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1938년 3월 25일(음 2월 24일생)

지 영 근

 

서 론

 

나는 이 회고록 서문을 세 번째 교정하였다. 1998년 여름에 회고록 초안을 작성하고 서문까지 기록하여 놓았다가 99년 12월에 교정을 시작하면서 두 번 세 번 바꾸어 기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남기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 퍽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또 이론적 정리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서문도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이 흐려지기 전에 속히 기록하는 것이 급한 실정이라 우선 생각나는 대로 또 추억에 남은 것을 역사적으로 남기는 것만 나의 할 일이다. 그리고 99년도까지의 회고록을 쓰고 21세기부터는 몇 년을 더 살지 모르나 일기장 형식으로 기록을 남겨 놓았다가 세상 떠날 직전에 기회가 있으면 남은 것을 정리할 생각이다.

나의 나이는 지금 62세이다. 수년 전부터 회고록을 기록하려고 하였지만 목회와 기독교 문서 집필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미루어 오다가 61세 된 여름에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어떻게 보면 좀 일찍 기록한 감도 든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목회와 집필을 하지만 나의 허약 체질로 보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사람의 죽음은 졸지에 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것 같고, 음성도 아직 쟁쟁하다. 그러나 요즈음 혈압이 170까지 올라서 약을 먹고 140으로 낮추었으며 치아를 개선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들기가 어렵다. 그런 중 계속하여 신앙 문서를 집필한다고 정신을 쓰다 보니 항상 피로를 느낀다. 사람의 이름이나 전문 용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둔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나 죽음에 대한 준비도 되도록 미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쉽게 이루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회고록은 유명한 사람들이 남기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나처럼 유명하지 않게 살아 온 사람도 무덤 대신 회고록을 남기는 것을 인생의 문화로 정착시켰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가난한 환경과 술로 세월을 보내며 살림살이에 거의 무능하셨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외가의 도움과 어머니의 고생하신 도움으로 30세에 목사가 되어 평범한 목회 생활을 한 인생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각박한 환경에서 더 많은 고생을 하고 성공한 분들이 많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30여년 신앙생활과 기독교 성직자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섭리”를 깨달은 바가 있다. 이 회고록에서 한 가지 유익을 얻으려 한다면 바로 “하나님이 한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에 대한 섭리를 깨닫고 각자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기회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부정적 환경에 접했을 때마다 그 환경을 교훈으로 삼고 부정적 환경을 역으로 시행하여 나쁜 일을 안 하려는 식으로 노력하였다. 어떤 사람은 좋은 교육적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부정적 환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볼 때 후천적 교육은 미흡할 뿐이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속담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처음부터 건설적인 생활만 하려고 힘쓴다는 뜻이다.

친족을 기억함에 대하여 먼저 친족으로는 내가 2대 독자이기 때문에 사촌 형제가 없고 5촌 아제와 6촌이 있을 뿐이다. 3형제 할아버지 중 내가 큰 할아버지 계열이고, 둘째 할아버지 환용(족보에는 寰鉉)의 아드님 榮源(족보에는 榮求) 아저씨도 몇 달 전(1999년도)에 별세하셨고, 6촌 동생 榮一, 榮吉, 榮海(족보에는 一根, 吉根, 海根으로 기록됨) 또 자매로는 金玉, 金禮가 있으니 이 가족의 근거처는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이다. 그 다음 셋째 할아버지 又鎔(족보에는 又鉉)의 자녀들이 계시니 中源(中求), 宇源(宇求), 5촌 아저씨와 그 자매 중옥, 중인, 부영 아주머니가 계시다. 이 분들의 거주 근거지는 강화읍 관청리(미공사)이나 주소는 유동적이다.

그 다음에는 증조부님의 동생의 계열 족보상의 36세 善周(나의 증조부이신 範周할아버님의 동생)의 계열로 昌源(昌求), 光源(光求), 崙源(崙求), 在源(在求)씨가 계시니 나에게는 7촌 아저씨이다. 또 그의 사촌 春源(春求), 昊源(昊求), 辰源(辰求) 아저씨들도 계시다. 이 분들의 거주 근거지는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흥천)이다.

그 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나의 세 분 자매 榮愛(누님, 별세), 榮嬉, 榮二의 가족과 처가의 두 처남 金英洙, 金春洙 형제분이 대구와 김천에 거주하신다.

이상 친족과 친척에 대하여 잘 기억하고 서로 인사하고 지내야 하며 빈번한 친교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뿌리에 대하여 : 나의 뿌리는 충주 지씨의 선조 경(鏡)이시고, 나는 그 분의 39대손이다. 숭정(崇禎) 3년(연도를 알 수 없음)에 발행된 옛날 족보에 혈통의 계열이 잘 나타나 있으나 33세조 “聖洙”로 끝난 후 연계 족보가 없어서 그 후손 계열을 알 수 없었던 중 내가 1978년도에 대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 곳의 족친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그때에 족친 총회에서 대동보(족보)를 편찬한다고 하여 계열을 잇는 수단(收單:족보에 수록할 이름들)을 제출할 때 다행하게도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에 거주하시는 昌源(6촌 아저씨)댁과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에 거주하시는 興雲(30세조 景灝, 景源, 형제분 중 동생 景源 계열로 37대손임)댁에 家乘(요약된 족보)이 있어서 33세조 聖洙 다음이 弘逑(34세조)이요, 그 다음이 商駿(35세)임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이 나의 증조부 範周(36세조)이요, 조부 世鎔(37세조), 부 孝源(38대 족보에는 孝求임)으로 계열을 잇게 되었고, 아울러 같은 해에 막내아들 大煥을 제외한 아이들의 이름을 1978년 5월에 출판된 대동보에 등재하게 되었다. 앞으로 몇 년 후에 증보되는 족보가 또 출판된다 하여 “大煥”이 까지 收單을 제출하였고, 또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묘소가 강화읍 용정리 1072-7(본적 및 출생지)에 이장한 내용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이다.

나는 선조의 묘역을 관리하는 문제로 현재까지 그 일을 감당하고 있으나 앞으로 후손들이 더 잘 하기를 바라지만 정부의 묘역 간소화 시책도 있고, 또 후손들이 관리하기 좋도록 교통 좋은 곳에 아담하게 정리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선대부터 묘역 4필지(강화읍 용정리 1072, 644㎡, 강화군 갑곳리 787-2, 1267㎡, 동 878-10, 1123㎡, 동 878-4, 1434㎡)와 그 주변의 토지를 갖고 있었으나 가재가 줄고 어렵게 되자 6.25 전쟁이 있던 1950년 전후에 묘역 주변의 땅을 팔아 없앴으므로 현재는 위에 기재한 묘역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네 묘역 중 두 필지는(878-2, 878-4) 비석이나 족보에 명시한 바가 없기 때문에 누구의 묘인지 모르는 실정이므로 묘역을 정리할 때는 파서 화장하여 없애려고 한다. 그 다음의 한 필지(878-10)는 28대조(필자는 39대임) 경징(鏡澄) 조부님 외 몇 분의 묘소인데 족보에 의하면 이 어른이 1705년(乙酉년)에 별세하셨고, 또 그 분의 아드님 29대조 구흥(છƒ興) 조부님은 1776년(丙申년)에 별세하셨으며 또 강화읍으로 들어가는 대로 옆에 있는 묘소는(용정리 1072-7) 30대조 경호(景灝) 조부님의 분묘인데 그 분은 1835년(乙未년)에 돌아가셨으니 이 묘역들의 역사는 약 300년 전부터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역 관리에 선조님들의 수고도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벌초에 대하여 : 아버님 시대에는 친구분들에게 사례비를 드리고 매년 초가을에 벌초를 하셨고, 그때에는 4~5인의 인부가 낫으로 풀을 베었다. 그 후 나의 25세 때인 1963년(음) 5월 27일에 부친이 별세하신 후에는 내가 벌초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는 내가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목회하던 시절이라 벌초할 때에 직접 와서 하지 못하고 먼저 벌초를 해 주셨던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그대로 부탁한 후 벌초 끝난 다음에 방문하여 사례비만 드리다가 1985년에 나의 목회 임지를 따라 대구에서 성남으로 이거하게 되었고, 그 후 몇 년(2~3년)간 종전 방법대로 시행하다가 1989년쯤부터 어차피 인건비를 드려서 벌초할 바에는 강화의 종친들께 부탁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의뢰한바 호응해 주시므로 점심을 대접하고 사회적 인건비 수준에 견주어 사례를 드리면서 1999년까지 약 10년간 시행해 왔다. 이 벌초에 수고하신 분은 불은면 두운리 흥운(18촌 조부)와 春源, 崙源(7촌) 아저씨였다. 그리고 근년부터는 모터 제초기를 사용하므로 많은 수고를 덜게 되었다. 1998년 벌초 때 中源(5촌)아저씨가 점심 식사를 잘 대접한 일이 있었고, 1999년도에는 흥운 조부 댁에서 역시 점심 대접을 잘 해 주셨다. 그런데 약 10년 쯤 족친들이 벌초 수고를 하고 인건비 사례를 받는 것을 거절하였으나 나는 선대부터 큰 집에서 해 오던 것이므로 책임을 감당한 것인데 계속 그런 방법으로 시행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라 하여 2000년도 부터는 별다른 방도를 연구해 보시자 하였는데 현재 연구 중에 있다. 앞으로는 후손들이 크게 성공하여 묘역 관리를 잘 하기를 바라지만 이 묘역보존이 후손들의 삶의 생산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간소화 시킬 것을 나는 구상한다. 그 구상 방법은 본래의 모역 자리의 한 부분을 쓰던지 아니면 다른 장소를 쓰던지 차도가 인접한 곳에 약 50평 정도의 푸른 잔디밭을 공원처럼 깨끗하게 조성하고 유골을 이장한 후 비석을 (옮겨) 세우되 돌아가신 분의 순위대로 유골만 1㎡ 간격으로 매장하는 것을 계획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1년에 한번쯤 후손들이 그 곳에 가서 야외 식사를 하면서 두 시간 정도 낫으로 풀을 깎으면 충분하도록 만들 생각이다. 유골(반드시 화장할 것) 1구당 1㎡의 자리를 잡는다면 50평 넓이면 200년도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조상의 묘소를 크게 하여 후손들의 명분을 세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외식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이 일이 2~3년 내에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혹이라도 내가 묘역 정리를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면 비석이 있는 두 묘역(용정리 1072-7)은 덕유 소유로 하고 갑곳리 878-2묘역은 성유 소유로, 갑곳리 878-4묘역은 대환의 소유로 각각 상속하게 할 것을 지시해둔다. 이 경우에 두 필지를 받은 덕유가 묘역 정리를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여야 할 것이다.

 

1998. 5. 4. 부산 동삼동에서 초안 작성하고

2000. 1. 1. 성남에서 교정함.

지 영 근.

목 차

 

서 론3

 

목 차7

 

1. 나의 출생9

2. 나의 어린 시절10

3. 나의 초등학교 시절12

4. 나의 중학교 입학과 6.25 동란14

5. 나의 고등학교 시절17

6. 청년 시절18

7. 은혜 받은 동기19

8. 아버지를 변화시킴22

9. 나의 군 생활23

10. 부산 신학교(총신 분교) 1년 시절30

11. 부산 신학교(총신 분교) 2년 시절35

12. 부산 신학교(총신 분교) 3년 시절37

13. 결혼과 결혼 초기의 풍파38

14. 제2 영도 교회를 떠남42

15. 상주 죽암 교회에서44

16. 의성 빙계 교회에서46

17. 동곡 교회에서 3년 반의 생활48

18. 구읍 교회에서의 생활53

19. 남일 교회에서의 14년 생활55

20. 한남 교회의 8년 반의 생활59

성지 순례 일기61

그 땅을 행하라70

21. 자유로운 생활77

22. 교회 문제와 관련한 법률적 경험81

23. 99년 10월부터 12월까지83

24. 가족들에 대한 평가와 관심(99. 12. 31.)84

25. 2000년을 맞이함(2003. 3. 14. 기록)99

26. 묘역을 이전한 사실100

27. 고서와 비문의 의미를 터득함101

28. 2002년도에 있은 일104

29. 2003년에 있은 일105

30. 32代, 33代 직계 조상 묘를 폐장함109

31.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출생일과 별세일111

32. 새로운 깨달음111

33. 2003년을 마무리하는 일기112

34. 2004년에 시작한 것112

35. 집필에 대한 진도113

36. 기적체험(1)113

37. 기적체험(2)114

38. 유라의 결혼114

39. 2004년 12월 31일115

40. 덕유의 결혼116

41. 2005년에 있은 일117

42. 족보와 관련된 이야기118

43. 벌초120

44. 2006년 8월 18일 오후121

45. 가족에 관계된 글123

46. 원준이에게 하고 싶은 말125

47. 2007년도를 회고함126

48. 정년 은퇴를 회고함127

49. 2008년 8월 7일 오전128

50. 2008년 9월 9일 오후129

51. 2008년 10월 2일130

52. 2008년 11월 7일130

53. 2009년 1월 6일 기도문130

1. 나의 출생

 

1) 나는 1938년 3월 25일(음 2월 24일) 오후 3시경 강화군 강화면 용정리 1072번지에서 아버지 지효원(池孝源)과 어머니 김간난(金干蘭)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장소는 현재 강화대교에서 500m쯤 오른쪽 신안택시 입구에 해당하고 그 시대는 광복 7년 전으로 대동아 전쟁이 계속 진행되는 시기였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김해 김씨로 4형제 분중 둘째 아드님이시고 나의 어머니와 9년 연하이신 이모님만 계셨다. 외삼촌이 안 계시므로 큰 외조부님의 둘째 아드님을 양자로 모셨고, 이모님의 자녀들은(나의 이종사촌)은 김근식, 김근무, 김근석, 김양숙, 김미숙으로 이 분들의 생활 근거지는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이다. 그리고 큰 외할아버지의 손자는 김은수, 김진수 등이며 외가의 본적지인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거주하고 외할아버지의 동생도 두 분이 계신데 먼저 동생 되는 할아버지의 아드님이 네 분인데 큰 외5촌 김종태씨와 작은 5촌 김종식씨가 외가의 본적지에 거주하시고 중간의 외5촌 김종안과 김종수는 6.25사변이 나자 의용군에 자원하여 이북으로 가신 후 아직 소식을 모른다. 도 외할아버지의 둘째 동생 되시는 할아버지의 자손들도 인천에 거주하신다. 아버지가 외아드님이신 중에 아들로 태어나서 퍽 귀하고 대견한 존재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2) 여기에서 어머니의 친정 즉 나의 외가에 대하여 남길 말이 있다. 어머니의 친정은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이며 어머니는 외조부 김성배(金聖培)님과 외조모 주갑녀(朱甲女)님의 두 따님 중 큰 따님이시다. 아버지는 21세, 어머니는 17세에 혼인하셨다고 하며 중매는 어머니의 큰 어머님이 하셨고, 그 분은 나의 할머니의 언니의 따님이시다. 그러니까 조카딸을 이모의 며느리로 소개한 것이다. 집안이 가난하자 가끔 중매인에게 원망을 표하는 말을 하셨다.

3) 어머니는 시골에서 자라시면서 보통학교(지금 초등학교)를 2년까지 다니셨기 때문에 한글을 깨우치셨는데 그 당시에는 보통학교 다니는 사람이 희귀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친정에서 자라셨지만 허리띠를 조인 일이 없었으나 지씨 집으로 시집오신 후부터 양식 걱정하는 어려움을 함께 당하셨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잊을 길이 없어 이 한마디라도 남기는 것이다.

 

2. 나의 어린 시절

 

1) 내가 두 살 되었을 때 왼쪽 무릎 위에 심한 종기가 나서 가족들을 안타깝게 한 일이 있었고(지금도 그 흔적이 있음) 또 그 때에 할아버지가 별세하셨다고 한다. 내가 41세쯤 되었을 때 공동묘지에 매장된 할아버지의 무덤을 판 후 완벽하게 보존된 할아버지의 유골을 할머니,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본적지인 용정리 1072-2 묘역에 이장한 일이 있고, 또 두 살 때 외가에 가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함께 찍은 최초의 사진이 지금도 있다.

2) 또 5세때 천자문 책을 갖고 글방에 다닌 기억이 있으며 천자문책 글자 밑에 한글로 토를 달았지만 한글을 읽지 못하였고, 하루 학습에 두 줄(8글자)만 읽을 줄 알면 되는데 그것을 읽지 못하여 안 선생님이란 훈장이 얕은 책상 위에 세운 후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하시고 회초리로 두 대씩 때려 매 자국이 나도록 하였다. 너무 아프기도 하고 또 집에 가서 어른들이 종아리의 매 자국을 보시면 부끄럽기도 하고 책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글방 문 밖에 나가서 매 맞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고무신 바닥으로 매 자국을 문지른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짚신 신은 사람이 많았고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한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도 짚신을 신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에 조계완 이란 친구가 고의로 나의 집 문 앞에 와서 “오늘 영근이 매 맞았어요”하고 외친 일이 있었으나 어른들에게 큰 책망을 받지 않았으며 그 때에 천자문책 두 세 권을 뗐고, 천자글 상당부분을 외우기도 하였으며 천자공부를 끝내고 계몽편을 두어장 배우다가 7세 때 초등학교(당시의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 배우던 “啓蒙篇”은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3)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초등학교를 들어간 것이 아니고, 교육을 필요로 하는 집의 자녀들로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통지를 우편으로 받고 들어갔다. 나도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기억이 난다. 5,6학년 쯤 된 여학생의 안내를 받아 한 교실에서는 주소, 성명, 부모님의 이름을 물었고, 또 한 교실에서는 기억력을 시험하였는데 책상 위에 각종 물건(연필, 책, 공 등)들을 7~8점 놓고 이름을 물은 다음 보자기로 그 물건들을 덮은 후에 “이 속에 있는 물건들을 말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다섯 가지를 대답하였고, 기억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면 입학이 되었으나 떨어진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4) 저의 할머니가 기독교 초창기에 감리교 선교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셨는데 그 세례명이 김 요안나(본명은 모름)이시다. 나도 할머니의 권유로 누님과 함께 강화읍 감리교회에 주일학교 어린이로 다닌 것이 기억난다. 그 당시에는 헌금을 수전이라 하였고, 예배당 밖 야외에 둘러 앉아 기도하고 수전으로 1전씩 낸 기억이 나는데 그 1전의 가치는 연필 반자루(연필 1개에 2전이었음) 값이며 그 당시의 작은 문방구 점포에서 2전을 주고 연필은 일제 연필로 품질이 참 좋았다. 해방 후에 생산된 연필에 비하면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5) 내가 8세 때인 초등학교(강화 국민학교) 2학년 때인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 2학년이 되도록 초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 교과서를 읽기는 하였으나 의미를 알지 못하였고, 신사참배한 기억과 방공연습을 한 기억이 있다. 나의 집 사랑채에 심씨 가정이 살았다. 그 집 어른은 갑곳(지금은 병인양요 유적지임)에 있는 어업조합의 이사였는데 초저녁에 동리 사람들 몇 명이 그 집에 모였고 그 분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나도 함께 따라 “만세”를 부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경축하는 행사였다. 그 당시 나는 어린 나이라 정치에 대한 것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일제 시대에 특별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청소제도였다. 매주 토요일에 대청소가 실시되어 저의 아버님은 비질을 하시고 저는 쓰레기를 삼태기로 담아 퇴비버리는 일을 자주 하였으며 청소가 끝나면 면소에서 직원이 나와 검사를 하고 딱지를 문기둥에 붙여주는 것을 보았다. 지금도 그런 제도는 꼭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3. 나의 초등학교 시절

 

1) 나의 초등하교 시절은 별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그 시절에 두 번 죽을 위험에서 무사하였으니 한 번은 동리 아이들과 옥수수, 감자를 먹고 동리 앞 먼 곳에 있는 개울물로 물놀이를 갔다. 그 개울은 갑곳의 바다로 이어지는 하류지역으로 퍽 위험하였는데 얕은 곳에서 놀다가 자신도 모르게 깊은 곳 물살에 떠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물 속으로 떠내려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행히도 친구 안홍태의 삼촌인 안종인이 헤엄쳐 달려와서 나를 구출해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은혜로 여길 줄도 몰랐다. 또 한 번은 강화읍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 나오다가 동리 사람의 소달구지를 만나 타고 오는 도중 장동이란 동리에 와서 그 소가 뛰면서 달구지를 길 옆 도랑 아래로 넘어뜨렸다. 그 때 나의 오른 발의 앞쪽 복숭아 뼈 부분이 깎였는데 발목이 바퀴살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큰 다행이었다. 내가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그 당시에 하나님이 나를 살리시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건재한 것을 은혜로 생각한다.

2) 나의 초등하교 시절은 가난과 아버지의 주정(취중의 폭력)으로 큰 환란기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집에는 양식이 없고 아버지는 주점에 종일 계시다가 밤이면 집에 오셔서 주정을 하셨기 때문에 나의 남매들과 어머니, 할머니에게 큰 고역을 치르게 하였다. 이런 어려움은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년을 계속 하였으며 비로소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견디기에 익숙해졌을 정도였다. “가난한 사람의 삶은 귀신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가난한 생활을 극복하는 일들 중에는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도 많다. 그 당시 나의 집은 촌에서 살면서 논농사가 없었기 때문에 늘 양식을 사먹었고, 아버지가 특별한 직업없이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밭과 산을 한 부분씩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으니 얼마나 답답하였겠는가?

3) 또 잊을 수 없는 일은 어느 날 오후 3시경 아버지가 몹시 취한 상태로 집에 오신즉 어머니가 살림살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불평하신 모양인데 이때 아버지는 방안에서 부엌으로 난 문을 발로 걷어 차서 부엌문이 떨어져 나갔고 그 문짝이 부엌에 있는 열두 동이쯤 드는 물독을 깨뜨려 부엌을 물바다로 만든 적이 있었고, 또 벽에 걸린 시계와 화로를 안마당으로 던져서 어머니로 하여금 울화병에 걸리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우시면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면서 도저히 살 수 없지만 내가 나가면 너희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여 도망하지 못한다”고 하소연을 하셨을 때 나도 많이 울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난다. 그 때에 어머니는 그 길로 친정에 가셨고, 친정(외가)에서 몹시 앓으시니 인천에 가서 여러 가지 한약을 지어다 잡수시고 거의 한 달만에 집에 오신 일이 있었다. 그 당시의 생활은 할머니가 물감장사를 하여 양식 보탬을 하셨다. 그리고 수시로 외가의 도움받은 사실이 기억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방학 때나 농사일 바쁠 때 외가에 가서 일을 도와드리고 잘 먹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양식 몇 되씩 도와준 것이 무슨 큰 도움이냐”고 하셨다.

4) 나는 누님과 함께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기도 하였지만 열심히 나가지도 못하였고, 또 주일학교 때에 성경을 배운 기억이 전혀 없다. 이것은 내가 다섯 살 때 천자를 외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 잊어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몇 분의 선생님들과 나의 학업에 대한 약간의 기억이 있지만 생략한다. 그리고 그 때에 나는 아버지의 주정 폭력을 피하려고 보리단을 쌓아 놓은 헛간에서 밤새도록 모기를 물리며 잔 적이 있고, 또 한 번은 방에서 잠을 자다가 “집밖의 산 언덕에서 아버지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두려운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그 쪽 산으로 올라간 일이 있으나 이것은 꿈 속에서 듣고 행동한 일이었다.

 

4. 나의 중학교 입학과 6.25동란

 

1) 나는 6.25 동란이 나던 1950년 5월에 강화 농업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중학교는 6년제였다. 그 때에 내가 사는 먹절(지금 갑곳리)이란 동리에서 3~4명 정도만 입학하였는데 나는 입학금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갑곳 선창에 나가셔서 아주 큰 농어 한 마리를 외상으로 사 가지고 오셔서 그것을 중학교 교장이신 박용묵(경상도 노인)선생님께 선물하고 입학금 연기를 받았다. 입학금을 못낸 상태에서 중학교 교무실을 들여다 본즉 칠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아무도 나에게 입학금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두달 쯤 중학교 생활을 하다가 6.25 동란이 발발하였다.

2) 6월 25일은 주일이었는데 그 날의 날씨가 전반적으로 흐리고 검은 구름이 덮혀 있었다. 나는 그 주일날에 누님과 강화읍에 있는 강화읍 감리 교회를 다녀오면서 북쪽하늘에서 큰 천둥(뇌성)소리가 자주 나는 것을 듣고 누님에게 말하기를 “북쪽 영종(연백군 지역)에는 큰 비가 오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아무일 없이 잠을 자고 그 다음 날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9시경 조회를 할 때 북쪽에서 나는 포성을 들었지만 아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자 가방을 분배해 주어서 호기심에 그것을 만지는데 “전쟁이 일어났으니 별도의 연락이 있기까지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4㎞정도의 길을 뛰어 강화읍 북산 밑에 있는 학교에서 본적지인 용정리의 집으로 온즉 오후 11시경이었는데 집에서는 약간의 짐(이불인듯)을 꾸려 놓은 상태였고, 우선 어머니와 아이들만 강화 남쪽(화도면 사기리)에 거주하는 외가로 피난을 가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셔서 피난행열을 따라 남쪽 외가로 50리 길을 걸어 오후 5시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외가 동리는 고요한 생활을 하시면서 외할아버지는 마당에서 강낭콩을 까고 계셨다. 그 날 저녁은 외가에서 잠을 잤지만 그 이튿날은 “인민군들이 젊은 남녀를 잡아간다”하여 외가의 뒷산 바위틈에서 비를 맞으며 이틀을 보냈다. 이틀 후에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정보를 듣고 마을로 내려왔고, 또 몇 일 있다가 집으로 왔다. 그 때 집에는 아버지만 계셨고 할머니도 우리가 나온 후에 남쪽 화도면 상방리 쪽으로 피난을 하셨다가 다음 날 귀가하셨고, 아버님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인민군들을 영접하여 무사하였다고 하셨다.

3) 몇 일후 중학교에서 소집이 와서 여름 방학도 없이 이북정치 하에서 약 3개월간 교육을 받았는데 주로 노래(공화국 애국가, 김일성 노래 등)와 노어를 배운 기억이 나고, 또 농업학교이기 때문에 자주 농작물 작업에 임하였다. 공산주의 정치가 시작되자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들과 학생들 중에서 공산주의 정치를 지지하며 불시에 웅변가로 변하여 정치 선전을 하는 것이 특징이었고, 이북에서 넘어온 김학천 선생님외 몇 분에 대한 성토대회와 추방운동이 있었다.

4) 그 때에 한 이웃에 사는 안홍태는 나와 함께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였는데(그의 작은 삼촌 안종인은 내가 물에 떠내려 갈 때 건져준 사람임) 그의 아버지와 삼촌 세 사람이 다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가 인민군이 들어 온즉 그들과 합세하여 지역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았다. 즉 안홍태의 아버지인 안종욱씨는 강화면장이 된 것이다. 그 때에 농사를 많이 짓던 사람들이 충남 서산 쪽으로 피난을 갔고 농사 지을 사람이 없었는데 면장과 내무서원들이 나의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논을 몇 필지 줄터이니 농사를 지으라”고 권하였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단연코 거절하시는 것이었다. 그 거절하신 이유는 “당신들도 알다시피 내가 농사를 지을 줄 모르지 않느냐? 힘도 없고 기술도 없어서 못한다”고 하시니까 그들이 생각하여도 그럴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권유 당하시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일은 여성동맹이란 모임이 자주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가 그 모임에 두 번 소집을 당하였다. 그 때에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성동맹에 자주 나가면 안되니 친정에 가서 있으라”하여 친정에 가셨는데 몇 일 후에 내무서원과 동리의 인민군 동조자들이 찾아와서 “왜 당신 부인이 여성동맹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이 “당신들도 알다시피 양식이 있어야 집에 있지 않겠소. 옛말에 ‘열 손 벌지 말고 한 입 덜으라’는 말이 있듯이 양식이 없어서 얻어먹으라고 친정에 보낸 것이오”한즉 이유가 되므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5) 그러자 한 달쯤 후에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그들이 북으로 쫓겨갔고, 늦가을쯤 되어 다시 피난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면장을 한 안종욱씨의 두 동생은 월북을 하였지만 안종욱씨와 그 가족들은 월북을 하지 못하여 그들이 큰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안종욱씨의 등에 북을 메게하고 동리 사람들(모르는 사람들)이 그 북을 치며 조리를 돌게 한 것입니다. 나는 조리 돌리는 일을 그때 처음 보았다. 북은 다른 사람이 치고 “인민 공화국 만세”는 북을 멘 안종욱씨로 외치게 한 것이다. 그 당시에 그 가족들은 12월경까지 괴로움을 당하며 살아 있었는데 그 해 겨울 1월초에 눈이 많이 오고 퍽 추웠는데 하룻밤 사이에 안종욱씨와 그 동생들의 가족들이 다 그 동리 매장지 골짜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를 강물에서 살려 준 안종인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 안홍태도 죽었으며 그 밤에 안종욱씨의 집에서 잠을 잔 이웃의 부인도 함께 끌려 가서 죽었고, 안홍태의 동생인 안윤태는 어린 나이로 끌려가다가 구덩이에 엎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숨어서 죽음을 피하였다. 안윤태는 지금도 옛날의 악몽을 기억하면서 강화를 근거지로 어디에 살고 있을 것이다. 저의 할머니는 저의 아버지에게 자주 안종욱씨의 근실함을 칭찬하시면서 물질을 절약하라고 교훈하셨는데 결국 그들의 근실함도 소용없이 된 것이다.

6) 그 당시 추운 겨울이요, 온 산과 들에 눈이 덮였고, 밤이면 당산을 무대로 빨치산들이 출몰하고, 낮에는 이 집 저집에 특공대들이 있어서 빨치산들과 교전을 하였다. 그때에 아버지가 나에게 건너편 안씨 집에 가서 “담배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을 때 퍽 속상한 적이 있었고, 담배는 사오지도 못했으면서 당산 위에서 나를 겨낭하여 쏘는 딱콩총알이 나의 머리 주변으로 연발 지나가는 것을 체험하였다. 담배는 그만큼 끊을 수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7) 나의 집과 내가 생존한 이유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이 곧 나의 아버지가 술만 잡수시고 일을 할 줄 모르셨기 때문에 6.25 당시에 다른 사람의 논을 경작하지 않은 점과 또 가난을 이유로 어머니를 외가에 보내어 여성동맹의 활동을 피하게 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그 두 가지를 거절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명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그런 과정에서 나를 생존케 하셨음을 알고 그 당시의 모든 악조건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3개월 동안의 공산주의 정치가 끝나고 다시 우익정치가 들어섰을 때 피난 중에서 돌아오신 박용묵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선 학생들에게 스승을 성토하고 내쫓은 놈들은 “쥐새끼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책망한 사실을 기억한다. 나는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였는데 6년제 중학교가 3년제로 변동되어 인문계 3학년으로 졸업을 하였다.

 

5. 나의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 학제가 변경되어 중학은 인문계로 3년, 고등학교는 농업고등학교 3년으로 변경이 되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는데 그 당시 강화에 직조공업이 성행되어 고등학교를 공업고등학교로 또 변경하였다. 그래서 나는 1950년 5월 20일에 중학에 들어갔고, 1953년 4월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며 1956년 3월 23일에 강화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때의 일은 추억할 만한 것이 없으나 한 동리 친구인 이선구와 학교내의 감을 따먹다가 김모 담임 선생님께 들켜서 크게 뺨을 맞은 기억이 있고, 한 동리의 동교생인 이선구와 박형원(이 두 친구는 수년전에 별세하였음), 이승구와 친하게 다닌 기억과 또 교회에 열심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학생회에 출석하면서 기독병원 원장님이신 김한식장로님의 아들 김학진을 사귀었고 강화읍 대산리에 사는 황정주가 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삼산면 매음리에 사는 고만희도 교회에 나오므로 잘 알게 되었다. 고만희는 인천방면에서 한의사로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약 2년 전에 중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옛날의 친구들을 만나고 감회에 젖어 본 적이 있었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저의 집이 본적지인 강화읍 용정리에서 외가가 사는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로 이사를 갔다. 그때에 이사 간 이유는 아버지의 집안이 없어서 외롭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되어 나는 강화읍에 사시는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기숙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본적지의 묘역벌초는 이선구씨의 아버지인 이남용씨와 또 이근태씨의 아버지인 이진순씨가 수고해 주셨는데 현재 이남용씨만 생존하시고 다 타계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진학문제로 고심하다가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학비 안드는 공군사관학교를 가려고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축농증으로 인하여 떨어지고 대학진학을 포기한 상태로 졸업하여 가사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때에 가사란 어떤 사업을 한 것이 아니고 속히 취직하여 생계에 보탬을 주는 일일 뿐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중 상권 정도로 배움에 진력하였으나 수학의 진도가 빠르게 되자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 가므로 실력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 상태로 졸업하였다.

 

6. 청년 시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가의 친척들이 사는 고장인, 집에 갔을 때 외할아버지댁은 두 노인만 사시기 때문에 항상 일이 많았고, 그 동리에서 인천으로 왕래하는 배가 있어서 그 배에 물건들을 싣고 내리는 작업을 하는 작은 단체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일로 약간의 용돈은 쓸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직업이 아니었으므로 인천의 어떤 기업체에 취직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외할머니의 동생의 사위되시는 김남길 아저씨가 인천대한중공업에 나를 취직시켜 주려고 그 분의 형님(사장)을 통하여 부탁하는 중에 있었고, 1년쯤 집에 있으면서 사기리(강남)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청년들과 퍽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강화읍 교회를 다닐 때는 교회도 멀었고 친교도 없이 다니다가 시골의 강남교회에 온즉 가족적 분위기여서 재미있게 다녔고 그 때에 김영창 감리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자 인천에서 취직이 될 것 같으니 “인천에 와서 대기하라”하여 자주 김남길 아저씨 거처하는 집에 가서 대기하면 또 연기되고, 또 갔다가 연기되는 일이 무려 5회 이상을 거듭하였다. 한 번은 인천에 가서 대기하는 중에 가까운 송현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고향의 강남교회에서 교회생활의 재미를 보던 터라 인천에서도 속히 적응하였고, 또 믿음있는 청년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 마당에 종각없는 종이 놓여져 있었고, 내가 거주하는 집은 고철을 발굴하여 용접하고 또 고철을 대한중공업에 공급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종각을 만들어 교회에 제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타산해 본즉 철제는 고철더미를 관리하는 김남길 아저씨가 주시겠다 하므로 용접인건비를 물은즉 3만원쯤 되어 그 당시의 노동자 한달 인건비가 3만원쯤이었으므로 “취직하여 첫 번째 번 돈으로 종각 값을 드릴 터이니 만들어 주시오”하여 승낙을 받고 만들었다. 나는 그 종각을 만들면서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믿고 하는 것이니까 이번에는 꼭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였다. 그 종각을 만든 후 6~7명의 청년들이 그것을 어깨로 매고 예배당 마당으로 올려 갈 때 어깨에 상처가 날 정도였고,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였다. 그 종소리는 그다지 명랑하지 않았다. 위승진 목사님(당시 전도사님)과 김관수 청년(지금 장로님)은 그 사정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7일 후에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이 와서 신앙적으로 첫 번째의 간증거리가 되었다.

약 1년 반쯤 인천 송현동에 방을 얻고 자취를 하면서 대한 중공업 직공생활을 하였다. 직공 생활의 작업은 16인이 8명씩 2조로 나누어 중유를 탱크로 공급하는 일이다. 그때에 고려대학교에 다니면서 같이 일한 박형오란 분은 전두환 정권때 목포에서 국회의원까지 한 일이 있었다. 나의 직장생활의 기간이 짧았고, 또 인천에서 사글세 방으로 소모하는 금액이 있어서 가세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송현 감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역미필자의 감원이 우선되어 1958년 여름에 귀향하게 되었다. 두 달치 봉급을 못받고 갔다가 봉급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받으러 간즉 다른 사람이 내 도장을 새겨서 찍고 받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본인 확인을 안하고 주면 되느냐고 항의하였더니 맡은 서무 직원이 나의 봉급을 다른 돈으로 순순히 내 주어서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7. 은혜받은 동기

 

집에 와서 다시 농사에 협력하였고, 이웃 또는 교회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가 퍽 좋았으며 특히 나보다 두 살 쯤 위인 장종협과 친구로 어울린 생활이 누구보다도 따듯한 우정이었음을 잊지 못한다. 그 해 초가을 무렵에 고향의 함허동천(옛날에 함허대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 함)이란 곳에서 기도하시던 노정길 전도사님(40세가 넘었음)과 박영도 전도사님(35세쯤, 육군대위출신)을 만나 교제하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계신 기도원에 가면 함께 앉아 찬송하고 통성기도를 하여 마음에 뜨거움을 느꼈고 “나는 그 동안 믿음생활에 열심은 있었으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뜨거운 체험이나 믿음에 큰 확신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하고 여쭌즉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그렇게 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하였고, 나의 외6촌 동생인 김진수(장로)청년과 나의 집에서 잠을 자면서 둘이 함께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일 새벽부터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하고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말라(시 15:4) 하셨사오니 저희들도 이 결심을 변하지 않고 잘 시행하여 특별한 은혜를 받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고 잠을 잤다. 그런데 그 밤에 비몽사몽 같은 꿈을 두 번 꾸었다. 이 비몽사몽이란 뜻은 꿈을 꾸면서도 “내가 꿈 중에 이 광경을 보는데 꿈을 깬 상태에서 계속 보았으면 좋겠다”하고 눈을 뜨면 그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첫번째 꿈은 강화읍 감리교회 같은 교회당에 불빛이 밝은 중 내가 그 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통회하는 꿈이었고, 또 한 번은 비슷한 언덕에서 환하게 불켜진 예배당을 내려다보면서 역시 통회하며 기도를 하는데 먼 동쪽에서 밝은 태양빛 같은 것이 내 앞으로 비취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면 무슨 광경이 나타날 것인가?하고 기다렸더니 그 불빛이 가까이 오다가 5~7명의 사람이 중처럼 머리를 깎은 상태에서 예수님처럼 가시관을 각각 그들의 머리에 쓰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꾸면서 이런 관경을 꿈이 아닌 생시에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눈을 뜬즉 역시 꿈을 꾼 것이었다. 그 때 시간이 새벽 3시쯤이었으므로 “잠을 깬김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에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같이 잠자던 김진수 동생을 깨워 같이 교회로 갔다. 그때 나는 그 꿈을 기도결심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도원에 계신 전도사님들게 말하였더니 좋은 결심을 한 자에게 은혜를 주실 징조라고 하시면서 단 9:3,23을 읽어 주셨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것이 기도하는데 지구력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 꿈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는 해석하기 어려웠다. 욥 33:15이나 창 20:6, 37:5등에 보면 꿈으로 계시를 주신 사례가 있다. 그러나 꿈을 해석하는 계시를 못받으니까 꿈을 꾸어도 내용을 모르는 것인데 나중에 신학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고 충족하다”(요 21:25, 히 1:1)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꿈을 적당히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강남교회에는 교역자님이 안 계셔서 한연성 장로님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셨다. 그런 기도생활을 계속하는 중에 한 번은 밤기도를 하러 교회당에 갔다가 함허동천 기도원에 올라가고 싶어져서 밤 12시쯤 되어 혼자 용기를 내어 40분쯤 올라가는 산길을 갔으나 계셔야 할 두 전도사님이 계시지 않았다. 나는 두 전도사님이 그 곳에 계실 것을 믿고 무서움도 모르고 가서 전도사님의 숙소인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주위에서 약 30분쯤 기도를 하고 동굴에 들어간즉 두 전도사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두 분이 기도하시러 밖에 나가셔서 그렇거니 생각하고 그 곳 동굴에서 또 혼자 기도를 하다가 잠을 청하였다. 새벽 두 시쯤 되었는데도 주위에서 기도소리도 없고 돌아오시지도 않았다. 그때서야 두 분이 그 곳에 계시지 않음을 깨닫고 외로운 생각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교회당으로 내려온즉 새벽 3시 30분쯤이었는데 새벽시간이 너무 일러서 예배당에 불을 켜지 않은채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4시쯤 되어 한 성도가 새벽기도회를 나왔는데 그 여성도는 나의 외5촌댁 아주머니였다(외할아버지의 양자 며느리임). 그 아주머니는 어떤 마귀에 사로 잡힌 분으로 가끔 비정상인처럼 행동한 일이 있어서 약간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캄캄한 예배당에서 나는 앞자리에서 기도하고 그 아주머니는 뒷자리에서 아무 기척없이 엎드려 있는데 나혼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혹 “그 아주머니에게 들어간 마귀가 나를 해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나서 기도를 잘 할 수 없게되자 그것을 극복하려고 눈을 감은채 노력을 하는데 휙소리가 나면서 검은 보자기로 나를 덮어 씌우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무서움에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을 뜬즉 아무런 변화가 없고 창문은 그대로 초생달로 인하여 빛을 내고, 외5촌 당숙댁은 여전히 엎드려 있다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소리를 지르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교인들이 와서 새벽기도회를 하려고 불을 켜고 다섯 시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때에 두 전도사님이 그 곳에 오셨기로 내가 밤에 기도처에 다녀 온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 분들은 전날 저녁에 그 이웃에 계신 이정숙 여전도사님의 초청을 받고 내려 오셨다가 그 댁에서 유숙하시고 새벽기도회에 나오셨다고 하셨다. 저는 그 당시 기도처에 오르내리면서 성경문답도 하였고, “먹보다도 더 검은”이란 찬송과 “주의 피로 이룬 샘물 깊고도 넓도다”하는 찬송을 20회까지 부른 기억이 나는데 “찬송을 너무 오래 불러서 힘들다”고 하였더니 박영도 전도사님의 말씀이 “아직 목에서 피가 안나지 않았느냐, 어떤 성도는 피가 나도록 부른 사실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일 후에 집에 가서 큰 시험을 만났다. 가을에 궂은 비가 몹시 와서 땅이 질고 달이 없는 밤이라 몹시 어두운 때였는데 새벽기도회에 가기 위하여 12시쯤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고 나의 아버님이 함께 술 취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셔서 “방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에 그 광경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분을 터트리며 “본을 보이시라는 등, 이 밤 중에 따라 온 친구는 어떤 사람이냐는 등” 책망과 불평과 반항을 마구 토해 버렸다. 이 때에 아버님은 술 취한 상태였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여 할 말을 잃고 술이 다 깬 것처럼 되었고, 따라온 친구는 “미안하다”하고 그대로 돌아간 상태이며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나의 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너 내 집에서 나가라”하셨고, 저는 도저히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속으로 탄식하며 교회로 갔다. 몇 달 전부터 은혜를 받으려고 힘쓰는 중에 순간적으로 당한 마귀의 역사를 이기지 못한 것을 깨닫고, 이 상처를 아물리는 방법은 아버지에게 찾아가 크게 절하고 사죄하는 도리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이튿날 아침 9시경에 집으로 가서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고 아버지에게 과거보다 더 잘 할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하였더니 알았다고 하시면서 “나가서 무슨 일을 준비하라”고 하셔서 고맙게 여기고 열심히 아버지의 시키신 일을 하여 그 역경을 만회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지 몇 일이 지난 초겨울에 여전히 새벽기도회를 나갔는데 그 날 기도처에 계신 전도사님이 새벽기도를 인도하셨고, 준비 찬송으로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하는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눈물은 흘리려고 하여 나오는 것도 아니며 울려고 힘을 쓰는 것도 아닌데 북받치는 회심과 눈물이 계속 나온 것이다. 그 다음날도 역시 찬송하려고 하거나 기도하려고 하면 마음속에 통회가 일어난 것이다. 이 통회는 나의 감정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나를 감동하여 그렇게 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대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으라”(엡 3:4, 딤전 4:13, 계 1:3), “기도를 힘쓰라”(롬 12:12), “회개하라”(행 2:38, 막 1:15), “충성하라”(고전 15:58, 계 2:10)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순조롭게 하고 싶은 충동으로 하게 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일이라고 깨달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죄가 두렵게 여겨지고 성경을 재미있게 읽게 되며 십자가의 은혜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동안 자주 기도처에 다니며 기도하고 성경토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또 전도의 사명감이 생겨서 기도하는 전도사님과 무전여행, 노방전도를 할 생각도 가져 보았다. 죄를 두렵게 여기게 되자 과거의 죄가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웃의 부잣집 일꾼이 주인의 동산에 쌓아 놓은 나무가리가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나무하러 갔다가 그 나무 두 단을 도적질해 온 일이 생각나서 결심하고 그 일꾼 아이를 찾아가서 그 사실을 말하고 갚겠다 하였더니 그 아이는 오히려 부끄럽고 무안스럽게 생각하며 “형님 제발 그만두시요”라고 하여 고백으로 끝낸 일이 있었다. 회개할 때는 아무리 죄가 부끄러워도 시인하고 머리를 숙이며 자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8. 아버지를 변화시킴

 

나의 아버지의 술 잡수시는 습관은 중독된 상태요, 그로 인하여 가산을 탕진한 것은 예삿일로 돌리더라도 약주만 잡수시면 외롭다는 등 돈이 필요하고 술마신 외상값을 갚아야 한다는 일 등으로 할머니를 몹시 괴롭게 하셨고, 제가 집에 있을 때에도 수차례 외상 술값을 갚아드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변화됨이 없이 할머니를 괴롭게 하시니 할머니가 너무 분하고 원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니 네가(아버지를 가르키는 말) 먼저 죽고 내가 3년만 편안히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꼭 그대로 성취되었다. 오죽하면 할머니가 아들보다 더 살기를 바라셨겠는가? 나는 아버지의 일로 마음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로 기도하던 차 “에스더”의 3일 금식에 대한 말씀을 읽고 기도처에 가서 처음으로 3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목적은 아버지의 변화였다. 술, 담배만 끊고 교회에 출석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내가 그런 사유로 금식하는 것을 본 두 전도사님도 “형제가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이 있은즉 “우리도 금식을 하겠노라”하여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이웃에 사시는 외할머니에게 전해졌다. 금요일 아침부터 시작하였으므로 주일 아침이 금식 3일이 되는 날인데 나는 기도처에 있었으나 토요일 오후에 외조모님이 나의 아버지를 찾아오셔서 크게 책망하고 “아들이 금식 기도까지 하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자네가 그대로 있으면 되는가? 내일 나와 함께 교회로 가세”하시고 그 다음 주일날 아침에 일찍 집에 오셔서 아버지를 데리고 교회로 오셨고, 아버지는 무슨 힘에 붙잡힌 분처럼 아무 말도 없이 끌려 나오셨다. 내가 오전 10시 반에 강남교회 예배당에 어지러운 몸을 움직여 나온즉 아버지는 그 앞자리에 나와 계셨다. 예배시간 중에 한연성 장로님이 “지영근 선생 부친께서 이제부터 회개하고 믿기로 작정하시고 교회 나오신 것이지요?”하며 인사를 시킨즉 아버지께서 일어서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고, 온 교중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역사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금식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약간 체험한 듯 하였고, 아버지는 그 후 몇 주일 나오시다가 역시 핍박만 멈추셨을 뿐 기독교 신앙에 깊이 들어오지 못한 상태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 당시 기도처에서 먹던 음식은 고구마를 썰어 넣은 밥과 새우젖에 산추열매를 넣고 밭솥에 찐 반찬이었는데 그 당시는 양식이 귀할 때이므로 꿀맛 같았고, 지금도 나는 그 음식이 생각나고 그 환경이 그립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부산 영도의 동삼동 숙소가 모든 시설이 구비된 환경이기는 하나 나는 이 곳을 옛날의 기도처로 생각하고 그 때에 하나님을 사모하던 것처럼 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인생 말년을 함허동천 기도원 생활 분위기로 마감하려고 계획중이다. 함께 기도하던 두 전도사님은 용문산(나운몽 장로) 계통에서 은혜를 받으신 분이었고, 그 곳에서는 무전 전도여행을 시킨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런 생활을 바랬는데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온 것이다.

 

9. 나의 군인 생활

 

나의 군대 생활 기간은 1959년 4월 9일부터 1961년 11월 21일까지이다. 군입대 영장을 받기까지 몇 달동안 고향에서 지낼 때 기도처의 전도사님들과 함께 교제하며 은혜를 받았고 또 교회생활을 통하여 친구들과 뜨거운 우정에 사로잡혀 있다가 영장을 받았다.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항상 나이가 1~3년쯤 적은 편이었다. 나보다 먼저 군대에 나간 사람들까지는 동리에서 베풀어주는 환송이 있었다. “축입영 장정 OOO용사”라고 쓴 플랜카드를 들고 동리 사람들이 선창까지 나가 전송하였지만 내가 입대하는 때부터는 그런 번거로운 환송절차가 없어졌다. 그 당시는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 시절이라 정치제도의 엄격한 면이 없었고 돈과 권력이면 다 잘 된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그런데 입대할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의 집에서는 나에게 들려 줄 여비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때 나는 기도생활로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런 은혜를 군생활을 통하여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에 나가면 모든 것을 다 주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겠느냐”하고 “돈을 안 갖고 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날까지 돈을 1000원도 갖고 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오해하기를 떠나는 그 시간부터 치약, 칫솔, 수건까지 다 공급되기 때문에 몸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함께 나가는 윗집 친구 한상준과 함께 선창에 나가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막내 여동생 영이가 급히 뛰어 나와 돈봉투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웬 돈이냐?”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어디서 빚을 얻어 온 돈이라 하면서 2만원을 여비로 주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돈을 안 갖고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하고 그 봉투에서 돈 2000원을 꺼내어 “내가 이것만 세면도구 구입용으로 쓰기 위하여 갖고 간다”하고 18,000원을 돌려보낸 후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는 경기도 김포 등 각처에서 온 입영장정들이 많았는데 하인천역에서 열차를 타고 영등포를 거쳐 논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소사쯤 갔을 때 안면 있는 청년이 기차 안에서 돈을 걷으러 다니는 것이다. 이유인즉 인솔자 사병에게 돈을 주어야 인솔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나는 그런 돈을 줄 여유가 없는 고로 “돈이 없다”하였더니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재차 “사실이라”하니까 더 이상 독촉을 안하고 떠났다. 영등포를 지났을 때 또 그런 일이 있음을 알고 미리 화장실로 피하여 그들을 따돌렸다. 군대 생활은 처음 겪는 일이라 새로운 면도 있지만 몹시 욕스러운 언사들이 많아서 퍽 불쾌하였다.

논산의 수용 연대에 들어가서 신체검사를 하고 의복과 구두, 모자, 군번을 받아야 훈련소로 가게 되는데 그 절차가 보통 3~4일이 걸리는데 수용 연대의 기관병들에게 돈 몇 천원만 주면 모든 절차를 쉽게 밟고 군번을 속히 받아 훈련소로 빨리 갈 수 있으나 나는 그런 부탁을 하는 것도 부정으로 여겼고, 돈도 없어서 절차와 순서대로 되기만을 기다렸다. 3일이 지난즉 함께 갔던 강화 김포 지역의 장정들이 거의 다 가고 몇 사람 남지 않았으며 언어가 다른 전라도 청년들이 섞여 들어오는 상태였다. 그 때에 퍽 외로움을 느끼며 기도하였다. “주보”라 부르는 매점은 있지만 돈이 없어 무엇을 사먹을 수도 없고 초조한 중에 그 매점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아리조나 가보이”란 노래는 나를 퍽 처량하게 만들었다. 신체검사 중 X-레이 찍는 순서가 가장 번거로웠는데 아침부터 많은 수가 줄을 섰지만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뇌물을 받은 기관병들이 중간에 다른 입영자들을 넣기 때문이었다. 앞에 서너명 남은 상태에서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그만한다는 말을 두 세 번 당하였다. 그래도 순서대로 하려니까 입소 6일이 되었어도 X레이, 피검사 등이 끝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X-레이를 약식으로 통과하는데 500원을 준 기억이 난다. 얼마나 초조하였으면 500원을 뇌물로 주었을까? 그리고 혈액형은 검사없이 AB형이라고 하였다. 나는 혈액형을 검사해 본 일이 지금까지도 없다. 그 당시 도민증에서 아버지의 B형과 어머니의 A형을 본 일이 있어서 무조건 AB형이라 하여 군번에도 그렇게 찍어 넣었고, 그 짐작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갖고 있었다. 약 2년 전에 아이들이 자기들 혈액형과 어머니(나의 처)의 혈액형을 알고는 나의 혈액형은 O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의 혈액형은 O형이라고 믿고 있다. 의료보험 조합에서 성인병 진단을 하라는 통지서가 2년 전에 왔었고, 지금도 와 있는데 피검사도 없이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종합검진을 계속 미루다가 요즈음 혈압이 170을 넘기 때문에 종합검진을 수일 전에 하였는데 아직 결과 통지는 받지 않았다. 수용 연대에서 7일이 되었을 때 기관병 선임하사와도 안면이 있게 되었고, 선임하사가 “너는 본 지가 퍽 오래 되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느냐”하여 사실대로 말하였더니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큰 일이라”하면서 몇 가지 절차를 밟게 하여 훈련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훈련소는 21연대 2중대 5소대였다. 내가 배치된 5소대 막사가 집합 장소와 예배당과 중대 사무실이 인접한 곳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그것은 수용 연대에서 절차를 늦게 하신 것이 바로 예배당 옆에 있는 막사로 들어오게 하신 섭리란 사실이다. 그래서 훈련도중에 아침, 저녁 기도를 빼지 않고 할 수 있었다. 학과 출장이라 하여 운동장에 모일 때마다 10분 전에 나가서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하였고, 저녁에는 점호가 있기 전에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는데 그 때에 강화군 삼산면에서 온 김성규는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나같은 열심은 갖고 있지 않았는데 내가 저녁 기도를 가게 될 때는 “가서 마음놓고 기도하여라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연락해주마”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성규의 고마운 일에 대하여 느낄 줄을 몰랐고, 기도할 때도 그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없없다.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어두워지면 전혀 눈 앞의 일도 감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내가 갖고 간 2천원은 500을 X-레이 통과에 주고 두 세주일 헌금을 몇 백원씩 하였으며 치약과 칫솔을 구입한 것으로 소모되고 돈은 일푼도 없는 상태였다. 내무반에서 함께 잠자는 인천시 학익동에서 온 윤도섭의 허리에 돈뭉치가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갖고 왔느냐”고 물으니 5만원을 갖고 왔다고 하였다. 그는 위장이 좋지 않아서 건빵을 먹지 못하였으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다. 나는 간식 살 돈이 없으니까 간식이 필요하였으나 돈이 없고 그 대신 담배를 피우지 않으므로 담배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윤도섭이가 너무 반가워하면서 건빵과 담배를 바꾸어 쓰자하여 그렇게 하여 간식에 큰 유익이 있었으니 이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적당하게 보호하시고 익하게 인도하시는 일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청년이란 것이 21연대 군목이신 라원용 목사님에게 알려졌다. 라원용 군목님은 현재 종교감리교회의 목사님인 줄로 안다. 한 번은 그 목사님이 나를 불러서 “수요일 기도회 설교를 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군종부에 있는 선배 상병도 나를 퍽 존경하는 뜻으로 대우해 주었다. 설교의 부탁을 받았을 때 내 마음은 퍽 긍정적이었다. 그 당시에는 성경도 쉬지 않고 읽었을 뿐 아니라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에 자신이 설교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다른 세력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수요일 저녁에 40평 정도의 좁은 예배당에 모인 장병들은 주로 훈련병들이었으며 약 200명 정도였다. 그 때 나는 단 12:4의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자식이 더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세의 징조”란 제목으로 설교를 약 40분 하였는데 무슨 말씀을 증언하였는지는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배를 마친 후 취침 전의 점호 시간이 임박하여 즉시 내무반 막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주간 토요일 오후 2시경에 5~6명 정도의 훈련병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중에 한 사람 이름은 손형호로 기억되고 대부분 경주 방면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형님으로 호칭하면서 “어제 수요일 기도회 때 설교로 큰 은혜를 받았는데 형께서는 어떻게 그런 은혜를 받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여기의 그런 은혜란 내가 믿음이 좋은 청년 같음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대답하기를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결심하고 새벽기도를 계속 하였고, 항상 성경읽기와 배움에 노력하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소속으로 돌아갔고, 몇 사람은 주소를 교환하여 몇 차례 편지의 교제가 있었다. 훈련소에서 가장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은 도적질 방비였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사이에 누가 모자를 벗겨 간 것이다. 이 때 나도 그 다음 화장실 문을 열고 모자를 벗겨 가지고 도망하여야 위기를 면하게 되지만 그것은 나 역시 도적질하는 죄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을 때 집합을 하게 되니 모자를 쓰지 않은 군인은 나 혼자였다. 중대 부관이 모자를 안 쓴 나를 보고 나오라 하여 연유를 묻기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그러면 너도 즉시 같은 방법으로 모자를 구해 써야 할 것이 아닌가?”하면서 “군대는 수단이라”고 하였다. 이 때 나는 기독교인인데 도적질을 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한즉 더 말하지 않고 기관병을 시켜서 모자를 구해오게 하여 나에게 준 일이 있었다. 그 때 그 부관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전반기 훈련을 마치고 후반기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 곳은 논산에서 몇 십리 남쪽으로 가는 곳이었고, 제 27연대란 부대였다. 몇 중대, 몇 소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역시 예배당 옆이 나의 내무반 막사였으므로 이 때에도 또 한 번 놀랐고, 하나님이 예배당 곁으로만 인도해 주시는 것을 감사하였으며 그 곳에서도 기도생활을 계속 하자 군종부에서 나를 믿음 있는 자로 여겨 설교 부탁을 하기로 수요일 저녁 설교를 한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전반기 훈련소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그렇게 은혜로운 분위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6월초에 배출대로 가게 되었다. 수용 연대가 입소자의 안내소라면 배출대는 훈련 끝난 사병들을 각 부대로 배치하여 보내는 곳이었다. 육본에서 충원지시가 오면 배출대에서는 순서대로 충원 온 부대에 병력을 보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때가 훈련을 마친 때이므로 그 기회에 많은 면회를 접하게 된다. 면회 온 가족들이 돈을 주고 가면 그 돈을 적당히 써서 고생을 덜하는 후방의 부대로 배치받도록 부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면회 오는 문제를 생략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이크로 호명을 할 때 3명 이하를 부르면 “저들은 후방으로 간다”하였고, 많이 부르면 “전방으로 간다”고 하였다. 6월의 뙤약볕은 퍽 더웠고 배출대 막사 근방에는 자라나는 버들나무 그늘뿐이었는데 그 그늘마다 수십명의 군인들이 앉아 있어서 그 곳에서는 묵상도 할 수 없어서 운동장 한가운데로 가서 혼자 묵상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었다. 그 때 갖고 있던 성경은 시편이 첨부된 작은 신약 성경이었다. 그늘에 앉은 사람들은 왜 내가 운동장 가운데에 혼자 앉았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2~3일 후에 40명을 호명하는 그룹에 내 이름이 포함되었고, 부대로 이동되는 기차를 강경역에서 타고 기차 안에서 잠을 자다가 누가 작고 헌 구두를 놓고 내 구두를 바꿔치기 하여 상당한 고생을 하였다. 몇 일 후 동료 군인 박정덕이가 사람이 자기의 구두가 너무 크다고 하면서 작은 것과 바꾸자 하여 구두에 대한 불편을 덜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해결해 주신 일이지만 그 당시는 그것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새벽에 도착한 곳은 전남 송정리 역이었고, 송정리역에서 광주시에 소재한 1군관구 사령부 본부중대로 오게 되었다.

그때가 6월 하순이었는데 오전에 도착한즉 여러 부처에서 장교들이 와서 한 두사람씩 자기의 근무처소로 졸병들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이 때 군종 참모 중령 박봉윤 목사님이 오셔서 “신자들 손들라”하여 파악을 하는데 40명중 25명 정도가 신자라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2,3명 뿐이었다. 본부 중대의 인사계가 40명을 세워놓고 대졸, 고졸, 중졸 등 학력별로 나누어 배치를 하다가 병력이 다하여지자 나까지 고졸자 두 명만을 따로 남겨 놓았으니 이는 다른 부처에서 천천히 데리러 오는 장교들의 부탁에 의한 것 같았다. 마침 짚차 한 대가 오더니 유춘용 중위가 내려와서 “우리 법무부에도 한 명 데려가야 하는데 남겨 놓은 졸병이 누구냐”고 묻자, 본부 중대 인사계가 “이 두 사람 뿐이라”고 나와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 때 유중위는 두 사람을 데리고 본부 중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잉크와 펜을 주며 “너희들의 주소를 써 보라”고 하였다. 그 때 내가 묻기를 한글로 씁니까? 한문으로 씁니까?한즉 한문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의 학생시절에 다른 한문은 많이 쓰지 않았지만 주소만큼은 날린 글씨 종서로 익숙하게 연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京畿道(경기도) 江華郡(강화군) 江華面(강화면) 龍井里(용정리) 1072番地(번지)를 익숙한 필체로 썼더니 두 사람 중에 나를 데리고 법무 참모부로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군대의 법무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가자 마자 검찰과의 사병으로 들어가서 30헌병 중대 영창에 구속된 군인을 불러내는 심부름을 하였고, 선배의 업무를 파악하는데 상당기간 어려움이 있었다. 전화 받는 것과 교환을 부르는 것까지 생소한 업무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법무부 사역을 위하여 본부중대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파견근무에 속하였고 근무지가 30헌병 중대 안에 있으나 소속은 본부 중대원이기 때문에 간섭을 받지 않으며 식사만 함께 하고 내무반도 법무부 사병 내무반이 따로 있었다. 헌병 중대는 도망병과 교통사고만 취급하였고, 그 이외의 범죄는 같은 건물에 있는 CID라는 특수 수사기관에서 조사하여 전부 법무부 검찰과로 넘기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법무부 검찰과 요원이었기 때문에 수사기관원들이 업무상 나에게 사정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얼마 후에 법무부의 검찰과 업무와 심사과 업무, 그리고 법무과와 행정과의 업무를 파악하게 되었다. 나의 임무는 처음에는 선배 밑에서 돕는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군인 피의자 예심 서기, 공판조서 서기를 하게 되었고, 사건 접수는 조두성이란 전남 무안 출신의 선배가 담당하였다. 약 3년 업무 기간에 많은 경험을 하였고, 약 3000매의 기소장과 공판조서를 작성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의 법무관으로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전두환 전대통령 때 국회의원을 지내신 라석호 변호사님과 얼마 전까지 대법원 판사로 계셨던 배만운 판사님을 기억하며 그 외에도 여러 분들이 계셨다. 내가 군생활을 할 때 잊지 못할 사건들이 있었다.

1) 나의 새벽기도 생활과 청소 생활이다. 부대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중앙 성결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김광선 목사님이 시무하셨고, 내가 새벽기도회에 빠짐없이 나가자 나를 신임하시고 나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한 번은 새벽에 비상이 걸려 법무참모까지 출근을 하셨는데 나는 새벽기도회에서 늦게 돌아와 책망을 받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본부에 있는 군인 교회에 나갔다가 통합측 목사님이신 박봉윤 중령이 군목으로 계시면서 나를 사랑해 주셨고, 부목으로는 정성규 목사님이 역시 나를 인정해주셨는데 정성규 목사님은 지금 여수 제일교회에 시무하신다. 박봉윤 목사님이 나를 약한 개척 교회를 돕도록 지시해 주셔서 유문동에 있는 성북교회(개척교회)에 나가서 오명동 목사님을 도와 드렸고, 성북교회 청년들과의 재미있는 생활이 퍽 즐거웠다. 지금도 그 당시의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오순세 선생님, 김용한 선생님은 중․고등 교편을 맡으신 분이요, 김판상 선생님은 사회사업을 하셨으며 김이만 장로님과 김영만 장로님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나는 군생활을 할 때 새벽기도를 마치고 부대에 와서 모든 사무실 청소를 다해 놓고 성경을 읽고 앉아 있노라면 그 때에 다른 사병들이 일어나서 내가 청소 끝낸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였고, 주일날은 내가 교회만 다녀오면 종일 사무실을 지킨다 하니까 다른 동료들이 외출을 많이 하게 되어 좋다고 하였으며 겨울철에 석유를 부어 연탄난로를 피우는 기술은 특수하였다. 선임하사인 심상근 중사님도 나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선배 조두성씨는 “너 같이만 한다면 너의 하나님 예수가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비꼬는 칭찬을 하기도 하였다.

2) 내가 군대에 간 후 기도처에서 함께 기도하던 노정길 전도사님과 편지 왕래가 있었고, 그 전도사님이 용문산 41기 수련회에 가신다 하여 군생활 1년이 되도록 정기휴가를 가지 못하였다가 그 기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내어 용문산에 처음 갔었다. 그 곳에서 노정길 전도사(지금은 다른 교단의 원로 목사님일 것임)님을 반갑게 만났고, 각처에서 모인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반갑게 만나 감격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위기는 퍽 큰 감명을 받게 하였다. 나는 그 때에 큰 은혜 받기를 기대하였으나 한 가지 회개하지 못한 죄로 은혜의 길이 막혔었고, 큰 은혜를 받지 못한채 1주간만에 부대로 돌아왔다. “회개하지 못한 죄”란 부대로 나오는 증인 소환비를 법무부 요원들이 나누어 먹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먹지 말자”고 기치를 들던지 돈을 반환하고 항의를 하여야 하는데 그런 용기를 나타내지 못하였다. 이 증인 소환비란 법무부에서 재판을 하다가 민간 증인이 필요하면 불러서 참고인이 되게 하고 그들에게 여비를 지급하라고 나오는 돈인데 그것을 주지 않고 준 것처럼 서류를 꾸며 놓고 그 돈을 고등 군법 회의비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 사병들은 받아 보았댔자 그 당시의 돈으로 5000원 정도였으니 이는 식사 두끼 값에 불과하지만 높은 사람들은 더 많은 금액을 먹었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내가 그 사실이 거리낀다고 선배에게 말한즉 “관례대로 따라야지 그렇게 안하면 함께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서 회개를 못하였고, 용문산에 가서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여 은혜의 깊은 맛을 체험하지 못한채 냉냉하게 부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확실한 회개와 함께 은혜를 받지 않겠는가?

3) 나는 군생활 1년이 지난 후에 오명동 목사님의 추천으로 바로 부대에서 인접한 대의교회에 있는 광주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섭리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에 사령부의 많은 사병들이 조선대학의 야간부에도 많이 입학했다. 거기에 따라 내가 광주신학교에 가는 것을 법무부 장교들이 허락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무실을 지켜야 하는 사병들의 불평도 약간 있었지만 1년 뿐이었고 다음 1년은 고참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군생활 3년의 후반부 2년을 광주신학교 생활로 겸무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목사를 속히 되게 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4) 또 중요한 것은 제대를 하던 해인 61년도에 5.16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 소장은 5.16혁명 1년 전쯤 내가 근무하는 1군관구의 사령관을 하고 떠난 분이다. 박소장 이임식 때 나도 참석을 하였다. 그러나 그 분이 육본 작전 참모로 있으면서 혁명을 주도하여 정권을 잡고 계엄령을 선포하니까 사회의 모든 기관 특히 법원 검찰, 경찰의 업무가 내가 근무하는 고등 군법 회의라는 군 법무부 지휘 아래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법무부 고참 사병이었기 때문에 별 것 아니지만 위세 있는 기관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각 경찰서의 사건도 받게 되었고, 광주 지방법원, 고등법원의 사건도 배정하게 되었으며 그 판검사님들을 군법무부 사무실로 오시게 하여 일을 담당하게도 하였다. 몇 달 그렇게 하다가 계엄령이 해제되어 원상복귀 되었지만 참으로 대단한 권세를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지방 경찰서로 전화를 하려면 경찰국 교환을 거쳐야 하는데 그 때 “여기는 계엄 고등군법회의라”하면 모든 통화를 중지하고 우선 연결을 시켜주는 특혜를 맛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종합하여 34개월 동안 군생활로 인한 경험을 하였으니 범죄관계, 서류관계, 소송관계, 판검사를 알게 된 것, 많은 사건 기록을 쓰는 것 등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훈련이 된 것이다. 61년 11월 21일이 제대일이었지만 군의 업무 인계가 되지 않아서 인사대접을 받으며 1개월을 더 복무하였고, 나는 그 동안에 신학교 2년 수료를 12월까지 마치게 되었다.

5) 62년 1~2월을 강화의 집에 와서 거하고 3월초에 다시 광주에 가서 부산 고려 신학교(당시 고려파와 장로교파가 합동하고 고려 신학교는 총신 분교가 되었음)로 편입할 최영기, 최기채, 서복만 동료와 함께 부산을 가게 된 것이다. 광주를 떠나게 되면서 부산의 총신 분교로 가게 된 이유는 장로교회가 에큐메니칼 사건으로 분리되면서 보수측 장로회 교파가 고신측과 합동하였고, 양측 교단의 신학교를 합동하자 지방 신학을 폐지하게 되었으며 학제도 2년을 더 증설하였다. 그래서 지방 신학 1년, 4년을 수료한 사람은 서울 총신으로 가게 하였고, 2~3년을 수료한 사람은 부산으로 가게 한 것이다. 나는 광주 신학교를 다닐 때 꼭 목사될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막상 2년을 수료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가는데 안 갈 수도 없고 집에 가 보았자 특별하게 할 직업도 없고 하여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섭리로 이용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당시 고신에 입학원서를 보내게 되어 유문동 우체국에 가서 등기를 붙이게 되었는데 분명히 등기우표 값을 주지 않았다고 두 번 말했지만 그 직원이 알았다고 하면서 등기우편을 무표로 붙여 주었다. “그 분이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서에 대하여 봉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이 그런 일에 이르기까지 도와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10. 부산신학교(총신분교) 1년 시절

 

나는 본래 감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군대 생활을 광주에서 할 때 감리교회를 쉽게 찾지 못하였고, 군목의 인도를 받아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장로교파 지방 신학교까지 가게 되어 장로 교인이 되었다. 장로교파의 대표적 교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측과 반대측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그 반대측, 즉 보수교파 계열에 있게 되었고, 또 기독교 장로교파와 고신측 장로교파가 있던 중 내가 소속한 장로교파와 고신파가 합동하면서 신학의 제도를 증설하였다. 그리고 양측이 합동한 것을 근거로 장로회 합동측이란 별명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본래 본과와 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2년 수료기간 후에 3년을 배워 졸업하는 제도이고, 별과는 나이 많은 장로님이나 지방의 교역의 경험있는 전도사님들이 성경학교를 나와서 3년을 배워 졸업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어도 2년 수료기간을 갖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면 3년 만에 본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경제가 어려운 때라 그만한 과정도 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교파가 합동하자 본과는 4년제 대학 졸업후 신학부 3년을 배우게 되었고, 별과는 예과 2년을 이수한 후 신학부 3년을 배우게 되었는데 내가 부산에 갈 당시는 그 법을 만든 시기였으므로 그해 편입생까지는 종전 제도(3년 만에 졸업하는 제도)로 적용하고 다음해부터 변동된 학제를 시행하게 된다고 하였다. 종전의 학제란 지방신학교 2년 한 것을 총신 1년 한 것으로 간주하여 3년에 졸업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같은 경우는 광주신학교 2년 수료한 것이 총신 1년 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총신 2학년에 편입하여 2년만 배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산 신학교에 간즉 무조건 편입이 아닌 “시험을 치라”하여 시험을 쳤고, 영어실력에 따라 떨어진 자도 있지만 나와 최영기 전도사님을 1학년에 편입시켜 준 것이다. 그래서 3년을 배우고 졸업하였는데 이것은 더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제도에 임하게 한 것입니다. 부산에서 3년, 신학을 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1) 나는 군대에 나가는 22세 초기까지 감리교회에만 다니다가 전남 광주에서 군생활을 할 때 감리교회를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없었고, 군목님들이 장로교파 목사님들이었으며 개척교회인 유문동에 소재한 성북교회에 나가면서 장로교회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교파간의 교리적 차이에 대하여 서로 알지 못하다가 신학을 배울 때에 칼빈주의가 장로교회의 교리체계이고, 감리교회는 알마니안 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 당시에 에큐메니칼 w.cc 운동 때문에 장로교회 큰 교단이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누어지면서 기독교 사상적 갈등이 큰 것도 체험하였고, 여기에 따라 해방직후에 기독교 장로교파가 파생된 경위와 고신파, 재건파가 생긴 것도 약간 알게 되었다. 군생활 중 장로교파의 신학을 2년간 수료하면서 합동측 장로교파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는데 이 “합동측”이란 용어가 고신측과 합한데서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쓴 “기독교 신앙백과”의 교파의 유래란 글에도 약간 기술하였다. 문제는 당시의 고신파를 어떻게 생각해 왔느냐?하는 점이다. 고신파는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많이 포교된 교파로서 일제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생활을 하신 한상동 목사님을 중심으로 결성된 극히 보수적이고 경건하다고 하는 교파인데 유명한 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이 고려신학교 교장을 하시면서 발전하였다. 부산시 서구 암남동 현재 복음의료원이 있는 뒷자리에 위치하였고, 교실 10개 정도되는 긴 단층건물이었다.

2) 내가 그 학교에 갔을 때는 이미 총신(총회신학교)과 합동하여 간판을 총신 부산 분교로 돌려 붙인 후였고, 학생은 1,2,3 학년을 합하여 70명 정도였는데 그 중 10여명만 고신파 아닌 장로교 총회파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예과 1,2 학년생이 몇 명 생겼으며 3학년은 서울 총신(그 당시 용산역 앞의 전세 건물을 사용하였음)에 가서 졸업하게 되었는데 고신계의 많은 학생들이 총신파 신학교와 합한 것을 불평하였다. 그 이유는 “총신 학생들이 고신계 학생들보다 경건하지 않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부산에서 배우던 학생들이 서울에 가서 1년간 공부할 수 있는 비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님을 중심한 교계의 여론이 합동을 의미있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방침대로 시행하여 3학년 학생들은 서울로 올라갔고 2학년 이하의 학생들만 공부를 하면서 교파 또는 신학교 합동을 반대하다가 결국은 신학교만이라도 부산에서 졸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말들을 하였다. 당시의 교수님은 이상근 목사님, 박손혁 목사님, 홍반식 박사님이 계셨고, 오병세 박사님은 고신계에서 배출한 분이지만 서울 총신으로 가신 상태였으며 한상동 목사님과 하도례 선교사님이 계셨고, 다른 몇 분의 강사님들도 계셨다. 그 당시에 박윤선 목사님은 계시지 않았으니 이야기를 들은즉 주일에 도착하는 선교사를 영접하기 위하여 부두에 나가신 것을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이사회에서 문제시하여 해임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은 서울에서 소위 보류파(양측 교파 중간에 처한 몇 교회로 대표 교회가 충현교회인 줄로 알고 있으나 그 이듬해 박윤선 목사님의 부산 총신 분교 교장으로 오시면서 그 교회들도 합동측에 합류하였음)란 단체에서 신학교를 하셨다. 고신측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의식적 경건한 모양이 두드러진 감이 있었으나 김종한 전도사(당시 45세쯤)님 같은 기도의 역군도 계셔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 때에 학우 회장이 석원태 전도사였는데 그 분은 학생들 80%쯤의 지지를 받으며 고신 복교 운동을 하면서 1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3) 1학기를 마칠 무렵인 63년 6월 중순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신학교에서 받았다. 1학기 방학을 약 20일 앞두고 그런 일이 생겨서 금요일 오후에 전보를 받고 저녁 기차를 타고 토요일 오후 2시경에 집에 와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님의 연세는 52세였고, 나는 25세였다.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에 저의 집 안마당에는 백합화 향기가 진동하였으며 속히 모내기를 마쳐야 하는 이앙기이어서 동리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품앗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 온즉 교인들과 동리 사람들 사이에 장례 일자를 두고 의견이 대립된 상태였는데 동리 사람들은 평소에 아버지께서 술을 좋아하셨고, 술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모내기 작업을 계획대로 하고 3일장을 치르되 주일날 장례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교인들은 주일날은 장례식을 못하니 상주가 오면 오늘(토요일)하든지 월요일에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인들의 의견은 전혀 합리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하였는데 그 판단과 결정을 나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평소에 아버지께서 기독교를 핍박하시면서 꼭 주일날만 무슨 일을 계획하여 교회가는 일에 지장을 주는 것을 나쁜 일로 생각하였고 또 이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까 그런 장애는 없게 되었음을 생각하면서 믿음과 인정으로 볼 때 교회 중심으로 일을 하여야만 할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형편에서 행 5:4 말씀이 생각났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는 말씀인데 나는 이 말씀에 나의 형편을 대입시켜 보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핍박을 하실 때는 네 임의로 못하였지만 이제는 돌아가셔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는데 왜 내 임의로 못하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결단을 하고 “오늘로 장례를 치르자”고 하였다. 이 때 그 결정을 들은 동리 사람들은 다 비웃으며 돌아갔다. 모내는 논으로 들어가서 야유를 하며 모내기를 계속 하는 것이었다. 별안간 장례가 진행되어 오후 3시경에 염을 하고 그대로 출관하여 상여에 안치한 후 묘소가 가까운 외5촌의 산이므로 운구하기가 쉬웠지만 상여를 멘 인원이 한쪽은 3인, 한쪽은 4인으로 초라하게 운구되었고, 매장하는 작업도 쉽게 끝나서 토요일 오후 5시경 해가 높이 있을 때 끝내게 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 갔다.

4)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가 9월 개학이 되어 부산에 갈 때 광주와 나주에 들려 최영기, 최기채 전도사님과 같이 부산으로 갔다. 2학기 공부는 순조롭게 시작했으나 고신 복교운동이 더욱 표면화되었다. 그 방법으로 학우회 주최로 박윤선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기로 하였으니 그 기회에 박윤선 목사님을 교장으로 모시고 옛 고신을 다시 복교하자는 협의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국교회에 통지서를 보낸 상태였지만 그것이 순수한 부흥회가 아닌 정치적 목적임을 안 교수회에서 반대를 하였고, 결국 이상근 목사님이(박윤선 목사님과 사돈간임) 박목사님께 집회의 취지를 전화로 말하여 집회는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원태 전도사(이 분은 고신측에서 새로운 교단을 파생시켜 지도자가 된 줄 앎)는 학우회 앞에서 순수하게 은혜만 받으려고 하는데 학교측이 훼방을 하여 못하게 하였다고 불평을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로회 총회파 동료들과 함께 갔기 때문에 고신 복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이미 교통사고로 고인이 된 변순재, 박효배 등과 소수이지만 그 반대운동의 대열에 있게 되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2학기 공부를 마칠 무렵이 되었는데 11월 경쯤 어느 날 금요일 오전 경건회가 있어서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예배를 드린 자리에 한상동 목사님이 참석하시니 학생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한목사님이 교단 합동에 앞장 서신 분이고, 또 고신 복교를 반대하여 학생들의 뜻을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신학교 이사장님은 노진현 목사님이셨고, 부산 분교의 학장은 이상근 목사님(?)이였으며 한상동 목사님은 이사 중 한 분일 뿐이고 목회학 강사역을 담당하신 분인데 광고 시간에 앞에 나가셔서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은 “내가 고려 신학교를 다시 복귀하였은즉 학생들은 다음 화요일부터는 고려 신학생의 자격으로 등교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자 교수님들은 아무말 없이 교무실로 가셨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성토대회를 갖게 되었는데 고신 복교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80%에 달하므로 그들은 부산에서 졸업할 수 있기만을 원하였는데 복교까지 시켜주었으니 “밥위에 떡을 얹어 준 격이라”하면서 좋아하였고, 반대한 학생들은 “우리는 끝까지 총신 분교생이라”는 신분을 고수하기로 하였다.

6) 그 후 교수님들의 동정을 살핀즉 이상근, 홍반식 교수님은 한상동 목사님의 처사가 부당하고 불법인즉 우리는 총신 분교의 제도에 그대로 머문다고 하였는데 박손혁 목사님은 침묵한 상태에서 한상동 목사 편에 계신 듯 하였다. 주일이 지난 후 화요일에 등교한즉 고신교의 시간표가 따로 계시되었고, 그 당시에 서무주임은 김장로란 노인이었고, 급사로 한좌웅 청년(한좌웅은 한상동 목사님의 집안이라고 하였음)이 있었는데 서무주임은 고신측 시간표에 준하여 종을 울렸고, 한좌웅은 총신측 시간표에 준하여 서로 비슷한 시간에 종을 울려 번거롭고 혼잡한 모습을 보였다. 바로 그 전날쯤 이상근 교수님과 소수의 총신생들과는 미리 합의가 있었다. “우리는 총신 시간표에 따라 종전대로 교수를 받는다”하였고, 이상근 교수님은 시작 시간 10분 전에 들어오셨다. 정시가 되자 박손혁 목사님이 문 앞에 오셨다가 이상근 교수님이 먼저 와 계신 것을 보고는 그대로 가 버리셨고, 고신교측 학생들은 서로 “이래서 되느냐”하며 떠들고 이상근 교수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근 교수님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조직 신학과목을 교수하시다가 학생들이 교수를 받지 않고 떠드니까 교수받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시고 나가셨다. 이런 일이 2~3일 계속되며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니 긴급 이사회에서 총신 분교생은 따로 나와서 다른 장소에서 2학기 수업을 종료하라는 지시를 받고 부산역 근방의 모 여관 홀에서 두 주간 정도의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친 후 2학기를 끝냈다. 그 때에 이사회에서는 고신의 재단이 한상동 목사의 명의로 있음을 착안하여 그 학교를 포기한 것으로 짐작을 하였고 또 그렇게 되었다.

7) 학기가 끝났으므로 신학기의 통지를 기다리기로 하고 귀가를 서두르게 되었는데 그 때에 나는 내 생전에 가장 빈궁한 때를 만난 것이었다. 기숙사의 식사 한끼가 50원이었고, 시내 버스 요금이 25원으로 기억되며 그 당시에 혁명 정부에서 화폐개혁을 하여 돈의 단위가 1/100로 축소된 상태라 다소 혼돈함이 있었다. 기숙사의 식사를 몇 번쯤 거절한 기억이 있고, 그 당시의 밥맛은 참으로 일미였다. 작은 공기로 밥 한 그릇, 김 두 장, 나물국 반대접, 그리고 김치 조금씩 주는 것이었다. 식비와 버스 여비가 없어 어려움이 있던 중 서울에 계신 박윤선 목사님이 신학교 및 교계의 일로 부산에 다녀가시게 되자 큰 교회에 시무하시는 차문제 목사님(이민 가신 것으로 앎)이 박목사님의 상경하실 기차표를 사드리도록 나에게 부탁하셨는데 그 때의 기차는 재건호(지금의 새마을호) 오전 8시 차였고 나는 그 기차표를 사 드리기 위하여 학교에서 사용하는 할인권(교수, 학생용임)을 갖고 부산역에 새벽 5시에 가서 세 번째로 줄을 섰다가 6시경에 기차표를 사고 8시에 개찰구에서 기다려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 표를 전하고 할인혜택으로 남은 돈을 사용하였는데 그 금액은 기억되지 않으나 시내 버스를 10회 정도는 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자 서울에서 군생활을 같이 하였던 친구, 이광호의 편지가 왔고 전화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이광호는 군에서 헌병대에 있었고 용문산 계통에서 은혜를 받은 군후배 청년이며 한국신학대학 재학 중에 군에서 나와 친구가 되었는데 제대 후에 어떻게 연락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1년간 신학을 하는 동안 그는 제대하여 서울에서 어떤 회사(승산 식품공사)에 있으면서 그 회사에서 여러 가지 제품을 판매하는 중 성탄등(성탄절에 촛불을 켜서 대문에 거는 종이등)을 보내 줄 것인즉 부산교회를 상대로 팔아서 얼마의 이익을 먹고 원금을 회사로 송금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물건을 인수하여 먼저 각 교회마다 다니면서 견본을 보이고 주문을 받은 후 다음에 물건을 전달하고 성탄절이 지난 다음에 또 수금을 하였다. 약 10일 동안 그 일을 하며 식비와 차비를 벌고 기성복 빠이로 오바를 사 입고 고향에 간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 방문판매에 대한 경험을 얻으면서 신학생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부탁을 한즉 같은 교파에서는 상당한 동정을 하고 친절히 대해 주었지만 통합측 영락교회에서는 말도 못하도록 거절당한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 혼자 물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채은수 전도사님(현재 총신교수)과 함께 나간 일이 있었고 영락교회에서 거절당하는 형편을 본 채은수 전도사가 “이런 일을 힘들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을 때 나는 “경험삼아 해 보는 일이고 이런 일로 인내의 연단을 받지 않겠느냐”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8) 1학년을 부산에서 보내던 기간에 교회의 생활을 잊을 수 없다. 광주에서 떠날 때 오명동 목사님의 천거로 부산에 가서 이찬봉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이찬봉 목사님은 황해도 은률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신 분이라 이중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부암동 성지교회에 시무하시면서 혼자 사셨습니다. 주일마다 그 곳에 가서 점심, 저녁을 먹고 함께 자고 또 아침을 먹고 학교로 오므로 식생활과 정신적 휴양에 큰 도움을 받았는데 몇 개월 후에 그 목사님이 괴정 중앙교회로 전임을 하셨고 전임하신 때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신세를 지며 교회의 성가대를 돕기도 하였다. 신학생들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공부를 하기 때문에 시무 교회가 있는 전도사들은 주말이면 다 각자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광주에서 온 최영기, 최기채, 나 그리고 신학교에서 도서관 일을 맡은 채은수 전도사 등은 주일에 갈 곳이 없어서 여기 저기 흩어져 주일을 지키고 월요일과 토요일은 기숙사에서 운동과 산책을 하였다. 이런 생활로 1학년을 마치고 추운 겨울에 강화도의 본집으로 귀가한 것이다.

 

11. 부산신학교(총신분교) 2학년 시절

 

1) 집에 와서 겨울을 지나고 3월초에 새 학기 등록 통지서가 왔다. 새 학기 시작 예배를 부산 중앙 교회에서 드린다는 것과 부산, 대구 신학교 등 지방 신학교의 폐지로 편입생이 많이 있는데 그들도 시험을 쳐서 입학하여야 하므로 재학생들이 그 안내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광주로 들러서 최영기 전도사님과 함께 갔다. 개학 일을 하루쯤 앞두고 부산 중앙교회에서 편입생(재학생들도 전 학기에 이수한 과목의 시험을 친 듯 함) 시험의 출제를 맡은 홍반식 목사님이 예고 없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어제까지도 이상근 교수님과 신학기 시작 의논을 하셨는데 하루 사이에 한상동 목사님의 설득으로 고신측에 기울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출제 업무를 이상근 교수님이 맡아 일을 처리하시게 되었고, 그때부터 부산의 신학교는 총신분교의 입장을 그대로 취하여 박윤선 박사와 이상근 교수님이 부산에 상주하여 계셨고, 가끔 상경하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서울에 계신 박형룡 박사, 명신홍 박사, 최의원 박사, 한철하 박사, 김득룡 교수님 등이 부산에 오셔서 시간표대로 교수를 하셨고, 교장은 이상근 목사님이셨다. 그때 교사는 영도구 영선동 낭떠러지에 소재 한 현재 부산 신학교로 사용하는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작은 교실 두 개와 기숙사 방이 서너 개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대구 신학교의 폐교로 많은 학생들이 2학년에 편입되었고, 예과 1,2학년도 있었으며 3학년은 서울 총신 졸업반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2) 고신이 복교되면서 고신측에 그대로 있기를 원하였던 교회들이 생기게 되었고, 총신파와 합동한지 2년만에 다시 재분열을 하는 상태라 교회마다 분쟁과 분열이 비일비재 하였다. 그리고 총신분교가 영도에 있게된 즉 학교와 가장 가까운 제2영도교회 성도들이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에 대하여 많은 봉사를 하였다.

3) 그 봉사원 중에 김삼수 장로님의 맏자부님이 김상도 목사님의 부인이신데 시부댁에 왔다가 학교 기숙사 일을 돕게 되었다. 그 곳에서 탁송된 화물을 보셨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인천역에서 보낸 나의 이불 꾸러미였다. 그 사모님은 친정 고향이 인천 앞 영종도이기 때문에 인천에서 온 화물을 보시고 반가워하셨고, 또 나의 고향이 강화란 사실을 듣고 더 반가워하시면서 나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그 부군이신 김상로 목사님은 교계적으로 원로급에 속하는 목사님이셨고, 또 평화고등학교 교장직에 계셨다. 나중에 그 목사님 내외분은 나의 임지를 소개하시는데 귀한 역할을 하셨다. 그 때에 제2영도교회는 과거에 고신측이었지만 합동한 후 다시 분열하게 되었을 때 정길수 목사를 중심한 평신도 120명이 고신계로 노선을 정하였고 김삼수, 송양 장로님을 중심한 70명 정도의 교인들이 총신파에 그대로 머물게 되어 한 예배당에서 두 교회가 시간을 정하고 교대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이었고, 목사님은 김희수 노인 목사님이 계셨다. 2학년 때 기숙사에서 사생회장을 한 학기쯤 맡은 기억이 있고, 영도 대평동에 소재한 남성교회에 가서 주교사 교육과 찬양대원으로 봉사한 즉 그 교회 남전도회에서 월 5,000원씩 나를 도운 사실이 있었다. 그때 그 교회 시무하신 분은 황해도에서 피란 나오신 이찬영 목사님이 계시다가 온천 제일교회로 전임하시고 다시 황인섭 목사님이 오셨다. 그 교회의 박근욱 집사님(현재 장로님)과도 퍽 친해졌다.

4) 그러자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지금은 부산 광역시 대저동임)에 도도교회도 제2영도교회처럼 분규가 일어나서 고신측을 반대하는 성도 몇 가정을 위하여 교역자가 필요한 상태였는데 그 사실을 아신 김상도 목사님이 나를 추천하여 그 교회에 부임케 하셨으니 어려운 시기인지라 먹을 양식만 주어도 족할 입장이었다. 도도교회는 곡창지대 벌판에 옛날 건물로 예배당이 있고, 이향우 목사님이 시무하셨으며 교인이 30~40명 뿐이었다. 그런데 목사와 처녀들 다수가 고신파에 속하고 이석조 영수님과 박대근 집사님 댁, 그리고 구룡포 남쪽 장길리에서 이사오신 이연우 집사님 댁만 교단의 분교사태를 아는 고로 고신파 분열에 가담하지 않고 따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 단체를 위한 전도사로 처음 부임을 한즉 박대근 집사님 댁에서 나에게 방을 하나 주셨고, 내가 그 곳에 머물 때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더운 밥과 생선국을 끊여서 나에게 대접을 하시니 나는 그때부터 퍽 호강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또 월요일날 학교에 올 때는 필요한 쌀과 김치를 갖고 와서 자취를 하다가 나중에는 기숙사 밥을 사먹게 되었다. 나는 교회 부임 시작부터 대립하는 교회, 분열된 상태, 2부제 예배를 드리는 상태로 시작하였으니 이것은 퍽 어려운 연단이었다. 나는 전도사 초기에 어떻게 설교를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설교를 할 수 없는 무식한 상태에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대로 환영을 받은 것을 보면 하나님이 마른 막대기를 쓰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2학기가 다 하여가는 가을에 제2영도교회 김삼수 장로님이 계신 측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노인이시기 때문에 젊은 사역자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그 목사님이 나가시게 되었고, 후임자를 물색하던 차 어려운 교회에서 연단을 받은 지영근 전도사를 모시자는 의견에 따라 내가 제2영도 교회(지금은 부영교회 임)로 전임하게 되었고, 김해의 도도교회에는 친구 손중호 전도사를 소개하여 부임시켰다. 이때부터 제2영도교회 전임교역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신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점심을 먹으러 올 정도이니 이것은 하나님이 김상도 목사님의 사모님을 만나게 하신 인연 등 나를 인도해주신 섭리였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에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못하였다.

6) 제2영도 교회에 귀한 분은 이북에서 피난 나오셔서 겨우 생활의 질서를 잡고 예배당 뒤 모퉁이에 2층 판자집을 짓고 사시는 송양 장로님과 그의 부인 김순빈 권찰이시다. 이 가정은 믿음과 봉사가 풍요한 가정이었다. 그때 송양 장로님이 연세대학 영도 분교의 서무직에 계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는데 문제는 나에게 늘 따뜻한 밥과 고깃국을 제공하여 돌보아주신 것이다. 내가 신학교 2학년 가을철에 부임하여 이듬해 3학년을 졸업하고 그 다음해 2월 18일에 결혼을 하기까지 약 16개월간 식사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 나는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 가정은 음식 습관이 고기 찌개를 잡숫고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의 식탁에 채소만으로는 대접할 수 없다는 방침을 세운 가정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먹을 식탁에 고기가 떨어졌을 때 부인되신 김순빈 권찰님이(그 당시 초창기에는 장로 부인에게 권찰직만 주었음) 그의 딸 송능자 처녀의 외투를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으로 고기를 사서 저에게 제공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어려운 교회를 섬기며 신학을 계속 하였다.

 

12. 부산 신학교 3학년 시절

 

신학교 이사회의 방침대로라면 3학년을 서울 본교에 올라가서 배워야 하는데 그 사이에 학제가 변동되었다. 그것은 고신학교가 복교되고 고신파 교세가 다시 세력을 나타냄에 대하여 여기에 대응할만한 총신이 부산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부산총회 신학교”가 일원화 된 것이다. 일원화란 뜻은 서울 총신이나 부산 총신을 꼭 같은 권위로 인정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산에도 서울 총신과 대등한 학교가 운영된 것이고, 이 학교를 “부산 총회 신학교”라 부르고 양측 학교장을 박윤선 목사님이 하셨고, 졸업 회수는 서울과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박윤선, 이상근 두 교수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64년 12월 8일에 어려운 환경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경제적 어려움도 많았지만 졸업시험과 학점제도가 너무 엄격하여 많은 수의 학생들이 졸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14명만 부산 총신에서 졸업을 한 것이다. 나도 그때 재시험 기회를 주셔서 겨우 졸업을 하였다. 하나님의 특별 인도가 아니면 졸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1학년 때 고신계의 학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누구는 한 학기를 하고 몇 년 쉬다가 또 한 학기를 하였다”하며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어 떠날 때는 “다음 학기에도 올 것이냐?”고 묻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일찍 쓰시려고 하셨는지 군 생활 중 예과 2년을 광주에서 하게 하셨고, 27세 되던 12월에 총신을 졸업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빠르게 졸업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신학생 중에 연소자였다. 내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졸업식을 할 때에 나의 어머니와 외조모님이 오셔서 제2영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축하해 주셨다.

 

13. 결혼과 결혼 초기의 풍파

 

나의 청년 시절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속 이성을 교제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나의 가난한 환경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인데 이 상태가 부산에서 전도사 직임을 이행할 때까지였다. 신학을 졸업한 전도사가 도시에서 80명 정도의 교인을 지도하는 입장이 된 즉 매월 고정 수입과 사택으로 판자집 방 두 칸이 있음으로 결혼할 수 있는 기틀이 된 셈이며 또 교역을 함에 있어서 총각으로 머무는 것은 덕이 되지 않으므로 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런 여건이 되기 전에 전남 광주에서 두 처녀가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과 또 친구들의 권유로 강화군 삼산면에 거주하는 처녀를 선 본 일과 부산에서 강귀봉 전도사님(현재 괴정 중앙교회 목사)의 중매로 선을 본 사실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로 추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학교 졸업을 앞둔 가을에 경북 금릉군 아포면에서 교회를 시무하는 이영대 전도사(지금 대구에서 목회함)가 한 처녀를 소개하여 만나보고 약혼 선물을 교환한 후 혼인날짜를 정하려고 하였는데 그 약혼자가 약혼을 파기하고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유쾌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였고, 이어서 김계희 전도사님(현재 장전 제일교회 담임)의 중매를 받았다. 김계희 전도사님은 경북 금릉군 남면 월명동의 월명교회를 시무하면서 그 교회의 송 집사님의 2남 1녀중 3대 외동딸 김윤주(金潤珠)양을 소개한 것이다. 김윤주양은 아버지 김일조씨와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1941년 윤 6월 9일(양력 8월 1일)에 출생하였다. 그런데 그의 주민등록상의 생일은 41년 6월 19일로 잘못 기록된 것이다. 김계희 전도사는 박력이 있는 친구로 목회도 잘 하면서 중매도 적극성 있게 하였다. 같은 해 초겨울에 자신이 남성현역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하고 그 자리에 축하객으로 오신 송집사님(장모님)과 그 집안 어른들을 인사시킨 후 손중호 전도사(별세)와 함께 처녀의 집으로 가서 선을 보도록 인도한 후 자기는 신혼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는 완행 열차가 저녁에 1회뿐이고 밤에는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밤중에 기차로 왜관에 내려 택시 두 대로 나누어 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이웃 처가의 근족 집사님 댁에서 손중호 전도사와 숙박을 하였다. 아침에 전도사님 사택에서 15분쯤 당사자와 대화를 나누고 처녀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다. 결과는 부산에 간 다음 서로 연락하자고 말한 후 돌아왔다. 부산에 와서 한 주간쯤 후에 상대자의 편지를 받았는데 “가정의 여러 식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니 나의 결정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때에 나는 내가 상대방보다 무엇이 나은 점이 있다고 상대방을 싫다 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허락을 하고 65년 2월 18일에 월명동 교회당에서 당회장 정선보 목사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하였다. 그때에 경북 지역에 계신 친구 전도사님들이 몇 분 오셨고, 남자 하객으로는 부산에 계신 이찬봉 목사님이 가정의 어른처럼 참석해 주셨으며 집안의 가족들은 거리 관계, 교통 불편 등으로 어머니와 외할머니만 가신 것으로 기억이 된다. 결혼 후 처가에서 2일쯤 있다가 강화의 고향으로 와서 어른들게 인사를 드리고 또 잔치를 하였다. 그리고 멀리 경북에서 강화로 오는 여행을 신혼여행처럼 생각하였다. 그 당시 눈이 많이 와서 고향으로 들어가는 뱃길이 막혀 인천에서 초지에 내려 20리의 눈길을 걸었다.

문제는 새롭게 시작한 가정생활이 어떠하였는가?하는 점이다. 결혼한 지 2개월쯤 지난 후였다. 송도교회의 부교역자로 시무하시는 이상덕 전도사님이 신학교에서 나를 만나 결혼을 축하하시면서 다음 주 월요일 12시에 나의 부부를 초청하니 꼭 와 달라는 것이었다. 감사하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도 있었지만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 약속을 하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다. 아내는 월요일 아침에 미장원에 다녀와서 떠날 시간을 약 40분 남겨 놓고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나에게 문득 생각이 떠오른 것이 있어서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나를 초청한 이상덕 전도사님은 결혼을 조금 일찍 하신 분인데 결혼초에 그 사모님이 편찮으신 일이 있어서 간호도 하시고 두 아들(쌍둥이)을 양육하시는데 고생을 많이 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박효배 전도사님을 통하여 들었는데 이번에 가서 만나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는 방법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듣고 와야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하기 이전에 아내와 다투거나 갈등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심코 건설적인 의미로 이야기를 던진 것뿐인데 떠날 시간(11시경)이 되었을 때 자기는 안가겠다는 것이었다. 신혼 부부 초청사에 배우자가 안가는 것은 초청의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11시부터 약속 시간이 지난 12시 30분까지 같이 가 주기를 권유하였지만 여전히 듣지 않았으니 결국 초청하고 준비한 수고의 보람이 없도록 되었고, 또 이 전도사님도 오후에는 자기의 일정을 가지셔야 할 것이므로 결국 초청에 응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그대로 넘기기도 싫은 일이라 너무 마음이 상한 나머지 “해도 너무 한다 꼴 보기 싫으니 어디로 나가라”고 하였다. 이때 아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채 나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화가 흔하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는 전화가 없었고 송도 교회에는 전화가 있었는데 그 곳에 부탁하여 이상덕 전도사님이 사시는 주택으로 연락을 전해야 할 형편이어서 오후 1시 반경에 “못간다”는 연락을 하였다. 교역자의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고, 또 곁에 사시는 송 장로님댁에 알려지면 덕이 안되어 혼자 고민을 하다가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나는 영도구 영선동에 살았으므로 부산역 쪽으로 갈 것을 예측하였고, 혹 위험한 곳으로 가서 자해 또는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내 버스를 타고 부산역 쪽으로 가면서 찾아본즉 영도다리를 걸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 내렸고 아내를 만나서 “내가 심한 말을 한 것은 잘못했으니 돌아가자”고 권유하였으나 상관없는 사람과 만난 것처럼 태도를 취하면서 동행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나를 피하여 안 보이는 곳으로 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운 모양도 있고, 도저히 계속 추적하여 따라 갈 수도 없이 되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일 오후 2시 반경에 송 장로님 부인 김순빈 권찰님이 오셔서 사모님을 찾고 안부를 물으시기에 사실대로 말한즉 “우선 점심이나 잡수시고 찾아 나설 방도를 궁리하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 장로님 댁에서 늦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 오신 권찰님이 “사모님이 돌아오셨으니까 잘 위로하여 마음을 안정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점심식사를 하고 집에 온즉(예배당을 사이에 두고 양쪽 주택에서 거주하였음) 아주 들어온 것이 아니고 화장품 등 소지품을 갖고 나가기 위하여 들어온 것이었다. 권면하고 위로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작은 옷 보따리를 꾸려들고 또 나간 것이다. 1시간쯤 그대로 머뭇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갈 곳은 친정뿐일 것이고 기차는 낮에 출발하는 것이 없으므로 떠난다 하여도 오후 5시경 부산역이나 부산진역 외에는 출발할 곳이 없음을 알고 오후 4시경에 부산역으로 갔더니 그 대합실에서 기차표도 끊지 않은 상태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자”고 권하였으나 여전히 나를 피하여 역 밖으로 나와서 부산진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4~5m 상간에서 계속 따라간 즉 부산진역으로 들어갔고, 기차 시간이 임박하여 기차표를 사려고 하는 것을 강하게 만류하여 다시 밖으로 붙들고 나왔다. 이유는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는데 가도 그런 방식대로 가면 안되니까 처음 친정에 가는 사람처럼 준비도 하고 시간도 낮 시간을 택하여 가야 한다”는 주장을 말하면서 영도로 들어오는 전차를 탔다. 날이 어두워지려 하였다. 영도 종점에 내렸지만 10분쯤 집으로 걸어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므로 할 수없이 주위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는 모두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집에 온즉 저녁 8시경이었는데 젊은 여인을 여관에 혼자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가서 간곡하게 사정을 하여 밤 10시쯤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자 잠을 자게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친정으로 연락을 하여 장인어른을 오시게 하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므로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송 장로님 가족들의 권유가 있어서 나만 아침 식사를 송 장로님 댁에서 하고 오전에 시골에 계신 장인 어른께 “부산속래”라는 전보를 쳐 놓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언잖게 여겨서 또 친정 부친을 피하여 종적을 아주 감출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날 아침부터 조금 정상적 생활로 돌아간 듯 하였고, 나의 저녁식사를 위하여 시장을 보고 준비하는데 나는 그 저녁 식사를 경북에서 기차로 오시는 장인을 맞이하여 음식점에서 대접을 하도록 계획하고 있었고, 그 일에는 송 장로님이 동행하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먹지 않을 것이라”하였으나 이상하게 여기는 듯 하기로 “처가에 연락을 하였다”는 말을 하고 장인 어른을 맞이하기 위하여 부산역으로 나갔다. 그때 시간을 맞추어 송 장로님은 음식점에 대기하고 계셨다. 정한 시간에 장인이 도착하셨는데 “무슨 일이 생겼는가?”하여 크게 당황하시는 모습이어서 우 아무 일도 저질러진 일이 없음을 말씀드리고 송 장로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 집으로 모시고 와서 송 장로님과 약 반시간 이야기를 하시고 또 밤늦도록 그 동안 되어진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때 장인 어른은 퍽 불쾌하고 미안한 모습으로 주무셨는데 새벽에 내가 새벽기도회에 나갔을 때부터 일어나 앉으셔서 딸을 크게 책망하신 것으로 짐작되었다. 새벽 기도회를 끝내고 나온 즉 장인께서는 나에게 퍽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그 책임을 자네에게는 돌리지 않을 것이라”하시고는 새벽 진지도 잡수시지 않은 채 새벽차로 떠나시겠다 하여 택시를 태워 가시게 하였다. 이것으로 결혼생활의 1차 풍파를 겪었으나 앞으로 어떻게 잘 살게 될지, 아니면 누구의 책임이던 못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염려가 생겼다. 그래서 중매한 김계희 전도사에게 이런 사실에 대하여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후에 김 전도사가 나를 만났을 때 하는 말이 “자기 같으면 도저히 계속 살 수 없었을 것이라”하면서 “어떻게 참고 견뎠느냐”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이런 사실을 결혼 35년이 된 이 시간까지 거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결혼생활을 재미있게 만들지 못한 원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이 사실은 내가 제2영도 교회를 떠나는 일에도 약간의 부끄러운 자극제가 되었다. 앞으로도 부부관계에 대한 내용이 몇 차례 더 기록될 것이지만 이것을 기록하는 목적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남기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 옛 추억으로 기억만 할 뿐이지만 사람마다 성격과 가치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만 서로의 오해나 충돌이 없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4. 제2영도 교회를 떠남

 

결혼하던 해 여름에 이미 고인되신 한동희 전도사님과 또 다른 전도사님과 내가 송정교회에 시무하시는 이재기 전도사님(지금 은퇴하셨음) 댁에 놀러 가서 대화를 하는 중에 내가 시무하는 제2영도 교회에서 여 전도사님을 모시려고 물색중이란 말을 하였고, 또 대구에서 이OO 전도인이 와서 부산에 거주하는데 김삼수 장로님이 송도교회 최천구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그 분을 모시려고 준비하는 중이라는 말을 하였더니 한동희 전도사님이 펄쩍 뛰시면서 “내가 가덕도 기도원에 갔을 때 그 부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는데 너무 신비성이 강해 보이더라”하면서 그런 분을 모시면 교인들의 신앙을 크게 혼돈케 하여 좋지 않으니 절대 모시면 안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수석 장로님이신 김삼수 장로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린 후 참고하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 장로님은 최천구 목사님의 추천을 신임하시는 터라 나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몇일 후 부산노회가 모이는고로 거기에서 최목사님을 만나면 다시 확인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런 말이 먼저 이OO 전도인에게 알려지자 “교회가 큰 대우를 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봉사적으로 수고하려고 하였는데 전임 교역자인 지전도사가 자신을 좋지 않게 여기니 자신은 사양하겠다”하고 초빙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어 기대하였던 사역자를 모시지 못하게 되니까 김삼수 장로님은 2차, 3차 나에게 불만을 나타내시면서 “장로가 물색하였고 목사님도 흠을 잡지 않는데 전도사가 흠을 잡아 놓치게 하였다”고 하셔서 나를 퍽 섭섭케 하였다. 또 나는 그것까지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나를 아들처럼 사랑하여 1년 이상 식사를 제공한 김순빈 권찰님도 역시 나를 원망하면서 “일단 쓰고 보자 하였는데 모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전도사님 혼자서 심장전도 다 잘해 보세요”라고 말할 때 퍽 섭섭한 충격을 받았다. 사랑과 봉사를 많이 하시던 김순빈 권찰님이 섭섭한 말을 할 때 일시적 정이 멀어지는 감을 느꼈고, 그 시로 교회에 계속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3일 만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교역이 본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별 일도 아닌 일에 참지 못한 것이나 그만한 일을 잘 수습하지 못한 나의 졸렬함을 후일에 가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 때 부산을 떠나므로 내 인생의 길이 크게 달라졌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사임 의사를 단호하게 표현하고 송 장로님의 권면도 거절한즉 여러분 집사님들이 강하게 눈물로 만류하였지만 한 번 말한 것은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고집을 부리고 끝내 사임을 하고 1개월 안에 나갈 것이니 그 사이에 나도 나갈 길을 찾고 이 교회에도 들어올 사람을 구하라고 하였다. 나갈 길이란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아니면 쉽게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닌데 나는 그런 이치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신학을 다 하였고, 가족이 두 식구 뿐이라 어느 곳, 어느 약한 교회에나 쉽게 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어느 곳이나 인도하시되 먼저 청빙하는 교회가 저의 갈곳인 줄로 믿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서원기도였기 때문에 그대로 실천할 각오도 있었다. 그리고 이웃의 이윤화 목사님께 부탁을 드린즉 “갈 곳도 없이 사임의사를 밝힌 것은 잘못한 일이라”하시면서 거제도에 약 100명쯤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시일을 두고 소개하시겠다고 하셨다. 1개월 거의 다 되었을 때에 나에게 혼인 중매를 한 경북의 처가 동리의 교회에 시무하는 친구 김계희 전도사님께도 편지로 부탁을 하였더니 그가 경서노회(김천, 상주, 문경 지역)의 여러 교회의 형편을 알고 상주군 중동면 죽암리 죽암교회에 소개를 하면서 그곳은 무조건 이삿짐을 갖고 가면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대로 상주 죽암교회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가 65년도 초겨울이었고, 졸업한 다음해요, 결혼한지 약 반년 뒤였다. 도시 생활이 얼마나 편리한 것과 전기에 대한 고마움도 생각하지 못한 채 오지, 벽촌, 시골로 간 것이다. 문명의 차이조차 헤아리지 못할 만큼 순진하고 하나님이 보내시면 어디든지 간다는 사명에만 마음을 둔 것은 좋으나 인생의 삶에 대하여 앞뒤를 모르는 숙맥과도 같은 데가 있었다.

 

15. 상주 죽암교회에서

 

1) 죽암교회는 본래 고신계였는데 합동한 후 분리하지 않았고, 교세가 약 15명, 예배당은 산 밑에 상여막처럼 20평쯤 되었고, 교역자의 작은 방 한 칸의 시골 주택이 있었으며 교통은 상주에서 낙동쪽으로 50리쯤 가다가 낙동강을 배로 건너고 또 10리쯤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1년 동안의 생활은 참으로 은혜롭고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믿음 좋고 순진하게 충성하는 집사님이 다섯 가정쯤 있었는데 교역자에게 성실하게 봉사하였다. 가을에 채소가 많고 산에는 버섯이 많았으며 대추, 감, 땅콩까지 식생활에 풍요로웠다. 나는 그 곳에 있는 동안 강도사 고시에서 한 과목 탈락된 정치 공부를 열심히 하여 그 지역의 경서노회에서 66. 9. 14. 강도사 인허를 받았다. 그 이웃에 박정식 전도사님이 시무하시는 오상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서동걸 전도사님이 부흥회차 오셨다가 저를 만나 친하게 되었고, 죽암에 있은지 1년 후에 그 전도사님이 나를 자기 이웃에 같이 있기를 원하여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 교회였다. 이 성동결 전도사님은 신학 1년 선배요, 연세는 저보다 17년쯤 위이시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끝내시고, 지금은 은퇴목사로 전도 일에 수고하신다. 나는 시골 생활의 고독함을 잘 몰랐다가 죽암교회에 가서 외로움을 느꼈다.

2) 그때 내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그 곳에 갔다. 만삭이 되어 친정에 가서 해산하도록 하였는데 몇 일 후에 처가에서 오라 하여 갔더니 “죽은 딸을 낳아서 버렸다”고 하면서 나를 위로하였다. 가던 날까지 태동이 있었는데 아마 김천에서 월명동까지 가는 버스에서 자리도 못 잡은 채 피곤하게 시달렸다는 말을 듣고 그런 이유로 사산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아내가 죽암에 와 있을 때 한번은 하혈이 멎지 않아서 상주 적십자 병원에서 두 번 치료를 하였으나 여전히 효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구로 데리고 와서 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님의 소개로 대구백화점 근방에 있는 호산나 산부인과(권병일 박사)에 갔더니 잠깐 치료하고 약을 처방해 주므로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과연 의사라 하여 치료 방법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3) 그런데 그 곳에서도 또 아내와의 관계에서 크게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 한번은 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집사람이 “산에 올라 가서 꿩을 주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아내는 눈을 맞으면서 등산하는 즐거움을 맛보려 한 것일까? 그 당시에 꿩 잡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꿩 약을 뿌려 놓는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어떤 기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눈이 오는데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그날 저녁부터 밥도 안하고 잠도 따로 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이틀이 지났다. 아내가 고집스러운 성격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계획적으로 “폭력을 써서 두렵게 하여 굴복시켜 보아야 하겠다”하고 두어 차례 폭력을 쓰면서 말도 격동된 상태로 책망을 하였다. 효력은 커녕 오히려 입으로 거품을 뿜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들어가면서 몸이 뻣뻣해지려고 하였다. 너무 놀라서 사과를 하고 몸을 주물러 안정을 시키고 이웃에 사는 충성된 유정남 여 집사님(현재 김형원 장로의 모친이요, 권사님이며 사위도 목사임)에게 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집사님은 오셔서 자기의 생활 환경과 아내의 생활 환경을 대조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내 아내에게 유감의 뜻을 갖고 권면하였다. 그 집사님은 시집오셔서 2남 1녀를 낳고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장정 두 분의 시동생이 다 정신 이상자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시모님이 두 정신 이상된 아들을 데리고 용문산 기도원에 가서 계시고, 또 시무님은 노인이신데 분수없이 행하는 일이 있어서 그 환경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는데 사모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이런 태도를 취하느냐고 하였다.

3) 몇일 간의 시일이 지나면서 다시 회복되어 살아가는 중에 고향의 막내 여동생의 결혼일자가 가까워왔다. 그 기회에 처가의 장모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장모님을 죽암으로 오시게 하였는데 이것은 나와 처가의 동의로 계획한 것이었다. 아내는 시누이 결혼식에 강화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시간이 되어 권하면 안 가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고 장모님을 오시게 하였는데 계속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감정을 가중시키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장모님이 오실 때 시골에서 떡을 해 오셨는데 그 음식이 시골에서 늘 먹는 것이기 때문에 “안 해 오셔도 되는데 수고하며 해오셨습니까?”하고 인사드린 말을 “왜 그런 떡을 해 오셨느냐?”하는 부정적 인사로 오해하여 감정을 더욱 대립시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함께 시가의 잔치에 다녀와야 하는데도 여전히 가지 않겠다 하여 결국은 장모님과 나만 김천까지 가서 김천역에서 장모님은 집으로 가시게 하고 나 혼자 여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 다음 해 3월 11일은 내가 의성에 있을 때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가게 되었으나 아내는 같이 가지 않았다. 내 아내는 그 후 계속 시가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다가 수년 전부터 벌초할 일이 있을 때 협력하는 정도이다.

 

16. 의성 빙계교회에서

 

1) 상주 죽암 교회에서 강도사되고 1년간 생활하다가 66년 초겨울에 서동걸 전도사님의 소개로 의성 빙계교회로 전임하였다. 그 때 서동걸 전도사님은 15리쯤 떨어진 의성군 가음면 가음교회에서 시무하시면서 나를 가까운 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내가 1년 만에 죽암을 떠난 것은 퍽 미안한 일이었지만 강도사된 입장에서 목회 발전상 필연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죽암은 너무 오지였고, 또 교세가 약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빙계교회는 교인이 약 70명 모였고, 이종칠 장로님과 이상훈 장로님이 계셔서 조직상으로는 든든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때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교파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였고, 나 역시 보수적 입지가 대단하였던 터라 빙계교회의 이종칠 장로님과 융화되지 못하였다. 이종칠 장로님은 당시 통합측 신학교 학장이신 이종성 박사님의 집안 형제분이라 “이종성 박사도 에큐메니칼을 하는데 왜 나쁘다고 하느냐?”하시면서 항상 보수적 사상의 일치감을 주시지 않았고, 반대로 이상훈 장로님은 보수적 신앙으로 뜻을 같이 하셨다. 빙계교회의 특징은 청년들이 나무를 하여 장작을 쌓아 놓으므로 나무 때문에 불편이 없었으며 그 나름대로의 추억도 적지 않았다. 그 지역은 경중노회였고, 그 노회에서 67. 9.17.에 목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빙계교회에서 1년쯤 시무하고 목사가 된 것이다. 전도사님, 강도사님이란 호칭을 받다가 목사님이란 호칭을 받으니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점잖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목사될 때는 동기 동료자인 권기동, 이찬구 두 강도사와 같이 되었고, 노회 석상에서 안수 받을 때 축하객 성도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당시는 교통도 불편하였고, 또 노회 때에 목사 고시를 치면 합격이 될지 안 될지를 모르고 있다가 합격 발표와 동시에 안수를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예고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가운을 입는 제도도 없었고, 큰 교회 목사님 한 두 분 정도만 가운 입은 것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2) 빙계교회를 시무할 당시에 충격적인 일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혼을 단행하고 세례를 받으려는 김임순 성도가 있었다. 김임순 성도에게 세례를 베풀려는 몇 일 전부터 “그의 남편의 전처가 살아 있어서 언제라도 남편이 부르면 같이 살려고 대기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김임순 성도는 첩이란 뜻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분에게 그런 소문을 알리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을 하였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이혼을 하고라도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남매의 어린 자녀가 있었다. 그 때 나는 “남의 가정을 파탄케 하는구나”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후 그 일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 처의 친정 고장인 사미교회에 가서 사정을 물은즉 김임순 성도의 남편의 전처가 남편과 헤어진 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한 주간쯤 살다가 적응을 못하여 다시 친정에 와 있는 형편이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와서 사실 관계로 이혼의 사유가 있었으므로 세례를 받으라 하여 받은 일이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이종칠 장로님의 따님이 기독교 장로교파의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기독교 장로교파는 성경 유오설을 주장하는 교파라 하여 천주교처럼 결혼을 꺼리는 상태였다(교회 헌법에도 천주교인과의 혼인은 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 그 때는 내가 목사되기 전이라 이웃교회의 정석현 목사님이 주례를 하시게 되었다. 정 목사님은 그런 문제에 대한 관행을 더 알아보시기 위하여 나를 도리원교회에 계신 소종렬 목사님께 보내어 알아보게 하셨다. 그래서 소종렬 목사님을 찾아가 여쭈니 확실한 방도를 알 수 없고, 의성의 큰 교회 목사님 딸도 그런 상대자와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당회장님께 그대로 알렸는데 정 목사님은 결혼식 30분 전에 기장파 교회 신랑을 불러서 기장파의 12신조가 장로교파의 12신조와 같은 것을 근거로 하여 “12신조를 그대로 믿는다”는 고백서를 신랑으로부터 받고 결혼주례를 하셨다. 이모 저모로 목사 생활은 단순하지 않구나 하는 것을 그때에 깨닫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빙계교회에서도 부부간의 갈등스러운 일이 있었다. 가음교회에서 서동걸 목사님이 청도군 매전면 동산교회로 전임하여 나가시자 즉시 그 교회에 김진홍 목사님이 오셨다. 그 김 목사님의 장모님 회갑 때 그 사모님은 딸만 있는 맏딸인데 “저고리 한 가지만을 선물하였다”는 말을 하셨다. 그만큼 경제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시기에 나의 장인, 장모님 회갑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요구대로 성심껏 선물을 하려고 노력하였고, 의성읍에 가서 양단 한복 한 벌씩을 하도록 하여 과히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선물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는 딸로써 풍요롭게 못해 드리는 일로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었다. 그 때도 “그만 살고 나간다”는 말을 하고 잠시 대문 밖을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사하고 “임신 중에 있는 아이를 유산시키겠다”고 강하게 주장을 하여 나로 하여금 퍽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강하게 만류하여 끝내 결행하지 못하고 동곡교회로 전임한 후 낳은 아이가 첫 아들이요, 지금 32세 된 덕유이다.

1년쯤 되었을 때 의성 가음교회에서 청도 동산교회로 옮기신 서동걸 목사님이 동산교회 근방에 있는 청도군 금천면 동곡교회로 또 나를 소개하여 67년 11월 쯤에 이사하였다. 동곡교회는 면소재지 교회이며 빙계교회보다 조금 큰 교회였다.

 

17. 동곡교회에서 3년 반의 생활

 

1) 그 당시 청도의 교통은 비포장도로에 버스가 간헐적으로 다녀서 불편함이 있었으나 면소재지요, 또 5일 마다 시골장이 서기 때문에 살만 하였지만 상주와 의성에서 2년 동안 전기가 없는 불편을 겪었는데 그 곳도 역시 발전하는 전기를 몇 시간만 주기 때문에 역시 불편하였다. 교인은 100명쯤 모였고, 장로님은 김종수, 김원조, 우도일 세 분이었다. 우도일 장로님은 같은 지역에 소재한 작은 성결교회에서 동곡교회로 합쳐 오신 분인데 에큐메니칼 사상이 있고 꼼꼼한 성격이어서 다른 두 김 장로님의 집안과 잘 동화되지 못하는 것이 흠이었다. 김종수 장로님의 후처인 서갑선 집사님은 덕이 많은 분으로 집안을 융화시킬 뿐 아니라 교역자 섬기는 일도 특별하였다. 과일과 잡곡을 보내오실 때마다 잡곡 속에 돈봉투를 넣어 보내신다.

2) 나는 그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목회상으로 감당하여야 할 권징상의 어려움을 당하여 교회법의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고, 첫 아들을 낳았으며 그 주위에 있는 박곡교회, 방지교회, 김전교회 등 여러 교회의 당회장을 하였고, 또 동곡교회 예배당을 지었다.

3) 내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부터 우도일 장로님이 다른 성도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너무 깐깐하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지 못한 다른 성도들에 대하여 자주 지적을 하니까 이런 일들을 좋지 않게 여긴 것이다. 그러자 그 주위 야산이나 과수원 울타리에 족제비 덫을 놓는 일로 교회의 여 집사님의 과수원 울타리를 서성댄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게 되자 그 여집사가 항의를 하고 우장로와 큰 언쟁을 하였고, 이 일을 동리 사람들이 다 목격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자 많은 교인들이 우장로의 대표 기도나 시무를 원치 않으니 새로 부임한 목사가 그것을 해결하라고 요청해 오게 되었고, 그 대표자가 김종술 집사였다. 그래서 나는 일차적으로 “우장로의 시무를 통제할 만한 죄건이 못된다”고 설득하였지만 듣지 않고 만일 교인들의 뜻대로 처리해 주지 않으면 목사님의 청빙을 묻는 투표에 반대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먼저 부임한 후 다음 노회가 열릴 때 청빙투표를 하는 사례가 많았다. 나로써는 퍽 답답한 일이었다. 그 때는 경중노회에서 경청노회로 이명증서를 전달하기 이전이므로 당회장권도 갖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자인제일교회에 시무하시는 당회장 이현달 목사님께 여쭈었더니 퍽 난처해하시면서 당회장권을 일임하니까 어떻게 처리하든지 하라고 하셨다. 이현달 목사님은 총회적으로도 법을 많이 지도하시는 분이었다. 그 때 그 교회의 이웃에 처 6촌 언니의 남편인 조만식 목사님이 계셔서 만나게 되었고, 또 교회 사정을 말하고 정식 당회장도 아닌 제가 그 사건을 처리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냐고 여쭌즉 그것이 불법이라도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못한다고 사양하였다가 교회를 떠나라고 한다면 입장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당회 재판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고, 또 재판을 한다 해도 시무를 중지 시킬만한 죄가 못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적은 죄로 큰 벌을 주는 부당한 재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당회장권 없이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일단 처리는 내가 하되 3월 노회때 당회장권을 받아 가지고 하겠다 그때에 교인들이 원하는대로 처리를 안 할 것 같으면 청빙을 안 해 주어도 좋다”고 하였더니 차츰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그 이유는 “법에 익숙한 이현달 목사도 안 하려는 것을 지목사가 하겠다는 용기를 보이니 우선 청빙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도 공의롭게 행하고 우장로를 억울하게 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장로는 “지목사가 당회장이 되면 반드시 다수 교인들의 편이 되어 자기를 치리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그 가족들과 측근들이 나의 청빙에 부표를 던졌지만 결국은 그 수가 많지 않으므로 임시 목사 청빙을 받았다. 그 때 당회에서는 정직 시킬만한 죄건이 못되니 자진 휴직을 권유하기로 하여 2, 3차 권하였으나 “죄대로 벌을 받을지언정 자진 휴직은 안 하겠다”고 하였다. 이 상태에서 주일 공예배 대표기도를 시키면 교인들이 “아멘”하지 않고 다 나간다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 우장로의 집에 가서 12시가 넘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권면한즉 비로소 한 달만 자숙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그 주일 예배의 위기를 모면한 후 한 달동안 우장로와 함께 열심히 심방하면서 우장로의 변화를 알리고 교인들의 거부감을 많이 유화시켰는데 한 달이 되었을 때 김종술 집사 한 사람이 여전히 유화되지 않는 것이다. 김종술 집사는 가족과 집안이 많아서 교회적 비중이 큰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김종술 집사를 계속 설득하였으나 설득 당하지 않았고, 우장로는 “집사 한 사람의 불평으로 인하여 목사가 할 일을 못하면 안된다”하면서 대표기도 복귀를 계속 추궁하는 것이었다. 이 때 나는 우장로를 먼저 권면할 때처럼 또 사정하기를 “한 달만 더 자숙하면 그 때는 책임을 지고 시무회복되게 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계속 거부하기로 만일 한달 후에 시무 복귀를 못 시킨다면 내가 어떤 추궁도 받을 것이라고 하여 겨우 한 달 연기를 더 하고 그 사이에 김종술 집사가 이해하고 협력하기를 기다리는데 그 사이에 김종술 집사에게 두 가지 우환이 닥치면서 그가 스스로 돌이켜 목사의 입장에 협력하겠다고 돌아오므로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우환이란 김종술 집사가 자기의 과수원 옆에 있는 작은 나무를 한 벤 것이 삼림법 위반으로 입건이 되었고, 또 한 가지는 이웃에 홀로 사는 부인 집에 잠깐 들어 갔다 나온 일에 대하여 궤휼스러운 소문이 나서 괴로움을 당하게 되어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알고 이웃과 목사와의 관계를 화해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 때 이런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섭리로 해결해 주시는구나 하고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에 김종술 집사님(지금은 장로)과 더 친해졌다.

3) 이듬해인 68년 봄에 대구 대봉교회 시무하시는 유도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였는데 부흥회하던 새벽 3월 23일에 큰 아들 덕유를 낳았다. 그리고 이웃 교회의 당회장을 하면서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있었다.

4) 박곡교회는 오래된 작은 교회인데 박정식 장로님이 계셔서 덕을 많이 세웠으나 그 분은 음성 나환자였다. 한 번은 그 교회의 집사님 딸이 믿지 않는 청년에게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주례를 부탁 받았는데 내가 믿지 않는 자와의 혼인주례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퍽 난처하게 되어 박장로님과 의논을 하는데 결국은 “혼인행사를 파할 수는 없으니 나라도 주례를 할 것이니까 나중에 나를 권징해 주소”하여 그대로 묵인하고 결혼식 지난 후에 또 가서 그 장로를 6개월간 정직에 처한 일이 있었다. 이 문제를 서로 웃으면서 시행하였다. 또 그 박곡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갈라진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에 김광덕 장로님이 계셨는데 두 교회가 다시 합한다 하여 합동하는 합의서를 작성하고 떡을 나누어 먹으며 친교를 하였는데 합동한 후에 통합측 교역자를 모시고 교회를 다시 통합측으로 돌린다는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소식이 나와서 다시 파기한 일이 있었다.

5) 동곡 이웃에 방지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개척을 시작한 지 몇 년 안 된 교회였다. 69. 1. 2. 방지교회의 이은경 처녀가 유천교회 김장로님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어 신랑의 삼촌인 통합측 교단의 김목사님과 또 같은 통합측 유천교회 김목사님이 함께 그 결혼식에 오셨고, 나는 신부측 교회 당회장이므로 결혼 주례를 맡았는데 그 분들은 나보다 수년 선배 목사님들이지만 내가 속한 합동측 교단에서는 합동측 교단의 성직자를 강단에 세우지 않게 하였으므로 결혼 순서에 기도나 축도 등을 부탁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는 뜻으로 미리 말씀을 드렸더니 유천교회의 김목사님이 자신은 천주교 신부와도 강단을 교류하여 예배를 드린 일이 있는데 같은 장로교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느냐?하시면서 같이 온 유천교회의 청년들과 하객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종교를 개혁한 칼빈 선생님이 통곡을 하실 일이라”고 응수하였다. 따라서 그때 그 결혼식은 참으로 민망한 분위기에서 마쳤고, 피로연 석에서도 아무말없이 음식만 먹고 헤어진 일이 있었다.

6) 70년 11월 27일에 두 번째로 딸을 낳고 이름을 “사라”라고 지었다. 사라는 아브라함 같은 훌륭한 믿음의 남편을 만나야만 행복하리라고 느꼈다. 사라는 그 머리통이 약팍한 편이어서 두뇌개발을 염려하였으나 그것은 기우였고, 그렇다고 하여 철이 일찍 든 것도 아니었다.

7) 또 71. 1. 16.에 같은 교회에서 이광석군과 이승옥양의 결혼 주례를 하는데 신부가 지나칠 정도로 땀을 흘리며 어지러워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주례를 간단히 끝냈는데 71. 1. 30.에 시가가 사는 운문산 계곡으로 트럭을 타고 가다가 눈길에 차가 낭떠러지로 미끄러져서 두 사람이 다 죽었다. 그 때 그 신랑이 믿음생활을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혼인을 한 것 같았다.

8) 또 그 이웃에 김전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시무자 박동석 전도사가 이웃의 동산 기도원(하태호 원장)에 자주 다녔고, 동산 기도원은 청계산 기도원 원장이신 이금자 권사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금자 권사는 새로운 계시를 받아 전달한다는 말이 있어서 나는 그 곳에서의 집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산 기도원의 하태호 원장과 잠시 갈등을 한 일이 있었으나 잘 화해되었고, 박동석 전도사는 자기 교회의 집사 아들(청년)이 정신병자로 있었는데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면서 폭력적 언사를 쓴 일이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귀신병자를 굴복시킬 목적으로 폭언이나 구타를 하지만 그것은 귀신을 굴복시키는 방법이 아니다. 그때에 김 전도사는 착한 사람이라 과한 책망을 하지 않은 줄로 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교회의 담을 쌓을 때 정신병자 청년의 어머니(집사)가 놀고 있는 그 아들에게 전도사님의 일을 도와 드리라 하여 괭이를 갖고 와서 일을 돕는척 하다가 괭이로 전도사님의 머리를 쳐서 즉사시켰다. 그래서 그 시신을 본 집으로 옮긴 후 당회장인 내가 장례를 집례하였는데 그 당시 초여름이었고, 시신도 험하였지만 나는 매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겨우 장례를 치른 기억이 난다. 그때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알 수가 없다. 그 후 그 교회에는 박우현 집사(그 후에 목사가 되었음)가 있었고, 또 한창열 전도사(그 후에 목사됨)가 시무를 하였는데 이들도 동산 기도원(신앙)과 연연하여 나의 지도를 반대하며 탈퇴하려고 하는 것을 겨우 만류시킨 일이 있었다.

9) 큰 아들 덕유가 돌이 되었을 때는 69년 3월 23일인데 그 무렵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가산을 정리하시고 나에게로 합류하셨다. 그때 외할아버지로부터 상속받으신 논 서마지기를 팔아서 12만원을 갖고 오셨는데 그 당시 한달 생활비는 12,000원 쯤 받은 것 같고 목사가 돈을 저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 돈으로 책장, 녹음기, 냉장고 등을 사서 없애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잘 한 것 같지 않다.

10) 나는 동곡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보다가 고전 15:7~10 말씀에서 바울의 겸손에 대한 교훈을 받고 크게 감동하였다. 바울 사도가 자기를 가르쳐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등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목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처럼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동곡교회에 있으면서 대구시 등 도시로 임지 옮기는 부탁을 한 것을 후회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있는 자리에서 충성할 뿐 도시나 큰 교회로 가기 위하여 부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그렇게 시행하였고, 때로는 크고 좋은 교회가 비었을 때 “나를 거기에 소개해 주시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기에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입장을 아시고 적당한 때에 길을 인도해 주셨다.

11) 나는 목회를 하면서 배척을 받거나 교인들이 계속 시무를 원치 않으면 즉시 나온다는 다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 목사로 청빙되면 그 임기가 1년이다. 위임 청빙을 받으면 또 한 교회에 오래 있을 각오를 하여야 한다. 나는 시골에 오래 있을 생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해마다 위임을 사양하고 2년까지만 임시 목사 투표를 하여야 하는 것을 해마다 하여 목사된지 6년 만에 9회의 청빙 투표를 받았다. 목사될 때 빙계교회에서 1회, 동곡교회에서 4회, 그 다음 구읍교회에서 3회, 남일교회에서 1회 하였다. 목사가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데 누를 끼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95년도에 한남교회를 사임할 때도 작용하였다. 교인을 내쫓고 자기를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이기주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12) 동곡교회에서 아담한 예배당을 짓고 그 이듬해인 71년 봄에 청도군 화양면 구읍(화양읍)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때에 사라를 낳은 지 몇 달 후였고, 원복순 집사가 안고 짐차 앞에 앉혀 같이 갔다. 전임의 동기는 구읍교회의 장덕채 장로님이 나를 초빙하였는데 나는 “동곡교회에서 시련도 받았고, 예배당도 지었으니까 할만큼 하였고 또 구읍교회에 가서도 예배당을 한 번 더 짓겠다”하는 욕망이 있었다. 내 나이 30 초반이라 향토예비군 훈련 대신 경목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동곡에서는 월요일 아침 9시 (청도 경찰서 조회시간)까지 청도 경찰서에 가서 설교할 수 있도록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설교를 못하는 경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구읍교회는 청도읍에서 3㎞ 떨어진, 교세가 비슷한 교회였다. 장덕채 장로가 나를 초빙하려고 부탁하러 오던 전날 밤에 내가 시무하는 동곡교회 마당과 뒷 개울이 큰 비로 인하여 물에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꾼 후 전임 부탁을 받고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교회를 옮길 때마다 시무하는 교회의 예배당이 태풍에 피해를 입는 꿈을 꾸었다. 구읍에서 대구 남일교회로 갈 때도 예배당 지붕이 태풍으로 날라가는 꿈을 꾸었다. 또 남일교회에서 성남의 한남교회로 전임하게 될 때도 역시 같은 꿈을 꾸었다. 시무하던 예배당이 수해나 풍해를 당하면 반드시 교회를 떠나라는 계시인 것일까?

 

18. 구읍교회에서의 생활

 

1) 71년도 이른 봄쯤 딸 사라가 갓난 아기였을 때 구읍교회에 부임한즉 예배당, 사택이 퍽 초라하였다. 동곡과 구읍교회 사택이 다 서향집이어서 봄, 여름이면 햇빛의 불편을 느꼈는데 구읍교회 사택도 서향집이었다. 가자 마자 불쾌한 입장을 느낀 것은 내가 장덕채 장로의 초빙 권유를 간곡하게 받고 부임을 하였는데 그의 형 장복채 장로는 “내가 잘못 부임해 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동생 덕채(장로)가 일방적으로 청해왔다는 것이다. 그때도 청빙투표를 받지 않고 먼저 간 것이다. 그리고 임시 목사는 1년직인지라 엄격하게 1년에 한 번씩 투표하여 재 청빙을 확인하였다. 또 동곡과 구읍에서 7년을 보내며 위임을 하지 않은 것은 그 곳에서 영구적 목회를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요, 결국 목사될 때부터 대구의 남일교회로 전임하기까지 년년히 아홉 번 청빙투표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 복채 장로가 나를 싫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동생 장로와의 불화 관계로 사사건건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 장로는 나를 많이 위로하였고, 형 장로는 어쩔 수 없이 따르는 형편이었다. 그런 중에서 예배당을 지으려니까 돈도 없고 뜻도 맞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 산파역을 한 분이 손순금 집사였다. 청부업자 김도득 장로가 공사비를 독촉할 때 목사가 크게 곤욕 당하는 것을 보고 여기 저기서 돈을 빌려 공사비를 지불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예배당을 쓰고 있다. 구읍교회는 동곡교회보다 곡식이 더 풍성하여 매월 한 식구당 쌀 한 말씩 주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다섯 식구분 한 가마씩 받으므로 양식이 풍요로웠고, 복숭아, 사과가 많았으며 또 매주 월요일 오전 9시에 가까운 청도 경찰서에 나가 경찰관들을 40명쯤 모은 자리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때에 천주교인 조기제 서장님은 개신교 젊은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로 대우하며 설교 시간에 앞자리에 서서 말씀을 들으므로 모든 부하 경찰관들에게 하나님과 성직자의 권위를 세워 주므로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 때도 설교를 마치고 나면 “좋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받았는데 30년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 때에 많은 지성인들이 나를 어떻게 수용하였는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지금은 더 잘 할 것 같고 주관적 설교를 할 것 같은데 들어 줄 사람들이 적은즉 대신 글로 써서 남기는 것이 그 대책이다. 구읍교회에서도 인상깊은 일들이 많았다.

2) 예배당을 지을 때 장복채 장로는 마지 못하여 협조는 하나 불평을 많이 하였고, 연로하신 김용한 장로님과 장덕채 장로의 협력과 또 손순금 집사(현재 권사로 지금도 친교를 나누고 있음)의 수고를 잊을 수 없다.

3) 그런 중에 또 남산골에 교회 묘지를 사 놓았다가 별로 필요가 없어서 내가 대구 남일교회로 부인한 후 그 묘지를 남일교회에서 사도록 하였다.

4) 72. 2. 18.은 구읍교회 사택에서 둘째 아들 성유를 낳았는데 난산을 겪으므로 아내를 잃을 것으로 각오하는 마음까지 가진 일이 있었으나 잘 해산하고 장시간 치료하여 회복이 되었다. 산모가 산욕열로 고생을 한즉 항생제를 복용하므로 젖이 없어 성유는 모유를 빨아보지도 못하고 양육을 받았다. 이웃에 사시는 정옥기 권사님이 목사에 대한 봉사를 잘 하셨다. 한 달에 한 두 번 소고기를 보내 주셨고, 처음으로 목사 가운을 선물해 주셔서 목사된 지 약 7년 만에 가운을 입었으며 그 가운을 지금도 사용한다.

5) 내가 경청노회에 6년쯤 있으면서 두 가지로 두각을 드러냈다. 하나는 내 생활비를 늦게 받으면서도 총회시책대로 경상비의 11조를 철저히 상납한 것이요, 또 한 가지는 군대에서 기소장을 쓰던 솜씨로 노회 회록 서기를 잘 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73년도 3월 노회때에 임원을 개선하게 되었는데 노회장에 올라야 할 부노회장이 타 노회로 전임을 가고 서기는 신만선 장로였기 때문에 그 다음 서열의 임원인 회록 서기가 회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요즈음 같이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판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전국 노회장 회의에 참석하여 대전 관광 호텔 목욕탕 안에서 순천노회의 연로하신 목사님이 저의 노회를 묻고 “노회장 대리로 왔느냐?”고 하셨을 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즉 내 나이를 묻고 깜짝 놀라시면서 “한국교회 100년 가까운 역사 속에 35세 노회장이 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하시기로 어리석은 마음에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 때 노회장을 한 것이 대구 남일교회로 전임하는데도 한 몫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6) 일반 주민 뿐 아니라 교역자들도 자녀들의 교육문제나 생활향상 문제로 도시에 가서 살기를 꿈꾸었는데 나는 도시로 나가는 일에 대하여 감히 꿈꾸지 못하였으나 경청노회(경산군 청도군 지역의 교회로 구성된 노회)에서 같이 시무하신 현명길 목사님이 청도읍 중앙교회를 시무하셨고, 현목사님은 고향이 평북이요, 나는 경기도인지라 경상도 방언을 쓰지 않으므로 친근감을 느꼈는데 현목사님이 나보다 2년쯤 먼저 대구 태평교회로 전임하셨다. 그리고 태평교회와 한 노회 소속인 대구 남일교회에 교역자 이동문제가 생겨서 우선적으로 나를 그 교회로 인도하시게 되었다. 그때가 73년도 11월이었다. 덕유는 6세, 사라는 4세, 성유는 두 살, 미라는 임신 중이었다.

대구 남일교회는 이북에서 피난 나오신 김창환 장로, 신병설 장로, 홍신숙 권사님이 중직자였는데 그 분들이 대구노회(당시는 경북노회) 소속 남흥교회를 설립하고 믿음생활을 하는 중 중혼자 징계 문제가 노회로부터 대두되어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이북노회인 황동노회에 예속하여 태평교회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남일교회에 교역자가 없을 때 경북지역의 목사나 이북에 고향을 둔 목사를 피하고 타지역 목사를 모신다는 원칙에 의하여 내가 청빙을 받은 것이다. 나는 대구로 나갈 길이 생기자 하나님이 큰 아들 덕유의 초등학교에 들어 갈 시기에 인도하시는 은혜로 믿고 가게 되었고, 또 그 당시 내 나이가 35세였는데 경청노회장을 하고 있으면서 전임하였고, 74년 3월 노회 때 노회장직을 이임하고 황동노회로 이명하였다.

 

19. 남일교회에서의 14년 생활

 

1)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남일교회는 몇 분의 규합으로 새로 설립된 지 7~8년 된 교회이고, 홍신숙 권사님이 예배당 대지와 건축을 전담하고 김창환 장로님이 철물공사, 신병설 장로님이 목수 비용을 협조하여 대명 8동 15번지 언덕에 작은 예배당을 우뚝 세웠으나 교인은 100명 미만이었고, 홍 권사님이 경영하는 희락원(지금 경북 어린이 집)의 고아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였다. 도시 교회이지만 재정적으로는 시골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나 홍 권사님의 교역자 섬기는 특별한 봉사에 힘입어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다. 남일교회는 “이북사람들의 교회다, 고아원 교회다”하는 등의 좋지 않은 여론을 감수하여야 하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교회 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홍 권사님은 사회 사업가로써 이승만, 전두환 대통령의 표창도 받고 교회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편이어서 장로 한 사람의 힘을 과시하였다. 한 가지 거리끼는 것이 있었다면 홍 권사님이 사재로 예배당을 짓고, 예배당 출입구 위에 “홍신숙 권사 회갑 기념 성전”이란 글을 새겨 넣은 것 때문에 “개인 우상 교회”라는 비난이 나오게 한 것이다. 봉헌한 물건에 그런 표시를 안 내면 더 좋을 것이지만 그런 표식이 있는 건물을 꼭 사용해야만 하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결국 없애기로 허락을 받았는데 신병설 장로님이 그 간판을 떼내는 작업을 손수 감행할 용기를 내지 않으므로 그대로 둔 상태에서 나는 그 교회를 떠났다. 여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겨야만 하는 연약, 그것을 문제 삼아 신앙의 타격을 받는다는 교인들의 연약이 성숙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높이 나르는 독수리가 어떤 장애물도 구애받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도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나가야 할 것이다. 홍신숙 권사님은 한 달에 계란 30개씩 14년을 봉사했고, 그 외에도 의복, 식사대접 등 친자식처럼 나를 섬겼으며 매주 화요일 아침마다 고아들에게 설교를 하고 홍 권사님과 아침식사를 하는 대접을 받았고, 덕유를 제외한 다섯 아이들이 다 홍 권사님이 경영하는 어린이집, 유치원의 교육을 무료로 봉사받았다. 이 사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은혜였다.

2) 김 장로님, 신 장로님, 조장환 장로님과의 추억도 많지만 전이석 장로님의 추억은 더욱 감동이 컸다. 전 장로님은 평북 선천의 장로님 아들로 남한에 와서 처음에는 믿음생활을 잘 못하시다가(부인 계희란 권사님) 노년기에 고향과 부모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부친의 장로직이라도 계승하여 효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하시고 새벽기도 등 믿음생활에 열심하셨다. 노구의 몸으로 약 6~7년 노력 끝에 장로가 되셨고, 장로로 준비하는 기간에도 자전거 사고, 수술을 하셔야 하는 질병 등으로 큰 시험을 당하셨지만 잘 승리하여 장로가 되셨고, 보람된 생활을 장식하셨다. 신병설 장로님은 내가 강화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묘를 한 곳으로 이장할 때 노회 참석차 함께 서울에 오셨다가 나의 이장하는 일을 도와주신 것을 잊을 수 없는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 남일교회의 14년 생활은 짧게 지나간 세월 같지 않았다. 교회의 대지도 넓히고 사택도 어려운 여건에서 변동 건축하는데 작은 예배당을 짓는 것만큼 힘들었으며 허술한 사택에서 네 차례나 연탄가스 위험을 당하여 어머니는 병원에서 회복되셨고, 아내와 미라와 대환이도 사경을 헤매다가 소생한 일이 있었다. 여러 장로님들과 황선자 집사님 등등 기억하여야 할 성도들이 많은데 다 기록하지 못하는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3) 그 중 고정옥 권사님의 믿음과 사랑과 봉사의 뜻은 지금까지 계속 된다. 고 권사님의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노력하신다. 고 권사님의 부군은 50대에 별세하셨는데 공무원 경력을 가진 총명한 어른이시다. 다만 술로 세월을 보내어 모든 가족들에게 괴로움을 주었지만 고 권사님은 한 번도 부군 앞에서 짜증을 내시거나 불평스런 표현을 나타낸 일이 없다. 이것은 남편을 하늘처럼 모시는 동양적 전통에 의함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성경에 준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의 본을 보이시기 위함일 것이다. 따님들도 다 교육 공무원이 되었지만 외아드님 홍종인 박사는 중학교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내가 지켜보았는데 경건과 학문으로 정진하여 서울대학, 미국 콜럼비아 대학을 나와서 지금 서울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교수직도 물욕에 따를 수 있으나 홍 교수는 청념 결백하게 산다는 말을 들었다. 고 권사님의 막내 따님 홍신애씨가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 세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에 처녀들이 세례 받을 때는 믿는 신랑과의 결혼을 다짐한다. 홍신애씨가 학생회장을 할 때 믿음에 열심하지 못하는 회원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한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경북사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즉시 교편에 임하였고, 과년한 나이에 이르도록 믿음있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세례받을 때 하나님과 내 앞에서 약속한 사실을 지키며 변함없이 생활하다가 99년도 봄에 신앙과 학력과 직장이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였다. 이 회고록을 쓰는 이 시간까지는 나의 윤택하지 못한 생활을 염려하여 상당한 금액을 송금하였으니 이 신세를 어찌 갚아야 할 지 알 수 없다. 딤후 1:16에 나타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듯 고 권사님의 기도를 응답하시옵소서”하는 축복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4) 남일교회에 있는 동안 연단과 추억이 많았다. 이상익 집사님은 소경이지만 꾸준한 기도의 역군이었고, 교회가 금요밤 기도를 하여 교회 부흥을 구하자고 제의하므로 금요밤 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철야기도회의 의미대로 8시간씩 강행한즉 교회가 부흥되는 체험도 하였지만 그렇게 힘들여 수고해야만 부흥되게 하실 하나님이신가?하는 의문이 생겼고, 또 힘든 철야 기도를 계속 할 수가 없어서 본래의 생활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노회가 이북노회이기 때문에 부흥이 안된다”는 여론도 맞지 않았다. 내가 남일교회를 떠난 후 지방노회에 편입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한 줄 안다. 교회 부흥의 요소는 진리와 기도와 사랑의 힘 세 가지 외에는 없고 이 세 가지 요소 아닌 것이 지장을 준다 하여도 그것은 큰 이유가 되지 못한다. 믿음은 어떤 부정적 요소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내가 남일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노회를 섬기고 충성하는 인물로 인정을 받았는데 대구 시찰 교회 중 신평교회, 태평교회, 산격교회 세 교회가 순서대로 노회의 지도를 불순종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분규 문제가 생겨서 그 일들을 수습하는데 큰 곤욕을 치뤘고, 아울러 교회 문제 연구 소장을 하면 좋을 만큼 경험을 쌓게 되었다. 이런 분쟁 사건은 지교회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노회와 총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또 교회의 사건 처리 방도를 놓고 교역자간에도 여야 입장처럼 대립되니 동료간의 친밀함도 멀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참으로 무서운 비극이다. 이미 별세하신 원승길 목사님이 황동노회장을 하실 때 내가 부노회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노회장이 노회장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았다. 나는 성직자이면 교회 헌법을 앞장 서서 지켜야 하고, 또 자신에게 불리한 입장이 되어도 지켜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따라서 불법성을 많이 지적하는 기질이었다. 노회에서 총회 신학을 나오지 않은 목사에게 정회원권 주는 불법을 지적하므로 거기에 해당되는 목사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된 줄로 안다. 따라서 부노회장이 노회장 되어야 하는 관례를 깨고 임원에서 물러났지만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노회장 추대 서열이 멀어졌지만 역시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4년도는 기독교 전래 100주년 기념 해였는데 내가 여러 해 노회 임원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 권봉태 목사님 외 몇 분들이 노회 장소를 대구의 남일교회로 정하고 나에게 “노회장을 하여야 한다”하여 만장 일치의 투표를 받고 황동노회장이 되었다. 그 노회 당시에 대구에서 오랫동안 병석에 계신 장모님이 별세하셨고, 또 그 해에 기독교 100년 기념행사와 총회 사진 명감이 나왔다. 여기에서 남기고 싶은 말은 노회장 하는 감투 의식이 전혀 없었는데 때가 된즉 하나님의 섭리적 방법에 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일을 맡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6) 나도 한때는 총회 총대가 되고 싶어서 투표용지에 나의 이름을 써낸 일이 세 번쯤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 평생 후회한다. 왜 성직자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지 못하고”(롬 12:10) 허탄한데만 뜻을 두는지(시 24:4) 알 수 없다. 대구 시찰의 어려운 교회의 일들로 인하여 대구 지역 노회의 동료들과 서먹한 관계도 있고, 또 고향과 노회의 중심이 수도권인지라 서울 쪽으로 전임하고 싶지만 “교회의 임지를 부탁하지 않는다”는 결심 때문에 여러 교회에 교역자 이동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만 믿고있었는데 성남에 있는 한남교회에 교역자 초빙 문제가 생기자 나를 사랑하시고 신임하시는 권봉태 목사님이 강하게 추천하여 86년 4월 1일에 한남교회로 전임하게 되었다. 그 때에 대학에 진학해야 할 사라는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때였고, 막내 아들 대환이는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 때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과 성도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욕심 내거나 수단을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더더욱 깨닫게 되었다.

7) 대구 광역시 북구 고성동에 있는 태평교회의 분규문제는 다 기록할 수 없으나 그 곳에서 교회 수습에 뜻을 같이 하신 송병일 장로님, 김설연 장로님, 이정우 장로님, 이구안 장로님을 기억한다.

8) 또 신평교회와 산격교회 문제로도 많은 고충을 당하였고, 교회의 좋지 못한 쓴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이 깨달았다.

9) 남일교회의 사택 구조는 보통 주택같은 집이 아닌 부속 건물이었지만 당회실까지 방 다섯을 사용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대구 시내를 다 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 같았으며 또 70평쯤 되는 부속건물의 스라브 옥상이 운동장과 같아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아무리 시끄러운 일이 있어도 인접된 집이 없어서 자유로웠으며 또 어린이집, 유치원도 곁에 있음이 6남매의 자녀들을 키우는데 너무 좋고 편리하였다. 좋은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그렇게 자라난 자녀들에게 신앙적 교육을 옳게 하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20. 한남교회의 8년 반의 생활

 

86년 3월 말에 두 트럭 분의 이삿짐을 싣고 14년간 정들었던 대구를 떠나는 마음이 몹시 섭섭하였다. 많은 성도들의 눈물의 환송을 받으면서 한남교회의 승합차를 타고 이영합 장로님의 안내로 성남에 도착하였다. 그때에 덕유는 대구에 있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집을 나간 상태였고, 성남으로 같이 오지 않았으며 그 상태로 군에 입대하였고, 또 제대한 후에도 집에 와서 하루쯤 지낸 후 다시 객지로 나가 지금까지 대구에서 혼자 거주하는 상태이다. 한남교회를 시무하면서 인상깊은 일 몇 가지를 기록한다면

1) 21평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21평 아파트가 대구의 사택보다 넓게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도난 관계 등 편리한 점이 많았음을 느꼈고, 또 얼마 살다가 연탄 보일러가 기름 보일러로 바뀌면서 등불을 켜다가 전기를 켜는 것만큼의 편리한 기분을 느꼈다.

2) 또 운전을 전담하는 조기현 집사님이 계셔서 개인적 볼 일이나 교회업무 등 움직이는 활동이 대단히 편리함을 느꼈다. 그러나 교회의 일로 대구에 있을 때보다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분주하였다.

3) 성남에 오자 마자 교회에서 그레이스 승합차를 사서 목사 우선 용으로 쓰게 한 것이다. 성남에 오기 3년 전에 대구에서 오우용 목사님(당시 집사)이 운전 교습소 직원으로 계시면서 나의 교습비를 전담해 주므로 그 기회를 타서 쉽게 1종 보통 면허를 따 놓았으나 대구에서는 차가 없어서 운전을 못 하였다가 성남에 와서 운전을 숙달하게 된 것이 퍽 좋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땀을 흘리면서 숙달을 하다가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서울에 출입하는 일을 포함하여 5년쯤 지나니까 운전에 대한 부담이 완전히 해소 됨을 느꼈다. 대구에서 온 지 약 10개월 후에 대구에서 정화여고를 졸업한 사라가 중앙대학에 입학 수속을 하게 되고 시험을 쳐서 합격한 후 안성 캠퍼스로 다니게 되고 그 곳 기숙사에 짐을 운반하는 일 등에 자동차를 사용하게 되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이 일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감사하였다. 한남교회는 330명쯤 출석하는 교회로 부 목사님도 계셨고, 남 전도사도 두 분, 여 전도사님 한 분이 계셔서 도와주는 면도 많았지만 어느 교회나 담임 목사가 해야 할 몫이 있기 때문에 편리한 점은 있으나 교인들의 생활에서 목사의 심방을 필요로 하는 일이 퍽 많아서 시간과 피로에 쫓기는 일은 여전하였다..

4) 한남교회의 당회원은 7명인데 다 부드러운 분위기여서 교회를 다스려 나가는데 고충이 없었고, 대구 남일교회보다 훨씬 일하기 좋다는 느낌을 갖고 부담없이 6~7년을 일 할 수 있었다. 교회마다 당회에서 갈등이 생기면 교역자의 정신적 부담이 커지고 그만큼 피곤해지지만 약 7년까지 있는 동안 당회로 인한 고충은 없었으며 장로회 정치가 당회 중심의 공화 정치인 만큼 나는 당회장의 고집을 내세우는 일이 없이 무슨 일이나 당회원의 합의에 따라 일을 하였다. 또 장로님들은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듯도 하였다. 한남교회 성도들 중에는 다른 교회에서 느끼지 못한 특색있는 성도와 특색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5) 성남에는 같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약 10년 전부터(그 당시에) 신학원을 하고 있었고, 나도 그 신학원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설교학, 교회정치, 성경지리, 성경강해 등의 강의를 하면서 더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며 1990년과 91년도에는 학원장을 그 다음에는 이사장을 한 경험도 있으나 이것은 순회적으로 하는 직무에 불과하였다. 강사로 시무하는 교회에서 신학교 운영비 보조를 하는데 한남교회 시무 7년쯤 되었을 때 한남교회 당회에서 “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무인가 신학교를 하는 것이 거리끼는 일이며 또 거기에 보조를 하는 것도 문제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나는 수 년 전부터 무인가 신학이란 법적 규제를 탈피하기 위하여 등록금을 받지 말고 무보수 강의를 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로 점차 시일을 두고 잘 교정되는 때를 기다리다가 보조금 문제와 함께 무인가 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는 것도 거리끼는 일이 아니냐?는 발언이 나와서 보조를 중단하고 이사직과 강의하는 것을 사양하게 되었다. 성남 신학원은 수도권에 있었으나 인근에 총회의 인가를 받은 칼빈 신학교와 수원 신학교가 있어서 발전하기 어렵고 또 신학생의 진로가 열리지 않는 문제를 지금도 갖고 있다.

6) 성남에 온 다음 해 87년 2월 1일부터 24일까지 성지 순례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노회의 교역자회에서 성지순례원을 모집할 때 이영합 장로님이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면서 그 비용 230만원을 부담한 것이다. 나 혼자의 힘과 생각으로는 꿈도 꾸지 않았을 일인데 이 장로님의 강한 권유로 처음 해외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일기를 기록한 것이 있어서 해외여행 기념으로 기록한다. 이 여행은 참으로 추억 깊은 여행이었으며 사도행전 강해서를 쓸 때 실제의 지역을 눈으로 보고 다녀 본 상태에서 쓰게 된 것을 퍽 유익한 일이었다.

성지순례일기(89년 2월 1일~23일)

-카이로, 이스라엘, 터키, 헬라, 로마, 스위스, 프랑스-

(경유지:일본 나리타 공항, 필리핀 공항, 태국 공항, 앵커리지 공항)

 

(동행인 이영합 장로님과 노회원 20여 명)

 

2월 1일

8시 30분 집을 떠남. 10시 김포공항 도착. 12시에 탑승(노스웨스트 에어플랜, 폭 10석). 12시 20분 출발. 기내식사. 2시경 일본 나리타 공항 도착. 짐은 애굽행 비행기에 직접 탁송. 5시 30분 애굽 비행기 이집트 에어포트에 탑승. 6시 출발. 비행기 규모 10×65석 정도.

2월 2일

밤 2시 방콕 착륙(2시간 빠름). 승무원 교체. 3시 30분 이륙. 7시 봅베이 상공 경유. 8시 아라바아 남쪽 진입(밝지 않고 밤이 계속됨). 11시 홍해바다 상공. 1시 카이로 도착(1시를 뒤로 돌려 새벽 6시에 맞추니 7시간을 얻은 격이 됨). 기내에서 식사 6회 함.

아침 7시에 공항 나옴. 7시 20분 메르데인 호텔 도착. 7시 30분 뷔페식사. 숙소 지정. 8시 30분 관광 출발. 9시 30분 카이로 박물관. 12시 기독교 박물관. 예수님 피난 하신 곳. 12시 30분 시내 교포 음식점에서 식사. 2시 피라미드, 스핑크스, 파피루스 제조공장. 7시 호텔. 8시 교포 한식. 9시 호텔 로비에서 호화 결혼식 구경함. 10시 취침.

2월 3일

5시 기상. 두 사람 기도회. 8시 식사. 9시 호텔 출발. 사하라 사막통과. 10시 45분 스우에스시에 도착(애굽의 제3도시,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작은 호텔에서 식사함. 12시 30분 시나이 반도쪽으로 출발. 2시 스우에스 운하 지하 터널 2.5㎞ 통과. 동쪽으로 운행중 20분간 마라지역 도보행. 3시 30분 옥천탕 통과. 5시 바란 광야(작은 촌락이 있음). 6시 어두운 저녁에 시내산 호텔 도착. 식사하고 천막형 호텔에서 10시에 취침함.

2월 4일

밤 2시 30분 기상. 커피숍 경유. 버스로 시내산 입구 도착. 3시 30분 등정. 6시에 정상 도착. 예배드림. 7시 30분 하산. 여호수아가 머물던 곳 경유. 8시 30분 카타리나 수도원 답사. 11시에 호텔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국경쪽으로 출발. 12시 45분에 홍해 보이는 식당에서 식사함. 2시 40분 아카바만. 타브 국경도착. 3시 15분 애굽 출국. 이스라엘 입국. 김주경 선교사 만남. 3시 30분 해저수족관. 5시 40분 에일낫에 있는 코랄시 호텔 도착. 9시 취침함.

2월 5일(주일)

6시 기상. 7시 뷔페식사. 7시 30분 예루살렘 쪽으로 출발. 9시 솔로몬 광산. 아라바광야 지남(빈들에 마른 풀같이,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찬송가 음미함). 10시 5분 애인야하보 휴게소에서 휴식함. 12시 맛사다 관광 및 식사. 1시 20분 예루살렘으로 출발. 사마리아인 기념관 경유. 3시 입성. 김주경 선교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도착. 예배드림. 5시 칵테일 간식. 5시 15분 키카르 지온 호텔 도착. 식사하고 잠시 외출한 후 취침함.

2월 6일

6시 30분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 몰몬교 대학. 히브리 대학. 루터병원. 감람산 언덕. 예수 승천교회. 승천 발자국. 주기도문 교회(70국어로 번역, 한글도 있음). 재림 기념교회. 눈물교회. 소련교회. 스데반 순교교회. 기드온 골짜기. 종려깔고 입성한 길. 겟세마네 감람나무들. 압살롬의 무덤. 실로아 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분문. 가야바의 집. 고문당한 곳. 가야바의 심판소. 감람산 법정 골고다. 마가의 다락방. 시온산 언덕. 장막절을 위한 초막집. 성령받은 마가의 다락방(합동 촬영). 성모 마리아 죽은 곳(천주교 주장). 이스라엘 요르단 국경. 12시 30분 한식 식당에서 식사함. 2시 다메섹문 옆으로 예루살렘 동북쪽, 벤야민 지파 지경 쪽으로 감. 벌꿀형집. 동쪽 기브아(사울의 도읍지). 엘리사 무덤. 사무엘 무덤과 교회, 소렉 골짜기. 3시 15분 오네시모의 무덤. 마리아가 동산지기 만난 곳. 주염 열매. 예수님 무덤(단체 촬영). 십자가의 길(비아돌로사) 7번 쓰러지심. 애굽 콥릭 교회. 6시 호텔 도착. 특강. 식사 후 민속춤 보고 9시 30분 취침.

2월 7일

5시 30분 기상. 7시 아침식사. 8시 관광 출발. 통곡의 벽. 기드론 골짜기로 다시 감. 소련교회. 스데반 성전 바라봄(혈통은 여자로 따지고 사람 수는 남자로 침). 모슬렘교도 중 여자는 나오지 않으며 하루 5회 기도함. 죽으면 그날로 묻고 어두우면 다음날 장사함. 헤롯(솔로몬) 성전터에 가다. 이스라믹 박물관. 코란경을 보다. 이삭제사 드린 곳. 죽 쑤는 큰 솥. 예수님 당시에 쌓아진 아치와 밑바닥길. 오만사원. 이스라엘 여군들 보다.

10시 경에 사해 사본 관리하는 박물관. 그릇형 건물. 각종 물품(샌들, 가죽부대 등). 사해사본(사해사본은 모조품이라 함. 진품은 비밀로 보관됨.) 이스라엘의 상징인 7촛대. 종합청사. 수상집무실. 신 시가지라 함. 히브리대학 캠퍼스 일부. 유대인 600만 죽은 추모관. 헷셀의 독립운동 기념관. 유대인은 나치 정권시에 자기를 구해 준 은인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나무를 심음. 환등으로 나치의 학살 장면과 사람을 의학 실험도구로 사용한 장면들을 봄. 1시에 김주경 목사님 집에서 점심. 점심 후 연합군 묘지와 히브리 대학 옆을 통과하여 베들레헴으로 감. 일찍 핀 살구꽃이 있음. 카톨릭에서 경영하는 교육관 뜰에서 각종 유품(모조품으로 제작된 것)을 봄. 포도주 틀과 농기구를 봄. 3시 40분에 베들레헴 도착. 라헬의 무덤. 예수 탄생교회(4세기 건물) 페르시아 군이 들어와서도 파괴하지 않았음. 제롬의 동상. 천주교 건물, 동쪽에 모압 들판. 2%가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2%가 정통이라 함. 400평 75만불짜리 가옥을 봄. 5시 30분 호텔 도착. 특강을 받고 9시에 취침함.

2월 8일

5시 30분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 갈릴리 쪽으로 가다. 스데반 교회 압살롬 무덤. 벳바게를 지나 베다니의 나사로 교회 들림. 여리고로 가는 언덕. 유다 광야의 험한 지역을 봄. 선한 사마리아인 휴게소. 깊은 계곡. 물골. 사망의 골짜기. 조지 수도원이 건너편에 보임. 여리고는 푸른 마을임. 헤롯의 별장들. 사해바다 쪽으로 가면서 사해사본을 발견한 쿰란 동굴. 9시 10분 사해바다 봄. 9시 40분까지 사해 바다에서 목욕함. 다시 여리고로 올라와서 엘리사의 샘과 삭개오의 뽕나무를 봄. 동쪽의 베뢰아와 요단강이 보임. 길갈. 에브라임 산지. 헤롯의 요새. 비크스족의 농장, 악어 농장, 그 앞의 요단강은 사해 남쪽보다 400m 얕다고 함. 사해의 동쪽은 애논. 세겜, 얍복강 계곡이 있고 요단강 동쪽은 요르단 동리가 보임. 길보아산. 이스르엘 골짜기가 오른쪽에 있음. 여리고에서 갈릴리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이 사울왕의 근거지로 비옥한 농장이 있고 헬몬산이 먼 북쪽에 보임(골란고원). 갈릴리 호수 앞에 도착. 요한이 세례받던 곳. 엥게벨에서 베드로 고기 튀김으로 점심을 먹음. 경치 좋음. 1시 10분에 배를 타고 데가볼리와 거라사를 바라보면서 2시 30분에 가버나움에 하선함. 예수님이 말씀 증거하신 회당은 기둥만 있음. 베드로의 집터(4세기에 재건한 것). 몇 가지 유적품(연자매). 물고기 잡수신 곳(요 21:). 5병 2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 8복 교회 산 언덕에 엉겅퀴와 백합화가 피어 있고 고라신으로 가다. 8복산 왼쪽은 돌레마이. 계속 44㎞ 북쪽으로 가면 레바논. 시리아 마지막 국경. 키리아 슈트나 동리. 탱크부대 있음. 요단의 물줄기는 (1)하스바니아 (2)라이스(재판관) (3)스닐(세계에서 제일 큰 샘) (4)바니야스로 이 네 물줄기가 갈릴리 바다의 수원임. 가이사랴 빌립보에 감. 바산지역의 암소를 봄. 다시 갈릴리 서쪽으로 와서 막달라 마리아 무덤을 지나 6시 30분에 디베리우스 시에 있는 요르단 리버 호텔에 도착. 목욕 후 7시 식사. 9시까지 강의받고 취침 함.

2월 9일

6시 기상. 동쪽으로 갈릴리 바다를 바라보는 경치가 좋음(음력 1월 4일임). 해뜨는 장면. 7시 식사. 8시 출발 나사렛 쪽으로 출발하였음. 그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는 200m 얕고 사해 바다는 400m 얕다고 함. 8복산 위에 큰 동리가 있으니 이는 산 위의 동리가 숨기우지 못한다는 말씀과 관계가 있음. 갈릴리 바다의 깊이는 50m. 비 안 오면 2년 쓴다 함. 가나 기념교회(물로 포도주 만드신 곳). 나사렛에 감. 마리아의 우물. 헌금 요청. 수태고지 교회. 요셉의 집. 7계단 내려가 세례 받는 곳이 있고 다불산(=변화산), 나인성, 수넴, 이스르엘 평원을 바라봄. 길보아산과 나봇의 포도원을 봄. 가나에서 나사렛으로 오는 길에 깊은 낭떠러지가 있음(눅 4:29). 요시야왕이 죽은 전쟁의 요새지 므깃도. 갈멜산 엘리야 제단. 서쪽에 지중해가 보임. 갈멜산 물을 높은 성으로 물골을 만들어 가이사랴까지 8㎞를 인도함. 헤롯의 건축 잔해가 있음. 1시 30분 해변 식당에서 점심. 큰 원형극장. 벨릭스 아그립바가 바울을 재판하려 한 곳. 동상 잔해의 큰 발목. 다이아몬드 공장. 텔아비브. 숙소인 단 파노라마 호텔을 거쳐 욥바로 감. 4시 40분에 베드로 기념 교회. 시몬의 집(피장)과 욥바(물고기 동상) 구경하고 5시에 다시 호텔로 감. 6시 식사. 7시 이스라엘의 전쟁사 강의. 8시 50분 취침.

2월 10일

5시 기상, 5시 30분 벵구리온 공항에 도착. 8시 30분에 LY581비행기(이스라엘 작은 비행기)로 터키의 이스탄불로 떠남. 지중해 상공에서 구보로 섬을 내려다 봄. 10시 30분에 흐린 날씨를 헤치고 이스탄불에 도착함. 12시 그 곳에 있는 서울 식당에서 점심, 콘스탄틴 로마 황제 사열하던 곳. 회교 사원. 왕궁터. 박물관. 4시~5시 30분까지 가죽시장 쇼핑. 6시 다시 이스탄불 공항에 감. 7시 이즈밀로 가는 비행기를 탐. 이즈밀(옛날 에베소)에 9시 10분 도착. 그랜드 호텔로 감. 9시 45분에 112년된 시계탑을 봄. 아직 고장난 일이 없다 함. 서편 에게해가 있음. 저녁 식사를 늦게 하고 11시에 취침함. 시계탑은 이즈밀의 상징임. 터키는 남한 영토의 8배, 버스로 3일을 가야하는 거리임.

2월 11일

5시 기상. 에게해를 향한 사진 촬영. 7시 식사. 8시에 소아시아 7교회 방문에 나섬. 이즈밀 시 옆에 서머나 교회가 있었음.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시무한 곳(주후 115~156). 폴리갑의 친구 스타리우스 총독이 풀리갑을 죽음에서 살리려고 “한 번만 예수를 부인하라”하였지만 “86년 동안 해롭게 하신 일이 없는 예수님을 내가 어찌 부인 하겠느냐”하고 진실을 지키므로 화형을 받은 역사가 있음. 1시에 버가모에 감. 버가모는 주전 323년에 리스만구스가 건설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심한 곳이라 함. 아크로 유적지. 소나무 있고 사탄의 위가 있는 곳. 제우스재단. 목욕탕문화 흔적. 지중해 배 감시소. 현지명은 베르가마. 원형극장. 도서관 흔적. 버가모 교회 자리는 궁전 자리라 함(계 2:12~17 참조할 것). 카페트 공장 답사하고 두아디라에 감. 두아디라는 유적 남은 것이 없음. 현지명은 아크희살(성경에 자주 장사 이야기가 있으나 행 16:14은 이 곳이 아님). 돌기둥과 교회벽. 아폴로 신전 흔적만 있음.

1시에 사데로 가다. 아데미 신전과 후대에 세운 작은 교회와 넓은 평원이 있음. 주전 600년에 페리아 왕국 수도라 함. 사데 5㎞ 앞에 “샤르트”라는 군청 소재지가 있음. 2시 10분에 그 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음. 페르샤 수도에서 사데까지 돌길을 닦았음. 극장터, 아크로폴리스 광장, 아데미신전 등은 3000년 전의 것으로 흔적이 남아 있음. 수나고그(회당)을 봄.

4시 45분 빌라델피아에 감. 큰 기둥 위에 벽 잔해가 있다. 오래 지속되다가 없어졌다 함. 6시경 숙소로 간 곳이 “파무칼레” 목화성(온천) 석회수 온천이 있는 고루 호텔임. 온 동리가 석회색으로 흰 고장임. 방갈로식 방에서 9시에 취침 함. 온천이 강물처럼 나오지만 목욕은 못함. 목욕할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음.

2월 12일

5시 기상. 7시 식당에서 주일 예배드림(이기훈 목사 설교). 8시 30분 출발. 신전 성벽 잔해(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 무덤지역 많음. 관 출토됨. 빌립집사 순교지 교회. 원형극장에서 끌려나와 돌에 맞아 순교한 곳. 이곳은 “히에라볼리스”라 하며 온천이 있어서 세운 도성이라 함. 하얀 석회바닥에서 사진을 찍고 그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이 라오디게아 임(왕비 이름). 그 곳은 돌가루와 안약이 유명하였다 함. 이곳은 지명도 남지 않고 돌맹이 몇 개뿐 흔적도 없음(그 다음 순서가 골로새이지만 골로새는 그 곳에서 동북쪽으로 퍽 떨어져 있고, 시간상 가지 못함. 역시 흔적도 없다 함). 10시경 에베소 쪽으로 가면서 큰 물이 분출되는 넓은 온천을 봄. 12시 30분 에베소에 도착. 사도요한의 교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곳에 옴. 요한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함. 마리아 살던 집. 원형 경기장. 박해의 문. 요한의 무덤에 저스틴이 건물을 지음. 관을 얹는 상이 있음. 기독교인 많이 학살된 곳. 에베소 교회 흔적이 있고 불가사의한 기둥. 비잔틴 시대에 건립되었다 하며 그 지명은 샐죽이라 함. 1시 20분 중간 동리에서 식사함. 마리아의 집(캐더린 수녀가 계시 받고 발굴하여 알게 되었다 함). 무화과 곶감이 있음. 에베소는 서쪽 해안 10리 안쪽에 있음. 바울이 매맞은 곳. 두란노 서원. 목욕탕. 창녀촌. 이곳에서 당나라에까지 다닌 실크로드가 있었다 함. 3차 종교대회의가 열린 곳(2개월간). 세례베푼 곳. 손 씻는 바다(넓은 그릇). 맹수로 사람 죽이는 경기장. 아데미 여신전. 조각상이 많음을 보고 4시 30분에 구사다스 항구에 옴. 5시 10분 투산 호텔에 투숙. 서쪽바다 에게해의 태양빛을 받으며 사진을 찍음. 식사 후 취침 함.

2월 13일

6시 30분 기상. 밧모섬행 준비. 구사다스 항구는 투산 호텔에서 5분 거리임. 7시 30분 승선. 다이아나 1호 작은 배를 타고 에게해 남쪽으로 향함. 10시 30분 바다에서 헬라영토 섬들을 찍음. 헬라 인구의 80%가 기독교라 함. 교회는 1년에 3회쯤 간다 함. 유아 세례, 성탄, 추수감사, 부활절, 장례식 때에만 가는 것임. 2시 밧모섬에 도착함. 2시 30분 카스델리 모텔에 투숙. 6시까지 대기하고 6시 30분에 해변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 다시 모텔에 와서 취침함.

2월 14일

7시 기상. 섬과 바다 경치 감상. 해뜨는 사진을 찍음. 밤 9시에 도착하는 배로 미국 교포 순례단이 한 여관에 옴. 이곳 주민은 여름에 벌어서 겨울을 산다 함. 사도요한이 계시 받은 동굴에 감. 11세기 초에 발굴되었다 함. 계시가 모아진 곳이라 함. 높은 언덕 위에 빳도미 성경학교가 있음. 1088년에 크리스트가 지은 신학교가 현재 운영되고 있다 함. 높은 곳에 있는 수도원 답사. 옥상의 종탑이 있음. 요한이 처음 거처한 집. 큰 선인장이 길목에 있음. 다시 해변가로 내려와서 요한이 세례 베푼 곳을 보고 북쪽 해변가로 가서 그 곳 사람이 낙지 잡는 광경을 봄. 1시까지 관광을 마치고 식당에 오다. 점심 후 호텔에 와서 지루한 시간을 보냄. 4시에 식당에 가서 한국식 문어를 먹음. 6시에 저녁으로 한국식 불고기와 매운탕을 먹음. 같은 여관에서 취침함(배편을 맞추지 못하여 1일을 더 묵게 됨).

2월 15일

밧모섬에서 아침 7시 기상. 8시 식사. 당일 밤 헬라로 가는 배를 기다림. 등산하고 권봉태 목사님과 시진을 찍음. 비디오로 시간을 보냄. 7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11시까지 비디오(중국 마지막 황제)를 봄. 도로아에서 떠난 배가 온다하여 항구로 내려가 12시에 아덴으로 가는 배를 탐. 배는 해상 호텔과 같았음. 배 이름은 로도스로 아주 큰 배임. 침대칸에서 취침함.

2월 16일

아침 7시에 기상하여 해상 사진을 찍음. 10시 10분에 아덴시의 빠드라 항구에 도착함. 항구의 규모가 크고 큰 배들이 많음.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10시 30분에 헬라의 아덴시를 관광함. 잠시 쇼핑을 하고 담요와 코트를 삼. 12시에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함. 올림픽 경기장 길에서 안내자의 말을 경청함. 헬라는 공화국. 발칸반도 끝에 위치. 4개 나라와의 접경. 인구 1000만. 헬라어. 희랍정교. 신부월급제. 신앙생활화. 목사의 실력에 관계없이 가까운 교회 나감. 여름 45〫, 겨울 5〫, 겨울도 푸름. 시간차 7시간 늦음. 화장터 없음. 부활을 믿으므로 사망 신고 끝나면 24시간 이내 매장. 다방 많고 예식장은 교회뿐이라 함.

국회의사당. 시장점포 앞에 보임. 교회를 헐지 못하여 로타리에도 그대로 있음. 희랍정교회 사진. 책을 삼. 12시 30분 호텔로 감. 의사당 사진을 찍음. 귤나무, 가로수, 뽕나무, 전기버스가 있으며 저녁 8시 까지는 무료버스임. 전쟁박물관을 보고 1시 그 곳의 교포 식당인 서울식당에서 식사하고 촬영함. 2시에 버스 타고 계속 관광함. 대통령 관저. 보초병 교대 장면. 최초 올림픽 운동장을 시민이 만들어 기증하였다 함. 아크로폴리스 신전(주전 515년 건립). 아테네의 수호신을 섬김(처녀신). 아레오바고에 감(돌산, 대법원 장소, 바울사도 변론, 전도한 곳). 그리스 정교회 기도원이 먼 건너편에 보임. 동남쪽에 기둥 2개와 경기장이 보임. 4시에 데살로니가로 가기 위하여 아덴 근교의 공항으로 감. 공항은 올림픽 공항과 일반공항이 있고 6시 10분에 탑승하고 공항 이륙시 사진을 찍음. 7시 30분 데살로니가에 착륙. 캐피탈 호텔로 가서 식사하고 9시에 취침함.

2월 17일

7시 기상. 8시 출발. 데살로니가는 헬라의 제2항구 임. 12사도 교회에 감. 거리와 아파트 사진을 찍음. 도로 옆에 사진을 넣은 죽은 자의 추모탑이 있음. 마게도냐왕 필립이 자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빌립보성이 폐허되어 있다. 시장터가 있고 법정으로도 사용하였다 함. 빌립보란 곳은 현재 명칭도 사용하지 않음. 바울이 갇힌 감옥(갈릴리 북쪽의 가이사랴 빌립보와 구별할 것). 행 16:11~15과 관계됨. 두아디라에 가다. 현재 이곳을 리디아라 함(루디아의 이름이 전승된 것). 루디아 기념교회가 있고 그 앞에 강이 있다. 세례베푼 곳. 갠지스 강이라 함. 이사의 지역을 살핀 후 11시쯤 버스로 “네압볼리” 항구에 가다(현재는 “까발라”라 함). 경치 좋은 항구임. 1시에 도착하여 갤럭시 호텔에서 점심을 먹음. 항구를 바라본 사진을 찍음. 터키왕국이 다스릴 때 “네알볼리”를 “까발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함. 2시 30분에 바울 선교 도착 기념교회에 감. 전경 사진을 찍음. 아볼로니아쪽으로 통과하여 암비볼리스에 3시 30분 도착. 유적발굴중. 암비볼리는 옛날의 마게도니아 수도였으나 폐허되어 있음. 암비볼리아는 행 17:1에 해당함. 4시 30분에 바울이 강론했던 곳에 도착함. 행 17:12을 헬라어로 거꾸로 새긴 비문이 있음. 뒤에 있는 폐허 건물은 한증탕이라 함. 사진을 찍음. 옛 성전은 터만 있음. 그 곳에서 데살로니가 까지 65㎞ 임. 그곳 변두리에 있는 12사도 교회로 감. 해질 무렵 그 곳에 가니 역광이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성수터가 있으며 수리 중이었음. 6시에 호텔로 다시 옴. 7시에 저녁 식사 후 8시에 취침함.

2월 18일

4시 기상. 다시 아덴으로 가서 오전에 고린도를 방문하고 오후에 로마로 갈 것임. 5시에 데살로니가 공항으로 가다(이때 김원배 목사가 출발 버스를 타지 못하여 염려하던 중 30분쯤 후에 공항에서 만남). 7시 10분에 올림픽 에어라인(비행기 명칭) 903편에 탑승. 120석. 해뜨는 장면 비행기에서 찍음. 7시 45분에 아덴에 도착. 갈 때 비행기는 1시간 20분 걸렸으나, 올 때는 35분 만에 도착함. 8시 20분에 고린도로 감. 2시간 가다. 10시 고린도 입구 운하에 도착. 운하에서 사진을 찍음. 운하 길이 6.5㎞, 높이 78m, 밑폭 29m, 윗폭 80m라 함. 주후 50년 경 바울의 2차 전도 때 방문한 곳임. 10시 10분에 고린도 항구에 도착. 옛날 아가야의 수도임. 디도유스도의 집이 있는 곳. 현재 약 10만의 인구가 거주함. 바울교회 있음. 종탑 33m. 주신부 명단이 정문에 계시되어 있음. 바울, 아볼로 순서로 고린도 박물관에 가다. 돌상 깨진 것이 많음. 해발 576m에 자리한 고린도 아크로폴리스를 감. 이는 후대의 전략 성타라 함. 돌집. 샘터. 로마 헬라식 건물. 옥타비아노 신전. 땅바닥에 송충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보았음. 시장터 잔해. 아가야 총독이 머물던 곳. 바울이 송사받고 기각된 곳. 성터만 있음. 11시 30분에 고린도 답사를 끝내고 아덴으로 오면서 큰 정유공장을 봄. 고린도 시내에 사람이 뛰는 모습의 로타리 탑이 있는데 “온모니아 로타리”라 함(다툼이 없다는 뜻). 의사당, 신타크마 헌법광장 등을 보면서 1시에 한식집에 도착하여 식사함. 그 곳에서 헬라의 국제 공항까지 12㎞라 함. 2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3시 35분에 알리타리아 0481호 150석 비행기를 탑승함. 이태리 비행기로 성능이 좋은 듯 하였음. 로마 영토를 내려다 보며....1시간 40분만에 5시 25분에 로마의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에 착륙함. 점검을 끝내고 호텔에 오니 5시 50분임. 나들이 관광 회사의 고광오 이사가 마중 나와서 비행기 원리를 연구한 다빈치 동상에 대한 이야기와 로마에 대한 여러 가지를 설명하였음. 빌라밤빌라에 도착하여 호화롭게 살던 로마인의 주택정원을 보여줌. 8㎞의 둘레임. 취침함.

2월 19일

7시 기상. 8시 30분 식사. 예배드림(주일-본인 설교:“자세히 주의 할 것”). 로마 사람들은 주일에는 청소도 안 한다 함. 이태리 여인 가이드 동승. 97% 카톨릭 신자임. 짚시 아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였음. 데베레 강 복판에 수도원 있음. 8세기에 건립된 다리. 로마인은 옛날 유적관에서 사는 것 같았음. 전차경기장, 나토유엔기구, 골로세움(원형경기장), 콘스탄틴대제의 개선문, 궁정정문, 여자 동상문, 궁전돌기둥(디토장군의 개선문, 돌기둥), 원형경기장은 타원형이요, 45000석, 둘레 572m, 높이 57m. 기독교인 박해. 짐승과 싸우게 함. 출입구 80개. 10분에 5만명 퇴장 가능. 짚시 때문에 우리 일행이 흩어지지 않고 단체가 잘 되었음. 베드로 성전.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베드로 성전을 “삐에다”라 함. 뿔 2개 있는 모세상, 옛날 쇠사슬이 로마공과 대학 옆에 있음. 네로의 궁전터, 드라야노 상가, 베니스 광장, 기민당사, 주일 점포 문닫음. 오벨리스크(탑) 기둥위의 코끼리 상, 바르메로 신전, 라파엘의 무덤, 빅토리오왕의 무덤, 비너스, 제우스, 아폴로 신전 탑, 비둘기 모임, 상원공관 건물, 호보나 광장, 분수 4개, 남자 나체상탑, 대법원, 베드로 성당 30만 수용. 16세기에 베르리니가 건축, 애굽에서 옮겨 온 탑, 교황집무실, 베드로 성당의 각종 사진, 교황이 12시에 창문을 내다보고 기도함. 근방의 중국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1시 바울대성전으로 가다. 이 성전은 옛날 공동묘지터에 콘스탄틴 황제가 건립하였다 함. 성령의 검을 가진 바울상. 주일 시장은 오전만 본다 함. 강과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찍음. 바울의 집필하는 상. 바울 성전 창문 대리석의 등불 밑에 바울의 무덤이 있다. 콜럼버스의 길. 시민회관. 바울의 참형터와 머리 굴러간 자리리라 함. 트라지스트 수도원이 같이 있음. 겨울에도 얼음과 눈이 없음. 러시아 주재 청사가 있음. 카타콤에 감. 53개 발견. 무덤을 신성시 함. 헬레나 성녀 기념 성전(무릎으로 기어감). 콘스탄틴이 지은 사도 요한의 기념 성전(로마 주교 거주, 교황은 교황청에 있음). 12사도 동상. 음향전달방식 시설. 천장 금장식. 베네딕트 성전. 십자교회 전경. INBI(예수, 나사렛, 왕, 유다 란 뜻 즉 나사렛 예수 유대의 왕). 십자가의 가시와 못을 보존. 싼타마리아 성전. 통일 기념관. 토물로스 왕을 추대한 깜비돌리온 언덕. 미켈란젤로 광장. 로마시에서 운영하는 결혼예식장. 베드로와 바울의 감옥. 오네시모 감옥. 5시 30분 호텔에 도착. 7시에 이태리 식사. 9시 취침.

2월 20일

5시 기상. 대합실에서 촬영. 식사 후 6시 30분 공항으로. 비행기 AZ 410편 8시 50분 출발-10시 20분에 스위스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공항의 안개 사정으로 10시 30분 출발-11시 50분에 스위스 공항에 도착하였음. 알프스 산의 눈덮힌 모습을 내려다 봄. 12시 30분 공항에서 버스로 출발하면서 김홍재 가이드를 만나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들음. 스위스 수도는 베른. 이 곳 제네바는 관광지요, 국제기구가 많음. WCC 본부. 망명자 대책 본부. 세계보건 기구. UN기구. 발명 특허 본부. 우리나라의 춘천 인구와 비슷함. 종교개혁의 도시. 멀리 노틀담 성당이 보임. 앱손 호텔로 가니 1시 임. 식사 후 1시 50분에 다시 관광함. 2시 제네바 공원 산책. 테마호수. 스위스는 1142개 호수의 나라임. 팍대조비보 공원에서 촬영. 이 공원은 개인이 개인 저택을 기증한 것이라 함. 북한 대표부가 있음. 4개국어 사용한다 함. 80% 산악, 20% 농장. 소련교회 사진와 박물관 원형보존. 칼빈교회(칼빈 23년간 설교). 파렐이 그 후임임. 지하의 순교자 무덤을 발굴하고 있었음. 몽블랑도로. 다리. 칼빈이 종교개혁을 협의한 곳. 칼빈 후예인 알리니루안 가족묘지 있음. 스위스는 자국언어가 없다. 호텔같은 큰 집이 제네바 시청임. 칼빈무덤의 입구에서 장례식이 있었음. 칼빈의 무덤은 707호 비문 JC. 무덤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하셨다 함. 칼빈 무덤에서 대표기도함. 4시에 성지순례 일정을 마치고 시계상점 쇼핑. 인구 4명당 차 1대라 함. 앱손 호텔 사정으로 로얄호텔로 변경되고 5시 30분에 호텔에 가서 식사 후 취침함.

2월 21일

5시 기상. 8시 식사. 9시 공항으로 출발. 10시 20분 프랑스 비행기 탑승. AF963 180석. 비오다. 11시 20분 프랑스에 도착. 1시간 비행한 셈. 챨스드골 공항 도착. 계단 없는 버스(작키식으로 올라감.)를 타고 12시에 공항을 출발함. 여행사측 파리 주재 윤재영 사장 인사함. 프랑스국 영토는 한국의 5배, 농업국이며 시내에 공동묘지가 있으니 이는 죽음도 삶의 연장으로 여기기 때문이라 함. 인구 5500만이요, 1/5이 파리 주변에 거주한다 함. 프랑스 내에 개가 100만 마리쯤 되고 개의 생명보험이 있으며 개똥 청소부가 따로 있고, 개의 향수도 있음. 시내광경 촬영함. 파리시는 19세기에 오스만 시장이 설계하였다 함. 1층 상가, 2층 사무실, 3층 주택, 상층은 하녀나 유학생이 사용함. 한일관 한국 식당에서 점심식사함. 오스만 거리. 한일관 앞에서 촬영. 계속 관광. 벨사이 궁전에 감. 콩코드 광장,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개신교 없는 나라, 신교 탄압 최고, 낭트칙령으로 신교의 자유를 줌.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림이 특징임. 노틀담 성당으로 나오면서 촬영. 세느강, 다리, 루불 박물관, 파리 시청 건물 촬영. 코나추는 수술을 한다 함. 천문대 거리, 룩셈부르크 궁전, 국회의사당, 햇빛이 귀함. 나폴레옹 무덤, 엘발리도(샌트루이) 성당,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서 노획한 무기들, 파리=파라지=어부의 땅이란 뜻. 예술의 도시, 나폴레옹의 개선문(독립문 같이 건립됨, 수리중), 개를 끌고 다녀야 미인이 돋보인다 함. 에펠탑 앞의 분수와 동상들. 화장품 쇼핑, 몽마르트 성당, 언덕에 초상화 그리는 화가들이 있음. 그 곳에서 보는 파리의 전경은 예루살렘을 보는 것 같음. 1년에 성당에 3번 가는 교인이 대부분. 영세때, 결혼때, 장례때(헬라와 비슷함). 밤이 되니 밤거리가 찬란함. 7시에 비스트로 로메인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를 먹음. 8시에 노브렐 미니올레 호텔로 감. 짐을 정리하고 취침함. 메라크리알스 회사의 건물이 건너편에 보임.

2월 22일~2월 23일

7시 기상. 식사 후 8시 공항으로 출발. 8시 30분 파리 공항에 도착. 10시 40분 AF727 비행기로 출발. 북극을 통과하여 앵커리지로 향함. 1시 기내에서 점심. 2시경 석양을 나타내더니 어스름한 초저녁 같고 달이 보임. 5시 30분 다시 해가 솟는 것 같더니 6시 30분에 해가 뜨고 달이 없어지고 또 식사가 나옴. 저녁 같은 아침식사임. 8시 15분에 앵커리지 도착. 사방에 눈 경치뿐 주유하는 동안 1시간 15분쯤 공항 대합실에서 마지막 쇼핑함. 9시 30분에 다시 일본으로 향함. 4시 50분에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 4시 50분을 +8시간 하여 12시 50분으로 교정함, 공항에서 1시간 반 기다렸다가 2시 20분에 출발 즉시 또 식사함. 4시 20분 김포공항에 도착함. 일본서 한국까지는 대부분 한국승객임. 여러 성도님들이 공항까지 마중나옴. 교회버스로 함께 귀가함.(이 일기는 사진을 정리하는데 필요하였음)

그 땅을 행하라(창 13:14~18)

-성지순례를 마친 후 주일 설교-

 

1) “먼저 저와 이영합 장로님의 23일간의 성지 순례 일정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희들과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또 저희들의 여행을 성원하시는 뜻으로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시고 갈 때와 올 때에 시간을 내셔서 배웅과 영접을 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 이번의 성지 순례 팀은 23명의 적은 수가 갔지만 어느 팀보다도 성지 순례를 주밀하고 계획성있게 잘 하였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정배를 가시고 계시를 받으셔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신 “밧모섬”은 지도상으로도 찾기 어려운 작은 섬이었지만 이번에 그 곳까지 순례를 하므로 과거에 성지를 다녀오신 분이 밧모섬을 가기 위하여 또 같이 가신 분이 계실 정도로 보람이 있었습니다.

3) 이스라엘과 접경국인 “요르단이나 레바논”에도 성지가 있지만 이스라엘을 통과한 여행객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곳의 순례는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별도로 해야 하고 시리아 영지는 개방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애굽과 터키와 희랍과 로마와 스위스, 프랑스 등은 다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80%의 성지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 저는 이번에 ① 이스라엘의 12지파가 400년을 살고 40년의 광야를 여행하였다는 애굽을 비롯하여 ② 예수님의 성역지인 이스라엘 땅의 상당 부분과 ③ 계시록에 나타난 소아시아 7교회가 있었던 터키와 ④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지인 헬라의 아덴, 데살로니가, 고린도,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정배지였던 밧모섬을 다녀왔고, ⑤ 기독교를 박해하였고 또 천주교의 근거지인 로마를 거쳐서 ⑥ 칼빈선생님의 개혁 교회의 발원지인 스위스에 가서 순례를 마치고 ⑦ 우리나라에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블란서의 파리에서 하루를 관광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5) 89년 2월 1일 12시(당시 수요일)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노스웨스트(North West)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만에 일본의 나리타 공항에 내려서 2시간쯤 기다렸다가 오후 5시경에 애굽으로 가는 애굽 비행기를 타고 떠났는데 그 비행기는 약 5시간 만인 저녁 10시경에 필립핀의 마닐라 공항에 내려서 손님을 갈아 태우고, 또 4시간쯤 가서 밤 2시경에 태국의 방콕 공항에 기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5시간만 가면 7시 아침이 되어야 하지만 비행기가 지구의 자전을 따라가는 바람에 7시간의 밤을 더 가서 내린 곳이 애굽의 카이로인데 그 때에 애굽은 2일 아침 7시가 되었습니다. 식사는 비행기에서 4시간마다 한 번씩 주기 때문에 5번의 식사를 비행기에서 먹고 내렸습니다. 아침에 애굽 카이로에 이르자 관광 회사측에서 대절한 전용차로 호텔에 가서 짐을 보관하고 애굽의 박물관과 왕의 무덤인 피라밋과 그들의 우상 신상인 스핑크스, 예수님이 피난가셔서 계셨던 곳, 모세의 기념교회 등을 답사하고 저녁 늦게야 호텔에 돌아와 여장을 풀고 쉬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 호텔에서는 애굽의 호화판 결혼식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신기한 광경을 보면서 문화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그 이튿날 2월 3일에 일찍 일어나서 전용차를 타고 카이로를 출발하여 홍해 바다쪽으로 오면서 사하라 사막의 넓은 광야를 처음 체험하였고, 홍해바다 입구에 와서 점심을 먹은 후 스우에스 운하를 구경하면서 해저 터널로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반도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곳을 헬라 글자형을 따라 δ지역이라고 하는데 거기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노정을 따라 자동차 길이 열려 있어서 동남쪽 해변을 끼고 시내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마라”와 바로왕의 온천과 바란 광야를 거쳐 저녁 늦게야 시내산 앞에 있는 호텔에 와서 잤습니다. 시내산 앞에 있는 시내산 호텔은 방 한 칸, 한 칸을 따로 지은 방갈로식 집이어서 그 이유를 물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시내산에 올려 보내고 기다리던 장소에 그들이 쳤던 천막의 모형을 따라 지은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그 곳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4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그 지역 안내자를 앞세우고 전지불을 들고 옷을 두껍게 입고 시내산 등정을 하여 3시간만인 6시 30분에 정상에 오르니 영하 10〫정도의 추운 바람이 불고 동쪽에 해가 뜨는 시간이어서 그 곳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듯한 넓고 편편한 바위에 혼자 앉아서 제가 가지고 올라간 성경 십계명의 말씀을 펼쳐 읽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머물렀다는 곳을 거쳐 내려오다가 모세가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호렙산 골짜기에 기념성전으로 세운 카타리나 수도원을 구경하고 호텔에 오니 아침 10시였습니다. 아침식사는 도시락 빵을 내려오면서 먹었기 때문에 그대로 버스를 타고 북상하여 오후 3시경에 이스라엘 국경인 타부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타부 국경은 이스라엘 맨 남쪽의 항구로 “에일랏”이라고도 하는데 요르단 국경의 항구와 애굽영토 중간에 작은 해변을 점령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검문이 심하여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이스라엘국으로 입국하자 그곳에 해저 수족관이 있어서 구경을 하고 바로 그 곳의 호텔에서 유숙을 하였습니다.

2월 5일은 주일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포교회를 방문하고 오후 3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계속 버스를 타고 올라가면서 우편으로 사해바다와 요르단 영지를 바라보고 좌편으로는 유대땅의 각 지역의 설명을 들으면서 오후 3시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포 20명쯤 모인 교회에 합석하여 권봉태 목사님 설교로 예배를 드리고 호텔에서 쉬었습니다.

6일 아침에 일어나서 베들레헴, 감람산, 실로아물, 베드로 기념 교회 등을 순례하므로 하루를 피곤하게 보내고, 또 그 이튿날도 겟세마네, 골고다, 마라의 다락방, 통곡의 벽 등을 순례하여 바쁘게 보냈으며 또 그 다음날 8일에는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여리고와 사해바다를 거쳐 갈릴리 쪽으로 북상하여 멀리 보이는 헬몬산을 바라보며 갈릴리 주변의 모든 성지와 골란고원 등을 거쳐 호수가 있는 디베랴의 호텔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 9일에는 갈릴리 바다 서쪽 디베랴에서부터 가나, 나사렛, 갈멜산, 가이사랴, 욥바 등을 거쳐 지중해변에 있는 텔아비브(욥바)에 와서 1박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10일에는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비행기를 타고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가서 이스탄불에 있는 소피아 사원과 박물관 그리고 회교사원 등을 구경하였고, 그 곳에서 저녁 비행기로 같은 영지에 있는 “이즈미”(서머나)에 도착하여 잠을 잤습니다.

11일에 서머나 교회를 비롯하여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파무칼레로 호칭함)를 답사한 후 그 지경에 석회수 온천과 호텔이 있어서 거기서 잠을 자고 12일 주일을 맞이하여 이기훈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고 계속해서 라오디게아, 에베소, 히에라볼리 등을 답사한 후 “쿠사다스”라는 항구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 13일 아침에 밧모섬을 가기 위하여 작은 배를 전세내어 5시간을 타고 밧모섬에 도착하여 오후에 밧모섬에 있는 사도 요한이 계시받으신 유적을 순례하였고, 그 다음 13일은 헬라의 수도 아덴으로 들어가는 배편이 맞지 않아서 하루를 밧모섬에서 더 휴식한 후 밤 12시에 호텔처럼 제조된 큰 배를 타고 9시간 만에 16일 오전 10시경 아덴에 도착하여 그곳의 몇 곳을 답사한 후 그 날로 비행기를 타고 헬라의 북쪽 두 번째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가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 17일에는 데살로니가에서 차를 타고 빌립보를 비롯한 네압볼리, 암보볼리아, 아볼로니아, 베뢰아 등 몇 곳의 유적지를 살핀 후에 그 곳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18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아덴으로 와서 아덴에서 버스를 3시간쯤 타고 고린도에 가서 몇 곳을 순례한 후 다시 아덴으로 와서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19일 밤을 보내고 20일 아침 주일을 맞이하여 호텔 식당에서 본인의 설교로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그 날 로마의 교황청이 있는 베드로 성당과 카타곰 등 다른 유적지들을 살피고 쉬었으며 21일날 오후에 스위스의 도시인 제네바에 와서 칼빈 선생님의 개혁운동의 발상지인 칼빈기념교회와 그의 초라한 무덤을 답사하므로 성지순례의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블란서 파리로 가서 하루를 더 묵고 그곳을 구경한 후, 22일 오전 11시에 출발하여 미국 영지인 알라스카의 앵커리지와 일본 공항을 거쳐 23일 오후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갈 때는 밤이 오래 계속되는 여행을 하고 올 때는 반대로 밤이 없는 여행을 하면서 삶의 큰 변화를 느껴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의 일정은 들어보신바와 같이 강행군이었고, 교육이며 큰 연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의 3일 동안은 밤에 특강이 있어서 더욱 피곤하였습니다. 성지 순례의 결과를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① 성경과 관련된 풍부한 지리 공부를 하였으므로 성경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되었고 ② 각국의 문물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③ 기독교적인 영적은혜는 성경을 묵상하는 것만큼 감동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지를 통하여 영적은혜를 주신다면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국에는 유대교와 회교사원만 있기 때문이고, 로마나 블란서는 천주교만 있으며 터키나 애굽은 회회교만 있고, 희랍은 천주교 비슷한 희랍정교만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만이 가장 잘 사는 좋은 나라인데 그 나라만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발상지요, 또 그런 교회가 많은 곳이어서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방편을 성경으로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이 성경을 통해서 굳이 그 곳을 못 가보셔도 은혜받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럽의 나라들이 잘 사는 경우가 있어도 식생활 등이 맞지 않아서 역시 제2의 천국은 우리나라이고 우리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15일의 일정을 보내고는 빨리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린 여행에 대하여 성경과 관련이 있는 것은 본문 17절에서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하셨기 때문에 제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의미로 영적으로 주신 약속의 땅을 종과 횡으로 다녀 보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남쪽 국경인 타바, 에일랏에서 북쪽 헬몬산 중턱까지 갔으니까 종으로 다녀 본 것이고,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지중해변에 있는 “욥바”(텔아비브)까지 갔었으니까 횡으로 간 것이 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종과 횡으로 다닌 것처럼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도 종과 횡으로 연구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신령한 은혜를 더 받도록 기대하여야 하겠습니다.

6) 목회와 출판 문제: 나는 한남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구 남일 교회에서 하던 것처럼 주보의 일면에 신앙지식을 게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1년쯤 계속 하자 남전도회에서 “그 내용을 책으로 내면 어떠냐?”는 제의를 하였고, 그 당시에 정병영 집사님이 인쇄소의 일을 하였기 때문에 더욱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나는 그 일을 크게 보람있게 생각하였고, 또 비용도 남전도회에서 부담하여 그 책을 전도 교육으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작품인지라 내용도 잘 다듬어지지 않았고, 책도 맵시없이 나온 것 같았으나 나는 그 일을 큰 보람으로 여겼고, 그것이 집필과 출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상식”이란 책을 출판한즉 그때부터 집필의 의욕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성경개론”을 또 출판하였고, 또 이어서 “교회헌법연구”를 출판하고, 또 그 다음에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을 출판하니까 이때부터 책을 출판하여 보급하는 것이 300명 상대로 목회하는 것보다 진리를 펼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더 보람있는 일이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상식과 성경개론을 합본하여 “기독교 신앙백과”를 만드는 계획과 다른 강해서와 문답집, 그리고 산적된 설교문을 정리하여 출판하여야 되겠다는 의욕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말씀연구에 집착한즉 시 119:103에 “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다”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성경에 이끌리는 것을 곧 성령님의 역사로 믿었다(요 14:17, 16:13).

7) 한남교회를 8년 이상 시무하는 중 예배당 뒤의 40평 부지를 매입하여 그 곳에 4층 건물을 지어 교육관과 사택으로 사용하였는데 한남교회와 사택의 위치는 일장일단이 있었으니 좋은 점은 교통과 시장의 요지인 점이고, 단점은 퇴폐업소와 인접한 것이다. 이 퇴폐업소가 교회적으로나 자녀들에게 좋은 환경이 되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내가 한남교회를 사임하기 약 3년 전에 교회 부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진로 노변에 1000평의 밭을 3억에 매입하였다. 그때 나는 저축금의 약 1/5을 헌금하였다. 그러나 그 땅은 아직도 그린벨트가 해제되지 않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8) 나는 목회할 때 진실함과 겸손과 말씀 중심과 또 교회 헌법에 대한 서약을 이행함과 모든 성도에 대한 공평한 대우를 하려고 노력하였고, 특히 목회를 하면서 성직자의 입장에서 거리끼는 일을 안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것은 나의 성직자로써의 성실함인데 이런 것을 타인이 잘 알아주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또 그런 일로 안타까움을 느낀 일도 많았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편벽된 대우를 함이 없었는데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고, 궁극적으로 욕심을 갖지 않는데도 욕심이 있다고 보는 경우이다. 내가 30대 목회시절부터 저축을 잘 하였다면 지금쯤 두 채 이상의 집을 장만하였을 것이다. 물질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고 또 비축된 재산을 의존하지 않아야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보실 것이라는 믿음, 또 예수님이 가난한 상태로 사신 것을 모방하려고 여러 가족을 거느렸으면서도 집을 장만하지 않고 산 것은 재물 욕심의 큰 절제였다. 그리고 모든 것들 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직접 받는 체험을 하게 될 때 큰 보람과 심지어는 충격을 느낄 때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을 강조하는 나 자신에 관한 일일뿐 모든 가족에 대하여 적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믿음이 약한 가족은 물질을 앞세워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9) 나는 성도에게 감정에 호소하여 목회하는 타입이 아니고 의지에 호소하는 타입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진리가 이렇다”하고 가르치면 끝난다는 식이다. 그래서 늘 강조하기를 “성경보다 더 독한 약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성도가 성경을 진리로 믿고 거기에 복종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지도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현실 목회는 성경 진리 외에 다른 구경거리나 감정을 돋굴 만한 수단을 동원하여 성경 아닌 방법을 가미시켜야만 교인들이 무엇을 얻으려고 움직이는 고로 거기에 따라 목회자는 순수한 성경적 목회를 멀리하고 많은 활동과 현실적인 선전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을 모으는 일에 주력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또 그 같은 방법에 투자하는 것을 본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것이 성경적 목회인가?하고 회의를 느낀다. 전도할 때는 진리 전달, 친교 전도를 하되 미련한 방법을 써야 할 것은(고전 1:21)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믿음이 설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수단 쓰는 전도와 목회를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믿음과 부흥의 가치를 자신들의 본질적 신앙에서 찾지 않고 물량주의에서 찾는 사람들은 나의 목회에 회의적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0) 시대는 원시시대에서 농경시대, 공업시대로 변하였고, 이제는 기계문명에서 컴퓨터 문명으로 개화되어 우주를 한눈에 보며 살지 않는가?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신앙생활은 원시적 초창기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지식은 컴퓨터 식으로 발전하지만 신앙을 터득하는 방법은 아직도 재래적이다. 다시 말하면 목사의 말 재주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이 성도가 성경이나 기독교 문서를 읽음으로서 자기의 신앙 양식을 스스로 얻고 목사의 설교는 그때 그때 방향만 지도받는 식으로 의존하는 신앙으로 성숙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그래서 나는 수년 전부터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할 때 말로 증거하는 설교와 글로 전달하는 설교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점차 듣는 설교에서 보는 설교로 신앙생활의 문화가 바꾸어지기를 기대한다. 성경에는 “읽으므로 깨달으라”는 말씀이 많다(계 1:3, 엡 3:3~4, 골 4:16). 그러나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눈을 이용하는 설교를 좋아하지 않음이 안타깝다. 눈으로 보는 설교는 듣는 설교에 비할 때 시간을 1/3로 축소할 수 있다. 내가 성경 요절 공부 및 강해서를 기록할 때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므로 그것 이상 더 보람있는 일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고, 또 그 일에 이끌리면서 심방이나 행정적인 일로 시간과 정신을 쓰는 것이 아깝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누누이 문자로 나타내는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면서 말씀집필에 몰두하는 것을 하나님의 고상한 사역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자주 거론하였으나 이 말은 오히려 감동과 설득보다 목회에 전념하고 글쓰기를 포기하든지 은밀하게 쓰라는 반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학자도 아닌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우습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① 말씀연구에 끌리기 때문이고, ② 평신도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③ 구두증거는 소수 대상을 상대로 하지만 문서와 책은 많은 대상에게 축적되는 내용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타산을 하였다. 그래서 담임목회 사역을 축소하여 설교목사처럼 일하고 당회장만 하면서 생활비를 얼마큼 줄이고 성경 연구 중심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기회를 가져 보려 하였으나 실현성이 없었다. 여기에서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뺏어가지 않으리라”(눅 10:42)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목회 일선에서 후퇴하여 말씀집필과 문서 보급사역 쪽으로 전환하는 소원을 굳히게 되었다.

11) 한남교회 목회 8년에 들어섰을 때 당회 행정상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당회에서 주장하기를 교회 행정의 분업을 시도할 것과 무슨 안건이나 다수 가결로 결정하고 소수가 다수의 의견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따라야 할 것과 유급사역자 인사 문제에 있어서 시무자를 내보낼 때는 가급적 나갈 길을 열어 내보내므로 교역자를 어렵게 하지 말자는 뜻을 폈지만 실현되지 않으니 행정은 피곤해지고 사랑 역행의 거리낌이 누적되었다. 사람이 얼마나 더 산다고 이웃을 해롭게 하겠는가? 또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정신을 실천하지 않고서야 어찌 목회라 할 수 있겠는가?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관리직으로 수고하던 분을 내보내려 함에 있어서 내보내려는 교회측과 나가지 않으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관리인과의 심각한 대결로 9개월을 끈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 장로들은 강경책으로 나왔고, 목사에게 해결의 짐을 지우므로 장로들이 목사를 보필하려 하지 않는 뜻이 확실하게 나타났으며 당회의 분위기가 항상 경색되고 충돌하는 세계로 변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또 몇 달 후에 OOO 장로가 목사를 신뢰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언동을 두 번이나 감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언행은 그 자신의 신앙에 불익한 심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때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목회 사역에서 떠나게 하시는 섭리임을 알게 되었다. 목회의 판도는 화평하고 사랑스러워야 하며 또 상호 신뢰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므로 목회의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이 생각은 집필과 문서 보급 사역의 의욕에 따라 반사적으로 갖게 되면서 특정 사건으로 인한 당회원 두 분과의 신뢰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사랑에 역행되는 목회는 할 수 없지 않은가?

12) 그 후에 나는 이명섭 장로님(별세)과 이철희 장로님께 뜻을 밝혔다. 조용하고 부담없이 생활하면서 집필과 문서 보급 사역으로 전환하고 싶은데 이것이 실현되려면 젊고 유망한 작은 개척교회 사역자와 본인이 임지를 교체하므로 물질적 부담없이 임지 전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이 말이 전체 장로들에게 전달되었고, 몇 일 후에 한 자리에서 의사 타진을 확인하였으며 사역자 교체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개척교회라는 의미를 30평 정도의 집회소로 하고 가족들이 이사할 수 있는 25평 정도의 전세주택의 대책만 교회가 배려해 주기를 바랬는데 그것을 당회에서 수긍해 주었다. 의견이 좁혀지자 노회의 위원들과도 합의하였고, 결국 한남교회가 전셋집 대금 5000만원과 집회소 비용 3000만원 및 1년간 생활비를 교인의 유동을 막기 위하여 부담하고 성남에서 개척하지 말라는 조건을 제시받았을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으나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신 28:6) 그 조건도 순순히 지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95년 9월 중순에 사임하고 이사 나오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이 교회적 침체와 인간적 연약과 일시 빚어진 갈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나를 밀어내신 섭리로 믿는다. 한남교회는 목사에게 퇴직금을 주는 것 같은 책임으로 8000만원을 부담하였을 것이나 나는 아홉식구와 함께 일터를 포기하므로 명예적, 물질적, 취약점을 과감하게 감수하고 희생정신으로 감행한 일이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고, 또 8000만원 문제는 가족의 거처와 일터를 제공하는 피할 수 없는 최소한의 대책이라고 생각한다. 교역자가 일한 공로를 내세워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능력있는 젊은 사역자에게 교회를 맡겨 더 부흥되도록 기회를 주고 교회는 흥하되 나는 쇠하고저 하는 세례요한의 정신으로 임지를 양보한 만큼(요 3:30) 부끄럽게 나온 것이 아니며 또 연약한 상태에서 참지 못하였거나 이기지 못한 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과 나 자신의 달란트 사역을 위하여 사명적으로 시행된 일이라고 믿는다. 목회자는 많아도 내가 받은 은사의 달란트 사역을 시행할 자는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셋집 대금은 지금까지 살아 있으나 집회소 대금은 2년 만에 반 이상을 소비하였다. 내가 나올 당시에 내가 만일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면 9년간 적금된 은급비 1300만원 정도와 임의 목사의 명의로 된 2년쯤 사용한 승용차를 제공하여 나가는 교역자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을 것이다. 현실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물질문제를 타산하는 기업체 같은 인상을 느끼게 하는 풍조가 속히 개혁되고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절차로 30년 기성교회의 목회를 마치게 되었다. 여전히 성경 말씀에 대한 집착과 메시지 분출의 은사는 계속 되었고, 한 주간쯤 이삿짐을 꾸리는 동안 7분 설교 5집을 집필할 정도였다. 나는 계획을 가지고 기성 교회 목회를 사임, 중단한 것이다. 나의 계획은 작은 목회. 깨끗한 목회 그리고 은사 활용을 통한 문서 집필에 대한 목표인 것이다.

 

21. 자유로운 새 생활

 

1) 나는 기성교회 목회를 사임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도하려는 결심을 가졌을 때 사임 2개월 전쯤 새로운 목회 방법을 구상하여 “새교회 새목회”란 메모를 한 일이 있었다. 그 계획의 특징은 장소와 재정에 구애없고, 주일학교는 가정 중심으로, 교육은 문서중심으로 하면서 제도적 거품을 빼고 말씀, 예배, 사랑실천 생활만을 강조하는 단순하고 자유로운 교회생활을 꿈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도나 유행이나 인간 정욕에 얽매이지 않고 교인을 모으기 위하여 구걸하듯 하지 않으며 성경이나 배우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살아가는 단체같은 것이다. 내가 기성교회를 사임한 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독과 어려움이 시작됨을 느꼈는데 그것은 약 1개월 전부터 이사 갈 전세 주택을 찾는 것부터였다. 법률적 문제와 위치, 그리고 집의 넓이 문제가 적당치 않아서 약 1주간 헤매다가 어렵다는 사실을 느끼고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하나님 나는 서울 가까운 쪽과 모란 쪽을 택하려 하였으나 적당한 집이 없습니다. 이제는 장소와 방향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적당한 집을 만나는 곳이 내가 가는 곳입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 이튿날 9월 초에 현재 살고 있는 금광 2동 3000번지의 집을 찾아 가장 적당한 집으로 알고 계약하였다. 이때 나는 노아의 방주가 방향키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람따라 간 것처럼 나의 길과 행사도 그렇게 맡긴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집은 차고가 있고, 찾기 좋은 곳이며 또 서울 가는 순환도로 곁이고 아이들의 아르바이트 직장 근방이며 또 신구전문대학 근방인데 2년 후에 대환이가(막내 아들) 그 대학에 들어간 것입니다.

2) 내가 고독해지고 생활의 변화를 느끼면서 하나님이 그 일부터 인도하셨음을 깨달았다. 9월 중순에 마지막 주일 강단을 지키면서 “나는 더 나은 일을 위하여 큰 것을 포기한다. 더 나은 일이란 교회의 부흥이고 또 나로써는 집필과 문서 보급 사역이라”고 하였으며 부분적 원인이었던 몇 가지 갈등 문제는 나타내지 않았다. 의견 차이가 있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장로들 전체가 서로의 유대관계 때문에 과감하게 목사편을 들어 유익한 증언을 하지 않는 것은 목회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그해 추석을 지나고 이사를 할 때 많은 교인들이 도와주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 없는 수요일 기도회를 맞이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은 안 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아내와 나 둘이서 가족 기도회를 드렸는데 이때 내 아내는 고독을 느꼈을지 모르나 나는 수요 기도회를 심방예배처럼 드리니까 대단히 쉽고, 그 기도가 더 간절하며 오히려 더 은혜로움을 느끼고 감사하였다. 주일 낮 예배도 가족들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역시 단조롭고 거품 없는 신앙생활임을 느꼈다.

3) 그리고 3주 후에 문정동 사거리 코너 상가 3층을 보증금 500만원과 월세 60만원으로 2년을 계약하고 “새교회”란 이름으로 10월 노회 때에 등록을 하고 10월 둘째 주일부터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나는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예측도 안 하였는데 방화숙 권사님과 그의 따님들, 그리고 김영자 집사님과 정구희 집사님이 함께 해 주셔서 13명의 회집이 시작되었고, 그 제직들이 주일 점심 식사를 매 주일 잘 해주셔서 생일을 축하받는 기분으로 음식을 먹으며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또 그 시기에 김호룡 강도사님이 다른 임지에서 나온 시기라 나를 도와서 설교를 해 주셨는데 1년쯤 후에 개척교회를 하면서 나가시게 되었고,(김목사님은 그 이전부터 나의 출판물 편집을 도와준 큰 은인이며 지금도 계속 나를 도와주신다.)

4) 문정동의 새교회 사역은 주일 낮 예배 두 번 드리는 것이 전부였고, 성구를 벽에 걸어 간판 전도하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시기에 나는 “성경요절 연구”를 열심히 집필하였으므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시간에 쫓기고 잠이 부족한 것에 비하면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그 때 나의 변동 생활을 알고 염려해 주는 식구들이 나를 도운 일이 있었다. 대구의 태평교회, 김천 제일교회, 강화의 강남교회, 전농 중앙교회, 한남교회, 시찰회, 세계로 교회, 연정교회 등이었다. 나는 보조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염려해 주시므로 매월 5~10만원씩 보내 주어서 2년쯤(지금까지 보내는 교회도 있음) 생계의 보탬을 주었다. 나는 목회 말년에 보조를 받아야 먹고 살만큼 어렵지는 않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좋게 여기지도 않지만 오직 출판과 문서 선교를 위해서는 주시는 보조를 사양하지 않으므로 서적 보급 및 출판 비용에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보조를 받았다. 그리고 그 금액을 서적 선교비 장부에 넣어 그 목적으로 지출하였으나 결국 내가 지출할 것을 보충한 셈이다.

5) 1년쯤 지난 96년 12월에 부산 당감 제일교회를 시무하시는 선배, 존경하는 최진도 목사님이 나의 사정을 아시고 나를 부산의 임지로 이끌어 주시는 소개가 있어서 동삼동 소재 동삼로 교회에서 분립된 50명 정도의 교인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교회는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갈등이 있는 중 노회가 대립된 교인들만 부당한 방법으로 치리하여 내쫓고 목회자만 편벽되게 비호하는 상태였는데 1년동안 교역자 없이 단체를 유지하면서 많은 민,형사 소송에 접하고 있었다. 나는 이 교회로 이사 오기도 어렵고 또 단호히 거절할 형편도 못되었다. 내가 부산으로 전임하기 어려운 이유는 ① 새교회의 계획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고 ② 목회 말년에 26년 이상 머문 황동노회를 떠나기 어려우며 ③ 가족들의 생활근거지를 분리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그러나 또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① 최진도 목사님의 호의를 두 번 거절할 수 없음과 ② 나에게 교인이 없은즉 이 교인들과라도 인연을 맺어야 하는 점과 ③ 이 교인들이 교권주의에 희생되어 합법적 투쟁을 외롭게 하고 있은즉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정의감이었다. 그 무렵 새교회는 김호룡 목사님이 나가셨지만 이성광 목사님 가족이 나를 도와주는 상황이었고, 또 부산에는 부교역자를 두어 기관 지도를 해야하는 만큼 양쪽에 다 부교역자가 있는 관계로 매월 격주제로 시무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구애 없이 오고 가며 조용한 생활과 집필사역을 자유롭게 시행한 것이다. 이렇게 양쪽 교회를 제도적으로 왕래하니까 새교회의 부흥활동은 할 수 없는 대신 자유 시간을 가지고 개인적 달란트 사역(집필 등 원고 정리)에 몰두하므로 진리를 밝히는 일을 계속 하였다(빌 2:16).

6) 새교회 전셋집 기한이 만기되자 양적 부흥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소비만 할 수 없어 장소를 폐쇄하고 당분간 주택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남 외곽지 조용한 곳으로 나가서 연구실 겸 집회소를 가져 보려고 하였는데 나를 따라준 권사, 집사님들 몇 분이 교회 발전의 전망이 없고, 또 부산의 교회로 가도록 하려는 뜻으로 교회 출석을 사양하게 되었다. 그분들은 문서 메시지로 은혜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섭섭하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97년 10월 하순부터 98년 2월까지 약 4개월간 집에서 이성광 목사님 가족과 예배를 드렸는데 그 해 3월에 신덕교회의 초빙을 받았다. 신덕교회는 오래된 교회였으나 장로와 장립집사 두 가족이 1억 상당의 전세 예배당만 갖고 있었고, 나는 예배당과 연구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 시기에 청빙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허락할 때 부산의 교회도 상당기간 함께 살피기로 하였고, 또 나는 재정이 빈약한 상태에서 생활비에 부담을 주지 않을 뜻을 말하고 부임한 후 4월 노회에서 위임 목사 청빙 승인을 받았고, 또 10월 노회에서는 신덕교회와 새교회가 합동하여 이름을 “새교회”로 사용하는 것까지 노회의 승인을 받고 동년 11월 28일에 위임식을 하였다. 교인 10여명을 상대로, 또 한 노회에서 3회차 위임식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또 IMF로 경제가 위축된 상황 등을 감안하여 참으로 거품없는 위임식을 행하였다. 가운도 안 입고 순서지를 이면지에 복사하여 진행할 정도였다. 이것은 현실교회의 거품있는 행사를 개혁하는 도전적 시도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에 있었던 많은 체험들에 대하여 “놀라운 충격”이란 제목으로 간증하는 글을 남겼다.

7) 또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97년 10월 31일(음 9월 17일)에 어머니가 별세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1915년 음 11월 4일(을묘생)에 출생하여 어려운 인생을 가난과 인내와 노력으로 사신 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과거의 인생을 잘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의 어머니 같이 훌륭한 분은 없다”고 믿는 가난을 이기신 분이며 세상의 영화를 꿈꾸지 않는 분이며 자식들을 위하여 끝까지 묵묵하게 봉사만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80세가 넘으시면서 청력도 약해지고 계단 출입도 못하시며 무엇보다도 “무엇 무엇이 잡숫고 싶다. 입고 싶다”는 의욕을 갖지 않으셔서 성의껏 음식 대접을 못한 것이 항상 내 마음에 걸린다. 돌아가실 때가 된즉 음식을 잡숫지 못하셨고, 심부전증 현상이 일어나서 순간적으로 숨이 차는 고생을 하실 때 의례히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을 스스로 기다리셨다. 병원에 가실 것을 강력하게 3차나 권유하였지만 강경하게 거절하셔서 그대로 미루다가 나중에 너무 고통이 심하여 이웃의 중앙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병원에서는 심한 고통없이 호전되는 듯 하였지만 3일 되던 새벽 5시에 임종하신 것이다. 그 전날 밤에 나는 더 사실 줄 알고 집에서 잤고, 내 아내가 병실을 지켰는데 새벽에 잠시 잠든 사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병원 규정에 따라 초렴을 하여 집으로 모셨고, 3일 되는 날이 주일이어서 4일장을 치를 때 한남교회의 남전도회원들이 오셔서 출관을 도와주었고, 그 분들이 다 가신 줄 알았는데 또 화장터에까지 오셔서 운구해 주므로 큰 은혜를 받았다. 어머니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만 선산의 아버지 묘에 합장하였는데 나는 어머니 시신을 화장할 때 장례문화의 간소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례날에는 어머니 몸이 불탄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한자처럼 감정이 덤덤하였고, 오히려 아이들이 위로받도록 “어머니는 천국에 가셨으며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장례 문화가 후손들에게 부담을 주고 영토가 좁아지는 상태에서 화장을 권장하였지만 나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고향(강화 갑곳리)에 300평 상당의 묘소 네 필지를 매년 벌초하는데 큰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 일을 계속 감당하고 있지만 자식들은 장성하여도 그런 일과 고향쪽에 마음을 쓰지 않으므로 선산관리 묘역을 축소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의 모습과 예수님 앞에 가셔서 후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모습만 상상할 뿐 그 시신이 땅에 묻힌 일에 대하여는 일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화장한 것을 시작으로 모든 후손들도 화장하여 그 유골 단지를 아주 작은 묘역에 1m²공간을 점유하여 봉분없이 묻고 비석만 세우는 일을 죽기 전에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8) 나는 기성교회 목회를 중단하고 작은 목회, 집필사역 등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인도하시는 섭리를 더욱 강열하게 체험하였다. 그 결과로 새로운 생활 철학을 터득하였는데 그것은 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의 방도가 열리는 대로 행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생각과 계획을 앞세우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교를 “무엇을 할까요?”란 제목의 설교문을 썼다. ① 동삼로 교회 문제는 소송이 끝나고 노회에 예속한 후 유망한 사역자를 세워준 후 나는 후퇴할 것과 ② 성남의 새교회 문제는 위임한 입장인 만큼 70세까지 시무하되 더 나은 위치(시내의 경우)나 혹은 외곽 지역(땅을 살 경우)에 자리를 정하여 집회소, 연구실 및 주방, 운동실을 시설하여 놓고 혼자 거주하면서 서적 보급, 성경 연구 및 기도회, 신앙상담 사역에 임할 것과 ③ 가족들에 대하여는 이미 큰 아들은 대구에, 둘째 아들은 안산에 나가 있은즉 그들을 따로 살게 하고 또 미라와 유라도 적당한 곳에 따로 살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고 거기에 대환이와 아내가 함께 거하면서 아내는 내가 있는 연구실에 오고 가게 할 생각이다. 2~3년 안에 모든 아이들이 다 가정을 이루어 독립하기를 바라고 나는 단신으로 아내의 협조를 받으며 가족에 대한 부담 없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역자가 되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④ 달란트 사역에 대하여는 약 30종의 집필 계획(집필계획 및 진행 상황 참고. 끝 page에 첨부 예정)이 있으므로 시간과 능력에 따라 열심히 집필, 정리, 편집하여 디스켓을 만들고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인터넷 및 CD를 통하여 널리 보급되도록 만들어 놓고 경제적 여유를 보아서 몇 권만 출판하고 또 서적보급사정에 따라 요긴한 책만 상품화시킬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주시는 대로 성취하게 될 것이다.

 

22. 교회문제와 관련한 법률적 경험

 

내가 87년도에 대구 태평교회 싸움에 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일반 법원에서 벌금형을 받은 일이 있었다. 사건은 교회 분규 대립 중에 한편에서 예배당 문을 파손하였는데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내가 파손한 측을 법리적으로 돕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에서 기물파괴를 함께 한 것처럼 고소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검사 앞에서 수차 기물파괴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변명했으나 상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파괴했다”고 증언하여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정에서도 판사에게 그 사실을 말한즉 판사의 말이 3인이 길을 가다가 다른 두 사람이 싸우게 되었는데 그 싸움을 말리지 않고 동참한 사실이 있으면 같은 싸움꾼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형사소송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으므로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대법원에까지 상고하였으나 기각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싸우는 곳에 있지 않을 것을 결심한 일이 있었다. 내가 부산 동삼로 교회에서 3년 가까이 있으면서 일반 법정 싸움에 간접적으로 상관하면서 교회의 분쟁과 관련하여 또 깨달은 바가 있었다. 교인들끼리 싸움을 안 해야 좋다. 싸움을 하게 되는 이유는 재물이나 감정대립의 싸움보다도 그렇게 한 것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를 판단하기 위하여 계속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 법을 몰라서 불법을 합법인 줄 알고 행하는 자에게는 재판을 거쳐서라도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경우에 사랑과 친교에 멀어짐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본의 아닌 상태로 죄(불법)에 빠졌더라도 죄는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만큼 어떤 상대방이 자기의 잘못을 깨우쳐 주거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고소를 당했을 때는 반드시 죄를 깨우쳐 준 대상에게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욥 32:35~37). 과연 일반적 송사가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가?에 대하여 “성도의 일반적 송사문제”란 제목으로 글을 쓴 것이 있다. 그 당시에 부산 동삼로 교회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체에게 신앙적 지도를 하면서 그 단체와 모체 교회 간에 있었던 송사들에 대하여 새로운 법리를 깨달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그 단체가 출입금지 가처분을 당하여 쫓겨나올 때 교회의 건축 공금 1000만원과 천막과 악기 등을 갖고 나왔다. 따라서 모체 교회에서는 그것들이 자기들 것이라고 송사를 하였으나 대법원 판결은 “원칙없이 분립된 단체가 분립 이전부터 소유한 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이므로 분립 당시 교인들 총의에 의하여서만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립하면서 종전에 취급하던 것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측 총의에 의하지 않고 처분하면 죄가 된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법률상으로는 교인 총유의 것이므로 교회가 단체적으로 분립될 상태이면 절대로 싸우지 말고 물질에 대한 욕심도 부리지 말며 교인 수의 비례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 물질에 의존없이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가 예배당이나 경상비 같은 물질에 비중을 두어 교회를 성장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누예가 뽕만 먹고사는 것처럼 믿음은 말씀의 은혜로 성립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파생 단체가 천막을 갖고 나와서 임의로 쓴 것은 죄가 되지 않으나 상대방이 그것을 쓰겠다고 했을 때 주지 않으면 죄가 된다. 즉 같이 쓰고 같이 취급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 출입금지 가처분(교인 일부를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의 권징에 의하여 교인권을 상실 당하고 폭력 또는 확실하게 예배의 훼방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모체 교회가 권징을 할 때 법적 실권자가 권징하지 않았거나 또 권징 절차에 큰 문제가 있으면 출입금지 가처분은 무효된다. 따라서 권징은 합법 절차에 의할 때만 유효해진다. 또 권징 절차가 완벽하지 않아도 범죄성을 무효시킬 근거가 아닌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잘 참작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변호사 선임 기회를 주지 않은 것 같은 것이다. 또 출입금지 가처분을 시행할 때 판결문에서 “누구 누구는 어디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고 하였다면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다른 일을 보는 것은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들어가서 혼자라도 묵상기도를 하고 나온 것은 죄로 인정이 되었다. 작은 불법이라도 감행하고 고발을 받으면 피할 수 없이 벌금 등을 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분리 또는 분립이란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하는 점이다. 교인들을 내쫓은 쪽은 노회도 있고, 시무 교역자도 있으며 본래의 예배당을 그대로 쓰고 있는 실정이지만(교회 존립이 인정됨) 나온 측은 나오자마자 소송 관계가 복잡한 상태에서 일정한 노회(교파)나 담임목사의 입지 등이 완전하지 못한채 교인들과 목사가 모여 독립적으로 예배만 드릴 때 그 단체를 완전한 분리 또는 새로운 교회 단체로 보느냐 안 보느냐가 대법원 판례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있다. 나의 생각은 두 사람 이상이 특정교파와 관계없이 전총적 종교 제도에 의하여 종교행사를 하고 있다면 그 단체도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점은 반드시 총회가 규명지어야 할 것이다. 폭력 사건은 그 재판이 요지경이다. 폭력을 안 하고도 유죄가 될 수 있고 폭력을 많이 당하고도 증거가 없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런 분위기는 항상 피하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도 증거 또는 문서를 남기지 않은 것은 서로의 뜻이 달라질 경우에 입증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은 가정생활이 아니므로 물질 관계를 거부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성도가 신앙을 위하여 물질을 버리면 하나님이 재물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을 꼭 체험하여야 할 것이다(욥 22:24~25).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재산 문제로는 싸우지 말라. 예배당을 포기하고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얼마든지 좋은 면이 있다. 한 단체가 모여 예배드릴 장소가 필요하면 성도끼리 돈을 모아 전셋집이라도 얻어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성도가 자기 심령에 유익이 없어서 더 좋은 교회로 가고자 할 때는 그가 투자한 전세금을 돌려주어서 그의 심령(믿음)에 유익한 곳으로 가도록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현실 교회가 이기주의, 물권주의에 사로 잡혀 성도를 억압하거나 알지 못하는 성도가 그런 일들을 두려워하여 양심에 속박을 받는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에 위배되는 일일 것이다. 교회간의 소송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보통 2년을 끌어야 대법원의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그 판결로도 종결되지 않는 문제가 또 생긴다. 그러면 또 미비한 문제의 대립으로 새롭게 소송하여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므로 신앙정진과 교회 부흥에 손해될 따름이다. 그러니까 물질은 포기하고 신앙적 법리를 옳게 재판해 주지 않을 때는 그 교단을 탈퇴하여 법을 존중하는 교파에 가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교권주의가 난무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존하거나 합류할 때는 자신의 신앙에 유익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허탄한 것들을 멀리하고 고독해질 때는 주님이 가까이 곁에 와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 큰 만족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23. 99년 10월부터 12월까지

 

1) 99년 8월부터 부산 단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란 소송사건을 지루하게 여긴 청년 몇 명이 교회를 떠났고, 끝나야 할 소송은 상대방이 작은 문제까지 물고 늘어지므로 지연을 시키는 중에 부산 노회 소속 소망교회 지우훈 목사님과 내가 지도하는 동삼로 교회측 대표자 황택관 집사 간에 양측교회 합동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 황택관 집사는 그 사실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그때 나도 그 사실을 긍정적으로 호응하였으니 그 이유는 ① 동삼로 교회가 부산 모 지역노회로 들어감이 합당하고 ② 또 지우훈 젊은 목사님이 유망한 분이며 ③ 부산노회와 지우훈 목사에게 그 단체를 일임하는 것을 유익한 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결되지 못한 남은 문제들을 인계하고 나를 인도해주신 최진도 목사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9월 중순에 시무를 중단하였다. 조금 아쉬운 것은 그 단체가 나에게 대표권이나 행정권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게 강단과 소송에 대한 자문만 맡긴 것이다. 그때 나는 집필에 몰두하려고 그런 행정적 직무를 피하였다. 그래서 소망교회와의 합동하는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깊이 간섭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서동걸 목사님이 연로한 몸을 이끌고 나와 교회를 돕다가 같이 사임하였다.

2) 내가 성남의 새교회를 오래 시무할 생각으로 위임을 하였고, 예배당 장소를 전철 가까운 곳으로 옮겨 보려 하다가 쉽게 되지 않자 오히려 그 장소, 그 건물을 과분한 은혜로 알고 99년 10월에 연구실 구조를 고치고 정착하였다. 김호룡 목사님 가족이 계속 나를 도와주시므로 나의 집필과 부산 다니는 일이 순조로웠다. 이 상태를 12월까지 잘 유지하면서 2000년에 더 잘 되기를 바라고 새출발을 하였다. 내가 남은 여생에서 목표하는 바는 교회가 20세대 30명으로 증가하는 것이고 모든 성도들과 가족이 건강한 중 나에게 맡겨진 목표대로 집필하여 출판 또는 CD를 완성하는 것이다(2000년을 소망하면서).

 

24. 가족들에 대한 평가와 관심

 

목사가 교인들의 성격과 생활과 신앙을 관찰하는 것처럼 가장 잘 아는 것이 가족에 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시는 것처럼 내 가족에 대한 것도 하나님만 잘 아신다. 나의 자녀들의 생활을 살핀다면 믿음생활이 억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자녀들이 초등학교쯤 다니는 시기에 목회에 전념한 일들로 인하여 개별적으로 지도하지 못한 것이 생애의 큰 결함임을 스스로 지적한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속담처럼 교역자의 자녀들도 직접적인 교육이 필요한 것인데 이 사실을 교회 교육에만 의존한 것이다. 따라서 1대 1의 교육과 교육의 확실을 기함에 소홀하였다. 나와 내 아내와 여섯 자녀들에 대한 소감을 순서대로 피력하면

1. 내 성격은 흑백논리를 잘 따지는 고지식한 성격이고 결벽증이 상당하게 있고, 비판을 잘 하며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는 성격이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 소신대로 사는 것을 보람과 행복으로 여긴다. 따라서 고독한 면이 있지만 스스로 위로를 느낀다. 그리고 30년간의 목회는 민주적 헌법과 텃세하는 교회에서 사실상 장로 중심으로 움직이는 목회를 하였을 뿐 자신의 소신대로 하지 못하였고, 만일 소신대로 하였다면 아부를 안 하는 목회로써 다수 교인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을 것이다. 건강은 50대에 들어서면서 시력도 저하되고 견비통, 요통 등이 있었지만 잘 이기면서 60대에 들어섰으나 운동적 체질이 아닌지라 자주 피로를 느꼈는데 한남교회 시무할 때는 두 세달에 한 번씩 혓바늘(설염)이 돋아서 큰 고생을 하였지만 자유의 몸이 되어 휴식을 마음대로 취하면서 그런 증상은 거의 없어지고 식욕도 좋아졌는데 61세 초기부터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회갑이 되었을 때 나는 어른 공경도 잘 못하였고, 또 자신이 영광이나 대접받는 것도 싫었으며 이웃을 초빙하여 축금을 받고 대접하기도 싫은지라 아무 표시없이 보내기로 하였다. 마침 음력 생일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평소와 같이 아침을 먹고 주일 예배를 집에서 드렸다. 그 시기에 시찰회가 모인다 하기로 내가 부임한 신덕교회로 장소 정할 것을 자청하여 약 25명쯤 손님들이 오셨기로 남한산성 뷔페식당에 가서 자비로 대접하였다. 그 후에 그 비용 40만원을 사라(출가한 딸)가 갚으므로 그 딸이 회갑잔치를 해 준 셈이 되었다. 다른 자녀들은 회갑의 어떤 의미조차 표시하지 않았고, 나도 바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과 시간을 주시는 한 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계획대로 진행하다가 상당 기간 더 산다면 그때 가서 남은 생애의 삶의 방법을 인도받을 것이나 집필 사역을 끝낸 후에는 보급에 힘쓸 계획이다(62세 후반에 혈압이 170까지 올라서 약을 먹고 150으로 낮춘 상태에 있다).

2. 내 아내는 가정 살림과 자녀들에 대한 뒷바라지를 잘 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듯 하였고, 역시 운동체질이 아닌지라 몸이 강인하지 못한 중 50대 갱년기 영향을 받으며 마음을 부요하게 갖지 못하는 탓으로 59세인 현재 나이에 퍽 허약한 몸을 갖게 되었다. 과거 여러 차례 “죽을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하는 공포와 초조감에 사로 잡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진찰했을 때마다 큰 병이 아니고, 신경성인 증상만 드러나서 회복을 하였다가 1~2년 후에 또 나타나곤 하였다. 마음이 부요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생활에서 창고를 열고 쓰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늘 스트레스를 주었을 듯 하고, 큰 교회에서 나오자 고독을 느끼면서 말 벗이 없으면 성경이나 독서 등 특별한 취미에 붙잡힐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는 점과 덕유, 성유, 사라의 생활에 불안한 점을 생각하면서 신경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덕유와 성유는 부모 곁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과 확실한 직업이 없어 염려되고, 배우자 영입에 대한 준비도 허술한 입장이며 사라는 남편과의 생활이 원만하지 않으므로 역시 염려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성경말씀에 끌리고 그 교훈에 민감해져야 하며 현실적인 욕구, 특히 좋은 의복이나 풍요한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희망스럽게 생각하여야 하며 자녀들은 다 성장한 만큼 마치 짐승이 젓뗀 새끼를 외면하는 것처럼 적당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요, 식생활 개선을 잘 하여 주방 일을 축소하고 등산, 독서, 여행, 기타 취미 생활에 바쁜 일정을 보낼 수 있도록 생활개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경이 날카로워서 마음에 불안을 느끼므로 발생하는 병은 오직 신앙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현세욕을 못박으며 삶의 기한과 삶의 취미도 하나님께 맡기고 생활개선을 할 때에 호전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내가 노력할 것은 “주여, 제 아내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으며 낙을 누리다가 죽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예배당에 부속된 방에서 간단한 식찬으로 먹으며 의복은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리고 시간 있는 대로 오직 성경과 신앙교육 자료를 구상한대로 글로 남기고 보급하는 일에 전력할 것인즉 내 아내도 그런 일에 협력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자녀들의 생활을 독립시키고 부양 가족이 없이 살아갈 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현실을 적당하게 부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요 8:32).

3. 큰 아들 덕유에 대한 관심은 이렇다. 나는 이 아들을 처음 키울 때 몹시 사랑하고 기대를 가졌다. 크면서 겁없이 행동하고 활발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을 늦추지 않았다. 덕유가 5세쯤 되었을 때 견문적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울릉도까지 데리고 다녔다. 구읍교회에서 4~5세 때 높은 종탑에 올라가서 몹시 때린 일이 있었고, 또 나무에서 떨어져 이마를 다친 일이 있었으며 경북 어린이집 미끄럼틀에서 다리에 큰 나무가시가 박힌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고난과 아픔을 잘 이기는 성격이었다. 고등학교 때 척추의 통증 때문에 공부하는 자세를 취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담임 선생님과 불화한 관계를 맺으면서 말썽부리는 학생이 되었으며 고등학교 공부에 취미를 잃고 대학가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자기는 대학을 안 갔어도 공부한 자만큼 돈도 벌고 사회에 적응한다는 자신감을 보인 일이 있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그 졸업식에 오지 말라 하여 아무도 안 갔음) 졸업장을 11시경에 갖고 와서 전달하고 당일 오후 3시경에 약간의 여비를 가지고 대구에서 집을 나갔고, 그 후에 우리 가족은 성남으로 이사를 하였다. 2년쯤 객지 생활을 한 것 같다. 그 다음 군입대 영장이 나왔을 때 의정부 부대에 입소하는 날 새벽에 마산에서 출발하여 겨우 2시에 입소하도록 강남 고속 버스 정류소에 나가서 의정부까지 차로 인도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군생활에 잘 적응하고 제대하자 집에서 2일쯤 머물고 군생활의 친구나 고등학교 졸업 후의 친구들을 따라 또 집을 나갔다. 결국 대구에서 철근 기술과 건축 노동에 종사하였고, 대구에 방 한 칸을 얻어 주었다. 건축 공사가 있을 때 돈을 벌어서 약 500만원쯤 저축하도록 송금해 온 후 다시 그 돈을 이용하여 승용차를 사서 사용할 때 그 승용차 대금 남은 것과 보험은 거의 집에서 지급하였다. 더 이상의 저축없이 25~32세까지 대구에서 혼자 지내다가 신앙까지 멀리 하는 상태에서 IMF를 당하여 일정한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000만원을 활용하여 생활비에 쓰겠다 하기로 매월 생활비를 보태 주는 것보다 나을 것으로 여겨 꾸어 주었는데 현재 이자는 받지만 그 돈의 관리가 의문스럽다. 덕유는 식비, 활동비의 씀씀이가 큰 편이다. 작은 돈을 아껴 큰 돈 만드는 취미가 없는 아이이다. 부모 가정에 대한 관심은 있어서 자주 전화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비젼은 전혀 없는 것 같고, 우선 자신의 편안만 좋아하며 부모를 모시고 살거나 아니면 부모와 함께 살면서 적당한 직장을 갖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사실과 또 가문 계승(고향의 묘소 관리 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고, 또 경제력이 없으므로 그런 생각조차 못하는 형편같다. 덕유에게는 끈질긴 투지와 어렵게 고비를 넘기는 노력이 없다. 꼭 취미상 쉬운 일만 하려 하고 머리를 지식적으로 쓰려 하지 않는다. 성격이 쾌활한 면도 있지만 돈 없고 약해져도 그럴 것인지 의문스럽다. “경기도에 살면 대구 사투리를 말하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이유를 들어 수도권에 살기를 피하고 살던 곳 대구만 편안한 곳으로 안다. 내가 수도권의 지리를 익히게 하려고 교회 운전을 몇 달만 하라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옛 친구들만 좋아하고 새로운 환경과 대상에 적응하지 않는 좁은 생각이요, 성남에 살면서 서울 지역을 익힐 수 있는데도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어 나갈 것인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망이 멀게만 여겨진다. 현재로써는 교회 출석도 안 하는 것 같으니 신앙있는 아가씨를 소개받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 되었다. 믿음은 쉽게 뜻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모든 취약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이나 군인 제대 후의 생활이 지혜롭지 못하였다는 것을 후회하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 중심을 부모 중심으로, 세상 중심을 하나님 중심으로, 대구 중심을 수도권 중심으로, 또 육체 활동 중심을 머리 쓰는 지식과 기술 중심으로 돌리는 생활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앞으로 신앙과 직업을 회복하고 배우자를 택할 때는 가문이나 지식이나 재물같은 것은 보지 말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활발하고 낙관적 희망을 갖고 하체가 짧지 않고 생활력이 강한 건강한 여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한다. 현재 덕유에게는 1300만원 주택 자금과 1000만원의 유동 자금과 승용차가 있은즉 앞으로 부모가 더 도와준다면 약간의 결혼비용만 부담할 뿐 더 줄 것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99. 2. 23. 기록). 덕유의 생활은 99년까지 변함이 없다. 공사 일도 뜸뜸이 있는 형편이고, 자기 생활비만 벌어 쓰는 것 같은데 앞으로 건축 공사쪽 일감이 많아지기만 바라는 것 같다(99년 12월 31일).

4. 성유는 경북 청도군 화양면 화양교회 사택에서 태어날 때 난산으로 인하여 산모도 죽을 고비를 넘겼고, 태아도 머리만 나온 상태에서 장 시간을 지체하여 얼굴 색깔이 검푸르게 되었고, 태어난 이후 전체의 피부 색깔도 정상이 아닌 상태로 자라다가 수개월 후부터 점차 붉은 색, 흰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산모가 항생제 약을 섭취하므로 젖이 말라 붙어 오직 우유만으로 양육하니 어머니의 젖은 한 모금 맛도 모른채 성장하였다. 성유의 성격은 퍽 명랑하게 자랐고, 초등학교 1~2학년 때 카드놀이를 하면서 글자수를 쉽게 파악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아이로 생각하였으며 5~6학년 때 삼성야구팬으로 열심히 쫓아다니며 대구 백화점까지 걸어가서 삼성야구팬이라는 잠바를 사 입고, 명랑하게 자란 기억이 난다. 말을 잘 안 하는 성격이 자기의 엄마를 닮은 것 같았고, 성남에 이사와서도 서 고등학교에 잘 편입하여 적응하였다. 성유에게 조용한 공부방을 주어 대학 입시 준비에 노력하게 하였는데 그 방이 너무 습하고 공기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주택의 선택을 할 때 지층벽이 있는 것을 피해야 함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성유는 그 방에서 공부에 열심하지 않고 남녀 친구들과 가끔 모여서 논 것으로 안다. 그것이 오히려 공부에 지장을 주었을 것이다. 졸업 때가 되어 수도권의 대학에 들어 갈 형편이 못되어 광주 조선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1차 심사에서 합격을 못하였다가 나중에 합격 통지가 와서 전자공학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성유는 입학원서를 넣을 때나 합격한 후 하숙집을 정하는 일까지 혼자 다니면서 스스로 주선하였고, 부모가 한 번도 동행해 주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성유에게는 상당한 독립성과 자립적 성격이 있는 것을 알고 연단을 받게 하면서 지켜보았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대구역에 가서 “기차표를 사오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은 그 곳까지 걸어서 갔다 오는 것을 하기 어려운 일로 알고 안 하였지만 성유는 그런 심부름을 해내는 투지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갈 무렵 공부하는 지능이 뛰어나지 않은 것도 알게 되었다. 대학 1년 초학기를 하숙집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처녀와 계속 교제하면서 보내준 2학기 등록금을 다 쓰고 방학 때 집에 오지 않고 소식도 전하지 않으므로 휴학을 시키기 위하여 등록금을 지불하려다가 공부할 의욕없는 상태이므로 효력이 없을 것으로 여겼고, 또 소식이 끊긴 상태에서 더 이상 동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어 2학기 등록을 내가 포기하므로 학교 생활이 중단되었다. 그 후에 300만원 정도의 밑천을 달라하여 주었더니 친구와 함께 분식점을 경영하다가 월세, 관리비 등에 몰려 다 허비하였고, 축농증 증세가 있어서 방위병으로 근무를 잘 하고 근무 중 거의 용돈을 쓰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제대 후 주유소에 근무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희망을 느꼈으며 또 승강기 회사에 다니다가 볼링장 근무를 하였다. 볼링장 근무지를 안산으로 이동하면서 집을 떠났고, 그 후에 분당으로 옮겨오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주어 친구와 함께 있게 하였다. 성실하게 근무에 임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자 97년 가을부터 IMF의 영향으로 직장에 부도가 나고 나오게 되어 한달쯤 놀다가 같이 있던 친구와 함께 구미로 가서 비디오 점포를 인수 운영한다 하기로 자기가 저축한 돈 약 500만원을 포함하여 1000만원을 주었는데 1년쯤 운영하다가 적자를 초래하고 350만원쯤 남긴 돈을 갖고 다시 친구 따라 안산으로 갔다. 그 당시 집에 들렀을 때 “특별하게 갈 곳이 없으면 집에 있으면서 직장을 구해 보라”고 권했으나 집에 잠시도 머물기를 싫어하면서 안산에 있는 친구에게로 간다고 하였다. 나의 심정은 성유가 집에 있으면서 주일 예배만 참석하면 다른 생활은 자유롭게 살면서 직장을 구하기를 원하였고, 또 그 동안 가족들과의 친교를 바랬으나 성유는 이미 가출생활에 익숙해졌고, 집에 있으면 신앙생활 하라는 속박과 부모의 권면을 잔소리로 여겨야 하는 것이 부담되어 그대로 안산으로 간 줄로 안다. 나는 성유에게 신앙생활에 뜻이 없음을 알고 분노했으며 “집에 있기 싫으면 나가서 들어오지 말고 나중에 성공한 다음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성유는 혹 “부모가 자기를 위로하고 감싸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할지 모르나 “감싸준다”하여 집에 있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직자의 집에서 자란 아이로써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 같은 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섭섭함을 느꼈다. 안산에 가서 석달쯤 지난 후에 전화 연락 번호까지 없애므로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상태다(99. 3. 4). 나는 그가 건설적인 생활에 임하기를 기도하고 또 신앙생활도 싹트기를 기도한다. 또 자기 생활에 자립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고 결혼 상대자가 생기면 전세방이라도 얻어 주어 독립된 가정 생활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에 대한 생각과 사회 적응 생활에 대하여 철이 늦게 든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말하면 속히 어른스러워지지 않는 것이다. 현재 덕유 나이 32세, 사라 30세, 성유 28세, 미라 26세, 유라 25세, 대환이 22세이다. 이들은 다 부모의 협력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지금은 성유가 잘 있는 줄 알고 있다. 신용카드를 발행하는 금융기관의 직원으로부터 조회 전화가 와서 성유가 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유가 모유를 먹지 못한 탁으로 부모와의 정을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5. 미라는 우리가 대구로 이사온 후 1년쯤 후인 74년 1월 22일에 대구 동산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음력 섣달 그믐날이었고, 흰눈이 온 천지를 희게 덮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내는 첫 딸을 시골(경북 금릉군 남면 월명동) 친가에서 출산하였으나 출생한 아이가 호흡을 하지 않으므로 버리게 되었고, 덕유와 사라를 동곡(동곡교회)에서 성유를 화양(구읍교회)에서 낳은 후 병원 출산으로는 처음이었다. 해산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미라의 어릴 때는 퍽 탐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자라면서 크게 자라지 않고 총명하기만 하였다. 유치원 때에 경북 연합회 주최로 시행하는 노래 자랑에 나가서 1등을 한 일이 있었고, 또 유치원에서 행사하는 성극의 마리야 역을 너무 잘 해서 많은 자모로부터 총명한 딸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미라는 공부를 더욱 잘 할 것으로 믿었으나 생일이 1월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1년쯤 빠르게 공부를 시작한 탓인지 보통 이상 더 큰 실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중,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하여 기억이 없을 만큼 조용하게 보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신구전문대학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할 무렵에 정보처리 2급 자격을 취득하였고, 또 졸업 후에 6개월쯤 CAD를 이수한 후 취직이 쉽게 되어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미라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면도 있고, 지구력과 타개력이 있어서 직장에서 마다 필요한 인물로 일하고 있다. 많은 봉급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용돈으로 한달에 30~35만원을 쓰고 나머지는 가계에 보탬을 준다. 미라의 소득이 가정 생활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미라가 소득하여 나에게 맡긴 돈에 대한 통계를 계산하고 있으며 현재 99년 말에 3,647만원으로 계산되었다. 적당한 배우자가 생기면 혼인에 필요한 돈을 쓰게 하고 남는 것을 내가 보관하다가 미라의 생활이 우리보다 윤택하면 내가 쓰고 우리보다 못하면 돌려 줄 생각이다. 미라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원만한 편이다. 부모와 직접 대화로 신경질을 내거나 거역한 일이 없었다. 언젠가 한 번 신경질 부리는 것을 본 일이 있으나 간접적인 일로 불평을 나타낼 뿐이었다. 따라서 신경질적인 성격이 노출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기본 성격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미라는 사회적, 문화적 식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든지 잘 적응하리라고 믿으며 “하나님이 그의 키를 7㎝만 더 자라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중이다(2000년 1월 10일에 퇴촌에 있는 작은 독립 건물을 구입 미라 명의로 계약하였음).

6. 미라의 출생 이후 11개월 쯤 불임 상태에 있다가 다시 임신하여 75년 10월 24일에 유라를 낳으니 미라보다 1년 9개월 늦게 출생하였다. 유라가 출생한 날은 유엔 데이 공휴일이었고, 그 날 대구 시찰교회 연합 체육회가 영남대학 캠퍼스에서 있었다. 유라는 대구 백화점 근방에 있는 호산아 산부인과에서 출생하였다. 호산아 산부인과 의사 권병일 박사는 산부인과적 의술에 해박한 분이었다. 대구 서문교회 이성헌 목사님의 인도를 받아 알게 된 후 아내의 산부인과 문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꼭 같은 산부인과 의사라도 모든 처방 기술이 같지 않다고 느껴지며 그 분은 그 당시에 경북대학교 산부인과 과장을 역임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 후에 대환이도 그 곳에서 출산하였다. 유라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예쁜 편이었고, 또 예쁘고 착하게 자랐다. 여러 아이들이 함께 자랐고, 또 어머니(아이들 할머니)가 양육을 전담하다시피 하셨으며 나는 목회에 바쁜 관계로 아이들의 자랄 때의 모습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요즈음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찍은 사진이나 소풍 또는 교회 절기 발표회 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추억할 따름이다. 유라의 초등, 중등 시절은 거의 기억에 없고 성남으로 이사와서 성일여고에 다닌 기억이 있으며 대학에 들어갈 때 용인 외국어대학과 단국대학에 입학원서 제출을 위하여 데리고 간 기억이 나며 그 후 단국대학 천안 캠퍼스에서 졸업할 때 갔던 일이 기억난다. 유라는 평소의 생활에 특징이 없이 자기 일에 조용히 몰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라의 대학 3학년 되던 가을에 한남교회를 사임하였는데 그때까지 교회에서 등록금을 부담하였고, 4학년 등록금은 저금한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유라가 졸업은 하였지만 지금까지 2년 동안 취직을 안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유라는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몇 몇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행하여 자기의 용돈을 썼기 때문에 거의 용돈을 가져가지 않았다. 유라 뿐 만 아니라 세 딸들은 고등학교 나온 이후에 의복과 화장품 및 용돈에 대하여 부모가 돈을 준 기억이 없다. 이것은 두고 두고 기억될 일이며 또 부모의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라의 성격이 퍽 부드러운 줄 알았다. 그러나 무엇을 시키면 순종하지 않을 때가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년쯤 내가 시키는 일(설교원교 식자하는 일)을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번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나와 내 아내가 어느 날 오후 5시에 전임지 교회의 황희자 집사댁 추도 예배에 초청을 받고 가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같은 시간에 컴퓨터 서비스를 하러 온 사람이 우리 집을 찾지 못하여 집에 150m쯤 떨어진 신구전문대학 앞에서 그를 만나 집으로 안내하는 일을 유라에게 부탁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끝내 사정하여도 듣지 않자 내가 화를 내게 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 형편을 알면서도 말을 듣지 않을 바에는 왜 아버지 집에서 밥을 먹고 사느냐? 차라리 나가라”고 한 것이다. 이 말에 기분이 나빴을 것이지만 자기가 반드시 순종했어야 할 일에 불순종한 것을 생각하면 과한 꾸중으로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내 아내와 함께 가는 일을 취소하고 그 일을 아내가 맡아 행하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아내는 딸을 나무라지 않는다. 불순종하여도 괜찮은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에 유라의 그 성격이 자기 어머니를 닮은 성격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 아내는 무슨 일이나 또는 상당하게 명분이 있는 일이라도 시행하기 싫을 때는 “안한다, 안 따라간다”하면 더 이상 권면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성격적 이유로 내 아내는 교역자의 모임이나 단체 회동에 잘 협력하지 않았다. 이것은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의복, 신발, 가방 등 출장에 필요한 장비가 어색하여 그런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경제 여건은 항상 절약형으로 살기 때문에 고급 의복을 피하고 2, 3급 의복을 선호하는 형편이지만 내 아내는 거기에 적응하는 성격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제일 좋은 것을 착용하지 않으면 차라리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반면에 나는 솔직한 것과 허술한 차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지금도 노동자 복장처럼 차리고 산책을 나가곤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복이나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활로 나타내려는 것이 나의 취미이기 때문이다. 유라와의 사이가 멀어지자 대화도 없이 약 1년 동안 원고 식자를 부탁하지도 못하였다. 한 집에서 유라와 말을 안 하고 생활한 것이 마치 그렇게 살았던 아내와 의견 충돌이 있었을 때 서로 말하지 않고 살아온 것과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자 어머니가 별세하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과거 생활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그 성격을 생각할 때마다 자주 눈물이 난다. 내가 우는 것을 가족들이 그 때에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성 교회를 사임한 후 어떻게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약간 느꼈을 것이다. 평상시 목회를 할 때도 육체의 피로로 인한 구강염이 생겨서 자주 고생한 일이나 목회상으로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고충을 아이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목사의 생활이 퍽 낭만적이면서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의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마음은 뜨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년쯤 후부터 유라의 입에서 대화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반갑게 받아주었고, 또 유라는 “나의 원고를 쳐 줄 것이니 식자 비용을 내라”고 하였다. 나는 또 반갑게 허락하였다. 지금까지 유라에게 수고비를 준 일이 없지만 유라가 수고한 원고의 분량은 축적되고 있고, 또 나는 “꼭 쓸 돈이 필요하면 준다”는 약속과 함께 유라가 시집갈 때는 어느 정도의 비용을 부담할 것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에 유라가 취직 시험을 쳤으나 떨어진 일이 있는데 앞으로 잘 되기를 기도한다. 유라는 계속 부드럽고 겸손하며 순종적인 성격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요즈음은 대단히 좋은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할 때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믿는다. 미라와 유라는 다 성숙한 나이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배우자가 나타나는 대로 순서없이 결혼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덕유와 성유도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막내 대환이가 친교하는 처녀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일도 잘 성취되면 성혼을 시켜서 일찍 손자도 보고 또 결혼을 큰 일로 여기지 않고 적당히 방종한 큰 아들에게 깨달음의 기회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유라는 취직하지 않고 작곡 학원에 다니는데 6개월 수강료가 대학원 수강료와 같은 수준이다. 이것을 1년 째 하고 있으니 대학원 비용을 쓰는 셈이다. 속히 끝내고 취직하여 자립하기를 기대한다.

7. 유라를 낳은 다음 내 아내는 더 이상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자리를 멀리하는 피임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말씀이(창 1:28) 피임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믿었고, 자녀를 주시면 계속 받을 생각을 하였다. 대환이를 낳는 기간까지 피임을 노력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 일로 마음에 가책을 받기도 하였고, 또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갖지 못하는 부끄러운 마음도 가졌다. 자녀를 하나쯤 더 낳았다면 피임의 가책에서 해방 뻔 하였다. 그래서 그 가책의 대가로 어린애 하나를 입양하여 키워볼 생각도 하였고, 또 양육자 없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그 딸과 몇 일 같이 살아보았는데 7세 미만인 나의 아이들이 그 아이를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고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온 가족이 데려온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만 입양이 가능함을 깨달았다. 대환이의 이름을 지을 때 족보에 규정된 돌림자로 환(煥)자를 쓰게 되었다. 큰 불꽃, 교회의 부흥의 불꽃,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가 있어 주시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큰 아들 덕유의 이름을 나는 송암(松岩)이라고 지으려 하다가 작은 할아버지의 작명을 따랐고, 성유는 덕유의 유자와 관련한 것이며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연상하였고, 미라와 유라는 사라의 ‘라’자에 따른 것이다. 족보에는 덕유가 ‘덕환’으로, 성유가 ‘성환’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종친회에서 다시 족보를 만든다고 하여 누락된 대환의 이름을 올렸고, 어머니의 별세 기록과 저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묘소를 이장한 내용도 교정하도록 재료를 전달하였다. 아직 몇 년 더 있어야 12권으로 된 족보가 나온다고 한다. 그때에 덕유는 장손으로써의 책임상 그 족보를 구입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대환이가 출생하였을 때 하나님이 또 아들을 주신 일에 대하여 퍽 감사하고 기뻤다. 그래서 아내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세탁기를 사기로 하였는데 아내는 “큰 것을 사라”하였고, 나는 장소가 넓지 않고 또 큰 빨래는 1년에 한 두 번 쓸 뿐이니 작은 빨래만 빨아도 되지 않겠느냐?하고 큰 것 다음 제품을 구입하였다. 나는 아내가 그대로 수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크게 반대였다. “당신 고집으로 사왔으니 그대로 써 봅시다.”하였으면 나의 속이 시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반대하였다. 대환이를 낳은지 7일도 못 되었을 때인데 크게 반대하고 바꾸어 오라는 등 쓰지 않겠다는 등 너무 심하게 반발하여 나는 내 나름대로 적당히 쓰려고 선물처럼 사 온 것인데 왜 그대로 수용을 못하느냐?하였지만 여전히 반대가 심하여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탓하는 정도까지 언쟁이 비화되었다.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다른 날은 나의 서재에서 그대로 잠을 잤는데 그 날 새벽은 산모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산모의 방에 와 보니 연탄개스로 큰 위험에 처한 것이다. 갓난 애기 대환이와 그 옆에서 자고 있는 미라는 혼절 상태이고 산모는 몸부림만 치면서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어제 세탁기 일로 불순종한 잘못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집을 치셨다”고 외쳤다. 그리고 코에 식초를 대어 숨을 쉬게 하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로 즉시 솜에 식초를 묻혀서 두 아이의 코에 대고 기도를 하였더니 두 아이가 다 재채기를 하면서 소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원에도 가지 않고 그 위기를 잘 넘겼다. 나의 가정은 부분간에 언쟁이 있으면 몇 시간도 안되어 어려운 일(특히 아이들 질병)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채찍이란 사실을 나는 일찍 알았고, 아내는 그런 일이 자주 있을 때 알았다. 대환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누나들과 설탕을 불에 녹여 먹으며 놀다가 그것에 손을 데어 왼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미 혈관이 수축되어 왼편 손가락이 1/3쯤 구부러졌는데 그 당시는 의료보험도 없었고, 또 보통 외상은 집에서 치료하는 실정이었다. 그때 즉시 병원에 갔더라면 굽어진 힘줄을 늘려 펴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 후에 김병호 외과 의사에게 보인즉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유익할 수도 있다”하기로 수술하지 않았다. 그 후에 대환이가 그 손가락 장애로 군생활에 불편이 있을 것을 생각하였고, 또 수술을 하여도 군생활을 마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사실대로 그 손가락 때문에 현역병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위병이 된 것이다. “정형외과 의사의 말은 간단한 수술로 끝낼 수 있다”고 하였지만 수술 후에 작용이 얼마나 힘있고, 오그리고 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아직 확인하지 않고 있는데 더 좋아질 수만 있다면 수술을 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대환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성남으로 와서 성남 초등학교에 편입하였다. 태권도를 가르친즉 의욕있게 잘 적응하였는데 한 번은 무릎을 다쳐서 상처가 났기로 “펜브렉스”라는 항생제 두 알을 먹였다. 그 약을 먹자 하루 만에 무릎 상처는 말라 붙은 듯이 나았다. 내가 이 “펜브렉스”라는 약을 자주 쓰는 이유는 유라의 얼굴에 급성염증이 생겨서 볼이 붓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동산 병원에서는 “입원을 시키라”는 것을 김병호 외과 의사의 지시로 주사를 맞고 “펜브렉스”와 “기모타브”를 먹여 낫게 한 일이 있은 때부터 자주 편도선 염증 등에 사용하여 효력을 본 일이 있었다(약은 더 잘 알고 써야 한다). 대환이에게 그 약을 먹일 때 아이인고로 한 알 먹여도 되는 것을 대환이가 먹는 식사의 분량이 어른만큼 먹는다는 것을 감안하여 어른이 먹는 분량으로 약을 먹인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쯤 후에 대환이에게 배가 아프고 기운이 떨어져서 활동을 못하는 증상이 생겼다. 그래서 주택 바로 밑에 인하병원으로 가서 진단하고 여러 날 입원 치료를 하였다. 병명은 신장염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항생제 사용한 사실을 말했지만 의사는 그 원인으로 병이 생겼다는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약의 과다 투여로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병원 치료가 거의 한 달이 넘었어도 학교에 가기 어려울 만큼 회복되지 않았는데 어떤 집사님이 영등포의 어떤 한 의사가 모든 병을 잘 고친다고 하여 거기에 데리고 갔다. 나는 그 때 한의학의 발달에 대하여 깜짝 놀랐다. 컴퓨터 같은 기계로 환자의 몇 곳 맥을 짚어본 후 그 맥박의 기점을 연결하여 그래프 모형을 그려 놓고 의사가 그것을 보면서 “신장이 많이 상했다는 진단을 하고 일반 병원에서는 신장 이식 수술 외에는 방도가 없으나 약을 먹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하고 약을 지어 주었다. 그 약을 한 재 먹이고 난 후 오줌에서 단백질이 나가는 증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 때에 “차도가 없다”하고 약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저는 “더 심하지 않으니 한 재를 더 먹여 보자”하여 먹인 후부터 차도가 있기 시작하였고, 또 한 재를 먹이므로 완치시키는 경험을 하였다. 그 후에 대환이는 중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실력이 중급이상이면 가까운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인데 아까울 정도로 중급이하이어서 1차에 진학을 못하고 2차인 성인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성인 고등학교에서는 1등 합격생이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의 무실력자보다 하급학교의 실력자가 낫다는 위안을 받으면서 1학년 때는 장학생이었고, 학교의 관심 대상이 되었는데 2학년 때는 3등 이하로, 3학년 때는 4등 이하로 실력이 떨어지면서 졸업을 하였다. 실력 점수는 많지 않으나 내신성적은 좋다고 하였다. 나는 대환이 고등학교 시절에 대학생 이상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였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실력 양성을 위하여 고등학교에 기숙사를 두고 진학할 자들을 기숙사에 있게 하는 제도와 또 1급 학생이란 평가로 부모에게 봉사적 부담을 주는 일과 기숙생의 자모회와 전체 학생회의 육성회원 등의 책임이 따른 것이다. 봉사는 거의 못하였지만 비용을 많이 쓰면서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그러나 4년제 대학은 희망할 수 없는 실력이었고, 또 사라나 유라도 4년제 대학으로 큰 실리를 거두지 못한 터라 처음부터 전문학교 세 곳을 지망케 하였다. 한 곳은 우리 주택 옆에 있는 신구전문대학 토목과요, 또 한 곳은 수원에 있는 장안전문대학, 그리고 나머지 한 곳에 원서를 넣었는데 신구에서는 떨어지고 장안과 다른 곳은 합격을 하여 집 곁에 있는 신구대에 못 간 것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수원 장안대에 등록하였는데 몇 일 후 신구 전문대에서 대환이를 오라는 것이었다. 꼭 성유가 조선대학에 입학한 것처럼 된 것이다. 나는 그때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구대 옆에 살게 하실 때 그만한 유익을 주시기 위한 뜻이 있을 것으로 믿었고, 또 수원에 가게 되었을 때도 그 믿음을 간직한 채 아쉬워하였는데 결국 믿음대로 신구대에 다니게 하신 것을 깨닫고 감사한 것이다. 그런데 대환이는 고등학교에서 실력이 떨어진 것처럼 대학 생활에서도 학구에 전념하지 않는 것이 현저하였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어 용돈을 쓰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장차 배움에 열중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환이 공부(졸업)를 마치므로 부모로써의 교육적 책임에 일단락을 지으려고 졸업 후에 군에 가라고 하였으나 전체 학생들의 추세에 따라 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잘 된다는 여론에 따라 1학년을 마치고 98년 6월에 공익 요원으로 입대하게 된 것이다. 현재 남구청 관내에서 주차 위반 단속을 하고 있다. 어려운 졸병 시기는 잘 넘겼고, 점차 수월하게 공익요원을 끝내고 2000년 10월쯤에 제대한다고 한다. 그런데 관청에서 나오는 10만원 정도의 봉급으로 차비와 식비에 쓰고 깨끗하게 군복무만 하면 좋겠는데 친구들과의 교제 또 여자들과의 친교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한 달에 어려운 경제 속에서 30만원 정도의 용돈을 쓰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익 요원 제도에 문제가 많다. 배울 기회에 있는 청년들을 노인들도 할 수 있는 주차 단속을 시키는 것은 나라의 인력 소모요, 또 가정에서의 용돈 비용이 큰 것과 일과 시간 외에는 선임자가 “놀러 나오라”하면 밤새도록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폐단이 있다. 대환이도 약간의 고집이 있는 듯 하나 부모에게 심하게 나타낸 적이 없어서 큰 약점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남매들끼리는 친하고 우애있게 보내는 것 같았으나 부모와의 친교는 역시 멀리 하는 편이고 고등학교 때 담배를 피운 일로 내가 학교에 불려간 일까지 있었는데 현재 담배는 거의 안 피우는 것으로 짐작하며 술은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것으로 알고 있고, 밤늦게 들어오는 것이 건설적이 못되는 생활에 얽매임일 것으로 짐작을 한다. 그러나 말로 하는 단속은 소용이 없다. 성공할 자는 싻부터 다르다. 신앙생활은 부모의 권유로 끌려 가는 것 같은데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립하는 신앙을 확립하고 성경으로 성숙하는 신앙에 오르기를 바라고 기도를 드린다. 요즈음 어떤 처녀와 사귀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어떤 여자이든지 자부감이 되려면 신앙이 있고, 효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처녀가 임시로 대환이를 사귀고 있지만 가치관의 차이 등으로 교제를 끊는 경우가 있음을 예상하고 사귀라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덕유와 성유가 부모를 떠난 상태에 있어서 대환이 만이라도 부모 측근에 있어 주기를 바라지만 대환이도 두 형의 모습을 상당하게 닮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서 철이 들고 변화를 받아 부모의 심정에 반 만큼이라도 동화되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대환이가 제대하고 전문대를 졸업하기까지 자녀들 뒷바라지에 신경을 쓰고 속히 하나님의 인도 하심 따라 생활을 따로 하면서 가벼운 마음과 단순한 생활로 남은 여생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바라고 있다.

8. 사라는 이미 출가한 아이이기 때문에 순서를 뒤로 돌렸다. 동양의 윤리관으로 볼 때 여자는 출가하면 삶의 근거가 남편의 집으로 바뀐다. 남편의 집이 자기 집이고 남편의 부모가 자기의 부모요, 남편의 기업이 곧 자기의 기업이 되어야 하고 친정은 도의적 인정만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남녀의 인권 차별도 없어지는 것처럼 시집과 친정에 대한 격차도 없어지고 있는데 사라는 심하게도 남편과 시집과의 인연이 멀어지고 친정을 자기 집에 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다니고 있다. 못 오게 할 수는 없지만 삶의 절도가 있고, 결혼의 의미와 인생의 보람을 잘 알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사라는 동곡교회에서 태어났다. 70년 11월 27일 아침 10시경에 태어날 때 나는 처음으로 분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산모가 힘을 너무 세게 주어서 총알처럼 튀어 나와 문지방에 걸리는 상태를 보고 놀랐다. 사라의 특징은 머리 두상이 적은 편이다. 나는 사라를 낳고 여자는 “믿음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뜻으로 또 그렇게 축복하는 뜻으로 이름을 ‘사라’라고 지었다. 사라는 어려서부터 다 성숙하도록 아픈 일이 없었고, 홍역을 할 때도 혼자 방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냈다. 몸은 강인한 체구가 아닌 것 같으나 병을 앓는 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어릴 때 가끔 짜증 부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이니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대구 남일교회 사택에 있을 때 사라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독방을 주어야 한다”고 욕심을 부려서 할 수 없이 독방을 주었다. 그때부터 자기 방, 자기 소유, 자기 생활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자기의 일을 자신이 책임지는 듯 하였다. 한 번은 중 3인지 고 1인지 알 수 없으나 “자기 방에 도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도배를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몇 일 끌게 되었는데 도배를 속히 안 해 준다는 불평으로 벽에 검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여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남일교회 신병설 장로님이 그 방을 들여 다 보시고 아이의 성격을 나무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허허 웃으시면서 “성질이 대단하구만요”하시고 도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그 후 사라가 정화여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성남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정화여고 근방에 방을 얻어 주고 자기의 피아노도 옮겨 주고 또 연로하신 어머니로 하여금 밥을 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어머니는 퍽 민첩하고 성실한 분이지만 노인인지라 부족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사라는 할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할머니가 슬퍼하실 만큼 잔소리를 하고 짜증을 냈다. 내가 대구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니는 속히 집으로 올라오시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1년을 못 채우고 어머니가 집으로 오셨다. 사라는 알뜰하게 고등학교를 자취생활로 마쳤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사라의 성격이 못됐다는 것과 사라에게 당한 일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애로운 마음으로 모든 손자들을 대하셨다. 몇 일 전에 사라의 결혼생활이 2년 가까이 공전하는 상태에 있는 중 친정에 왔기로 “고등학교 때 대구에서 할머니에게 심하게 구박한 일을 회개해야 한다”고 하였더니 “내가 무슨 구박을 했다고 합니까”하면서 자기의 행동이 구박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현재 문명(전자제품 작동시키는 것 등)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보고 “왜 그것도 모릅니까?”하면서 불평하였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사라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 내가 학교의 담임과 의논하여 중앙대학 안성 캠퍼스 축산과에 원서를 넣게 하였는데 잘 합격이 되었다. 그 당시 교회에 자동차와 운전 기사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사라가 1, 2학년까지 장학금과 기숙사 혜택을 보았고, 3, 4학년은 통학하여 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하자 작은 주택건설회사 비서로 몇 달 취직하였다가 부도가 나서 급료도 못 받은 채 나왔지만 대학을 나온 아이가 직업에 귀천을 가리지 않은 일에 대하여 만족하였고, 그 후에 대교(과외 학습지 회사)에 들어가서 약 1년동안 근무한 것도 좋은 일이었다. 대교라는 기업체도 고용인 교사의 노력의 성과를 뜯어 먹는 단체란 사실이 노출되면서 사라는 그런 일에 불평을 하였고, 그 불평하는 일과 부도덕성을 지적하는 성격이 나를 닮은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 일로 대교직을 사임하고 피아노 교습 교사로 취직하였다. 사라는 물질에 욕심이 있고 쓸데 쓰면서 저축도 하는 실리적 성격이었다. 사라는 초, 중, 고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바이올린도 곁들여 배웠다. 나는 사라의 피아노 실력을 소극적으로 평가한다. 건반을 자신있고 큰 소리 나게 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초급생을 지도하는데는 충분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청년회 회장을 하면서 발표력이나 책임성도 퍽 좋은 편이어서 대중적 인물이 되는데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한남교회 있을 때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사라가 어떤 친구에게서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와서 키우게 되었는데 그 강아지가 크게 자라면서 집안에 냄새도 나고 교인이 목사집을 방문할 때 짖기도 하며 큰 불편을 주어서 수차 “그것을 없애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개장사에게 거저 주면 “개를 죽는데 보낸다”하여 더욱 반대하고 융통성 없이 거역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 성격이 어미를 닮은 것이 아닌가?하고 유감을 품기도 하였다. 더 이상 개를 키울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이웃에 계신 최인열 목사님이 그 개를 키우시겠다 하기로 사나운 개를 겨우 붙들어서 최목사님 댁에 갖다 드렸는데 그날 사라가 직장에서 왔기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발 대발 하는 것이었다. 너무 기대에 어긋나고 융통성 없는 행동이 미워서 “이것을 폭력으로 잡아야 하겠다”는 뜻으로 뺨을 때리고 밀쳤다. 성숙한 숙녀가 거실에 넘어졌고, 분한 상태가 극도에 달하여 숨찬 증세를 보이고 입에 거품을 내며 헛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내 아내가 상주 죽암교회에 있을 때 심히 기분이 상하면 나타나는 증세와 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하면 너무 속이 상하거나 분하면 정신 이상 같은 증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속히 마음을 고쳐먹고 위로하기 시작하였다. 사라는 개를 죽는데 보낸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속히 다시 가서 그 개를 가져 온 것이다. 자기 성격을 조절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참았을 것이다. 사라의 성격이 과민한 것을 그 때에 비로소 알게 되었고, 다시는 사라를 맞대항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몇 달 후 그 사건으로 인한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기 전에 한남교회를 사임하고 현 거주지로 이사오게 되었다. 이사올 때 개 때문에 또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 이사를 오면서 또 가족이 원치 않는 개를 2층 집으로 갖고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라에게 사전 예고를 하고 “개를 키우시겠다”고 하는 어떤 집사님이 가져 가시도록 부탁을 하고 이사를 왔는데 몇 일 후에 그 개를 시골로 갖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사라가 알자 “그 개가 확실히 살아 있는지 그 곳에 가서 확인하고 다시 개를 가져오자”고 주장하면서 가족을 괴롭히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고, 이사온 후 약 1년 동안 서로 대화도 잘 하지 않으면서 불편하게 지냈다. 사라는 자기가 번 돈을 그대로 저축하여 상당금액을 혼자 보관하고 있었는데 피아노 교습자격을 얻기 위하여 연습장소를 가져야 하니 방을 얻어내라는 독촉을 받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거실에 피아노가 있고, 그 거실은 2중창으로 되어 있어서 아무리 피아노 소리를 내도 이웃에 지장을 주지 않게 되어 있기로 “집에서 하라”고 수차 권면하였지만 듣지 않고 독촉하기로 나는 사라와의 친교를 멀리하고 싶었는지라 “방을 얻어 줄터이니 그 돈으로 결혼비용까지 쓰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물질적 부담 문제는 끝을 낸다”하고 1500만원 방값을 통장에 넣어 주었다. 사라는 그 돈으로 방 한 칸을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방음 상태가 좋은 방을 얻을 수 없자 예금된 돈의 이자까지 자신이 받아 챙기면서 나가지도 않고 집에 머물러 있다가 결혼 문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 무렵에 사라와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 같고 아버지가 사라에게 공부시킨 공치사를 하자 사라의 대답이 “공부는 교회가 시켜주었지 아버지가 무슨 등록금을 댄 일이 있느냐?”는 말을 하였다. 오기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그만큼 옹졸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망하였다. 그 때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린 지 얼마 안되어 결혼할 뜻을 말하기로 29세나 된 만큼 혼기가 늦은 감이 있어서 상대방이 믿음만 가진 자라면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승낙할 생각이었는데 “믿지 않는 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으며 “목사의 딸이 어떻게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물은즉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반문을 받았을 때 또 한 번 놀랬다.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도 아는 사실인데 목사의 딸이기 때문에 당회원 장로님이 세례문답을 할 때 엄중히 다짐을 안한 것 같았다. 참으로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자와는 결혼을 못한다”고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로 “믿겠다는 결심과 실천을 나타내면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북 안동(영양군) 방면의 지방적 또 불신자적 생활문화가 너무 차이가 커서 적응하기 어렵고 처음부터 생활의 방도가 맞지 않을 것을 말하면서 반대를 하였지만 “그래도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로 부모가 반대하여 불행해졌다는 원망을 듣는 것보다는 승낙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믿고 당사자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 생활, 교회 생활을 꼭 하여야 하니까 “결혼을 계기로 결심하라”하여 서약서를 받고 가문의 보수적 생활로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를 말한즉 그런 일에 별로 염려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결혼 승낙을 하면서도 사라가 결혼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는데 그칠 것으로 예측을 하였다. 그 이유는 사라의 성격상 남편과 화합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결혼 절차는 대체로 간단하게 하였다. 당사자의 선물교환이 생략되었고, 양가의 음식 교환도 간단하였으며 결혼예식장 비용만 쌍방이 부담하였다. 나중에 들은즉 1200만원 정도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라 결혼식 때 고모들과 본가와 외가에 전화로 연락하고 주례 목사님(이상춘 목사)께 청첩장을 단 한 장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사라의 친구들을 통하여 전임지 한남교회에 알려졌다. 감사하게도 한남교회에서 70여명의 교인이 와서 예식장을 빛내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라는 결혼 당일부터 남편과 갈등하였다. 남편이 예식을 마친 후에 예정에 없던 친구들과의 피로연에 신부를 참석하게 한 것인데 사라는 여기에 참석을 못한다고 반대하여 서로 갈등하다가 신혼여행 가는 시간이 바쁜 관계로 그 순서를 취소하고 떠난 것이다. 1년쯤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 예상한대로 문제가 많았고, 현재는 사라가 따로 나와서 별거하는 중이며 한 주간에 한 번 씩 친정에 오는 형편이다. 정신과 생활은 이혼한 것과 같고 법적 관계만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랑이 적응하지 못하는 점도 중첩되었다. 사라는 자기 고집대로 하면서 남편이 따라오고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고 남편은 아내가 고집을 부릴 때 참지 못하고 폭행을 하므로 서로의 사이가 더 어려워지게 된 것 같다. 나는 아버지로써 남자의 성격과 생리적 본성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아내가 순종형이 못될 때 나타나는 결과가 뻔하다는 것을 짐작한다. 남편은 폭력을 삼가지 않으며 생활재정을 책임지면서 아내에게 맡기지 않는 약점이 있고, 사라는 자기 뜻에 따라와야만 협력한다는 굽히지 못하는 고집이 있으니 쌍방이 이 결함을 고치지 못하는 한 평온한 생활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현재 상태에서 남편은 “아내와 살기를 원하고 교회에도 잘 다니겠다”하므로 나는 그 뜻을 받아들이고 싶으나 사라의 말은 “그 말이 그 때 뿐 또 본성이 나타난다”고 하니 그 말도 부정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분거할 경우 불편과 손해는 남자편이 당하게 되고 여자는 상당기간 버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두 편이 다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인즉 이혼이 금지된 계명이지만 믿음으로 행복을 만들지 못할 바에는 속히 이혼을 하는 것이 남자에게는 행복을 빨리 찾는 방법일 것이요, 사라는 두 번 결혼을 포기하는 상태에서 장기간 혼자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라의 인생도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따름이다(99. 12. 31).

 

25. 2000년을 맞이함

(2003. 3. 14.에 기록함)

 

1) 나의 생애에 2000년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새 출발을 함에 있어서 큰 자극을 주는 것 같았다. 인터넷이 시작되고. E-Mail이 개설되면서 나의 E-Mail 주소를 gyk2000@hanmail.net로 할 정도였다(g.y.k는 지영근의 약자임).

2) 나의 집 주소(금광2동 3000번지)나 교회의 주소(금광 2동 656번지)의 변동 없이 새해를 맞이하였다. 2000년 6월에 전흥덕 군이 장기 복역 후 많은 변화를 받고 출감하였으나 거처할 만한 곳이 없어서 예배당의 나의 서재실에 있게 하였고, 그가 1년쯤 잘 있으면서 잠실의 버섯상회의 점원으로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2002년 5월 5일에 소매치기 미수범으로 인정되어 1년 6월의 복역기를 마치고 계속 감호 조치를 당하여 지금까지 청송감호소에 있는 형편이다. 그 곳에서 신앙적 연단을 받으면서 컴퓨터 기술을 배운다고 하니 퍽 기대를 가져본다. 내가 지금까지 집필한 여러 종류의 문서는 39종에 이르고, 현재 홈페이지에 수록된 것이 약 10종이다. 전체를 다 수록한다면 30여 종에 12000 page 이상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완성하는데는 미라와 유라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였는데 두 딸들이 직장 생활의 노고로(원고 식자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는 터라 고심 중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표에스더 목사님의 부군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므로 형통한 중에 있는데 앞으로 전흥덕 군이 나오면 “자신이 그것을 맡겠다” 하므로 역시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뜻으로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릴 것이다. 전흥덕 군이 장기 감호에서 속히 풀려나와야 할 것입니다.

3) 2001년 7월 1일에 문정섭 서리 집사를 장립 집사로, 그의 부인 김삼님 집사를 권사로 취임케 하였다. 중요한 것은 개혁적인 차원에서 누구를 초청하거나 광고, 잔치도 없이 연초에 제직을 임명하듯 단순하게 임직식을 행하고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예배당은 넓어서 좋으나 불편한 점이 더 많았다. 집세가 9000만원 전세요, 승강기 세가 비쌌고, 또 언덕의 불편과 전철, 교통도 불편하여 옮기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던 차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현 위치(금광 2동 3305번지)로 2001년 12월 31일에 옮기게 되니 사택과의 거리도 가깝고 전세금도 4000만원이나 절약되었고, 교통도 괜찮으며 보일러 시설로 목사 서재실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환경은 내가 한남 교회를 나올 당시에 꿈꾸었던 것인데 이 사실이 7년 만에 이루어졌고, 또 전세 예배당을 옮김에 있어서 나는 전세비를 정한 때에 못 받았고, 들어갈 집 주인에게는 돈을 주어야 하며 또 그 장소를 비워 주고 나가는 사람도 돈을 받아야 하는 실정에서 금전 유통이 되지 않는 어려움을 내가 담보 대출(퇴촌에 있는 미라의 집 담보)을 3000만원을 받아서 제공하므로 해결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거처할 공간을 주신 사실에 대하여 크게 만족하고 감사한다.

 

26. 묘역을 이전한 사실

 

강화읍 용정리 1072번지는 나의 본적지이자 내가 17세까지 자라난 곳이고, 그 곳에 30대조 “경호” 조부님과 좌우 부인의 묘가 비문과 함께 보존되어 왔는데 그 지역이 청소년 교육 회관의 부지로 지정되자 그 묘역 200평을 감정 가격(평당 15만원 정도)에 팔라는 청원이 있었다. 나는 몇 차례 망설였지만 사회 공익적 개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어서 2001년 10월에 전체 가격 5000만원에 군청 측에 팔고 이장하는 사역을 책임 지운 후 그 장소에 임시로 이장하였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묘소를 따로 정하기 위하여 하점면 창후리 817번지의 밭 338평을 2500만원에 사서 그 곳에 조부모님과 부모님 묘를 2001. 11. 20.에 이장하고 다음 날 21일에는 고묘인 “경호” 조부님과 두 할머니 유골을 수습하여 탑모루산(28대 승민, 29대 구흥 묘 있는 곳) “구흥”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망두석 두 개는 창후리로 옮겼고, 다른 석물은 원형대로 옮겼다. 이 일을 주선할 때 불은면 白雲谷에 사시는 지흥운 할아버지가 많이 수고하였다. 지흥운 할아버지는 위에 기록된 “경호” 조부님의 동생 “경원”의 계열로 촌수는 멀지만 조상의 묘역 보존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여 내가 존경한다. 이 분이 2000년, 2001년, 2002년에 벌초를 혼자 하셨고, 28대, 29대, 30대 묘역 보존을 원하시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동의하면서 영구 보존 묘역의 재산권을 나누어 드릴 약속도 하였다(그 산 언덕 부분의 40평 쯤은 제하고). 금년 벌초하기 전에 탐모루산의 비석 없는 묘 다섯 자리를 없앨 계획이다. 비석 없는 유골이 그만큼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오래 보존될 것을 남기는 것이 좋은 것 같다(지흥운 할아버지께 묘역 등기를 나누어 드릴 때는 묘지 관리 등 사후 재산 처리 문제 등에 대하여 더 연구하고 어떤 물증을 남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나의 아버지와 할머니는 화도면 사기리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곳에 묻히셨다가 1972년 9월에 본적지 산으로 임시 이장 하였고, 또 조부님은 1939년도에 별세하여 인근 매장지에 묻히신 것을 같은 시기에 본적지로 옮긴 것이다. 그 후 어머니가 별세하시자 화장한 유골 단지를 아버지 유골 옆에 모셨다가 다시 창후리로 옮긴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묘역을 언제까지 또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은 자손들의 몫일뿐이다. 조상의 묘역을 팔았지만 198평을 팔아서 밭 338평을 샀은즉 땅을 줄이지 않아고, 판 금액 중 2500만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적당한 토지 부동산을 매입하여 자손들에게 넘겨줄 계획이다. 내가 영구 보존 묘역의 정상 부분 40평쯤을 고수하려는 이유는 그 장소가 정상이기 때문에 필요한 수양처를 지을 수도 있겠지만 유골만 모시는 가족 묘역을 만들고자 하는 계획 때문이다. 모든 묘역이 다 길이 없은즉 잘 개발하여 유용하게 쓰여 지기를 바랄 뿐이다.

 

27. 古書와 碑文의 의미를 터득함

 

우리 집에는 선대부터 내려온 고서 몇 종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많은 책들을 팔아 없애시는 것을 보았는데 남아 있는 책은 족보 두 권, 啓下事目 1권, 杜律 1권, 入德文 1권, 동몽선습 1권 계몽편 1권 뿐이다. 이 책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약 2년 전에 KBS 진품 명품에 출원서를 냈는데 그 연락이 2002년 7월에 와서 한학자이신 김선윤 선생님을 만나 짧은 시간이지만 고서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 기회에 “경호” 할아버지의 비문의 뜻도 알게 되었다. 그 비문의 내용을 족보에도 첨부했지만 여기에도 기재한다.

1) 계하사목은 조상님의 국가에 대한 공훈을 인정하여 그 후손들을 잘 선대하라는 왕의 칙서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보훈처의 표창장이나 훈장을 수여한 것과 같다. 따라서 잘 보관함이 좋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큰 공을 세웠는가?에 대하여는 28대 경징(승민) 할아버지도 벼슬을 하셨지만 그의 부친이신 27대 “계최” 할아버지의 공이 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남 광주시에 “병천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그 사당은 “계최” 할아버지와 몇 분의 공을 기리는 사당인 만큼 나라에서 크게 인정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지씨 1000년사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29대 “구흥” 선조는 진사 벼슬한 기록이 비문에 있음).

2) 杜律은 중국의 두보란 문학자가 여러 종목으로 쓴 수필집인데 그것을 어떤 조상님이 필사본(직접 베낀 것)으로 보존한 것이요,

3) 入德文은 한자 여덟 개를 배열하여 뜻을 나타낸 글로 중복 없이 2491자를 써서 글 공부를 시킨 책인데 그 책은 “50만원 가치가 있다”고 2002. 7. 21.에 KBS 진품 명품 프로그램으로 방영하였다.

4) 동몽선습은 교양 서적으로 다 아는 사실이고,

5) 계몽편은 내가 千字文 공부를 다 마쳤을 때 아버지가 그 책에 일본 이름(池田榮根)을 써서 나를 주신 것인데 내가 그 책을 갖고 몇일 쯤 학방에 다니다가 해방되어 당시 국민학교에 들어간 기억이 새롭다. 잘 보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6) 그 외에도 족보와 관련된 책으로는 신족보 2권, 근대판 족보 13권, 지씨 1000년사 1권과 충효명감 1권, 우리 조상 나의 뿌리 란 책도 있다.

7) 다음 비문에 대하여

가문의 묘소에 보존된 비석은 두 개 인데

① 하나는 승민(경징), 구흥, 익명의 묘를 표시한 것뿐으로 그 비문의 亥坐, 任坐, 子坐는 풍수지리 용어로 분묘의 방향을 쓴 것뿐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이라 그런 것은 숭상하지 않는다.

② 또 한 개의 비문은 30대 “경호” 조부에 대한 비문인데 이것은 33代 “성수” 할아버지가 그의 증조부이신 “경호”의 죽음을 애도한 내용이다. 그 내용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나는 이 비문 해석을 위하여 2002년 7월초에 KBS 진품 명품 설명자이신 김선원 선생님을 만나 자문을 받았는데 국어 사전에도 여러 가지 내용이 설명되었다). “嗚呼”는 감탄사요, “感愴”은 깊이 사모하며 슬퍼한다는 뜻이고, “府君”은 바깥 조상 즉 죽은 남자를 존칭하는 용어이며 “前我兩朝”란 인종과 명종 두 왕조를 뜻한다(前은 과거, 我는 현재). “27代 명관”은 유명한 계최 장군을 뜻하고, “之孫”은 그의 손자란 뜻이며 “行年十二不幸”은 12세에 불행한 일을 당하였음이요, “天崩”은 아버지를 여읜 뜻이고, “家聲冷落”은 가문의 명성이 점차 식어짐을 뜻함이요, “居”는 거주한 뜻, “此”는 이 곳이란 장소의 대명사요, “慰悅”은 기뻐하여 위로를 받는 뜻이고, “武士之地”는 무사의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장을 뜻하는데 나의 본적지인 용정리 1072번지 인근 마을을 지방 말로 “궁제말”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활 쏘는 기술을 연마하는 장소란 뜻으로 추정된다. “投筆操弓”은 문필을 버리고 활을 잡아 무예를 닦았다는 뜻이요, “弱冠”은 남자 20세를 뜻하고, 약관 2세는 22세요, “道科參榜而”는 도에서 실시한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뜻이다. “參榜”은 합격자 명단을 게시한 뜻이고, “於”와 “而”는 어조사임. 孝는 효도를 필요로 함이고, “不暇於求仕者”란 (母에 대한 효도 때문에) 벼슬하러 나갈 여가가 없었다는 뜻이요, 萱堂은 어머니란 뜻임(중국의 유명한 어머니가 거처한 방 앞에 원추리 화초가 심겨져 있어서 어머니 계신 곳을 훤당이라고 하였음) “가世”는 세상을 멀리 하였다는 뜻이고, “萱堂之壽八十九也”는 어머니 연세 89세란 뜻이며 “終侍가世”는 세상을 멀리하고 끝까지(어머니를) 모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其於子孫” 즉 그의 자손이 “豈不哀재”(哉子의 古語)는 어찌 비로소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뜻이다. 曾孫聖洙가 謹丞(삼가 계승시킴) 家傳(가문에 전함) “銘干揭陰以”(비석 뒤판에 새김으로써) “知後裔”(후예는 알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연결하여 설명하면 “오호라 감창하도다 증조부군의 자는 우영이고, 본은 충주인데 우리나라 인조, 명종 양조 때 명관이셨던 27대 계최의 손자이시다. 12세에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여의고 가문의 명성이 점차 떨어지자 위열차 무사의 땅에 거하였고, 붓을 던지고 활을 잡더니 22세에 도에서 시행하는 무과에 합격하였다. 89세를 사신 어머니께 효도하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벼슬에 나갈 겨를이 없었으니 그의 자손들이 비로소 슬프지 않겠는가? 증손 성수가 비석 뒤에 글을 새겨 삼가 가문에 전하므로 후예들에게 알리노라”

 

30代 京灝 할아버지의 비문 해설

 

嗚呼感愴 曾祖父 字又映 本忠州(오호감창 증조부 자우영 본충주)

오호 감창하여 탄식한다 증조부의 이름은 우영이고 본은 충주라

 

府君前我兩朝 二十七代 名官 繼漼之孫(부군전아양조 이십칠대명관 계최지손)

돌아가신 어른께서는 이조의 인조, 명종 양조(임금) 때 27대 명관이셨던 계최의 손자이시다

 

行年十二不幸 天崩 家聲冷落居此 慰悅武士之地(행년십이불행 천붕 가성냉락거차 위열무사지지)

12세 때에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여의시고 가문의 명성이 약해지므로 무사의 길로 위로를 받으셨다

 

投筆操弓 弱冠二歲 道科參榜而(투필조궁 약관이세 도과참방이)

붓을 던지고 활을 잡으시더니 22세에 도에서 시행한 무과에 급제하셨으나

 

萱堂之壽八十九也 孝不暇於求仕者 終侍가世(훤당지수 팔십구야 효불가어구사자 종시가세)

어머니 연세 89세라 효도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갈 여가가 없어 종시 세상을 멀리 하셨으니

 

其於子孫 豈不哀哉(기어자손 기불애재)

그 자손들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曾孫聖洙 謹丞 家傳 銘干揭陰以 知後裔(증손 성수 근승 가전 명간게음이 지후예)

증손 성수가 명간게음(비석 뒤에 새김)하여 가문에 전하여 후손에게 알리노라

 

2003. 11. 39대 榮根 전달함.

 

28. 2002년도에 있은 일

 

11월 23일에 먼저 살던 주택에서 현재 살고 있는 금광2동 3280번지로 이사하였다. 7년 2개월 동안 주차공간도 좋은 곳에서 잘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사올 때 가족들은 좋은 새 집으로 가기를 원하였지만 위치와 교통, 주차 문제, 집세 등을 고려하여 7000만원 전세 주택에 오니 교회도 가깝고 주차 공간, 일조 관계, 전망 등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이다. 주택은 2층을 사용하지만 지하실 방 두 칸도 있어서 집 없는 사람에게 덕을 줄 수 있는 입장도 되어 있다. 전흥덕 군이 지금쯤 출감하면 그 곳에 있기에 안성맞춤이다. 2002년 10월부터 나의 집필한 자료들이 홈페이지에 뜨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런 일을 간절히 원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9월 중에 CN.com(홈페이지 운영자) 선전원이 찾아와서 권면하기로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하여 “홈페이지 www.ncbc.or.kr”을 개설하였고, 또 이봉근 전도사가 내가 집필한 “교회헌법연구” 책을 참고하고 인터넷을 통한 “교회행정연구소”를 한다 하면서 협력을 구해왔다. 나는 이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그의 일을 돕는 반면에 내가 집필한 신앙 재료 보급도 함께 하자 하여 그의 홈페이지 기술을 도움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나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는 젋은 목사 몇 분이 계셔서 그 분들과의 회동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2002년 8월 30일에 큰 딸 사라가 남편과 이혼하기 위하여 시집의 본적지인 안동시에 갔는데 사위가 이혼에 승낙하지 않고 시집의 가족들이 사라를 설득한 모양이다. 결국 이혼으로 끝내지 않고 남편과 가끔 만나더니 10월부터 경기도 광주에 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나는 본래 이혼을 반대한 터라 하나님이 싸매주시는 섭리로 믿고 감사하면서 2003년을 맞이하였다.

 

29. 2003년에 있은 일

 

2003년 1월 5일 첫 주일에 이성광 목사님의 장모님이신 윤석남 권사를 시무 권사로 취임케 하였고, 이 글을 기록하는 3월 14일 현재 홈페이지에 수록된 내용이 기독교 신앙 백과, 교회헌법연구, 핵심 설교집, 어린이 성경 교육 자료,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강론, 신앙문답집 등 상당 분량이 홈페이지에 수록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미 완료된 다른 재료들을 다 수록한다면 12000page 이상이 될 것이다. 아직도 할 일은 많다. 인물 중심 설교와 인물 중심 성경 공부(책이름)를 끝내야 하고, 출애굽기로부터 열왕기까지의 강해 문서를 정리하여야 하며 그 다음에 일반 설교를 계속 요약하여야 하고, 틈틈이 “개혁의 소리”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개혁교회의 헌법초안”을 작성하고 싶은 심정인데 하나님이 건강을 주실 것인지 기도로 구하여야 할 것이다. 당년 2월 25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여 정치에 큰 기대를 갖고 지켜 본다.

 

2003. 3. 14

1) 2003년에 들어와서 1월 하순경부터 나는 예배당의 서재실에서 혼자 침식을 시작하였다. 그 동기는 나의 전셋집 주택과 예배당 서재실이 150m쯤 떨어져 있어서 늘 부담 없이 왕래하였는데 아이들은 내가 들어가면 나와 내 아내의 방에서 TV를 보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분명히 나에게 부담을 느끼고 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나와의 대화를 융숭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아내는 집 청소, 빨래 그리고 반찬을 먹도록 하는 것은 잘 하므로 불편이 없으나 밥은 내 식성에 맞지 않는다. 나는 진밥이 아니면 오래 먹어야 하고 덜 깨물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습성이 만성화 되어 있는데 잡곡밥, 현미밥, 압력솥밥 같은 것은 나에게 금물이지만 그것을 나 본위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불평하게 되었고, 또 식사 도중에 관람하는 TV 프로가 나의 선택과 다르며 나는 집에 가서 30분을 있어도 성경 강해문이나 원고 등을 갖고 가서 기록을 하기 때문에 그 때마다 방을 어지럽게 해야만 한다. 이때마다 아내는 잔소리를 하였다. 서재는 한 곳에서만 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예배당 서재실에서 가급적 집에 안 가는 주의로 살고 있으니 이 나이에(만 65세가 10일 남았음) 홀아비 신세가 된 것 같지만 잘 적응하고 있다. 1층에는 만물 슈퍼마켓이 있고, 내가 있는 서재실에 씽크 취사대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TV 보면서 운동 기구 이용하면서 글도 쓰면서 냄비에 밥을 하고 김치, 두부, 콩나물, 돼지고기로 국을 끊여 먹으면 아무 부담도 없고 탈도 없다. 그 일로 나는 식생활에 질서가 잡혔고, 집에서는 큰 부담을 덜었을 것이다.

2) 나는 나의 인생 말기를 사치나 과소비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음대로 쓸 돈도 없지만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요 6:12)하신 말씀도 있고, 또 옛날에 아버지, 할머니 시대에 어렵게 사신 것과 또 이 시대에 굶는 사람이 많은 것을 생각한다. 그 뿐인가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나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는 말씀도 기억한다. 또 한 가지는 내가 21세 때 고향의 하마동천 계곡에서 두 전도사님(노정길, 박영도)과 생활할 때 영적 은혜가 많았고, 그때의 식생활이 그리워진다. 그때는 배고픈 시절인즉 고구마를 썰어 섞은 쌀밥에 김치와 새우젓 한 가지로 밥을 먹었는데 그 맛이 지금도 그리워진다. 지금 나의 식생활은 퍽 자유롭고 부요하다. 이 뜻은 잘 먹어도 체중을 늘리지 않아야 하므로 조심스럽고, 못 먹어도 78㎏ 나가는 체중을 줄여야 하므로 역시 유익하다. 따라서 잘 먹어도 괜찮고 못 먹어도 괜찮으며 대접을 잘 받아도 괜찮고 안 받아도 괜찮으니 이 어찌 자유가 아닌가?

3) 이상의 취지를 갖고 근검하다 보니 좋은 것은 근본적으로 싫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세상에서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미약한 목사요 크게 한 일도 없은즉 누리는 것이라도 적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전되어 가급적이면 좋은 것을 피하고 나 자신을 위한 소비도 통제한다. 나의 생활필수품 70%가 길에서 주워 온 물건들이다. 밥그릇도 본래 쓰는 것이 있었지만 길에서 주워 온 것으로 대치하였고, 이불, 요, 책상, 신발 등 여러 가지를 얻어서 쓴다. 새 구두가 세 켤레나 있지만 잘 신지 않고, 내복도 기워 입을 정도로 새 것을 배격한다. 좋은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나 필수품은 쓰레기로 버려진 것을 발견하여 쓰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다. 요즈음도 8명이 앉아서 성경 공부 할 수 있는 테이블을 얻어 왔다. 나는 이렇게 되는 것이 세속의 향락을 떠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항상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모시고 사느냐”하는 것이다(시 73:23, 약 4:8).

 

2003. 3. 11. 아침

KBS 1 TV에서 근검 절약하는 가족이 소개된다. 양변기의 물 내려가는 것을 절약하려고 가족들이 요강을 사용하여 한 번에 붓고 물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일로 어느 정도 절약하는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두 가지 놀라운 것은 대학 다니는 아들 셋이 부모의 뜻을 본받아 최대한 절약한다는 것과 그렇게 절약한 탓으로 인천과 문정동에 큰 집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TV 프로를 보면서 “나도 짠돌이에 속하는 사람인데 내가 이렇게 된 경위를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즉시 필을 들었다. 나의 절약하는 생활에 대하여 29번, 2), 3) 항을 참고하라.

1) 나는 얼만큼 절약하는가?할 때 ① 음식의 찌꺼기를 버리지 않는다. 찌게 국물이나 라면 국물을 한 방울도 버리지 않는다. ② 버려지는 이면지를 흰 공백이 없이 다 활용하고 종이 절약, 잉크 절약 등을 위하여 글씨를 작게 쓴다. 사용한 편지 봉투를 뒤집어 사용하고 버린다. ③ 먹는 것은 체질에 맞게 먹지만 입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 혼자 먹는 식생활 비용은 한주에 5000~10000원 정도이다. 친구 목사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하고 내 식생활대로 식사를 해 먹든지 아니면 자장면 정도로 대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이유는 돈을 펑펑 쓸 입장도 아니지만 대접 받은 사람이 비중있게 대접을 받으면 그 사람 자신이 대접을 받았으므로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도록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은혜를 베푼 일도 없이 큰 대접을 받았다면 그것이 마음에 빚으로 남지 않겠는가? 그런고로 단순하게 사는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옛날에는 큰 일(결혼, 회갑, 입주, 사망 등)을 치르려면 경비가 부족하여 계를 모아 이용한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부조금에 의지하여 큰 일을 치를 만큼 가난하지도 않거니와 필요 없이 사람 모으는 일로 행사를 확대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시간과 부조금의 피해를 줄 뿐이다. 또 부조금을 받았다면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갚아야 하니 그것도 정신상의 부담이다. 그래서 간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방법이 곧 절약이기도 한 것이다.

2) 내가 짠돌이처럼 살게 된 이유를 말하겠다. ①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면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고생하셨는가?를 보면서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알뜰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② 우리 집에서는 양식 걱정을 하고 죽을 먹은 일이 있지만 외할머니 집에 가면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내가 정신 차리는 외손자가 되어 외할머니의 딸인 나의 어머니를 고생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자주 말로 교훈하셨는데 외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으니 한푼이라도 쥐고 놓지 않아야 한다” 하면서 강한 저축 의식을 심어 주셨고, 외할아버지는 마당에 흩어진 벼 알갱이를 주워 멍석 안으로 던지시면서 곁에 섰는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땅 열 길을 파 보아라 동전 한 푼 나오는가” 하시고 벼 한톨 줍는 뜻을 설명하셨다. 따라서 어릴 때의 경험과 어른의 교훈이 지금도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③ 가끔 성경으로 깨닫고 생활의 전환점을 이루는 중에 한 번은 요 6:12에서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신 말씀에서 깨달음을 느낀 것이다. 예수님은 이적으로 먹을 것을 만드신 분인데도 “남은 것을 거두어 버리지 않게 하라” 하셨으니 물질의 필요를 느끼는 인간이 더욱 절약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기 위한 노력을 더 하게 된 것이다. ④ 39번 3항에 기술한 바와 같이 내 인생을 작게 평가하여 적게 소비하고 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느껴졌는데 여기에 따라 내 마음도 비천한 수준에서 사는 것이 편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좋은 것이 싫어지는 마음은 내가 “진리에 이끌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빌 3:8의 말씀이 그것을 설명하신다. ⑤ 한 가지 더 부언할 것은 우리 집에 작은 평풍이 있는데 다른 가족은 이것을 버리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어머니를 보는 듯한 소중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평생 돈을 써 보신 일이 없는 분이다. 내가 대구 남일 교회 시무할 때는 아이들이 다 어릴 때였다. 어머니가 사택 근방에 나가셨다가 평풍 장사의 끈질긴 선전에 부딪히셨다. 평풍을 보시니 그림이 좋아 보였지만 20만원을 달라니까 거들떠보시지 않았는데 장사꾼이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15만원에 사시오, 10만원에 사시오 하다가 6만원에 사라 하니까 무조건 호기심에 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을 갖고 들어오셔서 “내가 샀으니까 돈을 내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평생 돈을 쓸 줄 모르시는 분인데 돈 줄 자의 의견도 묻지 않고 사 오신 것은 오직 그때뿐이었고, 또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때에 아홉 식구가 방 넷을 썼지만 어머니 방에 그 평풍을 세워드릴 공간이 없어서 사용을 못하였는데 내가 대구를 떠나 성남 아파트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 방을 따로 드리지 못하였고, 한남 교회 예배당 사택으로 왔을 때도 그 평풍 세울 자리가 없었으며 한남교회를 나와서 일반 주택에 살 때도 방은 셋이고, 가족이 아홉인즉 역시 평풍 세울 자리도 없고 농 하나라도 따로 세워드릴 공간이 없어서 사용을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지난 겨울에 그 평풍을 내 방에 세워놓고 어머니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죽은 후에 내 시신을 가린다면 꼭 그것을 이용하기 바란다. 나 죽은 다음에 버리는 것은 자유이다.

 

2003. 3. 25

이날은 내가 66세를 시작하는 생일이었다(음력 생일 2월 24일은 3월 26일임). 집 사람이 생일을 어떻게 차리겠느냐? 하였지만 나는 본래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고 또 다른 가족 생일도 챙겨주지 않는 터라 사양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내가 “고기를 사다가 미역국을 끊이면 되겠느냐” 하기로 그렇게 하라 하고 생일날 아침에 집에 가서 간단히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생일 전날 저녁에 한남교회 최용만 집사가 성남으로 이사왔다 하면서 초청을 하여 아내와 함께 가서 대접을 받았는데 나는 “하나님이 나의 생일을 차려주신 은혜”로 알고 혼자 감사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3월 25일 점심은 최인열 목사님으로부터 오리 고기 특별 대접을 받았다. 이때 하나님은 나를 섭섭하지 않도록 생일까지 챙겨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감사하였다. 그리고 3월 28일(금)은 내가 큰 기쁨과 만족을 체험한 날이다. 그 이유는 내가 누가복은 3:23~38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을 강해하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하여 답답하였던 심정을 시원스럽게 푼 것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 내용을 마태복음 1:1~16에 기록된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인데 내가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대로 두 족보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성경을 깨닫고 그만큼 만족해 보기는 처음이어서 기념으로 이 글을 남긴다. 미, 영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난 지 12일 째라고 한다(3/31, 밤).

30. 32代, 33代 직계 조상 묘를 폐장함

 

2003년 5월 13일은 내가 애석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큰 짐을 더는 홀가분한 마음을 가진 날이다. 사연인즉(아버지가 별세한 때) 나의 25세 때부터 66세 되는 오늘까지 조상님의 묘소 네 필지를 벌초해 오다가 2001년 11월에 본적지인 용정리 1072번지에 소재한 30代 직계조상을 모신 묘역에 청소년 회관이란 공공건물이 지어지는 바람에 그 장소를 정리하게 된 것을 26항목에서 이미 기록하였다. 그러나 갑곳리(탑모루산) 878-10에 분묘 일곱이 있으니 이것은 비석이 있어서 내용을 다 아는 무덤이지만 878-2의 세 무덤과 878-4의 상하 두 무덤은 비석이 없어서 누구의 무덤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관리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벌초와 관리의 영역을 좁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세 아들들이 조상님의 묘역을 살피는 정성을 나의 마음에 반만 가져준다면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여 비석 없는 묘역 두 필지를 없애게 된 것이다. 애석히 여긴 뜻은 조상님의 시설과 유적을 자손이 없애게 되는 것이 불효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1) 먼저 878-2의 분묘를 개봉한즉 가운데 묘에서 “學生忠州池公諱聖洙 后人丁 向癸酉辛 ”이란 표석이 나와서 이 분이 33代 聖洙 할아버지의 묘임을 확인하였고, 그 좌편 묘에서는 표석 없는 부인의 유골이 나왔으며 우편 묘에서는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허묘(봉분만 있는 것)가 있다”는 전언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 말씀대로 빈 무덤이었다. 이것은 두 번째 할머니의 묘를 쓰기 위하여 미리 만들어 놓았으나 사정상 쓰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2) 그 다음 878-4의 윗 무덤을 개방한즉 그 무덤의 주인공은 32代 직계 조부 “達漢”의 묘였다. 그 무덤에서 나온 표석의 글자를 소개하면 “忠州之公達漢之墓”라고 배열할 수 있고, 또 이 분의 벼슬 직책과 관계있는 글자로 “兵馬節 使, 行璘鎭山制 巽向折將將 衛乾”字들이 출토된 것이다. 글자가 낱개로 기록되어 있어서 내용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3) 고목 나무 앞에 있는 무덤을 개봉한즉 관뚜껑에 글씨가 보였는데 “大夫人金海金氏”로 쓰여 있었은즉 이 분은 위에 모신 達漢 조부의 부인으로 짐작된다(족보에 부인이 김씨로 기재됨). 그래서 이 네 분의 유골을 잘 화장하고 그 뼈가루를 878-10(7묘역) 아랫부분에 뿌렸다. 그리하여 28대, 29대, 30대, 31대, 32대(화장), 33대(화장) 조상의 유골을 한 장소에 모은 셈이다.

878-10에 모셔진 분들의 내용을 말한다면

1. 우선 이 묘역에 없는 27代 “계최” 할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이 분은 족보와 문헌에 잘 기록된대로 국가의 유공자이시다. 이 분의 기념 사당이 광주에 “병천사”란 것이 있으니 족보의 앞 면에 사진으로도 나타나 있다.

2. 맨 위에 있는 “承敏”이란 묘가 “계최”의 아드님으로 28代 직계 조상이다. 이 분은 “鏡澄”의 이름을 갖고 계신데 이 분의 아드님이 여러분이고, 그 무덤이 다른 곳에도 있다는 족보가 있으니 참고 하여야 한다. 그러면 왜 강화에 그 무덤이 있을까? 강화에 오셔서 정씨 부인을 만나 “구흥”(29대 할아버지)을 낳으셨기 때문이다. “무덤이 두 곳에 있다”는 뜻은 어느 한 쪽이 虛묘란 뜻이다.

3. 경징(승민)의 아드님이 “구흥”이고, 구흥 묘 옆에 “익명”(31대 직계)이 있으니 이 분은 구흥의 손자이시고, “경호”의 아드님인데 부친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구흥묘 왼편에 모신 것이다.

4. 그 다음에 30대 “경호”의 묘는 용정리 1072번지에서 비석과 함께 이장하여 익명의 묘 서편 아래에 모셨고, 이 묘에는 좌, 우 부인 유골을 함께 모셨다.

5. 31代 익명의 아드님이 32代 達漢이고, 그 아드님 33代는 “성수(聖洙)”인데 이번에 이 두분의 묘를 정리하여 없앴다는 것을 기록에 남긴다.

6. 34代는 “弘述”, 35代는 “商駿”, 36대는 범주(範周)(강화군 삼산면 공동묘지에 장사 하였으나 자손들의 실책으로 찾지 못함. 내가 어릴 때 가 본 일이 있었음) 37代 世鎔(족보에는 世鉉임, 부인 김요안나), 38대 孝源(족보에는 孝求임. 부인 김간란)의 묘는 하점면 창후리 817로 이장한 상태이다.

7. 자손들은 탑모루의 옛조상의 묘역과 창후리 묘를 잘 관리, 보존할 책임이 있다(이 날 탑모루산, 고목 나무 밑으로 올라가는 길을 약간 닦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기회가 되면 그 곳의 길을 확보하고 878-4가 좋은 집터로 활용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8. 또 878-10을 영구 보존 묘역으로 잘 관리하기 위하여 지興雲(이 분은 불은면 백운곡 동리에 사는 분으로 30代 경호 조부의 동생 “경원”의 후손으로 37代에 해당함) 할아버지와 의논 중에 있다. 이 분은 나보다 한 살 위요, 2대가 높다. 묘 관리에 정성을 쏟는 분이므로 오래도록 보존, 관리하는 일에 합력해 주신다. 2000년도부터 벌초해 주신 일에 대하여 사례를 받지 않으셨다.

 

31.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출생일과 별세일

 

1) 조부님 존함은 世鎔(족보에는 世鉉), 1886년 丙戌生이고, 54세 때인 1939년(乙卯) 음 12월 31일에 별세하셨다(내 나이 2세 때).

2) 조모님은 김요안나(선교 초기에 감리 교회에서 지어준 이름임) 1886년(丙戌) 음 8월 12일생이고, 82세 되던 1967년(丁未) 음 3월 11일에 별세하셨다(내 나이 30세 때).

3) 부친 존함은 孝源(족보에는 孝求), 1911년(辛亥) 음 4월 10일생이시고, 53세 되던 1963년(癸卯) 음 5월 27일에 별세하셨다(내 나이 26세 때).

4) 모친 존함은 金干蘭, 1915년(乙卯) 음 11월 4일생이시고, 83세 되던 1997년(丁丑) 음 10월 1일(양 10월 30일)에 별세하셨다.

위 네 분의 묘는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817번지에 각각 합묘됨.

5) 본인 榮根은 1938년(戊寅) 음 2월 24일(양 3월 25일)생.

6) 처 金潤珠는 1941년(辛巳) 음 윤 6월 9일(양 8월 1일)생.

두 사람도 별세하면 화장하고 유골을 단지에 담아 선영 옆에 묻고 평토장한 후 비석만 세우려고 한다.

 

32. 새로운 깨달음

 

2003년 9월 4일 오후에 요한복음 19장을 강론 기록하는 중 14절에서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6시라” 하셨는데, 이때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하여 박석이란 재판석에 앉아 재판을 끝내고, 사형집행을 허락한 때였다. 그런데 늘 알고 있는 지식은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붙잡혀 대제사장에게 넘겨지고(마 27:1, 막 15:1), 그 새벽으로 재판 과정을 밟아 당일 3시(9시)에 못 박고(막 15:25), 6시로부터 9시까지 어두움이 지속되다가 9시(오후 3시)에 운명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문헌에도 그렇게 기록되었기로 그렇게 증언한 것이었다(마 27:45~46, 눅 23:44~45). 그런데 요한복음 19:13에서는 재판 언도한 시간이 6시(12시)인즉, 3시(9시)에 못박히신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고, 예수님이 잡히신 것을 하루 전을 소급하여 수요일 저녁에 성만찬과 교훈과 겟세마네 기도가 있었고, 목요일 새벽에 붙잡힘과 대제사장에게 넘겨진 것이며, 제사장들은 새벽에 심문하고 재판을 하였겠지만 관청의 빌라도의 재판은 목요일 오전 중에 재판하여 6시(즉, 낮 12시)에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다음날 금요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십자가를 지고 가시게 한 다음, 3시(9시)에 못 박고, 9시(오후 3시)에 운명하신 것이다. 여러 곳에 나타난 잘못된 발표를 다 교정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이런 사실은 아직도 많은 성도들에게도 왜곡 전파된 것이다.

 

33. 2003년을 마무리하는 일기

 

2003년 11월 29일에 미라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혼인에 대하여 감사할 일은 미라가 모든 행사(비용과 준비) 전반을 책임지고 혼자 한 일이다. 배우자 황정훈 군을 중매에 의한 교제 끝에 정하였고, 결혼 경비는 그가 4,000만원을, 퇴촌의 집값으로 쓰게함에 대하여 3,000만원을 경비로 주므로 자기가 2년쯤 저축한 돈과 합하여 그 남편과 함께 6,300만원 짜리 전셋집을 얻고, 모든 준비 절차를 다 진행하므로 부모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일을 치른 것이다. 미라는 본래부터 직장 생활로 번 돈을 자기의 용돈만 제한 후 다 나에게 맡겼는데, 나는 미라가 작은 몸으로 번 돈을 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장부상, 그 통계를 계산한 것이고, 2000년 1월에 퇴촌의 작은 상가를 살 때 그 돈을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의 소유 등기는 내가 부동산 소유를 안 하려는 의지(성직자이기 때문에 삼간 뜻)와, 또 미라의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4,000만원+2,500만원) 미라 이름으로 등기한 것인데, 결혼할 때 3,000만원 가져간 것으로 그 이상의 것을 받지 않기로 하였으나, 나는 주기로 하였고, 또 다른 딸들에게 결혼 비용 1,500만원씩 쓴 것을 감안하여 1,000만원과 1,500만원을 주므로 빚을 갚았다.

2003년 하반기에 에베소서, 빌립보서의 강론 집필을 마쳤다.

 

34. 2004년에 시작한 것

 

오늘은 2004년 2월 10일이다. 2004년부터 골로새서 강론을 쓰기 시작하여 1월 중에 마쳤고, 2월부터 신약의 마지막 강론으로 로마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또 7분설교 9집을 편집만 하면 되도록 100과목 이상 준비하였다.

나의 성직에 관련한 목표는 이렇다. 메시지 사역이 1차이고, 목회는 2차 사역이다. 목회는 언제라도 사명있는 젊은 사역자가 나서면 인계할 작정이다. 달란트 집필 사역은 별지 목록표를 참고할 수 있다. 장차 이것을 제목별, 성구별로 나열하여 홈페이지에 입력하고, 집필이 끝나면 CD에 넣어 남기고 보급할 예정이다. 내가 이 일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 앞으로 간다면 여기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미라가 책임지고 김호룡 목사님과 김성진 목사님과 이봉근 강도사님과 상의하여 비용을 들여서라도 끝을 보게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금년 3개월경 안에 로마서 강론을 끝내고, 다른 설교 원고를 정리하면서 “개혁교회 정치문답” 및 현행헌법에 대한 보충자료 등을 기록할 작정이다. 성경의 인물공부를 쓰다가 중지한 것도 끝을 보아야 하지만 그 자료는 인명사전에도 있는 것이어서 중단할 생각이다. 금년에도 많은 진전을 기대하며 기도로 부탁드린다(2004. 2. 10. 낮 12시).

 

35. 집필에 대한 진도

 

집필에 대한 진도는 금년 초에 요한복음과 로마서 강론을 끝냈고, 출애굽기와 민수기 강론을 집필하여 8월 25일에 끝냈다. 금년 여름은 영남이 36°, 성남이 34°까지 올라갔으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 열심으로 더위를 극복하였다. 출애굽기 강론을 마치는 순간에 대구에 있는 덕유로부터 “어떤 아가씨와 교제한다는 사실과 그 아가씨의 신앙이 좋고, 또 나와 비슷한 신앙을 가졌다”는 전화를 받고,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자부를 주시는 은혜인가? 하여 희망을 가졌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몰두한 값으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으면 하고 바란 것이다. 두고 볼 일이다.

 

36. 기적체험(1)

 

2004. 8. 16. 오후 2시 50분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날이다. 나는 그동안 운전을 할 때마다 급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날에 광주에서 남한산성 터널을 거쳐 신구대학 후문 뒷길로 내려올 때, 9살 된 전우성 군이 불시에 튀어나와 급정거하는 차의 범퍼에 부딪혔는데, 나는 그 부딪힌 상태가 가벼운 일이 아닌 줄 알고, 그를 병원으로 인도하려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울면서 “아무렇지도 않으니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20명 정도의 인근의 사람들도 몰려오고 “일단 병원에 가보아야 한다” 하여 그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중앙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진단을 받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였고,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 모르니 일주일 후에 다시 와보라 하였는데, 일주일 지난 어제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은 별일 없다는 증거이다. 나는 그날 운전에 실수를 한 것은 아니다. 서서히 앞차를 따라 내려오는 중 오른쪽에 세워진 중형차가 오른쪽 시야를 막았으므로 서로의 앞을 다 보지 못하는 중에 그 아이가 친구들과 장난하다가 아무 살핌도 없이 무심코 도로를 건너려고 뛰어나온 것이다. 나는 그날 도의적 책임을 느껴 진단비 24,000원(만원은 아이를 따로 주고)을 주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자기 아이의 실수임을 인정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때 나는 군대 시절에 그와 비슷한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어서 그 아이도 중상을 입은 것으로 짐작하였으나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나중에 생각한즉 “하나님의 기적임”을 알았다. 또 하나님이 나의 급한 운전 자세를 깨우쳐주신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시험에 들려면 타인의 실수로 어려움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한층 더 경성하며 기도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37. 기적체험(2)

 

36번에서 자동차에 뛰어든 아이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내가 수일 전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민수기 강론을 8월 25일에 끝내고, 26일 저녁부터 28일(토요일)까지 3일 동안에 “교회헌법연구 재탐구”란 글을 썼는데, 큰 노트 90장의 분량을 단시일에 다 쓴 것이다. 내용은 생각하는 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쉽게 속히 썼다고만 생각하였는데, 그것을 교정하는 시간이 4일쯤 걸리면서 “내가 어느 순간에 이 글을 다 썼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속히 쓰다 보니 기록한 노고와 순간이 생각나지 않고, 교정에 힘들고 지루한 것만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그렇게 쓰도록 나의 정신과 수고를 붙드셨기 때문에 특별한 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믿고, 감사하기로 한 것이다. 요한복음 강론의 교정을 끝냈은즉 곧 로마서 강론을 교정할 예정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의외의 일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는 유라가 직장을 힘들다 하여 자의로 그만둔 것인데, 우선 “출애굽기 강론을 식자하라” 하여 잘 하고 있으니 다행이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의 교제하는 남자 친구 김두현 군이 민수기 강론을 식자한다고 가져간 것이다. 나는 그가 아직 신앙의 싹이 트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을 한다” 하였으니, 기특하고, 그 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와지기를 기대하기로 하였다(2004. 9. 2).

 

38. 유라의 결혼

 

9월쯤부터 유라가 김두현 군을 자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두현군은 미라의 친구(고등학교 동창) 흔전이의 남동생이다. 유라가 친교하는 남자가 없자 두현군의 성품이 착한 것을 알고 사귀게 한 줄로 안다. 유라가 직장을 그만 두기로 한다 하면서 다른 사업을 구상한다고 하였다. 직장을 그만둔 후 10월부터 샌드위치 장사를 한다 하면서 10월 한 달 동안 두현군과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 일찍 미금역, 야탑역 등에 가서 팔았다. 많이 팔아야 2, 30개인데 돈벌이는 2~3만원에 불과하였다. 나는 그들이 무슨 직업이든지 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것을 보고 칭찬해 주었다. 시일 끌지 말고 속히 결혼하라 하여 10월 16일에 분당의 음식점에서 상견례를 하였고, 12월 4일로 야탑의 코리아디자인센터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유라가 벌어서 저축한 돈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사라의 관례에 따라 1,500만원을 주었고, 그 외에도 폐백, 이바지떡, 절값으로 신혼 여행비, 또 피로연 대금을 지불하니 170만원이 더 들어간 셈이다. 호주로 신혼여행을 하였고, 미금에 전셋집을 정하여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39. 2004년 12월 31일

 

8월 중 몹시 더울 때 내가 민수기 강론을 마치는 시간에 대구에 있는 덕유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믿음의 아가씨를 소개 받아 교제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하나님이 말씀에 집착하는 값으로 복을 주시는 줄로 믿기로 하였다. 9월 26일 주일에 두 사람이 집에 다녀갔고, 10일쯤 후에 또 다녀갔었다. 덕유가 믿음생활을 멀리 하였는데, 교제하는 이명화 양과 사귀면서 교회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들은 2005년 5월쯤 결혼한다고 하다가 1월 15일 오후 2시, 대구 동변교회로 정하였고, 나와 내 아내가 11월 6일 동대구역 앞 음식점에서 이양의 부모님을 상견례 하였다. 덕유에게 주택비용으로 2,000만원과 혼인비용으로 1,000만원을 송금하였다. 덕유가 모아 놓은 돈이 없다 하여도 자기의 전셋집을 해약하는 비용과 몇 년간 보험으로 저축한 것이 있음을 아는데, 그것에 대한 용처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허비한 상태로 짐작한다. 신부가 전세 아파트를 갖고 있어서 신부에게 2,000만원을 지급하고, 신부가 사는 집에서 생활하기로 하였다니 주택의 덕을 본 셈이다. 지금 시간은 2004. 12. 31 밤 11시 30분이다. 덕유 결혼식을 15일 앞두고 기다리며 2004년을 넘긴다.

나의 집필 현황은 신명기 강론을 4장까지 썼고, 7분설교 11집을 20과목쯤 쓰고 있으며, 여기에 첨부하여 개혁교회 정치문답을 메모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년엔 성유도 꼭 결혼하게 되기를 기도한다(2004. 12. 31. 24시).

 

40. 덕유의 결혼

 

2005년에 들어서서 중요한 일은 1월 15일에 덕유 결혼식이 있은 일이다. 신부 나이가 동갑이라 하니 만혼 된 유감은 있으나, 하나님이 믿음있고 기도 힘쓰는 딸로 자부되게 하신 것이 더 큰 은혜라고 믿는다. 덕유는 제대 후 계속 대구에서 혼자 살았지만 결혼 준비로 비축한 돈이 없었다. 그때 신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들어와서 사는 것이 좋겠다” 하여 주택 비용 2,000만원을 주고 들어갔으니, 결국은 합동하여 주택을 확보한 셈이다. 추운 겨울이라 눈이 오거나 교통에 문제가 있을까 하여 계속 기도하였는데, 하루 전날 아침에 자동차 추돌 사고를 일으켜서 70만원 수리비를 드려 당일로 차를 수리하였다. 호사다마 격으로 마귀는 성도가 은혜 받는 일을 훼방한즉 각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 당일에 눈이 온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날씨가 좋았다. 우리 승합차에 자녀들이 타고, 지명교회 승합차에 목사님 세 분과 고모(신회 엄마 내외, 성렬 엄마) 가족들이 타고 갔다. 결혼 장소가 대구 변두리 동변교회인지라 음식을 삼계탕으로 하였는데, 내 생전에 결혼식 음식으로 삼계탕을 먹기는 처음이었으나, 나중에 들어보니 다 잘 먹었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날 음식을 속히 내오지 않아서 상당한 지장이 있었다. 그러나 동변교회의 수고가 컸다. 신랑측 손님이 70여명 와서 혼인 자리를 빛내 주었고, 저녁 8시까지 성남으로 돌아왔다. 신혼부부는 주일을 지키고 월요일에 호남, 진도 방면을, 화요일에 대전을 거쳐 수요일에 집에 왔기로 하루를 유하게 하고, 목요일에 영동선, 동해선을 거쳐 오후 8시 경에 집에 잘 도착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10여년 객지에서 “어떻게 먹고 사나” 하고 염려한 것이 이제는 일단락 된 셈이다. 그들이 더욱 자립하여 발전하고 속히 생산하기를 기도한다(2005. 1. 21. 아침).

 

41. 2005년에 있은 일

 

2005년 전반기에는 덕유 처가 임신한 축복을 받은 중 10월 중에 출산기가 되는데, 2개월쯤 후에 미라도 임신했다고 한다. 며느리가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하나님께 아들(손자)을 구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맡기는 것이 나를 더 복되게 하시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즈음 들은 말로는 병원에서 “아들이 확실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덕유가 허리 아픈 증세로 기도하고 물리적 치료를 하면서 차도 있기를 바라고 있고, 나는 2004년 초겨울부터 2005년 5월 중순까지 약 7개월간 왼쪽 어깨 통증(50견 같은 것)으로 고생했는데, 한백식품에서 생산한 오가피액을 6개월쯤 먹었을 때, 그 통증이 물러가는 것을 체험했다. 약효 치고는 너무 긴 셈이다. 운동부족이 그런 병을 자초한 줄 안다. 왼팔의 굵기가 가늘어진 정도인즉 아픔도 확실하였고, 지금은 나은 것도 확실하다.

금년에 처음 여름 초벌 벌초를 시도해 보았는데, 6월 15일에 간즉 풀이 너무 커 있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6월 초에 가야 좋은 적기라고 본다. 초여름에 초벌 벌초하고 가을에 한 번 더 제초기를 돌리면 큰 부담없이 벌초를 감당하리라고 본다. 대환이는 두 번쯤 체험했으니까 잘 할 것이다. 그리고 금년 가을 벌초를 끝낸 후 지흥훈 할아버지께 2000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 수고하신 사례를 드렸으나, 계속 거절하셨으니 고마운 일이다.

나의 집필사역은 6월말까지 완성된 내용들을 1단계로 정리할 예정이고, 현재는 시편설교를 요약 중인데, 이것이 끝나면 있는 원고에 의하여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를 계속 정리할 생각이며, 간간히 설교문이 나오면 7분설교 12집에 포함하고, 이어서 목회 회고록과 개혁교회 정치문답을 기초해 볼 생각이다. 70세 정년은 3년쯤 남았지만 언제라도 교회 후임자가 준비되면 독립적 교회를 시작할 것이다. 내가 어제 “거룩한 교회를 이루자”는 제목의 7분설교(12집 중)를 정리하였는데, 교회의 문제점 16종을 열거하였다. 나는 단 열 명이 모여도 거룩한 교회를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님이 기회 주시면 몇 년이라도 기초적으로 해보려고 한다(2005. 7. 14. 아침).

위 7월 14일 이후 특별한 일은 시편설교집 120과목을 쓴 것과 여호수아 강론을 쓴 것이 전부이고, 며느리의 손자 출산을 15일쯤 앞두고 건강한 것과, 미라 역시 외손자 출산을 2개월쯤 앞두고 건강한 일이다. 나의 건강은 50견이 재발하여 수시로 고생하고 있다. 화, 수, 목, 금에 퇴촌의 사라의 피아노 교습생 수송하는 일을 나의 운동삼아 도우려고 계속 출근하고 있다(2005. 9. 24).

 

42. 족보와 관련된 이야기

 

1. 우리 집에 있는 족보 문서는

1) 숭정 3년(1630년)에 발간된 옛 고서 족보 2권,

2) 가경 12년(1807년 순조 7년)에 하사된 啓下事目(왕이 공신의 후손에게 보낸 글)이 있으니, 이것은 족보와 함께 귀한 문서이다.

3) 1978년도에 출판된 大同譜(양장으로 된 것) 2권이 있으니, 거기에는 덕유(德裕, 족보에는 德煥)등 유라 이름까지 올라있다(그런데 고서 족보와 신양장 족보를 비교하면 28대조 경징(직계조상)의 동생으로 기재된 “경명”의 출생 및 사망 연도가 다르고, 또 “경징” 조상의 配人(처)과 묘소도 다르게 기재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사람이 쓴 글인즉 오자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4) 그리고 또 지씨 천년사와 충효명감이 있고, 작은 역사책이 또 한 권 있다.

5) 약 4, 5년 전에 12권으로 된 전체 족보를 또 구입하였다. 이미 출판된 족보에 나의 부모, 조부모의 묘소를 옮긴 것과, 30대 조부 “경호”의 묘를 탐모루산 아래로 옮긴 것과, 또 32대 달한, 33대 성수 할아버지의 묘를 화장하여 없앤 사실은 이미 출판된 족보에 교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2. 어제 종친회로부터 또 책 두 권이 왔다.

1) 하나는 “예의보감”이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받고 몇 가지 생각한 것을 기재한다. 우선 사람이 정착된 환경에 살아야 모든 책과 세간들을 보존할 수 있는 점이요, 또 보내온 책 중에 예의보감은 제례에 관한 것이라 별 필요가 없으나, 그 책 중에 “계하사목”이란 글을 본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계하사목과 꼭 같은 필적이나 연대와 대상은 다르다. 내가 보관하고 나의 직계 조상에게 전달된 계하사목은 가경 12년인즉 1807년(순조 7년)에 받은 것이고, 그 책에 수록된 계하사목은 함풍원년인즉 45년 후인 1852년(인조 8년)에 같은 충성군(27대 계최 할아버지) 자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것은 “충신의 후손들을 잘 대우하라”는 글로 계최 할아버지의 功이 있은 후, 182년 후(내가 소장한 것), 또 237년 후에(책에 수록된 것) 전달한 것이다. 이런 왕실의 배려 때문에 옛 할아버지들의 무덤 규모가 좋아진 것으로 짐작된다. 여하튼 계하사목을 중요히 여겨 간직하면 좋을 것이다. 역사의 한 문서로 그치겠지만….

여기에 부언하고 싶은 내용이 또 있다. 그것은 나의 조상님이 받은(보관한 것) 계하사목 끝에 32대 “달한” 할아버지와 33대 “성수” 할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다. 이 두 분의 무덤은 각각 두 필지에 큰 무덤의 묘역을 갖고 있었다(달한-갑곳리 878-4, 성수-갑곳리 878-2에). 그런데 거기에 비석이 없었는고로(관 위에 있는 표석에서 이름이 나타났음) 그 인적사항을 모르고 파서 이장 계획을 못한 채 화장하여 없앴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장계획을 하였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여 나중에 후회하였다. 그러면 왜 같은 후손에게 준 계하사목이 내가 소장한 것은 45년 전이고, 다른 후손에게 준 것은 그 후였는가? 에 대한 짐작은 이렇다. 이괄의 난리를 평정할 때 이괄의 무리들이 “계최” 할아버지의 가족을 해롭게 하여 흩어진 상태에서 그 후시대에 왕실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그 아드님이신 나의 조상 28대 할아버지가 강화에 오셔서 사셨는데, 강화는 수도가 가까운 곳이라 그 후손의 소식이 먼저 왕실에 알려져서 강화 후손이 먼저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 후손은 둘째 할머니의 후손인 것이다.

2) 또 하나는 “표곡장군 실기”이다. 이것은 27대 “계최” 할아버지의 공적을 적은 것과 그 공적에 대하여 관리들이 찬사를 보낸 글들을 담은 것인즉 그렇게 알면 된다. 앞으로 후손들이 더 잘 해야 빛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쓴 휘정씨는 지금 90세 가까운 노인 학자이신데, 유교적 사상이 강한 분이요, 계최 할아버지의 아들들은 전처 소생, 계처(다음 부인) 소생 두 계열이 있는데, 전처 소생은 수련, 수란, 수적, 수경, 수현이고, 계처 소생은 경징(승민), 경명인데, 현재 나는 계처 후손의 12대손이 된다. 우리 집안에 보존된 고서 족보에 의하면 경징이 앞에 있고, 수련이 뒤에 있어서 우리가 장자 계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족보를 살피고 경징과 수란의 생일 등을 살핀즉 우리가 차자 계열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계최 할아버지의 아들인 “경징”의 묘소를 내가 관리하지만 그 유적이 강화에도 있다는 사실을 역사책에 알리지 않았고, 또 경징의 묘도 강화에 있는데, 청주에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강화에 있다는 것은 구족보와 비문과 봉분으로 증명되나, 청주에 있다는 것은 신족보에 기재된 것 뿐이다. 기회 있으면 한 번 가서 확인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할머니만 강화에 있고, 할아버지는 청주에 계신 것인가? 아는 계통이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3) 그리고 27대(계최)부터 33대(성수)까지 그 연대를 살피면 대략 확실함을 알 수 있는데 “경징”의 아우되시는 “경명”의 생사 기록이 두 족보에 다르게 기록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여기서부터 조상님의 존칭은 생략하고 기록한다). 27대 “계최”는 1593년(게사)생이고, 32세되던 1625년(을축, 인조 3년)에 왕의 교서를 받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1637년 정축년에 순직하시니 45세에 별세하였다. 왕은 두고 두고 그 공을 치하하였다. 신족보에 의하면 그 분의 아들 “수련”이 1608년(선조 무신생)에 출생하셨고, “수란”이 1616년(광해 병진생)에 출생하였은즉, 나의 직계 조상 “경징”의 출생보다 24년 빠르다. 그리고 “수란”은 경징보다 8년 빠르다. 그래서 나는 장손이란 의미의 뜻을 접기로 하였다. 다시 설명하면 계최 15세 때 장자 수련을, 23세 때 차자 수란을 낳으셨고, 경징은 1632년(임신생)생이므로 40세 때에 낳으신 것이다.

4) 그런데 그 다음 동생 경명의 생사 기록이 문제이다. 구족보에 의하면 경명은 1650년(경인생)으로, 1674년에 상흥을 낳고, 66세인 1715년(을미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버지이신 “계최”가 1637년(정축)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없는 아들이 23년 후에 태어날 수는 없은즉 난감한 일이고, 또 신족보를 보면 1632년(임신생)으로 경징과 쌍둥이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16세인 1648년에 “일언”을 낳고, 1675년(숙종 을묘년)에 43세로 졸하였다 하므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경명에 대한 문서와 내력은 다시 검토할 대상이다. 우선 여기까지 보고 확인한 것을 기록하였다. 계보는 중요한즉 알 것만 알고, 보관할 것만 보관하라는 뜻이다(2005. 9. 24).

 

43. 벌초

 

내가 어제(2005. 10. 1) 강화에 가서 벌초를 하고 왔다. 백운골 할아버지(지흥운, 30대조, 경호의 아우님이신 경원 할아버지의 계열)가 거의 다 일을 하시고, 나는 협력만 한 정도였다. 그 할아버지는 집안 내력의 일에 관심도 있으시고, 또 유적(묘소) 보존에도 강한 집념을 가지신 분이라 우리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아시고 수고하신다. 그 할아버지의 뜻은 종친회나 충성군(27대, 계최) 후손들이 가끔 답사를 하러온즉 잘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도록 우리 당대에 잘 관리하자는 것이다. 나도 그 뜻에 동감한다. 이제는 탐모루산(갑곳리 878-10)에 있는 7분묘 한 필지와 하점면 창후리(817번지) 작은 묘역 뿐인즉 마음만 먹으면 하루 일로 쉽게, 또 일찍 끝낼 수 있으니까 아들, 사위만 협력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2005. 10. 2. 아침에 기록함).

 

44. 2006년 8월 18일 오후

 

이 시간은 2006년 8월 18일 오후이다. 셋째 딸 유라가 첫 애를 분만하기 위하여 병원에 있고, 집사람도 거기에 가서 기다리는 중이다. 43번의 글을 쓰고, 거의 10개월이 되었다. 지난 해 10월 10일은 대구에서 첫 손자 “元俊”이가 출생하였고, 12월 30일에는 둘째 딸 미라가 첫 외손자 “始暎”이를 출산하였다. 두 놈 다 잘 크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로서 자녀들과 손자들을 위하여 매일 기도한다. 금년 여름에는 태풍과 장마로 곳곳에 피해가 많았고, 말복 전후에 33°~36°까지 올라가는 등 몹시 더웠다. 오늘부터 더위가 한풀 꺾였다. 1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특기할 사건은 두 가지인데, 사라가 금년 5월 중에 이혼을 한 것이다. 서로 맞지 않아서 자주 싸웠는데 한 쪽은 폭력을 앞세우고, 한 쪽은 적응하려 하지 않으니까 살 수 없고, 혼자 사는 것이 편할 줄 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나의 집필 사역이 꾸준히 계획 되어 거의 목표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사용한 초벌 원고를 열왕기상하 강론 정리로 끝내니, 옛 필적 기록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마가복음 강론을 다른 복음서에 포함하였었으나, 신약 27권 강론 중 마가복음 강론만 빠진 것이 서운하여 그것도 다시 썼고, 또 인물공부란 책도 오래 전에 쓰다가 중단한 것을 적당히 끝냈으며, 수시로 기록하는 7분설교도 12집을 교정하는 중인즉 계속 바쁘고 힘들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나의 소속교회(새교회 위임목사) 시무 정년은 1년 5개월 남았는데, 그 안에 쓰는 일과 편집, 보급하는 일도 계속 진행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발바닥이 쑤시고, 저린 증세 때문에 4개월째 한약을 먹고 있다. 이 약을 다 먹고 두 달 쯤 기다리면서 증세가 호전되기를 기대하려고 한다. 작년 10월 중에 토스트를 과식하고, 손발이 차지면서 체증에 걸려 고생한 후부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의사가 “오가피를 먹은 일이 있느냐?” 하여 바로 체증나기 전에 4개월쯤 먹었다 하니까 열이 있는 체질에는 오가피와 홍삼이 맞지 않는 약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도 처음에 발이 붓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에 심부전증으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서 나의 할 목표도 있지만 혹이라도 할 말을 못하고 죽게 될 것을 염려하여 어제는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말”을 기록에 남겨놓고, 미라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졸지에 죽는다면 남기고 싶은 말을 회고록에 기록해 놓았으니 참고하라”고 하였다. 그것을 기록하고 난즉 크게 안심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말했느냐? 하면 장례식 절차와 연락대상에 관한 것과, 6남매 자녀들의 진로에 대한 것과, 물질의 뒤처리에 대한 것과, 내가 하려고 목표했던 것들을 다 적은 것이다. 자녀들이 그대로만 시행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앞으로 계속 할 일에 대한 포부와 목표는,

1) 사명적인 일로서 ① 집필 사역(통합복음서 정리, 개혁교회 정치문답)을 잘 끝내서 다방면으로 보급하는 일과, ② 정년까지 목회를 잘 유지하는 일과, ③ 은퇴 후에 독립적으로 가족교회를 예수님답게 하면서 개혁교회 정치문답을 만드는 일이요,

2) 가족적인 일로서는 ① 성유가 속히 장가 가는 일, ② 대환이도 그 다음에 장가 가는 일, ③ 내가 은퇴한 후 적당한 주택과 집회소를 갖는 일, ④ 종가 또는 큰 집으로서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전셋집에 살지만 내 집과 다름없이 살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는다. 아내도 늘 몸의 허약을 느끼지만 중병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유라가 해산을 잘 했다”는 소식을 기다리면서 우선 오늘까지의 일을 회고한 것이다.

 

45. 가족에 관계된 글

 

1) 기도백과 52과에 “나 자신을 위한 기도문”이 있는데(98년도에 쓴 것), 거기에 “내가 70을 산다면” 이란 글이 있다. 그 후 8년을 무사히 살았다는 뜻이다. 내가 발바닥 통증과 혈압이 높은 것을 느끼면서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지만 늘 위험을 느낀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산 동안 자녀들이나 타인이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또 남은 여생을 “적은 비용으로 산다는 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자 방침이다.

2) 오늘 날짜에서 앞으로 할 일은 이렇다. ① 통합복음서를 거의 꾸며 가고 있고, ② 남기는 글도 더 적었으며, ③ 7분설교 13집을 거의 다 썼다. 이 세 권의 책을 식자, 교정한 후, ④ 누락된 목록을 정리하고, ⑤ 회고록 몇 페이지를 추가할 것이 있고, ⑥ 이것을 순서대로 편집 정리하여 홈페이지에 넣고, 디스켓, CD에 넣어 보관한다. ⑦ 신문 광고는 내년 은퇴인사와 함께 낼 예정이다. ⑧ 그리고 현재 갖고 있는 출판사(한남 성경연구원)를 “새교회 성경연구원”으로 명칭 변경하여 요긴한 책(신약 강론, 핵심 설교, 요절 연구 등…)은 출판 할 예정이요, ⑨ 은퇴 후 가족교회를 이상적으로 하면서 “개혁교회 정치문답”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 문서 선교를 계속할 것이다. ⑩ 은퇴 후 적당한 위치, 적당한 공간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고, ⑪ 모든 재정을 모아 종가집 터전을 회복해 놓으려 하고, ⑫ 성유, 대환이 결혼하면 성유는 안산에 2,000만원 정도 보태주고(전세집 키우라고), 대환이는 성남에서 현재 살고 있는 집세를 가지고 전셋집을 마련해 줄 예정이다.

3) 각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자녀들이 다 신앙적으로 자립해야 하고, 또 생활 문제와 건강 문제도 든든해야 한다.

① 덕유는 장손의 계열로 어른이 없으면 집 안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가문에 대한 1차 책임을 져야 한다. 형제우애와 화목을 하려면 수도권으로 와서 자주 친교해야 함을 잊지 말라. 그것은 원준이 교육상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덕유는 본래 길을 잘못 잡은 것이 많은즉 잘 극복해야 할 것이다.

② 사라는 배우자를 만나고 안 만나는 문제에 대하여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경험이 있었은즉 취약점과 보완점을 잘 알 것이니, 자유롭게 삶을 개척하되 신앙과 건강과 경제를 튼튼하게 준비해야 하고, 또 자립해야 할 것이다. 부모와 한 집에서 사는 것은 얼마든지 좋으나, 독립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느낌으로 볼 때 누구나 자신의 고유적 성격을 고치기 힘들다고 본다. 성령님의 뜨거운 역사를 힘입지 않는 한…. 그래서 더 참고, 더 포용하는 노력을 하여 과거에 이○○와 과격하게 싸운 성격, 또 아버지와도 몇 차례 충돌한 성격 같은 것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요즈음 아내와 싸운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찌르고 집에 불을 지른 일도 있지 않느냐? 여자가 완악하면 남자의 성격은 극에 달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참는 남자이면 무난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남자가 순종하는 아내에게 화를 내겠느냐? 하는 것이다. 사라는 좋은 면도 많은 것을 내가 안다. 직업에 성실하고, 대인관계에 친절하며, 또 형제우애에도 힘쓰는 것을 잘 안다. 아버지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 조금씩 극기 연단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싫은 사람도 아주 배격하지 말고, 조금씩 접근하라는 것인데 너는 그것을 못하거나 안하려는 성격이 문제인 것이다. 잘 노력하기 바란다. 퇴촌에 집이 없었다면 네가 이혼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새가정으로 재출발할 때는 크게 유의해라. 피아노 학원 경영 중에 아이들 수송은 항상 문제인즉 다른 장소로 옮겨 가르치기만 해야 하고, 그런 장소를 얻을 때 약간 보태 줄 생각도 하고 있다. 혼자 있는 동안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도 좋을 것이다.

③ 성유는 조용한 성격자이다. 조용한 것이 지나쳐서 부모형제 간에 안부 연락도 없이 지내는 것이 심한 지경이다. 그래도 한 달에 두 번은 전화를 해야 한다. 인간이 연약한 존재란 점과 신앙 세계에서 자라난 점을 생각하여 교회에 출석하고, 믿음 생활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 가족교회를 시작하면 너를 성남에 오게 하든지 하여 가족 친교와 신앙에 기회를 주려고 한다. 네가 건강을 잘 지키고 회사 생활로 경제의 터를 잡으면 하나님께서 신앙의 딸과 결혼하게 하실 것이고, 가정의 자리 잡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너의 전셋집에 2,000쯤 더 도울 예정이다. 그러면 너는 열심히 저축하여 결혼 비용 1,000만원만 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일들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덕유와 네가 아버지 집을 떠나 산 것이 결국 신앙 타락과 경제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이 지나간 인생의 실수인데, 이제 깨달은들 어찌 하겠느냐? 남은 인생이나 생산성 있게 잘 살아야지. 아버지는 네가 순탄하게 발전하기를 기도한다.

④ 미라는 아버지를 많이 신용해 주어서 나도 너를 신용한다. 또 달란트 사역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인정하는데, 앞으로는 네가 이 문제를 잘 연구하여 컴퓨터 활동으로 보급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의욕적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만 사명을 느껴야 한다. 홈페이지 만드는 것까지는 아버지가 비용이 들어도 해놓고, 나중에 운영 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이봉근 강도사님도 아버지 재료를 아버지 홈페이지에 넣고 자기 싸이트에서는 링크만 하여 이용하도록 함이 좋겠다고 하였다. 네가 나에게 준 4,000만원과 결혼비용까지 다 갚았은즉 나는 짐을 벗었다. 그리고 시영이가 총명한즉 기대를 갖는다. 황서방은 좋은 사람이다. 시가의 가족에도 행복이 있어야 하고, 내가 가족교회로 독립하면 꼭 시모님과 시누이를 교회에 인도해라. 이상적 직업이 창출되기를 기도한다.

⑤ 유라에 대하여는 크게 할 말이 없다. 김서방도 좋은 사람이고, 시부모님들도 든든하지 않느냐? 유라가 임신 만삭의 몸을 갖고 7분설교 12집을 한 주간 내에 식자한 것을 보고 놀랬다. 삶의 저력이 있다고 본다. 너의 언니 미라를 포함해서 출산과 함께 너의 몸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운동을 힘쓰기 바란다. 그리고 김서방의 신앙생활 발전에 유의하여야 한다.

⑥ 대환이가 직장 일을 끝낸 시간에 여가를 오락실에 가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만 건설적이 못 되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 금년 여름 휴가는 집에서 보낼만큼 어울리는 친구들이 없는 모양이구나. 아무쪼록 성실한 신앙인, 건전한 인격자 되고, 속히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네가 결혼하면 아버지는 현재 사는 전셋집을 바꾸든지, 아니면 아담한 주택을 전세로 얻든지 하여 너를 독립시킬 것이다. 그러니 경제 생활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앞으로 6남매와 가족들은 아버지가 독립적으로 가족교회를 할 때 더 희망적으로 은혜롭게 할 것인즉 기대하기 바란다(2006년 12월 말).

 

46. 원준이에게 하고 싶은 말

 

원준아! 너는 세상에 태어난지 10개월쯤 되었다. 할아버지는 68년 5개월쯤 되었고, 너는 대구에 살면서 기어다니고 악만 잘 쓰는 줄 안다. 할아버지는 너를 보고 싶어도 멀어서 가지 못하는데, 두 달쯤 있으면 추석 때 너의 아빠, 엄마와 할아버지 집에 올 것이다. 할아버지는 네가 임신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너를 위해 기도하였고, 또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네가 좋은 사람 되기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네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이라도 할아버지가 산다면 이야기를 많이 해 주겠다만 그 이전에 할아버지가 죽는다면 많이 서운하겠지. 원준아! 너는 충주 지씨 41대손이고, 27대 “계최” 할아버지(선조 광해군 때 공신)의 14대손이며, 28대(경징=승민) 할아버지부터 큰 집 장손 계열임을 알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을 많이 써야 하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신앙과 관계된 책을 많이 썼는데(100권 상당), 너는 그 책을 꼭 읽고 잘 보관하며, 또 널리 선교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할아버지는 네가 좋은 성직자(목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쓴 글도 유익을 줄 것이다. 예수님다운 목사, 예수님다운 교회를 섬겨야 한다. 할아버지는 늙어서야 옳고, 그른 것을 많이 깨달았단다. 너만 똑똑하면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너의 갈 길과 성공의 길은 열릴 것이다. 나는 너에게 줄 선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할아버지가 "노회장 했다"는 기념 뺏지이고, 또 하나는 한문 성경책이다. 너의 시대에는 한문 성경을 보는 사람이 없겠지만 꼭 한문을 익히면서 한문 개역 성경을 사랑하기 바란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지도할 것이다. 바르게 크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100에 하나 정도일 것이다. 너는 반드시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제 라디오에서 강영우씨의 인터뷰 방송이 나왔는데, 그 분은 소경으로 박사되고, 미국 백악관에서 장애인 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한다고 한다. 그가 쓴 “꿈이 있으면 실현이 있다”는 책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차세대의 교육지침서”라고 한다. 나는 내 손자 원준이가 꼭 이 책을 사 보도록 말하고 싶었다. 잘 자라고 성공해야지…너는 한 살에서 세 살 때 너무 예민하고 설쳐서 너의 부모를 많이 고생시킨 아이다. 사랑하고 축복한다(2006. 8. 17. 69세 된 할아버지로부터)

 

47. 2007년도를 회고함

 

이 시간은 2008년 1월 1일 오후 1시이다. 2007년 한 해를 회고한즉,

1) 우선 나는 퍽 부지런히 살았다. 하나님이 특별섭리로 건강을 붙들어 주신 은혜로 소선지서 강론과 다니엘서, 욥기 강론을 마쳤고, 7분설교 14집도 끝냈으며, 작은 목회와 아울러 가사를 살폈다. 매주 월, 화, 목, 금에 퇴촌에 가서 피아노 교습생을 운송하였다. 어제 12월 31일에 홈페이지에 들어온 수가 750명 쯤 되었는데, 가장 많은 수로 알고 있고, 현재 8만명에 들어가는 중이다. 앞날을 크게 기대한다. 금년 4월 초에 정년과 동시에 홈페이지(기독교 신앙자료, 지목사가 증거한 모든 것)를 교계에 광고하려고 한다. 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숫자로 알려지기를 기도한다.

2) 덕유가 집을 샀으니 잘된 일이고, 원준이가 너무 설치고 체질이 약하여 자주 병치레를 하였는데, 자라면서 건강해지기를 기도한다.

3) 2007년도에 중요한 것은 도촌동 APT를 구입하게 된 사실이다. 당첨은 2006년 12월에 되었고, 계약금(4,500만원)과 중도금 두 번(6,000만원×2)도 다 감당하였으며, 현재 1억 5천만원만 1월 23일에 지불하고 인수 받도록 주선하는 중이다. 하나님이 그 돈을 다 주셨는데 주식투자의 실수로 1억 이상의 돈을 잠재우게 되어 난처하였으나, 강화도의 878-2번지 야산을 1억 1,000만원에 팔게 되어 난처한 입장을 면하게 되었다. 그 땅은 상속받은 것이라 양도세 1,500만원쯤 냈다. 하나님은 적기(은퇴 시기)에 집을 주셨고, 집을 주실 때 여러 번 특별섭리를 베푸셨다. 당첨될 때, 계약금 낼 때, 중도금 두 번 낼 때, 그리고 막대금 낼 때(강화의 토지 매각된 것) 내가 염려했던 것들을 다 해소시켜 주셨다. 그러는 중에 나 홀로 신경 쓴 일이 많았다. 아직도 3,000정도를 염출해야 하는데 주식이 적정선에 오르지 않으면 차용해서라도 완납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 막대금 치를 때 대환이 돈 3,000만원과, 사라 돈 1,000만원을 쓰고 사라 돈은 갚았다.

4)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적은 비용으로 산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것은 겸손의 뜻도 있지만 성격상 내가 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주택, 자동차, 음식, 의복의 비용까지 최대한 절약한다. 나는 성직자로서 집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도 원치 않는다. 아파트를 전세 놓고, 현재 전셋집에서 그대로 산다면 상당 금액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가족들이 좋은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여 2월 13일에 새 집으로 이사하게 하였고, 나는 본래 살던 집 지하실을 혼자 사는 서재실로 이용한즉 나 할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음을 감사한다.

 

48. 정년 은퇴를 회고함

 

2008년 3월 25일은 나의 70세 정년일이다. 총회의 강요로 10년 이상 은급비를 조금씩 납부한 것이 있어서 이것을 일시에 받으면 1,100만원이요, 분납으로 받으면 4월 15일부터 매월 25만원씩 죽을 때까지 지급된다고 한다. 4년을 더 살게 된다면 분납 받는 것이 유익할 듯하여 분납 수급으로 선택하였다. 죽은 후에는 아무에게도 혜택이 없다고 한다. 내가 시무하던 새교회의 사정을 잘 아는 목사님이 오셔서 그 분을 후임으로 천거하였으나, 타 교단이란 이유로 노회가 거절하였다. 이것은 나도 50% 예상한 바였는데, 악한 마귀가 “돈으로 흥정하여 소개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목사가 노회 공석에서 그런 언질까지 나타내어 명예적 상처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신즉 처리하실 줄로 믿는다. 정년 은퇴가 결정된즉 당회장이 바뀌고 예측한 바이기는 하지만 별안간 교회에 대하여 자연인이 된즉, 허무함을 느꼈다. 은퇴 소감 등 차분히 말하려던 것도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예배당 서재실을 비워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20평 정도의 연구실을 필요로 하였지만 그것이 준비되지 않아서 먼저 살던 집 지하실을 이용하기로 하였고, 책들을 퇴촌과 이 곳(지하실)으로 분산시켜 이사한 후 자리를 잡은즉, 그런대로 살만하다는 느낌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5월 9일 저녁부터 반지하 서재실을 사용하였다. 내일 주일은 도촌동 주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려고 한다. 박○○씨에게 빌려준 교회의 차대금 5,500만원을 받지 못한 관계로 깨끗한 인계를 못한 상태에서 은퇴한즉, 이래 저래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 되었으나, 6월 중에 강화 878-4(임야)를 담보해 주고, 6,000만원을 빌려 교회 돈을 갚게 하니 후련하였다. 나 혼자 책과 이삿짐을 옮기는 일로 10여일 피곤하였고, 다행하게도 퇴촌 집에 작은 창고를 지었으며, 이사 후 어느 정도 정돈되었다. 다시 에스겔 26장 강론 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49. 2008년 8월 7일 오전

 

2008년 8월 7일 오전 8시에 잠언 강론 쓰기를 마치고, 그동안의 일을 회고한다. “성경 66권 강론을 거의 다 쓴 것”은 예상 외의 일이고, 또 하나님의 이적으로 된 줄 믿는다. 5월 9일부터 금광 2동 3280번지 반지하에서 서재겸 거주 생활을 하였는데, 이 거처는 먼저 전세로 살던 2층과 합하여 창고로 사용하던 곳이다. 도촌동 APT에는 서재와 잡동사니 세간들을 놓을 때가 없은즉 이 공간을 부수적으로 쓰는 것인데, 나는 퍽 만족하였다. 내가 좋은 주택으로 가지 않아서 좋고, 또 이곳에서 편리한 자유 생활을 한즉 좋으며, 또 여름을 지내보니 29°이상 오르지 않는다. 장마가 있을 때 약간의 습기와 냄새가 있었지만 앞으로 환풍 시설만 잘 하면 그것도 문제 없다고 본다. 아이들 중에 내가 지하실 생활 하는 것을 얹잖게 여기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불편이 없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선풍기 바람을 인하여 기침, 감기에 걸린 일이 있었고, 약 처방을 하면서 10일 정도 몹시 땀도 내고, 고생을 하였는데, 많이 회복되었다. 내가 이곳에서 3~4개월 있는 동안 레위기 강론, 7분설교 15집, 그리고 잠언을 오늘 아침까지 끝내고 나니, 참으로 기분이 상쾌하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8월 3일 주일을 기하여 대구 식구들이 다녀갔다. 원준이가 많이 컸고, 요 1:12을 외우는 것을 보고 놀랬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원준이는 약간 체질이 약한 것 같고, 또 밤에 잠자다가 깨어 몹시 우는 습관이 있어서 원준 어미나 아비가 퍽 피곤한 것을 느꼈다. 원준이의 건강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려고 한다.

7월부터 퇴촌에 가서 아이들 수송해 주던 일을 중지하게 된즉 더욱 자유롭고 나의 할 일을 잘 하게 되었다. 사라가 퇴촌에서 교습소 일을 혼자 하지만 소득에 유익이 있기를 바란다.

교회가 나의 퇴직금으로 550만원(월 사례 55만원×10년)을 가져왔기로 감사히 받았다. 나는 새교회의 자금이 1억 5백만원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1억에 손실 주는 금액을 가져온다면 500만 받으려고 작정하였는데, 550을 가져왔기로 그대로 받은 것이다. 나는 교회를 부흥되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500도 과하게 여기지만 교회 측에서의 사명으로 볼 때는 담임목사의 전임과 은퇴를 구별하여 대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와 담임자 간에 이런 일들이 깨끗하지 못한 것 때문에 교회 헌법상 합리적 방안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기록한 것의 교정과 홈페이지 정리도 있지만 우선 계속 써야 할 것은 “개혁교회 정치문답”이다. 추석 전이나 연말 전에 끝낼 계획으로 서서히 구상하려고 한다. 내일부터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되고, 오늘은 입추요, 내일은 말복이다.

 

50. 2008년 9월 9일 오후

 

2008년 9월 9일 오후 9시에 시편 강론을 끝으로 성경 전체의 강론을 마치고 크게 만족하였다. 현재 나의 건강 상태는 시력이 3단계로 약해졌다. 나는 눈이 좋은 편이다. 52세 때 낮은 돋보기를 썼고, 60대에 한층 올렸는데, 지금 70초반에 또 한층 올렸다. 현재 올린 돋보기로는 1년도 더 안갈 것 같다. 분명히 몇 달 후에는 더 두꺼운 돋보기를 써야 할 것 같다. 잔글씨를 많이 본 원인일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소화기관 특히 직장의 수용력이 약해지는 점이다. 예를 들면 대변량이 적으면서 화장실에 가야 하는 점이다. 이것이 늙는 추세인데, 그것이 심해지면 생명지탱에도 문제가 되는 줄 안다. 그 다음에 없던 일 또 한 가지는 방바닥에 앉으면 더 심하고, 의자에 오래 앉아도 발등이 붓는 것이다. 어떤 때는 방바닥에 30분 앉았는데 왼발등이 소복하게 부은 일도 있었다. 소금물, 파스치료도 해보았지만 궁둥이를 압박하지 말고, 걷는 운동을 하면 치료될 듯하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2년 전부터 의욕상실이 시작되더니 음식을 적게 잡수시면서 대변이 토끼똥처럼 나왔고, 그 다음에 발등이 부은 것과 함께 주기적으로 가슴 답답하고 아프게 하는 증세가 오더니, 나중에 부은 발이 심해져서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병원에서 처방한 덕분에 다시 검은 다리와 발이 붉은색으로 회복되더니 발끝까지 다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겠지만 할아버지가 54세, 아버지가 52세에 별세한 것처럼 나는 50세에 가지 않았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는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더 쓰시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51. 2008년 10월 2일

 

내가 감사한 것은 몇 일전에 원준이가 다녀갔는데, 잘 양육되는 상태가 완연하여 만족했다. 넓게 마음을 쓰려하지 않는 것과, 자기 고집 세우는 것과, 때로는 잠자다가 우는 것이 염려스러웠으니 병원이나 상담소에서도 그런 아이들의 문제로 많은 상담하는 것이 있고, 또 TV에서도 그런 아이 교육 문제가 많이 나오니까 부모들이 보면서 지혜롭게 길잡이를 해서 총명하고 건전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너무 사랑하는 표현만 하지 말고, 한 가지 한 가지 경계심을 갖도록 지도해라.

엊그제 국민은행 직원 아가씨가 “할아버지 전보다 얼굴에 살이 많이 찌신 것 같다” 하여 그러냐 하고 가만히 생각한즉 7월부터 퇴촌의 운전을 안하여 몸이 덜 피곤했고(그러나 시편 설교 때문에 더위를 무릅쓰고 밤낮없이 애를 썼다), 식사를 잘 해서 그런 것으로 느꼈다. 달란트 사역을 끝내는 것은 금년까지 계속 하겠지만, 새로운 일감에 착수하는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이다. 강화도 밭에 작은 조립식 방을 만들고 농사 때만 갈까? 하는 생각도 있다. 손자들과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손자들이 할아버지 곁에 와 주지 않으니까 못할 것 같다. 퇴촌 집 4층에 남기고 싶은 책만 골라서 보관하려고 한다.

 

52. 2008년 11월 7일

 

오늘은 11월 7일이다. 내일 강화의 외6촌 동생 인수의 둘째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강화에 갈 예정이다. 내가 쓰기를 원했던 “개혁교회 정치문답”도 몇 일 안에 다 끝내고 서서히 7분설교 16집이 축적되는 중이다. 지금은 식자, 교정, 홈페이지 수록만 남았다. 놀랍게 진전된 셈이다. 다음 10일부터 성경인물족보에 착수하면 그것도 금년 안에 충분히 마칠 것이다. 따라서 내년 초에 CD, 제본, 선전, 보급을 예상한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할 일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줄 믿는다. 정치적 제언도 연구 중이고, 모든 재료를 제목별로 전산화 하는 일도 연구할 일이다. 계속 머리를 쓰고 여유있게 활동도 하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 이상 더 값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3. 2009년 1월 6일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어제는 중학교 동창회에 잘 다녀오게 해 주셨고, 방금 전에 삼성병원에 입원하신 김삼님 권사님의 병환에 대하여 안부를 물었습니다. 두 달이나 입원 치료를 하면서 염증 수치가 없어져야 퇴원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제가 심방 가서 얼굴을 대하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멀리서의 기도를 들으시고 거리에 관계없이 능력을 나타내시는 줄로 믿는 분입니다(마 8:8~10). 그래서 병문안을 원치 않고, 제가 있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족하게 여기십니다. 또 제가 부족하지만 저의 기도의 효력을 크게 기대하시는 믿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 특별히 저와 김권사님을 사랑하시고, 예상한 기한 전에 퇴원하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저의 달란트 사역이 이번 주간으로 끝나가고 있습니다. 7분설교 16집을 잘 정리하게 해 주시고, 성경인물계보도 그러하며, 다음 주간에는 미라가 인물계보를 식자하고, 저는 7분설교 16집을 교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드 정리, 목록집 정리, 정치문답 재검토를 해서 끝내야 하고, 이어서 CD와 제본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순서대로 잘 진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사역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미라와 김성진 목사님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루 하루 살아감에 있어서 저와 가족들과 연고자들의 건강과 평안이 중요합니다. 또 살아가는 생활에 있어서도 평안하고 보람있게 시간 보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 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과 연고자들의 믿음과 건강과 지혜와 보호와 공급과 형통함과 인도하심을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유라와 두현군에게 믿음과 건강을 주시고, 또 유라가 기침하며 좌복부에 담 결리는 증세로 고생하는 중 낳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에게 믿음과 기도의 힘을 주시고, 속히 낫게 해 주실 것을 아버지께 부탁드리며, 또 미라에게 건강을 주셔서 태아 양육에 지장없고, 또 신앙 자료 식자를 끝내고, 하드 정리, 목록집 정리하는 일을 지장없이 잘 끝내게 해 주십시오. 제가 기도하는 이 시간에도 증거 된 하나님의 말씀이 인터넷을 통하여 열려진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성령님께서 감동의 역사를 베푸시며, 국내와 세계로 더 많이 열려지게 해 주십시오. 지금은 14만명 선에 있지만 이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더 많이 알려져서 발목에 오른 물이 헤험 할 물이 되고, 바다가 되며, 소성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47장)처럼 확장되게 해 주십시오. 대구에 있는 아들의 가정과 손자 원준이에게 큰 지혜와 건강을 주셔서 명절 때에 잘 만나게 해 주시고, 사라와 배우자 될 사람과의 관계 개선 문제와 앞으로의 혼사 계획을 하나님이 영광되도록 지도해 주시며, 사라의 피아노 교습과 관계 된 모든 일과 아이들 수송에 안전을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또 성유와 대환이의 믿음과 건강과 배우자 문제와 생활 기반에 대한 것도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내일은 성경 연구원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네 분 목사님들에게 평안함과 형통함을 주시고, 말씀 연구와 함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일을 보람되게 여기도록 하여 주시고, 목회 사역과 자유로운 복음 사역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주위에는 제가 아무 공로도 없지만 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돕거나, 대접하는 손길들이 있습니다. 제가 골고루 아뢰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아시온즉 그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71세까지 목적한 사명은 끝을 냈지만, 앞으로 하나님이 건강과 기회를 주시면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에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사온데, 아무쪼록 저와 아내의 건강과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합당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는 물질적, 생활적 늪에서 헤어나고, 단순한 삶의 환경으로 자리 잡아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이 아시온즉 채권 관계가 속히 회수, 정리되고, 저의 살림 도구들도 정리한 후 하나님께 단순한 생활로 헌신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아무 때나 저를 데려가신다 해도 제가 깨끗이 정리할 일을 끝낸 후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일일이 구하지 못한 것까지 성령님께 의탁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 1. 9 1단계 집필 끝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