서 역사해 주시는 섭리에 따라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자기 일에 열심할 때 하나님이 그 배를 “아라랏”산에 머물도록 바람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과 같고 또 다윗이 왕되는 과정도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자기를 앞세우지 말고(마 12:19) 행사의 목적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두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바울을 사도로 세우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도의 직분과 사도된 신분이 오로지 예수님께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종속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바울과 그의 사도직도 주인의 종된 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교훈은 바울에게는 개인적 욕구 성취를 위한 자유가 없고, 오직 예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여 쓰신다는 뜻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편지를 받을 대상에 대하여(2절)

1)편지 받을 대상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이며.....또 “각처에서 우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 하셨으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교회”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하시므로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닌 성도 자신들임을 나타내셨습니다. ①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짐”은 예수를 믿는 자가 예수님의 속죄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히 9:14, 딤전 4:5) 그 인격이 성결하여짐을 뜻합니다. 이것은 구원 과정상 “성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② “성도라 부르심을 입었음”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그의 원하시는 시기에 성도되게 하시기 위하여 세속된 세계에서 불러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란 “거룩한 무리”의 뜻도 있지만 세속에서 불러 내셨으므로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었다”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성도된 자는 세속을 등진 자처럼 구별되게 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신앙의 외식자가 아니요, 진실한 성도이며 성경을 주신 대상도 역시 진실한 성도에게 주신 말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축복을 기원함에 대하여(3절)

1)모든 서신의 서론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신분을 밝힌 다음 안부를 묻거나 전하고 축복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 사도도 축복을 기원하였습니다.

2)축복은 사람이 할 수 있으나 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하신 것이 복의 근원자를 소개한 것입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 한 분으로 복의 근원이 되시지만 삼위일체의 사역을 생각할 때는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복의 근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고후 13:13) 그런데 본문에서는 성령님을 생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적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은 계획자이시며 예수님은 성취자이시고, 성령님은 전달자이신데 이 말씀에서는 근원자만 소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축복의 내용은 “은혜와 평강”이니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모든 선물이 풍성할 것을 기원하신 것이고, “평강”은 주신 은혜의 결과로서 영육간의 건강을 소원하신 것입니다.

4)그리고 이 축복의 방법은 축도가 아닌 기도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16:24과 고후 13:13과 대조할 때 선포의 형식보다 소원기도의 성격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기도에 예수님의 이름이 중보로 사용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요 14:14말씀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들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 과 감사와 확신 (고전 1:4-9)목록으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감사와 확신의 내용”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셨고, 5-6절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게 되었음”을 감사하셨으며 7절에서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 없이 주신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또 8절에서는 “성화(聖化)가 완성될 것을 확신한다”하셨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확신한다”하셨기 때문에 세 가지 감사와 두 가지 확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1. 감사 내용에 대하여(4-7절)

1)바울의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그들(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감사의 내용은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②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엡 1:4에 보시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그리스도 안에서”란 예수님이 구속 사역에 동의하신 것을 의미하며 그의 십자가 사역을 전제로 하여 구원의 대상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③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사역을 하신 것처럼 저희들은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시행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일반적으로 해석할 때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7:21, 고전 7:39) ④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 주신 것을 항상 감사하셨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그들을 사랑한 증거요, 또 전도의 결실을 얻게 하심에 대하여 감사하신 것입니다. 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셨다”는 말씀에서 저희들은 감사 아닌 것이 저희들 생활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2)“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게 되었음”을 감사하셨습니다.(5-6절) 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게 되었음(6절)은 전도를 확실하게 잘 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적 노력으로 성취되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은혜란 5절의 “그의 안에서”(예수님의 은혜로써)란 말씀이 증거하고, 인간의 노력은 5절의 “모든 일 즉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이란 말씀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구변은 말씀(λόγος)이란 뜻으로 진리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잘 되려면 증거자의 구변도 좋고 받는 자들의 지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란 전도에 대한 다른 조건들도 좋았다는 뜻입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에서 좋은 전도의 조건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로 전도를 하러 갑니다. 전도가 잘 되려면 진리와 은혜를 갈망할 만한 환경의 조건이 있어야 하며 전도자의 구변과 받는 자의 지식적 바탕이 구비될 때 증거의 효력이 있는데 고린도 교회가 그런 조건에서 전도를 받았으므로 효과적이었음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3)“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음”을 감사하셨습니다.(7절) ① 은혜가 일반적 또는 보편적 축복이라면 “은사”는 신앙생활을 위한 특별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의 종류가 고전 12:4-11, 28-31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은사에 대하여 부족함이 없을 만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② 또 그들은 그런 은사의 풍족함 속에서 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 것”입니다. 말세와 예수님의 재림을 임박한 줄로 믿고 기다린 것이 초대 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때가 가깝다”, “속히 될 일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1:1,3, 22:20)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살전 5:2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온다”하시므로 어느 시대의 성도이건 항상 깨어 준비할 것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생활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은혜를 받고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확신한 내용에 대하여(8-9절)

1)바울은 “주께서 성도를(너희)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성도가 궁극적으로 성화될 것을 확신하신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날”이란 시대의 종말로써 심판하실 때를 의미하며 ②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심”은 곧 예수님 앞에서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책망받을 일이 없음은 죄지을 가능성이 없음을 뜻하며 따라서 거룩이 완성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영과 육의 부패성을 없애는 일이요(고전 7:1), 천국 백성으로서의 성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거하는 동안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다가(딤전 4:5)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고후 5:1-10) 완성되어 부끄러움 없이 주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님의 도덕적 형상을 다 닮지 못하였어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많이 닮으려 해야 하고, 또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 완성될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① “미쁘다”는 단어는 “아름답고 진실하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진실하심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② 그런데 그 하나님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렀다”는 뜻은 1:2의 의미와 같고, 부르신 목적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심”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방법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요 1:1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하셨고, 요 14:6에서 “진리는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예수님이 마음 속에 계셔야 한다”(고후 13:5)하셨고, “그의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후 13:8)하셨으니 항상 성경을 묵상하고(시 1:2), 사랑하며(시 119:97) 탐구하고(시 119:103) 지키기를 노력하는 것(시 119:106)이 곧 주님과의 교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얼마나 예수님과 가까이 교제하십니까? 베드로 사도는 벧전 1:8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성화의 확신을 갖고 노력하실 일과 하나님의 미쁘심을 확신함은 물론 항상 예수님과 교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을 교훈받게 된 것입니다.

 

 

제 3 과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할 것 (고전 1:10-17)목록으로


이 말씀을 살피면 전체의 내용이 맨 끝에 말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① 10-13절의 말씀은 “분쟁을 지양하고 온전히 합하라”는 말씀이요 ② 14-16절은 “바울이 세례를 함부로 베풀지 않은 것을 감사한 내용”이며 ③ 17절 말씀은 “바울의 맡은 사명이 십자가를 나타내는데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편당을 지어 분쟁을 하거나 믿음의 확신과 덕이 부족한 사람이 교인(성도) 노릇을 하거나 전도자가 인간적 지혜를 부각시킨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어지는 결과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체의 내용이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할 것”을 교훈하신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1. “분쟁을 지양하고 온전히 합하라”하심(10-13절)

1)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형제들”로 호칭하여 친근감을 나타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하심”은 예수님을 대리하여 말씀하심을 뜻합니다. 이 권면의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므로 주님의 권면이 되는 것입니다.

2)권면의 내용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여 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10절) ① “같은 말”이란 모든 성도가 목적을 일치하여 그 목적에 부합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생활을 하는데는 그 목적이 교회적 사명을 수행하는데만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나 사랑에 관한 것 또는 십자가를 전하는 것에 목적을 일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같은 마음과 같은 뜻”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부합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③ 목적이 같으면 말과 뜻도 같아지므로 이 사상적 일치에 근거하여 온전히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의 종파 문제도 교리적 사상과 실천적 사상(도덕적인 면과 의식적인 면)이 일치할 때 온전히 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다른 곳에 계실 때에 고린도 교회 성도인 “글로에”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11절)

4)분쟁의 내용은 파당 싸움이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이 존경하는 지도자를 내세워 바울파로, 아볼로파로, 게바파로, 또 그리스도에게 속한 파로 따로 뭉쳐서 서로 대립하는 상황으로 분쟁을 한 것입니다. 요즈음 대통령 후보 3인을 중심으로 국민들의 인심이 갈리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그같은 양상으로 편당을 만들었던 것입니다.(12절) 교회안에서 편당을 만들거나 편당끼리 수근수근 하거나 사랑의 교제를 균등하게 하지 않는 것은 불화를 조성하는 원인이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은사를 자기의 뜻대로 각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고전 12:11) 모든 성직자의 은사적 소질이 같을 수 없고 따라서 각각 특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반석을 뜻하는 베드로를 아람어로 번역한 말;요 1:42)도 각각 특징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도들은 자신과 공감성이 많은 사역자를 중심으로 그를 지지하고 단결하게 되므로 계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교회 전체의 친교적 보편성을 상실함은 물론 사랑을 해치게 되고 신앙적 단결도 이룰 수 없게 되어 성회의 큰 암초가 되는 것입니다. 각 계파의 중심 인물의 특징을 살피면 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로 모든 은사면에 다양하지만 전도자의 입장인지라(17절) 자주 그곳을 떠난 상태에서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고 ② “아볼로”는 성경학자로써(행 18:24-28, 19:1, 딛 3:13) 교인들에게 인기를 끌만한 매력이 있었으며 ③ “게바”는 베드로(반석)를 뜻하는 아람어로 바울이 자주 사용하였습니다.(3:22, 9:5, 15:5, 갈 1:18, 2:9,11,14)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직을 받음으로써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④ 그리스도파는 인간 계파를 반대하는 신앙적 단체 같기도 하나(고후 10:7) 비판적 계파에 등장한 것으로 볼 때 부정적 의미가 없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성도는 주 안에서 믿음 생활만 잘 하고 인간 단체끼리 대립하는 계파에 편중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12절에서 각 계파의 요원을 1인칭 단수로 표현하였지만 11:18-19에서 편당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계파의 대표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5)바울사도께서는 이런 계파간의 분쟁을 없애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13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활 모범에 맞지 않고 또 인간 중심으로 계파를 만드는 것은 명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①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다스리실 때 인간별로 계파를 만드신 일이 없으셨고 ② 예수님은 구세주이시지만 바울은 누구를 위하여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일이 없으며 ③ 또 계파에 속하여 분쟁하는 자들 중에 바울이 구원을 제공하는 뜻으로 세례를 준 일도 없고 특별한 인연을 가진 자도 없었던 것입니다.(15절) 설령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준 것인즉 그런 인연으로 계파를 만들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이 함부로 세례 베풀지 않은 것을 감사함(14-16절)

1)바울은 자기로부터 세례를 받은 자가 계파 싸움을 하면 어찌 하나?하고 자기로부터 세례받은 자를 떠올려 본 즉 “그리스보”와 “가이오”가 생각났습니다. 성경에 “가이오”가 네 사람 있습니다만(행 19:29, 요삼 1, 행 20:4) 이 “가이오”는 고린도 사람으로 바울의 식주인을 한 사람이요(롬 16:23) “그리스보”는 고린도에서 회당장을 한 사람입니다.(행 18:8)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분쟁하는 성도들 중에는 바울에게 세례받은 자가 없음을 감사하였으니 이 말씀이 곧 “너희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신 말씀”입니다.(14절) 세례를 줄 때는 신앙과 도덕성이 투철하여 덕을 세울 수 있는 자임을 확인하고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28:19)

2)바울이 세례와 관련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혹 다른 사람 중에 누구라도 바울로부터 세례받은 것을 내세워 바울당파를 만들거나 서로 대립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15절) 바울은 인간을 중심한 파당이나 세력 확보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3)바울은 또 세례베푼 대상을 계속 생각하다가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에게도 주었음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 세례를 더 주었는지에 대하여는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알지 못한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16절) 14절에서는 세례베푼 대상을 확실히 아시는 듯이 표현했으나 16절에서는 인간의 기억에 한계가 있음을 시인하였습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영감하시는 일일지라도 그 부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바울 사도 자신의 생각하는 정도를 그대로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은 바울이 “아가야” 지역에서 처음으로 얻은 전도의 열매였고,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가족이며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바울을 방문한 일이 있었던 사람입니다.(고전 16:15-18)

3. 바울의 맡은 사명이 십자가를 나타내는데 있음(17절)

1)17절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특정 지역에 머물러 사역하는 목회적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을 각처에서 전하는 전도자적 사명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한 곳에 오래 있으면서 성도를 잘 가르쳐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필요에 따라 세례를 베풀 수도 있지만(행 8:38) 각 처로 다니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그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았습니다.(행 9:15)

2)그리하여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권위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의 지혜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스스로의 권위를 지닌 것이고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심에 있어서도 무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말과 표현을 잘못하면 십자가의 공로나 권위를 소극적으로 나타내고 인간의 인기를 고취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광이 어두울 때 빛나는 것처럼 사람의 지혜로운 말 즉 인간의 지식이나 웅변이나 황홀한 의식이나 독특한 재간을 나타내 보일 때 사람만 부각되고 십자가의 은혜가 감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십자가만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다른 지혜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보다, 훌륭한 성직자를 더 잘 알고 있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보다 교회직분이나 성물 등에 더 뜨거워져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씀처럼(요 3:30) 사람의 인기는 쇠하여지고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은총만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증언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말의 지혜”란 예수님보다 인간 쪽을 편들게 하려는 세상지식이나 감언이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 여러분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분쟁을 피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또 계파에 가담하여 편벽된 교제나 대립을 피하고 항상 공의롭게 친교하며 세례받은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다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하여 인간을 들레지 않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십자가의 도와 관련된 사항들 (고전 1:18-25) 목록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모두가 “십자가의 도와 관련된 사항들”입니다. 18-21절 말씀은 “십자가의 도와 인간의 지혜”에 관한 말씀이요, 22-24절은 “십자가의 도와 각종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며 25절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우월성”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십자가의 도와 인간의 지혜에 관한 말씀(18-21절)

1)18절에서 말씀한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도를 의미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대속의 희생이 없이는 죄를 용서하실 수 없었습니다.(살후 1:6-7) 그래서 자기의 죄없는 영원한 독생자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심으로써 대속의 죄짐을 지게 하시고 그 사실을 믿는 자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시는 방도입니다. 모든 성도는 반드시 “십자기의 도”의 뜻을 확실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십자가의 도를 받는 대상은 모든 인류이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얻는 성도(우리)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효력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① 멸망하는 자들은 비택자들입니다. ② 그들에게 “2000년 전에 유대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분이 죄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당신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인즉 믿으시요”했을 때 한낱 동화나 신화로 듣고 외면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리를 미련한 말 또는 웃기는 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심령이 아니고는 그 말을 믿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구원을 얻은 자 즉 선택을 받고 거듭난 자는 그 사실을 그대로 믿게 되며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여기의 “능력이 된다”는 뜻은 죄인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과 부활시키는 일과 또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3)“십자가의 도”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철학과 이론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십자가로 구원하시는 일)를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로 선민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실 때부터 인간적 지혜와 총명을 쓰지 못하도록 작정하시고 미리 예언하게 하셨으니 그 말씀이 19절의 말씀이며 주전 700년 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사 29:14) 십자가를 인간이 이해함에 있어서 지혜자의 지혜나 명철자의 총명으로는 가리워지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며 아울러 십자가의 도는 믿음으로만 받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4)그 결과로 지혜자나 선비나 변사라도 하나님이 세상적 지혜를 미련하게 또는 무용지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자나 선비나 변사는 세상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21절의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지혜로써 “십자가의 도리”가 가장 큰 지혜이며 “자기 지혜”란 세상적 학문이나 이론을 뜻하는데 후자로 전자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① “전도의 미련함”이란 뜻은 세상적 이론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구원의 도리를 전파함”이요 ② 이 사실을 하나님의 지혜로 알고 믿는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믿는 자에게 거듭나는 은혜를 먼저 주셨고(요 3:3), 세상의 지혜만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구원의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마 11:25-26)

2. 십자가의 도와 각종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22-24절)

1)십자가의 사건이 있기 전에 유대인들(선민)은 예수님이 유대땅에서 많은 기적을 나타내심을 듣고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서 표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한 것은 좋지 않은 것이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책망하시고, “요나의 표적(십자가와 부활)을 보여주신다”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2:38-39) 그러나 헬라인(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인간적 지혜(철학)만을 찾았습니다.(22절)

2)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전도자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히 전한 것입니다. 이 때에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거리끼는 것이라”하였고, 이방인들은 역시 동화와 같은 미련한 말로 여기에 되었던 것입니다.(23절)

3)그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거리끼게 받고 미련하게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가 이 도리를 믿을 때는 유대인(선민)이나 헬라인(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그대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4절)

3.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우월성(25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상대적 지혜와 힘에 비교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고의로 미련하심을 나타내신다 하여도 피조물인 인간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이 가장 약하게 힘을 쓰셔도 사람의 강함보다 나은즉 이 사실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 18:15에 보시면 “하나님은 그의 콧김으로 물 밑을 드러내신다”하셨습니다. 또 말씀 한 마디로 만물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엄청난 힘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노력하되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을 항상 의지하여야 할 것이고 또 인간이 무슨 일을 한다하여 절대로 교만을 나타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 5 과 세상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고전 1:26-31) 목록으로


이 말씀을 두 번쯤 읽으시고 목적과 핵심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십시오. 29절에서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하셨고, 32절에서는 “주안에서만 자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들은 “세상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1. 왜 세상 지혜를 자랑할 수 없는가?할 때

1)하나님이 구원사역을 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사역자들을 보면 거의가 세상적 지혜나 능력이나 문벌 등에 대하여 유력한 자들을 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자도 많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세상 지식이 일반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이 전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데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지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나 받아들일 때에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를 택하실 때도 가급적 세상적 지혜와 능력과 문벌이 없는 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십자가만 전하면 되니까 구태여 지식인을 쓰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그 지식을 필요로 할 데가 많겠지만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을 믿게 하는데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 11:25-26을 보시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자기들의 지혜로 비판하는 사람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믿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이므로 지식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들이 전도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 대통령이나 대학교 교수가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될 것 같지요. 그렇다면 다른 대통령이나 유명한 학자들이 기독교의 원리(십자가의 복음)을 몰라서 안 믿습니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내용을 알지만 자기들의 지혜로 십자가의 복음을 비판하기 때문에 못 믿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 원인으로는 거듭나지 못한데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대통령이 “복음은 이런 것인데 믿읍시다.”했을 때 전도를 받은 자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좋지만 대통령을 보고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이라면 별볼일 없는 신앙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다” 또는 “복음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믿었다”해야 복음을 믿는 것이지요. 복음도 잘 모르면서 대통령이 믿자고 해서 믿었다면 알맹이 없는 밤송이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들이 물량주의로 전도하려고 애를 쓰지만 실제 열매는 복음으로만 맺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각종 물고기를 잡아 온 그물과 같아서 끌어낸 다음에는 다시 좋은 것만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린다”(마 13:47-48)고 하신 것입니다.

2)27-28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이루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세상 지혜를 배척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지식을 가진 자들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최고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지식이나 인간을 내세우지 않는 자)들을 사역자로 택하여 ”지혜있다“는 자들을(구원의 은혜에서 따돌려) 부끄럽게 하시고,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또 이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즉 자기의 지혜로 복음을 비판하는 자들)을 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폐한다”는 뜻은 쓰레기처럼 내버린다는 뜻입니다. 쓰레기를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쓰레기란 쓸데 없는 물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창조자의 목적에 쓸데 없으면 버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 육체라도(πάσα σάρξ;모든 부패성 있는 인간들) 하나님의 지혜를 높일 줄 모르는 세상적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28절)

3)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이 인간의 지혜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입니다.(30절) 30절에 보시면 성도가 구원받는 과정을 말씀하셨는데 ① “하나님께로부터 낫다”하시므로 거듭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원문에는 거듭난 뜻이 없음;요 3:3, 엡 2:1, 요일 3:9)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고는 복음을 받을 수 없는데 이 거듭난 은혜가 인간의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성경에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였거나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찾아 오셔서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요 15:16, 마 28:20)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요일 1:5-6에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하시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이것도 복음을 영접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예수님을 본받아 살게 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 ③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도 예수님이 주신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가 구원받는 일에 공로를 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30절 중간에 보시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보내심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뜻함)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인간의 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헬라인들은 철학을 너무 숭상하였기 때문에(1:22) 바울 사도께서는 구원받는 일이 인간의 지혜나 철학으로 되지 않는 것임을 더욱 강조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지혜라고 하셨습니다.(24절) 따라서 예수님이 구원받는 우리의 지혜가 되시려면 우리가 그 예수님을 영접해야 되는데 그 영접하는 힘이 곧 믿음이고 그 믿음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히 12:2) 그러니까 세상 지식은 자랑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의로움”을 주셨는데 이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정죄받을 죄가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책을 십자가로 대신 짊어지셨는데 이렇게 대신 벌받으신 것을 “구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대속)은 “의롭게 해 주시는 방법”에 속하는 것입니다. 또 “거룩함을 주신다”하셨는데 이 “거룩”은 예수님의 인품을 닮게 하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부패성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제거하는 것이고(딤전 4:5)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린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므로(창 1:27, 롬 8:29) 천국에 거할 수 있는 깨끗한 신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원받는 모든 일이 하나도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지혜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문이 부족해도 구원받고 영광을 돌리는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2. 마지막으로 “이런 사실이 구약 성경에 이미 기록되었다”고 31절에서 소개하신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는 말씀이 렘 9:23-24에 기록된 것을 소개하셨습니다. 렘 9:23-24에 보시면 “지혜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용맹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진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는 것이라 하나님은 그런 일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의미상으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시고 믿음과 구원과 축복은 인간의 지혜를 앞세워 성취하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 지혜와 힘을 내세워 일하려 하지 마시고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게 믿고 순종을 잘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역사하시는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 주님과의 교제 (고전 1:9)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이는 미쁘시도다”하시므로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그의 아들 예수님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과 교제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과 교제한다는 뜻과 방법”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우선 주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교제한다”는 “코이노니아”(κοινονία)는 “사귄다”는 뜻과 함께 연대적 일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1)그렇다면 우선 저희들은 주님과의 교제에 앞서서 “예수님과 나는 하나라”는 연대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연 성도들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입니다.(사 56:6) 롬 6:5에 보시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하셨고, 요 15:4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주님과 연합하여 일치관계를 가지면 “주님의 것이 곧 내 것이라”는 소유권도 따라 붙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내 부활, 예수님 승리 내 승리, 예수님 천국 내 천국”이란 노래 가사처럼 되는 것입니다. 고전 3:21-23에 보시면 “만물은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이렇게 주님과의 연합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써 연대일치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2)“코이노니아”의 뜻은 “사귄다”는 뜻이 있으니까 예수님과 사귀는 일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사귄다”는 뜻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 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우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는 친분적 교제요, 또 사랑의 교제입니다.(행 2:42, 갈 2:9) 그런데 고전 10:20을 보시면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침례교 목사가 “자기는 귀신을 잘 안다 귀신을 잘 쫓아낸다”고 하였다가 이단으로 몰린 사실이 있는데 귀신과의 교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할 때 거짓에 동참하거나(요 8:44) 범죄에 접근하는 것(요일 3:8)이 마귀와의 교제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처음부터 범죄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와의 교제는 사랑의 교제이고 마귀와의 교제는 범죄적 작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의 교제는 어떤 것인가?할 때 그것은 영적 교제요, 신앙적 교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또 빌 2:1에 보시면 “성령의 교제”란 말씀이 있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요 16:13)하셨으니까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성령님과의 교제일 것이요, 또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였는데(창 5:24, 6:9) 동행은 분명한 교제이니까 어떻게 동행하였는지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와 보라“하여 그 계신데를 찾아가서 그 날 함께 거하였다”(요 1:38-39)하셨으니 하룻밤 한 집에서 거처한 것은 분명한 교제요, 또 계 3:20에서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이 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씀하신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와 육신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으니까 이 문제를 영적 신앙생활로 대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1)예수님에 대한 풍족한 신뢰감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감을 강하게 가지셔야 할 이유 4가지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이 진실하시고 영원하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이고 ② 사랑이 많으시고 자상하신 분이기 때문이며(막 8:13) ③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기 때문이고 ④ 과거와 현재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강한 신뢰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는 말씀이 곧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32:10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고 하셨습니다. 건강이나 기술이나 모아놓은 재물을 의지하지 마시고 꼭 예수님께 대한 강한 신뢰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 1:1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하나님 대하듯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로 대화를 하거나 편지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이 길을 걷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나 같이 길을 간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 불편없이 친교를 나누며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듣고 연구하며 지키는 생활이 바로 주님을 교제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하는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보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내가 주의 법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시고.......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40,43),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시 119:125)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3)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눅 18:1과 살전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꼭 자세를 갖추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소원, 마음의 묵상도 기도인 것입니다. 마음의 묵상을 빼면 쉬지 않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시 19:14에 보시면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하였고, 시 104:34에서는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원한다”하였으며 시 37:4에서는 “하나님을 기뻐할 때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격식을 갖춘 기도는 포장한 선물과 같은 것이고, 마음의 묵상은 포장없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다 선물의 효력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반가운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사모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가운 대상이니까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셔야 합니다. 그때에 기도할 환경이 적당하지 않으면 마음의 묵상으로 기도하시면 되고 그런 생활이 습관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딸이 친정에 와서 그 부모에게 자기 사정을 자세하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그런 태도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생활이 곧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4)마지막으로 주님과의 교제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 세계에서도 뜻이 안 맞으면 교제를 못합니다.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않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자기의 뜻과 생활을 예수님의 뜻과 생활에 맞출 때 주님과의 교제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연합이 엉성할 때는 예수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잠 8:20에 보시면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려면 예수님과 한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뜻을 갖지 않았거나 같은 길로 가지 않을 때는 사실상 교제의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보조를 맞추며 동행을 잘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대로 잘 따라가고 있습니까? 반드시 거리감을 좁혀가면서 주님 뜻대로 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사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좋은 선물을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선물 사 줄 것을 약속하고 같이 백화점에 갑니다. 그 어린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선물을 받았을까요? 40년을 고아로 살다가 TV 중계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예수님과의 교제를 잘 못하면서 아무리 축복을 사모하면 무엇합니까? 예수님을 든든히 모시고 은혜 주실 예수님과 교제를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교제를 중단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이 시간에 드린 말씀의 총 결론은 ① 예수님에 대한 충만한 신뢰감을 가지시고 ② 말씀과 기도를 힘쓰시며 ③ 예수님 뜻대로 행하여 예수님과 큰 교제를 갖고 예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받으시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2. 분쟁의 원인과 처방 (고전 1:10-13) 목록으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과 그 처방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상태는 당파로 인하여 사랑의 규합을 해친 것입니다.

1)당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그리스도파였고,

2)사랑을 해친 점에 대하여는 이기주의가 팽배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편당과 이기주의는 사랑을 해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고린도 교회 안에 신앙적 문제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단적 대립으로 나타난 사례가 없음을 볼 때 오직 사랑의 실패, 도덕적 분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2. 이 분쟁의 원인은

1)교회의 역사가 짧은 관계로 은사적, 도덕적 연단에 익숙하지 못한 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은사적 연단이란 누가 어떤 은사를 받았던지 자기와의 관계 개선에 익숙하지 못한 점이고, 도덕적 연단은 사랑과 봉사로 대처하지 못한 점입니다.

2)은사적 소질에 따라 편당을 이루어 이기주의적 행사를 나타낸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마다 은사의 특징이 있고, 성도들과의 친교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① 바울 사도는 선교사요, 교회의 설립자이며 목회자의 소질이 크고 문필가였습니다. 그러나 구변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근거가 성경에 있습니다.(고후 11:6, 12:7, 갈 4:15) ②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사도로써 부흥사적 사역을 한 사실이 있으나 예수님 당시에 낙심한 일도 있었고, 또 바울 사도에게 면책을 당할 만큼 연약한 점도 있었습니다.(갈 2:11) ③ 아볼로는 율법학자로 학문에 능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늦게 깨달은 약점이 있었습니다.(행 8:24-26) ④ 그리스도파에도 어떤 지도자가 있어서 그 단체를 규합, 지도하였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세 사람의 은사적 특징을 간추린다면 바울은 목회자적 사역자요, 베드로는 부흥사같은 사람이며 아볼로는 신학자같은 사역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반하는 교인들의 신앙도 바울같은 사역자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고, 베드로같은 사역자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으며 또 아볼로같은 학자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으므로 각각 은사적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 편당을 이룬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현실 교회안에도 잠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 신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 또는 표준적 생활을 좋아하는 성도들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3. 이런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처방하여야 합니까?

1)우선 자기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그 은사 발전에 노력하여야 합니다.

2)그리고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대하여 존경할지언정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는 성령님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11)

3)인간 중심의 당파를 만들거나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 또는 성도의 세계에서 사랑의 친교에 보편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4)모든 성도는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명예욕이나 권세욕에 사로 잡히지 말아야 하며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엄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5)자기가 몸담은 교회에 자기 은사 소질에 맞는 부흥사가 있기를 원하였는데 반대로 신학자같은 목사가 왔다고 가상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적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별을 잡으시고 일곱 금촉대 사이로 왕래하시면서 자기의 교회에 합당한 사역자를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계 1:20) 따라서 많은 성도의 감정적 신앙을 지식적 신앙으로 보충하셔야 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주부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부가 만들지 못하는 음식이 몹시 먹고 싶을 때는 그때 그때 나가서 사 먹으면 됩니다. 신앙의 은사적 욕구도 얼마든지 그렇게 보충할 수 있습니다.

6)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사람을 배척하거나 인간 당파를 만들어 갈등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떠나는 행위임을 아셔서 적응 연단을 잘 하시면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7)혹 이런 일이 장기화되고 고질화되어 상당한 신앙적 스트레스를 받게 될 때는 부득이 교회를 옮겨야 할 것이고, 이 때에 교역자나 교회는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합당한 대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 소질에 맞는 사역자를 찾아서 어떤 성도가 제가 하는 개척 교회를 도우러 나왔는데 ‘저는 개척교회에 전력하는 노력보다 집필하는데 힘을 더 쓰고 또 예배당의 모양을 갖추는 일에 힘쓰지 않고, 당분간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까 그 방법이 개척교회 발전에 맞지 않는다’하여 다른 교회로 나가기를 원하므로 그대로 허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마다 은사 소질과 교회 생활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도의 교회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신앙 양심과 은사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처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고,(고전 7:25)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하셨은즉 반드시 그 말씀이 실현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도요, 죄없는 예수님이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구원을 받는 성도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게 되는데 이 시간에 말씀 드릴 내용은 무슨 능력이 미치느냐?하는 것입니다.

1. 죄사함의 능력이 미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계획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목적을 알고 믿는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요 3:16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셨는데 “저를 믿는자”란 말씀이 곧 “십자가 사건을 믿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사건”을 믿을 때 죄사함의 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도 능력인가? 하시겠지요. 능력이 아니고야 어떻게 죄를 용서하겠습니까? 전직 두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능력없이 그 죄를 사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의 권세라야만 사면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최고 심판자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십자가의 도를 믿으면 죄사함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는 영원한 의를 힘입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구원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 구원의 능력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죄사함을 전제로 하여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때 권세자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나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데도 절대자의 권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천국문을 열고 닫을 자는 예수님 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계 3:7) 그런데 이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속죄 사건과 부활의 승리 사건이 없으면 하나님이라도 죄인들을 구원하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이고,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방도이며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파리가 미국을 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십자가를 믿음으로 타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영생의 은혜를 주시는 능력의 방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전달해 주신 것입니다. 요 3:16에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하셨고, 요일 4:11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다”하셨는데 이 사랑의 최상급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영원하신 독생자를 희생시키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으니 이 사랑 이상 더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사랑을 못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큰 힘입니다. 이 사랑의 힘을 받고 사랑의 의미에 감격할 때 자신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5:8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라”하였고, 고후 5:14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하셨으며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미친 것처럼 그 사랑의 힘이 성도들의 생활에도 나타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11)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4. 주님의 십자가는 인격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줍니다. 한편 강도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보고 회개하는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강도가 십자가 곁에서 회개한 것이 그 실예입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마 27:44) 그런데 한편 강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회개하고 변화된 상태에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눅 23:40-43) 죄없는 예수님이 죄있는 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강도도 변화가 되거든 하물며 성도들이 변화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는 사람은 분명히 그 인격이 변화됩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 4:5)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이해하고 십자가 중심으로 살고자하는 성도에게 변화가 없겠습니까? 그 변화란 곧 예수님을 닮는 인격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고 ② 독생자의 희생이 내포되어 있으며 ③ 예수님의 복종이 있고 ④ 예수님의 죽으시기까지의 인내가 포함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마 10:3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에게 주신 책임일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이행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듯 사랑과 복종과 희생과 인내로 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자신의 인격이 그만큼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인격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능력은 죄사함의 능력, 구원하시는 능력,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능력, 자기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4. 자랑할 것과 말 것 (고전 1:28-29) 목록으로


성경에 보시면 자랑할 것과 자랑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성도들이 실수하여 자랑하지 말 것을 자랑하게 되고 자랑해야 할 것을 자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 시간에는 자랑하면 안 될 것과 자랑해야 할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랑하면 안 될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본문 29절에 보시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말씀의 “아무 육체”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란 뜻이요, 이는 바로 피조물을 뜻하고, 또 타락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앞에서 또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신 자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자랑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함이 되는 것입니다. ② 타락한 인간이 “의의 은총을 받았다”할지라도 역시 자신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로워진 성도라도 자랑할 입장이 못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문벌 좋은 자도 있고, 지혜있는 자와 권세자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문벌과 지혜와 권세를 이용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비천한 사람들을 은혜로 구원하신 것이기 때문에 혹 구원받은 사람, 문벌 좋은 왕이라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 1:30에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써 오셔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주님 밖에서는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인간은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29절에 “아무 육체라도”하신 말씀을 신분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육신 또는 몸”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혹 몸이 건강하거나 아름다우면 자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건강하여도 병들어 죽고 아름다워도 늙으며 육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레슬링 선수는 아시아 챔피언이 된지 몇 일 만에 암으로 죽었고, 세계인들이 알아주던 영국의 황태자 부인도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또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이 다 육체로 말미암아 당하는 유혹들입니다. 특히 질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무익함을 더욱 실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 6:63)하셨고, 왕상 20:11에서는 “갑옷을 입는 자가 갑옷을 벗는 자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갑옷을 입는 것은 육체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허탄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약 4:16에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 24:4에서는 “뜻을 허탄한데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허탄한 것”이 무엇입니까? 허탄한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질 모든 것들입니다.(벧후 3:10-11) 사람도 허탄한 것에 속하기 때문에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하셨고(고전 3:21) 사람의 지혜도(렘 9:23), 사람의 내일 일도(잠 27:1), 악인의 승리도(욥 20:5) 다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의롭게 된 사실로부터 인간의 육체와 세상에 있는 모든 것까지 다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들입니다. 문벌, 지식, 명예, 권세, 재물, 육체, 외부적 경건도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17:43, 딤후 6:9, 눅 18:11, 고후 11:22, 단 4:30, 고전 7:18) 온 천하라도 자기 목숨 가치만 못하며(눅 12:20) 재물은 일만악의 뿌리가 되기 쉽고, 또 천국 가는 장애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딤전 6:9, 마 19:23-24) 권세도 자랑거리가 못되는 것은 우리 나라 정치가의 말로를 보아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특권과 외식을 자랑하였지만(마 23:5-7) 예수님의 뜻을 가장 폭넓게 거역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참고할 때 많은 교회들이 물질 중심, 교권 중심, 종교 의식 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자랑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1)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라”(대상 16:10, 시 20:7, 시 105: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독생자를 주신 분이요,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롬 15:17)

2)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빌 3: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영원한 중보자이시고 또 심판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항상 앞세워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3)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 6:14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도요, 전도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십자가와 부활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셨고(고전 2:2)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의 도리로써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셨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19) 또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요, 최고의 사랑이요, 유일한 구원의 방도인 만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렘 9:24) 렘 9:23-24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하나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라”는 뜻은 하나님을 아는 자기를 자랑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을 선전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5)“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 12:9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과거의 실수를 숨기지 않았고, 자신을 “죄인중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3,15) 또 자신의 육체의 약함에 대하여서도 숨기지 않았습니다.(갈 4:14) 성전에서 기도한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면서 자신의 약함을 드러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눅 18:13-14) 성도가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면 자신의 위치를 바로 찾게 되고 겸손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인정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신분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만 높이 자랑하고 인간이나 자신이나 자신의 의나 현실적인 것들은 자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적 교회, 교권적 교회, 의식만 장황스럽게 차리는 그런 것들도 자랑의 내용이 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6 과 십자가의 증거 (고전 2:1-5) 목록으로


본문을 살펴보시면 1-4절까지는 “바울 사도의 증거자로써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고, 5절은 “그런 자세를 취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목은 “십자가의 증거 자세”라 할 수 있고, 두 대지로 나누어 살피게 됩니다.

1. 증거자의 자세(1-4절)

1)1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1절의 “하나님의 증거”란 “하나님이 나타내시기를 원하신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1:17에서 설명한 바처럼 인간을 부각시키는 웅변이나 현실적 지식 등으로 십자가의 진리를 포장하는 것인데 십자가의 복음은 그 복음 자체로써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지혜나 인기를 아울러 선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적 지혜나 우월성을 나타내도 그 우월성이 십자가의 복음을 감출 수는 있어도 돋보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나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일체의 작태(현실적 행위)를 금한 것입니다.

2)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셨습니다.(2절) 바울의 사명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증언하는 것”이었고, 자기 생애에 있어서 그 사명 이상 더 큰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3)믿음의 동기도 복음을 받으므로 싹이 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증언하였느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사람이 잠잠하면 돌들로도 소리지르게 하신다”(눅 19:40)고 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복음이 가장 귀한 것을 아셨을 때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또 배설물로 여기셨습니다.(빌 3:7-8) 누구나 한 가지에 대한 만족과 거기에 몰두하기 위하여 그와 상관없는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귀하는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증언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필자는 외람된 말이오나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는 사명”(빌 2:16)을 위하여 95년 9월에 목회 일선에서 후퇴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연구하고 예수님과 십자가를 전하는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으니 이는 예수님과 복음 전파를 가장 귀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4)바울 사도는 성도들 앞에서 성직자로써의 권위를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3절의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권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겸손과 온유를 나타내셨고(행 20:19, 엡 4:2), “죄인 중에 괴수라”고 까지 하시면서 겸손하셨으니(딤전 1:15) 당연히 성도들 앞에도 그런 자세를 취하신 것입니다. 또 바울은 육체의 가시(고후 12:9)를 지녔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약하였고, 또 유대인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였으며(행 17:9-17), 또 하나님을 상대로 떠는 자세를 취하신 것입니다. 시 2:11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게 된 특별한 이유는 인간적 권위를 내세우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요, 그리스도의 권위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적 권위로 가리워질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러하였거든 하물며 우리 같은 존재야 더 미약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을 나타내려는 사람, 자기 부정을 역행하는 성도는 많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거짓 선전이나 세상적인 조건들을 내세워 인기의 덕을 보려는 사역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또 바울은 일반적으로 말씀할 때나 전도를 할 때에도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셨습니다.(4절) “지혜의 권하는 말”이란 세상지식을 가미하여 아는 체하거나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지식과 이론에 설득 당하여 발생하지 않습니다. 전도 수단으로의 참고는 될지라도 생명력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이란 이미 말씀하신 성경이나 영감으로 말씀 주심을 뜻하며(벧전 1:21), “능력”이란 성령님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행 1:8) 따라서 바울 사도의 전도는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 진리만 전한 것입니다.

2. 전도자가 인간적 권위를 배제한 이유는 “성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은 사람의 지혜로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 즉 거듭나게 하시는 재창조력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태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여유를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단순하게 전도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되도록 인간을 부각시키지 않게 하여야 하고 특히 성도나 복음 사역자는 현실적인 악세사리로 인기의 덕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역자가 승합차 운전을 하면 권위가 없다는 말까지 떠돈 사례가 있음은 불행한 일이며 또 학위복을 입고 예배드리는 것도 불행한 일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변증의 효력은 있을 수 있으나 믿음 발생의 원인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서 지나친 과장을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기위주에서 자기 부정으로 세상적 악세사리에서 진리 그 자체로 돌이키는 운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 7 과 하나님의 지혜의 성격 (고전 2:6-9)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성격”을 말씀하셨습니다. 6-7절은 “지혜를 받을 대상과 지혜의 근원”에 대한 말씀이요, 8-9절은 “지혜를 감추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지혜를 받을 대상과 지혜의 근원에 대하여(6-7절)

1)6절에서 전도자들(우리)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온전한 자들에게 주셨고, 온전한 자들이 이해하고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포괄적 의미는 예수님과 성경입니다. 또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이 생각해내신 구속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들”이란 거듭난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사실상 택한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도 역시 그런 의미입니다.(마 7:6)

2)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도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가 아니며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지혜도 아닙니다.

3)“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관원의 지혜란 정치하는 지혜입니다. 또 정치적 권세는 오래가지 아니하므로 “없어질 관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리는 속죄와 영생의 도리인 만큼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4)7절에서 “비밀한 가운데 감취였던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셨습니다. “비밀한 사운데 감취었다”는 것은 아무나 다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었을 때 필요한 대상에게만 깨닫게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많은 인류가 있었지만 메시야의 구원을 깨닫고 믿은 성도는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탄생 직후에 동방 박사나 시므온, 안나 등이 깨달을 정도요(마 2:10, 눅 2:25-38) 구약에서는 다윗 등 선지자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시 22:1) 하나님은 귀한 은혜를 그의 원하시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위하여 감추시고 보존해 오시다가 때가 되매 선택자들에게만 나타내신 것입니다.(살후 3:3)

5)“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광”이란 선택자를 구원하여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며 “이를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심”은 구원의 경륜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롬 8:30, 엡 1:4)

2. 지혜를 감추심에 대한 말씀(8-9절)

1)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것)를 그 시대의 관원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추셨습니다. ① 하나님이 구원의 지혜를 감추신다는 말씀은 사 6:9-10에서도 예언하셨고, 또 마 11:25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② 그리고 그 지혜를 그 시대의 관원들이 알지 못하였으니 이 관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실권을 가진 자들로써 교권자들과 정치적 권력자들입니다. ③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써 하나님이 그들의 심령을 닫으신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2)9절에서 “지혜가 숨겨지고 깨달아지지 못할 일”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바”라고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란 말씀은 전통 문헌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영감된 말씀, 곧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9절과 같은 문구가 구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말씀을 찾아 보면 사 6:9-10에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하신 말씀이 있고, 사 52:15에서는 “전파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라”하셨고, 사 64:4에서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다”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을 종합하면 ① 하나님이 자기의 진리를 “택한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숨기셨다”는 뜻과 ② 그런 이유로 진리의 대적자들이나 비택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들을 종합하여 뜻을 설명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민들이요, “예비하신 모든 것”은 복음과 신령한 은혜들이며 “눈으로 보지 못하고.......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음”은 비택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가리워져 있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적 섭리는 택한 백성에게 한하여 적용되게 하셨음과 세상적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8 과 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 (고전 2:10-16) 목록으로


이 본문을 살피면 전체의 제목을 “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이며(요 14:6) “신령한 일”(13절)이요, 구원의 도리(마 11:25)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님이 나타내시고 역사하실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10-13절에서 “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을 말씀하셨고, 14-16절은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셨습니다.

1. 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에 대하여(10-13절)

1)진리를 알게 하시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뿐이라고 하셨습니다.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셨고,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속사정을 그 사람의 마음(영)만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만 아시기 때문입니다.(11절)

2)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알게 하실 자들에게 자기의 영인 성령님을 받게 하시고, 그 성령님의 역사로 진리를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2절에서 “성도들은 세상의 영을 받는 자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성령을 받았으니 이는 성령받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성도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음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무대로 인간들을 유혹합니다.(눅 4:6) 그러나 성도에게 거듭나는 은혜를 주실 때부터 사탄을 쫓아내시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므로 그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요 3:3) ② 성령님이 내주하여 성도의 마음을 지배하시면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믿게 되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12절) ③ 그래서 전도자들도 하나님의 진리를 소개할 때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란 십자가의 도리를 믿게 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지식이나 구변을 의미하지만 그것으로 믿을 능력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이란 성령님이 말씀하신 성경 내용 그대로 증거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진리)은 신령한 것(성령님의 역사)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를 나타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13절) 따라서 13절의 “신령한 일”은 구원의 사역이고, “신령한 것”은 거듭난 성도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2.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셨습니다.(14-16절)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고, 또 한 종류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1)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하셨으니(14절) 이 사람은 진리를 영접하지 못하는 불신자요, 곧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하였다”는 뜻은 부패한 상태로 머물러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속에 성령님이 안 계시니까 성령의 일(복음사역)을 받지 못하고, 또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일을 자기의 지혜로 비판하여 미련하게 여기고 영적(성령의 감동)으로 분별해야 할 것을 그렇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2)그러나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5절) “신령한 자”란 성령님의 간섭을 받는 믿음이 성숙한 성도를 뜻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뜻은 신령한 은혜를 깨달을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선악을 분변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5:14) 그러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숙한 신앙인이 모든 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숙한 모범을 나타내므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나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석에 배석할 자격까지 주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고전 6:3)

3)오직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님을 가르칠 자는 성령님의 지도를 받는 자들 뿐이며 바울 사도와 함께 하는 전도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짐”은 곧 성령 충만한 영감적 은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은 성령님의 내주하신 역사로만 나타낼 수 있고, 또 받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 세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목록으로


사람의 종류를 구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고(2:14), 다음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며(3:1) 또 한 가지는 신령한 자(2:15)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2:14)

1)“육에 속한 자”란 원문은 “프시코스, 데, 안드로포스”(φυχικός, δέ, ἂνθρωπος)로 성령 없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프시코스”의 어근 “프스케”(φνχή)는 혼으로 번역된 말씀도 있고,(살전 5:23, 히 4:12) 영혼으로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눅 1:46, 약 2:26) 그러나 영어 성경에서는 natural man(자연 그대로 있는 사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원문상으로는 혼적 사람, 영(영혼)적 사람으로 일컬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은 성령 없는 자, 그대로 있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유 19) 그 이유는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2:14)

2)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것은 성령님의 간섭을 받지 않았음이요, 따라서 거듭나는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의 입장이 곧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성경과 신령한 복에 대하여 상관할 수 없으며 반대로 육체 소욕과 현실 정욕과 비진리에 민감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갈 5:17,18-21)

2.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3:1)

1)“육신에 속한 자”란 원문은 “살기코이”(σαρκικοί)로서 영어의 fleshly입니다. 육욕에 사로잡힌 상태 또는 부패성에 붙잡혀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란 “살코스”(σαρκός)의 어근 “살크”(σαρξ)는 신체를 뜻하지 않고, 신령함이 멀고 거룩보다 부패가 많으며 육체적이고 현실성이 강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신체와 몸을 뜻하는 용어는 “소마”(σώμα)란 용어가 따로 있습니다.(마 6:22, 롬 1:24, 고전 5:3) 따라서 이런 상태는 세속에 끌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요일 2:16)

2)본문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같은 자”라 하셨으니 ① 이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초보자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초보자는 무지와 무경험과 연약이 많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② 어린아이는 부드러운 젖만 먹어야 합니다. 맵거나 짜거나 뜨겁고 딱딱한 것을 못 먹습니다. 듣기 좋은 설교, 칭찬하는 말, 간단한 예배만 좋아하고 책망하거나 어려운 말씀은 듣고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은 신앙입니다. 깨닫는 것이 둔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3)육신에 속한 자는 시기하고 분쟁하여 사람따라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욕심과 시기가 덜 빠지고 분쟁을 그칠 줄 모르며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정욕대로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의 행위인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시기하거나 분쟁에 말려드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더 행복해지는 것을 싫어하여 자기를 그 앞에 세우려고 경쟁하는 행위인데 성도가 이런 상태를 극복하여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협력할 수 있다면 성숙한 성도라 할 수 있고, 또 분쟁과 대립의 환경을 피하기 위하여 말조심하는 일과 약속 지키는 일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혹 오해나 대립이 있게 될 때는 오해와 대립을 풀어주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지 않도록 겸손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들끼리 경쟁하는 기관이 아니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며 서로 사랑하는 기관임을 생각한다면 시기와 분쟁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사람을 따라 행하는 일은 편당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절) 성도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살전 3:12, 고전 10:33) 모든 사람을 친교할 때 보편적 교제를 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신령한 자가 있습니다.(2:15)

1)“신령한 자”란 원문은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οκός)로 이는 성령의 사람 또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의미합니다.(마 3:16, 4:1) 성령 충만한 성도가 곧 신령한 자인 것입니다.

2)성도가 은혜를 받아 신령한 성도가 되면 ①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히 5:14) 그러나 성경을 주실 당시에는 바울이 신령한 자가 되었으므로 그의 증언하는 말씀이 곧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고전 14:37)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인 것입니다. ② “신령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자가 판단력의 우위에 있고, 또 악인들로부터 판단 받을 만한 과오를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앙이 성숙되어 있고, 모든 생활에 모범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③ 신령한 자는 남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가르치겠느냐?” 신령함이 아니면 아무도 가르칠 수 없지만 신령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먼저 실천한즉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갈 6:1)

결론적으로 세 종류의 사람들은 불신자, 어린 아이 같은 신자. 성숙한 신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성도가 판단할 필요가 없으나 성도들은 자신이 어린 아이 같은 신자인지 아니면 어른 같은 신자인지, 육신에 속한 자인지 신령한 자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전 3:3에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하시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성장을 멈춘 채 계속 어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그런 미숙한 성도라는 취급을 받지 않도록 은혜에 정진하여 반드시 신령한 자의 입장에 서야 할 것입니다.

 

 

제 9 과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9) 목록으로


바울 사도께서는 신앙과 관련하여 사람의 종류를 세 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① 육에 속한 자(고전 2:14)인데 이들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만큼 불신자를 뜻하고 ② 신령한 자로서 믿음이 성숙한 상태에 있는 성도를 의미하며(1절, 2:15) ③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1.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 하셨으니 이 의미는 신앙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상태에 있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상태가 어린아이처럼 미숙하였기 때문에 바울 사도께서는 “초신자처럼 지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어린아이처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않았다”(2절)는 말씀입니다. 미성숙 상태의 성도는 어려운 말씀이나 책망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하여 노력 하셨겠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3절)하시므로 그들의 신앙 성장이 대단히 부진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셨습니다.

2. “육신에 속하였다”는 뜻은 인간 정욕을 다 못 박지 못한 상태로써(갈 5:24) 시기와 분쟁을 멀리하지 못하고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성도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보다 형제가 더 잘 되기를 바란다면 시기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고,

2)또 모든 것을 오래 참는다면 분쟁하지 않을 것입니다.(고전 13:4,7) 그러나 성도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십자가 정신에 가까이 나기지 못할 때는 여전히 사람을 따라 자기의 정욕 중심으로 행하게 되어 옛사람의 생활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3)“사람 따라 행함”이란 인간 정욕의 산물로 인간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가지고 이기주의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대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와 개성이 다른 이웃일지라도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삼고 융화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복음사역자인 바울과 아볼로를 상대할 때 공평하게 대우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의 사역자인즉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다 사랑하고 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복음사역자를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여 편파적으로 대한 것입니다. 한 교회안에서 “나는 바울이 좋으니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하였으니 이것은 교회안에서 사람 중심으로 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예수님(진리) 중심으로 행하고 모든 성도를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공평하게 교제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할 줄 모르는 성도들이 곧 어린아이 같은 성도들입니다. 보편적이고 공평한 교제를 못할 때 파벌이 생깁니다.

4. 하나님께서는 바울이나 아볼로를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5절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하신 말씀은 두 사람에게 차별을 둘 만한 명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1)주께서 각각 사역자 되는 은사를 주셨고(5절)

2)두 사람 공히 성도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사역자로 세우셨으며

3)두 사람에게 믿음 사역을 주심에 있어서 바울은 심는 자 곧 전도자적 사명을 주셨고, 아볼로에게는 물 주는 일 곧 신앙 교육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실과 일하게 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임을 모든 성도가 인식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8절에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가 일반이라”하신 말씀은 직분상의 권위상 우열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급도 “각인의 일한대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5. 바울 사도는 자신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수고를 겸손하게 낮추고 하나님의 역사를 절대시하도록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 사역을 생물의 성장으로 비유하여 표현하신 것으로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제도적 수고에 해당할 뿐이므로 이를 작은 일로 여기셨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비중을 두신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6. 마지막으로 9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여기에서 복음사역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란 자부심을 갖고 성직에 임하여야 할 것이요

2)성도를 “하나님의 밭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 하신 것은 교회 단체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밭이란 의미로써의 일터이고, 집이란 의미로써는 사랑의 단체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 이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성도의 신앙이 속히 성숙하여야 할 것과 그 성숙의 결과는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고 진리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제 10 과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목록으로


“지혜로운 건축자”란 제목 아래 본문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은 여러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울로 하여금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게 하셨습니다.(10절)

1)바울이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까지 은혜를 받은 것은 ① 구원 대상으로 선택하신 것과(엡 1:4) ② 거룩하게 하신 일과(살후 2:13) ③ 변화되게 하신 일과(행 9:17-18, 고전 15:10) ④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사역자를 세우신 것과(행 9:15) ⑤ 사도로 세우신 것(딤전 1:12, 고전 15:9) 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변화될 수도 없고, 사명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2)그러면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었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도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기독교 교리와 생활의 기초”를 세우는 직임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초란 뜻은 모범이란 의미도 있으며 선지자도 같은 직임을 가졌습니다.(엡 2:20)

3)“터를 닦았다”는 뜻은 하나님이 영감을 받아 계시를 기록한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 행하는 모범을 보였으며(고전 11:1) 또 한 가지는 이적 행하는 능력을 주셔서 기독교가 절대의 종교임을 입증하게 하신 것입니다.(마 10:1, 히 2:4) 이 사실은 사도들의 생활과 최후 성경인 요한계시록 기록으로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은 그 터 위에 세우나 어떻게 세울 것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10절)

1)“다른 이”란 일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일반 성도와 사도는 구별되어야 하며 사도직은 단회적 직임이라 바울 사도 이후에는 사도직이 계승되지 않았습니다.(유 3)

2)“그 터 위에 세운다”는 뜻은 11절에서 “예수님이 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사도들이 예수님을 모범하였기 때문에(고전 11:1) 사도적 신앙과 생활을 모범하라는 뜻입니다. 또 “세운다”는 의미는 신앙생활을 집 짓는 것으로 비유하신 용어입니다. 이 뜻은 12절-14절을 보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력을 드려 집을 지어야 하는 것처럼 “어떻게 세울 것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성경 표준에 맞는지를 주의하여 보고 시행하여야 합니다.

3)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닦아 놓은 터와 능히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11절)하신 것인데 이 뜻은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 일이 사도시대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계시나 사도적 이적이 다른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엡 3:3-5, 히 1:1, 딤후 4:20)

3. 12-14절에서 “공력이 보존되는 집”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짓되 가연성 재료로 짓는 경우와 불가연성 재료로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연성 재료는 나무나 풀이나 짚이고 불가연성 재료는 금은 보석입니다. “터 위에 세운다”는 뜻은 믿음생활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생활의 방법이 가연성 재료처럼 하느냐? 아니면 불가연성으로 하느냐?하는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는 아니고 상급(공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14절에서 “믿음생활의 공력을 불로 시험한 후에 불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처럼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가운데서의 구원이란 겨우 받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값싼 재료로 집을 지었으면 불로 공력을 밝힐 때는 다 타 없어질 것이고, 금은 보석같은 비싼 것으로 지은 집은 그것이 불에 타지 않으므로 그 공력이 영원히 남는 것이므로 이는 천국에서 칭찬받을 상급이 있도록 믿음생활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행위가 부족하거나 현실적 이기주의가 많았다면 이것은 가연성 재료로 집 지은 것과 같고, 믿음과 의로움과 헌신성이 많았다면 이는 불가연성 재료로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하늘의 상급이 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공력으로 받지 않으나 상급은 반드시 공력의 대가로 주십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성도들은 사도적 직임의 성격을 잘 알아서 본받아야 할 것이며 영원토록 공력이 없어지지 않도록 의와 헌신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제 11 과 자기를 속이지 말라 (고전 3:16-23) 목록으로


18절의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정하고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가지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를 하나님의 성전이라”하심에 대하여(16-17절), 둘째는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대하여(18-20절), 셋째는 “사람만 자랑하지 말 것”에 대하여(21-23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심에 대하여(16-17절)

1)성전은 구약시대의 성전을 뜻하며 성도를 “성전”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셨던 것처럼 성도의 마음에 말씀과 성령으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전의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는 것과(왕상 8:6) 또 그 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가득하였던 것이(왕상 8:10-11) 임재를 뜻함과 같이 성도의 마음 속에 말씀과(요 15:7, 엡 3:17) 성령님이 항상 거하시므로 성도를 하나님의 거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를 성전이라고도 하셨습니다.(요 2:21)

2)하나님이 구별하신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셨기 때문에(레 15:31, 민 19:20) 성전에 나가는 성도들은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결례를 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한 몸이나 악심을 품고 성전에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마 5:23-24) 이와 같이 성도가 성령님이 거하시는 자기의 인격과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여 더럽힌다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17절)

3)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성도도 거룩한 존재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범죄로 거룩을 훼손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 뜻이 곧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순결 보존을 잘 하므로 성도다워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대하여(18-20절)

1)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한 모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많이 배운 자)가 사람 앞에서는 지혜 있는 체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지혜가 무한하신 전능자 앞에서는 지혜 없는 체 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는 것은 자기를 의지하거나 나타내는 태도요,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은 자기의 지혜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 의뢰하여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미련하게 살아야 합니다. 똑똑하게 행하여 얻는 분량보다 하나님이 후하게 주시는 은혜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3)19-20절에서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불신앙적 지혜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불신한즉 하나님이 그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심이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불신앙을 합당하게 여겼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자기 궤휼에 빠진 결과가 된 것입니다.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은.....”하신 말씀은 욥 5:13을 인용하신 것이고,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하신 것은 시 94:11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란 창조자를 외면하고 인간 지혜를 내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눅 12:18에 보시면 “어떤 부자가 소출을 많이 거두고 곳간을 넓힌 후 평안히 먹고 즐거워하기를 바랐으니 이것은 재물 가진자의 당연한 계획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그의 영혼을 당일 밤에 찾으신다”하셨으니 이런 것이 바로 지혜자의 생각을 헛것으로 만드시는 경우입니다.

3. “사람을 자랑하지 말 것”을 교훈하심에 대하여(21-23절)

1)21절에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인 동시에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사람을 자랑하지 말 것”은 복음사역자를 중심한 계파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고 또 사람 중에 복음사역자 보다 더 귀한 자가 없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소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외에도 소망 대상이 있으며 하나님만 자랑의 대상이 되므로 사람을 자랑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에게 소망을 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도 소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사 3:1)

2)성도는 사람 뿐 아니라 광범위한 은혜를 소망스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만 주신 것이 아니고, 만물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 아볼로, 게바도 주셨고, 온 세계도 주셨으며 생명도 주셨고, 사망 이후의 소망도 주셨으며 지금 누리는 것과 장래에 누릴 것도 주셨은즉 모든 것과 모든 일들에 대한 소망과 자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계의 자랑이 인간에만 국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3)“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23절)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것임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속량하셨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속”이란 죄의 대가를 지불한 뜻이고, 속량(갈 3:13)이란 마귀의 종속에서 뽑아내 주신 뜻으로 이해하십시오. 성도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말씀하신 이유는 성도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종속시켜서 헌신하고 복종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6. 세 가지 문제점 (고전 3:1-9) 목록으로


본문을 살피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제의 ① 신앙이 성숙하지 않는 점이고, ② 사람 중심으로 당파를 짓는 것이며 ③ 사역자들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과잉 숭배인 것입니다.

1. 신앙이 성숙되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처럼 대할 수 없다”(1절) 또는 “어린아이처럼 대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령하지 못하다”하심은 성령 충만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 세계에서 방언 예언 등 신비스런 체험들이 나타났지만 그것이 성령 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1절에 보시면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이 말씀은 “살키코이 안드로포스”로 부패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부패성이 많이 남아 있으면 시기, 분쟁, 인간 중심 행위, 편당, 정욕적인 일 등을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고린도교회에는 신앙 성숙이 부족한 증거로서 무질서(고전 14:40), 은사 활용의 부조리(고전 14:26-33), 우상 숭배(고전 8:1), 음행(고전 5:1), 이혼(고전 7장) 등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신앙성숙은 말씀과 기도와 실천과 연단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숙한 신앙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사람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고전 1:12에 보시면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좋아하는 파, 아볼로를 좋아하는 파, 게바파, 그리스도 중심파가 있었다”하셨고, 본문 4절에서는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상황이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성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고(고전 1:13), 두 사람 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셨습니다.(9절) 그러니까 성도들이 두 사람의 사역에 대하여 비판의 태도나 우열을 가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는 씨를 심는 전도자적 은사를 주셨고, 아볼로에게는 물을 주는 목회적 은사를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사대로 필요하게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진리 중심)으로 한 파를 이루는 것은 좋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불완전하고 변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고 파벌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 중심으로 파당(누구 누구는 더 가깝다는 등)을 만드는 것은 악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람 뜻 따라 행하지 말 것과 인정 따라 할 것도 없으며 오직 진리와 사랑 따라 행할 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복음사역자들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지나친 숭배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복음사역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일하는 사람입니다. 7절에 보시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에 비할 때 아무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에 대한 과잉 숭배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역자가 모범적일 때 존경하면 됩니다. 또 사역자들도 자기들의 노력 따라 상급을 받습니다.(8절)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한 줄 모르고 지역적인 것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큰 교회 교인된 것, 또는 유명한 목사님을 모신 것, 또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크게 여기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와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님이 유명한 분이라 하여 자기가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역자를 천사처럼 숭배하거나 편벽되게 판단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스위스 교회 성도들은 복음사역자를 모실 때 천주교에서 신부를 파송하여 받는 것처럼 비판없이 받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믿음이 성숙한 성도는 교회적 이기주의에 치우침도 없고 교역자에 대한 기대도 과하게 갖지 않기 때문에 교역자 문제에 과민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사역자는 성도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씀 해설로 나타내주는 인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회가 인가한 사역자이면 믿음으로 모시고 존경하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진리 중심으로 믿음이 성숙할 것과 인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하지 말 것과 복음사역자들에 대한 과경과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 받았습니다.

 

설교보충 7. 사도의 사명과 은사 (고전 3:10-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도의 사명과 은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시면 “사도”라는 명칭이 나오고, 이 명칭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선봉적 역할을 함으로써 교회와 복음이 전승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도의 신앙과 역할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신앙적 모범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사도의 사명과 은사에 대하여 알아보시는 것은 퍽 필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1. 그러면 사도란 무엇이며 이 직분자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있었는가?에 대하여

1)사도란 예수님이 직접 택하여 세우신 신약 시대의 최고 직임자로써 예수님이 12사도를 택하여 세우신 때부터 마지막 사도인 바울 사도를 거쳐 가장 오래 사시다가 세상을 떠난 사도요한의 생애까지(그러니까 주후 3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70년에 걸쳐 있었던 초대교회 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써 사도성이 계승된다고 하지만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천주교 교황은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도, 클레멘 1세, 에바리스도까지 5대를 계승시켰으니까 교황의 계승은 인정되나 성경을 기록한 사도요한을 무시한 채 사도성을 계승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초대교회에만 있었던 직임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사도된 바나바와 아볼로도 있었습니다.(행 14:14, 고전 4:6,9)

2)이 직분은 기독교 성직의 고유한 명칭 “아포스토로스”로써 보냄을 받은 자 즉 전권대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는 주님이 하실 일을 대신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므로 전권대사라는 의미가 있고, 따라서 맡은 직임에 대하여 상당한 전권을 주어 행사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이 직분을 누가 어떻게 세웠는가?에 대하여 이 직분자는 예수님이 자기의 소원대로 직접 세워 임명하셨는데 큰 특징이 있습니다. 막 13:13에 보시면 “예수님이 자기의 원하는 자들로 세우셨다”하셨고, 눅 6:13에서는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하였으며 갈 1:1에서는 “사람에게서나 사랑의 뜻으로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하셨습니다.(롬 1:1) 이렇게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불러 세우셔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 계셨을 때만 세워졌던 단회적 직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또 몇 가지 사도로써의 자격 조건이 있었으니 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세움 받는 것 외에도 ② 부활하신 주님을 육안으로 목격해야 하는 것이고(고전 9:1) ③ 계시의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행 1:2, 고전 2:13) ④ 특수한 이적의 은사도 있어야 하고(고후 12:12) ⑤ 신령한 말씀 전파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9:11) ⑥ 또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행 4:20, 고전 9:1, 15:5-8) “마가”, “누가”는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지만 사도라는 말씀이 없고, 디모데 역시 바울 사도의 후계자이지만 사도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도는 특수한 은사와 사명을 받은 단회직인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사도들에게 주신 특수한 사명과 특수한 은사가 무엇인가?

1)교회를 세워 신앙생활의 기초를 수립하는 사명입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성도의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의 기초를 세우는 것은 신앙생활 하는 방법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성도들이 그 기초와 그 모범에 따라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표준을 설정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① 마 16:18에 보시면 “내가 이 반석(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하셨고 ② 마 28:19에서는 “교회를 교인으로 조직하려니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셨고 ③ 엡 2:20에서 “신약의 성도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아야 한다”하셨으며 ④ 본문 말씀인 고전 3:10에서 “사도들이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터를 닦았으니 다른 이는 다른 터를 닦지 말고 오직 그 닦아놓은 터 위에만 조심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하시므로 사도들이 세운 표준적 기독교에서 이탈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들에게는 오늘의 성직자들처럼 전도, 구제, 봉사 등 많은 사명이 있은 중에도 특수하게 교회의 설립과 기독교의 초석을 닦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2)그러면 이 특수한 사명을 위해서 특수하게 받은 은사는 무엇인가?할 때 ① 성경을 기록케 하시는 영감의 은사요, ②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특수한 기적의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은사가 “특수했다”는데 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①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영감의 은사가 특수하다는 것은 성경이 그분들로 통하여 기록이 되고 완성이 된 후에는 다시 아무에게도 그런 영감을 주시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행 1:2에 보시면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고전 2:13에서는 “오직 사도들은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사도들만이 받은 영감의 은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은사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요 20:30에서는 “여러 가지 행위가 있으나 오직 이것만 기록한다”하셨고, 요 21:25에서는 “낱낱이 기록되는 것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일”이라 하셨으며 고전 3:10-에서 “한 번 닦은 터는 견고하기 때문에 변동이 없고 다시 닦을 필요가 없다”하셨고, 엡 3:3-, 히 1:1-에서 “계시는 계속 주시지 않고 주신 것으로 완성되었다”하셨고,(유 3, 고전 4:6, 고전 7:19, 고후 13:8) “오직 단 번에 주신 도에 머무를 따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적 계시의 은사는 성경말씀과 함께 단회적 은사로 끝났고, 오직 성경만 표준으로 남았을 뿐 다른 계시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② 특수한 기적의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4. 사도에게 주신 특수한 기적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 보시겠습니다.

1)예수님이 사도들에게 특수한 기적을 주신 이유는 ① 기독교가 절대적 종교임을 증명하는데 있었습니다. 히 2:4에서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복음의 확실성을 증거하신다”하셨고, 요 14:11에서는 “말씀이 의심되면 행하는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셨으니 이것은 기적으로 기독교가 절대 종교임을 증명하신 말씀입니다. ② 마 12:7,12에 “자비와 선행 목적으로도 쓰셨던 것입니다. 광범위한 기적(물 위로 걷는 것, 무화과나무 말린 것, 고기를 잡으신 것, 죽은 자 살리는 것, 병 고치고 약한 것 고치는 것 등)을 나타내어 인간들에게 유익을 주셨습니다.

2)사도들이 어떤 능력을 받았는가?하면 마 10:1-8, 막 16:17 등에 근거할 때 “모든 병,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귀신을 쫓은 일, 방언을 하며 뱀을 집으며 독을 먹어도 해를 받지 않는 능력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능력이 그 당시 사도들로부터 나타났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병 고친 능력의 특수성을 살피면 ① 모든 병이 ② 통증없이 ③ 손을 얹은즉 ④ 당사자의 믿음과도 관계없이 낫고 ⑤ 재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비상한 기적을 그 당시에만 주셨고, 그 후시대에 없는 것은 그 기적의 목적이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수립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이 끝난 후에는 사도직과 함께 중지된 것입니다.

3)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하느냐?하시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시대 이후에도 사도적 능력을 주신 일은 없으나 특별 섭리로 치료하시는 방법과(고전 12:9, 약 5:13-15) 의술을 통하여 고치시는 방법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사도의 은사를 사모하시되 그 직분과 능력을 사모하지 마시고, 그분들을 통하여 주신 성경과 그 생활을 사모하고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을 느낄 때는 마땅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일반섭리로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아셔야 하며 기적의 은사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것이며 또 성도가 지나치게 기적만 추구하려 한다면 그 신앙이 섭리에 복종하는 신앙에서 자기 중심으로 기울어지거나 또는 순교적 신앙에서 기복적 신앙으로 기울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단 3:17-18)

 

 

설교보충 8.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목록으로


“지혜로운 건축자”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10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서 터를 닦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건축”이란 의미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뜻하기도 하고, 또는 복음사역자들의 사명생활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 7:24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바울사도도 역시 성도의 신앙생활과 사명생활을 집짓는 일로 비유하여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지혜로운 건축자인가?할 때

1.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명을 가진 자이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되었고,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수완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5:10에서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하셨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하셨으며 갈 1:1에서는 “자기의 사도된 것도 사람이나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었다”하셨으니 이렇게 거듭난 자기와 사명을 가진 자기와 사명생활을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되어져야만 지혜로운 건축자라 할 것입니다. 만일 사명자가 이기적인 목적이나 허영으로 사명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생활이나 사명생활은 자기가 누구를 위하여 해주는 것처럼 하거나 또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명생활을 꼭 이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닦아놓은 터 위에만 집을 짓는 자인 것입니다.

1)예수님께서는 초대교회 당시에 바울사도를 비롯한 여러 사역자들을 통하여 기독교의 터를 닦아 주셨습니다. 이 “터”는 요동할 수 없는 기본진리를 뜻하고, 신앙과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①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터를 닦았다 하였고 ② 11절에서는 “이 닦아놓은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하셨으며 ③ 그리고 “이 터는 (반석되신) 예수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신앙의 터는 성경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누구도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받아서 “예수님이 어떻다”는 것을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터를 닦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표준계시를 완성했다”는 뜻이요, 이 표준계시를 받은 자는 기독교 설립 당시에 사도들이였고, “다른 터를 닦을 수 없다”는 것은 표준계시인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가 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따라서 현재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닦아 놓은 진리밖으로 나갈 수 없고 오직 진리에 부합되도록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3:8) 유 3절에서도 “단번에 주신 성경만 도의 신앙표준으로 삼고 지키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신 표준계시를 가감하는 영감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엡 3:5)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 이외에 “다른 지시를 받았다”하면서 개인적 계시를 내세운다고 한다면 이는 성경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의 표준을 성경에 두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 13:1-3에 보시면 “하나님은 성도가 표준 계시만 의존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거짓선지자의 유혹을 받게 하시고 또 그 거짓 예언이 행한대로 이루어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표준계시의 권위와 진실성을 못 믿는 성도같으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행한대로 이루어질 때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고, 그 하나님이 성도를 표준계시에 묶어두신 이상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성경만을 유일한 신앙의 터전으로 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 것입니다.

3. 그 터 위에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조심하여 집을 짓는 성도입니다. 10절에 보시면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하라”하셨고, 엡 5:15에서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있는 자처럼 하라”고 하셨으니 지혜있게 한다는 것은 곧 “실수없이 잘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신앙생활과 사명생활은 조급하거나 분별없이 할 수 없으며 늘 조심하고 물어보며 말 한 마디의 내용과 어감까지 조심하여야 하고 내 소관인지 남의 소관인지도 따져야 하며 규모가 있는지 불법은 아닌지 억압이나 강요를 주는 것은 아닌지도 살피셔야 하고, 또 유익을 줄 것인지 안 줄 것인지도 잘 살펴서 생활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4. 지혜로운 건축자는 집 짓는 재료를 고급적인 것으로만 사용하여 오래가는 집을 짓는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있는데 만일 집을 짓는 사람이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저질적인 재료로 집을 지었다면 이것은 임시로 사는 집일 뿐이요, 그 집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집은 불이 났을 때 하나도 남을 것이 없지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에 타지 않으니까 영구 보존되는 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나 사명생활도 그렇게 하나님이 값을 인정해 주실 만한 공력을 드려서 행할 때에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집짓는 재료를 보석으로 쓴다는 것은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값진 생활로 주님을 위하여 살고 이 세상 정욕에 대하여 되도록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신앙의 집을 지어야 하니까 신앙적인 면에서 확실하여야 하고

2)사도적 터전의 규격을 위반하면 안 되니까 사도의 모범을 따라야 하며

3)자기와 자기 생활의 가장 값진 것을 주님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집을 지으면 그 집의 가치는 하나님의 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4)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그 집의 공력을 불로 시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금 은 보석의 진가를 불로 시험하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과 사명생활의 값을 판단해 보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과 헌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인정을 받겠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헌신은 기분이나 이웃의 체면이나 어떤 오락이나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중심으로만 끌려야 할 것입니다.

5)마지막 15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명생활을 타산적으로 하여 기독교를 생활의 수단이나 명예적 사업으로 이용하는 것 같은 생활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 나타날 공력이 없으므로 큰 손해를 볼 것이요, 이런 경우에 자기 영혼의 구원은 불가운데서 살아나오는 것처럼 위기 일발로 겨우 구원받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즉 사명생활에는 인정받을 것이 없고 구원은 겨우 받는 형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혜로운 건축자는 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사명을 받고 ② 사도의 터 위에서만 전도와 봉사의 사명을 다하며 ③ 범행에 조심하고 ④ 가장 값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9.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6-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18절 끝에 보시면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하시므로 미련함이 많은 성도들에게 지혜로워지는 방법을 몇 가지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1.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6절과 17절 말씀에서 성전이 거룩함 같이 성도도 거룩한 존재요, 또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심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1)본문 16절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전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성전에 계심 같이 또한 성령님이 성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성전은 거룩하게 관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성전이 청결되어 있지 않으니까 크게 분을 내시며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일이 있었지요. 본문 17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 더럽힌 자를 멸하실 만큼 성전은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성령의 전인 성도들도 거룩하여야 하기 때문에 성도의 거룩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약 1:27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한 경건은 봉사적 사명과 함께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하셨고, 요 3:3에서도 “주를 향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한다”하시므로 성도의 깨끗한 생활을 크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려면 성령님의 전인 자기를 죄의 도구로 쓰여지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된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성령의 충만을 힘입고 죽기까지 자기를 성결하게 지켰기 때문입니다.(눅 1:15-17)

2. 자기를 속이지 않는 자입니다. 본문 18절에 보시면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속이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자기를 속이는 일도 있는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속이는 일이 남을 속이는 일보다 더 많을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자기를 더 해롭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속이는 일이 무엇입니까?

1)잘못된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잘못된 지식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안 계신 줄로 안다든지, 생명의 주가 없다든지, 세상의 끝날도 없고 심판도 없다고 아는 것은 전부 잘못된 지식입니다.

2)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혜있는 자인 줄로 착각하는 것도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세상적 지혜를 믿고 인간을 자랑하지만 역시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면 미련한 자가 되라”하셨고, 21절에서는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세상 지혜를 믿고 그것을 의지하면서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지혜없는 자의 행동입니다. 피조물이 인간의 연약한 줄을 모르고 세상 지혜를 자랑하면 하나님이 역겨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궤계(자기의 잔꾀)에 빠지도록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있다는 자의 지혜를 헛것으로 만드신다(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시 49:6에 보시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자기를 위하여도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 못한다”고 하셨고, 시 146:3에서 “인간은 지혜롭다 하고 힘이 있다 하나 의지할 바가 못된다”하셨으며 갈 6:3에서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사람은 무지와 착각도 많지만 망각 때문에 자주 자기를 속입니다. 자기의 망각을 생각하지 못한채 무엇을 주장하다가 나중에 망각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풍족하게 모시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알기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믿음과 교제로 풍족하게 소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못 먹고, 못 입으며 못 배우고, 화장도 못하여 늘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돈 많은 집 딸을 부럽게 여기고 어떻게 하면 돈의 원수를 갚나 하였는데 이 처녀가 부잣집 맏아들의 눈에 들어서 결혼을 하였다면 그의 결혼과 함께 재물없는 한탄을 해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몸은 작아도 마음 만큼은 넓게 가지셔야 합니다. 넓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것을 다 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보시면 바울과 아볼로를 사모하고 게바를 사모하며 세계를 사모하고 생명을 사모하며 또 죽음 이후의 소망을 사모하고 지금 것과 장래 것을 다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그것을 다 주셨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셨을 때는 그 온갖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시집간 색시가 돈 걱정 할 필요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소유한 성도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고 부요하게 사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가난을 이기지 못하면 부자의 생활을 하나님보다 더 화려하게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억을 가진 부자라도 자기 분량 이상은 못 씁니다. 그것은 몸이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롬 14:17에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에 육체적 안일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아니요 반대로 못 먹고 못 쓰다가 세상을 떠나도 그것을 아쉽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성도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다 자기의 것인 줄도 모르고 늘 불평하며 사는 것을 맏아들 탕자 비유에서 교훈해 주셨습니다.(눅 15:25-32) 허탄한 것에 욕심을 가지므로 영적으로 핍절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과 함께 하나님을 모시는 성도는 그만큼 영적으로 부요하고 대범하여 신령한 은혜로 만족할 줄 알게 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①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는 자요 ② 자기를 속이지 않는 자이며 ③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풍족하게 모시는 자란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 12 과 완전한 판단 (고전 4:1-5) 목록으로


이 본문의 1-2절은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종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믿고 충성되이 일하기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3-5절은 “사람의 판단은 확실하지 않으며 세상 끝날에 주님이 판단하실 것만 기대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1대지는 “그리스도의 일군됨”, 2대지는 “완전한 판단”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됨.(1-2절)

1)1절에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자신과 그 동역자들에 대한 신임이 있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라면 아볼로, 디모데, 브리스길라 부부(고전 16:10-12,19) 등일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인정받아야 할 이유는 바울을 사이비한 사역자로 헐뜯는 핍박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핍박자들은 대부분 유대주의자들로서 이방 성도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에 대한 불신과 악의를 품도록 하였습니다.(행 14:1-2, 고후 2:11,3:1) 따라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도 그런 문제로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5절에서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그런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하나님이 세우신 정통적 사역자인 만큼 누구도 그들의 신분을 의심하면 안 될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일군”이란 주님의 하인같은 종을 뜻하며 “하나님의 비밀”은 일찍이 감취어 있다가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난 복음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받았다”는 뜻은 증거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3)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하였으니 모든 성도들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진리증거와 모범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맡은바 진리 사역에 충성하지 않고 허탄한 일들에 마음과 시간을 뺏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완전한 판단에 대하여(3-5절)

1)바울사도 주위의 사람들이 바울의 신분을 두고 판단을 하였습니다.(3절) 장점보다 단점을 더 지적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파가 아닌 성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부정적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나 부정적 판단을 받을 때 명예적으로 손해를 볼 것이나 바울사도는 그런 판단과 명예적 손해를 작은 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판단 자체가 옳지 않은 거짓이기 때문이고, 또 성도가 하나님의 판단을 의존하다 보면 인간의 불확실한 판단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면에 대범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저주를 하여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 사람의 판단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3절에서 바울사도가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자기를 아는 일에 대하여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2)바울사도는 자기를 살필 때 “자책할 일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4절) 이 사실은 바울의 생활이 그만큼 순결하였음을 의미합니다.(고전 11:1, 고후 11:31)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순결 자체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완전할 수도 없거니와 판단자체도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판단하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3)예수님은 “때를 정하시고 심판하실 분”이라고 하였습니다.(5절) 그런고로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심판을 하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판단이 옳다 하여도 피상적 판단을 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 어두움에 감추인 일들을 드러내실 것이고, 마음에 품은 뜻까지 나타내셔서 완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각 사람에게 그 행위를 따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계 22:12, 삼상 23:)

결론적으로 성도는 세상적 판단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칭찬의 대상만 되도록 자신감있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교만한 마음을 버릴 것 (고전 4:6-13) 목록으로


6절 하반에 보시면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본문의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6절 말씀은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임”이고, 7-8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왕 노릇함”이며 9-13절은 “복음사역자들의 비천함”으로 제목을 정하여 살필 수 있습니다.

1.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임.(6절)

1)6절 초두에 “형제들아”란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호칭한 말로서 교회안에서 또는 믿음 안에서 이웃을 형제처럼 대하였고, 또 그렇게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요

2)“나와 아볼로로 본을 보였다”하셨으니 이는 복음사역자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인 교역자나 대표자, 또는 먼저 믿은 성도가 반드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책할 것이 없을 만큼 수준 높은 순결과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고전 4:4)

3)여기에서 본을 보인 자는 바울과 아볼로였고, 이들은 교회의 지도자이며 “우리”란 복수를 사용하였는데(6,9절) 9절에서 “사도인 우리”란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아볼로”도 사도 호칭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도 사도 호칭을 받았지요.(행 14:14) 그런 의미로 볼 때 사도는 예수님이 세운 사도 외에도 맛디아(행 1:28)와 바나바와 아볼로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디모데”는 사도라 할 근거가 미약하다 할 것입니다.

4)무엇에 본을 보였을까요? 지도자는 모든 일에 본을 보일 책임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이 일에 본을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은 무엇을 지적하신 것일까요? ① 인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지 않는 것이요 ②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사나 지위로 볼 때 사도들이 교만할 수 있는 형편이고, 성도들은 겸손하여야 하는데 고린도교회는 그 반대 현상을 이루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사도들을 제외시키고 교인들이 왕노릇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교회가 현실에도 있을 것입니다. 신령한 사역자는 겸손한데 교인들은 교만하며 교회의 주권자처럼 군림하기를 좋아하고 교역자를 비판하며 자기들이 생활비를 주는 듯이 주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로 교회의 주인격이 되거나 교역자를 고용인처럼 생각하는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③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경과 일치되게 할 것을 교훈하신 것으로 중요한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5)성도가 교만한 마음을 먹는 것은 서로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성도의 세계에 이런 것이 없어지기 위하여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인 만큼 성도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므로 성도간에 대적하는 태도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6)7절에서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뇨?”하신 말씀은 아무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교만하거나 왕노릇할 특권을 준 일이 없다는 뜻이요, 또 그들이 구별되었다면 성도로 구별된 것인데 이 은혜와 모든 다른 은혜를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받지 않은 것이 없은즉 자기 것으로 교만하거나 왕노릇하는 자처럼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받은 것을 갖고 그것을 주신 자 앞에서 안 받은 것처럼 교만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8절에서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부요하였다”는 것은 성도들의 교만, 자긍, 향락적 생활을 뜻하고, “우리없이 왕노릇하였음”은 은혜를 전달한 사도들의 공로를 잊은 채 자기들만의 이기주의적 생활을 한 것이며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한다”함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영적 펑강과 부요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며 “참으로 너희가 왕노릇하기를 원한다”는 뜻은 성도의 처신과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므로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고 상급으로 왕 같은 보상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2. 지도자들(사도들)의 비천함.(9-13절)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복음사역자들을 비천하고 고난스럽게 쓰신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8절에서 “우리없이 왕노릇하였다”는 말씀에서 사도들이 왕노릇에서 제외되었는바 이는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이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해지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 “생각컨데 하나님의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같이 미말에 두셨다”하셨으니 이 뜻은 복음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죽어야 마땅할 자처럼 고난에 버리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작은 일 하나까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되는 일이 없거든 하물며 복음사역자가 당하는 일이겠습니까? 이 때에 사역자들은 비천함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믿은 만큼 마땅하고 복되게 여겼을 것입니다.

2)하나님이 복음사역자들을 붙드시되 (모든 사람의) 미말에 두셔서 세계 곧 천사나 사람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었고(9절), 또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게 되었다”하신 것은 복음사역자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만큼 자기를 부정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존하고 주님의 종처럼 사는 성도는 자기의 지혜를 감추므로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10절) 따라서 약하고 비천하였으며(10절)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를 맞았으며 정처없이 떠다니고 수고하여 돈을 벌고 후욕(꾸짖음과 욕설을 당함)을 받고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축복하고 핍박을 받고도 참으며 비방을 당하고도 권면하니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하셨습니다.(10-11절) 여기의 “더럽고 찌꺼기 같다”는 뜻은 증오하여 아낌없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3)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반대로 존귀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웠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일이요, “강한 것”은 믿음생활의 용기를 나타냄이고,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백성됨을 뜻합니다. 복음사역자들이 고난 당하며 복음을 전한 덕분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귀하고 영원한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왜 사역자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미말에 두어 고난과 비천함을 당하게 하였을까요? ① 복음의 성격이 고난을 받으며 생명을 걸고 전파하여야 할 만큼 귀한 것이란 사실과 ② 주님을 위하여 핍박받은 자들에게 상급주실 약속과(마 5:11-12) ③ 겸손한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물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고후 12:9) 또 한 가지의 교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도되고 신비한 은혜를 받은 우월감에 빠져서 사도들의 권위와 수고를 앞세우지 못함에 대하여 지적하셨으니 이는 8절에서 “우리없이 왕노릇하였다”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복음사역자도 겸손하여야 하고 성도는 더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14 과 사랑의 권면과 책망 (고전 4:18-21) 목록으로


이 말씀의 14-17절은 “바울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권면의 말씀”이고, 18-21절은 “바울을 불신하며 교만한 자들에 대한 처신”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목을 “사랑의 권면과 책망”이라고 정하였으니 교훈과 책망은 목회의 두 가지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1. 바울의 사랑의 권면.(14-17절)

1)14절에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하심은 바울의 권면과 책망의 목적이 과오를 범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고, 깨닫고 회개하며 바르게 하기 위함이란 뜻이요

2)“오직 너희를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한다”하심은 가족적 사랑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의 권면으로 복음사역자와 성도 간에도 적용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부모의 권면을 사랑으로 받지 않는 자녀들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하셨으니 이는 모든 복음사역자가 다 성도의 스승이 될 수 있은즉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나 아비같은 스승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아비”란 낳아 준 아버지, 양육의 아버지, 또는 신앙적으로 믿게 한 전도의 아버지, 믿음을 키워주는 목회의 아버지가 계신즉 이런 아버지는 몇 분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중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낳아 준 아버지”라 하였으니 이는 바울의 전도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16절에서 바울사도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나(요 13:15) 사도가 아니면 감히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사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본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4:6) 사도들이 본을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교회와 믿음생활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엡 2:20)

5)17절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냈다”하셨으니 “이를 인하여”란 디모데를 보내신 목적으로 교훈과 본을 보이게 하신 일이며 “주 안에서”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합당하게 여기시는 뜻 안에서 사역자를 파송한 것이며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한 것은 복음으로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16절, 행 16:1-3, 빌 2:22) 또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 처 각 교회에서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하셨으니 이는 바울의 교훈과 디모데의 교훈이 같음을 뜻하고 후계 사역자를 같은 사역자로 대할 것과 사역자가 가르친 진리를 항상 생각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을 불신하며 교만한 자들에 대한 처신.(18-21절)

1)18절에서 “어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해졌다”하신 것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을 불신하는 성도들이 “바울을 약점 있는 자로 취급하면서 그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하여서라도 고린도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 말입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교만을 나타냈습니다.

2)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못 가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가서 그들의 교만한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심”이란 주님이 사역자의 길을 섭리적으로 인도하실 때 간다는 뜻이고, 또 “교만한 자들의 말을 알아(확인)보지 않으려 하심”은 말(소문) 자체는 확인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말 자체가 바울의 실체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확인하려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을 알아 보신다”하신 것은 그들의 생활형태로서 결과를 확인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능력이란 곧 실천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말보다 실천 그 자체가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3)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하심은 “하나님의 나라(천국 또는 신앙생활의 본질)가 주장하는 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 생활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말만 많고 실체가 같지 않은 것보다 말이 없으나 실체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4)바울사도는 미구에 고린도에 가실 뜻을 가지시고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내가 매(징계)를 갖고 너희에게 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갖고 가랴?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매를 때리러 가실 것이고, 바울이나 아볼로나 디모데의 교훈을 잘 순종하여 회개하고 변화를 갖는다면 마땅히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갖고 가시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으로 권면을 받을 때 깨닫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특히 무지와 잘못 깨달은 것과 교만과 불순종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복음사역자로 하여금 책망과 징계의 매를 들게 하지 말고 사랑과 온유와 형제애로 대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0. 판단과 자책 (고전 4: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판단과 자책”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3-5절의 말씀에는 ① 사람에게 판단 받는 일은 작은 일이란 것이요 ② 바울사도 자신도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③ 바울사도 자신이 자기를 판단하려고 살펴보아도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요 ④ 그러나 자기의 양심적 결백을 하나님께 내세워 그것으로 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⑤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 뿐이신데 그 분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며 심판의 때를 정하시고 각 사람을 칭찬하실 분이라는 것이요 ⑥ 아무도 심판의 때가 이르기까지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이 6가지 교훈을 좀 더 인상 깊게 기억하시기 위하여 약간의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일이 작은 일이라는데 대하여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본래부터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다른 이웃 사람들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판단”이란 말씀은 의와 불의를 놓고 분별하는 판단이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놓고 서로 대조하여 우열을 가리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 다른 교회에 가셔서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한 시간 듣는다고 가정하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보다 은혜가 더 되나 덜 되나 혹은 우리 교회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고맙게도 내가 몇 곳에 가 보아도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만큼 좋지 않더라는 말을 하는 분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왜 교인들로부터 그런 판단을 받아야 하는가?하면 이제 말씀 드린대로 이웃의 교역자들과 자연적으로 비교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판단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를 중심 한 교인들의 세계에서 이미부터 그 사역자들의 권위문제를 놓고 파벌이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마다 “누가 더 훌륭한가?”하고 그 우열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서 바울사도는 “인간의 판단을 받은 것은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인간의 판단은 잘 모르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소평가를 받거나 심지어는 비난을 받아도 괜찮고, 또 그 반대로 칭찬을 받는다 해도 그것도 확실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당시에 바울사도가 좋은 호평을 받았느냐?하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말도 졸하며 건강도 안 좋고, 사도된 근거도 뚜렷하지 않다는 식으로 좋은 판단을 못 받았지만 인간의 판단은 확실하지 않으므로 별것이 아니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확실한 판단을 뜻하는 것이니까 못한다고 비난해도 위축될 것이 없고 잘 한다고 해도 우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하셨으니 이 말씀은 “인간이 확실한 판단을 못 하는 이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못할 만큼 인간은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판단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엇그제 죄를 짓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회개할 체를 안 하면서 자기의 죄인 됨을 모르거나 또 금방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할 만큼 자기를 잘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시 19:21에 보시면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자기의 죄를 모르고 사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예 자기를 괴수 죄인처럼 아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딤전 1:15) 또 인간에게는 편벽된 이기주의 때문에 자신의 자기 판단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바울사도는 자기에 대하여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께서도 늘 자기를 살피며 반성하셨다는 뜻이고, 또 반성해 보시니 자책하고 회개할 것이 없을 만큼 결백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왜 자책할 것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1)워낙 결백하게 살려고 애를 쓰셨기 때문이요

2)자기를 살피는 눈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먼지 같은 죄를 못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책할 것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성결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자책”이란 말은 “자기를 책망한다”는 뜻인데 바울은 스스로 반성해 보아도 자기가 책망 받아야 할 만한 죄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누구의 지적을 받을 만한 잘못이 있거나 양심에 선뜻 거슬리는 죄 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그 분의 무흠하게 산 생활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자책할 것이 없는 자기의 의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책할 만한 죄가 없어도 완전 결백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 64:6에 보시면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마치 속담에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사람이 결백하게 행하는 것은 마치 깨끗한 옷을 입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깨끗할지라도 털면 또 먼지가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는 바울사도처럼 수준급으로 결백하여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를 내세워 의롭다함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로만 죄사함 받고 의로워져야 하기 때문에 성도의 결백한 생활의 의는 복 받을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의로워질 조건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로워 질 근거는 십자가뿐입니다.

5. 복음의 사역자나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심판자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판단의 표준으로 ①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② 또 상대방이 자기를 알아줘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분적 판단일 뿐, 종합적인 판단은 주님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근원부터 아시고 조성하신 분입니다. 심장 폐부를 감찰하시고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묶으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는 분이며 각인에게 칭찬을 주실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칭찬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바울사도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딤후 4:8) 그래서 “때가 이르기 전까지 즉 주께서 심판하러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결론적으로 깨달으셔야 할 것은 인간의 판단은 정확성이 없는 것이니까 작은 일로 여기실 것이요, 항상 자기를 반성하여 자책할 것이 없을 만큼 생활하실 것이며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보다 주님이 자기를 아시는 것이 더 정확한 줄 아셔서 판단을 주님께 맡기시고 자기와 이웃을 판단하지 마실 것이며 인간은 자책할 것이 없어도 결백하지는 못하므로 인간의 의는 내세울 것이 못 되는 만큼 십자가만 의지하실 것이요, 어둠에 감추인 것과 마음의 뜻을 드러내시고 각인에게 칭찬해 주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열의 판단을 삼가며 인간을 차별대우하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1. 말씀 중심 생활 (고전 4: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말씀 중심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 이 세 가지는 교회생활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먼저 본문 6절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1)바울과 아볼로는 “이 일에 대하여 본을 보였다”하셨으니 여기에 이 일이란 ① 하나님의 말씀(당시는 구약)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일이요 ② 서로 대적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먹지 않는 일에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2)그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① 기록된 말씀의 규범을 무시하고 자율주의, 신비주의로 기울어지는 일들이 있었고, ② 소수 그룹을 지어 서로 대적하며 당파를 조성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말씀 중심에 든든히 설 것과 교만으로 대립하는 파쟁에 휩싸이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시간에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을 중심하여 말씀 중심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말씀 중심 생활은 어떤 것입니까?

1)기록된 말씀(성경)을 하나님처럼 믿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란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1:1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경 “그라페”(요 10:35)가 아니고, “로고스”란 말입니다. 그러나 요 20:9과 행 1:16에서는 그라페를 성경으로 번역하지 않고 로고스란 “말씀”으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로고스나 그라페는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스토익 철학파에서는 이 “로고스”란 용어를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으로 사용하였고, “필론이란 사람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중간 중보자라고 하였다” 합니다만 사도요한의 영감으로 로고스란 말을 사용한 것은 바로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을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이시라”, 또는 “기록해 주신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고 영으로만 존재하시며 내용만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견적으로 나타내주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도성인신 하신 주님과 기록된 말씀임을 믿는 것이 말씀 제일주의인 것입니다.

2)예수님과 성령님이 성경 66권만을 성문계시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 “진리”라 하셨고,(요 14:8,17) 예수님의 말씀은 “성부하나님의 뜻과 상통한다”고 하셨기 때문에(요 12:49) 영감으로 주신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작품이며 따라서 변할 수도 없고(벧전 1:25) 더할 수도 없는(요 21:25) 충분한 완성품이라고 믿는 신앙이 바로 말씀 중심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3)말씀 중심 생활은 성경의 권위를 최대한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 권위를 최대한 높이려면 ① “성경만 제일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된다 하고 성경 만능주의를 외쳐야 합니다. “성경이 제일이라”고 할 때 교리적으로 위반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나 성령님이나 예수님이 다 제일이다”하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만 제일이다”했다가 성령님이 시기하시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할 때 역시 “성령” 자신의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요, 성령님도 말씀 따라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섭섭하게 여기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중심주의는 결코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② “성경만 제일이다”했으니까 성경만 믿고 성경만 의지하고 성경대로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위반되는 것이면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어떤 성도가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이적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기로 “등에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여 기도를 한다는데 그런 방법은 성경에 없는 것이니까 나는 그런 방법으로 병이 낫는다해도 그런데 가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교인이 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하기로 “목사가 안 가니까 교인도 안 가면 좋지만 그래도 병 낫기를 기대하고 가야만 하는 개인의 양심을 막을 수는 없은즉 다만 성경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당사자에게 맡기되 추천서를 써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요일 4:1을 보시면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시험합니까? 그 시험의 시금석은 성경뿐입니다. 사 8:20에 보시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또 행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한다”하시므로 성경 말씀과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은 아침빛을 보지 못할 만큼 희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를 대고 직선을 긋는 것과 안 대고 긋는 것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씀 따라 사는 생활은 그만큼 흔들림이 없고 든든한 것입니다.

4)말씀 중심 생활은 성경을 실천하는 능력이 말씀 자체에 있음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말씀 권위와 능력은 믿지 않고 기도를 통해서만 말씀이 지켜지는 줄로 아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 1:5에서 “믿어 순종케 하신다”하셨고, 히 4:12에서는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운동력이란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행할 능력도 같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약 2:22에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임한다”는 말씀도 역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말씀에 끌리고 말씀 믿는 일에 집착할 것을 늘 강조하는 것입니다.(요 5:39, 11:15, 19:35, 14:11,20:29, 엡 3:3, 4:13)

아무쪼록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 법칙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서 축복받는 성도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1)말씀 중심 생활은 성경을 하나님과 같은 권위로 믿고, 성경 66권만 주신 것을 믿으며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에 위반되는 것을 따라가지 않으며 성경 실천 능력이 말씀에서 주어지는 줄로 믿는 신앙입니다.

2)이런 신앙을 가지시면 항상 만족하고 든든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율주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이 세상의 풍조에도 따라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실 기독교는 성경제일주의에서 세속문화주의로 많이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나 하나라도 자율주의, 세속주의를 멀리하고 말씀주의에 서야 하겠다”는 확실한 결심이 있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15 과 범죄와 징계 (고전 5:1-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을 살피면 4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범죄사실과 사도의 관심”이요, 4-5절은 “범죄에 대한 사도의 징계”이며 6-8절은 “권징하는 이유”이고, 9-13절은 “권징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범죄와 징계”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범죄사실과 사도의 관심에 대하여(1-3절)

1)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음행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소식이 바울사도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음행의 성격이 이방인들 세계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죄로써 아들이 아비의 아내와 음행을 한 것입니다. 이런 범죄는 구약성경에서 야곱의 아들 “르우벤”도 범하였습니다. 아비의 아내가 친모인지 계모인지 아비의 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크게 부끄러운 죄악입니다.(1절)

2)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거나 통한히 여기지 않고 여전히 교만하면서 그 범죄자에 대하여 징계의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2절에서 “오히려 교만하다”함은 그들 세계에서 누가 범죄를 하였던지 모든 성도가 연대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않고 여전히 교만하면서(4:8) 범인을 물리치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의 교만은 신앙적 교만일 수도 있으며 “물리친다”는 뜻은 교회 단체에서 떠나게 하는 출교를 의미합니다. 바울사도가 “물리치지 않느냐?”고 하신 뜻은 권징의 필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권징의 필요 ① 범죄자를 책망하는 뜻이 있으니 이 책망을 받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과 ② 다른 성도들에게도 그 같은 범죄 유혹을 경계하게 하는 의미가 있으니 “이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6절) 누룩같은 범죄 요소를 떼어 없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교회가 범죄를 엄하게 다스리므로 순결을 도모하는 단체임을 알리는 의미가 있고 ④ 또 그리스도의 순결을 지향하고 심판자의 심판적 권위를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4)바울사도는 얼마동안 고린도교회를 떠나 계셨으나 영으로 함께 계셨으므로 그 곳의 사정을 실제로 보신 듯이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3절) 잠시 떠나신 것은 에베소나 다른 지역을 순회하셨을 것이며 “영으로 함께 있으심”은 정신적으로 늘 염려하고 기도하며 소식을 듣기 때문에 범죄의 정황까지도 충분히 예측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범죄의 정황과 성격이 악하여 징계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2. 바울사도의 권징에 대하여(4-5절)

1)죄인을 권징하는 주체는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입니다.(4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권징을 뜻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함”은 그 권징의 권위와 효력에 능력이 나타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배후의 역사가 없는 권징은 헛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권징의 전달자는 사도와 교인들입니다. 4절에 “너희가(성도) 내 영과(사도) 함께 모여서” 권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대신 나타내지만 거기에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사도의 권징이 교회의 권징이며 교회는 성도의 단체이고 또 사도의 권징을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서 권징의 효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헌법의 권징자는 주님을 대리한 목사와 교인을 대표한 장로가 함께 재판국원이 되게 한 것입니다.

3)권징의 내용으로써 5절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한 것은 교회 밖으로 출교한 것을 뜻하는데(13절) 교회 밖으로 나간 것은 ① 교회적 보호에서 제외된 뜻과 ② 사탄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세계에 방치함과 ③ 육체적 질병에 당면하도록 선포한 뜻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도의 선포로 육체의 사망이나 질병을 들게 한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행 5:1-11, 13:9-11, 고후 10:8, 13:10)

4)이런 권징을 통하여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함이라”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① “육신이 멸한다”는 뜻은 육체의 죽음이나 쇠하여짐을 뜻할 수도 있고, 정욕적 부패성이 없어지게 됨을 뜻하며 ② “주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됨”은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시기 안에 영적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권징은 사랑으로 시행하는 것이고, 최후에 구원을 받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권징의 이유를 말씀하심에서(6-8절)

1)범죄가 누룩처럼 퍼지거나 전염되지 않게 하시고(6절)

2)변화를 촉구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7절에서 “너희가 누룩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버리라”하신 것은 간단히 표현할 대 “순결을 도모하라”는 말씀입니다. 7절의 “누룩없는 자”란 성도가 믿음을 시작할 때 거듭나는 은혜와 함께 깨끗하게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요 13:10) “새 덩어리가 된다”하심은 변화의 단체를 뜻하고, “묵은 누룩을 버리라”는 뜻은 옛사람의 악습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또 “우리의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속죄를 받은 만큼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여 순결한 생활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3)8절에서도 성도의 순결한 생활이 지속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명절을 지킨다”는 뜻은 구약의 성도들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면서 경성한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계속 명절을 지키는 것처럼 경성하되 누룩같은 부패의 요인을 탈피하여 진실함과 순결함(누룩없는 떡)으로 생활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의 “누룩”은 범죄성을 뜻하고, “누룩없는 떡”은 순결한 단체를 뜻합니다.

4. 권징의 성격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9-13절)

1)9절에서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뜻은 출교를 뜻하는 것으로(13절) 5절에서도 말씀드렸고,

2)출교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범죄자와 인간적(사회적)으로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범죄 행위에 동석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10-11절에서 “음행, 탐함, 토색, 우상숭배, 후욕, 술취함”을 동등성 있는 죄로 묶어 취급하신 것과 또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하심은 일반적, 사회적, 인간적 친교를 끊는 것이 아니란 뜻이요,(그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임) “오직 형제라 일컫는 자가 위에 표기한 범행을 할 때 범죄와 관련된 상태에서 사귀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3)바울사도는 성도와 불신자를 형제와 외인으로 구분하였습니다.(11,12절) 외인들을 판단(교훈과 권징을 위한 것)하는데는 사도들과 교회가 상관할 필요가 없으나 교중(성도)들은 교인들이 살피는 차원에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외인들은(성도나 교회의 간섭없이)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13절) 그러나 성도는 교회를 통하여 판단하고 감독 지도하며 권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구원과 회개와 순결과 건설적 목적으로 하되 사랑의 방법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12. 징계를 촉구하심 (고전 5:1-13) 목록으로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징계를 촉구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심각한 도덕적 부패가 있었으나 그 교회의 성도들이 회개하거나 문제시하지도 않고 정화되도록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 교만에 사로잡혀 있음을 꾸짖으신 내용입니다.

1.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죄를 범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의 “너희 중에”란 말씀은 고린도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를 뜻하고, “심지어”란 말씀은 부패성의 만연을 꼬집은 말씀입니다. 심지어 이방인 세계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근친음행을 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성도들은 연대적 책임감이 없음은 물론 통한히 여기지도 않고 물리치려 하지도 않으면서 신앙적 자랑과 우월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순결하여야 할 성도의 세계에 부덕한 일이 있으면 안 될 것이요 혹 있다고 하면 모든 성도가 ① 그 죄악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을 느끼고 다같이 겸손하면서 ② 부도적한 범죄 등을 통한히 여기면서 ③ 그 문제의 대상자를 물리쳐서라도 교회 안에 순결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범죄자를 물리친다”는 말은 성도가 데모와 같은 형식으로 무질서하게 죄인을 쫓는 의미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질서와 법도안에서 범죄자의 영혼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합법적으로 시행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바울사도가 이런 보고를 받고 어떻게 권면하셨는가?하는 것입니다.

1)“그런 자를 징계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징계란 것은 ①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이요 ②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이며 ③ 범죄자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일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끝에 “판단하셨다”는 말씀과 5절 말씀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씀이 곧 “징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모세나 장로들에게 율법에 의한 재판권이 있었던 것처럼 사도들에게도 그런 권한이 있었고, 오늘날도 역시 당회나 노회나 총회가 권징권을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2)그렇다면 바울사도는 어떤 절차에 따라 권징을 시행하였는가?할 때 ① 여건파악을 현지에 가 본 듯이 확실히 파악한 후 ②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셨고(인위적인 방도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셨음) ③ 육신은 멸하나 영혼이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징계를 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육은 고린도교회에 있지 않으나 영으로 함께 계셨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그만큼 고린도교회를 가보시지 않았어도 영적교통을 통하여 밝히 아신다는 의미요, 또 4절에서 “주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권징을 하실 때에 주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시고 그 일에 고린도교회 성도가 다같이 공감하는 입장을 따라 행하심으로 바울의 권징에 대하여 이의를 붙일 자가 없을 만큼 성도와 상통하는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권징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권징의 절차는 ① 충분히 내용을 아시고 ② 교중과 공감하는 상태에서 ③ 주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시행하신 것입니다. 혹 범죄자의 죄나 불법이 뚜렷하여도 재판의 공감성이 없으면 재판문제 때문에 더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리자는 치리자로써 하나님의 뜻과 공력을 앞세워야 공의롭고 명분있게 처리해야 하며 모든 성도는 치리자의 입장에 공감하여야만 부작용 없는 권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그렇다면 바울이 권징한 내용으로서 “육신은 멸하고 영혼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도록 권징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할 때 이것은 먼저 5절에서 “징계받은 자의 영이 주예수님의 재림시에(영광의 부활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여기에서 징계의 목적이 영적 유익을 주려하심에 있었음과 또 그 영혼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5절 말씀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어 육신을 멸하게 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할 때 이것은 병이 들게 하셨거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병을 고치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예수의 능력으로(4절) 병을 주거나 죽게 하는 능력도 있어서 그런 경우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행 5:1-9) 또 행 13:11에서 “엘루마”라는 박수는 바울을 대적하다가 소경된 일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자기가 받은 권징권(고후 10:8, 마 16:19)을 가지고 범죄자의 육신적 생명에 큰 타격을 주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회개치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육신이 쇠하거나 죽음으로 죄를 근절시키고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함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3. 교회의 순결을 촉구하시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6-8절의 말씀인데 이것은 누룩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6절 말씀에서 “너희의 자랑이 옳지 않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부패성이 있으니 당연히 모든 교중이 교만하거나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처럼 교회 안에 적은 부패성과 부도덕이라도 그것을 예사로 알고 버려두면 결국 적은 누룩이 전체를 부풀리는 것처럼 부패가 더 번져나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서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누룩은 8절에서 설명된 ”묵은 누룩을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라 하여 과거의 부패성을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누룩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는 뜻이요,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사함받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구약의 성도들이 유월절에 누룩없는 떡을 먹은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요1 5:18) 부패를 멀리하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한 생활로(누룩없는 떡을 먹듯이) 변화의 새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그 문제의 사람들을 얼마큼 경계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9-13절까지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려주셨는데

1)9절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본서를 보내기 전에 “음행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얼마큼 사귀지 말아야 하는가?할 때 “세상 안에 살면서 도무지 사귀지 않을 수는 없다”고 전제하셨으니까 여기에 “사귀지 말라”는 말씀은 완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1절 말씀에서 “음행자, 탐하는 자, 우상숭배자, 후욕하는 자, 술취하는 자, 토색하는 자”를 다 비슷한 죄인으로 함께 묶어 놓으시고 “그런 자들과 사귀거나 함께 먹지 말라”하셨으니 이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여 “동화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생활면이나 국민생활의 유대관계를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범죄행위 자체에 가까이 하거나 범죄를 목적하는 식탁에 같이 앉거나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일들을 위하여 사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그리고 불신자의 죄에 대한 판단은 사회가 하니까 직접 관여할 필요가 없지만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은 교회가 먼저 판단하여 그 잘못을 교정시켜 줄 사명이 있고, 여러 차례 권면하여도 듣지 않는 자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차원에서 출교(내어쫓으라)시켜도 마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 16 과 성도의 일반적 송사 (고전 6:1-8)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성도의 일반적 송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동기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에 일반적 송사를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일이 있어서 이것을 삼가게 하실 목적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강해함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당면하는 문제들과 관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적 당면이란 성도간에 또는 교회적(단체)으로 일반 송사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고, 또 교단에서는 무조건 “송사자에게 벌을 준다”는 식으로 통제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는 “반 고소파”라 하여 교회적 일반 송사를 반대하여 교파를 나눈 사례도 있습니다. 필자는 어떤 교회의 문제를 지도하면서 일반적 송사에 대하여 자문하고 송사문제를 긍정적 입장에서 지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강해서 후면에 “성도의 일반적 송사문제”란 내용을 수록하였습니다.

1. 1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다”는 뜻은 성도와 성도가 송사 문제를 갖고 있음이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않는다”함은 그들이 불신 세계의 재판관(사회 재판)에게 의뢰하고, 성도(원로 지도자) 또는 교회(치리 기관)에 의뢰하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세계가 더 밝은 양심을 가지고 합리적 재판을 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뜻은 공의로운 성도의 세계가 그러할 뿐 공의롭지 못한 성도의 세계는 무지와 편벽과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불신 법정만도 못한 경우가 있음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크게 비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하려고 하여도 중간에서 훼방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 재판을 포기해야 하는 실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2. 2절에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만유를 심판하실 때 함께 배석하게 됨을 뜻하고(엡 2:6, 히 2:5-9, 롬 8:17, 딤후 2:12, 사 24:21, 벧후 2:4, 유 6),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는다”는 뜻은 역시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심판석에 앉아서 주님의 심판에 공감함을 뜻하며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느냐”하셨는데 여기의 “지극히 작은 일”은 현실적으로 나타난 일, 또는 증거가 뚜렷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송사하는 일을 지적하셨다면 지극히 큰 일은 국가적 기관이나 더 유명한 재판관에게 의뢰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높은 재판 기관에 의뢰함이 결코 금지된 사항은 아닙니다.(롬 13:1-4, 행 26:32)

3. 3절에서 “성도가 천사를 판단함”은 2절의 뜻과 같으며 “하물며 세상일이라”하신 것은 역시 세상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감추어진 사건들에 비할 때 판단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4. 4절에서는 “세상 사건” 즉 교리와 신앙에 관한 것이 아닌 사회적 사건을 송사할 때 교회에서 존경받는 성도를 재판자로 세우지 않고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는 잘못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재판관을 뽑을 때 사건 관계의 이해 관계를 떠나 오직 공의롭고 지혜롭게 재판할 유력한 인사를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치리회에서 재판관을 뽑을 때 편벽되게 치우치는 경우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5. 5절 말씀은 성도의 세계에 공의롭게 재판할 만한 인사가 없느냐?고 질문하신 말씀이요, 6절은 “형제(성도)끼리 송사하는 일이나 믿지 않는 법정에 나가 송사하는 것은 좋지 않음”을 말씀하셨으니 형제애와 영광에 훼방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피차 송사하므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다”하심은 송사 그 자체가 대립이요, 무지한 탓이며 심하면 싸움과 같은 것인즉 허물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실수로 인한 소송이라 하더라도 널리 이해하고 양보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불의를 당하거나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하셨으니 이 말씀은 인간의 타산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함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어느 현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불의를 당하는 일”이란 상대방이 불의를 행하므로 한 쪽이 손해본 것을 뜻하고, “속는 것”도 한 쪽이 속였으므로 그 상대방이 피해를 본 것입니다. 이 경우에 상대방의 잘못을 규명한 상태에서 피해를 감수할 것을 권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자가 불의를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의롭고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속인 자가 속인 것을 시인하지 않고 서로 물고 먹으려는 경우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물적 피해는 감수하나 잘잘못에 대한 확인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6. 8절에서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의 형제로다”하신 말씀은 성도가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죄를 범하였더라도 형제인 만큼 긍휼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속인 자가 그 잘못을 시인한다면 형제인 만큼 긍휼히 여기고 잘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자는 자기의 불의를 시인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는 교인이라도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므로 형제적 대우를 할 수 없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자기의 불의를 시인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참고자료) 성도의 일반적 송사문제 (마 5:25-26)목록으로


1. 성도들 세계에서 일반적 송사가 있게되면 퍽 거리끼는 생각을 하거나 심하면 그런 것을 증오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성도간의 대부분의 송사는 “예배당 총유재산을 나누자”는 문제이고, 개인적으로는 서로의 원한 관계나 피해에 대한 변상문제로 송사하게 되는데 이런 송사가 없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하여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긍정하고 필요 불가피함을 인정해야 될 때도 있다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정통교파의 교리적 신앙중에 “성도가 자살을 하면 구원을 못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고려할 점이 없지 않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강의 내용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지체부자유한 장애인이 진실한 믿음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음을 개탄하여 그 자살의 동기와 목적을 적어 놓고 자살을 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웃에는 그를 살펴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 목사님이 직접 장례를 치뤄준 일이 있었는데 그 자살한 성도의 목적은 속히 안식에 들어가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인 즉 구원을 못 받는다고 단정하기 어렵지 않은가?하는 의문을 나타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또 성경에는 “한 알의 밀이.....죽어서 열매를 맺고(요 12:24)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요 15:13) 이런 말씀과 관련하여 자살에 관한 문제도 동기와 목적에 따라 더 연구하여야 하는 것처럼 성도간의 송사문제도 무조건 부정하고 증오하기 전에 상대방 또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좀더 자세한 지식을 배워보자는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송사하여 손해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는 인간의 완악이 극도에 달하여 서로 화해하거나 양보하지 못할 때 결국 송사로 문제를 끝내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송사의 원리를 잘 모르면 부당한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또 불법을 계속 덮어둔 상태로 묵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시킬 경우도 있음을 감안하여야 할 것입니다. 6.25이후에 고신파에서 마산 문창교회의 송사를 반대하여 “반고소파”가 생긴 일이 있었으나 요즈음은 반고소를 주장하는 교파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필자가 소속한 총회도 총회기관의 일반소송을 허용하면서 지교회로 하여금 가급적 또는 엄히 일반 송사를 하지 않도록 권장하였으니 결국 불가피한 송사는 허용한다는 뜻이 된 것입니다. 우선 지교회에 송사가 있을 때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어야 하니까요. 과연 성경은 송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송사에 대한 근거

1)교회재판에 관한 근거 ① 출 18:13-27에 보시면 모세가 재판기관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임명하였고, 출 20:22-23:33에서 형법과 민법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그 효력은 이스라엘 선민국 안에서 시행되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없어지므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계율은 신약시대 교회의 재판법을 만드는데 근거가 될 수 있고 ② 마 16:19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교회에 주셨다는 뜻)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시므로 교회적 권징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또 교회적 권징의 효력이 하나님의 역사와 상관된 것을 말씀하셨으며 또 교회안에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교회의 재판건으로 올리기 전에 화해의 절차를 밟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마 18:15-17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범죄한 성도가 있을 때 먼저 한 두 사람의 권면을 해보고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는 교회에 말하라(고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하셨으니 이것은 교회의 시벌이요, 믿지않는 자로 내쫓는 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율법에 근거한 신정국은 아니지만 유대인들 세계에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적 근거에 의한 재판으로 출교한 사실이 있고(요 9:22) 또 그것을 두려워한 사실도 있었으며(요 12:42)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을 받기 전에 대제사장의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 것도 역시 율법에 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출 22:20에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죽이라”는 형법도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하여 사형을 선고한 것입니다.(마 26:66) ④ 또 신약적인 교회와 재판법에 의하여 재판한 사례로써는 사도들이 직권으로 시벌한 사실이 있었을 뿐 치리회가 시벌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한 사실이 있고(행 5:9), 바울이 음행죄 범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준 일이 있었으며(고전 5:8)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의 규례를 만들어 지도한 사실이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행 16:4)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에게 권징권이 주어졌으니까 직접 시행한 것이고, 출 19:15에서 “공의롭게 재판할 것”을 또 잠 17:23, 18:5, 24:23등에서도 공정하게 재판할 것을 명하시므로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그와 같은 성경적 근거에 의하여 권징조례를 제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은 교회안에 당회, 노회, 총회의 삼심제 재판법이 성경에 근거하였음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교회의 재판을 받을 자는 오직 성도 뿐입니다.

2)일반재판에 관한 근거도 있습니다. ① 마 5:25에서 “너를 송사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어.........너를 가둘까 염려하라”하셨지요. 이 말씀은 성도가 누구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고발 당하기 전에 속히 회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이요, 또 고발을 당하면 일이 커지니까 그 전에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는 잘못한 사실이 있으면 속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 재판받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일반적 재판 제도에 대하여 예수님이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② 일반재판을 예수님이 인정하신 사실은 눅 18:6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또 롬 13:1-4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하시고 세상의 권세(즉 국권)를 주신 목적이 선을 행하고 악을 응징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사법제도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씀입니다. 사회적 또는 국가적 사법제도가 없으면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도의 대상은 모든 국민이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왜 기독교계에서 일반법정소송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느냐?할 때 두 가지 성경말씀에서 제재를 받기 때문입니다.

1)마 5:39-43에서 ①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한자는 막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뜻은 개인적으로 상대하여 싸우지 말고 져주든지 피하든지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악한자가 많았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다투신 일이 없으셨고(마 12:19) 결국 당하셨습니다. 그런 악한자는 개인이 대항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응징할 것을 롬 13: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②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폭력을 대항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때리는 것보다 맞는 편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무저항주의로 맞으셨습니다. ③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저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손해를 보였으면 후하게 보상하라는 뜻입니다. 송사를 받을 때까지 버틴 것도 잘못입니다. ④ 억지로 5리를 동행하자 할 때 흔쾌히 10리까지 동행해 주고 또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저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기꺼이 봉사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는 쉬우나 실천이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쉽게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제일 가난하게 살면 달라고 할 자가 없을 것이고 제일 약한 입장에서 살면 때릴 자도 없을 것이며 혹 몹시 폭력을 당했다면 죽으면 되니까요...그렇게 살았을 때 예수님처럼 큰 영광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가 최고로 선하게 사는 목표와 원리를 말씀해 주신 것이고, 지상낙원이 형성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그 모범을 보이셨으니까 그대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2)고전 6:1-11에서 일반적 송사와 관련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① 1절에 보시면 “성도간에 일(송사)이 있을 때 왜 성도 앞에서 송사하지 않고 불의한 자(불신자) 앞에서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혜로운 목사, 장로 앞에서 잘잘못을 가리고 지도받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자들보다 성도가 더 양심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2절에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심판석에 앉으셔서 심판하실 때 성도는 거기에 배석한다는 뜻입니다. 거기는 세상과 천사도 심판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작은 일 판단하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면 퍽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③ 4절에서는 “세상사건이 있을 때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판단을 받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사건”이란 교리와 신앙에 관한 것이 아니고 현실적 사건을 의미하는데 그런 판단을 할 때 교회에서 인정(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칫하면 공의롭지 않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지혜롭고 존경받는 성도를 재판자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④ 5절에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하시므로 성도의 세계에 지혜롭게 잘잘못을 판단할 만한 자격자가 없음을 탄식하신 것이요 ⑤ 6절에서 “형제끼리 송사하고 또 믿지않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하셨으니 이 말씀도 책망의 말씀으로 “형제간에 다투지 말아야 하는데 왜 송사를 하며 또 믿지않는 재판관에게까지 가서 성도가 재판을 받으니 부끄럽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⑥ 7절에서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피차 송사란 성도간 쌍방이 불신법정에 고소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끼리 싸우면서 믿지않는 법관을 괴롭히는 것이니까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또 이런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어느 한 쪽이 불의를 당하는 것(즉 손해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송사의 핵심은 성도와 성도간에 서로 불의를 당하였고, 속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본 자가 있으나 어느 한 쪽이 손해를 감수하고 또는 양쪽이 다 손해를 감수하고 불신법정에 안 가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일반적 이권에 손실이 있어도 그것을 포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분량이 크다면 당연히 그만한 신앙을 갖고 송사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송사를 지속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확실한 명분을 갖고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성도가 일반적 송사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송사의 대상과 사건의 성질에 따라 신앙적이고 건설적으로 대처하여야 합니다.

1)불신자와의 관계에서 ① 성도가 불신자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되고, 혹 우발적 사고나 실수로 피해를 주었을 때는 후하게 또는 화해되는 입장까지 잘 변상해 주므로 소송을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편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상을 요구해 올 때는 부득이 소송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에 소송을 받았으면 법원의 판결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② 반대로 성도가 불신자로부터 명예나 물질이나 신체상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할 때에 당연히 법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악하게 나오지 않고 선한 태도를 취할 때는 정도에 따라 양보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예를 선양하는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가 과오를 범하고 시인하는 상태에서 긍휼을 구한다면 성도의 편에서는 성실을 기울여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③ 그러나 서로 잘잘못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려 할 때는 공의로운 판단과 공평한 보상이 필요한 만큼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판을 할 때는 사실대로 입증하고 판결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2)성도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문제가 또 있습니다. ① 우선 성도간에는 송사발생이 없어야 정상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성도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은 성경적이고(약 5:16, 계 2:2, 마 14:4) 죄를 지적 받았거나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니까(눅 19:8) 그대로 시행하면 싸울 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보상하지도 않으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한 것만 탓하고 일방적으로 회개와 보상을 요구할 때는 재판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마 5:37) 이 때에 먼저 교회의 재판을 받는 것이 순서입니다.(마 18:17) 교회의 믿을만한 지도자들이 공의롭게 재판해 주고 성도가 거기에 순종하면 싸움은 끝날 것입니다. ③ 그런데 교회가 공의로운 재판을 안하거나 성도의 송사문제를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성도간에 중재자가 없을 때는 일반법정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계속 할 수는 없으니까 공의를 밝히고 싸움을 끝내기 위하여 일반법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④ 그리고 사건의 성질에 따라 재판하는 목적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로 잘했다는 입장에서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가리기 위하여” 재판을 하는 경우는 피할 수도 없거니와 법을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⑤ 그런데 한 쪽 성도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였다고 할 때는 우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데(마 18:22) 그 잘못으로 인한 후유증과 피해가 너무 클 때는 잘못을 시인한 쪽에서 사과하는 표로 상당한 성의를 기울여 변상을 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할 때는 후하게 대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입니다. ⑥ 그런데 또 어느 한 편이 불법을 행하고도 뉘우치지 않고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도 여전히 시인하지 않을 때는 신앙양심이 없는 태도이므로 그 태도 자체를 불신앙적 태도로 간주하여 불신자를 상대하는 소송처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인하고 고백하여야 하듯이(마 16:16, 롬 10:10) 죄도 고백하므로 회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눅 18:13, 약 5:16) 그러니까 “무엇 무엇을 잘못하였으니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긍휼을 구할 때는 인색하지 않은 사랑을 베풀 것이나 상대방이 성도라 할지라도 명분만 그러할 뿐 불신앙적 태도를 취할 때는 불신자를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소송이행에 거리낄 바가 없는 것입니다. ⑦ 이런 상태로 성도간에 소송이 계속 될지라도 항상 서로 인사하고 미워하지 말며 법이 밝히는 대로 복종한다는 태도로써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롬 12:19) 따라서 공의실현을 위하여 재판하고(미 6:8, 렘 7:5-7) 재판으로 선악이 가려진 다음에 사랑을 베푸는 것이 성경적 순서인 것입니다. ⑧ 왕상 3장에 보시면 솔로몬 왕이 재판을 잘하여 두 여인의 싸움을 해결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인 일반송사도 국민 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사람의 힘으로 밝힐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마지막 심판에 의존하여야 하겠지만 사람의 힘과 지혜와 제도로 밝힐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예방하고 축소하는 차원에서 시행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 17 과 세 가지 범죄를 경계하심 (고전 6:9-19) 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세 가지로 구별됩니다. 9-11절은 불의한 죄를 경계하신 말씀이고, 12절은 “절제하지 못하는 죄”를 경계하셨으며 13-19절은 “몸을 더럽히는 죄”를 경계하셨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범죄를 경계하심”이란 제목 아래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1. 불의한 죄를 경계하신 말씀(9-11절)

1)9절에서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불의한 자”란 불신앙과 함께 범죄하는 사람을 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하심은 구원 영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2)범죄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하는 일, 남색, 도적질, 탐람, 술취함, 토색하는 일 등입니다. 우상숭배는 신앙적 극단의 죄이고, 음란, 간음, 남색은 도덕적으로 가장 심각한 죄이며 탐람, 토색, 도적질, 술취함 등은 물질적 범죄입니다. 여기에 거짓, 외식, 교만 등 정신적 죄악이 생략되었으나 여하튼 범죄에 대한 죄책과 불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구원받은 성도는 이 죄책과 불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책은 구속(대속)으로 의의 은총을 힘입히신 것이고, 불결은 말씀과 기도로 깨끗게(성화)하여 주시되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완성되게 하십니다.(고후 7:1, 딤전 4:5)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같은 자들이 있었다”하심은 성도들 중에 과거에 믿지 않을 때 그같은 죄악을 짓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요,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은 거듭나는 은혜요(이미 목욕한 자처럼, 요 13:10), 거룩함은 계속 순결을 도모하는 생활이며(매일 발 씻는 일처럼, 요 13:10)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법적으로 정죄받지 않고 의를 인정받는 예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요 8:11, 마 9:6) 따라서 주님의 은혜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절제하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심에 대하여(12절)

1)12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뜻은 “불법이거나 죄되는 일이 아니라 하여 다 유익을 주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당한 조절이 필요하고, 적당한 조절이 없을 때 무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4:40)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 크게 죄될 것은 없으나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 TV에서 코미디쇼가 방영되었습니다. 내용은 가난한 사람이 부자 친구에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양식을 구걸하며 도움을 받았는데 그 당시는 퍽 겸손한 종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 법원 직원이 와서 그 가난한 자의 이름을 확인한 후 “당신의 아버지가 수억의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당신은 바로 그 재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후계자인즉 속히 상속받을 수속을 하라”고 말하자 그 가난한 자는 그때부터 허리를 펴고 목에 힘을 주면서 자기를 도와준 친구에게 교만한 자세를 부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법원 직원이 다시 와서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가난해도 나약해 보이지 않고 부자라도 교만하지 않게 사는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초신자 시절에는 겸손하다가 신앙 연조가 오래거나 어떤 직분을 갖게 되면 초신자 때처럼 겸손하지 않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이 다 절제 부족이라 할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이 가한 일이나 설교 시간을 짧게 만든다든지 육체 건강에 손해를 준다면 역시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2)그러면 바울사도께서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뜻은 바울이 모든 일에 절제를 잘 하시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제재 즉 절제 권유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모든 생활, 특히 예배나 경건 생활에서 표준적이고 규모있으며 적당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몸을 더럽히는 죄를 경계하심”에 대하여(13-19절)

1)“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는 뜻은 식물과 배(위장)가 상부 상조하는 관계에서 필요하고 또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적당히 필요하지만 사람의 육체가 현세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죽음으로써 육체와 양식을 폐하신다는 것입니다.

2)그와 같은 논리로써 사람의 육체도 음난과 같은 죄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위하여 성도의 몸을 위(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13절)

3)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육체는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내시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게 하셔서(14절)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4)15절에서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① 주님이 영과 육을 아울러 구속하셨기 때문이고(고후 7:1) ② 성도의 영과 육이 아울러 주님과 연합하였으며(요 15:7) ③ 성도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4:8) 그런즉 자기의 몸도 아닌 주님의 몸, 곧 그리스도의 지체를 창기의 지체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라도 죄의 도구로 쓰면 안 되거든 하물며 주님의 것을 함부로 죄 되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창기와 합(음행)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 15절의 뜻입니다.

5)16절에서 “둘이 한 육체가 된다”는 뜻은 마 19:5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부부의 육체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거룩한 성도와 계명에 따라서만 합(혼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주님과 연합하는 것은 한 영이라”(17절)하시므로 영으로 주님과 뜻을 합하는 것이 주님과의 연합이며 이 연합은 곧 믿음올 성취되는 것입니다.

6)바울사도께서는 육체적 범죄 중 음행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실 방법으로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행죄로 유혹받는 모든 여건에서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의미상으로는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욥”이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마음(마 5:28)과 육체의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고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7)“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다”는 뜻은 음행 아닌 다른 범죄는 육체가 도구로 사용된다 하더라도(예를 들면 도적질이나 폭행) 육체가 큰 감각을 느끼는 것이 아니므로 더럽힘이 적다 할 것이나 음행은 “육체의 교합으로 범죄의 감각을 강하게 느낄 뿐 아니라 범죄의 생명이 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 크게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18절)

8)결론적으로 19절에서 ① 성도의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 것이 아닌 값으로 산 것이라”는 말씀은 15절에서 설명드린 바이고, ②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하신 것은 성도의 영과 몸의 인격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③ 따라서 성도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몸이 영광의 도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구할 명분이 없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13. 성도간의 송사 문제 (고전 6:1-11) 목록으로


“성도간의 송사 문제”란 성도간에 발생한 잘잘못에 대한 시비, 또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사실 등에 대하여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방도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 본문 1절에 보시면 “너희 중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하신 것은 성도와 성도를 뜻하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란 사회 법정을 뜻합니다. 또 성도는 세례교인을 뜻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교회의 원로(당회원)들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간의 송사에 대하여 교회 원로들의 지도로 화해하고 만족한 해결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생활이 곧 신앙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송사의 대상이 불신자이고, 그 불신자가 교회 원로의 중재를 받으려 하지 않을 때는 일반 송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는 백성들의 권익 보호와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롬 13:1-4, 행 25:25) 그러나 일반 송사를 해 본 사람들은 정신적, 시간적, 물질적 피해가 큰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중재자를 세워 적당히 화해하는 방법을 모색한다면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3. 그러면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어떻게 응용할까요?

1)사소한 언쟁으로 친교적 사이가 멀어졌을 때는 반드시 말의 실수나 교만이나 완악의 죄악을 쌍방이 스스로 회개하고 서로 미안하게 생각하며 사과하고 화해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성도간에 한 쪽이 약속을 위반하여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는 반드시 약속 위반의 사유를 말하고, 잘못을 시인한 후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여야 합니다.

3)성도가 성도에게 피해를 줄 때 무지 또는 실수로 인하여 사건을 일으켰다면 이런 것도 교회 원로 회원 3명이나 5명 정도를 세워 무지와 실수에 대한 잘못을 일깨우고 가볍게 보상한 후 화해시키는 방법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교회 안에서 거의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성도라는 신분과 신앙생활의 개념이 바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간의 관계를 형제라 생각하고 부모나 어른들이 중재 및 화해를 권유할 때는 순종하고 만족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거의 시행되지 않는 실정이면 역시 완악한 세대라 할 것입니다.

4)사랑이 없고 용서와 이해가 부족하며 이기주의가 팽배한 성도의 세계라면 천사가 와서 중재를 한다하여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5)어떤 성도의 자녀가 실수로 이웃 성도의 집을 불태웠다고 가상할 때 민사소송을 하기 보다는 그 두 집의 재산 정도에 따라서 적당히 분할하여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는 다른 형제보다 더 잘 살아야 된다는 현실적 욕심이 있다면 회개함이 좋고, 그런 경우에는 교회적 중재가 잘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6)교회적 단체 생활에서 행정상 또는 권징상 불합리한 점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교정할 수 있는 책임이 상회에 있는 만큼 상회는 공의로운 자세로 임하여 누가 불법을 행하였던지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규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 교계는 재판을 기피하거나 성직자의 잘못을 꼬집으려하지 않는 경향 때문에 교회 안에 불법이 만연하고 그 불법으로 성도의 신분상 권익이 피해를 받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은 다 교계의 부패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가 재판하는 일이 분주하였던 것처럼 교회도 시시비비를 항상 규명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7)성직자의 잘못을 해당 노회가 공의롭게 재판하지 않거나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이 가지 않을 때는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위하여 마음 편한 교회로 옮기든지 아니면 그 교회를 분립시켜서라도 심각한 대립이나 갈등을 피하는 것이 서로 갈등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교회는 예배당 같은 건물 중심으로 이룩된 단체로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중심으로 모인 단체요, 결코 예배당 중심으로 모인 것이 아닌 만큼 교회 재산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재산을 붙잡기 위하여 사랑을 해친다면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재산을 버림이 마땅하며 재산을 버리는 신앙이 더 귀한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8)교리의 정확성, 사랑의 실현성, 재판의 공정성이 있는 교파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란 명분을 가진 자가 위의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성도가 아닌 외식자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로 취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4. 은혜와 절제 (고전 6:12, 10:23-24)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정당하게 받은 은혜라도 절제있게 선용하여야 유익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유익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하셨고, 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모든 것이 가하다”는 뜻은 “범죄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어떤 생활이 범죄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그 결과로 자기 또는 이웃에게 불리한 결과를 준다면 결국 유익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유익하려면 절제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절제, 규모, 적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4:40, 살후 3:6-7, 벧후 1:6) 또 대표적인 말씀으로 잠 30:8에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란 말씀은 부와 가난이 다 죄는 아니나 거기에 불유익이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것이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와 절제”란 제목으로 세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재물의 복이 은혜이지만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잠 30:8에서 너무 가난한 것도 문제이지만 재물이 넉넉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물질에 의존하여 타락할 소지가 많다고 하셨으니까요. 또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과(딤전 6:10)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마 19:33)하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물질이 많은 것을 잘 이용하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도 있고, 반대로 많은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으므로 잘못할 경우가 있으며 또 가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광을 가리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난한 환경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오히려 긍휼을 힘입어 신령한 복을 더 많이 체험하는 유익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욥 22:24-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은혜를 힘입게 하셔서 애굽 백성들로부터 은금 패물을 받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광야에서 그것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지요. 물질이 큰 범죄의 원인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것으로 하나님의 성막기명을 만들었으니 그것은 복되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식 없는 가난 등은 전부 이적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재물은 재물대로 지혜롭게 취급하고, 가난은 가난대로 은혜를 받도록 선용할 것을 교훈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육체의 건강 문제입니다. 건강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죄의 도구로 쓰면 건강 자체가 화가 되고 자기의 몸이 성령의 전인 만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쓴다면 그 건강이 크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건강한 몸을 가지고 폭력의 도구나 음행의 도루고 삼는다면 크게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있고, 비단 병든 몸일 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장로님이 예배당에 출석할 수 없게 되자 주일 오후에 목사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서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음식 대접을 잘 하는 사실을 본 일이 있고, 욥 같은 성도는 질병 중에서도 그의 믿음을 정금 같이 빛나게 한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욥 1:21-22) 따라서 건강이나 질병도 활용하는 방도에 따라 화도 될 수 있고, 유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자기 시간 관리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쁘게 살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고, 어떤 이는 특별한 책임이 없어서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 좋은 것입니다. 바쁘게 사는 것도 가하고 시간의 여유를 갖는 것도 가합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바쁘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고, 너무 한가로우면 시간을 허비하면서 죄의 유혹 받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한가하여 산책을 하다가 담 너머로 여인을 보고 범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삼하 11:2-3) 바울사도는 젊은 과부가 일하지 않고 게으를 때 망령된 폄론과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딤전 5:13) 이와 같이 시간도 있어서 좋을 수도 있고, 반대로 없으면 하나님께 헌신을 못하니 나쁠 수도 있으며 또 바쁘면 죄의 유혹을 피하니 좋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란 은사 활용을 적당히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기술적 은사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세 때에는 브살엘과 오홀리압에게 금속 가공기술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은혜, 그림을 잘 그리는 소질, 노래를 잘 하는 일, 말 재간이 좋은 것도 은사의 일종입니다. 총명있는 사람이 그 지식을 생산성 있는 일에 쓰면 복이 되나 전쟁하는 무기를 만들면 화가 되겠지요. 만종을 그린 프랑스 화가 “밀레”(19세기)가 처음에는 나체 그림만 그리다가 교회로부터 지적을 받고 신앙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이 곧 만종의 이삭줍는 그림, 삼우엘의 기도 모습이라고 합니다. 또 가수의 소질을 갖고 향락적인 노래를 부르는 경우와 교육적이고 신앙적인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노래의 성질에 따라 세상 정욕의 길을 안내할 수도 있고, 또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신령한 은사가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라면 교회의 직분, 기도 은사, 예언, 방언, 병고치는 은사 등인데 이런 은사들을 영광되고 유익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예를 들면 병고치는 은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과장되게 선전한다면 유익하지 못할 것이요. 적당한 방법으로 은사를 나타냈을 때 유익할 것이며

2)“방언”은 전도나 기도를 체험하는 뜻으로 유익하나 통역없이 어지러움을 나타낼 때는 유익하지 못할 것이며

3)예언도 설교의 뜻으로는 유익하나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 할 때는 무익할 것이요

4)기도의 은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할 때는 유익하나 신비적 경향을 나타낸다든지 기도자로서의 교만이 있던지 너무 소란케 할 때는 유익하지 않으며

5)교회의 직분을 받고 모범이 되지 못하거나 권위주의에 이끌리거나 화합을 해치고 덕을 세우지 못할 때는 교회에 유익보다 손해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직분자는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자신이 발전의 방법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도 예리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받은 은사를 활용할 때 무익하거나 허탄하게 활용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5. 성도의 육체와 건강 (고전 6:12-20) 목록으로


1. 성도의 육체는

1)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고전 6:19)

2)십자가의 구속으로 속량하여(값을 주고 사심) 주셨다.(고전 6:20, 고후 7:1)

3)그리스도의 지체라.(고전 6:15)

4)또 “성령님의 전이라”(고전 6:19)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됐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을 하였기 때문에 한 영혼, 한 육신, 한 인격처럼 된 것을 의미하고, “성령의 전”이라고 하신 것은 영과 육을 합친 성도의 인격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녀가 결혼을 하면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마 19:5)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하면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이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그의 육체와 인격이 성령님의 집이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된 거룩한 성물이 된 것입니다.

5)하나님은 성도의 몸을 위하시고(고전 6:13) 거룩케 하시며(고전 7:1) 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실 것인즉(살 4:16)

6)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고(롬 12: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하셨습니다.

2. 성도가 이 육신을 사용해야 할 용도가 많습니다.

1)먹고 입고 잠자고 운동하며 활동하는데 씁니다.

2)좋은 일하는데도 쓰고, 또 잘못하면 죄 짓는데도 씁니다.

3)또 신앙적으로 찬송하고 전도하며 영광 돌리는데도 쓰고

4)부활의 씨앗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육체가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44) 이 여러 가지 용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과 부활케 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천국의 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13절에 보시면 사람이 식물로 배를 채우고 식물이 육신을 위해 있지만 (육신이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이 의식주 문제를 다 폐하시는 것처럼 “몸은 음난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여지는 몸을 위하신다”고 하셨고, 또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주님을 살리셨고 또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하시므로 성도의 육신이 부활을 할 때에 신령하고 영원한 몸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할까요? 마땅히 음행을 피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사용할 뿐 아니라 세속적 향락에도 빠지지 말고(약 1:27) 몸으로 산제사(선행 실천)를 드리며(롬 12:1) 부활체를 사모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므로 몸을 사용하는데도 절제를 잘 하며 생활하여야 할 것입니다.

1)고전 9:27에 보시면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곧 몸의 소욕을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금욕주의, 고행주의로 시행하여 금식을 상습적으로 하고 때로는 몸을 학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이가 눈으로 범죄한다 하여 송곳으로 눈을 찌르고, 성욕을 억제시키기 위하여 고환을 자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나타나는 식욕이나 정욕 등을 적당하게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잠자고 일하는 것을 다 적당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몸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웃 사랑을 네 몸같이 하고 또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마 22:39, 엡 5:28)하신 말씀과 또 엡 5:29에서 “교회 사랑하기를 육체를 보양함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잘 보호 관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몸을 건강케 하는 일반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성경을 근거로 말씀드려야 되겠지요.

1)마음을 편케 갖는 것입니다. 잠 17:22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요 지혜로운 자의 말도 양약이 된다”(잠 12:18, 16:24)하시므로 자기 마음을 편케 갖고, 다른 이의 마음도 편해지도록 말을 지혜롭게 함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보통 말로 속을 뒤집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 각자가 먼저 자기의 마음을 편케 갖도록 하는 것이 건강에 퍽 유익한 것입니다. 웬만한 일에도 격동하지 말고 기분 나쁘게도 듣지 말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서 항상 편한 마음을 갖는 것이 건강에 양약이 된다는 사실을 성경대로 믿으셔야 합니다.

2)식이요법도 잘 하는 것이 좋습니다. 레 11:1-23에 보시면 짐승과 물고기와 새와 곤충 중에서 먹어도 좋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해 주신 말씀이 있는데 쪽발이 없고 새김질을 안 하는 것,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 또 사납고 더러운 것을 먹는 것 등을 가려서 금지를 시켰습니다. 더럽게 놀고 사납게 사는 것들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① 이것은 우선 부정한 것을 멀리 하고 순결을 간직하라는 영적 교훈도 있지만 ② 분명히 좋은 음식만 가리어 먹으라는 위생적 식이요법의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지 시킨 동물성 식품은 거의가 사람이 안 먹는 것들이고, 돼지나 개, 토끼같은 것만 그 예외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음식을 가려먹도록 교훈하셨고, 사나운 동물, 더러운 것을 먹는 동물의 고기를 삼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었습니다. 타락 전 처음에는 식물성만 허용되었다가(창 1:29) 타락한 후 노아시대에 동물성까지 허락을 하셨는데(창 9:3) 그때는 “생명되는 피만 삼가라”하시고, 종류별로 삼가라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에 와서 부정한 것들을 또 삼가게 하셨으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할 때 ① 타락 전 즉 순결한 생활을 하던 시대일수록 채소를 먹다가 ② 타락성 있는 인간이 되면서 동물성을 취한 것입니다. 노아 당시에는 모든 동물이 다 순한 동물이었습니다. 노아의 명에 다 복종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때는 피 먹는 것 외에는 동물성 음식을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시대에 와서 사납고 더러운 동물을 금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죄성에 따라서 그만큼 생물 세계도 퇴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순결해질수록 식물성으로 그렇지 않을수록 동물성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육체적 적당한 운동과 활동을 하셔야 합니다. 창 3:19에서 “땀을 흘리라”고 하셨습니다.

4)성경에 약과 의원을 권장한 부분이 있는가?를 살피겠습니다. ① 구약시대에도 의원이 있었는데 역대하 17:12에서 유다 6대왕 “아사”가 발에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을 의지하였다가 못 고치고 3년 만에 죽은 기사가 있으니 이는 의원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② 예수님 시대에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하시므로 병든 자가 의원을 찾는 것을 당연하게 말씀하셨으나 그 당시에 “의원이 병을 고쳤다”는 성경 말씀은 없으며 혈루증 든 여인이 의원을 찾아갔다가 아무 효험이 없고 더 악하여졌다는 말씀이 있고(막 5:5-26) 사도 시대에 의원 누가가 있었지만 그가 선교하면서 병고쳤다는 말씀이 없습니다.(딤후 4:11,17) 따라서 초대교회 당시에도 의술에 많이 의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약은 어떠냐 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무화과 진액으로 종처를 낫게 하였고, 엘리사가 요단강 물에 문둥병을 씻어 낫게 하였으며 예수님이 침과 흙을 이겨 발라 눈을 보게 하셨으나 이것은 약을 앞세운 것이 아닌 믿음을 일으키는 방법이며 그렇다고 해서 씻는 것이나 침이나 무화가 진액이 전혀 무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으니 이것은 특효약 아닌 것을 통해서도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효력이 있는 약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꿀과 감람유와 포도주입니다. 잠 24:13에서 “꿀을 먹으라”하셨고, 눅 10:34에서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포도주를 부었으며 약 5:14과 사 1:6에서 “기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결론은 약과 의원이 필요하나 극히 소극적 효과일 뿐이요 바울사도의 병도 의원 누가가 고치지 않고 주께서 고치신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딤후 4:11,17)

결론적으로 건강의 비결은 신앙으로 마음을 잘 연마하여 어떤 위협 즉 경제, 명예 훼손, 질병, 사망 등에서도 늘 평안하고 안정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만 병을 이기는데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잠 4:22-23에서 “온 육체의 건강은 주님을 든든히 모시고 마음을 평안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18 과 결혼과 관련된 교훈 (고전 7:1-6)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결혼과 관련된 여러 가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처음부터 살피면서 제목을 정하고, 그 제목과 공통되는 말씀을 7장 전체에서 인용하여 설명을 하겠습니다.

1. 금욕주의를 내세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입니다.(1절)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 함이 좋다”는 금욕주의 사상을 편지로 전해 온 모양입니다.(1절) 여기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심 때문에 부부동침을 속되게 여겨 멀리 하려는 금욕주의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그러나 바울사도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혼인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뜻을 나타내셨고, 또 특수한 경우에 따라 독신생활의 유익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혼인의 필연성이란 “음행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부부생활이 필요하고(2절), 또 이 음행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3절)고 하셨습니다. 9절에 보시면 “정욕이 불같이 타므로 음행의 유혹을 받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것이 낫다”하셨고, 불같이 타는 정욕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부부가 “분방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아내나 남편이 다 그 상대방에 대하여 자기 몸을 맡길 것을 의무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5절) 혼인은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낸 제도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창 2:18) 혼인의 목적은 음행을 피하는 것 외에도 생육 번성과 상부상조, 그리고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는 가정의 아름다움 등이 있습니다.

2)부부가 분방할 수 있는 경우는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한 후 잠시 동안이라”하셨으니 거의 분방하지 않을 것을 권장하셨고, 그 이유는 3절에서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시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5절)고 하셨습니다. 남녀가 각각 이성에 대한 욕구 분출을 못하면 큰 시험에 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마 5:28) 육체의 정욕은 식욕이나 성욕이나 향락욕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절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3)바울사도가 설명을 하시는 중에 6절에 보시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하시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뜻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렇고, 하나는 저런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혼인할 자도 있고, 안 할 자도 있는 것이요 ②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바울사도의 독신생활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더 되기 때문에 그처럼 살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③ “내 말이 권도요 명령이 아니라”하심은 혼인 제도란 각각의 은사에 따라 형편대로 행할 것이요 결코 교리화 할 성격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혼인을 안 함에 대한 유익을 말씀하셨습니다.(8,25,32절)

1)8절에서 “혼인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시기를 바울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처럼 금욕의 은사를 받고(마 19:11-12) 사명생활을 하면서 혼자 산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욕의 은사가 없을 때는 혼인하여야 할 것입니다.(9절)

2)25절에 보시면 혼인 안 한 처녀를 권면할 때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 그냥 지낼 것과(26절) 그 이유로서 28절에서는 “육신의 고난이 있을 것”과 35절에서는 “분요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의 “임박한 환란”이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초급한 심정으로 재림을 갈망하시면서 말세에 있을 핍박과 환난 등을 생각하신 것이고, ② 육신의 고난을 염려하신 것은 자녀 생산 등 가족 생활에 대한 수고가 단순하지 않음이며 ③ “분요함이 없기 위함”이란 단순한 생활 속에서 생각과 노력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예로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주의 일을 염려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아내 또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나누인즉 그 만큼 주님께 대한 헌신성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32-33절) 같은 원리로 혼자 사는 여인(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은 주의 일을 염려하고 또 몸과 영의 거룩을 힘쓰다가라도 시집을 가면 남편을 기쁘게 할 만큼 마음이 나누어지므로 역시 신앙의 헌신성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34절) 따라서 하나님께 헌신을 하는데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상당히 불리합니다.

3. 혼인한 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이혼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습니다.(10-17절)

1)글은 바울사도가 보내는 것이라도 말씀의 내용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영감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하는 자는 주님이라”(10절),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안다”(40절)고 하셨습니다. 26절에서도 “내 생각이 좋다”하셨으나 역시 이 생각도 주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기혼자들이 이혼을 안 하도록 힘쓰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이라”하셨고, 12절에서 “그 남은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부부가 신앙이 같지 않더라도 이혼을 삼가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이 없거나 진리 아닌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쓰시도록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명령이 아닌 뜻”은 무엇일까요? 이 뜻은 15절에서 “부부 중 믿지 않는 자가 믿는 대상과 이혼하기를 원할 때는 형제(남편된 자)나 자매(아내된 자)가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불신자는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12절 초두에 “그 남은 사람들” 속에는 믿지 않는 배우자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그들에게까지 명하신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진리는 오직 믿는 성도만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2)본문 10절에서 “혼인한 부부이면 신앙이 달라도 갈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① 신앙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고 ② 믿는 남편으로부터 아내가 전도를 받거나 믿는 아내로부터 남편이 전도를 받아 가급적 거룩하여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전도는 측근에 있는 대상에게 베풀기 쉽고 따라서 부부간의 전도가 가장 열매의 가능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16절) 따라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는데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상대방이 이혼하려 하지 않을 때는 서로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12-14절)

3)14절에서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다”하신 뜻은 무분별한 이혼이 자녀 교육이나 신앙에 순탄함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요, “그러나 이제 거룩하다”하신 것은 기독교적 환경이 가정적으로 순탄한즉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만일 (신앙적 갈등에 의하여) 혹 부부가 나뉘어져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합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따라서 이혼은 믿지 않는 측에서 믿는 배우자와 함께 살기를 거부할 때만 가능하고(15절) 그 이외의 경우에는 각별히 삼가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4)15절에서 “하나님은 화평 중에 너희(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화평을 깨치며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 불신간에 또 핍박자와의 관계에서 불화로 대항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대항을 한다면 사랑과 정의와 합법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절제, 금욕, 헌신의 은사만 있으면 혼인을 안 함이 유익하고 특별한 은사가 없을 때는 혼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신앙이 달라도 기혼된 상태에서는 가급적 이혼을 안 하는 것이 유익하고 믿지 않는 측에서 상대방의 신앙을 이유로 이혼을 원하면 이혼할 수 있으나 믿는 측에서는 이혼을 요구하여서는 안 됩니다. 또 부부생활의 목적 중에는 정욕으로 인한 사탄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있으므로 서로 분방하지 않을 것과 성적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하셨으며 혼인을 안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이유에 대하여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 19 과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17-40) 목록으로


이 말씀은 7장 앞부분에 연결된 말씀으로 17-27절은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8,36-40절은 “혼인의 자유에 대한 말씀”, 29-31절은 “현실 집착을 경계하신 말씀”으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습니다.

1.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17-27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독교적 생활을 함에 있어서 환경상 많은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께서는 죄가 안 되는 일이면 갑자기 환경을 변화시키지 말고 은사적 환경에 따라 그대로 지낼 것을 권면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따라 물처럼 흘러가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는데 바울사도는 이 교훈을 모든 교회에서 다 가르치셨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에 귀도하였으면 자기가 받은 할례를 무시하여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18절)고 하셨습니다. 율법적으로 주신 할례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치신 것이기 때문에 신약적 세례와 상통함이 있은즉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 기독교에 귀도하였으면 유대인들의 율법적 의식을 본받아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18절) 그 이유는 할례를 받음은 율법적이고, 할례를 받지 않음은 이방인으로서 믿게 된 것인데 이같은 의식이나 신분의 출처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19절)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의식에 구애받지 말고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20절)

2)예를 들어서 종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믿음생활을 하였다면 그대로 종으로서 상전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면 되고, 또 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해방되어도 좋다(21절)고 하셨습니다. 21절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종의 신분도 믿음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뜻이고, “차리리 사용하라”는 말씀은 종의 신분을 벗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 특히 성도가 다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종노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주께 속한 자유자”란 주님이 자유자로 인정하셔서 인간 상전을 섬기게 하신 것이므로 주님을 섬기는 종처럼 인간 상전을 섬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자유자로 있을 때 (인간의 종이 아닌 상태) 부르심을 받았으면 역시 주님의 종이 된 것인 만큼 자유 안에서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23절에서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공로로 대속하여 죄와 마귀의 종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은즉 사람따라 사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따라 사는 생활은 삶의 표준을 성경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4)24절에서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명분없이 변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더 발전하는 길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5)25절에서 “처녀에 대하여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뜻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교훈받은 바가 없으나 “주님의 자비하신 뜻 안에서 충성된 자로 의견을 고한다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은즉 이미 혼인한 상태에서 아내에게 매였으면 놓이려 하지 말것이나 이미 이혼된 상태이면 다시 아내를 구하지 않음이 좋다(26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혼인을 다시 하지 말라”는 뜻은 혼인의 부정적 이유로서 이미 설명한 것입니다.(2,26,19-31절)

2. 혼인의 자유에 대한 말씀.(28,36-40절)

1)혼인은 남자 편이나 여자 편에서 볼 때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28절) 이 말씀은 금욕주의자가 독처하면서 혼인하는 성도를 과소평가하지 못하게 하시는 말씀이요

2)36절에서 과년한 딸(혼기가 지나서 만혼하는 경우)을 혼자 살게 할 수 없어서(이치에 합당치 못함) 늦게 혼인을 시킨다 하여도 역시 죄되는 것이 아니며

3)37절에서는 36절의 뜻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어도 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혼인은 죄되는 것이 아니며(36절) 독신 유지는 잘 하는 것이라(37절)하시므로 혼인은 소극적으로 독신생활을 적극적인 입장으로 피력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뜻을 38절에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혼인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을 경우에 바울사도 개인의 뜻은 안 하는 것을 권장하신다는 뜻입니다.(40절)

4)39절에서 “아내가 남편이 산 동안은 부부일신으로 매어 있었으나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운즉 시집갈 수 있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뜻은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었을 때는 역시 재혼할 자유가 있되 믿음 안에서(신앙대상)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혼인의 자연스러움을 피력하신 말씀입니다.

3. 현실 집착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29-31절)

1)29절에서 “때가 단축하여졌다”는 뜻은 ① 구원 확보를 위하여 말세 환란기를 감하신다 하셨고(마 24:22), ② 또 세월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시사하신 것이며 ③ 또 한 개인의 생애도 변화되는 세월 속에 경점같이 지나감을 뜻합니다.(시 90:4-9)

2)“아내있는 자들이 없는 자 같이 하여야 할 것”은 결혼 생활에 깊이 빠지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빠지면 신령한 복보다 허탄한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3)“우는 자들이 울지 않는 자같이 할 것”은 혹 울 일이 있어도 잠시 뿐이며 영원히 웃을 날이 있기 때문이요

4)“기쁜 자들이 기쁘지 않은 자처럼 할 것”도 이 세상에서의 기쁜 일도 잠시 뿐이며 세상에서의 기쁨과 향락이 영원 세계에서 그 반대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5)“이 세상의 물건을 다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하시므로 풍성한 여건이 있다 하여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한다면 역시 그 향락을 누리지 않음만 못하기 때문에 다 쓰지 못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6)“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2000년대에 잠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은즉 다 지나가는 것뿐이므로 무상한 세속에 취하여 삶이 헛된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일 2:15-16)

 

 

설교보충 16. 독신주의와 결혼 (고전 7:1-9) 목록으로


1.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금욕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금욕주의”란 부부가 동침하는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부의 성교를 경건치 않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음이 좋다”는 사상을 바울에게 까지 보냈습니다.(1절) 만일 이것이 옳다면 결혼한 부부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는 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생활을 잘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본문 3-5절의 말씀이 바로 금욕사상을 깨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금욕으로 인하여 다소간 신령한 은혜를 더 받을 수는 있겠지만 금욕을 절제하였다 하여 은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알면 안됩니다. 은혜의 훼방은 범죄요, 부부동침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특수한 경우에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우선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혼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남녀가 혼인하지 않으면 불같이 타는 정욕을 억제하기 어렵고 따라서 정신적, 육체적 음행을 범할 수 있습니다.(마 5:27-28, 고전 5:1) 이런 경우에서 독신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범죄의 요소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타고난 고자”이든지(마 19:12) 아니면 바울사도처럼 살 수 있는 은사를 받든지 하여야 합니다.(고전 7:6) 그런 중에서 사명을 받으면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가 없으므로 하나님께 헌신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임박한 환난이 오고 있을 때에 결혼을 중지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 24:22을 보시면 “그 날에 아이 밴 자나 젖먹이에게 화가 있다”하셨으니 전쟁 중에 피난가기 어렵고, 아이들이나 임신부에게 피해가 올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7:26에서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하셨으니까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오는 것을 알면서 결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① 타고난 고자와 ② 정욕 제어의 은사를 받은 후천적 고자가 결혼을 안 할 수 있고, ③ 환난을 피하기 위하여서나 ④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그저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만일에 정욕을 피할 능력이 없어서 정신적으로라도 음행할 여지가 있을 때는 고전 7:9에 근거해서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으니까 꼭 혼인을 하여 그 불같이 타는 정욕을 합벅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혼인의 정당성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1)혼인은 인류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인류의 복으로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창 2:18-22에 보시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하시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부를 맞이한 것이나(창 24장) 야곱이 아내를 만난 것이나 모세가 혼인한 것이 다 중매형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배후에서 섭리하셨습니다.(창 24:44-45, 잠 31:10)

2)그리고 하나님이 혼인하게 하신 이유는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시고 생육번성을 위하며 음행을 방지하고 사회적 친교 사회를 만드시는데 필요하였습니다.

3)일부일처의 혼인을 제정하셨고, 일부다처에서 경건치 않은 자손이 나온다고 하셨는데(말 2:15) 아담의 7대손 라멕이 일부다처를 취하여 물질주의, 향락주의, 살생주의를 일삼는 자녀를 배출하였습니다.(창 4:;19-22)

4)그런 뜻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하셨습니다. 모든 부부가 이 말씀을 신앙적으로 받을 때 크게 행복할 것입니다.

4. 재혼하는 일이라 하여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적당한 시간 안에 재혼하도록 자녀들이 권하여야 합니다. 나는 저의 어머니가 50대 되셨을 때 재혼을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9남매 자녀를 둔 아버지가 70여세에 상처를 한 즉 그 노인과 딸들은 새 어머니를 모시려하고 아들들은 반대를 했으나 제가 “성경대로 하라”(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여 재혼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성적 욕구를 자제할 은사가 있거나 사명상 혼자 있음이 좋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늙어 결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방법은 신앙과 가정 화목과 사랑에 일치하는 세 가지 조건만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재혼하는 분들이 노후 대책을 내세워 생활 자금을 조건으로 결혼을 하려 하기 때문에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혼자 살 수 밖에 없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성도는 “서로 돕는다”(히 10:24, 고전 12:28)는 말씀과 “독처함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조건없이 혼인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5. 혼인 예식은 많은 사람들 앞에 광고하는 의미가 큽니다. 두 남녀가 결혼한 것을 모든 이웃이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예식은 행하되 사치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고(엡 5:16, 요 6:12) 과장된 의식을 피하는 것이 외식을 멀리하는 것인 만큼 단조롭게 혼인 예식을 치뤄야 할 것입니다. 혼인한 후에는 부부 간에 해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0) 분방하지 않는(7:3-5) 규례를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7. 새 가정의 출발 (고전 7:1-7) 목록으로


새 가정 출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새 가정의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의 화합과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하였겠지만 살다보면 타산에 맞지 않는 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하셨으니까 사랑으로 크게 이해하고 포용하며 나누어서 짐을 져야 할 것입니다. 또 영구적인 화합을 위하여 성격상, 취미상, 생활상의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1)두 남녀가 만나서 실제로 생활하다 보면 성격상의 차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때에 상대방의 성격을 서로 존중하거나 반반씩 맞추도록 노력할 것이요

2)취미상 차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서로 반반씩 나누어 누리도록 양보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요

3)생활상 차이인데 이것은 시집을 간 사람이 시댁의 생활 풍속을 따를 것이고, 혹 개혁할 것이 있으면 여러 가족의 이해를 구하여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효도와 형제 우애와 근면이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시댁의 어른들이 새 며느리를 맞이 하여 어려운 가풍으로 속박하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혼수감을 적게 해 왔다는 문제를 들어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하면 미신적 사상을 갖고 새 사람이 들어온 후부터 집안 일이 안 된다는 등으로 몰지각한 행동을 나타내어 새 부부의 삶을 훼방하는 것은 퍽 잘못된 일입니다. 항상 이해하고 봉사하는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청도의 어떤 장로님은 자부를 맞이한 후 (그 곳 결혼 풍속은 결혼 1년 쯤 후에 신부가 시집으로 옴) 임신 7개월 된 자부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100일 동안 절을 받았습니다. 절 받는 사람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가풍의 권위를 세우려고 그런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며느리를 맞이한 부모는 며느리를 딸처럼 알고 대하면 가장 편안할 것입니다.

3. 부부생활에 있어서 남녀간의 인권 문제가 동등함을 알아야 합니다.

1)법적으로 남녀의 인권이 동등한 것을 알면서 계획적으로 상대방을 누르기 위하여 과격한 항거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것은 부부간의 의리를 떠난 야비한 행동입니다.

2)기독교에서는 상당 부분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인권의 차이를 둔 것이 아니고, 부부간의 직무상 유익을 위하여 명하신 것이니까 잘 지키면 그 가정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 인권이 동등하나(고전 11:11-12) 창조의 순서와 방법과 목적이 다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고,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순종하되 교회가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창 2:18, 엡 5:22-24, 벧전 3:6)

3)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는 반드시 성경 말씀을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므로 아내의 사명을 다할 것을 권합니다. 이것을 인권의 차이로 알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으로 알아야 할 것이요,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면 남편은 그 이상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며 아내의 뜻을 존중하려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편을 앞세워 일하고 여자는 잠잠하며 가정직임, 내조직임에 충실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딤전 2:11-12)

4. 요즈음 페미니즘이란 여성 인권 운동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부부간의 내조에서 아내의 위치를 뒤집으려는 운동이 아니고, 오랜 전통에 따라 여자를 천시하거나 남자 다음으로 내세우는 풍조를 고치려는 뜻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1)아내의 불순종으로 가정이 파괴된다면 그 책임을 아내가 져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편을 주인같이 섬기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벧전 3:6)

2)기독교인의 가정 중에 경제적인 여유가 넉넉하지 못하다 하여 향락주의 자들처럼 과소비를 못하여 불평하고 불행을 느낀다면 은혜를 더 받던지 기독교 밖으로 나가든지 확실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신앙적 본연의 자세를 취하여야 하겠지요.(고전 7:29-31)

3)마지막으로 새 가정을 출발한 부부는 다음 성경을 꼭 읽고 지키기 바랍니다. 창 2:18, 엡 5:22-24, 벧전 3:6-7, 고전 7:29-31, 고전 11:11-12, 딤전 2:11-12, 고전 7:3-5, 엡 4:26, 마 19:6 등입니다.

 

 

설교보충 18. 주께 속한 자유자 (고전 7:18-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께 속한 자유자”란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22절에 보시면 “주께 속한 자유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① 주님께 속한 자가 되셔야 하고 ② 또 주님께 속하므로 자유를 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몇 가지로 세분해보면 ① 18-19절에서는 “할례와 구원과의 연관성”을 말씀하셨고, ② 19절 끝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하셨으며 ③ 21절에서는 “성도가 어떤 환경에 서던지 신앙적으로 적응할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④ 22-23절에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주께 속한 종으로서의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할례와 무할례에서의 자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그 당시에 “할례의 표”는 의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민 의식을 갖게 하는 믿음도 줄 수 있었습니다.(요 13:19)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까지 미쳐서 유대인과의 구별이 폐지되었고, 또 할례 대신에 영생의 표로서 세례를 베풀도록 명하셨기 때문에 할례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의 유대인들 중에서는 할례가 구원의 효력이 있는 듯이 주장하면서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유혹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께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확보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계명을 지키는 자유입니다.

1)구원은 계명을 지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는데 구약은 언약이요, 신약은 성취이므로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구약보다 신약은 더 밝혀진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3)그래서 구약의 율법 중에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은 신약이 밝혀 해석한 말씀들입니다. 예를 들면 마 5장에서 살인, 간음, 이혼 등의 계명을 예수님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고, 히 9장에서는 구약의 제사제도의 의미도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4)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것과 행할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리에 관한 것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십자가로 대속하셨다”,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하는 것은 모두가 믿어야 할 말씀이고, 그 이외의 명령은 다 지켜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강조하여 “오직 지켜야 할 따름이라”하셨으니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는데 이유를 달 수 없다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5)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시면 “제사제도에 관한 계명이 있는데 왜 그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의식으로 주신 계시가 신약시대에 와서 십자가의 완성적 제사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는 어느 것이나 어느 시대나 동등한 것입니다.

6)저희들은 지켜야 할 모든 계명을 아무 조건없이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복받을 일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으로 하는 것 뿐이요, “행위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는 일이 되겠습니다.

3. 부르심을 받는 일과 환경의 적응도 자유롭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0절과 24절을 보시면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예수 믿게 되었을 때) 그 부르심 그대로 (이것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임)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례로 “종으로 있는 자의 형편”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에는 고용인 제도가 있지만 옛날 로마나 헬라 같은 나라에서는 종이 주인의 기계에 불과한 신분으로 부자유한 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서 “종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종이 됐으면 인간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느냐”하는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종을 벗어날 길이 있으면 벗어나도 되지만(21절) 그런 방법이 없을 때는 그 형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어떤 완고한 동리나 완고한 가정에서 “혼자 믿었다”고 가상할 때 그가 예수 믿는 자유로운 동리로 옮겨 가서 살 수 있으면 막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니까 환경을 탓하여 피하는 것보다 그 환경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용인이나 종으로 예수를 믿어도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적 자유를 누리기 때문에 사람의 종노릇을 하여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환경을 피하려는 자가 되지 말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믿음으로 적응하는 생활을 자유롭게 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주께 속한 자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1)저희들은 다 주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권속이요, 백성입니다. 미국의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여행에 편리한 자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만유주 되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왜 자유가 없겠습니까? 요 8:32에서 “진리는 자유를 주신다”하셨고 고후 13:17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종 되기 전에는 다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서 해방되려면 상당한 보상을 해야 되는데 종에게는 보상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속물을 제공받으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종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2)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누려야 할까요? ① 성경이 막지 않은 것은 마음대로 또 편리하게 하면 된다는 자유를 누리십시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 전통, 풍속, 이웃 사람들의 표준으로 따르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또 그런 체면 치레 때문에 고달픈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성경에 명시한 바가 없으면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상 문제들이 교회 생활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② 주 안에서 생활하는 성도에게 특정한 환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환경이든지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울 때는 그 환경을 믿음으로 받아 적응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나쁜 환경에서 적응하고 믿음을 지키면 상급이 더 많습니다. ③ 모든 염려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여기에 대하여 “진리를 알지니”란 제목의 특별 설교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인간은 가난 염려, 질병 고통, 비천해지는 괴로움, 죽음의 공포, 내세 심판 문제 등으로 염려와 고통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역시 진리 안에서 다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고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자기를 부정하고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보십시요.(마 16:24, 갈 5:24) 그러면 모든 일을 주님 뜻에 맡기게 될 것입니다.(롬 14:7-8) 또 마구간에 나신 주님을 생각하고 십자가 앞에서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죽음을 부활과 영생으로 바꾸어 생각하신다면 모든 고난이나 불만을 다 해소하고 주 안에서 감사와 만족과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설교보충 19. 바울의 결혼과 (고전 7:25-4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결혼과”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1. 바울사도께서 이 결혼관을 말씀하실 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셨지만 의견을 고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된 입장을 취한 자기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점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25절) 그러나 바울은 꼭 “자기와 같으라”고 명하시지는 않았습니다. 7:7에 보시면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지만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한즉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 모든 성경이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6) 성경을 기록하는 저자가 자기의 입장이나 의견을 고하였다 하더라도 그 의견이 그대로 성경에 수용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25절)는 말씀이나 “내 생각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6절)는 말씀이나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12절)는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다 계시를 받는 과정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란 것 뿐이요,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영감은 다 유기적 영감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3. 바울의 결혼관은 대단히 소극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득이 할 때(정욕이 불같이 타므로 정신적, 육체적 음행을 범할 가능성이 클 때)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과 사명, 또는 환난을 견디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강조하셨으니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임박한 환난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26절에서 바울사도는 임박한 환난을 내다보셨습니다. 이 임박한 환난은 바울사도 시대로부터 약 25년 경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70년에 있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 마 24:21)을 예견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임박한 환난”이라고 하셨으니까 먼 훗날의 환난은 아닌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환난이 있을 때에 자기 혼자 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죽는 것은 깨끗한 일이고 가능한 일이지만 처자가 딸린 몸이 되면 지조를 지키기도 어렵고 순교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이북에 처자식을 두고 온 귀순병이 우리 나라에서 대우를 받고 호강할 것 같지만 자기 부인을 두드려 패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때문에 희생된 이북의 가족들 생각이 나니까 우울증에 사로잡히고 그럴 때마다 아내하고 다툰다는 것입니다.) 환난때 처자식이 있으면 정말로 시집 장가 안 간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이나 바울사도도 역시 환난이 있는 세대에서 결혼을 안 하셨기 때문에 환난을 피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2)29절에서 때가 단축하여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때가 단축하여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예언대로(마 24:22) 말세의 날을 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세의 날이 감하여졌고, 또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르니까(마 24:36)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하실지 모르므로 도적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항상 깨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마 24:42) 따라서 말세를 기다리는 형편은 2000년 전인 바울사도의 때나 2000년 후인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31절에서 “세상의 형적이 지나가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은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 만물인 것처럼 결혼을 해도 그 청춘이 꽃처럼 떨어지면 육신도 시들어 버리고 죽어지고 이별하며 천국가면 천사처럼 되어져서 부부의 정도 없어져 버리니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결혼 자체를 세속의 것으로 보아서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입니다.(빌 3:8)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따라서 성도는 속세를 허무하게 여겨서 바울처럼 멀리 하시고 버리시되 물욕이나 명예욕은 물론 결혼까지 없어질 세상의 형적으로 여겨 포기를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4)세상살이를 위한 염려와 고통을 주께 대한 충성으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① 가족을 거느린 자가 환난을 피하면 전 가족의 육신의 고통이 따르게 되고(28절) ② 세상살이는 물론 서로간의 의무 부담 때문에 염려가 큰데 결혼을 안 하면 그런 염려를 다 해소하고 “주님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32절) ③ 또 가정을 가진 사람은 남편이 아내를 기쁘게 해야 되고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염려를 해야 되지만 독신으로 있으면 가정에 기울일 염려를 자기의 거룩(몸과 영)을 위해 힘쓸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영적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각자의 받은 은사와 사명의 소질따라 양심대로 할 일이요, 가능하면 바울사도와 같은 입장을 취할 때에 더 잘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받은 은사와 사명 섭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20. 단축한 때의 생활 (고전 7:29-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단축한 때에 성도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29절에서 바울사도는 “때가 단축하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때가 단축하여졌다”는 뜻은 “세월이 긴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차분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① 요즈음 사는 인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간이 없어서 애쓰는 것을 볼 때에 단축한 때에 사는 생활을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고 한가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백갑절이나 빠르게 왕래하는 생활을 보면 빠르게 왕래하니까 시간이 남을 것 같은데 오히려 빨리 다녀도 더 바쁘니 웬일입니까? 따라서 “때가 단축해졌다”는 것은 “세월이 긴박하여 바쁘게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②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게 가까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시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당시부터 일과 달과 년을 정하셨고, 시 31:15에서 “인간의 시대를 주관하신다”하셨으며 예수님의 재림날짜도 하나님만 아시는데(마 24:36) 성도들의 환난을 덜어주시기 위하여 “그 날을 감하셨다”(마 24:22)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의 때도 퍽 긴박해졌습니다. 계 1:1에서는 “말세의 될 일이 반드시 속히 된다”하셨고, 따라서 예수님도 속히 오시며 “때가 가깝다”고 하셨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2000년의 세월이 더 지나갔으니 때가 단축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③ 때가 단축하고 시급한 것은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자기의 수명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단축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70세에 죽는다”하면 69세에 유언을 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의 때가 다 된 줄로 믿고 세상 생활을 정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세월, 재림이 임박한 시기, 기약없는 인생”의 삶이 단축한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헬라어에 “때”라는 말이 4가지 종류쯤 되는데 ① 헤롯왕 때, “노아의 때” 하는 “헤메라”(ἡμερα)가 있고, “별이 나타날 때, 어릴 때”라는 “크로노스”(χρόνος)가 있고, ② “때가 저물었으니 그 때에 제자들이 나와”하는 “호라”(ᾥρα)가 있는데 이런 단어들은 다 시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본문에 “때가 단축하여졌다”하는 말씀에는 “카이로스”(χανρός)를 사용하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시급하고 긴박한 세월을 의미한다고 합니다.(70인역에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다”는 말씀은 “카이로스”,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할 때는 “크로노스”로 번역되었다 함.) 따라서 저희들은 부지런히 살고 항상 준비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쁜 때를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셔야 하겠습니다.

2. 때가 단축한 때에 사는 성도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할 때 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기차 타고 멀리 여행할 사람이 시간이 급하면 집안 정리 다 하고 나오는 사람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당 갈 사람이 천당 갈 때가 가까워오면 이 세상일은 적당하게 하고 천당 갈 준비를 착실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년만년 살 사람처럼 행하다가 세상 것도 다 못 누리게 되고, 천당 갈 준비도 허술해지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적당하게 소극적으로 살아가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손해없이 힘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 하셨습니다. 현실적 최대의 축복이 부부생활과 가정입니다. 그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래서 가정 행복을 힘쓰는 것이 좋으나 때가 되면 자기도 죽고 아내도 죽으며 자녀도 뒤따라 죽을 것이니 그 영원하지 못한 것에 기쁨을 걸면 얼마나 걸겠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영생만은 못한 것이고, 끝날 때가 임박했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머지 않아 불타고 없어질 세상이기 때문입니다.(벧후 3:10) 그래서 “성도들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벧후 3:10-12)(대연각 호텔에 불날 것을 모르고 많은 부부가 잠자리를 즐기다가 죽은 예가 있지 않은가?)

2)“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다 보면 울 일도 많습니다. 시 90:10을 보시면 “인생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 뿐이지만 그것도 70년이나 80년 밖에 안 간다”고 하셨습니다. 길게 울고 슬퍼할 세월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쁜 때가 짧은 것처럼 슬픈 때도 짧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을 억제하는 것만큼 슬픔도 억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에 “세월이 남아 있다”해도 오래 가지 않는 것입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됐다 하더니 짧은 영광으로 끝났고, 재클린 여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나시스”에게 시집을 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희와 비는 교대를 하다가 끝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적당하게 누리라는 것입니다.

4)“매매하는 자도 없는 자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벌이에 몰두하는 자도 끝날 세상을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영원에 집착하라는 말씀이며

5)“세상 물건을 쓰는 자도 (나중에는 그의 향락의 형벌로 바꾸어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역시 다 쓰지 못하는 자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부하게 산 것 때문에 지옥에서 더 고통을 받았다면 신자가 천당에서 세상 것을 많이 누린 것 때문에 상급이 적을 것이니 그것을 생각할 때 세상에서 향락 누린 것이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되도록 좋은 것은 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생활자세입니다. “오래 못 살 세상 잘 살다 죽어야지 하던 생각을 다 된 세상 잘 못 살아도 천국 준비나 잘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바꾸시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교훈입니다.

6)마지막으로 “세상의 형적은 지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이 세상을 떠나서 하관식을 하고 보면 꼭 두 가지 말씀이 떠오릅니다. 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고, ② 세상의 형적은 없어지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저는 길권사님의 세 가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① 새벽기도회에 앉으신 모습 ②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언덕길을 넘어 왔다 갔다 하신 모습 ③ 병석에 앉으셔서 기도 받던 모습인데 이제는 아주 형적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길권사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제 어머니에게도 해당이 될 것입니다. 제 외조부님이 75세를 사시고, 외조모님이 77세를 사셨으니 제 어머님이 그 평균을 사신다고 하면 3년을 더 사실 것이고, 더 오래 사신다 해도 몇 년일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지금부터 마음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제 나이 25세 때 아버님이 52세를 사시고 떠나셨습니다. 제가 1년 만 더 살면 아버지 연수를 삽니다. 그래서 인지 생의 욕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또 유언서를 다시 보완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연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나나 너나 누구나 “미구에 없어질 형적들”이란 것을 명심하셔서 ① 없어질 것들에게 미련이나 애착을 두지 마시고 ② 오직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임을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고후 4:18의 말씀을 또 한 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51세 때의 설교임.)

 

 

제 20 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고전 8:1-13) 목록으로


고전 8장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분류하면 ①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1,4-6절) ② 지식과 사랑의 영향(1,2-3절) ③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무지(7절) ④ 식물과 신앙(8절) ⑤ 우상의 제물을 먹으므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라(9-13절)는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1,4-6절)

1)1절에서 바울사도는 “우상에 대한 지식을 다 갖고 있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가 우상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우상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를 많이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이란 잡신들에게 바치는 종교적 제물(음식)이므로 그 제물 자체에는 성분상 변화가 없지만 잡신에 대한 종교성이 하나님께 불결한 것입니다.

2)성도가 가져야 할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은 우상은 사람이 만든 생명 없는 물건에 불과하므로 아무 것도 아닌 줄로 아는 것이요, 세상에서 말하는 많은 잡신들도 다 헛것에 불과하고(5절) 피조물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며 그 분만 창조자요, 만유의 주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또 주 예수님이 같은 분이시며 창조자이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지식을 가진 성도이면 잡신에게 드린 우상의 제물이라도 아무 가책없이 먹을 수 있고, 또 먹은 후에도 정신적, 종교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3)그러나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 중에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확고하게 갖지 못한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그런 상태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면 그의 양심을 더럽게 할 것입니다.

2. 지식과 사랑의 영향에 대하여(1,2-3절)

1)“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1절) 지식이 많으면 아는 것을 나타내거나 자랑하기 쉬우므로 교만하여진다는 뜻인즉 교만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세상 지식이 많으면 사회적으로 교만해지기 쉽고, 신앙 지식이 많으면 신앙적으로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겸손해지도록 노력하면서 지식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2)또 한 가지 깨달을 것은 지식이란 그 소재가 무한한 것인 만큼 아는 것이 많을 때에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또 편벽된 지식만 가질 수도 있은즉 마땅히 더 알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2절)

3)그러나 “사랑”은 지식과 달라서 모든 이에게 덕을 세운다고 하셨습니다.(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이것을 사랑으로 옳게 실천하지 못하면 그 지식이 이웃을 실족시킬 수도 있으니 반드시 지식 위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 더 좋은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3절) 이웃 사랑도 여기에 포함됩니다.(요일 4:20)

3.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무지에 대하여(7절) 7절 말씀의 뜻은 “사람마다 4-6절에 말씀한 지식을 다 갖지 못하여 우상 숭배에 대한 습관이 그대로 재연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 그 양심이 더러워지거나 약하여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에 대한 신앙적 지식이 없이 우상의 제물을 옛 습관에 따라 먹으므로 신앙 양심을 스스로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닌 줄로 알고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는 뜻으로 먹으면 되지만 그것이 없이 먹었을 때는 하나님이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데 동참한 것이므로 신앙을 욕되게 한 결과가 되어 약해지고 더러워진 것입니다.

4. 식물과 신앙에 대하여(8절)

1)8절에서 “식물은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한다”하신 것은 하나님이 음식을 잡숫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2)하셨으니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 음식을 차려 제물 삼아 드릴 일이 없다는 것이요

2)“우리가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는 뜻은 성도가 궁핍하거나 어떤 사정에 의하여 음식을 풍요롭게 먹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신령상 부족할 것이 없고, 또 반대로 음식을 잘 먹고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여 그것이 신령한 복을 더 풍성하게 받는 방법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지식과 실천과의 관계요, 식물과의 관계는 아니란 뜻입니다.

5. 우상의 제물을 먹으므로 형제를 실족지 않게 하라“하심에 대하여(9-13절)

1)9절에서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하신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성도들이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 앞에서 함부로 자유행동(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한 자들 즉 지식없는 성도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유자들의 생활을 모방할까 우려되기 때문입니다.(10절) 만일 지식있는 성도가 우상의 집(신당)에 가서 그 곳 제단에 차려 놓은 음식을 먹었을 때 당사자들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 섬기는 심정으로 먹었으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이것을 본 자들 중에 우상이 헛것이란 지식도 없으면서 자유자들(지식있는 자)의 행동만 모방하였다면 그 일로 인하여 연약한 자들을 우상 숭배에 유도한 결과가 될 것이란 것입니다.

2)그렇다면 지식있는 자가 자신의 경솔한 태도로 약한 자의 신앙을 더 나쁘게 멸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 약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심으로 속죄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구원에는 상관이 없으나 신앙의 심령을 크게 더럽힌 것이 됩니다. 따라서 심령의 불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시려고 “멸망”이란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11절에서 “약한 자가 멸망하였다”는 말씀의 “멸망”은 “아폴루타이”(ἀπόλλυαι)로 “멸망을 향하여 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3)12절에서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은 그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죄는 양심상 거리끼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성도는 거리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13절에서 바울사도는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하셨으니 ① 성도가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은 큰 죄인즉 엄히 삼가야 할 것이요(마 18:6) ② 실족이란 범죄를 뜻하므로 약한 성도들을 범죄에 유도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과 ③ “고기를 먹지 않음”은 대부분의 고기가 우상 제물로 사용된 다음에 먹게 되므로 혹이라도 약한 자들의 양심을 어지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일체 고기를 안 먹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④ 따라서 약한 자를 위한 신앙선배의 배려와 희생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는 다양한 신앙 지식을 갖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혹 신앙의 지식과 성숙이 미치지 못한 성도들을 각별히 생각하여 그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21 과 사도된 증거와 특권 (고전 9:1-15) 목록으로


이 말씀에는 바울사도의 사도적 특징과 전체 사도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바울사도가 자신의 사도적 특징을 말씀한 이유는 바울사도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신빙성 없는 직임으로 비난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을 배척하게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계파가 있은 것과(고전 1:12) 바울에 대하여 힐문하는 자들이 있은 것과(3절) 또 바울이 고린도에 오는 것을 원치 않은 자들이 있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4:18)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눌 수 있으니 ① 1-2절은 “바울의 사도적 특징”이요 ② 3-15절은 “사도직의 특권”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사도의 사도적 특징에 대하여(1-2절). 바울은 사도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는 자유자란 것이요, 다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자기의 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1)“자유자”란 뜻은 “진리로 자유를 얻은 자”란 뜻이니(요 8:32, 갈 5:1) 율법적 의식에서의 자유요,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죄와 형벌에서의 자유이며 또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의미합니다.(갈 4:22-31) 바울이 자유자되었음을 말씀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도직임의 확실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부활의 주님을 본 것입니다.(행 9:5)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12사도에 들지 않았음을 인하여 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사도의 사역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데 있었으므로(행 4:20)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를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3)“바울의 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도하여 성도를 생산한 일에 직접 사역을 하였으므로 전도를 받은 성도들이 곧 사도직을 행사한 증거란 것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불신자 또는 직접 전도를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2절)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참성도인 만큼 그들을 지도한 사역자도 하나님이 세우신 자란 것입니다. “주안에서 인 쳤다”는 뜻은 바울을 사도로 믿고 복종한 성도들이 곧 증인이란 뜻입니다.

2. 사도직의 특권을 말씀하심에 대하여(3-15절) 바울사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는 3절 말씀에서 “힐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힐문이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고 불신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트집을 잡았을까요? 바울의 발명한 내용이 곧 트집당한 내용의 해명이었을 것이니 예를 들면 보수를 받지 않은 것이나 좋은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이나(8:13) 독신으로 사는 문제 등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4절 이하에서 발명한 말씀들을 보면

1)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실 권이 없겠느냐?” 바울사도도 얼마든지 좋은 음식으로 잘 먹을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며 절제하셨거나 아니면 궁색한 식생활을 한 것 때문에 힐문을 당한 것입니다. 60년대 초에도 농촌의 개척 교회 사역자나 전도사님들이 너무 가난하여 그에게 시집오기를 꺼리는 처녀들이 있었으니 이런 것도 가난한 교역자에게 힐문의 꺼리가 된 것입니다.

2)5절에서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하신 것은 바울도 결혼하여 배우자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으나 하나님 사역의 유익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고전 7:8-26,32) 다른 사도들은 베드로, 요한 및 바나바, 아볼로(행 14:14, 고전 4:6,9) 등이요, 주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며(마 13:55) “게바”는 베드로입니다.(요 1:42) “자매된 아내”란 베드로의 아내를 바울이 신앙의 자매로 호칭한 듯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독신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3)6절에서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 할 권이 없겠느냐?”하신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직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만큼 생활 자립을 위한 직업적인 일을 하지 않고 교회가 주는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보수(자비량)로 병정에 나가지 않고 포도를 심은 자가 그 포도를 먹을 수 있으며 또 양을 친 자가 그 양의 젖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란 것입니다.(7절)

4)8-9절에서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으로 구약 율법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신 25:4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일하는 소가 풀을 먹어야 하므로 그 입에 망을 씌우지 않게 하셨는데 이 말씀이 소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이 마땅함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따라서 밭 가는 자나 곡식 떠는 자도 소와 함께 일하는 자이므로 그 인건비를 받을 소망을 갖고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보수를 바라고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고하고 수고한 만큼 상당하게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11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하신 말씀은 신령한 복은 영원히 누리는 것이므로 육신의 것인 물질로 많은 보수를 받는다 하여도 신령한 복을 전달한 값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주시고 신령한 복을 주심이 현실의 물질이나 명예, 실권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임을 알고 거기에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12절의 “다른 이들”은 사도 아닌 사역자들을 의미하며 “그들도 보수를 받을 권이 있거던 하물며 사도들이겠느냐?”하셨고, 또 13절에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모시는 이들(제사장들)이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화목 제물)을 먹는다고 하시므로(레 7:6,14,28-36, 10:12-15) 하나님의 일군들이 받는 보수가 합리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7)예수님은 마 10:10에서 전도자에게 스스로 물질을 준비하지 않게 하시고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이 말씀들을 근거로 하여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14절)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교회나 성도의 단체가 복음 사역자에게 필요한 만큼 생활비를 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8)그러나 12절과 15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런 권을 하나도 쓰시지 않고 범사에 참으셨습니다. 그것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보수를 요청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보수받을 권을 포기하고 자급자족하며 봉사한 것입니다.(행 18:3)

결론적으로 바울이 복음사역자의 보수론을 가르친 것은 성경적 교훈을 나타낸 것일 뿐 바울 자신이 보수와 사례를 받자는 뜻이 아님을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바울이 물질 보수에 탐심이 있어서 복음사역을 하는 자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면 그로 인하여 그가 자랑하는 복음의 명예가 크게 가리워질 것입니다. 탐심있는 자의 소개하는 물건을 의심하기 쉬운 것처럼 탐심있는 자의 증거도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물질 보수와 사역을 연계시키지 않고 인내하면서(범사에 참는 것;12절) 보수와 상관없이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겸손과 봉사를 앞세우기 위하여 사도적 명령권도 다 쓰지 않으셨고(18절, 몬 1:8), 물질적 특권은 하나도 쓰시지 않았으며(15절) 사정에 얽매임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헌신자가 되신 것입니다.(롬 12:7-9)

 

 

제 22 과 전도자의 승리적 자세 (고전 9:16-17) 목록으로


이 말씀을 살피면 전체적 제목을 “전도자의 승리적 자세”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분류하면 16-18절은 “전도자의 사명적 자세”요, 19-23절은 “전도자의 친교적 처세”이며 24-27절은 “전도자의 승리적 자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 세 가지 자세를 잘 취한다면 하늘의 상급을 많이 예비하게 될 것입니다.

1. 전도자의 사명적 자세에 대하여(16-18절)

1)전도 사역을 천부적 직임으로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직임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여야 하며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이 되어 화를 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요나”선지자가 전도 명령에 불순종하다가 화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욘 1:10-12) 어떤 책임과 사역이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면 마땅히 하여야 합니다.(마 28:19, 행 1:8)

2)자랑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복음은 자랑거리라도 복음 전하는 자가 스스로 자기를 자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전도자를 구원하셨고, 또 전도 은사에 따른 직분까지 주셨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셨고, 17절에서 직분을 맡은 것도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며(고전 1:1) 또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임의로 행하면 상을 얻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말씀이 곧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야만 할 수 있는 일이란 뜻입니다.(롬 10:15, 고전 12:3)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하게 되며 또 불순종하면 화를 받게 될 것인즉 안 할 수도 없고 자랑할 수도 없으며 교만하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상급을 얻도록 헌신적으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18절) 그 방법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받은 특권을 다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 명예적 특권을 적게 누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값으로 많은 대접을 받거나 복음과 함께 받은 사역자의 명예적 특권을 내세워 존경이나 대접을 많이 받으면 그것으로 하늘에서의 상급은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마 6:1에 보시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여도....상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고, 반대로 “핍박을 받는 자는 상이 크다”(마 5:1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전도자로서의 상받는 방법이 영광을 멀리 하는데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은퇴한 목사님이 “많이 받고 많이 누린 것을 크게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하는 말을 하셨는데 이미 받은 다음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3. 전도자의 친교적 처세에 대하여(19-23절) 바울사도가 여러 종류(자유자, 종, 유대인,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없는 자, 약한 자)의 사람들을 대할 때 여러 모양이 되고(22절) 모든 것을 행하였다(23절) 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 중 더 많은 사람과(20절) 또는 몇 몇 사람들(22절)을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얻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잘 동화하여 전도의 효력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전도하기 위한 교제의 이질감을 없애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1)“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뜻은 모든 사람에게 인권상으로 자유하지만 그들을 섬기는 자처럼 또는 그들의 종처럼 겸손과 봉사를 나타냈다는 뜻이요

2)“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뜻은 바울이 벤야민 지파로서 유다지파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자손이므로 선민적 동질감을 갖고 그들을 친하였다는 뜻이요

3)“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하셨다”는 뜻은 바울사도가 복음적 신앙인이요, 율법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들과의 교제를 끌며 전도하기 위하여 율법주의자가 아님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뜻이요

4)“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는 이방인이 아니요 율법을 진리로 믿지만 율법없는 이방인과의 교제를 지속하며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신분을 속히 나타내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나 사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면 교제를 안 하려는 경향을 감안한 것입니다.

5)“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같이 되심”은 사람마다 자기 분수에 맞는 이웃과 부담없이 친교하는 사실에 입각하여 모든 면에 차이가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하신 것이요

6)23절에서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하셨는데 이 뜻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전도 대상들과 동화되기를 힘썼다는 뜻입니다.

4. 전도자의 승리적 자세에 대하여(24-27절) 전도자가 하늘의 상을 받는 자가 되고(24절), 이기는 자가 되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아야 하고(25절), 또 일시적으로 쓰임 받고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27절)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

1)“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규칙을 지키며 성실한 노력을 뜻하고

2)“향방을 정하고 허공을 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헛된 노력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며(보충 설교를 참고 하십시오.)

3)“몸을 쳐서 복종하여야 한다”하셨으니 이것은 육신적 부패성을 제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을 지키는 것과 목표에 적응하도록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과 순결 보존이 전도자를 승리하게 하고 오래 쓰임을 받으며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게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사명자는 반드시 “하늘의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고 하셨습니다.(24절)

 

 

설교보충 21. 바울의 사명생활 (고전 9:1-15) 목록으로


본문에서는 바울의 사도됨과 그의 사명생활이 어떠하였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어느 사역자나 자기를 반대하고 헐뜯는 무리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바울사도도 유대주의자들로부터 헐뜯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자와 사도가 아니냐?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이다. 예수님이 세운 12 제자만 부활의 주를 본 것이 아니고 나도 보았다. 내가 만일 사도가 아니라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따라서 너희가 곧 나의 사도됨을 인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직이 명분에만 있지 않고 결과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반드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사도적 사명생활이 어떠하였습니까?

1. 가족을 갖지 않고 단신으로 일을 하였습니다.(고전 7:8) 이것은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능률있게 헌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배우자를 만나면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던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기쁘게 할 것인가?하여 그 마음이 나누어지고 따라서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정신과 노력이 감소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7:31-35) 따라서 가정을 갖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는 100% 헌신하는 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주는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15절) 교회가 재정이 약하면 교역자의 생활비를 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자급자족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니까 두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1)교역자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안 받는 것이 마땅한 일로 인식이 되어 생활비를 받는 사역자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복음사역자를 병정에 비유하고 일하는 소로 비유하여 복음사역자에게 보수(생활비) 주는 것이 마땅함을 역설하셨습니다.

2)또 한 가지 부작용은 “보수도 안 받고 일하는 사역자인즉 문제가 있지 않느냐?하여 바울을 헐뜯는데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를 안 받는 것이 사역자의 자격에 문제되는 일이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헌신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사도직에 부여된 특권을 다 쓰시지 않은 것입니다.(12절) 사도직은 교회의 최고의 성직이기 때문에 때로는 예수님을 대리하는 직권까지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자되고 예수님을 대리하여 축도, 성례, 권징을 하니 얼마나 위대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존경받을 권위가 있고, 명령할 권세가 있으며 예수님 대신 대접받을 일도 생기는데 이런 좋은 권리를 다 쓰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대접과 존경과 칭찬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헌신한 상급이 줄기 때문이고, 권세를 많이 쓰는 것도 역시 자기 명예와 안일에 해당하는 것이며 성도의 신앙을 자발적으로 육성시키는데는 명령보다 부탁이 좋고(몬 1:8-10) 강권보다는 설득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역자가 명령적 권위를 자제하면 겸손한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성도의 세계가 너무 강직(순진하지 않음)하여서 사역자가 권위를 드러내고 위엄을 떨쳐서 교인이 그것을 두렵게 여겨 복종시키는 예가 있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겸손한 사역자를 더 겸손한 성도가 존경할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사역자들이 바울사도의 겸손과 헌신성을 조금이라도 본받는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과 순결로 보존하는데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22. 영적 운동회 (고전 9:24-27) 목록으로


고린도에는 운동경기가 성행한 곳입니다. 바울사도께서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에 빗대어 설명하신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엡 6:12에서는 신앙생활을 씨름하는 일로 비유하셨고, 빌 3:14과 딤후 4:7, 히 12:1-2에서도 신앙 생활을 운동 경기로 비유하여 교훈하신 일이 있습니다.

1. 운동의 첫째 조건은 체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관건이 믿음에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히 11:6) 체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운동 경기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근거로 하지 않는 신앙 생활은 없으며 찬송, 기도, 봉사, 전도 같은 종교적 행사도 믿음을 근거로 하여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롬 14:23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체력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믿음에도 분량이 있습니다.(롬 12:3, 엡 4:7) 믿음의 분량이 많아서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하시는 칭찬을 받든지 또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마 8:10)는 칭찬을 받는다면 그는 신앙 운동회에서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키우는 연구와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2. 운동의 두 번째 조건은 훈련입니다. 믿음도 배우고 연단을 받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4, 벧전 1:7) 따라서 30대 믿음과 60대 믿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환난없이 무난히 생활한 자의 믿음과 많은 환난을 겪은 성도의 믿음에도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체력을 운동으로 보존하는 것처럼 신앙도 계속 노력하므로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 기도, 전도, 봉사, 예배 등을 항상 계속 하면서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를 지해 나가셔야 합니다. 훈련에는 상당한 기술도 따릅니다. 딤전 4:7에 보시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하셨고, 히 5:14에서는 “연단을 받으라” 하셨으며 엡 4:13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신앙 생활의 숙달을 위하여 배우고 연단을 받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운동은 견디는 연습을 잘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에도 부족이나 연약을 느끼는 것에서 견디는 것을 잘 해야 합니다. 마귀는 영리하고, 세상의 경기장은 성도에게 좋은 조건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 생활은 곧 장애물 경주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 생활도 말씀과 생활에 많은 기술을 첨부하여 지혜롭게 행할 때 좋은 신앙을 육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34년째 목회에 장로 있는 교회 7교회 째 시무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단체에서 저에게 몇 시간 신앙 강의(설교)를 부탁해 온다면 저는 60세 이후에 깨닫고 체험한 것을 근거로 설교할 것입니다. 60세 이후 목회 환경의 변화와 함께 고독을 느끼면서 깨달은 은혜가 더 소중하였기 때문입니다.

3. 적을 알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반칙을 하면 당장 피해를 봅니다. 신앙 생활도 성경대로 또는 법대로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고,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2:5) 그러니까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아서 규칙에 위반 없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법은 성경입니다. 법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법이 있고, 국가와 국민 사이에도 법이 있으며 교회 단체에도 법이 있고, 두 사람 이상이 모여도 약속의 법이 있습니다. 형과 아우가 모여도 우애의 법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모여도 분별의 법이 있으며 노소가 모여도 선배와 후배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오히려 교회로서의 순결을 더럽히는 것이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옳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앞장 서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빛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4. 달음질을 잘 하고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방법을 써야 합니다.

1)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요(히 12:1)

2)푯대를 향하는 것이며(뚜렷한 목적;빌 3:14)

3)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고전 9:25;강해문 참조)

4)끝까지 달음질하는 것입니다.(마 24:13)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들은 영적 운동회에 참여한 선수들임을 아셔야 하고, 이 경주에서 이기기 위하여 체력(믿음), 훈련(연단), 규칙(말씀), 달음질(노력)에 적극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3.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27) 목록으로


바울사도께서는 성도의 신앙 생활을 운동 경주하는 것으로 비교하셨고, 24절에서 “너희도 상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상 얻는 자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경주의 대상이 성도가 아니고, 마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끼리 경주를 한다면 1, 2, 3등 순서가 나오겠지만 “상 얻는 자가 하나라”는 뜻은 죽지 않으면 사는 것처럼 마귀를 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같이 달음질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1. 이기는데 목적을 두고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연습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 앞과 마귀 세계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목적이 하나님 영광에 있고, 마귀와의 경주에서 이기는데 있으니까 그 목적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운동 선수가 목적지를 망각하고 향방없이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이 목적에 중요한 것은 “썩을 면류관”에 뜻을 두면 안됩니다. 반드시 “썩지 않을 면류관에 목적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썩을 면류관은 있다가 없어질 현세적 영광이고, 썩지 않을 면류관은 하늘에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상급입니다.

2. 장애물을 떨구고 뛰어야 합니다. 히 12:1에 보시면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 버리라” 하셨고, 히 12:12에서는 “피곤한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하셨으며 롬 12:11과 계 3:19에서 “열심을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 경기자의 가장 큰 장애물은 죄이고(시 40:12, 사 6:5) 그 다음이 세상 염려입니다.(마 13:22, 벧전 5:7) 성도가 허탄한 생각에 빠져서 세상 염려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런 것들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큰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신을 벗는 것처럼(출 3:5, 수 5:15) 겸손을 차리기 위하여 신을 벗는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3.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최대한의 노력을 뜻하는 것이지요. “혼신을 다한다”는 뜻이나 “장애물을 없애라”는 뜻이 같은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이 “주님의 오실 길을 평탄하게 닦는 일”이었습니다.(마 3:3)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 평안히 오시고, 잘 영접되게 하기 위하여 길을 닦는 것처럼 저희들은 예수님께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앙 생활에 거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세적 장애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필요 없는 물건들, 필요 없는 생각들, 필요 없는 볼거리들, 필요 없는 염려들을 다 옷 벗듯이 벗어버리고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집중되도록(마 22:37)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혼신을 기울여 우선적으로 잘 하여야 하는 것이고, 먹고 살아가는 문제는 “염려하지 말라”하실 정도로 이차적인 문제인데도 그 순서를 바로 잡지 못하는 성도가 많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마 6:33)

아무쪼록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마귀를 이기는 일에 두시고 최대한 장애물(신앙 생활에 도움되지 않는 것, 특히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 떨구시고, 자신들의 혼신이 오직 달음질하는데만 쏠릴 수 있도록 만들어서 힘있게 달음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노력하시면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설교보충 24. 두 가지 상급 (고전 9:25-27) 목록으로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 상급과 영원한 상급을 예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두 가지 상급의 종류는 썩을 면류관과 썩지 않는 면류관에 대한 것입니다. 면류관은 영광을 뜻하고, 썩는 것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고, 썩지 않는 것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리는 것인데 성도가 현실적 영광을 많이 누리면 썩을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고난을 취하더라도 영원한 상급을 누리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과연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상급에 목표를 두고 달음질을 하는 것인지 깊이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적 향락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성도가 썩지 않는 면류관을 예비하려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뜻은

1)“자기가 자기를 복종시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성격과 취미와 목적을 자기 정욕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이상한 일 같지만 이것은 칼로 세계를 정복하는 일만큼 크고 어려운 일입니다. 잠 16:32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기만 하여도 용사보다 나은 자라” 하셨고, 롬 7:15에서 바울사도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탄식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 하셨습니다.

2)“자기의 부패성을 억제하는 일”입니다. 21절에서 “내가 내 몸을” 하실 때에 앞에 있는 “나”는 “고생한 바울”이고, 뒤에 있는 “내 몸”이란 “부패성을 보유한 바울”을 의미합니다. “몸”이란 용어는 신체를 의미하는 “쏘마”(σώμα)가 있고, 부패성을 의미하는 “살크”(σάρξ)가 있는데 본문의 몸은 부패성이 아닌 신체로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부패성이 몸을 범죄의 도구로 쓰기 때문에 역시 “부패성”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네 손이나 눈이 죄를 범하면 그것을 없애고라도 죄를 짖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5:30) 그 말씀은 “범죄불능성있는 지체를 꼭 찍어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찍어 버릴 만큼 죄를 증오하여 견제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은 손으로 도적질을 시키려 하는데 자기의 손이 도적질을 못할 만큼 상한 상태에 있다 하면 그 상태가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3)자기를 해롭게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몸을 친다” 하셨으니 역시 “자기를 해한다”는 뜻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는 동기와 목적만 바르다면 결과적으로 큰 유익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경통 있는 사람이 자기 육체의 몸에 쑥을 놓고 불을 붙여 뜸을 뜨는데 그것이 피부를 상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일이지만 결국은 고치는 것처럼 자기를 해하는 일 자체가 궁극적으로 해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벧전 3:14에 보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두려워 말고 소동치 말라”하셨고, 벧전 4:14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목적이 있는 자해는 겸손과 연단과 조심하는 일에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빨리 달리는 차에 제동 장치가 있고, 제동 장치가 있으므로 차를 나가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마 16:24), 자기 십자가 지는 일(마 10:38),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갈 5:24),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일(벧전 2:11),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일(요일 2:15), 자기를 벌하는 일(고후 7:11) 등을 필수적 요건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썩을 면류관을 억제하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목표로 노력하셨는지를 반성하셔야 할 것이요, 또 얼마나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영원한 영광(내세의 상급,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하여 방향 설정을 잘 하셨는지를 역시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제어하는 것은 곧 현실성을 제어하는 것과 같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되도록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적당히 양보하고 때로는 멀리 보며 신령한 보화를 얻기 위하여 현실적 영달을 포기하는 결단을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23 과 역사의 거울 (고전 10:1-13) 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역사의 거울”이란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 제목의 근거는 11절에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당한 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역사이고, “그 역사가 거울이 된다”는 뜻은 역사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성도들이 잘 참고하여 교훈을 삼으라는 뜻이며 “말세를 만난 우리”란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시대를 말세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도요한도 “때가 가깝다”고 하였으니까요.(계 1:3) 사도들은 구약의 장구한 역사에 비할 때 신약 시대를 말세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계 2:16, 3:11) 따라서 2000년이 지나간 세월을 속히 지나간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우리 시대도 빠르고 또 주님의 재림도 임박한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교훈에 따라 살피면

1. 1절에서 “성도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많이 알아야 하지만 특히 성경과 선민의 출애굽 역사를 알고 그 역사 속에서 문제되는 바를 깨달아서 경계하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 선민들이 다 구름 아래 있었고(구름 기둥의 인도 받음을 뜻함), 바다 가운데로 지났으며(홍해를 갈라 육지로 통과하게 하신 것) “모세에게 속하여(모세의 지도를 받은 뜻)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2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① “다”라는 용어는 전체적 참여를 뜻하고 ②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은 그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통과하므로 옛 시대, 옛 생활을 하던 애굽과는 격리되고, 새 시대, 새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받는 백성으로 구별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마귀 세계에서 하나님 세계로 옮기고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 행사에 다 참여한 것을 뜻합니다. 이 사실을 명기하는 이유는 의식에는 다 참여하였으나 믿음과 구원에는 다 참여하지 않았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5절)

3. 3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음”은 “만나” 먹은 것을 뜻하며 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은 반석에서 솟아 나온 물을 먹은 것을 의미합니다.(출 16:16, 17:6) 이 기적의 양식과 물은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식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저희를 따랐다”하신 것은 주님이 성도 곁에 계시고, 늘 동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28:15, 딤후 4:17) 또 예수님을 “반석”이라 하신 것은(시 18:2, 마 21:44) 주님의 불변성과 권위를 상징하신 말씀입니다.

4. 그런데 5절에서 “하나님은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은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은 다수 즉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딤전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하셨으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의 심정일 뿐 공의와 결부된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랑과 공의가 조합된 하나님의 뜻은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엡 1:4, 살후 3:2) 따라서 하나님이 “저희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은 것”은 선민 전체 또는 인류 전체를 다 구원하려고 작정하시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② 그래서 광야에서 범죄하고 타락한 백성들을 권고하시지 않으니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가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합니다.

5. 6절 말씀에서 선민의 역사적 생활의 기록은 후시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시기 위한 거울로 주셨은즉 후시대의 성도들은 그런 잘못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 하셨습니다. 특히 그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놀고 우상을 숭배한 일들”(7절, 출 32:6) “발람”의 꾀임에 빠져 간음을 하다가 23000명이 죽은 사실(8절, 민 25:1-9), 또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린 사실(9절, 민 32:4-6), 그 외에도 여러 차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당한 사실이 있었으니(민 14:1-35, 16:1-35) 이 사실을 기록하신 것은 후시대의 성도들이 이런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6. 9절에서 “저희와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는 뜻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적과 보호와 인도를 체험하면서도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또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였으니(출 17:7) 후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심, 원망, 시험을 하지 않아야 하며 또 간음죄, 불순종죄, 낙심죄, 교만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7. 12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절대로 교만하지 말며 또 자기를 믿거나 의지하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믿기 어려울 만큼 약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퍽 건강하고 식사를 잘 하셨습니다. 나는 그 분이 식사를 잘 하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그 분의 건강과 소화력을 칭찬하니까 그 장로님 대답이 “저는 위장이 좋고 소화력이 좋아서 돌이라도 소화를 시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는데 꼭 3년 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고로 인생은 어떤 지식과 경험과 유력성이 있어도 선 줄로 여기지 말고, 겸손 또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8. 13절에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시험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1)이 시험의 성질은 넘어뜨리는 시험이 아니고(약 1:13-14) 연단의 시험입니다.(창 22:1, 출 15:25)

2)하나님은 성도에게 시험을 주실 때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회초리로 때릴 때 죽도록 때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착하고 아름다움)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험이든 하나님의 허락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욥 1:12, 2:6) 만일 그 시험이 과하여 시험을 받는 성도가 시험을 당할 입장까지 될 때는(시험을 당한다는 뜻은 범죄에 이름을 뜻함) “또한 피할 길을 내서 성도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고 피할 길을 찾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경의 역사와 믿음의 선진들의 역사와(히 11:2) 신앙 선배들의 역사를 거울보듯 참조하여 매사에 지혜로울지언정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24 과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33) 목록으로


이 말씀의 총 제목을 14절에 근거하여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정하였습니다. 15-22절은 “우상 숭배와 귀신 숭배의 연합성”에 대한 말씀이고, 23-30절은 “우상 제물과 관련한 주의 사항”이며 31-33절은 “모든 일에 덕되고 영광되게 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상 숭배로 인한 범죄를 막고, 이웃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상 숭배가 전통적으로 습관된 세계인 만큼 기독교 신앙 초기에 상당한 무질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우상 숭배와 귀신 숭배의 연합성에 대하여(15-22절)

1)15절에서 바울사도는 “성도의 우상 숭배가 곧 귀신숭배에 참여하는 것임을 스스로 지혜를 써서 판단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큼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그런고로 사리 판단을 잘 하여 무엇이 교리이고, 무엇이 윤리이며 무엇이 덕을 세움에 관계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16-20절에서 “우상 숭배는 이방인의 제사이며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인즉 그것이 곧 귀신을 숭배하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 하셨고, 이 사실을 기독교인의 성찬예식을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16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바”란 사도들이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찬을 베풀고, 신령한 복을 축복함을 뜻하고, “축복의 잔”이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 포도주 잔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참여한다”는 의미는 귀한 뜻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으므로 그리스도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연합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17절에서 떡(주의 몸)은 하나이고, 참여하는 성도는 많기 때문에 결국 많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한 단체)을 이루니 이것이 곧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엡 5:30-32)

3)육신을 따라 난(혈통 계승을 뜻함)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제물을 먹으면(출 18:12, 레 6:14-18, 신 12:12-14,26-27) 그들이 곧 제단에 참여한 자들이 되는 것처럼(18절)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 숭배와 관계 있고(19절), 또 이방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인즉 귀신과의 교제가 된다는 것입니다.(20절) 따라서 성도가 지식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상당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고전 8:4-6) 우상의 제단에서 제물을 먹는 일은 결국 귀신과의 교제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4)이상과 같은 논리로 볼 때 우상의 제물이 귀신의 잔에 해당하므로 “주의 상(연합에 참여하는 뜻)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참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21절) 마땅히 인간은 피조물로서 주님보다 강하지 않으므로 주님을 노엽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22절)

3. “모든 일을 덕되고 영광되게 하라”하심.(23-33절)

1)23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하신 말씀은 고전 5:12을 참고하십시오. 이 말씀에서는 성도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지식과 담력이 있어도 주위 환경과 이웃을 배려할 때 가까이 하거나 먹지 않는 것이 덕되고, 유익한 경우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당한 행위가 타인에게 양심상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고픈 자 앞에서 자기의 음식을 먹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함과 같은 것입니다.

2)따라서 성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하셨으니 각별히 유의할 것이요, 반드시 남의 일을 먼저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빌 2:4)

3)25절에서는 “누구든지(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시장에서 파는 것(식물의 출처를 모르는 것)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기 위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의 제물이라도 모르고 먹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4)본래 어떤 식물이든지 먹을 수 있는 믿음은 그 식물이 어떤 장소에 어떤 목적으로 이용되느냐를 알기 전에 먼저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26절)는 믿음을 갖고 대할 때는 아무런 거리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과 모든 식물이 다 하나님의 지으신 하나님이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5)또 어떤 불신자의 초청을 받고 음식 대접을 받게 되었다면 우상의 제물이든 아니든 모르고 먹으면 되니까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그 출처를 묻지 말고 먹을 것이요,(27절) 혹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사람이 “그 음식은 제물이라고 일깨워 줄 때는 그 일깨워 주는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않음이 좋다”(28절)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양심이 편하기 위하여 다른 성도가 먹지 않기를 바란 것이기 때문입니다.

6)29절에서 “내가 말한 양심”이란 우상의 제물을 거리끼게 대하는 자의 양심입니다. 그 양심은 그 자신의 양심일 뿐 모든 성도의 양심은 아닙니다.(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임) 따라서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하신 것은 남의 양심으로 판단받을 일이 아니지만 이웃을 위하고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먹지 않음도 역시 판단받을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29절)

7)30절에서 “내가 감사하므로 참여한다”는 것은 우상의 제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고 음식대접에 대한 봉사를 감사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딤전 4:3에 보시면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식물이든지 신앙적으로 받을 때는 비방받을 일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8)그런고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31절), 유대인에게나(선민) 헬라인(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모든 성도)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32절;거친다는 뜻은 훼방이 되거나 부담을 주는 것임) 바울사도처럼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요, 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특히 저희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복음적 봉사자가 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33절) 따라서 성숙한 성도는 영광돌리는 방법과 덕을 세우는 방법을 잘 알고 시행하셔야 할 것입니다.(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설교보충 25.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 하심 (고전 10:1-7) 목록으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 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이 제목은 분명히 본문 5절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 신앙세계에 상당한 착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착각이 무엇입니까?

1)많은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을 크게 걱정한 것이 착각이고

2)우리 교회에 교인수가 적어서 큰 걱정을 한 것이며

3)어떤 잘못된 교파나 교인들이 세계인류나 아니면 대한민국 백성만이라도 다 예수 믿기를 소원한 심정과 노력이 전부 착각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떤 곳에 보면 하나님이 세계인류를 다 구원하실 것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사 45:22)하신 것이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는 말씀이나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초청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다 세계의 각 계층으로 퍼져 있는 사람들 중에 택한 백성이 있으니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두루 넓게 전도하라는 말씀일 뿐 인류를 다 구원하실 뜻을 나타내신 것은 결코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이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으려고 하시는가?

1)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선택한 백성만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다수를 구원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② 그래서 인류의 부분만을 선택하신 것이고, ③ 그 부분이 멸장자들보다 적은 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2)얼마큼 적은 수를 선택 하셨을까?에 대하여 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찾는 이가 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고,(마 7:13) ② 눅 12:1,32에 보시면 무리 수만명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적은 무리로 줄어들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적은 무리들에게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하셨으며 ③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도 출애굽한 백성들이 200-300만을 헤아릴 수 있었지만 광야에서 버려지고 멸망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광야에서 순종하다가 죽은 사람들 몇 사람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다 버리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합당한 자만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④ 또 이런 실예는 노아 홍수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이고, 인류 창조 1000년대의 사람이요, 그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평균 834살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인구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노아의 8식구만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하나님이 왜 이렇게 적은 수를 구원하실까요? ① 하나님을 인간 심리에 비교한 것은 안된 일이지만 “아들 딸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인간 심리와 같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영광에 필요없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생명의 수를 탐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 닮은 거듭난 백성만을 원하신 것입니다. ② 그래서 부분 선택을 하시고 제한 속죄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택한 백성의 죄만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중보를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희생의 제물이 그 제물을 가져온 자의 죄를 위하여 희생당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는 자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기 때문에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요 3:16)

4)그러면 이렇게 제한적 속죄와 부분적 구원을 말씀하신 성경이 어디에 있느냐?하실 것입니다. ① 살후 3:2에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 하셨고, ② 행 13:48에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라야만 믿게 되며 ③ 엡 1:4에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신 자”로서 요 3:3에 근거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받아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따라서 구원은 사람이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믿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그 원하는 대상을 원하는 시기에 거듭나게 하셨을 때에만 그가 복음을 받고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랑이 부족해서 전도가 안된다”, “설득력이 부족해서 전도가 안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사랑과 설득력이 많으면 전도는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천적 신앙은 전도에서 발단되는 것이 아니고, 거듭남에서 발단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많이 하여 거듭난 사람을 데려올 수만 있으면 교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이 없으면 전도해도 믿어지지 않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교회에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과 자신과의 실제적 영적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에서 외식하는 성도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성도는 진짜 성도입니다.(요 8:47) 그러나 세상복을 추구하려 하고 명예를 추구하려 하며 교회를 한낱 사업체처럼 생각하면서 인간의 명예 사업, 직분 사업, 사회 사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과정은 내가 거듭났기 때문에 믿어져서 믿는 것이고, 믿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며 영광은 순종에 있고, 순종은 나를 부정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는 성도이어야만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은 ① 다수의 모임이 잘못된 것으로 아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교회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다 하여 그것이 “예배당 넓이 만큼 사람을 모으라”는 뜻으로 착각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넓이에 따라 선택된 백성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② 하나님은 수보다 질을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다 다녔어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또 “네 믿음이 크도다”하신 말씀이나(마 8:10, 15:28) 신앙의 사람인 아브라함이나 다니엘, 하박국, 욥, 엘리야, 엘리사 등의 믿음이 나라를 지키게 하신 것을 기억하셔서 더 좋은 믿음 가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을 원하신다”는 뜻은 최상품이 되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③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시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예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이 진리인고로 따르는 성도가 되실지언정 잘 살기 위해서 믿고 평안키 위해서 예수 믿으며 사람이 알아주니까 교회에 나가고 사랑하는 맛에 교회 나가며 떡 먹는 맛에 나가고 정치적 또는 직분 의욕에 얽매여 나가는 등 인간적, 정욕적 목적이 믿음생활 속에 섞여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자기와 상관 없는 자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적게 모이는 것은 전도 부족일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에 사람이 적다 하여 하나님이 무관심하시거나 못다 구원하실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숫자에 얽매여 고민을 합니까? 교회 사업하고 명예 사업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 염려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닮는 일에 힘쓰셔서 명실공히 질적 신앙을 높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6. 광야의 역사적 교훈 (고전 10: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광양의 역사적 교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광야의 역사적 교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을 기록한 구약의 말씀이 우리와 후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하는 것입니다.

1)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통하여 많은 말씀을 해 주셨지만 본문에서 소개한 몇 가지만 살핀다면 ①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 즉 출애굽한 백성들이 “구름 아래 있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구름 기둥의 보호와 인도받은 것을 의미하고(출 13:22) ② 그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바다를 통과한 사실을 의미하며(출 14:21-22) ③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은 ㉠ 그 백성들이 출애굽을 시도할 때 일제히 할례받은 것을(출 12:43-51) 신약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 또 그들이 할례받은 상처를 가진채 구름과 바다를 지나는 여행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나 신약의 세례는 같은 뜻으로 의식만 다르게 한 것입니다. 같은 뜻이란 선민된 것과 구원받는 것을 인치는 뜻이고, 마귀와 세상의 백성들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구별하는 표식인 것입니다. ㉢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에는 애굽의 생활을 청산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새생활에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를 받는 것도 불신앙의 생활에서 거룩한 생활로 구별된 것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④ 또 3-4절에 보시면 또 그들이 광야에서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었다” 하셨는데 이것은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출 16:13-14, 17:6) 이 모든 은혜를 신령한 반석되시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면 서 때를 따라 먹이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4절)

2)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버리시므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기뻐하지 않으시고 다수를 멸망하도록 버리셨을까요? 본문에서 그들의 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네 가지를 소개하셨습니다.(7-10절) ①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1계명과 2계명으로 엄금하신 것이었습니다. 7절에 보시면 “백성이 앉아서 먹고 뛰놀았다” 하셨는데 이것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 숭배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출 32:1-6) ② 그 백성들 중에서 간음을 하여 하루에 23000명이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민 25장에 나타난 발남의 유혹으로 이방 여인들에게 끌려 간음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요 ③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민 21:6에 나타난 말씀으로 그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원망하는 자들을 죽게 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출 17:17에 나타난 말씀으로 물이 없고 식물이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다”고 하면서 크게 회의를 느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시면 계신 것이고, 안 주시면 안 계신 것입니까? 또 고난을 주시면 안 계시고, 평안을 주시면 계신 것입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린 것입니다. ④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당하였다”하셨는데(10절) 이 말씀도 출 14:26-38에 보시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모든 사람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므로 인하여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지 않고 죽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우상숭배와 간음과 하나님을 시험하고 의심하며 원망하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있는 은혜를 받고도 거역을 한 것입니다.

2. 이런 역사적 사실을 성경에 담아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시면 “우리의 거울이 되어 저희의 악한 것을.....즐겨 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또 11절에서도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세상을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해 주셨다”고 하시므로 구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살피는 성도가 그들과 같은 웅덩이에 뒤따라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거울이란 자기 얼굴의 흠을 보게 하는 기구입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굴의 흠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저희들은 이스라엘 선민들이 범죄하고 벌받은 사실을 성경으로 깨달으면서 우리의 연약과 허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 백성들과 같은 허물을 발견할 때 크게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죄짓는 방법이 단순하였지만 오늘날은 더 다양해졌습니다. 우상 숭배나 간음이나 하나님 시험하는 것이나 누구를 원망하는 것 외에도 더 많은 종류의 죄를 저지를 여건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통사고의 범죄나 은행의 카드를 위법으로 인출하는 죄는 없었습니다. 저희들에게 닥쳐오는 다양한 유혹이 많은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 역사를 기록한 것은 바로 “우리의 경계를 위함이라” 하셨으니 저희들은 그런 시험에 들지 않기를 크게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1)저희같이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현실 우상 숭배와 자기 우상 숭배가 바로 우리가 받는 유혹 아닙니까? 여기에 끌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정신적 간음, 또는 덕스럽지 않은 이성간의 교제, 성도 세계에서 떠도는 좋지 못한 풍설 등도 크게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의 남녀 교제를 건전하고 덕되게 하여 교회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평안하고 기적이 나타나고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이 계신 줄로 믿고 내게 고난이 있고, 내 앞 길이 막히거나 죽게 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으로 믿으려는 잘못된 신앙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데 무슨 일을 못하시겠습니까? 내 맘에 맞아야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앙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하나님도 사람도 누구도 원망하는 유혹에 빠지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복을 못 받는 줄로 안다면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훼방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셨고, 광야의 고난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으며 바벨론의 악한 세력과 헤롯과 빌라도의 핍박 속에서도 구원 사업을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사람의 훼방 때문에 복 주실 자에게 복을 못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 같은 사람은 여러 모로 고난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넉넉하게 그들을 복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구약을 주신 목적과 이스라엘 선민이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통치를 받았는가?에 대하여 잘 깨닫고 죄를 경계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27.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0: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을 보시면

1)“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할 것이 없다”하시므로 “성도가 시험을 받는 일이 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받게 된다” 하셨고

2)하나님은 미쁘셔서 사랑과 유익만을 성도에게 베푸시며

3)감당 못할 시험은 아예 주지 않으시고

4)성도가 시험을 받고 넘어지려 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이 말씀을 보면 또 다른 비슷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바로 약 1:2-12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를 이룰 때에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으니 옳다 인정을 받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들의 뜻을 요약해 보면

1)하나님은 성도에게 필요할 때마다 시험을 주시는 분이시오

2)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선한 동기로 시험을 주시는 것이며

3)시험을 주실 때에 감당을 하도록 은혜를 주시고

4)또 시험을 잘 감당했다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가 성도가 그 시험에 못 이겨서 죄를 짓거나 탈선을 한다면 시험을 주신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책임지실 시험은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로써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 분이라”고 약 1:1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요 10:10) 그러면 어느 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고, 어느 것이 마귀가 준 시험이냐?할 때 죄나 불법을 동반하는 유혹은 마귀가 주는 것이고, 그 이외의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본래 불법한 자이고, 하나님은 유익을 주시려고 시험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역하고 불순종한 자(요 3:8)이며 모든 의의 원수(행 13:1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 짓게 하는 시험”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이 시험이란 뜻이 무엇인가?할 때

1)우선 유혹과 시험을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주기도문 중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한 것이 혹 입학시험에 떨어지라는(들지 말라) 내용으로 오해하기 쉬우니까 시험이란 용어를 유혹으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시험”이란 뜻은 실력을 헤아려 보는 것이고, 유혹은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시험이고, 마귀가 하는 것은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을 “유혹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던지 아니면 “시험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하면 용어상 혼돈이 없겠지요. 그런데 원문의 “시험”이란 용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ξω)인데 “어려움을 자초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시험이란 용어는 “잘 하나 못 하나를 시험하여 연단 주시려는 의미가 아니고 인간의 실수로 고난을 자초하는 잘못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2)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그 목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다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 간 것이지만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운 과제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에 섰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구나”(삿 2:22, 신 13:3)하는 것을 알 때는 능히 그 시험을 신앙적으로 해결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자신이 시험받는 줄을 아셨고, 말씀으로 이기셨으며 욥도 아브라함도 그런 방식으로 시험을 이겼습니다.(어떤 사람이 돈을 받았는데 집에 가서 헤아려 보니까 돈이 더 왔다고 가상해 봅시다. 이 때에 “저 사람이 내게 돈을 더 준 것은 모르고 준 것이 아니라 알면서 내 양심을 살피기 위하여 고의로 시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그 돈을 다시 반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귀의 시험도 이기고 하나님의 시험도 합격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하여야 할 것입니까?

1)“시험은 모든 이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번연”도 기도할 때 잡념이 들어오는 시험을 체험하였고, 많은 성도가 은혜를 받아도 건강은 좋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누구나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서 늘 넓은 마음으로 침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하나님은 미쁘신지라 성도에게 늘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지켜주시고(시 121:3) 대적과 싸우도록 구변과 지혜도 주시며(눅 21:15) 믿음이 보존되도록 기도해 주시고(요 17:15) 또 감당 못할 시험은 안 주신다는 말씀을 믿으시고 항상 소망과 용기와 지혜로 대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 보금자리를 어지렵혀 독수리 새끼를 연단하시듯 하시는 분이십니다. 신 32:11)

예; 해방직전에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어떤 목사님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병도 낫고 식욕도 더 좋아졌다”고 하는 간증을 한 분이 있고, 또 평소에 위장이 약한 사람이 군대에 가면 위를 튼튼히 고치는 예가 있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겹치는 시험을 면케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이런 어려운 시험도 있으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신 32:11에서 다니엘의 세친구가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던지우게 됐을 때에 그들은 스스로 피할 길을 만들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살려주셨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는 막히고 애굽군은 뒤쫓아 올 때 인간적으로는 전혀 피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 손 들고 기다리니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어려운 시험들을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부당하게 시험을 피해보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시험이 닥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물질의 시험에 들어서 곤궁한 생활을 피해보려고 저리의 이자를 빌려서 높은 이자로 주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돈을 잘리고 자기가 빌린 돈은 집을 팔아 갚으므로 더 어려운 시험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시험을 피하려 하면 오히려 더 큰 시험이 닥치고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까지 참고 견디면 주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모든 시험을 받되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시험이다”하여 이상히 생각지 말고, 하나님이 견딜만한 시험 주신 줄을 믿고 피할 길이 합법적으로 열리기까지는 인간이 불법하게 피하지 말고 인내로 참으면 큰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28. 시험과 위로 (고전 10: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시험과 위로”란 제목으로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시험이란 의미에 대하여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고, 또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1)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하시므로 어려운 과제를 주어 시험하셨고, 또 “욥”에 “고난을 주라”하여 고난당하는 욥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시려고 시험하셨습니다. 이 시험의 방법은 다 고난을 주신 것이고, 시험의 목적은 섭리와 연단에 있는 것입니다. 벧전 1:7에 보시면 “좋은 믿음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하다”하시므로 고난으로 연단하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롬 5:3-4)

2)마귀도 성도를 시험합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마 4:1) 베드로도 밀 까부르듯 당했으며(눅 22:31)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의 시험은 연단이나 좋은 뜻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도적이 오면 죽이고 뺏는 것처럼(요 10:10) 죄 짓게 하고 믿음을 떨구어 망하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험은 하나님의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으로 시험을 주시니까 고난에 대한 신앙적 자세만 잘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2. 시험을 받았을 때 위로 받는 방법

1)시험은 누구나 다 받는 것으로 아시면 큰 위로가 됩니다. 아브라함, 욥, 예수님, 베드로 등 믿음 좋은 성도는 다 받았습니다.

2)웬만하면 시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빌 1:21) 죽음도 시험이라 할 것이 없고, 있다면 믿음이 해이해져서 예수님을 멀리하게 되거나 죄 짓는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 시험입니다. 마 9:14-15에 보시면 “신랑을 뺏기는 일에만 금식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뺏기게 되는 일이 아니면 금식할 만큼 답답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이 시험을 주시되 감당할 만한 것을 주시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말씀하셨지요. 어떤 우환 있는 가정에 가 보면 믿음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을 잘 견디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감당할 만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적당한 시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입니다.(13절) “미쁘다”는 뜻은 착하고 진실하시다는 뜻입니다.

4)피할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에서 견디기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피할 길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피할 길을 인도받듯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선포를 받았을 때에 그들에게는 인간적으로 피할 길이 없었고, 오직 믿음 안에서 “십배의 풀무불에 들어가는 길 뿐”이었는데 그 길이 오히려 사는 길이 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물질의 궁핍한 시험을 피해 보자”하여 근면과 십일조의 길로 가지 않고 저리의 돈을 얻어서 고리의 돈을 받다가 돈 준 사람이 부도를 내어 같이 망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고로 성도는 어려운 시험이 있어도 반드시 믿음 안에서 피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험은 누구든지 다 있다”, “마귀의 시험은 죄 짓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험은 섭리와 연단에 있다”, “웬만한 고난이면 시험으로 여기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은 감당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 또 “어려울 때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9. 양심의 자유와 절제 (고전 10:23-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양심의 자유와 절제”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이 제목의 뜻은 “사람마다 양심의 자유가 있고, 특히 성도는 신앙적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양심대로 행할 자유가 있고, 그 양심의 자유를 시행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나 덕을 끼치지 못할 때는 자기의 유익 위주로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유익 또는 다수의 유익을 위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성도는 일반적 사회의 법률이나 도덕률을 제하고라도 두 가지 신앙적 법규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는데 ①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누구도 조정하거나 취사 선택을 못하고 무조건 하라는 것은 해야 하고, 말라는 것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공경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할 것을 못 하고, 안 할 것을 했다”고 해도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을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② 그런데 또 한 가지 규범은 “양심의 자유”입니다. 이 양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입장에 따라 자유롭게 이해하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범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왜 계명을 명확하게 주시지 않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자유로 해석하고 적당히 행동하게 하셨을까? 이런 경우에 상당한 무질서를 초래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계율을 주실 수가 없고, 또 사람 사람마다 받는 복과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이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권으로 양심을 주셨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그러면 이런 양심이 적용되는 경우를 들어보면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많이 주어서 잘 살게 해 주어야 사랑을 잘 하는 것이라”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에게 게으른 습성이 있기 때문에 많이 주면 오히려 방탕하고 낭비할 것이기 때문에 조금씩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양심은 목적은 같으나 방법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자기 개인의 돈을 갖고 구제하는 것 같으면 각각 자기 양심대로 하면 될 것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자기 양심과 같지 않다 하여 그것을 비판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생활과 성격이 다르면 당연히 양심도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제금이 두 사람의 공동 물질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이 양보를 하던지 아니면 평균액으로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같은 성질의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잘못했을 때 어떤 부모는 “몹시 때려야 훈계가 된다”하고, 어떤 부모는 “사랑으로 잘 감싸야 교훈이 더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리는 것과 감싸는 것은 서로 극과 극의 차이이지만 사람들 세계에는 그만한 양심의 차이도 있는 것입니다.

4)이런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키면 여기에서 충성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고, 또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을 만났을 때 먹을 수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자기의 양심적 결단만 옳은 듯이 주장하여 믿음 약한 자의 양심에 손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각별히 절제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설명드리려는 것이 본 제목의 내용입니다.

2. 본문 말씀의 의미를 설명드리고 교훈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1)23절에 보시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그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방법에 하자가 없고 자기 양심에 가책이 없다”하여도 다 유익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공동체 사회에서는 내가 잘 한 것 같아도 남을 손해 보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자동차로 시골을 지나가다가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태워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는데 그것이 버스 기사에게 발견되면 벌금 대상이 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사회에서는 “내가 옳다”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 유익과 덕이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어떤 표준으로 봉사와 양심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할 때 ① 24절에서 자기의 유익은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또 33절에서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되(되도록이면)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② 또 31-33절에 보시면 양심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 영광이고, 영광 돌림의 방법은 많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영혼 구원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경과 양심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자기의 유익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고(이것이 사랑의 기본임) 모든 사람(유대인, 헬라인, 하나님의 교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며(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거나 괴로움을 주는 존재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방향으로 생활하며 저희로 구원을 이루도록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되도록 개인주의, 이기주의, 편협된 생활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많은 대상에게 유익을 주고, 또 영적 구원을 주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본문 28-30절에서는 성도 개개인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양심은 각자 자신의 것이요 남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의 양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또 “내 양심의 자유가 다른 이의 양심으로 판단(제재)을 받아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내 양심이 중요하면 다른 이의 양심도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유를 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1)그것이 곧 율법에서의 자유(롬 7:6)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롬 8:2, 갈 3:13, 4:3), 육체적 죽음에서의 자유(히 2:15), 또 고후 4:9에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자유가 있고, 또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이런 자유를 주신 것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손해 주는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행하라는 말씀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각자의 신앙에 분량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롬 12:3) 따라서 그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어떤 이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만한 믿음도 있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롬 14:2) 추도예배를 드려야만 위로가 되는 이도 있고, 안 드리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의 양심의 자유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되며 또 나의 양심적 행위가 다른 이에게 부덕을 끼치는 것이 아닌지를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4)몇 가지 예를 더 말씀드리면 ①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엡 5:18), 술은 해롭다(잠 20:1, 호 4:11), 독주는 찾지도 말라(잠 31:4) 하셨는데 예수님은 포도주 이적에 성찬 예식까지 하셨고, 바울사도는 약용으로 조금씩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딤전 5:23) 그러니까 안 먹는 것이 좋으나 명분이 있을 때는 조금씩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약용(피로 회복)으로 포도주를 먹고 눈이 충혈되어 나왔다든지 운전을 하다가 음주 운전에 걸렸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큰 부덕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약용으로 주무실 때 조금씩 잡수시는 것은 건덕에 손해가 없고 약용이 되니까 부덕이라 할 수 없을 것이요, 만일 밖으로 나타나면 당장 방종한 자, 술 취한 자로 오해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될 것입니다. ② 오락도 건전한 오락만 해야 됩니다. 제가 62년도에 총신 고신이 합동하여 부산 고신교에 편입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고신교 신학생들이 총신과의 합동을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총신 기숙사에 장기판이 떠돌 만큼 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고신계의 대표적 목사님은 한상동 목사님이었고, 한 목사님이 합동을 추진한 후 2년 만에 다시 분립시켰지요. 그때에 합동을 반대하는 고신계 학생들을 집압시키기 위하여 다른 목사님들이 권면을 할 때 “한상동 목사님도 거제도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할 때 장기 훈수를 하실 정도였다”고 한즉 더 이상 장기판으로 인한 세속화 문제를 말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③ 또 그 당시에 부산의 교역자님들이 부산 금정산에 있는 수양관에서 수양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수양관 마당에 두 개의 탑이 있었는데 “그 탑이 기독교 수양관에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목사님과 “하나의 조각품으로 보고 문제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목사님이 계셨고, 또 어떤 장로님은 “사찰(절) 근방에도 안 간다”는 분이 계셨고, 또 어떤 분은 고적과 문화재 관람차로 가는 것은 괜찮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양심은 사람 따라 다릅니다. 다만 혼자 있을 때는 양심대로 하고 나의 양심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을 괴롭게 해 줄 때는 그 양심을 존중하여 절제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30. 이상적 신앙생활 (고전 10:31-33, 약 1:2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상적 신앙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상적이란 말은 가장 합리적이고, 목표에 알맞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도 이상적이 못 되면 불안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상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신앙 생활도 역시 이상적이어야 하는데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서 그 이상적 목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이상적 목표를 말씀드리면 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② 이웃에게는 덕을 세우며 ③ 자신에게는 죄 또는 영적 은혜에 손해되지 않게 사는 것이 이상적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주의 세계가 하늘과 땅이 있고, 땅 아래 바다가 있듯이 우리 성도의 주변에는 하나님과 이웃들과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각관계의 모든 대상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 신앙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31절에서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되도록 하라” 하셨고, 엡 5:10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연구하며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은 요리문답 1조에도 있고, 롬 11:36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실까요?

1)하나님을 많이 알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많이 아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알아야 믿으니까요. 그래서 호 6:6에서는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자기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 하셨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아는 신앙고백을 크게 기뻐하셨으며(마 16:16)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믿고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바라면서 그 소망이 약해지지 않을 때(롬 4:18) 기뻐하시고 믿는 자의 조상이란 칭호를 주셨으며 히 11:6에서도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제일 큰 방법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셨고, 중생과 신앙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본을 보이셨고”(요 13:15),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거룩함을 예수님처럼 거룩하라” 하셨으며(벧전 1:16) 바울사도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하셨는데 이 말씀들이 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형상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았을 때 부모가 기뻐하는 것처럼 성도는 그 인격과 생활이 꼭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닮아야만 영광이 주께 돌려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사의 태도를 취하셔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는 아이를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 37:4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기뻐하는 자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하셨고, 하나님은 성도의 기쁨을 원하시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 “하나님의 나라는....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하셨습니다. 욥은 환난 중에서도 찬송을 하였고(욥 1:21), 바울이 감옥에서도 찬미를 한 것처럼(행 16:15) 성도는 항상 기쁨과 감사와 희망의 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소극적인 방법으로써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유명해지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을 포기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만 그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여러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광은 오직 주께로만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성도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헌신으로 주님이 영광스러워지기를 바란다면 자신은 괴롭고 감추어져도 영광은 주님께로 돌아갈 것이나 그 영광을 자기가 누리면 그것을 누리는 만큼의 영광이 하나님께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질지언정 영광은 포기하는 성도가 되셔야만 할 것이요

5)성경대로 복종하는 생활을 하여야 영광이 주께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작은 일 하나라도 자기의 표준대로 행하지 말고 성경 말씀따라 행하고, 성경 말씀따라 멈추며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하는 주의(고전 13:8)로만 나갈 때 영광이 주께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다섯 가지를 옳게 하지 못하면 인생의 참된 목적을 이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2. 이웃에게 덕을 세워야만 이상적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32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주며 구원을 얻게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교회나 이방 세계를 물론하고 모든 이에게 덕을 세우되 해를 주지 않는 것부터 구원의 유익을 주는 것까지 덕을 세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사도처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이웃을 덕되게 하기 위하여 사랑과 봉사와 양보와 희생의 정신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결코 자신이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약 1:14) 성도가 그 이웃에 대하여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치는 존재가 된다면 그 신앙생활은 이상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웃을 의식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삼가야 할 것이요

3.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 1:27에서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은 구제와 자비도 이행하면서 자기를 지키고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하셨으니 자기의 청결을 지키는 일만큼은 철저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돌보러 가서 죄에 빠져 온다든지 이웃 사람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다가 주일을 못 지킨다든지 어떤 친구의 인정에 끌려 신앙 토론하다가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자기 순결, 자기의 영적 은혜를 최대한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이웃을 사귀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되 결코 자신이 세속에 물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① 하나님께 영광되고 ② 이웃에게 덕을 세우며 ③ 자신의 영적 은혜를 최대한 승화시키는 생활로써 이상적 신앙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릴 수 있기 위하여 ① 하나님을 많이 아는 신앙 ② 그를 본받는 생활 ③ 기쁨과 감사의 태도 ④ 영광을 포기하는 십자가 중심 생활 ⑤ 성경대로 사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하겠습니다.

 

 

설교보충 31. 영광을 위한 방편 (고전 10:31-3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광을 위한 방편”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고(창 1:10,21), 특히 인생 중에 성도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을 삼으신 것은 더욱 그렇다고 엡 1:6과 롬 8:3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무슨 방편을 주셨는가?할 때에 믿음과 말씀과 양심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장이나 도구 없이 일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인이 종에게 농사일을 시킬 때에 일 할 수 있는 여건에서 일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도들에게 믿음과 말씀과 양심을 주신 상태에서 그것으로 영광돌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1. 히 11:6에 보시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셨고,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요(12:2) 믿음을 친히 주신 자시며(고전 12:9) 또 그 믿음은 순종하는 힘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1:5)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히 11:8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어려운 명령도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말씀을 순종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순종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고(약 2:17) “행함을 갖는 믿음이어야만 온전한 믿음”이라고 약 5:22에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영광의 방편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은 명확한 계율이기 때문에 말씀대로만 살면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하고 하나님 뜻(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신 것처럼(마 7:21)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 앞에 잘 나타났다”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를 하지 못하면 탈락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잘 살고 못 살거나 사람이 알아주고 안 알아줌이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야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들에게 양심이란 자율권을 주신 것이 있어서 각자가 자기의 믿음 안에서 양심대로로 행동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양심을 주신 것은 “성경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로 주신 것이 아니고, 성경이 하나님의 제일 원칙이지만 성경이 다 설명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양심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① 양심의 근거는 롬 2:14에서 “율법없는 이방인이(즉 성경없는 이방인이라도) 그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다”하셨고, 그 본성으로 율법 역할을 하여 송사나 변명도 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양심의 증거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행 24:16, 롬 13:5) ② 그런데 성경으로 주신 계시는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고전 7:19) 양심 생활이란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 각자의 믿음과 지식과 생활 환경에 따라 양심 생활 방법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사는 방법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양심대로 하지만 단체에 관한 일은 민주적으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고전 7:35에서는 “이치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셨고, 고전 14:40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또 질서대로 하라” 하셨으며 살후 3:6에서는 “규모있게 행하고”, “사도들의 유전을 본받지 않는 자에게서 떠나라” 하셨고, 계 3:2에서는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하였다”하셨으며 삼상 2:3에서는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행하고 “덕을 세워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 14:26, 엡 5:15)

3. 양심 생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남의 양심을 존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각자의 지식과 믿음과 환경에서 결정하는 독특한 방법이니까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자기의 양심 생활이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을 만큼 표면화되지 않도록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29에 보시면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을 받으리요”하신 말씀은 서로 간의 양심 생활을 판단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의 행동은 최대한 이해하고 자기의 양심적 행동에 대해서는 “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살펴서 타인에게 손해나 상처 줄 듯한 일을 최대한 삼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그들을 다 돌로 쳐서 죽이라”(신 22:22)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와서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라”하시면 “재판권을 침해했다”고 할 것이고, “용서하라”하시면 “공의롭지 못하며 율법을 어겼다”고 책을 잡으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므로 아무런 흠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용서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양심대로 하신 경우입니다. 그 당시의 법관의 양심은 예수님과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너그럽게 처리하거나 엄격하게 처리하는 문제는 그 법관에게 있고, 그 법관은 다른 사람 양심에 크게 못 마땅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모든 이를 유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이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는가?할 때 교회에서는 교인의 대표인 장로님들의 의견을 들어 수렴하고 일반 사회에서는 이웃의 여론을 들어서 그들에게 크게 상처되지 않도록 행해야 하며 또 저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라”하셨으니까 최대한 영적 유익을 도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믿음과 말씀과 양심 생활을 잘 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고전 10:31) 목록으로


본문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시므로 ① 영광이란 무엇인가? ② 영광에도 종류가 있는가? ③ 하나님은 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성도는 왜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④ 성도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릴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1.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영광은 최고의 존귀와 만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런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의 위치에 계신 분입니다. 마귀와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지만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돌릴 사명을 갖는 것입니다.

1)출 3:2에 보시면 “하나님 임재의 영광이 불꽃으로 나타났고”, 출 13:11에서는 “구름”으로 나타났으며 요 1:14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독생자와 은혜와 진리로 나타났고, 계 1:13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으신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또 그 다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시는 영광이 있으니 이것은 모든 경영이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질 때 느끼시는 기쁨의 강도를 뜻하는 것으로 창 1:31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스스로 만족해하시는 일”이라든지 창 22:12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만족해 하신 일”과 마 8:10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신 일”, 마 16:17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흡족해 하신 일들로서 하나님은 그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그 본성을 통한 영광과 피조물을 통해 받으시는 영광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이런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는가?할 때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5:39에 보시면 “육체의 형상도 여러 가지라 사람, 짐승, 새, 물고기의 육체가 있고,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으며 땅에 속한 형체도 있는데 그 영광이 다 달라서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시므로 영광의 종류가 다양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악인에게도 영광이 있는데 악인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빌 3:19, 호 4:7)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피조될 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받았고,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다시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하신 것은 모든 피조물의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신적 영광을 가지시고 성도를 중심한 우주적인 상대로부터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이유는

1)하나님이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롬 11:36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은 영광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청지기가 돈을 벌면 그 돈을 주인에게 드려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영광의 주이십니다. 시 24:7에 보시면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3)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시요, 성도를 구속한 분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 1:18에서도 “만물이 영광의 피조물로 창조됐다”고 하셨습니다마는 사 43:7에서도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하시므로 피조물 중에도 성도를 영광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성도를 영광의 대상으로 삼으실 때에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대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으니까 성도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만유의 주, 영광의 주, 구속의 주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요

4)“홀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사 24:1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패한 세계에서는 의인 아닌 자가 영광을 누릴 수 있지만 의로운 세계에서는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4.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이유는

1)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이요

2)십자가로 구원하신 때문이며

3)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요

4)영생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으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방법은

1)하나님께 대한 신뢰감을 두텁게 가지셔야 합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교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요

2)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생활을 할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 116:17에서 “감사는 제사로 간주되고”, 시 69:30에서 “감사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방법”이며 시 95:2, 100:4에서는 “감사함으로 그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하셨고, 눅 17:16에서 “예수님이 감사에 만족하셨고”, 감사가 없음을 유감으로 표현하셨습니다.

3)하나님 말씀대로 복종할 때에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은혜를 갚겠습니까? 오직 그 말씀에 복종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드리는 것으로써 순종할 때 영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롬 7:4)

4)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충성을 많이 할 때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요, 마 25:21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그 주인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충성이란 주인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하는 것이고,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주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지 않으면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5)찬송으로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사 42:8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찬송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는다” 하셨고, 엡 1:6에서도 “성도에 대한 구속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드림에 있다”하셨으며 계 4:8과 15:3에서 하늘의 군상들도 하나님께 찬송함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 감사, 순종, 충성, 찬송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저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는 날에는 큰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행 12:33)

 

 

제 25 과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1-16) 목록으로


이 말씀의 1절을 제외하고는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의 수건 착용이란 헬라(고린도)의 여성도들이 공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드림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절은 “예수님과 바울을 본받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1. 예수님과 바울을 본받음에 대하여(1절)

1)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 바울이 예수님을 추종한 사실은 없지만 그가 개종하기 전에 핍박자의 입장에서(딤전 1:13) 예수님의 생활을 상당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도들과 자신이 받은 영감에 의하여(고전 7:40) 예수님의 뜻과 모범을 알았을 것이요, 그 모범을 본받아 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흠하시지만 예수님을 본받은 바울의 생활까지 무흠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순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욥 9:2-3, 25:5-6) 하나님이 보시기에 칭찬하실 만큼 예수님을 본받은 것입니다.(욥 1:8)

2)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바울과 일반 성도와의 연계적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모범을 바울이 승계하고, 바울의 모범을 성도들이 승계하여 기독교 신앙과 생활이 전승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전 3:10-11, 엡 2:20-21의 말씀이 실현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근거하여 예수님과 사도를 본받는 것이고, 먼저 믿음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닮고 다음에 일반 성도들이 믿음의 지도자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2-16절)

1)2절은 유전을 지킴에 대하여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이 유전은 헬라의 여성들이 공예배 때 수건 쓴 것을 바울사도가 묵인하여 예배의식의 유전을 그 지역에서 만든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라”하심은 사도적 유전을 잘 지키라는 뜻이요, 고린도교회 여성도들이 그렇게 한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유전이란 말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유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의 유전은 사람이 만들어 실천케 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즉 부모에게 공경하려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것이 매일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효도의 계명을 폐한 것입니다.(마 15:2) 그러나 유전이라고 하여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목적으로 사용되는 유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라든지, 선한 사업을 물려준다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하여 어떤 의식적인 방법을 쓰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위생을 위하여 식사 전에 손을 씻게 한 것은 좋은 유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 씻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마 15:2)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지켜오던 유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표시로 수건을 쓰고 다닌 것입니다. 이런 유전이 회교권으로도 전승되어 그 지역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권장하는 표시로 수건 쓴 것을 폐지할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전은 특수한 지역과 상황에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여자가 공예배 때에 수건 쓰는 것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여자가 수건을 쓴 의미는 “권세 아래 있는 표시”(10절)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통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수건 쓰는 전통이 기독교 신앙 이전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을 구태여 폐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3절의 뜻을 정리하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란 뜻은 머리가 몸을 지배하는 것처럼 위계 질서의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하셨고,(마 26:39, 빌 2:8) 남자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므로 복종하여야 하며(마 28:19) 여자는 최초에 부부를 만드실 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신 후(창 2:19) 여자가 먼저 범죄 한 다음에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고,(창 3:16) 따라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엡 5:22, 벧전 3:1) 그런 의미로 여인이 남편의 권세 아래 있는 표로써 수건을 착용한 것을 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3)만일 반대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설교)을 하였다면 이는 전통상의 인식과 창조 원리를 뒤집는 것이 되므로 “그 머리를 욕되게 함이 된다”(4-5절)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욕되게 함”이란 자기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데 쓰임이 되므로 욕이 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반대로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것도 남자가 쓰는 경우처럼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우에 왜 “깎으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수치감을 주는 풍자, 또는 책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건 안 쓰는 문제가 머리를 깎아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머리를 깎게 되면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서라도 쓰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남자가 머리에 쓰므로 머리를 욕되게 한 것”은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으므로 머리를 욕되게 함과 같고, 그것은 곧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여자가 쓰지 않은 것은 그 욕됨이 그의 머리를 민 것(깎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의 존귀와 미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깎는 것은 여자로서 욕된 일인 것처럼 남자에게 주신 권위를 남자가 스스로 버리는 것도 역시 욕이 되는 것입니다.

4)7절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하신 것은 최초의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하나님이 자신의 의와 선과 거룩을 닮게 하심) 하셨은즉 영광스러운 몸이므로 그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땅히 쓰지 않아야 하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위하여 “그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머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8절) 여기에 “천사들을 인하여”란 뜻은 하나님이 남녀의 구별을 지으실 때 어떻게 하신 것을 천사들이 알고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 되는 이유는 9절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과 함께 남편을 섬기고 복종하여야 할 것을 창 2:19, 3:16, 엡 5:22, 벧전 3:1, 딤전 2:11-15에 말씀하셨습니다.

5)11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것은 인권의 동등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 중에 남녀가 다 있다는 뜻이요, 또 12절에서 “여자가 남자에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말씀은 남녀 출생 경위가 다 하나님의 근원에 의하되 남자, 여자의 공동 역할로 출생하는 만큼 역시 인권상의 우열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문제를 성도가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의 남자에 대한 직무상의 입장을 하나님이 창조적 섭리로 정하여 준 이상 사람이 그 뜻을 거역하는 행위로 여자가 쓰지 않고 기도(하나님께 나가는 것)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13절)

6)14절에서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가졌다면 이는 여자가 쓰는 수건을 남자가 쓴 격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함은 물론(3절) 욕된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진 것은 남자에 대한 복종의 뜻을 표한 것으로서 수건을 쓴 것과 같은 격이 되고, 따라서 그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이런 문제로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사도들(우리에게나)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런 규례(수건을 쓰고 안 씀에 대한 규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7)다만 없는 것을 이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런 관습이 오랜 유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을 변동하는 것은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서 남녀의 입장을 혼란케 하는 실제적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 여성들이 미사드릴 때 수건을 쓰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이고, 개신교의 여성이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 나라에 그런 전통이 뚜렷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혹 그런 전통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성의 머리를 기른 것이 수건 쓴 것을 대신함이 되기 때문입니다.(15절)

 

 

제 26 과 성찬 예식에 관한 교훈 (고전 11:17-34) 목록으로


이 말씀의 전체적 제목은 “성찬 예식에 관한 교훈”입니다. 내용을 분류하면 17-22절은 “교회의 유익 없는 회집을 지적하심”이요, 23-28절은 “성찬 예식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말씀”이며 29-34절은 “잘못된 성찬 예식의 결과와 대책”을 말씀하셨습니다.

1. 교회의 유익 없는 회집을 지적하심.(17-22절)

교회적 모임은 어떤 것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회집에서 경건한 예배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든지 아니면 성도 간에 사랑의 친교나 봉사나 덕을 세우는 일로 모임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좋으나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며 갈등하고 대립하며 형제를 무시하는 등 친교에 손해를 주고 시간과 물질에 낭비를 초래한다면 크게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교회적 회집은 항상 신앙적이고 봉사적이며 건설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1)17절의 “내가 명하는 일”이란 “그들의 모임에 유익이 없고 해로운 일을 하므로” 그것을 교정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찬 예식을 바르게 하도록 교훈하시는 명령으로 “먼저 자기를 살피라”(28절)는 것과 “주의 몸을 분변하라”(29절)는 것과 “서로 기다리라”(33절)는 것과 “시장한 사람은 집에서 먹고 오라”(34절)는 것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라”(26절)는 내용입니다.

2)18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유익이 없다”하신 것은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분쟁의 성격은 편당과 사랑과 지식의 고갈 등이었습니다.(1:11-13) 편당이 있어서 사랑과 화합을 해치는 것은 신앙과 교회 발전에 큰 해를 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편당이 있음을 인하여 판단을 잘 한다면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을 분석하여 교정할 수 있고, 그럴 경우에는 유익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19절) 따라서 편당이 있을 때는 반드시 정의로운 편과 거기에 못 미치는 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바울사도는 20절에서 사랑의 화목이 없을 때는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을 받기 전에 미리 회개하고 화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찬 중에 화합을 해치는 또 한 가지 요인이 있음을 지적하셨으니(21-22절) 그것은 성도가 만찬용으로 준비한 음식을 가져온 자끼리 먼저 먹으므로 먹은 자는 취하고, 함께 먹지 못한 자는 시장한 상태에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하시며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모시고 성찬을 나누는 모임에서 가난한 성도를 기억하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먹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한 것은 주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잘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성찬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말씀.(23-28절)

1)성찬의 의미.(23-26절) ① 주님이 모범을 보이시고 시행할 것을 제자들이 시행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성찬의 모범을 보이시고 명하신 사실은 마 26:20-29, 막 14:22-26, 눅 22:15-2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요, 모범자로서 성찬예식의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② 이 예식을 통하여 축복을 받는 것이며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되 떡과 포도주로 대신하여 기념하는 것이고 ③ 25절의 “내 피로 세운 언약”이란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약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희생의 제물의 실체가 되어 속죄와 구원과 중보자 되실 것을 약속하시는 언약의 표로서 예수님은 그 언약을 십자가와 부활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④ 26절에서 또 이 예식의 의미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성찬 예식으로 은혜도 받고 이 행사의 의미를 전파하는데도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 예식은 주님의 명을 실천하는 의미,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는 의미, 새 언약으로 인 치는 의미, 전파의 의미가 있습니다.(그 이외의 의미는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2)성찬의 방법.(27-28절)

성찬에 참여하는 방법은 27절에서 “합당하게 먹고 마시라”는 것이요, 그 합당한 방법은 ① 성도 간의 화목한 중에서(33절;서로 기다리라는 말씀) ② 자기를 살피고(28절) ③ 주의 몸을 분변(성찬의 의미를 깨닫는 지식)한 후에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믿음과 회개와 사랑 중심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3. 잘못된 성찬 예식의 결과와 대책.(29-34절)

1)성찬을 합당치 않게 시행함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심 같다”(29절) 하셨으니 여기의 죄란 “크리마”(κρίμα)로서 “판단 또는 심판”이란 뜻으로 그것을 먹고 마심처럼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2)살펴 바로 행하지 못한 죄로(31절) 징계를 받아 몸이 약하거나 병들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30절)

3)그러나 32절에서 “세상과 함께 죄정함을 받지 않게 하심”이라 하심은 성찬 예식으로 범죄한 자에 대하여 자게 된 자(죽음)를 현실적인 징계로만 끝내시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심판하는 정죄에는 이르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고전 5:5) 다시 말하면 천국문까지는 막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경우도 있다 하시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아무쪼록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주신 교훈을 잘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신다”하시므로 여러 가지로 설명을 다 하지 못한 것은 고린도교회에 직접 가셔서 지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33. 주님을 본받는 법 (고전 11:1) 목록으로


바울사도는 주님을 본받으셨고, 성도들은 바울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을 본받으라”한 것은 곧 주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을 본받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을 발견하여야 하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알거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으면 본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들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줄 알아야 본받을 수 있습니다.

1)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님을 사귀었지만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고기 잡게 하시는 이적을 보고야 예수님을 바로 발견하였지요.(눅 5:4-8)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면서 인간의 기가 팍 죽을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2)바울사도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본래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문득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셨을 때(행 9:4-5) 다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가(9:8-9) 다시 깨어 “주여 무엇을 하리잇가?”(행 22:10)하는 사명적 자세로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진리이시며 구세주란 사실을 충분하게 발견할 때 주님을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자신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발견하였으면 새 포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먼저 자신을 비우고 새 마음, 새 생활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먼저 부정한 후에 따라야 한다”(마 16:24)하셨고, 바울사도도 주님을 발견한 후에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죽은 자로 취급하셨습니다. 롬 7:8에 보시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하셨고, 빌 3:8에서도 “내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무엇이던지 전에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겼고 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셨으며 갈 5:24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자기도 육체와 정신은 물론 미래의 생애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이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롬 6:3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이라”하시므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자기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어 없어진 것처럼 자기를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인격을 자기의 마음에 모셔 연합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돌감람 나무 가지가 참감람 나무에 접붙힘이 되어야 참감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5:4, 롬 11:17) 이 연합의 성격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롬 6:4-5을 보시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를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하셨고, 빌 1:21에서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하셨으며 갈 2:20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하셨고, 3:27에서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하시므로 자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죽여 못박은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빌 2: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신 말씀처럼 주님의 마음을 모시고 자신과 연합하여 주님의 인격으로 새 생명을 살 때 주님을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경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의 특별 계시이기 때문에 말씀을 떠나서는 주님을 알 수 없고, 주님을 본받는 방법은 역시 말씀을 따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행 18:5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행하셨다”하셨고, 마 4:1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셨다”하셨으며 갈 5:16,25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는 자요, 본받는 자이기 때문에 완전히 자의를 떠나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행이 곧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과 성령에 이끌려 사는 것은 표현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뜻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며 성령님께서 성경을 감동하여 기록하게 하셨고, 또 성경을 앞세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6,17, 17:17, 딤후 3:16) 고후 13:8에 보시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하신 것처럼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 곧 주님을 본받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발견, 자기 부정, 주님과의 연합, 말씀 중심이 곧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4. 무엇을 본받을까요? (고전 11:1) 목록으로


성경은 예수님과 바울(사도들)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마 11:29, 요 13:15, 벧전 1:16) 바울사도는 롬 8:29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성도를 선택하셨다”고 하셨고, 갈 4:19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게 하는 일이 목회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야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교만을 빼버리고(마 11:29)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엡 4:13) 잘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할까?할 때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으면 모든 것을 다 본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격은 사람이 모방할 것이 못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여러 가지로 구성됩니다. 우선 성격, 마음의 생각, 언어, 지식,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1)성도는 예수님을 믿은 때부터 반드시 성격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씨앗이 옥토에 떨어져야 싹이 나듯이 진리의 말씀도 마음에 심겨지기 때문에 약 1:21에서 “온유한 심령에 말씀의 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밭이 굳으면 씨앗이 튀는 것처럼 마음도 진실하고 착하고 온유할 때에 진리의 말씀을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1:29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으로서 그런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온유, 겸손한 마음은 가장 낮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높이 세운 마음이 아니고, 낮은 마음이기 때문에 더 낮아질 것도 없고, 실수로 쓰러질 것도 없습니다. 섰다 하면 넘어질 위험이 있지만 낮은 마음은 넘어질 위험이 없습니다.(고전 10:12) 예수님이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주무셨다”(마 8:24)는 것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실 수 있었음을 보여 주신 것인데 평안한 마음의 안전한 위치는 가장 낮은 위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하셨고, 잠 4:23에서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킬 때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 나타나시고 또 건강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2)예수님의 성품은 ① 온유하셨고 ② 겸손하셨으며 ③ 긍휼이 많으셨고 ④ 사랑이 풍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긍휼이 많으신 것은 비천한 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신 것과(마 4:15) 슬픔을 당한 사람과 같이 울어 주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으며(요 11:33,35) 또 사랑의 심정이 가득한 것은 죄인들의 거역하는 것을 보시면서도 오래 참아주시고(히 12:3) 또 끝까지 사랑하심에서(요 13:1)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또 예수님의 성품 중에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의로운 성품이 있고(고후 5:21) 악인과 의인을 공평하게 대하시는 공의의 성품도 있으신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 8:20, 살후 1:7) 예수님처럼 온유, 겸손하시고 사랑과 긍휼이 많으시며 의로운 성품을 가지려면 많은 노력과 자기를 못박는 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0년을 믿어도 자기의 포악이나 완고한 성품을 못 고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지, 정, 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예수님의 지식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믿음의 지식과 일반지식입니다. 너무 아는 것이 없으면 좋은 인격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흑암이 없고 지식의 하나님이라”(요일 1:5, 삼상 2:3)고 하셨습니다. 또 권능과 지혜가 무한하시고(욥 12:13) 모든 것을 주밀하게 아십니다.(마 10:30) 그리고 “하나님을 알라”(사 5:13, 호 4:6)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의 지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2)예수님의 감정 표현을 본받아야 합니다. 감정이란 어떤 사태를 만났을 때 적절하게 느끼는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참는 마음, 분한 마음, 슬픈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쫓을 때 분히 여기신 일이 있고,(막 10:14) 또 노하신 일이 있으며(히 3:10) 슬퍼하시고 민망해 하신 일도 있고(요 11:33, 12:27, 13:21) 심지어는 우신 일까지 있었습니다.(눅 19:41) 또 때로는 기뻐하신 일도 있었습니다.(눅 10:21, 마 18:13) 이렇게 “마음에 느끼는 것”이 감정인데 이 감정을 적당하게 느낄 수 있어야만 바른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민망할 일을 잘 된 것으로 느끼거나 슬픈 일을 기쁜 일로 느끼거나 긍휼히 여겨야 할 일을 그렇지 않게 느낄 때는 그 인격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면한 환경에 따라 적당하게 느끼고 적당하게 권면할 줄 아는 태도와 분수있게 처신하는 태도를 본받으셔야 하고

3)예수님의 의지적 행동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의로우시지만 인간들은 옳게 행동하는 의지적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굳게 결심하신 사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성으로 동행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기지만 예수님은 그 곳으로 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고(요 4:4)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고난을 감당하실 수도 있고, 피하실 수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스스로 취하신 것이요(요 10:18) 예수님의 의지의 활동인 것입니다. 약 4:17을 보시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성도가 선을 지향하는 힘이 없다면 어찌 바른 인격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3. 예수님의 언어를 본받아야 합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자세가 정립되어야만 정상적인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대화의 대상은 모두가 까다로운 대상뿐입니다. 말을 급하게 하다가 실수하면 큰 오해와 불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말이고, 또 이 말이 어려운 만큼 서로 이해하는 폭도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1)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막 1:22) 그 이유는 ①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 ② 심오한 내용 ③ 본이 되는 생활 ④ 거기에 능력까지 동반하셨으니까 크게 권세있는 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예수님은 순하게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①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 귀신을 쫓지 못했을 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마 17:17)하시므로 유감을 표명하셨고, ②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너무 영안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눅 24:25)하시고, 듣기 좋게 책망하셨습니다.

3)또 가장 악한 가룟유다와 빌라도에 대하여서도 역시 과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으니 ① 마 26:25에서 유다가 “내니이까?”했을 때 “네가 대답하였느니라”하시므로 유다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시사하여 깨닫게 하셨고, ②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준 빌라도에 대하여서도 “선한 증거로 증거하셨다”(딤전 6:12)고 하시므로 상대방이 책망을 받을 자요, 악한 자라도 결코 심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깨닫게 하시는데만 주력하신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찍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상대방을 평안하게 하고 격려하고 희망있도록 깨우치는 좋은 말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일반적 생활, 영적 생활, 사명 생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예수님의 일반적 생활은 ① 진실하게 사셨고(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히 6:18) ② 비천한 입장으로 사셨습니다. 세상 영화를 거의 포기하셨고, 마른 땅에 있는 줄기 같아서(사 53:2) 폭력적 대항은 하실 수도 없었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③ 성실하고 피곤하게 사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수고하신 일이 있었고,(막 3:20, 14:3) 배를 타고 여행하며 주무셨으며(막 4:38) 몹시 피곤하시면서도 시간을 아껴 쓰신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신 것도(막 1:35) 시간을 아끼신 방법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구속 사업을 위하여, 전도를 위하여(막 1:38) 성실하게 사신 것입니다.

2)예수님의 영적 생활은 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을 권장하셨고,(요 4:24) ② 예수님이 성전에 계시면서 성경 상담하는 것을 좋아 하셨으며(눅 2:46,49) ③ 습관 따라 늘 기도하셨고,(눅 22:39) ④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 떠나실 것을 생각하실 때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 12:23)하시고, 천국을 즐거워하셨습니다. 또 빌라도 앞에서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하셨고,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핍박을 받게 되고 이로써 주님을 먼저 핍박한다”(요 15:19-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 예수님의 영적 생활이 하나님과 천국 중심이었음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로 미움을 받을 만하여야 영적 생활에 깊히 빠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예수님의 사명 생활입니다. ① 예수님은 실제적 생활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사명을 이행하셨고, ②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충성하셨으며 ③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시므로 사랑의 모범자가 되신 것입니다. 구속 사업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는 것입니다. 엡 2:14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화평하게 하신다”고 하시므로 예수님의 화해 사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신앙적으로 화목해야 하고 ②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랑으로 화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롬 5:1-2)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실천하시는 일을 양식 삼듯 하신다”(요 4: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본받는 생활에서 성품, 인격, 언어, 생활을 구체적으로 본받을 때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설교보충 35.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3-16) 목록으로


1. 바울사도께서 이 말씀을 본문에 기록하신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여성도들이 수건쓰는 일을 생활화 한 중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자 수건을 쓰는 번폐함과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는 자별을 폐하기 위하여 수건을 벗든지 아니면 남녀가 다 쓰든지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바울사도께서는 그 시행을 시기상조로 보셨기 때문에 자제시키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왜 시기상조로 생각하셨을까요?

1)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더 교육하실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이요(엡 5:22, 창 2:18)

2)여자가 별안간 수건을 벗으므로 인식상의 혼란이 야기될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가 수건을 벗는다면 남녀간의 창조적 질서를 인식상으로라도 혼란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당연히 변화할 수 있지만 유전을 폐하므로 올바른 인식이 수반되지 않을 때는 시기상조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공 예배 때에 수건 벗는 문제를 시도하기 전에 먼저 알 것을 알아야 한다 하시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3-16절)

1)“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와 같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와 같으며 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절) 여기의 머리는 권세를 뜻합니다.(10절) 따라서 남자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알고, 여자는 남자를 그렇게 알며 또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을 그렇게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 되심은 영계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능력과 영광이 다 같은 것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성자를 성부 다음에 호칭하는 것은 영계의 순서와 직무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 뿐이요, 권위의 차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창조의 질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셨고, 여자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은 남자를 돕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창 1:18,22)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한 것이나(벧전 3:6)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엡 5:22)는 말씀은 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질서요, 여자의 미덕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함은 인권의 차이에서가 아닌 창조의 질서와 체질적 직임을 잘 활용하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자는 자녀를 낳아 양육하여야 하고, 남자는 건강한 육체로 활동하여 상부 상조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자를 복종하는 위치에 두신 것입니다. 이런 점은 가정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도 적용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2:8-15) 이런 사실이 족장 시대에도 시행되었고(벧전 3:6, 창 24:65) 그 후시대까지 전승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더 1:17-21)

2)“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강도)을 하면 그는 그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줄 알아야 한다”(4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남녀의 평등생활을 주장하여 “여자가 수건을 벗든지 아니면 남자, 여자가 다 써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번거로운 의식적 유전은 인식 목적이 완성될 때 중지할지언정 새로운 전통과 유전을 필요 이상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수건을 쓴다는 것은 머리로 상징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위를 등장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여자와 권위를 바꾸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함이 사실이요, 또 여자가 쓴 것을 벗고 예배에 임한다면 그것 역시 권위를 바꾸는 격이 되어 건덕상 좋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또 여자가 수건을 벗는 것은 본래 머리를 단장함이 쓰는 것을 대신한 것이었기 때문에(15절) 머리를 민 것처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5절)

3)만일 여자가 남자에 대한 복종의 미를 나타내기 싫어서 수건을 쓰지 않는다면 이는 머리를 깎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또 깎아야 할 것이니(6절) 본래 여자의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였기 때문이요, 또 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벧전 3:3) 수건 쓴 것이 전통화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수건을 벗음과 동시에 머리를 깎거나 민다면 다 부끄럽게 여길 것이니(사 47:2) 이런 것은 그들이 본성(천래적 성품 ; 롬 2:14)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시므로 그대로 써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6절)

4)남자와 여자가 각각 자기의 영광의 대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7절) 즉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신적 거룩과 의와 선을 품부하심) 창조되어 하나님을 대리한 자로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창 1:27,28)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된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돕고(창 2:18) 경외하므로(엡 5:33) 기쁘게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의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남녀 인권 문제의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부언하신 말씀입니다.(8-16절)

1)창조의 질서에서 남자를 앞세우신 것과

2)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남자에게 두신 것입니다.(창 2:18) 물론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창 1:31, 2:18) 여자의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엡 5:25)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그 인권상으로 동등한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주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11절)

3)10절 말씀에서 “여자가 천사를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두어야 할 것”은 여자를 창조할 당시에 있었던 천사가 지금도 여인들 곁에 있어서 여자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응하는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4)또 12절에서는 남녀의 필요성을 동등하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남녀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서 난 것 같이 모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출생한다”는 말씀입니다.

4. 그런고로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스스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요, 그 이유는

1)고린도교회의 여인들의 수건 쓴 것이 창조의 질서와 목적에 부합되고

2)이에 대한 의미상의 교육을 더 계속할 필요가 있으며

3)만일 여자가 수건을 쓴 것처럼 남자도 그렇게 한다면 남자, 여자 다 욕이 되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요(14-15절)

4)따라서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과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요즈음에 남녀 평등 생활을 주장하는 방법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여성들이 머리를 깎고, 또 남자가 치마를 입고 나왔다고 가상을 해 보십시오. 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5. 그러면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내용을 왜 오늘의 성도들이 시행하지 않느냐?하실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시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세계의 전통이라도 좋은 것이면 전승하여 은혜를 받으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계명으로 주시지 않은 전통을 이방 교회 성도들의 풍속을 따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이 사실을 확실하게 교훈하셨습니다. 즉 “우리(사도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규례를 주신 일이 없은즉 변론하려는 태도가 있을지라도 개의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옛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전통이 우리의 전통이 아닌 것은 마치 유대인의 장례법이 우리와 같이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기독교 초창기부터 남녀분별 관계에서 수건 쓰는 일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규례를 주신 일이 없는 이상 다른 민족의 전통까지 답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6. 살펴야 할 것들 (고전 11:28-3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살펴야 할 것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이 떡과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하셨고, 또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모로 잘 살펴서 실수 없고 불이익이 없는 생활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성도가 자기를 살피지 않고 성찬 예식에 불합리하게 참여하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고(27절), 또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자가 되는 것이며(29절) 현실적인 징계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서 약한 자가 되거나 질병을 받거나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30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피지 못하여 실수한 자의 결과가 대단히 무서운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찬식을 접하게 될 때는 몇 가지 살펴야 할 것이 있는데 ① 성찬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29절) ② 성도간의 사랑과 화목이 있어야 하며 ③ 전도와 충성심을 갖고 참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살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먼 관계인가? 가까운 관계인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창 3:9에서 타락한 아담이 동산 숲으로 숨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고 아담을 부르셨지요. 이 말씀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자신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뺏길 날이 이를 때 금식하라”하셨고,(마 9:15) 바울사도께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확증하라”(고후 13:5)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첫째로 살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먼지 가까운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살펴야 합니다. 성경을 살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노력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며 친교입니다. 시 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하셨고, 시 119:97에서는 “주의 법을 종일 묵상한다” 하셨으며 벧전 1:10에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성경은 믿음의 양식입니다.(마 4:4) 그러니까 많이 살피고 많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성경에 붙잡혀 사는 성도가 크게 복된 것입니다.

3. 자신의 도덕성을 살피는 것입니다. 고전 11:28과 갈 6:4에서는 “자기를 살피라” 하셨고, 고전 11:31에서는 “우리를 살피라” 하셨으며 롬 16:17에서는 “거치는 자를 살피고”, 전 1:13과 눅 1:3에서는 “모든 것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살피는 일을 잘 못합니다. 오죽하면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하셨을까요?(갈 6:3) 자기를 살펴야 할 종목이 많습니다.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를 살피고(잠 16:2) 언행을 살펴야 하며(약 3:26, 엡 5:15, 삼상 2:3) 정도의 길을 가는지를 살펴야 하고(잠 8:20, 말 2:8, 왕상 2:3, 잠 14:12) 또 안전한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민 16:3, 고전 14:40) 자신의 도덕성을 살필 때 또 중요한 것은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지 못하기 때문에(딤후 2:13) 족보로부터 출생 경위, 가난한 시절, 수치스럽게 돌아가신 일까지(갈 3:13) 다 기록하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숨기는데 익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마 23:26)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르면 그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혹 이기주의 목적으로 진실을 숨기거나 사실을 과장함이 없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4. 가치관의 판단이 흐리지 않은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교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보화가 매장된 밭을 사는 일(마 13:44), 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현실적 유익을 버리는 일(빌 3:7-8) “이 모든 것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마 6:33) 등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이 더 중요한 분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실 때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앞세워 모시는 것이고, 이기적인 목적보다 이웃 사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을 안다면 가치관의 판단을 잘 하여야 할 것이고, 또 값진 것을 선택 시행하는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후 4:18에서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하셨으면 영원한 은혜를 가장 값진 것으로 믿고 그 세계를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고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믿음이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속담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롬 5:3-4에서 “환난은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준다” 하셨고, 고후 4:9에서 “바울사도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 하셨으며 야곱도 험악한 세월을 보냈으나 복된 생애를 살았고, 약 1:12에서도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으니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뱃사공이 풍랑을 두려워하면 항해를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고난을 두려워하기 전에 고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행 14:22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도 당연히 핍박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딤후 3:12)

결론적으로 성도는 여러 가지를 살피되 ① 하나님과의 관계 ② 성경 살피는 일 ③ 자신의 도덕성 문제 ④ 가치관의 판단과 선택 ⑤ 고난을 수용하는 자세 등을 살펴서 책망이나 징계받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7. 성찬의 교훈 (고전 11:17-34) 목록으로


1. 교회의 모임이나 기독교적 행사가 합리성이 없을 때는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7절에 보시면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저희의 모임”이란 성찬 예식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찬 예식은 대체적으로 경건하게 시행되고 은혜가 되는 줄 아는데 “도리어 해롭고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

1)그 단체 안에 편당이 있고,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베드로, 바울, 아볼로를 두고 각각 계파를 만든 것과 성도 간에 대립, 갈등 등 보이지 않는 문제들과 부자유한 일들이 분쟁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편당과 분쟁 때문에 성찬식의 해로움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2)사랑의 고갈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찬 예식을 할 때 서로 기다리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의 성찬 예식은 배부른 것과 상관이 없지만 고린도교회 당시는 배부른 것과 상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없어서 음식을 못 가져온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거나 배려할 줄 모르고 여유가 넉넉하여 음식을 잘 준비해 온 사람들끼리 먼저 먹으므로 성찬식을 마치니 그 결과로 먼저 먹은 사람은 취하였고,(배도 불렀을 것이며) 나중 온 사람은 시장하고 부끄럽게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렇게 된 일은 작은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얼마큼 작은 일이 아니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것이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한 일이며 징계받을 일이라”하시고, 그 징계의 내용까지 열거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노회적으로 빈궁하고 약한 이웃을 부끄럽게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의 “서로 기다리지 않았다”는 뜻은 “배려하거나 화합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시장하였다”는 말씀은 공평치 않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 없고,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했다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면에 많은 개혁이 있어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

3)유익 없는 이유는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는 경우”입니다.(29절) 지식이 있는 성도라면 대부분 성찬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몸을 분변한다”는 의미를 깊히 생각하면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① 우선 성찬 예식은 예수님의 모범이고, 사도들이 받아 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들을 얼마나 모범합니까?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역으로 행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성해야 합니다. 지식에 관한 결함은 더욱 큰 것이라 할 것입니다. 성찬 예식은 예수님의 모범이고, 명령이며 사도들이 주께로부터 받아 전한 것이고,(23절) 떡을 예수님의 성체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기념하여 먹음으로써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굳게 다짐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식을 깊히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깊은 의미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표면적 지식에만 멈출 것이 아니라 깊히 연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이 예식의 모범을 십자가 전날 몇 시간 전에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때를 생각하고 “나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는 결심을 갖고 십자가의 뒤를 따르게 하심인 것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반드시 고난의 십자가를 따를 결심을 가져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 ③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적 음식으로 먹으라 하셨으니 이것은 주님의 성체와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본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생활로 모범하지 않는다면 성찬식의 의미를 거의 상실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복종과 겸손이 있고, 고난과 자기의 희생이 있는 봉사적 사역이요, 영광은 돌아가신 다음에 받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의미도 반드시 본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④ 주님이 자기의 성체를 먹게 하신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으면 자기의 피와 살로 변합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주님의 생명과 피가 우리 몸에 흐른다”고 생각할 때 명실공히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사는 것이요, 따라서 주님 뜻대로 살아드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뜻에는 “나는 곧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것은 다 내 것이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눅 15:31, 고전 3:21-23, 계 3:20) 주님과 연합한 성도는 반드시 이런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⑤ 성찬을 베푸시면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26절) ⑥ 성찬을 마친 다음 찬미하고 가셨으니 이것도 찬송 한 절을 부르면 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깊히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2. 마지막 결론으로 이런 일들에 대하여 자기를 살피지 않고 방심하게 행하거나 회개하지 않을 때는 모임의 유익이 없고, 약한 자에게 부끄러움 주는 일이 되며 칭찬 대신 징계가 따를 것인데 그 징계를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약한 자가 될 수 있고,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병든 자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잠자는 일이 속히 올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도 무섭지만 사명적인 차원에서 예수님과 바울사도의 모범을 진정으로 본받는 저희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38. 성도의 친교생활 (고전 11:17-22) 목록으로


본문 17절을 보시면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모임은 일반적 모임이 아닌 성도의 신앙적 모임이었고, 특히 성찬 예식을 하였는데도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롭게 된 것입니다. 없어야 할 편당 대립이 있었고, 또 마땅히 있어야 할 약한자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안에서의 대인적 관계는 상당히 민감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적응을 잘 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지만 성도 중에는 어린 아이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불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간에 친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우선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란 긍지를 갖고 어른다운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고전 3:3에서 “시기와 분쟁을 떨치지 못하는 성도는 육신에 속한 자요 어린 아이같은 신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반드시 시기와 욕심과 교만이 없어져야 할 것이요, 항상 화평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또 겸손한 성도들을 디디고 일어서서 교만하거나 이기주의 욕심을 차리는 자들도 용납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한 가족이란 개념을 갖고 친교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모든 자는 다 형제, 자매, 한 가족이라”(마 12:50)하셨고, 바울사도는 성도의 단체를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엡 2:19) 이 사회에서 가장 사랑과 화목이 잘 유지되는 단체는 가족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를 한 가족으로 대하는 친교가 필요합니다. 효도나 형제 우애를 잘 하는 모범을 교회에서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 연합과 협력을 잘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단체 생활이므로 무슨 일이나 혼자 하지 않습니다. 양은 서로 따뜻하기 위하여 몸을 접촉시키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성도의 단체도 이렇게 한 뜻이 되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깨닫게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히 3:13에서 “매일 피차 권면하여......죄의 유혹과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 하셨고, 히 10:24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하셨으며 빌 1:27에서는 “너희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듣고자 한다”고 하시므로 성도의 단체 생활을 통한 신앙의 격려와 협력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초신자가 교회 단체에 입회를 하면 그 단체를 지도하는 주최측에서는 초신자를 가까이 살펴 줄 수 있는 위원을 선정하여 그로 하여금 최대한 봉사하고 친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하는 방법으로는 무슨 일이나 억지로 따르게 하지 말고,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또 새로 입회한 성도는 단체의 회원이 된 것을 기회로 좋은 연단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항상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협조하고 사랑의 친교를 가지면서 신앙을 자라게 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봉사하는 성도에게 격려와 칭찬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혹 지도자가 합법적 절차를 밟지 못하였거나 일을 공평하게 하지 못하였을 때는 주저없이 실수를 말하고 양해를 구하여야 하며 그런 실수를 교훈 삼아 다같이 깨닫고 더 잘 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성도의 친교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고전 13:4-7에서 “사랑은 인내와 온유, 봉사, 겸손, 예절, 양보, 신뢰가 있고 또 진리와 함께 기뻐하여야 한다” 하셨고, 요일 4:7-11에서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라”고 하셨으며 요일 4:20에서는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실천을 평가한다면 너무 미흡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실천에 많은 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들의 대인 관계나 성도간의 친교가 어떠합니까? 혹 연약한 성도가 소외감을 갖도록 무관심하지는 않았습니까? 허탄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누구를 경계하거나 대립하는 입장은 아닙니까? 모든 이를 다 사랑하고 이웃에게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이 어느 정도 확립될 때 믿음의 인정을 받게 되고(마 5:24)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39. 자기를 살피라 (고전 11:28-32) 목록으로


본문에 보시면 “자기를 살피라”는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28,31절) 교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의 만찬을 먹음으로서 큰 징계를 받아야 했고,(30절) 또 그들의 모임이 도리어 “해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7절) 성경에는 “스스로 속는 일이 많다”고 하셨습니다.(갈 6:3,7, 딤후 3:13, 약 1:22, 요일 1:8) 따라서 성도가 자기를 살피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옛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1. 자기를 왜 살펴야 합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를 옳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갈 6:3-4에 보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하셨고,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하셨으며 또 고전 10:12에서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선 줄로 생각하였다가 넘어졌습니다.(마 26:33,72) 이렇게 자기를 옳게 모르면 큰 낭패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2. 언제 자기를 살펴야 합니까? 날마다 살펴야 합니다. 또 분초마다 살펴야 합니다.(욥 7:18)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도가 날마다 모여 떡을 나누었다”(행 2:42,46)하셨으니 날마다 자기를 살폈어야 할 것이고, 또 히 3:13에서는 “매일 피차 권면하라” 하셨으며 요 13:10에서 “발을 씻으라” 하셨는데 발은 날마다 씻어야 깨끗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살피고 분초마다 살피며 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더더욱 자기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눅 14:28-35)

3. 무엇을 살펴야 할까요?

1)자기 믿음의 분량을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은 성경 지식과 계명 실천의 분량으로 자기가 아는 성경 지식, 또는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아는 것, 또 그 뜻에 따라 계명 실천의 분량이 상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계명 실천은 곧 사랑 실천과 같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분량으로 자기를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자신의 거룩한 생활의 분량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변화받은 분량,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분량,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분량, 성령 충만의 분량 등입니다.(롬 8:29, 12:2, 엡 5:18) 성도의 인격에서 인간 냄새와 세속 냄새가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와야 할 것입니다. 도덕성은 불신자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성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도덕성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퍽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인격을 닮고 깨끗한 생활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3)자기의 사명성의 분량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명성이란 주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하는 정도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① 갈 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씀 ② 마 16:24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말씀 ③ 마 10:37에서 “아비나 어미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께 합당치 않다”는 말씀 ④ 눅 5:11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는 말씀(눅 18:28) ⑤ 롬 14:7-8에서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며......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헌신성의 분량을 저울질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4)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대로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성도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롬 11:36, 고전 10:30) 문제는 매 순간 모든 언행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행하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에 비유하였을 뿐 아니라(요 3:29) “주님은 흥하셔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반드시 자신이 누릴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 중심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살필 것은 ① 믿음으로 결속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② 자신의 변화의 분량에서 그리고 ③ 사명성의 정도에서 ④ 영광을 위한 목적 방향에서 늘 자기를 살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27 과 신령한 은사 (고전 12:1-11, 28-31)목록으로


고전 12장은 “신령한 은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 본문에 해당되는 내용은 각종 신령한 은사에 대한 말씀이고, 12-27절은 각 은사들의 유기적 관계를 말씀한 내용입니다. 본문 1-3절은 “서론”이고, 4-11절, 28-31절은 “은사론”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1. 서론(1-3절)

1)1절에서 성도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①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소극적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것”을 받는 것이 받는 자의 소원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을 받는 자의 소원으로 이루는 것이라면 적극적 표현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11절) 성도들이 그런 은혜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란다”는 뜻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② 신령한 것이란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다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 특정한 성도에게 주시는 영적 기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 믿음, 속죄, 양자, 구원 등은 신령한 것이나 성도에게 보편적으로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이나 신령한 사역의 기능(설교, 기도, 전도 등)은 특별한 자에 한하여 주셨습니다. 본문의 “신령한 것”은 특수 은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절에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불신앙 때의 형편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는 신령한 것의 반대되는 상식 이하의 물건인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갔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이 “끄는 그대로 끌려간 것”은 우상주의자들의 행동을 보고 비판없이 따라 간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그런 상태를 정당한 줄 알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함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의 영으로 말한다”는 뜻은 성령의 감동으로 신앙고백하는 성도를 뜻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신앙고백하는 성도가 예수님을 “저주할 자”로 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잠시 그런 유혹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이나(마 26:74) 예수님은 인류에게 불행을 주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② 또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쉽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에는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의 백성이 되어 주님께 절대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성령의 감동없이 스스로 “예수님의 종이 되겠다”고 자기를 버릴 자가 있겠습니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땅에 다녀가신 예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은 결코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님의 감동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 3:3)

2. 은사론(4-11,28-31절)

1)4-6절에 보시면 “은사와 직임과 역사가 여러 가지라” 하셨고, 또 각종 은사를 주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성부, 성자, 성령님이신데 “이 세 분은 다 같다”하시므로 삼위 하나님의 공통성과 분담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은사는 특정인에게 주시는 영적 사역의 기술이라고 이미 말씀드렸고 ② 직임은 교회적 직임 또는 사역에 따른 책임으로 이해하셔야 하며 ③ 역사는 은사를 활용하는 방법과 능력입니다 이 세 가지 종별이 성도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2)그러나 이 은사를 주시고 또 역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 한 분(같음)입니다. ① 6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같다”한 것은 삼위일체 사역의 공통성을 말씀하시면서 성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일을 맡아 시행하신다”는 것이요 ② 5절에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다”하신 것은 삼위 하나님의 공통성 안에서 직임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뜻이요 ③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이 같다”하심도 역시 삼위의 공통성 안에서 은사를 나타내는 역할을 성령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3)7절에서는 은사주시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도가 은사 역할을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게 하고, 자기와 이웃에게는 유익이 되도록 행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다가 사람을 죽게 한다든지 기도를 힘쓴다고 하면서 시끄럽게 하여 이웃을 해롭게 한다면 그것은 유익하게 하는 은사가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모든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4)8-10절에서는 은사의 종류를 말씀하셨습니다. 은사의 종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을 분별, 각종 방언들을 통역하는 것이요, 또 28절에서는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있다 하셨고, 은사의 직임으로는 28-31절에서 사도, 선지자, 교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각종 은사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 ① 지혜의 말씀은 사리 분별과 적응에 알맞는 말씀이고 ② 지식의 말씀은 학문을 근거한 교수력이며 ③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고백하는 신앙)이 아닌 역사하는 믿음이요(갈 5:6) ④ 병 고침의 은사는 기도를 통한 응답으로 병을 고침받게 하는 것이요 ⑤ 능력 행함은 모세가 지팡이로 초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은 능력이요 ⑥ 예언은 계시를 받거나 계시를 설명하는 것이요 ⑦ 영들을 분별함은 성령님의 역사 아닌 것을 판단하는 지혜요 ⑧ 방언은 외국어 또는 신령한 말을 하는 것이요 ⑨ 서로 돕는 것은 봉사적 역할이요 ⑩ 다스리는 것은 통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 종류에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던 사도시대(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성경으로 기독교의 기초가 세워진 사도 후 시대에 나타나는 은사 종류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병 고침의 은사가 사도 시대처럼 역사하시지 않는 점(행 3:6, 딤후 4:20) 또 능력을 행함이 모세에게처럼 역사해 주시지 않는 점, 예언의 은사를 새롭게 주시지 않는 점, 방언의 역사도 그치게 된 점(고전 13:8),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따로 없다는 것 등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확실성을 능력으로 증명하는 일이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이요(히 2:4) 또 한 가지는 가장 밝은 계시로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방언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전 13:8-10) 따라서 이 시대에 주시는 은사는 큰 일을 감당하는 믿음, 기도의 응답으로 병 고침 받는 은사(약 5:15), 성경을 밝히 증거하는 지혜와 지식, 봉사와 다스림 등입니다. 영을 분변하는 은사도 성경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따로 있지 않습니다.

5)28-31절에서는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직분과 그 권위의 순서를 말씀하셨는데 순서대로 열거하면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침 등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사도”는 신약 시대에 기독교의 시초 사역을 위한 고유 직임이요(엡 2:20), 선지자는 구약, 신약 시대에 다 사역한 직임이며(행 9:10, 21:10) 교사는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성직을 의미하므로 목사와 강도사, 교사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 28절 하반에 나타난 은사들은 앞 부분에서 다 설명드렸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직은 기독교를 반포하고 기독교 생활의 모범을 보이며 예수님을 대리하여 복을 선포하는 권위(고후 13:13)로 볼 때 최고의 직임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직임으로 두 번째이며(그러나 사도, 선지자는 계시사역이 끝남과 동시에 끝난 직임임) 세 번째가 교사직인데 이는 계시된 성경 말씀을 먼저 배워 가르치는 직임으로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 으뜸가는 직분입니다. 그 다음은 역사하는 일, 다스리는 일, 봉사하는 일 등인데 이런 것들은 다 진리 사역 다음에 해당하는 직분입니다. 마땅히 다스리는 직보다 가르치는 직임이 귀한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11절에서는 이 모든 직임과 은사를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주시는가?를 말씀하셨는데 ① 주시는 분은 “같은 한 성령님”이라 하시므로 성부, 성자, 성령님이 주시되 ②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고 ③ 각 사람에게(따로 따로) 나누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받는 자와 받는 분량과 종류를 다 다르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모든 은사가 받는 자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사도 수 없고, 다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으며 다 같은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29-30절)

7)31절에서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셨으니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요, “제일 좋은 길을 보이심”은 13장에서 “사랑 실천의 방법”을 계시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은사 중에 사랑의 은사가 최고인 줄 알면서도 이것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 실천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자기에게 있는 은사와 없는 은사를 확실히 깨닫고 은사대로 충성하되 하나님과 모든 이에게 유익하도록 역사하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 28 과 은사의 유기적 관계 (고전 12:12-27)목록으로


이 본문 말씀은 “은사의 유기적 관계”를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은사가 여러 가지이지만 한 분 하나님(예수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신 것인 만큼 특정 은사를 자랑할 것도 아니며 또 어떤 은사를 과소 평가하여도 안될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빛과 공기와 물이 있어야 하며 또 의식주도 있어야 하고, 이웃도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생존에 다 필요한 만큼 하나도 소외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은사의 종류가 많으나 다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1. 12절에서 “은사의 주”인 예수님과 각종 은사를 몸과 지체로 비유하셨습니다. 즉 지체가 여럿 있으나 몸이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은사가 주님께 귀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선민), 헬라인(이방인), 종, 자유자 등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라도 다 한 성령님 안에서 믿음을 갖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한 몸이 된 것과 같고, 다 한 성령(신령한 양식)을 영적 양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다 한 성령을 마신다”는 뜻은 성도가 공급받아야 할 신령한 양식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요 4:14)

2. 14-16절은 각 은사를 나타내는 성도가 주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음은 그 은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의 기둥입니다. 이 사실을 14,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가지가 기둥에 연합된 것처럼 발이나 손이나 귀나 눈도 몸에 붙어 있는 만큼 주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17-21절은 각종 은사 역할에 대하여 서로 존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하신 말씀은 특종 은사를 나타내는 성도가 자기의 은사만 귀한 듯이 자랑하거나 다른 이의 은사를 무시할 수 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21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에 알맞도록 은사를 주신 분이므로(18절) 사람의 생각을 따라 자기의 은사만 귀하다고 한다면 몸된 지체도 없어져야 할 것이니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19절)

4. 22절에서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를 들어서 눈은 팔보다 약한 지체이지만 특별히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보는 것이 팔의 역할보다 귀하다는 것이요, 23절에서 “지체 중에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예를 들면 발이나 손은 눈이나 입에 비할 때 덜 귀함)을 더 귀한 것들로 입혀준다”하심은 눈이나 입은 얼굴에 있기 때문에 가리우지 않지만 손이나 발은 추울 때 가리워주니 눈보다 천한 만큼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요,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는다”는 뜻은 사람이 국소(음부)를 부끄럽게 여겨 감추지만 그것이 생산(아름다운 것)의 도구가 됨을 뜻합니다. 또 24절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가 요구할 것이 없음”은 사람의 얼굴이 다른 지체보다 아름다운 만큼 가리우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하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 하셔서(24절) 신령한 은사에도 서로 고르게 하신 것과 필요성이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5. 25-27절에서는 은사의 상부상조를 신체적 상부상조로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한 몸이 모든 지체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영광도 함께 누리는 것처럼 성도의 은사와 교회에 대한 봉사도 분쟁없이(25절) 서로 상부상조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기 때문입니다.(27절) 다시 말하면 성도, 교회, 은사 활동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령님의 사역인 만큼 그런 사역을 하면서 서로 존경하고 사모하며 격려할 수는 있어도 멸시하거나 갈등할 문제가 아님을 확실하게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40. 은사를 선용하라 (고전 12:4-11) 목록으로


지금 읽은 말씀에 보시면

1. 은사의 출처와 종류와 목적과 나누어주시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은사의 출처는 한 성령님(삼위의 하나님)이 주시고

2)은사의 종류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 믿음, 또 큰 능력, 병 고치는 능력, 예언, 방언, 영 분별”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외에도 많은 은사의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은사 중 “믿음”이란 구원받는 신앙 이상으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는 큰 믿음(마 15:18)을 의미할 것이고, 능력이란 어려운 일, 큰 일 등을 감당하는 힘을 뜻할 것입니다.

3)그리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7절 말씀 따라 “유익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이요”

4)은사 주시는 방도는 성령님이 그 뜻대로 각 사람(원하시는 자)에게 나누어주시므로 사람이 자기의 소원 따라 은사를 받거나 모든 좋은 은사를 자기의 소원 따라 받을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5)한 가지 덧붙여서 생각할 것은 은사와 은혜의 다른 점입니다. ① 은혜는 모든 좋은 선물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성도가 보편적으로 받는 것들로서 만물, 일반 은총, 구원, 그리스도 등 큰 은혜가 있으며 ② 은사는 은혜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인에게 특정한 목적 성취를 위하여 특별히 주시는 신앙적 재능이나 직분이나 축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 25:14-23의 달란트를 주신 것은 재능 따라 주신 것이므로 은사에 속하고, 눅 19:13에서 “열 사람에게 공히 한 므나씩 주신 것”은 일반적으로 같이 주신 것이므로 보편적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6)설령 신령한 기술이 아니라도 그것이 성령님의 직접 사역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에 쓰여졌다면 그것도 은사에 속할 것인데 “브살엘”과 “오홀리압”이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 공교한 기술을 갖고 성막 기구를 만든 것과 같은 것입니다.(출 36:1)

2. 하나님이 이 은사를 왜 아무에게나 다 주시지 않는가?할 때

1)사람이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 뜻에 복종케 하시기 위함이요

2)다 받으면 교만해지니까 받은 것으로 감사하며 겸손케 하시기 위함이요

3)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도 존중하면서 전문성을 살려서 잘 노력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전문 분야별로 일하게 하여 더 좋은 집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우리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선용할까?하는 것입니다.

1)은사의 축복을 성경적으로 점검하여 모순이 없음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초자연적 역사(병 고침, 예언 등)를 행할 때에는 그 역사가 성령님의 역사인지를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① 은사 중에는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있다 하셨고,(고전 12:10) ② 또 요1 4:1에서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당시에 계시의 역사가 있었고, 많은 거짓 선지자(다른 영의 역사자란 뜻)가 나왔기 때문에 주신 경고였습니다. 따라서 말세인 현 시대에도 거짓 영의 유혹은 항상 있는 것이니까 영의 역사라 하여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고후 11:14, 계 13:13) 그래서 그런 것을 시험하여 확실하게 밝히라고 하신 것입니다.

2)어떻게 밝히는가?할 때 ① 기본적인 방법이 성경대로 시행되느냐?하는 점과(요 10:9-10) ②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명예 중심으로 시행되느냐?하는 점과 ③ 그 결과가 유익을 주느냐?(고전 12:7)하는 것으로 판단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3)모든 은사의 활동이 표준성 있고, 유익되게 활용되면 영광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외형상으로 유익을 준다 하여도 영광됨이 아닐 것입니다.

4. 항상 은혜받은 성도로써의 본분을 다하는 중에서 특수한 은사가 시행되어져야 하는 점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은사의 특수한 기술을 내세우면서 성도의 기본 생활조차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처럼 감당치 못할 자에게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다시 말하면 자기의 은사만 자랑하며 교만한다든지 다른 이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과소 평가하든지 하면 안되고(약 4:6) 규모나 질서를 무시해도 안 되며(살후 3:6, 고전 14:44) 또 자신이 약간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하여 인간을 초월한 사람처럼 교만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딤전 3:16에서 “은혜의 최고 방편인 성경”은 ① 성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고 ② 덕을 세우며 ③ 모든 이를 유익하게 하며 ④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2)끝으로 두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①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직분, 사명의 소질, 예를 들면 찬송의 은사, 기도의 은사, 봉사의 은사, 헌신, 전도의 은사, 교육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의 은사, 행정의 은사 등도 있으니까 꼭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은사인 줄 아셔서 선용하시기를 바라고 ② 나는 아무 은사도 받은 것 없다고 느끼는 분들도 평범한 중에서 봉사하는 것이 자기가 받은 은사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역자가 평범한 성도로부터 사랑과 격려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가 평범한 성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에게도 덕을 세우며 봉사하며 격려하며 합력하는 은사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성도님들이 받은 은사를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하여 선용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1. 몸과 지체 (고전 12:12-27) 목록으로


본문 말씀은 사람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으나 그것이 다 한 몸이고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위하여 유기적 관계를 갖고 서로 협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종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몸과 지체의 활동처럼 상부상조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지체란 몸에 붙은 팔과 다리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의 혈육이나 이웃, 또는 모든 성도들이 다 지체인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도가 교회라는 기관을 통하여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아셔서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뉴스가 있었는가?하면 월남에 파병 갔던 한국 병사가 그 곳의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본국에 귀국하면서 “반드시 그 동거녀와 자녀를 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월남이 망하였고, 월남에 남은 가족이 구사 일생으로 한국에 와서 남편과 아버지를 찾는데도 나타나지를 않아서 큰 비극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었고, 그렇게 생산된 혼혈아가 2,3만 명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이 유기적 관계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음이 비극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연계는 유기적 관계를 잘 지킵니다. 벌이 꿀을 먹고 꽃가루를 옮겨 주고, 나무가 흙의 진액으로 살면서 자기의 잎을 떨어뜨려 흙을 비옥하게 해 주고, 여기에서 삼림이 울창해지면 인간에게 좋은 경치를 줄 뿐 아니라 홍수를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부상조의 책임과 유기적 관계의 책임을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또는 은사의 사역으로 잘 이행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사랑하라 인내하라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상이 바로 이웃에 있는 것을 찾아야 하고, 누가 사랑의 대상이며 인내의 대상이며 봉사의 대상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여러 종류의 성도와 직분 은사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지체가 다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모든 성도와 직분도 역시 교회에 붙어 있고, 나가서는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팔, 다리가 몸에 붙어 있고, 그 몸이 자기의 몸이기 때문에 “몸만 내 것이지 팔, 다리는 내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한국 민족만 앉아 계시지만 서양이나 구라파 지역에는 각 나라 족속들이 함께 삽니다. 이와 같이 어느 백성이건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종과 계급에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성도의 지체도 성격이나 지식이나 순결면에서 생활방도가 달라도 다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지체이기 때문에 내가 팔이면 저는 다리이고, 내가 입이면 저는 눈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많은 부품이 있듯이 육체에도 많은 지체가 있고, 그와 같이 교회 안의 성도들도 가지 각색의 특수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여 내게 없거나 나와 맞지 않는 것이라도 역시 유기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화평함을 이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모든 지체가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처럼 교회와 성도도 서로 상부상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러시아와 무역을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러시아는 지하자원이 많고, 생활 필수품이 적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것이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 개인 개인 간에도 그러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와 교회 간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은사로 주신 소질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남이 하는 것을 과소 평가하려 하지 마시고, 남이 잘 하는 것을 칭찬하여 그 잘 하는 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도록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평소에 말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과 심방을 하다 보면 덕이 안 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단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고 임종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소망 주는 말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그 성도는 가난한 사람이나 임종자가 있을 때 같이 심방하면 좋을 것입니다. 어느 지체도 “나는 몸에 붙지 않았다 할 수 없고, 어느 지체도 나만 필요하고 너는 필요없다”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고르게 분배하여 주셨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성도간에 가장 힘쓰셔야 할 일은 연합의 유대 관계를 든든히 하는 것입니다.

1)육신의 모든 지체들은 서로 자기 책임의 일을 다합니다. “내가 제일이다”하지 않고 자기의 책임을 다합니다. 눈은 보는 것으로, 귀는 듣는 것으로, 코는 숨쉬는 것으로, 입은 먹고 말하는 것으로, 발은 거동하는 것으로, 손은 일하는 것으로, 몸 속의 내장도 다 자기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저희들도 자기의 사명과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남이야 어찌하든지 자기 책임만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2)그러다가 어떤 지체에 고장이 생기면 다른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왼발에 가시가 찔리면 오른발이 고난을 나누어 짊어지다가 또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같이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눈이 침침하여 모든 지체가 더듬거렸는데 눈이 밝아지니까 모든 지체의 활동이 다 민첩해져서 영광을 얻고 또 위장이 좋아지면 소화가 잘 됨과 동시에 모든 지체가 다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는 몸과 지체의 기능처럼 상호 유기적 관계에 있습니다. ② 몸과 지체가 하나요, 각 지체가 서로 아끼고 협조하는 것처럼 주님과 교회가 그렇고 성도와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가 그렇다는 사실을 아셔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성도 사랑하는 일에 사명을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엡 1:23, 골 1:18, 고전 6:15)

 

 

설교보충 42.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 (고전 12:31) 목록으로


본문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것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더욱 큰 은혜는 사랑 실천의 은혜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 실천이 쉽게 되지 않을 만큼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이유는 자기 변화가 부족하고 또 희생이 따라야 하며 상당한 환경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더욱 큰 은혜가 아닌 현실적 기복주의에 얽매여서 육신의 복을 많이 추구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교정하여 신령한 복과 더 큰 은사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고전 15:50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갈 5:16-17) 육은 영에 비하여 무익한 것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육이 무익한 이유는 ① 육적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며 ② 유한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영이 육보다 귀한 것은 ① 영이 믿음의 요소가 되며 ② 영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먼저 더욱 큰 은혜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신령한 것과 신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우열을 가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하나님을 풍성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신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신령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령한 것입니다. 거듭난 영혼과 성경도 신령하고 천국도 신령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신령한 것은 다 하나님과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 하셨지요? 여기의 “그 나라와 그 의”가 신령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먼저 구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령하지 않은 것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 건강, 안일에 대한 은혜보다 믿음, 말씀, 기도, 전도, 교회 생활 등의 은혜를 더 귀히 아시고, 더 사모하는 생활에 들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2.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이 있다”할 때에 어느 것을 더 귀히 여기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현세는 잠깐이고, 내세는 영원하며 현세에서 못 누린 것이 내세에서 갚음이 되는 만큼 내세적 축복이 더 귀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관제의 제물처럼 부음이 되어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하시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하시므로 내세의 축복과 상급을 기대하셨고(딤후 4:6), 고전 15:19에서는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성도가 가장 불쌍한 자라” 하셨고, 또 빌 3:13에서는 “오직 앞에 있는 것 하늘의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좇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현세복을 많이 누리는 것이 좋다”고 강조한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눅 16:19)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너는 거기서 고민을 받고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으니 그것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선민의 조상이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구원을 받은 것은 현세적 고난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하늘의 상급이 더한 것은 분명히 고난의 대가란 것을 아셔야 할 것이요, 따라서 내세적 영광이 더 큰 은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특별은총보다 일반은총이 더 귀한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의 은사로 받는 평안보다 일반은총으로 받는 은혜 생활이 더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은사”는 나타나는 확률이 적습니다. 예를 들면 생일 먹자고 3일 굶을 수 없고, 특식보다는 매일 먹는 양식이 더 요긴한 것처럼 일반은총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이 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기적으로 살구가 열린 것은 1번 뿐이었고, 만나로 양식을 대신한 것도 그 시대뿐이었는데 만일 살구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마른 막대기를 놓고 기도를 한다거나 농사를 폐하고 만나 쏟아지기를 기도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농사를 잘 지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은총을 힘입어 고난을 면하고 평강에 들어가는 것보다 일반은총 따라 연단을 받고 극복하는 신앙이 영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단 3:17-18)

4. 봉사적 생활보다 말씀받는 생활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생활이 헌금 잘 하고 대접 잘 하는 것이라면 말씀받는 생활은 예배 참석 잘 하고, 설교 잘 듣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귀하며 주님이 기쁘게 보실 것입니까? 요 10:42에서 “마르다는 대접하기를 힘썼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일을 힘썼는데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듣는 마리아가 접대하는 마르다보다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호 6:6에서도 “나는 제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하시므로 분명히 물질적 봉사보다는 예배 참석이 더 귀한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것, 내세적인 것, 일반은총, 말씀 신앙이 육신적이고 현세적이며 특별섭리나 물질적 봉사보다 더 귀한 은혜임을 아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설교보충 43. VIP 신앙 (고전 12: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VIP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은 “남보다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세상은 무엇이나 특출하지 않으면 사람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도 특출해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십니다. 성도가 평범한 은사, 평범한 생활에 머물지 않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면 더 많은 은혜를 받아서 특출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시 107:9) 물건도 유명 제품이라야만 알아주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생활도 특출하게 잘 믿는 무엇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영광을 더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VIP 신앙 가지신 분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포로를 교환할 때 VIP 한 사람과 일반 병사 수 백 명과 바꾸는 경우가 있지요. 이것은 한 사람의 비중이 수 백 명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1. 따라서 저희들은 신앙의 가치를 사람 수에 따라 계산하지 마시고, VIP 신앙에 따라 계산하는 척도를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앙인의 숫자보다 신앙인의 신앙적 비중을 더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자녀를 많이 가지려고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나나 둘만 낳아 잘 키우자”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잘난 자식 하나나 둘이면 족하다”는 뜻이지요. 하나님도 좋은 믿음 가진 성도를 구하십니다.(마 8:10, 고전 10:5)

1)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지 않으시고 적은 수를 선택하여 좁은 길로 가게 하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생명의 수를 좋아하신다면 구원받을 대상을 더 많게 선택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을 멸망의 대상보다 적게 선택하신 것은 바로 수량보다 신앙의 질을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과일 나무도 열매가 많으면 질이 떨어지고 학교의 학급도 수가 많으면 질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은 신앙의 성도를 확보하시기 위하여 적게 선택하신 줄로 아는 것입니다.

2)또 성경 고전 10:5에 보시면 “하나님이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다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다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광야에서 신령한 식물(만나)과 신령한 음료(반석의 물)를 먹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불평했을 때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이시고 아주 적은 수만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애굽에서 나온 선민은 약 250만(장정만 60만이므로)명으로 추산하는데 그들 가운데서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은 여호수아, 갈렙, 모세, 아론, 미리암을 들 수 있고, 광야에서 징계 아닌 상태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구원받은 수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백만분의 일” 정도를 구원하신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3)또 성경에 나타난 초기 구원의 역사를 살피면 아담, 하와는 타락했었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3:20,21, 5:1) 그 다음에 아벨과 셋이 있고, 노아 600세 까지 약 150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는 평균 나이 843세(12대 평균)를 살았으니까 그 인종의 번성은 천문학적인 수로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노아의 8식구만 구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마 3:9)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특출하게 잘 믿는 노아같은 사람을 좋아하시기 때문이요, 불확실한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특출한 신앙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비중 있게 쓰셨습니까? ① 아브라함 때에 “10명의 의인만 있으면 소돔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8:32) ② 기드온의 300명 군사로 32000명을 대신한 일이 있었으며(삿 7:6) ③ 모세 한 사람의 기도가 이스라엘이 받을 큰 진노를 면하게 한 사실이 있었고(민 21:7,8) ④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아 주셨다” 하셨고(삼상 7:13) ⑤ 엘리사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하셨으며(왕하 2:12) ⑥ 요나 한 사람의 역할로 앗수르 도성이 멸망을 면하였고(욘 3:3,10) ⑦ 바울 사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배에 탄 276명을 함께 살리셨으며(행 27:37) ⑧ 눅 12:32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모두 잘 믿는 소수의 성도들에게 구원과 축복을 주시고 그들을 특별하게 쓰시며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3. 그래서 이 시간에는 특수하게 잘 믿고 칭찬받은 분들 몇 사람을 성경에서 뽑아서 소개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칭찬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7대손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채 승천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최고 고령인 969세를 장수하였습니다.(창 5:27)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은 참으로 특출한 것입니다. 300년 동안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동행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았다는 뜻입니다. 내 뜻에 하나님을 따라오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까이 따라갔다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주일을 지키시는데 내가 주일날 잔치에 가면 동행이 안되겠지요.

2)에녹의 증손 아담의 10대손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믿고 120년 동안 산 위에 방주를 지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약속을 믿고 순종하려면 적어도 120년 쯤 길게 잡고 순종하면 특출한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500년간 번성한 인류가 다 죽을 때 8명 가족과 함께 제 2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3)이삭을 제물로 드린 아브라함의 특출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손입니다. 후사의 약속을 받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로 드리는 순종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순종, 절대 헌신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특출한 신앙을 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시고, 선민의 조상됨과 구원의 언약을 주셨던 것입니다.

4)또 저희들은 그 시대의 사람 욥의 신앙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욥은 까닭없이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도 나중에 자기의 무지를 회개했습니다. 까닭없이 고난을 당해도 원망, 불평하지 않는 신앙은 특출한 신앙입니다.

5)하박국 선지자의 신앙입니다. 그는 가난해도 하나님을 찬송한 사람입니다. “무화과, 포도나무,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식물이 없고, 양이 없고,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하였으니 이 얼마나 값진 신앙입니까?

6)다니엘의 신앙입니다. 나라 잃고, 자유 잃고, 민족 잃고, 가족 잃고, 신앙의 핍박 속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며 핍박을 견디는 신앙은 참으로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풀무불 속에서 건짐을 받고 더 귀한 재상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7)또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특출한 신앙인은 세례요한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 그는 향락과 명예와 따르는 제자들과 생명까지 다 버리고 주님만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 제일 큰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8)또 예수님 당시의 백부장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사람을 보냈지요. 이 사람은 겸손한 특징과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과 예수님을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말씀 신앙”을 칭찬하여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을 다 다녔어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말씀의 능력을 믿고 복종하며 의지하는 신앙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9)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유 한 옥합을 통째 깨뜨려 드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과 헌신을 칭찬하여 이르시기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든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나타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6:13)

10)그리고 어떤 가나안 여인은 딸의 간질병을 고치러 와서 세 차례 거절을 받고도 끝내 간청하여 허락을 받고 “큰 믿음”이란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으니(마 15:28) 이런 특출한 믿음들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일반 성도의 평범한 신앙을 합한 영광보다 더 많은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수가 증가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의 수만큼 증가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도의 특출한 믿음은 일당 백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을 생각하셔서 꼭 믿음의 발전을 이룩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범자들처럼 다 성자가 되시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한 마디로 주일을 거르면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은 일에서부터 노력과 성실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성경과 교회를 사랑하셔서 아주 견고하고 적응력이 강하며 봉사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 29 과 사랑의 중요성과 실천 방도 (고전 13:1-7, 13)목록으로


고전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3절, 8절, 13절은 사랑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4-7절은 “사랑의 실천 방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9-12절 말씀은 “온전한 것을 추구함”이란 제목으로 다음 과목에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1-3,8,13절)

1)1-3절에서는 사랑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꼭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 사랑 자체로도 인류에게 유익을 주지만 만일 성도에게 사랑이 없다면 ① 사람의 방언이나 천사의 말을 하여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를 잘 하는 실력이고, 천사의 말이란 의사 표현의 지혜와 권위를 뜻합니다. 실력과 구변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을 때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은 의미없는 소리, 즉 무익하다는 뜻이요, 더 나가서는 사랑없는 지식과 권위는 시끄러움을 줄 뿐이란 것입니다. ② “예언하는 능력과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 하셨으니 여기의 예언 능력이란 하나님의 비밀과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아는 것이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란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큰 일을 이루어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언은 영력에 속하고 산을 옮김은 대사 성취의 힘인데 이런 것들이 있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역시 아무 것도 아닌 즉 사랑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예언이나 능력을 주시는 목적이 사랑 실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계명의 강령이 사랑에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으나 열매가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외식적 구제가 있어도 실제적 사랑이 없으면 그 당사자(내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함”은 외형적 자선이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줌”은 자기의 최대 희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선과 희생이 있어도 사랑이 없이 시행한 것이면 결국 이기적 목적으로 봉사와 희생의 밑천을 드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밑천을 지불한 자에게 아무 유익(상급)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들이 많으나 사랑이 없는 것은 마치 돈은 많으나 양식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 중요하고 요긴한 것임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2)8절에서 “사랑은 영원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또 “항상 있을 것이라”(13절)하신 것은 금생과 내생에까지 사랑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지만 사랑은 영원한 천국까지 변함이 없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언이 폐한다”는 뜻은 성경이 완성되므로 폐한다는 뜻이요,(10절, 성경 66권이 완성되면 더 이상의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는 뜻, 유 3) “방언이 그친다” 함은 지식인이 많아지고 성경 계시가 밝아짐에 따라 방언이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요, “지식이 폐함”은 그 지식이 현세에서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현세와 내세에서 영원히 필요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3)13절에서 또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 소망보다도 사랑이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역사하며 천국에서도 신뢰하는 믿음을 계속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효력으로 구원이 성취되면 믿음의 용도가 구원을 성취한 만큼 축소됩니다. 그리고 소망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을 성취한 만큼 상당 부분 축소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서 조금도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풍성한 사랑으로 성취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사랑이 믿음, 소망보다 귀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받는 상급보다 봉사와 희생이 따르는 사랑으로 받는 상급이 더 많을 것이므로 사랑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2. 사랑의 실천 방도에 대하여(8-12절) 사랑은 이웃을 그 대상으로 하며 이웃은 여러 종류의 대상이 있으나 제외되는 대상은 없습니다. 원수도 사랑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5:44)

1)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오래 참아주는 것이고(4절)

2)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온유한 자세를 취해 주는 것이며(4절)

3)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투기하지 않는 것이며(4절)

4)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며(4절)

5)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며(4절)

6)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며(5절)

7)사랑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5절)

8)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성내지 않는 것이며(5절)

9)사랑은 이웃을 상대로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5절)

10)사랑은 이웃과 더불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며(6절)

11)사랑은 이웃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6절)

12)사랑은 모든 이를 상대로 참아주는 것이며(7절)

13)사랑은 모든 이를 상대로 믿어주는 것이며(7절)

14)사랑은 모든 이를 상대로 희망을 가져주는 것이며(7절)

15)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함께 지고 견뎌 주는 것(9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15가지 사랑을 실천한다면 믿음의 큰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제 30 과 온전한 것을 추구함 (고전 13:9-12)목록으로


본문에는 온전한 것을 추구함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안다”는 말씀(9절), “온전한 것이 온다”는 말씀(10절), “장성한 자가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11절)는 말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온전히 알 것이라”(12절)는 말씀 등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을 추구함”이란 제목을 정하고 순서대로 상고하겠습니다.

1. 9절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나 그 시대의 사도들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부분적이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계시와 교훈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 27권도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된 후라 할지라도 한정된 계시가 예수님과 천국을 다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만 가르쳤다(예언)는 뜻입니다.

2. 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온전한 것”은 계시로는 완성된 성경이고, 구원상으로는 천국 입국입니다. 계시가 완성되면 부분적 예언이나 방언은 필요치 않게 되며 성도가 구원을 완성받아 천국에 가면 천국과 예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도 폐하여 질 것인데 그 이유는 희미한 계시가 밝은 계시로 정복당하기 때문입니다.

3. 11절에서는 바울사도께서 자신의 신앙이 성숙하여지는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바울이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 어린 아이 같았지만 장성한 후에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인격의 성장을 말씀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성숙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요

4. 12절에서는 분량상으로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 천국에서 완성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하심은 이 세상에서 성경 계시로 아는 지식이 일부분이기 때문에(요 21:25)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거울은 문명의 미숙으로 맑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세에서 모든 신령한 지식을 알되 천국에 가서 밝히 보고 아는 것만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도 온전히 알 것이라”고 하셨으니 주님은 어디서나 항상 우리를 온전히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으로만 주님을 압니다. 이것은 주님을 직접 보고 아는 것만큼 밝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천국에서 주님을 뵐 때)는 성도들도 천국에서 주님을 온전히 보고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는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힘쓰고 또 구원이 완성될 때에 온전히 알게 될 것을 사모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44. 사랑의 가치 (고전 13:1-3, 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랑의 가치”를 공부하시고, 사랑 실천의 승리자 되기를 기도하려고 합니다. 성도의 생활 중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사랑이고, 가장 상급이 많은 것도 사랑입니다.(마 25:44-46)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지만 사랑실천을 옳게 못하기 때문에 사랑의 가치를 더 잘 깨달으시고 실천을 더 잘 할 수 있기 위하여 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1. 사랑은 여러 가지 은사 중에 가장 값진 은사입니다. 우선 고전 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는데 고전 13장에서 그 더욱 큰 은사가 “사랑”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① “사랑의 은사”가 제일 값진 것인 줄로 아셔야 하겠고 ② 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그 보다 못한 은사의 입장에서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은사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사도, 선지자,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을 받았어도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말 잘하며 설교 잘하고 천사같은 느낌을 주어도 아무 것도 아니요, 병 고치는 능력과 방언, 통역을 하고 심지어는 산을 옮기는 듯한 큰 일을 행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역시 아무 것도 아니요,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주는 봉사를 할지라도 사랑하는 목적으로 하지 않고 대가를 겨냥하거나 명예적 타산을 위하여 한다면 역시 아무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언이나 설교로 천사처럼 말을 잘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 소리처럼 시끄럽고 어지러울 뿐이요, 예언으로 깊은 비밀을 말하고 능력으로 남이 못하는 큰 일을 행하며 자기의 생명을 불살라 희생으로 내어주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니 하나님께 영광되지도 않거니와 자기의 축복과 상급에도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사를 고전 14:1 말씀처럼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하고 목적과 방법과 결과도 사랑에 부합되도록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다른 은사를 은혜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3.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요, 성령님이 맺으시는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꽃집에 가면 향기부터 맡게 됩니다. 꽃집의 매력은 꽃의 모양과 향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 사는 자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며 본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본질이 같으시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하신 것처럼 성령님이 제일 먼저 맺으시는 열매가 사랑입니다.(갈 5:22)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7,8,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고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다”(요 3:16, 요일 4:11)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4. 사랑은 계명의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1)계명의 으뜸이란 여러 계명 중에 제일 큰 계명이며 모든 계명을 포괄하는 계명이란 뜻입니다. 성수 주일 계명, 우상 숭배의 계명, 그 이외의 도덕적인 계명들이 다 중하지만 사랑의 계명 속에 모두 포괄되는 것입니다. 마 22:34-40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니잇가?”했을 때에 “첫째는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라 이것이 온 율법과 지자의 강령이라” 하셨고, 막 12:31에서도 “사랑”,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2)사랑이 이렇게 계명의 으뜸이 되다 보니까 사랑이 심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을 잘 하면 구원도 받고, 상급도 받으나 사랑을 못하면 구원도 못 받고, 징벌만 받는 것입니다. 계 20:13에 보시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한다”고 하셨지요. 이 행위도 사랑이 계명의 으뜸이니까 사랑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일 4:7에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하셨고, 요일 3:10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으뜸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사랑을 심판의 표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 25:34-46에 보시면 “주님이 양과 염소를 갈라놓으시고 먼저 양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웠으며 헐벗었을 때에 입혔고 나그네 되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으니...(즉 사랑을 실천했으니)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다 창세로 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의인들이 말하기를 “언제 주님이 그런 형편으로 오셨으며 우리가 돌아본 일이 있었습니까?”하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염소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하시므로 사랑 못한 자들에게 저주와 형벌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항의하기를 “언제 주님이 그런 형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도움을 청하신 일이 있습니까?”하였을 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하셨으니 여기에서 저희들은 “사랑이 심판의 표준”이 되고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일이 마땅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사랑은 믿음, 소망보다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2:31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하셨으니 왜 사랑이 믿음, 소망을 능가할까요? 연구를 좀 해 보셨는지요. 50원을 들고 나가면 전화 밖에는 못 겁니다. 500원을 들고 나가면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5000원을 들고 나가면 전화도 버스도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셋 중 어느 것이 큽니까?

1)여러분이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 점포에 가시면 무엇을 주시는지 압니까? 구원을 줍니다. 그리고 덤으로 하나 더 주시는 것이 있는데 “계명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 더 줍니다. 실천의 능력은 믿음에서 나옵니다.(롬 1:5)

2)소망을 갖고 가시면 무엇을 받겠습니까? 소망은 기다림을 주는 것입니다. 바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3)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을 갖고 가면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 ①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하나님 사랑”으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 7: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춘 여인에게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으니 이는 저의 사랑이 많음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축복의 대가를 현세에서도 받습니다. 시 91:14에서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하셨습니다. 성도가 사랑의 은사를 실천하면 그 사랑을 준 대상이 즉시 그에게 보답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은혜를 보답하며 짐승을 사랑하면 그 짐승이 보답해 주고, 나무를 사랑하면 그 나무가 그에게 보답을 해 줍니다. 그렇지요? ③ 사랑이 심판의 표준이니까 사랑을 많이 한 자는 그 행위에 따라서 내세의 상급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돈을 많이 들고 나간 사람과 같아서 구원도 받고, 현실 축복도 받으며 내세의 상급도 받기 때문에 그만 못한 믿음, 소망보다 당연히 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또 사랑은 “전도의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귀중성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성을 사랑에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45. 사랑과 실천 (고전 13:4-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랑과 실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 주위에는 사랑의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의 본분으로 보나 시대의 요청으로 보나 전도의 유익을 위하여서도 사랑 실천은 항상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마 22:35에 보시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함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가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므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첫째로, 사람 사랑하는 일을 둘째 계명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 실천의 순서에 있어서는 보이는 대상을 먼저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다음에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요 4:20을 보시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미워함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거짓이요 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므로 사랑의 실천 순서는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데서 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함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는 서로 나눌 수 없는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인륜의 계명을 어겨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1.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1)어떤 이는 사랑의 모양을 표현할 때 “둥글다”고도 하고, “심장 모양처럼 생긴 것이라”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그 색이 “붉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사랑의 설명이 다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2)한문의 사랑 “애(愛)”자는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으로 덮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문자”로 되어 있고, 국문학적인 설명으로는 “어떤 대상을 귀히 여겨서 정성과 힘을 다해 주는 마음이라”하였으며 철학적인 설명으로는 “정신생활의 기본 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저희들보고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상식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3)요일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심으로써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아셔야 하고, 또 그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출현된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만물과 생명과 믿음의 주 이신데 그것을 인간에게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일 4:11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다”하시므로 가장 큰 사랑을 모범으로 시행하신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모범을 어떻게 실천하셨습니까? ① 하나님 뜻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고 ② 겸손하셨으며 ③ 고난을 당하셨고 ④ 생명까지 희생하셨으니 이 “순종과 겸손과 고난과 희생”이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가 된 것입니다.

4)예수님의 이런 숭고한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천래적 사랑과 여러 가지 사랑을 120번 이상 “아가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인간적인 사랑을 “필레오”(마 10:37, 요 5:20, 약 4:4, 벗됨)로고 표현하였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부부간의 애정적인 사랑을 “에로스”라 하였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할 때에 “에로스”를 쓰지 않고 “아가페”를 썼으며 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할 때에 꼭 “아가페”를 써야 할 것 같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필레오”를 쓰기도 했기 때문에(요 5:20, 11:36) 원문상으로 펴현되는 사랑의 구별은 전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닌 줄로 아셔야 합니다. 다만 아가페적 사랑은 “그 사랑의 근거와 모범을 하나님께 두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가 사랑을 해도 아가페적 사랑으로 할 때 더 은혜로울 것입니다.

2. 고린도교회에 말씀하신 사랑실천의 방도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저희들은 방금 전에 예수님의 사랑 실천 모범에서 ① 하나님 뜻에 의한 절대 순종 ② 최고의 겸손 ③ 고난의 감수 ④ 생명의 희생을 배웠는데 이것은 사랑 실천의 방도를 넓게 시행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주신 사랑 실천의 교훈은 어디까지나 그 교회 실정에 맞는 교훈을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까?

1)“오래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마크로두미아”(μανροθυμά)란 말로써 “속에서 폭발하는 감정을 피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참는 방법은 “모든 것을 참고 오래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오래 참는다”고 하여 “인간이 죄짓는 것을 보면서 오래 참으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부족하기 때문에 부족하게 행하는 것을 여유있게 보면서 참아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 고의적이 아닌 일, 죄와 상관이 없는 일들에 대하여 모든 것을 참아 주되 “오래 참으라” 하셨으니까 그 “오래다”는 뜻은 “죽을 때까지” 참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2)누구에게든지 “마음의 유연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갖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크레스토테스”(χρηστότης)는 “자비를 베푸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기보다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내면 저 사람은 더 악해질텐데”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언제나 차분하고 여유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충청도 분들이 말이 느리기 때문에 격한 감정을 많이 완화할 줄 압니다.

3)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의 “투기, 자랑,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바로 자기부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따라 오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곧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누가 잘 되도 투기하지 않고 자기의 유력성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으며 또 교만하지 않으므로 언제나 자기를 뒤세우고 자기는 없는 듯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갈 6:4, 빌 2:3) 이 얼마나 덕 있는 생활입니까?

4)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 하심으로써 예의와 규례를 어기거나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과 질서와 규모를 잘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천에 결코 법이 무시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법을 주장하면 그를 사랑없는 사람으로 지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사랑을 잘 실천하려니까 법 질서를 지키고 무례한 행동을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 24:12에서 “불법이 성하면 사랑이 식는다”고 하셨으니 사랑을 식지 않게 하려면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사랑의 방해물입니다.

5)사랑은 그 사랑하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봉사와 양보, 희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 태도, 세례 요한이 “자기는 쇠하여야 하겠고 주님은 흥하셔야 한다”는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이것이 다 사랑의 충실한 모범입니다. 사랑은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봉사와 희생의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6)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결백한 태도, 즉 죄와 상관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사람은 사랑할 수는 있어도 죄 되는 것과 마귀는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 되는 것과 마귀의 역사를 미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몸에 가시가 박혔을 때 그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라도 그 가시를 빼주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의 죄 짓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죄 짓는 자의 죄를 못 짓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를 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신뢰와 희망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요. 그러나 자식의 거짓말까지 믿어주고 죄 짓는 것까지 희망을 걸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의 거짓말이나 잘못은 잘못으로 인정하되 앞으로 매진하면 잘 되겠지...철들면 좋은 사람이 되겠지...현재는 경험이 없어서 옳게 행하지 못하나 더 배우면 희망이 있겠지...하고 기대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쪼록 사랑의 성격과 방도를 잘 배우셔서 최고의 계명과 은사를 시행하여 큰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46. 항상 있을 것 세 가지 (고전 13:13) 목록으로


본문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씀이 “항상 있어야 할 이유”를 연결해 주셨는데 그 이유는 13장의 말씀에서 설명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다른 은사도 소용없기 때문에 사랑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만큼 항상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할 것이요, 또 10절에 보시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계시도 부분적이고, 예언도 부분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상상하되 성경으로 상상하고 깨닫지만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면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므로 그런 소망을 항상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왜 항상 있어야 할까요?”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주는 끈의 역할을 합니다. 성도가 현세나 내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시간은 한 순간도 없으니까 믿음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의 의미를 분석해 보고 과연 이 세 가지가 어떤 의미에서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믿음에 대하여

1)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끈과 같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온 천지에 충만하셔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없으니 믿음은 꼭 필요하고 영원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2)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도 든든히 붙들어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을 “마귀가 흔들고 까부른다”고 하셨습니다.(눅 22:31)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셨다”(눅 22:32)하셨으니 든든히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믿음이 아주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는 구원을 받아야 하니까요.(요 17:9) 그러나 분량상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큰 믿음이 작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마 15:28, 막 9:18-19)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 하셨고, 고전 15:58에서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3)어떤 경우에 믿음이 약해질까요? 말씀과 기도를 멀리 하거나 범죄의 유혹을 받고 넘어지거나 현실적 욕심에 이끌릴 때 믿음이 현저하게 약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진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4)믿음의 역할과 관련하여 믿음이 항상 있어야 할 이유를 살핀다면 ①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니까 금세와 내세에 영원히 있어야 하고 ② 믿음은 하나님의 진실함을 믿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변하시지 않는 이상 영원히 믿어야 하며 ③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충성하는 것인즉 금세와 내세에서도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천국에 들어왔으니까 믿음은 쓸데없지 않느냐?하면 안됩니다. 구원이 영원한 것이면 믿음도 영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믿음의 역사란 말씀이 있습니다.(살전 1:3) 이 뜻은 믿음으로 큰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도 역시 천국에서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소망에 대하여

1)소망이란 미래의 더 큰 행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만일 미래에 더 큰 행복이 없다면 더 살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하리라”(욥 8:7)하신 말씀처럼 미래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이 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 안에서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희망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도 희망이 계속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2)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일의 보람을 희망합니다. 또 내세의 상급과 주님 만날 것과 천국의 즐거움들을 희망합니다. 그런데 천국에 갔습니다. 모든 희망이 다 성취된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기대하던 소망은 천국에 들어가므로 거의 성취되지만 천국 생활을 시작한 시간부터 영원히 사는 동안 희망 있는 일들이 또 계속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희망 있는 곳이 천국이고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롬 15:13) 환란중에도 소망을 주시고(롬 5:3-4) 또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도 주십니다.(잠 14:32, 욥 19:26, 13:15, 빌 1:21) 하나님은 쇠하시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소망의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롬 15:13) 언제든지 소망을 가질 수 있고, 또 소망의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도에게 어떤 경우에서라도 소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리고 억울한 옥살이를 2년이나 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소망스럽게 하셨고, 모세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건지게 하여 큰 지도자를 삼으셨으며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셨고, 역시 바울 사도도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후 6:9에 보시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자 같으나.....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4)어떤 성도가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토인들이 사는 섬에 겨우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사는데 그 곳 원주민 토인들이 그 집에 불을 놓았습니다.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주위로 지나가던 상선이 집 타는 연기를 보고 그 곳에 배를 대어 그 사람을 구조한 것입니다. “끄레스 싹스” 부인은 선교사를 지망하여 떠나려던 날에 부친의 병세 위중으로 날짜를 연기하였는데 그 때 떠난 배가 풍랑으로 파선했다는 소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욥”도 큰 고난을 받은 사람이지만 노년에 더 큰 행복을 누렸습니다. 성도의 세계에 소망은 어느 순간 어떤 환란에도 없을 수 없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5)그러면 영원토록 소망을 간직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① 우리를 끝가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싫어 버리시지 않는다”(사 41:9) 하셨고, 예수님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신다”(요 13:1)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한 것을 믿으면 소망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전화위복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으로 연단으로 주시고(롬 5:3-4) 죽음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눅 23:43)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을 때 많은 열매를 얻는다”(요 12:24) 하셨으니까 성도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데는 반드시 잘 되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롬 8:28에도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③ “내 뜻대로 안 된 것이 주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만유를 섭리하시는 분이시고, 또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생활의 목적으로 삼을진대 자기의 뜻이 취소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④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소망을 갖는 방법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하신 말씀을 간직하면 어느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할렐루야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에 대하여

고전 13장에서 교훈하신 사랑은 그 대상을 인격자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물도 사랑의 대상입니다. 동물이나 자연도 사랑하면 그만한 대가를 받지 않습니까?

1)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을 만큼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마 25:45)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그 대가를 받기 때문에 항상 하여야 합니다.

2)사랑의 대가는 곧 행복입니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면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더 행복하지요. 그런데 이 행복이 이 세상에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천국에서도 있어야 하고 천국은 완전한 사랑이 성취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3)사랑 실천으로 받는 상급이 가장 큽니다. 대가를 받고 대접과 존경을 받으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상급이 적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봉사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마 25:31-46 말씀에서 사랑과 상급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4)마지막으로 왜 믿음, 소망보다 사랑이 제일일까요? 여기의 제일이란 뜻은 행복을 느끼게 하는 분량으로 볼 때 제일이란 것입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지만 사랑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은 사랑 없이는 홀로 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망은 미래의 행복을 내다보는 것일 뿐 현재 느끼는 행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은 현실에서도 누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며 내세의 열매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구원도 받고 복도 받습니다.(눅 7:44-47) 사람을 사랑하면 큰 행복을 느끼고 그것이 천국에서 받을 상급의 근거가 됩니다.(마 25:31-46) 그래서 믿음, 소망보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31 과 방언과 관련한 교훈 (1) (고전 14:1-19)목록으로


고전 14장은 방언 또는 방언과 관련된 교훈들입니다. 내용 분량이 많으므로 2부로 나누어 상고합니다. 이 말씀의 1절과 12, 13절은 명령을 주신 말씀이고, 그 이외의 말씀들은 “방언을 말함이 덕되지 않은 경우”를 설명하셨습니다.

1. 명령 주신 말씀(1,12,13절)

1)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며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하셨습니다. ① “사랑을 따라” 구하는 뜻은 어떤 은사를 사모하거나 받은 은사를 활용할 때 사랑을 이행하는 목적으로 행하라는 것이요 ②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세속적 은혜에 반대되는 것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세속적 은혜는 육체와 현실에 속한 것으로 유한한 것들을 뜻하고, 신령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와 직접 관련있는 것들로써 하나님과 믿음에 관한 것 또는 영원히 지속되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복주의를 앞세우는 것은 신령한 은혜의 큰 장애가 됩니다. ③ 특히 “예언을 하라”하신 말씀은 방언과 대조할 때 예언을 힘쓰라는 말씀인데 이 예언의 뜻은 계시로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성도가 깨닫도록 전달하는 사역으로 선지자 또는 교사의 직분에 해당합니다.

2)12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술이 넉넉할 때 막힘이 없는 것처럼 신령한 은사도 풍성할 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설교도 능숙하면 은혜가 더 잘 전달됩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것은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하고 덕을 세우게 하신 것이므로 풍성하게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방언의 은사로 족할 것이 아니라 통역을 할 수 있다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13절)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시지만(고전 12:11) 힘쓰는 자에게 더 주십니다.(엡 5:18)

2. 방언을 말함이 덕되지 않는 경우(3-11,14-19절)

1)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며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하셨으니 ① 이 말씀에 나타난 방언의 뜻은 “성도가 자기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신령한 언어로 말하여 하나님께만 뜻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방언하는 자와의 관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사를 주신 목적을 22절에서 말씀하셨고, ② “영으로 비밀을 말함”은 14절에서 설명 드립니다.

2)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 안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언은 설교와 같은 뜻이므로 듣고 깨달을 때 큰 유익이 있습니다. 증언자가 예언하는 내용에 따라서 권면도 받고, 위로도 받게 되므로 덕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로 자기만 은혜를 받는 것이고, 예언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의 은혜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4절)

3)바울사도는 5절에서 “다 방언하기를 원하지만 특별히 예언하기를 더 원하신다” 하셨으니 방언을 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린 방언 기도의 뜻을 알아듣도록 통역하여 성도들에게 나타내지 않을 때는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방언 기도가 비밀일 때는 알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없이 방언 기도만 있다면 다른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6절)

4)악기는 소리의 특징으로 용도를 분별하게 됩니다.(7-8절) 이와 같이 사람의 말도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9절)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고,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하였습니다.(10절) 동물의 울음소리에도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야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10-11절) 이 뜻은 알아듣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나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자의 부끄러움이 같으며 그런 무익한 일을 시행하는 인격에 도덕성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5)2절에서 “하나님께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14-15절에서 그런 기도를 “영의 기도”라 하셨고, 또 “마음으로 하는 기도”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의 기도는 마음의 열매(깨달음)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영과 마음이 다 기도하고 찬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영이 기도하고 찬미하는 것과 마음이 기도하고 찬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입니다. 영과 마음은 성도의 정신적 요소로서 영과 혼을 하나로 보는 것처럼 같은 역할을 합니다.(눅 1:46) 영이 신령한 것이고, 고급적이며 마음은 인간적이고, 저급한 요소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를 말씀할 때 영의 역할로 표현하셨고, 인간의 지각 작용을 나타낼 때 마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깨닫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의 기도(방언)가 자신에게는 덕이 되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세우지 못하고, 마음의 기도(내용을 알게 하는 기도)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므로 “영과 마음의 역할이 다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6)16절에서 “그렇지 아니하면”하신 말씀은 “영으로만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하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이면 영으로 축복하였을지라도 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처지에 있는 성도는 그 축복과 감사의 내용을 알지 못하므로 공감할 수 없은즉 따라서 “아멘”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감사를 잘 하였을지라도 다른 사람은 그 뜻을 모르므로 전달을 받지 못하였으니(17절) 이는 감사 기도에 동참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8)18절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방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보다 더 하는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가 시행한 방언은 영의 기도와 외국어 사용을 다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행 21:37, 고후 12:4) 그러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깨닫는 마음으로 몇 마디 말하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19절)(설교문 참고)

 

 

제 32 과 방언과 관련한 교훈 (2) (고전 14:20-40)목록으로


이 말씀도 31과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① 20,39-40절은 명령하신 말씀이요 ② 21-25절은 방언과 예언의 활용성에 대한 말씀이며 ③ 26-33절은 방언과 관련한 공예배의 질서에 관한 말씀이요 ④ 34-35절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말씀입니다.

1. 세 가지 명령(20,39-40절)

1)20절에서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환경에 옳게 적응하는 슬기를 뜻합니다. 방언 등 다른 은사를 시행함에 있어서도 공예배 등과 관련하여 지혜롭게 시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약 1:5)

2)39절에서는 “방언을 금하지 말되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1,5절) 방언을 금하지 말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사이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방언하는 자에게 덕이 있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도 되기 때문입니다.(4,22절) 또 예언을 사모할 이유는 이것이 믿는 성도들에게(22절) 권면과 안위로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4절)

3)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하심은 적당함과 질서가 모든 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설교문 참조)

2. 방언과 예언의 활용성에 대한 말씀(21-25절)

1)21절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할 방언이 징계의 수단에 활용되었음을 말씀하시므로 “깨닫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욕을 주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21절은 사 28:11-12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은 선민이 범죄함으로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앗수르 방언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또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할 때 그 말씀을 “율법”이라 하신 것은 구약 전체를 율법으로 인식한 것이 그 당시의 통용된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2)22절에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하셨으니, 여기의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음”은 방언이 믿는 자의 신앙발전을 주는 요소가 아니란 뜻입니다. 믿는 자의 양식은 방언 체험이 아니고,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을 보여 준 결과로 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여 교훈하는 것이므로 신앙의 발전을 줄 수 있습니다.

3)23절에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즉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나타내면) 무식한 자들(방언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미쳤다”할 것이니 그런 무질서는 성도의 도덕성의 문제를 나타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을 하면 이는 알아듣게 하는 말이므로 무식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라도 책망과 판단을 받는 유익이 있고,(24절) 이로써 마음의 숨은 일(평소에 가졌던 양심)이 드러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전파할 수도 있으므로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25절)

3. 방언, 예언과 관련한 공예배의 질서에 대하여(26-33절)

1)26절에서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찬송시의 낭독과 가르치는 말씀(설교)과 계시(새로운 예언) 전달과 방언과 통역(여기에는 신령한 방언이 아닌 지역 언어란 뜻도 있음)을 할 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하셨으니 이는 순서와 분량을 적당하게 조절하여 질서있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 순서가 적당한 시간 안에 적당한 순서로 진행되어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2)27-28절에서 “성도 중에 방언으로 말할 때는 두 세 사람만 순서대로 말하고 한 사람이 통역하여 그 뜻을 나타내라”고 하셨습니다. 방언 기도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지만 혹 대중에게 알려야 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반드시 순서대로 두 세 사람만 말하게 하고 통역으로 알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통역자가 없는 방언 기도는 그 당사자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므로 교회에서는 잠잠하여야 할 것입니다.(28절)

3)29절에서 “예언도 두 세 사람만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만 허용한 것은 예배 시간의 조절 때문이고, “분변함”이란 예언(설교) 내용을 이해하고 잘못 표현하는 것이 아닌지를 판단하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설교 표현에도 마귀의 역사가 나타나서 증거의 의미를 얼마든지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4)30-31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는 중에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였을 때는 먼저 하던 사람이 잠잠하고 새로운 계시의 말씀을 청종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님의 계시 사역에 혼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모든 사람이 고루 권면을 받을 수 있도록 질서있게 한 사람씩 예언하라는 것입니다.(31절) 현실 교회에서도 어린이 분반 공부를 할 때 소란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잘 규제하여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도록 질서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34-35절)

1)34절의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 같이”란 모든 성도가 교회 안에서 겸손과 복종하는 자세를 취할 것을 뜻하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하심은 여자가 나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와 타락의 역사로 인한 여자의 위치가 남자 다음임을(창 3:16, 딤전 2:12-14) 율법(모세오경)이 명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2)35절에서 “여자는 무엇을 배울 때에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묻고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성도가 교회에서 잠잠하고 의문된 사항이 있을 때는 그것을 남편에게 물어서 분별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나 가정에서 남편을 앞세워 일하고 자신은 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도는 반드시 이 교훈을 지키므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3)36-38절에서는 바울사도가 말씀한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요 명령임을 인식시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① 3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표준 계시는 사도들을 통하여 주셨지만(엡 2:20) 예언의 은사는 여러 사람에게도 주셨습니다.(30절) ②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을 신령한 자로 인정할 때는 “바울사도가 보낸 편지(고린도전서) 내용도 주님의 명령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바울의 편지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37절) ③ 만일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는 “그가 바로 깨닫지 못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8절) 이상으로 방언과 예언의 필요성과 활용성, 그리고 계시의 확실성을 말씀하셨습니다.(설교문 참고)

 

 

설교보충 47. 방언에 대한 고찰 (고전 14:26-33, 39-40) 목록으로


1. 구약에서 방언이란 용어가 10여 차례 나타나는데 구약에서 나타나는 방언은 현실적 언어를 뜻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방언이란 용어가 “라손”과 “사파”로 표기되었는데 “라손”은 말(창 16:1), 언어(신 28:49), 혀(출 4:10), 방언(창 10:5)으로 번역하였고, “사파”는 언어(신 28:49), 구음(창 11:1, 삿 12:6), 방언(사 19:18)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문맥을 보면 자국어를 말할 때 “라손”을, 타국어를 말할 때 “사파”를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언이 바벨탑 이후에 여러 종류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11:7)

2.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방언

1)행 1:19에서 본 방언에 그 밭을 “알게다마”라 한다 하신 것이나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마 27:46)하신 것은 유대인들 세계에 아람 방언이 통용된 것이고, 행 21:40에서는 바울이 히브리 방언을 하였고, 헬라말도 하셨습니다.(행 21:37) 요 19:20에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기록된 글씨가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람어,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가 통용된 중에 앗수르어와 애굽어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은 이적의 역사로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전도자들이 외국어로 복음을 전하는 기적적 방언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행 2:6에서 “각각 자기 방언으로 듣게 됨이 어찜이냐?”하신 것은 전도자들이 외국어를 배워 활용할 기회가 없었는데 듣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어로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행 2:6) 그 때에 각 나라에서 모인 나라의 수가 15개국이었고,(행 2:8) 이런 방언이 나타날 것을 예수님이 예언하셨습니다.(막 16:17) 핍박이 심한 중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시급히 전달되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비상 수단으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3)신약에 나타난 방언의 원문은 “그로사”(막 16:17), “디아렉토스”(행 1:19)가 있는데 전자는 “다른 방언”(행 2:4), “새 방언”(막 16:17), “각종 방언”(고전 12:10)이라 할 때 사용되었으며 후자는 “본 방언”, “자기 방언”(행 2:6)이라 할 때 사용되므로 역시 외국어와 자국어를 구별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글로사”는 혀와(막 7:33, 눅 1:64) 입술(행 2:26)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4)막 16:17에서 “새 방언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후 행 2:4에서 “다른 방언, 각 방언”(행 2:11)이 나타나므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고, 그 당시에 15개국 사람들이 다 자기의 말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 외국어 방언이었습니다.

5)그 후에 또 신령한 방언이 나타난 사례가 있습니다. 행 10:46에 보시면 가이사랴에 사는 고넬료의 식구들이 베드로를 모셔다가 가족사경회를 할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니 이는 방언을 말함”이라고 하셨고, 행 19:6에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바울사도로부터 교훈을 받고 안수를 받았을 때에 “성령이 임하시며 방언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 사건은 3번 뿐인데 이것은 다 외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방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6)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방언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이 방언이 특수한 것은 ① 하나님과만 대화하는 신령한 언어이고(고전 14:1-2,12)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특별히 주시는 은사이며(고전 12:10-11) ③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고(22절) ④ “온전한 것(계시의 완성)이 올 때는 그칠 것이라”(고전 13:8-10)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온전한 것”이란 외국어 활용이 보편화되거나 신령한 방언을 주시는 목적이 성취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방언을 주시는 목적은 세 가지를 들 수 있으니 하나는 기도하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갖는 것이고,(14:2) 둘째는 믿지 않는 자에게 보여주는 표적이며(14:22) 셋째는 기도의 연단을 주심에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신령한 방언의 형태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흔히 “이상한 소리로 방언을 한다”하고, 그런 말을 들을 기회도 있지만 그 방언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데 이것은 통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계시를 더 이상 주시지 않는 시대에는 방언의 은사도 그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표적으로써의 목적을 다 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 14:22, 히 2:4) 그런 의미에서 칼빈 선생님도 방언의 의미를 외국어에 국한한 은사로 보셨다고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각국 사람들의 모임과 그들의 방언으로 언어 소통에 혼란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더 많은 방언을 하셨다”(고전 14:18)하셨으나 그 방언의 의미는 첫째 다국어를 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체험을 말씀하신 바가 있지만(고후 12:1-4) 그 이상 밝혀진 계시가 없으므로 방언으로서 본받을 교훈은 아닙니다.

4. 이 시대에 신령한 방언이 없어도 될 이유는 많습니다.

1)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것이지만(14:1) 은사로서의 마지막 순서에 해당(고전 12:4-10)하는 이유는 온전한 계시가 성경이고, 최고의 은사가 사랑인데(고전 4:6, 7:19, 12:31, 14:1, 고후 13:8) 온전한 계시는 주후 100년경에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3:10)

2)계시가 완성된 것은 유 3에서 “단번에 주신다”하셨고, 계 22:18에서 “더 이상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생활의 계시도 사도들이 터를 닦으므로 완성하였습니다.(고전 3:10)

3)따라서 신령한 방언은 이방인들에게 기독교 종교의 표적으로 나타내심과 신앙에 이끌린 초신자들에게 기도의 힘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잠정적으로(고전 13:8-10)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4)고린도교회는 각국인들이 모여 공예배를 드렸을 것이므로 설교나 기도를 할 때에 순서대로 또 적당한 분량으로 나누어 증언하고 통역한 후 또 기도하고 통역해 주는 일이 번거로웠을 것을 상상한다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보충 48. 적당하고 질서있게 (고전 14:33,40, 살후 3: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적당하고 질서있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하셨고, 40절에서는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하셨으며 살후 3:6에서는 “규모없는 사람들처럼 행하지 말라”, 또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하신 것은 사도들의 모범을 닮지 않고 임의로 행하는 무질서한 사람들 세계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어지럽다”는 뜻은 규모와 질서가 없고 “화평하지 않다”는 뜻이요, 또 적당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질서와 규모를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규모와 적당함은 질서에 해당하는 말씀이고, 질서는 곧 평화와 관련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화평과 질서, 적당함과 규모 등에 대한 용어를 먼저 설명드린 것입니다.

2. 바울사도가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가?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단체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예언과 방언을 할 때 무질서(어지러움)를 초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이나 차근 차근 순서대로 조용하게(어지러움의 반대)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방언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예언은 많은 성도들을 상대하는 것인데 개인적인 방언을 대중 앞에 나타내려 했으니 그것도 규모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또 방언이란 그 자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역이 동반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적 행사에 어지러움을 주고 나가서는 예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장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니까 화평과 질서와 적당함과 규모를 살려서 경건을 유지하라”는 뜻을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적당과 질서는 성도의 단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3. 지금 이 자리에는 적당을 좋아하지 않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종종 적당치 못하여 큰 실수와 손해를 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적당”이란 뜻은 “분수를 지킨다”, “격식에 어울린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과식, 과욕, 과민, 과로, 과대 망상 등 이것이 다 적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빈곤, 쇠약, 적게 벌고 많이 쓰는 생활도 역시 표준에 못 따르는 것이어서 적당치 않는 것입니다. 만일 육체 생활이 적당치 않으면 자기 몸에 손해를 주고, 경제 생활 역시 적당치 않으면 파산하는 것이며 무엇이든지 적당하지 않으면 공통성과 균형성을 잃기 때문에 전체 유익에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나태나 극단적 열심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4. “질서대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어서 혼돈 세계를 질서로 정리하시는 창조 과정을 밟으셨고, 자연 법칙에도 질서가 있는 것을 보면 당연히 생활 법칙이나 신앙의 법칙에도 질서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에스더 1:7에 보시면 “바사왕이 어주를 마시는데도 규모가 있었다” 했으니 이 질서와 규모는 적은 일에 미치기까지 있을수록 유익한 것입니다. 질서의 반대는 혼돈이요, 혼돈은 죄악이며 멸망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성도이면 무슨 일에나 법을 묻고 방법을 물어서 충돌없이 생활하는 습관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서대로 생활하라”는 뜻이 무엇인가?할 때 질서 생활 ① 순서를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가고 나중 가며 나중 일어서야 하는 법이 있지요. 먼저 말하고 나중 말하는 순서도 있지요. 또 높은 자리 순위대로 앉는 질서도 있지요. 이런 모든 면에 순서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② 법칙대로 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순서를 잡는 것이 도덕적인 문제라면 법대로 하는 것은 의무적인 실천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살후 3:6에서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을 멀리 하라”하셨고, 11절에서는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이 곧 일을 만드는 자라”하시고, 딤후 2:5에서 “법대로 경기해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분수를 못 지켜서 적당할 줄 모르거나 예절과 규칙을 못 지켜서 질서를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분수와 질서를 잘 시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33 과 부활의 당위성 (고전 15:1-30)목록으로


바울사도는 본 장에서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5장의 내용이 많기 때문에 반씩 나누어 상고합니다. 본문 말씀을 살피면 거의가 “부활의 당위성”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정하였습니다. ① 1-8절은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된 근거”를 말씀하셨고, ② 9-11절은 “바울의 자기 부정 또는 겸손에 관한 말씀”이요 ③ 12-19절은 “부활을 부인하면 안 될 이유로 부활의 당위성”을 말씀하셨고, ④ 20-26절은 “부활의 결과”요 ⑤ 27-30절은 “만유의 회복”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게 된 근거(1-8절)

1)1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증거 한 부활과 복음 진리를 믿고 그 진리 위에 서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땅을 디디고 섰는 자가 땅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 진리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고 있음이 곧 부활 사실의 근거란 뜻이요, “이로써 부활 진리를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2절)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헛되이 믿지 않는다”는 뜻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과 성도의 부활 소망을 추상적으로 믿지 말고 사실로 알고 믿어야 구원받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2-8절에서는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게 된 근거를 또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성경에 근거함이고,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본 사실에 근거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자신이 본 것을 근거한 것입니다. ① 3-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이란 “바울이 믿게 된 부활 진리”이고, 바울이 그 사실을 믿게 된 것은 성경에 근거하였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 성경대로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믿은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언하셨고(사 53:1-11, 시 16:10, 욘 2:10) 신약 복음서에서도 예언 및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요 2:19-22, 마 20:19, 막 9:9, 14:28)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으로 믿어야 합니다. ②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5-7절에서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신 사실과(요 20:3-8, 21:7-22) 열 두 제자에게 보이신 사실이 있고,(요 20:19-29) 또 500여 형제에게 보이신 것은 승천하실 때에 보이신 것으로 사료되며(행 1:3, 1:4-11) 부활의 주님을 본 자들 중 이미 잠든 자(세상 떠남)도 있으나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까지 태반이나 살아있었음이 사실이요, 또 그 후에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으니 이 야고보는 순교자 야고보(요한의 형제;행 12:1-2)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행 12:17, 고전 1:9, 2:9)입니다. ③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셨다” 하셨으니 바울은 여러 사도들 중 가장 마지막에 부활의 주님을 뵈었고, 그 때에 변화되었습니다.(행 9:1-22) 바울은 변화된 다음, 부활과 복음의 증언자가 되었습니다.(1절) 따라서 우리가 증거할 부활의 근거도 역시 성경에 근거하여야 하고, 또 부활을 믿는 성도의 생활에 희망과 능력이 있었음을 근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자기 부정과 겸손에 관한 말씀(8-11, 29-30절)

1)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8절) 이는 자신이 창조자요, 구속자인 그리스도를 핍박할 만큼 모자란 인생이었음을 자책함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괴수 죄인”이란 표현도 하였습니다.(딤전 1:15)

2)“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습니다.(9절) 이것은 늦게 사도된 점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자기를 작은 종으로 여기는 도덕성이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경력 때문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구나 자신의 실수와 연약성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받은 성직이 과한 은혜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할 줄 알게 하는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한 사실은 행 9:1-5,21, 22:4-5, 갈 1:14, 딤전 1:13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4)“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10절) 이것은 바울을 변화시켜 주시고, 직분과 능력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렇게 고백하신 줄 압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이면 사명자가 자기를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할지라도 공로를 내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5)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음이요 또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10절)고 하였습니다. 사명자가 수고하고 헌신한 후라도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거나 과한 대가를 구한다면 역시 이 말씀에 따르지 못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과 사명에 대하여 철저하게 겸손하였습니다.

6)11절에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다”는 뜻은 부활을 전파하게 된 경위가 성경대로 성취된 사건을 하나님이 전파하도록 은혜를 주셔서 바울과 사도들(내나 저희)이 증언하게 되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너희)도 그대로 믿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부활의 당위성을 설명하심(12-19절)

고린도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2절) 그래서 바울사도는 “부활이 없다”고 할 때 나타날 모순점을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12절)

1)만일 부활 그 자체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3,16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행 4:19-21)

2)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전도자들의 전파와 성도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14절) 전파가 헛됨은 거짓을 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요, 믿음이 헛됨은 부활 교리가 없는 믿음은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3)또 거짓을 증거한 증인들이 될 것은(15절) 없는 부활(불신자의 말)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렸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요,

4)만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도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요(15절) 또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16절) 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되고(14절)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하셨으니(17절)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속죄의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히 5:6, 7:24-25, 8:24, 9:12, 10:12, 고전 15:24)

5)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고 잠든 자(죽은 자)도 망하였을 것은(18절) 그가 사후에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며

6)또 성도의 바라는 것이 (부활이 없으므로) 이생 뿐이라면 모든 사람들 중에 부활을 증언하고 핍박을 받으며 전도한 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19절) 바울은 이상과 같은 논리로 부활을 부정할 수 없음을 증거하였습니다.

7)29절에서 “만일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성도의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은 자들도 헛되다” 하셨으니 여기의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음”이란 먼저 죽은 자를 천국에서 만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영생도 누리고 주님도 만나지만 앞서 간 성도들과 가족을 만나는 소망도 크기 때문입니다. 또 30절의 말씀은 19절의 말씀과 같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 당한 자들이 부활과 함께 천국 소망이 없을 때 가장 불쌍한 자가 되므로 위험을 무릅씀이 소용없을 것이란 뜻입니다.

4. 부활의 결과(20-26절)

1)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하심은 주님의 부활을 첫 이삭으로 비유하여 주님과 연합된 성도의 부활도 뒤따라 있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요,

2)21-22절에서 “사망이 사람(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음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그리스도)으로 말미암으니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어 삶(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23-24절에서는 부활의 순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그 다음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연합된 성도의 부활이 있으며 맨 나중에 심판받을 악인의 부활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부활의 때는 심판 직전이며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심”은 마귀와 불법자들의 세계를 깨끗이 심판하여 정리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으로 건설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성부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곧 천국의 완성입니다.

4)그 때에 하나님의 모든 원수는 주님의 발 아래 있고(지옥에 가둔 상태)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이 불가불 왕(심판과 영광)노릇 하시게 되며(25절) 결국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26절) “멸망받을 원수는 천사나 사람을 막론하고 사망이라”하심은 그들의 최후의 결과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5. 만유 회복에 대하여(27-28절)

1)27절의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신다”함은 모든 원수를 발로 디딘 것처럼 주님의 승리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시 8:6에서 예언된 것을 인용하셨습니다. 25절의 “원수를 발 아래 두신 것”은 모든 악을 정복하심이요, “만물을 발 아래 두심”은 하나님의 통치에 장애물이 없음을 뜻하므로 타락으로 인한 우주의 무질서를 완전히 회복하신 것을 의미합니다.(행 3:21) 따라서 만물을 발 아래 두신 주님은 만물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시고 만물 위에 만물을 초월하여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2)28절에서 만물을 저(예수님)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이 이를(복종하는 만물) 성부 하나님께 돌려 복종하게 하시므로 하나님만 만유의 주가 되시고, 만유 안에 계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 “만유의 주가 되심은 원수 마귀가 없다”는 뜻이고, 만유 안에 계심도 역시 만유 안에 하나님의 권세만 있고, 불순종의 무리가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구원과 천국 건설의 완성입니다.(계 22:1)

 

 

제 34 과 부활의 형태 (고전 15:31-58)목록으로


이 본문은 “부활의 형태”란 제목을 정하고 4 대지로 나누어 상고할 수 있습니다. ① 31-34절은 “부활을 못 믿는 자들에 대한 항변과 권면”이요 ② 35-49절은 “부활의 형태”에 대한 말씀, ③ 50-54절은 “부활체의 근거에 대한 말씀”이요 ④ 55-58절은 “승리의 고백과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을 못 믿는 자들에 대한 항변과 권면(31-34절)

1)31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① 주 안에서 가진바.......나의 자랑이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고전 2:2) 십자가의 복음에는 부활과 영생의 복이 있습니다. ②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 일을 예사로 행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죽는다”는 뜻은 자기 부정의 뜻도 있고(갈 5:24) 또 육체적 죽음을 소망으로 여기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떠나는 일을 영광으로 아신 것입니다.(행 20:24, 빌 1:21) 육체의 죽음은 곧 부활의 씨를 뿌림과 같기 때문입니다.

2)3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부활을 불신하는 자들에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부활을 증거한 일로 에베소에서 핍박을 받아 맹수에게 던지워질 뻔 하였는데(행 19:26-41) 그 때 만일 핍박을 계속 받고 맹수에게 던지워졌다면 부활이 없을 때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유익이 없다면 차라리 핍박을 면하고 잘 먹고 잘 살자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3)그런고로 “선한 행실(부활을 믿고 생활하는 것)을 더럽히는 악한 자들의 말에 속지 말고, 항상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33-34절) 부활을 불신앙하는 자들은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34절)

2. 부활의 형태에 대한 말씀(35-49절)

1)35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 의문을 갖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다시 사는 방법은 “뿌려진 씨가 죽으므로 싹이 나는 것과 같으니”(35절) 부활은 죽음의 씨를 뿌린 다음에 있기 때문이요,

2)36-37절에서 씨와 형체가 같지 않음 같이 죽은 자와 부활한 자의 몸의 상태는 꼭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작은 씨를 뿌렸는데 파란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종자에 따라 형체를 주시며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38절)

3)39-40절에서 이 세상에는 각종의 육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등입니다. 새는 공중에서도 살고, 물고기는 물에서도 삽니다. 사람은 공기 없이 10분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육체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사는 몸의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며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40절)

4)41절에서 같은 원리로 “해와 달과 별의 영광도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천체에 인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나 그것을 보고 느끼는 사람이 볼 때 느끼는 점이 다 다른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한 형체나 영광도 다 다르다고 하셨습니다.(42절)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무덤에 갔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하였고,(요 20:15)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으며(눅 24:16) 예수님은 음식도 잡수셨고,(요 21:13) 문 닫힌 방도 임의로 통행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요 20:19, 행 1:9)

5)42절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산다”하심은 육체를 씨로, 부활체를 싹으로 비유하신 말씀이요, 43절에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하심은 고난당하다가 죽는 육체를 욕된 것으로, 부활체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설명하신 것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하심도 역시 병들고 죽을 몸이 다시 죽을 수 없는 강한 몸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뜻도 역시 육의 몸을 갖고 살던 성도가 신령한 몸을 힘입는다는 뜻이요,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다”는 뜻은 육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령한 몸이 있다는 뜻입니다.

6)45-46절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힘입는 절차”를 말씀하셨습니다. 창 2:7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그가 생령(산영)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하여 모든 인생의 죽음을 초래하였지요. 그러나 마지막 아담(마지막 아담이라 함은 마지막으로 세상에 오신 무죄한 인간이란 뜻)인 예수님은 다른 생명을 살려 주실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45절)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시오, 곧 살리는 영입니다.(요 6:63, 고후 3:6) 그런데 여기에 순서가 있습니다. 씨 뿌림이 먼저 있을 때 싹이 남같이 육체의 죽음이 있은 다음에 신령한 부활의 몸을 힘입는다고 하셨습니다.(46절)

7)47절에서 “첫 사람인 아담이 땅에서 났음”은 그 육체의 요소가 흙임을 뜻하고, “둘째 사람이 하늘에서 나셨음”은 예수님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몸도 땅에서 나시지 않았습니다. 즉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흙(땅)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한 자처럼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는 그 몸을 흙에서 취한 것이 아니므로 부활하여 하늘에 속하는 것입니다.(48절) 따라서 인간이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장차는 그리스도의 영의 힘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49절)

3. 부활체의 근거와 변화에 대한 말씀(50-54절)

1)부활체를 힘입는 근거는 땅에 속한 혈과 육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썩은 것(몸)은 썩지 아니한 것(신령한 몸)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0절) 이 사실은 시체의 흔적이 지상에서 산화되거나 없어졌어도 부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음을 입증하시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살려주시는 능력이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45절)

2)51-52절에서는 변화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도 변화에 속하지만 본문의 변화는 예수님 재림 당시에 죽지 않고 산 자의 변화를 뜻합니다. 5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한다”하심은 변화의 시기와 상태를 말씀하심인데 이것을 비밀이라 하심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시기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요(살전 4:16-17) 변화의 상태는 잠자지 않은 상태(즉 살아있는 상태)에서 변화되는데 그 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2절) 그 때에 부활하고 변화된 몸은 다시 죽을 수도 없고 썩지도 않을 몸입니다.(53절) 이렇게 될 때에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될 것이라”고 예언한 호 13:14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54절)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된다”는 뜻은 사망에 대한 원수를 완전히 갚는다는 뜻입니다.

4. 승리의 고백과 결론(55-58절)

1)55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망을 이긴 믿음의 확신 아래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또 너의 쏘는 무기가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사망의 패배를 승리의 고백으로 선포하셨습니다.

2)56절에서 “사망의 쏘는 것이 죄라”는 뜻은 죄는 사망을 가져오므로 사망이 죄를 쏘아 자기 가족을 만든다는 뜻으로 은유적 표현을 한 것이요, 또 “죄의 권능이 율법이라”는 뜻은 죄가 사람을 죽이는 권능이 있는데 이 권능은 율법이 주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3)결론적으로 5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에 대한 궁극적 승리입니다. 그리하여 견고하며(특히 부활 신앙에 대한 것) 흔들리지 말며(잘못된 교리의 유혹과 모든 범죄 유혹에)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의 수고가 주 안에서 결코 헛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절기 설교 중 부활 설교 참고)

 

 

설교보충 49. 바울이 전한 복음 (고전 15: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부활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었고,(고전 15:12)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에 대한 교훈을 본문에서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1. 바울사도는 먼저 “부활의 진리”를 복음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돌아가시고 성경대로 다시 사셨다”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을 복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복음이란 “유 앙겔리온”(εύαϒγέλιον)은 “좋은 소식”이란 뜻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좋은 사건, 좋은 내용”이란 뜻입니다. 눅 2:10에 보시면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하심으로써 구세주가 탄생하여 오신 것도 “복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구원의 소식”을 의미하며 구원의 소식은 예수님의 탄생과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이 그 핵심이 된 것입니다. 또 바울사도는 롬 1:1-3에서도 복음에 대하여 같은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을 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선지자들이 그의 아들에 대하여 미리 약속하셨고, 아들 예수님은 다윗의 계통을 따라 육신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하시므로 역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과 돌아가심과 부활을 복음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구원의 핵심을 이루는 복음인 것입니다.

2. 그러면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믿었을까요?

1)“다른 사람들의 전도를 받고 믿었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하셨고, 또 11절에서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하시므로 바울도 전도를 받아 믿었고, 전도를 받아 믿은 것을 또 전파하여 다른 사람도 믿게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전도를 당하여 믿은 것처럼 저희들도 전도를 받아 믿고, 또 전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2)“성경이 예언을 하여 믿게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성경대로 돌아가셨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이지만 실제 사건을 체험한 후에도 성경으로 믿은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인고로 성경대로 믿는 것이 가장 확실한 줄 아셔야 합니다.

3)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들이 태반이나 살아 있는 채로 증언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5절 이하를 보시면 (성경대로 살아나신 주님이) 게바에게, 야고보에게, 12제자에게, 그리고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본 자들 태반이 그 때까지 살아있어서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그 당시에 본 자들의 말을 신용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또 예수님은 거짓말하지 않고 신용할 만한 자들에게 나타내주셨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못박은 악당들에게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거짓말도 했을 것이고, 기독교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당들은 빈 무덤만 보았고, 소문만 들었을 뿐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본 자들은 다 구원받을 백성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본 자들의 증언은 성도의 증언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4)8절에서 바울은 친히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상에게 자기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본 것입니다. 바울은 행 9:5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영광 중에 나타나신 주님을 보고 눈이 흐리워졌으나 같이 가던 자들은 소리만 듣고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부활의 주님은 원하는 자에게만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① 전도를 통하고 ② 성경을 통하며 ③ 또 본 자들의 증언을 통하고 ④ 또 자신이 실제로 봄으로써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으로만 믿고, 성경에 근거한 증언으로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부활의 사실을 전해 들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그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므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서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이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복음으로 받고 구원의 방편으로 진실하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십자가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꼭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도”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이 사실을 전파하여 다른 이들도 믿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을 구원의 방편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고 전파의 사명까지 주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산 자가 변화되어 승천을 하거나 죽은 자가 다시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퍽 드문 일이니....전파의 내용이 아닐 수 없지요. 따라서 죽은 자가 다시 산 것은(그것도 3일 만에 무덤을 헤치고 다신 산 것) 세계적으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까지 사실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행 4:20) 성경 역사를 보시면 일찍이 주전 3000년경에 에녹이 승천하였고, 주전 900년 경에 엘리야가 승천하였으며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한 사건은 세상이 생기고는 예수님께만 단 1번 있은 일이니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 사건은 ① 놀라운 사건이고, ② 믿음의 근거이며 ③ 구원받는 방도이기 때문에 전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이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사도는 대단히 겸손한 태도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부활 사건 앞에서 더욱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나는 사도라 칭하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가 수고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생명의 주이신 능력자, 승리자, 심판자로 크게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바울사도처럼 성경으로 부활을 믿고 부활의 증언자가 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갖고 더욱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0. 되는 것과 하는 것 (고전 15:8-11) 목록으로


본문 10절에 보시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말씀이 있고, 또 다음 줄에 보시면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말씀이 있어서 “되는 것과 하는 것”이란 제목이 나올 수 있습니다.

1. 그러면 바울이 자기 된 것이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자기 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힘으로 예수님을 알거나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이 예수님 핍박하는 바울을 강권적으로 눌러서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2)바울이 겸손해진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 예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모르면 교만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바로 알았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눅 5:8) 만일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만을 나타낼 자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일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발견한 다음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나의 수고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다”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겸손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3)그리고 바울은 겸손 외에도 변화된 것이 많았습니다. 어떤 상태에서 변화를 받았습니까? ①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자였습니다.(빌 3:5-6) 이런 이단자가 예수님을 바로 깨닫고 예수님의 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고 핍박하기 위하여 살기등등 하였으며 스데반을 죽일 때도 가담하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할 만큼 신앙의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 옳게 이해하는 신앙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② 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종교적 의식과 이스라엘의 정통적 혈통이란 족보와 율법을 잘 지켰다는 인간적 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여 열심하던 자가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님 아는 지식을 추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 욕구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했고, 이기적인 목적도 역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하여진 것입니다. 저희들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멀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적 변화가 부족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요일 2:15, 롬 12:2) ③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본받는 자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빌 2:5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신 말씀이 바울사도의 교훈이고, 또 고전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하신 말씀도 역시 바울사도의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게 변화되기 위하여 “자기를 날마다 죽인다”(고전 15:31) 하셨고, 또 “예수님 죽인 것을 짊어지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기를 힘쓰는 자”로(고전 4:10) 변화된 것입니다. ④ 심지어는 자신의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 생활한 사명자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롬 14:7-8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인 만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과 고전 10:31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바울은 신앙이 변화되고, 목표가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삶의 방법이 변화되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자신이 무엇을 안다 하기 전에 어느 정도 변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4)바울이 된 것은 사도의 은사였습니다. 은사는 자신이 원하여 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도 그렇고 직분을 이행할 때 잘 할 수 있는 소질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 것입니다. 바울은 추호도 사도되기를 원하여 성취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갈 1:1) 이렇게 믿음, 겸손, 자기 변화, 사도된 것이 은혜로 된 것입니다.

2.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힘쓰고 노력할 사명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하게 하신 것은 ① 예수 잘 믿으라는 것과 ② 전도하라는 것과 ③ 사랑(봉사)하라는 것입니다.

1)예수를 잘 믿는 것은 단순한 것 같으나 범위가 넓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성경대로 살면 되니까 단순하고 복잡한 세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믿으려니까 어렵습니다. 요 6:29에서 “무엇을 하리잇가?” 질문하였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성도의 할 일인 줄 아시고, 말씀과 기도를 힘쓰며 예수님을 닮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전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지상 명령으로 주신 것이니까요. 지상 명령이란 승천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이 전도 사명이란 뜻입니다.

3)사랑과 봉사의 사명입니다. 사랑과 봉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 역할의 사명입니다.

3. 성도가 자기 변화를 이룩하고 전도와 사랑을 힘쓰면 필히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자기 변화를 위하여 가장 힘쓸 일은 말씀과 기도에 이끌려 큰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행 2:46-47에 보시면 “초대 교회로서의 특징을 드러낸 곳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하셨고, 행 9:31에서는 “평안함과 든든함과 위로가 있는 곳에 수가 더 많아졌다” 하셨으며 행 11:24에서 안디옥 교회가 부흥되어 큰 무리가 더한 것도 역시 먼저 믿은 자들의 잠잠함과 생명 얻는 회개가 있었고, 또 바나바가 유력한 사역자로 면모를 드러냈을 때 있었던 것입니다.(행 11:18,24)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어떤 회사의 물건 선전하는 것처럼 이상한 수단을 써야만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전도는 성도가 빛된 생활만 확실하게 하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저들은 왜 밝으며 빛이 나느냐?”하고 찾아와서 진리를 받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교회는 빛된 생활은 아예 포기해 버리고, 번쩍거리는 불빛과 함께 상업적인 수단과 어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학적 방법으로 사람을 모으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과 소금을 앞세워 진리를 전하지 않고, 현실적 인기를 내세워 사람을 모으다 보니까 항상 신앙의 순결함보다 현실적 냄새를 많이 풍기는 교회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먼저 자신이 되는 일을 힘쓰고, 다음에 빛과 소금 역할을 이행하면서 전도와 교육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1. 바울의 겸손 (고전 15:8-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울의 겸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에서 바울사도의 겸손의 모범을 깨닫고 겸손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울의 겸손을 깨달은 것은 33세 때였습니다.(여러분들이 저를 겸손하지 않은 자로 보실 수도 있겠지만 저 나름대로는 겸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하시므로 그 겸손한 마음이 예수님의 본심이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여야 하고, 또 약 4:6 말씀이나 벧전 5:5을 보시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하시므로 겸손은 은혜와 축복을 받는 방법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또 벧전 5:6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작게 여기는 자를 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삼상 15:17에서 하셨고, 또 고후 12:9에 보시면 “하나님은 바울사도에게 베푸신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어 그를 겸손케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이 꼭 겸손하셔야 할 이유는(이유가 없어도 겸손하셔야 하겠지만) ① 예수님의 본심을 닮고 ② 은혜를 힘입는 자가 되며 ③ 하나님의 쓰임 받는 자가 되고 ④ 받은 은혜와 능력이 보존되게 하기 위하여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인 고전 15장을 읽을 때 이 말씀은 바울사도의 부활 신앙을 설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도 그런 의미로 교훈을 살피다가 은연 중에 이 말씀 속에서 바울사도의 겸손한 태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대단히 유력한 분이었습니다. ① 그는 정통 유대인이고,(고후 11:22) ② 학문이 높은 사람이며(행 5:34, 22:3, 가말리엘) ③ 율법에 능하였고,(행 22:3) ④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빌 3:4) ⑤ 신앙적으로는 사도라는 최고의 직임을 받으신 유력한 분인데 이 분이 얼마큼 외식 아닌 겸손을 차리셨느냐?하면

1. 8절에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하시므로 자기는 태어날 적부터 모자람을 지니고 나온 사람인즉 “무슨 일에나 부족이 있는 자”로 여겨 주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 여건에 부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사도는 자기의 부족을 시인할 뿐만 아니라 또 고후 12:5,9을 보시면 자기의 유력한 점을 자랑할 것이 없고 약한 것들만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사실대로 알리기 위하여 “자기의 연약을 자랑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요지는 “나는 여덟달 반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 마땅한데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까지 나타나 주셨다”고 감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한 성도는 누구에게 무시를 받아도 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하여 섭섭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동료자 간에 겸손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곧 9절의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수님의 12제자 보다는 늦게 사도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고는 더 많이 하였고,(10절) 신약 성경 27권 중에 14권을 기록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동료 사도들 앞에 “내가 제일이라”고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사람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기가 수고를 많이 하셨고, 영감 받은 계시가 많았어도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하시면서 동료자들 앞에서 자기를 가장 낮추어 처신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깨달았을 때 큰 교회로 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저는 부교역자 노릇해 본 일이 없었고, 신학생 때도 부산 제2영도 교회를 혼자 시무하다가 목사 될 무렵에 시골로 와서 목회를 하니까 도시의 큰 교회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지방 교회에서 “위임하라”는 것을 안한 채 3년을 버티다가 이 말씀을 깨닫고 “내가 뭔데 시골교회 시무 못할 이유가 있나 나는 목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하는 생각이 저를 이끌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도시 교회로 나가려는 노력을 완전히 중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있는 장소에서 충실해야 되겠다”하여 두 교회의 예배당을 짖고 있으면서 오라는데 있으면 갈 뜻이 있으나 절대로 부탁은 안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으면 교인들이 권태감을 느낄 것 같아서 “오라는데 있으면 전임할 수도 있다”고 마음먹은 것이 두 번이나 옮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기셨다”는 말씀 때문에 저는 큰 교회 시무 의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동료자들과 무슨 일을 맡을 때도 맡겨 주면 하고 안 맡기면 그만이라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저를 교만한 사람으로 보거나 명예욕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면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 차리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고, 매력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려 하겠습니까?

3.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치 못한다”(9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부족이 많은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사도직을 주셔서 퍽 황송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자기를 낮추다 보면 직책 수행의 의욕을 갖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성직의 명분을 더럽힐까 더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집사나 장로나 목사도 처음 될 때는 황송한 생각이 들어서 선배를 보면 굽실 굽실하다가 2,3년 지나고 자신이 사람 앞에 부각이 되면 금방 교만해져서 목이 뻣뻣해지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참으로 안 됐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성도는 크건 작건 모든 성직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겸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직은 유력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써 보시고 더 좋은 그릇을 만드시기 위하여 주시는 것인 만큼 성직에 대하여 극히 겸손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자기의 수고한 공력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으니 바울은 자기가 변화되어 새 사람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기가 더 많은 수고를 한 것도 역시 자기가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한 것이라고 함으로 일체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자기 것으로 수고하고 자기 것으로 공로를 세워야 내세울 것이 있을 터인데 죽은 생명을 살려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신 것부터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지혜와 능력과 직분을 주신 것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만 자랑할 뿐 자기의 것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고, 혹 있다면 자기의 연약과 실수와 과거의 죄인이었음을 자랑할 것 뿐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겸손을 오늘의 성도님들이 액면대로 받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충성 노력을 많이 하고도 “마땅히 나의 할 의무를 다 했다”고 하면서 겸손을 차리는 종이 되셔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눅 17:10)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억지로 물러나게 될 때에 자기의 적은 공로를 자랑하면서 대가를 구하는 예가 있는데 성도들은 이런 것도 극히 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바울사도에게는 사도와 성도라는 직임이 군신 같은 격차가 있는 직임이지만 추호도 직분을 내세워 군림한 경우가 없고, 오직 형제, 가족과 같은 동격의 입장으로 성도를 대한 것입니다. 히 1:11,17을 보시면 “예수님도 성도를 대하실 때 형제라 부르기를 기뻐하시면서 형제처럼 대하셨다”고 하셨는데 바울사도 역시 “형제들아”(빌 1:12, 4:21)하시는 태도로 성도를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헌법에 “왕은 군림할 뿐이지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법이 있으나 바울사도는 군림하지도 않고, 명령으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으니 이것은 겸손으로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복음사역자들이 축복권을 빙자하여 권위주의로 자신을 군림시키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형제라는 동격의 입장에 서야 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이 주신 직임을 봉행할 때 권리를 쓰지 않고(고전 9:12) 모든 성도의 자유 의사에 따른 협조를 부탁하고 간청하였습니다. 딤후 2:2을 보시면 “충성된 자에게 부탁하여 사명을 맡기라” 하셨고, 고후 8:10에서는 “헌금을 할 때 물질의 필요를 말하며 뜻만 보인다” 하셨으며 고후 9:7에서는 “인색함과 억지로 따라오는 일이 없게 하라” 하셨고, 빌몬 8,9절에서는 “사도의 직권으로 마땅히 명령할 수 있으나 도리어 사랑을 인하여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다 바울사도의 겸손일 뿐 아니라 목회상의 미덕이요, 형제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는 태도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고용인에게 일을 시켜도 군림하는 자세나 명령식으로 시켜서는 안 되고, 형제와 같은 위치에서 필요를 일깨워 주는 방식으로 협조를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간의 대화에서 명령이나 강요식 대화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 하셔야 할 것입니다.

7. 바울은 고전 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을 힘쓴 것입니다.(마 16:24) 그러면 결론적으로 바울이 왜 이렇게 겸손하셨을까요? 그것은 본래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았기 때문이요(고전 11:1), 또 한 가지는 자신이 믿기 전에 주님을 핍박한 죄책감이 있었고,(9절) 또 겸손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에 계속 붙잡히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2:9)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도 각별히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알고도 겸손하지 않는다면 성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2. 흔들리지 않는 신앙 (고전 15:57-58) 목록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헬라 나라 남쪽의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사도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가셔서 1년 6개월을 머무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행 18:1-11) 바울사도께서 주후 51년경에 에베소(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 고린도교회는 역사가 오래지 않았고, 또 그 지역이 흥행업과 이방 종교가 성행한 지역이어서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고린도교회는 순결하고 정착된 잔잔한 교회가 못 되었습니다. 교역자를 중심하여 편당하는 문제, 인간의 지혜를 내세우는 문제, 어린 아이 신앙을 탈피하지 못하는 문제, 음행 사건과 송사문제, 금욕주의와 이혼문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사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 남녀의 지위 문제, 방언과 은사 문제, 사랑의 결핍증, 또 부활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점 등이 있어서 바울사도가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일깨워 주셨고, 부활 신앙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잘 하라고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많으면 신앙 약한 성도는 피해를 보기 쉽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런 위험을 안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바울사도께서는 부활로 인한 승리를 다짐하시면서 모든 성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바람이 불 때 흔들려 쓰러집니다. 이빨도 한 번 흔들리면 못 쓰게 됩니다. 이와같이 성도의 신앙도 한 번 흔들리면 피해도 받고 회복하는데도 힘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성도가 완악해질 때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새 장작으로 불을 피면 잘 붙어도 불타다가 꺼진 장작은 더 피기가 어려운 것처럼 흔들리는 신앙은 잘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릴 기미가 보일 때 속히 붙잡는 노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58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까요? 성도의 기본 의무인 믿음과 생활과 사명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①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고, ② 생활이란 성경 말씀따라 사는 것이며 ③ 사명이란 믿음에 근거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힘쓰고 수고하는 것이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 세 가지에 흔들리지 않을 때 구원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순서가 처음에 믿는 지식에서 시작하여 다음에 실천 생활을 하고 그 다음에 헌신, 충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가 흔들릴 때는 먼저 충성이 떠나가고 다음에 생활이 부실해지다가 나중에는 안 믿는 자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히 3:14)

2. 그러면 성도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믿음의 기초가 아주 든든한 사람은 흔들릴 우려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주 든든하지 못한 성도가 흔들릴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2)여기에서 흔들리는 이유를 분석해 본다면 ① 성경지식의 부족이나 신학적 지식의 부족에서 잘못된 유혹을 받을 때 ② 자신의 현실적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였을 때(갈 5:24) ③ 환난, 고통, 죽음에 대한 위험 극복의 연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약해지는 것과 타락하는 과정을 보면 거의가 지식 부족, 현실 정욕, 환란, 죽음에 대한 연단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아담은 마귀의 유혹하는 열매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로움직(현실 정욕) 함에 넘어갔고, ② 노아는 포도주에 흔들렸으며 ③ 아브라함은 무자식에 흔들렸고, ④ 모세는 백성들의 반발과 아우성 치는 바람에 흔들려 혈기를 부렸으며 ⑤ 발람은 재물과 명예에 흔들렸고, ⑥ 삼손과 다윗은 여자에 흔들렸으며 ⑦ 나만 장군은 체통에 흔들렸고, ⑧ 요나는 미운 감정에 흔들렸으며 ⑨ 가룟유다는 축재에 흔들렸고, ⑩ 베드로는 죽을 위험에 흔들렸으며 ⑪ 예수님의 제자들은 광풍에 흔들렸고, ⑫ 마가와 데마는 고생 때문에 사명에 흔들렸습니다. 어떤 분은 명절이나 길흉대사에 약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여호수아, 다니엘, 세례요한, 바울사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린 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물건을 선택할 때 흠 있는 물건을 취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신앙생활과 사명생활에 흔들리는 경력을 가지면 역시 명예로울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비상한 각오를 가지시고 믿음과 생활과 사명에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흔들림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성경적 지식이 많아야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2)자신과 현세를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욕, 정욕, 명예욕 등 헛된 영광을 죽이지 못하면 유혹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성도의 최후 영광을 부활과 내세에 두어야만 모든 난관을 이기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하시므로 “성도가 견고한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는 성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이 부활과 내세의 상급에 있음을 실제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35 과 연보 문제와 교역자 동정 (고전 16:1-12)목록으로


위 본문 말씀은 바울사도가 연보 문제와 교역자 동정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신 내용입니다. 1-4절 말씀은 “연보 모금과 전달하는 문제”에 대하여, 5-12절은 “복음 사역자의 동정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연보 모금과 전달하는 문제에 대하여(1-4절)

1)1절에서 “성도를 위한 연보”는 구제 헌금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헌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필요로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선교비나 교회 운영비를 필요로 할 수 있으므로 그런 명목으로 하나님께 헌금하고, 하나님(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헌금 중에 감사 헌금이나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릴 수 밖에 없고, 그런 헌금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게 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헌금은 대부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확보하기 위한 헌금이 많습니다. “연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고린도후서 8장을 참고하십시오. “연보”란 말의 뜻은 “덜어서 보충한다”는 뜻으로 가난한 대상을 위한 구제 헌금을 말합니다. 모금 방법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에 명한 것과 같이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2)그 방법은 갈라디아 교회에 명한 것처럼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미리) 저축하여 놓았다가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에 연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2절) ① “매 주일 첫 날”은 주일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일에 연보를 하였음은 곧 주일 예배 회집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계 1:10의 “주의 날”이란 말씀이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 계명을 주셨지만(출 20:8-11) 이 제도가 형식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하나님이 좋지 않게 보셨고(사 1:13, 암 8:5) 또 안식일은 천국의 모형인 바(창 2:1-3)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므로 천국이 성취된 바 되었으므로(막 1:15)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회로 안식일을 폐하셨습니다.(호 2:11, 애 2:6) 그리고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신 즉 사도들이 그 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지키게 되었고, 예수님도 그 날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계 1:10) 사도들의 모범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기초이기 때문에(엡 2:20) 신약 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 바른 생활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 제도는 폐하여졌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경배를 위하여 행사하는 그 사명은 안식일 정신에서 성수 주일 정신으로 계승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② 주일에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한다”는 뜻은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구제금을 모금하되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각자의 소득에 따라 헌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헌금 액이 십일조의 뜻을 갖는 것인가?할 때에 그런 의미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재물을 소유한 정도에 따라 구제 헌금을 하라는 보편적 지도를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헌금은 양심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많아도 믿음 부족으로 많이 못하는 경우와 적어도 사명으로 많이 하는 자유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에 십일조 헌금은 모든 것(생명과 몸과 헌물)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정신 속에 최하의 수준으로 포함될 뿐 헌금의 독립적 계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고후 8:5) 그 이유는 율법(십일조 제도)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또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를 사용해야 될 레위인이나 제사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이 갈 때에 헌금하지 않게 하라”하신 말씀은 구제금으로 모아 놓은 돈을 전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서는 헌금을 꼭 강단에 드리고 목사의 축복 기도를 받는 것을 목적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제도는 사람의 기복주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제도이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마 6:2-3)는 말씀에도 위반되는 것입니다. 헌금은 취급자에게만 전달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③ 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가시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연보 전달 책임자로 추천한 사람(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전달하면 너희의 은혜(구제금)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를 구제하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 곧 은혜받는 일”로 말씀하셨으니 은혜를 받지 않고서야 어찌 구제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④ 4절에서 “그 때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에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시고 미구에 고린도에 가실 뜻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2. 복음 사역자의 동정(動靜)에 대하여(5-12절)

1)5절에서 바울은 “헬라의 북부인 마게도냐 지역을 지난 후에 고린도로 가실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가시려면 헬라의 북쪽 항구인 “암비볼리” 항구로 가서 마게도냐 지역을 통과하여(행 17:1) 남쪽 아덴과 고린도로 가시는 육로가 해로만은 못하지만 다른 교회들을 순회하시면서 가셔야 하기 때문에 합당한 여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6절 말씀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면 “혹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과동할 듯도 하고,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의 다음 행선지로 가는 일을 위하여 협력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과동할 듯 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자신의 여정을 확정하지 않는 뜻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인도 섭리에 따라 행동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18:1, 고전 4:19, 약 4:15, 히 6:3) 또 “나의 갈 곳으로 보내 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구제비나 선교비의 주선으로 바울의 다음 여정의 길이 열리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3)7절에서 바울은 “지나는 길에 고린도에 잠시 들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고린도에 가시게 되면 하나님의 허락(섭리)에 따라 상당 기간(얼마 동안) 계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4)8절에서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계셔야 좋을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행을 위하여 즉시 출발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순절”은 구약 시대의 “초실절” 시기이기도 하지만(출 34:22) 신약의 성령 강림절입니다.(행 2:1) 그 때에 “바울에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오순절 시기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을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행 19:19-20에 보시면 에베소에서의 복음적 역사가 나타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사건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다”하심은(행 19:23, 고전 15:23) 바울의 생명을 노리는 핍박자들의 감시로 인하여 아무 때나 바울의 거동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내신 것 같습니다.

5)10절에서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에베소에 파송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라 혹 무례한 교인들로 인하여 젊은 사역자가 두려움을 느낄 것까지 염려하여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도 바울과 같은 주님의 사역자라”고 천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자라 하여 그를 멸시하지 말고 그의 교회 살피는 사명을 마친 후에 평안히 돌아오게 하고 또 올 때에 그 곳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11절)

6)또 12절에서 “아볼로”에 대하여도 디모데와 함께 온 형제들이 돌아갈 때 같이 고린도에 가 주기를 권하지만 “지금은 (고린도교회, 과도기) 갈 뜻이 없다 하나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갈 뜻이 없는 이유”는 그 당시에 고린도교회가 혼란하였고, 디모데가 그 정황을 살피러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화평한 기회에 가는 것을 좋게 여기신 듯 합니다.

 

 

제 36 과 권면과 결론 (고전 16:13-24)목록으로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13-18절 까지는 “권면의 말씀”이고, 19-24절은 결론의 말씀입니다.

1. 권면의 말씀(13-18절)

1)13절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하십니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더욱 근신하여야 하며 남자다운 용기를 갖고 지혜롭게 대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절)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권면할 때 또 징계할 때 반드시 사랑으로 하여야 합니다. 권면을 받는 자가 사랑으로 권면 받는 줄 알도록 하여야 합니다.

2)15절에서 “스데바나의 집(가족)”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는 바울이 아가야 지역(헬라의 남부 지역)에서 전도하셨을 때 처음 믿는 성도(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를 작정한 자라고 천거하셨습니다. 교회마다 성도 섬기기를 작정하고 노력하는 성도가 있을 때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또 16절에서 “이같은 자들(성도를 섬기는 자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하셨으니 이는 봉사에 솔선하는 성도가 있을 때 시기하거나 흠 잡으려 하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며 협력할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3)17절에서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에베소에 온 것을 기뻐하셨으니 그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었고, 그들이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런 자들을 알아 주라”고 하셨습니다. ① “스데바나”는 15절에서 설명하였고,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도 고린도교회 성도로써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여 소식을 전하고 섬긴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뻐하였습니다. ② 이 세 사람은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였으니 참으로 귀한 인물들입니다. 요즈음 교역자나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는 성도가 귀합니다. 신앙이 답답하고 봉사에 모자람이 있으면 답답함을 주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힘써서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③ 그리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신앙의 선배들과 봉사의 역군들을 알아 주고 칭찬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결론의 말씀입니다.(19-24절)

결론의 말씀은 문안과(19-21절) 저주와(22절) 축복(23-24절)으로 나누어집니다.

1)19절에서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들)과 아굴라, 브리스가 부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문안하였으니 여기에서 “아굴라 부부는 자기 집에서 교회를 한 것을 볼 수 있고, ‘브리스가’란 호칭이 ‘브리스길라’(행 18:2)”와 다르지만(롬 16:3) 이는 발음상의 변형일 것입니다. 20절에서는 에베소교회의 모든 형제도 문안하니 이 문안을 받을 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안의 소식을 받을 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안의 소식을 받을 때 “기쁨과 감사로 서로 입맞추라”는 뜻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입맞춤의 뜻을 설명하여야 했지만 이제는 이것이 보편적 인사법임을 알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이 친필로 문안하심”은 이 서신을 기록할 때 대필자를 세웠으나(골 4:18, 살후 3:17) 편지 말미에 바울이 친필을 첨부한다는 뜻입니다.

2)22절에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주께서 가까이 임하신다” 하셨으니 이 저주는 재림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저주한 사실이 있었는데(말 4:6) 바울도 저주하였습니다. 그 저주의 대상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3)23-24절에서는 축복을 하였으니 이는 편지 말미의 격식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와 함께 하고 또 나의 사랑(바울의 성도에 대한 애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에게 성도에 대한 애정과 축복이 있어도 이 축복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즉 주님의 중보자적 허락에 의하여 전달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53. 바울의 부탁 (고전 16:1-12) 목록으로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

1. 구제 헌금을 미리 준비하라는 부탁입니다.

1)행 11:28에 보시면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이 있고, 행 11:29과 롬 15:26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흉년이 심하였기 때문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구제의 손길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미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를 순회하시면서 구제금을 준비하게 하신 사실이 있었습니다.(갈 2:10) 갈라디아교회들은 아시아(지금 터키) 지역의 교회들이므로 이 모금이 아시아에서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마게도냐”에도 가실 뜻을 말씀하셨는데 고후 9:1-21에 보시면 그 곳에서의 구제 헌금 사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모금에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2)헌금은 주일에 모일 때 하는 것이 좋고, 또 “각자의 소득에 따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에 모임을 갖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때로 시작하여(요 20:19-20) 사도들이 모였고,(행 20:7) 사도 말기에 “주의 날”로 정착하였습니다.(계 1:10)

3)따라서 헌금에 대한 부탁은 “주일 날 모여서 거두라”, “소득의 비례에 따라 시행하라”, “미리 준비함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고후 8:5) 성도가 가난한 자를 외면하거나 구제 헌금에 인색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눅 25:45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거처 문제와 다음 선교지에 가도록 주선하라”는 부탁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급히 고린도로 가시지 못하나(8,9절) 기회가 되면 가실 것입니다. 그 때에 마게도냐 지역을 거쳐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5절) 바울이 고린도에 가시면 금방 떠나시는 것이 아니고, 상당 기간 계실 뜻을 말씀하셨습니다.(7절) 그러니까 바울이 상당 기간 거처하실 수 있도록 영접하는 준비가 있어야 하고, 또 6절에서 “너희가 나를 갈 곳으로 보내 주게 하려 함이라”하신 말씀이 선교비를 주어 다음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선교 초창기에는 자신이 벌어서 선교비를 쓰셨지만(행 18:3) 교인이 있을 때는 교인들이 선교비를 주어서 선교에 동참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대우하여 생활비와 선교비를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고전 9:11)

3. 나이 어린 “디모데” 사역자를 선대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10-11절에 보시면 “디모데는 바울과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인즉 저로 두려움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고 저를 멸시하지 말며 그 곳 형제들과 함께 평안히 돌아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마다 젊은 사역자를 가볍게 보거나 무시 또는 괴롭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역자는 그 연령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일 뿐 성도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괴로움 받을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웃이 사랑의 대상이라면 교역자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성경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4) 그런데 왜 괴롭게 하는가? 교역자를 교인들의 고용인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교역자가 교인들의 고용인이면 고용하는 인건비를 교인이 주고 고용 임무를 맡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인의 고용인 노릇할 교역자가 없을 것이요, 교인도 자기 재산으로 교역자의 고용비를 주고 주인 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금하고 그것으로 교회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의 지위를 무시하고 교인이 주인 노릇하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며 부흥되지도 않습니다. 교역자가 자신의 사명에 따라 일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만 부흥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교역자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것으로 인건비를 받으며 성도를 유익하도록 지도하는 자인데 어찌 교인이 교역자를 괴롭게 할 수 있으며 고용인처럼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교회의 미숙함과 교역자에 대한 인식과 도덕성을 많이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교역자로부터 신앙적 유익을 얻으려면 교역자의 지도에 순종하고, 그를 존경하며 섬겨야 할 것이요, 교역자에게 부족이 있어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과 성경으로 보충하는 입장에 서야 할 것입니다. 젊은 디모데가 혹이라도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잘 선대할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 부탁, 선교비 준비, 그리고 디모데 사역자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54. 믿음과 봉사 (고전 16:13-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린도전서”를 결론짓는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본문 13절의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씀이 믿음을 권장하는 말씀이고, 또 15절의 “스데바나의 집이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했다”는 말씀과 16절에서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씀과 17절에서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는 말씀, 또 18절에서 “저희가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는 말씀은 모두 봉사에 관한 교훈이기 때문에 이 말씀들을 근거로 하여 “믿음과 봉사”라는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4대지로 분류하면 ① 13-14절은 “바울의 특별한 권면”이고 ② 15-18절은 “봉사적 성도를 천거함”이요 ③ 19-21절은 “각종 문안 전달”이요 ④ 22-24절은 “저주와 축복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사도의 특별한 권면에서 13-14절을 보시면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다워라(ἀνδρίζεσθε;명령사), 강건하여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1)여기에 “깨여라”는 말씀은 부주의에 반대되는 말씀으로 늘 신앙적으로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돌다리도 두르려 봄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혹이 없는 일은 없으니까 늘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자칫하면 나태, 방심, 실수로 미끄러질 수 있고, 도 불건전한 신앙의 유혹이 많으니까 경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믿음에 굳게 서라”하셨으니 이것은 십자가를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가까이 모신 상태를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유혹을 받는 만큼 죄를 자주 지으니까 늘 십자가 속죄의 은혜를 힘입으며 살아야 하고, 또 죄나 환난에 대하여도 늘 약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놓치지 않듯이) 든든히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남자다우라”는 말씀은 남자의 성격과 체질이 여자보다 급하고 용감한 것을 염두에 두어서 신앙생활을 과감하고 힘있게 또 모험적으로 감행하라는 것이요

4)“강건하여라”하는 말씀은 육체가 건강하듯이 그 영적 신앙과 생활도 불건전하거나 병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말고, 어느 모로 보든지 건전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요

5)“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고전 14:1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을 대할 때나 모든 사건을 처리할 때 그 방법과 목적을 사랑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일해주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합당하게 여기시도록 지도해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동정으로 용서나 평안만 안겨주는 것이 다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요,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 영광에 부합되도록 행하는 것이 사랑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2. 봉사적 성도를 천거함에 대하여

1)스데바나의 집 식구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스데바나”는 “아가야”에 고향을 둔 사람으로 바울사도가 고린도 지방에 와서 전도를 할 때 최초로 세례를 받고 믿게 된 성도인데(고전 1:16) 그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어려움 당한 성도들을 상대로 기도나 권면이나 구제 등의 보살핌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봉사할 것을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이런 성도님들이 많아질 때 소리없이 부흥될 수 있을 것이므로 칭찬의 대상이 된 것이고,

2)“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가 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이 헌신적 봉사를 하니까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서 적극 협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추호의 시기나 빈정거림이나 헐뜯는 일이나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는 일이 없고, 헌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존경하며 협조하는 교인들이 많았으니 이런 봉사 협조 방법을 오늘의 성도님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3)“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선행을 칭찬하셨으니 그 당시에 이 세 사람은 고린도 지방에서 바울이 머문 에베소에 와 있었습니다. 이들이 교회 일선에서 봉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울사도에게 교회에 대한 안부 등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온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었다 하였으니 그들이 물질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부족한 성도를 많이 도와 덕을 세웠음이 확실하고 ② 따라서 “바울사도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봉사심이 많은 성도들을 볼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고, 이해성이 넓으며 봉사심이 많은 성도님을 보면 속이 다 후련해져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을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명이 꼭 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같아도 목회 방법이나 법 해석이 달라서 충돌하는 경우가 많은데 혹 뜻이 꼭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시원한지 모릅니다. 위의 세 사람은 바울을 시원케 해 주었습니다. 그런 성도가 많으면 역시 교회가 잘 발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고 존경하며 복종하고 협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문안 전달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와 성도 간에 또는 성도와 사역자 간에 안부를 묻고 전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1)그래서 19절에 보시면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 문안을 하였고,

2)또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간절히 문안을 했습니다. “간절히 문안을 했다”는 것은 평안의 여부를 자세히 물으며 “평안하기를 갈망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전도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로마와 고린도와 에베소 등지를 전전한 사람인데 에베소에서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주어 교회를 하게 하였고, 또 로마에서도 그렇게 하였습니다.(롬 16:3) 자기 집을 “교회 하라”고 내 주는 사람, “집을 팔아 예배당을 지으라고 내 주는 사람”은 그와 같은 봉사의 역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가정 집에서 시작이 됐는데 그 교회 권속들이 고린도 성도에게 문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3)에베소에 있는 모든 형제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문안을 하니까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한 형제요 권속인 것입니다. 근동 지방에서 반갑고 친한 사람들은 그 성별을 구별하여 입맞춤으로(볼을 맞대는 식) 친교의 뜻을 표한 것입니다.(21절은 강해서 참고)

4. 마지막에는 저주와 축복의 말씀인데

1)22절에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주님의 재림이 임바한 때에), “누구던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하셨으니 ① 이것은 사도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조건으로 저주도 선포할 수 있다는 뜻이요 ② 따라서 이 저주는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반사적 역할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23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하셨고,

3)24절에서 “나의 사랑(즉 바울의 성도에 대한 애정)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ἐν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번역, 엡 1:3, 2:7) 즉 예수님의 인정하시는 바 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전달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요약하면 ① 믿음의 경성과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셨고, ② 성도 섬기는 봉사와 교회 섬기는 헌신을 칭찬하셨으며 ③ 성도 간의 문안과 친교를 장려하셨고, ④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도적 사랑이 성도에게 풍성하기를 기원하신 사실을 교훈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보충 55. 시원케 하는 성도 (고전 16:15-18) 목록으로


장마와 더위가 계속되는 중에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따라서 정신적, 육체적 생활의 환경이 퍽 답답하고 짜증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때에 서로 서로 시원케 해 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덥고 짜증날 때에 시원한 바람과 찬 물 한 컵이 그 사람을 시원케 해 주는 것처럼 저희들은 서로 서로의 심기를 시원케 해 주는 역할을 잘 하여 더위를 견디는데도 도움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보시면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하셨고, 그 중에서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요, 그 가족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자이며 성도의 부족을 보충해 주는 자라”하시므로 그들의 시원케 해 주는 생활의 일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체로 이해성이 많고 덕을 끼치는 사람과 교제를 하면 만족과 시원함을 느낄 때가 있지요. 이렇게 서로가 자기 무장을 잘 하여 누구에게든지 시원한 감을 줄 수 있는 가을 바람 같은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활하여야 이웃의 마음을 시원케 해 줄 수 있는가?할 때에

1. 성도는 기쁨의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빌 4:4에 보시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기쁨, 만족, 희망의 표시가 없으면 신앙 생활의 보람을 나타낼 수도 없고, 따라서 상대방 마음에 시원한 감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희망의 근거를 붙잡고(희망의 근거는 예수님) 만족과 기쁨의 표시를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희망의 근거를 붙잡은 성도는 기쁨을 갖기 위하여 먼저 ① 모든 염려를 제거하는 기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아주시는 분이십니다.(벧전 5:7) 그리고 인간의 모든 염려는 이 세상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성도가 세상의 미련을 초개같이 버리고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긴 후 의연한 자세와 기쁨과 만족과 희망의 자세를 보여야만 상대방을 시원케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② 되도록 염려와 짜증을 이웃에게 전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기쁨을 발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 이해성이 넓은 마음을 가지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해성이 많으면 상대방에게 시원한 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해성이란 신앙에 근거한 지식과 경험에 의한 지식이 풍족할 때에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근거한 지식은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아량 넓은 마음입니다. 약자를 사랑해 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마음가짐이라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 줄 수 있을 것이요, 경험에 의한 지식도 이웃 사람들의 입장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떤 복잡한 문제를 갖고서 법률전문가에게 문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은 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라 하면서 쉽게 그 문제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과 경험이 부족하면 그만큼 답답한 것이 많지만 신앙에 근거한 넓은 마음과 경험에 근거한 지식이 풍성하면 서로의 마음을 시원케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서 넓은 마음과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3.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에 상대방에게 시원한 감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실이 엉키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각자가 자기 책임을 감당치 못할 때는 마치 실이 엉킨 것처럼 매사가 풀리지 못하여 답답함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문 거는 책임을 잊었다가 실물을 했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무책임이 얼마나 큰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까? 대인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책임이 있다면

1)윗 사람에 대한 복종의 책임이 있고

2)이웃에 대한 약속 시행의 책임이 있으며

3)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책임이 있고

4)주 안에서 자족과 감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마 8:9에 보시면 백부장이 그 하인에게 명령을 할 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하라 하면 하나이다”했으니 그 하인의 복종이 얼마나 그 주인을 시원케 했습니까? 저희들이 윗 사람에 대한 복종이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이 이렇게 잘 실현된다고 하면 그는 복종의 책임으로 이웃을 시원케 하는 자요 또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과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마치 교통 규칙을 잘 지키는 거리와 장애물로 인하여 교통의 체증을 당하는 형편과 대조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약속을 안 지키면서(특히 돈 거래에 대한 약속) 이유도 대책도 말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반드시 약속, 책임과 할 말은 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봉사적인 책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봉사적인 마음과 능력을 겸하여 갖고 계셨습니다. 외아들이 죽어서 울며 답답해 할 때 죽은 아들을 살려주시므로 시원케 하셨고, 앞 못 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므로 시원케 하셨으며 포도주가 모자라서 답답할 때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많은 사람의 짐을 벗겨 주시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삿 19:11에서 도움을 청하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유숙처를 제공한 노인이 있었고, 눅 10장에서 한 강도 만난 자가 있었는데 그가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제사장이 피하여 가고 레위인이 피하여 갔으니 그 환경을 타개하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리고 가고 치료를 부탁하며 더 들어가는 치료비를 올 때에 책임지겠다” 하셨으니 이 얼마나 이웃을 시원케 한 것입니까? 이렇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책임은 주위 사람들을 시원케 해 주는 미덕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넉넉하면 시원하고 모자라면 답답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시면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집이었고,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세 사람은 누구던지 성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전문가로써 바울사도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무덥고 짜증이 많은 생활 속에서 서로 서로 상대방을 시원케 해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