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1938년 3월 25일(음 2월 24일생)

지 영 근

 

먼저 드리는 글

 

나는 나의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회고록 남기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알았다. 회고록을 남길 뿐 아니라 다른 기독교 신앙자료도 많이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4. 12. 2. 광주 동명교회 최기채 목사님이 원로 은퇴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광주에 가서 축하 예배에 참여하고 최기채 목사님이 집필한 책 중에 “너는 저 방으로 가라”는 목회 수기를 선물 받고 집에 와서 그 책을 단숨에 읽고 큰 감동과 공감과 의욕을 느꼈다. 단숨에 읽은 것은 재미있고, 감동적이기 때문이고, 감동을 받은 것은 최 목사님이 모 교회 출신, 모 교회 사역자, 모 교회 초대 원로 목사가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초와 인내를 겪으면서 성실하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참으로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그 분을 두고 나온 속담일 것이다. 이런 감동을 근거로 하여 나도 나의 변변치 못한 사명 생활 중에 있었던 일들, 좋고 그른 것을 망라하여 기록을 해 놓는다면 혹 후시대에 교역자나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 참고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 당시는 한다고 하였지만 지나고 본즉 부끄러울 따름이다. 누가 자기의 과거를 자화자찬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런 중에 나도 24세부터 신학을 하고 30세에 목사 되어 이 시기에 이르도록 7노회, 7당회 교회를 거쳤으니 회고하면 많은 일들을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인데 현재 나의 나이는 67세이지만 정신 상태가 쇠약해져서 20% 정도는 망각과 착각에 머물기도 하니 아주 잊기 전에 생각을 떠올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려 한다. 오늘 오후에는 셋째 딸 유라의 결혼식이 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지만 나는 지금도 말씀 상고에 정신이 쏠려 있음을 고백한다.

 

 

2004. 12. 4.

 

저자 지 영 근

목 차

 

먼저 드리는 글3

 

목 차4

 

1. 나의 무지는 최상급이었다8

2. 은혜 주시는 방법8

3. 군 생활을 연단의 기회로9

4. 일거양득으로 신학을 함9

5. 이연우 장로님10

6. 의도 깔린 부흥회10

7. 작은 시선과 축복11

8. 전도사를 섬긴 두 가정12

9. 한 예배당에 두 교회12

10. 자존심과 고집13

11. 김계희 목사님14

12. 성직의 욕심14

13. 인도하시는 하나님15

14. 유정남 집사15

15. 작은 교회, 큰 사랑16

16. 하혈치료17

17. 서동걸 목사님17

18. 친구 따라 강남 간다18

19. 이상훈 장로님18

20. 에큐메니칼과 NAE19

21. 헌금갈등20

22. 이혼하고 세례 받겠다20

23. 목사된 이야기20

24. 박순대 목사님21

25. 미움과 거부감22

26. 예비군 훈련과 경목22

27. 곡식 속의 돈 봉투23

28. 나를 벌하소서23

29. 세 가지 사건24

30. 김전 교회와 동산기도원25

31. 현명길 목사님25

32. 형제의 대립26

33. 박홍선 사모님26

34. 노회장 된 이야기27

35. 권봉태 목사님27

36. 원승길 목사님28

37. 오우용 목사님28

38. 최용만 장로님29

39. 전이석 장로님30

40. 맡겼으면 불평하지 말자30

41. 감당할 자에게 시험을 주심31

42. 어떤 장로님에 대한 아쉬움31

43. 과반수에 따라야지32

44. 막걸리 한 사발의 유익32

45. 철야 기도회33

46. 민감한 사건들34

47. 연탄가스 이야기34

48. 남일 교회의 문제점35

49. 잊혀지지 않는 죽음들(1)36

50. 잊혀지지 않는 죽음들(2)36

51. 신평 교회 이야기(1)37

52. 신평 교회 이야기(2)38

53. 태평 교회 이야기(1)38

54. 태평 교회 이야기(2)39

55. 산격 교회 이야기40

56. 어떻게 벌할까?40

57. 인도자와 배신자41

58. 김호룡 목사님41

59. 조병남 목사님42

60. 큰 잘못, 웃기는 실수43

61. 당회 수양회43

62. 두 사람의 헌신44

63. 이영합 장로님44

64. 가장 큰 웃음45

65. 옆방에서라도 개척하라46

66. 여전도사 내보내기46

67. 관리인 때문에 곤욕47

68. 김상경 목사님47

69. 이해 안 되면 용서하시오48

70. 오해는 은혜의 장벽이다48

71. 한남 교회를 떠난 이야기49

72. 이성광 목사님50

73. 방화숙 권사님50

74. 김명자 권사님51

75. 신여순 집사님52

76. 김삼님 권사님52

77. 어머니의 별세53

78.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54

79. 목사는 홀로 서야 한다54

80. 성경 연구회55

81. 예종규 목사님55

82. 이봉근 전도사님56

83. 어떤 성도와의 관계57

84. 모처럼 집회에 가다57

85. 나의 자취 생활58

86. 속필의 결과60

87. 주보의 부작용60

88. 가운 홍수61

89. 점심식사의 문제61

90. 주택 소유를 포기함62

91. 특별한 과정63

92. 나를 추스림64

93. 먹고 사는 이야기64

94. 7년에 8회 청빙 투표65

95. 교회 옮긴 이야기66

96. 어찌할꼬66

97. 태교67

98. 나의 인생 욕심68

99. 나의 책임과 소원68

100. 못다한 이야기69

101. 새교회 이야기70

102. 화양읍 교회 100주년 기념70

103. 놀라운 이적체험71

104. 내가 쓰던 물건들72

105. 이상적 교회73

106. 먹을 것을 주시는 은혜74

107. 커피 잔이 없어짐74

108. 주택 이야기(1)75

109. 주택 이야기(2)76

110. 김성진 전도사76

111. 목사 시무 은퇴 소감77

112. 연탄가스 수난78

113. 이사 간 이야기78

114. 섬김 받은 이야기79

115. 정년 은퇴시의 유감80

116. 은퇴와 관련하여 있은 일81

117. 이상한 기적들82

118. 자매에 대한 이야기83

119. 고향과 친척 이야기83

 

1. 나의 무지는 최상급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한국 기독교 초기에 감림교 선교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김요안나”란 세례명을 받으셨다. 생활이 넉넉지 않았으므로 물질적 봉사는 후하게 못하셨으나 주일 예배와 집에서 가끔 찬송, 기도하시는 일 만큼은 성실하셨다. 나의 아버님이 술만 잡수시고 살림을 돌보지 않거나 과한 음주에 빠져 가족들을 속 썩일 때도 할머니는 기도하셨다. 저녁이 되면 등잔불 밑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같이 기도하자”하신 후 답답한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실 때마다 아버지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또 손자인 내 이름을 대시며 “하나님 아버지 손자 영근이를 하나님의 종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는데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그런 기도를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기도의 내용은 물론 응답에도 관심이 없었고, 이 상황이 초등, 중등, 고등, 군 생활, 신학교 생활을 다 거치고 또 30세에 목사가 될 때도 그 기도의 응답을 몰랐다가 초기 목사 생활을 할 때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느끼면서 “나의 할머니가 그런 기도를 하셨는데 그 덕과 응답으로 목사가 된 줄 안 것”은 거의 20년 후였으니 이 무지가 어찌 최상급이 아니리오. 지금도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여 이런 무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2. 은혜주시는 방법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데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때 환경을 통하여 주신다. 사람이 죄와 불법을 묵인하려 하거나 일삼는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나는 유년 시절과 20세 이전에 아버지가 일하시지 않고 술로 살림을 어렵게 한 일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버지의 나쁜 점은 결코 안 하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생활의 부정적 요소를 근절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가난이란 취약점에서 벗어나 앞 길을 인도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려보는 노력도 하였으니 이런 용기는 가난을 인함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당시는 기도 응답을 인한 하나님의 인도를 알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대학 진학의 길이 끊겼고, 취직을 하여 1년 이상 지내다가 다시 고향에 가서 은혜 받을 기회를 얻었으니 마니산 하마동천에서 기도하는 두 전도사님을 알게 되어 성경 읽기와 기도에 힘쓰게 된 것이다. 새벽 기도를 힘쓰던 중 아버지의 방탕(술주정)에 도전하는 혈기를 부리므로 큰 함정에 빠진 후 다시 재기하는 노력을 할 때 깊이 회심하는 눈물을 쏟게 되면서 은혜를 체험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마음의 갈등과 기도가 회개를 이루고 감동의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나는 그 체험을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은혜로 믿었고, 그때부터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을 통하여 은혜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3. 군 생활을 연단의 기회로

 

사회 생활에서 군 생활로 들어오는 것은 환경의 아주 큰 변화였다. 순한 언어가 경색된 언어와 욕으로 변하였고,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뇌물을 주는 추세가 활기찬 환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입대할 때부터 하나님이 군 생활을 통하여 의식주와 용돈을 책임지실 것으로 믿고 돈을 뿌리치고 입대하였으니 무엇으로 용돈을 쓰며 뇌물을 주겠는가? 그때 돈이 있었으면 나도 남처럼 뇌물을 주고 군번을 속히 받든지 아니면 좋은 지역으로 배출되는데 분명히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사모하고 연단을 목적으로 입대하였기 때문에 언어 폭력, 시장한 증세, 훈련의 고달픔 등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나는 훈련을 받는 기간에 가까운 군 예배당에 가서 아침, 저녁 기도를 꾸준히 할 수 있었으니 그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환경으로 나를 꾸준히 인도해 주신 것이다. 훈련소에서 두 번 막사를 옮길 때 예배당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1관구 사령부 법무부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파견 근무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성결 교회(광주시 금남로 2가 중앙 성결 교회)에 새벽과 저녁에 기도하러 나갈 수 있었다. 남들이 말하기를 좋은 부대에 배치 받아 편안한 군 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아 술이나 담배의 유혹이 전혀 없었고, 주일 지키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가까이 따르는 자에게 적절한 길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군 생활 중 한두 번 실수도 있었지만 많은 연단과 경험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4. 일거양득으로 신학을 함

 

나는 군 생활을 할 때 목사 될 의욕을 갖지 않았으나 오명동(당시 유동에 있는 성북 개척 교회 담임 목사님) 목사님으로부터 광주 야간 신학교에 다닐 것을 권면받고, 군 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배우는 과정이므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 생활 2년을 더하는 동안 2년을 이수하게 되었고, 제대하는 그 해에 5.16 혁명을 경험하고, 11월 하순에 제대하였다. 제대하였을 때 나는 진로가 막연한 중 “신학을 계속 하라”는 권유만 받게 되어 그 길을 택하였으니 여기에는 자의보다 하나님의 인도 섭리가 있었다고 본다. 총신에 입학하는 서류를 누문동 우체국에서 등기로 보낼 때 30대 젊은 직원이 등기에 우표 대금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왜 받지 않느냐?고 캐묻지 않았다. 그 직원이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신학교 입학 서류임을 알고 봉사한 것으로 믿는다. 또 하나님이 그런 도움까지 주신 줄로 알고 있다. 부산 총신 분교(과거 고신)에 가서 잘 입학하였다. 이때에도 나의 사명감은 뜨겁지 않았고, 교파 분열에 대한 적대감만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의 신학 시절은 또 한 번 생활의 변화를 준 것이 사실이었다. 나의 신학 공부는 피상적 교육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식적 선양은 미약하였으니 나는 그만큼 영특한 머리가 아니었음이리라. 다시 말하면 연구하는 두뇌가 20대에 열리지 않고, 40대쯤에 열린 것 같다. 총명이 빨리 왔으면 일찍 발전하였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과 건강체질이 아닌 것이 나를 겨우 감당하게 한 원인으로 이해한다. 나는 지금도 연약에 머물러 있다.

 

5. 이연우 장로님

 

이연우 장로님은 현재 구룡포 남쪽 장길리 교회 원로 은퇴 장로님이시다. 내가 27세 때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현재는 부산 행정구역) 교회에 최초 전도사로 시무할 때인데 그때에 이 장로님은 34세쯤의 집사님이었다. 장길리는 미역을 수집하는 어촌인데 그 당시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김해의 도도리 월포라는 지역에 거주한 것이다. 구정이 되었을 때 두 내외 집사님이 내 방에 인사차 오셔서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절 받는 것이 처음이고, 생소하여 놀랐지만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 종이란 신분의 무거운 느낌을 가졌다. 성직자끼리 절하는 예는 쉽지 않다.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김호룡 목사님 내외로부터 절을 받았고, 또 오산의 박순대 목사님 내외분이 오시면 나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님들로부터 절을 받은 일이 있다. 고마운 일인즉 이 분들을 위하여 축복 기도를 많이 해야 하겠다는 사명을 느낀다. 이연우 장로님 내외분은 참 좋은 분이시다. 청년 시절에 1년 반쯤 같이 지냈지만 서로의 인연을 끊지 않고, 다시 장길리 모 교회로 가신 후에 그 교회에 교역자의 공백이 생기면 꼭 나에게 교역자 안내를 부탁하신다. 그래서 내가 정원만 목사님을 소개한 일도 있었고, 최하도 목사님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나에게 한가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전국의 해변을 돌면서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그 장로님에게 진실과 겸손이 품어 있고, 모 교회를 사랑하는 열심이 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줄로 믿는다.

 

6. 의도 깔린 부흥회

 

1959년에는 WCC 운동 관계로 통합측과 분리되었고, 1960년 12월에는 본교단(합동측)이 고신측과 합동하면서 한상동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셨다. 나는 60년 11월에 제대하였으나(그 해 5.16이 있었음) 광주 신학교 2학년을 마치지 못한 관계로 군 내무반에서 한달쯤 군복을 입은채 생활하고 학기를 마쳤다. 고신파와의 합동 관계로 부산의 고신이 총신 분교가 되었고, 나는 61년도에 부산 분교에 가서 총신 1학년에 편입하였다. 한 학기는 잘 지냈는데 2학기부터 합동한 고신파가 다시 분열 운동을 시작하였고, 그 운동은 부산 총신 분교의 고신측 학생들로부터 일어났다. 그들은 한상동(과거 고신파 지도자) 목사님에게 다시 분열해 나올 것을 여러 차례 청원하였으나 한 목사님은 동하지 않았다. 2학기에도 계속 학우회를 모이면 분열 운동만 하였는데 그때의 주동자가 학우회장 석원태 조사였다. 학생들이 70명쯤 되었는데 90%가 고신파 지지자였다. 그들은 전국 고신측 교회를 규합하여 분리 운동을 하려고 부흥회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이 순수한 부흥회라고 주장했다.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이유인즉 총신측이 세속화 되어 같이 있기 싫어서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박윤선 목사님을 강사로 특약 받고 전국의 고신측 교회만 통지서를 띄웠다. 그러나 그 부흥회는 순수한 것이 아니고 분열 운동이기 때문에 이상근 교수님의 연락으로 강사 약조는 취소되었다. 그때 나는 기도 많이 하는 학우들을 존경하였는데 “순수한 부흥회”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나는 그들에 대한 신의를 갖지 못하였다. 그런데 2학기중 경건회 예배 때 한상동 목사님이 참석하여 광고 시간에 나오시더니 “다음주부터는 고신측 학생의 자격으로 등교하라”는 것이다. 설왕설래가 이루어졌고, 교수님들도 뜻이 갈라졌다. 한상동, 박손혁, 오종덕, 서무 주임이 고신측 분열을 지지하였고, 이상근, 홍반식, 김상도, 이장수, 장석인(장준하씨의 아버지), 하도례 교수와 강사는 합법이 아니란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니 교수와 수업이 옳게 되겠는가? 그 다음주부터 총신측은 총신측 교수의 시간표대로 시행하고 고신측은 그분들 나름대로 시간표를 만들어 시행하니 한 교실에 두 교수가 문을 두드리다가 그대로 가버리는 형극이었다. 이 일을 한 주간쯤 계속 하다가 이사회에서 “나오라”는 지시 때문에 숫자가 적은 총신측이 여관에 나와서 학기 수업을 마치고 방학에 들어갔다. 62년도 3월에 개학 통지를 받고 대청동 중앙 교회에 간즉 편입생 시험을 치기 위하여 출제를 갖고 오셔야 할 홍반식 박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분은 몇 일전에 한상동 목사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른 변통으로 편입생 시험을 치고 총신 부산 분교를 영도구 영선동 바다 낭떠러지 위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학업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고신파는 그런 경위로 갈라져 나갔고, 많은 교회와 목사님들이 그 분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때 고신파 분열에 앞장선 석원태 조사는 목사된 후에 또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7. 작은 시선과 축복

 

부산 신학교 2년째 배울 때 학교의 교사가 영도에 있었다. 기숙사용 이불을 인천역에서 기차 화물로 탁송하여 학교 마당에 도착시켰는데 부산 노회의 유력한 목사님이신 김상도 목사님의 사모님이 그 곳에 봉사하러 오셨다가 나의 보낸 화물에 탁송역으로 인천역 표시가 있는 것을 보시고 인천에서 탁송물 보낸 학생을 찾으신 것이다. 나는 강화에서 왔지만 강화는 철도가 없어서 인천에 와서 탁송한 것인데 그 사모님은 인천앞 영종도가 고향이어서 인천에 대한 향수를 느끼신 것이다. 나를 만나 반가워하신 후 나의 고향이 강화라 한즉 자신도 영종도 섬이 고향이라 하시면서 크게 반가워하셨고, 그의 시아버님이신 김삼수 장로님께 부탁하여 나를 그 장로님이 시무하시는 제2영도 교회에 전임 전도사로 소개를 해 주심으로 내가 신학 시절에 큰 편의를 힘입은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복인가? 나의 시무지 교회와 학교와는 400m 정도의 거리였으니 한 동리에 있는 것이다. 또 제2영도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도 역시 김상도 목사님의 소개로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 도도 교회에 부임하여 10개월간 사랑을 받고 신학 공부를 하였다. 김 목사님의 사모님의 작은 시선이 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물론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 섭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볼 때도 하나님의 인도 섭리가 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8. 전도사를 섬긴 두 가정

 

내 나이 26세 총신 2학년 때 처음으로 전도사 전임 사역을 시작하였다. 기숙사 생활 중에 임지가 생긴즉 큰 도움을 받게 된 셈이다.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 도도 교회는 평야 지대에 있는 교회인데 그 지역은 열 길을 파도 돌이 없다는 곳이다. 박대근 집사님 댁에서 작은 방을 주고 겨울에 아침 저녁으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해줄 뿐 아니라 하루 세끼 식사를 뜨거운 밥에 생선국을 끓여 10개월을 섬겼으니 그 공이 어찌 작은 일인가? 박집사님의 부인 양집사님께 크게 감사의 뜻을 갖는다. 나는 요즈음 가진 것이 있어도 생선국을 거의 먹지 못한다. 그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생선을 제공했을까? 그 다음 해에 제2영도 교회로 전임하였는데 역시 총각인지라 예배당 모퉁이에 사시는 송양 장로님 댁에서 내가 결혼하기까지 몇 달 동안 식사를 제공해 주셨다. 송양 장로님은 늙으신 어머니와 처자들을 데리고 피난 오신 분으로 판자집에서 생활하셨는데 연로하신 모친이 부인 김순빈 권찰님보다 가정 살림을 더 많이 하셨다. 전도사님 식사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서야 되느냐? 하시면서 매 식사마다 고깃국을 제공해 주셨는데 한 번은 소문을 들은즉 딸 송능자의 코트를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으로 고기를 사서 대접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일을 어찌 감당하리요. 지금도 우리 가정은 손님 대접할 일이 있을 때 부담을 느끼지 않는가? 들은 소문도 있지만 그때 나를 대접한 두 가정과 그 자녀들이 크게 발전한 줄로 알고 있다. 양집사님 아직 생존해 계시겠지요?

 

9. 한 예배당에 두 교회

 

나는 신학교 시절에 한 예배당에서 두 교회가 예배 드리는 일을 체험하였다. 김해의 도도 교회가 고신파였는데 현재 합동측 교회와 합동한 후 약 2년 후에 고신파가 명분없이 다시 분립하므로 많은 교회가 합동측에 그대로 있자는 교인들과 고신파로 다시 가자는 파로 나뉘어 큰 대란이 있었다. 그때에 도도 교회도 그런 현상이었다. 합동파는 영수, 집사 등 중직자 소수이었고, 분립파는 목사와 평신도들로 그 수가 더 많았다. 나는 그 교회 합동측 전도사로 들어가 10개월간 합동측 예배를 인도한 일이 있었고, 또 그 경력에 힘입어 제2영도 교회로 전임한 것이다. 제2영도 교회(지금 부영 교회)의 합동파는 김삼수 장로, 송양 장로 외 다수 교인이 있고, 고신파로의 분리측은 정길수 목사와 집사들 외 평신도로 그 수가 80대 120 정도였는데 그 교회에서 장로님들과 함께 2년쯤 시무하였다. 그때 나는 명분 없이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잘못으로 여겨져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정의감과 교회 시무 의욕에 잡혀 최초 교역을 하게 된 것이다. 예배당은 하나인데 교파와 교회는 둘이니 주일마다 예배드릴 때 또는 양측 교인들이 서로 만날 때 얼마나 불편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같으면 소수파가 따로 예배드리자고 할 것이나 그때는 다 가난한 집들뿐이니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겠는가? 이런 후유증을 방지하려면 고정된 예배당을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배의 자유와 예배 장소의 자유를 교인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물질 때문에 반목질시하고 물질을 나누지 못하여 사랑에 금이 가서야 되겠는가?

 

10. 자존심과 고집

 

내가 결혼 초기에 제2영도 교회에서 전도사일을 할 때 두 분 장로님을 모시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그 분들은 젊은 복음사역자를 천사처럼 섬기고 받들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 분들의 고마움에 대하여 잘 느끼지 못하였고, 다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김삼수 장로님은 원로급 장로님으로 그 분의 아드님 김상도 목사님이 평화 중·고등학교 교장님이고, 또 평화 교회목사님이셨으며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셨다. 또 송양 장로님은 연세대학교 부산 분교의 서무직에 계셨으니 다 훌륭한 분들이 아닌가? 김삼수 장로님은 나에게 할아버지 같았고, 송양 장로님은 아버지 같으셨다. 내가 왜 그 분들을 평생 모시지 못하였을까? 나의 고집 때문이었을까? 하나님의 섭리라고 봄이 좋을 것이다. 김삼수 장로님은 노회적으로 사람을 많이 만나는 분이다. 어떤 여전도사를 모시기로 섭외해 놓으셨는데 내가 친구 한동희 전도사(일찍 고인됨)로부터 그 여전도사는 신비성이 강한 분이라는 말을 듣고, 김장로님에게 그 사실을 말한 후 시일을 끄는 중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그 여전도사에게 소문으로 알려졌고, 그 여전도사는 초빙에 응한 약속을 취소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나는 김장로님으로부터 문책 비슷한 지적을 받았는데 그 일에 뒤이어 송장로님의 부인 김순빈 권찰이 나의 잘못이라고 또 추궁한 것이다. 나를 많이 섬기고 사랑해주던 장로 부인의 추궁을 받는 일로 교회 사임할 생각을 가졌으니 이 얼마나 가벼운 행동인가? 두 장로님은 “다시 생각하라” 하셨고, 여전도회 회장은 울면서 만류했지만 “한 번 결심한 것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자존심과 고집이 발동한 것이 사실 아닌가? 갈 곳도 없는데 시간은 가고 있으니 어찌할꼬. 그때 나는 신학을 마쳤고, 두 식구에 불과한 젊은 사역자란 조건을 크게 믿었었다. 과연 믿을 것을 믿은 것인가?

 

11. 김계희 목사님

 

내가 신학교 졸업반에 있을 때 김계희 전도사님이 편입해 오므로 동문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몸은 작으나 강하고 박력 있는 태도가 그의 특징인데 그로 인하여 나는 배우자 중매를 받았고, 그의 박력에 영향을 받아 혼인도 결성되었다. 김계희 목사님은 같은 시기에 졸업했으면서도 고의로 목사 되는 일을 천천히 늦추어 약 6~7년 후에 안수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박력 있는 목회가 결실을 거두어 경북 금릉군 용전 교회에서 청도읍 청도 중앙 교회로 전임하였고, 그때 나는 청도 동곡 교회에서 청도읍 서쪽 3km 정도에 위치한 구읍(현재 화양) 교회로 전임하였기 때문에 서로 가까운 사이에서 목회하였다. 그 후에 나는 대구로, 김 목사님은 부산으로 전임하였는데 김 목사님의 박력 있는 노력이 그의 목회를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줄로 안다. 내가 부산에서 신학을 졸업하고 부산 제2영도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나오게 되었을 때 편지 한 장의 소개를 받고(그때는 전화가 없었음) 상주 죽암 교회로 부임하여 시골의 외롭고 특수한 환경에서 목회하게 된 시발을 이루었다. 내가 결혼 대상을 만난 것과 목회지를 시골 골짜기로 간 것은 생애에 큰 영향을 준 두 가지 계기가 된 만큼 김계희 목사님을 추억하게 된다. 그의 고향은 약목이고, 그의 부친은 장로님으로 교역자 역할을 하시면서 내가 김 목사님보다 먼저 목사 됨을 인하여 어느 기차에 동승한 자리에서 “김 전도사(아들)를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도 있지만 김 목사와 내가 한 자리에 있으면 내가 그를 지도하려고 할 입장에 있지도 않다. 서로 가까운 친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12. 성직의 욕심

 

나의 어떤 친구는 신학을 같이 하고도 7년이나 늦게 목사된 분이 있다. 그는 연단을 더 받고 천천히 목사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나도 신학을 시작할 때부터 목사직이 좋다든지 빨리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고 절차에 따른 것이 목사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직임을 보화같은 상품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사람 앞에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이도 있다. 성경에도 사울이나 여러보암이나 웃시야 그리고 우상을 끌어들인 왕들까지 그 제사장의 직임이 탐이 나서 스스로 제사를 드린 일도 있고, 어떤 전도사는 목사만 하는 축도가 하고 싶어서 축도의 선포를 기도문으로 바꾸어 시행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절차와 합법을 떠나 목사 되는 이도 보았고, 경쟁하며 장로 되려는 이들도 보았으며 어떤 여집사는 교주 노릇처럼 자기 방에 강단을 놓고 병자를 안수하며 가운을 입고 권위를 입은 자인 듯 행세하는 이도 있었고, 또 무조건 목사 되어 강단에 서서 설교도 하고 교회를 다스려 보기를 원하여 조급하게 목사 되는 사람도 보았다. 결국 내가 살아온 길을 경험해 본즉 내가 30세에 목사가 되었으나 경험만 계속하고 50세에 목사가 되었다면 합당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이유는 50전은 물론 50이후에도 새롭게 깨닫는 것이 많았으니 아무래도 더 배우고 더 연단 받은 다음에 성직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성직을 명예적 직함으로 써 먹으려 하거나 성직에 걸맞는 자격이나 헌신 없이 욕심으로 성직을 가지려 한다면 큰 잘못일 것이다. 성직을 부실하게 감당하는 것보다 성직 없이 덕을 세운다면 하나님의 상급이 더 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직을 받되 오직 섭리적으로만 받고(섭리 안에서 노력함) 성직을 받았으면 참으로 지킬 것을 지키고 충성하며 덕을 세워야 할 것이다.

 

13. 인도하시는 하나님

 

제2영도 교회에서 사임할 것을 기정사실로 못 박았은즉 갈 곳을 찾게 되었다. “하나님 어느 곳이나 먼저 오라는 곳이면 주님의 인도로 알고 가겠습니다”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친구 김계희 전도사께 편지로 임지를 부탁한 후 즉시 연락이 오기를 경북 상주군에 교회가 있으니 무조건 이삿짐을 갖고 오라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이웃 교회 목사님은 거제도에 100여명 모이는 교회에서도 교역자를 구한즉 2,3주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 약속한대로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부산에서 경북 상주군 중동면 죽암리 죽암 교회로 가게 되었다. 부산에서 상주까지 기차로 가고 상주에서 50리쯤 버스로 가고 또 버스에서 내려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넌 후 또 10리쯤 걸어서 죽암동리에 갔는데 예배당이 보이지 않기로 물었더니 옆에 있는 열 평 정도의 흙벽돌 초가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예배당입니다”라는 것이다. 또 곁에 흙벽돌로 된 작은 스레트 지붕으로 된 집이 사택이라 하여 머물게 된 것이다. 교인들은 7,8 가정, 10여명이 모이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위기 직전에 인도하셨고, 또 나를 연단시키시기 위하여 작은 교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군 생활 3년과 신학 생활과 도시 교역자 생활까지 약 7년을 보내면서 시골의 외로움이나 불편에 대하여 일찍이 예측을 못하였는데 그런 사실을 처음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는 이틀에 한번씩 지나가는 우체부의 편지만 기다리게 되었다.

 

14. 유정남 집사님

 

내가 상주 죽암 교회에서 추억에 남도록 감동을 받게 한 분은 유정남 여집사님었다. 하나님은 내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나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여성도를 만나게 하셨다. 제2영도 교회의 김순빈 권찰(송양 장로님의 부인), 죽암 교회의 유정남 집사님, 빙계 교회의 김태임 집사님, 동곡 교회의 서갑선 집사님, 구읍 교회의 손순금 집사님, 남일 교회의 고정옥 집사님, 한남 교회의 주영애 권사님, 새 교회의 김삼님 권사님이시다.(앞에 있는 권찰, 집사는 다 옛날직분임) 그 중 가장 인격이 돋보인 분이 유정남 집사님과 고정옥 집사님이다. 그때 이 집사님은 40대 부인이신데 예절 바른 가문에서 엄격한 교훈을 받고 자랐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남편을 잃고 시부모님과 두 시동생과 2남 1녀의 자녀를 둔 시골의 넉넉지 않은 집의 가장이면서 교회를 으뜸가게 섬기는 부인이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불행한 사연이 있었으니 이는 두 시동생이 다 정신 이상자로 별거한 상태였고, 그의 시모님이 그 두 아들을 부양하는 일로 집에 계시지 않은즉 노인 시아버지와 자녀들과 농사에 임한 것이다. 얼마나 힘들고 구차하였겠는가? 또 시아버지는 홀로 계시면서 자기의 스트레스를 과부 며느리에게 퍼붓는 일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녀들 교육을 시키며 생활을 극복하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사셨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두 아들과 딸이 다 성숙하여 장로도 되고, 은행원도 되었으며 큰 교회 목사님을 사위로 두어 행복한 날을 보낸다고 들은 것이다. 그의 교양 있는 말을 나는 기억하지만 세상의 각박함을 탓하는 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작은 교회 큰 사랑

 

죽암 교회는 가족 교회 그리고 시골 인심 그대로였다. 그 교회는 본래 고신측이었는데 합동측과 합하였고, 그 당시 고신측의 특징은 정통 보수를 고수하는 면도 있지만 교역자를 천사처럼 대접하는 봉사를 일삼고 있었다. 성미쌀은 밥맛이 좋았고, 채소, 고구마, 옥수수, 밤, 감, 대추, 땅콩가지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으니 어찌 시골 교회의 매력을 느끼지 않겠는가? 산에 가서 버섯을 따고 집 앞 거름 더미에 심겨진 호박이 많은즉 버섯, 감자, 호박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이면 그 맛이 일품이다. 또 유집사님 댁의 대추나무는 나의 것이나 다름이 없고, 또 양의 젖은 나의 특수 양식이었다. 지금 쯤 은퇴할 나이에 그런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집사님 서너 가정이 돌아가면서 5일장마다 상주에 가서 고등어 같은 반찬을 사서 공급한다. 12월이 되면 교회에 남은 재정을 다 털어서 교역자에게 라디오나 만년필 등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신년도는 신년도 재정으로 새출발한다. 교회 가까운 곳에 유정남 집사님과 조 집사님이 나란히 거주하는데 주일 예배 후에 논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조 집사님이 빨래를 하고 돌아오자 유집사가 조집사에게 권면하기를 “남들이 다 보는 장소에서 주일날 빨래를 하면 전도사님이 보시고 얼마나 민망해 하시겠는가?”한즉 조집사님은 웃으면서 “잘못했다”고 시인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분위기인 것이다. 그 두 가정의 자녀들이 다 성공하였고, 나는 그 곳 경서 노회에서 강도사가 되었다.

 

16. 하혈치료

 

내가 상주 죽암 교회를 시무할 때는 강도사 고시 준비를 할 때인 줄 안다. 상주군 중동면 죽암리는 오지 중 오지요, 낙동강이 흐르는 주변으로 상주에서 낙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약 4~50리 간 후에 다시 넓적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서 10리쯤 시골길로 가는 곳이다. 그 곳에서 아내가 하혈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쉽게 멎지 않아서 상주읍 적십자 병원에 간즉 “소파수술을 해야 한다”하여 수술을 하였으나 낫지 않아서 또 간즉 “재차 수술을 하라”하여 하였지만 여전히 낫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구로 와서 아는 병원을 소개 받기 위하여 서문 교회 이성헌 목사님을 찾아가 부탁을 한즉 그때가 저녁 어두울 무렵인데 친절하게 택시를 타고 시내에 나오셔서 대구 백화점 근방에 있는 호산아 산부인과(권병일 박사. 당시 경북 의대 교수)로 안내해 주었다. 의사가 잠시 진단한 후에 에루고드와 또 한 가지 약을 처방해 주면서 자신이 반 수술 정도는 손을 보았다고 하였다. 주위에 약방이 있어서 청한즉 약을 지어주면서 하혈 치료의 약인 줄 알고 그런 증상에는 “황체호르몬 성분의 약을 겸하여 먹으면 좋다”고 권하는 것이었다. 모처럼 의사의 처방을 받았는데 함부로 다른 약을 겸하기가 어려워서 다시 병원에 가서 그 사유를 말한즉 “절대로 그 약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약을 먹은 후부터 하혈은 멎어졌다. 이때부터 나는 의사와 약 처방은 요기경속이라고 생각하였다.

 

17. 서동걸 목사님

 

서동걸 목사님은 나보다 16년이나 앞선 인생의 선배이다. 내가 부산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서울에서 공부하던 1년 선배님들이 졸업 수학 여행 차 부산에 왔을 때 비교적 연세가 높고 몸이 가냘픈 학생 한 분이 내 눈에 들어왔었다. 그 후 2년쯤 후에 내가 강도사 되었을 때 상주 죽암 교회를 시무하면서 그 이웃에 있는 오상 교회에 부흥회 참석차 간즉 바로 그 분이 부흥 강사로 오셨는데 그 이름이 서동걸 전도사였다. 내가 부산에 있다가 시골에 온 것을 아깝게 생각하면서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 듯 하더니 며칠 후에 그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 시무하는 이웃 교회로 이끌 듯 소개를 하여 의성 빙계 교회로 옮기게 하였는데 1년이 못 되어 그는 청도 쪽으로 시무지 교회를 옮겼다. 몇 달 후에 나를 또 찾아와서 자기 시무지 이웃 교회를 또 소개하면서 강하게 이끄는 바람에 목사 되자 또 청도 동곡 교회로 옮긴 것이다. 그 후에 두 사람이 다 대구시에 있는 교회를 시무하면서 자주 친교하였다. 서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부흥회를 수 백회 인도하였다. 큰 교회도 시무하였고, 또 작은 교회를 시작하여 크게 육성시킨 후 사위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셨다. 문제는 62세 때 사모님을 여의고 현재 나이 85세 되도록 혼자 지내시는데 지금도 나와 가장 친한 사이로 서로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농담도 많이 하며 지내는 중이다. 내가 조용한 환경에서 글만 쓰고 있을 때 서로 만나고 싶고 농담하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분은 이 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을 보시면서 퍽 칭찬해 주시고 또 부러워하신다. 그 분의 아들도 크게 출세한 상태(군인 대령)에 있고, 두 따님과 사위님도 큰 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시지만 홀로 됨으로 인한 외로움을 늘 말씀하신다. 나는 그분의 남은 여생과 그 자녀들에 대하여 축복하고 싶다. 그 분도 나와 내 자녀들에 대하여 많이 축복하신다. 나의 생활을 가장 자주 접하시는 분은 그 분 뿐이시다.

 

18.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죽암 교회 인근에 오상 교회가 있는데 그 곳에서 부흥회를 한다 하기로 낮 시간에 참석하여 부흥 강사 서동걸 전도사를 알게 되었다(서동걸 전도사는 나보다 1년 선배요, 16년 연장자이시며 지금 82세로 목회 은퇴 하시고 아드님 집에 계심). 그 분이 부흥회를 마치고 간 다음 끈질기게 자기 곁에 와서 같이 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 분은 의성군 가음면 가음 교회에 시무하면서 약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의성군 춘산면 빙계 교회에 나를 소개한 것이다. 그 교회는 장로님도 두 분 계씨고. 교인도 80명쯤 되었다. 끈질긴 권면도 있고, 조금 큰 교회로 나가는 의미 때문에 전임을 하였으니 죽암 교회에 대한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같으면 한 우물을 파야한다고 하였을지 모르나 그 당시에는 교역자가 큰 교회로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발전적 인도로 믿었기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또 교회와의 관계에서 양심에 거리낌을 갖지 않고 오래 시무하는 목사는 참으로 은사가 대단한 분이고 영웅으로 추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회 초기에는 큰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발전으로 여겼으니 어찌하랴.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 섭리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아나니아와 바나바가 바울의 길을 인도한 것처럼 서동걸 목사님은 그 후 또 한 번 나를 청도 동곡 교회로 인도하였다. 자신이 가음 교회를 떠나 청도 동산 교회를 시무하면서 또 그 곁에 있는 동곡 교회로 나를 소개하고 이끌어 인도한 것이다.

 

19. 이상훈 장로님

 

내일(2005. 3. 1.) 12시에 대구 범어동 그랜드 호텔에서 이상훈 장로 90수연 기념 잔치가 있다고 그 아들 이영재 장로의 초청을 받았고, 축사 부탁도 받았다. 다녀 오는 일정에도 신경이 쓰이지만 축사 또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음이 쓰인다. 지금부터 39년 전 내 나이 29~30세 때 의성 빙계 교회에 부임하여 이상훈 장로님과 그 가족을 알게 된 것인데 교역자는 나그네처럼 지나가지만 그런 중에서도 끈끈한 정이 계속 이어지고 친교와 사랑이 가는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10년 후 쯤 지나서 내가 대구 남일 교회를 시무할 때 이상훈 장로님도 나 있는 교회에 오셔서 한 교회 생활을 하셨고, 또 헤어져서 39년이 흘러간 것이다. 그 장로님은 나를 퍽 좋아하셨다. 나에게 무슨 좋은 것이 있었다고 그리하셨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이 장로님의 선친이 역시 90을 넘기신 후에 별세하시어 장례식을 주례한 일이 있었고, 그 다음 이 장로님의 맡아들 영재 장로의 결혼 주례를 하였으며 또 그 여동생 명희양의 결혼을 주례하였고, 또 이 장로님의 부인이신 김분금 집사가 별세하여 장례식 주례를 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뿐이랴. 이 장로님이 재혼하실 입장이 되어 그 재혼 주례도 하였으니 그렇게 따지면 상당한 인연이 있는 셈이다. 축사를 거론한다면 우선 다자한 집안임을 축하한다. 9남매의 자손들이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70수가 고희라는 말처럼 9남매도 쉽지 않은 축복이다. 믿음의 집안하고도 정통적 신앙을 좋아하였으니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효도하는 집안이다. 효도 없이 장수의 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장수하는 집안인즉 이 장로님은 100수를 넘기셔야 하고, 그 후손들도 장수하여야 할 것이다. 장수 번영과 믿음 활동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고 이웃으로부터도 큰 칭찬을 받아서 다음에 더 좋은 잔치가 있게 되기를 축사하는 바이다(이렇게 구상하고 글을 남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다시 읽었을 때 이 장로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20. 에큐메니칼과 N.A.E

 

부산에서의 신학교 및 최초 교역 기간에는 고신파의 분리로 인한 갈등 때문에 큰 고역을 치렀지만 목사 초기에는 에큐메니칼과 N.A.E.의 대결 때문에 재미없는 일이 많았다. N.A.E.는 “한국 복음주의 협회”로서 에큐메니칼 사상과 사역을 비판, 경계하는 단체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소속한 교단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지 않는가? 따라서 나도 그런 사상에 붙잡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빙계 교회의 수석 장로인 이종칠 장로님은 통합측 교단의 이종성 박사님과 가까운 친족이고, 그의 따님 교회도 통합측이었다. 이종칠 장로님이 에큐메니칼 선통을 적극적으로 행하여 교역자를 괴롭힌 일은 없으나 자주 “왜 에큐메니칼을 반대하는지 알 수 없다. 이종성 박사도 반대하지 않는데”하실 때는 퍽 마음이 아팠다. 또 그런 영향을 교인들이 안 받게 하기 위하여 자주 “에큐메니칼이 나쁘다”는 말을 설교로 발표할 때도 있으니 이것이 곧 인간 대립, 사상 대립, 믿음 대립이 아니고 무엇인가? 친구 최기채 목사님은 그의 시무하는 교회에서 교인의 소그룹을 해체시켰다는 말씀을 하셨다. 성도는 제발 파당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다”(고후 4:3)고 하시지 않았는가? 각자의 취향대로(은사대로) 믿되 예수님만 닮으면 되지 않겠는가? 누구와도 대립하지 말고 나 옳은 대로만 믿고 가르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에큐메니칼과 N.A.E.의 대립이 40년 지난 오늘에 와서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신학적 용공사상도 와해된 것 같다. 골치 아픈 기독교 사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21. 헌금 갈등

 

시골에서 광농을 하고 큰 과수원이 있으면 부자로 인정 받는다. 또 그런 분이 교회의 중직으로 있다면 교회의 살림을 많이 담당하게 된다. 그런 중에 어떤 교인은 말하기를 “부자 중직자가 헌금을 적게 한다”는 것이다. 교역자가 그 부자 중직자에게 “1년 소득이 퍽 많지요?”하고 물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과 한 알을 따기까지 24번 약을 친다하니 약값과 인건비를 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교인들은 그래도 그 집이 부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까? 부자 아닌 성도는 부자의 헌금액을 꼭 헤아려야 하나? 또 교인들이 헌금을 앞세워 비판을 하여야 하나? 또 교회를 물질 중심으로만 섬겨야 하는가? 성도가 신령한 은혜를 추구하고 이웃을 비판하지 않으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힘쓴다면 다른 이의 신앙생활이나 헌금을 놓고 갈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는 그고, 나는 나라는 정신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22. 이혼하고 세례 받겠다

 

김임순이란 젊은 부인은 남편과 두 남매를 두고 사는데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그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기가 있었다. 어떤 성도가 말하기를 김임순씨의 남편은 다른 곳에 본 부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첩에게 무조건 세례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사실을 김임순씨에게 알린즉 그도 깜짝 놀라면서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이혼을 하고라도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놀랬다. 세례를 베푸는 일로 단란한 가정을 가르게 되었으니 어찌하랴. 그리하여 우선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선 것이다. 멀지 않은 동리에 그 본처가 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리에 간즉 그 곳에도 교회가 있고, 내가 아는 분이 시무를 하고 있었다. 그 분에게 그 본처의 소문을 들은즉 얼마 전에 어떤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당하였는지 지금은 다시 친정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본 남편과 헤어진 후에 “확실히 시집을 한 번 갔었느냐?”고 한즉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집에 와서 “다 알아본즉 세례를 받는데 문제가 없다”하고 세례를 베푼 일이 있었다. 성도의 신분을 살피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혼을 하고라도 세례를 받겠다”는 그 믿음이 놀랍지 아니한가?

 

23. 목사된 이야기

 

빙계 교회에 강도사로 부임하여 몇 달 후에 목사가 되었다. 경중 노회는 경상북도 중앙 지역으로 교통 불편한 곳이 많았다. 노회 하는 앞 주일에 교인들에게 광고하기를 “이번 노회에 가서 목사 고시에 합격하면 목사 안수를 받는데 만일 합격이 안 되면 목사가 안 될 수도 있은즉 기도나 해주십시오”하고 버스를 세 번쯤 갈아타고 노회 장소인 대사 교회에 갔다. 같은 동창 권기동씨와 이찬구씨도 나처럼 목사 후보생이었다. 세 사람이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를 하고 다음 날 시험을 쳤다. 이웃에서 자주 만나는 고시 부원 목사님은(당시 탑리 교회 정연발 목사님) 시험을 잘 쳐야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압감도 주었다. 실력 발휘를 잘한 것 같지 않았으나 다 합격을 시킨다는 말을 듣고 내 생애에 마지막 시험을 쳤다는 느낌을 갖고 안도하였다. 의성읍 교회 박명수 목사님(서울 청량리 제일 교회, 증경 총회장)의 안수로 세 사람이 함께 목사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 섬기는 교회에서 축하하러 온 교인은 세 사람 모두에게 한 사람도 없었다. 무슨 임직패나 가운이나 기념품, 꽃다발 같은 것은 더욱 없었다. 강도사가 목사로만 호칭되는 것이다. 집에 온즉 교인들은 다 기뻐하였고, 목사님이란 호칭을 처음 들을 때 명예롭기도 하였지만 무거운 사명감을 느꼈다. 그때가 67년 9월 17일이었다.

 

24. 박순대 목사님

 

박순대 목사님은 지금도 오산 제일 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면서 수원 신학교와 서수원 노회에서 많은 일을 하시는 줄로 안다. 나는 이 목사님의 연하장을 받으면 그 서신을 쉽게 없애지 못하며 늘 기도의 대상이 되어 있는 목사님이다. 내가 30에 목사되어 두 번째로 청도 동곡 교회에 갔을 때 박 목사님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너무 준수한 학생이고, 그 아버님이 점잖으신 동리 유지이시며 그의 어머니는 교회의 직분자였다. 박 목사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교육 대학으로 진학하려는 것을 목사되도록 신학을 하게 하라고 권하였는데 그것이 어려운 여건에서 성취되었다. 그때 총신은 대학인가가 나올 때였고, 신학교의 학제가 늘어나서 총신대 4년, 신학부 3년 합하여 7년을 배워야 하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 분이 총신 재학 중에 복막염을 앓아서 큰 고생을 하고 휴학한 일이 있었으며 또 신학 중에 영장이 나와서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박순대 전도사를 2군 사령부 군수 부대로 배치되도록 아는 분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고, 또 그 다음에는 아는 군목(이화천 목사님)의 군종 사병으로 있도록 소개한 일이 있었으며 신학을 마쳤을 때 경산의 가일 교회로 소개한 일이 있고, 또 혼인 중매를 하게 되어 현재의 사모님과 부부되는 인연을 맺어주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형님 같고 그가 동생 같은 느낌도 들었으며 어렵게 목사된 과정이 나와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다. 좋은 목회를 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건강에 쫓겨 힘들어 보이는 여윈 몸을 보면서 늘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바른 목회자 되려고 애쓰는 중에 있으니 결국은 승리하고 보람을 느낄 것이다.

 

25. 미움과 거부감

 

성도에게 원수를 사랑할 의지가 없거나 화목을 힘쓰려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신앙의 미성숙이다. 똥이나 시체 곁에서도 음식을 먹을 만한 비위가 있어야 한다. 한 장로가 다른 장로를 지적하기를 “그는 놀고 먹는다”는 것이다. 장로가 그래서 되느냐?고 한다. 또 그 상대 장로의 입장을 보면 늘 성경을 꼼꼼히 읽으면서 아무 장로는 성경에 무식하고 성수 주일도 잘 안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자존심, 그리고 미움과 대결로 크게 곪아 있고, 또 쌍방의 편을 서로 두둔하는 세력도 있으니 이 단체가 언제 사랑으로 화목할 것인가? 40년쯤 지난즉 그들은 다 세상에 없다.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누구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한다. 이 뜻은 교인들의 지지가 적다는 뜻인데 뚜렷한 죄가 없이는 처리하기 힘든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 목사 1년직으로 시무하는 목사가 다수의 미움 받는 직분자를 두둔하면 그 목사도 배척한다고 은근히 협박을 한다. 한번은 그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장로의 가정이 이웃과의 다툼으로 소란스런 일이 있었는데 교인들은 그 사건을 이유로 아주 끊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 기도에는 아멘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는 끊길 죄도 아니고, 권계에 그칠 정도이다. 이를 어찌할꼬. 또 문제의 당사자는 자신의 죄가 면직감이 아닌 줄 알고, 자진 휴직은 할 수 없으니 재판을 해달라는 것이요, 또 반대편은 재판으로 면직을 시켜야 목사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환경에서 법통이라는 싹이 트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비공식적 휴직으로 3개월쯤 지낸 후에 갈등을 해소하였으니 이런 일을 없게 할 수는 없을까? 문제의 장로가 다수에 밀려 고전할 때 내가 다수 교인의 뜻에 편승한다면 얼마든지 그의 위치를 흔들 수 있었겠지만 나는 공의와 정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다수 교인의 배척 위기를 받으면서도 그의 입장을 세워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청빙 투표를 할 때 나를 시무 목사로 계속 영입하면 반드시 다수 교인의 뜻에 따라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제거할 것으로 기우하여 청빙 투표에 부표를 하였으니 그런 것을 보고 배신 또는 뒤통수침을 받는 일이라고 한다.

 

26. 예비군 훈련과 경목

 

30 초반에 예비군 훈련에 동원을 받는데 성직자로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경목일을 하게 되었다. 경목을 하게 되면 그것을 구실로 예비군 동원에서는 합법적으로 제외된다고 하였다. 경목이면 청도 경찰서에 가서 매주 월요일 아침 9시 조회 때 설교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동곡에서 청도까지는 거리 관계로 아침 9시에 갈 수 없어 고민하던 차 청도읍 가까운 화양 교회에서 청빙이 왔기로 경목 사역차 화양 교회로 전임하였다. 경목은 경찰 국장의 임명을 받기 때문에 지역의 서장들도 복종하여야 하지만 믿지 않는 정OO 서장, 옥OO 서장은 설교에 참여하지 않고 부하들만 듣게 하였다. 약 5~60명쯤 의자에 앉아 듣고 나는 단상에서 10분쯤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에 조기제 서장이 부임하였는데 그 분은 천주교 신자로 복음사역자를 대하는 태도가 각별하였다. 그리고 조회석에 먼저 와서 설교자를 기다리니 다른 부하들이 어찌 그 자리에 나오지 않겠는가? 그리고 설교를 할 때 앉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하들도 앉지 못하고 서서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앉아서 듣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많은 충격과 놀라움을 느꼈다. 참으로 보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것이 많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이 없이 어떻게 설교를 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쯤 경목을 시킨다면 좋은 설교를 할 것 같다.

 

27. 곡식 속의 돈 봉투

 

서갑선 집사님. 그는 90여세로 지금도 생존하시다 한다. 동곡 교회의 수석 장로님이셨던 김종수 장로님의 후처로 키우는 딸을 데리고 들어오셔서 믿음과 봉사에 큰 본을 보이시므로 집안에서는 물론 이웃의 칭송을 받으셨다. 김종수 장로님의 큰 자부(고 김상건 목사의 부인)께서 자기의 시무하시던 교회의 덕 있는 여집사님을 서모시어머님으로 소개하여 모신 것이다. 그 서 집사님은 가끔 목사집에 찹쌀이나 잡곡, 그리고 과일을 보내오셨다. 찹쌀 자루 속에서 돈 봉투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랬다. “고기를 사 잡수시라”는 정도의 돈을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찹쌀, 잡곡, 그리고 또 돈 봉투까지 은밀하게 주시는 봉사는 드물지 않은가? 그 집사님의 인상은 항상 눈 앞에 있다. 그 당시 조기연 권사님은 김원조 장로님의 모친이신데 늘 새벽 기도에 일찍 나오셔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되어 이 글에 남기는 것이다. 나는 동곡 교회에서 3년쯤 시무하며 예배당을 짓고 나왔다.

 

28. 나를 벌하소서

 

청도군 금천면 박곡 교회는 면소재지에서 밀양 쪽으로 5km쯤 떨어진 시골 교회이다. 박정식 장로님이 시무하셨는데 교회를 위하여 크게 충성하시는 분이다. 한 가지 안 된 것은 겉으로 알아볼 만한 음성 OO 환자이다. 내가 당회장으로 그 교회에 순회를 가면 그 장로님과 함께 자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음식이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계란이나 과일 같은 것을 손으로 집어 나에게 권한다. 나는 감사히 받아먹었다. 요즈음은 결혼을 늦게 하는 경향이 있고, 노총각, 노처녀가 많은데 40년 전이라 하여 중매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만혼자는 많지 않았다. 교역자가 없던 시기에 순회를 간즉 집사님 딸의 혼사 건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목사는 “믿는자 끼리 정혼을 했느냐?”하는 말부터 묻는다. 그런데 교회 출석은 하나 세례는 받지 않았고, 혼인 날짜를 정하였은즉 “주례를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관례로서는 신랑, 신부가 다 세례를 받아야만 목사가 주례를 했기 때문에 약혼을 하고도 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서 혼인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한 편이 학습만 받았어도 해 주었다. 지금은 어떤가? 교회마다 다르지만 믿음의 결심이나 시작만 보여도 나는 주례를 해준다. 결혼식을 개신교에서는 성례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의 결심 서약으로 혼인을 승낙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내가 거리끼기도 하고 또 문제를 삼아 뜯길 입장도 있고 하여 “못 하겠다”한즉 혼일 날짜를 연기할 입장도 못 되는지라 박 장로님 말씀이 목사님이 정 그러시다면 “내가 주례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때 나는 “누가 하든지 거리끼는 것을 하면 죄가 되지요”한즉 그러면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례를 할 수밖에 없으니 주례한 다음에 나를 벌하소서”하여 그 혼인식을 지낸 다음에 그 장로님에게 6개월간 시무 정지 처분을 하여 당회록에 기록한 사실이 있었다.

 

29. 세 가지 사건

 

1) 박곡 교회는 작은 동리의 교회인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으로 두 교회로 나뉘어졌다. 나누어진지 몇 년 후에 양 교회가 합동을 하고 친목을 한다 하여 우리 측 교회의 당회장 자격으로 순회를 갔는데 식사를 같이 하고 합동 조항을 발표하기 전에 상대방의 비밀이 누설된 것이다. 합동할 때 합동측 교역자를 모시고 중립에 있다가 1년 후에 교파 투표를 하기로 한 것인데 상대방에서는 교파 투표를 할 때 반드시 통합측으로 간다는 서약을 하고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합동 운동을 무산시킨 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계략적으로 하여서야 되겠는가?

2) 또 한 번은 이웃 방지 교회 당회장으로서 그 교회의 아가씨의 혼인 주례를 맡고 갔는데 신랑의 교회가 통합측이고, 신랑의 삼촌도 목사님이시므로 30 초반의 목사인 내가 50 전후의 두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총회에서는 통합측 교역자를 강단에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50대 목사님 두 분에게 인사하고 “총회법 때문에 결혼식 순서에 기도나 축도도 부탁 못 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였더니 설교는 하려고 하지 않지만 기도도 못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뜻을 표현하는 것인즉 설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신랑측 교회의 김 목사님이 대노하면서 “나는 지난 주일에 천주교 신부와 강단 교류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어찌 사랑이냐?”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또 말하기를 “칼빈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면 통곡하실 것입니다”하여 많은 청년들과 하객들 앞에서 떠들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피로연에서 다 한 상에 앉았는데 김 목사님이 “각자 기도하고 먹읍시다”하여 아무 말도 없이 먹고 헤어졌다.

3) 같은 교회의 다른 아가씨를 주례하는 중 설교를 하려는 무렵에 신부가 어지러움증을 느끼면서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한다. 그리하여 나는 설교를 줄이고 속히 예식을 끝내 주었는데 한 주간쯤 후에 그 부부는 자동차의 빙판 추락 사고로 신혼 중에 사망하였으니 참으로 안된 일이었다.

 

30. 김전 교회와 동산 기도원

 

내가 동곡 교회를 시무하는 기간에 주위에 있는(박곡, 방지, 신원, 신촌, 동산, 중남, 김전 등) 여러 교회의 당회장직을 겸임하였었다. 김전 교회의 박동석 전도사님이 정신 이상이 있는 청년과 일을 하시다가 그 청년이 괭이쇠로 박 전도사의 뒷머리를 쳐서 죽게 한 것이다. 참으로 안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죽음에 순교적 의미도 없지 않은 듯 하다. 정신병자를 살피려하다가 죽은 것이 아닌가? 그때에 그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그 시신에 대한 무서운 감정이 생겨서 고민한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시체를 무서워하였을까? 그 후 김전 교회는 두 남 집사가 주동이 되어 교회를 섬겼는데 그 분들은 다 목사가 되어 목회에 임하고 있다. 그때에 그 분들은 이웃에 있는 동산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였고, 나는 동산 기도원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계시를 받는다”는 권사님이 그 기도원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권사님은 기도를 받는 사람에게 “너는 속히 이사를 가야 죽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산 기도원의 집회에 가도록 광고하는 일을 하지 않은즉 기도원장 하태호 집사와 김전 교회의 식구들이 합작하여 나를 모해하는 글을 찍어 노회에 돌린 것이다. “녹음 설교를 듣게 한다, 기도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식으로 모해한 것이다. 그 후에 하태호 집사와 화해하였다. 하태호 집사는 경북에서 유력한 장로로 손꼽힐 줄 안다. 헌신적 사역자이기도 하니까. 다 지나고 보면 웃어넘길 일들인데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31. 현명길 목사님

 

내가 30대 초반 청도 동곡 교회를 시무할 때 현 목사님은 청도 중앙 교회를 시무하셨는데 현 목사님은 고향이 평북이고, 나는 경기도인즉 우선 경상도 사투리를 안 쓰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고, 또 부산의 고신을 나오신 분이라 보수적 신앙도 통하는 면이 있어서인지 현 목사님은 나를 많이 친근히 여겨주셨다(나는 고신출신은 아니지만 전신 고신계에서 신학을 한셈). 현 목사님이 청도에서 대구 태평 교회로 전임하셨고, 나는 청도 화양 교회를 시무하였는데 대구 남일 교회에 교역자가 없게 되자 같은 황동 노회 소속이므로 나를 그 교회에 전임되도록 소개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아들이 초등학교 갈 무렵에 지방에서 도시로 가게 되었고, 14년을 대구에 머물면서 6남매 교육 여건에 큰 도움을 받았다. 대구에 같이 시무하면서 현 목사님은 꼭 형님 같은 분으로 나를 사랑하셨고, 그 후에 현 목사님은 먼저 서울로 올라오셨으며 나는 몇 년 후에 성남으로 와서 가끔 만나 뵙게 되었다. 현 목사님이 지금은 은퇴하여 김포에 거주하시는 것을 알고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급히 방문한 때문에 “식사 대접을 못했다” 하시면서 식사값을 주신다 하여 애교와 친교로 받았는데 “3만원쯤 주셨으면 차후에 나도 대접하면 되겠지” 하였는데 10만원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현 목사님을 위하여 빚 갚는 대접을 톡톡히 하여야 하겠다”는 사명을 느끼고 있다. 언제쯤 강화도에 모시고 가서 바람이나 쏘이시게 하고 원하는 음식을 접대할 생각이다.

 

32. 형제의 대립

 

화양(구읍)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3년쯤 시무하면서 두 가지 일로 괴로움을 당하였다. 한 가지는 형제 장로의 대립이고, 또 한 가지는 동생 장로가 나를 초빙한 것 때문에 형 되는 장로가 나를 배척한 것이다. 동생 장로는 교회를 섬기면서 경주 쪽에 가서 전도사 일을 하였으나 반드시 수요일 저녁은 본 교회에 오고 교회의 봉사나 정치를 형보다 더 관심 있게 한다. 그 분이 나를 설득하여 초빙하였고, 공동 의회도 잘 통과했지만 한 두 표의 반대는 그 형님의 표였다. 두 장로는 서로가 상대방의 뜻대로 하면 교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OO놈이 모셔온 목사님이기 때문에 자기는 반대한다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당회와 제직회 뜻에 따라 예배당을 짓는데 건축의 진전이 있을 때마다 공사를 지연시켰다. 그러나 청부업자가 공사비를 달라고 독촉할 때는 그것은 목사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계약은 목사와 한 것이 사실이다. 목사가 청부업자 장로로부터 심하게 독촉 받는 사실을 목격한 손순금 집사가 너무 안타깝게 여겨 2,3차 돈을 빌려 대납한 일도 있었다. 그때 그 형제간의 가족은 약간 겸연쩍은 입장은 보였으나 그런대로 화목하였고, 단지 교회의 일로만 반대하거나 훼방하였으니 그런 마귀의 역사도 있는가? 내가 나온 후 그는 교회를 분리하였다. 그리고 그 형제는 두 분 다 오래 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33. 박홍선 사모님

 

내가 청도 화양(구읍) 교회를 시무할 때 여전도사가 필요하여 친구 김계희 목사님께 부탁한즉 25세된 박홍선 전도사를 보내주었다. 박홍선 전도사는 김천 출신이기 때문에 김 목사님과도 아는 사이가 된 것인데 서울 여자 신학교를 나온 후 서울에서 시무 교회로 부임할 때는 까다로운 절차가 많은 것을 알았는데 전화 한 통화로 “보내라”하여 필수품을 들고 처음 초빙을 받아 온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를 초빙한 나의 목회 방식이 단순하고 순진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사명을 가진 분이 잘 하면 좋고 못하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누구의 신분이나 이력을 잘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대구 남일 교회로 전임하였고, 또 얼마 안 되어 박 전도사를 대구 성지 교회로 인도해 주었는데 박 전도사는 얼마 후에 또 대구 서문 교회로 전임하였다. 내가 최인열 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어느 기도처에 기도하러 온 신학생 전도사가 배우자를 구한다 하여 박 전도사를 소개하였는데 잘 성혼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성남으로 왔고, 박 전도사의 부군 권진희 전도사는 목사가 되어 서울 목동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횃불 교회로 큰 교회를 이루었다. 박홍선 사모는 나에게 퍽 친근하였으며 내가 교회 행정에 법을 많이 아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자주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하였다. 박 사모는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후 그 채권이 부동산과 관련하여 복잡한 법률 문제의 늪에 빠져 있었는데 나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소송 비용 등을 염출하려고 애를 쓰므로 나도 그 일을 돕기 위하여 비축한 금액을 차용조로 투자해 주었다. 그런 연고로 법률 문제는 다 해결되었는데 부동산이 현금화 되는 일이 어려워서 벌써 7년째 끌고 있는 실정이다. 잘 해결될 줄 믿는다. 서로가 손해 보이지 않으려는 신념을 갖고 있으니까. 따라서 그 일과 권 목사님의 목회를 위하여 늘 기도한다. 2006. 3. 13.

 

34. 노회장 된 이야기

 

내가 화양 교회를 시무할 즈음에 경상비 11조로 상납금 내는 제도가 시행되었고, 또 나는 법통 정신에 따라 경제가 어렵지만 십일조 상납금을 냈다. 그리고 노회에 가면 “의무 이행하고 특권 행사 함이 옳다”는 말도 하였다. 그런데 상납금 낼 재정이 어려워지자 교역자 수양회비로 예산된 돈을 받아 상납금을 내고 제주도 수양 가는 일을 포기하였으니 그만큼 노회에 성의를 표한 셈이다. 하나님이 이 열심을 보신 듯 하고, 또 한 가지는 내가 경중 노회에서 목사 되어 경청 노회로 온 후 노회에 가서 유숙하면서 선임자 김성렬 목사님(대전 문화동 교회 장기 시무하심)의 회록 정리 하는 일을 도운 일이 있었다. 그때에 김 목사님은 “지 목사가 회록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을 한 후 그 다음해 임원 선거 때 나를 선전하여 회록 서기가 되었다. 내가 군 생활할 때 법무부에 있으면서 기소장, 예심조서, 공판조서 등 약 3000여건을 기록한 경력이 있으므로 무슨 사연이나 육하원칙대로 쓰는데는 많이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 봄 노회 때 임원개선을 하게 되었는데 노회장은 물러나고 부노회장은 경북 노회로 교회를 옮기는 상태이며 서기는 신만선 장로가 하였고, 부서기는 어떤 목사님이며 그 다음이 회록 서기인 나였다. 이런 상태에서 노회장을 뽑으려니까 남아 있는 임원에서 선출을 하다보니 나에게 많은 표가 온 것이다. 그래서 1967년도에 경청 노회장이 되니 총회 일로 모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서기가 온 줄 알고 노회장님은 무슨 유고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고, 어떤 노인 목사님은 30 중반에 노회장 한 일은 한국 교회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격려해주신 일도 있었다.

 

35. 권봉태 목사님

 

내가 대구 남일 교회를 부임하고 그 교회가 황동 노회 소속이 되므로 황동 노회를 지도하시는 선배님이신 권봉태 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권 목사님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지금은 방화동에 있음) 금화 제일 교회를 시무하시면서 피난민(황해도 동쪽 지역의 노회)으로 시작된 황동 노회를 키우시려고 많은 애를 쓰셨는데 나도 그 뜻에 협력한 즉 나를 많이 인정하시고 사랑한 줄 알고 있다. 대구에 있으면서 1년에 봄, 가을로 열리는 노회 회집차 서울에 오면 형님 같은 권 목사님 댁에 가서 유숙을 하고, 다음 날 아침을 대접 받고 또 노회에 가곤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서울 쪽으로 임지를 옮기고 싶기는 하였지만 스스로 나설 입장이 아니어서 때를 기다리던 차 권 목사님의 강권적 소개로 한남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두어 분은 내가 한남 교회에 부임하는 일을 부정적으로(건강 이유) 여겨서 소극적으로 대한 일도 있었지만 장로들의 뜻을 규합하여 잘 오게 된 것이다. 여하튼 권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늘 기억하여야 할 줄로 안다. 2006년 봄인가? 권 목사님이 별세하셨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하여 알고 자주 문안 못한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 기회 있으면 그 사모님이라도 찾아뵐 생각이다. 미안한 마음 이를데 없어 자주 그 유가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도 한다.

 

36. 원승길 목사님

 

나는 교만과 비판적 성격을 꺾지 못한 상태에서 누구와 친교를 하면 상대방의 장점도 발견하지만 약점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원승길 목사님은 강한 사명 정신이 뛰어나서 약점을 잡기 전에 존경심이 가곤 하였다. 진리이면 굽히지 않고 미는 성격, 세례요한처럼 강단에서 때리는 성격, 또 평상시에는 아주 겸손한 분으로 변하는 성격이 좋았다. 그 분은 빚을 얻어 예배당 짖는 성격이 아니셨고, “교세는 300명 정도면 좋다”고 하셨다. 내가 원 목사님을 존경하는 만큼 원 목사님도 나를 좋아하신 줄 안다. 배에 통증이 오고 복막염이 터지는데도 기도로 이기려고 하시다가 결국은 몸과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그 목사님의 발인 예배 때에 좋은 목사님이 가신 것이 너무 서운하여 많이 운 기억이 난다. 그 분은 돌아가실 날을 몇 일 앞두고 “자신이 떠나면 봉천 교회 후임자는 OOO가 적임자인즉 꼭 그리하라”고 어느 친구에게 뜻을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곧 나인 것이다. 이제 와서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려니까 그때 그 말을 전하신 목사님은 생각나지 않는다. 내 생애에 가장 순진하시고 또 말씀에 강력하시며 사명에 투철하신 분은 그 분 뿐이었다. 너무 강하여 장로 전원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장로들을 꺾고 교인들과 하나 되어 큰 교회를 이룩하셨다.

 

37. 오우용 목사님

 

내가 오우용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30대 중반쯤 남일 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의 부인인 김지은 집사가 교인(집사)으로 출석하고 봉사할 때이다. 그 분은 그 당시 원양어선에 나갔다가 귀환한 후 부인의 거처를 알기 위해 나의 사택에 찾아 왔었다. 그 후에 오우용씨는 중개소 사업을 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2년쯤 입원해 있으면서 한쪽 다리가 불구 되었고, 나중에 활동하게 되었을 때 신학을 한 후 목사가 되어 필리핀 선교사로 또 교회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영어를 잘 구상하므로 외국인 상대로 선교나 설교에 능한 줄 안다. 그 사모 김지은씨는 너무 겸손한 중 교역자를 섬기는데 뛰어난 관계로 내가 많은 섬김을 받았다. 교역자를 섬기므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신앙이니 어찌 기도에 잊을 수 있겠는가? 아들 오성동은 내가 두 살쯤부터 잘 알고 그가 다 성장하도록(현재 30세 넘었음) 위하여 기도하고 살핀 관계이다. 김지은 사모는 어릴 때부터 척추의 이상으로 그 몸이 일반인처럼 성장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오우용 목사님은 총각 때부터 그 처녀를 돕는 배필로 자청하여 결혼한 상태인데 후에는 오 목사님도 다리에 불구를 갖다 보니 두 분이 다 불구자가 된 것이다. 이런 사연 속에서 오우용 목사는 성자 같은 인물이다. 아들 오성동은 항공 대학을 나온 후 유명한 회사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부모에게 효도한다. 오성동에게 좋은 배필이 만나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참으로 잊을 수 없게 결속된 가정이다. 남일 교회의 성도로 고정옥 권사님과 함께 수도권에 살면서 지금도 자주 왕래하고 전화를 한다.

 

38. 최용만 장로님

 

내가 40세쯤 남일 교회에서 시무할 때 한 청년이 교회에 등록을 하여 교역자와 교인으로 만남이 되었는데 이 청년은 인쇄 기술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황동 노회 소속 교회를 다니다가 대구로 오게 되면서 같은 황동 노회 소속 교회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대단히 반가웠고, 또 교회를 섬기는 열심히 대단하였다. 대구에 있을 때 최 집사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이 있는데 하나는 인쇄소에 있으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원고노트를 한 짐을 찍어 차로 실어 오므로 지금까지 쓰고도 남게 된 일이며 또 한 자기는 주일학교 부장으로 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유천 강가에 가서 수양회를 할 때 설거지를 돕고 나물을 다듬으며 물가에 나가서 아이들을 감시하고 또 예배를 지도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만능적 재능과 봉사와 열심을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마산으로 이사 간 후 그 곳에서 결혼식을 하여 가게 된 일인데 이렇게 나를 좋아한 일에 대하여 고맙고 지금도 그 우정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한남 교회로 왔을 때 그는 서울에 거주하다가 교회를 옮길 입장이 되자 또 내가 시무하는 한남 교회로 와서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충성한다. 그리고 내가 책을 출판하려고 할 대 최 집사님이 인쇄소를 하는 덕분에 여러 권의 책을 찍어 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요청하려고 한다.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한지 9년이 넘었는데도 자주 만나 음식 먹을 기회를 주고, 또 최규호 장로님과도 함께 만남의 기회를 갖는다 그의 아들 충효와 충현이 그리고 최규호 장로님의 아들 윤일이의 앞길에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2005. 3. 11.

 

39. 전이석 장로님

 

남일 교회 전이석 장로님은 60쯤 되어 교회에 나오셨다. 그 분은 평안도에서 피난 나오셔서 오랫동안 미군 부대에 계시다가 퇴직하셨는데 연세가 높아지자 고향의 부모님과 교회 생활을 회고하셨다. 부친 장로님이 고향 교회를 섬기실 때 매주일 자신의 집에서 밥 먹는 식구가 5~60명이었고, 봉사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셨는데 한 번은 예배당을 짓고 기와를 올리는데 기와가 한 평쯤 부족하였다고 한다. 쉽게 구입할 수도 없고, 일을 마쳐야 할 입장이므로 부친이 인부들을 시켜서 자신의 집 한 모퉁이의 기와를 벗겨 교회 지붕을 완성하고 자기 집에는 영으로 그 자리를 때웠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하여 어렸기 때문에 별 의미를 못 느꼈으나 나중에 생각한즉 부친 장로님의 교회에 대한 충성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그 장로님의 아들로 교회를 멀리함이 불효임을 알고 믿음과 직분이라도 계승하여 앞서 가신 부친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겠다는 각오로 교회에 나오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분은 꼭 장로가 되셔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5년 계속 새벽 기도회를 빠지지 않으셨다. 기회가 되어 장로 피택이 되었는데 노회고시를 할 무렵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서울에 가실 수 없게 되자 고시 부원을 대구로 초청하여 시험을 치는 번거로움을 가졌고, 또 임직 시기에 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질병이 생겨서 역시 시험이 되었지만 겨우 퇴원하여 임직을 받으셨다. 그 후 계속 충성을 잘 하시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셨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40. 맡겼으면 불평하지 말자

 

대부분 교회나 기관에서 어떤 책임을 맡길 때는 1년씩 맡기거나 특정 사역을 맡기는 것이 상례이다. 대부분 맡은 자들은 자기의 생각하는 범위와 노하우에 따라 일하게 되고, 맡은 자의 은사에 따라 특징이 나타난다. 교역자가 바뀌는 교회에서는 전임자의 은사에 따른 교훈을 받다가 후임자의 은사에 따른 교훈을 받으면 다양성 있는 은사를 보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마음도 넓히고 포용성과 적응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에 두 장로가 있었는데 다 건축가이다. 교육관을 수리하게 되자 늘 교회의 건축, 수리 문제를 주장하던 장로가 다른 장로에게 “당신도 건축을 하는 사람인즉 어떻게 어떻게 수리하라” 하였는데 그 수리하는 방법과 재료를 쓰는 문제에서 큰 차이가 생기니 수리비가 갑절이나 더 들었다. 이때에 맡긴 장로는 “비싸게 수리했다”고 지적을 하였고, 수리한 장로는 수리 내역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 다투고 싸운 것이다. 맡긴 장로는 절약하려고 한 것인즉 잘 하였고, 맡은 장로는 좋은 재료로 일을 더 잘 하였은즉 잘 한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지켜 보면서 일단 맡겼으면 맡은 자가 한대로 칭찬하고 그것이 건설적이 못 되었으면 다음에 맡기지 않으면 될 것이다. 그런 것으로 다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라의 정치도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을까?

 

41. 감당할 자에게 시험을 주심

 

1) 남일 교회 안정희 집사는 그 남편이 정신 이상으로 얼마나 큰 고역을 당하였는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교역자가 자주 심방을 가도 오래 있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그의 생활이 어떠하였겠는가? 한 번은 아이들이 벗은 채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수십 년 그 일을 감당하였는데 지금은 크게 형통하였다. 아무리 살펴도 안정희 집사가 아니면 그 일을 감당할 자가 없었을 것이다.

2) 신경해 집사는 다섯 딸을 가진 직업 군인에게 재혼 하였다. 각오가 대단하다. 재혼하자마자 아들을 생산하였는데 그 애기가 출생 직후부터 목에 밤톨만한 혹이 있었다. 크게 실의에 빠졌었는데 심방 가서 기도한 후에 그 혹이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께 크게 감사드린 줄 안다. 15년쯤 후에 만난즉 믿음과 직분이 크게 발전하였고, 모든 피로에서 벗어난 분 같았으며 나에게 넉넉한 차비도 주어서 감사히 생각한다.

3) 고정옥 권사님은 특별한 인물이다. 술로 세상을 보내는 영감님께 변함없는 열녀였고, 자녀들에게 변함없는 효도를 권하였으며 어려운 생활을 작고 약한 몸으로 장사를 하여 극복하고 1남 4녀의 자녀들을 다 교사, 교수로 육성시켰다. 특기할 것은 내가 그 교회를 나온 지 15년이 넘었는데도 나에게 명절 인사, 생일 인사, 대소사간의 인사를 끊이지 않는다.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녀들까지 하도록 권장하니 그런 분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아드님이 홍종인 서울대 교수인데 현재는 미국 콜롬비아 대학 초빙 교수로 가서 당분간 그 곳에 머문다고 한다. 나는 그 분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42. 어떤 장로님에 대한 아쉬움

 

내가 남일 교회를 시무할 때 70세 넘은 장로님이 등록하셨다. 사연을 들은즉 통합측 교회에서 은퇴하신 후 교회가 멀게 되자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여 나오신 것이다. 그 분은 몸은 작으나 경마를 즐기셨고, 아파트 건립 초기에 3,40동의 아파트를 건축하실 정도인즉 많이 유력한 분이었다. 그 분이 남일 교회에 등록하실 때 가까운 곳의 교회를 일곱 곳쯤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분의 주택과 남일 교회는 역시 먼 곳에 있었다. 나와 심방도 같이 하셨고, 다른 장로님들처럼 봉사도 하셨다. 한 번은 그분의 자녀 결혼식 때 교회의 부조금을 받지 않았다 하셨고, 교회 재정부에서는 그 부조금이 지출되었다 하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퍽 아쉬운 일을 당하였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주일 공예배 대표 기도를 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한 번도 기도하는 법이 없으니 또한 의심스럽고 아쉬웠다. 경험 있는 장로님을 모실 때도 그런 것까지 살피고 점검을 해야 하는가? 무엇하나 소홀히 넘길 것이 없다. 당회에서 성찬 예식을 의논할 때 무임 장로에게도 분병, 분잔을 하게 하자 한즉 장로 한 분이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주일 대예배 대표 기도는 하게 하면서). 그리하여 그대로 시행하는데 어떤 장로가 앞에 앉은 그 무임 장로님에게도 흰 장갑을 전달하였으니 이는 분병, 분잔을 맡긴 듯한 오해를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집례자인 나는 당회의 결의대로 그 장로님에게 분병, 분잔을 맡기지 않았으니 얼마나 송구한가? 그 다음 주일부터 그 가정은 교회를 떠났으니 이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닌가? 이것이 성도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까?(고전 11:22) 그런 분위기를 나타내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43. 과반수에 따라야지

 

당회가 없으면 목사는 대부분의 정치(재판만 제외)를 혼자 한다. 마땅히 노회가 해야 하지만 노회의 형식적 감독 하에 목사 혼자 처리한다. 당회의 의논 과정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목사 중에는 고의로 장로 세우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장로회 교회는 목사의 독재를 불허한다. 그런데 여러 장로들과 당회를 하는 과정에서 만장일치가 아니면 결의를 안 해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안건은 계속 미루기만 한다. 안건의 대부분이 망하고 흥할 만큼 격차를 나타내지는 않을 것이다. 약간의 차이만 있다. 또 설령 차이가 많다 하더라도 다수가결에 따라 시행해보고 그것이 건설적이 못 되면 다음에는 그것을 교훈 삼아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의 의견을 존중할 마음이 없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꺾었을 때 서로의 대립을 의식하는 것 때문에 정출안이나 합의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이 어찌 건설적이라 하겠는가? 모든 안건은 토론하고 표결하되 공개적 표결이 좋지 않을 때는 무기명 투표 과반수로 결정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따르는 실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당회원 자신에게 이기주의가 없고 사랑이 넘친다면 어떤 주장을 내세워 관철하여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44. 막걸리 한 사발의 유익

 

지금부터 약 2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때에 막걸리 한 사발 값은 500원이었다. 김OO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가면 70세 넘은 그의 영감님이 병으로 누워계셨는데 오래 고생하다 보니 퍽 여위어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여윈(뼈만 남음) 시신은 평생 처음 보았다. 그 장지가 그의 고향인 달성 월배쪽 시골의 선산에 묻히게 되었는데 하관하려 할 때 90세 되신 아버지가 “나 먼저 장사 지내고 내 아들 묻으라”하면서 파놓은 무덤에 들어가 나오시지 않아서 관을 넣지 못하고 많은 사람을 울린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집사님 댁에는 시골에 아주 넓은 밭이 있어 과목도 심겨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녀들 생활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둘째 아들 박OO씨가 20 중반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고, 생활을 하려니까 리어카에 슬리퍼를 싣고 도시 골목마다 다니면서 팔았는데 오전 중 심방을 갔을 때 그 아들이 장사를 하다가 어머니 집에 와서 함께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힘들고 시장하면 빵이라도 하나 사먹고 장사를 해라”한즉 “어머니 요즈음 빵 하나 사이다 한 병을 사 먹으려면 1000원 가까이 드는데 막걸리 한 사람을 500원에 사먹으면 술 기운이 있어서 악을 쓰는데도 힘이 있고 돈도 적게 들어서 그것을 사먹고 시장기를 면하니까 악쓸 힘도 생기고 견딜만 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퍽 민망하였거든 그 어머니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취하기 위하여 술을 먹는 것은 금하여야 하지만 시장기를 면하고 돈을 절약하며 소리를 지르기 위하여 먹었다면 누가 이것을 잘못이라고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그 집사님댁 생활이 퍽 좋아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의 고향에 있는 농토가 다 도시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대구에 갔다가 만나 뵈었는데 그 집사님이 얼굴도 좋고 늙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때 고생하였으면 또 편안하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생활이요,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 아니겠는가? 2005. 3. 11.

 

45. 철야기도회

 

내가 남일 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체험인데 이는 철야기도회를 통한 양적 부흥이었다. 남일 교회는 양적으로 부흥되기 어려운 현실적 약점을 몇 가지 갖고 있다. 첫째는 이북 교회(이북 사람이 세운 교회, 이북 노회)라는 명분 때문에 지역 교회에서 불합리(이단 취급하듯)하게 여겨 외면하는 점과 고아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설립자 홍신숙 권사가 고아원을 경영한 일)과 또 설립자들이 권위주의를 나타내기 때문에(꼭 그렇지는 않음) 융성하기 어려운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번은 제직회에서 소경 집사 이상익씨가 “이웃의 남흥 교회를 가본즉 금요 철야기도회가 뜨거웠는데 그런 기도의 힘이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같다”하면서 우리도 힘써 보자는 것이었다. 기도하자는데 어찌 반대 하겠는가? 그때부터 우리도 금요 철야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철야의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8시간을 강행한즉 2개월 후부터 신입 교인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몇 달 동안에 20%의 교인이 증가하자 예배당 뒤에 다락을 만들 계획까지 하였는데 이 기도회의 계속이 너무 힘들어서 금요일 저녁이 무섭기까지 하였다.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8시간 인도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다음 날도 피곤하고 도무지 피곤이 풀리지 않으면서 심방건만 더 많이 생겼다. 그때부터 8시간을 4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철야기도회의 힘은 점차 약해졌고, 교인의 숫자는 본래 숫자로 감소하는 것을 체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철야기도회를 계속하는 방도를 만들어야 했는데 윤번제 자원이 없으니 어찌하랴.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야만 교인을 보내주시는 주님이신가?”하는 생각에 잠기면서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마음이 생겼고, 그것으로 기도회의 열심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거나 힘들게 전도하는 것도 지나치면 휴식과 자유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한다.

 

46. 민감한 사건들

 

1) 의복에 민감한 사람은 단정하여 좋다. 그러나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의복에 대하여 자문하지 않으면 편하지 않다. 어떤 직분자의 부인이 퍽 완고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다가 어렵게 출석을 하였는데 그만 의복에 민감한 부인이 그 분의 의복의 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 부분을 이렇게 하면 좋다”고 하였다. 그 부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간 후 그 다음에 나오지 않았다.

2) 어떤 분이 교회에 기념품을 해 놓았는데 10년이 넘으면 강산도 변하지 않는가? 다른 성도가 같은 물건을 신형으로 헌남하여 그것을 교체하였는데 먼저 해 놓은 사람에게 문의, 양해도 없이 임의로 바꿀 수 있느냐? 하였으니 누가 교회에 비품을 제공할 때는 반드시 사용 기한을 정해야 할 것이다.

3) 교회에서 발표하는 광고는 민감하다. 길 수도 있고, 감동 안 될 수도 있으며 공평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길흉사나 질병 우환에 대한 광고가 조심스럽다. 우환의 정도에 따라 덮을 것도 있고, 나타낼 것도 있으며 길흉사 관계는 확실한 범위가 중요하다. 출석하는 교인의 직계 또는 동거인이어야 한다. 그 이외의 연고자에 대한 광고는 균형을 생각해야 한다. 누구의 무엇은 광고하고, 누구의 무엇은 광고하지 않는다는 불평이 바로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여러 상가(초상집)가 있는 병원의 장례장에는 조화를 보내 온 경우가 있는데 성도의 장례장에도 교회 경상비로 조화를 보내자는 결정을 하고 권사, 집사 이상급만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권사의 남편(불신자)이 그 자리에 고인이 된 것이다. 멋도 모르고 화환을 보낸 후에 그 경비를 청구한즉 죽은 자가 직분자(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정부에서 지출이 거부된 것이다. 나와 이영합 장로가 조화를 보낸 책임자이지만 이영합 장로가 웃으면서 그 대금을 받지 않았다.

 

47. 연탄가스 이야기

 

이 제목의 뜻은 목회 생활 중 어려움도 있고 위안 받는 일도 있다데 있다. 남일 교회에 있을 때 연탄가스 사건이 다섯 번쯤 있었다. 그 중 두 번은 크게 심각하였다. 청도 화양면에 사시는 이병응 권사님이 대구에 오시면 꼭 찾아오셨고, 주무시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연탄가스에 취하여 나의 어머니와 함께 정신을 잃고 동산병원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두 분을 함께 장사지낼 위기에 있었는데 병원에서 깨어나 회생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내 아내가 막내아들 대환이를 낳고 10일도 채 못 되었을 때 둘째 딸 미라와 함께 자는 방에서 연탄가스에 취한 것이다. 나는 기도실 옆방에서 혼자 자고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안방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들어간즉 갓난아이와 미라는 호흡이 거의 없고 아내는 정신없이 손짓만 하는 상태였다. 문을 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초를 헝겊에 묻혀서 두 아이의 코에 댄즉 잠시 후에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위기를 면하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이다. 과거의 생활은 그만큼 열악하기도 하였고, 위험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쓴 물이라면 내가 매주 목요일 아침에 고아를 상대로 설교하고 홍권사님과 식사를 하였다. 좋은 것으로 대접받고 꿀 섞은 계란, 커피, 과일 등을 후식으로 먹는다. 홍권사님은 자기의 외아들이 미국에 있을 때와 그가 별세한 후에도 나를 그 아들처럼 연민한다고 하셨다. 매월 계란을 한판씩, 그리고 다른 종류의 선물들로 14년을 꾸준히 봉사한 것이다. 그때 받은 넥타이는 헤아릴 수도 없고, 의복도 여러 번 받았다. 쓴 물로는 연단을, 단물로는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48. 남일 교회의 문제점(70년대 이야기)

 

지상 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갖거나 느끼는 것은 비정상이다. 성도는 성경만 있으면 주님을 가까이 모신 상태에서 다른 문제들을 초월하여야 한다고 본다. 남일 교회는 경북 노회가 이북에서 나온 중혼 장로를 치리하려 하자 이북 교인들이 주동이 되고 몇 명의 평신도와 함께 남흥 교회에서 나온 단체로 시작한 교회이다. “피난 생활도 서러운즉 잘 나가서 잘 믿으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때 지역의 교회들은 이북 교인들이 따로 교회 세운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정통이 아닌 냥 비난하였다고 한다. 남일 교회는 이북 노회에 속하였고, 해교회의 홍신숙 권사님이 고아원(후에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변함)을 경영한 관계로 7,80명의 고아들이 주일 학교를 채웠다. 그리고 예배당을 건립할 때 홍신숙 권사가 대지 헌납 등 거의 혼자 부담하였고, 김창환 장로님은 철제 부분을, 신병설 장로님은 목재, 목수 부분을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권사의 자녀들은 그 예배당을 “홍권사님의 회갑 기념 건물”로 지어드렸다 하여 예배당 정면 위에 “홍신숙 권사 회갑 기념 예배당”이란 석판을 박은 것이다. 지금은 예배당을 리모델링하였기 때문에 그 글씨가 없어졌을 줄로 안다. 교회는 어렵게 성장하지만 남일 교회도 큰 발전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세 가지인데 “이북 교회, 고아원 교회, 개인 교회”라는 것이다. 현재 나의 신앙은 이상 세 가지가 큰 영향을 주지 않거니와 특히 이북 교회, 고아원 교회는 연민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거리끼는 일로 여겼으니 이는 가치관의 혼란인 것이다. 또 “누구의 기념 예배당”이란 그렇게 한 분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을 일일뿐 다른 사람이 그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일까지 하나님이 얹잖게 여기시겠는가? 우리의 신앙은 더 성숙하여 자신의 영광도 삼감이 좋고 다른 이의 사정을 나의 문제로 결부시키는 일도 하지 않음이 좋을 것이다. 신앙이 성숙하면 첩경도 평지로 여기게 될 것이다.

 

49. 잊어지지 않는 죽음들(1)

 

1) 죽암 교회 장순동씨는 자궁암으로 하체 감각이 없었는데 계속 임종할 것 같아서 자주 심방하고 자리를 지켰다. 숨이 가빠지고 얼굴에 땀을 흘리기로 그것이 마지막 죽을 힘을 쓰는 땀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이 너무 뜨거웠고 하반신이 열의 영향을 받아 데워진 상태에서 땀이 난 것을 알았다. 그는 수일 후 별세하였는데 상여가 동리 앞을 지나지 못한다 하여 동리 변두리로 돌아갔다.

2) 남일 교회의 한 여인이 암으로 죽은 듯하다. 그 성도가 임종하려 할 때 2,3차 심방을 하였다. 가뿐 숨을 쉰다. 그의 어린 아들이 “엄마 눈 좀 떠봐” 하면서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열어보지만 눈이 열리지 않는다. 그 여인은 아들의 간절한 소망을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갔다. 눈뜰 힘이 없는데 어찌 뜨랴.

3) 이북서 피난 나온 50대 여인에게 두 청소년 아들이 있으나 다 가출하고 집에 없는 중 혼자 세상을 떠났다. 소식이 없어 들어가 본즉 죽은 것이다. 교회적 책임으로 장례를 치러주기로 하였다. 방이 어찌 좁은지 시체를 돌려놓기조차 어려웠다. 교회 집사 몇 분을 불러 시장을 보러가게 하고 시신 있는 집을 비워놓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며 설교를 준비한 일이 있었다. 아내도 한 시간이나 혼자 지켰다고 한다.

4) 신평 교회 한경수 장로가 자기 교인집의 장례식이 있다고 당회장인 나를 청하였다. “가족들끼리 입관을 하면 나는 입관 예배와 발인, 하관 예배만 드리겠다”한즉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아침 8시에 간즉 이불에 덮힌 시신 그대로 있었다. 50대 남자인데 운명한 직후 손 한 번 댄 일이 없는데 염을 다 한 것처럼 나를 속인 것이다. 팔을 걷고 염을 하기로 결심하고 시신을 들치는데 겉이불, 속이불 또 홑이불, 얼굴에 수건까지 네 번을 들쳐 시신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얼굴이 두 번 보기에 힘든 형편이었다. 억지로 죽은 죽음같았다. 한 장로와 함께 이리 저리 굴리며 옷을 입히고 입관 예배를 드렸는데 나는 그때부터 시체에 대한 담력이 생겼다.

5) 한남 교회 유묘현 권사님은 며칠동안 고생은 하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심방한즉 “손자의 신앙이 자란 것을 기특하게 여긴다”고 자랑하셨다. 벽에 기대어 앉은 자세로 함께 기도하고 집에 왔는데 한 시간 후에 또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간즉 조용히 가시는 것이 아닌가? 목사는 성도의 임종을 보면서 기도할 때 보람을 느낀다.

 

50. 잊어지지 않는 죽음들(2)

 

1) 사돈의 죽음.

2006년 여름이다. 사돈 황호철씨는 착하고 겸손한 분이다. 그 분이 폐암을 앓게 되어 조기 수술을 하였지만 합병증을 이기지 못하여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하다 가셨다. 병중에 계실 때 나를 청하여 말씀과 기도를 받은 일이 있고, 그 다음 혼수상태 중에 또 한 번 방문하여 기도한 일이 있으며 또 그 다음에는 임종이 가깝다 하여 또 가서 손을 잡고 기도하는데 기도의 내용은 요 14:1~3에 근거한 기도로 “주님이 친히 오셔서 그 영혼을 평안하게 인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기도 중에 맥박 기계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리더니 침착하게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조용히 입술을 다무는 상태를 목격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민감하게 들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2) 함성환 집사님.

함집사님은 신장 계통의 암으로 별세하셨는데 사람의 생각대로는 1년을 더 사신 셈이 되었다. 의사의 진단대로라면 “2~3개월 더 사시기 어렵다” 하였지만 여전히 버티면서 병을 이기는 듯 하더니 결국 하반신 마비가 되어 상당기간 병원에 계시다가 소천하셨다. 병들어 계실 때는 가끔 심방을 하다가 임종이 가까울 것 같다 하였을 때 2~3일 간격으로 심방했다. 함집사님의 특이한 것은 신앙적으로 천국 갈 준비를 완벽하게 하여 설교할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자주 “한달, 두주, 한주, 2~3일쯤 더 사실 것이라”고 예측만 하고, 1시경에 심방한즉 너무 총총하여 “하루 이틀 더 계실 것 같다”하고 안심한 후 출타하였는데 당일 4시경에 소천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명 거두시는 때를 예측할 수 없음을 알았다.

 

51. 신평 교회 이야기

 

대구 평리동에 은평 교회가 있다. 이 교회의 본래 이름은 신평 교회였는데 70년도 초반에는 그 지역이 보리밭이었고, 그때 어떤 전도사가 이북에서 피난 온 H장로와 협력하여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서 그 땅 70평 정도를 어렵게 사서 천막을 치고 개척하였다. 그 후 H목사 때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건축 60%쯤 하고 모두가 빚과 외상으로 건축한 후 대구 지역 교회에서 보조를 구한즉 대구 노회가 아니라 하여 (황동 노회 소속 이북 교회란 뜻) 잘 도와주지 않으려 하자 H목사는 자신과 그 교회를 대구노회로 무법하게 옮긴 것이다. 그는 대구노회에 들어가서 황동노회의 협력으로 어렵게 장만한 그 땅의 등기를 대구노회명으로 변경하였는데 황동노회가 나에게 그 교회 당회장을 맡겨 교회를 다시 환원시키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 당시 H목사는 H장로와의 합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지지 세력과 모의하여 등기를 돌린 것이기 때문에 다시 교회적 입지를 세워 대구 노회로 된 등기를 황동 노회로 환원하는 신청을 하여 그대로 성취하므로 교회의 실권을 황동노회가 다시 회복한즉 H목사는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건축상 소요된 부채를 당회장인 내가 다 떠안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 건물 하나 지은 값을 인건비, 재료값 등으로 채무를 인수 받았으니 그 다음에 얼마나 독촉을 받았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얼마 후 다행하게도 K목사가 그 부채를 갚는 조건으로 부임하였고, 또 그 다음에는 다른 K목사님이 오셔서 상당 부분 교회 부채를 만회하였는데 그 분이 또 나가시게 되어 B목사가 와서 교회 명칭을 은평으로 고치고 발전하여 새 예배당 건축을 하게 된 것이다. 은평 교회의 과거 역사는 참으로 힘든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 사실을 사람은 다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그 역사를 아는 H장로도 별세하였고, 그 사실을 아는 성도는 거의 없을 것이다.

 

52. 신평 교회 이야기

 

대구시 서구 평리동에 있는 은평 교회(본래 이름은 신평 교회임)는 내가 초창기부터 당회장을 맡으면서 여러 교역자들을 소개한 일이 있었다. 그 교회는 도시 확장 되기 전에 70평의 보리밭을 사서 천막 교회를 세웠는데 친구 황진환 목사의 소개 부탁을 받고 시무하도록 알선하였다. 황목사는 부임하자마자 벽돌로 예배당을 지어 골조 공사만 끝을 내고 한경수 장로가 불출석하는 사이에 황동노회 소속 교회를 대구 노회에 가입시켰다. 이는 불법이고 배신이었다. 황동 노회는 나에게 그 교회를 수습하여 다시 회복케 하였고, 나는 황목사가 그 교회 대지를 대구 노회로 등기한 것을 내가 어렵게 합법적 시도를 하여 다시 황동 노회로 소유권을 넘겼다. 대구 노회는 크게 당황하였고, 교회는 혼란에 빠졌으며 황목사는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황목사는 예배당 골조 공사를 하면서 인건비, 재료비 등 7,8건의 부채를 안고 있었는데 그가 떠나게 되자 그 채권자를 소집해놓고 그 채무를 새로운 당회장인 나에게 지게 하여 내가 해당 금액의 차용 증서를 써주고 인수하게 되었다. 7,8건의 채권자들의 독촉이 얼마나 심하였겠는가? 나는 그때 여러 차례 돈을 융통하여 갚기도 하였는데 황목사는 건축할 때 돈이 필요하자 청송 고향의 친척 아가씨의 결혼 비용을 차용해 썼고, 그 독촉을 받자 “남일 교회 지목사에게서 받으라”한즉 나에게 왔기로 “나는 황목사의 잘못으로 짐을 지게 된 것인즉 융통되면 줄 것이라”하니 “돈은 황목사를 주었는데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와서 빚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면서 밤 12시까지 울고 간 사실도 있었으니 십자가 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후 그 부채를 갚고 권OO 목사가 부임하였고, 또 권목사의 부채를 김OO 목사가 갚았으며 김목사 후임으로 박목사가 들어와서 그 교회를 궤도 위에 올리고 이름을 은평 교회로 고친 후 정식으로 대구 노회에 가입시킨 것이다. 지금은 상당히 큰 교회가 되었다.

 

53. TP 교회 이야기(1)

 

대구의 T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교역자의 이동이 있자. Y목사가 부임하였는데 장로들과 여러 중직자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행정을 독재하려 하고 권위주의를 앞세우며 지지 세력과 당을 지어 반대 세력과 갈등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계속 되자 Y목사는 권징 절차를 무시하고 장로들을 면직에 처한즉 장로들은 불복하여 이 사실을 노회에 소원하게 된 것이다. Y목사는 내가 장로 편을 든다는 이유로 심각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성직자가 이웃 동료자와 불화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법을 지키는 차원에서 법을 안 지키는 자와 대립되었을 뿐 악의로 누구를 해치려는 생각을 한 일은 없었다. 성직자는 교회의 헌법을 지키는 서약하에 안수를 받은 만큼 그것을 위반하였다면 당연히 문책이 따르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일로 노회와 Y목사간의 대립이 있었고, 노회의 지도를 받아 해결에 나선 위원들과도 대립이 있었으며 결국은 폭력과 불법이 더욱 난무하여져서 사회 법정까지 가게 되었고, 약 8년 만에 교회가 분리되면서 어렵게 해결되었다. 나는 그 일로 폭력에 가담한 누명을 쓰고 다른 직분자들과 함께 피소되어 대법원까지 가서 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때 지법 판사는 유죄되는 비유로 말하기를 “3인이 길을 가다가 2인이 싸웠을 때 다른 1인이 그 싸움을 말려야 하고 말리지 못하면서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그 폭력에 동참자가 된다” 하면서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서로가 사랑의 가치를 모른 탓일 것이다. 그리고 교역자는 사랑에 위배되면 이유 없이 그 단체를 떠나야 한다고 본다. 사랑 실천에 위배되는 목회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 대책소가 되지 않고 또 명예의 전당이 되지 않을 때 상당한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54. TP 교회 이야기(2)

 

대구의 태평 교회는 황동 노회의 모체 교회이다. Y목사가 부임하여 전체 장로들과 중직자들의 불신임을 받았는데 반대로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의 수는 더 많았다. Y목사는 느닷없이 장로들을 단독으로 불법 치리를 하고, 지지자들의 힘을 빌어 강단을 독점하였다. 노회에서는 Y목사를 치리하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그 싸움은 여러 해 계속 되었고, 그 싸움으로 한 시찰에 있는 나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다. 한 번은 노회가 C목사를 보내어 강단을 점령케 하였는데 그 날 저녁에 노회원들도 서울에 와서 함께 협력하기로 나도 그 장소에 갔었다. 기물도 파괴되고 큰 수라장이 되었으나 첫 날은 그대로 진압되었는데 이틀 후쯤 늦은 밤에 C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교회 정문 앞에 섰을 때 Y측 교인들이 차를 덮치고 차 안에 있는 C목사를 납치하여 옷을 벗긴 후 소방수에 거꾸로 넣은 것이다. 때는 추운 겨울이었고, 소방수는 얼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넣었다 한다. 죽음 위기 직전에 꺼낸 모양인데 나중에 알게 된 C측 교인들이 병원에 입원을 시켜서 며칠 후에 퇴원하였다. C측에서 폭력 및 살인 미수로 주동자들을 고발한즉 상대방은 나와 당회장과 장로들을 기물 손괴로 고발하여 쌍방 피소인 전부 11명이 재판을 받고 50만원씩 벌금을 언도받았다. 나와 김설연 장로는 고등법원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판사는 기물 손괴를 안 했어도 손괴자들과 함께 있었으면 죄가 된다는 것이다. 나와 김설연 장로는 대법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것이다. 법리적으로는 Y목사 반대 측이 우세하였으나 숫자에 밀렸고, 경북 노회가 Y측을 붙잡는 바람에 소수 측이 예배당을 포기하고 주택을 받고 나오므로 일단락되었다. 나는 시찰 교회 수습 차원에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55. SK 교회 이야기

 

대구 산격동에 산격 교회가 신설되었고, 나는 그 교회 당회장이 되었다. 몇몇 교인들이 규합하여 땅을 사고 교회당을 지어 골조 공사를 마쳤는데 친구 .L목사가 그 교회에 초빙 되도록 부탁하기로 소개해주었다. 그 목사는 들어가자마자 골조 공사에 지쳐 있는 교인들에게 빚을 얻어 완공하자 하였고, 교인들은 천천히 힘내어 하자 하니 뜻이 맞겠는가? 그러나 L목사는 조급했다. “협력할 뜻이 없으면 다 내 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회계 집사가 장부를 반납하였다. 목사는 배척을 받았고, 노회에서는 시무를 중지시킨 후 당회장권을 다시 나에게 돌려 강단을 지키게 한 것이다. 그러나 L목사는 자기를 지지하는 청년 한 사람을 두었는데 그의 폭력성과 목사 방위력을 아무도 막을 자가 없었다. 결국 그 교회를 뺏긴 셈이다. 그러나 L목사는 노회의 치리하에 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걸림이 되었고, 노회는 당회장 반환 문제를 나의 재량에 맡겨 알아서 하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 없이 특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나의 양심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친구 입장에서 버티게 되었고, L목사는 나에게 “죽을 자를 살리는 자비로 도와 달라” 하니 어찌 하겠는가? 그리하여 당회장권을 돌려주고 지역 노회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것 역시 나를 배신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어긴 것이다. 얼마 전에 소식을 들은즉 L목사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56. 어떻게 벌할까?

 

내가 대구에 있을 때 황동 노회 소속 교회를 시무하는 K목사님이 교회를 이끌고 D노회로 소속을 옮긴 것이다. 그는 나와 목사 동기생이요, 친구였는데 “소속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들어와서 몇 달도 안 되어 D노회로 간 것이다. 지역 노회와 무지역인 이북 노회와의 지역 텃세가 부흥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 안에 그런 지역 텃세가 없어질 때를 기다린다. 그의 무법적 소속 변경은 잘못이고, 또 이명 증서 없는 K목사를 받는 것도 그 당시의 법으로는 잘못이었다. 그래서 황동 노회는 K목사를 불법이탈죄로 D노회에 고발한즉 D노회의 재판국 통지서가 황동노회로 온 것이다. 어느 날 “어디서 그 재판을 하니 원고측 소송대리인을 파송하라”는 것이다. 황동 노회에서는 내가 대구에 있는 목사이므로 나를 파송하여 내가 그 재판석에 가게 되었다. 다 한 지역(대구)에서 시무하는 교역자인즉 서로 다 아는 사이이다. 재판국원들도 알고 피고도 안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목사가 노회를 무단이탈하는 것과 교회를 타 노회 소속으로 절차 없이 빼내는 것을 “잘못이 아니라”할 수 없으므로 유죄 판결에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얼마큼 시벌을 해야 하는가?”였다. 이때에 D노회의 재판국장은 “얼마큼 시벌을 해야 원고측이 만족하겠느냐?” 하면서 묻는 뜻도 있지만 만일 가볍게 했다가는 또 총회에 상소할 것을 우려하는 뜻도 있는 것일까? 나에게 묻기를 “정직을 하면 되겠느냐?”하기로 내가 말하기를 “정직은 명예적으로 보나 목회상으로 볼 때 치명적이 될 수 있은즉 견책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다”한즉 깜짝 놀라면서 고맙게 여기는 것이었다. 피고 K목사도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였다. 문제는 “불법을 짚고 넘어가는데 있고 또 불법자가 죄를 깨닫는데 있다”고 하였다. 노회에 와서 그대로 보고하였다.

 

57. 인도자와 배신자

 

예수님은 바울을 변화시킨 다음 아나니아의 인도를 받게 하셨고, 또 바나바의 보증과 인도로 직임을 수행하다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가 되었다. 나는 전도사때 김상도 목사님의 사모님과 그의 시어른이신 김삼수 장로님의 인도로 김해 도도 교회와 제2영도 교회에 초빙을 받았고, 그 다음에 김계희 목사님의 인도로 상주 죽암 교회에, 또 서동걸 목사님의 인도로 의성 빙계 교회와 청도 동곡 교회에, 또 장덕채 장로의 인도로 청도 화양(구읍) 교회에, 현명길 목사님의 인도로 대구 남일 교회에, 권봉태 목사님의 인도로 성남의 한남 교회에, 김종찬 장로의 인도로 신덕 교회에 초빙되어 그 이름을 새교회로 고치고 현재에 이르렀다. 나를 소개한 목사님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고, 교회도 시험에 드는 일이 없이 잘 있다가 아쉬운 분위기에서 전임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임지를 부탁하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여러 번 교회에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 교회를 혼란케 하여 기대를 벗어나게 하였다. H목사를 S교회에 소개하였는데 노회를 탈퇴하는 등 못할 일을 저질렀고, Y목사를 T교회에 소개하였는데 공화 정치를 안 하고 불법 치리를 하는 등 큰 어려움을 주었으며 L목사를 S교회에 소개하였는데 교회를 개인 교회처럼 휘두르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K목사님을 S교회에 소개하였는데 교회의 부채를 갚는 공을 세우고도 화합을 못하여 사임하였고, 다시 K목사를 소개한즉 그는 감당을 못하고 사임하였다. 나는 마음 약한 흠이 있다. 누구든지 먼저 부탁하면 그것을 거절 못하고 들어주는 것이다. 교회는 꼭 인정할 만한 자격자에게만 소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사역자를 찾기란 거의 퍽 힘들다. 이기주의를 떠난 사역자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58. 김호룡 목사님

 

나는 김호룡 목사님과 그의 부인 김덕순 사모님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내가 성남의 한남 교회에서 일할 때 서동걸 목사님과 자주 만났는데 서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노령의 몸으로 영천과 울진 쪽에서 개척을 하셨는데 울진에서 교회를 개척하실 때 김호룡 집사 부부가 마치 바울 사도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섬기고 봉사한 것으로 비교한다. 그 후에 김호룡 가족이 한전 직원의 이동을 따라 성남으로 이사를 와서 내가 소개를 받았고, 함께 한남 교회에서 생활하였는데 그때 마침 내가 기독교 신앙 백과와 교회 헌법 연구 등을 출판하게 되었고, 그것을 편집, 식자하는 일을 도와주면서 말씀 사역에 협력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김호룡 집사 내외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욱 사명에 끌리게 되었고, 결국은 김호룡 집사가 목사가 되었다. 나는 김목사님이 나의 출판물 원고를 편집, 식자해 주었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출판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 협조와 관련하여 집필 사역으로 끌리면서 58세에 목회에서 강론 집필로 생활을 변화시켰고, 김목사님은 나의 원고들을 정리 또는 식자하면서 사명 일선에 서고 싶은 충동을 받고 신학을 한후 목사가 되어 작은 목회일망정 사명에 이끌린 몸이 된 것이다. 그 분은 한전 직원이면서 자기 생활을 교회에 의존함 없이 작은 목회를 하니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인가? 나의 달란트 사역에 대하여 재정적으로 도운 일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어제는 오래간만에 만났다는 이유로인지 두 부부가 나에게 절을 한 것이다. 내가 교역자였기 때문에 절을 받은 일은 세 번 있었다. 처음은 전도사로 있을 때 이연우 장로님 부부였고, 다음은 박순대 목사님 부부였으며 그 다음은 현재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성경 공부하는 목사님들이다. 이런 끈끈한 정은 형제보다 나은 친밀감을 느낀다. 김목사님은 영신, 성은, 성조 3매를 키운다.

 

59. 조병남 목사님

 

내가 한남 교회에 시무할 때 부목사님을 초빙하게 되었는데 일곱 분 정도의 이력서를 받은 중 그 중 두 분이 유력하였다. 그 두 분 중 한 분의 고향이 나와 같은 강화도 출신이라 반가웠지만 내가 고향의 인정과 인연에 치우치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 싫어서 두 분 중 한 분을 선택하도록 당회의 인사 위원회에 일임을 하였는데 장로 중 한 분이 “그런 지역주의에 편중한다는 평이 없을 것인즉 같은 조건이면 고향분을 초빙하시라”하여 조목사를 모시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부교역자를 동반해보았는데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조목사는 나와 강화도 어감이 같아서인지 더 부드러운 감을 느꼈다. 조목사의 특징은 좋은 점이 많았는데 자신의 경험이 부족한 만큼 문의와 의논을 좋아했고, 또 기관을 지도하다가라도 실무 책임자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때는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며 화해하기를 힘쓰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뛰어난 것은 어려운 환자를 위문하는 기도를 할 때 적절하고 좋은 말을 구상하여 부드럽게 기도하는 지혜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희망 없이 앓고 있는 병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 좋은 말을 구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또 설교도 간단하고 부드럽게 잘 하였다. 그가 다른 교회로 이동하게 된 원인이 기억나지 않으나 내가 잘 아는 선배 현명길 목사님(전농 중앙 교회)에게 추천 소개하여 거기서 여러 해 시무하다가 또 은퇴하실 김기운 목사님께 소개하여 그 곳 신응 교회에서 여러 해 시무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으나 위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내가 다시 대구 성지 교회로 부임하도록 소개를 하였는데 3개월쯤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서 김제 연정 교회의 초빙을 받은 것이다. 이때 나는 “먼저 모셔 가도록 확정한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그 곳으로 부임하였는데 2년쯤 150명 정도의 교인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나는 조목사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는 성미쌀 받은 것이 남으면 그 쌀을 마늘과 함께 나에게 여러 차례 보내왔다. 기도와 관심은 이렇게 주고 받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60. 큰 잘못, 웃기는 실수

 

큰 잘못 두 가지는 의복 착용의 실수와 졸음이다. 웃기는 실수는 성경 본문 미확인과 문상 방문 착오이다. 남일 교회의 기도실은 나의 침소와 문 하나 사이에 있었다. 보통 새벽 기도회에 2~30분 전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목사도 30분 전에 시계 종을 울리게 하는데 한 날은 그 종소리를 듣고도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옆 방에서 찬송 소리가 나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파자마, 와이셔츠, 넥타이, 상의를 입고 나갔는데 하의를 입지 않은 것을 알고 다시 뛰어 들어가서 입고 나갔으니 그 꼴이 얼마나 추하고 우스웠겠는가? 또 한 번은 한남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에 나갈 때부터 피로가 오더니 예배 중 장로가 기도할 때 뒷좌석에 앉아서 존 것이다. 소스라쳐 잠을 깬즉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아멘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도우셨지 그대로 잤으면 어찌 할 뻔 하였을까? 나는 수많은 설교를 하는 중에 본문 착오를 세 번쯤 겪었다. 설교 원고 제목 옆에 기록한 성경 본문이 착오 기록된 것이다. “마”를 “막”으로 쓰든지 10장을 20장으로 잘못 쓰면 원하는 본문이 아니지 않은가? 두 번은 즉석에서 찾아 교정하였지만 한 번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읽고 설교 따로 한 일이 있었고, 어느 주일날 오후에 부교역자들에게 상가 방문을 시켰는데 조의금을 전달하고 와서 말하는 것을 들은즉 다른 집에 전달하고 온 것이다. 골목이 비슷한 곳에 또 한 집에 조등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상주를 만나 인사를 하는데 어색하게 받더라고 하였다. 또 부의금을 갖고 바로 찾아가게 하였다.

 

61. 당회 수양회

 

여름철마다 교회 행사가 있는 것은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기관 행사마다 한번씩 가서 격려하고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회 수양회는 그렇지 않았다. 교회가 비용을 대고 교회의 차를 이용하며 장로님들께 준비를 맡기면 잘 하기 때문에 나와 내 아내는 가기만 하면 된다. 한 번은 서해바다 쪽으로 갔다가 어떤 이가 텐트 옆에서 서툰 솜씨로 자동차를 조작하다가 정의웅 장로 부인 심정자 집사의 사용하는 막사를 덮쳐 크게 놀란 적이 있었고, 그 다음 해는 대천 쪽으로 갔다가 텐트 옆에서 젊은이들이 밤새도록 떠드는 바람에 지옥같은 세계에서 3일을 보내고 오다가 평택 가까이 왔을 때 내가 운전하는 차 앞으로 한 소녀가 뛰어드는 바람에 차가 강 뚝 밑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다니는 일이 무섭지 않은가? 그 다음에는 동해 바다로 갔다. 양양에서 개고기를 사고 숙소를 정한다음 고기를 먹고 덥기는 해도 바다를 즐기니 좋지 않은가? 그때는 먹성도 꽤 좋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이명섭 장로는 “나는 위장이 좋습니다. 돌이라도 소화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몇 년 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함부로 건강을 자랑한 탓일까? 참으로 안된 일이었다. 당회 수양회는 장소나 방법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하였다.

 

62. 두 사람의 헌신

 

성경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눈물과 머리털로 발을 씻겨드린 일이 있고, 또 순교 역사도 많지만 아름다운 헌신을 곁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남일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기도실에 편 돗자리가 퍽 남루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헝겊을 대고 수선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에 신옥식 집사가 그것을 수선해 오겠다는 것이다. 그 돗자리를 둘둘 말면 섬 만한 부피로 네 개나 된다. 어떻게 수선하실 것이요? 한즉 자기 집에 갖고 가서 재봉틀로 헝겊을 대고 양쪽 변을 박아온다는 것이다. 의복을 수선하는 재봉틀은 있겠지만 돗자리 박는 재봉틀이 있겠느냐? 한즉 재봉틀이 좋은 것이어서 그 정도는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운반하려면 리어카를 빌려와야 하지 않느냐? 한즉 머리에 이어만 주면 갖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크게 당황하였지만 머리에 이어달라고 독촉을 하므로 이어준즉 약 500미터나 떨어진 집으로 네 번을 운반하고 그것을 깨끗하게 수리하여 또 네 번을 운반하여 갖고 왔으니 잊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집사는 성광 고등학교 교감 김충곤 집사의 부인이었다. 그 후에 목사 사위를 보았고, 지금도 충성된 생활에 임하고 있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한남 교회 문유희 집사이다. 그가 여전도 회장을 할 때 회원들과 광능 수목원으로 야유회를 갔는데 100명 가까운 회원들이 음식을 먹은즉 그 쓰레기가 많지 않겠는가? 그것을 쓰레기장까지 운반하려면 500미터쯤 산 아래로 와야 한즉 큰 비닐 봉투에 담아 머리에 이어 날라야 편리하다는 것이다. 그때 문집사가 깨끗한 한복을 입고 음식찌꺼기 담은 큰 비닐 자루를 이고 내려오는데 땀은 흐르고 그 자루가 터져서 찌꺼기 물이 머리로 얼굴로 목으로 흘러내리는데도 중도에 내리지도 못한 채 목적지까지 간 일이 있으니 주님을 위한 일이 아니면 이런 일을 어찌 감수하겠는가? 나 혼자 느낀 일이지만 참으로 잊지 못할 일이다.

 

63. 이영합 장로님

 

내 평생 가장 큰 은혜를 받은 것은 이영합 장로님의 배려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일이다. 89년 2월 1일부터 24일까지 애굽, 카이로, 이스라엘, 터키, 헬라의 여러 곳, 그리고 로마, 스위스, 파리까지 다녀온 것이다. 그때에 이장로님은 내게 강권하여 같이 가기를 청했고, 비용으로 나의 석 달 봉급쯤 되는 340만원을 제공하였다. 나는 나의 돈으로 그만한 비용을 쓰고 성지 순례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 지금쯤은 누가 비용을 댄다 하여도 TV로 많이 보았다 하고 안 가려 할 것이다. 이장로님은 마음이 퍽 순한 분이다. 그리고 나와 나이도 비슷하기 때문에 나는 형제적 우의를 다지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또 이장로님은 가진 재물에 비할 때 그 생활이 검소하고 사치를 모른다. 나도 그런 일에 공감한다. 명예욕도 없어서 시무 연령을 8년이나 앞두고 미리 은퇴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그때 성지 순례를 한 덕분에 외국을 다녀보았고, 요한계시록 2장과 또 사도행전과 편지서를 강론으로 쓸 때 그 지역을 마음으로 살피면서 쓴즉 크게 유익하였다. 한남 교회를 사임한 후에도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64. 가장 큰 웃음

 

귀하는 언제 가장 많이 웃어보았는가? 나는 89년도 2월초에 성지 순례차 새벽에 시내산 정상에 오른 다음 아침 9시경 하산하여 시내산 정상과 카타리나 수도원(가시떨기 나무 있는 곳)을 동쪽 뒤로 하고 서쪽을 향하여 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다가 멀리 앞에 보이는 돌산 벽에 나타난 조각상(이것은 자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데 관찰을 잘 하여야만 보임)을 보고 그것을 두 친구에게 살펴보라는 과정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자아낸 일이 있었다. 나도 웃고 두 사람도 몹시 웃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또 웃을 것이다. 이O훈 목사가 그것을 망원카메라로 찍었는데 선명하게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고 하였다. 그 조각상은 여인의 하체부분이었다. 나는 그 부분이 나타났을 때 자연의 조화의 신비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뒤따라오는 조O선 목사에게 “이상한 것을 찾아보라” 하였더니 무엇인데 그러느냐? 하면서 한참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면서 웃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목사님은 경건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눈에 안 보여야 하는데 그것을 발견한 것을 보면 경건치 않은 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것인 듯 또 웃는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이 눈에 나타났는데 어찌 안 보겠느냐?”고 하였다. 그 뒤에 이O훈 목사가 뒤따라온즉 조목사가 먼저 가까이 가서 “형님 저기를 한 번 보시오” 하였다. “뭔데 무슨 일인데”하면서 한참을 보더니 또 한 번 웃기를 시작하지 않는가? 그리고 “좋은 작품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만큼 웃은 적은 아직 없었다. 어제 시찰 목사님들 내외와 함께 강원도 정선 쪽으로 야유회를 다녀오면서 차안에서 서로 웃기기 위한 말들을 하였는데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상태였다. 그러나 젊은 목사들은 늙은 선배들의 눈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마구 음담패설을 토해 내는 것이다. 나이 많은 것이 민망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런 모임을 피할 수도 없고, 오히려 친구들처럼 터놓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 자식을 낳고 사는 처지에 누구인들 음담패설을 못하겠는가? 웃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65. 옆방에서라도 개척하라

 

한 동안은 총회적으로 같은 소속 교회를 500미터 안에 못 세운다고 하였다가 도시 밀집 현상이 일어나자 200미터로 고친 줄 안다. 그 200미터란 터를 사서 짓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임시로 전세 건물에서 예배드리는 일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한남 교회에 부임하자 어떤 교회가 가까이 설립되는 것을 불법이라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 혹 교회의 집사가 목사 되어 이웃에 개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 장로들은 그것을 문책 사유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옆방에서라도 개척하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어느 빌딩에 들어간즉 1호실은 무슨 교회이고, 2호실은 다른 교회였다. 서로 시끄러울 수는 있지만 교파가 다르고 사역자가 다르니 어찌 하겠는가? 나만 따르라거나 나의 교회에 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총신만 나와야 참 목사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적게 배운 목사가 목회를 잘 하는 경우도 보았다. 물론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전혀 무시하여서도 안 되는 줄 안다. 누가 가까운 곳에서 개척한다 하면 “잘해 보라”하고 또 하는 사람은 계획적으로 다른 교회의 교인을 끌어가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될 것이요, 가는 교인을 미워하지도 말고, 양심대로 교회와 교역자를 선택하게 하는 풍조로 돌아서야 할 것이다.

 

66. 여전도사 내보내기

 

여전도사는 참으로 어려운 직임이다. 전도하고 심방하며 유고자를 목사에게 알려야 하는데 목사보다도 교인의 바람을 더욱 탄다.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2~3개월동안 여전도사 사역을 간섭하지 않다가 때가 되면 “새 신자를 몇 명이나 데려왔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이때에 그 수를 말하지 못하면 명년에는 쓰지 않는다고 암시하여 내보낸다고 한다. 만년 임시직인 셈이다. 교회는 성숙하고 유력한 사역자만 쓰려 하지 말고 미숙하면 훈련을 시키기도 해야 하는데 전도 실적이 없다고 년년이 내보내면 되겠는가? 임시직이니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장로들도 있다. 그러나 팔이 안으로 굽듯이 전도사를 내보내면 그의 주택이나 생활이나 가족은 어찌 하라는 것인가? 나는 이런 일로 여전도사의 길을 인도하기 위하여 임지를 알선하기도 하였고, 나가는 전도사의 눈물과 통곡을 보고 큰 가책도 받았다. 왜 교회나 목사가 사역자를 꼭 울려야 하는가?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랑에 본이 되어야 할 교회와 성직자가 아닌가? 교회의 이기주의와 물량주의는 결국 사랑을 해치고 약자를 울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연속 계속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내가 기성 교회를 사임한 이유도 되었다.

 

67. 관리인 때문에 곤욕

 

교회가 작아도 관리인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 큰 교회야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청소, 문단속, 전등 점검, 각종 심부름, 운전까지 꼭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정착되다 보니 관리인은 교회의 고용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교역자가 융통성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찰도 그러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찰은 “담임 목사가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것이다. 학생회 임원이 “예배당 문을 열어 달라”하면 담임 목사님 허락을 받아오라는 식이다. 어찌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다 들어줄 수 있느냐?”하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가나 이런 일을 해소하려면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 번은 부목사가 현관의 전등을 갈라고 하였다가 속히 이행되지 않자 사찰에 대한 불평이 여기저기서 나와 당회에까지 알려졌기로 당회가 사찰을 호출하여 권면하였는데 몇 일 후에 부목사가 교회에 들어올 때 멱살을 잡고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와이셔츠를 찢고 “부목사의 고자질로 자신이 당회에서 문책을 받았다”고 폭행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당회가 부목사에게 폭행한 관리인을 불러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 한즉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목사가 거짓을 말하였단 말인가?” 한즉 “왜 부목사 말만 믿고 내 말은 안 믿느냐?”고 따져드니 증인이 없은즉 어찌 하겠는가? 목회자가 목회를 하면서 이런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이런 것을 제도상으로 개선하여 피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은 믿음을 키우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닌가?

 

68. 김상경 목사님

 

내가 한남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김상경씨는 서리집사직에 있으면서 광학사란 안경 렌즈 제조 및 도매업을 하였다. 그 사업은 지금도 번창하여 큰 기업체를 이루었다 할 수 있고, 따라서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 줄 안다. 그러자 그에게는 큰 시련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사탄과의 싸움이다. 그가 어떻게 사탄의 역사에 붙잡혔는가?에 대하여는 생략하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은혜를 구하는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부인 전경자 사모도 그 당시 어려운 일을 함께 극복하였다. 그는 기도의 힘에 힘입어 사탄을 물리칠 수 있었고, 뛰어난 사명적 열심 때문에 장로가 되었다가 또 목사가 되었다. 무슨 일이나 사모하고 노력하면 성취되는 줄 안다. 그가 목사 되었을 때 자기 사업체와 인접한 예배당 건물이 나와서 그것을 자기 돈으로 사고, 하나 교회 간판을 붙이고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상당한 초신자들이 등록하는 상태에서 목회의 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 나는 하나님의 한 가지 섭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대상을 보시고 거기에 적절한 사역자를 만들어 쓰신다는 사실”이다. 김목사가 큰 교단의 교회에서 헌법적 목회를 한다고 하였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그는 그런데서 해방되어 은사에 따른 소신만 피력하고, 또 거기에 적응하는 성도를 위하여 세워진 사역자라고 믿는다. 무엇이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나에게 전화하는 그의 겸손과 순진함이 돋보여 내 기억에 담아두려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에게 지도받아야 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69. 이해 안 되면 용서하시오

 

대체적으로 부인들은 황혼기가 되면 병치레를 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근심, 걱정을 갖고 살 때 더욱 그러하다. 내가 대심방을 하는 중에 신순희 집사가 병원에 다녀오다가 집으로 가지 못하고 길에 쓰러졌다. 남편인 권집사가 부인 신순희 집사를 길에서 업고 다시 큰 병원으로 가려고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망설였다. 그때 쓰러진 환자를 차에 태워 병원까지 동반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심방 할 가정에 시간과 순서가 약속되어 있는지라 돈 2만원을 권집사에게 택시비로 주면서 병원으로 인도하라 하고 그대로 심방에 임하였다. 이 일로 권집사 내외는 그 당시에 대단히 섭섭하였다고 하며 심지어는 “목사가 그래서 되느냐?”고 까지 하였다. 나는 냉정한 입장에서 타산적으로 행동하였고, 어려움 당하는 측에서는 무조건 이기주의로만 생각한 것이다. 내가 병원까지 안내하였더라도 치료에는 효험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안내를 하지 않았더라도 병원에 가는데 지장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심방을 계획대로 수행한 것이다. 권집사님, 신집사님 이해가 덜 되시면 날 용서하시오. 그 일 후에도 반갑게 만나서 친교하였다.

 

70. 오해는 은혜의 장벽이라

 

옛말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배를 떨어뜨린 범인이 까마귀가 아니란 뜻이다. 즉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나타낸 속담이다. 사람 사는 세계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은혜를 전달하는 복음 사역자에 대하여는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복음 사역자를 과소평가하는 오해가 있으면 자신이 은혜로운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 하여 과대평가로 덕을 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표현을 좋아하실 것이다. 나는 세례요한의 정신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 잘 되게 하는 사역자가 있으면 언제나 교회를 사임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교인이 목사의 설교를 또는 그 인간성을 지루하게 생각할까 염려하여 사랑이 식기 전에 전임하였으며 설교로 은혜를 끼칠 대상이 있다면 외처 강사나 부목사라도 주저 없이 강단을 개방하였다. 이것은 양심적 고백 그대로이다. 그런데 헌신 예배 초청 강사가 유고되어 본의 아니게 담임 목사인 내가 헌신 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성도가 나를 이기주의 발상으로 인정하는 오해를 하였다. 그가 담임 목사를 물욕 있고, 명예욕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서야 어찌 나의 설교에 은혜를 받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 성도가 은혜를 받으려면 진정 그의 존경하는 목사를 모시게 함이 옳다고 생각하여 나 자신을 쇠하게 할 목적으로 교회를 사임하였다. 앞에서는 사랑의 문제도 지적하였고, 또 집필 목적도 있었지만 사임의 뜻을 나타낸 동기는 나를 오해한 성도 앞에 계속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1. 한남 교회를 떠난 이야기

 

내가 처음 한남 교회를 부임하였을 때 참 좋은 분위기였다. 약 5년 정도 잘 지낸 줄 안다. 그때 나는 설교, 심방, 민주적 행정이 목회의 무기였다. 그 후에 목회의 번민을 느끼게 된 원인은 여전도사를 1년에 한번씩 내보내게 될 때 베풀어야 할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나가는 사역자의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고, 그 다음에는 또 사찰이 부교역자와 불화한 상태를 나타내어 그를 교회에서 나가게 하는 과정에서 평생 처음 겪는 어려움을 느꼈다. 여기서부터 “교회 제도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마음과 함께 회의를 느끼지 시작하였는데 또 그 당시 나는 기독교 신앙 상식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마태복음 강론과 요절 연구 등 출판물을 위한 집필에 맛을 들이게 되자 활동은 적게 하면서 피로는 가중되었다. 집필에 시간 쓰는 일을 교회가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중요한 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담임 목사님은 주일 설교만 할 뿐 다른 일은 부교역자 자신들이 다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이 방법대로 나간다면 교회에 누가 될 것이 뻔한즉 나의 자유로운 목회나 집필 행사를 위하여 작은 교회로 옮길 뜻을 착상하게 되었고, 이것이 실천에 옮겨진 계기는 B장로의 실수 같기도 하고 감정 어린 말 같은 뼈아픈 말을 들은 것이다. 그것은 오해로 비롯된 것이지만 나를 향하여 “그렇게까지 헌신 예배 설교를 하고 싶습니까?”하면서 나를 명예와 물질에 탐심 가진 자로 인정하는 말을 하였을 때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조용히 지내는 중에 집필의 자유와 자유로운 목회 활동과 성직자의 합리적 위치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 너무 중요하여 사임의 뜻을 밝히고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성직자는 물질적 또는 명예적 관계에서 교인들의 오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 일을 나 스스로 발설하자 장로들은 목회의 의욕 없는 것을 알고 순순히 허락한 것이다. 이런 경위로 나는 “개혁 교회 헌법”을 새롭게 연구할 결심을 한 것이다.

 

72. 이성광 목사님

 

내가 이성광 목사를 안 것은 그가 결혼할 때였다. 내가 남일 교회를 시무할 때 그의 부친이신 이상춘 목사님이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여 대구에서 서울 기독교 기념 회관까지 와서 주례를 하였다. 이상춘 목사님이 월남하여 처음 생활하실 때 강화에 거주하신 일이 있었고, 강화에서 결혼하실 때 나의 어머니의 고모님의 집안 따님과 결혼하였으므로 고향을 두고 약간의 연고가 있는 터였다. 이목사는 총신대와 총신 신학원을 나와 목사가 되었으므로 가장 정코스로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큰 교회를 맡겨주시지 않았다.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하고 개척 교회를 시작하였을 때 그가 와서 자기의 시무 교회인 “신덕 교회를 사임하고 나 있는 곳에 와서 평신도처럼 섬기고 은혜를 받겠다” 하기로 “임지 주시는 기회가 있을 때 사임하라” 하였지만 계속 시무의 의욕을 못 갖고 사임하여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 장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부부간의 금슬이 좋고 두 자녀가 다 총명하고 순종적이어서 후시대에 발전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이목사에게 동등한 설교 기회를 주고 동등한 대우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목사가 담임 목사로서의 오랜 경력이 없어서 더 많이 숙달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선배인 나를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계통의 신학을 해서 그렇겠지만 신앙 사상과 성경 해석의 방도가 건전하고 또 보수적이어서 그런 면에 “어떻게 저렇게 나와 일치할까?”하는 감탄을 갖게 한다. 속도 면에서 또 말씀을 다듬는 면에서 나를 좀 더 따라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나는 그의 목회 진로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배려해주고 싶다. 그도 나를 멀리 할 생각이 없을 만큼 나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내가 은퇴할 무렵에 이목사님이 후임자 되기를 원하였으면 인도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원하지 않았고, 멀리 이사가는 연고로 교회도 떠나게 되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끊긴 상태라 서운하기도 하고, 궁금한 점이 있다.

 

73. 방화숙 권사님

 

방화숙 권사님은 내가 한남 교회를 시무할 때 권사로 취임된 분이다. 나는 그 분의 아들 김신일군을 91. 10. 5.에 주례한 기억이 있다. 평소에 목회할 때 방권사님의 특징을 발견한 일이 없었는데 여전도사 한 분을 당회의 결의로 장로들의 단합적 주장에 의하여 해임시킨 일이 있었을 때 방권사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마땅치 않은 일을 했다”고 하였다. 그 권사님은 내가 여전도사를 내보낸 줄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때 나는 “장로가 9명인즉 다수결의에 의하여 결정된 일이라”고 해명을 해도 “목사님이 안 된다 했으면 장로들이 따라가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그 오해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 몇 년 후에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하고 따로 개척 교회를 하려할 때 따라 나온 식구는 방화숙 권사와 김영자 집사뿐이었고, 따라 나올 듯하다가 안 나온 사람이 두 사람이었으며 반드시 따라 나와야 할 가족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문정동에서 개척을 할 때 방권사님과 그의 두 따님까지 협력해 준 일에 대하여 늘 고맙게 생각한다. 방권사님은 나의 생일에 보신탕을 대접한 일도 있었고, 교회용 강대상과 의자를 헌납하신 일도 있어서 그 봉사의 흔적을 오래 간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방권사님과 멀어지게 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문정동에서 나와서 집회소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주택에서 예배드리게 되었는데 방권사님과 김영자 집사님이 주택 예배에 오기를 꺼려하여 멀어지게 되었고, 또 한 가지는 그 당시에 다른 권사님이 돈을 빌려 달라 하여 300만원을 빌려드렸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퍽 어려운 관계가 되어 있는 중에 또 방권사님이 나에게 금전 관계로 청해온 것이다. 아는 사이에 돈거래를 하면 “돈 잃고 사랑도 잃는다”는 말을 알고 있는터라 그것을 거절하였더니 섭섭하고 어색한 입장이 된 것이다. 내 아내도 고지식한 성격이지만 “그때 그 권사님의 청탁을 들어드렸어야 했는데”하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랬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살아 있을 때 다시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와 그 자녀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여야 하겠다. 2006. 3. 13.

 

74. 김영자 권사님

 

김영자 집사님은 내가 한남 교회를 시무할 때 알게 된 분이다. 그의 부군이신 권선생님은 퍽 완고한 분으로 알고 있었고,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가정적 시련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 그 댁에 심방을 했을 때 김집사님이 단무지를 보급하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에 길을 지나갈 때 단무지 보급차에서 김집사님이 나를 안다고 인사를 하는데 나는 처음 부임하였기 때문에 인사하는 분이 김영자 집사임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즉 차에 있는 단무지를 들어 보이면서 자신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신호를 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하였을 때 김영자 집사님과 방화숙 권사님이 따라나올 줄 몰랐는데 따라 나와서 많은 봉사를 한 것을 기억한다. 그때 이 두 분의 봉사로 “나는 주일마다 생일 잔치 음식을 먹는다”할 만큼 점심 식사의 맛이 좋았다. 2년 후에 집회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 관계로 김집사님이 이웃 교회로 옮겼고, 그 곳에서 은혜를 받는다는 소식과 함께 가끔 만났는데 몇 년 후에 그 교회를 불신하게 되었고, 나는 새 교회에 시무를 한즉 다시 새 교회로 와서 1년쯤 신앙생활을 같이 하였다. 그때 나는 김집사님의 병을 위하여 또 그 남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중동에 가까이 사는 김상경 목사님이 그의 부군 권선생님과 본래 아는 사이인지라 김상경 목사가 장로로 있을 때 전도를 한즉 “당신이 목사되면 나가겠다” 하였다는데 과연 김상경 장로가 목사가 되었고, 그의 부군은 그 약속에 따라 김상경 목사가 시무하는 하나 교회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기도의 응답으로 믿는다. 그렇게 완고하던 영감님이 교회를 나가게 되었으니 그를 보조하여 부인도 하나 교회로 나가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집사님이 떠나는 것을 나는 기뻐하여 환송한 것이다. 그 가정과 자녀들이 복받기를 기도하려고 한다.

 

75. 신여순 집사님

 

신여순 집사님은 내가 한남 교회에 있을 때 알게 된 분이다. 나는 그 집사님을 평범한 분으로 알았다. 또 그의 부군이신 함성환 집사님은 이북에서 피난 나오신 분으로 퍽 외로운 생애를 보낸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하였을 때 신여순 집사님의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대단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에 나를 만나 가장 크게 위로와 격려를 해 주신 것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내가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의 심리 파악을 너무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곧 나의 어리석음일 것이다. 그래서 “신집사님도 다른 분처럼 나를 따라 나올지도 모른다” 하였는데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에 이태섭 목사님이 태전 중앙 교회를 개척하자 한남 교회의 여러분들과 함께 태전 중앙 교회로 옮겼는데 신집사님의 부군이신 함성환 집사님이 병환 중이라 먼 교회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몇 년 후에 다시 새 교회로 나오시게 된 것이다. 함성환 집사님의 병은 머지않아 끝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중 요즈음 심한 통증과 함께 다리 신경이 마비되어 입원 중인데 놀라운 것은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이 그 생명을 길게 붙들어 주신다는 점이요, 또 한 가지는 함집사님이 계속 감사와 기쁨과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이실 때 “사렙다 과부로 하여금 너를 공궤하게 하셨다”(왕상 17:9)하신 것처럼 신집사님이 나를 섬기는 일이 많고 지금도 계속 하신다. 어제 주일에 내 생일 축하로 특식을 대접한다 하기로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구나” 하였는데 함집사님이 입원을 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그런데 마침 김호룡 목사님 내외분이 나를 방문하여 후한 대접을 받게 하였으니 “하나님이 신집사님 대신 김호룡 목사님에게 명하셨구나”하고 감사하였다. 요즈음에 와서 더 알게 된 것은 신집사님이 지압 기술과 요리 기술이 대단하고, 또 가정의 환경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믿음도 대단한 것을 알았고, 많은 정보도 알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함집사님이 병중이나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라고 또 신집사님과 그의 아들 충인이와 딸 미정이에게도 은혜 베푸시기를 계속 기도하여야 하겠다. 2006. 3. 13.

 

76. 김삼님 권사님

 

내가 새 교회를 개척하고 2년 되었을 때 신덕 교회와 합동하였다. 그 당시 신덕 교회는 성도의 수가 2,3인에 불과하였는데 약 2개월 후에 김삼님 집사님의 부군인 문정섭 집사가 본래 신덕 교회 교인이었기 때문에 돌아왔고, 또 한달쯤 후에 부인 김삼님 집사도 돌아왔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 안수 집사와 권사직을 주었는데 개혁적 차원에서 예배 중에 서약하고 즉시 임직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이름을 써 붙이고, 사진을 찍은 후 기념품을 주었으니 다른 임직식 절차에 비교해 볼만하지 않은가? 김권사님은 목사를 잘 섬기는 분이다. 특히 참치 매운탕을 끓여온 것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에게 두 번 시련이 있었으니 한번은 루프스병 때문이었다. 이 병을 차병원에서 오랜 기간 발견 못하였다가 결국 삼성 의료원에 가서 장기 입원을 하고 회복되었다. 병의 뿌리가 거의 빠져갈 무렵에 느닷없이 자궁 경부암이 진단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이 심한 모양이다. 방금 전 전화를 한즉 많이 좋아져서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나올 것 같다고 하였다. 문집사님은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데 더 심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아들 준호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좋은 배우자를 만나 효도하게 되기를 바란다.

 

77. 어머니의 별세

 

나의 어머니는 강인한 체질을 타고 나셨지만 젊은 시절에 힘들게 사신 탓인지 70세가 지난 후부터는 활발하시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가 노쇠하셨을 때 병원 치료를 서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머니 자신이 병원을 무서워하시며 안 가시려 한 점도 있고, 또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가 된 줄 아시고 치료를 거절하셨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어머니가 나에게 경제적 손해를 주지 않으시려는 점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왜 나는 병원 치료를 서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만 같았고, 어머니에게는 천국 가실 것만 소망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출입을 못하시고 귀가 어두워졌으며 음식에도 취미가 없고 감정도 둔해지셨기 때문이다. 80 넘으셨을 때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꼭 돌아가신 분 같았다. 그래서 병이 시작될 무렵에 병원에 모시지 않은 것이다. 병원에 모셨다면 며칠 더 사셨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머니의 병은 오른손 두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 하셨고, 화장실에 가시면 장시간 계셨다. 신진대사에 힘이 약해진 것이다. 오른쪽 다리가 붓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병원은 거절하셨고, 때가 되어 온다고 하셨다. 그 다음에 10분, 20분, 몇 시간 간격으로 가슴 답답한 호흡곤란 증세가 왔고, 오른쪽 다리의 색깔이 검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안고 자주 기도하였다. 호흡 곤란으로 너무 심한 고생을 하셔서 성남 중앙 병원으로 모신즉 박상은 내과 과장님이 아는 분이라 성실하게 치료하신즉 괴로운 증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사약 덕분인지 다리의 검은 피부가 붉게 회복되지 않는가? 2일 사이에 발가락만 검고 거의 회복되었는데 다음날 새벽 5시경 다 잠자는 사이에 병실에서 혼자 별세하신 것이다. 병명은 “심부전증”이다. 건강의 효과를 보려면 질병 초기에 치료를 서둘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치료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한 이유는 선산에 도로가 완전치 못하였고, 또 선산의 다른 묘들도 이장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화장한 사실은 모든 가족을 화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78.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은 목회와 관련이 있어서 기록한다. 어머니의 은혜는 누구에게든지 미친 바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더욱 크다. 집안이 가난했을 때, 또 내가 신학 공부를 할 때, 그리고 결혼할 때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보내주셨다. 나는 그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다. 어머니는 한없이 착하고 민첩하시며 세상 연락을 모르신다. 양식 걱정을 안 하고 사는 것이면 족하고 돈을 쓸 줄 모르신다. 6남매의 손자를 다 키우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빨래 담당을 하셨다. 내가 아내와 다투면 뒤에서 손짓을 하시며 “입을 다물라”고 하셨다. 혹 용돈을 드려도 잡수시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택의 방이 다섯이나 있지만 가족이 아홉인지라 어머니에게 아늑한 방을 드리지 못하였고 늘 부엌방에서 어린 손자들과 생활하셨다. 한번은 새 병풍을 들고 들어오셔서 너무 좋고 싸게 준다 하여 사왔으니 7만원을 내라는 것이다.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병풍을 사고 싶어 하신 것과 묻지도 않고 사는 결정을 하신 것이 너무 의외의 일임을 알고 나는 “잘 하셨습니다”하고 돈을 드렸다. 그 병풍은 장사꾼이 본래 20만원 짜리라 하면서 어머니를 붙잡고, 15만원, 10만원에 사라하다가 “7만원에 가져가시오” 하니까 어머니는 너무 싼값인 줄 아시고 사 오신 것이다. 남일 교회 사택과 성남의 태평 아파트에 살 때와 교육관 3층에 살 때와 또 나와서 사는 주택에 까지 네 차례 이사하고 12년을 사는 동안 독방에 그 병풍을 쳐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돌아가셨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안됐는지 나는 지금도 그 병풍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다른 가족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나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못 버린다. 나라도 늙었을 때 어머니를 생각하며 쓰다가 내가 혹 집에서 죽으면 그 병풍을 치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연을 KBS 프로에 글로 써서 보낸 일이 있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79. 목사는 홀로 서야 한다

 

목사를 위하여 눈이라도 빼주려 하고(갈 4:15) 목이라도 내놓아 줄 이웃이나 당회원이 있다면 든든할 것이다(롬 16:4). 교회마다 장로님들이 뜻이 하나되고 화목하며 목사를 협력하면 목사는 외롭지도 않고 신이 날 것이다. 그런데 장로들간에 뜻이 맞지 않아 갈등하면 목사도 편하지 않다. 누구의 편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의 편을 들었다 하면 그 목회는 피곤해질 것이다. 어떤 교회는 한 문중에 두 장로님이 계셨는데 서로 이질감이 있었고, 또 어떤 교회는 한 문중의 장로들과 타성의 장로가 있었는데 역시 화합이 잘 안 되었으며 또 어떤 교회는 형제 장로간의 갈등이 있었고, 또 어떤 교회는 장로들끼리 단결한다. 장로들끼리 단결하면 목사는 장로회 정치를 하여야 하는 만큼 소신껏 일하기 어렵다. 열 장로가 주장하고 목사 혼자 반대했어도 그 결정은 당회의 결정이고, 당회장인 목사가 결정한 것이 된다. 그 일로 인한 부작용은 목사가 뒤집어 써야 한다. “나 혼자 반대했는데 열 장로가 다 주장하여 어쩔 수 없이 결정하였다”하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참아야 한다. 어떤 때는 장로 한 사람이 목사에게 무례한 언사를 써도 다른 장로가 권면하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목사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목사는 이런 경우에 큰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지금 홀로 서 있다. 힘 있는 장로나 교인도 없다. 나 홀로 있은즉 주님이 곁에 계시다. 혹 1000명의 교인이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홀로 서야 하나님이 붙드시고 말씀 상고만이 외로움의 기회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80. 성경연구회

 

내가 기성 교회 목회를 중단한 후부터는 꾸준히 작은 교회를 계속 시무하였다. 2년은 문정동에서 개척 교회를 해보았고, 3년 동안은 부산의 동삼로 교회와 아울러 두 교회 시무를 하였는데 이때에 나를 도와주는 젊은 목사님이 늘 계셔주었기로 가능하였다. 지금은 새 교회 위임 목사로 8년째 시무를 하지만 집필하는 달란트 사역이 본무이고, 목회는 여전히 2선에 있으면서 현상 유지로 족할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 섭리이다. 교회가 나의 영적 관리를 위하여 있어 주는 것이다. 언제라도 자급사역자가 있어서 목회와 전도 중심으로 일하겠다고 하면 나는 기꺼이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목회 2선이란 공백을 나는 성경 연구와 집필로 보충하므로 더 바쁜 일정을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보실 때는 사명에 손해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쉴 줄 모르고 신앙 문서에만 몰두하지 않는가? 내가 성남 신학원에서 알게 된 제자들이 있는데 그 중 이대환 목사가 나를 찾아와서 “성경연구회 모임을 갖자”하기로 쾌히 동의하고 매월 첫 수요일과 셋째 수요일을 정하여 11시에 모임을 갖는데 이 모임의 성격에 협력하는 몇 분의 목사님들까지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그 시간에 나는 설교문 5~6편과 강해문 한 과목 정도를 소개하고 그 기간에 깨달은 것도 말하며 또 다른 이의 말도 듣고 토론한 후 기도하고 마치는데 시간의 가치로 볼 때 후회하지 않고 늘 기다린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러 해 지속하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여기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목사님들처럼 말씀 연구에 만족하면 얼마나 좋겠나”하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는 이 분들을 고맙게 여기고 그 분들은 나를 가까운 신앙의 후견인처럼 또 형제처럼 친교해주므로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 연구회가 조금 더 짭짤하게 시행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모임의 중요성이 나를 먼 지방으로 나갈 수 없게 한다.

 

81. 예종규 목사님

 

예종규 목사님은 통합측 장로회 목사님으로 성남의 수진동에 있는 성도 교회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분이다. 내가 한남 교회를 시무하면서 태평아파트에 거주할 때 새벽 4시 30분에 새벽 기도차 나오면 꼭 길에서 그 분 내외와 우리 내외가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가 서로 인사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분은 연세가 나보다 3년쯤 위시고, 청도 풍각이 고향인데 내가 청도에서 6년쯤 시무한 연고로 그 지역을 서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집사, 장로를 거쳐 목사가 되셨고, 교사와 교목을 거쳐 목회를 하셨으니 지식과 경력이 풍부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좀더 일찍 목사 되었다는 조건 때문에 목사직에 대하여는 나보다 더 겸손하려 하시고 나를 추켜 세우신다. 큰 교회를 시무하시면서도 많이 사례 받는 것을 사양하셨고, 목회하실 때 여름 수양회도 다니시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한남 교회를 사임한 후 개척 교회를 할 때 나와 함께 강화도로 또는 부산으로 두 차례 가족 수양회를 간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목사님이 나와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여 시행한 것이다. 나는 운전을 하였고, 그 목사님은 식비를 대셨다. 그 목사님은 사랑을 앞세우고 나는 공의를 앞세운즉 나로 하여금 사랑을 앞세우라고 권면하시며 토론하기도 하였다. 길에 버려진 전자 제품 같은 것을 고쳐서 쓰게 만드는 취미를 가지셨는데 그런 것은 나의 성격과 비슷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목사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컴퓨터 활용에 대해서도 나를 많이 자문해 주셨고, 인터넷 카페를 친히 만들어 주시기도 하였다. 이래 저래 나도 예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와 예목사님 사이에 더 발전적이고 보람스러운 일들이 전개되기를 바라면서 계속 기도하려고 한다.

 

82. 이봉근 전도사님

 

수년전에 이봉근 전도사님이 처음 나를 찾아 왔다. 그 분은 칼빈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 행정 교육에 대한 사명을 느끼고 익숙한 컴퓨터 활용과 홈페이지 및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한국 교회 행정 연구소(www.kolca.org)”란 이름으로 선교적 사명을 이행하는 30대 전도사님이었다. 그 분이 나를 알게 된 것은 전북 지역으로 보급된 “교회 헌법 연구”란 나의 출판물을 본 때문이었고, 그 책을 처음 읽고 교회 행정 사역이 연구 대상 또는 계몽 대상이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을 인터넷에 띄우는 문제로 나를 만나 나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났을 때 행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 메시지임을 말했고, 내가 쓴 기독교 신앙 백과를 선물한즉 두 내외가 그 책을 일고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근본적으로 또는 새롭게 인식을 했다 하면서 친히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나의 홈페이지(www.ncbc.or.kr)에 나의 재료를 수록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것을 약간 시행하다가 중단한 상태인데 이것은 그의 바쁜 일정 때문으로 믿고 있고, 나도 글 쓰는 기간이라 독촉하지 않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신앙 재료를 인터넷으로 보급하는데 그 진전 여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또 그의 동생까지 새 교회에 속한 교역자로서 교역자의 진로를 정하려고 나의 추천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의 동생은 다른 교단에서 안수를 받는 바람에 행정적 연고가 없어졌고, 이봉근 전도사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해본다. 그는 사회적 기업의 경험도 많다고 하였다. 나는 나의 모든 재료가 결성된 다음에 나의 독자적 홈페이지를 활성화되게 하겠지만 이전도사의 홈페이지 활동에 대해서도 협의해 볼 생각이다. 당분간 만남이 뜸하더라도 나중에 만나서 메시지 보급을 위하여 의논하고 협조를 구해볼 생각이다.

 

83. 어떤 성도와의 관계

 

내가 한남 교회를 시무할 때 어떤 청년이 나오다가 나오지 않더니 형무소에서 편지가 왔다. 그가 교회 청년 회원으로 성탄 행사의 물품을 사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어떤 범죄로 들어갔은즉 많이 협력해 달라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청송교도소로 갔고 장기 복역자가 되었다. 한 주간에 두 번씩 편지가 오고 그 내용이 신앙적이었으므로 나도 설교문을 계속 보냈다. 그 후에 그는 소매치기 상습범으로 해외에 원정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자신이 말했고, 전과 7범쯤 되므로 보통 7년 이상 감호를 받게 된 것이다. 몇 년 전 5월에 출감할 때 신원 보증과 직업 알선을 한다는 서류를 보내줌으로 나왔고, 갈만한 곳이 없자 예배당 서재실에 거주하게 하였다. 2개월쯤 지난 후 가락시장에 취직하여 자기 생활을 자립할 수 있었는데 꼭 1년 된 5월 5일에 또 소매치기 혐의를 받고 구속 피소되어 고등 법원에서 1년 6월 징역에 감호 조치 선고를 받고 또 들어갔다. 그동안 교회가 계속 보조금도 보냈다. 감호 조치의 법이 많이 완화되어 3년 만에 나왔다. 그러니까 작년 5월에 나온 것이고, 나올 때 또 신원 보증과 직업 알선, 있을 자리를 준다는 서류를 보냈다. 또 예배당 서재실에 있게 하였다. 그가 가락시장에 있을 때 신용을 얻었고, 그 상인들이 진정서를 제출한 일도 있었으며 3년 만에 나오자 다시 옛 직장에 들어간다. 그런데 5개월쯤 후에 버섯 상회 사장이 일본에 가서 버섯 재배 농장과 유통 과정을 답사하게 하는 회원들과 함께 일본 가는 기회를 주어서 가게 됐다 하면서 1차에 가서 15일쯤 있었고, 돌아온 후에는 과거처럼 복직하지 않고 전국에 흩어진 상회의 미수금 받는 일로 여기 저기 다닌다고 했다가 또 일본에 가서 30일쯤 있다가 왔다. 그리고 가락동 버섯 상회에서는 나왔다 하였고, 일본에 다니면서 악세사리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대 시절에 알게 된 여인을 만나 방을 얻고 살림을 차리므로 나의 서재실 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나는 그가 탈선하지 않고 믿음에 정진하기를 바라지만 과거 청송에 있을 때보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간절한 마음이 많이 식어진 것 같다. 변화하기 힘든 것일까? 두고 볼 일이다. 2005. 3. 11. 일본에 간 이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2006. 12. 7.

 

84. 모처럼 집회에 가다

 

나는 2005. 3. 7~9.에 화성군 팔탄면 진토리 교회의 집회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나는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다른 이의 집회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가지 않는 습관이 생겼으며 사람들 모이는 장소에 가면 혼자 성경 연구한 것만큼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46년 전에 군 생활 때 알게 된 오순세 장로님을 수원에서 만났는데 그의 다니는 진토리 교회에서 시행하는 교역자 집회에 오라는 것이다. 그 부인 박권사까지 합세하여 권했지만 나는 적당히 거절하였다.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다른 이의 말을 들어도 응용할 기회가 없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나의 할 일이 산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전화가 오기를 “목사님은 꼭 오실 줄 믿고 그 일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였는데 안 오시면 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그 분들의 끈질긴 열심과 기도의 덕을 거절할 수 없어서 “생각해보고 답변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 갈 구실을 찾던 차에 친구 목사 세 분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한즉 자신들도 따라가 줄 터인즉 같이 다녀오시되 5일 중 3일만 다녀오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망설이는 마음에 친구들의 협조를 받은즉 용기가 생겨 다녀오게 되었다. 내가 이 행사를 거절 못한 이유는 친구의 요청이 10%, 기도한다는 말에 거절 못한 것이 30%, 친구들이 가준다는 협력에 60%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이는 성령님께서 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으로 믿게 된 것이다. 은혜도 사모하였지만 비판적 자세도 있었다. 그 집회의 주인공인 강영기 목사님의 특징도 배웠고, 교회 형편도 많이 터득하였다. 예수님 중심의 생활도 많이 강조받았다. 그런데 집회 시간이 2시간 이상을 끄는 점은 무리였다. 그래서 다녀온 후 오장로에게 전화하기를 “현실 교역자들이 배워야 할 과제를 따라 강사를 세우고 그 강사의 교훈을 유인물로 만든 후 두 시간에 말할 것을 한 시간에 증거하고 휴식 시간을 줄 것과 먼 시골에서 온 가난한 교역자들을 위하여 음식의 질을 약간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수요일 오전 집회를 4시간 하는 바람에 허리도 아프고 지루하여 더 있을 생각조차 못하고 돌아왔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로 잘 다녀 온 후 나를 차로 안내한 오영섭 목사님께 나의 빚을 갚아준 격이 되었다고 인사하였다. 2005. 5. 11.

 

85. 나의 자취(自炊)생활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되던 봄(54년 18세)에 우리집이 강화읍 본적지에서 외가 고장인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로 이사를 가므로 나는 강화읍 작은 할아버지 집 작은 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자취도 하였고, 또 식사를 붙여 먹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석유 곤로를 쓰던 때였고, 반찬은 콩장과 감자국으로 대신한 기억이 있다. 그 다음 62~64세 사이에 부산 동삼로 교회를 살피게 되면서 격주제로 부산에 거주하며 또 자취를 한 일이 있다. 그때는 현대식 주방에서 가까운 슈퍼를 이용하고, 또 교인들이 반찬을 봉사하기 때문에 큰 불편 없이 지내다가 성남에서 부산까지 왕래하는 일도 힘들고 교회도 전임자에게 맡길 필요가 있어서 교회를 다른 교회와 합동시켜 주고 나온 일이 있다. 나는 그때도 성남의 새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시무하는 예배당에 서재실과 주방 용구를 항상 갖추고 있었는데 한 번은 아내와 식사 문제로 불편한 대화를 하고 내가 따로 자취할 것을 자청하여 교회 서재실에서 16개월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가 65,66세쯤 이다. 집과 교회의 거리는 250미터 정도이지만 한 번도 집에 가서 잔 일이 없었고, 식사는 명절 때만 가서 먹은 것으로 기억된다. 가끔 김삼님 권사님이 참치 매운탕을 가져오시면 그것으로 한 주간을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장기 복역수이고 수년간 전도 대상으로 편지를 왕래하던 전OO 군이 출소하여 있을 곳이 없게 되므로 당분간 나의 서재실에서 있게 해주는 바람에 자취를 중단하고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집에서 식사를 하면 편리한 점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다. 편리한 것은 수고를 안 하고 아내의 손으로 만든 것을 먹는 것이고, 불편한 점은 1일 3차 왕래해야하는 중 먹는 시간이 변동되며 또 입에 맞지 않는 것, 예를 들면 국이 없거나 여러 가지 반찬을 늘어놓거나 TV프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등이었다. 내 아내는 보편적 가정 주부 타입이고, 나는 식생활에도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 철학이란 입에 맞는 것 몇 가지로 족한 것인데 치아를 보수한 후 먹지 못하는 음식이 더 많아서 더욱 불편을 느낀 것이다. 내가 아직도 나의 생활에 적합한 주택을 마련하지 못하다 보니 주방과 식사하는 방이 한 공간으로 통해 있지 않으므로 불편이 있었다. 그러니까 밥상을 차리려면 여러 차례 주방으로 왕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나는 2006년도(금년) 여름에 더 바쁘게 지냈다. 예를 들면 설교를 구상하고 강론을 쓰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그 쓰던 줄거리를 머리 속에 담은채 식사를 하러 집에 간다. 그때 식사하는 그 시간은 반드시 내가 보려고 하지 않는 연속극이 나오고 아내는 거기에 관심을 쏟으니 그 식사를 다 하기까지 나는 마음이 답답하고 아린 것을 참는다. 몇 번은 그 TV를 끄기도 한다. 도저히 말씀 구상하는 정성에 맞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내 식성이 된 밥을 잘 못 먹기 때문에 국수 먹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점심은 내 서재실에서 국수를 먹었다. 김치와 멸치 국물만 갖고 국수를 준비하려면 10분이면 된다. 아래층 슈퍼에서 1000원짜리 국수를 사면 확실하게 6회로 나누어 삶아서 두 끼씩 먹으니까 12회를 먹는다. 나는 나의 식생활에 비용을 적게 드리는 것을 잘 하는 일로 여기고 만족한다. 뷔페 식당에 가도 국수를 먹을 정도니까 잘 먹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체중은 줄지 않고 몸은 여위지 않으니 이는 배고픈 고생을 안 하기 때문으로 안다. 약 10일 전에 나는 다시 자취하기로 결심하고 나왔다. 식사 중에 가정 일로 아내와 다툼이 있었고, 식사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오려 한즉 아내도 40%쯤 동의하였다. 나는 서재실에서 밥과 국수를 어울려 먹는다. 밥은 전기 밥솥으로 질게 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 놓고 반찬은 김치와 감자 두부 찌개를 먹으며 간장, 된장, 고추장 외에 여러 종류의 양념은 없다. 양파와 마늘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지압하는 신을 신고 서서 왕래하며 식사를 하고 TV는 취향에 맞는 것만 본다. 또 식사하면서 교정 작업도 한다. 식사 준비 시간도 짧지만 식사하면서도 여러 가지 일에 사로잡힌즉 시간도 효율적으로 쓰고 큰 불편이 없다. 한 사람 더 먹는 수고를 아내에게 덜어준다고 생각한다. 2006. 8. 17.

 

86. 속필의 결과

 

나는 글씨를 잘 쓰지는 못하나 속히 기록(메모)하는 소질이 있다. 이것은 군 생활을 할 때부터 검찰 서기, 공판 조서 등을 작성하면서 숙달된 것인데 이 솜씨가 툭하면 무엇을 기록하게 하는 습관을 갖게 하였고, 나중에는 무슨 연구나 생각하는 것까지 기록에 남기는 일도 익숙해졌다. 지금도 생각나는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 문서 등을 쓰게 하신 것이다. 어떤 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나는 문학이나 논리학을 배운 일이 없다. 다만 군 생활 당시 육하원칙에 근거한 기소장만 많이 썼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집필하는데는 유익을 준 근거가 되었으리라. 한남 교회를 시무할 때 주보 1면에 기록한 신앙 교육 재료가 신앙 상식을 출판하게 하였고, 또 신앙 상식을 기독교 신앙 백과로 발전시켰다. 그때에 정병영 집사가 출판사의 일을 하였고, 최용만 집사는 인쇄소를 경영하였으니 남전도회와 이 두 분의 뜻이 맞아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목회 일선을 떠나서 집필 일선으로 빠져 들었으니 이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라고 믿는다. 나의 생애에는 한 가지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가 아닌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서 남기는 일이 큰 보람을 느끼게 될 줄로 믿는다.

 

87. 주보의 부작용

 

주보는 한 주간 동안의 교회의 모든 정보를 알리는 문서이다. 예배 순서, 교회의 소식, 각 기관의 행사 및 설교 내용, 교인에 대한 정보 등 많은 내용을 담는다. 6.25전후에는 인쇄술 부족으로 큰 교회에서만 겨우 찍어내다가 점점 발전하여 지금은 주보가 대부분 교회의 얼굴이 된 줄 안다. 또 주보로 말미암아 얻는 소득도 컸을 것이다. 광고 내용 같은 것은 듣기만 하는 것보다 글로 확인한즉 더 유익하다 .그러나 예배 순서는 예배드릴 때만 참고할 뿐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보에 게재된 설교문은 집에 가서 한 번 더 읽으면 유익하겠지만 그 잔글씨를 꼼꼼히 읽는 성도가 몇 분이나 되는지가 의문스럽다. 담임 목사가 주보를 꾸미려면 여간 바쁜 일이 아니다. 우선 수요기도회 설교문과 성경 공부 내용과 설교문 요약에 상당한 힘을 기울여야 하고, 적당한 찬송을 찾는데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주보를 만드는 일로써 설교 1시간 준비만큼 공력이 들어야 하고, 또 글자 교정도 해야 한다. 나는 작은 교회를 시무하면서 주보를 만들지 않는다. 전국에서 주보 없는 교회는 새 교회뿐일 것이다. 주보가 없어도 예배드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 대신 설교 문서는 제공할 때가 많고, 설교만큼은 문서로 남지 않은 것이 없다. 주보 만드는 공력과 비용을 다른데 쓴다면 효과 매일반이라고 믿는다. 기성 교회에서 목회할 때 주보 때문에 속상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름자 틀리는 것, 이름 순서 기재 문제, 광고 내용의 불공정성, 특히 헌금액 발표나 서열 문제 등이 말썽의 대상이다. 말 조심이 필요한 만큼 글 조심은 더욱 필요하다. 주보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 하며 성도가 친교하는데 주보가 크게 필요하지 않고 선한 사업하는데도 역시 그렇다. 믿음 생활을 사무적이기보다 실제적 생활로 해봄직도 하다. 단순한 것이 좋다. 요즈음은 컴퓨터, 스크린으로 강단위에 다 보이게 하니 사실상 주보도 필요 없을 듯 하고, 찬송, 성경도 교회에 갖고 다닐 필요가 없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일들이 혹 하나님을 사무적으로 믿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88. 가운 홍수

 

구약 제사장의 성의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중보자의 모형자인 그들만의 것이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법복이란 것이 있어서 판사, 변호사가 입었는데 권위가 있어 보였다. 목사가 언제부터 어디에 근거하여 가운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는 목사된지 10년 후에 정옥기 권사님의 배려로 가운을 입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드물에 여름 가운으로 흰 것을 입는 목사도 있었다. 그 다음에 도시의 큰 교회에서는 장로님들도 강단에 올라가 기도할 때 가운을 입었고, 또 성례식 할 때도 입다 보니 가운의 수가 늘어났는데 그 후에 헌금을 맡은 집사들도 입게 되었고, 그 이전부터 찬양대 가운은 이미 있어오지 않았는가? 제1 찬양대만 찬양대는 아니다. 중고등 찬양대, 유년부 찬양대도 찬양대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입을 만한 사람들은 다 입었다. 보통 교회로 따지면 당회원 가운 10개쯤, 집사 가운 10개쯤, 1찬양대 50개쯤, 2찬양대, 3찬양대, 학생 찬양대 합하면 70개쯤, 모두 합하면 140개인데 하복을 따로 만들어 쓴즉 280개쯤이다. 1년에 한번 세탁을 해야 한다. 여전도회에서 세탁을 맡았는데 1층, 2층 커텐까지 포함한즉 그 분량이 더미를 이루었다. 예배당 마당에 큰 물통을 몇 개 놓고 세제를 풀어 지경을 밟듯이 밟고 헹군 다음 물을 버린즉 그 물이 이웃집 앞까지 벌창을 한다. 그 많은 빨래를 본당, 교육관, 지하실까지 의자에 널어 놓은 광경은 볼만 하다. 또 그것을 봉사자들이 나누어 갖고 가서 다림질을 해 와야 할 것이다. 식당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봉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요즈음에는 입으라는 말도 벗으라는 말도 못하는 모양이다. 천주교 신부의 가운은 더 거창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예수님도 그런 가운을 입으셨는가? 나는 목회 말년에 이런 사실을 비판한 후 가운 착용을 하지 않는다.

 

89. 점심 식사의 문제

 

옛날에는 시골의 광농하는 부자 성도인 영수 또는 장로님 집에서 주일 낮 예배 마친 후 먼데서 온 교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였고, 접대의 미덕으로만 여겼었다. 6.25이후 초기에는 점심 먹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그 후 교회 발전의 묘책을 세우면서 처음에는 찬양대나 실무자들만 식사를 제공하다가 이제는 보편화된 것이다. 식사 당번들이 재미와 봉사로 수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사실이다. 접대 부원들끼리 시장을 보면서 뜻이 맞지 않아서 갈등하는 사례도 있고, 점심은 의당히 교회가 주는 줄 알고 그것을 대접받기 위하여 찾아오는 객인도 있다. 여하튼 대접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갖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서울의 H교회는 점심 값으로 2000원씩 주면서 2년간 120명 정도를 매주일 수용하였지만 구제에 그쳤을 뿐 양적 부흥을 이루지 못한 교회도 있다. 비용은 교회의 재정, 접대비 항목에서 쓰는 교회가 대부분인즉 예수님의 돈으로 대접을 받는 셈이다. 시설비, 운영비, 인력, 시간 소모 등 대단한 밑천이 드는 셈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이 식사 한 끼 얻어먹기 위하여 교회와 교인들에게 짐 지우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이 복 받기 위하여 믿음 생활을 하면서 대접만 받으려 하거나 타인에게 또는 교회에 누를 끼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 믿음 생활에 대한 자기앞은 반드시 자기가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는 우선 점심이나 간식 비용을 스스로 부담케 하였는데 내 식사는 내가 간단히 준비하여 해결하여야 한다고 본다. 인스턴트 식품이나 간단한 도시락을 갖고 가서 점심 먹고 친교한 후 또 예배드리고 귀가 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곧 초대 교회의 방법이 아닌가?(고전 11:21)

 

90. 주택 소유를 포기함

 

나는 30대에 목회를 하면서 어느 날 설교에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외쳤는데 그 설교를 한 후에 “내가 말과 실천을 일치시키려면 평생 집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마음을 갖게 되자 집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소극적으로 생각하였다. 또 교역자 생활 시작부터 교회가 사택을 제공한 때문에 주택의 필요는 더욱 느끼지 않았다. 50초에 가족이 많아지면서 집 한 채는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주책 청약 예금을 넣고 주택 신청을 하러 갔는데 신청인들이 50미터 이상 줄을 선 곳에 나도 끼어 있었는데 “지나가는 교인이 보면 어찌하나”하고 퍽 후회를 하였다. 그때 나는 청약 예금 통장으로는 주공 임대 아파트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몰랐다가 취소되었다. 그때 청약 통장을 해제하고 얼마 후에 세 아들의 이름으로 청약 저축 통장을 하나씩 만들어주고 몇 년째 저축에 힘써 주었다. 내가 69세 된 어제는 2006. 3. 24.인데 이 날은 성남 거주자 중 최우선 순위의 청약자가 판교 아파트를 청약하는 날이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청약 저축한 것이 있다면 나이도 많고 무주택 년수도 많으므로 당첨될 확률이 많다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미 포기한 일이므로 체념하였다. 큰 아들은 대구에 있고, 둘째 아들은 안산에 있으니 나와 함께 사는 셋째 아들의 통장을 이용하여 신청해 볼 수는 있지만 집 값은 3~6억이고 임대를 하여도 서민은 살기 어렵다고 하니 판교의 주택은 강남권 거주자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전세에 얽매어 사는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에서 돈 있는 사람들 상대로 주택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저는 최소한의 자유로운 공간만 있으면 됩니다. 자녀들에게나 주택 때문에 괴로움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신청 기회를 흘려보냈다..

 

91. 특별한 과정

 

이 제목에서 남기는 이야기는 다른 목사님들이 흔하게 체험하지 않는 일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부러워 한 친구도 있었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 38년 3월생인 내가 67년 9월에 목사된 것은 빨리 된 셈이고, 그 당시로는 30명 중에 3명쯤 있는 일이다. 대부분 동창들이 5~10년 위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내가 광주에서 군 생활을 3년 하면서 2년간 광주 신학을 이수한 탓으로 기회 단축에 도움을 받은 때문이다.

2) 73년 3월은 내가 경청 노회장이 된 시기인데 내 나이 35세요, 목사된지 5년 6개월만이었다. 젊은 나이에 노회장 된 이야기는 다음에 기록한다.

3) 나는 한 우물 파는 장기 목회를 못한 대신 7개 노회(전남, 부산, 경서, 경중, 경청, 황동, 성남)를 전전하였고,

4) 당회 있는 7교회를 전전하였으니 곧 제2영도(부영), 빙계, 동곡, 구읍(화양), 남일, 한남, 새 교회이다.

5) 황동 노회에서 세 교회(남일, 한남, 새)를 전임하며 위임을 받은 것도 드문 일이라고 한다.

6) 목사된 후 7년 간에 연속 8회의 시무(청빙) 투표를 받았으니 1년에 한 번 이상 교인들의 신임을 물은 셈이었다(이 절차는 94번 참조).

7) 6남매를 낳고 어머니를 모신즉 아홉 식구가 되었는데 넉넉하게는 부양을 못했으나 식생활과 교육을 감당한 것은 사실인즉 아홉 식구를 30년 부양한 목회자도 흔한 것은 아니다.

8) 내가 57세 되던 가을에 아홉 식구를 그대로 부양하는 상태에서 교회를 전격 사임하였다. 이웃 교회의 목사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9) 그 다음에 황동 노회에서 27년 있는 중 원로급이 됐지만 성남 노회의 필요성에 의하여 노회를 옮기고 노회 뒷자리에 앉으니 겸손의 연단이 아닐 수 없었다.

10) 어머니가 별세하셨고, 4남매 혼인(두 아들 결혼은 남아있음)하는 대사를 큰 교회를 떠난 상태에서 청첩 없이 시행하였으니 이 모두가 빈번히 나타나는 일이 아니어서 기록을 한 것이다.

 

92. 나를 추스림

 

나는 방금 이웃 교회의 동역자 원로 목사 추대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축하 예배는 작년에 다녀온 광주 동명 교회 최기채 목사님의 행사와 꼭 닮은 행사였다. 어려운 시작, 장기 목회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겠는가? 설교, 축사, 격려사 등 모두가 은혜로운 말씀이고, 추대 받는 목사님에게 칭찬과 복이 되는 말씀이었다. 목회자가 장기 목회를 잘 하고, 큰 교회를 이루었으니 무슨 칭찬과 사례를 못 받겠는가? 나는 그런 목사님의 성공적 목회를 축하하러 왔으니 어딘지 모르게 나는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안 해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왜 장기 목회를 꿈꾸지 못했을까? 내가 목회 시작할 때는 도시 발전이 희소하던 때였고, 교역자마다 목회 발전을 위하여 더 큰 교회로 전임하는 일이 많았던 중 나는 기성 교회를 담임하면서 개척은 꿈꾸어 본 일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경색되는 일이 있거나 흥왕함이 없거나 한 두 사람이라도 피곤을 느끼는 경우가 있으면 교회로 하여금 새 출발을 하게 하고 나도 새출발 하는 식으로 옮기다 보니 당회 있는 교회만으로 7회를 옮기게 되었다. 어찌 보면 잘 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나 나로써는 떠나는 교회와 가는 교회가 다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58세 때에 아주 후퇴한 것이다. 기성 교회를 전격 사임할 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현실 문화를 따라 목회하기 어려운 점, 힘을 써도 영적 성장의 증표가 나타나지 않는 점, 한 두 사람의 행정 문제로 갈등을 겪는 점 등이었는데 이런 일들로서 목회자의 입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나온 것이었다. 내가 사람 상대를 피하고 자유를 찾는 사명은 말씀연구와 메시지 정리뿐이어서 10년 이상 그 일에 몰두한다. 발전한 교회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항상 놀지 않고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묵상에 몰두하여 내가 생각하고 증언한 글이나 남기는 것을 나의 사명이요, 보람으로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목회 성공자가 은혜로 성공하였듯이 나도 은혜로 값진 것을 남겨야 하겠다. 2006. 5. 1.

 

93. 먹고 사는 이야기

 

나는 군 생활을 할 때 포식을 하여 건강이 좋았다. 제대 후 부산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그 식사량이 항상 부족하였었다. 한 번은 방학 때 집에 와야 하는데 여비도 없었고, 코트도 없었는데 군에서 사귄 김광호 친구가 아르바이트 일감을 주어서 성탄 때 사용할 종이 등을 팔아 부족을 채웠다. 다음 학기부터 김해의 도도 교회에 부임한즉 식사가 너무 풍족하였고(그 일로 위장이 약해졌음), 등록금과 자취할 쌀 등을 주어서 생활을 잘 하였다. 그 다음 제2영도 교회에 부임하여 결혼하고 월 5000원 봉급을 받아 살 수 있었으며 시골 교회로 간즉 더욱 풍요하였다. 시골 교회에서는 가족 수대로 쌀을 주는데 가족 수가 더할 때마다 한말씩 더 준다. 동곡 교회에서 두 내외, 어머니, 큰 아들, 큰 딸 다섯 가족이 되었으나 다섯 말까지는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쌀이 더 넉넉한 화양 교회로 인도하셨다. 화양 교회에서 둘째 아들을 낳은즉 여섯 가족이 되었고, 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년 11월에 대구 남일 교회로 부임한즉 큰 아들부터 도시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그 교회에 유치원 하는 홍신숙 권사님이 계셔서 추가된 자녀 딸 둘, 아들 하나까지 전부 유치원을 무료로 보내게 되었다. 14년 동안 6남매가 한 초등학교의 길을 밟은 것이다. 사택은 교회 부속 건물이었지만 떠들어도 괜찮고 운동장이 있어서 좋았다. 큰 딸이 대학갈 무렵에 성남으로 온즉 한남 교회에서는 교육비까지 주어서 자녀들 상급 학교 보내는데도 순조로웠다. 목회 생활 30년 만에 큰 교회의 공급이 중단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때 그때 쓸 것을 공급해 주셔서 소유된 주택은 없지만 아무 지장 없이 살고 있다. 마 6:8, 32의 “쓸 것을 아신다”는 말씀, 또 33절의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 시 1:3에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한다”는 말씀, 히 4:26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족히 체험하고 있다.

 

94. 7년에 8회 청빙 투표

 

67년 9월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청빙하는 교회의 청빙서가 있어야 하므로 최초에 빙계 교회에서 임시 목사로 청빙 투표를 받았고, 68년 3월에 동곡 교회로 옮겼은즉 또 임시 목사로 투표를 받았는데 이 때에 위임 투표를 자신이 고사하였으니 이는 교회 불합의 요소도 있고, 나도 도시 목회를 지향한 때문이었다. 69년도 3월에 계속 시무해야 하므로 또 투표 받았고, 70년 3월에도(위임 투표를 하든지 이동하든지 해야 하지만) 역시 위임을 고사하고 임시 목사 투표를 받았다. 71년 3월에는 구읍 교회로 옮긴 상태에서 또 위임 투표를 고사하고 임시 목사 투표를 받았으며 72년 3월에도 그리하였고, 73년 3월에도 그리하였다. 73년 11월에 대구 남일 교회로 옮긴 후 74년 3월에 남일 교회에서 위임 투표를 받았으니 결국 7년 안에 8회의 투표를 받은 것이다. 위임투표를 받고 위임식을 하면 좋은 면도 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일단 위임을 받고 일하다가 기회 있으면 사임하고 나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임의 성격은 장기 목회를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기 목회의 결심이 없을 때는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그렇다고 하여 임시 목사 2년 시무 기간이 끝났으나 청빙 없이 시무하는 것도 잘못이기 때문에 매년 투표를 받았던 것이다. 장로 교회의 헌법은 임시 목사로는 2년까지만 시무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위임도 안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1년씩 더 한 셈이다. 이것은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매년 투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사가 시무권을 갖느냐 교인이 시무권을 주느냐 하는 문제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냐 이미 성립된 기성 교회의 초빙을 받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은즉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95. 교회 옮긴 이야기

 

70년대에는 도시 집중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개척 교회가 희소하였다. 따라서 초급 교역자들도 교역의 진로를 전임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상례였다. 나도 그 시절에는 개척을 꿈도 꾸지 않은채 조금씩 큰 교회로 또 도시 방향으로 나가는 꿈만 가진 것이다. 내가 유급 사역자로 처음 교회에 부임한 것은 신학교 1학년 때(26~27세)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 도도 교회였는데 1년쯤 있다가 부산 영도의 제2영도 교회로 소개를 받고 (후임자로 손중호 전도사를 소개한 후) 섭섭한 중에 그 곳을 떠났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등록금이나 식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그 다음 제2영도 교회를 전도사 신분으로 시무하였는데 그 곳은 장로 두 분이 계셨고, 교인이 80명 정도 되었으므로 전도사로써는 과분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때 여전도사 소개건으로 연세 높은 장로님과 차석 장로님의 부인인 김권찰님과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정도로 대화를 나누고 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였으니 그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의견 갈등 정도이면 “적당히 이해하시오” 또는 “내가 실수한 듯하니 이해하시오”하고 화해하거나 부드럽게 넘기는 처세를 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가족은 내외 뿐이고 신학 공부는 끝냈은즉 나 갈 길이 없겠느냐?”하고 사임한 후 울면서 붙잡는 분들까지 뿌리치고 나왔으니 어찌 하겠는가? 내가 목회에 성공한 목사님들처럼 되지 못한 것이 그때의 실수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갈 곳이 없게 되자 무조건 길 열리는 곳으로 떠난 것이 상주 죽암 교회였다. 교역자의 성장을 큰 교회의 이동으로 여겼은즉 1년 만에 의성 빙계 교회로, 또 1년 만에 청도 동곡 교회로, 또 3년 만에 청도 구읍 교회로, 또 3년 만에 대구 남일 교회로, 남일 교회에서 14년 만에 성남의 한남 교회로, 8년 만에 현재의 새 교회로 나온 것이다. 나로 때마다 배척을 받기 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남일 교회를 떠난 큰 명분은 더 나은 목회의 길이 열리면서 전임 교회에 새 바람을 불게 하기 위하여서였고, 한남 교회를 떠난 이유는 목회자의 양심적 갈등을 피해 보려는 이유에서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판단을 하실지 부정보다는 긍정이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96. 어찌할꼬

 

1) 우리 나라가 남의 나라의 양식을 꾸어먹지 않는 한 잘못된 외교에 끌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나라가 다 외교 상대가 되겠지만 거짓말 하는 나라와 폭력성이 있는 나라와는 외교를 끊었으면 한다. 과거의 역사를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외교의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들이 진실된 자세를 취할 때 외교하면 될 것이다. 조상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나라는 언제든지 전쟁을 대비하는 나라이다. 이런 면에서 일본과 이북은 아직 외교상대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이 두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어찌할꼬?

2) 신앙생활을 어렵게 풀어가려 하면 한정이 없다. 성경 해석, 신학, 윤리 문제, 정치에 가담하는 일, 교회의 정치, 교회의 순수성 문제, 교회의 이단 대처 문제 등 수없는 난제가 있는데 이것을 다 정립한 지식적 신앙을 가지려면 죽도록 노력해도 안 될 것이니 어찌할꼬?

3) 현실을 도피하고 4000년 전 아브라함의 시대로 돌아가서 순수하고 단순하게 산다면 복잡한 일에 말려들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의 힘으로는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없지 않은가? 멀리 떨어진 푸른 초원도 없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이럴 때마다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가 주님 앞에 와서 쉬는 일이 어떤 것입니까? 하고 여쭙고 싶은 것이다.

4) 죄 짐을 벗고 영생을 소망하면 많은 휴식이 되겠지요. 건강한 몸으로 활동하고 수고하여 먹고 살면 그것도 휴식이 되겠지요. 그런데 주위가 너무 복잡하다. 거짓과 위험과 사기 치는 일과 정의 아닌 것을 정의인체 하는 것과 예수님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앞세우는 것들을 보면 어찌할꼬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나 혼자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이 항상 내 곁에 있거나 나와 일치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나이에 신앙 자립을 많이 꾀했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아직도 어찌할꼬?, 할 일이 많다는 점을 인식할 때도 어찌할꼬? 하며 하나님을 의지한다.

 

97. 태교(胎敎)

 

태교는 “임부가 언행을 삼가서 태아를 감화시키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교가 태아의 정신적인 것에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고, 체질 건강에도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임신 중 특히 입덧이 심한 때에는 임부가 먹고 싶은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고 정신적으로 안정되며 유쾌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일도 꼭 필요할 줄 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태교의 조건이 열악한 경우에서 출생한 아이들이라도 총명하고 일찍 사회에 적응하여 잘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태교에 실패한 자녀들이 그다지 총명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인즉 태교는 필요하되 예외도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을 믿는 자이지만 청년 시절이나 어린 자녀를 키울 때 태교의 중요성과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하였고, 또 아내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충돌이 자주 있어서 더욱 태교에 대한 관심이나 자녀 어릴 때 자녀를 위한 기도를 꾸준히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60대에 와서 자녀들을 위한 기도나 며느리, 딸이 임신한 아이를 위한 기도를 힘쓰는 것에 비하면 과거에는 너무 허술하게 지냈다는 가책을 갖는다. 무지하기도 하였지만 설교, 심방 등에 몰두한 피로도 그 원인이라 할 것이다. 또 생각하기를 나의 총명 뒤떨어진 것이 술 중독에 빠져 사신 아버지의 영향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향이 자녀들에게도 미쳐서 나의 자녀들이 총명한 인물이 못 된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내가 아는 분 중에 그 아버지가 술 중독자였으나 그 자녀들은 총명한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노력도 한 줄 안다. 분명 예외도 있음이 사실이다. 요즈음에 와서 자녀들이 임신하면 태교에 힘쓸 분 아니라 나는 손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즉 분명 손자들부터는 총명한 아이들이 나와서 발전대열에 들어갈 것으로 믿는다.

 

98. 나의 인생 욕심

 

가만히 생각하니 나만큼 인생 욕심이 많은 사람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다자녀를 원하였는데 6남매만 두었기 때문에 7남매 못 둔 것을 늘 아쉽게 생각한다. 이제라도 양자나 적자를 하나 더 갖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인생 욕심을 갖게 된 것은 65세쯤부터였는데 이 때에 와서 할 일은 많고 살 날은 적은 것과 또 늙어지는 속도가 빠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조부는 54세를, 나의 부친은 52세를 사셨기 때문에 내가 50세를 더 살면서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하나님 앞에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우선 가장이니까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고, 목사이니까 성직을 참신하게 끝내는 것이며 성직을 떠나서라도 나는 말씀 연구과 기록에 은사를 받은 만큼 그것을 잘 마무리 짓는 일인데 시간과 건강이 나를 몹시 재촉한다. 어떤 이는 책을 많이 읽고 문학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누구의 책을 섭렵할 시간도 없고 내 생각만 기록하려고 하여도 시간이 없다. 이 세상에 나는 나뿐이다. 나 같은 자는 나 외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하나로 세상에 내신 것은 나의 특성대로 살라는 뜻인 줄 안다. 그러니 누구를 모방하겠는가? 그런데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강론 남기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고, 그것과 편승하여 나의 삶의 자취도 남기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이 74세라 하더니 요즈음은 또 77세라고 한다. 앞 날을 짧게 생각하니까 더 촉박해지고, 내 인생으로서 할 일을 다 해야 하는데 하면서 인생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욕심을 채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부지런히 할 일을 하는 것과 많은 꿈을 꾸어서 잠잘 때도 또 한 인생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꿈을 많이 꾸다 보니 꿈 인생도 내 인생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내 할 일만 다 했다면 더 살 욕심은 결코 갖지 않으려고 한다. 남의 인생으로 내 인생을 대신할 수는 없다. 2006. 4. 7.

 

99. 나의 책임과 소원

 

나의 목회 정년은 1년 남짓 남았다. 내가 장로 교회 헌법에 따라 목사가 되었은즉 헌법에 따라 정년까지 일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내가 전도 일선에 서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많은 교인을 주시지는 않는 것이다. 현재 내가 시무하는 교회는 나의 가족 6세대와 타인 가족 6세대의 식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소원은 나의 헌법적 목회를 순조롭게 정년까지 마치고 다음 기회에 교회가 발전하는 계기를 하나님이 주셨으면 하는 소원이다. 두 번째 소원은 문서 사역이다. 내가 58세 때 기성 교회의 목회를 사임하고 소규모의 교회를 시무한 것은 집필 사역을 위한 것인 만큼 이것이 1년 안에 다 정비되어 나의 정년 인사와 함께 “지영근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신앙 자료 안내”란 제목으로 널리 광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지 않은가? 셋째는 가정에 관한 일로서 두 가지 책임이 이행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는 아직도 두 아들의 결혼을 비롯하여 자녀들의 신앙이 미비한즉 자녀들의 신앙 훈련과 가족 구성에 대하여 나의 책임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이고, 또 한 가지는 생활의 정착지를 물질적(주택과 터전)으로 확보하여 자리를 잡는 일이다. 나는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4필지의 토지가 있고, 아버지가 사시던 집과 어머니 소유의 논 300평을 없앤 과거가 있으므로 그것을 회복하여 종가의 터를 세워 놓는 일이다. 넷째는 70이후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초대 교회적 목회(성경에 가장 가까운 목회)를 하면서 개혁 교회 헌법 초안을 기록하고 문서 보급에 열중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이 네 가지 소원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

 

100. 못다한 이야기

 

못다한 이야기가 많겠지만 생각을 짜내야 할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대구에 있는 돌 지난 손자가 설사를 하여 동산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을 하면서도 쉽게 고치지 못한다. 정밀 검사를 한즉 이상이 없다고 한다. 바이러스성도 아니고 세균성도 아니면 알레르기성인 듯 하다고 한다. 연고가 좀 심한 편이다. 내가 대구에 있을 때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나면 아이가 아픈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 말했을 때 처음에는 비웃었는데 그런 일이 너무 자주 또 확실하게 나타나니까 비로소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과 내가 다투면 자주 아이가 아픈즉 조심하자”고 한 일이 있었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데 꼬집어 말하기에는 주저스럽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의 묵상을 기도로 받으신다”(시 19:14) 하셨으니 앞으로 꼭 할 일이나 생각해보자. 나는 나의 남은 생애가 얼마일지는 모르나 나이 만큼 건강하지 않음을 인하여 길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즉 할 일은 많고 늘 조급하게 쫓기면서 산다. 쫓기는 생활이 노는 것보다는 큰 복일 것이다. 성직자적 사명을 생각할 때 속히 집필 사역을 마무리 하여 70 정년 인사 때나 그 이전 까지 타인에게 보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 순조롭기를 바라고, 또 공적 교회(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정년(2007년 3월)까지 조용히 시무하다가 은퇴한 후 자녀들과 함께 소신껏 또는 성경에 가깝도록 가족 교회 목회를 하면서 “개혁 교회 헌법 초안”을 만들까 한다. 그리고 출판과 문서 선교도 계속 할 생각이다. 다음에는 가족에 대한 사명으로 둘째, 셋째 아들과 큰 딸이 가정 이루는 것과 모든 자녀들이 믿음으로 자립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며 마지막으로 조상님들에 대한 책임으로 유산 남은 것과 써버린 유산을 정리 회복하여 13대 종가의 터전을 한 장소에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6. 11. 9.

 

101. 새교회 이야기

 

내가 뜻이 있어서 기성교회를 사임한 것은 95년도 9월이었다. 그해 11월에 문정동에 장소를 세내어 “새교회”란 간판을 붙였는데, 이 뜻은 “새로 시작한 교회”, 또는 “새로워지기를 힘쓰는 교회”란 의미이다. 큰 단체에서는 개혁하기 힘들지만 단독으로 시작한 교회는 소신대로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의외로 권사 한 분, 여집사 한 분이 합류해 주어서 큰 위안이 되었는데, 그때 주일마다 교회에서 먹은 점심식사는 매주일 생일을 지내는 것 같은 느낌과, 그 밥맛, 고등어 조림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전도 중심의 목회가 아니고, 집필 중심이다 보니 새교인이 늘지 않았는데 이때쯤에 부산의 동삼로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맡게 되어 3년간 부산 왕래를 하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나와 함께 하기를 좋아하는 이성광 목사님이 계서서 가능하였다. 2년 되었을 때 문정동 장소를 해약하고, 다른 장소를 구하려던 차에 성남의 신덕교회 김종찬 장로가 신덕교회 시무를 청하기로 예배당 장소가 생기게 되어 신덕교회를 새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합동하였으나, 교인은 몇 가정에 불과하였다. 나는 예배 중심의 공간보다 생활 중심의 공간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건물이 내 것이 아니므로 계속 불편을 참고 지냈다. 새교회 기본 교인들에게는 재정 봉사력이 없다. 그러나 “교회는 재정이 적어도 그런데 구애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므로 새교회는 명실공히 물질을 초월한 교회이다. 예수님은 보조를 원치 않으실 것이므로 교회도 보조 받는 것을 사양하였다. 엄격한 율법주의도 지양하고 전통적 생활도 형편따라 변화시키면서 자유를 선호한즉 부담없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짐을 체험하였다. 교회가 물질, 직분, 명예, 전통적 제도에서만 벗어나도 상당히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만 성경공부를 가장 위주한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한다. 성수주일에는 경건, 예배, 교육, 친교가 중요하고, 휴식도 필요하다. 현재 한 주간의 공적 행사는 주일 새벽기도회, 주일 11시~11시 30분까지 두 과목의 성경공부, 11시 30분~12시 10분까지 예배, 그리고 친교한 후 헤어진다. 수요일 기도회는 7시 30분부터 약 50분 진행하되 기도는 온 가족을 위하여 상세히 한다. 주일학교는 부모에게 책임 지운다. 나는 이 제도가 퍽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2006. 11. 24.

 

102. 화양읍 교회 100주년 기념

 

청도군 화양면 동상동에 위치한 화양읍 교회는 본래 큰길 서쪽, 서상동에 위치하였던 구읍교회이다. 내가 1971년~74년(34세~36세)까지 그 교회에 시무하면서 예배당을 동상동으로 옮겨지었고, 그 교회에 있을 때 아내가 둘째 아들 성유를 낳으면서 난산에 임하여 사경을 헤매던 기억이 있고, 예배당을 짓고 옮긴 일과, 노회장이 된 일 등 많은 추억을 남기고 떠났는데, 33년이 지난 몇 일 전에 그곳에서 100주년 기념식과 임직식을 한다고 오라는 초청이 있어서 갔었고, 또 축사도 부탁을 해서 간단히 한 마디를 하고 왔다. 100년만에 그 교회에는 23명의 목회자가 거쳐갔는데, 나는 17번째였다. 23명 중 일곱 분은 내가 모르는 분이고, 16명은 아는 분이며, 아는 분 중 돌아가신 분은 4~5명일 것으로 짐작한다. 기억에 깊이 남는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내가 있을 때 청년으로 있던 분들 중 김종길, 김영도 두 장로와 장원채 집사, 이복선 권사만 아는 분이었는데, 그 중 40대 청년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그의 어머니와 그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고, 박판태 집사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여 반가웠다. 장원채 집사는 “내가 자기 아들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면서 반가워하였는데, 나에게는 그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50대 초반쯤 된 젊은 분이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그 분은 “그의 부친이 이북에서 피난 나와 그곳에서 산 원필순(?)씨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부모와 큰 아들 기억은 나지만 그 분은 그의 둘째 아들일 것으로 예측되나 길게 따져보지 못했다. 33년 만인즉 자라는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는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감 한 상자를 준비하여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청년 시절에 무심히 보아 넘긴 소년이었는데, 그가 나를 기억하고 반가이 대해 주니, 놀라웠다. 그래서 나도 책 한 권을 기념으로 주었다. 내가 마음에 깊이 느끼지 못했으나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을 만난즉 너무 벅차고 감격스러웠다. 과거에 다녀온 교회가 7교회나 된즉 다 그런 행사가 있었으면 그런 기회에 꼭 가보고 싶은 심정이어서 이 글을 남긴다.

 

103. 놀라운 이적체험

 

나는 글씨를 많이 쓰는 관계로 잘못 기록한 글씨를 덮어씌우는 문방기구 Correction을 항상 사용한다. Correction을 사용함에 있어서 끝까지 잘 풀리고 잘 감기는 것도 혹 있지만 반쯤 쓰고 나면 잘 감기지 않아서 줄이 늘어지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이때에 케이스를 열어서 늘어진 비닐 줄을 감고 조정해 보기도 하지만 또 감기지 않을 때는 고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기 때문에 가위로 줄을 끊고, 그 줄을 왼손으로 잡은 상태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중에 다 쓰고 나면 절약상 케이스는 그대로 쓰고, 1,000원 짜리 “리필”만 사서 끼우고 사용하는데, 이렇게 리필을 교환하여 쓸 경우에는 원제품을 쓸 때보다 고장이 더 자주 생긴다. 그러나 나는 1,000원을 절약하기 위하여 또 리필을 교환하여 사용했다. 처음 1/3쯤 쓸 때는 잘 풀리고 감겼는데, 결국 예상대로 또 감기지 않고 늘어져서 아예 고칠 체를 하지 않고 가위로 끊은 다음 불편하지만 양손으로 잡고 사용하였다. 이것은 여러 날 그렇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결코 착각이 아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물건이 하나 더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 물건 하나 뿐이다. 그런데 2006. 11. 28 오전에 7분설교 “마음의 양약”이란 제하의 설교를 쓰는 중 잘못된 글씨를 덮기 위하여 Correction을 든즉 늘어진 줄이 없이 정품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사용한즉 정품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가위로 자르고 땡겨 쓰던 물건이 어떻게 정품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도저히 물리적 방법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나는 “하나님이 내가 잠잘 때 천사를 보내어 고쳐주신 것이라”고 믿기로 하였으니, 그렇게 믿지 않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예배당 서재에서 그 일을 체험한 후 즉시 집에 와서 두려운 심정으로 그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고 상세한 기도를 하면서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때 내 마음은 떨렸고, 감격하였지만 아내는 역시 착각을 한다고 하면서 깊이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이 엄연한 사실을 체험한 나는 이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당일 저녁에 이 기록을 하였다. 잠 3:6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하셨는데, 나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으로 인정한다. 이런 이적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나타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나님은 이런 일까지 나를 가까이 해주시는데 나는 어찌할꼬? 하는 심정과 함께 계속 두려움을 느낀다. 그 물건은 기념으로 보관하였다.

 

104. 내가 쓰던 물건들

 

60년대에는 종교서적(기독교)이 흔하지 않았다. 몇 분의 설교집 시리즈, 단편 강론집들 뿐인 중 완간된 주석은 박윤선 박사의 책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 해득력이 있는 분들은 풀빗주석, 랑케주석, 매튜헨리주석, 칼빈주석 등을 참고 하였으나 극소수라고 생각된다. 그 후에 책이 장식품처럼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나는 장식품처럼 진열하는 서재는 원치 않았다. 다만 내가 이해해야 할 부분을 설명해 주는 책 정도를 필요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책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들도 다 읽지 못하였고, 응용하지도 못했다. 책은 책이고 나의 구상과 묵상은 나의 것이다. 이제 와서 살림 정리를 하려니까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것은 내 서재를 계승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원준이나 손자 중에 내 서재를 이어 받을 자가 나오기를 기도한다. 그 사이에 나는 ① 내가 집필한 글(책, CD, 하드), ② 요긴한 서적들(성경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 ③ 잡동사니 책들로 분류하여 몇 상자만 보관하고, 또 사용하던 책꽂이나 책상도 그대로 두고, 작은 창고 방에 모아 둘 생각이다. 나중에 어느 손자가 나 같은 심정으로 성경을 연구하거나, 목회를 하거나,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를 원할 때 조상이 쓰던 유품을 보존 활용하는 정신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쓰시던 유품을 그대로 보존 활용한다”고 할 때, 이것이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갓을 만드는 후계자, 포도주를 만드는 후계자가 있다면 성직의 후계자는 더욱 갚진 것이다. 나는 내가 죽는 날까지 어머니가 사오셔서 사용하시지 못한 병풍을 보존한다. 그리고 조상이 쓰시던 유품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내버린 잘못을 크게 후회한다. 나는 진리가 아니면 새 것이 싫다. 좋은 APT가 생겨도 그곳에 가서 살 생각은 없다(어제 APT를 신청했는데 당첨될지는 알 수 없음, 2006. 11. 29). 따라서 주방, 세면실, 서재, 거실 외 다용도 큰 방 하나 있는 집을 선호한다. 오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주차공간은 있어야 할 것이다. 누가 어느 주택에 가서 살든지 필요치 않은 가재들을 따로 보관할 창고 방 하나를 구하여 모든 물건들을 간수할 생각이다. 2006. 11. 30.

 

105. 이상적 교회

 

나는 후년 3월까지 교단에 속한 새교회 위임목사직을 현행대로 수행할 것인즉 이것은 교단 헌법을 준수하기로 서약함에 따른 것이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라”는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시 15:4). 누구나 목사 될 때는 헌법 준수를 서약하지 않는가? 그런데 40년 목회와 교회 생활을 해본즉 예수님을 닮게 하는 신앙지도나 교회생활에 많은 부정적 요소가 있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70세 이후에는 교단에서 정년으로 물러나게 된즉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유롭게 성경적, 또는 이상적 교회를 유지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상적 교회이다. 따라서 이상적 교회로 표방해 나가는 원칙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교훈의 근거는 성경적, 정통적, 칼빈주의적으로 한다.

2. 겉모양이나 외식과 세속적인 것은 최대한 피한다.

3. 인기주의, 명예주의, 물질주의, 숫자주의도 선호하지 않는다.

4. 교회 안에서는 교회적, 개인적(교역자나 성도) 이기주의를 피한다.

5. 간단한 예배의식, 교수식 성경공부, 친교만 위주한다.

6.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성경만 배우고, 사랑 연습만 하게 한다.

7. 세례는 확실한 자격자에게 주고, 직분은 거래식으로 한다(거래식이란 일정한 책임을 이행할 때 주고, 명예적 직분은 없다는 뜻).

8. 교역자 초빙제도는 없고, 성도가 교역자를 신임하고 따라야 한다. 교역자가 신임되지 않거나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떠날 수 있다.

9. 예배당 건축비를 내고 거기에 연연하여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하려면 집회 장소를 지분으로 감당하고 빼갈 수 있다.

10. 교인이 헌금한 돈으로 선교적 구제를 한다. 주님의 돈으로는 집회소 관리비와 선교비, 구제비에만 쓰고, 기타의 소용되는 것은 다 자치 회비를 거두어 사용한다. 이상과 같은 취지로 시행하면 물량주의의 부작용, 이기주의의 부작용, 교역자와 성도 간의 신뢰의 부작용으로 빚는 알력과 개인적 명예나 인기주의 같은 것이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과 성도 간의 믿음과 지식이 두터워지며, 오직 사랑만 실천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한 번 시행해 볼 것을 기대한다. 2006. 11. 30

 

106. 먹을 것을 주시는 은혜

 

마 6:8, 32에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이 있고, 히 4:16과 빌 4:19을 보면 “때를 따라 너희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이 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회고록이나 설교문에 수없이 나타냈지만, 또 한 가지 첨부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식생활에 관하여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음식을 먹게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나의 체질을 아시고(시 103:14) 마치 엘리야에게 까마귀로 하여금 떡과 고기를 운반하여 먹이신 것처럼 식성대로 음식을 먹게 하시는 것이다. 나의 식성은 몹시 까다롭다. 소화력이 약한 것과 치아의 부실함과 음식을 아껴 찌꺼기를 버리지 않는 것까지 수없이 까다로와서 합동 생활에 따라가지 못할 형편이다. 그래서 숙식을 혼자한즉 좋은 점도 있다. 진밥과 국과 김치가 기본 식단인데, 그것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아래층에 슈퍼마켓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먹기 위하여 여기 저기 다닐 필요가 전혀 없고, 내가 어떤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그때 마다 그런 음식이 들어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빵이나 음료수, 과일, 생선, 심지어는 곰국 같은 것과 추어탕 먹을 기회가 생기는 것 등이다. “빵이나 음료수가 떨어졌은즉 사와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몇 시간 후에 가족이나 아는 이가 그것을 갖고 오기 때문에 고의로 기다릴 때가 많다. 그런데 얼마의 기간(1~2일)은 똑 떨어질 때도 있다. 이때는 계속 주신 하나님이 나의 체질을 아신즉 “잠시 안 먹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먹지 않거나 먹을 의욕이 없이 지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먹을 것과 먹을 음식의 종류와 분량까지 아시고 나의 식생활을 공급하시는 줄 믿는다. 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인가?

 

107. 커피 잔이 없어짐

 

내가 과거에 소화력이 약할 때는 국수나 커피를 먹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60 초반부터 소화력이 좋아지면서 국수와 커피를 먹게 되었다. 지금도 국수는 하루 한끼 쯤 먹어도 부족을 모를 정도요, 커피는 하루에 약하고 달게 꼭 한 잔씩 먹는다. 내가 사용하는 커피 잔은 깨끗하고 날엽하게 생긴 사기잔이다. 이 커피 셋트는 과거 어느 교회의 기관에서 선물한 것인데 워낙 그릇이 많다 보니 버려도 아깝지 않게 여길 것이나, 나는 그 중 하나를 소중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잔을 커피 잔으로 쓰고, 또 때로는 끓는 물을 담아 약을 먹기도 하는지라 씻어서 찬장에 넣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식탁 위에 있거나, 아니면 책상 위에 있거나, 또 아니면 씽크대 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주 쓰기 때문에 씻거나 헹구지도 않는다. 그런데 2006. 12. 9 토요일 아침에 식사를 하고 커피를 타 먹으려고 그 잔을 찾은즉 방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온 사람도 없고 치운 사람도 없는데 없어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적의 사건이 2006. 11. 8에도 있었지 않았는가? 있는 것을 없앨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신즉 “나는 하나님이 없애신 것 같다”고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월요일에 아내와 그 이야기를 한 다음 너무 이상한 일인지라 이 사실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은 2006. 12. 12 화요일 아침 9시이다. 나는 그날 식사 후 그 잔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다른 잔을 쓰려고(그와 같은 잔이 찬장에 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 찬장을 연즉 같은 잔이 한 개 더 있기로 그것을 꺼내어 대신 쓰고 있다. 먼저 쓰던 잔은 분명히 공중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어떤 이는 이 기록을 건망증이나 치매현상으로 나타난 착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없어졌고 다녀간 사람은 없은즉 이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108. 주택 이야기(1)

 

수도권의 주택 시세가 올라가면서 요즈음처럼 서민들이 주택 마련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시기도 없는 것같다. 그런데 나는 결혼 초기부터 주택 때문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으니, 그것은 교역자가 되었으므로 교회가 사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러하였다. 교회를 일곱 번 옮겼는데 다 교회 사택에서 살게 된 것이다. 관리비, 수리비, 연료비, 전기세 등 심지어는 이사비까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넓고 시원스러운 집에서 살지는 못했으나 서민적 주택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동곡과 구읍(화양)에서는 서향집으로서의 불편이 있었고, 대구에서는 예배당 부속 건물에서 살았지만 아이들 놀이터도 있고 하여 오히려 편리하였다. 나는 내가 집을 소유하면 하나님이 교회 사택에서 못 살게 하시고, 내 소유 주택에서 살게 하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목회 중에는 주택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약 7년 전부터 아들들 이름으로 주택청약저축을 해 주었으니, 나는 집없이 살아도 아들들은 집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58세 때에 한남교회를 사임하면서 교회가 배려한 5,000만원짜리 전세를 살게 되었는데, 한 번 옮겼지만 10년이 넘도록 아무 불편없이 산 것이다. 2008년 3월이 정년인고로 늦어도 2007년 12월까지는 정착할 주택이 있든지 아니면 전셋집이라도 옮겨야 할 처지인데, 2006년 11월에 대환이 청약통장으로 신청하면 “성남 장기 무주택자요, 노인을 모신 특혜가 있다” 하기로(몇 100:1에 해당하겠지만) 아이들이 신청해 보라 하여 신청한즉 12월 15일에 당첨 발표가 나온 것이다. 내가 이 집을 소유하려면 대금 지불에 상당한 문제가 있지만 여하튼 하나님이 “나의 정년의 때를 맞추어 집을 주셨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집에 들어가서 살 생각은 없다. 나는 집회소와 함께 붙은 곁방에서 옛날 사람처럼 사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나의 70세 정년 시기와 주택을 주시는 시기가 딱 맞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주택 이야기(2)는 7분설교 15집 중 “주택에 얽힌 이야기”를 참고할 것).

 

109. 주택 이야기(2)

 

2006년 11월에 신청한 것이 12월 15일에 당첨되었다. 대환이 나이 29세이나 고령 부모 모신 이유로 최연소 나이에 당첨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계약금 4,500만원이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금전 융통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기록에 남기는 목적) 대환이가 2,000만원 모아 놓은 돈이 있다 하고, 사라가 1,000만원을 은행 이자로 빌려주겠다 하며, 청약저축통장에서 1,200만원이 나온즉 무난히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이 4개월 간격으로 4월, 8월에 6,000만원씩 두 번을 내야 하고, 12월 20일(나중에 1월 27일로 변동됨)에 1억 5,000만원을 내야 하는 것이다(집값 전체는 3억 2,000만원이지만 이 집은 살 때부터 5억 이상의 시세임). 나는 계속 기도하였다. 박○○ 사모에게 빌려준 돈을 8년째 받지 못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어렵게 그의 부동산이 흥정되어 1차 중도금 6,000만원을 받았다. 그 후에 또 1억을 받아 2차 중도금을 미리 납부하여 60만원 공제를 받았다. 12월 20일에 1억 5,000만원을 내야하는데 또 4,000만원이 회수된즉 막대금 낼 돈이 8,000만원 예비 된 셈인데, 또 다른 유동 자금 2,000만원쯤 보내어 1억이라도 미리 내려 하다가 당시(2007년 6월, 7월)에 주식이 폭등하는 바람에 그 돈을 매제에게 맡겨 주식에 넣어 금방 2,500만원을 증액시킨즉 전체 금액이 1억 3,000만원쯤 되었는데, 그때 이것을 회수하여 막대금을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실수하여 계속 주식에 투자한 것이 갑자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현재 80%까지 내려가서 막대금 전액을 잠재운 격이 된 것이다. 참으로 후회막급했지만 이제와서 어찌하랴…. 내 생각으로는 집을 2억에 전세주어 청산하고, 남은 5천으로 이자를 늘려 생활비에 쓰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성화는 대단하였다. 가족들이 많이 불평하고 서운해 하여 이왕 시작한 일을 끝내보려고 구상하던 차에 강화의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묘역 한 필지를 1억 1,000만원에 팔게 되어 그것으로 보충하니, 그 나머지 모자라게 된 3,000만원은 은행과 개인에게 차용하여 해결하고 2월 13일에 이사하게 된 것이다. 이사한 후 전세비 6,000만원이 나와서 그것으로 차용금을 갚고, 등기비 700만원을 쓰고, 미라 돈도 갚으니 모두 해결된 것이다.

 

110. 김성진 전도사

 

김성진 전도사는 내가 한남교회를 시무할 때 알게 된 성도인데, 퍽 고독한 입장에서 가족이 없이 사는 청년이었다. 그는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배우기를 갈망하였는데, 성남 신학원을 거친 것은 이미 알았지만 칼빈대학원을 졸업후 총신대 대학원(선교학)을 거쳐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선교목회학)를 끝낸것은 나중에야 알게되었다. 또 그에게 컴퓨터 활용 기술과 영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목사 된 후에 선교사역의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김전도사는 한남교회에 있을 때 배우자 지형옥씨를 만났고, 그때에 내가 결혼 주례를 한 것을 기억한다. 그 후에 10여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봉근 전도사님을 통하여 그의 학교 생활과 컴퓨터 기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있으면 꼭 만나서 나의 집필문서 보급에 대한 것을 의논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중에 예고없이 그 부부가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이때에 나는 “하나님이 그를 보내주셨다”고 믿었다. 김전도사 내외는 여러가지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나대로 목적을 갖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이야기 끝에 결국 김전도사가 홈페이지 만드는 일을 맡아서 수고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는 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일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의 모든 식생활을 주관해 주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물며 그의 말씀 펼치는 일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겠는가? 현재 김목사님의 노력으로 홈페이지 입력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이다. 앞으로도 뜻을 모아 노력한다면 더 좋은 일이 있을 줄 믿는다. 또한 김전도사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의 설교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전파한다고 하였다. 그가 앞으로 외국 선교사로 나간다면 나도 기도 후원자가 될 생각이다. 지금도 위하여 기도하지만…. 그의 큰 성공을 빈다. 그는 독립 교단(총회장: 김상복목사)에서 목사가 되었다.

 

111. 목사 시무 은퇴 소감

 

하나님이 성직을 주실 때 총회와 노회를 통해서 주셨은즉 또 총회와 노회를 통해서 거두시기도 하는데, 은퇴는 만 70세가 되었을 때 교회 시무권만 거두고, 목사(또는 항존직 명예)라는 이름은 거두지 않는다. 목사 호칭을 받으면서 건강이 유지될 바에는 개인적으로라도 은사 적성에 맞는 복음사역을 계속함이 좋을 것이다. 어떤 친구들은 목회 외에는 할 일이 없는데, 은퇴하게 된즉 퍽 서운해 하고, 또 바쁜 일정없이 지내는 이도 있지만 나는 얼마든지 일감을 만들어 바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은퇴의 때를 재도약의 시점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1년 1개월 남았다. 현실 교회는 철저한 물량주의(교세, 물질 봉사, 학위)로 나가기 때문에 은퇴를 앞둔 목사라도 물량주의에 있지 않으면 외면 당하는 것이 일쑤다. 사람이 늙으면 경험이 쌓이는 만큼 젊은이의 단순한 경험보다 나은 데가 있을 것인즉 사람 모인 장소에서 예우할 때는 늙는 순서대로 알아주는 것이 좋을 상 싶다. 누구도 그 순서에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눅 17:10)” 하고 조용히 자기를 감추는 것이 잘 하는 일이다. 그러나 노회같은 모임에서 인사는 하고 끝내는 것이 좋을 것인데, 현행 제도로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명단을 보고 은퇴를 아는 실정이니까 은퇴한 후에 전임지 교회와의 관계를 멀리함이 좋을까? 아니면 그대로 출석함이 좋을까? 후임자나 교인들에게 부담을 준다 하여 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도 있다. 그것은 은퇴자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덕을 세움에 유익하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나는 내 자녀들의 신앙을 물량주의 교회에 방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계속 붙들고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경과 자신과의 신앙을 확립하는 날까지 지도하려고 한다. 나는 현실 교회가 인간 중심으로 세속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일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112. 연탄가스 수난

 

내가 대구 남일교회를 시무할 때 두 번이나 연탄가스의 수난을 겪었다. 한 번은 청도의 이병응 권사님이 오셔서 식당 거실에서 나의 어머니와 함께 주무셨는데, 밖에서 아궁이에 피운 가스가 방바닥 틈으로 들어와 새벽에 일어난즉 두 노인이 다 질식되어 정신을 잃은 것이다. 급히 택시를 불러 두 분을 태워 동산병원에 가서 산소호흡 등 치료를 가한즉 오전 11시쯤에 깨어나셨고, 그날 오후에 두통 증세를 느끼며 퇴원하신 일이 있었다. 아주 정신을 잃고 돌아가신 분처럼 되었다가 몇 시간 만에 깨어나신 것이다. 그 다음 또 한 번은 아내가 대환이 막내를 낳고 10일쯤 되었을 때에 작은 방에서 미라와 함께 잠을 자다가 새벽 5시 40분 경에 가스에 질식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환이 나이가 지금 31세인즉 30년 전 11월로 기억된다. 내 딴에는 아들 낳은 것을 위로, 격려하는 뜻으로 세탁기를 처음 사왔는데, 아내는 본래부터 큰 것을 사야한다고 했지만 큰 것은 가격도 비싸고, 놓을 자리도 적당치 않아서 작은 빨래 위주로 사용하기 위해서 나 혼자의 결정으로 사온 것인데, 위로와 격려의 뜻은 참작의 여지도 없이 작은 것을 샀다는 것만 탓하여 몹시 언짢은 입장까지 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내가 산모방에서 잠을 못자고 서재실에서 잔 후 새벽 5시 기도회를 마쳤는데, 다른 날과 달리 5시 40분 경에 산모방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갔더니, 두 아이는 질식 상태에 있고, 산모는 창문 앞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는가? 그래서 급히 창문을 열어 환기 시키면서 솜에 식초를 적셔 두 아이의 코에 댄즉 2~3분 후에 재채기를 하면서 깨어난 것이다. 그때 많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세탁기 일로 아내가 지나치게 반발한 일을 책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식초용법을 쓰는 바람에 잃은 정신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때 두 아이는 죽은 자 같았고, 아내는 말을 못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입장에서 회복된 것이다.

 

113. 이사 간 이야기

 

2008. 2. 13은 금광동 3280번지에서 도촌동 아파트로 이사 간 날이다. 식구들이 깨끗한 집을 깨끗한 것으로 치장하는데 목적을 두다 보니, 갖고 가는 물건들이 많지 않았고, 농은 다 버리게 되었다. 나는 추억 어린 책이나 가구에 정을 두고 살기 때문에 넓은 집에 그것들을 다 쌓고 진열하고 싶었지만 쇼파, 의자, 책상, 책꽂이, 책, 연장, 액자, 시계, 밥상, 심지어는 화병까지 퇴짜를 당하였으니, 내가 의자없고, 책상과 책이 없는데 어찌 잠시나마 그곳에 머물 수 있는가? 이사하고 정리한 후에 생각한즉 완전히 쫓긴 신세가 된 것을 확인하였다. 내가 가족을 위하여 집을 사지 않고, 나를 위하여 샀더라면 퍽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좋은 집이 싫었고, 옛날 따뜻한 시골집 방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에 쫓겨난 듯하여도 만족하였다. 취득세와 등록세 750만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2월 18에 살던 집이 전세로 나가서 계약금을 받으니, 그 문제도 해결되었고, 또 그 집에 들어올 가족이 4월 7일에 온다 하니, 내가 남은 세간 정리하는 기간도 충분하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기도와 함께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은혜주신 것을 기록하는데 있다. 7년간 적금할 때, 당첨될 때, 계약금 낼 때, 중도금 2차 낼 때,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할 때(막대금을 주식으로 실수한 것은 큰 연단으로 앎, 그 대신 땅을 잃었지만 주식이 만회되면 반드시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것임), 이삿짐을 정리할 때, 또 살던 집이 전세 나간 일까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적기에, 또 기회에 맞추어 해결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현재 내가 시행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방도가 타당함을 점검,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에 예레미야서 강론을 마치고 오늘부터 에스겔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한남교회에서 이사할 때는 그 분주한 중에서도 7분설교 5집 기록에 붙잡혀 있었는데, 이번 이사 때는 예레미야 강론에 붙잡힌 것이다. 하나님이 계속 순탄한 은혜 주실 것을 기대한다. 2008. 2. 17. 밤 2시.

 

114. 섬김 받은 이야기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26세 때 김해군 대저면 도도리 교회에 1년 못되게 시무한 일이 있었다. 그때 양집사님은 하루 세 끼 생선국을 끓여 식탁을 제공하므로 나로 기억에 남게 하였고, 부산 제2영도교회를 2년쯤 시무할 때는 송양 장로님의 부인 김순빈 권찰님이 “교역자님 식탁에 고기 없이는 대접을 못한다” 하면서 늘 좋은 식사를 제공했는데, 나중에 들은즉 그 딸 능자의 코트를 전당포에 잡힌 일까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김수동 집사는 70이 넘은 노인인데, 매월 사례비 봉투를 갖고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인사 격려하고, 기도해 준 후 돌아간 일이 인상적이었고, 29세 강도사 때는 상주 죽암교회에 있었는데, 그 교회 집사님들이 5일장 순번을 정하고 상주읍에 가서 교역자 반찬꺼리를 사서 제공하였으며, 연말에는 재정을 다 없애는 돈으로 교역자에게 만년필, 녹음기 등 큰 선물을 하는 관행이 있었다. 30초반 때 동굑교회 서갑선 집사님은 명절이나 보통 때 잡곡을 보내오면서 그 자루 속에 돈 봉투를 넣었었고, 대구 남일교회 14년 시무할 때에는 홍신숙 권사님이 14년을 계속 매월 계란 30개를 보내왔으며, 넥타이와 의복도 많이 봉사했지만 매주 화요일 아침식사를 잘 차린 음식으로 겸상하여 대접하였다.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이셨던 고정옥 권사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명절과 생일에 선물을 보내신다. 나는 그 권사님의 부군을 장례 집례한 일과 셋째 딸 은경 양을 중매한 일이 있었다. 한남교회 이영합 장로님이 350만원의 비용으로 성지순례를 시켜주므로서 사도행전 강론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내가 한남교회 사임했을 때 조형기 집사가 50만원 격려금을 준 일과, 사라가 결혼식을 할 때 최용만 집사가 50만원의 축의금으로 격려한 일이 있었다. 새교회에서는 김삼님 권사님과 신여순 권사님의 섬김을 잊을 수 없게 한다.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 분들과 그 분들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큰 복 주시기를 늘 기도한다. 2008. 3. 24.

 

115. 정년 은퇴시의 유감

 

2008. 4. 15은 나의 정년 은퇴 사임이 노회에서 통과된 날이다. 아울러 K목사님을 후임자로 청빙하는 청원을 하였는데, 그 분은 교단이 달라서 정치 15장 13조(타교단 목사 영입 조항)에 의거 가입을 청원한 것이다. 그리고 시무 명칭은 위임목사로 할 수도 없고, 또 임시란 용어도 쓸 수가 없어서 담임 목사 또는 장기 시무를 뜻하는 어조로 청원을 한 것이다. K목사님은 잠실에서 갑자기 예배당을 비워주게 되자 그 교인 9명과 함께 새교회에 오셔서 장소를 준비할 때까지 예배 장소를 쓰시라 하였더니, 따로는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 하여 반년 이상 같이 예배를 드렸고, 또 그분의 신앙이 보수적인 것을 알기 때문에 설교도 부탁했었다. 나의 은퇴 시기가 다가오자 후임자를 찾았지만 그분만큼 적당한 분이 안 나타나서 같이 온 교인들을 입교시킨 후 청빙결의를 한 것이다. 내가 모른 것은 정치 15장 13조가 타교단 목사로 어느 정도 경력과 학력을 인정하는 것인지를 모른즉 노회 정치부에서 해당되면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어떤 회원이 공회석에서 그 청원을 부당한 것으로 지적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 자격 기준을 알지 못한다. 또 한 지붕 밑에 두 단체가 예배드릴 수 있느냐? 는 지적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과 협력으로 한 일을 부당하게 여긴다면 그것 또한 건전한 사고방식이 아닌 것이다. 더 유감스러운 것은 “2,000만원설이 오고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후임자를 소개하면서 돈을 받고 시도한 뜻으로 말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은 성직 매매나 교회 불업가가 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K목사님을 초빙하는 문서를 쓰면서 헌법상 위임은 안 되고, 임시 목사 격으로 청빙 받는 것이라 한즉 “임시로는 못 온다” 하기로 “조건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인즉 따질 성격이 아니며, 거저 받는 것이니까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나는 성령으로 시작한 성직을 육체로 마칠 수 없다는 말을 후배 친구들에게 누누이 말한 적이 있었다. 상대방을 과하게 부정적으로 취급하거나 증거없이 비방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본다. 신앙생활은 이웃을 신뢰하기 어려운즉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더욱 홀로서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큰 교회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부조리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 하고 기독교 세계가 경색된 것을 헤아려 보았다. 또 내가 약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약한 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우려했다는 점도 생각하였다. 오해는 오해를 퍼뜨리겠지만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초교파 신문에 “새교회 성경연구원” 광고를 냈는데, 그것도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이단자에게 10만원이라도 광고비를 보태주는 것은 선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신문 발행자가 이단인지 아닌지 모르고, 그 신문 내용에 지적할 사항이 없기 때문에 이용한 것뿐이다. 본래는 1회 광고를 약속한 것인데, 두 번, 세 번까지 게재된 것이다. 나는 고맙게 여겼다. 신문사측에서 성경 메시지 전파임을 알고 사명적으로 그리한 것인 줄 믿고 있다. 혹 그 신문과 관련된 자 중에 이단자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병자에게 치료를 위한 약을 준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단은 성도 각자가 알아서 신앙적으로 대적할 뿐이요, 물질이나 현실적으로 적대시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씀 밖으로 나가면 다 이단인즉 모든 성도가 진리 안에서 무장하고 진리만 붙잡도록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116. 은퇴와 관련하여 있은 일

 

나의 은퇴는 2008년 4월 14일 노회 때 수리되었다. 내가 후임자로 K목사님을 소개한 것은 그분이 목회임지를 갖고 사명생활을 잘 하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었고, 또 교회적으로 볼 때도 재정상의 부담을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장벽은 그가 타교단 목사란 점이다. 헌법에 타교단 목사라도 신학을 더 하고, 강도사 인허를 받게 하는 조건(15장 13조)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안 받을 수도 있는 것은 노회의 자유다. 이 일과 병합하여 “2,000만원 배후설”이란 말이 떠돌았다 하면서 기각되었다. 나는 2,000만원설에 대한 무근한 말을 발설한 이가 모든 것을 알아보고 그런 근거가 없을 때는 반드시 해명과 동시에 명예회복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고 본다. 만일 이런 일을 예사로 넘긴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실 줄로 믿는다. 은퇴가 수리되고 교회와 무관한 입장이 된즉 대단히 허무함을 느꼈다. 다시 말하면 공석상에서 광고 한 마디도 못하게 된 것이다. 당회장은 나에게 설교 부탁을 할 수 있다지만 타교단 목사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즉 같이 설교하였던 K목사님도 허전하게 되었고 민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K목사님의 허전한 입장을 달래주는 뜻으로 “나도 설교를 안하겠다” 하여 다른 설교 목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노회는 교회(교인과 재산)를 원하고, 나는 조용한 이동을 원하며, K목사님은 가족들과의 예배 처소를 원하는 입장이 되었은즉 이 세 가지를 잘 만족시키는 방법을 내가 제안하였다. 그것은 “새교회 현 장소(전세 건물)를 나에게 인계하고, 새교회가 다른 장소를 얻어 나가라”는 것이었다. 만일 이 일이 실현된다면 전세비와 차대금(전재산)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더 편리한 곳에 옮길 수 있은즉 교회에 지장이 없고, 나는 현위치에서 성경연구원을 그대로 하면서 집회소 없는 분들에게 배려도 하고, 또 필요하면 노회에 소속한 교회로도 할 수 있을 것이요, 나는 짐 옮기는 문제에 편의를 보았을 것인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인 한 사람도 내 뜻을 건설적 의견으로 여긴 자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을 선택한다는 여유를 갖고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더 잘 되는 일로 믿었다. 내가 교회를 인수 받으려면 어렵게 6,000만원을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자의 값으로 얻어지는 것은 이웃에게 인정을 베풀고, 말씀 전파 사역에 기여할 뿐 10원도 생기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이것을 교인들이 막아주므로 물질적 부담에서 해방되지 않았는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다.

내가 은퇴 시기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하나는 어떤 사람(교회와 관계된 분)에게 교회 돈을 빌려준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타당하게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돈을 저리, 또는 고리로 보관할 수 없어서 다른 성직자의 가족을 도우면서 그 중간을 택한 것이고, 교회는 그 이자를 받아 쓰므로 운영비에 도움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돈이 은퇴시에 인계되지 못한고로 순탄하지 않은 결과가 왔고, 또 한 가지는 타교단 목사님을 배려한 것 때문에 푸대접을 받았다. 알고 보면 사랑실천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인즉 후회할 일은 아니란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 실천과 복음 사역을 더 잘 하려고 했지만 교권이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고, 교인들도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할 때 이기주의 뿐임을 실감케 한다. 우리는 이기주의 세계에서 버티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좋은 집을 원하지 않으나, 거처할 곳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궁색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우선 예배당의 서재를 옮김에 있어서 책들을 분산, 보관하고, 먼저 살던 집 지하실 한 칸이 나의 안식처가 될 것이다. 2008. 4. 29.

 

117. 이상한 기적들

 

하나님은 일반은총에 입각한 기적같은 은혜를 많이 주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놀라운 충격”이란 글도 핵심 설교집에 남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또 우연으로 여길 수 없는 실제적 일이 몇 번 있었다.

1. 이미 나타낸 이야기요, 증거품도 갖고 있지만 글씨 지우는 문구용품인 끊어진 Correction이 이상없는 물건으로 변한 일이고,

2. 테이블 위에 항상 놓고 쓰는 가위가 없어져(수 차례 살폈으나 없어진 것임) 할 수 없이 다른 데 있는 가위로 사용을 하고 온즉 있으리라 했던 자리에 가위가 있는 것이다. 눈에 구멍이 뚫렸다고 가상하더라고 2~3차례 살피면서 못 볼 이유는 없는데 없어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있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살핌의 실수로 여길 수 없었다.

3. 핸드폰 배터리 충전 기적이다. 2008. 6. 16. 6시 50분에 사라와의 전화에서 핸드폰 배터리가 전소된 것을 확인하고(그날따라 스페어 배터리를 갖고 가지 않았음), 7시에 집에 와서 즉시 배터리를 갈고, 전소된 배터리를 충전기에 장착시키고, 15분쯤 식사를 하고 본즉 파란불(충전 끝)이 들어온 것이다. 내 경험으로는 두 시간쯤 후라야 충전이 완료되는데 15분 만에 된 것이다. 그 충전을 확인하는 시험도 해 보았다. 이상없이 충전되었고, 이상없이 3일간 사용한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가?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할 때는 그렇게 빨리 되는 것을 본 경험이 있으나, 일반 전기 충전기로는 15분에 충전한 일이 없었은즉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4. 나는 밤에도 KBS 라디오를 밤새도록 켜 놓고 들으면서 잠자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꿈에 생시처럼 기도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오늘 새벽 4시~5시 사이에 KBS 라디오에서 어떤 남자의 역사 탐방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을 말하는 분이 대중 앞에 서서 이야기 하는 꿈을 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분의 모습은 꿈으로 보고 내용은 라디오 소리로 들으면서 비몽사몽 같은 입장에 취했다는 사실이다. 그 일로 잠이 깬 후에 에스겔 47장 강론을 계속 기록하였다. 2008. 6. 21 오후 8시 기록.

 

118. 자매에 대한 이야기

 

나의 누님은 나보다 세 살 위였고, 두 여동생은 5세, 8세의 차이가 있다. 이들과 어릴 때 부모님 밑에서 살면서 많은 추억들이 생각난다. 누님은 6.25 이후에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리원에서 피난오신 매부(김도원)와 결혼하여 종길, 종화, 종두, 연숙을 낳고 살았는데, 자녀들이 거의 성숙하고 생활이 안정될 무렵에(50세 초반)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누님을 불쌍한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하나님이 위로하실 것이다. 그 조카들의 장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다음 여동생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다. 황덕호 매제와 결혼하여 신회, 선회, 인회 2녀 1남을 낳고 그들을 교육시킬 때는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퍽 행복하고 평안하게 사는 줄 안다. 딸들도 결혼하여 생활안정이 되었고, 인회도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다. 남은 여생 더 행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셋째 여동생(영이)은 매제 한건화와 결혼하여 성렬, 화열, 은영 2남 1녀를 두었다. 그 중에 성렬은 미혼이고, 화열이 가정은 이혼한 상태이며, 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므로 자녀들에 대한 안정이 미흡한 상태이다. 속히 합당한 배우자들을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런 문제는 그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의 딸 사라도 적당한 배우자를 만나기를 바라고, 성유, 대환이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때를 두시고 섭리하신즉 유익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나는 외아들이란 특권 때문에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자매들은 중학교 진학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자매들에게 빚을 진 느낌으로 산다. 2008. 11. 15.

 

119. 고향과 친척 이야기

 

나의 고향은 강화읍 갑곳리(먹절, 용정리 1072번지)이다. 동리는 갑곳리에 속하고 주소는 용정리이다. 나와 아버지는 외아들이고, 아버지에게는 4촌 형제가 있으니, 영원(별세), 중원, 우원이 있고, 또 6촌 형제들도 계셨으니, 그 분들은 지금도 강화 양도면 흥천에서 사신다. 그 6촌 아저씨들의 이름은 창원, 광원, 춘원, 윤원이다. 다 노인이 된 상태이요, 창원(나의 7촌 아저씨)씨의 아들 “성래”는 서울 삼선동 감리교회 목사로 있다. 그의 동생은 미국에 유학하여 발전한 줄로 안다. 그러나 친족으로의 교류가 별로 없다. 내가 죽으면 아주 멀어지겠지만 그래도 알고는 지내야 한다. 아버지의 4촌 “영원”의 딸 금옥(나의 6촌 여동생)은 포항에서 잘 살고 있고, 그 친정은 강화 삼산면에 살며, 금옥의 어머니는 옛날에 별세하였고, 계모(5촌 당숙)에게서 남동생 둘(세 아들 중 장자 영일은 죽고), 여동생 하나가 수도권에서 산다.

나의 외가는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이다. 김해 김씨 집안이요, 외할아버지의 형제가 네 분이라 옛날에 그 집안이 번족하였는데, 다 돌아가시고 흩어져 살다 보니 지금 사기리에는 큰 외할아버지의 손자 은수(외6촌) 장로 집과, 큰 외할아버지의 딸(김남식 장로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의 4촌 여동생) 집과, 작은 외할아버지의 큰 아들 종태(90세 가까이 되었고, 나에게는 외5촌임) 집(외6촌 인수 장로 집)과, 몇 일 전에 별세한 그의 동생 “종식”의 가족이 살고 있다. 그 외가의 식구들은 나의 어릴 때 추억이 많은 식구들이어서 가까이 지낸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그곳을 찾겠는가? 두 여동생은 외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사기리(강남)교회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나가기 전에 은혜도 받고, 추억도 많았던 교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강화읍(중앙)교회를 다녔다. 2009. 2. 15.