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기독교 신앙문답


저자 : 지영근 목사

목 차

1. 기본 신앙에 대한 문답

1)"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13 바로가기

2)예수를 믿는 원리를 말씀해 주십시오14 바로가기

3)성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요?15 바로가기

4)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십니까?15 바로가기

5)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18 바로가기

6)참된 성도임을 알아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19 바로가기

7)예수 믿는 성도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합니까?바로가기

8)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21 바로가기

9)믿음의 성장단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23 바로가기

10)말씀중심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24바로가기

11)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이 무엇입니까?바로가기

12)현실교회에 무엇들이 문제스러운 일들입니까?26바로가기

13)현실 기독교회의 개혁의 과제는 무엇입니까?28바로가기

14)신앙생활의 보람을 어디에서 느껴야 합니까?바로가기

15)물질과 신앙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습니까?바로가기

16)믿음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어떻게 하여합까?바로가기

2. 교회에 대한 문답

17)교회란 무엇입니까? 33바로가기

18)교회의 조직은 어떻게 합니까? 34바로가기

19)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34바로가기

20)성도가 교회에 나가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바로가기

21)성도와 교인이 어떻게 다릅니까?바로가기

22)교회 안에 어떤 기관들이 있습니까?바로가기

23)교회의 기관을 연령, 남녀 등 계층별로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까?바로가기

24)교회 안에 청년회가 결성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가기

25)당회와 제직회는 무엇을 하는 기관입니까?바로가기

26)교회단체에서 선거를 할 때 특정인을 당선 시키기 위하여 은밀하게 운동할 수 있습니까?바로가기

27)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바로가기

28)교회는 누가 다스립니까? 바로가기

29)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바로가기

30)성도들의 교회를 보는 시선이 어떠하여야 합니까?바로가기

31)담임(위임)목사를 해임케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바로가기

32)예배당과 기도원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바로가기

33)성당이나 교회의 예배당, 사원 등 종교단체의 건물에 은신한 피의자는 법으로 제재하지 못합니까?바로가기

3. 신앙교육에 대한 문답

34)주일학교 사명은 무엇입니까?47바로가기

35)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과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47 바로가기

36)신앙교육의 목적을 위한 야외행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48바로가기

37)교회에서 지도를 받는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바로가기

38)어떤 방법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바로가기

39)설교를 들었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 이유는?바로가기

40)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의 최선책이 무엇입니까?바로가기

41)성도가 참고할 수 있는 기독교 서적을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52바로가기

42)건전하지 않은 증언들에 대한 실례를 말씀해 주십시오.53바로가기

43)한국에 신학교가 많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56바로가기

44)주일학교 운영에 문제점이 있습니까?57바로가기

45)평신도 신앙의 개혁의 과제들은 무엇입니까?58바로가기

46)교회의 지도 방침 중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58바로가기

47)기독교 생활의 개혁 과제들을 알고 싶습니다.59바로가기


4. 은혜를 받음에 대한 문답

48)직분을 갖는 것이 꼭 신앙의 성장을 뜻합니까?60바로가기

49)은혜 받은 자의 형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60바로가기

50)통성 기도에 대하여 알아야 할 사항이 무엇입니까?61바로가기

51)어떻게 하면 좋은 신자(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62바로가기

52)간증(干證)이란 무엇입니까?63바로가기

53)성도는 무엇들을 필요한 비품으로 여겨야 할까요?64바로가기

54)성숙한 교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65바로가기

55)성도의 교회생활이 어떠하여야 합니까?66바로가기

56)십자가 목걸이, 예수님의 성화, 마리아, 성자의 동상에 숭배의 자세를 갖는 것이 옳습니까?67바로가기

57)기복주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68바로가기

58)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69바로가기

59)대체로 어떤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하여야 할까요?70바로가기

60)은혜의 방편이란 무슨 뜻입니까?71바로가기

61)고후6:3의 “지금은 은혜 받을 때”란 무슨 뜻입니까?71바로가기

62)은혜를 잘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까?72바로가기

63)신앙생활을 깨끗하게 새출발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72바로가기

64)성도가 양보하여야 할 것과 양보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74바로가기

65)기도회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75바로가기

66)설교청취에 대한 방법이 무엇입니까?76바로가기

67)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수단이 무엇일까요?77바로가기

5. 구원 지식에 대한 문답

68)구원(救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77바로가기

69)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떠한 것입니까?78바로가기

70)성도의 죽음에 대한 신앙은 어떠하여야 합니까?. 79바로가기

71)죄에 대하여 알아야 할 지식이 무엇입니까?81바로가기

72)인간이 죄로 인한 불행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82바로가기

73)하나님이 진노 받을 인간들을 위하여 구원하실 방도를 베푸셨나요?82바로가기

74)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어떻게 중보 사역을 하신 것입니까? 83바로가기

75)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중보자가 되시면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84바로가기

76)하나님께서 죄인구원을 위하여 독생자의 중보사역이 왜 필요한가?바로가기

77)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다는 뜻이 무엇입니까?85바로가기

78)구원받음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용어들을 많이 알고 싶습니다.86바로가기

79)“중생의 체험이 있었느냐”고 할 때 어떻게 대답할까요?89바로가기

80)성도에게 "당신은 현재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묻는다면?91바로가기

81)“죄사함 받았다, 의로워졌다”는 뜻이 무엇일까요?91바로가기

82)롬7:23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하셨는데, 이 “다른 법”이란 무엇입니까?92바로가기

83)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92바로가기

6. 기독교의식에 대한 문답

84)기독교의식과 신앙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바로가기

85)은혜스럽게 예배드리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바로가기

86)민속명절과 기독교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바로가기

87)교회는 성도의 길·흉사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합니까?바로가기

88)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儀式)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바로가기

89)성도의 가정에서 장례를 치른 후에 특별히 시행해야 할 절차는?바로가기

90)성도가 시행하여야 할 장례절차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바로가기

91)죽은 시신을 장례할 때 화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바로가기

92)예배당이 부정적 의미로 활용되는 경우가 있습니까?바로가기

93)현실교회의 예배제도에 문제가 있습니까? 바로가기

94)예배당에 대한 견해를 알려 주십시오바로가기

95)찬송가에 대한 개혁적인 견해가 있습니까?바로가기

96)예배 의식에 대한 개혁적 견해가 있습니까?바로가기

97)예배 의식을 가질 때 꼭 까운을 입어야 합니까?바로가기

98)예배드릴 때 찬송을 부르면서 키타를 치는 것이 어떠합니까?바로가기

99)성수주일을 얼마큼 강조해야 좋을까요?바로가기

7. 교회절기와 성례에 대한 문답

100)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107바로가기

101)"성례”에 대하여 알아야 할 지식을 말씀해 주십시오108바로가기

102)부활주일과 새벽연합예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110바로가기

103)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누구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나요?110바로가기

104)예수님의 부활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바로가기

105)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나타나신 순서는? 111바로가기

106)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나타나신 일이 있었나요?112바로가기

107)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형벌이 로마인들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까?바로가기

108)한국교계가 금년(1995년)을“희년의 해”로 선포한 의미는?바로가기

109)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114바로가기


8. 전도에 대한 문답

110)전도회 기관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116바로가기

111)전도회 등 어떤 기관을 유지함에 있어서 어떤 점이 어렵습니까?116바로가기

112)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118바로가기

113)전도에 대한 상식을 말씀해 주십시오120바로가기

114)오랜 기간을 전도하였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121바로가기

115)인위적(人爲的)방법으로 상대방을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까?122바로가기

116)"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123바로가기

117)구걸하는 식으로 전도를 하여야만 합니까?바로가기


9. 헌금에 대한 문답

118)교회가 헌금을 합리적으로 거출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126바로가기

119)교회의 헌금을 합리적으로 취급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127바로가기

120)교회나 성도가 부채를 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바로가기

121)교회의 재정을 사용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128바로가기

122)교회 재정이 주로 어떻게 지출되어야 합니까?바로가기

10. 성도의 교제에 대한 문답

123)성도간의 물질거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바로가기

124)성도가 다른 교회 사역자들과 교제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130바로가기

125)교회단체의 야외행사를 건설적으로 갖는 방법이 있을까요?131바로가기

126)성도가 경쟁의식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까?132바로가기

127)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이유에서입니까?133바로가기

128)상전과 종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가 무엇입니까?135바로가기

129)사랑에 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137바로가기

130)결혼을 꼭 믿는 자와 하여야 합니까?137바로가기


11. 성직자와 목회에 대한 문답

131)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138바로가기

132)95년 2월 5일 경향신문 종교란에“목회자는 성직자가 아니다”라는 글이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138바로가기

133)교회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140바로가기

134)목사는 어디에 예속된 직분입니까?141바로가기

135)신령한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일이 더 보람이 있을까요?143바로가기

136)심방은 왜 합니까?144바로가기

137)성직자와 성직의 직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145바로가기

138)어떤 성직자가 훌륭한 성직자입니까?146바로가기

139)어떤 목회방법이 가장 좋습니까?147바로가기

140)교역자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148바로가기

141)복음사역자의 무장에 대하여151바로가기

142)성도와 복음 사역자들의 명예욕에 대하여152바로가기

143)성직자들의 개혁의 과제들이 있습니까?152바로가기

144)교회와 성직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153바로가기


12. 기타의 문답

145)극단적 휴거론이란 무슨 뜻입니까? 154바로가기

146)세월을 아낌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말씀해 주십시오155바로가기

147)직분맡은 성도로써 죄의식을 느끼는 고민으로 상담함에 대하여157바로가기

148)교회 헌법에 대한 개혁의 과제가 있습니까?158 바로가기

149)법적 송사에 대한 합리적 견해는 무엇입니까?158 바로가기

150)교회가 많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159 바로가기


(서론에 해당하는 글)


필자가 목회할 당시인 95년도 첫 주일부터 <기독교 신앙 문답>이란 제목 아래 신앙에 관한 문제와 해답을 글로 써서 2면 정도의 분량으로 주보와 함께 나누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답집은 교회 성도들에게 성경공부에 대한 방법을 여러 가지로 권장하며 재료를 공급한 것 중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주어졌지만, 문서로 나타낸 신앙지식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읽고 배우는 성도가 많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필자는 평신도님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기초신앙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백과>를, 교회생활을 위하여 <교회헌법연구>를, 새벽 기도회에 못나오시는 성도님들을 위하여 7분 설교집을,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성경 읽기와 성경의 총괄적 연구를 <요절연구사전>을, 기도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기도의 참고서>를, 또 전문적인 성경 공부를 위하여, 몇 가지 강해서를 집필하였습니다. 본서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문답 150문도 교회의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당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것 같아서 교육의 열의로 전달한 것과 마음에 두었던 것을 출판한 것입니다. 증언자의 열심에 동참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는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의 역사를 성도가 어떻게 체험하느냐에 따라 신앙생활의 양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감정으로 체험하려고 하는 성도들은 감정을 앞세워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려고 하지만, 감정으로 느끼는 기쁨이나, 만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는 크게 미흡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진리에 입각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님의 9가지 열매를 맺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느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함이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약2:17). 그러나 현실교회 안에는 실제 행동의 열매보다 감정으로 느끼는 체험만을 추구하려는 성도들이 많고, 또 그것만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인줄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성령님에 대한 바른 교육이 절실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정적(감정) 사역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적(知的) 사역도 하시고, 의지적(실천) 사역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이나, 성경으로 감화를 받는 것이나, 성경을 실천하는 것이 다 성령님의 역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복음성가) 가사 중에 신앙의 첨단을 달리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키고, 물에도 불에도 들어가며,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라”는 찬송을 부를 때 지나친 감정에 동하며 기뻐하는 성도를 볼 때가 있으나, “과연 그가 멸시천대를 자기의 십자가로 알고 지고 가느냐?”할 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 그의 찬송의 기쁨이 성령의 충만한 상태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다만 일시적 감정일 뿐이겠지요. 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바른 교육을 위하여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출판하였은즉, 많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절연구사전>은 성경의 전체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각종 강해서는 어느 정도 성경 공부에 취미를 가진 분들에게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실 수 있고, 또 성경 해석의 방법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재료를 드리는 것이오니 꼭 구입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기독교 신앙문답>은 초신자가 반드시 아셔야 할 것과, 현실 기독교 교육 중에서 감추어져 있거나, 왜곡된 가르침 등을 지적하고, 바른 교리와 생활에 대한 것을 쉽게 설명하므로 신앙에 상당한 기초와 길잡이가 되어지기를 바라서 감히 출판을 하였사오니, 초신자님들이 성실하게 읽으셔서 필자가 증언하는 메세지의 의도를 꼭 파악해 주시기 바랍니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없어질 수 있지만 글로 표현된 것은 더 확실하고 없어지지 않으므로 항상 성도님들 곁에서 가르치고 격려하는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기 위하여 문답식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이 글이 성경의 의미를 밝힌 것이기는 하지만, 글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으로 연결될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1995.1.1

지영근 드림


1.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1) 참 좋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내용이 좋은 질문이 되는 이유는, ① 행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요, ② 또 요6:28-29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즉 예수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또 성도의 기본 생활입니다.

2) 만일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하면서 예수 믿는 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거나 잘못 안다면, 결국 가짜 물건을 사는 사람처럼 믿음생활의 바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을 바로 아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요1:1,18, 14:9, 빌2: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요3:16,17), 구세주이시고(마1:1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14:6), 인간의 모범자이시고(요13:13-15), 신성과 인성을 겸하신 분이며(마1:16, 요1:1,14), 또 창조, 통치, 심판하시는 절대자란 사실들을 아는 것이요, ② 그 예수님을 자기의 주(왕)로 영접하고 모심에 있어서 자신의 옛사람과 인간적인 정욕을 죽이고(롬6:6, 골3:9), 예수님을 영접하여(요1:12), 자기 마음 속에 계시게 한 다음(엡3:17), 그분의 인격과 생활을 본받고(요13:13-14, 롬8:29), 그분의 지배를 받아 복종하며(요13:16), 섬기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다시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영접하여, 본받고, 복종하고, 섬기는 생활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2. 예수를 믿는 원리를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1) 예수 믿는 원리란 예수를 잘 믿는 방법으로서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바른 위치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시요, 자신은 피조물이며, 예수님은 구세주이시요, 자신은 죄인이며, 예수님은 왕이시요, 자신은 그의 백성이며, 예수님은 완전하신 스승이요, 자신은 그의 제자이며, 예수님은 주인이시요, 자신은 그의 종이란 사실을 알아서 예수님을 그 신분대로 섬기고 자신을 자신의 위치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반드시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고 예수님을 나그네처럼 멸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수 믿는 원리에 맞지 않는 것임을 지적해 드립니다.

2) 혹이라도 예수 믿는 생활이 기독교 의식을 가지므로 다 되는 것처럼 알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종교이건 의식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원리도 바른 신앙고백(마16:16)과, 하나님(예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마22:3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예수를 믿는 신앙의 기초요(마16:16), 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하신 말씀이 정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데(마7:21), 이 하나님의 뜻이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요5:39, 고전2:10,11, 딤후3:16).

결론적으로 예수 믿는 원리는 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함이요, ② 정신적인 신앙고백과 경외하는 정성이 있어야 하며, ③ 오직 성경에 입각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것을 그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3. 성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요?목록으로

: 성도와 신자는 같은 대상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으면 신자가 되고, 성도라고 일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말은 구약이나 신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신33:2, 시30:4, 마27:52, 행9:13). “신자”란 행10:45에서 “피스토스”란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이므로, 확실하게 믿기를 시작한 사람이면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란 “하기오스”란 말로서 거룩, 순결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가 없을 때는 세속(거룩의 반대)에 속하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여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세속에서 구별이 되고, 또 속죄의 은혜를 힘입어 의로워지며, 말씀과 기도로 더욱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의미는 ① 세속에서 구별되었다, ② 하나님의 은혜로 순결해졌다, ③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란 명칭에 합당한 긍지와 소망을 갖고 순결을 지키며, 구별된 생활을 영위하셔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십니까? 목록으로

: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전도의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의 시간을 알리지 않으심 같이(마24:36) “누구를 구원하신다”는 예고도 하신 일이 없습니다. 말세의 날을 숨기신 이유는 성도가 모든 인류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진리의 빛을 발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5:45). 그러나 말세의 시간은 몰라도 여러 가지 징조를 통하여 시기를 짐작할 수 있음 같이(마24:14,32-33) 구원의 대상도 짐작할만한 근거를 나타내주셨습니다.

1)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미리 선택하셨습니다(엡1:4, 행13:48). 이 “선택”이란 의미는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뜻이요, 또 구원의 길(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마7:13-14). 이 말씀은 복음에로 이끌려 오는 사람의 수가 적어도 낙심할 필요가 없음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고전10:5, 벧전3:20).

2) 위 질문에 가장 적절한 대답은 하나님이 노아같은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벧전3:20). 또 “롯”도 구원을 하셨습니다(창19:16). 노아와 롯을 구원하실 때 그 가족도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처럼 말씀을 불순종하고 뒤를 돌아본 사람은 중도에 탈락시켰습니다(창19:17,26). 롯이 멸망의 도성에서 나오게 된 사실을 “구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적 해석에 의함입니다.

3)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9:13)하심은 의인인 체하는 자를 구원하시지 않고 구원 받을 자가 죄인인체 하며 구원의 필요를 느낄 때에 믿음으로 나오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슬기있는 자(교만한 자)에게 복음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 같은 자(겸손하고, 순종하며, 죄인인줄 아는 자)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마11:25-26).

4) 예수님도 아무나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자에 한하여 구원의 중보를 이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7:8).

5) 한 가족으로 있으면서 기독교신앙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되기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라”하셨고(눅9:50), 또 믿는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믿게 할 수 있는 경우를 말씀하셨으며(고전7:13-14). 구약시대에 가족적인 할례를 행한 것이나(창17:10-13), 행16:34에서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음”이 그 가족 전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구원대상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특정인을 지목하신 바가 없다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신 다음에(창17:4,8-9) 그 후손인 이삭과 야곱의 후예들에게(전체라는 뜻이 아님; 창17:19, 갈4:23, 롬 9:13) 우선적 구원의 상대자를 삼으셨고(간간이 이방인도 구원하셨음; 마1:5),

7) 예수님은 같은 민족이라도(마15:24) 비천한 백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셨으며(마4:12-16)

8) 신약시대에 와서 오순절 이후부터 모든 족속 모든 계층에게 차별없이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마28:19, 막16:15, 행1:8). 따라서 구원대상은 비밀에 속한 것이나, 선택자는 그 사람의 선이나 행함에 근거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며(롬9:4), 처음에는 하나님만 아시는 선택자를, 그 다음에는 선민의 부족들 중에서, 또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 중에서(롬11:25) 작정된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야곱의 열 두 지파라 하여 다 구원이 작정된 것은 아니고, 그 중에서 구원하셨으며, 그 계열을 통하여 구원약속의 과정을 밟으셨고(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 마1:1),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특별한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구원의 약속(메시야 언약)을 역사적으로 이행하신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5.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목록으로

: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성경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중심 신앙에 정착하지 못한 성도가 많은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은, ① 성경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만물)계시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지만(롬1:20, 요5:18,14:9) 자연계시는 창조섭리 이상의 자세한 계시가 없고, 예수님은 세상에 계셨을 때만 나타내셨으며, 현재 인간에게 하나님을 자세히 알리신 계시는 성경 뿐입니다. ② 성경 66권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만큼의 계시를 주셨고(요21:25), 또 끝내신 분이며(히1:1-2, 유3), 성경 66권 이상을 가감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계22:18,19). ③ 성경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로 동등하게 믿는 것입니다. 요1:1, 행13:48,20:32은 성경을 하나님의 인격과 동등시 하셨습니다. ④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와 능력을 나타내시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력의 말씀이요(창1:3, 시107:20, 마8:8), 구원의 말씀이며(행13:26), 영생의 말씀(요6:68)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믿고 성경만 믿으며, 성경 66권의 내용으로 만족하고, 다른 계시를 추구하지 않으며, 성경의 권위만 최고로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성경을 소극적으로 대하며 다른 신비한 계시나 능력이나 체험을 앞세운다면 이런 것은 성경 중심의 신앙에서 아주 반대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변하지 않는 한(벧전1:25) 성경 중심의 신앙도 역시 든든하며, 질서가 있고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6. 참된 성도임을 알아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참된 성도는 우선 성품이 착합니다. 요10:4에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셨고, 또 딤전1:19의 “착한 양심”, 딤전3:9에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성품이 착하고 진실해야 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성경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고후13:8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 의롭게 살려는 간절한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시1:1-2).

3) 성경을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인 만큼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으니까 성경 배우기를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행17:11).

4) 항상 회개와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무리 주의를 한다해도 부족과 실수가 없을 수 없으므로 늘 자신의 연약을 알아서 회개하기를 노력하고 또 그만큼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이요(요13:10, 마18:22).

5) 예수님이 종의 형상으로 오셔서 섬기신 것처럼(눅22:27) 항상 봉사와 헌신의 자세를 취하고 많은 봉사를 하였을지라도 “나의 할 것을 한 것 뿐이라”고 한 겸손한 청지기처럼(눅17:9) 봉사자의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이요,

6) 자기를 부정하며 사욕에 뜻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앞세우려 하면 옛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일이 됩니다. 또 신앙생활의 목적이 어떤 사욕이나 기복에 있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에 있기 때문에 사욕을 외면해도 하나님의 주실 것은 다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마6:32,33).

7) 내세와 하늘의 상급, 신령한 복을 궁극적으로 사모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7. 예수 믿는 성도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합니까? 목록으로

: 1)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얻게 된 일에 대하여 큰 만족과 긍지를 갖고 사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상의 신령한 복들이 다 천하보다 귀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2) 성도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강한 목표와 그 성취를 위하여 진력하는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늘 영광돌리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분별하여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신의 옛사람은 죽었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주인이 되어 살아주신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롬14:8).

4)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 그 자체를 큰 복으로, 큰 보람으로, 또 큰 보화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시119:56, 고후13:8).

5) 신령한 은혜와 내세의 복을 현실의 모든 것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하며(롬8:24-25, 고후4:18),

6) 회개하는 자세와 의를 추구하는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여야 하며(시66:2)

7) 천국과 지옥은 물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으므로 잘잘못에 대한 분별과 손해로운 일에 대하여 너그럽게 참고 넘어가는 특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특징이 있으면 믿음이 성숙한 좋은 성도로서 믿음생활의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8.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 목록으로

: 매사의 핵심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 또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 또 독생자를 보내어 죄악의 인생을 구원하신 목적 등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의 핵심, 교회생활의 핵심, 자기생활의 핵심 등도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목양 7호)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는데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이적의 계속성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란 뜻이므로 하나의 작은 교리를 기독교의 핵심으로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핵심을 잘못 안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기독교생활의 핵심을 잘못 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최종목적이 아닌 것을 핵심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수주일, 예배(찬송, 기도 등)시설, 사무적인 행정 등을 핵심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법이지만 사실은 은혜받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에 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수주일이나 예배의식을 신앙생활의 핵심처럼 중요하게 여겼을지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면 더 중요한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삼상15:22) 하셨고, 또 “순결이나 변화없이 제사드리는 일을 자신의 마당 밟는 일이요, 역겨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사1:11-14). 이 말씀에서 성도의 예배 의식에는 더 중요한 책임을 동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가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을 때에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예배)을 드리라”(마5:23-24)는 말씀을 깊이 음미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입니까?

1) 진리를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7:21-23을 음미해 보십시오. 기도, 설교, 권능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의 불행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멸망이라”하셨고(호4:6),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호6:6)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아는 지식(이는 곧 믿음임)을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아셔야 하며,

2) 자기 변화에 두셔야 합니다. 성경에 “변화를 받으라”(롬12:2),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롬8:29), “거룩하라”(고후7:1, 엡1:4)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음생활을 할 때에 성품과 언어와 생활목표와 생활방법에 반드시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변화 받는 것을 핵심으로 여기셔야 하며,

3) 평상시의 생활이 항상 밝아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에만 하는 것도 아니요, 예배당이나 교회 단체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빛을 발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언제 어디서나 계명순종, 사랑, 빛을 발하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며 소금 역할을 잘 하는가에 관심을 두어 소금 역할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생활의 핵심이 성수 주일, 예배의 열심, 힘있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많은 헌금만 있으면 잘 되어가는 줄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 핵심적 생활이 없다면 그 핵심이 빠진 기독교 의식이나 유형한 시설들은 다 빛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9. 믿음의 성장 단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믿음은 자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막4:28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하시므로 신앙의 성숙단계를 싹과 이삭과 익은 열매로 비유하셨고, 고전3:2에서는 젖먹는 아이와 밥먹는 어른으로 비유하셨습니다.

1) 믿음의 성장단계를 표현할 때 두 가지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① 구원 받는 기본신앙을 가진 성도가 있습니다. 복음적 신앙을 깨닫고 세례를 받으므로 천국갈 준비를 확보한 성도입니다. 사도신경을 알고 고백하는 정도이면 이 신앙단계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② 신앙의 질을 높인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더 많이 아는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갖는 신앙, 실천을 많이 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신 말씀이 구원 받는 믿음이라면 히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받고 더 좋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더 좋은 믿음의 실례는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마8:8-10),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계1:9), 헌신하는 신앙(마26:13)이라 할 것입니다.

2) 성도의 믿음이 성숙하는 단계를 자각하려면 ① 신령한 은혜, 특히 말씀 연구하는 은혜에 이끌려야 하고, ② 죄를 두렵게 여기게 되어 어떤 좋은 대가를 받는다 하여도 죄를 거절하게 되며, ③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④ 현실적 생활의 향락이나 특권을 좋아하지 않게 되며, ⑤ 모든 면에 소망과 자유와 만족과 감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0. 말씀중심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 중심의 신앙과 같은 것이요,

2) 성경을 믿되 단회적으로 주시고 끝내신 66권의 말씀만 믿는 것이요(요21:25, 엡3:5, 히1:1-2, 유3, 계22:18,19),

3) 성경을 하나님의 인격적 권위와 동일시 함이요(요1:1, 행20:32),

4)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표준이므로 그 권위를 절대 유일로 높이는 것이요,

5) 말씀에 능력이 동반함을 믿음이요(창1:2, 시107:20, 마8:8, 눅1:37, 행10:44),

6) 성경을 사모하고 상고하는 것을 하나님 가까이 하는 것으로 믿고(시130:5), 성경을 열심히 상고함이요(시119:97,103,111),

7) 성경에 집착하는 생활을 기도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줄로 앎이요(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임; 눅10:39-42),

8) 말씀이 흥왕할 때 전도와 능력과 부흥이 이룩되는 줄로 믿는 것이요(행19:20),

9) 말씀따라 살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생활이요(창12:4, 행18:5),

10) 말씀의 뜻에 따라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수1:7) 다 준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7:5). 따라서 말씀중심에 선 성도는 성경만으로 모든 신앙생활을 충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첫째는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은 주일을 중심으로 공예배와 성도간의 친교와 성경공부와 봉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입문하고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일들을 교회를 통하여 배우게 되기 때문에 교회생활이 필수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생활 속에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받지 못한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교리에 관한 것)이나, 사랑 없는 태도나, 진실치 못한 일이나, 또는 불법이나, 부덕이 나타날 수도 있는 만큼 그런 일을 반드시 이해하고 경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음을 미리 아시고, 신앙생활에 유익한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둘째 필수 요건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씨앗과 같아서 마음 속에 믿음으로 심겨질 때(깨달을 때) 감동과 의지적 결단과 실천의 힘을 주게됩니다. 씨앗에 생명력이 있듯이 말씀에도 무한한 생명력이 있어서 믿음생활을 발전(자라남)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근거요, 영혼의 양식이며, 생활방도의 지표(指標)임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3) 셋째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명의 목표입니다. 신앙 생활 중 사랑실천을 뺀다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 없는 예배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마5:23-24, 사58:4-5). 따라서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은 교회생활, 성경공부, 사랑실천임을 명심하십시오.


12. 현실교회에 무엇들이 문제스러운 일들입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권의 책을 써도 부족할 것입니다. 우선 기독교 전체에 관한 문제를 생각한다면,

1)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교파와 교회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학은 정통신학 칼빈주의를 의미합니다. 이 칼빈주의 신학이 정립되려면 복음사역자가 정통신학을 많이 깨닫고 그 신학의 기초 위에서 가르치고 목회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희미해진 경우가 많고 종교혼합주의에 물들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적, 신학적 목회가 많은 사람을 모으는데는 혼합주의 종교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혼합주의란 사람의 생각대로 목적에 만족을 주는 것이면 무조건 다 모방하여 시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교회에 칼빈주의 신학이 평신도들에게까지 이해되고 신학노선의 필요를 느끼는 성도가 많아질 때까지 신학적 교육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는 항상 그 신앙의 순결과 확고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평신도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2) 개인이 받은 은사와 체험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이 평신도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도층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므로 성도가 당연히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의 체험이 성도마다 다 같지 않습니다(고전12:11). 이런 경우에 개인이 받은 은사는 스스로 간직하면서 신앙의 표준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은사의 체험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자신의 은사체험이 오히려 자신을 번민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번민이 있을 때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체험을 무시하고 그대신 성경을 더욱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혹 어떤 성도가 신앙과 본분의 절대유일의 법칙인 성경을 떠나서 개인적 은사체험을 선호할 때 그것이 믿음 약한 성도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서 성경적 신앙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은사체험은 대체로 기도를 통한 신비한 체험, 계시를 받는 체험, 병고침을 받는 체험 등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분명한 것은 개인적 감정에 흔들리지 마시고 성경의 지식을 따라 행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신령한 은혜보다 현실성에 큰 비중을 두는 문제입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서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최고의 방법은 회개와 말씀과 기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결을 유지하면서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회적 의무와 생활을 도외시하고 일방적 영적 은혜만 추구하여서는 안되겠지요. 여기에서 성도는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고(마6:24),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림이 되며(갈5:17), 성도의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됨이라(약4:4)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요, 따라서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귀히 여기는 성도는 마땅히 현실적, 정욕적 욕구에서 탈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적, 정욕적 욕구란 현실적 필수요건(예:의식주문제 같은 것)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요, 그 이상의 향락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 기독교 안에 성도가 갖고 있는 잠재된 악의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교만, 명예욕, 권세욕, 인기주의, 혈기, 폭력, 외식, 물량주의, 기복주의, 심지어는 교권주의와 직분탐심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량주의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과장하는 외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타파하는 길은 오직 자신을 먼저 죽이는 일일 것입니다(고전15:31). 자신이 겸손해 지지 않거나,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되어지지 않고는 현실적 경향에서 신령한 쪽으로 돌이키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현실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령한 세계를 사모하는 노력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은 신령한 보화를 깨닫고 소유하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마13:44-46).


13. 현실 기독교회의 개혁의 과제는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이에 대한 대답은 교파나 복음사역자의 형편에 따라 다르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보편적 또는 전체적 안목에서 성경과 초대 교회적 생활을 표준으로 비추어 볼 때,

1) 믿음위주에서 외형적 물량위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다시 믿음 위주로 돌이켜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가치관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헤아리지 않고, 성수주일 또는 교회생활과 물량주의로 헤아리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영적 호흡(친교)과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생활에 가치관을 두고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주일을 경건하게 보냈거나, 헌금을 하였거나, 교회의 일에 충성, 협력을 잘 한 것에서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적 생활은 신앙의 방법이고,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방법보다 열매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하는 부부가 의식이나 예절을 소중히 여김보다 서로 사랑의 관계를 굳게 함이 더 필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축복의 가치를 현실적인 것보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데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의 바램이 현실적 축복에 있고, 현실적 축복으로 영적 믿음의 축복을 바꾸려는 성도는 많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축복이 형통해야만 믿음생활의 보람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생활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고난이 믿음의 더 좋은 연단과 사명의 성취를 더 많이 이행할 수 있음을 알아서 물질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택하듯이(마6:24) 고난 중에서라도 믿음과 사명의 성실성을 택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눅18:8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유감의 표명이요, 예언인데, 그 “믿음이 없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파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주의에 집착함을 뜻하지 않을까요?

3) 제도보다 내용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는 행정, 조직, 계획, 문서상의 일이요, 내용은 말씀주입입니다. 현실교회는 하나의 말씀주입을 위하여 더 많은 비중의 시간, 물질, 노력, 계획 등을 투자하는 정성들이 너무 장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어린이 성경학교를 한다고 할 때, 말씀주입은 30분씩 10회에 불과합니다. 그 말씀주입을 더 간단히 효과있게 하면 15분씩 10회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는 참으로 장황합니다. 교회의 예산 편성에서부터 주교사 교육, 준비기도회, 사무적 홍보 등 참으로 많은 시간과 물량을 소모하는데, 이것이 핵심적 교육에 비할 때 지나친 소모책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교회의 개혁의 과제는 정통성확립도 물론 중요하지만 물량주의에서 개인적 믿음의 실속 차리는 일로, 현실적 기복주의에서 탈출하는 사명주의로, 또 제도상의 지나친 소모를 지양하고 핵심전달로 축소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4. 신앙생활의 보람을 어디에서 느껴야 합니까?목록으로

: 어떤 성도는 교인들과의 친교, 감정상의 기분, 교회적 직분생활, 또는 현실복의 형통에서 느끼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신앙생활의 실제적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보람은

1)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에서 느껴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거, 동행,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창5:24,26:9, 요14:23, 계3:20, 욥1:8)에서 찾아야 하며,

2) 자기변화 즉 예수님의 인격을 닮음에서 찾아야 하며(롬12:2,8:29, 살전4:3, 벧전1:16),

3)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성경에서 깨닫고 그대로 따름에서 찾아야 하며(시119:56, 마7:21),

4) 사랑의 실천에서 찾아야 하며(마25:32-46, 갈5:6),

5) 자유누리는 생활에서 찾아야 하며(요8:32, 갈5:1),

6) 영원히 살고 있는 생활, 즉 죽지 않고 영생함에서 찾아야 하며(요3:16),

7) 하늘의 상급을 예비하는 생활과, 그것을 기대하는 소망에서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눅16:25, 딤후4:7-8). 이 보람은 곧 충성과 헌신의 보람입니다.


15. 물질과 신앙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습니까?목록으로

: 성도가 물질을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신앙의 진가를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1) 신앙의 모범자이신 예수님은 그 이웃을 위하여 가난하게 사셨습니다(고후8:9).

2) 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하셨고(마6:24),

3) 부하려는 자들과 돈을 사랑함이 범죄의 요소가 된다 하셨으며(딤전6:9-10-),

4) 물질을 의존하거나 그것을 낙으로 알 때, 불행해진다는 교훈도 하셨은즉(눅12:15-21), 성도는 바다에 떠 있는 배가 물을 등에 대고 떠 있는 것처럼, 물질을 소극적으로 대함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 있음으로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마6:11,31,34, 딤전6: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교회 성도들이 물질우상주의에 빠져 있다면 믿음생활의 구심점이 잘못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함이 될 것입니다. 재물을 적게 가지므로 가난한 상태이지만 만족하면서 하루하루를 근면하게 사는 신앙이 더 값지고 순결한 믿음일 것입니다.


16. 믿음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누가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과히 거부감이 없는 상태에서 친교 및 교회생활을 하다가 제도에 의하여 세례까지 받고 교인이 되는 수도 있고, 세례 받기 전이나 세례 받은 후라도 자신의 믿음생활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그 회의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에 대하여 허무감을 느끼거나 “사람이 기록한 성경(영감의 지식이 없으므로)을 진리로 믿고, 그대로 실천하여야 복받는다”는 문제 등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기도로 소원성취가 안되거나 교인들과의 친교상, 모범상에 문제가 있을 때도 회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근본적 입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1)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만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요14:6, 롬3:4,7). 그런 취지에서 다른 이유로 흔들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또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 갖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서(히12:2)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가 믿음을 가져야 할 시기에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거듭나게 하시고(요3:3), 성령님의 진리전달 사역을 통하여 택한 자의 마음에 믿음의 싹이 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마16:17, 고전12:3).

3) 여기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로서 성경을 진리로 믿는 성도는 자신이 그 사실에 대한 확인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란 자신이 그리스도(성경) 안에서 사는 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서(성경을 무시함) 사는 자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성경을 억지로 믿는 형편이라면 믿음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고, 성경을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이 있으면 그의 믿음은 진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성경에 속박됨이 있습니다. 믿지 않을 수 없는 속박,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속박, 또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속박 등입니다(고후13:5).

4) 그러나 믿음의 소재인 성경은 방대하고 또 성경대로 시행하는 생활도 폭이 넓기 때문에 성경을 더 알고 덜 아는 차이와 성경대로 많이 실천하고 적게 실천하는 차이에서 믿음분량의 차이를 갖게 됩니다. 이 차이는 구원받는 신앙의 차이가 아니고(구원은 믿으면 받으니까) 성경적 생활을 나타내는 믿음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충만한 믿음을 가질수록 좋습니다.

5) 따라서 믿음의 회의는 ①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외식에 얽매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느낄 수도 있고, ② 또 거듭났지만 성경을 멀리하고, 잘못된 행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심령이 어두워진 상태에서 진리가 가리워지므로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전자는 거듭나기 전에는 치료가 안되고 후자는 회개하고 진리를 가까이 할 때 다시 그 심령이 소성함을 받아 회의감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눅17:5, 시42:5, 마5:8, 딤후3:14).


17. 교회란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1) 기독교인은 반드시 교회에 출석하여야 하며, 기독교인으로서의 교회생활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교회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바른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어떤 이는 “교회에 대하여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당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존재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광야교회(행7:38)도 예배당 건물이 없었고, 또 예수님 시대도 그러하였으며(마5:1,26:18), 초대 교회 당시에도 그러하였습니다(행1:13,14:1,18:4, 고전16:19). 성경에 보면 현재 예배당을 대신하였던 장소가 산이나 들, 또는 회당과 개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후시대에 교인의 단체가 커지면서 모임의 장소(예배당)가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 건물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 아니고, 건물이란 물질과 재정이 교회의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외에도 교회의 요소와 목적과 사명에 대하여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3) 교회란 “예수 믿는 성도의 단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단체 안에는 진짜로 믿는 성도(신자)도 있고, 가짜로 믿는 외식하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구약의 광야 시대에도 그러하였고(고전10:1-5), 예수님의 제자들 세계에서도 그러하였으며(요13:10),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라지가 용납되는 농장”(마13:24-30)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아시는 신령한 교회의 요소는 순수한 성도를 그 대상으로 하지만(계21:25-27), 지상에 있는 유형교회는 그렇지 않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계22:11).

4) 따라서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나눌 수 있되, 무형교회는 내세의 천국과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성도의 단체를 망라한 대상을 뜻하고, 유형교회는 현실 세계에만 있는 단체로서 성경적 신앙고백을 하고 성경적 기독교의식에 참여하였을 때,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사람이 인정하고 세례를 받게 한 사람들의 조직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간다”는 뜻은 보통 예배당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교회라는 단체생활에 합류하기 위하여 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18. 교회의 조직은 어떻게 합니까? 목록으로

답: 교회조직은 세례받은 무흠한 입교인들이 지교회(각교회)별로 단체를 이루고 이 단체를 지도하는 체계 안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교회 단체를 지도하는 기관은 당회와 노회와 총회에 귀속된 것을 의미합니다. 장로를 세워 당회를 구성하지 못한 개척교회는 노회의 지도를 받는 것이 원칙이며, 노회의 허락으로 당회장이 혼자서 임시로 지도합니다.

19.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답: 교회의 사명을 아는 것은 성도가 교회생활을 충실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개인적인 일은 개인의 양심과 목적대로 하고, 교회의 생활은 교회의 목적에 따라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 아닌 것이 교회에서 시행되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1) 진리에 대한 사명이 있으니 ① 진리(성경)를 보존하고, ② 진리를 해석하며, ③ 진리를 가르쳐서 은혜를 전달하고, ④ 전도하는 사명이요,

2) 사랑과 친교에 대한 사명이니, 모든 사람을 상대로 사랑만 실천하면 친교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3) 사회에 대한 빛과 소금의 사명이니, 성도 개인이나 교회단체는 반드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앞장서서 시행하여야 합니다.


20. 성도가 교회에 나가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목록으로

답: 1) 우선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혼자도 드릴 수 있고, 어느 장소에서나 드릴 수 있지만, 혼자 하는 것은 교회란 단체와 직접관련이 없는 것이고, 또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가 교회라는 단체를 상대로 하여 일을 하기 때문에 공예배가 개인적 예배보다 더 정성이 담긴 것입니다. 이 예배의식 속에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말씀, 기도, 헌금, 헌신, 축복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

2) 성도의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성도의 친교에 대한 말씀은 행2:44-46에 나타나 있고, 사도 요한도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으며(요일4:7,11), 시133:1에서도 “성도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게 여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교회에 나오시면 모든 대상을 상대로 사랑하고 친교하는 사명을 이행하셔야 합니다.

3) 합력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엡2:10에 보시면 “성도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하셨고, 롬8:28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단체입니다. 따라서 혼자 할 수 있는 선행은 얼마든지 개인이 자유롭게 하면 되지만, 혼자의 힘이 연약한 것을 단체적으로 모아서 큰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성도들과 함께 마음과 뜻과 목적과 방법을 하나로 모아서 기도, 전도, 구제, 봉사 등의 선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셔서 할 일은 예배, 친교, 합심선행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아닌 다른 부덕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사탄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1. 성도와 교인이 어떻게 다릅니까?목록으로

: 성도는 확실한 신자(信者)를 말합니다. 자기의 양심상, 확실한 기독교인(예수님을 믿는 자)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신자로 인정해 주시는 자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교회의 목사나 당회가 교인될 자의 신앙고백과 그 고백에 따른 생활을 참작하여 그대로 믿고 세례를 베풀어서 교회회원으로 입적을 시키면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신자) 중에서는 외식자가 있을 수 없지만, 교인의 입장에서는 혹 그의 신앙행위가 진실함이 아니라고 할 때는 외식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들은 진실한 신자(성도), 확실한 교인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2. 교회 안에 어떤 기관들이 있습니까? 목록으로

: 1)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이행하는데 도움되는 기관을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에 도움되는 찬양대, 전도에 도움되는 전도회, 교육에 도움되는 주일학교, 친교와 봉사에 도움되는 단체를 둘 수 있습니다. 현실교회가 필요로 하는 단체(기관)들을 살펴보면 1) 우선 교회의 전반적인 행정(다스림과 감독)을 지도하는 당회가 있고, 2) 당회의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모든 기관들로서 ① 예배를 돕는 찬양대, ② 성경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③ 전도, 친교, 봉사를 하는 남녀, 또는 연령별로 구성하는 전도회가 있습니다. 3) 그리고 교인을 분류하여 지도하고 관리함에 있어서 편의롭게 하기 위한 구역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기관들은 다 교회의 진정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유익한 일들만 시행하여야 하며, 되도록이면 교회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시간과 장소와 물질을 소모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23. 교회의 기관을 연령, 남녀 등 계층별로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까? 목록으로

: 일장이 일단이 있으나 가급적이면 구별을 적게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어른이나 아이가 다 함께 친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회동하는 일 이 자유롭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회동하는 것도 그렇다”, “선배와 후배사이가 그렇다”, “10년 이상 어른과 그 이하의 동생들과의 친교가 어색하다”는 등의 이유로 교회기관을 연령, 계층별로 많이 나누는 실정에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남녀간의 친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듯이, 연령별, 학력별 등에 대하여도 부모, 형제, 자녀처럼 상대하고 친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일장일단이란 무엇일까요? 장점은 비슷한 연령의 식구들끼리 친교를 임의롭게 하면서 자유로워진다는 점이겠지만 그 자유가 방종이나 예절을 벗어날 때는 단점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전체 가족이 다 함께 친교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성경을 교육할 때만 어른과 아이를 분별하여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혹, 젊은이들이 노인들과 함께 하는 친교를 꺼린다면, 어른을 경시한다는 오해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의할 것은 남녀친교에 있어서는 누가 보아도 부덕한 감정을 갖지 않도록 덕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24. 교회 안에 청년회가 결성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그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① 청년들끼리 건전한 친교를 갖기 위함이요, ② 장년부 성경교육이 부족할 경우에(청년들은 장년부 소속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음) 그것을 보충하는 교육을 받는 목적이 있고, ③ 선한 사업을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목적에서 친교는 믿음 안에서 가족적 분위기로 덕되게 진행하고, 교육은 시간을 정하여 지도자에게 받고, 선한 사업은 기도, 전도, 자선, 또는 교회 일의 한 분야를 맡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목적을 생각할 때 선한 사업에 대하여 힘 있는대로 전체 회원의 의견에 따라 진행하면 될 것입니다. 그 이외에 다른 문제들로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가 목적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당회에서 허용하는 것만 시행하셔야 합니다.


25. 당회와 제직회는 무엇을 하는 기관입니까?목록으로

: 여기에 대하여는 본인이 집필한 “교회헌법연구”에서 상당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답을 생략합니다. 다만 아셔야 할 것은 당회는 교회의 모든 행정사무와 성도개인이나 기관의 신앙과 활동을 감독 지도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요, 제직회는 교회의 재정을 교회가 결의한 계획에 따라 집행하고, 교회에 수반되는 봉사적인 일들을 담당하는 기관인줄로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신앙세계에서는 봉사의 직을 맡았음이 크게 영광스러운 것인 줄로 아셔야 하며, 당회원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근면하게 감독하고, 다스리며, 범사에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26. 교회의 단체에서 선거를 할 때 특정인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은밀하게 운동할 수 있습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의 대답은 “은밀하게 운동할 수 없습니다.” 교회 헌법적 규칙 제5조 1항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공회 자체에서 많은 회원들이 서로의 형편을 몰라서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후보자를 공천하고, 공천한 사람이 공천된 사람의 좋은 점을 대중에게 알리고, 지지를 부탁하는 것은 공회의 결의로 공공연하게 하는 것이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은밀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부덕한 일이요, 권위주의를 팽배시키고, 파벌을 조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히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세계에서는 “내가 당선되야 한다”는 마음조차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빌2:3). 너 나 할 것 없이 섬기는 위치에만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눅22:27).


27.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목록으로

: 노회에서 장로고시를 치르는 구두시험에서 “교회의 주인이 누구냐”고 질문하즉 “장로”라고 대답한 일이 있어서 그가 큰 책망을 받았는데,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병폐가 현실교회 성도들에게 많이 잔존하는 것은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목사가 주인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마16:18), 또 하나님이십니다(딤전3:15).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관련할 때 장로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할 때 교인의 대표자요, 목사와 함께 교인을 지도하는 직분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부언할 것은 예배당의 소유자가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예배당을 지을 때 하나님께 헌금한 것으로 지어 봉헌을 한 것이면 역시 하나님의 것일 뿐 교인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의 법은 예배당을 출석하는 교인의 몫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주님의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도 역시 주님의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흔히 교역자들이 성도들에게 충성을 권고할 때 “주인의식을 갖고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 주인의식이란 봉사를 주인처럼 하라는 뜻일 뿐 주인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목사)나 성도나 건물(봉헌된 예배당)이 다 주님의 것임을 아십시오(롬1:1, 딤전6:11, 요21:15-17).


28. 교회는 누가 다스립니까?목록으로

: 이런 질문은 퍽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헌법연구”란 책으로 이미 반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가 교회는 목사혼자 다스리는 줄로 아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회가 있는 교회는 당회에서 다스리는 법이고, 당회가 없는 교회는 목사가 단독으로 노회를 대리하여 다스리지만, 2년 이상 시무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로교회의 원리가 교인의 대표로 장로를 세워, 목사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기 원하시는 성도는 반드시 헌법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성례로 은혜를 전하는 것은 목사가 하는 일이요, 그 이외의 사무적인 것과 치리, 권징에 관한 것은 당회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당회에 건설적인 의견을 제의했을 때, 그것이 수렴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가치관과 장로의 가치관이 다를 수 있고, 당회에서 종합하는 견해와 성도개인의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청년 중에서 예배드릴 때 각종 악기를 사용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나, 준비절차 미비 등의 관계로 부결된 일이 있었습니다. 악기를 구입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그 악기를 기술적으로 이용하되 꾸준히 봉사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기술자를 양성하는 문제는 그 당사자가 한 교회에 영구히 있을 교인이어야 하며, 또 새로운 교육예산이 필요한 중, 이 사실들을 결정하는데는 상당한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첫째로 교회의 모든 다스림이 당회에 의하여 처리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며, 또 한가지 아셔야 할 것은 어떤 사건이 결정되거나 부결되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 것을 이해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단체생활에서나 특히 교회에서 자기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것으로 불평을 하거나, 그것을 부당하게 여긴다면 그 성도는 다른 환경에서도 서로 화합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약점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9.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목록으로

: 좋은 교회는 좋은 복음사역자와 좋은 교인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좋은 교역자는 진리를 바로 증언하는 자이며, 최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좋은 성도는 올바른 진리지식을 갖고 계명을 잘 지키는 성도입니다. 10계명은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① 우상 숭배하지 않는 것이니,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없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대상이 없는 것이며, ②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요, ③ 주님의 날은 반드시 주님께 영광되도록 지키는 일이요, ④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른 신앙과 사랑실천이, 좋은 교인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귀하가 혹 좋은 교회를 찾는다면 진리가 바로 선포되는 교회, 헌법원리대로 민주정치 하는 교회, 교회설립의 출처와 배경이 건전한 교회, 약점을 시인하면서 회개와 개혁을 힘쓰는 교회, 사랑과 충성이 많은 교회를 선택하십시오.


30. 성도들의 교회를 보는 시선이 어떠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의 취지는 성도가 교회다운 교회를 평가하는 표준이 잘못된 것을 설명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많다”는 근거는 십자가가 있는 건물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와 건물 그 자체는 교회가 아닌 것이 사실이지요. 진정한 교회는 예수님과 순결한 성도의 연합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를 볼 때 우선 큰 교회를 교회다운 교회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교회는 사람(성도)이 많고, 실력과 지도력이 있는 교역자가 있고, 물질적 사업이 크고, 또 조직화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교인이어야 하고, 또 실력과 지도력이 있는 성직자도 오직 주님의 뜻만을 받들어야 하며, 물질사업은 구령사업이 아니며(시49:6-9), 조직 역시 그리스도 중심이 아닐 때에는 교회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교회를 보는 시선은 물량주의나 조직적 체계를 볼 것이 아니라, ① 정통성 있는 신앙의 노선을 보아야 하고, ② “순결한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관계”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순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수나 건물, 또 조직과 성직자의 명예적 지위를 보기 전에 “기독교 사상이 건전한 교파관계와 순결한 성도들이 모여 그리스도중심으로 사는 생활”에 관심을 두고,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31. 담임(위임)목사를 해임케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목록으로

: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70세까지 시무한다(본래는 종신직이었음)고 헌법 4장 4조 1항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① 범죄, ② 질병, ③ 교회부흥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목사 스스로, 또는 성도측에서 특별히 어려운 문제와 함께 노회에 상정하면 노회가 심사 판단하여 결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위임목사의 청빙은 교인의 청원과 목사의 동의와 노회의 승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임도 이 방법을 그대로 소급하여 행하는 것이며,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해임을 시도할 때는 상당부분의 생활대책을 담당하는 것이 성경적이요(고전9:7-14),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자를 선대하는 도리인 것입니다(갈6:6).


32. 예배당과 기도원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예배당이나, 기도원 건물이나 예배의 처소로 사용함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격식과 자세도 꼭 같아야 합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은 이웃과 인접된 관계로, 큰 소리가 나가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으나, 기도원은 한적한 곳에 있으므로 큰 소리를 자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가 기도하는 성도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통성 기도가 기도를 연습하는 성도에게 담력(용기)을 주는 유익이 있고, 또 어떤 성도가 큰 소리를 내어 호소하는 기도를 하므로 위안을 받고 확신을 더 갖게 되는 경우에 유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상기도나 조용한 음성으로 하는 기도를 숙달한 성도는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아도 같은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구태여 소리내는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꼭 큰 소리로 기도한 것만 은혜로운 기도라고 단정하시면 안됩니다. 기도하는 자세에는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도시에 있는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 큰 음성으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하여 금지해야 할만큼 제재를 받지 않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조용한 기도원이나 도시의 예배당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도원에서 섬기는 하나님과 신앙의 표준되는 성경이 다 같은 만큼 어디서든지 은혜 받는 방법과 예배드리는 방법, 기도하는 방법, 찬송하는 방법 등이 꼭 같아야 할 것을 말씀 드립니다. 혹이라도 교회의 예배당은 보통은혜 받는 장소이고, 기도원은 특별은혜를 받는 장소인 것처럼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라며, 어느 장소이든 은혜는 하나님이 말씀과 성례로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3. 성당이나 교회의 예배당, 사원 등 종교단체의 건물에 은신한 피의자는 법으로 제재하지 못합니까?목록으로

: 이 문제는 1995년 6월초에 노사법 위반으로 명동성당에 은신한 피의자들을 구속집행하기 위하여 경찰서장 등이 일곱 차례나 성당 지도자들에게 부탁하였지만 듣지 않으므로 사복 입은 경찰관들을 들여보내서 피의자들을 체포한데 대하여 천주교 측이 정부에게 사과를 요청한 문제로 있게 된 질문입니다.

1) 이 사건이 나오면서 대한민국 어느 곳이던 “치외법권(治外法權)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치외법권”이란 국제법상의 용어로서 한 국가의 공적책임자나 군대가 다른 나라 영토에 있을 때 그 나라의 법률적 제재를 받지 않는 경우, 또는 반대로 한 나라의 주권자가 다른 나라 지역을 다스리거나 통제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국내 사건에서는 직접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2)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실 때 민35장(신4:41-43, 수20:2,21:13-18)에 보시면 도피성을 여러 곳에 설치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릇되이(고의가 아닌) 살인 한 자가 무법한 보응에 쫓겨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지 않고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왕상1:51,2:28에 보시면 반역자가 성전마당의 제단 뿔을 잡으므로 용서를 빈 사실이 있었는데, 결국 그 반역자인 “아도니야”와 “요압”을 용서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따라서 제단 뿔을 잡은 것은 속죄제의 의미와 관련하여 용서를 구하는 방법일 뿐 하나님이 그런 제도를 명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3) 그렇다면 도피성에 관한 문제는 오늘의 기독교 세계에서 적용될 수 있는 일인가 할 때 그 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① 도피성은 이스라엘 선민국가에서 시행케 하신 것인데 그 선민국은 주전 600년경에 없어졌기 때문이요, ② 현재 우리나라는 특정종교를 선호하는 국가도 아니고, 더우기 국교를 가진 나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 기독교를 국교화 한 나라에서 “성당에 은신한 피의자는 정부에서 붙잡지 말라”는 국법을 정했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나라가 종교를 신성시하여 범종교 사원을 도피성처럼 인정한다면 종교사원이 있는 모든 곳은 범죄자들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4) 그러면 천주교도들 상당수가 정부 대표자에게 사과하라는 것은 무슨 죄를 사과하라는 것일까요? ① 그것은 국법상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도덕적 문제일 뿐입니다. “신성한 성당에서 약자를 보호하였는데 왜 공권력이 개입하여 천주교의 실권을 무시당하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② 여기에 대하여 정부는 답변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 국법상의 범죄가 아니라는 점과, ㉡ 일곱 차례 설득을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는 점과, ㉢ 종교사원이 도피성이 되는 관례를 남길 때 있게될 부작용을 막아야 하는 일과, ㉣ 속히 노사간의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어느 쪽이 잘못인지에 대하여는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생각하기를 일곱 번까지 설득하지 않고 세번쯤 했을 때 해결의 협상이 나왔어야만 좋았을 것입니다. 또 교회는 국민이나 신자들의 관심을 끄는 사건을 이용하여 교회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거나 그 사건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은 개인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나라와 통치자에게 더욱 크게 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롬13:1-4, 딤전2:2). 교회의 권위는 정부를 이기거나 정부의 비호를 받음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의를 실현하는데서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4. 주일학교 사명은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주일학교 사명은 성도나 성도의 자녀들에게 성경과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설교와 문서로 가르치고 신앙생활은 본을 보여주므로 충분할 것입니다. 성경과 신앙생활을 가르침에 있어서 그 이외의 목적까지 포함하여 시간과 물량을 소모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35.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이며,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첫째가 신앙고백이요, 둘째가 성경지식이며, 셋째가 성도의 생활입니다.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을 중심한 핵심적 신앙지식으로 구원받음에 필요한 지식으로 세례 받을 때까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요, 다음 성경지식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의 기초지식과 본문내용을 영혼의 양식으로 터득해 나가는 것이요, 또 성도의 생활은 교회 안에서 적응하는 생활과 넓게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교육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교회의 교육의 문제점은 ① 성경을 거의 모르는 교인이 있는 것과, ② 성경지식이 부족한 교인이 있는 것과, ③ 성경을 이해하는 지식의 차이가 많은 점과, ④ 일대일로 성경지식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점과, ⑤ 교육하는 입장에서 교육재료의 순서가 전체적으로 준비되지 못하였거나, ⑥ 엄격하게 교육하지도 않고 받으려하지도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하늘을 찌르고 있고, 마귀의 역사는 쉬지 않는 환경에서 성도는 말씀무장에 너무 소홀히 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이 기독교 서적을 읽지 않고, 성경공부에 게을리 하는 실정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36. 신앙교육의 목적을 위한 야외행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목록으로

: 신앙교육이란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사랑실천을 연습하러 야외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말씀교육과 기도는 예배당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어떤 야외장소에서 말씀과 기도를 지도하는 특별한 행사가 있다면 이를 사모하는 성도들 자신이 개인적으로 참여함이 좋을 것입니다. 교회가 특별 강사님을 모시고 교육의 필요를 느낄 때는 본 교회로 초청하여 집회를 가짐이 옳고, 교인들이 다른 곳으로 나가서 은혜를 받는 문제는 역시 자유활동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특별강사와 관계없이 야외에 나가서 소풍도 하고, 신앙활동(기도회)도 하려고 한다면 이 행사를 기도회와 소풍으로 나누어서 기도회는 기관주최로 교회당에서 시행하고 소풍행사는 별도로 시행함이 좋을 것입니다.


37. 교회에서 지도를 받는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목록으로

: 교회에서 지도를 받는 자의 자세는 교역자의 지도를 받는 성도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교역자(목사)를 대할 때 ① 하나님의 사자(보냄 받은 자)처럼 대하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가 부족한 인간처럼 여겨질 때도 있고, 또 자기보다 못한 자로 여겨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하나님의 사자로 택함을 받은 것과, 일정한 성도의 지도자가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갈1:1, 계2:1). ②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사역자: 교역자)를 통하여 그에게 속한 성도에게 은혜를 전달하시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출3:10)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삼하12:1)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 백성들에게(욘1:1-2) 빌립을 통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행8:26-39)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행9:10-18), 베드로를 통하여 고넬료에게(행10:5), 은혜를 전달하신 것처럼 하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왕이 선물을 주실 때 그 전달자가 부족한 사람이라 하여 못 받거나 안받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를 지도하는 복음사역자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③ 지도자의 증언하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함이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가르쳤거나 성경에 근거하여 성도의 죄를 책망했을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출4:12,15, 겔2:7,3:4, 또 살전2:13을 꼭 읽으십시오). 복음사역자의 성경증언과 성경에 근거한 책망을 꼭 하나님의 명으로 받으셔야 하며, ④ 복음사역자는 성도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며, 회계(會計) 할 책임자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만큼 그로 근심되지 않게 하고, 즐거움으로 일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히13:17). 즐거움으로 일하게 하는 방법은 그의 양이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요10:4-5). 혹 복음사역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민26:12-14, 욘1:1-3:3), 노회 혹은 선배사역자들을 통해서 지도하게 할 것입니다(행11:22,15:1-2,4-5,16:4-5, 딤전4:11-16,6:11-12).


38. 어떤 방법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목록으로

: 1)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고, 2) 혹 증언자가 성경 아닌 간증이나 여담을 할 때는 또 그 여담이 자기에게는 불필요하다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줄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설교자가 같은 본문, 같은 내용을 반복했을 경우에도 역시 새로운 교훈이 첨부되거나 아니면 처음 듣는 성도들에게 해당 될 것으로 이해하실 것이며, 4) 혹 그 설교가 성경에 근거한중 자신의 죄를 책망함이 될 때는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으로 받으셔야 할 것이며, 5) 반드시 법관의 논고문이나, 정치가의 기조연설을 듣는 것 이상으로 경청할 것이며, 6) 알고 있는 내용을 또 듣는다고 생각지 마시고 알 것을 많이 모르거나 실천이 부진하여 또 듣는 줄로 여기셔야 하며, 7) 반드시 증언자와 자신과의 사랑의 관계를 갖고 청취해야 할 것이며, 8) 한 증언자의 설교를 연속 들을 때는 증언하는 자의 증언하는 논리적 관습을 알고 들으면 더 유익할 것이며, 9)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설교자의 설교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9. 설교를 들었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목록으로

: 그 이유는 반드시 설교자나 듣는 자 중에 책임이 있습니다. 설교자에게 책임이 있는 경우는 말씀의 배경과 목적과 논리를 질서있고 알기 쉽게, 또 듣는 자의 수준에 맞도록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듣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경우는 자신이 잘 들으려 하지 않았거나, 워낙 기초지식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말씀의 전개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40.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의 최선책이 무엇일까요?목록으로

: 이 질문은 참으로 어렵고도 방대한 대답을 요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자녀교육”이란 의미는 믿는 가정에서 신앙생활 잘 하는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데는 부모가 베푸는 감화력과 교회의 주일학교 같은 이웃이 베푸는 감화력, 또 스스로 따라와서 좋은 성도가 되는 특수한 예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분명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는 부모가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배우지 못한 부모가 많았고, 가르칠 능력없는 부모가 많았지만 현재와 미래에는 부모가 능히 가르칠 수 있는 실력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는 것은 성경지식을 뜻하고, 믿는 일은 신앙적 실천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알고 행하는 일”, 바로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믿음은 시인하므로 확신을 나타내야 합니다(마16:15-16, 롬10:9). 그런 면에서 믿는 자는 지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모르니 너는 교회에 가서 배워라” 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교육은 교회에 많은 짐을 지우는 일이 되고, 또 내 자녀의 신앙교육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비현실적 문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나 신앙생활을 독자적으로 힘써 나가야 하며, 따라서 교육의 힘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그 집의 주업이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도자기 제조기술을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서 계승시키는 것처럼 신앙교육도 그렇게 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부모가 성경공부를 게을리 하면서 자녀들의 성경공부를 교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땅히 부모가 먼저 배우고(딤후3:14), 실천하는 바를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신6:4-9). 이때에 교역자가 교육재료를 제시하여 내용의 통일을 이루고 자유롭게 가르쳐서 발전하도록 함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부모가 성경공부의 책임을 질 때 그 집은 아주 훌륭한 신앙중심의 처소가 될 것이요, 가족간의 교류도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외부로부터 받는 유혹을 물리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 혼자 믿는 어린이가 있다면 가까운 친구 가정으로 합류하여 교육을 받게 할 때, 그 가족과의 친교가 잘되고 그의 부모에게까지 좋은 감화를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6:4-9과 잠22:6을 음미해 보십시오.


41. 성도가 참고할 수 있는 기독교 서적을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목록으로

: 오늘날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처리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현실생활은 그만큼 발전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 생활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행위도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또 이방종교나 이단의 단체나 불건전한 기독교 세계도 역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앞서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지식이나 생활도 발전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려면 복음사역자가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퍽 미흡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짧은 기회에 필요한 모든 학문을 다 배우지도 못하고 선택된 과목도 역시 다 배우지 못한채 졸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학과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며,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 방법을 배움으로써 스스로 연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학교의 사명일 것입니다.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지식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책을 많이 읽으셔서 지식을 보충하셔야 합니다. 좋은 서적을 선택하는 방법은 ① 정통적 교파에서 출판한 책, ② 신학의 바른 운동을 전개하는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 ③ 건전한 교파에서 신임받는 성직자의 저서를 택하셔야 하며, ④ 반드시 교역자의 자문을 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배경이 뚜렷하지 않은 어떤 책의 내용이 거의 건전하고 은혜로운 것 같으나,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해석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으므로 역시 주의하여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잘못된 서적인줄 아시고 볼 때에는 비판을 잘 하셔야 하며, 유혹에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42. 건전하지 않은 증언들에 대한 실례를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성도를 바로 지도하려는 목회자는 성도가 바른 증언만을 청취, 탐독하기를 원하여, 좋은 책을 선택하고 분별없이 아무 집회에나 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이나 글은 돈을 주고 사 보아야 하지만 대체로 잘못된 글은 무료로 배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에게 보내온 “목양 7호”에서 “사랑의 치유사역”이란 제하의 2면 정도의 글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았습니다. 좋은 글같고 짧은 글이면서 너무 많은 정통신학에 위배되는 글을 담은 것입니다.

1) 어거스틴의 처음 목회사역에서 “교회 안에서의 신비스런 치유사역은 초기 교회 기간 동안에 이미 끝났다”고 하였던 것을, 그가 죽기 3년 전에 “기적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한 사실을 취소한다”고 고백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목회사역 2년만에 70여가지의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언은 역사가들의 증언과 상반됩니다. “초대 교회 이후에는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나타낸 것과 같은 성질의 기적이 계속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고전주석 P176). 이런 문제는 증언자의 진실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성도는 큰 기적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기도원 원장은 기적 사례에 대하여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확실히 알기 위하여 어떤 방송국에서 신유사역에 치중하는 어떤 기도원을 면밀히 취재한 일이 있었으나, 시원스럽게 “신비한 기적이 있다”고 보도하지 못한 사례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았다”고도 하였지만 그 증거가 없고, “마리아 동상에서 피눈물이 나왔다”, “공중에서 예수님의 사진을 찍었다”는 등의 증언이 거의 다 유언비어로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필자가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기적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요, 문제의 글을 쓴 분이 기적의 성질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점과 그분의 사상이 칼빈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분이 아니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2) 또 “기독교의 핵심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는데 있다”고 하였으니, 이 뜻은 영과 육의 치료와 회복을 의미하지만 이 속에 포함된 내용은 “병고침의 역사가 지금도 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병과 함께 육체의 병을 기적으로 고치는 것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구원계획을 이루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의지를 이행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는데 있다”고 하여야 좋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두지 않고, 인간의 불행을 치유하는데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3) 또 “인간은 치유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케 된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병고침의 은혜뿐 아니라, 정신적, 인격적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변화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격적, 육체적 치유를 완전히 받지 못하였어도 우선 만물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인격적, 육체적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 같으나, 자신에 대한 치유를 다 받지 못한 성도가 많을 것이고, 자신의 치유를 못받았다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못느껴서도 안될 것입니다.

4) “성경을 절대로 아무런 증거나 체험없이 믿는 것은 아니라”하였는데 성경은 무조건 믿어야 할 것이 대부분이요, 역사적 증거를 다 수집하여 증거를 갖고 믿으려면 의심나는 것이 많을 것이요, 체험을 못한 상태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지식이 없는 인간이라도 무조건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성경은 항상 확고부동한 지식을 그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하였는데,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요, 또 영감을 받아 기록한 사역자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그대로 기록한 기사도 많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벧후1:21,3:16).

6) “사도 바울”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존재 구성요소를 영, 혼, 육(살전5:23)의 3분 존재로 나타냈다”하므로 3분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분은 아직도 3분설의 미흡한 점과 2분설의 원만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살전5:23은 3분설을 말씀했으나, 고후7:1에서는 “육과 영”이라 하셨고, 예수님도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시고, 육신은 흙으로 가셨으니(눅23:46, 요19:30), 2분설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3분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영은 무엇이고 혼은 무엇이라”고 그럴듯한 설명을 하지만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것입니다. 한정된 지면에 표현의 수식어를 생략한 관계로 독자가 오해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것까지 지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 설명은 성도의 문장 터득의 지혜를 촉구하는 의미도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3. 한국에 신학교가 많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목록으로

: 이것은 한국에 교회가 많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믿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교회가 많아지고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교도 많아지는 것이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또 부정적 견해도 있으니, 어떤 성직자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으로 정부의 인가도 없이 학교를 운영하거나 또 잘못 가르치는 형편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견해에서 부정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또는 좋은 복음사역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목사와 목사후보생이 거의 포화상태이므로 한계점에 왔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수를 줄여서 질적으로 양성하여 좋은 사역자들을 배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도사님을 모시려 할 때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나온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현재 한 교단 안에서 여전도사의 배출이 수요에 따르지 못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도사를 양성하는 봉사적인 신학교는 앞으로 몇 개 더 있어야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나 교파에 따라 수없이 많기 때문에 그 신학교의 교리, 사상, 목적 등이 어느 정도 공통성이 있는 것인지를 살피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다”하여 그 신학교의 입장과 교육과 사상과 목적과 교육과목을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신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명분 있고 계통 있는 신학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4. 주일학교 운영에 문제점이 있습니까?목록으로

: 주일학교 운영을 통하여 지금까지 신앙교육에 공헌한 바가 크고 또 기대하여야 합니다. 몇 가지 부조리한 상황을 살핀다면,

1) 사명적으로, 지식적으로, 또 생활적으로 모범되고 자격있는 교사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마다 인재가 부족하여 통달하지 못한 교사에게 억지로 맡기는 문제가 시정되어야 하며,

2) 단체적 교육이 개인상대 교육으로 주의를 기울여 배우게 하고, 배운 과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알게 함이 필요합니다. 단체교육이므로 개인 개인 심령에 인치듯 전달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3) 총회가 발행하는 공과에 의존할 때, 교역자가 구상하는 내용 체계에 문제와 공백이 있을 수 있으므로 본 교회 교역자가 보완 설명하여 충분히 체계있게 연속시켜야 하며,

4) 불필요한 조직과 번거로운 행정사무를 간소화하여 담임교사에게 교육과 활동을 일임케 하고, 전체지도자는 감독하되 통일성 있고, 간소하게 시행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5) 주일학교 운영을 위한 조직과 행사와 비용이 상당하게 소요됨에 따라 약한 교회는 정상적 시설과 운영이 불비하므로 주일학교가 전문적으로 정착된 교회에 붙여서(도시의 경우) 함께 교육 받게 함이 필요하며, 앞으로는 부모가 다 교사가 되어 가정 주일학교를 하도록 권장하고 교회는 교육재료만 제공하므로 성경적 교육을 가정적으로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신6:4-9). 제도나 행사에 끌리는 심령이 되지 않고 성경에 끌리는 심령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45. 평신도 신앙의 개혁의 과제들은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평신도는 신앙의 초보자이므로 개혁의 소지(素地)를 갖게 된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지만, 평신도들은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고 깨달아야 할 책임이 있는 만큼 잘못된 일들에 대하여 느끼는 바가 있는대로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1)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확고한 믿음의 출발을 못하였거나, 회개를 안하거나, 성경 지식 터득의 불완전 또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부실, 신앙 생활의 목적 설정의 불완전 등으로 믿음 생활에 변화와 성숙이 없는 만큼 이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요,

2) 기복주의, 개인적 명예주의를 확실하게 떠나서 순수한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요,

3) 인간적 표준이나 조직을 선호, 의존하거나 다수 교인들의 군중 심리에 이끌리지 말고 항상 성경과 자신과의 일치 관계를 생각하면서 예수님 닮기를 노력하고, 성경 제일주의로 생활하기를 힘 쓸 것입니다.

4) 기독교의 전통 문화가 오래되었고 또 그 문화도 점차 변해가지만 성경과 문화를 구별할 줄 아는 교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6. 교회의 지도 방침 중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교회의 지도 방침이라면 목사와 당회의 지도 방침인데, 이것을 초월하는 교회 전통이, 지도 방침이 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가까이 하다 보면 자유롭지 못한 것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1) 재정난으로 고민하는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돈으로 예수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은과 금은 없고 예수님만 나타내어야 하니까요(행3:6). 좀 심한 말 같으나 예배는 아무 곳에서나 드리고, 교역자 사례는 형편대로 하든지, 아니면 보수 안받는 분을 모시면 안될까요 ? 이 말은 성직과 보수가 깊숙히 유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교회의 부흥은 성도의 수보다 각자의 신앙 성장을 근거로 하여야 합니다. 무조건 사람만 많이 모으는데 힘을 쓰지만, 그 중에 예수님 닮은 자가 몇이나 있는지 살펴 보셔야 할 것입니다.

3) 교회 단체(특히 당회)가 사랑 아닌 것은 시행하지 말아야 하며,

4) 교회의 생활과 행사 등으로 일반적 생활의 시간을 많이 뺏는 것도 문제이고,

5) 시간, 노력, 물질 등이 교회적 사명 아닌 것으로 낭비되는 것이 허다하며,

6) 구제와 자선을 앞세워 아부하는 식으로 전도하지 말고, 모든 이에게 십자가의 도리만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요,

7) 예배 행사가 항상 표준적이고 경건하여야 할 것입니다. 경건의 기품을 제거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47. 기독교 생활의 개혁 과제들을 알고 싶습니다.목록으로

: 1) 외형주의에서 거품을 제거하고 내실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예수님 닮은 성도와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3) 물질, 명예, 인기주의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영적 교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4) 세속에 취미가 없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취하여야 합니다.

5)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요8:32).

6) 제도, 의식, 전통, 유행, 조직 등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지고, 또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7) 신앙 고백을 바로 하고,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며, 사람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48. 직분을 갖는 것이 꼭 신앙의 성장을 뜻합니까?목록으로

: 이 대답은 직분 가진 성도의 신앙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직분자의 신앙이 좋으면 “직분과 신앙성장이 일치된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직분과 신앙성장이 무관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몇 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으니, ① 누구나 자격에 따라 직분을 받지 못하고, 상당히 부족한 상태에서 직분을 받은 후, 순종하고 연단을 받아서 그 믿음이 상당하게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② 어느 정도의 신앙을 성장한 신앙이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을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는 모든 성도가 인정하는 보편적 여론과 복음사역자가 보는 견해를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③ 직분자는 신앙 성숙인으로 인정을 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④ 추호라도 명예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직분을 욕심 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9. 은혜 받은 자의 형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고후6:2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하셨고, 또 히12:15에서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하셨으니, 반드시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은혜”란 뜻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의 인정 받는 인격과 생활을 성취하는 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에 충만하면 은혜에 이른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은헤를 받는 방법은 확실한 회개와 신령한 은혜를, 말씀, 기도, 복종, 충성된 생활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대체적으로 은혜 받은 자의 결과는 ① 충분히 회개한 상태에서 죄와 불의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는 생활이 나타나야 하며, ② 충분한 겸손과 자기부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 ③ 신령한 은혜, 즉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생활을 하여야 하며, ④ 말씀에 복종하고 충성하되 봉사와 헌신이 뛰어나야 하며, ⑤ 사랑의 실천은 물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50. 통성 기도에 대하여 알아야 할 사항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을 만든 취지는 통성 기도에 대한 오해와 상호훼방을 받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성 기도란 한 장소에서 여러 성도들이 큰 목소리로 자기의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20:16이나 신26:7에 보시면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히 어렵고 급박한 상황에서 큰 목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개인도 할 수 있습니다(시142:1, 겔27:28-31). 예배인도자가 통성 기도를 시키는 이유는 ① 기도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초신자들에게 기도의 말문을 열어주는 기회를 주는 것과, ② 이미 기도를 익숙하게 하는 성도에게 논리적 표현력을 키워주는 일과, ③ 전체적으로 기도의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때에 모든 성도가 다 자기의 기도에 집중하면 아무런 훼방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통성 기도가 단체적으로 일제히 시행되지 않으면 소리내어 기도하지 않는 성도가 옆사람의 기도를 듣고, 자기 기도에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서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통성 기도는 다같이 하는 상태에서 다 함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다른 사람의 기도소리가 작아지므로 자신의 기도내용이 너무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는 자신도 목소리를 자제하여 음량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 개인이 기도할 때 묵상기도만 계속하면 졸음유혹도 있고, 기도 자체가 불완전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이런 것을 방지하려면 적당한 비음(입을 다문채 음-하는 소리)을 내어 기도하므로 옆사람에게 큰 방해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리내어 하는 기도는 통성 음량에 따라 적당하게 하되, 반드시 그 기도내용이 분명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통성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통성 기도로 떠들석해야만 은헤를 받는 것같고,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못받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비중은 소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묵상기도를 권장하신 말씀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창24:45, 삼상1:3, 마6:5-6,14:23).


51. 어떻게 하면 좋은 신자(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목록으로

: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꼭 이런 질문이 있든지, 아니면 좋은 성도 되는 목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면 공부를 잘 해야 하듯이 성도이면 성도다운 좋은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으나, 믿자마자 착하고 겸손하며 욕심없고 봉사적인 사람만 되면 그는 신자의 자격을 반이상 구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확신, 바른 신앙 고백, 성경 연구, 계명 순종,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소망의 생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는 경건함과 충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성도는 충분한 믿음의 지식과 인애와 사랑의 실천자이여야 하는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1년간 교육을 받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52. 간증(干證)이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간증이란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지은 죄를 증명하여 자복하고 믿음을 교백하는일”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시 설명드리면 어떤 사람이 불신앙과 각종 죄악에 빠져 살다가 예수믿고, 깊이 회개한 후 바른 신앙 안에서 새로운 축복 받은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성도들 세계에서 이 간증을 하기 시작한 때는 6‧25동란 직후부터요, 그 당시 이단자인 박태선씨가 박OO권사를 대동하고 병고침의 안수를 시행하여 효력을 본 사람들에게 “병고침 받은 은혜를 널리 알려야 한다”하여 “나는 이런 병이 있었는데, 이번에 안수기도로 이렇게 나았습니다”하는 발표를 간증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간증이란 좁은 의미로 신앙적 변화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모든 은혜의 체험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다 은혜의 체험을 하고 변화를 맛본다면 좋은 간증꺼리가 될 것입니다. 행10:30-33에 보시면 고넬료의 간증담이 있고, 또 11:4-17에서는 베드로의 간증담이 있습니다. 간증과 관련하여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① 간증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은혜 받은 체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며, 또 각 성도가 은혜 받은 방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간증자처럼 체험을 해야만 되는 줄로 아시지 말 것이며, ② 혹 간증자가 성경의 교리를 잘 몰라서 교리에 위반되는 간증을 했을 때는 분별없이 듣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혼잡을 심어 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간증자의 기본신앙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간증은 어떤 신비한 일이나 이적을 체험한 사례보다 죄를 깨달은 경위와 뼈를 깍는 듯한 회개와 회개한 후에 받은 은혜와 충성의 사실을 말하므로 덕을 세우면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혹 이상한 꿈이나 음성 등 지시를 받고 시행하여 목적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성경아닌 것을 표준으로 믿게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53. 성도는 무엇들을 필요한 비품으로 여겨야 할까요? 목록으로

: 이 질문의 취지는 성도가 꼭 필요한 것을 갖추어야 할 것과 크게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문제시 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 우선 하나님과 동행을 위하여 성경이 필요하지요.

2) 검소한 생활의 의식주가 필요합니다(마6:32, 딤전6:8). 여기에 검소함을 첨부한 이유는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사치는 자기를 과시하는 일에 유익할 수 있으나, 경제와 시간에 낭비성이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과 일반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잘 선택하십시오. ①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찬송, 성경, 악기, 믿음을 위한 기독교 서적들, 성수 주일하는 직업, 교회가 가까운 주택 등일 것이요, ② 일반생활에 필요한 것은 지식을 보충하는 기구(책, TV등), ③ 건강을 돕는 기구(운동기구), ④ 시간을 절약하는 기구 등으로 구별하여 반드시 실속있는 기구를 구입하십시오. ⑤ 또 정서생활을 위한 시설을 사치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단순하게 실리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신앙, 지식, 건강, 사명, 정서를 위한 것은 다 필요한 것입니다.


54. 성숙한 교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우선 성숙한 교인은 믿음을 든든히 가진 분입니다. 이 든든하다는 뜻은 어떤 경우에도 그 믿음이 흔들이거나 변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성숙한 믿음 가진 성도의 불변함에 대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자(수1:7), 가난해도 잘 믿는 자(합3:17-18), 환난 핍박 중에도 여전한 자(롬8:35,5:3-4),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엡6:24),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자(빌1:21)”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또 성숙한 교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시63:1), 자기의 아버지로 관계를 맺으며(요1:1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요5:39),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하며(행17:11), 지키는 성도인 것입니다(요14:23, 계1:3). 이렇게 말씀과 관계를 맺으면 교역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성도를 살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성숙한 교인은 사랑실천의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교회를 섬기고 전도를 잘 하며, 계명을 지키고, 또 하나님의 종이나 소자를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마10:40-42). 성숙한 교인은 지식도 상당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실천의 능력입니다. 고전13:4-7의 말씀을 보시면서 사랑의 능력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는가? 온유한가? 투기하지 않는가? 자랑하지 않는가? 교만하지 않은가? 무례하지 않은가? 이기적 의도가 있지는 않은가? 성내지 않는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가? 진리와 함께 함을 기뻐하는가? 모든 것을 참는가? 모든 것을 믿는가? 모든 것에 소망을 두는가? 그리고 모든 일에 잘 견디는가? 이상의 15가지를 반드시 점검하시고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교인은 ① 든든한 믿음의 사람이요, ②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사는 사람이요, ③ 성경의 지식과 충성과 사랑의 힘이 있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5. 성도의 교회생활이 어떠하여야 합니까? 목록으로

: 교회와 관련한 성도의 생활을 알려면 우선 교회의 성격과 목적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으뜸으로 모신 성도의 단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단체를 지상에 존립하게 하시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의 집을 삼아주신 것입니다.

1)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이유는 필로 사신 교회(행20:28)란 말씀도 있고, 교회생활을 하는 성도가 진리에 절대순종하며,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교회에 여러 직종과 조직이 필요한 이유는 어느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부과된 사명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케 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3) 여기에서 지상의 교회가 존립하는 이유는 ① 진리보존 ② 진리해석 ③ 진리전파와 교육 ④ 성례로 은혜를 전달함 ⑤ 성도의 교제 ⑥ 신앙의 연단 즉 사랑실천의 도장이 되기 위함입니다.

4) 이상의 사실과 관련하여 성도는 교회생활을 교회목적에 부합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생활을 할 때 직분과, 조직, 행정사무를 중요하게 여기거나, 또는 구령사업, 자선사업, 교세확장에만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다 중요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교회생활의 목적은 바로 “자신의 인격과 생활이 예수님을 닮아 사는데 있음”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변화되는 문제와 예수님을 닮는데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들이 시정되어야만 바른 교회상을 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56. 목록으로악세사리로 목에 거는 십자가나 예수님의 성화 또는 마리아나 성자의 동상에 숭배의 자세를 갖는 것이 옳습니까?

: 위의 것들에 대하여 숭배의 자세를 갖는 것은 분명히 제2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십자가의 뜻을 담은 악세사리일 뿐이고, 예수님의 성화는 예수님의 뜻을 담은 그림이요, 따라서 마리아나 성자의 동상도 그들의 뜻을 담은 조각품일 뿐입니다. 여기의 “뜻을 담았다”는 뜻은 그런 것을 볼때에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목에 건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악세사리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이 불신자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모형적 사진이나, 마리아, 성자들의 모형적 동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이런 물건들을 성물(聖物)이라 하면서 그 성물들이 은혜를 주는 것처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뿐인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잘 모르는 성도들이 십자가를 보고 숭상하는 마음을 갖거나 그것을 불신자의 부적처럼 여기려는 잘못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본 총회(장로교 합동측)는 강단 배경에 십자가를 부착하거나 성전 안에 성화를 거는 것을 금지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핍박자가 “예수님의 모형적 사진에 침을 뱉어라”하거나, “성경책을 발로 걷어차라”했을 때, 사진이나 책 자체는 숭상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욕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신의 신앙양심을 굽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형식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생명을 걸고 거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물에 욕을 돌리는 것과 그것을 처분하여 없애는 것은 뜻이 다른 것입니다.


57. 기복주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이 말은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실의 복을 받기 위하여 신앙활동을 하거나(요8:26) 현실의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현실의 복만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외식하는 교인일 것이요, 신령한 복을 사모하되 그것은 소극적으로 사모하고, 현실의 복을 적극적으로 사모하여 신앙의 가치판단을 뒤엎는 성도가 바로 기복주의 신자인 것입니다. 이런 형태는 성도가 신령한 복의 가치를 앞세우지 않고 현실축복에 더 큰 민감성을 드러냈을 때 알게 되는 것으로 민망할 만큼 좋지 않은 현상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 인생들에게 만물과 생명을 주셨고, 모든 생명을 보존하시되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생물 등을 더 잘 보존하십니다. 그 중에도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간섭을 받는 입장으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25),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딤전6:8), “돈은 일만 악의 뿌리요”(딤전6:10),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려우며”(마19:23), “예수님도 기복주의로 사시지 않았고”(눅9:58), “바울 사도는 은혜를 받은 후에 모든 것을 해로 여기셨으며”(빌3:7-8), “욥이나 하박국은 현실적 낭패와 가난에도 의연한 신앙”을 가졌습니다(욥1:9-12, 13:15, 합3:17-18). 그리고 또 주님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6:33). 따라서 성도는 신령한 복을 적극적으로 사모하면서 현실의 복을 주시는 대로 받고 시험되는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은혜를 구하되 반드시 적당하게 구하고, 맡기며(시37:5), 욕심껏 바라지 말고, 또 현실의 복이 적어졌거나 없어졌다고 하여 크게 슬퍼하거나 낙심하는 연약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는 말씀은 단연코 현실의 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58.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이 은혜란 뜻은 “거저 주는 선물”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좋은 것을 거저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신지라 모든 좋은 것들, 자연과 일반통치의 은총을 온 인류들에게 주셨고, 또 신령한 복과 특별통치의 은총을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신령한 복이란 죄사함 받고 영원한 심판을 면하며 하나님의 자녀되고, 천국에서의 영생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므로 행복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믿음의 영적 교제를 갖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믿음의 영적 교제 중에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 속에 거하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2) 은혜는 꼭 좋은 것만 은혜되는 것이 아니요,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그것을 당하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도 은혜로 여기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고, 적은 고통으로 큰 징계를 대신하여 주시는 경우에는 역시 그 적은 고통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들 세계에서, 흔히 “은혜를 받았다”는 말로 좋은 깨달음이 있거나 유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실천하며 또 죄를 회개하며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4)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는 생활을 큰 은혜로 여기셔야 합니다(시73:23,28). 그리고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미7:7, 겔36:37), 회개하는 자에게(눅15:18-23, 행2:38), 또 겸손한 자에게(벧전5:5), 충성하는 자에게(마25:21) 더욱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5) 은혜 주시는 근거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과 부활하신 주님의 중보 사역이 없으면 저희들은 신령한 은혜를 기대할 수 없게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로 계시기 때문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히4:16).


59. 대체로 어떤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하여야 할까요?목록으로

: 많은 성도들이 일반은총, 즉 현실에 관한 은혜를 많이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일용할 양식이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한 사례가 있지만(마6:11, 빌2:27) 분명한 것은 일반은총으로 주시는 은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꼭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런 일반은총에 관한 것은 특별한 경우에 간구하시고 우선적으로 신령한 복을 많이 간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깨닫는 은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은혜, 예수님을 닮는 은혜(엡4:13), 계명을 복종하는 은혜,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잘 드리는 은혜 ,전도, 봉사, 충성하는 은혜 등을 구하시면 참 좋을 것입니다. 은혜를 구할 때 주의하셔야 할 것은 내가 구하여 받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될 것은 구하지 않는 습관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욕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복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 많아서 남을 손해 보이기 쉬우나 신령한 복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모해도 타인에게 손해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축복을 많이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60. 은혜의 방편이란 무슨 뜻입니까?목록으로

: 이 뜻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어떤 방도로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산가는 은혜를 구했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도로 인도하실까요? 고속버스나 기차나 비행기, 또는 선박으로 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말씀(성경)과 성례로 주시는 것입니다. 혹 기도로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 중에는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의 결과로 여깁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라야 기도할 수 있고, 기도로 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역시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은혜를 전달해 주실 것이므로 은혜의 방편을 말씀과 성례로 알고, 기도는 은혜 받은 자의 결과로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61. 고후6:3의 “지금은 은혜 받을 때”란 무슨 뜻입니까?목록으로

: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비할 때 신약시대는 은혜를 받을만한 때라는 뜻입니다. 얻어 먹는 거지도 가을 수확기에 다니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구약시대라 하여 은혜를 안주신 바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원사역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특별하게 주신 은혜가 있으니, ① 성령님이 땅위에 오셔서 함께 계시면서 역사해 주셨고(요14:17, 행2:1-4), ②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구약시대에는 예언으로 믿고 사모하였으나 신약시대는 친히 보고 확인한 일이며, ③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예수님과 성경(신약)으로 더욱 밝혀 주셨고, ④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는 때이므로(마15:24, 행1:8) 그 구원의 범위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이므로 말씀증언자가 있을 때는 바로 은혜를 받을만한 때인 것입니다.


62. 은혜를 잘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까?목록으로

: 고후6:1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셨고, 또 고전12:7에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받은 은혜는 수없이 많습니다. 백가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닮지 못하거나(롬8:29), 자기 스스로 받은 은혜에 따라 만족과 감사를 느끼지 못하거나(시23:1),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자유를 느끼지 못하거나(요8:32), 여러 가지 은사를 받고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고전13:1-2) 역시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래 믿은 성도가 무슨 은혜를 안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되지 못하다면 역시 그도 은혜를 헛되이 받음이 될 것입니다.


63. 신앙생활을 깨끗하게 새출발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성경에는 “성도로 거듭났다”는 말씀(요3:3, 벧전1:3)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출생함을 뜻합니다(요일5:1). “하나님께로서 난자”란 뜻이 영적으로 거듭난 것을 의미하며 거듭난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고, 또 “세상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요일5:1,4). 여기의 “세상을 이긴다”는 뜻은 믿음도 지키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요일5:3,4) 계명은 사랑실천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않은 자와 거듭난 자, 성도 아닌 자와 성도,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요일3:10)는 확실하고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빛과 어두움의 차이를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후6:14, 엡5:8). 롬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새출발 하기를 소원할 때 그 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으며, 반드시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1) 결심의 단계입니다. 새출발의 결심을 잘하여도 또 옛날과 같이 나태해질 수 있으므로 결심을 확실하게 잘하는 것입니다.

2) 마음의 변화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곧 가치관 설정입니다. 무엇을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는 생활로 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변화받은 성도는 “의롭게 사는 생활”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생활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며(눅5:11) 삭개오도 자기의 재산으로 과거의 토색한 죄를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눅19:8).

3) 바른 지식을 터득해야 합니다. 성도가 혹 지식을 가졌다하나 올바른 가치관에 부합되는 지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종합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진정한 의와 선행의 표준을 터득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칭찬할 때 부분적 선행만 보고 다른 악을 참고하지 않았다든지 어떤 이의 잘못을 평가했을 때 그의 전체적 선행정도에 기준함이 없다면 그 평가는 전부 바르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실례로 생각할 때 사람은 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고 오직 하나님이 평가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바른 지식, 바른 생활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새 생활을 출발하되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가까운 곳부터 적응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시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신앙생활과 일반생활을 이중으로 하여야 하는 것 때문에 분주하고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믿음생활과 일반생활을 하나로 합치면 한가지 생활로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교회 생활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의한 회집 때문에 성도를 바쁘게 만들지만, 이것이 다 신앙생활을 홀로 서지 못하는 결함 때문에 교회의 지도에 이끌려야만 믿음이 유지되므로 불가피하게 시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믿음의 확신을 갖고 성경과 자신 사이의 관계만 확립하면 교역자의 지도하에서 충분히 자립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교회의 공적 회집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회집은 교회라는 신령한 단체의 유지와 교육 친교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회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일반생활과 대폭 합류하여 자신의 생각과 말 표현과 행동의 일거수 일투족과 가까운 이웃을 상대하는 자세와 가장 먼저 접촉하게 되는 이웃에 대하여 실수없이 성경적으로 처신을 해나가는 것부터 새 생활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64. 성도가 양보하여야 할 것과 양보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양보하여야 할 것은 물질적이며, 명예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현실교회는 교회적 욕심에서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요,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령한 직책도 자기보다 유능한 사역자가 있을 때는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물질적인 것을 양보하였고(창13:2-9), 세례요한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바쳤으니, 여기에는 영광의 양보란 의미가 충분히 담겨 있으며(요3:29), 또 성도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는 좋은 일에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는 믿음 자체가 아닌 축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복을 더 받도록 양보함이 곧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2) 양보 못할 것은 무엇일까요? ① 부부를 바꾸는 일은 양보 못하겠지요. ② 진리를 포기하거나 진실을 바꾸는 일도 양보를 못합니다. ③ 현실적인 복을 위하여 신령한 복을 포기하는 것도 양보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에서처럼 망령된 행위가 되기 떄문이지요. ④ 믿음을 버리고 자신이 지옥가는 일이면 역시 양보를 못할 것이요, ⑤ 또한 정통적 신앙의 지식을 양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봇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왕에게 양보하지 않으므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왕상21:3). ⑥ 자기의 양심적 가치관도 양보 안함이 옳습니다.


65. 기도회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목록으로

: 1) 우선 새벽기도회, 수요일 저녁기도회, 금요일 밤기도회를 생각할 수 있는데, 수요일 저녁은 주일 낮 모임의 1/4정도, 새벽이나 금요일 밤은 1/10정도로 모이는 것이 보편적 실례입니다. 특별한 경우(강조기간이나 또는 인도자가 준비를 많이 하였을 때)에 더 많이 나올 수는 있으나, 계속하기에 힘이 듭니다. 합동기도회에 잘 나오는 성도는 특별은사와 시간적 자유와 건강의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임의 수에 연연하지 말고, 각자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수시로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가르치고 지도함이 좋을 것이요,

2) 기도의 방법은 항상 간절하고, 정중하며, 이론있게, 뜻을 표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가 감정적이고, 과격하다 하여 더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나타내는 기도에서, 은밀한 기도를 많이 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따라서 표현방법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타당한 간청은 관청에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고, 또 필요한 것은 구하지 않아도 주십니다(마6:32). 어려운 것을 구할 때 간절함의 표현을 나타낼 수 있으나, 성도가 억지를 쓰는 식으로 기도할 필요를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억지로 구하는 것보다 철저한 회개가 더 유효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합심기도회는 적당한 시간에 잠시(30분-1시간정도) 모여 찬송하고, 성경요절을 읽고, 기도의 제목을 인식한 후 차례로 간단한 기도를 하게 함이 가장 바람직 할 것입니다.


66. 설교청취에 대한 방법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설교자의 심정에 공감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지식과 사상을 이해하고 무엇을 전달하기 위하여 설교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자의 발표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 서론과 교훈의 동기와 성경내용의 해석과 교훈의 결말로 이어지는 만큼 그대로 공감하여 깨닫고,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청취자가 증언자의 설교를 자기설교 듣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면 은혜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판검사의 논고문이나 기조연설 또는 방송매체에서 전달하는 해설자의 말을 듣는 것처럼 청취하면 좋을 것입니다.


67.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수단이 무엇일까요 ?목록으로

: 기도와 성경입니다. 기도와 성경으로 완고하고 무지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최후의 수단입니다. 기도와 성경은 초능력을 의미합니다. 그 이상의 더 큰 힘이 없습니다. 물질 공세나 인간적 공세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말씀 외에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설득하지만 기도와 성경으로 듣지 않는 자는 믿음밖에 있는 자로 여김이 마땅할 것입니다(고후13:8)


68. 구원(救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우선 국어사전에 보시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서 건져줌”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사회적 통념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런 실례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군의 추격을 피하여 홍해를 건넌 일”(출14:13), “전쟁하는 대적에서 보호해 주시는 일”(신20:4), “원수나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보호해 주시는 일”(눅1:17), “학대받음에서 건져주는 일”(행7:25), “홍수에서 건짐 받은 일”(히11:7)등을 구원하신 것으로 나타내신 사실이 있고, 또 질병에서 고침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한 사례도 있습니다(마9:22, 막6:56, 약15:15).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성도들이 사용하는 “구원”이란 용어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영생에 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3:16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신 말씀이나, 또 롬5:18에서 “의의 한 행동(예수님의 십자가)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하신 말씀이 곧 기독교의 구원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 영생 주신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 1:21,10:22,18:11,19:25,막 16:16,눅 1:77,13:23,19:9,요3:17,10:9,행2:47,16:31 등입니다. 성도들이 이런 사실을 구별되게 하려면 “어려움에서 건짐받는 일”은 형통함으로, “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병고침의 은헤로, “죄사함 받고 영생하는 것”은 구원으로 표현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69.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떠한 것입니까?목록으로

: 1)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고전14:33,40) 무슨 일을 하시든지 계획성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망대를 짓는 자가 예산을 하지 않겠느냐?(눅14:28)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구원계획을 하셨습니다(엡1:5,3:2,9).

2)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속성(하나님 자신의 신분의 성격)에 따라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시는 분이시고 미래에 있을 일을 다 아시며, 그 될 일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물과 인생을 내시고 통치하셨지만 인생의 타락도 미리 아셨습니다.

3) 구원계획은 성부하나님이 주동하셨으나, 성자, 성령님과 합의하여 계획하셨으며, 특히 인류창조와 선택함에 있어, 성부와 성자가 의논하였습니다(창1:21; 엡1:4).

4)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타락한 인생 중 그의 기뻐하실 자들만 선택하여 구원하시되 구원 받을 자의 죄를 거져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대속 원리를 적용하셨고, 대속을 위한 희생적 제물은 상당한 가치가 있어야 하므로 결국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의 독생자의 희생을 요구하시게 된 것입니다(9:22).

5) 이때에 예수님은 그 뜻을 수락하셨고(창1:21, 요10:8),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함에 있어서 예수님만 구세주가 되셔야 하는 이유는 ① 예수님만 순결하시고, ② 영원한 생명자이시며, ③ 하나님과의 관계서 아들이시며, ④ 하나님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원하셨을 때 예수님도 기쁘신 뜻으로(자원하는 마음-) 수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6) 그리고 택한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거듭나게 하시고(요3:3),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의 도리를 믿도록 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0. 성도의 죽음에 대한 신앙은 어떠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1) 사람과 모든 생명의 주는 하나님이시고(창2:7,요14:6) 하나님이 잉태와 출산을 주관하시며(창3:16,룻4:13) 하나님이 생명의 연한과 때를 정하시고(행17:26,전3:2) 붙드시며(욘2:6) 다스리신다고 하고, 또 삼상2:6에서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의 생명이란 인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다가 하나님이 그 생명을 옮겨 가시는 것으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빌2:21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생명이 육신을 떠나는 죽음(성도에게는 영육이 분리되는 소천임)에 대하여 아쉬움을 갖지 않도록 생각을 고치셔야 합니다.

2) “성도의 죽는 것(천국에 가는 것)을 하나님이 귀중하게 보신다”(시116:15)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가 세상 떠나는 일을 안 좋은 일이나 망하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으니 저희들도 그렇게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계14:13에서는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하셨고, 또 빌2:21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하셨으므로 성도는 성도가 세상떠나는 일을 귀중하고 유익하며 복된 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성도의 죽음의 복에 대하여 충분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죄악세계와 고난의 세계를 떠나서 거룩하고 평안한 세계로 간 것이며, 하나님도 그 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지상에 남은 가족들에게도 변함없는 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28).

3) 성도는 자기의 생명이 언제쯤 끝날지를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것인지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죽음에 대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외출을 할 때에 반드시 용돈을 갖고 나가야 함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부탁하고 싶은 말을 미리 남겨 놓고 자기의 책임에 대한 것과 이웃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 또 하나님과의 화목을 성취한 상태에서 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하나님의 부르심)을 항상 긍정적으로, 또 소망적으로 맞이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요14:1-3에 보시면 성도가 죽음을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집(천국)에 거할 곳이 있음과, 그 주님이 중보사역을 통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사실과, 임종 때가 되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자기 계신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의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뜻은 마지막 때의 재림으로(살전4:16,요일2:28,계22:20) 구원의 완성 단계인 영화(부활)를 이루어 주시고 아울러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천받는 영혼을 인도하시려고 주님이 직접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임종시에 성도의 영혼이 어떻게 인도를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약간의 의문이 남습니다만 눅16:22에서 “천사의 받들림(인도)을 받는다”하셨고, 스데반은 임종할 때 “내 영혼을 받으소서”(행7:59)하였으며, 예수님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하셨고, 베드로 사도께서도 “조물주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라”(벧전4:1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주님께서는 한편 강도를 낙원으로 인도하실 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하셨은즉 하나님의 인도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또 천국은 “아브라함의 품”이라 하시므로(눅16:22) 좋은 안식처임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71. 죄에 대하여 알아야 할 지식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의에 반대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2) 이 죄가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왔는가 할 때, 본래 순결하게 창조받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의 계율을 어긴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시조가 최초에 계율을 어기므로 범죄한 것입니다(3:6).

3) 시조가 범죄한 후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① 범죄 그 자체는 더러워진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마치 의복을 더럽힌 것처럼 순결한 영혼과 인격이 더러워진 것이며(약1:21), 범죄의 요소인 부패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마23:27). ② 영혼이 영적으로 죽어서 신령한 생명을 상실하였고(창2:17, 엡2:1), ③ 이런 상태가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으니(롬5:2), 이것은 마치 병든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④ 죄로 인한 불행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심판의 날을 작정하셨고(히6:2, 행17:31), ⑤ 인간을 위하여 지은 자연에도 벌을 가하셨으며(창3:18), ⑥ 남자, 여자에게 각각 고통과 육적 사망을 내리셨습니다(창3:16-17).

4) 여기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할 때 롬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하셨고, 계20:14에서 이 사망의 뜻을 “불못에 던지움”이라 하셨으며, 그 불못은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마25:41).

5) 이렇게 죄는 인생에게 불행을 안겨주었는데, 불신자나 성도가 아직도 자기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에 의하여 죄의 조종자인 마귀와 합작, 또는 시험에 빠져 수시로 죄를 범하므로 연속적인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롬7:24)하면서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72. 인간이 죄로 인한 불행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목록으로

: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비롯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자요, 맑은 물을 흐려놓은 것처럼 부패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부패성을 씻거나 죄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자가 스스로 살 수 없고,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렘13:23). 계7:10에 보시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고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방도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73. 하나님이 진노 받을 인간들을 위하여 어떻게 구원하실 방도를 베푸신 바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우리는 그 방도가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요3:16에서 구원에 관한 소망적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심으로써, ① 일단 하나님이 구원의 방도를 베푸셨다는 사실과, ② 이 방도를 베푸시게 된 근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음과, ③ 하나님은 죄로 오염된 인간들과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사랑하셨음과, ④ 하나님이 독생자를 갖고 계신 중에 그 독생자를 구원대상에게 주시므로 구원의 방도를 세우신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과, ⑤ 하나님의 구원방도를 믿는 자에 한하여 멸망치 않고 영생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말씀은 “구원자와 구원의 근거와 구원의 대상과 구원의 방도(부분적 표현)와 구원의 내용”을 알려 주셨는데, 구원자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님이요,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요, 구원의 대상은 믿는 자에 한함이요, 구원의 방도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중보하게 하심이요, 구원의 내용은 멸망(심판)치 않고 영생(천국)을 힘입게 하신 것입니다.


74. 그러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어떻게 중보사역을 하신 것입니까?목록으로

: 하나님은 독생자를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그 이름을 “예수”(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 마1:21)라 하셨고, 그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겸전하셨으며(눅2:5-7,3:22),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역사적 인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오시기 위하여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①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요14:8-9) ② 인간의 모범적 생활을 보이시기 위하여(요13:15, 히4:15) ③ 십자가로서 구원할 백성들의 죄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사53:4-6) ④ 기적과 부활로 믿을만한 증거를 보이시기 위하여(행17:31) ⑤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사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히4:14,5:6, 히3:).


75.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중보자가 되시면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목록으로

: 하나님은 구원의 대상을 미리 정하셨고(롬8:29, 엡1:4, 마22:14), 때가 되면 구원하시되(전3:1)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심과 동시에 진리(성경)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요3:3, 마16:16-17, 고전12:3) 그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여 심판을 면케 하시는 것입니다. 롬5:1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씀이 죄의 용서를 전제한 것이요, 이것이 곧 “허물을 가리워 주심”인 것입니다(시32:1). 이렇게 믿는 자는 죄와 허물의 용서와 가리움을 받으므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요5:24).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신령한 생명과 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믿게 되고 성경이 말씀한 내용 안에서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데 예수님의 중보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14:6).


76.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 왜 독생자의 중보사역을 필요로 하셨을까요?목록으로

: 참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때문인 것처럼 죄인을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때 독생자의 중보를 필요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때문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고유 속성(본래 갖고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며(슥9:9, 벧전2:23), 공의란 “죄인과 의인들에게 적당하게 갚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살후1:5-7). 따라서 구원하실 인간의 죄값을 당연히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인간 중에는 순결한 의인이 없고(롬3:10), 있다 하여도(사실은 없지만) 인간은 한사람의 생명가치를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생명을 그들의 죄책에서 구원하려면 순결한 인간,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마3:17), 하나님이 임명하신 중보자(히5:5-6)가 대신 형벌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을 대표하여 사람으로 오신 것이고, 그 예수님의 중보가 아니면 구원의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 외에 구원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은 하나님이 한 분만의 독생자를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77.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다는 뜻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07문의 대답 중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처녀 상태에 있는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님의 능력(하나님의 이적)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잉태되어 출생하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셨고(사7:10), 예수님 탄생당시에도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마1:23).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한 일이 없는 중(눅1:27, 34, 35)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마1:18,20).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잉태하셨음은 아버지의 피를 받지 않았음을 뜻하며, 따라서 어머니(마리아)의 피와도 상관이 없이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어 출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원죄와 상관없이 죄없는 거룩한 분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사람의 생명(또는 영혼)을 출생시에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깨끗한 생명체를 받지만 원죄의 전가는 육체의 피를 통하여 받는다고 믿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피는 곧 생명이라”는 말씀도 있고(창9:4, 신12:23),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삼하1:16)하신 말씀, 또 “그 피흐른 죄가 네 집으로 돌아간다”(신22:8)하신 말씀이나,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엡1:7)는 말씀들이 피로서 인간의 원죄가 계승되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또 죄없는 인간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법률적으로나, 외모상으로나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그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피를 받지 않고 탄생하신 완전한 사람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78. 구원받음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용어들을 많이 알고 싶습니다.목록으로

: 좋은 질문입니다. 구원받음에 관한 용어를 잘 알면 구원의 원리와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있습니다.

1) 범죄와 관련된 용어로서,

① 원죄 : 원죄란 인류시조 아담의 범죄로 그 죄책과 부패성이 후손에게 계승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12:17)하셨는데, 결국 아담은 범죄하였으므로 “죽으리라”는 선포가 후손들에게 계승된 것입니다. 이 범죄와 관련한 계승에 대하여 롬5:12에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하시므로 시조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죄책이란 범죄로 말미암아 형벌이 있게 됨을 뜻하고, ③ 부패성이란 범죄로 말미암아 인격이 더러워지고 죄성(罪性)을 함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 죄책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에 의거하고 부패성은 피의 계승을 통하여 전가된다고 봅니다. ④ 사망 : 이 사망이란 의미는 죄의 결과로 선포하신 말씀으로 창2:17의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과 롬6:23의 “죄의 값은 사망이요”하신 말씀에서 기인되며 이 뜻은 세 가지 의미로 분류되는데 ㉠ 영적 죽임이니, 이는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불신앙의 상태요(창3:8, 엡2:1), ㉡ 영혼과 육신의 분리, 즉 육체의 죽음이요(히9:27), ㉢ 멸망과 같은 뜻으로(요3:16)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들어감을 뜻하는 것입니다(마25:46).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엡2:3).

2) 구원과 관련된 용어로서,

범죄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여 계획하신 바가 있으니, 이것을 “예정” 또는 “제정”이라 하며(롬8:30), ① 예정 : 하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심에 있어 미리 작정하시고 시행하시는 분입니다(잠16:33,29:26, 욥23:14, 행13:48,17:31). 따라서 구원에 대한 계획도 하셨으니, 이것을 예정이라고 합니다(엡1:4). ② 선택 : 선택은 타락한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고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일부분의 인류를 선택하여 그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하시는데(롬8:30,31, 엡1:4, 행13:48, 살후3:2), 인간의 의나 어떤 조건을 보시지 않고 선택하셨으므로(롬9:11) 이를 무조건 선택이라고 하며, 하나님이 중보자(구원자)를 세워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도, 역시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 대상들의 죄만을 대속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요17:9). 이것을 제한적 속죄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바로 배운 성도들은 예수님이 인류전부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줄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③ 대속 : 대속은 죄값을 대신 치른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값(죄책)을 치를 때 벌금으로 내게 하거나, 매를 맞게 하거나, 징역 또는 죽음의 형벌을 내릴 수 있는데 피조물 된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롬6:23). 이 죽음은 영원한 죽음, 즉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죄책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택한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대속은 대신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④ 속죄 : 속죄의 뜻도 대속의 뜻과 비슷하지만 대속은 대신 짊어짐을 강조하고 속죄는 값을 치르고 죄책을 없애는 뜻을 나타냅니다. ⑤ 속량(신7:8,13:5) : 죄 또는 부채 등으로 얽매인 자를 상당한 것으로 보상한 다음에 풀려나는 것을 뜻합니다.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남을 뜻합니다. ⑥ 칭의 : 롬8:30에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하셨습니다. 또 정죄에 이르지 않으면 심판에도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요5:24). 예수님이 대속으로 속량하셨기 때문에 정죄와 심판에 이르지 않으니, 정죄되지 않은 그 자체는 곧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법에 걸리지 않은 자는 검찰에 끌려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칭의는 성도의 본질을 깨끗하게 만든 것이 아니고, 죄책에 대하여 의롭게 인정하신다는 뜻임을 아셔야 합니다. 죄사함 받았으면 분명히 의로워집니다. 그러나 이 “의로워진다”는 뜻을 거룩해지는 것(본질이 깨끗해지는 것)으로 혼돈하지 마셔야 합니다. 거룩해 지는 것은 인격적 순결을 뜻하고 의로워지는 것은 “법적 정죄에 이르지 않음”임을 아셔야 합니다. ⑦ 거룩 : 거룩은 순결과 같은 뜻으로 인격과 본질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패성을 제거한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은 말씀과 기도로 성취된다고 하셨습니다(딤전4:5). 그러니까 십자가로는 의로워지고(죄책을 없앰) 말씀과 기도로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부패성제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데는 성령님의 역사도 필수적입니다(히12:29). ⑧ 구원 : 죄에서 용서받고 영생 받음을 뜻합니다(요3:16, 롬10:13, 딤후4:18). 그러나 성경에는 환난에서 건짐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명한 것도 있는 만큼(행27:20,28:1) 잘 구별하여 이해하셔야 합니다. ⑨ 구원의 단계에서 중생,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7단계를 설명합니다. ㉠ 중생은 죽었던 영적 새 생명을 주심이요, ㉡ 신앙은 구원받을 믿음지식을 가짐이요, ㉢ 회개는 신앙과 함께 잘못을 돌이킴이요, ㉣ 칭의는 정죄를 면하고 의롭다는 법적 인정을 받음이요, ㉤ 양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심이요(요1:12), ㉥ 성화는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닮음이요, ㉦ 영화는 신령한 육체로 변화(부활)를 받는 것입니다. 성화까지는 성도의 생전에 성취하다가 육체를 벗으므로 완성되고(갈5:16-21), 영화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취됩니다(살전4:16-17). 영화는 예수님처럼 몸의 부활을 힘입는 것을 뜻합니다.


79. “중생의 체험이 있었느냐”고 할 때 어떻게 대답할까요?목록으로

: 1) “중생”이란 말씀은(딛3:5) “거듭남”이란 말씀으로도 표현하셨고(요3:3), 또 “위로부터(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1:13, 요일5:1)라고도 하셨는데, 이 사실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엡2:1;불신앙)를 다시 살려 주시는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 심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으로(요3:3, 벧전1:23) 역사하여 성취하십니다.

2) 영적 생명이란 믿음을 발생시키는 신령한 요소로 성령님의 역사를 바람의 역사로 비유한 것처럼(요3:8) 신비한 요소이므로 정신적 변화의 발생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정신적 변화의 발생이란 중생의 결과로서 믿음의 징후가 나타남을 뜻합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시키는 과정을 바람의 역사로 비유하신 것과 씨앗을 심어 싹이 나는 것으로 비유(요일3:9)하신 것은 그 과정을 체험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나, 싹 나는 과정(성장의 과정)을 관찰하기 어려운 것처럼 중생의 체험도 감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진리의 말씀을 받을 때 자기 마음에서 믿음이 발생하였다면, 그것을 증거로 자신이 거듭났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거듭난 증거요, 결과입니다.

4) 어떤 사람은 바울사도가 변화받을 당시에 하늘로서 빛이 비취고 소리를 듣는 과정(행9:3-4)을 중생의 체험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중생과 함께 나타난 특별한 사건일 뿐 모든 중생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거듭나는 과정의 표준으로 설명하면 안됩니다.

5) 중생의 의미를 영적 새생명의 탄생으로 알지 않고, 신앙과 인격의 변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체험을 회개하고 변화된 체험으로 알고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신앙인격의 변화되는 체험은 중생과 믿음을 가진 후 특별한 은혜를 받음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질문자가 중생의 의미를 어떻게 알고 질문하는 것인지를 먼저 파악하여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인격변화를 중생으로 설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회개하며 변화 받는 체험은 성화의 과정에 속하는 것으로 믿은 것이 옳은 것입니다.

6) 따라서 중생하는 체험을 성경이 설명하신 바가 없으며, 체험으로 알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80.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현재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요소로서의 인격의 부패성이고 또 하나는 죄를 범한 상태에서 회개를 못한 허물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전자는 “항상 갖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지을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도 그런 사실 때문에 고민을 하였고(롬7:19-24), 또 알지 못하는 죄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눅23:34, 시49:10). 인간이 바로 알지 못하는 것도 죄이려니와 자신의 허물을 다 알지 못하여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못한 상태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항상 허물을 갖고 있다고 하여야 합니다.


81. “죄사함 받았다, 의로워졌다”는 뜻이 무엇일까요?목록으로

: “죄사함 받았다”는 말은 “용서받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마6:12,14) 십자가의 믿음을 갖거나 죄를 회개하였을 때 그 죄에 대한 일시적 또는 영구적 징벌에서 해방됨을 뜻하고, “의로워졌다”는 뜻은 스스로 의로워진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다”는 뜻으로(롬1:17, 3:24, 5:9, 9:30) 영구히 정죄받지 않는 상태, 또는 심판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법적 용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구히 정죄받지 않는 의”는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요, 회개는 일시적 징벌에서 용서받을 수 있고,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82. 목록으로 롬 7:23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하셨는데, 이 “다른 법”이란 무엇입니까?

: 이 다른 법은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유혹으로 범죄하였어도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범죄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자신의 계율을 위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법이 들어와 죄를 짓게한 것은 자기의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만 만일 그렇게 되면 인류는 다 죄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83.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목록으로

: 구원은 상당한 시간을 두고 완성됩니다. 롬13:11에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말세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과 영화의 때가 가까워짐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구원받는 문제를 완료형, 현재진행형, 미래형 세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1) 완료형은 거듭나고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요5:24) 궁극적으로 구원이 확보되기 때문에(요17:9-12, 히7:25, 벧전1:23)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2) 현재진행형은 믿음생활을 하면서 성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고후1:10)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대답함이요,

3) 미래형은 예수님의 재림과 영화(부활과 변화)로서 구원사역을 통한 천국건설이 끝났을 때를 의미하므로 미래완성형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이상의 대답은 시간적으로 관련지은 대답이요, 본질적 변화로서의 구원과정은 중생, 신앙, 칭의, 양자까지가 이미 받은 구원이고, 성화는 현재 받고 있는 구원이며, 영화는 앞으로 받을 구원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고후1:10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84. 기독교의식과 신앙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1) 이 질문은 기독교 의식에 과장 또는 불필요한 순서들을 규제할 필요를 느끼는 질문입니다. 다만 정신적인 면보다 의식이 과장되는 것은 좋지 않고, 의식에 지나친 권위를 인정할만큼 색다르게 표현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는 의식에 있지 않고 생활에 있는만큼 적당하게 간소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 기독교의식에는 성수주일과 각종 예배와 성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예배순서들 중에 찬송, 기도, 성경 봉독, 강론, 헌금, 축복이 있고, 그 외에 성경문답이나 권징도 의식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이 왜 이런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과 명령에 따름이기 때문입니다(마18:19,26:30, 눅2:46, 요13:15, 고전11:1,16:2, 엡2:20, 행2:42,46). 기독교 신앙생활은 자율종교가 아니고, 계시와 모범에 의한 종교이므로 예수님의 명령과 사도의 모범을 따라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합심기도를 명하셨고(마18:19), 찬송하셨으며(마26:30), 성경문답을 하셨고(눅2:46), 예수님과 사도들이 기독교 생활의 본을 세운 분들이며(요13:15, 고전11:1), 또 그 생활이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엡2:20) 사도들의 성수주일(고전16:2)과 성례, 합심기도(행2:42,46), 설교(행7:2,20:7), 교육(행11:26), 헌금(막12:41-43)등을 포함하는 의식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없는 의식이나 상징적 행위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① 성경적이며, 정신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목적에 부합되게할 것과,

②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심이 없이 결여된 상태에서 인간을 부각시키거나 인간적인 기복주의를 앞세우지 말아야 할 것이요,

③ 오직 바른 지식과 진실과 정성을 가지고,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목적으로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기독교 의식이 영광에 목적을 둔 것이 되고, 좋은 은혜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85. 은혜스럽게 예배드리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목록으로

: 예배는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며, 경외하는 최고의 경건 행위이며, 성도는 일주간에도 여러 차례의 예배를 드리는 만큼, 예배를 잘 드리는 방법을 터득하셔야 합니다. 사1:13에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하셨고, 사29:13에서는 “이 백성이‧‧‧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하셨으며, 약1:26-27에서는 “말에 실수가 많고 자비롭지 못하며 세속에 물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헛된 경건을 가진 자로 자기를 속이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훈은 예배드리는 자에게 기초상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스럽게 예배를 드리려면, ① 예배드리는 일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시42:1-2; 꼭 읽어보십시오). ② 공예배를 드릴 때 시간을 잘 지키셔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10분전에는 오셔서 찬송과 기도를 하시고 마음을 정돈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③ 예배의 순서들이 진행될 때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찬송가는 가사와 곡조에,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내용에, 특히 설교는 설교자의 심정을 헤아리며, 또 성경본문과 일치하는 설명에 대하여 확인하는 자세로 마음을 집중하시면 시간의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채 예배가 너무 속히 끝났다는 것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정성, 감사와 회개, 그리고 마음의 집중과 사랑의 실천이 예배를 은혜스럽게 드리는 요소임을 기억하십시오.


86. 민속명절과 기독교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목록으로

: 민속명절은 구정이나 추석을 비롯하여 단오절 등 조상 때부터 지켜오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신정은 해가 바뀌는 시기로 세계적 행사인 만큼 민속명절이라 할 수 없고, 또 어떤 종교의 경축일도 민속명절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선 민속명절은 세속적 입장에서 사람이 만들어 지킨 절기인만큼 성도가 성경적으로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 명절이라도 주일의 성별됨만 못한 것이며, 그런 것 때문에 성도가 신앙의 기존질서를 흐뜨러 뜨리면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 전체가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에 성도들도 아무런 의식 절차 없이 그 기간을 가족들의 모임과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 경우에 가정을 위한 예배와 이웃, 친척들에 대한 인사, 그리고 자녀들에게 훈계를 주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입니다. 다만 민속명절에 끌려서 신앙생활의 기본자세까지 어그러뜨린다면 그것은 시험에 드는 일일 것입니다. 성도는 세속적 행사를 멀리하면서 신령한 세계를 동경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87. 교회는 성도의 길‧흉사에 대하여 부조 관계를 어떻게 합니까?목록으로

: 성도의 길‧흉사를 대사와 소사(큰 일과 작은 일)로 나눕니다. 대사는 혼인, 수연, 장례이고, 소사는 생일, 입원, 개업, 입주, 첫번 추도 등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또 대사 중 장례(흉사)와 길사를 구별하여 축의금의 차이가 있고, 소사에는 교역자가 특별초청을 받았을 경우에 약간의 축의금이나 선물을 하게 되어 있는데 (현재로서는) 그 금액이 적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아셔야 할 것은 아무나 다 축의금을 전달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오래 나온 사람의 당사자 일이나, 직계 존비속의 일, 또 직계 존비속이 아니라도 당사자가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을 때에 충분하게 적용이 되며, 친정의 일이나, 직접 부양하지 않는 대상의 일에 대하여는 형편에 따라서 조정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협의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형편을 협의할때 그 상황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아시고, 궁금하시면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본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출석하는 경우는 본교회 성도들이 개인적 인사는 자유로 하실 수 있지만, 교회의 인사는 공적으로 하기 어렵고, 또 축의금 예산도 없으며, 주일에 치르는 대사에 대하여는 성수주일에 위배되기 때문에 공예배시에 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일에 오해나 섭섭함이 없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이것은 특정 교회 사례임).


88.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儀式)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목록으로

: 성수주일과 예배와 성례입니다. 이것 이외의 의식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1) 성수주일은 “주님의 날”(계1:10)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날을 지켜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주간의 주일이 어느 시간부터인가에 대한 것은 동서의 차이가 있은즉 그것까지 의식에 포함하는 규정을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예배의식은 예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겨지는 것이므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이 되는 것이요,

3) 성례식은 주님의 모범과 명령에 의하여 지켜야 합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① 의식의 경건성과, ② 의식 아닌 것에 치중하지 말 것과, ③ 의식 그 자체보다 내용과 정신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려는데 있습니다.


89. 성도의 가정에서 장례를 치른 후에 특별히 시행해야 할 절차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은 추도예배와 같은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추도 예배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입니까?”라고 만들지 않은 이유는 추도예배를 기정사실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과거의 전통적 제례법이 퍽 번거로웠으나 이제는 그것도 많이 간소화되었고 그 제례의 근거는 유교적 전통에 의하였으며, 불교나 무속종교에서 특수한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73년 6월 1일에 공포된 가정의례 준칙을 읽어보았는데 그 법은 완전히 유교적 전통을 간소화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준칙을 지키려는 사람이나 단속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줄 압니다. 성도가 그런 준칙을 지켜야 하는가 할 때, 그 준칙은 생활에 관한 것 외에 의식과 숭배에 관한 것이 있어서 기독교적 신앙과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떤 의식을(기독교적)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혼을 하나님 계신 곳, 곧 천국으로 인도하셨음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며, 그 죽은 자의 영혼이 현실세계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근거를 성경에서는 부정하였습니다(눅16:26). 이 말씀에 근거하여 지상의 성도들은 천국간 영혼을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성도가 먼저 간 영혼을 교제하거나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 받은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족이 돌아가신 일로 인하여 마음에 위로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수시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1주년이 되었을 때 혹 예배 드리기를 원하시면 그 예배의 의미가 유교적 전통에 의한 제례라고 생각지 마시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위로 받는 일과 효도의 의미를 갖는 일과 축복 받는 목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성도가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하여 정죄 받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90. 성도가 시행하여야 할 장례절차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가족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도는 위에서 교훈한 말씀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는 자세와 침착성과 소망을 가지셔야 하며 슬픔을 억제하시고(살전4:13) 서로 위로하시며(살전4:18) 두려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시신을 가까이 접해본 사람은 시신에 대한 무서운 감각이 둔하지만 경험이 적은 분들은 거부감이나 공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믿음과 담력으로 잘 견디셔야 합니다. 선진국 백성들이나 사후의 소망을 믿는 백성들은 시신이 있는 곁에서 공포감을 전혀 못 느끼며 오랜 세월을 시신 곁에 함께 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카타콤).

2) 장례 절차에 대하여 기독교적 특별한 규례가 있는가 할 때에 성경에 명시된 것은 없고, 다만 성경에 준한 헌법적 규칙이 있을 뿐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혼상례는 간소화하여 비용을 절약하라, 부모상에는 흰 상장(남)과 소복(여)을 착용하라, 상주는 베감투(남)와 수건(여)을 착용하라, 부모상의 복기는 1년, 남편상의 복기는 6개월로 하라, 입관할 때에 고인의 찬송가나 성경책을 함께 넣거나 불태우지 말라, 시신의 관이나 무덤 앞에 촛불이나 향을 피우지 말고, 절하지 말라, 부부 중 일방이 별세한 후 재혼하려면 6개월 후에 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 숭배 금지의 계명과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만든 규례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집에 가셨으나 혼인 규례를 만드신 일이 없으셨고(요2:1-11),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마8:22) 하셨을 때에도 장례 규례를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다만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자기의 생전에 향유 부음을 받으신 일이 있었으나(마26:12), 이는 성도의 봉사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의 규례에 의하여 당일로 장사되시되(신21:23,요19:31) 유대인들이 그들의 장례법에 따라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마27:59-60,요19:40) 굴속에 장사하였지만 이는 그들의 장례 문화일 뿐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장례법(창23:19)과 애굽인들의 장례법(창50:1-3,10)이 있지만 이것들은 다 그 지역의 문화적 풍속일 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장례식은 성경적으로 위반되지 않으면 됩니다. 장례의 기간이나 장소(묘자리)에 구애되지 마시며, 간소한 비품을 사용하시고, 손님을 대접하며, 슬픔의 감정을 억제하시고(살전4:13), 위로를 받으실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도와 예배를 드리시고 위로의 말씀을 받으셔야 합니다. 또 임종예배, 입관예배, 출관(발인)예배, 하관예배 네 차례 공식 예배를 드립니다만 이것도 위로와 교훈과 축복을 받는데 목적이 있을 뿐 어떤 근거에 의하여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없는 이방인들의 전통이나 우상적 미신적 장례법에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차나 방법에 신경을 쓰시지 마시고 편리한대로 하셔도 아무런 후환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이방인의 방법을 따르지 않을 때 더욱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12:2).


91. 죽은 시신을 장례할 때 화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목록으로

: 어떤 이들은 화장하는 것을 두 번 죽음으로 표현하면서 화장을 안했으면 좋을 것으로 말하는 분들이 있고, 또 성도들 중에서는 시신을 화장하면 부활 때 어떻게 부활할 수 있겠느냐?고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신을 불태우는 것은 누가 생각하던지 마음아픈 일입니다. 그러니까 형편만 되면 매장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입장에서 부활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권능적 역사가 새생명 창조사역,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 창조 사역과 새하늘 새땅을 만드시는 사역권에 포함되는 것입니다(창1:1, 롬4:17, 계21:1). 또 흙에서 취한 육의 요소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창3:19)고 하셨는데 사실 그대로 청취되는 것입니다. 시신이 부패하여 흙과 합장이 되면 나중에는 그 형적조차 없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전7:31). 필자가 대구에 있을 때 아주 오래된 고분을 개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 뼈라도 남았을줄 알았으나 물병 한 개 외에 이빨 한 개의 흔적도 남은 것이 없음을 보고 결국 시신은 흙 속에서도 없어지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신이 흙에 들어가 없어진 것이나 연소되어 연기로 사라진 것이나 꼭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시신의 흔적을 못찾도록 되는 경우가 많지만 부활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화형으로 순교당한 성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당연히 부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장례법에 대하여 계명으로 말씀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 문화 전통에 따른 시신 처리 풍속은 곳곳마다 다릅니다. 인도에서는 화장하여 간지스 강물에 뿌리고 유대인들은 굴에 안치하며 일본 사람들은 앉은 자세로 매장한다 하며 한국인들은 매장도 하고 화장도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화장하는 문제를 교리와 관련하여 문제되는 일로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92. 예배당이 부정적 의미로 활용되는 경우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예배당은 성도의 예배, 교육, 친교의 장소로 쓰기 위하여 마련한 부동산입니다.

1) 그런데 이 건물이 구약의 성전이나 천주교의 성당처럼 신성시되거나 우상시 되는 경향이 문제이고,

2) 또, 그 건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헌납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목적하지 않거나,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도록 함이 좋으나, 사람의 집처럼 세속성 있는 일로 사용함이 문제이며(헌납된 것이 그러함),

3) 교회의 발전책을 예배당 시설에 의존하거나 성도의 신앙생활을 믿음 아닌 건축헌금에 수십 년간 얽매이게 함이 좋지 않으며,

4) 예배당 건축에 많은 공을 드렸을 경우, 예배당을 자기 집으로, 또는 자기의 소유로 착각하여 교역자와 갈등이 있어도 예배당을 지을 때 헌금한 미련에 사로잡혀 좋은 교역자를 찾아 나갈체를 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습니다. 만일 예배당이 없다면 교역자와의 갈등을 피하여 얼마든지 좋은 사역자를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당은 이렇게 있어도 좋지 않은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93. 현실교회의 예배제도에 문제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예배만 드리면 신앙생활을 잘한 줄로 아는 예배우상을 타파하여야 하며, 예배의 다양한 제도나 행사보다 평소의 충성된 생활을 더 앞세워야 합니다. 현실교회의 예배행사가 너무 제도화된 느낌을 줍니다. 시간과 순서종목에 자유로움이 좋고, 공예배는 공에배에 필요한 설교나 축복에 주력하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예배종목은 스스로 행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권장함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은 지성적으로 설교를 청취하는 성도가 많으므로 본문중심과 강론식 설교를 문서로 전달하여 효력을 얻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주일날 예배종목이 많고 지루하여 휴식에 덕을 주지 못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과 휴식과 친교가 동시에 만족되는 성수주일과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94. 예배당에 대한 견해를 알려 주십시오.목록으로

: 신약의 교회들이 예배당을 신성시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헌금한 돈으로 예배당을 지어서 구약의 성전처럼 봉헌을 하다 보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배당이 하나님 것”이란 뜻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 장소와 물건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골방이나 조용한 처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하여도 그 예배의 가치는 예배당에서 드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대중의 예배처로 예배당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사치한 예배당을 만듦으로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 가난하여 예배당 건물을 가질 수 없으면 가정이나 안 마당, 거실, 또는 야외, 창고, 교실에서 예배드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부흥의 원동력은 말씀 전파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으로 사람을 끄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나 성도는 말씀에 끌려 나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배당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니까요. 많은 교회들이 성도의 믿음과 인격 변화에 중점을 두지 않고, 헌금 잘하여 예배당 짓는 일에 중점을 두어 강조하지만, 20년 걸려도 집 한 채를 마련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예수 믿는 바른 정신이 없이 20년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쓰게 한다면 하루 아침에라도 예배당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 예배당이 있으면 좋습니다. 신앙적으로 부담없이 마련하십시오. 그러나 사치하지는 마시고, 예배만 드리는 장소로 구별하지도 마십시오.


95. 찬송가에 대한 개혁적인 견해가 있습니까 ?목록으로

: 1) 제가 시간이 있으면 우선 찬송가 가사를 검토하려고 합니다. 교리적으로 모순된 가사, 문학적, 언어상으로 교정할 가사가 약간 있지요. 그런데 교리적 가사는 교파별로 다르기 때문에 교파별 찬송가를 만들기 전에는 통일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아시고, 그런 내용을 스스로 지적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고 가사 내용에 따라 영광송(성경 가사), 기도송(기도 내용), 간증송(간증 내용), 감사송, 전도 찬송, 회개 찬송 등으로 나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뉘어져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내용의 일관성이 없어요. 예를 들면, 믿음 찬송가에 사랑과 소망 내용도 함께 있으니까요. 따라서 여기에 어떤 일관성 있는 규칙을 두어 잘 정리했으면 합니다.

3) 요즈음 복음성가의 곡이 많이 활용되는데, 또 신 복음성가의 곡이 나와서 기성 세대는 따라 부르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그리고 세속적 곡이 많이 인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도 잘 취사선택하였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96. 예배 의식에 대한 개혁적 견해가 있습니까 ?목록으로

: 1) 예배의 순서에 대하여 교독문이나 사도신경 고백이 너무 제도화된 느낌이 듭니다. 특별한 경우에만 순서에 넣고, 일반적 예배 때는 찬송, 기도, 성경 읽기, 찬양, 강론, 헌금, 축도를 주축으로 간단하고 진취성 있게 진행하여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끝내야 좋을 것입니다.

2) 예배드리는 자세는 성령님의 감동에 힘입어 심적 간절함과 사모함, 감사함, 자복, 봉헌과 헌신, 말씀 듣는 깨달음, 음악적, 신령적 요소로서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광신적 과열이나 작태, 크게 외치는 소리같은 것이 있으면 안됩니다. 감동과 갈망함이 크다 할지라도 공예배 때는 조용하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단체의 예배는 마치 광신자들의 발작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보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여 규모를 지키라고 하셨으니까요(고전14:40,살후3:6,7).


97. 예배 의식을 가질 때 꼭 까운을 입어야 합니까 ?목록으로

: 필자는 목사된지 7년 만에 까운을 얻어 입었습니다. 그 전에는 꼭 입어야 한다는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또 까운을 준비하는 비용도 없었습니다. 그 시대가 다시 왔으면 합니다. 그런데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서 목사, 장로, 헌금 집사, 찬양대원까지 입게된 것입니다. 필자는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경건한 모양을 위하여 건설적 견지에서 그것을 허용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좋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다시 생각하면 종교적 거품이고, 권위 의식의 방도요, 스스로 거룩해 보이려는 수단이며 또 모르는 교인들은 그것을 권위의 방편으로 인정을 하는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의 의복에 비기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계시에 따라 지어진 것이고 또 계시의 목적이 있었지만, 이 시대의 까운은 권위와 단정함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주 없애면 좋으나, 그렇게 개혁되지 않으면 점차로(꼭 입어야 한다고 할 때만 입고) 없애나가야 할 것입니다.


98. 예배드릴 때 찬송을 부르면서 키타를 치는 것이 어떠합니까 ?목록으로

: 악기의 종류는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악기를 동원하여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시150:3-5). 물론 손뼉을 칠 수도 있고(시47:1), 춤추며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시149:3). 우선 손뼉치고 춤추는 것은 그만한 은혜의 감격과 자연적 충동에서 나와야 하며, 또 그것을 보아주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공감해 줄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감동과 충동이 없고 보는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때 시행하면 공감을 못하는 성도들에게는 외식이 되고, 억지가 되며 따라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드니까 좋지 않은 것입니다.

키타 뿐만 아니라 예배 의식에 악기를 선택하는데도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1) 악기가 생겨진 목적이 세속적 쾌락이나 우상 찬양에 있지 않고, 또 죄악 행위에 사용되지 않았어야 좋으며,

2) 그 악기의 연주 소리를 듣는 성도들에게 경건한 신앙적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 방종심이 흥기되면 안 좋다는 것입니다.

3) 북과 장고는 무당이 굿할 때 쓰는 것이란 인식이 지워지지 않고 있지요. 그런데 예배당에서 장고를 치며 찬송을 불렀다면 분명히 성도의 마음에 갈등을 느낄 것입니다.

4) 그런 맥락에서 키타의 사용도 생각해 봄직한 것입니다. 보수적 성도, 노인층이 많은 곳에서는 키타 사용이 더욱 부정적일 것이고, 진보적 젊은 층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흐르고 기독교 문화가 달라지면 그때에 가서 자연스러운 정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99. 성수주일을 얼마큼 강조해야 좋을까요 ?목록으로

: 구약의 안식일은 의식적 규범에 속한 것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호2:11,골2:16) 구약의 안식일 제도를 전체적으로 주일에 적용시키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마12:8) 안식일 규례가 포함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안식일 제도도 함께 없어진 것입니다(골2:14). 따라서 율법적 안식일 제도를 신약 시대의 주일에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율법주의에 기울어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 “주의 날”이라 하셨으니까(계1:10),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드림이 마땅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주의 날”이라고도 하였으나(살전5:2,살후2:2,벧후3:10), 이 날은 주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은 안식 후 첫 날인데, 그 날 예수님이 부활하셨고(마28:1-6), 초대 교회가 매주일 첫 날에 모임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일은 꼭 시행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일을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시행하고, 영광되지 않는 일을 배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오락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었고(사58:13), 매매와(느10:31) 노동도(출20:10)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노동은 허용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주일성수를 위하여 엄한 법규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고, 또 이런 것은 율법주의를 따르는 것이 아님도 잘 압니다. 물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강가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주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날 야외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간단한 운동으로 몸을 푸는 일입니다. 이것을 오락이라고 정죄하면 안될 것입니다. 진짜 오락은 TV를 보는 것이 아닐까요 ? 많은 직장 가진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적 생활로 속박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스트레스를 줄 염려가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장소 선택에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100.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성경에는 주의 날(주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행20:7, 고전16:1-2, 계1:10). 그중 행20:7에서는 주의 날에 성찬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고전16:1-2에서도 “매주일 첫날에 모임을 갖고 구제비를 모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주일 회집의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주일의 성격에 따라서 특별한 이름을 붙인 주일이 있으니, 그것이 곧 종려 주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이요, 추수감사주일이나 맥추감사주일은 감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것뿐입니다. 종려주일이란 고난 주간 앞에 있는 주일을 말합니다. 그날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성경에 주일날(또는 안식후 첫날) 입성하셨다는 말씀은 없으나, 학자들이 예수님의 한 주간 일정을 추적 연구하여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내용은 마21:1-11, 막11:1-11, 눅19:28-40, 요 12:12-13에 기록되었고,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길에 옷을 벗어 펴드리고, 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펴드린 말씀이 있어서(요12:12-13) 이를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나무가지를 폈다”하였고, 누가는 나무가지에 대한 뜻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요한복음에만 “종려 나무를 폈다”고 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고난의 행적을 명상하기 위하여 명칭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주간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고난주간은 있어도 고난주일은 없음을 기억하시고, 부활주일이나, 성령강림주일은 다 성경적 근거가 확실한 것입니다(마28:1, 눅24:1, 행2:1).


101. “성례”에 대하여 알아야 할 지식을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성례”는 기독교에서 시행하는 “거룩한 예식”이란 뜻으로 예수님이 실천, 모범을 보이시고 명하신 것으로 사도들이 전승시킨 것입니다. 성례에는 세례식과 성찬예식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세례식에 대한 모범과 명령은 마3:16,28:19, 행2:41,10:47,16:15등에 있고, 성찬예식의 모범과 시행은 마26:20-30과 고전11:23-29에 기록되었습니다.

1) 세례는 바른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천하는 자에게 목사가 그 머리에 물을 뿌리며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성도의 명분을 확실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도) 앞에서 성도된 것을 공포하여 성도의 단체에 가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때에 영적으로 전달되는 은혜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됨과 천국의 백성됨, 즉 천국호적에 입적이 되는 은혜를 함께 전달함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정죄를 받으니까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인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막16:16). 마16:13-1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셨고, 또 롬10:10에 보시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하셨습니다. 여기에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본질상 같은 뜻으로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요, 또 “의에 이르는 것”이나 “구원에 이르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입으로 시인하여야 할 이유는 성도의 단체에 입회하기 위하여 사람이 알도록 나타낼 것을 표현케 하신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거룩한 공회로서 성도가 합력하여 세상에 빛을 드러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마5:14-16).

2) 성찬예식은 믿는 성도의 모임에서 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기념하여 나누어 먹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상징적 의식으로 나타내어 더 확실하게 음미하고 실감케 하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더 확신케 하고 또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더 잘 하도록 인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언자가 예언하는 내용을 형식으로 나타내면서 말한 경우가 있습니다(왕상22:11, 행21:11). 이런 사실들이 다 그 내용을 인상 깊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처럼 성찬예식도 그런 의식과정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자주 십자가에 대한 실감있는 영적 접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례식의 기회와 시기는 일정한 규례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적당한 때와 적당한 시간에 할 수 있으며 성례는 말씀 은혜에 다음가는 하나님의 은혜전달의 수단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102. 부활주일과 새벽연합예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부활주일은 예수님이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으므로(마28:1-10, 막16:1-8, 눅24:2-11) 이를 기념하는 것이며, 어느 주일이 부활주일인가에 대한 것은 주후325년 5월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회집된 세계기독교대회에서 “춘분과 만월을 지난 첫 주일”을 정하므로 일치된 것 뿐이며, 지역적으로 새벽 야외 연합집회를 갖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되는 목적을 위하여 초교파적으로 일깨우며 성도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연합예배자체가 성경적으로 명령된 것은 아닙니다.


103.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누구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나요? 목록으로

: 이 대답은 성부, 성자, 성령 각위의 능력으로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고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부, 성자, 성령 각위의 하나님은 각각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창1:에서, 예수님의 창조사역은 요1:1에서, 성령님의 창조사역은 창1:26-27, 욥33:4, 요3:5-6, 요일5:4에 기록되어 있은즉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각각 생명력이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능력으로 부활케 하셨다”는 말씀 (행2:24,3:15,13:34,

37,골2:12)과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사셨다”는 말씀과(요2:19,20,10:18, 롬8:1, 고전15:12,20)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씀(롬8:1, 엡1:20-21)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뜻은 그 육체와 영혼이 다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벧전3:18) 낙원에 가셨다고 하셨으므로(눅23:43) 육체적 또는 인간적으로 돌아가신 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104. 예수님의 부활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목록으로

: 우선 ①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몸이었으며(마28:9, 행1:9), ② 서로 말씀하셨고(마28:9), ③ “살과 뼈가 있으니 만져 보라” 하셨으며(마28:9,눅24:39,요20:19), ④ 음식을 잡수셨고(눅24:43), ⑤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나셨으며(막16:12), ⑥ 닫힌 문을 열지 않고 통과하셨고(요20:19), ⑦ 장가나 시집을 가지 않는 천사와 같은 몸이라고 하셨습니다(요20:19).


105.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나타내 보여주신 순서는 어떠하였습니까?목록으로

: ① 제일 먼저 보게 된 사람은 무덤 옆에서 막달라 마리아였고(막16:9, 요20:18), ②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안나와 다른 여자들에게 나타나셨고(마28:19, 눅24:10), ③ 또 같은 장소에서 베드로에게 보이셨으며(눅24:34, 고전15:5), ④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 글로바와 (누가)에게 보이셨고(막16:12, 눅24:33-35), ⑤ 당일 저녁에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도마가 없는 열 제자들에게 보이셨으며(눅24:39, 요20:19-24), ⑥ 그 일이 있은지 8일 후에 예루살렘에서 도마가 있을 때 열한 제자들이게 보이셨고, ⑦ 디베랴 해변에서 일곱 사도에게 나타나셨으며(요21:1-14), 그곳에서 생선을 구어 주시고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으며, ⑧ 갈릴리 산에서 또 열한 사도에게 보이셨고(마28:16, 막16:14), ⑨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으며(고전15:6), ⑩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에게 보이셨고(고전15:7), ⑪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열한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막16:19, 눅24:50, 행1:9).


106.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나타나신 일이 있었나요?목록으로

: ①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모습으로(행7:55), ② 사울이 개종할 때 다메섹 노상에서(행9:5,22:8,26:15, 고전15:8), ③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 중에 보이셨으며, ④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환상 중에서 보이셨고(행18:9), 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받을 때와(행23:11), ⑥ 로마감옥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곁에 계셨다 하였으며, ⑦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도 나타나 주셨습니다(계1:13).


10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같은 형벌이 로마인들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까?목록으로

: 십자가 사형법은 로마의 사형법으로 최악의 범죄자를 사형 집행할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로마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최악의 범인이 되었다면 예외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죄수가 어느 나라 백성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마27:44, 막15:32, 요19:32). 이상의 질문과 무관한 내용이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용어를 육체적 사형집행이 아닌 “자기부정”이나(갈5:24,6:14)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영적 의미로도 사용한 예가 있습니다(롬6:6, 갈2:20).


108. 한국교계가 금년(1995년)을 “희년의 해”로 선포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이 사실은 본 교단을 포함한 초교파적 연합회에서 그런 선포를 한줄 압니다. “희년”이란 뜻은 레25:10-17, 겔46:17등에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6년간 농사를 짓고 7년 되는 해에 안식년을 지키므로 땅을 쉬게 함과 동시에 사람도 땅을 경작하는 일을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7회 반복하면 49년만에 안식년이 되고 그 다음해가 희년이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6년 기간에 3년 사용할 소출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레25:21). 그리고 안식년이나 희년에 저절로 생산되는 열매는 사람이나 짐승이 자유로 먹게 하셨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다른 것은 안식년에는 땅과 사람이 용도와 수고에서만 해방되지만, 희년에는 속박된 상태나 채무까지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겔46:17에서 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토지도 희년까지만 사용하면 왕에게 다시 돌려지게 되고, 그 소유는 상속됩니다. 그래서 모든 토지의 가격이 희년을 기점으로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15절).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민을 신정국으로 통치하실 때 시행하신 일이며, 그 신정국은 바벨론 포로 이후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나라는 그 신정국의 회복된 나라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가 선민의 후손도 아니요, 또 성경적 통치를 하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한국교회가 “희년의 해”를 선포한 것은 “8.15 해방이 된지 50년이 되었다”는 뜻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50년만에 희년의 제도를 주셔서 없는 자와 속박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해방 50년만에 통일이라도 주셨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50년이 아니라도 은혜 베푸실 섭리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선민의 희년은 역사적으로도 중단, 계승되지 못하였습니다.


109. 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안식일의 출처는 하나님이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시작되었습니다(창2:2-3). 이때에 하나님이 안식하신 의미는 ① 현상계의 창조를 끝내셨음과, ② 그날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인생에게 복을 주시고, ③ 또 영광을 받으시는 날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원시적 인간들이 이 안식일에 대한 의도를 알았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복을 받기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날로 지켰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아담부터 출애굽이전까지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켰다는 기록이 없다가 출애굽 때에 와서 안식일에는 만나도 거두지 않게 하시고(출16:30)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계율로 주신 것입니다(출20:8-11).

3) 출애굽 때 주신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① 휴식의 의미, ② 복을 받고 영광을 돌리는 의미, ③ 영원한 안식(천국)을 모형적으로 교훈하시는 의미가 있고, ④ 이날을 절기(안식일, 유월절, 대속죄제일; 레23:1-44)로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국의 주이신 예수님이 오시고, 날과 달과 모형적 제사를 드리는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호2:11, 골2:16) 복음이 온 후로는 이 계명을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4) 그후에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① 주님의 부활하심과(마28:1), ② 그날을 주님의 날로 구별하셨음과(계1:10), ③ 사도들이 그날에 신령한 모임을 가진 것(행20:7, 고전16:2)이 근거가 된 것이요, ④ 어차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므로 구약적 안식일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은 좋은 일인 것입니다.

5) 안식년은 레23:2-8에 나타난 말씀으로 6년 농사 지은 땅을 7년째 안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땅의 안식은 주인이 1년 동안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곡물이나 포도나무 같은 것이 잡초와 함께 저절로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저절로 나는 곡식이나 열매는 주인이 수확하지 않고 종이나 객이나 들짐승들이 먹도록 버려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① 휴식의 의미, ② 구제의 의미, ③ 땅을 북돋는(땅의 영양을 배양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년 농사를 쉬는 이는 사람입니다. 물론 농사에 협력하는 짐승도 쉴 것입니다. 따라서 7일에 하루, 7년에 1년, 또 일곱 안식년 중에 1년(희년; 레25:8-17)을 쉬도록 하신 것에 근거하여 이것을 목회자에게도 적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안식년 제도를 목회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최초 선교국에서 시행하였고, 선교사들에게는 필히 적용하여 안식년을 본국에 와서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제도를 희귀하게 적용하는 실정입니다. 목회자에게 반드시 휴식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회성도들이 목회자의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시기가 온다면 이는 성도들의 신앙이 목회자의 신앙생활을 많이 닮은 때라고 할 것입니다.

110. 전도회 기관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목록으로

: 전도회로 명칭하는 소 그룹이 교회마다 남녀별, 또는 연령별로 있습니다. 이 단체가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의 친교와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과 힘을 합쳐 선한 일에 봉사하는 일들입니다.

1) 사랑의 친교는 모든 교인들이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가기 때문에 한 교회 교인이면서도 서로 모르거나, 친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전도회란 부분적 단체 활동을 통하여 친교를 도모함이 마땅하고,

2)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인데 이를 위하여 기도회, 성경공부, 특별수련을 소그룹 단위로 갖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를 초빙할 때 반드시 당회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교회의 예배당을 사용하거나, 다른 종교 단체의 장소를 이용할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본 교회 예배당이나, 차량, 비품 등을 여러 기관이 중복없이 사용해야 하는 점 때문에 당회의 지도가 필요하고, 강사초빙이나, 다른 장소를 사용하는 문제는 신앙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분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위문, 구제, 전도,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이나 한두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교회의 단체는 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11. 전도회 등 어떤 기관을 유지함에 있어서 어떤 점이 어렵습니까?목록으로

답: 1) 가장 어려운 것이 융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단체는 어떤 기관이든지 그 개인이 겸손과 봉사의 자세를 갖고, 또 자신보다 남을 존경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서서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려 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여 신임을 받으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훼손시키거나 어떤 일을 혼자 다 하려 하거나, 합법적 결의 없이 시행하거나, 동참해야 할 사람을 모르게 시행하면 이런 일들 사이에서 오해와 부작용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또 불합리한 일들로 인하여 불신임 같은 부작용이 빚어질 때는 서로 이해하는 것과, 문제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과, 다시 원점에서 새출발하는 입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또 어려운 것은 어느 단체나 지도자의 유덕(有德)스럽지 못함입니다. 교회단체는 어느 기관이건 전문성이 약합니다. 예를 들면 부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회계장부를 맡겼습니다. 그는 잘 못한다고 사양했지만 “하나님의 일로 알고 하라”하니,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후에 만일 부기에 능숙한 회원이 엉성하게 기록된 장부를 보고 혹 부당한 양으로 지적하였다고 하면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관의 책임자를 조예있는 사람으로 세우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그 지도자는 기술적으로 세련되지는 못하였어도 덕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은 사람의 기술보다 덕으로 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맡은 일을 덕과 기술로 잘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회원들의 마음에 신뢰감과 존경과 인정을 받게 하는 언행도 필요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봉사적인 일을 잘 하고도 그 봉사에 따라오지 못하는 회원을 말 한 마디로 섭섭하게 했다면 그 회원을 잃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체의 지도자는 온유, 겸손, 인내, 솔선 등으로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시간을 내서 모이는 것과 물질로 봉사하는 일입니다. 현실 사회구조가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경쟁대열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궁하고, 또 물질도 궁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전체가 다 합력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믿음과 양심적인 충동으로 스스로 하게 함이 마땅하고, 강요하여서는 안됩니다. 회원의 협력이 부족하다 하여 낙심해서도 안되며, 낙심될 만큼 모임과 모금이 부족하여도 감사하게 느끼며, 봉사에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이상의 세 가지만 잘 이행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퍽 재미있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112.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목록으로

: 예수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엡2:1). 따라서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을 어떤 표준에 의하여 미리 가려낼 수는 없습니다. 이 질문의 취지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될 사람, 반드시 구원을 성취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셔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시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하실 백성들을 선택하셨고(엡1:4), 그 선택된 자에 한하여 때를 따라 믿음의 은혜를 주시게 되기 때문입니다(전3:1, 히4:16).

2) 거듭난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백성을(영적 죽음; 창2:17, 엡2:1)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셔야만(요3:3) 거듭난 영혼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16:17, 고전12:3). 거듭나지 않으면(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거듭난 생명은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자원하므로 믿어지는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벧전1:23, 살후1:10).

3) 진실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신 바, 이 뜻은 참되심이요, 믿음이란 뜻도 역시 진실(피스토스)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믿던지 믿음 그 자체는 진실에 입각하여서만 성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거짓된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의 믿음도 거짓될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음에 대하여서도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되고 진실한 자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4) 성경 66권 말씀의 일점 일획까지 믿는 자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하는데, 이 말씀을 순순하게 신종하지 않고 자신이 성경보다 더 높아져서 비판하거나 일부를 감하거나 가하거나 또 일부를 불신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신용을 안하는 것이므로 구원 받을 믿음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계22:18-19).

5)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6) 끝까지 탈선하지 않을 자입니다. 예수님이 탈선한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다(마26:24)”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탈선할 바에는 차라리 안 믿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믿는 자는 끝까지 믿을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 공경하는 것을 피조물 된 인간의 의무로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아니면 현실 복을 뜻대로 받아 누리지 못할 때 낙심하기 때문입니다(마13:20,22). 따라서 “나는 선택 받은 자이므로 끝까지 믿을 자”라는 확신을 가진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벧후1:10).

113. 전도에 대한 상식을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전도란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어야 할 이유를 말하되 인간은 죄로 인하여 불행한 상태에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시므로 선민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셨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2) 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오직 자신이 구원 받은 확신을 갖고, 그 확신하는 사실을 말과 생활로 나타낼 수 있는 담력과 사명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한국복음전도 훈련원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스스로 믿은 자가 3%, 축호 전도나 노방전도로 믿은 자가 3%, 부흥회 등 전도집회를 통하여 믿은 자가 2%, 전도지를 보고 믿은 자가 1%요, 81%가 가족, 친척, 이웃 등의 전도를 통해서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전도자는 반드시 이웃의 친교대상을 전도의 대상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4) 먼저 여러분의 가족 중에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한두 분을 지목하시고, 또 친척이나 이웃이나 친구 중에서 몇 분을 지목하여 명단을 적고(이를 태신자라 함) 그 대상자가 믿음 갖게 되기를 늘 기도하며 그에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상당기간 계속되다 보면 열매를 맺는 확률이 많을 것입니다.

5) 전도는 순간적으로 열매를 맺는 경우보다 점차적으로 세월을 따라 열매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전도열심에만 의존하시지 마시고 세월을 두고 꾸준히 기도하며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6) 누구를 마음 속에 지목하고 그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전도를 집중하는 것을 “태신자 잉태와 생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4:15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고린도에서 전도하여 믿게 된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하셨고,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딤전1:2)란 말씀과 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1:10)란 말씀이 전도자가 신자를 낳은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태신자 전도”란 용어에서 두 가지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①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를 낳고 “디모데”나 “오네시모”를 낳은 것은 그가 잉태하여 생산한 것이 아니고 그가 전도하고 교육하는 중에서 얻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도하고 교육시킬 때 “해산하는 수고를 하셨다”(갈4:19)는 말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전도자가 일정한 씨(특정인)를 잉태하여 생산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를 상대로 전도한데서 얻어진 열매란 뜻입니다. ② 사람은 예수 믿을 자(택한 백성)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누구를 잉태하여 그대로 낳는다”는 뜻은 구원의 대상을 인간이 선택한다는 뜻이므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태신자 생산)이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서 나왔음직한 것입니다. 장로교회 성도들은 이 용어를 알미니안주의식으로 받아서는 안되며, 다만 “태신자”의 뜻은 어떤 특정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믿음의 열매 맺어지기를 노력하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 대상이 혹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면 때가 될 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114. 오랜 기간을 전도하였으나 아직까지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목록으로

: 전도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마28:19, 행1:8, 딤전2:4). 또 가까운 이웃부터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행1:8,16:15,34, 고전7:14). 성도가 전도의 큰 사명을 가지고 어떤 이웃(혹은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오랫 동안 기도하고 전도하여 믿기를 바랐으나 역시 믿음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퍽 안타까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전도를 받고도 믿지 않는 이유를 찾으려면 ① 우선 자신이 빛된 생활과 성도의 모범적 품위를 나타냈는가를 살피셔야 하고, ② 빛된 생활과 모범을 보였는데도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믿게 하시는 때가 되지 않았음인 줄로 믿고(전3:1) 계속 기도와 노력을 하실 것입니다(눅18:1). 그러면 대부분 죽기 전에 믿음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기의 “믿음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는 전도가 시도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로 전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 뜻을 성도의 마음에 주셔서 기도와 노력으로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빌2:13).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비택자였기 때문입니다(행13:48, 살후3:2). 그러면 성령님께서 왜 비택자에게 전도하게 하셨을까요? 이때에 성령님께서는 생명구원을 목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고, 전도자에 대한 연단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건축자가 집을 짓되 반드시 자기가 살기 위한 집만을 짓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구원의 결실을 거두지 못할 대상에게 다른 목적을 인하여 전도하게 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던 안믿던 꾸준히 전도자의 사명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딤후4:2).


115. 인위적(人爲的)방법으로 상대방을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까?목록으로

: 인위적 방법이란 사람의 수단과 노력을 의미하는데 요즈음 이런 방법이 많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물공세, 사랑실천, 태신자 잉태, 여리고 70일 작전 등 조직적이고 전략적인 방법들입니다. 이런 인위적 방법이 전도의 효력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나 한계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한계란 진리의 씨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가까이 오게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 앞에 서도록 이끄는 방법인데 문제는 자기의 자원하는 심령(시51:12)으로 진리를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당에 오게 하는 것은 사랑과 물질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게 하는 것은 복음의 씨를 그의 심령에 전하였을 때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행16:14, 마16:17, 요3:3, 고전12:3). 따라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인위적 방법에 의하여 다녀보는 사람이 있고, 믿는 사람이 있으며, 믿음을 안가진 상태에서 다니고 있는 사람도 어느 기회에 믿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시126:6).


116.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은 연옥설을 합리화시키려는 주장에서 비롯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질문자들의 의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 영혼이 3일 동안 지옥(음부)에 내려가셔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전도하셨다”는 잘못된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계신 동안에도 대속적 고난을 받으셨고, 마지막 고난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며 돌아가시자 마자, 그 영혼은 낙원(천국)으로 가셨고(눅23:43) 그 육체는 무덤에 그대로 계시다가 부활하셨습니다.

2) 사람은 영혼(영적 실체)과 육신으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이유는 영과 혼으로 분리하여 표현한 말씀이 있기는 하나(살전5:23, 히4:12) 영과 혼의 본질이 어떻게 다르며 그 사역이 어떻게 다른 것을 명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과 혼의 기능이 비슷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눅1:46,47에서 영혼(푸스케; 혼으로 번역됨)은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마음(푸뉴마; 영혼으로 번역됨)은 하나님을 기뻐하였으므로 혼이 더 신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혼을 도덕적 실체로 영을 신앙적 실체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3) 예수님은 지옥의 문턱 앞에도 내려가실 분이 아니며 또 이 세상 밖에서는 전도받을 곳이 없는 줄로 아셔야 합니다(시6:5). 예수님이 과거에 죽은 영혼들에게 “3일 동안 지옥에서 전도하셨다”는 근거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은 혹 벧전 3:19의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하신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영으로 지옥에 가셔서 전도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안 믿어도 죽은 다음에 구원의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성립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정통적 견해는 지각있는 자가 죽기 전에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봅니다(요3:16, 롬10:9,13). 따라서 위의 말씀은 그 다음절인 “그들은 전의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면서 전도할 때 주님이 배후에서 영으로 역사하셨으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전도를 받지 않았으므로 옥에 있는 영들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문제되는 어구가 “전파하시니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현재도 영으로 지옥에 가셔서 전도를 하신다”고 오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전파하시니라”의 원문은 “포류데이스, 에케루켄”으로, 영어로는 “going he proclaimed”입니다. “포류데이스”는 “현재-한다”는 뜻이고, “에케루켄”은 “그가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의미를 부언하면 “예수님이 노아 당시에도 영으로 선포하셨고, 현재도(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이해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117. 구걸하는 식으로 전도를 하여야만 합니까?목록으로

: 필자는 구걸하는 식으로 전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세금내는 고지서로 전달하는 것처럼 하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금 고지서는 받은 자가 반드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의료보험 측에서 무료진단을 받으라는 통지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만 전달하면 됩니다. 감정에 호소하고 인정에 끌리도록 하여, 예수믿는 신앙이 생긴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뜻에서 많이 구원받도록 호소할 수 있지만, 구원과 신앙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 한하여 그 정하신 기회에 복음을 접하므로 믿음을 일으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요3:3) 그렇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소원과 노력에 따라 구원 사역이 전개되지만 구원자의 수가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므로(엡1:4-5) 구걸한다고 하여 더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영화를 보고 눈물을 쏟은 학생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사람의 몸이 흙이란 사실을 증명 받고도 믿지 않으며, 기적을 체험하고도 믿지 않는데, 구걸한다고 믿겠습니까? 체면상 믿어주는 형식을 취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믿음을 갖는 것은 구걸하는 전도가 믿음을 일으켜 주는 것은 아니며, 믿을 자는 벌써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고전12:3). 따라서 모든 대상 개개인 모두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리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전도를 안 받는 것으로 크게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십자가 모양이나 교회가 있음은 알렸지만, 구원의 도리를 세금고지서처럼 확인하도록 전달받지 못한 이웃이 대부분입니다.


118. 교회가 헌금을 합리적으로 거출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모든 헌금은 믿음으로 드려지고, 자원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드린다”는 뜻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만 드린다”는 뜻이요, “자원함”이란 누구의 어떤 강요에도 영향받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롬14:23)하셨고, “인색함이나 억지로도 하지 말라”(고후9:7)고 하셨습니다.

1) 교회에서는 헌금의 종류와 기회를 말씀드리고, 신앙적으로 성실하게 드리므로 복이 되는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여기에서 지나치면 강요가 되기 쉽고, 또 기복주의를 부추겨 “헌금을 많이 하고 복을 받으라”(고후9:6)는 식으로 강요하면, 결국 돈을 챙기고, 축복을 파는 격이 될 수도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질을 거출하기 위하여 축복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물질로 축복을 사려 한 시몬의 잘못처럼 되기 쉬울 것입니다(행8:18,19).

2) 헌금을 거출하는 방법은 헌금함에 넣거나, 헌금대를 돌려서 받거나, 경건함에는 차이가 없고, 다만 예배의 질서와 규모에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3) 성직자가 헌금한 성도를 위하여 축복함은 당연하지만(왕상8:14, 신12:5-7), 그 축복이 헌금을 근거로 하여서만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헌금자체로만 응답된다면 무엇이나 헌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도 신앙적이며, 헌신적이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119. 교회의 헌금을 합리적으로 취급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우선 교회의 헌금이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나 물질이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결국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취급해야 될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취급할 특권을 갖되(마20:8, 눅12:42), 신령한 직임과 더불어 행하기에 분주하므로 교회에 직원(제직회)을 세워, 그 직임을 맡기게 한 것입니다(행6:2-4). 따라서 담임목회자가 제직회 회장이 되고, 교회의 모든 헌금을 제직회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취급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드린 헌금이나 헌물은 예수님의 것인 고로 거룩되고, 명분있게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선교회, 전도회, 청년회등 각 기관행사를 위하여 드리는 회비나 찬조금에 대한 것은 구별되도록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 헌금(부담금)을 자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되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므로 당회의 감독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20. 교회나 성도가 부채를 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목록으로

: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부채를 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① “꾸어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며(신28:12), ② 내일 일을 모르므로 갚을 일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며(약4:14), ③ 하나님은 있는대로 받으시고,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며(고후8:12), ④ 복 주실 줄로 믿고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모험이라도 가하지만, 돈을 벌게 해 주실 줄로 믿고 빚을 얻어 헌금하거나 예수님(교회)을 빚지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교회가 많지 않은 돈을 부득이 융통해야 할 경우는 교인 몇 사람이 부득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고, 기존운영상 잔재한 부채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가 일체 빚을 안지고 사는 것이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121. 교회의 재정을 사용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목록으로

: 하나님께 헌금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인 목사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써야함이 당연합니다. 만일 헌금한 성도나 제직에게 사용권이 있다면 헌금의 의미가 상실되겠지요. 본래는 사도들이 주관하다가 업무상 편의를 위하여 집사들에게 맡긴 것이므로(행6:2), 결국은 사도들의 의도에 따라 집사들이 집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 교회가 법으로 재정 취급을 제직회에 맡겼지만, 제직회장인 목사의 최종 결재에 의하여 집행하는 뜻이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집행권한을 거스리지 말고 잘 복종하면 됩니다. 알지 못하는 교인들은 목사가 재정 취급하는 일을 부당한 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인은 재정권이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122. 교회 재정은 주로 어떻게 지출되어야 합니까 ?목록으로

: 여기에서 교회 재정이란 예수님의 것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기의 재정으로 “그런 일에 지출하실 수 있겠는지”를 살펴서 많이 통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것으로 불쌍한 자를 주시겠지요. 그러나 부자에게는 더 주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의 일로 수고하는 사역자들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전9:5-10) 하셨으니까, 전임 교역자의 생활비도 주실 것입니다. 현실 교회는 예배당의 비용과 관리비가 많이 소모되는데, 사실상 그 집은 교인들이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도 가지신 일이 없었으니까요. 따라서 교인 자기들이 쓰는 것은 교인 스스로 돈을 내어서 준비하고 운영함이 좋고, 교육비도 전임 교역자 생활비 외에는 성경을 배울 사람들이 그 비용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음식 대접을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은 와서 예수님의 것으로 구제 봉사를 받아야 하지만, 넉넉한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가 먹은 식사 값을 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역자의 생일축금이나 결혼축금을 하셔야 할까요 ?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이 자기의 재정으로 사역자들에게 선물을 하셔야 할까요 ? 이런 일들에 거리낌이 없지 않습니다. 많이 개혁하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살림에는 성물(구별된 헌금)이 아닌 일반적 헌금을 을 확보하고, 그것으로 자유롭게 쓰도록 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치회의 회비로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3. 성도간의 물질거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여기에 질문한 물질거래란 성도가 친교대상이 됨을 기회로, 돈을 차대, 차용하거나, 물건판매 거래를 하거나, 동업을 하거나, 계를 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이런 일들이 임시로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시일을 계속하다 보면 대부분 약속을 위반하고, 불화의 결과를 가져오며, 손해를 본 성도는 “자기를 손해보였다”고 원망하고, 손해를 보인 측에서는 “그만한 배려도 없다”고 원망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최선책은 가급적 “서로 물질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급하고 중대한 사태를 막기 위하여 부득이 거래를 하였으면, 분명히 신용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물질거래가 부득이 할 때는 주는 쪽에서 받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음이 좋고, 이럴 경우에 일용할 양식을 도와주는 것 이상 요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을 손해보이면서 내가 잘 되거나, 유익하여지기를 바라서는 안될 것이요, 오직 주는 자 입장에서 돕기를 원하는 일에 대하여는 주님의 도우심인 줄 믿고, 감사히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간에 물질관계의 개입으로 조금이라도 신용과 친교에 손실을 초래하였다면 속히 그런 일을 해결하시고, 자유로운 친교에 임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124. 성도가 다른 교회 사역자들과 교제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목록으로

: 필자가 이 질문을 만든 이유는 신앙이 건전하지 못한 사역자들이 때때로 기성교회 성도들을 방문, 친교하면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있으며, 또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이 쉽게 거절하지 못하면서 끌려가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의 합당한 사역자들과 본교회 교인들이 친교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 사역자든지 다른 교회 교인을 대할 때는 자기의 교회로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대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교인 도적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런 눈치를 챌 때 그 사역자는 건전하지 않은 사람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흔히 이단자들이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방문이나 친교를 해올 때는 완강하게 거절하셔야 합니다. 건전한 사역자는 거의가 타교인을 찾아다니며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규모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을 경계하시되,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과 친교로 모든 사역자와 성도를 교제하는 일은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125. 교회단체의 야외행사를 건설적으로 갖는 방법이 있을까요?목록으로

: 교회단체의 야외행사를 교회나 기관감독의 책임 하에 갖는 것은 참으로 큰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위험부담이고, 그 다음이 재정부담입니다. 그리고 단체회원 전체가 다 동원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실상 회원들 중에는 야외행사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을 수 있기 떄문에 다 참여하라고 강요하는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야외행사를 뜻있게 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시간과 비용과 위험과 피곤이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그 행사를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회원도 있으나,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서 합력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1) 우선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모든 회원이 개인적 자격으로 회동하게 하고, 그 중에서 인솔자와 준비하는 사람만 뽑는 것입니다.

2) 자유로운 입장에서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가야 합니다.

3) 비용은 확실하게 자신들이 부담해야 하며, 혹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찬조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야외행사를 하는 분들이 어떤 지도자를 모시는 것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잘 다녀오면 좋고, 혹 문제가 있었다 하여도 교회는 짐을 지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단체나 성도의 단체에서 아직도 불신자들의 노는 풍조를 버리지 못하는 성도가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세속주의를 증오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지향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과 기도와 말씀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세상의 어지러운 풍조를 단연코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126. 성도가 경쟁의식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까?목록으로

: 히12:1에서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하셨고, 엡6:12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도에게 경쟁의 대상과 대적자를 나타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혈과 육(인간자체)은 제외된다 하셨고, 또 성경은 세상의 향락도 멀리할 것을 권유하셨기 때문에(빌3:8, 요일2:15-17) 그런 것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무엇이나 제한된 것을 쟁취하려하면 이는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것을 탐한다면 절대로 욕심이 될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목욕을 하는데 누가 물 많이 쓴다고 말할 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유한한 것인만큼 보이지 않는 것에만 욕심을 갖고 경쟁하시면 될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도 눈에 보이는 것이면 욕심을 갖거나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관한 것, 말씀에 관한 것, 성령님에 관한 것, 내가 아무리 사모하고 취득해도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것은 다 경쟁의식을 가지고 취하기를 노력하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또 경쟁에는 순수한 은혜만 사모할 것이요, 사람의 어떤 칭찬이나 상급을 넘겨다 보는 경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127.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목록으로

: 교회가 진리 위에 든든히 서고 교인들이 자기의 출석하는 교회를 영적 생활의 유일한 근거지로 삼아서 평생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봉사와 축복을 계승시킨다면 퍽 은혜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교회의 실정이 그렇지 못한 것은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석을 잘 하거나, 봉사를 잘 하다가도 쉽게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니, ① 믿음생활에서 낙오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그의 처음 믿음생활이 외식이었는지, 아니면 연약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치 돌밭에 심겨진 씨앗이 해가 돋을 때 마르는 것처럼(마13:5-6) 믿음의 뿌리(확신)를 주기도 전에 시험에 빠져 낙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에 신앙의 지도자들은 처음 나오는 성도의 신앙정착을 위하여 힘써 지도해야 할 것이며, ② 멀리 이사가는 연고로 교회를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기 저기 많으니까 옮기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대대로 섬기는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은 더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교회를 꾸준히 섬기는 것보다 자신의 사회적 생활에 더 비중을 두기 때문에 직업이나, 교육 목적 등으로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가까운 교회로 옮기는 것은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작정할 것이로되 교회선택에 신중을 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인적관계를 갖고 그곳에 합류하기 위하여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나 친척이 성직자이기 때문에 그가 섬기는 교회로 나가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에 연고있는 성직자가 은혜롭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만 교회를 선택할 때 진리중심으로 하지 않고 인간(연고있는 성직자나 친구등) 중심으로 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은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친정 아버지가 목사라도 신앙적 동질성이 없으면 합류하기 어렵고, 또 강요하여 나오게 하여서도 안될 것입니다. ④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나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한 교회 교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서로 불화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교인들끼리 말과 행실에 부덕을 나타내어 교인을 떨구는 경우가 없도록 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⑤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도자라면 목사, 장로(당회), 또는 기관장 등의 부덕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로 은혜를 끼치지 못하거나, 당회가 권위주의를 앞세워 호응을 받지 못하거나, 기관장 등이 덕스러운 교제를 못하였거나, 불공평한 치리 등으로 불만을 갖고 나가는 경우입니다. 이때에는 서로 주의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적응하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지도자들은 다 자신 때문에 나가는 교인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또 나가는 교인도 이기주의적 정욕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⑥ 은사성격이 맞지 않아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다가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표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성경 중심이요, 칼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생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정통신학을 무시한채 자율적 은사로 활보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비주의, 기복주의, 극단주의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어 놓으면 표준적 교회에서는 적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은혜가 없는 교회로 낙인을 찍고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은사적 취향을 내세우고 표준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므로 바른 생활을 익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⑦ 장로직 등 직분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 이런 경우에 “직분을 맡겨준다”는 보장이 없으면 붙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직분같은 명예적 사명에 붙잡혀서는 안되겠지요. 일단 기복주의나 사사로운 이기주의에 얽매여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면 그 신앙생활은 허공에 떠있다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자제해야 할 일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이유 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으나 좋은 교회, 좋은 교인으로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128. 상전과 종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1) 우선 상전과 종이라는 계층이 성도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성도들 세계나 일반 인류의 세계에 꼭 있게 된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평등하게 통치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하여 구별 통치하시고(살후1:6-9), 노아 당시부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타내셨습니다(창9:25). 예수님도 식민지 백성으로 사셨고, 상전과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며(마10:24),자신이 스승이 되어 제자들을 두셨고(마10:1,28:19), 또 엡6:5-9에서 상전과 종 사이의 윤리규범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스스로가 섬기는 자의 입장을 취하신 것은(막10:45, 요13:14) 인간 개인이 다 겸손하여 다른 이에게 봉사적인 자세를 스스로 취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어떤 경우에 상전(윗사람)과 종(아래사람)이 구별될까요? 이것은 ① 연령차이, ② 지식과 경험상의 차이, ③ 직책관계에서의 계급차이(직장), ④ 통치자와 통치를 받는 자간의 차이(관청), 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입장에서 나타나는 차이 등으로 인간 세계에는 계급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상전과 종은 상호관계에서 어떤 윤리를 지켜야 할까요? ① 성경 엡6:5-9에서 먼저 종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 또 눈가림 식으로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하셨고, 또 상전들도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며 공갈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또 벧전5:3에서 “일을 맡기는 사람은 맡는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그들에게(양무리) 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분명히 계층은 있지만 업무를 시행함에 있어서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행동해야 할 윤리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세계에서는 모든 이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엡6:9)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종된 입장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 사회적 입장에서 상사와 부하간의 윤리를 설문으로 조사(코리아 리서치)한 것을 소개하면 상사는 친구나 형처럼 대해주는 자, 부하를 차별대우하지 않는 자, 칭찬과 비판을 구별하는 자, 실력이 있는 자, 자기주장을 굽힐 줄 아는 자, 소신있게 일하는 자, 공사를 구별하는 자, 부하를 믿어주는 자,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부하의 공을 가로채지 않는 자라 하였고, 부하된 자는 상사의 단점까지 커버해 주는 자, 불평불만을 시원스럽게 털어 놓는 자, 말보다 행동을 우선 하는 자, 실수를 인정하고 상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 상사의 의도를 맞추어 주는 자,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자, 정시에 출근하고, 유모어적 여유가 있으며,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의 분수를 지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번 읽으셔서 좋은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129. 사랑에 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이신 계명의 강령이지만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랑실천에 관한 말씀(마5:44, 고전13:4-7)을 살피면서 한가지 한가지씩 꼭 실천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실천의 종목은 핍박자나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함하여 14종의 실천강령을 말씀하셨으므로 한가지 한가지씩 반성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꼭 할 것은 인내, 온유, 믿음, 소망, 진리로 기뻐함이요, 꼭 하지 말 것은 투기, 자랑, 교만, 무례, 이기주의, 성냄, 악한 생각, 불의입니다. 이같은 할 것과 말 것을 대인관계에서 시행하라는 뜻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므로 만족을 느낀다면 믿음의 큰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130. 결혼을 꼭 믿는 자와 하여야 합니까?목록으로

: 어릴적부터 교회에서 자란 처녀가 “결혼을 꼭 믿는 자와만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서 “안 믿은 상태에서라도 결혼을 하고 믿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결혼은 믿는 자끼리만 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전7:39에서 “주 안에서만 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간접적 의미에서 교훈한 성경은 고후6:14에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하셨고, 창26:34-35,36:2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의 이방 혼인을 마땅치 않게 여긴 사실들로 알 수 있습니다. 그후 출애굽 때에는 신7:3에서 율법으로 이방 혼인을 금지 시켰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교회의 헌법, 예배모범 12장 2조에서 그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또 정치문답조례 165문에서는 무종교자나 천주교인, 우상 숭배자와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신도게요서24:3). 그런데 교회나 성직자마다 “주 안에서 하라”는 해석이 다양합니다. 어떤 목사님이나 당회에서는 엄격하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하고, 또 어떤 경우는 “학습만 받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더 완화하여 믿을 것을 결심하고, 교회 출석하면서 결심서를 제출하면 주 안에서 혼인하는 것으로 인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믿겠다”는 말을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혼사 문제에 시험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시고(사45:11, 창24:12), 너무 욕심내는 마음을 봉사적으로 바꿀 것이며, 신앙의 일치, 사랑의 일치, 가족의 일치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성사시켜야 할 것입니다.


131.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이에 대한 것은 “교회헌법연구”에 수록되었습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① 목사는 당회장권, 제직회장권, 강도(설교)권, 성례권, 축도권이 있고, ② 목회의 책임이 있을 경우에 교인들을 위한 기도, 위로, 말씀연구, 가르침(딤전4:15)외 전도 등 신앙에 관한 지도를 하는 일과, ③ 목사가 목회를 하지 않을 때 신학교수, 군목, 선교사, 지방전도목사, 문서 전도 등도 할 수 있습니다.


132. 목록으로 95년 2월 5일 경향신문 종교란에 “목회자는 성직자가 아니다”라는 글이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 글은 향린 교회 홍근수 목사(타교파인듯 함)의 글인데,

1) 목회자는 성직자나 목자가 아니라 모범적인 평신도일 뿐이라는데 대하여 목회자나 목자는 같은 뜻으로,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는 이상 목회자(목자)라는 호칭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목자(목회자)가 아니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요,

2) 다음에 “성직자가 아니라”는 말에 대하여 그 아니라는 근거를 “모범적 평신도라”하였는데, 이 말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를 전혀 직책상으로 구별하지 않고, 모범적인 형편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아마추어 형편으로만 구별을 한 것입니다. 목사가 평신도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의미는 당연하지만, 과연 직책상 차이가 없는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① 성직자의 개념에 생각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직”이란 말을 “직업”이란 뜻으로 상기하면서, 세속의 직업을 갖지 않고, 성직에만 전담하여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을 성직자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② 또 성직자 되는 일정한 과정이 있으므로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일(성직)을 맡았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목사가 사도의 계승자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도의 특수한 사명과 능력(기독교의 기초수립)을 현실목사가 다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실목사의 원조는 “디모데”에게 주신 직임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딤전4:11-16,5:19-22,딤후2:1-6,4:1-5). 여기에서 목사가 성직자로서 평신도와 구별되야 할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목사는 예수님을 대리하는 입장에서 교회의 대표자가 되고, 성례와 축도를 시행하는 점이 특수한 일이기 때문에 목사가 신학과 행정의 훈련을 받은 평신도보다 나은 모범자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현실교회의 어떤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역자가 목사요, 또 성직자를 받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내세워 군림하거나, 천사같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도 어린양처럼 오셨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요1:29,사53:2) 연약한 입장에 계셨으며, 또 온유, 겸손하셨고, 섬기는 자의 입장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마11:29,막10:45). 따라서 목회자는 권위를 내세우며 군림하는 직임이 아니고,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다스리고, 성경의 권위만을 내세워 일하는 직임입니다.

5) 신문에 게재된 홍근수 목사의 글은 우선 성직자를 정의하는 개념에 다른 점이 있고, 성직자의 사명을 평신도의 사명과 일치, 보편화시킨 점에는 다소 공통점이 있으나, 예수님을 대리하여 평신도들에게 말씀과 성례로 은혜를 전달하고,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대리하여 행사하는 은혜 전달자와 치리자란 점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목회자는 성직자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유감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3. 교회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목록으로

: 교회의 지도자라면 첫째는 신앙과 생활의 지도자인 목사가 있고, 신앙의 지도를 받는 입장에 있는 성도들로서 다른 성도들 앞에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부분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역장이나, 성경교사, 그리고 기관회원을 통솔하는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장로님들이 각 기관의 고문의 직을 맡은 것과 찬양대 대장이나 지휘자도 역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므로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신앙의 지도를 전체적으로 맡은 자와 부분적으로 맡은 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요, 우리의 완전한 선생님(지도자)은 예수님뿐이란 사실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마23:8,10). 어느 지도자든지 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며, 존경받을 만한 모범이 있어야 좋고, 또 동료간에 지도자로서 특이한 면이 없더라도 최소한 인덕(人德)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갖출 사항은 ① 온유, 겸손입니다(민12:3, 마5:5,11:29). 예수님도 자신의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시면서 멍에를 메고 배우라(복종하며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이 없는 지도는 그 상대방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②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성경지식과 기독교 사상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지식은 신앙고백을 바로 하는데 필요하고, 기독교 사상은 초교파적인 혼란한 기독교 운동에서 바른 노선을 따르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모르실 때는 교역자의 지도범위에서 탈선하지 않으면 좋을 것입니다. ③ 대인관계의 원만함을 유지하면서 화목을 조성하는 진실과 덕행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화와 양보와 봉사적인 솔선이 중요하지만,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딛1:7). ④ 반드시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노력하며, 책임을 질줄 알고, 지도의 대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성품이 원만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으며, 화평을 조성할 줄 알고(마5:9), 책임을 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34. 목사는 어디에 예속된 직분입니까?목록으로

: 하나님께 예속되고(출3:10, 사6:8, 딤전6:11), 예수님께 예속된 종이며(갈1:1), 예수님이 파송하신 종인 것입니다(마10:5, 요21:15-17, 계2:1). 그러면 성직자를 파송하는 직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할 때에 사도시대에 사도와 장로회의에서 임직하고(딤전4:14), 파송하였으므로(행8:13,11:22,15:1-5,16:4) 현실교회도 노회(상회)에서 목사를 임직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는 장로의 고용인이나, 교인의 고용인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교회가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그런 모양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성경대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님들은 바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고용인)일뿐 성도의 종은 아니란 사실을, 혹 교인의 헌금으로 목사의 생활비를 주는 것이 마치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주는 것인양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활비를 받고(고전9:8-12, 딤후2:6, 롬16:2) 하나님의 일을 맡아 주님의 양을 돌보는 책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요21:16-17). 필자가 이 답변을 길게 드리는 이유는 혹이라도 어떤 성도가 목회자의 알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에 목사에게 불평을 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래서인 것입니다. 혹 성도들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헌금하는 돈으로 교역자의 생활비를 주기 때문에 교역자가 교인의 고용인인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복음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특히 목회자) 성도를 알뜰하게 살피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요10:1-15,21:16). 그래서 성도의 신앙보호와 믿음성장을 위하여 성도의 부채(비유하는 말)를 갚아주어야 할 후견인처럼 사명을 갖고 노력하는 것입니다(히13:17). 그래서 성도의 아픔의 호소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꼭 아셔야 할 것 두 가지 중 하나는 목회자는 사람(교인)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성도를 보살피는 것인즉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가 상호협력의 처지로 보살핌을 요청하셔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피곤하고 병들 때가 있으며, 자신에 대한 시험도 있는 중, 이것을 스스로 잠재하고 성도 살피는 일을 먼저 도와드린다는 사실입니다.


135. 신령한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일이 더 보람이 있을까요? 목록으로

: 신령한 사명은 세속적인 사명에 반대되는 것으로 세속적인 사명은 인류가 육신적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일, 즉 정치, 과학, 문화 등 인류생활에 유익을 주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명은 영혼을 위하는 믿음에 관한 사명입니다. 이것을 전적으로 시행하는 기관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귀한 줄로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몸에 여러 지체(머리로부터 발끝까지)가 있어서 각기 사명이 다르지만, 다 필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체 중에 머리가 제일 중요하지요. 그러나 머리가 “무엇을 하자”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을지라도 이목구비나 손발이 없으면 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엄지발가락 하나라도 없으면 언덕에 오를 때 지장이 많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인체의 구조가 상부상조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교회의 일도 꼭 그렇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연구, 증언하는 사람이나, 와서 듣는 성도들이나, 또 말씀을 잘 듣도록 시설을 살펴주는 일이 각각 다르지만,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까 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받은 은사에 있어서 더 보람있는 일을 찾는다면 자신이 신령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또 긴밀하게 가까이 나가는 일이 보람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접적인 것보다 직접적인 헌신을 원하시고, 또 물질적인 것보다 심령적인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23:26, 사29:13).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명, 영혼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명이 더 보람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6. 심방은 왜 합니까?목록으로

: 이 질문의 의미는 심방하는 목적을 잘 모르거나 복음사역자의 심방을 중요히, 또는 복되게 여기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깨달음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심방이란 복음사역자가 성도의 집에 방문하여 권면, 교훈, 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성도는 복음사역자의 방문을 천사의 방문처럼 생각하며(창18:1-5) 축복으로 여기고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사역자들이 심방하는 이유는 ① 성도의 생활을 살피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양을 치기 위하여 양과 목장의 일거리를 살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양이 먹고, 자고, 양육받는 일이 목자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히10:24에서는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하셨고, 히3:12-13에서는 성도의 믿음 떨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면 마치 병을 감지하여 병원에 가듯이 교역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미숙한 성도는 찾아가서 일깨우지 않으면 끝내 권면 받는 기회를 갖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심방은 모든 것을 살피는 목적이 있으며, ② 축복의 목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의 전도와 심방의 발걸음에 축복권을 주셨고(마10:12-13), 또 성경에는 지도자의 축복하는 말씀이 있으며(민6:22-27, 왕상8:54-55, 엡6:24, 히13:20-21), 장로들의 축복기도의 말씀도 있습니다(약5:14). ③ 개별적인 교육이나 권면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공예배를 통한 보편적 교육이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지만, 특수한 문제를 당한 일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권면할때 개별적으로 지도해야 할 경우가 있고, 또 개별적 교훈을 받는 성도는 더 의미있게 받습니다. ④ 친교의 목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믿음의 지도자요, 영적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복을 주실 때 그가 섬기는 교회의 복음사역자의 입을 통하고, 기도를 통하여 주시며, 또 그의 손을 통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서(왕상17:11-16) 이런 축복들을 복음사역자의 심방과 관련하여 은혜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137. 성직자와 성직의 직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목록으로

: 1) 성도가 복음적 사명을 가졌다 하여 다 성직자는 아닙니다. 평신도도 복음적 사명을 가질 수 있고, 또 현재 교회의 직분자나 전도사, 강도사, 장로도 다 복음적 사명을 갖고 있지만 그분들을 성직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성직자는 목사뿐입니다. 또 목사라도 성직에 임하고 있지 않으면 성직자가 되지 못합니다. 다 같은 복음적 사명을 가졌는데 왜 목사만 성직자라고 하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대행하는 자격이 있어야 하고, 또 전폭적으로 복음적 사명만 이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평신도나 교회의 직분자들이 복음적 사명을 많이 이행하여도 예수님을 대리하여 성례나 축도,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는 특권이 없으면 성직자라 할 수 없고, 또 세상직업에 관한 일을 겸하여 성직을 행한다면 역시 성직이행에 완전치 못한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성직의 직종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반드시 목회를 해야만 성직을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를 살피는 목회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더욱 중요하며, 또 목회자에게 목회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장을 보아오는 사람, 요리를 만드는 사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각각 따로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헌법에는 목사의 종류가 많은 중 ① 목회를 위한 위임목사, 부목사가 있고, ② 교육을 위한 교육목사가 있으며, ③ 전도를 위한 전도목사, 군종 목사, 선교사 등이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교인을 지도하는 목회도 필요하지만 전국교회의 교인들을 상대로 좋은 기독교서적을 출판하여 공급하는 사명도 현실적인 형편에 꼭 필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138. 어떤 성직자가 훌륭한 성직자입니까?목록으로

: 우선 이 글을 쓰는 자신도 성직자이지만 부끄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현실교회에 목사는 많지만 적임자는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을 초빙하는 광고를 냈는데 80통의 이력서가 들어와서 그중 한 분을 선택한 예가 있고, 또 어떤 700명쯤 나오는 교회는 40통의 이력서가 들어왔으나 (박사 학위자 많음) 목사의 품위와 자질(인격)문제로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사찰(관리인)은 보수와 생활조건을 따지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목사는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않는 상태에서 지원자가 많으니 좋은 현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좋은 성직자를 선택하는 표준을 말씀드린다면 ① 건전한 교파에서 정규절차를 밟아 목사된 분, ② 배움과 연단의 기간이 오랜 분(불건전한 교파에서 짧은 기간 내에 쉽게 목사되는 경우도 있음), ③ 목회를 위한 다양한 지식이 많을수록 좋고, ④ 원만한 인격자이어야 하는데 겸손과 사랑이 풍부하고 현실정욕 및 이기심이 없는 것과 온유한 성품 등이 포함되는 것이며, ⑤ 준법정신과 강한 지도력(사람을 순종시키는 힘)이 있어야 하며, ⑥ 설교와 교육과 행정을 잘 하여야 하며, ⑦ 교인을 잘 살피고 상회의 일에 협력하며, ⑧ 공사를 분별하며, 고유권한이 아닌 것은 민주적으로 다스려야 하며, ⑨ 젊은 나이에 건강하여야 하고, ⑩ 가족이 단출한 것도 좋은 목회자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단출한 가족이 좋다는 뜻은 가족이 많은 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요, 그것은 오히려 좋은 것이로되 사생활에 적게 얽매인다는 의미에서 좋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열 가지를 다 구비한 분이 희귀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드러진 결격사유가 없으면 일부의 부족을 이해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139. 어떤 목회방법이 가장 좋습니까?목록으로

: 목회방법에는 받은 은사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기를 두는 사람이 포를 잘 써서 이기는 경우, 또는 상이나 졸이나 차를 써서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회도 설교로 주도하는 경우, 기도로 주도하는 경우, 친교로 하는 경우, 사회사업 식으로 하는 경우, 여러 가지를 많이 잘 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하던지 은헤를 끼치고(합당한 방법이 아니면 은혜 주시지 않을 것임) 만족과 감사를 느끼게 하며 믿음과 교회를 잘 성장시키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외식과 작태와 과장과 공갈같은 것이 나타나면 안될 것이요, 또 진리보다 현실적인 것들을 앞세워도 안될 것이요, 어디까지나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성실성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양적, 질적으로 성장시킨 목회이면 그 방법이 좋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합리적 방법(부덕, 불법, 불건전에 속하는 일)이 표출되지 않게 하려면 결국 표준적 방법을 따라야 하며 만인이 공감하는 표준적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표준적 방법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소 있지만 표준적 방법에는 거의 부작용이 없습니다. 편벽된 방법이나 감정주의로 나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는 방법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나 목회방법까지 표준적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 정도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생활일 것입니다.


140. 교역자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목록으로

: 교역자는 성도의 믿음생활을 위하여 교회를 근거로 일하는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담임목사,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가 다 교역자입니다. 또 교역자와 비슷한 말로 목회자, 성직자란 말이 있는데, 이 두 용어는 반드시 목사를 칭하는 말입니다. 목사는 목회를 하고 목사 아닌 교역자는 교역을 한다고 말을 해야 합리적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나 교역자들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못갖는 경우가 있는데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교회 안에서 일하는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의 할 일을 보좌하는 사역자들임을 아십시오. 그러면 성도가 교역자를 자기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할까요?

1)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자라고 생각하십시오. 특히 축복과 성례를 시행하는 목사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마11:10에서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하셨고, 고후5:20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하셨으니, 목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역자인 것입니다.

2) 교역자는 성도의 영혼의 목자라고 생각하십시오. 벧전2:25에서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이신 예수님”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의 목자가 가족의 부양자라면 영혼의 목자는 예수님이요, 그의 사역자들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성경말씀이요, 영혼의 안식처는 교회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천주교도들은 영혼의 목자를 “신부님”으로 호칭합니다. 신부님은 하나님 아버지란 뜻입니다. 반드시 영혼의 목자를 육신의 아버지보다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믿고 쓰시는 사역자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쓰실 때 80년간 연단을 시키신 후에 쓰셨고(출3:10-15), 여호수아를 쓰실 때도 “내가 네게 명한 것이라”하셨으며(수1:9), 이사야를 쓰실 때도 성령의 불로 입술을 짖으신 후에 사명을 주셨으며(사6:1-8) 바울사도나 베드로에게도 상당한 확신을 주신 다음에 쓰셨기 때문입니다(요21:15, 행9:1-18).

4) 예수님께서 자기 사역자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다 아시는 줄로 믿으십시오. 삼상2:12-34에 보시면 엘리 제사장의 잘못과 그 아들들의 잘못을 아시고 벌하신 사실이 기록되었고, 가룟 유다도 그런 일종이며, 계2:2에서는 에베소 교회 사자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밝히신 후 칭찬과 책망을 하신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역자의 일하는 모습을 분명히 감찰하시고 또 처음 사랑을 잃은 것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 뿐만 아니라 서머나, 버가모, 사데 등 일곱 교회의 사역자 전부에 해당되었습니다(계2:8,12).

5) 하나님은 사역자를 통하여 진리를 증언하시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전달하게 하시는 줄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혜를 직접 주셨고(출33:11),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전달하였습니다(출14:21) 또 히스기야 왕에게 은혜를 전달한 선지자는 이사야였고(왕하20:4-7), 사울이 개종할 때도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 역사하셨으며, 사울에게 사명의 복을 전달하실 때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주셨습니다(행9:3,12). 마10:12에서 제자들에게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뚝배기의 장맛처럼 사역자는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손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복을 전달하시는 줄로 믿고 사모하십시오.

6) 교역자를 선대하고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선대하고 섬기는 것이요, 자신과 후손에게 복이 되는 줄로 믿으십시오. 마10:40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역자를 섭섭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요,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왕하4:8-16,32-37에서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주밀하게 대접하고 없었던 아들을 선물로 받았으며, 그 후에 그 아들이 불시에 죽음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하여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수넴 여인이 선지자를 섬기고 자신과 그 후손이 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7) 교역자를 잘 섬기는 것은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고 격려하며 순종하고 받드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① 고전16:17-18에 보시면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성도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므로 바울사도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하셨고, 딤후1:16에서는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유쾌하게 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유쾌해져야만 건설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격려가 필요합니다. 못하는 것만 지적하면 점점 더 피곤해져서 쓰러지게 됩니다. 격려란 것은 더 잘하도록 용기를 넣어주는 것인데 이것은 지적이나 책망과 같은 것이 아니요, 사랑의 후원인 것입니다. ③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역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줄을 믿고 자기의 의견만 못해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물을 던질 때 자기의 의견에는 고기가 안 잡힐 것을 알고도 순종을 한 것입니다(눅5:5). ④ 받드는 것입니다. 기도를 받들고, 말씀연구를 받들며, 심방과 전도를 받들고, 명예를 받들며, 물질로 받들고, 모든 면에 도움이 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 교역자에 대한 일곱 가지 수칙을 잘 깨닫고 잘 이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141. 복음사역자의 무장에 대하여.목록으로

: 엡6:13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전신갑주”란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는 무기를 뜻합니다. 복음사역자가 꼭 가져야 할 무기는,

1) 말씀지식의 통달이요,

2) 말씀과 기도생활에 이끌림이요,

3) 현세욕의 취미가 없어지므로 이를 떠남이요,

4)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친교함이요,

5) 오직 신령한 은혜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무장을 잘 하려면 현실적 소욕이나 허탄한 것들에게 뜻을 돌릴 마음과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복음사역자는 말씀지식의 보충과 묵상 때문에 다른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자유시간을 갖는 만큼, 사명에 소홀히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시1:1-3,119:97,165, 엡1:17, 벧전1:8).

142. 성도와 복음 사역자들의 명예욕에 대하여.목록으로

: 모든 사람들이 강한 물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명예욕도 대단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성도나 복음사역자들 세계에서도 명예욕을 멀리 떠났거나, 주님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는 성도를 발견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명예와 칭찬 받는 일을 떠나서 말없이 어려운 짐을 지는 성도가 희귀하지요. 예수님은 들레지 않으셨고(마12:19), 세례요한은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요3:30) 하셨으며,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딤전1:15, 고전15:9) 하셨고, 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갈5:24) 하셨습니다. 또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것과(마16:24),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한다면(롬12:10), 다른 사람 위에 오르려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어린아이 같은 자라”고 하셨지요(마18:1-4). 그런데도 많은 성직자들이 명예욕에 사로잡혀 감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성도의 덕에 위배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회장이나 총회장도 하려고 노력하거나 부탁하여 하지 않도록 정신상태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나는 부족합니다. 그런 중한 책임을 지기에 미약한 존재입니다”하고 사양하지 못합니까? 그래도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 할 때는 겸손히 순종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 현실 기독교의 개혁은 성직자나 성도들의 겸손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아니면 잘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멀리 사라져 있습니까 ? 그런 마음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143. 성직자들의 개혁의 과제들이 있습니까 ? 목록으로

: 1) 성직자들은 성경 연구와 기도와 가르침에 착념하여야 하겠지요. 물론 휴식, 운동, 교회 정치, 교인들과의 교제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모든 책임을 적당하게 감당하되, 정신과 생활은 항상 말씀 쪽에 기울어진 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교회를 구멍 가게로, 또는 기업체로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 대책소라는 뜻이겠지요. 물론 사명으로 헌신하는 사역도 많겠지요. 필자가 교육 전도사님을 모시려고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사례를 묻기로, “40만원밖에 못 드린다” 하였더니, “요즈음 40만원 받고 갈 사람이 어디 있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대화로 주고 받은 말이지만, 무보수 헌신자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3) 좋은 목적에 올바른 방법만을 시도하려면 인간적 방법이나 외식을 제하고, 말씀의 권위를 높여서, 경건한 방법만 시도하여야 하겠지요.

4) 물량주의를 근절하는 문제와 이웃 사랑과 양보 정신, 권위주의 배격, 명예욕, 현세욕 등이 다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물질과 행사의 힘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아닌지요(행3:6).


144.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1) 교회는 기본 사명이 있고, 또 성직자의 받은 은사에 따른 사명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본 사명은 성경에 대한 보존, 해석, 교육, 전파의 사명과 성례 집행의 사명과 성도의 교제 및 사랑 실천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교회와 성직자가 다 공감대를 형성하여 잘하는 줄 압니다.

2) 그런데 성직자마다 받은 은사가 달라서 설교로 목회의 비중을 차지하는 목사, 기도를 많이 힘쓰는 목사, 성도의 친교 및 대인 관계에 노력하는 목사, 또는 교수 타입의 학자같은 목사, 신비주의를 선호하는 목사 등 다양한 은사 활동이 있습니다. 이때에 교회는 시무하는 성직자의 은사 소질에 공감대를 형성하여 그 은사 소질에 협력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알고 협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필자는 일반적 목회를 하면서 성경 강해서 등 교육 자료 집필하는 은사에 끌려서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나(빌2:16) 교회적으로 볼 때 좋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밝히고 문서로 증거하는 사역은 특별한 은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이 사역과 은사도 교회의 사명에 속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사의 가치는 목회적 은사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시무하는 성직자의 받은 은사의 소질을 공감하여 받고, 협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무 교역자를 신뢰하고 사모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고 사모할 수 있는 교역자를 만나서 따르므로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는 오직 가족적이고 사랑하는 관계를 가져야만 합니다.


145. 극단적 휴거론이란 무슨 뜻입니까? 목록으로

: 어떤 기독교 단체가 예수님의 재림의 일시를 말하면서 그날, 그 시간에 주님을 맞이한다고 하다가 허탈감에 빠져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신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약 7,000명의 사람들이 “금년 부활절 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서 일반생활을 다 폐하고, 재림주만 기다린다고 합니다. 지난주일 저녁 뉴스에 강림교회 김영록 목사는 4월 16일 밤(?) 2시-3시 사이에 주님이 꼭(한국으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날짜를 짚으면서 말세의식을 고조하는 것을 극단적 휴거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의 휴거란 뜻은 “들려 올라간다”는 말로 그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접과 동시에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을 희망한다는 말입니다(살전4:16-17). 그러면 이 극단적 휴거론자들의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할 때 마24:36에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며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하셨고, 또 “노아 홍수 때에 멸망이 오듯이 인자의 임함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마24:38-39). 여기에 대하여 극단적 휴거론자들은 자기들은 성경을 깨달았기 때문에 재림날짜를 알고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알고 영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재림날짜(말세의 때)를 감추신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깨어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마24:44). 이것을 안 사도들은 초대 교회 당시에도 깨어 이었고, 사모하며 기다린다고 한 것입니다(계1:3,22:20).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장소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적이어야 하며(살전4:16, 계1:7), 또 성도가 눈을 뜨고 기다리지 않아도 믿음을 간직한 성도는 다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팔소리로 오신다”는 뜻이 모든 사람을 다 일깨우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극단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고, 항상 믿음과 충성의 자세를 지키는 성도이면 언제 주님이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6. 세월을 아낌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말씀해 주십시오. 목록으로

: 엡5:15-16에 보시면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셨고, 롬12:11에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셨으며, 제4계명에서도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세월(시간)을 아낌에 대한 지식으로,

1) 왜 시간을 아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심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시간은 생명과 꼭같이 소중하므로 생명을 귀히 여김처럼 시간의 선용을 힘써야 할 것이요, ② 우리의 시간이 생명과 함께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며, ③ 세상이 악하여 잘못된 생활에 많은 시간을 뺏기기 때문입니다.

2) 인생의 목적과 관련하여 인생에게 주신 시간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목적 성취를 위한 기회요, 자원이며, 달란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한 줄 압니다. 성경에 보면 하루 단위로 사는 방법이 있고(마6:34), 한 주간 단위로 사는 방법이 있으며(출20:9-10, 고전16:2), 또 일평생 단위로 사는 방법이 있고(시90:10), 영원히 사는 것을 목표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시22:26,23:6). 이 경우에 하루 단위로 매일 매일을 충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이요, 멀리 내다 보면서 늦게 거둘 작정으로 씨를 뿌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구라파 사람들은 집을 짓되 아들 손자대로 물려가면서 오랜 세월에 집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목표를 짧게 정할수록 소득이 눈에 보일 것이고, 목표를 멀리 정할수록 그 소득이 당대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나, 결국 수고의 공력은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어떻게 수고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 될까요? ① 업무능률에 지장이 없을 만큼 휴식을 최대한 줄이면서 살아야 할 것이요, ② 자기 달란트(가장 잘 하는 일)에 따라 일하되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많이 돌아갈 일을 앞세워 행할 것이며, ③ 다른 사람과 합력하는 생활에서 다른 이의 시간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시간을 안 주시면서 사명을 이행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시므로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사명상 책임이 없습니다(고후8:12). 문제는 자신이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람직한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자기의 시간을 썼다면 그는 자기의 사명을 다한 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하나님께 가장 많은 영광을 돌리는 일에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7. 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은 성도인데 죄의식을 느끼는 고민으로 상담함에 대하여. 목록으로

: 많은 성도, 또는 직분자라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의 성질에 있어서 자기만 알고 고민하는 죄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알려지는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잘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회개를 요구하시고, 참아주시는 동안 속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속히 회개할 전망이 있으면 교회직분을 그대로 봉행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속히 회개할 힘이 없고, 직분까지 갖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면 교역자가 근심하지 않도록 사정을 알리고, 직분을 반납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죄를 범하여 이웃사람들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였을 때는 직분을 사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가혹하게 미워하며, 척결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 은혜 받는데 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발각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회개하는데도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148. 교회 헌법에 대한 개혁의 과제가 있습니까 ? 목록으로

: 필자는 타교파의 헌법을 참고한 바가 없고, 필자가 예속한 장로교 합동측 헌법을 30년 이상 사용하며 연구했을 뿐입니다. 필자가 출판한 <교회헌법연구> 말미에 “헌법 수정에 대한 필자의 의견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요즈음 총회적으로 헌법에 대한 대폭적인 개편, 정리 작업이 진행 중이며, 거기에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헌법에 합리적인 면이 참 많습니다. 문제는 그대로 지키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자기의 신분 보장에 불리하면 안 지키는 경향이 있으니, 이런 것을 단호하게 척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당회장 목사는 한 사람이요, 장로는 여러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인 당회에서 장로가 일치하면 모든 행정을 장로 임의로 할 수 있게된 점이 큰 문제입니다. 행정에도 인사 문제나 징계 문제가 따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해 관계만 따지고 사랑을 생각지 않는 행정이나 인사 문제를 목사가 막을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변화되지 못한 치리회원들이 문제입니다.


149. 법적 송사에 대한 합리적 견해는 무엇입니까 ? 목록으로

: 성도간의 송사는 안할수록 좋습니다. 우선 사랑으로 화해하고 해결하셔야지요(마5:25). 그러나 화해될 만큼 양보하지 못하여 송사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교회적 재판을 구할 수 있습니다(마18:15-18). 이 경우 믿음과 사랑을 갖고 교회 판결에 복종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총회) 재판 과정에서 불공정한 사례가 야기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들이지요. 그래서 교회적 판결이 불가능할 때는 일반 법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롬13:1-4,눅18:1-5). 그러나 성도가 선악의 판별을 못하여 믿지 않는 재판관에게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6:1-7). 이런 부끄러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최대한 인내하고, 양보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불법이 죄임을 모르는 자는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재산을 달라 하면 공정하게 나누십시오.


150. 교회가 많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 목록으로

: 교회가 많아진 원인은 많은 교파에서 교역자를 많이 생산했기 때문입니다. 도심지에는 어느 곳이나 한 눈에 들어오는 십자가가 5-8개나 됩니다. 교역자 생산도 잘못이 아니며, 교회당이 많은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단 몇 성도가 한 교회를 이루었다 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답게 사는 것이 문제겠지요. 요즈음은 기독교 문화가 큰 교회 중심도 있지만 사역자와 뜻맞는 성도들끼리 모이는 추세로 변하였기 때문에 많은 작은 교회들이 유지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참신한 성도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권고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교인 쟁탈을 의도적으로 하면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