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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론

저자 지영근 목사

목 차

제1과 서론과 감사 (골 1:1~8) 5  바로가기

제2과 성도를 위한 바울의 기도 (골 1:9~12) 7 바로가기

제3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골 1:13~20) 9 바로가기

제4과 구원의 내용과 방편 (골 1:21~23) 12 바로가기

제5과 바울의 사명적 고백(골 1:24~29) 14 바로가기

     설교보충 1. 흔들리지 않음 (골 1:23) 16 바로가기

제6과 일곱 가지 바라신 점 (골 2:1~7) 18 바로가기

제7과 노략할까 주의하라 (골 2:8~15) 20 바로가기

제8과 이단을 경계하라 (골 2:16~23) 23 바로가기

     설교보충 2.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26 바로가기

제9과 변화된 자의 사명 (골 3:1~11) 28 바로가기

제10과 변화된 자의 목표와 생활 (골 3:12~17) 31 바로가기

제11과 부부, 혈육, 주종 관계 (골 3:18~25, 4:1) 33 바로가기

제12과 전도를 위한 권면 (골 4:2~9) 36 바로가기

제13과 문안적 결론 (골 4:10~18) 38 바로가기

먼저 드리는 글


하나님의 은혜로 골로새서 강론을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해설에 관한 문제, 성구 찾는 문제, 논리적 정리 문제 등, 현재의 건강 상태에서 힘들게 끝냈습니다. 깊은 연구나 학자들의 문서를 참고하지 않은 채, 오직 묵상과 평신도 중심의 이해 차원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앞으로 로마서 강론을 끝내야 신약 전체의 강론집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이 힘주시는 대로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행정적으로 단순화되기 위하여 헌법의 새로운 문서를 구상 중에 있습니다. 후시대에 참고해주기를 바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필자가 쓴 모든 문서가 종목별, 제목별, 성구별로 홈페이지에 입력되어 사용하시는 성도님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필자의 최종 목적입니다. 문제는 성경의 글자를 헤아릴 정도로 살피고, 또 다른 사람의 문서를 꼼꼼히 읽을 줄 아는 성도가 몇 분이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서를 읽으시면서 기록자의 심정으로 끌려간다면 은혜 받지 못할 성도가 없을 것입니다. 홈페이지(www.ncbc.or.kr)에 기대를 걸어주십시오.

이 문서를 읽으시는 성도님들에게 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4. 1. 31.


저자 지 영 근

 

제 1 과 서론과 감사 (골 1:1~8) 목록으로


(골로새서 강론 쓰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출판된 「기독교신앙백과」에 수록된 골로새서 개론(p.640~641)을 살핀즉 “에바브로 디도”가 5회 기록된 중 앞부분 4회 기록이 “에바브라”의 오기임을 발견하여 교정합니다.)

“골로새”는 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7교회 지역과 인접한 성읍입니다. 성경에 수록된 지도에서 찾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89년도 성지 순례 때 “라오디게아”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골로새를 답사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전도 사역 중 골로새에 가셨다는 기사가 없음을 보아 다른 사역자의 전도로 교회가 설립된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다른 사역자는 “에바브라”입니다(1:7).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이 서신을 쓰실 무렵에 로마 감옥에 함께 갇힌 “에바브라”(몬 23절)가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로 있었다는 기록(골 1:7)이 있음을 보아 그의 영향을 받은 줄 압니다. 골로새 교회에는 몇 사람의 일군이 있었으니, 하나는 초기에 사역한 “에바브라”가 있었고, 다음에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아킵보가 있습니다. 오네시모와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 교인임은 골 4:9, 17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이 골로새 교회 중직자임은 몬 1:1~3에서 그의 집을 교회당으로 사용한 사실과 골로새 교인 아킵보와 함께 안부의 대상이 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서 로마 감옥에서 바울의 전도로 변화를 받고, 주인 빌레몬에게로 돌아가서 골로새 교회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몬 1:10~16). 골로새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함께 있던 “두기고”를 통하여 에베소서를 보낼 때(엡 6:21, 딤후 4:12) 함께 보낸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골 4:7).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시게 된 동기는 안부도 중요하였겠지만 골로새 교회에 불순한 사상(이단)이 침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기 때문에(2:4, 8, 18) 그와 같은 잘못된 사상을 경계하게 하시기 위하여 쓰신 것입니다(골 2:4). 그 사실들을 본문에서 살피실 수 있습니다. 1~2절은 이 서신의 “서론”이고, 3~8절은 “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서론(1~2절)

1) 1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 하신 말씀은 엡 1:1의 뜻과 같고, “형제 디모데”가 이 서신을 쓰시는 바울 사도와 함께 있으면서 송신자 입장에 동참한 것입니다. 영감적 기록자는 바울 사도이고, 디모데는 동참한 것입니다.

2) 2절에 나타난 말씀도 엡 1:2의 말씀과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신실한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도적 특권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그리고 말씀 영감을 주시는 성령님)이 신실한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축복하셨으니 이는 편지의 격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2. 감사에 대한 내용(3~8절)

1) 3절에서 복음 사역자들은 어떤 형편에서나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였으니”, 이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미덕을 들은 때문이었습니다.

2) 그 신앙적 미덕은 바로 4~5절에서 말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진 때문이었으니, 이 사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진 신앙적 미덕과 같은 것입니다(살전 1:2~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중심에 있는 것이고,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분별이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 하시므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내세와 내세의 상급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점에 대하여 감사하신 것입니다.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함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진리를 과거에 바울 사도의 제자인 “에바브라”로부터 듣고 아는 바라는 말씀입니다(몬 23절, 골 1:7).

3) 6절에서는 각처에서 성도들이 진리에 근거한 생활을 공백 없이 실현하므로 결실하는 사실을 감사하였습니다.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골로새 지역의 전파를 뜻함) 또한 온 천하(다른 지역을 뜻함)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하셨으니, 여기의 “열매를 맺어 자람”은 전도의 열매와 믿음 성숙에 진전이 있음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꾸준한 진리의 역사와 결실하는 결과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든든히 믿고 사모할 때에만 진정한 사랑의 역사와 믿음의 투쟁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7~8절에서 감사하신 일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에바브라”에게 잘 배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우리)과 함께 종 된, 바울의 사랑하는 제자이고 신실한 일군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라”(8절) 하셨으니, 여기의 “성령 안에서”란 뜻은 진실한 보고(영적 신앙에 관한 사실을 전달)를 뜻합니다. 신앙에 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성령 안에서(또는 진리에 입각하여)만 할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소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후 골로새에 가서 진리의 사역을 하다가 로마에 계신 바울과 합류하였고, 그 차에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전달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신 것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①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일치한 신앙을 가진 점,

② 진리의 역사가 골로새 뿐 아니라 각처에서 결실로 나타나고 있는 점,

③ 에바브라를 통하여 정통적 진리를 전수받은 점,

④ 에바브라를 통하여 정통한 소식을 알게 된 점을 감사하신 것입니다.

 

 

제 2 과 성도를 위한 바울의 기도 (골 1:9~12)  목록으로


본문에는 바울 사도가 성도들의 의미 있는 생활을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편지로 기록하여 보내신 것은 그 기도 소원에 따라 생활해 줄 것을 바라신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성도들과 교역자들이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들과 대조해보시고 바울 사도의 신앙 발전을 위한 소원 기도를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9절의 “이로써 우리도(로마에 바울과 함께 있는 사역자들)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말씀에서 “듣던 날”부터란 에바브로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들으신 것인바(7절), 그 이전에는 전혀 기도를 안 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소식을 통하여 정황을 아신 후 더욱 목적 있게 기도하셨다는 뜻이며, 또 중요한 것은 한두 번 기도하시고 그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실 때마다 연속적으로 간구하셨다는 뜻입니다. 성도들도 어떤 과제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시작하셨으면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성도를 위한 기도는

1. 성도들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은 바로 성경을 깨닫고 성경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마음이 채워지도록 기도하셨으니, 이는 곧 지혜와 총명의 충만을 구한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성도는 성경을 살핌으로 능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은 엡 1:17과 3:3~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이 기도의 응답은 성경의 맛을 알고 성경 공부에 끌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2. 10절에서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할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 1:27에서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성도는 범사를 행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하여(빌 2: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 대하여 여러 편의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하나님은 믿음(히 11:6), 복종(삼상 15;230)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마 7:21, 눅 12:47).

3.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하나님과 사람을 다 사랑하는 일입니다. 선한 일을 하여 맺어질 열매는 전도 열매와 사랑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해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9절 말씀과 비슷하지만 9절은 “하나님의 뜻(계획 같은 것)”을 아는 것이고, 본 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적 앎이 더 풍성해지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입니까? 신앙생활의 의미를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서 맛보는 성도가 되십시오.

5. 11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성도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행 1:8에서도 “능력을 받고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시 62:11) 하나님이 주시는데(슥 4:6) 바울 사도가 구하신 능력이 무슨 능력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그 영광의 힘”이란 하나님께 속한 능력을 수사(修辭)한 표현이고, “모든 능력으로 행하게 하심”은 연약을 탈피한 힘 있는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능력을 받으면 지혜와 용기가 생겨서 성숙한 믿음생활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6. 특히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견디는 것과 참는 것도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고전 13:7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도 “오래 참는 것과… 견디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 영광의 능력(성령님의 역사)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견딤과 인내함은 약자의 표현이 아닌 능력자의 처신임을 알 수 있으며, 바울은 고난에서의 견딤과 잘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7. 12절에서 “복음 사역의 열매를 거두므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란 복음 사역의 정의성을,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음”은 성도들의 신앙적 보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합당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풍성한 은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성도를 위한 기도를 요약하면,

① 신령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② 범사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③ 모든 선한 일에 열매 있기를,

④ 하나님을 더욱 앎으로 친교가 넘치기를,

⑤ 모든 능력을 힘 입기를,

⑥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기를,

⑦ 부흥의 열매로 감사하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 3 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골 1:13~20)  목록으로


본문에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어서 총 제목을 잡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3~14절은 “구원의 일반적 정의”요, 15~18절은 “구원자 예수님의 신분을 설명하신 말씀”이고, 19~20절은 “중보 사역의 결과”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본문 전체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된 내용으로, 매 절마다 예수님의 신분을 설명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방의 교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대비하려면 예수님의 신분을 옳게 아는 것이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1. 13절은 구원의 일반적 내용으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구원의 섭리자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은 죄악 세계와 마귀의 속박에서 빼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빼내어주신 방법은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불신앙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옮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마 17:5). “사랑의 아들의 나라”란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지상과 천상을 일괄하여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세계로써(막 1:15, 눅 17:20~21, 요 14:3) 지상의 믿음 세계와 내세의 천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나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2. 14절은 예수님이 “구원의 방편자 즉 대속자 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 하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의 구속 곧 죄사함”이란 예수님이 대속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란 엡 1:4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신 뜻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대속 사역(십자가로 구속함)을 전제로 구원 대상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실지라도 구속자(대속)가 없이는 죄의 용서를 못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살후 1:6~7, 사 30:18). 13~14절에서는 “구원의 내용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대속자이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15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영으로 계심, 요 4:24)의 형상”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신즉 보이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이 볼 수 있도록 형상 있는 하나님 곧 도성인신하신(요 1:14) 예수님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 하셨고(요 5:39),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나타내실 분이 없다”(마 11:27)고 하셨습니다.

4.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서도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셨다”는 뜻은 인간적 출생과 같은 뜻이 아니고,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나타내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고, 처음과 나중이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1, 계 1:8).

5. 16~17절에서 “창조자”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원문은 그 안에서) 창조되되” 하셨고, 17절에서는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셨으니, 이 뜻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창조하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단독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하셨으나, 요 1:2~3에서는 예수님도 창조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성령님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있음; 욥 26:13, 시 104:30). 따라서 “그에게, 그 안에”란 표현은 삼위의 하나님이 다 함께 창조하신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무엇들을 창조하셨습니까?

1)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의 “하늘과 땅”은 우주적 현상계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물질계와 영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에 들지 않는 것은 영계나 현상계를 망라할 때 하나님 신분 외에는 다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2) “보좌들, 주권자들, 정사들, 권세들, 또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만물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과 창조의 목적이 “그를 위하여”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지요(창 1:31). 문제는 “보좌들, 주권자들, 정사들, 권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세계(인간 세계)에서와 보이지 않는 세계(천사 세계)에서 쓰임 받는 자들에게 주시는 각종 직책과 능력의 은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롬 13:1, 요 19:10~11). 하나님은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필요에 따라 권세와 능력을 주시니까요.

6. 18절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같은 말씀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과 교회의 일체성을 의미하고(행 20:28),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 하신 것은 통치자의 뜻과 주인의 뜻을 갖는 것입니다. 행 20:28과 계 2:1~5에 보시면 예수님이 교회를 통치하시는 뜻이 나타나 있고, 또 “근본”이라 하신 뜻은 설립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 16:18).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심”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고전 15:20) 주님과 연합된 성도에게 장차 영광의 부활을 약속하신 말씀이고,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은 14절의 “구속 사역”과 18절의 “먼저 나신 부활”로 절대자와 심판자 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은 권위와 영광을 가지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인하여 심판권을 아들에게 맡기시므로(요 5:24, 27) 으뜸이 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19절에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모든 충만으로 자기 안에 거하게 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비유컨대 아버지가 아들의 성공을 바라셨고, 성공한 아들이 아버지를 자기 집에 모신즉 그 아버지에게 큰 만족과 성취감을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으뜸 자리에 계신즉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과(요 10:38, 17:21) 성도들도 모든 은혜의 충만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시 23:1).

8. 2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화목의 중보자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것”은 끝부분의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죄인을 성도 삼아) 사이를 화평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래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롬 2:5, 엡 2:3)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죄사함 받음으로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과 화목 되게 하신 것은 지상의 성도들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 당시에 인간에 대한 진노로 만물(자연계)에게 내리셨던 저주를(창 3:17) 많이 완화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연을 많이 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곧 땅에 있는 만물들과 화목하신 증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늘에 있는 것들과 화목 되기를 기뻐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의 영들로서 하나님이 그들과도 함께 천국의 영광을 누리시는 모든 일들이 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의 결과한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타락의 결과로 피조물들과 불화한 것을 화해하시고자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 일을 중보자 역할로 성취시켜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울 사도의 증언을 깊이 깨달으셔서 주님과의 관계를 화목으로 더욱 긴밀하게 유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구원의 내용과 방편 (골 1:21~23)  목록으로


필자는 본문을 읽고 “구원의 내용과 방편”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21절은 “악인들의 믿기 전의 형편”을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는 구원의 방편으로써 22절에서 “십자가”를, 23절에서는 “믿음과 복음 전파”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와 믿음과 복음 전파 세 가지가 구원의 방편이 되고, 구원의 내용은 “책망할 것이 없도록 만드신 다음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 악인의 믿기 전의 형편(21절)

믿기 전의 신분은 누구나 다 악인입니다. 창조자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원수지간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불신으로 하나님을 거절하였고, 하나님은 그런 이간들을 진노의 대상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롬 1:18~23). 또 이런 상태에서 속죄와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2. 구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22절)

1)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사” 하시므로 단절되고 원수지간이었던 관계가 해소된 것이고,

2) 하나님 앞에 책망(심판 받을 일)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즉 “너희를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흠 없다”는 뜻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거룩(성결)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고(요 17:17, 딤전 4:5),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심”은 대속에 의한 칭의(무죄로 인정하는 뜻)로써 심판 받지 않게 하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나타난 구원의 내용은 “칭의와 화목”으로써 실제적 구원(영생)에 전제되는 요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구원을 이루게 하신 방편입니다(22~23절).

구원의 방편으로서는 십자가와 믿음과 복음 전파를 말씀하셨습니다.

1) 22절에서 “그의 육체의 죽음”(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화목과 흠 없음(성결)과 책망할 것이 없게(칭의)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절대 조건은 속죄요, 속죄의 방편은 오직 예수님(하나님의 아들, 영원하고 순결한 생명, 자원하는 희생으로)의 십자가뿐입니다.

2) 23절에서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하시므로 십자가 대속의 공로가 자신에게 적응되게 하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터”는 예수님과 성경입니다(마 7:24, 고전 3:11, 딤전 3:15). 요 3:16에서도 그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받는 자가 믿음을 갖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거듭난 은혜; 요 3:3, 엡 2:1). “믿음에 거한다”는 뜻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믿음과 생활의 헌법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며, “터 위에 굳게 섬”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믿음에 흔들리지 않도록 확신함을 뜻하고, “너희 들은 바 복음(구원을 이루시는 방편)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흔들리지 않음”이란 설교문 참조). 이 말씀은 믿음이 영원히 간직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복음 전파가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또 하나의 방편입니다(23절). 23절에서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진리(복음)를 접해야 발생합니다. 롬 10:41에서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전도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고전 1:21), 따라서 땅 끝까지 전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마 28:20, 행 1:8). 그런 섭리로 전도자를 불러 쓰셨고(롬 10:14), 바울도 그렇게 쓰임이 된 것입니다(행 9:15). “이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바”란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음을 시사 하신 것이고, 또 행 1:8에 근거하여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것을 필요로 하신 말씀입니다. 전파의 영역은 세계의 모든 인종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가 가리운 자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을 수 있고(고후 4:3), 영생 주시기로 작정 상태라 하더라도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므로(살후 3:2)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행 13:48). 본문에서는 구원의 방편으로써 십자가와 믿음과 복음 전파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제 5 과 바울의 사명적 고백 (골 1:24~29)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바울의 사명적 고백”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복음적 경륜”과 바울 사도의 사명적 고백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적 경륜과 바울의 사명적 고백”이라고 길게 설명함이 좋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복음적 경륜부터 살피겠습니다.

복음적 경륜이란 하나님이 “복음 사역을 이루시는 계획”이란 뜻입니다.

1)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으며, 그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바울 사도(나)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남은 고난”이란 대속의 고난이 아닌 전파의 수고로써 전도자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신 것은 전파와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파의 고난까지 받으셔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난을 성도(전도자)에 맡기셨고, 그 사명 수행에 따라 상급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시 126:5~6, 딤후 4:7~8).

2) 25절에서 하나님은 인간 사역자를 통하여 전파와 교육과 섬김으로 교회 부흥을 이루어 열매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24절에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한다” 하신 말씀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열매를 거두신다는 뜻이고, 또 바울 사도가 “일군된 것”과 골로새 지역 등 이방 땅의 전도자된 것도 하나님의 경륜 따라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신 것은 복음으로 약속된 구원을 다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3) 26절에서 하나님은 때를 정하고 일하시는 분이신바(전 3:1), 한동안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았던(감추심) 비밀(복음적 구원 계획)을 “때가 되매 알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선민을 상대로 사역하셨고(구약 시대), 이방인의 때가 되었을 때(신약 시대부터임, 눅 21:24) 비로소 전도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비밀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다는 것”은 구원 계획이 만세전부터(엡 1:4) 있어온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감추셨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비밀 자체는 예수님과 구원의 도리입니다.

4) 27절에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복음적 구원)을… 알리신 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는 곧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소유자이십니다. 구원 받는 일은 영광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일인즉 영광의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비밀의 영광이 성도들 가운데서 얼마큼(어떻게) 풍성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5) 29절에서 하나님은 사역자들 세계에서 “능력으로 역사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은 믿는 데서부터 연구하고, 전파하며, 핍박을 견디고, 또 열매를 맺는 데까지 성령님의 역사가 따르는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믿을 수 없고(요 3:3),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며(9절), 전파하는 것과(롬 10:14~15) 열매를 맺는 일에 이르기까지(6절) 하나님이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사명적 고백입니다(24~25, 28~29절)

1) 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 하셨으니, 여기의 “너희를 위함”은 바울의 전도 사역으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직접 간접으로 신앙의 지도 받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적 고백으로는 “복음 사역 상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 5:11~12의 뜻을 받든 것이고, “육체에 채운다” 하심은 고난의 정황으로 옥에 갇힌 상태에서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감수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육체적 고난이 따라도 마음은 기쁘고 만족한 것입니다.

2) 2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일군된 것”을 믿었습니다. 이 사실은 롬 1:1, 고전 1:1, 갈 1:1 등 서신의 서두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 받았으니만큼(행 9:15) “일군답게 일하신다”는 고백입니다(고전 4:1).

3) 28절에서 사역의 성격을 말씀하셨으니 곧 “예수님(그들)을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딤후 4:13)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 가르침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입니다. 성도 개개인의 신앙과 지식과 생활을 분명히 확인하면서 가르쳐야 할 것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인데, 이 뜻은 완전한 자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완전이란 있을 수 없고(갈 3:10~11) 완전을 목표로 성화되다가 마귀와 죄가 없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의 장막을 벗고(죽음) 마귀 없는 세계(천국)로 가면 유혹도 없고, 육체적 죄성도 없어지므로 성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는 성화의 목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4)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되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항상 연약이 따를 뿐인즉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하되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만큼은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도 주시지만 힘쓰는 자에게 더 주시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욥 8:5~7, 대하 16:9). 하나님의 구원적(복음적) 경륜과 바울 사도의 사명적 고백을 잘 이해하십시오.

 

 

설교보충 1. 흔들리지 않음 (골 1:23)  목록으로


이빨이 흔들리면 용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도 흔들리면 신앙의 목적 달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총이나 활을 쓰는 사람이 흔들리면 명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고전 15:58에서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하셨고, 히 3:14에서도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연속되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수도관이 중간에서 끊기면 물 공급이 안 되는 것과 같지요. 따라서 믿음은 연속되어야 하는데 믿음을 흔드는 유혹이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인데, 마귀는 그 연합을 가르려 하고, 성도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흔들립니다. 마귀가 아담을 유혹하여 흔들리게 하였고, 또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았으며(창 3:1, 4; 마 4:4, 11), 베드로는 일시 흔들렸다가 회복을 하였습니다(눅 22:31, 56~60). 성도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은 줄 압니다.

1.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1) 믿음의 뿌리를 깊이 주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짝밭에 떨어진 씨처럼 뿌리를 깊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믿은 성도가 믿음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나 깊은 샘처럼 신앙의 원리를 확신 있게 또는 마음속 깊이 심어야 할 것입니다.

2) 신앙 활동의 중지 또는 나태입니다. 믿음생활의 꾸준한 노력을 멈추어 보세요. 여지없이 마음이 허황되고 세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전거는 멎으면 쓰러지고, 창파를 헤쳐 가는 배도 추진력을 잃으면 파도에 약해지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꼭 그런 것입니다. 마귀는 틈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엡 4:27). 따라서 자기 신앙생활의 패턴(성수주일, 말씀, 기도, 사명 등)에서 후퇴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세속을 가까이 하면 흔들립니다. 가시떨기와 옥토에 뿌려진 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13:22).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셨지요. 성도가 불신앙의 세계를 가까이 하고 거기에 취미를 가지면 믿음은 여지없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일 2:15, 약 1:27). 성도가 세속을 사랑하는 것은 내세를 적게 사모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내세의 상급과 소망은 틀림없는 것이지만 현세의 목적은 소원만큼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망하고 타락하며 흔들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따른 목적이 내세적 구원에 있지 않고, 현세적 물욕에 있었습니다(요 12:4~6). 결국 그는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확신 부족, 활동 중지와 나태, 세속 사랑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고, 흔들림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한 적극적 보완책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

1) 믿음의 확신을 강하게 갖는 것입니다. 무엇을 확신하셔야 하는가? 하면 “성경은 진리다(요 17:17), 나는 택한 백성이다(벧후 1:10), 현세욕은 누려보았자 한계가 있고, 나의 소망과 목적은 내세에 있다”는 원리에 확신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풍성하게 모셔야 합니다. 엡 5:18에서는 “성령 충만하라” 하셨고, 골 1:27에서는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한다” 하셨으며, 골 3:16에서는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하게 거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곧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이며, 하나님을 풍성하게 모신 뜻입니다. 성령 충만이나 말씀 충만은 같은 뜻이고, 그것이 마귀 유혹을 대항합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셨을 때 “성령에 이끌렸다”(마 4:1)는 말씀과 “기록되었으되” 하시고, 성경으로 대항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마 4:4, 6). 그때 마귀는 떡과 명예와 세상욕을 갖고 유혹하였지만 말씀 지식 앞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진리 지식이 풍성하여야만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연단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어른이 아이보다 강한 것은 연단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하기 전에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 연단의 도장”이라고 생각하셔야 하고, “사회가 어둡다” 하기 전에 ‘나에게 빛의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그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연단을 많이 받으면 마귀의 유혹에 대한 면역이 강해져서 흔들림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일사 각오로 유혹에 대항하셔야 합니다. 벧전 5:9에 보시면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에 말상대를 해준 데서부터 끌려가기 시작하였고, 결국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비진리, 불법, 부덕의 소치인줄 알면 말상대도 하지 말고 거절하고, 책망하는 식으로 대적하여야 합니다. “정의를 주장하다가 미움을 받고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불의와 싸워야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계 2:9~10, 3:8~12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 일사 각오로 마귀를 대적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는 성경 중심, 십자가 중심, 교회 중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요지부동(搖之不動)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6 과 일곱 가지 바라신 점 (골 2:1~7)  목록으로


본문에는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곱 가지 바라신 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① 서로의 입장을 알기 원하신 점이고(1, 5절), ② 위안 받기를 원하신 점이며(2절), ③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원하셨고(2절), ④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셨으며(2~3절), ⑤ 속지 않기를 원하셨고(4절), ⑥ 주님 안에 굳게 서기를 바라셨으며(6~7절), ⑦ 감사함이 넘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7절).

1. 서로의 입장을 알기를 원하신 점에 대하여(1, 5절)

1) 바울은 “에바브라”의 소식 전달을 통하여(1:8)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소식을 상당 부분 아셧읍니다. 그 내용에 대하여는 1:3~8에도 기록되었고, 본 장 5절에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하신 것과 또 6절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 하신 말씀이 역시 두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의 입장을 아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긍정적 사실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한 점(1:3~5), 규모 있게 생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확고한 점(5절), 또 그리스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점”(6절)이었습니다.

2) 따라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이(2:1) 로마 감옥에 계시나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자신의 입장을(고후 11:28) 알아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일지라도(1, 5절) 심령으로는 함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5절) 위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성령으로 함께 계신 것처럼 바울과 성도들이 육체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심령으로는 함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통하고 능력이 교류된다는 뜻) 은혜가 전달되어 위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위안 받기를 원하신 점입니다(2절).

방금 앞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바울이 은혜 전달(말씀과 기도로)자의 입장에서 두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힘을 쓰시는 만큼(1절), 이 사실을 성도들이 알게 될 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역은 몸으로 하는 면도 있지만, 심령으로 하는 것이고, 말씀 전달과 기도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7:17, 히 4:12). 한 시간 설교만 잘 들어도 위안이 되지 않습니까? 바울이 감옥에 계시나 큰 관심으로 기도하신즉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교역자를 잘 섬기십시오. 4:16에 보시면 “이 서신을 먼저 골로새 교회에서 읽은 다음 라오디게아 교회로도 보내어 읽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나타나고 서신으로 전달되며, 읽어서 깨닫고 은혜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엡 3:3~4).

3. 사랑으로 연합하기를 원하셨습니다(2절).

위안을 받은 다음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믿음과 사랑이 있었지만(1:4) 연합과 원만한 이해에 있어서 더 부요해지기를(부요에 이르러) 바라신 것입니다. 연합의 결속과 원만한 이해는 성도의 공동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심(2~3절)

1) 2절 하반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일까요? 오순절 이전까지 이방인들에게 감취어 계셨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광대무궁하신 분이기 때문에(성경 진리도 그러함) 연구, 체험을 평생 하여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잘 아는 성경도 깊이 묵상하면 늘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리스도를 깨닫는 방법”은 믿음으로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요 5:39). 또 성경 말씀을 실천함으로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습니다.

2) 3절에서 “그(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학문상으로 배우지 않았으나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슬기를 뜻하고, 지식은 학문적으로 배워 깨닫게 되는 모든 소재를 의미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근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보화”란 모든 은혜의 소재를 총칭한 말씀입니다.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의 창조자 예수님을 떠나서는 보존 또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생애에 자유를 누릴 만큼(요 8:32) 보화를 간직하셔야 합니다(마 13:44).

5. 속지 않기를 원하심(4절)

“내가 이것(지혜와 지식의 근원인 예수님)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서나 거짓 선지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걸 1:6~7).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지도자들은 이단을 배격하기 전에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선행하여야 합니다. 진리만 알면 다른 진리는 없는 고로 결코 다른 교훈을 따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6. 주 안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6~7절).

이 방법은 “주 안에서 행하여(계명을 지키라는 뜻)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확신과 안정으로 습관화되라는 뜻) 세움을 입어(힘 있는 자세를 뜻함, 고전 16:13) 교훈을 받은 대로(사도의 교훈, 곧 성경) 믿음에 굳게 서는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일은 곧 흔들리지 않는 것인즉 1:23의 설교문을 참고하십시오.

7. 감사함이 넘치기를 바라셨습니다(7절).

성도 자신들의 믿음과 생활환경, 그리고 바울 사도와의 신앙적 교류 등 감사할 일이 많겠지만 문제는 고난 중에서라도 범사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역경이 있어도 그 다음에 받게 될 은혜를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1:3~5, 롬 5:3, 살전 5:18, 롬 8:29).

 

 

제 7 과 노략할까 주의하라 (골 2:8~15) 목록으로


필자는 이 본문을 읽고 여러모로 제목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8절은 “철학의 저급적 평가”요, 9~10절은 “예수님의 신적 신분”이며, 11~12절은 “예수님과 연합되는 절차”요, 13~15절은 “거듭나고 연합된 성도가 받는 은혜”입니다. 전체를 요약하면 “철학에 속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라”는 뜻인데, 긴 제목을 피하기 위하여 8절의 말씀을 따라 “노략할까 주의하라”는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철학으로 노략당하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은혜를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철학의 저급적 평가(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이 무엇입니까?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학문은 사람이 연구하는 학문으로 최고의 학문을 뜻합니다. 요즈음은 최고의 학문이 컴퓨터나 인공위성이나 유전자 연구 쪽으로 나가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철학은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속한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고 유한한 인간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 문제, 죽음 문제, 영적 세계의 문제, 만물의 출처, 보존, 통치 문제 등 중대한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전염병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렇게 많은 소와 돼지와 가축 조류 등이 일시에 많이 죽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내세워 인간의 근본 문제(행복과 영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대의 경쟁에서 살아가려면 학문을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사람은 살아온 것입니다. 요즈음 TV에서 영국의 물리학자 ‘호킨’ 박사가 아내로부터 학대를 받는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학문이 자기의 행복을 확보해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에게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면 그를 불행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이 아닌 것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헛된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그런 학문적 선전으로 “성도의 마음속에 모신 예수님을 노략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철학은 사람의 유전(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란 뜻)을 좇는 것에 불과하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이 완전히 무용하다는 뜻이 아니고, 인간의 지식이므로 저급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름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와 학문 의존을 떠나서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신분이시기 때문입니다(9~10절).

1) 9절에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 하셨으니, 이 뜻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게 신성 충만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보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요 1:16).

2) 10절에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짐”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충만한 은혜는 “구원 받음으로 느끼는 모든 행복”입니다. 이 충만한 은혜는 모든 정사와 권세(1:16에서 설명됨)의 머리(주체 또는 근원이란 뜻)되신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필요한 만큼 학문(철학)을 한다 하여도 생명을 붙들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심(요 14:6)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은 바로 모든 은혜의 근원자이신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3. 예수님과 연합되는 절차입니다(11~12절).

예수님이 은혜의 주이실지라도 예수님의 구속적 은혜를 아무에게나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택한 자, 거듭난 성도, 세례를 받은 자에 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예수 믿는 믿음)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음”은 곧 구약식 할례가 아닌 신약적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신약적 세례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신앙 고백, 생활 변화, 거듭나고 회개한 증거, 하나님의 자녀 되고 백성 된 증표 등), 본문에서는 “육체의 몸을 벗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 뜻은 “자신(육적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는 뜻‘(롬 6:6)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영과 인격을 모시기 위하여 자기를 없애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모시는(눅 6:46, 요 13:13) 변화 그 자체를 ”그리스도의 할례“(영적 할례, 세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식임)라고 하셨습니다.

2) 12절의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하심은 앞 절의 “육적 몸을 벗는 것”을 재설명하신 것이요,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거듭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으키심을 받은 자”는 부활하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이 거듭난 증표입니다.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뜻은 역시 거듭난 생명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엡 2;1).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과 자신의 거듭난 심령은 신앙적으로 일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3) 13절 앞부분의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씀은 12절의 재설입니다.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은 뜻”은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을 거절한 죄로 죽은 영적 사망을 뜻하고(육체의 무할례는 하나님의 계율을 거역한 뜻임),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과 함께 거듭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는 절차로써 부활 신앙과 거듭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4. 거듭나고 연합된 성도의 받는 은혜입니다(13~15절).

1)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13절 끝에서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데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믿는 신앙이 전제됩니다.

2) 율법의 권위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14~15절). 율법은 까다로운 명령과 함께 정죄하고, 심판의 위협을 가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으며, 또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이 뜻은 율법의 명령적 권위와 정죄 또는 심판의 위협을 없앴다는 뜻임)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율법적 권위의 성격을 벗겨버리신 뜻) 밝히 드러내시고(율법의 부적격성)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한 줄 압니다.

① “율법이 성도를 거스리고 대적한 뜻”은 율법이 성도들에게 행동규칙으로써 부담을 주었고, 또 정죄와 심판 경고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맘의 짐을 지워주었다는 뜻입니다.

② 율법을 “의문에 쓴 증서”라 하심은 제사 의식 등의 까다로운 예법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예시한 것이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취하심에 따라 도말된 것입니다.

③ “도말, 제하여버림, 십자가에 못 박음”은 구약의 율법 전체를 예수님 뒤로 제쳐놓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강령이 사랑인바 예수님이 그 사랑의 실천을 이행하심으로 문자적 계율보다 훨씬 밝은 계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④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렸다” 하심은 율법적 속박과 위협의 권위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롬 6:23, 신 9:5, 9, 15) 하였어도 신약의 성도들은 그 정죄와 심판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지요.

⑤ “밝히 드러내신 것”은 율법의 연약성입니다. 율법이 연약한 것은 내용만 주고 모범을 주지 못한 점과 명령만 주고 지킬 능력을 주지 못한 점과 또 다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신 것과(갈 3:11), 또 중요한 것은 공의로운 재판을 못하고 무죄한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인 것 등입니다.

⑥ “십자자로 승리하심”은 예수님이 연약한 율법주의에 희생당하셨지만 부활로써 승리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모든 멍에에서 해방시켜주시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는 “죽이는 것뿐” 살리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말 4:6). “율법의 연약”이란 표현을 하였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 권위와 율법을 활용하신 섭리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그 말씀은 언제나 권위가 있고 합당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젖(초등 학문 같은 율법)을 먹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장성한 후에 딱딱한 음식(복음을 뜻함)을 주셨다 하여 어릴 때 먹은 젖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약시대에 율법으로 다스리신 것은 거기에 따른 환경에 적절하기 때문입니다(갈 3:19; 롬 5:13, 20). 율법은 구원하는 일에 무능하였지만 죄를 깨닫게 하는 일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것과 율법의 시행 부족으로 사망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과 구원의 방법이 다른데 있음을 찾게 하는 역할로 끝내주는 것입니다.

 

 

제 8 과 이단을 경계하라 (골 2:16~23)  목록으로


본문 말씀의 16~17절과 20~21절은 “율법주의 이단을 경계하신 말씀”이고, 22~23절은 “사람의 유전을 경계하신 말씀”이며, 18~19절은 “신비주의(천사 숭배)를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성도가 신앙의 노선이나 생활 습관을 잘못가지면 복음적 신앙을 바로 따르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크게 주의하셔야 합니다.

1. 율법주의 이단을 탈피하라 하심(16~17, 20~21절)

1) 16절은 율법에 나타난 의식적 계명을 탈피할 것을 말씀하셨고, 17절은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신 것은 14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의문에 쓴 증서 즉 의식적 계명을 도말 또는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므로 강하게 폐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율법에 명시된 것은 제물을 분별하여 먹는 것과(레 7:10~27) 동물성 고기를 분별하여 먹으라는 규례(레 11장)가 있는데, 이 규례를 주신 목적은 계시적 의미와 정결과 불결을 판별하는 의미 또는 위생에 관한 의미 등으로 주신 규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위생상의 의미를 제하고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모든 교훈의 모범이 밝혀졌기 때문에 절기(출 23:14~17), 월삭(민 28:11~15), 안식일(출 20:8~11) 등 의식적 계명(의문에 쓴 증서)이 예수님 시대에 이미 폐지된 것입니다(2:14; 마 11:13; 호 2:11; 롬 10:4, 13:10). 따라서 신약 시대에 복음을 받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이미 의식적 율법에서 해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절기, 월삭, 안식일은 물론 안 지켰을 것이고,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하여도 약간의 음주나 우상의 제물 같은 것에 대하여 상당하게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지켜보는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을 비판하고 폄론하였겠지요. “구약성경대로 지키지 않은즉 이단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하여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니까 폄론하지 못하도록 진리로 대항하라는 뜻입니다.

2) 그들의 폄론이 정당하지 않은 것은 17절에서 “율법의 모든 계명(이것들은) 이 장래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허상입니다. 그리고 “실체(몸)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실체란 뜻입니다. 구약(율법)의 목적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예수님의 사랑의 모범을 지시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였고, 아울러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으니까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지요(요 19:30).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까(롬 13:10)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모범을 봄으로써 구약의 계명을 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3) 그러면 20절의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율법, 8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예수님이 율법의 잘못된 심판으로 죄 없이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들도 그 율법에 대하여 함께 죽었다는 뜻)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율법 아래 사는 자처럼) 의문(의식적 율법)에 순종하느냐?” 하신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할 때 율법의 의식적 계명에서 탈피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의하여 죽었으니까 더 지킬 필요와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4) 어느 정도 없는가? 하면 21절에서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며 만지지도 말라” 하셨으니, 이 뜻은 멀리 경계하라는 뜻으로 “접근조차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적 용어 사용과 율법주의적 신앙 지도와 활동이 지금도 많이 나타나는 것을 아셔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하신 것은 율법적 의식에 얽매인 문제를 먹고 마시는 음식물(16절)로 비유하여 그 무용론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어느 음식이든지 먹으면 그것이 영적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살찌게 함과 동시에 부패한 배설물만 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2. 사람의 유전을 경계하신 말씀(22~23절)

1) 22절의 “이 모든 것(먹고 마시는 문제)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하신 말씀은 앞에서도 설명 드렸지만 마 15:17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음식)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진다” 하셨을 때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지적한 장로의 유전을 책망하실 때 하신 것입니다(마 15:1~11, 16:20) 따라서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마 15:() 하신 것은 인간의 유전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성경과 사도의 모범 아닌 것이 기독교 생활에 침투되어 자리 잡고 교리화된 것이 많습니다. 개혁을 지향하는 성도는 반드시 그런 사항에서 탈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성도는 이제라도 탈피할 것을 탈피하십시오. 성경적이 아닌 것이나, 교회라는 단체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또는 성직자의 권위를 보존시키는 방편으로, 사람의 모임을 부추기는 방법 등으로 교회의 헌법과 신앙생활의 제도를 만들어서 성도를 거기에 속박 당하게 하거나 맹종하고 따라오게 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까요? 율법주의는 이단이라고 하면서 안식일 계명으로 성수주일을 강조하는 경우, 또 십일조로 헌금을 강조하는 경우, 예배당을 구약의 성전처럼 존중시 하는 경우, 성직을 제사장에 비유하거나 외면치레 등으로 권위를 나타내려 하는 경우 등입니다. 반드시 교회 안에서는 고하를 막론하고 예수님 같은 모범만 나타내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명과 가르침”(인간의 전통과 유전, 문화 같은 것)에서 탈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 17:6과 18:27~31과 왕상 12:25~33과 왕하 16:10~16을 꼭 읽어보시고 자율주의(사람의 유전)의 악을 경계하십시오.

2) 23절에서는 그런 유전을 좇는 것이 “신앙에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유전 신봉)은 자의적 숭배(도덕적 경건심)와 겸손(도덕적 예절)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자신의 극기를 통하여 받은 연단)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다소의 유익이 있다는 뜻) 오직 육체(살크, σάρξ ; 인격의 부패성을 의미함)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 사랑실천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 아닌 것처럼(사랑의 모범은 예수님이, 능력은 성령님이 주심) 인간의 전통도 외식적 행동을 유도할 뿐 자신의 부패성을 억제하거나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패성을 억제하고 없애는 것은 오직 말씀과 기도의 역할뿐인 것입니다(요 17:17, 딤전 4:5).

3. 신비주의를 경계하신 말씀(18~19절)

1) 18절의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하신 것은 외식자들이 자신들의 경건적 외식을 정당화하고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일부로 겸손을 타나내는 경향이 있다는 뜻인즉 겸손 그 자체를 신용의 표준으로 삼으면 안 될 것을 교훈하신 것이요,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라 함은 사도 시대 이후에 아무에게나 표준 계시를 주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히 1:1, 엡 3:4~5) 어떤 개인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천사를 숭배하는 신앙으로 유혹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일 뿐(히 1:14) 인간의 숭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숭배의 대상이 아닌 상대를 숭배하면 자기의 상을 잃는 것인즉 삼가야 할 것입니다.

2) 신비주의자들은 천사를 숭배하거나 주관적 계시를 받는다 하면서 사도들의 지도 외에 자율적 행동을 취하는 자들입니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함”이란 “천사를 통하여 깨달았다 하는 주관적 계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육체(살크, 부패성을 뜻함)의 마음을 좇아 자율적으로(사도의 교훈에 표준을 주두지 않는 태도) “헛되이 과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헛된 과장”이란 자신이 느낌이나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은 듯이 과장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 표준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또는 좌로나 우로 치우지지 않으면서 정도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 정통 신앙의 길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천사 숭배, 본 것 의지, 육체의 마음, 헛된 과장” 등이 신비주의적 특징입니다.

3) 또 한 가지 신비주의의 특징은 19절에 이성의 초점을 잃는 것입니다. 기쁨이나 슬픔이 과격해지면 이성을 잃기 쉬운 것처럼(눅 24:41, 막 16:10~11) 성도가 신비적 계시나 체험에 끌리다보면 역시 “머리를 붙들지 않는 것”(이성의 초점을 잃어 분별, 적응을 못함)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지배를 받고) 마디(관절)와 힘줄로 명령적 공급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그 육체를)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는 것”인데 만일 머리로 생각하는 기능이 혼란해진다면 어찌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천사의 현현이나 주관적 계시나 감정 등에 치우치는 신비주의를 떠나서 성경 계시 중심 또는 사도의 교훈 중심(고전 14:37~38)에 굳게 설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2.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목록으로


본문 말씀 끝에 보시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넘치도록 감사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를 쓰시면서 감사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1:3에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다” 하셨고, 본문에서는 “감사를 넘치게 하라” 하셨으며, 3:15~17절에서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힘입어 감사하라”고 하셨고, 또 4:2에서는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의 마음과 감사의 기도와 생활이 항상 연속되어야 할 줄로 아는 것입니다.

1. 본문에 보시면 감사할 수 있는 자격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가 감사할 자격이 없겠지요. 6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지 않는 자는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상태에서는 감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그 안에서 행하되”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국법도 지키고, 교통법도 지켜야하는 것처럼 “그 안에서”란 “예수님 안에서”또는 “성경 안에서”란 뜻입니다. 얼마 전에 어디를 가다가 차가 너무 밀려서 감히 노랑 선을 넘어 U턴을 하였는데 바로 뒤에 경찰차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주 안에서 탈선하지 않는지를 늘 감찰하십니다. 교통법만 위반하여도 두렵거든 하물며 주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겠습니까? 주 안에서 행하는 자만 하나님께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를 넘치게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감사하기 전에 “믿음부터 굳게 다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현실적 은혜의 깨달음보다 믿음으로 깨달은 것을 감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그런 감사라야 감사의 비중이 커서 영광을 많이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넘치는 감사는 믿음에 굳게 선 자의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2. 또 감사를 넘치게 하려면 은혜를 알고 느껴야 합니다. 현실적인 은혜를 아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느낍니다(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느끼지는 않음). 우선 건강한 것, 자유 국가에서 사는 것, 의식주 해결하는 것, 돈 잘 벌고 출세하는 것을 감사할 일로 느끼겠지만, 믿음에 굳게 서서 느끼는 은혜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받는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 은혜, 하나님이 주신 문화 벌전의 은혜, 자신이 건재한 은혜, 자신을 건재할 수 있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환경,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삼아 주신 것, 죄사함과 영생 주신 것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요즈음도 하나님이 나의 식생활을 알맞게 공급해주시는 것을 깊이 느끼며 감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가 저 어렸을 때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데 “여자는 먹지 않고 사는 줄 알았다”(남자는 방에서 식사하고 여자들은 남자가 식사하는 사이에 부엌에서 식사하기 때문에 밥 먹는 것을 본 일이 없었음). 나중에 부엌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고야 알았는데 그때부터 “여자는 부엌에서만 식사를 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아는 것 같으나 너무 모르고, 아는 것 같으나 너무 착각만 하는 중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예민하게 연구하여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지요(고전 15:10). 담배로 죽는 사람, 술로 가정 망치는 사람, 허탄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을 볼 때 “나의 나 된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또 다른 방법이 무엇일까요? 헌금을 하면 될까요? 하늘같은 은혜를 받고 감사헌금 10만원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또 돈 100만원이나 곡식 한 섬을 드렸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쓰십니까? 직접 안 쓰십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감사의 제도에 따를 뿐인 것입니다. 실제 감사는 1) 은혜를 알고, 2) 하나님을 사랑하며, 3) 하나님의 뜻에 복종을 잘 하는 생활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호 6:6을 보시면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제사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물질과 의식이 따르는 것)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선 잘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며, 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서 뜻은 복종하고, 하나님은 사랑하며, 사모하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도 사상이 다르면 합하지 못하고, 종교도 역시 그렇지요. 사람도 뜻이 화합하지 않으면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암 3:3에 보시면 “두 사람이 의합치 않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감사를 넘치게 하려면 하나님을 잘 아시고, 베푸신 은혜를 깊이 헤아릴 줄 알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셔야 하는데, 하나님과 가장 잘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은 성도가 예수님을 많이 닮는 것입니다. 닮지 않으면 의합도 안 되려니와 목적과 방법도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동행이 안 됩니다. 동행이 안 되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 하여도 감사의 의미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제 9 과 변화된 자의 사명 (골 3:1~11)  목록으로


본문을 읽고 “변화된 자의 사명”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성도가 변화된 것은 거듭난 은혜와 함께 옛사람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꾼 것을 의미하고, 사명은 옛사람의 생활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① 변화에 관한 말씀은 1, 3, 10절에 기록되었고, ② 사명에 관한 말씀은 2, 4~9에 기록되었으며, ③ 11절은 “보편적으로 구원하시는 만유의 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변화에 관한 말씀(1, 3, 10절)

1) 1절의 “그러므로” 하신 말씀은 “율법주의를 탈피하라”는 3:9~23을 연계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 육체의 소욕(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죽었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새사람으로 산 것(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여기의 “죽었다 산 것”은 영적 의미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한 것은 죽고 삶에 대한 영적 비유입니다. 롬 6:6, 갈 2:20에서 “함께 죽은 의미”를, 벧전 1:3에서는 “함께 산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변화의 첫 순서는 거듭남인데, 이 상태는 영적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그 능력의 근거가 예수님의 부활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거듭남의 상태는 새롭게 탄생한 성도가 신령한 생활을 해야 할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2) 3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다” 하셨는데, 이 뜻은 “육신적(부패성) 옛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과연 아주 죽어 없어졌는가? 하시겠지만 이것은 거듭난 생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옛사람이 발동하여서는 안 될 것과 또 옛사람의 본질의 통제, 대항, 정화하여 완전함에 나갈 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골 1:28, 히 6:2). “너희 생명(거듭난 생명, 요 3:3; 새 생명, 요 13:34, 롬 6:4; 새 사람, 갈 6:15, 엡 2:15; 하나님이 씨, 요일 3:9)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였음”은 성도의 영적 생명이 예수님과 함께 있고, 또 이 사실이 하나님의 보호 섭리 안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10절에서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옛사람(믿지 않은 때)이 새사람(믿게 된 후)된 것은 갈 6:16과 엡 2:15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변화가 큰 것입니다. 일반 사람도 인격 연마를 잘 하면 새사람으로 변합니다. 성도가 새사람으로 변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죽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창조해주신 것이며(엡 2:1), 거기에 예수님의 인격을 연합시켜 변화된 사람, 변화된 신분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예수님)의 형상을 좇아(예수님 인격이 형상, 선과 의와 거룩;엡4:24, 5:9) 지식(예수님이 아시는 특별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특별한 지식(하나님과 연계되는 신령한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따라서 일반인들과 대조할 때 같은 지식보다 다른 지식이 많음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짐승 같은 자(시 49:12)가 사람 같은 자(전 12:13)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요 1:12)로, 또 천국의 시민권자로 승격, 변화된 것입니다.

2. 사명에 관한 말씀(2, 4, 9절)

1) 2절에서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땅엣것은 세속적인 것이고, 또 유한한 것이므로 길이 사모할 것이 못되나 위엣것은 신령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며 그 세계의 주인이 예수님(하나님 우편에 앉으신)이신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예수님과 그 세계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과 영적 친교를 섬세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찾고 사모해야 할 이유는 4절에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고(행 3:15, 요 14:6), 장차 심판주로 재림(나타나심)하실 분이며, 또 모든 성도(너희도)가 그분을 만날 것이기 때문(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남)입니다.

2) 5절에서 “그러므로(재림주 만남)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의미”는 죄의 정욕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롬 8:12, 고전 3:3, 갈 5:24). 육체의 마음(골 2:18)이란 더러운 정욕으로써(벧후 2:10) 사탄의 유혹 대상입니다(창 3:6, 마 4:3~11, 요일 2:16). 따라서 땅에 있는 지체 즉 육체적 소욕이 죽지 않으면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우상 숭배)”이 발동하게 됩니다. 여기의 “탐심이 우상 숭배와 같다”는 뜻은 육체 소욕에 해당하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모한즉 그것이 곧 우상처럼 마음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마음에는 예수님만 충만하게 계셔야 합니다(엡 3:17). 그러면 “땅에 있는 지체(육체의 정욕과 현세욕)를 어떻게 죽일까요? 이는 마치 배가 부르면 음식의 의욕이 없어지는 것처럼 자기 속에 진리를 채울 때 모든 정욕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요 17:17, 빌 3:7~8). 6절에서는 ”이것들(육체의 정욕적 행사)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심판이 일부)가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3) 7~8절에서는 완전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촉구하셨으니, 곧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불신앙 시절) 그 가운데서(육체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5절의 내용 포함)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5절과 8절에 나타난 부정한 행위가 성도의 마음과 언어와 행동에 나타나지 않을 만큼 그 인격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얼마큼 변화되었는지, 또 매일매일 얼마큼 변화되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보편적으로 구원하시는 만유의 주(11절)

1) 11절에서는 구원 사역의 대상을 선택하시는 범주가 세계적이고 보편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유”란 뜻은 창조자 즉 만유의 주란 뜻이요(요 1:2~3, 딤전 6:15), “만유 안에 계신 뜻”은 만유 안에 어느 곳이나 주님의 임재와 통치의 영역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거기는(선택 받은 자의 세계)는 헬라인(이방인의 대표족)이나 유대인(선민)이나 할례당(율법주의자들)이나 무할례당(복음주의 성도들)이나 야인(미개 인종)이나 스구디아인(앗수르 지역에 분포된 아스그나스족으로 야만민족으로 취급되었다함; 창 10:3, 대상 1:6, 렘 51:27, 마카비2서 4:47 참조; 아가페출판 성경 사전에 자세히 수록됨)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다” 하셨으니, 여기의 분별이 없음은 지역, 인종, 계급의 차별을 두시지 않고 보편적으로 선택하여 구원하신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는 변화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할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제 10 과 변화된 자의 목표와 생활 (골 3:12~17)  목록으로


본문의 12절은 “성도의 생활 목표”를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는 13절에서 “용서”, 14절에서 “사랑”, 15절에서 “평강”, 15, 16, 17절 중에서 “감사”, 16절에서 “말씀”과 “찬송”, 17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행할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변화된 자의 목표와 생활”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성도의 생활 목표(12절)

1) 12절의 “그러므로” 한 뜻은 앞에 있는 말씀과 연관할 때 “거듭난 자로 변화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깊이 살피면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자인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하라는 뜻입니다(마 17:5, 롬 8:29).

2) 그 다음에는 성도의 원만한 인품의 요소로써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 하셨은즉, 이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지요(갈 5:22~23). “옷 입으라” 하심은 의복이 몸을 가리운 것처럼 “부정의 요소를 제거하고 성령 충만의 열매로써 예수님이 인격적 형상만 타나나게 하라”는 뜻입니다(창 3:21; 계 3:18, 16:15)

2. 변화된 자의 생활(13~17절)

1) 용서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간에는 어떤 혐의가 있었든지 간에 서로 용서하여야 하므로 불화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화의 대상을 만나 서로 용서를 빌며 용서하고 화해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참으로 성도의 세계는 부모 자식 간이나, 형제간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란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되 “주께서 하신 것처럼” 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깨끗이 없애주시는 것으로써 성경은 이에 대하여 빚 문서 도말(렘 18:23), 등 뒤로 던지심(사 38:17), 다시 기억치 않으심(사 43:25) 등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한 후(자신의 죄 용서를 인하여) 계속적 사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나, 14절에서 “이 모든 것(용서) 위에 사랑을 더하라” 하셨은즉 사랑의 원상회복에까지 올라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는 온전케 매는 띠라” 하심은 용서가 몸을 가리는 의복이라면 사랑은 그 의복을 단정하게 유지시키는 띠의 역할 같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옷을 입고도 띠를 매지 않으면, 그 옷이 지탱할 수 없음같이 연속되는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용서 그 자체가 이기주의(자신 죄를 용서받기 위한)에 그친 것을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3) 평강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사 9:6). 그 평안을 성도에게 주셨습니다(요 14:27). 이 평강은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마 6:8, 32; 히 4:16; 시 121:2~8; 출 15:26; 롬 5:5; 빌 1:20; 마 8:24; 시 27:1~3). “이 평강을(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너희(성도)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신부를 선택하여 자부로 맞이하였으면 호적에 입적하고 한 집 식구로 인정하는 것처럼 “한 몸으로 부르심 받은 뜻”이 곧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한 몸이라고 하셨지요(골 1:18, 24). 그런데 “교회”는 주님과 함께 구원받은 성도의 단체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교회(성도)가 하나로 연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연합된 성도는 반드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4) 감사의 생활입니다. 필자는 감사 설교에서 “감사에 대한 것”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2:6~7). 15절에서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하셨고, 16절에서는 “마음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셨으며, 17절에서는 “예수님을 힘입어(모든 은혜의 근거를 뜻함)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바로 깨닫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5) 말씀 깨달음의 풍성함을 갖는 것입니다.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모든 성경)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성경 지식의 풍부함)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씀 지식의 풍성은 곧 자기 믿음의 분량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식을 “서로 갖고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 연구, 토론, 실천, 권면, 이 네 가지는 가장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은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문맥을 엡 5:19~20과 대조할 때 성령 충만과 말씀 풍성의 결과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는 찬미의 내용이고, 찬미와 찬양은 원문 상 “아이노스”와 “아도”로 표기되었지만(찬송도 “아이노스”임) 신에게 드리는 노래로써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노래(세속적 가사나 곡조가 아님)를 뜻하고, 부르는 방식은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만큼 사람을 상대하지 않음이 좋고, 믿음으로 불러야 하며, 또 혼자 부르면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7)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어 행하는 것”입니다(17절). 어떤 성도가 구제를 하면서 “내가 주는 것으로 알지 말고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아시오”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선행을 나타내는 동기와 목적을 예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과 같고(마 6:9), 예수님이 선과 의와 거룩의 주체이심을 나타내어 영광을 오직 그에게만 돌리는 생활입니다. 교역자가 교회를 물러날 때 “나(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나(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오직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성도와 사역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일을 그를 힘입어” 하였기 때문입니다(17절). 이상 변화된 자의 목표 일곱 가지를 교훈 받았습니다.

 

 

제 11 과 부부, 혈육, 주종 관계 (골 3:18~25, 4:1)  목록으로


① 18~19절은 “부부간의 처세”요, ② 20~21절은 “혈육 간의 처세”이며, ③ 22절 4:1은 “주종 관계의 처세”입니다. 여기의 혈육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처세의 순서에 있어서 남편보다 아내의 할 일을, 부모보다 자식이 할 일을, 또 상전보다 종이 할 일을 먼저 말씀하신 것은 논리적 순서가 아닌 실천의 순서라고 봅니다. 그 이유로써 아내는 봉사적 배필로 창조 당시에 책임을 주셨고(창 2:18), 또 여인의 우선적 타락으로 남자 앞에 겸손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셨기 때문이며(딤전 2:11~15), 또 자녀들이 부모에게 먼저 순종할 이유는 부모의 은혜를 받은 자녀들로서 효도의 책임이 앞서기 때문입니다(엡 6:1~3). 종 역시 상전의 하인 신분인즉 윗사람을 섬겨야 하므로 먼저 충성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4:1이 3장 끝에 연결되어야 하는데 왜 4:1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영감의 은사를 떠나서 후시대에 장, 절을 구분한 사람들이 실수한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마 8:1, 막 9:1에도 있으니 논리상 앞 절로 편입됨이 좋을 듯 하지 않습니까?

1. 부부간의 처세(18~19절)

1) 18절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종은 남편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남편이 아주 어리석을 때는 뜻을 베풀지 않을 것임). “주 안에서 마땅함”은 주님의 뜻에 의함이란 의미입니다. 그 근거는 창 2:18과 딤전 2:11~15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 교훈에 대한 말씀을 엡 5:22과 벧전 3:1~6에서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19절에서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괴롭게 하지 말 것”은 당시의 남존여비 사상으로 아내를 천히 여기거나 무거운 책임을 맡기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1세기인 이 시대에 와서 남존여비의 문화가 많이 평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주석에 보면 “괴롭게 한다”는 용어가 “프크라이네스데”인데, 그 뜻이 “씁쓸하게 한다”라고 합니다. 필자는 이 뜻을 “인정 없이 행하는 것” 또는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벧전 3:7). 남편들의 아내 사랑에 대한 말씀은 엡 5:25과 벧전 3:7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참고로 여성의 몰지각함을 교훈하신 말씀은 잠 9:13, 11:22, 21:9에 기록되었고, 반대로 유덕한 여인에 대한 말씀은 잠 11:16, 31:10~31에 기록되었으니 꼭 읽어 보십시오.

2. 혈육 간의 처세(20~21절)

1) 20절에서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셨으니, 자녀들이 효도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자신의 지혜롭고 발전하는 생활을 위하여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면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예수님과 부모님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을 믿음으로 받는 자녀들이 많지 않은 줄 압니다. 만일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녀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은 자녀보다 복을 더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교훈은 엡 6:1~3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자녀들은 반드시 부모의 경험을 존중하고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그 경험담을 들으려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교훈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2) 21절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엡 6:4을 참고하십시오. 부모가 자식에게 마땅히 행할 의무를 감당치 못하거나 자녀를 실족시키는 일이 있을 때,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겠지요. 부모는 자녀를 낳은 만큼 책임을 중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3. 주종 관계의 처세입니다(22~4:1).

이 말씀도 엡 6:5~8, 딤전 6:1~2(종의 책임)과 엡 6:9, 눅 12:46~48(상전의 책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알고 복종, 충성하는 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1) 22절에서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 하셨으니, 계급 상 또는 직무상으로 주종 관계가 있음을 시인하셨고, 모든 일(악을 의미하지 않는 업무관계)에 육신의 상전(하나님 상전에 대조한 인간 상전을 의미함)에게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상전이 종에게 불법을 명할 때 항거할 힘이 있는가? 할 때, 당연히 항거할 힘이 없겠지만 죽음으로 대항함이 마땅할 것은 그것이 곧 십자가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성직에도 상하 계급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목회상의 방법은 복종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종이 상전에 대하여 눈치껏 행동하거나 불성실하게 복종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종노릇하는 것처럼 양심껏 성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23절도 같은 뜻입니다. 신앙을 갖되 하나님을 상대하여 갖듯이 상전을 대할 때도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갈 1:10에 보시면 바울 사도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의 상전에 대한 태도도 역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는 것을 중요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종 된 사역자들이 다 그렇게 하면 속히 깨끗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2) 23절에서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시는 분입니다(전 12:14, 삼상 2:3, 계 22:12). 24절의 “유업의 상”이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주시는 특권이고,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김”은 주님이 공의로운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설령 종이 주인께 충성하고 그 대가를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주님이 다 아시고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상전을 눈가림으로 섬기는 자)는 불의의 보응(다른 이의 불의로 당하는 뜻)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 하셨으니(삼상 16:7) 외식이나 거짓이나 겉치레를 떠나서 뜨거운 중심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그의 말씀을 복종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계급은 어차피 존재합니다. 따라서 누구의 하인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 섭리로 믿고 성실하게 주인을 섬김으로 상을 받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4:1에서는 “상전의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상전들이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상전 직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비천한 종인즉 종의 심정을 갖고 사는 데는 상전이나 종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종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어 은혜를 끼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업이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만 마땅히 지급해야 할 인건비를 안 주면서 인권을 무시 학대하는 일은 상전으로서 큰 죄를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에서 교훈을 받고 노사문제를 잘 협의 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인과 종의 행동 원리는 주님 안에서(하늘의 상전이 계심, 4:1) 진실한 마음으로(외모로 취하지 않으심, 25절) 성실하게(성실한 마음으로, 22절) 의와 공평으로(4:1)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 12 과 전도를 위한 권면 (골 4:2~9)  목록으로


2~6절을 살피면 기도할 것과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신 중 그 제목이 “전도의 길이 열려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 6절에서 믿지 않는 외인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매 절마다 부분적인 교훈이 있지만 가장 크게 떠오르는 말씀이 “전도를 위한 권면”입니다. 그리고 7~9절 말씀은 두 송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전도를 위한 권면(2~6절)

1) 전도를 위한 권면 첫째는 2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눅 18:1과 살전 5:17에서도 교훈하신 것이고, <기도백과>를 통하여서도 증언하였습니다. 또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빌 4:6에서도 “감사로 간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경성이고,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이며, 또 목적 성취의 수단이 됩니다.

2) 3절에서 기도의 대상과 제목을 주시되 대상은 전도자 곧 바울 사도 일행이고(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제목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모든 은혜를 주십니다. 특히 전도의 기회와 말씀 증거의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교인의 증가를 원하고 전도의 사명을 느끼는 사역자들이 특별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계셨습니다. 따라서 감옥에서 나오는 일과 또는 재판, 심문 과정에서 고위층들에게 답변할 때, 진리 증거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섭리자 하나님께 기도로 구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하심은 전도 일념으로 생명을 걸고 노력하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찌 전도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3) 4절에서 “그리하면(하나님이 전도의 기회를 주시면) 내가 마땅한 말로써 이 비밀(구원의 도리)을 나타내리라” 하셨으니, 여기의 “마땅한 말”은 진리 전달에 있어서 효율적 언사를 나타낼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천당” 하는 식으로 단조롭게 하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 있는 내용, 또 그 환경에서 감동과 적응을 주는 어법으로 얼마든지 증언의 내용을 구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한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4) 전도의 권면으로써 또 중요한 것은 외인(불신자)을 상대하는 지혜로운 처세입니다. 5절에서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되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외인을 지혜롭게 상대하는 것은 마 10:16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뜻은 비효율적 전도에 시간을 소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절하면 “발의 먼지를 떨고 떠나라” 하셨으니(마 10:14) 전도 등 매사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있거나(행 17:22),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엿보이거나(행 14:9), 말씀을 청종할 때(행 16:14) 증거할 것이요, 거절하는 자에게 사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행 13:48). 세월을 아끼는 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엡 5:16).

5) 또 6절에서는 “말을 지혜롭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하신 것은 소금의 유연성(부드럽게 하는 용도)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으로, 원만하게 납득하도록, 오해 또는 과민하지 않도록 말의 지혜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하심은 불신자의 까다로운 질문에 대하여 말의 지혜를 갖추는 자에게 합당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지혜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벧전 3:15, 마 10:19~20). “기도, 전도, 세월을 아낌, 말씀 증언의 지혜” 등으로 전도를 위한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2. 두 송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7~9절).

7, 8절에서는 “두기고”에 대한 말씀이고, 9절은 “오네시모”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하시므로 “너희에게 알게 한다”는 말씀이 바로 골로새서를 전달하고 또 로마의 소식을 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기고”에 대한 말씀은 행 20:4, 엡 6:21, 딤후 4:12, 딛 3:12에 기록되었고,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며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저를 특별히 보내어 로마의 사정도 알리고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사역자의 방문 안부와 복음의 진전 소식을 듣는 것은 성도들에게 큰 위안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2) 또 9절에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오네시모”는 본래 골로새 지역에 사는 골로새 교회의 중직자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주인에게 범행한 후 로마 감옥에 갔다가 그곳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변화되었기 때문에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란 단서를 붙이신 줄 압니다.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하신 말씀이 그 뜻이요, “빌레몬서”에 자세한 설명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그를 두기고와 함께 보내셨으므로 “저희(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여기의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 13 과 문안적 결론 (골 4:10~18) 목록으로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문안적 결론”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0~11절은 “갇힌 자들의 문안”이고, 12~13절은 “에바브라의 문안”이며, 14절은 “누가와 데마의 문안”이고, 15~17절은 “문안 받을 대상”이며, 18절은 “친필의 확인”입니다.

1. 갇힌 자들의 문안(10~11절)

바울과 함께 갇힌 사람은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 세 사람입니다. 10절 초두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하신 말씀이 ‘아리스다고’에게만 관계될 수도 있지만, 11절 하반에서(세 사람을 거론하신 후)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 하시므로 함께 갇혀 역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맞는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감옥 밖에서 일하였습니다.

1) “아리스다고”는 그 이름의 뜻(최고의 통치자)으로 보아 헬라인이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동행한 자로 나타납니다. 에베소에서 핍박 받을 때 동참하였고(행 19:29),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갔으며(행 27:2), 또 함께 옥고를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4:10, 몬 24절).

2) 바나바(행 4:36~37, 9:26~27, 11:20, 25~26, 30, 12:25)는 바울의 선배 사도이며(행 9:27, 13:43, 14:14), 마가는 그의 생질인바 이는 마가복음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예루살렘 사람으로 “마가 요한”이라고도 하며, 그의 모친은 마리아이고, 그에게 객실이 있어서 제자들의 사용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눅 22:12, 13). 마가는 예수님 수난 시에 나체로 도망한 일이 있었으나(막 14:51~52), 예수님 부활 후에 다시 모여(행 1:13~15, 2:1, 12:12) 사명자가 되었고,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시에 “버가”까지 동행하다가 돌이킨 일이 있었으나(행 13:13), 그 다음에 바나바와 동역하였습니다(행 15:36~40). 로마 감옥에서 나온 후 베드로와 함께 바벨론에 가서 전도한 근거가 벧전 5:13에 나타납니다(인물에 대한 공부는 인명사전을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왜 사도로 임명 받지 못 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잘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약간 거리감을 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 마가에 대하여 명을 받았으니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혹 “복음 사역자로 초빙하라”는 뜻이거나 “그에게 선교적 후원을 하라”는 명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명에 대한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통하여 전달하였을 것입니다. 내용은

3) 11절에서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유스도”는 로마식 이름으로 “의인”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애칭한 듯합니다. 행 1:23~26에 보시면 사도를 보선할 때 맛디아와 함께 천거 받은 “바사바(별명은 유스도)라 하는 요셉”이었고, 15:22에는 안디옥 선교의 인도자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가 있었는데(또 행 18:7의 헬라인 ‘디도 유스도’는 정통 유대인이 아님), 문제는 이름이 여럿(유스도, 예수, 바사바, 요셉)이어서 혼돈이 되나 “저희(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는 할례당이라”(어릴 때 할례 받은 정통 유대인이란 뜻)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복음의 초기부터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한 자들”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정통 유대인(할례 받은 자) 중 유대주의를 떠나서 복음의 보편적 구원의 뜻을 이해하고, 유대인으로서 바울과 함께 이방 전도에 역사한 자들이(바울이 감옥에 계실 당시에) 그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독을 면하고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이전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할례당”이란 할례를 내세우는 율법주의자가 아니고 정통 유대인이란 뜻입니다.

2. ‘에바브라’의 문안입니다(12~13절).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에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로 와서 바울과 함께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으니, 그의 하는 일은 전도와 기도와 위문이었을 것입니다.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성도에게 애써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함) 너희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 하시므로 그는 로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완전함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또 인근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과 또 라오디게아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 “히에라볼리”(현재 파무칼레란 유원지로 석회 온천이 있는 곳)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서도 “기도로 수고하는 것을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으로도 문안을 전한 것이요.

3. 누가와 데마의 문안입니다(14절).

“사랑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의 저자인즉 누가복음 강론 서론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데마”는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에바브라”, 마가, 유스도, 아리스다고, 누가와 함께 로마에서 사역하였으나(11절, 몬 1:24), 바울 사도의 옥중생활 말기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딤후 4:10).

4. 문안 받을 대상입니다(15~17절).

이 편지의 수신자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뿐 아니라(1:2)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의)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눔바’는 여성도로써 자기의 집을 예배 처소로 쓰게 하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처가 되게 하였습니다(집에 있는 교회, 행 16:15, 롬 16:3~5, 몬 2).

16절의 뜻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편지(골로새서 등)는 하나님의 말씀인 만큼(고전 14:37~38, 엡 3:1~4) 인쇄술이나 교통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에 교회마다 돌려가면서 읽게 한 것입니다. 글로 표현된 편지를 읽으므로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전달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문서 전도의 위력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활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읽게 하라” 하신 것은 그곳에 별도의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고, 보낸 편지가 다시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절에서 “아킵보(골로새 교회 성도)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성실하게 봉행하라)”고 하셨습니다.

5. 친필 확인입니다(18절).

이 사실은 고전 16:21, 살후 3:17, 몬 1:19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이 눈이 어둡고 연로한 관계로 대필을 하게 한 다음 말미에 친필로 서명한 것을 의미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